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외전 3화 (12/12)

3

마음 같아선 계속 집에만 두고 살살 녹여 먹고 싶었건만. 원래 활동이 많았던 애라 그런지 좀 쑤셔 하는 게 눈에 빤히 보였다. 조금이라도 지루하단 마음을 먹을까 봐 어쩔 수 없이 미루를 다시 팀에 합류시켜야 했다.

어젯밤엔 선배들이 보고 싶다며 지나가듯이 말하는 걸 듣고 그냥 계속 집에 둘까 고민도 하긴 했지만. 그래도 당분간은 숨 쉴 틈을 만들어 줄 생각이었다.

“결과 나왔어?”

“네! 랭크 올랐어요, B로.”

조금 떨어진 거리임에도 미루의 목소리는 비교적 선명하게 들렸다. 오가는 대화에 온 신경을 쏟던 인우가 눈썹을 긁적이며 다리를 꼬았다. 이젠 목소리만으로도 아래가 빠듯해질 지경이라니. 단단히 미쳤지.

“오오, 대단해. 난 랭크 올리는 데 1년 넘게 걸렸는데.”

예상대로 미루의 랭크가 한 단계 올랐고, 인우와의 상성도 몹시 좋았다. 곧장 전담 가이드를 신청해도 될 만큼. 하지만 인우는 조금 시간을 두고 완벽하게 준비할 계획이었다. 밖에 동생이 있는 게 아무래도 마음에 걸렸고, 그렇다고 에스퍼들이 득실대는 센터에서 살게 두기도 싫었다. 음흉하게 미루를 쳐다보며 쑥덕거릴 인간들을 생각하니 또 금세 기분이 가라앉았다.

“동생 퇴원 밀렸다고?”

“네. 피 수치가 맞지 않아서, 지금 컨디션으로는 아마 수요일 이후가 될 것 같답니다.”

미루가 TF에 합류한 지도 한 달이 훌쩍 지났다. 남은 건 고작해야 열흘 남짓. 그사이 동생이 퇴원하면 미루의 걱정은 또다시 밖으로 쏠릴 텐데. 더군다나 형제가 사는 곳은 단칸방이었다. 동생과 마주칠 수 없게 두고 싶어도 불가능한 곳. 숨을 길게 늘인 인우가 멀찍이 앉아 있는 미루를 향해 시선을 두며 말했다.

“지낼 곳을 알아봐야겠네.”

“예, 제가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도화는 밖에 있는 미루의 동생을 살피는 일에 꽤 적극적이었다.

“가까운 거리에 동생이 따로 지낼 곳도 함께 알아봐 주면 좋겠는데.”

“예, 그러겠습니다.”

도화가 눈치 빠르게 알아들었다. 그사이 패드를 살피던 인우의 눈빛이 순간 번쩍였다.

“꼬리 밟혔다.”

요즘 들어 최 제약을 사칭하는 사례가 많아졌단 소문에 초조하기라도 한 건지, 드디어 움직임이 보이기 시작했다.

“다들 회의실로.”

그 말만 남기고 인우와 도화가 먼저 훈련장을 벗어났다. 쉬고 있던 팀원들이 하나둘 자리를 털고 뒤를 따랐다. 회의실에 전부 모이는 데까지는 10분도 걸리지 않았다. 곧장 화면에 메일 캡처 화면이 떴다.

“나흘 뒤에 최 제약 쪽에서 경매를 열 거야. 주주들 한정으로 보낸 초대장이라는데, 가이딩 팩 우수 거래자도 다수 포함되어 있어. 경매 위장해서 약 좀 팔겠다는 뜻이지.”

“나인 호텔.”

미루가 초대장 아래 쓰인 장소를 조용히 읊었다. 대리운전하면서 종종 들렀던 곳. 그저 화려한 곳인 줄만 알았는데, 거기서 저런 일도 벌어지는구나. 미루는 언뜻 저기에서 태웠던 손님을 떠올렸다.

“가이드들은 이번 임무에서 백업과 모니터만 맡는다. 아무리 조절에 능해도 예외는 없어. 경매에 오는 건 죄다 굶주린 에스퍼들일 테니까.”

“예.”

“일단 층별로 룸 하나씩 예약 잡고. 도화는 계속 가이딩 팩 구하는 흔적 남겨.”

인우는 익숙하게 각자가 해야 할 몫을 나눠 주었다. 미루는 민영과 함께 초대장을 받은 인원을 확인하는 일을 맡았다. 별거 아닌 듯 보여도 온종일 종이를 들여다봤더니 눈이 다 아팠다.

새벽 1시가 넘어가고, 여기저기서 피곤에 전 한숨이 이어졌다. 30분간 휴식을 갖기로 한 참이라 몇몇은 커피를 마시러 가거나 엎드려 쪽잠을 자기도 했다.

미루도 뻑뻑한 눈을 비비며 기지개를 켰다. 그때였다. 눈앞으로 커다란 손이 들어찼다. 가만히 눈을 가린 손바닥에서 따뜻한 온기가 전해졌다. 묻지 않아도 누구의 손길인지 단번에 깨달았다.

“피곤해?”

“조금요.”

눈두덩을 가린 채 아무것도 하지 않았지만 이상하게도 안정감이 느껴졌다.

“TF만 없으면 평소엔 그렇게 바쁘지 않아. 지금처럼 훈련할 필요도 없고.”

조용한 회의실 안에 나직한 음성이 기분 좋게 울렸다. 이상하게도 그 파동에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가이딩을 받는 게 이런 감각일까. 지금은 꼭 팀장님이 자신의 가이드 같단 기분이 들었다.

“그래요?”

“위험할 일도 생각보다 없어.”

작게 고개를 주억이면서는 인우가 하고 싶은 말이 뭘까, 한 번 더 고민하게 됐다. 센터에서 지내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말을 하고 싶으신 걸까?

“정말요?”

“가이드한테는 그런 일 생기게 두지도 않을 거고.”

그의 엄지손가락이 이마를 살짝 쓸고는 멀어졌다. 미루가 고개를 틀고 멀어지는 인우의 등을 응시했다. 그간 지켜본 팀장님이라면 가이드를 위험한 일에 휘말리게 두지는 않을 것 같았다. 그런데 왜 소문은 그렇게 났을까. 가이드를 괴롭히고, 아프게 하고, 죽게 만들기까지 했다는 말은 어디서 나온 걸까. 가이드한테 먼저 손 내미는 것도 본 적이 없는데.

한참이나 인우의 뒷모습을 지켜보던 미루가 이면지 모퉁이에 작게 글씨를 끄적였다. 심인우, 가이드, 전담 가이드.

“임무 마무리할 때까지 이러고 있으면 좋을 텐데.”

“……TF 끝날 때까지요?”

“응.”

그렇게 말하던 다정한 얼굴이 어른거렸다. 팀장님은 정말 내가 센터에 계속 머물기를 바라실까? 잘 모르겠다. 눈을 마주할 때마다 전해지는 그의 감정은 비단 가이딩 때문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한편으론 뚜렷한 확신이 들지 않았다. 팀장님은 제게 TF 이후에 관해서는 어떤 언급도 없었으니까.

계약 기간이 끝나고 내가 센터를 나가면, 언젠가는 팀장님에게도 전담 가이드가 생기겠지? 그럼 저한테 하는 것처럼 다정하게 말을 걸어 주고, 바라보고, 안아 주고, 재워 주고. 가끔은…… 입을 맞춰 주기도 하려나. TF가 끝나면 센터를 나갈 자신과는 하등 관계없는 일이란 생각을 하니 어쩐지 기분이 묘하게 가라앉았다.

“…….”

펜촉이 한곳에 오래 머무른 탓에 검은 잉크가 종이 귀퉁이를 까맣게 적셔 갔다.

***

나흘 뒤에 열린다던 경매는 하루를 앞당겨 진행됐다. 대충 예상한 터라 TF 팀의 대처는 빨랐다. 이른 아침부터 룸 하나에 팀원들이 전부 모였다.

“경매장엔 정각에 들어가.”

메일로 받은 초대장에 입장 가능한 인원은 둘이었다. 이능을 쓸 일이 적어 가이딩이 별 필요 없는 도화, 며칠 전부터 의식적으로 가이딩을 받지 않은 정우가 함께 들어갈 예정이었다. 며칠 가이딩이 뜸해서 그런지 정우의 컨디션은 몹시 안 좋은 듯했지만, 가이딩 팩 경매에 참여하기엔 적당해 보였다.

“오후부턴 주차장까지 통제할 테니까, 나머지 인원들은 룸 지키고. 최민영 가이드가 메인 모니터 맡도록.”

“예예.”

팀원들은 준비한 대로 역할을 잘 나눴다. 어떤 이는 호텔 가드로, 또 어떤 이는 주차 요원으로 위장할 계획이었다. 인우는 얼굴이 꽤 알려진 탓에 직접적으로 경매장엔 나서지 않지만, 룸을 돌아다니면서 최 제약 대표의 위치를 파악하는 역할을 맡았다.

“아까 9층 룸 업그레이드해 줄 테니까 재배정해도 되냐는 연락이 왔어. 최 제약 쪽 임원들이 아마 9층에 전부 모일 거야.”

“아, 그러네요. 지금 9층 빈 객실 없어요. 아까까지만 해도 몇 개 됐는데.”

“9층 룸은 체크아웃 시간에 맞춰서 빼 주고 도청 심어 놔. 그건 구지수가 도와.”

“예.”

가이드는 두 조로 나뉘어 8층과 10층에 배정됐다. 현장을 다녔던 탓에 제 몸을 지킬 만한 전투력은 지닌 가이드들이었다. 미루는 가장 고참인 민영, 재환과 한 조를 이루게 됐다. 상황을 살필 모니터를 설치하고 본격적으로 작전을 실행하기 전까지 팀원들은 각자 자리에서 대기했다.

인우는 작전이 개시되기 전까지 내내 미루의 곁을 지켰다. 혹시라도 기운이 밖으로 새어 나갈까 봐 가이딩도 해 줄 수 없는데, 연신 품에 안고 손을 만지고 입을 맞춰 댔다. 손길이 끈적해지면 저도 모르게 앓는 소리가 터져 나와 미루는 이따금 입을 틀어막아야 했다. 문 하나를 두고 선배들이 있는데 그런 소리를 낼 순 없으니까.

“무슨 일이 생겨도 넌 뒤로 빠져. 내가 제일 먼저 올 테니까.”

“네, 팀장님도 조심하세요.”

인우가 보드라운 머리카락 속에 손가락을 밀어 넣고는 살살 흔들었다. 기분 좋은 샴푸 향이 은은하게 퍼졌다. 침대에 누워 이 향기나 종일 맡고 싶은데, 언제쯤 그럴 수 있을까. 이번 임무가 마무리되면 그럴 수 있으려나. 이게 끝나고도 미루는 계속 제 옆에 남아 줄까.

다른 건 다 자신이 있었는데 가장 중요한 그 하나가 선명하지 않았다. 미루가 평생 최우선 순위로 두고 살았던 동생이란 존재가 생각보다 컸으니까. 인우는 짧게 숨을 몰아쉬고는 마른 어깨에 고개를 기댔다. 가슴팍에 닿은 등이 움찔거리며 얼어붙는 게 느껴졌다.

“이런 일은 지긋지긋했었는데. 그래도 네가 있으니 그다지 나쁘진 않네.”

부러 더 불쌍한 척 말끝을 흐리면서 미루의 허리를 강하게 끌어안았다. 다리 사이로 전해지는 뜨끈한 체온에 저도 모르게 입맛을 다시게 됐다.

“……빨리 끝내고 오세요. 숙소 돌아가서 소, 손도 잡아 드리고 가이딩해 드릴게요.”

“손도?”

그럼 그거 말고 다른 것도 해 준다는 소리냐고 집요하게 묻자 미루의 목덜미가 삽시간에 붉게 달아올랐다.

“일단 손으로 해 주는 것도 좋지.”

저 작고 하얀 손에 검붉은 좆을 쥐여 줄 상상을 했더니 아래가 뻐근해졌다. 으음, 숨을 길게 늘이며 목덜미에 입술을 묻었다. 습관적으로 입술을 벌리고 얇은 살을 입에 머금었다. 자국이 남을 정도로만 깨물고는 그 위를 연신 질척하게 핥아 댔다.

“무사히 오시면 손이든 뭐든……. 아무튼, 조심하세요.”

본인이 방금 얼마나 위험한 소리를 했는지도 모르는 듯 미루는 제 허리춤에 단단히 감겨 있는 손등 위로 손을 겹쳤다. 가이딩을 해 줄 순 없어도 체온은 나눠 줄 수 있으니까.

“알지? 가이딩은 깊이 닿을수록 빨리 괜찮아져.”

목덜미에 입을 지분대며 중얼대는 소리에 어깨가 절로 움츠러들었다. 부끄러움에 괜히 바닥만 응시하면서도, 팀장님의 단단한 손을 놓지 않았다. 한참 그렇게 서로의 숨소리를 느끼던 두 사람은 임무 30분 전이 되어서야 방 밖으로 나섰다.

―스탠바이.

각자 위치에 섰다는 무전이 하나둘 들어왔다. 미루는 모니터를 올려 둔 테이블 아래 바닥에 엉덩이를 대고 앉았다. 팀원들과 딱 붙어 앉지 말라던 팀장님의 말을 잊지 않고, 조금 거리를 둔 채였다. 소파에 멀찍이 앉아 있던 민영이 힐끔 시선을 내리더니 미루의 목덜미 쪽을 가만히 응시했다.

“미루야, 옷 좀 이렇게…….”

“왜요?”

민영이 손을 뻗자 슬쩍 몸을 무르던 미루는 결국 그녀의 손에 잡히고 말았다. 셔츠 깃을 억지로 당겨 보기도 하고 단추를 끝까지도 채워 봤지만 하얀 목에 남은 흔적은 쉽게 가려지지 않았다. 이내 혀를 찬 민영은 자국 가리는 것을 포기했다. 어차피 저걸 보는 이들도 팀원들이 고작일 텐데, 둘이 묘하다는 걸 모르는 TF 팀원은 없으니까.

“아냐.”

미루의 동그란 뒤통수만 살살 쓸어내리며 민영이 고개를 저었다. 빔 하나만 틀어 놓고 회의를 진행할 때도 미루를 향해 번뜩이는 시선을 자주 목격했다. 그뿐 아니라 미루와 뭘 해도 끈적하고 첨예한 눈길이 뒤를 따랐었다. 상성 검사를 하고 나서 이틀이나 애 얼굴도 안 보여 줄 정도이니, 아마 전담이 되면 아예 미루를 만날 수 없을지도 모르겠단 예상도 했다.

순진한 미루는 그런 것 따위는 전혀 모르고 그저 ‘팀장님, 팀장님’ 하며 눈을 반짝일 뿐이고. 심인우 가이드가 되기엔 너무 맑고 순수한 앤데, 어쩌다가……. 민영이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너무 긴장하지 말고. 어차피 너는…… 위험해질 수도 없을 거 같다.”

뒤통수를 쓸어 주는 손길은 한참이나 더 이어졌다.

미루의 시선은 줄곧 모니터를 향했다. 경매장인 3층엔 가드로 위장한 최영 에스퍼, 주차장 쪽엔 구지수 에스퍼가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도화와 김정우 에스퍼가 탄 차량이 진입했다. 입구에서 초대장을 확인하는 모습이 CCTV 화면에 잡혔다. 출입 확인까지 마친 뒤에야 차가 미끄러지듯 주차장 안으로 들어섰다.

―차량 진입.

경매장으로 사용되는 연회장 입구를 비추는 화면엔 슈트 차림의 남자 셋이 보였다. 그 사이에 섞여 있는 최영이 남자들의 신원을 확인해 들여보내곤 조용히 무전을 전달했다.

―경매 10분 전. 최 대표 비서진 입장.

―9층 룸, 도청 확인되는 것 없습니다.

