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현수는 배 속의 ‘그것’을 생명체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또 자신의 인생에 새 사람을 들일 마음의 준비를 해야겠다고 다짐하였다. 계기는 간단했다. 해정이 아이를 좋아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생활 패턴은 다르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늦게 일어났다. 그래서 해정이 자는 제 발목에 족쇄를 채우는 것도, 침대 가장자리에 걸터앉아 싸늘한 눈으로 제 배를 바라보는 것도, 신경질적으로 문을 닫으며 외출하는 것도, 여전히 몰랐다. 다른 것이라면 일어나자마자 의식적으로 하나의 사실을 떠올린다는 것뿐이었다.
배 속에 아이가 있다. 나와, 해정이의 아이가.
현수는 침대 위에 느슨히 앉아 있는 것 대신 비장할 정도로 정갈하게 앉아서 마른 배를 쓰다듬었다. 그리고 아직 얼굴도 없을 생명체에게 인격을 부여하듯 말을 걸었다. 내용은 별거 없었다. 해정이는 오늘 운전 잘했을까, 언제 올까, 나는 오늘 뭐 할까, 둥의 일상적인 말들이었다.
식탁으로 가면 해정이 사 두고 간 샐러드 샌드위치가 있었다. 어젯밤 해정은 현수의 입술을 매만지며 아침으로 먹고 싶은 게 따로 있으면 말하라고 했다. 현수는 네가 사 주는 샐러드 샌드위치가 좋다고 대답했다. 고집을 부린다기보다는 딱히 생각나는 게 없었다.
현수는 CCTV를 향해 고맙다고 인사한 뒤 식사했다. 물론 해정이 보고 있는지, 아닌지는 모른다.
해정의 전화가 오기 전까지 현수는 끊임없이 먹었다. 식욕을 따르는 게 아니었다. 의도적이었다. 시시때때로 견과류를 집어 먹고, 어린 잎 채소에 발사믹 소스를 뿌려 샐러드를 만들어 먹었다. 통밀 빵에 크림치즈와 계란 프라이를 곁들여 먹기도 했다. 기름기가 묻은 프라이팬과 샐러드 볼을 닦으면서, 현수는 무엇을 챙겨 먹는 게 꽤나 귀찮은 일이라고 생각했다.
“영양제 같은 거.”
그래서 저녁거리를 묻는 해정의 전화가 왔을 때 현수는 그렇게 말했다. 해정은 웃으며 영양제가 먹고 싶냐고 되물었다. 현수는 손에 묻은 물기를 슥슥 바지에 닦았다. 그리고 흔들의자에 앉으며 대답했다.
“애기가 잘 자라야 하니까…….”
말이 씨가 된다는 말을 현수는 어느 정도 믿었다. 그래서 그는 짐짓 배 속의 생명체를 소중하게 생각해야 할 수 있는 말들을 내뱉었다. 이런 말들을 자주 하다 보면 어느 순간부터 아이에게 애틋한 감정을 느낄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였다. 새 사람을 들일 마음의 준비. 이도 그 준비의 일환이었다. 물론 제 건강을 챙기는 일도 마찬가지였다.
해정은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해정아?”하고 현수가 그의 이름을 불렀다.
「……아, 네. 영양제. 영양제 사 갈게요.」
고저 없는 목소리가 말했다. 뒤이어 전화가 뚝 끊겼다. ‘이상하다.’ 현수는 꺼진 전화기를 내려놓으며 생각했다.
하지만 그 생각이 무색하게, 한참 뒤에 귀가한 해정의 얼굴은 평소와 다름없었다. ‘착각했나 보다.’ 현수는 금방 그 위화감을 지워 냈다. 몸이 나른한 탓인지 더 이상 기민하게 생각하는 것도 귀찮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