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
끄으으, 입을 떼기가 무섭게 내장 깊은 곳에서부터 신음소리가 밀려 나왔다. 핸드폰을 찾기 위해 옆을 더듬거리다가 침대가 비어있다는 걸 깨닫고 실눈을 떴다. 베개가 움푹 들어가 있는 걸 보면 나간 지 얼마 안 된 것 같다. 올해의 마지막 토요일인데 은율이는 또 출근하는 처지인가보다. 연말은 가족과 애인과 오손도손 함께하라고 좀 빼주면 어디가 덧나나, 노은율의 회사는 자비심이 없다. 그리고 음주 후폭풍 때문에 좀비 같은 소리를 내면서 거실로 기어나가게 만드는 내 회사도 자비심이 없고.
바야흐로 숙취와 주정의 하이라이트 기간인 망년회 시즌이다. 중고등학교 때 친구들하고는 몇 명 연락하는 녀석들이 없고, 대학교 친구라고 해 봤자 민기와 소정이가 전부고, 같이 입사 시험을 준비했던 인터넷 카페 모임 인원은 여자 반 남자 반이라 소주보다 간단하게 맥주 정도만 마시곤 한다. 그러니 이 지옥의 망년회 일정은 전부 회사 때문이다. 연말 술자리를 가질 거면 그냥 단체로 모여서 고기나 구워 먹고 말지 뭐 그렇게 따로 모이겠다고 이 자리 저 자리를 만드는지 골치가 다 아프다. 영업을 하는 회사도 아니고 술을 안 먹으면 인사고과에 영향을 주는 회사도 아니지만 밖에 한 번 나오면 집에 들어가기 싫어하는 부장님 덕에 술자리가 흘러넘친다. 부장님은 어찌나 친절하신지 우리 기수만 모아서 따로 술을 사주시고 부서 전체 다 같이 모여서도 술을 사주시고 우리 업무팀만 또 따로 모아서 술을 사주시고…. 동기들이 술이나 못 먹으면 눈치껏 단체로 자리를 피하기라도 하겠는데 말술에 주당들만 모여서 술자리가 생기면 신난다고 달려가는 놈들이라 그런 요령은 기대할 수도 없다. 심지어 상사들과 사이까지 좋다. 이게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모르겠다.
꼬박 사흘간 술자리에 불려 다니다가 어제는 기어이 기절한 채로 집에 실려 와야 했다. 물론 날 실어온 건 토요일 아침부터 출근을 한 노은율이고. 분명히 엄청 피곤한 상태로 나갔을 거기 때문에 오늘은 꼼짝없이 잘 보여야 하는 날이다. 속은 쓰리고 몸은 늘어지고 머리는 김이라도 날 것처럼 뜨끈했지만 나는 자발적으로 집 청소를 시작했다. 눈에 보이는 건 바로바로 치우라고 은율이가 아무리 잔소리를 해도 귀찮아서 나중에 한꺼번에 치우고 그러다 등짝을 얻어맞는 게 내 습관이지만 오늘은 등짝을 맞는 선에서 끝나지 않을 것 같아서 무조건 마음에 들도록 해놔야 했다.
청소기, 걸레질, 신발장 정리, 침대 시트 정리, 분리수거까지 완벽하게 해놓고 나서 나는 녹초가 되었다. 사람은 역시 일을 하면서 살아야 되나 보다. 식도를 타고 소주 냄새가 올라오는 것 같아서 뭘 먹고 싶지가 않았는데 집안일을 다 하고 나니까 엄청난 허기가 느껴졌다. 숙취엔 역시 라면이지, 고춧가루와 파를 듬뿍 넣은 해장라면을 먹으려고 물을 끓이며 노래를 흥얼거리고 있는데 갑자기 번호키 누르는 소리가 들렸다. 그것도 매우 빠른 속도로. 곧 문이 활짝 열렸다. 엄청난 속도로 열려서 문짝이 뜯어져 나가는 줄 알았다.
