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나는 내가 갑이라는 것을 잊지 않았다.
왜 돈이 아니냐고.
그 간호사가 먼저 얘길 꺼낼 때부터 눈치를 챘어야 했는데. 겁먹은 것이라 생각했었는데 아니었다, 젠장. 일주일 동안 이를 박박 갈았다는 것이 분명한 요구조항에 강동현은 어이가 없어 따졌었다.
[그런 게 도대체 왜 필요한데? 누구 인생 말아먹을 작정이야?]
[분명히 도은혁 환자님이 절대 못 할 범위의 일은 아니고 제가 원하니까 도은혁 환자님은 최선을 다해서 그 말을 들어주어야 하는 거고. 뭐가 문제예요?]
[그냥 돈을 달라고 해.]
[뭐든지 들어주신다면서요. 그럼 아예 처음부터 돈을 준다고 적든지.]
그렇게 말하는데 할 말이 있겠는가. 못할 테고 못할 거 같으면 이제 포기하고 떨어져라, 라는 건데. 강동현도 오기가 생겨서 알겠다고 하고 나와 버린 것이었다. 그 뒤 여자 친구를 만나는데도 기분이 더러워서 집중을 제대로 못 했다. 밖에서 생긴 일로 여자 친구를 걱정시키는 타입은 아니니 여자 친구는 강동현의 기분을 알아차리지 못했던 것 같지만, 어쨌든 오랜만에 만난 연인과의 시간을 완전히 거지 같은 기분으로 보내고 말았던 것이다.
게다가 더 거지 같은 건 지금 강동현은 그 간호사의 요구사항을 더 거부할 생각을 못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맙소사. 지금 강동현은 정말 홍대에서 고자라고 스스로 폭로할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빌어먹을….
“동현아, 집중!!”
“죄송합니다….”
촬영에 이렇게까지 집중을 하지 못한 것은 처음이었다. 사실, 촬영은 촬영이고 그 간호사의 요구사항 같은 건 다 끝나고 생각해도 되겠지만, 사안이 사안인지라 골이 지끈지끈해서 저절로 미간에 힘이 들어갔다.
“동현아! 인상! 너 독샷 아니라고 얼굴 막 할래?”
“아, 죄송합니다.”
“똑바로 해라.”
“예, 죄송합니다.”
강동현은 또 감독에게 지적을 받고 다시 고개를 숙여 주변에 사과를 했다. 오늘은 유달리 강동현의 NG도 많았다. 연기라는 게 사람이 사람을 그려내는 것이다 보니 배우의 컨디션은 생각보다 많은 영향을 미쳤다. 이렇게까지 집중을 못 하는데, 제대로 연기가 나오는 게 이상한 거지. 강동현은 자신의 양 뺨을 손바닥으로 짝짝 치고 집중력을 끌어올렸다.
‘정신 차려라.’
촬영은 그럭저럭 끝냈다. 자신의 연기가 너무 마음에 안 들어서 강동현은 짜증이 부글부글한 상태였지만 자기 하나 마음에 들자고 같은 장면을 계속 찍을 수도 없는 것이고. 절대 다음부터는 이러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오늘 하루 종일 촬영했던 자신의 연기를 전부 떠올려보았다. 자리에 앉아 대본을 보며 중얼중얼.
“동현 오빠, 수고하셨어요.”
“어? 아, 지연아. 고마워.”
같이 촬영을 하는 여자 아이돌이 넘겨주는 차가운 물을 받으며 강동현이 웃었다.
“오늘 무슨 일 있었어요?”
“응?”
“오늘따라 집중을 못 하시는 것 같아서요.”
강동현은 한숨을 조금 쉬었다가 힘 빠진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어… 뭐, 좀 개인적으로… 아, 괜찮아. 큰일은 아니고….”
“네. 잘 해결되셨으면 좋겠네요. 힘내요, 오빠.”
강동현은 고개를 푹 숙이고 한숨을 쉬었다. 힘을 낸다고 되는 거면 벌써 했다.
*
<야, 진짜 이건 아니다>
<딴 거 생각해봐>
<차라리 돈을 달라고 하라니까>
<야! 지금 씹냐? 장난해?>
<야아아아!!!>
황경호는 계속 울리는 폰을 질린다는 얼굴로 보았다. 문자들을 확인해보니 참 기도 안 찼다. 멍청한 놈. 그러게 이기지도 못할 싸움을 걸고 난리야. 황경호는 그렇게 비웃으며 답장을 보냈다.
<언제 할지 시간 보내요. 홍대 정문 앞에서 며칠 몇 시에 할 거예요? 그거 말곤 문자 보내지 마세요>
날짜랑 시간 알려달라는 것 때문에 번호를 알려줬더니 정말 질리도록 문자를 보냈다. 황경호는 이미 마음을 굳힌 상태였고 강동현이 이런 식으로 나올수록 더 유쾌해지기만 할 뿐이었다.
『와… 진짜 남한테 죄짓고 살면 안 되는구나….』
『왜? 복수하라고 한 건 너잖아.』
『그렇긴 한데….』
『야! 다른 사람은 뭐라고 해도 니가 그런 얼굴 하면 안 되지!』
강동현, 신서영 주연의 드라마의 내용은 이제 중후반에 들어서고 있었다. 주인공인 서준과 유연경의 사이는 알콩달콩해지고 있었고 외부요인인 아버지와의 갈등만 잘 해결되면 해피엔딩으로 끝날 드라마였다.
예전 사극에 나왔을 때의 과묵한 역할과 달리 여기는 이렇게 가볍고 촐싹거리는 역할인데도 매력을 어찌나 잘 살려 놓았던지 남자인 자신이 봐도 귀여워서 빠질 것 같았다. 그러면서도 그의 체구나 얼굴은 몹시 남자다워서 족보 있는 미남 배우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하였다.
“아, 난 저놈 진짜 싫은데 왜 또 이걸 보고 있지?”
황경호는 여전히 ‘연기자’ 강동현의 팬이었던 것이다. 이전 빠져들 듯 강동현의 연기에 반해서 열심히 찾아 보다가 병원에서 그를 실제로 마주치고 난 뒤엔 깨도 한참을 깨 강동현의 출연작들을 다 멀리해두고 있었다. 그러다 그가 나오는 새 드라마가 최근 방영되면서 또 슬슬 강동현 작품을 파기 시작한 것이었다.
『내가 이렇게까지 도와줬는데… 뭐 없어요?』
『고기 사줄까?』
『아… 돈도 많은 사람이 고기가 뭐야, 고기가.』
『돈은 니가 더 많잖아. 모르겠으니까 그냥 말로 해.』
『화장실 들어갈 때랑 나올 때 다르다더니. 지금 이 태도 뭐예요? 예? 기분 팍 상합니다?』
사실 ‘슬’ 정도가 아니었다. 황경호는 플레이어를 옆으로 작게 해놓고 타다닥 키보드를 치기 시작했다. 강동현의 공식 팬카페 <우리동현누리동현>에 장문의 강동현 연기분석 글을 올리고 있는 도중이었기 때문이었다.
<원래부터 강동현은 연기의 디테일과 자연스러움을 잘 살리는 편이라 연기에 감칠맛이 난다. 특히 이 장면이 나왔을 때를 보면 유연경에게 어리광을 부리는 연하남을 거의 완벽하다 싶을 정도로 연기하고 있다. 예전 사극을 했을 때는 아직 기량 부족으로 무뚝뚝함을 다소 평면적인 연기로(그래도 그 나잇대 연기자들 중에서는 탑이었다) 소화했었는데 이번 <연애출사표>에서 보이는 표정 연기의 다양함을 보면 확실히 그는 이런 식으로 디테일을 살리는 로맨스물에도 확실히 잘 어울리는 것 같다.>
이래 봬도 황경호의 분석 글은 <연애출사표> 방영 이래로 꽤 많은 우리누리인(강동현 팬들 명칭)들에게 호응을 얻고 있었다. 물론 감히 자신들의 동현 오빠를 까는 글도 있다는 이유로 욕을 적어놓는 우리누리인도 있었지만 그래도 나름 호평이었다. 대형 포털 엔진의 메인에 올라간 적도 있었다.
