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부 1권 - 1화 (1/47)

1. 내 인생에 이렇게 짜증 나는 새끼는 니가 처음이다.

세상은 현기증이 느껴질 정도로 빠르게 돌아간다. 광장을 걸어 다니는 수많은 사람들. 가만히 혼자 어디선가 들려오는 노랫소리에 집중하면, 풍경은 영화의 한 장면처럼 의미 있게 다가왔다.

“어어, 저거 뭐야? 커트커트!!”

감독은 안경을 추켜올렸다. 카메라에 잡히는 이물질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소리를 질렀다.

“거기 뭡니까? 지금 촬영하고 있는 거 안 보여요?!”

고작해야 갓 20살이 됐을까 싶은 앳된 얼굴의 청년이었다. 조연출이 뭐라고 해도 못 알아듣는 것 같았다.

“아, 진짜 조금만 비켜주십시다. 거기 학생…! 아, 진짜 금방 좋았는데.”

결국 연기자들도 극에서 빠져나와야 했다. 모두가 그쪽을 바라보았다. 특히나 주연 남자 배우는 감정 잡던 걸 완전히 망친 모양인지 표정이 안 좋았다. 그는 앞의 여배우가 걱정하는 기색을 보이니 표정을 풀었다. 어린 조연출들이 다가가서 양해를 구하고 있었다.

“저기… 그러니까 제가….”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그제야 정신을 차렸는지 방해자는 주변을 돌아보고 얼른 자리를 비켰다. 연기자들에게 달려드는 것도 아니라 팬은 아닌 것 같았다. 금방까지 멍청하게 다닌 것이 거짓말이었다는 듯이 그는 앳된 얼굴에 맞는 붙임성 좋은 미소를 띠면서 고개를 꾸벅 숙였다.

“아,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계속하세요. 죄송합니다.”

“아, 네. 이쪽으로 그럼 좀….”

“예, 죄송합니다.”

감독의 매서운 눈길을 견디고 있던 조연출은 그제야 그를 카메라 앵글 밖으로 몰아낼 수 있었다. 보니까 자신과 그다지 나이 차이도 나지 않을 것 같은 얼굴이었다. 아니, 고등학생인가?

“아니, 갑자기 왜 그러셨던 겁니까? 촬영하고 있는 거 버젓이 보이는데.”

조연출은 툴툴거리면서 무전기로 상황을 알렸다.

“아, 제가 좀… 멍 때리고 다닐 때가 많아요. 주말은 항상 그렇네요.”

“직장인이신가 봐요. 어려 보이는데.”

“아, 네. 하하. 그렇죠. 직장인들이 항상 주말엔 멍하죠. 지금 뭐 찍는 거예요?”

그가 붙임성 있게 웃으며 물까지 건네니 조연출도 어쩐지 마음이 풀어져서 곧이곧대로 대답을 해주었다.

“아, 다음 시즌 드라마 신작입니다. 요즘에 한창 광고 나오는 거 있죠? 강동현 나오는 거 있잖아요”

“강동현이요?”

“요새 강동현 모르는 사람도 있어요? 왜 OR 맥주 선전하는 애 있잖아요.”

“아아아, 이신혜 나온 드라마 남주인공?”

“그래요. 걔. 저기 보이시죠?”

훤칠한 키에, 무엇보다도 근사한 분위기가 시선을 사로잡았다. 새파랗게 젊은 배우임에도 그럴싸한 연기와 표정, 낮고 감미로운 목소리, 남자다우면서도 가끔 소년다운 생기도 가진 연기자. 몇 번인가 광고에서 보았다.

“저도 이 바닥 몇 년이지만 강동현은 진짜 볼 때마다 멋있다는 생각만 들더라구요.”

“그러게요. 화면보다 실물이 백배는 낫네. TV 볼 때도 잘생겼다고 생각은 했는데.”

청년이 맞장구를 쳐주었다.

“금수저니 흙수저니 하는 것보다 잘생기게 태어난 게 제일인 거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고.”

“하하. 연예계에선 확실히 그렇겠어요.”

“여자 연예인들이 더 그렇긴 하죠. 그래서 열심히 가꾼 애들이 많이 나오니까 포스트 이영애니 포스트 김태희니 하는 애들도 제법 나왔던 거 같은데 남자 연예인들은 뭐… 포스트 장동건이나 포스트 원빈 같은 거 안 나오잖아요. 특히나 요즘 남자 연예인들 보면 여리여리한 아이돌 아니면 개성파들이 많으니까 ‘진짜 잘생겼다!’ 싶은 남자 배우는 없는 것 같고. 그러니까 강동현이 독보적이지 않겠어요?”

“그렇군요….”

조연출은 살짝 말이 많았다. 강동현에 대한 평에 질투가 섞여 보인다. 뭐, 내 일도 아니고. 황경호는 지루해졌다. 이 땡볕에 뭐하는 짓인지.

“어쨌든 시기를 잘 탄 거죠. 시기를.”

“그렇군요. 아, 어쨌든 더운데 계속 수고하세요. 드라마 나오면 꼭 볼게요.”

잠시 촬영이 중단된 와중에 스타일리스트와 매니저가 배우에게 달려가 화장을 고쳐주고 햇빛을 가려주었다. 저 정도면 시샘할 만하긴 하다. 누구는 편하게 보호를 받고, 누구는 그를 보호하기 위해 땡볕을 구른다. 본인도 덥지만 남부터 먼저 부채질을 해줘야 한다. 그런 면에서 저런 배우들은 그런 고생도 하지 않으며 가장 돈을 많이 버는 것 같이 보이니 말이다.

‘무슨 상관. 내 일도 아니고.’

역시 집을 나오는 것이 아니었다고 생각을 하며 황경호는 어디론가 발걸음을 옮겼다.

*

황경호는 올해로 26살의 여름을 보내고 있었다. 애인? 그런 건 안 키운다. 친구? 진짜 친구라고 할 만한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을까. 취미? 만화책 보기 정도. 인생의 목표? 대충 굶어 죽지 않을 정도면, 뭐.

그래서 그럴까?

황경호는 부쩍 인생이 지루하다고 느꼈다.

그저 살고 있었다. 평생을 이렇게 살아왔으니 익숙해질 만도 한데. 편안함을 느끼기보단 정체되어 있는 자신을 깨달을 때마다 섬뜩했다. 이대로 살고 이대로 죽는 걸까.

학창 시절까지만 해도 대학 같은 가시적인 목표가 있었으니 괜찮았다. 대학 1, 2학년 때까지만 해도 노는 재미가 있어서 그럭저럭 살았다. 군대도 시키는 대로만 하면 되니까 아무런 생각 없이 잘 지냈다. 근데 그 이후부터 지금까진 뭘 하고 살았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을 정도였다.

인간관계도 어느 정도 요령이 있어 나쁘지 않게 유지할 수 있었다. 뭘 하든 뒤쳐지지는 않아서 굶어 죽을 일은 없을 것 같았다. 남들 취업난에 허덕거릴 때(살짝 사회적으로 거부감은 있지만) 엄청 잘나가는 의원에 취직해 좋은 월급 받고 잘 먹고 살고 있었다. 딱히 불만은 없었다. 그래서 그런지 딱히 좋지도 않았다.

집에 돌아온 황경호는 기지개를 켰다. 집은 26살의 독신이 살기에 딱 적당한 크기의 원룸으로 옷장은 붙박이에 식탁도 부엌과 일체형이다. 욕실도 작지만 깨끗했다. 선반엔 만화책이 잔뜩 있었다. 그런데도 왠지 썰렁한 느낌이 드는 방이었다.

황경호는 괜히 씻고 나갔다고 생각을 하면서 침대에 털썩 누웠다가 옆으로 데구르르 굴러떨어졌다. 그 자세 그대로 가만히 눈앞의 잡동사니들을 보았다. 5천 피스 짜리 퍼즐이 있었다. 황경호는 그대로 엎드려 퍼즐을 하나하나 맞추기 시작했다.

“좀 심각한 거 같긴 한데….”

황경호는 중얼거렸다. 공휴일 포함 금토일월을 내리 방에서 잠만 자고 문득 출근하는 날 새벽 5시에 눈을 떴을 때 황경호는 처음으로 그냥 죽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게 말로만 듣던 우울증인 걸까?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기에는 그다지 인생에 불만은 없었다. 이 정도면 누가 뭐라고 하지 않을 정도로 해왔고, 돈도 벌고 있고 사회생활도 그럭저럭하고… 정말 그냥 그럭저럭 살아서일까? 그럭저럭 죽어도 별문제가 없을 것 같다. 사는 의미를 잘 모르겠다. 그냥 살아 있어서 사는 것만 같았고 그것은 꽤나 허무한 느낌을 주었다.

황경호는 자신이 활달하고 긍정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런 자신이 못내 낯설고 실망스러웠다. 그래도 남들만큼은 살 줄 알았는데 돌아보니 무엇 하나도 남기지 못한 것 같았다. 남들처럼 연애를 해본 것도 아니고 남들만큼 놀아본 것도 아니고 뭔가 하고 싶은 것도 없고…. 그냥 되는대로 살아 인생에 심각한 고민을 해본 적도 없었다. 심각하게 기뻤던 적도 없었다.

그저 그런 인생.

퍼즐의 4분의 1을 채우기까지 약 3시간 정도 걸린 것 같았다. 배가 고프지 않았지만 이런 식이면 또 며칠이고 먹지 않을 것 같아 더듬더듬 핸드폰을 찾았다.

‘오늘은 백반이나 먹어볼까?’

전화를 걸어서 백반을 하나 시키고 TV를 켰다. 케이블을 이것저것 돌리다 보니 인기가 있었던 예전 드라마들을 방영해주고 있는 것이 보였다. 평소 같으면 그저 의미 없이 지나갔을 채널을 잡고 오늘 실제로 처음 보았던 배우를 유심히 쳐다보았다. 그다지 연예인을 좋아하고 그런 건 아니지만…. 황경호는 침대에 옆으로 누워 볼륨을 높였다.

『나도 안다. 그 앨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겠지. 내가 그 아이를 죽이지 못한다는 걸 깨달았을 때… 이미 결정된 거야.』

“오….”

오늘 낮에 본 그는 그 나이에 맞는 젊음이 생생한 현대의 20대를 연기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나오는 드라마에선 분명 지금보다 나이가 어렸을 텐데도 불구하고 좀 더 철이 든 남성의 느낌이 물씬 풍겼다. 낮고 멋있는 목소리가 힘을 발휘했다. 동요하지 않은 얼굴로 자연스럽게 말하는 것 같으면서도 단어 하나하나에 강약이 들어가 어쩐지 청자가 더 집중하게 된다.

『누군가 전해줬으면 좋겠구나… 다 잊고 행복하게 살라고.』

연기를 꽤 잘하는구나. 드라마 속의 기라성 같은 배우들 가운데서도 눈에 확 들어왔다. 그의 훤칠한 외모와 더불어 굉장한 인상을 주었다. 이래서 주연급 배우들이 따로 있는 건가.

황경호는 그 자리에서 재방송을 해주는 걸 다 보고 말았다. 노트북으로 못 본 부분까지 모조리 다 보았다. 스토리나 내용보다도 강동현의 연기에 집중해서 보았다. 여자들이 좋아할 것만 같은 그런 연애 이야기인데 감정 전달이 훌륭해서 극 중 남자 주인공의 감정이 여과 없이 와닿았다.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모를 집중력이 있었다. 그의 존재감이 너무나 눈부셨다. 다 보고 나선 자연스럽게 검색엔진에 그의 이름을 쳐보게 되었다.

이름: 강동현

나이: 26세 (만 25세)

학력: 중도대 연극영화과 재학 중

데뷔: 영화 <진주> 차기흔 아역

수상: 20XX년 SBN 연기대상 <신인상> 수상

‘동갑이네….’

그대로 황경호는 강동현의 데뷔작부터 지금까지 나온 작품들을 전부 찾아보기 시작했다. 다행히 배우가 젊고 아직 작품이 많지 않아 이틀 밤 새운 걸로 일단 주요 작품들은 다 볼 수 있었다. 그리고 다음 날 출근을 했더니 아무리 쇠도 씹어먹는 청춘이라고 하지만 피곤해서 하품이 마구 나왔다.

“하암.”

“환자분들 오셨을 때 하품하지 마라, 경호야.”

“예이, 쌤.”

황경호는 그러면서 몰래 한 번 더 하품을 하였다. 그러다 카운터에 기대어 물끄러미 자신의 고용주를 쳐다보았다. 하얀 가운에 단정하게 머리를 넘기고 환자들의 차트를 보고 있는 남자는 올해 34살의 젊은 의사 선생님으로, 이쪽 진료과목에서는 세계적으로 독보적인 실력을 가진 의사였다. 경영철학이나 사람을 보는 눈도 좋다. 자세히는 모르지만 집안도 좋고 여복도 있다. 사교성도 좋고 매너도, 사람도 좋다. 성실하고 삶의 목표도 있고 책임감도 있는 그런 사람이었다. 배려심도 깊다. 그리고….

‘우리 쌤은 칭찬하라면 한도 끝도 없지.’

진료 시간에는 잔소리도 많고 깐깐하게 굴 때도 있지만 가끔은 친한 형처럼 대해 주기도 했다. 말은 안 해도 황경호는 이강유를 꽤 존경하고 있었다. 사람으로도, 남자로도 말이다. 롤모델이랄까. 저런 사람이 된다면 이렇게 허무해지지도 않을 텐데, 라는 생각이 들면 부럽기도 하고 그랬다.

“사람이 살다 보면 한 번이나 두 번은 안 될 때도 있는 거야… 안 그래? 그런 건 좀 이해를 해줘도 좋잖아? 한 번이나 두 번 정돈데 말이야.”

‘세 번이나 네 번일 수도 있고, 다섯 번이나 여섯 번이어서 그런 걸 수도 있죠.’

황경호의 주 업무 중 하나는 상담이었다. 병원을 내원하는 환자들 중 십중팔구가 발기부전 환자라면 믿겠는가? 오늘도 여지없이 통계적 수치를 채워주는 환자였다. 황경호는 속마음과는 다르게 이해심이 철철 넘치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암, 그럼요. 암요.”

“세상 살면 얼마나 힘든 일이 많은데 고작 이 정도 가지고 말이지. 내가 을~마나 괜찮은 남잔데 말이야. 고작 그거 가지고 말이야, 어? 고작 그거 가지고 헤어지자 말자. 요즘 여자들은 말이야~”

여자가 그걸 하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그 여자가 아무리 마음이 고운 여자라도 뒤도 안 돌아볼 것 같은 분이 말이다. 자기객관화가 되지 않는다는 건 이렇게나 불행하다.

“걱정하지 마세요. 저희 이강유 비뇨기과는 환자분과 같은 진정한 남성을 더욱더 강한 남성으로 진화시켜주는 곳이죠. 사람이 살다 보면 한 번이나 두 번쯤은 있을 수도 있는 일이지만 이경태 환자님은 그냥 커피가 아니라 TOP 잖아요. 앞으로 더 잘 되시려고 이러는 거라고 생각하세요.”

“아, 정말… 가끔은 황 간이 여자였으면, 싶다니까. 흑흑. 우리 황 간~”

“에이, 괜찮다니까요. 정말.”

오십 대 넘은 아버지뻘의 아저씨들의 이런 모습을 보면 안타깝기도 하고 자신도 나중에 이런 사람이 되는 건가 싶기도 해서 기분이 싱숭생숭했다. 보통은 직업의식으로 그냥 듣고 넘어가는 데도 말이다. 요즘 꽤나 센치해져서 그런 것일까? 나이가 들어 자연스럽게 신체적 결함이 생기는 일로 사람들은 이렇게나 기가 죽어버린다. 평소처럼 눈이 촉촉해진 아저씨를 부둥켜안고 부둥부둥 위로를 하다가 자동문을 열고 나타난 새 환자를 보고 인사를 했다.

“아, 유태범 씨 오셨어요?”

오늘 카운터 담당은 황경호였기 때문에 일단 아저씨를 떼어놓고 일어났다. 조금 긴장하여 쭈삣쭈삣 들어오는 단골 환자, 유태범을 보며 환하게 웃었다.

“어때요? 치료 성과는 좀 있으세요?”

“네? 아… 네, 네…….”

그는 여전히 뭐가 그렇게 부끄러운지 안절부절못하고 서있었다. 이제는 그런 그가 공기처럼 익숙해서 황경호는 그러려니, 자연스럽게 그를 안내했다.

“우리 쌤이 그래도 이 바닥에선 완~전 알아주시니까요. 힘내세요! 우린 할 수 있어요! 파이팅!”

“파, 파이팅….”

좀 과장되게 호들갑을 떨어주니 좀 긴장을 풀었는지 유태범이 슬금슬금 진료실로 들어갔다.

‘어린데 안 됐단 말이지.’

뭐, 저런 어린놈들이 생각보다 한두 명은 아니다만. 황경호가 요새 환자들의 섬세한 정신을 컨트롤하는데 두각을 보이고 있어서 카운터나 입원 환자들 쪽으로 빠질 때가 많았다. 인기 많은 여자간호사들도 좋기는 하지만 가끔 남성 환자들의 자격지심을 불러오기도 했고, 남성호르몬을 훅훅 내뿜는 김형세 간호사 같은 육식계 남성들은 열등감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앳된 얼굴에 전 아무것도 몰라요~ 라는 순진한 분위기의 황경호가 꽤나 먹혔다. 게다가 황경호는 사교성도 좋고 어른들 비위도 잘 맞추니 말이다.

날씨가 좋았다. 벌써 금요일이다. 내일은 출근을 하지 않는 날이었고 그럼 이틀을 꼬박 집에서 보낸다. 황경호는 강동현 덕분에 내일은 뭘 해야 하나, 라는 고민을 하지 않아도 되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아, 황 간 이것 좀.”

“네!”

그래도 일 쪽에서 인정은 받는다. 아마 하는 일이라도 없었더라면 정말 그날 아침에 아무렇지도 않게 죽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정말 인생이 무료하기 짝이 없어서…. 황경호는 요새 그런 자신이 조금 무서웠다.

