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2화 (22/47)

*

“…….”

강동현은 담배를 줄창 피우고 있다가 건물에서 나오는 황경호와 눈이 딱 마주쳤다. 황경호는 인상을 팍 썼다. 분명히 아까 전화할 때 안 만난다고 했다. 경찰이 병원에 오는 바람에 원래 퇴근 시간보다 한창 늦은 9시에 퇴근을 하고 있는 황경호였다. 황경호가 짜증을 숨기지 않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안 만난다고….”

“했어.”

강동현은 황경호한테 휴대폰을 내밀었다. 서로의 사이에 거리가 있었다. 강동현은 필터까지 한 대를 다 태우고 다시 한 대를 물었다. 황경호가 그에게 다가갔다.

“했다구요?”

황경호는 안 믿는다는 듯이 그를 쳐다보았다.

“봐봐.”

강동현은 금방까지 쳐다보고 있던 SNS 채팅방을 그대로 띄운 채 황경호한테 휴대폰을 넘겨주었다. 황경호는 아버지, 엄마, 도은연이라고 표시된 사람들이 서로 메시지를 주고받는 것을 보았다. 주제는 강동현의 발기부전이었다. 황경호는 깜짝 놀라서 그를 올려다보았다. 말하라고 한 지 2시간 정도밖에 안 지났고 대충 보니까 황경호가 말하자마자 바로 한 모양이었다. 그래도 믿기지가 않아 황경호가 다시 물었다.

“진짜 말했어요?”

“어….”

강동현은 이미 다 때려치우자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무덤덤한 목소리가 나왔다. 진짜 마지막이다. 마지막…. 예전과 다르게 황경호의 리미트가 해제되어 어떤 걸 시킬지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그때도 알 수 없긴 했지만). 첫 번째도 두 번째도 오히려 예전보다 더 감당하기가 힘들었다. 예전에는 강동현 혼자서 어떻게 해결이 되는 것들만 시켰는데 지금은 촬영을 망치거나 가족들까지 연관이 되게 만들었다. 앞으로도 이런 식이면 정말 못한다.

“일단 타라.”

강동현은 운전석 쪽으로 돌아갔다. 황경호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휴대폰 화면을 보고 있다가 조수석에 탔다. 황경호는 메시지 내용을 캡쳐해서 자신의 폰으로 보냈다. 나중에 자세히 봐야겠다. 엄청 웃길 거 같다. 그렇게 생각하니 오늘 하루 종일 기분 나빴던 것이 살짝 가셨다.

말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아서 바로 할 줄은 몰랐다. 아니, 진짜 할 거라곤 생각도 못했다. 안 그래도 이강유 때문에 컨디션도 계속 안 좋은 상태였고 강동현의 무신경한 말이 정점을 찍었다. 그래서 황경호도 생각 없이 막 내뱉은 조건이었다. 가족에게 말하는 건 강동현 같은 남자라면 엄청 자존심 상해할 것 같아서 끝까지 안 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진짜 나랑 하는 게 뭐라고 이렇게까지 하는 거지….’

황경호는 그를 힐끗힐끗 쳐다보았다. 기분은 확실히 안 좋아 보인다….

“…….”

“…….”

강동현은 황경호를 집까지 데려다주었다. 9시가 넘은 시각이라 도로가 많이 막히지는 않았다. 황경호가 차에서 내렸다. 강동현도 차에서 내렸다. 그는 트렁크에서 꽃을 꺼냈다.

“자.”

“…….”

황경호는 그것을 받았다. 강동현은 한숨을 쉬었다. 이제 그만한다고 말해야지….

“지금까지….”

“키스할 거예요?”

강동현과 황경호가 동시에 말했다. 강동현이 눈을 깜박였다.

“뭐?”

황경호도 당황했다. 전엔 얼굴 맞고 키스 한 번. 이번에도 그런 거 아닌가?

“아니…. 그거 했으니까….”

“…….”

아까 그냥 만나려면 가족들한테 발기부전이라고 밝히라고 해놓고 키스까지는 하게 해줄 생각이었던 걸까. 아니면 잊어먹은 걸까. 어느 쪽이든…. 강동현은 황경호가 착각을 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굳이 알려줄 생각은 없었다.

“해.”

그래. 마지막인데 하고 끝내자. 그리고 강동현은 곧바로 그의 손목을 끌어당겼다. 그의 손에서 꽃을 다시 뺏어 차 위에다가 두고 끌어안았다. 가로등의 주홍 불빛이 고즈넉하고 거기에 달려드는 벌레들이 윙윙거린다. 강동현은 차에 등을 기댄 채 황경호를 끌어안고 그의 얼굴을 잠시 보다가 입을 맞추었다.

“응…!”

입을 맞추자마자 황경호가 그를 확 밀어내었다. 부드럽게 입술이 마주쳤다가 바로 떨어지자 강동현은 약간 짜증이 났다.

“왜.”

“담배 냄새….”

황경호가 그렇게 중얼거리자 강동현이 아…. 하고 대답했다.

“미안. 아까 너무 많이 피웠어.”

황경호는 강동현의 얼굴을 잠깐 보았다가 한숨을 쉬며 본인이 다시 다가왔다. 소년 같이 부드럽고 청결한 얼굴. 강동현은 심장이 두근 하고 뛰는 걸 느꼈다. 황경호가 속삭이듯이 말했다.

“담배 좀 끊어….”

그리고 푹신한 입술이 닿았다. 날이 따뜻해져서 그런 걸까. 겨울과 봄엔 거칠었던 입술이 말랑하고 부드러워졌다. 오싹, 하고 소름이 돋았다. 황경호의 왼손이 강동현의 얼굴에 닿았다. 부드럽다. 강동현은 그를 꽉 끌어안았다. 황경호의 오른손도 강동현의 어깨를 잡았다. 황경호가 강동현의 품에 쏙 들어온 채 입을 맞추고 있었다. 자신의 왼쪽 어깨에 머리를 기댄 것 같이 된 황경호와 입을 맞추기 위해 강동현은 왼쪽으로 고개를 돌려 따라갔다.

“으응… 음… 응… 으응…. 하아… 써….”

이번엔 또 완전 착 하고 달라붙는 느낌이다. 그의 몸과 자신의 몸이 완벽, 아니, 그 이상으로 서로 맞물려 있는 느낌이었다. 온몸이 맞닿았다. 소름이 마구 돋았다. 강동현은 온몸에 열이 확 오르는 게 느껴졌다. 아, 젠장….

“음… 큭… 하아… 더….”

담배를 많이 피워서 그런지 상대는 자꾸 쓰다는데 강동현은 그의 타액이 전보다도 달게 느껴져서 그의 혀를 계속 빨았다. 입 안에 고인 그의 타액을 꿀꺽 마셨다. 황경호는 숨을 쉬기 힘든지 신음소리를 흘리며 강동현의 목덜미를 꽉 잡았다.

“흐으응…. 앙…. 잠깐… 읍… 으응… 앗….”

강동현은 자신의 것이 점점 발기하는 게 느껴졌다. 그리고 상대의 것도 반응하는 게 느껴졌다. 강동현은 한 손으론 황경호의 등허리를 꽉 안고 한 손으론 그의 엉덩이를 주무르기 시작했다. 손에 가득 담기는 살의 감촉이 흡족하다.

“앙… 하응…. 읍… 잠깐만… 하으응….”

“이리 와….”

강동현은 황경호의 다리 사이에 은근히 무릎을 넣고 그의 엉덩이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황경호는 바로 딸려왔다. 차에 약간 기대어 서있는 강동현의 몸에 황경호가 살짝 올라탄 것처럼 되었다. 그는 한쪽 발로 까치발을 하고 서야 했다. 강동현은 황경호와 혀를 섞고 타액이 질질 흐를 정도로 입을 맞추면서 그의 엉덩이를 꾹꾹 눌러 서로의 극점을 자극했다.

“흐으응… 앙….”

황경호가 속눈썹을 바르르 떨면서 야한 얼굴을 했다. 마음이 달달거릴 만한 신음소리도 낸다. 강동현은 그의 입술을 핥으며 그의 얼굴을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싫다, 싫다 하면서도 나랑 하면 엄청 느끼는 주제에. 이것 봐. 젠장…. 도대체 뭐가 문제야? 이대로 하면 안 돼? 그냥 하고 싶다….’

강동현은 그의 바지 속으로 손을 넣어 그의 맨 엉덩이를 주물렀다.

“힉… 아응. 앙… 으응… 아앙… 아아앙….”

황경호는 눈을 지그시 감은 채 강동현과 서로 입술을 빨아주고 핥아주며 입을 맞추고 있었다. 혀가 간간히 맞닿는 게 기분 좋았다. 서로의 몸이 꽉 맞닿아 안고 있는 것에 황홀함을 느끼면서 신음을 흘렸다. 강동현 또한 키스만으로도 날아갈 것만 같은 기분이라 낮고 섹시한 신음을 길게 흘렸다.

‘아…. 그만두긴 뭘 그만둬….’

그냥 시키는 대로 하자…. 한창 키스를 하다 보니 저도 모르게 멍청하게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황경호도 어느 순간부터 정신을 못 차리고 키스에 정신이 팔려 있다. 여기가 집 앞인 데다가 야외라는 것도 잊고 있는 것 같았다. 강동현의 자지가 불끈하고 전부 발기되었다.

“아…!”

황경호가 눈을 번쩍 뜨더니 강동현의 어깨를 확 밀쳤다. 아직 강동현에게 꽉 끌어안긴 채 고개만 서로 떨어졌다.

“…….”

“…….”

둘 다 숨을 헐떡이며, 코가 거의 닿을 것만 같은 거리에서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눈이 마주쳤다. 그래서 서로의 눈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황경호는 점점 정신을 차렸다. 황경호는 그의 잘생긴 얼굴에 담긴 섹시한 표정에 당황했다. 거의 본전에 들어가기 직전 같은 얼굴이다. 전처럼만 할 생각이었는데…. 게다가 서로의 옷을 사이에 두고 둘 다 발기해 있었고 강동현의 손이 바지 속으로 들어와 있었다. 황경호는 얼굴을 확 붉히며 그를 완전히 밀어냈다.

강동현은 약간 당황한 얼굴이 되었다가 아…. 하고 상황을 깨달았다. 강동현은 침을 꿀꺽 삼키며 그에게로 다가갔다.

“나 이제 뭐 해?”

“…….”

뭐든 말만 해! 라는 느낌의 강동현에게 황경호는 약간 당황했다.

*

[다, 다음에 말할게요….]

‘음… 역시 그때는 내가 생각해도 좀 과했지. 당황할 만하지.’

강동현은 그렇게 드물게 상대를 이해하며 촬영장에 앉아 있었다. 그는 가족을 잃고(?) 고작 키스를 할 수 있었을 뿐인데도 굉장히 만족스러워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제 가족들 사이에서 두고두고 회자될 흑역사를 스스로 창조했는데도 불구하고 별생각이 안 났다. 그래, 가족들이니까 이해해주겠지. 이렇게 생각하면 별것도 아니라는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어차피 바빠서 집에도 잘 못 가고, 오히려 몸이 안 좋다니까 집에서 이것저것 해주려고 하고. 생각보다 나쁘지 않은 것 같다.

강동현이 하는 짝을 보면 딱 ‘남자가 색에 빠져 일을 그르친다’의 전형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드라마는 대기 시간이 길다. 강동현은 전의 키스를 생각하며 약간 멍 때리고 있다가 휴대폰 진동이 오자 화면을 확인하고 받았다.

“어, 기석이 형.”

오랜만에 배우 한기석에게서 연락이 왔다.

[동현아…. 바빠?]

“응? 어…. 촬영 중이긴 한데. 대기 중이라 잠깐은 통화 가능할 거 같은데. 왜?”

한기석은 <연애 출사표>를 찍을 때 당시 서브 남자주인공으로 출연했던 배우로 중간에 그가 전립선염에 걸린 것을 알고 동지가 된 친한 형이자 선배였다. 한기석이 절망적인 목소리로 용건을 말했다.

[동현아…. 나 어떡하냐, 진짜.]

“응? 왜?”

강동현은 여전히 전날 간호사와 키스했던 걸 생각하고 있던지라 영혼 없이 대꾸했다.

[나 진짜 죽고 싶다…. 나 또 걸렸어.]

“어…. 또?”

강동현은 상념에서 빠져나와 그에게 되물었다. 강동현도 곧잘 전립선염이 재발하고 있었지만 이 형도 만만치 않았다. 꼬박꼬박 재발한다.

“아니, 형도…. 아니… 왜 그래?”

강동현은 순간 ‘형도 발기부전이야?’라고 물을 뻔했다가 혀를 깨물고 멈췄다. 큰일 날 뻔했다…. 가족이야 가족이니 밝힌다만 같은 업계 사람들한테 말할 생각은 죽어도 없었다.

‘아, 근데 만약에 걔가 그러라고 하면 나 어쩌지?’

강동현은 순간 생각이 비약하여 급 걱정에 빠졌다. 그답지 않다.

[넌 그 이후로 재발한 적 없어?]

한기석이 물었다. 한기석은 강동현이 한 번 전립선염에 걸린 것은 알고 있었다. 한기석이 걸린 것을 알아차렸을 때 바로 고백을 했기 때문이다.

“아니…. 난….”

강동현은 제대로 대답하지 못하고 우물 쭈물거렸다.

“근데 그 의사가 여친이나, 아니면 혼자서라도 꾸준히 하면 괜찮다고 했잖아.”

강동현은 말을 돌렸다. 물론 손으로 입을 가린 채 작고 빠르게 말했다. 한기석이 답했다.

[나 좀 뜨고 나서부턴 스캔들 무서워서 여자 안 사귄 지 4년이나 됐고….]

아, 이 형 완전 쫄보지…. 강동현이 속으로 혀를 찼다.

[게다가 내가 완전 A급도 아니고…. 벌써 33살이고 아직 완전 대작도 안 나오고…. 고용불안이라는 게 이렇게 사람을 피 말린다…. 좀 벌면서부턴 집에도 돈 많이 드리고 나 관리한다고 돈도 많이 써서 돈 모아놓은 것도 많이 없다고.]

또 주절주절 넋두리를 하는 한기석이었다. 강동현은 인상을 좀 썼다.

“무슨 형이 A급이 아니야. 형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다고. 형이 이미지 관리한다고 일 많이 가려 받으니까 그런 거 아냐. 그리고 배우가 30대면 이제 막 한창 들어선 거지 뭘 그렇게 쓸데없는 걸 고민해. 스트레스받으니까 계속 재발하는 거 아냐.”

