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뇨. 아버지, 요새 딴 여자 만나세요?”
[응? 아니?]
강동현의 아버지는 약간 황당한 듯했지만 아무렇지 않게 그렇게 대답했다. 강동현이 다시 물었다.
“진짜요?”
[응. 아빠한테 딴 여자가 어디 있어? 난 너네 엄마밖에 없다.]
강동현이 자신에게 매달려 있는 두 사람을 내려다보았다. 엄마와 황경호는 이구동성으로 작게 말했다. 여행!
“아. 뭔 여행 간다면서요. 아버지 비서…. 그 누구냐. 서울대 나온.”
[걔? 걔가 나랑 여행을 왜 가? 그리고 걔랑 아빠랑 나이 차이가 몇 살인데.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걔 들으면 펄쩍 뛸걸. 너네 엄마도 들으면 펄쩍 뛴다.]
“아니, 안 그래도 엄마가 우리 집 와서 펄쩍 뛰고 있다고요, 아버지. 아빠랑 그 비서랑 여행 계획 짜는 걸 엄마가 다 봤다는데? 폰에서?”
[뭐?]
강동현은 짜증스럽게 말을 덧붙였다. 강동현의 엄마는 강동현이 다 말해버리자 깜짝 놀라서 발을 동동 구르며 아들의 팔을 찰싹 쳤다.
“바람을 피울 거면 안 들키게 피우든가, 자신 없으면 솔직하게 말하든가.”
자기는 안 들켰다 이건가. 황경호는 그의 얼굴을 가만히 노려보았다.
[잠깐만…. 무슨 말 하는 건지…. 내가 김 비서랑 무슨 말을 했다고….]
아버지가 허둥지둥대는 게 느껴졌다.
[아…! 아아…. 아, 이거….]
“뭔데요?”
[니네 엄마 거기 있냐?]
“네.”
[지금 너네 엄마한테 카톡 보냈다. 아니, 너네 엄마가 요새 몸도 그렇고…. 너희들 다 크니까 영 허전해하는 것 같아서 같이 어디 놀러나 갈까 해서.]
아버지는 멋쩍다는 듯이 그렇게 말했다.
엄마의 폰이 여러 번 울렸다. 엄마는 어쩐지 더 속상한 표정으로 휴대폰을 내려다보았다. 여러 장의 캡쳐가 와있었고 그건 처음부터 어떻게 된 일인지 알 수 있을 만한 내용이었다. 황경호는 어머니의 옆에서 고개를 대고 가만히 내용을 살펴보았다.
“다행이네요.”
황경호는 그렇게 말했다. 어머니는 한숨을 쉬었다.
[일단 끊는다. 너네 엄마한테 전화해야겠다.]
“바꿔 줄까요? 다 듣고 있는데.”
어머니는 고개를 저었다.
“됐어…. 나중에 전화한다고 해줘.”
강동현은 스피커를 끄고 약간 멀어져서 아버지랑 뭐라고 통화를 좀 더 하러 갔다. 황경호는 어머니의 눈치를 보았다.
“괜찮으세요?”
“응….”
오해가 풀렸다고 한순간에 기분이 괜찮아지는 사람도 있을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이런 일에는 일의 시비도 중요하겠지만, 공감이 필요한 것이니까 말이다.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을 황경호도 처음부터 알았다. 다만 기든 아니든 사람의 마음은 쉽게 상처받는다. 그래서 사람이 말을 조심해야 하는 것이다.
“좀 부끄럽네….”
어머니는 살짝 웃으면서 그렇게 말했다. 그녀는 몇 번이고 남편이 보낸 문자를 확인했다.
“내가 진짜 요새 정말 문제가 많나 봐…. 은혁이 말처럼….”
어머니는 한숨을 쉬었다.
“내가 애 아빠랑 어렸을 때 결혼해서…. 애들 가지고 같이 키우고…. 힘들기도 했지만…. 참 재밌었는데. 근데 이렇게 애들 다 크고 나니까 내가 할 일이 없어서…. 그래서 불안한가 봐.”
어머니는 메시지를 보다가 사진첩으로 들어갔다. 강동현이나 강동현의 누나로 보이는 어린아이들의 사진 등 가족사진들이 나왔다.
“다들 일도 있고 친구들도 있고 사회생활도 하고…. 근데 난 가족들이 제일 소중해서….”
어머니는 그렇게 말하다 한숨을 쉬었다.
“이제 이러면 안 되겠지…. 미안해, 경호야. 계속 아줌마 말 듣게 해서. 자꾸 너한테만 이런 얘기만 하네.”
어머니는 그러고 살짝 미소를 지었다.
“아니에요. 괜찮아요. 언제든 얘기할 상대 필요하시면 말씀하세요.”
황경호는 머뭇거리다가 덧붙였다.
“어머니 같은 분 좋아해요. 분위기가… 우리 선생님이랑 좀 닮았어요.”
“선생님?”
“저희 병원 원장 선생님이요.”
강동현이 어느새 다가와 있었다.
“…아버지, 데리러 오신대.”
“뭐? 아….”
어머니는 카우치에서 엉덩이를 살짝 뗐다.
“어떡하니…. 좀 창피한데….”
“뭘 또 창피해. 사람이 오해도 할 수 있고 그런 거지. 결혼 생활을 30년 넘게 한 양반들이 아직도 내외해?”
“그래도….”
어머니가 걱정하는 사이 강동현의 아버지는 금방 도착하셨다. 황경호는 솔직히 그가 어떤 사람일지 궁금했다.
“아들~ 오랜만이네. 너 때문에 할머니한테 아빠가 혼났잖아.”
“할머니한테 전화했어요.”
“몸은 좀 괜찮아? 응? 아빠가 남자한테 좋은 것 좀 구해뒀는데?”
“뭔데요?”
그렇게 부자가 만나자마자 쑥덕거렸다. 황경호는 살짝 놀랐다. 강동현의 아버지는 꽤 중후한 느낌의 미남이셨다. 하지만 정말 자상해 보이셨다. 강동현같이 강한 느낌도 없진 않았지만 인상이 부드러웠다. 그래서 강동현이랑은 완전히 이미지가 달라 보인다.
“네가 경호구나. 은연이 엄마가 너무 착하다고 칭찬 많이 했는데. 반갑다.”
그는 황경호와 악수를 했다. 손이 크고 단단하고 따뜻했다. 그리고 아버지는 아내를 바라보았다.
“은혁이가 나한테 아까 화 엄청 내더라. 똑바로 하라고. 엄마 울리지 말라고.”
황경호랑 어머니는 슬 강동현을 올려다보았다. 강동현은 모르는 척했다.
‘자기나 잘하지….’
황경호는 그렇게 속으로 궁시렁거렸다.
“일단 가자, 세연아. 가면서 얘기하자.”
그렇게 집을 떠나기 전에 강동현의 어머니는 아들을 보더니 그를 꼭 끌어안았다.
“아들, 엄마가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거 알지?”
“어.”
그리고 어머니는 황경호도 꼭 끌어안아 인사를 했다. 어머니의 품은 따뜻하고 푸근해서 기분이 좋았다. 그래서 조심스럽게 마주 안았다. 어머니는 아버지의 손을 잡고 나갔다. 황경호는 또 인지하지 못했던 피로가 마구 몰려와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이다….”
“우리 엄마, 아빠 금슬 좋기로 유명해.”
“…….”
병원에 오는 아저씨들을 보면 집에 깍듯하게 잘해서 좋은 남편, 아버지로 이름을 날리지만 결국 뒷구멍으로 딴짓을 하다가 병을 얻는 경우가 많이 있었다. 굳이 말하지는 않았다. 그래도 강동현보다는 훨씬 믿음직해 보였다. 그래서 안도했다.
“너희 아버지 되게 근사하시다….”
황경호는 그렇게 말했다. 솔직히 비교를 안 할 수가 없었다. 강동현의 부모님은 두 분 다 참 근사하고 좋은 분들이셨다. 선남선녀에 성격도 좋으시고…. 강동현은 단 한 번도 그들이 부끄럽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을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부모님을 떠올려 보았다. 세상과 삶에 치여 살 수밖에 없었던 그들은 어쩔 수 없이 속물적이고, 어쩔 수 없이 비겁했다. 가슴이 좀 아팠다.
“씻어야겠다….”
*
<경호야, 아줌마가 김치 새로 담갔는데 갖다 줄까?>
<이번에 새우가 제철이라 많이 샀는데 새우 좋아하니?>
<백화점 갔다가 옷 좀 샀는데 경호한테 어울릴 것 같아서…. 이거 어떠니? 언제 퇴근해?>
“…….”
“내가 우리 엄마 귀찮다고 했지?”
강동현은 마치 자기가 이겼다는 듯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아니…. 고맙고 감사한데…. 죄송해서. 안 이러셔도 되는데….”
황경호는 고개를 저었다.
“우리 엄마가 원체 가까운 사람들한테 뭐 해주고 이런 걸 좋아해서 그렇다. 일을 사서 한다니까. 내가 엄마한테 그만하라고 할게.”
“…말 예쁘게 해라, 진짜.”
“알았어.”
강동현은 성의 없게 대답했다. 황경호는 그런 그를 아주 미심쩍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강동현이 물었다.
“가서도 고생했지만, 그래도 일하는 게 더 스트레스받아?”
황경호는 잠깐 고민하다가 대답했다.
“아프리카에 있을 때는 몸은 좀 고되긴 했는데 진짜 좋았어. 뭔가…. 이런 게 마음이 편하다는 건가 싶고…. 일하는 건 익숙한 내 일 하니까 아직은 힘들다는 생각은 안 드는데? 아는 사람들 만나니까 좋아.”
강동현은 황경호를 괜히 건드리며 말했다.
“그래도 바로 일하려면 피곤할 텐데. 너네 일은 좀 못 쉬나? 안 그래도 간호 인력 부족하다며. 좀 쉬고 다시 해도 되잖아.”
“그렇긴 한데….”
그렇게 대답하다가 핫 하고 그를 흘겨보았다.
“나 일 그만 안 둔다니까. 왜 자꾸 그래?”
“아, 안 걸리네.”
강동현이 그렇게 쉽게 말했다. 황경호는 옷 속에서 배랑 허리를 만지는 그의 손을 잡아 멈추었다.
“진짜 그런 말 좀 하지 말라고 했잖아. 기분 나쁘다고.”
“알았어.”
이렇게 또 쉽게 대답하지만 다시 이럴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아니, 예감이 뭔가. 분명히 또 이럴 거다. 황경호는 인상을 찌푸리며 그를 돌아봤다.
“약속해.”
“알았다니까.”
“…….”
진정성이 안 느껴진다. 황경호는 그의 이런 점이 정말, 진짜, 최고로 마음에 안 들었다. 괜히 몇 마디 안 했는데도 마음 상한다.
‘더 따지면 또 예민하고 성가시다고 할 거고….’
마음이 상하다가 갑자기 화도 좀 난다. 이제는 제 거다, 라는 식으로 자연스럽게 옷 안에 쑥 넣고 있는 강동현의 손을 빼내고 황경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작은방으로 가니 강동현이 볼멘소리를 냈다.
“야, 혼자 놀지 말고 나도!”
작은방은 황경호의 아지트였다. 오히려 자기 방보다도 강동현이 들어오는 걸 싫어했다. 황경호는 3개월이 넘게 내버려두고 있었던 레고를 쌓으며 간혹 투덜거렸다.
“나쁜 놈. 지가 잘났다 이거지.”
그렇게 한참 하다 보니 오랜만에 무념무상으로 마음이 평온해졌다. 이 맛에 이 짓을 하는 황경호였다. 한 시간 반 정도 했을까. 뻐근한 몸을 스트레칭하며 밖으로 나왔다. 가만히 앉아서 집중해서 영화를 보고 있는 강동현이 보였다.
‘….잘생겼네. 멋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진짜 태가 나는 강동현이었다. 특히 일하거나 집중할 때는 진짜 잘생겼다는 게 티가 팍팍 났다. 황경호는 문득 그렇게 생각했다가 또 약간 억울해졌다. 매력이란 뭘까. 싫다고 생각하는 것도 어물쩍 넘어가게 만든다.
역시 좋다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황경호는 조용히 가서 카우치에 앉았다. 그와는 조금 떨어진 자리였다. 강동현은 영화를 집중해서 보고 있었다. 그는 곧 자연스럽게 황경호의 무릎에 머리를 뉘었다.
“미안. 진짜 앞으로 안 조를게.”
“뭘?”
“일 그만두라고.”
“…….”
