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울프, VIP 사라졌는데 도대체 어디야? 너랑 같이 있는 거야? 야 이 새끼야, 대답해!>』
『…VIP님 덕분에 선량한 경호원 하나가 직장을 잃습니다.』
『아, 왜 그래~ 나중에 들어가서 내가 잘 말해줄게. 오늘만. 응?』
『VIP님은 ‘오늘만. 응?’하고 귀엽게 한 번 애교만 부리면 되지만 선량한 경호원은 직장을 잃습니다.』
『왜~ 너도 나랑 이렇게 나와서 좋잖아~』
『제가 담당이 아닐 때였으면 좋았겠지만, 이렇게 선량한 경호원은 직장을 잃습니다.』
『자기, 아~』
여자는 남자가 불평불만을 말하는 것에 더 대꾸를 하지 않으며 이국적인 길거리 음식을 하나 남자 입에 넣었다. 얼떨결에 받아먹은 남자는 뜨거워서 펄쩍 뛰었다.
『아, 뜨겁구나.』
『하다 하다 보디가드를 온도측정계로 쓰는 겁니까?』
『아, 맛있다.』
여자는 안하무인이고 그런 그녀를 지켜야 하는 남자는 어이없어하면서도 하나하나 시중을 들어준다.
“…….”
그렇~게 황경호를 괴롭히는 인간이 말이다. 아무리 드라마라지만 저렇게 절절매고 있으니 저절로 ‘아가씨 더 힘내서 저 새끼 얼굴에 기름을 부어버려요!’ 하고 속으로 외치게 된다.
강동현이 최근에 찍고 있는 드라마인가 보다. 아무 생각 없이 TV 채널을 돌리다가 하필 발견했다. 그간은 채널을 돌리다가 보이더라도 그냥 넘어갔는데 말이다.
그전 드라마는 아무래도 철이 없는 역할로 나왔다 보니 잘생기고 귀여운 연하남이란 느낌이었지만 이번은 말쑥하고 프로페셔널한 느낌이다. 몸이 좋으니 이런 역할이 꽤나 잘 어울리네. 아니면 이런저런 역할에 들어가도 잘 해내니 배우인 것일까. 하긴… 그렇게 성격이 안 좋은데 대중적 이미지는 ‘싹싹하고 매력 있다’지…
‘열불난다….’
『이전에는 무슨 일 했어?』
『대충 먹고 살았습니다.』
『그럼 앞으로 뭐 할 거야?』
『대충 먹고살 겁니다.』
『좋겠다.』
경호원은 아주 성의 없게 대답했으나 그에 대응하는 톱스타는 아주 천진한 말을 했다.
『나도 대충대충 살아보고 싶어.』
아름다운 야경을 보면서 그녀는 그렇게 말했다.
『우리나라, 너무 살기 힘들잖아. 특히 나 같은 여배우… 연애도 못 해, 잠잘 시간도 없이 스케쥴은 빡시지, 사람들은 루머에 왔다 갔다, 악플은 엄청나지, 같이 일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하면 날 뽑아먹을까 그 생각만 하지….』
그녀는 그러다가 경호원을 돌아보며 미소를 지었다.
『‘배부른 소리 하고 앉아있네.’ 그렇게 생각했지?』
『그렇게 생각 안 했어요. 연하 씨가 그런 생각하는 줄 몰랐다곤 생각했어요.』
그녀는 남자의 대답에 후후 웃었다.
『사실 아마 다른 일이나 내가 하고 싶은 걸 했더라도 우리나라는 힘들겠지. 너무 살기 힘든 나라야. 사람답게 살기가… 나도 이런데 다른 사람들은 더 힘들겠지.』
『다른 사람보다 덜하고 더한 건 없어요. 각자 힘든 건 힘든 거예요.』
『그런가… 그렇겠지?』
출국을 하기 전의 루머와 스캔들이 떠오른 걸까. 그녀의 아름다운 눈에 눈물이 어린다. 이렇게 아름다운 여자가 흘리는 눈물이란… 경호원은 당황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조용히 티슈를 건넸다.
『<몰래 프라이빗 행사를 펑크내고 도망 나온 톱스타와 경호원. 좋은 가십거리다. 그럼 어떤가. 다른 사람의 시선 따윈 더이상 신경 쓰고 싶지 않아.>』
우정인듯 로맨스인듯 아슬하게 줄타기를 하고 있었다. 황경호는 어느샌가 드라마 에피소드가 끝날 때까지 몰입해서 보다가 깜짝 놀랐다. 그리곤 살짝 기분이 나빠졌다.
뭐하자고 이 인간이 한 드라마를 보고 앉아있는 거야. 그렇게 TV 채널을 한참 돌다가 한 바퀴 돌고 오니 다음 편이 연달아서 재방송이 되고 있었다. 한참을 갈등하다가 결국 팍 인상을 쓰고 침대에 제대로 앉아 드라마를 다시 시청하기 시작했다.
인간 도은혁을 떠나 배우 강동현을 보자면, 황경호는 항상 그의 표현력을 마음에 들어 했었다. 대단한 연애도, 우정도 쌓아본 적이 없는데도 그의 몸짓이나 언어를 들으면 뭔가 맨살에 닿듯 전달이 되었다. 그가 가슴 아파하면 보는 사람도 가슴이 아프다. 행복해하면 행복하다. 많은 사람들은 그의 외모를 찬양하지만 사실 그 재능이야말로 찬사받아야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배우로서 말이다. 사람은 천 번 죽어 마땅할 놈이지.’
왜 저런 놈이 왜 그렇게 못돼 처먹었을까. 가정교육을 못 받은 거야, 뭐야? 아님 저렇게 재능이 있으니까 성격이 더러운 거야.
화면 안의 그는 조금 시니컬하지만 유머러스하고 가끔 웃을 때가 굉장히 매력적인 남자다. 게다가 한 번씩 그냥 기대고 싶을 정도로 ‘남자답다’. 남자가 남자다움을 상실한(정말이다. 그는 세계제일의 비뇨기과 병원에서 일한다) 한국에서 저 정도나 되는 남자가 있다는 게 놀라울 정도다.
역시, 저런 걸 보면… 부럽다. 그는 아무리 피곤해하고 아무리 찌질하고 변태같이 굴어도. 그가 원하는 곳, 그가 사랑하는 곳에선 그는 언제나 빛났다.
다른 사람 같으면 그의 표리가 다른 데 환멸을 느끼고 싫어했을 것이고 황경호는 그러해야 할 이유가 차고 넘쳤지만, 왜일까. 왜일까. 왜일까.
황경호는 아마도 강동현 같은 사람이 되고 싶은지 모른다. 복심을 숨기고 사람들에게 표리로 대하고 스스로를 부끄러워하는 사람이 아니라, 이기적이고 주변에 민폐를 끼치더라도 자기가 원하는 것을 강하게 추구하며 사는 삶.
그래서 강동현이 그렇게 싫은 건데도, 그렇기 때문에 부럽다. 다른 사람한테 민폐를 끼치고 저질 같이 구는 게 세상에서 제일 싫은데도 마음 한구석은 여전히 부럽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왜 저 남자는 항상 이렇게 나를 고민하게 만들까. 왜 나에 대해서 생각하게 만들지? 그저 악연일 뿐인데.
아마 그는 조금도 고민하지 않을 것이다.
“억울하네….”
황경호는 그가 TV 속에서 매력적으로 웃는 것을 보며 어쩐지, 또다시 뭔가 체념하는 기분이 들었다.
*
“어? 은혁아?”
본명을 부르는 소리에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다. 아마 강동현? 이라고 불렀더라면 뒤도 안 보고 아무것도 아닌 척 걸어가 버렸을 것이다.
“야, 너 또 이러고 다녀? 푸핫, 진짜 웃기다. 안 더워?”
여자친구였다. 압구정 한복판에서 이렇게 딱 마주칠 줄이야. 강동현은 깜짝 놀라 말을 잇지 못했다. 어찌 보면 팬과 마주치는 것보다도 더 심각한 시추에이션이었다.
“어… 어. 영지야, 여긴 어쩐 일로….”
“뭐긴. 학원 왔지. 아, 나 학원 이쪽으로 옮겼거든. 근데 넌 여기 어쩐 일? 촬영 있어?”
변장도 하고 있겠다, 여자친구는 냉큼 팔짱을 끼며 웃었다. 하도 다망하신 남자친구님이시다 보니 얼굴 한 번 제대로 보기도 힘들다. 아니, TV에서야 뻔질나게 나오고 있으니 엄밀하게 얼굴을 못 본다 말할 수는 없겠지만 이런 식으로 우연히 마주치는 것은 고등학교 때 이후로 처음이었다. 신기하고 기뻐서 다른 건 생각 안 하고 있었다.
강동현도 내심 긴장했다가 여자친구의 반응을 보고 살짝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강동현이 나온 건물에는 그다지 관심을 가지지 않은 모양이었다. 하긴 이 건물에 병원이 몇 개고 가게가 몇 개인가. 아무리 여자친구가 강동현의 상황에 대해 반쯤 눈치를 채긴 했다지만 그렇다고 병원을 다니는 걸 들키는 건 다른 일이다. 그랬다간 정말 재기불능이다…. 강동현은 다시금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어 쉬고 여자 친구의 손을 잡았다(강동현은 안에서 무엇을 하고 나왔는지 깜짝 놀라서 한 방에 까먹었다).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식사나 한번?”
“콜!”
여자친구는 어린애같이 웃으며 좋아했다. 순진하고 솔직한 데다가 사람을 잘 따르는 게 귀엽고 사랑스러워서 좋아하게 되었다. 오랜만에 여자친구를 만난 강동현도 기분이 좋아졌다.
“어디로 갈까? 오빠가 쏜다.”
“올, 음… 어디 가지? 아, 근데 잠깐만. 나 여기 커피숍 좀.”
“어? 왜?”
그래도 빨리 이곳에서 벗어날 것만 생각하고 있던 강동현은 의아해하며 물었다.
“엄마가 원두 사 오라고 했거든.”
“아, 그래?”
“너 저기 계단 있는데 들어가 있어. 사람들 많은 데 있으면 알아볼지도 모르잖아.”
“음… 알았어.”
하필이면 병원으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가 있는 곳이었다. 같은 상가건물은 아니었지만, 커피숍이 바로 옆이라 신경이 쓰였다. 게다가 커피숍에는 사람이 많았다. 강동현은 그래, 딱히 의심받는 것도 아닌데, 싶어서 안으로 들어갔다. 여자친구는 5분쯤 뒤에 나와서 헐레벌떡 강동현이 있는 곳으로 뛰어왔다. 폴짝 안기면서 웃었다.
“사 왔어.”
“엄마 심부름도 잘하고. 착하네, 우리 영지.”
“후후.”
그러면서 장난스럽게 뽀뽀를 하고 있었다. 그때 엘리베이터가 땡, 하고 도착했다. 여자친구가 입술을 얼른 뗐지만, 어차피 못 알아볼 것을 아는 강동현은 여자친구의 허리를 끌어당기며 장난을 쳤다. 이윽고 문이 열리며 안에 있는 사람이 강동현의 뒷모습을 보자마자 걸어나오며 불렀다.
“도은혁 환자님, 휴대포…….”
황경호는 손에 들고 있는 폰을 건네려다가 벙벙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두 쌍의 눈동자를 보고 곧바로 실수했다, 라고 생각하며 말을 멈추었다.
“…이 아니라 사람 잘못 봤습니다.”
“어? 은혁이 맞는데요? 그거 은혁이 핸드폰이죠?”
“아, 네….”
기껏 모른 척해줬더니만. 황경호는 결국 살살 웃으며 휴대폰을 여자에게 건네주었다. 그리고 슬그머니 빠지려고 했는데,
“근데 저기 잠깐만요.”
“예? 저요?”
황경호가 웃으면서 돌아봤다. 켕기는 건 아무것도 없는 것 같은 순진무구한 미소였다. 강동현은 너무 긴장해서 말도 못 하고 있었다. 이유인즉슨,
“은혁이가 환자라뇨? 은혁아, 너 아파?”
그 순간은 둘이 죽이 맞아 동시에 움찔했다. 황경호는 슬그머니 간호사 가운을 벗었다. 거기 가슴팍엔 <이강유 비뇨기과>라고 아주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금방 사이로 보지 않았기를 피차 간절히 바라는 바인데….
“아니, 아니야… 내가 아프기는 뭘….”
“그러고 보니까 니가 왜 압구정에 있는 거야? 촬영도 아니고, 이 낮에. 병원? 아팠으면 말을 했어야 할 거 아냐. 어디 아파? 저기요, 간호사시죠? 우리 은혁이 어디 아픈 거예요? 많이 아픈 거예요? 어디 다친 거예요?”
이럴 때 환자를 돕는 것이야말로 진정으로 몸과 마음을 구원하는 참된 의료인의 자세일 터. 황경호는 마음을 가다듬고 말을 골랐다.
“아, 저는 이 건물 5층에 있는 정형외과 간호산데요. 도은혁 환자님 촬영하시다가 발목을 살짝 삐끗하셨더라구요. 심한 건 아니고 가벼운 염좌인데 아무래도 계속 촬영 있으니까 불편하시다고 해서 진통제 처방해드린 것밖에 없어요.”
“그래요? 야, 언제 다친 건데? 많이 아파? 왜 말 안 했어?”
