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초대
서해정은 자신이 저능아일 것이라고 생각하며 살았다.
선생님들은 저에게 유달리 똑똑하다고 했으나 스스로가 느끼기에는 전혀 아니었다. 저가 알고 시험에 쓰는 이론이나 공식은 누군가가 수업 시간에 알려 주었기에 아는 것뿐이었다.
허나 같은 반 아이들은 당연히 아는 것을 자신은 모르는 경우가 너무나도 많았다. 누군가가 가르쳐 주지도 않았는데 아이들은 알았다. 이럴 때는 당연히 이래야 하고, 저럴 때는 당연히 저래야 한다는 듯이, 자신 빼고 모두 다른 수업을 받았나 싶은 때가 하루에도 몇 번이고 있었다. 그때마다 해정은 멀뚱히 앉아 있거나, 누군가가 자신을 지적해서 귀찮게 될까 봐 옆 사람을 흉내 내어 반응을 하곤 했다. 자신이 이상하다는 것을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어서야 깨달았기 때문이다.
“넌 정말 나한테 관심 없어?”
관심.
키가 비슷한 탓에 4학년 때부터 계속 짝꿍을 했던 여자아이였다. 그 아이가 참지 못하겠다는 듯 제게 그렇게 물었을 때 해정은 눈을 깜빡이기만 했다. 관심에 대한 정의는 대충 알았지만 스스로 느껴 본 적은 없었다. 그래서 해정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랬더니 여자아이는 또 한 번 물었다.
“그럼 내가 손잡았을 때 왜 아무 말도 안 했어?”
해정은 저번 주에, 체육 대회 때 달리기를 기다리는데 갑자기 누군가가 제 손을 잡았던 걸 기억했다. ‘왜 아무 말도 안 했더라.’ 생각하던 중에 여자아이가 한 번 더 물었다.
“내가 손잡았을 때 싫었어?”
“아니.”
그건 아니었다. 해정이 작게 답하자 여자아이는 잔뜩 힘주고 있던 눈에 힘을 풀었다. 그리곤 느물거리며 말했다.
“그럼 내가 좋은 거네.”
“그건 아닌데.”
동그란 눈에 다시 힘이 들어갔다. 눈만 천연하게 깜빡이는 해정에게 얼굴을 가까이 들이민다.
“……너, 좋아하는 감정을 모르는구나.”
“알아.”
해정은 자신의 비정상적인 머리가 드러날까 봐 얼른 대답했다. 부모에게 알려져 귀찮게 되는 건 싫었다.
여자아이의 옅은 눈썹이 휙, 위로 올랐다.
“좋아하는 감정이 뭔데? 말해 봐.”
꼭 시험하는 듯한 말투였다. 해정은 당황했다. 좋아한다는 것. 이것도 역시 대충은 알았지만 정확하게 대답할 수가 없었다. 틀리면 어쩌지. 저만 모르고 사람들은 당연히, 너무나도 잘 아는 것이었다. 자신이 없었다.
해정이 쉬이 대답하지 못하자, 여자아이는 거 보라는 듯 웃었다.
“넌 좋아하는 걸 모르는 거야. 그래서 나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거라니까.”
그 뒤, 좋아한다는 건 말이야……, 하고 여자아이는 무어라고 장황하게 설명하기 시작했지만 해정은 흘려들었다. 궁금하지도 않을뿐더러 그 아이가 자신의 이상에 대해 눈치채지 못했다는 것에 안도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그로부터 몇 개월 후였다. 해정은 문득 그때의 대화를 기억했다.
「제발 그런 생각 하지 마세요. 티엠디……. 아 그러니까, 승우 님.」
그 부드러운 목소리가, 이어폰을 통해 귀에 흘러 들어온 순간에 그러했다.
좋다. 누군가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스스로 알게 된 순간이었다. 단순히 이 사람의 영상을 볼 때에만 느꼈던 ‘즐거움’을 넘어선 감정. 이건 그 여자아이가 운운했던 좋다는 감정이었다. 무엇인가에 대한 욕구. 별난 것. 잘 몰라서 흐지부지 그렇게 칭했던 그것의 이름이었다.
흥분을 주체하지 못하는 가느다란 손가락이 발발 떨렸다. 태블릿을 두드리는 손이 자꾸 헛나가서 짜증이 났다. 해정은 무릎을 더 가지런히 모아서 태블릿을 받쳤다.
[tmddn123] ㅛ생각하고싶지 않ㅈ디만
[tmddn123] 너ㅓ무 힘든어요
타자를 친 손이 얼른 미끄러지는 태블릿을 붙들었다. 등에서 식은땀이 삐질 흘렀다. 해정의 말에 다른 시청자들은 눈치를 주듯 냉한 반응을 보냈으나 상관없었다. 그리고 어쩐지 이 사람도 상관하지 않는 눈치였다. 위태로워 보이는 자신의 채팅이 영 마음이 쓰이는지 한숨을 내쉰다. 그 숨소리를 들었을 때, 해정의 덜 자란 그것이 살짝 딱딱해졌으나 본인은 눈치채지 못했다. 감았다 뜨는 걸 까먹어 벌게진 눈이 태블릿을 바라보았다. 킴수의 얼굴도 보이지 않는데, 꼭 보이는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였다.
「그래도 자살은……. 정말 가족들에게도 안 될 짓이에요. 아시죠?」
쉴 새 없이 올라가는 채팅 사이에 떠밀려 올라갔던 말 하나가 시작이었다. 모의고사를 망쳤다고 엄살을 부리는 누군가의 말에, 킴수는 그걸 놓치지 않고 위로했다. 그다음 날은 엄마랑 싸워서 뺨을 맞았다는 또 다른 누군가의 말에, 킴수는 그걸 또 놓치지 않고 위로했다.
해정은 누군가가 가르쳐 주지 않으면 모르는 것이 많았지만, 관찰을 잘했다. 그래서 가르쳐 주지 않아도 스스로 습득할 때가 있었다.
형이 절 학대해요. 죽이려고 해요.
그는 누군가의 아픔을 지나치지 못한다. 그걸 습득하자마자 해정은 제 유일한 아픔을 내보였다. 몸이 아픈 것이었고, 폭력을 피해 숨으면 되는 거라 정신적으로 힘든 것까지는 아니었지만 과장을 해야 했다. 정상인 사람이라면 그럴 것 같았고, 또 이 방송을 보는 천여 명의 사람들 중 자신이 제일 힘들어야 했고, 제일 안쓰러워야 했으니까. 그래야 이 사람이 나를 볼 테니까.
[tmddn123] 그래도 죽고싶어요
[tmddn123] 형이때려서ㅓ 뼈부러졌어요
그 말에 목소리는 자못 놀란 듯 숨을 짧게 들이켰다.
「네? 뼈가 부러졌다구요?」
길어진 잡담에 많은 사람들이 빠져나간 와중이었다. 계속 방송에 남아 있던 몇 명의 사람들이 기다렸다는 듯 이죽거렸다.
[fnffnfkffk] 뼈 부러졌는데 여기서 이러고 있음?ㅋㅋ
[asdqwe33] 주작 냄새
[happydog1] 아 ㅅㅂ 이제 상대 그만해주고 겜좀해라 킴수야.. 개답답;;;;;
[frozen88] 쟤 몇살임???
「부모님한테는 말씀해 보셨어요? ……여러분, 시청자한테 욕하시면 차단해요.」
부모님?
생각해 본 적 없었다. 해정의 뇌가 빠르게 돌았다. 사람들이 저렇게 분위기를 몰아가면 이 사람도 결국 제게서 관심을 거둘 수도 있다. 조바심이 났다. 잠시 액정을 피아노를 치듯 두드리던 해정이 다시 태블릿을 무릎 위에 두었다.
[tmddn123] 엄마아빠한테말하면죽인다고했어요형이요그래서말못해요
썩 괜찮은 변명이었다. 이 사람이 더 마음을 쓸 수 있게 할 수도 있다. 어쩐지 웃음까지 나올 정도였다. 뿌듯했다. 이 사람이 뭐라고 말할까. 더, 더, 더, 더, 더, 더 나한테 관심을 줄까.
뭐라고 할까. 응? 뭐라고 할 거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피가 쉴 새 없이 온몸을 돌고 있었다.
「그래도 우선…….」
기어이, 근심 어린 목소리가 이어폰을 통해 흘러나오기 시작했을 때였다. 어딘가로 빨려 나가듯 소리가 끊겼다.
“이, 씨발……!”
대신 귀에 박힌 목소리는 최승우의 것이었다. 힘없는 몸이 휙 돌아감과 동시에 명치에 주먹이 박혔다.
“윽!”
“씨발, 네가 뭔데!”
폭력이 무차별적으로 쏟아졌다. 해정은 조금이라도 덜 맞기 위해 몸을 웅크렸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화가 많이 난 것 같았다. 해정은 승우에게 맞으면서도, 킴수가 제게 무슨 말을 했는지 생각했다. 못 들은 게 아까웠다. 다시 보기가 남을 테니 그걸로 보면 되지만, 실시간으로 듣지 못한 게 아쉬웠다.
좋았는데. 좋다는 감정을 느끼고 있었는데. 이 버러지 같은 새끼가 뭔데, 그걸.
“으윽, 읏!”
아니, 아니야. 생각해 보니까 이것도 기회일 수 있었다. 다음에 다시 들어가서 말하는 거야. 형한테 맞았다고. 아, 방금 어딜 맞았더라. 이거 다 기억해 둔 다음에…… 그래.
“윽, 헉!”
다 말하는 거야. 그러면 또 관심을 가져 줄 거야.
관심.
“큭……!”
그 사람의 관심을 받으면 좋아. 기분이 너무,
좋아. 흥분돼. 좋아. 좋아. 좋아.
“우윽, 으!”
