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화 (17/47)

2. 애정의 모호함

“…….”

“사인해주세요.”

몇몇 알아들은 사람이 풋하고 그 사람을 쳐다보았다. 그는 뒤를 돌아보며 정확하게 설명했다.

“아, 저 강동현 씨 팬이에요. 이름 같아서 더 좋아하게 됐구요. 그냥 제가 요즘 좀 아픈데 힘이라도 얻을 수 있으면 좋을 거 같아서요.”

성의 없는 말투였다. 강동현은 일단 사인을 하기 시작했다.

“아니, ‘To 강동현 씨 발기부전, 지루, 불감증 힘내세요!’ 꼭 적어주세요. 강동현 씨 같은 사람은 당연~히 모르시겠지만, 4개월 정도 자위도 섹스도 못 하면 정말 못 견디겠잖아요. 정말 힘내야 하는 상황이라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기운 받으려고 왔어요.”

악성팬이라고 여겨진 걸까 시큐리티가 다가온다. 강동현은 그들에게 괜찮다고 얘기하고 ‘팬’이 말하는 대로 한 자 한 자 적었다.

“여기요, 강동현 씨.”

“아, 이거 들고 사진 같이 찍으면 안 돼요?”

“…….”

강동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팬은 기다란 셀카봉까지 들고 왔다. 사람들 앞인 데다가 이번엔 강동현이 얼굴을 가린 게 아니라 상대가 가렸다.

‘이거 진짜 짜증 나네, 젠장.’

강동현이야말로 사람들에게 알려져 있는 사람이었지만 항상 얼굴을 가리고 익명을 유지하여 황경호의 직장에서 진상을 부리곤 했다. 반대로 당해보니 손발이 묶인 것처럼 어떻게 할 수가 없다. 강동현은 속으로 울화를 삼키고 카메라의 앞에서 웃을 수밖에 없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그는 티셔츠를 들고 쏜살같이 사라졌다. 강동현은 잠시 그의 뒷모습을 쳐다보았다. 다음 팬이 다가오며 신기하다는 듯이 같이 그쪽을 보았다.

“저런 남자팬도 있을 줄 몰랐어요.”

“하하….”

팬사인회가 끝나고 바로 집으로 곧장 갔다. 집 주차장까지 가서야 전화를 걸 수 있었다. 두 번 만에 받는다.

“야!! 너 아까 그거 뭐야!”

강동현은 그대로 계속 언성을 높였다.

“너 저번에 그거 화나서 이렇게까지 하는 거야?? 내가 미안하다고 했잖아!”

[아, 나도 미안.]

황경호가 아주 성의 없이 그렇게 말했다.

“윽… 너….”

강동현은 화가 끓어 한참 씩씩대다가 언성을 약간 낮추고 물었다.

“너 설마… 그거 어디다 팔 거야?”

[네. 벌써 팬카페에 올렸는데요. 사겠다는 사람 엄청 많아요.]

“아오, 젠장….”

[아까 찍은 사진도 잘 올렸어요. 사정이 이래서 병원비 필요하다고 하니까 다른 사람들이 엄청 위로해주는데요. 다들 진짜 착하다. 댁도 그냥 걸렸다고 공개해도 되는 거 아니에요?]

그렇게 말하곤 풋, 킥킥 같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강동현은 상대가 아주 즐거워하는 기색을 느끼고 더 부글부글거렸지만 언성은 낮추기 위해 노력했다.

“…그래서 얼마에 팔 건데.”

[일단 10만 원 올렸는데… 너무 싸게 했나 봐요. 팬들끼리 경매를 하네. 벌써 50만 원 부른 사람도 있어요. 댁 팬들 굿즈 모으는데 진짜 정성이네.]

“야, 내가 살 테니까 일단 사진부터 내려.”

[네? 싫은 데요?]

“아, 진짜 내가 제일 높게 부른 사람 두 배는 줄 테니까 그냥 나한테 팔라고. 글 내리라고.”

황경호야 강동현 본인보다도 강동현의 병증(병뿐인가)에 대해 잘 아니 뭐가 문제가 되겠냐만, 다른 사람에게는 달랐다. 저런 끔찍한 티셔츠가, 사진뿐만이라도 자기가 사인까지 한 게 인터넷에 돌아다닐 걸 생각하면 치가 떨린다.

[아, 싫은데. 그게 더 위험한 거 아니에요? 이런 팬들은 누가 들고 있는지 금방 알아요.]

“니가 그냥 친구한테 팔았다고 하고 끝내면 되잖아. 아, 됐고 가격부터 불러.”

[와… 부탁하는 사람 태도 봐. 맡겨놓은 물건 찾으세요?]

아, 화난다… 강동현은 당장 이 간호사의 집으로 쳐들어가서 그 티셔츠를 뺏어 오고 싶었다. 시동을 켜고 출발만 하면 됐다. 30분만 가면 된다. 정확한 호수는 몰라도 집이 어디에 위치해 있는지는 안다. 아니, 호수도 매형한테 물어보면 서류를 가지고 있을 것이다.

“…진짜 내가 그때는 미안했다니까… 말이 경솔했고… 내가 하고 싶으니까 계속 너한테 강요한 거고… 뭔가… 니가 넘어왔으면 하니까… 니가 좋아하는 방식으로 해주면 좀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 해서… 제안한 거지, 제안. 혹시나 해서….”

화를 억누르고 그렇게 말했다. 예전 같으면 자신도 부득불 복수하려고 이를 갈았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사과를 했다. 성격 많이 죽었다, 도은혁.

“니가 기분 상하는 게 당연하다… 넌 나 싫어하니까.”

강동현은 잠깐 한숨을 쉬었다. 이런 말까지 하려고 한 건 아닌데. 강동현은 인상을 찌푸리며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진짜 반성하고 있으니까 그 티셔츠는 나한테 팔아라. 부탁이다.”

[500이요.]

“…….”

날강도가 따로 없다. 강동현은 또 열 받아서 확 소리를 지를 뻔하다가 겨우겨우 참았다. 이러다 또 화병 나서 실려가는 건 아닐지 모르겠다.

“그래… 계좌…는 싫어할 거고 그냥 현금으로 뽑아서 갖다 줄게.”

[아, 나 동영상도 있는데. 예전에 ‘나는 고자다!’ 했던 거. 홍대, 이대 다 있어요.]

“…….”

*

“내원하신 건가요?”

“네.”

아직 문도 열리지 않았는데 도착해있는 환자 하나를 발견한 신참 간호사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했다. 8시였다. 어지간히 급한 모양이다… 간호사는 얼른 문을 열고 그를 안으로 안내했다.

“많이 기다리셔야 할 텐데….”

“괜찮습니다.”

그렇게 커피를 마시며 30분쯤 기다리자 사람들이 하나둘 출근했다.

“아, 너 인간적으로 침대 좀 더 큰 거 사라. 키도 큰 게 잠버릇도 나쁘고.”

“안 그래도 다음 월급 나오면 살까 싶긴 하더라. 침대 작긴 작아.”

“너 때문에 잠 한숨도 못 잤잖아, 진짜. 니가 하도 깔아뭉개서.”

“아, 미안. 근데 너 뭔가 딱 안고 자기 좋단 말이야.”

그렇게 황경호와 김형세가 출근을 했다. 강동현은 저도 모르게 그들의 대화에 귀를 쫑긋 세웠다.

‘같이 잤다고?’

강동현은 인상을 팍 찌푸렸다.

‘저 새끼랑은 같이 자주는데 왜 나는 안된다는 거야?’

물론 저놈이랑은 그렇고 그런 것까지 한 건 아니겠지만…. 아니겠지? 내부 접수처에 있던 간호사가 황경호에게 손짓을 했다.

“도은혁 환자 30분 전부터 와서 기다리고 있어요.”

황경호는 그를 돌아보더니 활짝 웃었다. 엄청 반가운 얼굴이다. 강동현한테 저런 얼굴하는 거 처음 봤다. 청소년 포스터에 들어가도 될 정도로 순진무구하고 밝은 미소다.

“안녕하세요, 도은혁 환자님! 일찍 오셨네요?”

“…….”

아주 밝고 씩씩하다… 황경호는 간호사실로 들어가서 유니폼으로 갈아입고 다시 나왔다.

“도은혁 환자님 이쪽으로 들어오세요.”

황경호가 그를 안내했다. 강동현은 4번 치료실 안으로 들어갔다. 선글라스와 마스크를 벗고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내서 황경호한테 내밀었다.

“자.”

“와. 진짜요? 아싸.”

황경호는 봉투를 후 불어 열어보고 신나 했다. 예전엔 강동현한테 받는 게 싫어서 기부까지 해버리던 그였는데, 이제는 그냥 뜯어먹을 수 있는 건 뜯어 먹어야겠다 싶어진 모양이다.

하긴 완전 일석이조, 노다지다. 엿도 먹이고 돈도 벌고. 게다가 강동현은 모르겠지만 황경호는 그의 스케줄에 대해 완전 빠삭했다. 몇 번이라도 가서 비슷한 짓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 인간은 황경호를 어쩌지 못할 것이다.

다른 종류의 싸움들은 본진에서 싸울 때 유리하지만 사람들의 이목을 신경 써야 하는 사회적 배경 혹은 성격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본진에서 싸우면 굉장히 불리하다. 강동현이 황경호의 직장에 와서 진상을 부리면 황경호가 힘을 못 쓰고, 반대로 황경호가 강동현의 본진에 가서 행패를 부리면 강동현은 전혀 막을 수 없었다. 게다가 황경호는 눈 딱 감고 고소라도 먹이려면 먹일 수 있지만, 강동현이 그랬다간 비뇨기과를 다니고 있다는 사실까지 까발려질 테니 불가능했다. 황경호가 마음만 굳게 먹는다면 강동현 같은 건 사실 한 방에 보내버릴 수 있었다.

황경호는 그에게 종이봉투 하나를 넘겼다. 티셔츠와 휴대폰이 들어 있었다. 강동현은 티셔츠를 확인하고 휴대폰을 열어보았다.

“복사한 거 있는 거 아냐?”

“아니에요. 그거밖에 없어요. 그런 치사한 짓 안 해요. 내가 지 같은 줄 아나.”

황경호는 봉투를 고이 접어 바지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강동현은 기가 차서 신이 난 그를 쳐다보았다. 이제 화도 안 난다….

“나한테 돈 뜯어낼 생각이었으면 작년에 실컷 뜯어내시지 그랬어?”

“그러게요. 아깝네요. 제가 돈 달라고 하면 얼마나 줄 수 있었는데요?”

황경호는 치료에 필요한 마사지 기기를 밀고 왔다. 강동현이 의자에 앉았다.

“글쎄… 설마 억대 불렀겠어.”

“와… 진짜 한 번에 몇백만 원 불렀어도 줄 생각이었나 보네. 완전 아까운 짓 했다.”

황경호는 그의 바지를 내리고 초록색 천을 덧댔다. 장갑을 끼면서 생각했다.

‘그거면 그 집도 샀겠다, 진짜. 아, 잠깐… 사진 못하겠구나… 아, 집값 진짜 비싸단 말이야. 그래도 전세 정도는?’

