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1
이사한 집에선 새집 냄새가 났다.
독립한 뒤로 쭉 같은 집에서 살았고, 그 집 또한 처음 입주했을 때부터 오래된 빌라였던 터라 새집의 냄새는 오랜만이었다. 현수가 그런 말들을 이리저리 늘어놓는데도, 해정은 뚱한 얼굴을 한 채로 “그러게요.” 했다. 대놓고 삐친 티를 내고 있었으나 현수는 이유를 묻지 않고 그냥 웃고 말았다.
삐죽이는 입술이 귀엽다. 기어이 웃음이 새어 나오려는 입을 손등으로 막은 현수가 모르는 척 창문을 보았다. 다른 데를 보는 건 또 싫은 건지 곧바로 우악스러운 손이 뻗쳤다. 뒷목을 쥐고 억지로 고개를 돌리게 한다. 현수의 시야에 다시 해정의 얼굴이 가득 찼다. 고운 얼굴이 대놓고 인상을 쓰고 있었다.
“왜?”
“나 짜증 나게 하지 말아요.”
이미 짜증을 부릴 대로 부리고 있으면서 한다는 말이 그거였다. 현수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며 “알았어.” 했다. 몸을 아예 해정 쪽으로 돌려 앉는다.
허나 순순한 태도에도 구겨진 미간은 펴질 줄을 몰랐다. 현수를 빤히 보던 해정이 별안간 팔을 벌려 그의 몸을 안았다. 느긋하게 풀어진 몸은 끌어당기는 힘에 반항하지 않고 해정의 무릎 위로 올랐다. 큰 손이 현수의 뺨을 감쌌다. 얼굴을 제 앞으로 끌어당긴 해정의 눈이 찬찬히 그를 훑었다.
“왜 이렇게 즐거워하지?”
“…….”
낮은 목소리가 혼잣말처럼 물었다. 이번에는 조금 놀라 대답할 타이밍을 놓쳐 버렸다. 현수는 살짝 커진 눈을 깜빡이기만 했다. 웃음기를 최대한 숨겼는데도 감정을 금방 캐내는 해정이 놀라운 까닭이었다. 그는 매번 그랬지만, 저는 또 매번 놀라웠다.
“즐거운 일이 없는데 왜 그래요?”
“……네가 귀여워서.”
사실대로 실토하자 뺨을 감싸던 손이 반응했다. 손가락이 움찔 볼을 눌렀다가 떨어졌다. 현수의 말이 이해가 가지 않는지 해정이 생각하는 얼굴을 했다. 입을 뗀 건 조금 뒤였다.
“……내가 삐친 거 알았구나.”
“응.”
“근데 왜 안 풀어 줬어요? 내가 귀여워서?”
좀체 적응이 되지 않을 정도로 머리 회전이 빠르다. 현수는 재차 감탄했다. 저가 굳이 설명해 주지 않아도 해정은 조금만 생각하면 금방 인과를 도출해 내곤 했다. 어쩔 때는 그게 좀 당황스럽거나 무서웠는데, 지금은 마냥 귀여웠다. 왜 삐친 걸 알았는데도 풀어 주지 않았느냐고 당당하게 물어보는 것마저 그러했다.
현수가 참지 못하고 해정의 입술에 짧게 입을 맞췄다. “어. 귀여워서.” 덧붙이는 말 위로 보송한 웃음기가 내려앉았다.
“……두 번 귀여워하면 나 약 올라서 누구 죽일 수도 있겠어요.”
화풀이를 하는 것처럼 심술이 가득 들어찬 말투였다. 웃긴 말도 아니었는데 허파에 바람이 들어찬 것처럼 현수가 웃었다. 뺨에 있던 손이 허리까지 미끄러져 내려갔다. 허리를 움켜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퍽 위협적이었는데도 웃음을 거둘 수가 없었다.
그도 그럴 게, 해정이 삐친 이유가 너무 귀여웠다.
너무 커, 집이. 좀 부담스럽기도 하고.
집으로 오면서 생각 없이 내뱉었던 말 한마디 때문이다. 해정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은 것은 그 말을 듣고 나서부터였다. 꼭 알아 달라는 것처럼 아까부터 퉁명스럽게 대하는 걸 일부러 모르는 척한 건 자신이었다.
“진짜 부담스러운데 어떡해.”
현수가 짐짓 그 말을 한 번 더 내뱉자 기어코 해정의 눈이 가라앉기 시작했다.
