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서울에 한강이 없었다면. (2)
내년 여름에 개봉할 영화 가제 ‘해결사’의 촬영이 시작되었다. 주인공인 ‘김태평’의 아버지가 교통사고로 입원하면서 주요 등장인물들이 처음으로 모두 소개되는 장면이었다. 그래서 첫 촬영지는 병원, 그것도 하필이면 Y대 병원이었다.
김태평은 처음에 살짝 어리바리한 대학생 역할로 나왔기 때문에 안경을 쓰고 체크무늬 셔츠를 입은 전형적인 공대생 스타일로 꾸며졌다. 물론 기럭지와 얼굴이 있기 때문에 연기에 들어가기 전엔 그냥 잘생기고 훤칠한 남자라 수수하게 입은 옷차림 따위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지만, 슛만 들어가면 뭔가 항상 움츠려 있는 것 같은 남자 대학생이 되었다.
재미있고 코믹한 영화라 촬영에 임하는 사람들 모두 즐거운 분위기였다. 하지만 강동현은 이렇게 많은 선배 배우들과 함께 일하게 된 것은 처음이라 말은 안 했지만 꽤나 긴장하고 있었다. 연예인한테도 연예인 같은 그런 배우들이 있지 않은가. 동경하고 있던 배우들 중에 반은 여기서 보고 있는 것 같았다.
쪽대본으로 매일매일 분초를 다투면서 찍는 드라마와 다르게 영화는 긴 호흡이 있었다. 마음에 들 때까진 아무리 연기하기 힘들거나 몸이 힘든 장면이라도 몇 번이고 다시 찍을 때도 있었다. 하지만 그래도 영화가 드라마보단 낫다는 생각이 드는 강동현이었다. 처음 촬영지에 도착했을 때는 그 간호사 생각이 살짝 났는데 장비를 챙기고 회식을 가려고 할 때는 이미 간호사에 대한 생각은 새카맣게 잊고 있었다. 회식을 가기 전에 담배 피우는 사람들끼리 담배나 한 대 하려고 삼삼오오 모여있었다.
“지지.”
“응, 왜?”
“냄새.”
누군가 그렇게 옆에서 작게 말하는 게 들렸다.
“아… 여기서 담배 피우면 안 되는데 누가… 저기요. 담배는 저쪽 가서 피워야 돼요.”
“아, 맞다. 형 여기서 담배 피우면 안 돼요.”
강동현이 화급히 담배를 끄고 다른 사람들에게 말을 옮겼다가 문득 그 말을 한 사람을 돌아보았다. 말을 한 사람은 강동현과 같이 담배를 피우는 무리와는 좀 떨어진 곳에서 다른 사람들에게도 주의를 주고 있었다.
“어? 서준!”
초록이가 소리쳤다. 예전 강동현이 맡았던 배역의 이름이었다. 전에 봤던 그 꼬맹이와 그리고 진짜 이 간호사는 부모나 형제, 친구도 없는지 이 좋은 주말에 이러고 있다.
‘아, 진짜… 갑자기 짜증 나네.’
사람들이 삼삼오오 흡연 부스 쪽으로 옮겨갈 때 강동현은 같이 옮겨가지 않고 황경호 쪽으로 걸어갔다.
“한가하네. 넌 애인도 없냐?”
강동현이 말했다.
“주말마다 여기 발 도장 찍느니. 그렇게 애가 좋으면 정신 차리고 결혼해서 애나 낳든가. 남의 애한테 무슨 짓인지, 원.”
괜히 성질을 내는 강동현이었다. 사실 이 간호사를 보면 태반이 짜증이 나거나 흥분을 하거나 둘 중 하나다. 황경호가 그를 노려보자 강동현이 습관적으로 새 담배를 꺼내 물었다.
“뭘 그렇게 봐? 내가 뭐 틀린 말 했어? 책임질 생각도 없는 주제에 함부로 이러는 거 정말 애한테 안 좋을 텐데.”
“…뭔지는 모르겠는데요, 애 앞에서는 이러시지 마시죠.”
“이해가 안 돼서 그렇다니까. 좋은 일 하는 건 알겠는데 너 별로 봉사 정신이 투철하고 그런 사람 아니잖아? 죽을 때가 다 돼서 안 하던 짓을 하는 건가. 하느님 믿냐? 이러면 천국 가?”
초록이는 겁을 먹었는지 황경호의 다리를 껴안고 숨어있었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어머, 초록이 여기 있었네.”
갑자기 간호사 하나가 불쑥 튀어나와 정적을 깼다.
“아, 찾으셨어요? 얘기하고 나왔는데….”
황경호는 아차, 하고 그렇게 말했다.
“듣고 나온 거예요. 우리 초록이 주사 맞을 시간이에요.”
“응!”
“어머, 웬일이야, 우리 초록이. 주사 싫어하면서. 경호 씨 올라가죠?”
“아, 아뇨. 조금 이따 올라갈게요.”
“오빠….”
“조금 이따 올라갈게.”
황경호는 웃는 얼굴로 손을 흔들었다.
“도대체 왜 이러시는데요?”
“뭐가.”
“저한테 그러는 거야 그렇다 쳐도 왜 애 앞에서까지 그렇게 말해야 되겠어요?”
“뭐가. 내가 틀린 말 했어?”
“…….”
황경호는 잠시 다른 곳을 보다가 휴, 하고 짧게 한숨을 쉬고는 미간을 조금 좁힌 채로 말했다.
“일단… 담배는 저쪽에서 피우세요. 이러면 병실에 담배 연기 들어가니까요.”
자리를 옮겼다. 황경호는 자판기에서 음료수 하나를 뽑았고 강동현에게 뭐 먹을 거냐고 물어봤다. 커피나 달라고 해서 파란색 캔커피를 뽑아서 주었다.
“저 정말 도은혁 환자님 골탕 먹일 생각 없어요.”
황경호는 강동현이 계속해서 자신을 의심하고 있다고 생각해서인지 그렇게 대뜸 말을 시작했다. 강동현은 심드렁하게 맞춰서 대답했다.
