소설리스트

2화 (6/43)

02

- 꼭 냉동보관 해야 돼. 붙지 않게 중간에 호일이나 비닐 한 겹씩 깔고.

“예.”

- 나물은 오래 못 두니까 짬날 때마다 먹어.

“알아요.”

- 김치 한 통 새로 보낸 건 바로 냉장고에 넣고.

“엄마, 나와서 사는 거 하루 이틀 일 아니잖아. 알아서 할게요.”

- 그래, 그리고 전 종류는….

퇴근을 하고 집에 오자마자 전화를 받았다. 명절 음식 보관 및 올바른 식사법에 대한 엄마의 안내말씀이 벌써 십 분 째 이어지고 있다. 보통은 집에서 음식을 싸주시면서 설명을 하시는 편이라 듣다가 적당히 끊을 수가 있었지만 이번에는 전화라서 그런지 한도 끝도 없다. 집에서 나올 때 음식 싸 둔 짐을 깜빡하고 놓고 나왔는데 그게 못내 서운하셨던 모양인지 기어이 서울로 음식을 보내셨다고 전화를 하셨다. 구정도 아닌 신정에 음식을 많이 하는 것을 오지랖 넓은 이웃들이나 친척들이 이상하게 보는데도 꼬박꼬박 준비했다가 보내시는 정성을 보면 서운해 하시는 게 이해는 간다.

- 그리고 원래는 택배로 보내려고 했는데, 음식물이라 혹시나 해서….

“아, 엄마 잠깐만. 노은율! 현관 좀 나가봐!”

뭐 어쨌거나 설명을 하다 보면 끝이 있겠다 싶어서 말씀하시는 걸 건성으로 듣다가 초인종 소리를 놓칠 뻔했다. 컴퓨터로 심슨들이 우글거리는 이상한 퍼즐 게임을 집중해서 하고 있던 은율이가 방해해서 짜증이 났는지 오만상을 찌푸리면서 일어난다. 예전에는 내가 가족과 통화만 하면 바짝 긴장을 해서 아무 것도 못하고 넋을 놓고 쳐다보기만 하더니 간이 꽤 커졌다. 거실로 나가는 은율이의 엉덩이를 두드리자 걷어찰 것처럼 발차기를 해대서 요령 있게 피했다.

“말씀하세요.”

- 요즘 연초라 택배 어떻게 될지 모르겠어서….

“원우야.”

“엄마 미안, 잠깐만요. 아 왜?”

또 말이 끊겼다. 뭔가 당황한 것 같으면서도 평소보다 사근사근한 목소리로 은율이가 현관 쪽 벽 너머에서 고개만 쏙 뺀 채로 나를 불렀다. 하하, 녀석, 또 착불로 시켰는데 잔돈이 없는 그딴 상황인가. 나중에 이자까지 쳐서 갚으라고 해야겠다. 뒷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 휙 던져주고 다시 통화를 하려다가 불쑥 들어온 얼굴에 이번에는 내가 멈칫했다.

- 사람 손에 맡기는 게 나을 것 같아서.

“…예, 지금 왔네요.”

- 그래? 잘 도착했니? 심부름 하느라 고생했으니까 네가 좀 챙겨줘. 친구들 만난다고 서울 가서 두 밤 정도 자야 된다길래 형네 집 가서 자라고 그랬어. 밖에서 자게 하지 말고.

“알아서 할게요. 일단 끊을게요.”

간이 커진 건 아닌가 보다. 생각도 못했던 상황에 당황한 걸 넘어서서 겁을 잔뜩 집어먹은 은율이가 어느새 내 뒤로 와서 눈치를 보고 있다. 식탁 위에 거대한 통들을 쾅쾅 내려놓는 소리를 참고 들어주려니까 신경질 났다고 시위하는 것 같아서 나도 화가 났다. 쳐다보지도 않고 다시 나가려는 걸 붙들었더니 그제야 휙 돌아본다.

“어디 가냐?”

“친구 만나러.”

“엄마가 여기서 자라고 했다며.”

“됐어. 친구네 집에서 자면 돼.”

“서울에 너 재워줄 친구가 있냐? 누군데?”

“형이 알아서 뭐하게.”

손을 뿌리치고 현관문을 부술 것처럼 닫으면서 나가버리는 성질 더러운 놈, 입대하고 나서 꼬박 일 년 만에 얼굴을 보는 차현우, 내 동생이다.

분명히 사람이 하나 들어왔다가 일 분도 안 되어서 나간 건데도 폭풍이 몰아친 것 같았다. 나는 화를 삭이느라 아까부터 말을 하지 않고 있었고 현우가 가지고 온 음식들을 정리하는 은율이도 뭔가 생각에 잠겨있는 것 같았다. 적당히 놀고 집에 들어와서 자라고 문자를 보냈지만 확인만 하고 답은 없다. 애초에 그렇게 오기 싫었던 거면 그냥 음식도 택배로 보내라고 하지 뭘 집까지 들고 와서 성질을 있는 대로 부리고 가는지, 짜증이 확 났다.

“담배 좀 피우고 올게.”

“원우야. 동생 들어와서 자라고 해.”

운동화를 구겨 신고 있는 동안 쪼르르 현관으로 온 은율이가 대뜸 그런다. 아직 기분이 가라앉지 않은 상태라 나도 모르게 고개를 치켜들고 노려보다가 뜨끔해서 시선을 돌렸다. 애먼 데다 화내지 말아야 되는데.