‘나도 진짜 미친놈이다.’ 현수는 속으로 생각했다. 해정에게 이런 식의 장난을 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 알면서도 떠벌리는 입을 멈출 수가 없었다. 꼭 사자의 벌린 입에 손을 넣었다 빼는 걸 반복하는 것처럼 심장이 아슬아슬하게 뛰었다.
허리를 쥐어 비트는 힘이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아파지기 직전이었다. 현수가 다시 입을 열었다. 정말 무서워질 참이기도 했다.
“이렇게 집이 크면 청소하기 힘들어. 그게 부담스럽다고.”
“…….”
“전에 살던 집은 그렇게 작았는데도 힘들었거든.”
설명 조의 말에 가라앉던 빛이 뚝 멈췄다. 이윽고 해정이 티 나게 인상을 썼다. 눈이 가늘어진다. 아까처럼 정말 화가 난 듯한 분위기는 아니었다. 현수가 모르는 양 웃었으나 해정이 그에 넘어가지 않을 거라는 건 알았다.
“……지금 나 갖고 논 거예요?”
저가 생각한 뉘앙스가 아니어서 일단 기분은 풀린 눈치였다. 현수가 고개를 끄덕이자 헛웃음을 내뱉는다.
허리 부근을 지분거리던 손이 내려 티셔츠 안으로 들어섰다. 차가운 손이 뱀처럼 마른 몸 안을 서슴없이 돌아다녔다. 살 위로 소름이 끼쳤으나, 현수는 아닌 척 해정의 입술에 키스했다. 손과 반대로 뜨거운 혀가 입 속을 헤집는 감각이 느껴진다.
새것의 냄새가 나는 소파 위로 현수의 등이 닿았다. 키스를 이어 가며 현수를 눕힌 해정이 입술을 떼어 냈다. 얌전히 누워 있는 현수를 빤히 내려 본다. “왜?” 현수가 물으며 손을 뻗었다. 볼을 쓸어 주는 손을 잡은 해정이 손바닥에 촉, 입을 맞추었다.
“내가 가진 건 다 형 거예요.”
내려앉는 말소리가 손바닥에 작은 진동을 일으켰다.
해정이 집이 있다고 제게 말했을 때, 그리고 이 집을 처음 보았을 때, 부모님이 해 주셨느냐는 물음에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원래 내 거였는데요.’라는 말을 들었을 때까지 놀란 건 사실이었다. 그러나 부담스럽지는 않았다. 부담스러울 이유가 없었다. 해정이 방금 말했듯이 그의 것은 전부 제 것이다. 부담스러웠던 건, 방금 말한 것처럼 정말 집의 크기뿐이었다. 청소가 힘들 것 같다는 말은 지어낸 게 아니라 진심이다.
현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즉각적인 반응이 퍽 마음에 드는 것인지 해정이 입꼬리를 늘려 웃었다. 상체를 숙여 온다. 현수의 얼굴 위로 그림자가 드리웠다.
“형은 내 거고요.”
느물거리는 목소리였지만 치열한 아집이 들어 있었다. 이것도 역시 맞는 말이어서 현수는 또 고개를 끄덕였다.
* * *
해정과 동거를 시작한 지 3주째였다. 집만 바뀌었을 뿐이지, 생활은 합치기 전과 다를 게 없었다.
단순한 패턴이었다. 집에 가만히 누워 있거나 앉아 있다가, 해정이 집에 돌아오면 그를 반기고, 같이 밥을 먹고, 씻고, 귀찮아하는 얼굴을 붙잡아 로션을 발라 주고, 머리도 말려 주고, 하루 일과에 대해 말을 한다. 몸을 섞는 순서는 매번 달랐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할 때도 있었고, 다 씻어 놓고 할 때도 있었다.
집 안에는 현수의 집에 있던 컴퓨터 하나가 놓였다. 그마저도 인터넷은 되지 않았다. 하지만 해정은 현수에게 심심하냐고 물어보지 않았다. 도리어 꼭 현수가 집에만 있는 상황인 걸 잊은 사람처럼 굴었다. 똑같은 하루 일과를 말하는 그에게 조금 더 정확히 말하라고 캐묻기도 했다. 그때마다 현수는 조금 더 정확히 말했다.
아주 사소한 것들이었다. 커피를 내려 마셨다고 말했다가, 에스프레소를 내려 우유를 섞어 라떼로 마셨다고 덧붙이는, 정말 아주 사소하고 자질구레한 것들. 하지만 그렇게 들어야 해정은 이제 되었다는 듯 얼굴을 풀었다.
