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외전 1화 (10/12)

1

“과외비 아직 안 들어왔네.”

삼각김밥을 한 입 베어 문 미루가 웅얼댔다. 분명 오늘 저녁까지 주신다고 하셨으면서. 메시지를 보낼까 하다 11시가 다 되어 가는 시간임을 깨달았다.

“그냥 아침에 보내야겠다.”

얌전히 김밥을 더 베어 물자 볼 한쪽이 볼록 솟았다. 하도 피곤해서 그런지, 김밥 안에 매콤한 양념이 들어갔는데도 별맛이 느껴지지 않았다.

멍한 눈으로 턱을 움직이며 통장 잔고를 훑었다. 23만 원. 내일 과외비를 받으면 월세 먼저 보내고 마트도 가야겠다. 라면이랑 치약 사고, 샴푸도 다 떨어져 가던데. 요즘 딸기 철이니까 이루 병원 들를 때 한 팩 사 가야지.

그리고…… 휴학할까. 돈 좀 모으고 다시 복학해도 장학금 받을 자신은 있는데. 미루가 손등으로 충혈된 눈을 비비며 생각했다.

수업 사이사이 도서관에 들러 공부를 했고, 끝나면 과외나 아르바이트를 갔다. 센터에 가이드 등록은 해 놨지만 미루를 찾는 에스퍼는 없었다. 등급이니 뭐니 전부 애매했으니까. 해서 요일별로 바와 호프집 일을 나갔으며 틈틈이 대리운전도 했다. 수능을 보자마자 면허를 따 둔 게 아주 요긴했다. 솔직히 당시만 해도 큰돈 들이는 게 아까웠는데, 뭘 하든 면허가 있어야 편하다는 담임 선생님 말을 듣길 잘했다 싶었다.

양념이 없는 맨밥 부분을 크게 물고는 동기들이 떠들고 있는 채팅방에 들어갔다. 나온 지 4년은 더 된 구형 핸드폰 액정의 절반은 거미줄처럼 금이 간 상태였다. 그 틈으로 동기들은 쉼 없이 웃고 떠들었다.

2학년이 되고 긴장이 풀린 건지, 군대 가기 전이라 맘껏 즐기는 건지. 다들 동아리 활동에 미팅에 여기저기 잘 먹고 잘 놀러 다니는데, 미루는 신입생 환영회 이후로 어느 활동에도 참석하지 않았다. 아니, 못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 시간에 일하거나 공부를 하는 쪽이 미루에겐 훨씬 이득이었으니까.

“…….”

내일 수업이 끝나고 시간 맞는 이들끼리 치맥을 먹기로 한 모양이다. 어디 치킨이 맛있고, 어느 가게가 SNS에서 핫하다는 문자들이 마구 올라왔다. 미루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음에도 약속은 잡혔다. 이들에게도 미루의 불참은 익숙한 일이란 뜻이었다.

“……치킨 맛있겠다.”

딸기 말고 치킨을 사 갈까. 이루도 좋아할 텐데. 볼을 우물거리던 미루가 핸드폰을 더 만지작댔다. 집에 가기 전에 대리운전이라도 잡아 볼까 싶어 장소를 설정했다. 밥을 씹던 턱을 딱 멈추고 화면에 뜬 콜에 집중했다. 거리도 금액도 나쁘지 않은 콜이 있길래 얼른 누르는 순간, 핸드폰이 또 버벅댔다. 오래되긴 했는지 두세 가지 일을 동시에 하면 자꾸 멈추는 탓에 괜찮은 콜을 놓치기 일쑤였다. 오늘은 잡혔을까.

나인 호텔 → 정인동 스테이트 라운지빌

몇 초 지난 뒤에야 배정된 콜 정보가 화면에 떴다.

“잡았다.”

한 대도 못 잡을 줄 알았는데 다행이네. 출발지를 꼼꼼히 확인한 뒤 창밖을 살폈다. 시선이 닿은 곳은 편의점 창 너머 높이 치솟은 건물. 어둠 속에서도 반짝이는 저 호텔에서 온 호출이었다. 빨리 걸어가면 5분도 채 걸리지 않을 가까운 거리였다.

남은 삼각김밥을 한입에 욱여넣으면서 비닐을 움켜쥐었다. 어깨에 가방을 대충 둘러메고 쓰레기통에 김밥 포장지를 밀어 넣고는 급한 걸음으로 편의점을 벗어났다. 권태로운 표정으로 인사하는 알바생에게 고개를 꾸벅 숙이기도 했다.

김밥을 삼키지도 못하고 우걱우걱 씹으면서 횡단보도 앞에 섰다. 호텔은 무척이나 높고 커서 여기서도 잘 보였다. 얼마나 화려하고 멋진지, 노란 선 뒤에 서서 신호를 기다리는 제 처지가 무척이나 초라하단 감상이 들었다.

허름한 신발과 옷. 고등학생 때부터 쓰던 가방. 바닥이 보이는 잔고. 애매한 가이드 등급. 이렇게 평생 아등바등 살면 저런 호텔에 가 볼 수는 있을까. 입에 남은 걸 꿀떡 삼키고 전화를 걸었다.

“안녕하세요, 대리 기사입니다.”

아까까진 괜찮더니 속이 얹힌 것처럼 답답했다. 짧은 통화를 이어 가며 대충 주차된 위치를 확인했다.

“5분 내로 도착할 것 같습니다. 네에.”

그때 초록불이 켜졌고 미루는 가슴 부근을 툭툭 치면서 걸음을 내디뎠다. 피곤이 밀려왔다. 대리를 하고 집까지 걸어가려면 또 몇 시간이 걸릴까.

***

차 안엔 술과 담배 냄새가 가득했다. 출발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머리가 쑤실 만큼 지독했다.

“나 때느은, 다들 공사판에서 도―옥하게 돈 모았어. 팔 부러졌는데도, 어? 뼈가 막 보여도 벽돌 날랐다니까? 요즘 애들은 몸이 힘들면 일하지도 않아, 그으저 쉬운 것만 찾지. 안 그래? 봐, 봐아. 학생이 그렇다는 게 아니라. 요즘 애들이 다 그렇다니까.”

앳된 미루가 차 키를 넘겨받았을 때부터 남자는 묻지도 않은 말을 늘어놓았다. 운전석과 조수석 사이에 팔을 걸친 채 떠들었는데, 목소리가 어찌나 큰지 오른쪽 귀가 얼얼할 지경이었다. 한참 주정을 부리던 남자가 손으로 미루의 팔뚝을 툭툭 쳐 대기까지 했다.

“네에. 그런데 사장님, 벨트 하셔야 안전해요.”

“이익? 안 해도 안전하게 운전해야지이!”

그렇게 말하면서도 뒷좌석 시트로 등을 털썩 기댔다. 신호에 걸려 멈춘 사이, 미루가 힐끔 뒤를 살폈다. 남자는 좌석에 머리를 툭툭 박아 대며 연신 무어라 중얼거렸다.

“사고 나면 아주 다 청구한다아? 대리 백 개, 이백 개…… 몇 달 뛰어도 못 채워. 조심해애…….”

그의 말처럼 차는 무척이나 좋아 보였다. 조금만 긁혀도 몇 달 치 과외비를 쏟아부어야 할지도 모르고. 남자는 계속해서 미루를 깎아내리는 말을 나불거렸으나 그래도 때리거나 욕을 하거나 토를 하는 손님보다는 나았다.

“네에.”

남자의 불그스름한 얼굴을 살피며 미루가 작게 대답했다. 그는 이제 넥타이를 비틀어 풀더니 인상을 쓰기 시작했다.

“근데 학생, 안 더워? 왜 이리 더워…….”

그러곤 뒷좌석 창문을 반쯤 내려 밖으로 얼굴을 내밀었다. 가로등 불빛이 남자의 얼굴 위로 떨어지자 붉어진 낯이 한층 도드라졌다. 더운가? 오히려 겨울에 다가가는 무렵이라 추운 것 같은데. 미루가 살짝 떨리는 손끝으로 핸들을 움켜쥐었다.

“사장님, 조심하세요.”

“어엉.”

성의 없는 대답을 끝으로 차가 다시 출발했다. 한참 떠들던 남자가 잠들었는지 차 안은 곧 조용해졌다. 열린 창문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찬바람에 몸이 좀 떨리긴 해도, 매캐한 냄새가 날아가니까 한결 나아졌다.

“으윽, 아…….”

얼마 안 가 바람이 들이치는 소리 사이로 흐릿한 신음이 섞였다. 힐끔 뒤를 확인한 미루가 눈을 크게 뜨곤 서둘러 차선을 변경했다. 깜빡이를 켠 차가 길 한쪽에 다급하게 멈췄다.

“사장님! 괜찮으세요? 숨이 안 쉬어지세요?”

남자는 두 손으로 목을 꽉 움켜쥐고 몸부림을 쳐 댔다. 벌어진 입술 새에선 꺽꺽거리는 고통스러운 소리가 마구 터졌다. 이마와 목에 솟은 핏대가 기이할 정도로 도드라졌다. 제 목을 조르는 남자의 팔을 떼어 내려 용을 썼건만 취한 사람을 이겨 내긴 쉽지 않았다.

“잠깐만요, 119, 119…….”

벨트를 풀고 운전석에서 내리면서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떨리는 손끝으로 119를 누르며 뒷좌석으로 내달렸다. 삐― 전화는 연결되지 않았다. 액정을 확인한 미루가 종료 버튼을 터치하고 재차 119를 쳤다.

“왜 안 돼.”

어깨 사이에 핸드폰을 낀 채로 뒷좌석 문을 벌컥 열었다. 남자는 이제 완전히 드러누워 몸부림을 쳤다. 구둣발에 시트가 온통 더러워졌다.

“사장님, 잠시만요. 아, 왜 안 받아!”

삐― 또다시 먹통이었다. 내비게이션을 켜 둔 것 때문에 그런가. 하필 이럴 때 말썽인지. 미루가 입술을 짓씹는 사이, 남자가 손톱을 세워 제 목을 긁어 댔다.

“커억.”

피가 비칠 만큼 붉게 긁힌 자국에 퍼뜩 놀란 미루가 손목을 당겼다. 더는 상처를 낼 수 없게 손을 꽉 붙들고선 바닥에 떨어진 슈트 재킷을 주워 들었다. 급하게 주머니를 뒤져 핸드폰을 찾고 있는데, 일순 주변이 고요해졌음을 깨달았다. 차가운 정적에 등 뒤로 소름이 돋았다.

“…….”

잠긴 화면 위, 긴급 통화 버튼을 누르려던 미루가 힐끔 시선을 들었다. 꼭 피를 뒤집어쓴 양 시뻘건 얼굴과 마주했다. 형형하게 번뜩이는 시선. 순간 온몸에 기운이 빠져나가는 듯한 감각이 느껴졌다. 벌어진 미루의 입술 틈으로 당황한 신음이 샜다.

“어…….”

미루는 쥐고 있는 남자의 팔목이 지나치게 뜨겁다는 걸 알아챘다. 뭐지. 당황한 시선을 깜빡이는 사이 남자가 숨을 토해 내며 눈을 번뜩였다.

“뜨, 뜨거워……. 더워.”

그는 쫙 갈라진 음성으로 중얼대며 미루의 어깨를 부서질 만큼 세게 틀어쥐었다. 따끔, 정전기가 일었는데도 그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미루가 미간을 구기곤 몸을 물렀다. 잠깐 닿았는데 손길이 무척이나 뜨겁고 아팠다.

“왜, 왜 이러세요.”

미루가 엉덩방아를 찧으며 땅바닥에 주저앉았다. 거리가 벌어지자 남자는 뒷좌석을 기어 밖으로 나오려고 했다.

“사장님, 왜 이러세요!”

겁에 질린 미루가 휘청대며 얼른 몸을 일으켰다. 남자는 기괴한 미소를 지으며 팔을 뻗었다. 꼭 자신을 한 손에 움켜쥐고 터트릴 것처럼. 본능적으로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음을 감지했다.

남자가 나오기도 전에 뒷좌석 문을 세게 닫은 미루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내달렸다. 대리비 어떡하지. 짐도 차에 있는데. 그런 현실적인 걱정이 솟았지만 죽고 나면 그조차 받을 수 없을 테니까 이를 악물고 뛰었다.

힐끔 고개를 틀어 살피자 종잇장처럼 구겨진 차가 보였다. 남자는 이제 기괴한 소리를 내지르며 쫓아오고 있었는데, 달리는 속도가 어찌나 빠른지 꼭 에스퍼 같았다. ……에스퍼?

“미친.”

설마 지금 발현한 건가? 그래서 그렇게 덥다고 했나? 미루가 울상이 된 채로 주변을 둘러봤다. 만약 남자가 정말 에스퍼로 발현한 거라면 이렇게 도망을 가 봤자였다. 급 낮은 가이드가 이겨 낼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니까.

그렇다고 잡혀서도 안 됐다. 애초에 가진 가이딩 기운이 많지 않은데, 막 발현한 그에게 전부 빨린다면 저 구겨진 차와 똑같은 꼴이 될 터였다.

어떡하지. 아랫입술을 짓씹은 미루의 시야로 다리가 들어왔다. 차라리 물에 뛰어들까. 그게 먹힐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두 발을 힘차게 굴렀다.

“자, 잠시만요, 사장님.”

등 뒤로 다리 난간이 닿았다. 뛰어내릴 수도 없게 높은 철조망이 처져 있었다. 그 틈으로 바람이 불면서 미루의 머리가 정신없이 헝클어졌다. 심장이 어찌나 빨리 뛰는지 귓전이 아플 지경이었다. 차라리 아까 시끄럽게 떠들고 잔소리하던 게 훨씬 나았지. 남자는 짐승처럼 숨을 할딱이며 거리를 좁혔다. 미루가 팔을 뻗어 그를 저지하려 했다. 물론 효과는 없었지만.

“제, 제가 금방 신고해 드릴게요. 그러면 바로 가이드 연결해 주실 거예요. 저는 그, 급이 낮아요.”

