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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은 지나 금요일, 해정의 시험이 끝나는 날이 되었다.
종강을 했으니 아마도 내일이나 오늘부터 별장에 가 있을 것이다. 그 때문인지 기분이 조금 들떴다. 나는 하루 종일 패션잡지를 보며 해정에게 어울릴 만한 옷들을 스크랩하는 데 몰두했다. 중간에 해정의 점심시간이 되었을 때는 소파에 누운 채로 카메라를 향해 다리를 벌리고 오이를 쑤셨다. 손가락이 아닌 다른 것을 넣은 건 처음이었다. 해정이 좋아할 것이라 생각했는데, 집에 돌아온 해정은 짜증을 부리며 다신 하지 말라고 했다. 왜인지는 알 것 같지만 구태여 이유를 물어보자 뭉뚱그려 기분이 개 같다는 대답만 돌아왔다. 그게 웃기고 귀엽고, 또 기뻐서 나는 키득거리며 나를 무릎에 올리며 키스해 오는 해정과 손장난을 쳤다.
같이 샤워를 하고, 같이 밥을 먹고, 소파 위에서 노닥거리다 보니 어느덧 어둑한 밤이었다.
“…….”
해정이는 나를 안은 채로 방금 밥을 먹어 볼록해진 배를 둥글게 매만지고 있었다. 평소에는 내가 보기에도 바싹 마른 배가 밥을 먹으면 조금이라도 팽팽해지는 게 제 딴에는 마음에 드는 모양이었다. 참 이상한 것에 꽂힌다고 생각했지만, 종종 엉뚱한 짓을 일삼는 녀석이라 대수로울 건 없었다.
나는 내 배를 한 시간째 집요하게 어루만지는 손을 아무 생각 없이 바라보고 있다가, 문득 고개를 들어 시간을 확인했다. 10시. 보통 때라면 지금 별장에 출발할 시간이었다. 보통 밤에 출발해서, 다음 날 새벽에 도착한다.
‘다음 날. 다음 날이라…….’
‘그러고 보니, 내일이 정호 결혼식이네.’
시간을 헤아리다 보니 생각이 거기까지 닿았다. 이번 주 토요일이니까, 내일이 맞다.
“해정아.”
“왜.”
잠시 생각하던 나는 톡톡, 해정의 손등을 두드리며 녀석을 불렀다. 해정의 눈은 여전히 훤히 드러난 배에 고정되어 있었다. 뭐가 그리 볼 게 있다고. 나는 약하게 웃으면서 고개를 비틀어 해정의 뺨에 키스했다. 그리고 “별장, 안 가?” 하고 물었다. 걷혀 있던 티셔츠 자락을 내려 배를 숨기자 해정이 시선을 옮겨 나를 바라보았다.
“별장?”
“응. 너 종강했잖아.”
새삼스레 왜 물어보나 싶었으나 나는 잠자코 대답했다. 해정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를 눈으로 나를 가만히 쳐다보다가 말했다.
“가고 싶어?”
오늘 내리 들떴던 이유는 별장을 가기 때문이 아니라, 방학이 되면 해정과 종일 같이 있기 때문이었다. 별장은 지금 가나 내일 가나 내게는 중요하지 않다. 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되도록 오늘 가는 게 나을 것 같았다. 내일 있을 결혼식이 계속 나의 머리에 맴돌고 있는 탓이었다.
아예 지금 별장이 있는 지방으로 내려가면 거리상 결혼식에 가는 게 불가능할 테니까 쉬이 체념하고 말겠지만, 내일까지 계속 이곳에 머무른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갑자기 내게 해정이 숨기고 있던 청첩장을 보여 주며 ‘사실 형 친구 결혼식 있는데, 갈래요?’ 하고 물어 올지도 몰랐다. 그에 거절을 하는 게 정해진 답이지만, 나는 교육이 안 된 바보처럼 또 해정이의 자비롭고 순수한 표정에 홀랑 넘어가서 가겠노라고 할 것이다. 미친 짓이지만 난 자주 해정이의 꾀와 연기에 넘어가고는 했다. ‘해정이가 그래도 착한데. 나를 위해 노력해 주는데, 부탁을 들어주지 않을까. 이번엔 진심인 것 같아.’ 하며 해정이의 동그란 눈망울에 홀리는 것이었다. 물론 그 모든 건 해정이 이따금 나를 대상으로 하는 ‘시험’이었고, 그 ‘시험’에 통과하지 못한 결말은 늘 좋지 못했다.