“아, 그게 얼마 안 돼서….”
어떻게 저렇게 입에 침도 안 바르고 거짓말을… 강동현은 황경호의 말에 맞추어 대답하며 혀를 내둘렀다. 하긴 익숙해서 그런 걸지도 모르겠다. 보통과도 아니고 비뇨기과 간호사니. 이런 일은 거의 없겠지만 이런 식으로 사람들과 마주쳤을 때 말이라도 잘못했다간 큰일 아니겠는가. 비밀엄수야말로 이 과의 가장 중요한 덕목 중 하나일 것이다.
“야, 어딘데? 붕대 감았어? 보자? 응? 보여줘 봐.”
“붕대 안 감았어. 별로 붓지도 않았고 그냥 좀 아파서….”
“보여주라니까~.”
이미 10층까지 올라간 엘리베이터를 기다렸다가 가는 것도, 그렇다고 4층까지 부러 걸어 올라가는 것도 이상할 것이다. 황경호는 마치 원래부터 그럴 작정이었다는 듯이 슬그머니 커플의 옆을 지나가며 인사했다.
“하하. 그럼 안녕히 가세요, 도은혁 환자님. 다음에 오시면 싸인 꼭 해주세요.”
그렇게 자연스럽게 말하며 지나갔다. 여자친구는 자기 남자가 다쳤다는 말에 안절부절못해 아예 쪼그리고 앉아 직접 강동현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있었다. 걷어 올리려는 여자와 막는 남자의 치열한 공방전(동갑내기 커플이라 이럴 땐 한 치도 물러서질 않았다) 끝에 강영지는 작심하고 끌어안고 있던 가방과 봉지를 옆으로 내던졌다.
“어?”
같은 남자로서 들키지 않았다는데 약간 안도감을 느끼며 밖에서 커피나 사 먹기 위해 주머니에 두 손을 넣고 뒤적거리던 황경호는 마침 발을 바꿔 내디딘 다리의 무릎 뒤에 강영지의 전공 책 3권에 원두커피, 화장품 등등까지 담긴 흉기 같은 가방이 퍽 하고 부딪쳤다.
팔에 가운까지 끼고 주머니에 손을 넣은 완전히 무방비한 상태로 있던 황경호는 진짜 누가 메다꽂는 것처럼 넘어지기 시작했다. 게다가 정확하게 머리를 박을 거라고 예상되는 저 문턱은 진짜 위험했다. 황경호는 이 모든 것이 마치 슬로우 모션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문득,
‘설마 이렇게 죽는 건 아니겠지? 아무리 나라도 이런 건 싫은데.’
라는 생각까지 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황경호는 다가올 충격에 대비해서 눈을 꼭 감았다.
“…?”
분명 넘어지긴 넘어졌는데…? 황경호는 다시 눈을 떴다. 황경호는 끙, 신음을 내며 몸을 일으켰다. 옛말 하나도 틀린 거 없다고, 진짜 주머니에 손 넣고 다니면 안 된다는 어른들의 말씀을 깊이 체감하며 살짝 어지러운 머리를 흔들었다.
“어머!! 괜찮으세요?”
“야!”
황경호는 자신의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잘 차려입은 양복의 목깃이 보였다. 누군가 밑에 깔린 모양이다, 라고 생각하며 감사 및 사죄의 인사를 할 겸 고개를 드는데,
“으악!! 선생님!!!”
황경호는 깜짝 놀라서 후다닥 그 위에서 내려왔다. 황경호가 워낙에 세게 넘어져서 부지불식간에 덮쳐진 사람도 같이 넘어졌다. 게다가 액운이 낀 건지 부딪친 남자는 손에 든 게 많아 조금이라도 몸을 보호할 수 있는 수단도 없었다. 엉덩이는 반쯤 턱에 걸치고 뒤로 넘어져 머리를 인도에 부딪쳤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다 쳐다보았다. 게다가 설상가상으로 아는 사람이다.
“선생님? 선생님?! 아, 어떡해. 선생님, 정신 차리세요!”
몸을 흔들어 정신을 차리게 하려다가 이강유가 머리를 박아 기절했다는 걸 깨닫고 어떻게 손을 해야 할지 모르겠는지 안절부절 이강유의 이마를 짚었다. 몸을 짚었다 했다.
농담 반 진담 반, 올해 자기가 삼재라서 몸조심해야 한다고 누차 강조하던 이강유였다. 그리고 올해의 일련의 사건에 따라 황경호도 깊이 동의했던 바이기도 했다. 그런데 또 이런 일이…!
“서, 서, 선생님! 피! 피…! 아, 어떡해, 우리 선생님 돌아가시면 어떡해.”
“야! 피는 니 손목에서 나는 거야!”
이강유가 들고 온 물건들 중에 각이 진 것들이 많아 넘어지면서 크게 긁힌 모양이었다. 황경호는 너무 당황해서 제대로 들리지도 않는 모양이었다. 들고 있던 가운으로 출혈도 없는 이강유의 머리를 지혈하러 하자 강동현이 다가와서 홱 황경호의 손목을 낚아챘다. 진짜 어디 잘못 찢기기라도 했는지 피가 철철 나고 있었다.
“은혁아, 여기!”
여자친구에게서 손수건을 받아 꾹 눌러 지혈했다. 그대로 손목을 머리 위로 들게 했다. 여자친구는 미안해서 어쩔 줄을 몰라 했다. 덜렁거려서 이것저것 흘리고 다니고 실수한 적도 많았지만 이런 대형사고는 처음이었을 것이다.
“도은혁 환자님, 폰 좀 빌려주세요….”
그제야 강동현이 보였는지 황경호는 강동현을 올려다보며 그렇게 말했다. 거의 울먹울먹하는 목소리와 표정에 강동현은 깜짝 놀랐다. 강동현이 굳어있는 사이 강영지가 냉큼 휴대폰을 건넸다.
“이거 쓰세요!”
한 손을 못 쓰는 황경호를 위해 다이얼을 띄운 채로 건네주자 황경호가 전화번호를 누르기 시작했다. 보니까 119는 아닌 것 같은데…
[이강유 비뇨기과입니다.]
여자 목소리였다. 목소리를 듣자 황경호가 눈물이 핑 돌았는지 눈가가 빨개지고 눈물이 그렁그렁해졌다.
“오 간호사님….”
때마침 받은 것이 간호사들 중에 최고참인 오 간호사였다.
[응? 경호니? 너 어디길래 병원으로 전화를 해?]
“오 간호사님, 큰일 났어요… 저 지금 병원 1층인데요. 이강유 선생님, 바닥에 머리 박으셔서 기절하셨어요. 저 어떻게 해야 할지…. 119 부르면 되나요? 머리 다친 것 같으면 함부로 만지면 안 되는 거죠? 아, 저 어떡해요… 오 간호사님….”
본인이 간호사면서 패닉에 빠져서는 횡설수설이다.
[뭐? 좀 있으면 오후 진료 환자들 오실 시간인데 기절을 하셨다고?!]
“그게 문제예요, 오 간호사님… 저 어떡해요….”
황경호가 우는 소리를 내며 말하자 오 간호사는 알았다며 전화를 끊었다. 황경호는 전화기를 여자에게 건네주었다. 황경호는 떨리는 한숨을 푹 내쉬며 이제 좀 주위를 살필 수 있게 되었는지 강동현을 올려다보았다.
“이제 됐어요. 제가 잡고 있을게요.”
표정이 좀 안 좋긴 했지만, 마음을 가다듬었는지 표정은 평소에 나타내는 범위 이내로 돌아왔다.
“…됐어. 지혈하려면 머리 위로 들고 있어야 하는 데 불편하잖아. 간호사면서 그것도 모르냐?”
“야, 너 말을 왜 그렇게 해. 안 그래도 미안한데….”
강영지가 강동현의 옆구리를 찌르며 말했다. 황경호는 입씨름할 기운도 없어서 다시 이강유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렇게 황경호가 이강유를 부여잡고 어디 큰일이 난 건 아닌가 살펴보고 또 살펴보고 있을 때 엘리베이터가 도착하며 안에서 우르르 사람이 나왔다.
“경호야!”
“오 간호사님! 여기요!”
오 간호사가 달려와서 이강유의 머리를 짚으며 상태를 살폈다. 김형세가 자연스럽게 강동현에게서 황경호의 손목을 건네받아 지혈했다. 강동현은 얼떨결에 황경호의 손목을 놓았다.
오 간호사는 마침 작은 손전등 같은 의료용 후레쉬를 가져와 거품 물고 쓰러진 이강유의 눈을 까뒤집고 동공반사를 확인했다.
“내려오면서 119에 연락했으니까 좀 있으면 앰뷸런스 올 거야. 크게 문제는 없을 것 같네. 아마 뇌진탕일 것 같은데…. 일단 큰 병원 가서 사진 찍어보자. 경호, 너도 어디 다쳤어?”
“으아… 손목 진짜 깊이 찢어졌는데요? 기워야겠어요.”
김형세가 피범벅이 된 손수건을 들추었다, 화급히 다시 막으며 그렇게 말했다.
“그럼 너는 경호 데리고 위로 올라가. 강 선생님한테 가서 기워달라고 해.”
“예.”
그렇게 김형세가 황경호를 일으키려고 하자 황경호가 기겁해서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저도 이강유 선생님 따라서 병원 갈래요. 가서 치료할게요.”
“안 아파?”
“괜찮아요.”
오 간호사는 기절한 이강유의 양복 깃을 꼭 쥐고 있는 황경호를 보고 고개를 절레절레 젓더니 뒤를 돌아보았다.
“음? 도은혁 환자님? 아… 괜찮으니까 이제 가셔도 돼요. 깜짝 놀라셨죠?”
오 간호사는 지레짐작으로 사고당한 이강유를 보고 깜짝 놀라 강동현이 자리를 뜨지 않는 것이라 생각한 모양이었다. 강영지가 쭈뼛쭈뼛 거리며 말했다.
“그게… 저 때문에 다치신 거라서….”
“네?”
“그게… 항상 조심한다고 하는데… 전공 책 세 개나 들어가 있는 가방이 위험한 건 아는데… 생각 없이 옆으로 던졌다가 이 간호사님이 맞으셔서… 앞에 이분도 같이 넘어지셔서….”
강영지가 우물쭈물 설명했다. 오 간호사는 짧게 한숨을 쉬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셨군요. 고의로 그러신 것도 아니고 괜찮습니다. 가셔도 됩니다. 다음에 병원에서 뵙겠습니다, 도은혁 환자님.”
“아니, 아니에요. 저 제대로 사과도 못 드렸는데….”
“지금 이강유 선생님은 정신이 없으시니 어쩔 수 없겠네요. 그리고 도은혁 환자님은 이렇게 소란한 곳에 계시면 안 되지 않으세요? 사과는 다음에 해주셔도 괜찮습니다. 분명히 선생님도 괜찮다고 하실 거예요.”
“그렇지만….”
강영지가 주저하면서 망설였다. 강동현이 입을 열었다.
“치료비 청구해주세요. 정말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사고니 누구 탓도 아닙니다.”
물론 부주의로 상해를 입혔으니 경범죄 정도는 될지도 모르겠지만 이강유가 그런 것 하나하나 따질 품성이 아니다. 강영지는 쪼그리고 앉아 정말 미안한 표정으로 두 손을 마주 쥐었다.
“정말 죄송해요, 간호사님. 많이 아프시죠?”
“아니에요. 괜찮아요. 저보다는 선생님이 큰일이시죠. 별일 아닌 것 같으니 괜찮습니다. 두 분 약속 있으셨던 것 아닌가요? 깜짝 놀라셨죠? 제가 부주의하게 있었던 탓도 있으니까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황경호는 웃는 얼굴로 그렇게 대꾸했다. 그러자 여자 친구의 얼굴이 좀 밝아져서 다시 사과의 인사를 하고 일어났다.
“그럼 가볼게요. 진짜 정말정말 죄송합니다.”
“예, 안녕히 가세요.”
그리고 서있는 강동현의 손목을 잡고 강영지가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으아, 깜짝 놀랬다. 그치?”
강영지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그렇게 말했다.
“좋은 사람들이라서 다행이다. 잘못했으면 정말 큰일 났을 수도 있겠다.”
강영지는 불안하고 놀랐던 만큼 이야기를 해서 털어버리고 싶은 모양이었다. 강동현은 잠자코 따라가다가 발걸음을 멈추었다.
“…내가 따라가 봐야겠어.”
“어? 왜?”
“원래 교통사고가 나도 진단 나올 때까지 끝까지 가봐야 아는 거야. 저러다가 만에 하나라도 잘못됐을 땐 어떡할 거야. 가봐야겠어.”
“어… 그럴 사람들로는 안 보이는데.”
“그건 모르는 거야. 먼저 가. 전화할게.”
마침 앰뷸런스가 오는 소리도 들렸다. 강동현은 다시 발걸음을 되돌려 간호사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갔다.
“아무래도 저는 따라가야 할 것 같습니다.”
“예? 안 그러셔도 되는데요….”
“혹시 모르니까요. 역시 이대로 그냥 가버리는 것도 예의가 아니다 싶구요.”
“어차피 앰뷸런스에는 두 사람밖에 못 타니까….”
“제 차로 따라가겠습니다. 어디 병원으로 가는지 전화 한 통만 주세요.”