“네가 싫어하는 것도 알고 왜 싫어하는지도 알고 있는데…. 진짜 그 병원 진상 많은 것도 싫고 네가 고생하는 건 더 싫고 그래서. 같이 있고 싶기도 하고.”
“…나 우리 병원 사람들 좋아해. 다 친하고. 환자들 진상 많다고 뭐라고 해도 다른 병원은 동료들끼리도 안 좋은 데 많아.”
황경호는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진짜로 그렇게 생각했다. 이강유 비뇨기과처럼 사람들이 좋은 병원은 찾기 힘들 것이다. 단점이 있는 거야 다른 병원들도 다 그럴 것 아닌가.
“넌 그런 거 굳이 선택 안 해도 되잖아. 봉사활동 하는 게 좋으면 그것만 해도 되고 다른 거 하고 싶으면 다른 거 해도 되고. 네가 하고 싶은 거 다 할 수 있는데 그중에서 굳이 환자들 진상 짓 받아줘야 하는 일을 하고 싶냐는 거지, 나는.”
하고 싶은 것만 한다. 하고 싶은 게 뭔데? 황경호는 자신을 책임질 수 있을 정도로 제 몫을 할 수 있는 일을 그만두고 싶지 않았다. 그걸 하고 싶은지 아닌지가 그렇게 중요한 걸까? 그런 말을 들으면 괜히 별거 아닌 일을 하고 별거 아닌 사람인 것처럼 느껴졌다. 설사 진짜로 그렇다고 하더라도, 기분이 나빴다.
강동현이랑 같이 살면서 황경호는 점점 몸도 마음도 여유로워지는 걸 느꼈다. 사실상 황경호가 걱정하던 것의 대부분은 정말 돈 때문이었던 것일까? 막연한 불안감, 막막함, 갑갑함…. 그런 것들이 점점 완화되어 갔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좀…. 그럴 정도로. 풍족한 생활, 친절한 사람들, 예전엔 꿈도 못 꿨을 관리 서비스. 가끔 싸우기도 하고 또 조금 불안할 때도 있지만, 시간이 갈수록 더 깊어지는 강동현과의 사이. 행복이란 이런 것일까? 하고 가끔 스스로에게 물어보기도 하는 나날들.
그래도 스스로 지키고 싶은 것도 있었다.
“그냥…. 난 지금이 좋아. 그러니까 그런 말 더 안 했으면 좋겠어.”
“…알았어.”
강동현은 크게 한숨을 쉬긴 했지만 그렇게 대답했다. 이번엔 좀 무게감이 있다. 그래서 황경호도 더 이상 말하지 않고 가만히 같이 영화를 보았다. 강동현이 내내 황경호의 손가락을 만지작거렸다. 영화가 끝났다.
“내일 9시 수업이잖아.”
“응…. 아, 인제 와서 학교 다니려니까 죽겠다.”
“일은 밤도 새서 하면서.”
“일이랑 같냐.”
“…너 진짜 공부 못했어?”
“아니! 못하진 않았다니까?”
“알았어….”
같이 침실에 들어왔다. 강동현은 훌훌 벗고 팬티만 입은 채 이불 속으로 들어갔고 황경호는 잠옷으로 갈아입었다. 리모컨으로 전등을 끄자 주홍빛 조명 불이 은은하게 남았다. 황경호가 그것도 끄려고 하자 그 손을 잡으면서 슬 그의 위로 올라탔다.
“…….”
“…….”
눈을 마주쳤다. 가만히 서로의 눈동자를 바라보고 있다가 천천히 얼굴을 가까이했다. 강동현이 장난스럽게 황경호의 코를 깨물었다. 황경호는 약간 인상을 썼다. 강동현은 그의 미간에 입을 맞추고 다시 눈을 바라보고, 드디어 키스했다.
“으응….”
황경호는 자연스럽게 눈을 지그시 감으며 강동현의 뺨을 감쌌다. 그의 머리카락을 만졌다. 부드럽다. 좋은 냄새가 난다. 강동현이 몸을 붙여왔다. 착 포개졌다.
“하아….”
황홀하다…. 사람의 체온과 피부가 이렇게 좋은 것이란 걸 모르고 살 때는 차라리 아무 생각이 없었다. 다른 사람들도 이렇게 사는 걸까?
아니면, 역시 그가 특별한 걸까?
“할까…?”
혀를 한참 섞다가 강동현이 황경호의 뺨을 살짝 깨물고는 귓가에 속삭였다. 황경호는 얼굴을 약간 붉힌 채 황홀감에 젖어 대답했다.
“한 번만 하면….”
그렇게 서로 만지고, 간지러워서 한바탕 웃음소리도 나고 엎치락뒤치락하다가 하나가 되었다.
“아아…. 아앙…. 하읏….”
황경호는 강동현의 멋진 몸 위에 엎드려 같이 몸을 움직이고 있었다. 찰박찰박. 젖은 소리가 울린다. 강동현은 황경호의 얼굴에 깃털 같은 입맞춤을 했다. 요즘에 자꾸 그가 이렇게 입을 맞추는데 기분이 너무 좋아서 곤란했다. 온 피부가 근질거리고 아랫배가 당긴다.
둘만의 집, 오로지 둘이서. 많은 사람들 속에서도 이 세상을 혼자 헤쳐나가야 한다는 느낌에 막막하기만 했는데, 어째서 단 둘뿐인데도 이렇게 충만한 것일까?
“하아…. 으응….”
배 안이 따뜻했다. 뭉근한 뜨거움이 기분 좋았다. 빨리 격렬해지고 싶기도 했고 영원히 이대로 있고 싶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떨어지고 싶지가 않았다.
“원래…. 원래 이런 거야…?”
“응…? 뭐가?”
황경호는 자신의 몸을 만지는 그의 손을 잡았다. 크고 뜨거웠다.
“다른 사람들이랑 해도 이래?”
“뭐가….”
강동현은 알아듣지를 못하고 자꾸 되물었다. 황경호는 그와 눈을 마주쳤다.
“다른 사람이랑 해도 이렇게 기분 좋을까…?”
“…….”
강동현은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약간 화가 난 것도 같고…
“다른 사람이랑 하고 싶어?”
강동현이 물었다.
“아니…. 모르겠어…. 부끄러워. 그냥…. 그냥 궁금해서…. 어땠어…?”
“…….”
전에 강동현도 아주 무드 없게 이런 시간에 이덕재에 대해 물은 적이 있었다. 황경호도 문득 궁금해졌다. 평소 같으면 궁금해도 절대 물어보지 않았을 것이다. 전에 그가 그렇게 했으니까…. 그런 핑계를 댈 수 있는 시간이라 물을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 강동현이 대답을 하지 않았다.
“…미안. 대답 안 해도 돼.”
강동현이야 억지로 끝까지 대답을 들어냈지만 황경호는 그런 성격이 아니었다. 난처한 질문이었을 것이다. 그가 얼마나 전 여자친구를 좋아했는지는 황경호도 잘 알고 있었다.
그냥 궁금했다. 다른 사람이랑도 이럴 수 있는 건지…. 또 누군가를 진심으로 좋아할 수 있는 건지. 황경호는 도저히 그럴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기 때문에, 그래서 더 궁금했다.
아마도…. 황경호는 다른 사람이랑 이런 사이가 될 수는 없을 것이다. 딱히 바라지도 않고 누군가가 그렇게 자신을 원해 올 거란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래서, 단지 처음이라서 이렇게 특별하다고 느끼는 건지, 아니면 정말로 강동현이라서 이런 건지 궁금했다. 궁금했다.
“그냥…. 하읏…. 궁금해서….”
황경호는 무방비한 채로 그렇게 말했다. 강동현은 대답하지 않고 딴소리를 했다.
“사랑해.”
그러면서 그는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황경호는 야시시하게 인상을 찌푸리며 침대 시트를 꽉 잡았다.
“으읍…. 으읏…. 아윽…. 흐으으으응….”
온몸이 바르르 떨리며 아찔한 절정이 왔다. 황경호가 오르가즘을 느끼기 시작하자 강동현이 열정적으로 입을 맞추며 그를 꽉 끌어안고 그의 음부를 푹푹 찔렀다. 황경호는 마구 경련을 하면서도 이제는 아주 조금 익숙해져 그의 어깨와 시트를 꽉 잡으며 견뎠다. 물론 견딜 수 있다고 힘들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경호야…! 으으윽…!!”
“아아아아앙….”
그 끝에 강동현이 섹시한 얼굴로 사정을 하기 시작했다. 황경호는 흐물거리며 눈물을 줄줄 흘렸다. 뭉근했던 뜨거움이 온몸을 녹여버릴 정도로 뜨거워져 몽롱하고 기분이 좋아서…. 마음이 부풀어 올랐다.
좋아한다고 말하고 싶었다.
어째서인지 모르겠다. 말 같은 거…. 몽롱했다. 몸이 무거웠다. 기분 좋아. 좋아해. 좋아해…. 황경호는 강동현과 그렇게 끌어안고 있다가 저도 모르게 스륵 잠이 들었다.
*
아직도 시차가 있는 것 같다. 새벽쯤에 눈을 떴다. 눈을 뜨자마자 어슴푸레한 새벽녘의 빛 덕분에 강동현의 얼굴이 바로 보였다. 아프리카 가기 전에도 냉전이 길어 각방을 썼던지라 같이 살기 시작하고도 같이 잔 날은 생각보다 그렇게 많지 않았다.
섹스야 그렇다 치더라도, 처음엔 누군가와 같이 침대를 쓰는 것 자체가 힘들었다. 누군가 옆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몸을 뒤척여도 될지도 모르겠고, 솔직히 너무 불편했다.
그런데 섹스에 지쳐 그냥 쓰러져서 그의 몸 위에 아무렇게나 누워 잠들기도 하고 자주 그의 팔을 베고 자고 가끔 완전 반대 방향으로 누워 잠들기도 하면서 점점 익숙해졌다. 절대 이것만큼은 익숙해질 수 없을 것 같다고 생각했는데 말이다. 아프리카에 갔다 와서 다시 같이 침대를 쓴 지 2주 정도인데 정말 아무렇지도 않았다. 마치 헤어져 있던 100일 동안도 항상 같이 잠든 것처럼 말이다.
그렇게 가만히 잠들어 있는 강동현의 얼굴을 보고 있다가 살짝 그의 얼굴을 만졌다. 눈썹도 만지고 코도 만지고 입술도 만졌다.
‘왠지…. 나중에 이런 거…….’
뭔가 가슴이 아프다. 예전에 새벽에 깨어 허무감을 맛봤던 거랑은 달랐다. 그때는 속에 아무것도 없는 것 같았는데 지금은 안에서 무언가 흘러넘칠 것만 같았다.
그는 가진 게 많은 남자였다. 비단 물질적인 것이 아니더라도, 그의 성격이나 가정환경이나…. 그리고 그는 일에든 사랑에든 열정적인 사람이라 열중하는 것에 많은 것을 주었다.
‘나쁜 놈….’
전에 그가 괴롭혔던 것이 생각났다. 첫눈에 반했지만 몰랐던 것뿐이라고 자꾸 사기를 치는데, 결국 몸이 당기고 쉬워 보여서 들이댄 거라는 건 아무리 돌이켜 생각해봐도 달라지지 않는 것 같다.
황경호도 그를 미워하면서도 결국 끌려서 그에 대해 찾아보기도 하고 그에게 복수하기도 하고…. 결국엔 서로 좋아하게 되어 같이 살게 되었다. 그와 만나고 나서부터 아무것도 없던 황경호의 인생에 무언가가 차곡차곡 쌓였다. 아주 쓴 것부터 아주 달콤한 것까지, 아주 어두운 것부터 아주 밝은 것까지.
그래서 그럴까. 아침부터 그런 생각이 났다. 아니, 아프리카에서 지낼 때부터 했던 생각이 났다.
‘좋아해….’
어떻게 말하지? 그냥 지나가다가 말할까? 얘처럼 꽃이라도 사서 들어올까?
‘웃을 것 같다…. 놀릴 거 같다…….’
아프리카에서 한 50일쯤 됐을 때부터 생각해 왔었는데 막상 그를 앞에 두고 있으니 계속 입이 안 떨어졌다.
강동현은 황경호가 그렇게 싫다는 데도 기어코 사랑한다, 사랑한다가 입에 붙고 말았다. 예전에 좋아한다, 좋아한다를 입에 달고 살았던 것처럼 말이다. 그런 말을 듣는 것 자체는 사실…. 황경호에겐 가슴이 펄쩍펄쩍 뛸 일인데, 항상 진지함이 안 느껴져서 말이다. 괜히 혼자서만 마음을 졸이는 것처럼 느껴져서 좀 원망스럽기도 하고…. 그래도…. 행복하기도 하고…
‘얘는 그렇게 쉽게 말하는데 난 왜….’
