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외전 2화 (11/12)

2

“가이딩 팩 거래 날짜 잡혔어. 이틀 뒤 오후 11시, 천영 대학교 후문.”

어두운 회의실이 작게 일렁였다. 외부에서 지내는 에스퍼가 많아지며 자연히 불법 가이딩이 성행했다. 돈을 들여 센터에 등록하고 가이드가 배정되길 기다리는 것보다 값이 싸고 편했으니까.

그중에서도 꽤 유명한 제약 회사인 ‘최 제약’이 TF의 타깃이었다. 거기서 얼마 전부터 불법으로 가이딩을 추출해 수액 형태로 판매한다는 제보가 들어왔기 때문이라고. 큰 회사에서 본격적으로 손을 대는 거면 수습할 수 있을 때 뿌리를 뽑아야 하는데, 그쪽에선 내부 수색 영장도 무시한 채 버티는 바람에 센터에서 나설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지금까지 컨택한 거래 중에 가장 신빙성 있긴 하지만 가짜일 확률도 무시 못 하고, 직접적으로 연관된 직원이 나올 리도 없으니. 거래자 우선 체포 후, 주변인을 조사한다.”

“예.”

“거래 투입은 내가 가고 사주 경계는 김정우, 최영, 구지수. 모니터는 도화가 맡는다.”

팀원들에게 임무가 주어졌고, 가이드들 역시 담당 에스퍼와 함께 움직일 터였다. 미루는 긴장과 함께 낯선 두려움을 느꼈다. 가이드로서는 처음 현장에 나가는 거였으니까. 괜히 손에 땀이 차는 듯해 허벅지에 몇 번이고 문질러 댔다.

불이 켜지고 나서도 회의실은 소란했다. 담당 가이드와 에스퍼가 추가 훈련을 잡거나 가이딩 진행할 시간을 맞추느라 분주했다. 미루는 조용히 일어나 인우에게 향했다. 옆에 있던 도화가 먼저 알아채고 시선을 들었고, 인우는 지도를 살피느라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저어, 팀장님.”

“미루 넌 이번 작전에서 빠져. 무리하지 말고.”

쳐다도 보지 않고 뱉는 말에 미루가 입술을 잘근 씹었다. 물론 아직 선배들처럼 자유자재로 가이딩을 잘 다룰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랭크도 상승하지 않았다. 그래도 인우와 저는 상성이 꽤 잘 맞는 데다, 교관님도 이젠 현장에 투입돼도 괜찮은 수준이라고 하셨다. 은근히 기대를 걸어 봤지만 역시나 대답은 가차 없었다. 두 사람 사이에서 오가는 묘한 기류에 도화가 슬쩍 분위기를 살폈다.

“교관님도 현장 가는 거 문제없을 것 같다고 하셨어요. 이제 방사 가이딩도 조금 익숙해졌고. 제가 현장에선 크게 도움 안 되더라도, 다른 거라도 시켜만 주시면…….”

탁. 인우가 말을 끊어 내듯 펜을 거칠게 내려 두었다. 회의실 안의 모든 시선이 이쪽으로 쏠렸다. 찬물을 끼얹은 듯 내부가 고요했다. 그 틈으로 낮게 억눌린 인우의 목소리가 사납게 떨어졌다.

“안 된다고 했는데.”

차가운 시선이었다. 인우를 알게 되고 처음 보는 표정과 말투. 미루가 입술만 벙긋대며 떨리는 호흡을 토해 냈다. 겁을 집어먹은 미루를 빤히 쳐다보는 눈길이 집요했다. 시선을 거두지 않은 인우가 멀찍이 떨어져 있는 민영을 불렀다.

“최민영 가이드.”

“네?”

“교관한테 전해. 쓸데없는 말 해서 애 부추기지 말라고.”

인우가 잇새로 한 글자씩 짓씹어 발음했다. 미루는 그 서늘한 시선과 목소리를 피하지도 못하고 고스란히 버티고 서 있었다.

“예에.”

TF 팀 가이드 내 가장 고참인 민영이 작게 대답했다. 인우와 미루의 시선은 끊어지지 않고 계속 맞물려 있었다. 밀려오는 서러움에 미루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그러자 눈썹을 찌푸린 인우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보고 있던 지도와 서류를 챙기더니 도화에게 턱짓을 했다.

“가지.”

도화가 힐끔 미루의 얼굴을 살피고는 곧 인우의 뒤를 따랐다. 순식간에 텅 빈 자리를 내려다보며 미루가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도움이 되고 싶은데,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네.

“미루야, 괜찮아?”

민영이 걱정스러운 어투로 말을 건네 왔다. 어깨를 느릿하게 쓰는 다정한 손길에 괜스레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눈을 질끈 감고 호흡을 골랐다. 요동치는 마음을 최대한 잠재운 뒤에야 입술을 열었지만, 그래도 목소리가 떨리는 건 막을 수 없었다.

“아무래도 팀장님이 저 별로 안 좋아하시는 거 같아요.”

분명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잘해 주셔서 헷갈렸는데, 이제야 확실해졌다. 지원자가 저뿐이라 어쩔 수 없이 가이드로 들이긴 했다만, 자신이 싫은 게 분명했다. 그래서 접촉 가이딩이든 방사든 받기 싫은 거다. 아무리 전담 가이드 없이 힘들게 지냈어도 C 랭크 가이드는 성에 안 차니까.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화를 낼 리가 없잖아. 현장에 함께 가서 도움이 되는 게 자신이 센터에 있는 이유이자 돈을 받는 이유인데. 무리하지 말라는 말로 둘러대긴 했으나 결국은 빠지라는 소리였다.

“아니야, 너를 왜 안 좋아해. 걱정되니까 그러는 거지.”

민영이 다급하게 미루를 달랬다. 진짜 싫어하면 본인 집으로 데려갈 리도 없을뿐더러, 에스퍼에겐 필요도 없는 밴드니 붕대 따위를 붙여 준다고 얌전히 달고 다니지도 않았겠지. 그리고 미루를 현장에 데려가지 않는 까닭이 그를 걱정해서라고 민영은 느꼈다. 하지만 지금 미루에겐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을 테니, 등을 쓸며 달래 줄 뿐이었다.

잠깐 휴식을 갖고 난 다음에는 다시 훈련 시간이 돌아왔다. 도화와 어디론가 사라졌던 인우도 복귀했고 미루는 의식적으로 그들이 있는 쪽으로는 시선을 주지 않았다. 눈이 마주치면 괜히 눈물이 날까 봐서.

에스퍼와 가이드가 구역을 나눠 체력 단련을 하는 내내, 미루는 에스퍼 구역은 애써 무시했다. 그렇게 훈련을 마친 후 잠깐 주어진 쉬는 시간. 모든 팀원이 한 곳에서 휴식을 취했다. 인우는 도화와 또 훈련장 밖으로 나섰다.

“…….”

문이 닫히고 나서야 미루의 눈길이 문에 힐끔 닿았다. 아까 그렇게 말해 놓고도 팀장님은 아무렇지 않은 모양이다. 서러운 건 나뿐이지. 입술을 잘근 씹어 대던 미루가 옆에 널브러져 있는 정우의 팔을 쿡쿡 찔렀다. 눈을 감고 숨을 고르던 정우가 한쪽 눈을 힐끔 치떴다.

“선배님 혹시요, 가이딩 필요하지 않으세요?”

“……왜? 나 해 주게?”

갈색 머리카락이 위아래로 끄덕거렸다. 늘어지게 누워 있던 정우가 으차, 소리를 내며 몸을 일으켰다.

“안 되는데…….”

“왜요?”

작게 되묻는 미루의 얼굴이 단번에 울상이 되었다. 곤란한 듯 눈썹을 긁던 정우가 잇새로 숨을 들이켰다. 그러곤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입술을 뗐다.

“그냥 쉬어.”

다 서로서로 잘 받으면서. 팀원들도 꺼리는 걸 보면 진짜 내 가이딩이 별로인가 봐. 그러니까 등록을 해 놓고도 몇 년간 아무도 자신을 찾지 않았겠지. 어깨를 툭툭 두드리는 정우의 투박한 손길에도 우울한 기분은 나아질 줄을 몰랐다.

뒤늦게 훈련장으로 들어온 도화가 미루 쪽으로 시선을 뒀다. 정우가 무어라 말하며 미루의 어깨를 토닥여 주는 광경이 보였다. 5분 내로 팀장님 돌아올 것 같은데. 저러고 있으면 또 훈련 강도만 험해질 게 분명했다. 짝, 꽤 큰 소리로 손바닥을 부딪치자 팀원들의 시선이 전부 도화에게 쏠렸다.

“훈련 일찍 끝내야죠.”

눈치껏 알아들은 에스퍼들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큰 눈이 자신을 바라보는 게 느껴졌지만, 도화는 애써 외면하고 걸음을 옮겼다.

큰 집엔 미루 혼자뿐이었다. 밥을 다 먹고 씻고 나올 때까지도 내내 고요했다. 준비할 것이 있다며 몇몇 팀원과 도로 회의실로 향한 인우는 아직 귀가하지 않았다. 지원을 나가는 것보다야 낫긴 하지만, 그래도 주인 없는 집에 혼자 있는 건 영 적응이 되지 않았다.

거실에서 팀장님을 기다릴까 고민하다가도 어차피 제 도움은 필요 없을 텐데, 싶었다. 느릿하게 방으로 향한 뒤에는 이불에 푹 파묻혀 천장만 멀뚱히 쳐다봤다.

“……이루 보고 싶다.”

어두운 천장에 이루의 얼굴이 아른댔다. 미루가 팔을 뻗어 핸드폰을 끌어왔다. 아직 10시니까 자고 있진 않겠지. 가장 위에 남은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형?

“이루야, 안 자고 있었네?”

―응, 나 매점 가서 젤리 사 왔어. 지금 올라가는 중.

“젤리? 밥은 먹고 간식 먹는 거지?”

―아, 그럼.

젤리 봉지를 뜯고 잘근잘근 씹는 소리가 전화 너머로 이어졌다. 이루의 기척을 듣고 있자니 괜스레 눈물을 쏟을 것 같았다.

“보고 싶다. 형이 이거 끝나면 바로 갈게.”

―응. 근데 형아, 이제 케이크랑 과일 안 보내 줘도 돼.

“케이크랑 과일?”

―어, 형이 보낸다면서!

미루가 눈을 멀뚱하게 깜빡였다. 월급을 타면 케이크랑 과일 사 갈 생각을 하긴 했지만 아직 행동으로 옮긴 적은 없는데.

―도화라는 분이 며칠에 한 번씩 와서 주셨는데. 형이 보내는 거라고.

“…….”

도화가 케이크랑 과일을 왜 이루한테 보냈지? 나한테 언질도 없이? 머릿속엔 물음표밖에 차지 않았다.

―혹시 모르는 분이야? 잘못 보내셨나? 어떡하지. 나 그거 다 나눠 먹었는데…….

“아냐 아냐, 잘했어. 형이 내일 물어볼게. 여기 부팀장님이시긴 한데.”

통화를 마치고 나서도 의문은 가시질 않았다. 지금은 회의 중인 데다 시간도 늦었으니 내일 물어보는 게 낫겠지. 미루가 핸드폰을 내려 두고 몸을 바로 눕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액정이 번뜩였다. 어두운 방을 환히 밝히는 빛에 미루가 눈을 찌푸리며 핸드폰을 확인했다.

형아 오늘도 수고했어. 잘 자.

“…….”

온종일 참고 있던 서러움이 밀려오고, 갑자기 눈물이 차올랐다. 시야가 금세 흐릿해졌고, 눈꼬리를 타고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흐으.”

내내 억누르고 있었지만 그만두고 싶다는 마음이 비죽 치솟았다. 센터엔 저를 괴롭히는 사람 하나 없지만 그렇다고 살갑게 반겨 주는 이도 없었다. 하루를 거의 같이 보내는 팀장님부터가 그랬다. 등 뒤로 손을 감추던 매몰찬 모습하며, 작전에 참여하지 말라고 싸늘하게 선을 긋던 모습이 차례로 머리에 스쳤다. 다정하게 대해 주던 모습들은 당장의 서러움에 가려져 뒤로 밀려난 지 오래였다.

“흐, 흡…….”

이불을 끌어 올린 채 미루가 서럽게도 끅끅댔다. 질끈 감은 속눈썹이 흠뻑 젖어 눈 아래 진득하게 뒤엉킬 만큼 엉엉 울었다. 그래도 쉽게 그만둘 순 없었다. 여기서 더 실수하면 안 돼. 미움받고 쫓겨나면 안 된다. 우리 이루 병원비도 내야 하고, 돌아오면 따뜻한 이불도 사 줘야 하고. 건강하게 대학교도 가려면 자신이 조금만 더 참고 노력하면 됐다.

미루는 익숙하게 혼자 슬픔을 토해 내며 밤을 견뎠다. 흐느끼는 소리가 방 밖에 선 남자에게 들릴 줄은 전혀 모른 채로.

***

인우는 밤새 뒤척였다. 날이 밝자마자 기죽은 미루 밥을 챙기고 훈련실에 데려다 두기까지 하고는 바삐 가이드 교관을 찾았다. 그에겐 예전에 몇 번 도움을 받았기에 꽤 편한 사이에 속했다.

“가이딩은 어때.”

“엄청 좋아졌어요. 기본적으로 가르치면 잘 따라오는데, 연습도 많이 해요. 검사하면 확실히 랭크 변동도 있을 것 같고요.”

교관의 말을 가만히 듣던 인우가 머릿속으로 날짜를 계산해 봤다. 이번 작전을 끝내고 나면 랭킹도 다시 측정하고 상성 검사도 한 번 더 해야겠다. 계약 기간이 끝나도 자신을 벗어날 수 없게. 미루가 B 랭크 수준만 되어도 좋을 텐데. 그럼 가이딩 한 번 했다고 기절하는 일은 없을 거고, 어느 정도 제 기운을 감당할 수도 있을 것이다. 여전히 간지러운 감각이 맴도는 듯한 손끝을 찬찬히 문질렀다.

“검사 한번 잡아 볼까요?”

“급한 일 마무리하면.”

성의 없이 대답하며 돌아서던 인우가 발길을 멈추고 서늘한 눈길로 교관을 응시했다.

“그리고 현장에 나가도 된다느니 그런 말은 애 듣는 데서 하지 마.”

교관이 단숨에 눈썹을 구겼다. 막무가내로 TF 가이드 하나 교육하라고 들여보내더니 하지 말라는 게 너무 많았다. 현장 가이딩 교육도 아직 하지 말고, 칭찬도 하지 말고, 에스퍼 상대로 실습도 시키지 말고. 이래서야 어떻게 교육을 하라는 건지, 원.

“……없는 말도 아닌데.”

“하지 말라면 좀.”

“네에!”

교관이 부러 말끝을 더 누르듯이 대답했다. 심인우는 폭주에 다다라도 약으로 참는 이였다. 위험한 상황에서 가이딩이 필요해도 5분 이상 손을 잡아 주는 이가 없었고, 본인도 원하지 않았다. 아마 자신을 둘러싼 소문을 잘 알고 있는 듯 보였다. 물론 그의 노력에도 소문은 잦아들 기색이 보이지 않긴 했지만.

그랬던 심인우가 이번에야말로 가이드에게 관심을 드러낸다. 여기까지 와서 저런 소리를 해 댈 정도면 확실했다. 거기다 현장에 노출하지 말라는 건, 결국 본인 가이드로만 두고 싶다 이거지.

