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화 (7/47)

7. 산다는 것, 죽는다는 것.

새벽같이 뭔가, 인기척이 느껴졌다. 평소 같으면 절대 깰 리가 없는 시간이었지만 눈이 떠졌다. 잠든 지도 몇 시간 되지 않았고 잠결에 취해서 그냥 옆으로 돌아눕기만 했다. 조금 있다가 똑똑, 하고 작게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상대는 아마 강동현이 일어났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는 발걸음 소리를 죽여 옆으로 다가와 뭔가를 탁자 위에 두고는 다시 조심스럽게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 그 순간 강동현은 잠결에 상대의 손목을 덜컥 붙잡았다.

“언제 왔어….”

강동현은 상대의 손목을 끌어당겨 자신의 침대에다 눕혔다.

“십 분만 더 자자….”

상대를 끌어안고 머리카락에 얼굴을 묻는데, 욕실에 있는 샴푸와 같은 냄새에 촉촉한 느낌, 짧은 머리카락, 마른 느낌이 낯설면서도 어쩐지 기억에 있는 것도 같고….

“아… 저기….”

여자 친구가 아니었다. 강동현이 눈을 번쩍 떴다. 황경호와 눈이 딱 마주쳤다. 황경호는 살짝 미간을 찌푸린 채로 강동현의 헐벗은 가슴을 밀어내었다.

“음… 저… 어디다 메모를 둬야 할지 모르겠어서요… 전 도은혁 환자님 번호도 없고… 음….”

황경호는 아마, 당황하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황경호는 침대에서 내려와 바로 서서는 저 멀리 아래를 보면서 말을 이었다.

“어제는 죄송했습니다…. 출근해야 해서 실례인지는 알지만, 욕실을 좀 썼어요. 허락 없이 정말 죄송합니다.”

“…….”

황경호는 얼른 탁자 위에 뒀던 메모만 구겨서 들었다. 그 옆에는 돈도 있었다. 물끄러미 그걸 보자 황경호가 아, 하면서 황급히 말했다.

“어제 얼마 나왔는지 모르겠지만 일단 있는 대로 뒀어요. 부족하면 말씀하세요. 그럼… 정말 죄송했습니다. 나중에 병원에서 뵙겠습니다.”

그렇게 그는 고개를 숙이고는 황급히 문밖으로 나갔다. 강동현은 허리를 일으키고는 몇 시인지 시계를 보았다. 7시 45분…. 절대 일어날 시간이 아니었다. 강동현은 다시 누웠다.

“…야, 잠깐만.”

“네?”

황경호는 딱 문을 열고 나가기 전에 강동현에게 다시 손목을 잡혔다. 강동현은 잠이 아직 덜 깬 것 같았지만 일단 미간 사이를 강하게 엄지와 검지로 누르고는 말했다.

“데려다줄 테니까.”

“아뇨… 저….”

“돈도 저렇게 다 두고 가면서 차비도 없잖아.”

“지하철 타고 갈 거라서….”

“시간 아슬아슬 한 거 아냐?”

“아뇨… 지하철 타면 대충… 그리고 차 놔두고 오셨잖아요….”

“5분만 기다려.”

“저 정말 괜찮은데….”

강동현은 대충 티셔츠에 몸을 욱여넣더니만 차키를 들고 나왔다. 어제 술 마신 데 차 두고 오지 않았나? 황경호는 뭐라고 말도 못 하고 강동현의 강압에 밀려 같이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하로 내려갔다. 다른 차가 한 대 더 있었다. 황경호는 한숨을 쉬었다.

“저… 도은혁 환자님. 안 이러셔도 돼요. 아직 피곤하신 것 같은데 저 때문에 괜히 수고 끼쳐드리고 싶지 않습니다. 저 원래도 지하철 타고 다니구요. 그냥 다시 올라가셔서 주무시는 게….”

“타.”

강동현은 그렇게 말하며 운전석에 올라탔다. 거치대에서 선글라스를 꺼내 쓰고는 멀뚱히 밖에 서 있는 황경호에게 클랙션을 울렸다. 황경호는 마지못해 조수석에 올라타 벨트를 맸다. 차가 출발했다. 얼마 못 가서 하필이면 또 길이 밀린다.

“…….”

“…….”

차 안은 당연히 정적… 아마 지하철보다도 훨씬 시간이 많이 걸렸을 것이다. 8시 20분을 가리키는 시계를 보며 황경호는 제시간에 병원에 도착하기를 포기했다. 강동현은 핸들에 몸을 기대다시피 해서 앞만 보고 있었다. 황경호도 창밖을 보았다.

“…야.”

“네?”

그래서 강동현이 불렀을 때는 조금 놀랐다.

“너 저번에 보니까 나랑 동갑이던데. 왜 꼬박꼬박 존댓말이냐고. 내가 삭아 보여?”

“네??”

“그리고 왜 내 번호가 없어? 내가 보낸 문자가 몇 갠데?”

“…….”

황경호는 살짝 당황해서는 강동현의 옆얼굴을 쳐다보았다. 제대로 된 대답도 없이 황당하다는 반응뿐이자 강동현은 미간을 조금 찌푸리며 혀를 찼다. 거북이처럼 느릿느릿하게 기어가는 어색한 폐쇄공간 안에서 그렇게 견디기를 억만년같이 하고 나서야 차는 그나마 병원 근처까지 오게 되었다. 여기서 더 차를 몰고 가느니 걸어가는 게 더 빠를 것 같아서 황경호가 먼저 입을 열었다.

“여기서 걸어가는 게 나을 것 같아요. 이미 늦었고….”

평소 같으면 30분은 더 일찍 도착했을 것이다. 황경호가 길 한가운데서 문을 열려고 하자 강동현이 짜증을 냈다.

“야, 적어도 갓길까진 가서 차를 대야 할 거 아냐. 죽고 싶냐?”

“빨리 오는 차도 없는데요….”

그래도 강동현이 끝끝내 우겨서 갓길까지 차를 대는데 또 5분은 걸린 것 같았다. 내리려고 할 때는 또 잡았다.

“폰 줘봐.”

“네?”

“폰 줘보라고.”

“왜요?”

“달라고 할 때 그냥 좀 주면 어디 덧나냐?”

강동현은 아직도 자기 번호가 저장되어 있지 않은 그 폰에 자기 번호를 저장했다. 아무래도 어제오늘로 신세 진 것이 있어서 그런지 황경호는 꺼림칙해 보여도 폰을 건네주었다. 강동현은 몇 번 화면을 두드리더니 황경호한테 휙 던졌다. 황경호는 그것을 떨어뜨릴 뻔하다가 겨우 잡았다.

“태워다 주셔서 감사합니다, 도은혁 환자님. 어제오늘로 폐를 많이 끼쳐서 정말 죄송했습니다.”

황경호는 꾸벅 그렇게 고개를 숙이고는 차에서 내렸다. 강동현은 핸들에 기댄 자세로 눈동자만 돌려 그가 빠른 걸음으로 뛰다시피 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리고는 다시 집에 들어갈 기분이 들지 않아 등록되어 있는 헬스장으로 갔다. 이른 시간이지만 비싼 회원제 헬스장이라 사람들이 많았다. 강동현은 옷을 갈아입고 들어가서 물을 좀 마시고 운동을 하기 시작했다. 새삼 어젯밤 일이 생각났다.

차라리 울고 소리를 질렀더라면 더 나았을 것이다. 술도 잘 안 마실 것 같은 애가 죽자고 술만 마시면서 정신은 다른 데 팔려 있었다. 정말 그대로 보냈으면 다시 죽으러 갔으려나. 알 수가 없다.

또 아침에 일어나니 피해를 끼쳤다고 죄송하다고 몇 번이나 말하고. 그런 애를 어떻게 어제 죽으려고 하던 사람이라고 볼 수 있겠는가. 애초에 그런 기분이 들 게 만든 것도 어찌 보면 강동현이 단초였는데 말이다. 그 초록이란 아이를 보면서 자살이라는 것에 대해 생각하지 않게 되었다는 그를 그런 식으로 무시하면서, 다시 자신을 의미 없는 존재로 생각해버리게 만들었는데도.

강동현은 운동을 하다 그만두고 머리를 감싸 쥐었다. 역시 후회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후회는 으레 비겁한 남자들처럼 상대에 대한 탓으로 변질되었다. 우울증 좀 괜찮아졌다고 했으면서 좀 건드렸다고 그렇게 또 한강까지 쪼르르 달려갈 줄 누가 알았겠냐고.

‘아냐… 조심해야 한다는 건 알고 있었잖아. 그것보다도… 사실 그런 걸 강요하는 게 문제긴 했지…’

강동현은 처음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이놈의 병 때문에 이게 무슨 사달이야…. 그렇다고 그만두겠냐고 물어본다면 당연히 그만두진 않을 것이다. 강동현은 이기적인 남자다.

지금까지 한 번도 제대로 대화를 나눈 적은 없었는데 그래도 어제 술김이라도 그 간호사의 얘기를 좀 들을 수 있었기 때문일까(사실 별로 한 얘기도 없지만). 다리에서 뛰어내리려고 하는 꼴은 예전에도 한 번 봤지만 그때는 한심하기만 하지 딱히 동정심도 안 들고 공감도 안 되었었는데… 배역을 아는 것과 똑같았다. 처음에는 전혀 낯선 타인이지만 점점 그 배역에 대해 연구하고 계속 생각하다 보면 어느샌가 익숙해지고 그러면 이해가 되고 그렇게 ‘알게’ 된다.

‘귀찮아….’

강동현은 그저 하고 싶을 뿐이었지 다른 건 이것저것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왜 하필이면 쟤가 간호사여서 내가 이 지랄을 하는 건지…. 그때 휴대폰 진동이 울렸다. 강동현은 전화를 받았다.

“응. 영지야.”

[뭐 하고 있었어?]

“운동하고 있었어.”

[아, 진짜? 나두. 우리 밍밍이랑 산책.]

“밍밍이 많이 컸어?”

[말도 마. 얘가 갠지 돼진지 모르겠다니까. 다이어트 시키는 중이야.]

강동현은 자연스레 미소를 지으면서 웃었다. 서로 안부를 묻고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얘기를 하다가 아예 헬스장을 나왔다.

“진짜… 보고 싶다, 영지야.”

[너도 참… 니가 데뷔한 지 꽤 돼서 그런가 이제는 그런 말 정말 진짜같이 말한다, 너.]

영지가 키득거렸다. 강동현이 장난스레 한숨을 쉬었다.

“난 언제나 진심인데.”

[아이구. 알겠쪄요, 우리 은혁이. 누나가 뭐 사줄까. 말만 해.]

강동현이 저도 모르게 푸핫 하고 웃었다. 언제든 남자를 웃게 만들어 줄 수 있는 여자가 있다는 건 얼마나 행운인지.

“사랑해, 영지야.”

강동현이 새삼 눈을 감으며 진심을 담아 그렇게 말했다.

[나도 사랑해. 내 지갑에 아주 빨대를 꽂아라. 쪽쪽 빨아라, 우리 은혁이~]

“큭큭. 기대해라.”

그렇게 계속 이야기를 하다 보니 어느새 집이었다. 집으로 들어가면서 시간을 보니 꽤 통화를 오래 해서 끊게 되었다. 그리고 샤워를 하고 물을 한 잔 마시고 있으니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래… 끝내자, 끝내. 그런 병신 같은 거 그만하자. 걔도 마음잡고 싶어하는데 나 때문에 더 힘든 것 같고. 다 떠나서 그 성격이 피곤하고. 죽든 살든 영지랑 노력해보지, 뭐.’

강동현은 홀가분하게 기지개를 켜며 그렇게 생각했다.

*

그 뒤로는 영화를 촬영하랴 광고 찍으랴 바빴다. 연말이 다가오니 무슨 이벤트들도 많아 일이 여기저기 풍년이었다. 금요일마다 정기적으로 시간을 비우기도 힘들어져 아예 예약도 하지 않았다. 마포대교에서 뛰어내리기까지 했던 열정은 어디로 갔는지, 아니 그 열정은 고스란히 연기에 대한 열의로 화하여 열심히 일에 매진 중인 강동현이었다.

“마, 느그 아버지가 임마 지금은 이래 보여도, 어, 을~마나 대단한 양반인데.”

“아, 성재 아저씨이이! 저 진짜 지금 가야 한다니까요!”

“마! 팍씨! 느그 아버지 이래 누워있는 거 보고도 가시나 만나러 나가겠다고 지금?!”

김태평은 네, 라고 바로 대답하고 처맞았다. 한 씬을 끝내곤 여지없이 다시 모니터링이다. 강동현은 카메라 뒤에 앉아있는 감독에게 얼른 다가갔다.

“와, 이제 진짜 춥다. 옷 입어.”

“응… 감독님, 여기 이건 좀 더 과장하는 편이 나았을까요?”

모니터를 보다가 감독에게 의견을 구했다.

“음, 아니야. 이게 나은 거 같아. 코믹한 거 너무 집중하면 몰입감이 떨어지니까.”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만….”

