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남이 X같게 굴기 전에 먼저 X같이 해라. 선수를 뺏기면 더 X같이 굴어라
황경호는 잠깐 뭔 말인지 못 알아듣는 듯하더니 인상을 확 찌푸리고 다시 강동현을 팼다.
“이게 뭐가 좋아하는 거야!!”
그건 그렇지… 더 화가 나게 만든 모양이었다. 이제 진짜 온몸이 욱신거려서 저도 모르게 주먹을 좀 피하니 상대의 화를 더 돋궈서 더 맞았다. 진짜 멍 엄청 들겠는데….
“으흑… 흑….”
다시 진이 빠질 때까지 때리더니 황경호가 탈수 증상을 보였다. 하긴 벌써 시간이… 강동현은 그의 빨간 얼굴에 손등을 살짝 대었다. 엄청 뜨겁다.
“일단 물 좀 사 올게. 차 안에 있어.”
대답을 못 하는 건지 안 하는 건지 대꾸는 없었다. 강동현은 선글라스만 끼고 차에서 내려서 휴대폰으로 편의점의 위치를 확인하고 걸어갔다. 어깨나 팔이나 가슴이 엄청 욱신거렸다.
‘이런 거 좀 더 빨리했으면 좋았을 텐데….’
시간이 너무 많이 흐른 것 같았다.
‘작년 여름에 처음 봤으니까 1년 9개월 정도 됐나, 안지… 그래도 이덕재 일, 아니 술 먹고 그러고 난 이후로는 진짜 정신 차렸는데… 그때라도 좀 풀었으면 좋았을걸.’
500ml 생수 세 통을 사서 들고 갔다. 차로 오니 황경호가 너무 울어서 울음기가 남은 숨을 쌕쌕 쉬며 바로 앉아 창밖을 보고 있었다. 아까 만큼은 아니더라도 아직도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자.”
강동현이 생수를 열어서 건네주니 황경호가 힐끗 보다가 받아서 마셨다.
“…….”
“…….”
잠깐 그렇게 차 안에서 시간을 보냈다. 강동현도 물을 반병쯤 마셨다. 차 안에는 쌕쌕거리는 숨소리만이 전부였다. 강동현이 황경호를 살펴보았다. 손을 살짝 잡아당겨 이쪽을 보게 했다. 그리고 얼굴을 감싸 잡았다.
“그만 울어. 힘 빠지잖아. 더 하고 싶은 말 있으면 해.”
그러자 확 눈물을 더 흘린다. 강동현은 깜짝 놀라서 고개를 숙이는 그의 턱을 잡아 들었다.
“왜 그래? 야.”
“몰라… 손 치워.”
황경호가 신경질을 냈다. 강동현은 손을 퍼뜩 뗐다.
“더 말하고 싶은 거 있으면 말해. 지금 말고 나중에도 괜찮고. 니가 하고 싶을 땐 언제든….”
처음 말을 했다가 약간 강요하는 것 같아서 뒤에 주절주절 덧붙였다. 황경호는 다시 창밖을 바라보는 자세가 되었다. 강동현은 핸들에 두 손을 올리고 거기에 관자놀이를 기대고 그를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왜 계속 울지… 아직도 뭐가 남았나….’
그러고 있는데 황경호가 울음기가 잔뜩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 갈게요.”
“어… 이렇게 가게….”
벌써 내렸다. 강동현도 차에서 내렸다. 그가 차 앞쪽으로 돌아 나오고 있었다. 강동현이 그쪽으로 걸어갔다.
“괜찮아?”
“괜찮아요.”
“진짜?”
“네.”
강동현이 그의 손을 잡아 멈춰 세웠다.
“이렇게 가지 마… 진짜 괜찮아?”
그렇게 말하자 황경호가 강동현을 노려보았다.
“괜찮아. 괜찮다고! 그냥 좀 가!”
그가 화를 내자 강동현이 손을 얼른 뗐다. 얼떨떨하게 마치 항복하는 자세로 두 손을 들고 있었다. 황경호는 빨개진 눈으로 그런 강동현을 좀 더 노려보다가 건물 안으로 들어가버렸다.
뭐야, 이거….
‘괜찮은 거야? 괜찮은 거야, 이거? 더 화난 거야? 왜? 괜히 건드린 거야? 더 빡친 거야? 또 잘못한 거야? 뭐가 문제지?’
강동현은 약간 얼이 빠져 그렇게 생각했다.
*
“…….”
병원에 가니 이제 인사도 하지 않았다. 황경호는 강동현을 보자마자 대놓고 인상을 팍 썼다. 강동현은 진짜, 엄청, 완전 난감했다.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얘기 좀 했다고 뭐가 확 나아지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나 잘 지내고 싶다고 했는데? 잘 해주고 싶다고. 원하는 건 다 해주겠다는 말도 했는데? 끌린다는 말도 했고? 나한테 끌려줬으면 좋겠다는 말도 했고?’
아니, 그것보다도, 그전보다 훨씬 화난 거 같은데? 강동현은 황경호의 뒤를 따라 4번 치료실로 들어갔다. 대뜸 추궁하기도 뭔가 난감해서 옷을 갈아입고 오는 내내 고민을 했는데도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의자에 앉아 가만히 그의 얼굴을 쳐다보고 있는데, 평정을 가장 하지도 않고 완전 대놓고 짜증 난다는 듯이 표정을 찌푸리고 있는 황경호였다. 모르겠다.
“아직 화난 거야?”
그렇게 물어보니까 황경호가 강동현을 확 노려보았다.
“그럼 화 안 날 거 같아?”
“아니….”
그렇게 대꾸하니 또 할 말은 없었다. 가만히 보고 있다가 또 불쑥 말했다. 정말 이해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더 화난 거 있으면 말해. 참지 말고.”
그러니까 황경호가 그냥 무시했다. 그냥 아직 화가 안 풀렸나 싶어서 그 뒤 일주일 정도는 강동현도 그냥 입을 닥치고 있었다. 하지만 일주일이 지나도 못마땅하고 짜증 난다는 얼굴은 그대로였다. 강동현은 좀 답답했다. 하지만 더 이상 뭘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일단 얘기를 좀 더 해야 하는 거겠지?’
그래서 퇴근 시간을 맞춰서 기다렸다. 이것도 아직 5월 초라서 가능한 것이다. 일주일만 지나면 이제 다시 스케줄이 꽤 빡빡해진다. 강동현은 담배를 피우고 있다가 황경호가 나오는 걸 보고 담배를 바닥에 떨어뜨려 발로 대충 밟았다. 곧바로 다가갔다.
“시간 있으면….”
“얘기하기 싫어.”
강동현이 채 말을 다 하기도 전에 그렇게 말했다. 그는 지하철역 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강동현은 그의 뒤를 따라갔다.
“알았어. 알았어. 그럼 잠깐만. 진짜 잠깐만.”
강동현은 캡모자를 깊이 눌러 쓰고 후드를 뒤집어쓰고 선글라스를 끼고 있었다. 마스크도 아까까지 하고 있었는지 턱밑에 있었다. 강동현은 얼른 차에 가서 뭔가를 들고 왔다.
“꽃… 사준다고 했는데 못 사줘서….”
황경호는 그걸 물끄러미 보았다. 강동현이 그걸 안겨 주었다. 황경호는 인상을 확 찌푸리더니 다시 강동현한테 거칠게 되돌려주었다.
“장난해?”
“…….”
모르겠다… 황경호는 그러고 가버렸다. 꽃은 눈에 너무 띄고… 강동현은 그걸 차에다 다시 갖다 두고 그냥 황경호의 뒤를 따라갔다. 그가 바짝 따라와 옆에 오자 황경호가 그를 노려보았다.
“지금 뭐 하는 거야.”
“아니….”
강동현이 어물쩡하게 말을 흐리자 황경호는 그냥 입을 다물고 지하철 승강장으로 내려갔다. 강동현은 순간 주머니를 뒤져보다 지갑을 안 가져온 걸 깨닫고 당황했다가 휴대폰으로 뒤늦게 요금을 지불하고 내려갔다. 이리저리 고개를 돌려 황경호를 찾다가 발견해서 그의 뒤에 섰다.
‘근데 여기 사람 너무 많은 거 아니야?’
퇴근 시간대니 사람이 많은 건 당연했지만 지하철 안 타고 다닌 지도 오래되어서 적응이 안 되었다. 사람들이 밀고 들어가자 어어 하는 사이에 지하철 안에 타게 되었다. 황경호의 바로 뒤에 있었기 때문에 본의 아니게 그의 등에 바짝 몸이 붙었다.
‘아, 젠장….’
그의 코끝에 상대의 향기가 살짝 스쳤다. 고개를 숙여 그의 머리카락에 얼굴을 묻고 싶었다. 그랬다간 당연히 영영 아웃이겠지….
콩나물시루처럼 사람들이 다닥다닥 붙어서 지하철에 탔다. 두어 정거장을 간 후에 환승을 했더니 거기는 더 심했다. 정말 폐부가 짓눌리는 느낌이었다. 환승을 할 때 너무 사람이 많아서 한 대를 보내고 황경호와 강동현이 가장 먼저 탔다 보니 정말 어중간한 위치에 있었다. 황경호를 짓누르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앞에 있는 봉을 붙잡고 힘을 주어 버티고 섰다. 그리고 한참을 갈 동안 전혀 사람이 안 줄어 들었다. 낙성대역부터 사람들이 좀 내렸다. 신림역에 이르러 황경호도 내려 강동현도 따라 내렸다.
지하철역을 나가서 어디론가 걸어가기 시작하는 황경호의 뒤를 따라갔다. 약간 더 가니 눈에 익은 골목이다. 거기로 들어가니 사람이 거의 없었다. 강동현은 황경호에게 말했다.
“지하철 사람 너무 많다, 진짜. 차 있는 게 낫지 않겠어? 사줄까?”
강동현이 마지막 말을 하자 갑자기 황경호가 홱 돌아보더니 진짜 세게 정강이를 차버렸다.
“!”
너무 아파서 악 소리도 안 났다. 허리를 숙이고 다리를 붙잡고 있다가 겨우 가라앉았을 때쯤에 다시 걸었다. 욱신거린다.
“아니… 있으면 좋을 것 같아서.”
화내지 말자. 화내지 말자… 강동현은 겨우 그렇게 말했다. 황경호는 앞서 걸어가며 빠르게 말했다.
“화대는 이제 안 받아.”
“화대가 아니라…!”
강동현이 깜짝 놀라 그렇게 말했지만 황경호는 빠르게 말을 이었다.
“니가 뭘 주든 다 화대야. 그러니까 그런 말 하지 마. 진짜 기분 나빠.”
“…….”
할 말이 없었다. 그러게… 무신경하기 짝이 없는 말이었다. 이때까지 엄청 많이 했는데… 얘기 좀 해주지… 변명하자면, 그래도 정말 고생 안 했으면 해서 한 말이었다.
“그래… 미안. 앞으로는 안 할 게.”
도저히 화가 풀릴 기세가 아니다. 강동현은 그의 눈치를 보았다.
‘그나저나 아직도 화 많이 나 있네… 계속 저럴 건가? 난 더 어떻게 해야 하지?’
강동현은 여전히 그의 기분을 풀어주고 싶었다. 근데 이제 더 이상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있잖아….”
황경호가 사는 집은 역에서도 20분 정도는 걸어가야 했다. 그의 집이 보일 때쯤 강동현이 그의 손목을 살짝 잡았다. 황경호가 바로 노려보길래 놓기는 바로 놓았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나 더 어떻게 하면 돼? 너 화 풀어주려면.”
“내가 화가 풀리든 안 풀리든 너랑 더는 안 해.”
“알았어. 알았어. 안 해도 돼. 그냥… 나 더 원망하거나 화내고 싶으면 해. 안 참아도 돼.”
그러자 곧바로 얼굴로 주먹이 날아왔다. 그래도 지금까지는 배우라고 신경 써줬는지 얼굴에 주먹질을 하진 않았는데. 선글라스가 날아갔다.
“넌 진짜… 인간이 글러 먹었어. 니가 나 괴롭힌 게 거의 2년이야. 몇 번 미안하다고 하고 잘못했다고 하면 다 한 건 줄 알아? 꽃 사주고 차 사주면, 뭐? 뭐 어쩌라고! 수작 부리지 마!”
“…….”
역시 할 말이 없다.
*
“그럼 5월 14일에 크랭크인 할 건데. 컨디션은 어때? 배역은 맞는 거 같아?”
“네. 좋아요. 이명실 작가님 작품 진짜 해보고 싶었어요. 저 현대 판타지는 한 번도 안 해봤잖아요.”
“그러니까.”
요즘은 현대극에 판타지 요소가 가미된 미니시리즈가 대세다. 시대가 시대라서 그런지 사람들이 그런 것에 빠져든다. 사극으로는 한 번 그런 요소가 있는 것을 해봤지만 현대극은 처음이었다. 최근까지 영화를 좀 무거운 걸 찍기도 했고 작년에 찍었던 울프도 캐릭터는 조금 시니컬하고 무거운 편이었다. 재미있고 발랄한 걸 하고 싶었다. <연애출사표>는 내용이 코믹해서 그런지 찍을 때도 정말 재밌고 촬영장 분위기도 화기애애했다. 그런 맛에 또 드라마를 찍는 것이니까 말이다.
“좀 쉬어서 그런지 확실히 몸도 좋고 기분도 괜찮아요.”
“그래 보인다. 1월인가 2월까지만 해도 진짜 칙칙했지, 너. 원래는 이렇게 잘생긴 놈이었는데.”
“와. 그 정도였나, 진짜?”
“화장발로 버틴 거지.”
사장이 강동현의 등을 툭툭 쳤다.
“현대극이 좋긴 하지. 광고도 잘 들어오고.”
“옛날에 <세조> 아역이랑 <서리> 빼고는 영화도 드라마도 다 현대극이었지만… 전 광고 좋긴 한데 요새는 PPL이 너무… 솔직히 스트레스 받아요.”
“이번엔 더 할 걸… 니가 지금 찍은 광고가 몇 개냐.”
“차랑 가구랑 화장품은 진짜 미친 듯이 나오겠네요.”
이번 드라마의 제목은 <시크릿 블러드>. 주인공은 399년을 산 뱀파이어로 오랜 세월을 살아 부자에 귀족적이고 우아하나 너무 오래 살아서 유행에 느린 허당기가 있는 캐릭터다. 시대가 시대니 만큼 수혈팩을 사서 마시고 선크림과 선글라스로 햇빛을 피하고 잘 사나 어느 날 웬 소녀의 피 냄새를 맡고 나서부턴 수혈팩으로 식사를 해결하지 못하게 되는데….
사장도 대본을 같이 체크하는데 문득 말했다.
“근데 원래 뱀파이어면 좀 파리하고 슬림해야 하는 거 아냐? 오히려 너 칙칙했을 때가 이 역할에 더 잘 맞겠다.”
사장이 그렇게 말하자 매니저가 어깨를 으쓱했다.
“남자 주인공이 잘생기고 연기 잘하면 됐죠.”
“아니… 이게 일 없다고 운동을 너무 많이 해서 이미지랑 좀 안 맞지 않나 해서.”
“아, 좀 과한가. 뺄까요? 작가님이나 감독님한테 연락 한 번 해볼까요?”
“그래. 한 번 해봐.”
3일 후면 대본 리딩이었다. 그리고 일주일 후 곧바로 크랭크인, 그리고 2달 정도 뒤엔 제작 발표를 하고 그 뒤 한 달쯤 후 방송에 들어갈 것이다. 첫 방송은 9월 2일. 아직 무더울 때다.
여자 주인공은 채은진이라는 20대 중반의 배우로, 소녀 같은 분위기를 팍팍 풍기는 상큼한 이미지의 배우였다. 거기에 30대 초반의 인기 남배우 중 하나인 안도현과 30대 초반의 여배우 이해진이 나왔다. 안도현과의 브로맨스와 코믹한 장면도 극의 주요 재미 중의 하나였다. 안도현과는 예전에 <세조>를 찍을 때 잠깐 같이 찍은 적이 있었다. 강동현은 주인공 세조의 아역을 맡았고 안도현은 작게나마 꾸준히 나오는 젊은 무사의 역할을 했었다. 극 중에서 만난 적은 없었지만 촬영장소에서는 마주친 적이 몇 번 있었고 뒤풀이도 몇 번 했다. 성격도 좋은 형이라 괜찮을 것 같다.