맨 뒤는 작게 얘기했다.

[동현아, 니가 이 고통을 한 번밖에 못 겪어봐서 그런 소리를 하는데… 계속 전립선염으로 비뇨기과 가보면 사람이 있잖아, 막 예민해지고 슬퍼지고 그런다?]

“아…. 나도 그 뒤로 두세 번 더 걸렸어. 우는소리 하지 마.”

강동현이 솔직하게 밝혔다. 그랬더니 한기석이 동지가 생긴 느낌인지 좀 목소리가 밝아졌다.

[아, 진짜? 넌 왜 그러는데? 난 진짜 혼자 하려고 해도 기분이 안 나….]

“나야 바빠서….”

강동현이 어물쩡 말했다.

“형…. 그냥 익숙해져…. 어쩔 수 없더라.”

강동현은 한숨을 쉬면서 그렇게 말했다. 지금도 여전히 억지를 부리고 있긴 하지만, 어쨌든 병 좀 나아보겠다고 사람 하나 괴롭힌 결과를 지금 보고 있는 강동현이 아닌가. 그는 다시 한숨을 쉬었다.

[동현아….]

자기보다 5살은 어린 동생이 어른스럽게 조언하자 한기석은 은근히 존경스러운 모양이었다. 그렇게 조금 더 통화를 하다가 다시 대기모드로 들어갔다. 강동현도 약간 고민이 되었다. 한 달 전쯤에 재발을 한 번 했으니 아직 위험한 수준은 아니지만 이대로 가면 분명히 재발하겠지…. 또 팬티라도 뺏어야 하나….

강동현은 다시 휴대폰을 들어 메시지를 타이핑하기 시작했다.

<나 진짜 뭐할까?>

일하고 있나. 답이 없었다. 강동현은 그냥 대책 없이 타자를 쳤다.

<뭐든 말해>

<키스하고 싶다>

<뭐해?>

<일해?>

<나 아는 형이 전립선염이 계속 재발하는데. 이 병 원래 이런 거냐?>

<나 그 형한테 너네 병원 소개해 줬는데>

<너네 의사 선생님 진짜 돌팔이인 거 아냐?>

<진짜 키스하고 싶은데>

<나 진짜 뭐해?>

그렇게 생각나는 대로 메시지를 보내는데 답장이 딱 왔다.

<정신 나갔어? 왜 이래>

“…….”

확실히 좀 기분이 업 되어 있긴 하다…. 아니, 불안과 흥분이 공존하다 보니 사람이 좀 혼란했다. 고작 키스 한 번일 뿐인데 심각한 발기부전에 불감증인 그의 것을 발기시키고 기분은 끝내주게 좋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 키스를 하려면 간이 쫄깃해질 정도의 미션을 해야 했다. 극과 극을 왔다 갔다 하니 기분이 멀쩡할 리가.

<빨리 나 뭐할지 말하라고>

강동현이 그렇게 답장을 하자 한참 답이 없다가 답장이 왔다.

<여자에게 진심으로 고백하고 차이는 거 촬영해서 보내>

*

그때, 강동현이 집에 데려다줄 때 황경호는 그의 가족 채팅방 대화를 전부 캡쳐하여 자신의 폰으로 보냈었다. 그리고 한 며칠을 그걸 보며 웃었다.

강동현네 집은 생각보다 평범한 느낌이었다. 어머니는 조금 유난하다 싶을 정도로 자식 사랑이 지극했고 아버지는 좀 무뚝뚝하지만 자상하고 누나는 웃겼다. 얼굴을 볼 수 있으면 좋았을 텐데 캡쳐본이라서 얼굴을 볼 수는 없었다. 어머니나 아버지는 프로필 사진이 셀카가 아니라서 아예 모르겠지만 누나는 굉장한 미인인 것 같았다.

<엄맠ㅋㅋㅋㅋㅋ 쟤 이제 장가는 다 갔닼ㅋㅋㅋ>

<은연아 넌 동생이 아프다는데 그러면 어떡해>

<다들 너무 걱정하지마. 은혁이 잘할 거야>

<아빠 쟤 성격 몰라?ㅋㅋㅋㅋ 쟤 희망이 있었으면 평생 우리한테 말 안 했을 걸ㅋㅋㅋㅋ 이거 완전 희망 없어서 미리 통보하는 거잖앜ㅋㅋㅋㅋㅋ 쟤 그냥ㅋㅋㅋ 고잨ㅋㅋㅋㅋㅋ 평생고잨ㅋㅋㅋㅋㅋ>

누나라는 분이 강동현을 아주 칼을 들고 푹푹 찌르고 계셨다. 아무 대꾸도 못 하고 이걸 보고 있던 강동현이 생각나서 엄청 웃겼다. 속이 시원하다. 그렇게 그날 밤도 자기 직전까지 보면서 웃다가 휴대폰을 옆에 두었다. 돈을 달라고 한 거 말고는 듣자마자 바로 황경호의 말대로 한 것은 처음이었다. 화도 안 내고 그냥 알겠다고만 하길래 안 할 줄 알았는데.

‘아, 통쾌하다…. 저 뒤에 저 누님이 얼마나 더 놀렸을지 보고 싶다….’

황경호는 저도 모르게 잠깐 또 킥킥 웃다가 눈을 떴다. 밖의 불빛이 간간이 들어오는 어두운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약간 시간이 지났다. 그리고 자신의 입술을 잠깐 만졌다.

‘아, 싫은데….’

황경호는 인상을 약간 썼다. 이리저리 뒤척이며 자세를 바로잡고 다른 생각을 하며 금방의 충동을 잊어버리려고 했다.

“아으….”

황경호는 베개에 얼굴을 박고 엎드렸다. 싫어. 싫어. 싫어. 황경호는 그대로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썼다. 그리고 오른손을 바지 속으로 넣었다. 그리고 왼손을 티셔츠 안에 넣었다.

“흐응… 아으응….”

황경호는 여자와 섹스해본 적이 없었다. 사교성이 좋고 깔끔했기 때문에 인기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친한 여자친구들도 많았고 걔 중에는 사귄 여자애들도 몇 명 있었다. 하지만 중학교 때 반 친구들이 전부 자위를 해보았기 때문에 자위를 시작한 것처럼, 그 나이 때에 여자를 사귀는 게 마치 통과의례 같던 거라서 사귀었던 것 같다.

남들 다 하니까 사귀고, 남들 다 하니까 데이트를 하고, 남들 다 하니까 손을 잡고…. 그 여자애들에게 사랑을 느꼈냐고 물어본다면 모르겠다는 대답만, 아니, 아니라는 대답만 나올 것이다. 사귀고 나서도 친구 이상으로 대할 수가 없었다.

물론 그녀들에게 성욕까지 느끼지 못했던 것은 아니었다. 갓 스무 살이 된 그녀들은 미인이고 아니고를 떠나서 굉장히 싱그러워서, 그런 욕망을 간간이 느낄 때가 있었다.

하지만 그런 것들이 굉장히 잘못된 것처럼 느껴졌다. 게다가 고지식하게도, 그런 걸 하면 뭔가 책임을 져야만 할 것 같았다. 그런데 그러기엔 그 관계에 그 어떤 애정도 느껴지지 않아서 난감했다. 그리고 이런 마음으로 그들을 만나고 있다는 것도 굉장히 죄책감이 들었다. 대학교를 다닐 때 그렇게 흐지부지 만나고 헤어졌던 의미 없는 관계들을 뒤로하고 군대를 갔다 오고 졸업을 하니 어느새 사회인이 되어 있었다.

사회인이 되고 나서는 친구로 만나 서로를 알고 관계를 쌓을 기회도 적어졌다. 소개팅 같은 것을 해보아도 어색하기만 할 뿐이었다. 직장에서 알게 된 여자애들이랑 그런 관계가 되고 싶다는 생각도 당연히 해본 적이 없었다. 나중에 헤어지기라도 하면 직장 다니기 엄청 난감해질 테니 말이다.

내가 뭐가 문제인 걸까. 그런 생각을 할 때도 많이 있었다. 여자들이 싫은 것은 아니지만 만나면 도저히 책임질 자신이 없었고 책임을 질 만큼 애정도 생기지 않았다. 여자친구면 죽고 못 사는 친구들을 보아도 어떻게 저렇게 여자한테 빠질 수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리고 많은 친구들은 그저 섹스를 하기 위해서 여자를 만났다. 전자는 그저 여자를 사귈 수 있는 자기 자신에게 도취되어 있는 것만 같았고 후자는 비열했다.

그래서 그 뒤론 인연이 있다면 언젠가 만나겠지, 하고 그냥 손을 놓고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계속 노력을 해봤어야 했나 라는 생각도 들긴 한다. 그런 노력이 일천해서 결국 첫 경험을 여자가 아니라 남자랑 먼저 해버린 것 아닌가.

“흐으응…. 아으… 으읏. 아앙….”

황경호는 베개에 얼굴을 묻은 채 신음을 최대한 억누르려고 노력하며 부드럽게 자신의 성기를 만졌다. 젖꼭지를 검지로 문지르니 온몸이 움찔거리며 성기가 더 단단하게 섰다.

처음에 강동현이 입을 맞추거나 몸을 만질 땐 싫어서 소름이 돋는 게 눈으로 보일 정도였다. 만지는 것도 싫고 손끝이 차갑고 구역질 나고 아프고…. 근데 그때 강동현을 처음 때리고 흥분한 이후로는 점점 몸이 이상해지더니 고작 키스 정도로 정신이 팔렸다.

아니, 키스할 때만 정신이 나간다.

그가 그의 커다란 남성기를 처음으로 황경호의 엉덩이에 처넣을 때도, 황경호가 오기로 먼저 그를 도발한 것이었지만 곧바로 후회하며 당했었다. 술 먹고 했을 때는 기억도 나지 않는다. 모텔 이후로는 미친 듯이 느껴도 몸과 마음의 괴리가 커서 항상 싫다고 울고 하지 말라고 애원하면서 당했다.

그가 자위를 하는 걸 보여줄 때도 그가 자위를 하는 것에 눈을 뗄 수가 없어 그가 뭘 하든 휩쓸려 당하곤 했지만 요새 그와 입을 맞추는 것처럼 적극적이지는 않았다. 그때는 그가 입을 맞춰주는 걸 가만히 받고 있다가도 그가 자신의 것을 들이밀면 깜짝 놀라곤 했으니….

근데 이번에 입을 맞출 때는 그가 옷 속에 손을 넣고 서로의 하반신을 은근히 붙여 애무를 했는데도 그냥 그의 입술에 정신이 팔리고 그가 그렇게 만지는 걸… 즐겼다.

‘그러니까… 날… 쉽게… 보는 거 아냐….’

황경호는 그렇게 스스로를 탓하며 얼굴을 새빨갛게 붉히고 검지로 성기의 끝을 천천히 문질렀다. 짜릿하고 성감이 올라온다.

“흐으응… 흐읏…. 아앙….”

그가 쏙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큰 몸, 두껍고 기다란 팔, 큰 손, 부드러운 입술과 예쁜 얼굴, 만지는 느낌이 좋은 머리카락, 좋은 냄새, 안으면 푹신하고 느낌이 좋은 근육, 쓰지만 뜨겁고 부드러운 혀.

“아…!”

황경호는 그의 몸과 자신의 몸이 아주 가깝게 밀접했을 때의 그 황홀함을 기억해냈다. 칠칠치 못하게 흘렸다. 그는 황경호를 안아 들어 자신의 무릎 위에 올리고 하반신을 은밀하게 꾹 누르며 바지 안으로 손을 넣어 엉덩이를 주물렀다. 만지던 방식이 야했다.

“하아… 아으…. 흐응….”

분명 그대로 조금만 더 키스했더라면 바로 사정해버렸을 것이다. 황경호는 그때의 황홀함을 떠올리며 수음을 계속하다가 순간 움찔움찔하며 절정에 올라섰다.

“하아아아….”

베개에서 얼굴을 떼고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내쉬었다. 온몸이 크게 박동 치고 있었다. 눈물이 한 방울 흘렀다. 기분 좋아… 쌕쌕 숨을 쉬었다. 그리고 좀 정신이 들자, 괴로워하며 다시 베개에 얼굴을 박았다.

‘창피해….’

그렇게나 싫어하는 놈을 떠올리며 자위를 또 하다니. 정말 제정신인지 모르겠다. 황경호는 우울한 기분으로 일어나서 욕실로 가서 손을 씻었다. 그리고 옷을 벗고 샤워를 하기 시작했다. 아직도 젖꼭지와 성기가 두근거리며 민감하다….

‘짜증 나….’

강동현이 가족들한테 개쪽을 파는 메신저 채팅방을 봤을 땐 그렇게 기분이 좋았는데, 완전 기분이 다운되었다. 며칠 전 그냥 대놓고 뭐든 시켜달라고 하는 강동현이 생각났다.

정말 생각할수록 어이가 없는 놈이다. 엿 먹으라고 그랬는데 나쁘라는 기분은 안 나쁘고 오히려 기대를 하며 뭘 더 시켜 달란다. 그런 그가 어이도 없고 싫어서 머리를 굴리다가 진짜 안 될 것 같은 걸 생각해서 시켰다.

여자한테 진짜로 고백을 하고 차여라.

솔직히 황경호는 강동현의 팬질을 꽤 오랫동안, 깊게 했었고 그의 매력이 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정말로 남자다운 매력을 가지고 있는 배우라서, 안 그래도 남성성이 부족한 다른 우리나라 남자들에 비해 어마어마한 어드밴티지를 가지고 있는 우월한 수컷이었다(물론 발기부전이라는 걸 모른다는 가정하에). 여자라면 사족을 못 쓸 스타일이라는 말이다. 그러니까 애초에 그가 정말로 고백을 했을 때 차이기란 힘들 것 같다. 솔직히 길 가다가 아무나 붙잡고 고백을 해도, 그게 거짓말 같아도 여자들이 받아줄 것 같다.

게다가 그는 작년 여름 이래로 어마어마한 빅스타가 된 배우였다. 커리어를 중요시하는 그가 스캔들 관리를 안 할 리가 없었고 그렇다면 아무한테나 고백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고 아무한테나 고백을 하지 않고 아는 사람들 중에 결정해 고백을 한다면 상대가 받아줄 가능성이 더 커진다.

