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2화 (42/47)

4. 영원의 약속

“나 갔다 올게!”

사람이 함께 있으면 나아지는 것도 있지만 나빠지는 것도 있었다. 출근 준비가 분주해진 것이 그중 하나였다. 강동현이 곧잘 나가려는 사람을 붙잡아서 미적거리다 보면 꼭 급하게 준비를 하고 나가게 되었다.

“어! 잠깐만….”

강동현이 욕실에서 물을 줄줄 흘리며 튀어나왔다. 황경호가 아! 하고 화를 내려는데 그가 얼른 와서 황경호의 뺨에 입을 맞췄다.

“빨리 와.”

“…닦아라, 어?”

“어.”

그러면서 강동현은 황경호의 양 뺨을 잡고 입술에도 쪼옥 입을 맞추었다. 황경호는 얼굴을 살짝 붉히면서 그의 얼굴을 보고는 뒤로 돌아 집을 빠져나왔다. 지하철을 타고 병원으로 향했다. 지하철은 곧바로 한강을 건너기 시작했다. 창에 서리가 낀다. 추워지고 있었다.

이런 거 정말 얼마나 갈까 싶었는데 벌써 3년째다.

‘3년….’

말이 3년이지, 벌써 3년이나 되었다니. 이제 곧 연말이다. 연말이 되면 정말로 그와 함께 살기 시작한 지 3년. 제대로 만난 지는 3년 반? 알고 나서는 5년… 그렇게 곰곰이 따져보니 더 신기하다. 별의별 일이 다 있었지. 벌써 몇 사람에게 들켰는가….

‘이러다가 진짜 아는 사람한테 다 들키는 거 아냐….’

그러면 진짜 얼굴 들고 못 산다… 황경호는 한숨을 푹푹 쉬었다. 한 정거장으로 한강을 건넌 뒤 얼른 내린 황경호는 병원으로 올라갔다.

“왔어?”

“네, 늦었습니다.”

황경호는 얼른 간호사실로 가서 옷을 갈아입었다. 그리고 카운터로 나왔다.

“선생님 결혼 파토난 거 들었어?”

정기연이 슬쩍 다가오더니 황경호에게 속닥거렸다. 황경호가 그녀를 돌아보았다.

“파토났대?”

잘됐다… 정말 엄한 여자 인생 망칠 뻔한 거 아닌가. 그런 파렴치한 악덕 의사… 황경호는 이번엔 쉽사리 동료들에게 다시 불거진 이강유의 파렴치 행위에 입을 열지 않았지만 내심 그렇게 생각했다.

“응. 차였는지 선생님 완전 얼굴 반쪽이야. 그렇게 결혼한다고 좋아하더니만.”

“그래….”

황경호는 열기 없이 그렇게 반응하며 오늘 올 예약 환자들을 확인했다. 그리고 점심시간에는 잠깐 혼자 나와 관공서 일을 보면서 강동현과 통화를 했다.

“그렇대. 다행이지 않냐? 선생님 여자친구 엄청 예뻤는데 그런 이상한 변태한테 안 물린 게 천만다행이지.”

[하하. 참, 사람 일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아, 너 휴가 날짜는 나왔어?]

“아, 맞다. 응. 나왔어. 12월 22일부터… 1월 4일까지.”

[딱 2주네… 이번엔 어디 갈까.]

“작년에 호주도 좋았는데… 음. 좀 멀리 가도 되나….”

[왜? 어디 가고 싶은데 있어?]

“바하마….”

안 그래도 이따금 여행 사진 찾아보는 게 취미 아닌 취미가 된 황경호였다. 10월부터 찾아보았던 것 같다. 근데 카리브 해가 정말 예쁜 것이 아닌가… 보자마자 꽂혀서 어떻게 얘기를 꺼낼까 고민을 하고 있던 찰나였다.

“일단 미국 갔다가 가야 해서 이것저것 준비할 건 많긴 한데… 그래도 진짜 예쁘더라.”

[가자.]

강동현은 별달리 생각도 안 하고 그렇게 쿨하게 말했다.

“전에 초록이 보러 갔을 때도 입국심사 까다롭던데. 공항에서 대기하기 시간 너무 아깝잖아. 거기 근처도 며칠 관광하면 좋겠다 싶어서….”

[그렇게 하자. 괜히 고생하지 말고 내가 석현이 형한테 물어봐서 아는 여행사 한 번 찾아볼게. 우리 둘이 갈 패키지 만들어 달라고 하면 되니까.]

“아, 뭘 그래. 돈 들게.”

[쉬러 가는 건데 전부터 보니까 너 너무 신경 많이 쓰길래 안 되겠다 싶어서. 내가 알아서 할게. 아, 혹시 특별히 더 가고 싶은데 있으면 말하고.]

황경호는 더 뭐라고 할까 하다가 그냥 관두었다.

“응… 땡큐.”

[고마우면 오늘 집에 빨리 와라. 서비스해라.]

“죽어라, 죽어.”

[나도 사랑해~]

옛날부터 느꼈지만 목소리도 굵직한 사내새끼가 애교를 참 잘 떤다… 막내라서 그런 것일까.

‘이러니까 어머니가 배신감 느끼는 거지…’

어렸을 땐 엄마한테 이렇게 이쁜 짓을 하다가 좀 머리 컸다고 바로 무관심/무신경 모드로 바뀌었다는 거 아닌가. 참나… 그렇게 생각난 김에 어머니께도 문자 한 통을 남기고 병원으로 다시 돌아갔다. 그리고 퇴근을 하고 난 뒤 전화가 걸려왔다.

“아… 아버지.”

[음, 그래. 경호야. 잘 지내고?]

“네.”

황경호가 먼저 연락을 하지 않고서야 먼저 연락하는 일도 없는 아버지라 무슨 일이 있는 건가 싶었다.

[아니… 니 엄마랑 나랑 집에만 있기도 적적하고 해서 이번에 사업을 하나 하자고 했는데.]

“네? 사업이요?”

[아니, 큰 건 아니고. 작게 치킨집이나 하나 할까 하고. 사람이 놀면 뭐하나 싶어서.]

쉬고 싶어서 퇴직도 빨리하고 싶다고 하셨던 분이 막상 그만두니 적적하신 모양인 건 이해하겠는데… 그래도 뜬금없이 치킨집이라니. 그런 건 해본 적도 없는 분들이 말이다.

“음… 안 해보신 거 하는 거 괜찮으시겠어요?”

[너희 엄마가 음식 하고 내가 배달하고 하면 괜찮을 것 같아서. 일단 아는 사람 집에서 배우고 차차 시작해보게.]

아버지 나잇대에 일을 그만두면 경비 일이나 그런 것 외엔 할 수 있는 게 그다지 없는 게 사실이기는 했다. 황경호는 조금 걱정이 되긴 했지만 어련히 부모님께서 알아서 하실까 싶어서 알겠다고 대답했다.

[연말 때는 또 어디 가냐? 혼자만 가지 말고 다음에는 엄마랑 아빠도 좀 데리고 가라.]

아버지가 섭섭하다는 식으로 그렇게 말했다. 황경호는 그것도 그냥 알겠다고 했다. 어머니랑 한창 싸우면서 얼굴을 붉힐 때는 아버지도 어머니도 다 미웠지만 결국엔 부모 자식이라는 것은 칼로 자르듯이 잘라낼 수가 없는 것이었다. 결국에는 또 흐지부지 연락이 오면 오고 가면 가는 형태로 돌아왔다. 황경호는 그게 잘 된 거라고 생각했다.

***

그렇게 한 달이 지나자마자 아버지의 퇴직금이 고스란히 가게를 빌리는데 묶여버려 주택 대출 원리금을 갚을 때 조금씩 모자라게 된 모양이었다. 부모님이 십만 원, 이십만 원씩 송금을 해달라고 부탁을 해오셔서 어느샌가 예전처럼 부모님께 매달 용돈을 드리듯이 하게 되었다. 어차피 예전에도 했던 것이고 생활비야 문제없으니까… 부모님이 계속 달라는 소리를 하게 만드는 것도 그래서 그냥 부모님이 달라고 하기도 전에 전처럼 같은 날짜에 꼬박꼬박 입금을 하게 되었다. 그러자 두 달 정도 뒤에는 어머니한테서 문자가 왔다.

<이번 달만 조금만 더 넣어줄 수 있겠니? 이번 달은 좀 힘들어서.>

그래서 순순히 알겠다고 했더니 바로 전화가 와서 오랜만에 어머니와 통화를 했다. 어머니는 2시간 내내 자신이 얼마나 힘들게 일을 하고 있는지에 대해 얘기하셨다. 마음이 안 좋아져서 어머니가 말씀하신 금액보다 이십만 원 정도를 더 넣어서 보냈다. 그랬더니 다음 달이 되기 전에 어머니가 말씀하셨다. 한 달에 백만 원 정도만 보태줄 수 없냐고. 아직 가게가 자리를 안 잡을 때라 너무 힘들다면서 이해해 달라고 말이다.

“…….”

그렇게 한두 달을 더 했을까. 황경호는 문득 이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다시 부모님께 ‘이용’만 당하는 것 같다는 그런 거지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런 게 아니라고 생각을 하며 돈을 송금했다. 하지만 한 번 그런 생각을 하자 그 생각은 오래도록 사라지지 않았다. 이렇게 혼자만 끌어안고 생각해 봤자 결국엔 예전과 같다는 생각에 어머니께 전화를 했다.

“엄마.”

[응, 경호야. 웬일이니.]

황경호는 몇 번이나 마음을 다잡고 입을 뗐다.

“돈… 붙여 드리는 거 말인데요. 언제까지 필요하세요?”

그러자 어머니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되물었다.

[왜 그러는데?]

“아뇨… 저도 월급 반이나 보내 드리니까 언제까지 해야 할지는 알아야 할 것 같아서요.”

사실 어머니께 돈을 안 드린다고 하면 어떻게 나올 거냐고 물어보고 싶었다. 물론 그러지 못했다. 어머니는 다시 잠시 말을 멈추시더니 불쑥 말씀하셨다.

[…너 돈 있는 거 다 알아.]

“네?”

[너 로또나 그런 거 됐지? 안 가던 해외여행을 휴가 때마다 가고 입고 다니는 옷도 비싼 거고….]

“…….”

[엄마, 아빠가 오죽 힘들면 이러겠니? 언제 엄마가 너한테 이랬어.]

정말로 기억을 못 하는 것일까? 황경호는 취업을 하고 나서 꼬박꼬박 집에 돈을 부쳤다. 1년 전까지만 해도 말이다. 황경호는 말을 잃었다.

[너 로또라도 된 건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너 돈 좀 있는 거 엄마가 알고 있다는 것만 알아라. 그런데도 엄마 아빠한테는 한마디도 안 하고… 그럴 수도 있다 싶었지만 솔직히 속상했다. 가족끼리 좀 도와주고 그럴 수 있는 거 아니니?]

그 말에 황경호는 출처를 알 수 없는 수치감이 들었다. 자신이 한없이 치사하고 얄팍한 인간이 된 것 같은 느낌이었다. 뭐라고 대답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혼란스러웠다. 언제까지 돈을 드려야 하냐는 질문을 한 게 그렇게 문제였을까? 부모님과 잠깐이라도 이야기를 하려고 치면 언제나 황경호가 잘못된 것만 같은 느낌을 받는다. 어째서?

강동현과 같이 살고, 그가 돈이 많다고 해서 황경호가 노동을 해서 번 돈을 낼름 전부 부모님께 갖다 드려도 아깝지 않다고 여겨야 하는 걸까? 왜? 엄마, 아빠는 단 한 번도 조건 없이 그에게 베푼 적이 없으면서 그는 아낌없이 그들에게 주어야 한단 말인가. 어째서? 그들에게 전부 헌신적이지 않다고 여기면 이렇게나 창피를 주면서, 그들은 언제 황경호에게 헌신적인 적이 있었단 말인가. 황경호의 가슴 속에서는 그런 억울함이 울컥 솟았다.

[다른 집 아들들은 나이 들고 결혼하면 와이프 시켜서라도 부모한테 효도한다는데 넌 어째 나이가 들수록 인색해지는 것 같다. 전에도 그렇고… 내가 다 잘못 키운 건가 싶기도 하고. 지금까지 뭐 하고 살았나 허무하기도 하고.]

엄마는 그런 식으로 말씀하셨다. 그건 언제나 그랬듯이 황경호의 안에 죄책감과 수치감을 잔뜩 낳았다. 억울함과 분노도.

“…엄마는 참… 저한테 뭘 맡겨 두신 것 같아요, 항상… 전에 그렇게 싸우기도 했으면 뭐가 바뀔 줄 알았는데… 전 그냥 엄마한테 편리한 인출기 같은 거네요. 자식이니까 당연히 그렇게 해야 하는 거고… 편하시겠어요.”

황경호는 저도 모르게 그렇게 빈정거리고 말았다.

[뭐? 너 또 왜 말을 그렇게 하니? 어?]

“그러는 엄마는 저한테 뭐 해주셨어요? 엄마, 아빠는 저한테 뭐 해주셨는데요? 저 대학도 알아서 다녔고 학비도 제가 알아서 했고 서울 와서 살면서도 엄마, 아빠한테 한 번도 손 벌린 적 없는데 왜 엄마, 아빠는 자꾸 저한테 손 벌리세요?”

[또! 또 이래! 또! 내가 자식한테 하소연 한 번을 못 한다, 어? 엄마가 힘들어서 힘들다고 말 좀 할 수 있는 거 아니니? 그게 그렇게 싫어? 어? 부모 자식 간에 이 정도도 안 돼? 그리고 내가 너한테 못 해준 게 뭐가 있어! 너 대학 다닐 때 보증금은 누가 대줬는데! 어?!]

“그것도 결국 다 들고 가셨잖아요! 아, 진짜…!”

결국 한 푼 두 푼 이런 식으로 따지게 된다. 치사하고 얄팍하게. 어째서 엄마랑 황경호 사이에는 항상 이렇게 낯부끄러운 걸 하나하나 따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 벌어지는 걸까. 황경호는 이런 상황에 처하느니 차라리 자신이 손해를 보고 말자는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런데 남도 아닌 부모는 그것마저도 못하게 했다. 부모라는 이유로 황경호에게 많은 걸 강요하면서 황경호의 의문이나 거절은 불효막심하고 나쁜 것으로 몰아간다. 그리고 그것은 황경호에게 수치감을 느끼게 했다. 아니라는 것을 이제 아는 데도 말이다.

어째서 내가 잘못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이렇게 창피함을 느껴야 하는 것일까. 어째서 아무것도 잘못하는 것 없이, 손해를 봐가면서도 이런 말을 들어야 하는 것일까. 자신의 부모는 왜 이런 것일까. 왜 다른 사람들처럼…….

황경호가 어머니와 언쟁을 끝내고 전화를 끊었을 땐 너무 부끄러워서 얼굴이 화끈화끈하고 손이 떨렸다. 눈을 감고 두 손으로 얼굴을 덮어 가렸다. 다른 사람들은 힘들면 부모님이 생각이 난다는데 어째서 그의 부모는 그에게 고통만 가져다주는 것일까. 깨닫고 나서 돌아보니 좋았던 적이 한 번도 없었던 것 같다. 설사 있다고 하더라도 항상 진실을 외면해 왔던 건 아닌지, 그런 생각이 들었다. 부모님은 항상 그들의 눈치를 보게 만들었다. 불안과 초조, 그런 감정을 자꾸 되뇌게 한다. 다른 사람들도 이런 걸까? 다른 사람들의 부모들도 이런 걸까?

‘…걔네 집이 특별한 건 알아. 빠지는 게 없는 집이니까. 부유하고 화목하고….’

황경호는 어쩔 수 없이 또 강동현의 집과 비교를 하면서 그렇게 스스로를 타일렀다.

‘그냥 한동안… 연락 끊으면 돼. 그러면 또 괜찮아질 거야.’

황경호는 그렇게 생각하며 겨우 마음을 달랬다. 그리고 청소를 하고 요리를 하면서 좀 기분을 풀고 있을 때 강동현이 돌아왔다.

“나 왔어.”

“왔어?”

“맛있는 냄새 난다.”

강동현은 곧바로 부엌으로 왔다. 그리고 여느 때와 같이 황경호를 뒤에서 끌어안으며 황경호가 하고 있는 것을 내려다보았다.

“밥 안 먹었어?”

“응. 그냥 집에서 먹고 싶어서.”

강동현은 황경호의 손목을 잡고 들어 올려 황경호가 손으로 잡고 있는 요리의 끝부분을 먹었다. 활짝 웃었다.

“진짜 맛있네? 다 안 됐어? 빨리 먹자.”

사람에게 기운이라는 게 진짜 있다면, 강동현은 정말 그런 기운이 밖으로 뿜어져 나오는 스타일이었다. 자신이 주변 사람들에게 영향을 많이 받는 스타일이라서 그럴까? 그가 돌아오니 진짜 기분이 좀 좋아졌다.

“밥부터 퍼.”

“알겠습니다.”

강동현은 예쁜 그릇에다가 밥을 동그랗게 담아서는 식탁에다 놔두었다. 황경호도 얼른 반찬과 메인 요리를 식탁에다 두었다. 그리고 둘이서 오랜만에 엄청 포식을 했다. 강동현은 세 그릇이 넘게 먹었고 황경호도 두 그릇 정도는 먹었다.

“더는 못 먹겠다… 와… 맛있었어….”

강동현이 의자에 늘어져서 자기 배를 만졌다. 그리곤 중얼거렸다.

“아, 맞다… 나 다이어트 해야 하는데….”

“응? 왜?”

황경호가 깜짝 놀라 그를 바라보았다. 음식 하는 사람한테는 맛있게 먹어주는 사람이 언제나 필요한 법이다.

“다음 영화. 캐릭터가 마음고생을 좀 심하게 하는 캐릭터라 못 해도 15kg 정도는 빼야 할 것 같아.”

“어? 그렇게나 많이?”

갑자기 그렇게 다이어트를 하면 당연히 건강에 안 좋다. 황경호가 약간 걱정스러운 얼굴로 보자 강동현이 씨익 웃었다.

“니가 더 많이 하게 해주면 잘 빠지지 않을까? 어? 그게 다이어트에는 직빵이라는데.”

“지금도 많이 하는 거라고… 어? 알긴 아냐.”

황경호가 약간 질린다는 얼굴로 그를 보았다. 그가 촬영 때문에 집에 못 오거나 해외를 가는 게 아니라면 아침저녁으로 한 번씩은 한다. 주말에는 더 하고… 원래 부부들은 이렇게 많이 하는 것일까. 아니면 그가 발기부전 및 지루에 대한 보상심리 등으로 더 하려고 드는 걸까. 원래는 이렇게까지 많이 안 했다고 본인 입으로도 그랬던 것 같은데.

그렇게 밥 먹고 같이 치우고 강동현은 본인이 다이어트가 정말 시급하다면서 황경호를 얼른얼른 벗겨서 예의 소파에다가 넘어뜨렸다. 소파의 높은 언덕에다 그를 엎드리게 하고 뒤에 서서 팡팡 그의 엉덩이를 치는 것은 강동현이 제일 좋아하는 체위 중의 하나였다.

“아… 난 이게 너무 좋더라. 윽… 하아… 아, 좋다~”

결혼 3년 차…라고 해야 할까. 강동현은 섹스할 때 좀 아저씨 같아졌다. 황경호는 좀처럼 몸을 움직일 수가 없는 소파에 찰싹 달라붙어서는 버겁게 신음하면서 얼굴을 빨갛게 붉히고 있었다. 눈을 감은 채 앞뒤로 빠르게 흔들리면서 불평했다.

“난 이게 제일 싫어…! 핫… 아앗! 너무 깊어어… 읏…! 아앙. 아앗…! 흐… 흐아…!”

