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
바싹 마른 목 때문에 헛기침을 하며 거실로 나왔다. 밖이 밝은 걸 보니 아마 대낮이 되도록 잠을 잔 모양이다. 역시 숙면에는 주말 늦잠이 최고다.
평소에는 잘 보지도 않고 볼 시간도 없어서 매번 버릴지 말지 고민하게 만드는 TV는 이렇게 주말이 되어야 제 역할을 한다. 과자 봉지 하나를 끌어안고 멍하니 TV를 보고 있는 노은율의 옆에 가서 끙, 하는 소리를 내며 드러누웠다.
“맨바닥에 누우면 입 돌아간다. 거기 보일러도 안 들어가.”
사람이 나와도 쳐다보지도 않길래 관심도 없는 줄 알았는데 그래도 챙기기는 한다. 나는 굼벵이처럼 꿈틀거리며 몸을 움직여서 노은율의 허벅지를 베고 누웠다. 무겁다고 투덜거리면서도 부스러기가 떨어지지 않도록 과자 봉지를 한 쪽에 내려놓은 노은율이 하품을 하며 채널을 돌렸다. 드라마도 재미가 없고, 예능 재방송은 어지간한 건 다 케이블에서 하도 많이 해서 본 거고, 결국 건물이 펑펑 터져 나가고 차가 뒤집어지고 사람들이 소리를 지르면서 도시를 질주하는 이상한 액션 영화를 틀어놓고는 내 머리를 쓱 밀어낸다.
“왜….”
“밥 먹어야지.”
“안 먹었냐?”
“혼자 먹기 싫어서.”
참 설명이 필요 없는 간단명료한 대화다. 쿠션을 끌어안고 누운 채로 고개를 젖혀 주방으로 가는 노은율의 뒷모습을 가만히 보았다. 대충 있는 반찬 데워 먹는 걸로 해결할 생각인지 냉장고를 열고 뭔가를 찾고 있다. 나는 노곤한 몸을 일으켰다. 능숙하게 상을 차리는 노은율의 옆에서 어슬렁거리다가 슬쩍 허리를 안았다. 내내 햇빛을 받고 있던 몸이 따뜻해서 기분이 좋기는 한데….
“왜 이래, 좀 떨어져.”
냉정하긴. 예전엔 이런 행동을 하면 닭살은 돋더라도 어쨌거나 눈도 맞추고 입도 맞추고 배도 맞추고 했던 것 같은데 말이지. 머리를 긁적이면서 팔을 풀고 식탁에 얌전히 앉았다. 당사자도 감흥이 없어 보이는데 괜한 짓을 한 것 같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밥을 젓가락으로 깨작거렸다.
예전의 노은율은 최소한 지금보다는 귀여웠다. 시험공부가 힘들다고 소주 세 병을 원샷으로 빨고 나서 징징 울지를 않나, 마른 수건이 떨어졌다고 가져다 달라길래 욕실 문을 벌컥 열었더니 다 벗고 있는데 왜 문을 막 여냐면서 세숫대야를 집어던지지를 않나, 한참 리포트 쓰고 있길래 뒤에서 좀 들여다봤더니 얼굴이 새빨개져서는 귀에 대고 훅훅거리지 말라고 울상을 해서 사람 얼빠지게 하지를 않나… 아, 공통점이 있구나. 그 기억들은 전부 우리가 사귀기 전의 일이다. 한참 묘한 기류가 형성된 때였으니까 내외도 하고 내숭도 떨고 밀당도 했었다. 나도 노은율에게 마찬가지로 굴었고.
지금은 둘 다 내외건 내숭이건 밀당이건 개뿔도 없다. 눈곱도 안 뗀 채로 밥을 먹은 게 찜찜해서 식사가 끝나자마자 이를 닦고 세수를 하고 있는데 대뜸 들어온 노은율이 변기 커버를 올린다.
“인간적으로 사람 씻고 있는데 옆에서 용변 보는 건 좀 그렇지 않냐?”