황경호는 이때까지 보통 사람들이라면, 황경호 본인이라면 하지 못할 것들만 생각해서 그에게 하라고 했는데, 알다시피 그는 보통 사람이 아니었고 결국엔 다 해내서 황경호를 더 기분 나쁘게 하곤 했었다. 솔직히 촬영 전날 얼굴을 패게 해달라는 거나 가족에게 발기부전인 걸 밝히라고 한 것도 정말 받아들일 줄은 몰랐다. 도대체 이 놈은 못하는 게 뭔가, 하고 생각하다가 그냥 이 인간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못하는 걸 시켜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얼굴을 패게 해달라는 것도, 가족들에게 임포를 커밍아웃하라는 것도 속전속결로 해버린 그가 이번 미션에는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

강동현은 배우였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숱한 버전에 숱한 느낌으로 고백을 해보았다. 하지만 진짜로 고백을 해본 건 전 여자친구인 강영지에게만 해보았다. 그 외에는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강동현이 현실의 연애나 고백에 무지하다는 말이 아니었다. 그는 자신이 어떤 남자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여자들에게 굉장히 먹히는 남자였다. 강동현은 자신의 메신저의 연락처와 페이스북을 전부 뒤져보았다. 이리저리 사람을 물색해보았지만 나오는 결론이 같았다.

‘다 받아줄 것 같은데….’

건방진 말이 아니라 진짜였다. 그는 엄청나게 주가를 올리고 있는 유망한 배우였고 잘생기고 키 크고 젊고 돈도 많았다. 솔직히 길 가다가 아무한테나 고백을 하더라도 받아줄 것 같단 말이다…. 고백을 하는 것 자체야 문제가 안 되는데 안 받아줄 여자를 찾으라니…. 이건 강동현이 어떻게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처음에는 지금까지 했던 것들에 비해 정말 별거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하려니 막막하다.

강동현은 심각하게 휴대폰을 내려다보고 있다가 매니저에게 물었다.

“형.”

“응?”

“내가 고백하면 안 받아줄 것 같은 여자 혹시 없을까?”

“응? 그게 무슨 말이야?”

“혹시 레즈비언이라든가….”

강동현의 뜬금없는 질문에 김석현이 어리둥절한 얼굴을 했다.

“글쎄…. 잘 모르겠는데.”

“한 번 생각해봐. 진지하게.”

그러자 매니저 김석현도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강동현이 문득 고개를 들어 그를 보았다.

“혹시 형 딸 어때? 형 딸 어리니까 내가 고백하면 차지 않을까?”

김석현의 딸은 이제 5살이었다. 그가 고개를 저었다.

“내 딸 너 엄청 좋아해. 너랑 결혼한단다.”

“아….”

김석현은 어깨를 으쓱했다.

“길 가다가 아무나 붙잡고 하면…. 음, 그래도 받을 것 같다. 이때다! 하고.”

“으음….”

강동현은 고심에 고심을 했다. 스캔들을 조심하자면 또 할 수 있는 상대가 적어진다. 그런데 그 적어진 상대들 중에서는 쉽사리 누구도 결정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황경호는 진심으로 고백을 하라는 조건을 붙였다. 그런 식으로 강동현이 고백을 했을 때 안 받아줄 여자란….

“김혜지 선배님 어떠냐?”

“어…. 그거 좋은 생각 같은데.”

매니저가 70대의 대선배 배우를 언급하자 강동현이 고개를 퍼뜩 들었다. 그러다가 다시 한숨을 쉬며 고개를 숙였다.

“그 정도 되면 엄청 기분 나빠 하실 것 같은데. 젊은 애가 장난친다고…. 나 찍히기 싫다.”

“진짜로 고백하게?”

매니저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강동현은 손을 휘휘 저었다.

“아, 신경 쓰지 마.”

그렇게 강동현은 꼬박 사흘 동안 여자들을 물색하고 고민을 해보았지만 영 답이 나오지 않았다. 진짜 그랬다. 이전까지만 해도, 옛날 것까지 포함을 하더라도 황경호가 강동현에게 요구했던 미션들은 일단 물리적으론 할 수 있지만 강동현이 하기 싫어 주저하는 것들뿐이었다. 가족들한테 커밍아웃하는 것도 그냥 말을 하면 되는 것이고, 마포대교에서 뛰어내리는 것도 연습해서 뛰어내리면 되는 것이었다(물론 연습을 했는데도 죽는 줄 알았다). 하지만 이건 강동현 본인이 어떻게 하느냐보다도 상대측에서 반드시 거절을 해야 하는 게 문제였다. 게다가 거절을 하지 않으면 이쪽도 곤란했다. 스캔들도 스캔들이고 사귀면 또 어쩔 것인가. 강동현은 발기부전이다.

강동현은 새벽쯤 촬영장에 도착해서 사람들에게 인사를 했다.

“일찍 왔네.”

“안녕하십니까.”

강동현은 시간을 철저하게 지켜서 오는 편이었다. 뜨면 초심을 잃어버리고 갑질 비슷하게 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렇게 해서야 롱런하기 힘들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한동안 너무 바빠서 시간을 못 맞출 때는 제작진 측에서 많이 배려를 해줬기 때문에 지금은 더 시간을 잘 지켜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주연배우이자 현재 한국에서 가장 주가를 올리는 배우가 강동현이라 강동현이 시간을 맞춰서 촬영장에 등장하면 다른 배우들도 그 정도로 시간을 지켜준다.

확정 방영 일자가 8월 27일로 좀 당겨졌다. 강동현이 주연을 맡은 흡혈귀 ‘서이건’은 많은 판타지 연애드라마들과 같이 약간은 과장된 캐릭터를 가진 인물이었다. 귀족적인 취향과 나르시즘이 특징이다.

앞서 여자주인공인 여고생 ‘유진아’의 나레이션이 흐른다.

[“세상에 이렇게 잘생긴 미친놈은 처음 본다”]

“하! 이해가 안되는군! 왜 안 믿지? 세상에 어떤 인간이 이런 걸 할 수 있다고!”

서이건이 유진아에게 온갖 마술을 보여주지만 유진아는 그를 마치 변태 보듯이 쳐다보았다.

“저기요…. 아저씨. 허우대도 멀쩡한 분이 진짜 왜 이러세요…. 이런 건 마술공연장 가서 하세요….”

“이 얼굴에 아저씨라니!”

훌륭한 여고생인 유진아는 곧바로 경찰을 불렀다.

“야…! 너! 너 진짜…! 나중에 두고 보자! 내가 너 피 빨고 만다!”

끝나자 다들 키득거렸다. 강동현도 웃었다. <연애 출사표>도 코믹한 드라마였지만 이번은 노리고 웃긴 장면들이 많다 보니 다들 화기애애했다.

“이렇게 달려가는 건 어때요?”

“아, 그만해. 킥킥. 너무 웃겨.”

그 뒤로 동일한 장면을 여러 각도에서 찍고 다음 컷으로 넘어갔다.

“요새 누가 안 괴롭혀? 응? 내가 혼내 줄게. 학교에서 왕따 같은 거 안 당해?”

“안 당해요.”

“내가 400년 가까이 살면서 는 거라곤 사람 괴롭히는 기술밖에 없어. 응? 보여줄까?”

“사람 참 잘 괴롭히시는 건 이미 잘~ 알고 있구요.”

“나 돈도 많은데? 응? 뭐 사줄까? 내가 여~기부터 저~기까지 다 사줄 수 있는데.”

“아…. 잘생긴 남자가 이렇게 짜증 나긴 머리털 나고 처음이다….”

“머리털 나고 처음인 김에 한 입만. 응?”

연기를 하는데 어디선가 자꾸 해본 것만 같고 그런 강동현이었다.

흡혈귀라 좀 굶는다고 죽진 않지만 벌써 한 달이 넘게 제대로 식사를 하지 못하고 있는 서이건이었다. 처음 2주는 갈피를 못 잡다가 우연히 유진아를 다시 만나고 그녀의 상처에서 풍겨오는 피 냄새에 강렬한 흡혈 욕구를 느꼈다.

여자주인공인 유진아는 부모님이 어렸을 때 사고로 돌아가시고 이모의 집에 얹혀사는 처지였다. 이모가 아무리 잘해주어도 어차피 그녀에게도, 다른 사람에게도 가장 소중한 존재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공부도 열심히 하고 씩씩하지만 시니컬 하기도 하고 쓸쓸해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이 정신 나간 자칭 흡혈귀라는 남자가 피 한 번만 빨아보자고 덤비게 되면서 무채색의 인생이 황당하기도 하고 재미있기도 한 판타지틱한 사건들로 가득 차게 되는 것이다.

“그냥 덮쳐. 뭘 귀찮게 그러고 있어?”

우연한 기회에 사냥을 당하고 있는 걸 구해주게 된 이후로 서이건의 집에 얹혀살고 있는 늑대인간 ‘정요한’이 고기를 크게 썰어 먹으며 그렇게 말했다.

“와. 사람 잡아먹다 헌터한테 걸린 주제에 말하는 거 봐라? 야, 그리고 나는 고리짝 시절부터 억지로 덮쳐서 막 피 빨고 그러는 무식한 흡혈귀가 아니었어. 먹이들이 알아서 나 잡아먹어 주세요~ 이렇게 해야지 먹었다고.”

“내가 잡은 그놈은 죽어 마땅한 놈이었다고.”

“네네. 정의의 사도 나셨네요~”

“야…. 너 뒤진다, 진짜.”

“이 강아지가 삐꺽하면 덤벼.”

둘이 으르렁거렸다. 정요한이 짜증이 섞인 손길로 고기를 썰었다.

“그럼 그때는 어떻게 꼬셔서 피 빨았는데?”

“그거야 당연히 내 이 섹~시함으로….”

그렇게 말하다가 서이건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요새 수혈 팩만 먹고 산 지 몇십 년이 되다 보니 먹이를 유혹하는 방법을 까먹고 있었다.

“오호라.”

그 날의 촬영을 마치고 감독이 칭찬을 했다.

“강 배우, 어디서 이런 거 해봤어? 엄청 잘하네.”

“저, 웃긴 거 좋아하나 봐요.”

강동현이 웃으면서 대꾸했다. 요즘 미니시리즈들이야 다들 어느 정도 개그 요소를 들고 가는 편이었지만 이렇게 대놓고 개그 캐릭터는 처음이었다. <연애 출사표>의 서준도 이 정도는 아니었으니 말이다.

“여자한테 집적거리는 것도 엄청 잘해. 그렇게 집적거리면서 작업해?”

감독이 엄지손가락을 치켜들었다.

“아…. 하하…. 아뇨….”

“하긴 강 배우 얼굴에…. 그냥 말만 하면 넘어오겠지. 어쨌든 오늘 수고.”

“예, 감독님도 수고하셨습니다.”

강동현은 그러고 주변을 살폈다. 서브 여자주인공인 이해진이 보인다. 강동현은 그녀에게 얼른 다가갔다.

“이해진 선배님.”

“어~ 동현아. 말 편하게 하라니까.”

“누나.”

“오냐. 왜?”

“아, 저 잠깐 시간 있으세요?”

“응? 왜 그러는데?”

“제가 그…. 나중에 드라마에서 나올 고백 장면 좀 연습을 하려고 하는데….”

“뭐? 우리 드라마?”

“아, 그건 아닌데…. 혹시 잠깐 괜찮을까요?”

강동현이 말하자 이해진은 그의 얼굴을 좀 쳐다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뭐, 어떻게 하자는 건데?”

“제가 고백을 하면 누나가 차는 거예요. 엄청 매정하게.”

“응? 그런 건 왜?”

“한 번 그런 역할 하면 어떤 느낌일까 궁금하기도 하고…. 혼자만 볼 거니까 잠깐 폰으로 촬영해도 괜찮죠?”

“응…. 뭐, 그래.”

이해진은 참 별것도 열심히 한다 싶어서 그를 쳐다보았다. 그렇게 영상을 그 자리에서 몇 개나 찍은 후 그중에서 가장 그럴듯한 것을 골랐다. 강동현은 그것을 황경호한테 보냈다. 차를 타고 사무실로 갔다. 벌써 밤 11시였다. 사무실에 도착을 하고 나니 한참 뒤에 답장이 왔다.

<가짜잖아>

“…….”

강동현은 회사에 생긴 자신의 사무실에 앉아 책상 위에 놓인 휴대폰에 온 메시지를 보고 좀 좌절했다. 어떻게 알았지?

<진짜야>

<8월에 방영하는 드라마 출연자 아냐? 니가 진짜 그런 여자한테 고백을 했다고? 그리고 이거 촬영 각도가 대놓고 상대도 찍는 거 보이게 되어 있는데 내가 바보로 보이냐?>

“…….”

애가 쓸데없이 예리하다….

‘아오, 진짜….’

강동현은 곧바로 인정하고 태세를 전환했다.

<좀 봐줘>

<싫어>

강동현은 한숨을 푹푹 쉬었다. 도대체 누구한테 고백을 하란 말인가. 강동현이 노이즈 마케팅을 해야 할 급의 배우도 아니고 스캔들 같은 건 무조건 마이너스였다. 그리고 대뜸 진짜같이 고백했다가 누가 수락하면 어쩔 것인가. 곧바로 거짓말이었다고 말하는 것도 엄청난 실례일 것이며 강동현은 발기부전이라 사귀는 척하기도 힘들다.

게다가 동료 배우들이나 업계 사람들 사이는 당연히 위험하고 그렇다고 개인적으로 아는 사람들은 개인적으로 알기 때문에 더 위험하다. 지금까지 알았던 여자들 중 어떤 여자라도 전화를 하면 나올 것 같지만….

‘고백하면? 아…. 꼬인다, 꼬여….’

강동현은 휴대폰을 들고 왔다 갔다 하고 있었다. 강동현의 사무실 문이 열리면서 사장인 옥미현이 고개를 내밀었다.

“은혁아, 왜 사무실에 있어? 촬영은?”

“아…. 찍고 왔어요. 생각보다 빨리 찍어서….”

“그럼 집에 가지 왜 사무실로 왔어?”

“아, 뭐 좀 들고 가려고….”

옥미현도 아직 퇴근을 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녀는 강동현의 오피스 문을 열고 들어왔다. 강동현은 아직도 고민을 하고 있다가 앗, 하고 옥미현을 돌아보았다.

날 제일 잘 찰 것 같은 여자!

그는 휴대폰 카메라를 켜서 녹화 버튼을 누르고 몰래 책장에 세웠다. 그리고 강동현의 책상 위에다 들어온 대본을 놓는 옥미현을 뜨거운 눈길로 쳐다보았다.

“누나….”

강동현이 그렇게 나지막하게 부르자 옥미현이 깜짝 놀라 그를 돌아보았다. 그녀는 주변을 쳐다보다가 자기 자신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지금 나 부른 거니?”