교관에겐 눈길도 주지 않은 인우는 별다른 인사도 없이 휙 몸을 돌렸다. 어디론가 전화를 걸면서 순식간에 멀어지는 뒷모습을 보며 교관이 혀를 차기도 했다.

“……사람이 정도 없지, 정말.”

내가 급할 때 가이딩해 준 적이 몇 번인데. 교관은 교육 시간표를 뒤적이며 박미루의 이름을 찾았다. 아무래도 앞으로 꽤 오래 볼 듯싶으니, 신경을 써서 잘 가르쳐야겠단 예감이 들었다.

한편, 그 시각 미루는 부은 눈두덩을 꾹 누른 채 발길을 옮기는 중이었다. 손 틈으로 바닥을 확인하며 막 모퉁이를 도는데, 신발 앞코가 눈에 들어왔다. 걸음을 멈추려고 했건만 단단한 가슴팍에 부딪히는 게 먼저였다.

“윽, 죄송합니다.”

충돌하며 손바닥으로 눈을 더욱 꽉 누른 건지 얼얼한 감각이 남았다. 질끈 감았던 눈을 뜨자 흐릿한 시야로 익숙한 얼굴이 들어찼다.

“아, 도화 선배. 안녕하세요.”

무감한 시선으로 미루를 지켜보던 도화가 팔을 뻗었다. 그러곤 눈두덩을 비비는 손을 끌어 내렸다.

“잘 만났네요. 잠깐 시간 좀 내요.”

“네.”

잠깐 얘기를 나누자는 의미인 줄 알았는데 도화는 로비를 가로지르고 주차장으로 향했다. 주변을 살피며 뒤를 따르던 미루가 볼을 긁적였다.

“밖으로 나가는 거예요?”

“네.”

“이따 회의 있지 않아요? 아…….”

혹시 회의도 참석할 필요 없다는 걸까? 미루의 눈두덩이 도로 붉어졌다. 도화는 안경을 추켜올리며 짧은 한마디를 뱉었다. 미루의 표정을 단번에 바꿀 만한 말이었다.

“동생분 보러 갑니다.”

아니나 다를까 미루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반갑다기보단 걱정스러운 감정이 더 커 보였다.

“이루 왜요? 어디 아프대요?”

“아뇨. 일단 타요, 가면서 얘기해 줄게요. 시간이 얼마 없어서.”

미루가 얼른 조수석에 올라탔다. 그리고 병원으로 가는 동안 도화에게 신기한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앞으로 일정이 더 빡빡해지면 외출 전혀 안 됩니다. 그 전에 동생하고 시간 보낼 수 있게 신경 쓰라고 하셨거든요.”

“……누가요?”

“팀장님이죠.”

당연한 걸 묻냐는 듯 빤한 눈빛에 미루가 안전벨트를 쥐고 몸을 바로 했다. 신경 써 주리라 전혀 생각지 못한 부분인데. 동생 얘기를 꽤 자주 해서 그런가. 아랫입술을 잘근 씹던 미루가 어젯밤 통화를 떠올렸다.

“선배님, 저 어제 동생이랑 전화했었는데요. 케이크랑 과일 가져다주신 거, 선배님 맞죠?”

“예. 그것도 팀장님 지시였습니다.”

“그래요? 원래…… 그렇게까지 하나요?”

그냥 잠깐 머물다가 갈 계약직인 데다, 가이딩도 전혀 못 해 주고 있는데.

“그렇게까진 안 하죠. 알지는 모르겠지만, 팀장님이 신경 많이 쓰고 있어요.”

아, 미루가 말끝을 흐렸다. 그건 스스로도 느끼는 부분이었다. 그래도 뒤에서 이루까지 챙겨 주고, 따로 만날 시간까지 만들어 주리라곤 예상해 본 적이 없었다.

“그건 저도 알아요. 그런데…… 왜 가이딩은 안 받으실까요?”

얼굴을 자주 본 도화가 편해서 그런 건지, 이야기를 잘 들어 줄 것 같아서 그런 건지, 미루가 내내 혼자만 앓고 있던 고민을 조심스레 꺼냈다. 때마침 신호에 맞춰 천천히 차가 멈추자 대충은 분위기를 파악하고 있던 도화가 최대한 에두른 설명을 늘어놓았다.

“아직 가이딩하기엔 위험한 상태라서 그런 게 아닐까요. 준비 안 된 채로 가이딩하면 몸이 아픈 경우도 종종 있거든요. 박미루 가이드가 교육은 받고 있어도 익숙해지려면 시간이 더 필요하고, 랭크 차이도 좀 나니까.”

“그래도 잠깐은 괜찮잖아요. 면접 봤을 때처럼 상처 나을 정도로만. 잠깐도 손 안 잡아 주신다니까요? 1분도 안 된대요. 저번에는 이렇게 뒤로 숨겼어요.”

미루가 등 뒤로 팔을 보내며 열정적으로 덧붙였다. 가만히 얘기를 들어 주던 도화가 일정한 속도로 핸들을 두드렸다. 그간 쌓인 게 꽤 많았나. 투정을 들어 주는 일엔 취미가 없지만 종알대는 꼴이 꽤 귀엽긴 했다.

“그랬어요?”

“네. 아파 보이는데 도와드릴 게 없으니까, 약이라도 발라 드리는 거거든요.”

“아아.”

도화가 무언가를 깨달았다는 듯 말을 길게 들였다. 그래서 컨디션이 심하게 나쁜 날을 제외하곤 보충제를 안 먹는 거였구나. 어쩐지, 자잘한 상처는 약만 먹으면 금방 사라질 텐데 번거롭게 붕대 따위를 달고 다니는 게 이상하다 싶었다.

“그런데 다른 선배님들은 1분이면 된대요.”

“보통은 그렇죠.”

그 말에 미루가 더욱 좌절한 얼굴을 했다. 그 뒤로도 하소연은 이어졌고, 도화는 적당히 맞장구를 치면서 인우에게 전할 말을 떠올렸다. 박미루 가이드가 몹시 서운해하는 걸 알고는 있느냐고. 이러다가 계약 기간 내내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그냥 보내 줘야 할 것 같다고.

그럼 아마 인우는 당장이라도 미루를 데리고 현장에 나갈 거였다. 물론 손 하나 까딱하지 못하게 두겠지만. 인우의 미묘한 변화를 지켜보는 건 생각보다 흥미로웠다. 게다가 밖을 오가는 것도 도화에게 꽤 귀찮은 일이었는데. 요즘엔 이 형제 덕분에 꽤 즐거운 외출이 되고 있었다.

외출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엔 센터 정문을 거쳤다. 적정 속도를 지키는 도화의 차량 옆으로 트레일러 한 대가 빠르게 스쳐 갔다. 미루의 눈길이 자연스럽게 창밖으로 향했다.

“혹시 팀장님은 또 지원 가셨을까요?”

“그렇겠죠.”

도화가 대수롭지 않다는 투로 대답했다. 창문에 바짝 붙은 미루는 막 센터 로비에 멈춘 트레일러를 뚫어지게 바라봤다. 우르르 쏟아져 내리는 에스퍼와 가이드들 사이, 머리 하나는 더 큰 사람이 곧장 눈에 띄었다. 그는 내리자마자 대원들을 모아 무어라 말하고 있었다.

“어? 팀장님이다.”

작게 중얼대는 소리에 주차하던 도화도 힐긋 트레일러를 쳐다봤다. 방금 다녀온 임무는 인우가 자주 활동했던 지역에서 벌어진 테러 진압이었다. 알고 있는 바로는 지휘와 자문 정도만 맡는 거였는데, 아마 미루의 눈에는 그렇게 비치지 않을 테지. 기회를 잡았다는 듯 도화의 눈이 일순 반짝였다.

“사수 피곤해 보이시네.”

“…….”

“내릴래요?”

“……네.”

차가 멈추자 미루가 얼른 벨트를 풀고 조수석에서 내렸다. 그러곤 곧장 트레일러로 향했다.

“오늘 오후에 다시 현장 수색하도록 하고. 이상.”

그 말을 끝으로 저마다 가이드와 손을 잡기도, 다친 곳이 있나 확인을 하기도 했다. 얼마 전에도 봤었던 소란스러운 광경이었다. 인우는 아직 미루를 발견하지 못한 모양인지 가만히 장비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아침까지만 해도 서운하기만 하던 감정은 잦아든 지 오래였다.

“심인우 에스퍼, 보충제 드릴까요?”

가운을 입은 직원 하나가 유리병을 작게 흔들어 보였다. 막 글러브를 벗던 인우가 무언가를 가늠하듯 시선을 내리깔았다. 그 짧은 정적이 숨이 막혀 미루는 저도 모르게 걸음을 재촉했다. 팀장님이 받아 주리란 확신은 없지만, 그래도 가이딩을 해 줄 사람이 주변에 하나쯤은 있다는 걸 알려 주고 싶었다.

“팀장님.”

소란에 묻힌 작은 부름이었으나 인우는 기민하게 반응했다. 주변을 살피던 날카로운 시선이 미루에게 닿았다.

“왜 혼자야?”

인우가 슬쩍 미간을 구기고 시간을 확인하는가 싶더니 근방을 예민하게 둘러보며 미루를 슬쩍 잡아끌었다. 그리고 미루가 입고 있는 후드를 당겨 머리에 씌웠다. 끈을 당겨 최대한 얼굴을 감춰 대는 손길이 꽤 사나웠다.

“저기 계세요.”

도화가 자리한 방향을 가리키는 미루의 손을 잡아끌어 내리고, 후드에 감싸진 작은 머리통을 제 쪽으로 향하게 두었다. 말간 얼굴을 빠르게 훑는 눈길이 집요했다. 아침 먹을 때만 해도 눈이 시뻘겋더니 이젠 좀 괜찮아 보이네. 동생을 만나고 온 게 그렇게나 좋았나. 이래서야 동생을 두고 센터에 머물 생각은 전혀 하지 않을 듯싶은데.

“…….”

“팀장님 내리는 거 보고 왔거든요. 제가 랭크는 좀 낮아도 보충제보다 효과 좋지 않을까요?”

머리칼이 이마에 눌려 시야가 방해되는지 미루가 눈앞을 연신 훔쳤다. 그 꼴이 멍청해 보이긴 해도 입맛이 돌았다. 미루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면서 가만히 시선을 돌렸다. 아닌 척해도 다들 이쪽에 신경을 쏟고 있는 게 느껴졌다. 안 그래도 눈에 띄는 애인데 자신과 함께라서 더 주목을 끄는 게 분명했다.

인우가 날카롭게 주변을 훑고는 미루의 뒤통수를 움켜쥔 손에 힘을 주어 당겼다. 단숨에 딸려온 얼굴이 거의 맞닿을 듯 가까워졌다. 놀란 미루는 눈만 크게 뜨고 깜빡일 뿐이었다. 당황한 표정을 조용히 읽어 낸 인우가 가까운 거리를 유지한 채 작게 속삭였다. 더운 숨결이 미루의 입술 위로 내려앉았다.

“이 정도는 해야 될 텐데. 괜찮아?”

기본 가이드 교육에서 배운 건 손을 잡는 행위가 전부였다. 진해 봐야 포옹 정도였고. 그런데 이건 분명 입을 맞추자는 시그널 같은데……. 마른침을 삼키거나 조금만 몸을 떨어도 입술이 닿을 듯 가까웠다. 미루가 큰 눈을 이리저리 굴리며 당황스러움을 숨기지 못했다. 얼어붙은 미루를 응시하던 인우는 바람 빠지는 웃음을 짓더니 허리를 도로 세웠다.

“…….”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뒤통수를 느리게 한 번 쓸어 주었다. 후드로 얼굴이 가려져서 다행이지. 아니었다면 온통 시뻘게졌을 미루의 귀와 양 뺨을, 그 꼴을 여기 있는 놈들이 다 봤겠지.

“도화야. 혼자 두지 말라니까.”

“예, 주의하겠습니다.”

인우가 둥근 뒤통수를 손바닥으로 감싼 채 당겼다. 손길에 휩쓸린 미루는 힘없이 인우의 옆에 찰싹 붙은 꼴이 되었다. 미루를 거의 품에 안다시피 한 상태로 로비를 가로지르면서 인우가 힐끔 뒤를 돌아봤다. 이쪽을 보면서 쑥덕대던 대원들과 하나하나 시선을 마주했다. 서늘한 눈빛이 선을 긋듯 이어지고 이내 관심의 눈길이 하나둘씩 거둬졌다.

“…….”

이래서야 혼자 둘 수가 없겠네. 인우는 미루를 밖으로 나돌지 않게 할 방법을 떠올려야 했다. 박미루는 심인우에게 어떤 작전보다 어렵고, 복잡한 고민을 안겨 주는 존재였다. 물론 그런 과정이 꽤 귀찮기는 해도, 손에 넣을 수 있다면 이만한 수고쯤이야 견딜 만했다.

세 사람이 나란히 복귀하고 나서는 곧장 회의가 이어졌다. 두 시간 내내 작전을 짜다, 겨우 숨 돌릴 틈이 생겼다. 민영의 주도하에 가이드들이 다 같이 회의실을 나섰다. 단발성 TF지만 그래도 팀워크가 좋아야 한다는 이유에서 자주 저렇게 미루를 데리고 다녔다. 인우는 가만히 가이드 무리를 응시했다. 정확히는 그 사이에 있는 가장 앳된 남자의 얼굴을.

“…….”

미루가 다른 이들에게 예쁨받는 광경을 보고 있자니 묘하게 불쾌해졌다. 볼 안을 혀로 밀어내며 진득한 눈길을 보냈다. 가이드들이 회의실을 벗어나고 말소리가 멀어진 뒤에야 인우의 시선이 문에서 떨어졌다. 그리고 다시 서류를 뒤적이면서 아까부터 자신을 힐끔대는 도화를 향해 물었다.

“할 말 있나?”

“동생 만나니까 무척 좋아하더라고요.”

“…….”

굳이 설명을 붙이지 않아도 그래 보였다. 아침보다 표정도 훨씬 좋았고, 트레일러 앞에서 만난 자신에게 가이딩을 해 주겠다며 선뜻 다가온 걸 보면 기분이 한결 나아졌단 뜻일 테니.

인우가 들고 있던 서류를 두고 의자에 기댄 채 눈두덩을 꾹꾹 눌렀다. 끝내 가이딩 보충제를 안 먹어서 그런가 오늘따라 몸이 무거운 것 같기도 했다. 한참 눈을 감고 있다가 가만히 입술을 뗐다.

“……가끔 시간 비면 나갔다 와.”

물론 아예 나가지 않고 지내면 좋으련만. 그렇게까지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닌 데다, 동생이 센터 바깥에 있는 한 미루도 반기지 않을 눈치였다. 끅끅대며 흐느끼던 소리가 얼핏 귓가에 맴돌았다.

“예. 그리고 가이딩은 조금씩 받아 보시는 게 어떤가요.”

얌전히 감겨 있던 눈을 떴다. 까맣고 서늘한 눈동자가 말없이 도화를 응시했다. 도화를 오래 봐 왔지만 이렇게 남에게 신경을 써 주는 일은 드물었다. 더구나 몇 개월만 호흡을 맞추고 사라질 가이드라면 더더욱. 그런데 요즘은 미루를 꽤 각별하게 챙긴다는 느낌을 받곤 했다.

“체력도 좋고, 교육도 잘 받고 있고, 사수와 기운도 잘 맞는 편이고. 무엇보다…… 박미루 가이드가 서운해하더라고요.”