황경호는 그렇게 속을 졸이며 잠든 강동현의 얼굴을 하염없이 보았다. 그렇게 그를 괜히 만지작거리다가 일어났다.
이제 해가 점점 짧아져서 밖은 아직 어슴푸레 했다. 거실에 있는 라운드 형의 전면 창밖으로 경치를 잠깐 감상했다. 고요한 그 모습을 보고 있으니 도리어 황경호의 마음속은 더 어지러워졌다. 황경호는 씻고 부엌으로 향했다. 그로부터 한 시간쯤 뒤에 잠에서 깬 강동현이 식탁을 보고 놀랐다.
“아침부터 무슨 진수성찬이야?”
“옷 좀 입고 다녀….”
황경호는 대답하지 못하고 그렇게 말했다. 강동현은 식탁에 앉기 전에 황경호를 뒤에서 끌어안고 뺨에 쪽쪽 입을 맞췄다.
“고마워. 잘 먹을게. 사랑해.”
“…빨리 앉아. 식겠다. 학교 가야지.”
그렇게 매일이 진수성찬이었다. 100일 동안의 회포를 몸으로는 원 없이 풀고 있었지만 마음만은 그렇지 못해 부풀어 오른 마음을 겨우 이런 식으로나 풀고 있는 황경호였다.
“응? 나 이거 좋아하는 건데. 언제 했어? 맛있다.”
“아니…. 얼마 전에 형이….”
사실 어머니한테 물어봤다…. 황경호는 아까부터 얼굴이 화끈거려서 애꿎은 밥만 퍽퍽 퍼먹었다. 밥을 먹고 같이 정리를 하고 식기세척기를 켜고 황경호는 출근 준비를 하고 강동현도 얼른 씻고 옷을 입었다. 가볍게 청바지에 티셔츠를 입고 자켓은 손에 들었다. 머리도 별 시간을 안 들이고 몇 번 만졌을 뿐인데 깔끔하게 모양이 났다.
‘…잘생겼다….’
황경호는 그를 몇 번 힐끗힐끗 보다가 눈이 마주쳐서 애꿎은 카우치만 자리를 잡는답시고 움직였다.
“가자. 데려다줄게.”
강동현이 황경호의 손을 잡았다.
“지하철 타는 게 더 빨라. 차 타면 빙 돌아가야 하는데…. 너 지각해.”
“지각 좀 하면 어때.”
강동현은 황경호의 골반 쪽을 잡고 자신의 쪽으로 끌어당기며 뺨에 입을 쪽 맞추었다. 그리고 둘이 눈이 마주쳐서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처음에는 장난스러웠는데 한 번, 두 번, 세 번 맞추니 서로를 바라보는 눈빛이 점점 뜨거워졌다.
“…….”
“…….”
황경호의 얼굴이 빨개졌다. 눈빛도 입술도 촉촉했다. 강동현은 그를 꽉 끌어안으며 깊게 입을 맞추고 이번엔 떼지 않았다. 그러면서 카우치에 황경호를 눕혔다. 황경호도 자연스럽게 그의 허벅지를 다리로 감쌌다.
그로부터 30분 뒤, 황경호는 강동현의 몸 위에 늘어져서 강한 오르가즘에 몸을 떨고 있었다. 상대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황홀감에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다.
‘지금 말할래…. 말하고 싶어….’
황경호는 아직도 그를 몸 안에 품은 채로 고개를 들어 그의 얼굴을 가까이에서 내려다보았다. 약간 정신을 차린 그가 황경호를 보고 미소를 지었다. 가슴이 떨린다. 잘생겼다. 섹시하다. 멋있다. 그가 좋았다.
“은혁아….”
“응? 왜 그러시나요, 우리 경호님.”
강동현이 웃는 얼굴로 황경호의 뺨에 입술을 비볐다. 황경호는 몹시 취약하고 빈틈 많은 얼굴로 살짝 몸을 떨었다.
“그게…. 내가…….”
“응?”
“그러니까…. 나….”
“응…?”
강동현은 황경호의 피부에 코와 입술을 비비며 즐기고 있었다. 황경호는 침을 꿀꺽 삼키고 그의 얼굴을 일렁이는 눈동자로 바라보았다.
“조….”
부우우웅. 그때 휴대폰 두 개가 동시에 울렸다. 황경호는 어깨까지 확 빨개졌다. 강동현은 자기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가 황경호를 안으며 벌떡 일어났다.
“…우리 완전 지각이다.”
“어…?”
그러면서 같이 그의 휴대폰 화면을 보았는데 벌써 8시 40분이었다. 황경호는 그야말로 깜짝 놀라서 기겁을 했다. 그는 안 그래도 100일이나 휴직 아닌 휴직을 해서 동료들에게 폐를 끼친 것 때문에 요새 진짜 열심히 일하고 있었다. 출근해야 한다는 사실을 새카맣게 까먹고 있었다. 둘은 부랴부랴 옷을 다시 챙겨 입고 집을 나섰다.
강동현은 끙하고 괴로워했다.
“아, 가기 싫다…. 좀만 더 안고 있고 싶은데….”
강동현은 엘리베이터 안에서도 황경호를 끌어안으려다가 황경호가 단칼에 쳐내자 더 끙끙거렸다.
“경호님….”
“아! 일 안 그만둔다고!”
황경호는 그가 별말 하지 않았는데도 무슨 뉘앙스인지 알고 버럭 화를 냈다. 바로 어제 그런 말을 하지 않는다고 약속을 해놓고도 또 이런다. 어쨌든 그렇게 황경호는 지하철을 타고 바로 병원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연신 죄송하다고 하며 병원에 들어갔더니 다들 아직 시차가 안 돌아온 모양이라며 괜찮다고 해줘서 더 미안했다. 허겁지겁 밀린 일을 하고 있으니 점심때가 훌쩍 지나갔다. 그리고 집에 돌아갈 때가 되니 슬슬 또 근심이 몰려왔다.
‘…어떻게 말하지….’
그냥 아침에 눈 딱 감고 얘기할걸…. 아, 속 쓰려…. 강동현은 요새 수업만 마치면 재깍 재깍 집으로 달려왔다. 아직 황경호가 돌아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았으니 술 약속이고 미팅이고 전부 미루거나 아니면 황경호가 일하는 시간으로 맞춰둔 것 같았다. 며칠 전에 친구랑 통화하는 걸 우연히 들었는데 한사코 안 간다, 일 있다며 거절하는 것이었다. 괜히 기쁘기도 하고…. 그렇게 음식 차리는 것만 더 화려해졌다.
집에 가는 길에 꽃을 샀다. 항상 강동현만 이런 걸 사줘서 말이다. 한 번쯤은 사주고 싶었다. 그래서 그걸 들고 떨리는 마음으로 집에 갔더니 강동현이 주인 돌아온 강아지처럼 달려 나왔다.
“경호야~”
그의 포옹은 언제나 기분이 좋았다. 딱 맞춘 것보다도 더 겹쳐져서…. 황홀했다. 황경호는 그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좋은 향기….
“꽃 사 왔어? 말하지. 내가 사 왔을 텐데.”
“아니, 으음…. 이건…. 아…. 으읍….”
황경호는 얼굴을 붉히며 그의 입맞춤을 받아들였다. 말을 할 틈을 안 준다, 진짜…. 강동현은 그렇게 쪽쪽 거리며 황경호를 거실로 데려왔다. 황경호는 여전히 꽃다발을 손에 쥐고 있었다. 그는 황경호의 얼굴에 깃털처럼 입을 맞추면서 말했다.
“으음…. 제가 부탁이 있는데요, 경호님.”
“뭔데…?”
강동현은 황경호의 머리카락을 살살 쓰다듬었다. 다른 손으로는 꼭 끌어안아 몸을 붙이고 있었다. 황경호는 간질간질하고 구름 위에 둥둥 뜬 것만 같았다.
‘말해야 하는데….’
맨날 이런 것만 하니까 멍청해지는 것 같다…. 발갛게 튼 얼굴로 가만히 입맞춤을 받고 있는 귀여운 얼굴을 보고 있으니 웃음이 나와서 강동현이 실실 웃으며 카우치에 미리 두었던 걸 들어 올렸다.
“이거 입어주시면 안 될까요?”
“…….”
이번엔 바니걸이다.
강동현이 이런 말투를 쓸 때는 다 이유가 있었다. 황경호는 강동현이 들고 있는 검은색 바니걸 복장을 보고 들고 있던 꽃다발로 그를 때렸다.
“변태!”
“아니, 그렇게만 생각하지 말고. 예쁜데, 이거? 응? 재밌을 거 같지 않아? 응? 응?”
꽃잎이 조각처럼 흩어져 있었다. 해가 저문 붉은 강가. 옅은 주홍빛이 도는 밝은 등을 켜놓은 실내. 자꾸 짓궂은 장난을 치는 연인.
“아, 싫어! 얼마 전에 해줬잖아!”
“그땐 간호사복이었고 지금은 바니잖아. 바니~ 응?”
“안 해!”
“안 해도 돼. 안 해도 돼. 옷만 입자, 어때? 콜?”
“저번에도 그렇게 말해 놓고!”
“경호야~ 우리 경호~ 경호니임~”
강동현이 애교를 떨어댔다. 그렇게, 결국 입었다. 강동현은 싱글벙글 웃으며 그물 스타킹을 신은 황경호의 무릎에 입을 맞추며 검은색 하이힐을 신겼다.
“…….”
하등 쓸모도 없는 하얀색 목깃에 손목에도 비슷한 걸 차고 있었다. 우스꽝스럽다. 황경호는 뚱한 얼굴로 신이 난 강동현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역시 여자가 좋아?”
“응?”
강동현이 무슨 소리냐는 듯이 그의 얼굴을 보았다. 강동현은 그의 머리에 머리띠도 씌웠다. 황경호는 얼굴을 붉혔다.
“저번에도 그렇고…. 왜 자꾸 여자 옷을 입혀?”
강동현은 그런 생각까지는 해보지 못했는지 약간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냥…. 너 부끄러워하는 거 좋아서?”
“넌 나 괴롭힐 생각밖에 없지?!”
황경호가 화를 냈다. 강동현이 옷을 다 입힌 그를 일으켜 세웠다. 자긴 카우치에 다시 앉아서 감상을 했다. 황경호는 인상을 찌푸리고 삐딱하게 섰다. 강동현이 엄지를 치켜들었다.
“지금 자세 좋아.”
한 대 맞았다. 강동현은 침실로 그를 데려갔다. 황경호는 불평을 했다.
“또 맨날 하기만 하고….”
“아, 그렇네. 미안…. 주말에 어디 갈까?”
“됐어.”
“전에 게 먹었던 데 갈까?”
강동현은 황경호의 뺨에 쪽 입을 맞추면서 슬슬 시동을 걸었다.
“우리 바니걸…. 뭐 할 줄 알아? 응?”
“…뭘 원하시는데요, 손님.”
이번에는 그냥 처음부터 심드렁하게 장단을 맞춰줬다. 이제 이런 건 체념을 안 할 도리가 없었다. 일일이 화를 내면 더 좋아한다. 그 꼴 보고 있으면 더 빡친다….
‘말 안 해….’
나쁜 놈. 눈치 없는 놈. 색마. 변태. 황경호는 괜히 속으로 이를 갈았다.
“제일 잘하는 게 뭐야?”
“대충 다 잘해요.”
“오~ 적극적이야. 마음에 드는데?”
강동현은 꽤 장단을 맞춰주는 황경호한테 좀 놀란 모양이었다. 그렇게 서로 바니걸과 손님으로 역할극을 했다.
“우리 바니~”
“아, 그렇게 부르지 마요. 징그러워.”
황경호야 오늘 계획대로 되지 않아서 좀 상심한 상태였기 때문에(듣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하지도 못하고…) 될 대로 되라는 상태였다.
봉사활동을 가서 한국에서 처지가 나쁘다고 생각할 수 있는 것보다도 훨씬 나쁜 상황에서도 밝고 희망적으로 살아가는 이들을 보면서, 마치 예전에 초록이를 처음 봤을 때처럼 오히려 그들에게 위로를 받고 힘을 받아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기적이게도, 황경호는 그들과 자신을 비교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과 비교를 해보았다고 부모님과의 문제나 강동현과의 문제가 아무것도 아닌 게 된 것은 아니지만…. 그렇게 생각해야겠다고 여긴 것도 아니지만…. 적어도 그것 외에도 그가 가지고 있는 것이 생각했던 것보다 많다는 것을 처음으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건강한 신체를 가졌고 직업을 가졌고 돌이킬 수 없는 일이 일어난 적도 없었다.
