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So what? (2)
“끝났어요. 일어나세요, 도은혁 환자님.”
다시 바빠졌다. 강동현은 약간 피곤한 얼굴로 잠들었다가 일어났다. 멍하니 앉아서 정리를 하고 있는 간호사의 얼굴을 보고 있었다. 병원에 오는 것도, 담배도 결국 못 끊었다.
‘그냥 다시 덮칠까….’
멍청하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성에 찰 때까지 하게 해줄 생각이었다며. 그럼 그냥 지금도 그때까지 하게 해주는 거 아냐? 참아주겠지. 잘 참으니까. 그리고 앞으론 제대로 된 곳에서 좀 상냥하게 해주면 될 거 아냐. 분명히 그 정도로도 전보다는 낫다고 생각할 거 같은데….’
그래서 그냥 손을 뻗어서 간호사의 손을 잡았다. 황경호가 화들짝 놀라서 돌아보았다.
“도은혁 환자님?”
강동현은 황경호의 손을 그대로 끌어당겨 입술을 묻었다. 부드러웠다. 간호사들은 왜 이렇게 손이 부드러운지 모르겠다. 남잔데도… 그의 냄새가 났다. 강동현이 정말 좋아하는 냄새였다. 달큰하고 뭔가 기분 좋고 유혹하는 것 같은 체취… 그대로 눈을 감고 코와 입술을 비볐다.
“도은혁 환자님!”
강동현이 눈을 번쩍 떴다. 그리고 자신이 황경호의 손을 잡고 그의 손목에 코를 파묻고 있는 걸 발견했다. 화들짝 놀라서 곧바로 경찰한테 항복을 하듯이 바로 두 손을 위로 들었다.
“미안….”
행동을 한 본인이 더 깜짝 놀라서 심장이 마구 뛰었다.
‘와, 금방 나 뭐하려고….’
얼굴을 볼 수가 없었다. 이러니까 아무것도 안 한다고 해도 병원에 오는 거 싫어한 것이다. 새삼 깨달았다.
“진짜 미안.”
“네… 먼저 나갈게요.”
황경호는 이상한 걸 보듯이 잠깐 보았다가 밖으로 빨리 나가버렸다. 평소보다 어쩐지 빠르게 느껴진다. 문득 그가 지금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지 궁금해졌다.
‘진짜 병원을 안 와야 하는 건가….’
계속 봐서 미련을 못 끊는 걸까. 눈 딱 감고 잘해줄 테니까 그의….
‘…섹파라도 되어 달라고 하면 엄청 때리겠지.’
그렇다고 연인이 되어달라고 할 것인가. 애초에 강동현부터 그 단어에 거부감이 드는데 말이다. 그리고 그러지도 않겠지만, 설사 그가 그 말에 넘어와서 연인이 되어준다고 해도, 그게 할 짓인가. 사실상 지금까지 강동현과 황경호가 한 섹스는 전부 강간이라고 해도 할 말이 없었다.
“다음 예약 때 뵐게요.”
강동현은 인사를 하며 미소를 짓는 황경호를 물끄러미 잠깐 보았다가 아무 대답 없이 밖으로 나갔다. 이제 정말 날씨가 따뜻하다. 지하로 내려가 차를 끌고 올라왔다. 요새 한창 영어를 배우고 있어서 약속 장소로 가고 있었다. 어차피 갑자기 줄인 스케줄이 갑자기 마구 채워지지는 않았다. 6월부터는 다시 좀 빡세질 것 같은데 그사이에 영어공부를 시작한 것이다. 오후 스케줄이 없는 날이면 학창시절에도 하지 않았던 공부를 하고 있었다.
선릉로를 따라 학동사거리 쪽으로 가고 있는데 문득 작은 꽃집이 하나 눈에 보였다.
‘꽃… 사준다고 했는데.’
도대체 뭘 얻으려고 작년 말부터 쭉 참아왔던 걸까? 계속 그런 식으로 관계를 지속했다면 강동현이 원하는 ‘원만한 섹스파트너’라는 관계가 될 수 있었을까?
저 성격에?
강동현이 하는 말, 행동, 그게 생각이 있어서 그렇게 얘기를 했든 아니든, 어떤 의도가 있든 아니든. 그게 어떤 걸 의미하고 있는지 언행을 하는 강동현 본인보다도 훨씬 잘 알아차리는 애였다. 강동현의 입장에선 과민반응이라고 항상 느꼈을 정도다. 강동현은 그가 자신을 필요 이상으로 나쁜 사람으로 몰아간다고 생각까지 했다. 하지만 그는 강동현이 자신을 그저 간편한 섹스 도구로 인식하고 있다는 걸 예전부터 알고 있었다. 강동현은 자기가 그런 식으로 행동하고 있다는 것조차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아니, 심지어 그래서 뭐 어쩌라고, 이런 식으로 생각했던 적도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강동현은 그런 생각들조차도 사실 다 기억하지 못했다. 그가 상처받은 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만나다 보면 어떻게든 될 거라고 생각하고 황경호와의 관계를 이어온 자신도 나이브했다. 그래, 고작 섹스 때문에 2년 가까이 괴롭힘을 당했는데. 그가 마포대교로 뛰어갔던 것 중에 몇 번은 정말로 자신 때문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면목이 없기도 하지만, 허탈하기도 했다. 그래, 좌절스럽다. 오랫동안 원해와서 그럴까. 생각해보면 섹스파트너라는 건 결국 섹스파트너일 뿐인데. 고작 그것 때문에 허탈해지는 건가. 그게 뭐라고.
‘계속 섹스파트너라고 하기 싫다… 그런데 연인도 아니야.’
가끔씩 황경호가 스스로를 몸 파는 사람인 것처럼 지칭할 때는 열불이 뻗쳤다. 심지어 저번엔 걸레라고까지 했지. 화대라는 말도 또 했다. 그런 말을 들으면 억울하고 화가 났다. 그런 거 아니고, 그렇게 취급하고 싶었던 게 아니라고 하고 싶었다. 하지만 자신이 생각해봐도 그렇게 여길만한 짓을 많이 해서 제대로 된 말은 못 하고 그냥 언짢은 기색만 팍팍 내곤 했다.
그렇다고 정말로 ‘연인’이 되고 싶은 것은 아니었다. 정말 아니었다. 사랑한다고? 좋아한다고? 사귀자고? 앞으로 잘 지내보자고? 일단 남자인 것부터 문제지만 섹스까지 했으니 그건 차치하더라도, 그래서 뭐?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런 말로 구슬려 놓고 분명히 섹스만 잔뜩 할 것이다. 차라리 섹스파트너가 맞지.
영지랑 연애할 때는 강동현이 데뷔하기 전부터 데뷔 후까지 쭉, 바빠서 자주 못 보고 헤어지자는 말이 오갈 때도, 심지어 지금도 떠올리면 사랑이라는 감정을 느꼈다. 사랑스럽고 그립고 애틋하다. 남들이 해본 것, 남들이 안 해본 것 전부 함께했다. 그녀를 떠올리면 추억. 사랑. 행복. 미래. 그런 단어들이 떠올랐다.
황경호를 생각하면 초반에 한창 서로 엿 먹이면서 싸웠던 것, 자살, 예민, 성가심, 섹스, 죄책감, 억울함, 화… 이런 단어들이 떠오른다.