서운해하는 걸 모를 리가 없었다. 책임감이 강한 건지, 맡은 걸 허투루 하기 싫은 건지, 아니면 동정을 얻기 위해 했던 같잖은 연기가 먹힌 건지. 미루는 시키지 않아도 선뜻 가이딩을 하겠다며 손을 내밀었다. 그 순간마다 큰 눈에 기대가 잔뜩 담겨 있다가도, 곧 시무룩해졌다.

그 꼴을 볼 때면 입맛이 돌았지만 그래도 아직은 때가 아니었다. 그릇이 완전히 차지 않았을 텐데, 자신에게 기운을 빼앗겨 정신을 잃거나 몸이 아프면 적대감이 생길 터였다. 그럼 미루도 다시 두려워할 거다. 먼저 손을 내밀지도, 살갑게 말을 붙이지도 않을 테고. 겁에 질려 저를 피하겠지. 다른 가이드들처럼.

“……때를 기다리는 중이야.”

“그럼 작전에라도 합류시키는 건 어떨까 싶습니다. 짐이 될 친구는 아닌 듯싶은데.”

테이블 위를 두드리던 인우의 손길이 느릿해졌다. 생각에 빠진 듯 무표정한 얼굴이 이내 도화를 향했다. 한참 만에 입술 새를 비집고 나온 음성은 몹시 서늘한 온도를 지니고 있었다.

“꽤 가까워졌나 봐? 네가 그런 걸 다 신경 쓰고.”

“가까워졌다기보단―.”

“무슨 말인지는 알아들었어. 내가 궁금한 건…….”

서운하단 얘길 할 때 박미루는 무슨 표정을 지었지? 어떤 목소리로 투정을 부렸지? 제 앞에선 그런 모습을 보여 준 적이 없는데. 혹시 울거나 한숨을 쉬었나? 이처럼 세세한 것들이 몽땅 궁금했다. 자신의 몫으로 떨어지는 일들이 없었다면 미루가 서운해하는 표정과 음성을 전부 알았을 텐데. 아니, 아직 저에게 그런 편한 말을 토로해 주진 않으려나. 혀를 찬 인우가 의자에 기댔던 몸을 바로 세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냐, 됐어.”

도화가 오늘 타고 갔던 차량이 뭐였더라. 전해 듣는 것보다 블랙박스에 남은 흔적으로 확인해 보는 편이 더 빠르리란 생각이 들었다. 인우는 도화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고는 곁을 스쳤다. 10분 더 쉬라는 말을 추가적으로 남기곤 회의실을 벗어났다.

얼마 지나지 않아 돌아온 인우가 작전표에 미루의 이름을 써 넣었다. 별다른 롤은 주지 않을 테지만. 그래도 제 옆에 적힌 ‘가이드 박미루’라는 글자가 꽤 묘하게 느껴졌다. 에스퍼들은 인우의 뒷모습을 보며 저마다 몰래 시선을 주고받았다.

“감만 익히라고 합류시킨 거니까, 가이딩 받을 생각들은 말고.”

다들 어느 정도 눈치는 채고 있었다. 심인우가 박미루를 대하는 게 여타 가이드들과는 조금 다르고, 팀 가이드가 아닌 전담처럼 챙긴다는 걸. 그래서 그간 시무룩하게 다니는 미루를 봐도 가이딩 한 번 해 달라는 소리를 꺼내지 못했다. 아니, 가이딩은 고사하고 곁에 가서 말이라도 걸라치면 심인우 팀장의 살벌한 눈길을 견뎌야 했으니까.

“예에.”

이제 TF 팀 전원의 이름이 작전표에 올랐다. 가이드들은 휴식 시간이 끝나기 5분 전에 돌아왔다. 그중 미루가 가장 마지막에 발을 들이고 문을 닫았다. 가이드들이 장난을 친 건지 후드 티 모자 안에는 초코우유 한 팩이 들어 있었다. 자리에 앉고 나서야 민영이 우유를 꺼내 갔고, 미루는 무어라 말을 하며 작게 웃음 지었다. 저를 향한 인우의 시선은 깨닫지 못했는지 꽤 즐거워 보이는 얼굴이었다.

“어?”

작전표에 쓰인 이름을 제일 빨리 발견한 민영이 슬쩍 미루에게 눈짓했다. 크고 맑은 눈이 뒤늦게 놀란 듯 뜨였다. ‘팀장 심인우’ 옆에 적힌 이름을 확인하고는 얼른 고개를 돌렸다. 내내 집요한 시선을 두고 있던 이와 드디어 눈이 마주쳤다.

“…….”

“…….”

솔직히 미루가 어떤 표정을 지을까 궁금했었다. 놀란 표정을 할까, 아니면 긴장할까. 상상과는 다르게 미루는 환하게 웃었다. 입술이 보드랍게 호를 그리고 하얀 뺨이 둔덕을 이루며 봉긋 솟았다. 갑자기 얼마 전 입에 댔던 하얀 생크림이 떠오르며 달큼한 맛이 느껴지는 착각이 일었다.

“……그냥 따라만 와.”

입술이 바싹 마르는 갈증을 느끼며 인우가 시선을 피했다. 이제 눈에도 들어오지 않는 서류를 뒤적거렸다.

“네!”

짧은 대답이었지만 미루를 알게 된 후로 가장 밝은 음성이었다. 인우는 서류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작게 웃음을 흘렸다. 그렇게 기쁜가. 합류한다고 해도 좋은 꼴은 못 볼 텐데.

사실 아까 이름을 써 넣을 때까지만 해도 고민이 됐다. 위험한 곳에 데려가서 겁을 먹게 하고 싶지 않았다. 무엇보다 다른 이에게 가이딩해 줘야 하는 돌발 상황이 생길 수도 있단 가능성 자체가 싫었다.

“다들 앉지.”

그래도 우는 것보단 나으니까, 뭐. 인우가 꽤 홀가분한 표정으로 지도를 펼쳤다.

회의가 정리되자마자 인우는 곧장 시뮬레이션을 하러 자리를 옮겼다. 내일이 당장 가이딩 팩 거래 날이라 세세하게 체크할 사항이 있는 듯 보였다. 짐이 되지 않게 열심히 하겠다는 말을 꼭 해 주고 싶었는데 그럴 겨를도 주어지지 않았다. 아쉽긴 하지만 내일을 위해 짐을 챙겨 든 미루가 가이딩 교육관으로 향했다.

“오. 벌써 현장 나가요?”

“네, 내일이요.”

교관이 꽤 놀란 표정을 했다. 아침에만 해도 들쑤시지 말라더니, 어떻게 데려갈 결정을 다 했대. 반나절 만에 마음을 바꾼 이유가 궁금하다가도, 눈앞의 가이드가 이렇게 들뜬 모습을 보니 대충 짐작이 가기도 했다.

“가이딩할 일이 있을까는 모르겠지만. 박미루 가이드는 지금 하는 대로만 하면 돼요. 현장에서 따로 알아야 할 건…….”

미루가 눈을 반짝이며 교관의 말에 집중했다.

“혹시 모를 돌발 상황만 주의하면 되는데. 폭주 알죠? 이능 많이 쓰면 열이 오르거나 상태가 엄청 안 좋아지거든요. 꼭 발현했을 때처럼.”

“아.”

문득 얼마 전 제 손님이었던 에스퍼를 떠올렸다. 그 남자도 연신 덥다는 말을 중얼대다가 발현했었지. 그때 느꼈던 공포가 다시금 떠오르며 어깨가 움찔 떨렸다.

“그땐 에스퍼가 가진 에너지가 부족한 상태라서 가이딩 양이 좀 더 늘어나야 해요. 지금 연습하는 것처럼 방사나 껴안는 거 말고, 무조건 접촉. 피부가 많이 닿아야 합니다.”

“피부가…….”

미루가 교관의 말에 집중하며 의자를 바짝 끌어 앉았다. 여기서부터는 가이드들이 기본적으로 듣는 수업과는 조금 다르리란 예감이 들었다. 교관이 손을 쫙 펴더니 엄지손가락을 안쪽으로 접었다.

“첫째, 전투복 상의를 벗긴다.”

“상의를 벗긴다.”

말을 따라서 곱씹는 미루의 얼굴은 꽤나 진지해 보였다. 교관은 웃음을 참으며 손가락을 하나 더 접었다.

“둘째, 맨몸을 끌어안는다. 이때, 가만히 있는 것보다 등을 쓸어 주면 더 좋습니다.”

“맨몸?”

“셋째. 얼굴을 딱, 잡고―.”

이번엔 손가락을 접는 대신 미루의 양 뺨을 아프지 않게 틀어쥐었다. 볼이 눌린 채 눈을 깜빡이는 미루를 보니 더 놀려 주고 싶은 마음이 치솟았지만, 서슬 퍼런 심 팀장이 떠올라 관뒀다. 교관이 입맛을 다시며 손을 뗐다.

“뽀뽀를 갈긴다. 참 쉽죠?”

손자국이 난 뺨을 쓸어 대던 미루가 눈을 치뜨고 교관을 노려보았다.

“이거 장난이죠.”

“장난이라니. 위급할 땐 이거보다 더한 걸 해야 될 수도 있어요. 심 팀장님 정도면…….”

교관이 경계하는 미루 쪽으로 상체를 기울이곤 작게 속삭였다.

“섹스는 해야 할걸?”

“저, 저, 저는 그냥 임시인데요? 임시 가이든데……. TF 기간만 있을 거예요.”

아까 트레일러 앞에서 팀장님이 입을 맞출 듯 다가오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내려앉았는데. 그런 짓까지 했다간 정말 심장이 터질지도 모른다. 더구나 자신은 잠깐 일하다 말 사람이고. 미루의 눈이 빠르게 깜빡였다.

“뭐, 그냥 마음의 준비만 해 가요. 팀장님이 알아서 해 주시겠지.”

그럼 아까 팀장님이 이 정도는 되어야 한다고 했던 말이, 그냥 하는 소리는 아니었던 거네? 당황해서 얼마나 문질러 댄 건지 미루의 하얀 뺨이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푸하, 박미루 가이드. 무슨 상상을 하는데 얼굴이 그렇게 빨개요.”

“아무, 아무 생각도 안 했어요.”

미루가 괜히 티셔츠 앞섶을 펄럭이며 바람을 만들어 냈다. 위험한 상황에 사람 하나 살리려면 뭔 짓을 못 하겠느냐만 방식이 그럴 줄은 몰랐다. 아니, 그런 행위가 비즈니스 사이에서도 가능한 거야? 에스퍼와 가이드 중에서도 좀 깊은 관계에서나 그러는 게 아니고? 괜히 목구멍이 뜨거워지는 듯해 미루가 헛기침을 이어 갔다.

“걱정 마요. 심인우 에스퍼는 그렇게까지 다치진 않을 겁니다.”

“그러면 다행이지만…….”

그동안 지원이나 임무를 다녀온 인우를 떠올려 보면, 어디가 찢어지거나 화상을 입는 수준이 가장 큰 부상이었던 것 같다. 폭주라고 일컬을 만큼 상태가 안 좋았던 적도 없었고. 매일 복귀하면서 몰래 약을 먹어서 그런 건가.

“…….”

TF 작전 때도 안전하리란 보장은 없지만, 다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홀로 그런 생각을 하며 연신 뜨거운 숨을 입술 새로 뱉어 냈다.

미루는 누군가에게 짐이 되는 게 싫었다. 보육원이든 주변 이웃이든, 순수한 호의는 이 세상에 없다는 걸 너무 어린 나이에 깨달은 탓이었다. 짐이 되지 않으려면 가진 게 없는 자신은 몇 배로 노력해야 했다. 어중간한 가이딩으로 보답하기엔 턱없이 부족하겠지만 그래도 거슬리는 존재가 될 순 없었으니.

숙소로 돌아와서도 노트를 살피며 혼자 시뮬레이션을 해 봤다. 팀원들과 떨어졌을 땐 당황하지 말고 몸을 숨길 곳을 찾기. 가이딩을 최대한 잠그고 흔적을 지우기.

“몸속에 있는 스위치를 끄는 느낌으로.”

미루가 눈을 감고 중얼댔다. 제대로 잠근 건지는 모르겠으나, 몸이 저릿해지는 걸 보면 뭔가 되고 있기는 한 걸 테다.

“무전기 옆에 비상 스위치를 따따, 따따, 따. 다섯 번.”

이렇게 누르면 가이드의 GPS가 뜨며 위치가 곧장 공유된다고 했다. 그럼 팀장님이든 근처에 있는 팀원이 와서 구조해 줄 거고.

“따, 따, 따.”

텀을 두고 버튼을 세 번 누르면 근처에 낯선 이가 있다는 뜻이고. 세 번씩 빠르게 누르면……. 무전기 대신 손바닥 위를 꾹꾹 누르며 열심히 교육 내용을 복기했다. 만약에 에스퍼가 다치는 상황이 왔을 땐, 최대한 손을 잡아 가이딩을 하고 다른 곳으로 새지 않게 기운을 넘겨준다. 주변에 팀원이 많다면 방사를 해도 된다고 했고. 노트를 넘기던 미루의 시선이 한 곳에 닿았다.

최악의 상황 = 폭주… 절대 ×

자신이 절대 안 된다고 해 봤자 현장에서 일어나는 변수를 어떻게 막을 수 있을까. 아마 코앞으로 닥치면 가장 당황할 일이니까 더 확실히 시뮬레이션을 해 봐야 했다. 미루는 최악의 상황을 그려 봤다.

“덥다고, 그때 그 손님처럼 다가오면…….”

“첫째. 전투복 상의를 벗긴다.”

교관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도는 듯했다. 머릿속에서는 인우의 전투복 재킷 지퍼를 내리는 상상까지 이어졌다. 안으로 보이는 탄탄한 가슴. 앞섶을 벌려서 젖히면…….

“이건 좀 변태…… 같지 않나?”

이마를 짚은 미루가 눈을 질끈 감은 채 중얼댔다. 교관이 팀장님은 폭주까진 하지 않을 거라고 했으니까 이거까지 시뮬레이션하지는 말아야겠다. 머리를 마구 저으며 고개를 든 미루가 거실 한쪽에 서 있는 인영을 보고 놀라 소리를 질렀다.

“으익!”

“왜 그렇게 놀라.”

가슴 부근을 부여잡고는 주섬주섬 노트를 덮었다. 30초만 빨리 오셨어도 변태 같다고 혼자 중얼대는 걸 들었을지 모른다.

“아, 아뇨. 들어오시는 소리를 못 들어 가지고요.”

인우는 늘 그렇듯 별다른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온 그가 거실 테이블 위에 늘어진 노트를 힐끔 내려다봤다.

“연습하고 있었니.”

“네, 내일 실수 안 하려면 복습하는 게 좋을 거 같아서요.”

그대로 들어갈 줄 알았는데 인우는 소파에 털썩 앉더니 미루의 노트를 주워 들었다.

“봐도 될까.”

“네. 필기 열심히 했어요.”

인우가 맨 앞에서부터 종이를 찬찬히 넘기며 살폈다. 낙서 하나 없이 오로지 가이딩과 작전에 관한 내용만 필기되어 있었다. 이렇게 보니까 대학생 티가 나는 것 같기도 했다. 인우가 웃음을 삼키면서 페이지를 마저 넘겼다. 시선은 노트에 향한 채였으나 온 신경은 소파 아래 자리한 미루에게 쏠려 있었다.

