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5화 (25/47)

*

‘섹스…… .’

몇십 분 전까지 그런 섹스를 하고 왔는데 일에 온전히 집중이 될 리가 없었다. 몸이 욱신거렸다. 단지 아프기 때문만은 아니다.

도대체 섹스가 뭐길래 이렇게 사람을 정신 못 차리게 하는 것일까.

처음에 강동현이 황경호한테 집적거릴 때도 고작 그거 하겠다고 그 미친 짓을 하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병원에 오는 환자들도 마찬가지였다. 이해도 되지 않고 좀 더럽게 느껴지기도 했다.

근데 제대로 하니까 너무 기분이 좋았다. 상상도 못 했다. 다른 사람들도 지금까지 이런 걸 즐기면서 살아온 걸까. 지금도 부끄럽고 또 창피해서 수시로 얼굴이 붉어졌지만, 그와의 섹스에 완전히 빠져들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순 없었다.

‘원래 이런 걸까… 막 죽을 거 같고….’

다른 사람들도 이런 걸까. 황경호는 깊은 한숨을 쉬며 그렇게 생각했다. 정기연이 내부 카운터로 돌아와 앉으며 황경호한테 말을 걸었다.

“뭐야. 야한 생각해?”

“응?! 아니…!”

황경호가 깜짝 놀라서 황급히 대꾸했다. 정기연이 놀렸다.

“아니긴. 딱 봐도 야한 생각 중이었는데.”

“…….”

원래 표정을 잘 숨기는 축에 속했던 황경호였다. 도대체 어떤 얼굴을 하고 있었을지 감이 안 와서 자신의 얼굴을 만져보았다. 정기연은 다음 자기 담당 예약 환자를 확인하며 지나가듯 말했다.

“요새 연애라도 해?”

“응?!”

황경호가 깜짝 놀라서 그녀를 돌아보았다. 정기연이 쯧쯧 혀를 찼다.

“이래서 연애도 제대로 안 해보고 사는 것들은 꼭 티를 내요. 몇 주 전부터 사람 분위기가 바뀌어서 촉이 딱 왔는데.”

“아, 아니야….”

“오빠 원래는 엄청 어린애 같은데 요새 문득문득 보면 어른스러워진 것 같고… 맞지? 맞지? 다들 눈치챘어. 오빠 대학 이후로 여자 손도 안 잡아 봤잖아. 그치?”

“아, 아냐….”

대학 때도 제대로 손 안 잡아봤다. 개인적인 일을 이렇게 꼬치꼬치 캐물어지는 것은 진짜 손에 꼽을 정도였다. 강동현이 아니고서야, 황경호의 처신에 아무도 그런 것을 황경호에게 강요하려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근데 그렇게 티가 날 정도였다니.

“오빠 얼굴 빨개지는 거 봐. 어머, 이 오빠 진짜 웃긴다. 좋아 죽나 봐, 완전?”

“아니….”

얼굴이 화끈화끈한 게 스스로도 느껴졌다. 이럴 때 뭐라고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사람들 간의 표면적 관계에 능숙하다고 스스로도 생각해왔는데. 당혹스럽고 부끄러워서 그냥 얼굴만 빨개졌다.

“진짜 이 오빠 좀 봐. 어떤 앤데, 응? 어떤 사람? 연상? 연하?”

황경호는 엄청 머뭇거리다가 그냥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모기만 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동… 갑….”

“하하. 진짜 이 오빠 엄청 귀엽네. 예뻐? 귀여워? 오빠는 어떤 타입 만날지 상상이 안 되네.”

“…예뻐….”

황경호는 창피해서 쥐구멍이라도 파고 들어가고 싶었다. 말을 안 하고 싶은데 자꾸 대답을 했다. 너무 부끄러워서 죽을 것만 같았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폭주하는 쪽팔림을 달래기 위해 스스로를 계속 타일렀다.

‘아… 오버하지 마. 사귀는 것도 아니고 섹스만 하는 건데….’

좋아한다고 하긴 했지만… 그래도 하고 싶은 마음이 더 큰 것 같고. 어차피 섹스밖에 안 하고… 좋아한다는 말도 그때로 끝이었고. 하고 싶어서 하는 거라고 대놓고 말도 했고….

황경호는 병원의 책자로 얼굴을 부치면서 겨우 평범하게 대답했다.

“사귀는 건 아니고… 그냥… 만나는… 그런 거 같은데.”

“그게 어디야. 그렇게 마음에 드는 사람 일단 있다는 것만으로도 좋은 거지. 하, 내 맘에 드는 사람 찾기가 얼마나 힘든데. 오빠는 좋겠다.”

정기연이 그렇게 말했다. 황경호는 기분이 복잡해졌다.

황경호는 그가 정말 싫을 때도 그에게서 항상 어떤 매력이나 끌림을 느꼈었다. 하긴, 그에게서 그런 걸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이 더 적을 것이다. 그는 잘생기고 훤칠한 남자였고 돈도 많고 능력도 명성도 있는 남자였다. 그가 황경호에게 어떻게 하느냐를 떠나서 그 자체가 대단한 남자라는 건 항상 인정하고 있었다.

‘난 놈이지….’

이렇게까지 되었으니 이제 억지로 당한 척 굴 수도, 싫은 걸 억지로 한 거라고 말할 수도 없게 되었다. 문득문득 결국 그가 하고 싶은 마음만 큰 것 같다고 느껴질 때도 결국 허락하고 마니까 말이다.

그래도 하기 싫다고 단호하게 하면 안 하고 황경호가 기분이 나빠 보이면 신경도 쓰고 장난도 치고 자연스럽게 대화도 하지만, 그래도 역시 연인이라고 할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그럼… 섹….’

너무 적절한 용어가 갑자기 떠올라서 얼굴이 좀 빨개졌다. 다시 책자로 얼굴을 부치고 조용히 자재나 보러 밑층으로 내려갔다. 일용품들의 개수를 세고 주문을 해야 할 걸 정리하고 몇 개는 들고 위로 올라왔다. 상담 환자들도 꽉꽉 차 있어서 이제 집중해서 일을 했다.

그리고 일을 다 하고 났을 때쯤엔 한숨이 푹 나왔다. 몸이 아직도 좀 욱신거렸다. 슬슬 창피함이 올라왔다.

섹스라는 건 사실 커뮤니케이션이다. 두 사람만의 아주 긴밀하고 비밀스러운 대화다. 서로를 수용하고 느끼고 이해하고 위하는.

지금까지 두 사람 사이의 역사를 생각해보자면 사실 이런 관계가 된 것도 기적적이고… 솔직히 황경호의 입장에서는 그렇게나 질색하고 싫어하던 짓을 바로 질색하고 싫어하던 바로 그 인간과 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래서일까. 조금만 생각이란 걸 하면 금방금방 창피해졌다. 이유도 없이 들뜬 마음이 가라앉으면서 말이다.

섹스를 할 때의 그는 짓궂고 황경호가 싫다는 짓만 골라서 하지만, 끝나고 나서의 그는 다정했다. 부드럽게 끌어안고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그게 정말 기분이 좋았다.

‘습관 같은 거 같긴 하던데…. 누구랑 해도 그렇게 하겠지… 괴롭히는 건 나만 하더라도… 예전에 할 땐 화장실 같은 데서나 했고….’

“…하아.”

한숨이 나왔다. 역시 좀 창피하다. 스스로 생각해도 역시 좀 쉬운 편 같기도 했다. 그렇게 취급해도 좋다고 대주고 있고….

‘…아, 또 이런다. 또. 그냥 나도 기분 좋게 했으면 이제 됐지. 뭘 바라냐.’

아, 됐어. 됐다. 생각하지 말자. 평상심… 돌아가는 길에 강동현의 카드로 같은 색깔의 1인용 소파를 하나 샀다. 근데 어차피 며칠 뒤면 황경호도 나갈 건데 안 사도 되는 것 아닌가 싶었다. 어차피 혼자 사는 집이고 손님이 오는 집도 아니고….

‘뭐… 알아서 하겠지….’

황경호는 그렇게 생각하며 약속한 부동산 중개업자를 만나 이곳저곳 방을 보러 다니기 시작했다. 황경호가 원하는 가격대의 원룸은 어차피 강남에선 찾을 수 없었다. 황경호는 낙성대, 서울대입구, 신림 근처를 이틀 내내 돌아다녔다. 강동현의 집에서 살면서 눈이 엄청 높아졌는지 죄다 마음에 안 들었다. 그래서 슬쩍 월세가 높은 방들도 둘러보기 시작했다. 원래 월세의 2배가 넘어가니 그럭저럭 꾸미고 살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좌절했다. 절대 감당 못 할 가격이었다.

‘그냥 제일 싼 데로 가야지….’

황경호는 그렇게 결심하고 일당 내일 연락을 주겠다고 하고 끈덕진 부동산 중개인과 헤어져 강동현의 집으로 향했다. 항상 좋아했던 이 집의 풍경도 오늘은 한숨이 나왔다. 진짜 그림의 떡이다….

그리고 드레스룸 구석에 잘 개어 놓은 커다란 가방을 꺼내서 미리 짐을 좀 챙기기 시작했다. 짐을 맡겨놓는 업체에 맡겨둔 박스도 3개 정도 있었다. 여기는 어차피 거의 몸만 들어온 거라 챙길 것도 별로 없었다. 옷이나 자질구레한 소지품 정도다.

꼭꼭 잘 개고 잘 넣어서 한 가방에 모든 짐을 다 챙기고 팔을 걷어붙이고 청소를 하기 시작했다. 역시 신세 진 게 커서 이런 거라도 안 하면 찝찝했다. 집 안에서 세제 냄새가 확 날 정도로 번쩍번쩍하게 쓸고 닦았다. 치우고 나니 또 보람이 있는 집이다. 문을 열어 환기를 시키고 창가에 하나 있는 1인용 소파에 앉아서 가만히 해가 지는 걸 바라보았다. 그리고 읽던 책을 마저 읽다가 슬슬 잘까 싶을 때 강동현이 들어왔다.

“무슨 냄새야….”

강동현은 엄청 피곤한지 미간을 찌푸린 채 안으로 들어왔다.

“아직도 냄새나? 환기시켰는데… 청소 좀 했어.”

“적당히 해. 너무 깔끔 떠는 것도 병이다, 너.”

강동현은 그렇게 말하면서 차키와 휴대폰을 카우치 위에 던지고 곧장 침실로 갔다. 옷을 훌렁훌렁 벗어서 던져놓고 욕실로 들어갔다. 황경호는 습관적으로 물건들을 제자리에 두곤 가만히 창가의 1인용 소파에 앉아 바깥 야경을 보았다.

그리고 멍하니 있다가 문득 창에 강동현의 모습이 비치는 걸 발견하고 그걸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가까이 다가오자 고개를 돌렸다. 그가 손을 뻗어 황경호의 머리를 만지려고 하자 움찔하면서 그의 손을 미리 잡아서 막았다.

“왜?”

그리고 그렇게 물어보니 강동현이 테이블에 엉덩이를 걸치며 대꾸했다.

“그냥.”

그리고 강동현이 아무 말 없이 기어코 귓불을 만지작거리자 황경호가 어깨를 움츠리며 그 손을 피했다.

“만지지 마.”

“왜?”

“…그냥.”

강동현이 물끄러미 황경호의 이마를 내려다보았다.

“너… 설마 저거 짐 싸놓은 거야?”

강동현이 물었다.

“응… 오늘 21일이니까.”

“진짜 나가려고? 왜?”

강동현이 좀 신경질적인 목소리로 물었다.

“내가 잘못한 거 있으면 말로 하라고 했잖아. 또 왜 그러는데?”

“…….”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 황경호는 그의 밑도 끝도 없는 추궁에 마음이 좀 상했지만, 굳이 따지지 않기로 했다.

“딱히 니가 잘못해서 그런 게 아니라… 언제까지 너한테 얹혀살 수도 없는 거고. 원래 나가기로 했으니까….”

“그냥 살라고 했잖아. 원하면 준다니까. 그럼 내가 얹혀사는 걸로 해.”

“…….”

역시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황경호는 그와 싸우고 싶지 않았다. 이래저래 말을 한참 고르다가 말했다.

“굳이 안 그래도 돼. 내가 이 집을 왜 받아. 부담스러워. 그동안 고마웠다. 덕분에 잘 있다 가.”

그러자 강동현이 인상을 확 찌푸렸다. 그는 화가 난 어조로 말했다.

“이틀 전까지만 해도 밤낮없이 나랑 해놓고 갑자기 왜 또 빼는 건데.”

“갑자기….!”

황경호의 얼굴이 확 붉어지며 반박하려고 하다가 그냥 꾹 참았다. 싸우려고 들수록 그가 절대 안 지려고 하는 걸 잘 알았다. 황경호는 겨우 목소리를 낮춰서 말을 이었다.

“…왜 그러는데.”

“너야말로 왜 이러는데?”

강동현이 대번에 받아쳤다.

“…….”

“…….”

강동현이 한숨을 푹 쉬었다.

“내가 항상 말하잖아… 불만 있으면 그냥 말로 하라고. 내가 너만 쳐다보고 사는 사람도 아니고. 니가 무슨 생각하는지 일일이 어떻게 눈치채?”

“…너야말로 왜 이렇게 사람 말을 안 들어? 니가 뭐 잘못한 것도 아니고, 불만 있는 것도 아니라고.”

황경호도 결국엔 그를 노려보았다.

“그럼 굳이 왜 나가려는 건데?”

“왜 내가 나가면 안 되는데?”

강동현이 울컥한 얼굴이었으나 바로 대꾸는 하지 못했다.

“…뭐가 불편한데? 뭐가 또 신경에 거슬리는 건데?”

“아무것도 안 불편하고 신경에 거슬리는 것도 없어.”

“아, 그럼 왜 나가는 거냐고.”

“나도 혼자 사는 게 편하니까 나가겠다는데 왜 이러는데.”

“방 몇 개 더 있는 큰 집으로 이사 갈까? 니가 원하는 대로 고르고 니가 원하는 대로 꾸며.”

“너 또….!”

그의 말에 화가 나서 확 소리를 치려다가 겨우 참았다. 소리 지르면 더 말 안 통했다. 얼굴이 새빨개지는 게 느껴졌다. 황경호는 손으로 얼굴에 바람을 부치며 목소리를 잠재웠다.

“…내가 그냥 남한테 빚지고 사는 성격이 못되고… 그래서 그런 거니까. 이제 그만 하자.”

하지만 강동현은 상대가 한발 물러서 준다고 자기도 한 발 빼주는 그런 성격도 아니었다.

“그런 거 다 됐으니까 그냥 나가지 마.”

“…….”

“안 나갈 거지?”

“….나가면 어쩔 건데.”

황경호는 점점 화가 나는 걸 느꼈다. 강동현의 이런 면이 너무 싫었다. 삐꺽하면 그를 무시하고 자기 마음대로만 하려고 했다. 비위를 맞춰주는 것도 그때뿐이고….

‘아니. 결국 하고 싶어서 잠깐 맞춰주는 것뿐이지.’

편하게 하고 싶으니까. 황경호는 온몸이 확 빨개졌다. 창피하고 화가 났다.

“니가 뭐라고 하든 나갈 거야.”

황경호는 그렇게 말하고 주먹을 꽉 쥐고 손톱으로 손바닥을 찔렀다. 창피함을 견디는 데 도움이 되었다.

‘정말 나 바보구나.’

알면서도 계속… 창피하다. 잘못된 선택만 자꾸 반복하는 자신이.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조용히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달래기 위하여 노력했다. 괜찮아.

“…….”

“…….”

그렇게 둘 사이로 침묵이 흘렀다.

점점 갈수록 이대로 있는 게 정말 부끄러워서 죽을 것만 같았다. 창피하다. 같이 즐겼으면 됐다고 계속 스스로를 설득해보아도 너무 부끄러웠다. 온갖 창피한 꼴을 다 보였다. 그런 거 아무한테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차라리 섹스 같은 거 평생 안 해도 괜찮았다.

손대면 빨간 물이라도 나올 것처럼 빨개져서 창으로 고개를 돌리고 있는 황경호였다. 그를 가만히 보고 있던 강동현은 한숨을 쉬었다. 그래… 또 이대로면 대화가 안 될 것이다. 강동현은 다그치는 듯한 태도를 버리고 조용히 물었다.

“나가지 마… 진짜로. 왜 그렇게 나가려는 건데….”

“…….”

왜 이렇게 나가려고 하냐고? 또 혼자서만 참는 척 담담하게 하는 그의 질문에 황경호는 울컥했지만 마치 강동현이 왜 그가 나가면 안 되느냐의 질문에 대답을 하지 못한 것처럼 황경호의 안에서도 선뜻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황경호는 한참을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모르겠어… 원래도 나가기로 하고 들어온 거였고… 그냥 나가고 싶어.”

강동현이 태도를 누그러뜨려 주었으니 황경호도 날을 세우고 싶진 않았다. 그와 싸우는 건 세상에서 제일 피곤하고 답답한 짓이었다.

“…그럼 지금은 뭐가 그렇게 화가 나는데?”

