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부 1권 - 16화 (16/47)

1. 너와 나의 거리

압구정 한복판에는 훤칠한 키의 남자가 서있었다. 굉장한 비율, 세련된 옷차림과 남자다운 스타일. 선글라스를 끼고 있었지만 지나가는 사람이라면 남녀노소를 불구하고 돌아볼 만한 존재감을 가진 남자였다.

‘분명히 선글라스를 벗기면 굉장한 미남이 서 있을 것 같다…!’

연예인이라도 되는 것일까. 그런 기대감이 아찔하게 드는 남자였던 것이다. 그는 어느 건물의 앞에 서서 화보 마냥 그 건물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이제 완연한 가을날이다. 서울의 하늘도 모처럼 푸르다. 가로수가 노랗게 물들었다. 한강에서 그렇게 멀지 않은 압구정 한복판에는 치과 교정 포스터에 들어가도 손색이 없을 만한 남자의 포스터가 붙어 있는 건물이 있었다.

<닥터스 초이스 의사 이강유! 한국 남성의 문제를 해결합니다>

포스터에는 이런 문구들이 쓰여 있었다. 바로 예의 청담 빌딩 3, 4층은 바로 이 나라에서 한 손 안에, 아니 전 세계에서 한 손 안에 꼽을 만한 명의가 운영하는 병원이 있었다.

고개 숙인 모든 한국 남성들의 성지이자 메카, 알파이자 오메가인 병원!

그 어떤 흠 있는 남자도 말끔하게 새것처럼 고쳐내는 바로 그 병원!

압구정에 위치한 이강유 비뇨기과 의원!

건물의 4층으로 올라가니 곧바로 세련된 프론트데스크가 나왔다. 병원 내부가 보이지 않도록 미묘하게 칸막이가 설치되어 있었다. 프론트데스크의 접객원 둘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이강유 비뇨기과입니다.”

아니, 도대체 이만한 남자가 어떤 심각한 결점을 가지고 있단 말인가! 세상 믿을 놈(?) 하나 없다더니! 얼굴로 프리패스일 정도로 단골 환자(?)인지 이름도 말하지 않고 간단하게 증상에 대해 언급했다.

“전이랑 똑같은 증상이요.”

그러자 접객원은 환자를 안으로 안내했다. 접수처의 왼편으로 들어가니 어두운 금색의 커다란 카우치와 마치 고급 커피숍처럼 1인용과 2인용 검은색 카우치가 창가 주변에 배치되어 있는 환자 대기실이 나왔다. 그는 기다릴 필요가 없었다. 프론트데스크에서 이미 연락을 하여 담당 간호사가 곧바로 환자를 맞이하러 나왔기 때문이다(그는 VIP다). 간호사는 언제나처럼 청소년계도포스터에 들어갈 정도로 순진무구하게 웃는 얼굴로 환자를 맞이했다.

“오랜만에 내원해주셨네요, 도은혁 환자님.”

그가 얼마나 진상 환자인지 아닌지와는 상관없이 말이다. 환자는 선글라스를 낀 채로 팔짱을 끼더니 아주 삐딱한 자세로 간호사를 내려다보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간호사는 어디서 빼다 박은 것처럼 웃는 얼굴로 환자를 치료실로 안내했다.

“탈의실 가서 옷 갈아 입고 나오세요.”

4번 치료실은 VIP 전용이다. 개인 탈의실이 따로 준비되어 있었다. 간호사가 그렇게 말하는데도 꿈쩍도 않고 그가 이것저것 준비하는 것을 보고 있던 환자는 선글라스를 벗으며 입을 열었다. 아주 마음에 안 든다는 기색을 팍팍 냈다.

“넌 내가 너 때문에 칼빵까지 맞았는데 신경도 안 쓰냐?”

선글라스를 벗은 남자는 작품을 낼 때마다 최고가를 경신하고 있는 배우, 강동현이었다. 그는 요즘 한국 남자 연예인답지 않게 남자답고 음영이 깊은 얼굴을 가지고 있는 미남 중의 미남으로 낮고 깊은 목소리와 큰 키, 멋진 몸매까지 가진 톱배우였다. 최근 <코드명: 울프>라는 드라마로 아시아권 일약 스타로 떠오르며 최전성기를 구가하고 있기도 했다. 나이는 27세. 한국 연기파 미남 배우의 계보를 이어가고 있는 S급 연예인이다. 이런 남자가 왜 여기에 있는 걸까.

“아, 맞다….”

간호사는 깜박했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황경호(27세)는 몸에 난 흠 때문에 마음까지 흠이 나고 있는 이 땅의 수많은 고개 숙인 남성들을 위로해 주는데 강점을 가진 이강유 비뇨기과 병원의 간호사였다. 최근 갖가지 진상 환자들로 인해 고생을 하다가 다시금 마음을 다잡고 일에 매진하고 있는 성실하고 직업 정신이 투철한 간호사였다.

“죄송합니다… 제가 좀 바빠 가지고. 흉은 안 지셨어요?”

‘한 번 대줬으니 끝이다 이거야? 진짜 이건 뭐 간호사가 몸으로 때우는 게 상습이야.’

그의 형식적인 물음에 강동현이 속으로 중얼거렸다.

“흉이 지지 안 지겠어? 12바늘이나 꿰맸는데.”

그제야 확실히 미안한 얼굴이 되어서는 한숨을 쉬는 황경호였다. 강동현은 자리에 허리를 세우고 바로 앉았다. 그리고 황경호의 바지 허리 부분에 손가락을 넣어서 자신의 쪽으로 확 끌어당겼다. 그리고 황경호의 뺨에 입술을 묻었다.

“어제 퇴원했어.”

“이제 병원 안 온다면서요.”

황경호는 심드렁한 목소리로 그의 얼굴을 손바닥으로 밀어냈다.

“니가 전화를 안 받잖아.”

“전화도 안 한다면서요.”

황경호는 진상 환자를 진료용 의자에 제대로 앉게 했다. 탈의실에 밀어 넣어 옷을 입힐 자신도 없어서 그냥 그대로 바지만 좀 벗기고 구멍 난 천을 덧대어 마사지할 생각이었다. 그는 처음에는 계속 집적거리려고만 하더니 황경호가 자신의 바지를 벗기려고 하자 얌전하게 있었다. 황경호가 강동현의 청바지 버클을 풀고 지퍼를 내렸다. 그대로 명품 로고가 찍혀 있는 언더웨어와 함께 내리자 남자 손으로도 한 뼘 길이가 넘어가는 무언가(?)가 나온다.

“맨날 내가 니 바지만 벗기다가 니가 내 바지 벗기니까 기분이 묘하다.”

“시끄러워요.”

강동현의 오른쪽 옆구리에는 여전히 의료용 밴드가 붙어있었다. 아직 실은 풀지 않은 모양이다. 황경호는 강동현의 그 부분 위에 초록색 구멍 난 천을 덧대고 마사지기를 들었다. 마사지기의 전원을 키자 낮게 우웅 하고 울리는 소리가 났다.

“차갑습니다.”

황경호는 강동현의 서혜부에 마사지용 젤을 짜서 발랐다. 마사지기를 장갑을 낀 손으로 잡고 강동현의 아랫배를 마사지하기 시작했다. 치료는 서혜부 및 성기 주변의 혈액순환를 돕는 마사지로 발기부전 및 불감증을 위한 치료법이었다(그렇다. 이 잘난 남자는 무려 남자의 무덤이라 불리는 ‘발기부전’으로 비뇨기과 병원을 다니는 중이었다). 스트레스 등의 심인성 요인이 대부분인 강동현에게는 그다지 효과가 있는 치료법이라 볼 순 없었지만 의료보험도 되지 않는 이 치료를 받겠다고 거금을 갖다 바치며 병원에 오고 있는 강동현이었다.

“야, 내가 딴 건 안 바랄 테니까….”

“안 할 겁니다.”

황경호는 강동현이 용건도 꺼내기 전에 그렇게 딱 잘라서 말했다. 강동현이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

“내가 뭐 해달라고 할 줄 알고?”

“도은혁 환자님이 뭘 해달라고 하든 안 할 거라서 안 한다고 하는 건데요?”

“그 돼지 새끼는 칼 들고 있어도 말로 하자느니, 대신 패 줘도 말려주고 그러더니 나한테만 왜 이렇게 철벽이야?”

“…….”

황경호는 강동현이 말하는 ‘돼지 새끼’, 이덕재라는 환자에게 스토킹을 당하여 몇 달을 고생하였다. 그놈 때문에 칼까지 맞은 주제에 말은 잘한다. 황경호는 거시기를 쳐다보고 있다가 눈만 치켜들어 그를 노려보았다. 강동현은 입을 다물었다. 그는 팔걸이에 팔꿈치를 대고 주먹으로 살짝 얼굴을 괴었다. 그리고 자신의 거시기 한 부위를 마사지 하고 있는 간호사를 내려다보았다. 혼잣말하듯이 중얼거렸다.

“키스만 하자고 하려고 했는데.”

들으라고 한 거다. 황경호는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가 못 들은 척했다. 강동현은 대놓고 들으라고 하는 혼잣말을 계속 시전했다.

“이제 상처도 별로 안 아픈데~ 몸 다 나으면 허리 나갈 때까지 박아준다고 했는데~”

“아, 좀! 시끄러워요!”

강동현이 성질을 계속 건드리자 황경호가 결국 버럭 화를 냈다. 강동현은 이때다 싶어 황경호의 멱살을 끌어당겼다. 입술을 맞추었다.

“으읍…!”

황경호는 장갑을 낀 손에 젤이 잔뜩 묻어 강동현을 밀어낼 수가 없었다. 어차피 이 인간도 이걸 기다리고 있었던 것일 거다. 처음에는 멱살을 끌어당겼던 손도 어느새 턱만 검지로 살짝 받친 채 입술을 겹쳤다.

“응… 흐응… 음….”

강동현이 고개를 오른쪽으로 바꾸며 입술을 한 번 핥았다가, 다시 안으로 혀를 넣어 고양이 혀처럼 약간 까슬한 상대의 혀끝을 건드리고 입천장을 간지럽힌 뒤 다시 혀를 섞었다. 강동현이 낮은 신음소리를 내었다. 더욱 입맞춤에 열중하여 상대의 허리를 잡아당겼다. 황경호는 손을 어찌할 수가 없어서 결국 초록색 천을 덧댄 엄한 부분(?)을 손으로 짚으며 겨우 서로의 몸 사이에 간격을 두었다. 안 그러면 유니폼에 잔뜩 젤이 묻을 것이다.

“음…!”

허리를 감싸고 있던 강동현의 손이 밑으로 내려오더니 황경호의 엉덩이를 한 번 꽉 잡았다. 황경호가 손목으로 그의 손을 꾹 눌렀다. 입술을 떼고 숨을 겨우 들이켰다. 강동현은 다시금 입을 맞추어 황경호의 입술을 살짝 빨면서 상기된 얼굴로 말했다.

“뺨 깨물고 싶어.”

“아, 진짜 개새끼세요? 왜 남의 볼을 이렇게 깨물려고 해요?”

“깨물어도 돼?”

“당연히 안 되죠! 그거 때문에 제가 얼마나 고생했는지 아세요?”

허구한 날 기회만 나면 사람을 깨물어 대는 통에, 아니, 그것도 꼭 눈에 보이게 뺨이나 목을 시뻘건 피멍이 들 때까지 물고 빨아댔다. 덕분에 얼굴이랑 목에다 반창고를 엄청 붙이고 다녀야 했다. 게다가 멍은 왜 그렇게 안 빠지는지. 낫지도 않았는데 또 물리면 그것만큼 짜증 나는 게 없었다.

“아! 이 인간이 또!”

강동현이 기어코 깨물려고 하자 황경호는 후다닥 뒤로 물러났다. 강동현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턱을 살짝 들고 굶주린 듯한 시선으로 황경호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그 얼굴이 굉장히 섹시하다. 모르는 사람은 모르겠지만, 그는 굉장히 섹슈얼한 느낌을 효과적으로 낼 수 있는 얼굴을 가진 배우였다. 잠깐 그 사이로 침묵이 흘렀다.

삐비빅. 삐비빅.

침묵을 깨고 마사지기가 종료되는 소리가 났다. 강동현은 한 몇 일 굶은 것 같은 얼굴을 두 손으로 문질렀다. 황경호는 얼른 마사지기를 준비된 수건으로 닦고 강동현의 아랫배를 잘 닦아준 뒤 후다닥 뒤로 다시 물러났다. 강동현은 자리에서 내려와 자신의 바지를 끌어올리며 버클을 채우고 지퍼를 올렸다. 별다를 거 없는 행동인데도 무슨 청바지 광고가 따로 없다.

“…….”

그대로 강동현이 선글라스를 쓰며 문을 열고 나가는 걸 유심히 경계하면서 뒷걸음질을 치다가 그가 나가자 얼른 정리를 하고 그도 밖으로 나갔다. 강동현은 내부 접수처에서 예약을 하고는 엘리베이터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황경호도 내부 접수처 안에 잠깐 갔다가 그를 따라갔다.

“도은혁 환자님.”

“…왜.”

키스만 했더니 오히려 욕구불만이 그득그득한 모양이었다. 강동현은 선글라스 너머로도 느껴지는 나른함과 목마름 때문에 몹시 관능적인 느낌이 났다.

“여기 젤 묻어서요.”

황경호는 강동현의 허리에 티셔츠에 약간 묻은 젤을 손수건 같은 것으로 닦아주었다.

“알로에라 마르면 별로 티는 안 나겠지만요.”

그리고 강동현의 등 쪽도 잠깐 살피면서 만져보더니 다 됐다고 한 발자국 물러났다.

“…이런 거 신경 써줄 정신 있으면 다른 거나 하게 해줘.”

“조심해서 가세요, 도은혁 환자님.”

황경호는 엘리베이터를 손수 잡아주며 웃는 얼굴로 그렇게 인사했다. 강동현은 그의 웃는 얼굴을 보며 짜증인지 뭔지 싶은 한숨을 내뱉더니 도착한 엘리베이터에 탔다. 강동현은 그렇게 지하주차장으로 내려가 차를 타고 사무실로 향했다.

“강 배우, 몸은 괜찮고? 너무 빨리 퇴원한 거 아냐?”

소속사 사장님이 강동현을 맞이하며 걱정스럽게 오른쪽 옆구리를 보았다. 그녀는 강동현의 옷깃을 들춰보기까지 했다.

“진짜 흉 지는 거 아냐, 이거?”

“져도 이 정도면 티도 안 날 거예요. 메이크업하면 되고.”

강동현이 그렇게 답했다. 그리고 선글라스를 벗으며 안쪽으로 걸어가는데 사장님이 불렀다.

“어? 은혁아, 등에 뭘 붙이고 다니는 거야?”

“네?”

강동현은 사장의 말이 무슨 말인지 제대로 못 알아들어 반문했다. 사장은 강동현의 등에서 무언가를 떼어냈다.

“발기불능 고자 새끼?”

사장이 소리를 내서 그것을 읽자 사무실 내 사람들이 다 돌아보았다. 강동현은 그녀가 들고있는 포스트잇을 황급히 뺏어 그 내용을 보고 얼른 구겨버렸다.

“하하. 친구가 장난을….”

이 망할 간호사가!

*

라는 심플한 이름으로 주력 주종이 뭔지 모를 호프집을 하는 사장 김태형은 올해 34살이 되어 요즘 세간의 기준에 따르자면 청년이라 말할 만했으나 겉으로 보기에는 40대 후반, 50대 초반의 아저씨처럼 보였다. 왜 술장사를 하는지 모를 정도로 놀라운 음식 솜씨를 가지고 있으나 본인은 바(Bar) 스타일에 좋은 사람들과 어울리며 술과 음식을 내는 생활을 즐기고 싶었던 것 같다. 타겟 고객이 불분명해서 그런지 안주의 맛이나 서비스에 비해 파리가 날릴 정도로 손님이 없다. 그런 손님 없는 가게에 몇 안 되는 단골이 미묘한 시각에 등장하자 사장은 인사의 말에 앞서 자동멘트를 입에 올렸다.

“경호 없는데.”

김태형이 얼굴을 보자마자 그렇게 말하자 강동현이 약간 짜증스럽게 반응했다.

“그냥 술 마시러 오는 거라니까요.”

“칼 맞았다면서요, 형님? 괜찮으세요?”

군대에서 제대한 지 1년이 다 되어 가는 알바생 이신현이 물었다. 아직도 청소년 마냥 얼굴에 여드름이 그득하다. 강동현이 자신의 배를 까서 보여줬다. 이신현이 우와, 하면서 쳐다보았다.

“칼 맞았는데 술 마셔도 돼요?”

“이제 거의 다 붙었어. 실만 뽑으면 돼.”

“식사는 했어? 뭐로 해줄까?”

“소주 한 병이랑 식사할 만한 걸로 아무거나 해주세요.”

“일은 안 해요? 촬영 바쁠 거라고 들은 거 같은데.”

“칼 맞으니까 올스톱 됐어.”

강동현이 그렇게 말하면서 소주부터 깠다. 강동현도 이러고 보면 꽤나 애주가다. 그냥 이렇게 혼자 밥 먹을 때면 술을 물처럼 상시 마신다.

“아니, 근데 진짜 일이 어떻게 된 거예요?”

“그래, 말 좀 해봐. 그냥 길 가다가 모르는 여자를 구한 거야?”

“아, 그게….”

강동현이 잠깐 당황해서 말을 찾다가 물었다.

“걔 얘기 못 들었어?”

“경호 형이요?”

이신현이 왜 여기서 그 이름이 나오냐는 얼굴을 했다. 강동현은 인상을 찌푸렸다.

‘이거 봐라….’

또 아무한테도 이야기를 안 한 모양이다. 병원 식구들도 전혀 눈치챈 기색이 없었고. 강동현은 짜증스러운 한숨을 내었다.

‘도대체 왜 그렇게 사는 거야. 놀랬을 거 아냐. 주변 사람들한테 얘기라도 좀 하고 그러면서 살아야지.’

“설마… 그 환자야? 피해자가 경호야??”

김태형이 깜짝 놀라서 그렇게 물었다. 이신현이 더 놀라서는 삑사리가 나게 되물었다.

“뭐가요? 설마! 또 그 이상한 돼지 환자가 쫓아다닌 대요?”

강동현은 이 상황이 아주 마음에 안 든다는 티를 팍팍 내면서 비난의 어조로 말하기 시작했다.

“아니… 걔는 도대체 왜 그래? 뭔 일이 있으면 말을 해야 할 거 아냐. 왜 맨날 혼자 꽁쳐두고 일을 키우냐고.”

적반하장도 유분수라고 자기가 더했으면 더했지 못 하진 않은 남자가 그렇게 말했다. 알 리가 없는 김태형이나 이신현이 그의 말에 동조해서 고개를 끄덕였다.

“경호 형, 그런 거 좀 섭섭하긴 했는데… 와, 그래도 이건 말 좀 해주지. 아니, 그 씨 발라 먹을 돼지 새끼가 칼까지 들고 경호 형한테 지랄한 거야? 아놔, 그 새끼 진짜 뭐야? 변태 새끼가….”

이신현이 쌍욕을 하기 시작했다. 김태형이 그나마 어른스럽게 대꾸했다.

“애가 워낙 예의가 발라서 그런 거라 답답하긴 해도 나쁜 건 아니지.”

강동현과 이신현이 동시에 반박하려고 하다가 이신현이 양보했다. 그래서 강동현이 말했다.

“나쁜 거죠. 혼자 감당 못 할 일은 말을 해야지 사람이 도와주든지 말든지, 아니, 당연히 도와줄 건데 왜 말을 안 하냐구요. 왜 큰일을 만들어. 안 그래도 사람 바빠 죽겠는데.”