원인은 여러 곳에 있을 수 있지만 불안은 마음속에 있는 것이었다. 황경호는 쓸데없이 자신을 불안으로 내몰아 다른 사람에게까지 피해를 끼치는 게 예전부터 정말 싫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럴 때마다 가장 많이 도와준 게 강동현이기도 했다. 감사할 만한 것은 감사하고 싶었다. 예의상이나 선을 긋기 위한 게 아니라 진심으로…. 겁내지 않고 그를 사랑하고 싶었다. 나중 일이 어떻게 될지 모른다 하더라도…. 용기를 내보고 싶었다.
그런데 안 하던 짓이 그렇게 빨리 될 리가 없었다. 하지만 뭔가…. 이런 기대나 마음을 전해 보려는 건 처음이라 이런 상황들이 더 좌절스럽다.
“우리 바니 꼬리도 달려있네? 응? 귀엽게시리.”
“손님은 돈만 많은 변태 같아요.”
“응? 잘생기기도 했을 텐데?”
“매일 보니까 그냥 그래요.”
“어허. 우리 바니 안 되겠네? 시력에 이상이 있는 것 같다?”
그렇게 십수 분을 말장난을 하다가 본격적으로 서로 물고 빨고 만졌다.
“으응…. 하아…. 앗….”
황경호는 바니 복장을 한 채로 강동현을 쑥 집어넣은 채 양쪽으로 엉덩이를 흔들었다. 그냥 하고 싶다는 대로 빨리해주고 끝낼 작정이었다. 예전보다 훨씬 살이 붙은 통통한 엉덩이로 그의 식스팩 복근을 누르며 손으로 그의 가슴을 짚고 양쪽으로 빠르게. 유달리 쩝쩝거리는 소리가 났다.
“아…! 큭…. 바니야…. 으윽…. 와, 진짜…! 우윽…!”
강동현이 얼굴이 벌게져선 그물 스타킹을 신은 황경호의 허벅지를 만지다가 훅 그걸 뜯고 맨살을 만졌다. 황경호는 깜짝 놀라서 잠깐 멈추었다가 다시 움직였다.
“야…. 그렇다고 찢으면 어떡해…. 차라리 벗으라고 하지….”
하여튼 헛돈 쓰는 데는 일가견이 있는 강동현이었다. 강동현은 영 뿅 가는 목소리로 대꾸했다.
“큭…. 다음에 다시 입어주려고? 우와…. 윽…. 다시 사 올게…. 아윽…. 야…. 너 왜 이렇게…. 으윽…!”
이거 좋은가 보다…. 강동현은 찢어진 스타킹 속으로 퍼렇게 핏줄이 선 손을 집어넣어 그의 허벅지 살을 주물렀다. 강동현의 얼굴이 점점 섹시해지더니 애원하기 시작했다.
“바니님…. 하아…. 저 싸고 싶은데요. 으윽…. 좀만 더 세게….”
황경호는 빳빳하고 큰 걸로 전후좌우 능숙하게 자기 음부를 후비며 그의 팔을 쓰다듬듯 잡았다.
“너…. 지루도 좀 괜찮아졌어…?”
의외로 얼른 되는 거 같은데…. 발기부전은 거의 다 나은 것으로 알고 있다. 그래도 지루는 어려운 것 같았는데…
“바니야아…. 헉…. 나 죽겠어. 으윽…. 빨리…. 빨리…. 허억…. 으윽….”
물론 정신이 없는 강동현은 딴소리를 했다. 터질 것 같은데 터지지가 않아서 문제였다. 뭐가 마려워서 미칠 것 같은데 한 방울도 나오지가 않는다. 아랫배가 돌처럼 단단해졌다. 강동현은 참는 데 급급해졌다.
“왜 이렇게 잘해…. 허윽…. 진짜…! 으윽….”
전날 황경호가 다른 사람들이랑 해도 이러냐는 말에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발기부전에 걸리기 전과 후가, 아니, 황경호를 만나기 전과 후의 강동현의 섹스 스타일이 확 바뀌었다는 것은 강동현만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섹스 스타일만 바뀌었겠는가. 연애하는 방법도, 상대를 대하는 것도 전부 바뀌었다. 이런 쾌락도 오직 그뿐이었다. 강동현도 다른 상대들을 많이 경험해본 것은 아니었지만 곧바로 알 수 있었다. 이 정도로 맞는 상대는 전에도 후에도 없을 거라는 것을 말이다. 하늘이 점지해준 사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착 달라붙는다. 이건 경험이 많고 적고를 떠나서 본능적으로, 직감적으로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왜 그걸 모르고 의심하는 것일까. 화가 났지만 화를 낼 수는 없었다. 지나간 사랑에 대한 예의를 지키고 싶었기 때문이다.
‘진짜 궁금하다고 딴 놈이랑 하면 내가….’
그 생각만 하면 부글부글하다. 없으면 못 살 것 같다는 느낌은 이전 연인에게서도 느꼈기 때문에 그녀에게 고백하게 되었다. 하지만 황경호에게는 아예 그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이제 다른 누구와도 이렇게 살 붙이고 살고 싶지 않았다. 그만 있으면 됐다. 왜 그걸 몰라줄까?
“바니야…. 큭…! 경호야…. 황경호…. 으윽…!! 와…. 나 진짜…! 으윽…. 야…. 멀었어…?”
아무리 그래도 황경호가 오르가즘을 느낄 때까지는 참고 싶은지 강동현이 괴로워했다. 그는 곧 못 참고 스타킹을 찌익 더 찢으면서 바니 복의 다리 구멍으로 손을 넣어 그의 앞을 만졌다. 황경호가 깜짝 놀라 멈추었다.
“아앙…! 만지지 마. 만지지 마…! 핫…. 거기도…! 아아앗…!”
거기에 가슴까지 꼬집으니 몸이 앞으로 확 기울여졌다. 강동현은 스스로 움직여 쑤컥쑤컥 그의 엉덩이를 팠다. 머리띠가 벗겨져서 떨어졌다. 허리가 징징 울리게 박히다가 황경호가 엄청 야시시한 얼굴로 사정하기 시작했다.
“하아아아앙…!!”
“으윽…! 으으윽…!! 아…!!!”
강동현은 못 참고 그의 얼굴을 콱 깨물었다.
“히익…! 으읏…. 하읏…. 으으읏….”
황경호는 바들바들 떨며 눈을 감았다. 견디는 얼굴이 못 참을 정도로 야하다. 강동현은 자세를 반전하여 그를 깔아뭉갰다. 그리고 입을 맞춘 채 몇 번이고 허리를 털어 안에 찐득하게 지렸다.
“흑…. 으아…. 아아앙….”
황경호는 꿈틀꿈틀거리며 척추를 빳빳하게 늘이며 고개를 치켜들었다. 그가 강동현의 목을 감싸 안았다. 황경호의 손목에 달린 깃이 간지럽다. 그렇게 강하게 압박하며 몸을 포개 경련하다가 서로 꽉 끌어안았다. 둘은 거의 정신을 반쯤 잃고 헐떡거리기만 했다. 십수 분이 지나고 나서야 강동현이 웅얼거리듯 말했다.
“아…. 예뻐 죽겠다…. 사랑해, 우리 바니….”
강동현은 그렇게 귀에 속삭이며 황경호의 뺨에 입술을 누른 채 눈을 감고 있었다. 황경호는 꺼지지 않는 쾌락에 흐느적 늘어져서는 헐떡거리며 투덜댔다.
“이럴 때만….”
“무슨 소리야…. 내가 맨날 예쁘다고 입에 침이 마르도록 말했는데…. 귀여워 죽겠다….”
강동현은 황경호의 뺨을 빨았다. 완전 기분이 나는 모양이었다. 얼굴이 엉망이 될 거다. 강동현은 황경호와 왼손을 깍지 껴 잡았다.
“흐응….”
강동현이 실실 웃으며 슬슬 다시 몸을 비볐다. 그리고 몸을 좀 일으켜 황경호를 내려다보았다. 예쁘다. 완전 귀엽다. 아깝다…
“왜?”
“…사진 찍으면 안 돼?”
“뭐?! 싫어!”
“한 장만…. 응? 딱 한 장만.”
“싫다고 했다. 앗! 야! 찍지 마!”
그렇게 바니 놀이는 아무 방해도 받지 않고 신나게 즐겼다. 강동현은 이 플레이가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는지 한동안 황경호를 바니라고 자꾸 불렀다.
“바니야~”
“…병원이에요, 도은혁 환자님.”
황경호는 웃는 얼굴로 조용히 그에게 경고했다. 강동현은 마스크 밑으로 실실 웃으며 황경호를 따라 4번 치료실로 들어갔다. 들어가면서 바로 그를 뒤에서 끌어안았다. 마스크를 내리고 쪽쪽 그의 얼굴에 입을 맞췄다.
“우리 바니. 내 바니.”
황경호는 어쩐지 복잡한 마음에 한숨을 푹 쉬었다.
‘이렇게까지 좋아해 주는 건 좋긴 한데….’
강동현은 진짜 누가 봐도 황경호한테 푹 빠져 있었다. 혼자서 괜히 아련해 하거나 가끔씩 불안해지는 게 바보같이 느껴질 정도로 말이다.
‘좋아한다고 말하면 더 기고만장해져서….’
황경호는 그렇게 잠깐 고백을 하고 나서의 부작용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했다.
“아…. 들키면 어떡하지….”
이제 와 아주 현실적인 고민이 갑자기 확 든다. 황경호는 한숨을 푹푹 쉬었다. 강동현은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그럼 일 그만두고 나랑만 있으면 되지.”
“또 이런다! 또! 확, 진짜! 앉기나 해!”
“우리 바니 화내는 것도 예쁘네~”
*
고백을 하든 안 하든 황경호가 이것저것(?) 다 들어주니까 아주 기고만장해진 강동현은 이미 입힐 만한 것들을 주야장천 들고 와서 황경호에게 입히고 있었다. 매번 고백할 타이밍을 놓치고 만 황경호는 자꾸 좌절해서 아예 될 대로 되라 모드였다. 물론 붙어있는 건 싫지 않지만….
“박예준 씨, 많이 기다리셨죠? 들어오세요.”
한 달 전부터 내원하고 있는 발기부전 환자였다. 결혼한 지 얼마 안 된 새신랑으로 강동현이랑은 다르게 심인성과 기능성 문제가 겹쳤다. 치료는 같은 치료를 받고 있었다. 평범하게 성실하고 순진하게 생긴 20대 후반 회사원이었다.
“차갑습니다.”
차가운 젤이 닿자 그는 움찔했다. 그리고는 한숨을 쉬었다.
“에휴…. 결혼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그는 저도 모르게 그렇게 중얼거렸다.
“마음 편히 드세요. 이럴 수도 있다 생각하고….”
황경호가 대꾸했다. 환자는 황경호를 보더니만 물었다.
“선생님은 결혼하셨어요? 전에 저랑 동갑이시라고 한 것 같은데.”
“으음…. 결혼은 아직입니다.”
황경호는 그렇게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아, 그럼 결혼할 여친은 있으신가 봐요?”
“음…. 네….”
“아직 날이나 그런 건 안 잡으셨어요?”
“둘 다 아직 그렇게 서두르는 편은 아니라서….”
황경호는 그렇게 얼버무리고는 물었다.
“그래도 결혼하니까 좋으세요?”
“좋죠.”
박예준 환자는 그렇게 밝은 얼굴로 말했다. 역시 성실하게 생겼다 싶더니, 여기 와서 마누라 욕이나 하는 다른 환자들이랑은 다른 것 같다. 황경호는 웃으면서 물었다.
“뭐가 제일 좋으세요?”
그는 참 순진하고 순수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하고 싶을 때마다 공짜로 맘껏 할 수 있는 거요.”
“…….”
황경호는 순간 말문이 막혀서 그를 올려다보다가 당황해서 고개를 숙였다.
“아, 네….”
“진짜 결혼해보시면 알 걸요? 그게 제일 좋아요. 나만 그런가?”
“그럴 수도 있죠….”