“됐어.”

“내가 하루 나가서 자면 되니까 들어와서 자라고 해도 돼.”

“네가 왜 나가냐, 우리 집인데. 그리고 하루 가지고 될 것도 아니었어.”

“며칠 있어야 된대? 그럼 그렇게 하라고 해. 그냥 내가….”

“야, 노은율.”

아 진짜 지금 은율이한테 화내면 안 되는데….

“네가 왜 나가?”

“불편해 하잖아.”

“불편해 하면 불편한 사람이 알아서 해야지, 왜 네가 걔 편하라고 너 불편할 짓을 해?”

“나야 회사에서 철야도 자주 하니까 나가서 자는 거 안 불편하고, 서울에 친척도 없는데 올라와서 밖에서 자면 동생 힘들 거고….”

“그러니까 지가 힘들어도 밖에서 자겠다는데 왜 네가 자리를 피하냐니까?”

어떤 감정인지는 모르겠지만 하여튼 은율이도 지금 엄청나게 참고 있는 건 알겠다. 살얼음판을 걷는 것처럼 아슬아슬한 대화를 하고 있다. 누구 하나 여기서 터지면 큰 소리가 나는 선에서 끝날 것 같지가 않았다. 치고 박고 싸우는 거면 차라리 다행이지만 감정이 상할 것 같아서 최대한 눌러보려고 기를 쓰면서 숨을 참았다.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가시가 잔뜩 돋은 내 말에도 은율이는 평소처럼 짜증을 내지 않는다. 잠깐의 정적이 흘렀다.

“…점수 좀 따려고 그런다, 됐냐?”

“…….”

“그러니까 들어와서 자라고 해. 그래도 나 없으면 친구 집보다는 여기가 편하….”

“왜 네가 그렇게 비굴하게 굴어?”

더 심각해지기 전에 대충 농담으로 때우려던 심산이었나 보다. 하지만 그 말을 듣자마자 나는 참고 있던 화와 짜증과 열과 기타 등등의 것들이 꼭 둑이 터진 것처럼 한 번에 치밀어 올랐다.

“차현우 그 새끼가 뭔데 네가 점수를 따네 마네 하면서 숙이고 들어가? 네가 뭐 잘못했냐? 뭐 죄라도 지었어?”

“잘못했다는 게 아니라…!”

“뭐, 내 동생이라서? 웃기지 말라고 해, 형 취급도 안 하는 동생 새끼가 뭐가 동생이야, 나도 동생 취급 안 하니까 너도 신경 꺼, 알았어?”

“차원우.”

“그 새끼가 우리 볼 때마다 저 지랄하는 게 어디 하루 이틀 일이야? 점수 같은 거 딸 필요 없어. 얼굴 안 보고 살면 그만이야. 씨발 어디 길바닥에서 처 자다가 얼어 뒤지든 말든…!”

“차원우. 그만해.”

제어가 안 된 상태로 줄줄이 말을 쏟아 내면서도 솔직히 한 대 맞을 줄 알았다. 하지만 은율이는 때리지도 않았고 소리를 지르지도 않았다. 차분하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나를 제지하고는 잠시 눈을 감고 숨을 가다듬던 은율이가 내 어깨를 밀었다.

“…일단 나가. 담배 피운다며.”

“…….”

“화 좀 식으면 다시 얘기해.”

현관 밖으로 떠밀리고 곧 눈앞에서 문이 닫혔다. 여전히 씩씩대면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일 층으로 내려왔다. 단골 흡연 장소인 놀이터 뒤쪽 벤치로 가면서 온몸으로 찬바람을 확확 맞았다. 그리고 한 번 바람을 맞을 때마다 정신이 번쩍번쩍 들었다. 벤치에 앉아서 담배를 물고 나니까 완벽하게 제정신으로 돌아왔다. 차원우 이 멍청하고 한심하고 답도 없는 병신 같은 새끼, 해일처럼 밀려오는 자괴감에 불붙은 담배를 들고 머리를 싸매 쥐다가 머리카락을 태울 뻔했다. 노은율이 무슨 잘못을 했다고 거기다 대고 언성을 높이고, 미친놈, 이 찌질한 놈. 내가 뭐라고 지껄였는지 다시 되새겨 보았다. 솔직히 동생 욕을 한 건 차현우에게 하나도 미안하지도 않았고 일말의 죄책감도 없었다. 얼굴 안 보고 살면 그만이라고 했던 것도 화가 많이 나서 내뱉은 거긴 하지만 아예 생각 없이 한 말도 아니었다. 거슬리는 건 그게 아니다.

기절한 은율이를 업고 집 밖으로 뛰어나가서 초조하게 앰뷸런스를 기다리던 날이었다. 어깨가 축축하게 젖는 느낌이 들 때마다, 맥없이 늘어진 팔이 흔들거리는 걸 볼 때마다 누가 목을 조르는 것처럼 숨이 막혔다. 그렇게 큰 사고가 아니라는 것도, 치료를 받으면 별 이상 없이 깨어날 수 있다는 것도, 생명에 위협이 될 정도로 피를 흘린 것도 아니고 그 정도로 다친 게 아니라는 것도 이성적으로는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무서워서 온몸이 덜덜 떨리고 이가 딱딱 부딪혔다.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그 말을 반복하면서 병원으로 갔다.