그러면서 오 간호사의 폰에 전화번호를 남겼다. 잘생긴 남자 배우에게 번호를 따이게 된 오 간호사는 새삼 기분이 삼삼해져 그러시라고 승낙하고 말았다.
“그럼 형세 너는 올라가서 다른 애들한테 얘기하고 빨리 예약 환자분들에게 전화 돌려. 진료 오신 분들에게도 사정 설명하고.”
“예.”
오 간호사가 일어나서 김형세가 잡고 있던 황경호의 손목을 지혈하려 하자, 강동현이 마침 일어나 있는 김에 자기가 하겠다고 해서 그의 손목을 잡았다. 이미 손수건으로는 피를 다 못 빨아들여 손목을 타고 팔로 새빨간 피가 주륵 흘러내리자 강동현이 깜짝 놀라 지혈할 만한 다른 것을 찾을 때 앰뷸런스가 바로 앞에 도착했다.
“사건입니까, 사고입니까.”
“사고입니다. 넘어져서 뒤통수를 바닥에다 박았습니다. 의식은 없고 동공반사는 합니다. 한 번 더 확인해주세요.”
사람들이 내려 들것에다 이강유를 실어 차에다 태웠다.
“알겠습니다. 그럼 이쪽은?”
“일단은 손목만 찢어진 것 같은데 아마 둘 다 다른 타박상도 있을 것 같습니다.”
“알겠습니다. 누구누구 타실 겁니까?”
“저랑 이쪽만 탈 겁니다. 저분은 차로 따라오신다고 합니다.”
119대원이 황경호의 손목을 건네받아 상처를 살폈다. 그리고 오 간호사와 황경호가 차에 타고 그걸 보고 강동현은 지하로 내려가 차를 찾아 탔다.
“XX 병원….”
문자로 온 병원 이름을 보고 강동현이 차를 출발시켰다.
*
“어떻답니까?”
“이제 막 CT 찍으러 들어가셨어요.”
응급실에 들어가니 오 간호사가 보였다. 금방 따라온 거라 이제 막 침대에 앉은 것 같은 황경호에게 레지던트 의사가 하나 붙어 상처를 살피고 있었다.
“피는 좀 멎었나요?”
“예. 마취 놓습니다.”
지혈제가 도는지 피는 멎고 있었고 레지던트가 바늘과 실을 들어 상처 부위가 훤히 드러난 황경호의 팔을 깁기 시작했다. 역시 보고 있는 것은 비위 상하는지 황경호는 고개를 돌리고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 강동현이 물었다.
“안 아파?”
“아파요.”
“CT라는 거 결과는 언제 나오는데?”
“사오십 분 걸릴 거예요.”
“그래?”
강동현은 간이의자에 털썩 앉았다. 팔은 금방 기웠다. 소독하고 커다란 파스 비슷한 것을 붙이니 끝이었다. 치료를 마친 황경호는 기운이 없어 보였다.
“경호야, 괜찮니?”
오 간호사가 황경호의 이마를 짚고 얼굴을 들어보며 물었다.
“조금 피곤해요.”
“피도 꽤 흘렸지. 우유라도 마실래?”
“괜찮아요.”
“물이라도 마셔.”
“진짜 괜찮아요. 가만히 있고 싶어요.”
“그럼 누워.”
애가 많이 놀랐네, 하면서 오 간호사가 황경호를 침대에 눕힌 뒤, 촬영이 어떻게 되어가나 보러 갔다. 강동현이 물끄러미 황경호를 보다가 툭 말했다.
“…괜찮을 거야.”
황경호는 대답이 없었다. 그냥 눈을 감고 전등 불빛을 가리듯 팔을 눈 위에 올려두었다. 잠깐 그렇게 있다가 강동현에게 말했다.
“그냥 가세요. 저도 이제 괜찮아요.”
황경호는 강동현에게 그렇게 말했다. 강동현을 쭉 뻗은 다리를 꼬고 앉아 문자를 하고 있었다.
“됐어.”
“바쁘신 분이 뭐하러요. 가시라니까요.”
니가 있으면 없던 병도 생길 것 같다는 어투였지만 강동현은 문자를 하면서 심드렁하게 말했다.
“오늘은 시간 많아.”
“그럼 가서 쉬세요.”
“아~, 내 맘이야.”
강동현이 짜증을 냈다. 황경호는 정말 피곤해졌다. 그래서 그냥 입을 다물었다. 그대로 응급실의 소란만이 그 사이로 흘렀다. 30분쯤 그렇게 시간이 가자 오 간호사 돌아왔다.
“이강유 선생님, 입원하셨다. 깨어나셨어.”
“괜찮으세요?”
황경호가 벌떡 일어났다.
“가벼운 뇌진탕. 어지러워하시긴 하는데 괜찮으신 거 같아. 링겔 맞고 누워 계신다.”
“가봐요.”
“3124호. 난 수납 좀 하고 올라갈게.”
“네.”
황경호는 심각한 표정이 되어서는 얼른 엘리베이터로 걸음을 옮겼다.
“아… 이제 진짜 좀 가세요.”
황경호는 강동현이 따라오는 걸 깨닫고 그렇게 말했다.
“나도 인사하고 가야지. 내 여자친구 때문에 다치셨는데.”
왜 이럴 땐 또 예의를 차리냐… 황경호는 더 이상 생각하기도 싫다는 얼굴로 그냥 엘리베이터를 탔다. 사람도 우르르 탔다. 강동현은 선글라스와 마스크를 고쳐썼다.
“선생님, 괜찮으세요?”
황경호는 누워있는 이강유를 보더니 또 처음 보는 얼굴이 되어서는 쪼르르 침대 곁으로 다가갔다.
“어. 경호야… 넌 또 왜. 다쳤어?”
이강유는 누운 채로 황경호의 손목을 잡아서 보았다.
“기억 안 나세요? 제가 넘어져가지고….”
“아, 그래? 넌 많이 안 다쳤어?”
“네. 괜찮아요. 선생님은 머리 다치셔서….”
기껏 엄청 좋은 머리 타고 태어나셨는데… 황경호가 안절부절못하며 앉지도 일어서지도 못했다.
“죄송합니다. 제 친구가 잘못하다가… 병원비는 제가 내겠습니다.”
“어휴, 환자분까지….”
황경호만 보다가 멀찍이 서있는 강동현을 보지 못한 모양이었다. 이강유가 자리에서 일어나다가 머리를 잡았다. 황경호가 부축했다.
“병원비는 괜찮습니다. 보험처리 하면 되니까요. 그냥 사고니까 신경 쓰지 마세요. 여기까지 와주시고 정말 감사합니다.”
“…….”
이강유는 황경호의 어깨에 팔을 걸치고 있었다. 황경호는 그를 계속 걱정스럽게 살피고 있었다. 정말 어느 때, 누구를 보는 얼굴보다도 진심인 얼굴로. 강동현은 그런 그를 보면서 인상을 조금 썼다. 그리고 이강유를 물끄러미 보았다.
항상 생각하지만 이럴 때일수록 티가 나는 게 배운 사람인 것 같다. 배웠다는 게 단순히 명문대 명패나 석박사를 땄다는 증명보다도, 태어났을 때부터 접해온 사회, 문화, 언어, 사람이 다르다는 느낌이다.
천박하지가 않다.
이렇게나 천박한 사회에서 말이다.
“선생님, 다시 누우세요.”
황경호는 이강유를 다시 눕혔다. 자세를 바꾸는 동안이 제일 어지러운 모양이다.
“너 팔 흉 지는 거 아니냐.”
“좀 지면 어때요.”
“아, 물건들은 뭐 깨진 건 없냐? 그거 신 선생님이랑 같이 보기로 한 샘플인데.”
“무슨 샘플이요?”
“수술 도구 소독이 동시에 되는 포장지라고 하더라고. 겸사겸사 다른 것들도… 아, 머리야. 소독 후 감염 없어서 편하겠더라. 전에 의료기기 컨퍼런스 갔다가 연락해봤지.”
“좋네요. 안 비싸요?”
“그냥 포장지보단 비싸긴 한데….”
그렇게 둘은 금세 대화에 빠져들어 강동현을 ‘잊어’ 버렸다. 지금 한국에서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은 진짜 뻥 안 치고 하나도 없을 것이다. 강동현은 한참을 가만 둘을 보다가 타이밍을 보아 입을 열었다.
“둘 다 괜찮으신 거 같으니 가보도록 하겠습니다.”
“아, 네. 죄송합니다. 제가 정신이 없어서….”
이강유가 깜짝 놀라 그렇게 대답했다. 머리를 손으로 짚었다. 이런 실수는 안 하는 남잔데 확실히 아프니까 허둥지둥하는 게 보였다.
“안녕히 가세요. 병원에서 뵙겠습니다.”
“네….”
강동현은 선글라스와 마스크를 벗고 인사를 했다가 황경호를 보고 다시 선글라스를 꼈다.
*
[저번엔 고마워. 그리고 집에 보내준 것도 고맙고. 넌 보면 그런 거 진짜 잘 기억하더라. 내가 말한 거.]
여자친구가 지나가다 키우기 쉬운 화분 하나 사고 싶다고 했었다. 들은 지 이 주일 정도 됐다. 문득 기억나서 택배로 보냈더니 전화가 온다.
“뭐 그런 거 가지고. 기껏 남친 출세했는데 더 비싼 거 사달라고 하지도 않으니까.”
[그것도 쓰던 사람들이나 그러는 거지. 막상 닥치니까 딱히 그런 거 안 바라게 되더라… 저금이나 잘 해두면 나중에 좋겠다, 이런 생각만 했지.]
“뭐, 나중에 애 낳으면 쓰게?”
[어. 와, 그럼 우리 애는 금수저야.]
그렇게 여자친구와 시시껄렁한 전화를 했다. 공항을 가는 길이었다. 드라마 촬영은 다 끝났지만,드라마는 아직 방영 중이다. 중국의 사전제작 및 검열 문제로 미리미리 찍는데, 정말 죽는 줄 알았다. 그리고 현재 중국과 일본에서 굉장한 인기를 얻어 강동현은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말로만 듣던 한류스타가 되었으니 말이다.
옛날 같으면 굉장히 흥분하여 뜬눈으로 밤을 새우고 좋아했을 것이다. 담담한 기분인 건 엄청나게 노력을 해서 그런 걸까, 아니면 너무 피곤해서 그런 걸까. 좋긴 좋지만, 실감은 아직 잘 안 난다.
오늘 밤 중국 시상식에 참여하러 가게 되었다. 아직 방영 중인 한국 드라마 출연자 둘이 이렇게 가는 것도 이례적이다. 공항으로 가면서 전화통화를 계속했다.
[근데… 이제 너 더 바빠지겠다… 요즘 중국에서 울프 난리라던데.]
“왜? 싫어?”
[아니… 잘 나가니까 엄청 좋은데 너무 무리하는 거 같아서….]
“아직 괜찮아. 쇠도 씹어먹을 나이라는데.”
이제 고작 27살. 성공 가도를 달리기엔 너무나 어린 나이다. 강동현의 성숙한 외모 때문에 좀 더 들게 보일 수도 혹은 역할에 따라 어리게 보일 수도 있는 천생 배우 스타일이다.
[그러다 훅 간다, 진짜… 매니저 오빠도 너무 무리하지 말라고 하시고. 가끔 연예인들 차 사고 날 때마다 깜짝깜짝 놀라… 물론 아이돌만큼은 아니겠지만 너 보면 너무 스케쥴이….]
웬일로 걱정하는 소리가 줄줄 이어진다. 고등학교 때부터 사귀기 시작해서 6년. 햇수로 따지면 7년이다. 동갑내기라 싸우기도 많이 싸웠지만 언제나 서로가 없는 것이 이상할 정도로 잘 맞았다. 강동현의 안하무인인 성격이나 말버릇도 여자친구를 사귀면서 엄청 좋아진 것이었다.
친해지기는 고등학교 연극부에서부터 친해졌다. 자석에 이끌린 듯 서로 성격이 맞았다. 여자친구는 재미있고 가끔은 엉뚱하고 밝고 솔직했다. 그녀의 웃는 얼굴을 보는 게 좋았다. 사랑스럽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연애경험 없이 18년을 살았고 워낙 허물없이 친해서 잘 깨닫지 못하다가 졸업할 때쯤에 ‘아, 난 얘 없으면 안 되겠구나.’ 하고 깨달아 곧바로 고백했다. 여자친구는 기다리다가 지칠 뻔했다고 웃으며 답을 돌려주었다. 졸업을 하며 여자친구는 곧바로 꽤 좋은 대학교에, 강동현도 연극영화과가 유명한 대학교에 진학하게 되었다. 강동현이 자취를 하면서 거의 같이 살다시피 하곤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가 좋았는데.’
가만히 서로를 끌어안고 영화를 보곤 했다. 그땐 딱히 돈도 없을 때였지만 그저 손을 잡고 남들이 다 가보는 데이트 장소들을 예산 아껴가며 하나하나 다 다녀보았다. 즐거웠고 행복했다.
강동현은 꽤 자신의 노력에 자신이 있는 남자였기 때문에 무명생활에도 열성적으로 활동했다. 하지만 좋은 평가를 받으며 처음 데뷔를 했을 때 소속사 문제로 결국 그 기세를 타지 못했다. 그때 강동현은 너무 어린 나이였고, 노력을 많이 했기 때문에 좌절했다. 그래서 무작정 연기를 하지 않겠다고 결심하며 군대에 들어가 버렸다.
