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6화 (26/47)

8. 사랑의 바로미터

첫눈에 반하고도 몰라서 끊임없이 상처 주고도 벗어나질 못했다. 상대도 처음부터 그에게 반해서 끊임없이 상처받으면서도 그에게서 벗어나질 못했다.

강동현은 그가 그저 자신에게 호감이나 어떤 감정을 느끼고 있다는 걸 막연하게, 본능적으로 알아차리고 있었다. 강동현을 사랑하는 많은 사람들처럼 말이다. 그리고 이성적으로도, 그게 아니라면 말이 되지 않았다. 강동현은 제대로 반성하진 않았지만, 자신의 잘못은 이제 대부분 인지하고 있었다. 의사나 김태형이나 강동현이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부분까지 지적하곤 했으니까. 그런 짓을 했는데도 황경호는 강동현이랑 만나주었다. 그래서 머리로는 알고 있었다. 그가 싫어한다는 감정만 품고 있는 게 아니라는 걸 말이다. 그리고 그 이상 고민하지 않았다. 마치 한 번 결론을 내리면 뒤돌아보지 않는 것처럼 그가 자신을 좋아한다는 걸 하나의 공리처럼 취급했다.

강동현은 얼마 전에 와서야 자신이 아예 처음부터 그에게 끌렸다는 걸 깨달았다. 처음부터 그랬다. 그래서 ‘아, 그때 정신만 좀 차렸으면 지금처럼 어렵지는 않았을 텐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두 달 동안 그와 데이트를 하며 그를 좋은데 데려가고 좋은 걸 먹이고 한 것은 그런 자신을 벌충하기 위한 것도 컸다. 그리고 그의 기분이 풀리고 다시금 함께할 수 있으면 그때 다시 실수하지 않으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고작 두 달, 일주일에 한두 번 만나 데이트를 했을 뿐인데 그는 경계심에 신경이 바짝 곤두서 있는 상태에서 점점 마음을 놓는 게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언제나 그는 솔직하지 못하고 사람을 잘 따르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전혀 그렇지 않았다. 그리고 오늘 드디어 그가 믿고 따르는 사람 앞에서만 보이는 미소를 짓는데, 생각보다 크게 감동이 일었다.

역시 나 좋아하잖아. 그렇게 안도했다. 두 달. 그렇게 길지 않은 시간이었는데도 이러는 걸 보니 앞으로는 문제없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래서 좀 더 관계를 진전시키기 위해 예전의 일을 조심스럽게 물어보았다. 그랬더니 여전히 그를 못 믿겠고 무섭고… 그리고 금세 두 달 전으로 돌아가 아무것도 풀리지 않은 것처럼 딱딱해지더니 다 그만두자고 했다.

그가 원하는 대로 해주겠다는데. 아니, 그가 원하는 것보다 그 이상으로, 좋은 건 다 해준다는데. 그도 결국 좋아했으면서 왜 또 얘기가 그렇게 되는 것인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관계가 진전되는 게 싫으면 그냥 두 달 동안 지낸 것처럼 계속 지내면 된다. 그렇게 하고 싶다고 말만 하면 되는 것이다. 근데 고작 그 질문 한 것이 기분에 거슬려 그냥 다 엎어버리겠다고? 이해할 수가 없었다. 더 원하는 게 있거나 마음에 들지 않는 게 있다면 말하게 할 생각이었다.

일단 그가 강동현을 좋아하고 있다는 것만큼은 인정하게 해야 이야기가 진행될 것 같아 그가 생각하고 있는 바를 짧고 정확하게 전달했다. 그랬더니만 세상 이렇게 서러울 수가 없다는 듯이 울었다. 그리고 또 자학을 하기 시작했다. 자신이 바보 같고 우습지 않냐며. 그리고 그는 강동현에게서 벗어나려고 많은 노력을 했다는 뉘앙스를 말했다. 알고 있었다. 그는 직장도 그만두고 집도 옮기면서까지 강동현을 피했던 적도 있었다. 이해도 할 수 있었다. 그때 강동현이 그를 많이 괴롭혔으니까.

하지만 강동현 본인이 계속 집적거린 걸 아니까 그래서 그가 벗어나지 못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가 강동현이 그랬던 것처럼, 계속 강동현을 잊지 못해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그는 언제나 관계에 수동적인 입장으로만 보였기 때문에 강동현의 강압에 어쩔 수 없이 넘어가고 일종의 끌림을 강동현한테 느끼는 것도 그 일환이라 여기고 있었던 것 같다.

스스로의 마음을 인정하라며 다그치려고 하는데 문득 강동현 자신도 그 마음을 인정하는데 아주 오랜 시간이 걸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인정했다고 하고도 질질 끌었던 것도 있었다는 걸 인정한다.

왜? 왜 얘도 자기 마음을 인정하기가 이렇게 힘든 걸까? 난 왜 힘들었던 걸까?

그가 원래 사랑하던 형태와 달라서, 남자라서, 그의 이상형과 너무 달라서…. 나도 모르게 반해 있어서.

스스로 인지하지도 못하고 하는 사랑을, 그것도 그 상대를 질리도록 괴롭히고 난 이후에야 인정할 수 있겠는가. 인정하는 순간 천하의 몹쓸 놈이 되는 건 기정사실인데. 강동현은 스스로에게 자신이 있는 남자였고 ‘고작 그런 간호사’ 하나 때문에 자신이 그렇게 되는 걸 인정하기가 정말 힘들었다.

하지만 인정했다. 도저히 그게 아니면 설명이 안 되니까. 그가 집을 나가고 자신이 느끼는 감정을 돌아보며 더 확신을 하기도 했다. 그는 거의 황경호에게 홀딱 빠진 수준이었다.

그러니까 미룰 게 전혀 없었다. 강동현은 그에게 홀딱 빠졌고 그도 어쨌든 강동현을 좋아한다. 그래서 그가 그 사실을 인정하도록 하려고 했는데, 그가 자꾸 울었다. 화를 참지 못하고 울분에 차서 눈물을 흘리는 게 아니라 서럽고 또 서러운 것처럼 울었다.

그리고선 만나고 싶지 않다고, 그만하고 싶다고, 자기 좀 놔 달라고….

애원을 했다. 그는 이제 강동현한테 애원할 필요가 없는데도 그렇게 했다. 이 관계에서 힘을 가진 것은 자신이 아니라 그였다. 그는 이제 강동현에게서 벗어나고자 한다면 언제든 벗어날 수 있었다. 강동현은 최선을 다해서 그를 놓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런데 그에게 놔 달라고 애원하는 건 어불성설이다.

결국 그냥 순순히 인정하라고 윽박지르려고 하는데,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는 왜 강동현에게 끌렸던 걸까? 고작 성적인 끌림 때문에? 강동현이 그런 힘을 조금만 부리면 끌려왔으니까? 근데 얘가 그런 애였던가. 세상에 만나봤던 사람들 중에서 이렇게 섬세한 애는 처음 봤는데. 그는 섹스보다도 그 후에 껴안고 있는 걸 훨씬 좋아했다. 달래 주며 부드럽게 말하는 것과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걸 좋아했다.

만약에 얘도 나한테 첫눈에 반했던 거라면, 그런데 나한테 그런 취급을 받았던 거라면 아마 절대로 인정할 수 없지 않을까. 이 생각은 떠오르자마자 이상할 정도로 가슴에 와 박혔다. 본능적이었다. 설명할 수 없었다. 강동현과 황경호는 그렇게 맞지 않으면서도 세상 그 누구보다도 맞았다. 그건 강동현뿐만이 아니라 황경호에게도 그랬다. 그랬다.

그럼 나는 날 좋아하는 사람을 그렇게 취급한 걸까

나는 날 좋아하는 사람을 그렇게 취급하는 남자였나

나는 내가 좋아하는 사람을 그렇게 취급한 걸까

나는 내가 좋아하는 사람을 그렇게 취급하는 남자였나

지금 눈앞에서 울고 있는 이 청년도 그의 인생의 사랑이었다. 강동현은 그 순간에 인정했다.

“지금까지 전부… 내가 잘못했어. 미안해. 잘못했어. 나 너 정말 좋아해. 앞으로 절대 니가 싫어하는 건 안 할게. 평생 소중하게 할게. 니가 하는 말만 들을 게. 울지 마. 내가 다 책임질게. 나 미워하지 마. 나한테 한 번만 더 기회를 줘.”

강동현은 진심으로 말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하고 나니 지금까지 그의 고백들이 얼마나 무성의하고 가벼웠는지 알 수 있었다. 강동현은 그렇게 말하면서 황경호의 두 눈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손에 입술을 누르며 안타까운 한숨을 흘렸다.

“니가 말하는 건 정말 뭐든 들을 테니까….”

아아, 이 말을 얼마나 많이 했던가. 그는 믿지 않을 것이다. 강동현은 황경호가 뺨을 치기도 전에 이미 그렇게 생각했다.

“갑자기 그런 말 하면…! 내가 그냥 넘어갈 것 같아!”

황경호는 화를 냈다.

“니가 뭘 책임질 수 있는데! 니가 뭔데! 니가 뭐라고!!”

그는 강동현의 위에 올라타서 그를 마구 때렸다. 마지막에 얼굴을 주먹으로 치려다가 카우치를 쳤다. 그러더니 또 눈물을 왈칵 쏟았다.

“흑… 으흑….”

“미안해… 미안해. 울지 마. 응?”

항상 이 정도겠지, 라고 생각했다, 자신과 그의 관계는. 병 때문에 잠깐 미쳐서 끌리는 거, 나도 모르지만 그냥 기분 좋은 거, 짜증 나지만 어쩔 수 없이 만나야 하는 거, 만나지 않으면 내가 손해니까, 가끔 이유 없이 보고 싶은 거, 좋아하는 건 아닌 거, 좋아하는 것 정도. 하지만 항상 그 이상이 나왔다. 항상 예상하지도 못한 그 이상이 나왔다.

강동현은 언제나 자기 자신에게 자신이 있는 남자였지만 그를 상대할 때면 언제나 틀렸다는 걸, 그리고 지금도 제대로 아는 게 없다는 걸 알아차렸다.

그는 항상 ‘그 이상’이었다.

“제발… 미안해. 내가 정말 잘못했어. 울지 마. 내가 다 잘못했으니까.”

강동현은 상체를 일으키고 울고 있는 그의 뺨을 잡아서 쓰다듬었다. 새빨개져서 부어있었다. 강동현은 그의 이마에 자신의 이마를 대었다.

“나 봐… 응?”

눈이 마주쳤다. 그러자 둘은 하염없이 서로의 눈만 바라보았다. 그의 눈은 엉망으로 눈물에 젖어 흰자가 다 새빨개져서는 숨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면서도 강동현의 눈을 바라보고 있었다. 강동현은 키스라도 할 듯이 그의 뺨과 뒷덜미를 한 손으로 강하게 감싸 잡으며 그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그가 덜덜 떨면서 강동현의 옷을 잡고 있었다.

“이번엔 진짜야… 믿어줘. 정말 좋아해. 잘할 게. 응? 정말로… 너한테 심한 소리도 절대 안 하고. 널 내 마음대로 하려고도 안 하고. 괴롭히지도 않고. 안 하고 싶으면 평생 안 해도 돼. 하게 해줘도 니가 하자는 대로만 할 테니까. 나 니 거야. 니가 나 좋아하든 싫어하든 나 니 거니까 마음대로 해.”

그러자 황경호가 더 부들부들 떨었다.

“그런 말… 하지 마… 무서워….”

“뭐가 무서워…..”

강동현은 황경호의 손에 입술을 누르며 그의 눈을 다시 올려다보았다.

“이젠 내가 더 무서워.”

그렇게 서로를 바라보면서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한참 있다가 황경호가 먼저 시선을 돌렸다.

“물 줄까?”

“…응….”

잠깐 그런 그의 얼굴을 쓰다듬었다가 강동현이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물었다. 투명한 컵에 물을 따라서 두 잔 들고 왔다. 강동현은 카우치의 등에 팔을 걸치고 물을 마시는 그의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살랑살랑 건드렸다. 황경호가 어깨를 움츠리며 피했다.

“뭐 하는 거야.”

“좋아서.”

강동현이 말했다. 황경호가 얼굴을 벌겋게 하고 강동현을 노려보았다.

“다시 같이 살자.”

강동현이 말했다. 황경호가 인상을 조금 쓰고 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무슨 의도가 있나 탐색하는 것 같다.

“이 집은 둘이 살기 불편하니까 방 두 개 이상 있는 데로 옮기자.”

“내가 왜….”

“어디가 좋아? 이 아파트로 할까? 아니면 다른 데로 옮길까?”

“…….”

“너 경치 좋은데 좋아하니까 한강 근처로 할까?”

황경호가 입을 꾹 다물고 강동현의 얼굴을 보았다. 강동현은 그의 시선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내가 왜 너랑 같이 살아야 하는데.”

“내가 좋아하니까. 같이 살고 싶어.”

“…….”

“너랑 나랑 생활패턴이 너무 다르니까. 같이 안 살면 너무 보기가 힘들잖아. 나 이제 일 쉬긴 하지만 그래도 아직 올해 말까진 바쁘고… 그런 거 아니더라도 같이 살고 싶어. 매일 보고 싶어.”

“난 너 안 좋아해. 그런데 내가 왜 같이 살아야 돼?”

“알아. 너 나 싫어하는 거. 그러니까 같이 살자. 같이 살아야지 그것도 어떻게든 바꾸지.”

“…갑자기 왜 이래.”

황경호가 물었다. 강동현은 피식 웃었다.

“뭐가 갑자기야. 그냥… 아까 얘기하다가 내가 미쳤다고 또 욱해서 너한테 강요하려고 드는구나 싶어서.”

“…….”

“못 믿겠어?”

황경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강동현은 한참을 그런 황경호의 얼굴을 보고 있다가 결심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침실로 가서 뭔가 한참 뒤적거리더니 나왔다.

“나 잠깐 차에 좀 갔다 올게.”

그리고는 또 주차장에 갔다가 금방 올라왔다. 그러더니 실로 묶는 갈색 서류 봉투 하나를 황경호의 품에다 안겨주었다. 황경호는 얼떨떨해서 물었다.

“이게 뭔데….”

강동현이 매력적으로 씨익 웃었다.

“내가 가진 거 전부.”

“?”

황경호는 봉투를 열어보았다. 일단 눈에 띄는 건 차 키 두 개와, 도장 두 개, 카드 몇 개, 통장 서너 개와 집문서 등… 황경호가 깜짝 놀라서 강동현을 쳐다보았다.

“비밀번호 같은 건 다 포스트잇에다 써서 붙여놨다.”

“…….”

있는 남자에게 사랑의 바로미터란,

바로 돈이었다.

“내가 이런 걸 왜 받아!”

황경호가 펄쩍 뛰면서 서류 봉투를 카우치에다가 던졌다. 마치 못 만질 걸 만졌다는 태도였다. 강동현은 봉투를 열어서 안을 보았다.

“왜? 공인인증카드도 다 넣었는데… 아, 내 명의로 휴대폰 하나 줄까? 그러면 아마 웬만한 건 다 쓸 수 있을 걸…. 아, 일단 폰….”

강동현은 그러더니만 다시 침실에 가서 자기 휴대폰 두 개를 가지고 나왔다.

“이건 일해야 되니까 안 되고… 아, 안 되겠네. 폰은 내일 만들어서 바로 줄게. 카드 써, 카드.”

그리고는 다시 황경호의 손에다 쥐여주었다. 그랬더니만 또 막 울 것 같다.

“너 또 돈으로….”

“야, 어떤 미친놈이 돈 주고 섹스하겠다고 자기가 가진 걸 전부 주냐? 마누라한테나 그렇게 하는 거지.”

강동현은 황경호가 말을 다 끝내기도 전에 끊었다. 저 비슷한 말은 너무 많이 들어서 귀에 인이 박힐 지경이었다. 강동현이 약간 농담을 섞어 말하니까 또 엄청 때린다.

“아파. 아파. 알았어. 안 할게.”

“싫어… 이런 거 싫어. 싫어. 가져가.”

황경호는 완전히 겁에 질렸다. 강동현의 무릎에다 그걸 얼른 놓고는 벌떡 일어서서 엉거주춤 물러나 있었다. 강동현은 그걸 들어서 잠깐 안을 보았다. 부족할 리가 없는데.

“왜?”

그렇게 물어보면서 다시 황경호의 손에다 쥐어주었다. 안 잡으려고 해서 아예 같이 일어나서 그의 품에 끌어안게 하고 뒤에서 두 팔을 잡아 꽉 끌어안게 했다.

“니 거라니까.”

“놔…!”

“그러니까 이사 가자? 응? 솔직히 난 여기도 충분한데… 너 혼자 있는 공간 필요하다며. 이제 난 못 사. 돈 없어서.”

“흑… 이러지 마… 무서워….”

“왜 무서워? 아직도 못 믿겠어? 나 진짜 너 좋아서 이러고 있는 거라니까? 나 진짜 가진 거 이거밖에 없어. 이게 단데…….”

부족하나… 강동현이 깜짝 놀라서 황경호의 옆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는 당혹스러워서 얼굴이 빨갛다가 빠졌다가 눈물이 차올랐다가 떨었다가… 강동현은 그냥 상황을 즐기기로 했다. 그의 머리카락에 오랜만에 얼굴을 묻고 비볐다.

“나 좀 믿어줘. 응? 나 아무한테도 이래 본 적 없어.”

전 여자친구한테도 이렇게까지는커녕…. 뭐, 나중에 결혼했다면 다 걔 거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그래도 진짜 주는 거랑 생각만 하는 거랑은 천양지차일 것이다. 그가 진정이 될 때까지 그렇게 끌어안고 있었다.

“알았어… 믿을게. 그러니까 이건 들고 가.”

황경호가 말했다. 강동현은 그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냄새를 맡으면서 대답했다.

“아니, 됐어… 그냥 진짜 니가 들고 있어.”

“믿는다니까. 이런 거 우리 집에 놔둘 데도 없어… 누가 훔쳐가면 어떡해.”

“뭐… 신고하면 되지…..”

아.. 진짜 만지고 싶다… 강동현은 너무 오랜만에 이렇게 몸을 맞대고 있으니 진짜 온몸이 근질거려서 저도 모르게 그를 더 꽈악 끌어안으며 그의 뺨에 입술을 꾹 누르고 얼굴을 비볐다. 핥고 싶다.

“아… 잠깐만… 갑자기 뭐 하는… 야…!”

강동현이 숨소리가 약간 깊어지면서 너무 꽉 끌어안자 황경호가 깜짝 놀라서, 아니, 그것보다도 구겨지는데…! 집문서만 해도 15억짜리다. 황경호는 팔 두 개가 다 잡혀서 꼼짝도 못 하는 상황이라 그냥 발뒤꿈치로 그의 발을 밟았다. 막 아프게는 못 밟았더니 그냥 무시한다. 그래서 뒤꿈치로 정강이를 깠다.