드르르륵.

“네, 어서 오세요! 처음 오시는 분이신가요?”

자동문이 열리는 소리를 듣고 황경호는 자연스럽게 영업용 미소를 지으며 인사했다. 원장인 이강유를 필두로 이강유 비뇨기과의 모든 직원들은 아주 잘 웃었다. 뛰어난 의사이자 경영인인 이강유의 투철한 직원교육의 성과였다. 예전에도 필요할 때마다 잘 웃었던 황경호였지만 이제는 언제 어디서든, 어떤 상황에서도 웃을 수 있었다.

푹 눌러쓴 모자와 선글라스, 마스크를 장착한 큰 키의 남자가 뚜벅뚜벅 들어왔다. 아무리 비뇨기과라지만 자의식과잉이다…. 물론 그런 남자들은 대한민국에 아주 많다. 황경호는 전혀 이상한 걸 보지 못한 사람처럼 평범하게 웃었다. 그는 몇 번 목을 가다듬다가 어렵사리 말을 꺼냈다.

“아… 흠흠… 예약했는데요.”

“아, 예. 예약을….”

순간 황경호는 깜짝 놀랐다. 고개를 들어 남자의 얼굴을 자세히 올려다보았다. 남자는 선글라스 안으로 살짝 미간을 찌푸리는 것이 보였다. 그는 고개를 돌리며 황경호의 시선을 피했다.

“아, 죄송합니다. 성함이….”

세상에…. 강동현이 여긴 왜…. 근래 강동현 작품들을 내내 파고 있는 황경호라 똑똑히 그 목소리를 알아들을 수 있었다. 공원에서의 그날은 아예 알아보지도 못했던 배우를 이제는 목소리만으로도 알아차렸다

“도은혁입니다.”

어떡하냐… 진짜 맞는 것 같은데… 어디선가 그의 본명이 도은혁이라는 것을 들은 것도 같았다. 우와, 그렇게 뭐 부족할 것 없을 것 같은 놈이 여기를…? 어떡하냐… 뭐지? 조루? 조룬가? 역시 그건가?!

황경호는 새삼 가슴을 두근두근하며 이것저것 상상을 했다.

‘역시 조루?!!’

처음으로 내원한 환자라 황경호는 새 차트를 꺼내 들고 그 위에 환자의 정보를 필기하며 상담실로 안내했다.

“네, 상담실은 이쪽입니다.”

황경호는 깔끔한 상담실의 의자에 강동현을 앉히고 자신도 그 반대편에 앉았다.

“지금 이강유 선생님께서는 수술을 하고 계셔서 20분 정도 기다리셔야 합니다.”

“아니… 예약을 하고 왔는데도 기다려야 합니까?”

“아, 죄송합니다. 원래 수술이란 게 일정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서요. 그리고 그 전에 무엇이 문제인지 상담을 해야 빨리 진료를 볼 수 있기 때문에 우선 제게 문제 사항을 말씀해주시면 됩니다.”

강동현은 꽤나 불만이 많아 보였다. 강동현은 그냥 입을 다물고 있다가 못마땅하다는 듯이 말했다.

“그러면 선생님께만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프라이버시를 중요시하는 사람이라.”

“그럼 진료가 늦어지게 될 텐데요.”

비뇨기과에 이런 남자들이 어디 한둘이겠는가. 황경호는 프로의식을 발휘해서 살살 웃으며 말을 이었다. 너의 문제가 무엇인지 확실히 밝혀라!

“그러지 마시고 무슨 문제인지 간단히 말씀만 하시면 됩니다. 저희는 환자의 프라이버시를 지키는 데에는 확실합니다. 그리고 실력 또한 확실하죠. 도은혁 씨도 입소문 듣고 오신 거겠죠?”

황경호는 그대로 포스터에 박아 넣어도 놀랍지 않을 정도로 환하게 웃으며 물었다. 강동현은 입을 꾹 다물고 있다가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황경호는 겉으로는 절대 티를 내지 않는 웃는 얼굴이었지만 속으로는 흥미진진하게 기대를 하며 그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잘….”

“네?”

강동현의 좋은 목소리는 계속 이상하게 발성을 해서 제대로 들리지가 않았다. 딴에는 자기라는 걸 못 알아보게 하려고 하는 것 같았지만, 황경호는 아~까 눈치를 챘기 때문에 소용이 없었다.

“네? 뭐라구요, 도은혁 환자님?”

그는 황경호의 웃는 얼굴을 좀 노려보더니 또 한숨을 푹 쉬고는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일단… 잘… 안 서는데… 서도 싸기 전에 발기가 죽어요….”

아, 연예인 입으로 이런 얘기 들으니까 좀 깨긴 깬다. 우리나라 연예인은 암묵적으로 이런 19금 토킹은 금지, 특히 젊은 애들일수록 하지 않는 것이 원칙이니 대놓고 싸니, 발기니 하는 것을 들으니 확실히 황경호도 대단히 깨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게다가 임포라니. 아이고, 얼굴이 아깝다, 얼굴이. 황경호는 차트에다 ‘임포에 지루’를 적어놓고 계속 물었다.

“언제부터 증상을 자각하셨나요?”

“몇 달 되긴 했는데… 4개월쯤… 처음에는 피곤해서 그런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 뒤로도 점점 안 되더라구요….”

이런 말을 남한테 하는 것은 처음인지 강동현은 작게 쌍욕을 했다. 황경호는 프로답게 모르는 척해주었다. 생각보다 자존심이 세구나. 아, 아니 뭐 이런 경우에야 어쩔 수가 없나.

“음, 심하게 스트레스를 받거나 하는 경우가 있었나요? 업무적으로나 사생활 적으로나… 보통 젊은 남성의 경우는 제일 많은 경우가 심인성이거든요. 우울증이나….”

“우울증은 없습니다. 스트레스는 직업 특성상 어쩔 수 없어서 잘 관리를 해왔다고 생각했는데… 후우… 심인성이라면 저한테 크게 문제가 있다는 것은 아니죠? 얼른 고칠 수 있는 건가요?”

“물론 크게 문제가 아니라면 아닐 수도 있지만, 가끔 신체적 결함보다 더 잘 안 고쳐지는 경우가 있어요. 사람의 성격이라는 것이 잘 바뀌는 것도 아니구요. 음, 자세한 것은 검사를 해봐야지 알 것 같습니다.”

그렇게 얘기하고 있는데 상담실 전화기가 삐리리, 하고 짧은 음을 내며 빨간불이 반짝거렸다.

“아, 예. 그럼 가겠습니다.”

황경호는 전화를 받고 짧게 통화하고 끊었다. 황경호는 웃으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강유 선생님께서 수술실에서 나오셨습니다. 바로 진료실로 모시라고 하네요. 가실까요?”

상담실에서 진료실로 가기 전에 옷을 갈아입는 곳이 있었다. 거기에서 먼저 옷을 갈아입도록 지시하고 황경호는 먼저 진료실로 들어가서 의사에게 설명을 했다.

“26살에 임포에 지루. 4개월. 쯧쯧. 젊은데 스트레스 많았겠네.”

“아, 그리고 선생님, 환자 특이사항으로는 도은혁 씨가 연예인이에요. 강동현 아시죠? 저 보자마자 알아챘는데 모르는 척했어요. 선생님도 아시고만 계세요.”

“아, 그래? 미희가 강동현 엄청 좋아하는데.”

하지만 선생님은 역시 선생님이라 그런지 그다지 크게 신경 쓰시는 것 같지는 않았다. 황경호는 조용히 뒤에서 대기했다. 이강유가 황경호를 돌아보며 물었다.

“안 가냐?”

“저 좀만 구경하면 안 돼요?”

“어허. 환자분 싫어하신다. 나가라, 빨리.”

“쳇. 쌤 치사하게 자기만.”

“빨리 나가.”

황경호는 입을 삐죽이며 발걸음을 옮겼다. 진료실에서 카운터로 향하는 문을 열 때 탈의실의 문이 열리며 가운을 입고도 여전히 우스꽝스러운 변장을 한 강동현이 등장했다. 황경호는 그냥 웃으며 인사를 하고 나갔다.

남자들이 가장 약해질 때가 언제인 줄 아는가? 바로 여자 앞에서 망신을 당한 거랑 그 망신을 앞으로 안 당하겠다고 비뇨기과 의자 위에 처음으로 누울 때다.

뭘 파기 시작하면 끝을 보는 황경호였지만, 이번만큼은 빠르게 식는 것을 느꼈다. 아마 지금까지의 덕질 중에서 가장 짧은 기간인 것 같았다. 일주일? 연예인이고 자시고 간에 강동현도 그냥, 그저 그런 고개 숙인 남자들 중 하나일 뿐인 것이다.

“퍼즐이나 마저 맞춰야지…….”

*

사연도 가지각색에 생긴 것도 가지각색, 이유도 가지각색으로 이강유 비뇨기과에 내원하는 수많은 남성들 중에서도 단연 돋보이는 환자 둘은 항상 같은 요일에 같은 소파에 앉아 대조적인 자세로 진료를 기다리고 있었다. 한 명은 바짝 긴장해서 얼어붙은 듯이 가만히 앉아 있었고 한쪽은 우스꽝스러운 변장에다가 더불어 신문까지 확 펼쳐 읽으며 앉아있었다. 물론 진짜 읽는 것 같진 않다. 전자는 Y대학교 대학원에 재학 중인 24세의 대학원생으로 심각한 민감증과 조루로 내원 중이고 후자는 유명한 연예인으로 심각한 불감증과 지루, 발기부전으로 병원을 다니는 중이었다.

“도은혁 씨.”

정기연 간호사가 오늘따라 유난히 활짝 웃으면서 환자를 불렀다. 강동현은 대답도 하지 않고 그냥 슬 일어나서 탈의실 쪽으로 향했다. 정기연이 황경호의 팔을 툭툭 치며 귓속말을 했다.

“오빠, 저 사람 연예인 맞지?”

“내가 어떻게 알아, 정 간.”

정기연 간호사는 황경호보다 한 살 연하였다. 연하의 여자애인데도 불구하고 대놓고 섹시한 기운이 마구 풍겨서 아저씨들한테 인기 만점이었다. 검은 머리카락과 아찔하게 올라간 눈매가 대단히 잘 어울리는 미녀였다.

“아니 솔직히 아무리 그래도 일반인이 저렇게까지 변장하고 오냐고. 분명히 연예인이라니까.”

“난 몰라.”

정기연 간호사는 아, 내가 어디서 봤는데, 이러면서 알쏭달쏭한 얼굴로 돌아갔다. 굳이 이게 뭐 좋은 일이라고 떠들고 다니겠는가. 오래 다니다 보면 자연스럽게 알게 될 것이고. 황경호는 2주 동안의 약물 투약결과를 알기 위해 귀두에 진동극을 달아 감도를 검사하는 기계를 준비하기 위해 진료실로 들어갔다.

“안녕하세요, 도은혁 환자님.”

탈의실에서 가운으로 갈아입고 들어온 마스크맨에게 황경호가 활짝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이강유가 치과 보정 포스터에 들어가도 모자라지 않을 정도로 이가 반짝이는 완벽한 미소를 짓는다면, 황경호 쪽은 청소년 계도 포스터에 들어갈 정도의 순진무구한 미소였다. 본인이 요새 겪고 있는 무기력증이랑 웃는 얼굴은 별개의 문제인가 보다. 강동현은 대충 끄덕 인사를 하고 이강유를 기다렸다. 의사가 들어오기 전까지는 진료 의자에 앉지도 않을 생각인 모양이었다.

선생님, 늦으시네… 그렇게 무료하게 있는데 갑자기 진료실의 문이 벌컥 열렸다.

“황 간호사, 지금 응급환자 실려 왔습니다. 지금 환자분께는 죄송하지만 지금 급히 수술이 들어가야 하는 환자라…. 차트 보니 오늘은 테스트와 투약이던데 황 간이 테스트하고 수술실로 결과 보고해도 될지 환자분께 여쭤보라고 하십니다.”

김형세가 급한 말투로 빠르게 말했다. 보통 예약 환자를 뒤로 미루는 것은 이강유의 경영철학상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이 환자는 특히 의사 외에는 자신의 몸을 맡기기도, 말하기도 싫어하는 케이스다. 황경호가 얼떨떨하게 물었다.

“그렇게 급합니까? 도은혁 씨는….”

“절단 사고라서요. 죄송합니다. 도은혁 환자님, 양해를 구해도 될까요?”

절단…. 강동현과 황경호의 눈이 마주쳤다.

“감사합니다.”

김형세는 인사를 하고 다시 밖으로 나갔다. 이건 남자라면 절대 ‘내 고추가 먼저’라고 말할 수가 없는 사안이다. 황경호와 같은 섬뜩함을 느낀 강동현은 한숨을 좀 쉬더니 알아서 의자에 앉았다. 적어도 절단보단 낫지, 라고 생각한 모양이다. 황경호는 마스크와 장갑을 꼈다.

“죄송합니다, 도은혁 씨. 가끔 이렇게 응급환자가 실려 올 때도 있어서요.”

“어쩔 수 없죠, 뭐….”

그래도 불만은 어쩔 수 없는지 강동현이 의뭉스럽게 발음을 뭉개며 말했다. 황경호는 가운을 옆으로 치우고 동그란 구멍이 뚫려있는 천을 대었다. 그 구멍 사이로 나온 강동현의 성기를 보았다.

‘역시 키랑 거시기 크기는 비례하는 건가….’

하긴 그럼 뭐해. 제 기능도 못 하는데. 황경호는 속으로 아깝다, 쯧, 하고 이강유처럼 혀를 한 번 차고는 마사지기계를 손에 들고 그 표면에 젤을 발랐다. 그리고 진동을 5로 맞추고 천천히 강동현의 성기 위를 부드럽게 문질렀다.

“릴렉스 하시구요. 숨 천천히 쉬시고 긴장하지 마세요. 다른 생각이나 야한 생각 하시면 더 좋구요.”

“농담하는 거 별로 안 좋아합니다.”

“아, 죄송합니다. 환자분들 긴장 푸실 때 도움이 될 때도 있거든요.”

진짜 반응 없네. 전에 유태범 환자 결과를 보니 진동 1에 훅 갔다던데… 둘의 감도를 합쳐서 딱 반으로 나누면 좋겠다. 황경호는 진동의 정도를 두 칸 올렸다. 지잉 하고 손이 울렸다.

“마스크랑 모자랑 선글라스 실내에서까지 하고 계시는 거 불편하지 않으세요?”

“안 불편합니다.”

어지간히 딱딱하게 구는 강동현이었다. TV에 나오는 거 보니까 잘만 웃더니만. 연예인들은 정말 다 가식인가 봐. 황경호는 강동현의 성기를 환자 자신인 양 보며 말했다.

“결국엔 사람은 다 뇌로 결정 나는 거거든요. 머리나 얼굴 쪽에 계속된 압박이나 긴장이 있을 때는 뇌로 혈액순환이 잘 안 돼요. 왜 모자나 안경을 계속 쓰고 있으면 두통이 나는 것처럼요. 병원에 오는 도은혁 환자님 보면 왠지 옆에 앉아 계시는 그분보다 더 긴장하는 것처럼 보여서요. 긴장이 제일 안 좋은 거거든요, 여기에.”

강동현은 대답이 없었다. 황경호는 환자들의 불안을 덜어주기 위해서 입에 모터를 단 것마냥 몇 시간이고 상대에게 맞춰서 얘기할 수 있었다.

“아, 물론 벗는 것이 더 신경이 쓰이신다면 안 벗으시는 게 더 좋구요. 혹시 더 궁금한 점 있으시면 다 물어보세요.”

황경호는 이제 오기가 생겨서 열심히 이쪽저쪽을 다 마사지하고 있었다. 성기와 회음, 기둥과 귀두의 아래, 선단을 모두 왱왱거리며 문질러보았는데도 서기는커녕 점점 더 물렁물렁해지는 느낌이었다. 아, 이거… 아무리 그래도 보통 이 정도면 조금은 서는데. 황경호는 마사지 기계에 젤을 더 묻히고 진동을 8로 올렸다. 강동현은 자신의 성기에 집중하고 있는 황경호를 보다가 문득 물었다.

“맨날 남자들 거시기 보고 만지는 거 안 싫어? 왜 다른 일 안 해?”

‘이 새끼가 갑자기 반말은…’

동갑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이렇게 훅 말을 놓을 줄이야. 물론 간호사 생활하면서 간호사라고 좀 막 대하려는 사람은 몇 번 보았지만, 그래도 이렇게 새파랗게 어린놈은 없었다.

“갈 수 있는 병원들 중에서 여기가 제일 월급이 셌어요.”

“보니까 나이도 어린 것 같은데 벌써부터 돈돈 거리는 거 웃기지 않아? 더 좋은 일 다 놔두고 왜 이런 일을 굳이 하는지 이해가 안 되는데.”

이런 일 하는 사람이 없으면 너 같은 고자 새끼들은 다 나가 죽어야 돼. 이런 데 와서 흠 있는 거시기를 전시하고 있으니 자존심이 상하지 않을 리가 없겠지만… 가끔 이런 식의 공격성을 발휘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걸 알면서도 기분이 나빠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이쪽도 사람이기 때문이겠지. 황경호는 굳이 환자와 싸우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적당히 응수해주었다.

“그렇게 말씀하시니 그런 것도 같네요.”

“꿈 같은 것도 없어?”

황경호는 결국 포기했다. 마사지 기계를 껐다. 차트에 신경질적으로 결과를 기록했다. 차트를 앞뒤로 넘겨보면서 말했다.

“저번이랑 결과가 별반 차이가 없군요. 지금까지 해본 검사나 사진을 볼 때도 신경학적인 문제나 기능적인 문제는 전혀 없으세요. 처음 예상했던 데로 심인성 질환이구요.”

황경호는 의료용 천으로 강동현의 성기에서 젤을 닦아 내었다. 가운까지 여며주자 강동현이 허리를 일으켰다. 별반 차도가 없다는 소리에 인상을 찌푸렸다.