하루 일과를 말하기 전이었다. 늘 현수를 따라 소파에 앉던 해정이 갑자기 현관문 밖으로 나갔다. 잠시 후 박스 여러 개를 들고 들어와서는 거실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그렇게 세 번 현관문 밖과 거실을 왕복하니 길고 큰 좌식 테이블 위에 박스들이 크리스마스 선물처럼 쌓였다.
“이게 뭐야?”
소파에 앉아서 그 모양을 가만히 보고 있던 현수가 천천히 소파에서 내려와 테이블과 가까이 앉았다. 맞은편에 앉은 해정은 박스 테이프를 뜯는 것에 열중하고 있었다. 현수가 박스 하나를 들면서 묻자 해정이 대답 대신 박스 안에 들어 있는 것을 들어 보였다. 곧바로 번들거리는 카메라와 눈이 마주쳤다. 생물체도 아닌데 지레 놀란 현수가 움칠 몸을 떨었다.
비닐까지 벗은 카메라가 테이블 위에 놓였다. 정적이 내려앉았다. 해정은 기계처럼 박스를 뜯는 데 여념이 없었다.
“…….”
거실 테이블 위에 가득 쌓여 있는 박스들은, 전부 감시 카메라였다.
‘왜 샀어?’ 현수는 물으려던 입을 다물었다. 대신 아직도 쌓여 있는 박스들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카메라가 싫다기보다는,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어차피 해정은 제 하루 일과를 다 알았다. 매일 블랙커피를 마시던 자신이, 딱 하루 라떼를 만들어 마신 것까지 눈치채는 녀석이었다.
“……왜 그런 표정이에요?”
불쑥 나온 질문에 현수가 박스를 보던 눈을 들었다. 해정은 상자를 뜯던 손을 멈추고 눈만 든 채였다. 마주친 눈이 묘하게 차가웠다. “어?” 묻자, 해정이 같은 표정으로 입만 벌려 한 번 더 물었다.
“이거 설치하는 거 싫어요?”
“아니. 그건 아니고…….”
“아니고, 뭐?”
“이게 필요한가 싶어서.”
꼬리를 잡듯 확 물어 오는 목소리에 놀랐으나, 현수는 공연히 조곤조곤하게 대답했다. 그게 효과가 있는지 해정은 화를 내지 않았다. 잠자코 다시 손을 움직인다. 눈이 내려갔다.
“……나 내일 졸업식인데.”
또다시 불쑥, 말이 나온 건 조금의 침묵 후였다. 버려진 박스를 납작하게 펴던 현수가 손을 멈추지 않고 “그래?” 되물었다.
“같이 갈래요?”
손이 멈추었다. ‘무슨 반응을 원하는 거지.’ 찰나에 그런 생각이 현수의 머리를 스쳤다. 진심인지, 아니면 떠보려는 건지 모르겠어서 혼란스러웠다. “어…….” 현수가 말을 끌면서 대답을 고르자 해정이 테이프를 뜯으며 소리 없이 웃었다.
“순수하게 묻는 거예요.”
“……어…….”
“…….”
“……가도 돼?”
졸업식 시즌이겠다는 생각은 어렴풋이 했으나 해정의 졸업식에 갈 생각은 꿈에서도 하지 못했다. 3주째, 아니, 이사 오기 전까지 고려하면 거의 두 달 내내 외출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도 집에 감시 카메라를 설치하려는 와중이었다. 갈 생각은커녕 해정의 물음에 의문이 생길 만도 하였다.
현수의 물음이 우스운지 해정은 웃었다. 예쁘게 눈을 접는 게 정말 즐거운 모양이었다.
“내가 못 나가게 하는 것도 아니고, 어때요.”
못 나가게 하는 거 맞잖아. 말하는 대신 현수는 납작해진 종이를 내려놓고서 뒷머리를 긁었다. 해정이 말을 덧붙였다.
“형이 원하면 같이 가요. 어차피 엄마 아빠 안 와요.”
“너 괜찮으면 갈게.”
말한 대로 해정이 괜찮다면 가고 싶었다. 졸업식이라는 큰 행사를 겪는 해정을 눈에 담고 싶었다.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다.
현수의 대답에 해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상자로 손을 뻗는다. 마지막 상자였다.