강동현은 그녀의 손목을 잡고 자신에게로 끌어당겼다. 그리고 카메라의 각도를 의식하여 그녀와 자신의 투샷이 제대로 나오게끔 자세를 잡고 그녀의 눈을 열렬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사랑해요…!”

강동현은 그렇게 말하며 옥미현의 허리를 끌어당겼다.

“저 사실 누나 만나려고 사무실로 온 거예요. 요새 우리…. 너무 얼굴 안 본지 오래됐잖아요.”

“은혁아…. 너 미쳤니?”

옥미현이 얼떨떨한 얼굴로 말했다. 강동현은 그녀의 입술에 자신의 검지를 턱 올렸다.

“저 누나 처음 봤을 때부터 반했어요. 저 그때 갈피 못 잡고 오디션이나 보러 다닐 때 저 알아봐 주시고 거둬 주시고…. 누나처럼 강하고 멋있는 여자 처음 봤어요. 함께 하면 할수록 좋았어요. 사실 제 전 여자친구랑도 누나 때문에 깨진 거나 다름없어요. 제가 계속 누나 생각만 하니까요.”

“야….”

“전에 만난다고 하는 애도 누나 잊어보려고 그래서 만난 거예요. 근데 누나가 계속 제 마음도 모르고 놀리고….”

“잠깐만 은혁아.”

“저 많은 거 안 바라요, 누나…. 누나 가정 있는 사람인 거 잘 알아요. 그런데 정말… 누나 너무 보고 싶어서…. 그래서… 오늘 온 건데…. 누나 얼굴 보니까 갑자기 참을 수가 없었어요. 보고 싶었어요!”

그리고 강동현은 옥미현을 확 끌어안았다. 그리고는 금지된 사랑에 빠진 순수한 청년처럼 애절한 눈빛으로 그녀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사랑해요.”

“……..”

옥미현은 일단 강동현을 밀어냈다. 그리고 품에서 담배를 하나 꺼내서 물더니 불을 붙였다.

“누나…. 실망했어요? 제가 이렇게 공사 구분 못 하고… 사랑한다고 해서….”

강동현이 약간 시선을 피하며 자신감 없는 목소리로 말하자 옥미현이 담배를 든 손으로 눈썹을 살짝 긁적이더니 손가락으로 강동현을 가리켰다.

“너… 너… 음….”

옥미현은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는지 그러다가 다시 담배를 물었다. 그녀는 아리송한 얼굴을 하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너…. 그럼 우리 회사 주식 5%만 무상으로 돌려주면 안되냐?”

“……..”

임기응변에 약하지 않은 강동현이었지만 순간 뭐라고 반응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옥미현이 피식 웃었다.

“농담이야, 쨔샤.”

“누나….”

옥미현이 갑자기 소리를 내서 웃기 시작했다.

“하하하. 진짜. 어휴. 참나.”

그렇게 이해할 수 없는 소리를 내더니 다가와서 강동현의 어깨를 툭툭 치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은혁아.”

“네….”

“누나는 남편과 애들이 있어요. 응?”

“네…. 알아요.”

“마음만 감사하게 받을게.”

그렇게 말했다. 강동현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사장님, 최고!’

옥미현은 또 웃더니만 강동현의 등을 퍽퍽 쳤다.

“웃기는 놈이야, 진짜. 참나.”

그러더니 그녀가 사무실을 나갔다. 강동현은 얼른 책장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그리고 영상이 제대로 찍힌 것을 확인했다.

“아, 잘 나왔다.”

스스로도 그렇게 감탄했다. 그리고 대용량 비디오를 몇 개로 나누어 황경호한테 전송을 하고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약간 고민했다. 우리 사장님이 이런 거 가지고 어색해지고 이러실 양반은 아니지만…. 그래도 단박에 거절하시네. 살짝 혹하실 만도 할 텐데….

‘나 차는 여자가 영지 말고 또 있다니….’

강동현은 저도 모르게 약간 자존심에 타격을 입었다.

*

황경호는 오늘도 이른 시간에 출근을 하면서 한숨을 푹푹 쉬었다. 오늘은 낙서가 없는 날이지만 쓰레기가 왕창 쌓여 있을 것이 분명했다. CCTV를 달았는데도 얼굴까지 꽁꽁 싸매고 오는 범인이라 제대로 추적이 안 되는 모양이었다. 아니, 강남 길바닥에 CCTV가 얼만데 왜 이걸 추적을 못 하는가. 다른 범인들은 잘만 잡던데! 아니, 그냥 하루 정도만 잠복해도 잡을 수 있는 거 아냐, 이 스토커? 이렇게 성실한데! 황경호는 강철중이란 형사의 됨됨이를 의심했다. 그 형사는 검사 출신 변호사가 등장하지 않으면 빠릿빠릿하게 일을 하지 않는 사람이다.

황경호는 또 한숨을 쉬며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는데 순간 매캐한 냄새가 나면서 병원 앞이 희뿌연 연기로 가득 찬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그리고 아래를 보니 쓰레기들에 불이 붙어있었다. 황경호는 얼른 소화기의 위치를 떠올리고 휴대폰으로 119에 전화를 걸었다.

“여기 압구정…!”

일단 소화기로 불을 끄고 소방관들을 기다렸다. 그러고 있으니 곧 몇몇 사람들이 출근을 했다.

“이게 다 무슨….”

사람들은 매캐한 냄새와 소화기 분말로 엉망이 된 자동문 앞을 보고 입을 딱 벌렸다. 황경호는 연기를 마셔서 아직도 콜록거렸다.

“그 형사 진짜 일 좀 제대로 하라고 해요. 이걸 왜 못 잡아요.”

황경호가 깜짝 놀란 마음에 이강유에게 그렇게 말했다. 이강유도 요새 이것 때문에 마음고생이 심해 얼굴이 반쪽이 되었는데 불까지 나니 정말 눈빛이 퀭해지는 게 보였다. 이강유는 곧바로 전화를 했다.

“예, 강 형사님. 이강유입니다. 지금 그 범인들이 저희 병원 앞에 방화를 했는데요…. 이 정도 되면 정말 수사 좀 제대로 해주셔야 하는 거 아닙니까? 이 정도면 3년 이상 징역 때릴 수 있는 범죄라고 알고 있는데요.”

이 정도 되면 아무리 점잖은 사람이라도 목소리가 높아지기 마련이었다. 이강유는 자리를 옮기면서 전화 통화를 하고 이제 막 온 소방관들은 간호사들이 상대했다. 결국에 겨우 어질러진 것을 치우고 문을 여니 10시였다. 예약 손님들이 불만을 터뜨렸다.

“죄송합니다. 갑자기 저희 병원에 일이 생겨서…. 예, 죄송합니다.”

황경호는 그렇게 인사를 하고 돌아다녔다. 결국 다들 점심도 먹지 못하고 일을 하고 7시 30분이 되어서야 병원문을 닫을 수가 있었다. 다들 쫄쫄 굶어서 얼른 식당으로 향했다. 이번 일로 병원 식구들 모두가 엄청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 상황이라 별다른 말 없이 밥만 먹었다.

“내일 봬요….”

그렇게 인사를 하고 헤어지는데 한숨이 푹푹 나왔다. 황경호는 문득 대학을 같이 다니던 동기들 중에 다른 비뇨기과로 취직을 한 친구가 생각이 났다. 뜬금없긴 하지만 그에게 불쑥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아…. 제현이 전화 맞나요?”

[맞는데요.]

“아, 제현아. 나 경혼데. 황경호.”

[어! 황경호! 야, 너 진짜 오랜만이다. 살아 있었냐? 동창회도 한 번도 안 오고.]

“잘 살아. 너도 잘 지냈어?”

[나야 잘 지내지! 그래, 웬일이야? 갑자기 전화를 다 하고.]

“아니…. 너도 비뇨기과로 취직한 게 생각이 나서. 너네 병원은 어떤가 싶고….”

[응? 왜? 너네 병원 무슨 일 있어?]

이제현은 황경호가 간호대학을 다닐 때 꽤 친하게 지냈던 친구들 중 하나였다. 오랜만에 전화를 했지만 넉살이 좋은 애라 크게 어색해하는 기미도 없었다. 황경호는 지금까지 병원에서 일어났던 일들을 차근차근 설명을 했다. 그리고는 한숨을 쉬며 그에게 물었다.

“너네 병원도 이래?”

그렇게 물었더니 이제현이 즉답했다.

[아니? 야, 세상에 그런 병원이 어디 있어?]

“…….”

진짜 병원을 때려 치워야 하나. 예전에 강동현 때문에 심각하게 이직을 고민한 적이 있었지만, 진짜로 이직을 해야 하나 하는 생각이 갑자기 들었다.

‘사람들도 좋고 다 좋은데….’

“그래…. 그렇구나…. 알겠어…. 응. 다음에 술 한잔해. 응~ 들어가.”

황경호는 힘없이 전화를 끊고 한숨을 푹푹 쉬면서 집으로 갔다. 식당에서 먹은 음식이 음식 같지가 않았다. 술이라도 한잔 할까 싶었다가 내일 아침에도 또 일이 있을 걸 생각하면 술 먹기도 무서웠다. 발을 질질 끌며 지하철을 탔다. 오늘따라 지옥철이 숨이 막힌다. 완전 녹초가 되어 집으로 들어왔다. 억지로 씻고 침대에 털썩 몸을 던졌다. 침대가 마구 그를 빨아당기는 것만 같았다. 밤 9시였다. 배가 고팠다. 게다가 너무 피곤하니 잠도 오지 않았다. 황경호는 어찌해야 할 바를 모르며 피곤에 지쳐 엎드려 있었다.

그러다가 너무 배가 고파 일어나서 냉장고에서 김치랑 계란, 스팸을 꺼내고 싱크대 밑에서 식용유, 참기름, 간장을 꺼냈다. 프라이팬을 꺼내 중불에 올리고 식용유를 둘렀다. 스팸을 썰고 김치도 한 번 씻어 물을 짠 후 빠르게 썰었다. 스팸을 먼저 볶고 김치를 넣어 볶고 밥을 크게 한 주걱 퍼서 넣었다. 참기름과 간장을 작은 스푼으로 두 스푼을 넣고 계란도 두 개 풀어서 볶았다. 그리고 완성된 것을 큰 유리 볼에다 넣고 모양을 동그랗게 해서 위에다 깨와 김 가루를 뿌렸다. 그걸 그냥 침대로 안고 와서 노트북을 틀어 무릎 위에 놓고 퍽퍽 퍼먹기 시작했다.

‘아, 진짜 피곤하다….’

근데 피곤한 데다 배까지 고픈데 이러고 먹으니까 밥이 술술 들어갔다. 보통 침대 위에서는 절대 뭘 먹지 않는데 말이다. 그러고 영화라도 하나 틀어놓고 보고 있는데 갑자기 폰에 메시지가 마구 오기 시작했다.

‘뭐지….’

황경호는 끔뻑끔뻑 졸음이 오는 눈으로 휴대폰을 확인했다. 강동현에게서 동영상이 와있었다. 뭐야…. 황경호는 그중에 가장 처음에 있는 것을 눌렀다.

[누나, 사랑해요…!]

황경호는 잠에서 약간 깼다. 노트북을 그냥 덮어 옆으로 밀어버리고 동영상을 전체화면으로 바꾸어 보기 시작했다. 황경호는 킥킥 웃기도 하고 감탄도 하면서 끝까지 보았다.

“와…. 진짜 잘한다.”

황경호는 키득키득 웃으면서 눈에 고인 눈물을 닦았다. 저번에 보냈던 영상은 누가 봐도 거짓말 같았는데 지금은 누가 봐도 진짜 같았다. 게다가 저 ‘누나’라는 사람은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나이도 강동현보다 꽤 있어 보였는데(하긴 애도 있는 유부녀라고 했다)도 강동현의 열렬한 사랑 고백에 웃기만 하면서 바로 거절을 하는 걸 보니 대단한 사람 같아 보이기도 했다. 나름대로 고심을 해서 고른 상대인 것 같았다.

처음에 사랑한다면서 외쳤을 때는 ‘저렇게 사랑 고백 하는 사람도 있어?’라고 당황했으나 그 뒤에 그가 한 말이나 눈빛, 말투, 제스처를 보면서 정말 잘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진심으로 고백을 하고 있는 남자 같아 보였다. 마음이 애끓고 주체할 수 없는 혈기왕성한 젊은 남자 같았다.

‘진짜 이런 식으로 고백하는 놈은 아닐 것 같은데.’

실제로 전 여자친구한테 이런 식으로 고백했을 것 같진 않았지만, 뭐. 이건 인정을 안 해줄 수가 없다. 황경호는 몇몇 명장면을 몇 번이고 돌려보았다. 그리고는 동영상 화면을 대신해 채팅창을 띄웠다. 그리고 강동현한테서 온 메시지를 확인했다.

<이제 됐지?>

황경호는 어쩐지 기분이 유쾌해져서 그에게 답장을 보냈다.

<근데 누구야, 저 여자분?>

<우리 사장님>

강동현이 곧바로 답장을 보냈다. 황경호는 그 답장을 보고 더 웃겨서 키득거렸다. 그 여자가 강동현을 개처럼 부려 먹는다고 팬 커뮤에서 악명이 자자한 J 엔터 사장이었나 보다.

<사장님한테 그래도 돼?>

<우리 사장님 이 정도론 끄떡도 없으셔. 좀 놀리시긴 하겠지만>

황경호는 다시 영상을 틀어서 보다가 또 키득거렸다.

한다고 하는 건 진짜 다 하는 남자

황경호는 문득 천장을 보면서 그렇게 생각했다. 강동현이 집적거리기 시작한 지도 진짜 거의 2년이다. 재작년 7월인가 8월쯤부터 병원에 다니기 시작했으니. 이제 6월이고….

황경호가 울고불고 화를 내든 말든, 싫어하든 말든, 뭐라고 하든 말든… 강동현은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있었다. 황경호를 만나고 싶으니까 계속 만날 거라고 하고. 이전까지 한 일들에 대해 죄책감이 눈곱만큼도 없어 보였다. 그런 거 생각하면 정말 미워서 죽을 것 같다.

하지만 그때 키스 대신에 얼굴을 때리고 난 이후로 황경호가 뭐라고 하기만 하면 재깍 재깍 시키는 대로 하는 강동현을 보면 뭔가, 유쾌했다. 강동현 본인이 자기 얼굴에 먹칠을 하고 있는 건데도 불구하고 그는 황경호에게 절절 메여서 뭘 더 시켜달라고 조르질 않나. 우습기도 하고 통쾌하기도 하고 그랬다.