뭔가 버거움과 쾌락을 왔다 갔다 하는 느낌이랄까. 황경호도 이제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져서 예전처럼 삽입을 당하는 것에 크게 긴장을 하거나 하진 않았다. 그가 젤을 잔뜩 발라서 핑거링을 하고 쑥 집어넣으면 이제 잘 들어왔다. 강동현도 금세 이렇게 움직이고 말이다. 하지만 그래도 처음엔 벌어지는 게 좀 한계가 있어서 그가 이렇게 빠르고 강하게, 진동폭을 크게 해서 박으면 배 안이 늘어졌다 좁아졌다 하는 게 너무 생생하게 느껴져서 힘들다. 꽉 붙여 들어오면 한계 이상으로 늘어나는 느낌이라 헉, 하고 놀란다.

“뭐가 또 싫대. 좋으면서. 으윽… 헉… 좋지? 응? 좋지?”

강동현은 황경호의 허리를 잡고 퍽퍽 박다가 그의 등에 자신의 몸을 붙이며 그의 몸을 끌어안았다. 젖꼭지를 검지로 말랑말랑 누르며 그의 귓가에 웃음을 흘렸다. 황경호가 신음을 흘리며 예민하게 안에 들어온 자지를 조였다.

“으음… 좋다고 해, 빨리, 어? 더 빨리 할까? 더 세게?”

“아! 됐어! 으윽… 하…! 으음… 응….”

황경호는 미간을 강하게 좁히며 강동현이 자신의 귓가와 뺨에 입술을 비비는 걸 느꼈다. 살이 부딪치는 소리가 너무 빨라서 야하다. 엄청 박히고 있는 것이다. 언젠가 그가 이런 식으로 박히고 있는 황경호를 찍은 동영상을 보여준 적이 있었는데 생각보다 훨씬, 너무 야해서 깜짝 놀란 적이 있었다. 그때 동영상은 바로 지워버렸다. 강동현이 아주 세상 무너진 얼굴을 했다.

‘아으… 갈 것 같아….’

황경호는 더이상 참기가 힘들어서 파르르 떨면서 숨을 헐떡거렸다. 지금 가면… 지금 오르가즘을 느끼면 진짜 죽을 것 같이 될 것이다. 그가 봐주지도 않고 더 신나서 퍽퍽 박아대면 황경호는 울고불고 그에게 애원을 해가면서 멀티를 느끼고 그는 안에다 잔뜩 사정할 거고… 물론 이런 상상은 오히려 상황을 악화시키기만 했다.

“핫… 으으… 아아앙… 하… 안 돼… 흑… 아아… 싫어… 아아앗….”

그대로 황경호는 난잡한 말들을 더 상상하고 말았다.

기분 좋아. 기분 좋아. 너무 기분 좋아. 사랑해. 사랑해. 너무 좋아. 빼지 마. 절대 빼지 마. 계속 박아줘. 죽을 때까지 해줘. 찔러줘. 싸줘. 더럽혀줘. 잔뜩… 나올 것 같아. 나와. 나와. 죽을 것 같아. 뜨거워. 빨리…!

“하아으… 나 좀 어떻게… 아아아아앙….”

황경호는 그대로 끝내주게 야시시한 얼굴로 온몸을 수축했다 풀었다 하면서 오르가즘을 느끼기 시작했다. 강동현이 헉 하면서 그에게 더 달라붙었다.

“아윽… 씨X… 너 이럴 때 진짜… 으윽… 경호야… 경호야… 미치겠다… 헉… 진짜 좋아… 아윽… 허억….”

황경호의 음부가 자신을 쫙쫙 조이며 빨아대자 강동현이 황경호를 꽉 감싸 안고 그의 턱을 움켜쥐고 그의 뺨을 깨물고 빨았다. 황경호는 경련을 계속 하면서 숨을 멈추고 있었다. 온몸이 커다란 쾌락에 감싸 안겨 있었다. 모든 감각은 역치를 넘으면 아프다. 고통스러운 쾌락이었는데 끝나지 않기를 바랐다. 황경호는 흐릿하게 눈을 뜨고 옆을 보았다. 그러자 거실의 유리창에 그가 어떤 꼴로 강동현에게 박히고 있는지 적나라하게 비쳐 보였다. 강동현은 섹시한 얼굴로 열중하고 있었고 그의 몸과 자신의 몸이 끊임없이 빠르게 섞이고 있었다. 황경호는 온몸이 확 빨개졌다. 더 빨개졌다. 괴로운 듯 인상을 찌푸렸다. 너무 야했다.

“하아앗… 읏. 아아아아… 모, 못해… 아앙… 나 계속….”

이 소파가 문제다. 강동현이 자꾸 한계 이상으로 들어와서 민감한 성감대를 치대고 문지르자 황경호는 결국 엄청 경련하며 또 애원하기 시작했다.

“빨리… 빨리 해… 아앗. 아앙…! 힉. 으으. 하윽. 으윽… 빨리. 앗. 그, 그만… 흐윽… 그만. 나 이상해져. 죽어. 핫. 빨리. 빨리 싸. 이 변태! 하악. 아. 아아. 아아앗.”

황경호가 팔에도 힘이 안 들어가 훅 하고 앞으로 넘어지자 얼른 강동현이 잡아서 다시 일으켰다. 강동현은 황경호의 양쪽 가슴을 손으로 억지로 움켜쥐며 황경호의 귓가에 얼굴을 묻고 거칠게 숨을 헐떡거렸다.

“안 돼. 진짜, 죽겠다. 헉. 아, 진짜… 젠장. 아, 너무 좋아. 사랑해. 사랑해. 으윽. 아…!”

“으음… 읍… 안 돼. 핫… 안 돼애. 아앗. 아. 아앙. 아. 아아아. 아아앙.”

강동현이 손이 아래로 내려가 줄줄 흘리고 있는 황경호의 것을 잡자 황경호는 몸을 뻣뻣하게 하며 그의 팔을 꽉 붙잡았다. 안 그래도 그에게 박히면서 소파에 잔뜩 눌러지고 비벼져서 미칠 것 같은데 그가 손으로 쥐니 정신이, 존재 자체가 아찔해지는 느낌이었다. 황경호는 정신없이 애원했다.

“은혁아. 은혁아. 아니… 안 돼. 핫. 아앙. 만지지 마. 아앙. 거기 만지지 마. 핫. 그만해줘. 그만. 아. 사랑해. 사랑해. 아아앙. 그만…! 아앙. 사랑해. 너무 좋아. 이제 해줘. 앗. 이제 제발 해줘. 거기 안 돼. 거기 안 돼. 빼줘. 핫. 못 해. 이제 못 하겠어.”

첩첩첩첩. 찍찍찍. 퍽퍽퍽! 황경호가 어떻게 느껴지냐, 강동현이 어떻게 박냐에 따라 소리가 조금씩 달라졌다. 강동현은 최고의 속력으로 피크를 찍으며 황경호의 어깨를 꽉 깨물었다.

“은혁아아아….”

황경호는 뒤로 아예 넘어가며 전신의 구멍에서 온갖 것을 다 흘리며 무아지경으로 느꼈다. 온몸이 땀과 체액으로 흠뻑 젖어 타오를 듯이 뜨거웠다. 그리고 더 뜨거운 상대의 몸과 이어졌다.황경호는 거의 넋이 나간 채로 강동현이 안에 잔뜩 싸는 것을 느꼈다.

“아윽…! 아…!! 으으으윽…!!!”

“하아아아앗…!!”

오늘은 마지막까지 너무 격렬하고, 또 격렬한 오르가즘이다. 황경호는 마구 경련하면서 강동현의 팔을 마구 쥐어뜯었다. 영원한 쾌감. 하나가 된 기쁨. 그렇게 얼마나 있었을까. 정신을 차렸을 땐 황경호는 소파에 덜렁덜렁 걸쳐져 있었고 강동현은 그 위에 엎어져 쓰러져 있었다.

“하아… 흑… 아….”

황경호는 움직일 수 없었다.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불평했다.

“내가… 너 때문에 제 명에 못 산다… 아….”

“나도….”

거의 정신이 나갔다 싶은 강동현이 그렇게 대꾸했다.

“살살 좀 해… 살살… 사람 잡을 일 있어….”

“조금만 더 있다가… 한 번만 더 하자… 아, 진짜 너랑 이것만 하고 살면 소원이 없겠다….”

“제발 죽어, 좀… 힘들어… 흐윽….”

이런 섹스를 하면 그날 나쁜 일이든 좋은 일이든 전부 까먹을 수 있다는 게 장점이자 단점이다. 황경호는 그렇게 유종의 미를 거두었다.

***

그렇게 지내는데 전과는 다르게 어머니가 먼저 연락을 보내왔다.

<전에는 엄마가 너무 흥분했던 것 같다. 니가 이해해주겠니? 엄마도 사람이잖아.>

어머니가 이런 식으로 연락을 먼저 한 것은 처음이었다. 그런데도 찝찝한 마음은 가시지 않았다.

‘그래… 엄마는 진짜 힘들어서 그런 말씀 하신 거겠지. 안 하던 일 하시는 거니까. 장사하려고 음식 하는 게 보통 일도 아니고. 엄마라고 그러고 싶어서 그러셨겠어. 다 사정이 안 좋으니까….’

황경호는 그렇게 자신을 타일렀다. 그리고 날짜가 되었을 땐 전에 엄마가 말했던 대로 백만 원을 송금했다. 괜찮아지시면 어련히 말씀하시겠지, 하고.

그렇게 몇 달이 지나니 이번엔 아버지가 전화를 해오셨다. 일요일 아침이었다. 강동현은 아직 잔다. 그는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경호야… 정말 정말 미안한데….]

“네? 왜 그러세요, 아버지?”

[그… 지금 돈 얼마나 있을까. 엄마 아빠 좀 빌려줄 수 있을까?]

“네? 얼마나요?”

[있는 대로 좀… 아니, 너희 엄마한테 들었다. 너 돈 좀 있다며. 괜히 돈 있는데 이자를 왜 내. 서로 힘들게. 그냥 원금 통째로 갚고 아빠가 그 돈 너한테 갚는 게 좋지 않겠니? 응?]

황경호는 당황했다. 아마 남은 원금이 아직 억 단위는 될 것이다.

“저… 그 정도 돈은 없어요, 아버지.”

[에이~ 너네 엄마가 너 못 해도 몇억은 당첨됐을 거라던데. 너무 그러지 말고. 엄마, 아빠 딱 한 번만 돕는다고 생각하고. 응?]

“아니… 아버지, 진짜 없어요. 정말이에요. 저 해봤자 저금한 거 몇천만 원 정도밖에….”

2년 정도 꼬박 월급을 저금했으니까 말이다. 가끔 가출(?)을 할 때나 기부를 할 때 유용하게 쓰곤 했다. 알다시피 강동현은 기부 같은 건 질색을 해서… 강동현도 누차 남자는 비상금이 있어야 한다고 강조하곤 했는데 정말 비상금은 중요하다. 마음가짐이 달라지니까 말이다.

황경호가 당황해서 사실대로 말하자 아버지는 한숨을 푹 쉬시더니 중얼거리셨다.

[진짜 너희 엄마 말대로 너 많이 바뀌었구나….]

“…그게 무슨 뜻이세요?”

[아니… 이제 너도 커서 그렇겠지만… 예전에 넌 엄마, 아빠 말이라면 어떻게든 기를 쓰고 해주려고 했지 않니. 효자도 이런 효자가 없다고 내가 자랑도 참 많이 했는데….]

“…….”

[그럼 그거라도 좀… 보내줄 수 있지?]

아버지의 목소리엔 절박함이 느껴졌다. 그러지 않았더라면 아버지가 이렇게 연락을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엄마, 아빠는 항상 니가 잘 되기만을 빌어. 니가 잘 되어야 우리도 잘 되는 거지. 이번 한 번만 도와줘.]

황경호는 습관적으로 저도 모르게 네… 라고 대답하고 말았다.

[그래… 정말 우린 언제 호강 한 번 하고 살아보나 싶다. 우리 아들만 믿고 있지만. 노후 대비는 무슨… 어휴. 사는 게 참 팍팍하다. 되는 것도 없고.]

이번에는 아버지도 그런 식으로 푸념을 하셨다. 그냥 듣고만 있다가 전화를 끊었을 땐 이게 뭔지 제대로 알 수가 없었다. 그리고 송금을 하려는데 미적거리기만 했다. 어차피 한꺼번에도 안 될 거고….

‘어차피 안 주시겠지… 항상 그 집 나중에는 내 거 될 거라고 얘기하시곤 했으니까.’

몇천만 원… 남들 눈에는 정말 얼마 안 되는 돈일지도 모르겠다. 누구라면 부모님이나 가족한테 그 정도 주는 것은 아무렇지도 않을지도 모른다. 가족이니까 말이다, 가족이니까… 그런데도 황경호는 미적거렸다.

“뭐해?”

강동현이 막 일어났는지 눈을 비비며 침실에서 나왔다. 황경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니. 오늘 어디 가야 한다고 하지 않았어?”

“어… 근데 아직 시간 많아. 이리 좀 와봐.”

강동현이 눈도 제대로 못 뜨면서 팔을 벌려서 황경호를 불렀다. 황경호는 주춤하다가 그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서로 끌어안았다.

“아~ 일하러 가기 싫다….”

“또 이런다.”

“주말에 일하러 가는 거 진짜 짜증 나. 너 쉬는데….”

“하하.”

황경호가 웃었다. 강동현은 같이 간단하게 시리얼과 샐러드를 먹고(진짜 다이어트 중이다) 같이 스파 가서 빨리 목욕 좀 하고 붓기도 뺀 강동현은 일하러 가고 황경호는 집에 들렀다가 사람들을 만나러 나왔다. 같이 쉴 수 있을 땐 대부분 함께 있지만 그러지 못할 땐 어쩔 수 없으니까 말이다. 황경호는 오랜만에 예전에 아프리카에 같이 갔던 사람들을 만나 얘기를 나누었다. 그리고 그렇게 며칠은 계속 사람들을 만나서 이야기를 하며 소일했다. 강동현이 일찍 오는 날은 빨리 들어가고… 혼자 있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며칠이나 지났을까. 11시쯤에 집에 들어왔다. 맞춘 듯이 엄마에게 전화가 왔다.

“아, 엄마….”

[음, 그래. 집이니?]

“네.”

[혹시나 까먹었나 싶어서… 너희 아빠가 니가 도와주기로 했다는데 연락도 없고 해서 무슨 일 있나 해서….]

엄마는 힘없는 목소리로 그렇게 말씀하셨다. 힘이 없는 그녀의 목소리는 황경호에게 죄책감을 들게도 했다. 안타까운 마음도 들게 했다. 하지만… 구질구질하다는 생각도 들게 했다. 그리고 그런 게 총체적으로 기분을 순식간에 가라앉혔다. 황경호는 작게 한숨을 쉬면서 한 손으로 머리를 감쌌다.

[…너 진짜 부모 죄인 만들래? 어?]

“네?”

[어디서 엄마 앞에 두고 한숨을 쉬어?! 내가 너 진짜 그렇게 가르쳤어? 어?]

자존감은 없고, 하지만 자존심은 강하고. 에고를 받쳐줄 만큼 능력도 부도 되지 않고. 유일하게 자신의 밑이라고 할 수 있는 자식에게 화풀이를 하고 상처를 주거나 감정을 토로하는 용도로 쓰고 조금이라도 반항하거나 거부하면 권위로 찍어 누르는 건 사실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많은 한국의 부모들이 하고 있는 일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해서 그들이 굽히고 들어올 때 자신의 얄팍한 힘과 권위를 즐길 수 있는 것이다.

“아니… 엄마… 그게 아니라요….”

[그래! 필요 없다, 필요 없어! 다 필요 없어! 너 다시는 엄마한테 연락할 생각하지 마라! 알겠어?!]

그 소리를 들으니 이제 이런 엄마의 욱하는 다혈질은 적응이 되었다고 생각하면서도 상처받았다.

“엄마….”

[돈 그거 꼴랑 몇천이 아까워서 부모를 이렇게 죄인으로 만들고!! 너 키우는데 얼마나 들었을 거 같아!! 몇천 가지고 됐을 거 같아!!]

“…….”

그대로 전화를 끊지도 못하고 엄마가 분에 풀릴 때까지 화를 내고 심한 말을 하는 것을 그대로 듣고 있었다. 엄마는 끊임없이 악담을 했다. 언제나 그녀는 자신을 사랑하지만 삶이 힘들고 감정이 치밀어 오르니까 그 순간에 실수로 그런 말을 하는 것이라고 스스로를 타이르곤 했다. 그 순간만 지나면 그녀는 가끔 상냥해질 때도 있었으니까. 하지만 이제는 그냥 이게 그녀의 진심이라고 생각해야 할 것 같다. 그냥 그게… 더 마음이 편할 것 같다.

그러고 가만히 있는데 갑자기 누군가의 손이 황경호의 손에서 휴대폰을 뺏어갔다. 깜짝 놀라 돌아봤더니 강동현이 황경호의 휴대폰을 들고 통화종료 버튼을 누르고 있었다.

“아… 있었어? 미안….”

황경호는 그의 얼굴을 잠깐 보았다가 다시 고개를 돌렸다.

“언제부터 이랬어? 왜 말 안 했어?”

통화 상대의 목소리가 밖에서도 다 들릴 정도로 컸다. 강동현이 그렇게 말하자 황경호는 휴대폰을 받으면서 고개를 돌렸다.

“아니, 별일 아니라서.”

“무슨 일인데? 집에 무슨 일 있어?”

강동현이 황경호의 옆에 앉으며 그의 얼굴을 살폈다.

“뭔데? 어?”

“아무것도 아니야. 내가 해결할 수 있어.”

황경호는 그렇게 말했다. 그러자 강동현이 인상을 찌푸렸다.

“뭐가 아무것도 아니야. 힘든 거 있으면 참지 말고 말하라고. 어?”

“아니라니까.”

“황경호.”

“진짜 아무것도 아니라니까.”

그러자 강동현이 자신에게로 시선을 돌리지 않는 황경호의 얼굴을 가만히 보고 있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진짜 나쁘게 듣지 말고. 그렇게 힘든 거면 돈은….”

“싫어! 그런 말 하지 마.”

강동현이 운을 떼자 황경호는 다 듣기도 전에 그렇게 화를 냈다. 자존심이 상하기도 했고, 여러모로 속상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 집 문제는 내가 알아서 해.”

“너무 그렇게 생각하지 말고. 어? 우리 돈 써도 되잖아. 너네 집 일은 이제 내 일이나 다름없는 거야. 우리 집에 무슨 일 있으면 넌 안 도와줄 거야?”

강동현은 그렇게 설득했다. 황경호는 강동현이 그의 스타일로 이번 일을 해결했을 때 앞으로 어떻게 될지가 훤히 예상이 되었다. 절대 끝이 안 날 거다.

‘그래서 다른 사람은 몰라도 우리 집에는 절대 들키고 싶지 않다.’

이렇게 스스로의 부모를 생각하는 건 자학을 하는 것만큼이나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그리고 강동현을 설득하기 위해 이런 걸 ‘구질구질’하게 다 설명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만으로 스트레스를 받았다.

“안 돼. 내 말대로 해. 절대 싫어.”

황경호는 유례없이 확고하게 자신의 의견을 피력했다.

“…….”

“…….”

그렇게 둘 사이로 침묵이 흘렀다. 사람들은 결국 영원히 서로를 완벽하게 이해할 수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황경호는 엄마와의 통화로 너무나 기운이 빠진 상태였다. 그녀에게서 그런 말을 듣는 건 여전히 너무나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한 마디 한 마디가 비수처럼 꽂혔다. 어째서 그녀는 황경호가 상처받는 말을 그렇게 잘 아는 것일까.

“흐, 흑….”