그렇게 즐겁게 생각하다가 문득 정말 몇 달 전까지만 해도 뭐든 암울하게만 생각했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작년에 돈을 받아간 건 물론, 지금도 좋은 기억은 아니지만… 아마 예전의 그라면 돈 같은 건 죽어도 안 받았을 것이다. 빚지는 것 같아서. 사실은 이쪽이 착취당하는 건데도 말이다.

어차피 다시 돌아가도 이놈 억지는 당해내지 못할 테니 그냥 한몫 두둑하게 챙길 걸 그랬다는 농담 섞인 생각까지 들었다. 발전을 했다고 해야할지, 속물적으로 변했다고 해야 할지. 어쨌든 엿 먹이고 돈까지 뜯어내니 기분은 아주 상쾌하다.

“뭐… 텐프로 같은 거 하는 여자들도 그 정도는 안 받겠죠? 역시 남자한테 화대를 그 정도로 쓴다는 건 영 현실성이….”

황경호는 꽁돈을 번 신나는 기분으로 일상을 얘기하듯 말했다. 강동현이 말을 끊었다.

“화대라고 하지 마.”

그는 기분이 안 좋아 보였다. 당연히 좋을 리는 없을 것이다. 협박당해서 돈 뜯긴 거나 매한가지인데. 황경호도 이렇게까지 했는데 굳이 강동현의 성격을 더 긁을 생각은 없었다. 더 긁으면 분명히 저쪽도 기를 쓰고 복수하려고 할 거다. 얌전히 사과할 때 받아야지.

“뭐… 그래도 화대는 화대죠.”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저도 모르게 그렇게 말했다. 강동현이 황경호의 얼굴을 똑바로 보았다.

“12월 31일이랑 4개월 전에 했던 것도 값 쳐줘야 하겠네. 얼마 줄까?”

“아….”

‘진짜 화났네.’

황경호는 상대가 하는 말의 무례함에 화가 나기보다도 먼저 그런 생각이 들었다. 강동현은 황경호를 그대로 똑바로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콘돔도 안 하고 했으니까 후하게 쳐줄 게. 불러.”

“…거시기 내놓은 채로 그런 말 해봤자 웃겨요.”

황경호가 그렇게 말하자 강동현은 인상을 팍 쓰더니 그냥 고개를 돌려버렸다. 그대로 20분가량의 마사지가 끝났을 땐 강동현은 아무런 말 없이 옷을 제대로 입더니 치료실을 나가려고 했다. 그런데 그러다 말고 그는 치료실 문에 이마를 갑자기 박더니 중얼거렸다.

“아, 열 받아….”

그리고 황경호를 그대로 돌아보았다. 황경호는 위험을 감지했다.

“왁…! 잠깐…! 앗…!”

강동현은 도망치는 황경호의 팔을 붙잡아서 강하게 끌어당겼다. 그리고 허리를 왼손으로 끌어안으며 황경호의 오른팔을 같이 안아 그의 손목을 붙잡아 결박했다. 왼손은 그냥 무시했다.

“윽….”

그리고 그의 뺨을 깨물었다. 황경호가 밀어내는 손에 선글라스가 벗겨져 떨어졌다.

“아…! 아파…! 아프다고! 이 변태가…! 진짜 아파…! 윽!!”

황경호는 마구 강동현을 때리다가 결국 진짜 아픈지 그의 팔뚝을 손마디가 하얘질 정도로 꽉 잡고 견뎠다. 강동현은 몇 번이나 같은 자리를 깨물고 빨아서 완전 시뻘건 멍을 만들어 놓았다. 입술을 떼고 내려다보니 황경호의 얼굴이 고통 때문에 시뻘게지고 촉촉해져 있었다.

“아으… 윽….”

입술을 뗐는데도 아픈지 황경호는 눈을 질끈 감고 신음을 냈다. 강동현은 충동적으로 그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응…! 으응…! 음…!”

강동현은 오랜만에 상당히 거칠게 입을 맞추었다. 황경호의 입을 크게 벌리게 해서 혀뿌리부터 끝까지 핥아 올리고 입 안을 핥아댔다. 그를 벽으로 밀어붙였다.

“으응… 응… 하… 잠깐… 아앙…!”

셔츠 속으로 손을 집어넣어 그의 젖꼭지를 엄지로 굴렸다. 엄청 부드럽고 통통한 유륜이 수축하며 유두가 딱딱해졌다. 입을 맞추며 젖꼭지를 빠르게 문지르자 황경호가 몸을 수도 없이 움찔거리며 야한 목소리를 계속 냈다.

“으응…! 하앙…! 읍… 하… 읏….”

강동현은 결박하고 있던 황경호의 오른손을 풀고 그 손으로 그를 안아 올렸다. 서로의 하반신을 붙이고 문지르기 시작했다. 이제 막 새들이 짹짹 우는 아침이었다.

“읍…! 아… 그만… 힉…! 아… 변태애… 아앙….”

젖꼭지 만지는 게 엄청 자극적인 모양이다. 계속 손을 잡아떼려고 했다. 울 것 같다. 강동현은 흥분해서 퍽 하는 소리가 날 정도로 허리를 밀어붙였다. 그도 정신을 못 차리고 황경호의 다른 쪽 뺨을 물었다.

“아… 큭…. 젠장… 으윽….”

“하앗…! 응… 아으응… 싫어… 흑… 그마안… 아파… 앗….”

강동현의 허리짓이 격해지며 치료실 안엔 거친 숨소리가 가득했다. 강동현은 황경호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집중해서 서로의 것을 문질렀다. 강동현의 어깨를 끌어안고 쉴 새 없이 신음을 흘리는 황경호도 어느샌가 눈을 감고 느끼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노크 소리가 똑똑똑 나더니 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시간 지난 것 같은데 얼마나 더 남았을까요?”

그렇게 물으며 고개만 빼꼼 안으로 들이민 신참 간호사였다. 환자로 추정되는 선글라스를 낀 장신의 남자가 곧바로 자신을 밀치며 나가는 걸 돌아보았다. 다시 안을 보니 약간 상기된 얼굴의 선배 간호사가 자기 양쪽 뺨을 두 손으로 감싼 채 약간 어색하게 웃고 있는 걸 발견했다.

“아, 끝났어요. 치료실, 쓰셔도, 됩니다.”

황경호는 말을 하면서 뒷정리를 황급히 하더니 어디서 빼다 박은 듯한 웃는 얼굴로 그를 보면서 치료실을 빠져나갔다.

*

“음~ 학상~ 얼굴이 빨갛구만.”

“아… 제가 원래 홍조끼가 있어서요.”

황경호는 웃었다. 사람들이 얼굴을 볼 때마다 뭐라고 해서 이제 입에 침도 안 바르고 거짓말을 했다.

청담빌딩 의사들과 함께 외지 봉사활동을 와있었다. 원래 겨울에 사람들에게 가장 병이 많이 생긴다. 특히 어르신들한테 문제가 많다. 흔한 봉사활동일지라도 의료 봉사활동은 사람을 정말로 도울 수 있는 일이라 보람 있다. 하지만….

“간호사 학상~ 나이가~ 몇 살이라고~”

이빨도 다 빠진 할아버지가 상담 겸 검진을 받고 있는 중이었다. 그는 황경호의 여기저기를 만졌다.

“스물일곱 살이요, 어르신.”

“좋을 때네~ 피부도 탱탱하고~ 엉덩이도 탱탱하고~ 다 늙어 빠지니까 젊은 애들은 다 좋다니까~ 젖만 있으면 딱 좋겠다~”

“하하….”

그는 처음 자리에 앉을 때부터 끝까지 계속 황경호의 손을 쓰다듬었다. 이강유는 환자들에게 적절한 진단을 내리고 내원해야 할 정도의 환자와 그렇지 않은 환자를 나누고 있었다. 본진인 자기 병원이고 여기고 환자들이 넘쳐났다. 그는 명의였다. 황경호가 어쩌고 있는지 봐줄 여력이 없을 것이다.

“애인은 있고~”

“안타깝게도 없네요.”

“왜~ 내가 학상 나이면 매일 여자들 만나고~ 좋은 거 하며 살았을 거야~ 이렇게~”

할아버지는 왼손의 검지와 엄지로 동그라미를 만들고 오른손 검지로 그사이를 왔다 갔다 하는 제스처를 했다.

“하하….”

“내가 학상 나이에는~ 보자… 일주일에 1명씩 새 여자랑 잤다니까~ 응~ 남자는 인생~ 그렇게 살아야 돼~”

“네. 네.”

“학상은 어떤 여자가 취향인감~ 나는 딱 젖통이 먹을만한~ 그런 여자들이 좋더라고~”

“저는 딱히….”

“왜~ 말해봐~”

황경호는 쭈글쭈글하고 고목나무 껍질처럼 거칠고 마른 손이 계속 자신의 손등을 긁는 것을 견디며 말을 하기 시작했다. 나이 차이가 이 정도까지 되면 절대 뭘 못한다는 말을 못 하겠다.

“음… 자연스러웠으면 좋겠어요. 미녀면 좋겠지만… 굳이 연예인으로 따지자면… 고설아나 임진아 같은 스타일?”

“청순한 스타일 좋아하는구먼~ 난 김혜수~”

할아버지가 요즘 연예인들도 잘 아는 모양이었다. 황경호가 청순가련 스타일이지만 할 말은 하는 캐릭터를 많이 맡았던 연예인들을 말하자 할아버지는 김혜수만 연호했다. 황경호는 말을 이었다.

“굳이 미적인 부분을 보자면 고설아가 더 좋죠. 전 너무 얼굴이 작은 연예인들은 별로던데… 물론 직접 보면 또 엄청 작겠지만요. 이목구비가 커도 성형 많이 한 것 같은 게 아니라 자연스럽고… 피부도 좋고 하얗고. 게다가 고설아는 다리가 정말 예쁘더라구요. 허리, 골반이랑 다리까지 라인이….”

“키 큰 여자들을 좋아하는 구만~”

“남자도 키가 큰 게 훨씬 좋잖아요. 185 넘어가면 진짜 비율도 굉장하고… 강동현도 187인데, 직접 보면 더 멋있어요. 화면으로 볼 때는 멀리서 찍지 않는 이상 잘 모르잖아요. 게다가 신발 신으면 더 커지니까요. 그리고 강동현은 몸도 굉장히 좋거든요. 키가 크니까 사람들이 잘 모르지만, 진짜 몸이 좋아요. 몸이 두꺼워요. 무겁고. 남자다운 게 그런 건가, 라는 생각이 자주 들어요. 얼굴도 요즘 배우들 같지 않게 꽤 선이 굵어서….”

할아버지는 듣다가 버럭 화를 냈다.

“에잇! 왜 이렇게 남자 얘기를 해~ 재미없게~”

“아… 네… 그렇죠….”

황경호도 순간적으로 당황했다. 왜 강동현 얘기를 열심히 하고 있지? 어쨌든 황경호는 괜히 이 할아버지를 상대하고 있다가 잔뜩 만져 지기만 했다. 나이가 많은 게 뭔지 뭐라고 할 수도 없고….

그렇게 진상인 할아버지들만 골라서 상대하다 보니 벌써 오후 5시가 되었다. 진료를 마무리하고 다들 서울로 출발하기 시작했다.

“고생했다, 경호야.”