“그러네.”

“실습도 꾀 안 부리고 열심히 했거든요. 방사도 어느 정도 할 수 있고, 조절하는 방법도 배웠고요.”

미루는 제가 짐이 되지 않겠다는 포부를 적극적으로 표현했다.

“무전기 다루는 것도 안 까먹으려고 연습해 보고 있었어요. 여기 일하라고 데려왔는데, 아무것도 안 하는 거 같아서 솔직히…… 마음이 좀 불편했거든요.”

“불편했어?”

입술을 축이던 미루가 머뭇대다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끝까지 합류시켜 주지 않았다면 이런 말도 못 했을 테지만. 이제야 겨우 제 기분을 조금이나마 드러낼 수 있었다.

“저런. 불편하면 나한테 말을 하지 그랬어.”

무슨 부탁이든 다 들어줄 법한 나긋한 음성이 떨어졌다. 평소엔 냉랭한 태도를 보이긴 해도, 이따금 인우가 이런 목소릴 내면 괜히 손끝이 간지러웠다. 꼭 가이딩을 할 때처럼. 자신을 내려다보는 눈길이 조금 더 짙어졌다는 생각을 할 무렵 그가 가만히 팔을 뻗었다.

단단한 손끝이 흐트러진 미루의 머리카락을 조심히 쓸어 넘겼다. 미루는 호흡까지 멈추고 인우의 손길에 온 신경을 쏟았다. 사르륵. 머리칼이 스치는 소리마저도 크게 들릴 만큼 고요한 정적이 흘렀다.

팀장님은 가끔 이렇게 묘한 얼굴을 했다. 꼭 무언가를 억누르는 것 같기도 하고, 어떻게 보면 하나도 참지 않는 것 같기도 한 표정. 하나 확실한 건, 팀장님이 이럴 때마다 심장이 빨리 뛴다는 거였다. 가이딩을 하는 것도 아니건만 전신이 저리기 시작했다.

“앞으론 그런 게 있으면 나한테 말을 하도록 해. 다른 사람 말고.”

“…….”

“알겠지.”

“……네에.”

빤히 바라보는 검은 눈동자에 홀린 양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러자 인우의 입꼬리가 매끄럽게 밀려 올라갔다. 서늘하다고 생각했던 얼굴 위로 부드러운 미소가 스치자 그게 무척 아름다워 보였다.

빛을 다루는 사람이라 그런가, 주변에 빛이 떠다니는 것 같네. 미루가 멍하니 입술을 벌린 채 올려다보고 있자니 인우는 조용히 마른침을 삼켰다.

“더 서두르는 편이 좋겠어.”

“…….”

뭘 서두르라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미루가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을 꽤 귀엽게 여긴 인우는 손을 거두는 척하며 은근히 뺨을 쓸기도 했다.

“연습은 이쯤 해 둬.”

탁, 노트를 덮는 손길은 가차 없었다. 그제야 미루가 정신을 차리고 손을 뻗었다. 뒤에 몇 장이 더 남았는데.

“아직 조금만 더…….”

하지만 인우는 노트를 뒤로 보내곤 고개를 저었다. 꼭 가이딩을 거부할 때처럼 단호한 행동이었다.

“내가 폭주할 일은 없을 테니까. 거기까진 연습할 필요 없어.”

“…….”

당황한 미루가 눈을 빠르게 깜빡였다. 혹시 혼자 연습하면서 중얼댄 소리를 들으신 건가. 아니면 그냥 필기를 보고하시는 말일까.

“만약에 그런다고 해도 네가 할 건 없어.”

현재의 미루가 폭주한 인우를 어떻게 해 보겠다는 건, 죽겠다고 달려드는 행위나 다름없었다. 랭크 차이도 나고, 더구나 미루는 아직 능숙하지 못하니까. 무엇보다 미루가 달려든다면 인우도 자제하지 못할 것이다. 정신을 잃은 애를 붙들고 욕심을 채워 댈지도 모르지. 심인우를 둘러싸고 있는 소문처럼.

“어서 들어가.”

“……아, 네. 주무세요, 팀장님.”

벌떡 일어나서 방으로 향하는 미루의 뺨이 조금 붉은 듯 보였다. 바삐 움직이는 종아리와 아킬레스건이 도드라진 발목을 훑으며 인우가 느릿하게 입술을 축였다. 역시 더 서두르는 편이 좋겠어. 교육이든 검사든, 뭐든. 저 애를 곁에 붙여 둘 확실한 명분이 필요했다. 인우는 미루의 체온이 묻은 노트를 조금 더 들여다본 뒤에야 방으로 향했다.

***

“박미루 가이드, 여기 팀장님 가이딩 좀 해 줘!”

인이어 너머로 저를 찾는 목소리가 다급했다. 화단 근처에 몸을 숨기고 있던 미루가 벌떡 일어나 주변을 살피며 뛰어나갔다. 방금까지 저를 불러 댔던 정우가 인우를 업은 채 건물 쪽으로 향했다. ‘펑! 펑!’ 연신 폭발음이 이어지는 가운데 미루가 얼른 그들의 뒤를 따랐다.

“빈 곳 찾아봐, 아무 데나 문 열어!”

정우의 말에 미루가 급하게 강의실 문을 하나하나 열어젖혔다. 가장 가까운 곳은 전부 잠긴 상태였고, 코너를 돌아서야 겨우 문이 열린 강의실 하나를 찾아낼 수 있었다.

“이쪽으로 오세요!”

미루가 열어 둔 문틈으로 정우가 달려왔다. 그 와중에도 창밖에선 계속해서 굉음이 이어지고, 인이어 너머로도 정신없이 대화가 오갔다. 미루는 당황했지만 최대한 침착하게 행동했다. 인우의 몸을 더듬으며 피가 난 곳이 있나 살피고, 그 뒤에는 전투복 지퍼를 조금 내려 호흡을 편하게 했다.

“가이딩 약간 받으면 정신 돌아올 거야. 팀장님 좀 부탁한다.”

“네!”

다급하게 무전을 하며 정우가 강의실을 벗어났다. 문이 닫히고 미루는 요란할 만큼 크게 침을 삼켰다. 침착하게. 주변에 누가 있을지도 모르니까, 최대한 약한 가이딩으로 팀장님한테만 전달되게.

떨리는 손끝으로 글러브 한쪽을 벗기고 맨손을 찾아 쥐었다. 손을 잡고 있자니, 손바닥에서부터 기운이 빠져나가는 저릿한 감각이 느껴졌다. 미루가 얼른 인우의 얼굴을 살폈다. 구겨진 미간은 펴질 줄을 몰랐고, 속눈썹이 작게 떨렸다.

“팀장님.”

얼굴을 가까이 한 채 인우를 불렀다. 팀장님, 제 목소리 들리세요? 팀장님. 그렇게 인우를 불러 대면서도 강의실 출입구를 향해 세운 경계를 풀지 않았다.

“아.”

몇 번의 부름 끝에 인우의 입술이 달싹였다. 무어라 발음하는 것 같은데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미루가 얼른 입가로 귀를 가져다 댔다.

“네, 듣고 있어요.”

잡고 있지 않은 인우의 손이 천천히 들리나 싶더니 제 쪽으로 뻗어 왔다. 미루는 반쯤 엎드린 채 눈만 치켜뜨고 그의 손끝을 응시했다.

“어어.”

글러브를 낀 손이 미루의 허리를 단숨에 낚아채더니 강한 힘으로 당겼다. 눈 깜짝할 새에 인우의 몸에 올라탄 꼴이 되었다. 당황한 미루가 바닥을 짚고 몸을 일으키려는데 허리를 틀어쥔 손이 천천히 살결을 타고 내려왔다. 큰 손이 엉덩이를 아플 만큼 꽉 움켜쥐더니, 이내 바지 속을 파고들었다.

“티, 팀장님! 잠시만요!”

“왜.”

음란한 행동을 하는 사람치고는 목소리가 평온했다. 곧고 단단한 손가락이 엉덩이를 꾹 누르며 점차 안쪽으로 가까워졌다. 밑에 팀장님이 깔려 있으니, 달싹이긴 해도 크게 몸부림은 칠 수 없었다. 미루가 눈을 질끈 감은 채 인우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었다.

“뭐 하시는, 뭐예요.”

“현장에 데려와 달라며. 연습은 끝났어, 이젠 실전이야.”

“잠, 잠깐 그래도.”

인우의 팔뚝 부근을 꽉 틀어쥔 채 중얼댔다. 그러자 미루를 안정시키듯 뒤통수를 감싼 손이 느릿하게 움직였다. 꽤 애정이 담긴 것처럼 다정한 손길이 이어지고.

“이런 거 알면서도 나오고 싶다고 한 거 아니었니.”

“으읏, 팀장님…….”

기어이 아래를 파고드는 손가락. 미루가 입술을 세게 짓씹었다. 맞닿은 하체로 아까부터 단단히 선 것이 느껴졌는데, 착각으로 치부하기엔 점점 크기가 커졌다. 귓가에 들리는 인우의 호흡 또한 거칠고 축축했다.

아래를 파고든 손가락이 주름을 훑듯 천천히 원을 그렸다. 분명 가이딩이 빠져나가는 기분은 아닌데 온몸이 달아오르고 전율이 흘렀다. 손등 뼈가 도드라질 만큼 강한 힘으로 인우의 팔뚝을 쥐었다.

“계속 이런 생각 하고 있던 거 아니었냐고.”

작게 속삭이는 음성엔 나직한 호흡과 혀가 질척이는 축축한 소리가 뒤엉켜 있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으나 감각만으로 금세 몸이 반응했다. 아래가 빠듯한 통증이 살짝 드는가 싶더니, 안을 침입한 손가락이 조금 더 깊어졌다. 생전 처음 느껴 보는 감각에 미루의 발끝이 안으로 말렸다. 인우가 아니라 자신이 폭주를 앞둔 양 뜨겁고 덥고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미루야, 배웠잖아.”

귓바퀴를 핥는 끈적하고 뜨거운 살덩이의 감촉에 미루는 참지 못하고 옅은 신음을 뱉어 냈다.

“이럴 땐 옷을 먼저 벗기라니까.”

흐릿한 웃음이 실린 음성이 귓가에 닿았다.

동시에 미루가 눈을 번쩍 밀어 떴다.

“허억.”

어둡고 조용한 방 안에 심장 박동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미루가 숨을 몰아쉬며 눈동자를 굴렸다. 낮도 아니고 강의실도 아니고, 인우도 없다. 컴컴한 천장을 바라보면서 상황을 파악했다. 가장 먼저 전해지는 감촉은 축축한 아래였다. 찝찝하단 느낌이 제일 빨리 찾아들었고, 다음엔 발끝에서부터 소름이 끼쳤다.

“팀장님 꿈…….”

요즘엔 이루보다 팀장님을 더 오래 생각하긴 했다지만. 꿈에도 나오고, 심지어 그를 상대로 몽정까지 할 줄은 몰랐다. 현실을 깨닫자마자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다.

“아아.”

나 진짜 미친 거 아니야? 당장 몇 시간 뒤에 작전을 가야 할 상황에 팀장님을 상대로 그런 꿈이나 꾸고. 심지어는…….

“돌았어, 미쳤어.”

얼른 몸을 일으키고 이불을 걷었다. 엉거주춤한 걸음으로 갈아입을 옷을 챙겨 방문 앞에 섰다. 방이 어두운 탓에 문틈으로 새어 들어오는 빛이 선명하게 보였다. 혹시 아직 거실에 계신가? 지금 새벽 3시인데. 입술을 잘근잘근 씹던 미루는 축축한 사타구니에서 느껴지는 불쾌함을 참지 못하고 문고리를 쥐었다. 조용히 문을 열고는 그 사이로 밖을 살폈다.

“…….”

인우는 소파 등받이에 기댄 채 눈을 감고 있었다. 손에는 서류 같은 것이 들린 채였는데, 아마도 일을 하다가 잠이 든 모양이었다. 깨지 않게 조용히 얼른 갔다 와야겠다. 안 그래도 에스퍼는 감각이 발달해서 작은 소리도 쉽게 캐치할 테니까.

겨우 몸만 나갈 틈을 만들고선 조심스레 발을 뻗었다. 살금살금. 아마 움직임에서 소리가 난다면 그런 단어가 붙을 거였다. 발끝으로 기척을 죽인 채 욕실 앞까지 다다른 미루가 얼른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문을 닫고 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물소리가 들렸다.

“…….”

그제야 인우의 눈이 천천히 뜨였다. 어설프게 쥐고 있던 서류를 내려놓자 허벅지 한쪽이 두툼해진 광경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벽을 사이에 두고 흐리게 새어 나오던 끙끙대는 소리만으로도 이만큼이나 흥분할 줄이야.

입술을 축인 인우가 고개만 살짝 틀어 욕실 쪽에 시선을 두었다. 그러고는 단단해진 제 허벅지 안쪽을 슬쩍 쓸었다. 그거 잠깐 스쳐 갔다고 거실에는 은근히 비릿한 향이 퍼졌다. 오른쪽 눈을 구기면서 두툼해진 다리 사이를 천천히 매만졌다. 옷을 다 입은 상태라 갑갑하긴 하지만, 그 감촉과 압박감이 인우를 더욱 흥분하게 만들었다.

박미루는 꿈에서 자신과 무슨 짓을 했을까. 뭘 했기에 그렇게 신음을 흘리고 저를 불러 댄 건지. 붉은 입술이 진득한 웃음을 머금은 채 미소 지었다.

“더 서둘러야겠네.”

오래 기다릴 것도 없다. 이번 작전만 얼추 마무리되면 검사를 진행해야지. 옆에 영원히 붙여 놓을 명분만 있으면 돼. 그러면 된다.

훌쩍이던 미루가 뒷정리를 하고 나와 뒤도 보지 않고 빠르게 방으로 돌아갈 때까지, 인우는 눈을 감고 제 아래를 쓸어 댔다. 달칵, 미루가 문을 닫는 동시에 인우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당장 혼자 빼지 않으면 문을 부수고서라도 들어갈지 모르니까.

욕실에 남은 미루의 향을 느끼며 몇 번의 사정을 한 뒤에야 거실로 나왔다. 혼자 몇 번을 했는데도 전신에 꽉 들어찬 흥분이 잦아들지 않았다. 혀로 볼 안을 훑던 인우가 미루의 방문을 가만히 응시했다. 방 안에서도 뒤척임이 잦아들었다. 시간은 4시를 지나고 있으니, 분명 잠들었겠지. 인우의 발길이 조용히 미루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방문을 열자 곤히 잠든 미루가 보였다. 이채를 띤 형형한 눈이 어둠 속을 익숙하게 훑었다. 옷장 손잡이에는 못 보던 옷걸이가 걸려 있었다. 거기에 걸쳐진 젖은 속옷과 바지가 시야에 잡혔다. 물기를 짜긴 했지만 아래엔 물방울이 작게 고였다.

“어설프긴.”

인우는 젖은 옷가지를 그대로 들어 올리곤 테이블 의자를 끌어다 앉았다. 창문으로 들어오는 달빛이 얌전히 잠든 미루의 얼굴을 비추었다.

가만히 미루를 내려다보던 인우가 젖은 옷을 천천히 얼굴로 가져왔다. 코를 파묻고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시원한 비누 냄새에 섞인 비릿한 향. 그게 온몸으로 퍼지자 다시 뜨겁게 들끓기 시작했다. 시선은 미동 없는 미루의 속눈썹을 향한 채 숨을 죽이고 수음을 했다.