“서로 한 게 있는데 말만 그렇게 한다고 믿음이 가나.”
“뭐가 그렇게 못마땅한 건지 잘 모르겠는데요. 그냥 신경 끄시면 되잖아요.”
“누가 니 일에 신경이나 쓴대? 애는 불쌍하잖아. 불쌍한 애 보니까 자기 위안이 좀 되냐? 넌 죽고 싶어서 필요도 없는 돈까지 받아가면서 금요일마다 그러는 주제에 그 돈을 죽어가는 애한테 쓴다는데. 게다가 돈만 주는 것도 아니고 직접 찾아와서 정 붙이고. 뭐하는 짓이야? 그러고 나서는 어쩔 건데? 너 죽으면 애는 어쩌라고. 애가 부모가 없으니까 막 해도 된다는 거야, 뭐야?”
강동현이 그렇게 말하자 황경호가 바로 대답하지 않고 이온음료를 조금 마셨다.
“사실….”
황경호가 어렵사리 입을 떼었다. 캔을 두 손으로 잡고 무릎에 놓은 채, 그 입구를 바라보면서 저도 확신이 가지 않는 목소리로 말이다.
“요즘은 잘 모르겠어서요. 그렇게 죽고 싶다고….”
“뭐?”
황경호한테 소개해줄 정신과 의사 전화번호도 알아봐 놓고 여태껏 끌고 갈 기회를 노리고 있었는데 대뜸 이런 소리를 하다니. 강동현은 깜짝 놀라서 황경호를 돌아보았다.
“그게 안 죽고 싶다는 게 아니라… 그냥 잘 모르겠어요. 그런 생각이 전혀 안 드는 게 아닌데….”
황경호가 잠시 말을 멈추었다.
“솔직히 처음에는 도은혁 환자님이 말씀하신 그런 마음 없다고도 못하겠어요… 자기 위안으로 초록이한테 그런 거겠죠? 충동적이고 변덕스럽고 무책임하게….”
황경호가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저번 주에 도은혁 환자님한테 그 소리 들었을 땐 좀 뜨끔했어요. 자기만족이라는 말….”
강동현은 담뱃재가 떨어지는 것도 모르고 벙찐 얼굴로 황경호의 옆얼굴을 보고 있었다. 말이 맞고 틀리고를 떠나서 솔직히 강동현의 말하는 본새가 누구 기분 좋으라고 한 말도 아니었고 반은 화풀이에 반은 의심을 섞어서 화를 돋우려고 안간힘을 쓴 말들이었는데 이런 반응이라니. 게다가 이런 말을 누군가에게 하는 것도 처음인지, 그리고 그 말을 하필이면 강동현한테 한다는 것이 어색하고 불편한 얼굴이었다.
“그냥 초록이를 처음 만났을 때… 부끄러웠어요.”
“…뭐가.”
“어떻게 아셨는지는 모르겠지만… 초록이, 고아잖아요. 부모님도 없고 친척들도 없고… 게다가 뇌종양도 있고… 그런데 처음 봤을 때 공을 던지는 법을 가르쳐달라고 하더라구요.”
처음 봤을 때 또래보다 훨씬 작은 6살짜리 아기는 낡은 골대에 제 머리통보다도 큰 공을 어떻게든 넣어보려고 열심히 던져보고 있었다. 고아원의 아는 오빠만큼 골인을 많이 시키고 싶다고 했다. 그리고 낯도 하나 가리지 않고 처음 본 황경호의 소매를 끌었다.
“여섯 살이 되면 두발자전거를 탈 거래요.”
황경호가 말했다.
“부끄럽더라구요. 초록이는 치료를 받는다면 그래도 여섯 살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르는데 돈이 없어서 올해 안에 죽을 거라고 하더라구요. 그렇게 아픈데도 항상 웃으면서 뭔가 배우려고 하고 밝게 지낸다는데 나는 뭐 하고 있는 건가 싶더라구요. 문득 나는 기회가 있는데도 허비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이런 말을 하는 것이 부끄러운 것인지 황경호의 얼굴이 조금 빨개졌다가 다시 하얀색으로 돌아왔다. 강동현은 이미 담배는 잊어버리고 그대로 황경호의 얼굴만 멍청하게 계속 보고 있었다.
혼자서 철석같이, 그렇게 싫어하면서도 강동현한테 대주고 있으니 아직도 죽고 싶은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강동현은 이 간호사에 대해서 정말 아무것도 알고 있지 못했다. 단지 그가 죽고 싶어 한다는 사실만 유일하게 알 뿐이었다. 어떤 생각을 하는지, 어떤 걸 소중하게 여기는지 아무것도 몰랐다. 7월에 만나 벌써 5개월. 그저 죽고 싶어 하고 있을 뿐이라고 막연하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사이, 강동현이 보지 않는 그 시간을 거치며 차츰차츰 변해가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리고 그 변화가, 그리고 그 변화의 방식이… 모르겠다.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다. 달랐다. 다르다. 그는 강동현과 너무나 다른 사람이었다. 그것을 처음으로 깨달은 것 같은 느낌이다.
“그냥 뭔가 크게 책임져보려고 한 건 아닌 거 맞아요. 그냥 초록이가 여섯 살이 되고 제가 자전거를 가르쳐주면 좋을 것 같더라구요.”
황경호는 자신은 없는 말투였지만 그렇게 말했다. 그때 한강에 뛰어내리지 않았기 때문에. 반년이라는 유예가 생긴 덕분에. 뇌종양에 걸린 아기천사를 만났기 때문에. 더럽고 기분 나쁘고 신경질 나게 주어진 반년이었지만 그 짧은 시간 동안 많은 일이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분명 초록이를 만나기 위해서 생긴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요즘 드는 황경호였다.
강동현은 얼떨떨한 얼굴로 말했다.