형한테 명치를 맞았고요 머리도 세게 맞았어요 소파에서 바닥으로 뒹굴었고 몸이 바닥에 부딪혀서 온몸이 아팠어요 너무 아파서 머리가 어질어질하고 눈앞이 잠시 안 보였는데 그 형은요 교묘해서 엄마 아빠에게 안 보일 곳만 때려요 그래서 내가 엄마 아빠한테 말할 수도 없어요 엄마 아빠가 안 믿으면 나만 이상한 애 되는 거잖아요 엄마 아빠가 없는 낮이랑 이른 저녁에만 때리거든요 엄마 아빠 앞에서는 친절한 척 웃어요 그래서 저는 맞을 수밖에 없어요 학대당할 수밖에 없어요 그게 무서워요 힘들어요 자살하고 싶어요 그 형은 너무나도 악랄해서 엄마 아빠 앞에서는 절대 티를 안 내거든요
어때요 저 너무 불쌍한데
“죽어.”
티를,
안 낸다고.
“…….”
“……흐으…….”
티를, 안 내야 한다고, 넌.
“…….”
해정은 속이 터지는 감각을 느끼면서 후들거리는 팔로 바닥을 짚었다. 그리고 가까스로 마른 상체를 일으켰다. 피 맛이 나는 침을 꿀꺽 삼키고, 말했다.
“그런 말,”
“…….”
처음 불안이라는 감정을 맛본 혀는, 독약을 마신 것처럼 파랗게 질려 있었다.
“엄마 아빠 앞에서는 하면 안 돼.”
“…….”
그래야만 내가 외롭지 않을 수 있어. 그래야만 그 목소리가 내게 말을 해. 그러니까, 그런 말은 절대 입 밖으로 내지 마. 네 감정을 티 내지 말고, 치밀해져. 치밀하게 날 학대해.
“들키잖아.”
들키지 마.
넌 가해자고, 난 피해자야.
* * *
“이상하네.”
샐쭉 벌어져 있던 입술에서 웃음기가 감춰 드는 건 순식간이었다. 원래 그런 마음이었다는 듯, 건조한 목소리가 평이하게 흘렀다. 흰 손이 우악스레 현수의 목을 쥐었다. 몸이 힘없이 흔들렸다. 금방이라도 목을 조를 것 같은 위협감에 심장이 떨었다. 현수가 짐짓 눈에 힘을 주고 해정을 올려 보았다. 눈을 피하면 안 된다는 본능적인 생각이 든 탓이었다.
“…….”
“……나도, 병원에서 처음 알았어요.”
“…….”
“괴물이 형인 거요. 그때 얼굴을 처음 본 거거든요.”
무표정한 얼굴로 꼭 남의 얘기를 하는 것처럼 말하기 시작한다. 괴물이 형. 해정의 입술 사이로 그 말이 나왔을 때 기다란 손톱이 명치를 후비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현수는 대답하지 않고 눈만 감았다가 떴다.
해정이 말을 이었다.
“열이 존나 많이 나서 정신이 없나 보다 했는데, 그 이후로도 계속 괴물이 형으로 보이더라고요. 아, 내가 착각하고 있었구나. 원래부터 형이었구나. 깨달을 때부터 무슨 일이 일어난 줄 알아요?”
목을 쥔 손이 손가락으로 슬슬 살을 매만졌다. 해정이 자조적으로 웃으며 말을 이었다.
“김현수 옆에, 또 다른 김현수가 보여요.”
일순 현수의 몸이 차게 얼었다. 바싹 마른 입술이 잘게 떨렸다.
“무슨…….”
“지금도 있어요. 형 옆에 괴물이 보인다고요. 형 얼굴인데, 괴물은 맞아. 내가 봐 왔던 괴물이 한 말들을 똑같이 하거든. 형이 내게 사랑한다고 할 때마다, 어디 안 간다고 할 때마다 귀가 아플 정도로 소리를 질러.”
“…….”
새카만 불안이 더 깊은 암흑 속으로 침잠한다.
“‘김현수는 널 싫어해. 도망가고 싶어 해. 너 안 좋아해. 눈 감았다 뜨면 어딘가로 도망가 있을 거야.’”
별안간 손이 떨어졌다. 해정이 느리게 팔을 벌려 현수를 한 품에 안았다. 무덤덤한 얼굴과는 달리, 몸은 겁을 먹은 것처럼 약하게 떨고 있었다. 해정의 몸을 한꺼번에 대고 있어야 느낄 정도의 진동이었다.
어깨에 턱이 얹혔다. 귀에 속삭이는 목소리는 고통에 짓이겨진 신음과도 같았다.
“‘넌, 김현수한테 속고 있는 거야.’”
“…….”
“……섹스 할 때도 그랬고, 그 이후로도 계속 그랬어요. 형 옆에 계속 있었다고요. 몰랐죠? 진짜 좆같았는데.”
불현듯 현수의 머리에 머지않은 과거가 스쳤다. 끊임없이 몰아붙이고, 끊임없이 확인받으면서도 무언가에 쫓기는 것처럼 화를 내며 저에게 상처를 주었던 해정의 모습들이 떠올랐다.
나 안 싫어하겠다고 약속해 줄 수 있어요?
형, 나 좋아해?
왜 나 안 싫어해요?
형이 자꾸 받아 주니까 불안해서요.
아, 어떡하지. 나 점점 불안해져.
“…….”
형. 나 어떡해?
얼굴이 서서히 떨어졌다. 다시 해정의 얼굴이 보였다. 상처 입은 눈이 한 번 눈꺼풀에 의해 숨었다가 드러났다.
“근데 그 괴물이 하던 말을 진짜 김현수가 한 거야, 방금.”
“해정아.”
“정말 이상하죠. 그 괴물은 내 환상이 아니었나 싶으니까 막, 기분이 이상해요.”
“…….”
얼굴처럼 고운 손이 제 심장 위를 천천히 눌렀다.
“……아프고, 무서워요.”
이건 대화가 아니었다. 해정은 생각하는 걸 여과 없이 그대로 내뱉고 있었다. 가지런한 손이 해정의 어깨를 더듬거리며 잡아 냈다.
“……내가 하는 말은, 네가 싫어서 하는 말이 아니야, 해정아.”
“알아요. 형이 왜 그런 말 하는지.”
해정은 현수가 했던 말을 기억하고 있었다. 트라우마 수준의 죄책감 때문에 아직도 누군가가 구원을 바라면 강박적으로 받아 주게 된다는 말이었다. 그의 시청자라면 다 알 듯, 해정도 어렴풋이 그런 현수의 성격을 파악하고 있었으나, 그 말을 기점으로 확실하게 그걸 이용했으니 잊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현수가 이렇게 충격을 받을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최승우가 가해자고, 자신이 피해자라는 게 거짓말이라는 것만 들키지 않으면 된다고 해정은 생각하고 있었다.
근데 지금 김현수는, 모든 걸 다 아는 듯한 눈치인데도 그 거짓말에 신경을 쓰고 있지 않았다. 도리어 자신이 괴물이라는 것이 문제라는 듯 굴었다. 거기에 자신이 괴물이니, 네 옆에 있지 않겠다고 했다. 이해가 안 되었다. 누가 가르쳐 주지 않은 죄책감이란 감정은 이용하기만 했지, 아직 응용하기 힘들뿐더러 와 닿지도 않았다.
왜? 내가 좋으면 되는 건데. 상대방이 힘든 게 무슨 상관이야. 내가 좋아서 옆에 두면 되는 건데. 형은 그런 거 못 견디는 편이니까, 그래, 그냥 좀 미안해하면서 옆에 두면 되는 거 아니야?
그냥 좀 미안해하면 되는데, 왜?
왜 그렇게까지?
혼란스러워하는 해정의 얼굴을 향해 현수가 손을 뻗었다. 달래듯 천천히 뺨을 매만진다. 차가운 뺨은 좀체 온기를 품는 법을 모르는 듯하다.
“왜 이런 말 하는 건지 알면, 형 말 들어줘.”
“…….”
“형이랑 멀리 떨어져 있으면 괜찮을 거야. 그리고 병원 다니면서 치료하면 돼. 괴물도 없어질 거야.”
“싫어.”
해정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대답했다.
좋다는 것도, 흥분도, 아픈 것도, 다 김현수 때문에 알았다. 괴물이라는 불안감도 김현수가 없었으면 보이지 않았을 것이었다. 그걸 깨닫고 난 뒤에, 저는 더 이상 찾아오는 괴물을 무서워하지도 않았다. 지옥도, 벼랑 끝도, 악몽도, 모든 감정이 제게는 다 김현수다. 김현수만 무서웠고, 김현수만 끔찍했으며, 김현수만 좋았다.
“너, 형이랑 붙어 있고 난 뒤부터 더 힘들어했어.”
“상관없어.”
다 감싸 안으면 된다. 문제 될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김현수가 주는 불안도, 고통도, 괴물도, 모두 다 감당할 수 있었다. 다 알지 못하던 때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아니, 돌아갈 수가 없다.
“지금 집에 가. ……그리고, 형 방송 보지 말고, 연락도…….”
“혹시 내가 요새 자꾸 형한테 상처 줘서 그래요?”
억눌린 목소리가 낮게 물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죄책감이라는 게, 그가 스스로에게 강요하고 있는 그 이타심이라는 게 도무지 이해가 안 되어서, 해정은 다른 경우를 물어보았다.
“그런 거 아니야.”
“안 그럴게요. 불안할 때마다 참을게요.”
생각할수록 터무니가 없다. 말 사이에 빠득빠득 이가 갈렸다. 피처럼 솟구치는 감정을 주체 못하겠다.
“그런 거 진짜 아니…… 윽!”
“그럼 진짜 나를 좋아해서, 나한테 이딴 좆같은 소리를 하고 있다고?”
별안간 손이 불쑥 튀어나가 제 뺨을 쓰다듬는 손을 움켜쥐었다. 현수가 손을 빼기 위해 팔을 제 쪽으로 당겼으나 과격한 힘은 빠져나갈 길을 허용하지 않았다. 이윽고 반대편 손까지 잡혔다. 몸이 끌어당겨졌다. 해정이 현수를 끌어 침대 위로 밀었다. 양손이 잡힌 현수가 중심을 잃고 해정이 미는 방향대로 쓰러졌다. 바로 위에 해정의 얼굴이 자리했다.
“해정아. 제발, 좀.”
“형이 뭘 좀 착각하고 있는 것 같아요.”
“이거 놔. 응? 놓고…….”
