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서울에 한강이 없었다면. (1)
“미쳤냐? 나보고 죽으라는 거야?”
“싫으면 그만두시면 되죠.”
간호사는 일어나서 옷을 챙겨 입었다. 어차피 황경호 본인도 강동현이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서 지른 말도 아니었다. 여기서 강동현이 황경호의 말을 못 들어주게 되면 어차피 이 계약은 유명무실해지게 될 뿐이었다.
“내가 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잖아!”
“왜 못해요? 액션 연기도 하시잖아요. 보니까 한 사나흘 연습하면 웬만큼 다들 할 수 있다는데.”
“미쳤냐? 안 그래도 사람들 많이 자살해서 난리인 판국에 내가 거기 가서 다이빙 연습이나 하면 얼씨구나 다들 좋아하겠네? 어?”
“그건 니 사정이구요.”
황경호는 강동현의 얼굴을 쳐다보지도 않고 그렇게 말했다. 그는 쓰레기를 챙겨서 버리고는 마지막으로 이기적인 남자를 노려보았다.
“그 잘난 계약만료일날만 기다릴게요.”
간호사는 정말 크게 한 방을 먹이고 강동현을 내버려 두고 나갔다. 저번 주와는 완전히 상황이 뒤바뀐 것이었다. 강동현은 입을 딱 벌리고 그 뒷모습을 보고 있었다. 문이 쾅 닫히고 곧 정적이 흘렀다.
마포대교에서 뛰어내리라고?
그게 말이 쉽지, 괜히 사람들이 거기서 뛰어내려서 죽는 것이 아니었다. 전문가가 아닌 이상 전부 등이나 배, 팔다리를 이상하게 해서 떨어지게 되고 그러면 그냥 맨땅에 떨어지는 것이나 진배없는 상황이 벌어지는 것이었다. 내장파열이나 뇌진탕이나 팔다리가 부러지거나….
물론 뛰어내리는 일 자체는 강동현이 물리적으로 못할 일은 아니었다. 이미 둘 다 서로에게 억지를 시키고 있었기에 강동현은 더 이상 불만의 말을 토로할 수도 없게 되었지만.
‘그래도 그건 아니지. 젠장, 거길 어떻게 뛰어내려? 저게 미쳤나….’
강동현은 똥 씹은 얼굴이 되어 캡모자를 깊게 눌러 쓰고 자신도 그 방에서 나갔다. 어차피 강동현도 병세가 확연히 완화되었다. 저 간호사를 만날 때는 말할 것도 없고 의사도 분명 많이 나아졌다고 했다. 약을 먹지 않아도 가능할 정도라고 분명히 말했지 않은가. 스트레스를 조심하고 하면 강동현 또한 저딴 간호사 따위 필요 없게 되는 것이었다.
‘그래, 나도 더러워서 안 한다. 진짜. 내가 다 나으면 이쪽 방향으로 돌아눕지도 않을 거라고!’
*
…라고 생각한 지 어언 한 달이 흘렀다. 이제는 가을 기색이 완연한 10월이었다. 강동현은 다리를 달달 떨며 다른 사람들의 컷을 지켜보고 있었다. 발기부전도, 지루도, 불감증도 분명 처음보다는 훨씬 나아진 것이 분명했다. 그 의사가 검사를 해봐도 그렇고 환자 본인의 느낌도 그러했다.
‘근데 왜….’
여자 친구, AV, 손 등등 불법이 아닌 것은 전부 해보았다. 집창촌까지 갈 생각은 안 들었지만, 진짜 이제는 그래야 하나, 하는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사랑하는 여자 친구의 손과 입, 거기로도 도저히 자연 발기가 안 되어서 결국 몰래 약을 먹어야 했다. 굴욕이었지만 거기서 더 창피를 당할 수도 없는 일 아니겠는가. 남자도 페이크 오르가즘을 꾸며낼 수 있다는 걸 처음으로 알았다…. 지루와 불감증으로 인해 강동현은 아니 한 것만 못한 상태를 한 채 뜬눈으로 밤을 지새워야 했다.
그다음 날은 마치 처음으로 발기가 제대로 되지 않았던 날처럼 미친 듯이 친구가 추천해준 주옥같은 컬렉션을 보며 자위도 해보고, 심지어 말도 안 되는 그런 성인기구들까지 사서 자극해보았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약을 먹어 발기를 시켜서 해도 불감증이 나아지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지치기만 할 뿐이었다.
강동현은 진짜 짜증이 나서 돌아가실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정말 한강에 뛰어들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병원을 갈 때면 마치 한 번도 강동현이라는 남자를 개인적으로 대해본 적이 없다는 듯한 얼굴로 웃으며 자리를 안내하고 차를 내주고 다른 환자들을 챙기는 그 간호사를 노려보기만 하였다. 강동현이 계약 사항을 이행하지 않는 이상 그 이후의 대가도 없었다. 그 간호사의 거짓 웃음을 볼 때마다 여기저기 간질간질한 느낌이 들어서 더더욱 참기가 힘들었다. 그 빌어먹을 병원. 대기시간이 정말 짜증 날 정도로 길어서 다리를 모로 꼬고 외로 꼬다가 결국 화장실로 달려가 자위를 해보아도 결국 허탕일 뿐이었다.
강동현은 욕구불만이었다.
“한기석 씨, 한기석 씨. 한기석 씨 어디 가셨냐? 지금 씬 찍을 차롄데….”
감독이 목청을 높여 배우를 불렀다. 그때 준 주연 남자 배우인 한기석이 헐레벌떡 나타나서 고개를 숙였다.
“아, 죄송합니다. 감독님. 잠시 화장실에….”
“그래? 오늘 화장실을 왜 이렇게 자주 가.”
“죄송합니다. 요새 변비라, 하하….”
강동현보다 다섯 살 많은 남자 배우였다. 물론 배우답게 당연히 나이가 들어 보이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강동현은 선배 배우의 연기를 유심히 지켜보며 있었다.
‘어디 불편하시나… 허리 아프신 건가….’
강동현도 배우이니만큼 사람의 동선이나 몸의 움직임에 민감했다. 그 씬이 끝나고 강동현의 차례라 자리에서 일어나는데 어디론가 또 슬쩍 사라지는 한기석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자자. 오늘 막방이니까 다들 집중합시다. 집중.”
“네!”
오늘로 <연애출사표> 촬영을 끝마치게 된다. 중간에 화병으로 실려 가기도 할 만큼 강행군이었지만, 시청률도 꽤 많이 나왔고 촬영이 즐거웠던 작품이라 정이 많이 들었다. 강동현은 분장을 다시 고치고 화면의 안으로 들어갔다.
“도대체 널 누가 데려가니.”
“시끄러워요! 과장님한테 그런 말 듣고 싶지 않거든요!”
“마마보이.”
“그만 해요.”
서준은 마마보이, 유연경은 파파걸이다. 서로 그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래도 이렇게 좋게 다 마무리된 건 네 덕분이야.”
“아, 그건 다 제 덕인 거 아는데. 우리 엄마 화난 건 어쩔 거냐구요! 우리 엄마 화나면 얼마나 무서운지 몰라서 그래요? 우리 엄마 진짜 나 미워하면 책임질 거냐구요~!”
얘는 다 멋있는데 말이야, 이럴 땐 너무 찌질해서 큰일이야, 라는 표정으로 유연경이 서준을 쳐다보았다.
“그럼… 이렇게 할래?”
서준이 유연경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진짜로 결혼을 하는 거야.”
“누가 누구랑요.”
“너랑 나랑.”
마지막 장면 촬영이 끝나고 꽃다발을 받으며 강동현이 환하게 웃었다.
“기석 선배 어디 계세요? 기석 선배도….”
샴페인을 터트린 감독 때문에 한껏 술에 젖어서 강동현이 잘생긴 얼굴로 웃으며 동지를 찾았다. 강동현은 샴페인을 시원하게 한 모금 들이키곤 화장실로 갔다. 남자 화장실에서는 욕설이 들려오고 있었다.
“아윽, 젠장… 아프잖아. 이건 도대체 어떻게….”
슬쩍 보니 한기석이 소변기에 일을 보면서 신음을 흘리고 있었다. 허리 뒤를 툭툭 치면서 쉽사리 그 앞에서 벗어나질 못하고 있었다. 강동현은 헉, 하고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선배… 설마 전립선염…….”
“헉! 동현아!”
*
“선배… 아니, 형….”
강동현은 모자를 푹 눌러 쓰고 마스크를 턱에 걸친 한기석의 잔에 소주를 따라주었다. 강동현도 모자를 푹 눌러 쓰고 있었다. 한기석은 그저 소주를 원샷 하고 강동현한테 잔을 돌렸다. 그리고 소주를 따라주었다. 이쪽도 한 잔 거나하게 원샷 했다. 막 촬영 날 회식을 갔다 온 다음 날 서로 약속이라도 잡았던 것처럼 만났다.
“난 진짜 이게 이렇게 될 줄은 몰랐지….”
뜻하지 않은 인생의 시험을 겪게 되는 사람들이 숱하게 하는 생각이었다. 한기석이 깔깔하고 기운 없는 음성으로 말했다.
“괜찮을 줄 알았지….”
강동현이 다시 그의 잔에 술을 따라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그럴 줄 알았죠….”
크흡…! 한기석은 눈물을 사리물고 다시금 술을 마셨다.
화장실에서 둘 사이를 가르던 정적을 아직 잊을 수가 없었다. 눈이 마주친 순간 서로는 서로를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강동현은 한기석의 그 모습을 보자마자 바로 그가 지금 인생의 가장 힘들고 암울한 시기를 겪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고 한기석은 강동현의 그런 표정에서 그의 깊은 이해심과 통찰력을 볼 수 있었다. 아아, 그것은 실로 남자들만이 알 수 있는 남자들만의 세계였다. 경험자가 아닌 자는 절대 상상도 할 수 없는 고통과 고난과 시련의 세계였던 것이었던 것이었다!
“니가 그 말 하는데 주마등처럼 드라마 초기 때가 생각나더라… 너 그때 자주 화장실 간다고 감독님한테 소리 들었었는데 난 그것도 모르고….”
경험자와 경험 중인 자, 가까우면서도 뛰어넘을 수 없는 격차가 있었다. 한기석은 그때는 알지 못했던 고통을 지금 겪으면서 나이로는 동생이지만 더욱 성숙한 강동현의 분위기를 절절히 납득하고 있었다.
“저도 진짜 그때는 힘들었죠… 이게 제가 어떻게 참는다고 참아지는 게 아니다 보니까… 다른 분들한테 피해 주고 싶지는 않은데 그게 또 맘대로 되는 게 아니고.”
“말 놔라, 동현아. 큭.”
강동현은 그 기분 이해한다는 식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형… 병원은 다니고 있어?”
한기석은 고개를 저었다. 강동현은 살아생전 이렇게 성심을 다해서 고기를 구운 적이 없었다. 그것도 저 먹는 것이 아니라 오직 아는 형, 아니 이제는 피붙이보다도 마음이 가는 형에 대한 연민으로 정성과 공을 들여 삼겹살을 굽고 있었다. 하나라도 좋은 거 먹여주고 싶은 그런 마음뿐이었다. 이쪽 업계 사람들 중에 진짜로 친한 사람을 꼽을 수 있다면 이제 한기석이 될 것 같았다.
“쪽팔려서 어디 말할 수도 없고….”
“형… 나도 그렇게 생각해서 참으려고 했는데 그건 도저히….”
강동현은 조심스럽게 말했다. 한기석이라는 한 남자가 지금 얼마나 예민하고 섬세한 상황인지 피차 이해 못할 바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강동현도 참을 수 있을 때까지 참다 참다가 발기부전이 4개월이 이르러서야 겨우 병원 문을 두드릴 용기가 났었다. 하지만 만약 처음 걸린 병이 전립선염이었다면 강동현은 4개월은커녕 단 한 달도 참지 못하고 병원 문을 박차고 들어갔을 것이다.
한기석은 잠시 강동현의 눈치를 보았다. 강동현은 사려 깊게 그것을 기다렸다. 한기석은 입을 겨우 뗐다. 예상했던 질문이었지만 강동현은 짐짓 모른 척했다.
“너… 병원 어디로 다녔냐. 효과… 괜찮던?”
“나 우리 아버지가 알아준 데로 갔는데, 좀 화날 정도로….”
“못해?”
한기석이 불안하게 물었다. 강동현이 한숨을 쉬었다.
“잘해. 의사가 너무 잘나서 재수가 없을 지경이야.”
“그 정도야? 어딘데?”
한기석이 화색이 되어 물었다.
“이강유 비뇨기과라고… 압구정에 있는데 아마 검색해보면 바로 나올 거야.”
“넌 얼마 만에 나았는데?”
“한 달… 아니, 제대로 치료받고 나서는 이주일 만에 나았지….”
강동현은 한참을 뻗댔던 자신의 옹졸한 나날을 되돌아보며 한숨을 쉬듯 말했다.
‘생각해보니 살짝 쪽팔리네. 지금 다시 하라고 해도 못 하겠지만, 그래도 기왕 해야 할 거 그냥 빨리 끝내 버릴걸.’
그 꼬장을 애꿎은 간호사 한 명에게 퍼부었다는 사실은 까맣게 잊은 채 강동현은 그렇게 생각했다.
“거기 정말 그렇게 잘해?”
“의사는 좀 젊은데… 내가 나중에 알아보니까 진짜 유명한 곳이더라고. 우리나라에서 거기에 문제 생기면, 돈 많은 사람들은 다 거기 간다더라. 나 가서도 간혹 아는 얼굴 발견해서 깜짝깜짝 놀란다니까.”
“헉. 설마 연예인들도 많이 있어?”
“내가 본 건 뉴스 나오던 인간들인데… 아마 연예인들도 있긴 있는 것 같아. 거기 경영 수완이 보통이 아니라서 스케줄 조정을 다 해놓더라. 대기실도 잘 나눠져 있어서 사람들도 잘 안 마주치는데 간혹 응급환자가… 형, 나 비뇨기과에 응급환자가 있다는 거 처음 알았다니까.”
“왜? 그런데도 응급환자가 있어?”
“나 첫날 갔을 때 거시기 절단된 놈 하나가 실려 와서 첫 검진을 간호사한테 받았어.”
“절단?!”
간단한 거라서 간호사가 해도 별 상관은 없는 거였긴 했지만. 강동현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형의 접시에 고기반찬을 올려주었다.
“어디 응급실에서 바로 실려 온 모양이더라고. 계속 다니다 보니까 간간이 있더라.”
간간이, 라니. 한기석은 오한에 부르르 떨었다.
“무섭네… 근데 넌 일주일 만에 나을 걸 왜 한 달이나 다녔냐?”
“어? 아, 어쩌다 보니까… 하하….”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남자의 가오가 있어 발기부전과 지루까지 있다는 사실은 말할 수가 없었다. 이제 마음만으로는 이미 친형 같은 형에게도 말하지 못할 이 몹쓸 병이여.
“하긴 너 광고도 많이 찍고 드라마다 영화다 바빴지… 니가 진짜 고생했겠다.”
뜨끔한 강동현이었지만 한기석이 먼저 그렇게 말해서 두루뭉술하게 그 대답에 실려 넘어갔다.
“그래, 형… 기왕이면 빨리 병원 가서 빨리 치료받아… 그리고….”
강동현은 침을 한 번 삼키고 한기석을 진지하게 바라보았다.
“그거 검사할 때… 아무리 싫어도 눈 딱 감고 견뎌… 그게 빨리 낫는 지름길이야, 형.”
“응? 그게 뭔데? 뭐 이상해?”
“가서 해보면 알아….”
강동현은 술 한 잔을 들이켜며 그렇게 말했다.
그렇게 배우 둘은 반도의 흔한 형, 동생 사이가 되었다.
“동현아~~ 동현아 형이 있잖아~~ 크흡… 이 나이 돼서 이렇게 좋은 동지 만날 줄은 몰랐다~~ 동현아~~”
“형, 많이 마셨다. 일어날 수 있겠어?”
“동현아~~ 형이~~ 형은~~ 니가 진짜 좋은 놈인 거 예전부터 알았어~~ 진짜 알았어~~”
“그래, 고마워. 형. 형, 형. 근데 집 어디야? 주소?”
“동현아~~ 형이~~”
오래도록 말 못한 고민을 안전한 타인에게 털어놓을 수 있었다는 게 한기석에게 있어서는 맺힌 한을 풀 듯 시원했던 모양이었다. 강동현도 그 마음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 없어 그를 잘 챙겨서 택시까지 태워 집으로 보냈다.
한기석은 천생 배우인 타입이었고, 그런 만큼 꽤나 섬세한 감수성을 가졌다. 연습에 연습을 걸쳐 계산적인 연기를 높게 치는 강동현과는 조금 다른 스타일의 연기자였다. 강동현은 그런 한기석을 꽤 높게 쳤고 또한 그런 스타일을 배우고 싶다는 생각도 드는 선배 배우였기도 했다. 술을 꽤 마시니 화장실도 자주 갔고 그럴 때마다 끙끙거렸을 그를 생각하니 연민을 금할 수가 없었다.