그렇게 생각하는데 갑자기 다짜고짜 눈물이 나왔다. 강동현이 깜짝 놀라서 황경호의 팔을 붙잡고 그의 얼굴을 살폈다.

“아, 진짜….”

강동현은 부글부글한 얼굴로 황경호를 껴안았다.

“미안….”

황경호가 자신의 얼굴을 가리며 그렇게 작게 말했다. 강동현이 완전히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대꾸했다.

“니가 뭐가 미안해.”

“괜히 쓸데없는 데 너도 불편하게 만들잖아. 귀찮지….”

“야… 내가 우리 집에 지랄했을 때 니가 더 맘고생 해놓고 그렇게 말하면 내가 뭐가 되냐?”

강동현이 말했다. 그리고는 헉 하고는 황경호를 보았다.

“너 이런지 몇 달 됐지?”

“…….”

“진짜 말 안 할래? 어? 이런 일 있으면 혼자 힘들어하지 말고 재깍재깍 말하라고. 내가 몇 번을 말하냐고.”

강동현이 약간 화를 내며 그를 다그쳤다. 황경호는 할 말이 없었다.

“미안….”

이런 일을 말하는 게 자존심이 상하고 슬프다는 걸 알지 못하는 것 같은 강동현이었다. 하지만 걱정을 하는 그의 마음은 이해가 되고 고마웠다. 그래서 미안하다고밖에 말할 수 없었다. 황경호도 이런 자신이 싫었다.

“아니… 사과하라는 게 아니라….”

강동현도 답답해 보였다. 이런 일은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누가 가르쳐 주었으면 좋겠다. 둘 다 아직 젊어서 그런 걸까. 잘 모르겠다.

“그럼… 어쩔 거야?”

강동현이 물었다. 황경호는 그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은 채 조용히 대꾸했다.

“모르겠어… 그냥 일단 내가 가지고 있는 것만 드릴까 봐.”

“뭐 때문에 문제인 건데. 일단 그래도 둘이서 생각하는 게 혼자 생각하는 것보단 낫지 않겠어?”

강동현이 그렇게 묻자 황경호가 약간 갈등하다가 한숨을 한 번 쉬고 간략하게 지금 부모님의 재정상태를 자신이 아는 것을 기준으로 설명했다. 설명을 다 하고 나니 최대한 구질구질하지 않게 한다고 했는데도 너무 구질구질해서 창피함을 느꼈다. 황경호는 얼굴이 홧홧해서 그의 앞에서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강동현은 약간 생각하는가 하더니 말했다.

“일단 대출이 문제인 거네. 그것 때문에 계속 일하려고 하시는 거고… 음, 근데 솔직히 퇴직금으로 그냥 대출금 최대한 갚아버리고 다른 일 하시는 게 제일 괜찮은 거 아니셨을까? 지금 하시는 사업이 잘되시는 거 아니라면….”

“계속 힘들다고만 하셔서 지금 하시는 일로 얼마나 버시는지는 잘 모르겠어… 한 번 내려가서 봐야 알 것 같아….”

도와드리면서… 황경호가 우울한 기색을 떨치지 못하며 그렇게 말했다. 집과 관련된 얘기를 솔직하게 누군가에게 해본 것은 강동현이 유일했기 때문에 더욱 창피하기도 했다. 그는… 그는 황경호의 연인이지 않은가. 황경호도 멋지고 좋은 모습만 보이고 싶었다. 잘 해주고….

강동현은 고민이 되는 표정으로 잠깐 끙 하더니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진짜로, 내가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건 진짜 해야 할 것 같아서 하는 말인데.”

“뭐….”

“일단… 일단 빚은 그냥 갚아드리자. 니가 부모님한테 빌려주는 거라고 하든가. 이자가 무시 못 하는 거잖아. 부모님도 그럼 훨씬 나을 거고.”

“…….”

“진짜로. 그러면 진짜 나을 거야. 지금 하는 사업을 계속하시든 안 하시든. 한 달에 원금 빼고도 이자만 몇십만 원씩 하는데 그런 거… 잘은 모르지만 영세업자들한테는 차이가 크잖아.”

“…….”

“응? 이건 진짜 내 말이 맞아. 어? 한 번 부모님 뵙고 어떤지 보고… 그리고 그렇게 하자, 응?”

절대로, 절대로 여기서 강동현의 도움을 받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에게 몇 달 동안 얘기를 하지 않은 것이었지만, 그의 말이 일리가 있어 단박에 싫다는 말도 하지 못했다. 부모님이 싫은 만큼 걱정되는 마음도 없다고는 할 수 없었다. 부모니까 말이다….

“너무… 미안해서… 그런 거… 난 너한테 해줄 수 있는 것도 없는데….”

“아, 뭐라는 거야. 지금까지 니가 나한테 해준 게 얼만데…! 진짜 그런 소리 좀 하지 마라. 그리고 결혼했으면 내 게 니 거고 니 게 내 건 거지!”

강동현이 화를 냈다.

“난 너 완전 내 거라고 생각하고, 어? 이런 거(?) 저런 거(?) 다 하는데 니가 계속 그렇게 빼니까… 너만 손해 보잖아. 사람 찔리게….”

그리고 그가 좀 툴툴거렸다. 그의 말에 웃을 곳이 어디 있었는지 황경호가 저도 모르게 어이가 없어서 웃었다.

“진짜 넌… 난 놈이다….”

“응? 나? 당연하지.”

황경호는 드디어 강동현의 품에서 몸을 떼고 얼굴을 들 수 있었다.

“고마워… 일단 한 번 대전 갔다 와서 더… 얘기하자.”

“응. 나 좀 멋있었어?”

강동현이 그렇게 장난스럽게 말했다. 황경호는 또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래.”

“우리 이제 진짜 좀 부부 같지 않냐? 나도 내 입으로 말하는데 막 오~ 싶더라. 좋은 남편 아냐? 어? 빨리 칭찬해.”

“아, 진짜… 그런 건 그런 말 안 해야 더 멋있는 거 아냐?”

“아니… 뭔가, 내가 생각해도 내가 대견해서.”

강동현이 약간 머쓱하게 그렇게 말하자 황경호는 진짜 확 웃음이 터졌다.

“하하하.”

그러자 강동현도 확 얼굴이 펴져서는 미소를 지었다. 그는 황경호를 다시 끌어안으며 카우치에 털썩 같이 누웠다.

“우리 경호는 웃는 게 제일 예쁘다니까.”

“아! 잘생겼다고 하라고!”

“뽀뽀나 할까, 마누라?”

“아! 진짜 싫어. 징그러워.”

강동현이 간지럽히며 자꾸 장난을 치자 황경호가 몸을 이리저리 피하면서 그의 얼굴을 밀어내며 웃었다. 강동현이 기어코 황경호의 입술에 쪽 입을 맞추면서 말했다.

“사랑해.”

아까 그렇게 절망적인 기분이 어디로 갔나 싶을 정도로 기분이 좋아졌다. 왠지 앞으로 다 잘 될 것만 같다는 희망이 들었다. 이런 적은 처음이다. 황경호는 그런 희망에 마음이 부풀어서 그의 얼굴을 끌어당기며 입을 맞추기 전에 속삭였다.

“나도 사랑해.”

***

황경호는 더이상 미적거리지 않기로 했다. 그래서 주말에는 기어코 따라오겠다는 강동현을 뿌리치고 대전으로 내려갔다. 차를 끌고 갈까 말까 하다가 그냥 두고 기차를 타고 내려왔다.

‘여기 맞나….’

받은 주소가 입력된 지도를 휴대폰으로 보면서 이쪽저쪽 보다가 정말 생각보다도 허름한 치킨 가게를 발견했다. 아는 사람이 하는 걸 받아서 하는 거라고 하더니만 뭐 하나 바꾸지 않고 하는 것인지 간판이나 내부 인테리어나 허름했다.

순간 마치 그 허름함이 자신의 근본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득바득 중산층처럼 보이기 위해 무리해서 아파트를 산 부모님은 결국 번듯한 그 집을 위해서 퇴직을 하고 나서도 이렇게 일을 해야 했다. 황경호도 강동현과 같이 살지 않았더라면 지금 눈앞에 보이는 것과 비슷한 느낌의 원룸을 전전하며 그렇게 오래 살았어야 했을 것이다.

‘정말 돈이 없다는 것만으로도 사람이 참 초라해지는 거구나….’

예전엔 그런 자각마저도 없었는데 이제는 그런 격차를 눈과 몸으로 확인할 수 있는 여건이 되니 오히려 그런 실감이 들었다. 그래서일까. 황경호는 지금까지 돌려받지 못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생각 없이 부모님께 드렸던 모든 돈에 대해서 후회했다. 황경호는 이제 정말 돈이 없는 생활이 무서웠기 때문이다. 자신이 이런 생각을 하는 날이 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

“엄마… 아버지.”

미리 온다고 연락은 했다. 가게로 들어가니 이바지는 배달을 나간 것인지 보이지 않았고 어머니가 가게 식탁에 앉아 TV를 보고 계셨다. 그녀는 아들이 온 것을 보자 자리에서 일어나며 미소를 지었다.

“왔니? 더웠지? 앉아. 물 줄까? 콜라?”

아마 그녀는 저번에 그런 식으로 통화를 했던 것이 못내 미안한 모양인지 얼른 마실 것을 꺼내기 위해 가게 냉장고로 향했다.

“아니에요. 파는 건데….”

“그래도 오랜만에 아들 온 건데. 밥 먹었니? 배 안 고파? 치킨이라도 먹을래? 이제 제법 맛있게 잘 튀기는데.”

어머니는 황경호가 끝끝내 사양을 하는 데도 다시 부엌으로 들어가 음식을 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가게 식탁에서 바라보는 그녀가 무척이나 지치고 나이가 들어 보인다는 생각이 들었다. 황경호는 그녀를 보고 있는 것이 어쩐지 괴로웠기 때문에 시선을 떼고 천천히 가게를 둘러 보있다.

“많이 힘들지는 않으세요? 그래도 적자는 안 나게 굴러가나 봐요.”

“응… 그래도 여기는 치킨집이 그렇게 많지가 않아서 그런 거 같아. 가끔 알바 고용해서 전단지 돌리고 하면 확실히 전화 많이 오고. 나중에 저녁 시간 지나면 주문은 꽤 들어와.”

어머니는 그렇게 말했다. 그녀의 말에 황경호는 그래도 최악의 상황은 아니구나 싶어서 안도했다.

“아직 운영이 미숙하긴 한 거 같아. 너희 아빠도 평생 직장인이었지 자기 사업 한 번 안 해본 사람이니까. 물건값 한 번 깎을 줄도 모르고….”

황경호는 심호흡을 한 번 하고는 말을 꺼냈다.

“엄마… 집에 빚이 총 얼마나 남은 거예요?”

“이제 2억 좀 덜 남았으려나….”

어머니는 그렇게 대답했다. 2억… 정말 보통 사람들에게는 너무나 큰 숫자였다. 당장 황경호만 해도 월급을 하나도 안 쓰고 6년은 모아야 만질 수 있는 돈이다. 그리고 원금이 저렇다는 건 이자까지 하면 더 많은 돈을 은행에 줘야 한다는 거니까.

‘은혁이 말이 맞아….’

황경호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해주는 게 도리인 것 같았다. 강동현이 정말로 황경호를 배우자로 생각해줘서 기꺼이 그렇게 해주겠다고 한 게 정말 기쁘고 고마웠다. 돌아가면 정말 잘해줘야지. 그렇게 생각하며 황경호가 입을 열었다.

“엄마… 제가 돈을 좀… 빌릴 수 있을 것 같긴 하거든요. 무이자로….”

“응? 돈을 또 빌리면서까지는….”

“그러면 좀 낫지 않을까요? 저랑 친구한테 같이 갚으면 되구요.”

“…그 친구 혹시… 강동현이니?”

아마 황경호의 눈치는 어머니를 닮은 것일지도 모른다. 어머니가 갑자기 강동현을 언급하자 황경호는 깜짝 놀랐다.

“아… 아뇨… 갑자기 왜….”

의아한 표정을 짓던 어머니의 얼굴이 황경호의 부정에 약간 굳었다. 그녀는 황경호를 가만히 보고 있었다.

“전에 그 친구 데리고 왔을 때도 좀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원래 집에는 친구 안 데리고 왔잖아, 너. 그때 니가 일부러 데리고 올라온 것도 아닌 것 같은 느낌이었는데.”

“그냥 걔가 외갓집 가면서 차 태워줘서….”

“요즘에도 자주 만나니, 강동현?”

“아, 아뇨….”

“그때 강동현 진짜 외할머니댁 간 거 맞았니? 너 그때 새벽에 나갔다가 10신가 들어 왔잖아. 한 번도 그런 적 없었으면서.”

“그땐 중학교 때 친구가 갑자기 불러서….”

“중학교 친구 누구.”

“태호…요.”

“태호한테 전화해서 물어봐도 돼?”

“…….”

걸렸다. 그냥 엄마가 모르는 친구 이름을 댔어야 했다. 황경호의 얼굴이 새하얘졌다. 황경호가 제일 두려워하던 것이 바로 이거였다. 엄마한테 들키는 거!

“…….”

“…아니지? 설마…….”

“…뭐가요… 아니에요….”

황경호는 자신이 어떻게 처신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식탁 아래에 감춘 손이 덜덜 떨렸다. 어머니가 부엌에서 나와 황경호의 어깨를 퍽 때렸다. 작고 초라해 보이던 그녀가 엄청나게 거대해졌다. 얼굴에 화를 입은 그녀에게서 황경호는 공포를 느꼈다.

“아니지!!”

“아니… 아니에요. 아니에요, 엄마….”

“아니긴 뭐가 아니야!! 너 뭐야?! 남자 좋아하는 거야? 어?! 강동현이랑 만나는 거야?!! 왜!! 너 원래 남자 좋아하는 애였니?!!! 지금까지 엄마한테 숨긴 거야?!!! 정신 나갔어!! 미쳤어!!!”

“어, 어, 엄마, 아니에요. 잘못했어요. 아니에요. 아니에요….”

황경호는 엄마한테 계속 맞고 있었지만 저항을 할 수도 없이 몸이 굳어서 잘못했다는 말과 아니라는 말 밖에 하지를 못했다.

“돈도 얼마 못 벌던 애가 명품 옷을 입고 다니질 않나!! 분위기도 달라지고 엄마한테 반항하고!!! 그래서였니?!! 더럽게!! 남자한테 대주고 그렇게 살아?!!!!”

어머니의 히스테릭한 외침은 황경호의 가슴에 큰 상처를 입혔다. 그녀의 말을 듣자마자 눈물이 확 나왔다.

“나가!!! 당장 나가!! 꼴도 보기 싫으니까 당장 나가!!!”

어머니는 마치 어렸을 때 황경호를 혼내듯이 그렇게 말했다. 황경호를 가장 두려움에 떨게 하며 그녀에게 잘못을 빌게 했던 말이었다. 황경호에게는 분명히 돌아갈 집이 존재하는데도 그녀의 말을 들으니 오히려 발이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화가 난 그녀에게 뺨을 엄청 맞았다. 어떻게 가게를 나왔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다리가 덜덜 떨려서 몇 걸음 걷지도 못했다. 그런 그의 앞에 택시가 천천히 속도를 줄이자 그냥 손을 뻗어 택시를 세웠다. 그리고 무슨 정신으로 그냥 서울로 가달라고 했다. 장거리를 뛰게 되어 오늘 일당을 충분히 벌게 된 기사 아저씨는 울고 있는 황경호의 얼굴을 힐끗힐끗 보기만 했다. 대전 전민동에서 서울 성수동까지 택시비는 14만 원이 좀 넘게 나왔다.

집에 들어갔더니 불이 꺼져 있었다. 다행히 강동현은 집에 없는 모양이었다. 씻으려고 욕실로 들어가면서 커다란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는데 머리는 엉망이고 얼굴은 붓고 손톱에 긁혀 상처도 나 있었다. 코피도 나서 말라붙어 있었다. 초라하고 비참한 모습이었다. 황경호는 자신의 얼굴을 한동안 그렇게 보고 있었다. 아마 이 모습이 오랫동안 잊혀지지 않을 것 같았다. 옷을 벗고 욕실에 들어가서 샤워를 하고 뜨거운 물에 앉았다. 그런데도 온몸에 한기가 도는 듯 몸이 덜덜 떨렸다. 눈물이 났다. 뺨이 쓰라렸다. 오랜 시간 동안 욕조에서 나갈 수가 없었다.

***

얼굴이 엉망이었다. 강동현에게 보이고 싶지 않았다. 누구에게도 보이고 싶지 않았다. 그는 곧 집에 들어올 것이다.

‘어디로 가야지….’

기운이 없었다. 그의 품에 안겨서 위로를 받으면 좋을지도 모르겠지만 역시 그 전에 그에게 걱정을 끼치고 또 싸우게 될까 봐 겁났다. 그러기엔 역시 기운이 없었다. 황경호는 조용히 나갈 채비를 했다. 그나마 돈이라도 있으니 어디든 갈 수 있을 것이다.

‘예전에는 마포대교 밖에….’

그런 것마저도 이런 차이 때문일까. 씁쓸하다. 아직 저녁 시간도 되지 않았다. 막 나가려고 문을 열었는데 현관문 앞에 누가 있어서 깜짝 놀랐다. 그녀도 깜짝 놀랐다.

“어머… 집에 있었니? 연락을 해도 아무도 답장이 없길래….”

강동현의 어머니, 홍세연이었다. 황경호는 깜짝 놀라서는 슬그머니 손을 올려 얼굴을 좀 가렸다.

“아, 무음으로 되어 있어서… 웬일이세요? 들어오세요….”

“경호야, 얼굴이 왜 이래. 어머… 잠깐만 손 좀 치워봐. 응? 무슨 일 있었니?”

황경호는 어떻게든 그녀의 손을 피하려고 했다. 집 안으로 물러나니 어머니가 들어오고 문이 닫혔다. 그녀는 또 아들을 위해서 잔뜩 음식을 해온 모양인지 짐을 현관에다 두고 신발을 벗고는 얼른 황경호에게 다가왔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뭐가 아니야…! 누구한테 맞았….”

그러더니 그녀의 얼굴색이 하얘졌다. 어머니가 자신의 입을 두 손으로 가리며 대경실색을 하였다.

“서, 설마 은혁이가 그런 거니? 어?”

“아, 아니에요…! 절대 아니에요!”

그 말에 황경호도 깜짝 놀라서 황급히 말했다. 홍세연은 황경호의 팔을 붙잡고 카우치로 데려와 앉혔다. 불도 다 켜고 자세히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강동현이 그녀를 귀찮아 하는 것도 너무나 사랑이 많은 엄마 타입이라 다 자란 아들의 라인을 넘기 때문도 있었다. 그리고 이제 황경호도 그 집 식구가 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약 발라야겠다… 어머, 세상에….”

“제가 가져올게요.”

어머니가 허둥지둥 약 상자를 찾자 황경호가 가서 얼른 가져왔다. 그러자 그녀가 속상하다는 얼굴로 황경호의 얼굴에 약을 바르고 밴드를 붙여주었다. 그녀는 한숨을 쉬며 그의 얼굴을 계속 만졌다.

“어떡해… 이런 건 약도 못 바르겠는데… 얼음 있지?”

그리고 이번에는 그녀가 냉장고의 얼음정수기에서 얼음을 잔뜩 빼고 서랍에서 얼음 주머니를 찾아 거기에 넣어 가져오셨다. 수건도 욕실에서 가져오셔서 감싸고는 황경호의 얼굴에 직접 대주었다. 황경호가 달라고 했지만 끝까지 주시지 않았다. 걱정스러운 얼굴로 그의 얼굴에 얼음 주머니를 댔다가 뗐다가 했다. 안 그래도 생각 없이 뜨거운 물에 들어가 있어서 맞은 얼굴이 더 화닥화닥했는데 얼음을 대니까 좀 낫긴 했다. 강동현도 피하고 싶은 마당에 그의 어머니가 왔으니 더 불편할 수밖에 없었지만, 그녀는 강동현처럼 마구 다그치거나 추궁하지 않았다. 그녀는 정이 깊은 사람이었다. 이해심도 많으시고….