“2주나 다녔는데 차도가 없다고? 실력 좋다더니 여기 돌팔이 아냐?”

황경호는 처음으로 환자의 앞에서 인상을 찌푸렸다. 그는 앞으로 다가가 강동현이 앉은 의자의 발 받침에 발을 올리고 차트로 강동현의 가슴을 쿡 찔렀다.

“심인성 질환은 머리가 문제죠. 신체적 결함도 없고 사지 멀쩡한 주제에 고추 좀 안 서는 것 가지고 다른 사람한테 화풀이하는 그놈의 정신머리가 말이죠, 강동현 씨.”

강동현이 헉하고 놀라서 굳은 것을 흥하고 쳐다보고는 뒤돌아서 씩씩거리며 진료실을 빠져나갔다. 뭐에 화가 나는 것도 오랜만이었다. 뭐, 곧바로 후회하긴 했지만. 환자에 대한 서비스 정신이 투철한 이강유 경영철학상 환자의 시비에 걸려서 같이 싸운 그가 혼날 게 눈에 훤했기 때문이다.

*

『아… 같이 연기하신 이신혜 선배님, 오경욱 선배님, 서윤 선배님, 이의상 감독님, 피디님들, 조연출님들, 음향 감독님… 아, 또… 아, 제가 다 외워 왔는데… 스타일리스트 누나, 메이크업 해주는 윤지 누나, 매일 고생하는 매니저, 부모님, 사장님… 다 정말 감사합니다. 이번 상은 제가….』

드라마나 영화에서는 그렇게 멋있더니.

문득 틀어놓은 TV에서 작년 연기대상 수상식이 방영되었다. 강동현이 긴장한 것이 한눈에 보였다. 얼굴도 상기되어 있었고 트로피와 꽃다발을 안고 있는 손도, 입술도 말도 다 떨리고 있었다. 고작 신인상일 뿐이지만 이제 막 뜨기 시작한 신출내기 배우에게는 저게 그 어떤 것보다도 대단하게 느껴지겠지. 다른 중견 배우들의 능숙함을 보다가 그의 서투름과 젊음을 보면 피식하고 웃음이 나올 것도 같았다.

『더 열심히 하고 정진하라는 뜻으로 받겠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앞으로 더 잘하겠습니다.』

상투적인 멘트였지만 바짝 긴장해서 말하는 것을 보니 오히려 진심이 가득 느껴지기도 했다. 누가 저 남자가 임포에 지루에다가 성격까지 별로라고 생각하겠는가. 사람의 매력이란 정말 알 수 없는 것이다.

『네, 요즘 대세라죠? 강동현 씨의 작년 S본부 수상 소감이죠. 그동안 올해 가을 개봉 예정인 영화를 찍다가 이제는 다음 시즌 드라마까지. 영화와 드라마. 요새 이 남자가 나오지 않는 광고가 또 없습니다.』

『네, 그렇습니다. CF면 CF, 화보면 화보. 저는 개인적으로 20대 남성 배우들 중에서 가장 얼굴이 아름다운 배우 중 하나라고 생각하는데. 김영희 리포터는 여자의 입장에서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두말할 것도 없죠. 깊은 눈매와 오똑한 콧날, 단정한 이마. 보고 있기만 해도 하루의 피로가 확 날아가는 것 같은 미남이죠. 또 피부는 어떻게 그렇게 좋은지. 여자인 저보다도 좋으니까 가끔 질투도 날 정도예요.』

‘얼굴로 먹고산다는 그 조연출의 말이 생각나는구나.’

우리나라에 연예인만 2만 명이 넘는다고 한다. 그저 그 업계에 몸을 담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 만족한다면 상관이 없겠지만, 타고난 것으로 갈라지는 이 우열을 견디기 힘들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강동현은 연기를 꽤 잘하기는 하지만, 뭐 임포이기도 하니까 적당히 쌤쌤이라고 치자.

*

“안녕하세요, 도은혁 환자님!”

황경호는 활짝 웃으면서 환자를 맞이했다. 강동현은 이제 옷을 갈아입으면서 마스크와 모자와 선글라스를 벗었다. 이미 다 들켰다는 걸 알았으니 그 꼴을 계속하고 다니는 게 더 꼴사나운 짓이었다. 가까이에서 보니 정말 같은 남자도 혹할 정도의 미모였다. 하지만 이 남자의 찌질함을 아는 황경호야 그저 보통의 다른 찌질한 환자들과 똑같이 활짝 웃으며 대할 뿐이었다.

강동현은 이강유에게 황경호의 실수를 꼰지르지 않았다. 자신도 잘못한 점이 있다고 생각해서일지도 모른다. 어쨌든, 그 점에 대해서는 고맙게 생각했고, 황경호는 앞으로는 실수를 하지 않겠다고 마음먹고 강동현을 대할 뿐이었다.

“술은 많이 드십니까?”

“적당히….”

“어느 정도 마십니까?”

“밤에 잠이 올 때까지 먹습니다. 맥주 한 캔 두 캔에서 많게는 다섯 캔?”

“술 끊어야 합니다. 담배는요?”

“하루에 두 갑 정도….”

그거 피우고 저 피부 유지하는 게 더 신기하네.

“담배도요. 둘 다 발기에 아주 해로워요. 지루의 경우는 과도한 자위나 정상적이지 못한 성행위 때문에 일어나기도 하는데 어떻습니까?”

“자위는 그다지 안 합니다. 여자랑은 간간이 했었지만 그다지 정상적이지 못한 것을 한 적 없습니다.”

“지금도 만나고 있는 애인분이 계신가요? 관계는 지속적으로 가지고 계시나요?”

약물을 처방받았으니 성행위를 하고자 한다면 무리는 없을 것이다. 연예인의 사생활이란 것은 역시나 흥미로운 소재이고 황경호는 귀를 쫑긋하고 듣고 있었다. 물론 상담실의 밖에서, 문에 귀를 대고.

“몇 달 전까지는 그랬는데 요새는 바빠서….”

“애인은 한 분인가요?”

그러자 갑자기 강동현이 짜증스럽게 반응했다.

“제가 연예인이라고 색안경 끼실 수 있다는 건 알지만 전 그렇게 문란하게 노는 놈 아닙니다. 고등학교 때부터 사귄 친구고 성인이 되어 처음으로 정상적으로 섹스했고 지금까지 바람 한 번 안 피우고 사귀었습니다.”

“아, 죄송합니다. 그런 뜻이 아니라… 이런 말 하긴 남자로서 참 부끄럽지만 우리나라 남성분들이 생각보다 불륜이나 양다리가 많아서요. 확인 차 물어봤습니다.”

“…저도 발끈해서 죄송합니다.”

“그럼….”

질문은 계속되었고, 대답도 계속되었다. 처음에는 흥미진진하게 들었는데 생각보다 재미가 없어져서 황경호는 그냥 찌뿌둥하게 기지개를 켜고 카운터로 나왔다.

“나 화장실 좀 갔다 올게, 김 간.”

“그래.”

황경호는 남자 화장실로 가서 일을 보았다. 그리고 손을 씻고 문득 거울을 봤다.

아, 위험….

“으….”

갑자기 두 어깨에 바위라도 올려놓은 듯이 무거웠다. 시간이 갈수록 무기력증의 증상도 심해졌다. 꼼짝도 못 할 것 같았다. 아무것도 하기가 싫었고 그 감각이 무서웠다.

‘안 돼… 생각을 해… 오늘은 차트의 개수가 1567장이라는 걸 알았어. 3일 동안 센 거라고. 남자 화장실 바닥 타일은 120장이고… 집에서 맞추던 퍼즐 조각은 이제 1342개 남았고… 오늘 집에 가서 다 맞추자. 다 맞추면 기분이 좋아질 거야…. 아, 진짜 왜 이래… 그냥 이대로 잘 살면 안 되냐고.’

왜 부족하다는 생각이 계속 들까. 그냥 그런 생각을 안 하면 되잖아. 인생이 뭐가 따로 꼭 더 있어야 되는 건가.

[꿈 같은 것도 없어?]

꿈 같은 소리 하고 앉아있네, 젠장.

“…비켜. 세면대 잡고 뭐하는 짓이야?”

황경호는 순간 뒤에 누군가가 다가온 것을 알고 깜짝 놀랐다. 움직여라, 움직여라, 좀! 황경호는 발을 질질 끌며 옆으로 비켰다. 강동현이 우스꽝스러운 변장을 하고 손을 씻었다. 그는 손을 털고 티슈를 뽑아 닦다가 힐끗 거울을 통해 멀뚱하게 서있는 황경호를 보았다.

“야. 너 왜 그래?”

강동현은 식은땀을 흘리는 황경호의 얼굴을 보고 의아하게 말했다. 항상 웃고만 있는 그였다. 마치 그것을 보여주기 싫다는 듯이 두 손을 올려 얼굴을 가렸다.

“아… 괜찮아요. 그냥 현기증이 좀….”

“그냥 현기증이 아닌 것 같은데.”

강동현이 손을 뻗자 황경호가 흠칫하며 뒤로 물러섰다가 화장실 칸막이에 등을 부딪쳤다.

“괜찮다니까요. 만지지 마세요.”

그래도 다행히 누군가 들어와서 정신을 빨리 차렸다. 황경호는 금세 좀 어색하게나마 웃으면서 강동현에게 평소처럼 말을 걸었다.

“아, 상담은 빨리 끝나셨네요. 일주일 치 약은 처방 받으셨어요? 아니면 제가 지금 처방전 출력해 드릴게요.”

“…받았어.”

“아, 그럼 지금 가세요?”

“어.”

“그럼 조심해서 가세요. 다음 주에 뵙겠습니다.”

황경호는 현기증이라기보단 무언가에 깜짝 놀라 무서움에 떨다가 겨우 안도의 한숨을 돌린 사람 같았다. 강동현은 물끄러미 밖으로 나가는 황경호를 보다가 자신도 밖으로 나왔다.

“야.”

“네?”

“너 이리 와봐.”

‘이게… 사람이 개냐. 어디서 오라 가라야?’

황경호는 탐탁지 않았지만 일단 가보았다.

“왜 그러세요? 뭐 찾으시는 거라도….”

“이쪽으로 돌아봐.”

“예? 뭐 묻었어요?”

황경호가 대충 삐뚜름하게 몸을 돌리자 갑자기 강동현이 황경호의 엉덩이 한 짝을 꽉 잡았다.

“으악…! 뭐하는 짓이에요?!”

황경호가 펄쩍 뛰었다. 강동현은 황경호의 엉덩이를 쥐었던 손을 쥐었다 폈다 하면서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아, 미안… 그냥 갑자기….”

“그런 게 어디 있어요? 연예인이라고 지금 뭐든 다 될 줄 알아요? 아, 진짜 사람을…!”

황경호가 성질을 버럭 내자 강동현이 실수를 인정하는지 두 손을 들며 다시 사과했다.

“미안. 진짜 나도 내가 니 엉덩이 만질 때까진 내가 니 엉덩이 만질 건지 몰랐어.”

“뭐래, 진짜! 그게 변명이라고 하는 겁니까?”

“아, 그러니까 미안하다잖아.”

“그게 미안하다는 사람 태도예요?”

“아, 그럼 어떡하라고.”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황경호는 진짜 어이가 없다는 식으로 강동현을 노려보고는 그냥 말을 말자, 말을, 하면서 병원 안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

그 뒤부터였다.

“도.은.혁.환.자.님.”

“왜.”

“테스트를 저한테 받으시는 건 좋은데요.”

“근데 뭐?”

“제 엉덩이는 좀 그만 놔두시죠.”

‘마스크는 좀 오버’라는 이강유 선생님의 말을 듣고(아니, 그럼 왜 자기는 마스크 쓰는 건데?) 마스크는 쓰지 않고 강동현의 발기테스트를 하는 황경호였다. 젤이 묻은 장갑 때문에 치한 환자의 손을 뿌리치지 못하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닳는 것도 아니고 좀 있어 봐. 왠지 느낌이 올 것 같단 말이야.”

“아, 진짜…! 콩밥 먹고 싶으세요? 손 당장 못 떼요!? 이게 진짜 보자 보자 하니까 사람을 보자기로 아나!”

황경호가 버럭 화를 내자 강동현이 웃었다. 황경호가 웃어?! 이런 눈빛으로 강동현을 노려보자 강동현이 그 예쁜 얼굴로 또 피식 웃으며 자신의 거시기 쪽으로 턱짓을 했다.

“그런 기계보다 니 혀가 더 마음에 들 것 같은데?”

“와, 씨. 이게 진짜…! 성희롱도 엄연한 중범죄인 거 모르세요? 진짜 그만 하세요. 저 진짜 기분 나빠요.”

강동현이 살짝 사람 성질을 건드린다는 생각은 했지만 이런 식으로 괴롭힐 줄은 몰랐다. 이강유야 자기보다 한참을 연상인 데다가 자신을 치료해주는 의사이니 어느 정도 예의를 지키는 것 같았지만, 어쩐지 이 인간은 황경호한테만 못되게 굴었다. 그가 병원 식구들 중에서 제일 만만하게 보이는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이런 짓을 해도 되는 것은 아니었다.

“정말이에요. 손 치워요. 기분 나쁘다구요.”

황경호가 인상을 찌푸리며 그렇게 말하자 강동현이 알았어, 알았어, 이런 태도로 어깨를 으쓱하며 황경호의 엉덩이에서 손을 치웠다. 지는 지금 내 앞에서 거시기 내놓고 있는 주제에 무슨 똥배짱이래. 황경호는 화가 나서 평소보다 과격하게 쓱싹쓱싹 손을 움직였다. 그러자 움찔하고 강동현의 똘똘이가 살짝 커지는 것 같았다.

“어? 지금 좀 왔어요? 진동 좀 더 올려볼까요?”

황경호는 강동현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진동을 두 단계 정도 더 올리고 열심히 마사지를 해보았는데 아서라, 그냥 죽었다.

“음… 아깝네요. 그래도 반응이 있다는 건 뭐 좋은 거죠. 일주일 치 약은 다 드셨나요? 비아그라도 처방되어 있어서 성생활을 하시는 데는 무리가 없으셨을 것 같은데. 임포에는 규칙적인 성생활도 꽤 중요하거든요.”

“내가 요새 얼마나 바쁜지 몰라? 일주일에 한 번씩 여기 오는 것도 기적이야.”

“차라리 여기 오는 것보다 여자 친구를 만나시는 게 더 좋을지도 몰라요.”

“그렇게 생각하고 몇 달이나 고생하다가 온 거잖아.”

“…그건 그렇겠네요.”

황경호는 부드러운 천으로 강동현의 거시기를 말끔하게 닦아 내었다. 그런데 그 순간 강동현이 또 움찔했다.

“어? 왜요? 뭐가 오세요? 아, 역시 마사지 기계보단 사람 손이….”

황경호가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강동현의 거시기를 유심히 관찰하자 강동현이 살짝 기묘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런 것 같지?”

“지금 도은혁 씨 손으로 한번 해보실래요?”

“내 손으론 안 돼. 내가 몇 번을 해봤는지 알아? 까질 때까지 해봤다고.”

“…고생하셨네요. 다음엔 더 나아지겠죠. 내려오세요.”

“왜 내려가? 니 손에 반응했으니까 니 손으로 해봐. 니가 치료하는 사람이잖아.”

“….진짜 신고해요, 저… 장난 아니에요, 지금….”

황경호가 정말 불쾌했던지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원하면 따로 너한테 치료비 낼게. 나도 인생이 걸린 문제라고. 사람 하나 살린다 치고 협조해줘도 괜찮잖아.”

“그게 무슨 범죄자 마인드예요? 와, 진짜 이 사람 안 되겠네. 지금 자기가 뭘 잘못하는지 모르는 거예요?”

“뭘 어떻게 하면 해줄 건데?”

“뭘 어떻게 해줘도 안 할 거예요!”

강동현은 미간을 좁히고 한숨을 푹 쉬었다. 한 손으로 얼굴을 쓰다듬으며 꽤나 애처로운 얼굴이 되었다.

“정말 나 심각해. 장난하는 거 아니야. 네가 만지니까 뭔가 될 것 같았단 말이야. 어? 한 번만… 부탁이야….”

황경호는 저도 모르게 당황해서 강동현에게 다가갔다.

“도은혁 환자님… 그게 그렇게 한다고 되는 게 아니라서요… 너무 조급해하는 건 정말 안 좋아요. 항상 긍정적인 마음을 갖고….”

“그러니까… 한 번만… 다른 것도 필요 없고 그냥 한 번만… 싫으면 앞으로 다른 담당으로 바꿔도 좋아. 지금 한 번만 해줘.”

황경호는 자신이 불쌍한 사람에게 약하다는 것을 처음으로 깨달았다. 정말로 닳는 것도 아니고, 엄한 거 대달라는 것도 아니고 손으로 한 번이라는데… 앞으로 다시 할 일이 없다면 진짜 사람 한 번 살린다 치고 해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부터는 김형세 간호사로 바꿀게요. 여자 간호사들에게 그러면 이강유 선생님 진짜 고소 넣어요. 우리 선생님 한다면 진짜 하는 사람이에요.”

“알았어. 여자들한텐 당연히 안 하지.”

황경호는 난감하고 난처한 표정으로 한숨을 조금 쉬고 장갑을 낀 손에다 젤을 짜려고 했다. 그러자 강동현이 갑자기 황경호의 손목을 잡았다.

“장갑 벗고…! 해주면 안 돼?”

순간 장갑 벗고 해! 라고 강압적으로 말할 뻔한 강동현은 순간의 기지로 참고 부드럽고 또 애처로운 연기를 하면서 불쌍한 강아지 같은 눈으로 황경호를 보았다. 황경호는 똑똑하고 처세술 좋은 척하면서 의외로 맘이 약해 사기를 잘 당할 타입이었다. 황경호는 당황했는지 말을 더듬었다.

“어… 그건 좀….”

“어차피 환자들 거시기 많이 만져 봤잖아… 다른 아저씨들 것보다는 내 게 더 낫지 않아? 아님 그 아저씨들 게 좋아?”

