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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 1 (8/12)

외전 1   

미루가 새로운 요새에 적응하기까진 오래 걸리지 않았다. 행동반경이 좁기도 했고, 인우가 가끔 집을 비우면 할 수 있는 거라곤 집을 뽈뽈대며 돌아다니는 일뿐이기 때문이었다. 미루는 저택 생활에 더는 답답함을 느끼지도 않았다. 하루하루가 이렇게 평온할 수가 없었다.

별채에서 지내는 도화는 낮에 몇 번씩 본채에 들렀다. 딱히 대화가 오간다거나 무언가를 같이하지는 않았지만, 오늘은 달랐다. 지금은 인우가 잠깐 집을 비웠고, 미루도 꼭 하고 싶은 일이 생겼으니까. 멀찍이서 도화를 지켜보던 미루가 슬쩍 말을 먼저 걸었다. 얼마 전 인우가 구해다 준 만년필을 들고선.

“도화.”

“네.”

마른 천으로 난을 닦던 도화가 고개만 틀어 미루를 바라봤다. 안경 너머 눈동자가 미루 손에 쥐어진 만년필과 종이로 향했다.

“그으, 부탁하고 싶은 게 있어서요.”

“네.”

“도화는 글을, 쓸 줄 아시죠?”

미루는 어딘지 멋쩍은 표정이었다. 예상치 못한 말에 도화가 안경을 추켜올리고 몸을 일으켰다.

“아, 제가 글을 어깨너머로 배운 거라서요. 가르쳐 주실 수 있나 해서요.”

“…….”

미루가 어색하게 입꼬리를 밀어 웃었다. 도화는 멋쩍어 보이는 미루를 보며 생각했다. 도련님에게 배워도 될 텐데, 왜 굳이 자신에게 가르쳐 달라는 걸까.

“도련님께 배우시지 않고.”

그게 귀찮아하는 말로 들렸던 건지, 미루의 얼굴엔 얼핏 실망하는 기색이 스쳤다.

“아…….”

축 내려가는 어깨를 본 도화는 쥐고 있던 천 조각을 탁자에 내려 두었다. 오해가 생기지 않게 서둘러 말을 덧붙였다. 답지 않은 친절이었다.

“알려 드릴 순 있습니다. 제가 묻고 싶은 건, 왜 도련님께 배우지 않냐는 겁니다.”

도화는 대답해 보라는 듯 안경을 바로 했다. 곧 화색을 띤 미루가 종이를 고쳐 쥐었다. 달아오른 뺨을 한 채로 중얼대는 꼴이 꼭 부끄러워하는 듯했다.

“편지를 쓰고 싶어서요. 도련님이 알면은 안 되니까…….”

“동생분에게 쓰겠다는 겁니까?”

순간 도화는 이 얘길 도련님께 고스란히 고해야 하나 갈등했다. 편지라면 바깥과 소통하고 싶다는 뜻일 텐데. 동생에게 보내는 편지라면 허락해 주려나. 비록 하루지만 동생을 만나게 해 주기도 했으니.

“아니요! 도련님이요.”

“…….”

“도련님한테 써 드리고 싶어서요. 왜냐면 이거를 선물로 주셨거든요.”

미루가 소중하게 쥐고 있던 만년필을 내보였다. 손바닥을 펼쳐 도화 쪽으로 내밀었는데, 그 위에는 딱딱한 만년필이 구르고 있었다.

이런 물건은 사 본 적도 없고 팔아 본 적도 없어서 잘 모르긴 해도 꽤 값이 나가 보였다. 글을 잘 쓰지도 못하는 이에게는 분명 과분한 선물이었다.

물론 도련님은 자신이 글을 잘 못 쓴다는 사실을 모르셔서 주신 걸 테지만. 글을 제대로 배우지 못했다는 사실을 도련님께 들키면 엄청 부끄러울 것 같았다. 그래서 한참 고민을 하고 나서야 굳이 도화에게 이런 부탁을 하는 거였다.

“아.”

도화의 눈길이 만년필 위에 머물렀다.