“다들 그렇게는 말 안 해도 그럴걸요. 우리같이 평범한 사람들이 총각이라고 무슨 예쁜 여자들을 많이 만나고 다니겠어요. 그것도 다 돈 있고 얼굴 되는 놈들이나 그러는 거지. 얼굴이 예쁘나 안 예쁘나 하는 건 똑같잖아요. 확실히 남자는 결혼 빨리하는 게 이득인 것 같아요. 그나마 한 살이라도 여자가 어릴 때 결혼하는 게 낫죠. 아, 근데 갑자기 이래가지고…. 진짜 수지 안 맞는 느낌이에요. 신혼이 제일 좋을 땐데.”
“…….”
진짜 순하고 성실하고…. 어디 놔두면 티도 안 날 것같이 평범한 남자 같아서 도리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닳고 닳아서 남아 있는 거라곤 고작 천박함밖에 없는 것 같은 사오십 대 아저씨들이거나 겉으로만 제대로 된 사람인 양 위선을 떠는 게 훤히 보이는 남자들이 아니라 진짜 한 치의 사심도 없이 진심으로 순수하게 말을 해서 더….
“…진짜 다 그럴까요…?”
“제가 봤을 땐 99%는 넘는다고 봅니다. 어디 보니까 와이프한테 그렇게 직접 말했다는 사람도 있던데요, 뭐. 그래도 그 사람은 확실히 용자다….”
“그래도…. 그것만 있는 건 아니잖아요. 사랑하시니까 결혼하신 거죠….”
“동갑이라도 아직 총각이라서 그런가…. 솔직히 다들 끼리끼리 만나서 결혼하는 거잖아요. 비슷한 계층끼리…. 와이프보다 예쁜 여자가 저랑 결혼해준다고 했다면 솔직히 지금 와이프랑 결혼했을지 자신은 없네요, 하하. 물론 저랑 결혼해준 것만으로도 와이프한테는 완전 땡큐지만요. 하하하.”
“…….”
그에게 악의는 없었다. 다만 솔직할 뿐이었다…
“그럼…. 와이프보다 더 좋은 여자가 나타나면 이혼이라도 하실 거예요?”
“에이, 저한테 그런 일 안 일어나요.”
“그래도 인생 모르는데….”
그러자 환자는 순진한 얼굴로 성실하게 고민해보았다.
“그래도 이혼은 좀…. 새로운 여자가 이혼하고 다시 결혼해도 손해 안 볼 만큼 진짜 미인에 돈이 많다면 모를까…. 그냥 살짝 바람만 피우고 말지 않을까요? 뭐…. 제가 그때 능력이 된다면야…. 오래 피울 수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
이게 그냥 아주 솔직하고 악의 없이 순수한 마음일까? 황경호는 저도 모르게 고민했다.
“그래도 저희 와이프 진짜 열심히 가꾸거든요. 예쁜 건 아니고 귀염상인데…. 맞벌이해도 집안일 다 하고 그래도 여자라고 저 앞에선 예쁘게 보이고 싶어 하고. 제가 원하는 건 최선을 다해 맞춰주려고 하고…. 진짜 여자는 착한 게 제일 중요한 거 같아요. 여자가 기 세서 이거저거 해달라고 하고 불평불만 할 거 생각하면 아우…! 진짜 저 못 견뎌요. 어휴, 그런 여자들은 결혼할 생각을 하지 말아야지. 어디 멀쩡한 남자 버리려고. 우리 와이프는 안 그래서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요. 역시 마누라는 내 마누라가 짱이죠.”
이걸 칭찬이라고 하는 걸까…
‘바보, 등신에 병신이라 뽑아 먹기 만만해서 좋다는 말밖에….’
그런데 저도 모르게 숱하게 들어줬던 강동현의 요구나 그가 말하지 않아도 알아서 갖다 바친 요리들이나 서비스(?) 등을 떠올리니, 어쩐지 몸 둘 바를 모르겠다. 그건 잘못한 걸까? 그때 그건? 그때 박예준이 말했다.
“그래도 우리 와이프한테 쪼~끔 불만이 있다면…. 너무 당기기만 하지 밀당이 없달까. 뭐, 결혼해서 그렇겠지만 확실히 좀 심심한 맛은 있어요. 연애할 때는 혹시 헤어지자고 하면 어쩌나 맘이 동동거릴 때가 있었는데. 아무래도 이혼하면 여자들이 더 손해잖아요. 결혼하니까 그런 쪽으론 확실히 긴장감이 사라지네요.”
“…그래도 애 없으면 쉽게 이혼하기도 하더라구요, 요즘은….”
“아, 하긴 그렇죠. 얼른 애 가져야겠네요.”
“…….”
박예준은 정말 착하게 생긴 환자였다. 이렇게 순하고 착한 말투에 수용적인 태도까지 가졌으니 아마 주변 평판도 그러할 것이다. 그와 비슷한 환경에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는 친구들이라면 그의 이런 말에 거리낌 없이 그에게 동조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왜 이렇게 불편한지 모르겠다. 황경호가 단 한 번도 진지하게 결혼이라는 것에 대해서 고민하지 않고 살아서 그럴까? 황경호도 다른 평범한 사람들처럼, ‘남들처럼’ 제 나이에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살아가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했더라면 똑같은 생각을 하게 되었을까?
‘걔도…. 남들하고 날 비교하면서….’
평가를 하곤 할까?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하나하나 나체로 놓고 해부를 하듯이, 아무런 적의도 악의도 없이, 그게 당연한 권리인 것처럼…
아, 걔 착해. 착해. 엄청 착해. 좀 예민하고 성가신 건 있는데, 그건 다 지네 부모 탓이라. 불쌍한 애야. 그런 부모 밑에서 이렇게 착하게 큰 게 대단하다. 그래서 그런지 작은 것도 엄청 크게 생각하고 과분해 하더라고. 반지 좀 사다 줬다고 애지중지…. 아, 그런 것보다도 옛날엔 손가락 하나도 힘들었는데 요즘은 진짜 죽인다. 내가 이 맛에 산다. 결국엔 이거 최고인 애 이길 수 있는 건 없더라. 너도 만나 보면….
‘…그만하자….’
강동현이 자꾸 마누라, 마누라에 여자 옷을 입혀대고 놀려서 그렇다. 황경호는 마사지를 마무리 지었다.
“끝나셨습니다, 박예준 환자님. 가서 옷 갈아입으세요.”
“네, 수고하셨습니다.”
박예준 환자는 참 성실하고 사람 좋은 미소를 띠며 예의 바르게 인사를 했다.
*
대학교를 다닐 때를 생각해보면 황경호의 학과는 완전 여초였기 때문에 크게 그런 것은 없다고 들었지만, 듣기론 어떤 남초 학과에서 여대에 묻지 마 폭행을 하러 신입생을 보내는 게 연례행사라든가, 과에 들어온 여자 신입생에게 술을 많이 먹여서 성폭행을 하는 게 일상화된 과도 있었지만 학교 차원에서 쉬쉬한다는 소문을 얼핏 들었을 정도였다. 군대에서도 맨날 하는 얘기가 여자 연예인, 전 여친, 현 여친, 여자 형제에 그냥 이름만 아는 여자까지도 조리돌림을 하는 거였다. 황경호는 당시 여자든 남자든 인간관계 자체에 점점 지쳐가고 있을 때라 적당히 맞추기만 하고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었다. 우리나라가 여자들이 살기에 정말 팍팍한 곳이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우연히 여자들이랑 그런 얘기를 해보면 그들이 먼저 모든 남자들이 그런 것은 아니라며 방어를 해주었다. 쥐가 고양이 생각해주는 꼴이었지만, 그래서 더 그러려니 했다. 본인들이 문제가 아니라는데…. 아무래도 자기 일만 해도 벅찼기 때문에 별생각이 없었다. 병원에서 수많은 진상들의 갖가지 얘기들을 들어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이 남한테 하는 진상짓까지 신경 써줄 정도로 여유가 날 리가 없었다.
그런 면에 점점 불편해지기 시작한 건 결국 강동현을 만나고 나서부터였다. 본의 아니게, 원래라면 평생 연도 없을 ‘여자 입장’에 강제로 밀어 넣어져서 그랬다. 게다가 강동현은 멀쩡한 겉모습에 배우로서의 이미지와는 달리 황경호에게 완전 진상짓으로 일관하며 성희롱, 성추행…. 거기서 짧고 애매한 연인 관계에 결혼 생활까지 쭉 이어지니 주구장창 애로사항이 꽃 피었다. 가끔 아줌마들이 모인다는 사이트에서 퍼온 유명한 글이라도 팬 커뮤니티에 올라오면 괜히 찡하게 공감한단 말이다…
“안녕하세요, 주인호 환자님.”
“네. 오랜만입니다.”
사람 좋은 미소를 띠며 치료실로 들어온 환자는 또 보기 드물게 인상이 좋고 선한 환자였다. 진상 안 부리는 환자라 다른 간호사들도 좋아하던 장기 환자였다. 다른 병원에서 암 수술이 잘못되어 이강유 비뇨기과에서 재수술을 받고 오랫동안 관리를 받고 있었다.
“다음 달에 출국하신다면서요. 걱정하시더니 어떻게 잘 되셨나 보네요.”
“네. 아버지 아시는 분 도움 받아서 가서 일하려고요.”
“그럼 아내분이랑 다 같이 가시는 거예요?”
“네.”
그는 한국에서의 직장 생활을 계속하다 보면 결국 다른 사람들처럼 아내랑 데면데면하고 돈만 벌어오는 기계가 될 것 같아 이민을 결심하게 되었다고 했다. 쉬운 결정은 아니었을 텐데 새로운 곳에서 그런 도전을 시작하는 그가 퍽 대단해 보였다.
“아내분은 하시는 일이 없으셨나요?”
“있는데…. 그만두고 따라가는 거죠. 제가 그냥 솔직하게 다 말했어요. 대신에 가서 돈 못 벌어온다고 무능력하다고 하지 말라는 것만 딱 못 박았죠.”
“네.”
“참, 사람이 그릇이 커지려면 다른 사람을 이해하려고 자꾸 노력을 해야 하는 거잖아요. 쓸데없는 욕심 버려야 하는 거죠. 둘이서 행복하면 되는 거잖아요. 돈이야 먹고 살 만큼만 있으면 되죠. 좀만 참으면 돼요, 좀만.”
어쩐지 이 말이 황경호가 아니라 자기 부인한테 하고 싶은 말인 것 같았다. 황경호가 아직 20대에 얼굴은 제 나이보다도 훨씬 어려 보이니 곧잘 이렇게 가르치려는 사람들이 나타나곤 했다. 얼굴이 순해 보여서 더 그러는 것 같았다. 아마 이 인상 좋은 환자 스스로는 자기가 좋은 말을 해준다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네…. 그래도 한국에서 자기 일 포기하고 가는 게 쉽지는 않을 텐데…. 대단하네요, 부인분.”
황경호는 어쩐지 이 말을 해주고 싶었다. 주인호는 별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는 태도였다.
“뭐…. 솔직히 가서 일할 제가 더 걱정이죠.”
“네….”
본인이 가계에 대해 책임지고 있는 부분이 많으면 남의 직장에 대해서 저렇게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는 걸까. 만약에 황경호가 더 부유한 입장이었다면 강동현에게 그가 하듯이 그렇게 했을까.
안 할 것이다. 물론 부인분은 일을 그만두고 싶을 수도 있고 그만큼 남편을 믿고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황경호가 치료를 마치고 나와 카운터에서 차트를 정리하며 한숨을 쉬었다.
“왜 그래? 무슨 일 있었어?”
금방 도은혁 환자였나…. 오희연 간호사는 나가는 환자를 확인했다.
“주인호 환자 아냐?”
“맞아요.”
“왜? 저 환자 이제 몇 번 안 남았잖아.”
“아뇨…. 그냥….”
황경호는 짧게 박예준 환자와 주인호 환자의 이야기를 해주었다. 오희연은 약간 놀란 얼굴을 하긴 했지만 별일 아니란 표정이었다.
“난 또 별일이라고. 원래 여자들한테 제일 무서운 남자가 착한 남자다? 여자들은 그나마 착한 거 하나 보고 선택하는 건데 그런 놈들이 뒤에서는 있는 놈들보다 더 따진다니까. 나 예전에 알던 남자는 쥐뿔도 없이 진짜 착하기만 한 놈인데 술 먹더니 여자 직업, 집안부터 발톱 어떻게 생겼는지까지 다 따지더라고. 어우, 질려서.”
“아, 선생님. 소름.”
옆에서 정기연이 듣고 질색을 했다.
“우리나라에 그냥 착한 남자는 있을지 몰라도 여자한테 착한 남자는 없어.”
오희연은 단언하다시피 했다. 그러다가 어깨를 으쓱했다.