“아니에요. 선생님은 매달 봉사하러 오시잖아요. 저야 가끔가다 한 번씩인데요.”

“뭐 먹고 싶어?”

황경호는 이강유의 회색 벤츠 S클래스 조수석에 올라탔다. 역시 차가 좋으니 앉는 느낌부터 주행 느낌까지 완전히 다르다. 차 안이 아주 조용하다.

황경호의 주변에 이렇게 비싼 차를 타는 사람은 이강유랑 강동현밖에 없었다. 아마 이 차는 옵션까지 다 하면 거의 3억 가까이 되는 올해 신형으로 알고 있었다. 얼마 전에 청담빌딩 의사 중 한 명이 왕창 긁어서 이강유가 속앓이를 좀 하다 보험처리 하는 수준에서 끝냈다.

강동현은 차가 두 대 있었는데 하나는 짙은 네이비 색의 BMW 세단이었고 하나는 하얀색 벤츠 SUV였다. 둘 다 이강유가 타는 것보다는 확실히 젊은 느낌이 나는 차들이었다.

셋 중 어디든 황경호로서야 탈 때마다 깜짝깜짝 놀랐다. 택시비도 아까워 지하철이나 버스만 타는 황경호 같은 소시민으로서야 정말 억 하는 차들이었기 때문이다.

‘진짜 안 타 본 사람들은 모를 거야… 차가 이렇게 좋을 수도 있구나, 하는걸.’

사실 황경호도 강동현의 차나 이강유의 차를 타보지 않았더라면 몰랐을 것이다. 집도 그렇다. 강동현의 집에서 짧게나마 살아보지 않았더라면 그냥 지금까지 살았던 원룸들 수준에서 크게 벗어날 생각도 못 했을 것이다. 뭐든지 해보지 않고는 말을 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질이란 생각보다 굉장하다.

“와… 여기 비싼 데 아니에요?”

이강유가 꽤 비싸 보이는 한우집 앞에다 차를 주차하니 약간 쫄아서 내렸다.

“그렇게 비싼 편은 아니야. 저번에 먹어보니 맛있더라.”

1인분에 150g이라 적어놓고 사실은 그것보다 훨씬 적게 내놓을 숙성한우 전문집이었다. 1인분에 5만 원이 넘는다. 그것보다 더 비싼 곳도 있을 것 같긴 했지만, 황경호에게는 딴 나라 이야기였다. 종업원이 와서 일일이 다 구워 주었다. 반찬들도 깔끔하고 맛있었다. 보통 소고기의 맛과는 확실히 달랐다. 스테이크를 먹는 느낌인데 강한 양념의 맛이 나는 것은 아니었다. 오묘하게 중독된다. 열심히 먹었다.

“그래도 좀 쉬다 와서 괜찮아? 기껏 쉬었는데 요새 병원이 너무 바빠서….”

이강유가 말을 걸었다. 황경호는 명이 나물에 고기를 싸 먹으며 말했다.

“괜찮아요. 선생님이 큰일이죠. 요새 점심도 못 드시고 계속 진료만 보시잖아요. 화요일 저녁마다 방송도 하러 가시고.”

이강유가 부드럽게 웃었다.

“나 걱정해주는 건 너밖에 없다.”

황경호는 기본적으로 사람들과 같이 있을 때 뭐든 다른 사람에게 맞추는 편이라 인간관계에 크게 굴곡이 없이 살았지만(강동현은 제외다), 사람들과 같이 있는 게 그렇게 좋다고 생각해본 적도 딱히 없었다. 하지만 이강유와 같이 있는 것은 항상 마음이 편했다. 저쪽이 더 능숙하게 주변 사람들을 편하게 해주는 성격이라서 그런 모양이다. 얼굴은 딱 봐도 잘생겼다. 착하고 인텔리한 분위기도 많이 난다. 사실 굉장히 젊은 나이인데도 크게 경거망동하지 않고 차분하다. 그런 분위기가 좋았다.

“그나저나 쌤 이렇게 방송도 나오시고 그러면 막 꾼(?)들 붙을 거 같아요.”

“꾼?”

“뭐… 사람들이 여자를 소개시켜 줬는데 자세히 보니 꽃뱀이더라, 같이 사업하자고 주변에서 꼬드긴다든가, 좋은 투자처 있다면서 막….”

황경호가 그렇게 말하자 이강유가 웃었다.

“넌 어린 게 어떻게 그런 걸 잘 아냐. 뭐… 없다곤 못 하겠지만 나야 더 욕심은 없으니까. 확장 개원이나 해서 환자들 좀 더 많이 볼 수 있었으면 하는 거 정도?”

황경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강유비뇨기과 병원 식구들의 프로의식이란 정말 굉장했다. 이강유는 황경호의 접시에 고기를 올려주었다.

“나야 이제 나이 꽉 찼으니까 괜히 다른 거 신경 쓰다 이도 저도 안 될까 봐 그게 무섭다.”

“왜요? 쌤 여자들한테 인기 많잖아요?”

황경호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이강유도 좋은 집안에서 인텔리하게 자란지라 한국의 보수적 관혼상제 개념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그런 남자에게 결혼은 웬만하면 해야 하는 것이었다.

이강유는 젊고 잘나가는 의사에다가 인물도 좋고 키도 컸다. 미혼이라 나이 찬 딸을 가진 집에서 중매도 꽤 주선해주고 있었고 요즘은 방송도 타서 더 그랬다. 예전에 황경호와 같은 대학을 나온 간호사도 소개시켜준 적이 있었다. 여자가 없어서 못 만날 팔자는 아니라는 소리다.

“니가 날 몰라서 그러는데… 내가 은근히 여자가 안 따라….”

“네?? 금시초문인데요?”

“나도 궁금하다….”

S대 의대를 다닐 때도 미남 의대생으로 소문이 자자했지만, 원체 바른 성품에 FM인데다가 의외로 연애 스킬은 부족해서 소위 ‘아쿠아리움’ 같은 존재였다. 게다가 원체 이미지가 깔끔하고 나이보다 훨씬 어른스럽다 보니 다들 분명히 애인이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든가, 아니면 알아서 잘하겠지, 라고 생각하고 마는 것이다. 잘난 남자다 보니 여자 보는 눈도 그렇게 낮지도 않고. 이러한 사실을 모르는 황경호로서야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을 뿐이었다. 황경호는 혀를 내둘렀다.

“우리나라 여자들 정말 눈 삐었나 보다….”

“아니, 뭐… 내가 여자를 못 만난다는 건 아닌데. 바쁘니까 여자를 꼬시러 갈 시간도 없다.”

“아… 진짜 그건 그렇겠네요, 쌤… 지금은 만나는 분 없으신 거예요? 제가 소개라도 시켜드릴까요? 선생님이랑 스펙은 안 맞아도 그냥 젊은 애들은 몇 명 있기는 한데….”

“니 친구들이면 미희랑도 알 거 아냐. 너도 그럼 미희 얼굴 보기 더 껄끄러워질 텐데.”

“아….”

이강유가 그렇게 말하자 그건 그렇지, 하며 황경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가 너무 잘나고 거기에 성격까지 좋으면 이런 문제가 있을 수도 있구나…. 진짜 우리나라 여자들은 다 바보다.

“그래도 또 그러다가 생기고 하는 거겠죠.”

“그래… 넌 만나는 애 있어? 내가 10대, 20대 때 제일 후회하는 게 연애 많이 안 해본 거야. 너도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많이 만나.”

이강유가 그렇게 말했다. 황경호가 하하, 웃었다.

“그것도 서로 좋아야지 되는 거죠.”

“그건 그렇다. 그게 문제지.”

그렇게 얘기를 하다 보니 의외로 이야기가 길어져서 술도 한 잔 같이 걸치게 되었다. 이강유가 황경호에게 끝까지 택시비를 쥐여줘서 어쩔 수 없이 받았다.

“다음에는 너 아는 형이 한다는 가게도 가봐야겠네. 거기서 회식 자주 한다며? 그렇게 맛있다는데 한 번도 못 갔네.”

“네. 다음에 꼭 같이 가요. 대리기사 아직 안 왔어요?”

“거의 다 왔대. 아, 왜 기다려. 먼저 가, 먼저 가. 오늘 진짜 수고했다.”

“아니에요. 쌤 먼저 가시는 거 봐야죠. 쌤 술도 약하시면서.”

그렇게 실랑이를 하고 있다 보니 대리기사가 먼저 왔다.

“오늘 진짜 수고했다. 월요일에 보자.”

이강유는 황경호의 머리와 얼굴을 쓱싹쓱싹 쓰다듬고는 차에 탔다. 이강유가 얼굴을 쓰다듬어주는 건 항상 기분이 좋았다. 잠깐 음미하듯 가만히 있었다. 어쩐지 술도 오랜만이라 한 잔 더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 택시를 잡아서 타고 로 향했다. 회식을 할 때 빼고는 거의 저녁 시간에 갔던지라 오랜만에 상당히 늦은 시간에 가는 것이었다.

“응? 경호야? 오늘 무슨 봉사활동인가 간다며.”

“아, 말도 마. 거기 있던 어떤 변태 할아버지가 얼마나 만지…던…지….”

“…….”

원래 여기도 강동현 때문에 처음 오게 된 가게였고… 간간히 강동현도 와서 술을 마신다는 걸 눈치채고 있었지만, 황경호는 일반적인 직장생활을 하는 사람이었고 저쪽은 연예인이라 타이밍이 아예 달라 마주칠 일이 없었다. 저번에 아침에 그러고 나서 처음 보는 것이었다. 황경호는 얼굴이 약간 빨개졌다. 인상을 확 찌푸리곤 바(bar)형 테이블에서 그 인간이랑 적당히 먼 곳에 앉았다.

“뭐야. 둘이 또 싸웠어?”

김태형이 물었다.

“아니….”

싸우고 말고 할 게 없는 사이라니까. 강동현은 여전히 약간 화가 나있는 상태인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지가 화가 날 게 뭐가 있다고… 내가 틀린 말 했나.’

황경호는 따뜻한 사케에다가 나베를 안주로 시켰다. 밖이 추웠다. 술부터 나와서 한잔하니 금세 몸이 따뜻해졌다. 아까 한잔하고 와서 그런가, 술맛이 아주 기분 좋게 느껴졌다.

“너 한잔하고 왔구나?”

“응. 그거 봉사활동 가는 거 우리 건물에 있는 의사들 다 가는 거거든. 근데 우리 선생님 가면 항상 일손이 딸려서 간호사들끼리 돌아가면서 같이 가고 있어. 선생님이 소고기도 사줬다. 완전 맛있었어.”

“돈도 많이 버는 양반들이 그런 것도 잘하고 대단하네.”

“형 우리 원장 선생님이랑 동갑이야.”

“엑?! 진짜?”

이신현이 깜짝 놀라서 되물었다. 이강유는 방송도 타고 있기 때문에 TV에서 본 적이 있었다. 황경호가 웃었다.

“우리 쌤 완전 잘생겼지? 젊지? 인기도 엄청 많아.”

“보니까 S대 의대 나왔던데 대단하다… 아니, 세상에 어떻게 그렇게 다 가진 사람이 있을 수가 있지?”