지금 생각해보면 무척이나 치기 어린 일이었다. 깜짝 놀란 여자친구가 자대배치 후 거의 매주 오며 강동현을 설득했다. 1년쯤 지나니 여자친구한테 너무나 미안해졌다. 스스로가 바보 같게도 느껴졌다. 그래서 다시금 마음을 다잡았다. 아마 이때 조금은 예전보단 철이 들었을지도 모른다. 그때 이후론 새로 지금의 소속사랑 계약을 하게 되어 활동하게 되었다. 소속사 사장이 강동현을 원래 눈여겨본 듯했다. 아이돌로 데뷔할 뻔도 했지만, 강동현은 뼛속까지 배우인지라 춤추고 노래하는 것은 그다지 흥미가 없어 무산되었다.
강동현은 인천공항으로 가는 길에서 가만히 바깥 풍경을 보며 차 시트에 누워 있었다. 피곤해서 바로 잠들 법도 한데 생각이 이어진다.
‘그나저나 걘….’
강동현이 인상을 찌푸렸다. 그를 마지막으로 본 것은 종합병원이었다. 그때 이후로 바빠서 병원을 못 갔다.
그는 항상 연상들이랑 더 허물없이 친하다는 느낌이 들긴 했는데(발기부전인 아저씨들이랑 겁나 친하다) 자기네 원장이랑도 그렇게 친할 줄은 몰랐다.
‘아니, 친하다기보단….’
바라보는 눈빛이 달랐다. 확실히 그건 다른 연상들을 보는 눈빛이랑도 다르다. 작위적이지가 않았다. 걱정하는 척을 하거나 예의를 차려서 그런 얼굴이 나오는 것이 아니다. 황경호는 표정의 특징이 정말 잘 드러나는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강동현은 그런데 전문가인 사람이다.
‘진심’으로 걱정하고 ‘진심’으로 안도했다. 상대가 말을 먼저 걸지 않더라도 선뜻 다가가는, 그 간호사로서는 이례적인 태도를 보이기도 했다. 그 아픈 꼬맹이랑은 다른 의미로 그에게 특별한 사람이라는 게 바로 느껴졌다.
‘무슨 사이야….’
“은혁아, 다 왔다. 일어나.”
매니저는 강동현이 잠들었다고 생각했는지 그렇게 말했다. 강동현은 상념을 끊고 바로 일어나 선글라스를 꼈다. 매니저와 함께 카트에다가 캐리어를 실었다. 그리고 허리를 펴고 차 앞에 다시 서자 기자들의 카메라 세례가 이어진다. 아마 ‘강동현 공항패션’, 혹은 ‘인천공항에서 강동현’라는 워딩을 쓰며 연예기사로 올라갈 것이다.
비행기에 올라탔을 땐 바로 잠들었다.
*
“자, 잠깐….”
수납을 하자마자 치료실로 들어오더니 의자에 앉기는커녕 바로 끌어안았다. 오랜만에 왔다 싶더니 이 인간이 보자마자 또 진상 짓이다.
“의자… 읍….”
사람이 불합리한 일에 익숙해질수록 체념이 빨라질 뿐이다. 스스로를 귀하게 여기지 않는 사람일수록 더욱 그렇다. 강동현은 눈을 떠 인상을 찌푸리며 자신을 견디고 있는 황경호를 바라보며 안을 느릿하게 핥아 올렸다. 잠깐 눈이 마주쳤다. 황경호는 현실을 외면하듯 다시 눈을 감아버렸다.
강동현은 황경호의 손을 끌어당겨 자신의 바지 안으로 집어넣었다. 그가 자신의 것을 잡자 낮게 신음을 흘리며 그를 더욱 벽에 밀어붙이듯 끌어안았다. 아픈지 인상을 더 찌푸린다. 강동현은 그의 표정을 보는 게 좋았다.
황경호가 손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살짝 차가운 듯한 손이 일단은 물렁물렁한 성기를 주무르기 시작한다. 강동현은 황경호의 귓가를 감싸며 다시 입을 맞추었다. 입술을 빨아들이고 혀를 빨아들여 거칠게 키스하자 견디다 못해 황경호는 그의 목을 손으로 잡아 밀어내며 기침을 콜록콜록했다.
“적당히 좀 해요… 콜록. 숨은 쉬게 해줘야 할 거 아니에요.”
사람은 불합리함에 익숙해지면 체념만 할 뿐이다. 강동현은 자신의 성기가 제대로 직립하며 제대로 그의 손길이 느껴지기 시작하자 황경호의 목을 물어뜯었다가 큭 하고 신음을 흘리며 얼굴을 묻었다.
“하윽… 큭….”
강동현은 황경호의 이마에 자신의 이마를 대고 누르다가 고개를 조금 떼고 그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위험할 정도로 충동이 들었다. 그의 허리를 끌어안은 손으로 그의 엉덩이 한쪽을 꽉 쥐었다.
“윽…! 뭐하는 거예요? 손 떼요.”
다른 손이 윗옷으로 들어가 그의 맨살을 쓸었다. 황경호는 예민하게 반응하며 싫어했다.
‘이대로 벗겨서 박으면 어떤 얼굴을 할까….’
그냥 머릿속에 그 생각밖에 안 들었다. 하지만 실행하지는 않았다. 그저 얼굴을 바라보았다. 바라보는 걸 느꼈는지 눈이 마주쳤다.
“…….”
“…….”
그대로 눈을 계속 마주치면서 바라보자 인상을 조금 쓰더니 눈을 돌렸다. 강동현은 진짜 너무나 괴롭히고 싶다고 생각했다. 눈을 못 돌리게 하고 싶다.
“이것보다 조금만 더 하면 안 될까? 응?”
강동현이 귀에다 나직하게 속삭였다. 그는 어지간히도 강동현의 목소리를 싫어했다. 소스라치게 놀라며 어깨를 좁혔다.
“뭘 더 해요? 이것도 한계예요.”
“조금만 더….”
숨을 내뱉으며 귀를 핥자 주먹으로 그의 어깨를 때렸다. 강동현은 씨익 웃었다.
“그동안 잘 지냈어?”
“댁만 없으면 잘 지내요.”
강동현은 황경호의 귀를 만지작거리며 그의 얼굴을 보고 있었다. 황경호는 어깨를 좁히며 그 손을 떨쳐내고 싶어 했다.
“가만히 있어… 그럴수록 더 괴롭히고 싶어진단 말이야.”
“아, 진짜. 성격 나쁜 것도 자랑이야.”
강동현이 짧게 웃었다가 다시 입을 맞추었다. 중국 갔다 오는 동안은 안 해서 오늘따라 엄청나게 느리다. 강동현은 상대방을 엄청나게 지분거리고 핥아댄 끝에야 사정할 수 있었다.
“윽… 하아… 하아… 윽….”
강동현은 완전히 정신을 못 차리며 황경호에게 기대었다.
“어어… 잠깐만요. 제대로…! 좀 서요…! 우앗….”
손에 그의 정액이 묻어서 제대로 부축을 할 수도 없었다. 결국 어어, 하는 사이에 강동현에게 깔려 주저앉았다. 잠든 것인지 기절한 것인지 이미 정신이 없다. 엄청나게 무겁다. 황경호의 품에 얼굴을 묻은 채 정신을 잃은 그의 머리카락에서 좋은 향기가 났다. 이렇게 피곤하면서도 관리를 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게 배우인가 보다.
“도은혁 환자님. 여보세요. 야.”
황경호는 잠시 어찌해야 할지 감이 안 잡혀 가만히 굳어있다가 낑낑거리며 손을 뻗어 바닥에 떨어진 티슈를 잡아 손을 닦았다. 그리고 강동현을 밀어내고 일단 손부터 씻었다. 그리고 다시 돌아왔다.
‘와, 이거 어떻게 해야 하냐….’
강동현은 완전히 정신을 잃었다. 황경호는 그의 어깨를 잡아 흔들었다.
“도은혁 환자님, 괜찮으세요?”
한참을 깨워도 안 된다. 황경호는 일단 대충 그에게 선글라스를 다시 씌우고 결국 밖의 사람을 불렀다.
“김 간호사.”
김형세가 문밖에 있다가 다가왔다.
“또 시간 더 걸렸잖아. 다음 환자 기다린다.”
“그게 아니라… 도은혁 환자 지금 쓰러졌어.”
“뭐?”
“입원실로 옮겨야 할 거 같은데 좀 도와줘라.”
아무래도 선글라스만으로는 도저히 강동현이라는 게 가려지지가 않아 마스크도 씌웠다. 그리고 둘이서 낑낑거리며 휠체어에다 실어 입원실로 데려가서 다시 낑낑거리며 침대 위에 눕혔다.
“와… 도은혁 환자 보기보다 엄청 무겁네.”
“영화랑 이번 드라마 때문에 몸 만들어서 그래.”
황경호가 그의 신발과 벨트를 벗겨 침대에 좀 더 편하게 누울 수 있도록 하며 말했다. 김형세가 눈을 깜박거렸다.
“잘 안다?”
“아, 뭐 일단은 오래 알았으니까….”
“하긴 둘이 친하지.”
“안 친해.”
황경호가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김형세는 호출을 받아 금방 나갔다. 일단 VIP 입원실로 옮겼다. 뭐, 돈도 많은 인간이니 상관없겠지. 마지막으로 선글라스랑 마스크를 벗기는데 갑자기 허리를 꽉 끌어안아 온다. 중심을 잃어 넘어질 뻔했다.
“잠깐만요…!”
그대로 끌어당겨 황경호를 옆에다 눕혔다. 황경호는 황당해서 눈을 깜박거리고만 있다가 한숨을 쉬며 그를 밀어내었다.
“그쪽 여자친구 아닙니다.”
전에도 한 번 착각한 적이 있다. 황경호는 정말 가지가지 하는 인간이다, 라고 생각하며 일어나려고 했다. 강동현은 더욱 그를 끌어안았다.
“알아… 황경호… 자고 가….”
이러고는 다시 곯아떨어졌다. 황경호는 황당해서 그의 얼굴을 한 번 보았다가 그를 떨어냈다.
“자고 가긴 뭘 자고 가, 이 미친놈이.”
황경호는 옷을 바로 잡고 병실 밖으로 나갔다.
*
“그래도 작년보다는 경호 형 좀 밝아진 거 같아. 초록이가 건강해져서 그런가.”
알바가 그렇게 말했다. 반주 겸해서 한잔하고 있던 황경호가 설마, 라는 얼굴로 되물었다.
“진짜?”
“어… 왜? 작년보다 올해가 더 힘들어?”
“말도 마.”
그렇게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가 멈추었다. 문득 올해는 마포대교에 한 번도 가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올초만 해도 정말 기분이….
명확한 원인이 규명되는 사건과 그렇지 않은 사건이 있다면, 차라리 명확하게 원망할 상대가 있는 것이 더 견디기 쉬운 것일지도 모른다. 성격상 자책이 전혀 없었다고는 말할 수 없겠지만, 결국엔 증오할 상대가 있음으로써 스스로에 대한 공격이 덜해진다.
‘차라리 그래도 작년엔 그 인간 엿이라도 엄청 먹였었는데….’
황경호 스스로도 굉장히 의아하다고 생각했다. 정말 작년만큼 우울감에 젖어 살지는 않는다… 그러다 다시 속으로 고개를 저었다. 초록이가 나아서 그렇겠지.
“경호 일이 원체 극한이잖냐. 올해라고 다르겠냐.”
그렇게 사장이 입을 떼자 황경호가 한숨을 팍 쉬며 말을 받았다.
“우리 병원이 괜히 돈을 더 주는 게 아니라니까. 진짜 거기 문제 있는 남자가 세상 남자들 중에 제일 질이 나쁘다고.”
그렇게 거시기 망가진 아저씨들을 부둥부둥 해주는 황경호였으나, 강동현 때문인지 전부 다 질려버려 여기 와서는 시원하게 환자 욕을 하는 황경호였다.
“거기 이만하게 만든 할아버지 어떻게 됐어?”
“예상대로 수술 중에 결국 돌아가시는 줄 알고 다들 식겁. 이강유 선생님 아니었으면 성공은커녕 바로 장례식장행이야.”
“그래서 잘 되신대?”
“별 탈 없으시니까 안 오시는 거겠지… 하지만 작년에 그 정도까진 아니지만 한… 이 정도로 수술한 할아버지는 많이 써먹지도 못하고 한 6개월 만에 지병 도져서 돌아가시고… 아, 2년 전에 어떤 아저씨는 하다가 복상사. 큭큭큭.”
“와, 진짜. 큭큭큭.”
이걸로 명 당기는 남자들이 너무 많아서 여자들보다 남자들이 평균수명이 짧은 거다. 그렇게 황경호가 서비스직 같은 전문직인 비뇨기과 간호사로서의 애환을 쏟아내자 이쪽도 서비스 직종 중 최고 난이도를 자랑하는 물장사의 애환을 털어놓는다.
“아, 우리는 전에 그 진상 손님 또 와서….”
“아, 그 새끼?”