똑똑. 노크 소리에 눈이 번쩍 뜨였다. 졸음이 전부 달아난 미루가 몸을 급하게 일으켰다.

“네!”

“더 잘 거니.”

“아뇨, 금방 나가요!”

힐끔 옷장 앞에 걸어 둔 옷을 확인하고는 서둘러 몸을 움직였다. 밤새 물기만 겨우 가신 것 같긴 한데 돌아오면 말라 있겠지. 들키면 좀 민망할 뻔했으나 다행히도 팀장님은 방에 함부로 들어오지 않으니까. 부스스한 머리를 손으로 대충 정리하며 방문을 열어젖혔다. 문 바로 앞에 서 있던 인우와 마주친 미루가 어색하게 고개를 숙였다.

“좋은 아침입니다아.”

도로 얼굴을 들기도 전에 큰 손이 가까워졌다. 귀를 감싸듯 스친 손길이 빠르게 멀어졌다. 가이딩이 새어 나가는 느낌이라든지 저릿함이라든지, 그런 걸 느낄 겨를도 없는 찰나였다.

“준비하자.”

인우가 먼저 등을 돌리고 걸음을 내디뎠다. 식사가 도착했는지 주방 한쪽에서 고소한 냄새가 풍겨왔다. 이 와중에 또 착실하게 배는 고파서 미루는 얼른 인우의 뒤를 따랐다.

***

TF 팀원들은 세 팀으로 찢어져 차를 타고 이동했다. 거래 직전에 장소와 시간이 바뀔 확률이 높아 따로 움직였는데, 탁월한 결정이었다. 벌써 약속된 시점에서 한 시간이 지났고, 장소는 두 번이나 바뀌었다. 마지막 위치는 한강이었다.

“저기 편의점 보이네요. A, 곧 도착입니다.”

운전석에 앉은 도화가 무전을 치며 조심히 속도를 줄였다. 편의점이 훤히 보이는 근처 주차장으로 차가 들어섰다.

―B, 편의점 안.

―C, 화장실 줄 길어서, 여기 서 있겠습니다.

무전이 차례로 도착했다. 오늘 인우가 맡은 임무는 가장 위험하면서도 중요했다. 가이딩 팩을 거래하는 척 판매자를 잡는 일. 판매자가 일반인이라면 혼자 가뿐히 체포할 수 있겠지만, 에스퍼라면 팀원들이 곧장 합류해야 했다. 오픈된 공간에 사람도 많아서 특별히 더 신경을 쓰는 듯했다.

얼굴이 꽤 알려진 인우가 해도 괜찮은 일인가 싶었으나, 오늘 차림을 보니 잘 알아보지 못할 수도 있겠단 생각도 들었다.

인우는 삭막하고 살벌한 전투복이 아닌 검은 코트에 감색 목도리를 두른 채였다. 이따 써야 한다며 모자도 들고 있었는데, 캠퍼스에서 마주친 동기들과 비슷한 분위기였다. 물론 키나 얼굴은 다를 테지만. 지금 그의 모습은 팀장님이란 소리를 듣는 것보단 선배나 형이라는 호칭이 더 잘 어울렸다. 그 차림이 꽤 마음에 들었는지 미루가 힐끔대며 인우를 관찰했다.

“너는 여기 있어.”

“같이 안 가고요?”

아까 마지막 회의를 할 때까지만 해도 친구인 척 동행하기로 했는데. 미루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은 인우는 여분의 모자가 들어 있는 쇼핑백만 뒤적였다. 계절에 맞지 않게 샛노란 모자를 하나 들고 살피던 그는 그걸 그대로 미루의 머리에 툭 얹었다.

“자전거 타고 싶은 거면 나가도 되고.”

인우가 턱짓으로 가리킨 곳엔 어린애가 얼굴이 꽁꽁 언 채로 네 발 자전거를 타고 있었다. 평화로운 모습을 잠시 바라보던 시선이 도로 인우에게로 향했다. 장난하냐는 듯한 표정이긴 하나 인우에게는 전혀 위협적이지 않았다.

“…….”

“이건 네 첫 임무니까 실수하지 마.”

인우가 작게 웃더니 모자를 눌러썼다. 챙 아래로 부드럽게 휘어진 입매가 보였다. 긴장도 안 되는 건지 여유 있는 미소였다. 이내 목적지에서 약간 떨어진 자리에 차가 멈췄고, 인우는 모자를 고쳐 쓴 뒤에야 내렸다. 문을 닫으면서는 허리를 굽혀 미루와 눈을 마주치기도 했다. 인우가 성큼성큼 멀어지자 미루는 어설프게 걸쳐진 모자를 끌어 내렸다.

“걱정 마요. 이런 일은 원래 혼자도 하시던 분이니까.”

무전을 잠시 끈 도화가 뒷좌석에 앉은 미루에게 넌지시 말을 걸었다.

“네에.”

“아직 가이딩은 안 하고 있어요?”

“네, 오늘은 받아 주실지 모르겠네요. 해 드리고 싶어서 연습 많이 했는데.”

작전에도 합류시킨 걸 보면 조금씩 변화가 생기고 있는 것 같긴 한데, 미루의 표정을 보니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모양이었다.

“곧 할 수 있을 겁니다.”

“그렇겠죠? 계약서 도장까지 찍었는데 아무것도 안 하면 좀 그래서…….”

미루가 멋쩍은 얼굴을 하고 웃었다.

위험한 상황이 생긴다 해도 팀원들이 주변에 잠복하고 있으니 큰일로는 번지지 않으리란 설명에 불안이 조금은 잦아들었다. 원래 단독으로 움직였던 사람이니까 혼자 가는 게 마음 편할 수도 있겠지.

“…….”

그래도 자잘하게 다쳐 오던 상처들이 자꾸 눈앞에 아른댔다. 인우의 뒷모습이 한참 멀어지고 나서야 미루는 인이어를 더 꾹 눌러 꼈다.

―3시 방향.

빵이 담긴 쇼핑백을 들고 선 인우의 우측으로 케이크 박스를 든 남자가 다가왔다. 모자와 마스크로 얼굴을 가린 채였지만 한눈에 봐도 덩치가 꽤 커다랬다. 인우가 들고 있는 쇼핑백에는 돈이 담겼고, 케이크 박스 안에는 포장된 가이딩 팩이 들어 있을 거였다. 그게 서로의 손을 떠나 상대에게 닿는 그 순간을 위해 팀원들은 전부 숨을 죽였다. 인이어 너머로 작게 오가는 대화가 들렸다.

―캐처님?

―예.

―혼자 왔어요?

―네.

―……벤치로 오세요.

앞장서는 남자를 따라 인우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주변을 정신없이 살피는 남자를 가만히 응시하던 인우가 모자를 눌러쓰는 게 보였다. 거래가 시작될 거란 신호에 팀원들이 바짝 긴장을 조였다.

―봉투 줘요.

남자는 벤치에 엉덩이를 걸치자마자 돈이 든 쇼핑백을 요구했다. 인우가 그것을 건네자 바스락대는 빵 봉지 소리가 한참이나 들렸다. 빵 아래 깔린 돈을 얼추 헤아렸는지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들고 온 케이크 박스는 벤치 끝에 그대로 둔 채였다.

―곧장 회원 탈퇴하고, 2주 뒤쯤에 다시 경로 뚫을 거니까 더 필요하면 컨택하고요.

―저기요.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남자의 팔을 덥석 잡은 건 인우였다. 도화도 상황을 주시하며 인이어를 고쳐 꼈고, 편의점 안과 화장실 앞에 줄을 서 있는 팀원들 역시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저도 물건은 확인해야죠.

―해, 해요. 확인! 그래서 일부러 저기에 담아 온 거잖아요.

남자의 말대로 윗면의 손잡이 부근이 투명한 케이크 박스였다. 그 안으로 살피면 안에 든 팩의 형태는 대충 보일 텐데.

―확인할 때까지 기다려요.

인우가 남자를 놓지 않은 채로 케이크 박스를 잡아 들었다. 그때였다. 남자가 돌연 인우의 팔을 크게 떨치고는 달아나기 시작했다. 박스가 바닥에 처박히면서 안에 든 케이크가 무너졌다. 인우는 발치에 엎어진 케이크 박스를 신발 끝으로 툭 차면서, 도망치는 남자의 뒤꽁무니를 길게 응시했다.

―김정우, 쟤 잡아서 센터에 넘겨. 최 제약 애들 아니야.

인우가 모자를 벗고 머리를 몇 번 쓸어 넘겼다.

―예, 일단 잡겠습니다.

편의점 앞 벤치에서 컵라면 물을 올려놓고 있던 정우와 지수가 남자의 뒤를 빠르게 따랐다. 동시에 인우가 손끝으로 박스의 멀쩡한 부분을 눌러 굴리더니 그 안에서 작은 팩 하나를 꺼내 들었다. 줄을 서 있던 최영 에스퍼와 그의 가이드가 달려가 무어라 대화를 나누었다. 무전을 끈 탓에 대화가 들리지 않았지만, 손에 쥔 것을 넘긴 인우는 곧장 차로 돌아왔다.

“하급 가이딩 약이야. 성분 의뢰 넣을 거고 두 시간이면 결과 나올 거야. 철수해서 회의실에 모이는 걸로.”

“예, 근데 최 제약 쪽 사람이 아닌 건 어떻게 아셨습니까?”

내심 미루도 궁금했던 부분이었다. 대화 몇 마디를 나눈 것뿐인데.

“저 사람 가이드야. 그 약, 저 사람 기운으로 만든 걸 수도 있고. 잡았을 때 흐릿해도 가이딩 기운 느껴졌거든. 그러니까 기를 쓰고 도망가지. 최 제약 쪽 에스퍼면 가이딩 부족해서 약까지 구하는 새끼 하나쯤은 그냥 처리했을 테니까.”

인우가 슬쩍 손가락 끄트머리를 문지르며 설명했다. 그리고 목도리와 코트까지 마저 벗어 두고는 조수석에 놓인 패드를 가져와 무언가를 확인했다.

미루는 멀뚱히 옆에 앉아 그 모습만 지켜봤다. 그러면서는 생각이 샛길로 새었다. 왜 자기 가이딩까지 불법으로 추출해서 팔았을까. 어떤 에스퍼에게도 부름받지 못한 자신 역시 하급이나 다름없는데. 나중에 취업도 못 하고 빚만 더 늘어나면 가이딩을 파는 날이 오는 건 아닐까. 아랫입술을 잘근 씹었다.

“넌 밖에서 저런 제의 받은 적 없지.”

“없었어요. 한 번도요!”

혹시 제 생각을 읽고 있는 건가 싶어 놀라긴 했지만 꽤 티를 안 내고 잘 넘겼다.

“……있으면 안 되지.”

미루의 얼굴을 살피던 시선이 이내 시트에 놓인 노란색 모자에 닿았다가 곧 도로 패드로 향했다.

“회의 끝나고 같이 갈 데 있으니까, 딴 길로 새지 마.”

“……어디 가는데요?”

그냥 알겠다고 대답하려다가 조심스럽게 질문을 건넸다. 매일 아침 훈련장에 데려다주고 식사를 같이 하긴 하지만, 시간을 비우라면서까지 어딜 가자고 한 적은 없었기 때문이다. 무언가 말해 줄 듯 입술을 달싹이던 인우가 이내 시선을 창밖으로 돌렸다.

“가 보면 알아.”

더 캐묻고 싶었지만 상대가 상대니 만큼 미루는 금방 물러났다. 고개만 주억이며 도대체 날 어디로 데려가려는 건가,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아까 도망친 남자를 따라갔던 구지수 에스퍼를 제외하곤 팀원 전부가 회의실에 모였다. 나름 준비했던 작전이 어그러졌음에도 누구 하나 아쉬운 기색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 남자는 지금 격리실에 있습니다. 센터에 등록은 된 가이드인데, 활동 내역은 전무해요. 그 사람 이력이고요.”

정우가 팀원들 앞에 종이를 한 장씩 내려 두었다.

“등록된 자택으로 구지수 에스퍼가 찾아갔고, 어린 아들 하나 있는 것만 확인했다고 합니다. 돌봐 줄 다른 보호자가 없는 걸로 보여 지금 같이 오는 중이고요.”

“거래 내역은?”

“저희와 접촉했던 방법과 유사한 수법으로 총 23차례 거래를 진행했습니다. 전부 현금화 거래였고, 최 제약이나 다른 업체와의 컨택 내역도 전무합니다.”

미루도 제 앞에 놓인 한 장짜리 종이를 가만히 내려다봤다. D 랭크 가이드였는데, 아마 생활고 때문에 불법 가이딩 추출을 해서 판 모양이었다. C 랭크인 자신도 에스퍼와 매칭이 안 됐으니, 어쩌면 당연한 결과일지 몰랐다. 어쩐지 종이 안에 담긴 내용이 저와 멀지 않은 얘기들이라 미루는 괜히 마음이 뒤숭숭했다.

“사이트 서버도 직접 관리하는 것 같던데, 폐쇄 직전에 막았습니다. 불법 거래한 에스퍼들 정보도 확보했고요.”

인우가 테이블 위를 몇 번 두드리며 무언가를 고민하는 듯 보였다.

“사이트에 최 제약 이름 걸어. 최대한 어설프게.”

“네.”

도화가 패드에 무언가를 적어 내려갔다.

“최 제약 귀에 들어가게 소문도 좀 흘리고. 사칭해서 가이딩 팩 거래하는 사람들이 생기고 있다고. 그 욕심이면 돈 되는 손님 잡으려고 뭐든 할 테니까.”

“예예.”

“가이딩 팩은 긴급 성분 조사 들어갔고, 두 시간 내외로 나올 것 같습니다.”

“그럼 그때까진 쉬어. 멀리 가진 말고.”

“예.”

으으. 저마다 늘어지는 소리를 내며 테이블에 엎드리기도 했고, 손을 잡은 채 부족한 가이딩을 채우기도 했다. 미루가 힐끔 그쪽을 바라보다가 금세 다시 서류로 눈길을 돌렸다. 몇 번이고 살핀 남자의 정보를 읽고 또 읽었다.

가이딩을 얼추 마친 이들은 바람이라도 쐬려는 양 우르르 자리에서 일어났다. 뒤를 지나치던 가이드 하나가 미루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미루야, 카페 갈래?”

“아뇨, 다녀오세요.”

딱히 뭘 한 건 없어도 긴장은 많이 했던 탓에 미루도 뻣뻣한 몸을 쭉 늘이며 스트레칭을 했다. 회의실 안에는 다섯 사람이 남아 있었다. 인우는 뭘 확인하는 건지 패드를 살피고 있었고, 도화는 테이블에 흐트러진 서류를 차곡차곡 정리했다.

인우 쪽을 힐끔대는 미루를 발견한 이는 도화였다. 그는 흐음, 숨을 길게 늘여 쉬고는 며칠 뒤로 잡혀 있는 미루의 가이딩 검사 일정을 떠올렸다. 그것도 결과가 나오려면 하루 이틀은 걸릴 텐데 저런 꼴을 더 보는 것도 불편하고, 어차피 결과는 뻔하건만 오래 끌 필요가 있을까 싶었다. 그래서 해 본 적 없는 오지랖을 부리기 시작했다.

“박미루 가이드.”

“예?”

갑작스러운 부름에 미루가 곧장 자세를 바로 세웠다. 패드를 넘기던 인우의 손길도 조금 느릿해졌다. 아닌 척해도 이쪽으로 신경이 쏠리는 티나 났다. 도화가 작게 웃음을 삼키며 미루 쪽으로 손을 뻗었다.