“아니 그런 문제가 아니라….”

황경호는 강동현의 고집스런 얼굴을 보고 아, 낚였구나, 하고 깨달았지만 굳이 더 싸우고 싶은 마음도 안 들었다. 그냥 이걸로 끝내고 피하는 것이 더 낫겠지. 그런 마음에 순순히 장갑을 벗었다. 진료실에서 맨손으로 환자를 만진 적은 한 번도 없었지만, 어차피 얇은 수술 장갑은 끼나 안 끼나 비슷하지 않을까나…. 맨손에 짠 젤은 꽤나 차가운 느낌이었다. 그리고 미끌미끌하고. 황경호는 강동현의 성기를 오른손으로 살짝 잡았다.

‘으아… 이건 아니다. 진짜. 진짜 아니다. 우엑. 못 하겠어.’

라는 생각이 바로 들었다. 하지만 강동현은 다리를 움찔했다. 그는 갑자기 얼굴이 상기되어 허리를 일으켰다. 희열을 느끼는 얼굴로 자기 거시기를 내려다보았다.

“계속해 봐. 진짜 느낌 오는 것 같아.”

“아, 네…. 불쾌하시거나 기분 나쁘시면 바로 얘기하시….”

“빨리하기나 해.”

속았다. 긴가민가하던 황경호는 그제야 강동현이 앓는 체를 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황경호는 그냥 짜증스러운 한숨을 작게 쉬고 손을 움직였다. 엄지와 검지로 링을 만들고 그사이에 강동현의 거시기를 끼워 아래위로 흔들었다. 고환이 움직여 살에 부딪히며 탁탁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제대로 해. 강하게 쥐어….”

어느샌가 가까이 온 강동현의 얼굴에 깜짝 놀랐다. 낮게 쉬는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황경호가 뒤로 물러서려고 하자 강동현이 두 손으로 황경호의 어깨를 잡고 끌어당겼다.

“알았어요. 알았으니까 좀 놔요.”

“두 손으로 해. 두 손으로… 읏….”

“알았으니까 좀 놓으라구요. 안 놓으면 안 할 거예요. 놓으라니까요?”

황경호가 계속 어깨를 비틀며 손을 멈추자 그제야 못마땅한 얼굴로 강동현이 손을 놓았다. 대신 손잡이를 꽉 잡고 마치 어린아이가 흥분한 것 같은 얼굴로 자기 거시기를 내려다보았다. 황경호는 왼손으로 강동현의 고환을 굴리며 오른손 전체로 그의 것을 쥐고 탁탁탁 세게 흔들었다.

“읏… 아… 씨발….”

‘어어어… 선다. 서.’

황경호는 그동안 약을 먹어도 션찮았다는 강동현이 약도 없이 서는 것을 신기하다는 듯이 보고 있었다.

“애인분이 손으로는 해주지 않는 타입이신가요? 남자 손으로도 반응을 보일 정도면 애인분에게 부탁하면 더 효과가 있을지도 몰라요. 이런 식으로 자신감을 가지다 보면….”

황경호도 약간의 직업병이 생긴 것일지도 모른다. 희망이 보이자 저도 모르게 응원하는 말을 하며 강동현의 얼굴을 보는데 깜짝 놀랐다.

드라마나 영화에서는 멋있는 주인공으로, TV에서는 매너 좋고 전도유망한 배우로, CF나 잡지에서는 남자다운 미모를 자랑하는 강동현이었다. 그런 그가 자신의 손에 느껴 완전한 남자의 얼굴로 인상을 찌푸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잘생긴 얼굴은 속눈썹도 길어서, 그 순간 황경호의 시선을 느껴 바라보는데 진짜 깜짝 놀랄 정도로 매력적이었다.

“어, 그럼 서는 걸 확인했으니까 이 이후는 애인분한테 가서….”

황경호가 슬쩍 손을 떼려고 하자 강동현이 거칠게 황경호의 손목을 잡았다.

“젠장… 계속해… 내가 지금 몇 달 만에 이렇게 됐는지 알기나 해? 하려면 끝까지 책임지고 해.”

‘이건 뭐… 내가 안마방 직원도 아니고….’

“아이고… 알았으니까 손은 놓으세요.”

황경호는 한숨을 쉬었다. 그래. 마지막이니까 내가 참는다. 황경호는 다시 강동현의 거시기를 잡았다. 우뚝 선 그의 거시기는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컸다. 애인 분이 복을 타고 난 건지 아닌 건지… 황경호는 질린다는 표정으로 그냥 빨리 끝나라고 빌며 얼른얼른 손을 움직였다. 단단하게 근육이 오른 강동현의 허벅지와 아랫배가 점점 더 움찔거렸다.

“읏… 읏… 아, 온다… 제기랄….”

바로 정면에 서있는 황경호는 살짝 위험했기 때문에 옆으로 살짝 피하려고 발을 옮기는 찰나였다. 강동현이 번개같이 손을 뻗어 황경호의 뒤통수를 잡아챘다.

“읍…!!!”

강동현은 황경호의 입 안에 혀를 밀어 넣음과 동시에 사정했다. 진짜 손에 정액만 안 묻어 있었어도 싸대기를 댓 번은 때렸을 것이다.

“헉… 헉…. 아, 윽….”

오랜만의 사정에 강동현이 정신을 못 차리는지 거친 숨을 쉬며 황경호의 목을 꽉 끌어안았다. 황경호는 강동현을 확 밀치면서 화난 얼굴을 했다. 손등으로 입술을 훔치며 화를 버럭 냈다.

“지금 진짜 뭐하는 짓입니까!!!”

“얼굴에 묻는다, 그거….”

강동현은 현기증까지 도는지 이마를 붙잡고 숨을 몰아쉬면서도 한마디를 안 지고 그렇게 말했다. 강동현의 말에 황경호가 핫, 하고 입에서 손을 떼었다. 아서라, 벌써 뺨에 조금 묻었다. 얼마나 싸댔던지 손이 흥건했다. 황경호는 굉장히 기분이 나빠졌다. 진짜 이런 걸 받아들인 자신이 제일 병신 같았다.

“후우… 되셨죠? 닦는 건 알아서 닦아 주세요… 전 손 좀 씻으러 갑니다.”

황경호는 그렇게 잘 웃고 순진해 보이는 얼굴을 왕창 일그러뜨리며 짜증을 숨기지 못했다. 강동현은 영 정신을 못 차리는지 이마를 붙잡고 있을 뿐이었다. 황경호는 그 새에 얼른 진료실에서 바로 통하는 의사 전용 세면실로 들어가서 문을 쾅 닫았다.

황경호는 얼른 물을 틀어 손을 세 번이나 비누칠을 해서 빡빡 씻고 얼굴도 벅벅 씻었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거울을 보는데 인상을 잔뜩 찌푸리고 있는 얼굴이 보였고 입술도 눈에 들어왔다. 황경호는 금방 물컹하게 들어왔던 강동현의 징그러운 혀가 생각났다.

“읏…….”

황경호는 얼른 물을 입에 머금고 열심히 가글을 했다. 기분이 진짜 나빴다. 다시는 저런 저질, 상대도 안 할 것이다.

*

“이번엔 또 뭐하냐?”

김형세가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황경호는 점심시간을 틈타 스마트폰으로 게임을 하고 있었다.

“게임한다.”

“이젠 하다 하다 게임까지 하냐? 너 원래 게임은 안 했잖아.”

“하다 보니까 또 하게 되네. 집중하고 있으니까 말 걸지 마.”

김형세는 선물로 들어온 바나나를 후식으로 먹으면서 잠시 푹신한 의자에 몸을 맡겨 등을 기대었다. 원체 하루하루가 바쁘기 그지없는 이강유 비뇨기과의 간호사들은 간혹 이렇게 상담실에 숨어들어와 한숨을 돌리는 것이 낙이었다.

“너 근데 왜 그 환자 담당 바꿨냐? 니가 처음에 한다고 한 거잖아.”

김형세 간호사는 바나나를 또 하나 까서 먹으며 물었다. 도대체 비뇨기과 병원에다 바나나만 몇 다발씩 선물하는 의도는 잘 모르겠지만, 일단 상하기도 쉬운 과일이라 간호사들이 생각날 때마다 먹고 있었다. 이강유 선생님은 먹을 시간도 없다.

“어? 아, 그거. 그냥.”

“그다지 어려운 환자도 아닌데 왜 바꿨대? 우리 환자분들은 예민하셔서 함부로 담당 바꾸고 이러는 거 자제해야 한다고 선생님이 그러셨잖아.”

우리 병원 사람들은 다들 필요 이상으로 직업 정신이 투철해서 문제야. 황경호는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그건 내가 더 잘 알거든? 그런데도 바꿀 수밖에 없었던 내 마음은 어땠겠냐고. 안 그래도 이강유 쌤한테 잔소리 들었단 말이야.”

“에휴, 젊은 사람이 그러니까 더 안타깝더라. 우리랑 동갑이던데 우리가 담당하는 게 좋은 건지 모르겠다.”

“정석이 형도 그렇게 나이가 많은 건 아니란 말이야. 28이니까. 조 간이나 정 간은 너무 어리고. 오 간호사님은 출산 휴가 나가셨으니…. 할 사람이 없다. 할 사람이.”

“아, 이럴 땐 니가 딱인데.”

“됐어. 그 인간은 나랑 안 맞아.”

“넌 홀아비 냄새나는 아저씨들이 더 좋아?”

“얼씨구? 그런 아저씨들 불쌍하다고 같이 술 푸는 니가 할 말이냐?”

환자를 걱정하는 마음이야 이강유 비뇨기과에서 황 간호사와 김 간호사만 한 사람이 더 있을까… 황경호는 문득 앱을 종료하고 김형세를 쳐다보았다.

“김 간.”

“엉? 왜.”

우물우물거리며 바보같이 대답하자 황경호가 혀를 차며 잔소리를 했다. 키도 크고 얼굴도 좋은 놈이 언제나 바보같이 구니 뭔가 계속 잔소리를 하게 되었다.

“야. 바나나를 도대체 몇 개나 먹냐. 돼지냐?”

“이거 하루 더 두면 진짜 상해.”

“그렇다고 그렇게 무식하게 먹냐…. 난 니 배에 그게 다 들어가는 게 신기하다.”

“그래?”

“어쨌든 그게 문제가 아니고.”

황 간호사는 슬그머니 눈치를 보다가 아무렇지도 않은 말투로 일단 말을 꺼냈다.

“도은혁 환자…. 뭐 다른 건 없냐?”

“음? 뭐가?”

김형세는 그새 바나나를 하나 더 깠다. 벌써 네 개째다. 아까 전에 분명 밥도 두 공기나 먹고 들어온 놈이었다. 황 간은 징그럽다는 표정으로 김 간호사를 쳐다보았다.

“그… 너한테 좀 이상한 짓 하거나… 그러진 않지? 야, 아무리 니가 바보라도 이상하다 싶은 건 이상하다고 말해. 알았지?”

“뭔 말이야?”

“뭐 없으면 다행이고….”

강동현의 담당 간호사가 김형세로 바뀐 지 거의 한 달째였다. 아무리 둔한 김형세라지만 설마 성추행도 못 알아챌 정도로 바보는 아닐 거라 믿으니 정말 별일은 없었을 것이다. 게다가 지도 은팔찌 차고 싶지 않다면 행동 똑바로 하겠지. 일단 자긴 연예인이잖아? 뭐든 일 터지면 손해는 지가 보는 거고….

황경호는 그렇게 도은혁에게 신경을 끄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그냥 시시하고 지루한 자신의 인생에 집중했다. 요새는 게임 캐릭터나 키우면서 그저 시간을 흘려보내고 있었을 뿐. 바나나만 열심히 처먹고 있던 김형세가 아, 하고 말했다.

“도은혁 환자 얘기해서 그런데.”

“음, 왜?”

황경호는 게임 속 양에게 먹이를 먹이면서 성의 없게 대답했다.

“그 환자 전립선염도 왔어.”

김형세가 쩝쩝 바나나를 밀어 넣으며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뭐, 자위도 시원하게 안 되고 벌써 반년이나 제대로 못 빼냈다는 건데…. 애초에 안 걸린 게 이상하지.”

“그 인간… 그 소리 듣고 완전 똥 씹은 표정이었겠구만.”

“똥 씹은 정도가 아니었지.”

직접 본 김형세는 그렇게 말했다. 황경호는 얼떨떨하게 눈을 깜빡거리다가 결국 크게 웃었다.

“푸하하하하. 아, 미치겠다. 쪽팔려서 어떡하냐, 그 인간. 잘난 척할 때부터 알아봤다. 그럼 그것도 치료 시작했겠네?”

“야, 무슨…. 절대 그것만큼은 못한다면서….”

“푸하하하하!”

황경호는 배꼽이 빠져라 웃었다. 근래 이렇게 웃었던 적이 언제였나 싶을 정도로 깔깔 웃었다. 그 잘난 척하는 인간의 면상과 지루, 불능, 전립선염, 그리고 전립선마사지를 떠올리니 웃음이 안 나올 수가 없었다.

“그럼 검사도 제대로 못 했겠네?”

“응. 그래서 이강유 쌤도 난처하신 것 같더라.”

“이미 여기까지 왔으면 끝난 거지 무슨 자존심을 그렇게 세우는지 모르겠단 말이야, 그 인간.”

“아직 어리잖아.”

“헹, 꼴 좋다.”

황경호는 깨소금이다, 하며 게임을 계속했다.

*

“윽… 젠장.”

벌써 오늘만 화장실을 몇 번 오는지 모르겠다. 촬영 중이었는지 멋진 차림새였지만 변기를 마주한 그의 표정은 똥을 씹어도 제대로 씹은 표정이었다. 이제는 잔뇨감뿐만 아니라 허리까지 저릿저릿했다. 계속 앉아있다 보면 아랫도리가 욱신욱신 아프기까지 했다.

“동현이 오늘 화장실 자주 온다?”

화보 촬영을 하던 포토그래퍼가 화장실에 들어왔다가 손을 씻고 있는 강동현을 발견하고 그렇게 말했다.

“아, 오늘 좀 긴장됐는지 물을 많이 마셔서….”

“하하. 김소연이 예쁘긴 예쁘지?”

“어우, 실물이 아주 그냥….”

“어려서 좋을 때다. 메이크업 한 번 더 수정하고 세 번만 더 찍자, 동현아.”

“예.”

강동현은 넉살 좋게 대답하며 화장실을 먼저 나왔다. 깍듯하게 예의를 차리고 사람의 말을 잘 받는 모습은 어디로 가고 다시 인상을 팍 구긴 얼굴로 돌아왔다. 금방 분명히 싸고 나왔는데도 여전히 잔뇨감이 남아 기분이 찝찝하기 짝이 없었다.

‘아, 진짜….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다고 진짜….’

그는 정말 열심히 살았다. 게다가 지금이 얼마나 중요한 시기인가. 이런 게 사람 발목을 잡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쪽팔려서 친구들한테도 말 못 했다. 가족은 당연하다. 인생 이제 시작이라고 생각했는데 이게 무슨 날벼락인지 모를 강동현이었다.

“후우….”

“어머, 동현 씨. 왜 한숨이에요?”

김소연이 예쁘게 웃으며 물었다. 강동현은 자동적으로 웃으며 그녀와 눈을 마주쳤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조금 피곤한 것도 같고… 근데 말 놓으세요, 소연 누나.”

“후후, 그럴까?”

다시 스튜디오 안으로 들어와서 메이크업을 수정했다. 메이크업 담당자가 강동현에게 물었다.

“동현 씨, 오늘 회식 가?”

“아, 오늘은 좀….”

“어머, 금요일이라고 약속 있는 거야? 여자 친구?”

“아아~ 아니에요. 고등학교 친구가 지금 교통사고를 당했는데 제가 오늘 밖에 시간이 안 돼서….”

“어머 어머. 많이 다쳤어?”

“아, 한두 달은 병원에 누워 있어야 하나 봐요. 엉덩이뼈가 부러져서.”

“큰일이다. 자기도 교통사고 조심해. 너무 스케줄 무리하다 사고 난다. 내가 아는 연예인들 몇도 그러다 큰 사고 났었어.”

“조심할게요.”

강동현은 연예계 내에서도 예의 바르고 깍듯하기로 유명했다. 더불어 자기 일에 항상 열심이고 열정적인 면모가 돋보여서 연기파 선배들도 꽤 아껴주고 말이다. 하지만 위의 말은 거짓말이다. 오늘은 금요일이고 금요일 오후엔 언제나 병원 예약이 잡혀 있었다. 그것도 비뇨기과. 그것도 지루와 임포와 전립선염 치료를 위해.

“근데 자기 오늘 컨디션 안 좋아? 표정이 별로 안 좋다?”

“아, 그런가요? 조금 피곤해서….”

“어머, 정말 자기 몸 관리 잘해야 돼. 오래 하려면.”

“네.”

강동현은 메이크업이 끝나고서도 잠시 의자에 앉아 거울을 보다가 자신의 무릎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는 한숨을 푹 쉬었다.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살고 싶으면 싫어하는 일 한두 개쯤은 참고 해낼 수 있어야 남자겠지?’

“후우우….”

강동현은 더 크게 한숨을 한 번 더 쉬었다.

“동현 씨, 촬영 시작합니다.”

“네! 지금 갑니다!”

*

하고 싶은 일을 마음껏 할 수만 있다면 싫어하는 일 한두 개가 아니라 백 개도 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시절도 있었는데.

“도은혁 환자님, 사실 이게 그렇게 큰일이 아닙니다. 촉진으로 어떤 감염군인지를 일단 알아내야 약을 먹을지 아니면 ‘다른’ 치료를 해야 할지를 알 수 있는 거라니까요.”

진료실의 안에서는 인내심이 부처님과 같은 수준인 이강유도 이제 슬슬 짜증이 올라오는 모양이었다. 강동현은 딱딱하고 기계적인 음성으로 답했다.

“……저는… 아직…… 마음의…… 준비가…….”