“한 5개월은 또 엄청 바쁘겠네요.”
매니저가 기지개를 켰다. 사장도 이리저리 대본을 보며 가끔 메모도 하고 있었다. 강동현은 연출가랑 작가한테 메시지를 보냈다. 한참 메시지를 주고받고 있었다. 일단 봐야 알겠다, 사진을 보내봐라, 그래서 헬스장에서 최근 찍은 걸 보내더니 단체 메시지방에서 연출가랑 작가가 이래저래 말을 주고받는다. 옷 입은 핏이 중요하다길래 옷 입은 것도 보냈다. 괜찮을 거 같단다. 더 만들지만 말란다.
“근데 은혁아.”
“네.”
“너 소처럼 일한다는 소문이 아주 짝짝 퍼져서 벌써 연말 작품 하겠냐고 들어온 것도 있다.”
“한두 달 정도만 쉴 수 있으면 괜찮을 것 같은데요? 2월쯤 방영하는 걸로.”
“웬일이냐. 쉰다는 소리를 하고.”
“좀 그래야 할 일이….”
“아~ 걔?”
사장이 대본에서 눈을 떼고 강동현을 보았다.
“너 그 좋아한다는 앤가 뭔가.”
“아~ 아니에요.”
강동현은 약간 인상을 썼다. 저번에 한 번 물어봤을 때부터 내내 놀리는 사장이었다. 그녀는 킥킥 웃으며 물었다.
“그래서 어떻게 되어가는데. 잘 되고 있어? 일반인이지?”
“모르겠어요.”
“요즘 일반인 상대여도 디스패스 같은 데서 찍는다. 조심해라.”
“네….”
뭐… 그럼 이미 열애설이 문제가 아니라 병원을 그 딴 데 다니는 게 더 문제다. 물론 의료적 사실을 까발리는 건 명예훼손이고 범죄인 데다가 기자들의 암묵적인 룰 때문이라도 안 하겠지만, 뭐…. 강동현이 왜 다니는지 알면 이미 강동현의 열애설은 포기했을 것이다. 애초에 영지랑 사귀는 것도 안 걸렸고….
사장은 이번 드라마 제작과 관련해서 광고주와 제작사와 같이 미팅을 하러 나갔고 강동현은 영어 선생을 만나 수업을 받다가 약간 빨리 병원에 도착했다.
‘아, 진짜….’
냄새라도 좀 맡고 싶다. 손이라도 잡고 싶다. 어느 순간부터는 굳이 병을 고쳐야 한다는 거라던가 굳이 빼야 한다는 강박 때문이 아니라 그저 그 간호사를 만지고 싶어 죽을 것 같은 느낌을 받아왔다는 걸 강동현은 정말 최근에서야 알았다. 강박이 목적과 이유를 혼돈한 것인지 어떤 건지… 일단 만질 수 있으면 좀 좋을 것 같다. 담배를 끊으려고 했을 때의 느낌과 비슷했다. 계속 땡긴다.
‘아… 진짜 더 화나게 하고 싶진 않은데.’
계속 잘못된 버튼을 누르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황경호가 아랫층에서 올라와 내부 카운터 쪽으로 왔다가 강동현을 발견했다. 강동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황경호가 입을 열었다.
“잠깐만요. 먼저 들어가서 옷 갈아입고 앉아 계세요.”
그는 그렇게 말하곤 카운터 쪽으로 갔다. 강동현은 황경호의 말대로 치료실로 들어가 옷을 갈아입고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눈을 감고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만지긴 뭘 만지냐… 말도 제대로 못 하는 판국인데. 아, 짜증 난다….’
왜 짜증 나는지도 모르겠다. 이러니 적반하장이란 소리를 듣는 거겠지. 아, 그래도 진짜 왜 이러고 있어야 하는지 모르겠다. 따지고 싶다.
‘쟤 그냥 내 건데 내가 왜 이렇게 궁상을 떨고 있어야 하냐.’
강동현은 순간 자신이 무슨 생각을 한 건지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나 금방 뭐라고 생각했지?’
채 생각해 볼 틈도 없이 문이 열렸다.
“빨리 오셨네요.”
황경호는 그렇게 말하곤 미간에 내 천 자를 잡고는 한숨을 쉬었다. 강동현은 금방까지 뭔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다 까먹었다. 황경호가 이것저것 끌고 오자 문득 강동현이 말했다.
“나 이제 다시 좀 바빠.”
일주일에 세 번이나 병원에 오고 있었다. 실비가 되는 치료인데도 그냥 받고 있어서 가격도 상당했다. 강동현이 그렇게 말하자 황경호는 잠깐 강동현의 얼굴을 봤다가, 뭔가 안도의 한숨 같은 걸 내쉬었다.
“다행이네요.”
“…….”
대놓고 저러니 진짜 짜증이 또 확 샘솟는다. 강동현은 정말 못마땅하다는 얼굴로 황경호의 얼굴을 보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서.”
“네?”
“그래서 넌 그때 나한테 왜 키스한 건데.”
뜬금없는 질문에 황경호는 좀 놀란 얼굴로 강동현의 눈을 보았다가 시선을 피하곤 인상을 찌푸렸다. 그리고 대답하지 않았다. 강동현이 또 질문을 했따.
“내가 자위하는 건 왜 그런 얼굴로 보면서 좋아했는데?”
“…….”
“또 보여줘?”
“!”
그렇게 말하면서 손을 자신의 것으로 가져가자 황경호가 엄청 놀라면서 뒤로 물러났다. 강동현은 그런 그를 보고 약간 실수했다는 기분이 들어 두 손을 깍지 껴 단속했다. 황경호는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다시 그냥 하던 걸 계속했다.
“…….”
“…….”
사과하고 싶은데, 사과하고 싶지 않았다. 오히려 저러는 걸 보니 조금 더… 강동현은 가만히 그의 얼굴을 보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난 왜 그렇게 쳐다봤어?”
“…그만 해요.”
“내가 왜?”
그러자 황경호가 확 노려보았다.
“니가 나한테 그렇게 죄책감 안 느낀다는 것도 알고 있고 결국엔 지금 니가 하는 짓도 예전이랑 별반 다를 거 없다는 것도 잘 아니까 계속 그렇게 확인 안 시켜줘도 된다고.”
“…….”
“하고 싶으면 이렇게 사람 괴롭히지 말고 그냥 맘대로 해. 차라리 대줄게.”
“…알았어. 알았어. 미안… 그 말은 제발 하지 마.”
어쩐지 애가 좀 독해진 것 같은 느낌이다… 강동현은 왜 이렇게 자신이 얘한테만 이렇게 오기를 부리는지 알 수가 없었다. 약간 후회를 하고 있다가 아차 싶어 물었다.
“설마 너 정말 나… 이덕재 말고 또 그런 식으로 먹고 떨어지라고 대주고 이런 적 없지?”
“…….”
그 질문을 하니 황경호가 정말 머리끝까지 화가 난 얼굴로 강동현을 쳐다보았다.
*
“어!! 은혁아! 너 얼굴 왜 이래!!”
사무실에 들어온 강동현을 보고 사장이 깜짝 놀라서 달려왔다. 뺨 한쪽이 붓고 입술이 터졌다. 회사에서 제일 잘 팔리는 배우가 이렇게 됐으니 깜짝 놀랐다. 다행히 대본 리딩은 어제라 이 얼굴로 제작진과 다른 배우들을 만나진 않았지만 6일 뒤면 크랭크인인데 대작 드라마의 남자 주인공 얼굴이 이렇게 되다니.
“입술! 이거 어떡할 거야!”
“일주일 뒤까진 나을 거래요. 괜찮아요.”
진짜 좀 걱정되어서 병원도 갔다 왔는데 입술은 상처가 금방 나아서 괜찮을 거라고 했다. 사장이 엄청 깜짝 놀라 얼음팩까지 비서한테 사오라고 시키곤 얼굴을 살펴보았다.
“뭐야? 맞은 거야? 누가 이랬어?”
“건드리지 마세요. 약 발라 뒀어요.”
“세상에… 누가 이랬냐니까?”
사장의 얼굴을 봐서는 고소도 불사할 얼굴이다. 강동현이 별거 아니라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개인적인 거라….”
그러자 사장이 귀신같이 눈치를 챘다.
“뭐야! 이거 걔지! 걔 미친 거 아냐?! 배우 얼굴을 이렇게 만들면 어떡해!! 이 미친년이…! 야, 이 씨. 걔 이름 대봐. 야. 빨리 이름 대봐!”
“아니에요, 사장님. 진짜 진짜 이거 제가 잘못해서 이렇게 된 거예요.”
“아, 됐고 이름부터 대라고! 이 썅년이 앙탈도 정도껏 부려야지!!”
사장님이 평소에는 재미있고 유쾌한 분이더라도 업계에서, 그것도 여자라면 무시하고 보는 쇼비즈니스 업계에서 여자 혼자서 이 정도까지 회사를 키워낼 정도로 대단한 사람이었다. 소속사 문제로 군대까지 가서 방황하고 있던 강동현을 알아보고 스카웃 한 것도 사장님이었다. 자기 회사 식구, 사업에 관한 거라면 물불 가리지 않는 사람이었다.
게다가 강동현은 작년 <코드명:울프> 이래 수백억 원 대의 광고 매출을 올린 배우였다. 그걸 계속 이어가기 위한 고된 드라마 촬영인데 처음부터 얼굴이 이렇다니 이건 말이 되지 않았다.
매니저 형까지 열심히 자기가 잘못한 것처럼 빌자 여전히 짜증을 못 벗은 얼굴로 담배를 꺼내서 입에 물었다. 강동현이 얼른 라이터로 불을 켜서 붙여주었다. 그녀는 강동현의 턱을 잡고 한창 얼굴을 살펴보았다.
“아, 속상해. 괜찮겠어, 이거? 김 팀장, 이거 봤어?”
강동현의 매니저 김석현이 강동현의 얼굴을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병원 갔다 왔어요. 괜찮대요.”
“아니, 드라마가 첫 장면이 중요한 건데…! 아, 진짜 짜증 난다.”
그러더니 그녀는 담배를 빠르게 피우면서 바로 휴대폰을 들어 어딘가에 전화를 하기 시작했다.
“어, 박 원장. 난데. 아니~ 우리 강 배우. 아, 얼굴이 좀 상해서. 응. 어, 입술이 터졌는데. 얼굴도 좀 붓고. 아, 아니. 싸움 나고 이런 건 아니고. 계집애한테 맞아 가지고. 어, 어. 몰라. 원래 이런 애 아니야. 응. 어. 데려갈게.”
사장은 전화를 끊고는 가방을 챙겼다.
“뭐해. 가자. 김 팀장, 운전해.”
병원을 갔다 왔다는 데도 다시 데려갈 모양이었다. 하긴 강동현 하나로 움직이는 돈이 얼만지 생각해보면 충분히 그럴 만하다. 강동현은 얌전히 따라나섰다. 강동현은 내려오는 길에 마주친 사장님 비서한테서 받은 얼음팩을 얼굴에 대고 차에 탔다.
“너… 이렇게밖에 관리 못 해?”
“죄송합니다….”
J엔터 대표이사이자 최대주주인 옥미현은 드디어 강동현을 질책하기 시작했다.
“너 사고 안 치고. 안 놀고. 일 진짜 열심히 하고. 욕심 있고. 내가 그래서 너 좋아하는 거 몰라?”
“압니다. 죄송합니다.”
“강 이사, 어? 이제 이사잖아. 우리 끝까지 같이 가자고 내가 2대 주주까지 해준 거잖아. 내가 미쳤다고 아는 것도 없는 스물 몇 살짜리한테 이사 줄 거 같아? 나 우리 강 배우 믿는다고. 나 우리 강 배우 근성 하나, 자기 관리 그거. 내가 그거 믿고 준 거야. 알잖아?”
“네….”
“내가 너 하고 싶다는 거 있으면 물심양면으로 다 뒷바라지해주잖아. 나 내 새끼들한테도 이렇게 안 해.”
“네.”
옥미현은 신경질적으로 강동현에게 당부했다.
“그리고 그 기집애 한 번만 더 니 얼굴에 손대면 나 걔 찾아낸다? 단속 잘해라.”
“네….”
걔… 아마 우리 사장님한테 걸리면 뼈도 못 추릴 것이다. 강동현은 사장님의 단골 병원에 가서 터진 입술을 고정하는 작은 테이프를 두 개 붙이고 온열 찜질을 받은 후 나왔다.
‘계속 이런 식이려나….’
걔의 집 앞에서 그렇게 얘기를 한 건 어찌 되었든 잘한 짓일 것이다. 다만 직후에는 좀 당황했는데, 잘 생각해보면 화를 내는 게 전보다는 좋은 사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일단 강동현의 말이나 행동을 그냥 참아 넘기는 게 아니라 죄다 화를 낸다는 건 일단 반응을 한다는 거니까 말이다.
그래도 좀 당황스러운 건 싸울 때 싸우더라도 도대체 어떻게 하는 게 맞는 건지 영 갈피를 못 잡겠다는 거다. 화를 내는 것까지는 좋은데, 이쪽에서 그걸 풀어줄 수 있어야 할 것 아닌가. 그게 오리무중이다.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뭔가 말을 걸면 걔는 계속 화를 내고 때리고… 이걸 반복하면 되는 것인가.
그리고 자신이 말하는 게 도대체 어디서부터 어디가 잘못된 건지도 모르겠다. 분명 좋은 의도로 말을 꺼내는데 자꾸 화를 더 돋구는 쪽으로 가는 것 같다.
병원을 갔다 와서 오피스에 앉아 대본을 외우고 있다가 담배를 한 대 피우러 나갔을 때 강동현은 어딘가에 전화를 걸었다.
[응~ 아들~ 웬일이야. 먼저 전화를 다 하고.]
“엄마.”
[왜, 우리 아들. 무슨 일 있어? 또 어디 아파?]
강동현은 단도직입적으로 용건을 말했다.
“엄마 나 예전에 말 못되게 한다고 많이 뭐라고 하지 않았어? 그랬던 거 같은데.”
[응? 그건 갑자기 왜?]
“아니… 그냥. 엄마가 그때 뭐라고 했지? 엄마도 그때 울었잖아.”
[아니… 그거야 우리 아들이 엄마 맘 몰라주고 너무 섭섭하게 하니까….]
“내가 어떻게 했어?”
[뭘 어떻게 해… 엄마 이거 해줘, 저거 해줘, 이럴 때나 말 걸지 그런 거 없을 땐 귀찮아하고 짜증 내고. 엄마랑 말하기도 싫어하고… 그리고 너 좋을 땐 애교 부리고.]
“그건 그냥 사춘기라서 그랬던 거 아냐?”
[너 가끔씩 진짜 말 밉게 할 때 있어… 너 아빠나 누나한테는 안 그러면서 엄마한테는 짜증 난다, 싫다, 귀찮다 이런 말도 많이 하고. 엄마는 니 인생에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당연한 거처럼 여기고. 굳이 그렇게 말 안 해도 될 걸 꼭 상처받게 말하고….]
뭐야… 엄마도 쌓인 게 많잖아. 강동현은 엄마의 하소연을 주절주절 들으며 당황했다.
“나… 나 요즘에도 엄마한테 그래?”
[예전만큼은 아닌데… 그래도 너 엄마한테 전화 안 하고 가끔 해도 말 끝나기 전에 툭툭 끊고 니 할 말만 하고. 아무리 바빠도 그렇지 엄마가 문자 하는 건 답장 안 해주고. 근데 너 누나나 아빠한텐 꼬박꼬박하잖아.]
“진짜…?”
내가 그랬나… 강동현은 인지 부조화를 느꼈다. 강동현은 당혹스럽고 또 괜스레 짜증도 나고 찔리기도 하고 복잡한 마음이었다.
“미안, 엄마… 앞으론 안 그럴게. 진짜 미안….”
강동현이 그렇게 말하자 엄마는 잠깐 말이 없었다. 그리고 그녀가 먼저 입을 열었다.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엄마, 울어?”
강동현은 깜짝 놀랐다. 엄마 목소리가 영 그랬기 때문이다.
“이게 뭐라고 울어, 쓸데없이. 앞으로 안 그런다는데.”
[아니, 그냥… 엄마 진짜 우리 아들 너무너무 사랑해… 흑.]