곧 점심시간이라 다 같이 식사를 시켜서 먹었다. 점심을 먹는 내내 강동현은 작가의 옆에 붙어서 캐릭터에 대해서 물어보고 있었다. 촬영하다가 짬짬이는 상대 배우에게 묻기도 했다. 아무래도 아직 촬영에 들어간 지 한 달 정도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에 빨리 캐릭터를 확립하고 싶어서 그런 것 같았다. 드라마와 달리 영화는 촬영의 기간은 길어도 단 2시간 내외로 스토리가 흘러가기 때문에 처음엔 캐릭터에 몰입하지 못하고 나중에 몰입하게 되어 극을 완성하더라도 드라마처럼 그럭저럭 괜찮아 보이거나 하지 않는다.

배우에게 촬영이란 곧 기다림의 연속이었다. 자신의 씬이 언제 끝날지 모르는 만큼 다른 사람들의 씬이 언제 끝날지도 알 수가 없고 오늘 분량의 촬영을 하기 위해선 밤을 새우기 일수였다. 병원이란 장소를 무한정 빌릴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낮부터 밤까지 시간대별로 알차게 쓰기 위하여 다들 고군분투하였다. 새벽녘 장면까지 찍고 나니 거의 만 하루를 꼬박 촬영장에서 보내게 되었다. 메인 주인공 중 하나인 강동현은 몇몇 다른 배우들과 달리 종일 스탠바이를 하고 있었다.

오늘 오후엔 화보 촬영이 있으므로 잘 시간은 차 안에서 자는 걸 합해도 서너 시간밖에 되지 못할 것이다. 강동현은 차에 타자마자 바로 누워버렸다.

“1시쯤에 데리러 갈 테니까 들어가자마자 잘 자고. 모레 통영 내려가는 거 알지? 다음 주는 해외 화보 촬영도 하나 있다. 하루 정돈 거기서 쉬고 올 순 있을 거야.”

“오케이… 이제 잔다.”

강동현은 키가 크고 비율이 모델급이라 화보 스케줄이 엄청 많았다. 얼마 뒤엔 해외 촬영도 있다. 그리고 영화 속의 주인공이 점점 몸이 좋아지는 설정이다. 슬슬 운동과 식이요법도 함께 해야 했다.

촬영장소를 빠져나오면서 강동현은 피곤한 몸을 의자에 뉘었다. 밴을 새로 뽑은 지 얼마 안 되었다. 저번 밴과는 달리 의자가 180도로 누워 편했다.

‘……’

너무 피곤해서 그런가. 보통은 그냥 곯아떨어질 타이밍이 지났는데 잠이 안 들었다. 조금 뒤척이다가 잠들었다. 그리고 몇 시간 자지도 못하고 바로 일어나서 미용실을 갔다가 화보촬영장으로 향했다.

“동현 씨, 이쪽 보고~ 오케이. 좀 더 자연스럽게. 응, 좋아.”

어차피 뭐가 좋고 나쁘고는 나중에 나오는 것이다. 지금은 일단 엄청나게 많은 양의 사진을 찍었다. 이번 화보는 해외진출을 노리고 있는 국내 브랜드 화장품 화보로 아시안인데도 키가 크고 체격이 좋은 강동현이라 거의 외국 남자 모델 화보처럼 찍고 있었다. 다 입은 거부터 벗은 거까지 찍은 것이다. 같이 찍고 있는 톱스타 여자 연예인은 여신같이 입고 있었다.

“동현 씨, 잘생겼다고 생각은 했는데… 이런 섹시한 느낌도 나오는구나.”

요즘 유행이라고 하는 여자같이 예쁜 얼굴을 가진 아이돌 같은 얼굴이 아니라 남자답게 잘생기고 체격도 있는 강동현이라 곁에 있는 여배우와의 체격 차이만으로도 꽤나 섹슈얼한 느낌을 주었다. 게다가 작정하고 눈빛에 힘을 주어 카메라를 바라보니 장난이 아니었다.

“내가 찍은 남자 배우들 중에 제일 관능적이야.”

사진사는 강동현에게서 이런 섹시한 느낌이 나올 것이라곤 생각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잘생긴 얼굴 때문에 항상 반듯한 역할만 했었고, 사실 그런 반듯한 느낌은 멋있다는 느낌은 주어도 섹시하다는 느낌은 크게 안 나니까 말이다.

“등도 멋있네.”

모델이 아주 마음에 든 모양인지 사진사가 연신 그렇게 칭찬을 하며 강동현의 단독 샷을 찍었다. 메인인 여자 모델을 두고 이렇게 칭찬을 들으니 좀 머쓱했다.

“아니에요. 하하….”

여자 연예인들 중엔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예쁘지 않은 곳이 없는 경우도 있었다. 남자 연예인들의 경우 키가 작거나 어깨가 좁거나 다리가 짧거나 해서 어쩔 수 없이 전문모델들과 차이가 날 때를 많이 느끼니까 말이다. 요즘은 모델 출신 연예인들이 꽤 많아지는 추세였지만 강동현은 모델 출신이 아닌데도 사진사는 꽤 마음에 들어 했다. 게다가 한국 모델은 마른 모델들밖에 없는데 강동현은 꽤 체격도 있고 말이다.

“동현 씨 다음에 몸 좀 빡세게 만들어서 나랑 사진 하나 찍지 않을래?”

“저 벗는 건 이 정도가 한계예요.”

상반신 누드로 촬영하는 중이었다. 영화 때문에 몸 만들고 있는 것도 있어서 저쪽이 생각했던 것보다 몸이 좋았던 모양이었다.

“현진 씨를 의자 위에다가. 응, 그래. 그렇게. 현진 씨 살짝 얹는다는 느낌으로 발끝을 밑으로 하고 동현 씨 어깨에 발을 올려.”

다리 모델이 따로 들어와 강동현의 어깨에 발을 올린 장면을 찍었다. 강동현은 욕조의 안에 들어가 있었고 물이 반쯤 차 있었고 강동현은 바지를 입은 채로 물에 흠뻑 젖었다.

“동현 씨는 최대한 섹슈얼한 느낌이 들게~ 어, 오케이. 그것도 좋아.”

일단 정해진 포즈대로 정면 샷을 한 번 찍었다. 그 뒤로 고개의 각도를 조금 다르게 하거나 위치를 다르게 하여 찍었다. 후엔 자연스럽게 모델들끼리도 의논을 하여 자세를 바꾸곤 하였다. 강동현은 모델의 흠 하나 없는 아름다운 발을 손으로 잡고 종아리에 반쯤 얼굴을 파묻고 찍었다.

“아, 그거 좋다. 현진 씨, 아예 좀 더 앵글로 들어와서 동현 씨가 현진 씨 무릎을 잡고 허벅지에 얼굴을 금방처럼 해봐. 눈빛은 좀 더 섹시하게.”

강동현에게 점점 ‘더 섹시하게’를 외치는 감독이었다. 강동현도 두 번의 드라마가 잘 되며 S급까지는 모르더라도 A급 톱스타 반열 정도는 올라왔다. 원래 이 정도 되는 젊은 남자 배우들은 거의 벗지 않았다. 특히나 요즘 젊은 남자 배우들은 죄다 몸이 말라서 벗고 이 정도를 찍을 수가 없다. 남자 아이돌 중에서는 아예 섹시 쪽으로 컨셉을 잡은 애들이 꽤 나왔었지만 남자 배우들은 그다지 없기도 하고. 벗어도 잠깐 드라마에서 스쳐 지나가는 식이지 제대로는 거의 없다. 여자 배우들만큼이나 벗고 나오는 이미지가 박히지 않길 바란 탓도 있을 것 같다. 하지만 강동현은 아예 홀딱 벗고 나온다고 해도 이미지가 그런 쪽으로 판에 박힐 것이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연기에 대한 노력만큼이나 스스로의 실력에 자신이 있는 강동현이었다.

‘이것도 할 수 있을 때 하는 거지. 20년 뒤면 찍고 싶어도 찍지도 못한다.’

이런 생각을 하는 남자가 다른 사람 오금을 저리게 할 정도의 섹시함을 뿜고 있을 거라곤 생각도 못 할 것이다. 한창 정신없이 사진을 찍던 사진사는 순간 고개를 돌렸더니 스튜디오에 있는 여자들이란 여자들이 죄다 모여있는 것을 발견했다.

우리나라에 멋있는 남자 배우들도 있었고 연기를 잘하는 남자 배우들도 있었고 이 정도로 섹시했던 남자가 있었던가? 우월한 수컷 같은 느낌이 드는 배우였다.

‘정말 매력 있는 배우야. 정말 조만간에 정말 대박 나겠어.’

그렇게 생각하며 촬영감독은 연신 셔터를 눌렀다.

*

“하, 역시 심각하네요.”

이강유 비뇨기과의 두 마스코트 중 하나, 눈꼬리가 섹시하게 올라간 비뇨기과 계의 소악마, 정기연 간호사가 말했다. 그녀는 수술용 마스크와 복장을 한 채 환부를 바라보며 인상을 확 찌푸렸다.

“그렇네. 여느 때만큼 심각해.”

그리고 또 하나의 마스코트, 이강유 비뇨기과 자타공인 백의의 천사 조한나 간호사가 천사 같은 얼굴에 수심을 가득 담은 채 매우 안타깝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비뇨기과 계에 15년이 넘게 간호사로 있었는데. 정말 딱 평균적으로 심각하다.”

오희연 간호사가 더 이상의 반론은 있을 수 없다는 듯이 그렇게 말했다. 황경호가 환자를 대신하여 대신 한숨을 쉬며 집도의를 돌아보았다.

“선생님, 이번엔 ‘한국 남성의 음경 크기가 왜 계속 작아지고 있는가’에 대해 논문을 쓰는 게 어떨까요.”

이강유가 심각하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나야 덕분에 병원이 잘되니까 고맙긴 한데… 우리나라 어디서 방사능이라도 터진 건가. 점점 왜 이러냐.”

그래도 같은 조국을 이고 태어난 같은 남자로서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는지 의사가 참으로 비탄을 금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메스를 들었다. 김형세가 수술 전 정확한 기록을 위해 환자의 성기 사진을 자와 함께 찍었다. 정기연이 자신의 엄지를 들어 잠깐 크기를 가늠해보았다. 조한나가 그녀의 손을 두 손으로 잡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러지 마. 그러지 않아도 더 작다는 거… 너도 잘 알잖아.”

김형세가 바이탈을 살피며 순진하게 말했다.

“이 정도 추세면 십 년 뒤쯤엔 우리 병원이 진짜 전 세계 최고가 될 거예요.”

이강유가 수술을 시작하며 심드렁하게 답했다.

“지금도 세계 최고야.”

그러했다. 한국에서 최고인 비뇨기과 병원이 세계에서 최고인 것은 이미 몇십 년 전부터 기정사실이었다.

“그나저나. 만혼이 문제인 걸까요? 산모들 나이가 올라가서 남자애들 고추가 작아지는 건가.”

정기연이 고개를 갸웃했다. 오희연 간호사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산모의 나이가 올라갈수록 기형이 많아지는 건 산모의 나이 때문이 아니라 산모보다 남자의 나이가 더 많기 때문이라고 하더라. 여자는 태어날 때 감수분열 몇 번만 하고 난자가 계속 보관되기만 하지만 남자는 계속 분열을 하니까 당연히 돌연변이가 생길 확률이 높지. 그리고 특히 Y염색체는 엄청 작고 불안정하잖아. 사내아이들은 아버지의 나이가 올라갈수록 직격탄을 맞을 거야, 아마.”

“아아, 그렇겠네.”

정기연은 예전에 배웠던 유전학 내용을 떠올려보며 그렇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여자들한테 성형 많이 한다고 뭐라고 하는 거 좀 웃기지 않아? 우리 병원에서 이거 하는 사람들이 20대부터 70대까지 엄청나게 많다는 걸 사람들이 알기나 할까?”

“그렇지? 왜 이건 사람들이 주목을 안 할까.”

이제는 하도 익숙한 수술이라 눈 감고도 할 수 있는 수술진이었다. 이강유는 간호사들의 대화를 듣는 척 안 듣는 척하다가 대답해주었다.

“고추는 본 사람만 알 수 있는 거잖아. 사람들이 못 보니까 모르는 거야.”

“아, 그렇겠네요.”

성형 수술도 이것저것 부작용이 많은 편이지만 음경확대수술은 하면 백 퍼센트 부작용이 생겼다. 보형물을 삽입하는 순간 크기가 예전에 비할 바 없이 커지지만 자연 발기가 불가능해진다. 손으로 구부려서 펴거나 아니면 버튼을 눌려 발기시킨다. 사실상 진짜 고자가 되어가면서까지 억지로 고추를 크게 만드는 것이다. 안타까운 일이다.

‘그래도 이걸로 환자분이 인생에 자신감을 되찾게 된다면 그걸로 좋은 거야.’

황경호는 호흡기를 달고 있는 환자의 잠든 얼굴을 잠깐 바라보며 안쓰러운 마음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파이팅, 오늘의 음경확대수술 환자님.