“….돈을 더 달라고 하지. 왜 항상 백만 원이었어? 뭐든지 들어준다고 했으니까 내가 낼 수 있는 한도 내에서 금액을 더 크게 불러도 아마 난 냈을 거야.”
그렇게 말하자 황경호가 웃었다.
처음으로, 정말 처음이었다. 정말 처음으로 강동현의 앞에서 거짓 웃음이 아닌 진짜 웃음으로 웃은 것 같았다. 항상 그러듯이 보이기 위해 활짝 웃는 화려한 미소가 아니라, 수수하게 웃어서, 정말 생각보다 수수하게, 정말 순수하게 웃어서 놀랐다.
“참 그러고 보면 도은혁 환자님도 나긴 난 사람이네요. 정말 자기가 말한 거 다 지키긴 하네. 아무리 그래도 남자한테 쓰는 화대에 백만 원도 솔직히 너무 과하죠. 충분해요.”
황경호는 그러고 시계를 보더니 초록이가 기다리겠다며 먼저 자리를 떴다. 강동현은 병원 벤치에 앉아 그 뒷모습을 보다가 중얼거렸다.
“…그게 뭐야….”
*
금요일을 누가 불에 타는 듯 정열적인 날이라고 했던가. 금요일은 인내의 날이었다. 강동현은 온몸의 근육이 꽉 조인 듯 뭉쳐 있었고 뻐근했다. 눈 밑이 칙칙했고 다리가 저릿저릿했다.
“스트레스입니다. 스트레스.”
오늘도 이 돌팔이 의사는 매번 같은 소리를 했고 강동현도 매번과 같은 대답을 했다.
“정말 저는 스트레스는….”
“담배도 빨리 끊으시구요.”
“예… 노력은 해보고 있는데 담배는 좀….”
스트레스는 모르겠지만, 피곤은 확실했다. 강동현은 만 2년간 오버 워킹 중이었고 이 병원을 제외하더라도 최근에만 세 번이나 병원 신세를 졌다. 원래는 병원이라는 곳과 인연이 멀었던 그였으나 이젠 확실히 육체적으로 이상이 올 정도로 피로해졌다는 것을 뜻할 것이다. 슬슬 자각할 법도 한데 몸의 비명에는 전혀 무심하며 꿈과 일에 대한 목적과 열정이 강한 그는 매번 같은 얘기를 들어도 매번 그저 흘려 들을 뿐이었다.
황경호도 말했듯이 강동현은 ‘난’ 남자였다. 자기 일에 충실하고 다른 것에는 무심하고. 세상에 이름난 여느 남자들이 으레 그렇듯이 말이다. 일에서 성공할 수 있다면 건강 정도는 쉽게 생각할 수 있는, 아니, 자기 자신에 대한 확신이 강한 것이었다. 이 정도로 자신의 몸에 뭐 큰일이야 나겠나, 하는 무신경함과 무대포 정신이 강할 뿐이었다.
공인으로서 몸가짐에도 충분히 신경을 쓰고 있었고 부모님께는 그동안 불효한 것 갚는답시고 매달 상납금 바치듯이 용돈도 드리고 있고 여자 친구 외의 여자들에게는 딴 맘을 품지 않으니 강동현은 자기 자신에게 꽤 자신이 있는 남자이기도 했다.
다만 자신의 꿈은 여기가 끝이 아니다. 이제 시작일 뿐이기 때문에 자신이 추구하는 것에 다른 사람들보다 더욱 몰두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래서 나머지에는 더더욱 신경을 쓰지 않는 것이고.
그렇기에 자기 확신이 때때로 독선이 되고 열정이 아집이 되고 하며 자기도 모르는 새에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기도 했다. 하지만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그런 것 아닌가?
젊은 나이에 남들이 부러워할 만한 길을 걷고 있고 갈고 닦지 않는다면 금방 날아갈 수도 있는 기회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자기 자신에게 쉴 틈을 주지 않는 것은 강동현이었다. 지금 조금 놓치는 다른 것들보다 배우로서 성공하고자 하는 게 더 중요하니까 선택한 것이다. 후회할 턱이 없었다.
의사와의 상담 및 치료가 끝나고 나선 이젠 자동으로 그 간호사를 덮치러 갔다.
“하… 으….”
계속 얼굴을 숨기려고 해서 강동현은 억지로 간호사의 얼굴을 옆으로 돌렸다. 인상을 찌푸리고 때때로 숨기지 못하고 얼굴이 붉어지기도 했다. 이 간호사의 웃는 가면 사이를 훔쳐볼 때면 언제나 아랫배가 당겼다.
“아…!”
강동현은 황경호의 성기를 손으로 잡았다. 그가 두 손으로 황급히 강동현의 손을 저지했지만, 꽉꽉 주물러 대니 주먹을 꽉 쥐며 신음을 흘렸다.
“제 건… 됐어요… 그만 해요.”
“싫어.”
물렁물렁한 그의 성기는 그가 이런 신음을 내는 게 느껴서가 아니라 불쾌하게 느끼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려주었지만, 강동현은 아랑곳하지 않고 싫어하는 간호사의 성기를 더 주물러댔다. 경험이 별로 없는 건지 원래 피부가 하얘서 그런 건지 모르겠는데 진짜 옅은 분홍색이다. 젖꼭지도 그랬고… 그래서 그런지 다른 남자의 몸이라면 정말 더럽다는 생각부터 들었을 텐데 그러진 않았다.
“읏… 아읏….”
아픈지 고통스러운 신음을 흘리며 몸을 떨었다. 맞붙은 허벅지 사이에 자신의 성기를 비비면서 계속 그를 괴롭혔다.
“그만 해요. 싫어요. 읏… 그만 하라고… 아….”
전에 그가 했던 것처럼 귀두의 날개 부분의 밑을 손끝으로 건드렸더니 그가 움찔하며 강동현의 손목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강동현은 집중적으로 거기를 공략하며 귀두의 입구 부분과 날개 부분을 엄지로 돌려가며 만졌다. 딱딱해질 겨를이 안 보이긴 했지만 뭐 싫어해서 보이는 반응도 나쁘지 않으니까.