계속 도돌이표다. 생각을 하면 항상 서로 안 만나는 게 좋다는 결론이 나온다. 하지만 언제나 다시 만나러 간다. 이젠 이쪽도 끝내고 싶다고 생각하는데도 어느샌가 보면 그에 대한 생각을 하고 있을 때가 많았다.
뭐라고 하면 좋은 것일까
이 마음….
*
“너… 동현이랑 또 싸웠어?”
“응?”
갑자기 김태형의 입에서 생각지도 못한 사람의 이름이 나와서 황경호는 술을 한잔하다가 고개를 들었다.
“갑자기 너 잘 지내냐고 자주 물어보더라. 그냥 너한테 물어보면 될걸.”
“아… 뭐….”
“동현이 요새 일 좀 널널해졌다고 하더니 친구들이나 일 같이하는 사람들 엄청 데려와 줘서 매상 엄청 올려줬다. 우리 가게 역대급이다, 진짜. 와, 진짜 가격 상관없이 먹더라. 내가 일본 갔을 때 사 온 거랑 해서 30만 원짜리 사케 몇 병 있는데 아무도 안 사더니 동현이가 다 땄다.”
김태형이 새삼 혀를 내둘렀다.
“하긴… 동현이 정도면 30만 원짜리가 뭐냐. 300만 원짜리 먹겠지.”
돈이라는 건 사람의 가치를 어느 정도까지 알려주는 것일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황경호에게는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이었다. 강동현이 돈이 얼마나 많든지 김태형이 훨씬 대단해 보인다. 그는 맛있는 음식을 만들 줄 알고 사람들을 편안하게 해주는 능력을 가진 사람이었다.
“형은 이 가게 청담동이나 압구정 같은 데서 했으면 훨씬 잘 됐을걸. 형 음식 맛있어서.”
“아우, 내가 그런 돈이 어디 있어.”
강동현이 그렇게 사람들을 끌고 와줘서 그런가. 그래도 예전보다는 손님이 좀 있다. 다행이다. 처음 왔을 때는 겨우 적자 면하는 수준으로 장사한다고 들었는데 물장사하는 집에서 술이 잘 팔린다면 그것보다 좋은 게 어디 있겠는가.
황경호는 휴대폰에 사진을 띄워 김태형에게 보여주며 물었다.
“형, 이건 어떻게 만드는 거야?”
“꼬막?”
“어. 어렸을 때 진짜 좋아했는데 크니까 음식 해주는 사람이 없으니까 못 먹은 지 한참 됐어.”
“이거 진짜 별로 안 어려워. 일단 삶을 때….”
김태형한테서 요리 레시피를 듣고 하나하나 세세하게 적었다. 내일 당장 마트 가서 사와야지. 요리라고는, 아니, 요리가 뭔가. 그냥 조리 정도의 수준으로 뭔가를 덥혀 먹는 것만 할 줄 알았는데 점점 요리를 할 줄 알게 되니 정말 좋았다. 맛있는 걸 먹으면 기분이 좋아진다. 김태형은 정말 요리를 잘해서 어설프게 따라 해도 엄청 맛있는 음식이 나왔다.
“형은 어떻게 이런 걸 다 알아?”
황경호가 새삼 대단하다는 듯이 말했다.
“나 고등학교도 그쪽으로 나왔고. 엄마가 가정주부였는데 음식을 진짜 잘하셨거든. 엄마한테도 많이 배웠어.”
“대단하다… 나 진짜 음식을 집에서 해 먹으니까 식비도 줄고 완전 좋아.”
무엇보다도 기분이 괜찮아지는 데 큰 일조를 한 게 요리였다. 맛있는 걸 먹으면 진짜 삶의 질이 달라진다.
“뭐든지 물어봐. 한 접시로 할 수 있는 음식 같은 거 위주로 일단 배워. 시간 많이 안 들이고 한 끼 나오니까.”
“응. 안 그래도 <냉장고가 빵빵해>도 보고 있어. 레시피 다 따라 하는 중이야.”
황경호는 세세하게 정리한 김태형의 레시피를 휴대폰 메모 어플에다가 저장했다. 이미 그런 식으로 저장한 레시피가 수두룩했다. 취미 생활이라고 해봤자 퍼즐을 맞추거나 만화책을 읽거나 하는 식의 시간 떼우기 용이 많았는데 이렇게 건설적인 취미를 가지니 정말 좋았다. 뭔가, 없던 자신이 생긴다.
“그나저나 동현이는 몸도 안 좋다면서 계속 그렇게 술 마셔도 되나? 전만큼은 안 먹는 것 같았지만….”
김태형이 중얼거렸다. 황경호는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알아서 하겠지.”
“정말 싸웠어?”
“진짜 도… 아니, 걔랑은 정말 별 사이 아니야.”
섹스까지 한 사이니 별 사이라면 별 사이일 수도 있지만, 섹스가 대수인가. 그것도 사람 나름이지. 별 사이 아니다.
이제 강동현이 나오는 작품들도 잘 보지 않았다. 모르겠다. 그렇게 찾아보고 했는데 요즘은 시들했다. 새로 작품이 나오지 않아서 그런가. 아니면 정말 이제 그 남자라면 지긋지긋해진 걸까.
이제 거의 다 끝이라고 생각하며 돌아보니 정말… 별별 일이 다 있었다. 어떻게 그렇게까지 할 수 있었을까 싶은 순간들도 많았다. 처음에는 어이도 없고 억울하고 화도 났는데, 그냥 우울했었다. 그냥 모든 감정들이 우울로 이어졌다. 강동현이 막 대하고 막말을 해서 화가 나다가도 결국엔 내가 이런 취급을 받을 만하니까 이러는 거구나, 그런 식으로 생각했다. 그렇게 우울해하다 보니 결국 강동현이 뭘 했냐는 그다지 중요하지도 않았다. 계속 죽어야 하는 이유들만 찾고 있었다. 사는 게 너무 수치스러웠다. 왜 사는지 알 수가 없었다. 자신의 삶에 어떤 가치가 있는지도 전혀 알 수가 없었다. 황경호가 가장 약했던 날들이었다.
하지만 초록이를 만나면서 산다는 것에 대해서도, 죽는다는 것에 대해서도 생각을 많이 했다. 아이가 나아가는 걸 보며 그도 치유 받는 것 같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사는 것도 여전히 수치스럽고 강동현이 멋대로 해대는 것도 결국엔 우울하고, 때때로 죽고 싶다는 생각도 많이 했지만 초록이를 보면서 힘을 냈었다. 그때는 그답지 않게 화도 많이 나고 신경질도 많이 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왜 그랬나 싶을 정도였다. 결국 그것도 황경호 나름의 반사 작용이었던 것 같다. 그때까지 스스로를 공격해왔던 것에 대한 보상….
