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남자는 돈, 명예, 얼굴. (2)
“…이 인간은 도대체 하고 많은 술집 중에서 왜 여기야?”
황경호가 짜증을 냈다. 가게에 들어오자마자 소파에 널브러져 있는 강동현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아마 우리 가게가 손님이 없어서 그런 거 아닐까나.”
이신현이 그렇게 대꾸했다. 황경호는 이제는 안 오겠지 싶어 가게를 갔다가 또 강동현을 발견해서 기분이 완전히 잡쳤다.
“강동현이 이번 달 우리 가게 매상 다 올려줬어.”
이신현이 덧붙였다. 황경호는 거의 정신을 잃은 그를 노려보다가 그냥 바 형태의 자리로 향했다.
“식사?”
“응. 알아서 해줘.”
일주일에 세 번은 여기 와서 식사를 해결했더니 정말 섭식의 수준이 한층 높아졌었다. 맛있는 걸 먹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진다. 아마 황경호의 우울증이 작년보다 좋아진 데는 김태형의 요리가 단단히 한몫을 했을 것이다. 황경호는 진지하게 요리를 배워볼까 하는 생각을 했다. 나중에 초록이한테 해주면 좋을 것 같다.
‘그나저나… 저 인간 뜨고 난 이후부터 거의 한 번도 안 쉬었지 않나? 벌써 한 달이나 저러는 거 같은데… 일은 때려친 거야, 뭐야?’
꼭 거슬리게 눈에 띄는데 와서 저러냐고. 아, 짜증 나. 황경호는 신경을 안 쓰려고 노력을 하며 오랜만에 반주를 걸치며 밥을 먹었다. 근데 황경호가 밥을 다 먹고 났을 때도 강동현은 황경호가 들어왔을 때 모습 그대로 널브러져 있었다. 김태형과 이신현이 걱정하기 시작했다.
“어제도 겨우 깨워서 보냈는데….”
“그러게요. 아, 연예인이라 진짜 경찰에 신고하기도 그렇고.”
김태형과 이신현이 황경호를 쳐다보았다. 황경호는 한숨을 푹 쉬었다.
“알았어. 택시나 불러줘.”
“고맙다, 경호야.”
‘이 인간 진짜 무겁단 말이다….’
황경호는 다른 사람들이 듣지 못하게 다시 한숨을 쉬었다. 며칠 전에 강동현이 집 앞에 잠깐 왔다 간 이후로 처음 본다. 그 스캔들 이후로 병원도 안 온다. 이제는 발기부전이 문제가 아니라 정말 저러다 사람을 잡을 지경으로 보인다.
“도대체 사랑이 뭐라고 이래….”
황경호는 사랑에 애태운 적이 없었기 때문에 이해도 공감도 잘 되지 않았다. 아니, 애당초 다른 인간이었으면 공감도 하고 이해도 되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강동현이다. 그렇게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인간이 피도 한 방울 안 섞인 다른 사람 때문에 이러는 게 못내 어색하고 이상하다. 다른 사람 같아 보인다.
‘하긴 저번 주엔 어울리지도 않게 사과나 하고 지랄했지.’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로 때울 수 있는 게 가해자들의 특권이라면, 정말 이 나라의 많은 사람들이 몽땅 다 가해자가 되려고 발버둥 치고 있는 것도 일견 이해가 된다. 가증스러울 뿐이다. 강동현도, 그런 많은 사람들도.
“에이, 7년이나 사귀었다는데. 힘들겠지.”
김태형이 그렇게 말했다.
“그럼 혼자서 끙끙대든가. 다른 사람들한테 폐는 끼치고 난리야.”
“그러니까 여기 술 마시러 오는 사람들이 있는 거지. 나 장사 공치라는 거냐.”
“이중적이야. 그렇게 안하무인이면서 자기 애인은 특별하다? 토 나와.”
너 진짜 강동현 싫어하는구나…. 김태형이 어쩐지 어린애를 보는 듯한 눈으로 웃었다.
“그게 사랑이지. 애인을 대하는 거랑 다른 사람들을 대하는 거랑 같으면 그게 사랑이냐.”
“사랑 따윈 필요 없고. 예의가 있어야 할 거 아냐?”
“다들 인생에 한 번씩은 사랑 때문에 슬프고 술 먹고 다른 사람들한테 진상도 부려보고 하는 거야. 그런 게 없으면 무슨 낙에 인생 살겠어.”
“형도 여자 타령해?”
그러니까 이놈의 직장이 말이다. 섹스에 미쳐서 돈을 갖다 붓는 남자들이 환자의 99%를 차지한단 말이다. 여자와의 섹스(뭐 가끔 남자와도)를 죽었다 깨어나도 포기 못 하는 인간들이 온다. 그 남자들이 연애니 섹스니 주구장창 가르쳐 드는 걸 듣다 보면 진력이 난다. 황경호가 봤을 땐 그 남자들은 상대방을 사랑하는 게 아니었다. 단지 상대방과 섹스할 수 있는 자신을 좋아하는 것뿐이다.
“너도 언젠가 알겠지.”
김태형은 그저 어른스러운 얼굴로 동문서답했다.
“택시 왔어, 형.”
가게 밖에 택시가 도착했다. 황경호는 강동현의 지갑을 털어 술값을 계산하고(거스름돈은 챙기라고 했다) 김태형, 이신현과 함께 강동현을 이고 지고 또 택시에다 태웠다.
“갈게, 형.”
“어, 그래.”
“삼성동이요.”
황경호는 택시에 올라탔다. 택시가 한창 가고 있는데 갑자기 강동현이 손을 잡아 왔다. 깜짝 놀라서 손을 뺐다.
“뭐야… 일어나 있었어요?”
그럼 지 발로 걷지. 안 그래도 무거운 놈이… 황경호가 질색인 얼굴로 쳐다보았다.
“나… 뭔가 잘못 산 걸까.”
강동현은 꽤 진지한 얼굴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누가 봤다면 초췌해 보이기 때문에 오히려 우수에 젖은 모습이라고 할지도 모르겠다.
“…그걸 말이라고 해요?”
황경호가 어이없어했다. 강동현은 말을 이었다.
“나름대로 열심히 산다고 살았는데….”
이걸 진짜 말이라고 한단 말인가. 그것도 황경호의 앞에서? 아무리 술을 처마셨다지만 대꾸를 안 할 수가 없었다.
“열심히 사시는 건 대단한데요. 그렇다고 다른 사람들한테 피해 주고 그러면 안 되는 건 상식 아니에요?”
목소리가 뾰족해진다. 술 취한 사람 상대하는 것만큼 의미 없는 짓도 없을 텐데.
“나 그렇게 다른 사람한테 피해 주고 살지 않았어.”
“뭐라구요?”
황경호가 화가 나서 그렇게 쏘아붙이자 강동현이 한숨을 쉬며 덧붙였다.
“너 말고.”
말문이 막힌다. 할 말이 없다. 강동현을 상대하면 항상 이렇다. 황경호는 강동현을 한 대 때리고 싶다는 생각을 멈추질 못하다가 말문을 다시 열었다.
“이제 그 가게에 오지 마세요.”
“왜.”
“불편해요.”
“니가 전세 냈냐.”
“저한테 잘못하셨다면서요. 저한테 미안하다면서요. 그럼 오지 마세요.”
강동현이 한숨을 깊이 쉬었다. 그 뒤론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황경호가 입을 열었다.
“이제 정신 드셨으면 저는 여기서 내릴게요.”
그리고 택시 기사한테 내려달라고 하려는데 이 인간이 또 손을 잡았다.
“내리지 마.”
“왜요? 정신 드셨으면 알아서 가세요.”
황경호는 손을 빼려고 했지만, 꽉 잡아서 빼지 못하게 했다.
“집 앞까지만 데려다줘.”
“제가 왜요?”
“몰라. 몸도 안 좋고 머리도 아파. 나중에 말하는 거 뭐든 해줄 테니까. 집까지만 데려다줘.”
“뭐든 해줄 수 있을 거 같으면 그냥 저 여기서 내릴게요.”
강동현이 짜증스러운 얼굴로 황경호의 손을 자기 이마에다 대었다.
“진짜 아파서 그런다, 아파서!”
“…….”
그의 얼굴은 뜨거웠다. 술을 먹었다고 쳐도 뜨거웠다. 황경호는 그래도 내리겠다고 하려고 했으나,
“거, 택시 안에서 싸우지 마시죠.”
택시 기사가 그렇게 언짢은 티를 내서 입을 다물게 되었다. 눈에 익은 고급 아파트의 앞에서 내렸다. 눈에 익은 게 더 짜증 난다. 황경호는 택시에서 내리자마자 인상을 팍 쓴 채로 지하철로 향했다. 손을 잡혔다.
“아! 진짜! 건드리지 마요! 이제 집 앞이잖아요!”
“야… 나 진짜 힘들어….”
강동현은 왼손으로 황경호의 왼손을 잡고 오른팔을 황경호의 어깨에다 걸쳤다.
“진짜 집 앞까지만… 응?”
거의 귓가에 대고 그렇게 속삭였다. 황경호는 강동현의 손을 뿌리치고 황급히 귀를 막았다. 그대로 강동현은 또 정신이 오락가락한 지 무릎이 자꾸 꺾였다. 황경호는 부글부글한 기분에 소리라도 지르고 싶었지만, 아직 길가에 다니는 사람이 많았다. 황경호는 속으로 욕지거리를 하면서 강동현을 질질 끌었다.
‘내가 이 인간이랑 또 엮이면 손에 장을 지진다, 장을 지져!’
황경호는 이를 갈면서 저번과 비슷한 루트로 강동현의 집 앞에 갔다. 이번에는 그냥 안에 넣어줄 것도 없이 밖에다 던져둘 생각이었다. 아직 여름이라서 안 죽을 것이다. 하지만 저번과 다르게 이번엔 묘하게 정신이 있어서 그가 스스로 문을 열고 황경호의 어깨를 꽉 쥔 채로 안으로 들어갔다. 어어, 하는 사이에 침실까지 끌려갔다.