엄청나게 불만이 쌓였는지 그답지 않게 하소연을 늘어놓는 강동현이었다. 아직도 앙금이 남아있는 모양이다.

“내가 그렇게 우리 집에 있으라고 했는데도 안 있고. 보니까 그 환자 새끼 가족들도 장난 아닌 거 같은데 또 무슨 일 당하면 어쩔 거야. 전화번호도 또 바꾼 거 같은데 연락을 먼저 안 하면 내가 어떻게 알아. 얘는 진짜 이게 문제야. 내가 그런 것까지 어떻게 일일이 신경을 쓰냐고. 내가 시간이 남아도냐고.”

강동현은 굉장히 투덜거리면서 술을 마셨다.

“말만 하면 뭐든 해줄 텐데 왜 말을 안 해요.”

그러면서 혀를 차는데 문득 자신을 보는 가게 사장과 종업원의 눈길을 느껴 그들을 바라보았다. 이신현이 자기 사장을 보았다가 다시 강동현을 보더니 말했다.

“진짜 경호 형이랑 친하시네요. 맨날 경호 형이 아니라고 해서 그냥 친구인가 보다 했는데 완전 절친이네.”

“그러게.”

김태형도 맞장구를 쳤다. 강동현은 뭐라고 한마디 하려고 했다가 그냥 흐릿하게 말했다.

“절친 같은 건 아닌데….”

“경호도 아직 애가 어려서 그래. 어른스러운데, 애가 어른스러운 척하는 거랑 같은 거지, 뭐. 여자도 한 번 제대로 사귀어보고 하면 알지 않겠어? 사람이랑 가까이 지내는 게 뭔지. 솔직히 경호가 허물없는 척하면서도 너무 깍듯하지.”

“그런 거 여자 만나면 알게 되는 거예요?”

이신현이 물었다.

“확실히 남자들은 그렇지?”

김태형이 대답했다. 강동현이 둘의 대화를 듣고 픽 웃었다.

“뭐, 걔도 여자들 만날 만큼은 만나봤을 텐데요. 나이가 몇 갠데.”

그러자 또다시 미묘한 두 사람의 시선이 느껴진다.

“경호 여자친구 있었대?”

김태형이 물었다.

“저야 누군지는 모르죠. 있었겠죠.”

“에이, 경호 형 딱 봐도….”

이신현이 말했다. 강동현이 심드렁하게 안주를 집어 먹으면서 물었다.

“뭐가?”

“경호 형 여자친구 제대로 사귄 적 없을 걸요.”

“뭐?”

그렇게 반문한 강동현이 곧 어이가 없다는 듯이 웃었다.

“걔가 사람들한테 얼마나 살살 웃으면서 잘하는데. 그런 거 좋아하는 여자들도 많잖아.”

황경호는 언제나 같이 있는 사람들의 눈치를 많이 봤다. 분위기를 빠릿하게 눈치채고 남들에게 거슬리지 않게 행동한다. 그래서 항상 웃는 얼굴에 남들을 배려하는 게 습관이 되어 있었다. 딱 강동현만 빼고, 다 그렇게 해주기 때문에 잘 알고 있었다.

“경호가 여자들한테 인기가 없었을 거 같다는 소리가 아니라… 전에 동현 씨 여자친구 헤어지면서 난리… 아니, 힘들어하는 거 보고 한 번 그러더라. 여자 한번 제대로 사귀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고. 나는 그거 듣고 경호가 생각보다 여자를 안 만나 봤나 보네, 이런 생각이 들긴 했지.”

김태형의 말에 이신현이 고개를 저었다.

“아뇨. 저는 그 말할 때 딱 삘이 왔어요. 경호 형 여자 만나 봤든 아니든, 뭐 얼마나 만났든 여자랑 그렇고 그런 거까지는 안 해봤구나.”

“에이, 그건 아니다.”

“그건 너무 나갔다.”

김태형과 강동현이 동시에 그렇게 말했다. 이신현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흥분했다.

“아니, 이 형님들이 정말 뭘 모르네. 저야 뭐…흠흠. 그런데 관심이 많으니까, 또 경호 형 일하는 데가 그런 데니까 이것저것 많이 물어보기도 하고 가르쳐달라고 하기도 하는데 말하는 거 들어보면 영 남 얘기하는 거 같고 자기 경험은 하나도 말 안 하는데, 경험이 없어서 딱 그런 거 같은 느낌이라니까요. 솔직히 20대는 있으면 다 자랑하려고 하잖아요.”

“난 아닌데.”

강동현이 말했다.

“여자친구랑 한 거 다른 놈들한테 왜 얘기해. 딱 질색이야.”

“아, 봐. 그러면 이런 느낌이라도 나는데 경호 형은 아예 그런 게 아니었다니까. 형이랑 그런 말 안 해봤어요? 사장님은?”

강동현과 김태형을 번갈아 보는 이신현이었다.

“게다가 같이 있을 때 여자들 지나가면 저절로 눈 돌아가는데, 아니 솔직히 그렇잖아요. 여친 있고 없고를 떠나서. 예쁜 여자라도 있으면 보게 되고. 근데 진짜 경호 형은 그런 게 하나도 없다니까. 그렇다고 형이 게이 같냐고 하면 그렇지도 않아. 드라마나 이런 데서 나오는 예쁜 여자 배우들은 또 엄청 좋아해요, 형이. 그런 느낌을 통틀어 봤을 때 형도 나랑 동류구나. 평생 그런 일은 없었구나.”

이신현이 스스로 고개를 끄덕였다.

“동정은 동정을 알아본다니까요.”

“어…그런가? 뭐 나도 그렇게 빨리 딱지 뗀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경호는 진짜 멀쩡한데. 애 성격도 좋고 얼굴도 그만하면 괜찮고 날씬하고 키도 그냥 평균은 넘잖아. 여자들이 바보도 아니고.”

이신현이 여자들이 문제가 아니다, 라며 대꾸했다.

“경호 형, 배우들 엄청 좋아하잖아요. 그런 거 얘기하는 거 들어보면… 이 형이 은근히 눈이 어마어마하게 높아요.”

“아, 진짜?”

김태형이 되물었다. 이신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뭔가 자기 원하는 미적 기준이 딱 있다니까요. 여자고 남자고 칼같이 있어요. 그런 타입은 그래, 동현 형님처럼 생겨도 못 사귄다니까요, 여자.”

강동현은 얘기를 듣는 건지 마는 건지 골몰히 생각하더니 결국 고개를 저었다.

“에이… 말도 안 돼. 설마. 아니지.”

“뭐가?”

김태형이 물었다. 강동현은 술을 마시면서 역시나 어이가 없다는 듯이 대꾸했다.

“그럴 리가 없어요. 내가 아는데.”

“아, 그래? 역시 있긴 있겠지.”

그렇게 다른 시시한 일로도 얘기를 나누다가 강동현은 식사를 끝마치고 밖으로 나왔다. 대리를 불렀다. 담뱃갑을 손등이 툭툭 쳐서 한 개비 올라오게 하는데 문득 아까 한 말이 생각났다. 강동현은 곧바로 휴대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다. 몇 번을 걸자 받는다.

[아… 왜요.]

상대는 엄청 싫은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강동현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너 여자랑 자본적 없어?”

[뭐래요, 이 미친놈이.]

“그럼 남자는 있었어?”

상대는 일언반구도 없이 전화를 칼같이 끊어버렸다.

*

“또 오셨네요, 도은혁 환자님.”

저번에 오고 며칠 되지 않아 또 왔다. 상큼하게 웃는 얼굴은 어디 포스터로 붙여도 될 정도지만 강동현만은 은근히 꺼리는 기색을 느낄 수 있었다. 사람들 앞이라면 강동현한테도 활짝 잘 웃는 황경호였다. 4번 치료실로 안내를 받으며 강동현이 그에게 살짝 변명하듯이 말했다.

“실 뽑는 건 굳이 같은 병원 가서 안 해도 될 거 아냐.”

“일 안 해요?”

황경호가 다른 사람들에게는 들리지 않게, 하지만 강동현에게는 확실하게 들릴 정도로 말했다. 한심하다는 투다.

“칼 맞아서 쉰다. 다음 주부터 다시 촬영.”

강동현은 남들 다 일할 시간에 예약도 안 잡고 슬 오더니 오른쪽 옆구리에 입은 자상을 꿰맨 실을 풀려고 왔단다. 전에 있던 병원이나 여기나 본인 집에서 크게 거리 차이도 안 날 텐데 굳이 여기까지 기어 와서 사람을 귀찮게 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살을 꿰맨 실을 잘 푸는 데는 비뇨기과만 한 곳이 없다. 어떤 곳을 꿰매고 푸는지 생각해보면 여기만큼 잘 하는 곳이 없을 것이다.

강동현은 진료용 의자를 뒤로 약간 기울여 누워 자세를 잡았다. 황경호는 장갑을 끼고 핀셋과 의료용 가위를 들고는 강동현의 옆구리 실을 풀기 시작했다. 어디 덧나거나 하지도 않고 깨끗했다. 흉이 크게 질 것 같지도 않았다. 하긴 이러니저러니 해도 건장하고 건강한 남자다. 애초에 커터칼로 깔끔하게 베여서 시간이 지나면 아예 티가 나지 않을 것 같다. 황경호는 최대한 조심조심 실을 풀었다. 아무래도 부채감이 좀 있기도 했고 말이다. 강동현은 가만히 집중하고 있는 간호사의 얼굴을 보며 그의 귓불을 만지작거렸다.

“뭐 먹고 싶은 거 없어?”

“왜요.”

황경호는 약간 신경질적으로 인상을 찌푸리긴 했으나 이젠 이골이 났는지 그냥 가만히 있었다.

“살 좀 찌우고 싶어서.”

“제 살을 왜 도은혁 환자님 마음대로 찌우고 말고 결정해요?”

“오늘 우리 집 가자. 맛있는 거 해줄게.”

저질… 황경호는 완전 그런 눈빛으로 한 번 강동현을 쏘아보았다.

‘아, 진짜….’

강동현은 요새 그가 노려보는 눈빛에 꽤 흥분했다. 꿰맨 걸 반쯤 풀고 있는데 강동현이 황경호의 팔을 잡아끌었다. 날카로운 걸 들고 있었기 때문에 깜짝 놀라서 손을 치웠다.

“뭐 하는… 읍.”

강동현은 그에게 입을 맞추었다. 그리고 곧바로 그를 끌어 당겨 자기 위에 엎드리게 했다.

“병원에서 이러지 좀 마세요, 진짜.”

황경호가 강동현이 다칠까 봐 날카로운 걸 든 손을 그의 머리맡 너머로 고정한 채 키스를 당하고 있었다. 강동현의 커다란 손이 열기를 담고 상대의 몸을 쓰다듬었다. 강동현은 그의 뒷머리를 부드럽게 감싸고 다른 손으론 그의 등과 엉덩이를 만졌다. 셔츠 속으로 들어와 약간 건조한 듯 부드러운 등을 만지고, 바지 속으로 쑥 들어가 엉덩이를 주무르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상대는 몸을 움찔거리며 예민하게 반응했다. 그런 것 하나하나가 굉장히, 돋구었다.

“키스는… 언제 처음 해봤어?”

“알아서, 음, 뭐 하게요… 읏… 잠… 읍.”

강동현이 다친 것 때문에 부채감을 느끼는 것일까. 익숙해져서? 아니면 그냥 체념한 것뿐일까. 귀찮아서 그런가. 강동현이 입을 맞추는 거나, 아주 쬐~끔 집적거리는 것엔 이젠 그러려니 하는 것 같다.

그런 면이 못 참겠는 건데.

‘아, 진짜 집에 데리고 가고 싶다. 그냥 이대로 데리고 가고 싶어….’

뭘 해주면 될까. 어떻게 꼬시지. 강동현은 마치 술집에서 여자를 낚아갈 생각밖에 없는 남자나 별반 다를 거 없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본인은 실제로 그런 걸 안 해봐서 유사성을 찾지 못할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으응… 음… 하아… 적당히… 음….”

그의 뺨을 엄지로 만지니 약간 따끈따끈해진 게 느껴졌다. 기분 좋냐고 물어보고 싶다… 강동현은 그와 키스하는 것만으로도 굉장히 기분 좋았다. 그리고 상대도 기분 좋게 만들고 싶었다. 괴롭히고도 싶었다. 부드럽지만 끈질기게 입 안을 핥으니 상대는 결국 야시시한 신음을 흘렸다.

“흐으응….”

강동현은 정말 못 참겠다고 생각했다. 자세를 반전해서 그를 아래에 깔았다. 의자가 끼익 불안한 소리를 내었다. 그의 엉덩이를 한 손으로 꽉 잡고 서로의 하반신을 비비듯이 꽉 붙이니 간호사가 강동현의 턱을 손으로 확 밀어냈다.

“적당히 좀 해요!”

황경호는 얼굴을 붉히곤 손등으로 입술을 가렸다. 강동현은 목이 뒤로 확 꺾이는 바람에 아파서 뒷목을 붙잡았다. 그는 자신의 목을 주무르며 고개를 숙인 채 무거운 한숨을 쉬고는 의자에서 내려왔다. 황경호도 얼른 내려왔다. 그러자 강동현이 다시 자리에 얌전히 앉았다.

“너 말이야… 나 봐도 정말 아무렇지도 않아? 나 남자들한테도 꽤 인기 있다고 들었는데….”

약간 꼴사나울 정도로 애원조가 되었다. 굶을 대로 굶던 시절의 강동현은 어차피 입에 집어넣을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에 오히려 잘 버텼다. 그렇게 몇 달 참다가 병을 고치겠다고 병원에 와서 황경호를 발견했다. 그 뒤엔 맛있는 걸 감질나게 조금씩 핥아 보다가, 매주 한 입 정도 베어먹을 수 있게 되었다가 두어 번 포식도 해보았는데… 다시 핥는 수준으로 돌아왔으니 본인 입장에선 얼마나 답답하겠는가.

“저 남자 안 좋아해요.”

“아니, 나 말이야. 나.”

“댁은 그냥 싫어요.”

강동현은 침을 꿀꺽 삼켰다. 손가락 끝이 굉장히 긴장된 느낌이다. 다시 붙잡고 싶어서다. 강동현은 삐딱하게 턱을 괴고는 다시 실을 뽑기 시작한 간호사를 쳐다보았다. 그는 얼굴이 상당히 상기되어 있었지만, 평정을 가장하고 있었다. 아까 몸을 맞대어 문지를 때만 해도 반응이 있는 것 같았는데 위에서 내려다보니 지금 어떤지는 모르겠다. 그래서 강동현은 가만히 그의 얼굴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냥 머릿속으로 야한 생각이나 하면서 말이다. 황경호의 핀셋이 실수로 그의 살을 집었다. 날카로운 통증에 강동현이 움찔했다.

“아, 죄송….”

눈이 마주치자 황경호가 인상을 찌푸렸다. 강동현이 굉장히 느끼~한 눈으로 쳐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좌우지간 외견이 멀끔한 남자란 이렇게 무섭다. 그럴듯해 보인다. 눈이 마주치자 그는 그대로 홀린 듯이 천천히 눈을 감으며 고개를 숙여 황경호에게 다시 입을 맞추었다. 황경호는 그의 이마와 어깨를 잡아 밀어내었다.

“그만 좀 해요…! 정신 차려요…!”

“더 못하게 할 거면…! 키스라도 맘껏 하게 해줘…! 왜 이렇게 짜게 굴어?”

강동현은 적반하장도 유분수가 있다는 건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뻔뻔하게 요구했다.

“아! 고작 12바늘 푸는데 시간이 왜 이렇게 많이 걸려요!”

“연장하면 되잖아…! 손님도 없으면서…!”

“여기가 무슨 안마방이라도 되는 줄 알아, 이 변태야!”

황경호는 결국 들고 있는 핀셋을 위협적으로 강동현의 목 밑에 들이댔다.

“가만히 있어.”

강동현은 제일 좋아하는 장난감을 뺏긴 어린아이 같은 느낌으로 등을 팍 기대어 의자에 바로 앉았다. 황경호는 마저 실을 풀어냈다. 아직 완전히 다 나은 건 아니기 때문에 상처 난 부위가 빨갛다. 황경호는 그 위에 의료용 밴드를 크게 붙여주었다.

“일주일은 떼지 마세요.”

강동현은 굉장히 몸이 무거운 사람처럼 느릿하게 일어났다. 머릿속으로 날짜를 가늠해보았다. 어차피 자위도 할 수 없을 정도의 발기부전이었기 때문에 이 간호사랑 종합병원에서 그러고 난 이후 한 달가량 단 한 방울도 배출하지 못했다. 이렇게 정력적으로 사는 남자가 말이다. 허리가 굉장히 무겁다. 불길하다.

“아, 나 이러다 또 전립선염 걸릴지도 몰라.”

강동현이 절망적인 어조로 말했다.

“그땐 치료받으면 되죠.”

“남 일이라고 아주….”

강동현은 선글라스를 꼈다. 뭘 해도 그럴 듯하게 멋진 남자다 보니 저절로 눈길이 가서 쳐다보았다. 강동현은 황경호를 돌아보았다. 가까이 다가갔지만, 거리를 두었다. 그 거리를 사이에 두고 손을 뻗어서 그의 얼굴을 만졌다.

“잠은 좀 자? 기분은 괜찮아? 집 안 불안해? 누가 찾아오진 않고?”

이제 와서야 제대로 안부를 묻는 강동현이었다. 황경호는 다크서클이 조금 내려와 있었다. 살은 여전히 빠진 채다. 그때 이덕재가 칼을 들고 황경호의 집을 3주나 점거하고 살았을 때, 그런 집에 강동현이 데려다줬을 때 다시 없을 만큼 공포와 불안에 사로잡혀서 떨던 모습이 선명했다. 언제나 평정을 가장하지만 어느 깊숙한 곳엔 언제 깨져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이 불안정한 그가 있다는 것을 강동현만은 잘 알았다.

“아직도 영 불안하면 우리 집에 와. 난 다른 데서 지내면 되니까.”

“아니요. 됐어요. 괜찮아요.”

그는 얼굴이나 머리카락을 만져주는 걸 좋아하는 것 같다. 그럴 땐 묘하게 그냥 손길을 받아들였다.

“무슨 일 있으면 말해.”

강동현은 치료실 문을 자기 손으로 열면서 나갔다. 그러면서 덧붙여 말했다.

“일단 팬티 한 장이라도 주면 안 되냐? 대충 어떻게든 될 거 같은데.”

“싫은 데요.”

“나 이대로 가면 분명히 일주일 내로 니 팬티 그냥 강제로 벗겨서 가져갈 걸… 그냥 얌전히 줘.”

“아, 저질. 최악이야.”

강동현은 웃으면서 밖으로 나갔다. 내부 카운터에서 다음 시간 예약을 변경했다. 화장실에서 잠깐 손을 씻고 나오는데 병원 원장이 간호사들이랑 얘기하는 것이 보였다.

“경호 완전히 살이 쏙 빠졌네. 다시 좀 찌나 싶더니.”

“5킬로 정도 불렸었는데 다시 줄었어요.”

“아, 남자는 그래도 너무 마르면 안 돼.”

“하긴 선생님은 몸 좋으시죠.”

황경호가 이강유의 배를 만져보았다.

“힘 줄 시간은 줘야지.”

이강유가 웃으면서 황경호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어린아이를 쓰다듬듯이 머리카락과 얼굴을 투박하게 슥슥 쓰다듬어주었다. 그러자 그 간호사는 굉장히, 뭐랄까… 수수하게 웃었다. 언제나처럼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해 활짝 웃는 게 아니었다. 바쁜 원장은 금세 떠나갔지만 황경호는 잠깐 동안 그의 뒷모습을 눈으로 쫓았다. 그리고 고개를 돌렸을 때 강동현과 눈이 마주치자 금방 표정이 바뀌었다.