한때는 그렇게 강압적으로 황경호를 괴롭히던 남자였다. 그런 그가 황경호가 이러라면 이러고 저러라면 저러고 있으니. 이상할 정도로 즐거웠다. 고작 키스 한 번으로 그 정도나 되는 남자를 마구 조종할 수 있다는 건 정말 단전이 떨릴 정도로 기분 좋은 일이었다.

황경호는 강동현이 보낸 메시지를 다시 확인했다.

<내일 퇴근 때쯤에 병원으로 간다?>

황경호가 답장했다.

<알았어>

*

아침에 병원에 오니 뜻밖의 소식이 와있었다. 간밤에 스토커가 잡혔다고 한다.

“진짜?”

“어. 유태범 환자님 스토커.”

“대박….”

황경호가 입을 딱 벌렸다.

“나도 도은혁 환자 스토커일 줄 알았어.”

“와…. 진짜 걔 생각보다…. 인기 없나 보다…. 민간인한테 지네.”

“아, 그렇게 되는 건가?”

“근데 유태범 환자 진짜 대단하다. 예전에 김철식도 그렇고….”

결국 병원에 테러를 하고 있는 범인은 유태범 환자의 스토커로 밝혀진 모양이었다. 어젯밤에 이강유가 경찰서까지 갔다 왔다고 했다. 그 형사가 일을 영 안 하는 건 아니었나 보다. 황경호와 정기연이 동시에 한숨을 탁 쉬었다.

“이제 좀 살 것 같겠다. 이제 아침마다 안 치워도 되고.”

“근데 우리…. 처음에 초딩인 줄 알았잖아. 큭큭. 아, 미안하다. 초딩들한테.”

“아, 그러게. 초딩… 초딩들 불쌍해.”

둘이 그렇게 하릴없이 시시덕거렸다. 그리고 그날은 다들 좀 가벼운 마음으로 근무를 마치고 6시 반부터 하나둘 퇴근을 하기 시작했다.

“경호야, 너도 빨리 퇴근해.”

“아, 네.”

황경호는 매일 가장 늦게까지 남아 문을 잠그는 습관이 생겨서 저도 모르게 옷을 갈아입고 남아있었다. 이강유의 뒤를 따라 나가려다가 병원으로 전화가 와서 그걸 받으러 돌아갔다.

“선생님, 먼저 내려가세요.”

“그래. 내일 보자.”

“네, 이강유 비뇨기과입니다.”

[아, 이강유 선생님 거 계십니까?]

“어? 형사님이세요?”

황경호가 목소리를 알아듣고 그렇게 물었다.

“선생님 이제 막 나가셨는데요. 무슨 일이세요?”

[전화를 안 받아서. 아, 별게 아니라…. 조사를 하다 보니까 범인의 자백이랑 병원에서 일어났던 범행 몇 개가 완전히 일치하지가 않네. 혹시나 싶어서 연락해봤어.]

“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별게 아닌 게 아닌 것 같은데…. 황경호가 깜짝 놀라서 되물었다.

[아니, CCTV를 확인해보니까 좀…. 어쨌든 별일 없으면 됐어. 수고.]

그러고 형사는 전화를 뚝 끊었다. 황경호는 황당해서 전화기를 쳐다보았다.

“일을 할 생각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그렇게 생각했다가, 황경호로써도 별달리 알 수 있는 게 없어서 그냥 문단속을 하고 엘리베이터를 탔다. 그리고 1층으로 내려오니 엘리베이터의 옆에 익숙한 얼굴이 서있었다.

“응? 유태범 환자님? 안 가시고 뭐 하세요?”

유태범이 서있었다. 황경호가 고개를 갸웃했다.

“아, 저… 이강유 선생님 언제 나오시나 싶어서….”

“우리 선생님이요? 벌써 차 끌고 가시지 않았을까요?”

“어? 오빠. 안 가고 뭐 해.”

그때 정기연이 1층 화장실에서 화장을 고치고 나왔다. 그녀는 유태범을 발견하더니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안 가시고 뭐 하세요?”

“아…. 이강유 선생님 좀 기다리느라….”

정기연과 황경호가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이 악덕 파렴치 의사….

“무슨 일 때문에 그러시는데요?”

정기연이 물었다. 유태범은 평소와 같이 약간 주눅이 든 것 같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 그게… 저 때문에 병원 피해 입으신 것 때문에요…. 얼마나 될지 잘 몰라서 일단 있는 대로 들고 와봤는데요….”

유태범이 주머니에서 흰 봉투를 꺼냈다. 황경호와 정기연이 당황해서 손을 마구 가로저었다.

“아뇨! 저… 저희한테 이러셔도….”

저거 돈이지? 황경호와 정기연이 서로의 얼굴을 황망하게 쳐다보았다. 그때 황경호의 전화기가 울렸다. 전화를 받았다.

[너 왜 이렇게 늦게 나와? 앞에 차 대 놨으니까 빨리 와.]

“뭐?”

화면을 보니 <지루임포고자개새끼>다. 빵빵하고 밖에서 클락션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들어보니 인도 앞에 짙은 네이비색 BMW가 서있다. 황경호는 일단 전화를 끊었다. 그때 옆 건물의 커피전문점에서 커피를 두 잔 사든 이강유가 나타났다.

“다들 안 가고 뭐 해?”

“아, 선생님! 아니, 유태범 씨가…!”

“유태범 씨?”

“선생님 이거 받으세요!”

유태범은 이강유에게 가지고 온 걸 덥석 떠넘기더니 순식간에 달려갔다. 얼떨떨하게 유태범의 뒷모습을 보던 이강유가 간호사들을 돌아보았다.

“이게 뭐야?”

“돈이래요….”

“뭐? 돈?”

이강유가 깜짝 놀라서 고개를 빼 유태범을 찾아보았다. 그때였다. 차에서 내려 청담빌딩 쪽으로 걸어오던 강동현이 이강유의 팔을 홱 끌어당겼다. 그 순간 쇠로 된 야구방망이가 깡! 하고 이강유가 있는 쪽 벽을 쳤다.

“선생님!”

황경호와 정기연이 비명을 질렀다. 벽을 친 반동으로 야구방망이를 놓친 사람은 오토바이 헬멧을 쓰고 있었다. 그는 이강유를 노리고 있었다. 정기연은 얼떨결에 그 야구방망이를 얼른 집어 들었다. 이강유와 강동현은 서로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우당탕 넘어졌다.

“선생님! 괜찮으세요?”

황경호가 얼른 두 사람을 일으키려고 다가가다가 문득 멈추어 섰다. 깔려있는 이강유와 그 위를 덮친 강동현을, 저도 모르게 감상하듯이 쭉 훑어보고 말았다. 한 명은 양복을 입은 엘리트 의사에 한 명은 화려하게 생긴 연예인이다. 기본적으로 둘 다 훤칠하고 잘생긴 남자들이라서 그런지 은근히 합이….

그렇게 황경호가 이상한 상상에 사로잡혀 있는 동안 테러에 실패한 범인이 도망가려다가 황경호와 부딪쳤다. 황경호는 이제 막 일어나려는 강동현의 등으로 엎어져서 이강유는 두 사람분의 무게에 고통스러워해야 했다. 강동현이 욕지거리는 속으로 삼키며 황경호를 밀어냈다.

“이놈의 병원은 뭔 이런 일이 시시때때로 일어나?”

강동현은 그대로 바닥에 넘어진 범인을 붙잡아 눌렀다. 그리고 헬멧을 벗겨냈다. 드러난 얼굴을 보고 강동현이 깜짝 놀라서 입을 떡 벌렸다.

“은지야?”

황경호가 헐레벌떡 다가와서 물었다.

“누구야? 아는 사람이야?”

경황이 없어서 반말이 나갔다. 강동현에게 짓눌려 있는 것은 웬 여자였다. 그것도 꽤 어려 보이는 여자애였다.

“오빠! 일단 이것 좀 놓고 얘기해요!”

강동현은 그녀를 놓아주었다. 황경호가 강동현의 옆구리를 찔렀다. 강동현은 선글라스를 고쳐 쓰며 작게 얘기했다.

“내 팬클럽 회장….”

“뭐?!”

황경호도 입을 딱 벌리고 그녀를 보았다. 강동현 팬 커뮤니티 <우리동현누리동현>의 회장이 바로 이 여자애란 말인가! 강동현이 침착하게 물었다.

“너 여긴 어떻게 알고….”

강동현이 그렇게 묻자 여자애는 되려 엄청나게 분하고 억울한 얼굴이 되었다.

“내가 나 좋으라고 이런 일 하는 줄 알아요? 내가 어떻게든 오빠 지켜주려고…!”

“뭐?”

그녀는 빔이 쏘아져 나올 것 같은 눈으로 이강유를 노려보았다. 그리고는 정의를 위해 의연히 일어난 투사처럼 외쳤다.

“오빠가 임포라니!”

강동현은 당연하고, 수많은 병원 일동이 모두 달려들어 그녀의 입을 막았다.

*

사랑하는 오빠의 수치스러운 사실을 영원히 지워버리고 싶었다. 그게 스토커의 이유였다. 그녀는 완벽한 강동현의 단 하나의 흠(?)이라고 할 수 있는 병원 기록을 말살하고 싶어 했다. 그래서 불도 지르고 원장인 이강유도 완전히 보내 버리려고 했단다. 원래 치료기록이라는 것은 환자 개인의 동의 없이는 밖에 유출될 수 없다고 말을 했지만, 세상일은 모르는 거라는 어른스러운 말을 했다.

강동현의 팬클럽 회장과 병원 사람들은 전부 경찰서에 몇 시간이고 붙잡혀 있어야 했다. 강동현은 나중에 변호사를 부르고 자기는 상관없는 사람이라고 중간에 쏙 빠져버렸다. 게다가 신고를 하게 된 결정적 계기였던 차 테러 사건은 초딩이라는 또 다른 범인이 있었다. CCTV를 다시 보다가 발견했단다(진짜 이 형사 일 제대로 안 한다).

비뇨기과 의사라는 게 이렇게 방방곡곡에서 원한을 사는 직업이라는 걸 알게 되니, 황경호는 정말로 이직을 해야 하나 심각하게 고민을 하면서 경찰서를 나왔다.

“데려다줄까. 고생들 했는데….”

이강유가 파리한 얼굴로 정기연과 황경호에게 물었다. 황경호는 고개를 저었다.

“아뇨…. 전 그냥 갈게요.”

“전 이 근처에서 약속이….”

“그래….”

다들 한숨을 푹 쉬고는 헤어졌다. 황경호가 발을 질질 끌며 계단을 내려가는데 근처에 차가 오더니 클락션을 울렸다. 빵!

“타.”

강동현이었다. 아직 해야 할 게 남아있었다…. 황경호는 한숨을 푹 쉬었다. 조수석에 탔다.

“민폐 덩어리….”

황경호가 그렇게 중얼거리자 강동현이 코웃음을 쳤다.

“이게 왜 내 탓이야. 은지 탓이지. 내가 그러라고 시킨 것도 아닌데.”

그렇게 말하니 할 말이 없다. 황경호는 완전 녹초가 되어 강동현의 차 시트에 몸을 푹 뉘었다. 그렇게 아무 말 없이 황경호의 집 앞까지 왔다.

“엄청 피곤한 모양이네.”

강동현이 웃으면서 황경호의 얼굴을 만졌다. 그는 선글라스를 낀 채로 황경호의 얼굴을 보고 있었다. 황경호가 힘없이 대꾸했다.

“네….”

아, 이걸 또 해야 하나….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강동현이 가까이 다가왔다. 황경호는 그냥 체념하고 눈을 감았다. 쪽.

“들어가서 빨리 쉬어. 아, 밥은 어떡해. 뭐 사주고 갈까?”

“…….”

황경호는 약간 당황했다.

“이걸로 끝이에요?”

황경호가 그렇게 묻자 강동현이 오히려 더 놀랐는지 가만히 황경호의 얼굴을 보다가 확 다가왔다.

“더 해도 돼?”

그는 선글라스를 벗었다. 황경호는 두 손으로 그의 턱을 밀어냈다.

“아니…! 아니, 그런 게 아니라…. 이거… 그쪽이 그 사장님한테 고백하고 하는 거….”

황경호가 그렇게 말하자 강동현이 눈을 크게 떴다.

“아, 맞다!”

강동현이 한 손으로 자신의 두 눈을 덮고 하늘로 고개를 들며 안타까운 신음을 내더니 다시 황경호를 보았다.

“다시 해도 돼?”

“아뇨….”

황경호가 그렇게 말하자 강동현이 한숨을 푹푹 쉬더니 황경호를 놓아주었다.

“알았어…. 들어가.”

그러더니만 두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감싸고 자학했다.

“아, 나 진짜 병신 아냐…. 나 간다….”

그러고는 자기 차로 가더니 운전석에 탔다. 곧 시동을 넣더니 출발했다.

“…….”

황경호는 떠나가는 차를 잠깐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여전히 피곤한 몸으로 집으로 들어오니 문자가 온다. 확인하니 강동현이다.

<깜박했다. 나 이제 뭐 해?>

“……..”

황경호는 신발을 벗으면서 답장했다.

<생각해볼게요>

그리고 며칠 동안 그냥 잊고 살았다. 몇 번 더 문자가 왔지만 씹었다. 황경호는 결국 병원에 오랜만에 치료를 받으러 온 강동현과 마주해야만 했다.

“오랜만에 오셨네요, 도은혁 환자님.”

그렇게 웃으면서 맞이했다. 강동현은 황경호를 따라서 진료실로 들어갔다.

“옷 갈아입고 앉으세요.”

그렇게 말하는데 강동현이 다가왔다.

“자.”

강동현은 품에서 장미 한 송이를 꺼냈다. 황경호는 그걸 한 번 보았다가 고개를 돌렸다.

“이런 거 안 받아요.”

“왜. 전에는 받았잖아.”

“오늘은 싫어요.”

“그냥 주는 거야. 오는 길에 생각나서 사왔어.”

“안 받아요.”

“아, 그럼 어떡해. 이걸 버려?”

“맘대로 해요.”

“그냥 받아.”

가벼운 듯 투명한 포장지에 가볍게 쌓인 장미 한 송이였다. 황경호는 마지못해 그것을 받았다. 단 한 송이일 뿐인데도 이렇게 향기롭다. 잠깐 향기를 맡는데 기분이 좀 이상하다. 그냥…. 뭔가 이상하다. 그래서 그냥 장미꽃을 가만히 보고 있었다.