“벌써 퇴근했어?”
번호키도 현관문도 아작을 낼 것처럼 열고 들어오더니 내 질문을 가볍게 패스한 은율이가 광속으로 방으로 들어가 버린다. 나는 어리둥절해졌다. 그리고 은율이가 들어오는 과정을 다시 복습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저렇게 화를 낼 만큼 마음에 안 드는 짓을 한 기억이 없다. 이럴 때 제 화를 못 이겨서 나에게까지 성질을 내는 노은율을 잘 구슬리면 지난번처럼 쭈구리 모드의 귀여운 모습을 구경할 수 있다. 살짝 열려 있는 방문 앞으로 슬금슬금 다가가서 노은율, 하고 불렀는데 대답이 없다. 안을 들여다보자 옷도 안 갈아입고 침대에 엎어져 있다. 심상치 않은 기운이다.
“…왜 그래?”
실연당한 여고생마냥 베개에 얼굴을 파묻은 채 미동도 하지 않는다. 혹시 우나 싶어서 슬쩍 등 위에 손을 올려보았다. 들썩거리는 정도는 아니어도 떨고 있는 것 같기는 하다. 얼굴을 봐야 할 것 같아서 어깨를 붙들어 일으키려고 하자마자 은율이가 내 손을 확 쳐내더니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미안한데 나 지금 너무 빡쳐서 너한테 불똥 튈 것 같으니까 좀 나가 있어.”
나는 재빠르게 분위기 파악을 했다. 주변 공기부터가 다르다. 이럴 때는 조용히 나가줘야 한다. 평소에는 불똥이 튀든 말든 화가 나면 애먼 데에 다 짜증을 뿌리고 다니는 녀석이 나가 있으라고 먼저 말을 한다는 건 곧 불똥이 불똥 정도가 아니라는 소리다. 군말 없이 방문을 닫고 나왔다.
라면을 끓여서 먹자니 방문을 부수면서 은율이가 뛰쳐나와서 넌 내가 이렇게 심각한데 라면이 넘어가냐고 일갈을 할 것 같아 도저히 편하게는 못 먹겠고, 그렇다고 화가 난 은율이를 달래서 뭐라도 먹이려니 엄두가 안 나고, 거실을 서성거리며 고민을 하다가 나는 결국 세수만 하고 패딩 점퍼 후드를 뒤집어쓴 채로 밖으로 나왔다. 집 앞 놀이터 구석의 벤치에 앉아서 담배 한 개비를 뻑뻑 피웠다. 일어나자마자 밥보다 담배가 먼저 들어가니까 눈앞이 어질어질했다. 머리를 싸매 쥐고 하나 더 불을 붙였다. 내가 물 올렸던 가스 불을 끄고 나왔었나, 나는 언제 밥을 먹을 수 있을까, 언제쯤 들어가면 타이밍이 맞을까… 모르겠다, 대충 좀 있다가 들어가면 되겠지. 앉아서 시간을 때우면 너무 백수처럼 보일 것 같아 일어나서 아파트 산책로를 천천히 걸었다. 다혈질 애인 덕분에 속 쓰림과 두통에 시달리며 상쾌한 주말 낮의 찬 공기를 마시게 되다니 거 참 이렇게 고마울 수가 없다.
거의 한 시간을 밖에서 그렇게 떨고 있었던 것 같다. 추워서 경비실에라도 들어가 있으려고 다시 집 쪽을 향해 걷다가 혼자 멈칫했다. 보통 이런 일이 생기면 왜 화가 났는지를 제일 먼저 궁금해 해야 하는 거 아닌가, 내가 처음 한 걱정이 가스 불이었다는 걸 아는 사람도 없는데 괜히 미안하고 창피해졌다. 그 타이밍에 딱 문자가 도착했다. 얼어 죽을 것 같았는데 귀신같은 타이밍이다.