“더 필요한 거 있으세요, 도은혁 환자님?”

“…….”

어쩐지 가슴이 답답해졌다.

*

환자가 앉아 있어야 할, 앉은 각도를 조절할 수 있는 치료용 의자 위에 간호사가 앉아 있었고 그 앞에는 환자로 추정되는 남자가 서있었다. 둘은 간호사의 바지를 잡고 있었다. 하나는 벗기려고, 하나는 그걸 막으려고.

“아…! 잠깐만…! 놔…!!”

“가만히 있어!”

“아, 이 미친놈아…! 하지… 말라고…!”

“내가 말로 할 때 얌전히 주라고 했지!”

강동현은 결국에 황경호의 바지랑 팬티를 홀랑 벗겨버렸다. 그대로 그걸 한 손에 쥔 채 뒤로 도망갔다. 황경호는 얼굴을 새빨갛게 붉히며 윗옷을 잡아 내렸다. 머리끝까지 화가 나서 마구 욕을 했다.

“이 쓰레기 호모 변태 색마 지루 불능 고자!”

“하나만 해라, 하나만.”

다른 사람이 말했으면 모르겠지만 황경호가 말하는 것에는 전혀 타격을 받지 않는지 강동현이 그렇게 놀렸다. 황경호가 그대로 잡으러 오려고 하자, 강동현이 치료실 문손잡이를 잡았다. 황경호가 움찔하고 멈춰 섰다. 황경호가 억울함을 가득 담아 상대를 힐난했다.

“치사하게….”

강동현은 흥 하고 웃었다.

“나 치사한 거 이제 알았냐. 그러니까 그냥 주라고 할 때 주지.”

“아, 진짜. 좀! 그렇다고 이러면 어떡해요! 나 일해야 한다고!”

황경호가 화를 내자 강동현이 의기양양하게 웃었다. 어쨌든, 황경호를 괴롭히기 아주 좋아하는 남자였다. 강동현은 황경호의 팬티를 자기 바지 주머니에 넣었다. 그리고 왼쪽 손목에 찬 시계를 보더니 황경호한테 바지를 흔들었다.

“남은 시간 동안 키스하게 해주면 바지는 돌려줄게.”

“아… 내가 저 새끼를 왜 경찰에 안 찔렀을까….”

그냥 만나자마자 신고했어야 했다. 황경호는 땅을 치고 후회하며 얼굴을 한 손으로 감쌌다. 한숨을 푹푹 쉬더니 결국 결심했는지 강동현에게 척척 걸어갔다. 서로 틈만 나면 엿 먹였던 적이 있었기 때문에 강동현은 경계심을 풀지 않고 문손잡이를 잡고 있었다. 여차하면 열겠다 이거였다. 황경호가 자기 바로 앞에 올 때까지도 그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의도를 살폈다. 황경호는 강동현의 의기양양한 얼굴을 노려보았다.

“죽어 버렸으면 좋겠어.”

그렇게 말하며 황경호는 강동현의 멱살을 잡아당겼다. 입술이 닿는 순간, 정말 짜릿했다. 금방까지 치고 박고 싸워서 그럴까, 아니면 일주일만이라서? 강동현은 그의 입술이 닿는 순간 머리털 끝까지 저린 게 느껴졌다. 강동현은 바로 들고 있던 바지를 옆으로 집어 던지고 그의 허리와 맨 허벅지를 잡아 그를 들고는 문에다 쾅 밀어붙였다. 황경호가 깜짝 놀라서 아픈 것도 잊고 그를 타박했다.

“미쳤어? 밖에 들…!”

강동현의 숨이 순식간이 엄청나게 거칠어졌다. 강동현은 황경호의 맨다리를 쭉 쓰다듬어 자신의 허리를 감싸게 했다. 그리고는 자신의 팔로 그의 허벅지를 받치며 엉덩이를 잡았다. 황경호가 인상을 찌푸리며 그의 손을 떼어내려고 했다. 그리고 이미 하반신은 서로 맞대어져서 문질러지고 있었다. 강동현이 오늘은 면바지를 입고 있어서 망정이지 쓸려서 아플 뻔했다.

“읍… 으음…! 으응…! 으으응…!!”

입맞춤이 너무 거칠고 강동현이 너무 흥분해서는 섹스하듯이 서로의 하반신을 문질러대고 있었다.

‘키스만 한다면서…!’

강동현의 혀가 엄청 깊게 들어와서는 혀의 뿌리까지 핥아 대었다. 입을 크게 벌리고 있는데도 정말 숨쉬기가 힘들었다.

바깥 대기실과는 얇디얇은 문 하나만 사이에 두고 이쪽은 19금 영화를 방불케 하는 엄한 입맞춤을 하고 있었다. 강동현은 이미 황경호의 엉덩이와 허벅지를 잡고 그를 들어 올린 채로 벽에다 밀어붙이고 있었다. 강동현의 것은 이미 꽤 부풀었다. 여기도 얇디 얇은 천 몇 장을 사이에 두고, 느리지만 강하게 문질러지고 있었다. 십 수 분을 이러고 있으니 황경호는 정말 숨을 쉴 수가 없어서 그의 머리카락을 잡아당기다가 등을 마구 쳤다. 강동현은 끝까지 황경호의 입 안을 핥아 대다가 순간 정신을 차린 듯 입술을 떼었다.

“아….”

강동현은 탄식에 가까운 낮은 신음을 흘렸다. 그는 황경호의 이마에 자신의 이마를 댄 채 눈을 감고 한숨을 쉬었다.

“큰일 날 뻔했다….”

“…….”

뭐가 큰일 날 뻔했다는 건지는 알 수 없다. 황경호는 숨을 헐떡거리면서도, 눈을 감고 있는 강동현의 얼굴을 가만히 보고 있었다. 그대로 서로의 몸을 밀착한 채 강동현은 황경호의 얼굴을 감싸 쥐고 머리카락과 뺨을 꽤 쓰다듬다가 겨우 억지로 몸을 떼었다.

“바지 입어. 나 나간다.”

강동현은 황경호의 얼굴도 쳐다보지 않고 그렇게 말하더니 선글라스를 끼고 바로 문손잡이를 잡아 돌렸다. 미쳤다. 황경호는 깜짝 놀라서 바닥에 떨어진 바지를 주워서 열리는 문 뒤로 숨었다. 강동현은 내부 카운터에서 다음 예약을 묻는 소리를 무시하고 곧바로 걸어나갔다.

“갑자기 문을 열면….”

불만을 말하려고 해도 들어야 할 인간은 벌써 나갔다. 황경호는 깜짝 놀라서 콩닥콩닥거리는 심장 소리를 들으며 문을 닫고 얼른 바지를 입었다. 노팬티이지만 어쩔 수 없었다. 치료실 밖으로 나가려는데 마음의 준비가 필요했다. 아직도 입 안이 민감하다. 뺨도, 머리카락도. 다리나 엉덩이나 그의 손이 집적댔던 곳은 어쨌든… 잠깐 한 손으로 입 주위를 덮고 눈을 감고 마음을 다잡았다. 그리고 문을 열고 나갔다.

“어, 황 간. 도은혁 환자 예약도 안 하고 나갔어.”

“아, 그래? 또 똑같은 시간 오겠지. 나중에 전화해볼게.”

황경호는 그렇게 말하고 잠깐 병원 밖으로 나갔다. 편의점에 가서 얼른 팬티를 하나 사서 올라와서는 화장실로 향했다. 얼른 팬티를 안에 입고 있어야지 일을 다시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고급스러워 보이는 문을 밀어 안으로 들어왔다.

“큭… 으윽… 하윽… 큭….”

그렇게 들어왔는데 황경호는 예상치 못한 소리에 깜짝 놀라서, 거짓말 안 하고 주저앉을 뻔했다. 어디서 여자들이 좋아한다는 보이스 라디오를 틀어놓은 것 같았다. 엄청나게 섹시하고 좋은 남성의 목소리가 나고 있었다. 당사자는 억누르려고 하는 것 같았지만 그래서 더 그렇고 그런 목소리 같았다. 탄식 같기도 하고 감탄 같기도 한 억눌린 숨소리들이 어딘가 저릿하게 만든다. 황경호는 순간 자신이 뭘 하러 들어왔는지도 모르고 굳어버렸다. 거기다 저 목소리의 주인을 그는 알고 있었다. 그대로 망부석처럼 굳어서 온몸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왜인지, 이쪽이 부끄러웠다.

“하아… 아… 윽… 후… 으….”

게다가 그의 목소리만 울리는 게 아니었다. 남자라면 누구라도 알만한 소리가 나고 있었다. 자위를 할 때 손과 고환이 부딪치고 체액이 질척거리는 소리.

‘진짜… 이 인간이 뭘 하고 있는 거야…! 공공장소에서!!’

그의 피치가 빨라질수록 황경호는 얼굴이 더 빨갛게 되었지만, 어째서인지 나갈 수가 없었다. 소리를 낼 수도 없었다. 주박이라도 당한 것처럼 꼼짝할 수가 없다. 이런 것도 관음증의 일종인 걸까. 아까 치료실을 급하게 나간 것도 이러려고 그런 건가. 황경호가 편의점을 갔다 올 사이에도 이러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발기부전에 불감증, 지루까지 골고루 있는 남자라 꽤나 시간이 걸렸다. 그리고 드디어….

“크으윽…!”

화장실 문까지 덜컹거렸다. 아까 전까지의 긴박한 소음은 끊기고 그대로 숨 막힐 듯 침묵이 이어졌다가, 몇십 초 뒤에 드디어 길게 숨을 들이켰다가 내쉬는 게 들렸다. 아찔할 정도의 숨소리. 그리고 또 몇 분 뒤가 되어서야 옷을 입는 소리가 나더니 예고도 없이 문이 확 열렸다. 황경호는 누가 발에 못이라도 박아놓은 것처럼 꼼짝도 못 하다가 금방의 주인공이 나오자 그를 올려다보았다.

“…….”

“…….”

선글라스를 끼고 있는 강동현의 얼굴은 상당히 상기되어 있었다. 물론 황경호는 완전히 토마토 같았다. 강동현은 황경호가 밖에 있는 것을 보고도 전혀 당황하지 않았다. 강동현은 그대로 황경호에게 다가오더니 그의 오른손을 잡아서 무언가를 쥐어주었다. 그리고는 손을 씻고는 페이퍼 타월로 손을 닦으며 밖으로 나갔다.

황경호는 자신의 손에 쥐어진 것을 내려다보았다. 아까 강동현이 뺏어갔던 황경호의 팬티였다.

꽤나 묵직…했다.

“$#%#^&@…!!”

‘저 인간 진짜 죽여 버릴 거야!!’

*

그 뒤로도 강동현의 악행은 계속되었다.

치료실에서 치료를 받기는커녕 황경호의 바지를 벗겨서 팬티를 강탈해 가기 일쑤였고, 가끔은 퇴근할 시간을 귀신같이 맞춰 와서는 차로 잠깐 납치(?)해서 팬티를 벗겨 갔다. 안 그래도 칼 맞아 일정이 죄다 밀린지라 엄청 바쁜 걸로 알고 있는데 악착같이 찾아왔으며 빈도도 점점 많아졌다. 도대체 어떻게 시간을 맞추는지 알 수가 없었다.

치료실에서 벗겨갈 때는 입맞춤을 끈질기게 요구하곤 했었지만, 차를 타고 와 퇴근 시간을 노릴 땐 잽싸게 팬티만 벗겨서 가져갈 때가 많았다. 그리고 노팬티 상태의 황경호를 차 밖으로 내쫓곤 엄청 엑셀을 밟아서 어디론가 가곤 했다. 완전 제멋대로다. 처음 당했을 때는 너무 황당해서 제대로 화도 못 냈다.

게다가 그러면서 꽤나 끈질기게,

[첫 상대는 누구야? 언제 했어? 어떤 여자였어?]

혹은,

[첫 키스는 언제 했어? 몇 살 때 했어? 누구랑 했어?]

또는,

[그런 건 해봤어?]

내지는,

[이런 건?]

이런 추궁에 가까운 질문들을 해댔다. 정말 귀찮았다. 아주 성가셨다. 그렇지 않아도 황경호는 한두 달 전까지만 해도 병원 환자 중 하나인 이덕재라는 사람에게 몇 달 동안이나 스토킹을 당해 거의 신경쇠약에 걸릴 뻔했다. 그는 누가 보아도 사회 부적응자에 직업도 없고, 키는 작고 뚱뚱하고 여드름 득실한 외모를 가지고 있어 사회성을 가지기도, 다른 사람들에게 애정을 받기도 굉장히 힘든 조건을 가지고 있었다. 게다가 사회생활을 오래 하지 않아 자기중심적이며 상대방을 배려하지 못하는 성격이 병적으로 심했다. 망상증까지 생겨 나중에는 황경호가 자신에게 흘렸다느니, 꼬셨다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곤 했다.

너무나 불쌍한 그 모습에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친절하게 대해 주었던 게 문제였을까. 애초에 이런 사람을 피하는 사람들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이런 사람 자체가 잘못된 것일까. 그가 원하는 대로도 해주어 보고 경찰에 신고까지 해보았지만 그는 떨어지지 않았다. 결국 누가 다치고 구속이 되고 나서야 끝났다.

이렇게 큰일도 치뤘겠다, 이제 맘 먹고 잘살아 보자고 마음 먹은 황경호에게 강동현만큼 짜증 나는 인간이 없었다. 그야말로 황경호를 1년 넘게 괴롭히던 장본인이 아닌가. 아무리 배우로 활동하고 있는 그를 소위 ‘덕질’하고 있는 황경호라지만 인간 ‘도은혁’ 자체는 싫었다. 아마 황경호만큼 그를 싫어하는 사람도 없을 것이다.

금요일 3시. 황경호는 정확하게 시간에 맞춰 도착한 강동현에게 여느 때처럼 웃으며 인사했다.

“오셨어요. 차 많이 막히지 않으셨어요? 이쪽으로 오세요.”

선글라스와 마스크, 모자까지 쓰고 있는 강동현은 웃는 얼굴로 자신을 맞이하는 그를 보며 실실 웃었다. 4번 치료실로 안내를 하자 금세 강동현이 황경호의 엉덩이에 손을 올렸다. 황경호가 그 손을 태블릿PC로 가렸다. 강동현이 그의 엉덩이를 주무르며 은근히 귀에 속삭였다.

“오늘은 조금만 더 하자.”

“옷 갈아입고 오세요.”

치료실에 들어가고 그 문이 닫히자마자 강동현은 마스크를 벗더니 탈의실로 가기는커녕 곧바로 굉장히 집적거리기 시작했다. 뒤에서 끌어안아서는 머리카락에 얼굴을 묻고 냄새를 맡았다. 황경호의 얼굴에서도 바로 웃음기가 싹 사라지고 상당히 성가시고 짜증 난다는 얼굴이 되었다. 황경호는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강동현의 얼굴을 겨냥했다.

“빨리 안 떨어지면 이거 쏩니다.”

“…뭐야, 이거.”

“저 장난 아니에요. 이거 쏘면 눈 빨개지고 얼굴 부어서 촬영 못 하실 걸요.”

강동현은 황경호가 들고 있는 치한용 페퍼 스프레이를 가만히 보고 있다가 순식간에 그걸 뺏었다. 황경호는 전혀 당황해 하지 않고 주머니에서 하나 더 꺼냈다. 진심이라는 걸 안 걸까. 결국에 강동현은 정말 싫다는 듯이 끙, 하더니 떨어졌다.

‘그래, 요새 너무 당해준다 싶더니 이럴 때가 됐지….’

황경호는 그 사이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던 것처럼 정해진 대사를 읊었다.

“옷 갈아입고 오세요.”

“알았어….”

황경호는 미적거리는 강동현의 등을 밀어서 탈의실로 넣었다. 강동현은 가운으로 갈아입고 맨 얼굴로 오래간만에 제대로 치료용 의자에 앉았다. 뭐, 아무리 잘생긴 남자라도 저런 옷을 입고 있으면 좀 웃기다. 황경호는 그의 의자를 적절히 뒤로 기울이고 가운을 벌리고 구멍이 난 녹색천을 대었다.

“차갑습니다.”

황경호는 수술용 장갑을 끼고는 젤을 쭉 짜서 강동현의 서혜부와 아랫배에 바른 후 온열감이 있는 마사지기를 대고 마사지를 하기 시작했다. 강동현은 뚱한 얼굴로 아무 말도 없이 못마땅하다는 듯 그를 계속 보다가 왼손으로 간호사의 오른쪽 귓불을 만지기 시작했다. 간호사는 약간 한숨을 쉬긴 했지만 싸우기 귀찮다는 듯이 그냥 두었다.

“팬티 사줄까?”

진짜 이 변태는 왜 이렇게 사람 성질을 긁는 말만 골라서 하는 걸까. 황경호는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싫어요.”

“왜. 내가 너무 많이 들고 가서 없을 거 아냐. 받아.”

“이상한 거 사줄 거잖아요.”

“너 맨날 트렁크나 브리프밖에 안 입잖아. 어차피 내가 들고 갈 건데. 조금만 내 취향으로 입으면 어디 덧나냐.”

“네.”

“안 덧나.”

“덧나요.”

“덧 안 나.”

강동현은 간호사의 귓불을 엄지와 검지로 비비듯이 계속 만지다가 손으로 그의 머리카락을 파고들어 목덜미를 쥐고 엄지로 쓰다듬었다. 그리고 어깨 속으로 살짝 손을 넣어 쇄골을 만졌다.

“적당히 하세요.”

황경호가 경고하듯이 말했다.

“조금만 참아줘. 오늘은 키스도 못 하게 할 거잖아.”

강동현이 그렇게 말했다. 강동현은 어깨와 목을 손으로 감싸고 엄지로 쇄골이나 목젖, 턱 아래를 쓰다듬었다. 황경호가 인상을 약간 찌푸렸다. 강동현은 이 이상 집적거리는 걸 포기했는지 약간 잠이 오는 표정이 되었다. 밀린 촬영분까지 연일 강행군이다. 강동현은 하품을 한 번 했다가 문득 생각난 듯 물었다.

“근데… 이때까지 만났던 여자들 중에서 어떤 여자가 제일 취향이었어? 청순파? 섹시파? 아니면 평범한 쪽?”

“아~, 진짜 그런 건 왜 계속 물어보는데요?”

또 또. 또 이런다. 황경호가 짜증을 냈다.

“응? 그냥. 궁금하잖아… 어떤 스타일이랑 할 때 제일 좋았는지, 어떤 스타일은 싫었는지. 아님 뭐, 어떤 식으로 하는 게 좋은지.”

“남이사 뭐가 좋든, 그런 게 왜 궁금한 데요?”

황경호가 정말 짜증 난 목소리로 다시 물었다. 강동현은 약간 짓궂은 생각이 들어 반은 장난, 반은 진심으로 말했다.

“다음에 다시 너랑 할 때 참고하려고.”

치이이익. 황경호는 아까 전부터 들고 있던 치한용 스프레이를 강동현의 거시기에 정확하게 뿌렸다.

“…!”

콜록콜록. 황경호마저도 눈이 매워 뒤로 화급히 물러났다. 처음 써봤는데 굉장히 독했다. 강동현은 엄청나게 괴로운 표정으로 얼굴이 시뻘게져서는 신음을 흘렸다.

“야… 너, 죽을… 큭….”

말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강동현은 자신의 아랫배를 덮고 있는 녹색 천으로 최루액을 닦아냈지만 점점 갈수록 따가워졌다.

“아, 잠깐… 큭. 야. 이거… 으윽.”