“아, 잠깐… 아, 여긴 싫다고… 잠깐….”
황경호는 질질 끌려갔다가 결국 강동현의 무게에 못 이겨 강동현에게 깔리며 침대에 넘어졌다.
“…….”
황경호는 끓는 듯한 한숨을 깊이 내쉬었다.
‘전생에 내가 이 인간에게 큰 죄를 지었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일어나려는데 강동현이 어느새 손에 깍지를 껴오며 황경호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아, 진짜….”
도대체 이 인간은 정신을 못 차리면 꼭 지 여친이랑 같이 있다고 생각하는지 이런 짓을 해왔다. 황경호는 겨우 강동현의 얼굴을 손으로 밀치며 그를 떨구어냈다.
“무거워 죽는 줄 알았네.”
무릎과 허리가 지끈거린다. 안 그래도 무거운데 술까지 취하니 쌀을 몇 가마니 짊어진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렇게 현관에서 신발을 신고 밖으로 한시바삐 나가려는데,
띡띡띡띡. 삐리리릭.
갑자기 누가 현관문의 비밀번호를 눌렀다. 황경호가 어떻게 반응할 새도 없이 문이 벌컥 열렸다.
“우아악!”
“…….”
문을 열고 들어오던 사람은 예상치 못한 사람을 마주치자 깜짝 놀라 소리를 질렀다. 황경호도 똑같이 놀랐으나, 이쪽은 놀라서 오히려 소리를 못 질렀다.
“누… 누구세요?”
“아… 그게….”
현관의 불이 켜졌다. 여자는 황경호의 얼굴을 자세히 보았다.
“어… 저번에 그… 간호사…님?”
“아… 어… 넵….”
저번 사고 때 봤던 강동현의 여자친구 강영지였다. 황경호는 죄지은 것도 없이 쭈그러드는 기분이었다.
“여긴 어떻게 계세요?”
“아… 그게….”
“혹시 은혁이 아픈 거예요?”
“아… 그러니까….”
강영지는 집 안으로 황급히 들어왔다. 집에 별 상관도 없는 간호사까지 있으니 놀란 모양이었다. 그녀는 너무나 익숙하게 강동현의 침실까지 갔다가 잠시 뒤 돌아왔다. 황경호는 슬그머니 집 밖으로 나가려다가 잡혔다.
“아… 혹시 은혁이 집까지 데려다주신 거예요? 진짜 감사합니다. 어떻게 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강영지는 얼른 냉장고에서 마실 것을 꺼내왔다.
“아, 아닙니다. 그냥 가겠습니다.”
“아니에요. 쟤 무거워서 고생하셨을 텐데….”
“아뇨. 진짜….”
왜 자신이 죄지은 느낌을 받아야 하는 것일까. 원래도 아무 죄도 없는 누군가의 호의를 냉정하게 거절할 수 있는 타입의 사람은 아니었다. 게다가 이 말할 수 없는 죄책감이란… 황경호는 발을 질질 끌며 거실의 카우치에 앉았다.
“그때 사고 났을 때 뵀을 때도 좀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네, 네?”
마시던 걸 뿜을 뻔했다. 황경호는 입을 훔치며 강영지를 바라보았다.
“은혁이가 정말 친한 사람 아니고서야 그렇게 허물없게 대하는 애가 아닌데… 그냥 환자, 간호사 사이는 아니신 거 같더라구요. 지금 이렇게 같이 술 마신 거 봐도 그렇고.”
“아, 같이 마신 건 아니구요….”
‘근데… 헤어졌다는 여자친구가 이렇게 버젓이 집에 들어와? 저 인간은 도대체 왜 이 삽질을 하고 있는 거야?’
황경호가 캔 음료를 마시며 그렇게 생각했다. 잠깐 어색하게 침묵이 흘렀다. 황경호는 자기가 왜 여기에 있는 건지 점점 알 수가 없었다.
“저….”
그때 강영지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황경호는 자세를 바로 하여 대답했다.
“아, 네.”
“혹시 은혁이가… 무슨 말 안 하던가요? 오늘은 전화가 안 와서 혹시 무슨 사고라도 났나 싶어가지고….”
그래. 저 인간이 바로 술 먹고 전 여친한테 전화해서 진상부리는 전형적인 한국 남자였지… 오늘은 전화를 안 한 모양이었다. 그렇다고 이렇게 찾아오다니. 역시 이쪽도 미련이 남긴 하는 모양이었다.
‘하긴… 여자친구한테 잘하는 거 같던데.’
잘생기고 돈도 많고. 무엇보다도 7년이나 쌓은 인연이라는데. 황경호는 한숨을 쉬었다.
“그냥… 계속 술을 많이 드셔서 그런 걸 거예요. 제가 기억하기로만 한 달째 맨날 술 먹고 저렇게 뻗는 것 같던데. 아무리 건강해도 저러면….”
이렇게 말하다가 아차 하고 말을 바꾸었다.
“그게 아니라… 사실 저… 정말로 도은혁 환… 도은혁 씨랑은 잘 모르는 사이입니다. 아는 분 술집에서 술을 너무 많이 드시고 뻗으셔서 몇 번 데려다준 것뿐이에요.”
황경호가 그렇게 말하자 강영지가 눈을 크게 떴다가 민망한 듯 웃었다.
“아, 그러시구나. 전 진짜 친구인 줄 알았어요. 죄송합니다. 고생하셨어요.”
“아니에요….”
황경호는 마구 손사래를 치다가 결국 견디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전 이만 집에….”
황경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현관으로 갔다. 강영지가 인사를 했다.
“아, 네. 늦은 시간에 붙잡고 죄송합니다. 조심해서 가세요.”
“네. 안녕히 계세요.”
*
황경호는 일을 하다가 문득 생각했다.
‘아마 그 둘 다시 사귀는 거겠지.’
그냥 계속 잘 사귈 거면서 뭐하려고 그 지랄을 했대. 그 여자도 강동현이 걱정되니까 밤늦게 찾아온 것일 테다. 그와 친한 사람이라면 분명히 강동현의 몸을 망치는 생활상을 알고 있을 것이다. 애정이 있다면 반드시 걱정하겠지.
그리고 그 이후로 강동현은 병원에 오는 것은 같았지만, 그의 예약시간에 맞추어 황경호가 피해버렸기 때문에 서로 얼굴을 마주치는 일은 없었다. 일부러 황경호를 찾지 않는 걸 보면 저쪽도 단념한 모양이다. 김태형의 가게에도 오지 않았다.
“다시 사귀나 보다, 그치?”
김태형이 그렇게 말하자 이신현이 물었다.
“그냥 강동현이 완전히 마음 접은 거일 수도 있잖아요?”
“내 촉이 그래. 예전에 시사회 표 챙겨줄 때도 느꼈지만, 애가 아직 어린데 사회생활을 일찍 해서 그런지 경우도 좀 있고… 그 정도 되는 남자를 그렇게 쉽게 못 놓지.”
뭐… 모르는 사람은 그렇게 말할 수 있을지도…가 아니라, 아마 황경호가 아닌 모든 사람은 저렇게 말할 것이다. 황경호는 애당초 그런 사람들에게 강동현이 진짜론 얼마나 최악인지에 대해 말해본 적이 없었다. 안 믿을 것을 안다. 사람들은 믿고 싶은 것을 믿는 거지 사실을 바라는 것이 아니다.
이걸로 진짜 끝이겠지
지금 생각해보면 몇 번이나 술에 취해서 정신이 없었던 그 인간에게 복수라도 몇 번 하지 못한 게 살짝 걸리긴 한다. 에고가 강한 인간이라 공격력도 높지만, 방어력도 똑같이 높은 놈이었다. 평상시엔 상대도 제대로 되지 않는 이쪽이지만 술에 취해서 꼴은 놈한테 한 방 먹이지 못할 정도로 바보도 아니다.
‘아니다. 그냥 됐다. 더이상 엮이지 않는 것만으로도 충분해.’
[에어리어TV 설수현 리포터입니다. 오늘은 개봉 1개월 만에 벌써 3백만의 관객을 돌파한 영화 <해결사> 주인공분들을 모셔보았습니다. 박수로 맞이해주시죠.]
원래 연예인이라는 게 활동을 하지 않아도 재방송이나 VOD를 통해 접할 수 있는 존재라 한 달 정도의 외유는 티도 나지 않았다. 인터뷰나 새로운 프로모션에서 보이는 그는 전이랑 별반 다를 게 없이 멀끔했다.
어쩐지 물이라도 한 번 끼얹지 못한 게 또 살짝 후회가 되었다. 아니, 됐어, 됐어. 이제 그냥 예전으로 돌아가면 되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했는데.
“…….”
“초록이한테는 좋은 기회야.”
“경호 씨가 초록이한테 해준 거 전부 다 고맙고 너무 훌륭하다고 생각해. 경호 씨는 아직 어리고 또 가정도 없고 한데 아픈 애를 이런 식으로 계속 맡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좋은 가정이고 앞으로 초록이가 다시 아프더라도 충분히 서포트해줄 수 있을 만한 집이기도 해. 의지도 있고.”
황경호는 할 말을 잃었다.
초록이가 미국으로 입양을 가게 되었다.
“이번 주 내로 아마 미국에서 한 번 초록이를 보러 올 거야. 이미 얘기가 다 되었지만… 아마 이대로 간다면 한 달 정도면 끝나겠지.”
“…무슨 말인지 알겠습니다.”
고아원에서 황경호를 부르길래 무슨 일인가 했다. 솔직히 이래저래 많이 친해지고 서로 도왔지만, 황경호도 제대로 된 초록이의 보호자도 아니고 저쪽이랑 직접적으로 연관이 있을 만한 사이는 아니기 때문이었다. 황경호는 우연히 초록이를 알게 된 거였고 정이 든 것이지 고아원과는 큰 연이 있는 것은 아니니까.