[들어와]
[치킨왔어]
[맥주사와]
뭐가 왔다고? 눈을 의심하고 문자를 다시 읽었다. 빡쳐서 말도 안 하고 침대에 엎드려 있더니 대체 치킨은 언제 시켰는지 모르겠다.
맥주 두 캔을 달랑달랑 들고 집에 들어갔더니 정말로 치킨 냄새가 나고 있었다. 거실 쪽으로 들어가다가 나는 앞에 펼쳐진 기가 막힌 광경에 멈춰 섰다. 치킨, 피자, 보쌈, 무슨 뷔페도 아니고 거실에 온통 널브러져 있는 음식들을 입을 떡 벌리고 보다가 초인종 소리가 울려서 인터폰을 들었다. 멍하니 서있는 나를 지나쳐서 현관으로 간 은율이는 태연하게 계산을 하더니 자장면과 짬뽕, 탕수육까지 있는 접시를 양손에 들고 와서 거실에 내려놓는다.
가끔 귀찮을 때 밥을 시켜먹는 동네 분식집 아주머니가 살갑게 웃으며 쟁반에 한가득 가지고 온 떡볶이와 김치볶음밥과 돈가스 세트를 내려놓는 것으로 홈 뷔페 메뉴 배달이 끝났다. 은율이는 발 디딜 틈도 없이 차려진 음식들을 전부 뜯어 놓고 정말 뷔페라도 온 것처럼 접시에 하나씩 담아 오물오물 잘도 먹고 있다.
자주는 아니어도 꼭 한 번씩 이런다. 이번에도 올 것이 왔구나. 한숨을 쉬었다.
“왜 안 앉아? 배 안 고파?”
“아니, 고프지. 고픈데….”
배는 아까부터 고팠지만 이걸 다 먹을 정도는 아니었다. 그렇다고 적당히 시키지 너무 많이 시킨 거 아니냐고 잔소리를 하면 성질을 낼 것 같아 일단 앉아서 짬뽕 국물부터 들이켰다. 시원하긴 하다. 뭐 어차피 시킨 거니까 먹어볼까.
아무리 남자 둘이어도 나나 은율이가 그렇게 많이 먹지는 않는다. 배를 채우고 정신을 차리고 보니까 먹은 음식보다 남은 음식이 많아서 한숨이 나왔다. 이게 다 얼마야, 얼추 계산을 해 봐도 십만 원은 훌쩍 넘길 것 같다. 그 와중에 맥주를 왜 두 캔만 사오냐면서 투덜거린 은율이는 주방에 가서 소주를 들고 온다. 소주 냄새만 맡아도 속에서 올라올 것 같았다. 같이 술을 먹어주는 대신 남은 보쌈 고기를 골라 먹으면서 눈치를 살폈다. 재미도 없어 보이는 TV 프로그램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치킨 조각에 소주를 후룩후룩 마시고 있는 표정이 아까보다는 많이 풀어진 것 같았다.
“왜 인간은 위가 하나밖에 없냐, 짜증나게.”
“어?”
“소처럼 한 네 개쯤 되면 다 먹을 수 있었을 텐데.”
그러다 아주 되새김질도 하고 싶다고 그러겠다. 아쉬운 눈빛으로 남은 음식들을 쳐다보고 있는 걸 보니 정말로 다 먹고 싶어서 시킨 것 같기는 하다.
“…회사에서 무슨 일 있었어?”
“기획하던 거 하나 파토 나서. 나 피자 좀 줘.”
멀리 있던 피자를 끌어다 줬더니 피자 두 쪽을 겹쳐서 한껏 베어 문다. 여태 먹은 것만으로도 양이 차고도 넘쳤을 텐데 저렇게 먹는 걸 보니까 왠지 시간이 좀 지나면 탈이 날 것 같은 강한 예감이 들었다. 집에 소화제가 있었던가.