“모니터, 호텔 내 수상한 움직임 없어요.”

저마다 위치에서 무전을 보내왔다. 1층 카페에 앉아 로비 쪽을 응시하고 있던 인우도 뒤이어 무전을 쳤다.

―로비, 최 제약 쪽 에스퍼 가드들 나오고 있어. 이동 시에 주의하고. 센터 지원 팀도 세팅 스탠바이. 지원 있으니 긴급 상황에도 무리하지 마.

―예.

―알겠습니다.

미루는 긴장한 눈길로 모니터 속 인우를 힐끔댔다. 호텔리어들과 같은 차림을 한 인우는 안경을 쓰고 머리를 전부 넘긴 채였다. 그 차림이 낯설지만 무척이나 시선을 끌었다. 서류를 넘기며 차를 마시는 모습이 긴장이라고는 하나도 하지 않은 것 같았다. 지금은 TF 팀원이나 지원 팀이 있으니 그렇다 쳐도, 평소에 혼자 임무를 할 때도 저렇게 여유로울까? 문득 한 번도 보지 못한 인우의 모습이 궁금해졌다.

“들어온다.”

민영이 모니터 가운데를 가리켰다. 3층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는 정우와 도화가 보였다. 그들은 주차장에서처럼 초대장을 꺼내 가드에게 내밀었다. 확인을 받은 뒤엔 가드로 위장한 최영 에스퍼가 소지품을 검사했고, 그러고 나서야 안쪽으로 움직일 수 있었다. 이제 진짜 TF 팀의 임무 시작이었다.

긴장한 미루가 마른침을 꿀떡 삼키며 화면을 응시했다. 한쪽 테이블에 자리를 잡은 정우와 도화는 자연스럽게 행동했다.

―경매 곧 시작됩니다.

3층에서부터 무전이 넘어왔다. 경매장 안의 조명이 어둑해지더니 이내 단상에만 환하게 불이 켜졌다. 마이크를 잡은 남자의 목소리는 내부에 있는 팀원들의 무전을 통해 전해졌다.

―모두 자리에 앉아 주세요.

―20분 타이머 가동.

경매장 내 안내 멘트와 인우의 무전이 거의 동시에 겹쳤다.

TF 팀의 작전은 이러했다. 경매가 시작되고 인우는 호텔 내에 있을 최 대표의 흔적을 찾고 근방에서 대기한다. 20분 타이머가 끝나는 시점엔 인우의 이능으로 호텔의 모든 불을 꺼 혼란을 일으킨다. 동시에 경매품이 있는 대기실에 도화와 정우가 급습한다. 꼭 가이딩 팩을 노린 침입자처럼 굴며 상황을 더 어지럽게 만드는 역할이었다.

상황 보고를 받은 최 대표가 도주를 시도하면, 그때 인우가 최 대표를 제압한다. 이때 주차장에 있던 구지수가 인우를 백업하고, 지원 팀이 도망치는 이들을 막는 역할이었다. 가이딩 팩이든 최 대표든, 경매에 참여해 불법 가이딩을 취하려 했던 에스퍼든. 짧은 시간 안에 큰 전력 손실 없이 전부 체포하는 게 이번 임무의 핵심이었다.

미루는 경매장을 비추는 모니터를 유심히 확인했다. 단상에 놓인 미술 작품이 보였다. 도화나 정우도 이따금 경매에 참여하며 눈에 띄지 않게 굴었다.

“…….”

다들 상황에 집중해 모니터와 무전에 온 신경을 쏟는 사이, 미루가 주변 모니터를 살폈다. 평일이라 그런지 숙박객도 많이 없어 움직임은 크게 잡히지 않았다. 인우는 트레이를 끌고 맨 꼭대기 층 객실 복도를 천천히 걷는 중이었다. 이능 파장이 느껴지는 룸이 있는지 체크하는 모습이었다. 한참 인우를 바라보던 미루가 다시 전체 모니터를 훑었다.

“……어.”

그러곤 뭔가 의문스러운 움직임을 포착했다. 4층 객실 복도에 서 있는 두 남자. 아까 2층에 있는 걸 본 듯한데. 그들은 트레이를 밀고 다니면서 모든 방을 두드려 댔다. 손님과 잠깐 대화를 나누나 싶다가도 곧 다음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꼭 지금 꼭대기 층에서 인우가 하고 있는 행동과 흡사했다.

룸서비스에 착오가 있는 거면 곧장 전화를 걸었겠지 저렇게 일일이 확인하고 다니진 않을 텐데. 방학 내 호텔 아르바이트를 해 본 경험이 있었기에 상황이 의아하게 느껴졌다. 조용히 관찰하던 미루는 그들이 5층으로 올라가 똑같은 행위를 하는 것을 보고 나서야 민영에게 상황을 전달했다.

“선배, 이 사람들이요. 객실을 확인하고 다니는 거 같아요.”

“어디?”

민영이 미루가 가리킨 작은 화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51번 카메라…….”

작게 중얼대던 재환이 키보드를 몇 번 두드리자 손바닥만 했던 화면이 확대됐다. 수상한 남자들은 이번에도 역시 5층 룸을 하나하나 두드리며 무어라 말하고 있었다.

“경매하는 곳 건너뛴 거 같아요. 방금은 4층에서 올라왔고요.”

“그럼 룸서비스는 아니겠네.”

“네. 그건 확실히 아닌 듯해요.”

민영과 재환은 그들의 움직임을 조금 더 관찰한 뒤 팀원들에게 상황을 공유했다.

“현재 5층 복도에 수상한 움직임 발견. 객실을 전부 확인하나 본데.”

―주차장에도 이상한 기류. 출차 차량도 일일이 확인하면서 보내네?

여전히 경매는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지만 분위기가 묘하게 흘러갔다. 무전을 듣던 인우가 한 층 아래로 이동하면서 다음 명령을 내렸다.

―호텔 내 다른 가이드나 에스퍼 있는지 확인하는 듯 보이는데. 계속 경계하면서 작전은 변동 없이 진행한다. 모니터 더 집중해 주고.

―네. 지원 팀 주차장 진입했고, 저도 최 대표 위치 체크하면서 올라가겠습니다.

주차장을 지키고 있던 구지수에게서 무전이 도착했다. 위아래에서 동시에 수색이 시작될 거란 말에 민영과 재환은 보다 더 화면에 집중했다. 미루 역시 수상한 움직임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들은 점점 위층으로 향해 오더니, 이젠 미루와 가이드들이 대기 중인 8층까지 다다랐다. 남자 둘이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는 걸 본 후 민영이 곧장 무전을 쳤다.

“8층 진입했고 상황 잘 정리하겠음. 10층도 대기해.”

―예.

민영이 미루한테 손을 뻗으려다 말고 재환에게로 방향을 틀었다. 재환이 무전 한쪽을 빼고 시선을 보냈다.

“벗어.”

“……뭐?”

“대충 위에만 벗어서 가운 입어. 네가 가야지 우리가 가야겠냐?”

재환이 슬쩍 민영과 미루를 살피더니 순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민영은 모니터 앞을 지켜야 했고, 미루는 가이딩 조절에 능해졌다고는 해도 돌발 상황에 당황할지도 몰랐다. 더군다나 미루에게 가운을 입혀서 내보냈다간 임무고 뭐고 심인우한테 먼저 큰일을 당할 게 눈에 훤했으니. 재환은 가운만 덜렁 걸치고는 머리까지 자연스럽게 헝클인 뒤 다시 모니터 자리로 돌아왔다.

“옆방까지 왔어요.”

미루가 모니터를 가리키며 작게 속삭이자 민영이 꽤 상기된 표정으로 마른 어깨를 두드렸다.

“그냥 지나갈 거야. 우린 가이딩만 잘 잠그면 돼.”

미루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교육 내내 배웠던 가이딩 조절하는 법을 복기했다. 완전히 잠그는 느낌으로. 괜히 허리까지 힘이 들어가는 바람에 경직된 모양새가 되었다.

똑똑. 노크 소리가 이어졌다. 재환이 부러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똑똑똑. 이번엔 아까보다 약간 더 큰 소리가 이어졌다. 시간을 살짝 끌고서야 그가 문을 거칠게 열어젖혔다.

“뭐야? 룸서비스 안 시켰는데.”

“아, 안녕하십니까.”

“뭐냐고.”

재환은 중간중간 하품을 하면서 꽤 태연한 연기를 잘 해내 주었다.

“다름이 아니라 오늘 저희 호텔에서 행사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손님께 불편을 끼쳐 드려 송구한 마음에, 작은 성의를 준비했습니다.”

“행사?”

재환은 의식적으로 가이딩을 꽉 틀어 잠그면서도 밖에 서 있는 남자 둘을 잔뜩 경계했다. 피지컬이며 풍기는 기운이며, 딱 봐도 일반인은 아니었다.

“예. 와인과 디저트를 올려 드릴 예정인데, 한 시간 후쯤에 받아 보실 수 있게 준비해 드려도 괜찮으실까요?”

머리를 긁적이는 척하며 재환이 슬쩍 그들을 다시 살폈다. 뒤에 트레이를 밀던 남자가 단말기에 뭔가를 입력하듯 손을 움직였다. 삐익. 아주 희미한 기척과 함께 가늘게 뜬 시선이 룸 안을 집요하게 살폈다. 그러다 재환과 눈이 마주치자 급하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예, 뭐……. 그러시든가요.”

“그럼 그렇게 준비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들은 그렇게 인사를 하고는 문을 닫았다. 재환은 몸을 돌리지 않고 그 앞을 지켰다. 옆방으로 갔다는 민영의 신호를 받고서야 모니터가 있는 자리로 향했다.

“에스퍼인 건 확실해요. 기운 안 느껴지는 거 보면 조절 잘하는 것 같고. 안쪽 힐끔대면서 뭐 확인하는 눈치던데. 작전 샌 거 아닌가 몰라요.”

무전을 듣던 인우가 슬쩍 고개를 기울이는 게 보였다. 곧 나직하면서도 단호한 음성이 넘어왔다.

―동요하지 말고, 끝까지 경계해.

“네.”

수상한 남자들은 미루가 머문 방을 지나 두 개의 룸을 더 확인했다. 그러더니 저들끼리 무슨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지나갔던 길을 되돌아오더니 이내 어느 문 앞에서 발길을 멈췄다.

“뭐야, 우리 룸 앞인데?”

민영이 아랫입술을 감쳐물었다. 아직 가운을 갈아입지 않은 재환이 끈을 더 세게 잡아맸다. 미루도 소파에 기대고 있던 등을 세운 채 문과 모니터를 번갈아 응시했다. 그들은 노크하거나 안을 살피는 행위는 하지 않았다. 그저 문 앞에 서서 대화를 나눌 뿐. 그 모습이 가이드들을 더 긴장하게 했다.

―문 열지 말고 기다려.

“예.”

쾅! 일순 들려오는 소음에 룸 안에 있는 가이드들의 시선이 일제히 문으로 쏠렸다. 미루가 불안한 눈으로 모니터를 살폈다. 남자 하나가 무작정 몸으로 문을 들이받았고, 그때마다 문이 크게 흔들렸다. 재환과 민영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금방 뚫고 들어올 거 같아요. 시간 끌어 볼게요.”

―내가 갈 거야. 구지수는 이탈하지 말고 계속 확인해.

―네!

인우가 무전을 하면서 급하게 비상구로 뛰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아직 최 대표의 위치도 파악하지 못했는데. 정말 작전이 노출되기라도 했나. 상황이 뭔가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쾅! 다시 한번 큰 굉음이 들리며 굳게 잠겨 있던 문이 부서지듯 열렸다. 그들은 거침없이 안으로 침입했다. 미루가 당황한 시선으로 모니터를 빠르게 훑으며 인우의 흔적을 찾았다. 그러나 인우는 보이지 않고 8층으로 모여드는 가드들이 시야에 잡혔다. 아까 인우가 말한 최 제약 소속 에스퍼 가드들 같았다.

“다 여기로 오고 있어요.”

민영에게 작게 속삭이자 그녀는 표정을 굳히며 몸을 일으켰다.

“미루야, 비상 스위치.”

“네.”

따따, 따따, 따. 침착하게 스위치를 다섯 번 눌렀다. 이제 혹시나 이동을 한다 해도 실시간으로 가이드들 위치가 공유될 것이었다.

“여기 가이드분들 계시는 거 같아서 와인 서비스 왔는데요.”

“하, 씨. 쥐새끼 같은 놈들.”

분명 가이딩도 잘 잠갔고, 재환이 나갔을 때는 숨도 죽이고 있었는데. 어떻게 여기에 가이드가 있다는 걸 알아챈 걸까. 예상치 못한 상황에 마른침을 삼켰다.

“우리가 가이딩값 좋게 쳐서 팔고 있는데. 혹시 같이 일해 보실 의향들은 없으신가?”

남자가 고개를 좌우로 뚝뚝 꺾으며 거리를 좁혀 왔다. 전투에는 꽤 익숙한 민영과 재환이 앞장을 섰다.

“얼마나 좋게 치시는데.”

“가서 테스트 한 번만 해 보면 견적 딱 나와. 보아하니 최상급들이시네?”

남자가 이채를 띤 눈길로 룸 안의 가이드들을 훑었다. 긴장감 흐르는 대치가 이어졌다. 그 순간, 열린 문 너머로 갑자기 소란스러운 웅성거림이 들리기 시작했다. 남자가 힐긋 뒤를 도는 듯하더니, 이내 관심을 끄고 민영 쪽으로 다가왔다.

“이쪽 언니 기운이 제일 좋을 거 같은데?”

남자가 씩 웃음을 지었다.

―최 대표 5층, 위치 확인!

삐빅. 20분 타이머가 울리는 동시에 구지수를 통해 최 대표의 위치가 공유됐다. 모든 상황이 한 번에 밀려들어 왔다. 이렇게까지 같은 타이밍에 일이 터질 줄이야. 다들 짐짓 당황한 와중에 인우의 차분한 음성이 넘어왔다.

―작전 그대로 진행한다. 구지수가 따라붙어. 곧 갈 테니까.

―예!

경매장을 벗어나 화장실 부근에서 서성이던 도화와 정우는 가이딩 팩이 있는 대기실로 곧장 향했다. 그 뒷모습을 마지막으로 객실 불이 꺼졌다. 칠흑 같은 어둠에 정말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았다.

“뭐야?”

침입자들은 당황한 눈치였다. 민영과 재환, 미루는 미리 준비해 둔 투시경을 썼다. 그러자 그들이 어둠 속에서 우왕좌왕하는 모습이 선명하게 잡혔다. 그 틈에 세 가이드는 훈련한 대로 안전한 자리를 찾아 뿔뿔이 흩어져 몸을 숨겼다. 한쪽에선 파열음과 고통스러운 신음이 점차 크게 들려왔다.

“뭐냐고 이거, 시발. 야, 빨리 불 켜! 빨리! 가드 불러, 얼른!”

바람 속성을 가진 에스퍼인지, 그가 흥분하니 룸 안에 바람이 크게 들이쳤다. 커튼 아래 숨어 있던 미루는 창문 쪽에 있으면 위험하다는 사실을 깨닫곤 몸을 움직였다. 발소리를 죽여 소파 뒤쪽 틈에 비집고 들어선 순간.

“저쪽에서 소리 났는데?”

“밖에서?”

그들은 가이드들을 찾기 위해 손을 마구잡이로 뻗어 댔다. 미루가 숨어 있는 소파 근처로 한 남자가 다가왔고, 빠르게 뛰는 박동이 전부 들릴 것 같아 미루는 입을 틀어막고 기척을 죽였다. 큰 눈을 치뜬 채 남자의 손끝을 뚫어지게 응시하던 그때. 미루 머리 바로 위 허공을 휘젓던 손이 일순 움직임을 멈추었다.

“여기…….”