“너무 차갑진 않니?”

“아뇨… 딱 좋아요.”

그녀는 계속 황경호의 얼굴을 부드럽게 만졌다. 그녀의 손이 약간 서늘하면서도 기분이 좋았다. 여자가 이렇게 자신의 얼굴을 만져주는 것은 처음일까. 황경호는 처음 봤을 때부터 그녀가 좋았다.

[나가!!! 당장 나가!! 꼴도 보기 싫으니까 당장 나가!!!]

“…….”

눈물이 나왔다. 그녀는 더 속상한 얼굴로 황경호의 얼굴을 닦아주었다.

“왜 울어… 응? 무슨 일 있었어? 은혁이가 이런 거야, 진짜?”

그간의 패악으로 강동현은 언제나 그의 편이었던 어머니에게서도 신뢰를 팍팍 잃은 것이 보였다. 황경호는 그게 약간 웃겨서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가 다시 입을 꾹 다물었다. 그녀는 황경호를 안아주었다.

“진짜… 응? 울지 마. 엄마 마음 아프잖아.”

그녀는 가끔 호칭을 실수하곤 했다. 그래서 더 눈물이 나왔다. 그녀의 품에서는 부드러운 향기가 났다. 강동현과는 달랐다. 그는 크고 뜨겁고 강하고 단단했다. 그녀에게서는 향기로운 냄새와 부드러운 살 냄새, 섬세하고 폭신한 품을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포근하게 느껴졌다. 다 감싸지는 느낌이었다.

“…저희… 저희 엄마한테 들켰어요… 그래서….”

아무한테도 말할 생각이 없었다. 그런데 눈물 콧물을 흘리면서 홍세연에게 이실직고했다. 그녀가 황경호의 머리카락을 가만히 쓰다듬으며 등을 두드려주었다.

“그래… 어머니가 많이 속상하셨나 보다… 그래도 자기 애기 얼굴을….”

때려도 다른 데를 때려야지… 그녀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그의 등을 쓰다듬었다. 황경호는 더이상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홍세연도 크게 더 말하지 않고 그러고 있었다. 그러고 있는데 현관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뭐야. 문 앞에… 엄마 왔어?”

곧장 거실 쪽으로 오며 짐을 양손 가득 옮겨온 강동현은 자기 엄마랑 황경호가 끌어안고 울고 있으니 깜짝 놀라더니 짐도 다 내팽개치고 얼른 왔다.

“뭐, 뭐야. 뭐야?! 엄마가 구박했어?”

홍세연이 자기 아들에 대한 신뢰도가 팍 깎인 건 이해가 되는데 저게 저러는 건 아주 배은망덕해 보였다. 아들의 의심에 홍세연이 깜짝 놀라서는 말했다.

“아냐! 얘는…! 엄마를 뭘로 보고!”

“근데 왜 이래!”

강동현이 화를 냈다. 그는 엄청 놀란 얼굴로 황경호의 얼굴을 살폈다. 그리고는 그제야 황경호가 대전에 내려갔다 왔다는 걸 기억해내고는 표정을 확 구기더니 황경호를 끌어안았다.

“젠장….”

“밥 안 먹었지, 니들?”

어머니는 황경호의 머리를 토닥토닥 한 번 더 쓰다듬고는 강동현이 내팽개친 짐을 들어서 부엌으로 옮겼다. 그리고는 곧 부엌에서 음식을 하는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황경호는 강동현의 품에 얼굴을 묻고 있다가 웅얼거리듯이 말했다.

“엄마한테 들켰어.”

“응? 뭘?”

“우리….”

“어?!”

강동현도 놀랐다. 황경호가 다른 사람한테는 다 들켜도 자기 부모님한테는 들키고 싶지 않다고 예전부터 신신당부를 했었다. 게다가 그다지 교류도 없어서 들킬 건덕지도 없었다.

“왜? 어떻게?”

“오늘 집에 가서… 빚 문제 얘기하다가… 전에 너 집에 한 번 왔을 때부터 이상하다고 생각은 하셨나 봐….”

의외로 말은 술술 나왔다. 어머니가 한 번 황경호의 상처 받은 마음을 부드럽게 돌봐 주셔서 그런 것 같았다. 강동현은 말도 안 하고 어쩔 줄을 모르는 얼굴로 황경호의 얼굴을 들어서 살폈다. 자기도 비슷한 일로 자기 집과 갈등을 일으킬 때 자기 아버지한테 아주 엉망으로 처맞아 놓고 자기 마누라가 맞는 건 아주 미치겠는 모양이었다.

“많이 아파?”

“아니… 괜찮아.”

“힘들었지… 아, 미치겠다. 차라리 같이 갈 걸. 아, 씨….”

“니가 건드리는 게 더 아파.”

그러자 강동현은 더 인상을 팍 쓰면서 진짜 욱하는지 얼굴이 확 빨개졌다가 황경호를 그냥 꽉 끌어안았다.

답답해서 미칠 것 같았다. 이런 건 처음이었다.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언제나 쾌도난마로 자기 앞에 닥친 일을 해결해내는 그였고 심지어 황경호에 대한 것도 그런 식으로 하는 그였지만 그의 부모에 대한 것까지 그가 그럴 수는 없는 것이었다. 그는 황경호가 상처받는 것이 싫었다. 차라리 자신이 주는 거라면 어떻게 풀어라도 주고 앞에서 죽는 시늉이라도 하지, 이런 건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 건가.

“하고 싶은 말 있으면 다 해. 알았지? 무슨 말이든 해도 되니까. 알았어? 어?”

“응….”

“나중에 엄마 가면 다 말해. 응?”

“알았다니까.”

그러고 있으니 부엌에서 어머니가 그들을 불렀다.

“밥 먹어.”

밥을 먹을 때 황경호는 괜찮았다. 결국 또 평소처럼 분위기를 맞추려고 했던 것일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자기가 정리를 하겠다는 황경호를 거실로 몰아 놓고 어머니가 강동현을 붙잡고 등에 스파이크를 때렸다.

“아…! 갑자기….”

자기 엄마가 이런 식으로 자기를 때리는 건 정말 별로 없는 일이었다. 강동현이 짜증이 가득한 얼굴로 자기 엄마를 내려다보았다.

“안 그래도 놀란 애 앞에서 소리부터 지르면 어떡해?”

“어? 뭐가? 뭐가?”

“처음에 들어올 때! 내가 다 깜짝 놀랐다, 진짜.”

엄마가 그렇게 혼내자 강동현이 자기가 그랬나? 라는 표정을 지었다가 아… 하고 반성했다.

“나도 놀라 가지고….”

“니가 더 흥분하지 마, 바보야. 그러면 애가 무슨 말을 하겠니.”

엄마가 자길 바보라고 부른 것도 처음인 것 같다… 강동현은 카우치에 앉아 TV를 보고 있는 황경호를 힐끗 보았다가 자기 얼굴을 한 손으로 감쌌다.

“엄마, 나 진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욕 나올 것 같아.”

“어머, 얘가. 안 돼.”

“나 어떻게 해야 해?”

“아휴….”

그래도 홍세연은 같은 경험을 해서 그런지 황경호의 어머니를 좀 두둔했다.

“얼마나 놀라셨겠어… 경호가 너도 아니고 순하던 아들이 갑자기 그러는데 어떤 엄마가 안 놀라.”

“아… 쟤 엄마 그거 말고도 많다고… 애를 얼마나 잡는데.”

“왜? 뭐가?”

“나중에 얘기해줄게.”

모자는 부엌에서 작게 속닥거렸다.

“엄마가 가는 게 낫겠니, 있는 게 낫겠니?”

“좀만 더 있어. 엄마 있으니까 좋아하는 거 같아.”

“니가 얼마나 듬직하지가 않으면… 니네 아빠는 엄마 속상한 일 있으면 처음부터 납죽한다고, 납죽. 죽는 시늉이라도 해야지. 니가 목소리가 크면 안 된다고.”

“어….”

한다고 하는데 33년 차 기혼자의 눈에는 영 부족해 보이는 모양이었다. 강동현은 또 물었다.

“그럼 나 어떻게 해? 아버지는 어떻게 해?”

“응? 그냥… 그냥 엄마 껴안고 있어. 엄마가 울고불고해도 다 들어주고 괜찮다고 하고… 엄마 이해해주고 공감도 해주고….”

“쟤가… 쟤가 내가 이해하기엔 좀 뭐가… 아….”

아버지보다 못한 아들인 모양이다. 남들이 몰라서 그렇지 황경호는 진짜 섬세한 성품이라 강동현 같이 인생을 아주 단순하게 접근하는 놈은… 문제를 해결해줬으면 해줬지 이해와 공감은….

“그건 노력이 부족한 거지.”

“아니… 그… 아… 설명하기 힘들다.”

강동현은 그런 그가 좋았다. 그는 섬세하고 민감하고… 사고방식도 삶의 태도도 강동현이랑 많이 달랐다. 그는 순하고 착했다. 같이 산 지 벌써 3년이지만 이해 안 되는 거 아직 엄청 많다. 그래서 좋단 말이다.

“과일 먹어, 경호야.”

“아, 감사합니다.”

홍세연은 과일을 예쁘게 썰어서 거실 테이블에 가져다주었다. 강동현도 자기 엄마의 뒤를 약간 자신 없는 얼굴로 따라갔다. 그답지 않은 태도였다. 강동현은 엄마 말대로 바로 황경호의 곁에 앉자마자 그를 안았다가 바로 혼났다. 어머니도 있는데 뭐하는 짓이냐면서….

“어머, 뭘 그런 걸 신경 써. 솔직히 엄마는 저번에 지리산 갔을 때 이후로 엄청 많이 놨다.”

홍세연이 무릎에 쟁반을 두고 끊임없이 과일을 깎아 애들에게 먹이려고 하면서 말했다. 황경호가 얼굴이 화끈해져서는 어머니를 쳐다보며 입을 뻐끔거렸다. 그때 일은 언제 말해도 쪽팔렸다. 홍세연이 아휴, 하면서 황경호의 손에 배를 꽂은 포크를 또 쥐여 주었다.

“아니… 은연이가 좋은 거래. 원래 아들한테는 빨리 정 떼는 게 정신건강에 좋은 거라고. 역시 은연이 말이 항상 맞는 거 같아. 요새 마음도 편하고.”

집에 오실 때나 아들을 볼 때마다 언제나 그의 눈치를 보고 초조해하시던 어머니가 요새는 영 이너피스를 찾으신 것 같긴 했다. 아들이 사고를 대대적으로 한 번 치니까 그렇게 아들 사랑이 지극하시던 어머니가 강동현을 아주 많이 놓으신 것 같긴 했다. 강동현의 한 마디 한 마디에 예전처럼 휘둘리지 않으시는 것 같다.

“그냥 경호 니가 우리 아들 데리고 산다고 고생이 많지.”

“아뇨….”

그녀는 언제나 황경호와 신나게 강동현의 욕을 하곤 했는데 이렇게 그녀 혼자만 쏙… 황경호는 순간 당황했다가 어머니가 주는 사과를 또 한 입 먹어야 했다. 보니까 강동현이 가끔 황경호를 엄청 먹이는 건 어머니를 닮은 게 아닌가 싶다. 어머니도 때만 되면 음식을 양손 가득히 들고 집에 오시곤 하니까 말이다.

‘어머니 진짜… 배신감….’

그렇게 생각했더니 약간의 억울함이 찾아오면서 동시에 그를 지배하고 있던 초라함과 불안, 슬픔이 가시는 것을 느꼈다. 이열치열 같은 걸까.

“응? 뭐라고?”

“아뇨….”

그리고 그 원흉인 남자를 돌아보았더니 그는 세상 심각한 표정으로 카우치 등에 팔꿈치를 괴고 황경호의 얼굴만 보고 있었다.

“…….”

“엄마는 이제 가야겠다.”

어머니가 시계를 보시더니 자리에서 일어나셨다. 그녀는 자신을 배웅하러 나온 아들들을 한 번씩 꼬옥 안아주고는 가셨다. 예전과는 달리 정말 강동현에게 질척(?)거리시지 않았다.

‘그럼 내가 여기서 제일 질척거리는 사람이라는 뜻일까….’

황경호는 엉뚱하게도 그런 생각이 났다. 혼자 있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어머니 덕분에 기분이 많이 나아졌다. 이런 게 가족인가, 라는 생각이 들어서 마음이 훈훈한 것도 같고….

“안 씻어?”

황경호는 강동현을 돌아보면서 그렇게 물었다. 강동현은 황경호의 얼굴을 보더니 표정이 무너지더니만 그를 끌어안았다.

“아… 짜증 나.”

“응? 어? 야….”

황경호가 당황해서는 그의 등을 끌어안았다.

“너 울어?”

“진짜 빡친다고… 씨….”

“야….”

황경호는 당황스럽기도 하고 놀라기도 해서 그의 얼굴을 떼어 보려고 했다. 그와 이마가 거의 맞닿을 것 같았다. 그가 우는 걸 보는 건 처음이다.

‘아니, 스크린에서는 많이 봤는데….’

새카맣고 숱이 많은 매끄러운 머리카락, 반듯한 이마와 우뚝 솟은 코와 각이 진 턱은 아주 남자답고 시원하게 큰 입술이 도톰하게 예쁘고 깊고 시원한 눈매가 멋있다. 덩치는 산만하고… 눈을 감은 그의 속눈썹 사이로 눈물이 떨어졌다. 황경호는 그의 얼굴을 두 손으로 잡고 눈물을 닦아주었다. 그는 인상을 왕창 찌푸리고 있었다.

“왜.”

“짜증 나서.”

그가 울고 있는데 어째서 마음이 따뜻해지는 느낌이 들까. 누가 자신을 위해 이렇게 눈물을 흘려준 적이 있었나. 그는 진짜 짜증을 냈다.

“아, 진짜 밖에서 맞고 다니지 말라고. 어? 그게 제일 빡쳐.”

강동현은 원망스럽기까지 하다는 어조였다. 아까 자기 엄마의 조언은 아무런 소용이 없는 그였다.

“맞으면 차라리 그만큼 때리든가! 병신같이 왜 맞고만 있냐고.”

“아니… 엄마한테 어떻게….”

“엄마고 뭐고 맞지 마! 어? 말해. 약속해. 맞으면 맞은 만큼 때려. 더 때려. 합의금이고 자시고 다 내가 낼 거라고.”

막연한 저항감에 대답을 하지 못했다. 누구와 갈등을 겪느니 그냥 자신이 손해를 보고 말자는 식으로 살아왔던 그였다. 고작해야 강동현한테나 좀 자기주장을 하고는 했고 병원의 진상 환자들은 예전만큼 호구같이 굴지는 않았지만 여전히 호구이기는 했다. 근데 누구를 때리라니.

“씨….”

그는 완전 울상이 얼굴로 황경호의 얼굴을 자꾸 만졌다. 전에 병원에서 어떤 진상 환자의 손이 스쳤을 때도 엄청 화를 내며 일을 그만두라느니 노발대발했던 그인데 지금은 아예 얼굴이 상할 정도로 맞았으니까 아주 팔짝 뛴다.

“너네 엄마는 도대체 왜 그러냐. 어? 니가 말로 해서 못 알아듣는 애도 아닌데 왜 손부터 나가.”

딱 봐도 히스테릭하게 때렸다는 게 느껴지는 상처들이었다. 다혈질에 감정적으로 자기 아이를 대한 것이다.

“이런 건 니가 깨무는 것보다 빨리 나아.”

황경호가 말했다. 그는 진짜 화나고 그런지 울어서 눈이 벌겠다. 그리고 완전 세상 억울하고 짜증 난 얼굴로 황경호의 얼굴에 난 상처들을 보았다. 밴드도 괜히 떼어 본다.

“니네 엄마만 아니면 벌써 내가 가서 엎었다.”

“이제 괜찮아.”

“앞으로 대전 가지 마. 절대 가지 마. 연락도 하지 마.”

강동현은 그렇게 말하며 황경호를 끌어안았다. 황경호는 처음으로 그게 모든 것의 해결책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했다.

***

다음 날엔 엄마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어제 그렇게 때린 것에 대한 사과였다.

<전엔 엄마가 미안하다. 그래도 니가 그런 짓을 하고 산다는 게 믿기지가 않는다. 안 그랬으면 좋겠구나.>

아마도 사과로 하는 말일 것이다. 황경호는 사과를 받고도 어째서 더 기분이 나쁜지 알 수가 없었다. 엄마의 메시지가 눈에 띄는 게 싫어서 다른 사람들과 얼른 메시지를 주고받아 밑으로 내렸다. 이런 부분이야 예상을 충분히 했는데도 생각보다 사람의 기분을 나쁘게 했지만 좀 놀랐던 건 강동현의 태도였다.

강동현은 정말 유례없이 태도가 부드러워졌다. 짓궂은 장난도 치지 않고 말이나 행동도 조심했다. 황경호가 자주 잔소리를 해야만 했던 부분도 싹 사라졌다. 다만 그는 황경호의 얼굴을 볼 때마다 상당히 속이 상한다는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상처에 좋다는 약과 밴드를 매일 사 왔다.

‘지가 만드는 멍은 신경도 안 쓰면서….’

그런 그를 보는 건 좀 기분이 이상했다. 게다가 하룻밤은 강동현이 늦게 와서 먼저 잠이 들었는데 그가 들어와서는 잠도 안 자고 유심히 상처를 살펴보며 황경호의 머리카락을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그리고 이마에 입을 맞추고 가만히 몇십 분이고 그렇게 있었다. 잠에서 깼는데도 꼼짝도 할 수가 없어서 가만히 굳어 있어야만 했다.

아무래도 황경호의 인생이 더 나쁜 일이 상대적으로 많았기 때문일까. 황경호는 이런 과정에 익숙했다. 상처 난 자신을 다시금 챙기는 일에 능숙했다. 하루 이틀 지나니 기분은 평소 수준으로 회복되었다. 하지만 강동현은 그런 상태가 계속 이어졌다. 나쁘지는 않지만 약간 부담스럽기도 한 것 같기도 하고….

금방 일을 끝내고 들어온 강동현은 손에 또 뭘 잔뜩 들고 왔다. 대체로 먹을 거였다. 그가 부엌에 물건을 다 챙겨 넣고 카우치에 앉아 한숨을 돌렸다. 조금 피곤해 보인다. 황경호는 카우치로 와서 그의 얼굴을 만졌다.

“너 어디 아픈 거 아니지?”

“안 아파. 하암.”

강동현은 자신의 얼굴을 만지는 황경호의 손을 잠깐 주물렀다. 그리고는 잠시 황경호의 얼굴을 살피는 게 느껴졌다. 황경호가 망설이다가 물었다.

“목욕할 건데… 같이 할래?”

“응?”

강동현이 카우치에서 벌떡 일어났다. 황경호는 얼른 욕실로 들어갔다. 좀 있으니 강동현이 어슬렁 들어왔다. 샤워부스에 같이 들어가니 또 강동현이 황경호의 얼굴을 잡고 유심히 살펴보았다.

“아, 다 나았다니까.”

“그러네.”

그러자 강동현이 약간 미소를 짓고는 황경호를 꼭 끌어안았다. 욕조에 들어가고 나서는 좀 망설이다가 황경호가 먼저 등 뒤에서 껴안고 있는 그의 뺨에 입을 맞추었다. 그리고 입술에도 쪽.

“응? 왜 이래?”

“…….”