“그럼 바짝 벌어서 화장실 두 개인 데로 이사 가든가.”
“아주 따로 살겠다, 그러다가.”
농담으로 한 말이었는데 고개를 휙 돌려 쳐다보는 시선이 쌀쌀맞기 그지없다.
“왜, 너무 오래 같이 사니까 이제 좀 따로 살고 싶냐? 한 번 따로 살아봐?”
젖은 얼굴을 대충 닦으며 대꾸했다.
“너 짜증나 있는 건 알겠는데, 나 때문에 짜증난 거 아니면 나한테 풀지 마라.”
이제는 말없이 얼굴만 봐도 기분이 어떤지 알 수 있는 사이인데 분위기가 별로 안 좋은 녀석을 괜히 장난친답시고 건드린 것 같아 정색을 했다. 내가 이런 식으로 진지하게 나가면 노은율의 반응은 보통 두 가지로 나뉜다. 성질이 많이 났을 땐 분위기 잡으면서 잘난 척하는 거 꼴 보기 싫다고 화를 낼 때도 있지만 때때로 자기가 심하다고 생각할 때는 주눅이 들어 꿍얼거리며 변명을 한다. 오늘은 후자의 경우인 것 같다. 스파크가 튈 것처럼 노려보던 눈빛이 슬그머니 누그러진다.
“…늦잠 자려고 했는데 이상한 아줌마가 문 두드려서 다 깼어. 우리 집에 심상치 않은 기운이 어쩌고, 기운 같은 소리 하네, 아 짜증나.”
어쩐지 쉬는 주말은 무조건 해가 중천에 뜰 때까지 잠으로 채우는 노은율이 왜 나보다 먼저 일어나있나 했다. 잠을 못 자서 신경이 예민해져 있었나 보다. 다시 자려고 했는데 잠도 안 들고, 이러다 낮잠 자면 밤에 못 잘 텐데, 내가 별 대답이 없으니까 쫄아서 계속 변명조로 웅얼거리더니 샤워를 하려는지 옷을 벗고 있다. 눈앞에서 벌어지는 무감정의 스트립쇼를 구경하다가 툭 던졌다.
“얼른 씻고 나와서 한 번 하자.”
“…뭘 대낮부터 덤벼, 싫어.”
“예전에는 욕실에서도 했으면서.”
“그건 혈기왕성한 이십대 때 얘기고, 체력이 예전 같은 줄 아나.”
그건 맞는 말이다. 그래도 체력은 몰라도 테크닉은 예전보다 낫지 않나, 속옷 하나만 입고 있는 노은율의 팔을 슬쩍 잡았더니 얼른 손을 쳐낸다.
“여기서는 안 해. 힘들어. 나가서 해.”
오 초 전까지만 해도 싫다고 한 사람 맞나 싶다. 나는 피식 웃으면서 밖으로 나왔다.
침대에 엎드려 핸드폰을 만지작거리고 있다가 방문이 열리는 걸 보고 침대 옆 서랍장에서 콘돔과 젤을 꺼냈다. 젖은 머리를 대충 털면서 옆으로 들어온 노은율의 맨몸은 꼭 김이라도 날 것처럼 뜨끈해져 있다. 너무 뜨겁지 않나 싶을 정도로 온도 높은 물을 펑펑 틀어놓고 샤워를 하는 버릇 때문이다. 손바닥에 살이 감기는 느낌이 좋아서 가볍게 키스부터 했다.