“머리도 엄청 좋고 일도 진짜 열심히 하셔. 공부도 많이 하시고. 보고 있으면 저러니까 사람이 잘 될 수밖에 없구나, 싶다니까. 아는 사람들 중에서 제일 존경스러워.”

황경호가 마치 자기 일처럼 자랑을 했다. 이신현이 물었다.

“근데 회식할 때마다 못 봤던 거 같은데.”

“응. 올해 좀 선생님이 일이 많아서… 하긴, 이런 거 보면 확실히 사람이 다 가질 순 없는 건가 싶기도 하네.”

“왜?”

김태형이 물었다.

“선생님 올해 삼재래. 병원에 별별 일이 다 있었다니까.”

“아.”

황경호에게서도 몇 번 들은 적이 있었다. 그 병원에서 일어나는 일들이란 다른 사람들은 도저히 상상도 못 할 만한 것들이 많았다.

“말도 마. 비싼 새 차도 왕창 긁었지. 진상 환자들 때문에 엄청 고생했지. 선생님 살 빠지는 거 보여서 진짜….”

황경호가 절레절레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김태형이 문득 황경호의 볼을 만졌다.

“근데 넌 얼굴이 또 왜 이래? 또 얼굴에 뭐 나서 이런 거야?”

얼굴에다가 반창고를 붙여놓은 황경호의 얼굴을 잡아서 이리저리 보았다. 황경호는 그의 손을 밀어내었다.

“아, 별거 아니야.”

“넌 뭐가 올라오는 피부가 아닌 거 같은데… 잠깐 보자. 너 약은 바르고 이래 놓는 거야?”

“아, 떼지 마. 떼지 마. 아직 아파.”

“다친 거야?”

“아니….”

황경호는 어물쩍하게 말을 흐렸다. 한 손으로 제일 심한 쪽 뺨을 가렸다. 그리고 뭔가 억울해서 강동현 쪽을 노려보는데 딱 눈이 마주쳤다. 읏… 황경호는 얼굴이 또 빨개질 것 같아서 그냥 술을 빨리 마셨다. 따뜻한 술이다 보니 술기운이 금방 돌았다. 강동현은 무시하고 계속 이야기를 이어갔다. 봉사활동을 갔다 온 얘기를 한창 했다.

“아, 진짜 우리나라는 나이 많다고 정신 차리는 것도 아니야. 할아버지들 성희롱, 성추행 장난 없어.”

“그러고 보면 너 은근히… 남자앤데도….”

김태형이 황경호의 머리를 슥슥 쓰다듬었다.

“부들부들해서 만질만 하단 말이야.”

“아, 뭐야… 그런 거 때문인 거야? 어쩐지 옛날부터 그렇게 아저씨나 할아버지들이 만지더라니…”

“그래요?”

이신현도 와서 황경호의 머리카락을 만져보았다.

“하긴 형 피부도 좋고.”

이신현이 겸사겸사 황경호의 피부도 만져보았다.

“아까 그 할아버지는 완전… 자기는 이제 다 늙어서 젊은 애들이라면 다 좋다고 나한테 가슴만 더 있었으면 좋겠다고 이러는 거야.”

“아이고, 어르신 나이 먹고 주책이네.”

“자기는 오로지 김혜수란다.”

“큭큭. 아, 할아버지 웃긴다.”

이신현이 웃었다. 그는 문득 재미있게 얘기하다가 강동현을 돌아보았다.

“형님! 형님도 같이 얘기해요. 어차피 다 같이 아는 사인데.”

“그러게. 너희 둘 친하면서 왜 이렇게 내외하냐.”

김태형과 이신현의 말에 둘 다 약간 움찔하며 동작을 멈추었다. 그리고 저도 모르게 서로 바라보았다가 복잡한 표정이 되었다.

“에이. 싸운 거 있으면 풀고 그래요. 뭘 또 그렇게 서먹하게 있어요.”

황경호와 강동현은 의자 2개를 사이에 두고 앉아 있었다. 이신현의 재촉에 마지못해 강동현이 잔을 들고 왔다. 여기는 이쪽한테도 낯설지 않은 곳이고 저쪽에게도 낯설지 않지만, 그렇다고 둘 다 본진이라 하기도 애매한 장소였다.

“…….”

“…….”

그대로 둘 다 입을 다물고 한마디도 하지 않자, 김태형과 이신현이 둘을 번갈아 보다가 눈빛을 주고받았다. 왜 이래.

“뭐, 음식이라도 더 해줄까, 동현 씨?”

“아. 소주 한 병 더 주세요. 안주는 과일로 주세요.”

강동현은 술이 강한 편이라 한 번 마시면 꽤 마시는 편이었다. 그런데 옆에서 황경호가 도구리를 자작해서 계속 마시자 제지했다.

“그만 마셔. 술도 약한 게.”

“남이사 마시든 말든.”

황경호는 강동현의 손을 피해서 한 잔 털어 넣었다. 따뜻한 술의 온도와 알코올의 화기가 식도를 따라 내려가는 게 느껴졌다. 강동현이 계속 못마땅하다는 듯이 쳐다보자 황경호가 결국 째릿 노려보았다.

“뭐.”

“너 얼마나 마셨어.”

“아, 뭔 상관이야.”

“그만 마시라니까.”

황경호가 픽 웃었다.

“왜? 전엔 더 먹여서 재미 좀 보시더니.”

강동현이 인상을 확 찌푸렸다. 뭐라고 반박을 하고 싶은 것 같으나, 하지 않았다. 그는 그대로 그냥 술이나 마셨다. 황경호는 흥, 하고 웃었다. 그대로 둘 다 술만 마셨다. 별 얘기도 없었다. 손님도 없는 가게 사람들은 그 둘의 눈치만 슬슬 보았다. 황경호는 문득 자신이 그들을 불편하게 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한 번도 이런 적이 없었는데 말이다.

“아… 이제 가봐야겠다. 진짜 많이 마셨네….”

괜한 호승심에 주량보다 훨씬 많이 마신 황경호였다. 자리에서 일어나니 바로 핑그르르 돌았다. 어이쿠! 하며 나머지 사람들이 그를 붙잡았다. 강동현도 그의 팔을 붙잡았다. 강동현은 짜증이 잔뜩 섞인 한숨을 푹푹 쉬더니 자기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거 둘 다 계산해주세요.”

강동현은 카드를 내밀면서 황경호를 제대로 부축했다. 황경호는 가만히 있다가 갑자기 그의 어깨를 퍽퍽 치기 시작했다.

“이 나쁜 놈! 변태! 개새끼!”

쌓인 게 많은 모양이었다. 강동현은 잔뜩 성가신 얼굴이었다. 김태형도 이렇게까지 취한 황경호는 본 적이 없어 눈이 휘둥그레 했다.

“진짜 많이 취했네, 경호… 물 좀 먹여.”

이신현이 컵에 물을 따라서 가져왔다. 강동현이 그의 입술에 물컵을 대고 물을 마시게 하였다. 고개를 약간 치켜들고 촉촉하고 붉은 얼굴이 가깝다. 강동현은 더 성가시다는 얼굴이 되었다. 김태형은 계산을 다 하고 영수증이랑 함께 카드를 돌려주었다.

“형, 형. 괜찮아? 집에 갈 수 있겠어?”

“됐어. 내가 데리고 갈게.”

강동현이 그렇게 말하며 그를 부축해서 밖으로 나갔다. 술을 마실 생각으로 차를 끌고 오지 않았기 때문에 택시를 잡아야 했다. 이 시간엔 택시가 잘 잡히지 않는다. 모바일 어플을 이용해 택시를 부르고 황경호를 똑바로 세우려고 했다. 아까까지만 해도 강동현을 막 욕하면서 때리던 그는 이제 잠잠해졌다. 잠든 모양인지. 비틀거리는 걸 끌어안아서 가만히 있었다.

이렇게 가만히 끌어안고 있을 수 있는 건 그가 정신을 못 차릴 때뿐이다. 목덜미에 닿은 황경호의 얼굴이 따끈따끈했다. 강동현은 그를 끌어안고 가만히 있다가 문득 황경호의 뺨에 있는 반창고를 슬쩍 떼내어 보았다. 잇자국에 시뻘건 멍이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저도 모르게 픽 웃음이 나왔다.

‘뭐 났다고 둘러대는 모양이지?’

여기가 사람들이 많이 안 다니는 곳이라서 다행이다. 강동현은 자신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잠든 황경호의 머리카락과 귓가에 얼굴을 묻고 숨을 들이켰다. 따뜻하고 좋은 냄새가 났다.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부드럽다. 다른 사람들은 쉽게 만지게 해주면서 강동현은 안 되는 거니까 말이다, 이런 건….

[왜? 전엔 더 먹여서 재미 좀 보시더니.]

‘이것도 그런 거라고 하려나….’

강동현은 황경호를 한참 그렇게 끌어안고만 있었다. 그리고 택시가 오자 데리고 탔다. 강동현의 고급 아파트에 도착했다. 집으로 데리고 올라갔다. 침실로 데리고 가서 그를 눕혔다. 일단 불편해 보이는 건 벗겼다. 팬티랑 긴 팔 티셔츠만 남기고 나머지는 다 벗겨서 대충 선반 위에다 올려 두었다.

강동현은 침실에 있는 욕실로 들어가서 씻기 시작했다. 다 씻고 나오니 3시다. 물을 한 잔 마시고 침대에 누웠다. 먼저 누워 있던 사람을 끌어당겨서 껴안았다.

‘재미 보는 셈 치지, 뭐.’

그대로 머리카락에 얼굴을 묻고 눈을 감았다.

*

‘아, 목말라….’

어디선가 좋은 냄새가 났다. 약간의 향수 냄새가 섞인 살내음… 정말 향기로웠다. 피부가 맞닿은 느낌도 좋다. 근데 무겁다.

‘뭐지. 이상하네….’

금방까지 떠올린 것들은 황경호에게 굉장히 생소한 것들이었다. 그런데 기억에는 있었다. 눈을 떴다. 주변을 둘러보았다.

“…….”

그림에서 튀어나온 것 같은 미남자가 황경호의 어깨를 베개 삼아서 베고 자고 있었다. 온몸에 그의 팔다리가 올라와 있었다. 그는 알몸인 것 같았다. 황경호는 깜짝 놀라서 벌떡 일어나서 온몸을 더듬어 확인해 보았다. 옷이 좀 벗겨져 있기는 했지만, 알몸은 아니었다. 몸의 느낌도 평소와 별반 다를 거 없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앗…!”

그때 황경호의 허리에 올라와 있던 강동현의 팔이 그를 안아 다시 침대에 눕혔다. 강동현은 그의 허리를 뒤에서 끌어안았다. 황경호의 뒷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아무 짓도 안 했어… 그러니까 좀만 더 자자….”

강동현은 그러고 진짜 잠들어 버렸다. 황경호는 황당해서 황급히 어젯밤을 기억해보았다. 이강유와 밥을 먹고 술을 한잔하고, 좀 모자라서 김태형네 가게에 가서 술을 더 마셨는데… 어느 순간부터 희미하다. 술을 진짜 많이 마셨다. 황경호는 남자를 밀어냈다. 그리고 욕실로 들어갔다.

‘아, 머리야….’