강동현은 자신이 인정하는 타입의 사람들에겐 꽤나 예의가 바른 타입이었다. 특히나 존경할 만한 선배 연기자들에게는 정말 깍듯하고 배우고자 하는 열의가 있어 꽤나 귀여움을 받을 정도였다. 동종업계에 일하는 사람들에게도 예의를 잘 지켰다.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을 오래도록 하여 성취하고자 하는 목표가 있었기 때문에 동종업계의 사람들과 마찰을 일으키고자 하는 마음은 눈곱만큼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진짜 저 형도 힘들었겠네.’
이런 공감도 스스로가 인정한 사람한테만 할 수 있다는 것도. 사실은 강동현뿐만 아니라 수많은 한국 사람들이 하고 있는 일일 것이다. 강동현은 집으로 돌아와 얼굴을 깨끗이 한 번 더 씻고 샤워를 하고는 한참을 틀지 않은 TV를 틀어보았다.
『저도 이럴 줄은 몰랐죠.』
기계음으로 어떤 남자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르포 형식의 다큐멘터리였다. 제목은….
“…….”
<고개 숙인 남자들>
‘누구야, 저딴 개 같은 제목을 쓴 작가가…’
강동현은 욕설을 중얼거리며 저도 모르게 볼륨을 높였다.
『처음엔 허리가 불편한 건 줄 알았는데요. 점점 소변을 누어도 눈 것 같지가 않고 잔뇨감이 느껴지고… 자다가도 몇 번이나 깨고… 진짜 일상생활이 불가능해요.』
『치료를 받으셨다면서요?』
『받았죠. 안 받을 수가 있나요. 그런데 이게 나아도… 전립선염도 생활병이에요. 근본적으로 그… 자위나… 어쨌든 지속적으로 시간이 없는 사람들은 계속 재발을 한다니까요.』
“재발?”
강동현은 헉, 하고 더 볼륨을 높였다.
『결국, 비뇨기과 관련 질병들은 재발률이 높다는 것이군요. 예, 알겠습니다. 인터뷰에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시청자 여러분, 보셨듯이 이는 부끄러워할 병이 아닙니다. 대한민국 남성의 10%가 조루증을 앓고 있고 또 다른 10%가 발기부전에 시달리고 있다고 합니다. 조기에 치료를 하지 않으면 완치가 어렵고 또한 치료를 받아도 재발이 잘 되는 특성상 오래도록 고통받을 수밖에 없는 질병인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나라 남성들은 병원에 가면 마치 자신이 남성으로서 실패한 것마냥 두려워하고 있는 실정이라 병을 더욱 키워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건강한 성생활이 건강한 남성을 만듭니다. 여러분 두려워하지 마시고 병원의 문을 두드리길 바랍니다.』
뭐라고 말하는지 귀에 잘 들어오지도 않았다. 강동현은 벌써 또 한 달을 단 한 번도 빼지 못하고 있었다. 건강한 남성의 성생활 따위 개나 물어준 형국이었다. 이미 한 번 치료를 해서 나았기 때문에 다시 걸리리라고 생각해본 적은 없었는데. 생활병… 지속적으로 안 되는 사람들은 계속 재발….
그렇다면 계속 그 간호사가 빼주지 않는다면 결국 다시 재발해서 다시 그 짜증 나는 물건을 항문에다가 꽂아야 하는 비극이 일어날 수도 있다는 말이 아닌가.
‘미친. 장난하냐. 절대 싫어.’
절대 두 번 다시는 겪고 싶지 않은 일의 첫 번째를 꼽으라면 그것이 전립선염이요, 그 두 번째가 그것 때문에 엉덩이에 전립선마사지기를 꼽는 일이었다. 세 번째인 임포와 네 번째인 지루증을 제친 폭력적인 등수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 바로 전립선염 및 그 치료법이었던 것이었다.
강동현은 멍 때리고 협찬에 이강유 비뇨기과 의원이 뜨는 것을 보며 멍청하게 생각했다.
‘…마포대교에서 뛰어내린다고 다 죽는 건 아니겠지?’
*
“그래도 그건 아니지!”
강동현이 대본을 읽다 말고 버럭 그렇게 말하자 옆에서 강동현의 식단을 준비하던 매니저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무슨 말이야? 대사야?”
“아니야….”
전립선염에 걸린 선배 하나를 발견한 강동현은 결국 덜컥 겁이 나고 말았다. 정말로 재발한다면… 이라고 생각하자 끔찍해졌다. 어린애 같다고 말해도 상관없었다. 싫은 것은 싫은 것이었다. 강동현은 기분이 잡쳐서 원래는 다 읽을 대본은 반밖에 읽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강동현은 주섬주섬 선글라스를 꼈다.
“여자 친구 만나러 가냐?”
“어….”
강동현은 힘없이 그렇게 대답하며 사무실을 나섰다. 오늘은 금요일이었다. 강동현은 무겁고도 가벼운 이상한 느낌으로 병원을 향하며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그래, 그래도 그건 아니지. 그렇지만 진짜 또 걸리면 어떡해. 그래, 마포대교에서 뛰어내리는 것도 연습만 하면 죽는 건 아냐. 4일 만에 절벽에서 뛰어내리는 여자도 있었는데. 아, 근데 진짜 이게 내가 한강에 뛰어들 만큼 대단한 일인… 거지… 그럴 수도 있지. 아니…! 아, 미치겠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강동현 본인도 도통 알 수가 없었다.
“도은혁 환자님, 진료실로 들어가시겠습니다.”
간호사가 그렇게 불렀다. 진료실 내로 같이 들어가는 내내 강동현은 간호사의 관자놀이를 노려보았다.
“여기서 옷 갈아입고 나와 주세요. 몇 번 해보셨으니 아시죠? 전부 다 벗어야 돼요.”
간호사는 붙임성 있는 얼굴로 그렇게 웃으면서 문을 열어주었다. 강동현은 들어가다가 말고 황경호의 손목을 붙잡아서 홱 끌어당기고 탈의실 문을 닫았다.
“…뭐 하시는 겁니까, 도은혁 환자님?”
“다리에서 뛰어내리는 거 말고 딴 거 해.”
“네?”
“마포대교에서 뛰어내리는 거 말고 딴 걸로 하라고. 딴 건 내가 들어줄 테니까.”
“싫은데요.”
갑자기 이 남자가 뭘 하나 했더니… 황경호는 딱 잘라 그렇게 말하며 강동현에게 잡힌 손목을 억지로 빼냈다. 손목을 주무르며 심드렁하게 답했다.
“야…! 아무리 그래도 다리에서 뛰어내리라는 건 말이 안 되잖아. 누구 인생 끝낼 일 있냐!”
“싫으면 안 하시면 되죠. 한 번 안 하시면 귀찮은 제 요구 쭉 안 들어주셔도 되는데 그게 더 낫잖아요.”
“야!”
“소리 지르지 마세요. 여기 진료실 앞이에요.”
황경호는 인상을 찌푸리며 고함 때문에 귀가 아프다는 듯 고개를 살짝 피하며 그렇게 말했다.
“어차피 댁도 제가 사정사정하는데도 안 들어 주셨잖아요. 그런데 제가 왜 댁 말을 들어 줘야 해요? 진짜 보면 사람이 몰상식해서….”
“무식하다는 말하지 마.”
강동현이 경고했다. 황경호가 픽 웃었다.
“제풀에 찔려서는. 몰상식하다고 했지 제가 언제 무식하다고 했어요?”
“너….”
화가 나서일까. 몸이 뜨거워진 것 같았다. 언제나 웃는 얼굴을 하고 있는 주제에 꼭 강동현의 앞에서는 이렇게 심드렁하고 불쾌해한다. 강동현은 자신의 얼굴을 쳐다보지도 않는 황경호의 턱을 붙잡아 자신에게로 돌렸다.
“뭐하는 짓이에요?”
강동현은 대답하지 않고 가까이 다가왔다. 황경호가 이맛살을 확 찌푸렸다. 강동현은 정말 못 참고 다짜고짜 얼굴을 들이댔다.
“아! 진짜! 이 인간이 미쳤나 봐!”
설마, 하던 황경호가 차트로 자신과 강동현의 얼굴 사이를 정확하게 막으며 버럭 소리쳤다. 차트에 코를 박은 강동현도 짜증이 난다는 얼굴로 떨어졌다. 스스로도 미쳤나 보다 싶을 정도였다.
몸이 그 달콤함을 기억했다. 정나미가 떨어진다는 듯이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이 볼품없는 간호사의 부드러운 손과 피부를 기억하고 있었다. 저 찌푸린 얼굴에 흥분하는 자신을 시시각각으로 느꼈다. 이유는 여전히 알고 싶지도 않았다. 직감적으로 역시 이 간호사가 아니면 백퍼 전립선염에 다시 걸리리라 예감했을 뿐이었다.
“…좋아.”
강동현이 한숨처럼 말하곤 웃옷을 벗었다. 티셔츠도 한 번에 벗고 상체를 헐벗은 강동현은 경계와 혐오의 눈빛으로 자신을 쏘아보는 간호사를 쳐다보지도 않고 말했다.
“내가 진짜 마포대교에서 뛰어내린다. 너 딴소리 하면 죽는다.”
“하. 웃기고 있네요. 개그맨이나 하시죠. 진짜 뛰어내리면 제가 성을 갑니다.”
강동현은 욱 하고 화가 올라와서 황경호를 노려보았지만, 황경호도 기본적으로 그렇게 녹록한 성격이 아니었다. 귀찮아서 피할 뿐이었지. 피하지 않는 황경호는 강동현 같은 남자를 앞에 두고도 전혀 기가 죽지 않았다. 하지만 강동현이라는 남자는 상대가 이렇게 나오면 나올수록 오기가 받는 사람이었다.
“호적 다시 새길 준비나 해라.”
강동현이 이를 갈면서 그렇게 말했다. 그가 시위라도 하듯 황경호의 눈앞에서 바지까지 벗어버리려고 하자 황경호는 그 꼴이 보기 싫어서 그냥 대답도 없이 홱 탈의실을 나가버렸다.
*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지학의 나이가 조금 덜된 세손은 어느 날 사냥감을 쫓다가 길을 잃고 만다. 한 번도 궁 밖에 나가지 못 해봤던 세손은 살짝 겁은 먹었지만 씩씩하게 사람들에게 돌아갈 궁리를 했다. 주위에 사람이라도 있으면 물어볼 텐데 넓은 숲속에서 어떻게 인기척을 느끼겠는가. 그러다가 우연히 숲속에 살고 있는 여자아이를 만난다.
『아, 다행이다. 드디어 사람을 만났구나. 혹시 궁궐 사냥터로 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아느냐.』
여자아이는 아무것도 대답하지 못하고 갑자기 쓰러졌고 세손은 그 아이를 안아 들고 당황해했다. 그때 호위무사가 세손을 찾으러 왔고 그 여자아이까지 함께 데리고 간다. 또래의 여자아이를 이렇게 가까이서 보는 것이라 신기해한다. 아이가 배를 곯아 쓰러진 것으로 생각하여 빈민의 구휼에 힘써야 되겠다는 장한 생각도 한다.
억지를 써서 여자아이를 궁으로 데려오지만, 그때 궁궐에 역신이 들었다는 무녀의 말에 궁궐 안이 한바탕 뒤집힌다. 무녀들이 그 근원을 찾아 세손의 처소까지 오게 되고 세손은 당황하여 그들이 원하는 대로 아이를 보여주려고 하지만 아이는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무녀들은 세손이 역신을 이끌고 궁궐에 들어와 주상에게 해를 끼칠 뻔했다고 힐난한다. 세손은 그런 미신 따윈 믿지 않는다며 오히려 그들을 꾸중한다.
그 뒤로도 무녀들은 왕의 곁을 항시 지키며 혹시 모를 변고에 대비하였지만 정말로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세손은 그런 자들을 비웃었다. 그렇게 할바마마에게 문안을 드리고 아버지인 왕세자의 문안을 갔는데 문득 아버지의 존안이 점점 어두워져 가는 것을 느낀다.
‘그러고 다음 편부터 성인 연기자들로 바뀌지. 날이 갈수록 아역배우들이 연기를 잘하는 것 같단 말이야. 인물도 더 좋아지고.’
황경호는 이미 두 번 정도 정주행을 한 드라마를 또 틀어서 보며 그렇게 생각했다. 다음 화로 넘어갔다. 갓 주위로 면사를 둘러쓴 남자와 그의 호위무사가 사람들이 많은 저잣거리를 걷고 있었다. 이때의 표현이 여타 로맨스 사극 드라마와는 상당히 달랐다. 주인공과의 거리감이 있는 촬영 연출로 그가 많은 사람들 속에서, 그것도 얼굴을 가리고 있는데도 확연히 눈에 띄는 인물이라는 것을 표현했다. 이것은 순전히 주인공을 맡은 배우의 키와 체격, 그리고 분위기에 의존하여 할 수 있었던 표현 방법이었다. 그는 저잣거리를 돌아다니며 물건을 사고 면사를 살짝 들어 차를 마시곤 했는데 그때 살짝 드러나는 입매가 너무나 매력적이었다.
‘하여튼 잘생기고 볼 일이다…’
황경호는 이 인간이 얼마나 강아지 같은 인간인지 아는 사람이 이 인간을 아는 사람들 중에 몇 명이나 될까 생각해보았다. 설마 자기밖에 없는 건가, 라는 생각이 들어 잠깐 심각해졌다. 언젠가 진짜 고소미를 먹이려고 마음을 먹는다고 해도 고소미를 먹일 수 있을지조차 모르겠다.
‘뭐… 고소할 생각도 없다만…’
왜 고소할 생각이 없냐고 물어본다면 할 말이 없다. 굳이 말을 하라고 하면 쪽팔려서 그렇다고 말하겠지만… 어차피 정말 죽는다면… 결국 아무런 상관이 없어지는 게 아닌가. 물론 처음에 욱하는 마음에 그런 거지 같은 계약을 한 것이라 항상 그만둬야 되겠다고 생각하면서도 저 인간한테 항상 끌려다녔다. 몹시 후회했지만 결국 후회하는 것을 고치고자 하는 열정이 부족하다. 그냥 내가 참고 말지, 이게 생활이 되어버리니 정말로 거부해야 할 것도 결국엔 스스로 지쳐서 다 받아들이고 만다. 그리고 스스로도 결국 그래, 별거 아니잖아, 라고 합리화해버린다.
귀찮았다, 모든 게. 시키는 일이 아닌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는 것만으로도 귀찮았다. TV에서 떠들어대는 힐링이니 뭐니, 여행이니 뭐니, 연애니 뭐니, 다 귀찮고 쓸데없이 느껴졌다. 그래서 뭐? 청춘은 열정으로 살아라, 노력해라, 큰 꿈을 가져라… 다 피곤했다. 그래서 진짜로 원하는 걸 하면서 사는 사람들이 몇이나 되는데? 다들 결국 누군가가 떠들어대던 그럴듯한 걸 마치 자기가 원하던 것인 것처럼 연기하고 자아도취 되어 산다. 추하게 느껴졌다. 적어도 나는 솔직하잖아. 비겁하더라도 스스로에게 거짓말은 하지 않는다.
스스로를 똑바로 보지 못하는 인간들을 보면 무서웠다. 사이비 종교를 광신하며 현실과 망상을 구분하지 못하는 신도들처럼. 스스로에 대해 비만한 신앙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왜 나는 성공하지 못하냐고, 왜 나는 다른 사람들에게 사랑받지 못하냐고 불만을 마구 터트리는 사람들 중에 태반은 실제 본인 빼고는 그 사람이 왜 원하는 걸 이루지 못하는지 다 알고 있다. 벌거벗은 임금님을 보는 사람처럼 이쪽이 다 부끄러워졌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그중에서 자기 자신에 대해 그렇게 확신을 가지고 자신을 믿고 실제로 그것을 이루어내는 몇몇 사람들을 보면 가끔 저도 모를 열등감이 들었다. 자신이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 알고 거칠게 추구하여 이루어내는 사람들을 보면, 더 바라는 건 딱히 없고 그럭저럭 만족하고 살고 있다고, 욕심을 부리지 않기 때문에 평온하다고 생각했던 자신을 부정당하는 느낌이었다.
누군가는 남이 원하는 것을 내가 원하는 것처럼 착각하고 살고 나는 내가 원하는 것이 있는데도 그것이 없다고 생각하고 살았던 것이 아닐까. 스스로를 제대로 알아보지 못하는 사람들이 싫었던 것은 내가 나 자신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해서인 것은 아닐까.
나는 왜 이럴까.
나는 왜 제대로 살지 못하는 걸까.
제대로 산다는 것은 뭘까.
나는 왜 죽고 싶은 걸까.
죽고 싶다.
황경호는 베갯잇에 얼굴을 파묻었다. 별로 불만 가질 인생은 아니라고 생각했고 이대로도 좋다고 항상 생각하는데도 ‘이대로 평생을’ 살 것을 생각하면 숨이 턱 막힌다. 행복해 보이는 사람들을 보면 미소를 지으면서 대했다. 불행해 보이는 사람들을 봐도 미소를 지으면서 대했다. 고민이 없어 보이는 사람도, 있어 보이는 사람도 모두 그렇게 대했다. 누군가가 내가 어떤지 알아낼 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수치심에 얼굴이 빨개졌다.
그래서 누군가를 고소한다거나 하는 건 처음부터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누구에게도 알리고 싶지 않았다.