진짜요. 울상이 된 채 중얼댔다. 하지만 발현하고 처음 느끼는 가이딩에 눈이 뒤집힌 그에게 설명이 먹힐 리 없다. 남자가 금방이라도 터질 듯한 얼굴을 하고는 달려들었다.

“아악!”

뒷걸음질을 쳤으나 꽉 막힌 난간에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등급이라고는 애매해서 센터에 취직할 수도 없는 주제에 하필 이렇게 에스퍼 눈에 띌 건 뭔지. 한번 꼬인 삶은 쉽게 풀리는 법이 없었다.

그래도 이대로 죽으면 보상은 받을 수 있겠지. 가이드 등록할 때 냈던 돈이 얼만데, 해 줘야지. 그럼 이루 병원비는 걱정 없겠다. 과외비 못 받은 것도 받아 내야 하는데, 문자 보내서 증거 남겨 둘 걸 그랬나.

의식하지 않기 위해 애써 다른 곳에 정신을 쏟으려 했지만 지척에서 느껴지는 뜨거운 열기에 겁이 났다. 그리고 이루에게 미처 사다 주지 못한 딸기와 치킨이 스쳐 지나갔다. 미루지 말고 지난주에 사 줄걸, 하는 후회도.

그때였다.

“눈 감아.”

어디선가 뻗친 손이 미루의 눈앞을 가리는 동시에 귓가에 작은 속삭임이 들렸다. 목소리는 낮고 묵직했다. 발현한 손님과는 다른 음성이지만 몹시 위압적이었다. 미루는 저도 모르게 시키는 대로 눈을 질끈 감았다. 속눈썹이 손바닥을 스치는 감각이 선연했다.

어두워진 시야로 번뜩이는 빛줄기가 스며들었다. 눈을 가린 손에 힘이 더욱 들어가더니 눈두덩과 콧대를 묵직하게 눌렀다. 닿은 살결이 전부 간지러웠다.

“끄아!”

걸걸한 비명에 미루가 입술을 세게 짓씹으며 어깨를 움츠렸다. 어떤 일이 벌어지는진 모르겠고, 그저 상황 자체가 너무 무서울 뿐이었다. 어디든 의지하고 싶은 마음에 제 옆에 선 남자에게로 바짝 붙었다. 누군지도 모르는 데다 안전한 사람인지도 알 수 없었으나 그래도 체온이 닿으니 마음은 편했다.

“아.”

분명, 처음엔 편안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정전기가 오르듯 전신에 전율이 흐르고 머리가 빙 돌았다. 찢어지는 비명이 멎기도 전에 미루는 스르르 정신을 잃고 말았다. 가이드 등록을 한 이래로 가이딩을 가장 많이 한 날이었다.

***

[이름] 박미루

[나이] 21세

[구분] C 랭크 가이드

[소속] 한국 대학교 경영학과 2학년

[가족 관계] 동생 박이루, 17세, 미발현

11세에 후원을 받아 심장 수술을 받은 후, 주기적으로 검진

현재는 한국 대학 병원 입원 치료 중

[기타] 동생과 생활 중

장학금, 나라 지원금, 가이드 지원금 등으로 학비 및 생활비 충당

과외, 택배 상하차, 대리운전, 호프집, BAR, 단기 사무직 등 아르바이트 다수 병행

급여 상당수 병원비로 지출

“애매하네.”

C급이면 현장을 뛰기에도, 센터에 소속되어 일하기도 어중간한 랭킹이었다. 가이딩으로는 돈을 벌 수 없으니 일을 이렇게 많이 하나. 보통의 남자애들과는 다른 특이 사항에 가만히 눈길을 뒀다. 애매해서 열심히 사는 애. 도화의 감상은 그게 전부였다.

그때 침대에 얌전히 누워 있는 이의 긴 속눈썹이 움찔댔다. 소리도 나지 않는 작은 기척을 알아챈 도화가 들고 있던 서류를 내려놓았다. 가만히 작은 얼굴을 바라보고 있자니, 이내 느릿하게 눈이 뜨였다. 눈두덩으로 짙은 쌍꺼풀이 새겨지고, 갈색 눈동자가 느릿하게 좌우로 굴렀다.

“머리 안 아픕니까?”

“……네?”

그리 어려운 질문도 아니었건만 미루는 멍청하게 눈을 꿈뻑거리며 되물었다. 작게 혀를 찬 도화가 너스 콜을 눌렀다. 그러곤 서류를 챙겨 한쪽 옆구리에 꽂았다. 자유로워진 두 손으로는 핸드폰을 톡톡 두드렸다.

가이드 일어났습니다.

“여기는 가이드 병원입니다. 어디까지 기억납니까.”

제 사수에게 짧은 보고를 넣은 도화가 침대 옆에 멀뚱히 서서 눈만 내리깐 채 물었다. 안경을 슥 올리는 행동에선 아주 귀찮은 티가 넘쳐흘렀다.

“아아, 병원……. 네?”

눈을 굴리던 미루가 갑자기 몸을 벌떡 일으켰다. 가이드, 병원. 두 단어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러고 보니 머리도 깨질 듯 아프고 온몸에 힘도 없는 게 종일 굶고 상하차를 했던 날의 컨디션과도 흡사했다.

이마를 짚은 미루가 의식을 잃었던 순간을 더듬더듬 떠올렸다. 편의점에서 늦은 한 끼를 때웠고, 대리 콜을 잡아 호텔로 향했다. 엄청 비싼 외제차였고, 중간에 덥다고 창문을 열었지. 그리고 그 손님이…….

“아! 소, 손님이 저를 따라와서 도망갔는데요. 발현한 것 같았거든요? 아닌가……. 아무튼 짐, 제 짐도 그 손님 차에 있어요.”

“저거 말입니까?”

손가락을 들기도 귀찮은지, 도화가 서류 파일 모서리로 가리킨 방향엔 미루의 가방이 놓여 있었다.

“네! 지갑이랑 도서관에서 빌린 책도 들었는데…….”

미루가 허둥대며 침대 아래로 내려가려 하자 도화가 어깨를 꽉 붙들었다. 마주친 시선이 몹시 무뚝뚝하고 서늘해서 미루는 절로 어깨를 움츠렸다.

“가만히 있어요.”

대신 가방을 가지러 가는 듯 천천히 걸음을 옮기는 도화를 보며 미루가 기억을 더듬었다. 처음 보는 사람이 맞는데 왜 이렇게 낯이 익은 것 같지.

“그 남자는 발현한 거 맞습니다. 지금 에스퍼 관리소에 있고.”

“아, 그렇구나.”

“짐은 대충 챙겨 왔는데, 빠진 거 있나 확인해 봐요.”

가방을 건네받으면서 손끝이 언뜻 스쳤다. 따끔, 정전기보다 훨씬 약하지만 분명 전율이 통했다. 에스퍼구나. TV나 기사에서 스치듯 봤던 에스퍼 중 하나라 익숙한가.

“감사합니다.”

“전화가 꽤 오던데. 학교랑 일하는 곳에는 따로 연락 갔을 겁니다.”

“눈 감아.”

가방 안을 확인하던 미루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발현한 손님이 공격하려고 했고, 그때 나타나 눈을 가렸던 큰 손. 손가락 틈으로 새어 들어오던 강한 빛. 이 사람이 나를 구해 준 건가? 그날도 눈을 가리느라 맞닿았던 살갗으로 가이딩이 되는 감각이 일었던 걸 보면 에스퍼가 맞긴 할 텐데.

그런데 목소리가 조금 다른 듯싶었다. 그땐 더 낮고 거칠었던 것 같은데. 무엇보다 지금처럼 존댓말을 하지도 않았고. 큰 눈으로 멀뚱히 응시하자 도화가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였다.

“없어진 것 있습니까?”

“아, 아뇨. 저 구해 주신 거 감사하다고 인사 안 드린 거 같아서.”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미루는 짐을 정리하다 말고 고개를 꾸벅 숙였다.

“…….”

병실을 지키는 것 말고 자신이 딱히 한 일은 없지만 어차피 한 번 보고 말 사람에게 구구절절 설명을 붙이긴 귀찮았기에 도화는 안경을 추켜올리기만 할 뿐이었다.

“가이드님 깨셨어요?”

병실 문이 열리고 간호사가 안으로 들어왔다. 가방을 뒤적대던 미루는 그 뒤로 정신없이 그들의 손에 끌려 갖가지 검사를 했다. 피곤한 몸을 이끌고 돌아왔을 때 병실은 텅 비어 있었다.

“……이름도 못 물어봤는데.”

그래도 감사하다고 미리 인사해서 다행이다. 이젠 다시 만날 일 없을 텐데. 미루가 아쉬운 마음을 애써 달랬다.

병원비는 센터 측에서 낼 테니 하루 더 머물다 가라는 권유에도 미루는 곧장 퇴원 준비를 했다. 공부 좀 하다가 대리라도 나가야지. 하루만 쉬어도 통장엔 구멍이 크게 났다. 그나마 다행인 건 오늘은 과외가 잡히지 않은 날이라는 거였다. 옷을 갈아입곤 어제보다 더 자잘하게 금이 간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제일 먼저 확인한 건 통장 잔고였다.

“아직도 안 들어왔네.”

미루는 가방을 메고 병실을 나서면서 학생 어머니께 문자를 남겼다.

어머니 안녕하세요^^ 기우 선생님 박미루입니다. 다름이 아니고 이번 달 수업비가 입금되지 않았더라구요. 늘 말일에 보내 주셨어서 혹시 변경이 생긴 건지 확인차 연락을 드립니다.

전송 버튼을 누르곤 너스 스테이션에 있는 간호사들에게 꾸벅 인사를 했다. 터덜터덜 걸음을 옮겨 엘리베이터 앞에 서서 답장만 기다리고 있자니 직원들의 대화가 들려왔다.

“심인우 에스퍼 TF 꾸리나 봐. 이번엔 새 가이드도 구할 거래.”

“엥? 뭔 TF?”

S 랭크 심인우 에스퍼. 미루도 익히 알 만큼 유명한 사람이었다.

“그건 모르겠는데. 왜, 너 해 보게? 관심 있어?”

“미쳤냐? 이 나이에 개고생하다 죽고 싶진 않다.”

“왜애, 그래도 TF 가이드 같은데.”

“말이 TF지, 다른 에스퍼들은 다 전담 있을 텐데. 거기 가면 심인우 전담하란 뜻 아니냐?”

TV나 기사에서는 대체 불가한 에스퍼라고 그를 소개했다. 하지만 가이드들 사이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가이드 커뮤니티에 떠도는 블랙리스트 가장 상위에 올라 있을 만큼 악명 높은 인물.

심인우 에스퍼는 거칠고 위험한 업무만 도맡는데, 팀으로는 잘 움직이지도 않고 간혹 TF나 결성해서 일을 해결했다. 전담 가이드가 없으니, 한 번 임무를 마치고 돌아오면 투입되는 가이드만 해도 수십이라고. 다들 하도 기피하는 탓에 억눌린 가이딩을 충당하다가 반은 버티지 못하고 기절하고, 나머지 절반은 도망을 간다나. 해서 약으로 컨디션을 조절할 수밖에 없다고 들었다.

“그럼 심인우 TF 들어가서 연봉 1억 받기, 평생 고정 연봉 3천 받기. 골라 봐.”

“무조건 후자. 가늘고 길게 삽시다.”

나라면 연봉 1억 선택할 텐데. 직원들의 시답지 않은 대화를 들으면서 속으로 대답한 미루는 막 도착한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뭐, 어디까지 소문이라지만 가이드 병원 간호사들도 저렇게 말하는 걸 보아하니 아예 뜬소문은 아닐지 몰랐다.

***

그 뒤로도 미루는 하루도 빠짐없이 바빴다. 틈틈이 공부했고, 시간이 날 때마다 돈을 벌었다. 늘 그렇듯이 바쁘고 피곤한 날을 보내다 어떤 날은 추운 방에 웅크려 눈물을 찔끔 흘리기도 했다. 이따금 푹신했던 가이드 병실이 떠올랐지만 갖지 못할 것에 미련을 둘 여유조차 없었다.

호프집 아르바이트가 끝난 건 2신데 집에 도착하니 3시가 다 되어 갔다. 택시비를 아낀답시고 걷는 게 익숙해져서 이젠 다리가 아프지도 않았다. 서둘러 씻은 뒤 바닥에 깐 이불에 몸을 쏙 집어넣었다. 곧 종강이라 진득하게 일할 곳이 필요한 터라 하품을 쩍, 하면서도 메일함을 확인했다.

신규 TF 기간제 가이드 채용 공고 ― 가이드 지원 팀

기간제? 졸음이 가득한 눈으로 메일을 눌렀다. 첨부된 파일을 켜는 것만 해도 한참이 걸려 졸 뻔했지만, 내용을 훑던 미루의 눈이 금세 반짝이기 시작했다.

얼추 방학과도 기간이 맞고, 시간도 9시부터 6시. 위치가 센터이긴 하지만 숙식까지 제공되는 데다 세후 수령액도 6백이 넘었다. 틈틈이 다른 일을 병행하면 방학 내내 공장에 붙어 있는 것보다 훨씬 많이 벌 수 있겠는데. 고민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하던 차에 가장 마지막 줄로 눈길이 향했다.

상기 TF는 심인우 외 4인의 에스퍼로 운영될 예정이며, 주 업무는 작전 및 에스퍼 서포트입니다. 또한 현장 지원 업무를 맡아 병행하게 됩니다.

“아…….”

전기장판만 겨우 켜진 이불 속에 몸을 웅크린 미루가 숨을 길게 늘였다. 팀 가이드로 들어가도, 전담이 없는 심인우를 주로 맡을 테니 페이가 센 거였구나. 언뜻 병원에서 들었던 간호사들의 대화가 떠올랐다.

심인우 TF 들어가서 월 6백 벌기, 하루에 세 시간 자면서 월 3백 벌기.

“고민할 것도 없지. 내 처지에.”

거기다 퇴근 후 대리나 과외만 해도 7, 8백만 원은 벌 텐데. 지원 자격과 마감일을 확인한 미루는 눈을 뜨자마자 지원서를 넣어야겠다고 다짐했다.