문득 첫 키스를 하던 때가 생각났다. 원룸 앞 포장마차, 새벽 세 시쯤, 주인아주머니는 한 테이블밖에 남지 않은 손님들이 일어날 기미가 안 보여서인지 TV 앞에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소주 안주로 생오이를 와작와작 씹어 먹던 노은율이 오이를 더 가지고 오겠다고 일어서는 걸 붙들고 키스를 했었다. 그때 노은율의 표정을 잊을 수가 없다. 여자 친구를 많이 사귀어봤다느니 어디까지 갔다느니 하면서 있는 대로 허세는 다 부리던 놈이, 그게 뻥카라는 걸 증명이라도 하는 것처럼 먼저 혀부터 집어넣던 나를 밀어내지도 못하고 눈을 꼭 감은 채로 몸을 덜덜 떨고 있었다. 실눈을 뜨고 표정을 봤다가 빵 터져서 웃기 시작했더니 터질 것처럼 빨개진 얼굴로 욕을 거나하게 하는 바람에 주인아주머니가 그쯤 먹었으면 들어가서 잠이나 자라고 짜증을 내셨다. 우리는 손을 잡고 집으로 돌아왔고 밤새 입술이 퉁퉁 붓도록 키스를 했었다.
“아 좀… 감질나니까 빨리 만지라고.”
그런 풋풋함 역시 지금은 없어진 지 오래다. 먼저 내 손을 잡아서 아래로 가져다 대는 노은율은 예전처럼 부끄러워하지도 않고 얼굴을 붉히지도 않는다.
“천천히 만지면 안 되고?”
“안 하던 짓 하지 마.”
안 하던 짓이라니, 내가 매번 그렇게 급하게 한 것도 아닌데 좀 억울하다. 괴롭히고 싶어져서 느긋하게 다시 키스를 하면서 등을 쓰다듬다가 손을 앞으로 돌려 유두를 꾹 눌렀다. 손톱으로 살살 긁고 빙글빙글 주위를 문지르자 파드득 몸을 떤다. 예전 같은 게 아직 남아있긴 하다. 아니, 예전보다는 훨씬 익숙해지고 나아진 반응이다. 혀를 말아 당기고 있는데도 뭐라고 웅얼웅얼 말을 하려고 해서 입술을 놓아주었더니 이제야 좀 상기된 얼굴로 빤히 쳐다본다.
“왜?”
“…너 이상해.”
“뭐가?”
“그냥 하던 대로 해.”
“이게 원래 내가 하던 대로잖아.”
“그거 아니잖아, 아, 잠깐만….”
언제는 빨리 하라더니 지금은 또 잠깐만이란다. 갑자기 분위기를 잡으니까 이상했나본데 그럴수록 더 쑥스러워하도록 만들고 싶어진다. 말랑한 성기를 겹쳐 쥐고 그 사이에 단단해져 있는 유두를 입에 물었다. 혀를 세워 콕콕 찌르다가 한 번씩 빨아주면서 손을 슬슬 움직였더니 뒤로 자꾸만 도망가려던 허리가 점점 앞으로 바짝 붙는다. 몸을 들썩이던 노은율의 입에서 기어이 한숨 같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하아, 읏, 원우야….”
아마 노은율이 내 이름을 저렇게 애틋하게 부를 때는 이럴 때 말고는 없는 것 같다. 안고 있어도 얌전하게 구는 때도 이럴 때 말고는 없는 것 같고. 참 깐깐한 애인이다.
***
회사 일이 늘 바쁜 편은 아니라서 종종 여유가 생길 때면 나는 가정주부들처럼 떨어진 생필품을 사기 위해 인터넷 쇼핑몰을 뒤지곤 한다. 내가 ‘친구’와 오랜 기간 같이 살고 있다는 것을 모를 때 회사 사람들은 의외라는 듯이 수군거리더니, 알고 나서는 오히려 먼저 더 싼 곳을 추천해 주거나 많이 사서 남는 게 있으면 나누어줄 때도 있다. 정년이 보장된 직장이고 내가 꽤 빨리 입사를 한 편이라서 동기 몇 명을 빼면 같이 일하는 사람들이 거의 다 나보다 나이가 많다 보니까 내가 무슨 집안의 막내아들 같은가 보다.
오늘도 더 싼 두루마리 휴지와 섬유유연제를 찾기 위해 점심시간 전 짬이 났을 때 정보의 바다를 한참 뒤지고 있는데 문자를 받았다. 며칠 전까지 진상 클라이언트 때문에 개고생을 하더니 겨우 하루 쉬는 날을 받아서 집에 널브러져 있을 노은율이다.