“아….”

황경호는 그가 자신의 벌건 얼굴을 보고 그렇게 물어본 것을 알고 얼굴이 더 화끈거리는 것을 느꼈다. 원래는 표정이나 얼굴색을 정말 잘 조절했는데… 꼭 강동현과 관련된 일이면 이렇다. 세상에서 제일 표정관리를 하고 싶은 놈 앞인데 말이다.

“너 때문에 화난 거 아니야… 그냥 좀… 내가 한심해서.”

황경호는 한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좀 가렸다.

“뭐가 한심한데?”

“그냥 이것저것….”

“그게 뭐냐고.”

“…….”

그가 처음 술을 먹고 열정적으로 좋아한다고 말했을 때 느낀 감정은 ‘기쁨’ 같은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안도’에 가까웠던 것 같다. 황경호가 잘 휩쓸리고 손쉽고 만만해서 계속 그를 괴롭힌 게 아니라, 차라리 좋아서 그랬다고 하면… 마음이 놓이지 않는가.

내가 하찮아 보여서가 아니라 좋아해서

달콤한 말이었다. 그가 한 건 정말로 좋아하는 사람에게라면 더 몹쓸 짓이었지만, 그래도 그때는 그렇게 느꼈던 것 같다.

그리고 그가 그 일을 전부 잊어버려서, 황경호도 실수했다는 생각에 흔들렸던 마음까지 전부 조용히 정리를 하려는데 그가 통보하듯이 좋아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추궁하고 다그치고… 그땐 사람을 또 쉽게 보는 것만 같아서 화가 났다. 그는 항상 그래왔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그 뒤 끈질기게 황경호를 설득하며 그에게 잘해주려고 하고 확실히 태도를 달리하는 것을 보고 조금은 믿었다.

그런데 그것도 결국 작은 안도였을 뿐인 것 같다. 제대로 설명할 수가 없었다. 왜 안도인지. 안도일 뿐인지.

이 집에 와서 강동현은 잘해주었다. 가끔씩 이유 없이 우울해하는 황경호를 신경 써주기도 하고 가끔 장난도 치고 가끔 얘기도 평범하게 나누고… 예전에 비하자면 정말 장족의 발전이었다. 이젠 황경호도 그와 하는 것을 기분 좋게 느끼고 있고. 그러니까 그의 입장에서는 뭐가 문제냐는 말이 나오는 걸까?

황경호가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집 나가도 어차피 할 거면서… 별문제 없는데 왜….”

“뭐?”

강동현이 되물었다. 황경호는 잠깐 생각을 정리하고 강동현 쪽을 보았다. 그는 이제 얼굴색도 많이 돌아왔고, 웃는 얼굴은 당연히 아니었지만 그냥 좀 이상하다는 기색으로 강동현을 보았다.

“너 내가 나가는 거 왜 이렇게 싫어해? 어차피 내가 나가도 하고 싶을 땐 할 거잖아.”

“…….”

“어차피 집에 잘 들어오는 것도 아니면서….”

“…….”

“니가 좀 불편하다고 반대하는 거면… 그건 좀… 이기적이잖아… 그냥…. 나도 혼자 있고 싶을 때도 있으니까 좀…… 봐줘….”

황경호는 말미를 어떻게 맺어야 할지 잠깐 고민하다가 그냥 작게 그렇게 말했다. 강동현은 어디서부터 어디를 어떻게 말을 해야 할지 감이 오질 않았다. 참으려고 했는데 그냥 열이 확 받았다.

“…너 또 내가 하고 싶어서만 이런다고 생각하는 거야?”

“어? 아니….”

황경호는 시선을 돌렸다. 강동현은 더 열이 뻗쳤다. 힘을 주어 말했다.

“내가 좋아한다고 했잖아.”

“…….”

왜 저 말에 자꾸 비참한 기분이 드는 걸까… 황경호는 가만히 마음을 달래려고 노력했다. 자꾸 소리 지르고 정신 놓고 미친놈처럼 굴고 싶지 않았다. 원래 황경호는 그러는 사람이 절대 아니었다.

“어….”

황경호의 미약한 반응에 강동현은 더 화가 난 것 같았다. 그리고 그럴 때의 그는 하나도 거칠 것이 없는 사람이었다.

“니가 해달라는 거 다 해주고, 너 성가시게 굴고 짜증 나도 다 참고 그렇게 다 맞춰줬는데 도대체 내가 여기서 더 어떻게 해야 하는데?”

황경호는 다시 온몸이 확 새빨개졌다. 읏… 황경호는 한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창피했다. 그의 말이 맞고 틀리고를 다 떠나서…. .

‘아니… 그런 것보다도….’

역시… 황경호는 가까스로 변명하듯 대꾸했다.

“그래서 내가… 애초에 여기… 들어오기 싫다고 했잖아….”

황경호는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디 가.”

강동현이 황경호의 손목을 꽉 잡았다. 황경호는 한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로 애원하듯 작게 말했다.

“잠깐… 잠깐만… 혼자 있고 싶어….”

“삐꺽하면 말하다 말고 도망가지 마. 얘기 안 끝났잖아.”

얼굴을 가리고 있는 손도 억지로 얼굴에서 떼어내자 새빨개져서는, 어쩔 줄 모르는 표정에… 궁지에 몰린 것 같은 얼굴이었다. 황경호는 강동현의 얼굴을 보았다가 시선을 돌렸다. 손을 비틀어 빼냈다.

“…알았어. 안 나갈게. 그러니까 잠깐만… 바람 좀 쐬고 올게.”

그렇게 말하곤 황경호는 도망치듯이 빠른 걸음으로 밖으로 나갔다.

*

그가 없는 곳으로 나오니 숨통이 트였다. 그리고 어쩐지 허탈한 게… 황경호는 언덕을 따라 빠른 걸음으로 올라갔다. 어두컴컴하고 넓은 거리에 커다란 건물들만 가끔 불빛을 내고 있을 뿐 차도 그다지 다니지 않는 거리였다. 빠른 걸음으로 걸어서 그런지 다른 이유 때문인지 가슴이 엄청 뛰고 있었다. 별로 덥지도 않은 것 같은데 땀이 배어나왔다.

한참을 걷고 나서야 문득 한숨이 나왔다.

‘진짜 한심하네….’

황경호는 조금 걸음을 천천히 하여 걸으며 요 몇 달을 되돌아보았다.

‘도대체 여기서 뭘 하고 있었던 걸까…. 뭘 바라고 여기까지 따라와서 같이 살고… 이렇게 될 거 뻔히 눈에 보이는 거였는데… 진짜 나 이렇게 멍청했나? 원래는 잘 살았던 거 같은데… 적당히 다 잘 챙기고 인간관계도 원만하고….’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가 없었다.

‘그러게… 왜 굳이 나간다고 그랬을까… 걔가 싫어하는 거 알고 있었는데… 근데 걔가 싫어하면 난 내 집도 마음대로 못 가지는 거야? 왜?’

강동현이 줄 수 있는 게 더 값어치가 있는 것이니까 황경호의 힘으로 구하는 건 의미가 없는 것이라는 것일까? 당연히 그러진 않을 것이다. 황경호는 원래 누군가에게 빚을 지는 걸 정말 싫어했다. 인간관계에 채무가 끼어드는 것만큼 부담스럽고 싫은 게 없었다. 그게 돈이든 뭐든. 강동현의 집에 살다 보니 눈이 높아져서 구한 집들이 다들 썩 성에 안 차긴 했지만 그래도 당연히 혼자서 알아서 잘 살 수 있었다. 남의 집에 얹혀사는 것보다 내 돈 주고 내가 알아서 사는 게 훨씬 마음이 편한 거야 당연한 것 아닌가.

이런 당연한 걸 그가 왜 이해를 못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이렇게 와서 생각해보면 당연한데 그가 하는 추궁 앞에 서면 이쪽이 잘못 판단한 것 같다는 착각마저 들 정도였다.

그리고 문득 그의 마지막 말이 생각났다. 그리곤 씁쓸하게 떠올렸다.

‘좋아한다…고….’

황경호는 아마 평생 그 말의 진위를 알 수 없을 것만 같았다. 그냥 하고 싶고 황경호가 멍청하게 저 말에 넘어가니 그런 말을 한 것이라 생각하면서도… 황경호는 길을 따라 죽 걸었다. 또 문득 생각이 떠오른다.

‘…근데 그럼 나 도대체 저 집에 얼마나 더 있어야 한다는 거야?’

언제까지? 그 질문이 떠오르자마자 곧바로 ‘걔가 질릴 때까지’라는 답변도 같이 떠올랐다. 그리고는 솔직히… 마음이 좀 상했다. 결국 전에 하던 짓이나 지금 하고 있는 짓이나 별반 다를 게 없었다. 감정이든 몸이든… 그가 질릴 때까지 얌전히 대주는 게 황경호의 역할이었다.

‘그러면 좋아한다고나 하지 말던가. 그냥 대줄 때 마음대로 하지. 왜 굳이 사람을 이렇게까지 비… 아니야. 아니야. 생각하지 말자. 생각하지 말자. 생각하지 말자. 생각하지 말자. 됐어. 됐다… 진짜 뭘 바라냐… 어차피 저런 놈이라는 거 몰랐던 것도 아니고 매번 속는 사람이 병신인 거지. 그래. 그래… 그렇잖아.’

막막했다.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집을 나올 수도 없고 이런 상태로 얼굴은 계속 마주쳐야 하고… 차라리 오늘 전까지만 해도 사이가 나쁘지 않다고는 말할 수, 아니, 좋다고 말할 수 있는 상태였는데 또 이렇게 싸웠으니….

이러다가도 그가 원하면 결국 거부하다가 또 해야 하는 건가? 그렇게 생각했더니 덜컥 겁까지 났다. 그와 하지 않겠다고 굳게 마음을 먹고도 이미 몇 번이나 그와 하고 말았다. 황경호는 이번에도 또 그럴 것만 같아서 어쩐지 절망적이었다. 무력감이 느껴졌다.

‘왜? 왜? 이렇게 하기 싫은데 왜 또 해야 해?’

그러면 걔는 도대체 언제쯤 질릴까? 내일? 일주일 뒤? 한 달 뒤? 1년? 그가 원하는 대로 다 대줘야지 빨리 끝나는 걸까? 고분고분하게 말을 잘 들으면서?

황경호는 두 손을 모아 얼굴을 기댔다.

정말 싫었다.

너무너무 싫었다.

애초부터 여긴 죽어도 안 들어오는 건데. 병원이든 태형이 형 집이든 형세 집이든 그냥 버티는 건데. 쟤가 기억 못 할 때 아무 말도 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그냥 오지 말라고 했어야 했는데. 술 취했다고 내가 왜 신경을 썼을까. 애당초 술 마신 놈의 말을 믿는 게 병신이다. 그때 넘어가지 말았어야 했다. 그때 키스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그렇게 모든 걸 후회하면서 앞으로도 뒤로도 가지 못하고 서있었다.

빠앙-!

갑자기 크게 클락션이 울리면서 자동차의 라이트 불빛이 비쳐왔다. 황경호의 옆에 바로 급정거를 한 차에서 사람이 하나 내리더니 황경호의 쪽으로 걸어왔다.

“너 도대체 어디까지…!!”

강동현은 화가 난 얼굴이었다. 찾으러 다닌 모양이었다. 황경호가 채 피하기도 전에 그의 손목을 잡았다.

한강이라도 갔을까 봐 조마조마했다. 금방 쫓아 나왔는데도 찾을 수가 없어서 도는 줄 알았다. 강동현은 굳은 목소리로 말했다.

“일단 집에 가자.”

“…….”

“내일 나가도 되니까… 일단 집에 가자고.”

황경호는 힘으로 끌어당긴 게 아닌데도 그 무언의 압박감에 밀려 차에 올라탔다. 강동현은 운전석에 타고는 바로 차를 돌렸다. 그리고는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집까지 도착해서는 지하주차장에다 차를 대고 내렸다. 그리고 황경호가 내리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를 앞세우고 자신이 그 뒤를 따라서 엘리베이터에 탔다.

“…….”

“…….”

14층에 도착할 때까지 오로지 침묵뿐이었다. 강동현은 그저 시선을 내리고 생각에 잠겨 있는 황경호의 옆얼굴을 가만히 보고 있었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강동현은 한 여자랑 무려 7년이나 지지고 볶고 사귀어 본 경험이 있었다. 같이 살아본 적도 있었고 설레고 행복했던 적도, 싸웠던 적도, 권태기에 서먹했던 적도 있었다.

전 여자친구는 솔직하고 당당한 친구였다. 밝고 쾌활하고 구김이 없었다. 스스로가 원하는 것도 싫어하는 것도 확실히 알았고 그런 면이 시원시원해서 애초에 친구로 친해지게 된 것이었다. 함께 있으면 항상 즐겁고 재미있었다. 심지어 헤어지고 나서 만났을 때도 얼마나 편하게 잘 마무리를 지었던가.

강동현이 무심한 만큼 그녀도 웬만한 일에 무딘 구석이 있었다. 만약에 강동현에게 마음에 안 드는 점이 있으면 꼬치꼬치 가르치러 들었다. 그래서 싸운 적도 많았지만, 그녀는 똑똑하고 영리했기 때문에 강동현을 항상 이겨 먹었다. 그리고 그런 그녀가 강동현은 좋았다.

강동현이 그녀를 위해 무언가를 해주면 그녀는 기뻐했다. 그녀가 강동현에게 원하는 것이 있으면 솔직하게 말을 했다. 서로를 이해할 수 있어서 기뻤다.

그런 모든 것들이 지금 눈앞에 있는 애한테 적용하면 다 빌어먹을 정도로 오답이 되었다. 애초에 첫 시작이 잘못되었다는 걸 알아서 아무리 벌충하려고 해도, 심지어 그가 자신을 어떻게든 원하고 있다는 사실까지 알고 있어도 말이다. 강동현이 생각하는 대로 해도 안 되고 그가 말하는 대로 해줘도 안 된다.

이해가 되지 않았다.

결국 그도 강동현을 원하고 있으면서 왜 자꾸 선을 긋고 멀어지려고만 하는가.

마음에 안 드는 점이 있다면 얼마든지 고칠 텐데 왜 말하지 않을까.

뭐든지 해달라고 하면 해주는 걸 알면서도 왜 말하지 않을까.

도대체 강동현의 어떤 면이 그를 계속 이렇게 상처 입히는 것일까?

과거의 일의 연장일까, 아니면 싸움 중의 말투? 아니면 다른 것?

정말로 그가 하고 싶어서만 이러는 거라고 믿는 것일까?

도대체 왜? 내가 다른 어떤 사람한테 이런 적이 있었다고?

전부 다 캐묻고 싶었다. 근데 조금이라도 이런 대화를 하면 그는 금세 도망가고 싶어 하고 계속 상처를 받았다. 정말 말 한마디를 꺼내면 안 되는 건지,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속 시원하게 그의 생각을 듣고 싶은데 그는 모른다는 말만 해서 더 돌아버릴 것 같았다.

집에 들어와서 황경호는 조용히 욕실로 갔다. 분명히 먼저 씻었을 텐데 또 씻었다. 그게 강동현과 얼굴을 마주하기 싫어서인지 다른 것 때문인지 알 수가 없다.

‘좋아한다는 게 원래 이런 거였나?’

예전에 여자친구와 싸울 때도 이런 분위기였었나? 강동현의 기억엔 전혀 아니었다. 그리고 그땐 강동현도 답답하다고 이렇게 상대를 상처 입히는 말을 하지도 않았다.

항상 황경호를 대할 때면 화가 나고, 짜증이 나고, 후회가 되었다. 이렇게 비건설적이고 소모적인 인간관계는 처음이었다. 그런데 그 관계를 계속 이끌어 나가고자 하는 것이 결국 강동현이라는 것도 모순적이다.

황경호가 오랜 샤워를 하고 나올 때까지 강동현은 그냥 거실 카우치에 가만히 앉아 생각을 하고 있었다. 벌써 새벽 1시다. 황경호는 거실에 있는 그를 보고는 그냥 가만히 서있었다. 역시 남의 집은 불편했다. 금방 있을 곳이 없어졌다.

“그렇게 있지 말고 이리 와.”

강동현은 가만히 그를 바라보면서 말했다.

“이리 와줘.”

“…….”

황경호가 걸어와서 좀 멀찍이 앉았다.

“집은 구했어?”

“…응….”

전화하고 돈 넣고 계약서에 도장만 찍으면 된다. 딱히 자세하게 설명하고 싶지 않아서 대충 대답했다.

“짐은 다 챙긴 거야? 저거밖에 안 가져 왔어?”

“응….”

“내일 데려다줄까? 언제 옮길 건데.”

“바쁘잖아…… 됐어.”

강동현은 가만히 황경호를 바라보았다.

“그래서… 앞으로 나 안 만날 거야?”

그가 물었다. 황경호는 약간 한숨을 쉬며 테이블만 쳐다보다가 작게 대꾸했다.

“내가 안 만나고 싶다고 하면 안 만날 수 있는 거야?”