사람의 마음이란 것이 어찌나 간사한 것인지. 화장실 들어갈 때 마음과 나올 때 마음이 다르다고, 강동현은 고작해야 항문에 손가락 하나 넣는 것 가지고 이렇게 주저하는 자신에게 좀 실망하고 말았다.

‘씨발. ‘고작’은 아니지 솔직히.’

“후우…. 정 그러시다면… 천천히 생각하시고 결정하셔도 됩니다. 일단 잠시 상담실에서 생각 더 해보시겠습니까?”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렇게 강동현은 상담실 중 하나로 소변 컵 세 개를 든 채 쫓겨났다. 아직도 밖은 환자들이 많아서 그다음 환자를 부르는 목소리와 응답하는 환자의 목소리, 간호사들의 분주한 발걸음, 간혹 진료실이나 수술실에서 나와 간호사들에게 뭔가를 말하는 의사의 목소리도 들렸다.

“아, 경호야. 오늘은 초밥 먹자. 초밥 시켜라.”

“아싸! 근데 오늘 저녁은 약속 없으세요?”

“취소했다. 오늘 예약 환자가 밀렸잖아. 그냥 돌아가시게 할 수도 없고.”

“역시 우리 쌤! 병원 생각하는 마음 하나만은 끝내주시네요.”

“내가 그것만 끝내주냐?”

“이런 점이 가끔 몹시 짜증 나긴 하지만 부정할 순 없군요.”

황경호가 장난스러운 진지함으로 그렇게 평했다. 바로 강동현이 들어있는 상담실의 밖에서 오간 대화라 듣기 싫어도 들렸다. 그런데, 그러고 갑자기 강동현이 들어있는 상담실 문이 벌컥 열렸다.

“초밥! 초밥…….”

문을 벌컥 열고 들어왔다가 강동현을 발견한 황경호의 밝은 표정이 바로 확 꺼졌다. 쭈뼛쭈뼛 나갈까 들어갈까 머뭇거리더니 살살 조심스럽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거기 서랍에 배달음식 책자가 있어서…. 하하….”

역시 웃는 얼굴 하나만큼은 기가 막히게 익힌 황경호라 땀은 등 뒤로 삐질삐질 흘리고 있을지언정 미소 짓는 얼굴만큼은 순진무구한 소년 같았다. 황경호는 얼른 들어와 서랍 안에서 책자를 집어 들었다가 문득 상담실의 책상 위에 올려져 있는 세 개의 소변 컵과 푹신한 소파 의자에 삐딱하게 앉아 있는 강동현을 차례로 보았다. 그리고는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그냥 하지…….”

강동현이 눈썹을 추켜올렸다. 황경호는 아차, 하고 입을 합 다물었다.

“이 병원은 환자들 신상을 나불나불 잘도 얘기하나 보지?”

아니나 다를까. 실은 만만찮은 성격의 강동현이다. 삐딱하게 황경호를 올려다보며 그렇게 말하자 실수한 황경호는 손사래를 치며 얼른 변명했다.

“무슨 얘기 안 들었어요! 아무것도 못 들었어요! 우리 쌤이 그런 거에 얼마나 엄격한데…! 그냥 도은혁 환자님 상태에서 소변 컵 세 개를 앞에 두고 고민할 상황이라면 역시 그거밖에 없지 않겠나 싶어서….”

“역시 ‘그거’가 뭔데?”

“전립선염…….”

황경호가 눈치를 보면서 그렇게 중얼거렸다. 강동현은 인상을 팍 찌푸렸다. 강동현의 심기 불편한 얼굴을 보다가 결국 오지랖을 참지 못한 황경호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이게 늦으면 늦을수록 증상이 심해지는 건데요…. 고치기도 힘들어지고 재발률도 높아진다니까요. 도은혁 씨처럼 고 스트레스군 직업일수록 더 그렇다구요. 눈 한번 딱 감고 하면 못 할 짓도 아니에요, 그게….”

강동현은 짜증스러운 시선으로 황경호를 노려보았다.

“너보고 하라면 하겠냐?”

“예? 뭐… 필요하면 하겠죠?”

“하, 넌 안 필요하니까 쉽게 얘기하는 거 아냐. 너도 막상 너한테 닥치면 털끝만큼도 안 망설일 거라고 자신할 수 있어?”

‘너는 지금 털끝만큼이 아니라 무려 3주를 망설이고 있잖아요.’

황경호는 그 말이 턱 끝까지 올라왔지만 참았다. 환자랑 싸워봤자 손해는 이쪽이고.

“도은혁 환자님, 그걸 그렇게 부정적으로만 받아들이지 마시고 그냥 아무것도 아니다, 하고 최면을 걸면서….”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니니까 내가 이러잖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짜증 나고 토 나오는데 어떡하라고.”

“그럼 어떡해요. 그걸 그냥 그렇게 놔둘 거예요? 임포나 지루야… 뭐 안 하면 티 안 나지만 전립선염은 일상생활하기 진짜 힘들어요. 알잖아요.”

강동현의 표정이 더 일그러졌다. 하기사 싸도 싸도 싼 거 같지 않고 앉아도 일어나도 누워도 아랫도리가 불편하고 심지어 아프기까지 한 병인데 모를 리가 있겠는가.

“그냥…… 약 먹고 치료하면 안 되는 거냐고….”

강동현이 그나마 좀 누그러진 음색으로 그렇게 말했다.

“전립선염이 세 가지 종류가 있는데 그게 각각 치료법이 달라요. 일단 어떤 것에 감염이 되었는지 알아보려면 전립선액을 배출해야 하는데 그걸 하려면 일단 전립선 마사지하기 전에 첫 소변, 중간 소변 받고 마사지 후에 한 번 더 받은 후 현미경으로 샘플 관찰을 해서 세균을 알아내야 해요.”

“그건 이미 들었어.”

“전립선염은 결국 전립선액이 배출이 되지 못해서 일어나는 증상인데 강동현 씨 같은 경우는 지루에다가 임포라서 성생활도 자위도 힘든 상태라 나중에도 전립선마사지가 계속 필요할지도 모르는데 벌써부터 이러시면….”

“그걸…. 계속…… 해야 한다고…?”

황경호는 강동현의 말에 어…. 하면서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는데 일단은 검사는 해야….”

강동현은 완전 삐진 어린애 같은 얼굴이 되었다. 황경호야 얼굴이 귀엽고 어린애 같은 인상이었지만 실상은 근래 우울증을 겪으며 허무함이 깃든 늙은이 같은 반면, 강동현은 건장한 성인 남성의 얼굴과 몸을 한 주제에 간혹(자주) 저렇게 어린애 같이 굴었다.

“그럼….”

그래. 방송에서 보이는 것과 다르게 매우, 아주 자주, 올 때마다 유치하게 굴지. 황경호는 문득 그렇게 생각하며 강동현을 보았다. 강동현은 삐진 어린아이 같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니가 먼저 해봐.”

“…네?”

“니가 먼저 시범을 보여 보라고.”

황경호는 어이가 없어서 따지고 들었다.

“억지를 부릴 걸 부려요. 지금 그걸 안 해서 손해 보는 게 저겠어요, 도은혁 환자님이겠어요?”

마치 유치원 선생님이나 할 법한 얘기를 하고 있었지만 정말 상대는 쪼그만 유치원 애보다 못한 짓을 황경호에게 강요하고 있었다.

“치료하는 사람인 니가 먼저 시범을 보여 보라는 게 뭐가 억진데? 나는 잘 모르니까 니가 시범을 보이라고. 자기 똥구멍에 남의 손가락이 들어오면 어떤지 니가 말을 해달라니까.”

“아니… 정말 별거 없어요. 매일 아침 화장실 가서 힘주는 거랑 그다지 느낌이 다를 바가 없다니까요. 아, 좀 변비 걸렸을 때 느낌 난다고도 하고… 물론 사실… 전립선 마사지하면 좀 기분이 이상한 건 맞아요. 맞는데… 그래도 사람이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일이라는 게 있잖아요.”

황경호가 설득을 하고자 손짓 발짓해 가면서 제발 좀 말 좀 들으라는 식으로 열변을 토했다. 하지만 오히려 그럴수록 강동현은 삐딱하게 나올 뿐이었다.

“그러니까 너도 이게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한번 해보라니까. 내 눈앞에서.”

“도은혁 환자님, 그게 그렇게 막 강요한다고 되는 게 아니잖아요. 모든 의사가 환자 앞에서 치료시범을 보이는 것도 아니고. 그렇게 치면 우리 선생님은 음경확대수술을 천 번은 더 했을 거라구요.”

“그거랑 이거랑은 다르잖아. 이거 한다고 별일 생기는 거 아니라고 말한 건 너잖아.”

“물론 그건 그렇지만… 아, 게다가 의료기구를 사용하려면 의사의 지시가 필요한데 저는 의사가 아니고, 병도 없는 저한테 이강유 선생님이 기구를 함부로 사용하라고 말할 리도 없고, 그리고 애초에 시술 자체도 의사만 할 수 있는 거고… 이게 제가 함부로 하면 의료법 위반이라….”

황경호는 아, 맞다, 하는 식으로 주절주절 의료법 위반이니 의사의 지시니 떠들어댔다. 강동현은 시큰둥하게 손을 휘휘 저었다.

“아, 무슨 말 하는지 모르겠고. 그냥 해봐. 그럼 나도 할 테니까.”

“아, 진짜 이 인간 보면 볼수록 사람이…!”

황경호가 결국 참지 못하고 버럭 했다.

‘지가 어린애야? 초딩이야? 그렇다고 지가 중딩이야? 고딩이야? 대딩이야? 사회인이면서 일 한두 번 해보나! 진짜 이건 뭐…! 못 알아들을 만한 인간도 아니면서 이렇게 말귀를 못 알아듣는데, 진짜! 드라마나 영화나 CF에서는 그렇게 멋있게 나오면서! 이걸 찍어서 인터넷에다 확 올려버릴까 보다!’

황경호는 생긴 것과 다르게 매우 눈치가 빠르고 사람들의 기분을 잘 파악했다. 처음 만났든 오래 만났든 사람들의 비위를 잘 맞춰주었고 그랬기에 지금껏 살아오며 크게 싸워본 적도 감정 상해가며 언성을 높여봤던 적도 별로 없다. 그래서 이런 상황이 더 싫었다. 싫기 때문에 그렇게 살아온 것이니까 말이다.

“흥. 지도 못 하면서 남보고 하라 마라야.”

강동현이 그 모습을 보며 픽 비웃으면서 사람의 신경을 긁었다. 황경호는 오랜만에 짜증이 마구마구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는 타인에게 크게 기대를 해본 적이 없어 사람에게 크게 실망해 본 적도 없으며 심지어 자신에게조차 큰 기대를 걸어본 적이 없다. 그런데 근래에 그런 그의 신경을 긁고 짜증을 나게 하는 인간이 있었다. 정말 몇 번 얼굴도 제대로 마주쳐보지도 못한 동갑의 남자였다. 사는 세계도 전혀 다르고 성격도 살아가는 태도도 배경도 완~전 다른, 그냥 완벽한 타인.

황경호는 간만에 짜증이 치밀어 오르니 감당도 되지 않았고 표정도 관리를 못 해 잠시 미간을 찌푸리고 한숨을 푹 쉬었다.

“진짜 댁 같은 저질…. 내가 두 번 다시 또 상대하면 손에 장을…….”

“됐다고. 하기 싫으면 안 하면 될 거 아냐? 너야말로 왜 남 일에 열불이야?”

신경은 있는 대로 긁어놓고 이쪽만 바보로 만드는 강동현의 말에 황경호가 주먹을 꽉 쥐고 겨우 욕설이 튀어나오려는 것을 막았다. 화가 나서 웃는 얼굴도 제대로 안 만들어지는 황경호는 이를 박박 갈면서 강동현에게 말했다.

“진짜 내가 어이가 없어서… 하, 진짜…. 후… 좋아요. 진짜 내가 하면 하는 겁니다? 예? 하는 거예요? 진짜 다 큰 남자가 쪽팔리게… 어휴. 아, 뭐 이런 진상이 다 있어?”

황경호는 지금껏 아무리 짜증 나는 환자가 있어도 한 번도 그런 폭언을 내뱉은 적이 없었다. 강동현은 아랑곳하지 않고 해볼 테면 해봐, 이런 표정으로 삐딱하게 황경호를 보고 있을 뿐이었다. 황경호는 짜증 서린 목소리로 강동현을 불렀다.

“이쪽으로 따라와요.”

황경호는 상담실 책상 위에 있는 소변 컵들을 챙겨서 진료실 쪽 문을 열었다. 이강유는 자기 오피스에서 상담을 하고 있는 중인지 진료실은 비어있었다.

“참나, 내가 진짜 별짓을… 똥이 더러워서 피하지 무서워서 피하나. 오십 대 아저씨들도 저렇게 진상 안 부린다고. 아, 진짜 올해 수상하다, 수상해.”

황경호는 투덜대면서 냉장고같이 생긴 은색 물체에서 무언가를 꺼내고 수술용 장갑과 무슨 이상한 약들을 챙기더니 그것을 은빛 스테인리스 쟁반 위에다 올리고 또 어딘가로 걸어갔다. 침대 하나에, 옆에는 고가의 장비들이 여럿 서 있는 치료실처럼 보이는 방으로 들어갔다. 강동현이 따라 들어가면서 문을 닫았다.

황경호는 들고 온 쟁반을 세게 침대 위에다 내려놓더니 자기 바지를 진짜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홱 내렸다. 속옷도 한 번에.

“하, 진짜 이게 뭐라고….”

황경호는 정말 이해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게 엄한 짓 하는 것도 아니고 치료를 하겠다는 것뿐인데 뭐가 그렇게 부끄럽고 그렇게 싫다는 거냔 말이다. 의사고 간호사고 다른 사람들을 이렇게까지 괴롭히면서 못할 일이냐는 것이다, 이게.

‘치료를 안 하면 손해는 자기가 보지 의사가 보나? 간호사 봐? 다 지 손핸데 왜 안 하겠대? 이게 부끄러워? 무슨 생각을 하길래 이게 부끄럽다는 거야? 여자 앞에서 엉덩이 까? 남자 앞에 까는데 뭐가 그렇게 부끄럽다고. 어이고, 진짜 별꼴이….’

강동현은 들어오자마자 바로 엉덩이를 까는 황경호한테 조금 놀라긴 한 모양이었다. 눈을 크게 뜨고 황경호의 엉덩이를 쳐다보았다. 황경호는 뒤돌아 서 있었기 때문에 그 시선은 알아차리지 못하고 오른손에 수술용 장갑을 끼면서 아주 못마땅하다는 표정과 목소리로 설명했다.

“장갑을 낀 검지와 중지에 젤을 바릅니다. 그리고 이렇게 항문에 집어넣어서….”

혼자서 하는 거다 보니 침대에 하복부와 치골을 기대었다. 허리를 숙여 몸의 무게를 지지한 자세로 왼손으론 침대를 짚었다. 바지와 팬티는 발치까지 흘러내렸고 몸을 조금 숙인 자세 때문에 엉덩이가 훤히 드러냈다. 장갑을 낀 손가락이 엉덩이의 사이에 망설임 없이 다가가더니 젤로 적셔진 중지가 들어갔다. 한 번에 검지까지 같이 들어가지는 않는지 읏, 하며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뽀송뽀송하고 부드러워 보이는, 남자치고는 굉장히 동그란 엉덩이의 사이에 숨겨진 분홍색 치부가 이물이 어색한지 젖어서 움찔대는 것이 강동현의 눈에 적나라하게 비춰지고 있었다. 황경호는 그냥 이 상황이 짜증이 날 뿐인지 아무렇지도 않게 억지로 검지까지 집어넣었다.

“그리고 촉진을 일단 합니다. 병리적인 현상이 어떤지, 전립선을 만졌을 때는 어떤지….”

그대로 손가락을 빼내려고 하자 강동현이 미간을 찌푸리며 집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전립선 안 만져?”

황경호가 인상을 찌푸렸다.

“이게 원래 혼자 하는 게 아니라서 이렇게 해선 못 만져요. 예시를 보여주는 거예요.”

“아니, 그럼 이게 무슨 소용이야?”

강동현이 그렇게 말하자 황경호가 겨우 참으며 이를 벅벅 갈며 대답했다.

“손가락으론 안 돼도 마사지 기계로는 닿으니까 기다리세요, 도은혁 환자님.”

그 말에 강동현은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키며 은색의 쟁반 위를 보았다. 딱 봐도 딜도… 비슷하게 생긴 굵은 봉이 위에 올려져 있었다. 황경호는 그냥 이 상황이 짜증 그 이상 이하도 아니라는 듯이, 항상 잘 웃는 그 얼굴을 못마땅한 듯이 구기고서는 그래도 정중한 말투로 설명을 계속했다.

“아까 전에 말했죠? 첫 소변, 중간 소변을 받고 난 뒤에 전립선마사지를 합니다. 이때는 보통 이렇게 생긴 정식 전립선마사지기계를 사용하는데 검사 시에는 약 10분가량 하고 치료를 위한 전립선마사지를 할 때는 30여 분가량 마사지를 하면서 빠져나오지 못한 전립선액을 빼냅니다.”

말을 하면서 황경호는 엄지와 검지를 모아 원을 만든 정도의 굵기를 가진 기계에 젤을 발랐다. 자기한테 쓰는 건데도 그다지 성의 없는 손길이었고 곧바로 왼손으로 자기 엉덩이를 한쪽으로 벌리더니 그것의 끝을 입구에 맞추어 천천히 눌렀다.

“으으….”

황경호가 어깨를 움츠리며 인상을 썼다. 생각보다 잘 안 들어가는 데다가 자세가 불편했다. 황경호는 정말 그다지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왼쪽 다리를 바지와 팬티에서 빼내어 침대 위에 올렸다. 다리를 벌리면서 동시에 몸도 안정적으로 지탱하게 되자 왼손으로 다시 엉덩이를 쫙 벌리고 그사이에 기계를 밀어 넣기 시작했다.