초록이 수술도 잘 되고 주변 사람들이 정말 좋은 사람들이라서 고맙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자신만 겉돈다는 생각을 했었다. 나아진 것 같은데 더디고 만족스럽지가 못하고… 그러다가 연말, 결국 자살 충동을 이기지 못하고 달려갔을 때 강동현이 막아주었다. 상황이 다 나아지고 있는 것 같은데도 자신만 정체되어 있는 것 같아 견딜 수가 없었다. 강동현한테 화풀이를 했다. 그리고 그는 그런 걸 좋게 받아주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때 일은 후회가 많이 되었지만 결국 강동현이 병원에 오지 않게 되어 다행이라는 생각도 했었다. 몇 개월 뒤부터 다시 오기 시작해서 별 의미는 없었을지도 모르지만. 또 집적거렸지만 그전만큼 강압적이지는 않다가 또… 그리고 초록이가 입양을 가고, 너무 슬펐다. 그때는 잘된 일이라고 슬프다고 말하면 안 된다고 생각을 해서 그런 말은 하지 않았지만, 슬펐다. 그래, 너무 슬퍼서 눈물이 계속 났다. 근데 황경호는 자신이 왜 눈물을 흘리는지도 잘 몰랐다. 잘된 일인데 왜 계속 울지, 그렇게만 생각했다. 시시때때로 눈물이 나와서 그게 초록이 때문이라고 생각하지 못한 적도 많았다. 그리고 그런 자신이 너무 당황스럽고 부끄러웠다. 술도 많이 마시고 잠도 잘 못 잤는데 그게 왜 그런지 제대로 알아 차리지도 못했다. 그렇게 생활이 안 좋아지니 갑자기 어느 날 크게 자살 충동이 일었다. 그 전년도 이후로 거의 그런 충동을 못 느꼈는데 말이다.
마포대교까지 갔는데, 물을 내려다보는데… 전화를 했다. 무슨 생각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런 순간에 전화를 걸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래서 그냥 강동현한테 전화를 했다. 그는 황경호가 죽고 싶어 한다는 걸 아는 유일한 사람이었으니까. 근데… 전화를 하는데 갑자기 무서웠다. 몸이 떨렸다. 분명히 죽고 싶은데, 또 살고 싶었다. 기어코 스스로를 죽여버릴 것만 같았다. 그래서 강동현에게 살고 싶다고 했다. 그가 곧바로 달려와서 그때까지 계속 그랬던 것처럼 황경호를 죽음에서 멀리 떼어내 주었다.
강동현은… 정말로 가진 게 많은 남자라서 그런지 황경호한테도 곧잘 원하는 게 있다면 뭐든 해주겠다는 말을 했었다. 저 날도 그는 황경호를 자신의 집으로 데려와서는 자신이 앞으로 어떻게 해줄까, 라고 물어보았다. 정말 뭐든 말하면 들어주겠다는 듯이 말이다. 그래서 때리고 싶다고 했다. 그가 무서웠다. 미웠다. 하지만 자신을 조금이라도 알아주는 것도 그밖에 없었다. 그래서 더 미웠다. 때리게 해줘서 때렸다. 그가 자신에게 폭력을 휘둘러 왔듯 황경호도 그러고 싶었던 걸까? 흥분하고 말았다. 어차피 강동현도 황경호에게 배려심이 깊고 상냥한 스타일도 아니지 않은가. 기회를 잡아서 곧바로 이용했다. 그때까지는 단 한 번도 강동현의 손에 발기하거나 느꼈던 적이 없었다. 아니, 그 어떤 사람의 손에도 느낀 적 없었다. 너무 당황스럽고… 근데 강동현은 너무나 자연스럽게 황경호를 대했다. 부드럽게 스킨십을 하고 힘들면 언제든지 전화를 하라고 했다.
그 이후로 강동현은 진짜 얌체같이 황경호의 약점을 이용해서 덮쳤다. 오히려 예전처럼 황경호는 전혀 느끼지 않고 그를 빼주었을 때보다 당황스러웠다. 차라리 그때는 눈 딱 감고 시간만 지나가길 기다리면 됐는데 이제는 그 행위의 주체 중 하나가 되어버린 거니까. 그리고 슬슬 황경호도 혼자서 가만히 있으면 점점 우울해지고 차라리 그 남자가 난장이라도 피우면 거기에 집중을 하게 되어 우울에 대해 생각을 하지 않게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거기에 그에 대한 화나 분노를 표현하게 되면서 좀 더 그렇게 되었다. 화나 분노라는 건 언제나 부정적인 거라고만 생각했는데 그것을 그냥 인정하고 나니 마음이 점차 가뿐해졌다. 그를 때릴 때마다 속이 아주 시원했다(물론 그 뒤에 당해서 계속 낚이는 기분이었지만). 때때로 강동현의 행동 때문에 우울해질 때도 있었지만, 또 그럴 땐 꽤 눈치를 채주는 게 느껴졌다.
게다가 저 딴에는 좀 덜 괴롭혀보겠다는 건지 팬티만 들고 가서 스스로 처리를 한다던가 하는 식으로 황경호한테 손을 안 대려는 시도도 몇 번 하는 게 보였다. 그러다가 황경호는 또 살짝 우울해졌다. 그럴 때 하필이면 술에 취해 강동현을 만나서… 기억도 제대로 나지 않았지만, 끝까지 엄청 당했다. 화가 머리끝까지 났다. 도대체 왜 그러는 걸까. 정말 좀 괜찮다는 생각이 들만하면 이렇게 사람의 속을 뒤집는 놈이었다. 직장이고 집이고 연락처고 죄다 바꿀 생각으로 뛰쳐나왔다. 정말 이 지긋지긋한 인연을 끊어버릴 생각이었다.
그러다가 이덕재랑 엮였다. 안 그래도 병원도 나가지 않고 집도 바꾸고 연락처도 바꾸고 강동현을 피하느라 인간관계도 단절되고 화도 나고 또 우울하고 그럴 때 하필이면 계속 사람을…. 게다가 그는 정말 말도 통하지 않고 말도 안 되는 헛소리를 당연한 사실인 양 말하고 상식에 맞지 않는 행동을 해서 사람을 정말 미치게 만들었다. 게다가 그가 하는 말들이란 죄다 황경호를 이상한 사람으로 만들어서 결국 어떻게 해보려는 것이었다. 며칠이고 이어지는 스토킹이 사람을 점점 지치고 우울하게 만들었다. 게다가 무단 가택침입은 사람을 몇 번이고 잠에서 깨게 만들 정도로 불안하게 만들었다. 결국 해달라는 대로 해주고 끝내려고 했으나 그렇게 되지 않았다. 결국 큰 소동이 있고 나서야 해결이 되었다.
그 뒤로 강동현은 뻔뻔하게 자기가 다친 거 대신에 키스를 해달라느니 하며 황경호를 또 귀찮게 했지만, 그 뒤로는 입만 맞추었다(좀 만지기는 했다). 그리고는 팬티만 훔쳐갔다. 그것도 짜증 나서 치한용 스프레이로 바퀴벌레 잡듯이 퇴치했다. 엄청 기분 좋았다. 강동현은 매일 팬티를 달라며 애원하기까지 했다. 비웃었지만 역시 그것도 나름 기분이 좋았다. 통쾌했다.
그러다가 강동현의 집에서 우연히 하룻밤 묵었는데… 이 인간이 자기가 자위를 하는 걸 보여주었다. 그 전에도 그가 자위하는 걸 듣고 깜짝 놀랐지만 말 못할 호기심이 일어 몰래 들었는데… 직접 보여주기까지 하니… 지금도 왜 그런지 모르겠는데 정말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가 너무 섹시하고 야하고… 정말 그가 키스하고 만지는 걸 거부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그 쾌감… 저항할 수 없었다. 뭐가 뭔지 알 수가 없었다. 그걸 알고 강동현이 계속 놀리니 너무 화가 나서 그의 팬사인회에 가서 그를 대대적으로 엿 먹이기도 했다.