“하아… 싫어… 변태… 만지지 말라고… 읏….”
“누구보고 변태라는 거야. 남자가 만져서 느끼는 게 누군데.”
싫어하고 느끼지 못하는 그를 억지로 몰아붙였다는 것을 스스로 알면서도 그렇게 말했다. 황경호는 귀까지 얼굴을 붉히며 인상을 찌푸렸다.
“윽… 아파….”
정말 싫어하는 목소리가 아득하게 갈라졌다. 강동현은 아랫배를 가볍게 한 대 맞은 것 같은 느낌이었다.
‘위험해… 넣고 싶다…’
강동현은 허리를 일으켜 두 손으로 황경호의 엉덩이를 잡았다. 그리고 옆으로 쫙 벌려 그사이의 분홍색 치부를 드러나게 했다. 황경호가 강동현을 의아한 얼굴로 돌아보았다.
“뭐하는 거예요?”
“…안 들어갈까?”
“네?”
강동현은 곧바로 황경호의 항문에 자신의 성기의 끝을 대고 꾹 눌렀다. 민감한 부분에 그런 대물이 닿았으니 황경호는 깜짝 놀라 펄쩍 뛰었다.
“뭐, 뭐하는 짓이에요!!”
황경호는 얼른 몸을 돌려 강동현을 밀어내며 엉덩이를 사수했다.
“한 번 넣는다고 닳는 것도 아니고… 뭐 어때…!”
“무슨 헛소리예요!!”
낑낑거리며 덮치려는 사람과 저항하는 사람이 힘 싸움을 했다. 덩치 면이나 힘 면이나 한참 딸리는 황경호가 결국 두 손목을 잡혀 눌렸다.
“와…! 싫어요! 싫다고 분명히… 히익!!! 야 이 변태새꺄! 손 안 떼!?!”
엉덩이골 사이로 강동현의 손가락이 들어와 치부를 꾹 눌리자 황경호가 또 펄쩍 뛰며 욕설을 뱉었다.
“너 호모야? 게이야?! 손 안 떼!? 악! 싫어싫어싫어! 사, 사람 살려!!”
“조용히 해. 억지로 하기 전에.”
“언어장애 있냐! 지금도 충분히 억지야! 이 미친놈아! 악!! 아악!! 선생님!! 형세야!!!!”
계속 강동현의 손가락이 사이를 뚫고 들어오려고 하자 황경호는 미친 듯이 몸부림을 치며 저항했다. 결국, 강동현은 황경호의 격렬한 저항에 밀려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둘 다 진이 완전 빠졌다.
“변태새끼… 이 변태 호모 지루 고자 새끼야! 어디다 손을 대는 거야!”
“적당히 닥쳐라. 안 그래도 입맛 떨어졌으니까.”
강동현이 짜증스럽게 말하며 옷을 챙겨 입었다. 컨디션이 좋은 날도 아니고. 뭐, 좋은 날이라도 황경호의 화를 받아줄 성격도 아니었다.
“하… 뭘 잘했다고 큰 소리야….”
황경호가 어이가 없는지 그를 노려보면서 말했다. 강동현이 인상을 찌푸리며 그를 내려다보았다.
“딴 사람 인생 자기 인생이니까 터치 안 하겠다고 생각하고 또 생각했는데. 진짜 그쪽 쓰레기인 거 알아? 그냥 억지로 하고 아니면 땡? 그 억지에 휘둘리는 사람 입장에서 생각해 봤어?”
강동현은 지금 기분이 안 좋았다. 거절당한 것도 뭐 물론 기분이 나쁘긴 했지만, 그것보다도 금방 자기 자신이 이 간호사에게 시도했던 짓 자체가 기분이 나빴다. 그런 것을 자기가 하려고 했다는 사실 자체가 기분이 나쁜 것이었다. 황경호가 지금 자신에게 욕을 하고 있는 상황도 기분이 나빴다. 강동현은 이럴 때 굳이 생각을 하고 말을 하는 타입이 아니다.
“남자 주제에 시끄럽게 굴지 마. 안 했으면 됐잖아.”
황경호는 어이가 없어서 바로 맞받아쳤다.
“안 했으면 됐다고? 되긴 뭐가 돼! 내가 지금 기분이 엿 같은데 뭐가 됐는데?!”
“어차피 돈 받고 대주는 주제에 니 기분이 나랑 무슨 상관이야.”
황경호는 입을 다물었다. 강동현은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옷을 다 갖춰 입고 선글라스까지 끼고 우연히 뒤를 돌아보았다가 황경호의 얼굴을 보았다. 선글라스 때문에 그가 자신의 얼굴을 보는 것을 조금 늦게 알아차린 황경호는 금세 표정을 바꾸며 고개를 돌렸다.
“그러니까 그게….”
황경호가 옷을 입기 시작하자 강동현은 짜증이 나는지 자기 머리를 쓸어 넘기며 한숨을 쉬었다.
“그래, 내가 잘못했어. 그러니까 기분 풀어.”
“괜찮아요.”
“미안하다니까.”
“네.”
“미안하다고 하잖아.”
“예, 알겠어요. 억지로 사과 안 하셔도 돼요. 전 괜찮습니다.”
강동현이 황경호의 어깨를 잡아 돌려세웠다.
“미안하다고.”
그러자 황경호가 한숨을 쉬었다. 조금 짜증이 난다는 표정으로 강동현을 올려다보았다가 다시 한숨을 쉬며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
“됐다니까요. 어차피 댁이 그런 사람이었던 거 모르는 것도 아니고. 본심도 아닌 사과 계속 들을 생각도 없어요. 됐다는데 왜 그래요? 진짜 가만 보면 정말 이상한 사람이야.”
“정말 괜찮아?”
“괜찮다고 몇 번을 말해요.”
강동현은 황경호의 어깨를 놓았다. 황경호는 먼저 방을 나서려는 생각인지 문 쪽으로 향했다.