“나는 내가 병신 되는 한이 있어도, 형 절대 안 놓을 거거든요.”
그 말에 심장이 내려앉는다. “서해정!” 놀란 현수가 큰 소리를 내었다. 저를 앞에 두고 자해라도 할까 싶어 불안했다. 현수가 몸부림을 치기 시작하자, 손목이 더 세게 짓눌렸다.
뼈가 얼얼하다고 생각한 순간이었다. 오른쪽 손목을 압박하던 힘이 풀렸다. 그리고 그대로 뺨이 돌아갔다. 날카로운 마찰음. 눈을 감았다가 뜨자, 시야는 벽을 비추고 있었다. 뺨의 가죽이 찢긴 것처럼 아팠다. 뺨을 맞았음을 인지함과 동시에 밑 턱이 가볍게 잡혔다. 다시 얼굴이 정면으로 돌아간다.
서해정의 얼굴은 이미 광기에 잡아먹힌 후였다.
“반대도 마찬가지야. 너 병신 만드는 한이 있어도, 나는 너 안 놔.”
“…….”
맞았다는 사실이 사고를 짓이긴다. 아무 생각이 나지 않았다. 머릿속이 새하얗다. 맞은 뺨이 부어오르는 감각이 느껴졌다. 놀란 나머지 눈물이 핑 고였다.
해정이 허리를 숙였다. 현수의 오른뺨에 다정하게 입을 맞췄다. 극적일 정도로 바뀐 표정이 최선을 다해 현수를 꼬드겼다. 사근사근한 눈이 시선을 맞춰 온다.
그 트라우마가 김현수에게 그렇게 지배적인 것이었다면, 다 부숴 버리면 되는 것이다.
“……뺨 때려서 미안해요. 갑자기 너무 화가 나서 그랬어요.”
“놔줘. 제발, 해정아.”
그 말간 눈 사이에 밴 살기를 차라리 모른 척하고 싶었다. 뺨에 머물렀던 입술이 서서히 내려갔다. 턱 끝을 잘근 무는 이가 간지러웠다. 해정이 속삭임을 이었다.
“내가 어려서 감정을 주체를 잘 못하는 것 같아요.”
“해정아, 그만…….”
“그래서 견디기 힘들었던 거죠? 미안해요. 이제 안 그럴게요. 약속해요.”
“그런 거 아니라고 했잖아. 대체 왜 그래.”
고였던 눈물이 떨어졌다. 눈가를 적신다. 목소리가 맥없이 파들거렸다. 현수가 어느새 자유로워진 손을 들어 해정의 어깨를 밀어냈다. 해정은 밀려나지 않았다.
“그냥 궁금한 게 있는데요.”
해정이 화제를 전환하듯이 목소리를 높여 물었다. 그게 웅웅, 메아리처럼 현수의 밑바닥까지 퍼졌다. 말끔한 얼굴이 더 가까워졌다. 물끄러미 바라보는 눈은 모든 생각을 훑어볼 것처럼 섬세했다.
“그 뒤로, 개고기 먹고 싶었던 적은 없었어요?”
“……뭐?”
“한 번도 그거 생각난 적이 없었냐고요.”
화제를 꺼내기만 했을 뿐인데 돌연 개고기 냄새가 진동하는 착각이 일었다. 여린 위가 꿈틀거리며 반응한다. 현수의 얼굴이 체한 것처럼 핏기가 가셨다. 해정이 작게 웃으며 대답하지 못하는 입술에 짧게 입을 맞췄다. 그리고 말을 이었다.
“진짜 그냥 궁금해서요. 나도 한 번 먹어 본 적 있는데, 맛있던데.”
능청스러운 목소리. 그 위에 할아버지의 목소리가 겹친 건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들깨 냄새. 기름이 둥둥 떠다니는 벌건 국물. 쫄깃한 고기.
어때, 맛있어?
테이프가 늘어나듯 할아버지의 목소리가 느리게 늘어진다. 현수는 그 뒤 자신이 했던 대답이 떠오르기 전에 억지로 지워 냈다. 누군가가 손을 넣어 휘젓는 것처럼 정신이 어지러워졌다. 잦아들었던 개들의 소리가 다시 다가온다.
“궁금했어요. 솔직히 그 개를 죽이고 형한테 먹인 형 부모가 잘못한 거지, 왜 굳이 형이 죄책감을 가질까? 형이 너무 착해서?”
“이런 얘기 안 하고 싶어. 상관없는 얘기야.”
“왜 아직까지 그 별것도 아닌 기억을 트라우마로 기억하고 있을까. 그래. 그냥 나쁜 기억으로 놔둬도 될 걸, 왜 생각만 해도 이렇게, 토하려고 할까, 김현수는? 왜?”
“그만해.”
현수가 낮게 말했다. 해정이 빠져나가려는 현수를 몸으로 짓눌렀다. 웃는 얼굴로 숨을 틀어막는다. 트라우마의 원인이었던 그 감정으로, 해정은 현수를 빈틈없이 몰아가고 있었다.
“알았어요. 그럼 그냥 답해 줘요. 어땠어요, 개고기?”
속을 뒤집어서 먼지까지 탈탈 털어 내는 것이다. 현수는 그 의도를 분명히 알았다. 사랑스럽다는 듯 말 사이에 입술이 쪽, 쪽 떨어졌다. 현수가 밀어내는 손에 힘을 주었다. 해정은 밀려나지 않았다.
“맛없었어?”
“그만 좀……!”
“맛있었지?”
그래서 계속 생각난 거야. 형은. 그치.
단순한 질문 하나가 시야를 까무룩 잠재웠다. 철창이 보였다. 그 사이에 개가 있었다. 철창 사이로 손을 뻗었다. 개의 내장. 고기. 피. 근육. 위장을 짓이기는 듯한 감각. 턱 아래까지 차오르는 더부룩한 고깃덩이들. 개 비린내. 고소한 냄새.
또 다시 한 번 늘어진 테이프가 재생된다. 군침을 삼키며 했던, 자신의 대답이 흐른다.
응. 맛있어.
“우욱!”
구역질이 치솟는다. 현수의 몸이 울렁였다. 토하고 싶었다. 목 부근이 간질거릴 정도였다.
실체를 안다 한들, 그 감각은 지워지지 않았다. 개고기를 떠올리면 고소한 냄새가 떠올랐고, 그 댕강댕강 찢긴 갈색 고기들이 떠올랐고, 기름이 뜬 벌건 국물이 떠올랐다. 그러면, 침이 고였다.
그걸 부정하고 싶었다. 그래서 힘껏 구역질을 했고, 그런 식으로 살아왔다.
그런 식으로 살아야만 하는데.
“진짜 날 밀어내고 싶으면, 그렇게 해요.”
급격히 냉정해진 목소리가 팔딱이는 뇌를 갈라낸다. 해정의 손으로 인해 마구잡이로 파헤쳐진 마음 사이에, 현수가 얼굴을 들이밀었다. 제 가장 밑바닥의 것을 바라본다. 본심. 본능. 입맛. 욕심. 이기심. 나. 나는.
서해정 옆에 있으면 안 돼.
왜?
난 괴물이야.
맛있었어. 서해정이 좋아.
서해정의 몸. 개고기.
원하는데.
서해정.
쾌락.
내가 좋으면 됐잖아.
개를 도축하든, 정신병의 원인이 나든 무슨 상관이야.
나만 좋으면 돼.
내가 제일 중요해. 내 마음만. 내 쾌락만.
저만 아는 본능들이 손을 뻗으며 아우성치고 있었다. 끔찍했다. 현수는 아찔해져서 눈을 꽉 감았다. 아까 가까스로 다물리게 했던, 그 개 짖는 소리가 선명하게 들리기 시작했다. 동시에 몸이 달아올랐다.
해정을 옆에 두는 건 너무 이기적인 일이다. 이대로 해정을 거부하고 도망가는 게 이 아이를 위해서 더 좋은 일이었다. 해정이가 정상적인 치료를 받아야 하는데. 자신이 아닌, 정말 제대로 된 치료를. 아직 늦지 않았는데. 그래야만 이 짖는 소리가. 내 강박. 죄책감. 개들. 다 사라지는데.
알고는, 있는데.
“우윽…… 흐으…….”
“부드럽게 할게요.”
“짖는 소리, 짖는 소리가…….”
“괜찮아.”
현수가 훌쩍이며 울기 시작했다. 겁을 먹어 몸을 바르작거린다. 해정이 연달아 부어오른 뺨에 키스했다. “볼 따갑겠다. 많이 아프죠.” 걱정이 가득한 목소리가 물었으나, 현수는 듣지 못하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 토, 토할 것 같아…….”
“사랑해요. 너무너무.”
어지러웠다. 멀미가 나는 것 같았다.
개 짖는 소리. 개고기 냄새. 서해정의 체향. 서늘한 온도의 몸. 철창. 긴 속눈썹. 다갈색의 눈. 개의 몸. 유리같이 반짝거리는 눈동자. 침대. 파란 트럭. 고소한 냄새. 체리 향. 구토. 속삭이는 목소리. 달콤하게 녹아내리는 숨. 서해정. 서해정. 이 예쁜 얼굴.
개와 서해정이 마구잡이로 뒤섞였다. 기어이 잔뜩 굳어 있던 몸에 힘이 풀렸다. 여기저기 들쑤시는 감각들에 정신이 너덜거렸다. 그대로 차가운 입술이 부딪혔다. 정말 도망가도 된다는 듯 가뿐하게 내려앉는 입술이, 천천히 현수의 입 사이에 자리 잡았다.
현수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 * *
유난히 매미 소리가 컸던 날이었다.
열다섯 살의 여름 방학이었다. 거실 바닥에 앉아 레슬링을 보고 있었다. 기억하기로는 매우 끈적거렸다. 몇십 년 만의 폭염이라고 했었나. 여하튼 그때 엄마와 아빠는 일을 나가고 없었다. 혼자였다.
허기가 일었다. 둥글게 제 배를 쓰다듬으며 냉장고에 무엇이 있는지 생각했다. 밑반찬이 여러 가지 있었던 것 같은데 입맛이 당기지는 않았다. 상을 차려 먹는 것도 귀찮았다. 뭘 시켜 먹을까 생각했는데 그도 귀찮았다. 스팸 하나 집에 있으면 구워 먹는 건데. 아쉬운 마음에 입맛만 다셨다.