“…….”

“마음대로 해….”

강동현은 뭐라고 하려다가 입을 다물고 인상을 찌푸렸다. 그리고 침묵이 흘렀다.

“…….”

“…….”

강동현은 한숨을 쉬고 입을 뗐다.

“내가 좋아한다고 하는 거… 왜 계속 안 믿는 거야?”

“…….”

“나 어떤 점 고칠까? 마음에 안 드는 거 있으면 다 말해. 전부 고칠게.”

“…….”

“아까 전에도 미안… 말 함부로 해서. 니가 결국 나간다고 하니까 화가 나서….”

“…….”

황경호는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강동현은 한숨이 나왔다. 벽을 두고 상대하는 것 같다. 강동현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를 그의 옆얼굴을 가만히 보고 있었다. 잠깐의 침묵 후 다시 강동현이 물었다.

“…그럼 넌 나 어떻게 생각하는데?”

“…….”

“아무것도 아니야? 내가 하고 싶다고 계속 귀찮게 구니까 또 먹고 떨어지라고 이러고 있는 거야?”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건가 싶을 정도로 미동도 없이 있던 황경호는 그 말에 살짝 얼굴이 상기되더니 입술을 꾹 다물고 미간을 좀 찌푸렸다. 그리고 갑자기 얼굴이 확 붉어져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강동현의 그의 손목을 꽉 잡고 자신의 쪽으로 몸을 돌리게 했다.

“그렇게 참지 말고 하고 싶은 말 있으면 하라고.”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어….”

“왜 몰라. 그냥 나오는 대로 말해.”

“별로… 말 안 하고 싶어.”

황경호는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돌렸다. 강동현은 그의 턱을 잡아서 자신의 쪽으로 돌리고 그의 눈을 직시했다.

“그래도 말해.”

황경호는 움찔했다가 얼굴이 또 빨개졌다.

“이런 거 너무 싫어….”

“뭐가.”

“니가 뭔데 계속 나한테 이래라 저래라야? 내가 말하고 싶으면 할 거고, 안 하고 싶으면 안 할 거야…!”

황경호는 그의 손을 쳐냈다. 황경호는 그를 노려보았다.

“집도 원래 나가기로 한 거였는데 왜 계속 사람을 바보 취급해? 내가 도대체 여기 왜 살아야 하는데?”

“…….”

“그리고 좋아한다고 말하지 마!”

황경호는 그렇게 소리쳤다. 그는 흥분을 가라앉히기 위해 노력하며 말을 이었다.

“니가 나 우습게 보는 건 예전부터 알고 있었으니까.”

“….좋아한다는 게 왜 널 우습게 보는 건데.”

강동현은 울컥해서 받아쳤다.

“넌 그냥 니 마음대로 휘둘려지는 내가 병신 같고 재미있겠지. 니 거기 서는 것도 포함해서.”

황경호가 냉정하게 말했다. 강동현은 화가 났다.

“도대체 그 말은 언제까지 할 건데? 예전 일은 내가 잘못하고 미안하다고 했잖아. 그래도 화나서 소리 치고 때리고 싶으면 마음껏 해. 그래도 지금은 아냐. 내가 몇 번이나 말했잖아.”

뻔뻔하다. 황경호는 울컥해서 그를 찌를 듯이 노려보았다.

“그래서 좋아한다고?”

“그래.”

“어차피 나한테 바라는 건 섹스밖에 없으면서?”

황경호는 그의 딱딱한 얼굴을 보며 물었다.

“나랑 섹스 말고 하고 싶은 게 있기나 해?”

강동현이 뭐라고 반박하기 전에 바로 말을 이었다.

“전 여자친구랑도 이렇게 하기만 했어?”

“…….”

이런 말까지는 정말 하고 싶지 않았다. 황경호는 크게 한숨을 쉬었다. 부끄럽지도 않았다. 피곤했다.

“딱히 여자친구처럼 대해 달라는 건 아니야… 그런 거 바라지도 않고… 그냥… 아니잖아… 아닌데 자꾸 맞다고 하지 마. 바보 취급당하는 것 같아서 화나니까.”

“…….”

“…….”

강동현은 뭔가 얼굴이 상기되고 핏줄이 좀 선 게 화가 난 것 같기도 하고 답답한 거 같기도 했다. 그런 얼굴로 황경호를 뚫어지게 보고 있다가 크게 한숨을 쉬었다.

“좋아하는 게 아니라고….”

“그래.”

황경호가 곧바로 대답했다. 강동현은 말없이 그런 상대를 바라보았다.

모든 사람들이 강동현의 말을 듣고 사랑이라고 할 때도 강동현은 끝까지 사랑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사랑일 리가 없었다. 강동현이 해본 사랑은 이렇지 않았고 앞으로도 이렇지 않을 것이었다.

하지만 보고 싶고, 걱정이 되고, 짜증도 나고, 만지고 싶고, 괴롭히고 싶고, 키스하고 싶고, 섹스도 하고 싶다. 생각을 하고 싶지 않은데도 항상 생각이 났다. 떨어지고 싶다고 바라도 떨어질 수가 없었다. 보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면 괴롭고 화가 났다.

그래서 강동현 본인도 더 이상 좋아하는 게 아니라면 도저히 설명할 수가 없어서 그렇게 결론을 내린 것이었다. 좋아한다. 그거 말고는 도저히 말이 안 되었다.

그런데 또 상대는 아니라고 했다. 강동현은 깔깔한 목소리로 또 물었다.

“난 그냥 너 어떻게든 쉽게 따먹고 싶은 거고.”

“…죄책감 없이.”

“…….”

강동현은 자신이 최악의 쓰레기가 된 것 같은 느낌이었다. 바로 이 무해한 얼굴을 한 동갑의 앞에서.

“…….”

“…….”

그렇게 서로의 눈을 바라보고 있었다.

*

드라마 <시크릿 블러드> 첫 방영이 시작되고 나니 강동현은 엄청나게 바빠졌다. 시청자들의 반응에 따라 대본이 바뀌기도 하고 대기 시간이 하염없이 길어져 발목이 잡히기도 했다. 제대로 잠도 못 자고 제대로 못 먹고 일만 하고 있었다. 하지만 기본적인 와꾸는 찍어놓은 드라마였기 때문에 매주 쪽대본이 나오기 전까지는 시간이 좀 있었다.

<아시아의 히트메이커, 강동현! ‘코드명:울프’ 그리고 ‘시크릿 블러드’까지!>

반응은 생각보다 뜨거웠다. 해외에서는 유료 채널을 통해 편당 결제로 팔리고 있었는데도 시청률이 굉장했다. 촬영을 끝마치고 나면 다시 광고 랠리가 시작될 예정이었다.

“그래서 다음 작은 정했어, 우리 도 이사님?”

옥미현 사장의 얼굴에 완전 꽃이 폈다. 그간 강동현 자체는 잘 나갔지만, 회사 자체로는 유동성 이슈가 있어서 갑작스럽게 강동현이 회사의 2대 주주가 되기까지 했었으니. 옥 사장은 강동현이라는 대형 스타가 있는 데도 불안한 한 해였다.

“이대로면 연말 상장도 예정대로 되겠는데? 우리 강 배우 대작 하나만 더 내면 내가 진짜 소원이 없겠다.”

“저 좀 쉴게요.”

강동현이 말했다. 옥미현은 아주 긍정적으로 답했다.

“그래. 그래. 체력 보충도 하고 해야지. 한두 달이면 된다고 그랬지? 아, 그래도 광고는 다 찍어야 한다. 광고야 몇 시간이면 되니까. 어? 그럼 팬미팅은 어떻게? 가야지?”

“그런 건 할게요. 근데 작품은…… 일단 당분간은 안 하고 싶어요.”

“에이, 또 그런다. 쉬다가 지가 못 견뎌서 일 달라고 하면서.”

“건강이 안 좋아져서요.”

강동현이 그렇게 말하자 싱글벙글하던 옥미현이 펄쩍 뛰었다.

“왜?! 설마 병이라도 걸렸어? 암??”

“그런 건 아닌데요… 어쨌든.”

“알겠어…. 그럼 작품 미팅도 안 하게?”

“네. 적어도 반년은요… 만약에 중간에 제가 한다고 하면 말려주세요.”

“많이 안 좋아, 도 이사? 응? 내가 걱정해야 할 정도야? 말 좀 해봐.”

옥미현이 꼬치꼬치 캐물었으나 강동현은 대충 말을 돌렸다.

그리고 강동현은 병원이란 병원은 다 다니기 시작했다. 내과, 외과, 한의사 등등. 종합 검진도 받고 유명한 쇼닥터나 트레이너를 통해 건강을 위한 생활패턴과 식단, 운동스케줄을 설계하고 심지어 정신과 의사까지 만나기 시작했다.

“속상하시거나 힘든 점 있으시면 얼마든지 얘기하셔도 됩니다. 보통 부모님 얘기부터 하는 게 도움이 많이 되죠.”

노여진이라는 사근사근하게 웃는 의사를 보면서 강동현이 말했다.

“그런 건 딱히 문제가 없구요. 그것보다도, 제가 아는 간호사가 하나 있는데 걔가….”

그리고 결국 이강유비뇨기과도 다시 가기 시작했다. 오랜만에 이강유를 만난 강동현은 자신의 상태를 줄줄 읊었다.

“술은 끊었고 담배는 하루 두 개피 정도만 피웁니다. 일단 촬영 없는 날은 밤 10시 자서 아침에 6시 일어나고 삼시 세끼 잘 챙겨 먹고 운동하고 명상도 하고 있습니다.”

“…엄청나게 발전하셨군요. 몸은 어떠신가요? 컨디션이 좋아지신 건 느껴지나요?”

이제 병원을 다닌 지도 2년이나 되었다. 의사도 거의 희망의 끈을 놓고 있었던 것 같더니 강동현의 말에 화색이 돌았다.

“컨디션은 예전보단 좋습니다. 덜 피곤하고 일어나는 것도 개운하구요. 이번 촬영 끝나고 일 좀 마무리되면 반년 이상은 쉴 겁니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석 달 정도 푹 휴식하시면서 좋은 거 먹고 하시면 건강 자체는 확실히 나아지실 겁니다. 그럼 파트너와 성관계는 꾸준히 가지고 계십니까?”

“아뇨. 지금 사이가 좀 안 좋아서.”

“그럼 자위는 시도해보셨나요?”

“일단 당장은 안되는 거 같은데 마음은 편히 갖고 있습니다.”

“좋습니다. 좋습니다.”

환자가 치료에 열성적으로 따라오면 그것만큼 좋은 것이 어디 있겠는가. 안 그래도 이 환자는 스스로 수명을 깎아 먹는 것처럼 살더니 이제야 정신을 차린 모양이었다.

“이렇게 쭉 유지 하셔야 됩니다. 원래 사람이 한 번 아프기는 어렵지만 두 번, 세 번은 쉽습니다. 바짝 관리하고 괜찮아졌다고 안심하고 다시 돌아가시고 이러면 말짱 도루묵이예요.”

“네, 알겠습니다.”

그리고 치료실로 가니 순하고 밝은 얼굴로 미소를 띠고 있는 그가 있었다. 못 본 지 일주일이 넘었다.

“오랜만에 오셨네요, 도은혁 환자님.”

“어, 황 간호사. 테스트랑 온열 마사지까지.”

“네.”

바쁜 의사는 금방 나갔다. 강동현은 옷을 갈아입고 와서 앉았다. 테스트를 다 하고 태블릿pc에다가 뭐라고 입력을 하는 걸 물끄러미 보고 있었다. 강동현이 먼저 입을 열었다.

“잘 지냈어?”

“네.”

“바빠서 연락 못 했어.”

“네.”

“뭐라고 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

“그래도 보고 싶었어.”

“…….”

“진심이야.”

그리고는 침묵이 흘렀다. 황경호가 입을 뗐다.

“차갑습니다.”

“…….”

그대로 15분이 지나고 정리를 하는 그를 보면서 다시 강동현이 말을 걸었다.

“퇴근하고 잠깐 시간 돼? 얘기 좀 하면 좋겠는데.”

“할 말 있으면 지금 해요.”

“왜 계속 그렇게 딱딱하게 굴어….”

“…지금 말해.”

강동현이 한숨을 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깐만 보자… 나쁜 짓 안 해. 기다릴게.”

“…….”

강동현은 잠깐 황경호의 얼굴을 보다가 탈의실로 향했다.

*

강동현은 황경호의 퇴근 시간에 맞추어 건물 앞에 차를 대고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선글라스를 끼고 있어도 사람들이 간혹 눈치를 채고 속닥거리다가 지나갔다. 이제 9월. 아직 덥다. 그림자가 좀 더 길어진다 싶더니 기다리던 사람이 나온다. 강동현은 조수석의 문을 열었다.

“…….”

황경호는 아무 말도 안 하고 잠깐 보고 있다가 와서 차에 탔다. 강동현도 운전석에 탔다. 그리고는 차를 끌고 얼마 가지 않더니 내리라고 했다. 발레파킹을 하는 사람이 차키를 받아간다.

“밥부터 먹자.”

“…….”

무슨 으리으리한 건물로 데리고 왔다. 그대로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니 고급 레스토랑이 나왔는데 아예 한강이 보이는 방으로 안내했다. 벽이 전부 유리에 한강과 경치가 꽉 차게 보였다. 황경호는 이런 곳은 처음 와봐서 깜짝 놀랐다. 웨이터가 의자를 빼줬다. 황경호는 긴장해서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한숨을 쉬며 강동현에게 말했다.

“나 이런 데 잘 몰라….”

“나도 잘 몰라. 추천으로 두 개 주세요. 가리는 거 없습니다.”

“네.”

그리고 웨이터가 방을 나갔다. 강동현은 선글라스를 벗었다.

“살 좀 찐 거 같다.”

“별로….”

곧 디쉬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음식은 맛있었다. 김태형 때문에 맛있는 음식에 눈을 뜨게 되었지만 이건 어쩐지 새로운 맛에 가까운 것 같았다. 평소에 못 먹어보는 맛이 잔뜩 났다. 맛이 풍성하다. 그래서 생각보다 엄청 잘 먹었다.

“병원에선 별일 없었어? 또 이상한 환자 오거나 그런 건?”

“없어… 진상 환자야 꾸준히 있지만.”

강동현은 평이하게 물었고 그래서 황경호도 평이하게 대꾸했다. 강동현이 탐탁지 않다는 듯 물었다.

“그런 건 좀 어떻게 안 돼? 너네 의사, 돈도 많이 버는 양반이 왜 그런 건 계속 놔둬?”

“몸 아파서 오는 사람들인데….”

“몸 아프다고 정신병까지 있는 건 아닐 거 아냐. 마음에 안 든다.”

“지는….”

황경호가 작게 중얼거렸다.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은 일상적인 대화를 하다가 후식이 나오고 나서 강동현이 드디어 본론을 꺼냈다.

“미안해.”

“어? 뭐가?”

황경호는 작은 수제 아이스크림을 한 입 먹고 있었다. 꿀꺽 삼키고는 강동현을 쳐다보았다.

“그냥. 지금까지.”

“아… 어…….”

그리고는 다시 아이스크림으로 시선을 돌렸다.

“하려고 그렇게 군 거 아니라고 말은 하면서 계속하기만 했으니까. 니가 못 믿는 것도 당연하다.”

“아… 됐어. 다 지난 일인데. 굳이 사과 안 해도 돼.”

“…….”

강동현은 가만히 그를 보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지난 일 아니야.”

“어?”

“너랑 내가 왜 지난 일이야.”

“…….”

황경호는 당황하더니 얼떨떨하게 말했다.

“그 뒤로 연락도 없었고…… 아니, 그런 게 아니라…….”

“…….”

강동현이 2주 가까이 연락을 못 했더니 다 끝났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강동현은 너무 바쁜데도 매일 박 터지게 고민을 하느라, 또 연락을 했다가 더 어긋나지는 않을까 싶고 또 무슨 말을 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그렇게 주저하다가 가장 기본적인 것을 까먹고 말았다. 관계의 기본은 연락이다. 강동현은 한숨을 쉬었다.

“미안… 내가 정신이… 미안.”

“…….”

강동현은 처음부터 뭐가 자꾸 어긋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답답했다. 사과를 하고 기분을 풀어주고 싶었다. 그리고 오해도 풀고 싶었다.

“일단…. 나가자.”

황경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강동현도 속으로 욕지거리를 하면서 일어났다. 계산을 하고 차를 탔다.

“집 어디야? 데려다줄게.”

“아니…. 그냥 지하철역에서 내려줘.”

“…데려다줄게.”

“그냥 지하철역에….”

강동현은 차를 급정차했다. 황경호가 깜짝 놀라서 손잡이를 잡았다. 강동현은 핸들에 팔을 올리고 거기에 얼굴을 박고 있었다. 답답하다.

“…내가 어떻게 하면 되는지 가르쳐줘.”

강동현은 오늘 하고 싶었던 말들을 전부 건너뛰고 그렇게 말했다.

“니가 원하는 대로만 할게.”

강동현이 말했다.

