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그렇게 하지 못하는 이유 (1)
“무슨 말인지 알 것 같다…. 나 솔직히 저번 작품 찍을 때 너한테 홀딱 빠져가지고 좀 집중 못 하긴 했거든…. 집에 빨리 오고 싶고.”
근데 의외로 그 뒤로 강동현이 장난스럽게 황경호에게 자기 작품에 대해서 물어보았다가 나중에는 진지하게 황경호의 말을 경청하는 식으로 이야기가 마무리되는 게 몇 번 반복되었다. 강동현은 회사에 갖다 두었던 자기 대본들을 싹 다 들고 집에 왔다. 형광색 포스트잇으로 마킹이 마구 되어 있고 안에는 그의 메모도 가득 적혀 있었다. 황경호는 그것을 보고 저도 모르게 말했다.
“이거 나 줘.”
“응? 새 거 줄 게.”
“아니, 새 거 말고.”
강동현은 별거 아니라는 듯이 전부 주었다. 황경호는 그걸 자기 놀이방에다가 잔뜩 진열해두고 그날부터 매일매일 몰래 읽었다. 그리고 하루는 또 이야기가 새어 <시크릿 블러드>에 대해서 얘기를 하다가 강동현이 끙하고 변명했다.
“아…. 그래도 그때는 꽤 진지하게 했는데….”
강동현은 그렇게 말하면서 TV로 서이건이 유진아에게 품은 감정을 인정하고 나아가 그녀를 위해 희생하며 불멸성을 잃는 장면을 다시 찾아보았다. 그는 유진아를 바라보면서 쓸데없는 말을 하면서 마음속으로만 사랑을 고백하며 재가 되어 사라진다.
“아니야. 눈빛이 영…. 너 서리 때만 해도 진짜 달랐다고. <인사이더> 봤어? 이XX <인사이더>에서 극 중 예전 애인 잠깐 바라보면서 얘기하는데 진짜 모르는 사람이 봐도 저런 느낌일까 싶을 정도로 애정이 묻어나와서…. 서리 때 너도 여자 주인공 보면 정말 다른 사람 볼 때랑 눈빛이 달랐는데.”
“<인사이더> 어느 장면이야?”
강동현은 IPTV에서 황경호가 말하는 영화를 찾아보았다. 황경호는 그 장면을 찾아서 보여주었다. 강동현보다 한참은 선배의 연기인지라, 강동현은 그걸 몇 번이나 돌려보았다. 그리고 영상을 멈추고 자기 대본을 유심히 보고 있던 강동현은 갑자기 황경호를 보았다.
“왜?”
황경호는 처음에 그렇게 되물었다. 그런데 강동현이 꽤 진지하게 황경호의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아니, 진짜 진지하게 그렇게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쳤는데 뗄 수가 없었다. 황경호는 점점 얼굴이 붉어졌다. 어쩐지 둘 사이에 텐션이 확 올라갔다. 그의 눈동자에서 자신에게로 어떤 에너지가 자꾸 빨려 들어오는 것 같았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도 몸이 베베 꼬일 것만 같이 피부가 간질간질하다. 황경호는 침을 꿀꺽 삼켰다. 뭐라고 얘기라도 해야지 안 되겠….
“사랑해.”
“…!!!”
황경호는 순간 심장에 누가 주먹질이라도 한 것 같아서, 숨도 못 쉴 정도로 고통이 느껴졌다. 기쁜 게 아니라, 고통스러웠다. 숨을 못 쉬겠다. 그게 너무 당황스러워서 헛숨을 들이켰다가 눈물이 확 차올랐다. 얼굴이 확 빨개져서는 뻐끔뻐끔 뭐라고 하려는데 강동현이 대본으로 다시 시선을 돌리며 중얼거렸다.
“이렇게 하면 되나….”
“…윽….”
황경호는 겨우 숨을 쉬고는 가슴을 부여잡고 카우치에 엎드렸다. 강동현이 고개를 돌려 그를 보았다.
“왜 그래?”
“…….”
절대 말 안 해…. 황경호는 화라도 내고 싶었지만 방금 심장이 입은 타격과 강동현의 무신경함에 상처 입은 마음 때문에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카우치에 얼굴을 묻은 채로 치명상이라도 입은 것처럼 꼼짝도 하지 못하고 힘겹게 고통을 소화해야 했다.
강동현은 대본에 그대로 정신이 팔린 채 그냥 황경호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황경호는 눈물이 핑 돌아서 속으로 몇 번이고 되새겼다.
‘절대 말 안 해. 절대 말 안 해. 미워 죽겠어. 절대 말 안 해.’
황경호는 강동현이 하는 일에 관심이 많았다. 배우로서의 그에게 지대한 애정을 들이고 있기도 하고 말이다. 그래서 근래에 그가 자신의 말을 여느 때와 다르게 열심히 경청하는 것을 보고 내심 기쁘기도 하고 뿌듯하기도 했다. 익명의 사람들이 아닌 아는 사람, 그것도 강동현이, 그 본인이 황경호의 의견을 들어준다는 게 말이다. 그의 연기에 대한 이야기라서 더 그랬지만, 누군가 황경호의 이야기라는 걸 이렇게 진지하게 들어준 적이 있었던가.
누군가가 자신의 말을 들어주고 알아주고 이해해준다는 것은 굉장히 기쁜 일이었다. 그래서 예전에 지음이라는 말이 있었지 않았던가. 서로의 소리를 알아주는 친우라는 의미에서 말이다.
강동현 본인이야말로 가끔 황경호에게 무력감을 느끼게 할 정도로 그에게 정신적, 물리적 힘을 휘둘렀지만, 황경호에게도 강동현만큼 자신의 힘을 휘두를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이렇게 되기 전에도 그가 자신에게 휘둘리거나 자신의 말이면 거역하지 못하고 듣는 것을 보면 괴이한 위력감과 우월감이 들었고 그게 너무나 기분이 좋아서 그를 떨치지 못하고 계속 엮이고는 하였다.
안 그래도 평소엔 황경호를 괜히 놀리고 괴롭히고 건드리는 그가 아니던가. 진지한 얼굴로 자신의 말을 들어주는 것이 좋았다. 그래서 열심히 그의 대본을 읽어 보기도 하고….
‘바보 같아….’
[사랑해.]
치명상을 입은 심장이 반사 반응을 일으켰다. 두 손으로 가슴을 꾹 눌렀다. 푸켓에서는 그저 지나가듯이 사랑한다고 말해주기라도 했다면 좋았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눈을 바라보면서 장난기 하나 없는 얼굴로 진지하게 사랑한다고 말해줄 거라고는 기대도 하지 못했다.
그런데 연기 연습….
황경호는 푸켓에서 있었던 일 때문에 상했던 마음보다 몇 배는 더, 몇 배가 뭔가, 엄청나게 타격을 받았다. 안 그래도 요새 그가 자신의 말도 잘 들어주고 해서 마음이 다 풀린 상태였는데….
황경호는 그렇게 한참을 엎드려 있다가 흐느적 몸을 일으켰다. 한 것 없이 피곤했다. 이명이 울렸다.
“밥 먹을까?”
강동현이 대본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로 그렇게 물었다. 황경호는 힘없이 대답했다.
“혼자 먹어….”
“…응?”
강동현이 그제야 대본에서 시선을 떼고 황경호를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황경호의 얼굴을 보았다. 뭔가 아주, 아주 마음이 끌리는 얼굴이다. 강동현은 이끌리는 대로 대본을 카우치에다 두고 슬 일어나서 그를 껴안았다.
“왜 그래? 응? 배 안 고파?”
“안 고파….”
황경호는 그를 치우려고 했다. 강동현은 그를 뒤에서 끌어안고 아주 질척거리면서 그의 뺨을 쪼옥 빨았다.
“하지 마….”
진짜 싫어한다…. 뭐지? 뭐 한 걸까? 뭐…. 어쨌든 좋다. 강동현은 그가 싫어하는 걸 알면서도 아주 지분거렸다. 그때 황경호의 휴대폰이 울렸다. 강동현이 그의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응? 어머니시네?”
그러고 휴대폰을 건네주었다. 황경호는 휴대폰 화면을 잠깐 보다가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통화음량을 최소로 낮추어서 상대 쪽에서 무슨 말을 하는지는 모르겠다. 딱히 이상하게 통화를 하는 것 아니었지만, 강동현은 문득 단 한 번도 황경호의 부모나 가족에 대한 얘기를 들어본 적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지나가다가도 말한 적이 없었다. 그가 짧은 통화를 끝내는 것을 보고 강동현이 물었다.
“나 너 엄마랑 통화하는 거 처음 보는 거 같은데.”
강동현의 스케줄이 슬 줄어들면서 가족들, 특히 엄마와 연락하는 횟수가 좀 늘어났다. 예전에는 엄마가 연락을 해도 잘 못 받았는데 요새는 받는 것이다. 음식도 꽤 자주 해주셔서 집에 가서 가져오기도 하고 말이다. 하지만 황경호가 그러는 것은 못 봤다. 강동현은 일 때문에 이번 설날에 집에 못 갔는데 황경호도 어디 간다는 소리를 못 들었다.
“아…. 딱히 연락을 많이 하고 지내고 그러진 않아서.”
황경호는 별거 아니라는 듯이 그렇게 말했다. 강동현은 그의 얼굴을 가만히 보고 있다가 물었다.
“형제는 있어? 너 혼자야?”
“외동이야.”
굳이 따지자면 외동 느낌은 아닌데 말이다. 황경호는 자신을 끌어안고 있는 강동현의 손을 자연스럽게 풀면서 말했다.
“배고프다며. 밥해줄까?”
그러면서 부엌으로 가는 황경호였다. 강동현은 설명할 수는 없지만 이상한 느낌을 자꾸 받아서 그를 졸졸 따라갔다.
“내가 우리 집은 얘기해줬잖아. 전에 내가 메시지 주고받은 것도 봤고. 대충 어떤 느낌인지 감 오지?”
“응. 좋아 보이더라.”
“너네 집 얘기도 듣고 싶어. 어땠어? 너 어렸을 때는? 부모님은 어때?”
“우리 집? 딱히…. 뭐 특별할 건 없는데. 아빠는 회사원이고 엄마는 가정주부…. 집은 대전이고. 난 대학 때부터 서울에서 쭉 지내서.”
“그래도 외동이면 집에서 많이 챙겨주지 않나?”
“뭐…. 그렇지도 않아.”
“부모님 얘기하는 거 싫어?”
강동현이 그렇게 물었다. 황경호는 약간 인상을 찌푸리며 그를 돌아보았다. 뭔가 체념과 못마땅함이 동시에 보이지만 그렇다고 마음이 상한 얼굴은 아니다.
“너 나한테만 그런 식으로 직구 던지지? 다른 사람들한테는 안 그러잖아.”
“남들이 너랑 같냐. 내가 미쳤다고 남들에게 이런 걸 물어봐.”
“그냥…. 딱히 사이가 좋은 것도 아니고 나쁜 것도 아니야. 무슨 일 있었던 것도 아니고.”
“흐음….”
강동현은 그렇게까지만 듣고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황경호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강동현은 그대로 식사를 준비하는 황경호를 보다가 옆에 가서 도왔다.
“아무래도 너 더 먹어야겠어.”
“여기서 뭘 더 먹어?”
푸켓 갔다 와서도 매일이 진수성찬이었다. 살도 제법 붙었다. 강동현은 황경호의 배, 허리, 엉덩이를 만지고 주물러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더 먹어야겠어.”
“참나.”
평소보다도 더 먹고는 과식으로 늘어져 있는 황경호의 입에다 과일까지 열심히 넣어 주는 강동현이었다. 전에 사이판 갔다 왔을 때 같다.
“그만해…. 죽겠어.”
“이럴 때 먹여놔야지. 또 나랑 하면 살 빠질 텐데.”
그러고 있는데 황경호의 휴대폰이 또 울렸다. 이번에는 메시지다. 강동현이 시선만 쭈욱 따라붙어 확인해보니 또 황경호의 어머니였다. 그리고 그의 얼굴을 힐끗 보니 역시나 뭐라고 말할 수 없이 미묘하다. 딱히 표정이 바뀌거나 하지는 않는데, 그래서 미묘하다. 강동현만 알아차릴 수 있는 종류의 것이었다.
‘뭐지?’
황경호는 s정말 착했다. 진짜 착했다. 가끔(자주) 호구 같고 병신 같을 정도로 착했다. 사람이 무르고 착하고 친절하고 숨 쉬듯이 다른 사람들 배려하고…. 그러면서도 자기가 생각하거나 느끼는 건 내색하지 않으려고 하고 곧잘 스스로에 대해서 부끄러워하고 창피해했다.
학창시절 때 왕따라도 당해본 걸까 싶었는데 영 그런 분위기는 아니다. 사람들이랑 잘 지내고…. 굳이 따지자면 연령에 상관없이 사람들에게 소소하게 예쁨받는 스타일이었다. 어렸을 때도 그랬을 것 같다.
멀리서 봤을 때 황경호는 정말 사랑받는 가정에서 예의범절 교육을 잘 받은 애 같았다. 밝고 잘 웃고 다른 사람들에게 친절하고 교우관계도 얼추 좋고 깔끔하고. 하지만 가까이에서 부딪혀 본 그는 쉽게 불안해하고 사람을 못 믿고(물론 이런 건 강동현이라서 더 그런 것도 있는 것 같긴 했지만, 강동현은 그 사실을 무시했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쉽사리 포기하거나 외면하며, 이유 모를 우울증에 시달려 몇 번이나 자살하려고도 한 전적이 있는 사람이었다.
지금까지 몇 달을 같이 살면서 단 한 번도 이런 의심을 해보지 못한 것이 강동현답다면 강동현다웠지만, 오늘의 이 미묘한 느낌을 보니 새삼 그의 가정이 어땠을지에 대한 의문이 강하게 드는 강동현이었다.
‘우리 사실 벌써 결혼(?)했는데….’
법적으로 어떻게만 못 할 뿐이지 다른 부부들처럼 애정과 돈으로 얽힌 완벽한 부부였다.
강동현이야 톱배우다 보니 일찍 결혼할 생각은 전혀 없었지만, 김태형의 말처럼 ‘평생 책임진다’는 말 외에 상대를 설득할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것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에 그냥 자신을 던졌다. 먹혀서 다행이었다.
원래부터 순서가 뒤죽박죽이었지만, 뭐, 그냥 연애 같은 건 스킵해버리고 집까지 산 후 신혼생활부터 시작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런데 생각해보니까 황경호나 황경호의 직장, 교우 관계는 꽤 아는 편이라 자부할 수 있었는데 부모나 가정에 대해서 아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벌써 이렇게 된 마당에 그의 가정환경이 마음에 안 든다고 모든 걸 다 물을 생각은 없었지만 갑자기 궁금하긴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황경호는 지극히 ‘혼자’라는 느낌이 강했다. 그러니까 강동현도 그렇게 쉽게 접근했던 것 아닐까. 어떤 끈도 연결되어 있지 않은 느낌이었다.
같이 사는 것(결혼)을 설득할 때도 부모라든가 누군가를 따로 설득해서 그를 낚을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물론 남자끼리라는 걸 차치하더라도. 언제나 방법은 있는 법이다). 그러니까 누구 다른 사람들에게 잘해서 그에게 잘 보이는 방법 따윈 쓸 생각도 하지 못하고 오로지 황경호만 공략했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남의 집 귀한 아들을 이렇게 낼름(?)….’
언젠가는 부모님이나 걔 부모님한테 말하게 되는 일도 오지 않을까 싶기도 했다. 세상일 어떻게 될지 모르는 거고 한 15년이나 20년 뒤쯤에는 자연스럽게….
의절 당한다면 뭐 어쩔 수 없지만 딱히 그럴 거 같지도 않고, 그런다 해도 뭐…. 자식 이기는 부모는 없다고 하기도 하고 의절 당한다 한들 부모님 손해지 강동현의 손해겠는가. 그런 거 별로 걱정 안 한다. 대가 끊기는 게 문제라고 하면 이쪽은 누나도 있고 한데 황경호는 외동이다.
‘다른 나라에서 대리모라도 해야 하나…. 그럼 경호랑 애는 외국에서 살라고 해야겠는데? 나야 자주 가면 되고…. 기러기 아빠 되겠네.’
그는 대충 그렇게 생각했다. 강동현이야 뭐든 다 할 수 있는 남자라 당장 닥치지 않은 일에 크게 걱정은 안 하는 타입인데, 아무래도 상대는 없는 걱정도 사서 하는 스타일이라 되레 강동현도 사서 그에 대해 걱정하게 되었다. 자기 스타일대로 가다가는 탈이 나는 걸 이제 좀 알아서 그렇다.
이제 6월이 되고 슬슬 낮은 더워지기 시작했다. 강동현은 확연히 일이 줄어 황경호가 일을 하고 있을 때는 병원 다니고 몸 만들고 영어를 배우고 연기학원을 갔고 돌아오면 같이 밥해 먹고 얘기하고 밤에 가끔 산책도 나가고 그랬다. 주말에는 꼬박꼬박 놀러 나갔고 말이다.
“이번 주말은 나 어디 가야 돼.”
황경호가 말했다. 같이 욕조 안에 있었다. 황경호는 책을 읽고 있었고 강동현은 그를 마주 보고 발로 그의 엉덩이를 쿡쿡 찌르고 있었다. 벌써 2주째 못 하게 하고 있었다. 이번 주말은 진짜 자빠뜨려야지, 라고 계획하고 있던 강동현은 허리를 일으키며 물었다.
“왜…!”
꽤 절망적인 어조였지만 말이다. 황경호는 책을 한 장 넘기며 대답했다.
“집에 가봐야 해. 엄마가 한번 오라고 하셔서.”
“오랜만에 가는 거야?”
“응. 그렇지.”
강동현은 도를 닦는 심정으로 ‘참을 인’ 자를 속으로 적었다. 물속에 손을 넣어 황경호의 발을 잡았다. 그리고 들어 올려서 쪽 입을 맞추었다. 황경호가 다리를 움츠렸다.
“하지 마.”
“왜. 발에 뽀뽀하는 거 좋아하는 거 아니야?”
전에 발에 키스하라고 자기가 해놓고는 흥분하기까지 했고 말이다. 강동현은 눈을 내리깔며 황경호의 엄지발가락에 입술을 누르고 발바닥의 오목한 부분을 살짝 깨물었다.
“간지러워. 하지 마.”
그렇지만 얼굴은 이미 약간 야하다. 강동현은 씨익 웃는 얼굴로 그를 보았다. 황경호의 얼굴이 좀 빨개졌다. 강동현은 자신만만하게 생각했다.
‘하여튼 얼굴 밝힌다니까.’
복숭아뼈 밑을 혀로 살 핥고 아킬레스건을 깨물었다. 황경호의 발에서 물이 떨어져 흘렀다. 강동현은 종아리를 부드럽게 주무르며 입을 맞추어 올라가다가 무릎 근처의 허벅지를 깨물었다. 그렇게 슬 황경호의 다리를 벌리게 하며 그 사이로 파고 들어갔다. 황경호를 욕조 테두리에 앉혔다. 강동현은 그의 허벅지를 쪽쪽 빨았다. 물기가 어려서 촉촉하고 살이 맛있었다.
“으응……!”
황경호는 책을 손에 쥔 채 욕조 테두리를 꽉 잡으며 눈을 감았다. 될 것 같은 느낌이다. 강동현은 아예 허벅지 안쪽까지 왔다. 그러자 황경호가 강동현의 얼굴을 손으로 막았다.
“왜?”
“됐어…. 차라리 내가 해줄게.”
그냥 그를 기분 좋게 해주고 싶었다. 그런데 가끔 이런 식으로 군단 말이다. 강동현은 그의 말을 무시하고 그의 것을 입에 물었다. 진짜 안 해봐서 그런 건지, 아니면 피부가 달라서 그런 건지 남자 걸 해준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냥 황경호니까 말이다. 딱히 크게 저항감은 들지 않는다.