그는 꽤… 아마도 황경호한테 잘 해주려고 한 것 같았다. 선물을 사주거나 꽃을 사주거나… 자위를 하는 걸 보여주면서도 싫다고 하면 건드리진 않았고 가끔 키스만 했다. 황경호도 그냥 그래, 예전보다는 훨씬 낫지. 그렇게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런데 초록이가 한국에 왔다가 가는 날, 강동현은 이유도 없이 옛날처럼 강압적으로 황경호를 호텔로 끌고 갔다. 사람들의 눈이 무서워서 제대로 저항도 하지 못하는 걸 질질 끌고 갔다. 그가 중간에 멈춰서 겨우 도망갔지만…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오는데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다. 뭐가 낫다고 생각한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렇게 생각했던 자기 자신이 너무 바보같이 느껴졌다. 이쪽이 어떻게 생각하든 저쪽은 언제든지 기회를 노려 덮칠 생각만 하고 있었는데, 이제 괜찮다고 마음을 놓고 있던 자신이 정말 손쓸 수도 없는 멍청이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만나고 싶지 않다고 했다. 정말로 만나고 싶지 않았다. 근데 강동현이 만지지 않겠다, 그냥 얼굴만 보러 오겠다며 또 사람을 병신처럼 취급했다. 그가 그런 말을 몇 번이나 했는지 기억을 못 하고 있었다. 그는 다른 사람들에게 하는 말은 전부 지키면서 황경호에게는 잘 지키지 않았다는 것도. 그가 얘기를 하자고 하길래, 정말 황경호의 생각을 들을 생각이 있는 줄 알았다. 하지만 그는 전날에 대한 죄책감도 옅었고 전혀 황경호의 말을 들어줄 생각이 없었다.
그리고 그 순간 황경호는 자신이 강동현한테 어떤 기대를 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도 전이랑은 다르니까. 적어도 내가 왜 이러는지 알고 이해해주지 않을까. 적어도 알겠다고 해주지 않을까. 적어도 나한테 미안하다면, 이제는 그만하지 않을까.
전혀 아니었다. 그도 어차피 황경호 따위는 어떻게 되든 상관이 없는 그런 놈이었다. 알고 있었는데도 계속… 계속 뭔가 이제는 안 하겠지, 그만하겠지, 그런 기대를 하게 된다. 그는 점점 황경호의 기분을 신경 쓰는 것처럼 행동했으니까 말이다. 꽃을 사주고 섹스를 요구하지 않아도 부드럽게 스킨십을 하고… 그러니까 결국 황경호가 멍청했다는 말이었다. 그게 뭐라고….
실망해서, 실망했다는 걸 숨기고 싶었다. 그러니까 그에게 기대를 했었다는 걸 숨기고 싶었다. 그런 자신이 너무 바보 같고 멍청하고 병신 같고… 그래서 그냥 하라고 했다. 그냥 마음껏 하고 싶은 대로 하고 꺼지라고 했다. 그는 정말로 황경호를 데리고 모텔로 갔다. 가는 내내 뭐가 어떻게 되든 견디자, 죽지 말자, 고작 이딴 놈 때문에 잘못되는 게 더 억울하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이 망할 고자 새끼가 중간에 또 멈추었다. 가라고 했다. 마음을 단단히 먹고 있었는데 어이가 없고,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았다. 이젠 지난 일이라고 생각했던 것들까지도 한꺼번에 몰려와서 욱하고 욕하고 때리고… 정말 오랜만에 정신을 놓고 진이 빠질 때까지 난리를 피웠다. 그리고 그때 강동현이 키스를 했다.
모르겠다, 지금도.
왜 그때 그 키스를 받아줬는지.
그 키스까지는 정말로 황경호도 하고 싶어서 같이 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 이후는… 지금 생각해보면 순진, 아니, 멍청한 게, 그걸 또 고스란히 다시 당한 것이다. 그다음 날도 그렇고. 참… 황경호는 여러 의미로 자신이 얼마나 쉬운지 생각했다. 이러니 이놈이고 저놈이고 멋대로 하려고 하는 거겠지. 멍청하다. 멍청해.
생각보다는 우울해지지 않았다. 막 땅을 파고 들어가고 또 마포대교에 올라갈 정도로 우울해지진 않았다. 명확한 원인이 있어서 그런 걸까. 그냥 이덕재 때를 생각하면 담담하고 그냥 제 3자처럼 멀찍이, 남 일처럼 생각하면 못할 것도 영 없었다. 이제는 정말 싸우기 싫었다. 결국 얘기를 하고 싸운다는 것도 그가 자신의 말을 들어줄 것이라 기대를 한다는 게 아닌가. 기대를 한다는 게 굉장히 사람을 수치스럽게 만들었다. 그리고 황경호는 그런 수치스러움이 싫었다. 수치스러움은 사람을 죽고 싶게 만든다.
물론 강동현이 그 이후로 미친 듯이 황경호를 덮친 것도 부끄럽기는 했다. 당하고 나면 왠지 마음이 허하고 창피했으니까. 하지만 무던히 생각을 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렇게 하니 생각보다 괜찮았다. 이러고 좀 있으면 끝이겠구나 생각하면 더 괜찮았다.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냥 ‘역시….’ 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강동현이 성가시게 하는 질문에도 전혀 대답할 생각이 없었다가 별로 상관없으려나, 귀찮다, 그렇게 생각하며 대수롭지 않게 말한 것이었다. 그러면 앞으론 그런 질문 같은 건 하지 않겠지 싶어서. 그리고 그가 과민반응을 하는 걸 보고는 좀 어이가 없었다.
그럼 처음이 아니었으면 그렇게 당할 만하다는 건가. 괜찮냐는 질문은 또 뭔가. 황경호가 괜찮은지 안 괜찮은지 따윈 안중에도 없으면서. 그가 황경호를 또 신경 쓰는 척 말하는 게 가증스럽기도 하고, 그냥 전부 성가시고 귀찮았다. 왜 일일이 따지는지 알 수가 없었다. 황경호의 이유 같은 게 언제 중요했다고 그러는지 모르겠다. 그럼 거기서 그냥 하고 싶어서 그랬다고 해야 하나? 그렇게까지 강동현의 비위를 맞춰줘야 할 이유도 없었다. 귀찮게 계속 물었다. 그래서 사실대로 말했다.
그러니까 또 안 건드리겠단다. 그러면서 병원은 온다. 황경호는 그냥 강동현이라는 인간을 이해하기 위한 노력을 전부 멈추었다.
그래, 또 저러다가 언젠가 덮칠 수도 있겠지. 아닐 수도 있겠지. 덮치면 또 뭘 어쩔 것인가. 이젠 아끼기에도 이미, 한두 번도 아니고. 그런 식으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가 잠깐이라도 건드리려고 하면 소스라치게 놀랐다. 스스로도 놀랄 정도로 말이다. 가슴이 두근거리고 식은땀이 났다. 왜 그런지 스스로도 알 수가 없었다.
그러니까 그냥 오지 말았으면 좋겠는데. 그 말도 하기가 성가셨다. 그런다고 올 사람이 안 올 것도 아니고… 오기 싫으면 이쪽이 오라고 해도 절대 안 올 사람이었다.
혼자서 안주랑 술을 먹다가 음식을 다른 테이블에 내주고 설거지를 하고 있는 김태형을 보았다.
“형.”
“응?”
“형이 봤을 땐 강동현 어떤데?”
“뭐가?”