“가이딩.”

크게 눈을 뜬 미루가 도화의 얼굴과 손바닥을 번갈아 응시했다. 갑자기 무슨 소릴 하냐는 듯한 표정이었지만, 도화는 오히려 말을 더 보탰다. 곁눈으로 인우의 가슴이 크게 부푸는 게 보였다.

“아까 해 보고 싶다면서요.”

“아.”

미루가 힐끔 인우를 살피면서 쭈뼛거렸다. 해 보고 싶다고 한 건 팀장님 가이딩이긴 한데……. 지금은 누구한테든 도움이 된다면 좋을 듯싶었다. 애초에 여기 온 것도 팀 가이드로 들어온 거고, 도화 역시 이능을 잘 쓰지 않는 탓인지 전담 가이드가 없는 상태였으니.

별다른 저지가 없자, 테이블 아래 얌전히 내려 둔 팔을 들었다. 조심히 도화에게 손을 뻗는 순간. 깜빡깜빡, 회의실 전등이 점멸했다. 미루가 눈을 치뜨고 천장을 살폈다. 멀쩡한 전등을 확인하고 시선을 내리니 언제 고개를 든 건지 모를 인우와 눈이 마주쳤다.

타당. 둔탁한 소리와 함께 패드가 책상에 나뒹굴었다. 피할 수도 없이 단단히 옭아매는 강한 눈길이었다. 호흡을 제대로 할 수 없을 만큼 무거운 위압감에 미루의 목울대가 크게 일렁였다.

“…….”

“지금 뭐 하는 거지.”

시선은 미루에게 고정된 채였는데 질문은 도화에게 향했다. 대충 이런 반응을 예상하고 있던 도화의 음성은 덤덤하기 그지없었다.

“실전 가이딩을 해 보고 싶어 해서요. 제가 에스퍼들 중에 기운 소모가 가장 적으니, 한두 번 해 보기엔 적합할 것 같아서 그렇습니다.”

“저번부터, 신경을 많이 써 주네.”

인우가 짓씹듯이 한 글자씩 꾹꾹 눌러 발음했다. 최대한 억누르고는 있었지만 ‘거슬리네’라는 뉘앙스가 단번에 느껴질 수준이었다. 도화는 미루를 향해 뻗은 손을 거두지 않은 채 대답을 이어 갔다.

“그러게요. 신경이 쓰이네요.”

미루를 삼킬 듯이 쏟아지던 시선이 곧장 도화를 향했다. 꼭 현장에서나 볼 법한 눈길이 도화에게 닿았다. 깜빡, 깜빡. 회의실 불이 더욱 빠르게 점멸했다. 심인우가 동요하고 있다. 가이드를 두고 한 번도 이런 모습을 보인 적이 없던 제 사수였기에, 도화는 이 상황이 흥미로우면서도 내심 안도가 됐다. 두 에스퍼의 시선이 치열하게 뒤엉켰다. 가운데서 눈치만 살피던 팀원 둘이 시선을 교환하더니, 헛기침을 시작으로 말을 꺼냈다.

“흐음, 저 부팀장님. 드릴 말씀이 있는데 잠깐 시간 괜찮으실까요?”

“지금 얘기해야 합니까?”

“네네, 꼭이요.”

도화가 인우의 표정을 살피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에스퍼들과 함께 회의실을 나서면서는 미루의 어깨를 아프지 않게 쥐고 스쳐 갔다.

“이따 부탁해요.”

분위기를 이렇게 만들어 놓고 그냥 가시면 어떡해요. 미루의 눈꼬리가 아래로 축 늘어졌지만 도화는 매정하게 등을 돌렸다. 곧이어 회의실 문이 닫히고 싸늘한 얼굴을 한 인우와 단둘만 남게 되었다. 침을 삼키는 소리도 클 것 같아서 미루는 눈알만 느릿하게 굴렸다.

“미루야.”

“예?”

인우가 머리를 쓸어 넘기며 차분하게 숨을 골랐다.

“가이딩이 필요한 건 나도 마찬가지야. 참고 있는 것뿐이지.”

“…….”

“네가 무서워할까 봐. 그래서 결국에 다른 가이드들처럼 나를 피할까 봐.”

미루는 입술만 벙긋대며 옅은 숨을 뱉어 냈다. 팀장님이 그런 이유로 참고 있는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냥 제 가이딩이 성에 차지 않아서, 차라리 약을 먹는 쪽이 더 효율적이라고 여기는 줄 알았는데…….

“차라리 아무것도 안 하는 지금이 나았다는 후회를 할까 봐.”

“…….”

“그래서 네가 손을 내밀어도 참고, 준비되길 기다리던 건데…….”

말끝이 흐릿하게 떨어졌다. 미루는 아랫입술을 잘끈 씹으며 시선을 내리깔았다.

“너는, 내가 아니어도 되는 건가 봐.”

작게 웃음이 섞인 음성은 어쩐지 쓸쓸하기까지 했다. 미루가 퍼뜩 고개를 들고 손을 내저었다.

“아, 아니에요.”

“가이딩만 해 줄 수 있다면 그게 누구든 상관없는 것처럼 굴길래.”

“저, 저도 팀장님한테 도움이 되고 싶어요. 그런데 별로 안 좋아하시는 거 같아서……. 그런 생각 하고 계신 줄은 몰랐어서 그랬어요.”

“내가 너를?”

마른세수를 하던 손이 느릿하게 떨어져 나갔다. 그 틈으로 번뜩이는 시선이 곧장 미루에게 박혀 들었다.

“그럴 리가 있겠니. 나한테 먼저 손을 내밀어 준 사람은 너밖에 없었는데.”

그간 봐 왔던 인우의 상처가 하나둘 눈앞에 스쳤다. 그리고 익숙하게 가이딩 보충제를 털어 넣던 모습도. 모두가 지친 몸을 쉬게 하던 시간에도 그는 현장으로 나섰다. 온종일 쉼 없이 굴러 놓고도 내밀어진 손은 끝내 거절했고, 하찮은 붕대나 밴드만 붙였다. 상성도 잘 맞는 거 같다면서 왜 그토록 거부했을까 내내 궁금했었는데 지금에서야 조금은 알 듯했다.

후회와 두려움. 심인우가 걱정하던 건 그 감정들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여타 다른 가이드들이 그래 왔던 것처럼, 처음 손을 내밀어 준 저 역시 가이딩해 준 일을 후회하고 무서워할까 봐. 괴물 취급을 받으며 버텨 온 시간 동안, 그가 몇 번이고 겪었을 상황이 생생하게 그려졌다.

“팀장님. 저 공부도 열심히 했고, 연습도 많이 했어요. 매번 다쳐서 오실 때, 약밖에 발라 드릴 수 없는 것도 계속 마음에 걸렸거든요.”

인우는 달싹이는 미루의 입술을 빤히 응시하며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별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목이 타들어 가는 건지, 마른 입술을 축이며 숨을 죽였다.

“제가 팀장님 무서워하거나 피할 일은 없어요. 그러니까…… 팀장님만 괜찮으시면 저도 괜찮다는 뜻이에요.”

괜찮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는 알고나 하는 소리일까. 미루는 단순히 인우를 고통스럽지 않게 해 주고 싶다는 생각으로 덤비는 걸지도 몰랐다. 나중에 진짜 제 욕심을 드러내면, 그제야 두렵다고 발버둥을 칠지도 모르지. 그래도 품에 뛰어든 이를 놓아줄 의향은 결코 없었다. 인우가 입 밖으로 터질 것 같은 웃음을 억지로 삼켰다.

“내가 너한테 무슨 짓을 해도?”

작은 머리통이 열심히 위아래로 움직였다. 가만히 미루를 응시하던 인우가 끈덕진 욕심을 삼켜 냈다. 목울대가 느릿하게 일렁이며 혀 아래로는 침이 다 고였다.

“그때는 정말 다른 사람한텐 안 되는 거야.”

“…….”

“손끝 하나 닿는 것도, 기운을 함부로 드러내는 것도.”

그뿐일까. 미루가 누군가와 쳐다보고 말을 섞는 것도 싫었다. 미루를 귀여워하는 다른 이들이 가끔 머리를 쓰다듬거나, 친근하게 어깨를 툭툭 치는 행위에서도 인우는 불쾌한 감정을 느꼈다.

아까 도화와 손을 잡았더라면 그대로 이성을 잃고 무슨 짓을 했을지 가늠조차 되지 않았다. 완벽히 자신만의 가이드가 되기도 전에 집에 두고 오로지 저 혼자 볼 수 있게 하고 싶은데. 그런 음침한 마음까지 알아도 미루는 지금처럼 고개를 끄덕일 수 있을까.

“……네. 배워서 알아요.”

깜빡. 이번엔 회의실 밖에서도 알아챌 수 있을 정도로 건물 전체 불이 깜빡였다. 찰나에 불과했으나 인우의 감정이 크게 치솟았다. 더 느긋한 속도로 아껴 주고 싶었는데. 역시, 조금 서두르는 편이 좋을지도 모르겠네. 그간 자잘한 상처를 두고 미루의 동정을 얻었던 것이 영 허튼짓은 아니었단 생각이 들었다.

“그럼 따라와.”

자리에서 일어난 인우가 테이블 위에 놓인 작은 손을 낚아챘다. 전등은 여전히 요동치는 감정을 고스란히 담아 점멸하고 있었다.

인우가 회의실 문을 벌컥 열어젖히자 복도에 서 있던 팀원들이 고개를 돌렸다. 짐짓 걱정하는 다른 에스퍼들과는 다르게 도화는 평온한 눈길로 둘을 바라봤다. 곁을 지나치면서 인우는 마치 견제하듯 미루를 뒤로 보내기도 했지만 도화는 기분이 나쁜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티, 팀장님. 조금만 천천히…….”

미루는 거의 매달려 가다시피 하는 꼴이었다. 조금만 주춤대도 넘어질 듯했다. 대답 없는 인우의 뒷모습에 무섭기도 하면서 걱정도 됐다. 맞잡은 손이 지나치게 뜨거운 데다 호흡도 거칠어졌다. 그사이에 컨디션이 더 안 좋아지신 게 아닐까 싶었다. 아무리 불러도 인우는 한 마디 없이 급한 걸음을 할 뿐이었다.

도착한 곳은 숙소였다. 대문에서 현관까지 1분 남짓한 시간 동안 미루의 머릿속에선 별의별 생각이 다 스쳤다. 폭주에 가까울 때 해야 할 일과, 불과 어젯밤 꿈속까지 따라왔던 행위들이 줄을 이어 떠올랐다. 맞잡은 손바닥으로 땀이 스몄다.

“마지막으로 묻는 건데. 정말 괜찮아?”

인우의 걸음이 거실 한복판에서 뚝 멈췄다. 등지고 있는 채라 자신이 보이진 않을 테지만, 미루는 열심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맡은 바는 다하고 싶었고, 위험에서 구해 준 팀장님에게 보답도 하고 싶었고, 필요 있는 사람이고 싶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제게는 다정하고 섬세하게 굴었던 팀장님이니까. 더더욱 그러고 싶었다.

“네. 아프지 않게 해 드리고 싶어요.”

“…….”

인우가 천천히 뒤를 돌았다. 상기된 낯을 마주하자 또다시 감정이 크게 일렁였다. 잡은 팔을 당기자 작은 체구가 쉽게 딸려왔다. 인우는 미루를 끌어안고 뒤통수를 단단히 받쳤다. 온몸을 옭아매듯 등허리도 강하게 감싼 채였다. 가슴이 완전히 맞닿은 자세라 그런지 서로의 박동이 더욱 선명히 전해졌다. 쿵쿵. 얼굴이 홧홧해지는 기분에 미루가 눈을 질끈 감았다.

“팀장님.”

“아까부터 이러고 싶었어.”

사실은 처음부터 그랬을지도 모르겠다. 다리에서 벌벌 떨던 미루를 그냥 지나치지 못했고, 이른 아침 로비에 멀거니 앉아 있던 미루도 홀로 두지 못했다. 굳이 다른 팀원들을 물리면서까지 밥을 먹이고 혼자만의 공간으로 데려왔다. 자각하지 못한 사이, 눈이 가고 신경이 쓰이는 존재가 되어 버린 걸지도.

손가락 틈으로 결 좋은 머리카락이 흩어졌다. 인우가 고개를 틀고 미루의 귓바퀴에 입술을 묻었다.

“언제부터 가이딩 받고 살았다고. 너만 보면 마음이 급해지는지.”

“…….”

얼어붙은 채로 쭈뼛대던 미루가 천천히 손을 들어 인우의 허리춤을 슬그머니 쥐었다. 닿아 오는 작은 무게에 숨을 크게 들이쉬던 인우가 눈을 치떴다. 상체를 더 기울여 미루와 더욱 깊게 몸을 맞물렸다. 고개를 살짝 더 비틀자 입술에 보드라운 뺨이 닿았다. 얼마 되지 않는 접촉에도 전율이 일었다. 비단 가이딩 때문만은 아니리란 확신이 들었다.

“고개 돌려봐.”

그가 낮게 속삭이자 뜨거운 숨결이 미루의 뺨에 퍼졌다. 아까부터 발끝이 안으로 굽어들고 손바닥에선 땀이 났다. 자꾸 목이 마르며 속이 뜨거웠다. 가이딩이 되고 있는 건가. 손만 잡아 보다 안는 건 처음이라 기운이 많이 빠져가는 걸까, 아니면 그냥 팀장님이라 그런 걸까. 온갖 생각을 다 하면서 느리게 눈을 떴다.

간간이 뺨을 스치던 입술이 천천히 눈가에 닿았다. 체온이 어찌나 뜨거운지 미루의 어깨가 흠칫 떨릴 지경이었다.

“나 보라니까.”

“…….”

속눈썹이 빠르게 팔랑일 때마다 인우의 입술과 스치는 기분이었다. 온몸이 결박당한 꼴인 데다 뒤통수도 인우가 단단히 잡고 있는 탓에 움직임이 크지 못했다. 마른침을 꿀떡 삼킨 미루가 조심스럽게 고개를 틀었다. 맞닿은 인우의 어깨에 머리카락이 헝클어져 흩어졌다.

“사실 검사 같은 건 안 해도 알아.”

인우의 목소리엔 웃음이 섞였다. 스치듯 손목을 잡는 행위에서도 느낄 수 있었다. 이젠 그 랭크 차이도 줄었으리라 확신했다. 지금 전해지는 감각이 처음보다 훨씬 선명했으니까. 그래도 검사를 통해 증거가 남으면 미루가 빠져나갈 틈이 더 줄어들 테니 기다려 보려고 했는데. 이렇게 뜻하지 않게 흘러가는 것도 괜찮을 수 있구나.

인우가 입꼬리를 반듯하게 밀어 올리고 눈을 맞췄다. 동시에 뒤통수를 감싼 손이 느릿하게 내려가나 싶더니 미루의 목덜미에 감겼다. 조금 힘을 주어 당기자 높낮이가 다른 두 얼굴이 맞닿을 듯 가까워졌다. 얼마나 바투 붙은 건지 서로의 표정이 시야에 담기지도 않을 정도였다.

“가이딩 멈춰.”

“네?”