“하으응…. 아…! 싫어…. 으응…. 아앙…. 강동현…. 아우으…. 힉. 아앙….”
황경호는 빨아주면 가장 빠르게 흥분하고 사정할 것같이 되었다. 책은 어느새 바닥에 떨어뜨리고 강동현의 머리카락을 감싸 쥔 채 신음만 야시시하게 흘렸다.
“그만…. 하아…. 그만해. 그만해…. 아아앙…. 하으…. 으읏…. 아…! 으으응…. 강동혀언…. 아…. 제발…. 응…? 제발…. 부탁이야…. 흐앗…. 아앙…….”
애원하는 소리가 달콤하다. 엉덩이를 자꾸 빼려고 하는 걸 붙잡고 입안을 진공으로 만들어 아예 쪽쪽 소리가 날 정도로 빨아버렸다.
“흐아앗…!! 아앗…!! 아아앙……! 하으…. 그만…. 그마안….”
진짜 필사적으로 참는다. 입에 하는 게 그렇게 부끄럽나? 강동현은 그의 입에 할 때 정말 기분이 좋았는데 말이다. 마지막으로 쪼오옥 하면서 입술을 떼었다. 황경호가 부르르 떨었다. 강동현이 끌어안으니 마주 안아왔다. 강동현이 실실 웃으면서 물었다.
“흐응, 기분 좋았어?”
“하윽…. 아….”
부끄러워한다. 황경호는 강동현이 같이 흥분을 한 상태면 그나마 괜찮은 것 같은데 혼자만 기분 좋아지는 건 영 부끄러워했다.
“너도…. 너도 빨리해.”
황경호는 강동현의 것으로 손을 뻗었다. 강동현은 그의 어깨를 빨았다.
“나 예전부터 하고 싶은 거 있었는데….”
강동현은 황경호가 자신의 것을 만지는 것을 기분 좋게 느끼면서 그렇게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뭐…?”
황경호는 상대의 것을 두 손으로 만졌다. 잘하니까 말이다. 엄청 기분이 좋다. 허리가 부르르 떨릴 정도다. 강동현은 황경호의 어깨를 깨물고 그걸 좀 즐기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세면대 위 찬장을 열어 뭘 들고 온다. 새 일회용 면도기와 자기 쉐이빙 크림이다. 전동면도기 쓰면서…. 아니, 그것보다도 왜 갑자기? 황경호가 흥분해서 야시시한 얼굴로 강동현을 쳐다보았다. 뭔지 이해가 안 되는 모양이다. 강동현은 다시 황경호의 다리 사이로 들어와서 그의 똘똘이를 마주했다. 쉐이빙 크림을 거기에다 잔뜩 묻히자 그제야 뭔지 알아차렸다.
“시, 싫어!”
“아, 왜. 한 번만.”
“아…! 잠깐만…!!”
“움직이지 마. 다쳐.”
강동현은 엄청 공을 들여서 삭삭 황경호의 아랫도리를 면도했다. 털이 꽤 부드러운 편인데, 이런 데 면도 같은 건 한 번도 해보지 않았을 것 같다. 황경호는 얼굴이 벌게져서는 아래를 보았다.
“하지 마….”
“벌써 반이나 했어. 여기서 그만두는 게 더 이상해.”
회음부까지 깨끗하게 면도를 하고 물로 씻었더니 안 그래도 분홍색 거시기인데 완전 귀엽다.
“엄청 부드럽네….”
강동현이 황경호의 거기를 만지면서 웃었다. 황경호는 얼굴이 벌게져서 그의 어깨를 퍽 쳤다.
“나중에 다시 날 때 따갑다고.”
“응? 여기 면도해봤어? 처음일 줄 알았는데….”
약간 실망한 목소리(?)로 강동현이 물었다.
“환자들 수술할 때마다 다 깎아서 알아. 내가 이런 걸 왜 해.”
황경호가 부끄러워하며 말했다. 그러면 그렇지, 하고 그의 부드러운 거기를 만지작거리며 좋아하다가 강동현이 물었다.
“그럼 그런 남자들 면도해준 적도 있어?”
“많지…. 왜?”
“…….”
강동현은 슬슬 그를 껴안고 그의 음부를 만지는데 그가 그렇게 대답하자 다시 몸을 일으켰다.
“나도 깎아줘.”
“아, 진짜! 변태 같은 생각 좀 하지 마!”
하지만 기어코 깎게 했다.
“깎으니까 더 커 보이지 않아?”
강동현이 황경호의 뺨에다가 기립한 자신의 자지를 슬 문지르며 물었다. 황경호는 체념 반, 한심함 반의 목소리로 답했다.
“맨날 바보 같은 생각만 해…. 너 학교 다닐 때 공부 못했지?”
“…못하진 않았어!”
욕조가 엉망이 되었다. 대충 치우고 씻고 밖으로 나갔다. 서로 로션을 바르며 애무를 하다가 침대에 몸을 겹쳐 누웠다. 강동현이 밑이다. 서로의 것을 마주 대니 평소랑 느낌이 다르다.
“와, 이거 좋은데? 느낌 더 좋아.”
강동현이 그렇게 말하며 황경호의 어깨에 쪽 입을 맞추었다. 둘만의 집, 둘이 자는 침대, 가까이 붙어 있는 두 사람. 거기에 둘만 아는 바보 같은 짓들이나 잔뜩 해대고…. 황경호는 새삼 얼굴을 붉히고 강동현을 내려다보았다.
아마 강동현은 누구랑 함께 시간을 보내도 이럴 수 있을 것이다. 굳이 황경호가 아니더라도, 그가 애정을 느끼는 누구에게라도 그는 이럴 수 있을 것이다.
‘아마…. 나는 아니겠지.’
이런 건 아마 앞으로도 말 못 할 것이다. 부끄럽기도 하고 좀 억울하기도 하고, 괜히 상대에게도 부담스럽게만 느껴질 것 같다. 안 그래도 이유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고 마음이 상했다가 풀렸다가 하는 귀찮은 성격을 그대로 받아주고 있는 강동현이었다. 황경호 본인도 자신의 그런 성격이 싫었다. 그런 면에서는, 차라리 자신과의 섹스라도 좋아하는 게 다행일지도 모르겠다.
물론, 황경호는 스스로의 생각에 조금 상처를 받았다.
왜인지는 모르겠다.
강동현과 그대로 입을 맞추었다.
“하아…. 괜찮아…?”
“응…. 조금만…. 하으….”
“천천히 할까?”
강동현은 황경호의 음부를 좀 더 부드럽게 만졌다. 안에 젤을 잔뜩 넣어서 질척거리게 만들었다. 그리고 강동현은 면도를 해서 더 부들부들해진 그의 엉덩이 사이에 자신의 남성기를 딱 붙였다.
“하…. 진짜 느낌 좋아…. 진짜 부드러워. 왜 진작 안 했지?”
“변태…. 다시는 안 해.”
“제모하는 거 사야겠다….”
둘은 그렇게 딴소리를 하며 서로의 부드러운 살을 비볐다. 강동현은 그리고 상대의 작은 구멍에다가 자신을 끼워 넣기 시작했다. 황경호는 뻣뻣하게 긴장해서 몸에 힘을 풀다가도 못 풀고 그를 밀어내려고 하다가 그가 힘으로 끝부분을 집어넣자 그의 몸 위에 그냥 엎어져서 움찔거렸다.
“처, 천천히….”
“알았어. 알았어…. 하아…. 힘 좀 더 풀어…. 응?”
강동현이 황경호의 엉덩이를 주무르며 그의 긴장을 풀어주려고 했다. 서로 입을 맞추고 뺨을 비볐다. 접촉감이 황홀하다. 둘 다 피부에 촉촉하게 땀이 배었다.
“아아아아……!”
강동현이 스륵 자신의 자지를 안으로 미끄러뜨려 깊게 박자 황경호가 움찔움찔하면서 사정했다. 2주 만이라서 말이다. 엄청 민감하다. 둘 다 제모도 했겠다 살이 찰싹, 쫀득하게 맞붙었다. 황경호가 엉덩이를 경련하며 서로의 민감한 부위를 문질렀다.
“으윽…. 아, 진짜….”
강동현이 신음을 흘리며 황경호의 뺨을 깨물었다. 그대로 느릿하고 섹시하게 그와 살을 섞었다. 스르륵. 스르륵. 찌이걱. 황경호는 얼굴이 벌겋게 터서는 헐떡거렸다.
“아우으…. 강동현…. 흐윽…. 강동혀언…. 아으…. 아흑….”
그는 잔뜩 앓는 소리를 내면서 핏줄이 잔뜩 선 강동현의 팔을 잡았다. 오랜만인 데다가, 첫 번째라 얕은 곳부터 깊은 곳까지 단단하게 기립한 커다란 자지가 왔다 갔다 하는 게 너무 생생하게 느껴졌다. 버겁고 힘들다. 사정하고 나서 바로 쑤셔지니까 계속 오르가즘을 느끼는 것 같다. 뭐가 자꾸 나온다. 부끄럽다.
“기분 좋아? 하아…. 난 진짜 좋은데….”
강동현이 뜨거운 숨을 내뱉으며 자신의 얼굴 바로 위에서 감당 못 할 쾌락을 견디고 있는 황경호의 야시시한 얼굴을 보며 물었다. 황경호는 그런 질문을 들을 때마다 뭐라고 말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가 얼굴에 입을 맞추는 게 황홀하다. 황경호는 몸에 자꾸 힘이 빠져서 그의 얼굴에 입술을 눌러 기대며 웅얼거리듯 답했다.
“녹을 것 같아….”
“하하.”
강동현이 웃었다. 황경호는 목덜미에 쭈뼛 소름이 돋았다. 그를 꽤 조인 것 같다. 강동현이 섹시한 신음을 흘리더니 자세를 반전해서 황경호를 깔았다.
“아…!”
거의 끝까지 박혔다. 강동현은 황경호의 다리를 활짝 벌리게 해서 몇 번을 박다가 두 허벅지를 한 손으로 모아 잡아 황경호의 가슴으로 눌렀다. 엉덩이를 들리게 해서 박아 깊이는 안 박히는데 얕은 곳부터 중간까지 빠르게 퍽퍽 박았다. 딱 바로 거기가 엄청 문질러졌다.
“흣…! 아으…! 아흐윽…! 아아…! 아흐으…. 죽어…. 죽을 것 같아…! 아…! 하윽…! 천천히…. 아! 천천히이…!”
황경호가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애원했다. 강동현은 다리 두 개를 모아 잡은 손 말고 다른 손으로 황경호의 손을 잡아 깍지를 끼고는 허리짓에 아주 정성을 다했다.
“헉…! 황경호…. 황경호…! 경호야…. 아윽…. 으윽…. 아…. 하아…!”
황경호가 완전 자지러졌다. 자세 때문에 움직이지도 못했다. 자유로운 손으로 침대 시트를 쥐어뜯었다.
“강동현…! 아…!! 나…. 나와…. 흑…. 아…! 어떡해…! 아우…. 아우으…. 아아앙…. 하아으…. 아앙…! 나와…. 흑…. 나온다니까아…!”
“기분 좋다고…. 윽…. 나한테 짜증 내지 마…. 젠장…. 귀여우니까.”
“아아앙…! 변태…!! 거기만 자꾸…! 아으…. 아아…! 무서워…! 하아아아앙……!”
“으으윽…! 크윽…. 아우…!!”
영원히 끝나지 않을 쾌락.
황경호는 상대에게 꽉 붙잡혀서 움직이지도 못한 채 쾌락의 커다란 발에 짓밟혔다.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숨이 막혔다. 거기가, 거기가 망가질 것 같았다. 강동현의 손을 꽉 잡았다. 이 순간을 같이 느끼고 있는 상대의 존재가 이 손과 가장 민감한 곳부터 강하게 느껴졌다. 단단한 살덩이, 그의 허벅지, 강한 손, 섹시한 숨소리…. 고통스러운데 갑자기 깊숙한 어디에서부터 어떤 언어가 부상했다. 마치 새어 나올 것처럼….
‘좋아해…. 좋아해. 좋아해. 너무 좋아해.’
네가 미워. 너무 미워. 너무 미워서 죽을 것 같아.
그가 좋았다. 좋아서 미웠다. 원래 그 같은 건 좋아하지 않았다. 싫어했었다. 증오하기도 했다. 자신을 이렇게 만든 그가 원망스러웠다. 그는 결국에 그가 원하는 대로 황경호를 자기 것으로 만들어버렸다.
그는 뭐든지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황경호는 그렇지 않았다. 지금은 서로 좋아할지 모르겠지만 나중은 모르겠다. 여전히 조심하고 싶은데, 이제는 그게 잘 안 되었다. 창피해지고 싶지 않았다. 좋아한다고 말했다가, 좋아했다가 나중에 내버려지는 건 싫었다. 하지만 싫다고 닥치지 않을 리가 없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나 같은 거….’
진짜 별거 아니라서. 섹스는 언젠가 질릴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 아마도 다 끝나겠지. 혼자가 되는 게 무섭다. 언젠가는 끝나기만을 바라고 또 바랐는데 왜 이렇게 되었을까. 밉다. 원망스럽다.
“하아…. 윽…. 경호야…. 황경호….”
길고 긴 오르가즘이 끝나고 나서 강동현이 황경호를 껴안아왔다. 너무나 황홀해서 그냥 이대로 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
“언제 출발해?”
“딱히 예매 안 해서…. 저녁 전까지만 가면 될 것 같아.”
집에 간다고 하길래 새벽같이 갈 줄 알았는데 아침부터 그답지 않게 늑장을 부리는 느낌이었다. 있을까 싶었는데 강동현이 운동을 마치고 왔는데도 집에 있었다. 강동현은 샤워를 금방 하고 나와 말했다.
“데려다줄게.”
“응? 어딜?”
황경호는 책을 읽다가 고개를 들었다. 그가 없다. 강동현은 드레스룸으로 들어가 한참을 있다가 나왔다. 검은색 바지에 회색 라운드넥 티셔츠를 입고 팔은 반쯤 걷었다. 머리는 평소보다 정돈된 느낌이다. 시계도 캐주얼하고 악세사리는 그것 말고는 없다. 가볍게 입은 것 같은데 단정하다. 강동현이야 옷보다 몸이라 훤칠했다. 키가 커서….
“오늘 또 어디 가?”
황경호가 물었다.
“가자.”
강동현이 그렇게 말했다. 황경호가 물었다.
“어딜?”
“너네 집.”
“…응? 왜?”
“데려다준다니까.”
황경호가 엉거주춤 일어났다.
“뭘 데려다줘…. 대전이야, 대전.”
“그러니까 데려다준다고. 언제 터미널 가서 버스 타고 내려가?”
강동현은 드레스룸에서 나와서도 여전히 거울을 보고 있었다. 너무 과하지 않으면서도 그냥 친구 같지만 깔끔해 보이도록…. 뭐, 잘생겼으면 됐지.
“가자.”
“그럼 차라리 기차를 타고 내려가지…. 사람 하나 데려다준다고 그 수고를 왜 해? 네 차 기름값이 더 나와.”
“내 마누라 편하게 모시려고.”
“뭐라는 거야, 진짜!!!”
황경호가 화를 냈다. 이럴 때 그가 화를 내면 귀엽다. 강동현은 황경호를 뒤에서 끌어안아 뺨에 쪽 뽀뽀를 했다.
“우리 경호 손에 물 한 방울 안 묻혀야 하는데 내가 부족해서. 식기세척기 일단 사야겠다. 왜 진작 안 샀지? 나 너 손 거칠어지는 거 진짜 싫은데. 예쁜 손~”
강동현이 황경호의 손에다 또 쪽쪽 입을 맞추었다. 강동현이 장난을 치면서 애교를 떨자 황경호가 얼굴을 붉히며 타박했다.
“또 괜한 돈 쓰려고.”
“뭐 살까? 또 불편한 거 없어? 우리도 공기청정기 살까? 요새 미세먼지도 장난 아닌데.”
“아, 공기청정기는 좀…….”
“세 개 사면 되겠지? 거실, 우리 방, 네 방.”
“아, 그렇게 세 개? 그러게…. 세 개나 사야 하나….”
황경호가 가계부를 떠올려 보며 잠깐 정신이 팔렸다. 그 새에 강동현이 황경호의 가방을 들고 자기는 휴대폰이랑 지갑만 챙기고는 자연스럽게 그를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 황경호는 엘리베이터에 같이 타자마자 아차, 해서는 중얼거렸다.
“진짜 안 데려다줘도 되는데….”
“원래 삼식이들은 운전이라도 잘해야 돼.”
강동현이 아무리 휴식기라지만 요리도 곧잘 하고 같이 해서 삼식이랄 것도 없는데 그는 이런 종류의 농담을 좋아했다. 그들을 부부로 비교하는 농담을 말이다. 황경호한테도 곧잘 마누라라느니….
‘쪽팔리게….’
황경호의 얼굴이 괜히 홧홧하게 달아올랐다. 강동현은 뭐가 그렇게 기분이 좋은지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뭐…. 섹스할 때도 그렇고 그가 집을 다 해온 것이나 황경호가 살림을 거의 다 하는 것이나, 통속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역할이 그렇게 나뉘기는 하는데….
“진짜 괜찮아? 일 있는 거 아냐? 안 피곤하겠어?”
황경호는 자꾸 그렇게 물었다. 지하 주차장에 있는 벤츠 SUV의 문을 열어주면서 강동현이 대꾸했다.
“괜찮아요. 괜찮아. 응? 내가 데려다주고 싶어서 그런다고. 같이 있고 싶어서.”
강동현은 아무렇지 않게 그렇게 설명했다. 황경호는 그가 운전석으로 돌아와 탈 때까지 얼굴을 벌겋게 붉혔다.
차를 출발시켰다.
“아, 너 운전 배워야지.”
“학원 등록할게.”
“그래. 등록해. 필요할 때 차 끌라니까.”
“응….”
이러는 거 보니까 운전하는 거 배우긴 해야겠다. 황경호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강동현이 운을 띄웠다.
“그래서 그러는데요, 경호님. 저 차 좀….”
노는 시간이 많아져서 그런지 강동현은 자꾸 사 새 차를 사고 싶다고 그랬다. 자기 돈이니 결국 그냥 자기가 사버리면 될 텐데 끝까지 황경호의 허락을 받으려고 했다. 물론 통장이나 카드나 이것저것 황경호가 다 들고 있기는 했지만(강동현이 지금 들고 있는 카드는 한도가 작은 데다가 황경호의 폰으로 죄다 문자 알림이 왔다) 결국 같은 집에 살고 있으니 가져가려고 하면 얼마든 가져갈 수 있을 텐데도 말이다. 그런 게 이해도 좀 안 되고 이상하기도 했지만 한 달 가까이 조르니 황경호도 은연중 자기가 결정권자가 된 것처럼 행동하게 되었다.
“진짜…. 5억은 오버라니까.”
“올해도 돈 많이 벌었는데…. 그거 쬐끔인데, 쬐끔.”
“그게 뭐가 조금이야?”
“쓰라고 버는 거야, 쓰라고. 우리 정도 살면 그 정도 차 괜찮다고. 내가 몇 대를 산다는 것도 아니고 딱 한 대 산다는데. 나 진짜 다른 놈들에 비해서 차 적은 편이라고. 알지? 기석이 형도 마세라티 끌어.”
이강유 비뇨기과에 오는 환자이자 배우 한기석을 언급하며 강동현이 졸랐다. 그러자 은근히 마음이 흔들렸다.
‘그래도 남들보다는….’
그리고 그런 자신에게 깜짝 놀랐다. 5억짜리 차에 대한 자신의 생각이 바뀔 수 있을 거라곤 상상도 못 했기 때문이다. 강동현이 귀신같이 그 기색을 알아차리곤 황경호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남자들 사이에 은근히 그런 거 중요한 거 너도 알잖아. 너도 남자면서.”
“…알았어. 카드 주면 돼?”