강동현의 엄마는 좀 감정적인 편이었다. 이게 뭐라고. 울긴 왜 우는가. 강동현이 한숨을 쉬었다.
“아, 또 오버한다. 엄마….”
괜히 또 사람 마음 안 좋게 하네, 이 아줌마가… 그렇게 말하려다가 문득 이런 점인가, 라는 생각이 들었다.
“알았어. 진짜… 나 근데 엄마 말고 다른 사람한테도 그래?”
[너 진짜 얄밉게 아빠나 은연이한테는 잘하잖아. 다른 집 엄마들한테도 그렇고.]
“엄마랑 다른 집 엄마들이랑 같아? 엄마는 내 엄만데.”
강동현이 어이가 없어서 그렇게 대꾸했다.
“그리고 내가 무슨 아버지랑 엄마를 차별해. 도은연 걔야 내가 뭐 안 하면 개지랄하니까 그런 거고, 아버지도 가끔 연락하시는 거니까 그런 거지.”
[응….]
“그리고 섭섭한 거 있으면 그때그때 말해. 쌓아 놓지 말고.”
강동현이 그렇게 말하자 엄마가 약간 주저하다가 곧바로 말했다.
[이런 거 섭섭해….]
“뭐가?”
[엄마가 너 때문에 이런 게 섭섭했다고 하면… 그냥 그래서 섭섭했구나 해주면 안 돼?]
“아니, 그게 말이….”
[엄마도 너한테 섭섭하다고 많이 말했어. 그럼 넌 항상 안 그랬다고 하고 그게 섭섭할 일이냐고 하잖아… 금방도 엄마가 너 너네 아빠랑 은연이한텐 안 그러면서 엄마한테만 그런다고 하면 곧장 아니라고 하고. 엄마 바보 만들잖아. 예민한 사람으로 만들고….]
“…….”
[니가 그렇게 해서 그렇게 느껴지는 걸 어떡해….]
성가시다. 곧장 그렇게 생각했다. 강동현은 한숨을 쉬고 잠깐 눈썹을 긁적이다가 대꾸했다.
“그래서 내가 어떻게 해줬으면 좋겠는데.”
[그렇게 귀찮다는 듯이 말하지 말고 말 좀 예쁘게 해주면 안 돼?]
“아니….”
[그냥 엄마가 그래서 그랬구나, 그렇게 공감해주고 그러면 좋잖아.]
안 맞는다… 짜증 난다… 강동현은 담배를 재떨이에다가 눌러 끄고 인상을 잔뜩 찌푸렸다. 새삼 어렸을 때 엄마를 귀찮아했던 게 이런 것 때문이지, 라는 생각이 들었다.
“알았어, 엄마… 앞으론 진짜 조심할게.”
강동현이 말했다.
“진짜.”
[근데 진짜 무슨 일 있어? 갑자기….]
“응…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나중에 전화하자. 들어가.”
[응….]
“먼저 끊어.”
강동현은 엄마가 먼저 전화를 끊는 걸 기다리곤 귀에서 전화기를 뗐다. 그리고 잠깐 끙하고 생각했다.
‘걔가 나한테 엄마처럼 뭐가 섭섭해서 그런 건 아닐 건데…. 비슷한 건가, 안 비슷한 건가. 모르겠다… 말을 어떻게 가려서 해야 하지? 아니, 엄마나 걔 말고는 아무도 나한테 그런 말 안 하는데 왜 둘은 내가 말을 못 되게 한다고 하지? 물론 옛날엔 대놓고 걔한텐 막말했으니까 그렇다고 치는데 요새는….’
맞은 뺨이 아렸다. 아. 진짜 그냥 모르겠다.
*
이번 드라마는 지방 촬영과 해외 촬영이 많았다. 내일은 곧바로 강릉이고 그 이후로 지방과 해외를 돌고 나서야 서울 촬영이었다. 그래서 방영 중엔 거의 서울 도심 촬영이나 세트 촬영이 주를 이룰 것이다. 가기 전날 밤 촬영을 마치고 11시 30분쯤 출발해서 12시에 신림동에 도착했다. 좀 더 가서 눈에 익은 빌라가 나오자 전화를 걸었다.
[밤에 전화하지 마.]
받자마자 상대가 그렇게 말했다. 강동현이 말로 하라고 해서일까. 정말 뭐라고 말할 틈도 없이 하지 마, 하지 마….
“나 지금 너네 집 앞인데.”
지저분한 전선이 달리는 동네였다. 번화가는 이제 전봇대가 없으니 새삼 신기했다. 주홍빛 가로등 앞에 차를 세웠다. 강동현은 차에서 내렸다.
“잠깐 내려와.”
[싫어.]
“잠깐만. 응?”
최대한 부드럽게 말했다. 그러자 잠깐 저쪽이 말이 없었다. 끊은 건가? 강동현은 휴대폰 화면을 보았다가 다시 스피커 가까이에 입을 대고 말했다.
“잠깐만 내려와.”
그러자 이번엔 진짜 전화를 끊었다. 다시 걸어야 하나… 하고 있는데 앞의 건물 3층 계단의 등이 켜졌다. 그리고 2층, 1층. 황경호는 가벼운 차림으로 발을 질질 끌며 내려왔다. 그리고 강동현을 보더니 움찔하며 멈추어 섰다.
강동현은 짙은 네이비 슬랙스에, 위에는 아이보리 색 셔츠 위에 검은 가디건을 걸치고 커다란 꽃다발을 들고 기다리고 있었다. 후드나 선글라스나 마스크도 없었다. 가벼운 차림이었지만 훤칠하고 멋있게 입었다. 강동현은 그에게 다가갔다.
“받아.”
“난 이런 거….”
“꽃은 괜찮잖아. 아무리 생각해봐도. 돈도 아니고 차도 아니고 집도 아닌데.”
강동현은 황경호의 말을 잘라먹고 그렇게 말했다. 그래도 밀어내려고 하자 강동현은 그냥 억지로 그의 품에 떠넘겼다.
“그냥 받아. 꽃 좋아하잖아. 아무도 뭐라고 안 해.”
“…뭐하러 온 거야.”
황경호는 전처럼 꽃의 향기를 맡는다든가, 꽃에 정신이 팔리진 않았다. 하지만 꽃만 보았다. 강동현은 평이하게 답했다.
“내일부터 못 봐서. 3주 정도… 그냥 얼굴이나 볼까 하고.”
“…….”
“자고 있었어?”
“아니….”
“저번엔 미안. 나 또 말 그렇게 해서….”
강동현이 그렇게 말하자 황경호가 그의 얼굴을 잠깐 올려다보았다. 그때 이후로 일주일 정도 지났다.
강동현이 자신이나 이덕재 말고도 또 그런 식으로 몸을 대준 적이 있냐는 물음에 황경호가 머리끝까지 화가 나서 손으로 들고 있는 걸로 강동현의 얼굴을 쳤다. 꽤 무거운 마사지 기기였다. 그것도 두 대나. 그래서 입술도 터지고 뺨도 붓고 멍이 들었다. 황경호는 그대로 다 내팽개치고 나가버렸다. 강동현도 당황했다가 또 말실수를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황경호가 약간 주저하더니 입을 열었다.
“그때 얼굴은….”
“바로 병원도 갔고. 괜찮았어. 신경 쓰지 마.”
강동현은 상대의 심난한 얼굴을 보며 어쩐지 미안하기도 하고 초조하기도 하고 그랬다. 강동현이 말했다.
“나 진짜 바본가 봐.”
강동현의 말에 황경호가 그를 다시 올려다보았다.
“너한테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어.”
강동현은 지그시 황경호의 얼굴을 관찰했다. 살짝 거리를 좁혔다.
“내가 어떻게 해줬으면 좋겠어?”
“…가까이 오지 마.”
강동현이 한 걸음 더 다가서니까 황경호가 한 걸음 뒤로 물러서면서 그렇게 말했다. 그는 다시 시선을 피했다.
“잠깐만 나 좀 봐봐. 내가 너한테… 그렇게 할 때만큼 스트레스받고 그런 건 아니지? 기분은 요즘 어떤데?”
“…자살 같은 거 이제 안 하니까 그런 건 걱정 안 해도 된다고….”
“그래… 다행이네.”
“…….”
“…….”
멀리서 차가 달리는 소리가 간헐적으로 들린다. 주홍빛 가로등 아래에 가만히 말없이 서있었다. 강동현은 가만히 황경호의 이마를 보고 있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 뭐 하나만 물어봐도 돼?”
황경호가 살짝 고개를 들었다. 긍정이라고 생각하고 운을 띄웠다.
“진짜… 너 기분 나쁘게 하고 싶어서 하는 질문이 아니라… 진짜 진짜 진짜 그냥 궁금해서 그러는데….”
맞는다면 얼굴은 사수해야겠다, 라고 생각하면서 강동현이 물었다.
“그때 나한테 왜 키스했어?”
“…….”
“응?”
황경호는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시선을 멀찍이 더 돌렸다.
“나도 몰라….”
대답했다… 강동현은 약간 놀랍기도 하고 어쩐지 좀… 기쁘기도 했다. 강동현은 바로 또 뭔가를 물으려고 했다가, 한 번 다시 생각하고 말을 골랐다.
“그럼 만약에… 내가 그 뒤로 너한테 안 그랬다면… 너… 다시 나한테 키스하고 싶어졌을까?”
“…….”
“그리고 이제 난… 전혀 그러기 싫어?”
“…….”
이건… 대답을 안 하는 게 더 낫다. 강동현은 뭔가 확 기분이 좋아졌다. 황경호는 인상을 찌푸렸다. 아니라고 바로 대답을 했어야 했는데. 황경호는 인상을 찌푸린 채 탐탁치 못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하고 싶다는 게 아니야.”
“알아.”
황경호는 강동현의 이런 태도가 짜증 났다. 그는 의외로 차분하게 대응을 했다. 저번에 여기서 울고불고 난리를 친 이후로 쭉 그랬다. 화가 났다. 그의 태도는 정말 황경호가 바보가 된 것 같이 느껴지게 만들었다.
정말로 내가 제대로 얘기를 안 했기 때문에 그렇게 했던 거 아닐까? 내가 그때, 언제라도 제대로 단호하게 말했더라면 정말로 그렇게 안 할 사람이었는데 내가 괜히 오버해서 필요 이상으로 방어적으로 행동한 거 아닐까, 그런 생각. 그의 말대로 차라리 전화나 문자로라도 내 생각을 그대로 말했더라면 그런 식으로 사람을 덮치진 않았을 거라는 생각. 결국 또 멍청하게 한 달 동안 자기 무덤을 자기가 팠다는 생각. 필요 이상으로 강동현을 나쁜 사람으로 만들어버린 것 같다는 생각. 그리고 그런 생각들은 정말 자기 자신을 손쓸 수 없는 멍청이처럼 느껴지게 했다.
분명히 처음부터 강동현이 멋대로 넘겨짚지만 않았으면 되는 것이었는데도, 싫다고 말할 때 정말로 싫다고 받아들여야 했던 건데도. 이쪽도 괜히 잘못한 게 없나 생각하게 되었다. 그는 또 황경호의 기분을 굉장히 신경 쓰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심지어 촬영을 앞두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대놓고 얼굴에 상처를 냈는데도 군말 하나 없었다.
‘이 새끼는 잘해도 못해도 사람을 병신으로 만들어….’
그런 게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한 번 전부 퍼붓고 났더니 더는 화를 못 참겠다. 누군가를 그렇게 때리고 화내고 악을 쓰고… 그런 상대는 강동현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이전 호텔로 끌려갔을 때는 그를 걷어차도 되는지 안 되는지도 누구한테 허락을 받아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 정도로 난감했고, 예전에 그를 때릴 때도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그의 얼굴을 피하거나 그의 얼굴에 상처가 안 나는 식으로 때렸었는데 대놓고 그의 얼굴에 주먹질하거나 상처를 내기까지 하니 이전과는 차원이 다를 정도로… 이렇게까지 해도 되나 싶어서 무섭고 불안하다가도 그렇게까지 할 수 있다는데 어떤 희열이 느껴졌다.
그래, 너 같은 거 아무것도 아니야. 내가 왜 이렇게 못해!
그렇게 생각하면 정말이지 지금까지 느껴볼 수 없었던 고양감이 느껴졌다. 게다가 그는 이제 정말 잘못한 척이라도 할 생각인지 맞아도 화를 참는 게 보였다. 화가 안 나는 게 아니라 화가 나도 참는 것이다. 그게 더 화를 돋구면서도 유쾌하게까지 느껴졌다. 언제나 피해를 받는 것도 이쪽, 참아야만 하는 것도 이쪽이었는데 그게 뒤바뀐 것이 느껴졌다.
그때 키스를 왜 했냐고? 그런 것 따윈 모른다. 그 이후로 강동현이 황경호를 그렇게 마음대로 안 덮쳤더라면 다시 키스하고 싶을까? 모른다. 그런데 앞으로?
황경호는 계속 시선을 피하고 있다가 다시 강동현을 보았다. 그는 확실히 예전보다 좋아진 얼굴로 말쑥하게 차려입고 서있었다. 큰 키에 좋은 몸은 어떤 옷을 입어도 전혀 왜소해 보이지 않았다. 캐주얼한 옷차림일수록 오히려 더 남자답고 세련되어 보이게 했다. 옷에 가려지지 않는 그의 몸의 윤곽이 굉장히 탄탄하고 단단하다. 키가 커서 근육이 꽤 큰데도 훤칠하고 시원하게 뻗었다. 게다가 건강한 혈색이 도는 얼굴은 남자답고 그림으로 그린 것처럼 잘생겼다. 그는 금방 30만 원이 넘는 꽃다발을 황경호한테 주었고 그가 타고 온 차는 벤츠였으며, 일년에 못해도 수십억을 버는 남자였다.
지금 황경호가 화를 내면서 지긋지긋하다고 따라다니지 말라고 욕을 하고 때려도 그는 아마 군말 없이 그대로 받아줄 것이다. 강동현의 이런 태도는 한 달을 고스란히 그에게 또 당한 황경호를 완전 바보 같이 만들었지만 동시에 앞으로의 황경호를 무적으로 만들어주었다.
순간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왜? 내가 왜 못해?’
얘가 나한테 한 것처럼 내가 왜 못해?
황경호는 천천히 그의 잘생긴 얼굴을 똑바로 보면서 물었다.
“넌?”
“응?”
강동현이 되물었다.
“넌 나한테 키스하고 싶어?”
강동현이 순간 깜짝 놀랐는지 눈을 크게 뜨고 황경호를 내려다보았다.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는 모양이었다. 강동현은 얼떨떨해하다가 답했다.
“어….”
“또 키스하면 그냥 무작정 넣을 거야?”
강동현이 바로 고개를 마구 가로저었다.
“내일 촬영이라고 그랬지?”
“어? 어….”
“내가 지금 니 얼굴 엄청 세게 칠 거거든?”
황경호가 말했다.
“그래도 괜찮으면 키스하게 해줄게.”
*
“야, 너 얼굴….”
강동현이 얼굴에 아이스팩을 대고 있었다. 매니저 김석현이 강동현에게 귓속말을 했다.
“티 많이 날까?”
“떼 봐.”
이쪽 각도, 저쪽 각도에서 보았다. 강동현은 아이스팩을 얼굴에서 뗐다.
“밤새도록 찜질하긴 했는데.”
강동현은 온열팩으로 바꾸어 얼굴에 대었다. 김석현은 한숨을 쉬었다.
“크게 그렇진 않은 것 같은데… 그래도 오른쪽 안 맞은 게 다행이네.”
보통 사람은 왼편을 더 선명하게 인식한다. 모든 것을 왼쪽부터 인식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의 얼굴도 당사자의 입장에서는 오른쪽 얼굴의 생김새가 왼쪽보다 더 중요했다. 특히 화면에 나온다면 말이다. 강동현도 잠깐 찜질팩을 떼고 거울을 보았다. 주먹질도 해본 놈이 한다고 크게 상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화면에는 고스란히 잡히는 법이었다.
“진짜 지금 만난다는 그 여자애가 이러는 거야? 야, 걔 진짜 사장님한테 걸리면 복날에 개 맞듯이 쥐어 터질 걸….”
“어… 그렇겠지… 아…. 비밀로 해줘.”
강동현은 밤새도록 잠을 자지 못해서 머리가 아팠다. 잠을 잘 수가 없었다.