황경호는 김태형의 호프집 의 단골이 되었다. 황경호가 병원에서 헌신하고 있는 서비스를 생각한다면, 황경호야말로 마음만 먹으면 남자들이란 남자는 다 후릴(?) 수 있을 만큼 사교성이 좋다. 김태형이나 이신현도 괜히 물장사를 하고 있는 건 아니라 사교성은 당연하고 둘 다 사람이 순박하고 좋다. 초록이 덕분에 연도 깊어졌다.
황경호는 개인적인 인간관계 자체를 이렇게 귀찮아질 정도로 깊이 사귀는 사람이 아니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정말 신기한 일이다. 작년까지만 해도 같이 있어도 멀리만 느껴졌던 사람들이 이렇게 가깝게 느껴지게 될 줄은 몰랐다. 결국, 사람과의 연이 문제였던 것일까. 황경호는 문득 돌이켜 그렇게 생각했다.
“작년은 진짜 길었던 거 같은데 올해는 빠르다. 벌써 여름이야.”
황경호가 중얼거렸다. 작년은… 너무나 많은 일들이 있었다. 우울, 강동현, 마포대교, 다이빙, 홍대 앞… 머릿속으로 휘리릭 지나가는 영상들이 칼라풀하다. 새삼, 그렇게 충격적이고 이상한 일들이 숨 쉬듯 일어나는 해도 없었다. 강동현 그 고자 새끼 때문에 정말 거지 같은 일도 엄청나게 많았지만, 우리 초록이 만났으니까.
“이러다 초록이 금방 학교 간다고 한다.”
“형은 애도 없고 장가도 안 갔으면서 그런 말 엄청 잘한단 말이야.”
경호가 피식 웃었다. 그렇게 황경호가 반주를 곁들여 식사를 하고 있는데 이신현과 김태형이 서로 눈치를 봤다.
“음… 경호야.”
“응? 왜, 형.”
“우리가 이걸 받았는데….”
김태형이 티켓 세 장을 꺼냈다. 황경호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게 뭐야?”
*
“최우수연기상! 강동현 씨, 축하드립니다!”
연주가 울리며 수상자가 호명되었다. 꽃다발이 오고 가며 배우 하나가 시상대로 올라갔다. 그는 수많은 꽃다발과 트로피를 받고 약간 상기된 얼굴로 수상 소감을 시작했다.
“작년 신인상에 이어… 올해 이렇게 큰 상을 받게 되어 정말 영광입니다. 약간… 얼떨떨하기도 하구요. 너무 기쁩니다. 이 상을 제가 받아도 될지 잘 모르겠습니다. 지금까지 부족한 데도 잘 이끌어주신 여러 감독님들, 이번에 <코드명: 울프>에서 많이 배운 설 감독님, 그리고 작년 <연애출사표> 신 감독님, 김수현 감독님, 안지성 감독님. 같이 연기한 많은 선후배 연기자분들, 우리 회사 매니저 형, 사장님… 그리고 누구보다도 사랑하는 팬분들… 모두 제가 이 자리에 있게 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강동현은 긴장했지만 기쁘단 얼굴로 그렇게 소감을 말했다. 김태형과 이신현은 카메라로 연신 밑에 앉아있는 수많은 배우들의 사진을 찍으며 연신 감탄했다.
“와… 진짜 예쁘다. 연예인들 이렇게 많이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이에요.”
“나도… 진짜 다르긴 다르구나. 강동현도 우리 술집 올 때랑 저렇게 하고 조명받으니까 또 엄청 다르다.”
“그러니까요. 저 형은 아무것도 안 해도 엄청 잘생겼는데 저러니까 진짜… 와… 와, 저기 임지현! 진짜 예쁘다… 와….”
이신현이 괜히 흥분해서 황경호의 팔을 쳤다. 황경호는 그저 허허… 하고 웃었다. 지금 셋은 OO 예술대제전 시상식에 와있었다.
황경호는 전혀 몰랐으나 강동현이 가끔 지인을 데리고 와서 김태형의 집에서 술을 마시고 한 모양이었다. 그는 지인들과 이야기를 해서 딱히 김태형이나 이신현과 얘기를 하거나 한 것은 아니지만, 어쩌다 시상식 티켓을 받았다고 한다. 딱히 연고도 없이 오려니 그래서 황경호를 끌고 왔다. 초록이 일 때문에 여러 가지로 신세를 많이 졌던 황경호는 거절하기가 힘들었다
‘진짜 인종이 다른 거 같다….’
황경호는 1층 테이블에 수두룩하게 앉아있는 연예인들을 보면서 그렇게 생각했다. 다들 아름다운 조각품처럼 하얗고 예쁘다. 미소를 짓는 얼굴들이 근사하다. 2층에 앉아있는 수많은 평범한 사람들과 비교해보면 정말 다른 세계와 다른 인종이다. 거기에 더 무서운 것은 저렇게 아름다운 사람들 사이에서도 명확하게 상하가 나뉘는 게 보인다는 것이다. 취향의 차는 분명 있을 수 있겠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는 아름다움의 우열. 황경호는 그 적나라한 우열을 지켜보고 있었다.
강동현이 꽃다발을 엄청 들고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사람들의 환호가 이어졌다. 지금 방영되고 있는 드라마가 중국과 일본에서도 인기다 보니 외국 사람들도 많이 보인다.
‘점점 더 이해가 안 되네… 저렇게 예쁜 여자들도 많은데 굳이….’
저도 모르게 강동현을 눈으로만 좇으며 그렇게 생각했다. 시상식이 끝나고 셋은 연예인들을 더 구경하다가(여자 연예인들에게 집중하여) 밖으로 나왔다.
“와… 오기 잘했다. 눈이 호강했네.”
제일 어린 이신현이 신나서 그렇게 말했다.
“티켓 감사하다고 연락 좀 해줘라. 우린 연락처는 없으니까.”
“다음에 가게 오면 직접 말해. 그게 더 좋지.”
황경호가 그렇게 말하며 건물을 돌아갔다. 지하철역 쪽으로 향하려다가 사람이 너무 많아서 잠깐 기다리고 있었다. 건물은 금세 한산해졌다. 누군가 담배를 피우고 있는지 담배 냄새가 난다.
“TV로 봤어? 나 상 받은 거? 어, 대박이지? 나 사진 보낸 것도 봤어? 응. 응. 하하. 고마워. 보고 싶다.”
목소리가 좀 상기되어 있었지만 멋있다. 황경호는 저도 모르게 휙 돌아보았다. 눈이 마주쳤다. 황경호는 살짝 후회하며 못 본 척 다시 고개를 돌렸다.
“뭐야… 너도 왔어?”
하지만 강동현 쪽에서 먼저 아는 척을 했다.
“어, 동현 씨.”
“아, 사장님. 오셨네요. 신현 씨도.”
“티켓 주셔서 이런 데도 와보고 진짜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전에 폐 끼친 것도 있고….”
김태형과 이신현도 강동현을 발견하고 인사를 했다. 티켓을 준 데 황경호가 모르는 뭔 이유가 있었던 모양이다. 황경호는 그냥 한 걸음쯤 떨어져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었다. 그러다가 강동현이 황경호를 보더니 미소를 지었다.
“나 상 탄 거 봤어?”
“네? 아… 뭐….”
기분이 굉장히 좋은 모양이다. 강동현은 담배를 한 대 피우려고 차에 타지 않았던 건지 바로 옆에 서있던 굉장히 큰 밴의 문을 곧장 열더니 꽃다발을 하나 꺼냈다. 그리고 무작정 황경호에게 안겨주었다. 딱 봐도 굉장히 비싼 꽃다발이었다. 굉장히 화려하고 꽃송이가 큰 꽃들이 예쁘게 꽂혀있는 꽃다발. 향기가 확 하고 후각을 적셨다.
“갑자기….”
“너 꽃 좋아하잖아. 간다.”
“아니, 잠깐만….”
강동현은 김태형과 이신현에게 인사를 하고는 밴에 탔다. 차가 출발하자 순식간에 주차장을 빠져나간다.
“너 진짜 강동현이랑 친하구나….”
김태형이 새삼 감탄해서 황경호를 쳐다보았다. 황경호는 인상을 찌푸렸다.
“절대 아니야.”
*
“…….”
“황경호 간호사는 오늘 외근이라 임시로 제가 담당하게 되었습니다.”
강동현은 저도 모르게 가운을 여몄다. 약간 인상을 썼다. 마사지 기계를 들고 있는 건장한 남자 간호사를 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그럼 다음에 받도록 하겠습니다.”
“네? 아… 그러시겠어요?”
간호사는 약간 당황한 듯하다가 금세 수긍하며 고개를 끄덕이며 강동현을 안내했다. 질문도 하지 않았다. 확실히 이 병원은 직원들 교육이 잘 되어 있었다.
하지만 강동현은 다음에 왔을 때도 황경호를 만날 수가 없었다. 세 번째 왔을 때는 드디어 치료를 하러 들어오긴 했지만, 떨떠름한 얼굴이었다.
“오늘은 좀 그래요….”
“왜?”
“좀 기분이… 다음에 해드릴게요.”
이런 식으로 말해서 일반적인 치료를 받고 넘어가고 말았다. 다음번에 왔을 때 또 외근이라는 말을 듣고서야 황경호가 묘하게 다시 강동현을 피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하여튼 거짓말하는 데는 선수라서 저번에도 비슷하게 속아 넘어간 적이 있으면서도 이제야 눈치를 챘다.
“…….”
“왜 이렇게 늦게 와.”
황경호는 그가 알아채면 화를 낼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딱히 화난 기색이 아니었다. 황경호가 살고 있는 오래된 빌라 앞이다. 강동현은 해가 지고 있는데도 선글라스를 끼고 있다가 황경호가 오니 선글라스를 벗으며 차에서 내렸다.
“무슨 일 있어? 왜 또 나 피해?”
“…….”
전부터 묘하게 느껴지던 것들이 있었다. 황경호는 그걸 말로 설명할 수가 없었다. 다만 그래서 더욱 강동현이 꺼림칙하게 느껴진다는 것뿐이다.
“…이제 그만두죠.”
“뭘?”
“병원에서 그런 거 하는 거요.”
“…….”
강동현은 인상을 썼다. 그리고 황경호에게로 다가왔다. 황경호는 주춤 뒷걸음질을 좀 쳤다. 강동현은 멈춰섰다.
“왜 그래, 또.”
강동현은 그제야 약간 짜증의 기색이 말투에 묻어나왔다. 황경호는 한 걸음 더 뒷걸음질을 쳤다.
“왠지 그쪽 여자친구 분한테 죄송해서 그래요.”
강동현이 뭐라고 하기 직전에 황경호가 빠르게 말했다.
“저번에 이강유 선생님 일로 마주치기도 했고… 어쨌든….”
“무슨 헛소리야. 너랑 나랑 지금 연애하냐?”
조금 위협적으로 다가와서 황경호는 출입문에 등을 딱 붙을 정도로 더 물러섰다. 강동현이 문을 손으로 짚었다. 아, 불편하다. 황경호는 한숨을 쉬었다.
“그렇다고 당당하게 여자친구 분한테 말씀드릴 수 있겠어요? 저랑 있었던 일.”
“…그래서 지금 협박하는 거야?”
“이게 어떻게 협박이에요.”
“말하겠다는 거 아냐.”
황경호는 한숨을 쉬었다.
“말 안 해요.”
강동현의 부담스러울 정도로 잘생긴 얼굴이 가까이에서 황경호를 내려다보았다. 황경호는 그의 얼굴을 똑바로 보지 않고 그의 어깨쯤을 보면서 말을 이었다.
“그냥… 이제 그만 해요.”
얼굴은 보이지 않는다. 젠장… 강동현이 작게 중얼거리는 게 들렸다. 황경호는 그대로 시선을 더 내려서 그가 험한 소리를 하기만을 기다렸다. 이번엔 그가 아무리 협박을 하더라도 눈 딱 감고 지나가겠다고 결심을 굳혔다. 설사 초록이를 걸고넘어지더라도 말이다.
강동현의 오른손이 올라오는 게 보였다. 황경호는 눈을 크게 뜬 채로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여전히 그를 올려다볼 수가 없었다.
그 순간 황경호는 자신이 그동안 이 남자를 얼마나 무서워하고 있었는지 깨달았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지금 이 순간도 이 남자가 어디까지 할 수 있는 인간인지 가늠이 가지 않는다. 그럼에도 분명히 그는 그가 원하는 것을 위해선 뭐든지 할 수 있는 남자다. 그것만은 알겠다. 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황경호를 짓밟을지 따윈 그의 안중에 없다는 사실도 말이다.
체력적인 차이나 그런 건 아무런 의미도 없다. 그런 것 따위보다, 의지의 차이다. 황경호는 스스로를 지킬 의지조차도, 그의 욕망에 항상 졌었다. 황경호가 평생 가졌던 의지 중에서 가장 강했던 의지, 죽고자 했던 마음도 얼마나 어이없게 가로막혔었던가. 다른 사람의 마음 따윈 안중에도 없는 사람이다. 그럴 수 있을 만큼 자아가 강한 사람을 황경호같이 삶의 의지가 약한 사람이 당해낼 수가 없는 건 어쩌면 처음부터 당연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더 이상은 싫어.’