강동현은 완전 좋아했다. 황경호는 한숨을 푹 쉬었다. 5억…. 무시무시한 숫자다. 강동현이야 연에 황경호의 연봉의 수백 배를 버는 놈이었고 같이 산 지도 좀 됐지만, 이런 건 정말 못 따라가겠다.
아니, 따라간다고 열심히 따라갔다. 가계는 황경호가 관리하니까 말이다. 지금 사는 집은 각종 공과금에 관리비까지 하면 월에 기본 2백은 깨졌다. 거기에다가 강동현의 각종 보험비에 차 끄는 비용까지 하면 천만 원은 그냥 나갔고 거기에 기본적으로 집에서 먹는 거, 칫솔 같은 소모품들 등 생활비도 둘이서 수백이 깨졌다. 싸지 않은 걸 사서 먹고 쓰니 그랬다. 황경호는 항상 최저가의 물건을 사서 쓰곤 했는데 강동현과 살면서는 좋은 음식 재료와 물건을 써야 했기 때문에 그럴 수가 없었다. 다행히 강동현이 운동하고 관리를 받는 건 회사에서 돈이 나오는데 황경호가 하는 건 또 가계 지출이었다. 이것도 달에 백 단위로 나갔다. 거기에 강동현이랑 황경호랑 둘 다 바깥에서 인간관계 유지하는데 또 돈이 든다. 강동현도 일 바쁠 때는 거의 안 썼는데 일을 쉬니까 친구들 만나고 이것저것 하면서 적어도 천 가까이 썼다. 황경호도 백은 쓰는 것 같았다. 게다가 주말마다 데이트도 나가고…. 이렇게 다달이 3천이 넘게 쓴다.
이것만으로도 소시민은 가슴이 벌렁거리는데 2년 치 생활비로 덜컥 차를 사겠다는 강동현이 곱게 보이겠는가.
‘물론 얘 돈 많지. 아는데….’
<시크릿 블러드> 방영 이후로 백억 넘게 통장에 들어왔다. 출연료와 이후 러닝 개런티, 광고 출연료, 콘서트 수익금, 팬 미팅, 사인회 등등까지 해서 120억이 좀 안 된다. 강동현이 지금 당장 일을 그만두고 평생 놀고먹어도 아무런 문제가 없을 돈을 그는 이미 가지고 있었다. 사실 요즘 은행의 각박한 이자만으로도 1년 생활비보다는 더 나온다.
그래도 그런 차 덥석덥석 사면 금방 다 없어질 돈이다…. 집도 올해 덜컥 사면서 안 내도 될 세금까지 내고.
“이번에 차 사면 몇 년은 차 사지 마. 차라리 좋은 일에 돈 써. 어차피 차는 한 번에 한 대밖에 못 끄는데….”
황경호가 한숨을 쉬었다.
“알았어. 알았어. 고마워.”
“아…! 사람들 본다고!”
“못 봐. 못 봐.”
그렇게 대전까지 한 시간 반 정도 운전을 해서 내려갔다.
*
“미쳤어?”
집에 따라 올라가겠다는 강동현을 보고 황경호가 그렇게 말했다. 황경호의 집은 대전 동구에 있는 한 아파트였다. 큰 아파트 단지 내에 속해 있는 것이었다. 아파트 동 앞에 차를 세우고는 트렁크에서 이것저것 꺼내기 시작하자 황경호가 입을 딱 벌렸다.
“이런 건 언제 샀어? 나 아침에 그냥 나갔으면 어쩔려고….”
“그럼 우리가 먹으면 되지 싶어서. 어디로 가면 돼?”
“아, 잠깐만. 잠깐만. 이거 너무 이상하지 않아? 이상하잖아.”
“아니, 우리가 같이 산다고 말한다는 것도 아니고 그냥 인사만 한다니까.”
“진짜 왜 이래? 하지 마.”
이러려고 데려다준다고 한 모양이었다. 황경호는 기겁을 해서 그를 말렸다. 강동현이 두 손 가득히 물건을 들고는 황경호를 재촉했다.
“빨리. 무거워. 어딘데?”
“나 이런 거 진짜 싫어.”
강동현이 또 막무가내이자 황경호가 말했다. 강동현이 약간 한숨을 쉬며 그를 돌아보았다. 그는 또 약간 궁지에 몰린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내가 너한테 잘못한 것도 많고…. 죄송해서 그래. 별말 안 할 거야. 그냥 얼굴만 뵙고 난 갈게.”
“…그래도 이상하잖아…. 내가 너랑 안다는 것도 이상한데….”
“술 먹고 친구 됐다고 하지, 뭐.”
강동현은 전혀 문제 될 것 없다는 듯이 그렇게 말했다. 황경호는 그의 기세에 밀려 결국, 주저주저하며 그를 집으로 안내했다.
황경호의 본가는, 서울에서 그가 지내던 걸 생각해보면 조금 의아할 정도로 괜찮은 집이었다. 전형적인 중산층 주거 환경이라고 보면 될 것 같았다. 평수는 30평대 중반에 방 3개, 욕실 2개가 딸린 아파트였다. 황경호는 끝까지 주저하면서 초인종을 눌렀다.
“비밀번호 몰라?”
“까먹었어.”
그 사이 인터폰에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누구세요?]
“엄마, 저예요.”
황경호가 목소리를 가다듬고 그렇게 말했다. 곧 현관문이 열렸다.
“그게….”
황경호는 벌써부터 변명 조로 뭔가 설명하려고 했다. 강동현은 그의 말을 가로채며 웃는 얼굴로 선글라스를 벗었다.
“안녕하세요, 어머니.”
황경호의 엄마가 입을 딱 벌렸다.
“강동현?”
“경호 친구 도은혁이라고 합니다. 대전 내려올 일이 있어서 같이 내려왔는데 짐 좀 같이 들어준다고요.”
강동현도 필요할 때는 황경호 뺨치게 사근사근하게 굴 수 있었다. 황경호의 엄마는 강동현이 건네는 짐을 하나 자연스럽게 받으며 들어오라는 듯이 옆으로 비켜섰다. 원래 연예인은 실물을 보면 더 잘생겼다. 인물을 평상시 어디서 보겠는가. 얼굴만 쳐다보고 있었다.
“경호 친구라고….”
황경호의 엄마는 황경호를 쳐다보았다. 황경호는 바짝 긴장해서는 작게 말했다.
“그게 어쩌다가….”
일단 집까지는 들어왔다. 강동현은 집안 식탁까지 딱 짐만 옮겨주고는 인사말을 다시 했다.
“야, 나 갈게. 갈게요, 어머니.”
“아니, 아니…. 차라도 한잔하고 가요.”
황경호의 엄마가 그렇게 강동현을 붙잡았다. 강동현이 미소를 지으며 반겼다.
“정말요? 감사합니다. 그러면 물 한 잔만….”
“앉으세요.”
황경호의 엄마는 당황해서 약간 긴장한 모습이었다. 황경호에게 자리를 안내하라고 하고 부엌으로 가셨다. 황경호는 강동현을 거실의 소파에다 앉혀두고는 자기도 부엌으로 향했다.
‘엄청 닮았다.’
강동현은 부엌에서 나란히 서 있는 모자를 보면서 그렇게 생각했다. 황경호의 부드럽고 섬세한 느낌은 엄마한테서 거의 다 물려받은 것 같았다. 얼굴 생김새가 완전 판박이다. 하지만 엄마 쪽이 인상이 더 강하다. 그리고 집을 잠깐 둘러보며 구경했다. 어렸을 때부터 여기서 살았다고 들었다. 황경호의 방을 보고 싶었지만 참았다.
“집에 있는 게 없어서….”
황경호의 어머니는 차와 다과를 내놓으며 그렇게 말했다. 황경호도 엄마를 도와서 접시를 가져왔다.
“물 한 잔이면 되는데…. 감사합니다.”
“영화랑 드라마 다 잘 보고 있어요. 사인이라도 한 장 받아야겠네.”
그제야 황경호의 어머니는 진짜 톱스타 강동현을 직접 만난다는 실감이 났는지 그렇게 말했다.
“그나저나 경호랑은 어떻게 알게 됐어요? 학교 친구일 리도 없고….”
어머니가 그렇게 묻자 황경호는 강동현이나 알아차릴 수 있을 정도로 확 긴장했고 강동현은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
“그게….”
“아, 아는 형이 술집을 하는데 거기 단골이라서 만났어요. 그 형이랑 경호랑 친해서요.”
그러자 황경호의 어머니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황경호를 돌아보았다.
“너 술 마시고 돌아다녀?”
“아, 아뇨. 아뇨…. 그냥 가끔….”
“얘가 요즘 어떤 경긴데…. 너 월급에 그런 거 할 수 있는 처지니? 얼른 돈 모아서 전세부터 할 생각해야지.”
황경호의 어머니는 그렇게 황경호를 혼냈다. 강동현이 먼저 손사래를 쳤다.
“아뇨. 아뇨. 얘 술 못 마셔서….”
황경호의 어머니는 저녁까지 같이 먹고 가라고 했다. 강동현은 몇 번 사양하다가 받았다.
“대전에는 무슨 일로 오게 된 거예요? 사인회라도 하는 거예요?”
“말씀 편하게 하세요, 어머니. 대전은 아니고…. 무주에 외할머니가 사셔서 내려오는 김에 대전에 경호도 데려다줄 겸 왔어요.”
“아니, 그러면 빨리 가야 하는 거 아니에요?”
“아뇨. 아뇨. 제가 요즘 휴식기라 시간 많습니다.”
“그래도 저기 사 온 것들도 그렇고….”
“아, 저거 경호가 산 거예요. 집에 오랜만에 와서 부모님 드린다고. 저는 음료수 저거 하나 사 온 거예요.”
강동현이 웃으면서 그렇게 말했다. 황경호랑 황경호의 엄마 둘 다 깜짝 놀랐다.
“넌 저런 걸 저렇게 많이 사 오면 어떡해. 돈이 남아도니? 정말이지…. 아무리 이런 친구 생겼다지만 그렇다고 돈을 이렇게 펑펑 쓰면서 살아? 너 원래 안 이랬잖아. 분수에 맞게 살아야지….”
어머니는 인상을 확 찌푸리면서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물건들을 다시 살피러 갔다. 황경호는 자기 엄마와 강동현의 눈치를 동시에 살피더니 귀가 좀 빨개져서는 자기 엄마를 따라갔다. 그러면서 강동현에게 입 모양으로 소리 없이 속삭였다. 미안.
“이런 건 그냥 들고 가서 환불해. 다 있는 거야.”
“환불은 좀…. 그냥 쓰세요.”
“너 돈이 어디서 나서 이런 거 사고 이러는 거야? 요새 어려워서 집에 돈 보내는 것도 줄여 놓고.”
“그건…. 다시 예전만큼 보내드릴게요. 죄송해요.”
“너 돈 있으면서도 그런 거야? 엄마 좀 섭섭해지려고 한다.”
“죄송해요….”
“너 어렸을 때부터 은근히 이기적인 건 알았지만…. 아, 이런 걸 왜 비싸게 사? 얘가 안 이러면서 왜 이렇게 바보같이….”
황경호의 어머니가 그렇게 한숨을 쉬었다. 황경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자기 어머니가 물건을 정리하는 걸 도와주고 있었다. 서로 작게 말한다고는 했지만 거실에 있는 강동현에게도 고스란히 들렸다.
“…….”
강동현은 뭔진 모르겠는데 좀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그때 현관문 비밀번호가 눌리는 소리가 나며 누군가 들어왔다.
“우리 아들 왔다며?”
누군가 밝은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보니까 평범한 50대 중반 아저씨 하나가 집에 들어왔다. 배가 좀 나오고 인상이 좋다. 그리고 거실에 있는 강동현을 보고는 깜짝 놀라서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강동현?”
“아, 아빠….”
황경호가 얼른 부엌에서 거실로 나왔다. 황경호의 아빠는 황경호의 팔을 잡고 강동현에게 손가락질을 했다.
“네가 데리고 온 거야?”
“아, 그게….”
“안녕하세요, 아버님. 경호 친구 도은혁이라고 합니다.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저도 지방 내려올 일이 있어서 어쩌다가….”
강동현은 자리에서 벌써부터 일어나 있었다. 그렇게 자기소개를 했다. 아버지는 거실 상석에 앉아서는 여전히 눈을 휘둥그레 뜨고는 강동현을 외계인이라도 보듯 쳐다보고 있었다. 황경호의 어머니보다도 훨씬 놀라신 것 같았다.
“진짜 잘생겼네. 허 참. 아들, 친구야? 어떻게 알게 됐어? 응? 둘이 언제부터 알고 지냈는데?”
“2, 3년 됐습니다. 아는 형이 술집을 하는데 거기서 알게 돼서….”
“그런 데 비싼 데 아니야? 아들, 그런 데는 어떻게 알고 갔어?
“비싼 데는 아닌데….”
“그냥 아는 형이 소소하게 하는 술집이라…. 제가 일도 바쁘고 힘들 때 얘기도 잘 들어주고 해서 친해지게 됐습니다.”
“경호가 친구 집에 데려오는 건 또 처음이네. 많이 친한가 봐?”
“예. 많이 친해졌습니다.”
“연예인 실제로는 처음 봤네…. 그래서, 얼마나 벌어?”
황경호의 아버지가 갑자기 그렇게 물었다. 강동현은 약간 당황하고 황경호는 아버지를 말렸다.
“아, 아빠. 그런 건 왜 물어봐요.”
“아니, 궁금하잖아. 예전부터 궁금했는데. 연예인들 얼마나 버는지.”
“생각보다 그렇게 많이는 못 법니다.”
강동현이 그렇게 대답을 했다.
“대학은 나왔나?”
“아직 다니고 있습니다. 가을에 한 학기만 다니면 졸업입니다.”
“그래? 아직 고졸이네?”
“아, 네. 그렇죠.”
“연예인들은 활동한다고 제대로 출석도 안 하고 학점 딴다더니 그런 거 아니야?”
“아빠….”
황경호는 귀가 빨개져서는 강동현의 눈치를 보고는 아빠를 말렸다. 황경호의 아버지는 이게 뭐 별거냐는 태도였다.
“아니, 못 물어볼 거 물어본 것도 아니고…. 궁금하잖아. 우리 경호는 중고등학교 다닐 때 속 하나도 안 썩히고 자기가 다 알아서 해서 대학교 가고 그러더라고. 과외 한 번 안 시켰는데도 좋은 대학 간호학과 가서 빨리 취직하고. 그런 게 효자지. 요새는 남자 간호사들도 많잖아. 안 그래?”
“네, 네. 그렇죠. 일 힘들어도 열심히 하고 항상 대단하다고….”
“아니…! 고된 일은 아니지. 응급실이나 이런 데서 일하는 것도 아니고. 편하게 하는 편이지, 편하게. 성적 좋아서 좋은 병원에 취직하고. 대학교 다닐 때도 전액 장학금 받고 다녔어, 우리 아들.”
“아, 그랬어요? 진짜 공부 잘했나 보네요.”
“과 수석 맨날 하고.”
“아빠….”
황경호는 얼굴이 홧홧하게 달아올라서는 자기 아빠의 입을 막으려고 했다. 부엌에서 음식을 준비하던 황경호의 엄마가 갑자기 끼어들어 말했다.
“뭘 잘해. 고등학교 때 좀만 더 해서 수능만 잘 쳤어도 진짜 사람들이 부러워할 만한 곳 들어갔을 텐데. 그런 것도 아니잖아.”
“에이, 그래도 그 정도면 잘한 거지.”
“당신이 애를 그렇게 오냐오냐하니까 애가 더 못한 거잖아.”
“너 항상 그렇게 말하더라. 내가 뭘 어쨌길래?”
어머니와 아버지는 그렇게 대화를 나누었다. 황경호는 결국 포기했다. 그는 강동현도 보지 않고 창밖으로 시선을 돌리며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잠깐 그대로 있다가 강동현을 돌아보고 작게 물었다.
“갈래…? 내가 잘 얘기할게. 미안.”
“아니…. 괜찮아.”
“진짜 미안…. 이럴 줄 알았어야 했는데. 진짜 가고 싶으면 가도 돼. 지금 일어날래?”
뭐가 자꾸 미안하다는 건지 모르겠다. 괜찮다고 하려는데 황경호의 아버지가 들었다.
“에이, 자고 가. 자고 가. 경호 친구라며. 술은 좀 할 줄 아나?”
“아, 아빠. 얘 지금 술 끊는데….”
“응? 둘이 술집에서 친해졌다며?”
“어…. 그렇기는 한데….”
황경호는 그렇게 말을 흐리다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웃으면서 자기 아버지를 보았다.
“아빠는 나랑 술 마셔야죠. 오랜만에 봤는데 아들은 제치고 강동현 봤다고…. 난 쳐다도 안 보네.”
“어, 그랬나, 아빠가? 우리 아들 섭섭했어?”
그제야 황경호의 아빠는 황경호를 돌아보면서 사람 좋게 웃었다.
“말 나온 김에 술 한잔할까?”
“아, 얘는 자기 외가집 가야 하니까 술 주지 마세요. 운전해야 돼요.”
“아, 그래? 오늘 가는 거야? 자고 가지.”
“엄마도 오세요. 오랜만에 아버지랑 술 한잔하세요. 제가 음식 할게요.”
“네가 무슨 음식을 할 줄 안다고 그래?”
“저 좀 배웠어요. 뭐 하고 계셨는데요?”
황경호는 부엌으로 가서 잽싸게 술 몇 병과 안줏거리를 내서 거실로 가져오고 엄마를 부엌에서 데려와서 거실에 앉히고 강동현은 일으켜 세웠다. 뭔가 척척이다.
‘일하는 것도 아니고….’
거기에 강동현이 받은 인상이었다.
“진짜 가게요? 저녁 같이 하고 가지 그래요.”
“얘 할머니 댁 가야 하잖아요.”
“그래도 아쉽다. 아, 사인받아야지.”
“몇 장 받아. 친구들도 좀 주게.”
“사진도 찍을까?”
그렇게 부산을 떨고 사인을 하고 사진을 찍고 그랬다. 그리고 강동현을 배웅하면서 얘기를 나누었다.
“우리 아들이랑 친하게 지내줘서 고마워요. 서울 가서 혼자 살아서 걱정 많았는데. 친구들이나 있는지 모르겠고.”
황경호의 어머니가 그렇게 말했다. 강동현이 웃으며 말했다.
“경호가 원래 친구들도 많고 사람들이랑 잘 지내잖아요.”
“그럼 다행인데…. 애가 좀 까탈스럽고 그렇지 않아요? 은근히 따지는 것도 많고…. 그래도 좀 봐줘요. 나쁜 애는 아니니까.”
황경호의 어머니가 그렇게 말했다. 강동현이 손사래를 쳤다.
“아니에요. 진짜 착하고 좋은 앤데요.”
그렇게 말하자 황경호의 어머니는 더 탐탁지 않은 얼굴을 했다.
“착한 게 무슨 소용이에요. 그리고 착하긴 뭐가 착해요. 부모 마음 하나 헤아릴 줄 모르는 앤데. 참….”
…뭘 어쩌란 말인가. 강동현은 저도 모르게 황경호를 쳐다보았다. 황경호는 시선을 내리고 가만히 그 말을 듣고 있기만 하다가 강동현의 시선을 느끼고는 그냥 살짝 웃으면서 또 입 모양으로 말했다. 진짜 미안.
강동현은 이제는 진짜 울컥해서 뭐라고 하고 싶어졌다. 하지만 뭐라고 할 수가 없었다. 한숨이라도 쉬고 싶은데 그럴 수도 없었다. 강동현도 웃는 얼굴로 인사를 마저 하고 나올 수밖에 없었다.
“그럼 저 가보겠습니다.”
“그래요. 다음에 또 봐요.”
“봐서 반가웠어. 어휴, 또 봐도 잘생겼다. 잘 가요. 외할머니 잘 보고.”
황경호의 아버지는 강동현의 등을 팡팡 두드리며 그렇게 말했다. 강동현은 그렇게 현관문 밖으로 나왔다. 문이 닫혔다.