원래 나이가 있는 아이들은 입양도 잘 안 된다고 들었는데 초록이의 이야기를 듣고 입양을 원하는 이들이 생겼다고 한다. 아이의 생명력에서 감동과 희망을 느끼는 나약한 어른들이 말이다.
아니지… 그들은 강한 어른들이니까 아직 아픈 아이를 자기 자식으로 받아들이겠다고 결정한 것이다. 나약한 것은 황경호다. 그가 그런 식으로 초록이를 생각하니까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보이는 것이다.
“오빠?”
초록이는 퇴원을 해서 이제 고아원에 있었다. 황경호는 결혼도 하지 않았을뿐더러 아픈 아이를 키울 수 있는 여건도 되지 않았고 설사 데려갈 수 있다 하더라도… 무서웠다. 그래서 단 한 번도 초록이를 입양하고 싶다는 의사조차도 내밀지 않았다. 그러니, 이런 결과는 당연한 것이겠지. 초록이는 너무나 훌륭하고 또 대단한 아이니까 말이다.
“초록이 보러 왔어?”
“응. 우리 초록이 보러 왔지.”
“오늘은 토요일 아니자나.”
“그냥 우리 초록이 보고 싶을 때마다 오려구. 초록이 뭐 먹고 싶은 건 없어?”
“아이스크림!”
병원을 나오니 아이는 먹고 싶은 것이 많아졌다. 군것질도 할 수 있게 되었다. 조금 있으면 이도 빠지겠지.
아이의 손을 잡고 밖으로 나갔다. 아이는 달릴 때는 약간 다리를 절지만 걷는 것은 크게 티가 나지 않았다. 초록이의 회복력에 덩달아 회복이 되었던 황경호였다. 황경호는 초록이를 안아 들었다.
“우리 또 놀러 갈까?”
“응! 어디?”
“우리 초록이 가고 싶은데.”
황경호는 눈물이 날 것 같아서 아이를 더 꼭 끌어안았다.
정말 예전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아무것도 없던 그때로.
*
“…….”
“어라? 강동현 씨? 오랜만이네요.”
술집 사장이 반갑게 인사를 했다. 강동현은 들고 온 선물을 건넸다.
“더 일찍 왔어야 했는데 죄송합니다. 조용하게 술 먹을 데가 여기밖에 생각이 안 나서… 여기 와서 신세 많이 졌습니다.”
고급스러운 무광택의 검은 종이봉투에 안에도 멋들어지게 포장이 되어 있는 선물세트였다.
“향신료랑 이것저것… 요리하시는 거 좋아하신다고 들어서요.”
“아, 감사합니다. 이런 것까지….”
“아닙니다.”
한동안 안 온다 싶어서 잘 해결이 되었던가 아니면 마음을 잘 접었나 보다, 라고 생각하고 있던 와중이었다. 이렇게 찾아와 인사를 하는 걸 보니 좋은 쪽으로 해결이 된 것 같은데? 이신현이 혼자서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여자라도 강동현이면 다시 돌아오지.
“어떻게… 식사라도 하셨어요? 뭐라도 드실래요?”
토요일 저녁 시간인데도 손님이라곤 하나밖에 없는 적적한 술집이었다. 강동현은 고개를 저었다.
“아뇨. 선물만 드리려고 온 거라….”
“잘 해결되셨나 봐요?”
이신현은 곧잘 강동현의 술주정도 들어줬던 터라 그렇게 물었다. 강동현은 그냥 웃었다.
“그럭저럭요.”
그렇게 대답을 한 강동현은 무슨 용건이 있는 듯 미적거리다가 한숨을 쉬었다. 그리곤 미간을 주무르며 물었다.
“그나저나 쟤는… 왜 저러고 있는 거예요?”
강동현은 결국 묻고 말았다. 황경호는 김태형이 요리를 하는 것이 바로 보이는 바(bar) 형태의 테이블에 술에 곯아서 처박혀 있었다.
“아….”
이신현과 김태형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게… 좀….”
“아, 어차피 강동현 씨도 알지 않나요? 전에 기부도 그렇게 하시고….”
“아, 그렇네.”
“네? 그 애… 초록인가, 걔 무슨 일 생겼어요?”
강동현이 깜짝 놀라 물었다. 죽었으면 죽었다고 연락이 올 텐데?
“그게 아니라… 그… 애가 미국으로 입양을 갔거든요. 저번 주에….”
“…….”
“입양 갈 부모도 다 만나보고 했는데… 말은 안 통하지만 좋은 사람들인 거 같더라구요. 잘 준비해서 보냈는데… 경호 입장에서는 마음이 안 상할 수가 없겠죠.”
“그래서 술 처먹고 이러고 다니는 겁니까?”
이 둘은 사이가 좋은 건지, 나쁜 건지… 강동현은 기분이 확 나빠진 것처럼 보였다. 본인도 연애 문제로 맘 상해서 술이란 술은 그렇게 먹고 다녔던 주제에 말이다.
“어휴, 그런 건 아니고… 오늘은 좀 많이 마시긴 했는데요. 그래도 평소엔 멀쩡하게 제 발로 돌아갈 정도만 마셔요. 오늘은 주말이라….”
“이러고 술 좀 깨면 집에 보내고 아니면 나중에 사장님 집에 데리고 가려구요.”
이신현이 거들었다. 강동현은 잠깐 생각을 하다가 갑자기 꼬치꼬치 묻기 시작했다.
“평소에는 멀쩡하다구요? 힘들다는 소리는 좀 해요? 애 보고 싶다든가, 아니면 애 얘기를 많이 한다든가.”
“네? 아뇨… 보통 초록이 얘기는 안 하죠. 그냥 평소 같아요. 병원에서 있었던 얘기하거나 축구 얘기하거나…. 요새는 술 안 마시던 앤데 마시니까 그것 때문이겠거니….”
“그렇게 걱정 안 하셔도 돼요. 진짜 경호 형이 강동현 씨 때보다 훨~씬 멀쩡해요. 애한테 좋은 일이라고 잘됐다고 그래서 웃으면서 잘 보내줬는데요, 뭐.”
이신현이 또 거들었다. 강동현은 점점 표정을 구겼다. 그리고는 품에서 지갑을 꺼냈다.
“이거 얼마에요?”
“네?”
“얘 마신 거요. 드리고 제가 데려갈게요.”
“경호 형 집 아세요?”
“네, 대충… 얘도 저 몇 번 데려다줬다면서요.”
강동현이 카드를 꺼내서 내밀자 잠깐 주저하던 이신현이 사장의 눈치를 보다가 결국 결제를 했다. 그동안 벌써 강동현은 대충 황경호를 들쳐멨다. 이신현이 건네주는 신용카드를 주머니에 찔러넣고 인사를 하고 가게를 나왔다. 앞에 대어놓은 차에 황경호를 실었다. 그렇게 뒷좌석에다 구겨 넣고 운전석에 앉았다. 시동을 걸어 차를 출발시키며 담배를 입에 물었다.
토요일 저녁이지만 어중간한 시간이라 그렇게 차가 막히진 않았다. 느림보처럼 기어가다가 곧 시원하게 뚫렸다. 담배를 하나 다 피우고 꽁초를 밖에 던지고는 하나 더 입에 물 때 전화가 왔다.
“어.”
[뭐하냐. 술 먹자.]
“술은 왜.”
[너 영지랑 헤어졌다며? 이 형님들이 다 위로를 해주려고 그러지. 지금 다 모였다. 너만 오면 돼.]
“오늘 말고.”
[뭐야. 빼지 말고 가자~]
“애교 부리지 마, 미친놈아. 토 나온다.”
[아, 왜.]
“선약 있어.”
[누구? 일? 요새는 그렇게 안 바쁘다며?]
“다시 바빠. 아, 그냥 끊어.”
[뭐야, 이 새끼. 맘 상하게 존나 짜증내네.]
그러자 뒤에서 누가 뭐라고 한다. 병신아, 여자랑 같이 있으니까 그러겠지.
[와, 역시. 강동현. 능력~ 어떤 여자야?]
“끊는다.”
강동현은 전화를 끊고 휴대폰을 조수석에다 던졌다. 다시 울리는데 안 받았다. 몇 번 와봤던 낙성대 낡은 빌라 앞으로 갔다. 들쳐메고 빌라 안까진 들어왔는데 몇 층에 몇 호인지도 모르겠다.
“야. 야. 너 몇 호야?”
강동현은 황경호를 흔들어 깨우려고 했다. 하지만 전혀 깨어날 기미가 안 보였다.
“아, 진짜 가지가지….”
본인이 술 취해서 진상 부린 것은 전혀 기억 못 한다는 눈치다. 강동현은 그렇게 욕을 지껄이다가 황경호의 얼굴을 노려보았다. 낡은 빌라 특유의 냄새. 축 늘어져서 눈을 감고 있는 소년 같은 이 간호사의 청결한 느낌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이렇게 가만히 상대의 얼굴을 보았던 적이 있었나.
있었지. 그때도 술에 골은 황경호를 강동현의 집 소파에다 재웠다. 자신의 그림자 밑으로 어둡게 그늘진 이 얼굴을 보고 있으니 어쩐지 말문이 막혔었다.
“…….”
그러다가 퍼뜩 정신을 차리고는 인상을 팍 구긴 채 그를 끌고 나와 다시 차에 탔다. 그리고 다시 운전을 하며 힐끗 백미러를 보았다. 백미러로는 옆으로 누워있는 간호사의 허리쯤이 보일 뿐이었다.
“일주일….”
일주일 전에 입양을 갔으니 그사이 댓 번은 마포대교 난간에 올라가 봤을지도 모른다. 신정에는 도착하자마자 정말 뛰어내리려고 해서 깜짝 놀랐다. 전처럼 주저하지도 않았다. 만약에 근래에도 그랬다면 아마, 강동현은 오늘에서야 그가 죽었다는 사실을 듣게 되었을 것이다. 모든 게 다 끝나고 나서야.
‘도대체 인생을 왜 이렇게 사는 거야? 좋은 일이잖아. 좋은 부모 나타나서 앞으로 잘 살 건데. 솔직히 누구는 못 보내서 못 가는 미국인데…. 진짜로 죽을 생각 또 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
강동현은 한숨을 쉬었다.