강동현은 진짜 고통스러운지 어쩔 줄을 몰라 했다. 황경호는 본인도 콜록거리다가 그 꼴을 보고는 웃었다.

“와, 대박. 진작 살걸.”

괜히 치한용 스프레이가 아니었다. 지금까지 강동현이나 이덕재한테 당한 걸 생각해보면 이걸 왜 이제야 쓸 생각이 들었나 싶을 정도다.

‘하긴, 내가 이런 게 필요한 날이 올 거라곤 상상도 못 했었지.’

강동현은 진짜 앉지도 일어서지도 못하고 부들부들 떨었다. 진짜 아픈 모양이다. 하긴 그냥 피부에 닿아도 아프다는 걸 거기다가….

“지금 웃을 때야! 빨리 와서 어떻게 좀 해봐…! 윽…! 진짜 아프다고!”

“싫은데. 얼굴에 안 뿌린 게 어디야.”

“갈수록 더 아파…! 윽…!”

“그러게 누가 가만히 있는 사람 괴롭히래?”

그렇다. 그가 곧잘 체념하며 뭐든 잘 받아들인다고(심지어 이덕재 같은 사람마저도) 해도 그냥 당하기만 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가끔씩 꼭지가 돌아 스스로도 들이 받아버리던 걸 생각하면, 그걸 조금만 외부로 발산시켜도 이 정도는 너끈히 해낼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건 당연했다. 강동현도 그런 면에 꽤나 치였던 적이 있지 않았던가. 황경호는 멀찍이 서서 아주 통쾌해하며 강동현이 고통스러워하는 걸 구경만 했다. 캡사이신의 매운 냄새가 진동을 했다. 강동현은 스스로 차가운 마사지 젤을 잔뜩 자기 거시기에다 발랐다가 다시 의료용 천으로 닦아냈다. 그것도 썩 효과가 있는 것은 아닌지 엄청난 고통을 그대로 견디다가 황경호를 찌를 듯이 노려보았다. 황경호는 콧방귀만 꼈다.

“흥.”

그리고 그는 여기저기 어질러진 걸 정리하더니 치료실 문으로 다가갔다.

“이제 다음 환자 들어와야 하는데. 문 엽니다?”

저번에 강동현이 했던 그대로 복수를 하면서 의기양양하게 강동현을 쳐다보았다. 강동현이 이를 갈면서 겨우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났다. 황경호는 그의 꼴사나운 모습을 보면서 저도 모르게 킬킬거리며 웃었다. 강동현은 탈의실로 어기적어기적 걸어가다가 황경호를 노려보았다.

“너 진짜 다음에 죽는다.”

황경호는 혀를 내밀었다.

그렇게 한 번 강동현을 퇴치하고 나니 정말 가슴이 후련했다. 왜 진작 안 이랬을까. 그래서 며칠 동안 아주 상쾌한 기분으로 잘 살았다. 그 이후 때 되면 나타나는 그 끈질긴 변태를 몇 번이나 치한 스프레이로 퇴치했다. 정말 후련~했다. 근래 이렇게까지 마음 가볍게 살았던 적이 있었나 싶다.

“요새 기분 좋아 보이네?”

“아, 진짜요?”

“무슨 좋은 일 있어?”

“네? 아뇨. 없어요.”

원장의 질문에 웃으며 그렇게 답했다. 생각해보면 강동현한테 엿을 먹일 때마다 항상 기분이 좋았다. 그에게 이대 앞에서 ‘나는 고자다!’라고 외치게 했던 건(와, 그 동영상 잊고 살았다. 다시 봐야지) 진짜 신의 한 수였다. 잊고 살았다, 이 짜릿함. 황경호는 콧노래를 부르며 차트를 잘 정리하고 입원 환자들을 체크하고 기구가 소독이 잘 되어 있는지 소모품의 재고는 넉넉한지 체크를 하고 약간 늦게 퇴근을 했다.

‘아, 이번에 강동현 뭐 나레이션 했다고 했지? 그거나 봐야겠다.’

그렇게 퇴근 후 계획까지 세우며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는데 곧바로 쎄~한 느낌이 들었다.

“…….”

“이거 뿌려요.”

흥. 황경호가 웃었다. 이제 대충 이 인간이 어떻게 사람을 끌고 가는지 감이 왔다. 아니나 다를까. 돌아보니 선글라스를 낀 키 큰 남자가 자신의 뒤에 서서 애매한 포즈를 잡고 있는 것을 바로 발견했다. 사람들이 많이 퇴근해서 어두컴컴한 청담빌딩의 1층. 여기서 바로 끌고 가면 지하주차장으로 갈 수 있었다. 황경호는 바로 호주머니에서 치한용 스프레이를 꺼내서 그의 얼굴 정면에 조준했다.

“너 또 얼굴에 뿌릴 생각… 악!”

아마도 촬영 중 나왔을 거 같아서 아~주아주 살짝 뿌렸다. 그리고는 그가 비명을 지르며 비틀거리다가 씻으려고 얼른 어디라도 들어가는 것을 보며 뿌듯하게 웃었다. 정의를 구현한 느낌이었다.

“진짜 사람을 뭘로 보고.”

아마 손쉬운 팬티 자판기 정도로 생각한 게 분명했다. 황경호는 마음이 다 뿌듯하다. 퇴근하는 발걸음마저 가벼워졌다.

‘아, 진짜 박스 채 사야겠다.’

이렇게 간편하고 손쉬운 방법이 있었다니. 진작에 이럴 걸 그랬다. 그랬다면 저 끈질긴 인간 엿도 먹이고 물리치고 얼마나 쉬웠겠는가. 그간 저놈 때문에 고생했던 체증이 싹 내려가는 것 같았다. 세상에 저놈이 고통스러워하는 것만큼 고소한 게 없었다. 아, 통쾌.

그는 그렇게 룰루랄라 지하철역으로 향했다. 한참 뒤가 되어서야 커피숍 화장실에서 얼굴을 씻고 나온 강동현은 그가 어디로 갔는지 찾다가 사람들이 자신을 쳐다보는 걸 느끼며 선글라스를 꼈다. 아직도 얼굴이 욱신거렸다. 분명히 부었을 것이다.

‘아, 촬영….’

강동현은 당장 돌아가야 하는 촬영지를 떠올리며 한숨을 쉬었다.

저 간호사… 그간 당하기만 하더니 감이 엄청 좋아졌다. 강동현이 기회를 노리고 들어올 때를 완벽하게 파악한 것이다. 그때 거시기에 스프레이를 한 번 분사하고 난 이후로 그 효력을 맹신하게 되었는지 번번이 강동현의 면전에 그걸 들이밀기 시작하더니 이내는 결국 정말 치한 마냥(사실 진짜 치한 맞다) 뿌려댔다. 이미 한 세 번 정도 얼굴에 스프레이를 맞고 촬영장을 가는 사태가 벌어져서 꽤 문제가 되었다.

이제 진짜 안 되는 건가?

그 많은 일을 겪은 끝에 결국 종착점이 치한 스프레이라니… 할 말이 없다. 강동현은 얼굴을 차가운 캔으로 진정시키며 결국 차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여전히 캡사이신 냄새가 났다. 강동현은 과속을 해대며 운전을 하다가 갑자기 소리를 질렀다. 차를 옆에다 세웠다.

“아!!!”

욕구불만이 하늘을 찔렀다. 그 간호사가 야시시한 신음을 잔뜩 흘리며 더 이상 못 하겠다고 할 때까지 줄기차게 그의 엉덩이를 따먹고 싶었다. 좁고 뻑뻑한 그곳이 쫄깃해지고 그의 것에 딱 알맞을 정도로 익숙해질 때까지. 사정을 너무 많이 해서 더 이상 들어갈 곳이 없을 정도로. 울고불고 욕하는 그 얼굴을 보고 싶었다. 그러면서 결국 강동현 때문에 오르가즘을 느끼며 야한 얼굴로 가버리는 걸 보고 싶다.

생각하니까 곧바로 차를 돌려서 그의 집으로 쳐들어가서 그냥 덮쳐버리고 싶었다. 그냥 욕먹고 원망을 듣고 말지. 더 이상은 못 참겠다.

‘진짜 못 참겠다….’

이쪽은 너무 굶었고, 저쪽은 너무 맛있었다. 강동현은 머리 받침대를 뒷머리로 쿵쿵 찧다가 휴대폰을 들어 올렸다.

<제발 팬티 한 장만요.>

메시지를 보냈다.

*

“옷 갈아입고 오세요.”

“치료는 됐어….”

강동현은 의자에 털썩 앉았다.

“치료 안 받을 거면 왜 왔어요? 돈지랄 해요?”

“그게 문제가 아니라….”

황경호는 강동현의 진~하고 아주 부담스러운 눈길을 받으며 약간 긴장했다. 어쨌든 이쪽에겐 저쪽도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처럼 느껴지는 건 마찬가지다. 그가 바짝바짝 마르는 입술을 떼서 물었다.

“메시지 받았어?”

“무슨 메시지요?”

“문자. 팬티 한 장만 달라고….”

강동현은 어쩐지 기세가 팍 꺾인 목소리로 말했다. 황경호는 별다른 반응이 없이 지나가듯 답했다.

“아, 그거….”

‘아, 그거….’가 아니다. 이쪽은 정말 심각하다. 강동현은 약간 예민해져서는 조급하게 말을 이었다.

“나 진짜 딱 한 장만. 아니, 일단 한 장만… 우앗! 나한테 손대지 마!!”

황경호는 깜짝 놀라서 그의 얼굴을 보았다. 환자가 옷을 안 갈아입고 오니 예전처럼 그냥 바지만 살짝 벗겨서 대충 하려는데, 강동현이 기겁을 하면서 자기랑 전혀 어울리지 않는 소리를 했다. 무슨 자기가 치한한테 당하는 줄 알겠다. 치료용 의자가 덜컹하며 뒤로 움직였다.

“하아… 하아… 윽….”

강동현은 완전 처음 보는 얼굴로 100미터 달리기라도 한 사람처럼 숨을 헐떡거리더니 자신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쌌다.

“와… 나 진짜… 큰일… 내겠다….”

“왜 그래요? 괜찮아요? 어디 아파요?”

황경호는 영 평상시 같지 않은 그를 보며 퍽 걱정이 되었다. 안 그래도 이상한 놈인데 뭘 잘못 먹었나…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빤히 보고 있었다. 강동현은 겨우 두 손을 떼더니 황경호의 얼굴은 보지도 않은 채 벌떡 일어났다.

“나 간다. 팬티는 그냥 우리 집으로 보내라.”

그리고는 치료실 문 쪽으로 빠르게 걸어갔다. 황경호가 어이가 없어서 중얼거렸다.

“안 보내요….”

“야! 꼭 보내!!”

그러자 강동현이 치료실 문을 열다가 말고 뒤를 돌아보며 빽 소리를 질렀다. 정말 궁지에 몰린 얼굴이었다. 눈을 마주치니 그는 더 그런 표정이 되었다. 곧 인상을 팍 쓰며 선글라스만 끼고 나가버렸다. 이상한 놈… 황경호는 물건을 정리하고 밖으로 나갔다.

“도은혁 환자 오늘 치료 안 받았어. 일 있다고 그냥 나갔어.”

“아, 진짜? 예약도 안 하고 가던데?”

“바쁜가 봐.”

황경호는 관심 없다는 어투로 그렇게 말했다. 그러고 일을 쭉 하고 입원실들을 정리하는데 갑자기 생각이 났다.

‘뭔놈의 팬티 타령이야, 허구한 날….’

황경호는 당연히 그때 화장실에서 있었던 일을 잊지 않았다. 예전에 팬티를 공급해줄 때도 막연히 ‘이상한 짓 하는 건가….’ 라고 생각은 했지만 크게 와 닿게 상상하지는 못했는데 그때 병원 화장실에서 그러는 걸 듣고, 그 변태가 자기가 양껏 쓴(?) 황경호의 팬티를 그의 손에 쥐여주고 갔을 때 정말 피부에 닿게 그가 자신의 속옷에 어떤 변태짓을 하고 있는지 실감이 났다. 그런데 어떻게 팬티를 다시 주겠는가.

어차피 강동현은 훨씬 잘 참는 남자였다. 엄청난 노력가이니 인내심도 강했고, 애초에 비뇨기과 병원에 내원한 것도 몇 달이나 발기부전이 지속되고 나서였다. 아마 지루나 불감증은 이전부터 있었을 것이다. 어차피 전립선염이 도지지 않는 이상 발기부전이나 나머지 증상들은 충분히 견딜 수 있다는 말이었고 의사와의 상담내용을 보면 전립선염은 아직 먼 것 같다.

거기다 황경호(나 황경호의 팬티)한테 하는 걸 보면 분명히 사정을 하거나 제대로 느낄 수도 있다는 것이다, 빈도가 낮아서 그렇지. 지금 당장은 여자랑만 제대로 안 된다는 것이고 자위도 어느 정도는 가능하다는 건데 뭘 저렇게 오버하는지 모르겠다.

심인성은 마음을 고쳐먹어야지 해결이 되는 것이다. 스트레스를 관리하든 명상을 하든 해야지. 뭔가 쉽게 하겠다고 어떻게든 만만해 보이는 사람 괴롭혀서 이상한 쾌락을 얻는 데 만족하면 평생 못 고친다.

‘어휴, 그 새끼도 정말 정신 좀 차려야지.’

황경호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그렇게 생각했다.

*

나름 황경호가 그를 위하는 마음으로 그렇게 생각해준 것도 모른 채, 강동현은 그 이후로도 지속적으로 황경호에게 팬티 타령을 해댔다. 없으면 죽을 기세다.

“아… 이 인간 진짜 끈질겨….”

아침이었다. 겨울이 다가오고 있어 일출이 늦다. 새가 지저귀는 소리가 들렸다. 황경호는 출근을 하기 위해 매일 7시에 일어났다. 알람을 굳이 듣지 않아도 5~10분 전에는 일어나는데, 밤새 들어와 있는 부재중 전화와 수신 문자들을 보면서 그렇게 중얼거렸다. 죄다 빨리 팬티를 내놓으라는 얘기였다.

<진짜 한 장만 딱 한 장만!>

<그래도 한국 사람이 한 개는 너무 박하고… 진짜 5개만 있으면 어떻게든….>

<아니면 그냥 집에 있는 세탁물을 다 보내. 내가 잘 빨아서 돌려줄게. 전부 다려서 각 잡아서 돌려줄게>

이런 짧은 것들도 있었고 아예 장문의 메시지도 있었다.

<내가 지금까지 너한테 지은 죄도 많고 백 번 사죄해도 너한텐 모자라겠지만, 진짜 요즘 나 너무 심각하다. 처음 만났을 때도 그렇고 그 뒤도 그렇고 내가 계속 니 기분 생각 안 하고 들이댄 거 진짜 백 번 무릎 꿇고 빌게. 너 기분 나쁠 거 알면서도 내 마음이 너무 급해서 그랬는데 진짜 내가 쌍놈이다… 앞으로 그렇게 막무가내로 안 들이댈 테니까 진짜 팬티만 보내줘… 진짜 너한텐 손가락 하나도 안 댈게. 약속, 진짜 약속. 근데 진짜… 나 너 아니면 안 되는 거 알잖아. 알면서도 이러는 거지ㅜㅜㅜㅜㅜ>

…누가 보면 일방적으로 차여서 징징거리는 구남친인 줄 알겠다. 찌질하다. 이덕재가 이런 식으로 메시지를 보냈을 땐 정말 이름이 뜨는 것만으로도 소름이 돋았는데 강동현이 이러니 웃긴다. 지금까지 비굴은커녕 적반하장에 배 째라 심보로 사람을 마구 괴롭히던 그였다. 예전을 생각해보자면 이놈도 성격 많이 죽었다….

‘이런 생각을 할 수 있는 것도 요즘 기분이 괜찮기 때문일까.’

시간과 다른 사람들의 도움으로 우울증에서 벗어나는 듯했다가 이덕재 때문에 하루하루를 살얼음판을 걷는 것 같이 살았던 때가 있었다. 그러다가 그가 잡혀 들어가고 다시 예전과 별다를 것 없는 일상생활을 영위하게 되니 그래, 다 뭐라고 그렇게 아등바등 고민했나 싶기도 하고, 다 마음먹기에 달린 거구나 싶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강동현이 집적되는 것에 대해서도 꽤 방어력이 높아지게 되었고 치한용 스프레이까지 장만하여 그를 열심히 퇴치하고 지냈다.

[야! 꼭 보내!!]

“아, 진짜 웃기다니까, 이 인간도. 큭큭.”

갑자기 며칠 전 완전 궁지에 몰린 표정으로 그렇게 버럭 화를 내고 도망치듯 병원을 나가버린 강동현이 생각났다.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강동현을 골탕 먹이는 게 세상 그 무엇보다도 유쾌하다… 새삼 그걸 깨닫고 이게 무슨 심리인가, 스스로 돌이켜 생각해보기도 했다.

예전 강동현이 처음 황경호에게 접근해서 자신을 치료해달라고 할 때도, 그가 자신에게 하는 짓들이 너무 화가 나서 저도 모르게 누구에게도 득 될 것 없는 요구사항을 지르곤 했다. 그 압권이 마포대교에서 뛰어내리는 거였지. 지금 생각해보니 진짜 대단하다, 그놈….

자신을 그렇게 괴롭히던 그가 곤란해하거나 한 방 먹어 열 받아 죽으려고 하면 그렇게 고소할 수가 없었다. 아마 그냥 모르는 사람이나 악인한테 골탕을 먹인다고 그렇게 후련할 것 같지 않았다. 심지어 이덕재마저도, 아마 이덕재에게 그런 골탕을 먹이겠다는 생각은 앞으로도 하지 않을 것 같다. 이덕재에게 그러는 것은 어쩐지 약자를 괴롭히는 기분이라서 골탕을 먹이더라도 기분이 찜찜할 것이다.

이것은 강동현이 가진 것이 많은 남자고, 강자라서 유쾌한 것이었다. 복수의 통쾌함. 힘으로, 혹은 영악함으로 황경호를 희롱하던 남자였다. 그런 남자를 오롯이 엿 먹이는 게 얼마나 재미있겠는가. 세상에 이렇게 재미있는 건 처음이다….

“출근하자, 출근.”

황경호는 침대에서 일어나 욕실로 향했다.

황경호가 그렇게 죽고 싶어 했을 때도 황경호가 얼마나 죽기를 원하든, 얼마나 그를 싫어하든 상관없이 강동현은 강압적으로 황경호의 자살을 막았었다. 황경호가 얼마나 난리를 치든 어떤 말을 하든 하나도 듣지 않고 그냥 질질 끌고 가기 다반사였다. 황경호의 자살 충동에 대한 변명은 정말이지 단 한마디도 듣지 않았으며, 단 한 번도 이해해주지 않았던 강동현이었다. 힘으로 막았고 힘으로 다시 삶으로 돌려놓았다. 물리적인 힘뿐만 아니라 자아와 의지의 힘이었다. 그는 다른 사람의 선택의 권리라든지 그가 다시 삶으로 돌아오는 것이 죽음보다 힘들지도 모를 것이라든지 그런 말랑한 생각 따윈 일체 하지 않았다.

그는 겉이고 안이고 정말로 강한 남자였고, 자신의 생각이 옳다는 강한 확신과 그것을 곧바로 실행에 옮기고 성공하는 행동력과 추진력까지 있는 남자였다. 같은 동갑의 사람이라고 비교 선상에 놓기도 어려울 정도였고, 그래서 황경호는 그를 보면서 상당한 열등감을 느끼곤 하였다.