“자, 끝났다.”

제대로 작동(?)하는지 검사까지 끝낸 다음에 간호사들에게 마무리를 시키고 의사는 밖으로 나갔다. 간호사들은 환부를 드레싱하고 밴디지를 한 후 정리를 하고 환자를 회복실로 옮겼다. 황경호는 담당 간호사가 되어 수액을 달고 환자가 깨어날 때까지 기다렸다. 호흡기를 떼주고 스스로 호흡하는 것을 도와준 다음에 나와서 차트를 정리했다.

집중을 해서 일을 하다 문득, 주변을 둘러보았다. 불안한 얼굴로 앉아있는 초진환자. 이젠 익숙해서 이쑤시개로 편안히 이를 파고 있는 환자. 신문을 보는 환자. TV를 보는 환자. 휠체어에 앉은 환자를 데리고 가는 간호사. 수다를 떠는 간호사. 환자를 안내하는 간호사. 차트를 심각한 표정으로 보고 있는 의사. 많은 사람들이 병원에 있었다. 넓은 병원이 좁게 느껴질 정도로 말이다.

황경호는 여기에 있기 싫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런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리면 좋겠다는 생각이 갑자기 든 것이다. 아무런 단서도 없이 갑자기 든 생각이라 그 생각을 한 본인이 더 당황스러웠다. 지금 당장 사라져서 뭘 어쩌겠다고, 스스로에게 그렇게 중얼거리며 황경호는 도리질을 하고 일에 집중하려고 노력했다.

퇴근 시간이 되어 정리를 하고 동료들과 인사를 한 후 밖으로 나오니 어쩐지 한숨이 나왔다. 주말을 앞두면 막막하다. 뭘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저 부지런히 자신이 아무 생각도 할 수 없도록 스스로를 여우 몰이하듯 몰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건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아, 오늘 그 환자는 진짜 너무 작았지… 거의 신생아 수준이었어. 진짜 내가 지금껏 봤던 환자들 중에서 제일 작았다. 아무리 봐도 오늘 이강유 선생님 미희한테 차인 거 같지? 정말 내가 한 말 때문인가? 큰일이네. 선생님 이번엔 정말 장가가실 것 같았는데.’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결국 집으로 향하지 않고 다른 데로 향했다.

“어, 경호야. 왔니?”

손님이 어지간하게도 없는 호프집이었다. 50대 근처로 보이는 30대 젊은 사장은 황경호를 반갑게 맞이했다.

“소주 한 병이랑 맥주 두 병에 안주는 형님이 추천하는 걸로 해주세요.”

“우리 단골이 주문하는 대로 해드려야지.”

그렇게 호프집 사장은 물장사하는 사람답게 서글서글한 태도로 황경호와 대화를 나누었다. 형, 동생 사이가 된 지도 꽤 되었다. 그때 강동현이랑 술 먹을 때야 정말 기분이 거지 같았지만, 이 호프집은 마음에 들었다. 음식이 맛있는데도 사람이 없다. 게다가 사장 또한 성품이 좋았다. 세상에 고추가 고장 난 한국 남자처럼 예민하고 성가신 존재가 없다. 그런 사람들의 기분을 맞추며 살아야 했던 황경호였기에 더더욱 저 자연스럽고도 따뜻한 인품이 놀랍고 좋았다. 언제나 고수는 고수를 알아보는 법이다.

“근데 말이야. 매출 올려주는 건 나야 감사한 데….”

호프집 사장, 김태형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황경호를 바라보았다. 소맥을 홀짝이던 황경호는 김태형을 올려다보았다.

“너 거의 일주일에 다섯 번은 술 먹는 거 같은데… 속은 괜찮냐? 원래 술을 좀 먹었었어?”

얼굴을 보니 뽀얗고 어려 보이는 게 술을 달고 살았을 얼굴이 절대 아니다. 김태형은 걱정스러운 어투로 말을 이었다.

“안 먹던 사람이 술 먹으면 정말 속 다 버려. 그런 사람들은 알콜을 분해하는 효소가 없단 말이야. 그것도 다 먹다 보면 만들어지는 거라… 이제까지 술 안 마시는 좋은 버릇 들였으면 앞으로도 쭉 안 마시는 게 제일 좋단 말이지.”

“아니, 이 형은 물장사가 손님을 계속 내쫓으려고 해.”

“동생 같으니까 하는 말이지.”

“그러니까 형 가게가 잘 안 되는 거야. 나 같은 호구는 잘 뽑아먹어야지.”

“뭐라냐. 너 몇 살이야. 어디서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게.”

“큭큭큭. 아, 근데 형, 나 생각보단 안 어리다. 다들 나 한 스무 살 정도로 보더라.”

“응? 너 그 정도 아니었어?”

“스물여섯 살입니다. 한 달만 있으면 일곱이야.”

“그래? 좋을 때다.”

그런가. 황경호는 그냥 희미하게 웃으면서 술을 들이켰다. 김태형은 안주를 내밀었다. 뼈가 없는 닭고기, 감자와 당근을 미리 제조해둔 야채 우린 물과 간장, 고추장, 마늘, 물엿으로 양념을 해서 볶고 적당한 때에 양파와 파와 아스파라거스를 넣어 은근하게 졸였다. 그리고 접시에 올리고 이름 모를 잎채소를 위에 뿌렸다. 그리고 곁에는 부드러운 스크램블 에그, 과일 몇 가지와 한 입 거리로 뭉쳐둔 주먹밥까지 함께 했다.

“우와… 형 이렇게 음식 내면 남는 게 있어?”

메뉴에도 없는 음식을 해내는 사장이었다. 새삼 예뻐서 폰으로 사진도 찍었다. 다시 볼지는 모르겠지만 그냥 이렇게 먹어버리기엔 아까웠다.

“너 저녁도 안 먹고 온 거잖아. 손님 없을 때나 해주는 거지.”

“잘 먹겠습니다.”

일단 닭고기를 하나 포크로 찍었다. 기름이 살살 돌아 윤기가 났다. 다른 가게에서나 볼 법만 그런 새빨간 닭볶음이 아니었다. 생각보다 양념이 적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먹었을 땐 딱, ‘맛있다!’ 이 한 마디만 생각났다. 매운맛과 단맛으로 승부를 보는 그런 맛이 아니었다. 미리 진하게 우린 야채 우린 물과 닭 육수의 풍부하고 건강한 맛과 쫄깃하면서도 맛있는 닭고기가 일미를 이룬 느낌이다. 황경호는 여느 때와 같이 감탄하며 김태형을 바라보았다.

“형은 술집이 아니라 음식점을 했어야 했어.”

그렇게 칭찬을 하자 매번 듣는 칭찬임에도 김태형은 슥 코를 만지며 쑥스러워했다.

“아니, 뭐 그 정도는….”

“사장님 저 출근했어요~.”

여드름이 그득그득한 어린 청년 하나가 그렇게 활기차게 외치며 가게 안으로 들어왔다.

“오냐.”

“경호 형. 또 왔네. 오, 대박. 맛있겠다. 사장님, 저 이거 먹어봐도 돼요?”

“야. 넌 손님 걸 뺏어 먹으려고 하면 어쩌냐.”

“먹어.”

이 지지리도 장사가 안되는 호프집 알바의 이름은 이신현으로 이제 갓 군대를 제대한 까까머리 22살이다. 작년 2월에 입대해서 올해 11월 전역했다고 한다. 아직 머리털도 짧다. 황경호의 저녁 겸 안주를 한 입 먹다가 옆에 그냥 앉았다.

“어이구. 월급에서 깐다.”

“네~.”

저렇게 말해도 한 번도 월급을 깐 적은 없었다. 이신현은 황경호보다도 훨씬 더 많이 안주를 먹으며 대화를 했다. 그러다가 사장 눈치를 슥 본 알바는 또 슬쩍 황경호의 눈치를 봤다가 물었다.

“아, 근데 경호 형… 강동현이랑 무슨 사이야? 그때 같이 왔던 사람 강동현 맞지?”

사장이 더 놀라서 이신현에게 야! 하고 소리를 쳤다. 황경호는 그냥 선선히 웃으면서 대답했다.

“어, 맞긴 한데….”

“지금까지 물어보고 싶었는데 계속 사장님이 안 된다고 해서… 원래 강동현이랑 아는 사이였어? 와, 나 진짜 팬인데.”

“야, 넌 무슨 군대 제대한 지도 얼마 안 된 애가 남자 연예인 좋다고 이렇게 공공연하게… 용기 있다, 너.”

취향은 인정해주겠다만… 황경호와 김태형이 동시에 참 이상하다는 듯 쳐다보았다.

“아~! 형들 지금 무슨 생각하는 거예요! 아씨, 진짜. 내가 웬만해선 남자 연예인 팬이라고 얘기 안 하는데. 연기를 너무 잘해서! 그래서 팬이라구요. 일단 우리 여동생이 완전 빠순 수준이라니까! 엄마랑!”

“아, 그래….”

무척이나 영혼 없는 반응이라 이신형은 어린애답게 좀 더 노발대발하다가 말을 돌렸다.

“일단 그러니까, 내가 궁금한 건… 경호 형은 강동현이랑 어떻게 아냐는 거지. 친구? 아마… 나이가 비슷한 거 같은데.”

“아, 뭐… 동갑이긴 한데… 그냥 이… 아니라. 오다가다 알게 된 거지.”

일이라고 말할 뻔했다. 둘 다 황경호가 비뇨기과에서 일을 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에 ‘일’에 이응 자도 꺼내면 안 되는 거였다. 물론 황경호가 비뇨기과에서 일한다는 걸 모르더라도 절대 일로 누군가를 안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나중에 황경호가 거기서 일을 한다는 걸 알아낸다면, 어쨌든 누군지 모를 그 남자의 인생이 바뀔 수도 있을 만큼 중차대한 일이었기 때문이다(정말로). 그는 어쨌거나 원장 이하 모두가 직업의식이 매우 투철한 이강유 비뇨기과 직원 일동 중 하나였다.

“어렸을 때부터 안 거야?”

“아니, 그런… 건 아니고… 내가 무슨 일이 좀 있었는데 우연~히 날 한 번 도와줘가지고… 어쨌든 그런 게 좀 있어서 알게 된 거지. 친하거나 이런 건 전~혀 아니야.”

“아, 그래도 좀 친해 보이던데. 막 연락처 있고 그런 거 아냐?”

“어… 연락처가….”

“아니 아니, 달라는 건 아니고… 그냥… 연예인 아는 사람 처음 봤어. 군부대 온 아이돌이나 입대한 놈들 몇몇은 본 적 있는데… 확실히 배우는 다르더라… 나 진짜 사람이 오징어가 된다는 게 뭔지 알겠더라고.”

“뭐… 그 인간이 외모 빼면….”

황경호가 피식 웃었다. 이신현이 완전 손사래를 쳤다.

“와, 형. 진심 강동현은 그 수준이 아니라니까. 내가 원빈을 직접 봐도 이 정도일까 싶더라.”

“얘 진짜 팬이네.”

신기한 놈이야, 하면서 사장이 한마디 했다.

“그래서 내가 진짜 바라는 건 없고… 사인 한 장만, 형님.”

“하하… 물어는 볼 건데 그 인… 아니 강동현이 나한테 그런 거 해주고 하진 않을 거 같은데?”

“응? 왜? 서로 술도 마실 정도잖아?”

그때 김태형이 안주를 하나 더 만들어서 내놓았다. 이번엔 간단한 김치볶음밥이었다. 잘게 썬 김치와 버섯, 완두콩 등을 넣은 것이었다.

“아, 이것도 맛있겠다.”

그렇게 자연스럽게 화제가 전환되었다.

“초록이는 어때? 너한테 계속 들으니까 남의 애 같지가 않아서… 다음에 음식이라도 좀 해서 갈까 싶던데. 애가 못 먹는 거 있니?”

김태형이 제시간 되면 닥쳐올 손님들의 음식을 하기 위해 밑준비를 계속하며 물었다. 아무래도 지금은 술 마실 시간이 아니라 손님은 황경호밖에 없었다.

“12월 말에 수술하는데… 그 전에 먹고 싶은 거 사주면 좋을 거 같다는 생각은 했었는데….”

“그래? 애기 뭐 좋아하니?”

“애가… 먹어본 음식도 별로 없어. 고아원이나 병원 음식만 먹어봐서….”

“에휴… 무슨 말인지 알겠다. 내가 알아서 좀 준비해야겠네. 언제 괜찮을까? 이번 주 주말도 괜찮아?”

“내가 병원에 전화해보고 되는대로 연락해줄게요. 못 먹는 음식 있는지도 물어보고.”

“그래. 그래라.”

그렇게 주중을 보내고 여느 때처럼 주말에는 초록이를 만나러 병원으로 갔다.

“안녕~ 우리 초록이 잘 있었어??”

황경호는 초록이를 들어 올리며 빰에 입을 맞췄다. 초록이는 굉장히 좋아하며 황경호의 목을 끌어안았다.