“그 씨발놈들, 금요일에 컨펌 받더니 월요일에 회의합시다 이 지랄해서 주말 내내 일하게 만들고, 해놓은 게 마음에 안 든다고 물리라고 그러고, 기획팀 매니저 새로 온 형이 다음 달로 넘기지 않으면 도저히 시간 못 뺀다고 하니까 매니저 형한테 얼마나 지랄을 해놨는지 회사를 그만두니 어쩌니….”
이어지는 말들은 은율이가 회사에서 하는 광고 업무에 대한 이야기였는데 나는 도저히 들어도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서 그냥 고개만 끄덕였다. 어쨌거나 클라이언트가 개새끼라 존나 빡치고 있었는데 기껏 일 다 해놨더니 광고사를 옮긴다고 해서 해놓은 일이 모두 수포로 돌아가는 바람에 걷잡을 수 없이 더 빡쳤다는 건 알아들었다. 실컷 쌍욕을 하고 나서 속이 좀 풀렸는지 남은 소주를 병째로 원샷을 한다. 얼른 탕수육 몇 점을 집어서 입에 물려주었다.
“아 씨발 회사 때려 치고 싶다 진짜.”
“그만둬, 그럼.”
“뭐?”
아무 생각 없이 한 대답이었는데 소파에 기대어 앉아 있던 은율이가 갑자기 자세를 바로 하고 눈을 치켜뜨며 되묻는 바람에 물을 먹다가 사레가 들려 한참 기침을 했다. 그렇다고 ‘그래도 힘을 내서 열심히 다녀야지 너무 우울해하지 마 우리에겐 밝은 새해가 다가오고 있잖아 내일은 오늘보다 더 나아질 거야 힘내자 파이팅’ 따위의 대답을 원한 건 아닐 것 같았다.
“아니, 난 그냥, 그 회사 너한테 일도 너무 많이 시키는 것 같고 그러니까.”
“…….”
“너무 힘들면 그만둬야지. 더 늦으면 다른 데 자리 잡기도 어렵고.”
말도 없이 빤히 쳐다보고만 있다. 정말 그 따위의 대답을 원한 건가….
“…이리 와 봐.”
손가락을 까딱까딱 한다. 솔직히 나는 좀 쫄았다. 지난번 코피의 추억이 문득 되살아났다. 멍이 든 게 한 열흘을 가는 바람에 회사에서 내내 놀림을 받았었다.
“한 대 까지만 맞아준다.”
“알았어.”
가드를 올리고 가까이 갔더니 팔을 잡아 떼어내려고 해서 나는 기겁을 했다.
“야 얼굴은 안 돼!”
“입술은 돼?”
아니 도대체 입술을 뭘 어떻게 때리겠다는 건지… 는 알 필요가 없었다. 은율이가 내 볼을 붙들고 대뜸 키스를 했기 때문이다. 입술 되지. 그럼. 되고말고. 백 번 돼. 알아서 주도를 하는 적극적인 노은율이 얼마만인지 모르겠어서 뒷덜미가 다 울릴 정도였다. 그런데 키스를 계속 하기에는 난관이 하나 있었다. 그 난관을 내 입으로 말하기 전에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다가 떨어져 나간 은율이가 픽 웃는다.
“아까 엄마한테 전화 와서 잠깐 통화하는데 내가 회사 그만두고 싶다고 했더니 여태까지 나 키우느라 들었던 돈은 다 갚고 그만두라더라. 아니 아들이 너무 힘들다고 징징거리면 엄마가 돼가지고 그냥 좀 힘내라 기운내라 우쭈쭈 해 주면 좀 좋아? 내가 돈을 안 드리는 것도 아니고.”
“너희 어머니가 계산은 확실하시잖아.”
“그니까 네가 우리 엄마보다 낫다고.”