“오늘 요구사항은?”
황경호가 발걸음을 멈칫했다.
“다음에 얘기할게요.”
그리고 밖으로 나갔다.
*
기분이 너무 안 좋았다. 황경호는 강동현과 함께 있던 진료실에서 나오자마자 욱, 하고 헛구역질을 했다. 황급히 손으로 입을 막으며 화장실로 달려갔다.
“우욱… 웩… 욱.”
화장실에 들어가자마자 바로 양변기에 얼굴을 처박고 구역질을 했다. 먹은 게 그다지 없어서인지 맑은 침밖에 나오지 않았지만, 기분은 엿 같았다. 생리적으로 눈물이 뚝뚝 흐르면서 내부의 열이 밖으로 나오며 얼굴이 빨개졌다.
진이 빠져서 바닥에 주저앉아 변기에 몸을 기대고 있었다. 황경호는 숨을 쌕쌕거리며 자기 팔에 이마를 기대었다.
아,
죽고 싶다.
왜 이 바보짓을 계속하며 살고 있었을까. 이렇게 간단한 해결방법이 있었는데. 황경호는 여전히 계속 눈물을 뚝뚝 흘리며 피식 웃었다. 이 화장실은 정말 사람을 깨우치게 하는 장소인 모양이다. 황경호는 자리에서 일어나서 물을 내리고 세면대로 향했다. 입을 헹구고 얼굴을 헹구었다. 페이퍼 타월로 물기를 닦아내고 밖으로 나왔다.
“어, 아직 퇴근 안 했니?”
간호사들 중 가장 나이가 많은 오 간호사가 황경호를 보고 그렇게 물었다. 황경호는 웃으면서 답했다.
“화장실 좀 갔다 와서요.”
“변비 있니?”
“요새 조금 있는 것 같아요. 과식해서 그런가.”
“조심해라.”
“넵.”
황경호는 간호사실로 들어가서 옷을 갈아입었다. 역시나 가지고 다니는 것이 별로 없어서 챙길 것은 없었다. 이제는 정말 추울 정도라 두터운 가디건을 걸치고 밖으로 나섰다.
상쾌한 날씨구나. 높은 하늘을 물끄러미 올려다보고 택시를 잡았다.
“여의도 한강시민공원 가주세요.”
차는 밀렸지만 역시 그다지 초조하지는 않았다. 뒷좌석에 몸을 기대고 수많은 차들의 물결 속에 잠겨 천천히 목적한 곳으로 향하고 있었다.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지만 결국 목적한 곳에 도달하는 것은 똑같다. 좀 달리다 보니 한강이 보인다.
‘역시 서울엔 한강이 없으면 안 되겠다…’
천천히 걸었다. 길을 따라서 우스운 문구들이 적힌 난간을 옆에 끼고 다리를 걸었다. 다리의 한가운데로 와서 저무는 햇살이 예쁘게 비치는 한강을 내려다보며 서 있다가 난간 위를 짚고 올라가 난간 밖으로 두 다리를 내고 걸터앉았다.
그러고 보니 참, 지금까지 지냈던 어떤 반년보다도 어이없고 기가 막히는 일들이 가득했던 날들이었다. 한강 다리에서 뛰어내리려고 하지를 않았나, 남자가 끈덕지게 찝쩍거리지를 않나, 일주일에 백만 원씩 기부를 하지 않나…. 항상 우울했던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역시 다 멀게만 느껴지고 허무감을 없앨 수가 없었다. 역시 이게 맞는 거라고, 이 바람을 맞으며 생각했다.
이제는 왜냐고 스스로에게 묻지 않기로 결정했다. 왜 죽고 싶은가, 왜 다른 사람들처럼 힘차게 살지 못하는가, 같은 것은 이제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지쳤다. 남과 비교를 하는 것도, 자기 자신과 싸우는 것도. 사실 이런 그에게 강동현과의 약속 같은 게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이겨내 버리면 그런 짜증 나는 인간 같은 건 필요 없었다.
바람이 정말 시원했다. 마지막으로 오로지 피부에 스치는 바람과 햇살을 느끼며 석양을 바라보고 있었다.
정말 남긴 것이 아무것도 없는 인생이었다. 인간관계도, 일도, 다른 무엇도 다 적당히 할 줄 알아서 도리어 눈에 띄게 남을 것이 없었다. 이렇게 죽고 나도 뉴스에 뜨지도 않을 것 같다. 알더라도 누구든 쉽게 잊어버리겠지. 황경호뿐만 아니라 결국 모두가 그런 식이겠지.
“하아….”
자신의 숨소리. 차 소리. 강물이 흐르는 소리. 온 세상이 소리로 가득했다. 빛. 햇빛. 강물에 반사된 주홍빛. 건물이 반사하는 창문의 빛깔. 온 세상은 빛으로도 가득했다. 세상이 아름다웠다. 황경호는 출처가 불분명한 노래를 허밍 하며 천천히 몸을 앞뒤로 흔들었다. 어린아이가 철봉의 위에 앉아 기우뚱거리며 장난을 치듯. 하늘과 강을 그네를 탄 것 같은 느낌으로 번갈아 보며.
‘초록이는 괜찮을 거야. 수술도 받을 수 있고. 생각보다 세상에 좋은 사람들 많으니까. 원래부터 내가 끝까지 책임져줄 수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까 이 정도면 됐어….’
무심하게 스쳐 지나가 주는 차들이 고마웠다. 눈을 느리게 깜박이자 하늘과 강이 번갈아 가며 망막에 들어왔다. 몸을 뒤로 누이고 다시 그 반동으로 앞으로 기울어졌을 땐 보석처럼 반짝이는 강물만이 눈에 들어왔다. 마음이 평화로워졌다. 잡음이 사라졌다. 손을 놓았다.
그 순간 우악스러운 힘이 허리를 낚아채서 눈을 번쩍 떴다.
“내가 이럴 줄…!!”