“윽…!”

“뭐 하는 거야!”

황경호는 그를 겨우 떨쳐내고 화를 냈다.

“아… 미안. 오랜만이라….”

강동현은 실수를 인정하고 빨리 사과했다. 진짜 아프다… 강동현은 까인 정강이를 손으로 문지르면서 카우치에 앉았다.

“너 믿는다고 했지? 같이 사는 거다, 그럼?”

강동현이 말했다. 황경호가 인상을 찌푸렸다.

“그거랑 그거랑 무슨 상관인데?”

“내가 좋아한다는 거 믿는다며?”

“그거랑 같이 사는 게 무슨 상관인데?”

“아, 왜~ 같이 살자~.”

황경호가 따지자 강동현이 그냥 앞뒤 없이 졸랐다. 황경호가 말을 잃고 그를 내려다보았다. 강동현은 웃는 얼굴로 그의 손을 잡아끌어 당겼다. 앗 하는 사이에 그의 무릎 위에 앉게 되었다. 강동현은 황경호의 쇄골쯤에 얼굴을 묻고 숨을 한 번 들이키더니 그의 허리에 두 손을 걸쳐 가볍게 깍지를 끼고 황경호를 올려다보았다.

“진짜 같이 살자? 응? 응? 내 소원인데.”

“…….”

“한강 근처에 있는 아파트들 돌아다니자. 다음 일요일부터 가볼까? 몇 평 대 갈까? 아, 너무 넓으면 같이 지내는 맛이 안 날 거 같고. 40평? 50평? 여기보다 더 좋은 데로 가자. 응? 나 돈 없으니까 니가 빨리 결정해줘.”

어디서 애교를…. 황경호가 얼굴을 확 붉혔다. 그는 자신의 매력을 잘 아는 남자였다. 그걸로 금세 또 황경호를 휘두르려고 들었다. 황경호는 못마땅한 얼굴로 그를 잠깐 내려다보다가 그리고 정말 긴가민가 하는 표정으로 손에 들린 갈색 봉투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다시 또 쓸데없이 잘생긴 강동현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강동현의 얼굴을 그대로 내려다보며 걱정스러운 얼굴이 되었다.

“왜….”

강동현이 부드럽게 물었다. 황경호는 한참 주저하다가 좀 취약해 보이는 표정이 되어서는, 강동현의 얼굴을 간호사 특유의 부드러운 손으로 만졌다.

“정말… 내 거라고….”

강동현이 씨익 웃었다.

“전부.”

*

자기가 원하는 걸 얻기 위해서는 말 그대로 물불 안 가리는 남자, 그게 강동현이었다. 황경호는 그걸 세상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결국엔 진짜 집에 그 봉투까지 들고 오게 되었다. 한숨도 잘 수가 없었다.

[오늘부터 그냥 같이 살면 안 돼?]

[갈 거야.]

[아, 왜.]

[몰라. 저리 가.]

[아, 너 이거 까먹었다.]

[……]

[아~ 그렇게 필요 없으면 가다가 버리던가.]

열어보고 싶지도 않았다. 봉인을 꽁꽁 묶어 놓고는 어디에 둬야 할지 알 수가 없어서 허둥지둥했다. 보증금 1000만 원에 월세와 관리비를 합쳐서 39. 그 정도 집에 있기에는 너무 값어치가 있는 물건이었다. 얼마짜리일지 상상이 안 갔다. 일단 집문서 15억에 차 두 대가… 차가 한 대에 못 해도 1억은 넘을 텐데…. 결국 어디에 둬야 할지 알 수가 없어서 침대 매트리스 밑에다 넣어두었다. 심장이 두근거려서 잠이 안 왔다. 그게 매트리스 밑의 물건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정말 날 좋아한다고?’

그렇게 한참을 뒤척이며 결국 새벽 5시를 넘겨서도 잠들지 못하다가 결국 천장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했더니 진짜 바보 같게도 좀 울컥해서 막 뭐가 나올 것 같았다. 황경호는 얼굴을 손으로 부채질을 하며 얼굴로 올라온 열기를 가라앉히기 위해 노력했다. 안 그래도 아까 강동현이랑 있을 때도 바보같이 엄청 울었다. 쪽팔리니까 앞으론 절대 울기 싫었다.

다시 만나면서는 정말 재미있었다. 생각했던 것보다도, 기대했던 것보다도 훨씬 더 말이다. 좋은데 다니고 좋은 거 먹고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고. 잠자리만 요구하지 않는다면 강동현만큼 황경호가 자신을 드러내는데 거리낄 게 없는 사람이 없었다. 이미 둘 다 서로 막장까지 다 봤다. 그는 그렇게 황경호도 잘 모르는 황경호가 좋아할 만한 것들을 잔뜩 해주면서 그의 환심을 사 결국 또 잠자리를 할 생각이었겠지만, 그래도 즐겁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마음이 편했다. 그가 정말 ‘섹스’만 원하는 건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 이상의 무언가로 관계를 정의하고 싶어 하지 않다는 것도 알아차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정도는 황경호도 충분히 이해가 되었다. 몸만 끌려서 이렇게 된 관계에 사랑이니 뭐니 생각해본 적도 없겠지. 섹스 좀 하겠다고 쉽게 사랑을 팔 남자도 아니고. 그는 자기가 비싼 놈인 걸 잘 알고 있는 놈이었다. 황경호는 그의 취향일 리도 없을뿐더러 전 여자친구처럼 미래를 함께하겠다고 생각할 리는 더더욱 없을 상대였다.

그래서 황경호는 정말로 이제는 더이상 아무런 기대도 하고 싶지 않았다. 딱히 어떤 거창한 걸 기대했던 적도 없었지만, 그래도 어떤 작은 것일지라도 기대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자꾸 스스로에게 되물었다.

그래도 괜찮겠어? 결국엔 섹스하려고 들 텐데.

그냥 이런 식으로 그가 잘 대해주고 가끔 이렇게 즐겁게 해주고 그런다면 어쩌면 괜찮지 않을까, 라는 생각도 든 적이 있었다. 섹스 자체는 기분이 좋더라도 부담스러웠지만, 그 뒤에 끌어안고 있는 것은 세상 제일 기분 좋았고… 그냥 황경호도 즐긴다고 생각하면서 하면 나쁘진 않은 거 아닐까.

그런데 막상 황경호가 고백을 받았는데도 비참해서 울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그가 물어보니 역시 그와는 앞으로 절대 섹스는 할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황경호는 그와의 섹스에 필요 이상으로 너무 많이 느꼈고 민감했다. 그런 걸 또 했을 때를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황경호는 그저 즐기는 섹스만 할 수는 없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다 솔직하게 말했다. 그는 상처받았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전에도 그가 고작 좀 죄책감을 가진다고 그를 위로하는 말을 했다가 결국 마지막에 상처를 받은 것은 황경호였다. 그냥 이대로가 좋았다. 하지만 그는 그런 보상 없이 이대로 황경호에게 잘해줄 이유가 없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먼저 그만두자고 했다.

그랬더니 또 우리는 서로 좋아하는 거라는 둥… 그가 책임질 수 없는 말들만 잔뜩 했다. 황경호가 그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하니 그가 거짓말이라고 했다.

그는 다 알고 있었다. 전부터 그랬다. 황경호가 그에게 매력을 느끼고 있는 것도, 휩쓸리는 것도, 결국엔 그와 하는 섹스도 좋아하게 되었다는 것도… 그걸 그렇게 당사자의 입에서 들으니까 너무 부끄러워서 말이다…. 너무 창피하고 부끄럽고 수치스러워서, 비참해서 눈물이 나왔다. 그가 너무 미웠다. 그래서 이번에야말로 모든 걸 다 끝내야겠다고 생각했다. 비참해도 애원했다. 끝내고 싶었다.

그랬더니 그가 또 막 다그치는데… 갑자기 가만히 황경호만 보고 있더니… 사과했다. 그리고는 황경호가 깜짝 놀랄 정도로 진지하게 고백을 했다.

정말 좋아한다고.

책임진다고.

평생 소중히 한다고.

그러니 한 번만 더 기회를 달라고.

듣고는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잠깐 정말 몸이 마비가 된 것 같아서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는 갑자기 겁이 확 나면서 또 그가 하다 하다 사람을 어떻게 해보려고 이런 말까지 하나 싶어서, 분하고 화가 났다. 근데도 그의 얼굴을 때릴 수가 없었다. 너무 화가 나서 눈물이 확 나왔다. 그는 황경호를 살살 달랬다. 그리고 마치 섹스를 할 때처럼 서로의 눈을 가까이서 마주 본 채 한참을 가만히 있었다.

그와 그렇게 눈을 마주치고 있으면 사위가 전부 멀게만 느껴졌다. 그와 자신만 있는 것처럼 그런 착각이 들었다. 빨려 들어갈 것만 같고 또 뭔가가 막 빨려 들어오는 것만 같기도 했다. 가슴이 터질 것 같기도 하고 진정이 되기도 했다. 왜 그런 느낌이 드는지 모르겠다. 황경호만 그런 걸 느끼는 것일까.

그리고는 강동현이 같이 살자고 했다. 자기 말을 증명하겠다고 지가 가진 것까지 전부 주었다.

예전에 강동현이 황경호한테 뭘 계속 퍼주려고 할 때도 고작 섹스 하나 하려고 오버한다고 생각했지만, 그는 진짜 그렇게 주려고 했다. 그래서 원래도 이런 식이냐고 물었더니 황경호한테만 그런다고 했다. 황경호가 생각해도 강동현은 사회인으로써 황경호보다 몇 단 위라 절대 호구같이 사는 놈이 아니어서 이상하다고는 생각했지만 직접 그 말을 들으니 정말 기분이… 이상했다. 그리고 그날 결국 휩쓸려서 다시 섹스까지 하게 되었다.

좋아한다는 말도 겨우 그런 식으로밖에 못 하던 놈이었다. 좋아한다고 했으니 자기 마음대로 뭐든 할 수 있다는 것처럼. 그는 그 말을 면죄부처럼 썼다. 그는 정말 거리낄 게 없는 남자라서 그의 말들은 대부분 대번에 무엇이 진심인지 판가름이 났다. 하겠다는 건 전부 하는 남자였다. 좋아한다는 말이야 같은 말이라도 사람과 상황에 따라 정도가 천차만별이니 그저 섹스파트너를 예뻐하는 정도라고 생각할 수 있었지만 책임을 진다든가, ‘평생’이라는 말을 함부로 쓸 놈은 절대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러니까 정말로 좋아한다는 거였다. 그렇게 생각하니까 자꾸 눈물이 나왔다. 그 개새끼 때문에 힘들었던 것들, 대부분 어쩔 수 없다며 화 한 번 못 내보고 참아온 것들이 수두룩했다. 이제 와서 그런 것들이 하나하나 생각나면서 막 억울하고 화가 나고 분하고…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미친놈처럼 다 엎어버리는 거였는데 왜 그렇게 못했을까 스스로가 바보 같게도 느껴지고 그랬다. 술 마시고 그가 기억을 몽땅 잊어버린 것도 차마 한 번 따지지도 못했다. 저번에 집을 나올 때 그가 성가시다느니 짜증 난다느니 할 때도 한 번 제대로 반박하지도 못하고 도망치기까지 했다.

‘지가 더 열 받게 하는데….’

그렇게 생각하니 갑자기 또 대단히 분노가 몰려왔다. 새벽 6시였다. 황경호는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불을 켜고 침대를 돌아보았다. 노려보기까지 했다. 그리고는 매트리스를 낑낑거리면서 들어 올리고 안에 넣어 놨던 서류봉투를 다시 꺼냈다.

“진짜 확 다 써버릴까….”

황경호는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서류봉투를 노려보다가 결국 묶여있는 실을 풀기 시작했다.

*

‘다 못 써….’

황경호는 잠은 한숨도 못 자고 출근을 해서는 지끈지끈한 머리로 멍청하게 아침의 일을 생각했다. 그건 도저히 한 사람이 평생 쓸 수 있는 돈이 아니었다. 황경호는 강동현의 팬질을 하기도 했고 그가 많은 작품의 히트를 친 것도 알고 있었다. 게다가 그가 예능프로그램이나 해외프로그램에도 간혹 나오는 것을 알고 있었고 광고는 근 1, 2년 미친 듯이 많이 찍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1년에 못해도 수십억은 벌겠거니 대충 예상은 하고 있었다.

그가 준 단출한 봉투 안에는

차 키 두 개 - 그가 끌고 다니는 검정에 가까운 네이비색 BMW 세단 하나와 흰색 벤츠 SUV

신용카드 두 개 - 하나는 저번에 줬던 파란색 카드와 하나는 검정색 카드

현금카드 세 개 - 각각 통장 세 개와 연결

공인인증카드 세 개 - 각각 통장 세 개용

통장 세 개 - 하나는 생활비 거치용 자유 입출금 통장, 하나는 이자율이 2% 정도 되는 3년짜리 정기예치금 통장, 하나는 수입이 들어오는 월급(?) 통장

도장 두 개 - 하나는 집문서 등을 위한 인감 통장, 하나는 모르겠음

집문서 - 강동현이 현재 거주하고 있는 삼성동 R파크 1동 1401호 매매가 15억짜리(비슷한 층에 비슷한 방향의 매물로 유추)

유가증권 - 강동현이 소속되어 있는 J엔터의 주식 9,530,124주

강동현은 정말 자기가 하는 일 말고 다른 곳에는 아예 관심이 없는지 수입의 대부분을 그냥 은행 계좌에 박아두고 일체의 투자라고는 하지 않는 것 같았다. 강동현이 거짓말을 친 게 아니라면 부동산은 진짜 지금 집 하나뿐이다(진짜 부모님한테 집 안 사드린 거 같다). 그리고 J엔터 주식은, 올해 초에 회사에 약간 문제가 생겨서 급전이 필요하게 되었는데 사장인 옥미현의 경우 회사를 굴리면서 꽤 빚이 많은 상황이라 어디서 융자를 얻어 오기가 힘든 상황이었다고 한다. 강동현이야 현금이 남아돌았고, 처음에는 회사 주식을 담보로 잡고 옥미현에게 빌려주려고 하다가 변호사인 매형의 조언으로 그냥 회사의 신주를 발행하여 회사에 투자를 하는 방향으로 합의를 보기로 했다고 경기도 어디 커피숍에서 들었었다. J엔터는 현재 옥미현이 60%, 강동현이 20%, 다른 투자회사들이 20%로 주식이 나눠져 있는 비상장회사다.

그래서 각각의 값어치가 대략적으로….

집 - 15억

BMW - 2억(찾아봤다)

벤츠 - 2억(이것도)

생활비 통장 - 11억

예치금통장 - 105억

월급통장 - 70억

유가증권 - 100억

일단 숫자로 표현되는 강동현의 재산은 총 305억 원에 달했다. 그리고 지금 중국에 회당 판권 7억에 팔렸다는 시크릿 블러드가 울프 이상의 엄청난 인기를 끌고 있다는 걸 감안할 때… 아마 앞으로 광고 수익이나 중국 출연 수익이 또 몰려올 것이다.

“…….”

황경호는 평생 이런 숫자의 돈이 수중에 들어올 것이라고는 상상도 해본 적이 없었다. 한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로또를 맞아보면 집을 사겠다, 여행을 다니겠다는 상상해보지만, 우리나라에서 로또 단독 1등을 맞으면 140억 정도에 세금을 떼면 100억을 못 받는다. 근데 요즘은 당첨확률이 높아져(?) 보통 1등 당첨금을 여러 명이 갈라 한 사람당 당첨금이 20억 안팎이고 수령액은 10억대 초중반…….

“…….”

…뭐라 할말이 없었다. 돈이 많을 거라곤 생각했지만 이렇게 많을 줄은 몰랐다. 돈이 너무 많아서 무서웠다. 황경호는 도저히 그걸 집에다 두고 올 수가 없어서 잘 들고 다니지도 않는 가방에다 넣어서 간호사실 락커에다 넣고 잠가 놓았다. 집보다는 여기가 더 안전할 것 같았다. 들고 올 때도 괜히 무서워서 택시까지 타고 출근했다. 택시기사 아저씨도 오늘따라 무서웠다.

아침에 돈의 총 액수를 확인하고 황경호는 단번에 그 돈을 쓰겠다는 생각 자체를 포기했다. 얼른 돌려주고 싶었다. 그래서 바로 아침에 전화를 걸었는데 자는지 받지 않았다. 그리고 그 뒤로도 계속 전화를 했는데 받지 않았다. 촬영하는 모양이었다. 퇴근을 하고도 전화를 계속 걸었는데도 받지를 않았다. 집에 갈 수가 없었다. 액수를 확인하고 나니 이건 진짜 황경호의 집에 있을 물건이 아니었다. 그런 빌라 같은 건 마음만 먹으면 사람 들어오고 나가는 건 일도 아니다. 책임질 수 있는 금액이 아니었다. 설사 분실신고를 하거나 하면 된다고 하더라도 손해 볼 금액의 액수가 달랐다. 그렇다고 병원에 두고 가자니 그것도 불안했다.

“아, 왜 전화를 안 받아!”

문자도 엄청 넣고 전화도 계속했는데 그 잠깐 틈이 안 나는지 안 받았다. 그동안은 바쁘다면서도 중간중간에 전화도 잠깐씩 하고 문자도 하더니만 말이다. 게다가 지금 찍는 드라마는 주말 드라마라서 월요일은 대본이 안 나올 때도 있어서 그렇게 바쁘지 않다고 분명히 말했는데.

황경호는 백팩을 앞으로 메고 전화를 하다가 또 강동현이 전화를 안 받아서 발을 굴렀다.

‘안 되겠다. 그냥 걔 집에다 두고 와야겠다.’

강동현의 집에는 금고도 있었다. 왜 있나 싶었는데 이런 걸 가지고 있으니까 있는 거였다. 택시도 도저히 무서워서 못 타겠다. 로또 당첨되면 택시기사도 의심된다더니 황경호가 딱 그 짝이었다. 게다가 지금은 퇴근 시간이라서 차가 엄청 막힐 것이다. 도저히 그 시간을 택시기사와 견딜 수가 없었다. 오늘 아침도 너무 힘들었다. 황경호는 압구정로데오역에서 삼성동 R파크가 있는 곳까지 그냥 걸어가기로 했다. 빨리 걸었는데도 30분이나 걸렸다. 11월이라 더울 리가 없는데도 땀이 났다. 황경호는 삼성동 R파크 1동 공동 현관 비밀번호를 누르고 들어가 14층으로 올라갔다. 1401호 앞에 서서 익숙한 비밀번호를 누르고 들어갔다.

황경호는 TV를 보며 카우치에 앉아있는 강동현을 보자마자 뱃속에서부터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너 집에 있으면서 왜 전화 안 받아!”

강동현이 씩 웃었다.

“너 올 거 같아서.”