물음표는 채 끝맺지도 못했다. 뜨거운 숨을 뱉던 입술이 천천히 부딪혔다 떨어졌다. 입술이 맞닿은 건 찰나였으나 떨어진 땐 무척이나 끈적했다. 미루가 시선을 내리깔자 촘촘한 속눈썹이 뺨 위로 길게 늘어졌다. 가슴 한쪽이 못 견디게 간지러워졌다.

일순 치미는 갈증에 인우가 급하게 몸을 기울여 입을 맞췄다. 촉. 짧게 몇 번 스친 입술이 이내 진득하게 맞물렸다. 밀어붙이는 힘에 미루의 입술이 속절없이 벌어졌다. 그 틈으로 뜨거운 혀가 비집고 들어섰다.

“으읍.”

온몸이 틀어잡혀 있는데도 붙어 오는 힘이 어마어마했다. 미루가 기세에 밀려 뒷걸음질을 쳤다. 그럴 때마다 입술 새로 틈이 생겼지만, 인우가 곧장 다시 붙어 오며 거리를 좁혔다.

뜨겁고 시뻘건 살덩이가 질척하게 뒤엉키며 젖은 소릴 냈다. 인우는 정신없이 미루의 입술을 맛보고 입 안을 핥았다. 입술로 혀를 움키고 약하게 빨면서 혀끝을 맞비벼 대기도 했다. 자그마한 몸이 미약하게 움찔댔고, 그 움직임은 고스란히 인우의 흥분을 키웠다.

“으, 읏.”

코끝이 스치고 부드러운 입술이 짓눌렸다. 태어나 처음 해 본 입맞춤인데, 원래 이렇게까지 야하고 몸이 달아오르는 건가? 상대가 팀장님이라 그런 걸까? 동기들이 연애 얘기를 할 때 조금이라도 귀 기울여 볼걸, 하는 후회가 됐다. 다른 생각에 빠진 걸 알아챘는지 뜨거운 살덩이가 혀 아래를 긁듯이 훑자, 미루가 참지 못하고 신음을 흘렸다. 자신의 입술 새에서 무슨 소리가 흐르는지도 알아채지 못할 만큼 정신이 없었다.

마지막으로 입천장을 훑고, 아랫입술까지 아프지 않게 씹어 댄 인우가 질척한 소리를 내며 얼굴을 물렀다. 온통 축축하게 젖은 채라 그런지 발음마다 끈적이는 소음이 뒤따랐다.

“정신 잃어도 나 피하지 마.”

곧장 퍼지는 뜨거운 숨결에 미루가 속눈썹을 파르르 떨었다. 엄지손가락이 귓불을 건드리는 감촉이 이어지고 저릿한 전율이 전신을 덮쳤다. 가이딩을 잠그라고 하셨는데 내내 기운을 넘겨주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걸 인식하니 언뜻 머리가 어지러운 것 같기도 했다. 인우의 허리춤을 꽉 틀어쥔 미루가 다시 눈을 질끈 감았다.

“네에.”

작은 대답이었지만 가까이 붙어 선 인우에겐 어떤 소리보다도 명확했다. 가이딩 멈추라니까. 닿은 살결에선 계속해서 맑고 투명한 기운이 전해졌다. 순수한 기운에도 이렇게 짐승처럼 흥분하고 매달릴 수가 있다니. 언뜻 제 꼴이 파렴치하다는 감상이 들었다.

그래도 모든 정신과 감각은 착실하게 미루에게로 향했다. 다시금 혀를 내어 붉게 부푼 입술을 핥고 벌어진 틈을 파고들었다. 또 한 번 뜨거운 살덩이와 맞닿자, 머릿속에 번뜩 무언가가 내리치는 감각까지 느껴졌다.

“으―.”

허리춤을 움켜쥐었던 작은 손이 점점 느슨해졌다. 뒷걸음질을 치던 움직임도 더뎌지는 걸 보아하니 점차 힘이 빠지는가 보다. 이 정도면 전보다 훨씬 많이 버티긴 했지. 인우가 눈을 번뜩이며 타액을 전부 삼켜 낼 듯 미루의 혀를 머금었다. 추읍. 질척이는 소리와 함께 아랫입술이 떨어지고 미루의 머리가 제 어깨 위로 기울었다. 곧장 늘어지는 몸을 받아 들곤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편히 자. 내일부턴 정신없을 테니까.”

미루를 안은 채 방으로 향하면서는 귓바퀴를 잘근 씹고 핥아 댔다. 고작 입맞춤이었건만, 꼭 섹스라도 한 양 흥분이 차올랐다. 마음 같아선 온몸 구석구석을 빨아도 모자랄 것 같았다.

아마 기절한 미루에겐 들리지 않을 테지만, 인우는 귓가로 연신 뜨거운 숨을 밀어 넣었다. 축 처진 미루를 침대에 눕히곤 그 위에 올라타 몸을 겹쳤다. 허리와 뒤통수를 끌어안은 자세로 한참을 목덜미에 코를 박고 호흡했다.

“미루. 박미루…….”

늘어진 몸에서는 더 이상 가이딩이 느껴지지 않았으나 맥박이 뛰는 연한 살에 입술을 붙였다. 체온과 향을 모조리 삼키듯 숨을 깊이 들이켰다.

아껴 줄 기회가 더 있었어도 좋았으련만. 성급한가 싶다가도 저만 괜찮다면 피하지 않겠다는 미루의 말이 자꾸만 머릿속에 맴돌았다. 오래 기다렸던 말이었다. 어쩌면 에스퍼로 발현하고부터 계속 듣고 싶었던 소리일지도.

“미루야.”

뒤통수를 그러쥔 손끝으로 힘이 들어가니 얼굴이 조금 더 가까워질 수 있었다. 뺨에 입술을 댄 채로 속삭였다. 미루야, 박미루.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지만 연신 그를 갈구했다.

전신에 들어찬 흥분에 몸 곳곳이 뜨거워졌다. 꼭 폭주하기 직전과도 비슷한 감각이었다. 미간을 구긴 인우가 겹쳐 맞댄 아랫도리를 진득하게 문질렀다. 다리 사이로 미루의 마른 허벅지가 짓눌리듯 닿아 왔다.

“하아.”

자는 애를 두고도 발정하는 스스로가 소름 끼쳤지만 오히려 그게 다행 같았다. 아마 미루가 맨정신으로 말갛게 올려다봤다면 더한 짓을 했을 테니까.

눈물이 고였던 건지 미루의 속눈썹 주변이 축축했다. 인우는 더운 숨을 뱉으면서도 그 물기를 전부 입술에 담았다. 눈가를 핥고 입을 맞추고 그러면서도 미루의 다리 사이를 파고드는 허릿짓은 멈추지 못했다. 턱턱, 고간이 부딪치자 작은 몸이 속절없이 흔들렸다.

“아, 아…….”

박미루와 닿고 싶다. 누구도 침범하지 않았을 곳에 제 흔적을 남기고 싶었다. 눈을 감고 깊이 호흡하며 미루의 나신을 떠올렸다. 품에 안긴 몸은 작았지만 꽤 단단했다. 옷에 감춰진 살결은 또 얼마나 희고 부드러울까. 잘근잘근 씹을 때마다 붉게 물들 몸을 그려 보자니 목덜미가 뻣뻣해지는 기분마저 들었다.

엉덩이에 힘이 잔뜩 들어가면서 미루의 아래와 더 깊이 마찰했다. 마른 골반 뼈에 성기가 짓눌리는 탓에 밑은 금방 홧홧해졌다. 눈썹을 구긴 채 잇새를 짓씹는 인우의 입술에서 밭은 신음이 터졌다.

“하, 아.”

인우가 미루의 어깨 뒤로 손을 밀어 넣어 더 단단히 품에 가두었다. 침대 밖에서 본다면 인우의 등밖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집요하고 집착적인 행동이었다. 보는 이도 없는데 미루를 결박하듯 온몸으로 덮친 뒤 시선만 내리깔아 높은 콧대와 벌어진 입술을 감상했다. 허리를 쳐올리는 힘이 거칠어지고 아래 깔린 시트마저도 정신없이 흐트러졌다.

“어지러워…….”

머문 지 얼마나 됐다고 온 천지에서 박미루의 향이 풍겼다. 귓가엔 이명이 길게 이어졌고 시야는 번뜩였다. 집 안의 불은 이미 전부 어둡게 꺼진 지 오래였다.

인우는 그 상태에서도 남은 이성을 다잡기 위해 아랫입술을 세게 짓씹어야 했다. 피가 날 정도로 감쳐문 입술이 결국 미루의 이마에 닿았다. 인우는 손끝 하나 대지 않고 사정했고, 미루의 속눈썹이 마를 때까지 입을 맞췄다.

미루는 다음 날 오후나 되어서야 눈을 떴다. 이상하게 무겁고 축축한 눈을 몇 번 깜빡이자니, 시야로 익숙한 얼굴이 들어섰다.

“…….”

“…….”

둘은 말없이 서로를 응시했다. 눈을 감았다 뜰 때마다 졸음이 조금씩 달아났다. 멍한 시선으로 인우를 바라보던 미루가 정신을 잃기 전 했던 행위를 떠올렸다.

도화에게 가이딩을 하려다가 숙소까지 끌려왔고, 피하지 않겠다는 말을 하자 그가 입을 맞춰 왔다. 의식적으로 가이딩을 잠갔다 푸는 중에도 한시도 떨어지지 않았던 입술이 머리를 스쳤다. 뜨거운 감촉과 말캉한 살덩이. 그 무섭다던 심인우와 사귀는 사이에서나 할 법한 행위를 하다니. 미루의 얼굴이 삽시간에 달아올랐다. 민망함이 밀려와 눈만 굴리면서 조용히 상체를 일으켰다.

“……몸은?”

미루의 등을 받쳐 주며 일어나는 것을 돕던 인우가 나직하게 물었다. 목소리는 평소 같지 않았다. 어딘지 불안하기도, 자신이 없는 것 같기도 했다. 미루가 천천히 고개를 틀어 그와 시선을 마주했다.

“…….”

팀장님은 언제부터 이렇게 저를 내려다보고 있었던 걸까. 어깨 너머로 보이는 창밖은 이미 어둑해졌다. 어제 이곳에 올 때까지만 해도 환한 낮이었는데.

“전 괜찮은데. 팀장님은요?”

얼마나 오래 잠들었던 건지 목소리가 다 갈라졌다. 괜히 목을 더듬으며 헛기침을 하는 미루에게 달라붙은 시선은 떨어질 줄 몰랐다.

“네 덕분에 괜찮아.”

미루가 눈을 들어 찬찬히 인우를 살폈다. 그간 약으로 응급 처치를 했던 흐릿한 상처와 화상 자국은 씻은 듯이 사라졌다. 이렇게 가이딩 한 번이면 다 되는 거였는데.

“네가 무서워할까 봐. 그래서 결국에 다른 가이드들처럼 나를 피할까 봐.”

그간 팀장님은 얼마나 참고 아팠던 걸까. 미루가 눈썹을 늘어트리곤 작게 중얼댔다.

“이번에는 갑작스러워서 그랬는데요. 다음에는 정신 차리고 있을게요.”

혹시라도 자신이 두려워하지 않을까, 하는 오해도 하지 못하게. 미루가 인우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이제 아픈 거 참지 않으셔도 돼요.”

“…….”

그 말에 인우가 잠시 숨을 삼켰다. 저 한마디가 꼭 저를 진창에서 꺼내 주겠다는 말처럼 들렸다. 늘 모두가 기피하고 두려워했던 자신에게도 이런 말을 건네주는 사람이 생길 줄이야. 그 어떤 임무를 완수했을 때보다 벅찬 쾌감과 만족감이 퍼졌다. 발밑에서부터 차오르는 풍족함에 인우는 한참이나 말을 꺼내지 못했다.

***

시야가 흐릿해지는 중에 앞으로 정신없으리란 말을 언뜻 들었던 것 같기도 한데, 잘못 들은 건 아닌 모양이었다. 인우는 날이 밝자마자 미루를 데리고 숙소를 나섰다. 목적지는 늘 가던 것처럼 훈련실이 아니라 검사실이었다. 막 업무 준비를 시작하던 검사원들이 문을 박차고 들어온 인우를 보고 눈만 끔뻑댔다.

“8시부터인데…….”

아직 10분이나 더 남았다는 말을 하려던 검사원은 인우를 힐끔 살피고는 그냥 입을 다물었다. 저건 분명 ‘아직 멀었는데 뭐 어쩌란 거야’라는 표정이 확실했으니까. 급하게 검사 준비를 하는 와중에도 인우는 미루를 등 뒤에 세운 채였다. 누구 하나라도 힐긋대면 제가 더 예민하게 날을 세우며 시선을 차단했다.

“30분이면 끝나지?”

“빨리하면 그렇긴 한데.”

인우가 시계를 확인했다. 이제 곧 미루가 밥을 먹을 시간이라 때를 놓치지 않기 위해서였다. 기계를 끌어오다 말고 멀뚱히 서 있는 검사원을 보고는 인우가 사납게 말을 뱉었다.

“뭐 해. 안 움직여?”

“아, 예예.”

이쪽엔 발도 들이지 않던 사람이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어서 이 새벽부터 난리인지. 검사원은 쩝, 입맛을 다시며 검사 준비를 시작했다.

“자아, 이쪽에 앉으세요.”

미루를 의자에 앉히고 가이딩 파장을 감지할 패치를 붙일 순서였다. 검사실 안까지 따라 들어온 인우가 팔짱을 끼고 감시하고 있는 탓에 직원은 아까부터 꽤나 긴장한 상태였다.

“그러면 가이드님, 이제 패치 붙일게요?”

말은 미루에게 건네면서도 시선은 인우를 향했다. 허락을 구하듯 눈길을 보내자 인우가 작게 혀를 차며 성큼 다가왔다. 거침없이 좁혀지는 거리에 검사원은 슬쩍 몸을 굳혔고, 미루는 검사원의 경계를 단번에 읽어 냈다.

“…….”

팀장님은 아무것도 안 했는데 왜 이렇게 놀라는 걸까. 저는 이렇게도 속이 쓰리건만, 정작 인우는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그는 미루 앞에 무릎을 굽히고 몸을 낮춘 후 검사원 쪽으로 손을 뻗었다.

“줘.”

“예에, 이쪽이랑 이쪽에 붙이시면 돼요.”

타인이 제 전담 가이드에게 손대는 것이 싫어 패치도 직접 붙이는 에스퍼들을 그간 꽤 봐 왔다. 하지만 심인우가 그럴 거란 상상은 결단코 해 본 적이 없기에 검사원은 이 상황이 낯설면서도 묘하게 신기했다.

“여기도 하나 붙이시면 돼요.”

“됐어?”

“네네, 이제 나오시면 됩니다.”

인우가 붙인 패치를 눈으로만 확인한 검사원이 먼저 걸음을 옮겼다. 인우는 금방 몸을 일으키지 않고 꽤 긴장한 기색의 미루를 가만히 올려다봤다.

“금방 끝나.”

큰 손이 제 무릎을 조심히 감쌌다. 이내 엄지손가락으로 무릎 아래를 느릿하게 쓸어 주었다. 낯선 공간이라 잔뜩 굳었던 마음이 조금씩 누그러졌다. 참 이상하지. 다들 무서워하는 사람이 제게는 이렇게 다정한 모습을 보인다. 내가 아니라, 내가 가진 가이딩 때문인 것일까?

“……팀장님, 여기 계실 거죠?”