“나 너 좋아해.”

“…그 말 하지 마….”

“왜?”

강동현이 고개를 들어 황경호를 보았다.

“내가 좋아한다는 걸 왜 니가 아니라고 해? 내가 너 오해하게 하긴 했지만…! 그래도 그런 거 아니라고 몇 번이나 얘기했잖아.”

왜 그가 오해를 하는지는 알겠다. 잘못했다고 스스로도 생각했다. 그의 말을 듣고 강동현도 정말 많이 고민했다. 설마 그런 것이었을까. 그냥 하고 싶어서, 죄책감 없이 하고 싶어서 좋아한다는 말을 그렇게 공수표처럼 던진 걸까.

하지만 아니었다. 절대 아니었다. 좋아하고 또 상처 주기 싫었다. 그냥 하고만 싶은 것이었으면 집에 들이고 같이 살지도 않았을 것이다. 같이 있고 싶으니까 그런 거였다.

“내가 너 안 좋아하는 거고 내가 그냥 너 쉽게 어떻게 해보려고 그런 말 했던 거면 도대체 넌 나랑 왜 했는데. 그렇게 생각하면서 왜 했는데? 너도 그냥 나랑 하고 싶었던 거였으면 도대체 너랑 나랑 왜 이러고 있는 건데?”

“…….”

역시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강동현은 답답해서 돌아버릴 것 같았다. 화가 난다. 뭔가 울컥울컥 나올 것만 같을 때 황경호가 천천히 입을 뗐다.

“그렇게 생각 안 했어….”

그는 정면을 보면서 그렇게 조용히 말했다.

“처음에는 믿었어….”

강동현이 그를 돌아보았다. 황경호는 조용히 덧붙였다.

“안 믿었으면 더 좋았겠지만….”

“…왜?”

“그냥… 너 실제로 그냥 하기만 했고. 너도 예전만큼 그렇게 막 하진 않았지만 결국엔…..”

황경호는 자세히 설명하지는 않았다. 그리고는 한숨을 쉬었다.

“그런 거 좀… 창피해서.”

“…뭐가.”

“그냥… 바보 같잖아.”

황경호는 조용하고 담담하게 말했다. 거기에서 강동현은 자신이 차마 연락하지 못한 2주 동안 그가 마음 정리를 완전히 해버렸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황경호는 말을 돌렸다.

“너 이제 건강관리 잘하고 있다며. 선생님도 생각보다 금방 나을 것 같다던데. 그럼 이제 다 잘 된 거네.”

“…….”

“너 인기 많으니까 병만 나으면 뭐… 괜히 스트레스받지 말고 그냥….”

황경호는 뭐라고 말해야 할지 한참 생각을 하다가 끝마무리를 짓지 못했다. 그는 한숨을 쉬며 말을 이었다.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네… 어쨌든… 이제 갈게. 잘 지내.”

황경호가 손잡이를 잡았다. 강동현이 그를 물끄러미 보다가 물었다.

“…넌 그걸로 좋은 거야?”

차 문이 달칵하고 조금 열렸다. 황경호가 그를 돌아보았다.

“내가 다 낫고 다시 여자 만나고. 그걸로 된 거냐고.”

“그거랑 내가 무슨 상관이야….”

“넌 도대체 나 어떻게 생각하는데.”

“…….”

“나랑 자면서 무슨 생각했는데.”

황경호는 한숨을 쉬었다.

“내가 뭘 생각하든 무슨 상관이야… 언제 신경 썼다고….”

“내가 왜 신경을…!”

“남의 집에 얹혀사는 것도 불편했고 니가 나 볼 때마다 은근히 하자는 분위기 내는 것도 부담스러웠어. 니가 가끔씩 말 심하게 하면 진짜 열 받고….”

황경호는 그가 화내는 것을 끊고 한숨을 섞어 그가 생각하던 바를 빠르게 말했다. 강동현은 할 말을 잃었다.

“너도 귀찮았다며. 이제 맘 잡고 고치는 거면 난 필요 없잖아.”

반박하고 싶은 곳은 수두룩했지만 넘어가고, 강동현은 다시 본론으로 돌아왔다.

“나 말고 너 말이야…… 넌 무슨 생각 하냐고. 나에 대해서… 내가 널 어떻게 생각하든 상관없이 넌 나 어떻게 생각하냐고. 그냥 죽일 놈? 개새끼? 뭐냐고.”

황경호는 강동현 쪽은 보지도 않았지만, 강동현은 아랑곳하지 않고 말했다.

“난… 그래도 니가 나 원한다고 생각했어. 듣고 어이없어 할 것 같긴 한데… 너 항상 나 보고 있었으니까.”

“…….”

“내 얼굴도, 내 목소리랑 내 냄새도 좋아하잖아. 내가 안아주는 것도 좋아하고 머리 쓰다듬어주는 것도 좋아하고.”

강동현은 바보가 아니었다. 물론 바보짓을 엄청나게 해왔고 예전에는 좋다고 그에게 달려들었다가 사실은 그에게 엄청나게 상처를 줬던 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래도 바보는 아니었다. 이제 정말 정을 나누어 보아서 알 수 있었다.

그는 섹스 후에 끌어안고 있는 걸 굉장히 좋아했다. 강동현도 정말 좋아했다. 황홀하고 아찔했다. 귀에 속삭여주는 것도 좋아했다. 가끔 짓궂게 그런 점을 이용하면 화를 냈지만, 기본적으론 좋아했다. 끌어안고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걸 싫어하는 척하지만 좋아하는 걸 알고 있었다.

“그리고 너 아무나랑 그렇게 안 하잖아. 너 이덕재랑 할 때도 그랬어? 아니잖아. 다른 사람이랑 하면 그렇게 할 수 있어?”

“…….”

“나랑 해서 그런 거잖아.”

섹스는 대화고, 그렇게 치면 그들은 꽤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그간은 그 방식으로도 서로의 언어가 달라 제대로 통하지 않았던 적도 많았지만, 같이 지낼 때는 전이랑 확연히 다르지 않았던가. 서로가 뭘 좋아하고 뭘 싫어하는지 많이 알게 되었다. 그 이상도.

강동현은 황경호의 손을 잡았다. 황경호가 강동현을 돌아보았다. 끌어당겨 그 손에 입을 맞추며 황경호와 눈을 마주쳤다. 그리고 말했다.

“너도 나 좋아하잖아.”

“아니야.”

황경호가 곧바로 말했다.

“싫어해.”

강동현은 전혀 타격을 입지 않고 물었다.

“싫은 데도 계속 대줬다고? 귀찮으니까?”

“뭐라고 생각하든 상관없어.”

그런 건 한 번도 생각한 적 없었다. 언제나 강동현이 어떻게 생각하는지에만 촉각을 세웠지 자신이 뭘 생각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오히려 자신에 대해서는 아무런 생각을 안 하려고 작년부터 노력하고 있었으니까 말이다.

그의 완강한 태도에 강동현이 물었다.

“그럼 누가 나나… 그 돼지 새끼처럼 너 귀찮게 하면 넌 또 쉽게 대줄 거야?”

“…….”

“나한테 해줬던 것처럼 그렇게 해주는 거야? 그렇게 빨개져서 잘 느끼고… 키스도 해주고…….”

강동현은 갑자기 이를 좀 갈더니 욕을 했다.

“야… 너 진짜 누가 또 그런다고 그런 식으로 하면 나 진짜 가만 안 있는다. 그 개새끼 내 손에 죽는 건 당연하고 너 바깥에 절대 못 나가게 할 거니까.”

강동현은 그의 손을 꽉 잡았다.

“그런 놈 있으면 바로 나한테 말해. 알았어?”

“…….”

“알았냐고.”

황경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한참을 있다가 입을 뗐다.

“….그래서…. 내가 너 좋아하는 거라고?”

황경호가 물었다.

좋아한다고?

좋아하지 않는다.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황경호는 갑자기 가슴 근처가 확 뜨거워지면서 몸이 떨리는 걸 느꼈다.

‘만약에 그러면 너무….’

이러고도 황경호가 강동현을 좋아하고 있기라도 한다면 그건… 정말 너무 비참한 일 아닌가.

지금까지 있었던 일을 다 당하고도 그에게 매력을 느끼는 것도… 그래, 그걸로 벌어 먹고사는 놈이니까 어쩔 수 없는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가 매력적으로 느껴질 때면 언제나 경계심이 먼저 들었다.

그런 점도 사람이 억울한데 좋아하기까지 한다고? 지금까지 강동현이 괴롭히는 걸 고스란히 다 당해 놓고도 그를 좋아하고 있다면 그건 정말… 병신이라고 밖에 할 말이 없었다. 그러니까 좋아할 리가 없었다.

게다가 아무리 해도 그는 황경호를 섹스파트너 이상으로 취급해주지는 않을 것이다. 느낌이 그랬다. 말로는 좋아한다고 해도 결국엔 섹스를 하기 위해서란 느낌이 강했다. 그는 황경호와의 섹스에 대단히 집착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렇게 또 그가 사과하고 기분을 풀어주려고 해도 언젠가 또 그가 양보하고 싶지 않은 순간엔 똑같이 사람을 성가시고 짜증 나는 존재로 취급할 것이다. 그는 그만큼, 적어도 황경호에 대한 배려는 없었다. 그가 저런 식으로 생각하고 있는 걸 미루어볼 때 그는 황경호를 밑도 끝도 없이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기도 했다.

그도 그럴게… 그는 아무런 약속이 없었다. 그는 현재만 말할 뿐이었다. 지금 본인이 끌리니까. 지금 그가 원하니까. 거기에 황경호가 당연하게 응해 주길 바랐다. 황경호도 결국 그를 원하고 있다고 생각하니까.

그런 관계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 거고 끝나고 나서는 어느 쪽이 상처받을지 명확하다.

“그래.”

황경호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던 걸 강동현은 이견이 있을 수 없다는 듯 그렇게 답했다. 마치 황경호가 전날 그가 자신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할 때와 같았다. 황경호는 인상을 찌푸렸다.

“안 좋아해.”

“그냥 솔직하게 인정해. 너 나 말고는 섹스 못 하잖아.”

“…너랑도 이제 안 해. 못 해.”

“왜 그렇게 고집을 부리는데.”

“고집부리는 거 아니야. 안 좋아해서 안 좋아한다고 말하는데 니가 뭐라고 남의 감정까지 이래라 저래라야?”

아까 강동현이 한 말을 비슷하게 하자 그는 입을 다물고 황경호를 보고 있었다.

“…….”

“…….”

강동현은 황경호를 보고 있었고 황경호는 앞을 보고 있었다. 강동현은 다시 황경호의 손에 입술을 눌렀다. 그리고 눈을 감고 가만히 숨을 들이켰다. 좋은 향기. 역시 원했다.

“그럼… 내가 어떻게 하면 나 좋아할 것 같아?”

“…….”

“내가 어떻게 하면 좋아할 수 있어?”

“…….”

“응? 말해줘. 이번엔 못되게 안 굴고 열심히 꼬실 테니까.”

“…그러지 마.”

강동현은 뭔가 하고자 하면 결국엔 해내는 남자였다. 그는 황경호가 그렇게 때리고 화를 내도 꽃이고 선물이고 가지고 와서 황경호의 비위를 맞추고 결국엔 어떻게든 넘어가게 만들어버렸다. 그가 뭔가를 하는 거 자체가 무서웠다. 분명히 또 휩쓸리고, 후회하는 것은 자신만 될 것이다.

황경호가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별로 좋아하고 싶지 않아….”

“왜?”

“…….”

더 이상 상처받고 싶지 않았다.

차라리 아무것도 느끼지 않을 때는 그를 상대해도 그렇게 크게 상처를 받지 않았다. 그 시절은 오히려 황경호 본인의 문제가 너무 커서 강동현 같은 건 그저 운이 안 좋게 트리거가 되거나 부수적인 문제를 일으킬 뿐이었다. 그가 심하게 취급해서 죽고 싶어져도 결국에 돌아보면 우울증의 문제가 더 컸다. 그에게 어떤 기대도 없었다. 화가 나고 분했지만 이렇게까지 상처를 받진 않았다.

하지만 점점 그를 알아갈수록 그에 의해서 받는 상처가 커졌다. 그는 아무한테도 그러지 않고 오로지 황경호에게만 못되게 굴었다. 더군다나 여자친구 때문에 힘들어하며 지고지순한 면은 직접 보기까지 했다. 그를 알아갈수록 황경호가 얼마나 그의 기준 밖에 있는 사람인지 잘 알 수 있었다. 함부로 취급하고 무시하고… 황경호가 그에게 매력을 느끼기 때문일까? 그럴 때마다 자존심에 크게 상처를 받았다.

게다가 그는 정말 애매하게 굴었다. 차라리 개새끼처럼만 굴던가 가끔씩… 잘해줬다. 정말 필요한 걸 선뜻 주기도 하고 그의 기준이 벗어났다 싶을 정도로 폭발해서 때리거나 화를 내도 받아주고….

하지만 계속 원점으로 돌아왔다. 섹스. 그는 황경호에게서 오로지 그것만을 원했다. 그것을 하기 위해서라면 그는 뭐든지 했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오히려 우쭐했을까? 하지만 황경호는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그는 황경호를 열심히 노력하면 결국엔 주어지는 보상처럼 여겼다. 그래서 노력해서 보상이 돌아오지 않으면 화를 내기까지 했다. 그에게 황경호는 사람이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그냥 입술이나 가슴이나 엉덩이가 달린 그런 존재였다. 그가 만지면 반응하고 재미를 느낄 수 있는….

‘그래… 그런데… 그런데 알면서도 왜 같이 있었을까… 왜….’

황경호는 점점 얼굴이 빨개졌다. 온몸이 빨개졌다. 몸이 떨렸다.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그러지 말고 말해… 어? 뭐든지 들을게.”

강동현이 부드럽게 말했다. 황경호는 너무 비참해서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좋아한다는 말이 아니면 결국 설명이 되지 않았다.

이렇게 미운데. 이렇게 원망스러운데. 그런데도 좋아한다는 말일까? 전혀 좋아한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까지 황경호가 했던 수많은 잘못된 선택들을 돌이켜보고 스스로에게 왜냐고 물어보면… 그 말 말고는 설명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정말로..? 말도 안 돼. 아니야. 절대 아니야.’

절대로 좋아하는 게 아니다. 그러면 너무, 너무 비참하다. 이미 그 가능성을 떠올려보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창피하고 수치스러워서 죽을 것만 같다.

“내가 널 좋아하는 게… 너한테 쉽게 할 수 있다는 것 말고 의미가 있어?”

황경호는 겨우 얼굴색을 가라앉히고 그렇게 물었다.

“그러면서 내가 널 좋아했으면 좋겠다고 말하는 거야?”

황경호의 말에 이번엔 강동현이 입을 다물지 않았다.

“그렇게 생각하면 마음이 좀 편해? 내가 몸만 노리고 너한테 이러고 있는 거라고 믿는 게 좋아?”

“믿는 게 아니야. 넌 그냥 하고 싶어서 이러는 거야.”

“좋아하니까 하고 싶은 거야.”

“넌 나 안 좋아할 때도 그랬어.”

“그때도 너 좋아했어. 내가… 멍청하게 못 알아차려서 그렇지.”

“거짓말하지 마. 넌 좋아하는 사람 그렇게 추행하고 강간해?”

“…….”

“아닌 걸 계속 맞다고 하지 마. 바보 취급하지 말라고.”

황경호가 화가 난 음성으로 그렇게 말했다. 고개를 돌렸다. 그는 황경호의 얼굴을 뚫어지게 보았다. 황경호가 결국에 그의 얼굴을 보자 다시 얘기를 계속했다. 정말 포기를 모르는 남자였다.

“…나도 내가 그냥 너 어떻게만 하고 싶어서 그러는 줄 알았어. 건드리고 싶고 만지고 싶고… 그냥 처음에 니가 손으로 해줄 때는 그걸로 충분하다고 생각했어. 내가 그때 일 생각밖에 없어서… 나도 내가 너한테 그런 식으로 점점 손댈 줄 몰랐어. 근데 너랑 뭘 같이 하면 미칠 것 같았어. 좋아서 죽을 것 같아. 니가 싫어해도 좋고 좋아하면 더 좋았어.”

“…….”

“그래. 내가 미친놈처럼 달려들었고 다른 사람들한테 이런 적도 없고 전 여자친구한테도 너한테 하듯이 한 적 한 번도 없어. 근데 어떡하라고. 나도 이런 거 처음이야. 예전 일로 니가 나 비난하면 항상 할 말이 없다. 다 미안하고 다 잘못했어. 그런데 그때 그랬으니까 내가 좋아하는 거 아니라고 말하지 마. 그때도 내가 정상적인 상태였으면 분명히 바로 알아차렸을 거야. 너한테 끌린다는 거. 아니라고 하지 마. 난 나 잘 알아.”