인우는 미루를 만난 뒤 내내 이랬다. 아까운 것 없는 사람처럼, 미련도 없는 사람처럼 모든 걸 미루에게 퍼붓고 맞췄다. 스무 해 넘게 결핍되어 있던 것을 모두 채워 주려는 양. 그게 필시 기운 때문만은 아님을 이제 도화는 알았다.

그런데 이 사내는 어떤 마음일까. 단순히 도련님이 자신을 잘 챙겨 주어서, 받아 보지 못한 걸 쏟아 주는 사람이어서일까. 그래서 글을 배워 가면서까지 도련님께 편지를 써 주겠다는 걸까.

감히 이런 말을 물어도 되는 위치인지는 모르겠단 걱정이 들었지만, 그보다 입술이 먼저 움직였다. 담장 아래 날을 세운 인우의 곁에서 오래 지낸 탓인지 도화 역시 경계가 습관이었다.

“도련님이 불쌍하신가요?”

“네?”

갑작스러운 물음이었다. 도화는 늘 그렇듯 서늘한 표정으로 말없이 미루를 내려다봤다. 동정심에 이런 짓을 하는 거냐고 물으시는 건가. 머릿속으로 생각을 마친 미루가 천천히 말을 꺼냈다.

“그래서 그런 게 아니라요. 항상 저한테 다정하게 해 주시니까……. 그래서 저도, 잘하고 싶어서 그래요.”

안경을 추켜올린 도화가 미루의 말을 곱씹었다. 다정이란 단어는 도련님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거지만, 그간 본색을 숨기고 미루에게 했던 행동들을 보면 이해가 가기도 했다.

“그러시군요.”

“네. 불쌍, 그런 거 아니고요. 절대.”

도화는 작게 웃음을 흘렸다. 앞에 있는 미루조차 듣지 못할 작은 소리였다.

“따라오세요.”

미루의 얼굴에 화색이 스쳤다. 꽤 반가운 걸음으로 도화의 뒤를 따랐다. 두 사람은 인우에게 처음이자 마지막일 비밀을 함께 만들었다.

***

“아. 오셨습니까.”

본채와 별채 사이에 담장을 둔 후 불편한 점이 생겼다. 인우가 대문을 드나들 때 늘어서던 행렬이 사라진 것. 일전에는 마당에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하면 인우가 귀가하리란 걸 짐작했는데, 지금은 기별 없이 대문이 여닫혔다.

물론 대문을 마음대로 넘을 수 있는 사람은 인우뿐이라 싫은 건 아니었지만. 그가 없는 사이 무언가를 해야 하는 처지가 되니 말이 달라졌다. 너무 조마조마했다.

“…….”

벌컥 대문을 열고 들어온 인우와 맞닥뜨렸다. 방금까지 글을 알려 주다 별채로 돌아가기 위해 대청을 내려서던 도화는 덤덤하게 반응했다. 미루만 혼자 긴장하고 시선을 이리저리 굴려 댔다.

완전히 식어 빠졌지만 소반 위에는 차도 한 잔 올려 두었고, 종이와 연필은 이미 치워 둔 참이었다. 도화가 시키는 대로 씻고 옷도 갈아입었다. 미루는 늘 깔고 앉는 방석에 떨어진 흑심 가루를 손끝으로 가만히 털어 냈다.

“도련님.”

한발 늦게 엉덩이를 떼고 일어섰다. 대청을 내려가 인우가 사 준 신을 신으면서는 손날을 허벅지에 슥 문질렀다. 몸도 닦고 옷까지 갈아입었지만, 흑심 가루가 새끼손가락부터 손목으로 이어진 손날에 잔뜩 묻어 있을까 봐서였다.

“별채로 넘어가 보겠습니다.”

도화가 고개를 꾸벅이고는 별채와 이어진 담장에 난 문으로 향했다. 인우는 말없이 미루의 행동을 관찰했다. 사나운 눈이 예민한 모양새로 길어졌다.

“뭘 하고 있었니.”

제게 다가오는 미루의 움직임을 인우가 하나도 놓치지 않고 따라붙었다. 벙긋거리는 입술 새로 시선이 오래 머물렀다.