‘그래도 사실 정확하게 연기를 잘하고 못하고를 떠나서 예전 사극이 더 확 하는 게 있었지… 분위기가… 아마 그때 감독이 강동현 팬이었을 거야. 매력이나 인기에는 연애출사표 같은 게 더 좋은 거 같고… 아, 그래도 사극 좋네… 목소리가 원체 좋아서….’
우리누리 동현영상이나 짤방 방은 정주행, 역주행, 재주행만 해도 이미 여러 번 했었다. 연기만큼은 정말 기똥차게 열심히 하니까. 메이킹 영상 같은 것도 보면 싹싹하게 인사도 잘하고 사람들한테 잘한다. 그런 모습을 보면 지금까지 이 남자가 그 개진상을 부렸던 인간이라는 걸 까먹고는 했다.
이런 영상이나 인터뷰에 나오는 강동현은 전부 ‘배우’ 강동현이었다. 황경호가 질색을 하는 ‘환자’ 도은혁이 아닐뿐더러 가까이 부딪치는 사람도 아니었다. 그렇게 멀찍이서 본 강동현은 왜 얘가 연예인으로 밥 벌어 먹고사는지 질릴 정도로 깨닫게 하는 매력이 있었다.
‘물론 알맹이야 개차반이지만, 뭐. 내 알 바 아니지.’
“아, 강동현 이제 사극 안 하나? 영화로 스케일 크게 해서 하나 해도 괜찮을 것 같은데.”
강동현의 필모를 한 번 보며 중얼거리는 황경호였다. 아마 십 수만 명이나 되는 우리누리 회원들 중에서 강동현 개인을 이렇게나 싫어하면서도 그의 연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황경호밖에 없을 것이다.
부우웅, 하고 문자가 왔다. 황경호는 폰을 집어 들었다.
<내일. 저녁 8시. 홍대 정문>
진짜? 황경호는 오, 하고 킥킥 웃었다. 내일이면 월요일이고… 8시? 아슬아슬하게 시간 맞겠네. 황경호는 글을 마무리해서 팬카페에 올리고 가뿐한 마음으로 자리에 누웠다. 그리고 저도 모르게 킥킥킥 거리며 웃었다.
‘이 바보 같은 인간이 하라고 진짜 하네. 나 같으면 그냥 관두고 병원이나 열심히 다니겠구만.’
황경호의 일상은 아무런 변화가 없고, 그는 앞으로도 어떤 변화를 기대할 수 없는 인생을 살고 있었다. 그게 무언가 문제인 것일까.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지 방법이라도 누군가 알려준다면 좋을 텐데. 왜 이런 우울감이 드는 것인지,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지. 아무렇지 않게 일상을 지내다가 어느 순간 가슴을 옥죄며 갑자기 모든 것이 불안해진다. 이렇게 살아도 되는 걸까? 새벽에 잠이 깨었다. 그리고 눈을 뜨자마자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게 너무 싫어서, 무서워서 잠을 아예 자지 않았던 적도 있었다. 퍼즐을 맞추거나 영화를 미친 듯이 보거나 결벽증에 걸린 것처럼 청소를 했다. 무언가를 하고 있지 않으면 불안했다. 왜 그런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그가 그 자신을 죽이지 않기 위해 하는 그 행동들이 이제 강동현이라는 배우를 파는 것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그나마 살아있는 사람이라 금방 완성되지 않는다는 것이 꽤 위로가 되었다. 진작 아이돌 빠돌이나 할 걸 그랬다. 그랬다면 우울증 따윈 걸리지도 않았을지 모른다. 지금이라도 도전해볼까?
이런다고 죽고 싶다는 생각이 사라진 건 아니지만.
오늘은 나름 평온한 기분을 느끼며 천천히 잠에 빠져들었다.
*
월요일 저녁의 홍대는, 그냥 홍대였다. 8시면 아직 그렇게 늦은 시간도 아니었고 불야성을 이루는 가게들과 술집들이 빽빽한 골목 사이로 젊음이 흘렀다. 그중에는 노래를 하는 사람도 있었고 연인들도 있었고 호객행위를 하는 직원들도 있었다. 분주하고 사람이 많고. 황경호는 이런 거리를 그다지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딱히 그렇다고 싫어하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턱을 삐딱하게 괴고 아이스크림이나 쪽쪽 빨아먹으면서 홍대 정문 앞을 바라보았다.
“이 인간이 벌써 8시 10분인데 어디서 뭐 하고 앉아있는 거야?”
그렇게 중얼거리면서도 그가 지금 얼마나 짜증과 분에 차서 여기로 달려오고 있을까 생각을 하니 저도 모르게 큭큭큭 거리고 웃게 되었다. 옆 테이블의 커플들이 이상하게 쳐다보자 얼른 웃음음 멈추었다. 하지만 저도 모르게 또 웃었다. 황경호는 흥미진진하게 강동현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다.
그렇게 잠시 있자 홍대의 정문 앞으로 검은색 작은 차 하나가 들어왔다. 번호판이 ‘허’로 시작하는 것을 보니 렌터카인 것 같았다. 운전석에서 사람이 내렸다. 모자에 마스크에 선글라스를 한 키가 훤칠한 남자 하나였다. 그는 내려서 수많은 인파를 바라보며 가만히 굳어 있더니 돌아서서 차 지붕을 주먹으로 한 번 세게 치고 거기에 잠시 고개를 박고 뭐라고 중얼중얼거리는 것 같았다. 사람들이 이상한 꼬라지를 하고 있는 그를 힐끗힐끗 쳐다보다가 지나갔다. 그는 심호흡을 하고 다시 사람들에게로 돌아섰다.
“나… 나는…….”
그는 침을 몇 번이나 삼키더니 거치적거리는 마스크를 한쪽 귀에서 떼어 늘어뜨리고 손을 입가에 모아 확성기처럼 동그랗게 만들었다. 그리고 갑자기 배에 힘을 주어 크게 소리쳤다.
“나는 고자다!!!!”
휘청휘청 지나다니는 인파들이 한순간 일시 정지를 누른 것 같았다. 그리고 웅성거리더니 남자를 쳐다보았다. 남자는 잠시 가만히 있더니 순식간에 차에 다시 타서 전력 질주로 달아나려고 했다가, 전봇대에 쾅 부딪쳤다. 사람들이 깜짝 놀라서 웅성웅성 쳐다보고 있는데 잠잠히 있던 차가 갑자기 급후진을 하더니 다시 미친 듯이 줄행랑을 치기 시작했다.
“…야, 쟤 미쳤나 봐.”
“쳐다보지 마.”
2층 카페 안에서 커플이 밖에 일어난 사건은 보지 못하고 상대방만 쳐다보고 있다가 아까부터 이상한 행동을 하고 있던 청년 하나가 테이블을 주먹으로 쾅쾅 치며 웃음소리도 내지 못하고 끅끅거리는 것을 보며 속닥거렸다.
“하아… 킥킥킥킥… 하아… 죽을 것 같아… 큭큭큭….”
황경호는 눈물을 닦아내며 동영상 찍기 모드를 정지했다. 그리고 확인차 그 동영상을 틀어보았다.
『나는 고자다!!!!』
“킥킥킥킥킥. 아, 하하하하. 아, 미칠 것 같아… 킥킥킥… 진짜 하란다고 하냐, 큭큭큭.”