하루 종일 불안에 떨었던 게 바보같이 느껴졌다. 황경호는 안으로 들어가서 그를 마구 팼다.

“진짜! 완전! 싫어!”

“아야! 잠깐만…! 아파! 아프다고!!”

가방으로 그를 막 패고는 분노로 새빨개져서는 씩씩거리며 가방 안에서 봉투를 꺼내서 그에게 내밀었다.

“다시 가져가.”

“싫은데.”

황경호는 그걸 카우치 앞 테이블에 올려놓고 바로 집을 나가려고 했다. 강동현이 어어, 하면서 얼른 일어나서 그를 붙잡았다.

“화났어?”

“그럼 화나지 안 나겠어?! 사람 또 이렇게 바보 취급해놓고!”

“누가 바보 취급했는데.”

“저런 걸 내가 어떻게 받아! 정신 나간 거 아냐?!”

“잘 들고 가 놓고 이제 와서….”

강동현은 슬금슬금 황경호를 뒤에서 끌어안고 두 손을 잡아 끌어안았다. 그의 머리카락에 얼굴을 묻고 비볐다.

“난 니가 집에 가자마자 바로 확인할 줄 알았는데. 아침에 확인했나 봐?”

“난 니 돈 같은 거 관심 없어!”

“아니, 그냥 내 남자가 얼마나 능력이 있나, 확인이나 해볼 겸 바로 볼 수도 있지.”

강동현은 정강이를 까였다. 강동현은 고통의 신음을 흘리며 한 손으론 그래도 계속 황경호의 손을 붙잡고 자신의 정강이를 문질렀다.

“아! 찬 데 또 차냐… 윽….”

“놔!”

황경호가 손을 뿌리치려고 했다. 그러자 강동현이 약간 당혹스러운 얼굴로 그를 보았다.

“진짜 화났어?”

얼굴이 울그락불그락 한 황경호를 보고 강동현이 물었다. 황경호는 얼굴을 손등으로 막 문질렀다.

“됐어. 나 갈게.”

“아… 가지 마. 금방 왔는데. 미안. 니가 이렇게 화낼 줄 몰랐어.”

“…….”

황경호가 입을 꾹 다물고 시선을 돌렸다. 강동현은 그를 앞에서 살짝 끌어안았다. 그의 허리를 둘러 양손을 가볍게 깍지 껴 가두었다. 그의 이마에 쪽 하고 입을 맞추었다.

“어제도 보고 오늘도 보니까 좋은데?”

“…….”

“왜 그렇게 화났는데? 응? 고칠게. 앞으로 안 할게.”

“…왜 전화 안 받는데.”

황경호가 까끌한 목소리로 물었다. 강동현이 그의 이마에 입술을 누르며 코를 대어 피부의 냄새를 맡으면서 대답했다.

“미안… 진짜 너 집에 왔으면 좋겠다 싶어서… 보고 싶어서 그랬어.”

황경호가 그의 어깨를 주먹으로 퍽 쳤다.

“거짓말하지 마. 사람 놀리려고 그런 거잖아.”

그러자 강동현이 끙, 하고 바로 인정했다.

“이게 습관이다, 습관… 미안. 너 놀리던 게 버릇이 돼서… 앞으론 조심할 게. 그래도 보고 싶었던 건 사실인데.”

황경호는 약간 얼굴이 붉어졌다. 그를 밀어냈다.

“어쨌든 나 간다.”

“아, 제발 가지 마….”

강동현이 황경호를 끌어안고는 그의 귀에다가 속삭이듯 졸랐다. 황경호는 귀를 막고는 얼굴이 펑 터질 정도로 빨개져서 눈을 크게 뜨고 그를 노려보았다.

“하지 마!”

“흐응.”

강동현이 기분 나쁘게 웃었다. 강동현은 그의 손을 끌어당겨 기어코 카우치로 끌고 갔다. 털썩 안고는 황경호를 마주 보고 자기 무릎에다 앉혔다. 그리고는 황경호의 턱에 부드럽게 입을 맞추었다. 촉. 촉. 쪽. 뺨과 귓가와 목덜미에 부드럽게 입술을 문지르며 등허리를 손끝으로 부드럽게 마사지를 했다.

“으으응….”

처음엔 밀어내려고 했지만 잠깐 그렇게 만져줬다고 금방 기분 좋은 소리를 냈다. 지금까지 잘 안 해줬던 게 미안할 정도로 그는 은근히 이런 스킨십을 좋아했다. 몸을 좀 더 붙여서 끌어안고 귓가에 얼굴을 묻고 문지르며 날개죽지가 있는데 근처를 엄지로 강하게 누르며 주물러줬더니 시원한지 또 좋은 소리를 낸다.

“어디 더 해줄까…?”

강동현이 속삭였다. 황경호는 눈을 천천히 떴다. 그리곤 인상을 찌푸렸다. 뭔가 또 낚인 느낌이다. 황경호가 그런 얼굴로 내려다보자 강동현이 씨익 또 웃는다.

“그냥 못 이긴 척 나 받아주면 안 돼? 이제 나 진짜 말 잘 들을 거 같지 않아? 딱 봐도?”

“…….”

“나 돈도 잘 벌고 말도 잘 듣고 이런 것도 잘하고, 완전 괜찮은데?”

강동현이 한 번 더 시원한 곳을 누르며 주물렀다. 황경호는 그의 손을 붙잡았다. 그러자 강동현이 황경호의 뺨에 코를 스치며 입술을 꾹 눌렀다.

“굳이 끝까지 안 해도 이런 거… 기분 좋잖아.”

유혹의 종류는 아주 많았다. 단지 눈빛일 수도 있고, 물질일 수도 있고, 말일 수도 있다. 하지만 뭐니 뭐니 해도 순간의 유혹엔 스킨십이 최고였다. 황경호가 그의 얼굴도 손으로 밀어내자 그가 그 손바닥에 쪽 하고 입을 맞추었다. 그리고 눈을 마주쳤다.

“그래도 아직 억울해? 나한테 넘어오는 거.”

황경호는 그가 자신의 손에 입을 맞추면서 또 끼를 부리는 것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이 새끼는 진짜 안 될 것 같다….

“같이 살자, 응?”

이러니까 연예인으로 밥 벌어 먹고사는 거다. 황경호는 아주 이제 대놓고 꼬셔보겠다고 매력 어필을 해대는 강동현의 얼굴을 진짜 가만히 쳐다보다가 입을 열었다.

“나 진짜 저거 다 써도 돼?”

“응? 응. 써. 어디다 쓰게.”

“어디다 확 기부해버릴까 싶어서.”

그러자 강동현의 표정이 약간 굳더니만 고개를 들었다.

“나 사실 기부나 그런 거 진짜 안 좋아해.”

“왜?”

“나 저거 진짜 고생해서 벌었다, 진짜로… 차라리 너 먹고 싶은 거 먹고, 사고 싶은 거 사지 기부 같은 건 꿈도 꾸지 마.”

“왜? 나 다 쓰라고 준 거 아냐?’

“…야… 생각을 해봐. 남편이 마누라한테 월급통장 주면 그건 탕진을 하라는 소리가 아니라 관리를 하라는 소리야.”

“마누라, 마누라 하지 마! 진짜 확!”

공격하려고 한 말이었는데 이쪽이 더 화가 났다. 황경호가 손을 확 들자 강동현이 이제 확 하고 피하려고 했다. 목표를 바꾸자 또 슬쩍 피하려고 든다. 그래서 그냥 바로 팔을 퍽 쳤다.

“아… 진짜… 그래도 기부는 하지 마, 응? 나 진짜 열 받아서 돈다. 나 그때 너 때문에 그 초록이한테 1억 준 것만 해도 내 생에 할 건 다 했다 생각하는 사람이야.”

강동현은 진짜 저게 다 황경호의 것인 것처럼 말했다. 황경호는 좀 얼굴을 붉혔다. 강동현은 황경호의 손을 한 손으로 만지작거리면서 옆에 손을 뻗어서 카우치 위에 있던 책자 몇 개를 집어왔다.

“짠.”

“…….”

진짜 아파트 책자다… 정말 말하는 건 전부 다 일사천리로 하는 남자라 이제는 진짜 무섭다, 무서워.

“이건 신축이라 건물 멋있더라. 앞에 공원도 있고. 근데 반포라 니네 병원이랑 좀 멀까… 내 차 하나 그냥 니가 끌어라. 아님 새 차 살래?”

강동현이 황경호한테 책자를 하나 주고 자기도 하나 펼쳐서 보면서 말했다.

“나 솔직히 집에도 잘 없고… 아, 근데 또 쉬면 다르려나. 어쨌든 집에 대해선 욕심 별로 없어서… 니가 마음에 드는 대로 골라. 아마 가서 봐야지 싶긴 하다. 시간 있으면 니가 먼저 좀 보러 다닐래? 아니면 같이?”

강동현이 황경호의 뺨에다 입술을 꾹 눌리며 말했다.

“집은 왜… 자꾸 새로 사려고….”

황경호가 당혹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강동현이 그를 또 은근히 지분거리면서 말했다.

“아니… 난 여기도 좋은데… 여기가 더 좋은데… 방도 하나밖에 없고… 너랑 같이 자고 싶고… 근데 니가 싫을 거 아냐….”

강동현은 황경호의 목에 자신의 코를 비비며 냄새를 흠뻑 맡았다. 점점 강동현의 손아귀 힘이 강해지자 황경호가 그의 정수리를 수도로 쳤다.

“진짜 적당히 해!”

“아… 미안….”

강동현은 완전 뻐근하단 얼굴로 억지로 카우치에 등을 붙였다.

“이사 가는 게 더 낫겠지? 적어도 방 두 개 이상.”

“…그럼 이 집은?”

“뭐… 팔던가, 아니면 도은연… 아니, 우리 누나 살라고 해도 되고.”

집…. 우습게도 황경호는 책자에서 나오는 집들이 너무 예뻐서 눈이 팔렸다. 예전에 처음 강동현의 집에서 3주 살았을 때도 이 변태 새끼 미워서 죽을 것 같았는데도 집은 미워할 수가 없었다. 여기서 2달 살 때도 마찬가지였다. 근데 책자에 나오는 집들은 더 좋은 집들이었다… 여기보다 더 좋은 집이 있을 줄이야.

“…….”

강동현이 웃으면서 고민, 혼란이 섞인 얼굴을 한 황경호의 뺨에 입을 맞추었다.

“그냥 넘어와라, 응?”

수컷들은 상대를 유혹하기 위해서 결국 자기가 얼마나 대단한 수컷인지 보여줄 수밖에 없다.

없는 남자들이나 평생의 사랑이나 사랑의 애달픔, 마음의 절절함을 강조할 뿐이다. 할 수 있는 것이 그것밖에 없으니까 그걸 주는 것이지 멀쩡한 혓바닥만 있다면 어떤 남자라도 약속할 수 있는 흔한 것이란 말이다. 그럼에도 그런 사랑이 세상에 흔치 않아 보이는 것은 그것마저도 제대로 못 하고 있는 것도 없는 남자가 대부분이라서다.

진짜 우월한 수컷들이 정말로 상대를 사랑한다면 결국 말보다도 자신이 상대에게 해줄 수 있는 가장 좋은 것부터 내밀기 마련이다. 그게 자신에게 넘어옴으로써 발생하는 상대의 기회비용을 싹 보상하고도 남을 정도로라면 실패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이 상대에게도 가장 좋은 사랑의 방법이다. 사랑이 돈으로 표현되지 않는다는 말은 돈이 없는 수컷들이나 하는 말이었다. 한낱 미물부터 인간에 이르기까지, 예나 지금이나 진정한 사랑은 물질로 표현되는 법이다.

“응?”

그렇게 가진 거 많은 데다가 얼굴까지 잘생긴 수컷이 졸랐다.

*

결국 그 갈색 봉투 말이다… 황경호가 여전히 가지고 있었다. 강동현이 그때 기어코 황경호의 손에 다시 들려서 데려다주었다. 영 불안하면 같이 살자고 한다, 미친놈이. 오만 걸 다 갖다 붙이고 있었다. 또 일요일이 되어 강동현이 놀러 가자고 데리러 왔다. 황경호는 못 이긴 척 나온 자신을 깨닫고 좀 부끄러웠다.

“오늘은 집 보러 갈까.”

강동현이 차를 출발시키며 그렇게 말했다. 황경호는 당혹스러운 얼굴로 그를 보았다.

“…진짜 살 거야?”

“어. 너 집에 들어오게 하려면 꼭 사야 할 거 같아서.”

강동현은 다른 차를 끌고 왔다. 국산차다. 회사 차란다. 지금 황경호가 그의 차키들을 전부 가지고 있어서 그랬다. 차키라도 가져가라고 했는데 안 된단다. 뭐가 안 된다는 건지 모르겠다.

삼성동, 청담동, 반포, 성수동까지 보러 다니자고 했다. 한강뷰에 지금 집보다 큰 평수로 찾으니 가격이 적어도 몇억 더 나온다. 반포, 청담동, 삼성동, 성수동 순으로 가기로 했는데… 진심으로, 처음 반포에 있는 신축 아파트는 단지 내에 들어서자마자 충격이었다. 그리고 집까지 올라오니 말문이 막혔다.

“…….”

“어때?”

강동현은 선글라스를 낀 채로 한 번 쭉 둘러보았다가 성의 없이 한 번 선글라스를 들고 보고는 다시 썼다. 탁 트인 한강이 보이는 로열층이었다.

“13층 64평 남서향이구요. 지금 이렇게 보시는 것처럼 한강이랑 숲도 잘 보이는 거 보이시죠? 침실은 4개구요. 드레스룸 2개와 서재도 따로 있습니다. 욕실은 세 개 있습니다. 이 매물은 33억이구요. 바로 앞에 반포 한강 공원 있고 주변에 쇼핑하기도 편리하고 강남이나 강서나 강북이나 차로 20분 이내로 접근 가능합니다.”

천장은 원래 강동현의 집보다 조금 낮은 느낌이었지만, 진짜 어마어마하게 넓었다. 일단 진짜 한강이 보인다는 것 자체가 충격이었다. 날씨가 좋아서 정말 풍경이 쨍하게 잘 보였다. 황경호는 이 풍경이 너무 실감이 안 나서 멍청하게 생각했다.

‘근데 강남에 있는 한강 보이는 아파트는 일단 북향이라…. 일단 여긴 너무 크다… 방도 너무 많다….’

“너무 큰 거 같아….”

황경호가 멍청하게 중얼거리자 강동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 방도 너무 많아서 별로 마음에 안 들어. 차라리 거실이 더 컸으면 좋겠어.”

“응….”

“그러시면 원하시는 그런 스타일로 보여드릴까요?”

그렇게 같은 아파트에 있는 여러 평수와 형태의 아파트를 보았다. 그냥 다 좋았다. 넓고 탁 트이고…. 게다가 황경호에게는 정말 입이 떡 벌어지는 가격대의 아파트라 도저히 좋다 싫다를 결정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강동현이 자꾸 황경호한테 의견을 물어보았다.

“어때?”

“모르겠어….”

“알았어. 잘 봤습니다.”

그리고 청담동으로 넘어왔다. 처음에 진짜 으리으리한 것부터 봐서 그런지 평수가 30평대 후반의 아파트는 한강뷰라서 멋있긴 했지만 지금 강동현 집보다 좋아 보인다는 느낌은 아니었다. 강동현 집이 원체 세련되고 예쁜 집이어서 그런 것 같았다. 이번에는 확실히 대답할 수 있었다.

“지금 집이 더 좋은 거 같아.”

“그래?”

그리고는 나와서 삼성동으로 갔다. 집은 넓고 멋있었는데 한강이 보인다고 해놓고 정말 콩만큼 보였다.

‘진짜 첫 번째 집이 너무 좋은 집이었다….’

처음을 30억대 이상의 으리으리한 집을 보고 나니 좀 작고 가격대가 낮은 집을 보자, 어디든 황경호는 평생 꿈도 못 꿨을 집인데도 우열을 확연하게 판별할 수 있게 되었다. 그게 좀 놀라웠다.

“여기도 별로야?”

“응… 모르겠어.”

“알았어.”

그렇다고 첫 번째 아파트를 선택하기엔 너무 과하게 으리으리하다는 생각만 드는 황경호였다. 물론 그가 사는 아파트도 아니었지만…. 그리고 둘은 성수동으로 넘어갔다. 황경호는 묘한 흥분 상태로 피곤하지도 않았다. 황경호는 정말 불가해한 얼굴로 옆에서 운전을 하고 있는 동갑의 남자를 돌아보았다.

돈이 있다는 건 이런 것일까?

황경호 본인이 서비스직에 종사하고 있기도 했고 정말 전형적인 서민의 삶을 살고 있었기 때문에 한 번도 이런 세상을 실감해본 적이 없었다.

그러니까 황경호가 알고 있는 거라곤 고작 강동현의 집에서 살면서 느꼈던 쾌적함이나 그의 차가 주는 쾌적함, 좋은 곳에 사니까 주변에 좋은 것들이 클러스터를 이룬다는 편리함, 안전함, 풍요로움, 거리를 다니는 사람들의 얼굴과 옷차림이 다르다는 것, 연령대가 다르다는 것, 지나다니는 차가 다르다는 것, 커피숍에서 떠드는 얘기가 다르다는 것… 그런 게 황경호가 강동현의 집에서 지내면서 느꼈던 ‘다름’이었다. 그러면서 아, 이런 게 있는 사람들의 삶이었구나, 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전혀 그게 아니었다.

그건 정말 아무것도 아니었다. 오늘 강동현과 집을 보러 다니면서 몇몇의 좋은 외제차를 끌고 다니는, 심지어 강동현의 것보다도 더 좋은 차를 끌고 다니는 중개인들이 만으로 해봐야 고작 27살밖에 되지 않은 강동현에게 엄청나게 깍듯하고 예의가 바른 태도로 대하는 것을, 아니 심지어 같이 다니고 있는 황경호에게조차 그렇게 한다는 것에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황경호는 저런 종류의 아저씨들을 잘 알았는데, 저런 아저씨들은 길거리에서 황경호를 만나면 반말부터 할 스타일들이었다. 황경호는 자신이 태어나서 이런 대우을 사회에서 받아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는 것을 그 대우를 받아보고 나서야 알 수 있었다.

게다가 강동현이 아예 선택은 니가 하라는 태도로 황경호의 입만 쳐다보니 중개인들이 빠르게 눈치를 채고 다들 황경호를 붙잡고 세일즈를 하기 시작했다. 이 집은 이래서 좋고, 저래서 좋고, 마음이 안 드시면 어떤 매물이든 보여드릴 수 있다, 최고의 커뮤니티, 최고의 서비스, 최상의 풍경… 뭐 이런 말들을 계속 들어야만 했다. 그들은 난감할 정도로 친절하고 깍듯하게 황경호를 대했다. 그 ‘난감할 정도로 친절하고 깍듯한 태도’는 드라마나 영화에서 과장되게 표현되는 것처럼 굽신거리고 비굴하게 구는 게 아니었다. 그들은 마치 황경호가 뭔가 대단한 걸 결정할 수 있는 사람이며 그런 힘을 가진 존재로 인정을 한다는 것처럼 행동했다. 그리고 좀 더 나아가 그가 그들의 인생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사람인 것처럼 여기는 듯 보였다. 황경호는 그게 너무 어색하고 괴리감이 느껴져서 자꾸 강동현을 쳐다보았는데 강동현은 전~혀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이었다. 그는 이런 것에 익숙한 것이다.