“도련님 기다리고 있었어요.”

“도화랑 같이?”

“아, 같이는 아니고요. 도화는 그냥 계셨던 건데, 평소처럼 그냥…….”

도화가 본채에서 하는 일은 단 하나였다. 자신이 자리를 비운 사이 조용히 미루의 곁을 지키는 것. 아마 오늘도 자신이 명령을 지켜 내고 있었을 거였다.

그런데 뭔가가 찝찝했다. 대문을 열고 들어서던 순간 흠칫 어깨를 굳히던 도화. 부산한 눈길로 주변을 훑더니 한발 늦게 움직이던 미루. 가까이 붙어 있었던 것 같지는 않은데 묘하게 어긋난 공기가 영 거슬렸다.

“그러니.”

입으로는 순순히 대답했지만 머릿속은 그렇지 않았다. 집을 비우는 횟수를 줄여야 하나. 하지만 미루와 관련된 일은 이제 남에게 맡기고 싶지 않았다.

그럼 자신이 없는 사이 미루의 행동반경에 제한을 두어야 하나. 더는 담장 아래에 풀어 두면 안 되는 건가. ……그래도 볕을 쬐는 걸 그렇게 좋아하는데. 인우가 볼 안을 혀로 훑었다.

“네에, 기다렸어요.”

“…….”

미루는 인우의 복잡한 심경을 가늠하지 못한 채 가만히 손을 잡을 뿐이었다. 두 손으로 꼬옥. 더는 상처를 달고 오는 일 따위는 없지만, 이제는 인사와 같은 행위였다.

인우는 가만히 눈을 내리깔았다. 진득하게 맞물린 손을 내려다보다 슬며시 고개를 기울였다. 미루가 뒤로 밀려나지 않게 허리를 감싸 힘을 주어 당겼다. 부드러운 목덜미에 입술을 파묻은 인우는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이제야 온전히 집으로 돌아온 기분이 들었다.

“…….”

입술을 열어 혀로 목덜미를 길게 핥아 올렸다. 그러자 미루의 어깨가 바르르 떨렸다. 인우가 상의 안으로 손바닥을 밀어 넣었다. 부드러운 살결을 손가락으로 더듬더듬 훑었다.

더는 필요하지도 않은 기운이 자신의 몸으로 넘어오는 것 같았다. 한참이나 미루의 살결 위에서 호흡을 해 댔다. 귓불을 아프지 않게 문 뒤에야 상체를 물렸다.

“왜 입술은 깨물고 있어.”

질끈 깨문 탓에 하얗게 질린 미루의 입술 위로 축축한 것이 닿았다 떨어졌다. 미루는 타액의 흔적이 남은 목덜미를 문지르며 멋쩍게 대답했다.

“간지러워서요.”

언제 남겼는지도 모를 울혈 위로 타액이 맺혀 있었다. 그것이 햇빛을 받아 묘하게 반짝였다. 가는 목덜미를 내려다보던 인우의 눈이 음욕을 담고 번뜩였다.

인우도 알고 있었다. 도화가 미루를 넘보는 일 따위는 없으리란 걸. 그럼에도 드러난 피부 전부에 자신의 표식을 남기고 싶었다. 손, 목덜미, 뺨, 턱, 입술, 발등에까지 전부. 치미는 욕심을 삼켜 내지 못하고, 미루를 번쩍 안아 올렸다.

“헉.”

놀란 미루가 인우의 머리를 확 끌어안아 매달렸다. 무릎 뒤를 당기는 힘에 이끌려 인우의 허리에 다리를 두른 꼴이 되었다. 엉덩이를 손으로 받친 그가 힘을 주어 손가락을 오므렸다.

“아!”

인우는 살집이 있는 엉덩이를 세게 움켜쥐고는 숨을 깊이 들이켰다. 벗겨 놓고 보면 벌겋게 남아 있을 손자국을 생각을 하니 군침이 다 돌았다. 입술에 닿는 미루의 쇄골 부근을 혀로 핥았다. 혀에는 부드러운 옷의 감촉이 느껴졌다.