“이거 되면 세 시간씩 안 자도 되겠다.”

안 그래도 잠이 부족해서 너무 힘들었는데, 됐으면 좋겠다. 느릿하게 깜빡이던 눈은 곧 조용히 감겼다. 피곤했던 하루가 드디어 끝이 났다.

종강 이틀 전, 그러니까 지원서 마감 날로부터 하루가 지난 시점에 연락이 왔다. 면접은 바로 다음 날로 잡혔고 시간은 아침 일찍부터였다.

면접 대기실이라고 쓰인 곳에 가만히 앉아 있자니 응시자들이 하나둘 모였는데, 손에 꼽을 만큼 적은 수였다. 그마저도 몇몇은 화장실을 가는 척하더니 돌아오지 않았다. 대기실에 남은 건 미루를 포함해 세 사람뿐. 적막 속에 앉아 있는 응시자들 앞으로 직원 하나가 불쑥 튀어나왔다.

“면접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 일정 설명을 드리자면, 간략한 인터뷰 후 일대일 가이딩 테스트를 거칠 예정입니다. 혹시 가이딩 불가하신 분?”

“…….”

저마다 눈을 맞추며 무언의 대화를 나눴다. 면접과 동시에 가이딩이라니, 미리 알려 줬으면 마음의 준비라도 했을 텐데. 미루는 마지막으로 가이딩을 했던 때를 떠올리며 가만히 주먹을 쥐었다. 그때 면접자 하나가 조심스러운 질문을 꺼냈다.

“저어……. 테스트 대상은 누구인가요?”

“음.”

직원이 말끝을 끌면서 손목에 채워진 시계를 확인했다.

“애매한데. 딱 맞춰 복귀하면 TF 팀장님이 들어오실 거고, 아니면 다른 팀원들이 되겠죠?”

“아아.”

팀장이라면 심인우 에스퍼를 말하는 거겠지? 가이드를 혼수상태에 빠트릴 만큼 거칠다던데 일대일 가이딩을 할 수 있는 건가. 면접 보다가 다치는 것도…… 보상해 주겠지? 미루는 괜히 허리를 곧추세우며 마른침을 삼켰다.

“박미루 가이드?”

“네, 네.”

대기실에 앉아 있던 미루가 조용히 손을 들었다. 권태로운 표정의 직원은 입꼬리만 부드럽게 올린 채 손짓했다. 영혼이라고는 전혀 담기지 않은 미소에 괜히 더 위압감이 느껴졌다.

“이쪽으로 오세요.”

“네.”

방긋 웃은 여자가 면접실 안쪽 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안에는 익숙한 남자가 앉아 있었다. 이마가 드러나게 올린 머리와 안경, 아무 감정 없어 보이는 얼굴.

“어?”

“거기 앉으세요.”

“아, 네.”

병원에서 그렇게 가 버린 뒤로 다시 만날 줄은 몰랐는데, 심인우 에스퍼와 같은 팀인 모양이었다. 그래도 아는 얼굴이 있어 그런지 긴장이 확 풀리는 듯도 했다.

면접실은 원래 회의실로 이용되는지, 긴 타원형 테이블이 놓여 있었고 남자의 맞은편 자리 의자가 뒤로 빠진 채였다. 그 자리에 미루가 조심스럽게 앉자 도화가 힐끔 시간을 확인하더니 서류를 뒤적였다.

“가이드 이론, 실습 성적은 좋은데. 지원 경험은 없네요.”

“매칭 신청은 해 뒀는데, 랭킹이 애매해서 어려웠던 것 같습니다.”

이것도 면접이라고 허벅지 위에 올려 둔 주먹 새로 땀이 차는 듯했다.

“TF 합류하면 외부 일은 병행 못 합니다. 아르바이트를 많이 하던데, 이 기간 동안은 정리해야 될 겁니다. 그래도 괜찮습니까?”

“아…….”

당연히 될 줄 알았는데. 생각지도 못했던 부분이라 미루가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외부 활동을 못 한다고 해도, 알바 여러 개를 굴리는 것보다 이쪽이 훨씬 수입이 좋았다. 한마디로 미루 앞에 놓인 선택지 중 가장 좋은 셈이었다. 그게 다들 기피하고 맡기 싫어하는 그 임무였지만 말이다.

“괜찮습니다.”

“그래요?”

이력서에 무어라 빠르게 적던 도화가 안경을 추켜올렸다. 안경알 너머로 보이는 날카로운 시선에 낡은 구두 안에 든 발이 꼼지락댔다.

“입소는 언제부터 가능하죠?”

“……내일부터도 괜찮습니다.”

잡아 둔 알바를 정리하는 게 좀 곤란하긴 하겠지만 그래도 지금으로선 이만한 일이 없었다.

아아, 도화는 별 감흥 없는 얼굴을 끄덕이다 이내 펜을 내려 두었다. 그러곤 갑자기 이력서를 정리해 챙기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미루가 의아하단 듯 눈을 크게 뜨고 그의 움직임만 좇았다. 둥근 테이블 끝부분으로 향한 도화는 의자를 하나 더 끌어 두 사람이 앉을 자리를 만든 후 그 위에 이력서를 올려놓았다.

“이리 와 봐요.”

“아, 네.”

영문도 모르면서 미루는 시키는 대로 벌떡 일어났다. 카펫 재질의 바닥이라 걸을 때조차 아무 소리가 나지 않았다. 의자에 엉덩이를 붙이자마자 도화가 문을 벌컥 열었다. 나가는 건가? 면접은 이대로 끝인가? 무슨 상황인가 싶어 고개를 비스듬히 틀어 등 뒤를 확인했다.

그때 문이 열렸고, 가장 먼저 재가 덕지덕지 묻은 전투화가 보였다. 검은 바지도 마찬가지로 엉망이었다. 찬찬히 시선을 올리자 몸에 딱 들어맞는 전투복이 보이고, 피가 묻은 큰 손, 깊은 상처가 난 얼굴이 차례로 들어왔다. 열린 문으로 성큼 들어서는 거구의 남자를 보고 미루가 작게 입을 벌렸다.

“아.”

얼굴보다도 이름을 더 많이 들어 봤던 사람. 심인우 에스퍼였다. TV로 봤을 때와는 달리 아름다운 인상이 강했지만, 동시에 소문처럼 냉랭한 기운이 가득한 얼굴이었다. 인우가 안으로 들어서자 공기부터 달라졌다. 건조하고 삭막하던 주변으로 뜨끈한 열기가 끼쳐 오며 알 수 없는 긴장감이 흘렀다. 미루가 마른침을 꿀떡 삼키며 아랫입술을 잘근 씹었다.

“밖에 있겠습니다.”

그 말만 남겨 버리고 도화가 밖으로 나갔다. 성큼성큼 걸어온 인우는 미루 옆 빈 의자에 털썩 앉았다. 그냥 키와 덩치가 큰 사람이라고 여기면 될 일인데, 위압감에 완전히 짓눌려 손가락 하나도 까딱할 수가 없었다.

“손.”

“…….”

짧은 한 마디였지만 분명 귀에 익었다. 어디서 들어 본 목소린데……. 미루가 눈을 굴리며 기억을 뒤적이는 사이 머리 위에서 재차 낮은 음성이 떨어졌다.

“손 달라는 말 못 들었나.”

“아, 네.”

일대일 가이딩 테스트를 하기로 했던 걸 이제야 떠올리곤 무슨 상황인지 눈치챘다. 미루가 서둘러 자신 쪽을 향해 뻗어진 큰 손바닥을 살짝 감쌌다. 그러자 커다란 손이 미루의 하얀 손을 잡아먹듯 덮쳤다.

뜨겁고 강한 힘. 그저 손을 잡는 행위에도 이런 기분이 들 수 있는 건가. 심인우 에스퍼를 둘러싼 것이 영 뜬소문은 아닌 듯싶었다. 닿은 살결 사이로 저릿한 감각이 이어지는 내내 미루는 피가 묻은 손등만 뚫어지게 응시했다.

“흐음.”

숨을 길게 늘이는 소리에 마른 몸이 흠칫 떨렸지만, 인우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나머지 손으로 테이블에 놓인 이력서를 들고 찬찬히 읽기 시작했다.

“박미루?”

“네, 맞습니다.”

그 뒤로 가만히 서류를 들여다보기만 했다. 미루는 그제야 인우를 제대로 살필 수 있었다. 그의 피는 아닌지 굳은 피 주변으로 벌어진 상처는 보이지 않았다. 힐끔 더 시선을 들자 턱 부근에 깊게 베인 상처가 눈에 들어왔다. 어쩌다 저렇게 다쳤을까. 엄청 아팠을 거 같다. 자신이라면 저 정도 부상에 아프다고 울기만 했을 텐데, 정작 다친 당사자는 아무 고통을 모르는 양 무심한 표정이었다.

“…….”

가만히 턱가의 상처를 보고 있자니 주변 살갗이 타들어 가듯 지글지글 일었다. 이내 조금씩 붉은 살이 차오르더니 그 틈이 채워졌다. 미세하지만 끝부분부터 찬찬히 상처가 아물어 갔다. 몇 년 전에 가이딩 실습은 해 봤지만 벌어진 살이 붙는 건 눈앞에서 처음 보는 터라, 미루의 눈에는 얼핏 공포가 스몄다.

성촌 공장 사거리에서 구조했던 가이드입니다.

인우는 도화가 이력서 맨 아래에 짧게 써 둔 메모를 찬찬히 읽었다. 아, 그때 벌벌 떨던 애? 갓 발현한 에스퍼 앞에서도 그렇게 겁을 먹더니 TF는 어떻게 지원했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니, 손바닥 아래로 미루의 손이 자꾸 움찔대는 게 느껴졌다. 인우가 가만히 시선을 돌렸다. 손바닥에 들어차던 작은 얼굴엔 공포가 가득했고, 상처를 향하고 있는 눈은 더 커질 수도 없을 만큼 커진 채였다.

“…….”

이렇게 보니 그때 걔 맞네. 그날도 딱 이렇게 겁을 먹은 표정을 하고 있었지. 구해 줄 수밖에 없게. 입꼬리를 슬쩍 밀어 올린 인우가 서류를 내려 두었다. 그러곤 피가 묻지 않은 손을 뻗었다.

“눈 감아.”

큰 눈을 가리자 손바닥 아래로 파들파들 떨리는 속눈썹이 스쳤다. 그 감촉이 꼭 가이딩 기운처럼 간질간질하고 솜털 같았다. 그때도 느꼈지만 가이딩이 나쁘지 않았다. 인우의 검은 눈동자가 파르르 떨리는 미루의 어깨부터 시작해, 정장 바지 아래로 보이는 하얀 발목까지 느리고 진득하게 훑어 내렸다. 고통밖에 없던 몸속에 조금씩 기운이 돌기 시작했다. 숨통이 서서히 트였다. 역시 나쁘지 않네.

“어……?”

시야가 가려진 채로 눈을 깜빡이던 미루의 머릿속에 번개처럼 기억이 들이쳤다. 동일한 행동과 같은 목소리.

“눈 감아.”

발현된 에스퍼에게 쫓기던 밤, 다리 위에서 들었던 음성이 분명했다. 잠시라도 저를 안심시켜 주던 그 손도 맞았다. 반가움인지 놀라움인지 몸이 경련하듯 작게 떨렸다. 그때 나를 구해 준 게 심인우 에스퍼였구나. 그 무섭다던 사람이 나를…….

너무 긴장한 탓인지 머리가 뜨겁고 어지러웠다. 닿은 손이 더 깊이 감겨 올수록 그런 감각은 한층 강해졌다. 눈을 감고 있어서 그런가, 상체가 중심을 잃고 작게 휘청대기까지 했다. 그러자 얼굴을 반이나 덮고 있던 손이 금세 떨어져 나갔다.

“가 봐.”

끝난 건가? 가이드 수십이 달라붙어도 어렵다던 사람인데 이 정도만 받고 끝인 걸까? 가슴팍과 뺨을 더듬어 자신이 멀쩡하다는 걸 확인하며 힐끔 인우를 살폈다. 턱에 난 상처가 조금 아물긴 했지만 여전히 보는 사람이 고통스러울 만큼 벌어진 상태였다. 입술만 벙긋대던 미루가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괜찮으신가요?”

얇은 손가락으로 제 턱을 가리키며 묻는 말에 인우가 숨을 길게 늘였다. 상처가 아물고는 있어도 속은 그렇지 않았다. 이능을 전부 끌어 쓴 양 뜨겁게 들끓으며 빠르게 박동했다. 그래도 전처럼 죽는 게 낫겠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 걸 보면, 이게 괜찮은 건가.

“글쎄.”

손끝을 맞비비며 감각을 되짚었다. 나쁘지 않은 것 같기도 하고. 인우가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찢긴 턱에서 어렵게 시선을 돌린 미루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에, 그럼 가 보겠습니다.”

말은 그렇게 해 놓고선 옴짝달싹하지 않는다. 인우가 힐끔 쳐다보자 하얀 얼굴에 당황한 것처럼 어색한 미소가 스몄다.

“그, 손을 놔주셔야 갈 수가 있어서요…….”

“아.”

인우의 눈길이 단단히 얽혀서 포개진 손으로 향했다. 새빨간 입술이 꼭 상흔처럼 벌어지며 미소와 비슷한 곡선을 만들어 냈다.

“…….”

괜찮은 모양이네. 인우는 그렇게 제 상태를 진단했다. 엄지로 미루의 손바닥을 긁듯이 쓸고는 놓아주었다. 손끝에 뜨끈한 체온과 보드라운 지문의 감촉이 선연했다. 미루는 인우가 풀어 주고 나서야 자유로워진 몸을 천천히 일으켰다. 그리고 문고리를 잡은 채 잠시 머뭇댔다.

“그, 그때 도와주신 분 맞죠?”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이며 어깨를 으쓱이는 행동이 대답 대신 뒤따랐다. 꾸벅 인사를 한 미루가 인사를 건넸다.