말끝을 흐린 남자가 느릿하게 시선을 내렸다. 암흑 속인데도 미루를 똑똑히 응시하는 눈동자. 미루가 볼 안쪽을 짓씹으며 비명을 삼켰다. 투시경 렌즈를 사이에 두고, 남자가 씨익 미소 짓는 광경이 선명히 보였다. 들킨 건가? 등 뒤로 식은땀이 주륵 흘러내렸다.

“잡았다.”

씨익, 밀려 올라간 입술 새에서 소름 끼치는 속삭임이 이어졌다. 그가 미루를 향해 팔을 뻗은 그때였다. 등 뒤에서 불쑥 손이 나오더니 남자의 얼굴을 완전히 틀어쥐었다.

“윽!”

“어디에 손을 대려고.”

낮고 서늘한 목소리가 어둠 새로 흘러들어 왔다. 익숙한 음성에 금방이라도 눈물이 터질 것 같았다.

“아악!”

남자의 눈을 가린 인우의 손가락 틈에서 강한 빛줄기가 흘러나왔다. 얼마나 강렬한지 미루의 눈이 시릴 정도였다. 발버둥 치던 남자는 인우가 손을 떼고 나서도 눈을 감싼 채 바닥을 뒹굴며 악을 썼다.

“씨발! 앞이!”

귀가 찢어질 듯 울리는 비명에도 인우는 소파 뒤에 앉은 미루를 조심히 일으킬 뿐이었다.

“가이드 즉시 호텔 밖으로 이동.”

―지원 팀입니다. 로비에 에스퍼 가드들 있으니, 주차장으로 내려오십시오!

무전 너머로 대화가 긴급하게 오갔다. 인우는 미루의 등을 쓸어 주며 룸을 천천히 빠져나갔다. 몸을 숨기고 있던 재환과 민영도 조용히 그들의 뒤를 따랐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 미루는 오직 인우의 손에 의지해 걸음을 옮겼다. 그의 숨소리와 향기, 뜨거운 체온에 미칠 듯이 날뛰던 불안도 잦아들었다. 직원용 엘리베이터 앞에 선 인우가 버튼을 누른 채 가이드들을 밀어 넣었다.

“E04 구역에 지원 팀 기다리고 있을 거야. 거기 합류해서 모니터 연결받아. 도주할 틈 만들어 주지 말고.”

“네!”

민영에게 지시를 하면서도 인우의 시선은 미루를 향해 있었다. 밖은 어둡고 엘리베이터 안에서만 빛이 새어 나가고 있는 터라 인우의 얼굴은 겨우 반만 희미하게 드러났다.

“이따 보자.”

미루의 뺨을 한 번 살짝 쓸고는 인우가 등을 돌렸다. 곧장 최 대표가 있는 곳으로 달려가는 거겠지. 에스퍼 가드들이 꽤 많이 포진되어 있는 것 같던데, 괜찮으려나. 미루는 아랫입술을 잘근 씹으면서 계기판에 줄어드는 숫자만 초조하게 응시했다.

유일하게 불이 켜진 지하 주차장에 도착한 세 가이드는 곧장 지원 팀이 있을 곳을 향해 달렸다. 막 모퉁이를 돌아 E 구역에 들어선 순간. 삐, 삐. 이질적인 기계음이 들리나 싶더니 뒤에서 소름 끼치는 음성이 넘어왔다.

“여기 가이딩 팩들이 돌아다니고 있네?”

―윽, 최 대표 도주! 지하 주차장으로 이동!

구지수 에스퍼의 외침에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주륵 흘러내렸다. 조금만 더 가면 지원 팀이 있을 텐데. 무작정 달려 나가기도 조심스러운 긴장감에 몸이 얼어붙었다.

“아무리 바빠도 바닥에 떨어진 돈은 주워야지. 안 그래?”

미루는 무심코 소리가 난 곳으로 고개를 돌리려다가 무언가를 떠올리곤 급하게 움직임을 멈췄다. 곁눈질로 보이는 건 하얗게 센 머리에 지팡이를 짚고 선 남자. 사진으로만 봤던 최 제약 대표. 최 대표의 이능은 최면이었다. 눈을 마주치면 안 된다.

그와 관련된 정보를 떠올리며 곁에 서 있는 덩치 큰 가드 둘을 응시했다. 그들의 몸에서 퍼지는 열기가 여기까지 느껴지는 걸 보면 역시나 에스퍼인 모양이었다. 최 대표가 작은 단말기 하나를 미루와 일행 쪽으로 두고 뭔가를 측정하는 행동을 보였다. 삑. 또다시 아주 미세한 소음과 함께 단말기가 깜빡였다.

“주워 와.”

“예.”

최 대표가 짧게 명령했다. 가이딩을 잠가도 감지할 수 있는 기계인 듯했다. 그래서 아까 룸을 샅샅이 살피던 남자들도 저들이 가이드란 걸 눈치챈 게 분명했다.

우선 미루 일행은 전투태세를 갖춘 채 방어를 시작했다. 아무리 훈련을 했어도 에스퍼의 힘까진 이길 수 없었기에 최대한 시간을 끌며 제압을 당하지 않는 게 중요했다. 지원 팀이나 인우가 올 때까지만이라도 버텨야 해.

미루는 제 쪽으로 달려오는 남자를 피해 기둥 뒤로 재빨리 몸을 숨겼다. 곁을 빠르게 지나친 남자가 슬라이딩하듯 바닥에 발을 길게 끌면서 몸을 세웠다. 끼이익! 꼭 자동차 바퀴가 끌리는 소리처럼 무겁고 시끄러웠다.

시뻘건 눈동자가 다시 미루를 향하며 씨익 웃었다. 미루는 얼른 주변을 살폈다. 이럴 땐 차라리 차 사이에 몸을 숨기라고 했었지. 얼른 땅을 박차고 주차된 차 행렬 사이로 뛰어들었다.

쾅! 쾅! 에스퍼는 아예 차체 위를 뛰어다니며 미루를 따라왔다. 꼭 사냥하는 것처럼 여유로운 모습이었다. 에스퍼 가드가 지나친 곳에선 경보음과 차가 찌그러지는 큰 파열음이 이어졌다. 겨우 진정됐던 가슴이 다시 빠르게 뛰어 댔다. 꽉 쥔 주먹 아래는 이미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윽!”

그 순간 반대편에서 튀어나온 가드의 등에 부딪힌 미루가 멀찍이 나가떨어졌다. 바닥에 나뒹굴면서도 잡히면 안 된다는 생각에 얼른 몸을 일으켰다. 그 틈에 차체를 밟으며 따라오던 에스퍼가 가볍게 바닥으로 착지했다.

“왜 그렇게 열심히 도망가? 잡기 미안해지게.”

전신이 부서질 듯 아팠지만 고통을 느낄 겨를도 없이 다시 땅을 박찼다. 도망쳐야 했다. 자신이 잡히면 작전은 완벽한 성공을 거둘 수 없다. 팀장님과 팀원들의 고생을 제가 망치면 안 된다. 그 일념으로 지원 팀을 향해 안간힘을 쓰며 달리던 그때였다.

깜빡, 깜빡. 주차장을 환하게 비추던 빛이 하나씩 점멸하기 시작했다. 주차장 입구에서부터 툭, 툭 불이 꺼지고 점차 어둠이 미루에게 가까워졌다. 아무 형체도 보이지 않는, 한 줄기 빛도 허락되지 않는 암흑. 헌데 밀려오는 칠흑 같은 어둠에도 두려움보다 안도가 치솟았다.

“팀장님…….”

흐느낌이 섞여 웅얼대던 발음이 입 밖으로 새어 나갔다. 이윽고 불이 지척까지 꺼졌다. 지원 팀 쪽으로 가는 것보다 저 안으로 뛰어드는 편이 나으리란 판단이 들었다. 미루는 곧장 어둠을 향해 달음박질쳤다.

“씨발, 저건 또 뭔데.”

뒤에 바짝 따라붙은 남자가 소리쳤다. 그가 손을 뻗는 동시에 미루가 암흑 속으로 몸을 던졌다. 몇 번 거칠게 바닥을 나뒹군 미루가 균형을 잡고 무릎으로 몸을 세웠다.

“하아, 하…….”

거칠게 숨을 내쉬면서 투시경을 고쳐 썼다. 덩달아 어둠 속으로 들어온 남자는 당황한 듯 몸을 낮추더니 허공에 손을 내밀었다. 그의 손바닥에서 거센 물줄기 같은 것이 뻗쳐 나왔다. 촤악! 차에 물줄기가 꽂히자 한쪽이 움푹 팰 정도였다.

깜깜한 어둠 속에서도 그 손바닥이 이번엔 미루 쪽을 정확히 향했다. 미루는 얼른 몸을 굴려 피했다. 방금까지 서 있던 바닥에 물웅덩이가 팼다. 그 과정에서 투시경이 벗겨지면서 미루의 시야도 캄캄해졌다. 마른침을 삼킨 미루는 가쁜 호흡을 억지로 억누르며 주변을 더듬어 몸을 움직였다.

“악!”

그리고 동시에 어디선가 가래가 낀 듯 둔탁한 비명이 들려왔다. 모두의 시선이 소리가 난 쪽으로 쏠렸고, 밝은 전등이 아직 켜진 곳에선 최 대표의 목을 움켜쥔 인우가 서 있었다.

거칠게 숨을 내쉬는 건지, 인우의 가슴이 크게 부풀었다 가라앉기를 반복했다. 눈동자는 꼭 방금 발현한 에스퍼처럼 온통 붉었다. 기운을 너무 많이 쓰셨나, 상태가 좋지 않아 보이는데. 미루가 눈썹을 구긴 채 인우를 샅샅이 관찰했다.

“끄읍, 큭.”

한 손으로 최 대표의 목을 움켜쥔 인우가 가쁘게 호흡하며 천천히 눈동자를 굴렸다. 그리고 출입구 근처, 암흑 속에 몸을 숨긴 미루에게 시선을 보냈다. 이렇게 거리가 멀고 어두운데도 눈은 단번에 마주쳤다.

“…….”

“…….”

서로 말없이 눈길을 주고받았다. 인우의 낯이 조금 더 서늘해지나 싶더니 이내 손등 위로 힘줄이 곤두섰다. 목을 틀어잡힌 최 대표의 얼굴엔 피가 잔뜩 쏠려 시뻘겋게 변했고, 이마 위로 핏줄이 불거졌다.

그러곤 이내 인우 머리 위를 비추던 빛마저 툭, 꺼져 버렸다. 주차장은 삽시간에 완연한 암흑에 잠식됐다. 그 사이로 소름 끼치는 비명과 뼈가 뒤틀리는 소리만이 울렸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건만 충분히 예상할 수 있어서 그런가 등골이 서늘해졌다.

그 뒤로도 이따금씩 큰 파열음과 앓는 신음이 뒤따랐다. 누구의 것인지 모를 비명, 그리고 주차장을 울리는 발소리도 점점 늘어났다. 인우는 괜찮을까. 확인을 하고 싶어도 제 손 하나 보이지 않는 상황이라 어쩔 도리가 없었다.

미루는 차 사이에 숨은 채 몸을 웅크렸다. 한참 그렇게 벌벌 떨고 있자니 지척에서 발소리가 들려왔다. 어차피 그 무엇도 보이지 않으면서 젖은 속눈썹을 질끈 감았다.

“무서웠나 보네.”

귓가에 와 닿은 건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다정하고 나긋한 음성이었다. 미루가 퍼뜩 고개를 들었다. 보이지는 않지만 가쁜 호흡이 지척에 인우가 있음을 알려 주었다.

“……팀장님.”

미루가 허공에 팔을 뻗자 곧장 뜨거운 체온이 얽혀 왔다. 그 순간 깨달았다. 다들 무서워하고 피하는 이일지라도, 팀장님은 언제고 저에게 이렇게나 큰 안도감을 주는 존재란 사실을.

“이제 괜찮아.”

힘이 풀려 주저앉은 미루를 안아 일으킨 인우가 어두운 주차장 사이를 가로질렀다. 드르륵.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고, 푹신한 곳에 몸이 앉혀지는 감각을 느꼈다. 그와 동시에 불이 켜졌다.

“지원 팀, 저쪽 수습해. 곧 시야 돌아올 거야.”

“네!”

지원 팀원들 또한 숨을 죽인 터라 같은 공간에 사람이 있는 줄도 몰랐는데, 바로 옆자리에서 대답이 넘어왔다. 지원 팀이 차에서 우르르 내렸다.

인우는 미간을 찌푸린 채로 미루의 몸을 샅샅이 훑었다. 식은땀에 젖은 이마부터 셔츠에 가려진 목덜미, 잘게 떨리는 손, 먼지가 묻은 바지 아래 보이는 발목. 몸 어디서도 피 한 방울 흐르지 않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다시 까만 눈동자를 응시했다.

“팀장님, 괜찮으세요? 손이 너무 뜨거운데.”

미루가 양손으로 인우의 손을 움켜쥐었다. 호텔 내에선 가이딩을 하지 말라는 명령을 잊지 않았는지 주물거리면서 온도만 확인할 뿐이었다.

습관적으로 괜찮다고 말하려던 인우는 생각을 고쳐먹었다. 끝까지 잠긴 셔츠 깃 사이로도 보이는 붉은 울혈에 눈길이 닿았다. 제 것이라는 표시로 남겨 둔 거긴 하지만. 최 제약 쪽 새끼들이 작전에 끼어들 줄은 몰랐다. 그럼 그 새끼들도 이 꼴을 보고 입맛을 다셨단 뜻인데…….

“…….”

저를 올려다보는 말간 눈과 젖은 속눈썹. 불그스름한 눈가와 입술. 식은땀에 젖은 머리카락이 달라붙은 이마. 하얀 목덜미에 남은 흔적. 이렇게 야해 빠진 광경을, 저 새끼들도 봤다고? 체포하기 위해 섬광으로만 잠깐 시야를 멀게 뒀는데, 센터로 돌아가면 아예 영영 시력을 되찾을 수 없게 해야겠단 마음만이 솟았다.

“혹시 이능을 많이 쓰신 건…….”

“그런 거 같아. 너무, 아프네.”

물론 완전한 거짓말은 아니었다. 허리 아래가 욱신대듯 저리고 있었으니까. 상기된 미루의 뺨을 쓸며 애처로운 목소리를 꾸며 냈다. 그러자 미루는 너무도 쉽게 인우를 동정하고 또 걱정했다.

“어떡해요. 여기서는 하면 안 되죠?”

가이딩을 하면 안 되냐는 물음인 건 알지만. 이미 음란하고 음습한 생각으로 가득한 인우에게는 그 말조차 다르게 와 닿았다.

“차에서 하면 네가 좀 힘들 거야. 제대로 하는 건 처음인데.”

“…….”

그 대답을 완곡한 거절이라 여겼는지, 미루의 눈썹이 아래로 축 늘어졌다. 인우는 뜨겁게 치솟는 웃음을 삼켰다. 붉은 입술이 만족스럽다는 듯 부드러운 곡선을 그렸다.

“집으로 돌아가서. 둘만 있을 때, 그때 해 줘.”

미루의 벗은 몸이든 쾌락에 젖은 얼굴이든 옅은 신음이든. 그 어느 하나도 다른 사람이 알게 두고 싶진 않았다. 인우는 입고 있던 유니폼 재킷을 벗어 미루의 어깨에 둘렀다. 품이 커서 넉넉하게 남아도는 겉옷 단추까지 잠그고선 이마에 달라붙은 머리를 쓸어 넘겨 주었다.

“응? 손이든, 뭐든 괜찮으니까.”

속살대는 목소리에 미루의 뺨이 언뜻 붉어졌다. 네에, 미루가 말끝을 흐리며 대답하자 인우는 그제야 만족스럽다는 듯 주변으로 시선을 돌렸다.

추가된 지원 팀이 막 주차장에 들어서고 있었다. 경매장을 빠져나간 에스퍼도 없고, 최 제약 대표와 임원들 중 누구 하나도 호텔을 벗어나지 못했다. 부상을 입은 팀원도 없는 데다, 다친 민간인도 없었다. 변수가 무척이나 많았던 작전이었지만 성공적으로 끝마칠 수 있었다.