강동현이 황경호의 허리를 잡은 손 그대로 뒤로 끌어당기자 황경호는 오히려 사색이 되어 발버둥을 쳤다.
“놔요! 놔…! 놓으란 말이야!! 댁이 뭔데…! 왜…!!”
어떻게 다시 잡은 기회인데! 황경호는 지금껏 없을 정도로 젖 먹던 힘까지 내서 발버둥을 쳤다.
“젠장!! 너 미쳤어?! 나한테 화가 났으면 차라리 날 쳐!”
“댁이랑 상관없잖아!! 잘난 척하지 마! 그쪽 때문에 이러는 줄 알아?!”
황경호가 허리를 붙잡은 강동현의 팔을 주먹으로 퍽퍽 쳤다.
“살기 싫단 말이야!! 왜 살아야 할지 모르겠다고!!! 다 귀찮고 다 허무해!”
“그래도 다시 생각해!! 그 아기는 어쩔 거야!!”
“내 애도 아니야!! 니가 무슨 상관이야! 놔!!”
저녁노을이 지는 하늘. 넓디넓은 한강 위. 죽느냐 사느냐 그 지랄을 하고 있어도 강물은 흐르고 차도 흐르고. 아까까지만 해도 너무나 마음이 평안하고 고요했는데 이 짜증 날 정도로 혈기 넘치는 남자가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황경호의 평온을 해쳤다. 흙발로 짓밟았다. 무슨 권리로 그러는 것이냐고 따져 묻고 싶었다. 관심도 없는 주제에. 아무 말이나 마구 하는 주제에. 왜 이럴 때만 이렇게…!
“하아… 진짜….”
강동현은 얼굴까지 한 대 얻어맞아서 짜증이 있는 대로 올라왔다. 결국, 진이 빠져 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황경호를 보고 혀만 한 번 차고는 바닥에 떨어진 캡모자를 주워 썼다. 그리고는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서 하나 물고 불을 붙였다.
“자.”
그리고 담뱃갑과 라이터를 던졌다. 황경호는 자신의 다리 위로 떨어진 그것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강동현은 한 번 깊게 들이마시고는 후 뱉었다. 아, 싱거워. 담배를 바꾼 것이 후회되었다. 황경호는 한참을 담배를 내려다보고 있다가 한 개비 꺼내서 입에 물었다. 손이 떨리는지 라이터를 제대로 못 켜서 강동현이 쭈그리고 앉아 대신 라이터를 켜서 대주었다.
“야, 빨아야지 불이 붙지.”
라고 말하자마자 황경호는 얼굴이 확 빨개져서는 기침을 세게 했다. 강동현이 픽 웃었다.
“지금까지 담배도 한 번 안 피워보고 뭐 했냐.”
“…….”
강동현은 그대로 서서 담배 한 개비를 필터까지 다 피웠고 황경호는 간간이 입에 대는 척은 했지만 제대로 담배를 피우지는 못했다. 뭐, 하던 사람이 해야지 그것도 맛이 있는 거지. 황경호의 어두운 얼굴을 보며 강동현은 그의 손목을 잡고 일으켰다.
“술이나 마시자.”
“됐어요. 댁이랑 제가 같이 술 마실 사이는 아니잖아요.”
황경호는 강동현의 손을 뿌리쳤다.
“누군 같이 마시고 싶어도 못 마시는 몸이구만. 됐어. 같이 가.”
“왜요. 싫어요.”
강동현은 황경호의 손에 불빛만 내고 있는 담배를 뺏어서 자신의 입에 물고 다시 황경호의 손목을 잡았다. 그대로 걸었다.
“…후우, 정말 싫어요. 놓으세요. 집에 갈 거예요.”
“너 하는 꼴 보면 이대론 불안해서 혼자 못 두겠고. 오늘 도대체 왜 죽고 싶어 하는지 얘기나 한번 들어보자.”
“언제부터 저 신경 쓰셨다고 이러시는지 모르겠는데요. 안 하던 짓 하지 마시고 갈 길 가세요.”
담뱃불은 필터까지의 거리를 더 이상 좁히지 못하고 애매한 선에서 수명을 다했다. 강동현은 그것을 신발로 짓이겨 밟아 끄고는 한숨을 섞어 말했다.
“……오늘 일은 정말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진심으로 사과하는 데 익숙한 남자는 대한민국에 없다. 강동현은 황경호 쪽은 쳐다보지도 못하면서 인상을 찌푸린 채 말을 이었다.
“내가 아까 좀… 미쳤었나 봐. 너도 알겠지만 내가 컨디션이 안 좋으면 말을 좀… 막 하잖아.”
황경호가 짜증스럽게 한숨을 쉬었다.
“댁 때문에 이러는 게 아니라고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들을지 감도 안 잡히네요.”
“그래.”
“이봐요. 놓으라구요.”
“알았어.”
황경호가 어이가 없어서 손을 비틀어 빼려고 했지만, 이번엔 착실히 여의도 공원에다 주차까지 한 강동현의 차에 실릴 때까지 그냥 끌려가야 했다.
‘이 인간이 사람 말을 듣겠다고 기대하는 내가 미친 거지.’
황경호는 조개처럼 입을 다물어버렸다. 강동현은 역시나 그다지 눈치도 보지 않고 자기가 가고 싶은 데로 갔다. 강동현은 의외로 단출하고 장사 안되는 호프집 같은 데를 데리고 갔다. 황경호는 짜증이 엄청 난다는 얼굴로 가게를 둘러보았다.
“아저씨, 일단 참이슬 두 병 주세요.”
소금 잔뜩 친 풍성한 팝콘에 초록색 병 두 개가 나타났다. 술을 황경호의 잔에 따라주고 양심은 있는지 자기 잔은 자기가 채우고 마셨다.
“너 설마 술도 못 마셔?”
대답하기도 싫다. 황경호는 그냥 술잔을 비웠다.
“…….”
술을 마셔도 어색한 분위기가 흘렀다. 강동현은 그냥 황경호의 잔이 빌 때마다 술을 따라주었다. 그러면서 본인도 얼추 속도를 맞춰서 먹었더니 황경호가 한숨을 쉬며 한마디 했다.