가급적이면 그런 결말을 피하고 싶었다. 내일의 나를 못 믿겠다. 나는 생각하면서 “응.” 하고 대답했다.
“하하.”
나를 바라보던 해정이 갑자기 웃었다. ‘왜 웃지.’ 내가 상황 파악도 하지 못한 사이 녀석이 소파에서 일어났다.
“속옷이랑 바지 입어요. 바로 가게.”
* * *
잠에서 깼다. 새소리가 시끄러워서인지 목이 말라서인지는 모르겠다. 나는 떠지지도 않은 눈을 끔뻑거리며 내 허리를 옥죄는 팔을 거둬 냈다. 몸을 움직이자 내 몸짓을 따라 안에서 흔들리는 이물감이 느껴졌다. 조금 더 허리를 당기자 박혀 있던 성기가 빠졌다. 구멍 사이로 정액이 흘렀다.
나는 엉덩이 부근을 더듬거리며 주변을 돌아보았다. 별장 침실이었다. 어제 새벽, 별장에 도착한 뒤 거실에서 섹스를 한 건 기억나는데 어떻게 침실까지 올라왔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았다. 기절한 까닭이었다.
“으…….”
척추가 엇갈린 것 같았다. 나는 느리게 몸을 일으켜 세우면서 다리를 뻗었다. 그리고 바닥에 발을 조심스럽게 댔다. 그 순간이었다.
“아, 윽!”
뒤에서 손이 뻗어 와 내 허리를 잡아채 그대로 당겼다. 무식한 힘에 휘둘리자 경직되어 있던 허리가 비명을 질렀다. 그러나 나는 바르작거리지 않고 자석에 끌리는 것처럼 그대로 끌려갔다. 잠시간 빠져 있던 성기가 다시 몸 안으로 꽂혔다. 퍽. 엉덩이를 찧는 성기의 감각부터 시작되어 전기가 내리친 것처럼 고통이 느껴졌다. 상체가 파르르 떨렸다.
해정은 내 허리를 안은 채로 다시 엎드렸다. 퍽. 퍽. 퍽. 마치 교미하는 것 같은 방아질이 이어졌다. 아무런 말도, 의사 표현도 없이 눈을 뜨자마자 무작정 나부터 괴롭히는 해정이 웃겨서 나는 이리저리 휘둘리면서도 웃었다. 뒤로 손을 뻗어 어디인지 모를 해정의 살을 만지자 해정이 내 몸 뒤에 바싹 붙어 왔다. 거친 숨소리가 귓바퀴를 덥혔다.
“어디 가려고 했어.”
“응, 물, 물 마시려고, 흣…….”
“정말이야?”
“해정아, 너무, 흣, 너무 세, 아! 읏, 멍, 멍들, 것 같아, 아, 으응.”
오는 길에는 안대를 씌우고 재우는 바람에 아주 먼 지방의 시골이라는 것만 알 뿐, 별장이 어느 지역에 자리했는지 모르는 데다가 꽤 깊은 산속이어서 담벼락 밖으로는 걸어 나갈 수가 없었다. 심지어 별장에서는 종일 연결되어 있을 거니까 족쇄를 차지 않아도 된다고 한 건 분명 본인이었으면서, 해정은 족쇄를 차지 않는 내가 못내 못마땅한 모양이었다. 한시도 떨어지려고 하지를 않았고, 이렇게 말없이 어디를 가려고 하면 성부터 냈다.
“정말이냐고.”
“그럼. 당연하지. 흐응, 읏……. 같이, 내려갈까?”