“성격이나… 그냥 전체적으로.”
“동현이?”
김태형은 잠깐 생각하더니 대답했다.
“어른스럽지.”
“어른스럽다고?”
황경호가 황당하다는 어투로 되물었다.
“인격적이라던가 그런 말은 아니고… 아, 동현이가 성격이 나쁘다는 건 아닌데. 애가 일을 일찍 시작해서 그런가, 사람을 대하는 걸 보면 선이 딱 보이지. 그러면서도 불쾌하지는 않아. 적당히 예의 바르고 적당히 상식적이고. 전에 보니까 자기 것도 확실히 지킬 줄 알고. 작은 건 딱히 신경 쓰지 않고. 남자답고 멋있지.”
“흐응….”
“사실 비즈니스 세계나 직장인들 세계에선 동현이나 너나 나이가 엄청 어린 거거든. 집 안에서도 그렇잖아? 근데 동현이는 외모도 그렇고 행동도 뭔가, 중요한 것만 한다, 이런 느낌이니까. 남 일에 크게 신경 쓰지도 않고 흔들리지도 않고. 그런 게 어른스러운 거야.”
황경호가 술을 한 모금 마셨다.
“뭐 돈도 많고 성공해서 그런 느낌이 나는 걸 수도 있는데. 동현이랑 비슷한 나이 또래 다른 연예인들 생각해보면, 뭐. 답 나오잖아? 난 너랑 동현이가 동갑이라는 게 신기하다.”
황경호는 마지막 말에 약간 기분이 상해서 투덜거렸다.
“나도 우리 선생님이랑 형이랑 동갑이라는 게 이상해.”
“어허.”
*
그는 딱히 누군가에게 조언을 구하면서 사는 성격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번엔 사람들에게 물어보았다. 아버지, 어머니, 매니저, 사장님, 기석이 형, 그 외 아는 형들, 아는 여자들. 전부 다 물어보았다. 그리고 전부 다 똑같은 대답을 했다.
“사랑하는 거 아냐?”
그리고 들을 때마다 강동현은 불쾌해했다. 다들 사랑이라고 했다. 강동현은 그럴수록 더 거부감이 들었다.
미안했다. 화도 났다. 어딘지 모르게 억울하기도 했다. 어떻게든 해야 할 것 같은데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하지만 거기에 사랑? 그 말만 들으면 거칠게 재촉이라도 당하는 느낌이었다. 불쾌하고 짜증이 났다.
‘왜 그게 사랑이지? 내가 생각해봐도 그냥 쉽게 대달라고 들이대는 거였는데.’
도대체 이 사람들은 얼마나 거지 같은 사랑을 한단 말인가? 이해할 수 없었다. 누군가 제대로 된 설명 좀 해주었으면 좋겠다. 그래서 마지막이다 생각하고 또 누군가에게 물어보았다.
“글쎄… 너 안 좋아하는 여자한테도 그렇게까지 하고 싶어?”
김태형이 괴상하다는 얼굴로 물어보았다. 강동현은 잠깐 멈칫했다. 그리곤 말했다.
“전 여친이 처음이었고, 지금 말하는 애 말고는 몰라.”
“아니, 모르는 게 아니라… 솔직히 그 정도까지 하면 몸정이라도 들어서 좋아하게 될 것 같은데. 전혀 그런 것도 없어? 너 너무 사랑을 거창하게만 생각하는 거 아니야?”
사랑을 너무 거창하게 생각한다라. 이게 거창한 수준인가? 강동현은 뭐라고 반박을 하고 싶었지만 쉽게 말이 튀어나오지가 않았다.
“걔 만약에 다른 남자랑 만난다고 생각해봐라. 괜찮아?”
김태형의 질문에 강동현이 곧바로 반박했다.
“걔 다른 남자 절대 안 만나. 못 만나.”
여자도. 강동현이 흥 하고 코웃음을 쳤다.
“왜 못 만나. 만나면 다 만나는 거지. 왕자를 만나다가도 거지도 만나게 되는 게 인생인데.”
“걔 성격이 절대 다른 사람을 만나고 그런 게 될….”
그러다가 순간 이덕재가 생각났다. 그리고 자기 자신도. 누군가 이런 식으로 그 애의 취약함을 알고 달려든다면 걔는 또 휩쓸려버릴 것이다, 멍청하게. 대주다 보면 끝나겠지, 그런 식으로 처신하면서. 강동현은 인상을 확 썼다.
‘남자잖아. 아니지. 벌써 두 명이나 엮였잖아. 아, 그 병원 진상들도 많은데….’
잘 모르겠다. 강동현은 판단을 보류했다.
“아니… 일단 그건 딴 문제인 것 같아요. 어쨌든… 그래서 결국 형도 제가 걔를 사랑하는 거다?”
“뭐… 좋아하는 건 확실한 거 같은데. 섹스를 하고 싶다는 것도 그런 거잖아. 그것도 걔만 보면 그렇게 하고 싶다며. 정신적이고 플라토닉 하고 건설적인 사랑도 있지만 리비도가 확 들끓는 사랑도 있잖아. 영화처럼.”
“…….”
“만약에 걔가 너 좋아한다고 해봐. 너 어떨 것 같아?”
‘날 좋아한다고? 그 간호사가? 좋아해요. 사랑해요. 그런 거? 걔는 그런 거 안 해.’
결국엔 이 형도 답이 없었다. 다들 너무 사태파악을 못 한다. 강동현은 한숨을 쉬곤 술을 좀 들이켰다. 그의 불만족스러운 표정을 보고 김태형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래서 어떻게 하고 싶은데?”
대답은 여전히 만족스럽지 못했는데 질문은 뭔가 훅 들어오는 느낌이었다. 강동현은 약간 인상을 찌푸렸다.
“…솔직하게?”
“어.”
“일단 만나고 싶은데. 잘 지내는지 궁금하고. 솔직하게 얘기도 좀 하고 싶고. 기분도 풀어주고 싶고. 안고 싶고.”
김태형은 역시 좋아하는 거네! 이런 식으론 말하지 않았다. 김태형이 또 물었다.
“걔는 어떤 스타일인데?”
강동현은 약간 갈등하다가 말했다. 일단은 이쪽도 아는 사람이니까.
“예민해. 근데 잘 숨기고. 겉으로 봤을 땐 엄청 사교적이고 싹싹해. 좀 호구 같을 정도로 착해.”
그리고 좀 더 갈등하다가 덧붙였다.
“귀여워.”
“너… 도대체 뭐가 문제냐?”
김태형이 어이가 없다는 듯 그렇게 말했다. 강동현도 김태형의 질문에 하나하나 답을 하면서 스스로도 그런 질문을 던졌다. 강동현은 좀 고민을 하다가 다른 답변자들에게는 하지 않았던 말을 좀 더 했다.
“그런데 걔 나 싫어해.”
“응? 너랑 잔다며?”
“음… 일단 걔 나 정말 싫어해. 내가 걔 말 무시한대.”
“아니… 진짜 너 걔 무시해?”
“음… 좀 그랬어. 걔가 뭐라고 하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했거든. 나 나름대로 신경을 썼는데… 나중에 되니까 또 내 맘대로 하고 있더라고.”
“왜 그래, 너… 그러는 거 여자들 진짜 싫어해. 너 전 여자친구한테도 그랬어?”