황경호는 숨이 넘어갈 정도로 미친 듯이 웃었다. 남자들은 자신의 모든 자존심과 자긍심을 허리 아래에 두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자기가 남자라는 것이 자기가 가진 자신감의 대부분일 때가 많다는 말이다.
특히나 저렇게 젊고 잘나가는 남자가 비뇨기과의 문을 두드린다는 것은 정말이지 자기 자신을 부정하는 것이나 진배없는 짓이었다. 고추에서 자신감이 나오고 또 고추 때문에 자존심을 구기는 열등한 동물을 남자라고 지칭하면 될 것 같다. 그럼에도 문제의 심각성에 매일매일 얼굴을 꽁꽁 싸매고 병원을 오는 남자인데 스스로 이렇게 사람이 많은 데서 고자라고 소리를 치다니.
“진짜 이 인간…. 킥킥킥킥.”
이렇게 즐거웠던 적이 언제 있었을까. 진짜 태어나 이렇게 재밌었던 적은 처음인 것 같았다. 정말 웃겨 죽을 것 같았다. 이게 사람을 골탕 먹이는 재미인가? 한 번도 그렇게 안 해봐서 몰랐는데 이거 진짜 재미있다. 습관이 될 것 같았다.
“하아… 킥킥… 하아….”
당분간 이것만 봐도 진상 환자 열 다스는 상대할 수 있을 것 같았다.
*
“야!”
황경호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다.
“안녕하세요, 도은혁 환자님.”
“너… 씨… 왜 문자 안 봐!”
“왜요? 무슨 용건 있으세요?”
황경호가 멀쩡한 사람이 대낮부터… 라는 노골적인 얼굴로 강동현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월요일에 내가 홍대에서… 젠장, 어쨌든… 봤잖아.”
“아~ 그거요?”
아. 진짜 좀 까먹고 있었다. 한 삼 일은 아주 재밌었는데 말이다.
“아니, 선글라스랑 마스크까지 끼고 그랬는데 뭔 소용이 있어요.”
“야! 진짜 누구 인생 망칠 일 있냐!”
정말 머리에 그거밖에 안 든 남자인가. 본인은 누구 인생을 어떻게 조지고 있는지 영 감이 안 잡히는 모양이다.
“도은혁 환자님 인생이랑 저랑 무슨 상관이 있다구요. 어쨌든 마스크랑 선글라스 끼고서야….”
“뭐어?!!”
누구는 인생 말아먹을 각오하고 한 건데 지금 저게 무슨 말인가! 강동현이 이를 빠득빠득 갈며 다시 목소리를 낮추고 조용히 윽박질렀다. 이 각오조차 다른 사람에게 억지로 자기 거시기를 만져 달라고 하는 거다. 정말 자기가 뭘 잘못하고 있는지 전혀 모르는 남자다.
“야, 너도 선글라스랑 마스크는 안 된다는 말 애초에 안 했잖아.”
“그거야 제가 말할 때부터 묵시적 합의가 돼 있는 거죠.”
“묵시적 합의 좋아하네! 애초에 이 사건에 합의 따윈 없었어.”
“없으면 왜 하고 오셨어요, 굳이?”
“야!!!”
강동현이 화가 나서 다시 빽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병원 대기실에 앉은 남자들이 전부 이쪽을 보았다. 그걸 느끼고 강동현은 모자를 더 눌러쓰며 황경호의 손목을 잡고 어디론가 끌고 갔다.
“아, 진짜 이 사람 안 되겠네. 저 지금 일하고 있는 중이거든요?”
“야, 진짜 장난 아니거든? 내가 그걸 무슨 심정으로 했는지 알아?”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요.”
내가 고자인 것도 아닌데. 황경호가 그렇게 어깨를 으쓱하자 강동현이 이를 갈았다.
“난 했어. 니가 말한 대로 했다고.”
한 삼 일 재밌고 말았던 황경호와 달리 이쪽은 이번 주 내내 분통을 삭힌 모양이었다. 엄청나게 불평불만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내가 너 때문에 배우 인생 말아먹을 뻔했다고. 알긴 알아? 도대체 쓸데없이 그런 짓을 왜 시키는 건데! 그렇게 안 생겨가지고, 어! 너 진짜 이딴 식으로 살면 안 된다.”
‘아, 정말 쓰레기 같은 놈이야, 진짜. 얘 팬들이 이걸 알아야 하는데. 멍청한 놈.’
황경호는 속으로 그를 비웃었다. 기분이 유쾌해졌다.
“야, 너 지금 웃었냐?!”
강동현은 한참을 투덜거리다가 대답 한 번 제대로 안 해주는 황경호를 힐끗 보고는 입을 다물었다. 혼자 흥분해서 소리치는 자신이 바보 같이 여겨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뭐가요?”
“……오늘은?”
“네?”
강동현은 답답해서 결국 윽박을 질렀다.
“네가 말한 것 들어줬으니까 오늘 하는 거냐고!”
“아, 진짜 이 인간… 칼슘제 좀 먹어요, 도은혁 환자님. 성격 안 좋아, 진짜.”
“야!”
“알았어요. 알았어.”
그토록 계속 불안했던 기분이 한순간에 차분해지는 기분이 들어 강동현은 스스로도 내심 놀랐다. 강동현은 가만히 황경호의 뭔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는 얼굴을 내려다보며 은근슬쩍 되물었다.
“…진짜지?”
“왜요? 그거 도은혁 환자님 아니셨어요?”
“맞거든!”
“그럼 뭐, 하는 거죠.”
“……알았어.”
태연자약한 황경호를 보니 계속 흥분해서 소리치고 화내는 자신이 정말 정말 바보 같이 느껴졌다. 황경호의 확답까지 얻고 나니 그 기분이 더 강해졌다. 강동현은 선글라스를 다시 쓰고 황경호를 두고 화장실을 나가버렸다.
“참나.”
황경호는 그런 강동현이 웃겨서 고개를 가로저으며 피식 웃었다. 그리고 그의 뒤를 따라 나갔다. 이강유 비뇨기과 대기실로 다시 들어가 보니 또 신문을 쫙 펼치고 일반인 코스프레를 하고 있는 강동현이 보였다.
“흥.”
황경호는 그렇게 코웃음을 치고 치료실로 들어갔다. 일을 하다가 문득 의사가 황경호에게 말했다.
“요새 컨디션 좋다, 경호야?”
“네?”
황경호는 이강유의 말에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이강유는 안경을 고쳐 쓰며 말했다.
“왜?”
“아뇨….”
황경호는 기분이 이상해서 자신의 얼굴을 매만졌다. 한동안 확실히 기분이 좋기는 했었다. 강동현에게 엿 먹인 게 하도 기분이 좋아서 말이다. 게다가 오늘 그 꼴사나운 꼴을 보니 과연 엿을 먹여도 제대로 먹였던 것이었는지 볼 맛이 났다.
처음에 그 일을 하고 당황한 자신이 너무 싫어서 정말 우울했으나, 생각해보면 제멋대로 행동한 강동현 때문에 그런 거지 같은 기분이 든 것이었다. 그러니 황경호도 똑같이 강동현을 기분 나쁘게 해도 상관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해보면 황경호가 지금껏 그런 경험이 전무했기에 확 휩쓸린 것이지 계약상 관계를 보면 황경호가 확실히 갑이었다. 지금도 강동현을 골릴 요구사항이 산더미처럼 머릿속에 있었다. 모르긴 몰라도 제 잘난 맛에 사는 저 인간을 잘근잘근 밟아줄 정도는 된다고 생각한다.
자신의 어디에 이런 심술 맞은 곳이 있었는지 모르겠으나, 뭐 강동현한테 옮은 모양이지, 어쨌든 그래서 근래 기분이 꽤 삼삼하게 괜찮기는 했었다.