짙은 꽃 내음에 새물내가 얼핏 느껴지는 거로 봐서 씻은 지 얼마 되지 않았나 보네. 요즘 들어 자신이 없는 사이에 씻고 옷을 갈아입는 일이 잦은 것 같아, 그것도 묘하게 거슬렸다.

인우는 눈동자를 치켜떠 말간 얼굴을 살폈다. 목덜미까지 붉어진 미루는 눈을 질끈 감은 채였다. 파르르 떨리는 속눈썹을 가만히 지켜보던 인우가 다시 가슴팍을 빨아 댔다.

한번 신경 쓰이니 별게 다 거슬리네. 사념을 지워 내듯 몇 번 더 같은 곳을 핥자 천은 타액을 머금고 축축해졌다. 젖은 옷이 살결에 달라붙기 시작했다.

인우는 대청에 올라선 뒤 미루의 발에 신겨져 있는 신을 벗겨 바닥으로 던졌다. 가죽신이 나뒹구는 애처로운 소리를 뒤로하고 복도를 가로질렀다.

제 어깨를 끌어안고 몸을 부르르 떠는 미루의 엉덩이를 다시 한번 세게 움켜쥐었다. 그러자 미루가 또다시 파닥대며 짧은 신음을 흘렸다. 이번엔 터지는 웃음을 참지 않았다.

***

그 뒤로 몇 번 인우의 외출이 이어졌다. 그럴 때면 미루는 도화와 마주 앉아 글을 썼다. 요즘은 예전보다 읽고 쓰는 게 많이 늘어 재미를 붙인 참이라 조금만 여유가 생기면 연필을 들고 도화를 찾아 댔다.

도화가 공책에 정직하게 써 둔 글자를 따라 미루가 획을 그었다. 이제 꽤 손에 익은 탓에 오늘은 연필 대신 만년필로 편지도 조금 끄적였다. 편지 내용을 보이는 건 또 부끄러워서 손으로 가리고 쓴 탓에, 필체는 삐뚤빼뚤했다.

“잘 쓰시네요.”

살갑지 않은 칭찬을 남긴 뒤 도화는 별채로 넘어갔다. 도련님이 오기 전에 편지를 다 쓸 수 있을 거 같았는데. 요즘 들어 도련님의 부쩍 외출 시간이 줄어들었다.

오늘도 생각보다 빨리 돌아온 바람에 몇 줄 적지도 못했다. 꽤 익숙하게 종이와 만년필을 방석 밑에 숨겨 두고 인우를 맞았다. 씻는 내내 곁에 있어 주길 원한 인우 때문에 난처했지만, 미루는 끝까지 그의 옆을 지켰다.

인우가 물기를 닦고 옷을 입는 사이를 이용해 방석 밑에 숨겨 놓은 것을 꺼내 침대 밑에 옮겨 두었다. 이게 몇 번 반복되다 보니 익숙해지기라도 했는지, 전처럼 식은땀이 나거나 손이 차가워지지는 않았다.

“안 추우신가요?”

그새 옷을 입고 대청에 앉아 있던 인우가 고개를 젓고는 손을 뻗었다. 바삐 움직인 탓에 미루의 뺨이 조금 붉어졌다.

“이리 와 봐.”

미루가 손을 맞잡으며 무릎을 굽혔다. 인우 옆에 놓인 방석에 앉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허리에 감긴 팔이 더 빠르게 움직였다. 거세게 끌어당기는 힘에 졸지에 그의 무릎에 앉은 꼴이 되었다.

단단한 가슴팍 위로 미루의 어깨가 부딪혔다. 미루는 붉어진 뺨을 감추기 위해 고개를 슬쩍 기울였다.

“손 이리 내.”

인우는 미루의 손을 쥐고 연신 쓸어 댔다. 그러면서도 눈으로 열 손가락을 하나하나 짚어 냈다. 손톱 길이를 꼼꼼히 확인한 뒤에는 손등에 입을 맞췄다.

“미루야.”

“네에.”