아 정말 이렇게 예쁜 소리 하는 게 너무 오랜만이라 참 좋기는 한데… 본격적으로 할 참인지 내 허벅지 위에 올라와서 목을 껴안고 얼굴을 들이미는 은율이의 입을 손으로 막았더니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본다. 그래, 나도 내가 지금 내 복 걷어차고 있는 건 알겠거든.
“진짜 미안한데 나 소주 냄새 때문에 토할 것 같아.”
“…하여간에 무드가 없어, 씨발.”
그 무드라는 게 언제 있었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어쨌거나 나도 내가 욕을 먹어도 싸다고 생각한다. 이런 절호의 기회 흔치 않은데… 당분간은 금주를 해야겠다.
집에서 밥을 먹어도 많아봤자 하루에 두 끼라서 늘 허전하게 비어 있는 냉장고 안이 각종 배달 음식들로 꽉꽉 찼다. 당분간 밥을 안 해도 일주일은 먹고 살 것 같다. 아침에 반들반들하게 닦아 놓은 거실에 거한 점심 식사의 잔해들이 남아있는 걸 보고 한숨을 쉬면서 다시 청소기를 꺼내왔다. 다시 아침의 상태로 집을 원상복구 시키는 동안 은율이는 방 안에서 아까부터 통화를 하느라 나오질 않는다. 아마 업무 때문인 것 같았다. 말은 그렇게 했어도 진짜로 그만둘 생각으로 그런 게 아닌 건 아마 모든 직장인들이 똑같을 것이다. 괜히 긁어 부스럼 만들기 싫어서 은율이가 나올 때까지 나는 조용히 인터넷 서핑만 하고 있었다.
“…배 아파.”
역시 슬픈 예감은 빗나가질 않는다. 허리를 구부정하게 굽히고 오만상을 찌푸리며 나오는 은율이에게 이미 아까 있는지 확인부터 해놨던 소화제를 꺼내주었다. 활명수를 무슨 막걸리 마시듯 콸콸 들이붓더니 소파에 웅크리고 누워서 끙끙거린다.
“손 따줘?”
“좀 있다가 봐서. 엄마가 너 신정 때 내려올 건지 물어보래.”
“나야 상관없는데 너 갈 수 있는 시간에 맞춰야지.”
“나도 쉬니까 상관없어.”
“…진짜 그만둔 건 아니지?”
“왜, 진짜 그만두면 안 돼? 아깐 힘들면 그만두라더니.”
힘들면 그만둬도 되지만 그렇게 되면 내가 더 힘들어지기 때문에 나는 머쓱하게 웃었다. 마이너스 통장은 내가 더 뚫더라도 당장 노은율의 통장이 내 통장보다 빵빵하기 때문에 정말로 그런 일이 현실로 일어나면 걱정이 태산일 거다. 그러나 인생은 매일이 현실이지만 연애는 가끔 현실이 아니어도 괜찮으니까 나는 허세를 좀 부렸다.
“형아가 다 알아서 할 테니까 걱정하지 마라. 내가 너 하나 못 먹여 살리겠냐.”
“형은 개뿔, 너랑 나랑 연봉 차이가 얼마더라….”
비겁한 자식, 남자의 자존심을 건드리다니. 하지만 반박할 말이 없었기 때문에 나는 얼른 말을 돌렸다.
“언제 가려고?”
“말일은 아마 정리 때문에 힘들 거고, 신정 다음날로 연차 쓰지 뭐.”
“그럼 신정 아침에 출발하자. 가서 하루 자고.”
“어. 아 진짜 배 아파, 넌 내가 미친놈처럼 처먹으면 좀 말려야지 안 말리고 뭐했냐?”
“네가 너무 미친놈처럼 처먹어서 무섭더라고.”