강동현이 마치 가족끼리 왜 이러냐는 듯한 말투로 말하자 황경호는 깜짝 놀랐다. 특별한 일이 터지지 않는 한 주로 그가 유혹을 해왔으니까 이 정도면 그가 자연스럽게 응해올 줄 알았는데… 그때 이후로 강동현은 황경호에게 손을 대지 않았다. 자기가 사고 치고 빌 때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신경을 쓰는 것 같아 보였다.

황경호가 당황한 얼굴로 강동현을 보자 그가 웃었다.

“왜? 하고 싶어?”

“아, 아니….”

약간 창피하다. 그가 놀리기 시작했다.

“뭘 또 아니래. 하고 싶으면 하고 싶다고 하면 되지, 어? 내가 오늘 좀 피곤하긴 해도 얌전히 빌려줄 수는 있는데.”

“아니… 피곤하면 됐어.”

“응? 하고 싶다고 말해봐. 내 자지 니 건데, 뭐. 마음껏 쓰시죠.”

“피곤하다며.”

“피곤해도 이 한 몸 불살라, 어? 우리 마누라 기분 좋게, 어? 그게 내 역할이지~”

황경호의 얼굴이 뜨끈뜨끈하게 달아올라서는 눈썹을 축 늘어뜨리고 있었다. 강동현의 두 손이 황경호의 다리 사이로 들어왔다. 그가 황급히 막았다.

“아니…! 안 해도 된다니까.”

“올라타 봐. 정 나 피곤한 거 걱정되면 직접 움직여 주시고.”

“아…! 잠깐만!”

그러자 자연스럽게 둘의 관계도 예전으로 돌아가는 것 같았다. 장난도 많이 치고 툭닥거리기도 하고 데이트도 자주 하고 섹스도 많이 하는 그런 일상생활이 돌아오니 황경호도 안심했다. 평소에는 강동현이 조금이라도 주의가 깊은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그가 그런 식으로 황경호를 신경 써주니 어색했다. 사람은 그냥 생긴 대로 사는 게 맞는가 보다.

‘이래서 쟤가 나한테 줘도 못 먹는다면서 뭐라고 했던 걸까.’

그런 생각도 잠깐 들었지만 이제는 익숙해진 일상에 젖어 곧 아무렇지도 않게 되었다. 황경호는 계속 병원에서 일하고 가끔 진상 환자들에 대해 그에게 투덜거렸고 강동현은 원래대로 소처럼 일했다.

부웅.

퇴근을 하고 막 집 앞 지하철에서 내리는데 메시지가 왔다. 확인을 하기도 전에 또 부웅, 하고 메시지와는 다른 진동이 울렸다. 은행 어플에서 온 진동이었다. 잠금을 풀기 전에 화면에 뜬 걸 확인해보니 돈이 2억 입금되었다는 알림이었다. 황경호는 깜짝 놀라서 알림부터 확인하였다. 어머니한테서 입금된 돈이었다. 그리고 메시지를 확인했다. 어머니였다.

<니들 인정할 생각도 없고 앞으로도 없으니까 이런 짓 하지 마라.>

황경호는 영문을 알 수가 없어서 입을 떡 벌리고 있었다. 어떤 말을 답장으로 보내야 할지 고민하다가 짧게 답장했다.

<무슨 말이세요? 갑자기 이 돈은 뭐구요.>

그러자 1분쯤 뒤 답장이 왔다.

<강동현이 주고 갔다. 돈 같은 거 필요 없으니까 연락하지 마라.>

“…….”

강동현은 황경호에게 신신당부를 했었다. 대전에는 내려가 지고 부모한테 연락도 하지 말라고. 그런 주제에 본인은 황경호에게 말도 안 하고 덥썩 이런 짓을 했단 말인가. 황경호는 황당했다가 화가 났다. 황경호는 엄마의 마지막 메시지에 답장도 하지 않고(할 말도 없었다) 강동현에게 바로 전화를 걸었다.

[응~ 경호님.]

“너 미쳤어?”

황경호는 강동현이 전화를 받자마자 그렇게 말했다.

“니가 연락도 하지 말라며, 만나지도 말라며. 그런데 넌 왜 우리 엄마 만나러 가는데! 어?!!”

그렇게 집에 들어가기도 전에 확 소리를 질렀다가 문을 열고 일단 집으로 들어갔다.

이 새끼의 이런 점은 절대 바뀌지 않는 것일까? 걸핏하면 돈으로 해결하려고 하고! 그것도 황경호에게만 그러는 게 아니라 그의 부모에게까지….

[…상의 없이 그런 건 미안.]

“니가 그러면 내가 좋아할 거 같아? 어? 너 도대체 나랑 몇 년이나 같이 살았는데 아직도 그래? 돈이면 다 되는 줄 알아?”

[…….]

“우리 엄마가 니 돈 받았으면, 그랬으면 내 기분이 어땠을 거 같아? 어? 우리 엄마가 니 돈 받고 우리 인정하고 화해하려고 했으면 그랬으면 내가 어떨 거 같냐고.”

강동현은 입을 다물고 있었다. 아마 일하는 중인 것 같았다. 그가 자리를 피하는 게 느껴졌다. 하지만 황경호는 도저히 멈출 수가 없었다.

“도대체 너 나 얼마나 우습게 보는 거야? 우리 엄마는 또 얼마나 우습게 보는 건데! 너 이러는 거 얼마나 기분 나쁜 짓인지 알아? 니가 보기엔 돈 몇 푼으로 우리가 어떻게 될 것 같이 쉬워 보여?!”

[그게 아니라….]

강동현이 한숨을 쉬었다. 황경호는 분을 못 참고 씩씩거리고 있었다. 진짜 쌍욕이 나올 것 같았다.

[나 우리 집이랑 연 끊으려고 했을 때 니가 더 힘들어했잖아. 니 일보다 더 신경 쓰고. 니가 그랬던 것처럼 나도 도와주고 싶었는데… 미안. 내가 생각이 짧았다. 앞으로 안 그럴게.]

“…….”

그의 말을 듣자 처음엔 놀랐다가 조금 뒤에 울컥했다. 가슴이 미어졌다. 일단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가만히 이 모든 일이 왜 이렇게 되었을까, 라고 생각했다.

강동현이 집과 화해하기를 바랐던 건 무엇보다도 그의 가족이 참으로 화목하고 좋은 사람들이었기 때문이었다. 강동현이 연을 끊지 않는 게 연을 끊는 것보다 훨씬 좋을 수밖에 없는 그런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모든 것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실제로 헤어지겠다는 생각도 했었으니까.

하지만 황경호의 가족은… 게다가 돈 앞에 비굴할 것이라 예상했던 그의 엄마는 황경호도 깜짝 놀랄 정도로 정확하게 예전에 그가 했던 반응과 비슷한 반응을 보였다. 그녀가 왜 그러는지 깊이 이해할 수 있었다. 그녀는 그 돈에 혹했기 때문에 더더욱 자존심이 상했을 것이다. 결국, 그는 그녀를 닮았다.

<돈 같은 거 필요 없으니까 연락하지 마라.>

황경호가 그랬듯 그들은 자신의 인생도 벅찬 사람들이라는 것은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이 상한 자존심을 이런 식으로라도 풀어야 하는 사람이라는 걸. 그러지 않으면 견딜 수가 없는 사람들이라는 걸. 하지만 그럼… 그럼 나는? 언제나 부모의 땜방용으로 살아야 하는 인생인 걸까. 언제나 죄지은 것 없이 죄책감을 느끼게 하고… 어째서… 어째서 그의 부모는 다른 부모들처럼 그렇지 못한 걸까. 아니, 다른 부모들도 별반 다를 거 없을지도 모른다. 정말… 정말 그렇게 자기 인생도 벅찰 정도면 애 같은 건 낳지 말아야 하는 거 아닌가.

힘들다. 강동현과는 언제라도 다시 남이 될 수 있다는 것이 두려웠다. 이렇게 좋아하게 되었는데 헤어질지도 모른다는 게 불안했다. 하지만 부모는 아무리 어긋나고 미워져도 헤어질 수가 없었다. 설사 서로는 헤어질 수 있더라도 황경호만은 그럴 수가 없을 것이다. 다른 이가 그에게 몹쓸 짓을 했다면 그의 불행에 웃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부모는 자신에게 몹쓸 짓을 해도 그들의 불행에 웃을 수가 없다.

‘구질구질하다….’

결국 그들의 본질이 황경호의 근본이었다. 그 사실이 오늘따라 못 견딜 정도로 억울해졌다.

강동현은 집에 들어와서 황경호에게 아주 싹싹 빌었다. 다시는 의논 없이 그런 짓을 하지 않겠다며 용돈 통장을 반납했다. 황경호는 구구절절 예전 얘기까지 꺼내면서 다시는 돈으로 사람을 어떻게 하려고 하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했다. 오히려 예전에 그런 일을 수시로 당했을 때는 말하는 것이 기운 빠져 제대로 이렇게 따져본 적도 없었다.

며칠이고 스스로를 돌아보면서 분석을 하며 안도감을 느꼈다. 자신을 똑바로 보는 것은 멍을 누르는 것처럼 아프면서도 되려 안심이 된다. 황경호는 여전히 그런 히스테릭한 엄마의 모습이나 아버지의 외면이 견디기 너무나 힘들다는 것을 인정했다. 거의 트라우마 수준으로. 그래서 이것저것 며칠 고민을 하다가 그냥 메시지를 보내기로 했다.

<키워 주신 은혜에 이렇게밖에 보답을 못 드려서 죄송합니다. 부모님의 마음에 차는 아들이 되고 싶어서 제 나름엔 열심히 노력했는데 그러기엔 제가 역부족이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이런 문제로 실망시켜서 죄송합니다. 하지만 이런 저라도 사랑해준다는 사람은 걔가 처음이라서 끝까지 잘살아보고 싶어요.>

답장은 받기 싫어서 그냥 차단했다. 아버지도 말이다. 그러고 나니 마음이 굉장히 허해졌다. 몇 날 며칠을 이어졌다. 분명히 이게 맞는 길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말이다. 전처럼 죽고 싶다는 건 아니었지만….

퇴근을 하고 집에 들어오니 강동현이 밤샘 촬영을 하고 들어온 건지 신발이 있었다. 조용히 침실로 가보니 역시나 그가 잠들어 있었다. 황경호는 커튼을 더 단단히 치고는 밖으로 나가려다가 침대로 다가갔다. 열린 문으로 들어오는 빛 때문에 그의 잠든 얼굴이 보였다. 그의 이마를 만졌다.

‘나한텐 이제 정말 너밖에 없는 걸까….’

그렇게 잠깐 강동현의 얼굴을 보고 있다가 문을 닫고 밖으로 나갔다.

***

촬영이 한창 중인 영화의 상대역이 잠깐 둘만이 남았을 때 갑자기 물었다.

“동현 씨, 사귀는 사람 있어요?”

“네, 있습니다. 여기 반지.”

강동현은 바로 커피를 들고 있던 손을 바꿔 왼손을 보여주었다. 가운데 다이아가 박힌 백금 웨딩밴드가 네 번째 손가락에 단단히 끼워져 있었다. 그러자 자연히 화제는 다른 곳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며칠 뒤 화보 촬영 차 청담동에 있는 스튜디오에 갔다가 김현아와 딱 마주쳤다. 마침 그녀가 유명한 영화감독과 함께 있었기 때문에 꼼짝없이 붙잡혔다.

“오! 오랜만이야, 강 배우.”

“네, 한 감독님. 잘 지내셨어요?”

그렇게 잠깐 화제가 되는 작품이나 배우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가 감독이 잠깐 자리를 비웠다.

“…아직도 여친이랑 안 깨졌어요?”

김현아는 무려 팬미팅 현장에서 공개고백을 할 정도로 과감한 여자였다. 그녀의 말에 강동현은 말없이 왼손을 보여주었다.

영 자신의 것이라는 자각이 없는 황경호 때문에 강동현이 먼저 반지를 맞추자고 조르다가 덥썩 자기 취향대로 사서 끼우고 다니기 시작한 게 시초였지만 실제로 그 쓸모가 남다른 건 강동현 본인이었다.

강동현의 철벽은 그의 팬 커뮤니티에선 이미 고리짝 소재였고 연예계에서도 이미 아는 사람들은 전부 그에게 애인이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공공연하게 반지도 끼고 다니니 알려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분명히 예전보다는 그렇고 그런 대시들이 적어지긴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끈질기게 은근한 관심을 보이는 사람들이 있었다. 옥미현에게 한 번 곤혹스러움을 토로했더니 니가 의외로(?) 성실하게 바람 안 피우고 일편단심으로 보이니까 또 그쪽 취향(?)들이 넘보는 거라고 말했다.

[게다가 남의 떡이 커 보이는 효과도 있고.]

사람의 마음이란 알다가도 모르겠다. 어쨌든 이제 접근하는 사람들만 보면 자동적으로 황경호의 얼굴이 빡 떠오르며 긴장했다. 까딱 잘못해서 스캔들이 나거나 밥이라도 한 번 잘못 먹었다간 바로 마누라(?)에게 칼침을 맞을지도 모르는 상황이다.

‘오래 살고 싶다….’

황경호의 섬세하고 예민한 성격이 요새 본령을 드러내어 점점 잔소리가 심해지고 있었다. 굳이 이런 것까지… 싶을 때가 종종 있었지만, 어찌 되었든 좋았다. 강동현은 그냥 평생 황경호에게 바가지를 긁히면서 사는 것이 꿈 아닌 꿈이었다.

그러고 하루 영화 촬영을 끝내고 사무실에 잠깐 들르는데 마침 옥미현이 전화를 걸면서 그의 사무실로 들어왔다. 강동현의 휴대폰이 울렸다. 그녀는 강동현을 발견하곤 전화를 끊었다.

“야! 너 혹시 뒤에서 김현아 만난 거 아니지?!”

그녀가 다짜고짜 소리쳤다.

“아뇨!!”

강동현이 깜짝 놀라 반사적으로 대답했다. 그리고 더 놀랐다. 그게 무슨 큰일 날 소린가!

“기사 떴다.”

옥미현은 그 말 한마디만 하고 바로 담배를 물고 변호사에게 전화를 하기 시작했다. 강동현은 깜짝 놀라서 휴대폰으로 인터넷을 뒤져보는데 슬슬 메시지도 오기 시작한다.

<형! 김현아랑 결혼해요?>

<동현아, 너 결혼해?>

‘결혼?!’

일단 실시간 검색어 1위가 <강동현 김현아 결혼>이었다. 황급히 그 기사를 눌러보았다.

<작년 팬미팅에서 공개적으로 고백을 해서 화제가 되었던 강동현•김현아 커플이 내달 결혼을 할 예정이라는 소식이 들려오며 인터넷이 뜨겁게 달궈지고 있다. 공개고백 직후에는 사귀지 않았으나 만남을 쌓아가며 자연스럽게 연인이 되고 이제 그 사랑의 결실을….>

망했다. 난 망했다. 경호한테 죽었다. 강동현은 살짝 패닉에 빠졌다.

“사장님! 이거 진짜 사실무근!! 저 그때 이후로 김현아만 보이면 얼마나 피해 다녔는데!!”

“귀청 떨어지겠다.”

옥미현이 인상을 팍 찌푸리며 담뱃재를 재떨이에 털었다. 그는 사실무근이며 법적 대응 할 거란 메시지를 전부 복사해서 연락을 준 사람들에게 돌렸다. 옥미현이 담배를 하나 건네자 마다치 않고 받았다. 매니저도 곧 강동현의 사무실로 들어왔다.

강동현은 완전 굳은 얼굴로 개인용 휴대폰으로 황경호에게 전화를 걸면서 업무용 폰으론 계속 새로 들어오는 메시지들에 대응했다. 미리미리 해두지 않으면 귀찮아진다. 황경호에게 계속 전화를 걸었지만 그가 받지 않자 전화를 거는 걸 포기하고 메시지를 보내기 시작했다.

<경호 님, 기사로 나온 루머는 전혀 사실무근이며 김현아와는 며칠 전에 화보 촬영가다가 우연히 마주쳐서 한마디 한 게 전부입니다. 진짜입니다. 전화 받아주세요.>

자동 존댓말이 나온다.

자초지종을 알게 되고 상대편 소속사와 어떻게 공동대응을 할 것인지 상의하고 고소장을 쓰고 위임하고 반박 기사를 써서 기자들에게 쫙 돌리고 나서야 집에 갈 수 있었다. 그동안 강동현은 계속 황경호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그는 받지 않았다. 일의 상황에 대해서도 전부 메시지로 보냈지만 답장이 없었다. 느낌이 좋지 않았다.

강동현이 집에 도착한 시각은 밤 10시 58분이었다.

“경호야!!”

강동현은 문을 열면서 집 안으로 얼른 들어갔다. 불이 켜져 있었다. 분명히 집에 있는 것 같았다. 그가 현관의 복도를 달리다시피 해서 거실로 갔다. 그러자 두다다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황경호가 부엌에서 튀어나와 강동현에게 물세례를 끼얹었다.

“…!”

강동현은 물을 좀 마셔 콜록거렸다. 그는 깜짝 놀라서 얼굴을 훔치며 눈을 동그랗게 뜨고 황경호를 보았다. 아니, 볼 새도 없이 뺨을 주먹으로 후려 맞았다.

“이제 다 싫어! 그냥 헤어져! 지긋지긋해!!”

“아, 아니. 경호야, 진짜 오, 오해야. 진짜 오해라니까. 이게 그때 김현아가 고백하고 난 뒤로 팬들이 올린 게시글 중에 하나가 와전돼서 이런 거야. 거의 소설 같은 거였는데… 그걸 이번에 어떤 악플러가 아예 루머로 퍼뜨려서….”

강동현이 속사포로 해명했다. 지금까지 스캔들이 떠도 항상 차분하게 먼저 이해하려는 모습을 보이던 황경호였는데 요새 아무래도 이래저래 스트레스가 쌓였는지 벌써부터 울고불고 난리였다. 강동현은 엄청 당황했다. 황경호는 얼굴이 다 벌게져서는 눈물을 흘리면서 그를 퍽퍽 쳤다.

“너 같은 거 믿은 내가 병신이지! 철벽을 치긴 뭐가!! 너 또 은근슬쩍 밥 먹어주고 차 마시고 그랬겠지!! 죽어버려!!”

“아니!! 아니아니!!! 진짜 그런 적 없어! 맹세코! 진짜 단 한 번도 없다니까! 그때 이후로 김현아랑 개인적으로 마주친 적도 없었어!!”

“그럼 일하면서는 만났다고!!”

“아니!!! 얼마 전에 화보 촬영하다가 몇 분 마주친 게 다야!! 진짜야!! 인사 한 마디만 했어!!”

“내가! 널!! 어떻게 믿어!!!”

“악! 윽…! 경호야, 아니…! 윽!”

엄청 맞았다. 강동현은 겨우 황경호를 카우치에 앉히고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서 싹싹 빌었다.

“내가 우리 집까지 뒤집어 놓으면서 너랑 결혼하고 사는데 바람피우면 내가 사람이냐, 어… 진짜 아니야. 진짜 루머야. 나 일 끝나면 곧장 집 오고 회식이나 미팅이나 친구들이랑 놀아도 너한테 전부 보고했고….”

황경호는 여전히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강동현은 인상을 썼다가 한숨을 푹 쉬었다.

“또 이런 기사 뜨게 해서 미안. 또 걱정시켜서 미안, 응? 나 진짜 최선을 다해서 조심하고 살았는데… 진짜 미안, 응? 화 풀어. 울지 마. 기운 빠져.”

여전히 무릎을 꿇은 채였지만 상대의 무릎을 양손으로 잡고 최대한 가까이 몸을 붙여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며 살폈다. 황경호가 숨을 꺾다가 물었다.

“진짜 안 만난 거지…?”

“당연하지.”