강동현이 그렇게 말했다. 확신에 차서 절대 그 외는 있을 수 없다는 말투였다. 어떻게 저렇게 자기 자신을 믿을 수가 있을까. 어떻게 이렇게 당당할 수 있을까. 황경호는 강동현의 이런 면을 아직도 잘 모르겠다. 강동현은 황경호의 손을 꽉 잡고 그의 손바닥에 입술을 눌렀다.

“맞아. 나 너만 보면 하고 싶어. 발정 난 개새끼라도 된 것 같은 기분이야. 하루 종일 니 생각밖에 안 나. 너랑 한 거, 너랑 하고 싶은 거… 그래서 좋아하는 게 아니라고?”

“…….”

“그래서 좋아하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상대는 굉장한 힘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의 외견도, 성격도, 언행도… 황경호는 언제나 그를 대할 때마다 무력감을 느꼈다. 언제나, 그가 원하는 대로 결국 다 이루어지고 말았다.

“…그러면 그건… 언제 끝나는데…?”

그렇게 말하는 황경호의 얼굴은 어쩐지, 취약해 보였다. 뺨도 상기되어 분홍색이었고 입술은 좀 떨렸다.

“…….”

강동현은 순간 그의 얼굴을 보고 약간 움찔했다. 그가 왜 이런 표정을 짓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미친 듯이 마음을 끌었다. 그 이유도 알 수 없었다.

“니가 질리면 끝나는 거야? 그럼 그게 언젠데?”

“…무슨 말이야?”

“니가 원할 때마다 하면 되는 거야? 니가 하는 말만 듣고? 기절할 때까지 하고 또 하고… 니가 괴롭히는 거 견디고… 니가 나 좋아해서 그러는 거니까?”

“니가 하기 싫으면 안 해… 나 진짜 안 해도 돼. 안 하고 싶은 건 아닌데… 그래도 그렇게 하기 싫으면 하지 말자. 응?”

“이게 다… 무슨 의미가 있는데.”

“왜 의미가 없어.”

강동현은 황경호의 얼굴을 만졌다. 얼굴이 몇 번 울그락불그락 하더니 좀 부었다. 연약한 느낌… 만지고 싶다… 강동현은 한참을 그의 얼굴을 만졌다.

“가끔 너한테 생각 없이 구는 것도 스트레스 때문인 것 같아서 일도 이거 끝나면 일단 안 받기로 했어. 앞으로도 스케줄 조정 잘해서 무리 안 할 거고. 니 얘기도 잘 들을 게. 그러니까 너도 조금만 나한테 말을 더 해줘.”

“나한테… 왜 그렇게까지 하는데….”

“좋아한다고 했잖아.”

그러자 그의 얼굴이 확 빨개졌다가, 눈도 빨개졌다.

“이제 그런 말 안 믿고 싶어….”

벌써 몇 번째인가. 황경호는 스스로가 바보 같이 느껴져서 견딜 수가 없었다.

강동현은 그의 얼굴을 끌어당겼다. 차 안이라 불편했지만 그를 끌어안았다.

“미안해… 나 진짜 너만 보면 좀 미친놈 같아져서… 힘들었지? 진짜 미안하다. 니가 조금이라도 허락하면 항상 오버해… 브레이크가 안 걸려. 너 또 잘 받아주니까….”

오랜만에 닿았더니 이 감촉이 정말 참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몇 번이나 다짐해왔던 것처럼 이번에도 다짐하게 되었다. 더이상 쉽게 손대지 말아야지. 정말로 상처 입히고 싶지 않았다. 진심이었다. 강동현은 그의 머리카락에 얼굴을 묻었다.

“정말 뭐든지 다 말해도 돼. 내가 좋아하는 애 괴롭히는 타입인 건 나도 처음 알았는데… 그래도 니가 말하는 건 다 들어줄 수 있어. 뭐든지 해줄 수 있어. 내가 말하는 거나 행동하는 거 싫으면 다 고쳐버려. 니 취향대로 만들어.”

“너… 내 말 듣는 거 싫어하잖아… 성가시다며….”

“안 싫어해. 좀 성가셔하면 어때. 어차피 니 말 들어야 하는 건 난데.”

“…….”

“너랑 난… 항상 니가 갑이고 내가 을이었는데 니가 왜 계속 을처럼 굴어. 내 눈치 보지 마. 솔직히 나나 내가 가진 거나 다 니 거나 다름없었는데… 넌 항상 그걸 모르더라.”

황경호가 고개를 들어 강동현의 얼굴을 보았다. 강동현은 그제야 미소를 지으면서 그를 내려다보았다.

“솔직히 처음부터 니가 챙길 거 다 챙겼으면 얹혀사는 건 나였을 걸?”

“…….”

“내가 누구한테 이래 본 적 있는 줄 알아? 진짜 홀딱 빠졌다니까. 나도 놀랄 정돈데.”

그리고 꽉 끌어안고 그의 뺨에 입술을 눌렀다. 황경호는 뭔가 약간은 울상인 표정으로 그가 뺨에 입술을 꾹 누르니 살짝 밀려나며 계속 고민스러운 얼굴을 했다. 강동현은 황경호가 마음을 정리하는 동안 오히려 황경호를 좋아한다는 마음에 확신을 가지게 된 것 같았다. 강동현은 황경호의 얼굴을 보더니 피식 웃었다.

“왜 그런 얼굴이야.”

그러면서 장난스럽게 덧붙였다.

“키스하고 싶잖아.”

“…….”

“아… 어. 그러니까 이런 게 내… 애정표현…이라고….”

약간 실수했다는 기분인지 그렇게 변명하듯 말했다. 그리고 공기가 약간 어색해졌다. 강동현은 그가 또 기세를 타고 황경호를 끌어안고 좀 지분거리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슬쩍 손을 뗐다.

“미안… 나도 이게 습관이다, 습관…….”

강동현은 한숨을 쉬었다.

“변명이긴 한데… 원래 안 이러거든, 나… 믿어줘….”

황경호는 여전히 표정이 안 좋았다. 시선을 차 오디오에 고정한 채고 얼굴색이 수시로 바뀌고 좀 떨기도 했다.

“괜찮아? 잠깐 있을래? 물이라도 사올 게.”

강동현이 편의점에 가기 위해 휴대폰으로 지도를 확인하더니 차에서 내렸다. 그가 보이지 않자마자 눈물이 흘렀다.

“…윽….”

황경호는 자신의 손목으로 눈두덩이를 꽉 누르며 눈물을 참으려고 했다.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 괴로웠다.

‘또 거짓말이야….’

말하는 본인이 그렇지 않다고 철석같이 믿으니 더 질이 나빴다.

이전까지의 일은… 기본적으로 강동현이 더 잘못했지만, 유달리 그에게 제대로 처신을 못 한 스스로의 잘못도 있다고 항상 생각했다. 처음엔 우울증에 못 이겨서, 근래엔 쓸모없는 기대 때문에….

그러니까 앞으로는 처신을 잘하고 싶었다. 예전처럼, 아니면 다른 사람한테 하는 것처럼. 그래서 더 이상 이런 건 안 겪고 싶었다. 계속 몇 번이고 생각했다. 만약에 그가 또 자신을 휘두르려고 들면 어떻게 해야 할지… 지금도 바로 거절하면 되는 것이었다. 결국 싸우고 상처를 주긴 할지언정 이제 정말 강제로 어떻게는 안 하니까.

그런데 어째서 선뜻 그렇게 말을 못 할까.

그게 너무 괴로웠다.

이번은 정말 다를까? 라고 생각하는 게

정말로 그를 좋아해서 이러는 걸까? 그런 건 정말 싫은데… 죽어도 싫다. 차라리 죽고 싶다.

그렇게 오열을 끅끅 삼키며 울고 있는데 문득 시선을 느꼈다. 선글라스를 쓰고 잠깐 편의점을 갔다 온 강동현이 밖에서 황경호를 가만히 보고 있었다. 황경호는 황급히 눈물을 닦고 고개를 돌렸다. 강동현이 운전석으로 다가와 올라탔다.

“…….”

“…….”

강동현은 생수 하나를 따서 황경호한테 넘겨주었다.

“…내가 미안하다.”

강동현은 조용히 그렇게 말했다. 그리곤 다시 시동을 걸었다. 황경호는 최대한 울먹거리는 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나, 난 지하철역에 내려줘….”

한 번 울음이 터지니까 안 들어갔다. 강동현은 굳은 얼굴로 잠깐 황경호를 돌아보았다가 물었다.

“괜찮겠어? 사람들 많을 텐데….”

조심스러운 어조였다. 황경호는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그냥 데려다줄게….”

“내, 내려줘….”

강동현은 결국 황경호를 가까운 2호선 역까지만 데려다줄 수 있었다. 황경호는 아무런 말 없이 차에서 내려 지하철역 안으로 빠른 발걸음을 옮겼다. 강동현은 그 순간까지도 그를 저렇게 보내도 될지 고민했다. 아마 예전이었으면 억지로라도 못 가게 했을 것이다.

그가 시야에서 사라지자 강동현은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스스로도 자신이 맹목적인 구석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를 좋아한다는 걸 깨닫고 나서는, 아니, 그 전에도 그랬다. 이제 그와는 꼭 보고 살아야겠다는 걸 알게 되고 나서부터는 일단 어떻게든 연이 끊어지지 않도록 하려고 열심히 노력했다.

하지만 그에게는 이 연 자체가 고통일 뿐일까. 그래서 강동현은 항상 그에게 상처를 줄 수밖에 없는 걸까.

그도 결국엔 강동현을 좋아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서로 좋아하니까 결국 지금 있는 문제들도 나중에 가면 다 괜찮아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렇게 생각하니까 나도 하나밖에 못 보는 놈이구나.’

그는 섬세한 사람이었다. 그런 걸 아마 강동현밖에 모르는 것 같긴 했지만, 근데 강동현은 도저히 그런 점을 제대로 맞춰줄 수가 없는 놈인 모양이었다.

아마 그는 절대로 서로 좋아한다는 것만으로는 절대 납득하지 않는다. 그것만은 아까 전에 그걸로 알 수 있었다.

*

“…여긴 연애상담소가 아닙니다.”

정신과 의사 노여진이 그렇게 말했다. 강동현은 한숨을 쉬었다.

“그래도 선생님은 전문가니까 아실 거 아니에요. 지금 제가 이 상황에서 뭘 해야 할지.”

“전부 솔직하게 말씀해주신 건 감사합니다만 조언을 해주기가 참 어렵습니다.”

“왜요?”

내가 여기다 내는 돈이… 이런 표정으로 쳐다보니 의사가 한숨을 쉬었다.

“애초에 도은혁 씨는 정신과 같은 데 오실 필요가 전혀 없으신 분인 거 같아서 다행이긴 합니다만, 본인과 직접 얘기를 나눠보지 않은 사람에 대해서 함부로 진단을 내리는 것은 힘듭니다. 그렇게 해서 자칫 잘못되었으면 책임지기도 힘들구요. 차라리 커플 상담을 해보세요.”

“커플 상담은 좀….”

탐탁지 않은 표정으로 강동현을 보던 노여진은 이쪽에서 요구하는 해답은 안 내놓고 갑자기 강동현에게 다른 충고를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여성분을 위해서라도 도은혁 씨는 더 이상 그 여성분이랑 뭘 어떻게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안 하는 게 맞는 거 아닐까 싶습니다. 의사-환자 조약 때문에 누구한테 말도 못 하겠지만… 정말 깜짝 놀랐네요. 드라마나 영화에서 나오는 거랑 배우 본인이 아무리 다르다지만.”

“…….”

그 조약이 있어서 진짜 눈 딱 감고 처음부터 끝까지 솔직하게 말해버렸다. 계약서까지 써서 만졌다는 것부터 술 먹고 그랬던 것도. 최근에 있었던 일까지 상대의 성별만 빼고 토씨 하나 빼먹지 않고 다 얘기했다. 그랬더니만 의사는 하라는 말은 하지 않고 저런 말을 했다. 저런 말에 꿈쩍을 할 강동현은 아니었지만 불쾌하기는 했다.

“…그래도… 걔도 어느 정도 저한테 마음이 있다는 건 확실합니다.”

“그게 뭔지 아세요?”

의사가 한심하다는 어조로 물었다.

“매맞는아내증후군이라는 겁니다. 가스라이팅이라는 말도 있구요. 좋게 말하면 남자들 중에 괜히 결혼하자, 결혼하자, 이런 말 많이 해서 여자 세뇌시켜 결혼하는 거랑 비슷한 겁니다. 피콕킹이라는 말도 있죠. 결국 여자한테 ‘너한테 나만 한 남자는 없다’는 식으로 여자를 착각하게 해서 넘어가게 만드는 수작인데. 착하고 순한 여자들한테는 이것만큼 쉽게 자빠뜨리는 방법이 없거든요. 미치고 팔짝 뛸 일이죠. 게다가 그 여자분은 도은혁 씨가 첫 상대라구요? 어휴, 같은 여자라서 그런지 천불 나네요.”

“…….”

“그리고 여자분이 계속 예민하다고 하는데 아니, 이건 예민하게 구는 게 아니라 도은혁 씨가 하도 개새… 개같… 아니….”

“…그냥 편하게 말씀하셔도 됩니다.”

“개새끼처럼 구니까 정당하게 자기방어를 하는 건데 거기다가 대고 예민하다고 하는 거 자체가 가스라이팅입니다. 가스라이팅이 뭔지 압니까? 이 램프가 이렇게 밝은데 계속 여자한테 ‘안 밝은데? 어두침침한데?’ 이런 말을 맨날 해서 여자들이 스스로의 판단 능력에 대해 의심을 가지게 해서 미치게 만드는 게 가스라이팅입니다. 스스로의 판단 능력에 대해 자신이 없어진 여자들은 남자들에게 의존하게 되죠. 남자들이 여자들 마음대로 조종하고 싶어 할 때 많이 쓰는 방법이구요. 잘 아시다시피 효과는 좋습니다.”

“…….”

“게다가 본인 입으로도 상대를 휘두르고 싶고 괴롭히고 싶다는 생각이 계속 들고 그래서 그렇게 괴롭히셨다면서요? 말이 좋아서 ‘괴롭힌다’지 괴롭힘당하는 당사자 입장에서 보면 좋아한다면서 괴롭히는 게 제일 나쁜 놈입니다. 아동학대에서 부모들이 꼭 ‘널 사랑해서 이러는 거야’라면서 애들 패죠? 그거예요. 그것 때문에 그 아동은 평생 고민합니다. 정말로 날 사랑한 걸까, 아닌 걸까. 사랑이라는 말, 정말 달콤하거든요. 남자는 정말로 날 사랑하는 거고, 때리는 건 정말 내가 잘못해서 그런 거라고 생각하면 세상에 아무런 문제도 없으니까요. 그러면서 맨날 맞는 겁니다. 전 그거 사랑이라고 인정 안 합니다.”

“…….”

“그리고 도은혁 씨도 그 여자분한테 대놓고 도은혁 씨 좋아하고 있다고 세뇌시키려고 했지 않습니까? 도은혁 씨가 하도 억지를 부리니까 맘 약한 그분이 자꾸 휩쓸린 거고 엄청 후회도 하고 계신 거 같은데 거기다 대고 니가 나 좋아하는 거라고 말하면, 그게 결국 니가 처신을 똑바로 못했으니까 나 같은 놈이 엮이는 거 아니냐는 말밖에 더 되냐구요. 왜 본인이 잘못 해놓고 상대를 탓합니까? 이기적이어도 정도가 있어야죠.”

한 타임에 30만 원이나 내는 상담인데 혼만 엄청나고 있었다. 강동현은 한숨을 쉬면서 물었다.

“그러니까 걔가 절… 싫어한다는 말씀이십니까?”

노여진이 픽 웃었다. 강동현이 그녀의 눈을 쳐다보았다.

“무서워할 겁니다.”

“…….”

강동현은 말을 잃고 잠깐 입가를 손으로 감싼 채 생각에 빠졌다.

“…그러면 걔는 저랑 왜 같이 살았던 겁니까? 그때는 왜 저랑 잘 지낸 거구요.”

“얹혀사는 주제이기도 하고 보니까 싸우고 갈등 일으키고 이런 걸 굉장히 싫어하는 분 같은데… 애초에 끌고 들어간 건 도은혁 씨 아닙니까? 그냥 체념한 거죠.”

“그때는 억지로 한 건 절대 아니었는데 왜 저랑 했을까요?”

이런 말은 사실 그와 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는 절대 얘기하지 않았다. 의사는 한숨을 쉬었다.

“그런데 기대를 걸지 마세요. 다 착각입니다. 말씀하신 분 같은 경우는요. 위계에 의한 상황이나 억지, 불합리한 상황에서 갈등을 일으키느니 본인이 손해를 보고 말자는 성격이고, 보니까 도은혁 씨가 그 부분을 더 심하게 만들었어요. 네? 도은혁 씨 없었으면 그 변태 스토커한테 그런 식으로 여자분 당하시는 일 없었어요. 아시겠어요?”

강동현은 인상을 찌푸렸다. 두 눈을 한 손으로 꾹 누르고 입 안으로 욕지거리를 삼켰다.

“…그럼 제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는 말인가요?”