그 개인이 좋은 사람이고 나쁜 사람이고를 떠나서

그에게 물리적으로 폭력을 행사할 때면 황경호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도리어 흥분하여 그에게 낚여 당할 때도 있었지만, 그에게 골탕을 먹일 때면 언제나 즐거웠다. 언제 우울했냐는 듯이 소리를 내서 혼자 웃을 때도 있었다.

그것은 황경호가 그 같은 남자, 강동현이라는 남자에게 물리적이든 감정적이든 힘을 행사할 수 있다는 것이 위력감을 느낄 수 있게 하기 때문이었다. 그런 남자가 황경호 때문에 일희일비하게 되는 그 모든 순간이 힘을 느끼게 하는 것이고 그것이 무력감으로 고통받은 황경호에게는 임시적으로나마 직방의 해결책이 되는 것이다.

물론 그가 황경호에게 그렇게나 강압적으로 행동했던 역사가 없었더라면 아마 이렇게까지 통쾌해하지는 않았을 테니 아이러니하지만.

“아, 춥다.”

따뜻한 물로 목욕을 하고 나오니 추웠다. 옮긴 집은 전의 빌라보다 작은 규모여서 그런지 한기가 잘 들었다. 밤새도 꽤 추웠고… 아마 겨울이 한창이 되면 좀 고생을 할지도 모르겠다. 창문도 이중창이 아니었고. 오늘 돌아오는 대로 바로 문풍지를 발라야 되겠다고 생각하며 얼른 몸을 닦았다. 로션을 다 바르고 새 팬티를 입는데 문득 휴대폰을 다시 한 번 보았다.

‘1시 20분, 3시, 4시, 5시, 6시….’

그가 문자를 보낸 시간을 체크해보았다. 이전 것도 체크를 해보니 시계가 한 4바퀴를 돌 동안 시간당 2~3통씩 보내 놓았다. 이틀 동안 거의 한숨도 안 잤다는 소리다. 설마 문자 보내려고 잠을 안 잔 것은 아닐 거고, 또 엄청 하드워크 중인 모양이다.

팬 커뮤니티 <우리사랑동현사랑>에 들어가 보았다. 영화 <타임리스>가 한창 촬영 중이니 밥차나 떡 돌릴 예정을 착착 짜고 있는 팬들이었다. 배우가 완전 일중독이라서 그런가. 팬들도 상당히 열성이었다. 황경호는 잠깐 생각을 하다가 짧게 글을 올렸다.

<강동현 조만간에 또 쓰러지는 거 아닌가 걱정되네요. 저번에 칼 맞은 것 때문에 일정 2주나 밀려서 힘들었을 것 같은데… 그렇게 몇 주 밀리면 계속 밀리는 거잖아요. 강 배우 성격상 쉬엄쉬엄할 것 같지도 않고 걱정이네요.>

황경호는 요 몇 달 열성적인 활동으로 인해 팬 커뮤니티 내에서도 꽤 네임드가 되어 있었다. 금세 댓글이 달렸다.

<앗, ㅎㄱㅎ님이다. 맞아요ㅜㅜㅜ 우리 오빠 작년에도 많이 쓰러졌잖아요. 아직도 해외 일정 많은 것 같은데 사고날까 봐 걱정돼요.>

황경호는 휴대폰을 놓아두고 머리를 말렸다. 옷을 입고 소지품을 챙겨 집을 나섰다. 정말 이제 쌀쌀하다. 외투를 여미고 목도리를 더 단단히 두르고 지하철역으로 향했다. 집에서 지하철역까지 걸어서 20분 정도 걸렸다. 그리고 황경호는 휴대폰으로 강동현에게 답장을 보내기 시작했다.

<자위 좀 못 한다고 안 죽어요. 잠이나 자요.>

그러자 곧바로 답장이 왔다.

<야, 넌 같은 남자면서, 아니 비뇨기과 간호사면서 이게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몰라서 그래?>

아직도 안 자고 있단 말인가. 황경호는 어쩐지 한숨이 나왔다. 몸을 축내는 덴 정말 일가견이 있는 남자다.

<이렇게 잠 안 자면 더 안 좋아져요. 잠부터 자요. 몸 좋아지면 저 말고 여자들한테도 멀쩡하게 잘 설 거예요.>

그러자 전화가 왔다.

“아, 네.”

[너 지금 누구 약 올리냐? 그때 칼 맞은 거 때문에 일정 늦어져서 이러고 있는 거 아니야?]

“거짓말하지 마세요. 어련히 소속사나 제작사에서 스케줄 조정해줄 텐데 자기가 그냥 괜찮다고 밀어붙이고 있는 거일 거 아니에요.”

[그리고 나 너한테밖에 안 서. 자위도, 시X 니 팬티 없으면 안 된다니까.]

강동현이 목소리를 팍 낮춰서 그렇게 말했다.

“그것도 다 그냥 스트레스 많이 받고… 그러니까 부담 없이 만만한 사람한테 편하게 화풀이할 수 있어서 그런 거잖아요. 도은혁 환자님은 스트레스 관리만 되면 다 고쳐져요. 그럼 저도 더이상 안 괴롭히시겠죠.”

황경호가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야, 너 말을…! 아, 네. 갑니다…! 나중에 보자.]

반박을 하려다가 전화를 뚝 끊는 강동현이었다. 황경호는 휴대폰을 외투에 넣고 얼른 지하철역으로 뛰어갔다. 추웠다. 병원에 도착하자 꽤 시끄러웠다.

“으아아앙! 흐아앙!”

6~7살짜리로 보이는 남자아이가 하나 있었다. 그리고 아빠로 보이는 남자가 절절매면서 아이를 달래고 있었다. 출근을 한 인원은 적었다. 황경호는 간호사실에 가서 옷을 갈아입고는 얼른 그에게 다가갔다.

“네, 무슨 일로 내원하셨나요?”

“아, 네… 제 아들인데요. 포경수술을 하러 데려왔습니다. 오늘 반차를 내긴 했는데 일이 있어서 빨리 들어가야 할 것 같아서 좀 빨리 왔습니다.”

“아, 그러셨어요. 접수는 하셨어요?”

“너무 빨리 왔는지 문만 열려 있고 사람들이 안 계셔서….”

“아, 네. 접수 도와드리겠습니다.”

황경호는 얼른 아이의 이름으로 접수를 하고 아이에게 장난감을 주었다.

“아, 이런 것도 있나요?”

“네. 저희 병원이 아이들 전용은 아니지만 가끔씩 어린이들이 와서….”

아이가 공룡을 집어 던져 버리고 빽 하고 더 울었다. 황경호는 아이 아버지가 너무 힘들어하는 게 보여서 아이를 달라고 했다.

“으아아앙!!”

“아, 아프게 하는 거 아니야. 아직 의사 선생님 안 오셨어. 삼촌은 간호사야, 간호사.”

아이가 대성통곡을 하기도 했고, 아이 아빠도 아이를 완전 잘못 안고 있었다. 황경호는 아이를 바로 안아 들어서 사탕을 하나 물려주고 토닥토닥 등을 두드렸다. 완전 진을 빼고 있던 아이 아빠는 겨우 카우치에 앉아 한숨을 돌렸다. 황경호가 커피 머신으로 커피를 내려 아이 아빠에게 주었다.

“아, 감사합니다. 한참 젊으신 것 같은데 아이를 잘 돌보시네요.”

“아, 네… 이만한 동생이 있었거든요. 아, 그러니까 아는 동생이요.”

황경호는 초록이를 떠올리며 그렇게 말했다.

‘잘 지내려나….’

아이를 안는 느낌이 굉장히 아련했다. 초록이는 아팠기 때문에 같은 또래인 이 아이보다 작았다. 보고 싶다.

“아이 엄마가 애를 거의 보는데 이번에 아파서 입원을 했거든요….”

“큰일이시네요.”

“네… 맞벌이해도 아내가 애를 다 봐서 몰랐는데 이게 진짜 큰일이네요… 정신 차리고 살아야 되겠어요.”

아이는 숨을 꼴딱꼴딱 삼키다가 금세 잠이 들었다. 아침 일찍 일어나서 오는 것도 짜증이 많이 났었던 모양이었다. 아이 아빠가 미안한지 아이를 돌려달라고 했지만 황경호는 아이를 안고 있는 이 느낌이 너무 좋아서 괜찮다고 하고 그냥 아이를 들고 있었다.

“선생님, 포경수술 환자요.”

“그래? 일찍 오셨네요.”

“아, 네….”

“그럼 바로 준비해서 들어가죠.”

그렇게 첫 환자를 수술실로 보내고 오전 내내 수술실에 있다가 점심을 먹고 환자 상담을 줄창 했다.

“이 정도 크기가 좋을 것 같은데요?”

“음, 환자님의 경우엔 그렇게까지 크게 할 수 있을 만한 피부조직이 못 되세요. 피부가 모자라요, 모자라.”

음경확대 쪽으로도 유명하다 보니 상담 일정이 많았다. 이런 상담도 그냥 상담 실장을 두지 않고 실무를 하는 간호사들이 하게끔 하는 것도 이강유 비뇨기과의 장점 중에 하나였다.

일을 하면 하루가 참 잘 갔다. 먼저 퇴근을 할 사람들을 보내고 황경호는 남아서 정리를 했다. 사람들이 다 나간 병원 안은 한적하고 넓어서 좋았다. 입원실까지 한 번 쭉 둘러보고 난 뒤에 세콤을 켜고 나왔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갔다. 빌딩 입구로 나오며 기지개를 한 번 폈다. 누가 앞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는지 담배 연기가 들어와서 눈살을 찌푸렸다.

밖으로 나와보니 옆 커피숍 유리창에 등을 기대고 담배를 피우고 있는 키가 큰 남자가 보였다. 이미 어두컴컴한 데도 선글라스를 끼고 훤칠한 키에 잘 어울리는 검은색 롱코트에 비싼 스니커즈. 강동현이었다. 사람들 다 쳐다봤다. 황경호는 얼른 주머니에 있는 스프레이를 잡았다. 강동현은 필터까지 태우더니 그것을 바닥에다 떨어뜨리고 발로 밟았다.

“진짜 잠 안 자요?”

황경호는 저도 모르게 말했다. 강동현은 황경호를 보더니 다시 담배를 꺼냈다.

“밥 먹었어?”

“아뇨… 집에 가서 먹으려구요.”

강동현은 담배를 한 대 더 피우기 시작했다.

“밥 사줄게. 가자.”

“…저 스프레이 지금 가지고 있는데요.”

“그건 나중에 생각하고. 밥 먹자니까.”

“밥도 밥이지만… 잠부터 자요. 안 피곤해요?”

강동현은 담배를 입에 물고 휴대폰을 잠깐 보더니 대답했다.

“너무 피곤하니까 그냥 머리만 아파.”

이 인간, 여긴 왜 온 거야. 황경호는 그의 입에 있는 담배를 빼앗아서 바닥에 버렸다.

“차 가지고 왔어요?”

“아니….”

황경호는 그의 팔을 붙잡고 도로 쪽으로 끌고 갔다. 그리고 손을 마구 흔들어서 택시를 잡았다. 운이 좋게도 빈 차가 막 지나가고 있던 중이라 급하게 섰다. 그를 조금 지나쳐 선 택시를 타기 위해 강동현의 팔을 억지로 끌고 택시에 탔다.

“삼성동이요. 코엑스 쪽으로 가주세요.”

황경호는 이해가 안 된다는 얼굴로 강동현을 보았다. 아침에 전화할 때만 해도 큰 문제는 없어 보이더니, 지금은 진짜 피곤해 보였다. 거의 사람이 정신이 없었다. 가끔 병원에 와서 치료를 받다가 잠들어 버리거나 황경호랑 한 번 하고 기절해버릴 때도 있었지만, 이건 그냥 걸어 다니는 좀비다.

“배우로 롱런하고 싶은 거 아니었어요? 왜 이렇게 살아요? 진짜 과로사해요.”

“몰라….”

“아니, 진짜… 몸 이렇게 망가뜨리면서까지 해야 해요? 좀 쉬엄쉬엄해요.”

“이렇게까지 피곤하면 죽을 것 같아서 더 못 자겠다고.”

“미쳤어요? 그럴수록 더 자야죠!”

“알았어. 시끄러워. 좀 가만히 있어.”

강동현은 황경호의 어깨에 자신의 머리를 기대고 눈을 감았다. 그의 어깨에 입술과 코를 파묻었다. 그러더니 진짜 바로 잠들어버렸다. 이 상태로 무슨 밥을 먹자는 것인가.

‘진짜 왜 온 거야?’

황경호는 황당해서 그를 쳐다보았다. 그의 머리카락밖에 보이지 않았지만. 차가 제동하자 곧바로 그의 몸이 앞으로 쏠렸다. 황경호는 그의 몸을 붙잡았다.

압구정에서 삼성동까지는 그렇게 멀지 않았지만 차가 조금 막혔다. 황경호는 택시를 전혀 타지 않았기 때문에 택시 요금이 나오는 것을 보고 혀를 내둘렀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런 놈을 데리고 지하철을 탈 수도 없는 노릇이고. 카드로 택시비를 계산하고 내렸다. 강동현은 완전히 뻗어버려서 아무리 깨워도 일어나지를 않았다. 황경호는 택시 기사에게 양해를 구해 둘이서 그를 집까지 데리고 갔다. 강동현이 연예인이라서 그런가 택시 기사는 흔쾌히 도와주었다. 강동현의 주머니에서 지갑을 찾아 공동현관과 현관까지 모두 열고 그를 침실까지 끌고 갔다. 황경호는 하는 수 없이 본인 지갑에서 만원을 꺼내 택시 기사에게 더 쥐어주었다.

“감사합니다.”

“네, 아이구. 감사합니다. 와, 근데 집 진짜 좋네요. 연예인들은 다 이런 집 사나 보네.”

사실 강동현의 집은 평수가 그렇게 큰 집은 아니었으나, 거실 하나에 방 하나인 아주 심플한 집이다 보니 거실만 보면 엄청 넓어 보였다. 황경호는 자기 집도 아니었지만 네네, 하고는 그를 보냈다.

“휴….”

강동현은 원체 키가 크고 근육질이라 정말 무겁다. 황경호는 어깨를 돌리면서 침실로 갔다. 아까 던져둔 그대로 자고 있는 그를 발견하고 일단 그의 옷을 벗겼다. 전부 다 엄청 불편할 것 같은 옷이라 팬티만 남겨두고 다 벗겨버렸다. 그리고 낑낑거리며 바로 눕혀서 이불을 덮어주었다. 그리고 집은 얼마나 안 들어온 것인지 난방이 하나도 안 되어 있었다. 그나마 아파트라서 얼음장 같지는 않았지만, 황경호는 일단 난방을 최대로 틀었다. 벗긴 옷은 잘 개켜서 선반에다가 놓아두었다. 코트는 일단 옷걸이에 걸어서 벽에 걸려 있는 옷걸이에 걸었다. 그리고 침실을 나가기 전에 잠깐 침대로 다가갔다.

‘죽은 건 아니겠지?’

미동도 하지 않는 강동현이라 그의 코에 손가락을 가져다 대어 보았다. 숨은 쉬고 있었다. 그래서 침실의 문을 닫고 밖으로 나왔다. 휴대폰을 보니 벌써 8시 반이었다. 예전에 3주가량 살았던 집이라 익숙했다. 거실 전등을 끄고 주홍빛 간이 등만 켜고 유리로 된 벽으로 향했다. 예쁜 야경이 펼쳐졌다. 아직 사람들이 일을 하고 있는지 불이 꺼지지 않는 빌딩들과 퇴근을 하는 사람들의 차들이 꼬리를 물어 붉은빛과 흰빛을 내고 있었다. 저게 다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여기선 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 빛무리일 뿐인데도 역동적으로 보인다.

가만히 보고 있다가 배가 고파서 집에 갈까, 생각하다가 뭐 어떤가 싶어서 그냥 부엌으로 갔다. 한두 번 온 집도 아니고. 냉장고를 열어보았다가 기함을 했다.

“아니, 이렇게 좋은 집에 살면서 고마운 줄을 몰라요.”

음식을 며칠이나 방치했는지 모르겠다. 일단 먹을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구분해서 못 먹을 것들은 다 꺼냈다. 싹 정리를 했다. 음식물 쓰레기도 갖다 버리고 집 안에 있는 쓰레기들도 전부 재활용과 일반으로 나누어서 버렸다. 내친김에 여기저기 쓸고 닦다가 깜짝 놀랐다.

‘나 지금 뭐 하고 있는 거야….’

예전에 이 집에서 잠깐 살 때도 남의 집인데도 꽤나 애지중지하면서 살았다. 정말 좋은 집이었다. 햇빛도 잘 들어오고 경치도 좋고. 이런 집에서 살면 원이 없겠다, 하면서 살아서 그런지 그때 습관이 남은 모양이었다. 이래서 일하는 팔자는 평생 일만 하는 것인가….

이제 집 안이 꽤 후끈해져서 황경호는 난방을 적정 온도로 내렸다. 그리고 진짜 배가 고파서 부엌에서 간단하게 라면이나 끓여 먹고 치웠다. 그리고 피로함을 느껴 카우치에 앉았다.

‘저놈만 없었으면 그냥 있고 싶다… 집에 가면 추울 텐데….’

그렇게 따뜻한 주홍빛의 불빛을 등에 이고 멀찍이 보이는 야경을 바라보며 앉는 느낌이 좋은 푹신한 카우치에 기대어 있었다. 조금만 있다 가야지… 하다가 저도 모르게 깜박 잠들었다.

*

“아….”

아주 푹 자고 일어난 기분이었다. 요즘에 집에 한기가 들어서 떨면서 일어나곤 했는데 오늘은 따뜻했다. 아니, 뜨겁다. 온몸이 뜨거웠다. 눈을 떴다. 묘하게 이상하다. 천장이 높다…. 황경호는 깜짝 놀라서 벌떡 일어났다. 주위를 휙휙 둘러보았다. 강동현의 침실이었다.

‘뭐? 내가 여기 왜 있어?’

그리고 어젯밤 기억을 더듬어보니 자신이 거실에서 잠들었다는 걸 기억해냈다. 하지만 그럼 거실에 있어야지, 왜 여기에… 게다가 옆을 보니 그림에서 튀어나온 것 같은 미남자가 쿨쿨 자고 있었다. 황경호는 기겁을 하며 침대에서 얼른 내려왔다. 몸을 만져보니 옷은 전부 그대로였다.

저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쉬고 거실로 나왔다. 거실에는 황경호가 벗어놓은 외투가 보였다. 거실에 있는 시계를 보니 벌써 7시 반이었다.

‘요새 그렇게 피곤했나? 엄청 잤네.’

여기서 출근을 해야 할 것 같았다. 황경호는 거실에서 이어진 욕실로 가서 샤워를 하기 시작했다. 어찌 되었든 이 집은 익숙해졌다. 새 칫솔을 꺼내서 양치질을 했다. 끝으로 수건으로 닦고 있는데 갑자기 문이 벌컥 열렸다.

“…….”

“아, 깜짝이야….”

강동현이었다. 놀래야 할 사람은 이쪽인데 저쪽이 놀랐다고 하고 난리다. 황경호가 깜짝 놀라서 아무 말도 못 하고 쳐다보고 있자 강동현은 황경호를 아래위로 보고는 고개를 홱 돌리더니 문을 쾅 닫았다. 황경호는 얼굴을 붉혔다. 왜 여자들이 남자들이 쳐다보는 걸 기분 나빠 하는지 알겠다… 황경호는 욕실문을 살짝 열고 강동현이 있는지 없는지 확인을 한 후 밖에 있는 옷을 더듬어 안으로 가지고 들어왔다. 그리고 속옷을 입으려고 하는 데 없다. 그는 문을 벌컥 열고 소리쳤다.

“야!! 내 팬티 내놔!!”