‘진짜… 일일이 성가신 놈.’
힘들면 힘들다고 얘기를 하던가. 죽고 싶다고 얘기하면 말려주기라도 할 거 아닌가. 살고 싶지 않았더라면 강동현이랑 그런 바보 같은 계약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진짜 살고 싶지 않았더라면 그 죽을 동 말 동 한 아기 따윈 신경도 못 썼을 것이다.
최대한 주변 사람들에게 숨기려고 하지만, 그게 바로 죽고 싶다는 신호라는 걸 강동현은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만약에 차라리 울고불고 그 아기 얘기만 죽창하고 지냈다고 한다면 오히려 이렇게 끼어들 생각도 하지 못했을 것 같다.
‘얘는 왜 이렇게 자기 자신을 싫어하는 걸까.’
*
잠에서 깨었다는 것을 느꼈다. 술에 잔뜩 취해 잠들었을 때의 그 느낌. 죽었다 살아난 것처럼 아무런 의식도 없는 곳에서 의식이 다시 살아나며 침대에 누워있는 스스로가 인지되는 순간 눈물이 주륵 나왔다. 왜 눈물이 나오는지 알 수 없었다. 한창 죽고 싶다고 생각했을 때도 이렇게 울어본 적은 없었는데 말이다. 요즘은 아침에 잠에서 깰 때마다 울었다. 왜인지 여전히 알 수 없다. 두 손으로 눈을 덮었다. 그렇게 흐느끼고 있었다.
“아침부터 무슨 청승이야….”
약간 쉰 듯한 굉장한 목소리다. 황경호는 깜짝 놀라서 옆을 돌아보았다. 거기엔 반라로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 자고 있는 미남자가 있었다. 황경호는 당황해서 그대로 강동현을 보다가 벌떡 일어났다. 주변을 휙 돌아보았다. 그렇게 볼 것도 없이 강동현의 방이었다.
어떻게 여기까지 오게 되었는지 생각해보았지만,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 저도 모르게 옷을 살폈지만 옷은 그대로였다. 황경호는 황급히 침대에서 벗어났다. 그리고 그대로 침실 문을 열고 나가 현관으로 갔다. 그러자 다시 침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나더니 인상을 잔뜩 찌푸린 강동현이 나왔다.
“무슨 말도 없이 가.”
“…….”
아직도 놀란 상태인지, 황경호는 한 번 그렇게 돌아보고는 현관문을 열었다. 띠리리리. 짧은 멜로디가 나오며 문이 열렸다. 그제야 강동현이 짜증이 가득한 한숨을 쉬며 빠르게 걸어가서 그의 손목을 잡았다.
“그렇게 가지 마. 도와주고도 짜증 나잖아.”
“…네. 감사합니다. 폐 끼치고 갑니다.”
기계적으로 그렇게 말하고는 다시 나가버렸다. 잡을 새도 없이 말이다. 강동현이 얼른 문을 다시 열고 살폈지만, 계단으로 내려가는지 발소리만 들렸다. 강동현은 그대로 팔짱을 낀 채로 기다렸다.
“어머! 깜짝이야!”
앞집 문이 열리더니 중년 여성 하나가 강동현을 발견하고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강동현이 자세를 풀고 인사를 했다.
“아, 죄송합니다. 누구 좀 기다린다고….”
“아, 네….”
앞집이라서 오다가다 마주친 적이 있어서 완전 초면은 아니지만, 상반신 누드를 보일 사이는 아니다. 그렇게 아주머니는 강동현을 잠깐씩 힐끗거리다가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갔고 1층에 도착한 그 엘리베이터를 타고 황경호가 다시 올라왔다. 열리자마자 강동현을 발견하고 똥 씹은 표정을 지었다. 멘탈이 좀 회복된 모양이었다.
“지갑이랑 휴대폰 주세요.”
“들어와. 씻고 가.”
“그냥 지갑이랑 휴대폰만 주세요.”
강동현은 그냥 집으로 들어갔다. 황경호는 욕지거리를 하며 따라 들어갔다. 강동현은 냉장고에서 차가운 생과일주스를 꺼내 잔에 따르지도 않고 꿀꺽꿀꺽 마셨다.
“술 냄새 장난 아니니까 씻어. 칫솔 새것 있으니까 알아서 쓰고.”
강동현은 손가락으로 욕실을 가리키더니 자기는 침실에 딸린 욕실로 들어갔다. 황경호는 그의 말을 무시하고 침실로 따라 들어가서 휴대폰이랑 지갑을 찾았다.
“아! 어디 있어요!”
“씻고 나면 줄게.”
“내가 여기서 뭘 씻어요!”
“아… 진짜 더럽게 말 안 듣는다….”
강동현은 황경호의 손목을 끌어 침실 욕실에다 넣었다. 그리고 서랍을 열어 옷도 대충 꺼내서 떠안겨 주었다.
“팬티는 새것이고 옷도 대충 입어. 칫솔 새것 있으니까 쓰고.”
“아, 또 왜 이러는데요?! 내 일에 신경 끄라고 내가 몇 번이나 말했는지 기억이나 하세요?!”
“너도 나 술 꼴았을 때 몇 번 데려다줬다며. 누가 도와 달랬냐.”
“그건…!”
니가 그 가게에서 지랄하니까 그렇지! 강동현은 한숨을 쉬었다.
“그냥 할 말 있어서 그런 거니까. 씻고나 나와.”
황망했다. 그러고 강동현은 다른 욕실로 가버렸다. 황경호는 욕을 하다가 결국 욕실로 들어갔다. 이 넓은 집을 다 찾을 자신도 없다.
좋은 아파트답게 욕실도 굉장히 좋았다. 욕조와 샤워부스가 분리되어 있고 천장에 달린 샤워기도 멋졌고 말이다. 다 벗고 뜨거운 물을 맞으며 있으니 기분 나쁘게도, 기분이 조금 나아졌다. 매일 좁아터진 원룸에서 샤워를 하는 것보다 훨씬 말이다. 이런 게 돈이구나, 싶으니….
‘초록이는 부모님도 생기고 형제들도 생겼으니까 훨씬 좋을 거야….’
문득 그런 생각이 따라 떠올랐다. 뜨거운 물로 오래 샤워를 했다. 상표도 알아보기 힘든 샤워용품으로 미적거리며 씻으며 한 번씩 한숨을 쉬다가 나왔다. 대충 뭔가 바르고 새 옷을 입었더니 진짜 기분이 좀 나아졌다.
‘하긴… 초록이 가고 나서 생활이….’
지금 황경호의 집은 엉망이었다. 짐도 별로 없어 더러워지기도 어려운 집인데 말이다. 한창 우울증에 걸렸을 때도 그렇게 엉망으로 해놓고 산 적은 없었다. 최근엔 거의 결벽증에 가까울 정도로 깨끗하게 하고 살았는데.
욕실 바로 앞에 스킨로션과 깨끗한 수건들이 비치되어 있는 연결 통로 같은 게 있었다. 그리고 거기에서 침실로 통하는 문이 따로 나 있었다. 목욕탕처럼 선반이 길게 설치되어 있었다. 그 위엔 커다란 통유리가 있었다. 그 거울 속에서 자신의 우울한 얼굴을 발견했다, 오랜만에. 원래 이렇게 생겼던가, 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 진짜 왜 이러냐….’
울컥 다시 눈물이 나왔다. 여기서 내가 뭐 하고 있는 거지. 요즘은 시도 때도 안 가리고 이랬다. 직장에서도 가끔씩 이유 없이 눈물이 나와서 일하기도 힘들 정도였다.
“야, 뭐하는데 이렇게 안 나….”
강동현도 씻었는지 어깨에 수건을 얹은 채로 문을 벌컥 열었다. 황경호는 황급히 수건에다 얼굴을 묻었다. 강동현은 피하는 그의 손을 잡아서 얼굴을 드러내게 했다.
“왜 울어.”
“아니에요.”
“나 또 뭐 잘못했어? 별거 한 거 없는데.”
“아니라니까요.”
눈물이 안 멈춘다. 본인의 의도와는 전혀 상관없이 수도꼭지 튼 것처럼 나왔다. 물에 젖어 촉촉한 얼굴에, 뜨거운 물로 씻었는지 몸이 발갛다. 거기다 이렇게 무해하게 우는 얼굴이라니. 강동현한테는 언제나 앙칼진 고양이 같던 간호사였다.
“…….”
강동현은 그런 황경호의 얼굴을 가만히 보고 있다가 손을 놓아주었다. 황경호는 얼른 수건으로 두 눈을 덮었다.
“조금만 있다가 나갈게요.”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가면을 바꿔쓴 것처럼 표정관리에 능숙한 그였다. 그런데도 이렇다니. 강동현은 저도 모르게 그를 끌어안았다.
“…뭐하는 거예요. 놔요.”
“아니….”
별생각이 있어 하는 건 아니었다. 언제나처럼 그는 떠오르는 대로 말을 이었다.
“뭐든 말해.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해줄 테니까.”
“놔요. 댁이랑 실랑이할 기분 아니에요.”
“진짜야. 어떻게 해줄까?”
황경호는 그냥 그를 밀어내려고 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놓지 않았다. 상대가 약하든 강하든 어떤 상황이든 빌어먹을 정도로 자기중심적인 남자다. 황경호는 이젠 정말로 이 인간과 실랑이를 할 기운이 없었다.
“그냥 저 좀 보내주세요… 댁만 없어도 전 훨씬 괜찮아요.”
“거짓말하지 마. 나 없었으면 넌 벌써 이 세상 사람 아니야.”
“그래요. 댁만 아니면 전 벌써 죽었겠죠. 그러면 다 깔끔했을 텐데.”
“좆 같은 소리 하지 마. 내가 죽었는데 세상이 깔끔하고 말고 무슨 소용이야. 그리고 너 죽으면 주변 사람들은 무슨 죄야? 그 가게 사장은? 병원 식구들은? 그 애는?”
