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 진짜 태형이 형네 가게에서 뭘 먹으면 다른 가게를 갈 수가 없다니까.”
“그 아저씨 진짜 음식 잘하긴 하더라. 왜 술집을 냈지?”
김형세가 말하자 정기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보여도 아직 30대야.”
“헉, 진짜?”
정기연이 깜짝 놀라 되물었다. 오희연이 가디건을 걸치면서 물었다.
“거기가 그렇게 음식을 잘해? 양식?”
“전부 잘해요. 양식도 잘하고 일식도 잘하고 한식도 잘하고. 요리 고등학교 나오고 계속 요리 공부도 하고 하나 봐요.”
“어머, 그래?”
“쌤~ 쌤도 같이 가요.”
황경호는 이강유를 불렀다. 이강유는 칙칙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경찰서 가봐야 해서 못 갈 것 같다. 여기, 오 간호사 카드 가져가요.”
이강유가 지갑에서 카드를 꺼내서 주었다. 이강유가 이런 곳에 쩨쩨하게 돈을 아끼는 성격이 아니라는 걸 다들 잘 알기 때문에 큰 사양 없이 고맙게 카드를 받았다.
“적당히 긁을게요.”
“먹고 싶은 거 다 먹어. 나 먼저 나간다.”
이강유는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며 밖으로 나갔다. 다들 그런 이강유의 뒷모습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정말 강유 쌤, 올해 삼재니, 삼재니 하더니만. 진짜 그런 가봐요.”
“올해 도대체 경찰서를 몇 번을 가시는지.”
“법 없이도 사실 양반인데.”
삼재라… 순간 나도 그런 건가? 라는 생각이 들어 황경호는 잠깐 생각에 잠겼다. 그렇게 다 같이 김태형의 가게로 갔다. 이러고 보면 정말 이 집 매상은 황경호랑 강동현이 다 올려주는 것 같았다. 듣기로는 강동현도 가끔 오고 있다고 들었다.
“어휴, 안녕하세요.”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초록이 일도 있고 했는데 한 번도 못 뵀네요.”
가장 연장자인 오 간호사가 악수를 하며 인사를 했다. 이신현은 정기연을 보고 눈에 하트 모양이 뿅 섰다.
“음식은 바로 나옵니다. 앉아 계세요.”
이미 테이블은 세팅이 되어 있었다. 5명이 앉기에 충분히 넓은 테이블에서 앉아 음식을 고대하고 있었다. 음식도 미리 얘기를 해서 준비를 해두었는지 5분이 지나니 금방 따끈따끈한 접시 대여섯 개가 나왔다. 소주와 맥주도 같이 나왔다.
“어머, 들은 대로 진짜 맛있네요.”
오희연이 깜짝 놀라서 음식을 이것저것 먹어보았다. 정기연과 김형세는 그냥 덮어놓고 아무 말 없이 음식만 먹고 있었다. 황경호는 둘 때문에 음식을 다섯 개는 더 시켜야 할 것으로 계산을 하고 김태형에게 미리 말했다. 이신현은 술을 직접 챙기러 온 황경호에게 다급하게 속삭였다.
“저분이 정 간호사님이야, 조 간호사님이야?”
“딱 보면 모르겠냐. 성격 있어 보이는 게 정기연이고 착해 보이는 애가 조한나야.”
황경호는 맥주 두 병과 소주 한 병을 챙겨서 자리로 돌아갔다. 다들 밥 먹고 얘기하고 술 먹고 얘기하고 그랬다. 기어코 디시를 10개나 먹었다. 김형세가 엄청난 대식가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정기연도 꽤 먹었다.
“넌 그렇게 먹는데도 애가 진짜 살이 안 찐다.”
오희연이 감탄스럽다는 듯이 정기연을 보았다. 정기연이 물 대신에 맥주를 쭉 들이켰다.
“저 운동도 많이 하니까요.”
그 뒤로는 안주 하나에 소맥을 마시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최고 연장자인 오희연 간호사는 비뇨기과 간호사로서 경력이 20년이나 되기 때문인지 엄청난 주당이었다. 저녁때부터 마시기 시작해서 새벽 세 시쯤 되어 파했다.
“기연이는 원래 잘 마시는 거 알았지만, 경호 너도 술을 꽤 하는구나. 예전에는 이렇게까지 안 마셨잖아.”
“늘었어요.”
다들 인당 소주 2병 이상은 마신 것 같은데 멀쩡했다. 오희연이 김태형에게 카드를 꺼냈다.
“형, 디씨해줄 생각하지 말고 그냥 긁어. 우리 원장님이 준 카드야. 마음껏 먹으랬어.”
황경호가 약간 알딸딸한 얼굴로 옆에서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밖으로 나왔다. 다들 택시를 탔다. 먼저 여자들을 보내고 김형세도 보내고 잠깐 다시 가게로 들어왔다.
“형, 좀 도와줄까?”
“넌 손님이 뭘 맨날 도와준대.”
“딱 한 잔만 더 할까?”
“너 요새 술 잘 안 마시더니만.”
원래 술은 먹을수록 술이 사람을 마시는 법이다. 테이블바 의자에 앉아서 가만히 김태형이랑 이신현이 일을 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앉았다가 일어서는 순간 엄청 어지러웠다. 술이 많이 돈 모양이다.
“내일 쉬는 날이니까 그냥 우리 집 와서 자라.”
김태형은 황경호의 상태를 보더니만 그렇게 말했다.
“응… 그럴까….”
이신현이 황경호의 앞에 물을 가득 따른 컵을 놔주었다. 황경호는 물을 홀짝홀짝 마셨다.
“내가 형이랑 너 많이 좋아하는 거 알지?”
“아, 이 형도 이상한 주사 생겼어요, 사장님.”
황경호가 이신현을 끌어안고 그렇게 말했다. 김태형이 설거지를 하면서 답했다.
“놔둬.”
이신현은 테이블을 닦고 청소를 하기 시작했다. 바닥을 쓸고 걸레질을 했다. 황경호는 설거지를 하는 김태형와 시시덕거리고 있었다. 이신현은 쓰레기를 밖에 버리려고 나갔다.
“손님이세요? 저희 이제 영업 끝났는데요.”
누군가 창을 통해 안을 살펴보고 있는 걸 발견했다. 이신현은 손님인 줄 알고 그렇게 말했다. 그러자 그 사람은 화들짝 놀라서 자리를 피했다. 이신현은 어디서 본 사람 같았지만 금방 사라져서 알아볼 수가 없었다. 그냥 별생각 없이 쓰레기를 지정된 자리에 버리고 다시 가게 안으로 들어왔다.
황경호는 1시간쯤 지났더니 정신을 차렸다.
“어우, 이제 좀 살 것 같네. 나 집 갈게.”
“왜? 우리 집 안 가고?”
“형도 일 끝났는데 쉬어야지.”
황경호는 밖으로 나와 택시를 잡기 시작했다. 택시가 잘 안 잡혔다. 폰으로 택시를 부르고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누군가가 툭툭 어깨를 쳤다. 황경호가 뒤를 돌아보았다.
“어, 어… 안녕하세요. 우, 우연이네요. 회, 회식이라도 하셨나 봐요. 술 많이 드셨어요?”
“…이덕재 환자님?”
“아… 네. 그냥 우연히 봐서요. 인사드릴까 해서… 죄, 죄송합니다.”
그러더니 이덕재는 금방 다른 곳으로 가버렸다. 황경호는 화를 내거나 따질 타이밍을 놓쳐 황망하게 그가 사라지는 방향을 보고 있었다. 우연이겠지… 뭔가 이상했지만, 술기운 때문일 것이라고 애써 생각했다.
*
황경호도 이제 병원에서 처음처럼 숨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뭔가 시선이 느껴져서 돌아보면 대기실에 이덕재가 앉아있거나 하는 일이 많았다. 뭐라고 탁 집어서 말할 수는 없었지만, 기분은 굉장히 안 좋았다. 황경호는 눈치를 보다가 슬쩍 이강유한테 물었다.
“선생님, 이덕재 환자 언제 수술하는 거예요?”
이강유는 금방 나간 환자의 차트를 잠깐 보고 있었다. 그는 평이한 어조로 답했다.
“계속 고민 중이라더니 이제 한다더라. 오늘 날짜 잡았어.”
“아, 진짜요?”
“다음 주 금요일 3시.”
“네….”
‘그럼 그것만 끝나면 이제 병원도 안 오겠지…’
찝찝했던 기분이 약간 해소되는 기분이었다.
‘그래, 별거 아니겠지. 또 쓸데없이 예민하게 굴어봤자 나만 피곤한 거니까.’
황경호는 그렇게 생각하며 그냥 생각을 비우고 열심히 일을 했다.
“오늘도 수고하셨습니다.”
“내일 뵙겠습니다.”
시간이 정말 눈 깜짝할 새 지나갔다. 다들 인사를 하고 나가니 이제 날이 꽤 짧아져서 해가 뉘엿뉘엿했다. 황경호는 숨을 크게 들이마시며 기지개를 켰다. 역시 실내 생활만 너무 하는 거 같긴 해. 뻐근한 목을 돌리다가 문득 도로변에 흰색 벤츠 SUV가 서있다가 출발하는 게 보였다. 차 넘버를 제대로 보진 못했지만….
‘기분 탓인가?’
강동현이야 요새 바빠서 한국 들어올 새도 없을 텐데. 황경호는 지하철역으로 향하면서 폰으로 팬 커뮤니티에 들어갔다. 역시 중국에 있었다. 이덕재 때문에 진짜 좀 예민해진 모양이었다. 이제 스스로도 생각 자체를 줄여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스스로를 위해서도 주변을 위해서도 그것이 좋을 것 같았다. 집에 가서 마저 벽지나 발라야겠다.
주변이 ‘나’에게 가하는 해로움에 대해 그저 예민해서 그렇게 느낄 뿐이라는 자기 변명은 굉장히 간편하면서도, 일견 일리도 있어 보인다. 어떤 사건들은 어차피 내가 어떻게 할 수 없고 어떻게 할 수 있더라도 어떻게 하는 것 자체가 피곤하고 에너지가 드는 일이니 그저 그 해로움이 존재하지 않는 척 해버리라는 것이다. 그러면 우습게도 마음이 조금 편해지니까. 그래서 누구나 어느 정도는 체념을 체화한다.
어떤 종교든 그저 받아들이라 말하는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마음도 비우고 생각도 비우고 멍청해지면 모든 문제가 그저 ‘나’의 문제일 뿐이고 세상에 불합리함은 존재하지 않는다. 세상은 본디 아름다운데 내 노력이 부족해서 그 아름다움을 누릴 수 없다는 것과 내가 아무리 노력해봤자 세상이 지옥 같아서 뭘 어떻게 해도 소용없다는 것 중 어느 것이 더 희망적인가.
황경호는 새로운 집의 화장실을 고치기 위해 이것저것 사 들고 언덕을 올라가고 있었다. 아직 벽지도 다 바르지 못했지만 마음이 앞섰다. 예전에 무료함과 우울증을 잊기 위해서 퍼즐을 맞추거나 숫자를 세는 것보다도 차라리 이런 것이 더 나았다. 무언가를 만들어낸다는 건 뿌듯한 일이니까 말이다.
황경호는 언덕을 다 올라 짐을 낑낑 지고 문을 열었다. 그리고 컴컴한 방안의 불을 켰다.
“…!”
너무 놀라면 여전히 소리를 잘 지르지 못한다. 반도 바르지 못한 벽지가 전부 바뀌어 있었다. 황경호는 짐을 바닥에 두고 몇 번이고 주변을 둘러보다가 집 밖으로 나왔다. 현관문 밖에서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다가 빌라 밖까지 나왔다. 경찰에 전화를 걸까 싶었지만,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황경호는 건물 밖으로 나와서 한참 자신의 집을 쳐다보고 있다가 김형세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야… 나 오늘 너네 집에서 자도 되냐.”
[괜찮은데. 무슨 일 있어?]
“아니… 그냥.”
그렇게 전화를 끊고 나니 심장이 미친 듯이 두근거리는 게 느껴졌다.
‘뭐지? 어떻게 된 거지? 누구지? 강동현이 저런 짓을 할 리도 없고, 이덕재? 근데 이덕재가 이런 범죄까지 저지를 만한 배짱이 있는 사람인가?’
모르겠다. 기분이 나빴다. 다 끝난 거 아니었나. 도대체 이런 일이 왜 계속 일어나는 것인가.
“빨리 왔네.”
서둘러서 김형세의 집에 가니 그가 문을 열어주었다. 밥을 먹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먹을래?”
“어… 어, 아니.”
무슨 일이 일어났다고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아니, 그런 생각도 하기 전에 바로 부정하는 말부터 나왔다. 안 그래도 2달이나 쉬면서 병원 사람들에게 잔뜩 걱정을 끼쳐 놓았는데 이제 와서 또 무슨 일이 있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역시나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심적으로는 이덕재가 분명하다고 계속 생각했지만, 무엇도 확신할 수가 없었다. 혼란스러웠다. 김형세의 집에서도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그렇게 병원에 출근을 하고 나서는 하루종일 피곤하고 긴장되었다.