* * *
가족석에 혼자 앉아 있으려니 어색했다. 낳지도 않은 아들이나, 있지도 않은 동생이 있는 기분이었다. 현수는 공연히 손목에 둘러진 검은 시계를 매만졌다. 학교로 오는 택시 안에서 해정이 둘러 준 시계였다.
교장이 올라와서 뭐라고 주절거리기를 몇 분째였다. 강당 안에 있는 사람 누구도 교장의 말을 듣지 않았다. 현수의 주변에 앉아 있는 가족 무리들은 모두 다 어수선했다. 특히 옆에 앉아 있는 가족은 더했다. 얼마나 말소리가 큰지 끝나고 중식을 먹을지, 경양식을 먹을지 정하는 내용까지 다 들렸다. 그 이야기를 훔쳐 들으면서, 현수는 ‘해정에게 외식하자고 해 볼까.’ 생각하다가 거두었다. 손목을 들어 시간을 확인한다. 아직 졸업식이 끝나려면 멀었다.
‘화장실 갔다 와도 되려나.’ 남이 보기엔 별것 아니겠지만, 현수에게는 진지하게 고민할 거리였다. 오랜만에 해정 없이 어디를 가려니 벌써 이런 생활에 길들여진 심장이 불안하게 뛰는 탓이었다.
해정은 강당의 맨 앞 열에 앉아 있었다. 그리고 지금 저가 앉은 가족석은 학생들의 뒤에 마련되어 있다. 화장실은 강당을 나가면 바로 있었다.
‘빠르게 다녀오면 되겠지.’ 끝내 생각을 마무리한 현수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허리를 살짝 숙인 채로 바로 뒤, 출구 쪽으로 향했다. 발걸음이 조금 부산스러웠다.
강당 밖도 안처럼 어수선했다. 졸업식이 끝나기를 기다리는 가족들이 서성이고 있었다. 현수는 “죄송합니다, 잠시만요.”를 중얼거리며 사람들 사이를 지났다.
손을 씻을 때였다. 인기척이 느껴졌다. 현수가 고개를 들었다. 제 옆으로 젊은 남자가 서 있었다. 저와 같이 손을 씻고 있다. 시야에 걸려 반사적으로 힐긋, 거울을 통해 남자의 얼굴을 본 현수가 수도꼭지를 잠갔다. 겹쳐 흐르던 물소리가 한 번에 뚝 멎었다. 남자도 현수와 같이 수도꼭지를 잠근 것이었다.
현수가 걸음을 옮겨 바로 옆 페이퍼 타월을 뽑았다. 남자는 제 뒤에 서 있었다. ‘쓰려고 하나.’ 생각한 현수는 페이퍼 타월에 손을 문지르며 살짝 옆으로 비켜섰다.
“…….”
하지만 남자는 멈춰 있었다. 그게 이상해서 현수는 페이퍼 타월을 쓰레기통에 버리며 살짝 뒤돌아 남자를 보았다. 곧바로 눈이 마주쳤다. 보고 있다는 걸 들켰음에도 남자는 상관없다는 듯 평온한 눈이었다. 피하지 않는 시선에 도리어 놀란 건 현수였다.
뭐지.
문득 이상한 기분이 등을 싸늘하게 식혔다. 좋은 기분은 아니었다. 현수는 서둘러 화장실을 나섰다. 문을 열자 소음들이 다시 밀려들었다.
현수는 빠른 걸음으로 강당으로 들어섰다. 아까 앉았던 자리까지 가는 사이, 직전에 훈화를 끝낸 듯 단상 위에 서 있던 교장이 내려갔다. 이어 안경을 낀 여자가 단상 위로 올랐다.
“이어서 학생 대표 졸업장 및 상장 수여가 있겠습니다.”
여자가 말했다. 현수는 시간을 확인하며 자리에 앉았다. 흥미를 잃은 눈이 단상 위를 바라보았다.
“학생 대표, 3학년 8반 서해정. 단상 위로 올라와 주세요.”
짧은 간격 뒤 이어지는 호명이 스피커를 통해 울렸다. 현수의 눈이 반짝거린 건 그 직후였다. 멀리서도 보일 정도로 긴 몸이 일어섰다. 계단을 오르는 발걸음마저 군더더기 없이 깔끔했다. 옆에 있던 가족 중 아빠로 보이는 남자가 “와, 키 엄청 크네.” 하고 짧게 감탄했다. 정갈한 뒷모습이 여자 앞에 섰다.
“졸업장. 3학년 8반 서해정. 위 학생은…….”