황경호는 거실에 그가 없는 것을 확인하고 그냥 옷만 꿰어 입고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그의 침실문을 열려고 하는데 열리지 않았다. 황경호는 침실문을 쾅쾅 두드렸다.

“아! 진짜!! 내 팬티에 이상한 짓 하지 마!”

“큭…! 숙박료라고 쳐!”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아… 크윽… 후… 윽….”

이미 이상한 짓을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어지간히 급했던 모양이다(하긴 며칠을 애원해댔던가). 황경호는 잠겨 있는 침실문을 마구 두드리다가 강동현의 신음소리를 듣고 기겁을 하며 문에서 떨어졌다. 아연실색하여 그 앞에 서있었다.

‘아무리 발기부전에 지루에 불감증 때문에 힘들다고는 하지만 그거 좀 안 뺀다고 그게 그렇게 큰일 날 일이야?!’

황경호는 그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황경호는 그 앞에서 강동현의 거시기한 소리를 또 듣고 있으면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점점 얼굴을 붉히며 못 견뎌 했다. 그러다가 강동현이 문을 벌컥 열고 나올 때까지 그 앞에 서있었다. 깜짝 놀랐다. 강동현은 완전히 상기된 얼굴로 그런 황경호를 내려보았다. 이번에는 말을 했다.

“너 또 듣고 있었지?”

“아, 아냐!”

황경호가 황급히 변명했다.

“내가 야한 짓 하는 거 보고 싶어?”

“아니거든!”

강동현은 명품 브랜드 로고가 박힌 검은색 팬티만 입은 반라였다. 몸이 멋있어서 벗은 것도 굉장했다. 그는 황경호를 확 벽으로 밀어붙였다. 그에게서 향수와 체취가 섞인 향기로운 냄새가 났다. 황경호는 얼굴을 붉히며 그의 가슴을 밀어내려고 하였다.

“보여줄까? 내가 자위하는 거?”

“돼, 됐어요….”

“진짜 보고 싶은 모양인데?”

황경호가 고개를 돌리며 어물쩍하게 대답하자 강동현이 웃었다. 어제저녁의 그 멍한 모습은 어디 갔나 싶다. 12시간 가까이 자더니 쌩쌩해진 모양이었다.

“오케-이. 내가 너 만지는 건 싫고 니가 나 만지는 것도 싫지만 내가 니 앞에서 자위하는 건 괜찮다 이거지?”

“안 괜찮거든…!”

황경호는 그가 그대로 팬티 앞을 내리고 그의 것을 꺼내자 기겁을 하며 몸을 떨었다. 아주 자주, 꾸준히 보던 것이지만 어쨌든 저것과는 영 흑역사투성이었다. 자기 옷깃을 두 손으로 꽉 쥔 채 눈을 크게 뜨고 바짝 굳어 있는 황경호의 얼굴을 보고 강동현이 섹시하게 웃었다.

“잘 봐.”

그는 황경호의 냄새를 잠깐 맡더니 그대로 자신의 대물을 주물럭거리기 시작했다. 심각한 발기부전이라 자위도 안 된다던 그의 것이 천천히 서기 시작했다.

“큭… 후… 젠장….”

그의 얼굴은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굉장히 관능적이고 섹시한 얼굴이 되어갔다. 황경호는 그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바라보고 있었다. 간혹 아래쪽도 쳐다보기도 했고 말이다. 눈을 지그시 감은 채 손을 움직이다가 별안간 그가 눈을 떠서 황경호와 바로 눈을 마주치자 화들짝 놀라 움찔했다.

강동현은 굉장히 남자다운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몸도 마찬가지었다. 훤칠한 키는 180대 후반이었고 몸은 누가 보아도 완벽할 정도로 아름다웠다. 이런 게 남성적인 아름다움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존재하는 것 같았다. 그는 목소리도 굉장했다. 듣고 있으면 가끔 오금이 저릴 정도….

강동현은 둔중하고 만족스럽지 못한 느낌에 괴로운 듯 보였다. 하지만 그 조급해 보이는 모습이 섹시하다. 그는 자신의 입술을 연신 핥으며 야한 얼굴을 하였다. 눈을 마주치면 그 안력이 대단했다. 집중하여 자신의 성기를 잡고 흔들고 있었지만 관중에게도 절대 소홀하지 않았다. 보여야 할 땐 어떤 식으로 보여야 하는지 잘 아는 것이다. 그는 배우였다.

‘말도 안 돼….’

설 것 같았다. 싫어하는데도, 항상 거부하던 사람인데도. 사람이 섹시하다는 것은, 사람을 섹시하게 느낀다는 것은 이런 것이었다. 다른 사람을 자신이 원하는 대로 할 수 있다는 것. 만약에 지금 그가 자신을 만진다면 거부할 수 있을까.

이런 얼굴이 TV에라도 나온다면 정말 난리 날 것이다. 여자들이 죄다 TV를 앞에 두고 자위를 할지도 모르겠다. 황경호는 얼굴을 새빨갛게 붉혔다.

‘나도 할지도 몰라.’

그렇게 생각한 자신에게 놀랐다.

“그, 그만 해요….”

강동현의 섹시함에 눌려 있는 황경호가 바짝 굳은 채 신음처럼 그렇게 말했다. 강동현이 웃었다. 그 웃음소리가 굉장히 섹시했다. 그냥 지금 이 남자가 하고 있는 모든 게 섹시했다! 황경호는 정말 큰일 날 것만 같아서 그에게서 억지로 시선을 뗐다.

“뭐야… 니가 보고 싶다고 해서 하는 건데… 고개 돌리지 마.”

강동현은 벽을 짚고 있던 왼손으로 황경호의 턱을 부드럽게 잡아서 돌렸다. 황경호는 정말 꼼짝도 할 수 없었다. 거부할 수가 없었다. 코가 닿을 것만 같은 거리다. 그렇게 지그시 자신을 바라보는 눈빛을 황경호는 혼란스러운 얼굴로 보고 있었다.

“키스하자….”

“…….”

황경호가 대답하지 않자 강동현은 천천히 눈을 감으며 황경호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관리가 잘 된 그의 입술은 정말로 부드럽기 짝이 없었다.

“으으응….”

닿는 순간 출처를 모를 황홀감에 황경호는 느릿한 신음을 흘렸다. 그의 두 손이 황경호의 바지를 벗겼다. 팬티도 입고 있지 않은 황경호의 아랫도리가 훤히 드러났다. 바지는 발치로 떨어졌다. 강동현은 그대로 황경호의 몸을 쓰다듬었다. 그리고 서로의 아랫도리를 맞닿게 하고 느릿하게 비볐다. 황경호의 것은 이미 바짝 서있었다. 강동현은 그의 피부에 닿자마자 마치 온몸의 촉각이 몇 배는 날카로워진 것 같은 느낌이었다. 발기가 제대로 되고 불만족스러운 기분이 사라진다.

“으응…!”

성기가 맞닿자 깜짝 놀라서 상대가 입술을 떼려고 하는 걸 허락하지 않았다. 그대로 그가 좋아하는 식으로 진하고 느릿하게 입을 맞추며 오른팔로 그의 왼 다리를 들어 올려 걸치고 그의 엉덩이를 쥐었다. 그대로 그의 하반신이 자신의 대물에서 떨어지지 못하게 하고 느릿하게 비비기 시작했다. 강동현은 왼손을 그의 티셔츠 안으로 넣어 젖꼭지를 엄지로 문질렀다.

방에서 오랜만에 한 발 빼고 나왔지만, 어차피 팬티로 하는 자위는 느낌이 둔중하고 소위 ‘물을 뺀다’는 느낌이 강하다. 하지만 이 간호사의 피부에 닿아, 그의 피부 어디에든 문지르면 기분이 날아갈 것처럼 좋았다. 지금도 자지가 폭발할 것 같이 커졌다. 강동현은 가까스로 거칠어지려는 몸짓을 억누르며 허리를 돌려 그의 성기를 자신의 것으로 비볐다.

“흐으응… 으응… 응… 하으응….”

게다가 이런 느낌은 또 처음이다. 간호사는 정신을 못 차리고 몸을 떨기만 할 뿐 강동현이 하는 대로 거부도 하지 않고 당하고 있었다. 마치 본인이 더 원하는 것처럼….

“앗… 으음… 응… 앗… 흐응….”

강동현은 황경호의 입 안을 남김없이 핥아대고 젖꼭지를 엄지로 살살 굴렸다. 그럴 때마다 예민하게 몸을 움찔대면서 야한 신음소리를 잔뜩 흘리는 황경호였다. 강동현은 뜨거워서 터질 것만 같은 자지를 바짝 서서 민감해진 상대의 것에 꽉 붙여 느리게 문질렀다. 한 번, 한 번 문지를 때마다 한 걸음씩 커다란 쾌락이 다가오는 게 느껴졌다. 온몸이 불덩이 같다. 땀이 미친 듯이 쏟아졌다. 입이 바싹바싹 말라 계속 상대의 타액을 갈취했다. 비비는 것만으로도 뭐라 말할 수 없을 만큼 기분 좋았지만 그만큼 괴로웠다. 강동현에게 지금 이 쾌락은 엄청 단단한 고무풍선에 억지로 바람을 천천히 넣어 터뜨리려고 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죽어 버리는 거 아닐까….’

오랫동안 피골이 상접할 정도로 굶었는데도, 어쩔 수 없이 입 안으로 맛있는 걸 잔뜩 빨기만 하다가 씹지도 못하고 겨우 천천히 삼키는 것처럼, 느릿한 섹스의 쾌락은 그런 식으로 절정에 올라섰다.

“하아아아앙…….”

“으으윽…!!”

바늘로 성기를 잔뜩 쑤시는 것 같았다. 안 그래도 굶어서 가득 쌓였는데 이렇게 끝에 끝까지 달아오르는 방식으로 했다. 강동현은 엄청난 고통 같은 쾌락에 거의 소리를 지를 뻔 했다. 황경호를 들고 있던 손을 놓쳐버렸다. 황경호가 다리가 풀려 주르륵 주저앉았다. 엄청나게 나오기 시작했다. 강동현도 오금이 풀려 겨우 벽을 짚고 몸을 지탱한 채, 본능적으로 아직도 진득한 걸 잔뜩 내뱉고 있는 자신의 남성기를 상대의 얼굴에 비볐다.

“아응… 아아… 하아….”

황경호도 정신을 못 차리고 주저앉아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강동현은 눈을 떠서 그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갓 깨끗하게 씻고 나온 그의 상기된 얼굴과 머리카락은 강동현의 정액으로 엉망이었다. 강동현은 오른손으로 자신의 남성기를 잡고 그 끝을 그의 뺨에 비비고 그의 입술에 문질렀다. 약간 벌어져 있는 그 입술의 도톰한 부분에 꾸욱 누르듯 문대였다. 절정감과 사정감이 오래도록 떠나지를 않았다. 진짜 천국을 한 두세 번 오고 가는 것 같다. 한참 끈질기게 그러고 있으니 황경호의 손이 강동현의 남성기를 밀어내었다.

“그만해… 이 변태….”

거기에 떠밀려 강동현도 결국 다리가 풀려 주저앉았다. 그는 숨을 거칠게 헐떡거리다 결국 뒤로 드러누워 버렸다. 황경호는 몇 번을 일어나려고 하다가 실패하고 한 손으로 바닥을 짚어 몸을 지탱한 채로 다른 손의 손등으로 얼굴을 훔쳤다. 정액이 잔뜩 묻어나왔다. 맛도 느껴졌다. 황경호는 얼굴 새빨갛게 붉혔다. 뭐가 뭔지는 모르겠는데 굉장히 부끄러웠다.

“읏….”

이게 뭐야… 성기가 욱신거리고 온몸이 민감했다.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대로 십 수분을 견디고 있고서야 겨우 일어날 수 있었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강동현은 더 맛이 가서 널브러져 있었다. 너무 부끄러운데 멍하기만 하고… 얼굴을 손으로 계속 닦아 내다가 시계를 보고 화들짝 놀랐다. 8시 45분이었다.

“아, 출근…!”

황경호는 쏜살같이 욕실로 다시 들어갔다.

*

“우앗….”

“어이쿠!”

황경호는 엘리베이터 앞에서 누군가와 부딪쳤다. 엘리베이터가 빨리 안 내려와서 계단으로 뛰어 올라오던 중에 프론트데스크 앞에서 누군가와 부딪쳐 같이 넘어졌다.

“우앗, 죄송합니다!”

황경호는 황급히 고개를 숙여서 사과를 해서 부딪친 상대가 누군지 확인하진 못했다. 그러자 상대가 황경호의 이름을 불렀다.

“경호야?”

“악! 선생님!”

진짜 악 소리가 나왔다. 한 번도 지각을 해본 적이 없는 황경호였다. 9시 10분쯤이었는데 이강유가 조금 늦게 출근을 한 모양이었다. 너무 세게 부딪쳐서 거의 그의 위에 올라탄 꼴이 되었다. 예전에 한 번 이런 식으로 이강유를 응급실로 보냈던 적이 있었다. 엄청 깜짝 놀랐다.

이강유, 34세는 서울에서 가장 잘 나가는, 아니 전국에서 제일 잘 나가는 비뇨기과 의원 전문의로 젠틀하게 잘생긴 마스크와 미소로 요즘 출연하고 있는 <닥터스 초이스>라는 쇼닥터 프로그램에서도 인기 만발인 젊은 의사였다. 명실상부 전 세계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남성 질병 전문의로 손꼽히고 있는 명의 중에 명의였다. 주 전문분야는 조루 치료, 음경확대 및 성형 등이 있었다. 미혼으로 여자들에게도 일등 신랑감으로 꼽히고 있는 남자였다. 성격도 배려심이 깊어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좋은 평을 듣는 사람이다. 그 때문에 살짝 손해 보며 살긴 하지만, 크게 개의치 않을 만큼 대인배이기도 했다(가끔 꽤 아까워하는 인간적인 면모도 있다).

“웬일이야. 니가 지각을 다 하고.”

황경호는 얼른 일어나서 이강유의 손을 잡아 그를 일으켜주었다. 가는 날이 장난이라고 한 번도 지각을 하지 않다가 지각을 한 날 하필 고용주와 이렇게 부딪치다니. 황경호는 완전 낭패인 얼굴로 기어들어 가 듯 답했다.

“늦잠 자서….”

“사람이 그럴 때도 있지. 머리도 다 못 말리고. 일단 들어가자.”

이강유는 혼을 내지도 않았다. 그는 그렇게 말하면서 부드럽게 황경호의 등을 밀며 병원 안으로 같이 들어갔다.

“오셨어요, 선생님. 아직 우성호 환자님은 안 오셨어요.”

“그래?”

이강유는 자신의 오피스로 들어가 하얀색 가운으로 옷을 갈아입었다. 황경호도 얼른 간호사실로 가서 옷을 갈아입었다.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좀 바로 잡고 밖으로 나왔다.

“죄송합니다. 늦었어요.”

“웬일이야. 지각을 다 하고.”

오희연 간호사가 신기하다는 듯이 이강유랑 똑같은 말을 했다. 지금까지 한 번도 지각을 한 적이 없던 황경호였다.

오희연 간호사는 30대 후반으로 이강유 비뇨기과 최고 연장자였다. 원장인 이강유보다 나이가 많았다. 병원 내에서 중심추 역할을 하고 있었다. 아이가 둘 있는 워킹맘이었다.

“그렇게 안 늦었는데요, 뭐.”

김형세가 또 어디선가 선물로 들어온 게 분명한 과일을 먹으며 그렇게 말했다. 김형세는 황경호와 동갑에 이 병원에도 거의 같은 시기에 들어온 간호사였다. 큰 키에 왕년에 운동을 했을 것 같은 느낌의 훈남이며 약간 바보 같을 정도로 낙천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는 청년이었다. 대식가이기도 했다. 동갑이라서 그런지 황경호와는 친하며 작년에 초록이를 돌보며 더 가까워졌다. 생각 없는 육식계에 은근히 여자들에게 인기가 많을 것 같은 스타일이다.

여기에 이강유 비뇨기과의 마스코트인 백의의 천사 조한나 간호사(24), 백의의 악마 정기연(25) 간호사 등이 있었다.

“얼굴이 왜 이렇게 빨개, 황 간?”

정기연이 황경호의 뺨을 손으로 만졌다. 황경호는 깜짝 놀라서 자신의 뺨을 만졌다. 손은 금방 밖에 있다 들어와서 차가웠는데 진짜 뺨은 따끈따끈했다. 황경호는 그대로 펑 하고 토마토 마냥 얼굴이 빨개졌다.

“아, 아니…! 아, 저 입원실 돌아보고 올게요…!”

이렇게까지 표정관리가 안 되는 것은 사춘기 이후로 처음이다. 황경호는 얼굴을 손으로 부채질하며 얼른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병원 내에 있는 계단으로 아래층으로 내려가다가 저도 모르게 악! 하고 벽 모서리에 딱 달라붙어 얼굴을 숨겼다. 아무도 없었는데도 말이다.

‘아, 그냥 죽고 싶어…!’

미칠 것만 같았다. 얼굴이 터질 것 같다. 혼란스럽다.

아침에 도대체 왜 그랬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전혀 거부도 하지 않고 그냥… 그냥 그 인간이 하는 대로 뒀다. 저번에 화장실에서 그가 자위하는 걸 들을 때도 꼼짝도 할 수 없었는데 이번에도… 그리고 그가 자위하는 걸 보여준다고 하니 저도 모르게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그가 너무 섹시해서 흥분까지 했다… 그대로 그가 하는 대로 그냥 당했다.

‘죽자. 죽어. 왜 사냐. 죽자. 죽자고.’

황경호는 자기 주먹에 이마를 콩콩 박았다. 그 변태한테 그런 일 당한 적은 꽤 많았어도 이랬던 적은 한 번도 없었는데 왜… 그가 자신의 얼굴에다 성기를 비볐던 것까지 기억해내자 진짜 부끄러워서 이대로 죽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무엇보다도 그가 그것보다 더했어도 아마 전혀 거부 못 했을 것 같다는 무시무시한 생각이 들자….

‘그때 그거 그냥 입에 들어왔으면… 아니, 분명히 또 박혔을 거야… 아, 상상이 너무 리얼하다….’

정말 접시물에 코를 박고 죽어 버리고 싶었다. 아직도 몸이 욱신거리는 느낌이었다. 거기에 그 인간이 어떻게 했는지도 계속 생각났다.

[잘 봐.]

황경호는 그때 강동현의 불한당 같은 눈빛과 미소, 목소리가 불현듯 떠오르자 저도 모르게 몸을 움찔했다. 황경호는 자기 주먹에 계속 머리를 박았다. 뇌를 락스에 빠뜨려 순백으로 탈색시키고 싶었다.

그 변태한테 이것저것 당하고 살았던 날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그런 일들도 처음이 아니었는데 왜 오늘 아침만 그렇게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는지 모르겠다. 진짜 그놈이 자위하는 걸 보여줘서 그런 걸까. 정말 보고 싶었던 건가? 강제로 당한다든가, 그를 때려서 흥분해서 당했을 때는 오히려 당하고 나서도 그냥 화가 나거나 체념하거나 아니면 또 그가 달려들까 봐 긴장해서 도망가려고만 했지 이런 건 진짜….

황경호는 겨우 정신을 차리고 입원실을 돌았다.

“간호사님, 괜찮으세요? 얼굴 빨개요.”

젊은 남자 하나가 함몰 성기를 수술하기 위해서 대기하고 있었다. 금식을 잘하고 있는지, 다른 이상은 없는지 확인을 하는데 또 얼굴이 빨개진 모양이었다. 황경호는 그가 그런 지적을 하자 진짜 악! 하고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누가 말할 때마다 더 미칠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한 번도 이런 적이 없었는데 정말 표정 관리가 안 되었다.