그래도 오늘은 집에 가야겠다. 열쇠 집 찾아서 도어락 바꾸고 안전고리 달면… 그렇게 생각을 하면서 문득 허망해졌다. 요즈음 병원 사람들이랑도 김태형이나 신현이랑도 잘 지내면서 뭔가 바뀌어가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었다. 그렇게 우울한 느낌도 들지 않았고 새벽에도 깨지 않게 되었다. 갑자기 눈물을 흘리는 횟수도 현저히 줄어들고… 그런데 결국 해결된 것은 아무것도 없었던 것일까. 다시 이렇게….
‘아니야. 너무 또 파고들지 말자.’
황경호는 그렇게 스스로를 달래며 시계를 연신 보았다. 집에 가야 하는 게 좀 무섭다. 이덕재가 힘으로 어떻게 황경호를 할 수 있을까 봐 무서운 것보다도 그냥… 그런 사람이 계속 그를 노리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을 해야만 하는 게 기분 나빴다.
시간도 에너지도, 한 사람이 쓸 수 있는 양이란 한정되어 있었다. 경계 에너지는 사람들이 자신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해 주변을 경계할 때 쓰는 에너지다. 포식자나 경쟁자들이 있는지 살피고 유리한 점을 도모하기 위해서 사용한다.
사람들이 선진국이나 평화로운 나라에서 사는 것을 선호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문명 도시에 사는 사람들은 비문명 도시나 분쟁 지역에 비해서 그 에너지를 확연히 덜 쓸 수 있다. 포식자도 경쟁자도 물리적 범위 내에서는 거의 제거되어 있는 사회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에너지는 과학, 기술, 문화, 예술에 쓰며 문명사회를 꽃 피우게 하는 것이다.
반대로 말하자면 이런 문명사회에서조차 경계 에너지에 자신의 에너지를 다 써야만 하는 사람들은? 사람의 시간도 에너지도 한정되어 있다. 자신에게 위협이 될만한 존재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끊임없이 경계하며 그것을 소모한다면 얼마나 낭비인가. 인생이 너무나 피곤하게 된다. 특히나 한국처럼 이런 범죄행위를 묵인하고 사회적으로 피해자를 침묵시키는 나라라면? 어떤 종류의 사람들은 문명사회에 산다고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생명의 위협에 항시 노출되게 되는 것이다.
황경호는 퇴근을 하고 피곤하면서도 긴장이 되어 신경이 끊어질 것만 같은 채로 집으로 갔다. 문에 포스트잇이 붙여져 있었다. 황경호는 그것을 읽었다.
<죄송해요. 그렇게 싫어하실 줄은 몰랐어요. 도와주고 싶어서 한 건데… 너무 나쁘게 생각하지 마세요.>
“…….”
황경호는 바로 열쇠 집을 불렀다. 나중에 집을 나갈 때 문 전체를 다시 물어줘야 할 수도 있다고 했지만 상관없었다. 안전고리를 달고 집을 박박 치우고 청소하니 새벽이었다. 그리고 침대에 누웠는데, 정말 기분이 더러웠다. 벽지는 눈에 들어올 때마다 기분이 나빠서 도로 다 벗겨버리고 싶었다. 침대보도, 이불도 바꿨는데도 기분이 나빴다. 잠이 오질 않았다.
그렇게 발목에 족쇄라도 채워진 것처럼 답답하게 일주일을 살았다. 아무에게도 말할 수가 없었다. 이미 다들 일이 잘 해결된 걸로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 다시금 걱정을 끼칠 수가 없었다. 아니… 그저 못 하겠다.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다는 것과도 좀 달랐다. 그저…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금요일이 되었다. 이덕재의 수술 날이다. 다들 황경호를 배려해주어 수술 간호사는 다른 간호사들로 배정되었다. 그런데 순간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냥 내가 들어간다고 하고….’
강동현의 머리를 벽돌로 내려치는 상상을 하는 것보다 훨씬 현실적이고 실현 가능한 판타지라서일까. 생각하자마자 화들짝 놀랐다. 정말 혹할 정도로 밀접하게 느껴진 상상이었다. 죄책감과 자괴감이 따라왔다.
*
“형….”
“어, 갔다 왔어?”
매니저는 담당 배우를 기다리며 밴 안의 의자를 눕혀 눈을 붙이고 있었다. 차 문을 열고 강동현이 들어오자 그가 일어났다.
“뭐래?”
“잠을 너무 안 자서 그렇대. 그리고 스트레스 많이 받고 긴장해서 어깨가 굳었다고….”
강동현은 <타임리스>라는 영화 촬영에 들어가며 국내외 일정을 전부 소화하고 있었다. 드라마 일정보다는 나았지만 영화 자체가 강동현의 스케줄에 맞추어 촬영 플랜을 짰기 때문에 강동현 쪽이 정신을 차리고 촬영에 임하지 않으면 다 어그러질 수가 있었다. 조금만 있으면 해외 일정은 좀 괜찮아지리라 보고 있긴 했지만… 아침 촬영 중 강동현이 갑자기 굉장히 피곤해하며 목이 돌아가지 않는다며 통증을 호소하여 병원에 오게 되었다. 한의원에 가서 침을 맞고 나자 그제야 눈도 제대로 뜨고 목도 돌아가게 되었다.
“다시 촬영장 간다.”
“응.”
매니저는 차를 출발시켰다. 강동현은 명상음악을 틀고 최대한 휴식을 취하기 위해 노력했다.
“우리… 너무 무리한 거 같다… 크랭크인 이후에도 해외 촬영도 하고 싶다고 하고… 아무리 니가 일을 열심히 한다지만 진짜 이건 좀 무리다.”
“<연애출사표>랑 <해결사> 같이 찍을 때 정도는 되는 거 같아.”
“그때는 겹치는 기간이 2주 정도였잖아. 체감상 그때보다 더 힘들다. 비행기 타는 거 진짜 일이네.”
매니저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강동현은 한국 내에서 드라마와 영화 촬영을 동시에 했던 적도 있었다. 하지만 해외 촬영은 비행기를 계속 타야 하는 게 가장 문제였다. 일본 정도야 괜찮지만, 시차가 바뀌는 나라는 정말 몸을 망친다.
“이번 건 끝나고 나면 진짜 사장님이랑 얘기 좀 해야겠다. 진짜 이러다가 사고 나.”
“응.”
강동현은 성의 없이 대답했다. 촬영장에 도착해서는 죄송하다고 연신 얘기를 하고 다시 씬을 찍기 시작했다. 대본은 열 번도 넘게 읽었고 곳곳에 어떤 식으로 연기를 할지도 체크해두었다.
“사랑이란 무엇으로 증명된다고 생각해?”
“시간.”
남주인공 서유운이 묻자 여주인공인 정진아가 대답했다.
<타임리스>는 한 50대 남자가 우연히 고물을 끄는 할머니를 도와주다 사고를 당하는 장면부터 시작된다. 죽음을 앞두고 그때까지의 삶이 주마등 같이 지나가며 문득 그의 가장 찬란했던 시절이 떠오른다. 고등학교 시절, 첫사랑. 같은 대학에 붙어 좋아하고 신년의 운을 빌러 가고 같이 캠퍼스를 거닐던 기억. 그리고 사고. 죽음을 앞두고도 옛 기억으로 괴로워하는 그의 머릿속에 할머니의 목소리가 들린다. 다시 살 수 있게 된다면 언제로 돌아가겠냐고. 그는 답한다. 그리고 그때로 정말로 돌아가며 다시 한번 과거를 바꿀 기회를 붙잡게 된다.
“컷. 동현 씨, 좋은데. 한 번 만 더 갑시다. 좀 더 사랑스럽다는 느낌으로 바라봐줘요. 그런 거 있잖아요. 바라만 봐도 좋은 거처럼.”
“…네.”
그 뒤로 다섯 번이나 더 찍었지만, 연출가는 아리송한 표정을 지었다. 회상 장면과 실제로 과거로 돌아가고 나서의 간극을 보여주어야 하는데 연달아서 찍다 보니 차이를 두기가 힘들다. 영화는 특히나 시간의 순서대로 촬영하지 않으니까 말이다. 회상 장면에서는 밝고 사랑스럽고 귀엽게. 돌아가서는 아련하고 아쉽고 초조하고… 미리 계산하고 온 것인데도 제대로 표현이 안 된다. 피곤해서인가. 연출가가 이런 분위기를 표현하는데 일가견이 있는 사람이라서 곧장 곧장 지적해왔다. 그냥 넘어가는 게 더 싫기 때문에 감사하다고 생각하면서도 마음대로 표현되지 않아서 답답했다.
더 잘하고 싶다.
더 잘할 수 있는데.
강동현도 잘나가는 젊은 남자 연기자답게 멜로 연기를 주로 해왔었지만, <서리>에서는 왕세손으로 왕가에 닥친 시련과 불행한 가정사에 신음하면서도 의연한 역할이었기 때문에 캐릭터 자체가 사랑에 솔직한 품성은 아니었다. 섬세한 캐릭터라 연기를 할 의욕이 많이 났던 캐릭터였지만 멜로적 역할에서 본다면, 솔직하지 않았기 때문에 애절했어서.
<연애출사표>에선 워낙에 철딱서니가 없는 캐릭터였다. 유쾌하고 가끔은 찌질하기도 하고 여주인공과 함께 극을 재밌게 이끌어나가는 역할이었기 때문에 사랑 또한 흔히 말하는 요즘 사랑처럼 친구 같기도 하고 연인 같기도 한 그런 느낌으로 갔었다.
<코드명: 울프>에서 남주인공은 굉장히 염세적이었다. 염세적이라서 오히려 모든 일을 유머러스하게만 받아들이고 표현했다. 아마도 여자 주인공에게도 첫눈에 반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자신의 마음을 직시하지 못했다. 오히려 여자 주인공의 캐릭터가 누가 봐도 사랑스럽고 매력적이라 어떤 목석같은 남자라도 넘어가지 않으랴 싶을 정도였기에 못 이기는 척 넘어간 것이지 솔직하지 못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해결사>는 히어로물이지 로맨스물이 아니었다. 로맨틱 코미디의 부분이 있긴 했지만. 그도 기본적으로 사랑에는 소극적인 남자였다. 맨 처음 데뷔작이었던 <진주>에서 아역을 연기했을 때 그 역할도 사랑에 솔직할 뻔했으나 자신의 상황과 비극적 운명에 사랑을 버리고 복수와 야망을 택했었다.
이렇게 보니 죄다 사랑에 솔직하지 못하거나 사랑에 어리숙한 남자 역할만 맡아왔다. 그렇게 생각하니 사랑에 열정적인 역할을 하고 싶었다. 기본적으로 강동현이 그렇듯이 말이다. 그래서 <타임리스> 대본을 보자마자 흥미가 생겼다. 지금까지 김은숙 연출가가 표현해왔던 현실적이면서 환상 같은 사랑의 느낌도 마음에 들었고 말이다.
매일 같이 사무실로 들어오는 대본을 읽어대는 강동현이었다. 심지어 예전에 대작이었던 대본들도 줄기차게 읽어댔다. 이쯤 되면 너무 눈이 높아져서 마음에 드는 게 나오기가 힘들다. 그러니 마음에 드는 게 나오면 잘하고 싶다. 그러기 위해선 상태가 좋아야 했다. 얼굴도 목소리로 몸도 연기력도.
배우는 몸 관리가 생명인 걸 알면서도, 2년 가까이 병원을 다니고 있으니 몸 관리를 잘해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이젠 스스로도 어렵사리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강동현은 폭주하는 기관차처럼 도를 넘어서 오버 워킹을 한 지 너무나 오래됐는데 이젠 스스로도 멈출 수가 없었다. 강동현은 자신이 하는 일을 너무나 사랑했다. 사랑하니까 열심히 했다. 그리고 이제 정말 일밖에 할 게 없다고 스스로 생각하기도 했다. 중독이라고밖에 설명할 길이 없었다.
오랜만에 해 뜨기 전에 집에 들어갔다. 머리가 멍했다. 차 타고 있는 내내 잠들어 있다가 도착할 때쯤 깨니 꿈인지 생신지 구분도 할 수 없을 정도였다. 매니저 또한 벌건 눈으로 차 문을 열어주었다.
“들어가서 편하게 자.”
강동현은 차에서 내렸다. 차 문이 저절로 닫혔다. 강동현은 거기에 등을 기대고 담배를 꺼냈다. 그러더니 별안간 갑자기 화가 나서 차 문을 주먹으로 내리쳤다.
“아! 진짜!”
매니저가 깜짝 놀라서 강동현을 보았다. 강동현은 두 손으로 얼굴을 문질렀다. 그리고는 괴로운 얼굴로 억눌린 신음을 흘렸다.
“왜 이렇게 잘 안 되지. 더 잘할 수 있는데.”
“…좀 쉬어. 사람이 쉬면서 해야지. 그렇게 하면 아무리 잘하는 사람이라도….”
강동현은 뒤통수를 차에 쿵 하고 박았다. 그리고 담배를 뻑뻑 피우다가 필터까지 태우고 바닥에다 담배를 떨어뜨리고 밟았다.
“미안. 들어갈게.”
강동현은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어갔다. 뒤쪽에서 잠시 뒤 차가 출발하는 소리가 들렸다. 강동현은 엘리베이터 벽에 기댄 채 계속 오늘 촬영했던 것을 생각했다. 정말 전부 마음에 안 들었다. 아무리 몸이 안 좋았다지만….