그제서야 강동현이 가진 게 진짜 뭘 의미하는 건지 조금이나마 알 수 있게 되었다.

이건 가진 사람들이나, 적어도 그 주변 사람이 되어보지 않고는 절대 모르는 세상이었다. 이 분위기… 황경호는 자신이 너무 긴장해서 하루 종일 쫄아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직도 이게 도대체 뭔지 잘 설명할 수가 없었다.

성수동에 도착해서 서울숲 바로 옆에 있는 엄청 멋있는 아파트로 향하자 황경호는 벌써부터 심상치 않음을 느끼며 긴장했다.

“58평형에 침실 3개, 욕실 2개입니다. 드레스룸 따로 있구요. 거실이 정말 멋있죠? 부엌은 전부 빌트인 되어 있고 가구 같은 경우는 이태리제 풀옵션인 것과 비어있는 것이 있습니다. 원래 가지신 가구가 많으시다면 빈 것으로 하시는 게 좋겠죠. 로열층에 남향이고 앞에 다른 건물은 없어서 채광은 걱정하실 것 없고 한강과 서울숲도 아주 잘 보입니다.”

“…….”

강남에서 강북을 바라보는 것보다 강북에서 강남을 바라보는 게 더 경치가 좋았다. 황경호는 얘기를 들으면서 창가로 다가갔다. 거실은 라운드 형식의 커다란 창이 연달아서 있어 탁 트인 한강을 볼 수 있었다. 이미 어둑해져서 강남의 불빛들이 하나둘 보이고 있었다.

“사생활 보호나 보안도 철저하고 호텔식 서비스 또한 받을 수 있으며 골프, 수영, 헬스 등 시설들도 완벽하게 갖추어져 있습니다.”

황경호는 입을 딱 벌리고 바깥 풍경을 보고 있었다. 강동현도 둘러보았다.

“가구는 몇 개만 들여놓는 식도 괜찮습니까?”

“네. 당연하죠. 가격은 그에 따라 조정됩니다.”

“네… 어때? 맘에 들어?”

가격은 20억대 중반. 강동현은 황경호를 돌아보았다. 황경호는 다른 방에 들어가며 대답했다.

“아직 다 안 봤어!”

마음에 드나 보네. 강동현은 중개인한테서 계약서를 받아서 읽어보았다.

“큰 카우치는 하나만 있으면 될 거 같고 저거는 빼주시구요… 색깔은 이거밖에 없나요?”

“아, 가구 카탈로그는 여기 있습니다.”

“야! 일단 이리 와봐!”

강동현이 황경호를 불렀다. 황경호는 상기된 얼굴로 거실로 돌아왔다.

“왜.”

“거실 가구부터 좀 봐. 난 다른 방 좀 볼 테니까. 그리고 큰 소파는 하나만 해라.”

“왜?”

“저렇게 두 개나 있으니까 좁아 보여. 그리고 집에서 니가 산 소파랑 테이블 들고 올 거니까.”

“아… 응.”

황경호는 거실에 들어갈 카우치의 색깔과 디자인을 정했다. 그리고 부엌도 정했다.

“냉장고는 들고 올 거 같은데….”

“문제없습니다.”

일단 모델로 해놓은 가구나 부엌의 색깔은 갈색이었다. 바닥과 벽지는 하얀색으로 조명은 약간 주황색이었다. 가족 단위의 가구가 지내기에 적절한 분위기 같다. 강동현의 삼성동 집은 포인트 칼라가 아이보리색, 회색, 파란색과 검은색으로 세련됨이 돋보이는 멋있는 집이었다. 황경호는 그 집도 좋았으므로 그걸 생각하며 색깔을 정했다. 그리고 제일 큰 침실로 가니 강동현이 트윈베드를 보고 아주 못마땅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침대는 둘 다 빼주세요. 집에 있는 거 가져올 거니까.”

강동현은 그렇게 말하고 다음 방으로 넘어갔다. 중개인이 황경호에게 물었다.

“다른 가구는 다 남기시겠어요? 디자인이랑 색깔 정하시겠어요?”

“아, 네….”

황경호는 엄청 고민을 하면서 일단 정했다. 그리고 작은 방 두 개는 황경호 마음대로 하라길래 그렇게 했다. 욕실 두 개와 드레스룸도 다 하고 나니 진이 다 빠졌다.

“근데 이렇게 정해서는 잘 모르겠어요… 실제로 색상 배치가 된 걸 봐야 알 것 같은데….”

“그럼 일단 그래픽으로 예상도를 만들어서 보내드릴까요?”

“그런 것도 돼요?”

“VR기기를 통해 실제로 보는 것처럼 체험해보는 것도 가능합니다.”

“아… 네….”

진짜 별게 다 되는구나…. 황경호는 그렇게 생각했다. 강동현은 중개인에게 말했다.

“일단 가구 예상도 해서 보내주시구요. 주변 시설 좀 보고 싶은데요. 그리고 다음 주에는 낮에 와서 봐야 할 것 같고.”

“네, 그렇게 하세요.”

그리고 아파트 내에 있는 모든 주요 시설에 대한 설명을 듣고 주변을 한 번 더 드라이브하고 나서야 집 보기가 끝났다. 황경호는 그제야 진이 빠졌다.

“진짜 완전 딴 세상….”

황경호는 조수석에 멍청히 기대어 앉아 멍청하게 중얼거렸다.

“이렇게 보면 지금 내가 사는 데는 평수에 비해서 가격이 너무 비싸단 말이야… 중형대가 실거주자들이 많아서 그렇다곤 하는데. 조금만 더 얹으면 완전 대형평수 나오네.”

오늘 하루 종일 집을 보러 다니고 받은 강동현의 감상이었다. 적게는 2~3억에서 많게는 18억까지 가격이 더 나왔는데 강동현 기준에선 조금인 모양이었다.

“이 집이 그래도 제일 마음에 드나 보네.”

“어… 진짜 완전 좋더라. 세상에 이렇게 좋은 아파트가 있나 싶던데. 주변 시설들도 삼성동 근처보다 훨씬 좋고….”

“여긴 아파트 주민들만 상대하는 가게들이니까 그럴 수밖에 없겠지.”

강동현이 그렇게 말했다. 황경호는 얼떨떨하게 있다가 강동현을 돌아보았다.

“진짜 살 거야?”

차는 T아파트를 빠져나와 성수대교를 탔다. 강동현이 답했다.

“니가 정해.”

“…….”

24억짜리 아파트였다. 황경호는 뭐라 설명할 수 없는 기분에 한참을 대답 못 하다가 말했다.

“그걸 내가 어떻게 정해… 니가 살 집인데.”

강동현이 그를 돌아보았다.

“너도 같이 살 거잖아? 그래서 오늘 같이 보러 다닌 거 아냐?”

“어? 아니…. 난 그냥 구경… 책자로만 봐서 진짜 그런 집은 어떨까 싶기도 했고….”

황경호가 얼떨떨한 목소리로 말했다. 강동현이 인상을 팍 썼다. 좀 짜증이 돋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오늘 하루 종일 집 보러 왜 다닌 거야? 그냥 너랑 다른 데 놀러 갔지.”

“…….”

“그냥 같이 살자.”

강동현이 손을 뻗어 황경호의 손을 잡았다.

“나랑. 아까 거기서.”

황경호는 선뜻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싫다는 말이 안 나왔다. 하지만 좋다는 말도 선뜻 할 수가 없었다. 예전에 그가 뭘 주겠다고 하면 덮어놓고 싫어하기만 했는데. 강동현의 지금 집으로 약간 심미안을 높인 상태에서 진짜 좋은 집을 한 번 보고 오니 싫다는 말이 진짜 확 안 나온다. 황경호는 또다시 물질의 위력을 느꼈다. 하지만 좋다는 말도 선뜻 나오지 않긴 마찬가지다.

“…니가 돈으로 나 낚는 기분이야.”

황경호가 중얼거리자 강동현이 씁, 하면서 못마땅하다는 티를 냈다.

“아무리 미친놈도 여기까진 안 한다고 했다.”

“니가 좀 미친놈이어야지….”

같이 산다는 건 결국 그와 그렇고 그런 게 된다는 거였다. 강동현의 집에서 두 달 동안 살 때도 이미 훌륭하게 그렇고 그렇게 살았지만, 기한이 존재했던 그 두 달과 이건….

‘이거 거의… 결혼하자는 거 아냐?’

같이 살겠다고 새집까지 사고 말이다.

“…….”

빨개진다. 빨개지고 있다. 황경호는 어떻게든 진행을 막아보려고 했지만 불가능했다.

‘아… 오버하지 마, 진짜로… 어차피 저번 집 자체가 얘가 살기엔 작은 집이었지. 얜 백 억짜리 집에 살아도 안 이상한데.’

황경호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창밖을 보면서 열기를 가라앉히기 위해 생각을 진정시켰다. 조금 있으니 열기가 사라지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집만 보러 다녔는데 이미 저녁 시간을 넘겼다. 점심도 집 보러 다닌다고 간단하게 뭔 호텔 라운지에서 때웠다(그게 가볍게였다…).

“뭐 먹지? 배고프다.”

강동현이 물었다. 황경호는 배가 고픈지도 알 수가 없었다. 그는 황경호를 이름 모를 한정식집으로 데리고 갔다. 코스로 요리가 나온다. 맛있다.

‘이런 거 익숙해지면 안 되는데….’

황경호는 문득 그렇게 생각했다. 그렇게 밥을 먹고 있는데 강동현이 물었다.

“그 아저씨 결국 어떻게 됐어?”

“응? 누구?”

강동현의 질문에 황경호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 하트 모양으로 박은 아저씨.”

아, 맞다. 안 말해줬다. 황경호는 놀라지 말라는 듯한 태도로 대답했다.

“그거 진짜 잘 나왔다? 막 진짜 예쁘다? 우리 선생님 진짜 비뇨기과의 신인가 봐.”

“와…. 사진 안 찍어 놨어?”

“찍긴 했는데….”

“나도 보여줘.”

“안 돼. 나 잡혀가.”

밥을 먹는 동안은 그런 시시껄렁한 얘기를 했다. 황경호를 집에 데려다주기 위해 다시 차에 탔을 때는 손만 잡은 채 별말 없이 운전만 하는 강동현이었다. 그리고 집 앞에(결국 알려줬다) 이르러서야 입을 열었다.

“다음 주 일요일에는 낮에 아까 집 가보자. 해 있을 땐 어떤 느낌이 보고 결정하면 될 것 같다. 가구 넣은 예상도도 보고.”

“…….”

“같이 살기 아예 싫은데 내가 너무 밀어붙이니까 싫다고 말을 못 하는 거야, 아니면 같이 살고 싶은데 부끄러워서 대답 못 하는 거야?”

강동현이 물었다. 그리고 그 질문은 황경호를 굉장히 부끄럽게 만들었다. 강동현은 종종 이렇게 사람이 고민하는 부분을 배려 없게 지적해서 사람을 민망하게 만들었다. 그게 이쪽을 얕봐서 그러는 건지, 정말로 별로 자각이 없는 건지, 성격인 건지…. 황경호는 한숨을 섞어서 조용히 대답했다.

“내가 왜 너랑 같이 살아야 하는지 잘 모르겠어… 난 솔직히… 그냥 이렇게가 더… 좋아.”

“뭐가? 일주일에 한 번씩 만나는 거?”

강동현은 황경호를 돌아보았다.

“…….”

또 그렇게 말하니 창피하다. 이미 그 말도 어떤 것에 대한 수락의 의미인 것처럼 느껴졌다. 황경호는 차마 그의 얼굴을 볼 수가 없어서 고개를 돌렸다. 강동현은 그의 좀 빨간 옆얼굴을 가만히 보다가 손을 뻗어서 손등으로 슥 한 번 쓰다듬었다. 약간 소름이 돋아서 황경호가 움찔했다.

“그게 괜찮으면 그냥 같이 사는 것까지 조금만 더 생각해보면 안 돼? 나 정말 니 말대로만 할 건데. 니가 싫다고 하면 손가락 하나도…… 아니, 그건 아니겠지만 일단…. 싫은 건 절대 안 할 건데. 일주일에 한 번만 보는 게 좋은 거면 같은 집에 살면서 일주일에 한 번씩만 마주치면 되지.”

진짜 말도 안 되는 억지까지 썼다. 황경호가 아무런 대답이 없자 강동현이 또 살살 구슬렸다.

“그리고 너 그거 너네 집에 가지고 있는 것도 불안하다며? 거기서 같이 살면 문제없는데.”

“그건 니가 들고 가면 되잖아. 지금 집에 가서 가지고 나올게.”

“그런 말이 아니잖아. 그거 니가 내 말 믿으라는 보증으로 준 건데 내가 다시 들고 가면 무슨 의미가 있어?”

“믿어. 이제 믿으니까… 들고 가.”

그러더니 강동현이 잡기도 전에 황경호가 얼른 차에서 내려서 얼른 집에 올라갔다 다시 내려왔다.

“자.”

“…….”

강동현은 황경호가 내미는 것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봉인을 묶은 실의 남은 길이가 아주 짧을 정도로 꽁꽁 묶여 있었다. 강동현은 일단 받지 않은 채로 물었다.

“…근데 왜 하나도 안 써?”

“어? 뭘?”

“돈.”

“내가 이걸 왜 써….”

황경호가 얼떨떨하게 말했다. 강동현은 봉투에서 시선을 떼고 황경호의 얼굴을 물끄러미 보았다. 황경호는 들고 있는 것을 얌전히 기어의 뒤쪽에 있는 홈에 두었다. 그리고는 얼른 손을 뗐다. 강동현은 눈동자만 돌려 그것을 지켜 보고는 다시 황경호를 보았다.

전에 황경호가 집에서 2달 동안 지낼 때 강동현은 신용카드 하나를 줬었다. 부서진 물건들을 사라고 주긴 했지만, 사실 그가 어떻게 쓰든 좋아서 아예 신경도 안 쓰고 있었다. 그가 TV고 식기고 선반이고 사서 집에다 채워 넣을 때는 잘 쓰고 있구나, 라는 생각이 들어서 기분이 썩 좋았다. 하지만 창문 앞에 있는 테이블과 소파는 자기 돈으로 샀다고 해서 좀 이상한 기분이 들어 확인해봤더니 딱 처음에 강동현이 말했던 것과 벽지, 욕실에 대한 것만 쓰고 생활비나 다른 비용은 전혀 쓰지 않았다. 그는 강동현이 집에 있을 때 꽤 음식을 해주곤 했는데 심지어 그건 다 자기 돈으로 사 온 식재료들로 한 것이었다.

혹시 쓰라고 말을 안 해서 그런가 싶어서 넌지시 카드 써도 된다고 말을 하기도 했지만 그래도 쓰지 않았다. 나중엔 집에서 생활할 때 드는 돈이라도 쓰라고 했지만, 결국 끝까지 쓰지 않았다. 게다가 집을 나갈 땐 얌전히 지금까지 썼던 내역까지 정리한 가계부 같은 것과 같이 카드를 얌전히 놔두고 나갔다. 게다가 제 돈 주고 산 가구는 또 그냥 두고 나갔다. 싫지 않다면, 부족하지만 그동안 월세 정도로 생각해달라나.

“먹고 싶은 거나 사고 싶은 건 없어? 써도 된다니까 왜 안 써?”

“그런 거 없어…. 그리고 있어도 내 돈 써. 내가 이걸 왜 써.”

“아니, 왜 쓰냐니… 그냥 쓰라니까. 번 사람이 쓰라는 데 왜 쓰냐는 말이 어디 있어.”

강동현이 답답해서 말했다. 그랬더니 황경호가 아무렇지도 않게 딴소리까지 한다.

“솔직히 주말마다 니가 어디 데려다주고 돈 다 내는 것도 미안한데… 나도 좀 보태면 안 돼?”

“그건 또 뭔 소리야. 내가 해주고 싶어서 하는 건데 거기다가 니가 돈을 내면 내가 뭐가 돼?”

“그래도… 뭔가… 너한텐 별거 아닐 수도 있지만… 그래도 좀 같이 내면 마음 편할 것 같아서….”

황경호가 말했다. 강동현은 황당했다. 또 말이 안 통하는 것 같다. 얘가 뭔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다.

“아니… 내가 너한테 잘 보이려고 이러는 건데 니가 돈을 왜 내냐니까.”

“어? 아니.. 나도 돈 벌고 그 정도는 낼 수 있고… 같이 다니는 건데 한 사람만 돈 내는 것도 이상하잖아.”

“아니, 그게 그게 아니라. 이 상황 자체가 내가, 너한테, 잘 보이려고 하는 건데 왜 니가 돈을 내. 내면 이상하지.”

강동현이 답답해서 한 자 한 자 끊어서 말했다.

“아니… 그래도….”

“차라리 날 만나기 싫어서 싫다고 하면 몰라도 니가 돈을 왜 내냐니까.”

구애는 이쪽에서 저쪽으로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저쪽이 비용을 더치로 하겠다는 건 거의 거절을 하겠다는 말인데 거절을 하려는 거면 돈을 내는 것보다 차라리 만나지 않겠다고 하는 게 구애를 받는 쪽의 올바른 선택이었다. 거기서 돈을 내면서 만난다는 건 이 게임의 룰을 위반하는 것이고 무한루프에 갇히게 된다. 구애는 거절하지만, 구애를 하는 상대를 비용을 지불하면서까지 만난다는 요상한 루프에 말이다. 그건 구애를 받는 쪽이 두 배로 손해를 보는 것이었다.

강동현은 진짜 이해를 할 수 없다는 눈으로 황당하게 황경호를 보다가 저도 모르게 말했다.

“지금 여기선 나는 너한테 주는 거고 넌 나한테 받는 거야. 그냥 당연하게 받아야 하는 거라고. 넌 예스냐 노냐만 말하면 되는 거지.”

라고 말했다가 아차 했다. 강동현은 황경호가 뭐라고 하기 전에 말했다.

“근데 아직 노라고 하지 마. 아직 다 안 줬어.”

“…….”

이게 다라면서 뭘 안 줬다는 것인가. 황경호는 갈색 봉투를 잠깐 보았다가 강동현을 다시 보았다. 강동현이 잠깐 정면을 보면서 고민을 하더니 말했다.

“전에 두 달 같이 사는 건 괜찮았잖아.”