“그래서 나 이제 뭐 해?”

강동현이 옷은 갈아입지도 않고 그렇게 황경호를 졸졸 따라오며 물었다.

‘근데…. 진짜 이 인간은 아무런 타격이 없는 모양이네….’

그제야 황경호는 장미꽃에서 눈을 떼고 강동현을 돌아보았다. 황경호는 분명히 이 인간이 그처럼 상처 입기를 바라서 그런 일들을 시킨 것이었다. 망신을 당하고 스트레스를 받으면 아무리 그라도 기분은 안 좋아질 테니까. 황경호는 강동현이 하는 말, 행동 하나하나에 영향을 받고 상처를 입곤 했다. 그런데 이 변태는 대놓고 엿을 먹이려고 해도 금방 이렇게 쌩쌩해진다.

‘얜 왜 이렇게 괜찮지….’

황경호는 그렇게 생각하며 물끄러미 그를 올려다보았다.

“무릎 꿇고 엎드려서 내 발에 키스해.”

이전 미션들처럼 깊은 고심 후에 나온 요구는 아니었다. 그때 얼굴에 주먹질을 해도 되냐고 했을 때만큼 즉흥적이었다.

“……..”

“……..”

잠깐 둘은 서로의 눈을 바라보았다. 황경호도 그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강동현은 어쩐지 설핏 웃었다.

곧 그의 머리가 황경호의 눈높이보다 내려가자 황경호는 깜짝 놀라서 가슴이 두근 했다. 정말? 본인이 시켰으면서 진짜 놀랐다. 그렇지만 밖으로 티를 내지는 못했다. 강동현은 정말로 무릎을 꿇었다. 황경호는 그를 내려다보았다. 심장이 한 번만 뛰는 게 아니라 마구 두근거리는 게 느껴졌다. 아플 정도로 뛴다. 침을 꿀꺽 삼켰다. 목 뒤의 솜털이 오소소 서는 느낌이었다. 긴장이 되어 주먹을 꽉 쥐었다. 그는 천천히 엎드려서 황경호의 발등에 입을 맞추었다. 그리고 옷을 살짝 들어 복숭아뼈 근처에도 입을 쪽 맞추더니만 다시 바로 섰다.

“됐지?”

“…….”

강동현은 황경호의 빨개진 얼굴을 감싸 잡았다. 그는 황경호가 흥분한 것을 발견했다.

‘하여튼 얘도….’

강동현은 상대의 대답을 기다릴 것도 없이 바로 입을 맞추었다. 그의 미끌미끌하고 황홀한 입 안으로 혀를 쏙 집어넣었다.

“응…!”

강동현은 황경호의 엉덩이를 받쳐 들었다. 그리고 의자에 털썩 앉아 그를 무릎 위에 앉게 했다. 황경호는 두 손으로 강동현의 어깨를 잡았다. 그는 얼굴이 완전 빨개져 있었다. 마치 그걸 할 때처럼….

“안에 핥아 줄게…. 혀 내밀고 입 더 벌려봐.”

강동현도 흥분하여 야하게 속삭였다. 황경호는 시키는 대로 입을 벌렸다. 강동현은 황경호의 혀끝부터 안쪽까지 천천히 혀로 쓸어 올렸다.

“으으응…!”

황경호가 소스라치게 놀라는 것처럼 몸을 부르르 떨었다. 이렇게 민감하게 반응하는 걸 보니 가슴이 다 뿌듯하다. 강동현은 그 반응에 힘입어 그의 셔츠 안으로 손을 넣었다.

지금까지 시켰던 걸 생각하면 이 정도는 우습다. 무릎을 꿇는 정도야. 강동현은 가족들에게 발기부전이라고 커밍아웃하는 것도 단박에 해치웠었다. 기분 나빠할 거라고 생각한 걸까. 이러는 걸 보면 은근히 애가 순진하다.

“아앙, 흐읏, 아앗…!”

엄지로 젖꼭지를 둥글게 한 번 문지르자 신음소리를 엄청 크게 내서 강동현도 깜짝 놀랐다.

‘아, 씨. 좋잖아…. 오늘따라 엄청 잘 느끼네.’

강동현은 그의 혀를 물고 이로 잘근잘근 씹다가 쪽쪽 빨았다. 당도가 높은 과즙이 터지는 것 같은 맛이다. 상대의 타액을 빨아먹었다. 그리고 혀를 넣어 그의 혀와 비비고 문질렀다. 강동현은 다른 손을 그의 바지 안으로 넣어 그의 둥그런 엉덩이를 꽉 주물렀다. 그리고 서로의 하반신을 꽉 붙였다.

“흐응…. 앙. 읏. 으으응. 하응….”

황경호의 손이 강동현의 머리카락 속으로 파고 들어왔다. 얼굴의 피부며 두피까지 짜릿짜릿 소름이 돋는 걸 느꼈다. 엄청 기분 좋았다. 그가 스스로 은근히 허리를 흔들어 앞을 강동현의 하반신에 문지르기 시작했다. 강동현은 그의 엉덩이를 꾹꾹 눌러 그것을 도왔다..

이런 건 처음이다. 강동현은 그의 반응에 솔직히 좀 놀라서 슬쩍 눈을 떠서 그의 얼굴을 보았다. 얼굴이 새빨갛고 속눈썹을 파르르 떨고 있는 야한 얼굴이 보였다. 강동현은 그의 뺨에 입술을 대고 쪽쪽 빨았다. 그리고 이를 세워 살살 깨물다가 다시 빨았다. 그리고 다시 입술로 옮겨와 그의 입술을 퉁퉁 불 때까지 빨고 핥았다.

다르다. 그때 그에게 한 달 동안 마구 했을 때랑은…. 그때도 황경호는 자극받아서 얼굴을 빨갛게 붉히고 신음을 흘렸지만, 이렇지는 않았다. 하긴 키스조차도 이렇게 다른데…. 강동현은 인상을 좀 찌푸리고 다시 입을 맞추었다.

아…. 넣고 싶다. 지금이라면 진짜 잘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정말 기분 좋게 해줄 수 있는데. 그가 원하는 대로 뭐든 해줄 수 있는데. 정말로 ‘섹스’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아흐응…. 앙… 흐읏… 아앙….”

강동현은 가냘픈 신음을 흘리는 황경호의 입술을 따라가며 핥았다. 갈 것 같은지 엉덩이에 잔뜩 힘이 들어가 있었다. 강동현은 그걸 풀어주듯이 부드럽게 주물렀다. 부드럽고 보송보송한 엉덩이가 어느새 촉촉해져서 손에 착 달라붙어왔다. 손가락이라도 넣고 싶다…. 강동현은 셔츠 안에 들어간 손으로 그의 등과 허리와 배를 쓰다듬고 다시 가슴을 주물렀다. 그리고 입을 맞추며 그가 자신의 위에서 엉덩이를 더 빠르게 흔들도록 도왔다.

“흣…. 으응! 앗… 으읏… 흐응… 하읏….”

아, 진짜 야하잖아…. 눈을 지그시 감고 스스로 느껴서 움직이는 황경호의 얼굴이나 몸짓이 엄청나게 마음을 끌었다. 뭔가 되게 섬세해서 말이다…. 강동현은 다시 깊게 그와 입을 맞추었다. 그도 이미 꽤나 흥분해 있었다. 그의 허리짓에 같이 비벼지며 섹시하게 신음을 흘렸다.

“으읏… 후….”

황경호의 혀가 강동현의 입술을 핥았다. 입을 벌려 그의 혀를 살짝 깨물고 그 끝을 핥았다. 잔뜩 신음을 흘리며 매달려왔다.

“흐읏…. 흐응…. 아응… 흑…. 아아… 아아아아앙…!”

갑자기 황경호가 크게 신음을 흘리면서 강동현의 위에서 몸을 바르르 떨었다. 강동현이 움찔하고 인상을 썼다. 아, 젠장…. 강동현의 것이 쑥 하고 더 커졌다.

‘아, 젠장. 야해. 꼴려. 아, 씨X. 덮치고 싶다.’

강동현은 잔뜩 흥분하여 그를 꽉 끌어안고 입을 맞추었다. 바지 속에 들어간 강동현의 손이 결국엔 그의 음문을 더듬기 시작했다.

‘일단 넣자…. 넣고 나서 생각하자….’

그렇게 미친 듯이 입을 맞추면서 그의 옷을 벗기려는데, 갑자기 노크 소리가 들렸다.

똑똑똑.

“시간 지났는데 아직 안 끝나셨나요?”

밖에서 다른 간호사가 그렇게 물어왔다. 강동현이 깜짝 놀라서 황경호를 꽉 끌어안고 대신 대답했다.

“아! 네! 아직 안 끝났습니다! 문 열지 마세요!”

“아, 예….”

문이 살짝 열렸다가 닫혔다. 강동현은 식겁을 해서 숨을 흡 참았다가 하아아, 하고 내쉬었다. 깜짝이야…. 그리고 강동현은 자신의 품에 끌어안겨 있는 황경호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괜찮아?”

“…….”

황경호는 얼굴이 새빨개진 채 눈만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 완전 충격먹은 얼굴이었다. 강동현의 품에 숨기라도 하는 것처럼 몸을 웅크리고서 입을 꾹 다물고 눈만 깜박였다.

“안 괜찮아?”

“…….”

황경호는 딸꾹질이라도 날 것 같은 기분이었다. 아까 노크 소리도 못 들었다. 강동현이 그를 확 끌어안고 밖의 다른 간호사랑 얘기를 할 때 정신이 들어서…. 황경호는 너무나 깜짝 놀라서 머릿속이 백지상태가 되어 있었다. 어떻게 된 일인지 알 수가 없었다. 게다가 속옷 안이 완전 축축했다.

‘말도 안 돼….’

황경호는 자신이 강동현의 위에서 직접 엉덩이를 흔들어 그에게 자신의 것을 비벼 댄 것을 기억해내자 정말 뇌가 녹아 귀로 나올 것처럼 얼굴이 벌게졌다.

강동현은 황경호를 끌어안고 그의 머리카락만 가만히 쓰다듬었다. 황경호는 공황상태에 빠져 그대로 영원히 굳어 있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사실을 뇌로 받아 들이고 인정하는데 엄청난 시간이 걸렸다.

그때 강동현이 황경호의 귀에 살짝 속삭였다.

“나도 이러고 계속 있고 싶은데…. 좀 있으면 또 다른 사람 올 걸.”

강동현의 속삭임에 소스라치게 놀라서 황경호는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눈이 마주쳤다. 황경호의 얼굴은 이제 거의 자주색으로 보일 정도로 빨갰다. 강동현이 웃으면서 그의 입술에 쪽 하고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그리고 말했다.

“우리 이제 슬슬 섹스하자.”

*

말이 안 나온다. 황경호는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알 수가 없을 정도로 충격을 먹은 상태에서 강동현의 그런 말까지 듣자 아무것도 움직이지가 않는 걸 느꼈다. 강동현은 황경호의 충격을 제대로 느끼지 못한 건지 그저 그의 뺨을 쓰다듬고 입술을 가볍게 마주치면서 말을 이었다.

“또 뭐든 시켜도 돼. 니가 원하는 거 뭐든 가져가도 되고.”

황경호가 몸을 움찔했다. 강동현은 그런 그가 귀여웠다. 하지만 황경호는 뭐든 빨리 말을 하고 싶었다. 적어도 강동현의 입을 틀어막고 싶었다.

“니가 화나서 나 골탕 먹이려고 이것저것 성가신 것만 시키는 건 알겠는데…. 화도 적당히 풀렸으면 이제 그만해라. 딱히 너한테 도움되는 것도 아니고.”

황경호는 눈만 움직여 그의 얼굴을 보았다. 입술은 여전히 안 떨어졌다. 무슨 말을 해야할지도 알 수가 없었다. 금방 강동현의 몸에 스스로 몸을 비벼 사정해버렸다. 아무런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지금 이 남자가 그런 황경호에게 섹스를 하자고 하면서 뭐라고 하고 있었다. 말을 할 수가 없다.

“아니, 그냥 니 맘대로 해도 되긴 한데…. 차라리 좀 가치 있는 걸로 가져가든가. 집이든 차든 줄 테니까. 그런 게 너한테 더 좋은 거잖아.”

“…….”

충격에 충격이 더해졌다.

황경호는 복수를 하고 싶은 것이었다. 그가 상처받았던 것만큼 상대가 상처받기를 원했다. 그래서 그가 멍청한 짓을 하면서 고생하는 것을 보며 통쾌함까지 느꼈다. 그는 가족들 앞에서도 굉장한 창피를 당했고, 커리어적으로도 분명히 스트레스를 받았을 것이고, 인간관계로도 스트레스를 받았을 것이다. 아마 비슷한 짓을 황경호가 당했더라면 이미 애저녁에 땅을 파고 들어가 누워 버렸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런 일들을 억지로 해도 이 남자는 금방 회복하고, 또 이런 것까지 당당하게 요구해오기에 이르렀다.

황경호는 원래 강동현에게 아무것도 받지 않고 싶어 했다. 뭘 받더라도 곧바로 남을 주거나 기부를 해버렸다. 그에게 뭘 받는다는 것은 결국 화대로 직결된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가 뭐라고 거기에 이름을 붙이든 말이다. 그는 어떻게 해서든 황경호와 섹스를 하고 싶어 했다. 그래서 그에게서는 아무것도 받지 않으려고 했었다.

그런데 강동현의 얼굴을 그렇게 때리고 난 이후로 황경호가 했던 것은 그의 망신을 몸으로 사는 일이었다. 고작 키스 한 번일 뿐이라도. 대가는 언제든지 바뀔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강동현도 얼마든지 값을 지불할 테니 키스만이 아닌 섹스를 하자고 말하고 있었다.

황경호는 정확하게 창부처럼 행동을 했고 강동현은 정확하게 그를 창부처럼 취급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황경호를 죽을 만큼 수치스럽게 만들었다.

눈물이 나왔다.

“야…. 왜 그래?”

강동현이 깜짝 놀라서 황경호의 얼굴을 살폈다. 황경호는 손등으로 얼굴을 가렸다. 뭘 하든 아무것도 소용이 없었다. 황경호는 절대로 강동현에게 상처를 입힐 수 없었다. 오직 그만이 상대에게서 상처를 입을 뿐이었다. 앞으로도 계속 그럴 것이다.

“아니….”