“오빠~~ 보고 시퍼떠.”

“오빠도 우리 초록이 보고 싶었어. 여기~ 태형이 삼촌이라고 하는데~ 우리 초록이 맛있는 거 먹여주고 싶다고 음식 해주셨어.”

“안녕, 초록아. 아저씨 처음 보지?”

“응~.”

“우리 초록이 씩씩하네. 아저씨가 우리 초록이 뭐 좋아하는지 몰라서 너무 많이 해온 거 같다.”

“형, 괜찮아요. 그럴까 봐 얘 데려왔거든요.”

“안녕하세요, 형님.”

황경호는 김형세를 데리고 왔다. 황경호와 김형세, 김태형과 이신현까지 함께 하니 언제나 허전할 초록이의 병실이 우글우글해졌다. 어째서인지 모르겠는데, 암에 걸린 어른들은 다들 얼굴이 어두운데 소아병동 아이들은 표정이 정말 밝아 보인다는 인상을 받은 김태형이었다.

“우리 초록이 정말 귀엽게 생겼네. 어휴. 초록이 같은 딸 하나 있으면 좋겠다.”

게다가 초록이는 애가 낯을 가리지도 않아서 누가 집어가도 모를 정도였다. 너무나 귀여워서 계속 미소가 지어졌다.

“식당 가서 먹을까?”

김형세가 초록이를 한 손으로 목말을 태우고 다른 손으론 김태형이 어마어마하게 싸 온 도시락 중 하나를 들었다. 황경호는 소아병동 간호사들이랑 이야기를 나누었고 이신현과 김태형은 초록이가 귀여워서 계속 발가락을 만졌다. 원래 아기 재롱 하나 보겠다고 어른들이 아기 앞에서 재롱 피우는 거 아니겠는가. 노래 부르는 거 한 번 들어보겠다고 다들 초록이 앞에서 마구 재롱을 떨었다. 초록이는 자기를 만나러 온 어른들의 정성을 알아주는 건지 평소보다 잘 먹었다.

“그럼 너랑 형세는 전부터 초록이랑 알았던 거야?”

“저도 우리 초록이 본 지는 한 달 정도 됐나? 그래요. 경호가 전에 이강유 선생님 외진 왔을 때 우연히 봤다고 했었거든요.”

“그렇구나.”

“우리 초록이 뭐가 제일 맛있었어?”

“다 맛있었어~ 치킨이랑~ 밥도 맛있었구~.”

“어이구, 그랬어요?”

황경호는 사람들의 밝은 표정을 보며 문득 병원에서와같이 모든 게 아득하고 멀게 느껴지는 걸 느꼈다. 또 이렇게 막막한 타인과의 간극. 역시 이번에도 왜 이런 기분이 드는지 모르겠는 황경호였다. 다만 우울하다는 생각과 그다지 전만큼 우울하지 않다는 생각이 동시에 드는 것을 느꼈다.

‘참….’

사람의 마음이란.

*

“안녕하세요, 에어리어TV 시청자 여러분! 지금 화보촬영장에 나와 있습니다. 네~ 요즘 가장 핫한 남자 모델은 여자 화장품 광고를 찍는다고 하죠. 자, 에어리어TV 오늘의 톱스타는~.”

카메라가 한창 촬영 중인 스타에게로 앵글을 돌렸다. 그는 새하얀 셔츠를 입고 바지는 깔끔하게 큰 키를 돋보이게 하는 슬림한 라인을 입었다. 셔츠는 앞섶이 다 열려있어 몸매를 은근히 드러내고 있었다. 예전에 찍었던 화보 촬영의 보충이 잡혀 강동현만 따로 찍고 있었다. 생각보다 광고주의 반응이 좋아서 제품별로 좀 더 사진을 찍은 것이다.

“네~ <연애출사표>가 막 종영을 하고 지금 가장 핫한 20대 남자 배우죠. 배우 강동현 씨입니다. 반갑습니다.”

“반갑습니다. 강동현입니다.”

“저번 드라마에 이어 이번 드라마도 평균 시청률 30%가 넘는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는데요. 기분이 어떠세요?”

정확하게 사람의 호감을 끄는 미소란 이런 것이라고 그림을 그리듯 보여주며 쑥스럽게 웃는 강동현이었다.

“다 감독님들과 스텝들 그리고 상대 배우분들이 모두 힘써주셔서 가능했던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더 기쁘고 좋은 것 같습니다.”

“<연애출사표>에서 유연경 역을 맡은 신서영 씨가 인터뷰하실 때 말씀하셨던 게 화제가 됐죠. 우리나라 흥행보증수표 여배우 중 하나이자 만인의 사랑을 받는 우리나라 최고의 미녀 중 하나인 그 신서영 씨께서 남자 배우들 중에 가장 미소가 아름다운 남자 배우로 강동현 씨를 극찬하던 모습이 굉장했죠. 표정이랑요.”

“하하하. 영광입니다. 신서영 씨 미소야말로 어디 비교할 데가 없죠.”

그렇게 인터뷰도 쓸데없이 길게 하고 나서 화보까지 마무리하고 나니 또 새벽이었다.

“동현아, 오늘도 수고했다. 많이 피곤하냐?”

“조금.”

“내일 아침 11시까지 인천 연수경찰서 근방에서 집합인데 일어나겠니?”

“언제 안 일어난 적 있어. 그냥 전화나 한번 해줘.”

“와… 벌써 12월 중순도 넘어간다. 올해는 정말 바빴다. 그치?”

“아… 오늘 17일이지.”

‘12시 지났으니까 18일. 그러고 보니 그 망할 간호사랑 약속한 날도 벌써 코앞이네… 벌써 5개월이나 지난 건가. 그 망할 계약서 쓰고 나서. 병원은 갔으려나 모르겠네.’

처음 계약서를 쓸 때 12월 31일에 그 간호사가 원하는 대로 죽여주기로 했다. 날짜를 보니 채 2주도 남지 않았다. 물론 요구를 들어주긴 했지만 그게 본 대가는 아니니까.

그래서 강동현은 충동적으로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매니저 형이 여자 친구냐고 물었지만, 그냥 무시했다. 전화 연결음이 계속 가다가 음성사서함으로 넘어갔다. 강동현은 아무렇지도 않게 다시 전화를 걸었다. 받을 때까지 걸 생각이라는 걸 알았을까. 두 번째에 바로 받아 놀랐다.

[…미쳤어요? 지금이 몇 신데 전화를 해요?]

“아, 지금 몇 신데?”

강동현이 생각 없이 물었다.

[세 시거든요… 뭡니까?]

벌써 그렇게 시간이 됐나. 강동현은 휴대폰에서 귀를 떼고 화면을 한 번 봤다가 다시 귀에 갖다 대었다.

“아니… 그냥.”

[끊습니다.]

“야!”

큰소리를 내자 매니저가 돌아보았다. 강동현은 짜증스럽게 인상을 찌푸린 채 목소리를 낮추었다.

“뭐해.”

[아, 정말 왜 전화하신 건데요. 아무것도 아니면 진짜 끊습니다.]

“좀 군말 없이 대답 좀 하면 어디가 덧나냐? 얘기 좀 하다 보면 어련히 말할까 봐.”

사실 딱히 용건이 있어서 전화한 것은 아니었지만. 강동현은 편하게 시트에 머리를 대고 기대었다. 눈을 감았다.

[자고 있었어요.]

들으라는 듯이 큰 한숨 소리 뒤로 그렇게 대답하는 황경호였다. 불합리함에 익숙해진 사람이란 결국 체념이 빨라질 뿐이다. 강동현이 피식 웃었다.

“그거 한마디 하는 게 그렇게 힘들었어?”

[예, 예.]

질문을 제대로 듣기나 한 건지 건성건성 대답하는 황경호였다. 강동현은 그게 또 웃겨 피식 웃었다.

“너 어디 살았더라.”

[왜요.]

강동현은 피곤함에 취해 아무 생각 없이 중얼거리듯이 대답했다.

“얼굴 좀 보자.”

[왜요.]

‘그러게 왜지…’

강동현은 반쯤 잠에 취한 정신으로 스스로에게 되물었다.

“아니야. 그냥… 좀 피곤하네.”

[아~, 진짜 왜 전화한 건데요? 끊어요.]

“너 말이야. 12월 31일 날… 어떡할 거야, 정말로.”

[…….]

“저번에 병원에서 말했지. 이제 그런 생각 많이 없어졌다고… 그럼 괜찮은 거야? 어쩔 거야. 스케줄 비워?”

[…이거 물어보려고 전화한 거였어요?]

“뭐… 그렇네.”

[…….]

그러자 한참을 대답이 없는 황경호였다. 강동현은 그 침묵을 그저 기다리고 있었다. 대답이 없어도 전화의 상대편에 누군가가 있는 이 느낌이 그리 싫지 않았다.

[모르겠…어요.]

“그래. 일단 약속은 약속이니까 그날 비워두긴 할게.”

[네….]

강동현은 눈을 떠서 잠깐 창밖을 바라보았다. 주홍빛 가로등 사이로 반짝이는 물빛이 보인다. 한강이었다.

“그날… 그냥 술이나 먹을 수 있었으면 좋겠네. 그냥 1년 정도 더 살아보고 결정해라.”

[그럼 저보고 당신한테 1년이나 더 괴롭힘을 당하라구요?]

“하하. 말이 그렇게 되나.”

[진짜 이 인간이 술 처마셨나… 끊어요.]

강동현은 또 피식 웃었다.

“그래… 잘 자.”

배우는 역시 얼굴보단 목소리라고. 피곤함에 취해 나직하게 중얼거리듯 말한 인사말이 귀가 간지러울 정도로 부드러웠다. 본인이 의도한 건 아닌 것 같지만, 저쪽은 바로 끊을 것같이 하더니만 잠깐 멈칫했다. 그리고 전화를 끊었다. 강동현은 피곤함에 죽을 듯 깊은 한숨을 내어 쉬며 의자를 더욱 뒤로 젖혔다. 매니저는 한참을 백미러로 그를 힐끗거리다가 결국 참지 못하고 물었다.

“너 혹시 바람피우냐?”

“뭐라는 거야, 형.”

*

“내일이 초록이 수술이라고 했나?”

돕는 사람들은 많을수록 좋다. 딱히 자랑을 하고 싶은 건 아니었지만, 주변 사람들에게 초록이 얘기를 많이 했고 참 다행스럽게도 주변 사람들이 정말 좋은 사람들이었기에 딱한 처지의 초록이를 많이 도와주려고 했다. 고마운 일이다. 괜히 마음이 따뜻하다.

12월 27일. 내일은 드디어 초록이의 개두 수술을 하는 날이었다. 종양이 안 좋은 위치에 있어 수술을 해도 죽을 확률이 90퍼센트나 됐지만 하지 않아도 1년도 채 못 살 거라고 했다. 초록이는 고아라 수술을 결정할 수 있는 사람들은 고아원 관련자들이었는데 사람들은 다들 좋았지만 돈 문제로 아예 수술을 못 받을 예정이었다.

그러다 강동현의 돈을 초록이에게 기부하고 뒤에 황경호가 초록이 얘기를 주변 사람들에게 했더니 조금씩 도움이 모여 결국 수술비를 마련할 수 있었다.

“아기들은 성인들이랑 다르게 회복력이 굉장하지… 잘될 거야.”

이강유가 황경호의 어깨를 두드렸다.

“네. 그럴 거예요.”

“수술 환자들이 있어서 나는 못 가지만 형세랑 같이 내일 가.”

“네. 감사합니다. 내일 전화드릴게요.”

황경호는 퇴근을 하자마자 Y대 병원으로 달려갔다. 고아원 사람 두 분이 와있었다.

“경호 씨 왔어요.”

“아, 원장선생님도 오셨네요.”

“네… 수술이 워낙 위험하니까요….”

초록이는 병실 안에 있었고 어른들은 밖에 있었다. 병실 안에서 초록이가 황경호와 김형세를 발견하고 마구 팔을 흔들었다.

“오늘은 선생님들이랑 오빠들이랑 다 같이 자는 거야, 초록아.”

“우와!”

초록이가 웃었다.

“그리고 초록이 오늘 약속한 대로 머리카락 잘라야 해요.”

고아원 선생님이 그렇게 말했다. 머리카락 잘라야 한다고 할 때마다 울던 초록이였지만 오늘은 밝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괜짜나. 머리는 또 나자나.”

“그렇지… 우리 초록이 어른스럽네?”

아이란 얼마나 사랑스럽고 또 얼마나 약한가. 내일 수술을 끝마치면 이 아이는 살아있을지, 그렇지 않을지 모르는 일이었다.

“수술 끝나면 오빠가 자전거 가르쳐준다고 해떠.”

초록이는 또래 아이들보다 작았다. 물론 또래 아이들만 했다 하더라도 두발자전거를 타기엔 무척이나 어린아이다. 황경호는 ‘애써’ 웃었다. 버튼을 누른 듯 언제 어디서나 웃을 수 있는 그였기에 드문 일이었다.