황경호는 얘가 무슨 말을 하는 건가 싶어서 그를 물끄러미 보고만 있었다. 강동현도 황경호를 돌아보았다.

“막 지금 너 나랑 같이 살겠다고 하면 나한테 코 꿰일 것 같아서 결정 못하는 거지?”

‘니가 나한테’가 아니라? 황경호는 순간 속으로 반문했다. 그리고 약간 고개를 갸웃했다. 강동현이 이쪽에게 같이 살자고 하는 건데 왜 나는 얘가 나한테 코를 꿴다고 생각하는 거지? 황경호가 그렇게 생각할 때 강동현이 제안했다.

“일단 몇 달 같이 살아보고 그래도 영 내가 못 쓰겠다 싶으면 그땐 니 말대로 이렇게 일주일에 한 번씩 보는 걸로 하든가. 어때?”

“몇 달 같이 사는 거야 그렇다 쳐도… 그러려고 그 집 사게?”

24억인데? 집에 욕심도 없다는 놈이 말이다. 아무리 강동현이 돈이 많아도 24억이면 너무 큰 지출이 아닌가. 황경호가 미쳤냐는 듯이 쳐다보자 강동현이 어쩐지 크게 한숨을 쉬었다. 그는 답답하다는 듯 눈을 한 번 감았다 뜨더니 천장을 본다.

“나 지금… 너랑 좀 말이 안 통하는 것 같은 느낌이야….”

“어…? 왜?”

황경호가 그렇게 반문하자 강동현이 그를 돌아보곤 굳은 결심을 한 얼굴로 입을 뗐다. 그는 손짓까지 하면서 설명하기 시작했다.

“내가 너 좋아하잖아. 그치? 진짜 좋아하지? 나 이제 믿는다고 했지?”

“어….”

뭔가 굉장히 공부 못 하는 애한테 수학 수식이라도 이해시키려는 것 같았다. 사실 황경호는 학창시절 때 공부를 썩 잘했었다. 그래서 그의 태도가 상당히 생소했다.

“내가 너 좋아하니까 너 꼬시고 싶을 거 아냐. 사귀거나 같이 살거나.”

“어….”

황경호는 마치 남의 얘기를 듣듯 그렇게 대답했다. 강동현은 자기 전 재산이 든 봉투를 들어서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래서 이것도 내가 내 말 믿으라고 준 것도 있는데 쓰라고 준 거야, 쓰라고. 쓰고 내가 잘난 것 좀 알아 달라고. 나 선택할 만한 놈이라고. 나 너한테 해줄 수 있는 것도 많고 앞으로도 더 해줄 수 있게 할 거고. 그럴 자신도 있는 놈이라고.”

“어…….”

“나 바쁜데도 주말마다 너랑 만나서 놀러 가고 좋은 거 먹고 같이 있으면서 너 기분 좋게, 즐겁게, 행복하게 해주려고 노력하는 것도 앞으로 내가 너한테 이렇게 할 수 있고 그렇게 하겠다는 거고.”

“어…….”

“집도 니 마음에 드는 게 중요한 거야. 니가 좋아하는 게 중요한 거라고. 돈이고 나발이고 그런 건 내가 알아서 하는 거고. 니 맘에 드냐니까. 나랑 막 같이 살고 싶을 정도로 맘에 드냐고.”

황경호가 상당히 멍청한 표정을 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강동현은 답답해 죽으려고 했다. 황경호는 멍청하지 않았다. 그래서 드디어 입을 뗐다.

“그래도… 왜 그렇게까지 해? 너무 오버하는 거 같아….”

“그럼 따로 원하는 거 있어? 말해.”

강동현이 엇! 하면서 자세를 바로 했다. 황경호는 당황했다.

“어… 아니…….”

“아… 그럼 어쩌라고.”

“딱히 어떻게 하라는 게 아니라….”

“…….”

강동현은 황경호의 얼굴을 보고 있다가 자신의 멀끔한 얼굴을 손으로 한 번 죽 쓸어내리더니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는 몇 번이고 주저하다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럼…… 역시…. 나 어떻게 해도 안 되는 거야?”

그리고 황경호의 눈을 직시했다. 그의 눈빛에서 전달되는 감정이 강하다. 불안, 초조, 상처……황경호는 숨을 참았다. 저런 얼굴 처음 봤다.

“…….”

“…….”

그대로 차 안에 긴장감 섞인 침묵이 흘렀다.

*

원래 구애의 많은 방법들 중에서 비용 대비 효과가 가장 큰 것이 바로 속임수였다. 상대를 속이는 것이다.

앞서 등장한 가스라이팅, 피콕킹 등의 단어들도 모두 사실은 그 일환이라고 볼 수 있었다. 강동현은 의도적으로 황경호에게 거절이라는 옵션이 있다는 것을 흐릿하게 만들었다. 아예 언급을 하지 않았다. 어차피 강동현은 스타트부터 말아먹었기 때문에, 그리고 전처럼 그를 강압할 생각도 전혀 없었기 때문에, 솔직히 이 정도는 해야 했다. 좀 밀어붙이는 듯이 보일지라도, 그가 조금쯤은 휩쓸린다 해도 결국은 강동현을 선택하도록 말이다. 좀 치사해 보여도 어쩔 수가 없었다. 결정은 저쪽이 하는 거고 강동현은 필사적이었다.

일주일에 한 번씩 이렇게 밍밍한 데이트만 하자는 건… 이제 강동현이야 황경호를 놓을 생각이 없으니 그런 데이트를 하는 것 자체는 아무런 문제가 없지만, 그대로 고착되는 건 문제가 있었다. 연인도 친구도 아닌 밍숭맹숭한 관계. 언제 흐트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관계. 그런 걸 바라고 지금 노력하고 있는 게 아니었다. 섹스야 필사적으로 유혹하긴 하겠지만 기다릴 수 있었다. 하지만 관계는 빠르고 확실하게 정립하고 싶었다.

사귀자고 하는 건 너무 무르다(게다가 거절당하고 더 할 수 있는 행동반경이 작다). 이미 좋아한다는 말도 공수표로 너무 남발해서 아슬아슬하다. 뭐든 해주겠다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이쯤에서 현물이 나오지 않으면 백지수표나 부도수표나 똑같은 것이다. 같이 살고 싶기도 했고 같이 살아야 뭐든 될 것 같았다. 집이 제일 적당했다. 그리고 집이야말로 제일 크게 한 방 쏠 수 있는 것이었다.

게다가 강동현의 집에서 잠깐 살 때 보니 집을 관리하고 꾸미는 것도 좋아하고 살림하는 것도 은근히 좋아했다. 집이 낙점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실제로 오늘 보러 다니다가 마음에 드는 게 나오니 얼굴이 상기 되어서 구경하고… 좋은 신호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가 바란다 말하는 것은 겨우 일주일에 한 번 정도의 데이트, 그것도 자기가 반은 비용을 내겠다니… 그건 결국 강동현이랑 그 애매하고 밍밍한, 언제든 끝을 낼 수 있는 관계 이상은 되고 싶지 않다는 말 아닌가.

[그러고도 거절하면 그냥 그 여자 인생에서 꺼져줘. 그게 매너지.]

거절 당하는 것이 두려웠다. 김태형의 말이 맞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는 전처럼 그렇게 강압적으로 끌어당기고 울리고… 그럴 순 없지 않는가.

이번이 정말 마지막 기회이지 않은가.

게다가 이렇게 끝나버리면 정말 평생 후회할 것이다. 전 여자친구와는 원 없이 사랑했는데도 헤어질 땐 정말 후회했다. 전부 이쪽이 못 해줘서 그렇게 된 것만 같고… 하지만 그에게는 아무것도 해준 것도 없었고 상처만 줬다. 지금이야 벌충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니까… 이대로, 제대로 아무것도 해주지 못하고 이렇게 밍밍한 채로 안녕, 그러면 얘는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자기 자리로 돌아갈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우연히 마주치기라도 하면 아마 처음 보는 사람처럼 미소를 지으며 대하겠지….

‘지금 당장에라도 내가 끌어당기는 걸 멈추면 그렇게 되겠지.’

도대체 왜? 나를 원하고 있는 주제에.

“…….”

당장 다그쳐 묻고 싶은 걸 간신히 참았다. 하지만 금방 떠오른 생각들이 정말 사람 마음을… 심란하게 했다. 강동현은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황경호의 얼굴을 잡고 충동적으로 입을 맞추었다. 몇 초 뒤 입술을 뗐다.

“….미안.”

강동현은 그렇게 말하며 황경호의 왼손을 오른손으로 꽉 잡고 잠깐 창밖을 보고 있었다. 황경호는 반응을 보이진 못했지만 깜짝 놀라 조금 뒤 슬그머니 입술을 손등으로 좀 문질렀다.

“…주말마다 다니는 건 괜찮은 거 맞지? 억지로 하고 있는 건 아니지?”

강동현이 갑자기 물었다. 황경호는 그의 질문이 갑작스러워서 약간 머뭇거리다가 대답했다.

“억지로 하는 거 아닌데….”

그러자 강동현이 돌아보았다.

“진짜지? 정말이지?”

“어? 어….”

“나중에 가서 억지로 따라다녔다고 말하지 마….”

그리고 강동현이 황경호의 손에다 입을 맞추었다. 그러더니 황경호의 손을 물끄러미 보더니 또 물었다.

“이건?”

“어?”

“손잡는 건? 괜찮아?”

“어? 어…….”

“그럼 손에다 키스하는 건?”

“그것도….”

“가끔 포옹하는 건? 머리카락 만지는 건?”

“…너무 만지지만 않으면….”

“싫었어?”

강동현 뭔가 좀… 풀이 확 죽은 것 같았다. 지난 두 달이나 저번 주 일요일의 싸움 이후로도 쭉 황경호를 이끌고 다니며 이것저것 하며 거침이 없었던 그였다. 그런데 황경호가 이 모든 게 부담스럽기도 하고, 또 미안하기도 해서 몇 마디 하니 그답지 않게 진짜 기세가 꺾인 느낌이었다. 그는 황경호의 눈을 가만히 보며 있었다. 어쩌라는 건가, 싶어서 쳐다보니 다시 물어본다.

“진짜 싫었어?”

“어? 아니… 그런 건 아닌데….”

그제야 황경호는 그렇게 대답했다. 그러자 강동현은 다시 좀 답답한 얼굴이 되었다.

“나 점수 따고 있는 건 맞는 거지?”

강동현이 그렇게 물었다.

“분명히 그런 것들 니가 좋아한다고 생각했는데…. 넌 왠지…. 좋아하는 걸… 싫어하는 거 같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좋아하는 걸 싫어한다니 무슨 말인가. 하지만 황경호는 그 말이 여운이 남았다. 좋아하는 걸 싫어한다. 강동현은 황경호의 얼굴을 초조하게 보다가 또 물었다.

“금방 키스는? 싫었어?”

“어…?”

“나랑 키스하는 건 싫어? 이제 그런 건 아예 싫은 거야? 키스뿐만이라도?”

“…….”

강동현은 황경호의 표정을 보고 순간 너무 나갔다는 걸 알아차렸다.

‘그래… 우리가 볼 거 안 볼 거 다 보고, 할 거 안 할 거 다 했지만…. 나 지금 이거… 얘한테 처음 만나 연애하자고 꼬시는 걸로 생각해야 되겠지. 생각해보니까 얘… 내가 처음이었지… 아예 연애 안 해본 거지….’

강동현은 자기가 또 조급해졌다는 걸 깨달았다. 항상 얘를 볼 때마다 그랬다. 그래서 짜증 나고 건드리고 싶고 괴롭히고 싶고…. 강동현은 한숨을 쉬며 잡고 있는 황경호의 손등에다가 입술을 꾹 눌렀다.

“미안. 대답 안 해도 돼. 내가 좀… 초조해서.”

그러면서 영 보내줄 생각은 없는지 계속 손을 잡고 있는 강동현이었다.

“…다음 주는 어디 가고 싶어?”

강동현이 물었다. 황경호는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너 그 중개인한테… 집 보러 간다고… 한 거 아냐?”

“…보러 가도 돼?”

“아….”

황경호는 아차 했다. 단순하게 강동현과 그 중년의 중개인이 ‘약속’을 했다는 사실 때문에 평소같은 데이트는 당연히 미뤄진다고 생각했다. 그 순간 어쩐지 강동현이 왜 그렇게 답답해 하는지, 조금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잠깐 또 침묵이 흘렀다. 강동현이 약간 미소를 띠며 황경호의 머리카락을 마구 흐트러뜨렸다.

“알았어. 그냥 놀러 가자. 어디 가고 싶은데 없어?”

“아… 어….”

“그럼 이번엔 속초 쪽으로 가볼까? 아침 일찍 가면 당일치기도 가능할 거 같고. 그치?”

“그럼 너무… 운전 많이 해야 하잖아. 피곤하지 않겠어?”

강동현은 어쩐지 인상을 살짝 찌푸리면서 황경호의 얼굴을 만졌다. 가만히 그러다가 한숨을 쉬며 입을 뗐다.

“난 니가 그런데 왜 신경을 쓰는지 궁금해. 그런 말 들으면 역시 나한테 마음이 있는 것도 같고… 또 반대로 완전 남처럼 생각하는 건가 싶기도 하고….”

“…….”

“그럼 또 어쩔 수 없어서 어울려주나 싶기도 하고….”

강동현은 분위기를 전환하는 데 실패하고 좀 울적한 표정으로 황경호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나중에 억지로 했다는 말이 제일… 상처받는 거 같아. 전에도 그랬고….”

강동현은 무거운 한숨을 쉬면서 자기 뒷목을 좀 주물렀다.

“싫은 건 진짜 싫다고 말해줘… 점수 따고 싶어서 이러고 있는 거지 깎아 먹으려고 하는 거 아니니까….”

최선을 다해 노력하고도 벽을 느끼면 역시 울적해지기 마련이다. 아기들이 잘 우는 이유는 항상 최선을 다해서 살기 때문이라고 하지 않는가.

강동현은 황경호의 눈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리고 말했다.

“뭐든 내 앞에선 참지 마. 그래도 되니까.”

아무것도 참지 않아도 된다.

듣는 순간 그런 말을 황경호한테 해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는 걸 바로 알 수 있었다. 오늘 그 잘나가는 중개인들이 황경호한테 했던, 사람을 정말 존중하는 태도와 대우를 사회 어디에서도 받아본 적이 없다는 걸 받아 보고야 깨달은 것처럼, 황경호는 작게는 주변 사람들부터 크게는 사회에 이르기까지 모든 이들이 그에게 참으라고만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유가 있든 없든 참고만 살라고,

니가 할 수 있는 것 그것밖에 없다고.

황경호는 순간 홀린 듯, 충동적으로 강동현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황경호는 언제나 약하고 상처받은 사람들에게 약했다. 감정이입인지 뭔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간혹 강동현이 상처받은 것처럼 굴 때도 습관적으로 상대를 배려하곤 했다. 멍청하게도 말이다.

강동현은 언제나 그에게 원하는 걸 말하라고 했다. 그럴 때마다 뭘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 뭘 원하는지, 뭘 원해야 하는지도 알 수 없었다. 황경호는 그에게 원하는 게 없었다. 아니, 설사 있다 하더라도 그게 황경호가 가질 수나 있는 것인가?

그런데 참지 말라니.

“아….”

입술이 잠깐 닿았다가 떨어지고, 황경호는 자기가 한 행동에 너무 놀라서 굳어버렸다. 강동현이 인상을 확 쓰더니 황경호의 팔을 강하게 끌어당겨 다시 입을 맞추었다.

“읍…!”

혀부터 넣는다. 황경호는 눈을 질끈 감았다.

“으응…! 하아… 읍….”

간격이 없다. 뜨겁다. 너무나 거칠고 열정적인 입맞춤이 영원인 듯, 순간인 듯 이어졌다. 차 안이 두 사람의 가쁜 숨소리로 가득 찼다. 그리고 얼마 후인지 모를 때, 뭐 때문인지도 모르게 입술을 뗐을 때는, 황경호는 운전석에 있는 강동현의 무릎 위에 앉아서 그의 양어깨를 밀어낸 채 새빨개진 얼굴로 눈을 크게 뜨고 있었다.

깜짝 놀랐다….

헐떡이다가, 강동현의 얼굴을 저도 모르게 보니 강동현이 말도 못 하게 섹시한 얼굴로 황경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거친 호흡을 하며 자신의 어깨를 잡고 밀어내고 있는 황경호의 손목을 잡아뗐다.

“한 번 더 해.”

그리고선 다시 입을 맞추었다. 입 안을 완전 야하게 핥아 올린다. 황경호는 뒤통수를 차 앞 유리 프레임에 꽉 누르고 그의 열정적인 입맞춤을 받아 내다가 이내 흐물, 녹아내리듯 그의 머리를 끌어안았다.

“으응… 하앙… 음… 하아… 조금만… 천천히….”

“하아… 이렇게…? 음….”

느릿하게 혀가 문질러졌다. 타액이 달고 달아서 서로의 타액을 쪽쪽 빨아 마셨다. 머리카락 끝까지 찌릿거렸다. 피부에 소름이 돋는다. 온몸에 기분 좋은 열기가 돌았다. 강동현이 황경호의 아랫입술을 입술로 물고 쪽쪽 빨다가 다시 서로의 입술을 포개고 혀를 넣어 혀끝을 마주치고 문지르고 빨았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둘은 이미 만리장성을 몇 번이고 쌓았다. 예전 한 달은 거의 장소도 안 가리고 했고 강동현의 삼성동 집에서 한 달 정도는 이틀에 한 번 꼴로 2~3번씩 했다.

몸의 상성은 세계 최고에다가 입을 맞추든, 서로 만지든 끌어안든 삽입을 하든… 뭘 하든 둘 다 녹아나지 않았던가.

“흐읏… 아응… 아앙….”

기분이 너무 좋았다…. 어느샌가 황경호는 그와 마주 보고 다리를 벌리고 그의 무릎 위에 앉아 있었다. 그의 어깨를 끌어안고 한 손으로 그의 머리카락을 만졌다. 강동현이 황경호의 상의 안으로 두 손을 넣어 등허리를 쭉 쓰다듬어 올리자 오금이 확 저리며 움찔움찔 떨었다.

“하아… 흐읏… 흐으응….”

황경호는 녹을 듯한 신음소리를 내며 같이 입술과 혀를 움직였다. 강동현이 거친 숨소리를 내며 황경호의 뺨과 귓가에 입술을 누르며 몸을 꽉 끌어안으며 얼굴을 비볐다. 이 접촉감… 두 달 하고도 몇 주만… 황홀했다. 황경호는 벌써 온몸이 확 빨개져서는 부들부들 떨며 눈물까지 글썽거릴 정도였다.

‘갈 것… 같아… 나올 것 같아…. 어떡해…..’