[야근?]
귀찮음을 온몸으로 드러내는, 수식어 하나 없는 깔끔한 문자였다. 그나마 물음표를 붙인 게 용하다.
[아니]
[마트]
[뭐 사야 되는데?]
그랬더니 전화가 온다. 품목을 문자로 찍기에는 손 하나 까딱하기가 싫었나보다.
- 여보세요?
“어. 말해”
- 계란, 라면, 양파, 감자, 또 뭐 있더라….
어깨와 얼굴 사이에 핸드폰을 끼워놓고 메모지에 끄적거렸다. 고추장, 마늘, 마늘은 네가 깔 거 아니면 깐 걸로. 마늘 글씨 앞에 ‘깐’을 추가해놓고 또 뭐 있으면 마저 말하라고 했더니 나머지는 알아서 사오란다. 주방 담당은 내가 아닌데 뭘 알아서 사오라는 거지, 돼지고기나 사가서 구워먹어야겠다. 삼겹살, 별표 두 개. 전화를 끊자 언제 왔는지 옆에서 내려다보고 있던 차장님이 풉, 하고 웃는다.
“시장 보는 건 원우 씨 담당이야?”
“그냥 번갈아가면서요.”
“전화까지 해서 목록 불러주는 거 보면 은율 씨는 참 꼼꼼한가봐.”
그냥 나중에 뭐 떨어졌을 때 자기가 사러 나가는 귀찮은 일 안 생기게 하려고 그러는 것 같은데…. 그러나 이미 나는 우리 회사 사람들의 노은율에 대한 무한 신뢰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별다른 반박을 하지 않았다. 차장님뿐만 아니라 부장님까지 이름을 알고 계실 정도니 여기서 노은율에 대해 뭐라고 말을 해 봤자 원우 씨는 은율 씨한테 고마워해야 돼 블라블라 구구절절 잔소리가 나올 게 뻔하다. 아무리 오래 같이 살 만큼 친하다고 해도 그렇지 매번 회식 끝나고 취해서 전화하는데 싫은 내색 한 번 안하고 새벽에도 데리러 오는 친구가 세상 천지에 어디 있냐면서 동기들까지 입이 마르고 닳도록 칭찬을 해대니까. 일반적인 친구라면 당연히 그럴 리가 없는데 왜 노은율이 매번 나를 데리러 오는지, 그 수상함에 대해 사람들은 간과하고 있다. 그리고 간과해서 다행이다.
“남자 둘이 살림하는 거 힘들지?”
띄워놓은 인터넷 창을 흘낏 본 차장님이 묻는다. 이거 왠지 뻔한 레퍼토리가 나올 듯한 분위기다.
“이젠 익숙해져서 괜찮습니다.”
“그래도 집안에 여자가 있어야지. 얼른 원우 씨가 장가를 가야 은율 씨도 연애도 하고 그럴 텐데, 아, 은율 씨는 아직 애인 없대?”
나는 여기서 항상 갈등하게 된다. 이미 몇 번 비슷한 대화를 한 적이 있었다. 차장님이 노은율에 대해 저렇게 시시콜콜 물어보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노은율이 나를 데리러 올 때마다 대외용 미소를 지으며 착하고 성실하고 싹싹한, 이 시대의 보기 드문 건실하고 바른 청년 코스프레를 하기 때문에 자기 조카랑 연결을 시키고 싶어서 그러는 것이다. 예상되는 상황은 두 가지. 내가 여기서 노은율이 애인이 없다고 하면 그 말을 덥석 물고 빨리 은율 씨 연락처 좀 달라고 좋은 처자 소개시켜주겠다고 할 게 뻔하다. 그리고 애인이 있다고 하면….
“있대요, 애인.”
“정말? 그럼 원우 씨가 빨리 장가를 가줘야겠네. 원우 씨는 선은 안 봐?”