집에 들어가서 씻었다. 씻고 나니 어쩐지 잠이 깼다. 참고라도 할 요량으로 TV에서 김은숙 감독의 영화를 하나 찾아보기 시작했다. 쉴 생각이 전혀 없는 남자다.
다 보고 한 대 더 피우고 잘 생각으로 테라스로 나갔다. 해가 뜨고 있었다. 피곤하다. 머리 아프다. 근데 이 피곤해서 깨질 것같이 아픈 머리가 오히려 열심히 산 인생의 표창처럼 느껴질 때도 있었다. 이젠 너무 익숙해서 그저 아무 생각이 없지만. 이렇게 자학적인 부분은 어쩌면 닮았을지도 모른다….
강동현은 문득 저도 모르게 스마트폰 화면을 켜고 누군가의 연락처를 보고 있었다. 몇 번인가 너무 피곤한 날에 새벽에 무작정 연락을 한 적이 있었다. 반 정도는 안 받았지.
부모님이나 전 여자친구나, 친구들이라면 이 시간에 전화를 할 생각조차 나지 않았을 것이다. 당연한 게, 다들 잠들어 있을 거 아닌가? 자고 있는 사람들 깨워서 성가시게 하고 싶지도 않고, 아니 애초에 필요성도 느끼지 못했었다. 걸고 싶었던 적이 그냥 없었다. 그런데 얘는 아무런 이유 없이 몇 번 괜히 한밤중이나 새벽에 전화를 걸곤 했다. 괴롭히고 싶어서 그랬나. 새벽 세 시가 넘어서 받을 때까지 건 적도 있었다.
‘어차피… 이제는 못하잖아.’
한참을 보고 있으니 담배를 세 개비나 피웠다. 아, 자야지. 강동현은 기껏 잘 수 있는 시간을 이렇게 날려버린 걸 깨닫고 반쯤 피운 담배를 재떨이에다가 얼른 비벼 끄고 침실로 들어갔다. 베개에 머리를 대자마자 죽은 듯이 잠들어 버렸다.
다음 날은 영화 촬영은 없었다. 하지만 광고 촬영 전에 관리 좀 받으라고 사무실에서 에스테틱에 강동현을 밀어 넣었다. 강동현은 거기서도 바로 곯아떨어져서 멍한 얼굴로 밖으로 나왔다. 메이크업을 받고 광고 촬영 장소로 이동하려는데 전화가 왔다. 김은숙 감독이었다.
“아, 네. 감독님.”
[아, 동현 씨. 오늘 저녁에 많이 바빠?]
“네? 광고 촬영이 있어서… 아마 11시쯤 끝날 것 같습니다.”
[그럼 잠깐만 볼까? 동현 씨 어디가 편해? 내가 강남 쪽으로 갈게.]
“아, 아닙니다. 제가 편하신 데로 가겠습니다.”
[동현 씨, 지금 우리나라에서 제일 바쁜 배운데 내가 어떻게 오라 가라 해. 그냥 잠깐 커피나 한잔할까 해서 그런 거야. 얘기도 좀 하고.]
김은숙 감독이 그렇게 말했다. 강동현은 어쩐지 올 게 온 느낌이라 약간 긴장해서는 약속 장소와 시간을 받았다.
“뭔데?”
매니저가 운전을 하면서 물었다.
“어… 김은숙 감독님. 갑자기 나중에 잠깐 보자는데?”
“응? 왜?”
“몰라…. 나 요새 너무 못해서 그런가….”
강동현이 그렇게 말하자 매니저가 얼른 대꾸했다.
“또 그런다. 잘만 하더니만.”
전에는 열심히 해도, 열심히 하기 때문에 최선을 다했다는 느낌으로 자신의 연기에 만족하던 강동현이었는데 요즘은 욕심이 더 많아져서는 초조해하는 게 보였다. 이른 성공에 오히려 불안해지는 것일까, 아니면 다른 것일까.
그렇게 광고 촬영을 끝내고 약속 장소로 가자 오후 11시 10분이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감독님.”
“아냐, 아냐. 바쁜 거 다 아는데. 앉아.”
김은숙 감독은 책 하나를 보고 있다가 강동현이 오자 일어나서 맞이했다.
“우리가 대본 리딩 때 말고는 따로 얘기할 시간이 없었잖아요. 강 배우, 워낙에 바쁘고.”
“네….”
강동현은 어쩐지 잘못을 저지르고 선생님의 앞에 서있는 기분이 들었다. 어쩐지 자신감이 떨어진다… 요즘 스스로가 자기 연기가 마음에 안 드는데 어떻게 자신이 있을 수가 있겠는가.
“그냥 한 번 얘기 좀 해보고 싶어서. 작품이나 내용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도 말해보고 싶고.”
“아, 네.”
“어때? 서유운? 강 배우 거 같아?”
“대본 읽었을 때부터 제가 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저 이때까지 적지만 여러 역할 맡아봤는데… 항상 사랑에 어리숙한 역할을 많이 맡았던 거 압니다. 여자에게 어리게 굴거나 딱딱하게 굴거나 그랬잖아요. 서준이나 울프나….”
“그랬지.”
“그런데 전 실제로 그런 스타일 아닙니다. 오히려 내 사람이다 싶으면 전심전력 다 합니다. 그래서 서유운 봤을 때 제가 해야겠다고 생각한 겁니다.”
“그래? 의외네.”
김은숙이 그렇게 말했다. 강동현이 물었다.
“저, 실제로 봐도 극 중 역할들처럼 어리숙하게 보이나요?”
“아니, 아니. 그렇지는 않아. 강 배우 요즘 젊은 배우들 같지 않게 무게감 있잖아. 남자답고. 마스크도 그렇고. 오히려 그래서 강 배우한테 사랑에서만큼은 좀 어리숙한 역할을 줬겠지. 인간적이고 귀엽잖아.”
강동현은 칭찬에 감사를 표했다. 김은숙은 웃었다.
“그런데 강 배우 연애 안 한 지 오래됐지? 그냥 데이트하는 거 말고 진짜 연애 말이야.”
“네? 아뇨… 얼마 전에 헤어졌기는 한데… 아, 6개월 다 되어가긴 하네요.”
“에게. 그거밖에 안 됐어? 강 배우 일하는 수준을 보니까 한 3년은 연애 못 했을 거 같은데. 여자친구도 대단하네.”
“…첫사랑이었거든요. 고등학교 때부터 사귀어서….”
강동현은 김은숙이 아무렇지 않게 한 말에 생각보다도 깊이 부채감이 느껴졌다. 그래… 헤어질 때 헤어지는 거 힘들다고 영지에게 진상이나 부렸지 사실, 미안했어야 할 일에 대해서 제대로 사과도 하지 않았다. 헤어지자고 하고 다시 한 달쯤 만나다가 다시 흐지부지 헤어져 버렸다. 다시 한번 제대로 만나서 얘기를 해야 할 것 같다. 처음으로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래? 진짜 의외네. 강 배우 연애경력 화려할 것 같았는데.”
“하하… 그런 거 화려해서 뭐해요. 그냥 제가 좋아하는 여자 하나만 있으면 돼요.”
“그렇게 오래 사귀었으면… 몇 년이야. 7년? 8년? 미련은 안 남아? 나중에 다시 만날 수도 있겠네.”
“바빠서 잊고 있었는데 금방 감독님 말씀 듣고 다시 한번 제대로 얘기해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헤어질 때 정말 제대로 끝을 안 맺고 흐지부지했어요… 그렇게 오래 만났는데.”
“강 배우 은근히 어른스러운 느낌 나는 거 그런 거 때문이었나 보네. 요즘 젊은 남자들 같지 않게 차분하다 싶더니.”
“감사합니다.”
그렇게 강동현의 연애사나 성격, 가족관계 등에 대해 이것저것 호구조사를 하더니 김은숙이 말했다.
“우리가 촬영 들어간 지 얼마 안 됐지만 약간 의견 차이가 있잖아.”
“아닙니다. 제가 부족해서 그렇죠….”
“아니, 아니. 강 배우 잘해. 강 배우가 우리나라 20대 남자 배우들 중에 제일 잘하는 거 누가 몰라. 게다가 흥행파워도 최고고. 강 배우가 가진 거 봐. 강 배우 얼굴에 목소리면 가만히 세워만 둬도 돼.”
김은숙은 조용히 겸양하고 앉아있는 강동현을 잠깐 보다가 목소리에 힘을 뺐다.
“난 강 배우 <진주>에서 아역했을 때 참 좋았거든. 연기가 담백하고 설득력 있고, 근데 또 풋풋하기도 하고. 요새 퓨전극이나 로맨틱 코미디 쪽을 많이 해서 그런지 연기가 많이 계산적이지.”
“네….”
언젠가 비슷한 소리를 들은 적이 있었다.
“힘을 좀만 빼자. 지금 강 배우 그 얼굴로 20대 초반 첫사랑에 취해 있는 남자애랑 후회에 가득 찬 50대 중반 아저씨를 같이 연기해야 하는 거잖아. 물론 달라야지. 근데 그냥 한 번 몸을 맡겨봐. 강 배우 처음에 사랑에 빠졌을 때 생각해봐. 그리고 30년 넘게 후회하다가 그때 그 시절 그 첫사랑 다시 만난다고 생각해봐.”
“네….”
“난 예전에 강 배우 정극할 때 정말 ‘앗’ 싶은 얼굴들이 너무 좋았거든. 저 나이에, 아니 나이가 문제가 아니라, 진짜 어떻게 저렇게 표현하나 싶어서 정말 놀랐다니까.”
“아닙니다. 많이 부족했는데요.”
강동현은 겸양을 하면서도 이미 고민에 빠져서 저도 모르게 한숨을 푹 쉬었다.
“요새는 너무 어깨에 힘이 들어갔어. 바쁘고 피곤하고 그래서 그렇겠지만… 그래, 괜히 한류 스타들이 공백기가 많은 게 아니지. 너무 성공하면 차기작에서 잘해야 된다는 강박이 강하니까… 솔직히 강 배우 나보다 훨씬 어리지만 존경스럽다니까. 일하는 거 보면.”
“아니에요. 열심히 해야죠….”
“좀 쉬어. 촬영 스케쥴은 조금 더 미뤄도 돼. 강 배우 요새 보면 진짜 아슬아슬 한 거 알아? 그런 거 화면에 고스란히 나와.”
“네. 죄송합니다. 저도 몸 관리하면서 해야 한다는 거 알면서도, 사람이 욕심이 많아서 그런가 스케쥴을 잡다 보면 계속 무리를 하게 되더라구요.”
“그건 소속사 잘못이네. 강 배우 같은 배우가 1, 2년 쓸 배우도 아닌데 벌써부터 그렇게 혹사시키면 안 되지.”
“아뇨. 사장님은 쉬라고 애원을 하세요. 제가 그냥… 하고 싶은 게 많아서요.”
“그래, 무슨 말인지는 알겠다. 일단 강 배우, 우리 한 일주일은 쉬자. 잠 좀 자고 마음도 좀 편하게 먹고 전 여자친구도 만나서 풀 거는 풀고. 그러면 우리 촬영 기간 일주일보다 더 아낄 수 있을 거 같다.”
“아, 그렇게까지 안 하셔도… 제가 다른 스케쥴 조정해보겠습니다.”
“아냐, 아냐. 강 배우 요즘 제일 비싼 거 아는데. 일단 잡아놓은 건 다 해야지.”
이렇게 갑자기 일주일이나 쉬게 되었다. 소속사도 듣고 깜짝 놀라서 확인 전화를 몇 번이나 걸었다. 일주일 동안 일본이랑 중국 북경에서 광고 1개씩이니 정말 갑자기 스케쥴이 텅텅 비어버린 거나 다름이 없게 되었다. 일단 1~2일은 먹고 자고 먹고 자고만 했다. 3일째는 전 여자친구를 만났다.
“미안. 갑자기 보자고 해서.”
“엄청 바쁜 것 같더니… 시간 괜찮아?”
오랜만에 만난 여자친구는 훨씬 밝고 예뻐 보였다. 취직한 곳도 잘 맞아서 잘 다니고 있다고 하더니.
“응. 갑자기 시간이 나서.”
“갑자기 무슨 일이야?”
“아니… 그냥. 한 번쯤 제대로 봐야 할 것 같아서.”
여자친구와 만나는 건 생각보다도 어색하지 않았고 편했다. 정말 오래된 동지나 친구를 만나는 기분이었다. 이제는 어쩔 수 없이 시간과 거리에 밀려 멀어지긴 했지만. 서로의 가족 이야기나 근황 이야기를 마구잡이로 했다. 시간이 쑥쑥 지나갔다. 재밌는 얘기도 많아서 서로 배를 잡고 웃기도 했다.
“우리 이런 것도 괜찮네. 정말 친구 같아.”
“그러게.”
그러더니 문득 영지가 말했다.
“우리 최근 1, 2년은 진짜 의리로 만난 거 아닐까? 솔직히.”
“뭐야. 넌 그랬어? 난 언제나 진심이었는데.”