치료를 받고 평온한 얼굴로 잠이 든 은율이의 손을 붙잡고 생각했었다. 나는 노은율에게 죄인이다. 은율이가 듣지 않아도 될 말을 듣고, 당하지 않아도 될 일을 당하고, 보지 않아도 될 험한 꼴을 보게 된 건 다 나 때문이다. 그런데도 내가 노은율을 놓을 수 없을 정도로 좋아하고 사랑해서 앞으로도 노은율은 계속 그런 일을 겪어야 할 것이다. 그러니 적어도 다른 사람들에게 노은율이 죄인 취급을 받을 일은 없게 해야 한다. 나 자신이 평생 죄를 지은 사람의 기분으로 살더라도, 최소한 노은율이 다른 사람들에게 손가락질 당하거나 비난을 당하는 일이 없어야 한다. 나 때문에 그렇게 된 거니까. 내 잘못이니까.

그런데 내가 거꾸로 노은율에게 네가 뭘 잘못했냐고, 죄라도 지었냐고 화를 냈다. 더 생각할 것도 없는 내 실수다. 내 말을 은율이가 오해해서 들을까봐 겁이 났다. 마치 은연중에 항상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한다면….

“차진지 말고 차청승 해야겠다. 온갖 청승은 다 떨고 앉았네.”

머리 위로 커다란 점퍼가 휙 덮어 씌워졌다. 집에 있던 차림 그대로 나와서 고작 셔츠에 카디건 하나 입고 있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너무 화가 나서 몸에 열이 올라서인지 추운 것도 모르고 있었다. 벌써 끄트머리까지 타들어간 담배를 끄고 점퍼를 대충 걸쳤다. 은율이가 옆에 와서 앉더니 대뜸 내 손을 자기 주머니로 가지고 간다. 얼어있던 손이 따뜻하게 녹기 시작했다. 비어있던 다른 손으로 새 담배를 물고 불을 붙였다.

“잘못했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은율이가 씨익 웃는다.

“차원우.”

“…응.”

“현우가 아까처럼 행동할 때마다 네가 왜 노발대발 화내는지 내가 맞춰볼까?”

“짜증나니까.”

“그러니까, 왜 짜증나는 줄 아냐고.”

“…그 새끼가 짜증날 짓을 하잖아.”

“아니, 너랑 똑같아서 그래.”

내가 뭘, 억울한 시선으로 홱 돌아봤지만 은율이는 신경도 안 쓰고 있었다.

“너 현우 나이 때 딱 그랬거든. 누가 길에서 부딪히기만 해도 막 화내고, 뭐 기분 나쁜 거 있으면 나 성질났다고 이마에다 써 붙이고 다니면서 사람 눈치 보게 만들고, 말은 참 지지리도 안 듣고.”

“…….”

“그래도 나중에 소심해져서 꼴에 존심 챙긴다고 사과는 못하고 괜히 버럭버럭 뻗대는 건 귀여웠지.”

“…아무리 그래도 내가 차현우 정도는 아니지.”

“아니긴, 유전자가 어디 가냐? 진짜 난 아까 타임머신 탄 줄 알았다. 어, 이상하네, 스물두 살짜리 차원우가 어떻게 여기 와 있지, 그랬다니까.”

갑자기 무지하게 창피해져서 귀가 다 화끈거린다. 고개를 숙이고 담배를 뻑뻑 빠는 동안 은율이는 주머니 속에서 내 손을 가지고 꼼지락꼼지락 장난을 친다.

나와 은율이는 싸운다고 하더라도 어지간한 게 아닌 이상 그걸 꽁하게 마음에 담아두지도 않고, 둘 다 생각하는 게 단순해서 내 잘못은 미안한 거고 네 잘못은 지랄병이고, 하는 식으로 끝내버리곤 한다. 게다가 이만큼 오래 살았으면 눈빛만 봐도 척하면 척이기 때문에 정말로 일이 커질 것 같으면 적당히 말을 자른다. 자잘하게 다투는 일은 많아도 크게 싸울 일이 없는 건 그래서이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감정적으로 상처를 받는 일이 안 생기는 건 아니다. 특히 민감한 경우가 몇 개 있기도 하고. 예를 들면 가족에 관련된 일 같은 것들 말이다. 오늘이 딱 그 경우였다. 가족 관련된 일로 말실수를 해서 상처를 줬다는 생각이 들면 자존심이고 뭐고 접고 들어가야 한다. 은율이의 점퍼 주머니 속에서 깍지를 껴서 손을 꽉 잡은 채로 나는 무릎 위에 고개를 파묻었다. 자존심이고 뭐고 접고 들어가기는 하겠는데 쪽팔린 건 어쩔 수 없다.

“…미안하다.”

“그래.”

“생각 없이 너무 막 뱉었어.”

“알면 됐다.”

“그리고 그렇게 생각하고 산 적 없어.”

“뭘?”

“네가 뭘 잘못했다거나, 죄 지었냐고 했던 거.”

“…….”

“난… 내가 너한테 죄 짓고 산다고 생각해. 차현우 그 새끼 때문에 기분 나쁠 일 만드는 것도 결국 내 책임이고, 네가 이런 일로 눈치 보고 미안해하는 것도… 다 내 잘못이니까.”