“아니… 영지랑은 말도 잘 통하고 얘기도 많이 하고… 영지랑도 싸우긴 했어. 나도 걔도 고집이 좀 세거든. 나이도 같고… 근데 얘는 안 싸우려고 해, 나랑… 그냥 포기해.”
“아, 뭔지 알겠다. 그냥 삐지는 타입이구나?”
“비슷해….”
“그래서 걔가 싫어한다는 게 널 좋아하는 마음이 있는데 너한테 섭섭해서 싫어한다는 거야, 아니면 진짜 그냥 대놓고 싫어하는 거야?”
“섭섭해하는 거.”
강동현은 생각도 채 하기 전에 그렇게 바로 대답했다.
“그게 아니면 다 말이 안 돼. 아…. 그러니까.”
강동현은 갑자기 머리를 쥐어뜯었다. 그러니까 그거다. 그거란 말이다. 이렇게까지 된 마당에도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좋아한다, 까지는 아닐 것 같다. 아니, 당연히 아니겠지. 하지만 황경호는 강동현의 억지에 점점 체념해가며 결국 강동현과 어떤 균형을 이루었다. 입을 맞추면 거부하지 않고 받아들이고 그가 선물을 하는 것도 꽃도 받아들였다. 얼굴이 새빨개져선 그를 쳐다보기도 했고 그의 집에 익숙해지기도 했다.
키스까지도 해줬고.
근데 그걸 결국 다 망친 건 강동현이었다. 사랑이고 나발이고… 이제는 대놓고 싫어하겠지. 강동현은 인상을 확 찌푸렸다. 그가 다른 사람들한테 질문을 하고 그들이 가르치려 들려는 말을 듣는 게 아니라 그가 질문에 답을 하다 보니 뭐가 더 대단히 잘못된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저도 모르게 변명을 하게 되었다.
“걔랑 잘 지내고 싶었어. 나한테 원하는 게 있으면 다 해줄 생각이었다고. 근데 성격이 너무 안 맞아. 서로 말이 안 통해….”
“그래… 사랑이니 아니니 그런 거 괜히 신경 쓰지 마. 마음이 시키는 대로 해야지… 사랑이면 어떻고 아니면 어떻냐. 그냥 니가 해주고 싶은 대로 해.”
그러게… 사람들이 강동현에 앞서서 계속 사랑 타령을 해대니 계속 거부감이 들었다. 사랑이면 잡을 거고 섹파면 안 잡을 거였나. 결국엔 주변에서 계속 빙빙 맴돌고 있는 건 강동현이었다. 결국엔 그건 아직도 포기를 못 했다는 것 아닌가.
“내가 그래도 잘하다가 한 번 실수를 했는데… 그것 때문에… 그전까진 괜찮았다가 나도 좀 정신이 나가서….”
강동현이 이런 식으로 하소연을 하는 스타일일 줄은 몰랐다. 얼마 전에 경호한테 어른스럽다고 했는데 이렇게 보니 영락없이 연애 문제로 고민하는 20대다. 김태형은 벌써 30대 중반이었다. 그는 별거 아니라는 듯 대꾸했다.
“그냥 그렇게 얘기를 해.”
“어?”
강동현이 좌절감 가득한 얼굴을 들었다. 저래도 저렇게 잘생겼다니 진짜 불공평하구만, 김태형이 생각했다.
“그렇게 얘기해봤어? 너한테 잘해주고 싶다고. 내가 실수했다고. 이해해달라고. 받아달라고. 뭐, 좋아한다는 말까지 하면 금상첨화고. 넌 어떻게 하고 싶냐고.”
“싫어할 텐데… 이제는 대놓고 싫어할 걸….”
“아쉬운 놈이 우물 판다고 그냥 지금처럼 얼쩡대는 게 더 꼴사나워. 그리고 들어보니까 딱히 섹스만 하고 싶어서 만나는 것도 아닌 것 같은데, 왜 이렇게 섹스라는 키워드에 집착해?”
“…….”
그건 진짜 발기부전 때문인가. 강동현은 스스로의 결점에도 좀 좌절스러워졌다.
*
일주일에 세 번. 20분씩. 정말 얼굴만 봤다. 그러기를 벌써 한 달이다. 병원에선 아무런 얘기를 할 수가 없었다. 그냥 그런 분위기였다.
‘사랑이고 나발이고.’
진짜 사랑이고 나발이고다. 사람들이 사랑이라고 말한다고 사랑인 것도 아니고 아니라고 아닌 것도 아니다. 강동현은 김태형의 말대로 지금 그가 하고 싶은 것에 대해서 생각했다.
사과를 하고 기분을 풀어주고 얘기를 듣고 싶다. 원망이든 뭐든.
압구정대로 앞에 차를 세우고 결국 끊지 못한 담배를 피우며 기다렸다. 이제는 날도 길어져 7시가 넘었는데도 해가 안 넘어갔다. 조금 더 있으니 주변에 관심이 없는 듯 그냥 건물을 나와서 지하철 쪽으로 몸을 돌리는 사람이 보였다. 지나가는 사람들 전부 선글라스를 낀 강동현을 쳐다보고 가는데도 이쪽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황경호.”
이름을 그다지 불러본 적이 없어서 약간 입 안에서 까끌한 느낌이었다. 막 지하철 쪽으로 걸어가려던 그가 이쪽을 돌아보았다. 강동현은 담배를 바닥에 떨어뜨려 밟았다.
“잠깐 시간 돼? 얘기 좀… 하자.”
“…무슨 얘기요?”
그냥 얘기나 하자고. 이런 식으로 퉁명스럽게 내뱉을 뻔했다. 아, 왜 얘만 보면 이렇게 화가 나는 것인가.
“그냥….”
정말 영지랑은 달랐다. 자신이 없다. 언어가 다르니 어떤 식으로 커뮤니케이션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 강동현은 아무 대답이 없자 다시 좀 울컥했다.
“싫어?”
재촉하듯이 물었다. 그는 사람들이 이쪽을 보고 있는 게 부담스러운 것 같았다. 좀 더 뒤집어쓰고 올 걸 그랬나. 후드까지 눌러 썼는데도 이쪽을 보는 사람들이 꽤 있었다. 그는 강동현 쪽으로 왔다.
“…일단 차에 타요.”
“알았어.”
강동현은 살짝 안도했다. 이것도 그의 약한 점을 이용하는 거겠지만. 강동현은 운전석에 타고 황경호는 조수석에 탔다. 차를 출발시켰다. 도로는 막혔고 잠깐 동안 침묵이 이어졌다.
“잘 지냈어? 기분은 괜찮아?”
강동현이 어렵사리 이야기를 꺼냈다. 황경호는 창밖을 보고 있다가 답했다.
“계속 같은 질문 안 해도 돼요. 자살 같은 거 이제 안 해요.”
병원에 있을 때보다 말투에 날이 서있다. 강동현은 어금니를 살짝 깨물며 인상을 찌푸렸다. 그대로 황경호의 집까지 말없이 운전을 했다. 거의 40분 정도 걸렸다. 황경호의 집이 어디 있는지 알고 있었지만 저번에 두 번 정도 데려다준 것을 빼면 오지 않았다. 이덕재의 일 이후로 어쩐지 갈 수가 없었다. 결국 스스로도 무의식중엔 비슷한 짓을 하고 있었다는 걸 알고 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빌라 앞에 차를 세우자 황경호가 말했다.
“태워 주셔서 감사합니다.”