‘저런 놈한테 그런 짓을 당하고 있다는 것도.’
황경호는 불쾌했던 기분들을 상기하고 인상을 찌푸렸다.
『너는 그때…』
비단 옷자락이 화려한 벚나무 사이에서 흩날렸다. 아름다운 주연 배우들의 외모를 한껏 부각하는 미장센이 돋보이는 장면이었다.
드라마는 그것을 보고 있는 사람의 기분 따위엔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흘러갔다. 그 안의 남자는 드디어 얼굴을 드러내었다. 원래 얼굴을 직접 보고 그가 얼마나 쓰레기인지 안다고 생각하면서도 문득 연기를 하고 있는 그를 보면 전혀 다른 사람 같았다. 결국엔 그렇게 황경호에게 몹쓸 짓을 해대는 남자지만, 대화도 제대로 해본 적도 없고 그저 자신과는 ‘다른’ 사람일 뿐이라는 것을, 타인이고 다른 세계의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저렇게 난 인간이라서일까… 처음에 봤을 때부터 날 괴롭혔던 건 그가 내 무언가를 봐서 그런 것인 건 아닐까. 누가 알아차릴 만한 것이었을까. 다른 사람들도 알아차릴 수 있을까.
‘그런 건 싫은데….’
정말 싫은데. 가족이나 친구나, 병원 사람들이 지금 황경호가 어떤 사람인지 조금이라도 알아차린다면, 정말로 도망가버리고 싶을 것이다. 그리고 아무도 자신을 찾을 수 없는 곳에서 죽어버릴 것이다.
외국으로 나갈까. 지갑 같은 것도 가지고 가지 말고 옷도 전부 버리고 새 옷을 사서 입고 아무도 날 알아보지도 찾지도 못할 곳에 가서 고통스럽지 않고 깨끗하게 죽을 수 있다면.
수치스러움이 마음을 좀먹었다. 누군가 자길 알아차리는 것이 겁난다. 죽고 싶다고 생각한다. 그런 생각들이 계속 반복되고 있었다.
[왜 그렇게 죽자고 죽으려는 건데? 그 마인드로 그냥 열심히 살아.]
“죽고 싶다….”
단 한 명도 내가 죽고 싶어 한다는 걸 알아차리지 못했으면 좋겠다. 이미 저 연예인병 배우는 알고 있지만 상관없었다. 내가 저 인간을 모르는 만큼 저 인간도 나를 모른다. 나는 날 알고, 내가 아는 사람들이 나에 대해 알기를 바라지 않는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내가 죽는 것을 너무나 무서워하고 있다는 것만큼은
정말 아무도 몰랐으면 좋겠다.
*
수요일에서 목요일로 넘어가는 새벽이었다. 새벽 3시 반. 황경호는 미친 듯이 울리는 전화에 겨우 잠들었던 의식이 겁탈 당하듯 강제로 깨어나는 것을 느꼈다.
‘아, 삼십 분밖에 못 잤는데.’
여느 우울증 환자가 그렇듯이 황경호는 가벼운 수면장애를 겪고 있었다. 한두 달 전부터 아침에 출근 해야 하는데도 밤에 잠이 오지 않아 고생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양을 몇천 마리나 새고 나서야 겨우 잠들었는데 고작 전화 한 통에 깨어야만 하다니. 사기 같았다.
황경호는 손을 더듬거려 휴대폰을 찾아내었다. 이 시간에 몰상식하게 전화를 해댈 사람은 알지 못했다. 뭔 일이 터진 건가. 이제 그 정도 생각은 할 수 있을 만한 정신이 되어 눈을 겨우 뜨고 폰화면을 바라보았다.
“아…. 내가 왜 이 남자한테 번호를 알려줘 가지고….”
황경호는 짜증을 내며 베개에 얼굴을 비볐다. 황경호는 그냥 붉은색 버튼을 눌러버렸다. 하지만 상대는 전혀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상대에 대한 배려심 따윈 눈곱만큼도 없었다. 배터리를 분리해버릴까 하는 생각이 번쩍 났지만 이젠 잠까지 깨서 그냥 멍청하게 침대에서 일어나 앉아 반짝거리는 폰화면을 내려다보았다.
그래, 황경호가 모르는 어떤 긴급한 상황이 벌어졌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뭐, 그럴 일은 없을 것 같긴 하지만 만에 하나라는 것이 있는 것이니까. 받아서 빡치더라도 찝찝한 것보다야 나을지도 모르지. 멍한 머리는 이상한 논리를 펼쳤다. 아니, 사실은 전화를 받아서 욕이라도 오지게 퍼붓고 싶어서 그런지도 몰랐다. 잠이 깨서 누구든 걸리기만 해봐라, 라는 심보였다.
“지금 시간이 몇 신데….”
[나와.]
황경호가 자신이 낼 수 있는 짜증을 모두 목소리에 담아 전화를 받는데 상대는 말을 뚝 끊고 그렇게 말했다. 황경호는 속에서 부글부글하는 이 어찌할 수 없는 짜증을 그대로 표출하며 되물었다.
“나가긴 뭘 나가요. 이 시간에… 진짜 이 인간이 미쳤나.”
[마포대교다. 전에 니가 기어 올라갔던 데.]
“거긴 왜요.”
황경호는 반쯤 혼몽한 상태로 멍청하게 그렇게 물었다.
[뛰어내리려고.]
“…뭐라구요?”
[니 요구조건. 마포대교에서 뛰어내려라, 맞지? 씨발. 니가 직접 안 봤다고 안 한 걸로 치면 나만 좆 되는 거잖아.]
강동현은 평소에는 쓰지 않는 욕까지 써가면서 그렇게 말했다. 황경호는 강동현의 말투에서 진심을 느끼고 혹시 이 인간이 너무 얄미워서 이런 꿈이라도 꾸는 건가, 하고 폰 화면을 한 번 확인했다가 다시 전화기를 귀에 대었다.
“미쳤어요?”
[씨발, 니가 하라며.]
황경호는 잠이 번뜩 깨는 느낌이었다.
“자, 잠깐만요. 지금 어디라구요? 진짜 뛰어내릴 거라구요?”
[마포대교라고 했잖아. 이십 분 기다린다. 그 안에 튀어 와.]
전화가 뚝 끊겼다. 황경호는 황당해서 처음으로 강동현에게 전화를 다시 걸어보았지만 폰 배터리를 빼버린 것인지 전원이 꺼져 있다는 안내음만 나오기 시작했다. 황경호가 오든 오지 않든 뛰어내리겠다는 것인가. 황경호는 제대로 판단이 나지 않았다. 그리고 덜컥 겁이 났다.
진짜 뛰어내리면 어떡해. 황경호는 부랴부랴 일어나서 욕실로 달려 들어가 일단 정신이 깨기 위해서 찬물로 세수를 했다.
누차 깨달아 온 것이지만 강동현이라는 그 남자, 황경호한테는 정말 쓰레기 같은 남자였지만 단 하나 무서운 점이 있다면 이 남자가 한다고 말한 건 정말 해버린다는 것이었다.
황경호가 진짜 강동현이 마포대교에서 뛰어내리길 바라서 그런 요구를 했겠는가. 앞서 고자라고 외치라고 하거나 하는 것도 결국 이 말도 안 되는 계약을 끝내자는 강경한 표현이었을 뿐 다른 게 아니었다. 황경호의 요구 같은 건 사실 강동현이 들어주지 않아버리면 끝나는 일이었다. 더러워서라도 안 한다는 심정으로 다른 사람을 찾아버리면 되는 일이었던 것이다. 말 그대로 얌전히 의사한테 치료만 잘 받아도 될 텐데 이 남자는 도대체 무슨 고집인지 황경호와의 요상한 계약을 끌어왔고 지금까지 수도 없이 말도 안 되는 짓을 해왔다. 단지 그 남자가 뭐든지 황경호의 요구를 들어주겠다고 말했기 때문이었다.
‘내가 그때 미쳤다고 왜….’
황경호는 설마설마, 하면서도 옷을 챙겨 입고 밖으로 나왔다. 시간이 촉박해서 할증 요금도 신경 쓰지 못하고 택시부터 붙잡아 탔다.
“아저씨, 마포대교요.”
“뭐? 이 새벽에?”
“네, 빨리 가주세요.”
그렇게 말하자 택시 기사 아저씨가 참으로 의심스럽도다, 하는 얼굴로 쓱 황경호를 한 번 돌아보았다.
“보니까 아직 학생인 것 같은데… 혹시 나쁜 맘 먹은 거면….”
“아니, 저 말구요. 제가 아는 사람이….”
“뭐??”
“그러니까 빨리 가주세요, 아저씨.”
아저씨가 깜짝 놀라서는 어벙벙해져 얼른 택시를 출발시켰다.
“아저씨, 미터기 켜세요.”
“학생 그게 문제야, 지금? 사람 하나가 죽게 생겼구만!”
아저씨는 정의의 사도마냥 급하게 택시를 몰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초조한 마음으로 시간에 못 맞춰 도착하면 어떡하나 싶었는데 나중에는 저도 모르게 문손잡이를 꽉 잡고 이러다 내가 먼저 죽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총알택시라는 게 왜 총알택시인지 몸소 느끼게 된 황경호다. 신호를 무시하기 위해 인도까지 올라가서 유턴을 해대며 겨우 마포대교까지 도착했을 때는 황경호가 더 정신이 없어졌다.
“어어! 저기 진짜 사람 있네!”
아저씨가 택시에서 같이 내려 어느 쪽으로 손가락질을 하면서 말했다. 폰을 보니 3시 50분이었다. 황경호는 헐레벌떡 난간을 넘어 인도로 올라갔다.
“미쳤어요!!!”
황경호는 멀찍이 서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그 훤칠한 키에 다짜고짜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약 십몇 미터쯤 떨어진 곳에서 멀찍이 한강을 바라보고 있던 남자가 고개를 홱 돌렸다. 그는 황경호의 목소리를 알아들은 것인지 선글라스와 모자를 벗었다. 너무 어두워서 얼굴을 멀리서 알아볼 수는 없었지만 모자를 벗는 꼬라지나 선글라스를 벗는 꼬라지나 여실히 강동현 특유의 몸짓이 보였다. 황경호는 깜짝 놀라서 저도 모르게 달려갔다.
“자, 잠깐…! 잠깐만요!”
“어머 어머!!”
택시 기사 아저씨도 깜짝 놀라서는 굵은 목소리로 그렇게 외치며 황경호의 뒤를 따라서 뛰었다.
“세상은 아름다워! 죽으면 안 돼!”
택시 기사 아저씨는 평소 절대 입에 담지 않을 법한 말만 외치며 양팔을 머리 위로 흔들며 달려갔다. 강동현은 신발까지 벗어 던졌다.
‘우와, 진짜 저 인간이 미쳤나 보다.’
황경호는 악을 쓰며 달려갔다.
“진짜 죽고 싶어요?!! 미친 짓 그만하고… 진짜 미쳤어요!!!”
황경호는 기어코 난간 위에 서서 어깨와 목을 푸는 강동현을 보고 기겁을 했다. 이제 1미터쯤 남았을까. 말릴 수 있겠다! 라고 생각했을 즈음에 강동현이 황경호를 돌아보며 말했다.
“너 나중에 딴말하지 마라.”
“자, 잠깐….”
강동현을 잡기 직전에 그는 마치 다이빙 선수들이나 할 법한 깨끗한 자세로 난간에서 점프를 했다.
‘저 인간 연습한 거야?’
황경호와 택시 기사는 입을 딱 벌리고 난간에 달라붙어 아래를 쳐내려다보았다. 곧 풍덩, 하는 소리가 들렸다. 택시 기사 아저씨는 황경호와 똑같이 얼이 빠진 얼굴로 밑을 바라보고 있다가 버럭 소리쳤다.
“1, 119!!”
“아, 아, 아저씨. 아저씨 전화해봐요…!!”
황경호도 아저씨의 외침에 정신이 들어 말을 더듬으며 저도 모르게 마구 아저씨의 어깨를 쳤다.
“여, 여, 여, 여기… 마, 마, 마, 마포대교… 사, 사, 사람 뛰, 뛰어내렸어…!!”
아저씨도 정신없이 말을 더듬으며 그렇게 119에 신고를 하기 시작했다. 가을의 새벽 4시는 어제도 아닌 것 같고 오늘도 아닌 것 같은 모호함 속에 감추어져 있었다. 이 넓은 다리 위로 차도 변변찮게 다니고 있지 않았다. 까마득한 다리의 아래는 간간이 검은 물빛만이 번쩍일 뿐이라 어떻게 되었는지 하나도 보이지가 않았다.
“그, 그, 그러니까 마, 마, 마포대교….”
기사 아저씨가 패닉을 일으킨 것인지 말을 더듬으며 그렇게 똑같은 소리만 반복하고 있을 때였다. 강동현이 뛰어내린 지 한 십 분쯤 지났을까. 전화벨이 울려서 황경호와 아저씨 모두 화들짝 놀랐다. 아저씨는 엉덩방아까지 찧었다. 황경호는 한 번 휴대폰을 떨어뜨렸다가 황급히 주웠다. 화면을 보고 부리나케 통화버튼을 눌렀다.
“여, 여, 여보세요?”
[선글라스랑 신발이랑 모자 챙겨 놔. 이번 주에 병원 가서 가져갈 거니까. 비싼 거다.]
그러고는 싸가지 없게 전화를 뚝 끊어버렸다. 택시 기사 아저씨가 119를 취소하고는 황경호에게 침을 튀겨가며 물었다.
“뭐야? 뭐야, 학생? 아까 뛰어내린 사람이야? 죽은 거 아냐? 살아있어?”
“네…. 그런가 봐요….”
황경호는 다리가 풀려서 저도 모르게 주저앉았다. 기사 아저씨도 십 년은 감수했다는 표정으로 아이고, 아이고, 하며 꿀벌처럼 8자를 그리며 돌아다녔다.
“지금 이게 뭐야? 어? 아까 그 인간 뭐하는 작자야? 뭔데 이렇게 사람을 놀래켜?!”
기사 아저씨는 이제야 화가 나는 것인지 버럭 그렇게 소리쳤다.
‘제 말이 그 말입니다….’
황경호는 대답할 기운도 쭉 빠져서 허탈하게 앉아 있었다.
“하하….”
황경호는 너무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나왔다. 시선을 내렸다가 캡모자와 그 안에 담긴 선글라스, 하나는 바로 서고 하나는 옆으로 누운 비싼 운동화가 보였다.
“이 상황에 저걸 챙겨 오래, 이 미친놈이….”
황경호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한 손에는 커다란 운동화를 들고 다른 손에는 캡모자와 선글라스를 들었다.
“뭐야, 학생? 응? 아까 뛰어내린 사람이 지금 학생한테 장난치려고 그런 거야? 어?”
“모르겠어요….”
황경호가 얼이 빠져서 그렇게 말하자 기사 아저씨가 정신을 차리자고 말하며 황경호를 일으켜 세워주었다.
“어이고, 아저씨도 다리가 풀려서 운전을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아이고. 소주 마시고 싶네.”
“아저씨… 청심환 하나만 사러 가요, 우리.”
“그래, 학생이 많이 놀랬네….”
기사 아저씨는 얼이 빠져있는 황경호를 보고 더 정신이 차려지는 황경호의 허리를 툭툭 치며 차로 데려갔다. 기사는 황경호를 일단 차에 태우고 운전석으로 들어갔다.
“밥이나 먹자, 학생. 어우, 오늘 장사 못 하겠다.”
“죄송해요….”
황경호는 왜 이렇게 자신이 충격을 먹었는지 곰곰이 생각을 해보았다. 아마 자신은 뛰어내리지 못했던 마포대교에서 저렇게 손쉽게 뛰어내려 버리는 저 남자를 보고 또 패배감이 든 모양이었다. 죽고 싶지도 않은 인간이 죽고 싶은 자신보다도 훨씬 간단하게 다리에서 뛰어내려 버렸다. 도대체 이도 저도 아닌 자신은 무엇인가. 강동현은 오기에 받아 뛰어내려 버린 것이겠지만 황경호는 마포대교까지 뛰어내리는 강동현을 보고 세상에 태어나서 가장 경멸하는 인간에게 단 하나 가지고 있던 강한 의지마저도 간단히 부정당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정말 기분 나쁜 남자….
황경호는 죽고 싶다, 고 생각하며 조용히 택시를 타고 마포대교를 지나갔다.
*
“어머, 오빠 기사 봤어?”
정기연 간호사가 점심 쉬는 시간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다가 어랏, 하며 황경호의 얼굴 앞에 폰을 들이밀었다.
“뭔데.”
“강동현. 오빠랑 이제 좀 친하지 않아? 저번에도 과로로 쓰러졌다고 하더니만 이번엔 몸살이라네. 이 남자, 허우대만 멀쩡하지 사실은 허약체질인 거 아냐?”
“몸살?”
황경호가 눈을 들어 휴대폰을 보았다. 거기엔 정말 배우 강동현이 무리한 스케줄로 인한 몸살로 병원 신세를 졌다는 소식이 적혀있었다. 독하게 어제, 오늘 스케줄을 끝내고 앓아누워 버렸다는 이야기였다.
‘하긴 어제 새벽에 한강에 뛰어들었던 인간이 멀쩡하면 그것도 이상하지….’