그러나 오늘 아침은 유독 집요하다. ‘왜 그러지. 안 좋은 꿈이라도 꿨나.’ 그런 생각이 들자 실실 흐르던 웃음이 멎었다. 나는 해정의 손을 끌어당겨 손가락에 입을 맞추면서 말했다. 내 말에 해정은 그제야 폭력적으로 이어지던 추삽질을 멈추었다. 상체를 세우고, 옆으로 돌아간 내 얼굴을 탐색하듯 내려다본다. 어느새 더 넓어진 것 같은 흉통이 들썩거렸다. 나는 그의 눈을 피하지 않으면서 삽입된 채로 몸을 돌렸다. 그리고 “내려가서 같이 물 마시자.” 하고 덧붙였다.
해정은 대답하지 않았다. 여전히 씩씩거리는 채로 등을 굽혀 내 쇄골에 이를 댄다. 세게, 그리고 천천히 살을 짓뭉개 오는 감각을 느끼면서, 나는 협탁에 놓인 해정의 시계에 흘끔 시선을 던졌다.
11시.
결혼식이 시작할 시간이었다. 결국, 당연히, 못 가게 되었다.
쓸쓸하거나 미련이 남는다기보다는 해정이 몰래 정호에게 축하 메일을 보냈으니 그래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마음이 놓이기도 했고, 어쩐지 정호의 결혼에 내가 취했던 일련의 대응들이 해정에게 능숙해진 스스로의 모습을 재차 확인받는 느낌이어서 기분이 좋았다. 이를테면 누구 하나 반타작도 내지 못하는 아주 어려운 시험에서 나 홀로 만점짜리 시험지를 받은 기분이었다. 성취감. 아늑한 책임감. 그리고, 아무도 모르는 은밀한 정복욕이 서서히 채워지는 듯한 이 느낌.
‘나보다 서해정을 더 잘 아는 사람은 이 세상에 없겠지.’
나는 소리 없이 웃으면서 해정을 꼭 껴안았다. “내려가기 전에, 한 번만 할까?” 하며 맨 등을 쓰다듬으니, 해정은 조련이 잘된 개처럼 재깍 반응했다. 그게 예뻐서 나는 또 한 번 웃었다.
* * *
늦은 아침을 먹은 뒤 해정이는 보여 줄 게 있다며 나를 별장 밖으로 이끌었다. 그와 나는 나란히 손을 잡은 채 걸었다.
도착한 곳은 뒤뜰이었다. 두 달 전 왔을 때까지만 해도 아무것도 없던 곳이 마치 잘 가꾸어진 식물원처럼 근사하게 변해 있었다. 햇빛이 쨍쨍한 날씨와 어우러져서 정원이 꼭 한 폭의 그림 같았다. 나는 나뭇잎 사이에 비치는 햇빛을 멍하니 바라보며 나무 사이를 느리게 걸었다. 오랜만에 마시는 신선한 공기와 낮의 광경이 머리를 환기시켜 주는 것 같았다. 나는 의식적으로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가 내쉬었다.
“여기 말고 보여 줄 데, 또 있어요.”
“어디?”
해정이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꽃줄기를 꺾었다. 그리고 그것을 내 귀에 꽂아 주는 데에 집중하며 “지하실.” 하고 대답했다. 머리를 매만져 주는 손길이 섬세했다. 귀에 꽃을 달고 있는 게 영 남사스러웠으나 나는 내색하지 않고 다시 해정의 손을 꼭 잡았다.
“지하실?”
의아하다는 듯이 되물었다. 해정은 내 손을 끌어 다른 쪽으로 향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통이 큰 나무들이 무성한 곳이었다.
“응. 형이 좋아하는 걸로 가득 차 있는 방.”
“어떤 거?”
“콘솔 게임이랑, 엄청 큰 모니터랑, 퍼즐. 오락기. 뭐 그런 것들.”
“꼭 다 나를 위한 것 같네. 정원도, 지하실도.”