황경호는 그의 무릎 위에서 내려왔다. 부끄러워서 죽어버릴 것만 같았다. 창피해서 죽고 싶었다. 왜 금방 그랬던 걸까. 그러지 말았어야 했는데. 그가 이렇게 자신에게 매달리니 스스로 대단한 사람이라도 된 것처럼 생각한 것일까. 결국 아무것도 아니었다. 아무것도 아니다. 또 뭘 기대한 걸까. 황경호는 빨리 아무 곳으로나 도망가고 싶었다.

“나중에… 나중에 연락할게요.”

황경호는 그렇게 말하고 얼른 진료실을 나가버렸다. 강동현은 황당해서 잡지도 못했다. 그가 뭘 또 잘못한 것인지 한참을 생각했지만 알 수가 없었다. 다른 사람의 재촉을 받아서 그도 진료실에서 나와야만 했다.

“황경호 간호사는 어디에 있습니까?”

강동현은 선글라스와 마스크, 캡모자까지 쓴 상태로 다시 대기실로 나와 사람을 붙잡고 물었다. 그는 내부 카운터 쪽에 눈짓을 했다. 눈빛을 받은 간호사는 고개를 저었다.

“잘 모르겠는데요. 아마 입원실 쪽을 돌고 있지 않을까 한데… 무슨 일 있으신가요?”

“아뇨…. 알겠습니다.”

강동현은 일단 병원을 나왔다. 그리고 전화를 걸었다. 안 받는다. 문자를 남겼다.

<왜 그래? 내가 또 뭐 잘못했어? 섹스하자고 해서 그래? 싫으면 안 해도 돼. 너도 이제 그렇게 안 싫어하는 것 같아서 물어본 거야>

답장은 역시 바로 안 온다. 강동현은 한숨을 쉬었다. 어렵다, 어려워…. 그리고 강동현은 지하로 내려가 차를 타고 촬영장으로 향했다.

황경호는 그 이후에 조퇴를 하고 바로 병원을 나왔다. 도저히 이 얼굴로 지하철을 탈 수가 없어서 택시를 타고 집에 와버렸다. 택시 안에서 내내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그리고 집으로 바로 들어와서 씻지도 않고 침대에 엎어졌다. 결벽증이 살짝 생기고 난 이후로는 절대 이렇게 한 적이 없었다.

“흑….”

왜일까. 계속 눈물이 나왔다. 스스로가 바보 같아서 견딜 수가 없었다. 우울증에 걸려서 스스로가 멍청하고 의미 없게 느껴질 때도 이렇게 운 적은 없었다. 바보 같고 멍청하고… 병신 같다.

왜 정신을 못 차리고 그런 바보 같은 짓을 한 걸까. 이번은 뭐가 다를 거라고 생각한 걸까. 뭐가 다를 수 있길래. 뭘 기대했는데. 아니, 왜 생각 자체를 안 할 걸까.

그냥 그때… 강동현에게 전부 퍼붓고 나서 오지 말라고 했어야 했다. 다시는 오지 말라고 꼴도 보기 싫다고.

근데 그가 계속 황경호에게 빌고 잘못했다고 하고, 황경호가 때리거나 욕을 해도 화를 꾹꾹 참으면서 그의 화를 풀려고 하니까 그게 그렇게 보기 좋았던 걸까. 잘못을 빌어올 때 정말 미안하다면 절대 다시는 만나러 오지 말라고 했어야 했다. 정말 너 같은 건 지긋지긋하다고. 싫다고. 싫어서 죽을 것 같다고…. 그러고 다시는 보지 말았어야 했다. 다시 보지 말아야 했다.

황경호는 곧잘 화대라느니, 창녀니 걸레니 그런 말을 강동현한테 해왔지만 그건 강동현이 아무리 그렇게 취급해도 스스로는 자기 자신이 그렇지 않다는 걸 은연중에 확인하기 위한 반복 작업이었다. 화대는 받지 않는다. 나는 창녀가 아니다. 나는 걸레가 아니다. 그런 식으로 스스로에게 말하고 있었다. 그게 황경호의 마지막 자존심 같은 것이었다.

근데 그 놈이 황경호의 손에 좀 놀아나는 것처럼 행동했다고 해서 대뜸 키스해줄 테니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시켰다. 그러니까 저쪽도 뭐든 해줄 테니 섹스하게 해달라. 결국, 처음과 똑같았다. 아무것도 달라진 건 없었다. 놀라울 정도로 하나도 바뀐 것이 없었다. 대가가 있는 섹스…. 손쉬운 상대. 왜인지는 모르겠는데 굉장히 절망적인 기분이 들었다. 그가 강동현을 마음대로 조종하는 줄 알았는데 그가 황경호를 이제껏 가지고 논 것 같았다. 그리고 그건 황경호의 자존감에 굉장한 타격을 주었다. 이제 많이 괜찮아졌다고 생각했던 바로 그 부분에 말이다.

부끄럽다. 창피하다. 수치스럽다.

이제 더 이상 만나기 싫어

꼴도 보기 싫어

황경호는 더듬더듬 휴대폰을 찾았다. 그리고 강동현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 연결음이 가는 동안 황경호는 눈을 감고 계속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울음이 섞인 숨이 계속 폐부를 아프게 했다.

[야…. 나 지금 촬영 들어가야 하는데…. 나중에…]

강동현이 전화를 받자마자 그렇게 말했다.

“나… 이제 너 만나기 싫어….”

황경호는 그가 뭐라고 하든 상관없이 말했다. 강동현이 깜짝 놀란다.

[뭐야, 너… 어디야? 아직도 우는 거야?]

“나 진짜 너 만나기 싫어…. 이제 제발 병원에 오지 마. 제발. 부탁이야.”

[…….]

강동현이 다른 사람들에게 뭐라고 하는 게 얼핏 들렸다. 마이크를 막고 있었는지 크게 들리진 않았다. 황경호는 더 몸을 웅크렸다. 어쩐지 가슴이 조일 정도로 수치심이 몰려왔다. 부끄럽다. 죽어버리고 싶다.

[…갑자기 왜 그래? 싫으면 안 해도 된다니까 왜 그래…. 그냥 니가 이제 나랑 있는 거 많이 안 싫어 하는 것 같아서…. 그래서 말해본 거야.]

“제발…. 제발 부탁이야. 오지 마. 응? 제발… 제발 오지 마.”

[왜 그러는데…. 어? 왜 그러는지 말부터 해. 갑자기 왜 또 이러는데?]

“오지 마…. 흑. 그냥 오지 말라고…. 다른 병원들도 많잖아. 오지 마. 제발…. 제발…. 제발 부탁할게. 제발….”

황경호는 그냥 빌었다. 그냥 빌었다. 강동현은 엄청 당황한 목소리로 말했다.

[일단 왜 그러는지 말부터 해. 어? 말부터 하라고.]

“그냥 너 안 보고 싶어. 보기 싫어. 너 보기 싫어서 죽을 것 같아.”

[…….]

“너 계속 온다고 하면 나 병원 그만둘 거야. 또 이사 갈 거고. 그냥 지방이든 어디든 내려가 버릴 거야. 그러니까 그냥… 니가 오지 마.”

[…일단 나 촬영 들어가야 하니까 나중에 마저 이야기하자. 나중에 제대로 얘기해.]

“그냥…. 그냥 안 오면 안 돼?”

알고 있었다. 황경호는 또 기대를 하고 있었다. 그가 그만둬 주기를. 그냥 황경호의 말대로 해주기를 말이다. 대가가 없어도, 그게 그가 하기 싫은 일이더라도.

[나중에 얘기해.]

그리고 강동현은 전화를 끊었다. 황경호는 침대에 얼굴을 파묻었다. 황경호는 그 말이 결국 거부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한참 그렇게 있다가 몸을 일으켰다. 눈을 훔쳤다.

‘아, 이게 뭐라고 우냐. 병신같이….’

원래 그럴 거라는 거 몰랐던 것도 아니고. 황경호는 손을 씻고 이불과 침대 커버, 베개 등을 모두 벗겨서 세탁기에 넣었다. 그리고 새 커버와 이불을 농에서 꺼내 정리했다. 그리고 집을 싹 청소하고 닦고 환기를 시키고 화장실로 들어가서 청소를 하고 샤워를 했다.

그럴 거라는 거 알고 있었어. 그런 거라는 것도 알고 있었고. 알고 있었어. 알고 있어.

그렇게 앞뒤 주어나 목적어가 없는 생각을 하면서 미친 듯이 청소를 하고 집 안 정리를 했다. 그리고 정말 할 일이 없자 그냥 밖으로 나가 걸었다. 3시쯤 병원에서 나왔는데 이미 컴컴하다. 황경호는 정처 없이 걸었다.

‘괜찮아. 생각하지 말자. 생각하지 말자. 그럴 수도 있지, 뭐. 그래. 괜찮아. 생각하지 말자.’

그래도 바보 같다. 아니, 생각하지 말자. 부끄러워서 아직도 얼굴을 들고 걸을 수가 없었다. 고개를 들었다가도 곧 숙이게 되었다. 점점 사람들이 없는 쪽으로 걷다 보니 한강이 나왔다. 1시간은 족히 걸었을 것이다. 갑자기 또 눈물이 난다. 그러게…. 병신같이 그때 죽었더라면 어쩔 뻔했냐. 그런 생각도 나고. 그리고 눈물을 그치고 또 걸었다. 그냥 걸었다. 그러다가 그냥 강가의 벤치에 앉았다.

‘어디로 가지? 진짜 지방으로 내려갈까. 아니면 경기도?’

그런 생각을 멍하니 하고 있었다. 주머니에 넣어두었던 휴대폰의 진동이 울렸다. 강동현이었다. 시계를 보니 벌써 11시다. 받았다.

“네.”

[지금 어디야?]

“집이요.”

[지금 봐. 집으로 갈… 뭐야. 집 아닌데? 너 지금 밖이지?]

전화상으로 이쪽의 소음이 들린 모양이다. 황경호는 한숨을 쉬었다.

“한강이요.”

[…너 설마….]

“아니에요. 그냥 벤치에 앉아 있어요.”

[정확하게 어디 있는데. 데리러 갈게.]

“아뇨. 제가 그쪽 집으로 갈게요. 여기서 그렇게 안 멀 거 같아요.”

황경호는 그렇게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벤치에서 일어났다. 다리가 무겁다. 그는 한강 공원을 벗어나 그냥 택시를 탔다. 오늘만 벌써 두 번째 탄다. 평소에는 택시라고는 절대 안 탔는데 말이다.

“삼성동 코엑스 쪽으로 가주세요.”

황경호는 그렇게 말하곤 입을 다물고 창밖으로 지나가는 불빛들을 보았다. 늦은 시간이라 그렇게 막히지는 않았다. 황경호는 고급 아파트 단지 앞에 내려서 익숙하게 A동으로 향했다. 그리고 벨을 눌렀다. 내가 먼저 도착했으려나. 그런데 곧바로 문이 열렸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14층을 눌렀다. 내리니 강동현이 문을 열고 그 앞에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이제 막 씻었는지 머리카락에 물기가 어려 있었다. 황경호는 그의 얼굴을 무덤덤하게 보고는 집 안으로 들어갔다.

“아까 그건 뭐야. 갑자기 왜 그런 건데?”

“아니에요. 신경 쓰지 마세요.”

“…….”

강동현은 문을 닫고 안으로 들어왔다. 황경호는 그를 돌아보았다.

“섹스하게 해줄 테니까 병원에 오지 말라고 하면 안 올 거예요?”

강동현이 인상을 찌푸렸다. 그리곤 한숨을 쉬었다. 그는 목소리를 최대한 가지런하게 하기 위해 노력하며 대꾸했다.

“…너 진짜 왜 또 그러는데? 어?”

“진짜 질릴 때까지 해도 돼요. 그냥 질릴 때까지 해요. 그러니까 정말 안 오면 안 돼요?”

“…….”

강동현은 뭐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짜증은 나는지 인상을 잔뜩 썼다. 그는 자신의 머리를 쓸어 올리면서 한숨을 쉬었다. 정말로 이해가 안 된다. 도대체 아까의 뭐가 이렇게 얘의 신경을 거스른 것일까. 진짜 앞에서 말 한마디 못하겠다. 그가 강동현의 위에서 스스로 즐길 정도로 마음이 열린 것 같아서, 그래서 제안한 것이었다. 그런데도 성급했다고 말한다면 할 말이 없었다.

“하기 싫으면 안 해도 된다고 했잖아. 그래. 내가 또 성급하게 너한테 하자고 했다. 잘못했어. 미안해. 그러니까 그런 말 하지 마.”

황경호는 강동현의 얼굴을 뚫어져라 올려다보았다.

“그럼 내가 섹스하게 해줄 테니까 배우 생활 접으라면 접을 거야?”

“뭐?”

강동현이 당황하더니 두 손을 들어올려 손바닥을 보이며 진정하라는 듯이 황경호에게 다가갔다.

“그런 거 너한테 필요 없잖아. 왜 갑자기 그런 걸 말해?”

“그럼 경찰서라도 가서 시시비비 좀 가려볼까?”

강동현이 한숨을 쉬면서 그를 진정시키려고 했다.

“내가 너한테 못 할 짓 많이 했지만….”

“못한다는 거야?”

황경호가 말을 끊고 물었다. 뭐 하자는 거야. 강동현이 인상을 썼다.

“못해.”

황경호가 뭐라고 하기 전에 말을 덧붙였다.

“니가 아무리 대준다고 해도 못 해. 그건 내 꿈이라고.”

약간 딱딱한 얼굴로 강동현을 보며 말을 하던 황경호의 얼굴이 갑자기 붉어지기 시작했다. 그는 갑자기 강동현을 가슴을 주먹으로 퍽 쳤다.

“그러니까 그냥 하고 싶은 대로 하고 꺼지란 말이야!”

“야…!”

황경호는 거실의 벽에 걸려 있는 액자로 강동현의 팔을 내리쳤다. 액자가 와장창 부서졌다. 강동현은 깜짝 놀라서 그를 붙잡으려고 했지만 황경호는 장식품이고 꽃병이고 손에 잡히는 대로 들고 강동현을 때렸다.

“뭐든지 해준다며! 근데 이건 왜 못 해주는데! 대준다잖아! 그냥 하고 꺼지라고!!”

“잠깐만… 윽! 말로 해!”

황경호의 팔을 붙잡았지만 그가 몸부림을 치느라 이리저리 휘청거렸다. 벽에 걸린 TV까지 떨어져서 그 아래 있던 서랍에 쿵 하고 부딪쳤다가 바닥에 떨어졌다.