“그지?”

“응. 오빠가 가르쳐주기로 했지?”

김형세나 다른 선생님들은 어쩐지 의연해 보였다. 언제나 가면을 뒤집어쓴 듯 잘 웃는 황경호였지만 역시 쉽사리 미소가 나오지 않았다.

“아무리 그래도 표정 좀 풀어라. 애 앞에서.”

김형세가 이렇게 말할 정도였으니 다 말했다. 항상 김형세를 생각 없는 육식계 바보 정도로 취급했던 황경호는 두 손으로 마른세수를 하며 답했다.

“너 데려오기 잘한 거 같다. 나 초록이 얼굴을 못 보겠어.”

“그러지 마.”

김형세는 황경호의 어깨를 두드렸다.

“나 어렸을 때 나 정말 귀여워해주시던 우리 할머니가 돌아가셨거든.”

김형세가 물을 마시며 그렇게 운을 뗐다. 황경호가 그를 바라보았다.

“어른들이 아이들은 누구 죽는 거 보는 거 아니라고 다 밖에 놀러 가라고 밖에 보내버렸거든. 할머니가 돌아가실 때 나 한 번만 더 보고 싶으시다고 그렇게 말씀하셨다던데.”

김형세가 어깨를 으쓱했다

“봤다면 좋았을걸. 그런 생각이 지금도 든단 말이야. 그러니까 볼 수 있을 때 많이 봐둬야 해. 게다가 초록이는 우리 할머니처럼 나이가 많았던 것도 아니고… 그러니까 더 잘 봐두라고.”

황경호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들어가자.”

김형세의 말대로 아이랑 하루종일 즐겁게 놀고 아이를 안심시키면서 놀이처럼 머리를 깎고 잠들 때까지 동화를 읽어주고 잠들고 나서는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정이 들고 나면… 사실 누구 아이든 상관없는가 봐요.”

초록이를 지긋이 바라보면서 황경호가 그렇게 말했다.

“그렇지. 아이들은 다들 사랑스러우니까.”

“…초록이 괜찮겠죠?”

황경호는 누구도 대답해줄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또 이렇게 물었다. 고아원 원장선생님은 조용히 답했다.

“잘 되어야지.”

이렇게 어린아이가 무슨 죄가 있다고 이런 병에 걸리는 걸까. 황경호는 신 따위 있든 없든 신경 쓰지 않았지만 혹세무민하는 많은 종교들이 말하는 인간을 만들고 사랑한다는 신은 없다는 것을 절절히 깨달았다. 죄도 없는 어린아이에게 이런 몹쓸 병을 주고 이것 또한 어떤 시험의 일종이고 그가 가진 큰 계획의 일부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입을 찢어버릴 것이다. 그렇게 거의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 그리고 아침에 수술에 들어가는 초록이와 인사를 했다.

“우리 초록이… 오빠가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게. 선생님들이랑 형세랑 같이.”

“응. 빠빠이. 조금 이따 바.”

초록이는 미소를 지었다. 저 쪼끄만 게 뭘 알고 저러는 것일까. 황경호는 그대로 굳은 얼굴로 의자에 앉았다.

초록이는 부모가 없었다. 아이가 병이 있어서 버린 것인지 아니면 그저 키울 수 없어 버린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머리가 아프다고 우는 아이에게 그저 두통약만 먹이다가 검사를 받게 되고 태어날 때부터 가진 뇌종양이 발견되었다.

그래서 초록이는 곧 죽을 예정이었다. 부모도 없고 돈도 없는 여섯 살 난 여자아이가 무슨 수로 수술을 받는단 말인가. 그저 하루하루 고통만을 경감시키며 죽을 날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도 마치 수많은 가능성을 지닌 다른 여섯 살 난 어린이들처럼 초록이는 사랑스럽고 귀여웠다. 밝고 따뜻했다. 아무도 아이에게 죽음을 가르쳐주지 않아서일까? 아니면 아이는 다 알면서도 좌절하지 않은 것일까. 초록이는 여섯 살이 되면 두발자전거를 타고 한글을 배우고 ABC를 배우고 농구를 배울 것이라고 많은 계획을 세웠다. 어쩌면 아이는 어른들보다도 더욱 어른스럽게 주변을 배려하고 있었던 것뿐일지도 모르겠다.

10시간의 대수술이 끝나고 났을 땐 눈물이 왈칵 터졌다.

“경과를 봐야 알겠습니다만 일단 종양은 잘 제거가 되었습니다. 이젠 하늘에 맡겨야죠.”

작은 몸에다 엄청나게 많은 호스와 바늘이 꽂혀있었다. 집중관리병동으로 들어간 초록이는 옮겨가는 새에 잠깐 볼 수 있었을 뿐이지만, 분명히 살아있었다.

살아있다.

*

“많이 아파?”

“으으응….”

초록이는 거의 움직이지 못했다. 매달린 호스의 무게만 해도 장난이 아닐 것이다. 유도 수면에 빠져있다가 상태가 안정되면서 아이를 깨우고 몇 가지 테스트를 했다. 운동기능 쪽에 장애가 남을지도 모르지만, 재활을 통해서 충분히 극복 가능할 정도라는 의사의 말을 듣고 김태형과 이신현까지 모두 얼싸안고 기뻐했다.

“다행이다, 진짜… 앞으로도 조심해야겠지만 진짜 기적이다, 기적. 초록이는 진짜 훌륭한 사람이 될 거야. 원래 어렸을 때 고생하는 애들이 나중에 다 크게 되려고….”

김태형이 눈물을 훔치며 그렇게 말했다.

“경호야, 고생했다.”

“아냐. 내가 뭘 한 게 있다고… 그냥 초록이랑 놀아주고 한 거밖에 없는 걸… 초록이가 정말 대단한 거지.”

“그래도… 고생했다. 너도 많이 힘들었지?”

김태형은 그렇게 별말 없이 황경호를 안아주었다. 황경호는 미소를 지었다. 고맙다고 인사를 했다. 무엇도 남는 게 없는 인생이라고. 어떤 것도 열심히 해본 적이 없고 어떤 사람과도 깊게 교류하며 살아보지 못했다. 사람들이 나쁘다고 생각해본 적도 없지만 좋다고 생각해본 적도 없었다. 그런데 세상에는 이렇게나 좋은 사람들이 많았다. 아무런 연고도 없는 어린아이의 가엾은 목숨을 걱정해주는 사람들. 고아원 사람들. 형세. 태형이 형. 신현이. 이강유 선생님….

새삼 감사함을 느꼈다. 아이의 생명력에, 이렇게 좋은 사람들이 주변에 있다는 것에 감사했다. 초록이뿐만 아니라 자신도 어쩐지 구원받은 거 같았다.

“어떻게 지나간 줄 모르겠다. 요 며칠… 벌써 31일이네.”

“그러게요. 내일이면 벌써 새해네요.”

김태형과 이신현이 그렇게 말했다.

“그래도 내 평생 이렇게 감동적이고 행복했던 적이 없었던 거 같다. 우리 초록이… 나 정말 아이들이 이렇게 강한 존재라는 걸 처음 알았다.”

김태형은 괜히 또 눈물을 찍어내며 그렇게 말했다.

“저도 군대 갔다 와서 많이 빠져있었는데… 진짜 열심히 살아야지 안 되겠어요. 저런 꼬맹이도 저렇게 열심히 죽을 힘을 다해 사는데….”

이신현이 코끝을 훔치며 말했다. 초록이는 주변의 사랑을 받은 이상의 놀라움 감동을 나이깨나 먹은 어른들에게 돌려주고 있었다. 하염없이 유리창 너머의 아이를 보고 있다가 결국 다들 쫓겨나왔다.

“어휴. 이제 가야겠다. 여기 더 있으면 손에 아무것도 안 잡힐 것 같다.”

“그러게요. 오늘은 선생님들이 계시는 거야?”

“응. 그럴 것 같아.”

“형은?”

김태형과 이신현은 가게를 열러 갈 것이다. 자신을 향한 질문에 황경호는 미소를 지었다.

“집에 가야지. 며칠 동안 집에 안 들어갔으니까.”

“그래. 너도 고생했다. 우리 새해 돼서 반갑게 술 마시자. 아무래도 우리는 오늘 같은 날이 대목이라… 오늘 술 한잔 못 해서 아쉽네.”

“아니에요, 형. 와준 것만 해도 너무 고맙다.”

정신없던 며칠이었다. 지하철역에서 서로 헤어지고 나니 왠지 긴장이 풀리면서 어깨에 힘이 쭉 빠졌다.

‘집….’

하도 며칠 동안 많은 일이 일어나서 좀 탈력감에 휩싸였다… 무작정 지하철에 올라탔다. 이제 해가 질 때쯤이라… 연말이다 보니 길거리에 온통 사람들뿐이다. 병원에서도 그렇고 여기도 그렇고. 사람이 없는 데로 가고 싶다. 이 한 생각만 가지고 무작정 가다 보니 어느새 코끝이 에일 정도로 추운 마포대교 위다.

“하아….”

어째서 여기 온 건지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입김이 영혼처럼 흩어진다. 한 걸음 걸을 때마다 난간에 불이 켜졌다. 삶을 격려하는 문구다. 조용했다. 차가 지나다니는 소리가 요란했는데도 조용하게 느껴졌다. 주변 가까이에 좋은 사람들이 있는데도 거리감을 느껴 불쾌했는데 지금은 낯선 사람들과의 이 거리감이 좋다. 아무도 나를 보고 있지 않은 이 평온한 느낌… 다리의 한가운데쯤 오자 저절로 발걸음이 멈췄다. 날이 맑았다. 하늘엔 달이 떠 있다. 난간으로 무심코 손을 뻗었다.

우우웅.

휴대폰 진동이 울렸다. 황경호는 화면을 보지도 않고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너 어디야.]

“…….”

황경호는 휴대폰을 귀에서 떼고 화면을 확인했다. 그리고 다시 귀에다 댔다. 상대방은 이쪽이 듣든 말든 말을 계속하고 있었다.

[…해서 일이 이제 끝났다. 어디야.]

“…오늘 같은 날은 시상식도 있고… 그렇잖아요. 참석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

[무슨 소리야. 예전부터 스케줄 빼놨구만. 어디냐고.]

“저….”

황경호는 다시 입김이 흩어지는 걸 보았다.

“마포대교예요.”

[….너 쓸데없는 짓 하지 말고 거기 가만히 있어라.]

상대방의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전화가 뚝 끊겼다. 뭐, 이런 남자라는 거 몰랐던 것도 아니고. 난간으로 다가갔다. 거기에 팔꿈치를 대고 가만히 강물과 야경을 바라보았다. 주홍빛으로 둘러싸인 서울은 따뜻해 보였다.

우우웅. 다시 전화가 왔다. 황경호는 전화를 받았다.

“네….”

[…연말에 그 애기 수술한다고 했던 거 같은데. 했어?]

강동현이 다시 전화를 건 것이었다. 운전을 하는 중인지 내비게이션 안내음성이 들린다.

“네….”

[….잘 됐어?]

“네. 잘 됐어요. 아직 위험하긴 하지만… 말도 할 수 있고… 운동장애 올 거라곤 하는데 어려서 재활만 충분히 하면 티도 안 날 거래요.”

[다행이네.]

황경호는 새삼 그의 목소리가 드라마 속의 그 목소리처럼 들렸다. 좋은 목소리니까 말이다. 조금 불공평하네. 아무리 알맹이가 썩 좋지 않아도 겉이 번지르르하니 그럴듯해 보인다는 건 확실히 많이 불공평한 거구나. 강동현과의 첫 만남부터 지금까지 그에게 호감을 가질 새가 없어서 항상 화가 나 있었고 이런 생각은 해본 적이 없었다. 작품 속의 그는 판타지니까 애초에 이런 생각 안 해봤고…. 황경호는 손가락이 떨어질 정도로 차가운 난간을 손으로 잡고 있었다. 근데 왠지 그 아픔이 기분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 안 오셔도 돼요, 도은혁 환자님. 바쁘실 텐데요. 병원도 계속 못 오셨잖아요.”

[야,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 거의 다 왔으니까.]

“왜요. 제가 마포대교에 있다니까 자살할 거 같아요?”

[그래.]

“제가 왜 죽어요. 초록이 수술도 잘 끝났고 다 괜찮은데.”

[니가 살고 싶은 생각이 조금이라도 드니까 나한테 니가 어디 있는지 말한 거잖아. 보인다.]

빵빵. 금방 이 인간이 무슨 말을 했는지 생각도 채 해보기 전에 클락션 소리가 크게 들렸다. 황경호는 화들짝 놀라서 돌아보았다. 조수석 창문이 내려가고 선글라스를 낀 잘생긴 남자가 언뜻 보인다. 황경호가 그냥 가만히 돌아보고 있자 클락션을 더 울렸다.

“야! 빨리 타! 차 더 밀리기 전에!”

그래도 황경호가 머뭇거리고 있자 클락션을 계속 울렸다.

“뭘 해도 내가 해! 그게 약속이었잖아! 빨리 와!”