이런 상황이 펼쳐진다. 나는 어색하게 웃었다. 지금 당신이 하는 말이 몹시 내 마음에 들지 않지만 그래도 당신이 내 상사이니 이 정도 선에서 끊어줄 테니까 이제 제발 그 따위 주제의 대화를 그만해 주었으면 좋겠다, 라는 많은 의미가 함축된 내 미소를 보고 차장님이 움찔하더니 곧 생긋 웃는 낯으로 그런다.
“선 생각 있으면 내가 우리 조카 소개시켜줄게. 원우 씨는 애인 없잖아.”
…불똥이 나한테까지 튀는 경우는 처음이다.
“전 독신주의자라서요. 아, 저 점심 먹고 오겠습니다.”
칼 같은 타이밍에 등장해 준 동기 덕분에 살았다. 하마터면 무한 루프의 대화 주제에서 벗어나지 못할 뻔했다.
예전에는 비슷한 상황이 될 때마다 애인이 없다느니 독신주의자라느니 하는 게 노은율에게 조금 미안했다. 노은율을 소개해야 하는 자리에서 같이 사는 ‘친구’라고 이야기를 하는 것에도 죄책감이 느껴졌었다. 지금이야 둘 다 그런 것 때문에 서로에게 미안해하지도 않고 죄책감은커녕 어떻게 대답하는 게 더 딱 잘라 말하는 것 같아 보일지를 고민하고 있지만 최소한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쉽사리 그렇게 부정하는 대답을 못했었다.
딱히 답은 안 나오지만 언제부터 이렇게 무뎌졌는지에 대해 생각을 할 때가 있다. 같이 있는 게 당연하게 느껴질 정도로 오래 되었고 또 서로를 잘 알다 보니 편하기 때문에 필요에 의해 연애를 하고 키스를 하고 섹스를 하는 사이를 유지하고 있는 게 아닐까 싶기도 하다. 가족이나 친구라고 할 수도 없지만 그렇다고 연인이라기에는 팔팔 끓어 넘칠 것 같은 사랑보다 자연스러움과 익숙함이 더하다. 그렇다고 지난번 농담을 했던 대로 따로 살 생각은 아예 해 본 적이 없다. 필요에 의해서도 당연히 그렇지만 그 허전함을 감당할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아마 이런 이야기를 노은율에게 솔직하게 하면 코웃음을 칠 것이다. 개폼 잡고 있네, 하면서. 부모님도 본 적이 없는 내 별의 별 모습을 다 봐 온 녀석이니까 어떤 부분에서 오그라들어하는 건지 이해는 가지만 그렇다고 사람이 정말로 심각하게 이야기를 할 때조차 허세로 여기고 넘기려는 건 가끔 화가 날 때도 있다. 물론 화를 낸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없다. 그래서 나는 우리가 조금은 달라질 필요가 있다거나, 혹은 예전 연애 초기의 감정을 좀 살려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한다는 이야기들을 하지 않는다. 내가 그런 생각을 조금씩 드러낼 때 노은율이 당황하거나 새삼 부끄러워하는 걸 즐기는 맛도 쏠쏠하다. 그리고 내가 굳이 말하지 않아도 본인이 그런 걸 느낄 때가 올 거라고 생각한다. 그럼 그때 가서 이야기해도 늦지 않을 거다.
***
아홉 시 출근, 여섯 시 퇴근, 회식이 잦기는 하지만 눈치 안 보고 쓸 수 있는 연차, 야근을 가끔 해야 하긴 하지만 꼬박꼬박 나오는 추가수당, 월급 자체가 썩 많지는 않다는 것만 빼면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직장이 내 회사다. 그에 비해 노은율의 회사는 노은율이 와인색 머리로 출근을 해도 될 정도로 근무 환경이 프리한 만큼 근무 시간도 프리하다. 일이 잡히면 일주일이 월화수목금토일이 아니라 월요일만 일곱 날이 될 때도 허다하다. 야근과 철야는 밥 먹듯이 하고 정해진 출근 시간보다 훨씬 일찍 나가야 하는 일도 잦은데다가 연차라는 것이 과연 존재하긴 하는지 의문이고 일이 마무리되면 뜬금없이 평일에 하루 이틀을 쉬곤 한다. 그렇기 때문에 나와 노은율이 같이 휴일을 보내는 날은 한 달 서른 날 중에 한두 번이 겨우 될까 말까다.