“잠깐 여기서 기다려. 문 닫지 말고.”

고개만 돌려도 제 시야에 들어올 수 있게 미루를 두고는 상황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이제 TF 임무도 마무리했으니 미루를 밖에 내놓지 않아도 될 거다. 그 생각을 하니 얼른 돌아가고 싶었다. 남은 시간 내내 실드로 둘러싼 집에 박미루와 단둘이 남아, 서로의 체온과 숨결을 나누고 싶다. 조급해지는 마음을 억눌렀다. 어차피 미루가 저를 피할 일은 없다고 스스로를 달래면서.

팀원들은 현장에서 체포한 에스퍼들과 최 제약 임원진들을 이송했다. 두 사람도 지원 팀 트레일러를 타고 가장 먼저 센터로 돌아왔다. 미루는 인우의 손에 붙들린 채 숙소로 복귀했다.

“다시 나가세요?”

“응. 급한 것만 처리하고 올 테니까…….”

끈덕진 눈길이 미루의 얼굴을 훑었다. 애처럼 이런 걸 묻히고 다녀. 먼지가 남아 있는 미루의 뺨을 살살 쓸었다. 손끝이 저릿하며 기운이 넘어오는 게 느껴졌다. 이제 안전하다고 판단했는지, 계속 잠가 두었던 가이딩을 푸는 모양이었다. 인우가 뜨끈한 숨을 삼키며 미루의 어깨를 집 안으로 밀어 넣었다.

“기다리고 있어.”

결국 해야 할 일이라면 빨리 정리하고 남은 시간을 다 털어 미루와 함께 보내는 편이 나을 테니까. 대기하란 말만 짧게 남긴 채 인우는 다시 센터로 향했다.

TF 팀의 성공적인 임무 완수로 센터는 정신이 없었다. 한쪽에선 체포된 에스퍼들에게 달라붙어 이능을 억제하는 패치를 붙여 댔고, 한쪽에선 현장에서 압수한 가이딩 팩에 이름표를 부착하고 상태를 확인하기 바빴다.

최 대표의 숨이 붙어 있는 것까지 확인한 인우는 가이딩 보충제를 먹었다. 힘이 달리는 정도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이능을 꽤 쓴 상태라서 저도 모르게 미루의 기운을 전부 앗을지 몰랐으니까. 저번처럼 입맞춤만으로 정신을 잃는 일은 벌어지면 안 되니 만일을 대비한 거였다.

“최 대표는 대충 검사 끝나면 독방에 가둬. 불 절대 켜지 말고, 나 외엔 아무도 출입 못 하게 하고.”

“예.”

센터 내 독방은 빛 한 점 들지 않는 어두운 공간이었다. 창문도 전등도 그 흔한 침구도 없는 빈 방. 어둠 속에서는 시간을 가늠하는 것조차 어렵다. 공허하고 두려운 그곳에 며칠 가둬 두면 그 누구라도 온전한 정신으로 남기란 불가능했다.

특히나 최 대표는 C급 최면 이능을 가진 것으로 알려졌다. 등급이나 이능이 미치는 범위는 최초에 검사한 기록뿐이라 지금과는 다를 수 있겠지만, 어찌 되었든 최 대표에게 밝은 시야를 주는 것은 위험한 일에 가까웠다.

“깨면 연락 남겨 둬.”

“예, 다른 조사는 어떻게 진행하면 될까요?”

“조사는 부팀장이 우선적으로 진행하고 내가 마무리하는 걸로.”

명령을 내리면서도 인우는 급한 걸음으로 성큼성큼 로비를 벗어났다. 그러곤 거의 뛰듯이 숙소로 향했다. 날이 저물며 주변은 어두웠지만 실드가 둘러진 집에선 은은한 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혼자 지낼 때는 늘 어둠뿐이었는데. 미루가 저곳에서 자신을 기다리는 중이란 생각을 하니, 가슴이 아플 정도로 가파르게 뛰기 시작했다.

돔 형태가 눈에 들어왔을 때부터 시계를 풀어 들었다. 지체 없이 렌즈에 시계와 손가락을 가져다 대 본인 확인을 마치고는 현관을 벌컥 열었다.

“미루.”

“팀장님!”

소파에 앉아 있던 미루가 벌떡 일어났다. 그가 다급한 시선으로 인우를 훑었다. 그사이 씻고 나온 건지 갈색 머리칼에는 물기가 조금 남은 채였다. 미루가 곁으로 다가서자 달큰한 향이 훅 끼쳐 왔다.

“다 끝나셨어요?”

“응.”

겉으로 보기에는 크게 다친 곳은 없는 것 같은데 아까부터 인우에게선 열기가 느껴졌다. 얼굴도 딱딱하게 굳어 있고. 작전하는 내내 가이딩을 한 번도 못 했으니 컨디션이 안 좋은 게 당연한 건가.

……하더라도 열기를 조금 잠재우는 게 낫겠지. 그렇지 않아도 에스퍼를 안정시킬 수 있는 매뉴얼을 떠올리고 준비해 둔 게 있었다. 미루가 인우의 손을 잡아끌고 욕실로 향했다.

“물 따뜻하게 받아 놨어요.”

“물?”

인우의 한쪽 눈썹이 작게 구겨졌다.

“네.”

얼마 되지도 않는 미약한 힘으로 열심히 끌어 댔다. 욕조엔 물이 가득이었고 여전히 김이 오르고 있었다. 인우가 픽 웃음을 흘렸다. 보자마자 붙어먹을 작정으로 보충제까지 삼키고 온 자신이 파렴치하게 느껴졌기에 순순히 셔츠 단추를 풀며 안으로 들어섰다. 욕조 안에 담긴 물을 손끝으로 휘휘 젓고는 미루의 얼굴 위로 물을 튀겼다. 속눈썹과 뺨에 물방울이 떨어지자 미루가 눈을 질끈 감았다.

“둘이 들어가면 넘칠 것 같은데.”

미루가 말없이 낯을 붉혔다. 둘이 씻을 생각 같은 건 하지도 않았는데. 혹시 오해하신 건가.

“저, 저는 씻었어요!”

“그럼 씻는 것 좀 도와줄래?”

“……네에.”

인우는 이따금 인상을 쓰면서 익숙하지 않은 유니폼을 벗기 시작했다. 어디가 불편한 건지 고개를 양쪽으로 기울이기도, 거친 한숨을 뱉기도 했다.

미루는 팀장님이 옷가지를 벗어 내리는 광경을 보고 있자니 조금 민망하기도 했지만 잘 짜인 근육에 놀라움을 더욱 크게 느꼈다. 옷을 입고 있을 때는 몰랐는데 몸이 무척이나 단단하고, 또 자잘한 흉터가 많이 남아 있었다. 특히나 등을 가로지른 큰 자국이 눈에 들어왔다. 팔에 옷을 걸던 미루가 손끝으로 가만히 흉터를 쓸었다.

“여긴 흉터가 엄청…… 커요.”

인우가 슬쩍 고개를 기울이곤 뒤에 선 미루를 응시했다. 눈꼬리가 축 처진 게 무척 걱정스러운 모양이었다. 인우는 언제 생겼는지도 기억이 가물가물한 상처를 떠올렸다.

“상처가 깊어서 약을 오래 먹었어.”

“많이 다친 건데 가이딩은 안 받고요?”

가이딩을 받았다면 정말 씻은 듯이 나았을 거 같은데. 오른쪽 날개 뼈 부근에서부터 왼쪽 옆구리까지 이어지는 긴 상흔을 고통스러운 눈으로 응시했다. 제 등줄기에 달라붙는 시선을 느끼며 인우가 욕조에 들어가 앉았다. 수증기가 오른 물이 욕조를 넘을 듯이 넘실댔다.

“처음에 가이딩을 받으려다 실패했어. 다친 직후엔 아마 나도 제정신이 아니라서 가이드가 고통스러워하는 건 안 보였겠지.”

인우가 젖은 손으로 미루의 마른 손목을 아프지 않게 움켜쥐었다. 엄지손가락이 손목 안쪽을 살살 쓸며 맥박이 뛰는 곳을 눌렀다. 미지근해진 물방울이 미루의 손등으로 옮겨 갔고, 이내 손끝에 맺혔다가 바닥에 떨어졌다.

“정신도 차리고, 자제하겠다고 해도 아무도 가이딩해 주지 않았어. 소문도 그때 생겼을 거야.”

“…….”

“너도 알고 있는 그 소문 말이야.”

소문이라는 말에 미루가 아랫입술을 잘근 짓씹었다. 심인우가 가이드를 죽이고 고통스럽게 만든다는 그 얘기를 말하는 거겠지. 미루가 천천히 욕조에 걸터앉았다. 동시에 미루의 손목을 감싼 손길에 힘이 들어갔고, 옷소매도 더 짙게 젖어 갔다.

“엄청 아팠겠네요, 나을 때까지.”

인우의 움직임에 맞춰 욕조 물이 물살을 그렸다. 축축한 소리가 잘게 흩어지고, 물방울이 표면에 떨어지는 기척도 선명했다.

“아직도, 낫지 못했어.”

“그럼…….”

아직까지 아프다는 뜻이겠네요. 미루가 뒷말을 삼켰다. 처음 들었던 소문은 그저 무서운 에스퍼라는 것. 처음 만났을 때도 무뚝뚝하고 서늘한 음성과 눈빛에 괜히 겁을 집어먹기도 했었다.

물론 지내는 동안 힘들고 괴로운 일도 있었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인우는 자신에게 그러지 않으리라는 거였다. 기간이 정해져 있든 아니든 그런 건 이제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그를 더 이상 아프지 않게 해 주고 싶을 뿐이었다. 잠시 머뭇대던 미루가 크지 않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욕실에선 옅은 파동이 잔잔하게 울렸다.

“아까 집에서 해 달라고 하셨잖아요. 지금…… 해도 되나요?”

“되긴 하는데.”

인우가 숨을 길게 늘였다. 저를 등지고 앉아 있는 미루의 시야에는 아직 보이지 않는 모양이었다. 말보다 확실한 대답을 위해 쥐고 있는 미루의 팔을 당겼다. 그러곤 욕조 안으로 손을 잠기게 했다. 어어. 기우뚱 기울어진 미루가 몸을 틀어 인우 쪽을 바라봤다.

“아…….”

인우가 다리 사이로 미루의 손을 가져다 댔다. 따뜻한 물의 온도보다도 뜨거운 무언가가 손바닥에 닿았다. 미루가 눈을 크게 뜨고 인우를 마주했다. 역시나 달뜬 얼굴에 호흡이 거칠었다.

“…….”

혹시, 이게 흥분에서 비롯된 건가. 단단하고 뜨거운 성기가 점점 더 크기를 키워 가는 것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아래를 쳐다보고 싶은데 시선을 차마 내릴 수가 없었다. 당황한 미루의 동공이 인우의 쇄골 부근만 맴돌았다.

“일단은 처음이니까…… 손으로 하기로 했지.”

그렇게 말하면서 미루의 손등에 손을 겹쳤다. 그리고 발기한 성기를 쥐게 만들더니 팔을 위아래로 움직였다. 눈을 내리깐 인우가 물속의 광경을 지켜봤다. 굵은 힘줄이 도드라진 검붉은 성기가 하얀 손에 잡혀 있다. 얼어붙은 손이 제 성기를 어색하게 쓸고 흔들었다. 눈썹을 구기고 고개를 뒤로 젖혔다. 이딴 어설픈 손길에도 몸은 금세 달아올랐다.

두 사람의 팔이 욕조 안에서 이리저리 흔들릴 때마다 물살이 크게 일렁였다. 결국 넘실대던 물이 욕조 밖으로 넘치며 걸터앉은 미루의 엉덩이 부근을 축축하게 적셨다. 인우가 뜨거운 숨을 길게 뱉으며 입술을 밀어 올렸다.

“벌써 그렇게 젖었어?”

미루가 변명하려는 듯 입술을 벌렸지만 더운 숨만 흩어질 뿐 쉽게 대꾸하진 못했다. 첨예한 눈초리를 한 인우가 미루의 곳곳을 응시했다.

물기가 조금 남은 머리칼, 당황해서 얼어붙은 눈동자와 품이 큰 옷. 상기되어 붉은 뺨은 베어 물면 무척이나 말랑거릴 듯해 저도 모르게 입맛을 다셨다. 옷 안에 감춰진 살결은 또 얼마나 희고 달까. 그 상상만으로도 허벅지에 힘이 들어갔다. 겹친 미루의 손등을 쥐고 아래를 빠르게 쓸어 댔다. 얇은 살갗이 위아래로 휩쓸릴 때마다 핏줄이 더 굵게 도드라졌다.

“하아.”

인우가 손에 힘을 주었다. 물살이 거칠어질 만큼 아래를 세게 짓치다가 끝내는 이를 짓씹으며 낮은 신음을 뱉었다. 가슴을 부풀리며 숨을 크게 몰아쉬었다.

“…….”

미루는 손바닥으로 무언가가 쏟아지는 감각을 느꼈다. 정액이 미지근한 욕조 물에 뒤섞이고 있었다. 눈을 깜빡이며 인우의 목덜미에 선 핏대만 응시했다. 빠지지 않기 위해 욕조를 꽉 쥐고 있던 손등도 어느새 축축해졌다. 손끝은 이미 물에 잠긴 채였다.

“가이딩하는 것도 까먹고.”

낮은 음성은 거친 호흡에 뒤섞여 더욱 음험하게 와닿았다. 물이 너무 뜨거워서 그랬는지, 욕실 안에 가득 찬 열기에 머리가 어질어질하기까지 했다.

“……아.”

그제야 자신이 이를 악물고 가이딩을 참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뻣뻣하게 경직되어 있던 몸이 작게 움찔댔다. 인우의 입술이 부드럽게 호를 그렸다. 그리고 여전히 단단하게 옭아맨 미루의 손을 끌어당겨 손바닥에 깊게 입을 맞췄다. 온통 젖은 채라 축축한 감촉뿐이었다. 미루의 손끝이 안으로 말리면서 인우의 눈두덩과 콧대 위에 살짝 닿았다. 가볍게 눈을 감은 인우가 작게 웃음을 흘렸다.

“한 번 해 봤으니까, 두 번째는 쉽겠지.”

아무 말도 못하는 미루를 진득하게 응시하던 인우가 욕조에서 일어났다. 촤라락. 몸을 감싸고 있던 물이 욕조로 추락하며 요란한 소리가 들렸고, 물방울이 정신없이 튀었다. 하얀 얼굴이며 몸에 달라붙어 진득하게 흘러내렸다. 미루가 눈동자를 느리게 굴렸다. 그러다 방금까지 자신이 쥐고 있던 성기로 시선이 향했다.

“…….”

분명 방금 사정했건만 인우의 성기는 다시 꼿꼿하게 서서 꺼떡거렸다. 심지어 아까보다 더 단단한 듯 위협적인 작태였다. 미루가 얼른 눈길을 떨어트려 일렁이는 물살만 쳐다봤다.

그때 옆구리로 팔이 단단하게 감겨 왔다. 미루를 한 팔로 둘러싼 인우가 욕조 밖으로 벗어났다. 그가 움직이는 길마다 물길이 짙게 늘어졌다. 떨어질까 봐 인우의 어깨며 팔뚝을 꽉 틀어쥐었다.

“자, 잠깐만요.”

미루는 제게 닿은 인우의 체온이 지나치게 높다는 것을 느끼곤 입을 다물었다. 이내 의식적으로 가이딩을 풀기 위해 노력했다.

“하.”

닿은 살갗을 통해 저릿한 감각이 전해졌다. 인우는 거침없이 미루의 방으로 향했다. 온통 달큼한 체취로 가득한 방에 들어서자마자 도로 사정감이 몰려왔다. 이대로라면 넣지 않고도 몇 번은 더 쌀 수 있겠다 싶었다.