“이제 초록이도 없어요… 다른 사람들한테 제가 그렇게 중요한 사람도 아니고.”
“그래서 지금 그 애 때문에 또 이 지랄 하는 거야? 그럼 애 다시 데려와. 니가 키우면 되잖아. 니가 입양해.”
그러자 황경호가 수건에서 눈을 떼고 고개를 들어 강동현을 노려보았다.
“그렇게 쉽게 말하지 마세요. 우리나라가 그렇게 애 키우기 만만한 나라인 줄 알아요? 아무런 연고도 없는 젊은 남자가 아픈 꼬마애 데리고 살 수 있는 나란 줄 아냐고.”
“그게 무슨 상관이야. 그렇게 너한테 중요하면 뭘 해서라도 지켜야지. 그래서 니가 걔 아빠가 되어주든 뭐가 되어주든 하면 될 거 아냐.”
강동현의 무신경한 말에 황경호가 눈물을 줄줄 흘리며 그의 어깨를 마구 쳤다.
“나 같은 거보다 훨씬 멀쩡한 가정에서 부모형제가 키워준다는데 내가 어떻게 거기서 내가 키운다고 그래! 말로 쉽다고 그냥 댁처럼 무대포로 살면 뭐든지 다 될 줄 알아?!”
“그렇다고 걱정만 하다가 아무것도 안 하면 그건 뭐 되는 인생이냐? 돈 때문이면 내가….”
단번에 뺨을 맞았다. 강동현도 화가 나서 황경호를 노려보았다.
“돈이면 뭐가 다 되는 줄 알아, 이 쓰레기야! 니가 돈이 많으면 얼마나 많다고 계속 돈 돈 거리고 지랄이야!!”
“이게 말이면 단 줄 아냐. 도와주겠다는 사람한테 무슨 짓이야?”
“놔! 이 개새끼야! 내가 대체 왜 너 같은 놈이랑 이렇게…!!”
“좀 진정해! 미친놈처럼 계속 이러지 말고!”
그러자 이쪽도 오기가 생겨 더더욱 놓지 않았다. 그대로 끌어안아서 씩씩거리는 상대의 호흡을 가슴으로 느꼈다. 한참 이쪽을 치고 난리를 피우다가 잠잠해졌다.
“…이제 놔요, 진짜.”
목소리가 아주 얌전해졌다. 눈물도 더이상 흘리지 않는다. 몸을 조금 떼니 강동현을 올려다보지 않고 시선을 옆으로 돌린 채 있는 그가 보인다.
“하고 싶은 말이 뭐예요?”
그가 물었다. 강동현은 그러게… 하고 생각하다가 도저히 떠오르지 않아서 대충 대답했다.
“다음에.”
“그래요. 그럼 이제 저 갈게요.”
또 이렇게 고분고분해진다. 강동현은 그의 얼굴을 잡아 자신의 정면을 향하도록 했다. 눈을 바라보진 않았지만 쳐내지도 않았다. 강동현은 다시 물었다.
“내가… 어떻게 해줄까?”
“필요 없어요. 용건 없으시다면서요. 저 이제 가도 되죠?”
강동현은 인상을 찌푸렸다.
“사람이 도와주겠다는데 계속….”
“도와주실 게 없으셔서 그래요. 말씀은 감사합니다만 제가 알아서 할 수 있어요. 저 좀 보내주세요.”
“금방은 내가 또… 좀 심하게 말한 거 같은데… 미안하….”
“괜찮습니다. 저도 똑같이 지랄했으니까 됐어요. 그것보다 저 좀 보내달라구요.”
“…….”
황경호는 강동현의 눈치를 살피더니 어조를 바꾸었다.
“아… 저 도은혁 환자님이랑 또 싸울 생각은 정말 하나도 없어요. 기분 나쁘신 거 있으셨다면 제가 사과할게요. 죄송합니다. 그냥 전 집에 가고 싶어서… 술도 많이 마셨고 그냥 집에서 쉬고 싶어서 그런 거니까… 제 지갑이랑 휴대폰만….”
황경호는 강동현의 비위에 맞춰 최대한 공손하게 말했다.
“제가 어떻게 할까요?”
강동현은 그런 황경호의 얼굴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황경호는 눈을 피하지 않았다. 강동현은 느린 어조로 대꾸했다.
“물건은 식탁 위에 있는데….”
“감사합니다.”
황경호는 곧바로 가려는 기색이었는데 강동현이 황경호의 손목을 놓은 채 안 놔주었다.
“키스하고 가.”
강동현이 어디 해보라는 듯이 그렇게 말했다. 황경호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그의 목에 두른 수건을 잡아당겨 짧게 입을 맞추고는 깜짝 놀란 강동현을 두고 나갔다. 곧바로 현관문이 열렸다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
“와. 너 있으니까 진짜 여자 많이 꼬이네.”
화장실에 가는 강동현을 따라와서는 친구가 그렇게 말했다.
“넌 누가 마음에 드냐? 난 시스루 셔츠 입은 애다. 건드리지 마라.”
“난 딱히… 니들 마음대로 해라.”
“뭘 딱히야. 니 옆에 앉은 애가 제일 예쁘더만.”
클럽이었다. 예전에 막 스무 살이 되었을 때나 군대에서 휴가를 나왔을 때 잠깐잠깐 춤추러 다녔던 적은 있었지만, 그것도 여자친구랑 대부분 같이 다닌 것이었고 이런 식으로 룸을 잡아서 여자까지 끼고 같이 노는 것은 처음이다.
“솔직히 죄책감 든다.”
강동현이 그렇게 말하자 진짜 이상한 소리 한다는 듯이 친구가 등을 팡팡 쳤다.
“뭔 개소리야. 영지가 일방적으로 찼다며?”
“너 전 여친이 한 달 만에 다른 남자 만났다고 그렇게 욕을 하더니만….”
강동현이 가증스럽다는 눈으로 친구를 보자 친구가 흥분해서 자신을 변호했다.
“아, 그거야… 여자랑 남자랑 같냐.”
“쓰레기.”
“와, 씨. 지도 여기까지 와놓고 욕하고 지랄이야.”
다시 자리로 가서 앉으니 밖의 요란스러운 음악 소리가 잦아들면서 좀 조용해졌다. 한 댓 명 정도의 남자와 그 정도의 여자들이 끼리끼리 앉아있었다. 남자고 여자고 다들 인물이 훤하다.
“이 오빠들은 자주 오는 거 같은데. 동현 오빠는 잘 안 오시나 봐요?”
옆에 앉은 여자애는 무슨 연예기획사 소속의 연습생이라는데 정말 누구 뺨치게 예쁘게 생겼다. 금방 어딘가라도 나오는 걸 볼 수 있을 것 같다.
“아… 뭐.”
“이 새끼 얼마 전에 여친한테 엄청 잔인하게 차였거든.”
술에 골은 친구가 그렇게 끼어들었다.
“난 진짜 얘네들 끝까지 결혼하는 줄 알았는데 이렇게 깨질 줄은 상상도 못 했다.”
“또 모른다. 나중에 되면 다시 만나서 결혼한다고 할지?”
강동현을 제외한 남자들끼리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자 여자가 흥미를 보이며 물었다.
“오래 사귀었나 봐요?”
다른 놈이 그대로 대신 대꾸를 했다.
“어, 거의 6년? 8년? 첫사랑인데 그만큼이나 사귄 거지. 이 새끼 와꾸가 아깝지 않냐?”
강동현이 술을 마시면서 고개를 저었다.
“영… 걔가 더 아까웠지. 일하고 나서는 잘 챙겨주지도 못했는데….”
그렇게 중얼거리듯 말하는데 다른 사람들, 특히 여자들이 강동현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음? 왜 그래? 얘기해. 얘기해. 우울한 내 얘기 좀 그만하고.”
그 뒤로는 자리에 앉은 모든 여자들이 강동현에게 급격한 관심을 보였다. 안 그래도 그 자리에서 제일 성공하고 제일 얼굴도 잘생겼기 때문에 계속 모두의 눈길을 받고 있었지만, 강동현은 이런 노골적인 시장에 내놓아진 게 처음이라 부담스러웠다.
남자 연예인들이 성매매 업종의 단골손님들이라는 것은 공공연한 사실이지만, 강동현은 전혀 그런 데 관심을 가져본 적도 없었다(물론 발기부전 때문에 딱 한 번 마스크 쓰고 도전해보려고 했으나 실패했다). 관심이 없는 게 아니라 솔직히 대놓고 싫어하는 축에 속했다.
어떤 남자랑 어떻게 했는지도 모를, 아니 대놓고 우리나라에서 제일 질 나쁜 새끼들을 순서대로 상대했을 여자들과 그런 것을 하기엔 강동현의 비위가 그렇게 좋지 못했다.
친구들이랑 친하다고 해봤자 어차피 인생 독고다이라고 하지 않는가. 데면데면하게 대해도 어렸을 때 친했던 놈들이나 다른 놈들이나 강동현을 허투루 대하는 놈들은 없었다. 예전에도 외모로 유명했고 지금은 아예 성공까지 했다. 오히려 그런 면이 좋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많으니. 성공이 참 좋은 것이다.
오랫동안 소중히 했던 사람을 이제부터는 만나지 못한다고 생각하니 아무리 둔감한 남자라도 마음이 허했다. 그러다 보니 이런 모임도 오랜만에 나온 것이다. 호기심 반 가지고 왔으나 역시나 맞지가 않다.
가치 있는 사람들만 상대해도 짧은 인생이다. 이런 애들이랑 어울리는 일도 거의 3~4년 만이었다. 어떤 면에서는 강동현도 강박적일 정도로 성실한 남자다.
‘뭘 안다고 여기서 사람을 만나냐….’
그냥 외모가 아름다운 사람이라면 연예계에 훨씬 많았다. 그리고 고맙게도 강동현은 지금 주가가 제일 높은 연예인이라 그런지 이래저래 연애 상대로도 꽤나 높은 점수를 받고 있는 모양이었다. 게다가 반응을 보아하니 마음만 먹는다면 이런 데서도 상대를 구하는 건 어렵지 않은 일인 것 같다.