원래는 머리를 맞추고도 남아야 할 쿠션이 날아오다 떨어지는 걸 보면 아픈 게 맞는 것 같다. 방에서 이불을 가져다 덮어주고 팔을 힘주어 주물렀다. 슬슬 얼굴까지 하얘지고 있다. 단단히 체한 모양이다. 예전에는 시험기간에 신경이 조금만 날카로워져도 쥐콩만큼 먹은 것도 체하고 토할 때가 많아서 나도 은율이가 먹는 것에 꽤 주의를 기울였었는데 내가 무뎌진 건지 오늘은 말릴 생각을 못했다.
“원우야.”
엄지손가락에서 꾸역꾸역 밀려나오는 죽은피를 아까운 듯이 내려다보고 있던 은율이가 나를 불렀다. 새파래진 입술을 손가락으로 문질러주면서 왜, 하고 대답했다.
“냉장고에 삼겹살 있던데 저녁에 삼겹살 구워 먹을까?”
“…니 손에서 지금도 시커먼 피 나거든?”
“피 뺐으니까 고기 먹어줘야지.”
뱃살 안 생기게 하려고 매일 한두 시간씩 운동을 꼬박꼬박 하는 나는 비쩍 마른 놈의 고기 타령에 엄청나게 억울해졌다.
예전의 나와 은율이는 정말 부끄러움이 없었던 것 같다. 펜션 주인이 우리를 이상한 눈으로 보든 말든 연말이라 엄청 비싼 펜션 별채를 예약해 색다르게 이런 짓 저런 짓도 해 보고, 집에서 같이 제야의 종 행사를 보다가 눈 맞으면 불타는 밤을 보내고 새해 첫 일출을 맨몸으로 보고 일출 본 기념으로 한 번 더하고 그랬었다. 아주 예전에 말이다. 지금 그렇게 했다가는 노은율에게 생생한 쌍욕과 영혼이 실린 로우 킥을 선물로 받을 거다. 그리고 그렇게 할 시간도 없었다. 한 해의 마지막 날, 우리는 각자의 직장에서 신정 다음날 연차를 내겠다는 집념으로 업무에 모든 체력을 불사르고 집에 오자마자 퍼져 버렸다. 냉장고에 남아 있는 음식들을 꺼내다가 끼니만 때우고 널브러진 채로 채널을 돌려가며 시상식을 봤다. 열두시가 가까웠을 때 보신각 타종 행사를 틀어놓고 꾸벅꾸벅 졸다가 새해가 됐다면서 펑펑 터뜨리는 폭죽 소리와 환호 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한 살 또 먹었네.”
은율이가 심드렁하게 말했다. 나이 드는 거 말고는 별로 바뀌는 것도 없는 새해다. 나도 별 감흥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뭐가 그렇게 즐거운지 신이 나서 카메라를 향해 손을 흔들고 웃고 난리가 난 TV 속의 커플들을 덤덤하게 보다가 좋은 생각이 났다.
“원래 새해 넘어갈 때 하는 일을 한 해 내내 한다던데.”
“그럼 우린 한 해 내내 이러고 놀아?”
“그러니까 딴 거 하고 있자.”
“뭐하게.”
뭐하긴, 알면서. 나는 음흉하게 웃으면서 은율이의 티셔츠 속으로 손을 넣었다. 피곤하게 새해 벽두부터 발정 나서 덤비지 말라고 발버둥을 치며 밀어내는 손에는 힘이 하나도 안 들어가 있다. 으이구 이 귀여운 츤데레 새끼. 사람 미치게 하는 데 뭐 있다.