“거짓말하지 마. 너 예전 같으면 밤에 전화 끊기 싫어서 밤 새우고 우리 집 앞에 불쑥불쑥 찾아오고 그랬잖아. 보고 싶다면서. 그때도 데뷔하고 나선데.”
“그건… 일이 바빠지니까….”
강동현이 말끝을 흐렸다. 영지는 약간 상한 강동현의 얼굴을 보면서 헛숨을 쉬며 웃었다.
“내가 널 몇 년을 봤는데. 9년이다, 9년. 너 니가 좋아하고 하고 싶은 거에 얼마나 최선을 다하는지 내가 다 알아. 니가 일이 잘되면서 내가 순위가 밀린 것도 알긴 했는데. 그래도 남자가 자기가 하고 싶은 일 열심히 해서 매진하는 거… 멋있잖아. 그래서 괜찮다고 생각했어.”
“그런데 왜 헤어지자고 했어?”
강동현이 물었다.
“그냥… 갑자기 어느 날 그런 생각이 들었어. 그만 만나는 게 좋겠다.”
“…….”
“나 지금도 너 좋아.”
나도. 강동현은 그렇게 중얼거렸다. 영지는 웃는 얼굴로 우스운 얘기를 하듯 말을 이었다.
“그런데 다시 너랑 사귀라고 하면 못 사귀겠어. 그냥 그랬어. 나도 그때는 스캔들 때문인가, 싶었는데. 뭐, 그거 말고도 조금(?) 뭐가(?) 더 있긴 했고….”
강동현은 마지막 말은 못 들은 척 음료를 마셨다.
“어쨌든… 결국 지나고 보니 그냥이었어. 그냥….”
영지가 그렇게 중얼거리며 씁쓸한 듯 창밖을 보았다. 그런 그녀를 가만히 보다가 강동현이 불쑥 말했다.
“미안해.”
“응?”
“그동안 내가 잘 못 해준 것도… 내가 모르고 서운하게 한 것도 다. 그냥 미안해서.”
“갑자기 왜 그래.”
“그냥. 한 번 제대로 말하고 싶어서.”
강동현이 사뭇 진지하게 말하자 영지는 풋 하고 웃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오케이. 접수.”
그러고 둘 다 음료를 한두 번 홀짝였다. 강동현이 물었다.
“만나는 남자는 있어?”
“응? 아니 아니. 없어.”
“집적거리는 놈들은 있을 거 같은데.”
“응? 하하하.”
영지는 그냥 웃었다. 영지는 항상 인기가 많았다. 강동현은 한숨을 쉬었다. 영지가 물었다.
“넌 만나는 여자 없어?”
“없어. 내가 여자가 어디 있어.”
강동현이 바로 대꾸했다. 영지는 자기가 더 아쉽다는 듯이 말했다.
“왜. 니 주위에 널린 게 예쁜 여자들일 텐데.”
“몰라.”
영지는 빨대로 음료를 쭉 마시다가 문득 생각난 듯 말했다.
“아, 갑자기 옛날 생각난다.”
“뭐가.”
“너 말이야. 고등학교 때 분명히 마음이 없는 것 같진 않은데 나한테 고백을 안 하는 거야.”
“그거 한 번만 더 말하면 백 번째다.”
강동현이 말했다. 영지가 웃었다.
“사람을 1년이 넘게 기다리게 하고 말이야. 난 바로 촉이 딱 왔는데.”
“난 정 들어야 하는 타입이라고 니가 그랬잖아.”
“그러니까.”
영지는 빨대로 얼음을 느리게 계속 저었다.
“그래도 금방 생기겠지. 지금도 니 여자친구 되고 싶어서 여자들 줄 설 텐데. 게다가 완전 얼굴값 할 거 같은데 안 하고. 완전 잘해주는데.”
“딱히 그렇지도 않아….”
강동현이 말했다. 영지는 의외라는 듯이 말했다.
“왜? 돈도 완전 잘 벌고. 완전 땡 잡은 건데.”
“자기는 차 놓고 말은 잘해요.”
*
“…….”
“아, 저… 그러니까… 저기….”
황경호는 몇 번이나 못 본 척 지나치려고 했지만, 이덕재가 계속 앞을 가로막았다.
“수술 후 2주부터는 그 저… 된다고 해서… 근데 저번엔 너무 빨리 그, 그랬잖아요… 그래서 간호사님은 별로 만족 못 하셨을 거 같아서… 다시 한번 기회를 주시면 좋을 것 같아서….”
“…….”
너무 어이없는 소리를 들으면 어디서부터 반박해야 할지 알 수가 없다.
“솔직히 한 번이나 두 번이나… 비슷한 거잖아요… 그때 제가 너무 못해서 그래요… 패자부활전 같은 게 왜 있겠어요….”
황경호의 눈치를 보며 비굴한 척하고 있었지만, 이덕재는 황경호의 무른 구석을 확실히 이용하고 있었다. 황경호는 이번은 단호하게 거절해야 한다고 몇 번이나 스스로에게 말 고개를 저었다.
“싫습니다. 다시 안 나타나신다고 각서까지 쓰셨잖아요. 왜 이러세요.”
“시, 신고하실 때 하시더라도… 제가 명예 회복할 기회는 주셔야죠!”
“안녕히 가세요.”
하지만 지금까지 이덕재가 했던 짓을 생각해보면 이 정도로 끝날 리가 없는 것이었다. 그 날 이후로 집 앞은 물론이고 출퇴근을 하는 병원에까지 죽치고 있기 시작했다. 이래서 무직 스토커가 제일 무서운 것이었다. 밤낮이 없었다.
“오빠, 괜찮은 거야, 저거?”
정기연이 인상을 확 찌푸리고 이덕재를 노려보았다. 엘리베이터 옆 구석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지하철 쪽으로 가는 황경호와 정기연을 따라오고 있었다.
“왜 저러는 거라는데? 오빠한테 돈 빌려달래?”
“아니….”
“아니면 진짜 오빠 좋아서 저러는 거야? 게이? 완전 극혐이다.”
정기연이 들으라는 듯이 아주 큰 소리로 말했다. 그 뒤로 병원 식구들이 신경을 써줘서 퇴근을 할 때 같이 지하철역까지 같이 가주곤 하였다. 황경호는 그런 병원 식구들의 배려가 고마우면서도 굉장히 미안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났을까. 황경호는 일부러 일이 있는 척 늦게 병원에 남았다. 걱정스럽게 김형세가 물었다.
“괜찮아? 너 언제 가려고?”
“아, 괜찮아. 괜찮아. 나 이것만 정리하고 갈 테니까. 가. 잘 가.”
황경호는 그렇게 말했다. 김형세는 주저주저하다가 나갔다. 황경호도 한숨을 쉬며 마지막으로 병원 안을 정리하고 밖으로 나갔다. 사람들이 너무 챙겨주니 감사한 데도 너무 송구스러워서 몸 둘 바를 모르겠다.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끼치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나가니 저녁 9시가 다 되어갔다. 황경호는 시원한 공기를 느끼며 빌딩 밖으로 발을 내디뎠다. 그러자 갑자기 축축한 손이 황경호의 손목을 확 잡아당겼다.
“도, 도대체 저 왜 그렇게 피해요!”
“이덕재 환자님…!”
이덕재는 평소랑 상태가 달랐다. 화가 굉장히 나 있는 것처럼 보였다.
“저 많이 기다려줬잖아요! 사람 이렇게 기대하게 하고…! 줬다 뺏는 게 제일 나쁜 짓인 거 안 배웠어요?! 제가 며칠 진짜 생각 많이 해봤는데요! 억울해서 미치겠어요! 제가 잘해줬잖아요! 잘해주려고 진짜 노력했잖아요! 사람이 이렇게 노력하는데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요?!!”
“잠깐 이거 놓고…!”
“내가 그렇게 좋아한다고 그랬는데!!”
사람들이 다 쳐다보았다. 사회성이 부족한 사람들은 특별한 경우가 아닌 이상 보통 인지 능력이나 학습 능력도 떨어지기 마련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사회성이 부족한 경우가 많으니까 말이다. 혼자서 어떤 비약을 했는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 결과가 이런 폭발의 형태로, 다른 사람의 눈이나 상황은 전혀 고려하지 않은 형태로 나타나는 것이었다. 급작스럽고 예상치도 못하게.
‘형세랑 같이 나갔어야 했나.’
당황하면서도 마음속으로는 그때 김형세랑 같이 안 나간 자신을 탓하는 게 먼저였다. 황경호는 사람들의 시선이 부담스러워서 일단 목소리를 낮췄다.
“이덕재 환자님, 일단 진정하시구요. 말로 해요. 손 놓으시구요.”
미친놈이 제일 힘이 세다더니 손목을 떼어낼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사람을 팰 수도 없는 일이고. 말을 하다 보니 자기 말에 이덕재는 더 열이 받았는지 무작정 황경호의 팔을 붙잡고 어디론가 끌고 가기 시작했다. 황경호는 저항했다.
“잠깐만요…! 우앗. 잠깐….”
“내가 그때 고추도 빨아주고 다 해줬잖아요! 받을 거 다 받고 이런 식으로 나오면 안 되지!”
황경호는 얼굴이 벌게졌다. 이덕재의 입을 틀어막고 싶었다. 그런데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 그때 그걸로 끝이라고 이덕재 환자님이 환자님 입으로 말씀하셨잖아요.”
“그때는 그냥 그렇게 말했는데 생각해보니까 제 손해잖아요!”
“손해라뇨….”
“저도 펠라 받아야겠어요!!”
“네?!”
“펠라 받아야겠다구요!!!”
황경호는 쥐구멍에 파고 들어가고 싶었다.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그를 말리려고 할수록 더 큰 소리를 내서 황경호를 부끄럽게 만들고 있었다. 혹시 아는 사람이라도 있을 거라고 생각하면, 그것만으로도 죽고 싶어졌다. 황경호는 마지막으로 팔을 빼내려고 몸부림을 쳤다. 이덕재의 손에서 땀이 너무 많이 나서 손이 미끄러워 빼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자 이덕재가 무작정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으아아아아아아악!! 아악!!! 아아악!!!”
황경호는 깜짝 놀라서 행동을 멈추었다. 이덕재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다시 황경호를 끌고 갔다. 그 뒤로는 속수무책이었다. 어두운 골목길로 들어가니 곧바로 모텔들이 보였다. 이덕재는 곧장 거기로 향했다. 싫었다. 정말 싫었다. 그런데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때 누군가 이덕재의 뒷덜미를 낚아챘다.
“뭐야, 이거….”
강동현이 어디서 달려온 것인지 숨을 헐떡거리며 서있었다. 선글라스를 쓰는 것도 까먹은 모양이다.
“가, 가, 강동현…?”
이덕재는 깜짝 놀라서 입을 벌리고 강동현을 돌아보고 있었다. 황경호는 그를 보고는 저도 모르게 말했다.
“저 좀 도와주세요….”
*
강동현은 급작스럽게 받은 휴일을 알차게 사용했다. 6일째가 될 때까지 오랜만에 집에 가서 엄마가 해주는 밥을 먹으며 호강했다. 명절 때도 못 오기 일쑤인 아들이 집에 백수처럼 죽치고 있자 어머니는 굉장히 기뻐하셨다. 매일 삼시 세끼에 간식까지 진수성찬에 왕 대접이 따로 없었다. 3일 정도밖에 안 있었는데 금세 몸이 좋아지는 게 느껴졌다. 젊어서 그런 것도 있겠지만, 그동안 강동현이 얼마나 식생활과 생활습관이 안 좋았는지 느껴지는 부분이었다. 그리고 다음 날 광고 촬영에 앞서서 삼성동으로 돌아왔다. 저녁 6시 반쯤인데, 가다가 그냥 압구정으로 차를 돌렸다.
도착하니 7시였다. 퇴근했으려나. 빨리 나갈 땐 퇴근하고도 남았을 시간이니까. 반대편 차도였다. 하지만 그냥 거기에 차를 세우고 있었다. 불이 켜져 있기도 했고… 그냥 생각을 좀 하고 싶었다.
김은숙 감독 말처럼 풀 건 풀라는 말이 다 맞았다. 강동현은 근 2, 3년을 정말 자신만 생각하며 살았고 그러면서 알게, 또 모르게 인간관계에 지운 부담감이 많았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전부 다 잘해왔기 때문에 그런 건 없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르지만, 김은숙 감독의 말을 듣고 진짜 마음속 깊숙이부터 어떤 부채감이 차올랐다. 여자친구에 대해서도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도. 그러니 여자친구도 다시 만나서 얘기를 나누고 항상 연락도 제대로 되지 않는 아들에게 섭섭해하는 엄마한테 가서 아들 노릇도 하고(사실 식충이 노릇이었으나 어머니는 좋아하셨다) 몸에 쌓인 스트레스도 풀었다.
그걸로 충분할지는 모르겠지만, 앞으로 계속 지속될 관계도, 끝난 관계에 대해서도 예의를 지켜야 했다. 만약 영지에 대해서도 그렇게 그냥 지나가버리고 말았더라면 과연 후회가 안 남았겠는가. 아니, 분명히 후회했을 것이다. 얼마나 소중했던가. 그녀는 강동현의 10대 후반과 20대 중반까지의 전부였다.
‘끝나버린 것 자체가 후회스럽다.’