“목소리 들으니까 기억이 나서요. 감사합니다. 인사를 못 드렸던 것 같은데, 정말 감사합니다. 덕분에 살았어요, 아니. 그 정도로 위험했던 건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도와주셔서 감사했습니다.”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은 인우가 피가 굳은 손을 휘휘 저었다. 움찔거린 미루는 마지막으로 고개를 한 번 더 꾸벅 숙이고는 얼른 문을 열었다. 앞에서 대기하고 있던 직원이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러곤 또 으레 지어 보이던 영업용 미소를 그려 냈다.

“따라오세요.”

미루가 직원의 뒤를 졸졸 따라 대기실로 향하며 조용한 복도를 두리번댔다. 아까 그 안경 쓴 남자는 보이지도 않네.

“연락은 곧 갈 거예요.”

“아, 네.”

“짐 챙기시고 저쪽 엘리베이터 타시면 됩니다.”

“어?”

대기실은 텅 비어 있었다. 의자 위에 올려 둔 짐도 미루의 것뿐. 멀뚱히 서서 갸웃대는 미루를 본 직원이 작게 귓속말을 했다.

“다 도망가는 바람에 어쩌다 보니 단독 면접이었네요. 오늘 수고했어요.”

“……네.”

그럼 나 합격할 수 있는 건가. 미루는 꽤 설레는 마음으로 센터를 벗어났다.

같은 시간. 미루가 나간 빈 회의실로 도화가 들어섰다. 인우는 가만히 이력서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겨우 한 장짜리 서류인데 몹시도 집중한 모습이었다.

“어떠신가요. 랭크가 좀 낮아서 돌려보낼까도 했었는데.”

“흐음.”

도화의 말에 인우는 가만히 제 손끝을 쓸어 보았다. 아직 지문 새에 남아 있는 체온. 박미루 가이드는 랭크가 낮아도 기운은 맑고 강했다. 덕분에 고통은 잠잠해졌지만 귓가엔 작은 목소리가 연신 맴돌았다. 가이드에게 살려 줘서 고맙단 인사를 들은 게 처음이라 그런가.

“약에 너무 길들어졌나. 잠깐이었는데도 효과가 꽤 좋네.”

“기운이 잘 맞는 모양입니다.”

사거리에서 쓰러진 미루를 안고 있던 인우의 얼굴이 도화의 머릿속에서 떠나지를 않았다. 지금도 비슷한 표정이었다. 지원서 사이에 미루가 있는 걸 보고 주저하지 않고 부른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어쩌면 C 랭크 가이드가 인우의 유일한 가이드가 될지도 모를 테니까.

“랭크야 교육받으면 오를 테고. 그때까진…… 못 버틸 이유도 없지.”

인우라면 그렇게 말할 줄 알았다. 더는 약에 절어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보지 않아도 될 날이 올까. 어렴풋한 기대가 피어오르면서 말갛고 앳된 얼굴이 다시금 떠올랐다.

“예, 연락 넣겠습니다.”

그리고 정확히 50분 후. 미루는 집에 도착하는 동시에 합격 연락을 받았다.

***

온갖 일을 해 보긴 했지만 가이딩으로 돈을 버는 건 처음이라 꽤 긴장이 됐다. 잠도 두 시간밖에 못 잤을 정도로. 입을 가리고 작게 하품을 한 미루가 허벅지에 올려 둔 짐 가방을 끌어안았다.

센터 로비에 8시까지 오랬는데, 도착하니 7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었다. 너무 일찍 도착하긴 했네. 40분쯤에 연락하는 건 괜찮겠지? 그러면 직원분이 오시려나. 연락을 해 준 건 남자였는데, 그때 안경 쓰신 분인가. 그런 실없는 생각으로 시간을 보내며 가만히 바닥에 시선을 두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시야로 운동화가 들어섰다.

“아직 약속 시간이 아닌데.”

익숙한 음성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운동을 하다 온 건지, 씻고 나온 건지 가벼운 차림을 한 인우의 머리칼은 젖어 있었다.

“아, 안녕하세요. 저 조금 일찍 도착해서, 기다리고 있었어요.”

쭈뼛대는 마른 몸을 느릿하게 훑은 인우가 손목에 채워진 시계를 톡톡 두드렸다. 그러곤 휙 등을 돌려 앞장을 섰다.

“따라와.”

“네에.”

미루가 다급하게 뒤를 쫓으며 가방을 둘러멨다. 몇 번 와 보긴 했어도 센터 지리가 익숙하지 않았기에 길이라도 잃을까 싶어서. 두어 걸음쯤 거리를 두고 걷자니 인우가 일순 발길을 딱 멈추었다. 비스듬히 고개를 틀어 자신을 응시하는 눈길에 괜히 겁이 나고 긴장됐다. 가방끈을 꽉 쥐고 조용히 올려다보는데 그가 갑자기 팔을 뻗었다.

“…….”

미루는 저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고 어깨를 움츠렸다. 딱히 위협을 한 건 아니었으나 그냥 심인우 자체에서 풍겨 오는 위압감에 주눅이 들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어떠한 접촉도 느껴지지 않았다. 미루가 파르르 떨리는 눈을 한쪽 밀어 떴다.

“왜 겁을 먹었지.”

“…….”

“누가 보면 내가 잡아먹는 줄 알겠어.”

눈이 마주치고 나서야 인우가 팔을 더 뻗었다. 곧이어 커다란 손이 미루가 메고 있는 가방 손잡이를 꽉 틀어쥐고 당겼다. 어어, 멍청한 소리를 내며 딸려 간 미루는 인우의 옆에 나란히 선 꼴이 되었다.

“식사는 아직일 거 같은데.”

“……네에, 아직이요.”

미루의 대답을 들은 인우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딜 가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가방 손잡이를 놓지 않은 채라 거의 끌려가는 모양새였다. 미루는 혹시라도 발이 엉켜 넘어질까 봐 정신을 바짝 차리고 걸음을 내디뎠다.

“먹어.”

“네. 그, 저기…… 에스퍼님은 안 드시나요?”

인우를 뭐라고 불러야 할지 몰라 망설이던 미루가 어색하게 말을 붙였다. 인우는 음식이 담긴 식판만 밀어 줄 뿐이었다.

“응.”

단호한 대답에 더 말을 잇지 못한 미루가 쭈뼛대며 수저를 들었다. 센터 식당은 학식과는 차원이 달랐다. 한식, 양식, 중식 식사는 종류별로 메뉴가 달랐고 가짓수도 많았다. 아침은 잘 먹지 않는 편인 미루의 입맛을 확 돋울 만큼 먹음직스럽기도 했고. 하지만 수저질은 느릿했다. 인우가 맞은편에 앉아 턱을 괴고 아예 구경하는 바람에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도 모를 상태였다.

“알겠지만 팀원들은 웬만하면 전담 가이드가 있어. 팀 가이드라고 해도 나를 서포트하는 일이 대부분일 거야.”

“네.”

대충은 예상했던 일이라 미루는 놀라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보호자 동의는 받아 왔나?”

“아, 아니요. 아직 서류를 못 받았어요.”

그런 서류도 필요하구나, 전화로는 못 들었는데. 급해서 우선 그냥 부르신 건가. 나는 이루한테 받아야 할 텐데 병원까지 다녀와야 하나. 사념에 빠진 터라 음식을 씹는 턱이 느릿하게 움직였다.

“그럼 신경 쓰지 마. 알아서 할 테니까.”

“예에. 저, 그리고…… 열심히 할게요. 붙여 주신 거 후회 안 하시게요.”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을 빤히 보던 인우가 후식으로 나온 요구르트 껍질을 까서 내밀었다.

“다 비우면 일어나지.”

“…….”

미루가 요구르트를 입에 털어 넣으며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식사를 마쳤는데도 7시 30분밖에 되지 않았다. 남는 시간 동안 계속 인우와 단둘이 있어야 하나.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니 인우가 또다시 가방 손잡이를 잡고선 미루를 끌어당겼다.

“지낼 곳을 알려 줄게.”

“네네.”

두 사람은 나란한 걸음으로 센터를 벗어났다. 숙소가 따로 떨어져 있는 건가? 궁금한 점은 많은데 상대가 인우인지라 미루는 쉽게 질문을 꺼낼 수도 없었다.

그저 조용히 이끄는 대로 따라가자니, 이내 그가 한 낮은 건물 앞에 멈춰 섰다. 북적이는 센터와 다르게 주변은 무척 고요했고 사람들의 발길도 뜸했다. 유리 같기도 하고, 실드 같기도 한 두꺼운 층이 돔을 이뤘고 그 안에는 단독 주택 형태의 건물이 있었다. 심지어 출입구엔 ‘심인우’라고 쓰여 있기까지 했다.

심인우 에스퍼가 혼자 지내는 곳인 듯한데 제가 머물 데도 여기란 소린가? 팀 가이드는 개인 숙소를 준다고 들었는데. 당황한 듯 눈을 굴리던 미루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센터 숙소가…… 아니네요?”

무서운 에스퍼의 심기를 최대한 거스르지 않는 선에서 단어를 고르고 골랐다.

“응.”

“어…… 다른 가이드분들도 여기서 지내시나요?”

“아니.”

단호한 대답이 이어졌다. 지문과 손목에 찬 시계를 차례로 출입구 렌즈 앞에 비추자 문이 천천히 열렸다.

“팀원들은 원래 지내던 곳에서 지낼 거야.”

“아아.”

“왜. 나랑 있는 게 불편해?”

“아뇨! 아니요, 그런 거 아닌데요.”

바람 소리가 날 만큼 빠르게 손사래를 쳐 댔다. 혹시나 오해할까 봐 최대한 무해한 표정을 지으면서 말이다. 잠깐 서늘해졌던 시선이 이내 거둬지며 인우가 열린 문틈으로 미루를 밀어 넣었다.

“그럼 됐고.”

등 뒤에서 작게 중얼댄 말은 미루의 발소리에 파묻혔다.

혼자 지내면서 잠만 자고 가는 건지 집 안은 무척 삭막했다. 꼭 모델 하우스처럼. 하지만 미루가 지낼 방이라고 데려온 곳은 온도가 달랐다. 딱 이 방에만 생기가 도는 느낌이랄까. 침대와 옷장, 책상, 커튼, 작은 화분, 액자. 심지어 전부 새 가구인지 딱 봐도 아무 손길을 타지 않은 듯했고, 꼭 자신이 오길 기다렸다는 듯 완벽하게 준비된 공간처럼 보이기도 했다.

“여기서 지내면 돼.”

“네에.”

미루가 낯선 눈길로 방 안을 훑었다. 이루와 부대끼며 살던 단칸방보다도 훨씬 좋았다. 옷장 근처에 짐이 든 가방을 조용히 내려놓고는 이곳저곳을 살폈다.

“훈련 있다고 들었는데, 언제인가요?”

“……흐음.”

팔짱을 낀 채 문에 비스듬히 기대서 있던 인우가 숨을 길게 늘였다. 훈련이면 당장 30분 뒤부터였다. 8시부터 6시. 식사 시간과 휴식 시간을 제외하고는 전부 훈련과 회의를 했고, 급한 작전이 있으면 지원도 나갔다. 그래서 미루를 그 이른 시간에 부른 거였지만, 졸음이 남은 저 눈을 보아하니 뭘 제대로 소화할 수나 있을까 싶었다.

“당장은 합류할 필요 없어.”

“아아, 네. 그렇구나.”

“주방에 요깃거리 있으니 점심 챙기고. 쉬어.”

“네에.”

인우가 곧장 몸을 돌리고 방을 나섰다. 덩그러니 남은 미루는 침대에 앉아 가만히 시트를 쓸었다. 엄청 따뜻할 것 같은 보드라운 이불. 전기장판을 최대치로 올려야 겨우 찬 기운이 가는 제 초라한 방과는 달랐다. 이루 퇴원할 때 맞춰서 이런 이불 하나 사 줘야지. 미루는 한참이나 이불을 쓸며 앉아 있었다.

옷을 갈아입은 인우는 잠시 일을 본다며 나갔고, 미루는 느긋하게 숙소를 둘러보며 시간을 보냈다. 돔 내부에선 돌아다녀도 된다고 했으니 마당에 나가 보기도 했다. 바깥도 구경하고 싶은데, 들어올 때 지문과 시계를 렌즈에 비추던 인우를 떠올리고는 금방 포기했다.

매일 쉬지 않고 몸을 움직이며 일을 해서 그런가, 이렇게 여유를 부리고 있자니 몸이 축 늘어졌다. 방으로 돌아온 미루가 푹신한 시트 위에 엎드렸다. 딱 10분만 쉬고 공부해야지. 토익이랑, 자격증 공부……. 깜빡이던 눈이 이내 조용히 감겼다.

“으음.”

이마를 간질이는 감각에 미루가 눈을 찡그렸다. 고개를 돌려도 집요하게 따라붙었다. 커튼인가 머리카락인가. 떨쳐 내려고 힘없는 손을 들어 올리자 뜨끈한 체온이 느껴졌다. 눈이 깜빡이더니 느릿하게 뜨였다. 시야가 잡히고 서늘한 표정의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헉. 오, 오셨어요. 언제 잠들었지.”

미루가 허둥대며 몸을 일으켰다. 10분만 자려고 했는데 창밖은 이미 어둑했다. 이불이 너무 푹신하고 따뜻해서 저도 모르게 깊게 잠들었나.

“식사도 거르고 잔 모양이네.”

“자, 잠깐 쉬려고 했는데, 이렇게 된 줄 몰랐어요.”

혼을 낸 것도 아닌데 주눅이 든 채로 변명을 늘어놓았다. 침대 맡에 의자를 두고 앉아 있던 인우는 헝클어진 머리칼을 살살 정리해 줄 뿐이었다. 무척 자연스러운 손길이라 이상함을 느낄 겨를도 없었다.

“나와 봐.”

그 말만 남기고 인우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네, 네.”

손등으로 눈을 비빈 미루가 침대 아래로 발을 내렸다. 그러곤 여전히 전투복을 걸친 인우의 뒤를 급하게 따라나섰다. 거실에는 익숙한 얼굴이 있었다. 인우와 달리 전투복 차림이 아닌 도화였다.