***
보통 사람들은 구정과 추석 때 고향에 내려가지만 나와 은율이는 일 년에 한 번 새해 첫날에 집에 다녀온다. 일이 바빠서 명절마다 꼬박꼬박 챙겨서 내려갈 수가 없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둘이 같이 내려가서 부모님들께 같이 인사를 하고 오기 때문에 친척들이 많이 모일 때는 집에 갈 수가 없어서다. 나와 은율이가 같이 집에 가더라도 재떨이가 날아오지 않고 엄마가 주방에 숨어서 울지 않게 되기까지는 우리 사이를 이야기하고 나서도 한참이 걸렸다. 아직도 우리 집 사람들은 은율이를 만날 때마다 서먹해하고 말도 잘 못 붙인다. 그래도 예전에는 쳐다보지도 않으시던 은율이네 어머니가 최근 몇 년 사이 나를 좋게 보고 계시는 덕분에 은율이네 집에 가면 하루 자고 올 수 있어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일 년에 집에 한 번 밖에 못 가는 만큼 갈 때는 확실히 점수를 따놔야 한다. 당분간 풀만 먹으면서 굶을 걸 각오하고 백화점 각종 코너를 휩쓸어 담아 왔더니 짐이 엄청나게 많았다. 내가 집과 주차장을 몇 번이나 오가며 그 많은 짐을 차에 싣는 동안 노은율은 손 하나 까딱 하지 않고 조수석에 누워서 잠을 자고 있다. 물론 처음에는 합의했을지 몰라도 이 정도까지 하라고 했던 건 아니었기 때문에 은율이를 그 꼴로 만든 원인 제공자인 나는 불만 없이 열심히 엘리베이터를 타고 오르락내리락했다. 땀까지 흘려가며 짐을 다 싣고 시동을 걸자 은율이가 그제야 부스스 일어나서 뒤척거렸다.
“뭐 안 먹어도 돼? 가는 길에 김밥이라도 사가?”
“됐어, 휴게소 들러서 먹자….”
“도착하면 깨울 테니까 더 자.”
“알았으니까… 나 잔다고 휴게소 지나치지 마. 나 휴게소 감자 먹을 거야.”
뭐지 새해 첫날이라고 서비스해 주는 듯한 이 귀여운 말투는… 나는 좀 감동받았다. 아련한 눈빛으로 내려다봤더니 분위기를 그새 감지한 은율이가 내 얼굴을 확 떠민다.
“…여기 카메라 있다고.”
“그냥 좀 보면 안 되냐?”
“그래, 거지꼴 만들어 놓으니까 볼만하냐?”
거지까지는 아니지만 상태가 썩 좋지 않긴 하다. 지금처럼 회복이 안 된 상태로 부모님을 뵈었다가는 서울에 올라와서 후폭풍 정도가 아니라 토네이도가 몰아칠 수 있기 때문에 나는 더 장난을 걸지 않고 조수석 시트의 히터를 올려주었다.
은율이가 조용히 잘 수 있도록 카오디오 대신 핸드폰에 이어폰을 꽂고 음악을 들으면서 운전을 했다. 시내를 빠져 나와서 고속도로를 타고 나니까 집에 가는 게 새삼스럽게 실감이 났다. 같이 집에 내려갈 수 있게 된 지는 오 년 정도 된 것 같다. 골프채로 맞아보고 재떨이도 피해보고 울다 실신한 엄마를 업고 병원을 가보기도 하고 아버지가 던진 화분에 맞아 이마가 찢어진 은율이를 데리고 응급실에 가서 꿰매는 일까지 있었더니 이제는 무슨 일이 생기든 초연해질 수 있을 것 같았다.
진지하게 연애를 시작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당연히 처음부터 집안의 동의를 얻을 생각은 하지도 않았었다. 연애를 하면서도 은연중에 우리가 헤어지고 나면 각자 평범한 여자를 만나서 평범하게 가정을 꾸리고 살겠구나, 하고 생각했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 그런 생각을 하면 화가 나기 시작했다.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을 만나는 노은율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끔찍했고, 내가 노은율이 아닌 다른 사람을 만난다는 상상은 할 수도 없었다. 그동안 해 왔던 것처럼 가벼운 연애는 이제 못하겠다, 내 감정이 그만큼 깊어졌다, 내가 한참을 망설이다 고백했을 때 은율이는 자기도 그렇다는 닭살 돋는 대답 대신 그 말 하는데 왜 그렇게 오래 걸리냐면서 화를 냈었다. 우리는 집에 커밍아웃을 하고 도망치듯 동반 입대를 했다. 그리고 그 이후로 재떨이와 골프채와 물과 화분으로 버무려진 격동과 고난의 역사가 있다. 지금은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너무 버거워서 별로 되새기고 싶지 않은 예전의 일이다. 옆에 있는 사람이 비록 다혈질이긴 해도 나보다 대범하고 쿨하면서도 착해 빠진 노은율이 아니었으면 견뎌낼 엄두도 못 냈을 과거이기도 하다.