결벽증도 없는데 손이랑 몸을 너무 많이 씻어서 피부가 아프다. 가만히 있다가도 때때로 수치심이 몰려온다. 왜 저 인간도 죄책감을 한 톨 가지지 않는데 황경호가 저 인간 여자친구란 사람한테 죄책감을 느껴야 하는지 모르겠다. 어차피 이 인간은 황경호를 착취하고 있을 뿐인데. 사생활에서도 황경호는 그를 피할 수가 없었다. 황경호는 TV와 미디어에서 쏟아지는 이 남자의 모습을 강제로 보아야만 했다. 이제 그냥 전부 싫다.
강동현의 오른손이 뺨에 닿았다. 소스라치게 놀라서 저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맞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동시에 차라리 맞는 게 낫지, 라고 생각했다. 몸이 긴장했다. 머릿속으로 온갖 상상이 다 들었다. 최악의 최악까지 말이다. 식은땀이 흘렀다.
강동현은 황경호의 뺨을 손으로 감싸고 입을 맞추었다. 황경호는 상상했던 것 중에 가장 최악의 것이 현실화되는 것 같아 무서웠다. 덜덜 떨고 있는 황경호의 입을 엄지로 벌리게 하고 그대로 안을 혀로 핥았다.
어느새 한 손으론 허리를 감싸고 다른 손은 얼굴을 감싼 채로.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가 빨아들였다. 혀가 다시 들어와서 상대의 혀를 진하게 핥아 올리고 섞었다. 입천장을 긁자 황경호가 몸을 떨었다. 그의 숨이 거칠어진다.
한참을 그렇게 키스를 하며 끌어안고 있다가 드디어 강동현이 입술을 떼었다. 황경호는 눈을 질끈 감은 채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강동현은 그대로 황경호를 두고 뒤돌아섰다. 선글라스를 다시 쓰며 차로 향했다. 차 문이 열렸다가 닫혔다. 곧 차가 출발했다.
*
“오빠, 오빠. 이거 봐.”
“응? 뭔데?”
정기연 간호사가 슬그머니 옆에 와서 휴대폰을 꺼내 보여주었다. 인터넷 기사다.
<단독 특종! 배우 강동현·임지현 열애!
드라마<코드명: 울프>가 한중일에서 인기리에 동시 방영을 끝낸 와중에 한중일 3국 광고계에서 최고 블루칩으로 떠오른 두 배우의 열애 사실이 알려져 큰 충격이다. 소식원에 따르면 두 사람은 드라마 촬영 중반부터 사귀기 시작하여 촬영장에서도 연인임을 숨기는 기색이 없어 공공연한 커플로 인정을 받아….>
“…….”
‘양다리? 아니 나도 거시기한 걸로 치자면….’
“하여튼 이 개쓰….”
…레기. 이강유가 옆을 지나가서 황경호는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병원에서 환자 욕은 금물이다.
“금방 기사 뜬 거 같은데 댓글 장난 아니야. 드라마에서 보니까 진짜 서로 눈빛 장난 아니던데. 이럴 줄 알았다, 와.”
이러고 있는데 탈의실 문을 벌컥 열고 강동현이 유달리 얼굴을 꽁꽁 싸맨 채 전화를 받으며 황급히 병원 밖으로 나갔다. 황경호랑 그렇고 그런 일은 어쨌든 그만두었지만, 치료는 받으러 온다.
“와. 기사 봤나 보다.”
“야, 조용히 해. 누구 듣는다.”
“아, 맞다.”
이제 저 남자가 강동현이라는 걸 모르는 병원 식구는 없지만, 환자들이 들으면 아주 곤란해질 것이다.
“이번에 중국에서 시청률 장난 아니었다던데. 거기도 이렇게 열애설 터졌으려나.”
정기연이 댓글까지 몇 번 보다가 쩝 하고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난 일하러 간다.”
“응. 수고.”
잠깐 병원 출입구를 보았다가 황경호도 일로 돌아갔다. 어쨌든 강동현은 오래된 여자친구가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저번에 사고로 황경호도 잠깐 봤었다. 경황이 원체 없어 얼굴은 잘 기억 안 나지만 꽤 예뻤던 것 같다. 서로 분위기도 좋았고 말이다.
임지현은 최근 강동현이 출연한 드라마에서 함께한 여자 배우로, 한국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드는 미녀가 누구냐고 물으면 백에 백 임지현은 꼭 넣을 거라는 평을 듣는 대단한 미녀 연예인이었다. 28세로 강동현보다는 1살 많았다. 둘 다 그림으로 그린 듯한 미녀에 미남인 배우들이라 드라마를 보는 눈이 즐겁다는 평이 많았다. 스토리도 너무 힘이 들어간 국가 간 합작 드라마 느낌도 나지 않아 재밌었고 배우들의 연기도 좋았다. 임지현은 연기가 출중하다는 평은 지금까지 못 들었었는데 이번엔 제 옷을 찾아 입었다는 평을 많이 들었다.
그렇게 아름다운 여자가 옆에 있다면 당연히 눈이 돌아가는 걸까? 소중한 사람을 배신하는 일이 되더라도 말이다. 더 괜찮은 여자가 옆에 있다는 것만으로 지금까지 소중했다는 사실은 아무것도 아닌 게 되는 것일까. 그 정도의 감정에 사랑이라 이름 붙일 것 같으면 사실 사랑이란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목맬 만큼 대단한 것은 아닌 것 같다.
하긴… 바람피운다 하기엔 그렇지만 이미 황경호랑 있었던 일도 누구 앞에서 말할 수 있을 만한 내용도 아니다. 그냥 강동현이란 남자가 최악인 것뿐일지도 모른다.
‘아, 그냥 여기 오는 애고 아저씨고 다 똑같다고.’
황경호는 본인도 남자면서 남성불신에 걸릴 것만 같다는 느낌이었다. 아니, 분명 벌써 걸렸을 것이다. 강동현에게 근 1년을 시달렸고, 근무환경도 유달리 불신에 걸리기 딱 좋은 환경이다. 애초에 스스로를 죽이고 싶을 만큼 세상에 그다지 애착도, 사람에 대한 애착도 없던 황경호였다. 그저 그런 모든 일들에 멀찍이 거리감을 두고 싶은 건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가 없었다.
“에휴. 내가 우리 초록이 없었으면 진즉에….”
황경호가 한숨을 팍 쉬고 그렇게 중얼거렸다. 하여튼 남자들이 문제야. 여기 오는 아저씨들 태반도 마누라 말고 창녀 만족시키고 싶다고 오는 거고. 애들도 고추가 너무 작거나 요도하열이 있거나 하는 병신들만 온다. 애초에 고추에 그 정도로 문제가 생기면 멘탈이 제대로 된 놈들도 없다. 그동안 같은 남자라고 불쌍하다고 부둥부둥해 준 것도 다 소용없었다. 어차피 다 강동현 같은 남자들일 뿐이다.
“에휴.”
“왜 그렇게 한숨이야.”
누가 머리를 손으로 흐트러뜨리며 옆에 섰다. 황경호는 반대쪽을 돌아보았다가 다시 고개를 돌렸다. 이강유가 태블릿에다 무언가를 마저 기록하곤 프론트에다 주었다.
“초록이 어디 아파?”
“아뇨. 이제 진짜 많이 건강해졌어요. 선생님이 사준 킥보드도 엄청 잘 타구요. 고맙다고 전해 달래요.”
“다행이네. 이제 수술 더 안 해도 되는 거야?”
“두개골에 철판 댄 거 때문에 클 때마다 한 번씩 봐줘야 한다는 거 같은데 이제 재발만 안 하면 큰 수술은 아마 안 해도 될 거래요.”
“진짜? 다행이다. 진짜 그 쪼그만 게… 큰일 하네. 너도 고생 많았다.”
“아뇨. 제가 뭘… 초록이가 고생 다 했죠….”
“힘들면 언제든지 말해라. 내가 크게 도와줄 순 없을지 몰라도 얘기는 들어줄 수 있으니까. 너무 무리하지 말고.”
이강유는 그렇게 황경호의 뺨을 손바닥을 두 번 가볍게 두드리곤 다시 진료실로 향했다. 손이 진짜 따뜻했다. 황경호는 얼떨떨하게 뺨을 잡았다.
‘아마 저런 남자는 우리나라에 100만 명 중 한 명 정도겠지.’
*
“잠깐만… 영지야!”
전화가 끊겼다. 다시 걸었다. 받지 않았다. 걸고 또 걸었지만 받지 않았다. 전원을 꺼야 할 때까지 끈질기게 걸었지만 받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메시지를 보냈다.
<영지야. 진짜 미안하다. 정정보도 나갈 거야. 나랑 임지현이 아니라 임지현이랑 전석균이랑 사귄 건데 나인 줄 착각하고 나라고 뜬 거라니까. 진짜 너 놀랐을 거 내가 아는데… 영지야, 진짜 갑자기 왜 이래. 우리 여전히 좋잖아. 중국 도착하는 대로 다시 전화할게. 제발 받아줘.>
전원을 껐다. 강동현은 폰을 앞의 테이블 위에 두고 신음을 흘렸다. 출국하기 전까지 잘못 나간 기사에 대해 정정보도를 내고 처리를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러느라 여자친구에게서 온 전화들을 못 받고 말았는데 그걸로 엄청 마음이 상한 모양이었다. 아차 싶어 전화를 얼른 걸었지만 헤어지자는 소리만 들었다.
동갑내기 커플에 가장 친한 친구로 지냈던 적도, 같이 살다시피 했던 적도 있었다. 재미있는 추억들도 많았고 눈물을 쏟던 사랑의 기억들도 있었으나 헤어지자는 말은 한 적이 없었는데. 불안하다. 강동현은 평소 같으면 앉자마자 잠들었을 텐데 뜬 눈으로 2시간 내내 비행기 안에서 초조함에 떨었다. 담배를 피우고 싶었다.
중국에 도착해서도 계속 전화를 걸었다. 일정을 소화하면서 겨우 표정관리를 했지만, 속으로는 온통 여자친구 생각뿐이었다. 새벽쯤이 되어 일정이 끝나 피곤함에 멍한 머리로 호텔에서 샤워를 했다. 그리고 침대에 퍽 누웠다. 마지막으로 폰을 확인했다. 부재중 전화가 있었다. 강동현은 황급히 다시 전화를 걸었다.
“영지야?”
[…….]
“안 잤어?”
[어….]
강동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전화 끊어버리고 연락 안 되면 난 어떡하라고… 일하면서도 계속 너밖에 생각 안 나서….”
강동형은 그렇게 말하다가 짧게 한숨을 쉬고 어조를 바꾸었다.
“아니다. 내가 너라도 화났을 거 같다. 너한테 먼저 연락했어야 했는데 정신이 없어서… 진짜 미안해.”
[은혁아.]
“응?”
[헤어지자는 거 진심이야.]
“……왜.”
강동현은 소리를 지르려다가 머리가 지끈해서 신음을 흘리며 침대에 머리를 묻었다.
“왜… 왜 갑자기 그래. 내가 또 뭐 잘못했어? 나 너 없으면 못 사는 거 알잖아.”
[나… 너 잘 돼서 정말 기뻐. 이런 스캔들이 나는 것도 니가 다 유명해지고 성공했으니까 그런 거라는 것도 알아.]
“영지야. 나 진짜 너 없으면….”
[우리 정말 매일 함께 있었잖아. 너 군대 갔을 때도 항상 전화하고 나 면회도 자주 가고 너 외박 나오면 항상 같이 있고… 너 군대 있을 때도 나 이렇게 혼자라는 느낌 든 적 없었거든? 근데 너 진짜… 한 달씩 연락 안 되고 이제 내 안부 묻는 것도 형식적인 게 되어가더라.]
“그건… 미안해, 영지야. 내가 고칠게. 이제 매일매일 다시 연락하고 내가 잘할게.”
[몰래 만나는 것도 예전엔 재밌었는데 지금은… 이번 스캔들 보고도….]
“그런 스캔들 다시는 없을 거야. 진짜 한 번만 믿어줘.”
[그냥… 너랑 나랑 사는 세상이 달라진 것 같아. 앞으로도 계속 이럴 거 같으면 차라리 아직 좋을 때… 헤어지는 게 맞는 거 같아.]
얼마나 오랫동안 이런 생각을 해왔던 걸까. 강동현에게는 모든 게 너무 갑작스럽게만 느껴졌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웃으면서 만났는데.
“영지야… 우리 벌써 7년이잖아. 이렇게는 아닌 거 같아. 만나서 얘기하자, 응?”
강동현이 그렇게 말하자 강영지는 마지못해 알겠다고 대답했다.
*
“영호 어머니, 오랜만에 오셨네요.”
“황 간호사도 오랜만이에요.”
대기실에 40대 초반 정도로 보이는 여자가 앉아있었다. 황경호는 반갑게 인사했다. 물론 이 여성분은 환자가 아니다.
“안녕, 영호야?”
3~4살쯤으로 보이는 어린이는 엄마의 뒤로 자꾸 파고들어 숨으려고 했다.
“어휴. 어린애라도 알 건 다 아나 봐요. 저번 주에 데려왔어야 했는데 애가 끝까지 안 간다고 난리를 쳐서….”
“어린애만 그러나요. 다 큰 어른 남자들도 다 그래요.”
“어머, 그런가요?”
이 미취학 남자 아동의 어머니는 어렸을 때부터 유난히 아들의 성기가 작다고는 생각했으나, 크게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진 않았었다.