키스를 하게 해줄 테니
촬영 전날의 얼굴을 팰 수 있게 해달라니.
너무 당황스러워서 뭐라고 할 수가 없었다. 황경호는 언제나 강동현에게 휘둘려 왔다. 그가 강동현의 잘못을 책망하고 강동현에게 화풀이를 하더라도, 그는 그것조차도 강동현에게 휘둘려 왔던 것이었다. 화를 내며 길길이 날뛰는 것은 황경호였고, 강동현은 그저 그가 그런 식으로 힘을 빼고 소진되길… 솔직히 기다린 거였으니까. 그럼 또 포기가 빠른 그는 화를 내느라 진을 더 빼지 않을 거고 또 어떤 균형이 만들어질 것이다. 굳이 섹스를 하지 않더라도. 그걸로도 좋았다. 그래서 그의 화가 풀리길 기다리며 그가 좋아하는 꽃도 사주고 그가 아무리 화를 내도 참고 있었다.
[그래도 괜찮으면 키스하게 해줄게.]
듣는 순간 머리가 딩하고 울렸다. 순간 떠올랐다. 그가 항상 무기력하게 강동현에게 당하다가도 꼭 카운터 펀치를 먹였다는 것을 말이다. 절대 강동현이 원하는 대로 호락호락 넘어가 주지 않았다는 사실을 말이다. 어떻게 잊을 수가 있었을까.
물론 강동현도 키스 한 번에 촬영 전날의 얼굴을 망칠 정도로 바보는 아니었다. 섹스였다면 정말 혹했을 수도 있을 것 같지만… 하지만 이걸 받지 않으면 황경호는 이제 정말 강동현이 뭘 어떻게 하든 그를 받아주지 않을 것이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게 사실이든 아니든, 그런 생각이 들었다는 게 중요한 것 아닌가. 아마 예전이라면 바로 화를 내고 다른 조건을 내달라고 했을 것이다. 근데 강동현은 순간 저도 모르게 다른 말을 했다.
[너 진짜 나한테 화 많이 났네….]
[그래서 할 거야, 말 거야?]
[…해.]
그래서 얼굴을 한 대 맞았다. 맞으니까 반사적으로 화는 확 나긴 했다. 그래서 곧바로 그의 멱살을 잡아당겨 입을 맞추었다. 그냥 전처럼 가만히 있을 줄 알았더니, 그가 강동현의 얼굴을 한 손으로 감싸 잡고 적극적으로 혀를 섞어 입을 맞추었다. 머리털 끝부터 발끝까지 소름이 돋았다. 맞아서 욱신거린다는 것도 잊어버렸다. 한 손으로 그의 허리를 끌어안고, 다른 손으론 손을 잡은 채 세상 모르고 입을 맞추었다.
[으응… 응… 앙… 으응… 흐읏… 읏… 하아…]
[음… 큭… 읏… 음… 입 좀 더 벌려… 하아.]
꽃은 이미 떨어뜨렸고 그를 낡은 건물의 벽에 밀어붙여 입술을 물고 빨고 핥고 혀를 넣어 고양이처럼 까슬한 혀와 맞닿아 서로 비비고 핥고 깨물고… 전처럼 완전 착 달라붙어온다는 느낌은 아니었지만 얼굴을 쓰다듬는 그의 손이 머리카락 끝까지 찌릿찌릿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그냥 강동현이 그의 몸을 더 꽉 끌어안아 하반신과 상체를 최대한 맞닿게 하였다.
[흐응…! 아….]
[혀 내밀어.]
주홍빛 불빛 아래에서도 그의 얼굴이 빨갛게 된 게 보였다. 그가 입을 벌리고 혀를 내밀었다. 젠장. 그래서 느릿하게 끝부터 안쪽까지 핥아 올렸다. 촉촉한 타액이 설탕물처럼 달았다. 그런 식으로 몇 번을 느릿하게 핥아 올리자 그가 미간을 찌푸리며 야한 얼굴을 하였다.
[흐으응… 앙…]
그가 못 참을 때 내는 신음 비슷한 게 나왔다. 그러니까 강동현도 정말 못 참을 것만 같았다.
왜? 이렇게 기분 좋은데. 왜? 아, 왜 맨날 못 하는 건데? 데리고 가고 싶다. 차든 어디든. 옷 벗기고 싶어. 가슴 만지고 싶어. 엉덩이도 만지고 싶어. 얼른 넣어서 울려버리면 기분 엄청 좋을 텐데.
타액이 흐르고 노골적인 쪽쪽 거림만 계속 울려 퍼졌다. 강동현은 어느샌가 무아지경으로 입을 맞추고 있었다. 그때 황경호가 강동현의 얼굴을 부드럽게 만지던 손으로 다시 그의 얼굴을 밀어내었다. 그의 입속 깊은 곳까지 핥아대던 강동현은 저도 모르게 밀려나 헐떡거렸다. 잠깐 정신을 못 차렸다.
[됐죠?]
[……]
얼굴 한 대가 뭔가.
하는 동안 완전 까먹고 있었는데.
이런 식이면 키스 한 번에 통장을 탈탈 털어가겠다고 해도 갖다 바칠 것 같았다. 강동현의 결론이었다. 맨 처음 강동현과 황경호가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썼던 계약서가 다시 눈앞에 어른거렸다. 그때도 말도 안 되는 불공정계약서였지만 황경호가 원체 호구 같아서 강동현을 별로 못 뜯어간 것이었다. 하지만 이런 식이면 말이 완전 달라진다. 강동현이 입버릇처럼 말했던 ‘니가 원하는 건 뭐든 해주겠다’가 자동실현되는 것이었다.
강동현은 실제로 상대가 그러지 않을 것이란 걸 무의식중에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에게 허세를 부릴 수 있었다. 뭐든 해주겠다고? 그건 강동현이 선심 쓰듯 제시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는 그저 상대에 의해 뼛골까지 착취당할 뿐이다
섹스는 정말 어마어마한 권력이었다. 강동현은 지금까지 오히려 자신이 그 권력을 휘두르는 양 행동했지만, 그 계약서부터가 갑을 관계가 확실하지 않았던가. 황경호가 그 힘을 휘두르고자 했다면 그는 강동현을 정말 언제든 패가망신시켜버릴 수도 있었을 것이다. 집? 차? 마트 쇼핑하듯이 집어갈 수 있을 것이다.
‘위험한데….’
강동현은 새삼 그런 생각을 하며 얼굴을 찜질했다. 정말 위험한 것은 벌써 강동현이 또 기대를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로케 촬영을 마치고 서울에 가면 뭘… 이미 황경호는 강동현의 밥벌이 수단 중 가장 중요한 부분에 주먹을 갈겼다. 예전의 그는 그렇게 화가 나고, 심지어 자신이 피해자인데도 남을, 그것도 가해자인 강동현을 배려하듯 얼굴을 피해서 때리곤 했는데 말이다. 섹스의 대가로 뭘 요구할지도 소름 끼쳤다. 뭐든, 거부할 수가 없을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마치 처음처럼 두 사람 사이에
갑과 을의 관계가 선명하게 섰다.
*
“음….”
촬영장면을 찍고 모니터링을 하는데 연출가의 목소리가 그다지 탐탁치 않은 것처럼 느껴지는 건 왜일까. 강동현은 약간 긴장해서 같이 화면을 보고 있었다.
“오늘따라 강동현이 화면발 안 받네, 진짜… 어제 라면이라도 먹고 잤어?”
“아니요….”
“그래? 아, 이상하네. 그냥 보면 괜찮은데.”
연출가가 고개를 절레절레 젓더니 한 번만 더 찍자고 한다. 그래서 강동현은 먼 바다를 배경으로 5월의 꽃이 잔뜩 핀 밤에 약간은 으스스하고, 하지만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낸다는 기분으로 꽃밭을 걸었다. 강동현이야 원체 키랑 몸이 좋으니 멀리서 찍어 영상을 많이 잡아내고 있었다.
그리고 곧 옷을 갈아입고 조선 시대의 한복을 입고 다시 찍었다. 그리고 대한제국 시절의 장교복을 입고 또 한 번 더 찍었다. 컷을 하고 모니터링하고 또 찍고 컷 하고 모니터링 하고 또 찍고 하다 보니 시간은 훌쩍 간다. 이 꽃밭에서 찍어야 할 장면들을 다 찍고 이제는 장소를 옮겨 바로 바다의 앞에서 촬영을 했다. 강동현은 대기로 들어가고 여자 주인공이 등대의 옆에 앉아 소주와 오징어를 놓고 죽은 부모를 기리며 바다에 대고 이야기를 한다.
‘아, 진짜….’
역시 티가 나긴 하는 모양이었다. 강동현은 자신의 얼굴을 만져보았다.
커리어는 강동현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결국 그 커리어에 집착하다 보니 인생의 사랑도 잃게 된 것 아닌가.
강동현은 연기라는 자신의 일이 좋았다. 매번 다양한 사람이 되어 그들을 세상 사람들에게 표현하고 그들에게 감동을 줄 수 있는 게 좋았다. 매번 발전해나가는 게 느껴지는 것도 좋았다. 그걸 세상에 인정받아 이렇게 명성이 쌓인 것도 좋다. 많은 이들이 자신의 연기를 칭찬하고 기사에서는 그를 20대 최고의 연기력을 가진 배우 혹은 한국 배우들 중 가장 영향력 있는 배우라고 꼽는 것도 들을 때마다 기분 좋은 말이다.
고등학교 때 우연찮게 연기를 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가소롭기 짝이 없지만 그래도 그때 친구들끼리 영화를 만들어본 게 정말 재미있었다. 강동현은 어렸을 때부터 외모가 출중해서 연예인이 되라는 권유가 많았지만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는데 배우라는 직업에는 홀딱 반하고 만 것이다.
대학교를 가서는 본격적으로 오디션을 보러 다니고, 합격하고 소속사도 생겨 금방이라도 배우로써 성공할 수 있을 줄 알았다. <진주>의 차기흔 아역으로 데뷔했을 때 굉장히 찬사를 받기도 했고 말이다. 하지만 소속사가 휘청하더니 강동현의 출연료는 고사하고 회사 자체의 존립 문제가 불투명해지며 어느 날 회사 경영진이 말도 없이 전부다 도망가버렸다. 그때는 강동현도 굉장히 어렸기 때문에 회사와 했던 계약을 어떻게 처분해야 할지, 사장 등이 도망간 회사의 빚을 강동현한테 독촉하러 오는 것도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도망치듯 군대에 가고 실의에 빠졌다. 소속사가 문제가 되어 신세를 망친 연예인들이 수두룩하다. 제대로 시작하기도 전에 그렇게 되어버린 것 같아 도저히 힘을 낼 수가 없었다. 그때 여자친구인 강영지가 강동현을 위로하고 다시 힘을 내게 해줘 말년에 군대에 있으면서 그 당시 막 사촌 매형이 된 변호사와 법적인 문제를 해결했다.
자유의 몸이 되어 다시 오디션 시장에 나왔을 땐 100번이 넘는 오디션을 보았다. 강동현은 연기도 그 나이대 신인 치고 퍽 잘한다는 소리를 들을 정도였으나 얼굴이나 몸이 당시 주연급 배우들 이상이었기 때문에 가능성이 있다는 말을 듣고는 결국 떨어지곤 하였다. 그는 조연으로 출연하기에는 너무 부담스러운 얼굴이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오디션을 혼자서 보러 다니다가 개그맨이나 예능인, 가수 등을 주로 가진 소속사였던 J엔터의 옥미현 대표를 만났다. 그녀는 그를 보자마자 데리고 회사로 갔다.
처음에 그녀는 강동현을 아이돌로 데뷔시키려고 했다. 그쪽이 인기도 빠르게 끌뿐더러 티켓파워나 셀링파워가 커져서 결국 영화나 드라마 쪽에서도 많은 콜이 들어온다고 설득해 처음엔 노래나 춤 연습을 하기도 했다.
소속사가 배우에 집중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강동현은 혼자서도 여전히 오디션을 보러 다녔다. 전 회사처럼 망할 만큼 작은 회사도 아니었으니 거기에 만족하기로 하고 말이다. 그러다가 <세조> 아역으로 한 번 더 세간의 조명을 받고 그 뒤 <하이스쿨호러>라는 케이블 TV 채널의 준주연 캐릭터로 한 시즌을 풀로 출연하고 그다음에 곧바로 <서리>의 주연으로 발탁되었다.
강동현은 자학을 하는 성격은 아니었으나 그래도 운 좋게 이렇게까지 빨리 성공을 할 수 있었던 건 연기력도 연기력이지만 그의 타고난 외견과 목소리 덕도 크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나도 그때 미쳤지… 촬영 전날인데 얼굴을 때려도 된다고 하다니.’
강동현은 후회와 기대가 계속 교차하는 것을 느꼈다. 모니터링을 할 때마다, 혹은 감독의 말을 들을 때마다 후회가 되고 또 가만히 그 간호사랑 했었던 것들을 생각하면 다시 저도 모르게 기대를 하게 되었다. 설마 이거보다 더한 게 있겠어? 그럼 됐지… 이런 식으로도 생각을 하다가, 또 얼굴이라도 패겠다고 하면 진짜 문제가 될 것도 같고….
왜 이런 쓸데없는 생각을 계속해야만 하는지도 모르겠는데 계속 생각하게 되었다.
“오늘 컨디션이 안 좋아?”
안도현이 자신의 개인 장면을 찍고 와서 말을 걸었다. 강동현은 상념을 멈추고 그를 돌아보았다.
“아니… 좀.”
“아직도 몸 안 좋아? 너 연말에 쓰러졌었잖아.”
“잠을 못 자서 그렇지 딴 건…. 3일 동안 3시간 잤었거든.”
“와… 너 진짜 빡세게 산다. 뭐가 그렇게 많아?”
“연말은 좀… 영화 촬영도 있고 시상식 3사 다 가고 중국이랑 일본도 갔고… 중간중간에 미팅도 있고.”
안도현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한류스타 클래스 나온다.”
“아니 뭐… 다들 하는 건데.”
“한 번 영화 찍고 안 나오는 배우들도 많잖냐.”
안도현은 물을 조금 마시더니 강동현을 보았다.
“너 연극은 관심 없냐?”
솔직히 강동현 정도의 클래스면 연극은 페이를 못 맞춰줘서 못 나간다. 강동현이 대답했다.
“대학교 1~2학년 때 학교에서 하는 수준으로 잠깐 한 적은 있는데.”
“난 연극이 메인이니까. 너 왠지 연극도 잘할 것 같아서 한 번 보고 싶더라구. 같이 해보고도 싶고.”
안도현이 강동현을 보며 순수하게 말했다. 30대 초반의 남자 배우인데도 굉장히 순수한 느낌을 많이 가진 배우였다.
드라마나 영화와는 다르게 연극은 컷이 없다. 몰입에 방해되는 것은 오로지 새카맣게 내려앉은 관객의 얼굴들이지만 집중을 하다 보면 그마저도 상관이 없게 된다. 처음부터 끝까지 오로지 그 배역에 빠져들어 몰입될 수 있는 연기란 연극밖에 없다. 강동현이 연기 자체에 굉장히 욕심을 내고 있다는 것을 예전부터 알고 있었던 안도현은 강동현이 한 번쯤은 제대로 된 프로 연극의 묘미를 느껴 보았으면 싶었다.
“연극 하면 진짜 드라마나 영화랑은 다르게 엄청 몰입하는 맛이 있다니까.”
“그렇지…? 그것도 프로들끼리 하면 진짜 배울 것도 많고. 형 연기 잘하잖아.”
충무로 출신들은 연기가 출중해서 기본 이상은 다들 쳐주지 않는가. 강동현이 한 번 그를 돌아보았다.
“진짜 한 번쯤 우정 출연이라도 해줬으면 좋겠다, 너. 관객들 엄청 올 거 같은데. 관객들이랑 한 번 직접 소통해보는 것도 엄청 기분 좋다?”
강동현이 잠깐 생각해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한 번 사장님한테 물어봐야겠다. 형 지금 뭐 해?”
“지금은 이거 찍으니까 아무것도 안 하는데, 아마 끝나면 바로 <클리너>라고 장신 감독이 쓴 연극할 것 같아.”
“그 감독님 연극도 하지, 참.”
