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화 (14/19)

2

잠이 많아졌다. 먼저 일어나 해정을 깨우는 것이 일상이었는데, 요즘은 그러지 못했다. 해정을 깨우기는커녕 도리어 그가 외출을 하는지도, 또 자는 동안 자유로웠던 제 발목에 족쇄를 채우는지도 모르고 현수는 깊이 잠을 잤다.

일어난 건 오후 1시였다. 현수는 살짝 부은 눈을 끔뻑이면서 침대 위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또 아무 감정도 느끼지 않고 멍하니 앉아 있던 그가 침대를 벗어난 건 그로부터 한참 뒤였다.

족쇄 외에는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맨다리가 부엌으로 향했다. 눈을 뜨자마자 먹을 것을 찾는 버릇은 없었는데 오늘은 유독 배가 허전했다. 현수는 무덤덤한 눈으로 식탁을 바라보았다. 식탁 위에 무엇인가가 차려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삶은 감자를 으깨어 야채를 섞어 만든 샐러드 샌드위치가 글라스 돔 아래에 놓여 있었다. 제가 좋아하는 것이었다. ‘해정이가 사 두고 간 건가.’ 현수는 의아한 듯 옅게 웃으면서 글라스 돔을 열었다. 그때, 종이쪽지가 펄럭거리며 식탁 위로 떨어졌다. 글라스 돔 옆에 비스듬히 세워 두었던 걸 발견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현수가 쪽지를 집어 들었다. 반듯한 글씨가 쓰여 있었다.

『아침 먹어요. 그리고 5시에 전화할 테니까 먹고 싶은 거 생각해 두고 있어요.』

조금은 다른 아침이었다. 눈을 뜨자마자 음식을 찾는 것도, 그런 저를 예상이라도 한 듯 해정이 직접 사 둔 샐러드 샌드위치도, 섬세한 쪽지도. 그 쪽지에 적힌 ‘전화’라는 단어도.

‘맞다. 전화기.’

현수는 거실 한편에 놓인 전화기를 바라보았다. 수신만 가능한 전화기는 자신과 해정이 산부인과를 다녀온 다음 날 설치되었다.

“…….”

아, 산부인과. 그제야 현수는 의식할 수 있었다. 아직 생명체라고 하기에도 미묘한 그것. 배 안의 존재를 깨닫는다. 깨끗했던 머릿속에 작고 깊은 파장이 일었다. 맞다. 그렇구나. ‘그것’이 있구나.

현실을 자각한 뒤에 딸려 오는 감정은 별로 없었다. 늘 그랬다. 우울하지도 않았고, 기쁘지도 않았다. 제 배 속에 있는 존재라고 해서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는 그저 한 번 배를 조심스럽게 쓰다듬고 말 뿐이었다.

해정이 볼지는 모르겠지만 현수는 식탁 정면에 위치한 CCTV를 향해 샌드위치를 들었다. 그리고 살짝 흔들며 자못 애교스럽게 웃었다. 입 모양으로 고마워, 하고는 의자에 앉았다. 해정이가 봐 줬으면 좋겠다고 그는 생각했다. 해정을 생각하니 비로소 감정이 일렁이며 설렘을 자아낸다.

해정은 정확히 5시에 전화를 걸어 왔다. 그 전까지 현수는 늘 그렇듯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 귀찮았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꽤나 식욕이 있었던 것 같았는데 집에서만 살게 된 뒤로는 해정과 하지 않는, 그러니까 홀로 하는 식사는 아무런 맛이 느껴지지 않았다. 점점 식이에 흥미를 잃게 된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따르르릉. 구식 전화기 소리가 거실을 가득 채웠다. 별안간 현수의 걸음이 바빠졌다. 쩔그럭거리는 소리가 요란했다.

“응. 해정아.”

「응. 나 지금 집 가요. 먹고 싶은 건 생각해 봤어요?」

수화기 너머 들리는 목소리는 온화했다. 아직 바깥인지 사람들의 목소리가 배경음처럼 들렸다. 다정한 음색이 현수는 못내 사랑스럽다고 생각했다.

“모르겠어. 그냥 아무거나.”

「임신하면 뭐 먹고 싶고 그런다던데. 형은 안 그래요?」

“별로……. 그냥 너 보고 싶어.”

「나?」

“응, 너. 뭐 사 오지 말고 빨리 와.”

해정은 나지막하게 웃었다. 차에 탄 건지 탁, 소리와 함께 주변 소음이 사라졌다. 금방 갈게요. 그 말과 함께 전화가 끊겼다.

현수는 무선 전화기를 좌식 테이블에 내려둔 뒤 넓고 푹신한 소파에 누웠다. 그리고 조금 전의 짧은 그 통화를 되새겼다. 아침에 식탁 위에 놓여 있던 그 샌드위치도 떠올린다. 이윽고, 그는 며칠 전 떠올렸던 그 생각을 확신시켰다.

아무래도 해정은 ‘그것’을 좋아하는 것 같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