그걸 이강유가 알아차릴지는 몰랐지만 말이다. 그렇게 얼굴로 티가 났나? 아무도 그런 소리 안 했었는데. 가끔 보면 우리 선생님 참 눈치가… 하긴 그거랑 손재주로 먹고사는 양반이지.
“도은혁 환자님 들어오시라고 해라.”
“네~”
황경호는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다리를 달달 떨며 기다리고 있는 강동현을 보지도 않고 차트를 챙기며 무심히 그를 불렀다.
“도은혁 환자님 들어오세요.”
강동현은 벌떡 일어나서 황경호를 따라갔다.
“이 병원은 예약환자도 왜 이렇게 대기시간이 길어?”
“장사가 잘되는 걸 어떡해요.”
그렇게 상담실로 들어와 이강유와 평소 때처럼 상담을 하고 투약상태를 확인한 후 옷을 갈아입고 나온 강동현이 입원실에서 내려와 대기실 정리를 하고 있는 황경호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아, 저 이것만 하고….”
“시끄러. 따라와.”
“아, 진짜.”
황경호는 질질 끌려갔다. 기계장비가 널브러진 창고 같은 치료실로 들어가서 문을 잠갔다. 강동현은 선글라스와 모자를 벗었다.
“빨리 와.”
“왜 이렇게 재촉하세요?”
고작 몇 번 정도였지만 황경호로 세우고 사정할 수 있었던 강동현이었다. 몇 달 동안이나 못할 때보다 오히려 이렇게 감질나게 일주일에 한 번씩 하는 것이 더 사람을 초조하게 만들었다. 막 자위를 시작했던 중고등학생 때보다 지금이 더 섹스 생각이 간절해지는 걸 보면 정말 얼마나 굶은 건지.
강동현은 물끄러미 물티슈로 손을 닦고 있는 황경호를 쳐다보았다. 심심한 얼굴이었다. 전처럼 당황하거나 불쾌한 기색은 얼굴에 하나도 올라와 있지 않았다. 다른 환자들에게는 항상 사근사근하게 대하면서 강동현에게만 심드렁한 그 태도 그대로였다.
“빨리.”
“예예.”
전처럼 강동현의 배 위에 거꾸로 앉아 웃통을 벗고 강동현의 아랫도리를 깠다. 정말 남들이 보면 뭐하는 꼴이냐고 물을 정도로 괴상한 모습이었지만, 어쨌든 이게 서로서로 편하니까 어쩔 수 없었다.
한 5분 정도 문지르자 빳빳이 선 강동현의 대물을 보며 황경호가 중얼거렸다.
“이거 이제 제대로 되는(?) 거 아냐?”
“안 돼… 하… 내가 집에서 시도해봤는데 안 돼.”
강동현은 제대로 오는 성감에 거친 숨을 몰아쉬며 대답했다.
“도대체 언제 제대로 되는 거예요?”
“그걸 알면 내가 지금 이러고 있겠냐? 읏. 야, 세게 쥐지 마.”
“빨리 싸기나 해요. 손목 아파요.”
“얼마 하지도 않았잖아. 내가 홍대에서…! 욱… 야, 그거 생각하면 혈압 오르니까 제대로 해라.”
황경호는 뭐가 웃긴지 하하, 소리를 내서 짧게 웃었다. 강동현은 한쪽 눈썹을 찌푸리며 그런 황경호의 뒷모습을 올려다보았지만 지끈지끈 올라오는 쾌감에 화난 것도 잊어먹었다.
‘아, 젠장. 기분 좋아.’
강동현은 입맛을 다시며 입술을 핥고 습관적으로 상대의 살을 만졌다. 강동현의 커다란 손이 허리와 배를 만지자 황경호가 불편한 듯 이리저리 허리를 빼며 투덜거렸다.
“나는 좀 안 만지면 안 돼요?”
“시끄러… 집중해.”
그렇게 저번과 크게 다르지 않은 시간 내에 강동현은 사정했다.
‘아…… 이거 점점 더 기분 좋아지는 것 같은데…….’
강동현은 현기증이 나 정신을 못 차리는 와중에 눈을 질끈 감고 그렇게 멍청하게 생각했다. 전에는 이런 느낌은 없었다. 예전은 사정하고 나면 끝이었는데 지금은 그 느낌이 오래 남아 정신을 쏙 빼놓았다.
아, 이럴 땐 그냥 끌어안고 뒹굴고 싶은데, 라고 생각했다가 황경호가 물티슈로 손을 닦으며 옷을 단정히 입는 것을 알아차리고 살짝 깼다. 쟤가 영지도 아니고 그런 생각이 잠시라도 든 게 어이가 없었다.
강동현도 억지로 무겁고 나른한 몸을 일으켜 대충 티슈로 거시기를 닦고는 옷을 정리하고 선글라스를 꼈다. 그리고 모자를 쓰면서 밖으로 나가려고 하는데 황경호가 불러 세웠다.
“어디 가세요?”
“왜. 끝났잖아.”
“저 이번 요구요.”
아. 강동현은 인상을 팍 썼다. 까먹고 있었다. 강동현은 짜증스런 목소리로 경고하려고 했다.
“야, 너 한 번만 더….”
“이번엔 이대 앞이 어떨까요?”
“…….”
“아, 강남역이 더 낫나?”
한 번만 더 그런 어이없는 소리 하면 가만 안 두겠다는 말을 딱 의미하는 바 그대로 싸가지없게 말하려고 했던 강동현은 할 말을 잃고 황경호를 쳐다보았다. 제정신이냐는 얼굴을 배우답게 아주 잘 표현해서 쳐다보고 있었지만 황경호는 간지럽다는 듯이 살짝 표정을 바꿨다가 선심 쓴다는 듯이 활짝 웃으며 말했다.
“이번에도 선글라스랑 모자는 써도 돼요.”
니가 지금 제정신이냐, 장난치지 마라, 죽는다, 등등 할 수 있는 말은 많았지만 그건 이미 저번부터 몇 번이고 말했던 것이었다. 그래도 몇 주 만났다고 황경호가 얼마나 단호하고 상대의 사정을 봐주지 않는 성격인지(적어도 강동현한테는) 알아 아무리 조르고 애원해 봤자 절대 안 들어줄 거라는 강한 확신이 들었다.
왜냐면 황경호가 갑이었기 때문이다.
갑은 절대 상대의 사정 따위 봐주지 않는다.
“……야, 잠깐만… 한 번만 더 생각해보면 안 되냐…….”
아 이 미친놈. 강동현은 스스로에게 절망했다. 이걸 또 하려고 생각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것을 황경호도 깨달았는지 그는 활짝 웃었다. 순진무구한 미소였다.
“안 돼요.”
“…….”
강동현은 저 미소가 정말 싫어질 것 같았다.
*
“형, 나 아스피린 좀.”
“너 아까도 먹었잖아.”
“그냥 줘, 좀.”
강동현은 인상을 쓰고 미간을 꾹꾹 누르며 매니저에게 손을 내밀었다. 매니저는 그의 손에 아스피린 한 알을 얹어주었다. 강동현은 그걸 씹어 먹었다.
“일이 너무 많냐? 너 지금보다 일 많을 때도 스트레스 관리는 잘했잖아?”
“일 말고 다른 거야.”
“여자 친구랑 싸웠냐?”
그런 귀여운 거면 말도 안 하지. 강동현은 돌아서면 화가 나고 돌아서면 짜증이 나는 이 기분이 어디서 비롯된 것인지 너무나 확실하게 알고 있었다.
“아오….”