“안녕하세요.”

“예.”

두 사람이 인사 나누는 소리를 듣던 인우의 발길이 잠시 멈칫하더니 이내 다시 움직였다. 미루는 쭈뼛대며 소파로 향했다. 테이블엔 서류 몇 장이 늘어져 있었는데 ‘보호자 입소 동의서’라고 적힌 종이도 보였다. 그 아래엔 박이루라고 꾹꾹 눌린 글씨도 쓰여 있었다. 제 동생의 이름에 미루의 눈이 반짝였다.

“저기…….”

“도화입니다.”

“아, 저는 박미루입니다.”

미루가 다급하게 꾸벅 인사를 하며 소파에 앉았다.

“혹시요, 제 동생한테 다녀오셨어요?”

“예.”

동그랗게 뜬 눈이 동생과 무척이나 닮은 것 같았다. 동생이 조금 더 앳되고 유약한 인상이긴 하지만.

“혹시 컨디션은 어때 보여요? 전화를 하긴 했는데, 못 본 지 열흘쯤 돼서.”

도화가 기억을 더듬었다. 저를 보고 겁을 먹은 듯 쭈뼛대면서도 제 형과 똑같은 질문을 했었지.

“저희 형 괜찮은가요? 어제 목소리가 좀 피곤한 거 같아서 걱정됐거든요.”

“괜찮습니다. 아픈 곳도 없어 보이고요.”

“다행이다.”

뒤이어 말갛게 웃던 얼굴이 떠올랐다. 하얀 얼굴 위, 봉긋 솟은 뺨에는 제법 생기도 도는 듯싶었고. 도화가 안경을 추켜올리며 대답했다.

“괜찮습니다. 아픈 곳도 없어 보이고요.”

“다행이네요.”

형제가 어쩜 이렇게 똑같은지. 도화는 조용히 가슴을 쓸어내리는 미루를 가만히 응시하다 평소라면 하지도 않을 질문을 꺼냈다.

“불편한 건 없습니까?”

“네, 아직. 오늘은 낮잠 잔 것밖에 한 게 없는데요.”

머쓱한 얼굴로 뺨을 긁적이는 미루를 보며 도화는 묘한 기분을 느꼈다. 센터에서 지내는 이들 대부분은 무척이나 건조하고 미련 없는 삶을 살고 있다. 도화나 인우도 매한가지였다. 현장에서 죽는 게 값진 죽음이라고 여기는 사람들이었으니까.

그런 연유로 이렇게나 열심히 살고, 삶과 가족을 향한 미련이 흘러넘치는 존재가 신기하면서도 부러웠다. 그래서 조금 더 시선이 가고 마음이 쓰이는지도 모르겠다. 도화가 목소리를 낮추고 미루에게만 들릴 만큼 작게 속삭였다.

“팀장님께 말 못 할 불편한 사항 생기면, 저한테 말하면 됩니다.”

“아. 네에, 알겠습니다.”

덩달아 목소리를 낮춘 미루가 작게 고개를 주억였다. 그때 도화는 어디선가 자신을 응시하는 시선을 인지했다. 고개를 들자 주방에서 무언가를 챙겨 나오는 인우와 눈이 마주쳤다.

“…….”

언제부터 이쪽을 쳐다보고 있던 건지, 인우는 말없이 빤한 시선을 내보였다. 저를 보는 건가 아니면 이 애를 보고 있던 건가. 눈길이 묘하다고 생각하는 사이 인우가 느릿한 걸음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손에 든 쟁반엔 샌드위치와 주스가 담겨 있었다. 전혀 어울리지 않는 광경이라 도화의 눈썹이 작게 들썩였다.

“서명 받으러 와 놓고 뭘 그렇게 떠들고 있어.”

딴소리 말고 얼른 설명이나 하라는 듯 살벌한 표정이었다. 도화는 웃음이 터지려는 걸 참고 서류를 뒤적였다. 기껏 생각해서 가이드를 구해 줬음에도 귀찮다고 거들떠도 안 보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정말이지 쓸데없는 고민이었다.

티를 내지는 않아도 제 사수는 이 가이드가 꽤 마음에 드는 모양이었다. 온 집 안 불을 모조리 끄고 살던 이가 이렇게 환하게 불을 켜 놓고, 가이드 숙소에 있어야 할 사람에게 방도 내주고 끼니까지 챙기다니. 사수가 저런 얼굴을 할 줄은 몰랐다. 작게 고개를 젓던 도화가 준비된 서류를 꺼냈다.

“TF 팀원 명단입니다. 이건 지금까지 추린 자료들이니 한번 읽어 보면 되고요. 작전 사이즈가 커서 숙지해야 할 사항이 좀 많네요. 그리고 이건 스케줄인데 박미루 가이드는 내일부턴 8시까지―.”

“도화야.”

“예.”

갑자기 말을 자르는 탓에 도화가 고개를 틀었다. 소파에 앉은 인우는 저를 불러 놓고도 미루를 응시하고 있었다.

“일정은 내가 정리해 주려고 하는데.”

“아. 예, 그러시죠.”

가운데 껴서 멀뚱히 앉아 있던 미루가 눈치를 보며 양쪽을 힐끔댔다. 그러다 인우와 시선이 마주치는 바람에 어깨를 작게 움찔 떨었다.

“안 먹니.”

“……예? 아 머, 먹을게요. 감사합니다, 잘 먹겠습니다.”

제 몫인 줄도 몰랐는지 미루가 허겁지겁 샌드위치를 쥐었다. 샌드위치를 베어 물고 씹는 사이 하얀 볼이 불룩 튀어나왔다가 홀쭉해지기를 반복했다. 꿀떡 삼키는 목울대를 확인한 다음에야 인우가 서류를 살폈다. 오자마자 확인했어야 하는 일이지만 도화도 인우를 재촉할 순 없었다.

“사인만 하면 끝나는 건가?”

“예, 바로 결재 올리겠습니다.”

계약서 하단 책임자란에 이름과 서명을 적어 넣은 인우가 펜을 넘겼다. 뒤이어 미루가 볼을 우물대며 계약서를 훑었다. 맹하게 생겨서 그냥 바로 사인할 줄 알았는데, 미루는 꽤 꼼꼼하게 서류를 읽어 내려갔다.

얼마 되지 않는 시간이지만 인우는 미루의 뺨을 뚫어지게 관찰했다. 피부가 엄청 부드러워 보였다. 만지면 크림처럼 푹 파여 자국이 남는 건 아닐까. 스물한 살인데도 수염 자국이 별로 없네. 집요하게 말간 얼굴을 구경하는 사이, 큰 눈이 인우를 향했다.

“다 했어요.”

얌전히 깜빡이는 속눈썹을 보고 있자니 저도 모르게 목울대가 일렁였다. 이능을 쏟아부었을 때처럼 입술이 바싹 마르기까지 하는 게 영 낯선 기분이었다.

“어디 봐.”

인우가 상체를 기울이며 왼손을 뻗었다. 오른팔로는 소파 등받이를 쥐었더니 팔 안쪽에 미루의 마른 몸이 닿아 오는 게 선명하게 느껴졌다. 거의 미루를 덮치듯이 몸을 기울인 뒤 빈칸이 전부 채워진 서류를 주워 들었다. 또박또박 눌러쓴 이름을 보니 입천장이 간지러워져 혀끝으로 슬쩍 긁었다.

“다 됐네. 여기.”

미루 옆에 앉은 도화에게 종이를 건넸다. 기울인 가슴팍에 미루의 어깨가 슬쩍 닿았다 떨어졌다.

“예. 그럼 저는 이만 가 볼 테니 쉬세요.”

“예에, 안녕히 가세요.”

도화가 짐을 챙기고 일어서자 미루도 덩달아 몸을 일으켰다. 순식간에 빈 품을 보고 인우는 알 수 없는 묘한 기분에 휩싸였다. 그저 가이딩 몇 번 느껴 봤을 뿐 전담 가이드도 아닌데, 잠깐 떨어졌다고 이리 아쉬운 마음이 드는 이유가 뭔지. 기운이 잘 맞는 이를 처음 만나서 그런 건가.

“넌 다 먹고, 자.”

인우는 익숙하게 손을 말아 쥐고는 욕심을 추슬렀다. 아무래도 차가운 물로 씻어야 정신이 좀 들 듯싶었다.

“알겠습니다. 그런데 내일 일정은 뭔가요?”

“일정…….”

작게 곱씹은 인우가 빵 부스러기가 묻은 미루의 입술을 힐끔 쳐다봤다.

“식사 같이 하는 거.”

“식사요?”

훈련이나 회의, 가이딩 수업 따위를 예상하고 있던 미루의 얼굴에 물음표가 스쳤다.

“왜. 싫은가?”

“아뇨? 그게 아니고요. 저, 팀장님.”

아까 도화가 그렇게 불렀으니까 저도 팀장님이라고 해도 괜찮은 거겠지? 팀장님이란 발음을 뱉을 때 유독 미루의 표정이 조심스러웠다. 인우가 별다른 대꾸를 하지 않자 뒷말을 이어 갔다.

“혹시 필요하신가요?”

미루가 반쯤 줄어든 샌드위치를 내려 두고 가만히 손을 뻗었다. 제 쪽으로 내밀린 손바닥을 내려다보고 있자니, 인우는 기분이 또다시 묘해졌다. 그간 센터 생활을 하면서 누군가 이렇게 손을 먼저 내준 적이 있었나.

매번 자신과 닿기를 고통스러워하고, 두려워하고, 끔찍하다 여기기 바빴다. 에너지를 소진해 정신없는 와중에도 가이드들이 제 곁에 오기를 꺼린다는 것쯤은 잘 알았다. 그들에겐 자신의 모습이 괴물처럼 느껴졌을지도 모르지.

전담 가이드를 갖고 싶단 욕심도 접은 지 오래였다. 그래서 가이딩 보충제로 연명한 게 벌써 몇 년째였다. 다리 위에서 저 남자애의 얼굴을 만지며 다시 가이딩 기운을 그리기 전까지, 꼬박 5년이란 시간을 말이다.

인우는 하얀 손을 잡을 듯이 팔을 뻗어 놓고도 차마 체온을 쥐지 못했다. 그저 손목을 감싸 엄지손가락으로 맥박이 뛰는 부근만 지그시 누를 뿐이었다.

“……됐어.”

그마저도 5초도 되지 않아 손길이 떨어졌다. 인우가 등을 돌리는 걸 보며 미루는 큰 눈을 깜빡였다. 혹시 제가 뭘 실수한 건가. 그냥 할 일을 했을 뿐인데. 샌드위치 먹던 손을 내밀어서 싫으셨나? 인우의 표정이 갑자기 가라앉은 이유를 추측하며 쟁반 위를 깨끗하게 비워 냈다.

“잘 먹었습니다, 안녕히 주무세요.”

인우가 한참이나 나오지 않아 문밖에서 인사를 건넸다.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으나 그래도 괜찮았다. 씻고 침대에 눕자 언제 낮잠을 잤었냐는 듯 몸이 고단해졌다.

심인우 에스퍼와 한 공간에서 지낸 첫날. 속단하긴 이르지만 팀장님은 소문보다 무서운 사람이 아닐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어두운 천장을 보며 눈을 깜빡이던 미루는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깊은 잠에 빠졌다.

***

닷새 정도는 일정이라고 해야 인우와 밥을 먹는 것밖에 없었다. 그는 매일 2시부터 한 시간 정도 숙소에 머물긴 했지만 딱히 뭔가를 하진 않았다. 가만히 옆에 앉아 있거나, 먹을 걸 쥐여 주곤 턱을 괸 채 미루가 먹는 모습을 구경하다가 돌아갔다.

슬슬 긴장도 풀리고 무료한 생활에 좀이 쑤실 무렵이 되어서야 미루는 제대로 된 TF 훈련에 합류할 수 있었다. 아무것도 없다던 인우의 말과 다르게 일정은 무척이나 바쁘고 힘들었다.

그리고 눈치껏 알아차린 사실 하나. 인우가 매일 찾아오던 2시는 고된 훈련 중에 주어진 유일한 휴식 시간이라는 거. 훈련을 하다 보니 휴식이 얼마나 꿀맛 같고 귀한 건지 알게 됐다. 팀장님은 그 시간을 왜 자신에게 할애했을까. 이따금 그런 의문이 들기도 했지만 물어볼 수는 없었다.

“10분 남았다, 미루야. 버텨. 버티고 기운 내…….”

훈련이라길래 앉아서 가이딩 연습이나 하는 줄 알았는데 체력 단련이니 시뮬레이션이니, 정신없이 굴려지는 중이었다.

오늘은 도피 훈련을 한답시고 건물에 TF 가이드들을 가둬 놓고 이능을 쉼 없이 내리쳤다. 에스퍼에게 잡히지 않고 부상도 입지 않고 제한 시간까지 버텨야 했다. 아직 한 번도 성공해 본 적이 없었는데 이번엔 그래도 10분만 버티면 성공할 기미가 보였다. 미루가 턱에 맺힌 땀을 닦아 내며 작게 웃음을 삼켰다.

“선배가 먼저 기운 내요. 잡히기 전에 쓰러지겠어요.”

“에헤이, 내가?”

당장이라도 쓰러질 법한 얼굴을 해 놓고선 민영이 장난스럽게 미루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하지만 그 손길마저도 힘이 하나도 실리지 않은 채였다.

“근데 누가 시간 멈춰 놓은 거 아니냐? 아까도 10분 남았던 거 같은데.”

TF 팀 김정우 에스퍼 담당 가이드인 민영은 원래도 현장을 자주 나갔다던데, 이번 TF는 유독 힘들다고 했다. 이런 훈련은 처음인 데다 할 게 너무 많다고. 처음부터 이런 팀에 들어온 미루를 불쌍하다고 자주 표현하기도 했다.

“저도 그 생각 하긴 했어요. 두 시간 아까 끝난 거 같은데.”

“그치?”