그때였다. 초인종 소리가 났다. 곧장 시간을 확인했다. 아직 엄마와 아빠가 올 시간이 아니었다. 의아한 얼굴 그대로 인터폰으로 다가갔다. 인터폰 화면으로 보이는 얼굴은 할아버지였다.
─할아버지!
얼굴을 확인하자마자 현관으로 달려갔다. 문을 열며 소리쳤다. 할아버지의 품에 안겼다. 가슴께에 얼굴이 파묻혔다. 시골집 냄새가 났다. 한껏 숨을 들이마셨다.
─우리 현수 키 많이 컸네.
포옹 뒤에 할아버지는 문 앞에 내려놓았던 짐들을 들어 집 안으로 들어왔다. 그럼요. 대답하며 쪼그라든 등을 졸졸 따랐다. 식탁에 짐을 내려놓은 할아버지가 영 힘에 부치는지 숨을 고르며 식탁 의자에 앉았다. 물을 따라 할아버지에게 내밀었다.
─엄마랑 아빠는 저녁에 와요.
─그래? 너는 배 안 고프고? 맞다. 이거 냉장고에 좀 넣어 놔라. 쉬면 안 되니까.
할아버지가 커다랗고 까만 비닐봉지 하나를 가리키며 말했다. 비닐봉지를 들자 무거우니 조심하라는 잔소리가 뒤따랐다. 그 말대로 꽤나 묵직했다. 몸이 휘청거렸다. 황급히 다시 식탁에 비닐봉지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안을 들여다보았다. 커다란 들통이었다.
─아이고. 내비 둬. 할아버지가 좀 쉬고 넣을게. 쏟겠다.
─이게 뭔데요?
순간적인 망각이었다. 서울로 올라와 초등학교, 중학교를 거치면서 그때의 일을 생각한 적은 거의 없었다. 일 년에 한두 번 불시에 할아버지가 방문할 때도 이런 걸 들고 온 적이 없었다. 매번 엄마와 아빠가 대접하는 식사만 드시고 가셨다. 그 바람에 잊고 있었다.
할아버지는 물을 마시느라 대답을 곧바로 하지 못했다. 그 사이를 못 참고 넓적한 뚜껑을 열었다. 동시에 빈 컵을 탁, 내려놓은 할아버지가 별거 아니라는 듯 말했다.
─어, 보신탕.
목소리가 제법 낮아진 나이였다. 그러니까 더 이상 할아버지는 돼지고기와 비슷한 거, 소고기와 비슷한 거라고 숨길 필요를 느끼지 못한 듯 했다.
그게 옳은 판단일지도 몰랐다. 왜냐하면 뚜껑을 열자마자 확 풍겨 오는 고소한 냄새를 맡은 순간, 올라온 건 구역질이 아니었으니까. 충격. 죄책감. 미안함. 동정. 자괴감. 그런 게 아니었으니까.
“아…….”
“형.”
기억한다. 혀에 감도는 건 군침이었다. 꼴깍. 고이는 침을 삼켰다. ‘맛있겠다.’ 입을 막을 새도 없이 본능이 단조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왈왈거리는 그 짖는 소리를 아예 잊은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저는 맛있겠다고 생각했다. 그 간절함을 아주 잊지 않았는데도, 그 눈을 보았는데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저를 깨닫자 불현듯 혐오감이 온몸을 짓이겼다. 어떻게 그럴 수 있지. 자신에게 물었으나 돌아오는 건 없었다. 설명이 필요한 영역이 아니었다. 그저 새카맣고 단순한 본능일 뿐이다. 자신의 쾌락만을 쫓는 본능이 무서웠다. 징그러웠다. 들키기 싫었다. 당장 제 앞에 있는 할아버지에게도. 모두에게도.
어린 날의 구토를 기억하기 위해 애쓴 건, 그날부터였다.
“아…… 으읏…….”
와르르.
모든 것이 뒤섞여 파멸되었다. 돌연 그 충격에 의해 깨진 유리 조각들이 몸 위로 쏟아지는 착각이 일었다.
“언제까지 울 거예요.”
아니다. 착각이 아니다. 생각해 보니, 그 유리들은 그 날 이후 매일 제 머리 위에 어설프게 달려 있었다. 아차하면 중심을 잃을 그 날카로운 조각들이, 정수리를 겨누고 있던 그것들이 방금, 30년 만에 쏟아져 버린 것이다.
큰일이 날 거라고 생각했다. 그것들이 쏟아진다면 온몸에 유리 조각이 박혀 피가 나고, 어딘가는 핏줄까지 잘려 너덜거리고, 살갗이 헤집어지고, 눈알이 터져 나갈 것이라고. 그리고 처참하고 징그러운 자신을 아무도 보게 되지 않을 것이라고, 사람들이 외면할 거라고, 저는 늘 생각하고 있었다. 확신에 가까웠다.
“흐윽, ……흑…….”
“계속 울 거예요? 응?”
“……흐으…….”
“……볼 아파서 그래요? 내가 미안해요. 때린 건 실수였어요. 진짜 미안해. 그만 울어요.”
허나 이상하게도 피 냄새 대신 베이비 로션의 포근한 냄새가 났다. 징그러운 자신을 욕하는 사람들의 목소리 대신, 달래는 목소리가 귀를 간질였다.
생크림처럼 잔뜩 로션을 묻힌 손가락이 애널 주변을 부드럽게 마사지했다. 아직 아물지 않은 상처 위로 로션이 발렸다. 이윽고 검지가 천천히 구멍 안으로 들어섰다. 현수의 맨다리가 움찔거렸다.
“흐, 읏…….”
“힘 풀어요. 다치면 안 되잖아요.”
언제는 꼭 다친 걸 신경 썼다는 듯 해정이 다정하게 말했다. 염려 섞인 목소리에 현수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제 다리 사이에 자리 잡은 해정의 팔을 양손으로 쥐었다. 차오르는 숨을 겨우겨우 억누르며 똑바로 말한다.
“……나, 괴물인데…….”
그 말에 대답 대신 웃음기가 묻은 입맞춤이 떨어졌다. 현수가 아랫입술을 꾹 물면서 팔을 고쳐 잡았다. 해정의 손이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느긋한 손놀림이었다. 현수의 엉덩이가 들썩였다. 현수가 부들부들 떨면서 해정의 팔을 부여잡은 제 손 위로 이마를 기댔다. 꿀꺽, 침을 삼킨다. 직후 중지가 미끄러운 구멍 사이를 비집고 들어갔다.
물끄러미 검은 머리통을 바라보던 해정이 고개를 푹 숙이며 현수를 향해 얼굴을 비틀었다. 얼굴을 확인하려는 눈이 치밀했다. 현수는 도피하는 사람처럼 눈을 꾹 감고 있었다. 해정이 작게 웃으며 젖은 뺨에 파고들듯 키스했다.
“사랑해.”
아까부터, 틈만 나면 그는 그렇게 말했다. 고백하는 목소리는 꿀처럼 뚝뚝 떨어져 딱딱한 현수의 몸을 눅진하게 달였다. 애널 안으로 들어간 두 개의 손가락이 유연하게 움직이면서 입구를 넓혔다. 로션이 살에 젖어 철벅이는 소리가 났다.
“아읏…….”
해정의 팔을 두 손으로 쥐던 현수가 이내 제 입을 꾹 막으면서 상체를 꼿꼿이 세웠다. 벽에 등을 기댄다. 눈이 힘겹게 깜빡거렸다. 해정이 한 손으로 현수의 두 손을 쥐어 내리면서 얼굴을 가까이 했다. 흐물거리는 입술이 드러났다.
꾸욱. 두 개의 손가락이 굽어졌다. 손끝이 안쪽 내벽을 지그시 눌렀다. 동시에 현수의 입술이 벌어졌다. 해정이 기다렸다는 듯 다가가 입술을 맞췄다. 그대로 벌어진 틈 사이로 제 혀를 밀어 넣는다. 뜨거운 혀가 진득하게 섞였다. 해정이 혀끝으로 입천장을 길게 훑었다. 현수의 몸이 움찔, 떨었다.
“하아…….”
입술이 떨어지자마자 숨이 힘없이 늘어졌다. 가까운 곳에서 시선을 맞춘 해정이 다시 한 번 짧게 입을 맞췄다. 현수는 숨이 모자라면, 금방 눈에 눈물이 고였다. 깔끔한 모양의 눈 위에 고인 물기를 구경하듯 바라보던 해정이 이윽고 현수의 안에 들어가 있던 손가락을 아프지 않게 빼내었다. 구멍이 벌어진 채로 손가락을 뱉어 냈다.
상의를 벗는 동안, 해정은 현수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검은 눈은 흔들리면서도 해정의 눈을 피하지 못했다. 셔츠 단추를 위에서부터 풀 때는 기어이 참지 못하겠다는 듯 해정이 현수의 입술에 연이어 입을 맞췄다. 입맞춤은 도망갈 기로를 막는 것처럼 다정하고, 또 절묘했다.
상체가 드러났다. 얼굴처럼 흰 몸이었다. 목 아래로 각지고 적당히 마른 어깨선이 이어졌다. 작은 근육들이 촘촘하게 붙은 팔이 현수를 대번에 안아 들었다. 허벅지 위에 몸을 앉히는 손길이 조심스러웠다.
해정의 얼굴이 바로 아래에 있었다. 잠시 흐트러졌던 시선이 다시금 마주했다.
쾅!
어그러진 정신 사이로 거의 평생 동안 못을 박아 두었던 그것이 망치질을 당한 것처럼 별안간 굉음을 내며 깊이 박혔다. 두통을 겪는 사람처럼 일순 눈을 찌푸린다. 현수를 말없이 올려 보던 해정이 손을 들어 그의 앞머리를 쓸어 넘겨 주었다.
“머리 아파요?”
“……언제까지 그럴 건데?”
“뭘요?”