명감독의 이름이 나오자 강동현도 진짜 좀 혹했다. 극이 시작될 때부터 끝날 때까지 단 한 번의 컷도 없는 연기. 해보고 싶었다. 하지만 강동현의 지금 페이 수준은 어느 연극도 못 맞춰줄 것이고 아마 소속사 수준에서 컷 당하겠지만 언젠가 한 번쯤, 정말 안도현의 말대로 우정 출연이라도 해보는 건 나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가 더 그렇지만, 드라마의 경우 영화보단 시간 순서로 이야기가 진행되더라도 항상 컷과 촬영이 반복된다. 한 장면을 마음에 들 때까지 찍고 같은 대사를 정면, 측면으로 다시 찍어 사실 캐릭터에 몰입을 한다기 보단 그 상황을 똑같이 그려내는 것에 집중할 때도 많았다. 물론 그런 식의 촬영이 그 배우의 가장 좋은 얼굴, 가장 좋은 연기를 뽑아낼 때가 많지만 가끔 연속된 몰입의 기분을 느껴보고 싶다고 생각할 때도 있었다.
강동현은 톱클래스의 마스크와 몸을 가진 배우라서 연기보다도 그의 외모에 더 조명을 받을 때가 있다. 예전 사극 드라마를 찍을 때는 아예 거기에 중점을 줘서 첫 장면을 찍어 굉장한 호평을 받기도 했지만, 강동현 본인은 연기에 굉장히 욕심이 있는 편이었다. 굉장히 자연스럽고, 연출가가 원하는 연기를 퍽 잘 해냈지만 그 이상도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진주>에서 야망이 있는 남자주인공의 아역, <세조>에서 세조의 아역, <하이스쿨호러>에서 조연, <서리>에서 비극을 타고난 애절한 왕, 영화 <해결사>에서 히어로 역할, <연애출사표>에서 코믹하고 철없는 연하남, <코드명: 울프>에서 시니컬하면서 유머러스한 남자주인공, 아직 개봉하지 않은 영화 <타임리스>에서 첫사랑에 목숨을 바치는 남자, 지금 찍고 있는 드라마 <시크릿 블러드>에서 오랜 세월을 산 뱀파이어….
‘정통 사극 하고 싶다… 요즘 퓨전 사극이 대세라지만 한 번쯤 <용의 눈물> 같은 대작 사극 같은 거 해보고 싶은데… 근데 그런 거 다시 나오겠어?’
강동현은 그렇게 생각하다가 문득 입을 열었다.
“형….”
“응?”
안도현은 강동현이 이십 대 초반에 찍었던 <세조>에서 세조 이유의 아역으로 나왔을 때, 조연인 한 젊은 종친으로 나왔었다. 얼굴은 정성적인 미남이라기보단 약간 여성스러운 얼굴을 가진 예쁘장한 얼굴이었고 키는 크고 말랐다. 목소리는 비음이 섞인 음성이라 특색이 있다.
“형, 누가 형 싫어서 복수까지 하고 싶을 정도면 형 어떻게 할래?”
강동현은 뜬금없이 그렇게 물었다.
“어? 누가 나 그렇게 싫어한대?”
“아니… 만약에.”
“복수까지 당할 만한 일 안 하고 사는데….”
잔말이 많았다. 순수한 건 좋은데 그냥 눈치가 없는 것일지도. 강동현은 그냥 힘을 주어 간략히 단어만 말했다.
“만약에.”
“복수까지 하는 사람이면 너무 무섭잖아… 그냥 안 만나고 도망칠 것 같은데?”
안도현이 꺼림칙하다는 얼굴로 그렇게 말했다. 참 순수한 형이다… 강동현은 커피를 한 모금하면서 한숨을 쉬었다.
“그렇지?”
*
이강유 비뇨기과는 압구정에서 가장 잘 나가는 의원 중 하나였다.
강남 일대를 아울러 수많은 성형외과들이 판을 치고 있는 가운데 고고하게 남성 의원의 성지를 자처하며 이 땅의 수많은 고개 숙인 남성들의 마음을 치료해주는 바로 그곳! 우후죽순처럼 생겼다가 물거품처럼 사라지는 다양한 병원들 중에서 확고한 입지를 쌓아가고 있는 바로 그 병원! 말 못 할 고민으로 눈물짓는 대한의 남아들에게 그야말로 재림 히포크라테스로 이름을 높이고 있는 이강유였으니 가히 그 규모가 개인병원치고 작지 않았다.
뛰어난 의술과 좋은 경영 마인드를 가진 이강유 원장을 필두로,
재무 및 수술 담당 오희연 간호사
상담 및 수술 담당 김형세 간호사
상담 및 수술 담당 황경호 간호사
수술 및 입원 치료 담당 조한나 간호사
수술 및 입원 치료 담당 정기연 간호사
입원 치료 및 보조 치료 담당 박정석 간호사
등이 현재 근무하고 있었다.
원장 이강유 자체는 외모지상주의자가 아니었지만, 이 병원을 찾는 환자들의 특성상 아름다운 여자 간호사들은 그들의 치료 의욕을 증진시키고 신체 건강하고 밝은 남자 간호사들은 환자들의 열등감을 자극하는바, 모두 치료에 기여한다고 보아 심사숙고하여 채용한 것이었다. 실제로 원장을 비롯한 간호사들 모두 선남선녀들이었다.
“황 간.”
“왜, 김 간.”
예약 손님들에게 커피를 한차례 날라주고 내부 프론트에 앉아 다음 예약 손님이 왔는지 체크해보던 황경호는 이전 환자들의 차트를 태블릿pc 버전과 하드 카피 버전으로 나누어 정리하고 있는 김형세를 돌아보았다.
“이번 달 진료실 담당 나잖아.”
김형세가 말했다. 위의 담당 설정은 병원 진료 시간 때의 주 업무이고 청소나 잡일 같은 것은 결국 나이나 직급순으로 나눠서 하고 있었다. 이번 진료실 청소 담당은 김형세였다.
김형세 간호사는 185cm의 훤칠한 키에 태생적으로 크고 유연한 근육을 가지고 있으며 누가 보아도 젊은 정력이 느껴지는 28세의 청년으로, 황경호와는 동갑이었다.
“어, 왜? 바꿔 달라고?”
황경호 간호사는 웃는 얼굴이 환한, 애교 있는 소년 같은 타입이었다. 동안에 군살도 없이 예쁘게 구는 편이라 특히 나이 많은 아저씨들이나 어르신들이 좋아한다.
“아니, 그게 아니라….”
김형세는 잠시 주위를 둘러보며 눈치를 살피더니 조심스럽게 황경호에게 속삭였다.
“내가 진료실 청소를 하는데, 진짜 이상한 게….”
“뭔데?”
황경호가 되물었다. 김형세가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해를 할 수 없다는 어조로 말을 이었다.
“금요일에만 진료실 휴지통에서 콘돔이 나온다, 야.”
김형세가 의미심장하게 말하자 그 내용에 황경호가 펄쩍 뛰었다.
“뭐?!”
황경호가 충격받아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흡, 하고 숨을 들이켜며 가라앉혔다.
‘아… 지금 나올 리가 없지. 아니…. 그 새끼 콘돔 쓴 적 없지….’
황경호는 정신을 차리기 위해 고개를 한 번 저었다.
“설마…. 그게 왜 병원에서 나와…. 누, 누가 환자랑 그런 걸 할 리도 없고….”
“그러니까 내 말이. 그럼 그게 어디서 나오는 거야. 그것도 딴 곳도 아니고 진료실에서. 이강유 선생님이 간호사들한테 손대는 그런 악질적인 의사도 아니고….”
둔한 김형세도 역시 콘돔 같은 잇 아이템이 나오자 이런저런 생각이 드는 모양이었다. 황경호는 충동적으로 김형세에게 말했다.
“나랑 청소 구역 바꾸자.”
궁금하다… 황경호는 최대한 강동현에 대한 생각을 하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이제 그 변태 새끼라면 지긋지긋했다. 정말 팬 커뮤도 안 들어가고 있었고, 그놈도 촬영 때문에 서울에 없는데 괜히 그놈 생각을 하며 기운을 빼고 싶지 않았다. 일을 하자. 뭔가 다른 생각할 거리가 필요하다. 황경호는 김형세와 청소 구역을 바꿔 매일매일 진료실 청소를 하다가 금요일에 딱 콘돔을 발견했다.
“와… 진짜 금요일에만 나오네.”
그것도 생생한 정액까지 담긴 알찬 놈으로. 이거 DNA 검사하면 범인이 나오는 것인가. 황경호는 장갑을 낀 엄지와 검지로 콘돔을 눈앞까지 집어 들어서 마치 안구로 DNA 분석을 할 것 같이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하지만 진짜 그런 걸 돈 들여서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오늘 하루 종일 이 진료실을 오갔던 사람들이 수두룩하다. 처음에는 그냥 흥미 위주로 접근했으나 점점 진지하게 궁금해졌다.
“황 간호사, 뭐해?”
이강유가 기지개를 켜며 진료실의 안으로 들어와 황경호한테 말을 걸었다. 황경호는 깜짝 놀라서 그를 돌아보았다.
“아, 청소하고 있어요.”
“그래?”
수술을 끝마치고 온 이강유는 피곤한지 이리저리 스트레칭을 했다. 황경호는 순간 생각했다.
‘DNA 검사가 왜 필요해? 어차피 진료실에선 선생님이 환자 보는데 선생님한테 물어보면 되지.’
그렇게 생각하고 물어보려고 하는데 어쩐지 물어보기가 애매한 기분이었다.
‘다음 주에 또 나오면 그때 물어보자.’
황경호는 휴지통을 들고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그다음 주 금요일이 되자 내부 프론트에 앉아 진료실을 오가는 사람들을 은근히 유심하게 지켜보았다. 그리고 한 사람이 진료실에 들어갔다 나오면 얼른 진료실로 들어가서 휴지통을 확인하고 나왔다.
“너 왜 계속 왔다 갔다 해?”
이강유도 이상한지 물었다. 황경호가 살살 웃으며 답했다.
“아니…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리고 다시 나왔다. 다시 내부 프론트에 앉았다.
‘귀신이 곡할 노릇이네….’
아무리 이 병원이랑 거시기랑 아주 밀접한 관계에 있는 곳이고 콘돔도 거시기랑 거시기한 사이이지만 그렇다고 콘돔이 병원이랑 밀접한 관계에 있는 물건이라고는 생각하기 힘든데 말이다. 그것도 이강유 선생님이 직접 진료하는 진료실에서….
“안녕하세요, 유태범 환자님.”
황경호는 오랜 단골이 병원으로 들어오자 웃으면서 반겼다.
유태범은 황경호와 비슷한 나이 또래에 조루로 고생하고 있는 심약한 청년이었다. 이강유 선생님의 말에 따르자면 그는 학계에도 보고가 안 됐을 정도로 심각한 조루증과 민감증을 앓고 있는 환자라고 했다. 아이돌처럼 귀여운 외모에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범죄적 인기를 끌고 있는 괴상한 사람이었다.
그를 좋아하는 같은 학교 동기가 성기와 고환이 파열되어 이강유 비뇨기과로 실려와 그 집 부모까지 출동해 병원을 개판으로 만든 적도 있었다. 그의 무시무시한 여자친구가 그에게 집적거리는 모든 사람들(남자, 여자, 소년, 소녀, 아저씨, 아줌마 등)을 무쌍으로 퇴치하고 있었다.
황경호는 으레 그렇듯 환자들에게 측은한 마음을 가졌지만, 유달리 더 측은지심을 가지며 그를 진료실로 안내했다.
“바로 들어가시면 돼요.”
“아, 네…. 감사합니다.”
그는 꾸벅 황경호한테 인사를 하고 진료실로 들어갔다. 황경호는 처음 내원하는 환자의 상담업무를 마치고 30분쯤 뒤 내부 프론트로 복귀했다. 금방 상담한 환자를 다른 간호사에게 인계하고 있으니 유태범이 풀이 죽은 건지, 기운이 빠진 건지 지쳐서 나가고 있었다.
“아, 이제 가세요?”
황경호는 웃으면서 그에게 말을 걸었다.
“네? 아, 네….”
그는 힘없이 대답했지만 그래도 예의를 다해 행동했다. 황경호는 그를 문까지 안내해주면서 생각했다.
‘아니, 도대체 애한테 무슨 치료를 하길래 애가 진료실만 들어갔다 나오면 얼굴이 반쪽이 돼서 나오는 거야?’
황경호는 순수하게 그런 의문을 가지며 그를 배웅했다.
“살펴가세요.”
그리고 황경호는 습관적으로 다시 진료실에 들어갔다. 그리고 휴지통을 확인했다.
“어, 있다….”
황경호는 헉하고 휴지통 안을 쳐다보았다.
“경호야, 적당히 해라. 쓰레기통에다 먹을 거 숨겨 놨냐.”
이강유가 커피를 후루룩 마시며 황경호에게 핀잔을 놓았다.
“아, 아뇨. 네…. 네? 네….”
황경호는 완전 당황해서 말을 더듬었다.
‘아니…. 뭐지? 왜지? 뭐지?’
유태범이 들어가기 전까지 없었던 게, 나가고 나니 있다. 황경호는 진료실 밖으로 나오며 곰곰이 생각을 했다.
이강유 비뇨기과에서 가장 눈에 띄는 환자 한 명을 꼽으라면 당연히 강동현이었다.
그는 1년이 넘게 이 병원에 다니고 있으면서도 항상 선글라스, 안경, 마스크, 모자까지 풀착용을 하고 방문했다. 그러고 신문으로 상체의 대부분을 가린 채 카우치에 앉아 있으면 간혹 호기심 많은 환자들이 혹시 연예인 아니냐고 물어본다. 애초에 그의 외모는 가린다고 다 가려지는 게 아니었기 때문에 그냥 다들 필사로 모르는 척을 해주고 있었다.
그리고 두 번째는 바로 이 유태범 환자였다. 그는 좋은 대학교를 졸업하고 동 대학 대학원을 다니고 있는 학생이었는데 황경호보다도 동안이라 진짜 소년 같이 보이는 청년이었다. 소심하고 심약하고 항상 주눅이 들어있는 그였지만, 괴상할 정도로 인기가 좋았다.
그 ‘인기’라는 것이 흡사 불을 향해 달려드는 불나방 같은 것이라, 그에게 빠진 수많은 여자와 남자들이 범죄를 불사하며 그에게 매달렸다. 그에게 약을 먹이거나 감금하기도 부지기수다. 이 환자 때문에 경찰서를 들락날락한 인원만 해도… 그는 지하철에 타면 항상 성추행을 당했고 스토킹은 일상이나 다름이 없었다. 게다가 조루에 민감증을 앓고 있어 스토커들이나 성추행범한테 저항도 못하고 고스란히 당하는 걸 이강유가 구해준 적도 수두룩하다고 했다. 하지만 본인에게는 너무 일상이라 익숙하게 넘어가는 대범(?)함을 보이곤 했다.
황경호도 볼 때마다 참 묘하게 사람의 눈길을 끌어 이상하게 말을 걸고 싶은 환자라고 생각은 했지만, 그에게 엮여 이강유가 고생을 하는 것을 보며 은근히 선을 그어야 되겠다고도 생각하고 있었다. 애초에 황경호는 강동현만으로도 벅찼기 때문이다.
황경호는 그렇게 곰곰이 환자의 신상에 대해서 떠올려 보다가 머리를 스치는 깨달음에 숨을 크게 들이켰다.
“헉!!”
황경호는 기분상 이강유가 있을 것으로 예상되는 곳으로 고개를 홱 돌렸다.
‘선생님까지???’
유태범, 그 심약한 청년이 결국 우리 선생님까지도 마성의 구렁텅이로 빠뜨렸다는 말인가!
*
“다들 뭐해?”
이강유가 말을 걸자 병원 식구 일동, 화들짝 놀라더니 어색한 얼굴로 그에게 인사를 하고 뿔뿔이 흩어졌다.
“뭐야?”
이강유가 사람들을 돌아보며 물었다. 황경호는 뭔가 화도 난 것 같고, 실망도 한 것 같고, 찔리기도 한 것 같은 기분으로 대답했다.
“글쎄요….”
이강유는 별달리 신경 쓰지 않고 그대로 진료실로 들어가며 말했다.
“지금 시간이 몇 신데. 일해, 일.”
“……..”