하지만 기저귀를 떼고 배변 훈련을 시키는 데 문제가 생겼다. 계속 애가 소변을 제대로 못 보고 흘리는 것이다. 그때야 자세히 아이의 성기를 보고 모양이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이가 너무 어려서 수술을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했었으나, 결국 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리고 저번 주에 수술을 위한 검사를 하기로 하였는데 아이의 고집으로 오지 못했다가 오늘 온 것이었다.
“영호 환자님, 의사 선생님 보러 갈까요? 오늘도 아픈 건 아무것도 없어요.”
아무리 어린아이라도,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눈치가 비상하게 빠르다. 원래 포유류의 새끼들은 어렸을 때 신체에 문제가 있으면 바로 버려진다. 인간의 아이들도 충분히 사랑받지 못하면 언제나 버려질 수도 있다는 망상에 사로잡히게 된다. 아이는 결국 엄마에게 안긴 채 진료실로 들어갔다.
거시기에 문제가 생겨 고통받는 한 아이가 2주에 한 번씩 1년 반을 내원하고 있는데… 솔직히 말하자면 많은 진상 환자들마냥 성격이 안 좋아질 게 눈에 보인다. 자존감이 낮고 자격지심이 심하다.
‘남자의 성격을 보고자 하면 그 남자의 거시기를 잘 쳐다봐라.’
황경호는 그렇게 속으로 중얼거렸다. 혹시 모르니까 주변 사람들이랑 다 같이 목욕탕이나 가볼까.
그렇게 성실히 노동의 일정을 끝내고 황경호는 나흘 만에 로 향했다. 노래는 호프집답지 않게 첼로가 가미된 잔잔한 재즈피아노곡이 나오고 있다. 아직 메인 타임이 오지 않아 식사 겸 반주를 하는 사람이 있다.
“형.”
“왔냐, 경호야.”
근데 눈치가 좀 이상하다. 인사를 하면서도 누군가를 흘끗흘끗 보는 시선에 황경호도 저절로 시선이 거기로 옮겨갔다.
“…….”
‘이 인간이…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야?’
“아, 뭐로 해줄까, 경호야?”
그때 김태형이 물었다.
“음… 뭐 되는데? 식사될 만한 거면 좋겠는데.”
“그럼 숯불고기랑 밥이랑 같이해서 줄까? 오늘 했는데 맛있더라.”
“어, 그걸로 줘, 그럼.”
황경호는 멀찍이 바에 앉았다. 그리고 곁눈질을 살짝 하며 물을 마셨다. 저쪽은 황경호가 온 지도 모르고 있었다. 뭐, 아는데도 모르는 척할 수도 있을 것이다. 저번에 그렇게 헤어지고 난 이후 보름은 지났나. 황경호가 저쪽을 주시하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는지 이신현이 테이블을 세팅해주면서 속닥거렸다.
“가게 문 열 때부터 있었는데… 무슨 일 있나 봐.”
가끔 올 때는 보통 지인이랑 같이 온다고 들었는데 오늘은 혼자 온 것 같았다. 그의 테이블에 초록색 병이 무더기로 쌓여있었다. 몸 안 챙기는 건 잘 알았지만 그래도 착실히 병원 다니면서 관리받으려고 하길래 정신 차린 줄 알았는데 저렇게 술을 처먹고 있다니.
‘저러니까 안 되지, 고자 새끼.’
황경호는 그렇게 속으로 욕을 했다. 밥만 먹고 그냥 가야겠다. 손님은 황경호와 저쪽, 두 사람밖에 없었다. 이쪽은 돌아보지도 않았다. 그래서 황경호도 신경을 끄고 밥이나 먹으며 가게 사람들과 얘기를 했다.
“왜 저러는 거지? 일이 뭐가 잘 안 되나?”
“그러게 말이에요, 사장님. 그나저나 선글라스 끼고 있어도 진짜 아우라가 다르네. 다른 데서 술 먹었으면 분명히 이렇게 조용히 마시지도 못했을 거예요.”
근데 일하는 사람들이 강동현한테 완전히 신경이 빼앗겨 있었다. 황경호는 살짝 한숨을 쉬었다. 얼른 먹고 가야지.
“아, 비 온다.”
가게에서 나오는 노랫소리와 어우러져 금세 공기가 습하고 시원해졌다.
“올여름은 비 잘 안 오나 싶었는데 드디어 오네. 이제 좀 더위 가시겠다.”
“그래도 금방 그쳤으면 좋겠다. 비 오는 거 싫은데.”
“요즘에 가뭄 심해서 오긴 와야 돼.”
황경호가 그렇게 대꾸했다. 덥고 마른 여름이었다. 7월 말. 시간이 빠르다. 또 그런 생각을 하면서 황경호는 식사를 했다.
“요새는 술 안 하네, 형?”
“야, 너는 왜 그런 말을 괜히 해?”
김태형이 그렇게 꾸짖었다. 황경호가 웃었다.
“형 말대로 안 마시던 사람이 마시면 안 되나 봐. 확실히 컨디션 안 좋아지는 게 느껴져서.”
작년부터 이 가게를 알게 되고 술을 마시면 좀 잘 수 있어서 마시기 시작했는데 반년 넘게 술을 매일 달고 사니 오히려 다시 멘탈 상태가 안 좋아지는 게 느껴졌다. 이제 홀몸(?)이 아니라서 스스로 관리하게 되었다.
어떻게 하면 바로 살 수 있는 것인지는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하지만 그 본질에는 결국 어떤 믿음이 있어야 하는 것 같다. 굳이 종교가 아니라도 상관이 없다. 아이를 사랑하는 것은 그 아이의 미래를 믿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다면 아이 따위… 너무나 절망스러워서 사랑할 수도 없을 것이다. 스스로를 믿지 못하는 사람은 다른 무엇이라도 기대어 믿어야지만 삶을 지속할 수 있는 건 아닐까. 초록이 같은 멋진 아이를 만나고, 황경호는 그 아이의 회복력에 덩달아 자신도 치유되는 느낌을 받았다.
저 남자의 믿음은 무엇일까. 분명히 스스로일 거라고 생각한다. 스스로를 사랑하고 스스로에 대한 믿음으로 성공한 남자였다. 그래서 스스로를 깎아 먹는 것 같은 그런 생활을 지속하는 것도 내심 열등감을 느낄 정도로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무엇이 저렇게 저 남자를 힘들게 한다면 그것은 또 그럴 만한 가치가 있기 때문이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드는 건 결국엔 그 남자가 어떤 가치를 만들어내는 사람이기 때문이겠지.
“이제 가야겠다.”
“아, 잠깐만. 내일 초록이한테 갈 거지? 이거 챙겨가라.”
“아, 뭘 또… 잘 먹일게.”
김태형이 뭔가 또 준비를 했는지 황경호의 손에 쥐여주었다. 이 형은 이렇게 장사해서 남는 게 있는지 모르겠다. 그렇게 황경호는 자리에서 일어나서 계산을 했다. 잠깐 이신현이랑 얘기를 하다가 비가 오는 걸 보고 우산을 빌렸다.
“어… 어… 강동현 씨…!”
쿠당! 소리가 나며 누군가 테이블을 엎으며 넘어지는 큰 소리가 났다. 황경호는 우산을 펼치다 말고 돌아보았다. 우산을 접고 짐을 문가에 두고 돌아갔다.
이신현이 끙끙거리면서 강동현을 일으키려고 했다. 김태형이 부엌에서 나와서 도왔다. 황경호가 가서 엎어진 테이블을 세웠다. 사장과 종업원이 강동현을 소파에다 앉혔다. 이신현이 얼른 치울 걸 가져왔다. 황경호도 멀쩡한 그릇을 주워서 테이블에 올리면서 인상을 썼다.
“아니, 마시려면 곱게 마셔야지 남의 가게에서 이게 무슨 짓이야.”
기분이 확 나빠졌다. 강동현이 그에게 집적거려서 기분이 나쁜 것과는 종류가 다르면서도 공격적인 기분이 들었다. 그와 가까운 사람에게까지 강동현이 폐를 끼치는 게 정말, 진짜 정말로 싫었다.
그래서 대충 멀쩡한 그릇들을 챙기고 치우는 걸 다 도운 다음에는 정신이 없는 그 인간의 품에서 지갑부터 꺼내서 현금을 왕창 꺼냈다. 그리고 김태형한테 주었다.
“어우, 뭐하는 거야.”
“괜찮아요. 받아요.”
“야, 이렇게 많이는….”
“이 인간 술도 많이 먹었잖아. 그릇도 다 깨 먹고. 받아요.”
“아니, 그래도….”
“받아요.”
억지로 김태형의 손에 쥐여주고 강동현의 멱살을 잡아 올리고 그 남자 뺨을 때렸다. 이번이 두 번째다.
“어우! 야…!”
뒤에서 깜짝 놀라서 황경호의 팔을 잡았다.
“정신 차려요.”
강동현이 눈을 느릿하게 떴다. 이신현이 뒤에서 강동현의 선글라스를 가지고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황경호는 그걸 받아서 강동현의 앞섶에다 걸었다.
“정신 차리고 똑바로 걸어요. 남의 가게에서 이게 무슨 행패에요?”
강동현은 술에 취해서 몽롱한 눈으로 황경호를 보면서 눈을 깜박거리더니 천천히 황경호의 허리를 감싸서 안았다. 처음에는 뭐지? 라고 생각했다가 껴안기는 순간 그가 너무나 강하게 안아서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순식간이었다.
“뭐하는…!”
황경호가 기겁을 해서 그를 떼어내려고 했다. 강동현이 어깨를 떨었다. 낌새가 이상해서 그를 잠깐 내려다보았다. 황경호의 가슴이 약간 축축해졌다.
‘뭐야… 이 인간 지금 우는 거야?’
“자, 잠깐만… 이것 좀 놔요. 뭐하는 거예요?”
강동현은 아예 힘으로 그를 끌어안아 저항하는 황경호를 거의 자기 위에 앉혔다. 황경호는 기겁을 해서 뒤를 돌아보며 도움의 눈길을 보냈다. 그제야 김태형과 이신현이 와서 강동현을 떼어내 주었다. 강동현은 한 손으로 자신의 눈을 덮었다. 황경호는 깜짝 놀라서 심장이 두근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어떻게 해야 하지… 강동현 씨, 집에 가실 수 있으시겠어요? 택시 불러드릴까요?”
대답을 안 하는 건지 못하는 건지, 미동도 없었다. 김태형이 굉장히 곤란해 했다. 황경호는 다시 인상을 팍 찌푸렸다. 얼른 이 짜증 나는 인간을 김태형과 이신현의 앞에서 치워버리고 싶었다.
“어디 사는지 알아요.”
“아, 그래?”
김태형의 얼굴이 좀 펴졌다. 하긴 연예인인데 술 퍼마시고 꽐라 됐다고 경찰을 부르기도 뭐하고… 강동현은 보기보다 엄청 무거웠기 때문에 세 명이 다 부축을 해서 택시에 태워야 했다. 일단 강동현을 어떻게 차에다 욱여넣었다. 우산을 받쳐 들고 있던 김태형이 말했다.
“너 안 오는 동안 매일 와서 저렇게 술 마셨어. 뭔 사람이 혼자서 저렇게 술을 마시나 했는데… 아무리 건강하다고 해도 진짜 간 다 상했겠다.”
“그리고 빨리 죽어버리면 좋겠네요.”
황경호는 저도 모르게 그렇게 말했다가 놀란 표정으로 보는 김태형을 발견하고 그의 시선을 피했다. 그리고도 스스로도 놀랐다. 이런 말을 입 밖에 낼 수 있는 사람이었나, 내가.
“근데 데리고 들어갈 수 있겠어, 형? 강동현 씨 엄청 무겁던데.”
“대충 되겠지.”
김태형이 아까 받은 돈 중에 오만 원짜리 지폐 하나를 얼른 넘겼다. 황경호는 이거는 써야지 싶어 그냥 받았다.
“코엑스 쪽으로 가주세요.”
택시에 타면서 그렇게 말하곤 그대로 그저 창밖만 바라보며 입을 다물고 있었다. 금요일 밤이라 운행되는 차량은 꽤 있었지만 막히지는 않았다. 한밤에도 밝게 빛나는 불빛들을 보면서 그저 가만히 있었다.
그러다 문득 고개를 돌려보았다. 강동현도 반대쪽 창밖을 보고 있었다. 그는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황경호는 못 볼 걸 본 기분이었는데도 어쩐지, 계속 쳐다보고 있게 되었다.
이 남자가 눈물을 흘리는 거야 꽤 보았다. 그는 연기자였고 그는 절절한 사랑 연기로 인기를 끈 배우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황경호가 본 그는 정말 피도 눈물도 없을 것 같은 이기적인 남자였다.
택시가 섰다. 택시 기사 아저씨까지 도와서 강동현을 차에서 끌어냈다. 와, 진짜 무겁다. 어깨에다가 걸쳤더니 진짜 무릎과 허리가 지끈거릴 지경이었다. 애랑 놀아준다고 근력이 꽤 강화된 황경호였지만 이건 뭐 사이즈가 틀리니.
‘술도 취했겠다… 진짜 몇 대 더 때릴까?’