더 이상 목소리가 귀에 들리지 않는 건 비단 단조로운 어조 탓만은 아니었다. 낯익은 느낌이 나서 현수는 제 가슴께를 꾹 눌렀다. 둥둥, 박동하는 심장이 느껴졌다.
해정은 그 뒤로 두 번이나 더 위로 올랐다. 졸업장 외에 수여된 상장은 총 세 개였다. 그러니까, 한 개 빼고는 다 해정의 것이라는 뜻이었다. “뭐야. 또 쟤야?”라고 아빠로 보이는 남자가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 웃음을 참지 못한 현수가 서둘러 입을 가렸다.
졸업식이 끝났다. 사람들이 물밀듯 강당 밖으로 빠져나가는 사이에서 현수는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이윽고 사람들 사이로 익숙한 체형이 보였다. 해정은 그 사이에 짐이 많아져 있었다. 현수의 얼굴에 저절로 웃음이 피었다. 사람들은 해정을 흘긋흘긋 바라보며 지나갔다. 그것도 웃겨서, 현수는 더 크게 웃었다.
“뭐가 웃겨요?”
가까이 다가온 해정이 현수의 팔을 쥐며 그의 옆자리에 앉았다. 사람들이 다 빠져나간 뒤에 나갈 모양이었다. 현수는 웃음기를 거두지 않은 채로 입을 열었다.
“너 이래서 졸업식 오자고 했구나?”
질문이었지만 대답도 맞았다.
자신이 오랜만에 외출할 수 있었던 이유는, 다 저거 때문이었던 거다. 현수는 해정의 품에 들린 상장들을 보며 확신했다. 그리고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해정의 머리를 한 번 쓸어내렸다.
“…….”
상장을 쥔 손가락이 토독, 벨벳 커버 위를 두드렸다. 뭔가 초조해 보이는 빛이었다. 그 손가락을 본 현수가 손을 다시 올렸다. 결 좋은 머릿결을 쓱쓱 쓰다듬는다.
“잘했어.”
그 말 하나에 초조해 보이는 빛이 금세 소멸되었다. 그 위로 해맑은 웃음이 활짝 피었다. 보상을 받은 것처럼 못내 뿌듯해 보이기까지 했다. ‘이럴 때 보면 진짜 단순한데…….’ 현수가 생각하는 사이, 해정이 일어섰다. 어느새 강당에는 사람이 다 빠져나간 뒤였다.
“얼른 집 가요. 아니, 아니다. 외식할래요?”
그렇게 말하는 목소리는 들떠 있었다.
* * *
다시 돌아온 집은 이미 누군가의 손을 거쳐 간 뒤였다.
현관문부터 달랐다. 바깥쪽 문은 키패드 위로 잠금장치가 설치되어 있었다. 이제 나갈 때도 비밀번호를 눌러야 하는 듯했다. 들어올 때 해정은 제 손을 꼭 쥔 채로 당당하게 비밀번호를 눌렀다. 나갈 때와 들어올 때의 비밀번호가 다른 모양이었다. 현수는 이것도 염두에 두고 같이 졸업식에 다녀오자고 했느냐고 물어보려다가 거두었다. 대답이 어떻든 상관없는 이야기였다.
천장에는 어젯밤 해정이 뜯어 놓았던 감시 카메라가 설치되어 있었다. 세어 보지는 않았지만 집에 설치된 게 대략 70개는 되어 보였다. 집이 넓기는 하나 개수가 많은 게 그 때문은 아니었다. 사각지대 하나 만들지 않겠다는 듯 카메라가 천장에 짧은 간격으로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
현수는 침대를 향해 꺾여 있는 카메라의 대가리를 빤히 올려 보았다. 눈싸움을 하는 것처럼 바라보아도 점멸하는 빨간빛은 꺼질 줄을 몰랐다.
“이리 와.”
멍하니 서 있는 현수의 허리를 끌어당긴 건 침대에 걸터앉은 해정이었다. 털썩. 주저앉듯 현수의 몸이 해정의 허벅지 위에 안착했다. 현수를 단단히 고쳐 안은 해정이 그대로 뒷목에 이를 박아 넣었다. 현수는 익숙하다는 듯 팔을 들어 해정의 머리를 매만져 주면서도 시선을 거두지 않고 계속 카메라와 눈을 마주했다.
“왜? 저거 싫어?”