휘하 간호사가 ‘아무리 세상이 그런 거라지만 선생님마저!’라는 얼굴로 자신을 쳐다보는 것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대단한 비뇨기과 의사 이강유(35)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자신의 오피스로 들어갔다. 황경호는 그런 그의 뒷모습을 경계심 가득한 눈으로 쳐다보며 내부 프론트로 돌아왔다.
“오빠, 오빠. 그럼 쌤, 여자도 노리는 거 아냐? 아니면 남자만 온리?”
정기연이 은근슬쩍 다가오더니 그렇게 물었다.
“야, 우리 쌤이 여자를 얼마나 좋아하는데. 그래도 병원 식구들은……. 환자한테만 그러는 걸까? 나 진짜 멘붕이다. 나 정말 다른 사람은 몰라도 우리 쌤 진짜… 존경했는데.”
황경호가 좌절 모드로 프론트 데스크에 엎드려 우울하게 중얼거렸다.
“하긴…. 유태범 환자 엄청 소심하고 그런 거 다른 사람들한테 잘 못 말할 것 같이 생기긴 했어, 그지? 그러니까 건드린 건가? 다른 놈들도 다 그래서 그러는 거 아냐.”
정기연이 말했다.
“모르겠다…. 근데 우리 쌤이 진짜 그런 사람이었어? 아니, 그래도 말이야. 우리 쌤이 그럴 사람은….”
황경호는 정말 충격이 커서 횡설수설을 했다.
황경호는 정말 이강유를 좋아했다. 그러니까, 정말로 말이다. 그와 개인적으로 친한 것도 아니었다. 그를 잘 안다고 감히 말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황경호는 그를 믿고 있었다. 좋은 사람이라고 말이다. 그는 다른 사람들을 아주 편안하게 배려했고, 황경호가 정말로 옆에서 마음 편히 있을 수 있는 몇 안 되는 사람들 중에 하나였다. 아니, 그렇게 마음으로부터 좋아하는 사람은 그밖에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열심히 살고 멋있고… 언제나 닮고 싶은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가 황경호가 제일 싫어하는 강동현 같은 짓을 환자한테 하고 있었다니….
‘선생님… 진짜 아무리 믿을 사람 아무도 없다지만… 선생님까지.’
뭔가… 삶의 큰 잣대 하나가 없어진 것 같은 느낌이었다. 이강유 같은 사람마저도 이런다면 이 세상에 제대로 된 사람이란 한 명도 없는 게 아닐까. 황경호는 여지없이 우울해졌다. 우울이 땅을 파고 들어갔다. 정기연이 말했다.
“그나저나 오빠도 조심해.”
“왜….”
황경호가 좌절 모드에서 고개만 들어 그녀를 보았다.
“요즘에 남자들도 그런 거 얼마나 많이 당하는데. 오빠도 은근히 그런 거 당해도 다른 사람들한테 말 못 할 것 같은 스타일이야.”
“…….”
“뭘 그렇게 봐?”
정기연은 무심하게 그렇게 말하곤 자신의 벗겨진 손톱을 발견하고 후후 불었다. 황경호는 정말 뜨끔해서 고개를 돌려버리고 말았다. 정기연이 말을 이었다.
“그래도 유태범 환자 진짜 불쌍하다… 저번에 그… 고환 터져서 온 대학생도 유태범 환자한테 집적거리다가 유태범 환자 여자친구한테 직싸게 털린 거라며? 우리가 신고까지야 할 수는 없는 거라도… 일단 그런 짓은 안 당하게 해주고 싶은데.”
정기연이 그렇게 말했다. 아무래도 직장이니까 직원들이 나서서 원장을 고소하라고 종용하는 건 너무 무리하는 것 같지만, 그래도 그런 파렴치한(?) 짓을 당하는 환자를 알면서도 그대로 내버려 둘 수도 없는 것이다. 원만하게 해결이 되면서도(?) 병원에 피해를 주지 않으려면 역시….
“그 유태범 환자 여자친구한테 연락이라도 살짝 해볼까?”
정기연이 해결책 하나를 제시했다.
“내가 그 불알 터진 환자 케어했는데 말이야…. 조금이라도 선생님을 위하는 마음이 남아있다면 그래도 경찰에 신고하는 걸 추천한다….”
황경호는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며 소문은 2명에서 4명으로, 4명에서 8명으로 퍼져나갔다. 그렇게 돌아오는 금요일까지 이강유를 제외한 모든 병원 식구들이 이강유의 후안무치한 음행(?)을 알게 되었을 때 드디어 간호사 일동은 불쌍한 환자를 구하기 위해 팔을 걷어붙였다.
“유태범 환자님 힘내세요!”
“언제든지 힘든 일 있으면 저희한테 말씀해주세요!”
환자를 위하는 마음만큼은 세계 최고라고 자부해도 좋을 이강유 비뇨기과 직원 일동이었다. 유태범은 요상하게 응원을 하는 병원 간호사들을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보며 인사를 했다. 그리고 진료실을 들어갔다가 한 30분 뒤 맥이 빠져나왔을 때 황경호가 그의 앞에 섰다.
“유태범 환자님….”
그는 얼굴이 붉고 눈빛이 촉촉한 것이 난감하고 난처하고 울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황경호는 어쩐지 마음이 찌르르 아파왔다. 황경호는 그가 저런 얼굴을 왜 하는지 알고 있었다.
‘부끄럽다고…!’
이쪽이 잘못하는 것도 아닌데 부끄럽고 창피했다. 이건 그런 일이란 말이다. 사람을 수치스럽게 만들고, 죽고 싶게 만든다. 정말 이런 짓을 하는 놈들은 평생 거기를 못 쓰게 만들어버려야 한다. 황경호가 강동현에게 그런 일을 당했기 때문에, 혹은 이강유를 믿고 있었기 때문에 이렇게 화가 나는 것이 아니다. 정말로, 정말로 이건…!
“괜찮으세요?”
황경호는 침착하게 마음을 누르고 유태범을 살폈다.
“아… 네? 네…. 네….”
유태범은 눈도 제대로 마주치지 못했다. 황경호는 이강유가 있을 것으로 예상되는 진료실을 노려보았다.
‘정말 이 선생님이…!!’
그리고는 유태범을 다시 살피고 자신의 일인 마냥 그를 부축하며 잠깐 병원 밖으로 나왔다.
“아, 정말…. 등잔 밑이 어둡고 그런 거라지만 정말… 유태범 씨, 정말 힘드시면 말씀하셔도 돼요. 제가, 저희가 정말 힘이 되어 드릴게요.”
황경호가 유태범의 오른손을 두 손으로 꽉 쥐며 이글이글한 눈빛으로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러자 오히려 유태범은 얼굴이 펑 터질 것 같이 빨개지더니 고개를 저었다.
유태범은 심각한 조루와 민감증으로 이강유 비뇨기과에 오랫동안 내원하고 있는 환자였다. 예전에는 일상생활도 불가능할 정도로 느껴서 시도 때도 없이 서거나 사정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그러니까, 아주 평범한 일상에서 말이다.
게다가 그는 처음 이강유에게 검사를 받을 때부터 약간의 터치에도 참지 못하고 사정을 하여 이강유의 얼굴을 더럽(?)히기까지 했다. 무시무시하게도 그때 한 번뿐만이 아니었다. 그가 치료를 할 때도, 그가 자신을 위기에서 구해줄 때도, 그가 자상하게 그저 말을 걸 뿐이더라도…. 항상 안면 분사를 하고 말았다. 하지만 인격자인 의사 선생님께선 항상 그의 실수를 관대하게 용서해주시곤 하셨지만, 오늘도 또 그러고(?) 만 것이다.
[인생이란 역시 방심해선 안 된다는 걸 유태범 씨한테 이렇게 배우네요.]
이렇게 이강유는 항상 유태범에게 상냥했다. 그가 이렇게 나약하고 손 쓸 수도 도리도 없는, 말도 안 되는 몸을 가지고 있어도 말이다. 지금까지 그에게 엄청난 피해를 끼쳤는데도 말이다. 그를 좋아한다는 사람이나 그의 가족들이 병원까지 찾아와서 난장을 피우더라도 이강유는 항상 유태범의 잘못이 아니라고 했다.
이강유는 항상 그랬다. 그는 다른 사람들처럼 유태범이 이상하다고 말하지 않았다. 유태범의 잘못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잘못이라고 말했다. 그렇게 말해주는 그가 너무 대단해서, 멋져서… 잠깐 그의 맨손이 아랫배를 스쳤다는 이유로 바로 그의 얼굴에다 사정을 해버리고만 유태범은 그냥 스스로 땅을 파고 들어가서 누워 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걸 막기 위한 콘돔이었는데 그걸 벗겨주는 손길에 또 안면 분사….
“아, 아니에요…. 저, 저보다 선생님이 훨씬… 힘드실 거예요.”
유태범이 그렇게 말하자 내막을 모르는 황경호는 완전 더 열불이 터져서 속으로 씩씩대었다. 황경호 본인도 비슷하게 항상 자신이 잘못한 것이 있다고 생각했었기 때문인지 더 화가 났다. 원래 자신의 일보다 자신이랑 비슷한 일을 당한 사람을 보면 훨씬 쉽게 화가 나는 법이다. 황경호는 이강유를 정말 좋아했는데도, 좋아했기 때문에 곧바로 욕이 나오기 시작했다.
“저 파렴치한 악덕 의사…!”
황경호는 정말 눈에서 불이라도 나올 것 같이 진료실을 노려보고는 다시 유태범을 보았다.
“저 정말 증인대에도 설 수 있어요. 정말이에요. 이런 건 진짜 콩밥 먹을 일이라구요!”
황경호는 마치 자신이 그런 일을 당한 것마냥 한 마디, 한 마디 강조해서 말했다. 유태범은 계속 고개를 저었다.
“분명히 선생님은 저 고소하지도 않으실 거예요… 이런 거… 한심하니까요….”
유태범은 황경호의 말을 아예 다르게 알아먹었다. 아마도 이강유가 유태범의 한심한 몸에 대해서 다른 사람들한테 말한 게 분명하다고. 그게… 그러지 않을 도리가 없으니까. 치료를 하러 올 때마다 의사의 얼굴에다 싸는 환자라니. 그 어떤 비뇨기과 환자 중에도 이 정도로 심각하고 말도 안 되는 케이스는 없을 것이다. 유태범이 고개를 푹 숙이자 황경호가 더 흥분해서 그의 양어깨를 단단히 잡았다.
“한심하다고 생각하시면 안 돼요! 피해자가 왜 죄책감을 가져요! 진짜 아구창이라도 한 대 날려요! 그러면 기분이 진짜 조금 괜찮아지는데! 지금이라도 갈까요?”
“이강유 선생님은 정말 착하셔서… 흑, 저도 제가 잘못했다고 생각해요….”
“우는소리 하지 마세요! 그러다가 더 당해요! 그런 놈들은 초장에 콱 잘라버려야 한다니까요!”
“흑…. 저 그래야 할까요?”
*
믿고 있는 사람한테 배신을 당하는 것은 마음이 아프다. 사람뿐만이 아니다. 믿고 있는 것, 그 모든 것들은 배신의 순간 사람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 그게 연인일 수도 있고, 부모일 수도 있고, 형제일 수도 있고, 친구일 수도 있다.
믿는다는 것은, 믿을 수 있다는 것은 기대를 할 수 있다는 말이었다. 어떤 것에 대해 예측을 할 수 있을 만큼 항상성이 있다는 말이었다. 일관성이 있다는 말이다. 이 사람에겐 이런 말을 해도 문제가 없을 거야, 혹은 어떤 해결책을 줄 수 있을 거야. 이 사람은 좋은 사람이야, 그러니까 믿을 수 있어. 이런 종류의 믿음은 배신당하는 순간, 그가 자신에게 그 어떤 도의적 책임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마음이 굉장히 상한다.
아직 세콤을 해제하지 않은 청담빌딩의 5층. 황경호는 엘리베이터에서 나오자마자 보이는 자동문 앞에 가만히 서있었다. 그리고 곧 다른 엘리베이터를 통해 올라온 사람이 내렸다.
“경호야, 일찍 왔네.”
이강유가 꽤 일찍 출근을 했다. 습관처럼 머리를 쓰다듬어주는데 황경호는 그 손을 홱 피했다.
믿을 수 없게도, 황경호는 이강유에게 배신을 당해 마음을 상한 것이 강동현이 지금껏 해왔던 몇몇 짓들보다도 훨씬 마음이 상해서 도저히 표정을 관리할 수가 없게 되었다. 황경호는 자신이 이만큼이나 이강유를 좋아했거나, 믿고 있었다는 자각도 없었다. 그냥 다른 사람들처럼 ‘아, 그 인간도 결국 그 정도의 인간이구나’라고 체념하고 넘어갈 수가 없었다.
이강유는, 이강유이지 않은가.
그는 성공한 남자고, 자상하고 배려심이 깊은 남자였다. 언제나 다른 사람을 먼저 생각하고 손해를 보더라도 참는…. 인격적으로 성숙하고 착하고 거기에 능력까지 있는, 정말로 드문 사람이란 말이다. 믿을 수 있고, 존경할 수 있는 사람이었단 말이다.
황경호에게는 유일하게 그럴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가 그저 자신을 직원으로만 생각하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황경호 본인이 그에게 어떤 기대도 강요할 수 없다는 것도 알았다. 그런데도 마음이 너무나 상했다. 그런 자신이 이상하다는 걸 자각하고 있을 정도로. 그런데도 태도를 바로 할 수가 없다. 이강유가 이상하다는 듯이 돌아보자 대답도 하지 않고 유리문에 붙어있는 종이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죽어라, 돌팔이 의사!>
이강유는 그것을 보고 꽤 충격을 받은 얼굴로 그 종이를 뜯었다.
“내가 돌팔이란 소리를 들을 만한 짓을 했던가….”
이강유가 그렇게 중얼거리자 황경호는 대놓고 흥, 하고 콧방귀를 꼈다.
“김철식 씨 어머니 아니에요?”
유태범에게 집적거렸다가 그의 여자친구에 의하여 고자가 되어 감옥까지 간 유태범의 대학 동기 김철식을 언급하자 이강유가 치를 떨었다. 그 사건은 삼재를 겪고 있는 이강유의 첫 번째 클라이막스였다.
“일단 경찰에 신고해야 하나….”
황경호가 세콤을 해제하고 병원 안으로 들어가자 거기를 따라 들어가면서 이강유가 그렇게 중얼거렸지만 그는 그냥 그 종이를 내부 카운터에 두고는 진료실로 들어갔다.
그러나,
[죽어!]
[그 사람한테서 손 떼!]
[죽어버려, 이 돌팔이 새끼야!]
[죽어라, 야 이 @&%#!]
[계속 내 말 무시하면 불 지를 거야!]
“얼씨구. 가지가지 하네. 거, 의사 양반. 무슨 원한 샀어?”
토요일 오후 다섯 시. 이미 병원 문을 닫을 시간을 두 시간을 넘긴 시점이었다. 이강유는 환자 대기실에 있는 럭셔리한 카우치에 앉아 다른 간호사들의 간호 아래 차가운 수건을 얼굴에 덮고 있었다. 황경호는 이미 앞선 사건들 때문에, 또 개인적으로 이덕재의 일이 있었던 덕분에 강 형사랑은 구면이었다. 황경호는 전의 일은 전혀 없었던 사람처럼 그저 난처한 미소만 지으며 대신 대답했다.
“아뇨…. 있어 봤자 포경 수술한 초등학생들 정도랄까요….”
그가 앞서 있었던 일들을 병원 식구들에게 말하진 않겠지만…. 껄끄럽다. 강 형사가 픽 웃으며 대꾸했다.
“이 짓도 경찰 못지않게 더럽구먼.”
그 어린애들이 어른들도 안 하는 짓을 저지르는 걸 보면 참 세상이 말세긴 말세다. 강 형사는 가지각색으로 알록달록 꾸며져 있는 협박서들을 쳐다보았다.
“이게 전부입니까?”
이미 강 형사와 면식이 있는 이강유나 황경호는 알고 있었지만, 다른 사람들은 이 강철중이라는 사람이 진짜 경찰인지 조폭인지 헷갈리는 모양이었다. 그의 옆에는 딱 봐도 <올해 합격했습니다!>라고 얼굴에 붙여놓은 청년 하나가 들뜬 얼굴로 서있었다. 조 간호사는 어쩔 줄 모르는 얼굴로 부연설명을 해주었다.