황경호는 내심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렇게 몸살에 걸린 인간이 오늘 병원을 올 리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마포대교에서까지 뛰어내린 인간이었다. 눈에 뵈는 게 있을 턱이 없었다. 도대체 오늘 그 남자가 무엇을 요구할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확신할 수 있는 것은 분명 그가 무엇을 시키든지 간에 황경호는 죽을 만큼 하기 싫을 것이라는 것과 마포대교까지 뛰어내린 그의 강압을 황경호는 절대 끝까지 거부할 수 없을 것이라는 거였다.
이런 마당에 몸살에 걸려 몸져누워 버렸으면 적어도 다음 주까지는 유예기간이 있다는 소리가 아닌가. 당장에라도 이강유 선생님께 말해서 다음 주 금요일 월차나 반차를 쓰던가….
그렇게 다행히도 그 주 금요일에는 강동현이 나타나지 않았고 또 일주일이 흘렀을 때는 차마 안 쓰던 월차를 쓰겠다고 말을 꺼내지를 못해서 주저주저하며 금요일을 맞이하고 말았다. 황경호는 손톱만 깨물고 있었다.
‘정말 짜증 나는 인간…. 어떻게 마포대교까지 뛰어내리냐고. 보통 뛰어내리겠다고 말하면 다 뛰어내리는 거였어? 그 인간 사전에 빈말이라던가 그런 건 없는 거냐고.’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불행이라고 해야 할지. 마포대교 다이빙에 이은 강동현의 요구가 무서워서 황경호는 우울증이고 자시고 다 잊어먹고 있었다.
“아, 황 간호사.”
“넵, 오 간호사님.”
최연장자 군에 속하는 오 간호사가 부르자 황 간호사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대답을 했다.
“오늘 이강유 선생님 Y대 병원 외진 있는 거 알지? 오늘 들고 갈 거 좀 있어서 운전 좀 하고 오후는 Y대 병원 갔다 와요. 예약 환자는 김 간호사한테 돌려놓을 테니까.”
“오, 갈래요. 갔다 올래요.”
완전 럭키! 황경호는 보통 때 같으면 귀찮다며 김형세에게 미뤘을 외진을 수락하고는 신나게 짐을 챙겼다.
“기분 좋아 보이네?”
이강유가 황경호에게 키를 건네며 그렇게 말했다.
“쌤 완전 구세주에요, 구세주. 앞으로 금요일 날 외진 있으면 무조건 저 데려가 주세요.”
“음? 왜 하필 금요일?”
“저 그 연예인병 환자 싫어하잖아요.”
“뭐? 아직도 엉덩이 만지고 그러냐, 그 인간?”
전에 한 번 푸념 삼아 말했던 것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던지 이강유가 인상을 찌푸리며 그렇게 물었다. 뭐 그렇긴 하지만… 황경호가 어깨를 으쓱하며 그런 건 아니라는 말투로 대답했다.
“뭐… 그냥 짜증 나서요. 그 인간 성격 엄~~~청 나쁜 거 아세요? 진짜 상상 이상이라니까요?”
“그래? TV에서 보이는 것보단 좀 신경질적인 건 같았지만 뭐… 그거야 원래 우리 병원 오는 사람들이 다 그런 것이고. 생각보다 건실한 것 같던데? 애인도 오래 사귀고 일편단심인 것 같고. 일도 열심히 하고.”
황경호는 차의 뒷좌석에 이것저것 싣고는 운전석에 앉았다. 이강유도 조수석에 앉았다.
“인간이 안하무인이라니까요. 자기 일, 자기 애인, 자기 사람 아니면 사람 취급도 안 한다니까.”
황경호가 콧방귀를 뀌며 그렇게 말했다.
“진짜 자기 혼자 완~전 잘 나셨어요. 인기 있는 연예인이면 단가. 진짜 별꼴도 그런 별꼴이….”
환자에 대해 이런 식으로 말하는 황경호는 처음이라 이강유는 또 진지하게 물었다.
“담당 다시 바꿔줘? 비상식적인 짓 하면 나한테 말해라. 병원 못 오게 할 테니까.”
황경호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이강유를 돌아보았다. 이강유는 더 말할 것이 있으면 말하라는 듯이 황경호를 살폈다.
“아뇨… 뭐… 그럴 정도까지는… 하하.”
‘새삼스럽지만… 참 우리 선생님은 사람이 너무 좋다니까.’
황경호는 괜히 쑥스러운 기분이 들어서 핸들을 돌리며 큰길로 빠져나갔다.
“환자 때문에 병원 때려치우겠다는 소리 갑자기 하지 말고 미리미리 말해. 나 잠깐 눈 붙인다.”
“넵, 쌤.”
이강유는 피곤한지 눈을 감고 쪽잠을 청했다. 황경호는 슬쩍 그런 이강유를 돌아보았다가 다시 운전에 집중하였다.
‘머리 좋아 인물 좋아 사람 좋아… 참 우리 선생님 누가 데려갈지 진짜 복 받은 여자네.’
정말 됨됨이가 된 사람이었다. 경영자로서도 남자로서도 인간으로서도 존경하고도 남을만한 남자였다. 세상 사람들이 이강유의 반만큼만 다른 사람들을 배려하고 살아도 참 아름다워질 것 같았다.
병원에 도착해서는 이강유를 졸졸 쫓아다니며 수발을 들었는데 생각보다 봐야 할 환자의 용태가 심각해서 수술실에서 꽤나 시간을 잡아 먹었다. 마무리를 하고 나왔을 땐 별이 총총 뜬 한밤중이었다. 황경호는 수술실 안에서 계속 서 있었기 때문에 다리가 저려서 병원이라도 한 바퀴 돌 생각으로 천천히 걷고 있었다.
데구르르….
발치에 작은 공 하나가 굴러왔다. 뭔가 싶어서 줍고는 주인을 찾아 고개를 돌렸다.
*
잠 잘 시간도 없는 마당에 이주 동안이나 다이빙 연습을 했다. 한강에서 뛰어내리고 28시간 연속스케줄을 소화했더니만 강철도 씹어 먹을 청춘이라도 탈이 안 날 수가 없었다. 그 지랄을 왜 했는지 이유도 알 수 없게 결국 그 주는 날려버리고 그다음 주 이를 갈고 병원으로 갔으나 그 망할 간호사는 외진을 하러 나가버렸다. 강동현은 이강유의 밑에 있는 의사 하나에게 대충 약이나 하나 지어 받고는 돌아가야만 했다.
한 달을 욕구불만으로 고생하고, 이주를 쓸데없는 다이빙으로 시간을 날리고 일주일은 몸살, 그다음 주는 간호사가 없었으니 거의 두 달을 강제금욕의 상태로 보내야만 했다. 강동현은 달달달 다리를 떨며 대기실 소파에 앉아 있었다.
“…저기요.”
보통 이강유나 황경호 아니면 말을 일절 안 하는 인간이었지만 강동현은 저도 모르게 앞에 차를 내려놓는 조한나 간호사를 붙잡았다.
“그 간호사… 황경호 간호사 어디 있나요?”
“황 간호사님 조금 있으면 상담실에서 나올 거예요. 뭐 필요하신 거 있으신가요?”
“아니요.”
“네,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조한나 간호사는 백의의 천사라는 이름에 걸맞게 착하고 친절하게 웃으면서 그렇게 말했다. 강동현은 다시 소파에 등을 기대고 팔짱을 낀 채로 다리를 달달달 떨고 있었다.
“아, 도은혁 환자님 여기….”
오빠, 환자님이 찾으셨어, 하면서 황경호에게 말하고는 웃는 얼굴로 강동현을 부르며 손짓했다. 강동현은 고개를 휙 돌려 그쪽을 바라보았다. 일부러 그러는 것인지 황경호는 굳이 태블릿PC를 카운터에 갖다 주고는 느정하게 강동현에게로 왔다.
“찾으셨다구요. 뭐 필요하신 거라도….”
황경호가 그렇게 묻는 사이 옆에 있는 아저씨 하나가 갑자기 황경호의 손목을 잡으면서 아는 척을 했다.
“황 간, 오랜만이야.”
“어? 허진호 환자님! 오랜만이시네요. 잘 지내셨어요? 오늘 어쩐 일로 오셨어요?”
“아, 한 일 년쯤 되면 검진받으러 오라고 해서.”
“벌써 그렇게 되셨어요? 어떠세요, 괜찮으시죠?”
“이젠 진짜 내 꺼 같다니까.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반년이나 일 년에 한 번씩은 와보려고.”
“와, 진짜 환자님들이 다 허진호 환자님만 같아도 저희가 걱정이 없죠.”
“황 간도 보고 싶어서 왔지.”
“에이~”
그 환자는 반갑다는 듯이 조카의 엉덩이를 두드리는 것처럼 황경호의 엉덩이를 두드리며 친한 척을 했다. 지금 급한 게 그쪽이 아닐 텐데 딴짓을 하는 간호사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 강동현이 발로 황경호의 발목을 툭 찼다. 황경호가 웃는 얼굴을 짓고 있다가 강동현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저 잠시 저 환자님 응대 좀 하고 나중에 나오시면 말씀 더 나눠요.”
“어~ 그래. 일해야지.”
황경호는 그제야 강동현에게 갔다.
“조금 있으면 선생님 뵐 수 있을 거예요.”
“그거 말고.”
“…….”
아마 대기하고 있는 환자들이 많아서 얼굴에 완전히 철판을 깐 것 같기는 했지만 작게 한숨을 짓는 것이 들렸다. 강동현은 지금까지의 짜증이 전부 심술로 바뀌어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일단… 조금 있다 선생님 뵙고….”
“그래, 좋아.”
강동현은 시선을 돌리며 마치 봐준다는 듯이 대답했다. 잠시 뒤 의사를 만나 여느 때와 같은 검진과 검사, 상담, 약 처방을 받고 옷을 입고 나왔다. 강동현은 천천히 대기실 쪽으로 나오면서 한 번 주변을 살펴보았는데, 눈에 익은 다른 간호사들은 보였지만 황경호는 보이지 않았다. 강동현은 선글라스의 안에서 인상을 찌푸리며 잠시 카운터와 다른 데를 찾아봤다.
“황경호 간호사 어디 갔어요?”
“네? 황 간호사님 아까까지만 해도….”
“찾으면 말씀해주세요.”
“아, 전할 말씀이라도 있으시면….”
“아닙니다.”
강동현은 슬쩍 상담실 문 근처를 얼쩡거리다가 아, 하면서 자동문을 열고 나가 화장실로 향했다. 깔끔하고 고급스러운 화장실에는 사람이 하나도 없어 보였지만 유달리 꼭 닫혀 있는 문 하나가 눈에 띈다.
“야.”
쾅쾅, 하고 화장실 문을 두드렸다. 안에서 누가 화장지 걸이를 친 것인지 뭔가 소리가 확 났다가 잠잠해졌다. 강동현은 그게 황경호라고 확신했다. 그럼 그렇지.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던 주제에 사실은 이렇게 슬쩍 꽁무니를 뺄 작정이었던 것이다. 저번 주에 외진이니 뭐니 하면서 몸 사렸던 것을 보면 충분히 예상이 가는 짓이었다.
“빨리 안 나와? 죽을래?”
강동현은 쾅쾅쾅 위협적으로 화장실 문을 두드렸다.
“야.”
“제, 제가… 도은혁 환자님이 진짜 마포대교를 진짜 뛰어내릴 줄 알았겠어요? 뛰어내리라고 진짜 뛰어내리는 사람이 어딨어요? 그리고 진짜 뛰어내리면 어떡해요. 잘못되면 어쩌려고…!”
“뛰어내리라고 한 게 누군데 이제 와서 딴소리야? 당장 안 나와?”
황경호가 강동현에게 마포대교에서 뛰어내리라고 했던 말의 진의는 이제 더 이상 당신 같은 인간은 꼴도 보기 싫다는 의미로, 이 지긋지긋한 연을 끊어버릴 작정으로 한 말이었지만 강동현은 그런 황경호의 의도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진짜 마포대교를 뛰어내림으로써 황경호에게 빅엿을 먹여버린 것이다.
보통 사람 같으면 그런 계약 따위 포기해버리고 몸을 사렸을 텐데 도대체 이 인간은 어떤 정신머리를 하고 있길래 진짜 거기서 뛰어내린 것인지 황경호도 어이가 없다 못해 무서울 지경이었다. 강동현이라는 남자가 정말 안하무인하고 자기밖에 모르고 쓰레기 같다고 누차, 누차 생각해왔지만 무섭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는데 마포대교까지 뛰어내리니 이제는 무서웠다. 황경호는 쾅쾅 흔들리는 화장실 문을 필사적으로 잡고 있었다.
“이, 이상한 건 싫어요. 진짜 싫어요.”
“일단 나와. 딴 사람들한테 들키기 싫으면. 사람을 마포대교에서 뛰어내리게 한 마당에 지금 이딴 식으로 군다는 게 말이 돼? 어?”
입장이 반대였다면 뒤도 돌아보지 않았을 거면서 말은 잘한다. 황경호는 역시나 스스로도 예견했듯이 강동현처럼 그렇게 철면피가 되지 못했다. 황경호는 난처한 듯 몇 번이고 주저하다가 결국 스스로 문을 열고 말았다. 문손잡이를 잡고 쭈그리고 있던 황경호의 팔을 잡고 강동현이 억지로 일으켰다.
“아… 저….”
조금 전에는 그렇게 환자들 앞에서 생긋생긋 웃어 대고 강동현의 앞에서도 아무렇지도 않은 척했던 주제에 결국 핀치에 몰리자 황경호는 무척이나 난처한 얼굴로 질질 끌려 나왔다. 아래층에 있는 예의 쓰지 않는 병실로 그대로 끌려갔다. 황경호는 저도 모르게 혹시나 강동현의 신경을 긁을까 봐 아무 말도 못 하고 그대로 잡혀갈 수밖에 없었다.
“바지 벗고 엎드려.”
다른 말은 없었다. 강동현은 모자와 마스크를 벗으며 그렇게 말했다. 황경호가 주저하며 서있자 선글라스까지 마저 벗으며 안 벗어? 라는 눈빛으로 노려보자 황경호는 아… 하며 난처함을 숨기지 못한 채 제 옷을 내려다보며 심한 내적 갈등을 겪다가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바지와 속옷을 내렸다. 느릿하게 옷과 속옷과 양말을 개서는 옆의 탁자 위에 올려 두고는 삐딱하게 자신을 바라보는 강동현의 눈과는 차마 마주치지도 못하고 얼굴을 붉히고 침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엎드리라고.”
강동현은 이글이글 자신의 속에서 타오르는 심술과 가학심을 느꼈다. 그걸 느꼈던 건지 황경호가 드물게 애원하는 듯 강동현을 쳐다보았다.
“저기… 저는 진짜 도은혁 환자님이 뛰어내릴 줄은 몰라서….”
“시끄럽고 엎드리라니까.”
“그럼 뭘… 할 건지만이라도….”
“왜 거부권이라도 또 쓰게?”
“….아뇨….”
하아… 황경호는 진짜 깊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나마 각오를 다졌는지 더 이상 군소리를 하지 않고 침대로 올라가서 네 발로 엎드렸다. 그래도 수치스러운지 이마부터 목까지 금세 새빨개졌다. 어린애처럼 생긴 것과는 다르게 평소에는 뭔 일이 있어도 얼굴색 하나 바뀌지 않는 주제에 꼭 이렇게 되어야지 표정이 바뀐다. 강동현은 저도 모르게 자신의 입술을 느릿하게 핥았다.
‘결국에는 내 말대로 할 거면서 뭘 그렇게 도망을 가고 난리야. 사람 힘 빠지게.’
강동현은 침대에 걸터앉았다. 동그랗게 보송보송한 황경호의 엉덩이를 바로 얼마 되지 않는 거리에서 바로 보고 있다가 곧 자신도 침대 위로 올라왔다. 황경호의 엉덩이에 손가락을 대고는 스윽 허벅지까지 쓰다듬었다. 뭐 하나 걸리는 것 없이 솜털이 난 엉덩이를 만지니 그 촉감이 대단히 만족스러웠다. 거의 두 달을 참은 것이었다. 강동현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도 온몸에 열이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렇게 변태 아저씨처럼 엉덩이를 만지고 있으니 소름이라도 돋은 것인지 황경호의 팔에 닭살이 돋은 게 보였다. 목덜미를 보니 빨갛다 못해 시뻘겋다. 지익, 하고 강동현이 바지의 지퍼를 내리자 흠칫하며 몸이 떨리는 것이 보였다.
이유가 뭘까. 멋대로 대할 수 있는 상대라서? 사실 강동현이 멋대로 대하는 것뿐이지 세상에 멋대로 대해도 되는 사람이라는 게 어디 있겠는가. 황경호는 매사 싸우니 피하는 게 능사라고 생각하고 밖으로 밝게 웃는 얼굴과는 다르게 심각한 우울증을 겪고 있었다. 자신에게 일어나는 일의 대부분에 대한 화살이 돌고 돌아 결국 자신에게로 향하게 하지 않았더라면 솔직히 강동현은 백 번 고소를 먹어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었다. 하지만 황경호는 그런 성격이었고 강동현은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그런 황경호의 성격을 많이 이용해왔다.