확실히 이렇게 굵은 걸 집어넣으려니 아프기도 했고 밀려들어 오는 느낌이 불쾌하기는 했지만 이것이 치료를 위한 것이라고 생각하면 아무렇지도 않았다. 당연한 것 아닌가? 황경호는 눈을 질끈 감고 끝까지 밀어 넣은 후 스위치를 켰다. 지이잉 하며 마사지 기계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황경호는 고개만 뒤를 돌려 강동현을 보며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이게 전부라구요. 알겠어요? 이게 뭐라고 다 큰 남자가….”

하고 뒤돌아보는데 황경호는 강동현이 발기한 자신의 성기를 잡고 그의 엉덩이를 뚫어져라 보며 자위를 하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황경호는 기겁해서 입을 딱 벌렸다.

“뭐뭐뭐뭐하는 짓이에요!!”

황경호는 깜짝 놀라서 저도 모르게 앞으로 도망칠 듯했다가 침대를 밀어 앞으로 꼬꾸라졌다. 무릎을 바닥에 세게 부딪친 황경호는 아야야, 하면서 신음을 흘렸다. 몸을 일으키려는데 살을 드러낸 엉덩이에 커다랗고 뜨거운 손이 닿아왔다.

“히익…! 잠깐만…!! 뭐하는 짓이에요!!!!”

맨살에 닿은 강동현의 손에 황경호가 깜짝 놀라 그 손을 떼어내려고 했지만 강동현은 그 엉덩이를 오히려 꽉 쥐며 흥분한 눈으로 엉덩이를 추켜 올린 황경호의 모습을 핥듯이 훑어보았다. 황경호는 그 눈길에 온몸에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가만히 있어.”

“가만히 있긴 뭘 가만히 있어요!! 손 당장 안 떼!? 이 변태 새끼야!!!”

강동현은 덩치만큼 꽤 힘이 강해서 그 손으로 등을 짓누르자 옴짝달싹도 할 수가 없었다. 엉덩이만 치켜든 민망한 자세로 오른손목이 등 뒤에 둘러져 짓눌린 채로 황경호가 고통에 찬 신음을 흘렸다.

“으윽… 아, 진짜 뭐하는… 제길….”

남에게 이런 식으로 힘에 짓눌러져 본 적은 처음이다. 정말 불쾌하고 기분이 나빴다. 게다가 상대가 지금 자신을 어떤 식으로 보고 있는지 깨닫자 그 불쾌감은 배로 뛰었다.

“당신 진짜 변태야? 게이야? 지금 도대체 뭐하는 짓이야? 안 놔?? 젠장, 경찰에 바로 신고해버릴 거라고! 그러면 당신 인생도 끝장나는 거 아냐?!”

“윽… 미안한데… 조금만 가만히 있어 봐. 다른 짓은 안 할 테니까.”

다른 짓은 또 뭔데!? 황경호가 이를 갈며 팔을 비틀어 빼려고 했지만 강동현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엉덩이에 꽂혀 여전히 징징대는 마사지 기계 때문에 수치감이 끊임없이 들었다. 분명 어디를 어떻게 하고 있는지 적나라하게 상상되는 강동현의 자위 소리에 황경호는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불쾌감이 도를 넘어서고 있었다. 이런 곳에서 이런 식으로 누군가에게 깔려서 이런 꼴사나운 모습을 하려고 지금까지 힘겹게 살아온 것이 아니었다.

“으윽…!”

엉덩이에 뜨뜻미지근한 불쾌한 액체가 뿌려졌다. 황경호는 불쾌감에 몸서리를 치며 겨우 견뎠다. 등 뒤에서 숨을 거칠게 몰아쉬고 있는 최악의 남자는 그러고도 잠시 있은 후에야 꺾어 누른 황경호의 팔을 풀어주었다. 어깨가 빠질 것같이 아팠다. 황경호는 왼팔로 바닥을 짚고 몸을 일으켰고 일단 엉덩이에서 그 지랄 맞은 마사지 기계를 뺐다. 사정 후의 탈력감에 정신을 못 차리고 주저앉아 있는 강동현을 내버려 두고 자리에서 일어나서 준비된 물수건으로 젤과, 그리고 상상하기도 싫은 강동현의 체액을 닦아 내었다. 그리고 속옷과 바지를 끌어올려 옷차림을 바르게 했다.

“이 변태 새끼!!”

그리고 곧바로 강동현의 멱살을 잡고 주먹을 치켜들었다. 탈력감에 빠져 정신을 못 차리는 강동현이었지만 먼저 선수를 쳐 황경호의 오른손목을 잡아 끌어당겼다. 바닥에 앉아 있는 강동현이 그렇게 끌어당기니 그 무게에 황경호의 자세가 무너져 강동현의 품에 거의 안기다시피 되었다. 게다가 오른쪽 어깨가 정말 심상치 않게 아파서 팔에 힘이 들어가지가 않았다.

“얼굴은 피해.”

강동현은 여전히 사정감에 제정신이 아닌지 황경호의 얼굴도 제대로 쳐다보지 않고 숨을 헐떡이는 채로 그렇게 말했다. 미안한 기색도 없고 죄책감의 기색도 없다. 황경호는 화가 있는 대로 나서 그를 뿌리치고 일어났다. 그리고 발로 그의 배를 퍽 걷어찼다.

“미친놈! 죽어버려!”

그리고 황경호는 정신없이 밖으로 나왔다.

“경호야, 초밥은?”

이강유가 마침 환자를 다 봤는지 기지개를 켜며 물었다. 황경호가 퍼득 고개를 들고 그를 바라보았다.

“아…… 선생님, 죄송합니다. 제가 지금 정신이 없어서…… 아, 그러니까 지금 시킬게요. 네….”

“장갑은 뭐냐?”

“아… 이거… 아니, 아무것도 아니에요. 정리하다가… 저 일단 초밥… 전화기….”

황경호는 황급히 장갑을 벗어 말아 쥐고 아까의 상담실로 뛰어들어가 책자를 집어 들고나와 카운터에서 초밥집에 전화를 걸었다.

“네. 대자 두 개요. 네… 네… 청담빌딩 4층… 예, 아시네요. 네. 기다리겠습니다.”

전화를 끊는데 카운터의 앞에 누군가가 있었다. 이강유의 다정하고 커다란 손이 황경호의 머리에 닿았다. 쓰다듬는다.

“경호야, 무슨 일 있었어? 왜 이렇게 정신이 없어?”

황경호는 그 순간 무언가 울컥했다.

정말 정말 울컥했다.

눈시울이 뜨거워져서, 감정이 복받쳐 얼굴의 표면이 뜨거워졌다.

“아, 무슨… 아무것도 아니에요. 오늘 바빴잖아요. 정신이 없네요, 제가. 하하. 그럼 저… 잠깐 화장실 좀…… 아까부터 참았더니 쌀 것 같아요.”

“하하, 화장실 때문이었냐. 방광 안 터지게 조심해라.”

황경호는 웃는 얼굴로 그 자리를 빠져나왔다. 밖으로 나와 화장실로 들어가 가장 끝에 있는 좌변기실에 들어가 문을 잠갔다.

“으흑…….”

죽고 싶었다. 그냥 죽고 싶었다. 순수하게 그냥 죽고 싶다는 마음만이 부풀어 올랐다. 이렇게 살기 싫었다. 그 자신도 자기 인생이 지루하고 지겹고 짜증이 나고 매일이 못 죽어서 살아가는 병신 같은 삶인데, 이제는 저런 놈까지 사람을 무시하고 짓밟고 하찮게 만들었다.

나 자신이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아무런 의미 없이 맞추는 3000개의 퍼즐처럼, 시간이나 죽이자고 하는 게임처럼, 누구도 세지 않는 타일의 개수나 그저 갈 길 가고 있는 일본왕개미 무리의 개체 수나, 멀쩡한 인간인 척하는 역겨운 자신의 웃는 얼굴처럼.

왜 이렇게 되었을까. 뭐가 문제일까. 나는 왜 다른 사람들처럼 멀쩡하게 소박한 꿈을 꾸며 인생을 즐기며 그렇게 살아가는 게 불가능한 걸까. 그래도 적어도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 끼치지 않고 살아왔다고 생각했는데 어째서 주변은 이렇게 가만히 있는 나를 건드리는 걸까. 내가 뭘 잘못했길래. 내가 뭘 했길래.

내가 자신을 의미 없고 하찮게 여기니까 다른 사람도 나를 그렇게 보는 걸까? 밖으로 티 내지 않으려고 그렇게 노력했는데도 열등감과 소심함이 밖으로 표출되는 걸까? 그러니까 도은혁 같은 개새끼가 나를 이렇게 병신같이 취급하는 걸까?

“으흑… 흐으윽… 흑….”

어떻게 계속해서 이유를 붙이려고 해도 슬픔이 가라앉지 않았다. 눈물이 계속 떨어졌다. 이렇게 울어본 것이 도대체 얼마 만일까. 우울하고 기분이 나쁘고 가슴이 답답하고 불안해서, 뭔가 화를 내거나 울어서 기분을 풀고 싶은데도 시원하게 눈물이 나오지가 않았었다. 슬픈 영화를 보거나 불쌍한 사건을 보면 금세 눈물이 나오면서도 자기 자신을 위해서는 눈물이 나오지가 않았다.

그런데 지금은 정말 비참하고 초라해서 눈물을 흘리고 싶지 않은데도 눈물이 펑펑 나오는 것이 너무나 억울했다. 이런 상황에서 혼자 화장실에 틀어박혀 울기까지 하니 더 짜증 나고 억울하고 비참한 데도 계속 눈물이 나왔다.

이건 강동현 때문에 우는 것이 아니었다. 지금까지의 인생이 짜증 나고 마음에 안 들고, 지금의 자신도 싫었기 때문에 나오는 눈물이었다. 강동현 같은 건 그저 마지막 한 방울에 불과했다. 자기 자신에 대한 미칠 듯한 혐오감이 발끝에서부터 머리끝까지 채웠다. 주먹을 들어 강동현이 아니라 자신을 내리치고 싶은 강한 자해 욕구가 들끓어 올랐다.

그렇게 한참을 울고 기운이 다 빠져 더 이상 흘릴 눈물도 없자 겨우 오열이 멈추었다. 온몸에 기운이란 기운은 하나도 없었다. 무기력감이 온몸을 잠식해서 숨쉬기도 힘들어졌다. 죽는다면 그냥 이대로 죽었으면 좋겠다. 정말 더 이상은 못 살 것 같았다.

[경호야, 무슨 일 있었어? 왜 이렇게 정신이 없어?]

‘아… 죽어도 여기서 죽으면 안 되지….’

황경호는 눈물을 훔치고 오금에 힘이 빠진 다리로 겨우 일어났다. 세면대와 마주하니 눈이 새빨개지긴 했어도 그다지 눈도 안 부은 눈물 젖은 얼굴이 보였다. 수돗물로 여러 번 얼굴을 씻어냈다. 핸드타월로 얼굴을 닦아내고 다시 병원으로 들어왔다.

“음? 경호야, 초밥 왔다. 와서 먹어.”

“아… 근데 저 오늘 집에 뭔 일이 있는 걸 깜박하고… 저 먼저 가볼게요, 선생님.”

“뭐? 그래? 무슨 일인데? 초밥 이렇게 많은데 우리끼리 어떻게 다 먹어?”

“형세가 다 먹을 수 있어요.”

황경호는 웃는 얼굴로 그렇게 말하며 간호사실로 들어가 빠르게 옷을 갈아입었다. 챙길 짐도 그다지 없었다. 황경호는 다시 대기실 쪽으로 나왔다. 그리고 평소 환자들이 앉아 기다리는 고급스런 벨벳 소파에 앉아 초밥으로 거나하게 저녁을 먹고 있는 병원 식구들을 보며 인사하려고 했다.

“아, 도은혁 환자님. 결정은 하셨나요?”

진료실인지 상담실인지 애매한 곳에서 강동현이 옷까지 다 갈아입고―선글라스, 마스크, 모자, 후드티까지―나왔다. 그 모습을 보고 말을 걸던 이강유가 설마 오늘도…? 라는 눈빛을 감추지 못하고 그를 보고 말았다.

“…어쩔 수 없으니까 하긴 해야죠. 그런데….”

강동현은 음식을 먹고 있는 간호사들을 쭉 훑다가 문가에 있는 황경호에게까지 시선이 닿았다. 황경호는 그에게 무미건조한 시선을 한 번 주고는 병원 식구들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그는 다시 또 웃는 얼굴이 되었다.

“오늘도 수고하셨습니다. 저 먼저 퇴근할게요.”

“그래, 가라.”

“월요일에 보자. 그럼 도은혁 환자님 지금이라도…?”

황경호는 그대로 자동문을 열고 나갔다. 강동현은 그 뒷모습을 보고 있었다. 투명 문을 나서자마자 황경호가 급하게 엘리베이터를 잡는 게 보였다.

“다음에… 하겠습니다.”

강동현은 움찔하고 앞으로 걸어가려다가 의사를 한 번 보고는 다시 문 쪽으로 시선을 돌리며 그렇게 말했다. 이강유는 조금 한숨을 쉬고는 평소처럼, 아까의 황경호보다는 점잖고 차분한 음성으로 강동현을 설득하려고 들었다.

“그게 미루면 미룰수록 증상이….”

“진짭니다. 다음 주에 오면 바로 할게요. 죄송합니다. 지금까지 기다리셨는데. 저 급한 일이… 가보겠습니다.”

강동현은 그렇게 말하고 급하게 병원을 빠져나갔다. 김형세가 그 모습을 보고 젓가락으로 그를 가리키며 어어, 거렸다.

“어? 도은혁 환자님 수납… 갑자기 뭐지?”

“어차피 다음 주에도 오시는 분이니까 그때 받아라. 그나저나 초밥 어떡하냐. 남겠는데?”

“저 정말 다 먹을 수 있어요.”

“그래? 너 돼지니?”

*

지하주차장에 차가 주차되어 있었지만, 강동현은 급하게 1층으로 내려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저쯤에서 손을 휘저어 택시를 잡고 있는 황경호가 보였다. 택시에 마저 다 타기도 전에 목적지를 급하게 말하는 황경호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마포대교요.”

‘마포대교?’

강동현은 자신이 잘못했다는 자각은 있었다.

물론 심각하게 미안함을 느끼고 있는 것은 아니긴 했지만.

한 달 전에 황경호에게 지분거릴 때도 물론 성희롱이니 잘못이라고 생각은 했다. 그래도 장난 반 섞어서 한 것이 있었는데 오늘은 힘으로 억눌러서 정말 억지로 해버렸다. 어쨌든 신고라도 하면 곤란한 건 이쪽이다. 그래서 돈이든 사과든 원만히 합의할 목적으로 정신이 수습되는 대로 나온 건데. 보니까 다행히도 병원의 다른 사람들에게 얘기한 것 같지는 않았지만, 금방 느낌이 정말 이상했다.

[…오늘도 수고하셨습니다. 저 먼저 퇴근할게요.]

강동현을 잠시 봤는데 화난 표정도, 혐오감이 서린 얼굴도 아니었다. 그저 ‘거기 뭔가 있구나’하는 표정으로 강동현 자체는 안중에도 없는 얼굴이었다. 그랬던 주제에 병원 식구들에게는 평소처럼 살뜰하게 웃으면서 인사했다. 그리고 퇴근한다면서 마포대교라니….

“설마…….”

강동현은 정말 설마설마하면서도 왠지 불안해졌다. 그는 자신의 직감을 꽤 믿는 편이었으므로 급하게 지하로 내려가 차를 몰고 올라왔다. 그리고 마포대교 쪽으로 액셀을 밟았다.

“아, 나는 왜 맨날 이런 시간에 예약을 잡아가지고….”

금요일마다 이 차량들을 다 뚫어가며 운전을 하다 보면 1시간이고 2시간이고 소리 소문 없이 흘러갔다. 강동현은 차를 끌고 나오자마자 후회했다. 저 간호사도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 시간에 택시를 잡은 거지? 택시비 장난 없을 텐데.

“하긴 죽으려는 새끼가 그런 거 따지지는 않겠지.”

문득 말하고 나니 강동현은 인상을 확 찌푸렸다.

‘마포대교라고 해서 좀 섬뜩하긴 한데…. 정말 죽으려는 건 아니겠지? 그게 뭐라고…. 끝까지 당한 것도 아니고 사내새끼가 몇 대 치고 풀면 될 걸 가지고……’

몹시 가해자 중심적인 몹쓸 생각이었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역시 이런 일로 죽겠다고 마음먹는 것은 정말 이해가 되지 않았다. 마포대교까지는 시간만 가고 차는 드럽게 안 갔다. 그래도 어쨌든 도착해서 마포대교 도로변에 차를 대니 뒤고 앞이고 장난 없이 빵빵거렸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주위를 황급히 둘러보았다. 보행자는 하나도 없는 보도 위에 강을 바라보며 난간에 기대어 있는 한 사람을 발견할 수 있었다.

여전히 설마설마하고 있긴 했지만, 그는 지금 차들이 시끄럽게 빵빵거리고 있는데도 돌아볼 생각을 하지 않았다. 문득 얼굴을 보았는데 언제나 웃는 얼굴이 웬말인 듯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강동현이 그대로 다가가지도 못하고 엉거주춤 서있는데 이게 진짜로 난간 위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우악! 야! 야야!! 뭐하는 짓이야? 미쳤어? 내려와!!”

강동현이 전속력으로 달려가서 난간의 위에 앉은 황경호의 다리를 잡았다. 황경호는 미간을 찌푸리고 그제야 강동현을 발견했다. 그가 왜 여기 있는지 이해를 못 하는 표정이었다.

“야, 이…! 내가 잘못한 건 알겠는데 그렇다고 이건 아니잖아!”

강동현이 기겁을 해서 황경호에게 소리쳤다.

“진짜 진짜 사과할게! 내가 그때 정신이 나가서 그런 짓 했는데…! 진짜 미안하다! 앞으로 다시는 그런 일 안 할 거고…! 와, 진짜…! 근데 이건 진짜 아니잖아! 빨리 내려와!!”