“이게 제일 처음 온 건데요, 저저번 주 목요일 날 왔어요. 그리고 그다음 날 이게 오고, 그다음엔….”
조한나가 순서대로 협박장을 늘어놓았다. 미리 포스트잇으로 꼼꼼하게 표시를 해두었다. 오히려 이 조막만 한 병아리 형사보다 이 간호사가 훨씬 나은 것 같다. 강철중이 그 협박장들을 보고 있자 조한나가 약간 불안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떡하죠, 형사님? 저희 선생님 어떻게 되시는 건 아니겠죠?”
아무리 그래도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그 선생님이 환자에게 파렴치한 짓을 하는 악덕 의사라는 사실(?)을 잊은 채 조한나는 울먹이는 얼굴로 강 형사와 신입 형사를 번갈아 돌아보았다. 그 청순한 모습이 심히 남성들의 가슴을 울리는지라 신입 경찰은 귀를 붉히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거, 걱정 마십쇼, 한나 씨! 다 괜찮으실 겁니다! 우리 반장님으로 말씀드릴 것 같으면…! 아얏!”
“야, 이 자식아, 아직 똥오줌도 못 가리는 게 어디서 큰 소리야? 조용히 안 해?”
“아, 진짜, 반장님… 다른 사람들 앞에서….”
강 형사는 말대꾸를 하는 신입 형사의 머리를 수첩으로 경쾌하게 더 쳐서 입을 다물게 했다.
“그렇게 오래됐는데 왜 얼른 신고 안 하셨어요?”
황경호는 에휴, 한숨을 쉬었다. 그렇다. 지금까지 협박장을 무시하던 이강유가 신고를 한 이유는….
“아니… 확실히 의사가 돈을 많이 벌긴 벌어, 그치?”
“그러네요. 경찰 월급 가지곤 꿈도 못 꾸는 건데요, 저거.”
강 형사도 꽤나 감명을 받은 모양이었다. 이강유는 안내를 하면서도 차마 제 눈으로 보진 못하겠는지 다른 쪽으로 얼굴을 돌리고 있었다. 그렇게 시선이야 피할 수 있겠지만 후각까지 그럴 순 없다. 멀찍이 떨어져 있는데도 냄새가 진동을 했다.
“저희 선생님이 엄청 큰맘 먹고 산 찬데요. 얼마 전에도 아는 분이 한 번 긁었던 거 겨우 수리하고… 이번에 세차도 막 한 건데…!”
황경호는 악덕 의사(?)로 밝혀진 이강유에게 굉장히 실망하여 요새 무언의 시위 중이었지만, 이번만큼은 이강유의 편에 오롯이 서있었다. 누가 뭐라고 해도 차는 잘못이 없었기 때문이다. 황경호는 요새 차에 대한 심미안이 높아져서 저렇게 좋은 차가 이런 수모를 겪는 것을 용서할 수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강유의 애마 B사의 S클래스가 아까 형사님께서 하셨던 저속한 표현의 주체들로 빈틈없이 뒤덮여 있었기 때문이다. 이강유가 퇴근을 하려다가 발견하고는 거의 기절할 뻔했다. 이강유는 헬쑥한 얼굴로 다시금 형사들을 바라보았다.
“일단 손 안 대고 그대로 둔 겁니다. 한번 보셔야 하지 않을까 해서…. DNA 검사라도 해서 저 협박범은 기필코 잡아 주셨으면 합니다.”
기본적으로 어느 정도 손해 보고 사는 게 습관이 되어버린 이강유였지만, 역시 남자에겐 절대 건드려선 안 될 역린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엄마, 애인, 그리고 차인 것이다. 이강유는 분뇨로 죽어라! 라고 크게 적혀 있는 자신의 차를 보고 이 새끼는 세상이 끝나더라도 잡아 족쳐야 되겠다는 아주 인간적인 다짐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곧바로 병원으로 다시 올라와서 드러눕는 동시에 일전의 사건으로 신세를 진 바 있는 강 형사에게 연락을 한 것이었다.
강 형사는 이 멀쑥한 의사가 또 웃기지도 않는 일을 당해 얼굴이 반쪽이 된 것을 보고 혀를 끌끌 찼다.
“거, 올해 조심해야겠어. 삼재 아냐, 삼재?”
“진짜 굿이라도 한 번 할까 봐요….”
다시금 참변을 목격하자 잠깐 추슬렀던 멘탈이 나가는지 이강유는 멍청하게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렇게 세상을 비관하고 있는 이강유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고 강 형사는 본연의 임무를 다하기 위하여 이쪽저쪽 사건 현장을 관찰했다. 강 형사에게 붙은 신입 형사 최동욱도 일단 사진을 몇 장 찍었다.
그리고 다시 병원으로 올라온 사람들은 사건을 차례대로 정리했다.
“저 [죽어라, 돌팔이 의사]가 6월 6일 아침에 도착했고… 보자, 자필은 아니네. 그리고 나머지들도 신문지나 잡지에서 오려서 붙인 거고… 딱히 이제까지는 물질적인 피해는 없었나 보죠?”
“선생님 차 정도….”
황경호가 말했다. 그러자 병원의 최연장자인 오희연 간호사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안경을 치켜 올렸다.
“아니요. 6월 첫째 주 목요일, 토요일, 그리고 이번 주 화목토에 병원 앞에 쓰레기를 무단으로 버리고 갔구요. 첫째 주 금요일, 둘째 주 월수금, 이번 주 월수금 아침에는 자동문에 대문짝만하게 낙서가 되어 있었어요.”
수첩을 탁 닫으면서 깐깐하게 말하는 오희연 간호사의 날카로운 눈빛에 강 형사가 감탄하여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 간호사분들이 이 쓸모없는 자식보다 훨씬 낫군요.”
“감사합니다.”
곰곰이 생각을 하다가 황경호가 손을 들었다.
“이번 봄방학 때 초등학생들 고래잡이를 많이 했는데, 역시 범인은 초딩 아닐까요?”
황경호가 꽤 설득력 있는 가설을 내밀자 병원 식구들이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포경수술은, 해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굉장히 아프다. 여전히 위생을 위해선 해야 한다는 사람들과 안 해도 된다는 사람들로 나뉘어 갑론을박 중이다. 이강유는 그래도 미래의 연인이나 부인을 위해선 하는 게 좋다는 말을 하기도 했다. 어쨌든, 그런 걸 어른들이랑 말도 제대로 안 통하는 유소년 시절에 당하니 설득이고 뭐고 아무런 소용이 없다. 가끔씩 의사를 노려보고 나가는 아이들을 생각해보면 있을 수 없는 일은 아니다.
“그러고 보면 일요일은 아무런 일도 없군요. 편지도 안 오고, 쓰레기나 낙서도 없고… 이건 어쩌면 학생이나 직장인 같이 정기적인 일을 가진 사람일 수도 있겠어. 학교나 직장을 다니면서 낙서나 쓰레기를 투척하고 편지도 두고 갈 수 있겠지.”
역시 30년씩 경찰 일을 하다 보면 명탐정 못지않은 추리력이 생기나 보다, 하고 사람들이 감탄해서 쳐다보자 강 형사는 에헴, 하고는 말을 이었다.
“하지만 이 편지!”
강 형사는 굵은 손가락으로 어떤 편지를 팟 하고 찍었다. 모든 눈들이 그 편지로 모였다.
[그 사람한테서 손 떼!]
의사와 간호사들은 심각한 얼굴을 한 강 형사를 불안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범인은 초딩이 아닐 수도 있어!”
사람들은 침을 꿀꺽 삼켰다.
“초딩이 아니라면 도대체….”
워낙에 의술이 출중한 의사다 보니, 아니, 개인적으로도 남한테 원한 사고 살 사람이 아니다 보니 다들 초딩이 아닌 범인을 제대로 상상할 수가 없는 모양이었다. 애초에 딱 하나 마음에 걸리는 인물이 있다면 유태범인데, 유태범은 스스로의 몸도 제대로 지키지 못할 정도로 심약한 몸과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가 누군가에게 해코지를 하는 건 상상할 수도 없었다. 애초에 차에 문제만 생기지 않았더라면 이 수많은 협박장들도 그냥 무시하고 지나갔을 이강유였다.
“김철식 씨 어머니라면 이런 짓을 하느니 병원을 한 번 더 엎으실 것 같고….”
오희연 간호사가 다른 후보자를 거론했다. 황경호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죠. 그분 전투력을 생각해보면…. 아, 유태범 씨 여자친구 분도 이런 시시한 짓을 하느니 차라리 우리 선생님을 고자로 만드는 게….”
김형세가 눈치도 없이 그런 말을 하자 황경호와 정기연이 동시에 그의 발을 밟았다. 다행히 이강유는 강 형사의 말을 듣고 있느라 이쪽 말은 제대로 못 들은 것 같았다.
“전에 한 번 스토커 사건을 맡은 적이 있는데….”
강 형사가 그렇게 말하자 황경호가 깜짝 놀라 그의 얼굴을 보았다. 황경호가 그의 눈을 보면서 열심히 도리질을 쳤다. 말하지 마세요! 강 형사는 황경호의 눈치를 본 것인지 만 것인지 다시 고개를 돌리더니 말을 이었다.
“왠지 그때랑 비슷한 느낌이 드네. 악질 스토커의 경우엔 당사자뿐만 아니라 의외로 관련이 없다 싶은 곳에도 피해를 주니까.”
이건 강동현이 칼을 맞은 걸 말하는 건가… 황경호는 그냥 이제 입을 다물기로 했다. 불안하다. 강철중은 계속 말을 이었다.
“여기 병원 사람들이 딱히 의심 가는 사람이 없으면 오히려 환자들을 스토킹하는 사람들일 수도 있지 않겠어?”
“스토커요? 그런 게 붙을 만한 사람은….”
이강유가 반문했다. 병원 식구들이 서로를 쳐다보았다. 머릿속에 반짝 떠오른 이름이 있었기 때문이다.
“강동현?”
*
“이거 비밀이긴 한데…. 강동현 아시죠?”
그렇게 말하자 강 형사나 최 형사나 알고 있다는 듯한 눈치로 의사를 보았다.
“그 연예인이 왜요?”
“그분이 우리 병원 환자입니다. 연예인이라는 직업과 우리 병원의 특수성상 이 말씀은 다른 데 가셔서 하시면 안 됩니다.”
고소도 불사하겠다는 의사를 확실히 표현하는 이강유였다. 강철중은 나이도 나이인지라 그럴 수도 있지, 라는 분위기였지만 최 형사는 펄쩍 뛰었다.
“아니! 강동현이 왜요? 어떤 병인데요?!”
강 형사가 곧바로 수첩으로 최 형사의 머리를 쳤다.
“씁, 이게 정신을 못 차리고. 죄송합니다. 얘가 아직 어려서…. 너도 얼른 사과 안 해?!”
“죄, 죄송합니다.”
이강유는 잠시 입을 다물었고 황경호가 한숨을 쉬며 말을 이었다.
“저도 잘은 모르지만…. 도은혁 환자님이 극성팬들이 좀 있긴 해요. 아이돌도 아닌데 사생팬도 좀 있고…. 어쨌든 도은혁 환자님이 이 병원 다니는 것만은 무슨 일이 있어도 숨기려고 하는데…. 혹시 누가 그 사실을 알아낸 걸까요? 근데 왜 우리 병원에 난리죠?”
황경호는 자기가 말하다가도 이상했는지 답을 구하듯 다른 사람들을 쳐다보았다.
“흠…. 자세한 걸 지금 다 알아낼 수는 없겠죠. 스토킹 사건도 염두에 두고 도은혁이라는 환자분과도 연락을 취해보도록 하죠. 혹시 지금 된다면 수사협조요청을 미리 좀 해주시죠? 아마 경찰 쪽에서 바로 연락을 하면 놀라실 텐데. 병원 입장도 있고….”
예전 강동현의 성질에 한 번 당한 적이 있는 강철중은 은근슬쩍 그렇게 말하며 황경호를 보았다. 다른 병원 식구들도 황경호를 보았다. 황경호는 깜짝 놀라서 쪼그라드는 목소리로 물었다.
“제가요…?”
“응? 친하잖아?”
병원 식구들은 그렇게 황경호를 쳐다보았다. 황경호는 자신의 휴대폰을 내려다보며 한숨을 푹 쉬었다.
“안 친해요….”
약간은 망설였다. 하지만 여기서 끝까지 못하겠다고 할 수도 없는 일 아닌가. 그래서 그냥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황경호는 미리미리 사정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지금 아마 촬영하러 가서 안 받을….”
[무슨 일이야?]
받았다. 황경호는 깜짝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사람들이 다 쳐다보고 있었다.
“도은혁 환자님, 저…. 지금 통화 가능하세요?”
[뭐야. 왜 이래?]
“지금 병원인데요.”
황경호는 그렇게 강조해서 말했다.
“지금 병원에 일이 좀 생겼는데 혹시… 그러니까… 일단… 형사님! 형사님이 통화하세요.”
황경호는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고, 이런 말도 그랑 하기가 싫어 얼른 전화기를 형사에게 넘겼다. 강철중은 전화를 받아 들고는 통화를 하기 시작했다.
“예…. 그, 안녕하십니까. 저 강남구경찰서 형사 강철중입니다. 전에 뵈었는데 기억나십니까.”
[아… 예. 무슨 일이십니까? 또 무슨 일 있는 겁니까?]
“아뇨. 전의 일은 아니고… 그… 여기 병원 다니신다고 들었습니다. 맞습니까?”
헉. 병원 식구들이 다들 깜짝 놀랐다. 그리고 황경호를 곧바로 쳐다보았다. 미리 이거부터 설명했어야지! 이런 눈빛이었다. 황경호는 얼른 형사한테서 다시 휴대폰을 뺐었다.
“아, 도은혁 환자님. 이게 지금… 누구 스토커로 추정되는 사람이 저희 병원에 테러를 하고 있는데 심중에 짚이는 사람이 없어서요. 혹시 도은혁 환자님 쪽에는 스토커 같은 사람들이 좀 있지 않을까 하고 말씀을 드렸다가…. 지금 수사를 하려고 하고 있는데, 경황이 없어서 미리 양해 구하지 못한 점 죄송합니다. 그러니까…….”
[…알았어. 무슨 말인지 알겠으니까 다시 형사 바꿔.]
강동현은 한숨을 쉬며 그렇게 대꾸했다. 전화기를 다시 형사에게 주며 황경호도 한숨을 쉬었다.
‘아, 정말 싫다….’
죽어도 이 인간한테 책 잡히고 싶지 않은데 완전 대형 책을 잡혔다. 그가 일반인인 것도 아니고, 비뇨기과에 다닌다는 사실을 양해도 구하지 않고 다른 사람한테 밝히다니…. 나중에 잘못되면 소송감이다. 병원 식구들도 아차, 하여 서로의 눈을 쳐다보았다.
“예…. 예…. 아, 그런 건 아니고 일단은 병원에 지속적으로 피해가 생기고 있는데…. 예. 일단 여기 의사 선생님부터 해서 다 탐문 수사를 할 건데, 아무래도 도은혁 씨가 연예인이고 하시니 이런 극성팬들도 있을 것 같아서. 네. 네. 그래서 그렇습니다. 예. 예, 아, 당연하죠. 그런 건 저희도 큰일 납니다. 네. 예. 그럼 다시 한번 연락 드리겠습니다.”
그러고 강 형사는 휴대폰을 황경호에게 돌려주었다. 그리고 이강유를 보며 말했다.
“수사에는 협조해 주시겠답니다. 그럼 일단 의사 양반을 노린 게 거의 확실하고 내용을 보니 의사 양반이 담당한 환자나 환자 주변이 하는 짓이라고 봐도 무방할 것 같으니까 일단 대체적으로 짐작 가는 부분부터 얘기를 좀 해봅시다.”
“네… 일단은….”
그렇게 강철중이랑 이강유랑 이야기를 하기 시작하고 황경호는 다시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야….]
“진짜 죄송합니다… 이런 거 절대 밖에다 얘기 안 하는데 저희도 진짜 경황이 없어서….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황경호는 너무나 짜증이 나고 이 상황이 화가 났지만, 기본적으로 황경호는 서비스직에 종사하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이건 진짜 고소라도 당할 수 있는 건이다. 황경호는 창피하고 화가 나서(스스로에게도, 그리고 왠지 상대에게도) 얼굴이 빨개졌지만 얼른 사과를 했다. 그러지 않으면 보통 이런 일은 삽시간에 커져서 손 쓸 수가 없게 된다.