아직도 내가 그렇게 안 믿기나. 한편으로 강동현은 그렇게 생각했으나 그래도 그가 이렇게 눈물을 흘리는 건 이제 가슴이 지끈지끈해서 못 보겠다. 강동현은 눈치를 봐서 겨우 그를 끌어안았다.

“나 바람 절대 안 피워. 진짜.”

황경호도 결국 그를 끌어안았다. 하지만 그 이후로 황경호의 컨디션은 그 전에 비하여 확연히 하강했다. 부모님과의 일로 스트레스받는 것은 별로 티도 안 냈는데 이번은 보인다. 일단 강동현을 슬쩍 거리끼는 게 느껴졌다.

“지금 잘해야 해, 지금. 평생 고생한다.”

강동현의 아버지는 그렇게 강동현에게 조언했다. 지당하신 말씀이다. 그래서 이후로 강동현은 그에게 잘 보이기 위해 아예 그가 말하기도 전에 집안일을 싹 다 해놓고 황경호는 손도 까딱하지 못하게 했다. 마음이 좀 초조하긴 했지만 그래도 부부싸움은 칼로 물 베기라고….

“이런 데도 좋네.”

“그렇지? 얼마 전에 아빠 아는 회사 사장이랑 밥 먹은 덴데 진짜 맛있더라고.”

“진짜 이런 데가 숨겨진 맛집이네요. 다음에 회식도 이쪽으로 한 번 와야겠다.”

강동현의 부모님과는 가끔 만나서 이렇게 식사를 같이하곤 했다. 어머니의 아들 사랑이 좀 잦아들자 강동현도 굳이 부모님을 만나는 걸 예전처럼 귀찮아 하지 않게 되었다.

“잘 먹었습니다. 맛있었어요.”

황경호가 늘 그랬듯 살갑게 웃으며 인사를 했다. 그걸 보고 기분이 좋아진 강동현은 부모님을 댁에 모셔다 드리고 성수동으로 향하면서 무의식적으로 황경호의 손을 덥썩 잡으며 웃는 얼굴로 말을 걸었다.

“밥 맛있었지?”

“…….”

강동현은 아차차, 하면서 잡은 손을 뗐다.

“아직 아냐?”

그리고는 헉 하고는 자신의 입도 살짝 가렸다.

“웃지도 말까?”

“…됐어.”

황경호는 약간 뚱한 얼굴이 되었다. 강동현이 옆에서 약간 안절부절못하는 게 느껴졌다.

오버하고 있다는 자각은 있었다. 하지만 그 기사를 보고 강동현에게 연락이 오기까지 그 몇십 분 동안 결국 너마저도, 라고 생각하니까 정말 슬프고 억울하고 분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래서 있는 힘껏 그에게 악을 썼고 지금까지 그 화풀이를 하고 있는 거나 다름이 없었는데….

‘얘는 진짜….’

그는 황경호가 화를 내면 필사로 달랬지만 거기에 상처를 받거나 땅을 파지는 않았다. 지금도 황경호의 눈치를 엄청 보고 있었지만 거기에 자존심을 상하지 않았다. 눈치는 봐도 활기차 보이고… 그래도 그때 황경호가 밖에서 잔뜩 상처를 입고 돌아왔을 때는 대신해서 분노하고 울어줬다.

그간 강동현의 부모님께 인정을 받거나 황경호가 그의 부모와 갈등을 겪으면서 강동현과는 점점 더 사이가 깊어지는 걸 느꼈다. 그는 황경호와의 생활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했고 오히려 그 과정에서 나약하게 굴었던 건 황경호였으니까. 그에게 심적으로도 점점 기댈 수 있다고 느끼고 있었다.

그런데 또, 또! 스캔들이 나니까 갑자기 잊고 있었던 불안감이 솟아올랐다. 그는 잘난 놈이고 그의 곁에는 똑같이 잘난 여자들이 드글드글하다는 사실을 말이다. 자신은 결국 불안해할 수밖에 없다는 걸 떠올리니까 배신감이 작렬했다.

그렇게 말없이 집에 도착했다. 집으로 들어가서 기지개를 켜는 강동현의 등짝에 대고 황경호가 혼잣말을 하듯이 말했다.

“진짜 바람피우면 계약서에 있는 대로 할 거야.”

“응?”

강동현이 무슨 말이냐는 듯이 돌아보았다. 그의 멀쩡한 얼굴을 보니까 또 울컥한다.

“너 죽고 나 죽는 거라고!”

그렇게 말하고는 자기 방에 들어가서 문을 쾅 닫았다. 그리고 스스로에게 놀랐다. 한때 강동현을 벽돌로 내리치는 상상을 해본 적은 있었지만 그렇다고 그걸 실현하겠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그렇게 하겠다고 입 밖에 내본 적이 없는 건 당연했다. 근데 금방은 진심이었다. 그런 자신에게 깜짝 놀랐다.

‘엄마나 아빠한테는 절대….’

그가 말한 것처럼, 혹은 그가 한 것처럼 부모에게 되돌려 준다는 생각은 상상만 해도 후련함과 죄책감이 동시에 몰려왔는데. 황경호는 자신이 뭔가 변한 것 같다는 실감이 들었다. 어디가 어떻게인지는 잘 모르겠다.

그리고 역시나 이쯤 되니 그에게 슬슬 미안한 마음도 올라왔다. 그의 말이 맞다면, 일단, 일단은, 그가 잘못한 건 없다는 얘기였다. 그런데 벌써 이주가 넘게 그를 고의로 무시하고 있었다.

‘그래도… 화난다고.’

왜 그의 인생은 딱딱 답이 떨어지지 않는 걸까. 진심으로 순수하게 강동현의 뒤도 안 돌아보는 시원한 성격이 부러워졌다.

***

“오늘도 수고했어, 이 선생. 어, 황 간도 수고~”

“네. 김 선생님, 조심해서 가세요. 대리 부르셨죠?”

“어. 어. 음… 어… 잘 가.”

청담 빌딩 의사 중 하나는 봉사활동이 끝나고 동네 어르신들과 엄청 마시고 뻗어 거의 실려 가듯이 대리가 끄는 차에 타고 집으로 향했다. 황경호는 술이 약한 이강유의 팔을 어깨에 걸쳐 부축하며 택시를 부르려고 했지만 엄청 힘들었다.

“선생님! 바로 좀 서세요!”

“어, 음… 어… 잠깐만… 우욱.”

“악! 선생님! 잠깐만요!!”

다른 간호사들에 비하여 이강유의 봉사활동에 자주 어울리는 황경호였다. 이제는 거의 황경호의 일처럼 되어버렸다. 황경호는 황급히 그를 화장실로 안내했다. 겨우 시간에 맞췄다. 등을 두드려주며 고개를 돌렸다. 그는 그렇게 비위가 좋은 편이 아니었다. 욱.

“평소처럼 적당히 드시지… 술도 잘 못 하시는 분이.”

황경호가 중얼거렸다. 먹은 걸 다 게워내고 나자 이강유는 좀 정신이 든 모양이었다. 입을 헹구고 간단히 세수를 하니 요새 파혼 등등으로 아주 살이 쏙 빠진 그의 얼굴이 보였다.

“미안하다… 이제 가자. 좀 괜찮아졌다.”

“네… 물 드세요.”

“어….”

이강유는 황경호가 건네는 플라스틱 통을 잡고 물을 마셨다. 그리고 밖으로 나가 이강유를 벤치에 앉히고 택시를 부르려는데 갑자기 이강유가 말을 걸었다.

“경호야… 너 오늘 빨리 들어가야 하니?”

“네?”

“내가 좀… 상담할 게 있는데… 시간 되면 같이 한 잔만 더 해줄 수 있을까? 시간 많이는 안 잡아먹을게.”

“…….”

요새 이강유에 대한 황경호의 태도는 굳이 말하자면 외면에 가까웠다. 친애와 존경의 감정을 가지고 그를 대해 왔던 황경호였으나 환자를 상대로 결국엔 그런 짓(?)을 했다는 게 확실시되는 이상 도저히 전처럼 그를 볼 수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오래 알아온 정이랄까, 그런 게 한 번에 사라지기는 힘든 것인지, 아니면 황경호의 고질적인 문제인 거절하지 못하는 호구병 때문인지… 그렇게 그와 2차 아닌 2차를 가게 되었다. 택시를 타고 서울로 들어와 조용한 술집에 들러 맥주 한 병만 시켰다. 술이 약간 들어가자 그는 곧바로 다시 취하기 시작했다. 아니, 그는 취하고 싶은 것처럼 보였다.

그가 물었다.

“너… 도은혁 환자랑은 잘 되어 가니?”

“풉. 네? 네… 네….”

갑자기 물을 줄은 몰라 맥주를 약간 뿜고는 바로 손등으로 닦았다. 그 부분에 있어서는 황경호도 죄송한 부분이 많았기 때문에 곧장 고개가 숙여졌다. 사실 들킨 건 두 번뿐이었지만 병원에서 못할 짓 정말 많이 했다. 죄송하다… 이강유는 술에 취해 약간 총기를 잃은 얼굴로 황경호의 왼손을 보았다. 황경호는 그의 시선에 손을 움찔했다. 이강유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한숨을 푹 쉬었다.

“너… 예전에 유태범… 환자랑 나랑 그렇고 그런 사이라고 오해했다고 그랬지….”

“…이제 진짜 그렇고 그런 사이시죠? 저 주차장에서 두 분 다투시는 거 봤어요.”

황경호가 먼저 그렇게 말하자 이강유가 움찔하더니 얼굴을 가린 손을 내리고 황경호의 얼굴을 보았다. 입을 떡 벌리고 있었다.

“아, 아, 아니! 아직 그렇고 그런 사이까지는 아닌데…!!”

그렇게 말하고는 아차, 하고 한숨을 다시 쉬었다. 황경호는 매우 의심스럽다는 얼굴로 그를 보았다. 그러니까 황경호가 남자랑 연애를 하니 그런 부분에 대해서 묻고 싶어서 이렇게 술을 마시자고 한 것일까.

“아니… 진짜 아니야.”

이강유가 그렇게 말하더니 하… 하면서 머리를 쥐어뜯었다.

“걔가… 걔가 나 좋아하는 거 모르다가 걔가 갑자기 고백을 해서… 당연히 거절했지. 난 하연이밖에 없는데. 근데 걔가 갑자기 차지현 씨랑 헤어지고… 술 먹고 또 이상한 놈한테 끌려가는 거 구해줬다가 실수로… 나도 취해서, 아니, 진짜 걔가 딱 한 번만 해주면 된다면서… 아, 내가 미친놈이지. 내가 미친놈이야. 미친놈!”

이 양반이 이러는 건 처음 보는 것 같다. 그는 자학적으로 머리를 쥐어뜯다가 한숨을 푹 쉬며 술을 꿀꺽꿀꺽 마시고 다시 머리를 쥐어뜯었다.

“나도 충격 먹어서… 근데 그날 너랑 도은혁 환자랑 그러고 있는 거 본 거야. 하… 너 게이 아니잖아, 맞지? 나도 아니거든… 도은혁 환자도 아닌 것 같았는데… 남자가… 남자가 인생 살다가 갑자기 길 잘못 밟는 일이 이렇게 흔한 거야? 어? 아니지? 아니라고 말해줘.”

“아니… 저한테 그렇게 말씀하셔도….”

전 걔랑 살림 차리고 사는 수준인데요… 황경호는 차마 그 말까진 하지 못하고 삼켰다. 일단 유혹을 한 쪽은 다행히도(?) 이강유가 아니라 유태범 쪽이었던 모양이다. 하긴… 걔가 평소에 선생님 보는 눈빛이 장난 아니기는 했다… 또 오해를 한 것이다. 황경호도 한숨을 쉬었다. 어째… 나이가 들수록 인간불신이 심해지는 것일까. 정말 다른 사람은 다 그래도 이강유만큼은 그럴 리가 없었는데.

‘아니지… 그럼 이 인간도 바람피운 거란 거지, 지금? 어?’

아. 믿을 놈이 하나 없는 세상이다. 황경호는 일단 그의 잔에 맥주를 따랐다.

“아니… 일단 그때 실수하고 그냥 지나갔으면 된 거 아니에요? 어쩌다가 약혼자한테 들켰대요? 바보같이.”

이강유도 동의하는 바인지 한숨을 푹푹 쉬고는 변명 조로 말했다.

“그게… 그 뒤에 나 술 취했을 때 어쩌다가 우리 집에서 또 실수로… 그리고 들켰어.”

“아니! 두 번 넘어가면 그때부터는 실수 아닌 거 아닌가요?”

“아….”

이강유가 괴로운 얼굴로 신음을 흘렸다. 황경호는 약간 헛웃음이 나왔다. 그가 유태범에게 파렴치한 짓을 했다고 오해했을 때는 마치 자기 일인 양 엄청 분개했었는데 지금 그가 이러고 있는 걸 보니 그냥… 그도 보통 남자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동경해왔던 이 남자도 그냥 보통 남자일 뿐이고 실수도 하고 좌충우돌하며 인생에 고민하는 것은 결국 모두 똑같은 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문득 실감이 났다.

“미안하다… 괜히 끌고 와서 내 하소연이나 듣게 하네… 내가 남자랑 이런, 이런 상태에 놓일 줄은 꿈도 못 꿔서… 나 보통 안 이런다.”

남자라니… 이강유는 그렇게 끙끙거리면서도 황경호의 잔에도 술을 따라주며 사과의 말을 입에 올렸다.

“…알아요.”

“니가 사람 말을 원체 잘 들어주니까… 미안하다. 고맙다… 아니, 그냥 내가 모든 게 다 충격적인가 봐… 누구한테 말도 못하고… 이 나이에 갑자기 이런… 아니, 난 여자가 좋은데? 여자가 좋다고….”

“네… 그래서 유태범 환자랑은 어떻게… 잘해 보시려구요?”

“아니!! 내가 미치지 않고서야! 차지현 씨한테 맞아 죽으려고!”

“아… 그건… 확실히.”

직장을 잃는 일이 생길 수도 있겠다. 유태범, 이 죄 많은 청년이여. 남녀노소를 아우르는 막대한 인원을 여러모로 돌아오지 못할 길을 건너게 한 그가 기어코 세상 반듯한 이 의사 선생님도 그 명단에 이름을 장식하게 했다.

‘둘이 나이 차이도… 10살 정도 될 텐데.’

문득 강동현이 7살 차이면 세대 차이도 어마어마하다며 강론했던 게 기억난다. 이강유는 머리를 쥐어짰다. 황경호가 보다 못하고 그의 손을 머리에서 떼어냈다.

“선생님… 다른 건 몰라도 탈모는 돌이킬 수 없으니까 머리는 좀….”

“지금이라도 빌면 하연이가 돌아올까? 어떻게 빌어야 할까? 뭘 해야 하지? 근데 유태범은 어떡해? 책임지라고 하는 느낌인데 지금.”

“어… 음… 선생님은 어쩌고 싶은데요?”

그러자 이강유가 완전 세상 무너진 표정을 했다.

“거기부터가 문제야 지금…! 아…! 도대체 왜 내가 이런 말도 안 되는 고민을 하고 있는 걸까, 경호야? 어?”

이 남자는 지금까지 인생 노선을 실수로라도 한 번 삐끗 잘못 밟아본 적이 없는 남자다. 황경호가 잘난 남자, 라는 단어를 들으면 자동으로 떠오르는 사람이 두 사람이 있는데 그 투톱 중 하나가 이강유였다. 그는 좋은 집안에서 태어나 엘리트 코스를 착착 밟아서 세계적으로도 유명한 의사가 되었다. 용모준수에 성격도 좋은 데다가 이렇게 조금(?) 인생에 대한 고민을 하거나 손해를 볼 정도의 인간적임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더욱 그의 인품이 빛나고는 했다. 자기 잘난 맛에 사는 거나 다름없는 강동현에 비하자면 확실히 이쪽이 몇 수나 위였다.

그는 사람들에게 상냥하고 친절하며 손해를 보더라도 여유를 가지고 어른스럽다. 자신의 일에 철저하고 노력하며 항상 발전하려고 애쓰고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간다. 실수도 하고 이렇게 고민도 하더라도. 그래서 그런 그가….

“저도… 선생님 좋아했어요… 아마도.”

많이. 그가 아마도 인생 최하점에 있기 때문일까. 이런 말을 할 생각 따윈 전혀 없었는데 너무나 자연스럽게 그런 말이 입 밖으로 새어 나왔다. 술김일까. ‘자기 인생은 이제 망한 건지도 모르겠다’와 ‘아니, 아직 돌이킬 수 있다’ 사이에서 혼란스러워하며 머리를 쥐어짜고 있는 이강유가 뭣? 하고 고개를 들었다가 양손을 앞으로 내밀며 극렬히 저었다.

“안 돼. 안돼안돼…! 내 인생에 더이상 남자는…!”

그런 그를 보고 황경호가 하하, 하고 크게 웃고 말았다. 이강유는 더욱 당황하더니 말했다.

“너 도은혁 환자 있잖아. 왜 이래. 차지현 씨 하나만 해도 무서운데.”

“아, 걔가 성격이 안 좋긴 해도 차지현 씨 정도는… 되려나? 얘가 빡치면 앞뒤 못 가리긴 한데… 그래도 차지현 씨 정도는 안 될 걸요.”

“그런 문제가 아니잖아….”

“하하하. 네… 사실 저희 같이 살아요.”

“진짜?!”

황경호는 누구에게도 솔직하게 먼저 이런 말을 해본 적이 없었는데도 먼저 그렇게 말했다. 진짜 술김이다. 후회할까. 이강유는 그제야 지금 황경호가 자신을 좋아한다는 사실은 아니라는 걸 깨달았는지 한숨을 돌렸다.

“휴. 그래도 도은혁 환자한테는 말하지 마라.”

“음… 사실 눈치는 진작에 채고 있는 것 같던데요.”

“그래… 어째 걔가 나한테만 싸가지가 엄청 없더라….”

황경호는 스스로의 마음도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살았다. 아마 강동현이 그렇게 지속적으로 추궁하지 않았더라면 평생 모르고 살았을 거란 생각도 들었다. 황경호의 아무렇지도 않은 태도에 이강유도 마음이 놓여 정말 뜬금없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내가 남자한테 인기가 있을 상인가? 그런 생각 한 번도 해본 적 없는데.”

“그렇다기보단….”

굳이 이강유에게 콤플렉스가 있다면 생각보다 연애 방면으로 운이 없는 부분이랄까. 들어보면 대학 이후론 꾸준히 계속 여자를 만나온 것 같은데도 본인은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다. 하지만 이강유는 어디에 내놔도 흡족한 상대다. 본인이 겸손한 성격이라 자신의 잘난 점을 당연하게 생각해서 문제였다면 문제였달까.

“제가 몇 년… 인생이 좀 힘들 때가 있었는데. 그때 선생님 보면 좀… 위안이 되더라구요. 세상에 아직 이런 사람도 있구나 싶어서 위로가 됐달까….”

“그거… 고맙네. 쑥스럽다, 야….”

이강유가 눈을 좀 끔뻑하더니 진짜 좀 쑥스러워했다.

“선생님 사람 가리지 않고 친절하시잖아요. 그런 점이 뭐랄까….”

“에이. 나도 사람 가려. 너야말로 애가 요즘 애답지 않게 진짜 착하니까.”

이강유가 진짜 쑥스러운 모양인지 웃는 얼굴로 황경호의 머리를 마구 쓰다듬으며 그만하라는 듯이 그렇게 말했다. 황경호는 오랜만에 그가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게 참 기분이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전엔 참… 이 손길을 좋아했었다. 이제는 알겠다.

“선생님 좋은 분이시니까 앞으로 다 잘 될 거예요.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겉치레나 자기 보신을 위한 게 아니라 진심으로 누군가에게 이런 말을 했던 적이 있었나? 처음인 거 같다. 이강유는 결국 피식 웃었다.

“니가 그렇게 어른스럽게 말하니까 내가 좀 우습다. 우는 소리 그만해야겠네.”