정말 말하는 건 다 지키는 남자다. 그래서일까. 황경호는 천천히 차로 다가갔다. 차가 좋아서 그런가. 조수석에 타자마자 시트 안으로 몸이 가라앉는 것만 같았다.

“피곤해 보이네. 애 신경 쓰느라 제대로 먹고 자지도 못한 거 아니야?”

오랜만이었다. 강동현도 바빠서 병원에 한 달이 넘게 안 왔고 전처럼 연락을 한 것도 아니었다. 그때 그렇게 술 마시고 다음 날을 끝으로 처음 보는 거다. 중간에 전화를 한 번 받긴 했지만….

“잊어버렸을 줄 알았는데.”

“너 같으면 누구 죽여주기로 한 날을 까먹겠냐.”

황경호가 중얼거리자 강동현이 그렇게 되받아쳤다.

“정말 죽여줄 거예요?”

황경호가 강동현을 돌아보았다. 그때 술 마신 날처럼 애가 나사 하나 빠진 듯 정신이 팔려 보였다. 술 냄새는 안 나는데. 정말 피곤해서 그런 건가. 강동현은 대답을 하지 않고 가만히 황경호를 보았다. 물결처럼 차가 흘러가는 마포대교의 위에서. 시끄러운 침묵이다. 강동현은 아무 말 없이 손을 뻗었다. 뭔지 쳐다보다가 그 손이 자신의 목을 꽉 죄자 황경호는 소스라치게 놀라 강동현의 팔을 두 손으로 잡았다. 예상외로 쉽게 떨어졌다.

“정말로 죽고 싶어 하면.”

강동현은 그렇게 말하며 선글라스를 벗고 차를 출발시켰다. 황경호는 눈을 크게 떴다. 약간 정신이 든 얼굴이었다. 그는 미간을 주물렀다. 정말 피곤했던 거뿐인가. 강동현은 가만히 옆의 기척을 살폈다.

“그동안 잘 지냈어? 한 번 더 연락할까 싶었는데. 바빠서.”

“저야 뭐….”

정말 오랜만에 만났는데 할 말은 없다. 그런 사이다. 별별 짓을 다 했어도 말이다. 강동현은 별로 캐묻지 않고 말을 돌렸다.

“어차피 오늘이 끝인데. 너 저번에 해야 했던 요구 말 안 했잖아. 말해.”

황경호가 그를 돌아보았다. 강동현은 자기가 오히려 더 안색이 안 좋은 얼굴로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는 한숨처럼 말했다.

“이제 더 이상 너한테 이상한 짓 안 할 테니까. 걱정 말고 말해. 내가 들어줄 수 있는 거면 다 해줄 테니까.”

“딱히… 요구할 만한 건 없어요. 이제 와서….”

“참나… 욕심이 없는 건지….”

강동현이 혀를 찼다.

“그냥… 바다나 한번 보고 싶네요.”

“그럼 그냥 바다를 보고 싶다고 말해.”

강동현은 차를 돌렸다. 차가 정말 미친 듯이 막히다가 어느 순간부터 확 뚫렸다. 아무도 이럴 때 서울을 빠져나가진 않는 모양이었다. 차가 좋아서 그런지 점점 기분이 평온해지는 느낌이었다.

“애기 수술도 잘 끝났다며. 전에 전화했을 때는 팔팔하더만. 진짜 애기 간병한다고 피곤해서 이러는 거야, 뭐야?”

“좀 맥이 빠진 거 같긴 해요. 너무 긴장했었거든요. 초록이가… 죽으면 어떡하나.”

강동현은 왜인지 모르겠지만, 마지막 말이 ‘초록이가 먼저 죽으면 어떡하나’로 들렸다. 인상을 썼다. 성가시다.

“너 죽고 싶은 거 아니라니까.”

강동현이 말했다. 황경호는 그를 돌아보았다.

“내가 전에도 말했지만, 넌 죽고 싶은 게 아냐. 너 계속 살 핑계를 찾고 있었잖아. 나, 그 꼬맹이. 넌 그냥 살고 싶은 거야. 죽고 싶은 맘 따윈 애초부터 없었어.”

“….그런 걸까요?”

“그런 거야.”

“모든 게 댁같이 확실하면 참 좋을 텐데요.”

“나라서 확실한 게 아냐. 확실하니까 확실한 거지.”

많은 좋은 사람들과 있을 땐 좋은데도 막막한 거리감에 괴로웠다. 하지만 오히려, 내가 죽어도 끄떡도 안 할 인간이라 그런가. 언행에 작위가 없어진다. 그래서 아까보다도 더 긴장이 풀렸다.

초록이의 수술 전후로 죽음에 대해 많이 생각했다. 그와 동시에 초록이의 수술이 성공해서 아이가 살아가길 간절히 바랐기 때문에 저절로 삶에 대해서도 많이 생각했다. 몸도 마음도 힘겨웠다. 하지만 누구에게도 말을 하겠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내가 이래서

내가 이래서 이런 거구나.

초록이가 아니었더라면 계속 뭐가 문제냐고 스스로를 다그치기만 했을 것이다. 영문도 모른 채 힘들어하기만 했겠지. 정말 선물 같은 아이다. 건강하길 마음 깊이 바란다.

서해안의 어느 작은 해수욕장. 도착하니 사위가 캄캄하다. 바닷바람에 눈이 시릴 정도다. 뒤따라 차에서 내리는 남자가 춥다고 작게 욕지거리를 하는 게 들린다. 맑고 달이 떠서 간간이 바닷물을 비추는 게 화창한 바닷가보다 어쩐지 더 마음에 들었다.

“밥 안 먹었지? 밥 먹고 술 한잔하고 집에 가면 되겠네. 가자.”

황경호는 바다를 쳐다보고 있었다. 마치 바다를 처음 본 사람처럼 말이다.

“뭐해?”

강동현이 조금 가까이 다가갔다. 황경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강동현은 굉장히 피곤했고 사실 오늘을 마지막으로 황경호와는 엮이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무의식적으로 그냥 평이하게 시간을 보내려 하고 있었다.

바다를 보고 있는 그의 표정은 화를 내는 것도 화를 참는 것도 체념을 하는 것도 웃는 것도 아니다. 이 간호사가 웃지 않을 때면 언제나 단전이 당기는 느낌이 든다. 강동현은 바다로 시선을 돌렸다. 아무리 강동현이라도 오늘 같은 날까지 손을 대진 않는다.

그렇게 말없이 한 30분은 서있었던 것 같다. 아무리 피곤했을지라도 정신이 번쩍 들었다. 엄청나게 추웠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황경호는 전혀 미동도 없었다. 강동현은 혀를 찼다.

‘그래서 죽고 싶다는 거야, 말고 싶다는 거야. 애가 기적적으로 병도 나아간다는데 지는 죽겠다고 마포대교 간 논리가 전혀 이해가 안 간다. 도대체 얘는 왜 이러는 거야? 말이라도 해야지 사람이 도와주든가….’

강동현은 도저히 추위를 참을 수가 없어서 황경호의 팔을 잡았다.

“밥 먹자, 밥.”

강동현은 그를 끌고 갔다. 시간이 거진 8시가 다 되어갔다. 그냥 보이는 대로 가서 식사를 시켰다. 강동현은 꽤 잘 먹는 편인 데다가 일까지 하고 와서 몹시 시장했던 관계로 밥을 거의 두 공기 반이나 먹었다. 아무 말 없이 깨작대고 있는 황경호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추위가 가시고 밥을 든든히 먹고 나서야 강동현은 슬쩍 황경호를 쳐다보았다.

“또 뭐 하고 싶은 거 있냐?”

“네?”

“하고 싶은 거 또 없냐고.”

“아뇨… 딱히….”

강동현은 짜증스레 한숨을 쉬었다. 정말 안 맞는다. 저 어중떠중한 태도가 정말 사람 성질을 나게 한다. 그 망할 놈의 병원에 있을 때 말곤 정신을 제대로 차리고 있는 걸 본 적이 없었다.

‘하긴 제정신으로 사는 놈이었으면 애초에 나랑 이런 식으로 엮이지도 않았겠지.’

“그럼 이걸로 된 거야?”

황경호가 강동현을 바라보았다.

“이걸로 우리 계약 끝? 싱겁네.”

올해 했던 그 장대한 지랄들을 생각해보자면 정말 싱겁기 짝이 없다. 뭐 그렇다고 딱히 또 무슨 지랄을 또 하고 싶다는 건 아니지만 말이다.

“그러네요. 싱겁네요. 어쨌든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바쁘신 분이….”

“알면 됐다.”

“다 드셨으면 가죠.”

황경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네, 진짜. 강동현은 따라서 일어났다. 계산을 하려고 하길래 강동현이 뺏어서 했다. 강동현은 자연스럽게 차에 가 탔다. 황경호는 다시 바다를 돌아보았다가 조수석에 올라탔다. 서울로 진입할 때까진 막히지 않았으나 들어가서는 막혔다. 결국 해지고 내내 운전밖에 안 한 강동현이었다. 강동현은 간간이 하품을 했다.

“여기 살아?”

작고 조금 오래된 것 같은 빌라였다. 황경호는 대답 없이 차 문을 열었다.

“데려다주셔서 감사합니다.”

유난히 딱딱하게 구네. 황경호가 차에서 내렸다. 강동현은 핸들을 잡고 바닥을 발로 툭툭 두드리다가 결국 차에서 내렸다.

“잠깐만.”

황경호가 건물로 들어가려다가 뒤돌아보았다. 강동현은 차 너머로 그렇게 황경호를 잠깐 보았다. 그리고 그냥 한숨을 쉬었다.

“됐다. 잘 가라.”

“안녕히 가세요.”

‘뭐, 이렇게 마지막일 수도 있는 거지. 무슨 사이인 것도 아니고.’

벌써 시간이 12시가 다 되어 갔다. 담배 한 대나 태우고 가야겠다 싶어서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냈다. 불을 붙였다.

“후우….”

건조한 담배 연기가 하늘로 올라갔다. 강동현은 바로 휴대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다.

“응. 뭐해?”

[은혁아~ 나 부모님이랑 동생이랑 같이 있었지. 연말은 가족과 함께. 넌? 넌 오늘 어땠어? 오늘 연기대상은 안 간 거야? 아무리 찾아봐도 안 보이더라.]

“아. 말하는 거 깜박했네. 다른 일이 있어서 예전에 스케줄 뺐었어. 하아. 오늘 같은 날은 너랑 같이 있었어야 하는 건데. 좀 우울하네.”

[나두… 그래도 새해 되면 좀 괜찮아질 거라고 했잖아. 그때만 기다리고 있어.]

“나도 그렇다. 일하는 건 정말 좋은데. 연기만 하는 것도 아니고. 스케줄은 진짜 빡빡해.”

[고생이 많아요, 우리 서방님.]

“하하.”

이런 말을 하는 것도, 이런 식으로 힘을 얻는 것도 여자 친구뿐이었다.

“사랑해, 영지야.”

[후후. 나두 사랑해~]

이러고 있으니 전화 저편에서 야유가 들린다. 여자 친구의 가족들인 모양이었다. 강동현은 그 그림이 그대로 그려져서 쿡쿡 혼자서 웃었다.

[아, 진짜… 미안. 시끄러웠지? 이제 카운트 다운한다.]

“응.”

[3, 2, 1… Happy new year!]

“새해 복 많이 받아, 영지야.”

그렇게 애인과 시시덕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새카만 골목들 사이로 무언가 튀어나갔다.

*

적막이 싫어 집에 들어오자마자 TV를 켰다. 습관 같은 것이었다. 딱히 뭘 보겠다는 건 아니고 바로 잘 생각이었다. 근데 언제 이렇게 시간이 흘렀는지 벌써 12시가 다 되어갔다. 새해가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불도 켜지 않은 채 세수나 간단히 하고 나왔다. 욕실의 불빛을 등에 진 채로 TV 화면을 바라보았다.

[네. 여러분. 드디어 새해까지 1분이 채 남지 않았네요. 올해도 정말 많은 일이 있었죠. 각종 사건, 사고들을 돌아보면 한숨이 나오지만 분명 좋은 일들도 많았습니다. 이런 게 우리가 살아가는 삶이겠죠. 네. 5초 남았습니다. 3, 2, 1.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시청자 여러분!]

환호하는 사람들. 기뻐하고 기대하는 얼굴들로 화면이 가득했다. 한 해가 이렇게 간 것을 아쉬워하면서 또 한 해를 계획하고 고대하는 사람들의 모습. 황경호는 순간 허탈감과 무력감이 온몸을 휩쓰는 걸 느꼈다.

이 이질감. 저 사람들과 황경호는 반대의 세상에 살고 있었다.

오늘 하루종일 뭐가 문제인지… 계속 생각했다. 왜. 도대체, 왜. 초록이도 나아가고 있고 예전보다, 그 지긋지긋한 기분에 괴로운 것도 확연히 줄어들었다. 그래서, 그런데도… 전혀 괜찮다는 생각이 안 들어서… 무엇도 그렇게 기쁘지가 않고 그저 멀게만 느껴지는 게 너무 이상해서, 그래서 도대체 뭐가 문제인지 계속, 계속 생각했다.