‘잘 모르겠네. 나 앞으로 여자는 어떻게 만나냐. 영지는 어떻게 좋아하게 됐더라….’
전 여자친구가 첫 여자친구고 첫 상대였다. 그렇게 설렘이 들어 사랑한다고 느끼게 된 것은 그때가 처음이라 이제부터 모든 걸 처음부터 해야 한다는 게 낯설었다. 지금으로썬 어떤 여자를 보아도 무기질적이게 느껴졌다. 한 2시쯤 되어 결국 쌍쌍이 갈라지게 되었다. 강동현의 옆에 있던 여자와 강동현도 같이 나가게 되었는데 친구들을 다 보내고 나니 여자가 팔짱을 껴왔다.
“우린 어디 갈까, 오빠?”
“음….”
보통 이러면 진짜 모텔까지 바로 가는 거야, 아니면 술을 더 마시는 거야. 술만 더 마시는 거면 그냥 마실 수 있겠지만, 그 이상은… 클럽에서 그럭저럭한 남자를 만난 여자 같은 고민을 하는 강동현이었다. 그것보다도 굳이 이런 데 이런 시간을 써야 하나. 괜히 나왔다고 아까부터 후회했는데.
“여자친구랑 헤어지고 내가 술을 좀 많이 마셔서… 오늘은 좀 피곤하네.”
강동현은 그렇게 말하며 여자를 돌아보았다.
“저 마음에 안 들어요, 오빠?”
여자가 황당하다는 듯이 말했다. 그 정도의 자신을 가질 만한 여자였지만 강동현의 스타일이 아니었다. 애초에 강동현의 스타일은 전 여자친구에게 고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같은 사람이 아니고서야 맞출 수도 없을 것이다.
“꼭 그런 건 아닌데… 그냥 벌써 이러고 있다는 게 죄책감도 들고 그러네. 미안하다.”
“아니, 미안할 거까진 없는데….”
여자애는 잠깐 강동현을 보다가 휴대폰을 내밀었다.
“그럼 번호나 교환해요.”
만날 것 같진 않다만… 강동현은 순순히 휴대폰을 내밀었다. 그러고 대리를 불러 집에 왔다. 혼자 술 마시는 것보다 배는 피곤했다. 역시 괜히 갔다. 마사지나 받고 쉬면서 영화나 보는 게 훨씬 나았을 것이다.
베란다에 나가서 담배를 피우는데 문득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어, 안 자냐.”
[아… 이 미친놈이, 시간이 몇 신데….]
안 자고 있었던 모양이다. 시간이… 벌써 새벽 두 시 반이다.
“너 내일 출근 안 해?”
[남이사 출근을 하든 말든 댁이 무슨 상관이세요….]
비아냥거리는 목소리를 한껏 섞어 그렇게 말하는 간호사였다.
“아니… 나 여자친구랑 완전히 깨졌거든.”
[미친놈아, 안 물어봤어요.]
“생각해보니까 저번 주에 그거 말하려고 했는데… 니가 그렇게 가버리더라고.”
[그러니까 안 물어봤고 안 궁금합니다.]
“내가 술 먹고 진상 부릴 때 커버해줬다니까 말은 해줘야 할 것 같아서. 근데 니가 진짜 키스를 하고 가서….”
뭔가 느낌이 이상해서 휴대폰을 보니 통화가 이미 끊겨 있었다. 강동현은 짜증이 났다.
‘그러게 이 시간에 왜 얘한테 전화를 하냐….’
술이 문제다.
*
“응? 강동현 다시 오네?”
정기연 간호사가 누군가를 발견하고 그렇게 말했다. 황경호는 고개를 확 돌렸다. 그러자 무슨 데자뷰처럼 캡모자, 선글라스, 마스크를 차고 있는 훤칠한 남자가 보인다.
“아, 저 새끼는 여자친구랑 깨졌다면서 무슨 소용이 있다고 또 오는 거야.”
“뭐야, 여자친구랑 헤어졌대?”
“몰라.”
“아, 하긴…. 헤어질 만하다.”
“응?”
황경호는 고개를 다시 돌려 정기연을 보았다. 새침한 눈꼬리가 아주 매력적인 간호사는 뭘 보냐는 듯이 황경호의 시선을 되받아쳤다.
“여자친구 첫사랑에다가 7년이나 사귀었다는데… 자기도 왜 헤어지자고 하는지 모르겠다던데?”
“모르긴 뭘 몰라. 큭큭큭.”
정기연이 빵 터졌는지 그렇게 큭큭 웃었다.
“여자가 이유 없이 헤어지자거나 잠수 이별하는 이유는 딱 한 가지야.”
“어, 그래? 몰랐네. 뭔데?”
“모르긴 계속 뭘 모른대. 여기 있는 남자들 왜 있는 거 같아?”
“!”
‘아, 맞네. 그거 굉장히 중요한 건데…. 그래. 이혼 사유로도 들어가는 거지. 이게 7년 사랑도 꺼지게 만드는 거구나… 아무리 돈이 많은 남자도 안 되는 거구나… 아무리 잘생겨도 안 되는 거구나….’
“그러게…. 내가 왜 그 생각을 못 했지? 아, 저 병신. 큭큭큭. 그거 안 돼서 차인 것도 모르고 술을 그렇게 처마시고. 큭큭큭. 아, 고자 새끼. 큭큭큭. 아, 완전 쌤통.”
바로 얼마 전에 또 그렇게 저놈이 진상짓을 해서 그럴까. 아주 통쾌하다.
“어, 오빠. 쌤 나오신다.”
“풉. 큭… 푸흡.”
황경호는 오랜만에 아주 즐겁게 웃었다. 그래서 강동현의 발기부전을 위한 혈행 개선 치료를 하러 들어갔을 때도 무난하게 영업용 미소를 장착하고 들어갈 수 있었다.
“오랜만에 오셨네요.”
“왜 웃어. 기분 나쁘게.”
강동현은 대번에 그렇게 말했다. 황경호는 웃으면서 대꾸했다.
“금방 동료 간호사가 재밌는 얘기를 해줬거든요.”
이렇게 순순히 대화가 진행되는 게 이상하다고 느끼면서도 강동현은 물었다.
“뭔데.”
황경호가 웃으면서 대꾸했다.
“여자가 남자한테 이유를 설명하지 않는 일방적 이별을 통보하는 이유요.”
“…그게 뭔데?”
강동현이 뜸을 들였다가, 긴장한 어조로 물었다. 황경호는 웃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말을 이었다.
“서야 할 때 안 서는 남자한테 뭐라고 하나요… 그냥 잠수 이별이나 안 당하면 용한 거죠.”
“…….”
“큭큭큭. 아, 죽을 거 같아. 큭큭.”
결국 황경호는 웃음을 빵 터뜨렸다. 충격과 배신감, 자괴감, 수치스러움이 뒤섞인 강동현의 얼굴은 진짜 볼 만했다. 황경호는 자기 입으로 전하자마자 마사지기를 잡은 채로 엄청 웃었다. 그간 초록이 입양으로 굉장히 우울해하던 그였으나 원수 같은 놈한테 한 방 먹이니 그렇게 통쾌할 수가 없는 모양이다.
“큭큭… 아, 재밌다. 그러니까 좀 착하게 살아요. 사람이 그렇게 사니까 벌 받는 거라구요. 큭큭큭.”
“…그만 웃어라.”
“미안하다 어쩌고 할 때는 언제고 또 이렇게 사람 괴롭히러 오는 거 보면 도은혁 환자님도 참 사람 되긴 글렀네요. 그러니까 여친도 떠나지.”
아, 그건 고자라서… 황경호는 다시 키득거렸다. 강동현은 짜증이 엄청 난 얼굴로 이를 갈았다. 그간 당하고만 살더니 한 방 먹였다고 신났다, 신났어.
“역시 찔리니까 아무 말도 못 하겠죠?”
“…….”
발기부전 및 등등으로 치료를 받고 있는 상황에서 저 말에 반박을 해봤자 필패의 형국이다. 게다가 의식적으로는 부정하고 살았어도 무의식적으로는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인지, 스스로도 합리성을 피부로 느껴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지금 와서 보면 진짜 도은혁 환자님 여자친구 분이 대단하시네요. 되지도 않는 남자를 데리고 1년 반이나… 큭큭큭. 아휴, 아무리 돈 많고 잘생기면 뭐해요~”
“그만하라고.”
“싫은데.”
그간 엄청나게 싸워댔어도 황경호가 이렇게 일방적으로 강동현을 몰아붙인 것은 처음인 것 같다. 죽었다 깨도 지 잘난 놈이라 한 마디를 안 지던 놈이었다. 강동현은 부글부글한 얼굴로 그냥 황경호를 외면한 채 입을 다물고 있었다. 대꾸를 해봤자 더 불리할 것을 아는 것이다.
15분이 지나 마사지 기계가 종료음을 내며 끝났다. 환부를 닦아주고 황경호는 아주 후련한 얼굴로 말했다.
“끝났습니다. 다음에 또 오실 거죠?”
강동현은 그를 째려보고는 말없이 탈의실로 갔다. 이겼다. 황경호는 오랜만에 콧노래를 부르며 물건을 다 정리하고 밖으로 나갔다.
‘아, 진짜 십 년 묵은 체증이 내려가는 느낌이 이거구나. 저 새끼 이제 여기 근처는 얼씬도 안 하겠지. 큭큭.’
“저기요… 저 죄송한데 궁금한 게 있어서요.”
황경호가 내부 카운터 앞에 서있으니 심약해 보이는 젊은 남자 환자가 갑자기 말을 걸었다. 황경호는 밝은 얼굴로 응대했다.
“네. 무슨 일이시죠?”
“아니… 좀 있으면 선생님 뵙긴 할 텐데… 제가 그… 거기에 이상한 게 나서… 근데 인터넷에 검색을 해보니까….”