“뭐…. 선생님 정도는 괜찮을지도 모르겠다.”
“아, 우리 선생님은 진짜 유니콘이죠.”
그렇게 이야기는 오희연과 정기연에게로 옮겨갔다.
“근데 또 선생님 정도 되는 남자들은 엄청 미녀가 얼른 물어간다? 선생님 지금 애인 봐. 무슨 연예인이야. 집안도 엄청 빵빵 하다던데.”
“하긴….”
“내가 결혼도 해보고 애들도 낳아보니까 느끼는 건데 여자들은 결혼만 안 해도 팔자 편다. 그나마 괜찮은 남자랑 결혼해도 여자가 손해야, 손해.”
“아…. 그래요?”
정기연이 되물었다.
“선생님 정도 되는 남자거나, 아니면 아예 내 팔자 펴줄 정도로 엄청 돈 많고 능력 있는 남자 아니고서야 그냥 종년 팔자지. 애들한테도 종년이고 남편한테도 종년이고 시댁한테도 종년이고 친정한테도 종년이야, 결혼한 여자 팔자가.”
오희연의 남편은 평범한 중소기업 회사원이었고 애들은 딸 하나, 아들 하나. 이강유 비뇨기과 간호사들 중에 제일 월급을 많이 받는 그녀라 연봉이 5천 가까이 되는 거로 알고 있었다. 거기에 남편 월급까지 하면 1억 가까이 될 텐데도 그런 모양이었다.
‘하긴 세금 떼면….’
아니, 그것보다도 같은 돈 버는데도 여자만 그렇게 집에서 일한다고? 진짜? 그렇게 잠깐 생각해보고 있는데 오희연이 지나가듯 말했다.
“혼자 살면 더 잘 살 수 있는데 나라 전체가 합심해서 결혼 안 한 여자들 못살게 구는데 뭔 수가 있나. 아무 생각 없이 결혼하면 바로 쪽박 치는 게 여자 결혼이야. 애까지 생기면 돌이킬 수도 없지. 그대로 인생 저당 잡힌 것처럼….”
오희연은 이제 두 돌을 넘긴 둘째가 있었다. 한참 손 많이 갈 때를 애 하나를 더 돌 보면서 직장 생활까지 하고 남편 내조까지 하려니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닌 모양이었다.
“아, 그런 말 들으면 이제 무서워요, 선생님.”
정기연이 어우, 하며 또 질색을 했다.
“그래서 이 나이 되어서도 제일 부러운 게 시집 잘 간 애들이다? 나랑 똑같이 10년 전에 시집갔고 똑같이 애 둘인데 난 아줌마고 걔는 아직도 아가씨 같아. 일도 한 번 안 해보고 고생 한 번 안 해보고….”
“그래도 다들 나름의 고생이 있겠죠….”
황경호는 그렇게 말했다. 그렇다고 내 고생이 고생이 아니게 되는 것은 아니지만…. 황경호가 여자인 것도 아니지만 ‘입장’이라는 게….
그렇게 하루 종일 심란하게 일을 마치고 집으로 갔다. 오늘은 집에 강동현이 없었다. 뭔가 피곤해서 얼른 씻고 방에 가서 좀 누우려고 했다가…. 방문을 여니 바로 은근한 노랫소리가….
“우리 바니 왔어?”
“악!!”
깜짝 놀라서 소리를 지르며 양손으로 눈을 가렸다. 그러자 장미꽃을 입에 물고 있던(…) 알몸의(……) 강동현이 어랏 하고 몸을 일으켰다.
“왜?”
“뭐 하는 짓이야!”
황경호는 여전히 눈을 가리고는 소리쳤다. 강동현은 빨간 장미꽃을 흩뿌리고 침대 옆에 와인과 핑거푸드까지 해놓고 황경호를 기다리고 있었다. 훤칠한 근육질의 몸에 장미꽃을 물고 옆으로 길게 누워 환하게 웃고 있으니 무슨 화보 판넬이라도 있는 줄 알았다.
“아니…. 요새 네가 해달라는 거 다 해줘서 나도 이벤트나 해줄까 해서…. 맘에 안 들어?”
황경호는 그가 옷을 입힐 때마다 부끄러워서(물론 다른 거랑 다르게 점차 적응해가는 게 무서웠다…) 그랬는데 그는 자기 꼴을 아무렇지도 않게 내려다보았다. 황경호는 눈을 가린 손가락을 벌려 난처한 표정으로 그를 보았다. 그러자 강동현이 참 밝고 예쁘게 씨익 웃었다.
“맘에 들지?”
“…….”
쟤는 진짜 인생에 걱정이란 게 있을까…. 황경호는 얼굴을 벌겋게 붉히고 말없이 강동현을 보았다. 엄청 섹시하다….
‘아니, 평소랑 별다를 것도 없는데….’
머리랑 조명이랑 분위기 탓인가…. 강동현은 침대에서 살짝 몸을 일으켜 황경호의 팔을 잡았다. 눈을 가린 건지 만 건지 애매한 모습을 하고 있던 황경호는 별 힘을 주지도 않았는데 슬 끌려왔다.
“흐응.”
강동현은 자기 앞에 앉은 황경호를 뭔가 뿌듯한 얼굴로 쳐다보았다. 그는 손을 뻗어 와인 잔을 잡아 하나 황경호한테 건네며 뺨에 입술을 눌렀다.
“좋은 냄새 난다.”
괜히 얼굴이 홧홧하게 달아올랐다. 강동현이 레드와인을 따라줬다. 같이 산 지 벌써 몇 개월이지만 그가 이벤트라고 할 만한 걸 해준 건 이번이 처음이다. 꽃도 몇 다발이나 있고 맛있는 것도 있고 뭔가 선물들도 있었다.
“너 또 돈이 어디서 나서….”
황경호가 괜스레 그렇게 중얼거리자 강동현은 씩 웃으며 황경호의 입에 음식을 넣어줬다.
“네 남편 능력 좋은 거 이제 알았냐.”
“…….”
평소 같으면 대번에 뭐라고 했을 텐데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강동현은 황경호의 입에 초콜릿을 넣어 주곤 입을 맞췄다.
“음…. 맛있다.”
그리고 강동현은 커다랗고 요란한 선물 상자들을 끌어와서 양반다리를 한 자기 무릎 위에 두었다.
“열어봐.”
황경호는 살짝 붉고 취약한 얼굴로 잠깐 머뭇거리다가 선물을 열었다.
“짠.”
애X사의 제일 큰 최신 일체형 컴퓨터가 나왔다.
“노트북 오래돼서 잘 안 돌아간다며. 그리고 노트북 쓰면 목이랑 어깨 아파. 우리 바니 아프면 안 되지. 맘에 들어?”
“…….”
“그리고 이것도.”
또 뭔가 큰 게 나온다. 또 뜯어보았다. 레고 한정판 세트다.
“계속하던 거 다 했잖아.”
“…….”
저번에 반지에만 6천만 원이 넘게 쓴 놈이다. 이 정도면 덜 쓴 거라고 봐야겠지…?
아니, 그런 것보다도…. 화내고 싶지 않았다. 솔직히 물건 하나하나보다도, 그가 자신이 기뻐하길 바라며 이런 걸 준비해준 게…. 무엇보다도 기뻤다. 마음이 마구 부풀어 오른다.
“…….”
그런데 이럴 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이런 거 받아본 적이 없었다. 아니, 집이고 뭐고 다 떠안겨주긴 했지만…. 그런 건 실감이 안 나는 데다가 자기 거라고 생각도 잘 안 됐다. 반지도 자기가 뜬금없이 떠안긴 거라, 게다가 너무 비싸서 화부터 냈다. 하지만 이번은 분명히 황경호의 마음을 헤아리려고 노력을 한 게 보였다. 돈의 액수나 그런 것보다도…. 진짜 그가 기뻐할 만한 것을 고심한 것이다.
뭔가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것 같은데 나오지가 않아서 얼굴로 피만 몰렸다.
“흐응. 왜 그래? 좋아? 기뻐서 그래? 우리 바니 울겠네~”
강동현이 황경호의 뺨에 쪽, 쪽 천천히 입을 맞추면서 황경호와 계속 눈을 마주쳤다.
“벌써 그러면 안 되지. 메인 선물이 난데.”
황경호는 오늘 하루 종일 심란했던 게 싹 날아갔다. 아니, 현재는 생각나지도 않는 상태였다. 이미 마음속이고 머릿속이고 온통 지금의 강동현으로 가득 찼다. 황경호는 뭐라고 말해야 할지 정말 한참 동안 고민하다가 자신의 귀를 애정이 어린 손길로 만지작거리는 강동현의 손을 살짝 잡고는 입을 열었다.
“고마워….”
“…….”
황경호의 얼굴을 보더니 계속 실실 웃고 있던 강동현의 표정이 좀 진지해졌다. 강동현은 황경호를 쭉 끌어당겨 그의 양 허벅지를 벌려 자기 허리를 감싸게 하며 그 얼굴을 뚫어져라 보았다.
“아…. 난 진짜 네 얼굴이 좋나 봐…. 너 이런 표정 하면 진짜…. 못 참겠다….”
그리고 입술에 쪽 입을 맞추며 진지하게 계속 얼굴을 바라보았다. 황경호도 그의 얼굴을 계속 바라보았다. 강동현은 천천히 그의 옷을 하나씩 벗겼다.
“으음…. 응…. 하…. 음….”
아주 천천히, 부드럽게 입술을 부비고 혀를 섞었다. 입술이 진짜 부드러웠다. 푹신푹신하고…. 깨끗한 피부, 좋은 목소리, 탄탄하고 멋진 몸도…. 그리고 향수 냄새가 은은히 섞인 체취…. 너무나 좋았다. 그리고 입을 떼고 그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그림으로 그린 것같이 잘생긴 얼굴에 매력과 섹시함이 넘친다. 거기에 그가 가진 것들까지 고려하면…. 그리고 그가 열정을 다 하는 상대에게 아낌없이 자기가 가진 것을 쏟고 또 자기가 하겠다고 마음먹은 것은 단박에 해치우는 시원시원한 성격까지 생각하면…
자신감과 우월함. 황경호는 비로소 전날 강동현이 자신에게 자신만만하게 했던 말의 의미를 제대로 알 수 있었다. 그는 자기 같은 남자를 그렇게 쉽게 떠나서 잊을 순 없을 거라고 했었다. 정말로 그만큼이라도 하는 남자가 세상에 없다는 걸 그는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것이다.
*
황경호는 잠에서 깼다. 바로 신음을 흘렸다.
“으응….”
출근하기 싫다…. 너무 나른하다. 더 자고 싶다. 그렇게 짜증스러운 소리를 내자 강동현이 황경호를 꽉 끌어안으며 비슷한 소리를 냈다.
“10분만 더 자자….”
황경호도 뜨끈뜨끈한 강동현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그리고는 다시 바로 잠들었다. 그리고 10분 뒤 이번에는 알람이 울렸다. 강동현이 손을 뻗어서 황경호의 알람을 껐다.
“10분 더….”
“응….”
강동현의 품과 이불 속에 있는 이 포근한 느낌이 너무 좋았다. 이제 10월 말이라 밖이 점점 쌀쌀해지고 있었다. 황경호는 발을 강동현의 종아리에 댔다. 뜨끈하다…. 그리고 또 정신을 잃듯 잠들었다. 좀 있다가 강동현 휴대폰도 알람으로 울렸다. 황경호는 꾸물거리다가 자기 입으로 말했다.
“진짜 5분만 더….”
강동현은 동의한다는 듯이 알람을 끄고 황경호를 더 끌어안았다. 그러다가 슬슬 황경호가 잠에서 깼다. 진짜 일어나기 싫었다.
“좀만 일찍 잘걸….”
진짜 피곤했다. 어제 얘기하고 술도 한잔하고 밤새 뒹굴고…. 황경호는 침대에 앉아 멍청하게 정신이 돌아오길 기다렸다. 그런 그를 강동현이 유혹했다.
“그냥 더 자자….”
강동현이 그의 팔을 끌어당겼다. 황경호는 끌려가서 다시 누웠다.
“너도 학교 가야 하잖아….”
“음…. 너 살 좀 붙어서 좋다….”
강동현은 딴소리를 하며 황경호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강동현이랑 같이 살게 되면서 삼시 세끼 잘 먹고 좋은 거 먹고 운동하고 마사지까지 받으러 다니니 마르기만 했던 황경호의 몸에 살이 붙고 의외로 꽤 남자다운 선이 살아나기 시작했다. 강동현만큼 본격적으로 운동을 하는 건 아니라서 그렇게 크진 않았지만 특히 팔이나 가슴이나 엉덩이가 꽤 글래머러스해져 강동현이 아주 대만족 중이었다. 강동현은 황경호의 엉덩이에 자연스럽게 손을 올리고는 한 번 주물렀다. 탱탱하다…
“난 더 쪄도 좋을 거 같은데….”