인우가 침대에 미루를 눕히곤 곧장 그 위에 올라탔다. 단숨에 단단한 몸에 깔린 꼴이 된 미루가 눈만 빠르게 깜빡였다. 아주 짧은 침묵이 흘렀다.

“이제 잠깐은 다 끝났니.”

“…….”

공기부터가 진득했다. 문득 미루는 얼마 전 교관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이능을 많이 써서 힘든 상태라면, 팀장님은 입맞춤으로는 되지 않을 거라던 말. 그땐 임시 주제에 무슨 그런 것까지 해야 하냐고 대답하긴 했지만, 그 내용을 떨칠 수가 없었다. 그날 밤엔 팀장님을 상대로 몽정까지 할 정도였으니까. 어쩌면 그때부터 마음을 조금 먹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가슴이 가파르게 뛰며 온몸이 붉게 달아올랐다.

“아까부터 몸이 영 엉망이라. 네가 필요한데.”

가증스럽게 속살대며 미루의 손을 끌어다 손바닥에 뺨을 기댔다. 인우는 애처로운 척 굴면서도 다리 사이에 마른 몸을 가둬 도망갈 틈이라고는 없게 옭아맸다.

“그, 그런데 저…… 처음이라서…….”

미루가 부끄럽다는 듯 작게 웅얼거리며 눈을 굴렸다. 방 안은 무척 어두웠다. 커튼을 치지도 않았건만 앞이 잘 보이지 않을 만큼 어두컴컴했다. 꼭 아까 주차장을 덮쳤던 암흑처럼. 새빨개진 얼굴을 인우가 빤히 내려다보고 있으리란 확신이 들었다. 해서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고개를 한쪽으로 틀어 버렸다.

한참 뺨 위로 무거운 침묵이 이어지나 싶더니, 인우가 가만히 미루의 얼굴을 쥐고 제 쪽을 향하게 돌렸다. 이내 숨결이 닿을 정도로 가까이 다가와 작게 속삭였다.

“꿈에선 끝까지 안 했나 봐. 처음이란 걸 보면.”

“……예에?”

눌린 뺨에 발음이 불명확했다. 어정쩡한 대답에 인우가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 곧장 벌어진 입술 새로 뜨거운 살덩이를 밀어 넣었다. 불쑥 침입한 제 혀를 조이듯이 미루의 입술에 힘이 들어가는 게 느껴졌다. 한쪽 눈을 구긴 채 입술을 더 맞붙였다.

정신없이 부드러운 볼 안쪽을 훑고 혀를 감아 빨았다. 미루가 뺨을 쥔 손목에 매달렸지만 놓아주지는 않았다. 벌어진 입술 틈을 혀로 쑤시고 타액으로 번들거릴 정도로 난잡하게 핥아 댔다. 욕조에서 들렸던 것과 비슷한 질척한 소리가 두 사람 입술 새에서 흘렀다.

“으읍.”

아랫입술을 진득하게 빨고 멀어지자 타액이 길게 늘어졌다. 미루는 눈을 질끈 감은 채로 가쁘게 숨을 내쉬었다. 그 꼴을 가만히 내려다보던 인우는 미루의 체온이 감도는 입술을 안으로 말아 물었다.

몸이고 머릿속이고 어찌나 뜨겁게 들끓는지. 살갗에 남아 있던 물기가 전부 증발해 버렸을지도 모르겠다. 거친 호흡이 드나드는 미루의 입술을 혀로 다시 핥은 인우가 작은 속삭임을 입 안에 밀어 넣었다.

“벗겨도 될까.”

음란한 소리를 저렇게 나긋하게 할 건 뭔지. 미루는 전신에 퍼지는 전율에 어깨를 잘게 떨었다. 그러고는 제 몸을 짓누르고 있는 인우의 무게를 느끼며 고개를 주억였다.

그러자 인우가 무너지듯 어깨에 고개를 파묻었다. 벌어진 앞섶으로 그의 뜨거운 숨결이 달라붙었다. 벗겨도 된다는 허락을 받고서도 그는 한참이나 미루를 끌어안고만 있었다. 미루의 떨림이 조금 잦아들고, 고른 숨을 뱉을 때까지.

“읏―.”

인우가 미루를 단단히 끌어안은 채로 느릿하게 허릿짓을 했다. 툭툭, 쳐올리듯 아래가 맞부딪쳤다. 발기한 성기와 축축해진 잠옷 바지가 쓸리면서 더욱 저릿한 쾌감이 퍼지기 시작했다. 미루는 단단한 어깨를 그러쥐고 신음을 참았다.

“으음.”

이젠 욱신대기까지 하는 성기를 미루의 다리 사이에 짓이기듯 밀어붙였다. 입술은 미루의 목덜미에 파묻고 깊이 호흡했다.

“아, 흣.”

미루가 이따금 흐릿한 신음을 흘릴 때마다 인우의 목울대가 크게 일렁였다. 마른 등허리를 감싸고 있던 인우의 손바닥이 천천히 아래로 향했다. 욕조에서부터 젖어 있던 바지 사이로 손을 밀어 넣었다. 축축한 속옷과 살결 사이에 갇힌 손가락이 익숙하게 길을 찾았다. 손에 힘을 줄 때마다 보드라운 엉덩이가 움푹 파였다.

고개를 튼 인우가 미루의 목덜미를 길게 핥았다. 그러면서 바지와 속옷을 잡아 단숨에 끌어 내렸다. 미루는 몸을 비틀며 벗기는 움직임을 도왔고, 하의와 속옷이 한데 엉켜 발목에 감겼다. 그 틈에도 인우는 연신 마른 미루의 목 빗근을 잘근잘근 씹어 대며 흔적을 남겼다.

“티, 팀장님. 몸이…… 너무 뜨거워요.”

미루가 웅얼댈 때면 목에 닿은 입술로 옅은 진동이 전해졌다. 인우는 그 움직임 하나도 놓치기 싫다는 듯 끊임없이 여린 살을 입술로 움켰다. 그 상태로 대답을 했더니 미루가 몸을 벌벌 떨었다.

“내가? 아니면 네가?”

“두, 둘 다요.”

미루의 손바닥이 인우의 등을 느릿하게 쓸었다. 얼마나 뜨거운지 이게 흥분 때문인지, 이능을 많이 써서 그런 건지 헷갈릴 지경이었다. 인우는 나직한 웃음을 흘리면서 미루의 무릎을 세웠다. 뒤이어 무릎 위부터 허벅지 안쪽까지 손끝으로 느릿하게 훑었다. 힘이 들어가는 듯 허벅지가 단단하게 굳는 게 느껴졌다.

“나는 좋아서 그런 건데. 미루는 어떨지 모르겠네.”

그리고 그대로 발기한 미루의 성기를 쥐었다. 이런 몸에 털도 없다니. 까슬한 감촉 대신 온전히 부드럽고 뜨거운 살결이 감겨 왔다. 무릎이 안쪽으로 모였지만 인우가 그 사이를 버티고 선 탓에 허리만 조이는 꼴이 됐다. 큰 손이 미루의 성기를 감싸고, 아까 욕실에서 그랬던 것처럼 느릿하게 움직였다. 귀두를 엄지로 짓누르듯 비벼 대면서 기둥을 쓸었다.

“아! 으읏.”

미루가 허리를 들썩이며 몸을 뒤틀었다. 인우는 한 손으로 작은 머리를 감싸고 입을 맞췄다. 미루가 터트리는 신음이 전부 인우의 입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아까 했던 입맞춤과는 다르게 입 안 점막을 부드럽게 들쑤시면서도 아래를 흔드는 손짓은 거칠었다. 마른 무릎이 벌벌 떨렸다. 그럴 때마다 인우의 손가락이 미루의 머리카락을 천천히 쓰다듬으며 달랬다.

“읍―.”

촘촘한 속눈썹이 완전히 푹 젖어 파르르 떨렸다. 찡그린 미간에 인우가 짧게 입을 맞추고 떨어졌다. 미루의 입술 새에서는 짧은 신음이 연신 터졌다. 뭐라도 붙들고 싶은 마음에 인우의 어깨를 꽉 틀어쥐자, 손톱에 파인 살이 하얗게 질릴 정도였다.

“하……, 읏.”

마른 허벅지가 달달 떨리더니 이내 인우의 손등 위로 희뿌연 것이 쏟아졌다. 만족스럽게 웃음 지은 인우는 흠뻑 젖은 손끝을 서로 맞대고 비벼 보았다. 끈적거린다고 느껴질 만큼 농도가 짙었다. 눈물이 맺힌 미루의 속눈썹 위로 입술을 진득하게 붙이고는 나직하게 속삭였다.

“여기도 뜨거운지 보자.”

정액으로 축축해진 손가락이 느릿하게 회음부를 훑고 미끄러지듯 입구에 닿았다. 움찔대는 것이 손끝으로도 선명하게 전해졌다. 인우가 억눌린 웃음을 삼키면서 천천히 입구 주변에서 손을 둥글리며 긴장을 풀어 주었다.

“흐, 으…….”

미루가 훌쩍이듯 숨을 끊어 뱉고는 인우의 목을 끌어안았다. 턱을 내린 인우가 어깨 위에 입술을 내렸다. 파자마에서 풍기는 섬유 유연제 향기도 꼭 미루처럼 보드랍고 달큰했다.

달뜬 공기와 어둑한 방 안에 울리는 질척한 소리. 도톰한 시트가 구겨지는 기척까지도 인우를 흥분하게 했다. 중지가 느리게 안을 파고들자 미루가 숨을 참으며 온몸에 힘을 주었다. 이래서야 좆이고 뭐고, 손가락이 먼저 잘릴지도 모르겠단 우스운 생각이 들었다.

“미루야.”

부름 끝에 인우가 낮게 웃자, 미루는 바짝 얼어붙은 몸에 힘을 풀었다. 그 틈에 천천히 안으로 밀려 들어오는 감각은 낯설지만 싫지 않았다. 가이딩을 했을 때처럼 저릿한 기운과도 비슷했고, 처음 입을 맞췄을 때 느꼈던 흥분도 같이 일었다.

손가락이 한 개에서 두 개로, 두 개에서 세 개로 늘어나는 긴 시간 동안 인우는 쉬지 않고 미루의 눈가와 입술에 입을 맞췄다. 충분히 안을 넓힌 뒤에는 금방이라도 사정할 것처럼 뜨거운 성기를 잡았다. 엄지로 좆 끄트머리를 누른 채 미루의 성기와 맞비비고 회음부를 느리게 타고 내려왔다. 매끈한 살결 위로 축축한 길이 길게 그어졌다.

그리고 이내 젖은 귀두가 입구에 맞춰졌다. 주름을 밀어내며 내벽을 파고드는 검붉은 성기. 미루의 허벅지가 저절로 벌어지며 달달 떨렸다.

“여기도 뜨겁네. 안 뜨거운 데가 없어.”

“아아…….”

미루는 눈을 질끈 감은 채로 앓는 소리만 늘어놓았다. 번들대는 시선이 어둠을 가르고 미루의 얼굴을 샅샅이 훑었다. 어느 정도 삽입한 뒤에 인우가 기둥을 잡았던 손으로 미루의 하얀 엉덩이를 꽉 틀어쥐었다. 아래가 더 깊이 결합될 수 있게 제 몸 쪽으로 당기면서 귓불을 잘근 씹어 댔다. 치뜬 눈으로는 눈꼬리를 타고 흘러내리는 눈물을 응시했다.

“으읍…….”

흥분에 겨운 신음이 연신 이어졌다. 미루는 뒤통수를 시트 위에 마구 비벼 대며 쾌락에 덜덜 떨었다. 뜨끈하고 축축한 내벽이 성기에 달라붙어 기분 좋게 조여 왔다. 가이딩이고 뭐고 다른 것에 신경 쓸 겨를은 없었다. 그저 깊이 연결된 서로의 체온에 집중하고 느낄 뿐.

“티, 팀장님…….”

인우는 엉덩이 근육이 단단히 설 만큼 힘을 주고 아래를 밀어 넣었다. 무릎 아래로 시트가 짓이겨지며 구겨졌다.

“하아.”

감은 시야로 번뜩이는 빛이 연신 스쳐 갔다. 꼭 이능을 남발했을 때처럼 머릿속이 어지러웠다. 닿은 살결은 전부 놓치고 싶지 않아 강하게 틀어쥐고 당겼다. 힘없이 딸려오는 미루에게 묘한 정복감을 느끼면서도 거친 행동은 멈추지를 못했다.

“읏.”

사정하며 허리를 뒤로 무르자 끈적한 액체가 길게 늘어졌다. 하지만 곧 사납게 맞붙는 결합부 주변에 물길을 그리면서 튀어 올랐다. 철벅철벅. 욕실에서나 들었던 음란한 소리는 침대 위에서 더 집요하게 울렸다.

“미루, 박미루…….”

거칠고 사나운 음성이 계속해서 미루를 불러 댔다. 미루는 대답할 겨를도 없이 온몸으로 흥분을 느꼈다.

처음 경험해 보는 쾌락은 생각보다 더 좋았고 부끄럽지도 않았다. 상대가 인우라서 그런 걸까. 미루가 더운 숨을 뱉으며 무릎을 안으로 모았다. 그러자 아래를 박아 대는 움직임이 더욱 거칠어졌다. 탁, 탁. 인우가 허리를 찍어 올릴 때마다 그의 허벅지 부근에 무릎이 부딪쳤다 밀려나기를 반복했다.

“더, 더 닿고 싶어.”

얼핏 괴로운 음성이었다. 인우는 성기를 거칠게 밀어 넣으면서도 연신 갈증을 느꼈다. 좆이고, 입술이고 손이고. 가능한 모든 곳으로 미루의 체온을 느끼고 있는데도 그랬다. 더, 더 몸속 깊은 곳까지 미루로만 채우고 싶은데.

성기가 박힌 입구 주변엔 희뿌연 액체가 밀려 뒤엉켰고, 엉덩이 골을 타고 흐르기까지 했다. 하도 강하게 아래를 치받는 탓에 물방울이 연신 허벅지 사이에서 튀겨 댔다. 그러면서 인우는 미루의 마른 턱을 이로 물고 혀로 핥아 쉼 없이 살결을 탐했다.

“읏…….”

방은 어두워서 인우의 표정이 보이지 않았고, 거친 호흡과 뜨거운 열기만이 느껴졌다. 정신없이 밀어붙여지는 탓에 시야가 어지럽기까지 했다. 원래 다 이렇게 하는 건가. 처음이라 모르는 게 많은 탓에 짐짓 두렵기도 했다. 인우의 팔을 끌어안고 어깨에 입술을 파묻은 채 미루가 웅얼거렸다.

“너, 너무 어두워요……. 불, 으읏, 불 켜면 안 돼요?”

인우는 아랫입술을 사리물었다. 지금 불 켜면 안 될 것 같은데. 목소리야 어떻게 속일 수 있다고 해도, 욕망에 잔뜩 전 제 얼굴은 감출 수가 없을 듯싶었다. 흥분에 멀어 버린 제 눈을 본다면 분명 미루가 무서워할 거다. 겁을 먹고 눈물도 흘릴 텐데, 그런 광경을 보면 더 흥분되지 않을까. 싫다고 밀어내도 막무가내로 몰아치고, 다신 가이딩 따위 하지 못하게 되더라도 상관없을 만큼 온 기운을 앗아 버릴지도 모른다. 그럼 다시는 이렇게 체온을 나눠 주지 않을 테지. 그럼…… 다시 긴 터널 같은 곳에 홀로 갇힌 채 미루의 얼굴만 떠올리겠지.

“……미안. 불은, 켤 수가 없겠는데.”

아직 제 욕심을 온전히 드러내고 싶지 않다는 이기적인 결정이었다. 하지만 미루에겐 이능을 쓸 수 없을 수준으로 지친 상태라는 소리로밖에 들리지 않았다. 미루가 인우의 몸을 더듬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으, 네……. 아, 읏.”