“…….”
그리고 그 현관을 다시 돌아보았다. 그대로 조금 있다가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1층으로 나와 지상 주차장에 있는 차에 올라탔다. 깊은 한숨이 나왔다. 잠깐 운전석에 등을 기대고 가만히 있었다. 잠시 뒤 휴대폰을 꺼내서 화면을 보았다. 그리고 전화를 걸었다. 상대가 전화를 받았다.
“…….”
[…….]
“전화 받을 수 있어?”
[응….]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강동현은 한숨을 쉬지 않으려고 노력하면서 물었다.
“언제 서울 올라갈 거야? 오늘 밤? 내일?”
[그래도 내일까지는 있어야 할 것 같은데….]
“알았어. 나 여기 호텔에 있을 테니까 오고 싶을 때 와. 내일 같이 서울 올라가자.”
[안 그래도 돼. 왜 그래…. 하지 마. 올라가. 불편하잖아.]
“내가 뭐가 불편해.”
강동현은 결국 한숨을 쉬었다. 강동현은 미간을 주무르다가 결국엔 입을 뗐다.
“…경호야.”
[응…]
“그냥 나와. 가자.”
[어딜?]
“집에.”
[…….]
“빨리 나와. 아직 밑에 있으니까.”
[무슨 소리야…. 온 지 얼마나 됐다고….]
“그냥 나오라고.”
[…….]
“듣고 있어? 나오라니까.”
[우리 부모님이 너 불편하게 한 건 알겠는데…. 그래서 내가 올라오지 말라니까….]
“그런 말이 아니잖아.”
강동현은 답답해서 약간 화를 냈다.
“너 불편하게 하잖아, 네 부모님이. 그러고 있지 말고 그냥 나오라고.”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마.]
“일단 나와.”
[…….]
“나오라고.”
[…끊을게.]
“야!”
황경호는 이미 전화를 끊었다. 강동현은 벌써 화가 턱 끝까지 차올랐다. 아까 어른들 앞이라고 참아야 해서 더 그런 것 같았다. 강동현은 다시 전화를 하려다가 참고는 일단 차를 출발시켰다. 차를 좀 몰고 나가서 호텔로 향했다. 전에 대전에 왔을 때 묵은 적이 있는 비즈니스호텔이었다. 도착해서 체크인을 하고는 바로 황경호한테 문자를 넣었다.
강동현은 별로 배도 안 고파서 바로 씻고 침대에 일단 누웠다. 그런데도 갑갑함이 사라지지를 않았다. 강동현은 그대로 뒤척여 엎드렸다.
마음이 아팠다.
‘제기랄….’
뭔지는 잘 모르겠다. 설명을 제대로 할 수는 없었다. 그런데 진짜 가슴이 아팠다.
다른 부모들은 저런 걸까?
다른 사람이 황경호한테 그랬더라면 곧바로 그들에게 욕이라도 한 바가지 하고 그를 끌고 나왔을 것이다. 아니, 설사 다른 사람들의 눈이 있어서 그렇게 하지 못하더라도 그에게 시원하게 그들의 욕이라도 하면서 그들이 얼마나 잘못한 것인지 그에게 얘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건 그의 부모였고, 부모는 그를 사랑하고 염려한답시고 그런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고 있었고 황경호는 그걸 그렇다고 생각하고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아니지….’
알 거다. 그가 더 잘 알 것이다. 젠장…. 아니, 제대로 아는 거 맞아? 그냥 놔두고 온 게 잘한 거야? 저 부모들은 왜 저러는 거야, 씨발….
정신과 의사 노여진이 전에 했던 말이 기억났다. 사랑한다며 아이를 때리면 아이는 평생 결핍을 느끼고 제대로 된 판단을 하는데 힘겨움을 느끼게 된다. 곧잘 부모의 나쁜 점을 닮은 배우자를 선택하게 되고….
‘아, 씨발…….’
황경호에게 강동현은 좋아하는 애를 괴롭히는 어린애처럼 굴었다. 좋아한다면서 괴롭혔다. 좋아하니까 괴롭힌다고 했다. 싫어하는 짓을 잔뜩 하면, 그래도 그걸 참아주고 받아주는 게 좋았다. 귀여웠다. 자신을 좋아하니까 이런 것도 받아준다고 생각하면 사랑스러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는 자꾸 자신을 부끄러워했다. 그런 그가 자신의 부모가 가진 천박함이나 상스러움을 못 알아차릴 리가 없다. 알아차리지 못하기엔 그는 너무 똑똑하고 섬세했다. 그는 자신의 부모를 부끄러워했기 때문에 자신을 부끄럽게 여기는 것이었다. 그는 자신의 부모에게 아무런 기대를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자기 자신에게도 아무런 기대를 하지 못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이 자신을 업신여기거나 함부로 대하면 상처받고 기분 나빠 하면서도 결국엔 체념했다. 불합리에도 저항하기보다는 그냥 자신이 손해 보겠다고, 아니 자신이 포기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곤 했다. 그는 자신의 생각을 말하지 않았다. 아마도, 한 번도 받아들여진 적이 없어서 그런 것이다.
어떻게든 해주고 싶었다. 마음이 아팠다. 그를 행복하게 해주고 싶었다. 그런데 이런 경우엔 어떻게 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강동현은 엎드린 채로 손을 뻗어 휴대폰을 찾았다. 그리고 화면을 보고 바로 단축 아이콘을 눌러 전화를 걸었다. 안 받는다. 그러니 곧바로 짜증이 나고 화가 났다.
‘병신…. 그걸 왜 참아. 그냥 나오라니까.’
강동현은 한숨을 푹푹 쉬다가 다른 사람한테 전화를 걸었다.
[오냐.]
“뭐 하냐.”
[누워 있다. 왜.]
누나였다. 강동현은 바로 누워서 천장을 보았다. 곧장 용건을 안 말하니 누나가 말했다.
[할 말 없으면 끊어라. 미드 본다.]
“야, 다른 부모들은 우리 엄마, 아빠처럼 안 그러냐? 난 우리 엄마, 아빠 평균이라고 생각했는데.”
[뭐가.]
“나…. 아는 애 부모님을 잠깐 만났는데 오늘….”
[너 여자 생겼냐?]
누나가 바로 눈치 빠르게 그렇게 말했다.
[거참 용한 놈일세. 임포라면서 여자가 또 붙긴 붙네. 너 엄마 아빠한테 잘해라. 그게 다 부모님 덕이다.]
“아, 너나 쓸데없는 말 좀 하지 마라. 짜증 나게.”
[고자한테 고자라고 말도 못 하고~]
“아, 씨발. 진짜 작작해라.”
[큭큭. 병신. 뭐. 왜. 여자 부모가 별로냐?]
“어…. 애한테 말을 진짜 거지같이 한다, 진짜로. 애 기를 완전 죽여.”
그래. 애 기를 죽인다. 제기랄. 강동현은 본인 입으로 그렇게 말해 놓고도 그 사실에 아직도 가슴이 좀 아팠다.
“씨발…. 얘 진짜 착하거든? 엄청 착해. 예의 바르고 착하고…. 씨, 그런데 그런 애한테 자꾸 이기적이라고 하고 바보 같다고 하고…. 진짜 듣고 있는데 돌아버리는 줄 알았어.”
[뭐. 그런 부모들도 있지.]
도은연은 흔하고 별거 아니라는 듯이 그렇게 말했다. 강동현은 그 사실이 싫었다.
“아니, 해준 것도 없으면서 애한테 바라는 건 왜 이렇게 많아? 말이라도 좀 곱게 하든가. 애한테 뭐 맡겨 놨냐고. 그렇다고 애가 또 뭐 해주면 해주는 대로 지랄하고. 어쩌라고. 씨발.”
[뭐야…. 걔 누구야? 언제부터 만났어? 엄청 빠졌네?]
“야, 너 자꾸 딴 데로 샐래?”
[아, 이 새끼가 자꾸 누나한테 너, 너. 죽고 싶냐? 끊어.]
강동현은 발을 구르며 다시 엎드렸다. 그리고 웅얼거리듯이 말했다.
“아니, 누나…. 씨발, 그래서 이러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하냐고….”
누나는 진짜 머리가 좋고 똑똑했다. 아는 것도 많고 할 줄 아는 것도 많아서 엄마고 아빠고 무슨 문제가 있으면 누나한테 물어볼 때가 많았다. 누나가 한 살, 두 살 나이가 들수록 더 그랬다. 공부도 잘했지만, 다른 머리도 뛰어났다. 누나는 사업가였다. 직장 때려치우고 시작한 지 이제 몇 년 되었는데 잘 굴러갔다.
[뭘 어떡해. 그냥 잘해.]
“지금 걔 자기 부모랑 자기 집에 갔는데…. 씨발, 그냥 데리고 나오고 싶다.”
[뭘 그렇게까지 해. 그래도 걔 부모잖아. 오버하지 마.]
“얘가 착한데…. 겁도 많고 가끔 너무 부끄러워하고 자기를 싫어해서 왜 그런가 했는데…. 지 부모 때문이잖아. 오랜만에 만났다고 지금도 엄청 털리고 있을 것 같은데.”
[오버하지 마라.]
도은연은 아주 성의 없이 그렇게 말했다. 강동현은 울컥 화가 나서 고개를 들었다.
“뭐가 오버야? 씨발, 진짜 좆 같았다니까.”
[남의 집에 간섭하는 거 아니야. 네가 책임질 거냐?]
“내가 책임질 거야.”
[얼씨구?]
“주로 걔 엄마가 애 잡아. 근데 아빠도 도움 안 돼. 방관하거나 눈치 없이 굴어. 둘 다 좀 상스러워….”
[뭔지 알아. 그런 부모들 많아. 경중은 있어도…. 우린 운 좋은 거야.]
“…….”
그게 운이 좋다, 나쁘다로 끝나는 상황일까. 강동현은 황경호가 체념하고 자기 엄마나 자기 아빠가 자신을 매도하는 말을 그저 듣고 있던 모습을 떠올렸다. 오히려 익숙하다는 듯이, 아니면 진짜 자기가 그렇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이기적인 게 아니라?]
언젠가 그는 그렇게 물었던 적도 있었다.
[근데 보통 부모들 문제 있어도 그런 거 접근하기 되게 어려워. 걔한테 뭐라고 할 건데? 연 끊으라고 할 거야? 그 말에 더 상처받을걸.]
“그럼 그대로 둬? 그게 더 나은 거야?”
[아니…. 보통은 연 좀 끊는 게 더 도움되지. 말은 그렇게 안 하지만.]
“아, 그럼 어쩌라고.”
[그런 거 보통 스스로 못 깨달으면 아무런 소용 없어. 억지로 연 끊게 하면 해결될 거 같아? 그러면 오히려 자기 부모를 판타지 화해. 그래도 이런 건 괜찮았지. 저런 건 좋았지 이러면서. 매 맞는 아내 증후군이랑 똑같은 거야.]
누나는 정신과 의사랑 비슷한 말을 했다.
[네가 거기서 걔 부모 욕하면 너만 나쁜 놈이야. 걔는 오히려 자기 부모 방어하면서 애착감을 더 형성한다고.]
“그래도…. 얘는 자기 부모가 자기한테 하는 말이 안 좋은 거라는 건 알고 있는 것 같아. 그냥 참는 거고 내 앞이라 좀 더 부끄러워하는 것 같았고…. 그냥 체념하고 있는 거 같았어.”
[걔 부모랑 같이 안 산다고?]
“응. 그래서 빨리 독립한 거 아닌가 싶기도 하고….”
[그럼 됐어. 자기도 대충 알고 있네.]
“된 거라고? 왜? 얘 안 괜찮아.”
강동현만 아는 것이지만 말이다. 그는 여전히 때때로 우울해하고 그걸 숨겼다. 전보다는 나아졌다는 걸로 만족했다. 강동현이 이렇게나 좋아하는데도 믿지를 못했다. 그게 끝나는 것부터 두려워했다. 믿는 순간 배신을 당하기라도 할 거라는 것처럼.
[그럼 걔 얘기나 좀 많이 들어줘. 화내지 말고, 병신아. 그런 거 누구한테 얘기해본 적도 없는 애면 누구한테 얘기하는 것만으로도 좀 좋아져. 보통 부모마저도 자기 얘기를 제대로 들어주지 않는다는 게 문제니까. 아니면 어디 상담이라도 받게 하든가.]
“아, 상담…. 예전부터 내가 가라고, 가라고 했는데 절대 가기 싫어해.”
[자존심 센 애네. 더 힘들었겠네. 그래도 가라고 해. 가는 게 더 나아. 아, 근데 카운셀러도 좋은 사람이어야 한다. 가끔 더 안 좋게 하는 놈들도 있으니까.]
“아, 어. 오케이….”
[넌 진짜 얘기나 좀 들어줘. 똑같은 얘기라도 그냥 계속 들어줘. 네가 뭘 해결하려고 하지 말고. 보통 본인들이 더 잘 알아. 멍청하지만 않으면. 지들 스스로 얘기하다 보면 보통 답이 나오니까.]
어쩐지 전에 김태형이 강동현의 얘기를 잘 들어줬기 때문에 강동현 스스로 얘기를 하다가 답을 찾곤 했던 것을 떠올렸다. 당사자를 본 적도 없는 주제에 성격 때려 맞추는 것도 감이 엄청 좋다. 강동현은 새삼 누나한테 물었다.
“누나…. 이런 거 어떻게 알아?”
[너랑 나는 뇌세포부터 수준이 다르다는 걸 아직도 모르냐?]
“오늘은 인정. 알았다. 미드 마저 봐라.”
[오냐.]
누나는 그렇게 전화를 끊었다. 강동현은 대충 머릿속으로 정리를 했다. 노여진이랑 상담. 얘기를 들어줄 것. 화내지 말 것. 많이 들어줄 것.
호텔의 위치는 번화가와 그렇게 멀지는 않았지만 주변에 소음을 낼 만한 장소가 거의 없었기 때문에 아주 조용했다. 그리고 한밤중, 아니 새벽, 해가 뜨기까지 30분이 채 안 남았을 때쯤에 조용히 문이 달칵 열렸다. 조심조심 문을 닫고 누군가 들어왔다. 그는 자고 있는 사람을 확인하고는 곧장 욕실로 향했다. 조용히 씻고는 목욕 가운만 입고 침대로 향했다. 자고 있는 사람의 옆에 누웠다.
“왔어….”
강동현은 눈을 제대로 뜨지도 못하고 그를 끌어안았다. 쭉 끌어당겨서 몸을 맞대어 꽉 끌어안았다. 황경호는 그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게 되었다. 황경호는 이유 없이 눈물이 글썽했다.
여긴 왜 왔을까
오랜만에 새벽에 깼다. 해가 뜰 때까지 멀뚱멀뚱 기다리고 있으려니 또 기분이 안 좋아졌다. 밖으로 나왔는데 갈 데가 없었다. 그래서 여기로 왔다.
부모도, 강동현도 일상적으로 그에게 상처를 입히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강동현은 아예 대놓고 나쁜 짓만 골라서 황경호한테 했던 적도 있었다. 하지만 부모는 놓을 수가 없었고 강동현은 좋아했다. 둘 모두에게 애증을 느끼면서 놓지 못하는 자신에게 무력감마저 느껴졌다. 무엇도 황경호가 선택한 것이 아닌데 황경호는 그것을 받아들이고 오히려 더 애착을 느끼고 있었으니 말이다. 멍청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도 부모보다는 그가 더 기대를 걸 수 있는 상대 같다는 느낌을 받고 있었다. 강동현은 현재 황경호에게 아주 가시적인 애정을 주고 있었으니까 말이다.
믿을 수 있을까? 아니, 믿고 싶은 것이다. 좋아하니까. 황경호에게는 그것밖에 없는 것이다.
“자…?”
황경호가 조용히 물었다. 강동현이 답했다.
“응….”
“미안…. 깨웠지?”
“아니. 잘 왔어….”
“어제는 미안…. 진짜 불편했지….”
“아냐. 그래도 너희 부모님 얼굴 봐서 좋았어.”
“전화도 그렇게 끊어서 미안.”
“그것도 내가 미안하다. 내가 또 억지 부렸잖아. 잘했어.”
강동현은 황경호의 몸 위에 자기 다리를 올려 더 그를 끌어안았다.
“언젠가 너네 부모님한테 너랑 같이 산다는 얘기하기 전에 얼굴은 한 번 봬야 하지 않겠나 싶어서 간 거야. 남의 집 귀한 아들을 내가 이렇게 낼름 데리고 가버렸는데.”
“그런 걸 왜 얘기해. 미쳤어?”
“얘기 안 해도 자연스럽게 들키지 않을까 싶은데…. 특히 우리 엄마한테는 안 들킬 자신 없다. 지금도 집 한번 봐야 되지 않겠냐고 자꾸 온다고 하고…. 우리 누나도 그렇고…. 우리 누나 눈치가 백 단이거든. 너 보자마자 알아차릴 것 같은데….”
“…….”
황경호는 아무 말도 못 하고 가만히 있었다. 강동현은 한쪽 눈을 떠서 어스름한 새벽빛을 의지하여 그의 얼굴을 보았다. 강동현은 피식 웃으면서 그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왜. 완전 나한테 코 꿸까 봐 겁나?”
“…나보다도 네가….”
“난 솔직히 상관없어. 부모님이나 누나가 뭐라고 하든 너랑 같이 살 거고 별로 달라질 건 없어. 우리 부모님이나 누나 성격에 연 끊는다 뭐다 오버할 리도 없고 괜찮아. 너한테 해코지도 안 할 거고.”
“그럼 다행인데……. 그래도 우리 부모님한테는 말 안 하는 게 좋을 거야.”
“왜? 막 연 끊는다고 하실 것 같아?”
“그것보다도…….”
황경호는 말을 잇지 않았다. 강동현은 누나의 말을 기억하고 물어보았다.
“왜? 걸리는 거 있으면 말해. 조심할게.”
“그냥…. 진짜. 우리 부모님한테는 조심하자. 말 안 하고 싶어.”
“알았어. 네가 편한 대로 해. 네 말대로 할게.”
“고마워….”
황경호는 약간 인상을 찌푸리며 그의 목덜미에 얼굴을 눌렀다.
“근데 그런 거 그래도 말 안 하는 게 좋지 않아? 나중에 어떻게 될지도 모르는데…. 진짜 누가 알기라도 하면 흠 되잖아….”
강동현은 웃으면서 황경호를 안아서 자기 위에 올렸다. 가운이 흐트러졌다.
“포기해. 포기해. 그런 거 흠 될까 봐 걱정해도 소용없어. 너 나랑 평생 살아야 된다니까.”
“…….”
가끔 이렇게 말이 안 통한다. 황경호야 어차피 누구랑 결혼해서 평생 산다든가 하는 옵션은 거의 없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별로 자신도 없고 그러고 싶은 상대가 나타날 거란 생각도 들지 않았다. 하지만 강동현은 달랐다. 이런 거 누구한테 들키기라도 하면 정말 흠 될 것이고 그러면 잃을 게 많은 건 강동현이었다.
항상 이랬다. 잃을 게 많은 건 당연히 강동현이었는데도 강동현은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 걸까.
“나 같은 거… 왜 좋아해?”
섹스할 수 있어서? 뒷말은 붙이지 않았다. 황경호는 눈을 감고 있는 강동현을 내려다보았다. 강동현이 눈을 떴다.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마, 좀. 이제 그냥 좋다니까. 그냥 보면 좋은데 어떡하라고. 그냥 좋아. 좋아. 좋아해. 응? 좋아 죽겠어. 네가 나 좀 어떻게 해줘. 네가 나 데리고 살아야 한다고. 나 너 없으면 이제 못 살아.”
“너…. 나 착해서 좋다고 했었지, 전에….”
“예전 집에서?”
“응….”
“그랬지. 귀엽다고.”