죽고 못 사는 애인보다는 가족이나 다름없는 동거인, 설레거나 떨리지도 않는 그저 그런 평범한 일상,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마음까지 식어버린 건 절대로 아니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그 괴로웠던 시간을 잘 이겨내 준 은율이가 꼭 포탄 쏟아지는 전장을 헤치고 함께 살아서 나온 전우 같아서 고마웠다. 애틋한 감정도 많이 생겼다. 그래서 요즘에는 예전보다는 좋아한다는 말이나 사랑한다는 말을 더 자주 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어렸을 때는 마음을 드러내는 것이 서툴고, 생각하고 있는 것을 내뱉는 데 익숙하지 않아서 적당히 눈치를 채주기를 바라며 어물쩍 넘어가곤 했지만 지금은 확실히 예전보다는 자연스럽게 속내를 털어놓게 되었다. 문제는 나만 그런 방향으로 변했다는 거다.
이왕 변할 거 같은 방향으로 변하면 매일이 신혼 같고 참 좋았을 텐데, 오히려 예전이 더 솔직했던 은율이는 점점 감정 표현에 박해졌고 어떤 면에선 오히려 나보다도 더 무뚝뚝해졌다. 말은커녕 행동으로도 감정표현을 잘 안 하려고 하고, 가끔은 좋아해서 같이 살아주는 건지 아니면 정말 지난번에 했던 말대로 쓰레기 분리수거를 잘하고 유리창을 잘 닦아서 같이 살아주는 건지 헷갈리도록 면박을 심하게 줄 때가 있다.
노은율이라는 인간의 성격과 생활 습관과 언어 습관까지 손바닥 들여다보듯이 빠삭하게 알고 있는 소정이는 그게 은율이의 방어기제 같은 거라고 했었다. 그렇게 하지 않았을 때 벌어질지도 모르는 일에 대해 미리 겁을 내고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좋아하고 사랑한다는 것을 가감 없이 드러냈을 때 생겼던 일들 때문에 은율이는 아마도 트라우마 비슷한 기억을 갖게 된 것 같다. 그래서 나는 처음에는 잘 적응이 되지 않던 은율이의 변화를 이해했다.
곤히 자고 있는 은율이의 이마를 덮고 있는 앞머리를 살짝 걷어 보았다. 아직도 남아있는 흉터를 볼 때마다 미안해진다. 그리고 동시에 질 나쁜 안도감이 든다. 이 정도까지 같이 왔으니 이제 헤어지려고 해도 아마 헤어질 수가 없겠구나, 하는 마음. 눈치 빠른 노은율에게 그 마음을 들키지 않기 위해 나는 나름대로 안간힘을 쓰고 있다.
아니, 어쩌면 안간힘을 쓰고 있는 나를 은율이가 모르는 척 해 주는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도 하게 된다.
“…괜히 옛날 생각하면서 심란해 하지 말고 운전에나 집중해.”
분명 삼 초 전까지 자고 있다가 여전히 눈을 감은 채로 내 표정을 보지도 않고 복잡한 내 머릿속을 속속들이 읽어버리는 걸 보면 말이다. 보드랍게 흐트러지는 머리카락을 내려서 이마의 상처를 덮어주면서 나는 허탈하게 웃었다. 아무튼 이길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