강동현 쪽은 계속 보지 않았다. 강동현은 핸들을 한 번 꽉 잡았다가 그를 돌아보았다.
“잠깐만.”
황경호가 안절벨트를 풀고는 이쪽을 보았다. 막상 그가 이쪽을 보니 그의 눈을 볼 수가 없었다. 강동현은 다시 정면을 보았다.
“나… 너한테 잘하고 싶었어. 알지….”
“…….”
“니가 싫다면 그렇게… 하고 싶지도 않았어… 알잖아.”
인천공항에서 끌고 갔을 때도 모텔에서도 결국 처음엔 그만뒀었다. 황경호는 인상을 확 찌푸렸다.
“그래서 제 탓이라구요?”
“아니…! 아니, 그게 아니라!”
강동현은 황경호를 확 돌아보았다. 강동현은 자존심도 상하고 당황스럽기도 하고 해서 확 상기되는 게 스스로도 느껴졌다. 하지만 가라앉히려고 노력했다. 젠장… 한 손으로 이마를 감쌌다.
“내가 오버한 거 알아. 니가 키스해줘서… 나 진짜 너랑 하고 싶었거든. 지금 내가 생각해봐도 너무 미친놈 같이 굴어서 솔직히 쪽팔려….”
“…….”
“그래도 포기하지 말고 한 번쯤은 제대로 말해주지….”
강동현이 마음이 달아 저도 모르게 그렇게 중얼거리자 황경호가 짜증스러운 한숨을 쉬었다.
“분명히 내가 말했다고 했잖아요. 항상 안 듣고 달려든 건 그쪽이잖아요.”
“전화든 문자든. 내가 너한테 안 달려들 때 할 수도 있었잖아.”
“그렇게 당연한 것도 제대로 모르는 사람인데 그렇게 말한다고 들어줬을 거예요?”
“당연한 거 아니야?”
“됐어요. 그만 얘기해요. 가세요.”
“아니…!”
그가 차에서 내리려고 하자 강동현은 깜짝 놀라서 그의 손을 붙잡았다. 생각도 못 하는 사이에 순식간에 말싸움으로 번졌다. 진짜… 순간 방심하면 이런 식이다. 진짜 깜짝 놀랐다. 정말로 싸우고 싶지 않았다.
“너랑은 정말 왜 이러지….”
강동현은 힘을 주어 그의 손을 쥐었다. 아직도 차의 문손잡이를 잡고 있는 그의 손을 한 번 보고 드디어 황경호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때 나한테 왜 키스했어?”
“…….”
“말해줘.”
그대로 서로 눈을 마주치고 있었다. 황경호가 천천히 입을 뗐다.
“그럼 도대체 그쪽은 저한테 왜 이러시는 데요.”
“…….”
여기서 좋아한다고 말하면 되는 것인가. 하지만 그건 역시 속이는 기분이다. 엄청나게 갈등이 되었다. 그러다가 그냥 솔직하게 얘기하기로 했다. 그도 황경호가 솔직해졌으면 좋겠으니까.
“너랑 잘 지내고 싶어. 나한테 원하는 게 있으면 다 해주고 싶고.”
그리고 약간 얼굴을 붉혔다. 진짜 영지를 대할 땐 이러지 않았는데 정말 말을 하기가 힘들다. 울컥하고 자존심도 상하고….
“그리고… 내가 너한테 끌리는 거처럼 너도 나한테 끌렸으면 좋겠어.”
강동현의 말을 듣고 황경호는 서서히 다시 인상을 썼다. 말을 잘못한 걸까. 황경호는 문손잡이를 잡던 손으로 자신의 눈썹을 매만지며 자연스럽게 얼굴을 좀 가려버렸다.
“결국엔… 쉽게 하고 싶다는 말이잖아….”
“아니, 그게 아니라….”
“그러니까 그냥 하고 싶은 대로 맘껏….”
“그런 거 아니라고!”
안 맞아. 안 맞아. 너무 안 맞아. 답답해. 미칠 것 같아. 강동현은 절대 화를 내거나 소리를 지르지 말아야겠다고 굳게 다짐을 하고 온 주제에 결국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황경호가 손을 내리고 강동현의 얼굴을 보았다.
“젠장! 그래! 나 너랑 하고 싶어. 지금도 하고 싶어서 미칠 것 같아! 내가 너 가지고 얼마나 자위했을 거 같아? 돌아버릴 것 같다고!”
강동현은 다른 손까지 확 끌어당겨 잡았다. 황경호가 움찔하며 손을 잡아 빼려고 했다.
“근데, 시X, 안 해. 안 한다고. 안 해! 나도 싫다는 사람 붙잡고 안 한다고! 안 해도 된다고! 그냥 너랑 나랑 이러고 있는 게 X 같고 매일 니가 나 처음 보는 환자 마냥 대하는 게 개 같다고!”
“…….”
“내가 너 나 어떻게 보는지 모를 것 같아? 너도 나한테 원하는 게 있잖아! 말해!”
황경호는 약간 인상을 쓴 채 입을 다물고 있었다. 강동현은 울화에 차서 한참 씩씩거리다가 황경호의 손을 잡은 두 손을 이마에 대고 신음성을 냈다. 아, 젠장. 저질렀다….
“그러니까….”
“난….”
강동현과 황경호가 동시에 말했다.
*
강동현이 퍼뜩 고개를 들었다. 눈이 다시 마주치자 고개를 돌려 피했다. 강동현은 한 손으로 황경호의 손 두 개를 동시에 잡고 다른 손으로 황경호의 뺨을 감싸 이쪽으로 보게 했다.
“말해.”
그는 인상을 찌푸리며 시선을 사선으로 피했다. 강동현은 황경호의 얼굴을 끌어당겼다.
“말해.”
그러자 어쩐지 그가 좀 더 인상을 썼다. 황경호가 입술을 꾹 다물고 잠깐 있다가 살짝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하기 시작했다. 강동현은 긴장했다.
“난… 니가 그만한다고 할 줄 알았어. 너 나… 진짜 많이 괴롭혔잖아.”
“…어….”
젠장…. 상처받은 게 느껴졌다.
‘그래, 제기랄. 안 받을 리가 없지. 거의 강간을… 당한 건데. 아, 젠장. 씨X.’
강동현은 속으로 욕지거리를 마구 뱉었다.
“근데 니가 끝까지 병원 온다고 해서… 진짜 너도 나 같은 건 어떻게 되든 상관없는 거구나… 결국엔….”
“아니야, 젠장. 아니라고.”
“맘대로 하라고 하니까 모텔까지 갔잖아!”
황경호가 눈이 빨갛게 되어선 강동현의 어깨를 주먹으로 퍽 쳤다.
‘왜 나는 계속 얘 말을 부정하려고 하지. 결국 진짜 맞는 말인데. 앞으로 못 만나게 된다면 그냥 따먹어버리자고 생각한 주제에….’
강동현은 미간을 찌푸리며 그 손을 잡았다. 그리곤 그 주먹에 입술을 누르고 대답했다.
“미안….”
당연히 엄청 쌓였을 것이다. 아까까지만 해도 아무 말도 하기 싫다는 얼굴로 창밖만 보고 있던 그가 눈이 다 새빨개져선 부들부들 떠는 걸 보니 속으로 욕지거리가 나왔다. 그래, 제기랄. 그걸 왜 참냐고….
“그리고 너 니 맘대로 했잖아! 병원에서도! 아무 데서나…! 윽….”