상처 위에 다시금 상처를 덧댄 뒤에야 이를 떼어 낸 해정이 나지막하게 물었다. 그리고 그대로 코를 박아 허겁지겁 현수의 몸 냄새를 맡았다. 쿵쿵쿵쿵. 해정의 심장 소리가 등을 두드린다. 현수는 여전히 시선을 떼지 않은 채로 “아니, 그건 아닌데…….” 하며 말을 끌었다.
“그럼 왜 그렇게 봐.”
점점 거칠어지는 숨결이 느껴졌다. 화내는 게 아니라는 건 엉덩이에 느껴지는 딱딱한 감촉 덕에 알았다. 금세 흥분한 혀가 게걸스레 살을 핥아 냈다. “김현수, 응?” 해정이 대답을 종용하며 한 번 더 목을 물었다. 이번엔 약한 힘이었다.
“너 아까…… 나한테 사람 붙였어?”
현수가 카메라를 물끄러미 보고 있던 이유는, 계속 그런 생각이 든 탓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했다. 눈치로 시계에 추적 장치가 달려 있다는 것쯤은 알았지만 그래도 서해정이 저를 방치하고 있었다는 게 그러했다. 집에 돌아와 보니 의문은 더 강해졌다.
이렇게 저를 옭아매지 못해 안달이 난 서해정이, 어떻게?
의문이 둥둥 떠다니는 와중에 카메라 렌즈와 눈이 마주쳤다. 그 순간 화장실에서 만난 남자의 시선이 떠오른 건 의도한 게 아니었다. 본능에 가까웠다.
“응.”
숨길 생각도 없던 건지 깔끔한 대답이 떨어진다.
‘그럼 그렇지.’ 그런 생각이 먼저 들었다. ‘이걸 그냥 받아들이는 나도 진짜 미친놈이 맞구나.’ 하고 생각한 건 수순이었다. 언젠가도 이런 생각을 했었던 것 같은데. 현수가 자조적으로 웃었다.
그사이 해정이 훌렁 현수의 티셔츠를 걷어 올렸다. 건조한 손가락이 납작한 가슴을 더듬거리더니, 이내 유두를 손가락으로 쥐어짜듯 동글동글 매만지기 시작한다. 현수의 어깨에 턱이 얹혀졌다.
“그런 사람은 어디서 구했어?”
“무슨 사람?”
“나한테 붙인 사람.”
“뭐, 그냥.”
유두를 비비는 힘이 더 강해졌다. 그 느낌이 버거워 현수가 허리를 뒤틀었다. 다른 건 다 괜찮았는데, 가슴을 만지는 건 이상하게 싫었다. 만질 것도 없고 또 아무 느낌도 없는데 꼭 느껴지기를 강요받는 것 같았다.
기어이 현수가 벗어나기 위해 엉덩이를 떼고 일어섰다. 엉거주춤 마른 몸이 떨어진 것도 잠시, 갈고리처럼 튀어나온 손이 다시 허리를 잡아챘다. 그대로 현수를 침대 위로 눕힌 해정이 그 위에 올랐다. 현수의 가슴을 핥기 시작한다. 고집스러웠다.
“거실이랑 방에 있는 건 뭐야? 가슴 그만, 해정아.”
“어떤 거.”
급기야 쪽쪽 빨아 대는 입에 현수가 해정의 머리를 쥐고 살짝 밀었다. 해정은 늘 그랬던 것처럼 말을 무시했다. 도리어 반항하듯 유두를 콱 깨문다.
“아!”
“어떤 거 묻는 거냐니까.”
“……아래에, 파이프.”
집 안에는 감시 카메라가 아닌 또 하나가 설치되어 있었다. C 모양으로 잘린 쇠 파이프였다. 발목 정도의 높이에 위치한 그것은 거실 초입 벽에 니은 자로 박혀서 거실에서 방, 화장실까지 끊임없이 연결되어 있었다. 그 탓인지 방의 문까지 다 제거된 상태였다.
현수가 벗어나려던 걸 포기하고 그에 대해 대답했다. 대답에 한숨이 섞여들었다. 해정이 그제야 웃으면서 잘근 깨물고 있던 유두에서 입을 떼어 냈다. 꼭 유치한 싸움에서 이긴 아이같이 웃는다.
그대로 얼굴이 올랐다. 벌게진 현수의 얼굴 곳곳에 키스한 해정이 비밀을 말하듯 속삭였다.
“내일 알려 줄게.”
졸업식 후에 들었던 것보다 더 들뜬 목소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