강동현은 황경호의 귓불을 만지작거렸다. 황경호가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나 사실 별로 안 착해. 엄마 말대로 따지는 것도 많고 까다롭고…. 그냥 남들이 뭐라고 하는 거 싫으니까…. 그냥 가만히 있는 거야. 너도 이제 알겠지만….”
“사람들 다 그 정도는 해. 그런 거 감안해도 넌 진짜 착한 거라고. 사람이 물러 가지고…. 안 착한 사람들이 남들이 하는 말 일일이 신경 쓸 것 같아? 게다가 네가 남들 뒷담 까는 거 한 번도 들어본 적도 없고 좋은 얘기만 하고 다른 사람들 격려해주는 말밖에 안 하면서.”
“…니 뒷담은 했는데. 엄청….”
“…진짜?”
“응….”
황경호가 그렇게 고백했다. 강동현이 약간 당황해서 그의 얼굴을 보았다가 끙하고 눈을 한 번 감고는 선선히 인정했다.
“그래…. 남편 욕은 다 하는 거지.”
“…….”
황경호는 확 하고 빨개져서는(어두운데도 티가 날 정도였다) 말을 잃었다. 강동현은 그의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뭐가 불만인데? 응? 나한테 말하라니까. 내가 다 들어주는데 왜 밖에 나가서 얘기를 해. 아, 하지 말라는 건 아닌데 궁금해서. 응. 궁금해서. 뭐가 불만인데?”
강동현은 아닌 척하면서 막 재촉했다. 황경호는 얼굴이 벌게져서는 고개를 돌렸다.
“아무것도 아니야.”
“내가 막 이런 거 해서? 응? 이런 거?”
“아…! 하지 마….”
황경호의 목에 입을 맞추면서 가운 사이로 손을 넣어 몸을 만지니 황경호가 움찔하며 그의 손을 잡았다.
“이, 이런 걸 어떻게 말해. 으응…. 아응…. 하지 말라니까….”
강동현은 뭔가 뿌듯한 것이, 기분이 좋아서 실실 웃으면서 그의 뺨에 쪽쪽 입을 맞추면서 그냥 그의 등이나 슬렁슬렁 쓰다듬었다. 황경호는 그의 목덜미에 이마를 대고 약간 몸을 움츠리고 엎드려 있었다.
“그리고 지금이야 몰라도…. 나중에 나이 들면 아, 안 귀여워…. 아저씨 되고 할아버지 돼도 괜찮을 거 같아?”
“나도 아저씨 되고 할아버지 돼. 뭔 걱정을 하는 거야. 그냥 네가 좋다니까.”
“…….”
강동현은 황경호의 얼굴을 부드럽게 들어 올렸다. 그리고 입술에 쪽 입을 맞추었다. 서로의 눈을 바라보았다.
“너한테는 내가 진짜 못한 게 많은데…. 그래도 나 진짜 괜찮은 놈이라니까. 내가 말하는 건 다 할 수 있어. 좀 믿어줘라. 응? 전에는 진짜 미안. 나도 멍청해서 큰일이다. 그치?”
강동현은 그렇게 말하며 옅게 미소를 띤 얼굴로 황경호의 얼굴에 위로하듯 입을 맞추었다. 황경호는 황홀감에 실금이라도 할 뻔했다.
“그러니까 뭐 바라는 거 있으면 다 말해. 다 해줄게. 다 할게.”
사랑한다고 말해줘.
황경호는 순간 그렇게 말할 뻔했다. 그 대신에 그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
“하아…. 하아….”
“윽…. 하아…. 괜찮아?”
“하으…. 응….”
새벽에 괜히 불타서 많이 하고 말았다. 강동현은 자신의 위에 엎드려 누워 있는 황경호의 머리를 감싸며 뺨에 입술을 눌렀다. 천천히 서로를 분리했다. 황경호는 부르르 떨면서 견디다가 축 늘어졌다. 강동현도 헐떡거리면서 손을 뻗어 겨우 물병을 집어왔다.
“마실래?”
황경호에게 한 병을 주고 다시 손을 뻗어 하나 더 집어왔다. 한 병을 다 마셨다. 아침 해가 밝다. 강동현이 크게 숨을 내뱉으며 말했다.
“배 엄청 고프다….”
둘은 씻고 호텔 라운지에서 밥을 먹고 밖으로 나왔다. 차를 운전해서 다시 황경호를 본가로 데려다주었다.
“그래도 인사는 해야 하니까….”
“알았어. 밑에서 기다리고 있을게.”
“응…. 고마워.”
강동현은 살짝 주변을 확인하고는 그의 뺨에 입술을 눌렀다. 황경호는 얼굴이 붉어져서는 고개를 돌렸다.
“남들 본다니까.”
황경호는 집에 갔다가 한 30분쯤 뒤에 나왔다. 그리고 둘은 내려왔을 때처럼 같이 차를 타고 서울로 올라갔다. 우습게도 내려올 때랑 올라갈 때랑 느낌이 달랐다. 굳이 설명을 하라면… 사이가 깊어진 것 같다.
이번에 강동현이 데려다준다고 했을 때도 그의 억지에 떠밀려 같이 내려오긴 했지만 부모님에게 그를 소개해준다든가 하는 생각은 전혀 해본 적이 없었다. 아니, 그런 건 평생 할 생각이 없었다. 앞서 얘기했듯이 앞으로 어떻게 될지도 모르고…. 무엇보다도 가까운 사람일수록, 아니, 가까운 사람이든 아니든 아는 사람에게 부모님을 소개해준 적은 거의 없었다. 황경호가 어쩔 수 없는 상황이 아니라면 말이다.
학창시절 때 집에 친구들을 데리고 온 적도 없었다. 밖에서는 부모님에 대해서 말을 하지 않거나 해야 할 때는 기본적으로 그들을 높여서 설명하고는 했다. 그러면 자주 허무함을 느껴서 나중에는 의식적으로 그런 주제를 피하곤 했다.
[내가 너한테 잘못한 것도 많고…. 죄송해서 그래. 별말 안 할 거야. 그냥 얼굴만 뵙고 난 갈게.]
강동현이 또 막무가내로 올라가겠다고 했을 때는 정말 화가 났었는데, 이 말을 들으니까 괜찮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한테 잘못했기 때문에 우리 부모님한테도 미안하다니….
하지만 같이 올라가고 나서는 정말로 후회했다. 뭐가 괜찮을 거라고 생각한 걸까. 예전에도 이 정도로…. 부끄러웠을까, 부모님이? 그런 생각을 하는 게 죄책감이 들었다. 강동현에게도 미안했다. 부끄럽고 미안하고 죄책감이 들어서…. 강동현을 대할 때보다도 그런 감상은 빨리 가라앉았다. 오랜만이었지만, 익숙했으니까 말이다. 곧바로 정신을 차리고 저질러놓은 것을 빠르게 정리했다. 강동현은 예정대로 빨리 보내고 부모님의 비위를 맞추며 용건을 들었다.
오랜만에 만난 부모님은 아버지의 명예퇴직 얘기를 했다. 정년퇴직까지는 좀 남았지만 요새 경기가 안 좋아서 명예퇴직 얘기가 나왔고 아버지도 그냥 빨리 쉬고 싶어 하셔서 받아들일까 생각하고 있다는 말씀을 하셨다. 어머니는 몹시 탐탁지 않아 하셨다. 그래서 그런지 평생 일이라곤 안 해보신 어머니가 캐셔로 지금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다는 말씀도 하셨다.
지금 집은 황경호가 10살 때 구입한 것으로 7억짜리를 5억을 대출을 받아서 구입한 것이었다. 처음부터 원리금을 갚아서 한 달에 은행에 갖다 바쳐야 하는 2백만 원이 넘었다. 아직 12년 정도 남았다. 그런데 벌써부터 아버지가 퇴직을 하게 되면 대출을 갚는 데 문제가 생기는 것이다.
결론은 어차피 나중에 되면 이 집은 황경호의 것이 될 테니 도우라는 말이었다.
[해줄 수 있니?]
황경호는 원래 다달이 집에 30만 원 정도를 부모님 용돈으로 보내주고 있었다. 이제 강동현이랑 같이 살게 되면서 월급 받는 거에서 한 푼도 쓰지 않는 황경호였지만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선뜻 그러겠다는 말이 나오지가 않았다.
원래 황경호는 저금을 꽤 많이 하고 있었다. 집에다 돈을 보내고 서울에서 월세를 내고 생활을 하고 남은 돈은 다 저금을 하고 있었다. 초록이나 김태형을 알기 전까지만 해도 한 달에 백만 원 정도의 돈만 쓰고 살았던 것이다. 그래서 2년 동안 2천만 원이 넘는 돈을 모았다. 빨리 전세나 얻을 수 있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하지만 이래저래 일이 많이 있으면서 그 저금도 바닥이 나버렸다. 그렇게 한동안 힘들 때도 부모님한테 손을 벌린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었다. 다만 몇 달간 용돈을 드리기 힘들 수도 있다는 말씀을 드렸을 뿐이다. 하지만 부모님은 간간이 힘들다면서 황경호에게 용돈을 더 부쳐달라는 말을 하곤 했다.
부모님은 황경호가 서울에서 원래 어떤 생활을 했는지 알고 있을까. 그런데도 거기서 얼마 간을 더 달라고 하는 것일까. 나중에 물려준다고 해도, 부모님이 그걸 물려줄 수 있을 때면 시간이 아주 많이 지나야 할 것이다. 그러면 황경호는 그때까지 계속 그러한, 한 달 한 달이 소모되는 생활을 유지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런 걸 생각해본 적은 있을까.
그리고 황경호는 요새 매달 월급이 통째로 모이는 걸 지켜보는 거로 꽤 큰 안정감을 느끼고 있었다. 고작 반년 정도인데 1,500만 원 이상을 모았다. 황경호가 강동현과 같이 사는 소비 수준을 자기 월급으로 따라가는 건 불가능하니 그 부분에 대해서는 포기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나중에…. 나중에 어떻게 될지는 모르니까. 1년 뒤가 될지, 2년 뒤가 될지, 10년 뒤가 될지 모르지만…. 이건 황경호의 보험이었다.
그래서 주겠다는 말을 더 할 수가 없었다.
[그래…. 너도 서울살이하느라 힘들긴 하겠지만….]
어머니는 그저 한숨을 쉬며 그렇게 말씀을 하셨다. 그러니 정말로 죄책감이 몰려왔다. 사실 황경호는 분수에 맞지 않은 호의호식을 하고 살고 있었다. 월급도 전혀 쓰지 않고 있었고 돈에 대해 걱정할 필요가 하나도 없는 삶을 영위하고 있었다. 그런데 부모님이 어렵다고 조금만 더 도와달라는 것에 선뜻 그러겠다고 할 수 없는 자신이 싫었다. 차라리 이기적이라고 뭐라고 하셨더라면 더 나았을 텐데….
저녁을 먹고 정리를 하는 어머니와 같이 설거지를 하면서 황경호는 조심스럽게 어머니께 말을 걸었다.
[죄송해요…. 저….]
앞으로 돈을 더 부쳐드리겠다고 하려고 하는데 어머니가 웃으면서 말을 끊었다.
[아까 엄마가 한 말은 잊어버려. 그나저나 우리 아들 못 본 새에 얼굴이 진짜 좋아졌다. 건강해 보이고…. 뭐 좋은 일 있어? 여자라도 생겼어?]
[아뇨….]
[이제 너도 나이 찼으니까 슬슬 결혼한 여자 데리고 와야 하지 않겠니? 착하고 순한 여자면 엄마는 소원이 없겠다. 엄마 친구들 중엔 벌써 손주 보는 사람들도 있으니까.]
[…….]
강동현은 착하지도 순하지도 않다…. 예쁘기는 한데…. 황경호는 어머니의 말에 의외로 긴장을 해서 식은땀을 흘려야 했다. 결혼이나 이런 건 정말 황경호가 자신 없는 부분이었기 때문이었다.
[저 아직 그런 생각 없어서요…. 아직 그런 거 생각할 때도 아닌 거 같고….]
[그래…. 요즘 경기가….]
그렇게 이야기를 끝내긴 했으나 내내 마음이 불편했다. 일찍 잔 것도 아닌데 또 새벽에 깨고, 마음이 불안해서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서 밖으로 나왔다가 바로 강동현이 있는 호텔로 갔다. 그리고 의외로 위로를 받았다.
“밖에서 먹고 들어갈까? 집?”
“그냥 집으로 가자. 집에 음식도 많은데.”
황경호가 대답했다. 강동현도 집으로 가고 싶었다. 강동현이 황경호의 손을 만지작거리면서 중얼거렸다.
“예전에는 밖에서 먹는 게 더 편했는데…. 이래서 결혼한 형들이 집밥밖에 못 먹겠다고 하는 건가….”
“…너 왜 계속 그렇게 말해.”
“응? 뭐가.”
강동현은 좌회전 신호를 받고 핸들을 돌리며 무심하게 물었다. 황경호는 얼굴이 약간 벌게져서는, 그걸 깨닫고 인상을 좀 찌푸렸다.
“우리가 진짜 결혼한 것도 아닌데.”
“왜? 우리 결혼한 거지.”
또 이런 데서 온도 차가 확 나는 두 사람이었다. 황경호가 황당해서 그를 돌아보았다.
“언제?”
“뭐가 언제야. 집까지 새로 사서 살림까지 싹 새로 해서 같이 사는데. 거기에 네가 내 통장 다 가지고 있지, 집도 네 명의지. 누가 봐도 부부구만.”
황경호는 진짜 황당해서 그의 얼굴을 보고 있다가 중얼거렸다.
“…아니야…. 이게 뭐가…….”
“아니긴 뭐가 아니야.”
그럼 이때까지 그게 다 농담이 아니라 진담이었다는 말인가. 황경호는 갑자기 확 속은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냥 같이 사는 거랑 결혼은 전혀 다른 것이었다. 둘 다 전에 해본 적도 없는 것들이었지만 그 정도는 알았다. 게다가 황경호가 동의한 것은 동거일 뿐이지 결혼은 전혀 해당 사항이 없었다.
“아니야.”
“뭐가 또 아니래.”
강동현은 집 지하 주차장으로 들어가면서 그렇게 말했다.
“그럼 넌 이거 뭐라고 생각했는데?”
“그냥 같이 사는 거지…. 뭐가 결혼이야. 말도 안 돼.”
“야…. 내가 왜 네 명의로 집 샀을 거 같아? 혼인신고서 낼 수 있었으면 벌써 냈어. 그게 안 되니까 이렇게라도 한 거 아냐. 이렇게라도 해야지 법으로 좀 엮이지.”
“내가 언제 너랑 결혼한다고 했어?”
“넌 내가 책임지겠다는 말을 뭘로 들었는데?”
“내가 내 이름으로 집 사달라고 했어? 네 멋대로 한 거잖아. 네 맘대로 해놓고 왜 멋대로 결혼한 거래?”
“너 나랑 앞으로 계속 안 살 거야? 같이 살 거면서 왜 그래? 그냥 같이 사는 거나 결혼이나, 응? 똑같지.”
“…….”
사이가 깊어졌다고, 서로를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고 조금… 기뻐했었다. 황경호는 또 자신의 동의 없이 벌써 김칫국물을 한 사발 들이킨 강동현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차에서 내려서 강동현이 먼저 엘리베이터로 향하는 데 따라가기가 싫었다.
‘왜? 우리가 제대로 사귀기를 했어, 뭘 했어? 왜 이렇게 되는 건데. 결혼? 그런 거 생각해본 적도 없는데….’
동거와 결혼의 유사성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 단어들이 가지는 무게가 다르다. 갑자기 혼란스럽다.
‘결혼…? 그게 뭐지…. 평생 같이 살겠다고 맹세하는 거? 그런 맹세 같은 게 무슨 의미가 있어. 세상일 어떻게 될 줄 어떻게 알고….’
그리고 한 명이 통보하듯이 이건 결혼이라고 말하면 그게 결혼이 되는 것인가…. 먼저 엘리베이터 쪽으로 갔던 강동현이 황경호가 따라오지 않으니 다시 돌아왔다.
“왜 그래?”
“…….”
황경호는 그를 마치 처음 보는 남자처럼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갑자기 울컥했다.
“이거 결혼 아니야. 나 너랑 결혼 안 해.”
그리고는 그를 지나쳐서 엘리베이터로 갔다. 강동현도 황당해서는 그를 따라갔다.
“진짜 왜 그래? 우리 결혼한 거라고 해서 그런 거야? 진짜로?”
“아니라고.”
“왜 이상한 데서 고집을 부려? 결혼이라고 하면 어때서. 그리고 진짜 결혼한 거나 다름없는데 왜 그래?”
하지만 황경호는 의외로 표정이 꽤 굳어 있었다.
“너랑 연애를 제대로 한 적도 없고 너랑 결혼을 하겠다고 한 적은 더 없는데 왜 이게 결혼이야? 앞으로 그런 말 하지 마. 기분 나빠.”
그러자 강동현도 약간 짜증이 났다.
“그게 또 뭐가 기분이 나쁠 일이야? 그냥 커플들도 서로 서방, 마누라 하면서 노는데. 같이 살기까지 하는데 그런 말 좀 하면 어때서?”
“하지 말라면 하지 마.”
“아니, 진짜 어이가 없네. 이게 왜 기분이 나쁜데? 내가 너 좋아서 그러는데? 그게 기분이 나빠?”
“…….”
황경호는 입을 다물고 고개를 좀 돌렸다. 또 말 안 한다. 강동현은 더 화가 났다.
“그럼 너 이거 다 뭐라고 생각했는데? 잠깐 같이 살다가 또 수틀리면 다 엎고 그럴 수 있는 거라고 생각했어?”
“네가…!”
네가 그럴 수 있는 거겠지. 이게 진짜 결혼이더라도 넌 네가 마음에 안 들면 다 때려치울 수 있는 놈이잖아. 평생 책임진다느니, 결혼이라느니 그렇게 기대만 키워놓고 아무것도 책임지지 않아도 되는 건 너잖아. 네 멋대로 끌고 갔다가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내팽개칠 수 있는 것도 너잖아. 지금도 내 의사 같은 건 이렇게 안중에도 없는데 헤어질 때는 얼마나…!
‘…조심하자…. 그러니까 조심해야 돼.’
심장이 꽉 조여들었다. 황경호는 어쩐지 평소보다도 겁이 났다. 어떡하지. 집에 더 돈 드리면 나중에 여기서 나올 때 힘들지 않을까? 제대로 준비할 수 있을까? 지금도 이렇게 얘랑 못 맞추는데…. 그래. 얘도 얼마나 답답할까. 좋아서 그런 말 하는 거 분명한데 난 이렇게 뾰족하게만 받고…. 역시 난 다른 사람들이랑 같이 사는 게 어려운 것 같다. 부모님도 그랬고 강동현도 그런 것 같다.
“아니…. 아니야. 미안…. 잊어버려.”
황경호는 그렇게 말하면서 엘리베이터가 도착하자 바로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집의 문을 열고 들어가 바로 방으로 들어갔다. 씻고 바로 침대의 이불을 뒤집어쓰고 누웠다. 심장이 이상하게 뛰고 있었다. 불안감이 사라지지를 않았다.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 요새는 이런 적 별로 없었는데…. 그렇게 최대한 스스로를 보호하듯이 웅크리고 누워있었다.
그때 황경호의 방의 문이 조용히 열리고 닫혔다. 침대 위에 누가 올라왔다. 강동현은 이불째로 황경호를 안았다.
“괜찮아?”
강동현은 이불을 들쳐서 황경호의 얼굴을 발굴해냈다. 황경호는 빈틈 많고 취약해 보이는 얼굴로 강동현의 얼굴을 보았다.
“…미안….”
황경호는 그렇게 말했다. 주변 사람들 중 한 명이라도 정신이나 마음에 문제가 있으면 금세 다른 사람들도 기분이 나빠진다. 황경호는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밖에서는 스스로를 최대한 컨트롤하고는 했었다. 그런데 이제 강동현의 앞에서는 그게 잘 되지 않았다. 그도 지금 황경호 때문에 많이 불편할 것이다.