자살을 하려고 시도하는 사람은 처음 보았다. 강동현은 진짜 심장이 떨어지는 줄 알았다. 황경호를 끌어내리려고 했는데 그가 버티고 내려오지 않았다. 황경호가 차분히 입을 열었다.

“너 뭐야? 무슨 소리 하는 거야?”

“……자살하려는 거 아냐?”

강동현은 순간 자신이 잘못 짚었나 싶어 황경호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

황경호는 말없이 강동현의 당황한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그쪽이랑 상관없는 것 같은데. 내가 뭘 하든 그쪽이랑 무슨 상관이야?”

어린 소년 같은 황경호의 얼굴 때문인지… 강동현은 조금 짜증스런 얼굴로 한숨을 쉬었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런 일로 자살까지 한다는 게 말이 되냐고. 장난치지 말고 빨리 내려와.”

강동현의 말투에 기분이 나쁠 법도 해서, 평소의 황경호라면 속으로 엄청 욕했을 것이다. 잘난 척하는 데다가 명령하는 말투가 재수 없다고. 하지만 황경호는 그저 조용히 강동현한테서 고개를 돌렸다. 한강을 바라보았다. 하늘도 쳐다보았다. 햇빛이 쨍쨍했지만 강바람이 제법 불어서 시원했다. 몸이 가벼웠다. 오랜만에 마음이 평온했다. 정말 죽기 좋은 날이다.

“별일 아니니까 그냥 가세요. 날씨가 좋아서 바람 쐬고 있는 것뿐이에요.”

황경호는 손을 뻗어 다시 그를 억지로 끌어내리려는 강동현의 손을 피하며 강동현을 돌아보았다. 황경호는 평소처럼 포스터에 들어가도 손색없을 정도로 순진한 얼굴로 웃으며 말했다.

“바쁘신데 쓸데없는 데 신경 쓰지 마시고 가세요.”

“뭐?”

잘못 짚은 건가? 강동현은 아까보다 더 당황해서 바보 같은 소리를 내었다.

“저는 괜찮아요. 어서 가세요.”

“너… 자살하려던 거… 아까 그거 때문에….”

강동현이 그래도 미심쩍다는 듯이 말했다. 황경호가 웃었다.

“어떤 사람이 그런 걸로 자살을 해요. 그냥 기분 안 좋은 때면 와서 바람 쐬는 곳이에요. 정말 신경 쓰지 않으셔도 돼요.”

강동현은 괜히 오버했나 싶어서 굉장히 머쓱해졌다.

“그러게 마포대교 같은 데를 오고 지랄이야. 사람 놀라게….”

강동현이 작게 투덜거렸다.

“어서요.”

뭘 하고 서있느냐는 듯이 황경호가 웃었다. 강동현은 마음에 안 든다는 얼굴로 황경호의 미소를 노려보았다. 그리고 욕지거리를 하며 돌아서려고 했다. 그러자 황경호도 다시 고개를 반대편으로 돌렸다. 강동현은 다시 황경호 쪽으로 고개를 홱 돌렸다.

“너….”

강동현은 배우였다. 연기를 하는 사람으로 세간에 평가받기를 지금 대한민국 20대 배우들 중에서 가장 연기를 잘한다고 말해질 정도로. 표정이나 제스처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 일가견이 있단 말이다. 황경호는 마음이 급했던 게 분명했다. 금방 고개를 돌리는 찰나를 참지 못하고 표정이 싹 바뀌었다. 아까 강동현이 다가오기 전처럼 무표정하고 진지하게. 강동현은 성큼 다시 다가가서 황경호의 팔뚝을 홱 끌어당겼다.

“내려와.”

“네? 저 정말 괜찮….”

“내려오라고. 미친놈처럼 거기 있지 말고.”

“저 진짜 바람 쐬려고 그런 거라니까요. 정말 괜찮아요.”

“자살하려는 새끼는 괜찮은 거 아니거든? 좋은 말로 할 때 내려와라.”

결국 황경호는 인상을 조금 구겼다.

“아, 진짜…….”

작게 중얼거리는 황경호의 짜증스런 목소리에 확신한 강동현은 신경질적으로 말을 이었다.

“아까 일이나 저번 일이나 내가 정말 잘못했다. 돈이면 돈, 사과면 사과, 니가 해달라는 대로 해줄 테니까 말만 해. 죽긴 뭘 죽냐. 완전 봉 잡았구만.”

연예인인 강동현을 협박할 빌미는 많았다. 당장에 그 병원을 다닌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급작스레 인지도를 얻은 강동현에게는 치명적일 것이고, 남자를 추행했다는 것이나 그래서 그 남자가 자살하려고 했다는 것이나 전부 자극적이기 그지없는 내용들이었다.

솔직히 강동현이 몸의 병 때문에 마음이 급해져서 황경호에게 이것저것 실수를 했던 것도 있지만, 어쨌든 황경호가 조금만 영악하게 군다면 강동현을 통해서 많은 것을 얻어갈 수 있을 것이다. 솔직히 지금 이것도 쇼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 강동현이었다. 그래도 여기는 우선 위험하다. 강동현이 일단 황경호를 끌어당겨 내리려고 했다. 황경호는 한숨을 푹 내쉬며 미간을 좁혔다. 자신의 얼굴을 한 손으로 쓸어내리더니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강동현을 내려다보았다.

“너 나 알아?”

“뭐?”

강동현이 미간을 조금 찌푸리며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는 듯 황경호를 올려다보았다.

“내가 몇 살인지, 어디서 태어났는지, 무슨 학교를 나왔는지, 부모님은 뭘 하는지, 어디에 사는지, 어떻게 사는지, 뭘 좋아하는지, 뭘 싫어하는지 니가 아냐고.”

알 리가 있나. 강동현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어 잠시 입을 다물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자의식과잉이야? 내가 왜 너 때문에 죽는다고 생각하는 건데?”

“그거야 내가….”

“뭐? 아까 니가 한 그 쓰레기 같은 짓?”

강동현은 그 말에 순간 얼굴이 달아올랐다. 분명히 죄책감도 미안함도 별로 없었고 단지 사건을 무마할 생각만 하고 있었는데. 어쩐지 황경호의 그 말에 지금 부끄러움을 느꼈다.

“그래. 기분 최악이었고 전혀 무관하다고는 나도 말 못 하겠지만. 그것 때문이 아니야. 난 원래 죽고 싶었어. 쭉… 계속 죽고 싶었어.”

차분하지만 확신에 찬 목소리였다. 그렇게 말하고 황경호는 강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황경호는 1년여를 쌓아온 우울감에 완전히 져버리고 말았다. 그래도 살아야지, 살아야지 했는데 도저히 의미도 이유도 찾을 수가 없었다. 타인에게도, 그리고 나에게도, 누구에게도 스스로가 의미가 없었다. 이런 병든 정신 상태로 의미 없는 평생을 보내는 것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목이 졸리는 것 같았다.

언제나 보이는 모습은 장난스럽고 일견 가벼워 보이기까지 한 황경호였다. 항상 활달하고 외향적이고 사람들과 잘 어울리고, 물론 강동현이 괴롭힌 게 있어 화를 내는 모습도, 짜증을 내는 모습도 본 적이 있지만, 이렇게 진지하게 말하는 황경호는 처음이었다.

황경호는 그렇게 가만히 강을 보고 있다가 문득 다시 강동현을 보고는 짜증스럽게 한숨을 쉬었다. 그러더니 스스로 난간에서 내려왔다. 바닥에 발을 디디고 먼지가 묻은 엉덩이를 털었다. 강동현은 깜짝 놀라 뒤로 물러섰다.

황경호는 다리의 양 끝까지의 거리를 가늠해보더니 가까워 보이는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당황한 강동현이 황경호의 손목을 잡았다.

“뭐야? 안 죽는 거야?”

황경호가 인상을 찌푸리며 그를 돌아보았다.

“니 눈앞에서 뛰어내리라고?”

“아니, 그게 아니라…….”

강동현은 조금 깔봐왔던 그에게 왠지 어떤 말도 제대로 할 수가 없었다. 차도 내버려 두고 졸졸 따라가니 황경호가 미간을 좁히며 뒤돌아봤다.

“왜? 뭐 할 말 있어?”

“너 어디 가는데.”

“집에 간다.”

“진짜? 너희 집 어딘데? 데려다줄게.”

그 말에 황경호는 더 인상을 찌푸리며 한숨을 쉬었다.

“후우, 서로 갈 길 갑시다. 왜 갑자기 친한 척이세요.”

만사가 다 귀찮은 티를 숨기지 못하는 황경호였다. 강동현은 가만히 서 있다가 왠지 또 느낌이 안 좋아서 계속 따라갔다.

벌써 8시가 다 되어간다. 강동현은 잠시 해가 저물고 있는 넓은 한강을 쳐다보았다. 이렇게 길을 걷는 것은 오랜만이다. 기다란 다리의 끝에 이르러서도 도로는 끊임없이 이어져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길에 도착하기까지 한참이 걸렸다. 강동현은 이미 차는 포기했다. 아마 경찰에 신고가 들어가 렉카가 끌고 가도 한참 전에 끌고 갔을 것이다. 택시를 잡을 수 있을 만한 데까지 오니 황경호가 택시를 잡았다. 정말 집에 가는 건가, 싶어 멀찍이서 물끄러미 보고 있던 강동현은 조수석과 운전석의 창문을 열고 있는 택시 아저씨 덕분에 황경호의 목적지를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한강대교 가주세요.”

강동현이 깜짝 놀라서 몸을 던져 택시를 막았다.

“으악! 잠깐잠깐! 아저씨 스톱! 스톱!!”

“뭐야, 총각? 비켜. 합승 안 해.”

푸짐한 택시 기사는 창문에 팔을 걸치고 강동현에게 비키라며 손을 휘저었다. 푹 눌러쓴 캡모자에 후드에 선글라스에 마스크까지 한 이상한 청년이었으니 아저씨의 표정이 좋을 리가 없었다. 강동현은 그것을 깨닫고 마스크와 모자를 벗고 선글라스까지 뺐다.

“아저씨, 지금 그 새끼 자살하러 가는 거라구요! 한강대교 가면 안 돼요!”

“어? 강동현…?”

아저씨가 차를 세웠다. 물론 뒤에서 빵빵거려 갓길에 바짝 붙이기는 했지만 말이다. 강동현은 얼른 조수석에 올라탔다. 뒤에서 황경호가 인상을 찌푸리며 다시 내리려고 하자 황급히 뒤로 몸을 돌려 황경호가 탄 쪽의 문을 잠갔다.

“아저씨, 일단 출발해주세요. 마포대교 지난 다음에 유턴해주세요. 여의도로 돌아가 주시면 돼요.”

택시 기사는 평소 같으면 여의도로 돌아갈 것 같으면 반대차선에서 타라고 윽박지를 것 같은 타입이었는데도 고분고분 차를 출발시켰다.

“아우, 알았어. 알았어. 그런데 강동현 실물이 훨씬 잘생겼네.”

“감사합니다.”

“우리 딸이 완전 팬인데 조금 있다가 싸인 좀 해줘. 응, 알았지? 딸이 두 명이거든. 이름이 지혜랑 지연이.”

“아, 예. 펜 가지고 계신가요? 제가 오늘은 펜을 안 가져와서.”

“아, 여기 있어. 당연히 있지. 종이도 많아.”

조수석의 서랍을 친절히 열어주며 아저씨가 말했다. 그러다 문득 택시 기사가 백미러로 뒷좌석을 힐끗 쳐다보았다.

“스읍, 근데 뒤에 있는 저 애는 한강대교 가달라고 했는데? 아는 사이야?”

“아, 예. 사촌 동생인데….”

“아까 쟤가 뭐하려고 했다고? 차 소리 때문에 못 들었어.”

“아무것도 아니에요. 좀 싸워서 삐졌어요.”

“아, 그래? 어이구, 이렇게 잘생긴 형이 있는데 뭘 삐지고 그런대. 허허허.”

“그러게요, 하하하.”

강동현도 역시 연예인이긴 연예인인지 일반인들을 대할 때 성격이 좋은 척하는 모양이었다. 강동현은 백미러를 통해 황경호의 얼굴을 보았다. 황경호는 백미러를 통해 강동현의 얼굴을 한참 노려보았다. 그리고 지금은 창밖을 보며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얼굴로 가만히 있었다.

8시가 넘으니 그나마 교통의 상황이 좋아졌다. 만에 하나 걱정이 되어 강동현은 차가 서기 전에 미리 싸인을 2장 해서 택시 기사에게 안겨주었다. 차가 서자 아니나 다를까 황경호는 바로 내렸다. 강동현도 내려 황경호의 손목을 붙잡았다.

“야야. 술이나 마시자, 술. 뭐가 그렇게 인생 좆 같은지는 모르겠는데, 그 나이에 그렇게 쉽게 죽으려고 하는 거 아냐. 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 벌써 죽는다고….”

강동현의 말에 황경호가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예예. 알겠으니까 일단 손목 놔요. 우리 집 한강대교 있는 데 있다구요. 길이 복잡해서 일단 택시 기사한테 한강대교부터 가달라고 한 것뿐이라구요.”

“뭐…?”

강동현이 눈을 깜박깜박하다가 갑자기 좀 쪽팔려졌다. 황경호는 딱딱한 음성으로 다시 말했다.

“그리고 기분 나쁘니까 빨리 손목 놔요.”

“어? 어…….”

강동현은 황경호의 손목을 놓았다. 무안한 손을 마주 잡아 비비고 깍지를 끼며 한 걸음 물러섰다. 누군가에게 만져져서 기분 나쁘다는 소리는 처음 들었다. 아니, 물론 한 달 전부터 병원 갈 때마다 황경호에게서 듣기는 했지만…. 그때는 일단 왠지 반응을 할 듯 말 듯 한 자기 거시기가 우선이었고 황경호의 기분 같은 건 생각도 안 했기 때문에 그다지 신경도 쓰지 않았다.

해가 졌어도 밝은 여의도 공원에는 사람들이 꽤 있었고 선글라스도 모자도 마스크도 쓰고 있지 않은 강동현을 알아보는 사람들이 수군거리면서 지나가고 있었다. 고등학생들로 보이는 여자애들은 꺅 소리를 지르며 가까이 다가와 싸인을 받으려고 했다. 강동현은 일단 다가오는 그녀들에게 미소를 지었다.

“우와… 강동현이다. 우와, 진짜야.”

“꺅! 오빠! 팬이에요!! 촬영하러 나오셨어요? 싸인! 싸인 해주세요!”

“아, 감사합니다. 네, 네. 싸인….”

누구든 자신에게 닿고 싶어서 이렇게 노골적으로 강동현에게 호의를 표했다. 남자든 여자든 상관없이.

황경호도 분명 처음에는 친절하게 대해 주었지만, 아니, 그건 환자라서였다. 강동현만 특별 취급한 것이 아니었다. 강동현이 은연중에 의심했듯이 사실은 쪽팔리는 병이나 가진 연예인을 속으로 비웃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는 강동현이 만졌을 때 진심으로 불쾌해했고 기분 나빠 했으며 지금은 몹시 귀찮아하고 있었다.

“오빠, 오빠! 저두요! 저두 손잡아주세요!”

“저도….”

“오빠, 오빠, 여기 왜 오신 거예요? 촬영 있어요?”

황경호는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걸어갔다. 그리고 다시 택시를 잡으려는 듯 길가에 서서 손을 흔들었다. 뭔 놈의 택시를 저렇게 많이 타. 강동현은 티 나지 않게 슬금슬금 그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사람들에게 싸인을 해주고 말을 주고받으면서도 말이다. 몇 대의 택시가 그냥 지나가고 드디어 하나가 황경호의 앞에 섰다. 황경호는 타기 전에 택시 기사에게 무언가를 묻는 듯했다.

“한강대교 가요, 아저씨?”

꺅꺅거리는 여자애들의 목소리에 일일이 답해주면서도 어쩐지 그 소리가 작게 들려왔다. 택시 기사의 목소리는 잘 들리지 않았지만 아마 가지 않는다는 소리 같았다. 차가 그냥 떠나려는데 황경호가 다시 잡았다.

“더블, 아니, 세 배로 드릴게요. 원효대교는 가까운데… 안 될까요?”

강동현이 여고생들을 상대하고 있다가 고개를 홱 돌렸다.

“저 미친놈이…….”

“네? 오빠?”

“아아, 미안해요. 미안해요. 일행이 있어서. 제가 바빠서 그런데 카페에 글 올리면 싸인 우편으로 보내드릴게요. 미안해요.”

강동현은 여자애들을 뿌리치고 택시에 또 막 타려는 황경호에게 달려가 손목을 홱 잡아끌었다. 그리고 주위의 눈이 있어 캡과 후드만이라도 눌러쓰고 걸었다.

이 간호사는 거짓말이 너무나 능숙했다.

또 깜박 속아 넘어갔다.

다리 위에서도, 난간 위에 기어 올라가 있는 주제에 바람을 쐬러 온 것이라며 병신 같은 소리를 그럴싸하게 지껄여서 사람을 헷갈리게 하고, 택시를 타고 집에 가는 줄 알았는데 한강대교라느니, 원효대교라느니 무서운 소리나 하고 앉아 있었다. 거짓말을 너무 잘했다. 무서울 정도로 잘했다. 저렇게 죽고 싶었던 주제에 그렇게 순진한 얼굴로 웃고 지냈다니 소름이 끼칠 정도다. 황경호는 넌덜머리가 난다는 듯이 한숨을 쉬었다.

“하… 또 뭐하는 짓이에요? 저 집에 좀 갑시다.”

“장난치지 마라. 한강대교 쪽이 집이라더니만 이젠 원효대교냐? 이러다가 한강 자살 명소는 다 도시겠네?”

멀리 떨어져 있어서 절대 못 들으리라고 생각했던 황경호는 미간을 찌푸리며 한숨을 쉬었다. 남들에게 피해를 끼치고 죽고 싶지는 않았다. 강동현은 유명한 연예인이고, 이런 것에 연관되어 봤자 자기만 손해라는 걸 알면서도 왜 이러는 것인가. 자살방조죄도 죄다. 사람이 특별히 배려를 해서 폐를 안 끼치려고 하는데 왜 계속 옆에서 얼쩡거리면서 사람을 귀찮게 하냔 말이다.