주말이 되면 당연히 쉬는 나와, 쉬는 날은 곧 과로로 실신하기 직전의 사람을 구제하기 위해 회사에서 어쩔 수 없이 내어준 날인 노은율이 휴일을 보내는 스타일은 아주 다르다. 지난번처럼 대낮부터 덤벼도 봐주는 건 노은율이 그나마 좀 한가할 때나 아니면 나에게 뭔가 미안한 일이 있거나 혹은 굉장히 기분이 좋을 때이다. 보통은 온종일 잠을 자거나 아니면 바닥과 혼연일체가 되어 한 장의 카펫처럼 움직이지도 않고 찰싹 달라붙어있다. 오늘도 마찬가지다. 소파 아래에 이불을 하나 깔아놓고 엎드려서 꾸벅꾸벅 졸다 깨다를 반복하고 있다. 채널을 돌리려고 하면 귀신같이 알아채고 왜 보고 있는데 딴 데 보냐고 성질을 내서 나는 벌써 한 시간 째 관심도 없는 프로그램을 보고 있다. 침까지 흘려가며 졸고 있는 주제에 도대체 뭘 보고 있다는 건지 모르겠다.
“들어가서 자라, 여기서 졸지 말고.”
“나 베개 좀….”
기어이 방에는 안 들어갈 것 같다. 나는 결국 베개를 하나 꺼내다가 머리에 받쳐 주었다. 깔아놓았던 이불을 둘둘 몸에 말고 한 마리 굼벵이가 되어 꾸벅꾸벅 졸던 노은율은 아무도 안 건드렸는데 혼자 퍼뜩 놀라서 깨더니 뭐라고 또 웅얼거린다.
“토요일인데, 내일도 쉬는데, 아 왜 자꾸 잠 오냐….”
저래서 거실에서 개긴 거였군. 이틀간의 황금 같은 휴일을 잠으로 꽉꽉 채워 보내기는 아쉬웠나보다. 가끔은 노은율이 내는 짜증이 짜증으로 안 보이고 투정이나 애교로 보일 때가 있다. 확실히 노은율보다는 내가 한참 죽고 못 살던 때의 감정에 조금이나마 더 가까운 것 같다.
“그냥 자, 저녁 되기 전에 깨워줄게.”
“자기 싫어.”
“그럼 뭐 먹을래? 치킨?”
“배 안 고파.”
“어디 영화라도 보러 갈래?”
“귀찮아.”
뭐 어쩌라는 거야, 노은율의 기분을 맞춰주는 건 포기하고 늦은 점심을 먹기 위해 무거운 엉덩이를 떼었다. 물을 올려놓고 라면을 넣어두는 주방 옆 다용도실 서랍장을 뒤지는데 라면이 안 보인다. 거실에 있는 주방 담당 굼벵이를 호출했다.
“노은율, 라면 다 떨어졌어?”
대답이 없다. 잠들었나. 다른 서랍을 열어봤지만 라면 부스러기도 보이지 않는다. 뒤적거리다가 포기하고 나가려는데 갑자기 뒤에서 그림자가 드리워지더니 이불을 둘둘 만 채로 노은율이 불쑥 들어온다.
“멍청아, 여기 있잖아.”
이상하다, 방금 거기 찾았을 땐 없었는데…. 서랍 안쪽으로 밀려들어가서 손이 안 닿았던 모양이다. 라면을 꺼내 내 머리를 툭 치더니 하품을 쩍쩍 하면서 식탁의자에 웅크리고 앉는다.
“먹을 거냐?”
“응.”