“아니, 내가 미안.”
강동현은 그렇게 말했다.
“내가 집도 멋대로 산 거고 결혼한 거라고 생각하는 것도 내가 멋대로 한 거고…. 네 말이 맞아. 생각해보니까 나 프로포즈도 제대로 안 했는데.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 너한테 예스라는 말도 못 들었고….”
강동현이 그렇게 줄줄줄 해답을 말했다. 강동현은 황경호가 샤워를 할 동안 정신과 의사 노여진(일요일인데도 어떻게든 전화했다)한테 속성으로 코치를 받은 상태였다. 강동현 능력으로는 아까 그 상황은 도저히 이해 불능이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강동현은 그의 얼굴을 보면서 변명하듯이 말했다.
“그래도 사실 내가 생각이 영 없는 건 아니었는데….”
강동현이 슬그머니 뭔가를 꺼내 황경호의 눈앞에 보여주었다. 달칵 뚜껑을 열었다.
“차 사고 싶다고 할 때 네가 하도 돈 많이 쓴다고 뭐라고 해서 바로 못 줬거든….”
“…….”
“그러니까 내가 마음만 한가득 이라 자꾸 순서 안 지키고 진도 빼서 미안. 나랑 평생 같이 살자, 황경호.”
강동현은 그렇게 2캐럿짜리 티파니 반지를 내밀었다.
“…….”
“…….”
황경호는 멍청한 얼굴로 반지를 보았다가 다시 강동현의 얼굴을 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입을 뗐다.
“…얼마짜리야?”
황경호가 물었다. 그러자 강동현이 조심스럽게 슬그머니 손가락 네 개를 펼쳤다.
“사십?”
강동현이 시선을 피했다.
“사백?”
강동현은 여전히 시선을 맞추지 않았다.
“사천?!”
“아니…. 이런 건 원래 그 정도 해. 원래….”
“너 지금…!!”
강동현의 변명에 황경호가 속사포처럼 잔소리를 하기 시작했다. 강동현은 워워 그를 진정시키면서 변명했다.
“더 비싼 거 사고 싶었는데 네가 이렇게 뭐라고 할 것 같아서….”
황경호는 어이가 없고 뭔가 화가 나기도 했다. 함부로 돈 쓰지 말라고 그렇게 말을 했는데도 말을 귓등으로도 안 듣는다. 바로 이런 면이 싫은 건데 어째서 이렇게 이해를 못 하는 걸까.
“그리고 나 간호사야. 이런 거 못 낀다고!”
“응. 알아…. 아니, 이런 건 의미가 중요한 거니까.”
“그리고 이거 여자 거 아냐?!”
“어…. 근데 너 손 예뻐서 어울릴 거 같아 가지고…. 일단 껴볼래?”
강동현은 구렁이 담 넘어가듯 일단 황경호의 손에다 반지를 끼웠다. 알이 세 개나 박힌 반지였다. 예쁘긴 진짜 예쁘다. 다이아 실제로 이렇게 본 건 처음이다…. 아니, 아니 아니! 그게 아니라!
“환불해!”
황경호가 질색을 하면서 반지를 도로 뺐다. 강동현이 어깨를 으쓱했다.
“벌써 산 지 몇 개월 지났는데? 어떻게 환불해?”
“너 돈이 어디 있어서 산 거야? 문자 날아온 거 없었는데?”
“어…. 그냥 용돈 받은 거 모은 거랑 예전에 사장님한테 빌려준 돈 현찰로 받아서….”
친구들이랑 놀러 다닌답시고 현금을 좀 빼서 가더니 이거 사려고 더 빼간 모양이었다. 황경호는 당황해서는 강동현의 얼굴과 반지만 번갈아 보았다. 강동현은 살짝 얼굴이 상기되어서는 황경호를 더 꽉 끌어안았다. 그리고 다시 황경호의 왼손 네 번째 손가락에 반지를 쏙 끼웠다.
“너 손 예뻐서 잘 어울린다.”
“…….”
“그래서? 앞으로도 쭉 나랑 같이 살아 줄 거야? 결혼하자, 경호야~”
“…우리가 결혼을 어떻게 해….”
“왜 못 해? 우리가 했다고 하면 한 거지.”
강동현은 황경호를 끌어안고 그의 이마에 입술을 눌렀다. 황경호는 손에 끼워진 반지만 쳐다보았다.
“4천만 원….”
이 조그만 게 4천만 원이라고? 황경호는 실감이 나지 않았다. 황경호의 연봉보다도 큰돈이었다. 금방까지 무슨 걱정을 하고 있었다는 사실조차 까먹었다. 이 4천만 원짜리 반짝이는 돌멩이 때문에…
“이런 거 못 끼고 다녀….”
어디 기스라도 나면…. 아니, 잃어버리기라도 한다면 어떡할 것인가. 황경호가 걱정과 근심이 한가득인 얼굴로 반지를 보고 있으니 강동현이 대꾸했다.
“응, 사실 이건 끼고 다니는 거 아니야.”
“어?”
그게 무슨 말인가. 황경호가 그를 올려다보았다. 이불에 돌돌 말려서는 바보 같은 얼굴을 하고 있는 그가 귀여웠다. 강동현은 같이 황경호가 낀 반지를 보면서 말했다.
“이건 프로포즈 용 반지고 원래 결혼반지는 좀 심플한 걸로 한대. 여자들은 보통 둘 다 끼고 다니는데 우리는 결혼반지만 끼고 다니는 게 낫겠지?”
“반지를 또 산다고?”
“응. 근데 그건 네가 편한 게 좋을 것 같아서 같이 고르려고. 볼래? 내가 좀 봐둔 거 있는데.”
강동현은 그렇게 말하며 휴대폰을 꺼냈다. 황경호는 황당해서 진심이냐는 듯이 그의 얼굴을 보았다.
“같은 거 크기 맞춰서 사면 되겠지? 이건 어때? 역시 이거 맞춘 데랑 같은 브랜드가….”
강동현이 또 뭔가 훅 혼자서 다 진행하려 하자 황경호가 폭발했다.
“…헛돈 좀 쓰지 마, 이 멍청아!”
그렇게 침대 위를 둘이서 데굴데굴 굴렀다. 강동현의 오른손이 휘황찬란한 반지를 끼고 있는 황경호의 왼손에 깍지를 꼈다.
“나랑 결혼하는 거지? 응?”
“도대체 뭘 어떻게 하는데, 우리가?”
황경호는 이젠 어이가 없는 얼굴이었다. 어디 한번 들어나 보자란 태도다.
“뭐…. 예식장 잡고 할 수는 없더라도…. 결혼 되는 나라도 있잖아? 그런데 가서 도장 찍든가. 하고 싶으면 주례도 좀 봐달라고 하고. 아니면 좀 아쉽더라도 보험금 수령자나 명의 같은 거 서로로 바꿔서 좀 서로 엮는 거지, 뭐.”
“…너…. 전 여자친구한테도 이렇게 했지?”
“응? 아니? 걔랑 만날 땐 결혼 생각 전혀 없을 때라…. 왜?”
“…….”
“아, 그리고 당연히 너니까 하는 거야. 너니까. 자꾸 비교하려고 하지 마라, 좀.”
강동현에게 결혼이란 본인이 결정하는 거지 서류나 다른 사람들의 공인 같은 건 전혀 필요 없는 모양이었다. 황경호는 그제서야 서서히 얼굴이 붉어지기 시작했다.
나중 일은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강동현은 이렇게나 황경호와 함께 있고 싶어 했다. 평생을 함께하자고 말하고 있었다. 황경호는 단 한 번도 누군가에게 이런 말을 들을 날이 올 거라고 기대해 본 적이 없었다.
“…….”
그러니까 강동현은 원래 그 말을 항상 해왔다. 평생 책임진다느니…. 황경호는 그 말들을 경계하기만 했다. 황경호한테만 유독 말이 빈 그라 언제나 그런 말에 기대하지 말자고 스스로를 다그쳤을 뿐이었다.
“…반지 같은 건 진짜 괜찮아. 환불해.”
황경호는 반지를 빼려고 했다. 강동현은 그런 그를 꽉 끌어안았다.
“안 돼. 프로포즈 용 반지 거절하는 건 결혼 안 하겠다는 거잖아. 진짜 이러기야? 진짜 나랑 안 살 거야? 어? 어?”
“그래도 이런 거….”
너무 과분하다. 황경호는 아까보다도 더 취약한 얼굴로 가만히 반지를 보고 있었다.
‘이런 거…. 익숙해지면 안 되는데….’
기대해도 될까
‘불안해….’
조금만….
‘나중에 어떻게 될지 모르는데….’
좋아해
‘너무 좋아….’
처음 그와 만났을 때 황경호는 우울증과 자살 충동 때문에 힘든 시기를 겪고 있었다. 강동현 또한 무리한 스케줄과 스트레스 때문에 병에 걸리고 1년에 몇 번이나 쓰러져서 병원 신세를 지는 걸 반복하고 있었다.
강동현은 황경호를 보자마자 자기 마음대로 하려고 했다. 황경호는 그런 그가 죽이고 싶을 정도로 미웠다. 항상 부딪쳤다. 그런데도 떨어질 수가 없었다. 부딪혀서 튕겨 나갔다가 다시 만나기를 반복했다. 그리고 또 상처받고 멀어지고…. 서로 잘 맞지가 않았다.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도 함께 있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헤어지게 될 것이 벌써 두려웠다.
언젠가 헤어지게 될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잘 모르겠다. 황경호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견디듯이 있다가 결국엔 그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그러자 강동현이 씨익 웃었다.
“승낙한 거지?”
“…….”
황경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불안한 눈빛으로 그의 눈을 보았다. 강동현은 웃음을 흘리며 그를 재촉했다.
“그냥 알았다고 해. 응? 고개라도 끄덕여.”
“…….”
황경호는 반지를 보았다. 이게 뭔가 바꿀 수 있는 걸까…. 황경호는 복잡한 얼굴로 그걸 보고 있다가 다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 고개를 한 번 끄덕했다. 강동현은 입이 째져서는 그를 끌어안았다.
“아, 속이 다 시원하다. 아니, 아까 진짜 나 열이 확 받는 거야. 내 거라는데. 어? 내가 책임진다고 몇 번을 말했는데. 평생 같이 살자고 내가 진짜 입이 닳도록 말했는데 왜 이게 결혼이 아니야? 어? 내 마누라 된 지 반년이나 지났는데. 뒷북도 정도가 있지. 내가 진짜 황당해가지고…. 아, 이러니까 중간에 집 나간 거였어? 맞지?”
강동현이 확 안도를 하면서 상대를 꽉 끌어안고 구시렁거렸다. 황경호는 아차 해서는 생각했다.
‘잠깐만. 이거 또….’
순서가 또 뒤죽박죽…. 황경호는 같이 살기 전에 강동현에게서 좋아한다는 말을 듣고 바로 같이 살자는 말부터 들었었다. 게다가 같이 살게 되니까 아예 이놈은 도장 찍은 거라 생각하고…. 황경호는 조금 실망했다.
‘그 말 듣기는 그른 것 같다….’
부부들끼리 그런 제대로 하는 거 별로 들어본 적도 없고…. 말을 하면 뭐든 해주긴 하는데, 황경호한테는 장난만 치려고 하지 로맨틱한 건 거의 안 해주는 강동현이었다. 남자끼리라서 그런 건지, 아니면…. 아니, 다짜고짜 이렇게 당연하게 자기 거라고 생각하니 노력을 들일 리가 있나…….
‘아니, 그런 것까지 바라는 건 아니었는데….’
황경호는 작게 한숨을 쉬면서 반지를 보았다. 딱히 황경호라서가 아니라더라도 이런 반지는 누구 손에 끼워도 예쁠 것이다. 역시 마음이 싱숭생숭하다…. 이런 거 생각해본 적도 없는데….
‘…포기하자….’
황경호는 결국 한동안 계속해서 자신을 괴롭혔던 문제에 대해 그렇게 결론을 내렸다. 프로포즈도 이런 식으로 하는 앤데, 기대를 하는 사람이 멍청한 것 같다….
강동현은 건강이 많이 회복되었던 연초에 비해서도 확연히 더 컨디션이 회복된 것을 느끼고 있었다. 중간에 잠깐 술과 담배를 확 달았던(황경호 가출했을 때) 적도 있었지만 6개월 정도 전반적으로 모든 스케줄을 건강 회복에만 집중했더니 확실히 가시적인 성과를 목도하고 있었다. 각종 통증 문제와 피로가 해결되었고 인간관계로 스트레스를 받을 것도 그다지 없었다. 평생에 이렇게 편히 쉬어본 적은 처음이다. 황경호와 기본적으로 툭탁거리는 것도 보통 이쪽에서 저쪽으로 스트레스가 가는 편이라 그런지 크게 무리는 없었다. 애초에 원래 성격도 크게 스트레스받는 성격은 아니다.
“어! 내가 뭘 잘못했는데! 어!”
누군가 병원 바닥에 홀딱 벗은 채 드러누웠다. 병원 관계자들이 전부 그를 말리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엉덩이를 만진 게 아니라 손이 닿은 거라니까? 그게 내 잘못이야? 어? 그러게 누가 내 손에 엉덩이 대래?!”
“환자님! 여기서 이러시지 마시고…!”
저기 어떤 젊은 여자 간호사도 화가 나서 그를 노려보고 있고…. 다른 남자 간호사들이 그를 일으키고 몸을 가리려고 하고 있었다. 누가 말리다가 뺨을 한 대 맞았다.
“…!”
아오, 이놈의 병원이 또…. 이러면서 그걸 초조하게 보고 있던 환자들 중 한 명이었던 강동현은 그걸 보고 깜짝 놀라서 벌떡 일어났다. 환자는 적반하장으로 소리쳤다.
“봐! 이거 또 쑈한다, 쑈해! 누가 얼굴을 거기다 갖다 대래!”
“환자님, 일단 가서 조용히….”
결국 원장까지 포함해서 병원 식구들이 그를 끌고 상담실로 들어갔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그러면서 다른 간호사들이 커피나 음료를 환자들에게 나누어주면서 사과를 했다. 강동현은 인상을 팍 구긴 채 자신에게도 음료를 주기 위해 온 다른 간호사에게 신경질을 냈다.
“여기는 이런 거 관리 안 됩니까? 저런 환자들은 좀 미리미리 거르라고.”
“아, 죄송합니다. 도은혁 환자님.”
“내가 여기 이러는 걸 몇 번이나 본지 압니까?”
“그러시죠…. 죄송합니다. 진짜 죄송합니다.”
“사과를 하라는 게 아니라…!”
말을 말자, 말을 말아…. 강동현은 기분이 확 상해서는 초조하게 자기 차례를 기다렸다. 곧 병원 식구들이 우르르 들어갔던 상담실에서 간호사 몇몇이 일을 하기 위해 다시 나왔다. 그리고 담당 환자들을 부른다.
“도은혁 환자님.”
황경호가 나와서 그를 불렀다. 강동현은 그가 부르기 전에 이미 일어나 있었다. 성큼성큼 걸어서 4번 치료실로 들어갔다. 황경호도 병원 대기실을 한 번 둘러보고 다른 간호사랑 얘기를 서로 한 후 빠른 걸음으로 따라 들어갔다.
“아, 미안…. 저 환자가 원래 좀 진상인데 오늘따라 유난히….”
강동현은 황경호가 치료실로 들어와 문을 닫으니 바로 그의 턱을 잡아 얼굴을 살폈다. 신경질이 머리끝까지 올라온 것 같은 얼굴이었다. 이런 얼굴은 오랜만이다.
“그렇게 세게 안 맞았어. 그냥 스친 거라….”
“스치긴 뭐가 스쳐…! 아예 짝 소리가 났는데. 씨발….”
“일단 앉아. 오늘 바쁠 것 같아서 빨리하자.”
강동현은 황경호의 얼굴을 안 놓아줬다. 계속 뺨을 만져봤다. 피부가 약해서 아직도 벌겋다. 좀만 빨아도 멍이 3주나 가는데….
“야…. 이거 그만둬라.”
강동현은 여전히 황경호의 뺨을 보면서 그렇게 말했다.
“뭐?”
황경호가 반문했다. 강동현은 아예 황경호의 얼굴을 똑바로 보면서 다시 말했다.
“일 그만두라고. 젠장. 예전부터 마음에 안 들었어, 이 병원. 그만둬. 네가 이런 거 안 해도 내가 먹여 살릴 수 있어.”
“…….”
황경호는 뭐라고 하지도 못하고 강동현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가 인상을 확 찌푸리며 얼굴을 잡고 있는 그의 손을 떼어냈다.
“그런 말 하지 마. 빨리 앉기나 해.”
“내가 하는 말 못 들었어? 그만두라고. 이런 일을 왜 하는데?”
“그 정도까지만 해. 빨리 앉아.”
“야, 나 장난하는 거 아니라고.”
“나도 장난하는 거 아냐. 앉아.”
황경호는 표정이 굳어서는 기계를 밀어 치료용 의자 근처로 갔다. 그리고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빨리 앉아.”
강동현은 그의 말대로 하지 않았다.
“차라리 너 하고 싶은 거 다른 거 해. 내가 다 도와줄 테니까.”
강동현은 저번에 황경호의 집에 갔다 오고 그가 빨리 독립을 하기 위해 이 직업을 택한 것은 아닌가 하고 은연중에 추측하고 있었다. 게다가 이 병원 다른 개인 병원들보다 돈은 확실히 많이 준다고는 하는데 그만큼 일이 고되다. 원장인 이강유도 가끔 험한 꼴을 보는데 간호사들이야…. 강동현은 황경호가 다른 사람들에게 이런 취급을 받는 게 정말 싫었다. 본인도 진상짓을 구구절절하게 다 해봐서 알았다. 그는 저항을 하거나 화를 내지도 못하고 그냥 다 참았다.
“…네가 아무리 돈 많이 번다고 해도 남의 직업 가지고….”
황경호가 울컥해서는 강동현을 노려보았다. 강동현이 한숨을 쉬었다.
“그런 말이 아니잖아. 객관적으로 봐도 일이 고되니까 그러잖아. 네가 왜 이런 일을 해?”
“그런 말이잖아, 지금. 사람 좀 우습게 보지 마, 너…. 진짜….”
황경호는 진짜 엄청 마음이 상한 얼굴이었다. 강동현은 그런 그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니, 너 고생하는 거 싫어서 그러잖아. 이게 왜 널 우습게 보는 거야?”
“고생 안 해. 내 밥벌이 정도는 내가 해.”
“야, 나 진짜 진지해.”
“나도 진지해.”
황경호는 병원에서 싸우고 싶지 않은지 계속 참으려고 했지만 진짜 화가 나는 모양인지 강동현이 뭐라고 대꾸를 끝내기도 전에 결국 화를 냈다.
“내 말 뭔지 알….”
“네가 뭔데 내 직업까지 이래라 저래라야?”
그 말에는 강동현도 화가 났다.
“내가 왜 뭐라고 못 해? 내가 왜 이런 말을 못 해? 우리 평생 같이 살 거야. 결혼한 거라고.”
“너한테 장단 좀 맞춰줬다고 이게 어떻게 진짜 결혼이야? 우리가 혼인신고를 했어, 뭘 했어? 그리고 진짜 결혼했다고 쳐도 내 직업까지 네가 이래라저래라 할 권리는 없어.”
강동현은 아주 대단히 열을 받았다. 저번에 반지 받고 그렇게 귀엽게(?) 굴어놓고 인제 와서 딴소리….
“야…. 너 진짜 말 그런 식으로 할래? 어?”
“너나 말 그런 식으로 하지 마.”
황경호는 그리고 시간을 확인했다.
“시간 다 됐어. 오늘은 치료 안 받은 걸로 할 테니까. 가.”
강동현은 황경호의, 본인의 생각으로는, 아무것도 안 일어난 것처럼 깔끔을 떠는 얼굴을 아주 열 받은 표정으로 노려보았다.
“빨리 나가. 다음 환자 기다려.”