“아뇨. 괜찮아요. 말씀하세요.”

“할 말은 다 했지, 뭐. 진짜 고맙다.”

그는 그대로 평소만큼 점잖고 여유로운 분위기로 돌아가며 황경호의 잔에 술을 따라주었다.

뭐랄까. 그의 이런 점이 좋았다. 그는 언제나 숨 쉬듯이 상대를 배려하고 자신을 돌아보아도 황경호처럼 우울증에 걸릴 정도로 자학을 하거나 삐뚤어지지 않았다. 사람을 겁내지 않았다. 스스로를 미워하지 않았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언제나 친절하고 사랑받았다. 그런 그처럼 되고 싶었다. 이런 남자가 되고 싶다.

“그나저나 나보다도… 넌 괜찮아? 걔가 성격이 좀….”

강동현은 호구를 알아보는 눈(?)이 아주 뛰어났다. 황경호한테 한 것만큼은 아니지만 보니까 초창기엔 이강유에게도 꽤 싸가지 없게 굴었던 것 같았다. 금방 말도 그렇게 하셨고… 게다가 이래저래 애인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면서 그의 만행(?)에 대해서도 황경호가 꽤 언급한 적이 있다. 황경호가 한숨을 푹 쉬었다.

“아, 말도 마세요. 안 그래도 싸워서 지금… 아!! 맞다! 아니! 선생님도 바람피운 거잖아요! 아! 애인 있으면서 제발 다른 사람 좀 건드리지 말라구요! 진짜 왜 그래요!”

“어? 어. 어… 어. 그렇지. 맞아… 잘못했지, 내가… 걔 바람도 피우냐….”

“그, 그건 아닌데…! 아니… 맞나? 맞지… 아. 선생님… 저야말로 어쩌면 좋죠….”

***

뛰어난 경청자를 상대로 술을 마시기 시작하면 앗 하는 새에 과음을 하게 된다. 황경호는 보통 자기 이상의 경청자를 만나본 적이 별로 없었다. 하지만 오늘은 상대가 이강유. 서로 본질이 맞는 사람들끼리 마시니까 둘 다 엄청 마셨다. 양쪽 다 주량이 센 건 아니라서 집에 돌아갈 때쯤엔 함께 갈지자를 그렸다. 항상 그와 자신 사이에는 넘을 수 없는 선이 있다고 믿던 황경호였기에 이런 교류가 놀랍기도 하고 순수하게 기쁘기도 했다. 아직도 예전의 그 감정이 동경 이상이었을지도 모른다고 추측하는 건 기분이 이상했지만 그래도 황경호는 이강유가 좋았다. 순수하게 말이다. 좋은 사람이었다.

그래서 오랜만에 엄청 기분이 좋아져서는 만취하여 귀가했다.

“야! 넌 전화도 안 받고!!”

엄청 늦게 들어갔는데 강동현이 안 자고 기다리고 있었다. 휘청하면서 신발도 제대로 못 벗고 있으니 그가 부축을 해주었다.

“무슨 술을 이렇게 마셔! 누구랑 마셨어?”

“응? 선생님이랑….”

그리고는 기분이 좋아서 헤실헤실 웃었다. 그러자 강동현이 아주 정색을 했다.

“뭐라고?”

“이강유 선생님이랑….”

황경호가 강동현의 품에 얼굴을 누르며 웅얼웅얼 대답했다.

“둘이서?”

“응.”

“지금까지?”

“응….”

그러자 그때까지 얌전히 황경호의 화가 풀리기만을 기다리며 아주 납죽 엎드려 살았던 강동현이 일순 버튼이라도 눌린 것처럼 폭발했다.

“야… 난 김현아뿐만 아니라 다른 여자들도 사적으로는 말 네 마디 이상 안 섞고 살았다고. 안녕하세요. 오랜만이네요. 잘 지내셨어요. 다음에 봬요. 근데 씨… 넌 왜 그러는데? 뭐가 이렇게 당당해? 나 질투 나서 죽으라고!”

“어…? 갑자기 왜 이래….”

“갑자기가 아니잖아!!”

강동현이 핏줄까지 서서는 버럭 했다. 황경호가 깜짝 놀라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대꾸했다.

“너랑 사정이 다르잖아… 난 맨날 보는 사람인데….”

“그래!! 그래서 난 다 양보했잖아! 너 일 그만두기 싫다고 하는 것도 오케이, 병원 옮기기 싫다는 것도 오케이, 병원에서 나보다도 더 많이 얼굴 보고 지내도 오케이, 니가 살갑게 굴어도 오케이!! 그럼 너도 좀 조심해야 하는 거 아냐!! 어디서 단둘이 이 시간까지 술을 마셔!!”

진짜 화났다… 황경호는 술이 살짝 깼다.

“아니… 선생님이 유태범 환자랑 문제가 있는지 상담 좀 해달라고 해서….”

그렇게 황경호가 변명 아닌 변명을 하자 강동현이 더 빡친 얼굴을 했다.

“말 잘했다!! 그래!! 이제 그 양반 남자도 되는 모양인데!! 내가 너 그 양반 좋아했던 거 뻔히 알고 있잖아!! 넌 맨날 내가 너 생각 안 해준다고 상처받는데, 넌!! 넌!!!”

“…….”

그가 이렇게까지 화를 내는 건 진짜 오랜만이다. 그는 요새 황경호가 죽으라면 죽는 시늉이라도 하는 수준이었다. 황경호는 갑자기 엄청 미안해졌다.

‘나… 선생님한테 좋아했다고까지 말했는데…….’

아무리 술 마셨다지만 미쳤다… 만약에 강동현이 그랬더라면 황경호는 집 나가버렸을 것이다. 이건 평생 비밀이다. 황경호는 죄책감이 마구 밀려오며 뭐라고 말해야 할지 감도 안 잡혔다. 양심이 매우 찔렸다. 실수했다.

“미안… 다시는 안 그럴게.”

황경호가 화가 난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며 그렇게 말했다. 술을 많이 마셔 빨개진 채로 여전히 눈빛도 이지러져 있었다. 강동현은 그의 사과에도 마음이 전혀 풀리 지가 않아 매섭게 추궁했다.

“어떻게?”

“어?”

“어떻게 다시는 안 그럴 건데. 너 일 그만둘 거야?”

“아니, 그건….”

“병원 사람들끼리 술 마시면 안 갈 거야? 이강유랑 봉사활동 가는 거 관둘 거야? 그 인간 앞에서 안 웃고 정색하고 있을 수 있어? 내가 하는 것처럼…!”

“아… 미안. 응? 미안, 은혁아. 내가 잘못했어… 진짜 잘못했어.”

그는 황경호가 자기변명도 없이 곧바로 애원하듯이 사과를 하니 더 화가 난 얼굴이 되었다. 그는 황경호의 옷을 꽉 잡은 채 이를 갈듯 말했다.

“역시 일 관둬. 최소한 병원이라도 바꿔.”

“…….”

그의 말에 곧바로 반발감이 확 들었지만 이번엔 진짜 황경호가 잘못한 거라 반박이 바로 안 나왔다.

“나 우리 병원 진짜 좋은데….”

황경호가 시선을 내리며 우물쭈물 말했다. 그의 인간관계에서 아주 큰 축을 차지하는 게 병원 식구들이었다. 솔직히 이런 직장 다시 찾기 힘들 것이 뻔했다. 아니, 설사 찾을 수 있다 하더라도 그 병원이 이강유 비뇨기과는 아니지 않은가.

“니가… 조심하는 것처럼 나도 그럴게. 선생님이랑은 네 마디 이상 안 하면 되는 거지….”

황경호가 그렇게 말하며 그의 눈치를 살폈다. 그는 살짝 욱하는 얼굴로 뭐라고 바로 확 하려다가 겨우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너랑 나랑 사정이 같아? 넌 매일 보는 사람이잖아. 아니, 내가 니가 진짜 그렇게 하는지 지켜보는 것도 아니고 어떻게 알아?”

“그럼… 그럼 넌… 니가 그때 이후로 진짜 김현아 만났는지 안 만났는지 내가 어떻게 아는데!”

그 이름을 입에 담으니 갑자기 욱해서는 그렇게 소리쳤다.

“너도 일이다 뭐다 핑계 대고 다른 사람들 끼워서 만나거나 하면 죄책감 안 들 거고! 그 여자 볼 때마다 기분 좋을 거 아냐! 그런 여자가 너 좋아한다고 고백까지 했으니까! 으쓱할 거 아냐!!”

“갑자기 왜 이야기가 거기로 새?! 그래서 내가 그 여자 만나서 뭐했는데? 커피 한 잔도 마신 적 없어!! 좋아했던 남자랑 버젓이 술 마시고 온 너랑 어떻게 비교를 해!!”

“이강유 선생님이랑은 그런 거 절대 없어!! 니가 좋아한 거다, 좋아한 거다 해도 존경심이 더 크다고!!”

갑자기 싸움이 점점 커진다. 강동현의 표정이 점점 더 안 좋아졌다.

“그래서? 넌 나도 데리고 살고 니가 그렇게 좋아하고 존경하는 이강유 선생님이랑도 잘 지내고 싶다고? 그 새끼가 머리라도 쓰다듬어주면 좋아하면서? 어?”

“나도 조심한다고 하잖아! 나도 너처럼 조심한다고! 오늘은 내가 잘못했고 미안하다고!!”

하지만 서로 감정이 상해 소리를 지르고 있으니 사과가 사과가 아니다. 강동현은 엄청 욱해서는 황경호의 얼굴을 뚫어져라 노려보다가 경고했다.

“야… 너 바람피우면 진짜 나 가만 안 있는다. 어? 너랑 바람피운 놈은 남자든 여자든 내 손에 죽는 거고 넌 병원이고 뭐고….”

“그렇게 협박하지 마!! 안 한다잖아! 바람 같은 거 안 피운다고!”

그리고는 확 마음이 상해 울컥 눈물이 나왔다. 황경호는 이런 종류의 폭력적인 말들이 싫었다. 그게 설사 욱한 마음에 나온 빈 이야기일 뿐이더라도. 마음에 크게 생채기를 남겼다. 언제나 그랬다.

“울면 다 되는 줄 알아?”

“아니… 아니야.”

황경호도 싸우다가 갑자기 눈물을 흘리는 건 부끄러웠다. 치사한 짓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멈추지 않았다.

“너 다시는 이강유랑 단둘이서 있지 마. 알았어? 병원 안에서도!”

“응….”

“아니, 역시 그냥 병원 바꿔! 내가 더 좋은 데로 찾아서 소개시켜 줄 테니까.”

“…….”

“울지 마! 얘기 중이잖아!”

“미안… 최대한 니 말대로 할게.”

“…….”

“…….”

잠시 둘 사이로 침묵이 흘렀다. 강동현은 눈을 잠깐 감고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그를 끌어안았다.

“울지 마. 말 심하게 한 건… 미안….”

“아니… 미안. 얘기하는 중이었는데.”

황경호는 최대한 마음을 추스르며 눈물을 참았다. 아, 진짜 딴 건 몰라도 이건 고치고 싶었다. 얘기 중에 본론과는 전혀 상관없는 기억까지 기폭제가 되어 눈물이 터져 나오곤 했다. 정말 싫었다. 강동현이 한숨을 쉬었다. 황경호는 진짜 눈물을 필사적으로 참았다. 진짜 인생 구구절절 한 많아 주체하지 못하는 사람처럼… 싫다.

“진짜 미안. 앞으론 절대 안 이럴게. 미안….”

“응… 나도 너무 욱 해서 미안….”

“너 이번에 스캔들도… 결국 니 잘못 아니었는데 자꾸 화내서 미안. 계속 내 기분 신경 써줘서 고마워… 이제 안 그럴게.”

“아니… 아니야. 결국엔 내가 잘못했지… 미안.”

강동현이 황경호의 몸을 꽉 끌어안았다. 그리고는 그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는 숨을 길게 내뱉었다.

“우리 좀 웃긴다….”

“뭐가?”

“한시도 조용하게 넘어갈 때가 없다. 안 그래?”

강동현이 피식 웃었다. 황경호는 그의 등을 끌어안고 조용히 답했다.

“조용히 넘어갈 수도 있는데… 내가… 내가 니 일만 되면, 우리 일만 되면 이상하게 감정적이야….”

“아니야… 나도 그래.”

“아니… 진짜로. 다른 사람들한테는 절대 안 이러는데….”

끝은 들리지도 않을 만큼 목소리가 작아졌다. 황경호는 그의 등을 꽉 부여잡고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양 눈동자를 번갈아서 말없이 바라보았다. 그러자 강동현이 씨익 웃었다.

“뭐야. 그런 얼굴로 보면 확 덮친다.”

“응….”

“주정뱅이가.”

강동현이 그의 코를 살짝 깨물었다. 그제야 강동현과 황경호는 현관에서 벗어나 집 안으로 들어갔다.

***

강동현은 콧노래를 부르며 운전을 하고 있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다.

정말 신기한 일이다. 싸우는 순간에는 세상이 두 쪽 나도 화해할 수 없을 것 같은데 막상 마음이 풀리는 건 순간이다. 드디어 그와 사이가 다시 좋아졌다. 그리고 이렇게 오르락내리락하면 더 뜨겁게 불타오르는 사랑이다. 요새 일을 마치면 최선을 다해 딱지만 안 끊을 정도로 밟아 집으로 향하는 강동현이었다. 마누라가 예쁘면 처갓집 말뚝에 절을 한다고, 강동현은 그거 백 번 천 번이라도 할 수 있었다. 그가 너무 좋았다.

“…엄마, 집에 좀 오지 마.”

강동현이 집에 들어가자마자 인상을 썼다. 강동현의 어머니는 아들에 대해서 많은 것을 놓자 오히려 필요할 때는 거리낄 것 없이 황경호에게 미리 연락을 하고 집으로 오셨다. 그렇다. 이 집의 대소사 결정은 황경호가 다 하고 있다는 걸 어머니도 아신 것이다.

“야, 경호랑 쇼핑하고 큰 거 나누려고 온 거야.”

어머니는 여전히 황경호와 잘 지냈다. 게다가 그렇다고 자주 오시는 것도 아니다. 강동현은 꺼림칙한 얼굴로 황경호를 보았다.

“엄마가 부담스럽게 하면 말해, 어?”

강동현도 한동안 황경호의 눈치를 설설 보며 지냈는데 그걸 엄마가 윗사람이랍시고 망치는 건 눈에 흙이 들어가도 못 본다. 제 딴에는 황경호를 신경 쓴다고 하는 말이었다. 황경호는 인상을 팍 쓰며 그의 옆구리를 찔렀다.

“야! 어머니 계시는데 그런 말 좀 하지 마!”

그렇게 대형 식료품을 좀 나누고 서로 반찬도 좀 나누더니 어머니는 강동현을 보고는 아, 하고 뭔가 건넸다.

“집으로 온 거. 니가 제때 제때 챙겨가면 엄마도 안 올 거 아냐.”

“아… 대충 다 주소 옮겼는데 아직도 거기로 가는 게 있어?”

“대부분 니 학교나 친구들이나. 청첩장도 많더라.”

“그래? 누가 또 가냐….”

강동현은 엄마한테서 받은 우편물을 뒤적거리며 엄마를 배웅하는 자리에 서 있었다.

“그럼 경호야, 나 갈게.”

“조심해서 가세요, 어머니.”

“응.”

어머니는 황경호를 한 번 끌어안고 자기는 본체만체하는 아들을 보고는 쯧쯧 혀를 차고는 문을 여는데 강동현이 헉! 하고 기겁을 하자 그녀가 문을 열다 말고 돌아보았다.

“왜 그래?”

“아… 아니….”

강동현은 청첩장을 팍 닫고는 황경호의 눈치를 일순 봤다. 황경호는 그 순간 눈치챘다.

“전 여친 결혼이라도 한대?”

“어? 어? 아니… 어… 그게….”

“영지 결혼한대?!”

강동현은 움찔하며 말을 더듬는데 어머니가 헉 하고 더 놀라셔서는 그렇게 소리치며 강동현의 손에 있는 청첩장을 훅 뺐었다.

“세상에….”

어머니가 더 놀라신 거 같았다. 그도 그럴게, 정말 며느리가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여자였으니… 그리고는 어머니도 지금 상황을 깨닫고 황경호의 얼굴을 보았다. 그녀는 청첩장을 다시 강동현에게 주며 황경호에게 살짝 웃는 얼굴로 말했다.

“아니, 나도 놀라서. 미안하다, 경호야.”

“아니에요, 어머니. 놀랄만하죠. 오래 사귀었잖아요.”

“그래… 이해해줘서 고맙다. 이제 진짜 갈게.”

“엄마…!”

강동현이 애타게 불러도 모르는 척 어머니는 집을 나가셨다.

“…….”

“…….”

황경호는 안쪽으로 들어갔다. 강동현은 자신의 입을 한 대 때렸다. 그리고는 잠깐 거기 서서 다시 청첩장을 열어보았다.

‘거짓말….’

아무리 천하의 강동현이더라도 이럴 땐 어쩔 수 없었다. 보자마자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고 입이 딱 벌어졌다. 첫사랑에 무려 7년이나 사귀었으며 그의 학창시절부터 이십 대 중후반까지 10년을 함께 했던 여자였다. 정말로 결혼이란 걸 한다면 당연히 그녀랑 할 거라고 생각하면서 살았었다. 그런 여자가 다른 남자랑 결혼을 한다고 청첩장을 보냈는데 어떤 남자가 충격을 안 받겠는가.

‘보통 전 남친한테 청첩장 안 보내지 않나?’

언제 어떻게 들어도 충격이겠지만 청첩장이라니. 그녀와는 헤어지고 나서도 한 번 만나서 제대로 마무리를 했으니 나쁘게 헤어졌다고 보기는 힘들었다. 역시 그녀와의 역사는 강동현에게 있어 중요했으며 아마 그녀에게도 그럴 것이다. 아마 보내는 게 의리라고 생각했을 가능성이 높다. 물론 먼저 간다(?)는 약올림이기도 할 거고… 그녀다웠다.

‘2주일 뒤?! 도대체 이거 언제 온 거야….’

강동현은 옛날옛적에 먼저 간 거나 다름없는데도 순간 기분이 진짜 이상했다. 그녀와 지냈던 시절이 머릿속을 주마등처럼 지나가며 기분이 엄청 복잡해지는 게… 그리고 그 정도로 마무리 지었다. 황경호가 기분이 좋을 리가 없었다. 그는 받은 우편물을 전부 현관 옆 선반에다 던져놓고 안으로 들어왔다.

“경호야….”

카우치에 앉아서 책을 읽고 있는 그의 옆에 앉아 곧바로 그의 허리를 팔로 감싸며 그의 뺨에 입술을 눌렀다.

“왜.”

“기분 상한 거 아니지?”

“뭐가.”

“아니….”

강동현은 아예 카우치와 그의 사이에 파고들어 그를 자기 품에 아예 안았다. 그리고 그와 뺨을 서로 대고 그가 보고 있는 활자를 같이 보았다.

“나랑 걔랑 끝난 게 언젠데. 나 너밖에 없어. 응? 그냥 좀 놀라서….”

“알아….”

황경호도 약간의 벽을 풀고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책을 덮고는 약간 주저하면서 그의 얼굴을 돌아보았다.

“…후회 안 될 것 같아?”

“야, 내가 무슨 후회를 해…! 큰일 날 소리를 한다, 너? 넌 후회되냐? 나랑 결혼한 거?”

“그런 게 아니라….”

강동현은 화를 냈고 황경호는 설명하기 어렵다는 듯이 곤란한 얼굴을 했다. 강동현은 황경호의 허리를 꽉 끌어안았다.

“너 후회해도 소용없다, 어? 너 나랑 평생 살아야 한다고 몇 번을 말해?”