신음을 뱉느라 대답이 짧게 뚝뚝 끊어졌다. 대신 체온을 더 나눠 주기 위해 단단한 허리에 파들거리는 다리를 감았다. 뒤꿈치로 단단한 엉덩이 부근을 꾹 누르자, 인우가 신음을 짓씹으며 더욱 사납게 허리를 마구 짓찧어 댔다.

암흑 속에선 이따금 정체를 알 수 없는 불빛이 터졌다. 침대 위에서, 창문 근처에서, 겹쳐진 두 사람의 나신 위에서. 그 빛은 밤이 새도록 끊이지를 않았다.

“가, 간지러워요…….”

정신을 잃었다가 눈을 뜨는 순간마다 벌어진 아래로 굵은 성기가 드나들고 있었다. 사정을 몇 번이나 해서 아랫배가 가득 찬 느낌인데도, 인우의 아래는 잦아들 줄을 몰랐다.

지금은 또 미루의 두 손을 위로 결박한 채 거칠게 성기를 밀어 넣고 있었다. 척척하게 젖은 마찰음이 또 거세게 이어졌다. 드러난 팔뚝 안쪽에 입술을 묻고 잘근 씹어 대던 인우가 작게 웃음을 흘렸다.

“잘 잤어?”

목소리도 처음과 비슷했다. 뜨겁고 사납고 거칠고, 흥분이 잔뜩 녹아 있는 음성. 인우는 혀를 내밀고 팔뚝 안쪽을 느릿하게 핥았다. 정말 체질이긴 한 건지, 겨드랑이에도 털이 없었다.

매끈한 살결에 입술을 파묻고 아프지 않게 잘근잘근 씹어 흔적을 남겼다. 뜨거운 살덩이가 피부를 핥을 때마다 작은 어깨가 움찔댔지만, 물러나 줄 의향은 없었다. 콧대가 짓눌릴 만큼 입술을 파묻고 정신없이 빨아 댔다. 미루의 체향이 조금 더 짙게 느껴져서 그런가 사정감이 빠르게 몰려왔다.

“티, 팀장님. 간지러워요, 읏.”

이제 몇 번이나 쌌는지 헤아리는 것도 멈췄다. 아랫배와 허벅지 쪽은 말라붙은 정액 때문에 빳빳하기까지 했다. 미루가 뻑뻑한 눈을 감았다 떴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도 물론 알 수 없었다. 집 안은 어떤 형태도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캄캄했으니까.

다만 한 가지 달라진 점은 등과 엉덩이 아래로 느껴지는 시트가 푹신하다는 거였다. 아깐 밑이 얼마나 축축했는지 시트가 엉덩이에 달라붙을 정도였다.

물론 침대를 옮긴 건지, 시트를 갈았는지 보이지 않으니 무엇도 확인하긴 어려웠다. 가끔 목이 마르다고 하면 인우는 그대로 미루를 안아 들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꼿꼿하게 선 성기를 품은 채 움직여야 했지만, 그래도 그 순간은 조금이나마 숨을 돌릴 수 있었다.

“네 향이 너무 좋아서 그래. 온종일 이 짓만 하라고 해도 할 수 있을 것 같아.”

인우가 킥킥대고 웃을 때마다 맞붙은 입술 새로 뜨거운 숨이 끼쳐 왔다. 그는 겨드랑이에 셀 수 없이 많은 잇자국과 울혈을 남긴 뒤 가슴으로 입술을 옮겼다. 여기도 엉망인 건 마찬가지였다. 하도 빨고 씹어 댄 탓에 퉁퉁 부어 혀가 닿기만 해도 따가울 지경이었다.

“읏.”

역시나 혀끝만 댔는데도 저릿했다. ‘따가워?’ 작게 묻는 말에 미루는 울먹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채를 띤 눈동자가 주억이는 미루의 얼굴에 닿았다. 그러고는 짓누르고 있던 상체를 조금 떼고 눈을 내리깔았다. 좆으로 들쑤실 때마다 납작한 배 위로 작은 둔덕이 생겼다.

인우는 잡고 있던 마른 손목을 놓아주곤, 살이 없는 배 위를 가만히 감쌌다. 동시에 사납게 허리를 쳐올렸다. 미루가 짧은 신음을 터트렸지만, 번뜩이는 시선은 아래에서 떨어질 줄 몰랐다.

여기까지 자신이 치달았단 뜻이다. 아무도 드나들지 않았던 곳에 제 흔적이 남았다는 거다. 마음 같아서는 더 들어가지 않을 곳까지 제 정액을 싸지르고 싶은데, 미루는 싫어하겠지. 이를 세게 짓씹으며 볼록 튀어나온 아랫배를 더욱 꽉 눌렀다.

“아흑, 읏…….”

미루의 상체가 뒤틀리며 달달 떨렸다. 맞닿은 몸 사이에 짓눌린 미루의 성기에서 정액이 쏟아져 나왔다. 처음보다는 묽고 양도 적었다. 뚝뚝, 뿌연 액이 귀두에 맺힌 채 촛농처럼 떨어졌다.

곧이어 인우도 아랫배가 저릿한 감각을 느끼며 사정을 했다. 이미 안을 꽉 틀어막듯 단단해진 성기와 빼내지 못한 정액 때문인가. 내벽은 더 사정액을 담지 못하고 접합부 사이로 찔끔찔끔 흘려보냈다.

인우가 허리를 느리게 비비며 내벽을 마구 짓눌러 댔다. 정액을 안에 전부 펴 바르듯 집요하고 끈덕진 행위였다. 미루의 허벅지가 달달 떨리는 것을 느끼며 천천히 몸을 물렀다. 덩어리진 것이 울컥 구멍 틈으로 흘러내렸다. 울혈이 남아 있는 회음부와 성기에도 뿌옇게 말라붙은 정액이 가득했다.

아예 고개를 기울인 채로 정액이 살결을 타고 내리는 광경을 뚫어지게 응시하던 인우가 붉게 부푼 입술을 다시 세게 깨물었다. 아직 뜨거운 기둥을 쥔 채로, 흘러내린 뿌연 액을 도로 쓸어 올렸다.

“미루야. 이번엔 정신 잃지 말고 잘 들어.”

“흐으…….”

“너한테서 얼마나 야한 소리가 나는지.”

작은 웃음소리가 섞인 음성이 무척 서늘하다고 느꼈다. 또다시 안을 파고드는 축축하고 단단한 성기의 감촉, 뜨겁고 버거운 그 감각에 미루가 눈을 질끈 감았다. 난잡하고 잡아먹을 듯 구는 섹스는 끊이지 않고 계속됐다. 까무룩 정신을 잃으면서 미루는 생각했다. 내가 가이딩을 한 적이 있었나, 하고.

“내일이 계약 마지막 날이라고요?”

하루쯤 지난 줄 알았는데 정신을 차려 보니 계약 기간을 하루 앞둔 날이었다. 도대체 며칠을 그렇게 붙어먹은 거지. 미루는 하얗게 질린 낯으로 손을 꼽아보았다.

“그래서…….”

어쩐지, 인우는 이따금 정액이 아닌 다른 것으로 배를 채워야 한다며 미루를 식탁으로 이끌었다. 물론 편한 의자가 아니라, 인우의 무릎에 앉혔다. 그것도 한시도 죽지 않는 좆을 품고선 말이다. 아무것도 안 보이는 채였는데 인우는 한 번의 흐트러짐 없이 미루의 입술 새로 음식을 밀어 넣어 주었다. 씹는 턱짓이 느려지나 싶으면 허리를 쳐올려, 정신을 쏙 빼놨다.

그리고 소변이 급하다고 하면 뒤에서 미루를 안아 들고는 변기 앞에 갔다. 사정도 많이 하고, 하도 물고 빨아 댄 탓에 퉁퉁 부은 성기를 쥐었다. 인우에게 잡힌 채 쪼르르 울리는 소리에 미루는 위아래로 질질 울어 댔다.

짓궂게 구는 게 좋아서 그런 건 줄 알았건만 정말 시간이 오래 지났던 것임을 이제야 깨달았다. 오랜만에 집 안은 평소처럼 밝았고, 인우 역시 겨우 흥분이 가라앉은 듯 보였다. 살을 부대끼면서 제대로 된 가이딩을 했는지도 가물가물한데 인우는 멀쩡해 보였다. 저만 골골 앓고 있는 꼴 같았다.

“이제 소문은 좀 사라질까?”

“네?”

큰 눈이 인우에게 닿았다. 그는 눈을 내리깐 채로 미루의 손끝만 만지작대고 있었다. 길게 늘어진 속눈썹이 티 나지 않게 떨리는 듯싶었다.

“미루 너는 죽지 않고 살아 있잖아. 나를 무서워하지도 않고.”

“아…….”

제 소문도 아니면서, 미루는 속상하단 듯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아랫입술을 훑어 침을 삼킨 인우는 샴푸 향이 나는 머리칼을 소중하단 듯 쓸어 넘기며 물었다.

“내가 너를 잡을 자격은 없지만, 물을 자격은 있는 거 같아서.”

“…….”

“계속 내 가이드로 남아 줄 수 있어?”

팀장님과 계속 같이 있고 싶으면서도 확신이 서지 않았던 건, 계약 종료 이후의 관계를 확실히 한 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내심 기다렸던 말이라 미루의 가슴이 빠르게 박동하기 시작했다.

“전담 가이드…….”

퉁퉁 부은 입술을 작게 달싹이자 인우가 고개를 주억였다. 미루는 당장이라도 그러겠다고 대답하고 싶었다. 그가 제게만 보여 주는 다정한 낯도, 음성도 전부 좋았고, 처음 겪어 본 설렘과 두근거림도 계속 느끼고 싶었다. 하지만 미루에겐 현실적으로 뒤따르는 것들이 너무 많았다.

“혹시요……, 팀장님 가이드가 되면 여기서 계속 살아야 하나요? 왜냐면 제 동생이 아직 어리고 자주 아파서요.”

인우는 대답 대신 고개를 기울인 채 가만히 미루를 응시했다. 그 빤한 시선에 괜히 목소리가 기어들어 갔다.

“……그리고 개강도 하거든요. 아르바이트도 곧 다시 시작해야 하고요…….”

말끝이 잘게 떨렸다. 잠깐 센터에 머무느라 잊었지만, 자신은 다시 팍팍한 현실로 돌아가야 했다. 원래 있었던 그 자리로.

가만히 듣기만 하던 인우가 손을 뻗어 미루를 품에 안고 뒤통수를 쓸어 주었다.

“그거 말고, 네 마음은 어떤데?”

“……저요?”

무언가를 결정할 때 스스로가 우선이었던 적은 없었다. 아르바이트 하나를 구해도 집이나 병원에서 가까운 곳에서 선택했고, 음식이나 침구 같은 것도 동생의 취향에 맞추기만 했었다.

“나는 그런 소리가 궁금한 게 아니야. 미루 네 마음이 듣고 싶은 거지.”

타이르는 말에도 미루는 가만히 눈만 굴릴 뿐이었다. 조용히 입술이 열리길 기다리면서 인우는 속으로 연신 되뇌었다. 나랑 있고 싶다고 말해. 그 한마디면 돼.

“팀장님하고, 같이 있고 싶어요.”

기어이 원하던 말을 얻어 냈다. 인우가 비죽 치솟는 입꼬리를 숨기기 위해 미루를 품에 가두었다. 단정한 뒤통수를 가만히 쓸어 주며 눈을 감았다. 가이딩 대신 간지러운 감정이 가슴속에 충만하게 차올랐다.

“그 마음만 있으면 돼.”

나머지는 자신이 다 알아서 할 테니. 어차피 처음부터 동생은 이길 수 없으리라고 판단했다. 굳이 이길 생각도 없고, 애초에 제 경쟁 상대도 아니었다. 힘들게 산 애한테서 기댈 곳을 뺏기도 싫었다. 학교는…… 솔직히 보내기 싫은데 그래도 졸업 때까지는 참아야겠지. 시커먼 속내를 발견하지 못하게 깊은 곳에 감춰 두었다.

***

TF 기간제 가이드 계약이 만료되고 퇴소 날이 되었다. 그간 같이 지낸 선배들과 인사라도 나눌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인우의 말을 들어 보니 다들 남은 일 처리를 하거나 임무에 나갔다고 했다. 그래도 팀장님 가이드가 되면 종종 만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으로 아쉬움을 달랬다.

집으로 가는 길엔 인우와 도화가 동행했다. 그래도 도화와는 마지막까지 얼굴을 볼 수 있다는 게 다행이다 싶기도 했다.

―500m 앞 목적지입니다.

집에 다 와 간다는 안내 음에 미루가 창밖을 살폈다. 한참 뒷좌석에서 조잘대느라 몰랐는데 이제야 낯선 풍경이라는 걸 깨달았다.

“어? 여기가…….”

대리운전을 할 때 가끔 오갔던 고급 빌라 단지였다. 유명한 사람들이 사는 곳인 데다 워낙 값이 비싸다고 들었다. 미루 형제가 사는 반지하 단칸방과는 차원이 다른 곳이었다. 미루가 눈동자를 굴리며 내비게이션을 확인했다. 아까 출발할 때 알려 준 집 주소가 아닌 다른 장소가 찍혀 있었다. 분명 제대로 불러 줬었는데.

미루가 운전석과 조수석 사이로 슬쩍 얼굴을 내밀었다. 운전대를 잡은 도화가 힐끔 곁눈질을 했고, 동시에 인우가 미루의 허리를 잡아당겼다.

“위험하게.”

“팀장님, 여기 저희 동네가 아니에요.”

작게 속닥대는 미루의 음성에 인우가 느린 시선으로 주변을 훑었다. 주차장으로 들어선 탓에 차 안에 잠깐 흐릿한 어둠이 찾아왔다. 인우의 눈동자가 마지막으로 향한 곳은 미루의 얼굴이었다. 고개를 기울이곤 귓가에 입술을 가까이 붙였다. 그러곤 미루가 그러했던 것처럼 작은 목소리로 속살거렸다.

“이제부턴 맞아.”

“네?”

“내리자.”

미루의 낯엔 물음표가 가득했다. 그래도 인우와 도화를 놓칠 순 없으니 얼른 뒤따라 내렸다. 비싼 곳이라 그런지 카드 키도 몇 번이나 찍은 뒤에야 엘리베이터에 오를 수 있었다.

“여기가 어딘데요?”

미루는 인우의 옷자락을 꽉 쥔 채 등 뒤에 바짝 붙어 있었다. 그 모습이 낯설면서도 겁을 먹은 것처럼 느껴졌다. 인우는 짐을 한 손에 옮겨 들고 미루의 손을 잡았다.

“가 보면 알아.”

대답과 동시에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미루는 인우에게 손이 잡힌 채로 끌려갔다. 앞장선 도화가 카드 키를 찍었다. 열린 현관문 틈으로는 팀장님 집 주변을 둘러싸고 있던 것과 같은 실드가 반짝이고 있었다.

“박미루 가이드가 지낼 곳이니 먼저 들어가요.”

미루는 여전히 쭈뼛대며 인우를 힐끔거렸다. 인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놓아주었다. 열린 틈새로 발을 내디뎌 안으로 들어섰다. 투명한 막을 지나칠 때는 살갗에 부드러운 천이 감기는 듯한 포근한 감각이 들었다. 완전히 실내로 들어서자 가장 먼저 눈길을 끈 건 거실 한쪽을 차지한 넓은 창이었다.

“와.”

작은 탄성이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다. 펜트하우스 내부는 무척 고급스러웠다. 소파며 TV며 냉장고, 식탁 따위가 모든 게 새것인 데다 한눈에도 무척 좋아 보였다. 외관이 그랬던 것처럼 안쪽도 무척이나 부티가 났다. 문득 거실 한가운데 놓인 자신만 동떨어진 기분이었다. 창문 앞에 멀뚱히 서 있자, 인우가 등 뒤에 바짝 붙은 채로 창밖을 가리켰다.