화병이란 게 한국 사람만 걸리는 병이라더니. 강동현이 딱 그 짝이었다. 억울하고 화가 나고 분이 안 풀려서 어쩔 줄을 모르겠는데 그것을 어떻게 해소해야 할지 답이 없으니 더 짜증이 나는 것이었다. 어디 가서 소리를 질러도 화가 안 풀리고 먼지 나게 베개를 치고 이불에 하이킥을 해도 이 울분이 풀리지가 않았다.
강동현은 서울 주요 관광요지에서 <나는 고자다!> 연작 시리즈를 찍고 있었다. 보통 무엇이든 여러 번 하면 내성이 생길 법도 한데 이것만큼은 도저히 티타늄 낯짝이라도 견디기가 힘들었다. 이대에 갔을 땐 정말 경찰에 잡혀가기라도 할까 봐 부리나케 도망왔다. 누가 알아보기라도 할까 봐 아예 붕대를 칭칭 감고 갔다.
정말 매니저의 말마따나 일로도 받은 적 없는 스트레스를 그 간호사 때문에 없던 편두통이 생길 정도로 받고 있었다.
‘그 간호사 자식을 어떻게 물 먹이지?’
이 생각으로 날밤을 지새운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강동현은 CF 촬영 중간에 밥을 먹고 잠시 쉬는 시간, 다시 지끈지끈 몰라오는 두통으로 아스피린을 씹으며 이를 갈았다. 그리고 폰을 꺼냈다. 주소록을 뒤지다 하나를 선택해서 통화버튼을 눌렀다.
『백만스물하나, 백만스물둘! 당신도 에너자이저가 될 수 있습니다! 압구정역 10번 출구 앞 이강유 비뇨기과! 여러분의 가정과 사랑 그리고 명예를 위하여, 이 나라의 2천 5백만 남성의 자신감을 위하여 오늘도 힘차게 도약하고 있습니다.』
“…….”
이 연결음조차도 짜증이 났다. 강동현은 허, 하고 기가 빨린 사람처럼 소파에 등에 머리를 기대고 기다렸다.
[네, 이강유 비뇨기과입니다.]
“예, 안녕하세요. 도은혁이라고 합니다.”
여자 간호사 하나가 밝은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강동현은 감고 있던 눈을 떴다.
[네, 도은혁 환자님. 문의하실 사항이 있으신가요?]
“아, 다름이 아니라 제 담당 간호사를 바꾸고 싶어서요.”
[도은혁 환자님 지금 담당 간호사가… 황경호 간호사네요. 혹시 저희 간호사가 환자분께 실수라도 했나요?]
“아, 그런 게 아닙니다. 너무 어려 보이셔서 상담할 때 조금 민망하더라구요. 그래서 다른 남자 간호사분으로 바꾸고 싶습니다.”
[아, 네. 그럼 김형세 간호사로 바꿔드리겠습니다.]
“네.”
[다음 예약일 때 뵙겠습니다.]
“네.”
강동현은 콧김을 훅 뿜으며 전화를 끊었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달력을 보았다. 오늘은 목요일.
“강동현 씨, 촬영 재개하겠습니다.”
“네!”
강동현은 씩씩하게 일터로 돌아갔다.
내일의 처절한 복수극을 기대하며.
*
다른 우울증 환자들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황경호는 다른 것에 집중하고 있을 때는 크게 자신에게 신경 쓰지 않으므로 그렇게 크게 우울감을 느끼거나 하진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직장에 있을 때나 퍼즐을 맞출 때나 할 때는 그렇게까지 우울한 자신에 대해 생각하지 않았다.
“경호야, 내 안약 어디 있냐?”
“그거 청소할 동안에 책장 위에 올려 뒀어요.”
“그래?”
“그리고 안약 얼마 안 남아서 새로 하나 사서 올려놨어요.”
“잘했다.”
이강유는 피곤한지 미간 사이를 주무르며 다시 진료실 안으로 들어갔다. 황경호는 트레이드마크인 순진무구한 미소로 환자들을 맞아 안내를 하였다.
“김철수 할아버지, 또 오셨네요. 어떠세요. 전보다 나아지셨어요?”
“응~ 좋아~ 우리 할마시가 완전 자지러지더라고~”
“오! 다행이시네요. 저도 간호사로서 무척이나 자랑스럽습니다. 김철수 할아버지 짱.”
“응~ 그래~ 우리 황 간도 고생했어~”
김철수 할아버지는 눈도 제대로 떠지지 않는지 지팡이를 짚고 부들부들 떨면서도 황경호의 엉덩이를 툭툭 쳤다.
“아, 도은혁 환자님 오셨네요. 오늘부터 제가 맡게 됐습니다. 이쪽으로 오세요.”
“아, 네.”
황경호는 김철수 할아버지와 이야기를 나누다가 고개를 들어 그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김형세가 선글라스, 마스크, 캡모자를 장착한 이상한 남자의 안내를 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갑자기 어제 전화를 해서 담당을 바꿨다는 이야기는 들었다. 저 인간 변덕을 자신이야 알 게 뭔가. 이대 앞에서 외친 것도 잘 찍어 놓았다. 이제 황경호를 상대하기 싫어진 것이라면 두 팔 벌려 대환영이다. 황경호도 저런 재수 없는 인간 근처에는 얼씬거리고 싶지도 않았다.
“황 간~ 언제 이 할아비랑~ 소주나 한 잔~ 먹지~ 우리 황 간~ 술 마실 줄~ 알지~”
“네. 할아버지. 할아버지가 불러주시면 언제든지 가야죠. 하하.”
“그래~ 할아비~ 무릎 아프네~ 소파에~ 앉아야겠어~”
“네. 저쪽으로 가세요.”
그렇게 강동현이 왔다는 것은 까마득히 잊고 정 간호사와 조 간호사를 대신해서 입원환자실을 한 바퀴 쭉 돌았다. 링겔을 갈고 빈 병을 들고 돌아가며 잠시 휴대폰을 보고 있는데 누군가 어깨를 탁 잡아서 뭐지, 하고 돌아보았다.
“야.”
“아, 네… 도은혁 환자님?”
황경호는 이 인간이 나한테 무슨 볼일이지… 라는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선글라스와 마스크와 캡모자로 얼굴이 가려져 있어 그가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는 전혀 알 수가 없었다. 강동현은 무작정 황경호의 손목을 잡고 끌고 갔다.
“어? 어…? 도은혁 환자님. 저 이거 갖다 놔야 하는데요? 이거 이렇게 놔두면 환자분들 다쳐요.”
그렇게 말하자 강동현이 휙 돌아 자기가 그 카트를 질질 끌고, 다른 손에는 황경호를 질질 끌고 어딘가로 가기 시작했다. 카트를 복도 구석에다 밀어 넣고, 강동현은 마치 미리 봐두기라도 했다는 것처럼 빈 상담실 하나로 황경호를 밀었다. 그리고 촥, 하고 복도 쪽 창문 블라인드를 내렸다. 방이 어두워졌다가 전등을 켜니 다시 밝아졌다.
“뭐, 뭐예요?”
황경호는 인상을 찌푸리며 강동현에게 잡혀서 아픈 손목을 탈탈 털었다.
“오늘 금요일이잖아.”
“네… 그렇죠?”
“뭘 그렇게 태평하게 말해. 할 건 해야지.”
안타깝게도, 이 남자는 그 쪽팔린 짓을 또 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짓을 그만둘 생각이 없었던 모양이었다. 황경호는 안타까움에 한숨을 쉬고 참 유감을 금치 못하겠다는 목소리로 성의 없이 대답했다.
“예… 뭐… 근데 왜 상담실에서 이래요?”
“여기도 상관없으니까.”