“안 그래도 더 찌고 있는 거 같아…. 배 나와….”
“배 나오면 더 좋을 거 같다….”
다시 일어나려는 황경호를 뒤에서 끌어안고 황경호의 배를 만졌다. 아침이라 그런지 더 홀쭉한 거 같다. 강동현은 눈을 감은 채로 황경호의 몸을 더듬거렸다.
“흐응…. 하지 마….”
잠이 든 듯 아닌 듯 그냥 눈만 감고 있는 것만으로도 좋았다. 진짜 출근하기 싫다. 보통 이렇게 늑장을 부리는 성격이 아닌데도 오늘은 너무 힘들었다. 그런데 강동현이 자꾸 이상한 곳을 만지니 짜증이 났다.
“아…. 하지 말라니까….”
황경호가 뒤척이며 엎드리자 강동현이 그의 등 위로 올라와 그를 몸으로 누르며 요즘은 간혹 아침 발기도 될 정도로 건강해진(?) 자기 자지를 황경호의 음부에다 꾸욱 눌렸다. 황경호는 여전히 잠에 취해서는 웅얼거렸다.
“하지 마라…. 진짜….”
하지만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그걸 물고 빨고 있던 곳이라 평소와는 달리 쉽게 백기를 들었다.
“하으응…!”
황경호는 온몸을 움찔하며 긴장했다. 침대에 엎드려 얼굴을 묻고 노곤함을 풀고 있던 황경호는 그가 반 이상 쑤욱 들어오자 긴장을 하고 있는 것도 의미가 없어 결국엔 흐물 늘어졌다.
“흐응…. 그래야지.”
강동현이 아침이라 약간 쉰 목소리로 만족을 표현했다. 강동현은 황경호의 머리카락에 얼굴을 묻고 냄새를 맡으며 빠르게 황경호의 엉덩이를 자기 하반신으로 팡팡 때렸다. 침대가 마구 반동을 일으켰다. 밤에 많이 해서 아주 미끈하게 빠진 황경호였다.
“하앗…! 앗! 으응…!”
황경호는 얼굴을 벌겋게 붉히며 살살해달라고 말도 못 하고 당하고 있었다. 아주 쑥쑥 들어갔다 나왔다 했다. 섹스도 결국 하면 할수록 익숙해지는 것인지, 느끼는 것과 별개로 누군가와 살을 섞는 것에 이질감을 버릴 수가 없었는데 아프리카에서 돌아오고 난 이후로는 진짜 좀 달랐다.
“아아앗…!”
“아윽…. 으윽…. 하아…. 경호야….”
황경호는 자신의 귀를 빨면서 엄청 즐기고 있는 강동현의 섹시한 목소리를 들으며 부르르 떨었다.
[하고 싶을 때마다 공짜로 맘껏 할 수 있는 거요.]
나도 그런 건 아니겠지…? 그와 섹스하는 게 좋았다. 그와 피부를 맞닿는 게 너무나 황홀했다.
기분 좋아. 기분 좋아. 좀 더 세게 해줘. 이름 불러줘. 사랑한다고 말해줘. 더 세게 찔러줘. 만져줘. 기분 좋아. 너무 기분 좋아. 녹을 것 같아. 더 깊이…. 더 깊이 박아줘. 떨어지고 싶지 않아. 좋아해. 좋아해. 정말 좋아해.
‘사랑해….’
“아아아아앙….”
황경호는 엄청 헐떡거리다가 온몸을 바짝 긴장하며 뒤에서 찌르는 대로 줄줄 흘리기 시작했다. 온몸에 뜨겁게 열기가 돌았다.
“아아앙…! 아흑…! 도은혁…. 아앙…! 흐윽…. 아읏…. 아으읏…. 아으….”
그대로 침대 시트를 두 손으로 꽉 쥐고 부들부들 떨며 경련했다. 강동현이 피크를 찍어대자 침대 시트에 얼굴을 묻은 채로 연달아 오르가즘을 잔뜩 느꼈다.
“흐아앗…. 아앗…. 아아앙….”
“하아…. 우리 바니…. 미안…. 빨리…. 싸줄게….”
강동현은 자신이 지루기 때문에 타이밍이 맞지 않아 그를 잔뜩 괴롭히게 되는 걸 알고 있었다. 그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황경호의 날개뼈 부근을 깨물었다. 최대한의 속도로 방아를 찧어대다가 순간 섹시한 신음을 내면서 울컥울컥 정액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히익…! 아앙……. 으으으응……!”
황경호는 자신의 팔을 이로 깨물고 견디듯 이어지는 멀티 오르가즘을 고스란히 느꼈다. 그리고는 둘 다 축 늘어졌다. 서로의 피부를 느끼며 둘은 말없이 그렇게 있었다.
“…지각이지…?”
황경호가 웅얼거리듯 물었다. 강동현은 눈을 감은 채로 황경호의 머리카락에 입술을 묻고 있었다. 그대로 손만 뻗어서 누구 것인지 모를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8시 10분….”
“아…. 지각은 안 하겠다….”
아슬아슬하게…. 가까워서 다행이다. 5분 만에 나가면 30분 전에는 도착할 것 같았다. 황경호는 드디어 눈을 제대로 떴다.
“무거워. 나와. 빼.”
“으응…. 우리 바니는 정신 들었네….”
강동현은 여전히 애매한 목소리였다. 황경호는 그의 엉덩이를 찰싹 때렸다.
“빨리 빼. 진짜 지각한다니까?”
“아…. 진짜 싫다….”
강동현은 황경호를 꽉 끌어안고는 옆으로 누웠다. 그래서 겨우 황경호는 그의 팔만 풀고 나올 수 있었다.
“아으….”
주르르르륵, 하고 길게 그의 것을 빼내니 절로 신음이 나와서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강동현이 눈을 한쪽만 뜨고는 씨익 웃었다.
“너 뺄 때 내는 소리 진짜 야하다?”
“빨리 씻기나 해.”
황경호는 강동현의 코를 한 번 꽉 쥐고는 일어났다. 급하게 씻고 챙겼다. 강동현은 그사이 샤워만 하고는 나왔다. 현관으로 빠른 걸음으로 가며 황경호가 외쳤다.
“나 갔다 올게!”
“이거 들고 가.”
강동현이 팬티만 달랑 입은 채로 양손에 뭘 들고 나왔다. 야채 주스 같은 것이었다. 하나는 자기가 벌써 먹고 있었고 하나는 황경호에게 주었다.
“너 그러다 지각한다.”
“9시까지니까…. 벌써 지각이야.”
차 끌고 가면 30분은 걸린다. 아직 옷도 안 입고 이렇게 있으면 당연히 지각이었다. 강동현은 현관문 손잡이를 잡고 돌리는 황경호를 뒤에서 끌어안았다.
“나 보고 싶다고 울지 말고.”
“악! 야…! 다 젖잖아!”
“우리 바니, 우리에 가둬 놓고 싶다.”
“빨리 놔. 빨리 놔. 나도 지각한다고.”
“진상짓 하는 환자 있으면 바로 거시기를 쳐버려. 알았지?”
“내 환자 중에는 네가 제일 진상이야!”
“흐응, 우리 바니. 나도 사랑해~”
*
싸웠다.
“…….”
“…….”
강동현의 차를 타고 돌아오는 길에 정말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황경호가 최근 운전 연습을 하고 있는데, 문제는 그걸 강동현이 가르쳐주고 있다는 것이었다. 처음 시작할 때는 우습게도 꽤나 알콩달콩한 연인 같았는데(“흐응~ 우리 바니 이런 거 하면서도 운전 잘하려나?”) 며칠 지나니까 점점 티격태격하기 시작했다. 원래도 강동현은 그렇게 말하는 본새가 좋은 편이 아니었는데도 최근은 황경호한테 빠져서 완전 해롱대고 있는 중이라 잊고 있었다. 이것저것 명령하는 듯한 말투에 사람을 무시하는 것 같은 태도가 황경호의 신경을 자꾸 건드렸다. 강동현도 자기는 도와준답시고 하는 행동이 황경호한테 그런 식으로 받아들여지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진짜 별거 아닌 것 같은데도 나중에는 아주 큰 소리를 내면서 싸웠다.
원래 저녁까지 먹고 집에 들어오려고 했는데 한참 전에 들어왔다. 집에 들어오자마자 황경호는 자기 방으로 문을 쾅 닫고 들어갔다. 그리고 씻으면서도 화가 나서 부글거렸다.
‘자기만 잘났지!’
아프리카가 갔다 와서는 이런 식으로 싸운 적이 한 번도 없었는데 대판 싸우니까 괜히 맘이 더 상한다. 그가 이런 식이라는 걸 잊고 있었다는 게 더 화나는 것 같기도 했다. 강동현이 해롱댔던 만큼 황경호도 그가 좋아서…. 그가 해달라는 걸 이것저것 다 해주고 계속 미뤄지기만 하는 고백의 대신으로 그에게 진수성찬을 갖다 바치거나 그에게 잘해주는 방식으로 마음을 표현했는데…. 괜히 그런 게 배신당한 것만 같고 그랬다.
이번 일은 이렇게 흐지부지 지나갈지라도 또 똑같은 일 일어날 게 불을 보듯 뻔했다. 아프리카 갔다 오기 전까지만 해도 끊임없이 반복되던 싸움이었다. 그는 예의나 배려가 부족하고 언제나 무신경하게 황경호의 선을 밟았다.
‘나는 왜 저런 놈이랑 같이 사는 거지? 진짜. 이때까지 쟤가 했던 걸 생각해보라고. 칼로 찔러도 시원찮겠다.’
돈 때문인가? 돈 때문에 같이 사는 건가? 황경호는 그렇게 회의적으로 생각하면서 몸을 벅벅 씻었다.
다 씻고 나와서는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놀이방으로 가서 레고를 하나하나 쌓다가 이것도 강동현이 사준 거라는 생각에 마음이 심란해졌다. 그래서 가만히 그 옆에 앉아서 책을 보고 있으니 휴대폰이 울렸다. 폰 화면을 보고 약간 움찔했다가 한숨을 쉬면서 전화를 받았다.
“네, 어머니.”
[응, 경호야. 지금 바쁘니? 전화 받을 수 있어?]
강동현의 어머니였다. 저번에 강동현이 어떻게 얘기를 했는지 모르겠지만, 강동현의 어머니는 그전보다 황경호에게 연락을 하는 횟수가 확연히 줄었다. 뭔가 죄송스러웠지만 그래도 그녀는 간간이 황경호에게 상냥한 안부 전화를 하곤 했다. 전화를 받으면 언제나 다정하게 전화를 받을 수 있는지에 대해 물었다.
[이번에 김장했는데 진짜 맛있게 돼서…. 은혁이한테 계속 연락했는데 귀찮다고 안 오더라고. 내가 들고 가자니 걔 펄펄 뛸 것 같아서…. 지금 진짜 맛있을 땐데 혹시 필요하니? 갖다 줄까?]
“감사해요, 어머니. 제가 가지러 갈게요. 어디로 가면 돼요?”
[아니야, 아니야. 아줌마가 가지고 갈게. 여기까지 귀찮게….]
“아니에요. 제가 갈게요. 지금 갈까요? 집에 계세요?”
[진짜 내가 갈게. 여기 멀어. 오기도 힘들고….]
“어머니가 무겁게 그런 거 어떻게 들고 와요. 안 돼요. 제가 갈게요. 주소 불러주세요.”
[진짜 내가 가도 되는데…]
“아, 주소 안 불러주셔도 되겠구나. 은혁이 데리고 갈게요.”
[음…. 그래. 알았어. 지금 온다고? 저녁 먹고 갈래?]
“은혁이한테 물어볼게요.”
[그래. 알았어. 조금 이따 보자.]
황경호는 전화를 끊고 한숨을 한 번 쉰 뒤에 밖으로 나왔다. 강동현은 삐딱한 자세로 TV를 보고 있었다. 황경호는 드레스룸으로 가서 옷을 좀 걸치고 다시 나왔다. 강동현이 퉁명한 목소리로 물었다.
“어디 가?”
“나와. 운전해.”
“어디 가는데?”
“너네 집. 어머니가 금방 전화 주셨어. 김장 새로 하셨대. 주신다고 해서 간다고 했어.”