“그렇게 자기 거기가 중요한 사람이 술은 왜 마셔요? 이강유 선생님이 술 마시지 말라고 하셨잖아요.”
“그럼 이 상황에 너만 마시게 하리?”
“혼자 있고 싶으니까 그냥 좀 가세요.”
“술까지 마시고 나중에 욱해서 죽으면 어쩌려고.”
“그럼 서로 좋겠네요.”
강동현이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다 너 진짜 후회한다.”
“…죽으면 후회 같은 것도 없어요.”
그리고 술을 계속 마셨다. 술이 떨어져 시키니 사람 좋게 생긴 사장이 시키지도 않은 안주를 가지고 왔다. 후덕하고 푸짐하게 생긴 데다가 털도 덥수룩하게 난 것이 분명 적어도 50 근처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목소리를 들어보니 의외로 더 젊을 수도 있겠다는 인상이었다.
“뭐 안 좋은 일 있으셨나 봐요. 서비슨데… 드세요.”
“아… 아니에요. 감사합니다.”
황경호는 확실히 기분이 거지 같은지 평소처럼 가면을 뒤집어쓴 듯 웃지는 못했지만, 평소처럼 그렇게 인사를 했다. 징글징글한 놈. 강동현이 혀를 찼다.
“왜 죽고 싶어 하는 건지 한 번 들어나 보자.”
황경호는 강동현을 노려보았다. 무시하고 그냥 술을 마셨다. 강동현은 답답했다.
“그렇게 꽁꽁 싸매고 있으면 누가 알아주기라도 한대? 문제가 이렇게 심각하면 해결을 하려고 노력을 해야 할 거 아냐.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을 청하든가.”
“신경 끄세요. 언제부터 저한테 그렇게 신경을 쓰셨다고.”
“야. 내가 너 한강 다리에서 뛰어내리려고 하는 걸 두 번이나 구해줬는데 그럼 내가 신경을 안 쓰겠냐?”
“구해줬다구요? 그것참 감사하네요. 그런데 그거 그냥 댁 자지 안 서서 그런 거 아니었어요?”
“야!”
강동현이 깜짝 놀라 주변을 둘러보았다. 다행히 여기에 신경을 쓰는 사람은 없었다. 애초에 손님이 없기도 했다.
“그건…! 그래, 그건 미안한데. 어쨌든 죽는 것보단 사는 게 낫잖아. 내가 저번에도 얘기했잖아. 죽자는 마음으로 그냥 열심히 살라니까.”
황경호는 또 대답하지 않고 그냥 술을 마셨다. 문득 강동현은 시계를 보았다가 한 시간도 채 되지 않았는데 황경호가 한 병 반이나 먹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강동현은 반사적으로 손을 뻗어서 그가 들고 있는 술병을 뺏어서 자신의 앞에다 놓았다.
“그것만 마시고 그만 마셔.”
“뭐하는 짓이에요?”
“많이 마셨잖아. 너무 급하게 마시면 안 돼.”
황경호는 뭐라고 할 것처럼 했다가 그냥 나머지 술을 원샷 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뭐야? 어디 가?”
“이제 가죠. 더 술 마실 것도 아닌데.”
“그래도 이렇게 뜬금없이… 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았잖아. 안주도 금방 나왔고….”
“됐어요. 우리가 이렇게 정답게 마주 앉아 술 마실 사이도 아니고.”
저런 표정은 처음 보는 거 같았다. 저 간호사의 웃지 않는 표정엔 전부 흥분했었던 적이 있었지만. 이렇게 술을 먹고도 말은 따박따박 하는 주제에 어쩐지 정신은 어디 팔려있는 것처럼 보였다.
“어디 가게?”
“집이나 가야죠.”
“…….”
양이 문제가 아니라… 이렇게 짧은 시간에 저렇게 마셨는데 멀쩡한 거야? 술 잘 마시는 건가… 하지만 저 간호사가 자신에게 짜증을 내거나 반감을 보이지 않고 저렇게 평이함을 연기하면 문득 불안함이 들었다. 그것도 아까까지만 해도 다리에서 뛰어내리려고 했던 놈이었다.
“그냥 마셔라. 자.”
강동현은 황경호의 잔에 술을 따라주었다. 황경호는 물끄러미 그것을 보았다가 자리에 털썩 앉고 술을 마셨다. 그렇게 둘이서 침묵의 대작을 하다가 강동현이 슬 입을 열었다.
“그 꼬맹이는… 괜찮냐? 수술한다며.”
“네… 연말에 할 거예요.”
“그래… 다행이네.”
“자전거는 가르쳐줬어? 가르쳐준다며.”
“아직 너무 작아서 세발자전거밖에 못 타더라구요.”
“공부도 한다며.”
“꽤 잘해요. 병원에만 있으니까 할 게 없거든요.”
잠깐 대화가 끊어졌다. 강동현은 조심스럽게 운을 뗐다.
“넌… 병원 가볼 생각은 없어?”
황경호가 인상을 찌푸리며 강동현을 쳐다보았다. 강동현은 아까처럼 꼰대짓을 하려는 게 아니라는 듯 두 손바닥을 내보이며 진정하라는 제스처를 취했다.
“내가 좀 알아봤는데… 죽을 때 죽더라도 한 번쯤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보고 하면….”
강동현이 한숨을 섞어 말을 이었다.
“너 다른 사람들한테 들키는 거 죽어도 싫잖아. 근데 너 뒤지면 다 알게 된다고. 물론 죽고 나면 죽은 너랑은 상관없겠지. 근데 진짜 그래? 너 진짜 상관없냐? 결국, 안 죽는 게 서로를 위해 제일 좋은 거라면… 한 번쯤 의사 찾아가 봐라. 그러고 나서 죽을 때 죽더라도 의사 돌팔이라고 욕이라도 하고 죽을 수 있지 않겠냐.”