큰 책상 아래 몸을 구기고 앉은 두 사람이 목소리를 낮춘 채 속닥였다. 그때였다. ‘팡!’ 거센 파열음과 함께 유리 조각이 우수수 떨어졌다. 주변이 조금 어두워진 걸 보니 책상 위에 달려 있던 전등이 터진 모양이었다. 미루가 어깨를 움츠리고 민영에게 찰싹 달라붙었다.

들킨 건가? 질끈 감았던 눈을 조용히 밀어 떴다. 먼지 하나 묻지 않은 전투화가 책상 앞으로 걸어왔다. 전투복 바지가 보이고, 이내 무릎을 굽힌 이의 얼굴이 드러났다.

“최민영, 박미루 가이드 아웃. 상황 종료.”

삐―. 상황 종료 무전에 맞춰 큰 경보음이 울렸다.

“아, 아웃이다.”

민영이 아깝다는 듯 작게 중얼대며 혀를 찼다. 미루도 꽤 아쉽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불쑥 팔이 뻗쳐 왔다.

“대화 소리가 너무 크네.”

책상 아래서 꺼내듯 당기는 강하고 거친 힘에 끌려 나오느라, 그가 무어라 말하는지 제대로 듣지도 못했다.

“예?”

눈을 크게 뜬 미루를 가만히 내려다보던 인우가 헝클어진 머리카락만 쓸어 정리해 주었다. 그러곤 단단히 쥐고 있던 팔을 놓아주더니 휙 몸을 틀었다.

“집합.”

짧은 한마디를 남긴 그가 성큼성큼 멀어져 갔다. 뒤를 따르려고 했지만 민영이 붙드는 바람에 발목이 묶이고 말았다.

“선배를 두고 어딜 먼저 가!”

얼른 그녀의 손을 잡고 책상에서 나오는 걸 도왔다. 그러고 나니 이미 인우는 사라지고 없었다. 팀원들과 함께 있을 때 그는 묘하게 더 날이 선 태도를 보였는데 불편해서 그런 건지 아니면 자신의 착각인지 헷갈리기 시작했다. 미루는 그가 떠난 빈자리에 오래 시선을 두었다.

훈련이 끝나면 항상 TF 팀원 전원이 모였다. 훈련 영상을 보며 짧게 모니터하는 과정이었다. 불을 전부 끈 채 프로젝트 빔만 띄워 놓은 어두운 회의실엔 모니터하는 도화의 목소리만이 울렸다. 그는 영상을 잠시 멈추고 화면 속 가이드의 행동을 지적했다.

“바람 이능인이 있을 땐 최대한 건물 중앙으로 가야 합니다. 창가 쪽으로 갔다간 단번에 휩쓸리겠죠.”

이내 다시 영상을 재생했다. 커튼 뒤에 숨어 있던 가이드는 도화의 말처럼 강한 바람에 휩쓸려 창가에 몸이 반쯤 걸쳐진 꼴이 되었다. 곧이어 달려온 에스퍼에게 구조되며 상황이 정리되는 장면이 담겼다.

영상이 바뀌고 이번엔 미루와 민영이 뛰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복도에서 만난 두 사람은 건물이 흔들리는 것을 인지하곤 곧장 가까운 방으로 움직였다. 그리고 책상 아래로 들어가 몸을 숨겼다. 그 타이밍에 영상이 또 멈췄다.

“적절한 곳에 피신하긴 했지만 현장에선 어떤 상황이든 최대한 흩어지는 편이 좋습니다. 전력을 동시에 잃을 순 없겠죠.”

미루가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화면에 눈길을 뒀다. 그때였다. 빔에서 쏘아진 불빛만 들어차 있던 회의실에 일순 조명이 환하게 켜졌다. 깜빡, 깜빡, 전등은 몇 번 점멸하더니 도로 꺼졌다. 회의실이 작게 술렁였다. 팀원들이 동시에 고개를 들고 주변을 훑었다. 미루도 스위치가 있는 입구 쪽을 살펴봤지만 손을 댄 사람은 없는 듯 보였다.

“집중합시다.”

도화의 말에 작은 소란이 잦아들었고, 미루 역시 자세를 바로 해서 앉았다. 그리고 다시 시선을 돌리려다 문득 저를 빤히 응시하는 시선을 느끼곤 가만히 눈을 굴렸다.

“…….”

영상에서 쏟아지는 빛이 밝지 않아 확실하진 않지만……. 인우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듯싶었다. 희뿌연 빛이 그의 얼굴 윤곽을 감싼 채였는데 그게 몹시 싸늘하다고 느껴졌다. 어둠 속에서도 이채를 띤 눈동자. 미루는 그 시선을 오래 마주하지 못하고 고개를 틀었다.

“…….”

“…….”

내가 실수해서, 그래서 화가 나셨나. 계약직이긴 해도 가이드라는 게 현장에서 멍청하게 굴어서 싫으신가. 그러고 보면 인우는 다른 에스퍼처럼 저에게 수고했단 소리나 다음부터 잘하란 격려 같은 것도 하지 않았고, 그저 조용히 응시하다 등을 돌릴 뿐이었다.

계약서에 도장을 찍은 후로는 가이딩을 받는 행위도 없었다. 자신을 마음에 들지 않아 하는 눈치가 분명한데. 괜히 주눅이 든 미루는 따갑게 닿아 오는 시선을 느끼면서도 도무지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에스퍼 훈련 영상까지 모니터하고 나서야 회의실 안에 불이 켜졌다. 시계를 확인한 인우가 3시에 다시 모이자는 말을 하자 저마다 앓는 소리를 내며 테이블에 엎어졌다. 미루도 뻐근한 목을 주무르며 기지개를 켰다.

“미루.”

그때 인우가 등 뒤를 스치면서 미루의 어깨를 아프지 않게 쥐었다 놓았다. 미루는 기다렸단 듯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쫓아 달려갔다. 미루가 완전히 밖으로 나오자, 인우가 곧장 회의실 문을 닫아 소리를 차단시켰다.

“잠깐 지원 다녀올 테니, 얌전히 있어.”

“지원이요?”

이제 휴식 시간인데 또 지원이라니. 미루가 눈썹을 늘어트리자 그는 조용히 주변을 훑었다. 복도에 아무도 없는데도 경계를 세우는 모습이었다.

인우가 가만히 팔을 뻗자 미루가 슬쩍 어깨를 움츠렸다. 덩달아 인우도 멈칫하나 싶더니 미루의 귓불을 툭 건드렸다. 그러곤 귓바퀴를 슬슬 문지르는 거였다. 행위가 묘하다는 생각을 할 무렵, 그가 아직 미루의 귀에 꽂혀 있는 인이어를 빼냈다.

“금방 오니까, 쓸데없는 대화 나누지 말고.”

아까 훈련 끝나고 안 뺐구나. 계속 이러고 다녀서 멍청하게 보였으려나. 괜히 눈을 굴리며 붉어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조심히 다녀오세요.”

주눅 든 모습을 가만히 내려다보던 인우가 작게 혀를 찼다. 그 소리에 미루는 괜스레 더 눈치가 보여 얌전히 모은 두 손을 꼬물거리며 쭈뼛댔다.

“너는…….”

“네?”

무엇을 말하려는 듯 입술을 달싹이던 인우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아까 어둠 속에서 봤던 시선처럼 서늘하지는 않은 온도였다.

“아니다. 쉬어.”

그는 곧장 등을 돌리고 멀어졌다. 넓은 등을 보고 있자니 무슨 말을 하려던 건지 궁금해졌다. 왜 저만 따로 불러서 지원 간다는 말을 하신 거지. 혹시, 가이딩이 필요하셨던 건가. 그래서 전담 에스퍼가 없는 저를 따로 불러내셨던 걸까. 가기 전에 기운을 좀 채우고 가셨어야 할 텐데.

“내가 눈치가 없었나.”

복도 모퉁이로 사라지는 인우의 뒷모습을 지켜보던 미루가 빈 의자에 자리를 잡았다. 금방 온댔으니까 여기서 기다릴 셈이었다. 복귀하시면 먼저 손을 내밀어 봐야지. 그의 기운을 채우기엔 턱없이 부족하겠지만 그래도 아예 안 하는 것보단 나을 테니까. 얌전히 앉아 있는데 회의실 문이 열렸다. TF 팀 가이드 재환이었다.

“팀장님은 어디 가셨어?”

“지원 가신다고 했어요.”

“또 지원? 어휴……. 그럼 돌아오시면 바로 훈련 합류하시나.”

“그건 모르겠고, 금방 오신다고는 했어요.”

아아, 재환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발길을 돌려 미루에게 향했다. 심심해서 대화할 상대가 필요한지 말을 붙이기 시작했다.

“근데 너 일은 괜찮아? 가이딩하는 거 말이야. 솔직히 우리 다 너 걱정하고 있거든. 숙소도 따로 쓰고 그래서.”

팀원들은 원래 지내던 곳에서 머문다기에 그런 줄 알았는데. 미루를 제외한 가이드는 전부 같은 숙소 건물에서 지낸다고 했다. 그것도 여태 모르고 있다가 어제서야 알았다. 다른 가이드들도 그걸 의아하게 여기는 기색이었지만 미루는 암묵적으로 팀장님 담당이라는 인식이 있어 그러려니 하는 모양이었다.

“음, 아직 몇 번 없어서 잘 모르겠어요.”

멋쩍게 웃자 재환이 조금 더 호기심 어린 표정을 했다.

“그래? 이상하네.”

“혹시 다른 분한테 받거나 그러는 건 아닐까요?”

“에이, 지금까지 전담 없으신 이유가 뭔데. 가이드들이 다 꺼리니까 그렇지. 해 줄 거면 우리가 해 줬지. 팀 가이드 들인 것도 센터 내에 팀장님 맡겠다는 사람이 없어서 그런 거잖아.”

전에 가이드 병원 간호사들이 나누던 대화가 떠올랐다. 확실히 피하긴 하는 것 같았지.

“센터 내엔 소문이 금방 도니까. 몇 년 전에 가이딩해 주다가 죽은 가이드도 있대.”

“네?”

미루의 낯 위로 언뜻 공포가 스쳤다.

“응. 예전에 선배한테 들은 얘긴데…….”

재환은 어디서 들었는지 꽤 구체적인 내용을 늘어놓았다. 임무를 마치고 폭주 직전까지 다다른 인우를 가이딩해 주다가 눈이 먼 사람도 있고, 고열에 시달리다 끝내 죽은 사람도 있다는 무시무시한 얘기. TV나 가이드 커뮤니티에서 보았던 것보다 더 끔찍한 소리였다.

“전에 잠깐 했을 때 그 정도는 아닌 것 같았는데.”

손을 잡았을 때 붕 뜨고 아득해지는 감각이 들긴 했지만, 고통스럽다거나 생명의 위협을 느낄 수준은 아니었다. 갸웃대는 미루에게 재환이 손사래를 치며 말을 덧붙였다.

“모르는 소리. 지금은 기운이 좀 있으니까 그런가 본데. 이능 좀 쓰고 그러면 달라질걸. 에스퍼들은 가이딩 없이 못 사는 존재들이야.”

“…….”

“그러니까 너도 잘 조절해서 가이딩해. 따로 요구하시는 거 아니면 최대한 못하는 척 시간 끌어도 좋고. 다른 에스퍼한테는 해 줄 필요도 없어, 우리가 알아서 할 테니까.”

말끝에 맞물려 재환의 전화가 울렸다. 액정을 확인한 그가 눈을 크게 뜨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헐, 벌써 왔나 보네. 나 동기 만나기로 했는데. 마실 거 사다 줄까?”

미루는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재환은 알겠다며 미루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곤 멀어졌다.

“…….”

기분이 묘했다. 가이드들 사이에서 인우의 평판이 그리 좋지 못하다는 걸 알고는 있었지만, 같이 팀을 이룬 가이드들마저 전부 피하고 있는 줄은 몰랐다.

가끔 무서운 표정을 짓긴 해도 위험한 사람은 아닌 것 같았는데. 다들 꺼렸으면 제대로 된 가이딩도 못 받았을 텐데 약으로 버티는 건 한계가 있지 않나? 복도에 덩그러니 앉아 발장난을 치면서 인우의 지난 시간을 감히 가늠해 봤다.

인우는 휴식 시간을 10분 남겼을 때가 되어서야 돌아왔다. 그는 복도에 자리한 미루를 발견하고는 꽤 놀란 듯 보였다.

“여기서 뭐 하고 있어.”

“팀장님 기다렸어요.”

“나를?”

인우가 묘한 표정을 하고는 가까이 다가왔다. 이능을 많이 쓰지는 않았는지 열기가 느껴진다거나 상처가 보이진 않았다. 미루는 패기 좋게 인우의 손을 쥐려고 했다. 하지만 그가 팔을 뒤로 보내는 움직임이 더 빨랐다. 급습에 실패한 미루가 눈썹을 늘어트리자 인우는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이며 빤히 눈길을 내렸다. 꼭 ‘뭐 하는 거냐’고 묻는 것처럼.

“지원도 다녀오셨고, 훈련하느라 이능 많이 쓰셨잖아요. 그래서…….”

말없이 바라보는 눈초리에 등 뒤로 식은땀이 흐를 뻔했다. 화가 난 건지, 짜증이 난 건지 검은 눈동자가 크게 일렁이고 있었다. 허공에 내밀린 손끝이 작게 떨릴 무렵이 되어서야 인우가 입을 열었다.

“가이딩 필요한 정도는 아냐.”

“아…….”

필요한 정도는 아니래도, 힘들긴 했을 텐데.

“그보다. 계속 혼자 있었나.”

인우는 끝내 가이딩을 거절하며 말을 돌린다. 완벽한 거절에 미루가 쓴웃음을 삼키며 손을 물렀다.

“네, 혼자 있었어요.”

그 대답에 인우가 주변을 느릿하게 훑었다. 미루가 앉아 있던 자리부터 텅 빈 복도까지 살핀 시선이 다시 미루에게로 향했다.

“잘했네. 들어가지.”

앞장서는 인우의 뒤를 따르면서는 재환의 말이 떠올랐다.