강동현이 톱스타이니 빨리 결혼할 수는 없을지도 모르겠지만 그래도 결혼한다면 영지랑 할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리고 강동현만큼 자기 예언적인 사람이 그걸 못 지킬 리도 없을 것이다. 여자친구만 한 여자를 다시 만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그때 그 시절 그렇게 사랑하게 되어서 지금까지 함께 한 연인이었고 친구였고 동지였다. 여자친구와 똑같은 성격에 똑같은 행동을 하는 여자가 나타난다면 모르겠지만, 적어도 그가 아는 한도 내에선 없었다. 누구 말대로 이 정도 인연이라면 언젠가 다시 만날지도 모르지만….
게다가 스트레스로 몸이 이렇게나 망가질 정도였는데… 지금에 와서 돌아와 생각해보면 그 간호사에게 스트레스를 풀어댄 게 아니라고 말할 수도 없다. 지금은 피로로 몸도 못 가눌 정도였다면 그때는 핀치에 몰린 것처럼 어딘가 맹목적이었다. 연기를 해야 한다, 얼른 병도 고쳐야 한다… 지금까지 누구에게도 그런 식으로 대한 적이 없었다. 하필 그때 걔가 거기에 있어서 그랬던 건지 아니면….
뭔가를 풀어야 한다면 사실 그 간호사랑 가장 먼저 얘기를 하고 싶었다. 지금까지 수도 없이 괴롭혀댄 것을 알지만, 마지막은 본의가 아니었다. 적어도 그런 식은 아니었다. 강동현이 생각한 것은 적어도 그가 길길이 날뛰며 화를 내고 이것저것 조목조목 따져오고 때리고 부딪쳐오는 것이었다. 그러면 미안하다고 하기도 하고 같이 싸우기도 하면서 내심은 연이 끊어지지 않도록 그의 화를 풀려고 노력했을 것이다. 분명히 그렇게 했을 것이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그랬다. 강동현은 그와 만나지 않으며 살 것이라고는 언제부턴가 전혀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간호사의 생각은 전혀 다르겠지만, 강동현은 지금까지 있었던 모든 일들이 그저 악연이라고만 생각하지 않았다. 강동현 본인도 그간 정말 평소의 그라면 있을 수 없는 일, 안 할 일들만 엄청 하고 쓸데없이 집착하고 그와 갈등을 일으키고 애매한 구석을 만들고 그랬다. 기부를 1억씩 하지를 않나….
그 간호사에겐 정말 싫을 짓들만 잔뜩 했다. 처음 그 맹목적일 시기에도 참 용케 강동현의 어거지를 받아줬다 싶었다. 강동현도 참 되는대로 말을 던졌었다. 그 간호사가 정말로 죽고 싶어 하는 것에도 그의 우울증에도 전혀 공감하지 못했고(그건 솔직히 지금도 그렇다. 다만 이젠 그의 자살 충동이 가진 위험성을 알 뿐) 그렇기 때문에 그를 많이 무시해왔다. 처음엔 정말 온통 병을 고치겠다는 생각밖에 하지 않았다.
하지만 점점 갈수록 그에게 원하는 게 많아졌다. 더 만지고 싶어지고 더 괴롭히고 싶어졌다. 만지고 싶어서 만졌고 괴롭히고 싶어서 괴롭혔다. 굳이 잘 생각해볼 필요도 없이 상식선에서만 봐도 그러면 상대가 질색을 할 거라는 게 확실한데도 어쩐지 그 간호사에 대해서는 그렇게 해도 될 것만 같다는 그런 이상한 확신이 있었다. 항상 그랬다. 사람이 물러서 그런 걸 이쪽도 이용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생각하면 할수록 싫어하는 게 당연하네….’
이때까지 그의 마음 같은 건 그렇게 고려하지 않았다. 싫어하지만 억지를 받아주는 게 좋은 거였으니까. 차라리 그가 강동현에게 원하는 게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뭐든지 말만 하면 해줄 생각이었다. 그냥 필요한 게 보여도 다 해줄 것이다. 이런 것들도 강동현의 수많은 억지들처럼 그냥 싫어도 받아주길 원했던 걸까. 어디서부터 이렇게 성격이 꼬인 거지.
가끔씩 정신을 차리고 멀어지려고 해도 멀어질 수가 없었다. 지금도 이렇게 또… 이게 뭔지는 강동현도 알 수가 없었다.
그렇게 복잡한 마음으로 2시간이나 차를 세우고 가만히 있었다. 그런데 문득 소란스러움이 들려왔다. 눈을 감고 있던 강동현은 처음엔 별로 신경을 쓰지 않다가 뭔가 기분이 쎄해서 고개를 돌렸다.
“으아아아아아아악!! 아악!!! 아아악!!!”
도로를 넘어 차 안에 있는 강동현에게도 다 들릴 정도였다. 게다가 그 돼지에게 잡혀 있는 건 황경호였다. 강동현은 깜짝 놀라서 바로 차에서 튀어나와 다시 확인을 하려고 했지만 벌써 어딘가로 들어가 버린 모양이었다. 강동현은 그대로 무단횡단을 했다. 손으로 오가는 차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인사를 하면서도 얼른 달려갔다. 아까 마지막으로 있었던 곳에서 제일 가까운 골목으로 들어가니 진짜 말 그대로 질질 끌려가고 있는 간호사랑 그 돼지 새끼가 보였다. 강동현은 그대로 달려서 그 돼지의 뒷덜미를 단단히 잡았다.
“뭐야, 이거….”
“가, 가, 강동현…?”
여드름투성이에 땀을 뻘뻘 흘리고 있는 돼지 새끼는 보는 것만으로도 보는 사람이 기분이 나빠질 정도로 비호감형이었다. 강동현은 설명을 구하듯 간호사를 쳐다보았다. 황경호는 정말 궁지에 몰린 얼굴로 강동현을 올려다보았다.
“저 좀 도와주세요….”
강동현은 그제야 이 돼지 새끼가 그때 들은 스토커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이가 갈렸다. 꼭 걸려도 이런 병신들만 골라서… 강동현은 돼지를 노려보면서 황경호한테 손을 내밀었다.
“휴대폰 줘봐.”
황경호는 휴대폰을 넘겨주었다. 패턴도 없는 황경호의 폰을 열어서 메시지랑 SNS 메시지를 찾았다. 예상대로 엄청나게 이상한 메시지들이 미확인 상태로 남아있었다.
“이 새끼 이름이 이덕재야?”
“네….”
“그리고 손 안 놔? 이 돼지 새끼가 지금 사람을 어디로 끌고 가는 거야?”
이덕재는 황경호의 손을 놓았다. 그리고 강동현은 황경호의 휴대폰으로 경찰에 전화를 했다. 황경호의 제재도 아랑곳하지 않고 말이다. 곧바로 경찰이 달려왔다.
“어? 간호사 청년이네.”
“안녕하세요, 강 형사님….”
병원에 원체 일이 많다 보니 경찰도 몇 번 들락날락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알게 된 서울 강남구 경찰서 강철중 형사였다. 하필이면 또 아는 사람이 온다. 황경호는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어, 강동현…?”
같이 나온 최 형사가 깜짝 놀라서 강동현에게 손가락질을 했다. 강동현은 이덕재를 형사들에게 내밀었다.
“이 새끼가 지금 이 간호사 억지로 모텔로 끌고 가려는 거 잡은 겁니다.”
“뭐?”
남자가 남자를 모텔로 끌고 간다니. 형사들이 눈을 휘둥그레 뜨고 둘을 번갈아 쳐다보았고 황경호는 얼굴이 시뻘게져서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강동현이 그의 등을 퍽 쳤다.
“야, 얼굴 들어. 니가 뭐 잘못했냐? 이런 건 초장에 경찰한테 찌르고 정신 차리게 해야지.”
“일단… 서로 가십시다.”
셋 다 경찰서로 갔다. 강동현은 자기가 완전히 열이 받아서 황경호를 을러가면서 사건을 접수시켰다. 휴대폰에 남아있는 메시지들과 지금까지 있었던 일을 전부 말하게 하였다. 심지어 강동현이 저번에 있었던 일까지 말하려고 하자 황경호가 그의 입을 틀어막아야만 했다.
“그리고 그 길바닥에 CCTV가 몇 갠데 그거 돌려보면 분명히 억지로 끌고 가는 장면 다 찍혔을 겁니다. 찾아보세요.”
“음….”
형사는 좀 복잡한 표정을 짓더니만 결국엔 펜으로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이게… 우리나라 법이 미수를 강력범죄로 인지를 하냐고 하면 그게 아니라서… 게다가 솔직히 저항하려고 하면 또 저항도 할 수 있는 거고 도망가면 되잖아요. 남자이기도 하고… 그리고 스토킹 부분도 남자가 남자를 어떻게 하는 건… 협박이면 또 모르겠는데 딱히 협박성이 있는 메시지도 아닌 것 같고… 가택침입 부분도 극구 부인하고 있는 이상 가택침입도 혐의 입증할 만한 요소가….”
“아, 네….”
“뭐라구요?”
황경호는 수긍을 하는 태도로 고개를 끄덕였고 강동현은 어이가 없다는 듯이 입을 딱 벌리고 있다가 곧바로 자기 휴대폰을 꺼냈다.
“금방 하신 말씀 안 까먹으시는 게 좋을 겁니다. 지금 당장 변호사 부를 테니까 한 번 변호사 앞에서도 똑같은 소리 해보시죠. 검사 출신으로 부를 겁니다.”
“아니… 그러니까 그게 그런 뜻이 아니라….”
“아, 누나. 매형 변호사 개업하신 지 얼마 안 되셨죠? 지금 뭐 하세요? 아, 옆에 계세요? 잠깐만 바꿔주세요.”
“아, 강동현 씨. 잠깐 진정하시고….”
“아, 매형. 저 은혁입니다. 지금 강남경찰서인데요. 아, 아뇨. 제가 무슨 일 당한 건 아닌데. 지금 시간 괜찮으세요? 네, 지금 당장 되면 좋은데. 네. 네. 아니, 이 경찰 새… 경찰들이 지금 사람이 하나 끌려가서 큰일 당할 뻔했는데 사건도 안 된다잖아요. 내가 살다 살다 이런 개소리는 진짜… 네. 강남경찰서입니다. 네, 매형. 기다리겠습니다.”
강동현은 통화가 끝나자마자 강 형사를 노려보았다.
“일 똑바로 하십시오.”
“어… 죄송하게 됐습니다. 음… 이러려고 그런 말씀을 드린 게 아니라….”
강 형사가 저렇게 쩔쩔매는 건 처음 봤다. 병원에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연락하면 수사도 대충, 취조도 대충, 이런 느낌이었는데. 심지어 이강유 같은 경우도 사람이 좋다 보니 강철중 형사가 뭐든 대충 해도 한마디 하지도 않고 속만 끓였다. 그런데 이강유에 비하면 강동현은 7살이나 연하였는데도 저렇게 강 형사가 절절맸다.
나한테 피해를 1이라도 끼치면 넌 아주 좆되게 만들겠다. 한국 사회에서 사는 사람은 적어도 이런 자세를 가지고 살아야지 사람들이 함부로 안 한다. 그런 분위기를 느꼈는지 이덕재도 자세를 움츠렸다.
“죄, 죄송합니다… 그러려던 게 아니라….”
이덕재가 옆에서 조그맣게 그렇게 중얼거리자 강동현이 완전히 짜증이 폭발한 얼굴로 그를 돌아보았다.
“야, 이 새끼야. 이제 와서 죄송하다고? 그러려던 게 아니라고? 사람을 몇 달이나 괴롭혀놓고 경찰서 오니까 죄송하다고? 죽고 싶어? 그냥 경찰서 밖에 나갈래? 어? 깽값 얼마든지 물어줄 테니까 병신으로 만들어 줄까? 평생 휠체어 타고 다녀볼래, 이 개새끼야?”
“강동현 씨, 진정하시고….”
강동현이 말하다가 완전 빡쳐서 일어나려고 하자 주변에서 얼른 말렸다. 황경호도 그의 옷을 잡아당겼다. 강 형사가 화제를 돌렸다.
“그래서 여기 두 분은 관계가….”
“…….”
“친구입니다….”
강동현은 입을 다물고 황경호가 한숨처럼 말했다. 강동현의 매형이라는 변호사가 도착하고 나서는 변호사를 통해서 말을 하게 되었다. 그러자 강철중 형사도 진짜 제대로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도 가택침입과 협박까지 혐의를 인정받아도 결국엔 많아 봤자 몇백만 원 벌금 수준에서 처벌이 끝날 거라는 게 결론이었다(이것도 변호사가 와서 나온 결론이다. 변호사가 안 왔으면 그냥 무단 가택침입을 한 성범죄자를 훈방조치로 내보냈을 거라는 거 아닌가. 미칠 노릇이다). 강동현은 당사자인 황경호보다도 훨씬 더 열이 받아서 변호사라는 매형에게 이것저것 물어보다가 담배를 뻑뻑 피웠다. 그러고는 매형에게 인사를 했다.
“…밤늦게 갑자기 죄송합니다, 매형. 다음에 제가 술 한 잔 살게요.”
“야, 요즘은 그런 것도 무섭다.”