사실 이 말까지는 안 하려고 했었는데 혹시나 오해하지 않을까 하는 그 조그마한 걱정이 결국 입 밖으로 부끄러운 말까지 꺼내놓게 만들었다. 처음 사과를 할 때는 대수롭지 않게 발로 모래를 툭툭 차면서 건성으로 사과를 받던 은율이가 나를 빤히 쳐다본다. 말을 잘못했나, 그게 왜 죄라고 생각하냐고 화를 내려나, 하지만 솔직한 심정이 그런 거라 더 변명으로 꺼낼 말이 없었다. 그때 은율이가 말했다.

“나도 내가 너한테 죄 짓고 산다고 생각해.”

“네가 왜…!”

“근데 그게 뭐가 문젠데?”

은율이가 픽 웃었다.

“좀 미안해하면서 살면 안 되냐? 미안해한다고 뭐 막 죄인처럼 제발 날 용서해 달라고 엉엉 울면서 빌고 그래야 돼? 아니잖아. 딱히 살면서 티내는 건 아니어도 조금씩 서로 미안해하면서 살다 보면 더 잘해 주고 챙겨줄 수도 있고, 신경도 더 많이 써줄 수 있는데 그게 나쁜 거야?”

“…….”

“나도 그래서 너한테 죄 지은 것 같은 기분일 때가 많아. 네가 우리 집 가서 은지한테 쩔쩔맬 때도 그렇고, 엄마나 아버지한테 말 한 마디 못 붙이고 웃기만 할 때도 그래. 근데 그럴 때마다 내가 널 붙들고 미안하다 내 잘못이다, 내가 널 홀려가지고 이렇게 비굴하게 굴도록 만들었다, 죽을죄를 지었다, 이러냐? 그냥 더 잘해 주면 되지. 미안한 만큼 더 좋아해 주고 아껴주면 되잖아.”

아마 우문에 현답이란 건 이런 걸 두고 하는 소린가 보다. 물어본 게 아니니까 우문은 아니고 멍청한 고백 정도. 숨겨두고 있던 걸 꺼내놓았는데 별것도 아니라는 반응이 와서 허전하고 허탈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속이 시원했다.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나 정말로 괜찮은 사람과 연애하고 있구나. 이런 사람과 십 년을 같이 살았구나.

“그러니까 지금 당장 동생에게 연락을 하도록. 길바닥에서 자다가 얼어 뒤지든 말든 상관없지도 않으면서 왜 허세를 부리고 그러냐.”

“허세 아니고 진짜 상관없어.”

“아이고, 그러셔요, 어련하시려고요. 근데 나 정말로 나가서 자도 돼. 어차피 동생 휴가 나온 거잖아. 길게 있다가 가지도 않을 거 아냐.”

“그 새끼 안 와도 된다니까.”

“차원우 씨, 고집 부리지 말고 민기 생각하면서 한 번 참아라. 민기 같은 착한 녀석도 형 마음 알기까지 그렇게 한참이 걸렸는데, 스물두 살 차원우랑 똑같은 네 동생은 더 한참 걸릴 거 아냐.”

“…너 지금 한 큐에 막 두 명씩 까냐?”

“생각보다 빨리 알아챘네.”

눈을 휘면서 생긋 웃는 은율이의 이마에 쪽 소리가 나게 뽀뽀를 해 주고 일어났다. 제일 마음 불편할 사람이 저렇게까지 말하는데 어쩔 수 없다. 스물두 살의 차원우는 더럽게 말도 안 듣고 세상에 저만 사는 줄 아는 멍청한 놈이었는지는 몰라도, 서른 살의 차원우는 노은율의 말을 잘 듣는 착하고 건실한 청년이니까.

***

안 부르고 싶은데, 안 와도 되는데, 네가 부르라고 하니까 부르기야 하겠지만 연락하기 싫은데, 아침에 출근 준비를 하는 내내 찡찡거렸더니 달랜답시고 은율이가 백만 년만의 모닝키스까지 해 줘서 기분은 참 좋았다. 그 좋은 기분이 얼마 안 가서 탈이다. 문자는 꼬박꼬박 확인하면서도 답이 없고, 전화도 안 받고, 뭐 어떻게 하라는 건지 모르겠다. 역시 난 착하고 건실한 청년이 되려면 좀 걸릴 것 같다. 업무를 보면서도 중간에 몇 번이나 어디냐, 밥은 먹었냐, 나름대로 살가운 문자를 보냈지만 연락은 개뿔도 없다. 그래도 빡치다 못해 빡돈 건 아니기 때문에 어제처럼 대놓고 욕은 못하겠다. 차현우가 비뚤어지기 시작한 이유가 나와 은율이의 일 때문이라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은지 같은 경우는 요즘 애들 발육이 보통이 아니어서인지 초등학교 때 이미 일찌감치 사춘기를 겪었고, 은율이 말에 따르면 ‘알아서 제 살 길 찾으려고’ 사람 대하는 법을 익히기 시작하면서 좋은 쪽으로 나를 받아준 케이스다. 그러나 내 동생은 정반대다. 나이 차이 많이 나는 형을 든든한 백그라운드처럼 생각하면서 한참 어리광을 부리며 중학교를 다니다 말고 그런 일을 겪게 되었으니 자연스럽게 받아줄 수가 없다는 건 이해한다. 그래서 은율이에게 까칠하게 구는 것도, 나를 만나지 않으려고 하는 것도, 특히나 나와 은율이가 같이 있는 걸 보기 싫어하는 것도 다 이해한다. 내 가장 가까운 친구가 똑같은 케이스로 자기 형을 몇 년을 피해 다녔는데 그거 이해하는 게 어려운 일도 아니다.