“아… 진짜 저한테 왜 이러세요? 왜 이렇게 사람이 싫다는 짓만 골라서 하시는 건데요… 저 댁 때문에 죽으려고 하는 거 진짜 아니니까 좀 놔주세요. 부탁입니다, 예?”

“야. 그게 아니더라도 사람이 자살을 하려고 하는데 놔둘 수 있겠냐? 어?”

“아, 네. 그래 알겠다니까요. 집에 얌전히 갈게요. 집에 얌전히 간다니까요.”

“내가 지금 그걸 믿을 것 같아?”

젠장…… 강동현은 깜짝 놀라서 심장이 다 두근거렸다. 아까 황경호가 진짜 마포대교에서 뛰어내리려고 했을 때만큼이나 심박수가 올라갔다. 사람을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속이다니… 하긴 이렇게까지 심각한 우울증을 숨기고 매일같이 웃어댔던 놈이니 그 정도 거짓말이야 입에 침도 안 바르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왜 그렇게 죽자고 죽으려는 건데? 그 마인드로 그냥 열심히 살아.”

그것이 가능했다면 지금 이 지랄을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렇기에 결단을 내린 지금이 중요한 것이다. 이 기회는 다시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또 지긋지긋한 그 기분으로 시간만을 간신히 흘려보내며 무의미하게 살아갈 것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이제는 지겹다. 정말 지겹다. 오늘에 이르러 이런 결심까지 내린 스스로가 기특할 정도다. 그러니 제발 방해하지 말고 그가 다른 데로 꺼져버렸으면 좋겠다.

황경호가 짜증 섞인 한숨을 쉬었다.

“저 지금 진짜… 걷기도 힘들어요. 댁 같은 인간이랑 더 이상 실랑이할 기운도 없다구요.”

병원에 피해를 입히기 싫어서 다리를 질질 끌고 겨우 마포대교까지 갔다. 날씨는 선선하고 맑아서, 밝은 햇살에 반짝이는 한강을 내려다보니 지금까지 무거운 바위 하나가 들어찬 것 같은 마음이 홀가분하게 느껴졌다. 결심을 하고 나니 지금까지의 우울증이 다 날아가 버리고 무척이나 자유로워진 것만 같았다.

그렇게 막 뛰어내리려는데 강동현이 나타났다. 사과라도 할 생각이었다면 그냥 아까 바로 하거나 나중에 할 것이지, 따라오긴 왜 따라와서. 홀가분해졌던 기분이 다시 나빠졌다.

강동현은 황경호에게 있어 열등감과 피해의식을 자극시키는 남자였다. 성격이 더러워서 황경호를 괴롭히는 것은 둘째로 치더라도 그냥 존재 자체만으로도 신경을 긁었다. 그저 연예인이고 멀찍이 TV나 컴퓨터 속에서만 봤더라면 몰랐겠지만 실제로 부딪치면 칠수록 본질적으로 황경호의 무언가를 자극했다.

꿈과 열정이 있는 젊음. 패기와 자신감. 스스로에 대한 높은 기대치와 그것을 쟁취할 수 있을 만한 각고의 노력. 이기적으로 보일 정도의 자존감.

모두 황경호는 가지지 못한 것들이었고 무엇보다도 지금까지의 그가 너무나 바라왔던 것들이었다. 그래서 처음에 그를 보았을 때 좋아하는 연예인이 나타났다는 선망도 잠시였고 그 뒤로 그를 볼 때마다, 그에게 하찮은 취급을 받을 때마다 다른 사람이 그러는 것보다 배는 기분이 나빠지고 우울해졌다.

질질 끌려가던 황경호의 다리가 기어코 꺾이고 말았다. 걸어갈 기운도 없다는 것이 사실이었나 보다. 무기력증에 전신을 휩싸인 황경호는 그대로 주저앉은 채로 꿈쩍을 못했다.

“야, 왜 그래?”

“아…….”

혈색이 파리해져서 식은땀을 흘리는 황경호를 보고 강동현이 물었지만 황경호는 대답도 하지 못했다. 숨을 쉬는 것도 힘든지 얕은 호흡만을 간헐적으로 간신히 하며 눈을 감고 있었다. 온몸을 석고 반죽에다 처넣은 것 같았고 숨도 쉴 수가 없었다. 강동현은 그런 그를 보고 화를 냈다. “야, 너… 미쳤냐? 그렇게 못 견딜 것 같으면 미리미리 병원을 가야 할 거 아냐!”

강동현은 황경호를 어깨에 들쳐 멨다. 다시 잡히는 대로 택시를 타고 응급실이 있는 병원으로 달렸다.

연예인을 하다 보면 좋은 게 생각보다 여러 편의를 쉽게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행동거지를 보통 사람들의 몇십 배나 조심해야 하고 고용도 불안하고 경쟁도 치열하지만.

강동현은 황경호의 품을 뒤져 주민등록증을 찾아 일단 등록을 한 뒤 정신과의에게 사정을 설명하고 신경안정제를 맞게 했다. 응급실에 앉혀 두자니 사람들이 힐끔거려 병원 측에서 편의를 봐주어 개인실로 옮겼다.

“1시간 정도면 다 들어갈 겁니다. 일어나면 간호사 불러 주시구요.”

“예, 알겠습니다.”

“신경안정제를 맞았어도 일어나면 상당히 기분 나빠하실 수도 있으니까 주의하시구요.”

“네.”

의사가 나가자 주황색 스탠드 불만 좀 밝게 켜놓은 어두운 방은 침묵이 흘렀다. 강동현은 황경호가 누워있는 침대의 옆 의자에 앉아 잠시 반성했다.

아무리 몰랐다고는 하지만 우울증이 이렇게 심한 애를 성희롱하다니. 물론 성희롱 자체도 나쁜 거긴 하지만. 남자에다가 비뇨기과 간호사고 성격도 외향적으로 보여서 좀 괴롭힌다고 크게 문제가 되리란 생각은 하지 못했다. 한 달 전에도 그랬지만, 오늘도 도를 넘었다. 억지를 부려 치부를 보이게 하고 그것도 모자라 그를 억누르고 그걸 반찬 삼아 자위까지 해버렸다. 그런 상황에서 원래 우울증이 있었다고 강동현이 이 사건에 책임이 없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솔직히 강동현 본인도 그렇게까지 한 스스로에게 놀랐다.

황경호의 부모님이나 친구를 부를까 하다가 관두었다. 이 정도로 심각한 우울증을 그렇게 열심히 숨기고 밝게 지냈는데 잘 알지도 못하는 자신이 폭로하는 것은 지금까지 그를 희롱하고 괴롭혔던 것만큼이나 실례가 될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에게 피해를 끼치고 싶지 않아 하는 황경호의 자존심은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내일 스케줄이 어떻게 되더라….’

밤새 지키고 있을 생각이었다. 강동현은 턱을 괸 채로 황경호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그의 머리카락을 쓸어 올려 잠들어 있는 얼굴을 자세히 관찰했다.

“귀여운 얼굴을 해가지곤, 그런 무서운 짓을 눈 하나 깜짝 않고 하네….”

자고 있는 걸 보니 그는 고생 하나 안 하고 자랐을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웃으면 더 그렇게 보이지.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깨끗하고 순진한 얼굴로 웃는다.

그러고 보니 그때 화장실에서도 약간 이상했다. 세면대를 붙잡고 혈색이 파리해져서 움직이지를 못하는 걸 뒤에서 재촉해서 비키게 했다. 그때 잠깐 굉장히 겁먹은 표정이었는데도 금세 표정을 바꾸고 웃었다. 그 얼굴에 뭔가 와서 불러 세우고 엉덩이를 만져봤다. 딱히 뭔가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사실 왜 그랬는지 잘 알 수도 없었고…. 그 뒤 한 2주 정도 계속 엉덩이를 만져봤지만 뭔가 올 듯 말 듯 초조한 기분만 들었고 딱히 수확이 없었다(생각해보니까 무슨 아저씨 같은 짓을 한 거지? 아무리 급하다지만… 여자였으면 고소를 당해도 댓 번은 당했겠군).

항상 웃던 그가 화를 내면서 손을 과격하게 움직이니 뭔가 확 와서 지금 스스로가 생각해봐도 어이가 없을 정도로 억지를 부리고 조르고 매달려서 손으로 하게 만들었다. 웃는 얼굴이 아닌 혐오감을 여실히 드러낸 난처한 표정으로 자신의 것을 맨손으로 만지고 있는 그의 얼굴이 상당히 왔다. 정말 싫어하는 그를 끝까지 그런 짓을 하게 만들어 마지막엔 참지 못하고 키스까지 했다.

솔직히 자신이 그런 짓을 당했다면 상대를 고자로 만들어도 시원찮았을 것이다. 보이는 것만큼 속까지 순수하진 않을지라도 사람 자체는 기본적으로 순하고 착한지 신고도 하지 않았고 병원에 말을 한 것도 같지 않았다. 물론 쪽팔려서 그런 것도 있겠지만… 간호사를 바꾸고 나서는 올 듯 말 듯 한 그런 것도 없어졌고 결국 쪽팔리게 전립선염까지 와서 심신이 어려운 찰나에 우연히 마주친 황경호의 얼굴을 보니 왠지 화가 나고 심통이 났다. 자기가 생각해도 말도 안 되는 억지로 심술을 부렸다.

‘우리 엄마 나 어렸을 때 어떻게 키웠을까. 내가 기억하기론 한 10살 때까지 딱 그랬던 것 같은데.’

딱 그 나잇대의 어거지를 좀 더 어른의 말로 말했을 뿐 실체는 같았다. 황경호는 싸울 바에야 차라리 져주자, 이런 성격인지 조금 자신을 억눌러 손해 보는 것 따윈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보였다. 강동현과는 완전 반대다. 분명 누구라도 좋은 성격이라고 말하겠지만, 그게 본인의 우울증을 키워온 원인은 아닐까.

그런데도 오늘은 정말 엄청나게 화가 난 것 같았다. 하지만 강동현은 또 거의 한 달 만의 사정감에 정신을 차리지 못해 제대로 쫓아가지도 못했다. 정신을 차렸을 때도 죄책감이나 미안함을 느끼진 않았다. 솔직히 고소나 돈이라도 달라고 협박하면 어쩌나, 하는 걱정부터 했을 정도니.

한 시간 뒤 신경안정제를 다 맞고 난 이후에도 황경호는 일어나지 않았다. 아침까지 푹 잠들 수 있도록 그냥 두었다. 강동현은 피곤해서 하품을 하다가 간이침대는 너무 좁아서 황경호가 누워있는 넓은 1인실 침대로 올라갔다. 사내새끼의 퀴퀴한 냄새도 날 법한데 어린애 같이 생겨서 그런지 황경호에게서는 굉장히 달큰한 냄새가 났다.

피곤할 때야 언제 어디서든 잘 자는 강동현이었지만 기본적으로 잘 때는 혼자 자는 것을 좋아한다. 하지만 황경호를 베개 삼아 팔다리를 얹고 자는 것도 나쁘지는 않았다. 적어도 이러면 얘가 일어나서 또 한강으로 뛰어가는 것은 막을 수 있겠지…….

강동현은 그대로 잠이 들고 말았다.

*

“으…….”

정신이 잘 돌아오지 않았다. 멍했다. 보통 아침에 일어나면 굉장히 기분이 나빠지면서 한없이 우울해졌는데 지금은 그런 우울감을 느낄 새도 없이, 그저 멍했다. 그래서인지 평소보다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은 빨랐다. 허리를 일으켜 앉는데 가슴에서 무언가 툭 떨어졌다. 사람의 팔이었다. 황경호는 물끄러미 오른쪽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그림에서라도 튀어나온 듯 잘생긴 얼굴의 남자가 죽은 듯이 잠들어 있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하고 황경호는 찬찬히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황경호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팔에서 링거를 뽑아내었다. 그리고 바로 침대에서 내려가려고 했다. 그러자 허리를 감싸고 있던 팔이 갑자기 황경호를 꽉 끌어안았다.

“너 또 한강으로 달려가면 죽는다….”

아침이라 살짝 가라앉은 목소리도 멋있었다. 물론 그런 게 지금 황경호한테 들릴 리는 없었지만.

“화장실 가는 거예요.”

“거짓말하지 마.”

“진짜라구요. 쌀 것 같다니까요.”

“그리고 너 어제 민증 보니까 나랑 동갑이던데. 왜 계속 존댓말이야.”

“초딩이라도 환자한테는 존댓말 써요. 그리고 기분 나쁘게 왜 같이 침대에서 자고 있는 거예요? 놔요. 화장실 갈 거라니까.”

강동현은 꽤 피곤했는지 아님 원래 아침에 약한 것인지 끙끙대며 겨우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는 심하게 뻗친 머리로 신발을 신었다.

“그래. 가자, 가.”

“…뭐예요? 설마 지금 같이 가는 거예요?”

“너 거짓말하는 수준을 보니까 뭔 말을 해도 못 믿겠고.”

강동현은 하품을 하면서 자기도 귀찮다는 듯이 황경호의 등을 툭툭 밀었다. 어이가 없어 하면서 떠밀려 화장실까지 간 황경호는 오줌이 마렵다는 것은 정말 거짓말이 아니었는지 꽤 많이 쌌다. 하긴 생각해보면 어젯밤부터 맞은 링거액이 얼만데, 마려울 만도 했다.

“기분 어때? 괜찮아?”

“후우, 괜찮습니다.”

황경호는 자기 직장이 아니라서 그런지 귀찮다는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강동현은 그런 황경호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또 물었다.

“오늘 따로 스케줄 잡힌 거 있어?”

황경호는 미간을 찌푸리며 또 한숨을 쉬었다.

“그런 건 왜 묻습니까, 도대체… 어제는 고마웠고 병원비는 다음에 병원 오시면 드리겠습니다.”

“진짜 병원에 출근할 생각은 있는 거야?”

“그럼 계좌번호 주세요. 바로 부쳐드릴게요.”

황경호는 미간을 찌푸리며 세면대의 물을 틀어 얼굴을 씻었다. 강동현은 여전히 그런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며 옆에서 페이퍼 타월을 뽑아 넘겨주었다.

“어제는 정말 미안.”

“됐어요. 그쪽 문제가 아니라니까요.”

“그래도 일단, 미안.”

“별로 안 미안하면 사과하지 마세요. 고소 같은 것도 안 하고 돈도 안 뜯어낼 테니까요.”

강동현은 황경호가 다 쓴 페이퍼 타월을 구겨서 휴지통에 집어넣는 것을 또 계속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도대체 왜 그러는데?”

황경호는 쳐다보지도 않고 대답했다.

“댁이랑 상관없어요.”

“말하면 뭔가… 해결은 안 되더라도 마음은 좀 풀릴지도 모르잖아. 우울증이라는 게 혼자서는 해결을 하기가 힘든 거라고, 꼭 주변에 도움을 요청하라고 하던데?”

강동현이 모르는 건 많아도 우울증 하나만큼은 좀 알고 있었다. 연예계 종사자들 사이에서도 문제가 되는 것이 우울증이었고 몇몇 대선배들이 우울증으로 자살했다는 소식이 들릴 때마다 찾아보기도 했으니 말이다.

“그쪽 같은 사람은 들어도 이해 못 할 거고 별로 말하고 싶지도 않아요.”

황경호는 그 말을 하면서 시선을 내리고 눈을 내리깔았다. 강동현이 침을 꿀꺽 삼켰다.

왠지… 얘가 웃는 얼굴이 아니면 기분이 요상한 것 같단 말이야…….

“너….”

강동현은 한발자국 황경호에게 다가갔다. 키가 큰 강동현이 다가오니 황경호는 인상을 쓰며 피하려고 했다. 강동현은 한쪽 팔을 뻗어 벽을 짚어 그를 빠져나가지 못하게 했다.

“뭐하는 짓이에요?”

강동현은 황경호의 턱을 움켜쥐어 제대로 자신의 얼굴을 보게 했다. 불쾌감에 일그러지는 표정을 보니 또 미추 부근이 간질간질했다.

“너 지금 여기 나가면 또 한강으로 달려갈 생각이야?”

“그쪽이랑 상관….”

“그래, 상관없어. 이건 순수하게 궁금해서 묻는 거야. 이제 안 말릴 테니까 솔직하게 말해도 돼. 이 정도까지 했는데 더 말려줄 의리도 없고. 그런 의미에서, 오늘 죽을 거야?”

황경호는 정말 귀찮고 성가시다는 듯이 한숨을 쉬며 나가는 문 쪽을 힐끗 보며 말했다.

“모르겠어요. 어제 그때가 딱이었는데… 댁 덕분에 기분이 안 좋아졌어요.”

“무서워진 거야?”

황경호가 인상을 팍 쓰고 강동현의 얼굴을 노려보았다. 강동현은 황경호의 턱을 쥔 손에 더욱 힘을 주며 더 집중해서 그 얼굴을 바라보았다.

“무서워진 거냐고.”

“…진짜 기분 나쁜 사람이네요.”

황경호가 강동현의 손을 홱 뿌리쳤다.

“어쨌든. 너 죽긴 죽을 생각인데 당장에는 안 죽을 거라 이거지?”

“아, 예, 예. 댁이 까마득히 잊어버릴 때까지 얌전히 있다가 뒈질 테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몇 주도 걸리지 않을 것이다. 황경호는 이제는 그냥 심드렁하게 말하며 화장실을 빠져나가려고 몸을 돌렸다.

“그럼…….”

강동현이 그 뒷모습을 이채가 담긴 눈으로 노려보았다.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 뚫어져라 그 뒤통수를 쳐다보고 있었다.

“죽기 전에 세상에 좋은 일 한다고 생각하고. 나 좀 고쳐주라.”

“네?”

황경호가 무슨 개소리냐는 듯이 미간을 찌푸리고 강동현을 돌아보았다. 강동현은 마른침을 다시 삼켰다.

“나 지금 설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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