“아, 아뇨. 몸이 좀 안 좋은가 봐요… 하하. 수술 앞두고 있는데 긴장은 안 되세요?”

“긴장돼요… 드디어 콤플렉스에서 벗어날 수 있다니 싶으면서도… 이거 수술하면 여, 여자 정말 만날 수 있겠죠?”

“그럼요.”

황경호는 여전히 얼굴이 붉었지만 훌륭하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함몰 성기는 어차피 꺼내 봤자 크기가… 아마 다시 음경확대 수술을 받으러 오지 않을까 싶었다. 그래, 차라리 젊을 때 받아라. 60 넘어서 받으면 진짜 수술하면서도 큰일 날까 봐 걱정된다.

그리고 상담업무를 하기 위하여 다시 위층으로 올라갔다.

“예약이 6개월이나 차 있어서 깜짝 놀랐어요.”

요새는 참 젊은 사람들이 많이 온다. 황경호는 약간 심약해 보이는 마른 남자를 앞에 두고 있었다. 예전 같으면 출처 모를 동정심부터 올라왔을 텐데 지금은 거리감이 있었다. 이덕재 때문일까. 황경호는 웃으면서 답했다.

“요새 이강유 선생님 <닥터스 초이스> 출연하셔서 환자들이 많아졌어요. 이제 2년 치는 꽉 찼어요.”

“진짜요? 와….”

“좀 있으면 정말 확장 개원하지 않을까 싶어요. 선생님들도 세 명 정도 더 들어오시고….”

“정말 잘 되나 보네요….”

“우리 선생님 방송 나가기 전에도 전 세계 최고 수준의 수술 실력을 가지고 계셨죠.”

방송을 타서 이렇게까지 손님이 몰리게 된 것은 순전히 이강유의 마스크 때문일 것 같았다. 잘생기고 호감형이라 남자들도 되게 좋아한다.

“보통 음경확대를 할 때는 귀두확대랑 음경확대로 나뉘는데요. 귀두확대의 경우 대체진피를 이용한 것과 자가조직을 이용한 것이 있고 음경확대는 대체진피, 자가조직, 복합조직, 라이펜이라는 필러제, 실리콘 임플란트 등을 이용해서 할 수 있습니다.”

“그냥 제일 크게 되려면 어떤 거 써야 해요?”

“그럼 일단 실리콘 보형물들부터 보시겠어요?

보형물과 수술기법에 따른 여러 가지 모형이 들어찬 커다란 플라스틱 모델을 가지고 왔다. 그리고 손으로 굵기까지 설명해가며 열심히 말하고 있는데 내담자가 갑자기 물었다.

“근데 지금 간호사 선생님 얼굴 빨간데… 어디 불편하세요?”

“아… 진짜요?”

황경호는 화들짝 놀라서 자신의 얼굴을 만져보았다. 좀 더 빨개졌지만 아무렇지도 않은 척 설명을 계속했다.

“아, 제가 요새 감기 기운이 있어서 그런지 열이 계속 오르네요. 일단 이것부터 마저 보시죠.”

상담자들 한 대여섯 명을 상대하고 나니 진이 빠졌다.

“일단 먼저 식사할 수 있는 분들은 식사하세요.”

이강유가 진료실에서 잠깐 나와서 그렇게 말하고는 다시 들어갔다. 요새 환자들이 너무 몰려서 점심을 못 먹는 이강유였다.

“간식거리라도 사와야 되겠어요. 선생님 몸 축나시겠다.”

“그러게요.”

일단 황경호와 김형세, 정기연이 먼저 먹으러 나왔다.

“뭐 먹지?”

“간단하게 먹자. 환자도 많은데.”

정기연의 말에 황경호가 답했다.

“그러니까 뭐 먹냐고.”

그러다가 결국 가던 데로 가서 먹던 걸 시켰다. 김형세는 처음부터 밥을 두 공기를 주문했다.

“초록이는 미국에서 잘 있대?”

“응. 연락은 가끔씩 오긴 하는데… 애가 어려서 혼란스러워할 까봐 연락을 자제하는 분위기라.”

“하긴. 그렇겠지….”

김형세와 그렇게 얘기를 나누는데 문득 그가 말했다.

“오늘 몸 안 좋아? 계속 얼굴 빨갛네.”

“아… 감기 기운이 있나 봐.”

별달리 눈치도 없는 김형세마저도 그렇게 지적하자, 황경호는 자신의 얼굴을 만지며 시선을 돌렸다. 정기연이 빤히 황경호를 보다 다시 밥으로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뭔가 야한 분위긴데.”

“욱…!”

황경호는 식사를 넘기다가 뱉을 뻔했다. 다들 황경호를 쳐다보았다. 그는 얼른 물을 마셨다.

“사레들린 거. 사레….”

황경호는 화끈해진 얼굴을 가라앉히기 위해 무진장 노력을 했다. 정기연은 언제나 감이 좋았다… 그렇게 밥을 얼른 먹고 병원으로 돌아갔다.

그렇게 며칠 동안이나 황경호의 홍조 증상이 유지되었다. 딱히 심각한 증상이라고 생각해본 적 없었는데, 막상 자신이 홍조 증상을 겪으니 상당히 성가시고 불편했다. 강동현에게선 꾸준하게 연락이 왔었지만 씹었다. 주말에는 정말 어디 산이라도 들어가서 소리라도 왕창 지르고 와야 되겠다고 생각하며 평일 마지막 날도 열심히 일을 하고 있는 황경호였다.

병원이 잘 되는 건 좋은 일이지만 업무가 고되졌다. 경영 마인드가 투철한 원장은 쉽사리 일손을 늘리지 않았다. 의사고 간호사고 사람을 구하고 있긴 한데… 사람들과 이야기를 많이 하는 것은 상당한 감정노동을 요했다. 기본적으로 이런 식의 상담은 세일즈나 다름없으니 말이다.

‘뭔가 진이 빠진다….’

잠깐이라도 혼자 있고 싶어서 몰래 간호사실에 들어가서 잠깐 앉아 있었다. 다들 바쁜데 미안하다… 선물로 들어온 과일들이 간호사실 안에 그냥 쌓여 있어서 하나하나 뜯어서 냉장고에 넣기 시작했다. 냉장고 안에서 초콜릿이나 강장제, 과일주스 등이 가득이었다.

‘참… 거시기가 커지면 이렇게 기쁜 건가. 다들 잊지 않고 이렇게 티를 내네…’

그냥 병이 낫는 정도면 이렇게까진 안 한다. 하지만 거시기가 잘 커지면 이런다. 그러다가 황경호의 얼굴이 다시 펑 하고 달아올랐다. 강동현은 심인성으로 인한 발기부전, 지루, 불감증만 아니면 상당히, 아니 정말 훌륭한 성기를 가지고 있었다. 그것과는 굉장한 악연이었지만 그런 걸 차치하고 심미안적으로만 생각해보자면… 아무리 외견이 훌륭한 남자라고는 하지만 그런 곳까지 타고 나다니.

‘아, 무슨 상관이야. 왜 계속… 어차피 불량품이라고.’

그날 아침의 일이 그렇게까지 충격적이었던 걸까. 계속 생각난다. 냉장고 문에 콩콩 머리를 박았다. 그렇게 재활용해야 하는 포장지들을 한곳에 얌전히 모아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간호사실 문을 열고 나가는데 앞에 훤칠한 남자가 선글라스를 쓰고 서있는 걸 발견하고 저도 모르게 뒤로 휙 돌아서 다시 간호사실로 들어오려고 했다.

“어디 가.”

금요일은 이 인간 예약 날이기도 했다. 안 올 줄 알았는데… 황경호는 손이 잡혔다.

‘와, 진짜 얼굴만 빨개지지 마라.’

황경호는 웃는 얼굴로 그를 돌아보았다.

“아, 내원하셨네요. 도은혁 환자님.”

“다시 가야 하니까 빨리하자.”

강동현이 그렇게 말했다. 그들은 4번 치료실로 갔다. 강동현은 들어오자마자 선글라스를 벗으며 불평했다.

“넌 휴대폰 진짜 폼으로 들고 다니냐? 왜 전화를 안 받아? 문자는 왜 씹어?”

황경호는 시선을 멀찍이 돌리곤 답했다.

“아, 휴대폰 고장 나서….”

“거짓말하지 마.”

강동현은 그렇게 말하며 가까이 다가왔다. 깜짝 놀라서 움찔하자 이상하다는 듯이 그를 보는 강동현이었다. 그는 황경호의 바지 주머니 양쪽에 손을 쑥 넣더니 거기서 네 개나 되는 치한용 스프레이를 꺼냈다. 너무나 자연스러워서 황경호는 예상도 하지 못하고 당하고 말았다.

“아, 잠깐만…!”

“야… 너도 참 대단하다. 이걸 네 개나….”

그는 그걸 자기 코트 주머니에 넣더니 겉옷을 벗어서 옆에 있는 선반에 던졌다. 그리고는 얌전히 의자 위에 앉았다. 지가 알아서 바지랑 팬티를 내려서 준비까지 해주었다. 구멍 뚫린 초록색 천까지 알아서 덮는다. 황경호는 얘가 왜 이러나, 싶으면서도 마사지기와 젤을 들고 가까이 다가갔다.

“차갑습… 악!”

황경호는 저도 모르게 비명을 질렀다. 강동현이 황경호가 그의 성기 근처에 젤을 짜서 바르자마자 자기 손으로 그의 것을 문지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다른 손으론 황경호가 도망 못 가게 그의 손목을 잡았다.

“뭐, 뭐뭐 하는 거예요!!”

“야, 밖에 들리겠다.”

그는 황경호의 손을 잡아당겨 거기에 입술과 코를 묻고 냄새를 맡았다. 이 정신 나간 놈이 치료를 받으러 와서 자위를 하고 있는 것이었다.

“놔, 놔요…!”

강동현은 눈을 감고 있다가 눈을 떠서 바로 황경호의 눈을 쳐다보았다.

‘아, 눈….’

약간 올려보는 듯한 자세라 황경호는 그 안력에 깜짝 놀라 질겁을 했다. 그가 계속 안절부절못하자 강동현이 오히려 이상하다는 듯이 그를 보았다.

“왜? 내가 자위하는 건 괜찮다며.”

“제가 언제요…!”

“아… 근데 너 바디로션 같은 거 쓰는 거야? 뭐 써?”

그는 위치를 바꾸어 황경호의 손목에 코를 댔다. 그의 부드러운 입술이 닿자 황경호는 인상을 썼다. 강동현의 것이 천천히 발기되기 시작했다. 황경호는 계속 뭐 마려운 개 마냥 긴장해 있었다. 강동현이 그런 기색을 느낀 건지 신음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안 건드려… 그렇게 싫다는데….”

그의 말에 황경호는 인상을 더 썼다.

“지금까지 쭉 싫었거든요? 저, 저번에도 진짜 싫었어요.”

그가 웃었다. 그리고 또 눈을 마주쳤다. 황경호는 움찔했다.

“진짜 내가 자위하는 건 안 싫은가 보네.”

“…!”

얼굴이 펑 달아올랐다. 강동현이 웃음기가 가득한 목소리로 물었다.

“뭐야? 관음증이야? 너… 보면 은근히 이상한 취향 있단 말이야. 사람 때리면 흥분하고….”

“내가 언제…! 이상한 말 좀 하지…! 마세요….”

황경호는 목소리를 겨우 낮추며 다른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강동현은 그대로 아무 말 없이 자위에 열중했다. 황경호는 안 보려고 하면서도 힐끗힐끗 그를 보다가 그런 자신을 깨닫고 온몸이 벌게졌다. 그런 자신에게서 신경을 돌리기 위해 입을 열었다.

“도, 도대체… 왜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데요? 좀 안 한다고 안 죽어요… 꼴불견이야….”

황경호가 뒷말을 덧붙였다. 황경호가 아닌 누구라도 이 상황에 저 단어를 말한다면 상당히 타격을 받겠지만 이 간호사는 그것보다 더 한 말을 해도 한 귀로 흘렀다. 강동현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손을 빠르게 움직이며 대꾸했다.

“그럼 니가 자위 안 하고 섹스 안 하고 4개월 정도 버텨봐.”

“그걸 왜 못 해요….”

그러자 강동현이 그를 다시 쳐다보았다. 눈이 몇 초간 마주쳤다.

‘그러고 보니까 진짜 얘 그동안 애인 있는 느낌은 아니었지….’

근 1년 하고도 몇 개월… 강동현은 그렇게 생각하면서 물었다.

“마지막으로 여자친구 사귀었던 때는 언제야?”

“또 그런 건 왜 물어보는데요….”

강동현은 마치 좀 더 냄새가 많이 나는 곳을 찾듯 황경호의 손과 손목, 손등을 부드럽게 입술로 문질렀다.

“궁금하잖아. 말 좀 해주면 어디가 덧나냐.”

“덧나요.”

강동현이 웃었다.

“예전에는 좀 더 잘 참았는데… 요새는 진짜 못 참겠어. 일하는데 집중하려면… 윽… 야… 키스만 좀 하자.”

그러더니 강동현이 황경호의 멱살을 잡아 당겨서 단번에 입을 맞추었다.

‘안 건드린다면서!’

예전에는 그렇게 마구 하더니 요새는 일부러 이러는 건지 상당히 부드럽게 했다. 그때 칼 맞고 병원에 실려 갔을 때부터인가. 강동현은 그를 자기 위에 올라오게 했다.

“아, 묻어…! 읍!”

황경호는 초록색 천으로 자신의 유니폼을 방어했다. 질척거리는 소리가 거세졌다.

“응…! 으음…! 읍… 으응…….”

심장 소리가 마구 빨라지고 있었다. 강동현의 혀가 황경호의 혀끝을 부드럽게 건드렸다.

“흐응….”

저도 모르게 이상한 신음이 나와서 얼굴이 엄청 빨개졌다. 강동현이 입술을 떼고 황경호의 쇄골 부분에 얼굴을 묻고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그가 그대로 목덜미를 깨물자 황경호는 깜짝 놀라 그의 어깨를 붙잡았다.

“깨물지 마요…!”

“아, 미안….”

그는 그대로 문 곳에 그냥 입을 맞추고 혀로 핥았다. 그대로 귀까지 올라와 귓바퀴와 귓불을 핥았다. 황경호는 입을 꾹 다물고 눈을 질끈 감았다.

“너 말이야….”

강동현이 그런 황경호를 빤히 보았다.

“요즘은 내가 만지는 거 사실 별로 안 싫어하는 거 아냐? 잘 느끼고….”

“응, 하응, 아앗…!”

강동현이 옷 위로 황경호의 유두를 문질렀다. 그가 굉장히 반응했다. 황경호는 자기도 깜짝 놀라서 그의 손목을 두 손으로 붙잡았다. 황경호는 당황해서 무작정 부정했다.

“아니야!”

강동현이 또 불한당 같이 웃었다.

“뭐야… 괜히 기분 좋은데?”

“으….”

황경호는 너무 부끄러워서 얼굴이 터질 것만 같았다. 그런 황경호의 얼굴을 실실거리며 보는 강동현이었다. 손등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는 황경호의 손바닥에 입술을 부드럽게 눌렸다.

“알았어.”

“뭐, 뭘 알겠다는 거야?”

“흐응.”

강동현은 또 기분 나쁘게 웃었다. 황경호는 저도 모르게 자기를 보는 강동현의 눈을 손으로 가려버렸다. 강동현은 일단 빠르게 자신의 것을 문지르며 황경호의 엉덩이를 주물렀다.

“오늘은… 큭, 이걸로 끝내는데….”

“아, 안 만진다며….”

황경호는 강동현의 눈을 가린 채 다른 손으로 강동현의 팔뚝을 잡았다. 강동현은 조준을 잘못해서 황경호의 턱 끝에 입을 맞추었다. 강동현의 입술이 그대로 상대의 입술로 타고 올라갔다.

“진짜… 너 어떻게 하는 거 좋아해? 솔직하게 말해봐.”

“뭘… 응… 으음….”

그가 기어코 입술을 찾아 키스를 하자, 황경호는 혼란스러움을 그대로 담은 얼굴로 눈이 가려진 그의 얼굴을 보았다.

“예전 여자들이랑 어떤 식으로 했어?”

“아, 그런 거 물어보지 마, 좀!”

황경호가 그의 입술을 피하며 질색을 했다.

“핥아주는 건 좋아해? 빠는 걸 더 좋아하나?”

황경호는 비명을 지르며 귀를 막았다.

“말만 해. 니가 좋아하는 방식으로만 다 해줄 테니까….”

강동현은 황경호의 손가락 사이로 그의 얼굴을 보았다. 눈이 마주쳤다.

“나랑 자자.”

황경호는 순간 할 말을 잃고 얼굴을 벌겋게 하고 굳어 있다가 확 화를 냈다.

“헛소리하지 마, 이 변태…! 자기가 진짜 뭐라도 되는 줄 알아!”

황경호는 강동현을 마구 때리곤 그를 밀쳤다. 그의 무릎에서 내려가서 멀찍이 떨어졌다. 황경호는 씩씩거리면서 그를 노려보았다. 강동현은 굉장히 불만족스러운 얼굴로 자위를 멈추었다.

“아… 망했다….”

발기가 죽었다.

‘망할 고자. 임포!’

황경호는 그가 자신의 거시기를 닦고 일어나는 걸 경계하는 눈빛으로 노려보았다. 그는 옷을 제대로 입더니 시계를 보고 한숨을 쉬었다.

“내가 나중에 전화할 테니까.”

“안 받아.”

“왜.”

아까까지는 그렇게 꼬드기더니 중간에 그만둬서 저쪽도 기분이 썩 좋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겨우 발기도 다 되었는데 죽었으니 말이다. 그는 한숨을 쉬었다.

“지가 좋아하는 대로 다 해준다는데 왜 싫다는 거야.”

“뭐라고?”

강동현이 들으라는 듯 중얼거리자 황경호가 화를 냈다. 강동현은 선글라스를 썼다.

“너도 남자니까 기분 좋으면 좋잖아.”

“어이가 없어서 말이 안 나오네….”

“만지면 좋아하잖아. 저번에도 그렇고. 그럼 이제 그냥 같이하면 좋잖아? 그동안 우리가 좀 안 좋은 일도 많았지만 그래도….”

“…….”

강동현은 자기가 말을 할수록 황경호의 표정이 더 안 좋아지는 걸 보고 말을 멈추었다. 그의 반응을 이해한다는 건 아닌 것 같았다. 그는 황경호에게 다가갔다. 한 걸음 정도의 거리에서 그의 손을 잡았다. 뭔가 뿌리치기 힘든 제스처다. 그런 느낌을 자유자재로 쓰는 상대의 능숙함이 인지된다. 황경호가 인상을 썼다.

“알았어… 미안해. 화 풀어. 내가 경솔했다.”

“…….”

“니가 나랑 하는 거 싫어하는 거 아는데….”

그렇게 말하더니 왠지 말을 잠깐 멈추었다가 젠장, 작게 욕설을 했다. 그는 그대로 자신을 쳐다보지도 않는 황경호의 얼굴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낮게 내쉬는 한숨. 그는 황경호의 얼굴을 부드럽게 감싸듯 만졌다.

“갈게. 화 풀어.”

그리고 그가 나갔다.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황경호는 부글부글한 기분에 화가 섞인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아, 열 받아…!’

화가 나면 황경호는 오히려 할 말이 없어졌다. 아니, 말을 하고 싶지가 않다. 자기를 방어하기 위해 큰 목소리를 내며 부딪치면 강철로 된 벽에 머리를 박는 기분이라 바보 같고 어리석게만 느껴졌기 때문에 말을 하고 싶지가 않게 된다. 그리고 거기서 더 진행되면 모든 걸 체념하고 그냥 그 상황을 넘기고만 싶어졌다. 상대랑 더 이상 같은 공간에 있기도 싫으니까.