나는 웃으면서 말했다. 다소 민망해질 수도 있는 말일 수도 있으나 타당성이 충분했다. 해정의 성격상 그랬다. 녀석이 예쁠 것 같다고 이렇게 큰 정원을 만들 리 없었고, 재밌을 것 같다고 이것저것 사 가면서 지하실을 꾸밀 리가 없었다.
예상대로였다. 해정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그래야 형이 계속 살고 싶어 하죠.” 했다. 그 말이, 아직도 고등학생 어린애 같아서 나는 웃음을 터뜨렸다. 웃는 얼굴 그대로 까치발을 들어 입을 맞췄다.
먼 곳에서 웽웽 울리는 벌의 날갯짓 소리가 아스라이 들려왔다. 강렬한 햇빛이 해정의 얼굴을 따스한 온도로 비추고 있었다. 눈을 가느다랗게 뜬 해정은 슬며시 웃으며 나의 허리를 안아 몸을 밀착시켰다.
“기분 좋아요?”
“당연하지.”
“왜?”
“재밌는 거 많은 지하실도 있고, 정원도 멋있고, 크고. 기분 좋아.”
“……여기, 마음에 들어?”
“응. 진짜 좋은데?”
어떻게 보면 무서울 정도로 철저하게 고립된 저택이었지만, 그래서 더 좋았다. 마치 고전 동화책의 한 페이지를 찢고 들어온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지나가던 사슴이 이족보행을 하고 말을 걸어와도 놀라지 않을 만큼 현실과 동떨어진 듯한 그 분위기가 아늑했다. 내가 적극적으로 긍정하자 해정의 얼굴 위로 떠 있던 웃음이 더 짙어졌다. 눈 아래 진 속눈썹 그늘이 부드러운 모양으로 팔랑거렸다.
“다행이네.”
“왜?”
“졸업하면 여기로 이사하기로 했어.”
너랑 여기서 살고 싶어. 평생.
어차피 해정의 뜻대로 할 테고, 졸업하기까지 몇 년이 남았는데도 그는 어울리지 않게 긴장한 얼굴로 말했다. 마치 프로포즈라도 하는 사람 같다고, 내가 무의식중으로 생각했을 때였다. 신기하게도 해정이 주머니에서 두 개의 반지를 꺼내어 나의 앞으로 내밀었다.
“…….”
손바닥 위에 놓인 반지는 화려한 디자인에 은빛으로 반짝거리고 있었다. 사방으로 빛을 내는 것이 꼭 결혼반지 같았다.
“디자인이 괜찮은지, 모르겠어요.”
“…….”
불현듯,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필이면 친구의 결혼식이 한창 이루어지고 있을 지금, 해정에게 ‘프로포즈 같은 것’을 받은 게 그러했다.
“…….”
‘뭐지?’라고 생각한 찰나, 해정의 손이 불쑥 다가와 나의 왼손을 끌어당겼다. 나는 생각이 숭덩 잘린 채로 고개를 들었다. 해정은 두 개의 반지 중 조금 더 작은 반지를 내 약지에 끼워 주었다. 녀석답지 않게 조심스럽고 부드러운 손길이었다.
“어때요?”
곧이어 해정은 키스할 것처럼 내게 가까이 다가오며 물었다. 영 물건을 고르는 데에는 솜씨가 없는 스스로를 의식하고 있는지, 불안하게 흩어지는 숨결이 나의 입술 위로 번졌다. 동시에 나는 안도하면서 ‘그럼 그렇지.’ 하고 숭덩 잘렸던 생각을 멀리 던졌다. 해정이가 알고 있다면, 이렇게 순하게 굴고 있을 리가 없다.
“예뻐.”
나는 남겨진 반지를 집어 해정의 손에 끼워 주면서 말했다. 그 두 음절의 대답에, 불안한 숨결은 금방 안정을 되찾았다. 이윽고 두 발의 끝이 맞닿았고, 두 개의 반지가 겹쳐진 채로 반짝거렸다.
해정이와 나는 여름꽃의 향기를 맡으면서 한참 동안 키스했다. 결혼식장의 하객들이 보내 주는 환호처럼, 벌들은 계속해서 웽웽 울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