아까 뺨을 때릴 때도 정말 생각보다 아주 후련했지…. 그렇게 비틀비틀 강동현을 부축해가며 유혹에 시달렸다. 비도 잠깐 맞은 것뿐인데 둘 다 꽤나 젖었다. 강동현의 지갑을 꺼내서 공동현관 비밀번호를 누른 곳에 대었더니 열렸다. 엘리베이터까지 또 낑낑거리고 들쳐메고 갔다. 14층을 누르고 엘리베이터 벽에 기대어 한숨을 푹 쉬었다.
“내 팔자야….”
엘리베이터는 또 왜 이렇게 느린지. 황경호는 그동안 한숨을 한 스무 번을 쉰 것 같았다. 14층에 도착하고 전에 몇 번 온 적이 있는 집 앞으로 갔다. 다시 지갑을 갖다 대어서 문을 열었다. 손잡이만 돌려 일단 잠금을 해제하고 발로 문을 쭉 밀었다. 그냥 집안에다가만 던져놓고 갈 생각이었다. 이 집구석에는 발 한 짝도 들여놓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황경호는 문을 열자마자 강동현을 그냥 놓았다. 그런데 그가 황경호의 멱살을 잡았다. 앗 하는 사이에 같이 넘어졌다. 강동현이 아래에, 황경호가 위였다.
“아오, 진짜…! 비켜요!”
황경호는 질색을 하며 그를 밀어내며 상체를 일으켰다. 강동현은 정신이 좀 있는 모양이었다. 그대로 황경호를 올려다보았다.
“너도… 나 싫지?”
강동현이 그렇게 물었다.
“당연하죠! 진짜 사람이 술을 처먹어도 곱게 처먹어야지….”
황경호가 욕지거리를 하자 갑자기 자세가 반전하여 황경호가 아래에 깔리게 되었다. 황경호는 목구멍에 뭐가 처박힌 듯 숨을 멈추었다. 어디선가 초침이 움직이는 소리가 들려온다. 물에 젖어 체취가 짙다. 몸이 떨려온다. 황경호는 강동현의 눈을 피했다. 잠시 뒤 강동현이 몸을 기대어왔다. 귓가에 닿는 숨결이 뜨거웠다.
“너한테도… 미안하다.”
황경호는 흠칫하며 몸을 떨었다.
아,
정말 싫다.
“진짜… 미안해….”
강동현의 입술이 귀에 닿았다. 황경호는 이를 꽉 깨물고 눈을 감았다.
‘목소리가….’
귓골을 울리면서 하반신까지 저릿해지는 느낌이었다. 그 느낌을 참을 수가 없었다. 황경호는 축 늘어진 강동현을 겨우겨우 떨쳐내고 현관문을 열고 뛰쳐나갔다. 한참을 뛰었다. 울고 싶은 기분이었다. 기분이 더러웠다.
기회가 왔을 때 마음 풀릴 때까지 팼어야 했다.
*
“그래?”
“그렇대.”
“넌 그걸 또 다 들어주고 있었어?”
황경호가 어이가 없다는 듯이 이신현을 바라보았다. 이신현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냥 사람이 와서 몇 주 동안 술을 혼자 퍼먹고 있어도 궁금할 텐데 강동현이 와서 그렇게 술을 퍼마시고 있는 거잖아. 형은 안 궁금하디?”
이신현은 오히려 황경호가 이상하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인터넷에다 올리면 난리 나겠지?”
황경호가 그렇게 중얼거리자 이신현이 진짜 더 이상하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저번에도 좀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둘이 친한 거 아니었어?”
“친하긴 계속 누가 친하대?”
황경호가 확 짜증을 냈다. 병원 사람이고 이쪽도 전부 그랑 그 병신을 어떻게든 엮으려고 난리다. 황경호의 신경질적인 반응에 이신형이 깜짝 놀란 얼굴을 했다.
황경호는 진짜 사람이 좋은 타입이었다. 항상 다른 사람을 배려하고 자신을 뒤로하는 것이 습관이 된 것처럼 보인다. 그러면서도 위선적이지 않고 눈치도 빠르다. 그래서 누군가랑 척을 지고 사는 그를 상상할 수가 없을 지경인데.
“사이가 안 좋은 거였구나… 그래서 요새 가게 안 오던 거였어?”
황경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짜증을 낸 것이 자신도 후회스러웠기 때문이다.
‘전에는 한 번도 이런 적 없었는데…’
울컥울컥 뭔가 터져 나오듯이 다른 사람들한테 화풀이를 하게 된다. 황경호는 몹시 후회하며 사과했다.
“미안….”
“아니, 뭐 사과까지야….”
이신현이 대답했다. 이신현이 김태형이 한 음식을 들고 초록이 병원에 들렀다. 다 같이 밥을 먹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초록이는 이제 퇴원할 날짜도 얼마 남지 않았다. 아이는 엄청 잘 먹다가 잠들어서 황경호가 그냥 끌어안은 채로 커피숍에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나저나 연예인들은 웬만하면 다들 있다더니만 강동현도 역시 있었네. 아니, 오히려 더 의외다. 사귄 여자친구가 첫 여자친구고 지금까지 7년이나 사귀었다는 게. 잘생긴 남자들은 얼굴값 한다더니만 딱히 안 그런 거 아냐? 일편단심 멋있다.”
“또 모르지….”
황경호는 커피를 마시며 그렇게 대꾸했다.
“여친 분명히 엄청 예쁘겠지? 그렇게 오래 사귄 커플인데도 헤어질 때 그렇게 힘든 거구나. 강동현 정도 되면 진짜… 여자 쪽이 미친 거 아냐? 도대체 왜 헤어진 거지?”
“왜 헤어졌다는데?”
“저번에 스캔들 터진 거 있잖아? 강동현이랑 임지현이랑. 그거 때문인 것 같은데… 여자친구 쪽은 그런 게 아니라고 하고. 남친이 톱스타가 되니까 오히려 자기가 죄인 된 것 같고 사이도 예전 같지 않아서 계속 좋을 때 헤어지고 싶다는 식으로 얘기를 했대. 그리고 그 이후론 매일 전화하는 데도 안 받고….”
“여자가 그냥 마음이 떠난 거네.”
“연애 한 번 안 해본 나도 그렇게 보이는데… 역시 그렇지?”
남의 연애는 척 보면 척인 법이다. 이신현이 아이스커피를 쪼옥 빨았다.
“하긴… 강동현 정도로 톱이면 언제 결혼할지도 모르고 지금은 이렇게 일편단심이더라도 언제 변심할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겠지. 만나기도 힘들고 잘못하다가 여친이라는 거 인터넷 같은데 뜨기라도 하면 엄청 피곤할 거고….”
‘연예인이라는 거 엄청 성가시구나. 주위 사람들까지도 이렇게 성가신 거였어. 그저 아는 사이고 강동현이랑 계속 엮인다는 이유로 주변 사람들까지….’
괜히 연예인들을 스타라고 하는 게 아닌 모양이다. 계속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고 신경을 쏟는다. 황경호같이 별 볼 일 없는 사람도 계속 그 때문에 공해처럼 피해를 입는다. 여자친구는 더 할 것이다.
여자친구한테는 딱히 황경호한테 하는 만큼 막장으로 하진 않을 거라고 생각하지만(그러면 진짜 범죄다), 그래서인가, 오히려 강동현에게 무지막지하게 시달려온 황경호라서 그 정도 이유로 그 인간을 굳이 찰 필요까지야 있나 싶기도 했다. 황경호한테 하듯이 하는 게 아니라 그냥 그가 평소에 하는 행실 정도로만 대해준다면 사실 그는 그렇게 나쁠 것까지야 없는 남자다.
‘젊고 잘생기고 돈도 많겠다. 진짜 왜 헤어지는 거래?’
그렇게 남 일처럼 생각하다가 문득 소름이 끼치듯 기억이 떠올랐다.
[미안하다.]
귓가에 울리는 듯한 낮은 목소리. 굉장한 전달력. 귓골이 울리면서 저도 모르게 몸을 움츠리게 된다. 눈은 돌리면 되고 스치는 건 피하면 되는데도 목소리만큼은 어쩔 수 없이 스며든다. 특히 귓가에다 말하면 뭐라도 지릴 것처럼 피부 위로 전기가 흐른다. 황경호는 인상을 확 구기며 커피를 쭉 들이켰다. 갑자기 크게 움직이니 초록이가 뒤척거렸다. 황경호는 초록이를 다시 잘 안았다.
“어쨌든… 불쌍하더라. 잘난 남자라서 그런가? 진짜 사랑도 좀 다른 거 같다는 생각 들었어. 다른 친구들 연애하는 얘기 들어보면 다 어쩐지 좀 구질구질하던데….”
“돈이지, 뭐.”
황경호가 말했다. 그렇게 얘기를 좀 하다가 초록이가 깨어나서 좀 놀아주다가 아이를 병실에 데려다주고 집으로 향했다. 토요일은 보통 이런 식으로 하루가 끝나서 집으로 가서 대청소를 한 번 하고 잔다. 청소를 하고 쓰레기를 내다 버리러 나왔다가 손을 털고 들어가려는데 어쩐지 눈에 익은 자동차가 보인다. 저 BMW… 그리고 빌라의 출입구를 보았다.
“…….”
황경호는 잠깐 멈추어 섰다가 모르는 척 그의 옆을 빙 돌아서 들어가려고 했다.
“잠깐만….”
황경호가 돌아가려고 하기도 전에 강동현이 일어섰다. 술 냄새가 났다. 이 인간 술 먹고 차를 끌고 온 것인가. 진짜 배우 인생 종 치려고 작정을 했구만. 자기 일 그렇게 신경 쓰는 주제에. 여자친구랑 헤어진 것 때문에 이런단 말인가. 얼굴은 2주 전쯤에 본 것보다도 훨씬 안 좋았다. 좋을 리가 없지. 그는 몸의 건강과 정신의 건강 양쪽에 다 문제가 생겨 발기부전 및 등등의 남성 질병에 걸린 케이스였다. 거기에 술을 저렇게 처마시는데, 악화일로일 것이다.
“저는 집에서 할 일이… 가시던 길 가시죠.”
황경호는 굳이 술까지 마신 이 인간의 신경을 거스르고 싶지 않았다. 강동현은 시계를 보았다.
“5분이면 돼….”
눈에 그림자가 퀭하게 져서 잘난 얼굴이 엉망이었다. 아까 말했듯이, 황경호는 굳이 그의 신경을 거스르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바로 대답했다.
“말해요.”
“나… 여자친구랑… 영지랑 헤어졌어.”
그 얘기는 오늘도 질리도록 들었다. 황경호는 아주 남 얘기 듣듯이 감정적으로 전혀 공감하지 못한 상태로 강동현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리 몰랐다고 하더라도… 내가 영지한테 불성실했던 걸 영지도 눈치챘던 거겠지. 너랑 그런 거 한 것도… 처음에는 무작정 그냥 병 고치고 싶어서 그런 건데… 니 말대로 그걸 영지한테 떳떳하게 말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것도 영지한테 미안한 거였어.”
“뭐, 그렇죠.”
이제 와 깨달으면 뭐하나. 소 잃고 외양간 고치기도 안 된다.
“그래도… 난…. 영지 없으면….”
강동현은 꽤 괴로워 보였다. 그래, 힘들어한다는 것도 다 들었다. 그래서 나보고 어쩌라고. 그는 그렇게 고개를 푹 숙이고 두 손으로 마른세수를 했다.
“그러게 누가 인생 그렇게 살라나.”
황경호가 비아냥거렸다.
“…너한테도 미안하다.”
‘그것도 들었….’
황경호는 소름이 돋아서 한 발자국 물러섰다. 이 인간이 그때 술 마시고 똑같은 말을 했다는 건 기억이 안 나는 모양이었다. 술김이 아니라 ‘진짜 사과’라도 하겠다는 건가?
“나도 왜 그랬는지 모르겠는데… 너만 보면 짜증이 나고… 그래서 더 그랬던 거 같다.”
“그래서 뭐 어쩌라고.”
황경호는 저도 모르게 그렇게 말을 받아쳤다가 스스로도 놀랐다. 강동현은 빌라 앞 계단에 앉아있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뭐 어쩌자는 건 아니야.”
그렇게 말하고는 갑자기 그는 휘청하더니만 머리를 잡고 괴로워했다. 그리고는 다시 한번 머리를 털고 차로 향했다.
“…잠깐만요.”
황경호는 인상을 팍 썼다가 그가 운전석에 타려는 걸 막았다.
“정신 나갔어요? 술 먹고 운전하지 마세요. 댁이야 전봇대에 처박아 죽든 트럭에 깔려 죽든 상관없는데 사람이라도 치면 어떡할 거에요? 대리 불러요.”
“그 정도로….”
“폰 내놔요.”
황경호는 강동현의 폰으로 대리운전을 불렀다. 그리곤 폰을 강동현한테 집어던지듯 돌려주고 몸을 돌렸다. 할 도리는 다했다.
“너 말이야….”
강동현이 황경호의 뒷모습에 대고 말을 걸었다. 황경호는 뒤를 돌아보았다.
“만약에 내가….”
강동현은 그 뒤로 말을 잇지 못했다. 황경호는 인상을 찌푸리면서 물었다.
“뭐요?”
“…아무것도 아니야.”
강동현은 선글라스를 끼며 차에 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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