예전의 황경호는 그랬었다. 꼭 체념까지 갔었고 그러고 나서는 자살 충동까지 가곤 했다. 근데 요즘은 강동현이 그 선을 넘기 전에 멈추니 화가 나는 단계에서 멈춰져 쉽사리 화기가 가라앉질 않았다. 예전의 자신을 좀 더 능숙하게 감정을 컨트롤할 수 있었다고 인지하는 황경호로서는 드문 기분이었다. 예전에 복수를 하겠다고 막 설쳐대는 복수심과도 달랐다. 강동현에게 물리적 폭력을 행사하는 판타지를 공상하는 것과도 달랐다.

‘맨날 저런 식이야…! 왜 말을 저따구로 하냐고, 윽. 남자니까 기분만 좋으면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뭐야. 항상 저렇게…. 다른 사람들한테는 안 그러면서 나한테만 계속…! 미안하다고 하면 다냐고! 사람을 뭘로 보는 거야, 진짜! 내가 그렇게 싫다고 몇 번을 말해…!’

저번에는 뭐 모르고 당해서 그냥 부끄럽기만 했는데 이렇게까지 되니 정말 화가 난다… 한동안 그 인간 겁나 엿 먹였는데 지금은 진짜 그냥 이쪽이 당한 기분이다… 굉장히 기분이 안 좋다….

그렇게 한동안 알 수 없는 억울함과 분노로 치료실 안에서 화를 삭이고 있다가, 문득 머릿속을 스치는 생각에 휴대폰을 꺼내 팬 커뮤니티 사이트에 접속했다.

*

[니가 나랑 하는 거 싫어하는 거 아는데….]

“…….”

[니가 나랑 하는 거 싫어하는 거 아는데….]

“…….”

[니가 나랑 하는 거 싫어하는….]

“강동현 씨, 스탠바이 해주세요!”

강동현은 대기하고 있던 의자에서 일어났다. 대본을 들고 있었지만 글자는 머리에 들어오지 않았다. 대본 같은 거야 미리미리 다 외우고 상대역 대사까지 다 외웠지만….

영화 <타임리스> 촬영장이었다.

영화 <타임리스>는 한 50대 남자가 우연히 고물을 끄는 할머니를 도와주다 사고를 당하는 장면부터 시작되었다. 죽음을 앞두고 그때까지의 삶이 주마등 같이 지나가며 문득 그의 가장 찬란했던 시절이 떠오른다. 고등학교 시절, 첫사랑. 같은 대학에 붙어 좋아하고 새해의 운을 빌러 가고 같이 캠퍼스를 거닐던 기억. 그리고 사고. 죽음을 앞두고도 옛 기억으로 괴로워하는 그의 머릿속에 할머니의 목소리가 들린다. 다시 살 수 있게 된다면 언제로 돌아가겠냐고. 그는 답한다. 그리고 그때로 돌아가며 다시 한 번 과거를 바꿀 수 있는 기회를 붙잡게 된다.

남자 주인공 서유운과 여자주인공 정진아가 대학에 붙고 데이트하던 장면들을 찍고 있었다. 마침 눈도 왔다. 미뤄졌던 일정이 이제 정상화되어 계절에 맞게 일정이 진행되고 있었다.

“아, 새해엔 뭐든 잘 되면 좋겠다.”

정진아가 말했다. 그녀의 얼굴은 너무나 앳되고 풋풋한데도 귀엽다. 서유운은 괜히 심통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S대 법대 합격했으면서 바라는 것도 많아….”

“뭐라고?”

“아니요.

정진아가 가르치는 듯한 말투로 그에게 말했다.

“예전부터 판사가 꿈이라니까? 너랑 같은 과 안 갔다고 계속 이러는 거야?”

“아니요.”

“꼬우면 지도 법대 오던가.”

서유운의 콤플렉스를 건드렸을까. 발끈했다.

“아, 진짜 나도 영어 하나만 더 맞췄으면 들어갔다니까!”

“네, 네.”

서유운은 심술이 난 얼굴로 정진아의 얼굴에 눈을 던지고 도망갔다.

“아, 너 잡히면 진짜 죽는다!”

정진아가 따라서 달려갔다. 눈이 많이 와서 너른 성당 앞이 푹신하다. 이미 시간은 새벽을 가리키고 있었다. 대낮처럼 밝은 달에 광경이 아름답다. 둘은 결국 장난을 치다가 눈밭을 굴렀다.

“오케이! 컷! 몸 좀 녹이고 30년 후 서유운 버전으로 다시 갑시다.”

김은숙 감독이 메가폰을 잡고 소리쳤다. 아까 전부터 쭉 같은 곳에서 거의 같은 장면을 감정선만 다르게 해서 다시 찍었다. 메이크업 아티스트와 스타일리스트들이 배우들에게 붙었다.

“동현아, 눈 많이 안 먹었어? 아까 내가 너무 했나 싶던데.”

여자 주인공 정진아를 맡은 배우 문영은이었다. 청순가련하면서도 앳된 얼굴이 귀여워 인기가 많았다. 나이는 강동현과 동갑이었다. 이제 촬영이 진행된 지도 2달이 넘어 편하게 반말을 쓰고 있었다.

“아니야. 적당했어. 더 했어도 됐을 거 같은데?”

강동현은 눈의 차가움 때문에 빨개진 얼굴을 달래고 있었다. 배우 둘 다 매서운 추위에 컷이 떨어지자마자 발목까지 오는 패딩을 입고 열풍기 앞에 모였다. 한밤중인 데다가 기온도 영하다. 게다가 배우들이 화면에 등장하기 위해 입는 옷들은, 특히 겨울엔 말도 안 되게 얇을 때가 많다. 화면으로는 무척 아름답게 표현되겠지만 다 이런 고통이 숨어 있었다.

“아, 진짜 겨울 점점 추워지는 것 같아.”

문영은이 부들부들 떨면서 말했다. 강동현이 웃으며 그녀의 양팔을 문질러주었다. 메이킹필름을 찍기 위해서 스탭 하나가 핸드핼드 카메라를 들고 와서 찍었다.

“다행히도 인공눈 안 뿌려도 될 정도로 눈이 왔는데. 어때요? 진짜 눈이랑 인공눈 중에 어떤 게 연기하기 편한가요?”

“음. 둘 다 비슷해요. 그냥 추워요…. 아, 형. 나중에 보자.”

근처에서 대기하고 있던 다른 배우가 와서 강동현의 등에 눈덩이를 던졌다. 그렇게 메이킹필름용 카메라에 인터뷰를 좀 하고, 다시 대본을 좀 보다가 촬영에 들어갔다.

“아, 새해엔 뭐든 잘 되면 좋겠다.”

정진아가 말했다. 서유운은 그런 그녀를 계속 신기하다는 듯이, 또는 환희에 젖어 보고 있었다. 과거로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다.

“뭐든지 잘될 거야, 뭐든.”

“아르바이트도 해서 돈도 왕창 벌어야지.”

그러자 곧바로 서유운이 그녀의 손을 잡아 세워 진지하게 말했다.

“아르바이트는 그렇게 많이 하지 마. 특히 서빙 같은 거 하지 마. 고생만 해.”

정진아가 이상하다는 듯이 그를 돌아보았다.

“왜 그래? 전엔 같이 하자고 해놓고서.”

“하여튼 안 돼. 절대 안 돼.”

서유운이 딱 잘라서 그렇게 말하자 정진아가 그의 눈앞에 손을 흔들었다.

“제가 알던 서유운 씨 맞으세요? 요즘 완전 오버 장난 아냐.”

“그냥… 내 말대로 해. 하지 마. 돈 필요하면 차라리 나한테 달라고 해.”

정진아가 나중에 사고를 당해서 죽는 건 아르바이트를 하고 늦게 집에 가다가 뺑소니를 당한 것 때문이었다. 서유운은 그렇게 말했지만, 정진아는 기분이 확 상했다.

“너 왜 말을 그렇게 해? 너 좀 잘 산다고 내가 거지 같아 보여?”

“아니, 그런 게 아니라….”

30년 후의 그가 더 서툴다. 아니, 30년의 간극이 저절로 발현되는 것이다.

“미안해… 내가 실수했어. 너랑 같이 있는 시간 적어지는 게 싫어서….”

서유운이 사과를 하자 정진아는 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보았다.

“너… 요즘 완전 다른 사람 같아.”

“…….”

슬퍼야 하는 말일까. 서유운이 말없이 있자 이번엔 정진아가 그런 서유운의 얼굴에 눈을 왕창 묻혔다.

“…….”

“…….”

“…너 이리 와.”

“꺅!”

이번엔 정진아가 도망가고 서유운이 쫓아갔다. 어떻게 이렇게 아름다울 수가 있을까. 이 밤. 이 풍경. 둘은 결국 지쳐서 눈밭을 굴렀다. 서유운은 자신의 위에 올라탄 정진아의 얼굴에 묻은 눈을 조심스럽게 닦았다.

그리고 그대로 그녀의 얼굴을 너무나 사랑스럽다는 듯이 올려다보았다.

“음… 컷!”

감독이 컷을 불렀다.

“마지막 장면만 다시 찍읍시다. 강 배우! 나쁘진 않은데 표정이 너무 유혹적이야. 야해.”

그 말을 듣고 사람들이 웃었다. 강동현은 당황해서 자신의 얼굴을 만졌다. 일어나서 모니터링을 하러 다가갔다.

“이런 표정 하려고 한 거야?”

“음… 아뇨.”

“동현 씨 너무 잘생겨서 그래요, 감독님.”

문영은이 따뜻한 커피를 마시며 그렇게 말했다.

“영은 씨는 느낌 어땠어? 너무 금방 강 배우는 너무 색기 돌지 않았어? 내가 이때까지 너무 청순파 남자 배우들만 써서 그런지 화면 보고 깜짝 놀랐어.”

첫사랑, 첫 연애 이런 소재들을 잘 살린다는 평을 받는 감독이었다. 남자 배우나 여자 배우나 국민 첫사랑 아이콘이 된 배우가 둘이나 있었다.

“동현 씨는 I화장품 광고만 봐도 장난 아니잖아요. 아깐 저도 심쿵.”

문영은이 귀엽게 심장을 부여잡으며 장난을 쳤다. 김 감독이 웃었다. 2번 정도 더 찍었다.

“밤중에 수고 많았습니다! 결국 아침 해 보면서 들어가네. 밥 먹을 사람들은 먹고 들어가고, 피곤하신 분들은 먼저 들어가요. 이틀 뒤에 봅시다.”

감독이 말했다. 이미 스태프들은 분주하게 촬영장비들을 챙기고 있었다. 강동현도 사람들에게 인사를 하고 차에 올라탔다. 그는 곧바로 의자를 뒤로 눕히며 눈을 감았다.

‘대본 안 읽고 딴 생각해서 그래….’

강동현이 한숨을 쉬었다. 대본 읽으며 몰입해야 할 때 그 간호사랑 있었던 일을 생각하고 있었으니. 표정이나 이런 게 미묘하게… 강동현은 대본을 읽고 분석하여 하나하나 계산하여 연기를 했었고 꽤 호평을 받았었다. 하지만 김은숙 감독의 조언도 있었고 조금 더 뭔가, 할 수 있을 것 같아서 자연스럽게 몰입한 연기를 해보려고 했다. 그랬더니 정신 집중을 하지 않으면 뭔가가 섞인다. 더군다나 캐릭터 자체도 30년 후와 전을 동시에 연기 해야 하니….

[니가 나랑 하는 거 싫어하는 거 아는데…]

“아!”

강동현이 답답함에 소리를 한 번 내질렀다. 매니저가 백미러로 잠깐 그를 체크했다.

“왜 또.”

“아니….”

강동현은 표정을 구기며 휴대폰을 꺼냈다. 그리고 무작정 전화를 걸었다.

[음…]

“여보세요?”

분명히 저쪽이 통화버튼을 누른 거 같은데 아무런 말이 없었다. 강동현은 화면을 보았다가 다시 귀에 댔다.

“여보세요? 야!”

[아… 알람 아니었네… 여보세요… 누구세요…]

받았다. 자고 있었나 보다. 하긴, 주말이니 자고 있을 시간이다. 아침 7시. 그래도 일어날 시간이네. 강동현은 몸에 긴장을 풀고 시트에 몸을 뉘었다.

“나.”

[아… 이 변태가 진짜… 새벽에 전화 좀 하지 마…]

“벌써 7시야.”

[잠자기 얼마나 힘든데…]

뒤척거리는 소리가 났다.

“왜 침대라도 불편해? 하나 사줄까?”

강동현이 물었다. 그러나 상대는 반응이 없었다. 대신에 조용한 숨소리가 느리게 이어졌다.

“…….”

다시 자나. 강동현은 전화를 끊지 않고 반대편 수화기에서 들려오는 작은 소음들을 그대로 듣고 있었다. 해가 떠오르는 한강의 동쪽을 바라보면서 말이다.

‘그래… 원래 얘 나랑 하는 거 엄청 싫어했지, 항상….’

그때 그냥 그의 기분을 더 상하게 하기 싫어서 사과를 했는데, 자기가 한 말에 자기가… 입으로 내뱉자마자 곧바로 거부감이 들었다. 그리고 그 거부감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분명히 오래전부터 주지의 사실이었는데….

사실 처음 만지기 시작한 것도 강제, 고작 두 번 제대로 섹스한 것도 결국….

‘강….’

여전히 전화는 끊지 않은 채 강동현은 다른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문질렀다. 피곤했다.

예전처럼 그 간호사가 싫지는 않다. 아직도 이해 안 되는 구석도 많고 답답한 것도 많고 화가 날 때도 많지만… 그래도 일단은 말이다. 싫지는 않다.

섹스는 엄청 하고 싶다. 정말 매일 눈 뜨면 드는 생각이다. 눈 감을 때도 드는 생각이다. 사춘기 때나 처음으로 여자친구를 사귈 때도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는데. 성적으로 하자가 생기니 진짜 어느 한쪽으로 비정상적인 성욕이 쌓이는 것인가(젠장). 그리고 섹스를 하고 싶다고 생각을 하면 예전에는 여자친구를 떠올렸지만, 그 간호사를 만나고 나서부턴 그 간호사밖에 생각나지 않았다.

뭘 할지,

어떻게 할지,

뭘 어떻게 괴롭힐지.

그의 손에 느끼는 걸 보면 괜히 뿌듯하고 재미있다. 더 어디를 느낄지 궁금했다. 대체로 강동현이 정신을 못 차려서 문제지, 정말 진득하게 할 수 있는 날이 온다면 아마 샅샅이 다 찾아볼 것 같다.

사실 그가 싫어하는 것도 기본적으론 좋아했다. 짜증 날 때도 있지만, 싫어해도 견디는 게 좋다. 견뎌주는 게 좋다. 어디까지 견뎌줄지, 견딜 수 있을지 궁금해진다.

그래서일까. 항상 그 간호사가 싫어하거나 거부하는 걸 대수롭지 않게 취급했다.

[니가 나랑 하는 거 싫어하는 거 아는데….]

그 주지의 사실을 그 간호사 입도 아니고 자기 입으로 얘기를 한 것뿐인데 왜 이렇게 사람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지.

‘나랑 하는 거 진짜 싫어하긴 싫어하겠지….’

잠깐 그간 했던 짓들을 떠올려 보다가 관두었다.

‘싫어하겠지….’

그러나 들었던 말들은 머리를 스친다.

[제가 뭘 하든 무슨 상관이에요? 처음부터 지금까지 쭉 무슨… 사람을 자위기구처럼 취급해 놓고 갑자기 왜 이러시는데요.]

[이제 사람들이 너무 막무가내로 굴면…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겠어요. 그냥… 그냥 해달라는 대로 하고 빨리 집에 가고 싶어져요.]

[언제까지 그거 받아줄 거예요. 그냥 한 번 눈 딱 감고 끝내는 게 더 낫잖아요. 제가 뭐… 그런 게 처음도 아니고….]

그때만 생각하면 화가 치밀어 오른다. 그때 그 돼지 새끼는 정말 반쯤 죽여 버렸어야 했다. 그리고 그 간호사가 했던 말들도 죄다….

사람들은 서로에게 영향을 미쳤다. 강동현이 처음에 황경호에게 집적거리기 시작할 때는, 솔직히 그것 때문에 그가 어떻게 되든, 아니, 자신이 그에게서 어떠한 종류의 영향이라도 받을 거라곤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당연한 생각인 데도 불구하고. 그때는 자신밖에 생각하지 못하던 시기였다.

당연한 생각, 그래, 그래서 당연하게도 그가 자신이랑 하는 걸 싫어할 거라는 걸 아는데도 계속 그 사실을 까먹었다. 강동현은 그와 하는 게 너무 좋았기 때문이었다. 사람은 자기가 좋은 쪽으로만 생각하게 되는가 보다.

‘나랑 하는 것만 싫어하겠냐… 나 자체를 싫어하겠지.’

호기롭게 내가 너 취향 아니냐, 내가 만지는 거 좋아하지 않느냐 사기를 쳐보지만 결국 진실을 보자면 아마도… 그렇겠지.

‘내가 그런 때 안 만났더라면 어땠을까. 그럼 좀 더 유하게 서로를 받아들….’

그런 생각을 하다가 강동현은 스스로 제동을 걸었다.

‘아니 아니. 잠깐만. 남자라고? 애초에 그런 병원 갈 일이 없었더라면 내가 영지랑 쭉 사귀었겠지. 무슨 그런 간호사랑….’

머리가 아프다. 피곤하다. 집에 가서 얼른 자야지. 강동현은 여전히 수화기를 귀에 댄 채 잠깐 천장을 보다가 눈을 감았다.

“야… 자는 거지?”

매니저가 백미러로 강동현을 확인했다. 미친놈처럼 혼잣말하는 것처럼 들렸으니 말이다. 강동현은 잠깐 그대로 있었다.

“잘 자.”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전화를 끊었다. 거의 20분이나 아무런 대답이 없는 전화를 잡고 있었다. 강동현은 피로함을 느끼며 잠깐 차 안에서 눈을 붙이고 집에 도착해서 침대에 눕자마자 기절했다. 그렇게 잠을 좀 자고 오후 1시쯤 일어나 오후 3시엔 사인회를 갔다.

“오빠!! 팬이에요! 진짜 팬이에요. 완전 잘생겼어요!”

“감사합니다. 사인 여기다 하면 되나요?”

티셔츠를 사서 거기에 사인을 받는 팬이었다. 강동현은 자신이 광고하고 있는 종합 의류 브랜드 매장에 사인회를 하러 와있었다. 한국 사람들뿐만 아니라 일본인, 베트남인, 필리핀인, 인도네시아인도 있었다. 중국인이 가장 많았다. 간단한 인사말 정도는 외우고 있는 강동현이라 간단하게 대화도 하곤 했다.

한 무리의 외국인 관광객들과 사진을 찍어준 후 다시 자리에 앉았다. 다음 사람이 왔다.

“성함이 어떻게 되세요?”

라고 물어보며 고개를 들었다. 그는 두꺼운 패딩에 캡모자, 선글라스, 마스크까지 쓰고 있는 ‘남자’팬이었다. 체구가 큰 것은 아니었지만 분명히 남자다. 남자팬이 이런 데까지 오는 경우는 많지 않는데….

“…강동현이요.”

“네?”

강동현이 다시 되물었다.

“이름, 강동현이에요.”

“…….”

처음에는 못 알아들었는데 금방 걸로 목소리를 알아들었다.

“잠깐만 너….”

“제가 불감증, 지루, 발기부전, 전립선염까지 걸려서 인생이 너무 힘든데 힘내라고 사인 좀 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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