“내가 괴물인 채로, 그렇게……, 나, 나만 생각해도,”
뭔가 묻고 싶은 것 같았는데, 생각이 정리가 안 되는지 현수는 계속 말을 더듬거렸다. 어지럽게 섞인 단어들이 답답했으나 해정은 독촉하는 대신 턱을 밀어 입을 맞추고 “천천히 말해도 돼요.” 했다.
현수가 버거운 것을 삼키는 것처럼 느리게 침을 삼켰다. 목울대가 울렁이는 게 예뻐서 해정이 목에도 쪽, 소리를 내어 입을 맞췄다. 얼굴을 떼어 내고 다시 눈을 올려 보니 불안하게 떨리는 눈이 해정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이기적으로…… 굴 거야.”
으름장을 놓으려는 듯했지만 그에 익숙하지 않은 목소리는 볼품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해정은 대답 대신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검은 눈 위에 불안한 감정이 더 짙어졌다.
“네가 망가져도, 사, 상관 안, 안 하고 옆에 있을 거야. 나만 생각하고, 내 감정, 감정대로…….”
“응. 좋아.”
“……언제까지? 언제까지 좋아할 건데?”
자기혐오가 강한 사람. 자신의 본성이 추악하다고 믿는 사람이었다. 살려 달라고 했던 그 개들을 맛있다고 느끼는 자신을 징그럽게 여겨 구역질을 했고, 옆에 둘수록 망가지는 연인을 알면서도 계속 옆에 있고 싶다는 충동을 느끼는 것에 또 절망하는 사람. 그래서 자신을 그토록 강박적으로 붙들어 매고 있었던, 이 안쓰러운 사람.
너무너무 예쁜 사람. 해정이 터뜨리듯 웃었다. 흔들리는 눈이 더없이 사랑스러워서, 얼굴을 더욱 가까이 하고 그 눈을 구경했다.
“언제까지 좋아해 줬으면 좋겠어요?”
“…….”
되물음에 당황한 듯이 현수의 손이 발작적으로 굽었다. 약한 움직임이었지만 해정의 시야에는 보였다.
빨리 대답을 못하는 걸 보니, 아직도 깨지지 못했다. 더 쏟아질 유리들이 남아 있었다. 해정은 그렇게 생각하며 현수의 양손에 깍지를 꼈다. 엄지로 손등을 슬슬 쓰다듬는다. 현수가 그렇게 좋아하던 웃음을 지으며 그가 나긋하게 종용했다.
“말해 봐요. 내가 형 때문에 망가지고, 더 불안해하고, 정신과 약을 먹고, 괴물을 보고, 힘들어해도…….”
“…….”
“내가 형 옆에, 언제까지 있었으면 좋겠어요?”
들쑤시면서 자극한다. 기어코 남아 있던 유리까지 모조리 쏟아진다. 현수는 제 얼굴에 그 조각들이 빼곡하게 박혔을 거라고 생각했다. 지금 제 얼굴이, 욕심이 흘러넘치는 제 얼굴이 추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서해정을 놓을 수가 없었다. 추악한 자신이 이렇게 혐오스러운 데도.
추악해.
더러워.
옆에 두고 싶어.
이기적이야.
서해정이 좋아.
못 놓겠어.
“평생.”
“…….”
“평생, 내 옆에 있어.”
현수는 덜덜 떨리는 입술로 그렇게 말했다.
별안간 다시 한 번 몸이 들렸다. 겨드랑이 사이에 손을 넣어 몸을 든 해정이 그대로 느슨하게 벌어진 구멍 사이에 제 성기를 맞췄다. 귀두부터 천천히 삽입하는 동안, 몸을 지탱하고 있는 무릎과 허벅지가 발갛게 익었다. 겨드랑이 밑에 있던 손이 내려가 골반을 감쌌다. “찢어질 것 같으면 바로 빼요.” 해정의 말에 현수가 주춤거리며 해정의 어깨에 손을 짚었다.
“흐, 윽……. 하……!”
두툼한 크기가 못내 버거운 것인지 현수가 입을 벌리고 숨을 바쁘게 내쉬었다. ‘반도 안 들어갔는데.’ 해정은 생각하면서 현수의 골반을 달래듯 주물렀다. 딱딱한 뼈의 감촉이 손바닥에 가득 느껴졌다.
“자세 바꿀까요? 형 힘들어 보여요.”
“괜찮……, 아……, 아흑!”
무엇인가에 쫓기는 사람처럼, 현수가 갑작스레 제 엉덩이를 내려 앉았다. 뒷머리가 살짝 흔들렸다. 경직된 내벽이 성기를 힘껏 조였다. 해정이 무표정한 얼굴로 현수의 허벅지 밑을 살짝 들어 접합부를 확인했다.
“풀어 준 보람이 없네……. 또 찢어졌잖아요.”
“괜찮아……. 괜찮, 아…….”
그렇게 중얼거리면서도 현수는 제 얼굴을 보여 주지 않으려는 듯 해정의 목을 꽉 안았다. 목 아래에서 고통으로 끓는 소리가 질질 샜다. 해정이 소리 없이 혀를 차며 잘게 움칠거리는 허리를 팔로 가볍게 감싸 안았다. 귓바퀴에 바싹 입술을 댄다.
“사랑해요.”
감미로운, 어두운 색의 속삭임. 현수는 펑펑 튀는 심장 박동을 느끼면서 눈을 감았다. 찌릿한 아픔 탓에 새어 나온 눈물이 빠르게 살을 타고 흘렀다.
“으, 읏…….”
“이렇게 예뻐서, 나야말로 불안한데.”
두꺼운 성기가 내벽을 천천히 휘젓기 시작했다. 해정에게 매달린 현수의 상체가 움직임에 따라 흔들렸다. 허리 아래를 찌릿하게 두드리는 감각들. 서해정의 열기. 집착. 애정. 소유욕. 날 향한 것. 모든 게 접합부에서부터 스멀스멀 터져 나와 허리를 타고 올라간다.
난 지금 서해정의 것을 모두 먹고 있는 거야.
“흐으, 읏……. 으응…….”
“우리 형이 왜 불안해하지?”
나조차 사랑하지 못하는 내 이기심을, 누가 사랑해 줄까.
아직도 불안한 의문이었다. 현수는 대답 대신 숨만 내쉬며 손바닥을 들어 보드라운 머릿결을 한 번 쓸어내렸다. 해정이 고개를 살짝 틀어 목줄기에 키스했다. 둥글게 긁는 감각이 서서히 빨라진다.
“나는 어차피 살기 위해서 형 옆에 있는 게 아니었어.”
“하아……. 해, 정아…….”
“죽어도 안 놓을 거라니까.”
계속 말했는데……. 머리 진짜 나쁘네, 우리 형.
놀리듯 그렇게 덧붙이면서도 해정은 맥없이 흔들리는 허리를 단단히 고쳐 안았다. 두 상체가 더 이상 파고들 틈 없이 들러붙었다. 해정의 심장 소리가 느껴졌다. 현수가 더 세게 긴 목을 끌어안았다. 이대로 서해정을 품고, 계속 살고 싶다는 이상한 충동이 일었다.
“놓지 마.”
현수가 당부하듯, 거친 숨소리 사이로 겨우 속삭였다.
해정의 성기가 세게 위로 치달은 건 그 속삭임 직후였다. “아!” 현수가 짧게 비명을 지르며 팔에 힘을 풀었다. 예고도 없이 또 한 번, 퍽, 세게 성기가 밀려들었다.
“아읏!”
고개가 뒤로 젖혀진다. 볼록 솟은 목울대를 해정이 짧게 핥았다. 그대로 현수의 몸을 뒤로 밀어 매트리스 위에 눕혔다. 허공에 달랑이는 두 다리를 쥐어 어깨 위에 올리자, 영 부끄러운지 현수가 손을 쥐었다가 폈다. 해정이 상체를 더 숙였다. 살짝 빠졌던 성기가 다시 몸 안 깊숙이 들어갔다. 로션이 녹아 미끈거리는 구멍이 두툼한 기둥을 무리 없이 쏙 빨아들였다.
“너무 많이 울었나 봐요. 눈이 다 부었어요.”
가까이 자리한 얼굴을 바라보며 해정이 작게 말했다. 그리고 어찌할 줄 모르는 두 손에 깍지를 끼고 침대 위로 내리눌렀다.
현수가 무어라고 대답하기도 전, 다시 반쯤 빠져나간 성기가 세게 안을 틀어박았다. 신음이 조금 더 부드러웠던 곳을 기억했다. 그곳을 향해 꾸욱, 세게 끝을 짓눌렀다. 현수가 입을 벌리고 턱을 바르르 떨었다.
“아으, 응……!”
“……하아, 윽…….”
성기를 자극하는 내벽이 턱처럼 바르르 떨면서 연이어 꿈틀거렸다. 꽉꽉 무는 감각이 해정의 성기를 정신없이 휘감았다. 해정이 이를 악물고 추삽질을 시작했다. 현수의 등이 매트리스를 비비적거리며 위아래로 움직였다.
“아, 아아, 응, 아흐, ……읏!”
발꿈치가 대롱대롱 흔들리며 해정의 등을 연신 툭툭 두드렸다. 그게 귀여워서 해정은 이를 악물면서도 입꼬리를 끌어 웃었다. 살짝 벌어진 입 안에서 감각에 못 이겨 움찔대는 벌건 혀도 귀여웠다. “혀, 내밀어 봐.” 해정이 말하자, 현수는 신음을 흘리면서도 혀를 내밀었다. 깍지 낀 손이 더 세게 짓눌렸다. 급히 상체를 숙인 해정이 푸딩을 빨아 먹는 것처럼 현수의 혀를 게걸스레 빨았다. 퍽, 퍼억, 그 와중에도 피스톤 질을 멈추지 않는 바람에 빨리는 혀가 살짝 깨물렸다.
“우음, 으……!”
혀를 빨던 입이 질척이며 옆으로 옮겨 갔다. 볼을 깨물고 핥더니, 귀까지 가서 모든 살 위에 제 타액을 남길 것처럼 미친 듯이 혀로 살을 뭉갠다.
“아아, 해정아, 아, 아……!”
“응, 왜 불러.”