강동현 앞에서조차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듯이 굴면 심술이 피어올랐다. 약한 주제에. 웃고 싶지 않은 주제에. 죽고 싶은 주제에. 그렇게 이 간호사의 보이지 않는 가면을 억지로 벗겨버릴 때마다 동통이 일었다. 무너지는 표정을 보면 희열이 느껴졌다. 말도 안 되는 억지를 결국 받아 주고야 말 때마다 승리감에 도취된다.
그래서 사실 이유 따위야 상관없었다. 두 달이나 참으면 이유고 자시고, 지금에 이르러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강동현은 성기만이 나올 수 있도록 팬티를 조금 내리자 우뚝 서버린 자신의 성기를 자랑스럽게 느낄 수 있었다. 약을 안 먹고도 설 수 있는 건 지금 이 순간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렇게 설 수 있다는 것을 느끼면 안도감과 정복욕이 차오른다. 남자로서 꽤나 기분 좋은 순간이었다. 뭐든 할 수 있을 것만 같이 파워풀한 기분이었기 때문이다.
강동현은 손을 좀 더 뻗어 황경호의 등을 쓰다듬으며 동시에 웃옷을 위로 걷어 올렸다. 황경호의 팔에 엄청나게 닭살이 또 돋아 오른 게 보였다. 그런 주제에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눈을 감고 현실에서 도피하고 있을 이 간호사의 얼굴이 보지 않아도 훤했다.
“다리 오므려.”
‘아무것도 아니다. 그냥 오이다. 오이라고 생각하면 돼. 오이…’
이러고 있던 황경호는 드디어 다리 사이로 강동현의 대물이 닿아오자 저도 모르게 화들짝 놀라서 파르르 떨었다. 진짜 몸서리를 칠 정도로 싫었지만, 이걸 거부하고 이 인간의 성질을 긁어서 더 한 것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황경호는 이를 꽉 깨문 채로 새하얀 베개를 내려다보면서 바느질의 개수를 세었다.
“아… 젠장….”
강동현이 꽤 흥분했던지 그렇게 중얼거리며 닿는 것이 흠칫거릴 정도로 뜨거워진 손을 가지고 황경호의 두 무릎을 한꺼번에 당겨 황경호를 침대에 옆으로 확 쓰러지게 만들었다. 갑자기 골반이 딱딱한 병원 침대에 부딪혀서 황경호는 깜짝 놀랐다. 황경호는 저도 모르게 눈을 크게 뜨고 옆으로 누운 자세로 강동현을 올려다보았다. 흥분에 가득 찬 강동현의 섹시한 얼굴을 보고 못 볼 것 봤다는 듯이 딱딱한 목을 다시 끼이익 돌렸다. 최대한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 오이다, 오이… 하고 최면을 걸고 있는데 갑자기 느낌이 쎄 해서 눈을 떴다. 왠지 그림자가 진 것 같아서 눈만 돌렸다가 강동현의 얼굴이 가까이 와있어서 깜짝 놀랐다.
“!”
황경호는 식은땀이 주르륵 흐르는 것을 느꼈다. 물론 강동현은 당연하게도 황경호의 당황한 얼굴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TV에 내보냈다간 여러 여자 보낼 것 같은 얼굴로 섹시하게 신음을 흘리더니 그대로 황경호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황경호는 팔 뿐만 아니라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이런 건 니 애인이랑 하라고! 그냥 빨리 끝내라고!’
알다시피 강동현은 지금까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무려 6년 동안 사귄 여자 친구가 있었고 그 여자 친구만 일편단심으로 만나왔기 때문에 그가 가진 섹스 습관은 정말로 다정한 연인들끼리나 어울릴 법한 것들뿐이었다. 정말로 쓸데없을 정도로 스킨십이 많았다. 그냥 손만 닿아도 질색을 할 판국에 황경호는 정말 이 인간이 이렇게 굴 때마다 정말 거부감이 올라와서… 귓가와 목가에 강동현의 뜨거운 숨결이 느껴졌다. 확 밀쳐버릴 뻔한 걸 겨우 베개를 짓이겨 잡으며 참았다.
“다리에 더 힘줘… 하아… 헐렁하잖아….”
강동현은 힘으로 황경호의 허벅지를 짓누르며 그렇게 말했다. 회음과 허벅지 안쪽에 비벼지는 오이(?)는 정말 열기가 대단했다. 허벅지를 짓누르는 강동현의 손도 땀으로 흠뻑 젖어있어서 황경호는 더럽혀진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정말 몸소 체험하는 기분이었다. 안 그래도 불감증에 지루인데 이따위로 있다간 삼십 분이고 한 시간이고 언제 끝날지 알 수가 없었다. 황경호는 굴욕감에서 도피하려고 애쓰며 다리에 힘을 주었다.
“그래… 더 힘줘… 하아… 죽인다… 윽….”
그 자극에 퍽 하고 엉덩이를 치이자 황경호는 진짜 거짓말 안 하고 딱 죽을 맛이었다. 체취를 맡는지 강동현이 목에 얼굴을 더욱 눌리며 숨을 들이켰을 때는 정말 불쾌해서 치가 떨렸다. 빨리 끝나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황경호는 미약하게 흔들리는 시야를 무시하며 억지로 먼지가 쌓인 장비들을 보았다. 얼룩이 몇 개인지 편집증적으로 세었다. 무슨 도구로 어떻게 닦아 놓을지 세세하게 계획을 세웠다.
“하아… 윽… 크윽….”
‘내일부터 하루에 하나씩… 여기 말고 옆방에도 있으니까 합쳐서 열 개 정도 있으니까…. 제길… 왜 이렇게 오늘따라 더 늦어… 이 인간 지루 더 심해진 거 아냐? 아, 아냐… 후우… 오늘 집에 돌아가면서 서점에 들러서 천 피스 퍼즐 사자… 전에 봤던 메이플… 후우… 주말 동안 맞추면 화요일이나 수요일쯤이면…’
“앗…!”
그렇게 마인드컨트롤을 하고 있던 황경호는 허벅지를 누르고만 있던 강동현의 오른손이 배를 타고 가슴 쪽으로 올라오며 스윽 피부를 만지자 깜짝 놀라서 저도 모르게 소리를 내고 말았다. 강동현의 손목을 움직이지 못하게 잡아버렸다.
“가만히 있어….”
귓가에 바로 속삭여져서… 배우는 원래 얼굴보다 목소리이지 않았던가. 황경호는 머리카락이 삐쭉 서는 것을 느꼈다. 강동현의 손은 그대로 황경호의 가슴팍으로 올라와서 젖꼭지를 만졌다. 황경호는 흠칫하며 그 손을 피해 몸을 일으켰다.
“저….”
황경호는 진짜 식은땀이 줄줄 흐르는 느낌이었다. 사색이 되어서는 옷깃을 붙잡아 아래로 내렸다.
“진짜 죄송하지만… 저는 좀… 만지지 않아주셨으면….”
강동현도 몸을 일으켰다. 아까까지만 해도 창피해서 얼굴이 벌게져 있던 애가 혈색이 빠져서는 강동현을 돌아보지도 못하고 그렇게 말했다. 강동현은 황경호의 어깨를 눌러서 침대에 다시 눕혔다. 황경호는 다급한 눈으로 지금까지 쳐다보지도 않으려고 했던 강동현을 올려다보며 사정사정했다.
“진짜 그냥… 나쁘지 않으시다면 그냥 해주세요… 진짜 꼼짝도 안 하고 가만히 있을 테니까….”
이런 건 또 처음이었다. 애원을 듣는 것이 오싹한 기분을 들게 했다. 강동현은 짙어진 눈빛으로 허벅지를 한 번 쓰다듬었다. 황경호는 바짝 긴장해서 오므린 다리에 힘을 주었다. 눈빛이 기분 나빴다.
“아…! 진짜…! 저는 좀…!”
말 안 듣는 청개구리도 아니고 강동현은 굳이 싫다는 사람 몸을 만지기 시작했다. 골반을 타고 배로 올라와서는 다시 젖꼭지를 엄지와 검지로 꼬집자 황경호가 질색을 하며 강동현의 어깨를 밀어내려고 하였다. 낭패하고 당황한 얼굴로 강동현을 어떻게든 밀어내려고 했다. 검지와 중지로 젖꼭지를 마구 비비고 다시 꼬집어 문지르자 황경호가 펄쩍펄쩍 뛰며 강동현의 팔을 꽉 잡았다.
“아파요…! 윽… 만지지 말라고 했잖아요…! 이 변태…! 자기 할 것만 끝내면 되잖아…! 진짜…!”
황경호가 진짜 아픈지 허리를 구부리며 강동현의 손을 잡아떼려고 했지만 그럴수록 더 세게 꼬집어서 눈물이 핑 돌 지경이었다. 황경호는 손이 하얗게 될 정도로 강동현의 손목을 꽉 쥐었다.
“아윽… 윽… 으으윽….”
강동현은 성에 찰 정도로 그 젖꼭지만 엄청나게 꼬집어 비볐다. 당연히 애인의 몸은 이런 식으로 거칠게 대한 적은 없었다. 손을 떼자 확연히 티가 날 정도로 그 한쪽만 벌겋게 퉁퉁 부어올랐다. 젖꼭지 근처의 살도 상했는지 생채기를 입은 듯 벌겋게 달아올랐다.
“윽….”
필사적으로 자신을 떼어내려고 하는 모습도, 아파하는 모습도, 체념하고 고통을 참는 모습도 심각하게 뭔가 돋군다. 강동현은 거칠게 허리를 움직여 황경호의 다리 사이에 자신을 비볐다. 흥건히 체액이 흘러나와 있었다.
‘진짜 이 표정… 이 얼굴….’
좀 더 여러 가지 표정을 보고 싶었다. 시시각각으로 표정이 바뀌는 그 찰나가 참을 수가 없었다. 참으려고 하지만 참지 못하는 게 좋았다. 싫어하기 때문에 더더욱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이 유쾌했다. 머리가 익어버리는 것 같았다.
강동현은 여전히 아픈지 이맛살을 찌푸리고 꼬집힌 자신의 가슴을 손바닥으로 누르며 진정시키고 있는 황경호를 내려다보며 짙은 한숨을 내쉬었다. 강동현은 거의 맛이 갔다 싶을 정도로 눈이 풀려 있었다. 지금까지 중에서 제일 기분 좋았다. 어쩐지 오래 하면 오래 할수록 기분이 좋은 것 같았다. 강동현은 허벅지를 쥐고 있던 손을 미끄러뜨렸다.
“아…! 자, 잠깐만요….”
황경호가 화들짝 놀라서 참으며 감고 있던 눈을 뜨더니 황급히 강동현의 손을 잡았다. 하지만 이미 급소는 그의 커다란 손안에 단단히 잡혀 있었다.
“잡아 보니까 그럭저럭 이네.”
물렁물렁한 황경호의 성기를 처음으로 만지며 품평했다. 황경호는 뭐라고 소리를 치려다가 강동현이 그것을 꽉 쥐어 버리자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베개에 얼굴을 파묻으며 강동현의 손등에 상처를 내었다.
“아야… 아프잖아. 가만히 있어.”
성기를 꽉 잡힌 황경호만 하겠는가. 황경호는 진짜 눈물이 핑 돌았다. 온몸이 식은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정말로 지금까지 중에서 제일 더럽혀지는 것 같고 제일 기분이 나빴으며 제일 토할 것 같았다.
“윽… 놔….”
황경호는 주먹으로 강동현의 팔을 쳤다. 그러자 강동현은 더 세게 황경호의 것을 쥐었다.
“아앗…! 윽….”
황경호는 몸을 비틀면서 강동현한테서 도망치려고 하였지만 그럴수록 점점 더 억눌러져서 꼼짝달싹 못 하게 되었다. 아파 죽을 것만 같았다. 황경호는 몸을 뒤틀면 뒤틀수록 강동현이 더 세게, 짜부라트릴 듯이 성기를 잡아 뭉개자 진짜 딱 죽을 맛이었다. 황경호는 결국 몸부림치는 것을 포기했다. 아파서 몸을 덜덜 떨며 목으로 앓는 숨소리만 쉬었다. 그러자 조금 죄는 게 풀어져서 입술을 꽉 깨물며 잠시 베개에 얼굴을 묻고 견디었다.
“진짜 하지 마세요… 윽. 왜 이러는 건데요… 진짜 저한테 무슨 원수 졌어요? 그냥 빨리 좀 끝내요….”
강동현은 왼손으로 황경호의 턱을 잡아 자신의 쪽으로 억지로 돌렸다. 황경호는 그냥 눈을 꽉 감고 있었다. 오른손에 들어온 살덩이는 무슨 버튼이라도 되는지 주물럭거릴 때마다 황경호의 표정이 시시각각으로 변했다. 아파하며 얼굴을 일그러트리는데 강동현은 뭔가 속에서 확하고 끓어오르듯이 남성기가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진짜 장난 아니야….’
강동현은 진짜 무섭게 아무 말도 없이 계속 허리를 움직여대다가 울컥울컥하고 엄청난 양의 정액을 황경호의 다리 사이에다 싸고 말았다. 진짜 지금까지 중에 기록으로 세워도 될 만큼 어마어마한 양이었다. 그 엄청난 양의 사정에 강동현은 엄청난 엑스터시와 오르가즘에 정신을 못 차릴 정도로 느껴 아찔한 현기증에 취해 무너지듯 앞으로 쓰러졌다.
“하아… 진짜 오늘이… 최고다….”
강동현은 그렇게 쉰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품에 안긴 상대의 피부를 습관적으로 쓰다듬었다. 황경호가 홱 하고 그런 강동현을 밀치고 침대 밑으로 굴러떨어졌다. 강동현은 아랑곳하지 않고 침대 위에 바로 누워 사정의 여운에 흠뻑 젖어있었다. 정말 끝내주게 기분이 좋았기 때문이었다. 강동현은 자신의 손으로 몇 번이고 자신의 커다란 남성기를 만지며 그 여운을 만끽했고 그동안에 황경호는 몸을 닦을 생각도 하지 못하고 몇 번이고 미끄러지고 넘어지면서 옷을 입고 있었다.
겨우 강동현의 의식이 돌아왔다 싶을 때 황경호는 이미 옷을 다 입은 상태였다. 바로 문을 열지 못해서 허둥지둥하고 있었다.
“오버하기는… 요구는?”
강동현의 목소리에 머리가 삐쭉 솟을 정도로 놀란 황경호는 뻣뻣하게 굳은 몸으로 그를 돌아보았다.
“예, 예?”
“요구 말이야, 요구… 뭐 또 이번엔 한강대교라도 갈까?”
강동현은 끝장나게 섹시하게 늘어져서는 나른한 목소리로 물었다.
“예?”
“요구. 이번엔 뭐 시킬 거냐고.”
황경호는 꽤나 충격을 받은 모양인지 꿀 먹은 벙어리처럼, 아니 무슨 말인지 당최 이해를 못 하는 사람처럼 멀찍이서 등을 문에 꽉 대고 강동현을 쳐다보고 있다가 멈추고 있던 숨을 약하게 내뱉더니 눈을 깜박거렸다.
“아….”
황경호는 눈길을 오른쪽 벽으로 옮겼다. 그리고는 다시 문으로 몸을 돌렸다.
“다음에… 다음에 말씀드릴게요.”
그리고는 드디어 문을 열고 강동현한테서 도망쳤다.
*
“어서 오세요. 자리 안내해드리겠습니다.”
여느 때처럼 웃는 얼굴로 환자를 맞이하는 황경호였다. 강동현의 얼굴을 보고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상대를 보고 도리어 강동현이 눈썹을 꿈틀했다. 잠자코 자리를 안내받는 척하다가 그 간호사의 손목을 붙잡고 계단 쪽으로 끌었다.
“왜 이러세요?”
“어차피 기다릴 거 아냐. 끝낼 거 끝내고 가자고. 접수는 했으니까.”
황경호가 강동현에게 붙잡힌 손목을 확 빼내고는 주물렀다. 강동현은 마스크와 모자를 벗었다.
저번 주는 정말 끝내줬다. 두 달이나 참아서 그런가. 지나가서 하는 말이겠지만 뛰어내릴 만했다는 생각까지 들 정도로 좋았다. 금요일까지 참기가 힘들어서 역시나 여자 친구와 또 도전해보았지만 실패, 무슨 금단증상 마냥 목이 말랐다.
사람들이 없는 비상계단이었다. 아까 전의 웃는 얼굴이 짜증이 서린 무표정으로 변하자 또 마른침이 넘어간다. 아, 젠장… 강동현은 벌써 뜨거워진 한숨을 내뱉으며 황경호의 쪽으로 그 잘난 얼굴을 들이밀었다. 황경호는 인상을 확 찌푸리며 차트 대신에 들고 다니는 태블릿PC로 강동현의 얼굴을 막았다.
“저 아직 그쪽한테 저번 요구 말 안 했는데요.”
“뭐?”
코를 부딪친 강동현은 인상을 확 찌푸리며 짜증스럽게 되물었다. 황경호가 차분하게 대답했다.
“요구요, 요구. 저번 분 거 얘기 안 했다구요.”
“뭐야. 그럼 빨리 말해.”
“아직 생각 중이에요.”
“뭘 얼마나 대단한 걸 시킬 거라고. 대충 말해.”
“생각 중이라니까요.”