입이 말랐다. 외풍이 들지 않는 집이니 황경호의 원룸에서 자는 것보다는 백번 나았지만, 그래도 아침에는 샤워가 필요했다. 특히나 술을 마신 날은. 일단 씻고 나와서 강동현의 옷장을 뒤적거려서 일단 흰색 티셔츠를 하나 꺼냈다. 세탁소 비닐에 싸여있어 갓 세탁된 물건이란 걸 알 수 있었다. 그걸 일단 입고 속옷을 찾기 시작했다.

“아… 역시 있네.”

황경호는 자신의 속옷들을 찾아냈다. 그러니까 지금까지 강동현이 들고 간 자신의 속옷들을 말이다. 황경호의 팬티로만 커다란 서랍 반이 찰 정도였다. 그동안 엄청나게 들고 갔구나 싶었다. 정말 어떤 면에서는 너무 근면(?)한 남자라서 감당이 안 된다. 황경호는 그중 눈에 익은 하나를 꺼냈다.

‘근데 이거 입어도 되는 건가… 분명히 이거….(?)’

황경호는 윽, 하고 손가락을 집게처럼 해서 자신의 팬티를 멀찍이 들고 쳐다보았다. 아주 미심쩍다….

강동현 때문에 약간의 결벽증에 걸린 황경호는 전날 입었던 옷이나 속옷을 다시 입지 않았다. 분명히 이것도 깨끗하게 세탁되어 있는 것 같았지만 이걸로 뭘 했을지 눈에 환해서 선뜻 입지를 못하겠다. 그때 반쯤 열려있던 미닫이문이 더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새것도 있는데 줄까?”

뒤를 돌아보니 강동현이 아직 잠이 덜 깬 얼굴로 문틀에 기대어 서있었다. 그의 눈이 잠깐 전체적으로 몸을 훑어보는 게 느껴졌다.

‘이래서 여자들이 남자들 싫어하는 거야….’

황경호는 상의가 길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미리 골라 둔 바지를 들고는 물었다.

“어디 있는데요?”

강동현은 드레스룸 안으로 들어오더니 방 한구석에 놓여있는 쇼핑백을 가져왔다. 새카맣고 두꺼운 종이로 만들어진 고급스러워 보이는 광택에 핑크색으로 적혀져 있는 이름 모를 브랜드… 강동현이 안에 있는 상자를 꺼내서 내밀었다. 왠지 약간 낯익은 것 같은데 이 상자… 그렇게 생각하며 상자를 열었다. 잔뜩 팬티가 들어 있었다. 황경호는 바로 뚜껑을 닫고 그걸로 강동현을 때렸다.

“내가! 이런 거! 싫다고! 했지!!”

“아, 잠깐만…! 그중에 잘 보면 니 마음에 드는 것도 있을 수도 있잖아! 다 새 거에 비싼 거라고!”

황경호가 때리는 걸 멈추었다. 그대로 잠깐 강동현을 노려보고는 상자를 드레스룸 가운데 있는 선반에 올렸다. 그리고 한숨을 좀 쉬고 상자를 열었다. 그리고 검지손가락 하나로만 이리저리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강동현도 그 앞에 서서 가만히 황경호가 하는 걸 보고 있더니 손을 뻗어서 커다란 진주가 주렁주렁(?) 달린 빨간 팬티를 꺼냈다.

“이거 한 번만 입어주면 안 돼?”

황경호는 인상을 팍 썼다.

“당연히 안 된다고 할 거 같은 건 안 물어보면 안 돼?”

“아, 진짜 치사하다… 닳는 것도 아닌데. 사준 사람 성의도 한 번 생각… 알았어. 그만할 게.”

황경호는 겨우 안이 보이지 않는 천의 면적이 좀 넓은 삼각팬티를 찾아내었다. 빨간색도 아니었다. 황경호가 곧바로 입으려고 팬티를 잡고 허리를 숙이다가 강동현을 올려다보았다.

“계속 그렇게 보고 있을 거야?”

“보고 있으면 안 돼?”

화났던 거 같더니 화는 풀린 건가? 황경호는 약간 인상을 썼다가 그냥 팬티를 입었다. 그리고 바지를 집어서 바지를 입으려고 하는데 허리 쪽이 서늘한 느낌이 들었다. 강동현이 티셔츠를 들어 엉덩이를 보고 있었다. 그나마 천 쪼가리가 있다고 판단한 팬티마저도 입으니까 아슬아슬하다. 황경호가 진심이냐는 듯이 돌아보았다.

“너도 전에 중간에 그만둬서 아쉬웠을 거 아냐.”

강동현은 확실히 꼴린 모양이었다. 엉덩이에서 눈을 못 뗐다. 황경호는 그의 손을 뿌리치며 피했다.

“아니거든요!”

그렇게 서로 못마땅한 얼굴로 쳐다보고 있다가 강동현이 아, 하고 뭔가 깨달았다는 듯 말했다.

“또 자위하는 거 보여줄까?”

저번처럼 또 팬티만 입고 어슬렁거리고 있던 강동현이 곧바로 자신의 속옷 안으로 손을 쑥 집어넣었다.

“미쳤…!”

황경호가 기겁을 하며 바지를 입으며 움직이려고 하다가 앞으로 넘어졌다. 황경호는 황급히 뒤로 돌아앉아 강동현을 경계하면서 바닥을 밀어 뒤로 도망쳤다. 강동현은 한 손으로 바닥을 짚으며 황경호의 쪽으로 기어왔다.

눈을 마주치며 다가오는데 안력이 강해서 맹수가 다가오는 것처럼 긴장하게 되었다. 황경호는 저도 모르게 티셔츠를 꽉 움켜쥐고 아래로 내렸다. 강동현은 어느 정도 다가와서는 황경호의 한쪽 발목을 잡아 들었다. 그리고 종아리에 코를 묻고 냄새를 맡았다.

“아… 내가 산 바디젤 냄새나네. 조금 다르지만….”

그러면서 무릎으로 서서 자신의 커다란 성기를 한 손으로 주무르기 시작했다. 겁먹은 건지 기대를 하는 건지 모를 얼굴로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는 황경호를 내려다보았다. 강동현은 초조한 듯 야한 얼굴을 했다. 황경호는 서서히 얼굴이 빨개지기 시작했다.

강동현이 발목의 복숭아뼈를 물었다. 황경호가 움찔했다. 핥으면서 옆으로 황경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I화장품 광고보다 훨씬 질이 안 좋았다. 진짜 잠에서 막 깬 강동현이 정말 하려고 상대에게 저런 눈빛을 보내는 거였기 때문이다.

강동현의 것이 점점 서기 시작하며 그의 표정이 아주 섹시해졌다. 황경호가 자신의 다리를 잡아당겨서 둘 다 끌어안았다. 강동현은 두 손으로 자신의 것을 잡았다. 한 손으로 기둥을 움켜쥐고 다른 손바닥으로 귀두를 거칠고 빠르게 비볐다.

“큭… 으… 하아….”

그가 눈을 지그시 감으며 잠깐 턱을 치켜들자 그의 단단하고 쭉 뻗은 목에 눈이 갔다. 흘러내리는 땀방울, 입맛을 다시며 찡그리는 눈썹. 분명히 같은 눈, 같은 코, 같은 입을 가지고 태어난 사람인데 왜 이렇게 다른 걸까. 그의 표현은 언제나 피부를 넘어서 닿는다. 이쪽까지 야해지는 느낌….

“하하… 너 완전 야동 처음 보는 열두 살짜리 같다.”

강동현은 토마토처럼 빨개져서 자신에게서 눈을 못 떼는 황경호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미소가 아름다운 남자 배우 1위로도 꼽혔던 몸이었다. 거기에 TV나 화보로도 잘 드러나지 않는 섹슈얼한 어필과 섹시한 몸이었다. 황경호는 그렇게나 좋아하는 ‘배우 강동현’의 돈 주고도 못 볼 쇼를 전용으로 보고 있는 것이었다.

강동현은 한 손으로 자신의 것을 주물거리며 한 손으론 바닥을 짚어 황경호 쪽으로 좀 더 기어갔다. 그가 야무지게 끌어안고 있는 무릎에다가 입을 맞추었다.

“키스할래…?”

일부러 이러는 걸까 싶을 정도로 섹스어필을 하며 은근한 눈빛에 섹시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바로 코앞에서 서로의 눈을 바라보고 있었다. 완전 선수다… 황경호가 입을 꾹 다문 채 그의 얼굴과 그의 것을 번갈아 보자 강동현이 소리를 내며 한 번 웃고는 부드럽게 코를 마주치곤 뺨을 지나 황경호의 목덜미에 코를 대고 숨을 들이켰다.

“아… 너 진짜 뭘 먹길래 이런 냄새가 나는 거야?”

“네… 네?? 무, 무슨 냄새요….”

황경호가 완전 쫀 목소리로 물으며 강동현이 냄새를 맡고 있는 자신의 목덜미를 손으로 가렸다. 강동현은 그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몰라… 그냥 니 냄새… 큭….”

강동현은 황경호의 머리카락에도 얼굴을 묻었다가 목덜미 냄새도 맡고 하다가 황경호의 이마와 자신의 이마를 맞댄 채 한참 자신의 것을 쥐고 세게 흔들었다.

“으윽…!”

그리고 강동현이 사정하기 시작하자 황경호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움찔했다. 상기된 강동현의 얼굴이 아름다웠다. 눈을 감고 있는 그의 속눈썹이 간지럽다. 강동현은 한참을 짐승처럼 신음을 흘렸다. 그리고 한참 후 숨을 거칠게 몰아쉬면서 약간 정신이 든 강동현이 세상에서 제일 야한 거 같은 얼굴로 황경호에게 말했다.

“정말 알 수가 없네… 하아….”

궁지에 몰린 쥐처럼 쫄아있는 황경호를 보면서 탈력감에 무너지는 자세를 겨우 유지했다. 강동현은 황경호의 얼굴을 천천히 훑어보았다.

“내가 자위하는 건 괜찮지만 내가 널 만지는 것도 싫고 니가 날 만지는 것도 싫고….”

강동현은 눈은 크게 뜬 채 굳어 있는 황경호를 관찰했다.

‘확실히 좋아하는 것 같은데, 감은….’

겁먹은 것 같기도 하고. 황경호의 상태를 그렇게 판단했다.

‘부끄러운 거야, 뭐야. 때려서 발기도 하고 내가 자위하는 거 보는 거 좋아하고… 매일 나한테 변태, 변태 하는데….’

강동현은 상대의 얼굴에 코가 닿을 것 같은 거리에서 물었다.

“만약에 아무 조건 없이 나 만져도 된다면 나 만지고 싶어?”

“…조, 조건이 없다는 게 무슨 뜻이에요?”

“예전처럼 그런 조건 없이. 내가 건드리지도 않고.”

“…….”

강동현은 미소를 지으면서 가까이에서 속삭였다.

“나 만지고 싶어?”

황경호는 침을 꿀꺽 삼켰다. 새빨간 토마토 같은 얼굴에 눈만 크게 뜨고 있던 그가 당황스러운 얼굴로 눈을 내리깔았다. 몇 번을 뻐끔거리더니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그리고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

“…꼭 이렇게까지 해야 하냐?”

“댁이 지금까지 한 전적을 생각해보세요.”

강동현은 한숨을 쉬었다. 그의 손목이 등 뒤로 묶여 있었다.