[…….됐어. 너무 그렇게 안 해도 돼.]
강동현은 누그러진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황경호는 그 말을 믿지 않았다.
“그래도….”
[됐다니까.]
저쪽에서 한숨을 쉬는 소리가 들렸다.
“……..”
[……..]
잠깐 주변의 소란을 뒤로하고 둘 사이로 정적이 찾아왔다. 황경호는 주변의 눈치를 보다가 살짝 자리를 옮겼다.
[나 이제 서울 왔다.]
“아, 네….”
[안 그래도 지금 병원 가는 중이었는데. 잠깐 보자.]
“…….”
[저번 한 번이 끝이야?]
은근한 기대가 느껴지는 말투에 황경호는 인상을 조금 썼다. 얼굴을 한 대 치는 것 정도로 꼬리를 말 인간은 아니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오히려 이렇게 기대하듯이 말을 해오니 기분이 좀 나빠졌다.
“만나기 싫어요.”
[오랜만에 보는 거니까 키스 정도는 하고 싶은데.]
기대 정도가 아니다. 대놓고 이런다. 황경호는 기분이 확 상했다. 정말 이런 놈들은 상대의 기분 같은 건 안중에도 없는 걸까. 강동현도 이강유도 성공한 남자라서 그런 것일까. 자기들 정도 되면 상대가 어떤 생각을 하든 상관없이 뭐든 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드는 걸까. 미안해하던 것도, 잘못했다고 말하는 것도 결국엔 또 어떻게든 쉽게 하기 위해 부린 수작이라는 걸 왜 이렇게 대놓고 티를 내는 걸까. 황경호가 정말 아무것도 느끼지 못할 거라 생각하는 걸까.
“너도 참 대단하다…. 그렇게까지 하고 싶으면….”
맘대로 하고 꺼지라고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또 황경호의 기분을 신경 쓰는 척, 잘해주는 척 그렇게 하던 강동현이었다. 이딴 남자 하나 거지 같은 건, 그래 그럴 수도 있었다. 세상엔 그런 놈이 셀 수도 없이 많으니까. 황경호는 얼굴이 빨개져서 고개를 푹 숙이고 진료실을 나오던 유태범이 생각났다. 항상 습관적으로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이강유도. 그가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게 정말 기분이 좋았다.
토할 것 같다. 화가 난다…. 황경호가 입을 열었다.
“가족들한테 발기부전이라고 말해요. 그러면 만나요.”
[…뭐?]
“가족들한테 그쪽 발기부전 걸렸다고 밝히라구요.”
*
“…….”
저번에 그런 식으로라도 입을 맞추게 해주었으니, 사실 좀 방심한 건 맞았다. 하지만 3주만에 보는 거라 정말 얼굴을 보고 싶었다. 굳이 입을 맞추지 않더라도 말이다. 어차피 서로 연락을 하고 그러는 사이는 아니라서 목소리도 오랜만이었다. 금방 황경호가 크게 실수한 것도 봐주었고 분위기가 조금은 괜찮은 것 같았다. 그래서 저도 모르게 자연스럽게 말이 나간 것뿐이다. 딱히 화가 날 내용도 아닌 것 같다. 근데 저쪽은 곧바로 화가 났다. 강동현은 정말 알 수가 없었다. 왜 이렇게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화를 내는가.
“자, 잠깐만. 왜 갑자기 그렇게 되는데? 전에는 얼굴 치고 키스는 하게 해줬잖아. 근데 이제 그런 걸 해야지 만날 수 있다고?”
강동현은 황경호의 말의 내용이 너무 당황스러워서 조건을 따지듯 말하게 되었다. 실책이었다.
[왜요? 그게 무슨 문제에요?]
저쪽은 더 말투가 딱딱해졌다. 강동현은 아차, 하고 입을 다물었다. 저번에 그런 식으로 키스하게 해준 것도 사실 화가 나서, 한 방 먹이고 싶어서 그런 거지 강동현이 예뻐서 그렇게 해준 게 아니었다. 그런데 3주만에 서울에 와서 그의 얼굴을 볼 생각을 하다 보니 ‘기대’ 쪽만 방대하게 커졌다. 방심한 것이다. 강동현은 한숨을 쉬며 언성을 낮추었다.
“화 좀 풀어, 진짜. 그런 거 한다고 기분 풀리는 것도 아니잖아.”
[풀려요. 엄청 풀려요. 안 해봐서 그런가 본데 댁이 엿 먹는 거 보는 것만큼 재미있는 게 없어요.]
역시 독해졌다…. 강동현은 한숨을 또 쉬고는 말했다.
“그냥 얼굴 보고 싶은 거야…. 키스 같은 거 안 해도 돼.”
[전 보기 싫어요.]
“…….”
강동현이 자위를 하는 걸 보여줄 때마다 이 간호사가 자신을 쳐다보는 눈빛을 떠올렸다. 간혹 자연스럽게 키스를 받아들일 때도. 그리고 전에 모텔에서 입을 맞추어 줄 때도….
‘너도 날 원하고 있잖아.’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이만큼이나 사과를 하고 이만큼이나 성질을 맞춰줬으면 이제 좀 풀려도 되는 거 아닌가. 게다가 이런 바보 같은 짓 말고 차라리 강동현한테서 가치 있는 것을 뜯어가는 게 더 본인에게도 좋은 것 아닌가. 집이나 차나 돈이나.
얼굴을 치는 거나, 이런 바보 같은 짓을 하라는 거나 도대체 그에게 무슨 도움이 된단 말인가. 예전에도 이런 거나 시켰다. 정말 이해할 수가 없다.
“알았어….”
강동현은 화를 내고 싶은 마음을 꾹꾹 참고 그렇게 말했다.
“다른 일은 없었어? 지금 병원에서 일어난 일은 걱정해야 할 정도야? 경찰까지 왔잖아.”
[신경 꺼요.]
그리고 황경호는 전화를 끊어버렸다. 강동현은 끊어진 휴대폰 화면을 보고 한숨을 푹푹 쉬었다.
‘아, 스트레스 받아.’
흔히들 합이 맞지 않는 성격들이 있다고 하는데, 그런 건 다 개소리다. 서로 마음을 열고 이야기를 나누면 어떤 인종, 재산 혹은 성별을 가졌더라도 대화가 통하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거기에 이기심과 아집과 편견이 끼게 되면 상대방을 이해할 수가 없다. 결국엔 태도의 문제인 것이다.
강동현은 가까스로 황경호가 자신에게 너무 화가 나서 그에게 계속 복수를 하고 싶은 거지 이게 사장님이 말하는 대로 앙탈이라든가, 아니면 그에게 똑같이 성욕을 느끼고 있지만 숨기고 있는 것이라든가, 그런 식으로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무의식적으로 그런 식으로 대했던 것 같다. 생각 자체를 그렇게 깊게 하지 않으니 알아차리기가 힘들었다. 어쨌든, 그저 그의 화를 가라앉히기만 하면 다 해결될 것이라든가, 시간이 지나면 다 괜찮아질 것이라든가, 적어도 그런 단순한 생각이나 태도를 그만두기로 했다.
‘그래서…. 진짜 이런 걸 하면 걔 화가 풀리는 거냐고….’
강동현은 아주 짜증 나고 초조한 얼굴로 휴대폰을 보고 있었다. 가족 SNS 메신저 방이었다. 예전에 황경호의 요구로 홍대 앞에서 고자라고 쇼를 하고 마포대교에서 뛰어내리기까지 한 전적이 있는 남자라 금방 그냥 하고 끝내자란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역시 가족들에게 그의 병에 대해서 말하는 건 꽤 큰 고민이 필요한 일이었다.
‘아…. 엄마고 도은연이고 진짜 짜증 날 텐데….’
게다가 이걸 또 뜬금없이 말해야 한다는 것도 문제다.
‘그냥 발기부전이라고만 말하면 되는 건가? 이렇게 갑자기? 진짜? 아…. 진짜 이런 걸 왜 해야 하는 거냐고….’
그냥 하고 끝낼까 하다가도 엄청 스트레스를 받았다. 예전에 황경호가 이런 말도 안 되는 것들을 요구랍시고 해올 때마다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았는지 기억났다. 화병으로 실려 갈 정도였다. 황경호는 은근히 강동현의 약점을 잘 알았다.
‘그냥 다 때려치울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왜 굳이 별 볼 일 없는 그 간호사에게 얻어맞기나 하고 화가 나도 참아주고 비위를 맞춰주고 해야 하는가. 고작 한 번 만나보겠다고. 고작 한 번쯤 키스를 해보겠다고. 그의 어느 부분이 그렇게 가치가 있다고.
강동현은 잘난 남자고 성공한 남자였다. 모두들 그를 좋아하고 사랑했다. 그는 능력이 있었고 매력도 있었다. 그리고 황경호는 고작해야 병원에서 근무하고 있는 평범한 간호사일 뿐이었다. 사는 세계도 다르고 원래라면 만날 일도 없는 사이다.
저번 날 황경호가 그의 얼굴을 때린 대가로 키스한 것 때문에 후회와 기대를 계속 넘나들었던 것처럼 지금 이것도 회의와 욕구가 교차했다.
“하아….”
강동현은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휴대폰을 다시 보았다.
‘그냥 하자….’
예전에 정말 이 간호사가 강동현에게 아무것도 아닐 때도 이런 병신 같은 일을 했었다. 정말 안 할 생각이었더라면 아까 전화할 때 화를 참지도 않았을 것이다. 설사 할 생각이었더라도 예전에는 마구 짜증이라도 냈었다. 문득 황경호의 체념이 옮아온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둘은 서로를 설득하기보단 체념해오기를 반복하고 있는 것일까.
강동현은 며칠 동안 자신을 제외한 가족들끼리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가족 SNS 메신저 방에다 딱 한 문장을 올렸다.
<나 발기부전 걸렸어>
강동현은 이미 황경호의 병원 앞에 도착해있는 상태였다. 차를 세워놓은 채 관심이 없는 척, 하지만 끊임없이 채팅방을 확인했다. 그러다가 드디어 읽지 않은 사람의 수가 3에서 2로 바뀌었다. 강동현은 심장이 두근하였다. 누구지?
<은혁아, 그게 무슨 말이야? 응?>
엄마다… 게다가 곧바로 전화가 온다. 강동현은 목을 가다듬고 전화를 받았다.
“어. 엄마….”
[은혁아! 그게 무슨 말이야?! 어디 아파? 어?]
강동현의 엄마는 걱정이 절절 묻어나오는 음성으로 그렇게 말했다.
“아니, 큰일은 아니고… 일단 병원은 전부터 다니고 있었는데 잘 안 나아서….”
아, 스트레스…. 강동현은 엄마한테 이런 말을 하고 있어야 한다는 사실 자체에 엄청나게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다.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로 말하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그 스트레스가 어디 가겠는가.
[그게 무슨 말이야? 병원을 언제부터 다녔는데? 어? 자세히 좀 말해봐 봐!]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 아프다고 하니 엄마의 목소리에서 패닉이 묻어나온다. 강동현은 그녀를 진정시키기 위해서 한참을 땀을 뻘뻘 흘려가며 해명을 해야 했다. 그리고 일단 전화를 끊자고 하고 나니 아빠랑 누나한테 부재중 전화가 와있었다. 둘 다 그사이 확인을 한 것이다. 참담한 심정으로 그걸 보고 있는데 아버지한테서 다시 전화가 왔다. 받았다.
“아, 예. 아버지….”
[은혁아.]
아버지의 목소리는 아주 침착했다.
“네….”
[너 그… 비뇨기과 잘하는 데 아냐고 물어본 거… 엄청 옛날이잖아. 2년 전이지?]
“네….”
[설마 그때부터니?]
“네….”
[……..]
“……..”
부자의 사이로 침묵이 흘렀다.
‘아, X같다…. 그냥 때려치울 걸 그랬다.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자고…. 뭐 얼마나 섹스에 미친 섹스광이라고 가족들한테 이런 얘기나 하고 있는 거지….’
강동현은 갑자기 후회하기 시작했다. 뭐가 다 잘못된 것 같았다.
[뭐가… 아예 잘못된 거냐.]
“아뇨! 그런 건 아니고…. 스트레스 때문이라는데…. 심인성이라 호르몬이나 기능 자체가 잘못된 건 아니래요. 사실 요즘은 예전보단 괜찮아졌어요….”
아버지의 침착한 음성을 듣고 있자니 엄마가 패닉에 질려 두려워하는 것보다 어쩐지 사람이 더 작아지는 기분이다. 강동현은 핸들에 이마를 박고 아버지에게 변명을 하고 있자니 그냥 딱 죽고 싶었다.
‘아… 이래서 사람이 자살을 하고 싶은 거구나.’
강동현은 처음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 니 엄마가 너 일을 너무 많이 한다고 걱정했었는데. 너 쓰러지면서까지 일하고 할 때 말렸어야 했는데. 하….]
아버지가 갑자기 깊게 한숨을 쉬셨다.
‘아, 씨X….’
원래 욕도 잘 안 하는데 머릿속으로 쌍욕이 터져 나왔다. 강동현도 바쁘고 아버지도 바쁘신 분이셨다. 오랜만에 통화를 하는데 이런 내용이니…. 그것도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 그런 쪽으로 문제가 있다는데 어느 아버지가 한숨이 나오지 않겠는가.
[젊을 때 하고 싶은 일 마음껏 하고 싶어 하는 거 아빠가 이해하고 응원하고 그랬는데… 다 내가 잘못한 거 같다. 미안하다, 은혁아.]
“아니! 아버지, 아니에요! 아버지가 뭘 잘못해요. 아, 이상한 소리 하지 마세요.”
강동현이 깜짝 놀라서 그렇게 말했다. 아버지는 한 번 더 한숨을 쉬셨다. 강동현도 한숨을 쉬었다. 다시 부자 사이로 침묵이 흘렀다.
[…그때 말한 그 병원 진짜 괜찮은 데라고 아직도 아빠 친구가 칭찬하는 데야. 별로 효과가 없었니?]
“아뇨…. 괜찮아요. 거기가 제일 잘하는 건 맞는 건 같아요… 그냥 제가 계속 술담배도 못 끊고 일도 빡세니까….”
강동현은 변명의 기조를 잃지 못하고 그렇게 쭈그러들 듯이 말했다.
[그래…. 일단 알겠다. 그동안 혼자서 마음고생 많았겠다… 그래도 아빠한테는 얼른 말하지…. 남자들끼리 부끄러울 게 뭐가 있다고.]
어머니의 패닉이야 예상한 바였지만 아버지가 이런 식으로 나와 주실 줄은 몰랐다. 아버지가 이렇게 세심하게 말씀하시는 거 처음 들어본다.
‘아… 진짜 이건 잘못된 선택이었다….’
그냥 그때 한 번만 다른 거 하게 해달라고 했어야 했다. 아버지의 점잖은 태도는 강동현을 더 구렁텅이로 밀어 넣는 기분이었다. 쪽팔려서 죽어버릴 것 같았다.
“예. 아버지. 네… 집에 한 번 갈게요. 네. 네. 어머니 많이 충격받으신 것 같은데 아버지가 말씀 좀… 네. 네. 감사합니다. 들어가세요.”
강동현은 전화를 끊고 핸들에 이마를 쿵쿵 박았다. 이제 집은 다 갔다…. 그리고 전화가 또 온다. 강동현은 화면을 보았다. 씹을까 생각했다가 더 이상 참담할 순 없을 것 같아 그냥 자포자기해서 받았다.
“어….”
[야! 큭큭큭큭큭! 야!]
누나다. 강동현의 누나 도은연은 강동현이 전화를 받자마자 엄청나게 웃기 시작하더니 말을 잇지 못했다. 강동현은 아까의 생각을 수정했다. 언제나 더 나쁜 것은 있었다.
“아, 씨X…. 안 그래도 기분 X 같으니까 끊어.”
[건방진 새끼가 누나한테 말하는 거 봐라, 큭큭큭. 아, 근데 진짜 진짜냐? 병신~ 큭큭큭큭. 너 영지한테 왜 차였나 싶었더니 그래서 그런 거였어! 와, 씨. 내 동생이 고자라니!!]
“…….”
아, 그냥 때려치우자. 강동현은 그렇게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