강동현은 성큼성큼 다가갔다. 강동현이 다가오는 만큼 당연히 황경호는 뒤로 물러났다. 그의 등이 책장에 부딪혔다. 강동현은 의아한 얼굴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황경호의 바지와 속옷을 쭉 내렸다. 황경호가 깜짝 놀라 강동현의 손을 잡았다.
“뭐, 뭐하는 짓이에요?”
“뭐하는 짓이긴, 하는 짓이지.”
그렇게 말하며 강동현이 황경호의 다리 사이로 쑥 손을 집어넣었다. 황경호는 기겁을 하며 다리를 오므리고 그의 손목을 잡고 낑낑거렸다.
“하긴 뭘 해요! 그냥 댁은 싸기만 하면 될 일이지 왜 나한테…!”
“그냥 싸는 게 아니라 니가 내가 요구하는 대로 해서 싸게 하는 거야. 나는 오늘 이렇게 하고 싶은 거고.”
정확히 뭘 어떻게 하고 싶어 하는지는 모르겠으나… 신변의 위협을 느낀 황경호는 마구 발버둥을 쳤다. 강동현은 황경호를 뒤집어 자신의 쪽으로 엉덩이가 향하게 하고 자신의 하체를 그의 엉덩이에 눌렸다. 황경호가 질색을 하며 소리를 질렀다.
“왜 이렇게 귀찮게 해요! 그냥 평소대로 해요!”
“싫어! 내 말대로 해!”
강동현의 손이 그대로 옷깃 속으로 파고들자 강동현의 예상보다도 황경호는 더욱 질겁을 해서 그를 흡족하게 했다. 황경호가 다급하게 외쳤다.
“거, 거부권!”
<2. 치료 시, 갑은 을의 요구사항을 1회 거부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진다.>
“…….”
“나와요!”
강동현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는 억울함이 가득 담긴 울분에 찬 목소리로 소리쳤다.
“잠깐! 그런 게 어디 있어!”
“어디 있긴요! 계약서에 있잖아요!”
“잠깐만… 아, 젠장….”
강동현은 당황했다. 황경호는 씩씩대면서 강동현을 떨쳐냈다. 황경호가 작정하고 자기를 물 먹이려고 한 강동현을 못 알아차릴 리가 있는가. 황경호는 이를 빡빡 갈았다.
“이 인간이 아주 작정을 하고 왔어… 씨….”
“아니… 잠깐만 이건 그런 게 아니라….”
“일단 이번 거 계산 끝내고 봅시다.”
황경호는 강동현의 벨트를 잡아 확 끌어당겼다. 덩치상 끌려올 레벨이 아닐 텐데 역시 남자의 약점은 거시기라고 훅 끌려왔다. 벨트를 풀고 그 안으로 손을 넣어 강동현의 것을 꽉 잡았다.
“야… 윽…! 잠깐만… 큭….”
황경호를 물 먹일 생각으로 흥분해 있던 강동현이라 금방 황경호의 손에 그곳도 흥분하고 말았다. 황경호도 오늘은 제대로 벗지 않았지만 두 눈에 이글이글 복수심이 타오르는 그의 얼굴을 직접 보면서 하는 것은 강동현에게 정말 자극적이었던 것 같다. 그 불편한 자세와 정상적일 땐 절대 느끼기 힘든 손짓으로 전과 비슷한 시간에 사정하고 말았던 것이다.
황경호는 책장을 손에 짚고 정신을 못 차리고 거친 숨만 헐떡이는 강동현에게 사각 티슈를 집어 던졌다. 황경호는 씩씩거리면서 말했다.
“그쪽 보니까 이번에 @@맨 나가죠?”
“뭐…? 그건 왜….”
강동현은 섹시한 얼굴로 쾌락의 잔향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채로 중얼거리듯 대답했다. 황경호는 강동현의 팬클럽의 우수회원이었으므로 다음 강동현의 스케줄도 훤히 꿰뚫고 있었다. 황경호는 이를 갈며 말했다.
“거기 퀴즈 파트에서 아는 것도 전부 다 틀려요.”
“뭐…?”
“알았죠? 문제 전부 다 틀리는 거예요. 하나라도 맞췄다간 봐봐.”
황경호가 본 강동현은 개념을 완전 밥 말아 처먹은 진상 중에서도 상진상이었다. 만만한 사람은 대놓고 막 대하면서 자기가 뭘 잘못했는지도 모르고! 배운 인간은 아니다. 게다가 그것을 대중 앞에서는 이미지로 잘 갈무리하고 있다는 것을, 배우 강동현을 덕질하는 황경호는 애저녁에 알아차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에 은근한 컴플렉스가 있다는 것도.
“잠깐. 그건 내 일이야. 그걸….”
“싫으면 마세요. 어차피 결정권은 그쪽한테 있잖아요. 관두고 싶으면 관두죠, 다.”
“…….”
강동현은 인상을 찌푸렸다가 한숨을 쉬며 사각 티슈를 주웠다. 묵직해진 안을 대충 정리하고 뭐라고 황경호를 설득해 볼 생각이었다. 하지만 황경호는 더 이상의 협상은 없다는 듯이 고집스러운 얼굴로 강동현을 마주 보고 있었다.
“야… 아까 내가 그런 건 사과할 테니까… 대충 다른 거로 타협 보자. 어? 이건 일이라니까. 내 일이라고. 너 진짜 사람 인생 하나 망칠 일 있냐?”
“뭐, 어때요. 이 정도는 홍대에서 고자라고 소리친 것보다는 낫지 않아요? 아니, 그냥 싫으면 하지 말라니까요. 참나.”
“야, 젠장. 넌 진짜 사람이 관대함이란 게 없냐? 난 환자라고.”
“그 말 그대로 돌려주고 싶네요. 개념 밥 말아먹은 이기적인 인간한테 그런 소리 듣고 싶진 않네요.”
황경호는 단단히 화가 난 것 같았다. 계약상 을이 갑에게 하극상을 일으키려고 한 것이었다. 황경호는 상담실의 문을 쾅 닫고 나가버렸다. 강동현은 우와, 씨… 하면서 발을 굴렀다.
*
『자, 강동현 씨. 스피드 퀴즈 나갑니다. 준비되셨죠? 시작!』
『자기가 잘못한 것은 생각하지 않고 남 잘못한 걸 뭐라고 하는 거 있잖아요. 그거… 속담! 그거 뭐죠?』
정말 잘생긴 미남이었다. 연예인들만 모여 있는 저곳에서도 정말 빛이 날 정도로, 심지어 아름다운 여배우보다도 더 눈을 사로잡는 남자 배우가 있었다. 대한민국 20대 남자 배우 중 최고의 비주얼이라는 말이 정말 무색할 정도로 아름다운 남자였다. 그런데 지금 그 남자는 완전 똥을 씹은 얼굴로 입을 다물고 있었다.
『개가 어쩌고 하는 거 있잖아요!』
『…….』
뭐 묻은 개가 뭐 묻은 개를 나무란다는 정말 보편적이고도 간단한 속담 앞에서 쩔쩔매고 있는 그 미남 배우를 보는 다른 출연자들의 눈은 진짜냐, 라는 믿을 수 없다는 기색을 담고 있었다.
『패쓰! 그럼… 영국에 유명한 총린데요! 철의 여인이라고 예전에….』
『…블레어?』
『총리가 여자였어요.』
『…….』
문제를 내고 있던 여자는 발을 동동 구르며 강동현에게 무언가를 계속 설명하려고 했지만 강동현은 계속 뜬금없는 대답을 계속하고 있었다.
“큭큭큭.”
황경호는 한쪽에는 실시간 TV, 한쪽에는 우리누리 팬클럽 카페 창을 띄워놓고 그것을 보면서 배를 잡고 웃고 있었다. 배가 아파서 제대로 웃을 수도 없었다. 킥킥거리면서 강동현의 팬클럽 페이지를 새로고침 했다. 때마침 새 게시물이 하나 올라왔다.