“제가 무슨 공직 있는 것도 아니고 사촌 누나 남편인데. 어차피 매형도 이제 검사도 아니시잖아요.”
“아, 그런가. 나도 담배 하나만 줘라, 은혁아.”
강동현의 매형이라는 남자도 강동현한테서 담배를 하나 받아갔다. 강동현이 라이터로 불을 붙여줬다. 매형은 담배를 깊게 빨아들였다가 후 뱉었다.
“매형, 담배 끊으셨다고 안 하셨어요?”
“그러게 금연자 앞에서 담배를 그렇게 피우냐.”
황경호는 잠깐 틈을 보다가 인사를 했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저… 그럼….”
“아, 그래요. 큰일 당할 뻔했다는데 깜짝 놀랐겠어요. 요즘 세상 무섭네. 남자도 참….”
“네, 그러게요… 감사했습니다.”
황경호가 고개를 꾸벅 숙이고 가려고 하자 강동현이 담배를 재떨이에 넣고는 그를 잡았다.
“야, 어디 가.”
“전….”
“매형, 죄송해요. 제가 나중에 전화 드릴게요.”
“그래. 친구 챙겨라.”
“조심히 들어가세요.”
“오냐. 나중에 사무실에 놀러나 와라. 니 팬들 많다.”
“네.”
강동현은 그러고 황경호를 붙잡고 차로 갔다. 황경호는 한숨을 쉬었다. 억지로 강동현의 차에 올라타서는(도움을 받아서 거부하기도 거북스러웠다) 그가 차를 출발시키자 입을 열었다.
“전 그냥 지하철역 앞에서 내려주세요.”
“우리 집에 가.”
“네?”
“그리고 당분간 우리 집에 살아. 아예 이사를 하던가.”
“제가 왜요?”
황경호가 황당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 새끼 감방 들어가는 것도 아닌데 또 집에 쳐들어가면 어떻게 할 건데? 사람이 그렇게 많은 대로 한복판에서도 질질 끌려가면서, 저 새끼 너 있을 때 집에 들어가면? 또 얌전히 대주고 끝낼 거야?”
“…….”
황경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다가 그대로 입을 다물고 고개를 돌렸다. 강동현이 갑자기 차를 세웠다. 뒤차가 크게 클락션을 울리며 지나갔다. 강동현은 갓길로 차를 댔다.
“아.”
강동현은 두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꾹 누르고는 가만히 있었다. 그리고는 황경호를 돌아보았다. 갑자기 그의 손을 잡았다. 자신의 쪽으로 끌어당겼다. 그렇게 아무 말 없이 얼굴을 쳐다보고 있었다. 황경호도 별안간 그의 얼굴을 쳐다보고 있어야 했다. 얼마나 그렇게 있었을까. 손을 놓았다. 그리고 그는 다시 차를 출발시켰다.
*
“비밀번호는 91232인데 바꾸고 싶으면 바꾸고 여기 키.”
“저 여기 안 살아요.”
“어차피 앞으로 나 집에 거의 없어. 지금까지도 그랬고. 그냥 마음대로 써.”
“안 산다구요.”
“내일은 아침에 나갔다가 저녁 7시쯤엔 들어오는데. 그다음 날부터는 로케를 3주나 가서 아예 서울에 없으니까.”
“안 산다고.”
“그냥 여기 있어. 그 새끼 병원 앞에서 하는 꼴 보니까 한두 번으로 끝날 놈도 아니고.”
“너만 하겠어?”
“지금 나한테 하는 만큼 그 새끼한테 해봐라.”
그대로 서로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그러다가 황경호는 한숨을 쉬며 피곤하다는 듯이 눈을 피했다. 기어코 다시 현관으로 몸을 돌렸다.
“어쨌든 오늘은 감사했습니다. 가볼게요.”
“야. 여기 있으라니까.”
강동현이 그의 손목을 잡았다. 강동현은 그대로 돌아보는 황경호의 눈빛을 보고는 한숨을 푹 쉬면서 인상을 찌푸렸다. 그를 안으로 끌어당기고 자기가 현관으로 갔다.
“알았어. 내가 나갈게.”
“진짜 왜 이래요.”
강동현은 신발을 신고 바로 서서는 황경호를 내려다보았다.
“그 집에 그 새끼 그냥 문 따고 들어갔었다며. 그런 집은 뭘 어떻게 해도 그냥 들어갈 수 있다는 소리야. 여기는 경비도 24시간 돌고 CCTV도 다 달려있고 애초에 아무나 들어올 수도 없어. 택배도 못 들어와. 그냥 여기 있어.”
“괜찮아요. 전 그냥….”
“제발.”
그러고는 강동현은 그냥 나가버렸다. 황경호는 우두커니 서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었다. 막상 강동현이 저렇게 나가버리니 의외로 갈등이 되었다. 안전고리를 달아도 불안한 건 마찬가지였고 뭐가 계속 없어지는 것만 같고 그랬다. 하지만, 진짜 강동현의 집은 위치도 그렇고 보안도 그렇고 황경호가 살던 집과는 차원이 달랐다. 강동현도 정말 안 들어온다면 여기보다 더 좋은 곳은 찾을 수 없겠지.
‘아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선뜻 나가버릴 수가 없었다. 정말 이 몇 주간 불안에 떨면서 제대로 자지 못했던 걸 생각하면….
황경호는 쭉 자신에게 해로운 것들에 알러지 반응을 일으키지 않고 그저 참고 살다가 강동현이라는 이물질에는 강한 알러지 반응을 일으켰다. 강동현이라는 이물질이 워낙에 그에게 독해서 그런 것도 있지만, 글쎄. 복잡하다. 이제 강동현 외에도 어느 정도 면역력이 생겼지만, 그래도 역시 여전히 강동현 외에는 대응력이 떨어졌다. 강동현에게는 워낙에 학습이 되어서 그런 모양이지만.
황경호는 결국 그냥 강동현의 거실 카우치에 풀썩 앉았다. 그리고 등을 기대었다. 편했다. 조용했다. 현관 근처의 불만 켜져 있다. 어둑한 방안의 조용함이 신선하다. 물질의 풍족함과 안전함이 느껴졌다.
아까 강동현이 경찰서에서 사람들을 절절매게 했던 게 생각났다. 강동현이 황경호한테만 유달리 싸가지가 심하게 없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만큼 TV 안에서나 그의 일에 관계된 사람들이나 주변 사람들에게는 꽤 경우를 잘 차린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처음에는 그래도 되는 사람에게만 안하무인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에 와서 보면 황경호만 콕 집어서 그렇게 대했던 거였다. 내가 뭔 죄를 지었다고). 이미지 관리에도 꽤나 열심이고 말이다. 그런데 아까 앞뒤 안 가리고 화를 낼 때는 제 성질을 다 내는 게 보였다.
그런 걸 어떻게 구별할 수 있는 걸까. 내가 화를 내야 할 때, 화를 내지 말아야 할 때. 이래도 될 때, 안 될 때. 그걸 잘 모르겠어서 언제나 참고 살았던 것 같다. 그런데 황경호한테도 그렇지만, 아까 경찰서에서도 아차 하면 연예인 생활에 큰일 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강동현은 그냥 뒤집어버렸다. 경찰에 신고한 것부터도 깜짝 놀랐다. 황경호는 강동현이 그렇게 진상을 부릴 때도, 이덕재의 도가 넘는 스토킹에도 끝끝내 112 세 번호를 누르지 못했다. 이 차이가 도대체 어디서 오는 걸까.
‘그리고 보니 그 인간 항상 그랬지… 마포대교도 지가 먼저 뛰어내리고. 정작 뛰어내리고 싶은 건 나였는데.’
누구는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겠어서 몸을 망치는데 누구는 인생을 살고자 하는 목표가 너무 강해서 몸을 망친다. 누구는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게 사는데 누군가는 너무나 빛난다. 누군가는 자신이 너무나 싫은데 누군가는 너무나 자신을 사랑한다. 아니, 사실 사랑한다는 생각조차도 하지 않는다. 그냥 자기 자신이 너무나 단단하다. 그렇게 단단하게 사는 게 당연한 인간.
‘나나 이덕재 환자나….’
피장파장이지… 스스로도 제대로 모르고 노력도 제대로 하지 않은 채 쉽게 실망해버리고. 삶이 쉽게 수치스러워진다.
‘똑같이 사는 거라면 잘살고 싶은 게 당연하잖아. 나라고 그런 사람이랑 엮이고 싶어서 엮이는 게 아니야. 잘난 척하면서 말하지 마. 너나 그놈이나 나한테는 똑같아….’
황경호는 그렇게 속으로 말했다. 도대체 강동현이랑은 무슨 연으로 이렇게 얽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멀어질 수가 없었다. 마음먹고 죄다 끊고 도망쳐도 결국엔 어떻게든 엮인다. 게다가 떨어져 있으면 또 황경호가 스스로 그의 모습을 찾아본다. 싫은 건지 좋은 건지. 아니, 그는 너무 싫었다. 당연히 이덕재보다도 싫었다. 그리고 그가 가진 능력은 너무 좋았다. 정말로 마음 깊이. 이렇게 강렬한 감정이 한 번이라도 있었던 적이 있었나.
황경호는 어두운 거실 카우치에 기댄 채 생각에 빠졌다. 그리고 어느샌가 지쳐 잠들었다.
그리고 며칠 뒤 이덕재가 약식재판으로 벌금형을 받았다는 소리를 들었다. 황경호는 그다지 큰 벌은 처음부터 기대도 안 했기 때문에 그렇구나, 하고 넘어갔다.
강동현의 집에는 생각보다 쉽게 적응했다. 아니, 적응하지 못하는 게 더 이상할 것이다. 그의 집은 정말 좋은 집이었다. 넓고 높고, 좋은 가구들과 욕실을 가진 집이었다. 황경호가 접할 수 있는 것보다 정말 수십 배는 좋아서, 새삼 물질의 대단함을 느끼고 있었다. 못 누려봐서 모르는 것이지 누릴 수 있는 물질이란 생각보다 컨디션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아침에 뜨는 해와 저녁노을을 마음껏 볼 수 있는 집이라니. 게다가 밖을 나가도 더럽고 좁은 골목에 누군지도 모를 사람들이 돌아다니는 게 아니라 사회적 지위와 부가 있는 사람들이 좋은 옷을 입고 돌아다니는 깨끗한 길이었다. 심지어 아파트 밑에 있는 마트마저도 무슨 백화점 마트 같았다… 얼마나 돈을 모으면 살 수 있을까 싶어서 검색을 해보았다가 포기하긴 했지만.
‘그놈이 그렇게 열심히 버는 이유가 있었구나.’
새삼 그렇게 생각하면서 잘살고 있었다. 오히려 2주 뒤에 강동현이 온다면 약간 실망스러울 것 같았다. 나가야 하니까.
“쌤.”
“응?”
“강 형사님한테는 무조건 강하게 하세요.”
황경호가 병원에서 이강유를 보고 그렇게 말했다.
“응? 왜.”
“그 형사님 변호사 부른다고 한소리 하니까 찍소리도 못하던데요.”
“그래? 그냥 원래 허허실실한 스타일인 것 같았는데.”
“빠릿빠릿하시던데요. 검사 출신 변호사만 앞에 서있으면.”
“그래?”
이강유가 의외라는 듯이 그렇게 반응했다. 김형세가 또 선물로 들어온 바나나를 처리하며 황경호한테 물었다.
“이제 이덕재 환자 안 오나 봐?”
“진짜? 다행이네.”
“이제 수술도 잘 된 사람이 왜 와.”
황경호는 그냥 그렇게 대꾸했다. 경찰서를 한 번 갔다 왔더니 겁을 집어먹은 모양이었다. 하긴, 애초에 깡이 있어 보이는 스타일은 아니었다. 그냥 황경호의 원룸에서 그대로 살았어도 그다지 문제가 없었을 수도.
황경호는 강동현의 집으로 곧장 퇴근을 해서 거실의 깨끗하고 커다란 통유리 앞에 앉아서 매일 노을을 바라보았다. 거실 쪽 창문과 침실과 반대편 선반 근처의 문을 열면 가을바람이 시원하게 들어왔다. 그리고 방 안이 온통 주홍빛으로 따뜻하게 물드는 것은 온몸으로 느끼고 있었다. 아름다웠다.
그리고 TV를 틀어놓고 요리를 해서 먹었다. 김태형에게서 슬슬 요리를 배우고 있었다. 여전히 찝찝해서 강동현의 침대에선 자지 않았지만, 침실 욕실이나 카우치는 마음껏 썼다. 딱히 황경호의 것도 아니었고 그럴 이유도 없었는데도 이 공간의 아름다움이 좋았다. 천장이 높은 것도 좋고 넓은 것도 좋고. 답답하지 않았다.
강동현이 죽어라 싫어서 이 집에 몇 번 왔을 때도 ‘그냥 집 좋네….’ 이 정도만 생각했지 살아보니 진짜 좋았다. 아예 모르고 살았으면 모르겠는데 고작 며칠 써보니 벌써부터 집에 가는 게 아쉬울 정도다. 강동현만 없으면 진짜 이 집은 완벽했다.
‘뭐… 그래도 내 건 아니니까.’