초록이가 나아도, 거지 같은 기분이 사라지더라도

살고 싶어지는 게 아니었다.

새해 같은 건 전혀 기쁘지 않았다.

이렇게 또 새해를 살기 싫었다.

더 이상 이렇게….

그런데 더 이상 이유가 중요할까. 결론이 중요할 뿐이다. 그러자 생각도 하기 전에 몸이 움직였다. 집을 뛰쳐나갔다. 시야가 좁아졌다. 식은땀이 흘렀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보고 싶지도 않았다. 이 거지 같은 기분을 영원히 없애버리고 싶었다. 그리고 황경호는 그 방법을 잘 알고 있었다. 집 밖을 마구 달리다가 어느 순간 택시를 잡았다. 택시를 타고 마포대교 근처까지 갔다. 마포대교라고 처음에 했던 택시는 아예 승차거부를 했다. 그다음 택시로 근처에 내려서 숨이 턱에 찰 때까지 달렸다. 외투는 입지도 않았지만 상관없었다. 추위도, 곧바로 사라질 것이다.

왜 눈물이 날까.

무서워서일까.

황경호는 눈물을 소매로 마구 훔쳤다. 사람이 죽는다는 것도 이렇게 비루하고 산다는 것도 비루하다. 원래 사람이 비루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사람이 존엄성을 가지고 살기 위해선 도대체 뭐가 필요한 것일까. 존엄을 가진 죽음이란 어떤 것일까. 산다는 것도 죽는다는 것도 이렇게 수치스러운데.

이젠… 이유 따위 뭐든 상관없어…

기대 같은 건 더 이상 하고 싶지 않아….

난간 위로 올라가서 섰다. 위태로웠다. 삶도 죽음도 하나로 위태로운 순간이다. 황경호는 검은 강물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곧바로 눈을 감았다. 동시에 몸이 앞으로 기울어졌다. 에일 듯한 차가운 바람만이 온몸을 감싸 안는다.

끝이다.

턱. 주르륵. 쾅.

“으윽… 젠장. 이 미친놈이, 진짜!!”

황경호의 무게에 의해 온몸이 철로 된 난간에 부딪힌 강동현은 욕지거리를 했다. 강동현은 두 손으로 황경호의 팔을 붙잡아 끌어올렸다.

“어… 어어어!”

“가만히 있지 말고 좀 도와요!!”

강동현이 차에서 내린 택시 기사에게 소리를 질렀다. 진짜 마포대교랑 원수라도 졌나! 그 기사 아저씨까지 동참해서 황경호를 붙잡자 그나마 수월하게 난간 위까지 끌어올렸다. 그때였다.

“이거 놔! 놔!!”

“어어! 학생! 가만히 있어! 그러다 진짜 죽어!”

황경호가 갑자기 엄청나게 발버둥을 치기 시작했다. 아예 죽겠다고 물먹은 솜마냥 흐느적거리던 게 죽는 게 아니라는 걸 알았는지 발버둥을 치는 것이었다.

“놔, 이 새끼야! 놔!!”

미친놈마냥 죽으려고 드는 황경호를 결국 마저 끌어당겨 바닥에 패대기쳤다. 황경호는 고통스러움에 신음을 흘리며 어깨를 부여잡았다.

“넌 도대체…. 니가 도대체 뭔데… 니가 뭔데 계속….! 왜 나 좀 가만히 안 두는 건데! 내 목숨 내가 알아서 하겠다는데! 어차피 죽여주지도 않을 거면서 왜 나한테 이러는 거냐고!”

강동현은 황경호를 붙잡느라 거의 나갈 뻔한 어깨를 겨우 돌리며 상태를 확인했다. 강동현은 한 손으로 미친놈처럼 욕하고 울고 웃고 난리를 치는 황경호의 손목을 단단히 잡은 채로 도와준 택시 기사랑 이야기를 했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어휴. 사람 목숨 달린 일인데 도와야죠. 와, 씨. 놀래라… 무슨 일이야, 이게… 경찰에 신고해야… 어… 어어? 혹시… 강동현 아니에요? 연예인?”

“아, 예….”

“아… 이게 중요한 게 아니지.”

강동현의 표정을 보고 아차, 한 택시 기사는 말을 돌렸다.

“아는 사람이에요?”

분에 차서 손이 까질 정도로 바닥을 주먹으로 치며 소리를 지르는 황경호를 무섭다는 듯이 멀찍이 쳐다보고 있는 택시 기사였다.

“예, 뭐… 신고보다도 병원에 가야죠. 도와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어떻게 사례라도….”

“어휴. 사람 살리는 거야 당연한 거지 무슨 사례야… “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나중에… 명함이….”

명함을 잘 쓰지 않지만 차에는 있었다. 강동현은 황경호를 끌고 차로 갔다 올 자신이 없어서 머리를 짜증스럽게 쓸어넘기고는 택시 기사에게 말했다.

“혹시 문제 생기시면 저희 매니지먼트로 전화해주세요.”

“아, 네… 그럼 학생 좀 잘 부탁드려요.”

“네. 정말 감사합니다.”

강동현은 황경호의 팔을 잡아끌어 일으켜 세우려고 했지만, 황경호는 언젠가처럼 제대로 일어서지도 못하고 숨만 헐떡거렸다. 강동현은 그대로 황경호의 팔을 목에 걸치고 거의 들다시피 해서 일으켰다. 그리고 뒷좌석에다 던져넣고 운전석에 탔다. 혹시나 몰라 뒷좌석의 문을 모두 잠갔다.

강동현은 말없이 운전을 하다가 빨간불에 차를 세웠을 때 담배를 물고 불을 붙였다. 창문을 열고 팔을 밖에 걸쳐 담뱃재를 털었다. 빨리 빨았더니 금세 필터까지 닳았다. 꽁초를 밖에다 던졌다.

얼마 안 걸려 차를 어느 건물 지하 주차장에 주차했다. 강동현의 고급 아파트 지하 주차장이었다. 황경호는 뒷좌석에 힘없이 늘어져 있는 채였다. 강동현은 차를 주차한 뒤 내려 뒷좌석 문을 열었다.

“…야. 내려.”

황경호는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차에서 내린 그는 맥이 다 빠져있어 옷걸이에 비닐봉지를 걸어놓은 것처럼 힘이 없어 보였다. 황경호는 아무 말도 없이 강동현을 지나쳐갔다. 강동현은 그의 팔을 잡았다. 무슨 시체처럼 손목이 찼다.

“또 어디 가.”

강동현이 짜증스럽게 물었다. 황경호는 얼굴이 파리했다.

“…집이요.”

“아까까지 멀쩡하게 들어갔던 놈이 또 갑자기 왜 이래?”

“말할 기운 없으니까 놔요.”

“도대체 또 왜 이러냐고.”

“상관없잖아요. 놔요.”

“상관없기는 뭐가 상관없어.”

황경호는 대답도 하기 싫은지 팔을 빼려고 했지만, 강동현은 놓지 않았다.

“어차피 나 죽여 주지도 않을 거잖아요… 이제 다 끝났잖아요. 댁도 다 고쳐졌고 나도 알아서 마음먹은 건데 도대체 댁이야말로 나한테 왜 이러는 건데요.”

“아니… 니가 멀쩡하다가 갑자기 이러니까….”

강동현이 짜증을 억누르려 노력하며 그렇게 말하자 황경호가 쏘아붙였다.

“내가 멀쩡하긴 뭐가 멀쩡한데요? 댁이 도대체 나에 대해 뭘 안다고 계속 참견질이에요?”

“알았어. 알았으니까 그만하고 좀….”

황경호는 갑자기 욱하는지 강동현을 무섭게 노려보았다. 안 그래도 기분이 거지 같은데 이 거지 같은 남자가 떨어질 생각을 안 해서 그런 것 같다.

“알긴 도대체 뭘 알았다는 건데? 우리 계약도 이제 끝난 거야. 제발 내가 죽든 살든 내 인생에 참견 좀 하지 마! 진짜 지긋지긋해! 이거 놔!!”

“…집에 가서 얘기하자.”

“내가, 거길, 왜 가…!”

황경호가 강동현의 손을 잡아떼려고 하며 질질 끌려갔다. 엘리베이터에 타고 올라갈 때까지도 마포대교 위에서처럼 마구 소리를 지르고 반항을 했다. 차에서는 그렇게 얌전하게 실려 오더니만. 진짜 미친놈이 제일 무섭다더니. 무섭다, 무서워.

“됐어. 또 진정되면 괜찮아질 거잖아. 화를 내든 소리를 치든 마음대로 해.”

“니가 뭘 안다고 계속…! 아는 척이야! 이 재수 없는 놈아!”

황경호가 악을 쓰며 강동현을 때리기 시작했다. 등을 맞으면서 드디어 집에 도착해 문을 열고 들어갔다. 아까까지 파리했던 얼굴이 분노로 시뻘겋게 달아올라서 마구 발버둥을 쳤다.

“도대체 나한테 왜 이러는 건데…! 도대체 왜! 내가 어떻게 되든 아무 상관 없잖아!”

“그래. 그래.”

“내 일에 제발 상관 좀 하지 마!”

“알았어.”

강동현은 황경호가 하는 외침을 이제 거의 듣지도 않았다. 성가시고 짜증 나지만 일단 지금만 참고 넘기자는 거였다. 자기가 뭐라고 저렇게 구는지 황경호는 하나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주제를 넘어도 한참을 넘는 거 아닌가.

그래. 남자가 주제를 안 넘은 적이 없다. 황경호는 이 인간이 항상 자신을 떼쓰는 어린애처럼 무시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고 분노와 동시에 수치스러움을 느꼈다. 그리고 허탈해졌다.

“그래서… 제가 어떻게 하면 되는데요.”

황경호는 한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눈빛이 애처로운 것도 같고 만사 귀찮은 것 같아 보이기도 했다.

“갑자기 뛰쳐나가서 한강만 가지 마. 오늘은 여기 있어. 너 진짜 한강이랑 무슨 원수 졌냐. 거기서 사람 뛰어들면 거기 담당하는 경찰이나 다른 사람들은 도대체 무슨 죄냐.”

강동현은 집 안으로 들어가 일단 부엌에 가서 정수기에 물을 받아마셨다. 황경호는 질질 끌려다녔다. 그리고 너무너무 비참했다.

“…도대체 나한테 원하는 게 뭐예요.”

“소파에서 자라. 아니다. 그냥 침대에서 같이 자자. 자는 동안 뛰쳐나가면 더 골치 아파.”

아, 더 피곤하다. 침실로 데려가려고 하자 황경호가 힘을 줘서 멈춰섰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나한테서 떨어져 줄 거냐구요.”

“내일 얘기하면 안 되냐? 어차피 상태 보니까 말로 뭐가 될 거 같지도 않고.”

강동현은 그냥 아예 황경호의 말을 무시하고 있었다. 정말 지긋지긋하다. 이런 취급받는 것도… 화가 났다. 어떻게 지금까지 이 인간을 참고 지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왜 오늘 만났는지도 알 수가 없다. 그냥 저번에 이 새끼를 죽여버리고 죽어버렸어야 했다.

무시당하는 게 한두 번이 아니라고 해서 기분이 안 나쁜 건 아니었다. 그것도 그의 생과 사를 결정할 문제에 끼어들 만한 자격이 있을 리 없는 인간이다. 그런데 말이 안 통한다. 화를 내도 좋게 말해도 애원해도 하나도 들어주지 않았다. 애초에 그는 황경호의 화도 애원도 들을 이유가 없는 사람이었다. 들을 자격도 없는 인간이었다. 화가 머리끝까지 났다. 지가 뭔데 나한테 맨날…! 이 인간의 잘난 얼굴을 엉망으로 패버리고 싶었다. 아니, 그냥 한 방만 먹여줘도 십 년 묵은 체증이 내려갈 거 같았다.

“그냥 자자. 자면 좀 나아질 거야.”

“…그냥 해요.”

전처럼 이 인간에게 어떻게 한 방 먹일까, 어떻게 하면 이 구질구질한 인간을 떨쳐낼 수 있을까 심장이 쿵쾅거릴 정도로 생각을 하니 저도 모르게 이런 말이 새어 나왔다. 그리고 그건 지금까지 어떤 분노와 외침보다도 효과가 있는 대사였나 보다. 성가셔하며 황경호를 질질 끌고 다니기만 하던 강동현이 우뚝 황경호를 돌아보았다.

“뭐라고?”

“어차피 니 좆같은 좆 때문에 이러는 거잖아요. 니가 하고 많은 사람들 중에 왜 하필 나한테 이러는진 모르겠는데… 그래. 이유 같은 건 궁금하지도 않다. 그냥 해라.”

“…….”

강동현은 갑자기 불의의 일격을 맞은 것 같았다. 그리고 황경호는 강동현에게 드디어 제대로 한 방 먹였다는 것이 아주 통쾌했다. 얼굴에 어쩐지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강동현이 조용히 대꾸했다.