“두 개? 세 개?”
“두 개만 끓여, 밥 말아먹게.”
“밥 없을 텐데. 밥솥 열어봐.”
“아 진짜 귀찮게, 좀 알아서 하지.”
이거 왜 이러시나, 주방 담당은 내가 아닌데. 차려주는 걸 고맙다고 해 주지는 못할망정…. 그래도 꾹 참았다. 간만에 같이 있는 휴일인데 굳이 큰 소리 내가면서 싸우고 싶지 않았다. 피곤해서 저러는 게 한두 번도 아니고.
냉동실에 언제부터 박혀 있었는지 모를 만두 몇 개를 꺼내다가 라면에 같이 넣고 끓이는 동안 밥을 퍼다 놓고 반찬을 꺼내고 분주하게 움직이던 노은율이 이번에는 다용도실로 들어간다. 아까 들어갔을 때 뭔가 마음에 안 드는 게 있었는지 우당탕, 하면서 정리를 하는 것 같았다. 저럴 때 밥을 먹고 하라거나 왜 지금 거기에 손을 대냐고 했다가는 분노의 샤우팅이 나올 수도 있기 때문에 나는 얌전하게 식탁에 라면 냄비를 놓고 그릇을 일부러 소리 나게 내려놓았다. 앉아서 젓가락을 들고 흠, 흠, 하고 헛기침을 해도 안 나오길래 다용도실을 슬쩍 들여다보았더니 빠지지 않는 서랍장 가장 아래의 서랍을 가지고 씨름을 하고 있다.
“차원우!”
지금 당장 달려오지 않는다면 라면 물에 코를 박아 고문할 듯 매서운 기세다. 나는 벌떡 일어나서 다용도실로 갔다.
“이거 위에 좀 잡아봐. 서랍 안 빠져. 붙었나봐.”
“밑에 뭐 들었….”
뭐 들었길래 그러냐는 말을 끝맺을 수가 없었다. 내가 미처 서랍 위쪽을 잡지도 않았는데 노은율이 아래에서 전력을 다해 서랍을 확 당겼다. 그 바람에 위쪽 서랍들이 우르르 열려서 내용물이 앉아있던 노은율의 머리로 쏟아졌다. 잘 안 꺼내 쓰는 것들이라 먼지가 잔뜩 쌓인 여행용 칫솔, 빨래비누, 우산, 옷걸이, 그리고 마지막에는 덜 말린 채로 넣어뒀는지 썩는 냄새가 진동하는 샤워 타월이 기어이 노은율의 정수리를 덮고 축 늘어졌다. 망했다, 라는 생각을 하기가 무섭게 노은율이 벌떡 일어내서 내 머리를 갈겼다.
“야 이 멍청아, 그거 하나 제대로 못 잡아? 어?”
기분이 나쁜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다른 데도 아니고 치사하고 비열하게 머리를 때리다니 순간적으로 화가 치밀었다. 되도 않는 땡깡을 참아주던 마음에 뚜껑이 열렸다.
“그게 내 잘못이냐? 내가 잡은 걸 확인하고 열어야지 그걸 왜 보지도 않고 여냐, 눈깔이 삐었어?”
“눈깔? 눈까알? 지가 멍청한 짓해서 날 이 꼴로 만들어놓고 눈깔? 아유 그래, 내 눈은 눈깔이고 네 눈은 눈느님이다, 이 씨발놈아!”
“네가 먼저 멍청이라고 했잖아 새끼야, 왜 또 지랄병 도져서 지랄 떨어?”