“그럼 오늘 거 하고 두 개 말해.”
“싫어요.”
강동현이 갑자기 말문이 막혔다. 왜 그런지 잘 알 수가 없었지만 더 이상 어떻게 반박을 해야 할지 그 근거를 알 수가 없게 된 것이다. 강동현은 뭔가 말을 하고 싶지만 뭘 어떻게 말을 해야 할지 난감해서 벙찐 얼굴로 황경호를 내려다보았다.
“…그럼 치료 끝나고 나서까지 말해.”
“생각해볼게요.”
그렇게 새침하게 말하더니 황경호는 아무런 저지도 없이 총총 비상계단 밖으로 나가버렸다. 강동현은 뭔가 분한 기분이 들었지만, 일주일 참은 거 삼십 분을 더 못 참으랴, 하는 마인드로 대기실로 가서 비싼 카우치에 앉아 신문을 펼쳐 들고 다리를 달달 떨며 앉아 있었다.
“도은혁 환자님.”
강동현의 본명이 호명되자 강동현은 자리에서 일어나서 익숙한 진료실로 발을 옮겼다. 들어가니 예의 그 잘나신 의사 선생님께서 치과 교정 포스터에 들어가도 손색이 없을 멋진 미소를 지으며 그를 맞이했다.
“오셨어요. 자, 그동안 경과는 좀 어떠신가요? 얼마간 힘드셨다고 하셨죠?”
“그건 그럭저럭… 요즘은 그냥 비슷비슷한 것 같아요. 약을 안 먹어도 잘하면 되긴 되는데 끝까지가….”
강동현이 한숨처럼 말하자 의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무언가를 태블릿PC에 체크했다.
“경과를 보면 발기부전은 많이 나아졌습니다. 보이시죠? 누차 말씀드렸다시피 도은혁 환자님은 스트레스로 인한 피로감 때문에 발기부전이 온 것이지 따로 신체적인 결함 때문에 생긴 질병이 아니라서 환자님께서 그 사실을 인지하고 스트레스를 관리하려고 노력한 것만으로도 상당히 효과를 본 것으로 보입니다.”
“아닙니다… 선생님이 잘 봐주셔서….”
강동현은 마지못한다는 마음으로 그렇게 말했다.
“도은혁 환자님이 젊은데도 불구하고 치료 행위에 열성적으로 따라 주셔서 그렇지요. 젊으신 분들은 몇 주 오다가 금방 오지 않으시는 분들도 꽤 있으시거든요. 치료는 항상 의지가 중요한 것이라서. 도은혁 환자님도 완치나 사후 관리 수준까지는 확실하게 치료를 하겠다고 마음을 먹으시는 게 좋습니다.”
“예… 원체 이 병원에서 잘 체크를 해주시니까 걱정은 없습니다….”
“이제 문제는 사실 발기부전보다도 지루와 불감증인데… 이 경우 파트너분을 만족시킬 수는 있을지 모르겠지만, 환자분은 상당한 불편함을 겪는다는 것인데요.”
“아, 네. 선생님, 진짜 이거 어떡하면 되는 겁니까.”
강동현이 자세를 바로 해서 물었다. 발기부전은 차도를 보이지만 지루와 불감증은 사실 그다지 나아지지 않은 것만 같았다. 스트레스 관리를 하겠다고 아로마요법이나 명상이나 모차르트도 듣고 있지만 정작 중요한 곳에서 차도를 보이지 않는다면 말짱 도루묵이지 않은가.
의사는 상당히 고민이 된다는 표정으로 제 펜으로 뺨을 톡톡 쳤다.
“이게 서로가 시너지를 일으키는 것이거든요. 불감증이라도 사정을 하시는 분들이 있고 지루라도 감도에는 이상이 없으신 분들도 많은데 도은혁 환자님의 경우에는 불감증 때문에 지루가 되고 지루다 보니 결국에는 불감증이 더 심해지고 있는 것이거든요. 관계가 상당히 만족스럽지 못할 것이라고 보입니다.”
“네, 진짜….”
강동현이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관계를 가지면 오히려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여자 친구에게 직접적으로 짜증을 내거나 하진 않지만 그래도 은연중에 그런 것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중년 남자들이 마누라가 샤워하는 소리만 들어도 벌벌 떤다던데 지금 강동현이 딱 그 짝으로 여자 친구가 넌지시 우리 집에서 라면 먹고 갈래? 라는 말만 해도 올 게 왔구나, 하며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 심정이 되는 것이었다.
“성관계를 할 때 억지로 해야 한다는 생각을 버리는 것이 먼저입니다. 하고 싶을 때 하면 된다고 편하게 생각을 해야 하는 거죠. 물론 여자 친구가 원하는데 거기에 응해주지 못하다 보면 남성으로서 자존심이 상할 수도 있다는 것을 압니다만, 거기에 압박감을 느끼지 않도록 스스로를 돌보는 것이 우선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게 가장 최우선입니다. 제가 처방해주는 약이나 간호사들이 안내해주는 여러 요법들은 차후 문제인 것이죠. 누차 말씀드리고 또 드리지만 도은혁 환자님은 스트레스가 가장 큰 문제입니다.”
“저는 정말 스트레스는 받지 않는다고 생각했거든요. 지금이 좋고….”
“담배 아직 안 끊으셨죠? 술은 덜 마시는 것 같긴 한데… 물론 힘드신 것은 압니다만 조금이라도 수면시간을 늘리시고 몸을 돌보세요. 솔직히 비뇨기과가 아니라 다른 곳에 있어서도 의사로서는 심각하게 우려된다고 생각됩니다. 지금의 생활습관을 계속 이어가면 후에 심장질환이나 관상동맥질환이나 폐질환, 간이나 신장 쪽으로 문제가 생기실 수도 있습니다.”
“예….”
“약은 잘 드시죠? 시간 없으시더라도 안내받은 요법들은 지켜주세요. 족욕이나 반신욕 자주 하시구요.”
“예….”
강동현은 한숨을 쉬며 진료실 밖으로 나왔다. 끝났다.
“황경호 간호사 어디 있습니까?”
강동현은 곧바로 지나가던 간호사를 잡아서 그렇게 물었다. 김형세는 어, 하면서 잠시 고민을 하다가 대답했다.
“아까 상담실에 상담하러 들어간 것 같더라구요. 조금만 기다리면 나올 겁니다. 따로 당장 필요하신 게 있으시면….”
“아닙니다.”
“네, 대기실에 계시면 제가 황 간호사에게 말씀드리겠습니다.”
강동현은 카운터로 가서 처방전을 받아서 주머니에 쑤셔 넣고 대기실에 앉아서 상담실 문들을 뚫어져라 쳐다보면서 기다렸다.
“크게 걱정 안 하셔도 되구요, 신 선생님. 이 정도는 충분히 3, 4개월 내에 효과를 보실 수 있으세요. 마음을 편히 먹으시고 꼭 약 제때 드시는 거 잊지 마시구요. 아셨죠?”
“그래요, 황 간호사. 항상 이렇게 신경 써줘서 고마워요.”
“아니에요. 살펴 가세요.”
황경호는 그 순진무구하게 밝은 미소를 띠면서 나이가 적잖이 든 노신사를 배웅했다. 황경호는 강동현은 보지도 못했는지 그대로 기지개를 켜며 어딘가로 가려고 하기에 강동현은 얼른 일어나서 그의 뒤를 따라갔다. 황경호는 간호사실로 들어가고 있었다. 강동현은 그대로 황경호의 등을 밀어 안으로 들어갔다. 안을 보니 다행히 다른 간호사들은 없었다. 황경호가 어처구니가 없다는 얼굴로 뒤를 돌아보았다.
“뭐하는 짓이에요?”
“생각했어? 말해.”
강동현은 앞뒤도 없이 그렇게 말했다. 뒤로 손을 돌려 문을 잠그고 황경호를 간호사실의 카우치로 밀어붙였다.
“잠깐만요, 잠깐만요. 지금 뭐하는 짓이에요? 여기 간호사실이에요. 환자분들은 들어오실 수 없어요.”
“잠깐만 있다 갈 거야. 요구나 빨리 말하라니까.”
“아, 진짜…! 좀 떨어져요…!”
황경호는 억지로 카우치에 앉혀져서 강동현이 무작정 들이미는 걸 거의 그의 목젖을 팔로 밀어 막으면서 질색을 하며 고개를 돌렸다.
“아직 생각 안 했다구요! 진짜! 기분 나쁘니까 떨어져요!”
황경호가 강동현의 가슴팍을 있는 힘껏 밀쳤다. 강동현은 인상을 확 썼다가 이를 갈며 눈썹을 검지로 문지르며 신경질적으로 물었다.
“그럼 도대체 언제 말할 건데? 우리 일주일에 한 번씩이었잖아.”
“뭔 소리예요. 1회 요구당 1회 치료였죠. 게다가 도은혁 환자님도 제가 마포대교에서 뛰어내리라고 했을 때 바로 뛰어내린 거 아니잖아요. 저도 좀 생각할 시간을 달라는데 그게 잘못된 거예요?”
강동현은 눈살을 찌푸리고 황경호를 내려다보았다. 황경호도 지지 않고 노려보았다. 한숨을 쉰 것은 강동현이었다. 강동현은 짜증스럽게 모자를 한 번 다시 고쳐 쓰고는 투덜거렸다.
“도대체 또 뭘 시키려고. 사람을 잡아라, 잡아.”
“기대하세요.”
강동현은 같잖다는 듯이 코웃음을 치고 나가버렸다.
*
“와, 동현이 15m까지 올라갔네. 야, 동현아! 무리하지 마!”
예능 프로그램 촬영이었다. 수영장이었는데 갖가지 놀이시설 같은 것들을 설치해두고 누가 더 많이 혹은 멀리 혹은 높이서 무언가를 할 수 있느냐였다. 두 팀으로 나누어서 점수를 가장 높게 획득한 팀이 이긴다.
때마침 1.5m, 3m, 5m, 10m, 15m 높이 순으로 다이빙대가 설치가 되어 있었다. 강동현은 사람을 놀리나, 싶은 마음도 살짝 들었지만, 순순히 15m까지 올라갔다. 올라가서 내려다보니 이제는 실소가 나왔다.
“아, 형 몰랐어요? 동현이 쟤 다이빙에 꽂혀서 몇 주 동안 절벽 다이빙 엄청 연습했어요.”
“오… 진짜? 몇 미터까지?”
“30m까지요.”
“으아, 30m라니.”
고소공포증이 있는 mc는 질색을 하며 강동현을 올려다보았다. 그가 대단하다는 눈치로 올려다보았지만, 강동현은 간신히 카메라에 비칠 자기 모습을 생각하여 표정관리를 하고 있을 뿐이었다.
‘젠장, 그 간호사….’
강동현은 지난 몇 주간을 돌이켜 떠올리며 이를 갈았다.
[아직 생각 안 끝났어요.]
[댁도 나 엿 먹였는데 저도 고심 좀 해봅시다.]
[아직이요.]
[아직.]
그 간호사가 그를 엿 먹이려고 아예 작정을 한 것이었다. 1~2주는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었는데 3주부터는 진짜 이상하다고 생각했고, 4주차가 되어서야 황경호의 의도가 무엇인지 겨우 제대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1. 갑이 을을 1회 치료할 때마다 을은 갑이 원하는 것을 1회 뭐든지 들어준다. 단, 을이 행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요구한다. 치료의 내용은 기본적으로 을이 정하고 갑의 지식을 참조한다.>
[다음에 말씀드릴게요.]
이런 식으로 요구를 미루니 강동현이 그렇게 마포대교에서 투신하는 것을 피했던 것처럼 황경호도 피할 수가 있게 된 것이다. 바로 1대 1 교환이 원칙인 각서에 의해서. 이대로라면 황경호가 한 번의 턴을 포기함으로써 계약 기간을 모두 채워버릴 수도 있게 된다는 소리였다.
강동현은 15m 다이빙대에서 뛰어내렸다. 깔끔한 자세로 입수를 하고는 자연스럽게 둥그렇게 잠수를 했다가 헤엄을 치며 물 위로 올라왔다. 환호 소리가 들렸다.
이미 전적이 있는 강동현으로서야 우기고 억지를 써봤자 황경호가 들어줄 리 만무하지만 그렇다고 강동현이라는 남자가 억지를 쓰지 않을 리가 없었다.
[이런 식이면 도대체 내가 각서를 왜 썼는데? 어? 나도 내 병 고치면 이 병원 방향으로 돌아눕지도 않을 사람이라고. 빨리 대충 요구 말하고 할 거 하자니까.]
[저는 뭐 거부권이 그런 식으로 될 줄 알고 계약서에다 썼겠어요. 댁도 두 달 넘게 요구 이행 미뤘잖아요. 형평성을 봐서라도 지금 저한테 이러시면 안 되죠.]
[야!!]
[병원에서 소리 지르지 마세요.]
강동현은 또다시 한 달이 넘어가기 시작하자 초조해지기도 하고 짜증도 나고 하고 싶기도 해서 제가 생각해도 오만 진상을 부렸지만 황경호는 끄떡도 하지 않았다. 애초에 강동현의 억지에 넘어가 각서를 쓰고 말았던 그때의 무기력한 사람이라고는 보기 힘들 정도로, 바늘 하나 들어가지 않을 것처럼 굴었다. 물론 그것이 다 강동현 덕분이겠지만, 어쨌든 지금 강동현은 미치고 팔짝 뛸 지경이라는 것이었다.
“수고하셨습니다~”
“네, 수고하셨습니다. 늦게까지 피곤했죠? 들어가서 쉬세요.”
“네. 들어가세요.”
새벽 네 시였다. 벌써 날짜도 금요일로 바뀌었다. 강동현은 차에 타자마자 의자를 뒤로 젖히고 드누웠다.
“형도 고생이다….”
“그래도 난 자다가 왔다. 집에 바로 갈 거지?”
“어.”
“내일 시간 날 때 읽어보라고 챙겨 뒀다.”
“뭔데?”
“캐스팅 들어온 거.”
“어.”
그렇게 약 삼십 분 꿀 같은 단잠을 자다가 칙칙한 얼굴로 집에 들어가서 샤워를 했다. 아무래도 배우라 화장을 매일같이 하다 보니 안 지우고 잘 수가 없었다. 대충 닦고 그대로 알몸으로 침대에 다이빙을 했다.
‘아… 하고 싶다…’
정말 피곤하면 손 하나도 꿈쩍하지 않고 가만히 있고 싶지만, 그렇게 가만히 있는 채로 하고 싶을 때가 있다.
하얗고 조금은 건조한 듯 솜털이 느껴지는 보송보송한 피부가 맞닿아왔다. 강동현의 채 닦지 않은 젖은 피부에 흐르는 물방울을 고양이마냥 까슬한 혓바닥이 쓸어 올렸다. 서늘한 손바닥이 강동현의 잘 가꿔진 단단한 허벅지를 쓸었다. 손바닥이 부드러웠다.
빨리.
솔직히 남자한테 전희 같은 건 어찌 돼도 좋은 것이었다. 빨리 어떻게든 본방에 들어가야 하는 문제지… 상대는 그런 강동현의 마음을 어떻게 안 것인지 금세 그 고양이같이 까슬한 혀로 강동현의 대물을 느긋하게 할짝였다. 곧 혀와는 다르게 촉촉하게 젖은 입 안으로 한껏 그 대물의 끝을 삼켰다. 반쯤을 입 안에 머금고 혀를 능숙하게 돌렸다. 그리고 곧 강하게 흡입하였다. 전신이 확 긴장되었다. 온몸이 끝까지 달아올랐다.
강동현은 정신을 반쯤 꿈속에 걸치고 있었다. 손가락 하나도 꿈쩍할 수 없었다. 피곤할 때는 아무것도 하고 싶지도 않았고 누구라도 사랑을 나누고 싶지 않았다. 그저 이 극심한 피로를 배설해버리고 싶을 뿐이었다. 강동현은 그냥 가만히 누워서 눈을 감고 꼼짝도 하지 않고 상대가 정성을 다해 자신을 만족시켜주길 바랄 뿐이었다. 사정을 할 수 있다면 뭐든 좋았다.
꿈이든 뭐든 하고 싶을 뿐이었다. 물에 젖어 추위를 느껴야 할 몸에 땀이 뱄다. 강하게 빨리고 나서는 부드러운 손바닥에 강하게 쥐어져 사정을 재촉당했다. 하얀 상체가 다가왔다. 들들한 체취가 코끝으로 물씬 들어왔다. 보송보송한 피부와는 달리 굉장히 촉촉한 입술이 뺨에 닿아왔다.
기분이 굉장히 좋았다. 강동현은 저도 모르게 황홀한 신음을 뱉었다. 가위에 눌리고 있는 듯 손가락 하나도 꿈쩍할 수 없었지만 그래도 상관없었다. 이대로 사정하고 나면 꿈도 하나 꾸지 않는 개운한 수면을 취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빨리해요….』
강동현은 온몸의 근육을 긴장시키며 목의 근육을 늘여 턱을 높이 들었다. 그의 남성기에서 뜨거운 열기가 용솟음쳐 나왔다. 정신을 잃게 만드는 무겁고 황홀한 절정이 그의 온몸을 가라앉혔다. 강동현은 그대로 잠들었다.