“저기.”

손끝은 근거리의 단지 하나를 향해 있었다.

“동생이 지낼 곳은 저기야. 도화가 퇴원도 도와주고, 집도 안내해 줄 거니까 신경 쓸 일은 없어.”

“이루가 저기서 지내요?”

놀란 표정으로 올려다봤지만, 인우는 꽤 단단한 근육이 붙어 있는 미루의 어깨를 쓸어내리기만 할 뿐이었다.

“원래 살던 곳은 알아서 정리하려다가, 어떻게 손대야 할지 몰라서 그냥 뒀어. 짐도 필요한 것만 챙겨 오면 돼.”

그는 모든 상황을 준비해 둔 것처럼 차분히 일러 주었다. 학교와 병원과도 가까운 거리니 불편할 일은 없을 거라며 설명을 덧붙였다. 미루는 사실 상황이 이해되지 않았다. 지금 이 집도 어마어마한데, 이루에게까지 따로 집을 마련해 줄 필요가 있나 싶었다.

“어…… 저, 동생이랑 따로 지내는 거예요?”

돌려서 말하긴 하지만 말간 얼굴에 부담스럽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인우는 잠깐 고민을 하다 적절한 변명을 늘어놓았다.

“앞으로 가이딩해 줄 일이 많아질 텐데. 소리 안 내고 참을 수 있겠니.”

가느다란 목덜미를 움켜쥐고 목덜미를 엄지손가락으로 가볍게 훑었다. 작은 접촉에도 마른 몸이 부르르 떨렸다.

“아.”

물론 손을 잡거나 가벼운 포옹으로도 가능하다지만, 가이딩을 핑계로 한번 불이 붙으면 기절을 해도 끝나지 않던 행위가 떠올랐다. 이루와 같이 지내면 아마 절대…… 숨길 수 없을 테다. 그럴 자신도 없고.

“…….”

붉게 물든 뺨 위로 진득한 시선이 들러붙었다. 지금 입을 대면 무척 따끈하고 부드러울 텐데. 입맛을 다신 인우가 뜨거운 마른침을 삼켰다.

“그, 렇긴 하죠? 그, 가이딩을 해야 되니까…….”

미루는 부끄러운 건지 눈을 마주치지도 못한 채 말을 더듬어 댔다.

“집이 마음에 안 드나.”

중얼대는 말에 미루가 얼른 손사래를 쳤다. 마음에 안 들 리가 없었다. 이런 곳을 마다할 사람이 어디 있을까. 다만 이런 집까지 덥석 받아도 괜찮은 걸까? 그런 걱정이 앞섰다. 아직 이렇다 할 가이딩도 해 주지 못했는데.

“아니요. 조금 부담스러워서 그랬어요.”

“해결되면 좋아할 줄 알았더니.”

아마 정식으로 전담 신청을 올리면 센터에선 미루에게 더한 걸 해 줄 게 분명했다. 필요한 존재지만 가이딩이 부족해 늘 골칫덩어리였던 심인우를 맡아 준다는데 이깟 집이 문제일까. 그래서 전담 신청서를 쓰기 전에 본인이 준비해 줄 수 있는 건 전부 직접 해 주고 싶었을 뿐이다. 욕심 가질 틈 없이 치열하게 살아온 애라 그런가. 이런 것으로 부담스러워할 줄은 몰랐다.

“아니에요. 좋아요, 정말로. 정말 감사해요.”

몇 번이고 고맙다며 울먹이는 말에 인우는 가만히 머리칼을 쓸어 주기만 했다.

동생이 마음에 걸린다고 했던 내 말을 기억하고 있었구나. 괜히 팀장님을 부담스럽게 만든 것 같아 미안하기도 하고, 고맙기도 했다. 다정한 손길을 느끼며, 하고 싶은 말들은 전부 삼키고 인우의 손을 잡을 뿐이었다.

짐을 대충 풀고 간단하게 식사를 하고 있자니 인우에게 호출이 왔다. 방으로 들어가서 연락을 받은 그가 이내 짜증스러운 표정을 하고 거실로 나왔다.

“미루.”

“……네에.”

우유를 꿀떡 넘긴 미루가 한 박자 늦게 대답했다. 입술에 뿌옇게 남은 흔적을 보고 인우의 얼굴에 언뜻 묘한 미소가 스쳤다가 금방 지워졌다.

“센터로 가 봐야 할 것 같아. 혼자서도 잘 잘 수 있지?”

동생이 병원에 있는 시간이 길었던 탓에 혼자 지내는 건 무척이나 익숙했다. 물론 그땐 이렇게까지 집이 넓지 않아 무섭진 않았지만. 낯선 곳이라고 뭐가 다를까 싶었다. 그리고 저도 어엿한 성인이었다. 가끔 팀장님은 그걸 잊은 사람처럼 굴었지만.

“그럼요. 제가 몇 살인데요.”

그 말에 맞은편에 앉아 있던 도화가 작게 웃음을 흘렸다. 왜 웃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기분은 썩 좋지 않았다.

“그럼 다행이고. 금방 올 테니까 조금만 기다려.”

인우가 결 좋은 미루의 머리칼을 살살 쓸어내렸다. 마음 같아선 당장이라도 여기서 지내고 싶지만 정리해야 할 것들이 남아 있었다. 최 제약 대표에게 맞는 벌을 내려야 했고, 작전 보고도 더 올려야 했으며, 개강 전에 미루의 동기들에 관한 정보를 살피는 일도 중요했다.

게다가 센터가 아닌 밖으로 나와 살기 위해선 복잡한 절차도 필요했다. 미루와 전담 신청서도 준비해야지. 물론 그건 모든 걸 준비한 뒤에 가장 마지막에 할 일이지만.

“네, 알겠어요.”

서둘러야 하는 걸 알았으나 차마 걸음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동생의 살길을 마련해 줬으니까 이젠 모든 미련을 끊고 센터로 들어오라고 할까. 학교든, 뭐든. 모조리 포기하고 그냥 제 곁에만 붙어 있으라고 할까.

……아니다. 그럼 센터 내 모든 사람의 시선을 받을 게 분명했다. 상상만으로도 불쾌해지는 일이었다. 인우는 치미는 욕심을 삼키고 집을 나섰다.

***

“어휴, 피곤하다.”

미루가 소파에 벌렁 드러누웠다. 한 것도 없는데 왜 이렇게 몸이 무겁고 피곤한지 모를 일이었다. 몸을 모로 세우곤 가만히 눈을 깜빡였다. 집 안엔 고요한 적막이 가득했다.

“…….”

인우가 찾지 않은 지도 벌써 일주일이나 지났다. 그래도 전화는 꼬박꼬박 했었는데, 어제부턴 통화를 길게 하기도 어려울 만큼 바빠 보였다.

“그래도 도화 선배는 매일 오는데…….”

도화는 정말 매일 미루를 찾았다. 첫날엔 지내던 단칸방을 정리해 줬고, 이루의 퇴원도 도와줬다. 저 모르는 사이에 두 사람은 자주 만났는지 꽤 가까워진 기색이었다.

그 뒤로는 발길이 뜸하리라 예상했는데, 매일 미루와 함께 이루네 집에서 시간을 보내다가 늦은 오후가 되면 돌아갔다. 은근히 도화 선배를 떠봤지만, 인우가 정신없이 바쁘다는 대답만 돌아왔다.

“집이 너무 크다.”

혼자 지내서 그런가, 집이 너무 넓게 느껴졌다. 유독 인우의 빈자리도 크게 다가왔고. 언제 오실까. 금방 온다고 해 놓고선. 여전히 답장 없는 핸드폰을 가만히 내려다보던 미루가 벌떡 일어나서 욕실로 향했다. 씻으면서 내려다본 몸에는 울혈이 아직까지도 흐리게 남은 채였다. 이게 사라지기 전에 올까. 이젠 모든 생각의 끝이 인우로 마무리될 수준이었다.

“후우.”

미루의 어깨가 한숨을 담은 채 추욱 늘어졌다. 씻고 침대에 누운 뒤에는 핸드폰으로 이것저것을 살폈다. 요즘에는 가이드 커뮤니티에 자주 들어가 전담 가이드가 되려면 필요한 정보를 얻기도 했다.

예를 들면, 전담 가이드가 되려면 신청서를 작성해야 한다는 것. 또,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는 사실 따위를 말이다. 보통 마음이 맞아 서로의 전담이 되는 데에 동의했다면 에스퍼 쪽에서 먼저 신청을 서두른다고 했다. 다른 에스퍼에게 빼앗기기 싫으니까.

“……바쁘셔서 아직 안 하는 건가.”

하지만 인우는 한 번도 제게 그런 얘기를 꺼내지 않았다. 커뮤니티에서 보기 전까진 신청서의 존재도 몰랐을 정도였으니. 정신이 없어서 그런 거리라 여기려 했지만, 괜히 이상한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게시글] 요즘 시대에 어떤 가이드가 먹버 당해ㅋ

커뮤니티 익명 게시판을 살피던 미루가 눈에 띄는 글을 클릭했다. 댓글도 이미 세 자리를 넘어가고 있는 글이었다.

는 나^^. 일단 난 스펙도 괜찮고 연봉도 나쁘지 않아서 가이딩으로 먹고살 생각 없었음. 근데 가이드 등록해 놔야 세금 감면 된다길래 걍 했음. (편법인 거 앎. 지적질 금지)

근데 에스퍼 쪽에서 가이딩 신청 들어왔고, 걍 안 하려다가 나가서 해 줬음. 근데 그 형이 생각보다 나쁘지 않고 가이딩도 잘 맞는 거 같더라. 주기적으로 만나서 접촉(손) 가이딩 했거든?

근데 점점 따로 만나는 시간 많아지고 분위기도 묘해지고... 진도도 점점 나가게 되는 거야. 한 몇 개월 그렇게 썸 타다가...

처음은 다르지만 언뜻 자신과 인우의 이야기와 닮은 탓에 미루는 점점 글에 몰입하기 시작했다.

형이 그러더라고. 전담 가이드 해 달라고. 그래서 난 존나게 진지하게 고민했지. 전담이면 그냥 결혼이나 다름없는 건데. 내가 고민했더니 자긴 이제 내 가이딩이 아니면 안 될 거 같대ㅋㅋㅋ

솔직히 형이 좋기도 하고.. 내 일도 계속 하게 해 준다는데, 전담까지 하면 연봉 몇 배로 뛰는 거잖아? 그래서 결국엔 ㅇㅋ하고 진도 끝까지 갔어; 몇 날 며칠;;;; 역시 에스퍼는 다르더라;; 눈만 맞으면 했다ㅋ 차라리 별로였으면 거기서 끝났을 텐데. ^^

근데 문제는 신청서 준비해 오겠다고 센터 가 놓고 연락 없다. 차단인지 뭔지. 안 받아 ㅅㅂ!!!! 이런 경우 옛날엔 좀 있었다고 하던데 요즘에도 있는 거냐? 아니 그냥 가이딩만 해 달라고 하지 따먹고 버리냐고 십새키가.. 존나 본새 업서ㅠㅠ

너네는 전담하자는 말에 속아서 뒤통수 맞지 말아라.. 진짜 뼈에 새겨. 튕기고 또 튕겨 알겠냐고ㅠㅠㅠㅠ ㅅㅂ 형 새끼야... 내가 진짜 존나게 사랑했다...

“허어.”

마지막 줄까지 읽은 미루가 눈살을 찌푸렸다. 몇 백 개가 달린 댓글에서는 하나같이 에스퍼를 욕하며 ‘절대 비전담’을 외치고 있었다. 커뮤니티를 보면 정말 별별 일이 다 있는 듯했다. 괜히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제 상황과 비교하게 됐다.

“아, 쓸데없는 생각.”

자꾸 이런 것만 들여다보니까 더 불안해지는 거 같아 핸드폰을 뒤집어 두고 그냥 눈을 감았다. 잠이라도 자야 헛생각을 안 할 것 같으니.

“…….”

그래도 사람 마음이란 게 한번 불안하기 시작하니, 사념이 끝도 없이 솟아올랐다. 이따금 방 안에는 반딧불처럼 작은 빛이 떠다녔다. 매일 밤 제 곁에 머물러 주는 빛이 있음에도 미루는 잠들지 못하고 뒤척였다.

충혈된 눈을 비비며 겨우 몸을 일으켰다. 밤새 인우에게서는 답장도 오지 않았다. 미루는 침대에 앉아 가만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집이 너무 넓고 또 무서웠다.

“그냥 혼자 못 잔다고 할걸.”

그런 후회까지 되는 거였다. 그래도 오실 거야. 올 거야. 내내 자신을 괴롭혔던 상상을 떨치며 자리에서 가까스로 일어났다. 청소를 하고 아침까지 먹은 뒤에는 소파에 앉아 가만히 도화 선배를 기다렸다.

“오늘 안 오시나?”

매일 이 시간에 왔었는데. 이젠 도화 선배도 바빠서 못 오는 걸까? 센터에 가 볼까 싶다가도 이젠 TF 팀원도 전담도 아니라, 혼자 센터 드나들기가 무척 까다로울 거였다. 시간은 10시를 훌쩍 넘어가고 있었다.

그렇게 한참 가만히 발장난을 치며 앉아 있자니, 벨소리가 들려왔다. 퍼뜩 고개를 든 미루가 월패드가 아닌 현관으로 곧장 달려갔다. 왜 이렇게 반갑게 맞아 주냐고 도화 선배가 당황해할지도 모르겠지만.

“선배, 안녕하, 어? 팀장님!”

“잘 잤어?”

벌컥 열린 문틈으로 보이는 건 인우였다. 전투복 차림을 한 그는 눈이 마주치자 작게 입술을 밀어 올리며 웃어 보였다. 아랫입술엔 이미 굳은 피딱지가 있었다.

“다쳤어요? 어, 얼른 들어오세요.”

미루가 재빨리 인우의 손을 꼭 쥐고는 가이딩 기운을 넘겨주었다. 인우를 소파에 앉히고 조심히 턱을 감싸 쥐었다. 그러곤 물티슈로 아랫입술을 살살 닦았다. 소파까지 오는 사이에 입술에 남았던 상처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다행이라는 말을 하기도 전에 인우가 미루의 허리를 그대로 끌어당겼다. 마른 가슴팍에 얼굴을 기댄 채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 내쉬길 반복했다.

“아, 살겠다.”

작게 중얼대는 소리를 가만히 듣고 있던 미루는 품에 안긴 인우의 머리칼을 살살 쓸어 주었다. 얌전히 손길을 받던 인우가 고개를 들더니 턱으로 미루의 가슴 부근을 툭툭 건드렸다.

“그런데 평소에도 도화를 그렇게 반겨 주나?”

웃음을 띠고는 있지만, 눈빛은 그렇지 않았다.

“아뇨, 아뇨. 오늘은 오시던 시간에 안 와서 그랬어요.”

“오는 시간도 알고 있을 정도야?”

으음. 미루가 눈을 굴리며 무어라 대답해야 할지 말을 골랐다.

“매일 그때 오셨으니까요……?”

“미루가 다른 사람한테 그렇게 관심이 많을 줄 몰랐는데.”

난감하단 듯 어색하게 웃으며 손사래를 쳐 댔다. 인우가 다시 웃음을 흘리며 가슴에 뺨을 기대 오자 미루는 의식적으로 가이딩을 풀면서 그의 어깨를 살살 매만졌다. 한참 침묵이 흐르고 나서야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그런데 왜 이렇게 늦으셨어요? 저 엄청 기다렸는데…….”

“아.”

그제야 인우가 미루를 단단히 엮고 있던 팔에 힘을 풀었다. 전투복 안쪽 주머니에서 봉투를 꺼내더니 탁자에 올려 두었다. 미루의 눈이 바쁘게 봉투를 살폈다.