상체에 짓눌려 성기가 자극되었는지, 현수의 발기한 성기 끝에서 쿠퍼액이 울컥울컥 치솟았다. 현수의 발끝이 꼿꼿이 섰다. 하체를 미친 듯이 자극하는 감각에 몸이라도 어떻게 움직이고 싶었는데 꽉 붙들린 손 때문에 움직이기가 힘들었다. 내몰리는 느낌이 아슬아슬했다. 소변이라도 볼까 봐 무서워서, 성기에 힘을 준 채 그저 신음만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안에서 뜨거운 게 흐르는 것 같다고 생각한 순간이었다. 곧이어 해정의 쿠퍼액도 터져 나와 접합부를 흥건하게 적셨다. 성기가 빠져나갈 때마다 애널이 벌름거리며 새어 나간 액체를 다시금 머금었다. 퍽. 비교적 짧고 빠르게 피스톤 질을 하던 해정이 별안간 깊이 성기를 박았다.
“아, 아아, 아읏! 으……!”
“하…… 하아…….”
깍지를 낀 손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동시에 배 안에서, 뜨거운 게 터졌다. 줄줄 흐르던 것과는 다른 폭발적인 감각에 현수의 사타구니가 움찔 떨렸다. 안쪽에 서해정의 것이 다 담겨 기어이 허벅지 사이로 흘렀다. 그 감각이 기분 좋아서, 흐르는 것조차 아까웠다. 다 먹고, 흡수하고 싶었다. ‘힘껏 다리를 벌렸다고 생각했는데.’ 현수는 고이는 침을 꿀꺽 삼켰다.
멈추는 건 잠시였다. 현수의 허리를 감싸 안은 해정이 다시 아까처럼 벽에 상체를 기대어 앉았다. 깊게 파고드는 성기에 현수가 고쳐 앉으면서 더 크게 허벅지를 벌렸다. 해정이 현수의 양 뺨을 잡아 쥐고 끌어당겼다. 쪽쪽, 젖은 입술이 짧게 키스했다.
“사랑해요. 사랑해요. 사랑해요. 사랑해요…….”
몇 번이고 이어지는 고백은 호흡처럼 당연하게 흘렀다. 현수가 해정의 목을 끌어안았다. 지금의 이 느낌을 간직하고 싶었다.
“……나도…….”
이기심의 조각들이 박힌 채 괴물이 되어 버린 자신의 얼굴이, 지금, 그러니까 서해정의 고백을 듣는 그 순간만큼은 추악하지 않을 것만 같은 착각이 든 까닭이었다.
* * *
나 지금 참느라 힘든데…… 나 대신 형이 참아 줄래요?
해정은 그렇게 말했다. 그 말에 현수는 기다렸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흰 얼굴이 냉큼 가슴 쪽으로 다가왔다. 침으로 번들거리는 입이 살 위에 얹혀졌다. 물렁한 살덩이를 세게 짓이기는 감각. 현수가 신음을 흘렸다. 이윽고 터진 살 사이로 피가 퐁퐁 솟아났다. 저릿한 아픔이 저를 안심시켰다. 그 아픔은 오랜 시간 동안 의식처럼 온몸에 퍼져 나갔다.
온몸이 얼룩덜룩해. 무슨 동물 같아요.
너무 귀여워.
왜 이렇게 예뻐요. 귀여워.
나 진짜 죽겠어.
팔 안쪽까지 빼곡히 흔적을 남겨 둔 해정이 감상하듯 몸을 내려 보았다. 끝내는 몸을 안고 낯간지러운 말을 홀린 듯이 쏟아 냈다. 쉴 새 없이 흐르는 말들 사이에 바득바득 이가 갈리는 소리가 났다.
그 말을 가만히 듣고 있다가 기어코 정신을 잃었던 것 같다.
꿈을 꿨다. 주마등처럼 어릴 적 살았던 시골의 풍경들이 지났다. 파란 트럭 위에 개들이 보였다. 철창이 없었다. 개들은 짖지 않았다. 더 이상 제게 살려 달라고 하지 않았다. 이상하게도, 저를 빤히 응시하는 눈이 개 같지가 않았다. 문득 꺼림칙해져서 현수는 질끈 눈을 감았다.
곧이어 몸 전체를 감싸는 포근한 품이 느껴졌다. 다시 눈을 떴다. 앞에는 익숙하고 아름다운 얼굴이 있었다. 서해정이었다.
그는 울고 있었다. 그리고 괴로워하는 눈을 했다. 왜 그러냐고 물어볼 새도 없이 저를 비난했다.
형이 괴물이야. 형이 옆에 있으면 난 나락이야. 형을 가질수록 정신이 돌아 버려. 내 몸에 상처를 내지 않고는 못 배길 정도로 불안하다고. 형이 내 인생을 망쳤어. 차라리 없었으면 좋았을 텐데. 몰랐으면 나았을 텐데. 차라리 그냥,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 채로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정말 나를 생각했다면, 내가 그렇게 말했어도 형은 날 두고 도망쳐야 해.
그렇게 안 할 거야?
진짜 이기적이다.
개의 소리가 그랬던 것처럼 귀에 쉼 없이 쑤셔 박는 말들이 저를 괴롭혔다. 변명할 여지가 없어서 현수는 해정보다 더 서럽게 울었다. 그러면서도 자신은, 해정의 팔을 놓지 못하고 있었다. 괴물이 맞다.
“괜찮아요.”
돌연 서해정의 목소리가 선명하게 들렸다. 서해정의 목소리였으나, 제게 팔을 붙들린 채 저를 탓하고 있는 이 서해정의 것은 아니었다. 현수가 주변을 돌아보았다. 암흑이었다.
“원래 사람은 다 그런 거잖아요. 다 자기밖에 모른다고요.”
암흑 사이로 재차 목소리가 들렸다. 냉정하게 떨어지는 말들은 위로 같기도 했고, 아닌 것 같기도 했다.
정말 다 이렇게 이기적인 걸까. 말도 안 돼.
현수는 믿지 못하겠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으며 울음을 그치지 않았다. 누군가가 뺨을 만졌다. 눈물을 닦아 내는 것 같았다. 이것 역시, 제가 붙들고 있는 서해정이 만진 게 아니었다.
현수는 주변을 돌아보지 않았다. 그때서야 이게 꿈과 현실의 경계임을 깨달은 탓이었다.
“모두 다 그래.”
모두, 다. 그 말이 이상해 현수는 되묻고 싶었다. 입술을 뻐끔거리니 그 위를 꾹, 누르는 감촉이 느껴졌다.
“진짜 사람들 다 그래요. 모두 다, 자기밖에 모르는 괴물들이야.”
대수로울 것 없다는 건조한 어조. 동시에 바람이 뺨을 스쳤다.
“나도. 나도 마찬가지니까…….”
바람이 귀를 훑고 목을 매만진다. 시원한 감촉. 현수가 눈을 깜빡였다. 암흑 속의 서해정 대신, 아침의 햇빛 아래에 누워 있는 서해정의 얼굴이 눈 안 가득 들어찼다. 바람은 그의 손이었다.
“그렇게, 힘들어할 필요 없어요.”
“…….”
위로다. 위로가 맞다.
현수가 말없이 해정의 품속으로 파고들었다. 아직도 이기심이 박힌 제 얼굴이 추하게 보일까 봐 무서워하는 눈치였다. 해정이 쪼그라든 등을 감싸 안았다. 살을 만지는 손길이, 그답지 않게 조심스러웠다.
* * *
“정신과 다시 다니려고요.”
덜그럭, 도자기에 금속이 부딪히는 작은 소음들이 멎었다. 시선 두 개가 얼굴에 꽂혔다. 해정이 젓가락을 식탁 위에 놓고 휴대 전화를 확인했다. 휴대 전화를 쥐어 든 손이 작게 떨리고 있었으나 식탁 주변에 앉은 누구도 눈치채지 못할 정도였다. 액정을 바라보는 얼굴 또한 무덤덤했다.
“……왜?”
놀란 눈으로 해정을 바라보던 수연이 물었다. 해정에게 향해 있던 승우의 시선이 수연에게로 돌아갔다가, 다시 수직으로 떨어졌다. 제 밥그릇을 내려 보는 눈이 허겁지겁 당황을 숨겼다.
“…….”
현수의 문자는 사진과 함께였다. 아이보리색 천장 사진은 현수의 방 안이었고, 그는 누워 있다고 했다. ‘거짓말 아닐까.’ 반사 작용처럼 튀어나온 의심과 불안을 꾸역꾸역 삼킨 해정이 휴대 전화를 내려놓고 정면을 바라보았다. 수연과 눈을 마주한다.
“엄마가 가라고 했잖아요.”
퇴원했던 날에 수연이 제게 조심스레 말을 꺼냈던 것을 기억하며 해정이 말했다.
“싫다며. 엄마 생각해서 무리해서 가는 거면…….”
“그런 거 아니에요.”
그리고 그 제안에, 단호하게 싫다고 잘라 냈던 해정이었다. 수연이 걱정스레 말하자 해정이 고개를 내저었다. 돌연 골이 흔들리는 두통이 일었다. ‘김현수는 거짓말을 하고 있어.’, ‘도망가고 있어, 지금.’, ‘사라질 거야.’, ‘거짓말이야.’. 동시에 괴물의 목소리가 겹쳐져 웅웅 울렸다. 해정이 욕을 삼키며 태연한 척 물을 마셨다. 말이 이어진 건 잠시 후였다.
“내가 가고 싶어서 가는 거예요.”
정확히 말하면 아까 현수가 저를 배웅하며 했던 말 때문이었으나, 제 엄마에게 말할 필요는 없었다.
손 놓고 있는 것보다는, 그래도…… 방법을 다 써 봤으면 좋겠어. 할 수 있는 건 다.
형이 도와줄게.
현수는 머뭇거리면서도 그렇게 말했다. 그래야만 제 죄책감이 조금 덜할 것 같다고 덧붙이며 손을 뻗어 해정의 머리를 정리해 주었다. 버석한 손이었지만, 움직임만은 섬세했다. ‘바보 같은 짓 아니야?’ 해정은 그렇게 생각했으나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다. 그저 현수를 껴안으며 알겠다고 대답하였다.