언뜻 그런 의심을 하다가도, 아마 가이딩 때문만은 아닐 거라고 미루는 확신했다. 저를 감싼 손이 무척이나 따뜻했고, 작게 입꼬리를 밀어 올린 인우의 얼굴이 참으로 다정했으니까. 그간 저를 향한 다정과 친절, 그리고 욕망이 비단 가이딩만을 바라는 것을 아닐 터였다.

“그럼. 밖에 있을 거니까, 무서우면 말해. 굳이 안 해도 괜찮으니까.”

랭크 변동이 생기면 이제 팀장님도 제게 가이딩 받는 걸 꺼리진 않겠지. 만일 계약이 끝나더라도…… 가이딩은 계속 해 줄 수 있을 거야. 미루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안 무서워요.”

이젠 잇자국이 희미해진 뺨을 느긋하게 쓸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검사실을 벗어나 있을 30분은 또 얼마나 더디게 흘러갈지. 일순 짜증이 불쑥 솟았으나 이 정도는 참을 수 있었다. 평생을 기다려 왔는데, 이것쯤은 못 견딜까.

인우가 전면이 유리로 된 검사실 앞에 섰다. 가만히 눈을 굴리던 미루와 시선이 마주쳤다. 팔짱을 낀 채로 가만히 그를 응시했다. 그것만으로도 미루는 꽤 안정된 듯 차분한 표정을 지었다.

“자, 검사 시작해요. 삐 소리 들리면 가이딩 시작하는 거예요. 한 5분쯤 걸리니까 집중해서 해 줘요.”

유치원생을 다루듯 나긋하게 이어지는 검사원의 목소리에 안쪽에 앉은 미루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윽고 검사장 안이 조금 어둑해졌다. 집요한 시선이 미루의 목울대가 느릿하게 일렁이는 것까지 전부 기민하게 관찰했다. 삐―. 경보음이 울리고 미루가 눈을 감았다. 얌전히 내려앉는 긴 속눈썹. 아무것도 아닌 그 광경을 인우는 몹시나 흥미로운 시선으로 관찰했다.

“저, 에스퍼님.”

미루의 기록을 조회하던 검사원 하나가 입을 열었다. 왜. 짧은 대답은 돌아왔지만, 인우의 눈길은 여전히 안을 향한 채였다.

“저분 TF 가이드 맞으시죠?”

“왜. 문제 있어?”

“아니요, 그건 아니고요. 기록 보니까 센터에서 활동 안 하시더라고요. 그런데 검사는 상성이랑 랭크 측정 같이 진행하신다기에…….”

어차피 잠깐 머물다 갈 사람한테 무슨 검사를 이렇게 하냐는 뜻인 듯했다. 눈을 감고 있는 미루의 얼굴을 집요하게 살피던 인우가 한참 뒤에야 입술을 뗐다.

“이제 내 가이드야.”

미루와 저와 상성은 잘 맞고, 보나 마나 랭크도 올랐을 거고. 무엇보다 미루도 가이딩하는 행위에 거부감을 느끼지 않는다. 가이딩을 해 놓고도 저를 무서워하지 않았고. 그런 애를 계약 기간이 끝났다고 그냥 돌려보낼 등신은 아니니까.

검사원들은 저마다 눈빛을 나누며 어깨를 으쓱였다. 심인우한테 가이드가 생기는 날도 다 오네. 진득한 시선은 하나도 깨닫지 못하고 있을 검사실 안 가이드를 보며, 조금은 측은하다는 생각도 했을 거였다.

검사가 끝난 뒤에는 곧장 숙소로 돌아왔다. 오늘도 회의가 있지 않았나, 일정을 되짚는 미루 앞으로 배달된 식사가 하나둘 놓였다.

“끼니마다 집 앞에 두고 갈 거야. 되도록 맞춰서 올 거긴 한데. 나 없어도 잘 챙겨 먹어.”

“식당에 안 가고요?”

“응. 식당은…….”

너를 쳐다보는 애들이 많으니까. 음습한 속내를 감춘 채 적당히 둘러댈 말을 떠올렸다.

“검사 후엔 아무것도 하지 말고 쉬어야 해. 이틀 뒤쯤 나온다니까, 그때까진 집에만 있어.”

“그래요? 뭐 힘든 것도 없었는데.”

미루가 크루아상을 먹기 좋게 찢으며 고개를 갸웃댔다. 평소에 교육받을 때보다도 가이딩을 안 한 것 같은데 꽤 오래 쉬어야 하는구나.

“그래도 팀장님한테는 가이딩해 드릴 수 있어요. 별로 안 힘들거든요.”

들끓는 감정이 억눌린 눈길이 미루의 얼굴에 닿았다. 맑은 눈동자와 단정한 콧대, 붉은 입술까지 차례로 훑은 뒤에야 나직한 대답이 떨어졌다.

“그래도 될까?”

“그럼요.”

“안 그래도 요즘…… 버티기 어려웠는데.”

어울리지 않게 기운 없는 말을 뱉으며 나이프를 쥔 미루의 손등을 가만히 붙잡았다. 작은 손이 단번에 손아귀에 들어차는데, 그게 꼭 제게 사로잡힌 미루의 모습 같아서 웃음이 번질 뻔했다.

“저 진짜 괜찮으니까요, 꼭 말해 주세요. 아니다. 말 안 하셔도 매일 해 드릴게요.”

짐짓 결의에 찬 낯을 보니 웃음이 치솟았다. 늘 서늘한 기운이 감돌던 인우의 얼굴에 억누른 미소가 스쳤다.

“매일 그런 짓을 해도 된단 소리야?”

“그, 그래도 되고……. 손잡아도 되고요.”

민망한 듯 미루는 눈도 마주치지 못했다. 하얀 손등에 붉은 자국이 날 만큼 한번 꽉 쥐었다가 이내 놓아주었다.

“알겠어. 얼른 먹어.”

그제야 미루가 식사를 시작했다. 인우는 턱을 괸 채 빵을 씹는 미루를 눈에 담았다. 일단 이틀은 집에 잡아 뒀는데 그 후에는 또 어떻게 구슬려야 할까. 어떻게 해야 박미루를 제 시야에만 둘 수 있을까. 밖으로 내보내기에 센터는 너무 위험한데.

아마 동생과도 막역한 사이니 미루는 센터에 아예 들어올 엄두도 내지 않을 것이다. 인우는 벌써부터 TF 이후, 미루의 거취에 대해 머리를 굴려 대기 시작했다. 음습한 속내 따윈 전혀 알지 못할 미루는 그저 빵이 맛있다며 인우에게 접시를 내밀 뿐이었다.

그 후로 인우는 매 식사 시간과 휴식 시간에 들렀다. 평소엔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올 때마다 자잘한 상처를 달고 돌아왔다. 해서 미루는 그가 숙소로 들어올 때마다 눈에 불을 켜며 몸을 훑어 댔다. 이번엔 턱 아래 긁힌 상처가 있었다.

“여기 아직 피 나요.”

미루가 차마 마음대로 손은 뻗지 못하고 제 턱 부근을 톡톡 두드렸다. 저긴 처음에 면접을 봤을 때도 다쳤던 곳인데. 나은 지 얼마나 되었다고 또 긁힌 걸까.

“어쩐지, 아프더라고.”

전혀 그렇지 않은 표정과 말이었지만 그걸 눈치챌 겨를도 주지 않고 미루의 손목을 끌어당겼다. 그러곤 제 뺨에 작은 손을 얹어 두곤 고개를 마구 비벼 댔다.

“으음.”

인우는 숨을 길게 늘이면서 감은 눈을 작게 구기기도 했다. 키 차이가 있어 팔이 좀 불편하긴 했으나, 이렇게 뺨만 만지고 있는데도 상처가 조금씩 옅어지는 게 눈에 보이니 참을 만했다.

“아물 때는 안 아픈가요?”

고개를 튼 인우가 미루의 손바닥 안쪽에 코를 파묻은 채 깊게 호흡했다. 아랫입술이 맥박이 뛰는 부근에 언뜻 스치며 더운 숨을 뿌리기도 했다.

“아프지만 참는 거지. 그게 익숙하니까.”

“…….”

동생이 어렸을 때부터 아파서 그런가. 누군가 아프거나 다치면 지나치게 신경이 쓰였다. 더구나 눈앞의 남자는 제 어린 동생과 비슷한 면이 많았다. 아파도 티를 내지 않고, 다쳐도 그저 입을 꾹 다물고 있을 뿐. 이루야 제가 늘 함께였다 해도, 팀장님은 곁에 아무도 없었다. 그나마 가깝게 지내는 건 도화 정도이려나.

미루가 소리 없이 인우를 올려다봤다. 감긴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는가 싶다니 이내 칠흑같이 까만 눈동자가 미루를 마주했다.

“이렇게 금방 나을 수 있는 거였네.”

속살댈 때마다 뜨거운 숨결이 맥박을 타고 요동쳤다. 인우의 시선에 담긴 끈적한 환희까지도 선명하게 전달되는 듯했다. 분위기가 묘하게 흘러갔다. 미루의 하얀 뺨은 붉게 물들었고, 입술을 자꾸만 잘근 짓씹어 댔다. 얼마나 목이 타는지 마른침을 삼켜도 목구멍이 퍼석했다.

“이 정도면 됐어.”

됐다고 말은 하면서도 인우는 손바닥에 입술을 깊게 파묻었다. 그 상태로 중얼대는 탓에 손끝이 살짝 안으로 말렸다.

“간지러워요.”

“그래서, 싫어?”

느긋한 속도로 눈을 치뜬 인우가 미루를 응시했다. 처음엔 저 눈길이 어찌나 두렵고 무서웠던지 마주하기도 어려웠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인우의 눈동자에 스친 감정이 너무도 선명해서 두려움은 저 뒤로 밀린 지 오래였다.

“아뇨.”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그제야 인우가 만족스러운 낯을 하고는 잡은 손목을 끌어 내렸다. 그러는 동안 손가락 하나 길이만큼 긁혔던 상처는 흔적을 지웠다. 미루의 눈길이 신기하단 듯 상흔이 있던 곳에 잠시 닿았다가 떨어졌다. 그사이 인우의 손바닥이 체온을 가늠하듯 마른 등을 쓸었다. 낮잠을 자면 묘하게 몸이 뜨끈뜨끈해지던데. 지금은 그렇지 않았다.

“점심 먹고는 뭐 했어. 낮잠을 잔 건 아닌 듯한데.”

한 시간의 휴식 중, 둘이 함께할 수 있는 건 고작 30분이었다. 인우는 온 시간을 다 털어 미루와 조금이라도 더 닿아 있고자 용을 썼다. 소파에 앉으려는 미루를 제 허벅지 위에 올려 두고는 또 뺨을 찾아 쥐었다. 엄지로 눈 아래 연한 살을 살살 쓸자, 긴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는 것마저도 귀여워 보였다.

“동생이랑 전화했어요.”

“그래?”

“저 팀장님, 기회가 없어서 말씀을 못 드렸는데요. 이루 챙겨 주셔서 감사해요.”

처음엔 과일과 케이크로 시작했지만 나중엔 제법 영양을 골고루 챙긴 식사까지도 보낸다고 들었다. 심지어 병실을 1인실로 바꿔 주었단 소리에 미루는 이마를 짚었다. 타이밍을 놓친 새 어디까지 이루를 챙기는 건지.

―오늘은 도화 형이 정신없이 굴어서 일단 왔는데. 내일 낮에 다시 원래 병실로 옮길게.

부담스러운 상황인 건 이루도 마찬가지라, 전화를 끊기 전엔 그런 말을 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정작 일을 그렇게 만든 장본인은 태연한 음성을 했다.

“밖에 두고 온 걸 신경 쓰길래.”

“이제 괜찮아요. 입원은 했어도 그렇게 안 좋은 상태도 아니고, 용돈도 있어서 알아서 잘할 거예요. 병실도 내일 다시 옮긴다고 했어요.”

미루의 등허리를 받치고 있던 손바닥이 다시 움직였다. 허리춤을 더듬대듯 쓸던 손이 툭 불거진 날개 뼈를 단번에 감쌌다. 그러곤 드러난 목덜미에 입술을 파묻었다. 긴장한 미루의 목울대가 크게 오르내리는 소리가 선연했다.

“안 그래도 돼. 동생이 잘 지내야 네가 바깥 걱정을 안 하지.”

자신에게만 쏟아도 모자랄 관심을 다른 이에게 두는 건 원치 않았다. 그게 동생이라 할지라도. 신경 쓰일 요소를 전부 채워 주면, 그럼 미루는 눈앞의 저에게만 집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

“…….”

미루는 대답하지 못하고 눈만 질끈 감은 채였다. 속삭일 때마다 온몸에 전율이 흐르듯 간지러웠고, 호흡도 편히 할 수가 없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요즘엔 이루보다 팀장님의 얼굴을 떠올리는 시간이 더 길었다. 가만히 있어도 서늘하면서 아름다운 얼굴이 눈앞에 아른대고 괜히 저를 부르는 달콤한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고.

그와 같이 앉아 있던 자리를 볼 때마다 그랬다. 이 사실을 알면 팀장님은 놀라겠지. 부끄러운 속내는 차마 드러내지 못하고 뜨끈한 살덩이가 스치는 감각에 집중할 뿐이었다.

“임무 마무리할 때까지 이러고 있으면 좋을 텐데.”

“……TF 끝날 때까지요?”

“응.”

인우는 목을 울리는 소리로 대답을 대신했다. 축축하고 뜨거운 혀가 목덜미를 타고 올라와 귀 뒤를 느리게 핥았다. 그곳에 모든 호흡과 맥박이 고이기 시작했다. 귓불을 잘근 씹고 빠는 질척임마저 귓가에 선연했다.

팀장님은 이런 식으로 정신을 차리지 못하게 만든 다음에, 꼭 저런 말을 하곤 했다. 휩쓸리듯 그러겠단 대답을 하게 만들 생각인 건지. 이번에도 미루는 집요한 혀끝을 피해 몸을 움츠리며 대답했다.

“그, 그래도 할 건 해야죠.”

“안 넘어오네.”

나직한 인우의 웃음이 목덜미에 퍼졌다. 거칠면서도 끈적한 목소리가 온몸에 달라붙는 기분이었다.

“제가 뭔가 할 수 있는 게 좋아요.”

환영받지 못한 삶을 산 건 미루도 마찬가지였다. 나이 차 나는 동생을 데리고 들어갔던 보육원도, 졸지에 고아를 맡아 신경 쓸 게 많다고 짜증을 부리던 담임 선생님도, 겨우 단칸방을 얻어 생활하는 형제에게 고운 눈길 한 번 보내 주지 않았던 집주인 할아버지도. 전부 미루와 이루를 달가워하지 않았다.

열아홉 때부터 공부와 아르바이트를 병행하면서는 그나마 스스로 무언가를 해낼 수 있다는 사실이 뿌듯했다. 그리고 이젠 심인우 같은 모자람 없는 사람에게도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사실 역시.

미루의 감정은 고스란히 얼굴에 드러났다. 봉긋 솟은 뺨을 가만히 내려다보던 인우가 아프지 않게 깨물었다. 연한 살결에선 꼭 단맛이 나는 듯했다.

“좋아하는 건 오래 할 수 있게 해 주고 싶은데.”

“연습 꾸준히 하면 그럴 수 있을 거 같아요.”

서로 가진 목표는 달랐지만 대화는 어떻게 맞물려 갔다. 발목을 잡고 오래 붙여 둘 계획을 세우고 있다는 건, 꿈에도 알지 못하겠지. 품 안에 들어차는 체온에 인우가 작게 웃음을 지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