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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수가 눈을 뜬 건 11시였다. 옆자리에 해정이 없었다. 일어나는 시간이 달라도 아침 수업이 없거나 주말이면 그는 자신이 눈을 뜰 때까지 몸을 만지곤 했다.
‘오늘은 주말인데. 어디 간 거지.’ 현수는 생각하면서 부엌으로 나갔다. 식탁 위에는 늘 있던 샌드위치 대신 쪽지 하나가 있었다. 병원 갔다 올 테니 조금만 기다리라는 내용이었다.
현수는 의자에 앉으면서 종이의 접힌 부분을 연신 매만졌다. 해정이 저를 대동하지 않은 채 병원에 갈 일은 하나밖에 없었다.
정신과다.
“…….”
몇 주 정도는 괜찮았는데……. 왜지. 내가 임신해서, 바깥에 자주 나가게 돼서 그러는 걸까. 그래도 의사와 눈 마주치지 않으려고 많이 노력했는데. 해정이 손도 꼭 잡고 있었고…….
현수는 고민에 빠진 얼굴로 종이를 식탁 위에 내려두었다. 그리고 여전히 마른 배를 둥그렇게 마사지하듯 만졌다. 이제는 의식하지 않고도 손이 저절로 배를 향했다.
‘해정이가 티를 안 낸 걸까. 병원에서 안 좋은 기색은 정말 없었던 것 같은데…….’
거기까지 고민이 이어졌을 때였다. 별안간 배에서 작게 꿈틀, 하는 감각이 느껴졌다. 현수가 놀란 얼굴로 눈을 깜빡였다. 시끄러웠던 생각이 순식간에 다물린다.
“…….”
현수는 조용히 턱을 내려 제 배를 바라보았다. 더 이상의 감각은 없었다. 하지만 좀 전의 감각은 착각이 아니었다. 분명 느껴졌다. 배 속에서 뭔가가 움직이는 것 같았다.
움직임은 그게 끝이었다. 해정이 집에 온 건 쪽지 내용처럼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해정은 현수가 좋아하는 해물 볶음 국수를 사 왔다. 1인분이었다. 봉지를 식탁 위에 올려놓는 손이 창백했다. 손가락 끝은 푸르스름한 기운이 돌았다.
“네 거는?”
현수가 나무젓가락을 두 갈래로 뜯으며 물었다. 해정은 맞은편 의자에 털썩 앉으며 현수의 앞에 물이 담긴 컵을 두었다.
“나는 별로 배가 안 고파서. 형, 물부터 마셔요.”
“속 안 좋아?”
“아니요.”
원래 목소리가 큰 편은 아니었는데, 오늘은 평소보다 더 작았다. 해정은 건조하게 대답하면서 식탁에 팔꿈치를 대고 턱을 괴었다. 현수는 해정의 말대로 물을 마신 뒤 포장 용기를 뜯었다. 졸인 간장과 해물 냄새가 코에 훅 끼쳤다. 울렁거리기는커녕 입맛이 돌았다.
“같이 먹지.”
“괜찮아요. 식기 전에 얼른 먹어요.”
“잘 먹을게.”
현수는 제가 더 아쉽고 섭섭하다는 듯 툴툴거리며 말했다. 해정이 약하게 웃으며 손을 뻗었다. 현수의 볼을 부드럽게 쓸어 만진다. 익숙한 스킨십이었다. 현수는 거리낄 것 없다는 듯 곧장 국수를 젓가락에 돌돌 말아 먹었다. 해정은 그 모습을 빤히 쳐다보았다.
“…….”
“…….”
‘병원은 왜 갔느냐고 물어볼까.’ 현수는 오징어의 통통한 몸통을 씹으며 생각했다. 아니다. 불안의 원인을 뻔히 아는데 새삼스레 왜 갔느냐고 묻는 것도 이상했다. 자신이 옆에 있는 이상 해정의 병은 불치병과 마찬가지였다.
그렇다고 모르는 척하는 것도 싫었다. 겉보기에도 해정의 상태는 좋지 않아 보였다. 식사를 거르는 것부터, 볼을 만졌을 때 느껴지던 차가운 감촉. 힘이 없는 목소리까지.