“응… 알았어.”

“대답에 성의가 없다!”

“알았다니까.”

서로 살짝 말이 안 통하는 건 결혼 3년 차가 넘어도 여전히 어쩔 수 없는 부분이 있었다. 그 뒤론 딱히 서로 말이 없었다. 강동현은 몇 번 다른 쪽으로 화제를 돌리려고 노력했지만 그가 봤을 땐 황경호가 영 건성이었다. 그리고 강동현도 그냥 말을 멈추고 뚱하게 같이 TV를 보았다. 서로 끌어안고 있었지만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역시 알 수가 없었다.

‘솔직히….’

성가시다… 스캔들이야, 그래, 마음 상할 수 있는 부분이다. 그래서 강동현은 자신이 잘못한 것이 하나도 없었지만, 납죽 엎드려서 황경호의 기분에 전부 맞추었다. 그를 사랑하고 그가 소중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 여친이 결혼을 해서 청첩장을 보내는 부분까지 강동현이 어떻게 할 수는 없는 부분 아닌가. 참다가 나중에 갑자기 나간다고 하는 것보다는 훨씬 나았지만, 이런 별거 아닌 거 하나하나에 불안해하는 성격은 도대체 어떻게 해줘야 맞는 건지 지금도 모르겠다. 그러면서 자신이 이강유나 다른 사람들이랑 잘 지내는 것에는 둔감하고….

‘잘 보면 이기적이야. 나한테만 이기적이야. 나는 안 괜찮고 자기가 하는 건 괜찮고!’

강동현 본인이 지금까지 지은 죄가 있어서 뭔 일이 있어도 다 그냥 넘겼(?)는데 이게 쌓이고 쌓인다. 원래 하고 싶은 말은 거침없이 하는 강동현이었지만 이제 황경호의 앞에서는 말조심을 꽤 했다. 그래서일까. 약간 원망스러운 것도 같고… 강동현은 그의 옆얼굴을 보다가 역시 심술이 나서 예고 없이 그의 뺨을 깨물었다.

“아, 잠깐만…! 뭐하는 거야!”

아주 쪽 빨았다. 그의 화가 난 얼굴을 보니까 기분 풀린다. 강동현은 시선을 돌리며 뻔뻔하게 말했다.

“애정표현.”

“얼굴은 좀 하지 말라니까!”

황경호는 얼른 휴대폰을 집어 들어 얼굴을 비춰보았다. 일부러 얼굴에다가 멍을 만들었으니 살짝 툭닥거렸다.

‘아… 진짜.’

이거 생각보다 진짜 오래간다. 황경호는 거울을 볼 때마다 밴드를 들춰서 상태를 살폈다. 다른 사람들은 황경호가 또 알레르기가 생긴 거라고 생각해줬지만 이제 사정을 아는 이강유는 보면 걱정을 해주었다.

“괜찮아? 니가 참 고생이 많다… 좀 뭐라고 해라. 다른 곳도 아니고 얼굴은….”

이강유가 황경호의 턱을 잡고 상태를 보며 그렇게 말했다.

“괜찮아요, 선생님….”

물론 그런 게 더 창피한 건 당연하다. 그의 앞에서는 표정관리를 했지만 돌아서니 얼굴이 화끈거렸다.

‘자기 얼굴에다가 하면 난리 칠 거면서…!’

황경호는 원래부터 조심했기 때문에 그의 얼굴에 그런 흔적을 남긴 적은 없었다. 그의 얼굴을 때린 적은 몇 번 있지만 그것도 대부분(?) 그가 잘못했을 때뿐이었다. 몸이 재산인 남자이니까 조심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럼 나는?!’

결국 모두가 몸이 재산이다. 황경호도 접객이 중요한 일을 하고 있는데 언제나 자기 기분이 나면, 혹은 기분 나쁘면 거리낌 없이 황경호를 괴롭히는 강동현이었다. 그런 부분은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없어 지지가 않았다. 이제 황경호도 체념하고 넘어가는 부분이 많기도 했고 그다지 상처를 받는다는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싫다는 건 이제 좀 안 했으면 좋겠다. 어차피 전부 자기 마음대로 하게 해주는데 적어도 얼굴은 좀 봐줄 수 있는 거 아닌가!

‘자기 기분이 우선이지, 항상!’

원망스럽다… 황경호는 밴드를 붙여 놓은 자기 뺨을 자꾸 만지작거렸다. 그랬더니 집에 갔을 때쯤엔 손으로 계속 만진 것과 밴드의 접착 성분 때문에 뺨이 벌겋게 텄다.

“아… 밴드 다른 걸로 바꿔야겠다.”

황경호는 얼굴을 씻고 약을 얇게 바르고는 부채질을 했다. 간지러웠다. 저녁으로 뭘 해먹을까 고민하면서 인터넷으로 요리를 찾아보며 TV를 틀었다. 그리고 한두 시간쯤 지나니 강동현이 들어왔다.

“경호야~”

그는 들어오자마자 손에 든 걸 그냥 바닥에다 던져놓고는 황경호를 끌어안으며 카우치에 다이빙했다. 그에게서 그의 향수 냄새와 분내가 확 났다. 그는 깔아 눕힌 황경호의 입술에 입을 맞추며 웅얼거렸다.

“아… 오늘도 피곤하다.”

그는 촬영을 위해 살을 엄청 빼서 유례없이 슬림한 상태였다. 촬영이 끝날 때까지는 다이어트 식단을 유지해야 했다. 그러지 않으면 금세 원래대로 살과 근육이 붙는 것 같았다. 원래도 또렷또렷하고 시원한 이목구비였지만 10kg이 넘게 살을 빼니 강한 느낌이 약간 사라지고 거기에 날카로움과 섬세함이 더해졌다. 한국 남자 연예인으로는 이례적일 정도로 키도 크고 덩치도 크고 근육질인 강동현이었으나 살을 이만큼이나 빼니 다른 남자 배우들처럼 슬림한 체형처럼 보였다. 소년 같은 느낌도 살짝 나고….

“씻고 와, 씻고. 화장품 냄새나.”

“아… 먹고 씻으면 안 될까….”

“배고파?”

“어… 한 끼만 배부르게 먹으면 소원이 없겠다.”

다이어트 시작한 지도 어언 몇 달이다. 강동현이 그렇게 말하자 황경호는 약간 마음이 안되어서 중얼거렸다.

“그럼 오늘은 그냥 먹으면 안 되나… 한 끼 정도는….”

“안 돼… 그러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은데.”

강동현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런 면에서는 진짜 철저하다. 괜한 말한 것 같다… 황경호는 그렇게 생각하며 그가 씻을 동안 가서 요리를 좀 했다. 강동현이 다이어트식만 먹다 보니 그런 그 앞에서 많이 먹을 수가 없어 황경호도 자연히 살이 약간 빠졌다.

“야, 넌 더 먹어. 지금까지 찌우는데 얼마나 힘들었는데.”

“어? 아니… 괜찮아.”

“먹어. 먹어.”

그러다 보니 자연히 외식이나 데이트도 줄어들었다. 강동현이 외식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서울숲이나 강변에 나가 앉아 있을 수 있는 날씨라면 도시락이라도 싸서 가겠지만….

“너 얼굴 왜 이래?”

강동현은 그제야 황경호의 뺨이 벌겋게 튼 걸 보고 그렇게 물었다.

“너 때문이다.”

“응? 진짜? 왜?”

“몰라… 밴드 때문에.”

“그냥 붙이지 마.”

“그럼 이 얼굴로 어떻게 일을 해!”

지 일 아니라고 아주 말이 쉽다, 이 나쁜 놈. 황경호는 한동안 뺨이 튼 것 때문에 살짝 고생을 했다. 가려워 죽는 줄 알았다.

그래도 주말에는 오랜만에 둘둘 둘러싼 강동현과 데이트를 나갔다. 강동현의 본가 근처에 있는 맛집을 하나 알아내 같이 가기로 한 것이다. 밖에 나다닐 때는 차 안이 아니고서야 친한 친구처럼 행동하는(일단은) 그들이라 차는 강동현의 부모님 댁에 대놓고 걸어갔다가 왔다.

“아… 오랜만에 음식다운 음식 먹었다.”

“진짜 맛있네. 또 와야겠다.”

“어, 나 이번 촬영 끝나면 가서 엄청 먹자.”

그런 얘기를 나누면서 걸어가는데 강동현이 우뚝 멈춰 섰다. 황경호는 뭔가 싶어서 그를 봤다가 그의 맞은편에서 걸어오던 어떤 사람도 우뚝 멈춰 선 것을 발견했다.

‘같은 동네 살았구나….’

그녀는 마트라도 갔다 오는지 가벼운 차림이었다. 약간의 침묵이 흘렀지만 곧 강영지 쪽이 웃는 얼굴로 말을 걸었다.

“너 아직도 이러고 다녀?”

그녀는 신기하다는 듯이 그렇게 말했다. 강동현이 마스크를 내렸다.

“당연하지. 내 얼굴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다고.”

강동현은 선글라스도 벗고는 약간 인상을 쓰며 말을 고르다가 말했다.

“그… 결혼 축하한다.”

“어, 고맙다.”

그녀가 씨익 웃으며 그렇게 말했다.

“그게 끝? 궁금한 건 없어? 신랑이 어떤 남자인지는 안 궁금해?”

그녀는 웃는 얼굴로 강동현을 놀렸다. 전 여친에게는 못 이겼다더니. 강동현이 끙 하며 그녀의 얼굴을 외면하며 황경호의 눈치를 살짝 보았다. 그러자 강영지가 아차 하고 황경호에게 설명했다.

“아, 저 이번에 결혼하거든요.”

“아, 네. 축하드려요.”

“감사합니다.”

활기차고 예쁜 여자였다. 그가 좀 아쉬워한다 하더라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었다.

‘이쯤에서 자리를 피해 주는 게 맞을까.’

저번에 스캔들이 났을 때는 울고불고 바람피우면 계약서대로 하겠다느니 악을 쓴 적도 있었지만, 그래도 추억은 소중한 것일 것이다. 그렇게 좋아했던 여자가 결혼을 한다는데 기분도 복잡할 거고. 황경호는 웃는 얼굴로 인사를 하려고 했다.

“그럼 나 먼저….”

“근데 나도 너한테 할 말이 있는데.”

강동현이 동시에 입을 열었다. 그는 복잡한 표정으로 한숨을 쉬며 황경호의 손을 잡았다. 응? 황경호는 깜짝 놀라서 그 손을 보았다.

“니가 보낸 청첩장 보고 내가 좀 배신 때린 것 같다는 기분도 들고 너한테는 말했어야 했나 싶기도 했거든. 의리가 있지.”

그는 그렇게 알 수 없는 설명을 하더니 전 여자친구를 똑바로 보며 말했다.

“난 3년 전에 얘랑 벌써 했다, 결혼. 미리 말 못해서 미안.”

“!!!”

“!”

황경호와 강영지가 입을 딱 벌렸다.

“아니…!! 아니에요! 아니…!”

그대로 황경호는 기겁을 해서 강영지를 보면서 강동현의 손을 뿌리치려고 했다. 강동현은 황경호의 손을 잡은 채 놓지 않으며 그에게 퍽퍽 맞으며 복잡한 얼굴로 그냥 가만히 서 있었다. 강동현은 왼손에 있는 반지도 보여주었다. 황경호도 끼고 있었다. 강영지는 입을 떡 벌리며 둘을 번갈아 보다가 확 열 받은 얼굴로 강동현의 얼굴을 퍽 주먹으로 쳤다.

“너 그때 바람피운 거였어!!”

“윽… 그건 미안.”

“와…! 이 새끼 뻔뻔한 거 봐라!”

“결혼 같은 건 원래 먼저 말한 사람이 이기는 건데 난 3년 전에 해놓고 너한테 말을 안 했더라고… 청첩장 보는데 진짜 지는 느낌이 확….”

강동현이 인상을 약간 찌푸린 채 맞은 뺨을 만지며 말했다. 황경호는 이제 거의 울 것 같았다.

“이기고 지고가 문제야! 죽어! 죽어죽어!”

황경호는 완전히 패닉에 빠져서 그의 등을 퍽퍽 치다가 강영지에게 고개를 숙여서 사과를 했다.

“죄, 죄송합니다. 바, 바람이 아니라… 그러니까 그때 저, 저는 정말로! 정말로 그러기 싫었는데 얘가 어, 억지로…!”

“최악! 너 이런 놈이었냐!”

강동현은 한 대 더 얻어맞았다. 황경호도 얼굴이 하얘져서는 그를 마구 책했다.

“넌 진짜 왜 쓸데없는 말을 하는데…!”

“너 신경 썼잖아. 쟤랑 항상 비….”

황경호는 그의 입을 틀어막았다. 이제 좀 나아졌다고 생각했는데 이 새끼는 입이 정말 화의 문이다. 강영지의 얼굴도 가관이었다. 황경호는 그녀의 얼굴을 볼 수가 없었다. 강동현은 그의 손을 떼어내고 다시 때리지 못하게 두 손목을 꽉 잡고는 말했다.

“후회는 무슨. 이 김에 확실히 한 거다? 나 너밖에 없는 거.”

“…….”

그 이후로 황경호는 그냥 메추리처럼 자기 얼굴을 손으로 가렸고 강동현이랑 강영지는 그 뒤로 약간의 말을 더 나눈 후 앞으로 더는 볼일 없을 것 같다는 식으로 말을 했다. 그리고 강영지는 갈 길을 갔다. 얼마 후면 새색시가 될 그녀가 얼마나 심란하고 짜증이 났을지는 말을 안 해도 뻔했다.

결국 이 새끼는 자기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끝까지 상처를 입히고야 마는 그런 놈이다.

“이제 비교하고 그러지 마라, 어? 나 너밖에 없다. 우리 둘이 평생 같이 사는 거라고.”

강동현은 시원섭섭한 얼굴로 그녀의 뒷모습을 한 번 돌아보았다가 황경호를 보았다.

“…….”

강동현은 황경호의 손을 잡은 채로 본가로 다시 걸어가기 시작했다. 선글라스를 꼈다. 이제는 뭐라고 화를 내야 할지도 모르겠다. 황경호는 그의 얼굴을 가만히 쳐다보고 있다가 말했다.

“…넌 걱정도 안 되냐? 전 여친이 앙심 품고 소문이라도 내면 어떡해.”

“아, 걱정 마. 쟤 그런 애 아니야.”

“야… 내가 여자라도 이건 앙심 품을 일이다….”

첫사랑으로 오래 사귀던 남자와 결국 끝을 지었다. 서로가 서로에게 말했던 것처럼 영원할 순 없었지만 소중한 추억이었다. 그런데 그랬던 전 남친이 자기 결혼 며칠 전에 그 시절 바람을 피웠다고 말하는데 어떤 여자가 앙심을 안 품겠는가. 황경호는 어이가 없는 말투로 또 물었다.

“너 진짜 내 기분은 생각 안 하냐?”

“어? 뭔 말이야. 니 기분 생각하니까 이런 거지. 너 자꾸 비슷한 일로 불안해하잖아.”

“그냥 온 동네방네 소문을 내라….”

“이렇게라도 해야지 좀 믿잖아, 너. 하암. 아, 배부르니까 졸리다. 집에서 좀 자고 갈까?”

그의 태평한 태도에 황경호는 다시 말을 잃었다.

‘그러니까… 이게 지 나름대로는 날 신경 써서 이러는 거라는 거지….’

신경을 안 쓰는 게 아니라… 머리가 지끈거린다. 황경호는 세상에서 창피한 게 제일 싫었다. 황경호의 입장에서는 강동현의 부모님한테 밝혀질 때도, 이강유가 그들을 발견했을 때도, 지금처럼 강동현이 그의 전 여자친구에게 그들의 관계를 밝힐 때도, 하나같이 쥐구멍에 들어가고 싶을 정도로 창피하고 당황스러웠다. 강동현이라고 이런 일을 자꾸 하고 싶은 것은 아닐 것이다. 부담스러울 것이다. 알지만, 그럼에도 강동현의 거칠 것 없는 태도는 종종 황경호를 바보로 만들었다. 하지만 아주 가끔은, 속이 시원할 때도 있었다.

아마 평생 황경호는 강동현을 이해하지 못할지도 모르겠다. 저쪽도 마찬가지일지도 모른다. 서로가 안 맞는 건 근본적으로 둘이 서로 다른 사람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렇게 둘 다 노력하고 있었다. 그리고 언젠가는… 서로가 누구보다도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런 순간에… 미워 죽겠는데.

황경호는 복잡한 얼굴로 땅을 쳐다보며 걷다가 문득 말했다.

“…사랑한다고 말해.”

“사랑해, 황경호!!!”

“…!!”

그가 입 주변에 손을 대고 쩌렁쩌렁 소리를 질렀다. 황경호는 깜짝 놀라서 그의 팔을 퍽퍽 쳤다.

“미쳤어!!”

“니가 말하라며.”

“누가 그렇게 크게 말하래!!”

“아, 그러니까 이제 적당히 좀 믿어라. 어? 우리가 같이 산 지가 벌써 3년이에요, 어?”

“빨리 걸어. 빨리!”

“해달라는 건지 말라는 건지.”

“이 나쁜 새끼….”

황경호는 얼굴이 벌게져서는 그를 끌고 집으로 향했다.

세상일은 모르는 것이다. 당장 내일, 아니, 당장 한 시간 뒤에도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다. 그런데 십 년 뒤나… 오십 년 뒤 같은 건 모르는 게 당연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지금 이 순간이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때까지 함께 하고자 하는 이 마음이 아무것도 아닐 리가 없었다. 서로 맞지 않고 잘 싸우고 화가 나고 미울 때도 있지만 결국엔 다시 서로에게로 돌아오고 마음을 확인한다.

화가 난다. 하지만 그래도 이렇게 계속 쭉 함께 있고 싶다. 그러기 위해 황경호도 노력할 것이다. 강동현도 노력할 것이다. 믿는다.

“그래도… 이제 다른 사람들한테는 들키지 말자. 나 좀 무섭다, 이 속도….”

황경호가 이마를 짚고 약간 끙끙거렸다. 양가 부모님에 누님, 이강유, 유태범, 거기에 강영지까지… 황경호가 한숨을 쉬며 그렇게 말했다. 거의 집에 도착해서 벨을 눌렀다. 강동현은 요새 촬영이 한창이라 정말 피곤한지 하품을 계속했다.

“어… 하암.”

“그렇게 피곤해? 나 좀 봐.”

황경호가 강동현의 얼굴을 살폈다. 그러다가 서로 말없이 상대의 눈을 바라보았다. 왜일까. 갑자기. 아무것도 말하지 않아도 통할 때가 있다. 완벽하지 않아도 완벽하다. 함께 있는 이 시간이 영원으로 늘어나는 것 같다.

“나도 사랑해.”

그런 말이 뜬금없이 입술 사이로 새어 나왔다. 그러자 강동현이 눈을 좀 크게 떴다가 악동같이 씨익 웃었다.

“이제 나 없으면 못 살겠지?”

황경호는 인상을 약간 찌푸렸지만 그대로 그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그냥 지금 여기서 하고 싶었다.

‘사람도 별로 없고 벽에 숨으면 괜찮겠지?’

이렇게 밝은 날, 따스한 햇살 아래에서. 그가 미소를 지으며 받아 주었다.

“어? 맞지? 나 좋아 죽겠지? 어?”

입을 맞추면서도 자꾸 그렇게 캐물어서 황경호가 화를 내려는 찰나 대문이 열렸다. 왔니? 라고 말씀하시며 어머니가 나오셨다. 그리고 둘을 보고는 기겁을 하셨다.

“얘들이 밖에서…!”

그녀는 강동현과 황경호의 팔을 붙잡고 집으로 끌어당겼다. 둘 다 등짝을 한 대씩 맞았다.

<고쳐줄까?> 3.5부 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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