하지만 이제 꼬박 십 년이다. 십 년 동안 아예 모르는 사람 취급하면서 안 보고 살았던 것도 아니고, 상전 모시듯이 앞에서 설설 기어주고 해달라는 거 다 해 주고 비위 맞춰주고 했으면 최소한 피드백을 어느 정도 해 줘야 되는 게 아니냐는 거다. 당연히 남자에게는 더더욱 인정받기 힘든 일이라는 건 알지만 십 년 동안 한결같이 사람을 벌레 보듯 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십 년이 지나도 계속 싫다면 그냥 외면하면 되는 거 아닌가, 잘해달라는 것도 아니고, 싹싹하게 대하라는 것도 아니고, 막말로 안 볼 생각하고 무시하면 차라리 본인도 편할 텐데 얼굴 볼 때마다 꼭 오만상을 찌푸리면서 깔보거나 대놓고 빈정거리고 비꼬는 말을 던지는 통에 심지어 아버지가 난처해하며 은율이에게 사과를 하신 적도 있다.

마음 같아서는 차현우에게 대놓고 말하고 싶었다. 애초에 이런 심부름 따위를 하지 말라고 새끼야, 엄마가 먹을 거 갖다 주라고 시켰을 때 그냥 형 애인 보기 싫다고 했으면 엄마도 강요하지 않았을 텐데 씨발 지가 가지고 와놓고 괜히 나한테 짜증을 내고 은율이한테 겁주고 지랄이야 이 씨발놈이…. 속으로는 이미 쌍욕 백과사전을 편찬할 정도였지만 속이 부글부글 끓는 걸 꾹 참고 마지막으로 문자를 보냈다. 이제 나도 더 못해먹겠다. 이 정도 했으면 은율이한테 보여 줘도 될 정도겠지. 은율이 밖에서 자고 온다니까 들어와서 자라고 쌍시옷 하나 없는 깔끔한 문자를 보내놓고 책상에 엎어졌다. 처음에는 나도 미안하고 걱정이 되어서 어떻게든 하나밖에 없는 동생 놈에게 잘 보이려고 애를 썼는데 이제는 될 대로 되라는 심정이다.

원래의 계획은 적당히 업무를 마치고 집에 먼저 들어가서 정리를 좀 해놓고 차현우를 데려다 앉혀 놓고 다시 나와서 은율이와 밖에서 자려던 것이었는데, 도저히 집에 들어가서 정리를 하고 차현우를 데려다 놓을 정신이 아니어서 나는 퇴근을 하자마자 은율이네 회사로 찾아갔다. 회사 앞이야, 저녁 같이 먹자, 하고 문자를 보냈더니 은율이는 한창 일을 하던 중이었는지 꽤 시간이 지나서 옷도 제대로 못 입고 내려왔다. 하루 종일 싸움닭이 된 것처럼 날을 세우고 있다가 은율이를 보니까 마음이 편해지면서 화기가 다 누그러지는 것 같았다.

“나 그래도 좋게 말하려고 노력은 했어.”

많이는 못했지만. 시선은 뚝배기 그릇에 고정한 채로 고개를 푹 숙이고 우물거렸더니 머리 위에서 웃음소리가 들린다.

“어이구야, 고생했다. 잘했다.”

“…회사 언제 들어가야 되냐?”

“어차피 오늘 철야할 거니까 밥 다 먹고 천천히 들어가도 돼.”

“그럼….”

“대실은 안 된다. 시간 때우려고 철야하는 거 아니라 진짜 일 많아서 철야하는 거니까.”

아니 대실의 디귿도 안 꺼냈는데 거 참 사람 민망하게 막 마음을 알아채고 그런다. 대실 말고 다른 데서도 얼마든지 할 수 있지만 일이 많다니 참기로 했다.

“내일 아침에 집에 옷 갈아입으러 들를 거야?”

“응, 씻고 다시 나와야지.”

“그럼 차 두고 갈 테니까 아침에 타고 와.”

“됐어, 버스 타고 가도 돼.”

“나 술 한 병만 먹게.”

잘 먹지도 못하는 놈이 허세 부리다가 큰 코 다친다고 핀잔을 줄 법도 한데 그냥 주문하도록 내버려두는 걸 보면 내 착잡한 마음을 은율이도 이해하고 있는 것 같다. 그래도 친동생인데 차마 인연 끊고 살지는 못하겠고, 그렇다고 떠안고 가자니 갈 길이 멀고, 아, 머리 터지겠다. 금방 테이블에 올라온 소주를 따서 한 잔을 채우자마자 원샷했다.

그렇게 해장국 한 그릇을 말아놓고 소주 한 병을 혼자 다 비웠다. 내 주량의 끝까지 마신 셈이다. 여기서 한 잔만 더 들어가도 취해서 헤롱거릴 것 같다. 알딸딸하고 몽롱한 기분이 들어서 계산을 하는 은율이의 어깨에 고개를 얹고 뭉그적거리다 배를 얻어맞았다.

“달라붙지 말고 얼른 집에 가서 푹 자. 택시 불러줄게.”

“나도 너네 회사에서 자고 갈까….”

“또 개소리 한다, 좀 떨어져봐.”