귀부터 턱까지 가려질 만큼 큰 손이 뺨에 닿더니, 힘을 주어 당겼다. 인우의 품에 완전히 파묻힌 미루가 눈을 감았다.

“도화랑 뭐 했니.”

“……네?”

순간 미루가 눈을 번쩍 떴다. 갑자기 왜 도화의 이름이 나오는 거지? 평소와 같이 집을 비운 사이 무엇을 했는지를 묻는 게 아닌 것 같았다. 그랬다면 ‘오늘은 뭘 하고 놀았니’라고 물었을 테니까. 작은 얼굴에 당혹감이 스쳤다.

“둘이 뭘 했어.”

인우가 한 번 더 재촉하듯 미루를 을러댔다. 당황한 눈동자가 연신 잘게 떨렸다. 도화가 분명 비밀을 지켜 준다고 하셨는데, 도련님께 말을 해 버렸나? 편지를 다 쓸 때까진 비밀로 하려 했는데. 그럼 안 되는데. 인우에게 보이지 않게 눈꼬리를 축 늘어뜨렸다.

인우는 미루의 손가락을 쥐어 제 코앞까지 당겨 왔다. 그러고는 아까부터 느껴지던 향을 깊게 들이마셨다.

“아니면, 시가 태우는 법이라도 배웠니.”

“아니요. 아니에요.”

“그런데 왜 너한테서 도화가 태우는 시가 향이 나지.”

고개를 기울인 인우가 미루의 어깨에 코를 묻고 숨을 쉬었다. 등에 감긴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게 느껴졌다. 미루는 입을 딱 다물었다.

“…….”

처음 글 쓰는 연습하던 날, 도화가 일러 준 것이 있었다. 인우가 돌아오기 전에 옷을 갈아입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씻어 흔적을 남기지 않아야 한다는 말이었다. 도화의 얘기를 듣고 항상 그대로 실천했었는데, 오늘은 인우가 일찍 돌아온 바람에 씻기는커녕 옷도 갈아입지 못한 게 실수였나 보다.

“대답, 더 기다려야 하니.”

진득하게 귓불을 문지르던 인우가 작게 속삭였다. 음성은 나긋했다. 윽박지르지도 화를 내지도 않았지만, 미루는 어쩔 줄을 몰라 했다.

도련님께 드릴 편지를 쓰기는 시작했지만 몇 줄 적지도 못했다. 이래서는 선물이 될 수도 없는데. 어떡하지. 도련님이 화내기 전에 사실대로 말할까?

“미루야.”

이름을 한 번 부른 것뿐인데, 미루는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다. 여기서 더 숨기거나 둘러댈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깜짝 놀라게 해 주고 싶었을 뿐인데 도리어 도련님을 화나게 할 듯싶었다. 아무래도 몰래 편지를 주는 건 실패한 모양이었다.

“그게 아니라요.”

“응.”

인우는 푹 수그리고 있는 미루의 뺨을 잡아 조심스럽게 끌어 올렸다. 겁을 먹은 목소리가 기어들어 가는 게 느껴져서였다. 본디 사람의 눈을 잘 마주하지도 못하던 이였지만, 이제는 제자리를 찾듯 익숙하게 눈길이 맞닿았다.

인우는 입술을 밀어 올려 웃었다. 미루의 방어선은 너무도 쉽게 무너졌다.

“그, 글 쓰는 걸 배우고 있어요. 제가 사실은, 읽는 것도 더디고, 쓸 줄도 잘 몰라서…….”

“……나 없을 때, 도화한테?”

작은 고개가 위아래로 움직였다. 인우가 엄지로 미루의 뺨을 쓸어 댔다. 그러고는 나긋한 목소리를 꾸며 냈다.

“언제부터.”

“얼마 안 됐어요.”

“내가 그걸 물은 게 아니잖니.”

인우는 늘 정확한 것을 원했다. 애매하게 에두르거나 숨기려 들면 몇 번이고 되물어 원하는 답을 얻어 냈다.

“여기 오고 나서, 얼마 안 됐을 때부터요. 만년필 주시고 다음 날인가…….”