“아, 불편한데.”

“그럼 말든가.”

“알았어.”

강동현과 황경호는 거실에 있는 카우치 위에 앉아있었다. 황경호가 기어코 바지는 입혔다. 황경호는 그 앞에 앉았다. 둘 다 서로를 바라보며 옆으로 앉아 있었다.

“진짜 만져요?”

황경호가 심호흡을 하곤 말했다.

“새삼스럽게. 처음 만지는 것도 아니면서.”

황경호는 끝까지 갈등하다가 슬쩍 강동현의 얼굴을 만졌다. 강동현의 눈동자가 그 손을 따라왔다. 강동현의 피부는 여자 피부처럼 엄청 부드럽거나 촉촉하다는 느낌은 아니었지만… 신기했다. 이렇게 가만히 강동현의 얼굴을 볼 수 있는 건 스크린 속에서밖에 없었다. 그의 뺨을 쓰다듬어보았다. 황경호는 사람을 앞에 둔 게 아니라 무슨 조각상을 만지는 것 같은 느낌으로 강동현을 만지고 있었다.

“근데 난 왜 만지고 싶은 거야?”

“네?”

강동현의 물음에 황경호가 손을 멈추었다. 그는 잠깐 고민을 하더니 대답했다.

“신기해서요?”

“뭐가?”

“몰라요.”

황경호는 애매하게 대답하고는 다시 강동현을 만지기 시작했다. 야하게 만져줄 거라고 기대도 안했다만… 강동현은 황경호가 가만히 자기 얼굴을 바라보면서 눈썹이나 코나 귀를 색기 없는 손길로 그냥 확인하듯이 만지자 약간 인상을 찌푸렸다. 그래도 눈을 마주치면서 가만히 보고 있으니 뭔가 혹한다. 색기도 없는 손길이고 상대는 전혀 그러고 싶은 눈치가 아닌데도.

‘얘도 이제 나랑 하면 같이 기분 좋아지는 것 같은데… 항상 나만 하고 싶어 한단 말이야.’

간호사들은 대부분 손이 굉장히 부드럽다… 거기다 잠깐 뺨을 부비며 눈을 마주치니 황경호가 못마땅하다는 듯이 인상을 썼다.

“그렇게 쳐다보지 마요.”

“그렇게 쳐다보는 게 뭔데?”

황경호는 강동현을 무시하고 그의 목과 어깨를 만져보기 시작했다. 뭔가 수치를 재듯이 두 손으로 근골격을 하나하나 만져본다. 팔, 팔꿈치, 팔뚝, 손… 손을 만지려고 하니 거의 껴안는 듯이 되었다.

‘아, 못 참겠다….’

강동현은 묶인 손으로 황경호의 손을 잡으며 그의 귓가에 코를 묻고 숨을 들이마셨다. 황경호가 질색을 했다.

“아! 하지 말라니까!”

강동현이 꿍얼거리듯이 변명했다.

“불가항력이었어….”

쳇. 강동현은 뚱한 얼굴로 카우치에 퍽 등을 기대었다. 그러자 황경호가 약간 당황하더니 말했다.

“바로 해요.”

강동현은 그를 물끄러미 보았다.

“니가 이리 와.”

그러자 황경호가 그냥 엉덩이를 끌고 강동현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강동현은 카우치에 바로 등을 기대고 있었고 황경호는 그의 옆에 앉아서 그의 옆모습을 보고 있었다. 황경호는 꽤 집중해서 강동현의 옆모습도 보았다. 황경호는 그의 콧날을 옆에서 다시 만져보았다.

‘깨물고 싶다.’

강동현은 자신을 만지고 있는 황경호를 관찰했다. 예전엔 강동현이 만지면 흥분하기는커녕 싫어하기만 했다. 이제는 흥분도 하고 잘 느끼고 휩쓸려서 같이 할 때도 있지만, 역시 아직도 강동현이 만지는 건 싫어했다. 억지로 강동현을 만지게 하는 것도 싫어했다. 하지만 이렇게 가만히 보고 있거나 뭔가 현물을 확인하듯(?) 만지는 건 싫지 않은 모양이다.

‘갈피를 못 잡겠네….’

진짜 성가시다. 까다롭다. 황경호가 가슴근육을 쿡쿡 손가락으로 찌르고 복근을 만져보았다. 간지러웠다. 만지고 싶어서 좀이 쑤셨다. 점점 강동현의 표정이 죽을상이 되어가자 황경호가 물었다.

“왜 그래요?”

“아니이….”

강동현의 목소리에는 이미 짜증이 한껏 섞여있었다. 그는 카우치에 머리를 푹 기대고 고개만 돌려서 황경호의 얼굴을 비스듬히 올려다보았다.

“뭔가 더 힘들어. 답답해.”

“뭐가요? 손 때문에요?”

시계를 보니 삼십 분이나 이러고 있었다. 황경호는 강동현에게서 떨어졌다.

“이제 됐어요. “

황경호는 그의 손목을 풀어주었다. 그리곤 침실로 가서 자기 옷을 가지고 나왔다.

“그럼 저 가볼게요.”

나와 보니 강동현은 뭔가 끈 풀린 인형 마냥 팔을 아무렇게나 하고 카우치에 얼굴을 박고 있었다. 황경호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그에게 물었다.

“괜찮아요? 왜 그래요?”

“…….”

강동현은 느릿하게 고개만 돌려 황경호의 얼굴을 보았다. 그리고 다시 카우치에 얼굴을 박았다.

아까 자위하는 거 보여주면서 그냥 건드릴 걸 그랬다… 아마 그때 건드렸다면 그냥 같이할 수 있었을 텐데. 그는 분명히 또 휩쓸렸을 것이다. 강동현을 때리거나 자위하는 것을 보면 황경호도 분명히 흥분을 했으니까 말이다. 물론 하고 나면 휩쓸린 걸 굉장히 후회하고 싫어했지만.

‘아, 그래도 그냥 할걸….’

만지고 싶다. 안고 싶다. 야한 얼굴을 보고 싶다. 저렇게 색기 없는 얼굴로 나를 보게 하고 싶지 않다. 빨개져선 원망도 하고 욕도 하고 울면서 나에게 안기는 걸 보고 싶다. 괴롭히고 싶어. 넣고 싶어. 나한테 박히면서 가는 걸 한 번만 더 보고 싶다.

‘예민해서… 잘 느끼니까. 그날 밤도 그랬어. 아, 젠장. 진짜 덮치고 싶다….’

“…그래. 잘 가.”

카우치에 얼굴을 박은 채 웅얼거리듯이 말했다. 황경호는 이상하다는 듯이 잠깐 보고 있다가 현관으로 향했다. 현관 앞에서 다시 인사말을 했다.

“네. 병원에서 뵐게요.”

밖으로 나갔다.

*

“와… 이 화장품 회사 강동현 아예 벗기기로 마음을 먹었구나….”

지상파 CF로는 절대 나오지 못할 수위다. TV에서 강동현의 눈만 흑백으로 잠깐 클로즈업했다가 여자 모델이 그의 온몸에 입을 맞추듯 그녀의 입술과 강동현의 몸에 남은 립스틱을 색깔별로 나타냈다. 그의 뺨, 콧등, 쇄골, 가슴, 배. 유투브에는 6분짜리 동영상도 있었다. 그냥 작은 화면으로 보다가 잘못하여 전체화면 버튼을 클릭했는데 갑자기 강동현의 눈이 고화질로 클로즈업되었다.

“…….”

깜짝 놀랐다. 저번에 강동현의 집 드레스룸에서 그가 황경호의 다리에 입을 맞추며 바라보았던 눈빛이 떠올랐다. 그땐… 정말 흥분한 걸 숨기느라 혼났다. 황경호는 강동현의 화장품 광고 6분짜리를 한 번에 볼 수가 없었다. 보다가 멈추고 보다가 멈추고 이랬다.

그가 황경호한테 변태짓만 하려고 하지 않는다면, 강동현의 야한 얼굴은 정말 근사했다. 잘생겼고 섹시하고… 그가 자위를 하는 걸 보거나 들으면 정말 꼼짝도 못 하게 되었다. 강동현의 말처럼 처음 야동을 본 어린아이처럼. 그의 섹시함에 눈을 떼지 못하면서 그에 대한 호기심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아무 짓도 하지 않을 테니 만지고 싶냐고 물었을 땐 당연히 아니라고 할 생각이었는데도… 황경호는 한 번도 강동현을 제대로 만져본 적이 없었다. 피부가 닿은 적은 당연히 많았지만 죄다 그가 원하는 대로였지 황경호의 생각이나 의도는 철저히 배제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를 가만히 만질 수 있었을 때는, 순수하게 말하자면 좋았다. TV 속의 그가 앞에 있고 그걸 만지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만질 수 없는 사람을 만지는 느낌… 그를 때리면 고양심이 드는 것도 비슷한 이유 때문일까.

황경호는 침대에 누워서 그런 쓸데없는 생각을 하다가 얼굴을 살짝 붉혔다. 눈을 잠깐 감고 참다가 이불을 뒤집어썼다. 그리고 바지 속으로 손을 넣었다.

황경호는 거의 자위를 하지 않았다. 아니, 그냥 아예 안 했다. 중학교 때 자위라는 게 뭔지 알고 반의 모든 친구들이 자위를 다 해봤다는 걸 알았을 때 처음 해보았지만, 남은 것은 생소함과 수치감이었다. 그 나이 때 애들은 자위를 하는 게 당연하다는 생각에 두어 번 더 해보았지만 역시 어디서 오는지 모를 회의감에 맛을 들일 수가 없었다. 그 뒤론 딱히… 경미한 우울증이 시작되었을 때부터는 정말 한 번도 하지 않았고 강동현이 집적거리기 시작했을 땐 그런 모든 것들이 혐오스럽기까지 했다.

그러니까 이번이 정말 몇 년 만의 자위였다.

“으응….”

눈을 질끈 감으며 부드러운 성기를 한 손으로 쥐고 다른 손으로 젖꼭지를 만졌다. 젖꼭지를 만지니까 금방 섰다. 황경호는 얼굴을 더 붉히고 자신의 것을 주물렀다.

[잘 봐.]

생생하게 생각났다. 그가 자신의 목덜미에 얼굴을 대고 냄새를 맡았다. 지금 가장 많은 매체를 타고 있는 연예인 중에 한 명이지만, 그런 섹시한 얼굴은 어디서도 본 적이 없었다. 남자다운 얼굴에 색기가 어리며 말끔히 정돈된 얼굴과 표정이 무너진다.

얼굴도 몸도… 애초에 상상도 못 할 정도로 완벽… 아니, 취향이었다. 그래, 그렇게밖에 설명을 못 할 것이다. 얼굴이 잘생긴 연예인들도 많고 아마 어딘가엔 그보다 잘생긴 사람도 분명히 있을 것이다. 더 굉장한 몸을 가진 사람도 있겠지… 취향이다. 지금까지 있는지도 몰랐던… 그렇지 않다면 강동현 그 개인은 그렇게 싫어하면서 그의 활동을 전부 스토킹하는 변태짓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키스하자…]

[키스할래…?]