“왜 그래요?”
“응?”
곰곰이 생각하는 얼굴이 이상한 듯, 해정이 물어왔다. 현수가 고개를 들어 해정을 바라보자 그는 한 번 더 “무슨 생각하는 것 같아서.”하고 덧붙였다.
마주 본 채로 잠시 침묵이 감돌았다. 이 침묵이 오래 지속되면 좋지 않다. 현수는 생각이 닿자마자 입을 열었다.
“……아까 생각나서.”
해정이 꼰 다리의 방향을 반대쪽으로 바꾸면서 웃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입매가 시원하게 벌어진다.
“아까? 왜?”
“아니, 나 아까 너 기다리면서…….”
“네.”
현수가 말끝을 흐리며 공연히 웃자 해정은 말해 보라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팔짱을 꼈다. 등이 비스듬히 의자에 기울었다.
“태동 느꼈거든.”
그 말에 해정이 눈을 깜빡였다. 벌어진 입매가 그대로 멈췄다. 현수는 해정이 소리 내어 웃을 거라 짐작했다. 다음 순간, 해정은 정말 짐작대로 웃었다. 청량한 웃음소리가 부엌을 메웠다.
“태동을 느꼈다고요? 벌써?”
“응. 배에서 꿈틀거렸어.”
현수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젓가락에 돌돌 만 국수를 먹었다. 해정이 웃는 얼굴 그대로 앞머리를 쓸어 올렸다.
“무슨 벌써 태동을 느껴요.”
“그런가? 진짜 느껴졌는데.”
현수는 공연히 천연한 얼굴로 되물었다. 해정이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그냥 내장이 움직인 거예요. 맥박이거나.”
사실 저도, 꿈틀거림을 느낀 뒤 찬찬히 생각한 끝에 해정처럼 결론을 내리기는 했다. 시기상 태동일 가능성이 전혀 없었다. 맥박까지는 생각하지 못했어도, 하여간에 착각일 거라고 여겼다.
그러나 그런 식으로 말을 꺼낸 이유는 자신이 들뜬 모습을 해정에게 보여 주고 싶었던 탓이었다. 현수는 해정이 그런 저를 보며 아이의 존재를 상기하기를, 그리고 안정감을 갖길 바랐다. 불안 따위에 휩싸이지 않고, 긍정적인 감정을 느끼기를.
그리고 제 바람과 의도는 성공한 것처럼 보였다. 그 증거로 지금 해정은 정말 재미있다는 듯 눈을 휘며 웃음을 멈추지 않고 있었다.
“그런가 봐. 네 말처럼 내가 너무 들떴나.”
“응. 그런가 봐요.”
현수는 말없이 웃으며 물을 마셨다. 그리고 젓가락을 들었다.
그대로 지나가던 화제에 가볍게 말을 덧붙인 건 해정이었다.
“그거 아직 사지도 없을 텐데.”
작고, 대수롭지 않다는 듯 가벼운 목소리였다. 웃음기를 머금은 얼굴은 악의가 없었다. 일상적이어서 말의 내용이 더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동요한 건 현수뿐이었다. 쿵. 놀란 심장 위로 무거운 무엇인가가 떨어지는 듯했다. 현수가 젓가락질을 우뚝 멈췄다.
그거?
“…….”
“왜 그래요?”
해정은 방금 본인이 한 말이 이상하다는 걸 눈치채지 못한 모양이었다. 그는 조금 전과 같은 어조로, 같은 내용으로 물었다. 그 말인즉슨, 아이를 그렇게 지칭하는 게 그에게는 당연하다는 뜻이기도 했다.
입맛이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돌연 작은 위에 가득 찬 쌀 면이 부풀어 올라 목젖까지 메우는 듯했다. 심장이 불안한 리듬으로 뛰었다.
이게 아닌데. 현수는 가까스로 침을 삼키며 생각했다.
“……아냐, 아무것도.”
얼버무리는 목소리에 해정은 고개를 끄덕이기만 하였다. 그는 웃고 있으나 창백한 얼굴 그대로 그의 맞은편에 앉아 있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