*
강동현은 또 다리를 달달 떨면서 자리에 앉아 있었다. 계속 캡모자를 벗었다 썼다 했다. 보는 사람이 산만했다.
‘어디 있어….’
강동현은 짜증이 가득한 표정으로 주변을 샅샅이 훑어보았다.
“4101호 황기석 환자님 혈당 떨어지셨어요. 지금 80 정돈데 가서 수액 좀 달아줘요.”
“네.”
찾았다. 강동현은 누군가에게 지시 상황을 말하고 의사의 진료실로 들어가는 간호사의 뒤통수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 뒤엔 닫힌 진료실 문만 계속 쳐다보고 있었다. 잠시 뒤 무언가를 정리해서 가지고 나오는 그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슬쩍 일어나서 그의 뒤를 따라갔다. 쓰레기통을 비우고 손을 씻으러 화장실에 들어갈 때를 노려 안으로 들어갔다.
고급스러운 화장실의 안. 손을 씻으니 비누의 향기로운 냄새가 퍼졌다. 황경호는 환자가 들어오자 웃는 얼굴로 뒤로 물러섰다.
“안녕하세요. 세면대 먼저 쓰셔도 되세요.”
강동현은 캡모자를 벗었다. 황경호는 미묘하게 미간을 찌푸렸다. 별로 티가 나는 것도 아니었고 아는 사람만 알 수 있는 경미한 정도였다. 간호사는 페이퍼를 뽑아 손을 닦고 핸드크림까지 잘 발랐다.
“오늘 치료는 잘 받으셨어요?”
강동현은 뒤로 손을 돌려서 화장실 문을 잠갔다. 황경호는 뭔가 할 말이 있었던지 한숨을 쉬더니만 입을 열었다.
“저….”
웃는 얼굴에서 살짝 신경질적인 표정으로 바뀌자 강동현은 선글라스도 벗었다. 전국 단위로 유명할 정도로 잘난 얼굴이다 보니 선글라스를 벗는 것만으로도 후광이 비쳤지만 뭐, 그것도 상대 나름인지라. 황경호는 일단 한숨을 또 쉬면서 말을 이었다.
“제가… 그… 저번에….”
황경호가 뭐라고 말하는지는 들리지도 않았다. 강동현은 입 안이 말라서 마른침을 삼켰다. 무작정 앞으로 걸어가서 간호사의 멱살을 잡아당겼다. 입을 맞췄다.
“읍…!”
강동현은 낮은 신음을 흘렸다. 입술은 차가웠지만 정말 촉촉하고 부드러웠다. 안으로 혀를 넣었더니 까슬한 혀가 강동현의 것에 찰싹 붙어오는 느낌이었다. 거부하지 않는 게 이상하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강동현이 계속 밀어붙이기만 해서 황경호는 세면대에 허리가 부딪쳤다. 아파서 밀어내자 강동현이 본능적으로 한 손으로 그의 허리를 꽉 끌어안았다. 멱살을 잡고 있던 손은 어느샌가 얼굴을 감싸 잡고 있었다.
황경호는 인상을 있는 대로 찌푸리고 있었다. 부딪친 허리도 얼얼하게 아팠고 숨도 쉬기 힘들었을뿐더러 입술이나 혀도 빨리고 깨물려서 아프기만 했다. 강동현이 반쯤 선 자신의 것을 밀어붙여 오자 황경호는 눈앞에서 열중하고 있는 그의 얼굴을 보고는 더 인상을 찌푸렸다. 한숨을 쉬고 싶었지만 쉴 수 없었다. 황경호는 강동현의 청바지 버클을 열고 지퍼를 내렸다. 그리고 안으로 손을 넣었다.
“윽…!”
이마가 부딪쳤다. 강동현은 끓는 듯한 숨을 쉬고는 잡아먹을 듯이 또 입을 맞추었다. 세면대에 허리를 대고 뒤통수는 거울에 박을 정도로 불편한 자세로 황경호는 짓눌러졌다. 강동현의 손이 황경호의 옷 안으로 들어왔다. 간호사의 부드러운 손이 자신의 것을 강하게 쥐고 만지는 동안 강동현의 손이 그의 허리와 등을 만졌다.
“으… 하아… 뭐야….”
끈질긴 입맞춤이 몇 분이나 이어졌는지 알 수가 없었다. 지루라서 무지막지 길다는 생각밖에. 그가 끝냈을 때는 사람 몇이 화장실의 문을 두드려도 보고 가고는 했다. 절정에 이르고 나서 강동현은 황경호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현기증을 견디지 못하고 비틀거렸다. 달콤한 살 냄새. 기분이 끝내주게 좋았다. 떨어지고 싶지 않았다. 더….
“정신 좀 차리세요, 도은혁 환자님.”
강동현이 눈을 떴다. 상대의 몸을 놓았다. 세면대를 양쪽으로 짚고 잠시 숨을 골랐다. 황경호는 한숨을 쉬고 다시 입을 열었다.
“좀 비켜요.”
한쪽 팔을 치워주자 그제야 황경호는 겨우 허리를 바로 세울 수 있었다. 강동현은 몸을 떨어뜨리고도 잠시 정신이 돌아오지 않아 숨을 몰아쉬며 눈을 감고 있었다. 황경호는 그래도 자신을 세면대와 그사이에 가두고 있는 강동현의 팔을 치우고 옆으로 나왔다. 그리고 손을 씻기 시작했다. 가글을 하고 페이퍼로 입술을 닦았다.
“…백만 원 주세요. 아, 저번 거까지 합쳐서 이백만 원.”
“하하… 뭐야. 카드라도 왕창 긁었나 보지?”
강동현은 눈을 뜨고 화장실 페이퍼에 손을 닦고 있는 황경호를 쳐다보았다.
“진짜야?”
“댁이랑은 상관없잖아요.”
한 달이나 사람 성질을 있는 대로 긁더니만. 강동현은 손을 씻으며 거울로 간호사를 뚫어져라 관찰했다.
“내가 다음 주에 뭐 시킬지 알고? 겁도 없이.”
그리고는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뭐 이제 언제든 한 번만 참으면 끝낼 수 있으니까 날 그냥 뜯어 먹기로 정했나 봐?”
강동현이 비아냥거렸다. 황경호는 감정적으론 털끝만큼도 반응을 보이지 않고 대답했다.
“선글라스나 쓰세요. 문 엽니다.”
강동현은 선글라스를 썼다. 모자도 쓰고 황경호의 뒤를 따라 나갔다.
“뭐냐고. 이러다가 또 갑자기 정신 나간 짓 시키려고? 어? 뭔 심경의 변환데? 가끔 너 혼자서 꼴에 받을 때마다 무서우니까 미리미리 좀 말하지?”
“시끄럽고. 돈이나 뽑아오세요.”
“무슨 생각인지는 모르겠는데… 적당히 해라, 적당히.”
계좌번호, 하고 강동현이 주머니에서 폰을 꺼냈다.
“계좌번호는 무슨. 현금으로 뽑아 와요.”
도대체 무슨 꿍꿍이길래… 강동현은 심히 미심쩍다는 얼굴로 황경호를 쳐다보다가 정말 밑에 내려가서 수표 두 장을 뽑아서 황경호에게 던졌다.
“자.”
황경호는 제 타이밍에 잡지 못해 떨어진 봉투를 주워들었다. 현금이 아니라 수표인데도 확인 안 해보는 것인지 그냥 주머니에다 아무렇게나 쑤셔 넣고 강동현에게 묵례했다.
“안녕히 가세요, 도은혁 환자님. 다음 주에 뵙겠습니다.”
“진짜 왜 이래?”
황경호는 대답 없이 병원으로 다시 들어가 버렸고 강동현만 찜찜함에 투덜거렸다.
*
“동현아, <해결사> 진짜 할 거야?”
“응. 한다니까.”
강동현은 무심하게 패션 잡지의 예상 질문지와 답안을 넘겨보며 말했다.
“좀 쉬라니까….”
“괜찮다니까. 벌써 찍기로 했는데, 뭐. 이유익 감독 작품 나가는 게 내 꿈이었다니까.”
“그래, 니가 같이 하고 싶은 감독… 한 열댓 명 되냐?”
매니저는 한숨을 쉬었다.
“너 올해만 3번이나 병원 실려 갔는데. 이젠 좀….”
“괜찮아. 좋아. 아주 좋아. 드라마 끝나서 한가하니까 더 이상할 정도야.”
강동현은 별것도 아닌 걸로 유난을 떤다는 듯이 성의 없이 대답하며 중얼중얼 답안을 몇 줄 읽어보았다.
“너 롱런하려면 관리 필수다.”
“압니다.”
강동현은 끝까지 건성으로 들으며 아, 하고 갑자기 딴말을 했다.
“오늘 며칠이더라?”
“오늘… 야, 벌써 11월 중순이다. 11월 17일.”
11월 17일. 강동현은 머리가 갑자기 지끈해서 관자놀이를 주물렀다. 그러고 보니 그 망할 계약 만료일도 얼마 안 남은 것이다. 12월 31일.
‘아무리 들키지 않는 방법이라고 해도 말이야…. 세상에 영구 미결로 남은 사건이냐 널리고 널렸지만…. 죽인다고? 사람을? 내가? 그 간호사를? 나야 그때 급해서 그런 말도 안 되는 계약서에 말도 안 되는 조항을 넣었지만… 아무리 나라도 사람을… 그리고 어디 죽는 게 쉽나….’
“형, 정신과 의사 잘 아는 사람 없어?”
“어? 왜?”
“아니, 내가 아는 사람 하나가… 진짜 죽고 싶어서 마포대교 올라간 적도 있거든. 그거 우울증 치료받고 그러면 확실히 나아지긴 하지? 죽고 싶단 생각 막 하고 그러진 않게 되지?”
“글쎄… 뭐 그렇다더라. 우울증약 먹으면 일단 좀 낫지 않겠어?”
“그렇겠지? 그럼 하나 알아봐 줘.”
“그래, 주변에 한번 물어볼게.”
“아버지한테도 한번 물어봐야겠다. 형, 나 전화 좀.”
“어~”
아버지와 전화통화를 하고 나니 차가 피부과에 도착하였다. 드러누워 간만에 관리를 받으면서 생각했다.
‘그건 도대체 무슨 꿍꿍이야? 갑자기 왜 돈을 달라지? 진짜 카드 긁었나… 쇼핑 중독이라도 걸린 거야, 뭐야? 그래, 차라리 돈이라도 쓰면서 우울증 좀 나아라. 분명히 막상 닥치면 또 겁나서 제대로 못 죽을 주제에. 진짜 생각 없이 막 지른다니까. 생각해보면 몇 번 제대로 하지도 못했는데. 진짜 수지 안 맞는다….’
강동현은 그렇게 속으로 또 투덜거리면서 스륵 잠에 빠져들었다. 관리를 받고 나와서는 병원으로 향했다. 다음 작품인 영화의 대본 리딩은 다음 주 월요일부터로 한가한 것도 이번 주가 끝이었다. 그동안 제대로 못 했던 운동도 빡세게 하면서 몸을 만들고 있었다. 다음 역은 확실히 선이 굵어서 몸무게도 좀 늘려야 할 것 같다.
“많이 나아지셨죠? 이강유 선생님께서도 이제 이렇게 자주 안 오셔도 괜찮으실 것 같다고 말씀하시던데요.”
“들었어.”
“그럼 그렇게 하시겠어요? 한 달에 한 번으로….”
“어차피 다음 달부턴 제대로 못 와. 다음 주는 미리 전화해줄게.”
“네, 알겠습니다.”
이제 곧 11월 말인데… 강동현은 힐끗 간호사의 옆얼굴을 쳐다보았다. 요즘은 순순히 강동현을 따라오는 황경호였다.
‘그래도 이걸 지속하는 걸 보면 계약서대로 끝나기를 바란다는 거겠지? 정말 내가….’
강동현은 한 번 모자를 벗었다가 다시 썼다.
“오늘도 똑같이 하실 거예요?”
황경호는 아무렇지도 않게 바지를 쑥 내려 벗으며 물었다. 이제는 부끄러운 척도 하지 않는 황경호였다. 이제 익숙해져서 정말 그런 것인지 아니면 그냥 얼굴에 철판을 깔아서 그런 것인지는 강동현으로서 잘 알 수가 없었지만.
‘이런 거 보면 이제 괜찮은 것도 같으면서… 또 계속하고 있는 걸 보면 아닌 것도 같고….’
속내를 알 수가 없는 얼굴이었다. 어쨌든 그날 이후로 황경호의 백만 원 타령이 시작되었다.
헷갈렸다. 강동현은 모자를 벗고 선글라스도 벗어 옆의 탁자 위에 무성의하게 툭 놓았다. 무슨 꿍꿍이가 있겠지, 하며 무척이나 의심을 하고 캐묻는데도 불구하고 황경호는 아랑곳하지 않고 백만 원 타령만 했다. 화장실에서야 손으로 했으니 그렇다 치지만. 그 뒤엔 그렇게나 싫어하는 스마타를 했는데도 그대로 백만 원만 달라는 소리를 했었다. 다그치고 비꼬아도 만족할 만한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예전에 백만 원으로 때우려고 했던 때는 엉덩이로 비비기만 하라는 것일 때였는데.
“다리 더 오므리라니까.”
지금은 더 심한 것을 당하고 있는데 백만 원으로 때우려고 한다는 것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더 세게 부르거나… 아니 지금 이미 이건 돈이 문제가 아니었다. 서로를 이기려 드는 게임이었는데, 갑자기 혼자서 링에서 내려갔다. 강동현은 허탈해지면서 동시에 강한 호기심이 올라왔다.
황경호는 다리에 더 힘을 주어서 오므렸다. 강동현은 인상을 찌푸리며 황경호의 다리를 더 짓눌러 허리를 움직였다. 압박감이 느껴지며 더욱 기분이 좋아졌다. 강동현은 얼굴을 계속 베개에 파묻으려는 황경호의 턱을 억지로 잡아 돌렸다.
여자 같은 건 한 번도 사본 적이 없었지만, 마치 익숙한 여자처럼 무덤덤해 보였다. 그냥 눈을 감고 고집스럽게 입술을 다물고 있는데… 이 간호사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무덤덤할 리가 없지. 강동현은 황경호의 웃옷을 들추어 손을 넣었다. 가슴을 꼬집자 황경호가 윽, 하고 신음을 흘리더니 강동현의 손목을 잡았다.
“아파?”
강동현이 심술궂게 웃으며 물었다. 황경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강동현의 손을 떨쳐 내었다. 강동현이 거친 허리짓을 계속하며 부딪쳐왔다.
“야… 너 진짜 뭔지 말 안 할 거야? 도대체 왜, 큭, 이러는데?”
“뭐가요.”
“왜 요새는 이렇게 얌전해? 약 먹었어?”
“시끄러워요.”
황경호는 수십 분을 계속 흔들리다가 그가 거의 절정에 이르는 것이 느껴지자 티슈를 뽑아 두 손으로 그의 대물의 끝을 감싸 잡았다. 강동현은 몇 번을 크게 허리를 짓누르며 왕창 싸댔다. 그리고 현기증이 가득 도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느린 한숨을 쉬었다.
“하아… 잘하는데?”
강동현이 웃으며 황경호의 귓가에 얼굴을 묻었다. 황경호는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조금 뺐다. 강동현이 사정을 하자 몇 겹의 티슈가 금세 묵직하고 축축해졌다. 강동현은 여전히 현기증이 도는지 황경호의 다리를 만지며 깊은숨을 내어 쉬었다. 그대로 황경호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은 채 황경호를 꽉 끌어안았다.
“…도은혁 환자님, 좀….”
황경호가 대충 타이밍을 재어 강동현을 밀어내었다. 강동현은 밀면 미는 대로 비켜서 침대에 드러누웠다. 황경호는 침대에서 내려와서 물티슈로 몇 번 다리 사이를 닦아내고는 옷을 말끔하게 입었다.
“오늘도….”
황경호가 말을 채 시작하기도 전에 강동현이 말을 잘랐다.
“자.”
강동현이 자신의 지갑을 던졌다. 얼떨결에 받은 황경호가 뭐냐는 듯이 그를 돌아보았다.
“들어있어. 꺼내 가.”
아직 일어날 기분이 아닌지 강동현은 쾌락에 젖어 늘어진 채로 눈을 지그시 감고 있었다. 황경호는 말없이 그의 명품 지갑을 열었다. 장지갑의 사진을 끼우는 곳에는 아마도 그의 연인으로 보이는 여자와 함께 찍은 사진이 들어있었다. 별로 관심이 없었으므로 신경을 끄고 오만 원짜리 현금이 꽤 있는 지갑을 뒤적거리다가 수표 한 장을 찾아내서 그것을 꺼냈다. 지갑은 그가 모자와 선글라스를 벗어둔 선반 위에다 두었다.
“저 먼저 나갈게요.”
“아, 잠깐만….”
강동현은 몸을 돌려 누워 손을 뻗어서 황경호의 손을 부드럽게 잡았다. 황경호는 뭐냐는 눈빛으로 그를 내려다보았지만, 그는 눈을 뜨지도 않고 황경호의 손을 붙잡은 채로 잠시 가만히 있었다.
“도은혁 환자님.”