“나 전화, 주머니에, 전화 왔는데.”

“네가 좀 받으라고.”

“전화….”

사실 그 정도로 취한 건 아니었지만 화 안 내고 받아줄 때 조금 더 떼를 쓰고 싶어서 식당 옆 골목에 들어가 은율이를 껴안고 목과 턱과 귀까지 쪽쪽 입을 맞췄다. 이럴 때 좀 움찔거리면서 반응을 해 주면 참 좋을 텐데 그런 걸 기대하기에는 노은율이 너무 베테랑이다. 허리를 껴안고 웅얼웅얼 전화가 왔다고 주절거리자 짜증을 내면서도 날 밀어내지 않고 마주 안은 채로 내 재킷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낸다. 그러더니 잠시 화면을 들여다보고는 곧 나에게 핸드폰을 건네주었다.

“동생 전화 왔어.”

“어어….”

“차원우, 너 지금 별로 안 취한 거 아니까 한 대 맞기 전에 똑바로 좀 서봐.”

쪼인트 까기의 달인인 노은율의 다리가 쓱 올라오는 걸 보고 나는 곧바로 제대로 몸을 가누고 섰다. 진동하고 있는 핸드폰을 받아들었다. 정말로 차현우의 전화였다.

“어.”

- …형 어딘데.

“나 밖, 왜.”

- 강남역 근처야?

“어.”

- …….

“왜, 뭔데.”

- …지갑 잃어버렸어.

헛웃음이 나왔다. 이놈의 새끼를 내가 진짜….

“너 알아서 해, 데리러 못… 으악!”

“차로 데리러 갈 테니까 잠깐만 기다리라고 빨리 다시 말해야지, 응? 착한 차원우 씨.”

무릎 아래를 손으로 붙들고 한 발로 뛰면서 끙끙거렸다. 지난번에도 걷어차서 멍들게 해놓고 지가 괜히 미안해서 찜질을 해 준다느니 파스를 붙여야 된다느니 난리를 쳤으면서 은율이는 같은 데를 또 풀파워로 걷어찼다. 이것도 기술인가, 너무 아파서 눈물이 다 찔끔 날 것 같았다. 서른 살의 차원우가 노은율의 말을 잘 듣게 되기까지는 숱한 고난과 엄한 교육이 있었다. 나는 두말 않고 동생에게 위치를 물어보았다.

하필 이 와중에 술을 마시는 바람에 차를 끌고 차현우를 데리러 가야 하는 건 내가 아니라 은율이가 되었다. 바쁘다면서 그냥 올라가서 일이나 하지 차현우한테까지 신경을 쓰냐고 했다가 뒤통수까지 얻어맞고 나서야 나는 조용히 침묵을 지켰다. 네온사인이 휘황찬란하게 번쩍거리는 번화가 입구에서부터 한참을 사람들 숲을 헤치고 안쪽으로 들어가고 나서야 건물 밖에서 덜덜 떨고 있는 차현우를 발견할 수 있었다.

“병신같이 지갑 잃어버리고 차비도 없으니까 형님 생각이 좀 났냐?”

“누군 전화하고 싶어서 한 줄 알아?”

당연히 하기 싫은데 했겠지, 존심이 아주 바닥을 쳤겠지, 하고 뒤이어 놀리려고 했는데 은율이가 기어 대신 내 허벅지를 터뜨릴 것처럼 온 힘을 다해 쥐어짜는 바람에 아무 말도 못했다. 여기도 분명히 피멍 들 것 같다. 그러면서 백미러를 통해 차현우를 보면서는 생긋 웃고 있다.

“형이 술 마셔서 내가 운전해 주러 온 거야, 집에 내려주고 옷만 챙겨서 바로 나갈게.”

“…….”

“편하게 쉬다가 가.”

여태까지 같이 살면서 봐온 얼굴 중 손에 꼽힐 만한 착한 얼굴로 은율이가 말했다. 뒷자리의 차현우는 대답도 없고 시선도 돌려버린다. 그나마 돈만 받고 나가겠다고 하지 않은 게 다행이라 나는 더 건드리지 않았다.

집에 들어가서 은율이가 씻고 옷을 챙기는 동안 나는 거실에 계속 서 있었다. 차현우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남의 집에 왔으면 적당히 예의를 지켜서 쓸데없는 거 뒤지지 말고 잠이나 자면 좋겠는데 여기 저기 들쑤시고 다니는 걸 보아하니 꼬투리를 잡으려고 그러는 것 같았다. 집에 내려가서 엄마한테 형네 집이 엄청나게 더럽고 정리도 안 되어 있어서 다시는 못 가겠다 뭐 이런 말을 하고 싶은가 본데 노은율이랑 같이 사는 이상 엄청나게 더러워질래도 더러울 수가 없다. 심지어 내 몸이 더러운 것도 지가 못 참아서 주말에 안 씻고 버틸 때 엉덩이를 걷어차서라도 욕실에 집어넣는 성격이 노은율인데 집이 더러운 꼴을 볼 리가 있나.

“…뭐, 깨끗하게 해놓고 사네.”

“네가 뭔데 남의 집 검사 질이야?”

“좀 보는 것도 안 되냐? 왜, 뭐 보면 안 되는 거 있나봐?”

“그런 거 없으니까 편하게 봐도 돼. 밥은 먹었어?”