젖꼭지가 뾰족하게 섰다. 여전히 말랑말랑했지만 찌릿찌릿하고 성기가 젖어 들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성적인 상대에게 어떻게 섹스어필을 해야 하는지에 무지하니까 말이다… 여자고 남자들이고 죄다 말도 되지 않는 애교라는 것을 떨고 있고 데이트폭력을 남자다움으로 착각한다. 강동현은 여자친구도 지금까지 하나밖에 안 사귀어 보았다고 들었는데도, 배우라서 그런 걸까… 분명히 자기가 다른 사람들에게 어떻게 보이는지 알고 그러는 것이다.

‘그러니까 매번 자기 보고도 안 끌리냐고 당당하게 말하는 거겠지… 그것도 나한테….’

“으응….”

황경호는 신음을 흘리며 베개에 반쯤 얼굴을 파묻었다. 부끄러웠다. 젖꼭지를 계속 만지고 싶으면서도 계속 만지고 싶지 않았다. 아래도 계속 만지고 싶으면서도 만지고 싶지 않다. 부끄럽지만 하고 싶었다. 머릿속으로 강동현이 어떻게 자위를 했는지 떠올렸다. 성기를 잡고 손바닥으로 끝을 천천히 문질렀다.

“하으응….”

이걸 어떻게 그렇게 거칠게 한 걸까. 황경호는 그처럼 손을 빨리 움직일 수가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때 그의 모습, 얼굴, 표정, 몸을 생각하자 어느샌가 손이 빨라져서 보는 사람이 있다면 얼굴을 붉힐 정도로 신음을 흘리기 시작했다.

“아앙… 아앗… 아아앙… 흐응…! 아아아앙…!!”

허리가 베베 꼬였다. 성기의 끝이 뜨겁다. 절정에 이르러 엉덩이를 들썩거리며 오르가즘에 몸을 떨었다. 그리고 한참 뒤에 눈을 떴다. 좀 자괴감이 들었다. 하필이면 몇 년 만에 하는 자위가 그 변태 새끼를 생각하면서 한 거라니….

‘미쳤다….’

황경호는 그대로 숨을 헐떡거리다가 일어났다. 이불과 시트를 전부 세탁기에 넣고 돌리기 시작했다. 본인도 샤워실로 들어가서 빡빡 씻었다.

*

한동안 강동현은 병원에 오지 않았다. 바쁜가 보다 싶었다.

“도은혁 환자 이제 그냥 병원 안 오는 게 더 나은 거 아냐?”

“어? 왜?”

“어차피 낫지도 않는데. 돈지랄.”

정기연 간호사가 심드렁하게 말했다. 이강유비뇨기과의 소악마는 의사보다도 훨씬 비정했다. 가망이 없는 고자는 아무리 명의를 만나 보았자 소용이 없다는 게 그녀의 지론이었다.

“그래도 사람이 그렇게 쉽게 희망을 버리면 안되지.”

오희연 간호사가 말했다.

“그래. 도은혁 환자 같은 남자가… 아깝다.”

다른 간호사도 말했다. 정기연이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잘생기고 돈 많아도 안 되는 남자는 그냥 안 되는 거야.”

단호한 그녀였다. 황경호도 예전 같으면 오희연 쪽이나 정기연 쪽이나 한쪽의 손을 반드시 들었을 텐데 의외로 선뜻 말이 안 나왔다. 그는 직업 소명이 투철한 비뇨기과 간호사였다. 환자 본인의 의지와 노력, 그리고 명의만 있다면 세상 모든 남성 질병은 고쳐질 것이라 믿는다. 다만 그 변태가 싫어서 가끔 소명의식을 저버리고 극렬하게 발기부전 환자들을 깠을 뿐이다.

‘이제 죽고 싶다는 생각은 잘 안 드는데….’

요새 계속 기분이 싱숭생숭했다. 좀 있으면 새해라서 그런 걸까. 수술 보조를 들어가고, 입원 환자들을 케어하고 상담을 5건이나 하고, 진료 및 치료 보조를 하고 차트 정리까지 하고 나니 시간이 쑥 가버렸다.

“벌써 좀 있으면 새해네. 이번엔 선생님까지 해서 회식 한 번 하죠.”

“이번 연말 휴가 길던데. 그 전에 한잔하자.”

정기연의 말에 오희연이 거들었다.

“선생님 어떠세요?”

“그때가 언젠데?”

“보자… 12월 22일이네요. 일주일 정도 남았어요.”

시간이 참 빨리 간다. 올해도 이렇게. 오희연이 말하자 이강유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다 같이 한 번 회식합시다. 새로 사람들도 들어왔는데 회식 한 번 다 같이 못 했네. 김태형 씨네 가게로 가면 되나?”

“오오. 그러면 좋죠!”

김태형의 가게는 지지리도 장사가 안됐다. 그 집은 정말 황경호의 병원이랑 강동현이 매출 올려주는 걸로 먹고살 것이다. 황경호는 웃으면서 대답했다.

“미리 말해 놓을게요.”

그리고 다들 인사를 하고 삼삼오오 짝을 이루어서 퇴근을 하기 시작했다. 황경호도 마지막으로 병원을 나서는데 뭔가 기분이 쎄했다. 순식간에 주머니에서 치한용 스프레이를 꺼냈다.

“너 그거… 더 있었냐?”

“한 박스나 있어요.”

선글라스를 끼고 있는 남자가 병원 엘리베이터 옆에 서있었다. 강동현은 손을 들었다.

“알았어. 알았어. 안 만질게.”

그렇게 말했지만 황경호는 믿지 않았다. 다른 말은 칼 같이 지켜도 황경호한테 한 말은 태반을 안 지켰다. 강동현이 말했다.

“그냥 팬티나 줘.”

맡겨놓은 거 찾아가는 투다. 황경호가 인상을 쓰자 그는 어깨를 으쓱했다.

“이제 팬티 정도는 그러려니 해라. 이러다 또 강제로 벗겨간다.”

“…….”

황경호는 한숨을 쉬었다. 치한용 스프레이를 주머니에 넣고 프론트의 불만 다시 켰다.

“기다려요.”

황경호는 화장실로 가서 바지와 팬티를 벗고 바지만 입은 채 팬티를 곱게 접었다. 이제 노팬티로 바지를 입는 것도 그렇게 어색하지 않다… 황경호는 또 한숨을 쉬며 돌아왔다. 곱게 접은 팬티를 넘겨주었다.

“여기요.”

“땡큐.”

강동현은 그걸 자기 코트 주머니에 넣었다. 남의 팬티를 주머니에다 넣고 다니는 강동현이라니. 사람들이 알면 기겁을 할 것이다. 그것도 남자 팬티… 황경호는 더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그래, 어차피 어떻게 해서든 벗겨갈 남자다. 그냥 주는 게 백번 낫지… 황경호는 묘하게 체념하면서도 전처럼 우울해하지는 않았다.

‘더러워서 피하지 무서워서 피하나, 변태 새끼.’

그렇게 속으로 잠깐 욕을 하긴 했다.

“자.”

강동현은 손에 들고 있던 커다란 종이백을 세 개나 주었다. 황경호는 얼떨결에 받았다. 그리고 안을 보았다.

“뭔데요?”

“촬영한다고 하와이 갔다 왔는데… 뭐, 이것저것.”

황경호는 황당해서 가방 안에서 눈을 떼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하와이랑 한우랑 무슨 상관이에요?”

“아니, 하와이 음식들도 있어. 고기는 그냥 오다가 샀어.”

“이걸 제가 혼자 다 어떻게 먹어요?”

예전에 강동현이 먹을 걸 줬을 땐 전부 다른 사람들을 줘버렸다. 그가 뭘 사주겠다는 말만 해도 기분이 나빠질 때가 있고, 그가 뭘 준다는 것만으로도 또 이 변태가 무슨 꿍꿍이인가 싶어했지만, 사람이 익숙해지는 것에는 도리가 없는 법이다.

‘이번엔 먹을 생각인가 보네.’

강동현이 피식 웃었다.

“아침, 저녁으로 열심히 먹으면 되지.”

“그래도 다 못 먹어요.”

“다 먹을 수 있어. 다 먹겠다고 생각하면 뭘 못 먹어.”

“넣을 자리도 없어요.”

“오늘 저녁부터 먹어.”

황경호는 잠깐 말없이 종이백 안을 보면서 약간 걱정을 했다.

‘이거… 진짜 일주일 내내 먹어야 할 것 같은데… 뭐야. 사골도 있어? 나 이런 거 할 줄 모르는데. 태형이 형한테 물어봐야겠다….’

얼마 전에 천만 원 정도를 우습게 뜯어냈다 보니, 이 정도 받는 걸로 질색하기엔 이미 선을 한참 넘어오고 말았다. 강동현이 엘리베이터를 잡았다.

“짐도 많은데 태워줄까?”

“안 바빠요?”

“오늘은 이제 일정 없어.”

뭔가 자연스럽게 강동현의 차를 타러 내려갔다. 오늘은 벤츠 SUV다. 뒷좌석에 짐을 싣고 조수석에 탔다. 황경호는 순수하게 감탄했다.

“벤츠가 좋긴 좋네요. 이강유 선생님 차도 벤츠거든요.”

“하나 사줄까?”

강동현이 말했다. 황경호가 살짝 인상을 쓰며 그를 흘겨보았다.

“그런 말 좀 하지 마세요. 또 얼마나 사람을 뽑아 먹으려고….”

“농담이야.”

강동현은 차를 출발시켰다. 하여튼 이런 차에 타면 뭔가 사람이 안정되는 느낌이다. 차의 진동이 엄마 뱃속에 있을 때랑 비슷해서 그렇다던가, 뭐라던가….

“그동안 뭐 했어?”

“일했어요.”

“일 말고는?”

“가끔 형네 가게 가서 밥 먹고 형세나 기연이랑 영화 보거나 그랬어요.”

황경호는 하품을 했다. 그리고 말을 이었다.

“그러는 그쪽은 뭐 하셨는데요.”

“나야 뭐… 일만 했지.”

“하긴 또 연말이라 바쁘겠네요. 크리스마스도 있고. 시상식도 전부 가야 할 거고… 중국이나 일본도 가야 하는 거 아니에요?”

“잘 아네.”

이야기는 그 정도로 끝이었다. 황경호는 잠이 솔솔 와서 깜박깜박 졸기 시작했다. 퇴근 시간이라 차가 많이 막혔다. 차는 가다가 섰다가 하면서도 꾸준히 목적지를 향해 가고 있었다. 어느샌가 차가 황경호가 살고 있는 빌라의 언덕까지 다 올라와 섰다. 강동현은 황경호를 깨웠다.

“다 왔어.”

황경호는 눈을 깜박거리며 잠이 깼다. 비몽사몽 간에 차에서 내렸다. 강동현은 뒷좌석에서 짐을 꺼내서 주었다. 그리고 트렁크를 열더니 뭘 하나 더 꺼낸다.

“자.”

황경호는 잠이 깼다. 향기가 확 하고 후각을 자극했다. 꽃송이가 거의 주먹만 한 빨간 장미 꽃다발이었다. 한 품에 가득 안기는 크기다. 정말 근사했다. 황경호는 저도 모르게 우와… 하면서 그것을 내려다보았다. 강동현은 꽃다발에 정신이 팔린 황경호의 한쪽 손을 잡으며 다른 손으로 그의 턱을 살짝 들었다. 꽃다발에 계속 홀려 있다가 시선을 바로 했을 땐 이미 강동현이 키스를 하고 있었다. 뭔가 반응을 할 새가 없었다. 짧게 입술을 꾹 눌렀다가 떨어졌다.