그래서 2주가 마저 지나고 강동현이 돌아온다는 날짜가 왔을 땐 마치 한시 빨리 나가고 싶었던 사람처럼 얼른 지냈던 흔적을 지우고 짐가방 하나 들고 나왔다. 그 몇 주 지냈다고 짐이 꽤 생겼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는데 전화가 왔다.
[어디야.]
“오늘 오신다고 해서 이제 짐 챙겨서 내려가고 있어요.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뭐? 오늘 나가란 말은 안 했잖아.]
“그 환자도 더 이상 안 오는 것 같고 괜찮을 거 같아서요. 신세 졌습니다.”
[…어딘데. 나도 지금 주차장 들어왔는데. 짐 많으면 데려다줄게.]
“아니에요. 진짜 괜찮습니다. 키는 거실 테이블 위에 두고 나왔어요.”
황경호는 로비를 지나 밖으로 나왔다. 지하철역까지 그다지 멀지 않았기 때문에 짐도 들고 갈 만하다 싶었다. 막 아파트 입구를 지나가려는데 뒤에서 클락션이 울렸다. 황경호가 돌아보았다.
“태워준다고.”
“안 탄다니까….”
강동현이 차를 세우곤 내렸다. 황경호는 짧게 한숨을 쉬었다.
“진짜 괜찮다니까요.”
“내가 안 괜찮아, 내가.”
강동현이 선글라스를 쓰며 그렇게 말했다. 황경호는 대놓고 말했다.
“저 집 옮긴 거 도은혁 환자님 꼴 보기 싫어서 옮긴 거예요. 또 갑자기 불쑥불쑥 집 앞에 나타나는 거 완전 사양입니다.”
“알아. 그냥 데려다주기만 할게.”
강동현은 황경호의 짐은 뒷좌석에다 실었다.
“앞으로 연락도 안 하고 집에도 안 가고 병원에도 안 갈 거야. 그럼 되는 거잖아.”
강동현이 먼저 단호하게 말하자 황경호가 얼떨떨하게 대답했다.
“네….”
황경호는 그대로 운전석에 타는 강동현을 물끄러미 보았다. 그가 클락션을 울리자 조수석으로 가서 탔다. 집 주소를 네비게이션에 치고는 그대로 침묵 속에 주행이 지속되었다. 강동현은 그다지 별다른 것 없이 운전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황경호는 그를 몰래 힐끗거리다가 결국 정면을 보았다.
말하는 건 다 지키는 남자다. 그럼 앞으로 정말 다시는 개인적으로 볼 일은 없을 거라는 말인 것이다. 이덕재도 저번 이후로 아무것도 없고 이대로 강동현도 황경호의 인생에서 사라져 준다면 그것보다 마음 가벼울 일이 어디 있겠는가.
새삼 그간 있었던 일들이 주마등처럼 머리를 스쳤다. 외견만 멀쩡한 이 쓰레기를 상대하느라 보낸 1년 반이었다. 인생 그 어떤 시간보다도 롤러코스터 같던 시기였다. 성희롱, 성추행을 밥 먹듯이 당하질 않나 이 잘난 인간을 홧김에 홍대나 이대에서 고자다! 라고 외치게 만들고 마포대교에서 뛰어내리게 만들었다. 예능 하나도 말아먹게 만들었고. 한 달에 4백만 원이나 뜯어내서 소아암에 걸린 우리 초록이, 초록이도 만나고. 태형이 형이랑 신현이도 만나고 고아원 선생님들도 만나고.
‘이 인간 패기도 엄청 팼지. 이게 미쳐서 물건 갖다 바칠 때 그냥 전부 쓱삭할 걸 그랬나.’
“다 왔어.”
황경호는 조수석의 문을 열었다. 강동현이 가방을 내려주었다. 황경호는 가볍게 묵례를 했다.
“감사합니다. 안녕히 가세요.”
“…그래.”
강동현은 담배를 꺼내면서 그렇게 답했다. 황경호 쪽을 보지도 않았다. 황경호는 그를 아주 잠깐 보았다가 짐을 들고 건물로 들어갔다. 거의 3주 만에 집에 오는 것이었다. 어디 여행이라도 갔다 온 것 같은 기분이었다. 하긴, 강동현의 집이 워낙 좋았어야지. 오랜만에 비밀번호를 누르고 안으로 들어갔다.
“왜, 왜 이제 와요?”
“…….”
집은 짐승의 우리라도 된 것처럼 엉망이었다. 냄새가 났다. 컵라면, 과자, 뭐가 뭔지도 모를 물건들. 그동안 얼마나 지낸 걸까. 예전의 깨끗했던 집이라곤 찾아볼 수도 없었다.
“저, 저… 황 간호사님 때문에 전과자 됐어요. 알아요? 저 앞으로 어떻게 살라고… 사람 좋아하는 게 그렇게 죄였어요? 말해봐요. 제가 좋아하는 거 그렇게 싫었어요? 사실은 즐겼잖아요!”
“…경찰 부를 겁니다.”
황경호는 목소리를 떨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그렇게 말했다.
“경찰요? 불러 봐요. 한 번이나 두 번이나 줄 긋는 거 똑같은 거죠. 저, 저희 엄마 저 전과자 됐다고 결국 쫓아냈어요. 다 황 간호사님 때문이에요. 알아요? 제 인생 이렇게 된 거 다 황 간호사님 때문이라구요!”
“…….”
말이 안 통한다. 황경호는 천천히 뒷걸음질을 쳤다. 이덕재가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의 손엔 커터칼이 들려있었다.
“가, 가만히 있어요. 어차피 저 범죄자잖아요. 한 번이나 두 번이나 똑같잖아요? 하하… 저 황 간호사님 때문에 수술한 거예요. 이제 제대로 쓸 수도 있는데 돈 들여서 수술까지 해서 안 쓰면 그게 낭비지, 뭐, 뭐가 낭비겠어요….”
이덕재가 천천히 걸어왔다. 황경호는 정말로 꼼짝도 안 하는 다리를 억지로 움직여서 뒤의 현관문을 열고 밖으로 달려갔다. 이덕재가 소리를 지르면서 따라오는 게 느껴졌다.
‘아, 어떡하지. 어떡하지. 아, 경찰.’
황경호는 얼른 휴대폰으로 112를 눌렀다. 두 번이나 번호를 잘못 눌렀다.
[네. 경찰서입니다. 무슨 일이십니까.]
“저…! 저 집에 사람이 문을 따고 드, 들어왔어요! 칼도 들고 있어요.”
목소리가 엄청나게 떨렸다.
[주소 말씀해주십시오, 선생님.]
“관악구 신림동….”
황경호는 덜덜 떨려서 번지수를 계속 틀리게 말하다가 겨우 말하고 3개 층을 얼른 뛰어 내려왔다. 밖으로 튀어나와서는 뒤를 돌아보았다. 이덕재가 거구를 이끌고 뛰어 내려오고 있는 게 들렸다. 그대로 다시 대로로 달려가려는데 누군가 뒤에서 잡았다. 황경호는 깜짝 놀라서 허우적거렸다.
“왜 그래?”
강동현이었다. 아직도 담배를 피우고 있었던 모양이다. 황경호는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너무 놀라서 더 이상 말을 못 하겠다.
“거기 서…!”
이덕재가 소리쳤다. 강동현이 인상을 확 썼다. 이덕재는 강동현을 발견하고 기괴하게 웃었다.
“와… 또 강동현이다.”
그는 커터칼을 더 뺐다.
“호스트 같은 게! 얼굴 반반하다고 나한테 깝쳤지!! 이걸로 얼굴 확 그어버릴 테니까! 그때도 한 번 협박해봐!”
그 말에 도리어 황경호가 더 놀라서 강동현을 밀어냈다.
“빨리 차에 타요…!”
그가 공포와 불안에 휩싸여서 덜덜 떠는 걸 보니 강동현은 짜증이 확 솟아올랐다. 얼마나 시달렸길래 이래. 이러고 몇 달이나 한마디도 안 했다는 거지… 강동현은 그의 뒷목을 한 번 주물러 주며 조용히 말했다.
“괜찮아.”
황경호는 화를 냈다.
“괜찮긴 뭐가 괜찮아요…! 진짜 다치기라도 하면 어쩔 거에요. 배우인데…!”
우습게도, 진짜 웃음이 나왔다. 강동현이 말했다.
“너 나 싫어하는 거 아니었어?”
“당연히 싫어하죠!”
그렇게 소리치고는 공포는 살짝 가셨는지 이덕재를 돌아보았다.
“이덕재 환자님… 일단 칼은 내려놓으시고 말로 해요.”
칼을 들고 있더라도 2대1이다. 이덕재는 말없이 칼을 드르륵드르륵 뺐다 넣었다 하고 있었다.
“말로 해요.”
그러자 갑자기 이덕재가 소리를 빽 질렀다.
“내가 가슴도 빨아주고!! 고추도 빨아줬잖아!! 후장도 빨아줬잖아!! 넌 뭐 해줬는데?! 몸 좀 만지게 해준 게 대수야?! 너도 즐겼잖아!! 근데 내가 왜 범죄자가 되어야 하는데!!”
황경호의 얼굴이 화륵 빨개졌다. 목덜미와, 아마도 어깨까지. 강동현까지 열이 확 받았다. 그는 이를 갈았다.
“넌 저런 새끼한테 도대체 왜….”
“…너나 저놈이나 똑같다고.”
황경호가 갈라지는 목소리로 작게 말했다. 강동현은 코웃음을 쳤다.
“인정 못 해.”
이덕재는 꽥꽥 소리를 계속 지르고 있었다.
“내가 왜!! 내가 왜!! 내가 뭘 잘못했는데!! 사람 좋아한 게 죄야! 쟤가 먼저 나 꼬셨어!!”
동네 사람들 다 나오겠다. 황경호는 온몸이 다 빨개져서 부들부들 떨었다. 아니라고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너 계속 그래도 되겠어? 경찰 오는데?”
그때 강동현이 그렇게 말했다. 이덕재가 괴성을 멈추었다. 황경호는 깜짝 놀라서 강동현을 돌아보았다가 이덕재를 보았다. 이덕재가 결국 칼을 들고 달려오기 시작했다. 황경호가 강동현을 잡아끌었다.
“야, 놔…! 니가 잡고 있으면 어떡해!”
“도망가라구요! 왜 사람을 도발해요!”
강동현은 황경호를 가까스로 밀치고 달려오는 무작정 달려오는 이덕재를 옆으로 피했다. 그리고 강동현은 균형을 잃은 그의 엉덩이를 걷어찼다. 넘어진 그를 말 그대로 마구 밟았다.
“내가 휠체어 신세 지게 해준다고 했지?!”
악의에 가득 찼다. 내내 벼르고 있었던 사람 같았다. 황경호는 그걸 보고 있다가 너무 도가 지나치는 것 같자 안절부절못했다.
‘저, 저래도 괜찮은 거야? 아무리 칼 들고 있었다지만 그래도 강동현 연예인인데 이런 구설수 생기면…!’
황경호는 결국 강동현을 말리기로 결정했다.
“그, 그만해도 될 거 같아요. 경찰 오잖아요. 사이렌 소리도 들리고. 그만 해요.”
황경호는 강동현의 허리를 붙잡고 뒤로 끌어당겼다. 경찰이 도착했다. 이러다 강동현이 현행범으로 잡혀가겠다.
“야, 야. 놔봐. 잠깐만. 이거 가지고 안 죽어. 놔. 놔보라니까. 이런 새끼는 맞아야 정신 차린다고. 야, 놔. 놔. 아, 진짜 놓으라고. 좀만 더 하면 돼.”
강동현도 완전히 흥분해서는 이덕재를 완전히 조져놓으려고 했다. 그때 이덕재가 무릎을 꿇은 자세로 칼을 들고 강동현의 오른쪽 옆구리를 찔렀다.
“…!”
“도은혁 환자님…!”
“괜찮으십니까!”
경찰들이 달려왔다. 이덕재는 곧바로 경찰들에 의해 짓눌러졌다. 강동현은 이를 꽉 깨물고는 오른쪽 옆구리를 손으로 감쌌다. 황경호도 같이 감쌌다.
“잠깐만 손 치워보세요.”
경찰에 구급상자 같은 걸 가져왔다. 그리고 옷을 들어 강동현의 상처를 확인하더니 거즈 더미로 상처 부위를 눌러주었다. 황경호가 받아서 눌렀다.
“그렇게 안 깊어요. 괜찮아요.”
황경호는 그를 부축하면서 상처를 지혈했다. 강동현은 그의 어깨에 팔을 걸치고 무게를 꽤 지탱했다. 알다시피 강동현은 덩치도 크고 근육질이라 무거웠다.
“잘하는 의사 선생님한테 가면 흉 안 지게 잘 기워주실 거에요.”
“지금 그게 문제냐… 아오, 진짜 더럽게 아프네.”
강동현이 그제야 입을 열었다. 황경호는 덜덜 떨면서도 불안하게 중얼거렸다.
“흉 안 지겠죠?”
“참나….”
강동현은 어이가 없다는 듯이 황경호의 얼굴을 보았다가 옆구리에 최대한 힘을 주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어디 전화해요?”
황경호가 물었다. 강동현은 현행범으로 잡혀가는 이덕재를 조용히 노려보며 전화를 걸었다.