의사를 만나기 전의 불안함을 잊어버리고 싶은 환자가 그렇게 황경호를 붙잡고 하소연을 하기 시작했다. 황경호는 웃는 얼굴로 그를 응대했다. 하지만 아까의 유쾌통쾌한 상태에서 평상시의 상태로 기분이 전환되는 와중에 갑자기 가슴이 저릿하면서 눈가에 눈물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황경호는 깜짝 놀라서 뒷걸음질 쳤다.
“아, 죄송합니다, 환자님. 저… 김, 김 간호사, 여기 응대 좀 해주세요.”
“네? 네, 알겠습니다. 무슨 일이시죠, 환자님?”
김형세가 이상하게 보는 것을 얼굴을 돌려 피하며 얼굴을 푹 숙이고 화장실로 급하게 발걸음을 옮기다가 누군가와 퍽 하고 부딪쳤다.
“아, 죄송합니다.”
“뭐야? 똑바로 안 보고 다녀?”
웬 중년 환자였다. 최근부터 다니기 시작한 환자였다. 성격이 더러워서 담당한 간호사가 엄청나게 욕을 했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진짜 큰일 났다. 눈물이 안 멈췄다. 사람들이 쳐다본다. 그때 누군가가 손목을 끌어당겼다.
“아저씨나 비켜요. 길 막지 말고. 안 가요?”
강동현이 중년 아저씨의 어깨를 밀치고 황경호를 데리고 일단 엘리베이터 쪽으로 나왔다. 황경호는 한 손으로 아예 두 눈을 단단히 가린 채 대충 인사를 했다.
“감사합니다. 안녕히 가세요.”
“너 또 왜 이래?”
“아무것도 아니에요. 안녕히 가세요.”
황경호는 눈을 가린 채 엘리베이터 옆에 있는 화장실로 잽싸게 들어갔다. 그리고 제일 끝에 있는 칸으로 들어가 문을 잠그고 두 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아….”
‘왜 이래, 진짜.’
두 손을 모아 얼굴 앞에 합장을 하듯 하고 기대었다. 눈물이 쉴 새 없이 나왔다.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눈물이 나오는 사이사이 간혹 가슴이 저릿했다. 몸을 웅크렸다. 크게 숨을 들이쉬고 내쉬면서 빨리 가라앉히려고 노력했다. 누가 올까 봐 인기척도 최대한 내지 않았다. 숨소리도 할 수 있는 한 내지 않으려고 했다. 들키는 게 죽는 것보다 싫은 게 당연하다. 아무 생각도 하지 않으려고 했다. 생각을 하면 항상 뭔가 걷잡을 수 없어졌다.
그렇게 한 15분쯤 있었던 것 같다. 눈물이 잦아들었다. 황경호는 티슈로 얼굴을 닦고 코도 풀고는 한숨을 크게 한 번 쉬고 기분을 다시 다 잡았다. 그리고 휴대폰 화면으로 얼굴을 확인했다. 눈은 그렇게 빨갛지 않았다. 코는 좀 빨갰지만 괜찮았다. 다시 한번 마음을 가다듬고 변기 물을 내렸다. 문을 열고 나왔다. 그러자 바로 문 옆에 기대에 서있는 남자를 발견했다. 키는 멀대같이 큰 데다 선글라스에 마스크까지 낀 모습이었다. 깜짝 놀라서 소리를 지를 뻔했다.
“…안 가시고 뭐 하세요?”
“넌 뭐 하냐.”
“볼일 봤죠.”
황경호는 그를 지나쳐서 세면대로 가서 손을 씻었다.
“진짜 그 애 미국 가서 그런 거야?”
“다음에 뵙겠습니다. 조심히 가세요.”
“또 죽고 싶고 그래? 어?”
강동현은 그냥 화장실을 나가려는 황경호를 붙잡았다.
“안 그래요. 그리고 설사 그렇다고 하더라도 더 이상 그쪽한테 어떻게 해달라고 안 할 테니까 신경 안 쓰셔도 됩니다.”
“잠깐만, 야. 너 전에 우리 집에서도 이랬잖아. 맞지? 그러니까 병원 좀 가라니까.”
“네, 알겠습니다.”
황경호는 대충 대답하고 강동현을 뿌리치려고 했다. 강동현은 답답했다.
“아, 진짜. 도와주려는 거잖아.”
그렇게 말하자 강동현 쪽은 쳐다보려고도 안 하던 황경호가 픽 웃으며 그를 돌아보았다.
“댁이 절 돕긴 뭘 도와요. 기회 잡아서 한 번 또 빼려고 그러는 거겠죠.”
“그건…!”
털이 확 솟는 듯한 반발감에 뭐라고 소리칠 뻔했지만, 말이 목구멍에서 안 나왔다. 황경호는 자신의 손목을 잡은 그의 손을 밀어내며 말을 이었다.
“확실히 제가 바보천치에 병신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앞으로도 계속 당할 거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강동현은 아무 말도 못 했다. 황경호는 그대로 화장실을 나가려다가 멈춰섰다. 그리고 강동현을 돌아보곤 또박또박 말했다.
“그리고 난 세상에서 니가 제일 싫어. 끔찍해. 혐오스러워. 내 앞에 다시는 나타나지 마.”
그대로 황경호가 돌아섰다. 강동현은 선글라스와 마스크를 벗으며 다른 손으로 그의 손을 거칠게 잡아당겼다.
[우리 앞으로… 연락하지 말자.]
7년간 사귄 여자친구가 마지막으로 그렇게 말했을 때도 이렇게 화가 났나? 아니. 그때는 그저 씁쓸하고 슬펐다. 황경호가 강동현을 데려다줬던 그 날 밤 영지가 걱정이 되어 찾아왔을 때, 서로를 여전히 잊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결국 다시 잘해보기로 했다가 결국 한 달 만에 다시 깨졌다. 또 잡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다시 깨졌을 때는 그전처럼 완전히 망가질 수도 없었다. 한 번 그렇게 힘겹게 힘들어하고 나니 그때처럼 열정적으로 붙잡을 힘도 나지 않았었다. 물론 그전이나 그 후나 여자친구에게는 화를 낼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근데 이 간호사는… 화가 난다. 아니, 지금 왜 얘를 여자친구랑 비교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니가 좋아서 이러는 줄 알아, 이…! 나도 너 하는 거 보면 구질구질하고 짜증 나!”
“놔요.”
강동현은 황경호를 화장실의 출입구에 쾅 밀어붙이며 이글이글한 눈으로 노려보았다.
“내가 처음에 너한테 지랄한 거 나도 알아! 젠장…! 그래서 뭐!”
이기적인 남자란 어느 정도 자각을 해도 자신의 이기적임을 강요하는 걸 멈출 수 없다. 기본적으로 자신이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너도 나한테 미친 짓 해댔잖아! 너 말로만 내가 너 살려준 거 원망하지 사실은 속으로 안도하는 거 내가 모를 거 같아?!”
게다가 이쪽도 분명히 할 말이 있다. 강동현은 또 말없이 뿌리치려고만 하는 황경호의 목을 잡고 그의 머리를 거칠게 벽에 짓눌렀다.
“우리 둘 다 서로를 이용한 거야! 나도 너 이용하고 너도 나 이용하고! 그래, 내가 더 잘못한 거 많은 것도 알아! 근데 너라고 티끌만큼도 잘못한 거 없는 거 같아?! 근데, 제기랄, 혐오스럽다고? 끔찍하다고?! 너 혼자 깨끗한 척 굴지 마.”
“…….”
강동현은 화를 참지 못하고 씩씩거리며 황경호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는 미간을 찌푸리더니 목을 죈 손을 풀고 그의 두 손으로 황경호의 양어깨를 잡았다. 크게 한숨을 내쉬며 거친 숨을 누르려고 노력했다. 황경호의 얼굴 옆 벽에 머리를 대고 눈을 감았다.
“젠장… 왜 너랑은 항상… 이렇게….”
강동현은 답답하다는 듯 말을 이었다.
“난 지금 그냥… 니가 또 죽겠다고 할까 봐 걱정하는 거라고.”
답답하고 화가 난다. 젠장. 이유를 알 수 없는 것도 화가 난다. 이유가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전부, 모든 감정이 화로만 튀어나올 것 같다. 강동현은 그를 상대하다가 화병으로 실려 간 적도 있었다. 강동현은 끓어오르는 화를 가라앉히려고 무척 노력했다. 그리고 황경호는 그가 진정되기만을 가만히 기다리다가 입을 뗐다.
“…그래서 제가 왜 도은혁 환자님을 싫어하는지 모르겠다구요? 그래서 화를 내시는 거예요?”
“…….”
“저도 잘못한 거 있으니까 댁이 말하는 건 닥치고 들어야 해요? 전에 무슨 일이 있었든 오늘은 걱정하는 거니까 전 그 호의를 감사하게 받아야 하는 거구요? 호의인지도 모르겠는데?”
“…아냐.”
강동현은 황경호의 어깨를 놓았다. 선글라스를 끼며 다시 한번 한숨을 크게 쉬었다. 그리고 새카만 안경 너머로 황경호를 보았다. 그리고는 시선을 돌렸다. 잠깐의 정적이 흘렀다. 그는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다 큰 놈이 밖에서 질질 짜고 다니지 마라. 보기 안 좋으니까.”
“남 일이니까 신경 끄세요.”
“자살도 하지 마.”
그리고 강동현은 밖으로 나갔다. 황경호도 겨우 일로 돌아갈 수 있었다.
*
그 이후로 강동현은 바쁘기 때문인지 아니면 이제 진짜 차도 없는 치료를 그만두기로 마음먹은 것인지 병원에 오지 않았다. 황경호는 어쩐지 그럴 마음이 생기지 않아 김태형의 가게에도 가지 않았다. 사람을 만나고 싶지 않았다. 3주일 정도 되었다. 다시 평화와 안정이 찾아왔다.
그리고 황경호는 날이 갈수록 직장에서도 눈물을 쏟는 횟수가 많아져 갔다. 화장실로 뛰쳐들어가는 횟수가 많아졌다.