“아니, 제 말 뭘로 들으셨어요? 그 여자분이랑은 인연을 끊어주는 게 그분을 위한 거라니까요?”

“네. 그건 알겠습니다… 그거 말고 그냥…. 걔한테 뭘 해주는 게 좋을까요? 집이나 차나… 달라고 하면 다 줄 수 있는데… 안 받으려고 할 것 같고… 꽃은 괜찮을까요? 제가 주는 거 싫어하면 다르게 줄 수도 있으니까요. 별로예요?”

“…….”

노여진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자신이 어떻게 해야 할지 물어보러 다니는 강동현이었다. 그다지 도움이 될 만한 말들이 없었다. 그래서 약간 위험하긴 했지만, 또 김태형의 가게 로 와서 그에게 조언을 구하기로 했다.

“이제 니 연애상담은 안 한다.”

“형…….”

강동현이 앉자마자 술술 입을 터니 김태형이 딱 잘라서 말했다. 강동현은 포기하지 않았다.

“나 좀 도와줘.”

“너 도와주면 나도 천하의 몹쓸 놈 되게 생겼는데 뭘 도와줘?”

김태형은 그렇게 선을 그으려고 했다. 아무리 모르는 여자이고 이쪽이랑 친분이 있다지만 그래도 되는 게 있고 안 되는 게 있는 법이었다. 강동현이 그 여자라는 사람한테 하고 있는 짓은 어디 걸리면 잡혀갈 수준이었다.

“나… 내가 그렇게 나쁜 짓 하는지도 몰랐어….”

“야, 그 말이 제일 나쁜 놈 같은 거 아냐?”

강동현은 술병을 바라보다가 치웠다. 나을 때까지 술은 끊는다. 강동현은 괴로움에 인상을 찌푸리고 두 손으로 얼굴을 한 번 문지르고 턱밑에 깍지를 껴 받쳤다.

“그래도… 같이 지낼 때… 나 좀… 행복했는데.”

그렇게 만족스럽게 지낸 날은 평생 없었다. 영지랑 한창일 때는 일이 문제가 있었고 일이 한창일 때는 몸과 마음이 여유가 없고 영지와도 서먹해졌다. 하지만 그와 지냈던 고작 그 몇 주는 전부 좋았다. 다른 생각은 아무것도 안 들 정도였다. 아쉽다고 생각되는 게 하나도 없었다. 일이 끝나면 부리나케 달려와서 그를 보고….

“근데 그때 걔는 억지로…. 아, 진짜 억지로는 아닌데….”

의사의 앞에서는 의연한 척 있었으나 은근히 듬직한 인생 선배 같은 형 앞에 있으니 변명조가 되었다.

잘해 주진 못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처음을 생각해보면 명확했고 그 뒤로도… 황경호는 언제나 강동현을 거부만 했다. 아마 강동현이 정말 좋았더라면 그러지는 않았을 것이다. 강동현은 그가 자신을 좋아하고 있다고 확신하고 있었지만, 정말일까? 그가 솔직하지 못해서라고? 아닐 것이다… 아닐 것이다. 설사 좋아한다고 치더라도 그가 그렇게 행동하는 것에는 이유가 있었다. 그런데도 강동현은 항상 자신에게 유리한 면만 보려고 하고 그에게 강요했다.

“진짜… 내가 그때 몸만… 아니… 하아…….”

애초에 몸만 노리지 않았으면 괜찮았을까? 그러면 만나지도 못했으려나. 아니, 그래도 만났겠지. 만났을 것이다. 몸만 멀쩡했더라도 그렇게 급하게 굴지는 않았을 텐데. 결국 다 망했다.

“내가 뭘 해줘야 좋아할까….”

강동현이 그렇게 중얼거리자. 김태형은 쯧쯧 혀를 찼다. 연애 상담은 안 해준다더니만 하고 있는 꼴을 보니 잔소리를 하고 싶어졌나 보다.

“넌 멍청한 것도 아닌 것 같은데 계속 뭘 돌아가는 거 같아. 조르고 억지 쓰고 여자부터 어떻게 하려고 하지 말고 그냥… 진짜 진지하고 진심으로 널 좋아하고, 사랑하고, 나한테 한 번만 기회를 더 준다면 정말 평생 소중하게 하겠다, 이 정도는 말하라니까, 확. 그러고도 거절하면 그냥 그 여자 인생에서 꺼져줘. 그게 매너지.”

“…….”

“그리고 그 정도 마음도 아니라면 더 이상 괴롭히지 좀 말고….”

“…….”

오늘은 죄다 혼내는 사람들뿐이었다.

*

강동현도 바보가 아니므로 당연히 연락은 끊기지 않게 하고 있었다. 전에 그가 집에서 나갔을 때는 본인도 머리가 터질 것 같아 미루었지만, 이제는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다. 그가 그 짧은 시간 동안 마음 정리를 싹 해버린 걸 보고 내심 좀 겁이 났다. 연락을 하는 것도 전처럼 새벽에 마구 전화를 걸거나 하지 않도록 조심하고 있었지만, 가끔 깜박하고 걸기도 했다.

“뭐해?”

[…지금 몇 신 줄 알아..?]

짜증이 가득한 음성이었다. 강동현은 아차 하고 휴대폰 화면을 확인했다. 두 시 반.

“아, 미안…… 촬영하느라 깜박했네. 오늘 전화 못 해서.”

[……]

“졸리면 바로 끊을까?”

[…할 말 있어?]

“아… 내일. 나 아마 촬영 없을 것 같은데 잠깐 보자고.”

<시크릿 블러드>가 주말 드라마라 방영일인 토요일과 일요일은 촬영이 없는 편이었다. 대체로 월요일도 대본이 나오지 않는 경우가 있어서 오프일 때도 있었지만 복불복이다. 그럴 때는 건강 증진을 위하여 이 병원, 저 병원을 다 다니고 있는 강동현이었다.

[……]

강동현은 앉은 의자에 등을 기대며 눈을 감았다. 그리고 귀가 간지러울 정도로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싫어?”

저번에 차에서 그러고 5일 정도 지났다. 일요일이라 분명히 쉴 것이다.

“어디 가고 싶은데 없어? 놀러 가자. 서울 근교면 어디든. 맛있는 것도 먹고.”

강동현이 섹스 어필이 굉장히 강해 지금까지 그걸로 황경호를 홀랑 벗겨 먹었었지만, 사실 그도 한국적 유혹의 정석 정도는 잘 알고 있었다. 데이트의 정석이라고 할 수도 있다. 좋은 데를 데리고 가고 맛있는 걸 먹인다.

[……]

“할 거 없으면 가자. 응? 나도 오랜만에 바깥 바람 좀 쐐보자.”

내내 지방 촬영도 하고 해서 거짓말이긴 했지만 강동현은 그렇게 말했다.

“내일 11시쯤 데리러 간다?”

[……]

“아, 근데 지금 니 집 어디 있지? 전에 살던 데 근처면 역으로 데리러 갈까?”

황경호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하지만 강동현은 슬슬 웃음이 나왔다. 가기 싫으면 가기 싫다고 처음부터 말했을 것이다.

“나 좀 만나줘. 보고 싶으니까.”

[……]

“아, 나 촬영 들어간다. 내일 봐. 잘 자. 먼저 끊어.”

황경호는 전화를 끊었다. 늦은 시간이라 좀 찌뿌둥해서 기지개를 일단 폈다.

그러니까 강동현이 데이트나 연애에 대해서 모르는 것이 아니었다. 강동현은 오랜 연애 경험도 있었고 그런 건 아주 빠삭했다. 돈이 없던 학생 시절부터 있는 시절까지, 차 없던 시절부터 차가 있는 시절까지 한 여자랑 쭉 연애를 했기 때문에 거의 모든 종류의 데이트 코스에 정통했다. 하지만 황경호와는 모든 순서가 뒤죽박죽이었던 데다가 처음부터 제사보다 잿밥에 정신이 팔리다 보니… 좋아한다고 해놓고도 함께 해서 가장 좋은 게 끌어안고 있는 거라 나머지는 전부 잊어버렸다.

아니, 솔직히 연애적인 부분뿐만 아니라 그냥 그와 서로 눈만 바라보고 있어도 일이고 뭐고 전부 잊어버리고 정신이 완전 나가는데. 정석적인 코스고 나발이고…. 게다가 몸이 아파서 그런 부분을 밀어붙이면서 아무런 고민을 하지 않는 바람에 계속 문제가 적체되긴 했지만, 솔직히 강동현이야말로 아무나와는 절대 못 자는 성격이었다. 그런 비위가 못 되었다. 아무리 예쁜 여자고 뭐고 마음 안 가면 절대 안 했다. 강동현은 평생 그런 유혹 속에서 살아왔었지만 그런 쪽은 항상 대쪽 같았다.

그런데 걔는 몇 번 보지도 않았는데 바로 그런 마음이 들었단 말이다. 그 당시 좀만 여유가 있었어도 알아차릴 수 있었을 텐데. 게다가 그때는 여자친구도 있었고, 그는 남자였고 여자친구와는 완전히 정반대의 성격에다가 느끼는 감정의 종류도 완전히 달랐다.

전 여자친구와는 처음부터 끝까지 연인이자 동지였고 친구이자 파트너였다. 서로를 향한 이해를 바탕으로 평온하고 안정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는 몸부터 끌렸다. 해보지도 않고 뭘 처음부터 그렇게 알아차렸는지 알 수 없었다. 본능적이었다고 밖에 설명할 수 없었다. 강동현이 생각하는 사랑의 정의와는 너무 달라서 처음엔 사람들이 흔히들 말하는 잠시 잠깐의 성욕이나, 권태기에 따른, 상대가 누구여도 상관없는 바람기인 줄 알았다. 하지만 애초에 그렇게 사랑하던 여자친구도 제끼고 그밖에 되지 않는다는 시점에서 생각을 좀 똑바로 해봤어야 했는데 그냥 편견과 아집의 관성을 그대로 내버려 두었다. 고민이 부재하니 그와의 사이는 언제나 살얼음판을 걷는 듯 살벌했는데도 떨어질 수가 없었다.

김태형의 말이 무슨 말인지 이제 알 수 있었다. 그렇게 수많은 사랑 이야기를 연기 해놓고도 사랑의 상대가 다르면 사랑 자체도 달라질 수밖에 없다는 걸 얼마 전에야 알았다. 강동현은 너무 오랫동안 한 여자만 사랑해와서 그것이 다를 수 있다는 사실 자체를 전혀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강영지는 강동현에게 남자로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룰을 거의 모두 정해주었다. 성숙하지 않을 때부터 성숙하고 나서의 사랑까지 모두 경험하게 해주었다. 애정과 책임감을 느끼게 해주었다. 그녀는 강동현이 무언가를 판단하는 기준이 되어주었다. 아마 앞으로 어떤 인생을 살아가더라도 그녀가 강동현의 안에 만들어준 기준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런 강동현에게 황경호는 그녀가 설정해놓은 모든 기준에 가장 반대, 아니 아예 누군가 강동현이 가장 모르는 걸 전부 담아 내민 판도라의 상자 같았다. 그의 생각, 두려움, 사고방식, 삶의 방식, 체질… 전부 모르겠고 잘 이해가 되지 않는 것투성이인데, 그래서 더 마음이 끌리고 눈길이 갔다. 자꾸 건드려서 반응을 살피고 싶었다. 강동현이 잘 이해하지 못하는 그 반응이 나오길 바라며 말이다. 게다가 피부, 체취, 안는 느낌, 바라보는 표정, 눈빛, 목소리, 신음, 감도, 촉감, 조임…. 이런 것도 강동현이 전혀 모르는 것들이었다. 강동현은 세상에 그런 쾌락이 있는지 전혀 몰랐다. 알지도 못하고 기대도 해본 적이 없기 때문에 미친 듯이 빠져들기만 했다. 매일이 달랐다. 항상 새로웠다.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아랫배가 당겼다.

강동현이 딱히 다른 사람들이 하는 것을 다 따라 해야 안심이 된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자존감이 낮은 인물도 아니었고 자신이 한 번 결론을 내렸으면 거기에 이견을 달지 않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황경호를 좋아한다고 결론을 내리고 나서는 뒤돌아보지 않았었다. 다만 본인이 이 관계에 너무나 만족하고 있었기 때문에 여기서 뭘 더 어떻게 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만약에 그가 불만을 가지고 무언가를 요구해 왔다면 당연히 들어줬을 것이다. 그가 그런 말을 전혀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깜박했다. 그와 끌어안고 있으면 말 같은 건 전부 의미가 없게 느껴질 때가 많아서 말이 중요할 때가 있다는 걸 잊어버리고 말았다.

그러니까, 강동현은 자꾸 잊어먹었다. 그와 함께하지 않은 모든 시간을 말이다.

강동현은 항상 자신은 영지와 헤어지면 절대 영지 같은 여자는 다시 만나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번에도 비슷한 생각이 들었다. 아마 남자든 여자든, 그와 같은 사람은 앞으로 두 명은 없을 것이다.

강동현은 새벽에 집에 도착하자마자 딴짓은 하지 않고 바로 씻고 자고 아침에 일어나서 약속 시간에 좀 이르게 신림역에 도착했다. 그리고 딱 11시가 되었을 때 전화를 했다.

“어디야?”

[5번 출구.]

“알았어. 거기 서있어. 차 돌려서 갈 테니까.”

강동현은 안에서 손을 뻗어 조수석 문을 열어주었다. 황경호는 그 문을 잡아 열고 조수석에 탔다. 힐끗 표정을 보니 복잡해 보였다. 강동현은 기어를 주행으로 맞추었다. 일단 나온 걸로도 반은 온 거니 그냥 손을 뻗어서 그의 왼손을 잡았다.

“너 게 좋아해?”

“어? 어….”

황경호는 강동현이 자연스럽게 손을 잡으니 뿌리치지도 못하고 그 손만 쳐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강동현이 자신의 시선을 인식하는 걸 눈치채고 얼굴을 좀 붉히고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강동현은 모르는 척 깍지를 껴서 더 꽉 잡았다. 그리고 엄지로 그의 피부를 슬슬 문지르면서 물었다.

“뭐 했어?”

“어?”

“그동안 뭐 했냐고.”

“그냥 일하고… 태형이 형한테 요리도 좀 배우고….”

황경호는 강동현의 질문에 순하게 대답해주었다. 아무리 그래도 모질지는 못해지는 성격이다.

“너 그러다 형 제자 되겠다.”

“그러게… 안 그래도 형한테 미안해서 강습료라도 내고 싶더라고.”

“니가 거기 가서 팔아준 게 얼만데.”

“형 항상 내는 돈보다 훨씬 많이 주잖아. 엄청 미안한데 항상….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그 형도 물장사가 사람이 좋아서… 됐어. 내가 비싼 건 다 팔아주니까.”

“…….”

강동현은 한 시간쯤 운전을 해서 경기도 쪽으로 빠지더니 웬 경치 좋은 곳에 있는 한옥집으로 데리고 갔다.

“어머~ 강동현 씨! 맞죠? 또 왔네.”

“아, 네. 여기 너무 맛있어서 또 왔어요.”

“친구랑?”

“네.”

“안으로 들어와요. 나중에 갈 때 사진 한 장만 더 찍어줘요.”

“네. 당연하죠.”

들어오면서 슬쩍 보니까 강동현이 사인을 해놓은 액자도 보였다. 황경호는 그냥 조용히 그의 뒤를 따라갔다. 안내된 방은 문이 열려 바깥의 개울이 다 보이는 곳이었다.

“이거 제일 큰 걸로 한 마리요.”

“네.”

강동현은 선글라스를 벗었다. 지금 대놓고 데이트라고 티를 팍팍 내고 싶었는지 훤칠하게 잘 입고 온 강동현이었다. 확실히 연예인이라서 일반인은 못 입을 것 같은 옷도 걸쳐 놓으니 멋있다. 황경호는 그런 그를 그렇게 많이 보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서울 아니라서 덜 부담스럽지?”

“나야 뭐… 니가 부담스럽지.”

“…….”

“…그렇게 쳐다보지 좀 마.”

황경호가 결국 핀잔을 주었다. 강동현이 웃었다. 그리곤 뻔뻔하게 말했다.

“내 눈으로 내가 보고 싶은 거 보겠다는데.”

그러니까 황경호가 인상을 찌푸리며 그를 한 번 보았다가 창밖을 보았다. 강동현이 아차 하고는 물었다.

“금방 그런 것도 싫어? 앞으로 하지 말까? 응?”

“…됐어.”

“싫고 좋은 건 확실히 말해. 나중에 참다가 빡치지 말고.”

“그럼 하지 마.”

“알았어.”

강동현은 웃으면서 선선히 그렇게 대답했다. 황경호가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쳐다보지 말라고.”

“아…. 그쪽이야?”

강동현은 흠… 하면서 등받이에 등을 기대며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몇몇 간단한 음식들이 나오고 곧 메인인 킹크랩이 나왔다. 엄청나게 큰 게를 한 마리 쪄서 다 손질되어 살까지 잘 발라져서 큰 접시에 예쁘게 담아서 나왔다. 절대 둘이서 다 못 먹을 양이었다.