헐떡이면서 참으려고 무진장 노력을 했지만, 강동현이 자꾸 사람을 주물렀다. 손, 팔, 허리, 등, 허벅지… 굳이 야한 곳을 만지는 건 아닌데 계속 짜릿짜릿했다. 강동현이 섹시한 한숨을 내어 쉬며 황경호의 귓불을 핥으며 속삭였다.

“어디까지 해줄까? 니 거 만져도 돼? 나도 해도 돼? 넣는 건 안 돼?”

그가 하는 단어 하나하나에 움찔거렸다. 야했다. 황경호는 뭐라고 대답도 못 하고 뻐끔거리다가 우는 소리를 냈다.

“부끄러워….”

“뭐가… 우리 그래도 좀 했잖아… 이제 니가 원하는 대로만 한다니까.”

그러면서 강동현은 한 번 침을 삼키며 깊게 한숨을 쉬었다.

“하아… 오랜만에 하니까… 진짜 죽겠다….”

강동현이 황경호의 뺨을 잘근 깨물었다. 황경호는 움찔하고는 결국,

“아아아앙…. 흐으응….!”

엉덩이를 앞뒤로 움찔움찔 떨며 눈을 가늘게 뜨고 야시시한 신음을 흘렸다. 강동현의 티셔츠를 찢을 듯 세게 움켜쥐며 몸을 뻣뻣하게 떨었다.

“아…. 너 진짜…….”

강동현은 절정에 이른 그의 얼굴을 보고 신음처럼 중얼거렸다. 황경호는 현기증이 핑 돌아 핸들에 등을 살짝 기대였다가 앞으로 몸을 구부렸다.

“하아… 하아… 하아…….”

부끄럽다. 황경호는 온몸이 터질 듯이 빨개져서는, 뇌가 녹아서 귀로 나올 것만 같이 얼굴이 뜨거운 걸 느꼈다.

“하하… 너 이럴 때 진짜 귀엽단 말이야….”

강동현이 황경호의 얼굴을 보고 그러더니 그의 뺨에 입술을 눌렀다. 그가 놀리는 것만 같아 조금 마음이 상했다. 그때 갑자기 밖에서 발자국 소리와 말소리가 들렸다. 황경호는 깜짝 놀라서 강동현의 머리를 품에 확 끌어안았다.

“야… 어차피 사람들 몰라.”

강동현도 약간 움찔했다가, 그의 등을 툭툭 두드렸다.

“그래도….”

그렇게 가만히 사람들이 느린 걸음으로 멀리 사라질 때까지 가만히 그대로 있었다.

“갔어?”

강동현이 웃음이 섞인 목소리로 그렇게 물으며 고개를 들었다. 또렷하고 깊은 눈매를 가진 그의 잘생긴 눈과 시원하게 커서 미소가 아름다운 입술. 거기에 조금 놀리는 감이 있는 표정으로 황경호와 눈을 마주친다. 황경호는 바로 아래에 있는 그의 얼굴을 일렁이는 눈빛으로 내려다보았다.

그가 너무 매력적이었다.

계속 가슴이 두근거리고 뭔가 안에서 튀어나올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뭔가 말을 하고 싶은데 어떤 말을 해야 할지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았다.

“키스 계속하자.”

강동현이 졸랐다. 그러면서 그는 황경호의 윗입술에 쪽 입을 맞췄다. 황경호는 눈을 감으며 입을 벌렸다. 그렇게 또 부드럽게 한참 입을 맞추다가 이번엔 사람이 아무런 기척도 없이 나타나 옆으로 조용히 지나가자 황경호가 기겁을 했다. 이번엔 운전석 채로 강동현의 얼굴을 끌어안았다.

“야… 아파. 아프다고. 내 코.”

운전석과 황경호의 가슴 사이에 끼인 강동현이 황경호의 티셔츠를 잡아당겼다.

“미안….”

고개를 들어 얼굴을 올려다보니 뭔가 엄청 취약하고… 어떻게든 해버리고 싶은 얼굴로 강동현을 보고 있다. 강동현은 심장이 크게 뛰며 그의 허리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아… 진짜 못 참겠다. 진짜… 진짜…….’

강동현은 몇 번이고 다시 생각하고도 결국 이기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너희 집에… 가자.”

강동현은 그의 귓가에 입술을 누르며 속삭였다.

“오늘 나랑 자자….”

황경호는 그의 부드러운 입술이 피부에 닿을 때마다 소름이 자꾸 돋아서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응?”

강동현이 유혹했다. 대답을 기다리며 강동현이 이마를 마주 대고 황경호의 눈을 가까이서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이 섹시하다.

황경호는 뺨이 발갛게 되어서는 뭔가… 억울한 듯도 보이고 울 것 같기도 한 얼굴로 그의 눈을 보다가 고개를 약간 숙이며 눈을 감았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강동현은 운전석 문을 열고 황경호부터 내려주었다. 강동현은 선글라스를 끼고 차에서 내리더니 황경호의 뒤를 따라왔다.

“몇 층?”

“2층….”

황경호는 얼굴이 벌게져서는 ‘지금부터 섹스할 거예요’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가 강동현을 잠깐 돌아볼 때 강동현이 받은 느낌이었다. 귀여웠다. 건물에 들어오자마자 그의 손을 잡았다.

그가 사는 집들은 다 비슷비슷했다. 그가 집의 문을 열고 들어가자 전보다 약간 더 작은 것 같은 조금 낡고 깨끗하게 정돈된 방이 나온다. 방에 들어오고 문이 닫히니 강동현이 곧바로 황경호의 허리를 끌어안고 그의 머리카락에 얼굴을 비볐다.

“진짜 괜찮은 거지?”

그의 뺨에 쪽 입을 맞추고 그의 눈을 바라보았다. 강동현의 눈에는 약간의 장난기와 성욕이 이글거리고 있었다.

“진짜지?”

대답할 때까지 계속 뽀뽀만 하면서 물어볼 기세라 황경호가 약간 짜증이 섞인 목소리로 대꾸했다.

“…자꾸 물어 보지 마.”

“알았어.”

강동현이 씨익 웃으면서 황경호의 엉덩이를 잡고 번쩍 들어 올렸다. 그리고 입을 맞추면서 침대로 갔다. 그는 신이 나기도 하고 긴장되기도 해서 그의 품에 얼굴을 묻고 미리 말했다.

“나 오늘 밤에 너 못 재울 것 같은데.”

상투적인 말이었지만 황경호는 그가 진짜 그렇게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나 내일 출근….”

“나 너무 오버하면 중간에 그냥 알아서 패라….”

강동현이 그렇게 말하며 씩 웃으며 그의 뺨에 입술을 꾹 눌렀다.

“고마워.”

*

몸은 꽤 괜찮았다. 아프지는 않았다. 엄청 나른하고 뻐근하긴 하지만 굳이 구분하자면 기분 좋은 나른함이었다. 잠을 좀 못 잤다는 것과 부끄러워서 시도 때도 없이 얼굴이 빨개진다는 것만 제외한다면 그럭저럭 괜찮았다.

그러니까,

별로 안 괜찮다는 소리였다.

‘또 했어. 또 했어. 또 했어. 어떡해. 아, 죽고 싶어. 쪽팔려. 부끄러워. 창피해!’

오랜만에 하니까 진짜 부끄러워서 죽을 것 같다. 전에는 어떻게 그렇게 했는지 모르겠다. 전에는 그래도 좀 떠밀린다는 느낌으로 했는데 이번엔 끝까지 물어보고 확인하고….

전에 그렇게 울고불고 또 절대 안 하겠다고 다짐해 놓고 또 이렇게 충동적으로 해버리다니. 분명히 황경호도 단단히 마음을 먹고 심지어 강동현도 엄청 조심스러운 태도로 육체관계에 대해선 몇 발자국 물러난 입장을 계속 보였는데도 말이다.

게다가 이번엔 뭔가…. 항상 정신 나갈 정도로 느낀다 싶어 힘들었는데 이번엔 처음부터 끝까지 부드럽고 황홀하기만 했다. 싫다는 말을 한 번도 안 했던 것 같다.

그냥 아무 말 없이 알몸으로 껴안고 있기만 해도 사실 기분 좋았다. 사람의 살이란 원래 그렇게 기분이 좋은 것일까. 맞닿은 느낌도 체취도 황홀했다. 게다가 말로 표현이 되지 않는 마음과 몸의 깊은 이어짐… 눈빛… 특별하게만 느껴졌다. 황경호는 그렇게 부끄러우면서도 멍하니 어젯밤을 자꾸 떠올렸다.

전에도 그랬지만, 진짜 강동현은 사람의 정기를 쪽쪽 빨아 먹는다는 악마 같았다. 남자답고 매력적이고 섹시하고… 분명히 뭔가를 빨아 먹고 있는 쪽은(?) 이쪽인 데도 뭐가 자꾸 빨리는 기분이다.

그렇게 멍하니 있다가 점심시간이 되어 휴대폰을 확인하니 그가 일어났는지 일하러 나간다고 문자를 보내 놓았다.

<몸은 괜찮아?>

강동현의 문자에 답을 한 적이 잘 없었지만, 이번엔 답장했다.

<응>

그러자 곧바로 답장이 와서 깜짝 놀랐다.

<나 또 어제 니 얼굴 안 깨물었어? 중간에 기억이 좀… 혹시 또 물었으면 미안….>

예전처럼 상처나 멍이 날 정도 깨물지는 않았지만 물긴 물었다. 답장했다.

<멍 안 들었어>

<그래? 다행이다>

강동현은 그렇게 답장했다. 황경호는 저 말에 어떻게 답장을 해야 할지 골똘히 생각하는데 강동현한테서 또 문자가 왔다.

<촬영 빨리 끝났으면 좋겠다. 나랑 같이 살자. 보고 싶다>

…더 어떻게 답장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황경호가 휴대폰 화면을 보며 쩔쩔매고 있는데 갑자기 정기연이 웍! 하며 사람을 놀래킨다. 황경호는 기겁을 했다.

“어디 신성한 병원에서 연애질을. 환자들 보기 부끄럽지도 않아? 어? 다 안 되는 남자들 앞에서 말이야. 양심도 없게 보란 듯이~”

정기연이 놀렸다. 요새 황경호는 누가 놀려도 재미있는 존재인 모양이다.

“아니…! 아니! 누가……!”

황경호가 깜짝 놀라서 말을 더듬었다. 정기연이 낄낄 웃었다.

“진짜 오빠 그런 스타일인 줄 몰랐는데. 연애하는 거 진짜 다 티 나네. 뭔데. 얼마나 예쁜 애길래 이래? 어? 어?”

정기연이 옆구리를 막 찔렀다. 황경호는 한숨을 쉬며 주저주저 대답했다.

“…예쁘기는……김태희급…?”

“정신 차려, 오빠. 완전 콩깍지가 장난 아니구만?”

“저리 가….”

황경호는 한숨을 쉬었다. 밥을 좀 먹고 나니 그제야 좀 정신이 드는 것 같았다.

오늘은 유달리 심하다… 강동현과의 섹스는 언제나 황경호에게 큰 영향을 끼쳤지만, 유달리 이번에는 정신을 못 차리고 계속 떠올렸다.

계속 키스하면서… 부드럽게…. 가끔 그가 짓궂게 놀리긴 했지만… 그래도 애정 어린… 느릿하고 부드럽고 황홀하고 섹시한…….

핫! 또 떠올렸다. 황경호는 벌게진 얼굴을 부채질하면서 슬그머니 아래층으로 내려가는 층계로 들어갔다.

‘정신 차리자, 정신.’

황경호는 심호흡을 크게 했다. 그때 아까 점심시간 때 주머니에 넣어 놨던 휴대폰이 울렸다. 휴대폰 화면을 보고 고개를 갸우뚱하고 받았다.

“네. 여보세요?”

[아, 황경호 씨 맞습니까?]

“네. 누구세요?”

[나 집주인인데. 거… 어젯밤에 시끄러웠다고 오늘 입주자들한테 전화가 좀 와서. 우리 빌라 오래된 건물인 거 알지? 알아서 조심해.]

“…네?”

[남자든 여자든 차라리 데리고 모텔 가. 알았어?]

그렇게 ‘전화는 용건만 간단히’가 모토인 것 같은 60대의 할아버지가 빛의 속도로, 하지만 무심하게 훈계했다.

*

[하아응…! 하앙……! 아앙…. 아…! 흣… 나… 나… 하앙…. 나… 아아아…]

[갈 것 같아? 윽… 하아… 나도….]

[아! 더 넣지… 아아응… 힉… 아.. 아…! 거기이… 하아아… 거기… 거기….]

[다리 더 벌려 봐… 엉덩이 좀 더 더 붙여… 그래… 그렇게… 아… 미치겠다….]

[힉…! 아… 아! 더 빨리하지 마…! 아앙…아앙…하앙… 아!]

[이 정돈….? 괜찮아? 윽…하아….]

[흑…아앙…아아앙…나아아… 할 것 같아…아으응… 어떡해… 아아앙….]

[해… 빨리. 얼굴 보여 줘. 빨리해.]

[부끄러워… 힉… 아! 안 돼…! 하아아아앙…!!!]

[으윽…! 큭! 아우윽……!!!]

“…….”

“거기서 뭐 해, 황 간?”

“악! 아무것도 아니에요!!”

황경호는 비명을 지르듯 그렇게 빠르게 대답하고 벌떡 일어났다. 누가 불렀는지 확인도 못 하고 층계를 순식간에 뛰어 내려가 입원 층으로 들어갔다. 심장이 벌렁거렸다. 얼굴이 벌겋게 텄다.

‘그냥 죽을 거야. 죽을 거야. 뛰어내릴 거야. 이제 싫어. 다 싫어. 다 필요 없어. 부끄러워. 창피해. 죽고 싶어.’

누가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고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고 했던가. 어젯밤에 강동현을 방으로 끌어들일 땐 저번에 어떻게 집에서 나오게 되었는지 진짜 뻥 안 치고 하나도 기억이 안 났다. 긴장해서 심장만 두근거리고… 떨리고….

이번 방은 저번 방보다도 작고 침대도 낡았고 한 층에 있는 방들도 많았다. 강동현이 술을 마시고 했던 날처럼 격하게 하진 않았지만 기억나는 한에서는 어젠 침대가 자꾸 벽에 부딪쳤던 게 기억난다… 게다가 강동현이 다섯 번인가 해서 못 해도 새벽 3~4시까진 한 것 같은데….

여기 사람들이 다 착한 것인지 꼭 그걸 다 듣고 다음 날 클레임을 걸었다. 차라리 벽이라도 한 번 쳤으면 옆집에 사람들이 있다는 걸 알고 조심할 텐데… 안 그래도 걔랑 섹스하면 세상에 둘밖에 없는 기분이라 자꾸 다른 중요한 것들을 까먹는단 말이다….

‘이번에도 진짜 다 들었을까? 그래도 저번만큼 그렇게 소리 많이 내진… 냈나? 낸 것 같다….’

황경호는 손을 대면 빨간 물이 묻어나올 것 같이 빨개져서 발을 동동 굴렀다. 이젠 정말 그렇게 막무가내로 나갈 수 없었다. 이제 정말 돈이….

[나랑 같이 살자.]

“……!”

황경호는 최대한 빠른 속도로 걸어서 화장실로 들어갔다. 그리고 전화를 걸었다. 촬영 중이라 안 받을 것 같지만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네 번짼가 거는데 받는다.

[갑자기 무슨 일….]

“너…!! 어제 일부러 그런 거지!!”

그가 받자마자 저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가 입을 확 막았다. 화장실 안에는 다행히 그 외엔 아무도 없었다.

[깜짝이야… 무슨 소리야?]

“어제… 어제….”

황경호는 부들부들 떨면서 말을 더듬거렸다. 황경호는 한 손으로 자기 얼굴을 감싸며 신음처럼 말을 이었다.

“어제 사람들이 또… 들었다잖아….”

[뭐? 진짜?? 뭔 벽이 그렇게 얇아? 우리가 어제 뭐 얼마나 했다고?]

“뭘 얼마나 해! 너 엄청 했잖아!”

황경호가 또 화가 나서 소리쳤다가 입을 또 막았다. 밖까지 들릴 것 같다. 황경호는 화장실의 문 칸막이에 얼굴을 박고 중얼거렸다.

“죽고 싶어… 죽고 싶어. 죽고 싶어.”

[왜 또 그래. 그거 뭐 별거라고… 아, 아니다. 엄청 잘됐네. 와, 대박. 나랑 같이 살자.]

강동현이 신난 어조로 그렇게 말했다. 황경호는 뭐가 자꾸 억울하고 화가 나는 기분이라 우는 듯한 신음소리를 내며 괴로워하다가 또 따졌다.

“너 일부러 그런 거지….”

[쪽팔리지~ 지금 엄청 쪽팔리지, 너? 그 집 나와야 돼. 그런 데 못 살아. 어떻게 살아~ 쪽팔려서. 오늘이라도 나와. 우리 집 와라. 응? 그리고 일요일 날 그 집 도장 찍고 다음 주에 바로 들어가자. 어때? 어때?]

이 나쁜 놈이 사람이 창피해서 죽으려고 하는데 마구 부채질을 해댔다. 사람 마음이 어떤지도 모르고…. 황경호가 기분이 왕창 상해서, 뭔가 확 또 올라와서 얼굴로 열이 막 몰렸다. 얘 이런 놈이야. 나쁜 놈이라고.

“너 왜 말을 그렇게 해…….”

[……어… 잠깐만. 야. 우는 거 아니지? 야, 잠깐만.. 끊지 마. 끊지 마. 끊지….]

끊었다. 황경호는 손으로 마구 눈을 비비고는 뚜껑을 덮은 변기 위에 앉아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며 얼굴을 감쌌다. 곧바로 전화가 다시 걸려오는데 무시했다.

‘이제 진짜 어떡하지….’

황경호는 한숨을 푹푹 쉬었다.

‘그냥 눈 딱 감고 살아야 하나… 이번 집은 들어간 지 얼마 안 돼서 서로 마주친 적도 거의 없고… 괜찮으려나… 아니, 괜찮고 안 괜찮고가 무슨 문제야… 돈도 없으면서… 그냥 참고 살아야지….’

[뭐든 내 앞에선 참지 마. 그래도 되니까.]

‘진짜 나쁜 놈….’

황경호는 눈을 주먹으로 마구 비볐다.

“아, 씨….”

짜증이 나서 발을 세게 굴렀다. 바보 같아.

강동현이 말이다. 계속 좋다, 좋다 하면서도 가끔 이쪽을 어떻게든 자기 마음대로 해보려는 게 빤히 보여서 말이다. 잘해 주려고 하는 것도 알겠고 갈수록 점점 얼마나 그가 바뀌는지도 느껴졌지만, 그런 점은 도저히 바뀌지를 않았다. 그리고 그가 원하는 대로 뭔가 또 착착 진행이 되는 것이 느껴지면 속는 것만 같고 또 억울하게 당하는 것만 같고 그래서 도저히 마음이 좋게 먹어지지가 않았다.