황경호는 다시 물건을 정리하고는 얼른 안 나가냐는 듯이 강동현을 보았다. 그가 저런 식으로 굴면 오히려 더 오기를 받는 강동현이었다. 강동현은 부글부글한 얼굴로 그를 보면서 말했다.
“집에 가서 얘기하자.”
“더 할 얘기 없어.”
열 받아…. 강동현은 한숨을 푹 쉬고는 문 앞에 서서 문을 열려고 하고 있는 황경호를 노려보면서 천천히 문으로 다가왔다.
“아, 진짜…. 씨…. 이거 얼음이라도 대고 있어라, 어? 뭐 없어?”
강동현이 황경호의 얼굴을 또 잡고 보며 뭐라고 했다. 황경호는 그의 손을 떼면서 말했다.
“빨리 나가기나 해.”
사람이 걱정을 하는데…! 강동현은 더 부글부글해졌다.
“아, 잠깐만…. 뭐 하는…!!”
그래서 그는 황경호의 뺨을 꽉 깨물어서 쪽 빨아버렸다. 살짝 맞아서 약간 붉은빛만 돌던 황경호의 한쪽 뺨에 잇자국과 벌건 멍이 생겼다.
“간다.”
“~~!!”
황경호가 그쪽 뺨을 감싸고 강동현을 노려보았다. 아, 기분이 좀 풀린다. 강동현은 선글라스를 끼며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
“나 내려갔다 올게.”
“데려다줄게.”
“아니, 이번에는 됐어. 빨리 갔다가 내일 올 거야.”
“그래도 데려다줄게.”
“싫어.”
황경호는 여전히 화가 난 상태였다. 아직도 얼굴에 멍이 안 가셨다. 강동현은 뚱한 얼굴이었다. 노여진한테도 얘기해봤는데 거기서도 혼만 났다.
[한국말은 아 다르고 어 다르다고. 몇 번을 말해? 걔한테만 말을 왜 그렇게 하냐, 은혁아. 어? 내가 이제 진짜 답답하다, 답답해.]
의사 선생님이랑 친해졌다. 하지만 그녀의 말에도 강동현은 별로 굽히지 않았다. 황경호의 직장이 진짜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원래도 마음에 안 들었는데 지금은 더 마음에 안 든다. 그래서 노여진한테 괜찮고 널널한 병원 없냐고 물어보니까 쓸데없는 말 했다가 더 싸운다는 말을 듣고도 그 말을 황경호한테 했다가 또 대판 싸웠다.
이렇게 싸우는 바람에 노여진이 알려준 다른 병원에 애 상담을 시키겠다고 마음먹은 건 말도 못 꺼냈다. 웨딩 밴드도 맞춰서 손가락에 끼워 버리고 싶은데 그것도 말도 못 하게 한다.
게다가 며칠 전 황경호의 아버지가 운동을 하시다가 엉덩이뼈에 금이 가서 수술을 받으셨는데 어머니가 요새 일을 시작하셔서 주말에 간호할 사람이 필요해 황경호가 주말마다 내려가게 되었다. 차라리 돈 써서 간병인 고용하자고 하니 싫단다. 안 그래도 평일에 일하는 애라 같이 있는 시간이 적은데 더 적어지게 생겼다. 싸우든 뭐든 신혼인데…. 같이 있고 싶단 말이다, 젠장. 진짜 요즘은 뭐가 다 마음에 안 드는 강동현이었다.
그렇게 황경호는 한 2주 아버지 수발을 들러 내려갔다. 그리고 일요일, 올라오기 전에 어머니와 만났다. 어머니는 안 하시던 일을 하면서 집안일까지 하는 데다가 남편까지 다쳐서 누워있으니…. 여유가 없는 모습이었다.
“진짜 돈이 좀 있는 거면 엄마 아빠 좀 도와주면 안 될까? 엄마가 나중에 갚을게.”
어쩔 수 없이 요새는 황경호가 입고 다니고 하고 다니는 것이 예전과는 달랐다. 어머니는 그의 모습을 아래위로 딱 한 번 훑어보더니 그 말을 딱 했다.
“엄마….”
크게 싸우기가 싫으니 이제 대놓고 말을 하진 않았지만 강동현은 은근히, 계속, 끈질기게 일을 그만두라고 황경호한테 종용하고 있었다. 황경호는 진짜 그게 너무너무 싫었다. 사람을 무시해도 정도가 있지 자기가 뭐라고 황경호한테 일까지 해라 마라 하는 건가. 안 그래도 강동현에게 의식주 모든 걸 기대고 있는데 일까지 그만두면 도대체 뭘 하라는 건가. 결혼했다 뭐다 계속 그러는데 전업주부라도 시킬 작정인 것일까? 진짜 싫었다. 이럴 때 보면 서로 정말 안 맞는다. 그런 상황에서 어머니까지 이런 말을 하니 황경호는 정말 한숨이 나왔다.
“너 지금 엄마 앞에서 한숨 쉰 거니? 어?”
그러자 어머니가 바로 혼내셨다. 황경호는 또 한숨이 나올 뻔했지만 바로 참았다.
“아니에요. 죄송해요.”
“아니긴 뭐가 아니야? 너 그런 거 어디서 배웠어? 애가 서울에서 혼자 살더니만…. 너 예전엔 이러지 않았잖아? 어디서 배운 버릇이야? 나 너 그렇게 안 키웠다.”
“죄송해요. 제가 좀 일이 있어서….”
“돈 없으면 잠깐 일이라도 쉬고 내려와서 너희 아버지 수발 좀 들어주든가. 정말 엄마 혼자서 다 하려니 진이 빠진다.”
그렇게 엄마는 한숨을 쉬었다. 황경호는 당황해서 잠깐 말을 잃었다가 입을 열었다.
“저 들고 있는 돈이 얼마 없어서…. 천오백 정도 있는데…. 많이 급하신 거면….”
황경호는 결국 부채감에 그렇게 가진 것 전부를 실토했다. 황경호의 엄마가 약간 인상을 찌푸리면서 황경호를 돌아보았다.
“진짜…. 있으면서 그런 거였어? 갚는다고 했는데도. 가족끼리…. 빈정 상해서 못 받겠다, 이젠. 지금까지 키워준 은혜도 모르고….”
“…….”
“진짜 애가 왜 이렇게 이기적일까….”
어머니는 그렇게 한숨을 쉬었다. 황경호는 순간 울컥했다.
“…엄마, 제발 그 말 좀 안 하시면 안 돼요?”
“뭘.”
황경호의 어머니는 신경질적으로 집안을 정리하며 대꾸했다.
“…저 이기적이라고 하는 거요.”
“왜? 기분 나쁘니? 내가 못 할 말 한 것도 아닌데 왜 그래?”
“저도 일하는 사람이고 부족하지만 집에 꼬박꼬박 용돈도 부쳤고 지금도 토요일에 일 끝나면 바로 내려와서 아버지 간호도 하는데 왜 제가 이기적이에요?”
황경호는 처음으로 그렇게 따졌다. 그랬더니만 정말로 속에서 뭔가 울컥울컥 솟아올랐다.
“너 지금 엄마랑 하나하나 따지자는 거니? 뭐 하는 거야? 너 이렇게 치사한 애였니?”
황경호의 어머니가 질색이라는 얼굴을 했다. 그 표정은 황경호의 마음을 정말 심하게 할퀴었다. 황경호는 단 한 번도 부모님에게 대들거나 한 적이 없었다. 대들 수가 없었다. ‘지금까지 키워준 은혜’라는 말을 듣거나 자식이니까 어쩔 수 없이 대한다는 느낌을 밭으면 절로 움츠러들어서 아무런 말을 할 수가 없어졌다. 존재 자체가 송구스러워지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을 황경호가 선택한 것도 아니었다. 만약에 선택할 수 있는 거였다면 황경호도 부모님의 짐이 되느니 차라리 부모님의 자식으로 태어나지 않는 길을 선택했을 것이다.
황경호는 거의 3년 가까이 강동현이랑 부딪치고 싸우고 울고불고 화내고 소리 지르고, 심지어 때리기까지 해보고 지냈다. 게다가 누군가와 같이 살아보기도 하고 처음으로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생각도 해보고 결혼하자는 말도 들어봤다. 그 때문에 어느 부분은 분명 체념이 더 짙어졌지만, 어느 부분은 방어력이 확 올라갔다. 특히나 자신의 자존심을 보호하는 부분이 말이다.
“제가 엄마 마음에 안 드는 자식인 거 잘 알아요. 근데 저도… 저도 그래서 죄송해요. 그래도 말씀을 조금만….”
“너 진짜 말 그런 식으로 할 거니? 어? 엄마가 뭘 그렇게 잘못했다고 너한테 가르침까지 받아야 해? 말 한마디 가지고 지금 어디 엄마한테….”
세상 순종적이기만 하던 아들이 대들자 황경호의 어머니는 깜짝 놀라더니 곧바로 분노하기 시작했다.
“제가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해요? 저 진짜 모르겠어요. 엄마 아빠 마음에 들게 하려고 진짜 많이 노력했는데…. 아무리 해도 항상 엄마한테 이기적이란 소리나 들어요. 제가 어떻게 하면 되는데요, 도대체…. 네?”
“네가 뭘 얼마나 해줬다고 지금 이래? 한 달에 꼴랑 몇십만 원 가지고 지금 생색내는 거니? 꼴랑 1, 2주 아빠 병간호 좀 했다고 이래? 그래, 다 들고 가! 다 들고 가라고! 그래! 내가 이 꼴 보려고 너 먹이고 키워줬다! 자식새끼 키워봤자 아무것도 소용없다더니! 자! 들고 가!”
엄마는 지갑에서 돈을 꺼내서 던졌다. 황경호는 거기에 엄청나게 강한 수치심을 느꼈다. 손끝에서 혈액이 싹 사라지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이런 말을 하려고 했던 적도 없었지만, 어머니의 반응은 상상 그 이상이었다. 배신감이 들었다. 지금까지 노력해왔던 모든 것들의 배신이다.
“…….”
어머니에게서 이기적이라는 말을 듣고 싶지 않아서, 처음으로 바라는 걸 말해보았을 뿐이었다. 그런데 이런 취급을 받아야 하는 걸까.
그럴 리가 없었다
황경호는 굳은 얼굴로 어머니를 보았다.
“…저 이 집 필요 없어요, 엄마. 안 주셔도 돼요. 있는 돈은 엄마 계좌로 전부 부쳐드릴게요. 당분간 연락하지 마세요.”
“너…!! 너 지금 뭐하는 짓이야! 어?! 어디 지금…!!”
어머니는 점잖으신 분이었지만 가끔 히스테릭해지는 면이 있으시다는 것을 알아서 항상 조심했다. 어머니의 비위를 맞췄다. 어머니가 기뻐했으면 좋겠으니까. 어렸을 때 가끔 어머니가 안아주는 게 좋았으니까.
하지만 비위를 맞추지 못하면 이런 취급을 받아야 한다는 것일까. 뭘 그렇게 잘못한 것일까. 아까 한 말이 이 정도 취급을 받을 만큼 잘못한 짓이었을까.
갑자기 가슴이 너무 아팠다. 왜인지 모르겠다. 황경호는 곧바로 등을 돌려 집을 나왔다. 어머니는 소리를 지르셨다. 뭐라고 하시는지 모르겠다. 이명이 울렸다. 숨이 얕게 쉬어진다. 덥지는 않은데 손이 축축하다. 바로 대전역으로 가서 기차를 탔다. 버스보다 비쌌지만 그때는 그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갔다.
“왔어? 빨리 왔네.”
어디 나갔을 줄 알았는데 집에 있었다. 거실 카우치에 앉아 TV를 보며 빈둥거리고 있는 강동현이었다. 강동현이 황경호를 돌아보았다. 그가 벌떡 일어났다.
“야, 왜 그래? 무슨 일 있었어?”
황경호는 손등으로 눈가를 가렸다. 그의 얼굴을 보자마자 눈물이 나왔다.
“야, 왜 그래? 응? 경호야…. 무슨 일 있었어?”
황경호는 눈물을 흘리고 싶지 않아 계속해서 눈물을 훔쳤지만 진짜 펑펑 나왔다. 울음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수도꼭지라도 튼 것처럼 눈물이 나왔다. 강동현은 황경호에게 얼른 다가와서 그의 손을 떼고 얼굴을 살피려고 했다. 황경호는 그것을 피했다.
“야, 황경호. 야! 말 좀 해. 뭔데? 응? 뭔데?”
강동현은 답답해서 죽으려고 했다. 하지만 황경호는 아무 말 없이 눈물만 흘렸다. 강동현은 인상을 찌푸리며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곧 그냥 황경호를 꽉 끌어안았다.
“울지 마….”
강동현은 깊은 한숨을 쉬었다.
“너 우는 거 보니까 나도 마음 아파.”
황경호는 강동현의 티셔츠를 꽉 쥐고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나…. 우리 부모님이…. 너무 미워….”
처음으로 입 밖으로 말했다. 그러자 봇물이 터진 듯 말이 터져 나왔다. 황경호는 기억나는 한 가장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부모님과 자신 사이에 있었던, 정말 사소한 것부터 심각한 것까지 전부 털어놓게 되었다.
“엄마가 그런 말 하는 게 너무 싫은데…. 아빠는 말이 잘 안 통하니까…. 엄마가 가끔 나 알아주면 그게 너무 좋아서…. 가끔 안아주시면 너무 기분이 좋아서….”
“응….”
“이제 엄마 다시는 나 안 보려고 하겠지? 나 같은 거 이제 진짜 버리고 싶겠지? 원래 엄마 아빠는 나 없으면 더 행복하셨을 테니까….”
“안 그래. 안 그래. 그렇게 생각하지 마.”
“내가 어떻게 했어야 했을까…. 난 엄마가 원하는 대로 다 했는데…. 근데 그렇게 안 하면 엄마는 왜 이렇게 화를 내실까…. 말을 잘 듣지 않으면 나 같은 거 필요 없어서 그런 걸까…. 엄마는 나 정말 사랑하기는 하시는 걸까…. 아니, 한 번이라도 사랑한 적이 있을까….”
황경호는 단 한 번도 이런 말을 다른 사람한테 해본 적이 없었다. 아니, 이런 말을 할 거라곤 생각도 못 했다. 마음속에서 어지럽게 혼재되어 있는 감정들과 의혹들이 언어의 껍질을 쓰고 현실화되니 그 순간 더 큰 상처가 되어 다시 돌아왔다. 한 번도 제대로 직시하지 않은 것들이라 그랬다.
“너희 부모님 다 너 사랑해.”
강동현이 말했다. 황경호는 눈물을 주르륵 흘렸다. 아니라는 건 본인이 더 잘 알았다. 뭔가를 하고 도움이 되고 말을 잘 들어야지만 사랑하고 그렇지 않으면 내치는 게 진짜 사랑이라고 할 수 있을까. 너무나 가혹한 조건부 사랑.
“근데 가끔 너무 무서워…. 왜 무서운지도 모르겠어. 불안해. 엄마 아빠 앞에만 서면 벌거벗는 기분이야. 뭐 하나라도 잘못하거나 마음에 안 들면…. 엄마도 가끔 내가 너무 마음에 안 들면 말을 함부로 하셔…. 욱해서 그런 거라고, 진심 아닐 거라고 이해하려고 해도…. 마음이 초조해…. 그리고 자꾸 가슴이 아파.”
“경호야…. 나 좀 봐. 응? 자꾸 울지 말고….”
강동현은 황경호의 옆에 바짝 붙어 앉아 그의 얼굴을 닦아주었다.
“그런데 제일 무서운 게 부모님처럼 되는 거야…. 그런 생각 하면 너무 죄송한데…. 그래도 그게 제일 싫어. 죽고 싶어. 근데 나 가끔 욱할 때마다 엄마같이 되는 것 같아서 무서워….”
“너랑 너네 부모님은 다른 사람이야. 닮을 수도 있고 비슷할 수도 있어도 전혀 다른 사람이야. 네 인생 네가 선택하는 거고 네 과거나 부모가 다 결정하는 게 아니잖아.”
“진짜 그럴까…. 사람이 바뀔 수 있는 걸까…. 나빠지는 것만 같아.”
“아니야. 아니야. 자기가 바뀌려고 하면 얼마든지 바뀔 수 있는 게 사람이야. 그리고 너 자꾸 말 그렇게 하는데…. 네가 어때서?”
강동현은 약간 화가 난 어조로 말했다.
“나도 너네 엄마랑 아빠가 너 기죽이는 말 계속하는 거 듣고 진짜 열 받아 죽는 줄 알았어. 너 진짜 존나 착하고, 씨발, 일도 열심히 하고 예의도 바르고 배려심 깊고 사람들한테 다 친절하고…. 너 같은 애가 흔한 줄 알아? 요즘은 어른이고 어린애고 할 것 없이 다 약아 빠졌는데. 근데 너네 엄마 아빠가 너한테 그런 말 하는 것보다 네가 자꾸 자기비하하는 말 하는 게 너무 화나…. 씨….”
강동현이 황경호의 얼굴을 양손으로 잡았다.
“솔직히 너네 부모님이 그랬는데도 네가 이렇게 잘 자란 게 신기하다…. 난 상상도 못 하겠다…. 네가 어렸을 때 얼마나 힘들었을지…. 그리고 씨발…. 너한테 내가 쓰레기 짓 한 거 지금 진짜 후회된다….”
강동현이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그는 자기가 과거에 저질렀던 일에 감정 같은 건 별로 이입하지 않았다. 심하게 죄책감 같은 것도 가지지 않았었다. 심각한 자살 충동까지 겪던 애였으니 문제가 있는 건 대충 알았지만 이렇게 선명하게 알게 되니 양심이 쿡쿡 찔렸다. 불쌍한 애한테 무슨 짓을 한 것일까.
“아…. 진짜 내가 그때 좀만 덜 바빴어도 생각이란 걸 좀 했을 텐데….”
강동현은 그렇게 샛길로 빠져서는 머리를 싸맸다.
“너 없으면 보고 싶고 보고 있으면 만지고 싶고…. 나 안 보면 괴롭히고 싶고…. 그랬는데…. 빨리 눈치챘으면 너한테 처음부터 잘 해줬을 텐데…. 아, 나 진짜 병신 아냐….”
강동현은 황경호를 꽉 끌어안았다.
“한번 조용히 부모님이랑 얘기해봐. 너도 너네 부모님 앞에선 너무 움츠러들어서 아무 말도 못 하더라.”
강동현이 말했다. 황경호는 그의 어깨에 얼굴을 묻은 채 웅얼거리듯 답했다.
“겁나…. 머리로는 알겠는데 엄두가 안 나.”
“뭐…. 어머니가 또 소리도 지를 수도 있고 너네 아버지는 완전 딴소리하면서 회피하실지도 모르겠는데….”
강동현은 황경호를 끌어안고 부드럽게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그러다가 뭔가 아쉬워 그냥 무릎 위에다 태웠다. 서로의 몸을 꽉 붙였다.
“너도 그냥 소리 질러. 싸워.”
“뭐? 내가 어떻게 그래…. 부모님인데.”
황경호가 깜짝 놀라서 그렇게 말했다. 눈물은 어느새 그쳤다. 강동현이 어깨를 으쓱했다.
“부모 자식 간이라고 뭐가 다른가…. 쌍욕도 하고 싸우는데, 뭐. 나 처음에 대학도 안 가고 배우 될 거라고 하니까 우리 아빠 나 머리도 다 밀어버리려고 하셨다. 그땐 진짜 엄청 싸웠지…. 지금이야 아버지랑 사이 좋은데. 자리 잡으니까 응원도 오히려 더 해주시고.”
“진짜?”