“먹자.”

강동현이 황경호의 접시에 몇 개를 먼저 놔주었다. 황경호는 일단 멈칫했다가 아무 말 없이 먹기 시작했다.

‘…맛있다.’

저번에 강동현이 엄청 비싼 라운지에 데리고 갔을 때도 느꼈지만 이런 건 진짜 맛이 다르다. 황경호가 이때까지 ‘맛있다’라고 생각했던 기준을 몇 단계씩 높여버렸다. 황경호야 먹는 낙 하나로 사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금세 먹는 거에 집중하게 되었다. 처음엔 엄청 양이 많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순간 모자라면 어쩌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솔직히 만나러 나올 때까지만 해도 ‘내가 또 뭐하고 있는 짓인가’ 싶은 생각에 회의감이 많이 들었는데, 이거 먹으러 온 거면 조금 용서가 된다 싶을 정도였다. 그렇게 게딱지 비빔밥까지 해서 배가 터져서 죽을 것 같다 싶을 때까지 먹었다.

“맛있었어?”

“어….”

그리고 계산하는 걸 보니 가격이 진짜 헉 소리가 나왔다. 약간 안절부절못해 강동현의 얼굴을 보았으나 그는 전혀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이었다. 강동현은 가게 주인과 종업원들이랑 사진을 찍고 사인까지 한 번 더 해주고는 밖으로 나갔다.

“커피 마시러 갈까.”

그리고 운전을 해서 구불구불한 길을 어디까지 올라가나 싶을 때쯤 경치가 기가 막히는 곳에 있는 모던한 건물 하나가 나왔다. 3층짜리 건물 전체가 커피숍이었다. 안에 들어가니 전면 창을 전부 열어놓아 앞의 저수지와 개울, 산까지 한눈에 보였다. 커피가 한 잔에 만 원이나 한다… 강동현은 무슨 세트를 시켜 케이크에 과일에 아이스크림까지 얹은 접시를 앞에 두고 아이스아메리카노 두 잔까지 해서 2층 창가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날씨가 맑아서 밖의 경치가 정말 아름다웠다.

‘차 있으니까 이런 데도 올 수 있구나.’

황경호야 운전면허증도 없었으므로 딱히 별생각 없이 살았는데 뭔가를 가지고 가지지 않고가 사람이 누릴 수 있는 걸 이렇게 차이 나게 만든다는 것을 새삼 느끼곤 기분이 이상해졌다. 그리곤 물끄러미 강동현을 보았다.

그의 집이나 그가 황경호한테 주는 거나 그가 황경호를 데리고 가는 곳이나 다 그런 위화감을 주곤 했다. 너무 좋은 것들인데 이렇게 좋은 게 있다는 것조차 지금까지 모르고 살았다는 이상한… 거리감.

‘하긴… 그건 다른 것보다도 본인이 제일 크지.’

사실 그 모든 것들 중에서 강동현이 제일 비싸고 좋은 거였다….

“오랜만에 나오니까 나도 좋다… 아, 나 진짜 3년? 와, 4년은 일밖에 안 했다….”

강동현이 새삼 감회가 드는지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바깥 경치를 구경했다. 황경호는 커피를 마셨다. 시원하고 맛있었다. 농도도 맛도 딱이었다. 입 안이 상쾌해진다.

“…왜 그렇게 일만 했어?”

황경호가 물었다.

“응? 뭐… 기세라는 것도 있고. 내가 처음에 데뷔했을 때 좀 문제가 있어 가지고. 그때 좀 고생해서 그런지 잘 될 때 확 자리를 잡아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

강동현이 대답했다. 황경호는 그의 첫 데뷔 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잘 알고 있었다. 들어가서 성인 아역으로 꽤 주목을 받을 때쯤 소속사가 망했다.

“그리고 나 일하는 거 진짜 좋아하고. 재미있어.”

“그래?”

“어. 사람들이랑 다 같이 일하는 것도 좋고 배우는 것도 많고. 연기하는 거 재미있으니까.”

웃기게도 서로에 대한 얘기를 하지 않으니 얘기가 통하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황경호는 그래도 일단 ‘배우’ 강동현에 대해서는 관심이 많기도 했고 말이다. 그렇게 해가 질 때까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얘기를 했다. 강동현이 연예계에 있었던 사건사고들 중에 재미있는 것들을 말해주는 걸 듣기도 하고 다른 얘기를 하기도 했다.

“이제 마감 시간입니다.”

“아… 진짜요?”

강동현이 시계를 보았다. 그리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8시였다.

“우리 저녁 건너뛰었네. 배 안 고파? 서울 들어가서 뭐 먹을까?”

“지금은 안 고픈데.”

저녁에 선글라스를 끼면 눈이 피로한지 강동현은 주머니에서 마스크를 꺼내서 턱밑에다가 걸치고 밖으로 나왔다. 그러다가 문득 어딘가를 보았다.

“왜?”

“……아니.”

그리고 차로 가서 타더니 한숨을 쉬었다. 황경호도 차에 탔다. 강동현은 자기 옷에 꽂혀 있는 선글라스를 갑자기 황경호의 머리에다가 씌웠다.

“금방 파파라치는 아니었던 거 같긴 한데… 너도 나 만나려면 선글라스는 필수다….”

“…….”

“미안.”

강동현은 차를 출발시켰다.

“그래도 아마 그런 쪽으로 들키진 않을 거야. 연예인들 중에도 남자들끼리 대놓고 같이 산다고 방송 타도 그냥 친구라고 하는 사람들도 많으니까. 연예인끼리 사귀는 거 아니면 파파라치들도 관심 없고.”

“…….”

“걱정돼?”

“…아니.”

황경호는 고개를 돌렸다.

“너 밖에서도 집적거린 적 많은데도 지금까지 아무것도 안 뜨는 거 보면 벌써 파파라치들이 너 임포인 거 아는 거 아냐? 애저녁에 포기했을 거 같은데, 니 스캔들.”

황경호가 직구를 날렸다. 강동현이 입을 떡 벌리면서 황경호를 돌아보았다.

“그, 그런 거야?”

“너 같은 애들 파파라치 상시 붙어 다니는 거 아니었어? 나 너 파파라치 때문에 고생하는 거 한 번도 못 봤어.”

“…….”

분명히 <서리>로 확 뜨면서부터는 파파라치에 대한 걱정으로 전 여자친구도 제대로 못 만나고 했었다. 하지만 <연애출사표> 찍을 때부터는 병원을 다니기 시작했는데… 그러게. 그때는 파파라치 걱정을 하나도 하지 않았다. 게다가 중간에 <코드명:울프> 찍고 나서 터진 스캔들도 강동현 쪽 파파라치가 아니라 상대편 파파라치에 의해 터진 것이었다. 강동현은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미치겠다….”

황경호는 속에 내장되어 있는 직업정신 때문에 자동으로 위로의 말을 건넸다.

“괜찮아. 나으면 되지… 남자는 고쳐 쓰는 거 아니라곤 하지만.”

강동현이 약간 화가 나서 오른손으로 그의 옆구리를 확 잡았다.

“아앙……!”

황경호가 입을 확 막았다. 그리고는 갑자기 기겁을 해서 강동현의 어깨를 주먹으로 쳤다.

“운전해, 운전!”

강동현은 정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

“…….”

황경호는 좀 창피해서 약간 화난 얼굴로 창밖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고 강동현도 말없이 운전만 했다. 아까 서울을 나올 땐 남의 손을 지 물건처럼 쪼물딱거리더니 이번엔 털끝 하나 손대지 않았다.

“…배는 안 고파? 저녁 안 먹었는데….”

“…내일 출근해야 하니까 이제 들어가야지.”

“어….”

강동현은 얌전히 차를 관악구 쪽으로 돌렸다.

“집 어딘데? 집 앞까지 데려다줄게.”

“싫어. 여기 앞에서 내려줘.”

“왜?”

“…이번 집은 그렇게 나가기 싫어.”

“어…….”

강동현이 물끄러미 황경호의 얼굴을 보았다. 황경호가 얼굴을 확 붉혔다.

“아니…. 너랑 할 생각도 없지만… 혹시 모르니까, 아니! 아니…. 어쨌든….”

“어…….”

“…나 갈게.”

황경호는 갑자기 너무 창피해져서 얼른 문손잡이를 잡았다. 강동현이 깜짝 놀라서 그의 손목을 잡았다.

“아, 잠깐만… 뭘 그렇게 급하게 가.”

황경호가 어쩐지 경계심 가득한 얼굴로 그를 돌아보았다. 강동현은 그의 손목을 약간 잡아당겨 그를 바로 앉게 했다.

“오늘 괜찮았어?”

“…뭐가.”

“나.”

강동현은 황경호의 손을 잡고 들어 올려 손가락에 입술을 눌렀다. 황경호는 움찔했다.

“다음엔 어디 갈까? 가고 싶은데 있어?”

강동현이 그대로 눈을 마주치며 물었다.

“…몰라.”

“음… 너 바다 좋아하니까… 강릉 갈까? 거기 횟집도 맛있는 데 있고…. 아, 근데 내가 아직 촬영 중이라서… 거긴 촬영 끝나고 가자. 다음 주도 일요일 비워. 알았지? 어디 갈지는 내가 생각해 놓을 테니까.”

차에서 내리고 나서 황경호는 어쩐지 이게 다 뭔가, 라는 생각이 들어서 한숨이 나왔다.

그가 만나자고 했을 때, 만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울면서 도망치기는 했지만, 그는 황경호에게 좋아한다고 다시 고백을 했고 황경호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오히려 황경호는 그가 오늘 그래서 어쩔 거냐는 대답을 재촉하지 않아서 다행이라는 생각마저도 들었다. 분명히 거절을 할 생각이었는데도 그랬다.

물론 강동현이 오늘 뭘 하려고 한지는 알겠다. 황경호가 어차피 섹스 밖에 원하는 걸 아니냐고 따졌으니 제대로 ‘연인’다운 짓을 해보려고 한 것이다. 대학생 때 여자랑 데이트를 몇 번 해본 적은 있었으나 다들 어린 학생들이었을 때라 거창한 것은 한 번도 해보지 못했었다. 오늘 강동현이 데리고 다녀준 데는 눈도 입도 코도 귀도 전부 즐거운 곳이라서 깜짝 놀랐다. 처음엔 부담스러울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그렇지도 않았다. 그리고 대화도 생각보다 자연스러워서 놀랐다.

나중에 돌아갈 때는 어색해서 설마 이대로 섹스라도 하자고 하는 건 아니겠지, 라는 의구심도 잠깐 들긴 했지만, 전혀 그런 기색은 아니었다. 하긴… 그놈의 섹스 때문에 얼마나 서로 힘들었던가. 그도 안다면 다시 함부로 그런 제안을 하진 않을 것이다.

그리고 만약에 하지 않아도 된다면 그가 어떻게 나올지 궁금하기도 했다. 만약에 또 그가 함부로 그런 것만 요구해온다면 그때는 정말 그만두어도 좋을 것이다. 하지만 그전까지는….

‘이런 것도 괜한 기대일까….’

황경호는 그렇게 고민하면서 천천히 집을 향해 걸어갔다.

*

황경호는 창밖을 보았다. 일요일인데도 일찍 일어나서 아침밥을 먹고 씻고 챙겨서 노트북으로 인터넷을 하고 있는데 슬슬 비가 오기 시작했다. 오늘은 영 날이 아닌 것 같다. 아직 10시밖에 안 됐고… 황경호는 강동현에게 전화를 했다.

[응.]

“지금 비 오는데. 어디 갈 거야?”

[비 오면 어때서. 가자. 지금 출발한다?]

“응….”

날이 맑으나 흐리나 그게 무슨 상관이냐는 투다. 강동현은 금방 도착해서 다시 전화를 했다. 황경호는 우산을 들고 역 앞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그의 차에 탔다.

“진짜 갈 거야?”

“응. 왜?”

강동현이 차를 출발시키며 되물었다. 강동현은 탁 트인 바다를 보고 싶다더니 동해를 가자고 했다. 일 끝나기 전에는 멀리 못 갈 것 같이 얘기하더니만… 이렇게 비 오는 날에 가는 게 무슨 의미가 있나 싶었지만 별로 상관이 없는 투였다. 2시간이 넘게 비 오는 도로를 운전해야 하는데.

“미안….”

“어? 뭐가?”

강동현이 황경호의 손을 만지작거리며 물었다.

“아니… 나 운전도 못 하고. 너만 항상 하니까.”

“괜찮아.”

강동현이 별걱정을 다 한다는 듯 픽 웃었다.

비가 차 지붕을 꽤 세게 두드렸다. 오후 1시도 되지 않았는데도 먹구름이 가득 껴 있었다. 황경호는 역시 오지 말자고 해야 했나 하고 후회했다. 열심히 운전해서 온 값어치를 못할 것 같은 기분이었다. 안 그래도 바쁜 놈인데….

“밥 먹을까?”

강동현은 동해에 들어오자 바로 밥집을 네비에 찍어서 운전을 했다. 이번에도 들어가니 뭔가 으리으리한 음식점이 나왔다. 인테리어가 지방에 있는 가게 치고 꽤 좋은 편이었다. 그렇게 맛있는 걸 먹고 둘 다 사탕을 하나씩 빨면서 다시 차에 탔다. 그리고 바다를 보러 향했다.

해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먹구름이 짙게 깔렸지만, 안개는 없어 먼바다까지 잘 보였다. 창문에 물방울이 빗금을 그으며 떨어졌다. 파도가 치는 물의 표면에도 빗방울이 원을 그리고 있었다. 우르릉. 천둥이 치는 것 같은 파도 소리와 잔잔한 빗소리가 어우러졌다. 황경호는 이런 광경을 한번도 본 적이 없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둘은 아무 말 없이 차 안에 앉아 밖을 보고 있었다.

같이 있는 사람 사이에 말이 없으면 언제나 불편한 느낌이 들었다. 이번에도 처음엔 그랬는데, 강동현의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을 힐끗 보니 그러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그래서 그냥 어깨의 긴장을 풀고 차 시트에 몸을 뉘인 채 밖을 보았다. 중간에 창문을 조금 열고 빗방울을 손으로 맞아보았다.

날이 밝으면 밝은 대로 우울하고 흐리면 흐린 대로 우울한 적도 있었다. 비가 오면 습하고 차갑고 축축 처져서 그렇게 좋아하지 않았다. 하지만 오늘은 습하고 서늘한 느낌이 사람을 차분하게 하는 것 같아서 안정감이 들었다. 파도 소리와 빗소리가 꽤 큰데도 고요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런 평온한 마음을 가져본 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다.

비가 오는 날을 좋아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생각할 때 강동현이 물었다.

“비 오는 바다도 좋다. 그치?”

“응.”

황경호가 대답했다. 그리고 또 둘 다 별말이 없었다. 2시간이 넘게 운전을 해와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냥 차 안에 앉아서 밖을 보고 있다니. 황경호는 이런 낭비를 원래는 좋아하지 않았다. 아무도 없는 해변에 차가 거의 달리지 않는 도로. 그 옆 주차장에 차를 대고 가만히 바다를 보고 있는 두 사람이었다. 아무도 없었다. 둘밖에 없었다. 강동현이 황경호의 손톱을 만지작거리며 유행곡을 가볍게 허밍 했다. 손톱이 간지럽고 귀도 간지러웠다.

몇 번이고 주저하다가 그의 얼굴을 힐끗 보았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차창에 팔꿈치를 대고 얼굴을 살짝 괴고 정면만 보고 있던 그가 허밍을 멈추고 황경호를 돌아보았다. 눈이 마주쳤다. 황경호는 내심 놀라서 아닌 척 다시 정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강동현도 별말을 하지 않고 그대로 바다를 다시 보았다. 그러다가 또 뭔가 흥얼거렸다.

이번엔 영화나 다른 일을 같이 병행하지 않고 하는 드라마 촬영이라서 그런지 가끔 피곤해 보이기는 했지만 대체적으로 무난한 컨디션을 유지하고 있는 강동현이었다. 찍을 땐 밤샘 촬영이 많아서 힘들지만, 겨울이나 한여름 촬영 시즌이 아니라서 좀 낫다고 했다.

그렇게 10월 말까지 강동현이랑 거의 일주일에 한 두 번씩 서울 내나 서울 근교를 다니면서 소위 ‘데이트’를 했다. 점심, 저녁을 거쳐서 할 때가 많아서 맛있는 걸 잔뜩 얻어먹었다. 처음엔 상당히 부담스러웠는데 적응하고 나니까 아무 생각이 들지 않았다.

주로 서울 근교로 나갔고 영화도 한 번 보고 서해 쪽으로도 한 번 나갔다. 서울 내에 있는 한강이나 야경이 전부 보이는 진짜 비싼 레스토랑을 3개 정도 갔다.

솔직히 재미있었다.

그렇고 그런 일로 부딪치지 않는 강동현은 만나는 게 즐거운 남자였다. 활기차고 대화하는 재미도 있고 매력 있고… 그가 섹스어필 말고 다른 매력으로도 황경호를 꼬시려고 이러는 걸 알면서도 가끔 그냥 즐겁다고 생각될 정도였다.