“내가 밖에서 지내기엔 절차가 좀 복잡하더라고. 그거 해결하느라 시간이 좀 걸렸어.”

인우가 턱짓으로 봉투를 가리켰다. 얼른 옆에 자리를 잡은 미루가 봉투를 열어 안에 든 종이를 꺼냈다.

“어…….”

“준비 다 끝내고 신청서 내고 싶었거든. 혹시라도 그사이에 네가 다른 사람 손 타는 건 싫어서.”

이제 미루에겐 부족한 것이 없으니, 센터가 나설 일도 없을 거였다. TF 계약을 한 순간부터 지금까지 미루의 모든 과정을 제 손으로 처리했단 사실이 만족스러웠다.

“너만 사인하면 돼.”

그는 미루가 펼친 종이 하단 부분을 가리켰다. 인우의 이름과 사인 아래, 제 몫의 자리가 보였다. 잠깐이라도 저를 버려두지 않을까 걱정했던 것이 미안했다. 밖에서 함께 지내려고 만나러 오지도 못할 만큼 바빴던 사람을 두고 내가 무슨 생각을……. 미루가 가만히 빈 곳을 쳐다보다가 얼른 펜을 들었다.

“저…… 사실 혼자 자는 거 엄청 무서웠어요.”

“그랬어?”

나긋한 척 대답하면서도 인우의 시선은 내내 펜 끝을 향해 있었다. 미루가 온전히 제 손에 들어오는 순간만을 고대하면서.

“네. 저만 여기서 지내는 건 줄 알고…….”

“무서웠니. 계속 미루랑 같이 있었는데.”

말끝에 반딧불 같은 것이 두 사람 주변에 둥둥 떠다녔다. 큰 눈이 반짝이는 빛을 응시하다 고개를 작게 저었다. 빛이 매일 밤 저를 지켜 주긴 했다지만, 팀장님이 곁에 있을 때만큼의 안도감을 느껴 보진 못했다.

“제가 보고 싶은 건 팀장님이라서 그랬나 봐요.”

뒤통수를 부드럽게 쓸어내리자 결 좋은 머리카락이 손가락에 감겼다. 이제 언제고 제 손에 닿을 수 있는 이 체온에 가슴이 벅차기까지 했다.

“이제 혼자 두면 안 되겠네.”

“네에, 계속 같이 있어 주세요.”

주변에 둥실둥실 떠다니던 빛이 일순 팟, 소리를 내며 터졌다. 인우는 요동치는 기운을 잠재울 노력 따위는 하지도 않은 채 미루의 목덜미만 더듬댔다.

“앞으로는 이렇게 숨기는 것 없이 뭐든 말해 줘야 돼. 알겠니.”

박미루의 눈길이 닿는 것, 스치는 생각까지도 전부 저만 알고 싶었다. 끈덕지고 집요한 물음에도 미루는 얌전히 고개를 주억일 뿐이었다.

“네에, 알겠어요.”

미루가 사인을 하고 펜을 내려놓자마자, 인우는 발그레한 뺨을 끌어 제 쪽을 향하게 두었다. 시선을 빼앗겼던 그 잠깐이 인우에게는 너무도 긴 시간처럼 느껴졌다. 인우가 조용히 미소를 띤 채 미루의 눈을 응시했다.

“이제 계속 같이 있는 거죠?”

“그럼.”

네가 싫다고 해도 떠날 일은 없어. 뒷말을 삼킨 인우가 말간 얼굴을 가까이 끌어당겼다. 곧 뜨거운 살결이 맞닿았고, 더운 숨이 오갔다. 이번에도 역시나 가이딩 기운은 두 사람 사이에 흐르지 않았다.

***

“미루야, 넌 바로 알바 가?”

“어어.”

사실 아르바이트를 전부 그만둔 지는 오래였다. 평소라면 일을 했을 시간을 전부 인우와 함께 보냈다. 그걸 일하는 시간이라고 치기엔 가이딩해 주는 건 정말 드물긴 하지만.

“그래, 어쩔 수 없지.”

“응. 재밌게 놀다 와.”

미루가 친구들에게 인사를 하고 급하게 걸음을 옮겼다. 교수님 말씀이 길어지면서 평소보다 5분이나 더 늦게 마쳤다. 혼자였다면 별 상관 없었겠지만, 인우가 기다리고 있다면 말이 달라진다. 흘러내리는 백팩 끈을 끌어 올리며 주차장으로 달려갔다. 늘 인우가 차를 대 놓는 구석에 다다라서는 눈동자가 바쁘게 움직였다.

“팀장님!”

운전석 앞에 서서 시계를 확인하던 인우가 고개를 들었다. 시선이 마주치자마자 미루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고, 건조하게 시간만 보던 인우의 눈동자에도 감정이 깃들었다.

“교수님 말씀이 길어져서 좀 늦었어요.”

얼마 되지도 않는 거리인데 굳이 마중을 나간 인우는 미루의 가방을 건네받았다. 가만히 미루의 말을 듣던 인우가 가늠하듯 고개를 기울였다. 오늘 마지막 수업 교수 이름이…….

“강인석 교수?”

“어? 네. 어떻게 아세요?”

“미루랑 가까운 사람은 다 알지.”

“……가까운 건 절대 아니에요.”

물론 교수님은 절 좋아하시는 것 같긴 하지만, 그러고 싶지 않아요. 투덜대듯 중얼거리는 말이 이어졌다. 인우는 미루의 어깨를 부드럽게 쓸며 차로 향했다.

“오늘 센터 가는 날인데. 잊지 않았지?”

“네! 안 그래도 낮에 민영 선배한테 연락 왔어요. 오늘은 오는 거 맞냐구.”

“최민영 가이드는 항상 미루 너한테 관심이 많네.”

속은 질투로 들끓고 있으면서 음성은 꽤 태연했다. 뛰어오느라 흐트러진 머리칼을 다정하게 쓸어 넘겼다. 손길이 익숙한 듯 얼굴을 내어 준 미루가 가만히 눈을 감았다. 인우는 내리깔린 속눈썹을 엄지손가락으로 느리게 훑은 뒤엔 뺨을 쥐고 입을 맞췄다. 쪽, 낯간지러운 소리가 차 안에 울렸다. 그제야 미루가 눈을 뜨고 짓궂은 미소를 띠었다.

“저는 이미 팀장님네 미루인데 뭐 어때요.”

가끔 저렇게 귀여운 소리를 해서 끝내는 웃음을 터지게 하는 재주도 있었다. 하하, 인우가 어깨를 들썩이며 웃었다.

“그렇네. 걱정 안 해도 되겠어.”

“맞아요.”

귀엽게 대답하는 미루의 뺨에 또 한 번 입을 맞추곤 안전벨트를 채웠다. 심인우의 전담 가이드가 된 후, 미루는 단 한 번도 현장에 나간 적이 없었다. 원래 그랬듯이 인우 혼자 임무를 수행하는 게 대부분이었기 때문이었다. 항상 그 점이 의아했었는데 생각난 김에 물어봐도 되려나. 머뭇대던 미루가 입술을 열었다.

“팀장님, 혼자 임무 하시는 거 힘들지 않아요? 전에 TF처럼 같이 할 수도 있잖아요.”

“편하기야 하겠지만…….”

핸들을 돌리던 인우가 말끝을 흐리며 힐끔 미루를 쳐다봤다. TF를 결성하면 전담 가이드도 무조건적으로 참여를 해야 했다. 훈련이든 회의든, 현장이든. 센터에 미루를 끼고 다녀야 한다는 소린데, 그러기는 죽어도 싫었다. 차라리 조금 더 힘들더라도 혼자 해치우는 게 낫지. 지금도 미루가 졸업할 날만을 손꼽아 기다리는 중인 데다, 학교에서 부딪히는 사람들을 감시하는 것만으로도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이렇게 사는 게 익숙해.”

“아.”

그냥 누가 미루를 쳐다보는 것 자체가 싫은 거면서, 인우는 익숙하게 불쌍한 척을 했다. 그럴 때면 미루는 늘 저런 표정을 지었다. 눈꼬리를 축 늘어트리고 입술을 작게 벌린 채 시선을 내리깔았다. 그러면 긴 속눈썹이 뺨 위로 길게 그림자가 졌다.

속이 들끓듯 요동치는 바람에 인우는 속도를 더 높일 수밖에 없었다. 검사고 뭐고 얼른 일을 끝내고 둘만의 요새로 들어가, 서로의 숨결을 느끼고 싶을 뿐이었다.

“검사만 하고 돌아올 거야.”

“네네.”

고개를 끄덕인 미루가 차에서 내렸다. 그나마 센터에 올 수 있는 때는 달에 한 번 있는 가이드 정기 검사가 전부였다. 미루는 매번 인우의 손을 잡고 센터로 들어갔다. 그러면 정말이지 모든 에스퍼와 가이드들의 시선을 받을 수 있었다. 아마 인우가 센터 내에서 꽤 유명하기 때문이라 짐작했다.

검사를 하는 동안 TF 팀에서 만났던 선배들이 찾아와 인사를 나눴고, 인우는 뒤에서 팔짱을 낀 채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적당히 눈치를 보던 이들이 돌아가고 나서야, 검사를 마무리할 수 있었다. 정말 딱 검사만 마친 두 사람은 곧장 집으로 향했다. 그들이 센터에 머문 건 한 시간도 되지 않았다.

“내일은 잠깐 지원 나갈 거라. 도화가 데리러 갈 거야.”

“네에. 저도 센터로 올까요?”

“아니.”

단호한 대답이 떨어졌다. 그럴 필요 없어. 인우는 신신당부하듯 한 번 더 안 된다는 말을 강조했다. 미루는 알겠다고 대답하면서도 내일 도화 선배에게 한번 부탁해 봐야겠단 다짐을 했다.

“작전 보고. 팀 T21, 에스퍼 불법 약물 거래 현장 정리 완료. 부상자 없고 팀원 6인, 지원 2인 복귀 중.”

가이딩을 받는 팀장을 대신해 인우가 센터에 무전을 보냈다. 그제야 숨을 돌린 인우는 작업 내내 확인할 수 없었던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지금이면 도화가 미루를 만나 집에 도착했을 시간이었다.

미루는 점심에 먹은 돈가스 사진을 보낸 뒤로 별다른 연락이 없었고, 도화에게서도 마찬가지였다. 잘 만났나. 보통 때라면 도화가 일일이 상황을 공유해 줬는데. 잇새로 바람을 들이켠 인우의 미간이 서늘하게 구겨졌다.

혀로 느릿하게 볼 안을 훑던 인우가 미루와 도화에게 번갈아 가며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트레일러가 센터에 도착할 때까지 누구도 전화를 받지 않았다. 한순간에 분위기가 살벌해진 인우를 힐끔대며 팀원들이 트레일러에서 서둘러 내렸다. 인우는 싸늘하게 굳은 얼굴로 연신 누군가에게 전화를 하고 있었다.

에스퍼를 마중 나온 가이드들이 더해져서 주변은 정신없었다. 인우는 거친 손길로 무전을 제거하면서도 계속 미루에게 전화를 걸었다. 무슨 일이 생긴 건가? 전화를 왜 안 받지? 도화와 뭘…… 하고 있기에? 몸에 무리가 갈 정도로 이능을 쓰지도 않았는데 점점 전신에 열기가 차오르기 시작했다. 인우가 잇새로 거친 욕을 짓씹을 그때였다.

“팀장님!”

익숙한 목소리에 얼른 고개를 돌렸다. 주차장 쪽에서부터 미루가 손을 흔들며 뛰어오고 있었다. 그 뒤로는 작게 목례하는 도화가 보였다. 대충 상황 파악을 마친 인우가 눈을 가리며 낮게 숨을 쉬었다.

“어? 통화하고 계신 건가.”

“……아냐.”

얼른 전화기를 내려 두고 팔을 뻗었다. 그러자 익숙하게 미루가 손에 들어왔다. 현장에 다녀온 건 자신이면서, 인우는 꼭 다른 가이드들이 확인하는 것처럼 미루의 어깨를 틀어쥐고 곳곳을 샅샅이 살폈다. 첨예한 시선엔 불안과 안도가 뒤섞여 있었다.

“왜, 왜요?”

“어디 다친 덴 없지?”

“네. 저 학교에서 바로 온 거예요. 팀장님 봐 봐요.”

미루가 인우의 뺨을 슬며시 그러쥐고는 가까이 끌어당겼다. 키 차이가 있어서 인우가 허리를 숙여 주어야 얼추 높이가 맞았다.

꽤 연인 같은 분위기를 풍기는 두 사람에게 여러 시선이 꽂혔다. 심인우가 가이드를 만나고 엄청 조용해졌다고는 하던데, 저렇게까지 변한다고? 꼭 맹수를 조련하는 듯싶으면서도 어설프게 인우의 뺨을 쓰는 가이드의 손길. 이 광경을 처음 겪는 사람들은 입을 벌린 채 멍하니 그 둘을 바라봤다.

“다친 데는 없죠?”

“없어.”

인우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얼굴이고 손이고, 더듬대며 확인하는 손길이 처음보다는 꽤 야무지다고 느꼈다. 허리를 세우자 미루는 당연하단 듯 인우의 품에 안겼다. 전엔 주변 눈치를 살피면서 부끄럽다고 뺨을 붉히더니. 이젠 꽤 기특한 말도 할 줄 알았다.

“팀장님 복귀하시면 제일 먼저 반겨 주고 싶어서 오자고 졸랐어요.”

웃음을 삼킨 인우는 미루의 마른 등을 쓸어 주며 멀찍이 서 있는 도화에게 시선을 보냈다. 뒷짐을 진 채 어깨를 으쓱이는 도화에게 턱짓을 했다. 그러자 도화가 얼른 등을 돌리고 도로 차에 올랐다. 아마 미루 동생을 마저 챙기러 갈 모양이다. 요즘 미루 동생과 무척 가깝게 지내는 눈치였다. 굳이 신경 쓰란 말을 하지도 않았는데도, 종종 찾아가 좋은 것을 보여 주고 먹여 준다고 미루가 고맙단 말을 전했을 정도니까.

“팀장님 다치지 않아서 다행이에요.”

품에 안긴 채 중얼대는 목소리에 인우의 시선이 아래로 떨어졌다. 단정한 머리카락 위로 오후의 봄볕이 부서졌다. 인우가 부드러운 머리칼에 입술을 묻었다.

입을 맞추듯 쪽쪽, 소리가 이어진 뒤에는 미루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눈동자는 무척 맑고 반짝였다. 자신이 다루는 이능보다 더욱이 아름답고 찬란한 빛. 인우는 가이딩과 함께 차오르는 충만함을 느꼈다.

“내가 다치면 울 거잖아.”

“……그럴 수도 있어요.”

한번은 다른 사람의 피를 미처 씻어 내지 못하고 복귀한 적이 있었다. 몸의 절반이 흠뻑 젖은 채로 돌아갔더니 미루는 눈이 퉁퉁 부울 때까지 눈물을 흘렸었다. 다치지 않았다고 설명을 해 주었는데도 한참을 울었다. 그때 눈물 콧물 빼면서 울었던 게 생각나는지, 미루의 얼굴에 멋쩍은 표정이 스쳤다.

“미루 울리면 안 되지.”

인우는 미루를 힘 있게 끌어안았다. 달큰한 향기와 숨결, 따뜻한 체온. 모든 게 자신을 안정시켜 주었다.

어릴 때는 가이드가 트레일러까지 마중 나오는 모습을 무척이나 부러워했었다. 한참이나 그들을 쳐다보았을 때도 있었고. 조금 커서는 자신에겐 절대 일어날 수 없는 일이라 생각하니, 포기가 쉬웠다.

그렇게 놓아주었던 꿈을, 미루가 이뤄 준 셈이었다. 늘 고통에 허덕이던 자신을 끌어안고 다독여 주고, 살고 싶게 만드는 존재.

인우는 미루를 만나고 나서야 제대로 된 빛을 볼 수 있었고, 내일을 그릴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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