강동현은 지갑에서 명함 한 장을 꺼내서 황경호의 앞에 내밀었다.
“언젠가 주려고 계속 가지고 있었는데… 못 줬다. 요새 너랑 나랑 좀….”
“됐어요.”
“되긴 뭐가 돼. 받아. 유명한 의사라고 했어.”
“됐다구요.”
황경호는 거들떠도 안 봤다. 조금 짜증이 난 강동현은 황경호의 손을 잡고 거기에 아예 쥐여주었다. 황경호가 짜증스럽게 뿌리치려는데, 그를 똑바로 보며 강동현이 말했다.
“너 말이야. 처음에 그 말도 안 되는 계약서 왜 쓴 거야?”
“그거야 댁이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부리니까….”
강동현은 황경호의 말을 끊었다.
“거짓말하지 마. 그런 계약 거부하려면 얼마든지 할 수 있어. 애초에 나 신고 왜 안 하는데? 왜 인터넷 같은 데다 안 퍼뜨려?”
“내가 댁 같은 짓이나 하는….”
“왜 그게 나 같은 짓이야? 정의 구현하는 거지. 안 그래?”
강동현이 비웃었다.
“지금 당장 한강에 뛰어들지 않을 핑계가 필요했던 거잖아.”
“뭐라구요?”
“내가 널 진짜로 12월 31일 날 죽여주든 안 죽여주든 그때까지는 어쨌든 내 핑계 대고 살 수 있는 거잖아.”
“핑계는 무슨… 누구한테 그런 핑계를….”
“그 핑계를 너 자신한테 대고 있었던 거지? 지금까지.”
“…….”
황경호는 인상을 확 찌푸리고 그의 손을 뿌리치려고 했다.
“그러니까 받아. 가든 안 가든 니 마음이긴 한데. 일단 받아.”
그러고 강동현은 황경호의 손에서 손을 뗐다. 강동현은 자기 잔의 술을 마시며 말했다.
“난 니가 죽고 싶어 한다고 생각하지 않아.”
한 잔 더 마셨다.
“아니, 애초에 진짜로 죽고 싶은 사람은 세상에 한 명도 없어. 그러니까 죽고 싶다는 생각할 동안에 조금이라도 살고 싶은 이유를 찾아.”
황경호는 얌전히 강동현의 얘기를 듣고 있었다. 술을 마시는 속도가 빨랐다. 그 뒤로 둘은 아무 말도 없이 술을 먹다가 강동현이 화장실을 갔다 온 사이 그새 황경호가 술에 꼴아서 앞으로 엎드려 있는 게 보였다. 술병이 어마어마하게 쌓여있었다. 강동현은 한숨을 쉬었다.
“사장님, 계산.”
“어이구… 얘 많이 취했네. 택시 불러 줄까요?”
“그게 낫겠네요. 폐 많이 끼칩니다.”
“아니, 됐어요.”
친절하게 택시도 불러주고 같이 황경호를 부축해서 밖으로 나가주었다.
“택시 왔네요. 자, 조심해서… 그래, 다음에 또 오세요. 다음에 오면 서비스해준다고 친구한테도 말씀해주세요.”
“예, 감사합니다.”
강동현은 좀 건성으로 대답을 하고는 제대로 중심을 못 잡는 황경호의 이마를 잡아 좌석에다 딱 붙이고 사장이 닫아주는 문을 잡아 같이 닫았다.
“야, 야. 너 집.”
강동현이 이마를 놓자 그새 휘청하며 중심을 못 잡았다. 앞으로 홱 쏠리는 걸 단단히 잡았다.
“거, 택시에서 토하면….”
“예 예, 죄송합니다. 아직 안 했어요. 야, 너 집 어디냐고.”
강동현이 몇 번이고 황경호를 탈탈 흔들어서 물었다. 잠시 정신이 들었던 건지 멍하니 눈을 몇 번 깜빡거리다가 고개를 들어 강동현의 얼굴을 보았다. 술에 취해서 뭐가 보이겠냐 싶었지만, 지그시 바라보는 그 눈빛이 낯설어서, 강동현은 몇 번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돌렸다.
“사, 삼성동 가주세요, 아저씨.”
그 말을 하는 새에 또 황경호는 축 늘어졌다. 강동현은 갑자기 이유 없이 마음이 심란해졌다. 강동현은 현금으로 택시비를 치르고 이제는 아예 정신을 잃은 황경호를 질질 끌고 갔다. 아파트 아래의 자동문의 인식기에 겨우 자신의 지갑을 대고는 그를 데리고 엘리베이터를 탔다. 14층.
“내가 왜 이러고 있냐….”
강동현은 짜증스럽게 그렇게 중얼거렸다. 전자키를 도어에 대고 집으로 들어갔다. 혼자서 쉬어도 모자랄 판에 이런 한심한 간호사의 시중까지 들어줘야 한다니. 그는 들어오자마자 거실의 카우치에 황경호를 내던졌다.
그리고는 욕실로 가서 샤워를 했다. 뭔가 안절부절못하겠다. 그래서 아까부터 심기가 사나웠다. 항상 따박따박 말대답을 하던 게 그냥 저렇게 얌전히 잠들어 있으니 더 그런 것 같았다.
훤칠하고 멋진 그의 몸 위로 물줄기가 계속 흘러내렸다. 차가운 물로 마무리를 하고는 몸을 닦고 속옷과 바지까지만 입은 채로 욕실에서 나왔다. 부엌으로 가서 차가운 물을 한 잔 마시고 머리를 마저 닦으며 나오다가, 욕실과 부엌에서 흘러나오는 빛에 그림자가 진 카우치를 보았다. 가까이 다가가 등받이의 너머로 거기에 웅크리고 누운 황경호를 내려다보았다.
“….야.”
강동현이 충동적으로 그를 불렀다.
“자냐?”
대답이 있을 턱이 없었다. 강동현은 물끄러미 그를 내려다보다가 침실로 가서 철푸덕 드러누웠다. 심란하게 잠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