그렇게 오후까지는 전날의 황홀함의 여파로 나른하고 멍하게, 그 이후는 불안과 걱정, 창피함과 약간의 억울함으로 한숨을 푹푹 쉬면서 보냈다. 그리고 저녁에는 어쩔 수 없이 발을 질질 끌면서 집으로 돌아갔다. 건물 내로 들어가서는 아무도 없는데도 불구하고 고개를 푹 숙이고 조용히 빠르게 집으로 들어가서는 문도 조심조심 닫고 쥐 죽은 듯이 가만히 있었다. 냉장고 문도 살살 열고 닫았다. 어제 그 끔찍한 소음(?)에 시달렸을 사람들을 생각하자면 그냥 앞으로 여기 사는 동안은 계속 조용히, 조용히 죽은 듯이 사는 것이 벌충하는 길일 것이다.

밥도 조심조심 먹고, 어젯밤 일로 엉망이 된 이부자리도 전부 세탁기에다 넣어두고(돌리지는 못했다), 조심조심 샤워를 하고, 조심조심 새 이부자리를 깔고 자리에 누웠다. 내내 긴장하고 있어 누우니 온몸이 욱신거렸다.

‘잠… 안 올 것 같아.’

어젯밤에 잘 자지 못해서 빨리 자야 했는데 각성 상태가 지속되며 잠이 하나도 오지 않는 게 느껴졌다. 게다가 여기는 어젯밤 내내 그렇게 강동현과 뒹굴었던 침대다. 싫고 밉고 짜증 나고 억울하고 화나는 데도 막상 또 생각나니까 온몸이 빨개지며 부끄러워지기까지 한다.

걔가 뭐라고. 그놈이 뭔데. 황경호는 억울해서 침대에 엎드려(침대 틀이 삐걱거리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려서 깜짝 놀라 중간에 조심히 돌아누웠다) 베개에 얼굴을 묻고 괴로워했다. 그렇게 한참을 뒤척이며 불면의 밤을 보내고 있었다. 몇 시인지도 모르겠는데 갑자기 현관에 노크 소리가 들려 경기를 일으킬 뻔했다.

똑똑똑똑똑.

알듯 모를듯한 경쾌한 박자로 노크하는 방문객이었다. 황경호는 식겁을 해서 고개를 들었다가 조심스럽게 침대에서 내려와서 불을 켜고 문으로 다가갔다. 몇 신데 사람이… 현관문의 바로 앞에 와서야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누구세요?”

안 들리는지 다시 노크를 한다. 다른 사람들에게 들릴까 봐 황경호는 그냥 얼른 문을 열었다.

“누구세….”

“나.”

황경호는 마스크를 내리며 씨익 웃는 강동현을 발견하고, 귀신을 봐도 이렇게 놀라지 않을 기세로 온몸의 털이 확 솟았다가 얼른 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주변을 살피고 그를 끌어당겼다. 문을 닫고는 심장이 너무 빨리 뛰어 심장마비라도 올 기세라 손으로 심장 부근을 꾹 눌러 진정을 시켰다. 아무도 못 봤겠지….

“갑자기 오면 어떡해! 시간이 몇 신데!”

황경호가 목소리를 확 낮추고 그를 타박했다. 강동현이 신발을 벗고 안으로 들어가면서 기지개를 폈다. 촬영장에서 바로 온 것인지 어제 입은 옷 그대로였다. 키가 훤칠한 그가 기지개를 펴니 거의 천장에 손이 닿을 것 같았다.

“너 아무리 꼬셔도 내 집에 안 올 것 같고… 근데 생각해보니까 같이 사는데 굳이 내 집에 살 필요는 없다 싶어서.”

“뭐…?”

황경호가 얼이 빠져서 그를 쳐다보았다. 강동현은 벌써 겉옷을 벗어 황경호의 옷걸이에다 걸어 놓고 황경호의 침대에 앉았다(그가 앉으니까 침대가 완전 작아 보인다). 그리고는 황경호를 올려다보며 미소를 지었다.

“나 여기 살래.”

“싫어. 안 돼. 나가.”

황경호가 말했다. 강동현은 티셔츠도 벗어서 황경호의 책상 의자에 걸쳐놓고 황경호가 어어, 하는 사이에 바지랑 명품속옷까지 벗어서는 같은 자리에 던져놓고는 근육으로 꽉 찬 멋들어진 나체로 황경호의 침대에 엎드려 누웠다.

“아… 피곤하다.”

황경호는 너무 당황해서 입을 딱 벌리고 있다가 온몸이 새빨개질 정도로 화가 나서는 그의 등짝을 손바닥으로 짝 쳤다.

“나가!”

“아야….”

강동현은 아파서 잠깐 움찔하고는 천천히 고개만 슥 돌려서 황경호를 올려다보았다. 새하얀 새 이부자리에 멋진 남자가 조각 같은 나체로 엎드려 잘생긴 얼굴로 근사한 미소를 지으면서 입을 열었다.

“아, 왜. 나도 내 집에서 몇 달 살게 해줬잖아.”

근데 말하는 게 저렇게 얄밉다. 황경호가 어쩔 줄을 몰라 했다.

“난… 어쩔 수 없었잖아. 아니, 그리고 니가 살라고 했잖아. 난 싫어. 나가. 나가….”

“나 이 꼴로 나가라고?”

한국 사람들 수틀리면 옷 벗는 이유가 이것일지도 모른다. 배짱을 부리는 것이다. 이렇게 훤칠한 외모를 가지고 왜 그런 짓을 하는가. 가끔 보면 애가 정말 답이 없을 정도로 막무가내다.

“옷 입으면 되잖아. 나가.”

강동현은 하품을 하면서 딴소리를 했다.

“나 사실 삼성동 집 내놨거든.”

“뭐?”

근데 그 소리가 또 기가 막힐 소리였다. 황경호가 놀란 얼굴로 반문하니 강동현은 진짜 피곤하긴 한지 나른한 얼굴로 황경호의 손을 만지면서 말했다.

“아, 그냥… 진짜 너랑 같이 살려고… 이사 가려고 집부터 내놨는데… 사람들도 몇 번 보러 오긴 했대. 나 바빠서 집에 없으니까. 살 때 13억 정도에 샀는데 가격이 좀 올라서 요새 15, 16 정도 하는 것 같더라고. 그냥 팔리는 대로 비싸게 팔아달라고 했는데… 또 내가 살던 집인 건 어떻게 알았는지 금방 나가더라. 3억 벌었다.”

“…….”

“팔아도 되지? 계약금 받아서 팔아야 돼. 나 집문서랑 인감 좀.”

“…….”

황경호는 말을 잃고 입만 뻐끔거리면서 그를 내려다보았다. 강동현은 하품을 했다.

“그러니까 나도 곧 집 없을 예정이야. 나도 어쩔 수 없이 니네 집에 얹혀야겠다.”

황경호는 입을 딱 벌리고 있다가 그의 등을 손으로 퍽 밀었다.

“그런 게 어디 있어… 말도 안 돼.”

“그런 게 여기 있지. 어디 있기는… 너 말이야. 얌체같이 넌 나한테 얹혀살아 놓고 난 너한테 못 얹혀살게 하려는 건 아니지?”

강동현이 한 손으로 머리를 괴고 옆으로 누워 황경호의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그가 그렇게 말하니까 진짜 할 말이 없었다. 하지만 얼굴이 새빨개졌다.

빌라 사람들은 어떤 남자 둘이 섹스를 하면서 좋아 죽는소리를 다 들었는데 이 좁은 방에 남자 둘이 산다…. 황경호는 그를 마구 때렸다.

“진짜! 싫어! 싫어! 짜증 나!”

“아야! 아파. 아파.”

맨몸에 맞으니 완전 따갑다. 강동현은 씻어야겠다며 얼른 그를 피해서 욕실로 들어갔다. 욕실은 더 작으니 그의 머리가 아슬아슬하게 문틀에 닿았다. 강동현은 고개를 숙이고 안으로 들어갔다. 10분 뒤에 다 씻고 또 슬 알몸으로 활보했다. 저거 지금 일부러 저러는 것이다.

“…물 흐르잖아. 제대로 닦아.”

“니가 닦아 줘.”

죽여 버리고 싶다. 황경호는 오랜만에 그에 대한 살심이 무럭무럭 솟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안 닦고 그대로 침대에 앉으려고 하니 결국 황경호가 그의 수건을 뺏어서 머리를 닦았다.

“야.”

“…왜.”

“나 진짜 예전부터 니가 해줬으면 하는 거 하나 있었는데….”

강동현은 황경호가 머리를 닦아주는 사이 한쪽 눈만 떠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뭔데.”

강동현이 손을 뻗어서 책상 위에 있는 잘 알려진 저가 브랜드의 로션을 들어 올렸다.

“나 이거 다 발라주면 안 돼? 전부.”

“…….”

“아, 진짜. 아, 진짜 농담 아니고 내 소원. 진심으로. 그러면 죽어도 여한 없다.”

강동현은 예전에 진짜 아무것도 모를 때도 그가 병원에서 마사지를 해주는 걸 받으며 얘가 전신 마사지 해주면 진짜 기분 끝내줄 거라는 생각을 간간히 하곤 했었다.

“나도 해줄게. 응? 응? 난 두 번, 아니, 세 번. 응?”

“…수작 부리지 마. 여기서 안 해.”

“죽어도 여한 없다니까~.”

“진짜 죽여 버린다.”

강동현이 쳇, 하고 혀를 차더니 알아서 바른다. 어쨌든 일단 왔으니까 내쫓을 수는 없었다. 아니, 내쫓는다고 내쫓길 애가 아니었다. 황경호는 한숨을 푹푹 쉬면서 일단 불을 껐다.

“오늘은 안 해. 절대 안 해. 그리고 내일 조용히 나가. 그리고 오지 마.”

“나 진짜 곧 집 없어진다니까.”

“돈 많잖아. 집 사.”

“돈 없어… 니가 가지고 있잖아.”

“가져가라고, 그러니까!”

강동현은 화를 내는 황경호의 손을 잡아서 침대로 끌어당겼다. 침대가 고작해야 슈퍼 싱글이다. 강동현은 침대 밖으로 발이 한참 나갔다. 나란히 바로 누울 수도 없었다.

“나 집도 절도 없이 사무실에서 자고 그래야 할지도 몰라.”

강동현은 옆으로 누워서 황경호에게 한쪽 팔을 내어주고 그의 허리를 끌어안아 손을 잡았다. 황경호의 머리카락에 얼굴을 묻고 비볐다.

“나 여기 살게 해줘. 응? 너랑 같이 살 생각만 하다가 지금 완전 대책 없어.”

“그러니까 왜 그렇게 하는데. 내가 언제 같이 산다고 했는데?”

“어… 그건 그런데… 그냥… 사람이 배수의 진을 쳐야 마음도 단단히 먹는 거고….”

“아… 잠깐만… 만지지 마… 앙… 아….”

강동현이 팔베개를 해주고 있던 손을 황경호의 허리와 침대 사이로 쑥 넣더니 상의 안으로 손을 넣었다. 그리고 황경호의 가슴을 쥐었다. 황경호는 가슴을 만지는 그의 손을 잡고는 신음을 흘렸다. 강동현은 옆으로 누워있는 그의 바지와 속옷을 같이 좀 내려서 그의 엉덩이가 드러나게 했다. 강동현이 그의 뒷덜미에 입을 맞추었다.

“아앙… 아…! 읏….”

황경호가 베갯잇으로 입을 막았다. 강동현이 그의 음부에 손가락을 넣어 더듬으며 황경호의 귀를 깨물었다.

“진짜 싫어? 하지 말까? 응?”

황경호는 얼굴을 새빨갛게 붉히며 눈을 질끈 감았다. 강동현은 그의 음부를 최대한 부드럽게, 빠르게 넓히고 적응시키면서 속삭였다.

“응? 하지 말까? 싫어? 아니야? 하고 싶어?”

“흐읏….”

강동현이 손가락을 빼고 자신의 남성기를 황경호의 부드러운 엉덩이 사이에 비볐다. 강동현이 자꾸 물어보았다. 황경호는 온몸이 빨개져서는 베개에 얼굴을 묻고 그의 팔을 잡았다. 그리고 들릴 듯 말 듯 대답했다.

“조용히 해야 해….”

“하고 싶어?”

“읏….”

황경호는 얼굴을 벌겋게 붉혔다. 더 어떻게 말하란 말인가. 강동현이 황경호의 귀에 섹시하게 목소리를 밀어 넣는다.

“이거… 넣어 줬으면 좋겠어?”

“놀리지 마. 그냥 하라고.”

황경호가 그의 어깨를 주먹으로 퍽 쳤다.

“알았어.”

강동현은 완전 기뻐하면서 황경호의 뺨에 입을 쪽 맞췄다. 그리고 강동현의 커다란 대물이 입구를 꾹 누르자 황경호는 움찔하면서 저도 모르게 아래쪽을 쳐다보았다. 보이지 않았다. 강동현의 다리가 황경호의 다리 사이로 들어와 그의 다리를 좀 벌리게 했다. 그리고 강동현의 남성기가 음부를 파고 들어오려고 한다. 황경호는 그의 팔을 잡으며 신음을 흘리며 힘을 풀려고 노력했다.

“하앗… 으….”

황경호는 눈을 감으며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오늘은 소리 안 낼 거다. 몇 번 진입이 제대로 안 되다가 결국 앗 하는 순간에 끝이 쑥 들어왔다.

“!”

“진짜 소리 안 내려고?”

강동현이 뜨거운 숨을 내뱉으며 그렇게 물었다. 그대로 강동현이 황경호의 엉덩이 한쪽을 쥐어 엄지로 벌리면서 앞뒤로 조금씩 진동을 주어 천천히 파고 들어왔다. 배 안이 점점 넓어지는 게 느껴졌다. 황경호는 어젯밤에도 분명히 느꼈던 건데도, 아니 지금까지 몇 번이고 느꼈던 건데도 항상 버겁고 생소해서 적응이 되지 않았다. 자신이 남과 살을 섞는다는 것 자체가 아직도 믿기지가 않는데.

그대로 깊이 박을 때까지 천천히 밀어 넣고는 서로의 하반신을 꾹 붙인 채 황경호가 제일 버겁지 않고 부드럽게 느끼는 식으로 섹스를 하기 시작했다. 뱃속에 깊은 한 점만 지그시 꾹꾹 누르면서 서로의 몸을 깊이 포개고 있는 것이다.

“하아… 읏… 흐읏… 읏….”

“하아…. 진짜… 좋아… 윽… 나 진짜 너 아니면 안 돼….”

강동현이 탄식 같은 한숨을 쉬며 그렇게 속삭였다. 강동현은 그대로 황경호의 가슴과 앞을 만지면서 황경호의 뒷덜미에 얼굴을 묻고 꿈틀거리듯 조금씩 움직이며 그의 뱃속을 뭉근하게 자극했다. 황경호는 자기 손가락을 깨물며 다른 손으론 자신을 애무하고 있는 강동현의 팔을 잡았다. 그리고 그의 팔을 천천히 쓰다듬었다. 그대로 둘 다 집중해서는 서로의 몸을 꼭 맞붙이고 뜨거운 체온을 나누었다.

“나 좀 봐….”

강동현이 속삭였다. 황경호가 고개를 돌리자 그대로 입을 맞추었다. 그의 커다란 게 안에 푹 박혀서 슬금슬금 움직이는 그 간지러움과 뜨거움, 허리가 베베 꼬이는 성감을 느끼면서 입을 맞추고 있으니 막 뭐가 터질 것만 같았다. 가슴이 두근거려서 터질 것 같다. 가슴을 만지는 그의 손이 그걸 알아차릴 것만 같았다.

황경호는 헐떡이다가 결국 그의 어깨를 붙잡으며 눈을 질끈 감았다.

“아아아앙…… .”

야시시하게 신음을 흘리며 엉덩이를 움찔움찔하며 그를 음부로 주무르고 빨았다. 강동현이 오르가즘을 느끼며 숨을 멈추고 있는 황경호의 뺨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기분 좋다. 귀엽다. 다 깨물어서 먹어 버리고 싶다.

‘아… 진짜 근데 움직일 수가 없네….. 여자가 아니라서…. 뭘 발라야 하나….’

강동현은 완전히 쩍 들러붙어 있는 그의 음부도 마음에 들었지만, 마음이 조금해질 때가 많았다. 이거 진짜 강동현이 두 번 정도 사정을 해야지 그나마 미끈해진단 말이다. 함부로 아무거나 넣어도 되는지도 알 수가 없고…. 찾아봐야겠다.

강동현은 오르가즘을 잔뜩 느끼고 완전 취약하고 빈틈이 많아진 황경호의 얼굴을 보면서 흐응, 하고 웃었다. 그의 입술을 쪽쪽 빨았다.

“기분 좋았어?”

“하아.. 하아.. 아… 졸려…….”

황경호는 거의 기절할 것 같은 목소리로 끊어지는 듯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뭐?”

황경호는 어젯밤에도 제대로 자지 못했다. 황경호는 절정 끝에 탈력감과 졸음으로…. 그대로 잠들어버렸다.

“자, 잠깐만…….”

강동현은 그의 어깨를 흔들었다. 진짜 깊이 잠든 것 같다. 그럼 이건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강동현은 깊게 한숨을 내뱉었다. 망했다.

*

황경호는 부스스 눈을 떴다. 그는 언제나 알람이 울리기 몇 분 전에 저절로 잠이 깼다. 이제 11월 중순이 넘었다. 집 안에 한기가 돈다. 하지만 그 한기가 기분이 좋았다. 몸이 따끈따끈했기 때문이다. 등 뒤가 뜨끈뜨끈했다. 베고 있는 것도. 그리고 그 피부에서 나는 좋은 향기….

“…….”

황경호는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보았다. 강동현이다. 그리고 어젯밤이 생각났다. 하다가…. 기억이 안 난다. 아마도 잠들어버린 것 같다. 그리고 몸에 별 느낌이 없는 게…. 그 뒤로 안 한 모양이다. 당연하긴 하지만….

‘좀 미안한 것 같기도 하고…….’

황경호는 손을 뻗어 휴대폰을 쥐고 알람을 미리 껐다. 이제 해가 짧아져 해가 이제 막 떴는지 새벽의 느낌이 강하다. 황경호는 밤새 내내 한 방향으로만 누워 있어 뻐근한 몸을 위해 방향을 바꿔서 돌아누웠다. 좁아서 바로 누울 순 없었다. 그랬더니 강동현의 잘생긴 얼굴로 마주 보게 되었다.

그의 얼굴을 멍청하게 잠깐 보고 있다가 문득 생각했다.

‘얘 정말 여기서 살겠다는 건 아니겠지? 그 짐은 다 어떡해? 지금 혼자 자도 모자란 침대에 둘이나….’