근처 병원에서 응급처치를 하고 강동현은 곧바로 병원을 옮겼다. 황경호는 강동현의 매형이라는 사람과 함께 경찰서에서 조서를 써야 했다. 그리고 그때부터 뉴스와 인터넷 기사가 왕창 올라오기 시작했다.
<톱스타 강동현, 스토커 시달리던 여성 우연히 구하다 자상>
<배우 강동현, 데이트폭력 당하던 여성 구하다 자상>
<단독 특종! 배우 강동현, 작년 마포대교에서 자살시도 택시 기사 구출>
…어쩐지 다들 조금 이상하다.
*
어디서 봤는데 강동현은 12바늘이나 꿰맸다고 한다. 이때까지 그렇게 많은 데이트폭력과 스토킹으로 인한 범죄가 일어났었는데 유명 남자 배우(지금 완전 톱 중 톱이지만)가 피해를 당하니 완전 나라 전체가 난리였다. 스토킹의 심각성이 공론화되고 여기저기서 특집 다큐멘터리가 생산되고 있었고 심지어 입법 움직임도 보였다. 우스운 일이다.
게다가 기사는 데이트폭력 피해자를 구한 거다, 스토킹 피해자를 구한 거다, 등등 통일이 되어있지 않았다. 일부러 그러는 것 같기도 했다. 사흘이나 지났는데도 여전히 불판이었다. 강동현이 칼에 맞았다는 소식에 혼절했다는 해외 팬도 다수라고 한다. 강동현은 본의 아니게 계속 개념 연예인으로 이미지를 구축하게 되었다.
이덕재는 당연히 감옥으로 갔다. 무단 가택침입(이건 재범이다), 사유기물손괴, 상해폭행, 특수폭행 등 죄질이 굉장히 나빴기 때문이다.
강동현이랑은 그 이후로 연락이 되지 않았다. 뭔가… 어쨌든 황경호 때문에 다친 것이라 사과를 하든 보상을 하든 해야 할 것 같은데 그의 휴대폰은 내내 통화 중이거나 아예 전원이 꺼져있었다.
황경호는 의외로 일상생활을 잘 영위하고 있었다. 본인이 칼에 맞은 것도 아니고, 게다가 이젠 이덕재가 진짜 감옥에 들어가서 이런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 아닌가.
집을 치우는 것은 일단 사람을 불렀다. 도저히 소름이 끼쳐서 손을 댈 수는 없었다. 그리고 나선 또 스스로도 박박 치우고 잘살고 있었다. 가끔 불안할 때도 있지만, 그건 시간이 해결해줄 것이다.
“어머. 오빠 이거 봤어? 강동현 칼 맞았대.”
“어, 봤어.”
“세상에 이 남자 그렇게 안 보였는데 은근히 봉사 같은 거 좋아하고 그런가 봐.”
“그렇지… 초록이도 있고.”
“어우, 그렇게 진상인데. 소름. 이미지 세탁이야, 뭐야.”
딴 건 몰라도 혹시 흉이나 지지 않을는지 걱정했다. 팬 커뮤니티에서도 그런 말은 초 단위로 올라오고 있었다. 아무래도 그때 황경호가 말리지 않았더라면 칼에 맞을 일은 없었을 게 거의 분명해서 황경호도 부채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래, 불공평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황경호는 그런 사람이었다. 자신에게 그렇게 피해를 입힌 사람이라도 이쪽에서 본의 아니게 피해를 입히면 계속 신경이 쓰인다(심지어 찌른 사람이 따로 있는데도). 게다가 몸이 재산인 남자한테 그런 기스(?)를 냈으니.
‘보험 같은 거 들어놨겠지? 그래도 병원비나 보상금이라도 내면 마음이 편할 거 같은데. 이사하고 쉬면서 돈을 좀 쓰긴 했지만 그래도 그 정도 병원비는 쓸 수 있겠지?’
퇴근을 하기 전에 전화가 왔다. 원래 근무 중에 전화를 잘 받지는 않았지만, 강동현이었다. 황경호는 순순히 전화를 받았다.
[나 강남 XXXX 병원. 1401A호. 퇴근하고 와.]
“이제 연락 안 하시는 거 아니었어요?”
[니 덕분에 칼 맞으신 사람한테 참 알맞은 말이다?]
황경호는 다른 사람한테 퍼주는 거엔 아무 생각 없어도 남한테 빚은 못 지는 사람이었다. 과일바구니를 하나 사 들고 병원을 찾아갔다. VIP 병동인지 엘리베이터 앞에도 지키는 사람들이 있고 삐까번쩍 했다. 병실 문을 똑똑 두드렸다. 그랬더니 들어오란 말이 들린다.
“왔어?”
“…….”
병원복을 입고 있는 걸 보니 더 부채감이 생긴다. 에휴… 황경호는 한숨을 짧게 쉬곤 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과일바구니를 그의 수많은 선물 더미들 사이에 놓았다.
“딴 거 사올 걸 그랬나 보네요.”
수많은 과일바구니를 보면서 황경호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그리고 멀찍이 서서는 강동현을 보았다.
“…저… 괜찮아요? 흉 지는 건 아니래요?”
황경호가 한참 뜸을 들이다가 그렇게 물었다.
“몇 번 전화드렸는데 안 받으시더라구요. 사과도 하고 싶었고 병원비 정도는 제가 내고 싶었는데… 아니, 다른 보상금 같은 거라도 원하신다면….”
강동현은 그런 그를 물끄러미 보다가 물었다.
“여기 병원비 낼 정도 돈이나 있어? 보상금은 얼마나 줄 수 있는데?”
“아… 저… 할부라도 하면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요. 모아놓은 돈도 조금은 있어요.”
황경호는 약간 당황하더니 그렇게 말했다. 강동현은 피식 웃었다.
“문 잠그고 이리 와.”
강동현은 그렇게 말했다. 해는 지고 있었다. 등을 켜지 않은 비싼 병실 안이 금세 주홍빛 석양으로 물들어갔다. 황경호가 강동현이 말한 대로 주춤주춤 다가오자 강동현이 그런 그의 얼굴을 가만히 보다가 말했다.
“돈은 됐고. 미안하면 키스나 해봐.”
황경호는 좀 당황했다가, 침대 머리맡을 잡고 그냥 입을 맞추었다. 가볍게 대었다가 금방 입술을 떼자 강동현은 자기 입술을 아쉬운 듯 혀로 핥았다. 그래도 욕은 먹을 줄 알았는데… 황경호는 강동현 때문에 이런 게 꽤 익숙해져 버리고 말았는지 이 정도로는 정말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다.
‘이 정도면 내 걸 빨라고 해도 할 것 같은데….’
그런 생각이 잠깐 들었지만 관두었다. 강동현은 황경호의 허리를 팔로 감싸 밑도 없이 끌어안았다. 넘어지지 않으려다 보니 황경호가 침대 위로 딸려 올라갔다.
“이것도 키스라고 하냐… 다시 해.”
황경호는 한숨을 쉬었지만, 역시 체념이 빠른 애라… 다시 입을 맞추었다. 그의 속눈썹이 자신의 것을 스치는 게 느껴졌다. 강동현은 그의 입술을 핥았다.
“입 벌려….”
강동현은 황경호를 더 끌어당겨 자신의 무릎 위에 앉게 했다. 황경호는 깜짝 놀라서 그의 상처를 건드리지 않으려고 얼른 무릎을 움직였다. 숨을 쉬다가 입을 벌리게 되자 강동현의 혀가 부드럽게 안으로 들어왔다. 부드럽게 황경호의 혀를 핥으면서 키스를 했다.
“으음…!”
그가 마구 물어뜯고 빨고 헤집는 키스야 꽤 해봤지만 이렇게 부드러운 건 처음이었다. 등골에 소름이 끼친다. 황경호는 저도 모르게 놀라서 허벅지를 좁혔다가 그의 상처를 건드렸다.
“윽…! 젠장…!”
강동현이 입술을 떼며 상처를 움켜쥐었다. 황경호도 덩달아 놀라서 그를 살폈다.
“괜찮아요?”
강동현은 한 손으론 여전히 황경호의 허리를 잡은 채 그의 어깨쯤에 얼굴을 묻고 고통을 참다가 다시 고개를 들었다.
“괜찮으니까 다시 해.”
그리고 고개를 끌어당겨 자기가 먼저 입을 맞추었다. 병실 안에는 두 개의 숨소리와 열린 창문 밖에서 들려오는 차 소리, 점막이 마주치고 떨어지는 소리가 전부였다. 강동현은 한 손으로 황경호의 귓가를 감싸고 엄지로 그의 뺨과 귀를 매만졌다. 입술이 붙었다 떨어졌다. 강동현이 그 사이로 물었다.
“그 새끼랑도 키스했어?”
“아뇨. 키스는….”
그때 잠깐 눈이 마주쳤다. 말없이 바라보는 눈빛이… 순간 손끝까지 소름이 쫙 끼쳤다. 심장이 떨렸다. 눈을 피했다. 방심하면 이렇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결국에 이 남자는 사람들을 끌어당기는 매력이 있는 남자였다. 그가 가진 것들이란 그런 것들이었으니까.
강동현은 말없이 다시 입을 맞추었다. 몇 번이고 방향을 바꾸어가며 구석구석 핥았다. 황경호의 얼굴이 빨개졌다. 입술도 입안도 잔뜩 민감해지는 느낌이 부끄럽다. 게다가 강동현의 숨소리가 명백하게 거칠어져 가는 게 느껴졌다. 한참 황경호의 얼굴을 만지던 손이 셔츠 안으로 쑥 들어오고 허리에 있던 손이 아래로 내려가 그의 엉덩이를 쥐었다. 황경호가 깜짝 놀라서 입술을 떼었다.
“자, 잠깐만요. 여기 병원이잖아요. 사람들 오면….”
“문 잠갔잖아.”
“간호사들은 다 열쇠 있어요!”
“아, 몰라. 빨리 옷 벗어….”
강동현은 다시금 그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대었다. 이번에는 깨물었다. 그가 흥분하고 있는 게 느껴졌다. 그는 황경호의 바지를 내렸다. 그리고 자신의 무릎을 덮고 있는 담요를 치우고 그의 허리를 끌어당겼다. 황경호는 깜짝 놀라서 그의 상처에 닿지 않으려고 다리를 M자로 세우며 입술을 뗐다. 그대로 강동현은 그의 바지를 벗겼다. 황경호는 뒤로 넘어질 뻔해 강동현의 다리를 잡고 버텼다. 팬티를 반쯤 걸친 채로 엉덩이 사이를 훤히 강동현에게 보여주고 있었다. 황경호는 얼굴이 시뻘게져서 한 손으로 다리 사이를 가렸다.
“내가 준 팬티 안 입어?”
“그걸 어떻게 입어요! 그리고 버린 지가 언젠데!”
아직도 창문 밖은 석양으로 환했다. 강동현은 고무줄로 된 바지를 약간 내려 남성기만 꺼냈다. 황경호의 손을 잡고 그를 다시 끌어당겼다. 성기를 맞대어 만지기 시작했다. 다시 입을 맞추면서 엉덩이에 손가락을 넣었다. 그가 바들 떨면서 강동현에게 매달려왔다.
‘진짜 몸으로 때울 생각인가. 엄청 고분고분하네….’
강동현은 그렇게 부드럽게 키스할 때는 언제고 결국 황경호의 뺨을 깨물었다.
“흐응… 흑. 아. 아파요….”
여자친구와 할 때는 이렇게 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황경호와는 완전히 습관이 잘못 든 것이다. 깨문 곳을 살살 핥다가 다시 깨물었다. 진짜 아픈지 진저리를 친다. 엉덩이를 꼭꼭 조여온다. 온몸이 화끈해진다.
“너… 그 새끼랑 진짜 어디까지 했어?”
강동현이 물었다. 황경호는 겨우겨우 견디면서 얼굴을 새빨갛게 붉히고 있었다.
“뭐가요… 응, 하아… 응… 거기 만지지 마… 진짜… 이 변태가….”
“그 병신 새끼가… 빨아줬다며. 느꼈어?”
강동현은 뺨뿐만 아니라 귓불과 목과 어깨까지 같은 짓을 반복했다. 황경호는 아파하면서 대답했다.
“네….”
“뭐라고?!”
당연히 아니라고 할 줄 알았는데 황경호가 순순히 사실대로 말하자 깜짝 놀라서 소리를 질렀다가 상처를 붙잡았다. 황경호는 금방까지 깨물리던 부위를 손으로 가리며 왜 그러냐는 듯이 그를 쳐다보았다.
“너… 내가 처음에 할 때는 아예 서지도 않았으면서 걔는 한 번 만에 바로 느꼈다고? 그럼 너… 설마 하면서 사정했어?”
“네….”
황경호는 정말 아무렇지도 않게 사실대로 말했다. 강동현은 이를 꽉 깨물고는 황경호를 뚫어지라 보았다. 어쩔 수 없는 패배감과 분노, 그리고 질투가 온몸을 휩쓸었다.
“내가 그런 돼지한테….”
“네?”
“내가 몸만 다 나아봐…! 너 진짜 허리 나갈 정도로 박아버릴 거야!”
강동현은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는 소리쳤다.
[고쳐줄까?] 2부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