“뭐…. 그때 내가 어려서 그런 것도 있는데, 진짜 나 그때 아버지한테 쌍욕도 했다…. 씨발, 내 인생에 해준 거 뭐 있다고 앞길 막냐고. 그때 처음으로 아버지한테 맞았지…. 우리 아버지 진짜 점잖으신 분이거든. 아마 배우 되는 것보다 대학 안 나온다는 거에 엄청 빡치셨던 것 같은데…. 그래서 타협 봐서 대학은 결국 들어갔지…. 지금 생각해보면 아버지 말씀대로 한 게 맞았다 싶네. 그땐 아버지한테 맞은 거 때문에 엄청 열 받아가지고 며칠 가출도 했어.”
“야…. 너네 부모님은 진짜 자상하시던데….”
능력도 있고 상식적이시고…. 황경호는 그런 반항은 상상도 해본 적이 없었다. 얘는 진짜 배가 불러 터지는 모양이었다. 황경호의 부모님이 강동현네 부모님 같았으면 정말 황송해서 몸 둘 바를 몰랐을 것이다. 강동현은 코웃음을 쳤다.
“아니…. 부모고 나발이고 내가 하고 싶은 거 하겠다는데 무슨 권리로 막아? 내 인생 꼴아박든 어떻게 하든 내 맘대로 하겠다는데.”
“그래도….”
황경호는 말문이 막혔다. 이럴 때는 정말 서로 다르다는 게 확 느껴졌다. 강동현이 황경호의 눈을 보면서 말했다.
“다음에 너네 엄마가 또 그러면 나한테 그러는 것처럼 확 성질내. 더 화내면 더 화내버려.”
강동현은 그렇게 황경호에게 비행을 종용했다.
“아니, 누구는 화를 못 내서 입 다물고 있나? 우리 경호가 화를 얼마나 잘 내는데.”
“야….”
“너 그거 화병이야, 화병. 내가 걸려봐서 아는데 그거 성질내야 할 때 못 내서 생기는 병이야. 아니, 부모라도 결국 다른 사람인데, 뭔데 막말이야? 지금 생각해봐도 열 받네. 확 엎어. 다시는 너한테 그렇게 못 하게 해야지.”
강동현은 처음에는 좋게좋게 말하려더니 결국엔 상대의 부모라는 것도 생각지 않고 마구 말했다.
“솔직히…. 솔직히 나라면 연 끊는다. 아니, 나 대학 안 들어가고 배우 되는 거 부모님이 반대할 때 진짜 집 나갈 생각 엄청 진지하게 했어.”
황경호는 내심 깜짝 놀랐다. 그는 단 한 번도 부모에게 반항을 한다든가, 아니, 그런 식으로 적대적이거나 폭력적인 언행을 할 수 있을 거라곤 상상도 못 해봤다.
부모에게 버림받을 것을 두려워하기만 했지 스스로가 그럴 수 있는 주체가 될 수 있을 거라곤 생각도 못 했기 때문이다.
“…….”
예전 같으면 누가 이런 말을 했다는 것만으로도 그 사람을 아주 달리 보며 싫어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상하게 선명한 이미지가 와 박혔다. 집에 가서 울고불고 소리를 지르고 화를 내는 자신이 말이다. 그리고 그것은 짜릿한 쾌감을 불러왔다. 해소감.
“야…. 너 부모님한테 잘해….”
하지만 그런 스스로에게 깜짝 놀라서 그렇게 말했다. 강동현이 어깨를 으쓱했다.
“뭘 더 잘해? 이미 충분히 잘하고 있어.”
“뭘 하는데?”
“내가 사람을 팼어, 사고를 쳤어, 어?”
“그 정도면 잘하는 거냐….”
“그럼 뭐…. 돈 잘 벌지, 잘생겼지, 사람들이 다 알아봐 주고 부러워하지. 뭘 더 바라? 거기서 더 바라면 그게 양심 없는 거지.”
“너 돈도 많으면서 부모님한테 집도 해 줄 생각 없다고 했었지….”
황경호가 문득 중얼거렸다. 강동현은 황당한 소리를 들었다는 얼굴이다.
“부모님이 필요하다고 하지도 않았는데 뭐 하려고 알아서 갖다 바쳐? 그런 게 돈 낭비야. 그리고 우리 엄마 아빠 집 있어.”
얘가 막내라서 이런 걸까…. 황경호는 그렇게 강동현의 얼굴을 가만히 내려다보며 관찰했다.
“…너 집에 연락은 자주 해? 어머니가 그런 거 섭섭해하신다며.”
“무소식이 희소식이라는 게 내 신조라.”
“야….”
“아, 귀찮아.”
“그러지 마. 어머니들 그 나잇대엔 호르몬도 많이 바뀌어서 힘들다고. 우리 엄마도 그래서 더 그런 것도 있는데. 주변에서 많이 도와줘야 해.”
“그런 건 아빠가 알아서 하겠지. 내가 같이 사는 사람도 아닌데 그걸 어떻게 일일이 다 신경 쓰냐? 그리고 내가 노는 사람도 아니고.”
“너 놀잖아.”
“나한텐 쉬는 것도 일이다.”
강동현은 참 배은망덕하게도 그런 식으로 엄마를 귀찮아한다는 사실을 숨기지 않았다. 황경호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한숨을 쉬었다.
“지도 한번 당해봐야지 정신을 차리지….”
“내가? 뭘?”
그러다가 문득 아까는 정말 죽고 싶을 정도로 절망적이고 기분이 안 좋았는데 어느새 이상할 정도로 아무렇지도 않은 상태가 된 걸 깨달았다. 예전 같으면 며칠이고 우울감에 떨며 스스로가 한 잘못을 끊임없이 반추했을 텐데.
황경호는 강동현의 얼굴을 가만히 보았다. 누군가와 함께 있다는 건 이런 걸까. 강동현은 황경호의 시선에 씨익 웃으면서 물었다.
“왜?”
황경호는 순간 복잡한 기분이 들어 시선을 피했다. 그리고 그냥 아무 말이나 했다.
“너 잘생겨서.”
“흐응. 알고 있네?”
“아…! 야! 하지 마!”
강동현이 옆구리를 잡으며 장난을 쳤다. 황경호는 간지러워서 몸을 움츠렸다. 둘이서 카우치 위에서 엎치락뒤치락했다. 강동현이 온몸으로 황경호를 깔아뭉개며 그의 뺨에 입술을 묻었다.
“흐응, 우리 경호~”
“아, 무거워!”
폐부가 짓눌리는 느낌에 황경호가 숨을 헐떡거렸다. 강동현이 몸을 좀 들어주자 좀 살 것 같았다. 강동현은 엎드려 있는 황경호의 티셔츠를 쭉 끌어올려 그의 부드러운 등에 입을 맞추었다.
“아…!”
황경호는 온몸의 피부가 정말 민감했다. 손끝으로 등허리를 슬쩍 쓰다듬으니 몸을 부르르 떨며 신음을 흘렸다. 민감한 것은 누군가 만져주길 바라서일까?
“아응…. 으응…. 갑자기 왜…. 하읏…. 읏…. 간지러워….”
등허리의 약간 단단한 살을 핥고 이로 깨물고 또 핥고 빨고…. 역시 황경호는 살이 맛있었다. 달다. 강동현은 그의 등을 쪽쪽 빨면서 한 손으로 그의 가슴을 지분거렸다.
“아앙, 힛, 아앗…!”
젖꼭지 부드럽다. 그리고 진짜 잘 느꼈다.
“가슴 기분 좋아? 응?”
“아앙…. 손톱으로…. 하응…. 아파…. 아파….”
“기분 좋잖아? 그치?”
강동현은 그의 등골을 하나하나 핥으며 그의 젖꼭지를 쪼물락거렸다. 황경호가 몸서리를 치면서 그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그의 바지 속에 손을 넣었다. 속옷 위로 그의 음부를 더듬거렸다.
“흐앗…. 아앗…! 아아앙….”
“혼자서 할 때 여기도 만져? 아니면 아직도 자위 안 해?”
“안 해…. 아으…. 으응…. 하으….”
황경호는 속옷 위로 들어올 듯이 꾹꾹 누르는 강동현의 손가락 때문에 식은땀을 흘렸다.
“왜 안 해? 가끔 싸우면 2주 넘게 나랑 안 하잖아. 그럴 때 하고 싶지 않아?”
“그걸 왜 해…. 아앙….”
젖꼭지가 떨어져 나갈 것 같다. 온몸에 땀이 확 돈다. 강동현이 얼굴을 살짝 붉히고 황경호의 뺨을 빨았다.
“아직도 섹스하는 거 싫어? 왜 안 해? 난 네가 안 해주면 혼자서 네 생각하면서 맨날 하는데.”
“…!”
황경호는 얼굴을 확 붉히며 주륵 투명한 걸 흘렸다. 거긴 만지지도 않았는데. 부끄럽다…. 강동현은 황경호의 옷을 홀딱 벗겼다. 그리고 자신도 벗었다. 그리고 서로의 피부를 맞대었다.
“으으응….”
소름이 돋았다. 황홀하다. 황경호는 부르르 몸을 떨었다. 강동현은 거실 테이블 밑에 있는 물건을 놔두는 보울에서 젤을 꺼냈다. 저런 데다 놔뒀단 말인가. 아직 날도 훤하고 커다란 창문으로는 한강이 바로 보인다. 황경호는 두 팔꿈치를 세우고 엎드린 채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강동현이 그의 위에 몸을 딱 붙여 올라탄 채 그의 날개뼈에 쪽 입을 맞췄다.
“왜?”
“커튼이라도 치자….”
“왜? 날씨도 좋은데?”
“누가 보면 어떡해….”
“저기서 여기까지 누가 봐.”
강동현은 황경호의 엉덩이에 젤만 가득 짜 넣고는 바로 자신의 남성기를 들이대었다. 핑거링 안 할 생각인가 보다. 황경호는 부르르 떨었다. 강동현이 그의 손을 잡았다. 부드럽게 어루만지며 귓가에 속삭였다.
“황경호….”
무거울 정도로 그가 등 뒤에 딱 붙어 있었다. 황경호는 그 소름 돋는 접촉감에 몸서리를 쳤다. 등골에 긴장이 달리며 식은땀이 났다. 숨이 벌써부터 가쁘다.
‘아플 것 같아…. 나쁜 놈. 지가 급하다고….’
넣어줘. 넣어줘. 빨리 넣어줘. 하나가 되고 싶어. 가지고 싶어.
황경호는 온몸을 확 붉혔다. 그만큼이나 자신도 원하고 있었다. 다리가 얽혔다. 입구에 매끈하게 팽창한 귀두가 쪽 붙어왔다. 황경호는 한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감쌌다. 강동현이 그대로 힘으로 꾹 누르더니 퍽 박았다.
“하…!!”
황경호는 그 짧고 강렬한 고통에 숨을 확 내쉬며 부르르 떨었다. 여파가 파도처럼 덮친다. 자신의 손을 잡고 있는 그의 손을 엄지로 긁었다. 아파서 엉덩이가 절로 경련했다.
그리고 사정했다.
“으흑…. 으으으응…. 아읏…. 아앙….”
아파…. 기분 좋아. 아파. 기분 좋아. 아파…. 기분 좋아….
강동현이 웃으면서 황경호의 귓가에 얼굴을 비볐다.
“너 오랜만에 하면 꼭…. 처음에 넣자마자 간단 말이야. 귀엽게시리….”
황경호가 얼굴을 확 붉혔다.
“아프다고, 멍청아….”
“미안…. 급해서.”
“지금 움직이지 마…. 하읏….”
“황경호…. 으윽…. 하….”
“아앙…. 움직이지 말라니까…. 앙…. 아앗…!”
쪽쪽. 찍찍. 첩첩첩. 찌걱찌걱. 음부가 자지에 찰싹 달라붙어서는 쪽쪽 빠는 소리를 냈다. 오늘따라 더 심하다. 황경호는 헐떡거리면서 그의 뺨에 얼굴을 묻었다.
“하앙…! 강동혀언…. 하아…. 아앙…….”
겹쳐진 피부의 면적만큼 하나가 된 느낌. 황홀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이런 거, 왜 이렇게 기분이 좋은 것일까. 모르겠다. 그가 처음에 확 박는 바람에 안이 따가웠다. 그 열감이 성애의 열감과 더해 온몸에 땀이 비 오듯 쏟아졌다.
“황경호…. 경호야…. 하…. 다음에 혼자 할 일 있으면 나 생각하면서 해…. 알았지? 내가 어떻게 해줬는지 기억하면서…. 이런 거 말이야.”
“아우으…. 변태…!!”
강동현이 꽉 눌러 붙여 변태같이 안을 막 휘젓자 황경호가 질색을 했다. 강동현은 실실 웃으면서 더 그랬다.
“이게 뭐? 이게 뭐?”
“하, 하지 마….”
“엉덩이 더 들어봐. 응? 사실 좋잖아? 좋아하잖아, 이런 거. 응? 그치?”
“아앙…. 아아앙…. 잠깐만…. 하앗….”
“으윽…. 하…. 황경호…. 경호야….”
황경호의 엉덩이를 살짝 들어서는 자기 하반신을 딱 붙이고 엉덩이 살이 다 딸려갈 정도로 안을 마구 후볐다. 기다랗고 두꺼운 막대기로 안을 잔뜩 휘저으니 여기저기 다 닿는다. 황경호는 너무 자극이 심해서 강동현의 단단한 허벅지를 주먹으로 퍽 쳤다.
“장난치지 마…!”
황경호가 화를 냈다. 강동현은 아직도 장난기가 안 빠져서는 땀을 주륵 흘리며 황경호의 귓가에 입술을 묻고 속삭였다.
“응? 왜? 왜? 내 건데.”
“내가 왜 네 거야!”
“내 거야.”
“아니…. 아앗…! 야…! 너…! 앗…! 아앙! 힉…!! 아…!!! 잠깐…! 힉…. 아…!! 흐앗…! 으아앗…! 죽어…. 죽어…. 흐앗…. 너무 빨라아…! 강동현…! 좀만 천천히…. 아…!”
“윽…! 젠장…. 후…. 아윽…! 경호야…! 큭…!!”
카우치가 마구 흔들렸다. 황경호는 자기 음부가 상대의 남성기에 의해 거칠게 뚫리고 파이고 찔리는 걸 속절없이 느꼈다. 반동으로 자기 엉덩이가 그에게 달라붙었다. 황경호는 눈물을 줄줄 흘리며 카우치에 바짝 엎드려 흔들렸다. 잡히지 않은 손으로 허리를 잡고 있는 강동현의 손을 잡았다.
“아앙…! 나쁜 놈…! 하…! 살살 해도 되잖아…! 아아…! 죽을 것 같아…! 하우…. 흑…! 아아아아앙….”
황경호는 질질 울면서 절정에 이르러 엉덩이를 마구 경련하며 체액을 핏핏 쌌다. 황경호는 오르가즘을 느끼고 있을 때 강동현이 계속하는 게 너무 싫었다.
“황경호…. 윽…. 귀여워. 귀여워…. 기분 좋아. 최고야…. 큭…!”
“하우…. 흑. 아으…! 으읏…. 하…. 앙…. 흣….”
몸의 컨트롤을 완전히 잃었다. 강동현이 봐주지를 않고 경련을 계속하고 있는 황경호의 엉덩이에 두꺼운 걸 자꾸 푹푹 찔렀다. 황경호는 그의 손을 할퀴었다.
“흑…. 아윽. 아앗…. 아앙…. 아흑. 흑…. 으윽…. 아윽…. 흐윽….”
황경호는 앓는 신음만 내며 말도 못 하고 꼼짝도 못 하고 당했다. 그리고 또 오르가즘.
“하아아아앙…….”
“큭…. 으윽….”
강동현이 조임에 인상을 쓰며 땀을 후두둑 흘렸다. 그리고 계속했다. 황경호의 온몸이 뻣뻣하게 꿈틀거리며 숨도 제대로 쉬지 못했다.
‘기분 좋아….’
그냥 이대로 죽어버리면 좋겠다. 그가 너무 좋았다. 몸을 겹치는 게 황홀하다. 기분이 좋아서 죽어버릴 것 같다. 그를 영원히 이렇게 품고 있고 싶었다. 그래서 죽고 싶다.
“강동현…. 하으…. 거기 좋아…. 흑…. 기분 너무 좋아…. 아앙…. 죽을 것 같아…. 더 해줘…. 더 찔러줘…. 아아….”
“큭…! 경호야…! 으윽….”
강동현이 황경호에게 딱 달라붙었다. 황경호가 고개를 들었다. 입을 맞추었다.
“음…! 으읍…. 읏…. 으응….”
둘은 세상 이렇게 진지할 수 없는 얼굴로 입을 맞추었다. 혀를 섞고 빨고 깨물고 타액을 섞고…. 황경호는 그의 뺨을 손으로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그가 끝에 다가간 게 느껴졌다. 몸 안에 들어온 그의 중심이 뜨겁다. 아니면 내가 뜨거운 걸까.
“해줘…. 흑…. 해줘…. 강동현…. 해줘. 싸줘. 내 안에…. 하읏…. 내 안에 해줘….”
입을 맞추면서 부들부들 떨며 그렇게 애원했다. 강동현과 눈이 마주쳤다. 온몸의 피부에 소름이 돋았다. 그는 섹시한 얼굴로 다시 입술을 훔치며 말했다.
“내 눈 보면서 다시 말해 봐.”
“아으…. 흑….”
눈을 마주치면서, 황경호는 그와 눈을 마주친 채 속삭이듯 결국 말했다.
“내 거기에…. 안에 깊이…. 네 정액 싸줘…. 강동현….”
“윽…!”
강동현은 그대로 황경호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꾹 누른 채 곧바로 절정에 이르러 정액을 싸기 시작했다. 가장 깊숙이 박아 왕창 지리고 있었다.
“하아……!!”
황경호는 그 느낌에 강동현과 입술을 떼고 비명처럼 탄식을 내뱉었다. 그리고 다시 입이 막혔다.
‘들어오고 있어…!’
그대로 강동현에게 꽉 끌어안겨 몇 번이고 그가 허리를 털어 안을 들락날락하며 끝까지 사정하는 걸 느껴야 했다. 그게 끝났을 땐 둘 다 축 늘어져 카우치에 엎드려 누웠다. 황경호는 강동현한테 뒤덮이듯 깔려 숨도 제대로 못 쉬었다. 정신이 몽롱해졌다.
죽음 같았다. 약간 무서워졌다. 황경호는 강동현의 손을 꽉 잡았다. 조금 괜찮아졌다.
“…괜찮냐….”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강동현이 헐떡거리듯 그렇게 물었다. 오늘은 그도 죽을 것 같은 모양이었다. 황경호는 아무 말도 못 했다. 강동현이 몸을 좀 일으켰다. 그제야 숨을 제대로 쉴 수 있으면서 머리가 약간 맑아지는 것 같았다. 강동현은 황경호의 엉덩이에서 자신의 것을 빼내고 자세를 바꿔 그를 자신의 위에 태웠다. 기본적으로 체급 차를 인지하고 있는 터라 안 깔아뭉개려고 노력하는데, 할 때는 괜찮은데 막판에 하고 나면 꼭 깔아뭉갠단 말이다. 황경호는 강동현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은 채 그냥 눈을 감고 있었다. 강동현이 그의 뺨을 입술로 지분거리며 다시금 안에 자지를 집어넣었다. 황경호는 움찔하며 몸을 바짝 긴장했다가 흐물거리며 다시 축 처졌다.
“나…. 더 못 한다….”
황경호가 깔깔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강동현은 황경호의 엉덩이를 주무르며 속삭였다.
“가만히 있어, 그럼.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그게 무슨 소용…. 아앙…….”
슥슥. 부드럽게 살덩이가 들어왔다 나갔다 하자 황경호는 신음을 흘리며 그의 몸에 달라붙었다.
“살살 할게. 살살….”
“으응……. 알았어…. 하앗…. 아앙…. 하앙…. 거기…. 거기….”
“여기? 알았어. 여기? 맞아?”
“아아앙…. 하으…. 기분 좋아…. 하앙….”
“나도…. 하…. 사랑해….”
“아…!! 할 때 그 말 하지 마!”
…뭐, 사이가 좋은 건 좋은 것이다.
[고쳐줄까?] 3부 3권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