“에스퍼들은 가이딩 없이 못 사는 존재들이야.”

가이딩 없이 못 사는 존재인데 왜 저의 가이딩은 거부할까? 저와는 닿기 싫으신가? 아니면 제 가이딩으로는 턱없이 부족하니까 잡을 필요도 느끼지 못하는 건가. 일정은 급한데 지원한 사람이 없어서 어쩔 수 없이 절 고용한 걸지도 모른다. 면접을 본 건 자신뿐이었으니 그에겐 선택지가 없었겠지.

“…….”

밀려오는 무력감에 작은 어깨가 축 늘어졌다. 두 달만 머물다가 가는 존재라도 도움이 되고 싶은데. 인우의 턱에 났던 상흔이 자꾸 눈앞에 아른댔다. 이젠 흔적도 남지 않았지만.

***

가까이서 지켜본 인우는 누구에게든 가이딩을 요청하는 법이 없었다. 상처에도 무척이나 무딘 사람이었고. 힘든 훈련을 소화하고서는 틈틈이 지원까지 나갔다. 크고 작게 다쳐 올 때도 많았는데 매번 미루가 내민 손은 거절했다.

가이딩으로는 도움이 될 수 없단 걸 깨닫고는, 소독약이니 연고니 밴드 따윌 챙겨 들고 인우 뒤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에스퍼들에겐 별 효과 없는 짓이라고 해도 낫기 전까지 고통은 조금이라도 줄여 줄 수 있을까 해서. 그래도 이건 피하지 않아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팀장님, 팔 좀 보여 주세요.”

패드를 확인하던 인우가 고개를 들었다. 그러곤 팔에 어설프게 감긴 붕대를 힐끔 내려 봤다. 가이딩 보충제 몇 번만 먹으면 사라질 상처이지만, 저를 졸졸 따라다니는 미루가 꽤 귀여워 부러 상처를 그대로 두었다. 그랬더니 아침저녁으로 붕대를 감았다가 밴드를 붙였다가, 분주히도 움직인다.

“이제 풀어도 되나?”

“아직인데……. 혹시 불편하세요?”

네가 불편해 보여서 그런다는 말은 웃음과 함께 삼켰다.

“아니.”

미루는 불편하지 않다는 확답을 듣고 나서야 붕대를 풀었다. 다친 팔뚝을 소독하고 입술을 모아 바람을 불었다. 후후, 간지러운 입김이 팔부터 시작해 가슴까지 끼쳐 왔다. 인우가 붉은 입술을 가만히 응시했다. 보드랍고 촉촉해 보이는 입술과 호흡이 새어 나오는 시뻘건 틈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깜빡. 순간 거실 전등이 점멸했다. 미루가 놀란 듯 눈을 크게 뜨고는 천장을 살폈다. 전등에 아무 문제가 없다는 걸 알고 나서야 인우에게로 시선이 옮겨 왔다.

“방금 깜빡거렸죠?”

“그랬나.”

“아닌가.”

잘 들리지도 않을 만큼 작게 웅얼대는 목소리. 아까 미루의 입김이 닿았던 것처럼 온몸이 근질대는 기분이었다. 인우가 마른 입술을 축이며 말간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이제 이거 붙여도 될 거 같아요.”

미루가 이번엔 손바닥 크기의 밴드를 팔뚝에 붙였다. 그 손길이 꽤 신중해 보여 인우는 괜찮다는 말도 꺼내지 못했다. 요 며칠 밴드니 붕대니 어울리지 않는 걸 달고 다녔더니 에스퍼들이 어찌나 쳐다보는지. 그게 귀찮긴 해도 나름 챙김받는 기분이 드는 데다 저 귀여운 꼴을 볼 수 있어서 나쁘지 않았다.

삐이이. 인우의 단말기가 또다시 시끄럽게 울려 댔다. 미루가 슬쩍 눈썹을 구기자 인우가 빠른 손길로 소리를 줄였다. 액정에 뜬 글자를 가만히 읽던 그가 익숙한 듯 소파에서 일어났다.

“잠깐 다녀올 테니까, 자고 있어.”

“이 시간에…….”

미루의 말끝이 조용히 흩어졌다. 개인적인 일일 수도 있는데, 자신이 물어봐도 되는 건지 모르겠어서. 밴드 포장지를 쥔 미루의 머리 위로 큰 손바닥이 올라왔다.

“무섭긴 한데, 궁금하기도 하고.”

나직한 목소리에는 언뜻 귀여운 것을 대하는 듯한 낮은 웃음이 섞인 채였다. 머리칼 사이를 느릿하게 쓰는 손길도 꽤 다정했다. 미루는 손에 쥔 포장지가 구겨질 만큼 세게 힘을 주었다. 지낼수록 의문은 커져 갔다. 이 사람이 정말 소문처럼 가이드를 죽게 했을까? 정말 그렇게 무서운 사람일까?

“…….”

“영화관에서 에스퍼 발현이 일어났어. 그거 정리하라는 호출.”

“아.”

그걸 꼭 온종일 훈련한 팀장님이 가야 하는 건가. 문득 그런 의문이 들었지만 센터 일에 무어라 토를 달 순 없었다. 대충 납득한 얼굴을 보고 인우도 손길을 거뒀다. 그러고는 방으로 향했다.

텔레포트가 가능한 에스퍼가 곧 숙소 앞에 도착할 것이다. 전투복으로 갈아입고 현장까지 도착하는 건 5분을 넘어선 안 됐다. 익숙하고 빠른 손길로 환복한 뒤에 방문을 확 열어젖히자, 바로 앞에 있던 미루가 움찔거렸다.

“왜, 할 말 있어?”

“아뇨. 조심히 다녀오시라고요, 다치지 마시고…….”

덧붙는 말에 인우가 잠시 멈칫하더니, 이내 입꼬리를 밀어 올렸다. 시간이 조금 더 있으면 좋으련만, 벌써 텔레포트 에스퍼가 도착했다는 알람이 울렸다.

“그래.”

짧게 대답한 인우가 숙소를 나섰다. 오늘처럼 발길이 떨어지지 않은 적은 없었는데. 얼른 현장을 정리하고 돌아와야겠다. 무방비하게 잠든 미루의 얼굴을 조금이라도 더 구경해야 했으니까.

발현한 에스퍼가 영화관 층뿐 아니라, 아래 쇼핑몰에서도 난동을 부리는 바람에 현장 정리에 시간이 좀 걸렸다. 이렇게 민간인이 많은 곳에서 첫 발현을 하는 경우가 가장 골치 아팠다. 힘을 주체하지 못해 여기저기 쏴 대는 바람에 부상자도 많았고, 폭주의 위험까지 동반했으니. 그래도 다행히 부상자 없이 현장은 말끔하게 정리됐다.

다만 영화관 바닥 유리가 깨지며 손등이 조금 긁히긴 했다. 물론 이건 상처 축에도 낄 수 없는 수준이었다. 가이딩 보충제를 먹으면 아마 순식간에 사라질 터였다. 하지만 인우는 굳이 보충제를 챙겨 받지 않고 숙소로 돌아갔다. 잠든 미루의 뺨이나 몇 번 만지면 괜찮지 않을까 싶어서.

“오셨어요?”

집 안으로 들어서던 인우의 걸음이 뚝 멎었다. 이능 탓인지 딱히 불을 켤 필요가 없어 늘 어두웠던 숙소. 온기라곤 찾을 수도 없던 공간인데 지금은 밝은 빛과 따뜻한 공기, 그리고 저를 반기는 목소리에 온몸이 노곤하게 녹아내리는 듯했다. 왜 이런 기분이 드는 건지도 모를 만큼 낯설었다.

“……왜 여태 그러고 있었어.”

졸음이 가득한 눈을 비비며 소파에서 일어나는 미루의 얼굴을 보니 꼭 이능을 남발해서 정신을 잃었을 때와 비슷한 울렁거림이 느껴졌다. 속이 뜨겁고 손끝이 떨리고, 가슴이 조일 듯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아, 그냥 약을 먹었어야 했나.

“기다렸어요. 혹시 다쳐서 오실까 봐.”

대부분의 에스퍼는 담당 가이드가 있었다. 전담 가이드는 현장에서 틈틈이 손을 잡으며 가이딩을 해 준다. 그게 아니면 이른 아침이든 새벽이든 복귀하는 트레일러 앞에서 대기하며 에스퍼를 맞아 주고 컨디션을 체크했다.

인우는 늘 조용히 가이딩 보충제나 얻어 그 사이를 빠져나오는 게 익숙했다. 전담도, 선뜻 그에게 가이딩을 해 준다는 이도 없었으니까.

그렇게 거의 평생을 살아왔는데, 제 앞의 남자는 자신을 기다렸다고 말한다. 걱정스러운 눈길로 저를 훑고, 다가온다. 분명 무서워하면서도 그 두려움을 전부 참아 내면서까지. 인우의 가슴이 숨을 담아 크게 부풀었다가 한숨과 함께 잦아들었다.

“어쩌지. 다쳤는데.”

“어디요?”

눈을 크게 뜨고 다가오는 미루에게선 샴푸 냄새가 가장 먼저 느껴졌다. 그 향기에 전신이 들끓듯 뜨거워졌다. 인우는 치미는 욕심을 삼키며 손을 내밀었다. 손등 위, 손가락 두 마디쯤 되는 상처를 발견한 미루의 눈썹이 아래로 처졌다.

“으, 따갑겠다.”

작게 중얼대는 말에는 마른침을 삼켰다. 센터 내 어떤 사람도 이만한 상처로 저런 말을 하지 않을 텐데. 그것도 자신을 상대로 말이다. 손등을 내려다보던 미루의 고개가 찬찬히 들렸다. 이젠 입꼬리까지 축 늘어진 게 꽤 걱정이 되는 모양이었다.

“잡아 드릴까요, 아니면 약 발라 드릴까요?”

미루는 매번 저를 시험하듯 물었다. 마음 같아서야 그의 체온을 원 없이 만끽하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 손을 잡는다면 아마 정신을 잃고 달려들지도 모른다. 가이딩이 아니라 오로지 미루의 체온을 얻기 위해, 더 걱정하고 더 보살펴 달라며 매달리겠지. 인우는 가까스로 욕망을 잠재웠다. 아직은 준비도 부족한 데다 자신에게 세운 벽을 다 허물지도 못했는데 성급하게 굴 순 없으니까…….

“약을 발라 주면 좋겠는데.”

“……네, 잠깐만요.”

어디서 구해 왔는지 모를 구급함으로 향하는 뒷모습을 눈에 담았다. 팔랑대는 옅은 갈색 머리칼, 헐렁한 잠옷과 마른 종아리, 하얀 맨발. 음험한 시선이 미루의 뒤태를 훑어 내리는 동안 혀 아래 침이 고였다. 미루의 뒤를 따르는 그림자는 무척이나 어둡고 짙었다.

“이거요, 방수되는 거라서 씻으실 때 안 불편할 거예요.”

손등을 후후 불던 미루가 흐물대는 밴드를 집어 들었다. 말간 눈을 바라보자니 인우는 불쑥 그런 생각이 들었다. 가이드 숙소가 아닌 제 공간으로 미루를 데려오길 잘했다고.

“이러길 잘했네.”

미루는 가만히 눈을 깜빡이더니 이내 고개를 푹 숙이고 밴드를 붙이는 데 열중했다. 살갗에 스치는 분홍빛 손끝으로 인우의 온 신경이 쏠렸다. 따뜻한 이 온기를 손에 쥐고 싶단 욕심이 잦아들 줄을 몰랐다. 아마 머지않아 뜻대로 될 테지만.

“다 됐어요. 어, 그러면…… 씻고 푹 쉬세요.”

다급하게 구급함을 정리한 미루가 후다닥 자리를 피했다. 여전히 저랑 단둘이 있는 게 불편한 모양이지. 거의 뛰듯이 달려가는 미루의 발목을 응시하면서 아랫입술을 느릿하게 핥았다.

한편, 미루는 그날 밤 이불을 푹 뒤집어서 쓰고 한참이나 잠들지 못했다.

“약을 발라 주면 좋겠는데.”

“이러길 잘했네.”

인우의 말이 꼭 가이딩을 받는 것보다 밴드 쪼가리가 낫다는 말처럼 들린 탓이었다. 그래도 요즘엔 교육 꼬박꼬박 받아서 조절도 잘하고 컨디션도 좋댔는데 한 번 맡겨 주지. 팀장님 올 때까지 잠도 안 자고 기다렸는데. 서운하면서도 스스로가 초라했다. 어쩌면 이런 대우는 당연할 텐데 말이다. 미루는 새벽 내내 뒤척이다가 겨우 잠에 들었다.

***

그 뒤로 인우는 자주 상처를 달고 왔다. 자잘하게 긁힌 것부터 시작해 커다란 멍을 달거나 화상을 입고 오기도 했다. 그때마다 미루가 팔을 걷어붙이는 건 당연했다. 물론 가이딩이 아니라는 점이 마음에 걸리긴 했지만, 인우에게 무어라도 도움이 될 수 있어 좋았다.

“미루야, 팀장님 요즘에 뭘 그렇게 몸에 붙이고 다니시는 거야?”

“어, 나도 봤어. 아까 그거 밴드 맞지?”

가이드들도 손등에 붙은 밴드의 존재를 알았다. 심인우 팀장과는 어울리지 않던 것을 떠올리며 다들 고개를 갸웃댔다.

“그거 제가 해 드린 거예요. 가이딩은 괜찮다고 하셔서요.”

가이드들이 조용히 눈빛을 나눴다. 왜 그런 비효율적인 짓을 하지? 재환이 눈썹을 긁적였다.

“1분만 가이딩해도 사라질 것 같던데, 그거.”

재환의 말에 미루가 슬쩍 시선을 떨어트렸다. 사실 그건 미루가 더 궁금한 부분이었다. 1분 만에 없어질 상처를 왜 자신에게는 맡기지 못하는지.

“괜찮으시다는데 억지로 손잡을 수는 없잖아요. 이미 거절당해 본 적도 있어요, 저.”