강동현이 눈을 떴다. 위에서 내려다본 그의 옆얼굴은 정말 잘생겨서, 눈을 떠서 나른하게 올려다보는 것만으로도 어떤 여자들은 오금이 풀릴지도 모르겠지만…
“뭐하는 짓이에요?”
황경호는 그의 손에서 자신의 손을 빼내었다. 매정하기는, 이라고 생각한 자신에게 놀랐다. 강동현은 자신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고는 정신을 차리려는 듯 벌떡 일어났다. 뭔가 재미가 없어진 느낌이었다. 하는 것은 좋았지만, 그래도 전에는 금요일이 손꼽아 기다려지면서 어떻게 하면 저 간호사에게 더 큰 엿을 먹일까 전전긍긍했었는데. 한 주를 그 간호사에게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지내다가도 통쾌하게 복수하면 자다가도 일어나서 웃었다.
‘뭐, 그때 했던 미친 짓들을 또 하고 싶다는 것은 아니지만…. 왜 갑자기 이러는 거야? 이러다가 또 미쳐서 나한테 엿 먹이는 거 아냐?’
“진짜 진심으로 순수하게 궁금해서 그러는데. 요즘 왜 이러냐?”
“뭐가요?”
“왜 돈타령이냐고. 나중에 딴소리하지 말고.”
강동현이 비딱하게 황경호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댁이랑 핏대 세우는 게 피곤해서요. 약속은 잘 지키는 사람이니까 그냥 참는 게 편할 것 같아서요.”
“하, 거 고마우시네. 성자 나셨구만.”
강동현이 빈정거렸다. 황경호가 한숨을 조금 쉬었다.
“일부러 나중에 뒤통수치려고 하는 거 아니니까 안심하세요. 그럼 가보겠습니다.”
진짜 무슨 비즈니스 관계인 것처럼. 황경호는 그러고 나가버렸다. 강동현은 진짜 질린다는 얼굴로 그 뒷모습을 보았다.
‘진짜 왜 저래. 진짜 더 심각해진 거 아냐? 이러면 진짜 나중에 죽여 달라고 하면… 와, 젠장. 어떻게 해야 하는 거냐. 정신과 의사한테 끌고 가야 하나….’
*
주말이기도 하고, 영화 촬영에 들어가기 전에 짬이 난 소중한 때라 강동현은 사양하지 않고 여자 친구와 함께 하루를 보냈다. 금요일 저녁부터 토요일 저녁까지, 만 하루를 쭉 같이 있는 것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덕분에 여자 친구도 자신도 즐겁고 행복한 한때를 보내고 있었다.
“월요일부터 영화 리딩 들어간다고 했지? 캐스팅됐다는 건 인터넷에서 먼저 봤지만… 이유익 감독 작품 그렇게 하고 싶다고 노래를 부르더니 결국 한다, 너. 대단한데.”
“내가 한다면 또 하는 남자지.”
강동현이 웃으면서 그렇게 대답했다.
“그런데 진짜 이제는 눈에 띄어서 어디 다니지도 못하겠다. 집에서만 봐야겠어.”
영지가 걱정스럽게 말했다.
“많이 불편하지?”
강동현이 미안해져 그렇게 물었다. 연예인 여자 친구로 사는 게 쉬운 것도 아니다. 죄지은 사람처럼 숨어 지내야 하고, 혹시나 파파라치들에게 찍히기라도 하면 골치 아파지고….
“아냐. 아냐. 옛날 생각 해보면 이런 걱정하는 것도 사치다, 진짜. 안 그래?”
강영지는 손사래를 치면서 그렇게 말했다. 강동현이 피식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해보니까 그렇네.”
“그래도 우린 좀 다행이다. 옛날에 같이 해볼 건 다 해봐서. 큭큭. 그지?”
“우리 처음 만난 날부터 압권이었지. 둘이서 분수에 빠지고.”
“아, 맞다. 킥킥.”
둘은 예전의 기억을 떠올리며 웃었다. 그러다 강영지가 갑자기 휴우, 하고 한숨을 쉬면서 슬쩍 말을 꺼냈다….
“그런 것보다도 주변에 원체 예쁜 여자들 많으니까 바람날까 봐 그게 더 걱정입니다, 남자 친구님.”
강동현이 진짜 웃긴 말을 들었다는 듯이 하하 웃었다.
“야, 옛말로 조강지처는 버리는 거 아니랬다고. 내가 너 두고 누구랑 만나냐. 여자 연예인들? 거의 성괴야. 너 TV로만 보니까 모르겠지? 직접 보면 대박이라니까.”
“에이, 뭐 예쁘기만 하던데.”
“너랑 나랑 사귄 지가 몇 년인데 의리가 있지. 다른 여자랑 바람은 안 펴.”
강동현이 단호하게 말했다.
“에이, 뭐야. 그럼. 헤어지고 만날 생각인가 봐?”
“아, 말이 그렇게 되나?”
“이 자식이!”
“야, 운전하는데 위험하게.”
“킥킥.”
둘은 그렇게 농담을 하며 한강 둔치도 걷고 밥도 먹다가 다음을 기약하며 헤어지기로 하였다.
“집으로?”
안전벨트를 매며 강동현이 물었다. 강영지는 아니, 하고 대답했다.
“Y대 병원 있지. 거기 데려다줘.”
“왜? 누구 입원하셨어?”
“응. 엄마가.”
“뭐? 어머니 입원하셨어? 왜? 뭐 때문에? 미리 말 안 했어?”
“아, 별건 아니고 갑자기 맹장이 터져서. 어차피 입원한 지는 꽤 됐는데 뭐. 나일롱 환자야.”
“미리 말하지….”
강동현이 섭섭하다는 식으로 말하자 강영지가 어깨를 으쓱했다.
“진짜 별거 아니었는데 뭐. 너도 바쁘고.”
“그래도 금요일이라도 갔으면 됐잖아.”
“내 남자 친구를 왜 엄마한테 뺏겨. 싫어.”
“으이구. 불효녀네.”
강동현이 귀엽다는 식으로 여자 친구의 볼을 깨물었다.
“환자한테 꽃은 그렇고… 너희 어머니 빵 좋아하시잖아. 롤케익이라도 하나 사갈까?”
“그러자.”
“넌? 오늘 거기서 자는 거야?”
“어. 오늘만. 엄마 심심하다고 해서.”
“그래. 잘해라, 좀.”
“너나 잘하세요, 이 자식아. 너희 엄마 나한테 전화하는 거 몰라? 너 살아있는지 죽었는지 모르겠다고?”
“TV 보면 되지.”
“말하는 거 봐. 진짜 너나 잘해. 킥킥.”
빵집에 들러 빵도 사서 병원으로 향했다. 강영지가 한사코 말리는데도 병실까지 가서 사위 노릇 좀 하다가 내려왔다. 담배나 한 대 피우고 갈 생각으로 주머니를 뒤져 담배를 꺼내 물었다. 담배 계속 피울 거면 약한 거로 바꾸라고 해서 레드에서 아이스블라스트로 갈아탔는데 시원한 맛에 나름 피울 만했다.
“여기서 담배 피우시면 안 되구요. 저기 앞까지는 가셔야 해요.”
“아, 죄송합니다. 이거 재떨인 줄 알았네요.”
옆에 있는 휴지통의 머리에 재떨이가 있는 줄 알고 피우기 시작했는데 보니까 그냥 깡통 휴지통이었다. 담뱃갑에다가 비벼 끄고는 자리를 옮기려고 하는데 여자가 붙잡았다.
“강동현…? 강동현 씨 맞죠? 배우….”
“아, 예. 안녕하세요.”
“어머, 어머 어머. 팬이에요. 싸인… 싸인 좀 해주실 수 있으세요?”
“아, 예. 그럼요.”
강동현은 후후, 하고 바깥쪽으로 숨을 몇 번 내어 쉬고는 고개를 돌리고 웃는 얼굴로 간호사로 보이는 여자의 핸드폰 케이스에다 싸인을 해주었다.
“누구 입원하셨나 봐요.”
“아, 예. 아는 사람이… 이제 가려고 하다가요.”
“담배 피우시는지 몰랐어요. 그런데 어떻게 피부가 좋으세요? 부럽다.”
“아니에요. 하하. 그럼 가보겠습니다.”
“네. 아, 저, 악수 한 번 해도 될까요?”
“아, 네.”
악수를 해주자 간호사는 대단히 좋아했다. 담배를 마저 피우고 싶지만, 사람들이 몰려오는 것도 싫고 해서 주차해놓은 데로 슬금슬금 걸어갔다.
“아, 경호 씨. 아직도 밖에 있었어요? 추운데 지금까지 밖에 있으시면 어떡해요. 빨리 병실로 애 데리고 올라가세요.”
경호라는 이름은 정말 흔한 이름이었지만. 강동현은 무심코 고개를 돌렸다.
“아, 죄송합니다. 들어갈게요.”
가로등의 밑에서 누군가 무언가를 들고 고개를 숙였다.
“혼났다. 그치?”
“혼났다.”
“다음 주에 마저 가르쳐 줄게.”
“내일 하면 안 돼?”
“안 돼. 내일 나 일 하잖아.”
“병원에서.”
“맞아. 병원에서.”
“이강유 비뇨기과!”
“쉿.”
“왜?”
“그런 게 있어.”
“지지야?”
“지지야.”
황경호가 한 손에는 조그마한 여자애를 들고 한 손에는 어린이용 네 발 자전거를 들고는 병원의 입구 쪽으로 향했다. 공놀이도 했던 것인지 아이의 손에는 농구공이 들려져 있었다. 아이에게는 꽤 큰 공이라서 아이는 이내 공을 놓쳤다.
“앗. 내 공.”
통통 튀어서 오는 농구공을, 강동현은 허리를 숙여 집어 들었다.
“아, 감사합니다. 초록이도 감사합니다, 해야…지….”
“감사합니다.”
“뭐야? 딸이야?”
아이가 공, 공, 하면서 손을 뻗자 강동현이 아이의 품에 공을 돌려주었다. 황경호는 좀 껄끄러운지 인상을 조금 썼다가 한숨을 쉬었다.
“아니에요. 감사합니다. 살펴 가세요.”
아이는 네 살이나 되었을까. 황경호는 전혀 대화를 하고 싶지 않다는 티를 팍팍 내며 강동현을 피해 갔다.
‘뭐야. 진짜 사고 친 건가…’
강동현은 물끄러미 황경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아, 저기. 저 간호사랑 아는 사이세요?”
“경호 씨요?”
아직도 가지 않고 강동현을 몰래 폰으로 찍고 있는 예의 여자 간호사에게 불쑥 다가가서 물었다.
“아, 네. 가끔 여기로 외진 오는 선생님이랑 같이 오는 간호사인데….”
그런데 그 선생님은 비뇨기과 의사다. 여자 간호사가 의뭉스러운 눈길로 올려다보자 지레 찔린 강동현이 선글라스의 안으로 살짝 인상을 썼다가 풀고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말했다.
“개인적으로 좀 아는 사람인데… 딸이에요?”
“아니, 딸은 무슨. 경호 씨 이제 스물 간당간당할 텐데….”
황경호의 나이를 제대로 모르는지 여자가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그럼 무슨 친척이나 그런 거예요?”
“아뇨. 그런 건 아니구요… 아, 이런 거 말해도 되나? 되겠지?”
“뭔데요?”
강동현이 집요하게 묻자 너니까 말한다, 는 식으로 여자가 말을 해주었다.
“후원자 같은 거죠, 뭐. 두 달 전인가? 외진 왔다가 우연히 초록이랑 만났는데 초록이 사정이 불쌍하다 보니까 아예 한 달 전부터는 매주 주말마다 만나러 꼬박꼬박 오더라구요.”
“저 애요?”
“네. 자세한 건 잘 모르지만요. 다행히 누가 요새는 초록이에게 기부도 해준다고 하니까 좀 있으면 수술도 받을 수 있을 것 같고 경호 씨 같이 돌봐주는 사람도 생기고. 아직 세상 살 만한 것 같다 싶어요.”
“저 간호사가 기부를 했다구요?”
“아, 경호 씨일지도 모르지만. 경호 씨야 뭐 월급도 빠듯할 텐데 어떻게 매주 백만 원씩 기부를 하겠어요. 기부는 다른 사람이라고 들었는데.”
“그렇군요….”
“그래도 경호 씨가 대단하죠. 매주 저렇게 선물도 사오고 애한테 공부도 가르쳐주고. 어린데 참 착해요.”
수다스러운 여자 간호사는 많은 것을 이야기해줬다. 초록이라는 여자아이는 올해 만 네 살로 부모가 없는 고아인데 올해 여름 뇌종양 양성판정을 받고 Y대 병원에 입원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고아원에서 입원까지는 시켜주었는데 각종 수술이나 치료비를 낼 형편이 되지 않아 그대로 퇴원을 할 마당이었는데 기부가 오면서 다행히도 수술을 받게 되었다고 한다. 물론 수술을 받는다고 해도 살 수 있을지 없을지는 모르지만.
그러니까 즉, 이 간호사가 강동현한테서 받은 돈을 고스란히 그 아기한테 쓰고 있다는 말이었다.
‘왜 그런 이상한 짓을 하는 거지? 당장 12월 31일이면 죽겠다고 날짜까지 받아놓은 마당에 친척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닌 여자애 사정이 딱하다고 그렇게 싫어하던 나한테 그냥 얌전히 당하고 있는 건가? 수술을 해도 치사율이 90퍼센트라는 애한테? 죽기 전에 무슨 세상에 큰일이라도 하고 가겠다고 마음먹은 건가. 그것도 웃긴데.’
강동현은 몹시 못마땅했다. 어차피 그 간호사와 강동현은 애당초 전혀 접점이 없는 사람들이었다. 한 명은 잘 나가는 톱스타고 한 명은 그저 유명한 병원의 일개 간호사일 뿐이었으니까. 그래서 병원을 갈 때마다 만나도 평소에 서로가 뭘 하고 있는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있는 방법이 없다. 애초에 서로가 어떤 사람인지도 잘 모를 것이다.
그가 왜 강동현이 준 돈으로 저러고 있는지 모르겠다. 차라리 그 자신을 위해서 돈을 썼더라면 차라리 기분이 더 나았을 걸 같다. 근데 그걸 아픈 아이에게 기부를 하고 있었다니. 왜 이렇게 기분이 찝찝할까? 그래서 좀 벼르다가 병원에 갔을 때 대뜸 물었다.
“너 무슨 부잣집 아들이야?”
돌아온 금요일, 못 올 줄 알았는데 리딩만 하고 본격적인 촬영은 조금 늦춰지며 짬이 나 병원에 왔다. 옷을 다시 입고 있는 간호사의 무표정한 얼굴에다 대고 그렇게 툭 물었다.
“네?”
“부잣집 아들이냐고.”
“아니요….”
강동현이 무슨 의도로 말을 하고 있는지 모르니 조금 경계하는 기색으로 그렇게 말했다.
“한 달에 사백만 원이 껌값도 아니고. 니가 쓰지도 않을 거면서 왜 그걸 가져가서 버려?”
“뭘요?”
사실 저쪽은 강동현에게 대주고 그 대가로 강동현이 돈을 주는 것이었다. 그러니 사실 그 돈을 어떻게 쓰든 그건 온전히 황경호의 선택이었다. 거기까지 강동현이 간섭할 이유도 없고 권리도 없었다. 그래서 지금까지 백만 원씩 던져주면서도 어디다 돈을 쓰는 건지 딱히 궁금해하지도 않았다. 다만 혹시라도 중간에 마음을 바꾸어 또 말도 안 되는 짓을 시킬까봐 걱정을 했을 뿐이다.
그런데 그 돈을 아픈 어린아이에게 쓴다는 건 단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한 일이었다. 다른 남자를 사정시켜준 대가로 받은 돈을 전부 기부한다… 그 돈을 준 강동현 입장에서는 정말이지 기분이 더러웠다. 그냥 더러웠다.
“내가 너한테 뭐, 싫은 짓 시키고 있고 약속한 게 있으니까 준 건데. 내가 부잣집에서 태어난 게 아니라서 그런지 남이 열심히 번 돈으로 그렇게 적선하고 다니시니 좀 그렇다?”
“…어쨌든 댁이 주면서 내 돈 된 건데. 내 돈으로 내가 어떻게 하든 도은혁 환자님이 무슨 상관이세요.”
황경호는 상관없다는 식으로 말하며 쓰레기들을 휴지통에 넣었다. 황경호의 말이 맞았지만 강동현은 그저 어깃장을 놓았다.
“성자 나셨네. 자기만족 때문에 그렇게 어린애 건드리는 거면 다시 생각해보지? 괜히 정 붙여놓고 넌 덜컥 죽어버리면 애는 뭐가 되냐. 아, 애도 얼마 안 있으면 죽으니까 상관없는 거야? 죽으려면 혼자 죽어.”
강동현은 황경호에게서 본심을 듣기 위해서 본능적으로 단어를 거칠게 선택해서 썼다. 하지만 상대는 아주 무덤덤했다.
“괜한 참견이시네요. 제 일은 제가 알아서 해요.”
황경호는 강동현의 심한 비아냥거림과 놀림에도 그다지 반응하지 않고는 그렇게 말했다.
“다음 주에 뵙겠습니다.”
황경호는 인사를 하곤 나가버렸다. 더 못마땅했다.
[고쳐줄까?] 1부 2권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