<동현 오빠… 왜 이러죠…>
클릭해보았다.
<우리 동현 오빠… 이렇게… 무ㅅ… (읍읍) 했다니… 오빠 이러지 말아요… 쉴드가 안 돼요.>
짧은 내용의 글이었지만 대다수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던 것인지 폭발적으로 댓글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황경호는 그것을 보면서 또 킬킬거리며 웃었다.
『줄무늬 막 있는 커다란 고양이과 동물이요! 우리나라엔 멸종됐어요. 그 호….』
『…호?』
이 유명한 미남 배우는 지금 전국을 상대로 개쪽을 팔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의 얼굴이 지금 울그락불그락 한 것이 화면으로도 상세히 보였다.
“뭐, 아무리 무식하다고 해도 호랑이를 모를 리는 없을 테니까… 이건 무식보다도 태도 논란이 나오겠는데?”
황경호는 강동현의 스피드퀴즈가 끝나고 출연자들이 그것을 어떻게든 수습해주는 것을 보면서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나저나 이걸 또 해요. 참나, 웃긴 놈이야. 그냥 하지 말고 나랑 인연 끊으면 깔끔하잖아. 왜 이렇게 질척거려, 인간이. 병신.’
어쨌든 기분은 몹시 후련해졌다.
‘이 멍청한 놈. 덤비지 말라고. 어디서 까불고 난리야. 그래 봤자 자기만 손해지. 아, 진짜 독하다, 독해. 나 같으면 그만두겠다. 여자 친구도 있잖아? 그냥 여자 친구의 정성과 사랑으로 치료하면 될 걸 가지고 왜 나한테 지랄이야? 진짜 내가 만만해서 그런가? 근데 그런 거면 도대체 저 지랄을 하면서까지 왜 그러는 거야. 사람을 괴롭히고 마음대로 하고 싶은 거면 진짜 돈을 내고 출장마사지라도 부르든가. …진짜 다음엔 출장마사지라도 부르라고 해야겠네.’
일단은 재밌으니까 얼마간 한다 하더라도. 이제 손으로 강동현의 거시기를 잡아 사정하게 하는 정도야, 사실 황경호의 직업을 생각해보자면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어차피 남자 거시기야 질릴 정도로 봐왔고 만지기도 많이 만져보았다. 그의 몸만 그렇게 함부로 건드리지 않는다면 황경호야 어려울 것이 없는 계약이었다. 덤비는 강동현이 바보인 것이다.
‘아, 끝났다. 뭐 먹지?’
황경호는 프로그램이 끝나자 침대에서 일어나 기지개를 켰다. 어깨가 살짝 무거운 느낌에 어깨를 툭툭 치고 냉장고를 열었다. 대충 라면이나 먹자 싶어서 김치만 꺼내고 물을 끓이기 시작했다.
주말이고 날씨도 좋았다. 밖에 나가고 싶기도 했지만 나가고 싶지 않기도 했다. 만날 사람도 없었고 만날 사람이 있어도 만나기 싫었다. 외롭지만 외롭지 않기도 했다. 아니, 외로워도 사람을 만나는 것이 귀찮았다.
항상 같이하는 이 공허함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는 여전히 알 수가 없었다. 이렇게 한바탕 웃고 나서도 결국 돌아서면 이렇게 한심함이 덮쳐왔다. 저게 뭐라고 내가 이렇게 바보 같이 낄낄거리고 있었던 것인가, 생각하면 우습고 한심하기만 했기 때문이었다.
정말 별것도 아닌 남자였다. 그다지 자신과 상관이 있는 사람도 아니었다. 계약 때문에 재밌었던 일이나 기분 나쁜 일이나 비슷하게 많았다. 그만두고 싶었다. 하지만 저 인간이 그만 못 두게 하니까 당최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인터넷이나 그런데 강동현이 이런저런 새끼라고 까발릴 수도 없는 일 아닌가. 사람들이 믿을지도 모르겠고 믿어준다 하더라도 황경호 본인의 신상이 털릴 일은 하고 싶지 않았다. 강동현은 그것을 알고 황경호에게 더 심하게 구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러면 화가 나서 황경호도 계약 사항을 이용한다. 그러니까 그 계약이 어떻게든 계속 이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아, 차라리 출근이라도 하고 싶다. 심심해….’
황경호는 무료한 기분으로 TV를 틀고 멍청하게 보고 있었다.
*
“사장님~ 동현이 화병이라는데요… 네. 네. 지금 병원 데려왔어요. 네. 저번에 사고 난 거 때문은 아니래요. 예. 예.”
“…….”
강동현은 지금 한창 활동 시즌이었다. 작년의 드라마로 급격한 인기를 얻고 이번에 찍은 드라마도 주가를 한창 올렸다. 공백기를 가지고 쉴 수도 있었지만, 지금까지 해온 것들에 대한 열매를 좀 더 맛보고 싶어 사실 무리하게 스케줄을 강행하고 있었다.
드라마 한 작품이 진행되고 있는 상황에서 다섯 개가 넘는 CF를 찍었고 그의 얼굴을 걸고 나오는 옷 브랜드도 있었다. 음료 광고와 제과 광고를 찍었고 곧 화장품 CF도 찍을 것이다. 잡지 화보 촬영도 빈번하게 있었고 인터뷰도 여럿에, 준비하고 있는 영화도 있었다. 다다음 주엔 사인회도 대대적으로 있었다.
그런데 지금 인터넷에서는 <강동현 과로로 쓰러져>, <무리한 스케줄로 인한 과로. 톱스타들의 사건사고, 강동현> 등등의 기사가 우르르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그런데 정작 병원에 와서 진단을 받아보니 과로도 아니고, 무슨 말도 안 되게 화병이라고 하지 않는가.
매니저는 소속사 사장과 전화를 다 끝내고 링겔을 꽂고 있는 강동현에게 다가갔다.
“너 뭐… 그렇게 스트레스 받았냐? 왜 그래? 형한테는 말해라.”
매니저가 걱정스런 얼굴로 말했다. 강동현은 그저 인상을 찌푸린 채로 눈을 감고 있었다. 매니저 형은 한숨을 푹 쉬고 말을 이었다.
“너… 물론 남들에 비하면 무명생활 짧기는 했지만, 고등학교 때부터 지금까지 계속 고생한 거 형이 안다. 넌 일단 얼굴이 확 튀는 데다가 연기에 욕심이 많아서 조연 자리 맡기도 힘들었었고….”
매니저는 주절주절 얘기를 꺼냈다.
“그래도 형은 니가 잘 될 거 알고 있었어. 넌 일단… 안 되기가 더 힘든 놈이야, 쨔샤. 작년에 우리가 기대했던 것보다도 너무 잘 되니까… 싫다는 건 아니지만 너도 중압감 컸던 거 형이 이해한다. 그렇게 한 번 반짝하고 져버리는 애들이 얼마나 많냐… 근데 넌 그런 건 죽어도 싫은 놈이니까… 작품 하나를 골라도 신중히 하고, 지금까지 한 번 쉬지도 않고 온 거 내가 봐도 진짜 대단하다.”
매니저 김석현이 봤을 때 강동현은 동생이었지만 여러 면에서 배울 게 참 많은 동생이었다. 사생활 관리 철저하고 동료나 선배나 후배 할 것 없이 싹싹하고 연기에 대한 열정도 대단하고… 젊은 남자애들 중에 이렇게 재능이 있으면 싸이코 같은 애들도 많은데 성격도 사교적이고 좋다.