방금 전까지 나한테 빈정거리고 있었으면서 은율이가 말을 걸자마자 입을 싹 닫아버린다. 딴에는 친절하게 말을 건넸는데도 무시당한 게 속상할 법도 하지만 은율이는 전혀 그런 내색을 하지 않고 있었다. 젖은 머리를 말리면서 옷을 챙기고 있길래 가서 머리를 말려주려고 했다가 찔끔했다. 눈을 부라리며 동생 보는 앞에서 허튼 수작 했다가는 거시기를 물어 뜯어버린다고 입모양으로만 말하는 걸 나는 용케도 알아듣고 얼른 손을 떼었다.

“…형, 이거 진짜야?”

웬일로 저 새끼 입에서 형 소리가 나오나 모르겠다. 어슬렁어슬렁 거실로 나갔더니 차현우가 TV 위에 걸어 놓았던 영국 축구팀 레플리카를 떼어서 들고 있었다.

“내 거 아니니까 은율이한테 물어봐. 은율이 불러줘?”

“…….”

“싫으면 말고.”

“부, 불러 봐.”

어쭈, 이건 또 처음 있는 일인데…? 저 유니폼이 뭔가 대단한 거라도 되나 보다. 그렇단 말이지. 방금 전까지도 술기운 때문에 약간 반응 속도가 느리던 머리가 순식간에 깨어서 핑핑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 타이밍에 딱 적절하게 은율이가 가방을 들고 나왔다.

“아, 그 팀 좋아해?”

“이거….”

“선물 받은 건데, 거기 감독님이랑 선수 사인도 있을걸.”

“어, 어디서…?”

“예전에 아시아 투어로 친선경기 왔을 때 우리 회사에서 홍보 맡았었거든. 그 유니폼 한정으로 나온 거라길래 제비뽑기까지 해서 타 왔던 건데.”

와, 차현우 저런 표정 처음 본다. 무슨 집안에서 굴러다니는 티셔츠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은율이는 덤덤하게 말하는데 듣고 있는 차현우는 얼굴 표정만으로 인간극장을 한 편 찍고 있는 것 같았다. 저 사람이 너무 싫은데 이 유니폼은 진짜 갖고 싶고, 저 사람한테 받기는 싫은데 이 유니폼이 한정판이고, 저 사람이 주는 거면 필요 없지만 이 유니폼은 소장 욕구가 막 끓어오르고, 저 사람은 진짜 마음에 안 드는데 이 유니폼은 정말 놓기 싫고….

“그냥 가져가. 어차피 나 그 팀 안 좋아해.”

엄청난 가치 갈등 속 혼돈 상태에서 은율이가 적당히 한 마디를 더 찔러 넣었다. 유니폼을 쥐고 있는 손이 하얗게 질려있는 걸 보면 엄청나게 갖고 싶었던 모양이다. 됐다, 상황 정리 끝났다. 나는 씩 웃었다.

“원우야, 나 간다. 옷 들고 가니까 아마 아침엔 안 올 거고 퇴근할 때 전화할게.”

“어.”

그리고 눈치를 볼 사람이 사라지고 나니 이젠 대놓고 좋아하고 있다. 유니폼을 여기저기 들춰보면서 헤벌쭉 웃는 걸 보니까 어이가 없고 황당하면서도 뭔가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생겼다 싶어 나도 기분이 묘하게 들떴다. 한참 그렇게 크리스마스 선물 받은 어린 아이처럼 어쩔 줄을 몰라 하다가 뒤늦게 정신이 돌아왔는지 다시 표정을 굳히며 차현우가 나를 노려본다. 기가 차서 웃음만 나왔다.

“그거 비싼 거냐?”

이럴 때는 괜히 심기를 건드린다거나 은율이가 싫어도 그건 좋은가보네 등등의 속 긁는 말을 하면 안 된다. 전혀 상관없는 말을 툭 던졌더니 차현우가 잠시 망설이다 고개를 끄덕인다.

“지금은 돈 주고도 못 사. 게다가 사인까지 거의 다 있어서. 이적한 선수도 있고….”

“좋은 건가?”

“…….”

“뭐 알아서 하고, 바닥에서 자든 소파에서 자든 알아서 해. 침대는 양보 못하니까.”

은율이와 똑같이 행동하는 게 플러스 요인이 될 것 같아서 노림수를 둔 거였는데 제대로 먹혔나보다. 씻으러 들어가려고 옷을 벗고 있는데 뒤에서 뭘 그렇게 망설이는지 그림자가 한참을 꼬물거리더니 형, 하는 소심한 목소리가 들렸다.

“이거 진짜 나 가져?”

“가져, 은율이가 가지라잖아.”

“…이거 존나 비싸다니까, 진짜. 경매도 잘 안 올라와.”

“비싸면 뭐해, 은율이가 좋아하는 팀 아니라는데. 그럼 나도 관심 없고.”

“…….”

“뭐 문제 있냐?”

“…없어.”

“그럼 나 씻는다.”

“…어.”