“간다. 들어가.”

“…….”

그러고는 차로 가더니 시동을 걸고 출발한다. 황경호는 왜 이렇게 된 것인지 머리를 굴리다가 자신이 강동현의 앞에서 엄청나게 방심하고 있었다는 것을 처음으로 인지했다. 술도 안 마셨는데 강동현의 차에서 졸지를 않나… 예전 같으면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도 그럴게, 언제나 그가 어떤 짓을 할지 몰라 바짝 긴장만 하고 살지 않았던가. 그런데 오늘 처음 봤을 때부터 지금까지 모든 게 너무 자연스러웠다.

‘언제부터 이렇게 됐지?’

언젠가부터 강동현은 예전만큼, 아니, 예전처럼 황경호를 막 대하지 않았다. 여전히 집적거리긴 했지만, 집적거리는 수준이었다. 예전처럼 황경호의 기분이 어떻든 강제로 만지지도 않았다. 어떻게든 자기가 원하는 대로 하려고 구슬리기는 했지만 거부하면 멈추었다. 사과도 했다. 또 무슨 꿍꿍이인지 모르겠다.

‘무슨 꿍꿍이겠어. 또 어떻게든….’

황경호는 짜증이 살짝 섞인 한숨을 쉬었다가 집으로 들어갔다. 이제 전처럼 멍청하게 당할 생각은 죽어도 없다. 상태도 예전보다 훨씬 좋아졌고 강동현이 하는 대로 휘둘리지 않을 자신도 있었다.

황경호는 집으로 와서 짐을 정리하고 나서 강동현이 준 것을 가지고 아무렇지 않게 요리해서 먹기 시작했다. 이제 이런 것 하나하나에 빚을 지니 마니 생각하지도 않았다. 어차피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들이다. 준 사람은 별생각이 있을 리가 없는데 이쪽만 하나하나 바들대는 것도 웃기기만 할 뿐이었다.

우울증은 뭐든 쉽게 자기 탓을 하게 했다. 지금까지는 다른 사람들이 뭘 하든 하나하나 의미를 부여하며 자학을 했는데 이제는 그것도 다 질린다. 이덕재도, 강동현도 황경호의 그런 점을 이용하기만 했다. 아~무 생각도 하지 않으면 편했다.

게다가 정기연의 말대로 어차피 낫지도 않을 거면 병원이나 황경호한테나 다 돈 지랄일 뿐이다. 그걸 깨닫게 된다면 아마 강동현이 먼저 병원도, 이런 짓도 다 그만둘 것이다.

*

하지만….

“큭… 으윽….”

황경호는 얼굴이 토마토처럼 되어서는 강동현이 자위하는 얼굴을 쳐다보고 있었다. 야동에 중독되는 사람들이 이런 기분인 걸까. 잘못된 걸 알겠는데도 보는 걸 멈추지 못하겠다. 오늘도 이강유비뇨기과의 4번 치료실이었다. 강동현은 들어오자마자 황경호의 냄새를 좀 맡더니 또 그에게 자위쇼를 보여주고 있었다.

어디 있다 온 것인지 근사하게 입고서는 자신의 대물을 감싸 쥐고 야한 소리가 잔뜩 나게 흔들고 있었다. 황경호는 다리를 오므리며 상의를 슬쩍 아래로 내렸다. 섰다….

“만지면 안 돼?”

뺨에 강동현의 뜨거운 입김이 닿았다. 그는 황경호의 뺨에 얼굴을 묻고 냄새를 맡았다. 황경호는 움찔했다.

“만지고 싶어….”

그가 귀 가까이에서 속삭이니 파르르 소름이 피부를 달린다. 다리가 풀릴 것처럼 달콤한 목소리였다. 황경호는 얼굴이 터질 것 같이 빨개졌다. 눈을 감고 어떻게든 둔중한 쾌감의 사이를 헤매는 강동현의 옆얼굴을 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그가 눈을 뜨고 눈을 마주치자 읏, 하고 작게 신음을 흘렸다. 그대로 강동현이 황경호의 눈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시선이 마주친다는 것은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 걸까. 서로를 인식하고 있는 것만으로 무언가가 연결된 느낌이 들었다. 그대로 강동현이 황경호의 이마가 거의 맞닿을 정도로 가까이 와서 서로의 눈을 바라보았다. 황경호는 다리를 꼼지락거렸다. 뭔가, 괴로웠다. 이런 느낌은 처음이었다.

‘괴로워. 만지고 싶어. 만지고 싶지 않아… 조금만… 아냐, 싫어.’

그때를 노린 듯 강동현이 말을 걸어왔다.

“만져줄까?”

강동현의 손이 황경호가 잡고 있는 상의를 살짝 건드리자 황경호가 기겁을 했다.

“싫어요. 싫어요!”

“아, 왜… 같이 하면 기분 좋잖아….”

강동현은 그렇게 속삭이듯 말했다. 황경호는 뺨에 있는 솜털까지 서는 기분이었다. 간지럽다.

“같이 하자. 기분 좋게 해줄게. 진짜… 세상에서 제일….”

“아, 하지 마…! 변태!”

귓가에 계속 변태같이 숨소리를 집어넣자 황경호가 질색을 하면서 그를 밀어내었다. 강동현이 웃었다. 만진다면 또 휩쓸리겠지만… 강동현은 그냥 황경호의 살랑살랑한 머리카락에 살짝 코를 대고 냄새를 맡았다. 강동현의 손짓이 여지없이 더더욱 빨라지더니 최고 속도에 이르렀다.

“윽… 크윽… 하아… 젠장… 부족해….”

강동현은 이를 갈듯 신음을 뱉었다. 그렇게 한참 손바닥이 까질 듯이 자기 걸 잡고 흔들다가 겨우 사정했다.

“하아… 하아… 하아….”

강동현의 아름다운 얼굴은 정말 괴로워 보였다. 불만족스러워 보이고 짜증과 신경질도 보인다. 강동현이 눈을 떠서 황경호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그도 계속 강동현의 얼굴을 보고 있었다. 그렇게 말없이 서로의 눈을 바라보다가 강동현이 천천히 입을 맞추었다.

“으응… 음… 잠깐…! 읍…! 아, 하지 말라고!”

황경호가 정신을 차리고 화들짝 놀라 그를 밀쳐냈다. 강동현이 투덜거리면서 물러났다.

“너 요새 묘하게 방어력이 높단 말이야.”

확실히 냄새나 팬티로 하는 자위는 정신을 빨리 차리는 것 같았다. 다리도 심하게 풀리지 않는 것 같았고 말이다. 강동현은 그래도 지치는지 진료용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손을 닦았다.

“이거 너무 피곤해….”

느낌도 제대로 나지 않는 것을 겨우 황경호의 냄새를 맡아서 사정까지 하게 하려면 억지로 쥐어짜듯 피곤해졌다. 정기적으로 빼지 않으면 허리도 묵직하고 전립선염도 걱정되고, 무엇보다도 이렇게 되고 나서는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면 정말 미친 듯이 하고 싶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기 때문에 다른 일에 집중을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이렇게라도 하지만… 강동현이 한숨처럼 중얼거렸다.

“그때 니 얼굴에 했을 때 진짜 쩔었는데… 한 번만 더 하고 싶다….”

“뭐라구요?”

황경호가 황당해서 그를 돌아보았다. 강동현이 어? 하고 되물었다.

“내가 뭐라고 했어?”

“…….”

황경호는 말을 말자는 표정이 되었다. 그는 여기저기 물건을 정리했다.

“자, 이제 나가죠.”

강동현은 선글라스를 끼며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황경호가 뭐냐는 듯이 그를 올려다보았다.

“팬티 줘.”

정말 맡겨 놨다. 맡겨 놨어… 황경호는 그냥 한숨을 쉬고는 탈의실로 가서 얼른 벗어서 넘겨주었다. 강동현은 물끄러미 그걸 보다가 받아서는 주머니에 넣었다. 그리고 밖으로 바로 나가려다가 갑자기 몸을 돌리고 황경호를 보았다. 그리고 아니다 싶었는지 다시 몸을 돌렸다가, 또다시 번복하며 황경호를 보았다.

“뭐예요. 할 말 있으면 똑바로 해요.”

강동현이 결국 침을 꿀꺽 삼키고 물었다.

“나 또 안 만지고 싶어?”

“네?”

“그냥 전처럼 니가 만지고 싶은 대로 해도 되니까. 이상한 데 안 만져도 되는데….”

그러자 황경호는 그냥 손을 들어서 강동현의 뺨을 한 번 슥 만졌다. 강동현은 약간 인상을 썼다.

“됐어요?”

“한 번만 더.”

황경호는 다시 강동현의 얼굴만 만졌다. 그러자 강동현은 그 손을 잡아 자신의 뺨에 그대로 누른 채 있었다. 그리고 황경호의 다른 손도 슬그머니 잡았다. 시선을 내린 채로 가만히 황경호의 손바닥에 입술을 누르고 있었다. 그리고 눈을 감으며 인상을 구겼다. 끙, 하며 어쩐지 괴로워했다.

“아, 진짜….”

“왜 그래요?”

황경호가 물었다. 강동현은 똑똑똑 하고 밖에서 노크하는 소리가 나자 황경호의 두 손을 놓아주었다. 그리고 문으로 먼저 향했다가 다시 돌아와서 양손으로 황경호의 양 뺨을 꽉 잡고 입술을 꾹 누르고는 진짜로 나갔다.

“뭐 하는 거야, 저거….”

황경호는 손등으로 입술을 닦았다. 황경호는 다음 환자를 비켜서 밖으로 나갔다. 강동현은 이미 밖으로 나간 모양이었다. 하긴 하고 온 꼴도 뭘 하다가 온 모양새였다. 황경호는 차트를 정리하고 잠깐 밖으로 나갔다.

“계산해주세요.”

황경호는 편의점에서 새 팬티를 내밀었다. 그런데 앞에 있는 편의점 종업원이 흠칫하면서 그의 얼굴을 보는 게 느껴졌다. 황경호는 아~무 생각 없이 물었다.

“아, 무슨 문제 있나요?”

카드 한도라도 초과한 것일까? 그렇게 많이 안 썼는데… 황경호가 그렇게 의아한 얼굴을 하자 종업원이 얼른 계산을 하면서 말했다.

“아니… 매주 낮에 이렇게 팬티를 사러 오셔서요….”

젊은 남자가 팬티를 버릴 일이 그렇게 많지가 않은데… 황경호는 물건을 받으면서 핫, 하고 놀랐다. 생각해보니 매주 같은 요일, 같은 시간에 와서 새 팬티를 사가고 있는 황경호였다. 그는 얼굴을 새빨갛게 붉혔다.

“수, 수고하세요.”

그리고는 황급히 나왔다. 이제 저 편의점은 절대 다시 못 가겠다.

‘뭐라고 생각하겠어….’

얼굴이 화끈거렸다. 진짜 그 인간 때문에 되는 게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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