힘들 거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회사 입장에선 이렇게 인기가 활활 타오를 때 본전을 빼겠다는 생각을 가지지 않기가 더 힘들었다. 물 들어올 때 노 젓는다고… 혹사당하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걱정하지 않아도 잘 관리를 하니까 쉽게 생각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올해 연말까지만 힘내자. 그러면 내가 사장님한테 목에 칼이 들어와도 쉬자고 말할게.”
“…형, 고마워. 난 괜찮아. 형이 더 고생했지, 뭐. 오늘은 스케줄 다 날아갔으니까 형도 그만 들어가서 쉬어. 난 내가 알아서 할게.”
“야….”
“형 딸내미 형 얼굴 까먹겠다. 들어가서 쉬어.”
“그래… 알았다, 동현아. 너도 몸 잘 추슬러라.”
매니저가 쭈뼛쭈뼛 나가자 강동현이 눈을 떠서 천장을 노려보며 이를 갈았다.
‘그 간호사… 내가 가만두나 봐라.’
*
“오늘 오겠어? 보니까 과로로 쓰러졌다고 하던데.”
고양이처럼 치켜 올라간 눈꼬리, 새카만 머리카락에 요염한 분위기. 앙칼진 고양이 같은 도도한 매력이 있는 이 백의의 천사는 정기연 간호사다. 정 간호사는 차트를 카운터에 내려놓으며 황경호에게 말을 걸었다.
“모르지. 이제 내 담당 아니야,”
“어? 보니까 다시 오빠로 바뀌었던데? 도대체 뭐하는 거야, 이 남자. 몇 번을 바꾸는 거야. 그것도 남자만.”
정기연은 이해가 안 간다는 얼굴로 그렇게 말했다. 황경호가 픽 웃었다.
“왜. 너도 강동현 팬이야?”
“팬까지는 아니더라도 궁금하잖아. 이런 곳까지 오는 젊고 잘생긴 남자 연예인이라니. 킥킥. 여자 친구 있는 건가?”
“있겠지. 다들 없는 척해도 다 있다더라,”
“하긴.”
정기연은 흐음, 하면서 새침한 얼굴로 돌아섰다. 그때 자동문이 드르륵 열리며 키가 큰 장신의 남자가 나타났다. 선글라스에 깊게 눌러 쓴 모자, 마스크. 양반은 못될 인간이다.
“어, 진짜 왔네.”
황경호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도은혁 환자님. 일찍 오셨네요.”
황경호는 여느 때처럼 때 묻지 않고 순수한, 청소년 계도 포스터에 들어갈 정도로 환한 미소를 지으며 그렇게 단골 환자를 맞이했다. 도은혁은 인상을 구기더니(선글라스와 마스크에 가려 잘 보이지 않았지만) 그런 황경호의 손목을 우악스럽게 콱 잡아당겼다.
“도은혁 환자님?”
“따라와.”
“저기 아직 진료 시간 기다리셔야…!”
말도 채 못 끝내고 질질 끌려갔다. 이제 정말 단골 됐다 이건지. 병원 구조를 훤히 꿰뚫고 있는 강동현은 예의 안 쓰는 치료실까지 황경호를 질질 끌고 갔다. 황경호는 짜증이 났다.
“도대체 뭐하는 짓이에요? 진짜 사람이 상식이란 것 좀 탑재해주시면 안 될까요? 남을 이렇게 함부로 끌고 다니면 안 된다고 못 배웠어요?”
황경호는 얼얼한 팔목을 연신 주무르며 강동현을 노려보았다. 강동현은 모자와 선글라스, 마스크를 벗어버렸다. 좀 상기된 얼굴로 말했다.
“벗어.”
“네?”
“어차피 이놈의 병원 드럽게 대기시간 길 거 아냐. 그 전에 너랑 나랑은 볼일 끝내자고.”
“그렇다고 지금 다짜고짜 벗으라고 하면… 우앗…! 잠깐만요…!”
강동현이 거의 황경호의 멱살을 잡아 당겨 옷을 찢어 버릴 듯하자 황경호는 깜짝 놀라서 그의 팔을 붙잡았다. 이로 보나 모로 보나 이 남자는 지금 굉장히 화가 난 것처럼 보였다. 하긴… 근래 시켰던 것들이 황경호야 웃겼지만 당사자야 얼마나 빡쳤겠는가. 황경호는 마치 다른 진상 환자를 달래듯이 그를 달랬다.
“잠깐만요. 안 도망가요. 천천히 하라구요.”
황경호는 가까스로 멱살 잡힌 것을 빼내고 옷을 추슬렀지만, 강동현은 이를 갈면서 그의 허리를 끌어당겨 거의 안았다. 그리고 서로의 성기가 옷 위로 맞닿게 하였다. 황경호는 기겁을 하며 펄쩍 뛰었다.
“뭐뭐뭐… 뭐하는 짓이에요? 기분 나쁘게.”
“오늘은 니 거랑 내 거 비벼서 가고 싶은데? 그렇게 해.”
“네에?!?”
황경호는 입을 딱 벌리며 저도 모르게 삑사리를 내며 되물었다.
“진심이에요? 미쳤어요? 도대체 왜 그러고 싶은 건데요? 기분 안 나빠요? 금방 저 소름 돋았어요!”
황경호는 진짜 닭살이 돋은 자신의 팔을 보며 그렇게 소리쳤다. 강동현을 밀어내려고 필사적이었지만 그는 그럴수록 더욱 하체를 비벼왔다.
“뭘 어떻게 하든 그건 내 마음이야. 넌 내 말대로만 하면 된다고.”
“이 인간이 진짜 미쳤나 봐!”
힘으론 도저히 되지 않아서 황경호는 빽 소리를 질렀다.
“거부권!”
황경호는 도대체 이 멍청한 인간이 이거를 까먹고 있었던 거냐는 식으로 그렇게 당당하게 소리쳤다. 강동현의 눈에 이채가 돌았다.
“그 거부권 받고, 수정 사안으로 스마타 해.”
“……네?”
“엉덩이 까고 내 위에 앉아. 내 얼굴 보면서. 그리고 니 엉덩이로 비벼서 사정하게 해.”
“제가 금방 거부권 썼잖아요. 더 이상한 걸 시키는 게 어디 있어요?”
“거부권을 쓰면 수정된 요구사항은 반드시 들으라고 명시되어 있고 수정 사항이 꼭 이전보다 수위가 낮아야 한다는 조건은 없어.”
“네? 뭔 소리예요. 거부권 썼으면 끝난 거지 또 그런 이상한….”
황경호가 질색을 하며 그렇게 말하자 강동현이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거부권은 한 번만 쓸 수 있어. 넌 더 이상 내 요구에 거부하지 못해. 네가 거부권을 쓰면 그 뒤에 내가 요구하는 건 무조건 들어줘야 해!”
강동현은 그렇게 말하며 미리 챙겨온 계약서를 황경호의 코앞에 들이밀었다. 황경호는 그것을 붙잡고 몇 번이나 읽다가 빼앗아 찢어버리려고 했다. 강동현은 키 차이를 이용해 휙 하고 그것을 들어 올렸다.
“이게 날 완전 호구로 보더니만 꼴 좋다, 흥.”
“이건… 사기야. 말도 안 돼.”
원래 계약 사항은 그러했다. 황경호가 마음에 안 드는 강동현의 요구는 1회에 한해서 거부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거부 후에 강동현이 요구하는 것은 반드시 들어줘야 한다는 조항이 있었다. 황경호는 거부를 하게 된다면 당연히 그것보다 수위가 낮은 행위를 하는 것이라고, 상식적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실제로 성문으로 명시되어 있는 사안이 아니라서 어떻게 할 수가 없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황경호가 충격을 먹어 눈을 크게 뜨고 강동현이 든 계약서만 올려다보고 있었다. 강동현은 의기양양한 목소리로 말했다.
“뭐해? 빨리 엉덩이 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