그는 황경호가 부담스럽지 않게 하려고 그런 것인지 그냥 친한 친구 둘이서 놀러 다니는 것처럼 행동했다. 물론 차 안에서 가끔 손을 잡거나 머리를 만지거나 하긴 했지만 대체적으로 그랬다. 뭔가 딱히 재촉하거나 하지도 않았다.

“촬영은 언제 끝나?”

황경호가 물었다. 이 수제 아이스크림은 진짜 꿀맛이었다. 황경호는 먹기 전에 잘 사진을 찍어놓고 주석까지 달아놓은 뒤(먹은 장소와 카페 이름. 언젠가 다시 올 거다) 아이스크림을 먹기 시작했다.

“3주 정도 남았는데. 방영은 11월 말까지. 추가 촬영 없다면.”

“고생 많네… 그래도 니 말대로 진짜 안 추울 때 해서 다행인가 봐.”

“어. 겨울이나 한 여름 때는 의상 때문에 죽을 맛이야. 화장도 그렇고.”

“나도 이제 좀 살 거 같아. 에어컨 안 틀어서. 아니 양기도 부족한 남자들이 무슨 열이 그렇게 많은지. 말도 안 된다, 진짜. 10월 중순까지 내내 에어컨 틀었다니까.”

“…야, 일단 나도 환자 중에 하나니까 보통 명사는 좀 자제해줄래?”

강동현이 한숨을 쉬면서 그렇게 말하자 황경호가 웃었다.

“하하. 너 그러는 거 진짜 웃겨.”

그러자 강동현이 약간 인상을 찌푸리더니 갑자기 손을 뻗어서 황경호의 얼굴을 만졌다.

“너 내 앞에서 이렇게 웃는 거 처음이야….”

황경호가 깜짝 놀라서 그의 손을 살짝 밀어냈다.

“사람들 봐….”

카페 안의 조용한 소란스러움이 둘 사이를 지나갔다.

“…….”

“…….”

갑자기 어색해졌다. 금방까지 엄청 맛있던 아이스크림이 무슨 맛이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렇게 한참을 있다가 강동현이 먼저 입을 뗐다.

“일어날까…?”

“어….”

주차장으로 가서 차에 탔다. 10월의 마지막 날. 석양이 지고 있었다. 운전을 하고 있던 강동현은 손을 뻗어서 황경호의 손을 잡았다. 황경호는 움찔했다가 가만히 있었다. 손등으로 깍지를 껴서 잡아서 간혹 힘을 주어 주물렀다.

“나… 뭐 하나만 물어봐도 돼?”

강동현이 갑자기 입을 뗐다.

“어? 어….”

황경호가 얼떨떨하게 대답했다. 강동현은 어디 화보에라도 찍힌 것 같은 모습으로 가만히 정면만 응시하고 있었다.

“너 그때 왜 그렇게 울었어?”

“어? 언제….”

“그때. 너 집 나가고 처음 봤을 때 차 안에서. 내가 너 진짜 좋아한다고 나 마음대로 하라고 했는데 너 혼자서 울고 있었잖아.”

“…….”

“내가 너 좋아한다는 게 그렇게 싫었어?”

황경호는 그의 얼굴을 멍청하게 쳐다보고 있다가 그가 자신의 얼굴을 보자 고개를 돌렸다.

“대답해줘.”

“…싫은 게 아니라….”

그동안 즐거웠다. 사실, 진짜 즐거웠다. 황경호 혼자서는 절대 할 수 없는 경험들이었다. 새롭고 신기하고 좋은 것들로 가득 찬 시간들이었다. 누군가와 이렇게 친밀하다고 느낄 수 있는 시간을 보낸 것도 처음이었다. 완벽하게 의존적이었는데도 빚진다는 느낌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느껴질 뿐이었다.

하지만 세상에 빚지지 않고 거저 주어지는 것은 없었다. 결국 이것도 그런 것이었는데. 너무 즐거워서 깜박했다. 그는 강동현에게 대답을 해야 했다. 그래서 그를 받아줄 것인지, 말 것인지.

“무서워서….”

황경호는 뭐라고 할 말이 없어 솔직하게 말했다. 그렇게 말하자 갑자기 강동현이 황경호를 돌아보았다. 그는 약간 화가 난 것인지, 억울한 것인지 모를 얼굴이었다.

“내가? 내가 좋아한다는 게?”

“둘 다….”

“왜.”

“….널 믿을 수가 없어서.”

강동현이 황경호의 손을 꽉 잡았다.

“…….”

“…….”

그대로 아무 말 없이 차가 달려서 신림역 앞에 도착했다. 강동현은 차를 세우고도 황경호의 손을 놓지 않았다.

“그래서 지금은?”

“어?”

“지금은 어떤데. 나 아직도 무서워? 못 믿겠어?”

황경호는 대답하지 못했다. 강동현은 황경호의 손을 만지작거리면서 황경호의 옆얼굴을 계속 보고 있다가 서서히 놓아 주었다.

“알았어… 미안. 갑자기 이런 거 물어봐서.”

“…….”

“밥 먹고 들어갈래? 이 근처는 맛있는 거 있어?”

황경호는 우습게도 그가 상처받았다는 것을 바로 알 수 있었다. 강동현은 지금껏 그를 상처 입혀 놓고도 황경호가 말할 때까지 제대로 알아차리지 못했지만, 황경호는 언제나 그걸 알아차렸다. 아마도 그가 상처받는 입장에 익숙해서 그런지도 모른다.

“우리… 이런 거 그만두자.”

황경호가 말했다.

“뭘?”

강동현이 물었다. 황경호가 담담하게 대답했다.

“이렇게 만나는 거.”

강동현이 다시 차를 출발시키려고 하다가 황경호를 돌아보았다.

“…금방 내가 그런 거 물어봐서 그래?”

“아니… 그것보다…. 그냥. 왜 이러고 있는지 모르겠어서.”

“나랑 있는 거 싫었어?”

강동현의 물음에 황경호가 약간 얼굴을 붉혔다. 솔직하게 답했다.

“아니… 좋았어.”

“근데 왜?”

황경호는 대답을 머뭇거렸다. 강동현은 황경호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강동현은 그의 손을 잡고 그의 턱도 잡아서 자신에게로 돌렸다.

“근데 왜.”

“….지금 좋아도…. 나중에도 좋을지 모르겠어….”

대답하기 싫었다. 하지만 부채감 때문일까… 사실에 가까운 대답이 나왔다. 강동현은 다시 물었다.

“왜?”

황경호는 궁지에 몰린 기분이었다. 강동현의 추궁에 결국엔 보이기 싫은 곳까지 들추어지는 기분이라 부끄러워지기 시작했다. 황경호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럼… 이런 거 언제까진데? 언제까지 이렇게 괜찮은 거야…?”

강동현은 또 자신이 이해하지 못하는 얼굴을 갑자기 하고 이해하지 못할 말을 하는 황경호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손대면 쉽게 그의 것이 될 것마냥 취약하고 빈틈 가득한 표정이었다. 눈까지 감고서. 강동현은 턱을 잡고 있던 손으로 그의 뺨을 넓게 감싸 잡았다.

“무슨 말이야?”

강동현이 조용히 물었다. 황경호가 침을 한 번 삼키더니 답했다.

“너 결국 나랑 하고 싶은 거잖아… 근데 난 하기 싫어… 그러면 너한테 이렇게 만나는 거 의미 없는 거잖아.”

“…안 해도 된다고 했잖아. 의미 있어.”

“거짓말하지 마….”

“이게 왜 거짓말인데.”

황경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리고 앞창으로 사람들이 쳐다보는 것을 느꼈다.

“사람들 봐….”

강동현의 손을 치우며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또 침묵이 흘렀다.

“…….”

“…….”

이 침묵은 서로가 말이 잘 안 통한다는 것을 인정하는 침묵이었다. 서로의 말이 서로에게 닿지 않거나 혹은 상처를 주니까 말을 고르는 것이다. 그리고 보통 그 상처는 황경호가 받는 편이었다. 그래서 황경호는 이 침묵이 정말 싫었다. 그가 안전벨트를 풀려고 할 때 강동현이 말했다.

“내리지 마.”

그리고 그는 차를 다시 출발시켰다.

“어디 가?”

“얘기 좀 하자.”

사람들 걱정 없이 얘기하려면 장소의 선택권이 확 줄어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결국 강동현의 집이었다. 전이랑 똑같은 모습이었다. 하지만 몇 달 만이라 어쩐지 어색하다. 거의 두 달 만인가. 황경호가 사놓은 가구도 그대로 창가에 있었다.

‘얘는 저기 앉아 봤을까?’

난데없이 그런 의문이 들었다. 하지만 물어보지는 않았다. 강동현은 카우치에 앉았다. 그리고 황경호를 올려다보았다.

“앉아.”

황경호는 강동현과 한 자리 정도 남겨놓고 옆에 앉았다. 침묵이 흘렀다. 그 침묵을 또 견디기 힘들어질 때쯤 강동현이 입을 열었다.

“나랑 같이 다니는 건 재미있었어?”

“어? 어….”

“나도.”

강동현이 그렇게 말하며 황경호를 돌아보았다.

“나도 좋았어. 너랑 같이 있는 거. 안 해도. 진짜 좋았어.”

강동현이 그렇게 말했다. 황경호는 아무런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나 니 몸만 노리고 이러는 거 아니야.”

“…….”

“너도 알잖아.”

말문이 막혔다. 강동현은 황경호의 옆으로 조금 다가왔다 하지만 거리는 유지해주었다. 그리고 손을 뻗어 황경호의 얼굴을 감쌌다.

“너한테 상처 주기 싫어. 앞으로도 그럴 거야. 그러니까 유통기한 같은 건 없어. 왜 자꾸 빚지는 것 같이 여겨? 사귀는데 그런 게 어디 있어.”

“….너랑 내가… 왜 사귀는 거야?”

“응? 서로 좋아하니까.”

강동현이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황경호는 뭐 때문인지 모르겠는데 확 열이 받았다. 그는 얼굴을 만지는 강동현의 손을 확 쳐냈다.

“난 너 안 좋아해!”

그러자 대번에 강동현이 인상을 좀 썼다.

“거짓말하지 마, 좀.”

“이게 왜…!”

“나도 머리 터지게 고민했어. 넌 나한테 휩쓸린 것뿐일까. 나 좋아하지도 않는데도 억지로 또 그런 거 하게 해주고 난 또 혼자 병신같이 좋아서 죽었던 건가.”

강동현이 황경호의 말을 끊고 딱딱한 얼굴로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황경호의 얼굴을 직시하고 그의 손을 꽉 잡았다.

“아니잖아.”

“…….”

“너도 나한테 끌렸잖아. 나랑 하는 거 좋아했잖아. 나 가지고 싶잖아. 좋아하잖아. 그래서 지금도 나 이렇게 만나고 있는 거잖아.”

강동현이 담담하게 그렇게 말하며 황경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황경호는 뭐라고 말도 하지 못하고 그런 강동현의 얼굴을 멍청하게 쳐다보다가 온몸이 새빨개졌다. 시선을 내렸다. 바로 손으로 눈을 가렸다.

“왜….”

강동현은 황경호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어 그의 뺨을 잡았다. 그리고 뺨을 엄지로 살살 쓰다듬었다. 황경호는 눈물을 주르륵 흘렸다.

“나… 너무 바보같지 않아…?”

“뭐가.”

“나 이러고 있는 거…. 우습지….”

“하나도 안 우스워.”

“니가 그렇게 나한테… 그렇게 했는데도 바보 같이 계속 너 못 떨쳐내고….”

황경호는 두 손으로 얼굴을 완전히 감싸 가렸다. 그가 덜덜 떨면서 눈물을 줄줄 흘렸다.

“너 너무 싫어서 죽고 싶고… 죽여버리고 싶고 그랬는데도… 니가 좋아한다는 말에 또 대주고… 계속 그러고….. 그런데 병신같이 또 너랑 만나고….”

너무 창피하고 부끄럽고 수치스러운 말이었다. 황경호는 지금 하고 있는 말 중 그 어떤 말도 평생 할 생각이 없었다. 그런데 저렇게 확신에 찬 어조로 아무렇지도 않게 사람의 가장 아픈 부분을 푹 찌르고 들어오는데…. 어떻게 방어를 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너랑 만나면 내가 항상 걸레 같고 창녀 같은데… 그렇게 되는데… 그런데도 내가 너 좋아하는 거라고… 그것도 니 입으로….”

황경호는 전처럼 오열을 참을 수가 없는지 끅끅거리면서 말했다.

“나 너 안 좋아해. 너 같은 거 제일 싫어….”

강동현은 바로 반박하려고 했다. 그가 한 말들을 전부 고칠 것이다. 그런 식으로 생각하지 못하게 할 것이다.

‘그러니까 날 좋아한다는 거 아냐. 그런데도 날 좋아하니까 지금 나랑 있는 거 아니냐고.’

의사의 말대로 강동현은 그에게 많은 잘못을 저질렀고, 그래서 황경호는 많은 상처를 받아왔다. 그래서 그동안 그의 어떤 부분은 눈에 띄게 많이 바뀌기도 했다. 어떤 면은 체념이 더 짙어지고 어떤 면은 오히려 방어력이 올라갔다. 그가 자신을 믿지 못하고 무서워하고 있을 거라는 것도 의사의 말이 맞았다. 그가 생각 없이 함부로 툭툭 말해왔던 것들이 그에게 대단히 나쁜 영향을 미쳤다는 것을 알고 말도 정말 조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의사가 한 말을 다 따를 생각은 없었다. 의사가 한 말은 도움이 많이 되었지만, 결정적으로 틀린 부분이 있었다.

“그렇게 싫으면 날 왜 만나? 좋아하니까 이러고 있는 거잖아.”

그러니 황경호가 그를 확 노려보았다. 찌를듯한 눈빛이었다.

“나도 너 같은 거 안 만나고 싶어! 그런데 계속…! 계속……!”

적의에 가득 찼던 그의 표정이 무너졌다. 강동현은 주먹을 꽉 쥐었다.

“나도 너 안 만나고 싶어… 이제 그만 하고 싶어… 니가 나 좀 놔줘….”

그가 울면서 애원했다. 강동현은 어쩐지 화가 났다.

“나라고 이렇게 인정하는 게 쉬웠는 줄 알아? 나도 너 안 괴롭히고 안 만나보려고 얼마나 노력했는데! 그러니까 너도….!”

그렇게 말하는데 순간 가슴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강동현이 그에게서 벗어날 수 없었던 것처럼

그도 강동현에게서 벗어날 수 없었던 걸까

내가 너한테 첫눈에 반했던 것처럼

너도 나에게 첫눈에 반했던 것일까

처음 만났을 때부터 지금까지의 일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강동현은 지금까지 그가 했던 모든 사과들이 결국엔 입 발린 말이었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자신이 잘못했다는 건 알았지만 단 한 번도 마음 깊이 미안했던 적이 없었다. 이미 지나간 일이었고, 그런 건 하고 싶다고 혹은 해야 한다고 진심으로 되는 것도 아니니까.

강동현은 언제나 강영지를 인생의 사랑으로 여겼다. 그것은 예전도 그랬고 지금도 그랬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녀는 강동현의 연인이었고 친구였고 동지였고 동반자였다. 그녀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뭐든지 할 수 있었다. 그건 예전도 지금도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마음이 맞아서 천천히 정이 들고 그렇게 사귀게 되어 7년이나 사귄 여자였다. 소중했다.

그리고 그한테는 첫눈에 반해서, 그것도 모르고 끊임없이 함부로 취급하다가, 심지어 좋아한다는 걸 알고 나서도 그렇게 하고, 그러고도 그녀를 생각할 때처럼 평생을 책임진다거나 하는 말을 할 수가 없어서 비위를 맞추고 기분만 어떻게 풀어 함께 하려고 했다.

그렇게 정신없이 빠져들어 놓고 소중하게 여기기는커녕 당연하게만 여겼다.

바로 이 순간까지도

‘나 때문에 죽으려고 했던 적도 있었다.’

온몸에 차가움 같은 열기가 쫙 퍼졌다. 열기 같은 차가움이 흘렀다. 소름이 끼쳐서 식은땀이 났다.

첫눈에 반해 놓고

첫눈에 반해 놓고

첫눈에 반해 놓고

첫눈에 반해 놓고

‘첫눈에 반한 주제에….’

그런데 얘도 똑같았단 말인가.

강동현은 어느샌가 황경호의 얼굴을 잡고 있던 손을 뗐다. 그리고 또 얼굴을 가리고 있는 황경호의 손을 부드럽게 잡았다. 그의 얼굴에서 떼어냈다. 엉망이 된 그의 얼굴이 드러났다.

가슴이 아팠다.

“아까 내가 한 말은 잊어버려. 미안해. 진짜 좋아해. 내가 너 평생 책임질게. 나한테 한 번만 더… 기회를 줘.”

그의 손에 소중히 입을 맞추며 강동현이 말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