“니가 나한테 원하는 건 그것뿐이잖아! 그래서 그렇게 해준다는데 왜 이렇게 질척거리는데!! 왜 사람을 계속 못살게 굴어!”

“아니야! 아니라고! 젠장! 내가 뭘 못살게 굴었는데! 지금까지 니가 해달라는 대로 다 해줬잖아!”

강동현도 결국 고함을 질렀다. 황경호는 손목을 비틀어 빼서 찬장에 있는 트로피를 손으로 쥐었다. 저건 위험하다. 크리스탈로 만들어진 트로피를 휘두르자 강동현이 깜짝 놀라 뒤로 피했다.

“뭐가 아닌데! 넌 그냥 나 어떻게 할 생각뿐이잖아!”

“니가 하기 싫다면 안 한다니까!!”

“하기 싫어! 하기 싫다고 내가 몇 번이나 말해!! 근데 왜 계속 그런 말 하는데!!”

“젠장! 니가 조금이라도 마음 바꿨을까 봐 하는 거잖아! 니가 오늘같이 내 위에 올라타면 씨X, 너 같으면 안 물어보겠냐!”

“그래, 해! 하라고! 하고 그냥 꺼지라고!!”

“그런 말이 아니잖아!!”

“뭐가 그런 말이 아니야!!”

황경호는 이미 거실에서 잡을 수 있는 물건은 다 잡아서 던진 상태였다. 창문 옆의 스탠드까지 들어 강동현을 패려고 했다.

“왜 하게 해준다는 데도 사람 계속 귀찮게 하는데! 너 쉽게 하고 싶은 데다가 왜 내가 협조까지 해줘야 하는데!”

“아! 그런 거 아니라니까!”

“아니긴 뭐가 아니야! 니 마음 편하자고 자꾸 사람 성가시게 하는 거잖아! 내가 분명히 그냥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몇 번이나 말했잖아! 근데 내가 왜 그걸 원하기까지 해야 하는데!! 왜!! 왜 내가 니 마음의 가책까지 떠안아야 하는데!! 내가 왜!!”

황경호가 손에 든 크리스탈 트로피를 던졌다. 와장창, 어딘가에 부딪혀서 뭐가 깨지는 소리가 났다. 황경호는 다시 찬장으로 돌아와 다른 트로피와 물건들을 들고 와서 강동현에게 마구 던졌다. 황경호가 마구 찬장에 있는 물건들을 쓸어서 던지다가 찬장의 한쪽 균형이 무너져 그의 위로 책이 마구 쏟아졌다. 강동현은 그가 걱정이 되어 다가갔다가 그가 던지는 물건 때문에 다시 피할 수밖에 없었다. 강동현은 그가 다음 것을 던지지 전에 다가와서 그의 손목을 틀어쥐었다.

“그만해.”

황경호가 손에 들고 있던 물건들을 다 떨어뜨렸다. 그중 하나가 발등에 맞아 강동현이 신음을 흘렸다. 황경호는 그에게 달려들어 그를 넘어뜨렸다. 그리고 그를 마구 때렸다.

“도대체 나보고 어쩌라는 건데! 너 때문에 계속 내가 창녀같이 되고 걸레 같이 되잖아!! 그런 거 싫다고!! 자살 같은 것도 이제 하기 싫다고! 근데 니가 뭔데 계속 사람을 죽고 싶게 만들어!!”

“알았어…. 알았으니까. 진정 좀 해. 어? 알았어.”

강동현은 꽤 맞아 주다가 황경호의 두 손목을 잡았다.

“더 때려도 돼. 더 때려도 되니까 일단 말로 해. 알아들을 수 있게. 왜 이러는데, 응?”

강동현이 자신의 위에 올라타서 씩씩거리고 있는 황경호를 올려다보았다. 그는 손목을 비틀어 빼려고 하다가 결국 포기하고 숨을 헐떡였다. 황경호가 입을 열었다.

“도대체… 왜 이렇게 사람을 비참하게 만드는데….”

“왜…. 내가 또 뭐 잘못했어?”

“너한테 꽃 같은 거 받는 게 아니었는데…. 흑….”

황경호가 눈물을 흘렸다. 어깨로 눈물을 얼른 닦았다.

“집이나 차 같은 거 필요 없어…. 그러니까 그냥 해. 그냥 하고…. 그냥 하고 제발 이제 나 좀 내버려 둬. 제발 부탁이야….”

“아….”

강동현이 아차 하고 눈을 한 번 꾹 감았다가 떴다.

“미안. 너랑 요새…. 니가 나한테 뭐 시키고 키스하고 이런 식이었으니까 나도 모르게….”

“모르긴 뭘 몰라! 넌 항상 그런 식이었잖아! 처음부터…! 처음부터 몸 파는 사람처럼 대했잖아! 내가 너한테… 내가 너한테 뭘 그렇게 잘못했는데! 내가 너한테 뭘 했다고 항상…!”

황경호는 강동현에게서 한쪽 손을 비틀어 빼내 그의 얼굴을 쳤다. 퍽.

“니가 잘못한 거 없어. 없어…. 미안. 내가 잘못했어. 진짜 앞으로는 말조심할게.”

“말조심하는 게… 무슨 소용이야…. 넌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말만 조심해 봤자…. 무슨 소용인데.”

황경호는 손목으로 거칠게 눈을 닦았다. 그리고 눈물을 겨우 그치고 강동현을 내려다보았다.

“그냥 해. 그냥 해. 응? 그냥 하고 싶은 대로 해. 그리고 만나지 말자. 나 진짜 너무 힘들어….”

“…….”

“너 그냥 그렇게 하고 싶은 거잖아…. 그냥 해…. 전에도 그렇게 하는 거 좋아했잖아. 이번엔 어떻게 하든 그냥 입 다물고 있을게. 티 안 내고 가만히 있을게. 그러니까 빨리… 그냥 끝내자. 끝내줘. 제발….”

황경호가 애원했다. 그런 그를 보고 강동현은 가만히 있다가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그는 한쪽 팔로 몸을 받치고 허리를 일으켰다. 다른 손으로 황경호의 얼굴을 감싸서 잡았다. 눈을 마주쳤다. 그리고 그가 대답했다.

“싫어.”

황경호는 상처받은 걸 숨길 수 없는 얼굴이 되었다. 아니, 그렇게 단정 지을 수만도 없다. 그가 눈물을 주르륵 흘렸다. 손바닥으로 얼른 눈물을 훔쳤다. 강동현은 그런 그의 얼굴을 보다가 천천히 그를 끌어안았다.

“미안해…. 울지마. 응? 내가 잘할 테니까.”

황경호는 그를 주먹으로 퍽퍽 때렸다. 강동현은 두 손을 위로 들었다. 그냥 맞겠다는 것이다.

무척 깔끔하고 세련되어 차분한 느낌이 주로 들던 강동현의 집은 지금 전쟁통이 따로 없었다. 식기들은 전부 쏟아져 깨져 있었고 대형 유리창의 옆에 서있는 스탠드 중 하나는 아예 박살이 나고 내장되어 있던 LED 등도 거기에 딸려 나와 뜯어져 흉물스럽게 늘어졌다. TV도 쓰러지고 화분도 엎어지고 카우치는 비틀어져 있고 테이블은 뒤집어졌다. 트로피, 책 이런 건 본 위치와 영 연관이 없는 곳을 뒹굴고 있었다.

황경호는 이제 진이 다 빠졌는지 강동현의 위에 올라타서 그를 때리는 것도 애원하는 것도 전부 멈추었다. 얼굴도 몇 대 때려서 강동현의 입술이 터져 있었다. 강동현도 울화병으로 한두 번 병원을 간 적이 있었지만 진짜 화병은 얘가 걸린 것 같다. 점점 화를 낼수록 애가 폭력적이 된다….

황경호는 진이 다 빠져서 휘청하다가 카우치의 등을 잡았다. 강동현은 비틀어진 카우치의 뒷면에 머리만 기댄 것 같은 자세였다. 거기 위에 황경호가 올라타 있었다. 황경호는 얼굴을 훔치고 일어났다.

“갈…게….”

완전 울음이 섞여서 말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강동현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얼굴을 잠깐 만져보았다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다행히 부엌과 거실 사이에 차 키가 굴러다니는 게 보였다.

“데려다줄게.”

그리고 마스크도 바닥 어디에선가 주워서 쓰고 현관으로 발을 질질 끌고 걸어가는 황경호를 따라갔다. 황경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는데 애가 계속 눈물을 뚝뚝 흘렸다. 강동현은 혀를 차며 그의 얼굴을 만졌다.

“야, 진짜 그만 울어. 넘어가겠다. 내가 개 같은 말하면 그냥 그 자리에서 말해. 왜 이렇게 혼자서 스트레스를 받아?”

그러니까 황경호가 입술을 꾹 다물고는 또 줄줄 눈물을 흘렸다. 그가 손목을 마구 눈을 비볐다.

“왜 나만 맨날, 흑, 정신 나간 사람 같고… 넌 왜 괜찮아….”

“뭐가 괜찮아. 나도 같이 소리 지르고 지랄했는데.”

“너무 싫어…. 흑…. 짜증 나.”

“알았어. 그만 울어.”

물부터 마시게 해야겠다. 강동현은 그의 손목을 잡고 차로 데리고 갔다. 조수석의 문을 열고 그를 태우고 운전석에 탔다. 강동현은 곧바로 차를 출발시켰다. 황경호는 손을 덜덜 떨며 안전벨트를 했다. 그리고는 창밖을 보며 울화와 울음을 잠재우기 위해 노력했다.

강동현은 나가다가 마트에서 잠깐 서서 생수를 사왔다. 다행히 주머니에서 카드가 하나 나왔다. 그리고 다시 차로 들어와 마개를 열고 황경호한테 넘겨주었다.

“마셔.”

그리고 자기도 나머지 한 병의 뚜껑을 열고 거의 벌컥벌컥 수준으로 마셨다. 황경호는 숨이 약간 넘어가서 천천히 마셨다. 그대로 말없이 도로 위를 달렸다. 좋은 차의 진동은 사람을 진정시킨다. 점점 황경호의 숨소리가 가라앉았다. 12시가 넘은 한밤중의 차분한 공기도 도움이 되었다. 황경호의 집 앞에 도착해서 보니 황경호는 눈만 좀 빨갈 뿐 괜찮았다. 강동현은 그가 차에서 내리자 따라서 내렸다.

“야, 잠깐만….”

강동현은 황경호의 손목을 붙잡았다. 황경호가 그를 돌아보았다. 강동현은 그의 얼굴을 잡고 잠깐 살폈다.

“아까 맞은 덴 괜찮아? 책 얼굴에 떨어졌잖아.”

“니 얼굴이나 신경 써. 바보 아냐?”

황경호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

“…….”

잠깐 그대로,

아무 말 없이.

강동현은 잡고 있던 황경호의 손목을 부드럽게 타고 내려가, 살살 손끝으로 그의 손을 쓸다가 잡았다. 눈이 마주쳤다. 아무 말 없이 눈을 맞춘 채 가만히 있었다. 강동현은 엄지손가락으로 황경호의 엄지와 검지 사이를 느릿하게 쓰다듬었다. 턱을 잡고 있던 손으로 부드럽게 목을 감싸 잡아 뺨을 엄지로 쓸었다. 황경호가 살짝 눈을 가늘게 뜨며 인상을 조금 썼다.

그 순간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에게 달려들어 입을 맞추었다. 충동이라는 건, 다 따져보면 이유가 있는 것도 같고 없는 것도 같고 그렇다.

“흐으응…. 으응…!”

입술이 맞닿고 서로를 껴안는 순간 둘 다 신음을 길게 흘리며 혀를 섞었다. 강동현은 건물의 벽으로 그를 밀어붙이고 한 손으로 그의 턱 전체를 움켜쥐었다. 그리고 상대의 입 안을 할짝할짝 핥았다.

“하앙…! 음… 으응…. 응… 하아….”

“음…. 큭… 하아….”

황경호는 완전 얼굴이 새빨개졌고 강동현도 얼굴이 꽤 상기되었다. 입술이 터져 아플 텐데도 정신없이 상대의 입술을 빨았다. 강동현이 황경호의 엉덩이를 꽉 움켜쥐며 서로의 몸을 바짝 붙였다. 황경호는 그의 어깨와 목을 끌어안았다. 키스가 점점 더 농밀해지자 황경호가 엄청 움찔거리다가 그를 밀어내려고 했다. 입에서 강동현의 혀가 빠져나가면서 타액이 늘어졌다.

“이제 그만해… 응….”

“조금만 더….”

강동현은 황경호의 뺨에 입술을 묻고 빨다가 다시 입을 맞추었다. 너무 밀어 붙여져서 다리 한쪽이 저절로 벌려져 강동현의 허벅지와 비벼졌다. 황경호는 그의 티셔츠를 잡아당겼다.

“싫다니까…!”

입술이 떨어지고 둘 다 헐떡거렸다. 강동현은 황경호의 이마에 입술을 누른 채 잠깐 눈을 감고 있었고 황경호는 크게 오르락내리락 하는 그의 흉부와 침을 삼키는 그의 목젖을 쪽에 시선을 두고 있었다.

강동현이 기어코 못 참고 다시 입술을 훔치자 황경호가 짜증을 냈다.

“하지 말라고, 읍…!”

“알았어. 알았어. 조금만 더….”

그리고 입 안을 구석구석 핥고는 다시 입술을 뗐다. 강동현은 억눌린 신음을 흘리며 황경호를 꽉 끌어안았다.

“나 이제 간다.”

강동현은 그렇게 말하고 포옹을 풀더니 차 쪽으로 가려다가 다시 황경호를 확 끌어당겨 쪼옥 입을 맞춰 상대를 놀라서 진저리치게 했다.

“진짜 간다….”

그러곤 진짜로 차로 갔다. 황경호는 손등으로 입술을 문질러 닦았다. 저질… 황경호는 빌라의 3층으로 올라와 집의 문을 열고 들어왔다.

“하아….”

한숨을 깊게 쉬자 다리가 슬 풀리면서 현관에 주저앉았다. 남의 집을 그렇게 박살 낸 것도 처음이고…. 오늘 너무 많은 일이 일어났다. 금방까지 포함해서.

‘난 도대체 쟤한테 뭘 바라는 거야…. 금방도 또 키스하고…. 그러니까 자꾸 쟤가 기대를 하잖아…. 나 바본가….’

황경호는 자신이 오늘 저지른 일들을 감당할 수가 없어 엉금엉금 기어 집 안으로 들어와선 욕실로 가 겨우 또 씻고 침대에 털썩 누웠다. 눕자마자 잠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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