동정심. 불쌍한 가면. 피해자의 역할. 다 뜯어진 그물들이었다. 김현수를 붙잡는 도구로서는 이제 효용 가치가 없었다. 그러니 현수가 너덜너덜해진 그것을 쥐고 제게 어떻게 하라고 말해도 상관없었다. 도리어, 그물 외의 모든 것들은 다 현수의 손에 쥐여 주고 싶기도 했다.
김현수는 정신을 잃은 뒤, 무의식을 유영하면서도 괴로워했다. 간간이 제 이름을 부르기도 했고, 어딘가를 향해 손을 뻗기도 했으며, 쥐어짜는 듯한 신음도 냈다. 뭔가를 확인하는 듯이 툭툭 제 뺨을 치기에 그것을 저지하니 또 울었다. 그 모습을 새벽 내내 지켜보면서 해정은 문득 생각했다.
되도록, 그를 괴롭게 만들고 싶지는 않다.
짓무른 눈가가 예뻤는데도 그런 충동이 일어서 스스로도 좀 놀란 순간이었다. 하여튼 그 방법을 모르겠으니 일단은 그가 원하는 건 다 줘 볼 생각이었다.
“엄마도 많이 불안하잖아요. 내가 다시 자해할까 봐서요.”
그 말에 밥그릇에 눈을 처박고 해정과 수연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승우가 흠칫 고개를 들어 해정을 바라보았다. 자못 혼란스러워하는 눈이었다. 무슨 속셈인지 파헤치려는 듯 바쁘게 얼굴을 훑는다.
해정이 점점 떨림이 심해지는 손가락으로 도자기 컵의 테두리를 스윽 훑었다. 그사이, 연민이 가득한 눈으로 해정을 바라보던 수연이 다행이라는 듯이 한숨을 내쉬었다.
“엄마는…….”
김현수는 도망갔어.
“엄마는 걱정 안 해. 해정아, 엄만 정말 다 괜찮아.”
결국 갔다고. 네가 지금 나온 사이에 도망가 버렸다니까? 이 멍청한 새끼야.
“똑똑하잖아. 늘 그렇듯이, 우리 해정이가 다 이겨 낼 수 있다고 믿고…….”
평생 못 찾을 거야.
“……자랑스러우니까…….”
김현수가 한 말은 다 거짓말이야.
“……건강만……, 으로…… 정원 씨도…….”
넌 김현수한테 속고 있어.
“……리고……, ……성당도 같이…….”
넌 김현수한테 속고 있어. 속았어. 다 거짓말이야. 얼마나 말해야 알아들을래? 김현수가 널 진짜 사랑한다 생각해? 대 주면 사랑하는 거야? 다른 새끼한테 벌리면 어쩔 거야? 그럼 그 새끼도 사랑하는 거야? 아니, 다리라도 자르지 그랬어. 다리를 남겨 두니까 도망가지. 그 쥐새끼는 이미 도망갔어. 넌 속은 거거든. 너보고 사랑한다고 말했었지? 다 좆같은 거짓말이라고. 말로는 누가 못해 씨발 넌 속았어 병신 새끼야 넌 김현수한테
“…….”
아니 나한테 속았다고 몇 번을,
“……좀, 닥쳐, 씨발…….”
“어? 뭐라고?”
귀를 들쑤시는 불안을 참지 못한 해정이 기어이 잇새로 욕을 내뱉었다. 무어라 계속 말하던 수연이 눈을 크게 떴다. 어느새 해정의 얼굴은 목이 졸린 것처럼 파랗게 질려 있었다. 해정이 앞머리를 쓸어 올렸다. 이제는 멀리서도 보일 정도로 손이 크게 떨렸다. 딱딱하게 언 입꼬리가 위로 끌려 웃는 모양을 만들었다.
“……아니에요. 죄송해요. 갑자기 귀가 아파서.”
“너 괜찮아? 얼굴이 파래.”
“괜찮아요.”
양 귀로 악에 받친 괴물의 웃음소리가 들렸으나, 해정은 공연히 침착하게 목소리를 내었다. 테이블 아래로 손이 숨어들었다.
* * *
줄줄이 이어지는 잔소리는 못내 딱딱했다. 성의 없이 고개를 끄덕이던 승우가 못 견디겠다는 듯 천장을 바라보자, 퍽, 수연이 주먹을 쥐고 팔을 때렸다.
“아!”
“좀 들어! PT 끊은 거 꼭 하고, 매일 도시락 갈 거니까 그렇게 알아.”
“……집에 사람 드나드는 거 불편하다니까.”
“그러니까 도시락만 배달 갈 거라고. 유기농이고, 다 좋은 것들이야. 입맛 없어도 먹어. 집 앞에 두고 가라고 내가 말했어.”
승우가 맞은 부분을 비비적거리며 마지못해 “알았어.” 했다. 수연을 내려 보던 눈이 올라 뒤에 서 있던 해정에게로 향했다. 해정은 승우를 보고 있었던 듯, 곧바로 눈이 마주쳤다. 승우의 어깨가 반사적으로 떨렸다.
「제가, 그만두게 할게요.」
어제, 카페에서 만난 남자는 그렇게 말했었다. 달궈진 얼굴이 그 차분한 한마디에 얼음물을 맞은 듯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제 말에 남자는 더 혼란스러운 눈을 하면서도 내색하지 않았다. 말을 더듬지도 않았고, 더 자세히 말해 보라며 저를 독촉하지도 않았다.
「죄송해요. 그쪽 말대로, 해정이가 그쪽한테 그런 거, 저 때문이…… 맞는 것 같아요. 제 책임입니다.」
도리어 사과를 해 왔다. 그게 이상해서, 승우의 눈썹이 와작 일그러졌다. 아무 대답도 하지 않자 남자는 잠깐 멈춘 말을 다시 이었다. 가지런한 손을 모아 희게 번질 정도로 꾹 움켜쥔다.
「죄송합니다. 이제 안 그러도록, 제가 해정이한테 말할게요.」
「…….」
「……그래도요.」
불현듯 살짝 숙이고 있던 고개가 올라갔다. 눈이 마주했다. 예상을 뛰어넘는 반응에 당황한 승우가 일그러진 얼굴 그대로 남자의 얼굴을 관찰하듯 훑었다. 남자의 눈이 온도를 내린 건 찰나였다.
「설령 서해정이 그쪽의 폭력에 아무렇지 않아 했어도,」
「…….」
「……그쪽 잘못이 사라지는 건 아닙니다. 외면하고 싶다고 그걸 정당화하지 마세요. 잘못은 잘못이잖아요.」
「…….」
「그쪽도 해정이한테 사과하셨으면 좋겠어요.」
조곤조곤한 말투였지만 남자는 화를 내고 있었다.
당신이 뭔데 이래라저래라야. 울컥, 지레 화를 내려던 승우가 일어날 새도 없이 남자가 일어났다. 안녕히 계세요. 인사를 하는 목소리가 울음을 참는 것처럼 떨렸다. 카페를 나서는 걸음이 성급했다.
“…….”
내가 잘못한 거라고? 사과하라고?
뻔뻔하게 눈을 마주쳐 오는 해정의 눈을 피하면서, 승우는 남자가 제게 했던 말을 박박 지웠다. 둘이 무슨 사이인지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그 남자도 서해정 편인 것 같았다. 그래서 그딴 말 같지도 않은 말을 하는 거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시발. 누가 봐도 더 많이 잃은 건 난데 내가 무슨 잘못을 했다는 거야. 좆같게.
“……갈게.”
승우가 화풀이하듯 발꿈치를 세게 비비며 신발을 대충 구겨 신었다. 수연이 부드럽게 승우의 품에 안겨들었다.
“멀리 못 나가서 미안해. 엄마도 얼른 나가야 해서.”
“괜찮아요. 어차피 주차장도 바로 아랜데, 뭐.”
정면에 우두커니 서 있는 해정이 보였지만 공연히 고개를 숙여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수연의 등을 몇 번 토닥이자 작은 몸이 느리게 빠져나갔다. “가.” 등을 톡톡 치며 하는 말에 승우가 뒤를 돌았다.
“내가 밑에까지 데려다줄게.”
문고리를 잡는데, 별안간 뒤에서 해정의 목소리가 들렸다. 승우가 움직임을 멈췄다. “어, 그럴래?” 수연이 뒤로 물러나며 말했다. 빳빳한 고개가 돌아갔다. 해정은 이미 신발을 신고 있었다.
“……괜찮은데.”
“아니야. 할 얘기도 있고.”
“그래. 바로 밑에까진데. 최승우 쟤 또 언제 올지도 모르는데 해정이가 데려다주고 와.”
시간이 급한 듯, 수연은 그렇게 말하면서도 벽시계를 확인했다. 그사이 신발을 신은 해정이 앞코를 툭툭 바닥에 두들겼다. “가자, 형.” 말하는 목소리와 달리 승우에게만 보이는 얼굴은 감정을 싹 빨아들여 무미건조했다.
여기서 한 번 더 거절하면 분위기가 이상해질 것이었다. 승우는 불안정하게 뛰기 시작하는 심장을 느끼며 말없이 문고리를 돌렸다.
분명, 그 남자가 이제 안 그러도록 말하겠다고 했는데. ……다 거짓말이었나.
철컥. 묵직한 소리가 등 뒤로 들렸다. 문이 닫혔다.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는 듯한 해정의 뒷모습을 보며 승우는 주춤주춤 가장자리에 섰다. 벌써 목이 졸리는 것처럼 숨이 잘 쉬어지지가 않았다. 생각이 우후죽순처럼 여기저기 돋아났다.
혹시 그 남자가 말해서 다 알게 된 건가. 혹시 서해정한테 내가 먼저 접근한 걸 말했나? 눈치 없이? 그런 거면 어쩌지? 애초에 그 남자가 저 새끼랑 무슨 사이인 줄 알고 안심했지. 그냥 한 소리일 수도 있는데. ……씨발. 그대로 보내는 게 아니었는데. 내가 뭘 믿고 그냥 보냈지?
“김현수랑 무슨 얘기 했어?”