“아.”

그럼 시간이 꽤 지났다는 소린데. 도화에게선 어떤 언질도 들은 적이 없었다. 늘 본채에는 잠시 머물다 간 게 전부라고 고했으니까. 곧이곧대로 믿어 줬더니 뒤에서는 이러고 있었구나. 인우가 볼 안을 혀로 훑었다.

“제가 도화한테 알려 달라고 했어요. 안 된다고 하셨는데, 계속……. 부탁했어요.”

혹시라도 도화에게 불똥이 튈까 바삐 말을 덧붙였다. 물론 거짓말은 아니었다. 도화는 몇 번이고 도련님에게 배우는 편이 낫지 않겠냐고 했었으니까. 그 말을 잠자코 듣고 있던 인우가 얼핏 눈을 찌푸렸다.

“글 쓰는 걸 배우고 싶었어?”

“네에.”

“왜 나한테 말하지 않고.”

미루의 허리를 끌어안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뽀얀 뺨을 완전히 자신 쪽으로 향하게 돌린 인우가 이마에 입을 맞췄다. 불안함을 해소하듯 눈두덩과 콧대 위에도 연신 입술을 내렸다.

“……주고 싶어서, 그랬어요.”

“응?”

인우가 입술을 포갰다. 대답하려고 벌어진 입술 틈으로 혀가 다급하게 비집고 들어섰다. 미루의 고개가 뒤로 밀리기 시작했다. 자꾸만 물러나는 목덜미를 움켜쥔 인우가 혀를 완전히 밀어 넣었다.

뜨겁고 말캉말캉한 혀를 옭아매고 입술을 물고, 타액을 삼켰다. 한참이나 입 안을 헤집고 나서야 입술이 느릿하게 떨어져 나갔다. 축축하게 젖은 살덩이가 떨어지는 소리는 질척했다.

“뭘 주고 싶었는데.”

엄지손가락이 젖은 입술 위를 누르듯 스치고 지났다. 입맞춤에 흥분한 모양인지 인우의 목소리는 금세 낮고 거칠어졌다.

“……잠깐만요.”

미루는 뜨거운 호흡을 뱉어 대며 제 입술 위를 핥는 인우를 슬쩍 밀어냈다. 그러곤 인우의 허벅지에 늘어져 있던 몸을 일으켜 세웠다. 잡힐세라 마루를 뛰어가는 발이 바삐 움직였다.

“…….”

손쓸 새도 없이 달려가는 뒷모습을 보며 인우는 여유롭게 입맛을 다셨다. 어차피 도망가 봤자 담벼락 안에서 벗어나지 못할 테니. 느긋하게 등을 기대고 미루를 기다렸다.

“이거, 아직 다 못 썼거든요. 왜냐면 받침이 조금 어려워서, 오래 걸렸는데……. 아니면 다 써서 보여 드릴까요? 선물이긴 한데.”

미루가 쭈뼛대며 들고 온 건 반으로 접힌 종이였다. 인우는 고개를 젓고 손을 뻗었다. 자신에게 말하지도 않고 도화와 무언가를 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이상. 지금 두 눈으로 확인을 해야 했다. 그게 무엇이 됐든.

머뭇거리며 미루가 종이를 건넸다. 그러곤 숙제를 검사받는 아이처럼 인우 앞에 무릎을 꿇고 고개를 푹 숙이는 거였다.

인우는 종이를 펼치던 것을 멈추고 미루의 겨드랑이 사이로 팔을 뻗었다. 자신보다 왜소한 몸을 쉽게 들어 올려 품에 가두었다. 미루의 양다리를 제 허리에 감게 만들고, 어깨 뒤로 팔을 둘러 벗어나지 못하게 안았다. 가슴이 완전 맞닿은 상태가 되어서야 종이를 펼쳤다.

“…….”

위험한 일을 하지 안으셔서 좋아요. 이제 아프지 안으셔도, 손잡고 십을 때면 언제든 잡아도 되나요? 왜냐면 저는…… 도련님 손을 잡는 게 좋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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