“너… 말조심해.”

“하. 웃기지 마. 말조심할 게 누군데… 그래. 니가 하고 싶은대로 뭐든 하라고. 니가 원하던 거 아냐? 닥치고 얌전히 대줄 테니까. 하고 떨어져라, 제발.”

황경호는 자유로운 다른 손으로 강동현의 다리 사이를 꽉 잡았다. 그리고 얼굴을 가까이해서 그를 올려다보면서 비웃었다.

“아, 어차피 못하지? 이 고자 새끼야.”

*

짙은 코발트블루로 통일된 시트와 짙은 그레이 커버. 검은색 원목 나무가 삐걱거렸다. 주홍색 침실스탠드만이 켜져 있는 어둑한 침실의 안, 겹쳐진 두 개의 인영이 흐릿한 그림자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도망가지 마… 니가 먼저 시작한 거잖아….”

강동현은 계속 앞으로 몸을 빼는 황경호의 팔뚝을 잡아당겼다. 힘이 강해서 저항도 무색하게 다시 끌려갔다. 물에 젖은 풍선을 비비는 듯한 소리가 났다. 질척하고 깊게 박힌 커다란 근육 덩어리 때문에 속이 거북해졌다.

“윽… 으윽… 하아… 싫어… 기분… 나빠…. 윽….”

침대에 잡힌 손이 고정되고 다른 커다란 손이 이마를 잡아 뒤로 끌어당겨 몸을 밀착하였다. 퍽퍽퍽 살이 부딪치는 소리가 거칠고 낮은 숨소리와 함께 귀를 어지럽혔다. 강하게 박힐 때마다 몸이 앞으로 퍽퍽 튀어나갔다. 속에 있는 장기들이 그 힘에 앞뒤로 출렁출렁 움직이는 것 같았다. 토악질이 나올 것 같다. 아프다. 어디가 찢어진 게 분명했다.

강동현을 알게 된 이후로 다른 사람에게 강제로 몸을 만져지는 게 얼마나 기분이 나쁜 일인지 익히 알아왔다고 생각했는데, 이건 정말 차원이 달랐다. 움직이지 못하게 석고 안에 굳혀져 있는 것 같은 그 참을 수 없는 답답함과 마음을 허락하지 않은 상대에게 이런 일을 당하는 불쾌함, 만지는 손과 특히 몸속에 들어와 있는 것에 대한 이물감, 혐오감. 무엇보다도 처음 보는 남자처럼 낯선 이 남자와 자신의 괴리감.

“하아… 큭… 너 진짜… 죽이는데… 제길….”

강동현은 정말 정신없이 달려든다는 것이 뭔지 온몸으로 보여주었다. 처음엔 화가 나서 그랬는데 중간부터는 아예 어떻게 시작된 섹스인지 잊어버린 것 같았다.

원래부터 상대를 많이 지분거릴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혀로 목과 등을 핥고 빨고 민감한 부분을 마구 쓰다듬고 만지는 것이 서로가 익숙한 연인들의 섹스 습관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물론 그럴수록 황경호는 강동현이 자신에게 하고 있는 행위와 자신의 괴리감이 몸서리쳐질 정도로 기분이 나빴다. 마치 정신이상자에게 덮쳐지는 것만 같이 불쾌했다.

“만지지 마… 이 변태… 기분 나쁘다고… 했잖아….”

황경호는 몸을 만지는 강동현의 손을 잡아 밀어내었다. 강동현은 아랑곳하지 않고 황경호의 부드러운 허벅지를 주무르며 뜨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조여… 뜨거워… 크윽… 갈 것… 윽… 같아… 하아….”

강동현이 눈을 지그시 감고 미친 듯이 허리를 흔들며 황경호의 귀에 속삭였다. 낮은 목소리라 목덜미에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황경호는 침대에 강하게 짓눌려 자신의 몸을 억압하고 있는 강동현의 손목을 잡아떼고 도망치려고 하였다.

“싫어… 안에다 하면 죽여 버릴 거야. 윽… 그만… 아앗….”

“크으윽…!”

황경호는 눈을 질끈 감으며 입술을 꽉 깨물었다. 도망가려고 안간힘을 쓰던 것도 무력하게 강동현의 뜨거운 손에 단단히, 그의 하체에 꽉 눌러진 채로 자신의 가장 깊숙한 곳에 그가 사정하는 것을 강제로 느껴야만 했다. 몇 번이나 안에다 정액을 뿜어내며 허리를 쿵쿵 짓눌러오던 강동현은 황경호의 머리카락에 자신의 얼굴을 묻으며 전신의 무게를 축 늘어뜨려 기대왔다. 여느 때보다도 사정감이 길게 이어지는지 계속 황경호의 몸을 습관처럼 매만지며 정신을 못 차리고 거친 숨만 내뱉었다.

“윽…!”

황경호는 순간 불쾌함을 너무 참을 수가 없어서 간신히 그를 뿌리치고 그의 품에서 벗어났다. 강동현은 침대에 엎드려 누운 채로 여전히 쾌락의 잔향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나른하게 늘어져 있었다.

황경호는 숨을 멈추고 있다가, 순간 땀에 젖어있던 몸에 한기가 끼치는 것을 느꼈다. 숨을 다시 쉬기 시작했다. 다리가 덜덜 떨리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알았다. 토할 것 같았다. 황경호가 황급히 침대를 벗어나 욕실로 달려가려는데 손목이 탁 잡혀서 침대에 엎어졌다.

“어디 가….”

낮게 쉰 목소리로, 강동현이 이제야 좀 정신이 들었는지 눈을 뜨고 황경호를 올려다보았다.

“놔… 주세요….”

황경호는 강동현과 눈을 마주치지도 못하고 손으로 입가를 가린 채 목이 졸린 것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멍청이. 죽을 생각하는 거라면 꿈 깨.”

강동현은 황경호를 침대에다가 넘어뜨리고 그 위에 올라탔다. 황경호의 얼굴이 급격히 창백해졌다. 강동현은 밀어내는 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억지로 황경호의 다리를 벌렸다.

“히익… 싫어… 싫어… 하지 마… 하지 마… 읏… 아…!”

황경호의 두 손으로 강동현의 어깨를 밀어냈지만, 아랫도리를 뚫고 들어오는 남성기를 막을 수는 없었다. 처음은 오히려 무기력하게 받아들였던 주제에. 정신이 든 것인지 두 번째는 정말 싫어하며 질색을 하였다. 인상을 쓰며 바들바들 떠는 것이 등골이 오싹오싹할 정도로 흥분되게 했다. 이렇게 빨리 부활한 것은 처음이었다. 강동현은 바로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으아앗… 아앗…! 흐앗… 싫어… 아앗…! 싫다고…! 그만…! 윽…!”

“아프잖아. 제기랄, 가만히 있어.”

예민한 성격만큼이나 몸도 예민했다. 황경호는 그의 안으로 강동현이 찔러 들어갈 때마다 뭍에 나온 물고기처럼 팔딱거리면서 힘들어했다. 주먹으로 마구잡이로 치며 반항해서 강동현은 미간을 찌푸리며 그의 두 손을 잡아 억눌렀다.

“윽…! 아아…! 싫어…! 히잇…! 힉…!”

황경호는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가는 사람처럼 호흡이 흐트러져 있었다. 강동현을 필사적으로 밀어내었다.

“금방은 잘… 했잖아…!”

강동현이 짜증을 냈다. 황경호는 몸부림을 치며 강동현을 밀어내려고 안간힘을 썼다. 강동현은 더욱 강하게 황경호의 손목을 옥죄며 경고하듯 목소리를 낮추었다.

“내숭 떨지 마. 니가 그래도 안 그만둬.”

강동현의 말에 황경호가 뭐라고 말을 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그때 턱 하고 숨이 막힐 정도로 강동현이 치고 들어오자 숨을 멈추며 잡혀서 움직일 수 없는 두 손의 주먹을 꽉 쥐고 참았다.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강동현의 얼굴을 보기 싫은지 시선을 돌리며 눈을 감았다.

“윽… 하아… 젠장… 다리 더 벌려….”

강동현은 한 손은 황경호의 머리 위에 겹쳐놓은 두 손에 깍지를 끼워 움직이지 못하도록 잡고, 다른 손으로 황경호의 허리를 둘러 엉덩이를 꽉 잡아 자신의 하체에 밀어붙였다. 고환까지 안에 넣을 기세로 퍽퍽 박아넣었다. 아까보다 훨씬 더 깊이 들어갈 수 있었다. 신음은 막아도 예민한 몸이 처음부터 이런 폭력적인 섹스를 감당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황경호는 강동현이 들어올 때마다 이를 악물고 자신의 팔에다 얼굴을 묻고 견디기에 급급했다. 미친 듯이 흔들리다가 황경호가 참던 숨을 내뱉었다. 강동현은 올려다보지도 못하고 미간을 찌푸린 채로 자신의 팔 너머 침대의 시트만 바라보고 있다가 강동현이 자신의 남성기를 꾹 눌러 박고 허리를 돌리며 안을 휘젓자 히익, 하고 목을 울리고 강제로 깍지가 끼워진 손으로 저도 모르게 강동현의 손을 꽉 잡았다.

“…그만 해요… 힉… 못하겠어요. 그만 해요… 아앗… 그만 해요….”

황경호가 작은 목소리로 애원하듯이 말했다. 강동현이 옆으로 돌려 드러난 황경호의 목덜미에 입술을 박아 강하게 빨아들였다.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목을 핥아 올리는 혀가 벌레가 기어가는 것처럼 불쾌했다.

“그만… 못하겠어… 못하겠어… 힉… 싫어… 싫어… 기분 나빠… 흐앗… 그만….”

아니, 오히려 황경호의 애원하는 목소리를 듣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강동현은 섹시한 숨소리를 흘리며 아까처럼 하체를 꽉 붙여서 안을 계속 휘저었다. 앗, 앗, 하고 몸을 떨던 황경호는 끝내 참지 못하고 눈물을 주르륵 흘렸다.

계속 황경호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허리를 움직이고 있던 강동현은 정말 누가 아랫배를 주먹으로 살짝 친 것 같이 온몸이 확 하고 긴장하는 게 느껴졌다. 누가 뇌 속에 폭탄을 터뜨린 것 같았다. 강동현은 신음을 흘리며 황경호의 입술에 자신의 것을 갖다 붙였다. 걸신들린 사람처럼 안으로 파고들며 혀를 핥아 올렸다. 황경호는 정말 싫어하며 미간을 확 찌푸렸다. 눈을 떠 그 얼굴을 보고 있던 강동현은 더욱 강하게 허리를 눌러 들어가 안을 비비며 입술을 핥았다. 황경호의 눈동자가 흔들리며 눈가가 벌게져 눈물이 다시 차오르는 것이 말 그대로 코앞에서 보였다. 강동현은 황급히 입술을 떼며 두 손으로 강하게 황경호의 다리와 허리를 안고 본능적으로 가장 깊이 자신을 박아 넣어 사정하였다. 황경호는 이렇게 빨리 그가 절정에 도달할 줄은 몰랐는지 눈을 크게 뜨고 그와 자신이 합쳐진 아랫도리를 바라보며 혈색이 파래졌다.

“하아… 하아….”

강동현은 섹시한 얼굴로 황경호의 위에 다시 늘어졌다. 자신이 들어가 있는 황경호의 엉덩이와 그의 허벅지를 계속 손으로 쓰다듬으며 황경호의 목덜미에 자신의 얼굴을 묻었다. 황경호의 손목을 매만지다가 습관처럼 깍지를 끼어 손을 만졌다. 황경호는 그의 숨소리가 잦아들 때까지 기다리다가 그 손을 슬그머니 빼내었다.

“…이제 됐으면 나와요.”

목소리는 아직 살짝 떨리는 것 같았지만 대체적으로 평소 같은 목소리로 황경호가 강동현에게 말했다. 강동현은 그 목소리가 아직 들릴 만한 상태가 아닌지 나른하게 늘어져 여전히 쾌감의 잔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황경호는 다시 목소리를 가다듬고 말했다.

“도은혁 환자님, 이제 다 되셨으면 나오세요. 저 이제 괜찮으니까 그만 가볼게요.”

황경호는 강동현을 자극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그의 품에서 벗어났다. 강동현은 아마도 지루가 된 이후로 사정할 때마다 극심한 오르가즘이 올라오는 모양이라 이렇게 정신을 못 차리는 경우가 허다했다. 황경호는 소리를 내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바닥에 발을 대었다. 오금이 저려 쓰러질 것만 같았지만 휘청거리지 않도록 혼신의 힘을 다하며 옷을 주워들어 입었다.

그래서 강동현이 정신을 차렸을 때는 텅 빈 침대 옆자리를 발견할 수 있었다. 화들짝 놀라서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이미 황경호는 온데간데없는 상태였다. 강동현은 한숨을 쉬며 제 얼굴을 손으로 감쌌다.

“젠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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