“…….”
해가 뜨기 직전, 여명이 밝아오며 새들이 지저귀기 시작한다. 황경호는 잠에서 깼다. 그리고 자신이 이 시간에 잠에 깨어났다는 걸 깨달으며 동시에 두려움이 몰려왔다. 잠들지 못하는 것보다 이 시간에 일어나는 게 무섭다. 피곤한데도 다시 잠들지 못하며 밝아오는 새벽에 저항하지 못하고 또다시 하루를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에 절망한다. 죽고 싶다는 생각이 가장 많이 드는 시간이다. 아니, 이 시간 깨어있을 때는 죽고 싶다는 생각 말고는 해본 적이 없는 것 같다.
눈물도 흐르지 않았다. 더 나약해진 것 같다. 전보다도 더. 정말 초록이가 미국에 가버렸기 때문일까. 그래서 다시 이렇게 죽고 싶어진 걸까. 가슴이 옥죄이고 불안하다. 그냥 죽고 싶다. 이 거지 같은 기분이 싫어서. 살기가 싫어서 죽고 싶다. 살아간다는 게 이런 기분을 안고 가는 거라면 죽는 것이야말로 축복이다.
도대체 난 뭐가 문제일까. 뭐가 문제라서 계속 이러는 걸까. 난 결국 여기서 벗어나지 못하는 걸까? 내가 뭘 잘못한 걸까.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왜 이렇게 내 삶은 가치가 없는 걸까. 누구는 그렇게나 사랑하는 삶이 나에게는 이렇게 고통일까. 무의미하게만 느껴질까. 나는 도대체 뭘까. 결국, 나는 죽어야만 하는 걸까.
진짜 초록이가 떠나서 그럴까. 아니면 그 병신새끼 때문일까. 병원일? 아니면 술을 안 먹어서? 내 가정사가 문제인가, 아니면 친구 관계나 인간관계가 원인인 걸까. 그 병신이 그때 그랬을 때는 그렇게 행동하면 안 됐었는데. 진짜 초록이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보내지마는 게 답이었을까. 술은 안 마셔도 가게는 갔어야 했는데 형도 걱정하겠지. 아니 내가 뭐라고. 아, 나는 왜 이렇게 제대로 하는 게 없을까.
내가 좀 더 정신을 차리고 살았더라면 그 고자 새끼한테 그런 일도 당하지 않았겠지. 좀 더 건실하게 살고 공부도 많이 했더라면 초록이를 도울 수 있는 방법도 많았을 거고 어떻게든 같이 있을 수 있는 방법을 찾을 수 있었을 것이다. 인간관계에 좀 더 능숙했더라면 모두 만족시킬 수 있었겠지. 그랬더라면 나도 나를 조금 더 마음에 들어 했을지도 모른다. 적어도 이렇지는 않았을 것이다.
왜 이런 건지, 뭘 잘못한 건지, 뭐가 잘못된 건지 끊임없이 생각하고 따져볼수록 스스로에 대한 불신만 커져간다. 아무것도 모르겠다. 자기 자신을 모르겠다. 어떤 것의 원인을 검증해보려고 해도 스스로도 납득이 안 가는 것이다. 그러다 보면 결국 결론이 ‘내가 못나서’로 끝난다. 그게 결국 사실이자 근본이니까. 남들에게서 원인을 찾는 것 자체가 비웃음당할 일이다.
황경호는 누운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고 거지 같은 기분만을 계속 곱씹으며 괴로워했다. 가위에 눌린 것도 아니다. 다만 무기력했다. 그래서 일어나서 물을 마시고 깊은숨을 들이마시며 그래도 괜찮다고, 그렇게 스스로를 다독이는 일조차도 할 수가 없었다. 황경호는 자신이 지금 할 수 있는 게 뭔지 찾을 수가 없었다. 지금 같아서는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무기력이 너무나 커서 손가락조차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불구가 된 게 아니다. 손가락을 움직여야겠다는 생각도 의지도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스스로에게 속박당한 채 계속 스스로를 돌아볼수록 더더욱 기분이 나빠지고 우울해진다. 결국엔 아무것도 없는 인생. 가슴이 옥죄인다. 정말로 이유를 모르겠다. 이렇게나 생각하고 또 생각하는데도. 이유를 안다면 고칠 것이고 그러면 이 거지 같은 기분을 다시 느낄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런데도 정말 모르겠다.
‘나는 어째서 이렇게나 구제 불능일까….’
모른다. 모른다. 아무것도 모른다. 아는 것이라곤 형편없는 자신뿐이다. 수치스러움이 마음을 좀먹는다. 똑같은 삶은 엿가락을 늘인 듯 의미 없이 반복하다가 결국 누구도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으로 죽을 것이다. 존재하는 것이 부끄럽다. 누군가 이런 나를 볼까 두렵다. 나약하고 비굴하고 패기 없고 멍청하고… 이런 내가 초록이를 제대로 책임지지 못하는 것은 당연했다. 이미 스스로도 책임지지 못하고 있다.
아… 정말 죽는 것이 답일까
죽고 싶다
아니, 살고 싶다.
하지만 어떻게 살아야 되는지 모르겠다. 누구도 어떻게 살아야지 행복해지는지, 아니 적어도 나를 죽이고 싶어지지 않는지 가르쳐주지 않았다. 이렇게 생각하자 수치스러움과 함께 억울해지기까지 했다. 그리고 그 억울함이 다시 수치스러움으로 돌아온다.
누가 가르쳐준다고 그렇게 살 수 있는 것도 아니면서. 다들 힐링이니 뭐니 TV에서 떠든다. 이렇게 살면, 혹은 저렇게 살면 괜찮다고 말한다. 말하는 건 쉽다. 나도 당장 다른 누군가 죽고 싶다고 하면 그럴듯하게 떠들 수 있다. 하지만 그래서 뭐? 아무도 이 거지 같은 기분에서 날 구원해주지 않는다.
[내가 처음에 너한테 지랄한 거 나도 알아! 젠장…! 그래서 뭐!]
그 인간은… 어째서 그렇게 생생한 걸까. 어떻게 그렇게 자기 자신을 온전히 위할 수 있는 걸까. 다른 사람들한테 피해를 끼쳐도, 스스로가 싫어질 만한 짓을 저질러도, 인생의 사랑과 헤어져도, 다른 사람에게 비아냥거림을 받고 증오를 받아도 어떻게 그렇게 강하지? 어떻게 그렇게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 걸까? 나 같은 사람은… 스스로에게서도 자신을 지키기가 이렇게나 벅차다.
황경호는 겨우 침대에서 굴러떨어져 자리에서 일어날 수 있었다. 그리고 침대에 기대어 멍하니 눈을 뜨고 앉았다. 주말이 이래서 싫었다. 오늘 하루 종일 뭘 해야 할지 모르겠다. 차라리 죽은 듯이 잠들 수만 있으면 좋을 텐데 잠이 오지 않았다. 황경호는 그렇게 아무것도 마시지도, 아무것도 먹지도 않고 멍청하게 그렇게 앉아있었다. 그렇게 해가 중천에 떴다가 다시 어느 정도 내려갈 때까지 누웠다가 앉았다가 그렇게 반복할 뿐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숨만 쉬며 바닥의 무늬만 쳐다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일어나서 깨끗하게 씻었다. 머리를 감고 몸과 얼굴을 씻었다. 머리를 말리고 옷을 입었다. 그리고 집을 나섰다. 걷다가 역을 발견해서 지하철을 탔다. 2번 정도 환승을 하고 이제는 몸에 익은 듯 자연스럽게 마포대교로 갔다. 여름 매미가 한창 울었다. 십수 년을 땅속에서 살다가 한 철을 울고 가는 매미.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천천히 마포대교 위를 걸어가는 동안 점점 해가 뉘엿뉘엿해진다. 한가운데 서서 서쪽을 바라본다. 해가 질 때의 한강은 예쁘다. 그래서 항상 이 시간에 여기 오는 것일지도 모른다. 어디쯤일까. 난간에 기대었다. 그렇게 해를 바라본다. 눈이 조금 아파서 물을 보고 하늘을 보기도 했다. 그렇게 덥진 않았다. 어젯밤에 잠깐 비가 왔다더니. 그렇게 한참을 있었다.
“으….”
다시 아침처럼 심장이 죄어왔다. 기분이 나빠진다. 수치스러움이 온몸을 좀먹는다. 괴롭다. 아무런 쓸모도 없고 아무런 의미도 없는 나. 어딘가에 머리를 처박고 스스로를 마구 때리고 싶어졌다. 이대로 강에 뛰어들어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사라질 수 있다면 좋을 텐데.
황경호는 난간에 이마를 꾹 누르고 괴로워하다가 문득 주머니에서 알림 진동이 나는 것을 느꼈다. 무시하려다가 꺼냈다. 메시지 자체는 흔한 광고 문자였다. 황경호는 난간 밖으로 뻗은 손으로 휴대폰을 잡고 그 화면을 가만히 보고 있었다. 모든 것이 그대로 강으로 떨어질 것만 같이 아슬아슬하다. 그런 자세로 한 손으로 휴대폰을 조작해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귀에다 대었다. 조금 연결음이 이어지다가 끊어졌다.
“…….”
[…….]
전화를 받은 것은 느껴졌으나 저쪽도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전화기 속에서 약간의 소란스러움이 들려온다. 황경호는 어쩐지 목이 메어서 입을 뻐끔거리다가 겨우 목소리를 냈다. 소름 끼치게도, 목소리는 스스로도 놀랄 정도로 떨리고 있었다.
“…나….”
[말해.]
어느 순간부터 몸도 떨리기 시작했다, 이 한여름에. 황경호는 스스로의 몸을 꽉 끌어안아 웅크리며 주저앉았다. 눈을 질끈 감고 난간의 다리에 머리를 기댔다. 쌩쌩 달리는 차들의 요란한 소리 속에서 들리지도 않을 정도로 작은 목소리였다.
“살고… 싶어….”
그렇게 황경호는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구원을 요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