미루가 어색하게 입꼬리를 밀어 올렸다. 순식간에 분위기가 축 늘어지자 민영이 재환에게 눈짓했다. ‘입 다물어’. 사나운 눈초리가 꼭 그렇게 말하는 듯했다. 재환은 고개를 끄덕이곤 입을 딱 닫았다.

“뭐어, 가이딩 안 받는 거면 잘됐지. 미루 너는 그냥 두 달 편하게 돈 벌다 간다고 생각해. 훈련이 좀 힘든 게 단점이긴 하지만……. 지원도 안 가고, 다른 에스퍼 가이딩 신경 쓸 필요도 없고. 얼마나 좋아?”

에스퍼 단독 임무가 아닌 이상 지원을 갈 때면 전담 가이드가 동행한다는 것도 어제야 알았다. 전날 김정우 에스퍼 앞으로 지원 명령이 떨어지자 민영 선배가 급하게 준비를 하는 거였다. 오늘 아침에도 구지수 에스퍼를 따라 재환 선배도 지원을 갔다 왔고. 그동안은 매번 인우 홀로 지원을 다녀왔기에 몰랐던 사실이었다. 물론 자신은 아직 전담까지는 아니라곤 하지만, 현재 TF에 노는 가이드는 저 하나뿐인데.

“그래. 방학 편하게 보내야지, 위험한 일 하면 쓰겠어? 정 눈치 보이면 방사 가이딩을 좀 배워 보든가.”

“방사요?”

“어어.”

미루가 방사 가이딩에 관심을 갖자 민영이 설명을 늘어놓았다. 아직 미루는 배우지 않은 단계였다. 현장을 뛰는 이들이 익히는 방법인데, 먼 거리에서도 기운을 줄 수 있어 따로 접촉할 필요가 없다고 했다. 설명을 듣던 미루가 ‘방사 가이딩’ 하며 단어를 곱씹었다. 그 정도면 팀장님이 그리 싫어하진 않을 듯도 한데.

“아니면 그냥 배 째라고 해. 작전 때야 우리가 조금은 백업해 줄 수 있으니까, 걱정 말고.”

은근히 주눅 든 미루의 기를 살리기 위해 팀 가이드들이 저마다 한마디씩 덧붙였다. 그들의 말도 틀린 게 아니었다. 가이딩을 안 한다고 해서 월급이 밀리는 것도 아니고. 짜인 훈련만 잘 소화하고 작전 때만 실수 안 하면 되잖아. 그동안 힘들게 돈 벌었으니까, 이렇게 쉽게 버는 일도 있다고 생각하면 돼.

“네에, 그럴게요.”

대답은 그렇게 했지만 미루가 마냥 편하게 마음먹을 수 없는 건 심인우 때문이었다. 그는 소문과 다르게 위험하지 않았고, 알려진 것과는 다르게 꽤 섬세했다. 저를 아프게 하지도 않았으며 가이딩을 무리하게 요구하는 법도 없었다. 팀원들과 있을 땐 날 선 모습이긴 해도 자신을 특별히 잘 챙겨 주었고. 특히 요즘 들어서는 그 빈도가 더 잦았다. 지원을 갔다 오는 길에는 꼭 미루가 먹을 만한 것을 하나씩 사다 안겨 주기까지 했다.

오늘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인우는 돌아오자마자 케이크 박스를 내밀었는데, 반쯤 투명한 박스 안으로 하얀 생크림이 언뜻 비쳤다.

“이게 뭐예요?”

“……단건 싫어하나.”

“아뇨, 좋아하긴 하는데…….”

아무 날도 아닌데 웬 케이크인가 싶었다.

“잘됐네.”

케이크는 동생 생일이 아니고서야 먹을 일이 드물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케이크 한 판이 전부 제 몫이었던 적도 없었고. 그간은 케이크를 좋아하는 이루에게 죄다 양보하다 보니 겨우 한두 입을 맛보는 게 전부였다. 벌써부터 상자 밖으로 달큰한 냄새가 풍겨 왔다. 미루가 꽤 설렌다는 얼굴로 박스를 만지작댔다.

“같이 드세요.”

“난 됐어. 씻고 올 테니까 천천히 먹어.”

인우는 곁을 지나면서 미루의 어깨를 슬쩍 쥐었다 놓았다. 그에게서 언뜻 매캐한 냄새가 풍겼지만 눈에 띄는 상처는 없었다.

“……네에.”

미루는 케이크를 접시에만 담아 놓고선 손 하나도 대지 않았다. 한참 뒤에 인우가 젖은 머리를 털며 나올 때까지. 눈을 가늘게 뜬 인우가 왜 먹고 있지 않냐는 듯한 표정을 짓자, 멋쩍게 말을 덧붙였다.

“갑자기 드시고 싶을 수도 있으니까. 일단은 잘라 왔어요.”

“…….”

“같이 드세요.”

조심스레 덧붙는 말에도 인우는 여전히 알 수 없는 표정이었다. 꿍꿍이를 숨긴 채 서로를 이용하기 바쁘고, 이기적인 이들이 가득한 센터에서 살아서 그런가. 성정이 순하고 누군가를 챙기는 게 익숙한 미루를 마주할 때면 기분이 묘해졌다.

“……그러지.”

별로 좋아하진 않지만 저를 기다린 정성이 있으니 시늉이라도 해야겠다 싶었다. 두 사람은 나란히 식탁에 마주 앉았다. 미루는 연신 인우를 힐긋대며 케이크를 먹었다. 꽤 입맛에 맞는 건지 줄어드는 속도가 빨랐다.

하얀 뺨은 볼록 솟았다가도 금방 잦아들었다. 살결도 하얗고 보드라운 게, 베어 물면 꼭 생크림하고 똑같은 맛이 나지 않을까. 딸기만큼 빨간 입술이 오물댈 때면 목구멍이 조여들었고, 이따금 붉은 혀가 입술에 묻은 크림을 핥으면 인우도 덩달아 입을 축였다. 아무것도 입에 대지 않았는데 단맛이 혀끝으로 느껴지는 것 같았다.

“…….”

먹지도 않고 가만히 쳐다보던 인우가 손을 뻗자 미루는 눈을 내리깔았다.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긴 했지만 어깨를 움츠린다든가 눈을 질끈 감지는 않았다. 두 사람 사이에 높다랗게 쳐 있던 담벼락이 조금 허물어진 기분이었다.

생크림이 묻은 미루의 입술을 느릿하게 훑은 인우가 손가락을 제 입에 담았다. 손끝이 혀에 닿자마자 단맛이 퍼져 왔는데, 그게 나쁘지는 않았다.

“다네.”

그 과정을 빤히 지켜보던 미루의 뺨이 붉어지나 싶더니 이내 헛기침을 하며 포크를 고쳐 쥐었다. 조용히 입꼬리를 밀어 올린 인우가 나지막하게 물었다.

“너는 아직도 내가 불편해?”

“……아니요, 불편하지 않아요.”

잠시 머뭇댄 미루가 고개를 저었다. 따지고 보면 인우는 딱히 눈치를 주거나, 불편할 만한 행동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잘해 주는 편에 속했지. 가이딩을 받아 주지는 않았으나 그건 자신이 부족해서 그런 거니까.

“대답이 늦네.”

“아니, 아니에요. 입에 든 거 때문에 그런 거였어요.”

“아아.”

눈을 크게 뜬 미루가 변명하듯 늘어놓았다. 정작 인우는 별 상관 없는 사람처럼 턱을 괼 뿐이었지만. 빤한 시선에 미루는 머릿속을 부유하는 말들을 마구 끄집어냈다. 불편하지 않다는 걸 어필하기 위해서였다.

“케이크 오랜만에 먹는 건데 엄청 맛있네요. 동생 생일날 말고는 잘 안 사 먹거든요. 동생도 좋아해서 자주 사 주고 싶은데, 아무래도 비싸고 그래서요.”

“그래?”

“네, 그래서 이번에 월급 타면 사 가려고요. 아, 외출…… 안 된다고 했죠?”

가만히 얘기를 듣던 인우가 흐음, 숨을 길게 늘였다.

“될 때도 있고. 이것도 마저 먹어.”

제 몫의 접시를 미루 앞으로 밀었다.

“……감사합니다.”

결국 케이크는 저 혼자 먹게 생겼다. 그래도 맛있으니 얼른 고개를 꾸벅 숙인 후 다시 포크질을 시작했다. 진짜 전담도 아닌 임시에 불과한 제게 이렇게 잘해 주는데, 매번 상처를 달고 오는 그를 알고 있는데. 어떻게 대충 돈만 받고 기간 채울 생각을 할 수 있을까. 미루는 민영 선배에게 방사 가이딩이란 걸 따로 배워 봐야겠다고 다짐했다.

***

모든 훈련이 끝난 뒤, 인우는 늘 그러했듯 또 어디론가 향했다. 손이 많이 가는 일에는 전부 투입되는 듯했다. 그사이 미루는 민영에게 틈틈이 방사 가이딩 법을 배웠다. 단순히 손을 잡아 가이딩을 하는 것과는 달리 익숙지 않은 감각이라 연습을 많이 해 볼 필요가 있다던데, 미루에겐 딱히 연습 상대도 없었다.

그나마 얘기를 많이 나눠 본 도화한테 부탁해 볼까, 그런 생각을 하던 미루가 무언가를 떠올렸다. 팀장님이 돌아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은근히 얘길 꺼내 보면 어떨까. 오늘 배운 걸 복습하겠다는 핑계를 대면, 막 복귀한 인우가 거부할 리는 없지 않을까. 방사면 손을 잡는 것도 아니니까. 미루는 가벼운 걸음으로 센터 로비를 가로질렀다.

트레일러가 복귀하는 장소에 다다르자, 조금 어수선한 분위기가 느껴졌다.

“벌써 도착했나?”

미루가 걸음을 바삐 움직였다. 트레일러 주변은 마중을 나온 가이드와 막 복귀한 에스퍼로 북적댔다. 가이드들은 손을 잡거나, 컨디션을 체크하듯 몸을 살피면서 에스퍼를 맞이했다.

그 사이 유독 혼자 우뚝 솟아 있는 인우가 단번에 눈에 들어왔다. 그는 어느 누구의 챙김도 받지 못하고 있었다. 다행히 다친 곳은 보이지 않았지만 얼굴은 꽤 지친 기색이었다. 언뜻 눈동자에 외로움이 스친 것 같기도 했고.

미루가 입술을 떼려는 순간 인우가 미간을 구기면서 어디론가 손을 뻗었다. 그러자 가운을 입은 남자가 익숙하단 듯 약을 건넸다. 단번에 털어 넣은 인우는 물도 없이 약을 씹어 삼켰다. 열댓 명은 되는 에스퍼 가운데, 가이딩 보충제를 먹는 이는 인우뿐이었다.

“…….”

진짜 담당도 아니고, TF가 있는 두 달만 자리를 채워 주면 되는 건데 고통스럽게 얼굴을 구긴 인우를 보고 있자니 기분이 이상했다. 곧이어 한 남자가 트레일러 안에서 쇼핑백을 들고 나와 인우에게 건넸다. 그걸 받은 인우는 곧장 발길을 옮겼다. 미련도 없는 걸음이었다.

“…….”

매번 저렇게 약을 먹고 오니까, 내 가이딩이 필요가 없는 거였나. 그럼 왜 나를 고용했지. 왜 전담처럼 자신을 본인 집에 두고 지내는 거지. 모든 게 이상했다. 미루는 알 수 없는 감정에 짓눌려 한참을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숙소로 돌아가니 막 현관으로 나오던 인우와 딱 마주쳤다. 아까만치 고통스러워 보이진 않았으나 인우의 미간은 깊이 구겨진 채였다.

“어디 있었어.”

화가 난 듯 말끝이 사나웠다. 트레일러 앞에 있다가 왔다는 말을 차마 꺼낼 수가 없어 눈을 굴리며 변명을 떠올렸다.

“잠깐 바, 방사 가이딩 연습 더 하다가 왔어요.”

C 랭크 주제에 무슨 연습이냐고 하면 뭐라고 대답하지. 그사이에도 사납게 오르내리는 인우의 가슴팍을 흘긋거리며 미루가 아랫입술을 잘근 씹었다.

“누구한테?”

푹 수그러든 머리 위로 낮고 서늘한 목소리가 떨어졌다. 땅바닥을 내려다보며 눈을 깜빡이던 미루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가이딩 연습을, 누구한테 했냐고 묻잖아.”

딱딱하게 굳은 얼굴을 마주하곤 마른침을 삼켰다. 거짓말이란 걸 알고 캐물으시는 건가. 이번엔 마땅히 둘러댈 말이 없어 솔직히 털어놓았다.

“사, 사실 연습 상대가 없어서 혼자 해 봤어요.”

“…….”

혼자 연습을 했다는 대꾸에 조금 누그러든 기색이긴 했으나 인우의 표정은 여전히 살벌했다. 미루는 맞잡은 손을 꼼지락대며 눈을 굴렸다. 무거운 침묵이 길게 이어지고, 인우가 낮게 한숨을 뱉으며 머리를 사납게 헝클였다. 거친 행동에 겁을 먹은 미루의 어깨가 움찔댔다.

“……지금 컨디션이 별로라 그래. 오니까 너는 없고.”

정말 상태가 안 좋긴 한 건지, 지척에 서 있는 그에게선 열기가 느껴지는 것 같기도 했다.

“화낸 거 아니니까, 들어와.”

“그, 그러면요. 가이딩해 드릴까요?”

랭크가 높진 않아도 보충제보단 가이딩이 나을 테니까. 미루가 쭈뼛거리며 꺼낸 말에 인우가 가만히 눈을 감고는 숨을 크게 골랐다. 잠깐 정적이 흐르더니 이내 익숙한 거절이 돌아왔다.

“이 정도는 참는 게 나아.”

“……아, 네에.”

휙, 몸을 돌려 안으로 들어가는 인우의 뒤를 따랐다. 센터에 들어온 후로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는데, 오늘 처음으로 조금 눈물이 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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