강동현은 아, 그거…. 하는 투로 다시 TV로 시선을 돌렸다.
“됐어. 그런 거 일일이 상대하지 마.”
“운전하라고. 집에 좀 가. 네가 집에 안 가니까 자꾸 나한테 전화하시는 거 아냐.”
“전화 아예 하지 말라고 할게, 그럼.”
“그런 말이 아니잖아. 너 진짜 어머니한테 왜 그래? 좀 잘해.”
황경호가 짜증스럽게 말했다. 강동현이 인상을 찌푸리며 그를 돌아보았다.
“내가 우리 엄마한테 어떻게 하든 무슨 상관이야? 그렇게 싫으면 너한테 문자 하나 못 보내게 해준다니까?”
말이 안 통한다…. 거기다가 그가 하는 말이 괜히 속상하다. 황경호는 목소리를 가라앉혔다.
“그런 말 아니니까 하지 마. 나 어머니 좋아하니까…. 너야말로 정 싫으면 주소만 가르쳐줘. 나 혼자 갔다 올 테니까.”
그러자 강동현은 한숨을 푹푹 쉬더니 TV를 끄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 가자, 가.”
그는 탐탁지 않은 티를 엄청나게 내면서 먼저 현관으로 갔다. 황경호는 그냥 입을 다물고 그를 따라갔다. 차 안에서는 아까보다도 더 긴 침묵이 이어졌다. 서로가 아까보다도 더 짜증이 나 있는 게 피부로 느껴졌다. 차를 타고 구불구불 이어지는 길들을 지나다 보니 어느샌가 강동현의 본가에 도착해있었다.
‘…원래 잘 사는 집이었어……. 역시….’
아무리 강동현이 돈을 잘 번다고 해도 말이다, 그의 성격을 특징짓는 여러 특성들을 생각해보면 그는 애초에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을 스타일이 아니었다. 그의 자신감이나 어떤 면에서의 관대함은 정말 부족함 없는 집에서 부족한 거 없이 태어나야 가능한 일일지도 모른다. 하나라도 부족하면 쉽게 자격지심에 시달릴 수밖에 없는 한국의 관습을 생각해보자면….
서울 한복판 노른자위 땅에 잘 가꿔진 정원이 딸린 큰 주택을 가지고 있는 집이라면 진짜 부잣집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강동현의 아버지랑 누나는 사업을 한다고 했고 둘 다 ‘그럭저럭’ 잘 돌아간다고 했으니….
황경호는 이런 집은 처음 와봐서 이리저리 고개를 돌리면서 구경했다. 정원이나 잔디나…. 창밖으로 한강을 보는 것이랑은 또 다른 느낌이었다. 모든 것이 선명하고 신선했다. 그리고 앞을 보니 대문을 열어준 어머니가 현관문을 열고 아들을 맞이하러 나오셨다.
“아들~”
어머니는 활짝 웃으셨다. 아들이 온 게 기쁜 모양이었다. 그녀는 황경호도 반가워했다.
“경호 덕분에 드디어 우리 아들이 집에도 와주네.”
“아니에요, 어머니.”
황경호는 웃으면서 그녀를 바라보았다. 강동현은 여전히 기분이 안 풀려서는 별말 없이 집으로 들어갔다.
“밥은 먹었어? 저녁 먹고 가.”
“됐어. 빨리 줄 거나 줘. 피곤해.”
강동현은 그렇게 말했다. 황경호는 뒤에서 그의 등을 꼬집었다. 강동현이 인상을 찌푸리며 그를 돌아보았다.
“말 좀 예쁘게 하라고.”
황경호가 속삭였다. 강동현은 콧방귀도 안 꼈다. 황경호는 어제 한 조림을 담은 그릇을 어머니한테 건넸다.
“어머니, 전에 이거 맛있다고 하셔서 가져왔어요. 혹시 괜찮으시면….”
“어머…. 고마워라. 그래, 이거 가끔 생각나더라.”
“새로 한 거라서 전이랑 맛이 똑같을지는 모르겠는데….”
어머니는 예상 이상으로 정말 기뻐하셨다. 밝게 웃으면서 황경호를 보았다.
“고마워. 잘 먹을게.”
그러면서 그녀는 황경호의 뺨을 쓰다듬었다.
“어쩜 이렇게 착한지.”
그녀에게서 이런 스킨십을 기대하지 못했기 때문인지 내심 놀랐지만, 기뻤다. 우습게도 황경호의 주변에 있는 많은 남자들이 그에게 쉽게 스킨십을 하곤 했는데…. 껴안고 잔다거나 머리를 쓰다듬는다거나. 그런 것과는 달리 여자들과의 스킨십에는 정말 익숙하지 않은 그였다. 하지만 기분 좋았다. 황경호는 강동현 때문에 기분이 안 좋았던 게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그제야 황경호는 진심으로 웃으면서 그녀에게 물었다.
“김장 언제 하신 거예요? 혼자서 다 하신 거예요? 힘드셨겠다.”
“시댁 식구들이랑 은연이 아빠랑 다 같이했어. 엄청 많이 했는데 다들 나눠 가니까 생각보다 얼마 안 남더라고. 다음에는 더 많이 해야겠다 싶다. 먹어볼래?”
“네.”
황경호는 그녀가 주는 김치를 먹어보았다. 진짜 상큼하고 맛있었다. 이거 먹은 걸로 갑자기 입맛이 확 돌았다. 밥 먹고 싶다.
“이건 굴 넣은 거고 이건 계피 넣은 거고 이건 그냥 생 거.”
“이렇게 많이 안 주셔도 돼요. 다 못 먹어요.”
“이건 나중에 묵혀서 신 김치로 먹고…. 아, 집에 김치 냉장고 없었나?”
“네. 냉장고도 커서….”
“은혁아! 엄마가 김치 냉장고 사줄까?”
“아니에요. 아니에요. 둘이 사는데 무슨 김치 냉장고까지….”
어머니도 통이 크시다…. 황경호는 한사코 손사래를 쳤다. 그런 식으로 어머니랑 이야기를 좀 나누려는데 거실에서 강동현이 소리쳤다.
“엄마 적당히 해.”
금방까지 기분이 좋았는데 강동현의 목소리를 듣자 갑자기 살짝 다운되었다. 거실 쪽을 노려보았다.
“…쟤는 진짜 한번 큰코다쳐봐야 해요.”
저도 모르게 그렇게 말했다.
“진짜 복 받은 줄 모르고…. 어머니 진짜 쟤 한번 제대로 혼내세요. 복날에 개 맞듯이 맞아봐야 정신을 차리지. 안 그러면 계속 저럴걸요?”
황경호가 그러자 어머니는 살짝 미소를 지었다.
“어떻게 그래….”
“제가 쟤랑 맨날 싸워봐서 아는데요. 쟤는 사람이 약하게 나오면 오히려 더 세게 나온다니까요? 이쪽도 소리치고 화낼 줄 안다는 걸 진짜 그렇게 하지 않으면 모르는 애예요. 사람이 강하게 나가야 말을 듣는다니까요?”
황경호가 답답한 마음에 그렇게 말했다. 강동현의 어머니는 또 웃으셨다.
“이제 다 컸는데 엄마라고 어떻게 그래.”
“아니, 이건 크고 안 크고의 문제가 아니라 예의의 문제잖아요. 쟤 진짜 저런 태도 고쳐야지….”
황경호가 이를 갈듯 말했다.
“세상에 어머니같이 좋은 엄마 정말 별로 없어요. 복 받은 줄 알고 감사히 여겨야지 저러는 거 진짜…. 남이라도 너무 보기 힘든 것 같아요.”
황경호가 그렇게 말하니까 어머니가 조심스럽게 그를 보았다.
“아…. 은혁이가 너한테도 그런다고 했지…. 내가 다 미안하네. 경호 집에 얹혀살면서 삼시 세끼 다 받아먹으면서…. 이건 내가 한마디 해야겠다.”
“저는 그래도 이제 쟤한테 할 말은 해서 괜찮은데…. 어머니는 이런 거 어떻게 참아요?”
어머니 때문에 풀렸던 기분이 다시 강동현 때문에 엄청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아무리 말해도 그가 바뀌지 않아서 더 그랬다. 오히려 어머니가 황경호를 위로하려고 해서 더더욱 그랬다. 어머니는 강동현의 말이나 태도에 일일이 상처받을지언정, 황경호가 화를 내면 오히려 더 의연하게 대처했다. 어머니는 강동현이 있는 거실 쪽을 보면서 대답했다.
“어떻게 참긴…. 사랑하니까.”
“…….”
“은혁이는 일부러 저러는 타입은 아니야. 그냥…. 내가 어떻게 해주는 게 이제 진짜 귀찮아서 저러는 거지…. 그래도 사랑하니까 뭐든 해주고 싶고…. 사랑하니까 저렇게 해도 참고 싶어. 가끔씩 엄마 생각해주면 여전히 기쁘고…. 행복하니까.”
황경호는 말을 잃고 그녀를 보았다. 그녀는 어쩐지 순수하게 미소를 지으면서 황경호를 돌아보았다.
“솔직히 내가 쟤를 이렇게까지 사랑 안 하면 나도 마음고생 안 하지. 내가 사랑하니까 내가 사서 마음고생 하는 거야.”
“…저는…….”
황경호는 뭐라고 말을 하려다가 핫, 하고 정신을 차렸다. 어머니는 상냥한 얼굴로 그를 보았다.
“응?”
“…아무것도 아니에요.”
어머니는 김치뿐만 아니라 이것저것 손에 쥐여주셨다. 저녁까지 먹고 집에서 나서니 이미 사위가 캄캄했다.
“운전 조심해서 가고.”
“네, 어머니. 감사합니다. 잘 먹을게요.”
“그래. 도착하면 연락해.”
“네.”
그렇게 차를 타고 집으로 향하고 있었다. 황경호는 창밖을 보고 있다가 입을 열었다.
“…이틀에 한 번씩이라도 어머니한테 전화해주면 안 돼? 짧게라도….”
“왜?”
“그냥…. 어머니 너무 적적해 보이셔서.”
“그럼 네가 하든가.”
“나도 할 테니까.”
“너 우리 엄마한테 왜 이렇게 신경 써?”
강동현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이 물었다. 황경호가 잠깐 머뭇거리며 말을 하지 못하다가 조용히 말했다.
“너희 어머니니까 그러지….”
“…….”
강동현은 황경호를 돌아보았다. 황경호는 얼굴을 살짝 붉혔지만 담담하게 말했다.
“운전.”
그러자 강동현은 다시 정면으로 고개를 돌렸다. 강동현은 갑자기 황경호의 손을 덥석 잡았다. 그리고는 한참 누그러진 목소리로 말했다.
“…미안.”
“뭐가?”
“아까 운전 가르쳐줄 때 짜증 낸 거…. 미안. 나도 답답해가지고….”
“그러니까 내가 그냥 학원 간다고 했잖아. 네가 억지로 잡아놓고….”
“응. 미안….”
집에 도착해서 음식을 냉장고에 다 넣고 나서는 슬 뒤에 붙어서 끌어안았다. 황경호의 얼굴을 보는 그의 표정이 좀 초조해 보인다.
“네가 말하는 대로 할게.”
“뭘?”
“엄마한테 연락하는 거.”
“…….”
은근히…. 강동현은 말을 잘 들었다. 생각하는 것보다도 훨씬 더. 정말로 말만 잘하면 다 들어준다…. 황경호는 인상을 약간 찌푸렸다. 이렇게 쉽게 할 수 있는 거면서 왜 지금까지는 안 했단 말인가. 황경호는 한숨을 쉬었다.
“넌…. 진짜 보면 볼수록 나쁜 놈인 거 같아….”
“왜!”
황경호에게 잘 보이려고 그의 말대로 한다고 한 건데 이런 소리를 들으니 강동현이 발끈했다. 황경호는 설명하기를 포기했다.
“뭐…. 됐어.”
“되긴 뭐가 돼? 사람이 기껏….”
황경호는 그가 투덜거리는 걸 막는 겸 해서 그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황경호가 입술을 떼고 물었다.
“뭐라고 했어?”
“…아니, 아무 말도 안 했는데요.”
강동현은 황경호의 몸을 자신의 쪽으로 돌리고 다시 입을 맞추었다. 황경호는 그의 어깨를 끌어안으면서 생각했다.
‘사람이 같이 사는 건 이런 걸까?’
화가 났다가도 어이없이 풀어지기도 하고, 행복했다가도 실망하고, 같은 문제로 계속 싸우고…. 그런데도 또 같이 살아가고.
사랑하니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