아마 제대로 주어와 서술어가 붙어 문장이 구성된 대화는 저기까지였던 것 같다. 그 뒤로는 그간 서로 사회생활에 치여 갈고 닦았던 욕들의 향연과 더불어 주먹과 발이 오가는 격투를 벌였다. 그리고 격투가 계속될수록 깨달았다. 나는 술에 만땅으로 취했을 때가 아니고서는 절대로 노은율을 이길 수가 없다. 노은율은 나보다 십 킬로그램은 덜 나가는 주제에 기술이 좋은데다가 손이 맵기까지 했다. 반격 한 번을 못하고 배와 허벅지와 어깨와 머리까지 주먹질과 발차기 등등으로 골고루 얻어맞다가 열이 받아서 가드를 올리던 걸 아예 풀어버렸다. 그리고 체격으로 눌러볼 생각으로 벽으로 밀면서 손목을 잡으려고 하다가 순간 얼굴이 반대쪽으로 돌아갔다. 경쾌한 빡, 소리가 울림과 동시에 노은율이 흠칫하더니 겁에 질린 토끼 같은 표정이 되어 멈췄다.
“…그, 그러게 왜, 왜 사람을 미냐, 어?”
노은율이 저렇게 당황하는 걸 보니까 보통 일이 아닌 것 같다. 화끈한 기운이 느껴지는 뺨에 손을 가져다댔다가 화끈한 게 여기만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코 아래에 손가락을 댔다. 주르륵, 꼭 콧물이 나는 것처럼 뭔가가 흘러나오면서 냄새가 확 났다. 나는 눈을 한 번 깊게 감았다가 떴다. 이제 입가까지 내려오고 있는 코피를 닦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노은율을 뚫어버릴 것처럼 빤히 쳐다보았다. 손톱을 잘근잘근 물어뜯고 있다가 눈이 마주치자마자 노은율이 웅얼거렸다.
“…미안.”
그래 이쯤 해놨으면 아주 존나게 미안해하기를 바란다. 나는 소매 끝으로 코를 대충 틀어막았다.
휴지로 코를 막은 채로 불어 터진 라면을 먹다가 짜증이 나서 젓가락을 집어던지듯 내려놓았다. 입으로 들어가야 할 라면이 자꾸 콧구멍에 꽂고 있는 휴지에 닿아서 내가 지금 휴지를 먹는 건지 라면을 먹는 건지 불편하기 짝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 그런 돌발행동에 아까부터 라면 국물보다 더 쫄아 있던 노은율이 또 어깨를 움찔하면서 쫄더니 슬그머니 자기 숟가락에 라면 면발을 담아 내민다. 나는 숟가락을 받는 대신 입을 아 벌렸다. 평소 같았으면 어디서 먹여달라고 수작질을 하냐고 숟가락으로 머리를 때렸겠지만 오늘은 고분고분 새 모이를 주는 것처럼 연신 면발을 담아서 먹여준다.
“너도 좀 먹어라.”
“머, 먹고 있어.”
말 더듬는 거 봐라, 진짜로 쫄았나 보다. 허둥지둥 자기 그릇이랑 내 그릇을 바꿔놓고 또 열심히 면을 잘게 쪼개고 있는 걸 턱을 괴고 빤히 보다가 불렀다.
“은율아.”
“응.”
“가서 얼음주머니 좀 해다 줘. 나 얼굴 붓는다.”
“잠깐만.”
착하기도 하지, 평상시에도 이렇게 말을 잘 들으면 얼마나 예쁠까. 냉동실의 얼음을 죄다 꺼내다가 수건에 잔뜩 싸서 건네주는 걸 받아들고 얼굴을 문질렀다. 멍이 들거나 붓거나 어찌 되든 월요일에 멀쩡한 얼굴로 출근하기는 다 틀린 것 같다. 사람들이 왜 다쳤냐 어쩌다 그랬냐 누가 그랬냐 귀찮게 굴 게 뻔해서 벌써부터 한숨이 나온다.
“노은율.”
“응.”
“너 그렇게 사근사근 구니까 되게 귀엽다.”
그래도 노은율이 이만큼 온순해지는 건 일 년에 한 번 보기도 힘든 희귀한 광경이다.
“…다음엔 피 안 나는 데만 열심히 패줄게.”
이를 악물며 기어이 제 성질 못 버리고 한 마디 하는 걸 보니 역시 피 좀 났더라도 좋은 구경했다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