욕실로 들어오고 나서 샤워기를 틀고 세면대 물까지 콸콸 틀어놓은 후에야 나는 최대한 소리를 죽여 가며 웃었다. 왜 은율이가 차현우를 보고 스물두 살의 차원우 같다고 했는지 이제 알겠다. 처음에는 욱하는 성격에 다혈질인 걸 닮았다고 하나 싶어서 안 닮았다고 우겼는데 그것만이 아니었다. 은율이 말대로 차현우는 어렸을 때의 나랑 똑같다. 욕심 많고, 좋고 싫은 거 못 숨기고, 남들에게 지기 싫어서 성질 더러운 티를 팍팍 내고 다니고, 한 번 싫은 걸로 정한 사람은 돌아볼 생각도 안하지만, 자기한테 잘해 준다고 생각되는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의 첫인상이 어땠든 간에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그런 단세포다. 그래, 단순하기 짝이 없다. 왜냐하면 어리니까. 웃음이 절로 나왔다. 이제 군대 들어가서 일 년 밖에 안 지난 놈이 다 큰 것도 아닌데 나는 저 녀석에게 뭔가를 기대하고, 또 원망을 하고….

그런 놈을 고작 유니폼 하나로 반쯤 구워삶아 놓은 은율이는 아마도 그걸 다 알고 그랬을 것이다. 그래서 차현우가 지껄이는 말에도 덤덤할 수 있었고, 냉랭한 태도에도 낯빛 하나 변하지 않고 태연하게 마주 대할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내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지껄여도 성질을 내는 게 아니라 그냥 받아 넘겨줬나 보다. 역시 나보다는 은율이가 백 배 낫다.

[현우가 유니폼 되게 좋아한다 진짜 단순한 새끼야]

문자를 보내자 금방 답이 왔다.

[너 닮은 거 이제 알았냐?]

내 애인은 똑똑하고, 현명하고, 든든하고, 강하고, 거기에 착하기까지 하다. 아, 예쁜 걸 빼먹었구나. 화장실 욕조에 쪼그리고 앉아 히죽히죽 웃으면서 사랑 고백 문자를 보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죄인처럼 살아야 되는 게 맞다. 이렇게 잘난 사람을 끼고 살다니 복을 아주 무더기로 받은 것 같다.

***

연초에 처리해야 될 일이 슬슬 많아지면서부터 업무가 늘어나고 있었다. 그래서 걸려온 전화를 못 보고 지나칠 뻔했다. 이상한 지역번호를 보고 스팸인 줄 알았는데 생각해 보니까 강원도의 지역번호였다. 어디 지사에서 전화를 한 건가, 사무적으로 여보세요, 하고 전화를 받자 전화 너머가 잠잠했다.

“네, 차원우입니다.”

- …나야.

“아, 어. 웬일이냐.”

생전 전화 한 번을 먼저 안 걸던 차현우가 부대로 복귀한 지 며칠 되지도 않았는데 무슨 바람이 불어서 전화를 한 건지 모르겠다. 신기해서 하던 일을 잠깐 멈추고 전화에 집중을 했다. 차현우는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지 한참 뜸을 들이더니 길게 한숨을 쉬었다.

- …은율이형한테.

“뭐?”

- 고맙다고 전해 줘.

“…누구한테?”

- 끊는다.

그러더니 전화가 툭 끊겼다. 화면이 꺼진 핸드폰을 얼이 빠져서 쳐다보다가 허허, 하고 웃었다. 도대체 그 유니폼이 어떤 거길래 그러나 궁금해져서 인터넷에 팀명과 한정판 레플리카 사인 등등의 검색어를 붙여서 검색을 해 보았다. 줄줄이 나오는 글들이 죄다 구매하고 싶다는 글 혹은 구매한 놈들의 자랑 글이다. 이렇게 귀한 건줄 알았으면 좀 잘 담아서 보관을 해둘걸 괜히 TV 위에 걸어놓았다. 하품을 하면서 블로그와 카페 몇 군데를 옮겨 다니다가 문득 눈에 뜨이는 글을 발견했다. 분명 엊그제까지 우리 집에 걸려 있던 유니폼과 똑같은 유니폼의 사진이 올라와 있었다.

제목 : 님들 나 득템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잠깐 휴가 나와서 서울 사는 형네 집에 갔는데 이 레플리카가 그 집 티비 위에 떡하니 걸려있더라ㅋㅋㅋㅋㅋㅋㅋㅋ 와 나 진짜 하도 성의 없이 해놔서 짜가인 줄 알았음ㅋㅋㅋㅋㅋ 근데 진짜였어 미친ㅋㅋㅋㅋㅋ 목 탭 국기 탭 숫자 탭까지 다 봤는데 와 미친 진짜로 진짜임 참나 게다가 감독이랑 선수 친필사인까지 있음ㅋㅋㅋㅋㅋㅋㅋ 내가 이거 얼마에 사왔게? 공짜에 가져옴ㅋㅋㅋㅋㅋ 형 애인이 일 때문에 받아온 건데 그냥 나 가지라고 줬음ㅋㅋㅋㅋㅋ 나 진짜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다 복귀날인데 미쳤나봐 기분 째진다 아오 시발 존나 좋아!!!

밑에 달린 리플을 살펴보았다. 미친놈아 존나 치사하다 부터 시작해서 아닐 거라고 짜가일 거라고 현실을 부정하는 시기와 질투, 거기에 부럽다는 심경과 함께 펼쳐지는 눈물의 향연까지 다양하다. 본문에 쓰여 있는 글씨를 나는 다시 한 번 또박또박 읽었다. 형 애인이, 형 애인이…. 피식피식 웃으면서 그 화면을 찍어 은율이에게 보냈다. 새끼가 결국 이럴 거면서 십 년을 속 썩게 만든다. 이 어린 차원우 같은 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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