눈물이 흘러나오자 그가 황급히 닦아 내었다.
“그건 진짜 미안… 잘못했어.”
강동현은 갈비뼈 안이 다 뻐근했다. 그건 정말 혼자서 생각할 때도 죄책감이 심한 부분이었는데 이렇게 말로 들으니 얼굴을 볼 면목이 없다. 강동현은 두 손으로 주먹을 꽉 쥐고 있는 황경호의 손을 만지작거렸다.
“…….”
뭐가 확 터졌는지 눈물이 뚝뚝 나와서 황경호가 말을 멈추고 입술을 꾹 다문 채 창밖을 보며 있었다. 그는 눈물이 흘러나올 때마다 눈을 마구 비비고 있었다.
“다 얘기해. 때려도 돼. 다 말해줘.”
강동현이 그렇게 말하자 황경호가 그의 얼굴을 노려보았다. 뭐가 또 확 올라오는지 얼굴이 새빨개지더니 주체할 수 없이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넌 진짜… 사람이 왜 그래?”
“응….”
“처음부터…! 처음부터 나 가지고 너 아픈 거나 낫게 하려고! 사람이 죽고 싶다는데 이상한 짓이나 하려고 하고!”
완전 처음부터 나오기 시작했다. 강동현은 고개를 숙이며 한숨을 쉬었다.
“알아… 나 완전 쓰레기지? 알아. 그건 진짜 지금 생각해봐도 왜 그렇게까지 했는지 모르겠어….”
“모른다고 하면 다야?!”
퍽. 엄청 세게 때렸다. 맞은 데가 욱신거렸다.
“너 멋대로 하고도 항상 잘못했다고 생각 안 하고 적반하장으로 굴고! 너 그거 진짜 범죄였어… 알기나 해?”
“알아….”
“그리고 너 진짜 말하는 거…! 너 진짜 최악이야. 어떻게 사람이 말을… 말을 왜 그렇게밖에 못해? 나 그때 진짜 죽고 싶었어. 죽고 싶었다고, 이 개새끼야!”
한 손으로 강동현이 멱살을 잡고 눈물을 참지 못해 팔에 얼굴을 묻고 흐느끼고 있다가 또 주먹으로 강동현의 가슴이나 어깨를 쳤다.
“미안해….”
“초록이 가지고도… 초록이 가지고 너 그런 식으로…! 이용해서 나…!”
마구 때리기 시작했다. 강동현은 그가 성에 찰 때까지 맞아주었다. 여기도 변명의 여지가 없다. 그를 마음대로 휘두르고만 싶었을 때였다. 왜 얘한테 그렇게 하면 안 되는지도 몰랐을 때였고. 아니, 왜 얘한테 그러고 싶었는지 몰랐다. 그러게. 진짜 얘한테만 유독 왜 이렇게 굴었냐… 새삼 당사자한테 들으니까 완전 미친놈이다.
‘아, 미치겠다. 나 원래 이렇게 사는 놈 아닌데… 진짜 이덕재가 아니라 내가 잡혀가도 할 말이 없다….’
“내가 아무리 죽고 싶어서 정신이 나갔다지만…! 넌 진짜 죽고 싶어서 뛰어내리려고 했던 사람이 맘대로 하라고 한다고 진짜 해? 미친 거 아냐? 너 진짜 사이코패스야?”
퍽퍽퍽. 정말 변명의 여지도 없다… 강동현은 다시 똑같은 말만 할 수밖에 없었다.
“미안… 잘못했어. 나도 내가 너한텐 왜 이렇게 미친놈처럼 구는지 모르겠다.”
“모른다고 하면 다냐고!”
“미안….”
“술 취했다고 멋대로 하고…!!”
“그것도 미안….”
지나온 일들에 대해서, 솔직히 말하자면 강동현은 그렇게 많이 생각하지 않았다. 옛말 중에 때린 놈이 발 못 뻗고 잔다고 하지만, 그건 진짜 거짓말이다. 별말 하지 않으니까 문제가 아닌 것처럼 그렇게 여기고 있던 것도 많았다. 아니면 한두 번 그가 화를 내는 것에 사과를 했으니 끝났다고 여기고 있던 것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항상 거의 비슷비슷한 실수나 잘못을 반복해왔고 아마 그때마다 상대는 예전 일들 때문에 받은 상처까지도 올라왔을 것이다. 사람이라면 그런 거니까….
“미안하다면 다야? 끌고 갔다가 그만두면… 그러면 내가 감사하게 여겨야 해? 니가 뭔데 나한테 이러는데! 니가 뭔데 날 계속 병신으로 만들고 바보로 만들어! 왜 창녀나 걸레같이 만드냐고!!”
몇몇 단어들이 진짜 깊숙이 찌르고 들어왔다. 강동현은 정말 죄책감이 느껴졌다. 미안함과 별개로… 그래서 스스로에게 좀 화가 나기도 했다. 후회가 되었다. 왜 굳이 그렇게까지 했을까. 다른 사람들한테 그러는 것처럼 좀 상냥하게 굴 걸….
“으흑….”
황경호는 진짜 주체할 수 없이 눈물이 나오는지 더이상 때리지도 않고 자신의 손목으로 눈물을 문질러 닦았다. 강동현도 다른 쪽을 손으로 감싸고 엄지로 닦아냈다. 그리고 말했다.
“원래 다른 사람들한테는 그런 식으로 한 적 한 번도 없는데 너한테는 진짜 항상… 개새끼처럼 굴어. 일부러 그러고 싶었을 때도 많았어… 미안해.”
“너 진짜…!”
강동현이 일부러 그러고 싶을 때도 많았다고 하니 다시 화가 나서 강동현을 퍽퍽 때리는 황경호였다.
“너한테는 그래도 될 것만 같았어. 나도 왜 그런지 모르겠어. 너만 보면 괴롭히고 싶을 때도 있었고….”
솔직하게 말하니까 더 때린다. 정말로 얘한테는 그래도 된다고까지 생각한 적도 있었다. 이상할 정도로 그랬다. 멋대로 굴고 싶었고 멋대로 굴었다.
“니가 그냥… 체념하고 받아주는 게 좋았던 것 같아. 내가 그렇게 멋대로 굴어도 그냥 참아주고….”
황경호는 이제 말도 안 하고 강동현을 때리기만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벌써 2년 다 되어 가는데… 니가 나 경찰에 안 찌른 게 용하다.”
황경호는 거의 숨을 못 쉬었다. 두 손으로 자신의 눈을 가리고 눈물을 참으려고 했다. 이런 상황에서 제일 개 같은 것은 상대가 알아주는 것만으로도 뭔가 후련함이 든다는 것이다. 바로 그 상대가 그 모든 짓을 황경호한테 한 것인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왜 이러는 것일까. 더 바보 같다.
황경호의 손등이 새빨갰다. 맨주먹으로 그렇게 때렸으니 황경호도 아팠을 것이다. 오히려 이런 게 더 미안하다. 정말 자신이 개새끼이긴 한 모양이었다. 강동현은 그의 손을 잡아서 빨개진 부분에 입술을 눌렀다. 그리고 얼굴을 새빨갛게 하고 오열을 겨우 참고 있는 황경호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나 진짜 왜 이러는 걸까….”
강동현은 눈물에 젖어 엉망인 그의 눈을 바라보았다. 자연스럽게 말이 흘러나왔다.
“나 너 좋아하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