지금 강동현의 전 재산도 황경호의 집에 있고 그거보다 더 비싼 남자도 황경호의 침대 위에 있었다. 정말 안 어울린다. 그러면서 문득 생각했다.

‘나 같은 거 뭐가 좋다고 이러는 거지? 역시 섹스밖에 없는데…. 지금 얘 안 되니까. 나한테만 되니까… 근데 그렇다고 전 재산이고 뭐고 이렇게 오버를 할 놈은 아닌데…. 진짜 좋아한다는 건 맞다는 건가…. 그래도 왜 날….’

그렇게 곰곰이 생각을 하다가 답이 안 나와서 관두었다. 그리고 그냥 가만히 그의 얼굴을 보고 있었다. 원체 잘난 얼굴이라 이 각도, 저 각도, 멀리, 가까이 찍어놓은 사진들도 많아서 많이 봤었다. 그래도 이렇게 직접 가까이서 가만히 볼 수 있는 건 이럴 때밖에 없으니까 말이다. 황경호는 손을 들어서 그의 속눈썹을 만져 보았다. 그리고 입술도, 코도, 턱도, 눈썹이랑 이마도.

그러다가 시간이 좀 지난 것 같아 조용히 일어났다. 그의 몸에 제대로 이불을 덮어주고 샤워를 하러 들어갔다. 밥을 해 먹으면 깨울 것 같아 그냥 나왔다. 일찍 병원에 가서 간호사실에 있는 걸로 대충 때우는 게 나을 것 같다.

그리고 평소처럼 일을 했다. 불편하게 자서 몸이 좀 결렸다. 촬영하러 간다는 문자를 받았다. 답장하지는 않았다. 집에 돌아와서 바로 세탁기를 돌렸다. 그리고 어제 새로 깐 이불은 전부 들고 동네의 코인 세탁소에 갔다. 일단 넣고 돌렸다. 비용이 8천 원이나 했고 건조기까지 돌리면 더 하겠지만 어쩔 수 없었다. 어제 황경호가 한 것 때문에 더러웠다. 세탁이 다 되려면 45분이 걸렸는데 그때 다시 와서 건조기에 넣어야 했으므로 어디를 가기가 애매했다. 그래서 그냥 거기에 있는 의자에 앉아 비치된 책을 읽었다.

그리고 세탁이 되자마자 건조기에다 탈수가 된 세탁물을 넣고 돌리고는 밖으로 나왔다. 배가 고팠다. 동네에 있는 간단한 음식을 사 먹을 수 있는 데 가서 빨리 먹고 다시 돌아왔다. 그렇게 총 한 시간 반 정도를 코인 세탁소에서 보내고 집으로 돌아왔다. 이부자리를 잘 깔고 세탁기에 빨래가 다 된 그 전의 이부자리를 집 안에다 널었다. 요새 건조해서 다행이었다. 아니면 집에서 이렇게 널면 안 말랐을 것이다. 그리고 이 닦고 노트북으로 뭐 좀 하다가 자려고 누웠다. 약간 복잡한 심상이 또 떠올라 뒤척거리다가 잠들었다.

그러다 새벽 3시쯤 현관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들렸다. 황경호는 비몽사몽 간에 잘못 들은 건가 싶었다. 그런데 또 들렸다. 황경호는 벌떡 일어났다. 설마. 황경호는 불을 켜지도 않고 현관으로 갔다. 강동현은 마스크를 내리며 입을 열었다.

“피곤해… 졸려서 죽을 것 같아.”

“…….”

그는 황경호를 안듯이 기대어왔다. 일단 황경호는 문을 닫았다. 강동현은 신발을 벗고 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옷을 마구 벗더니 욕실로 가서 진짜 5분 만에 얼른 씻었다. 그도 자기관리가 철저한 배우라 이런 건 확실했다. 그리고 대충 황경호 걸로 보습제를 바르더니 곧바로 침대에 엎어졌다. 황경호는 어쩔 수 없이 그의 머리를 닦아주면서 핀잔을 주었다.

“집에 가지 왜….”

그는 이미 잠들었다. 어쩔 수 없이 그를 또 재워줬다. 그다음 사흘 동안 내리 그랬다. 그동안은 잘 몰랐는데 주중은 아직 바쁜 모양이었다. 그리고 드디어 <시크릿 블러드> 촬영이 끝났다. 토요일 밤은 11시쯤 왔다. 황경호는 마음을 먹고 얘기를 했다.

“이제 진짜 오지 마. 집에서 자. 불편하잖아.”

그랬더니 강동현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무슨 소리를 하냐는 듯 황경호를 이상하게 본다.

“나 집 없다니까. 오늘 짐 뺐어.”

“뭐?”

황경호가 깜짝 놀라서 되물었다. 분명히 집문서랑 인감도장을 들고 가긴 했지만 그래도 이렇게 빨리…?

“왜 이렇게 빨리 뺐는데?”

“아니… 그냥 집 산다는 사람이 빨리 필요하다고 하고.. 나도 그냥……아, 근데 사람들한테 다 맡겨서 어디 상한 거 있는지 모르겠다… 일단 엄마가 봤으니까 괜찮겠지만….”

강동현이 하품을 하며 황경호의 침대에 드러누웠다. 황경호는 강동현의 집에서 지낼 때 지레 빚지는 느낌이라 이것저것 했는데. 역시 상황보다 사람이 문제인 모양이다. 저놈은 완전 지 세상이다.

“짐은? 부모님 집으로 보낸 거야?”

“아니.. 그런 거 놔둘 데가 어디 있어. 일단은 회사 창고에다가 다 넣어 놨는데….”

“…….”

또 너무 막무가내다…. 황경호는 안 그래도 다른 입주민들 때문에 요즘 신경이 바짝 선 상태였다. 그런 상태로 강동현도 자꾸 쳐들어오니 스트레스를 굉장히 많이 받고 있었다. 그런데 맨날 오자마자 쓰러져서 말도 제대로 못 하고… 황경호는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답답하고, 그리고 어떻게 할 수도 없을 것 같아 무력감까지 느껴졌다.

“그럼… 계속 이렇게 지낼 거야? 내가 너한테 신세 많이 지긴 했지만…. 그래도 빨리 집 구해서….”

황경호는 그렇게 말하면서 새삼 강동현은 자기 집에 황경호가 지낼 동안 더 있으라는 말만 했던 기억이 났다. 나중엔 너무 강압적이라 마음이 많이 상했지만, 처음엔 그런 부분에 마음이 놓였다. 그런데 이쪽은 계속 나가라고만 하니….

“…….”

그동안은 계속 화를 내던 그가 조용해지니 강동현이 아차 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미안. 미안…. 니가 받아주니까 내가 또… 미안해.”

“아, 아니… 오늘은…. 집 뺐다며….”

황경호가 미안한 마음에 그렇게 잡았다. 강동현은 황경호의 표정을 보더니 약간 못 참겠다는 얼굴이 되었다. 그를 끌어당겨 포옹했다. 그리고는 새삼스럽지만, 한숨을 섞어서 말했다.

“너 진짜…. 착한 거 같아.”

“어?”

“살면서 너같이 착한 애 한 번도 못 봤어.”

“갑자기….”

황경호는 그의 말에 귀까지 핫핫하게 달아올랐다. 이런 칭찬은 처음 들었다.

“너무 착해서 가끔 가정교육 잘못 받은 거 같아. 챙길 건 좀 챙겨. 싫은 거 참지 마, 좀….”

“…….”

내가 착하다고?

어렸을 땐 부모님한테서 이기적이라는 말을 많이 들었다. 그게 싫어서 부모의 마음에 들도록 행동하려고 했지만, 많이 노력을 해도 꼭 한 번씩은 들었다. 그런 게 언제나 밖에서 처신을 조심해서 하는 이유 중 하나가 되었다.

“…이기적인 게 아니라?”

황경호가 물었다. 강동현이 황경호의 머리카락에 얼굴을 묻고 냄새를 맡으며 되물었다.

“뭐가….”

“넌… 나 두 달이나 살게 해줬는데 난 너 계속 나가라고만 하고….”

“그게 무슨 상관이야? 내가 억지 써서 내 집에서 살게 하고 내가 억지 써서 여기도 들어온 건데. 내가 잘못했지.”

“….그런가? 그렇네…..”

“넌 내가 뭘 해주면 그걸 꼭 갚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거 같다? 그것도 똑같이… 아니, 더 손해 보게…..”

강동현이 문득 몸을 떼고 그를 내려다보았다. 황경호는 말문이 막혔다. 강동현이 완전 짜증 나고 답답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내가, 너, 좋아하고. 그래서 내가, 너, 지금 꼬시는 거고….”

“알았어. 알았어….”

황경호는 얼굴이 확 붉어졌다. 책상 위에 있는 봉투를 가리키며 강동현이 말을 이었다.

“이것도 니 거, 나도 니 거.”

“알았어. 알았다니까.”

“진짜 아는 거 맞아?”

강동현이 볼멘소리를 하며 황경호의 얼굴을 계속 쳐다보았다.

“모르는 거 같아.”

“…….”

강동현은 어쩐지 또 사람을 막 끌어당기는 눈빛으로 황경호를 보면서 말했다.

“나 너 정말 좋아해. 그건 아는 거 맞지?”

“…….”

“…도대체 왜 못 믿는데. 내가 이렇게까지 하는데….”

예전 일이 있다 하더라도, 아무리 미친놈이라도 정말 이렇게까지 하진 못한단 말이다. 그냥 물질적인 것만 뜻하는 게 아니었다. 강동현은 정말 이 몇 달 동안 최선을 다했다. 특히 근 몇 주는 살아생전 한 사람한테 이렇게 마음을 다해 본 적이 없을 정도였다.

“아니…. 좋아한다는 말은 믿는데…..”

정말? 황경호는 스스로에게 되물었다. 강동현이 덧붙였다.

“‘진짜’ 좋아한다고. 나 평생 너 책임지고 싶다니까? 알아들었어?”

“…….”

“왜… 뭐가 거슬리는데? 응? 고칠게. 내가 설명할게. 말해줘. 제발. 응?”

황경호가 시선을 중간에 피하니 따라갔다가 완전 얼굴을 가까이하고 그의 얼굴을 살폈다.

“말해. 말해줘.”

황경호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냥…. 왜 좋다는 건지 모르겠어서….”

“응? 그거? 귀엽고 할 때도 귀엽고 잘 느끼고 놀리면 또 귀엽고 화내는 것도 귀엽고 화내서 귀엽고 얼굴도 귀엽고 몸도 귀엽고….”

“놀리지 마!”

황경호가 화가 난 얼굴로 강동현의 어깨를 퍽 쳤다. 강동현이 씨익 웃으면서 그를 끌어안았다.

“글쎄…. 그냥 좋은데, 이제…. 처음에는 니 얼굴이 좋더라고. 맨날 영업용 미소만 짓다가 나한테만 다른 표정 보여주면… 그게 싫은 표정이라도 막 이상하게 가슴 뛰고… 끌리고… 다른 표정 보고 싶어서 괴롭히고….”

얼굴 때문이라고? 황경호는 자기 얼굴을 잠깐 만졌다. 고작 그것 때문에 그때 사람을 그렇게 못살게 군 것인가.

“나 니 손 엄청 좋아한다. 완전 부드러워.”

“…….”

“피부도 좋아. 부드러워. 보송보송하고… 촉촉해지면 또 잘 붙고….”

조금 뒤에야 그가 야한 얘기를 했다는 걸 깨달았다. 얼굴이 확 붉어졌다.

“이렇게 안는 느낌도 너무 좋고 니 혀도 좋아. 뭔가 까끌한데 맛있고….”

“하지 마….”

“잘 느끼는 거 완전 최고. 두 번 최고다. 너도 나랑 하면 진짜 미칠 것 같지 않냐? 나도… 나 너랑 하다가 언젠가 죽지 싶다….”

또 때렸다. 이 새끼가 듣자 듣자 하니까 결국엔 죄다 몸이랑 관련된 거 아닌가. 황경호는 살짝 기분이 상하려는 차였다. 강동현이 부드러운 어조로 말을 이었다.

“근데… 너 진짜 나한테 계속 선 그었잖아. 내가 그렇게 괴롭히고 너 나 싫어해도 내가 조그만 거 뭐 해주면, 진짜 별것도 아닌데 고맙다, 감사하다… 나 그거 처음엔 니가 빈정거리는 건가 싶었는데….”

물론 그런 것도 좀 있었지만… 강동현이 말했다.

“근데 너 다 그러는 거야. 나 말고도 다. 예의 바르고… 그 아픈 애도 마음 다해서 돌보고… 나 같은 건 신경도 안 쓰고. 죽고 싶어도 아는 사람들 걱정할까 봐 절대 말 안 하고.”

“아니… 그건…. 그런 거 아냐.”

황경호가 부정했다.

“그냥 인사말 많이 하는 건 안 하면 귀찮아져서 그런 거고. 초록이는… 내가 더 도움 받아서.. 괜히 내가 위안받고 싶어서 그런 거고. 죽고 싶은 거 얘기 안 한 건 내가 부끄러워서…….”

강동현이 웃으면서 그의 얼굴을 들고 눈을 마주쳤다.

“얘 봐라… 그런 게 착하다는 거야. 너 그냥 몸에 베인 거잖아… 난 그런 거 누가 돈 주고 시켜도 못 해. 안 해.”

“…….”

“너랑 나랑 그런 거 너무 달라서 볼 때마다 신기해. 그리고 진짜 좋아.”

서로가 서로에게 놀라는 포인트가 어쩐지 비슷한 거 같다…. 황경호는 그의 말도 못 할 실행력이나 강한 자기 확신 같은 건 몇 번을 봐도 이해가 되지 않는데, 부러웠었다.

황경호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강동현이 씨익 웃었다. 세상 제일 이쁘다는 그 미소로 말이다.

“키스할까?”

황경호는 인상을 구겼다. 그의 이런 면은 앞으로도 절대 못 당할 것 같다. 그리고 누가 먼저랄 거 없이 서로를 끌어안았다. 입을 맞추었다.

*

일요일이라서, 아니 보통 일요일도 일찍 일어났지만, 오늘은 늦잠을 자고 있었다. 해가 중천에 뜨니 정신은 반쯤 들었는데 눈을 뜰 수가 없었다. 노곤하고 피곤하고 그랬다.

쾅쾅쾅.

황경호가 깜짝 놀라서 벌떡 일어났다. 강동현이 대자로 침대에 누워있고 그는 그 위에 엎드려서 자고 있었다. 이불이 어디 걸렸는지 몸을 다 일으키지도 못했다.

쾅쾅.

“아… 뭐야….”

강동현이 짜증을 냈다. 황경호는 힘을 주어 그의 몸 밑에서 이불을 빼내 겨우 일어났다. 알몸이라서 얼른 옷을 입고 현관으로 갔다.

“누구세요?”

“나 집주인인데. 잠깐만.”

설마… 황경호는 침을 삼키고 문을 열었다. 황경호는 이미 발끝부터 이마 끝까지 빨개진 상태였다. 집주인은 무형의 압박감을 풍기며 문을 더 열었다.

“이거 봐. 이 방 맞네.”

황경호가 기겁을 하며 뒤를 돌아보았다. 강동현도 깨긴 깼는지 알아서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하지만 알몸인 건 훤히 보인다.

“아니… 시끄럽게 하지 말고 모텔을 가라고. 누가 뭐라고 해. 어? 전화가 몇 통이나 왔는지 알아? 여기 고시생들 많다고. 걔들이 이런 고통까지 굳이 겪어야 되겠어?”

“죄송…합니다….”

황경호는 울 것 같은 얼굴로 작게 말했다. 집주인은 못마땅하고 어이가 없다는 얼굴로 황경호를 한참 내려다보더니 말했다.

“상식 있게 살아, 상식 있게. 다음엔 진짜 안 봐준다.”

“네…….”

그리고 나서야 문을 닫았다. 황경호는 현관에다가 이마를 박았다. 죽고 싶다. 죽고 싶다. 죽고 싶다….

“아니, 저 영감탱이는 언제 봤다고 반말이야??”

강동현이 완전 짜증 난다는 목소리로 말했다. 밖에 들리라는 목소리 크기다.

“아침부터 사람 열 받게 하네. 뭐 얼마나 했다고…. 아, 씨. 얼굴만 안 팔려도.”

“아니… 여기 진짜 벽이 얇아서 그래….”

황경호가 완전 앓는 소리를 내며 그렇게 말했다.

“뭔 상관이야. 애인 없는 것들이나 남들 하는 거 질투하는 거야. 병신들.”

“들린다니까!”

황경호가 기겁을 해서 그를 말렸다. 강동현은 기지개를 쭉 펴더니 황경호를 보았다. 그리곤 갑자기 히죽 웃었다.

“이제 이사 가고 싶어? 어떡하냐. 난 여기 완전 좋은데. 둘이 딱 붙어 있고.”

“…….”

“나 돈도 없고.”

“진짜 확…!”

황경호가 폭발해서 그를 마구 때렸다.

“아야! 아파! 야…! 와, 이거 지금 진심으로 치네. 너 말이야. 어젯밤에 그렇게 나 좋아 죽더니 아침 되니까 입 싹 닦는 거 봐라. 이 얌체. 악! 아프다고!”

“진짜! 싫어! 싫어! 이 고자! 임포! 지루! 불능! 개새끼!”

그렇게 싸우고 있으니 갑자기 옆집에서 쿵쿵쿵 벽을 쳤다. 황경호는 강동현에게 두 손목을 잡힌 채 전신이 완전 빨개져서는 울먹거렸다.

“나 이런 거 제일 싫어… 부끄럽단 말이야….”

“알았어. 미안. 미안.”

강동현이 그를 끌어안았다.

“귀엽기는.”

황경호는 열이 받아 그의 옆구리를 주먹으로 퍽 쳤다. 아프다.

“이러다 나 들키면 어쩌냐.”

황경호가 움찔했다.

“어떡해… 일단 옷 입고….”

“아니…오늘 말고. 나 계속 너 보러 여기 올 건데 어쩔 거야.”

“…….”

“오지 말라고 할 거야? 그럼 니가 나 보러 와줄 거야?”

강동현은 그를 꽉 끌어안고 고개를 숙여 그의 귓가에 입을 맞추었다.

“그리고 우리 이제 앞으로 또 할 거잖아… 나 이제 집도 없는데 우리 둘이 손잡고 호텔 갈까? 근데 솔직히 호텔이 여기보다 더 들킬 것 같다.”

강동현이 말했다.

“나 집 좀 사줘. 응? 이렇게까지 애원하는데 나 가엾지도 않냐? 나 이렇게 잘생겼는데? 나 이렇게 멋있는데?”

“재수 없어….”

황경호가 들으라는 듯 중얼거렸다. 강동현이 활짝 웃으면서 그의 얼굴을 바로 보았다.

“지금 같이 산다고 한 거지?”

너무 어이가 없어서 그냥, 웃음이 나왔다.

<고쳐줄까? 2부> 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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