물끄러미 표시기를 바라보던 뒤통수가 말했다. 바싹 굳은 승우가 놀란 듯 몸을 들썩였다. 목소리는 별로 나빠 보이지 않았으나 모르는 일이다. 믿으면 안 된다. 서해정은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제 목을 조르고 협박했던 새끼다.
승우가 긴장을 풀지 않고 그대로 입만 열어 답했다.
“……김현수?”
상체가 돌아갔다. 서늘한 눈이 승우를 아래서 위로 훑었다. 정말 이름을 모르는 건지, 아니면 발뺌하는 건지 판단했다. 곧이어 해정이 눈을 마주한 채로 “네가 어제 만난 남자.” 하고 말을 덧붙였다. 급기야 승우의 얼굴이 바싹 굳었다. 진짜 그대로 말한 모양이다. 심장이 벌벌 떨리기 시작한다.
“무슨, 무슨 소린지 모르겠는데. 난 어제…….”
“줘 팰 생각 없으니까 대가리 굴리지 말고 그냥 말해. 피곤해.”
해정은 짜증 난다는 듯 미간을 구겼으나 근래 몇 번 보았던, 그 회까닥 돌아 버린 눈은 아니었다. 침을 삼키며 해정을 유심히 바라보던 승우가 입을 열었다. 혓바닥이 절로 더듬거렸다.
“너한테…… 말한댔어. 이런 거 다 그만두게.”
“네가 다 일러바쳐서?”
말이 끝나자마자 잡아채듯 물어 온다. 주춤. 더 물러설 곳도 없는 벽으로 승우가 뒷걸음치며 헛발질을 했다. “……그래.” 작은 목소리는 잔뜩 겁을 먹고 있었다. 이대로 귀신같이 흰 손이 제 목을 조를 것 같은 불안감에 눈앞에 사이렌이 빙빙 돌았다.
“그게 다야?”
그 뒤로 사과하라는 말 같지도 않은 말을 들었으나 중한 건 아니었다. 굳이 서해정에게 전할 필요가 없어 보였다. 승우가 한 번 더 그렇다고 대답했다.
다시 서해정의 얼굴이 보였다. 이번엔 상체만이 아닌 몸 전체가 돌았다. 거침없이 승우에게로 다가선다. 금방 얼굴이 가까워졌다. 승우가 급히 입을 열었다.
“여기 씨씨티비 있어. 내 몸에 손대면, 씨발 새꺄, 너, 신고할 거야. 엄마한테도 내가 했던 짓이고 뭐고 상관없고, 다 말할…….”
“그게 다야? 진짜?”
겁에 몰린 승우가 무어라고 협박하는지 관심 없다는 듯 해정이 똑같은 투로 물어 왔다. 승우가 눈알을 굴려 씨씨티비의 위치를 확인했다. 그사이 매끄럽게 피어 있던 해정의 미간이 구겨졌다.
“그게 다냐고.”
답답한지 묻는 목소리가 조금 커졌다. 승우가 도록 다시 눈을 굴려 정면을 바라보았다. 얼떨떨하게 벌어져 있던 얇은 입술이 더듬거리며 움직였다.
“……나한테, 미안하대.”
“…….”
“그리고 너한테…… 사과하래.”
이게 서해정이 원하던 대답인지는 모르겠으나, 굳이 더 말할 게 있다면 그것뿐이었다.
짜증이 섞여 있던 얼굴이 다시 피어났다. 거기에 그치지 않고 웃기까지 한다. 으레 보던 어여쁘고 착한 웃음이 아니었다. 그것보다는 훨씬 자연스러웠다.
가까이 있던 얼굴이 물러났다. 볼일 끝났다는 듯 해정이 가벼이 뒤돌았다. 손을 뻗어 열림 버튼을 누른다. 곧바로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엘리베이터에서 해정이 완전히 빠져나갔다. 공간이 분리되었다. 그제야 잔뜩 힘이 들어간 몸이 느슨해졌다.
“…….”
한참 동안 숨을 고르고 있던 승우가 별안간 눈을 들어 올렸다. 긴장이 풀리니 머리가 이제야 굴러간 탓이었다. 생각해 보니, 방금 보였던 바깥의 풍경은 집 현관이었다. 깨달은 즉시 눈이 옆으로 돌았다. 표시기를 바라본다.
애초에 버튼을 누르지 않았던 모양인지, 표시기는 집 층을 가리키고 있었다. “시발.” 승우는 습관적으로 욕을 중얼거렸다.
* * *
격하게 움직인 탓인지, 아니면 밤새 꾼 악몽 탓인지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가만히 누워서 해정과 문자를 하고 있는 게 몇 시간째인지 가늠이 되지 않는다. 배고프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천장의 벽지를 바라보던 현수가 느리게 상체를 일으켰다.
부엌으로 가 냉장고를 살펴보았으나 구미가 당기는 게 없었다. ‘이따가 해정이도 올 텐데, 마트나 갈까.’ 현수는 생각하며 식탁 의자에 걸어 둔 외투에 손을 뻗었다.
차 키를 챙기고 현관 앞에 앉아 신발 끈을 매고 있을 때였다. 별안간 멍했던 정신이 유리가 깨지는 것처럼 와드득 깨졌다. 현수가 고개를 번뜩 들어 올렸다. 휘청거리며 일어선다.
“…….”
현관문 옆에 걸린 자그마한 거울이 현수의 모습을 비추었다. 당황한 눈이 거울을 바라보았다.
거울에 비친 제 모습은 도저히 나갈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머리가 금방 자다 일어난 사람처럼 심하게 헝클어져 있었고, 옷도 마찬가지로 추레했다. 멀쩡한 건 외투뿐이었는데, 도리어 그게 더 이상했다. 멀끔한 외투 안에는 늘어난 티셔츠에, 저가 자는 사이에 해정이 입혀 둔 듯한 펑퍼짐한 파자마 바지를 입고 있었다.
‘정신이 없어도 이렇게 없을 줄이야.’ 현수는 저를 욕하면서 신고 있던 신발을 벗었다. 이 차림에 저가 신고 있던 것은 또 외투처럼 깔끔하고 정갈한 디자인의 스니커즈다.
욕실에 들어가 샤워를 했다. 뜨거운 물줄기에 몸을 녹이고 있자니 하나둘씩 현실적인 생각이 톡톡 깨어나기 시작했다. 동시에 물어 뜯긴 상처들과 아래의 감각도 살아났다. 현수가 슬쩍 몸을 돌려 욕실 거울로 제 몸을 확인했다.
수증기가 끼어 흐릿했는데도, 여기저기 찍힌 멍과 잇자국은 선명했다. 현수가 더듬더듬 뒤를 돌았다. 등과 엉덩이 아래도 마찬가지였다. 다리를 살짝 벌려 보니 허벅지 안쪽은 흡사 피부병에 걸린 사람 같았다. ‘저기는 또 언제 저렇게 물어뜯은 거야…….’ 현수는 기겁하는 얼굴 그대로 눈을 돌려 버렸다. 더 이상 보고 있기가 힘들었다.
샤워를 한 뒤 로션을 바르고, 티셔츠와 청바지를 입었다. 침대에 앉아 양말을 신던 손이 일순 멈추었다. 현수가 침대에 올려 둔 제 한쪽 발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이내 다시 멈추었던 몸이 움직였다. 현수는 망설임 없이 양말을 벗었다. 불현듯 현실적인 생각이 가장 중요한 부분까지 모조리 깨어난 탓이었다.
입었던 옷을 벗고, 다시 편한 옷으로 갈아입은 현수가 젖은 머리를 툴툴 털면서 부엌으로 걸어갔다. 재차 냉장고를 확인하는 눈이 아까보다 더 집요했다. 마트에는 가지 않기로 결정했으니 무조건 집에서 먹어야 한다는 생각이 든 까닭이었다.
* * *
택시 안이 흔들렸다. 뒷좌석에 앉은 해정은 제 왼손으로 오른손을 결박하듯 꾹 짓누르고 있었다. 힘을 준 왼손 위에 힘줄이 돋아났다. 창백해진 얼굴은 꼭 손과 분리된 것처럼 가라앉은 채였다.
잠시 후, 지나가는 풍경을 멀거니 바라보던 눈이 감겼다. 뒷머리가 툭, 시트에 닿았다.
“…….”
아파할 것 같기는 해도 그 방법밖에는…….
발목이 가느다란 편이니까, 좀만 힘주면 쉽게 꺾이겠지.
바로 병원 가지 말고…… 하루 놔뒀다가 데려가야 하나. 그동안 많이 아파할까.
침착하게 맞물리는 생각들은 괴물의 목소리가 머릿속을 휘몰아치고 간 뒤의 잔재일 뿐이었다. 해정은 이미 그렇게 결론을 낸 상태였다. ‘그 전에, 지금 집에 갔는데 만약 이미 도망갔으면 어쩌지.’ 톱니바퀴처럼 돌던 생각이 울컥, 돌연 치솟는 불안 탓에 끼긱 소리를 내며 멈추었다. 오른손을 누르는 힘이 더 강해졌다.
아니야. 잡으면 돼. 쫓아가면 되지.
그러니까, 만에 하나 도망가지 않았으면 발목부터…… 그러면 몇 주는 못 돌아다닐 테니까. 그사이에…….
울렁이는 불안을 안심시키는 건 그나마 그런 생각뿐이었다. 실행해야 한다. 왼손의 엄지가 손등을 건드렸다.
“…….”
“학생, 다 왔어.”
생각이 다시 돌아가고 있을 때였다. 택시가 빌라 앞에서 멈추었다. 백미러를 통해 해정을 확인한 기사가 뒤돌아 말했다. 잠을 깨울 것처럼 뒤로 뻗은 손이 해정의 무릎을 건드리기도 전에 감겨 있던 눈이 가벼이 뜨였다. 시트에 기대고 있던 등이 일어났다.
‘자는 게 아니었어?’ 기사가 얼떨떨한 눈으로 그를 보는 사이, 해정이 제 주머니를 뒤지더니 손에 잡히는 대로 지폐를 꺼내었다. 콘솔 박스 위에 지폐가 놓였다.
“잔돈은 괜찮습니다.”
만 원도 넘지 않는 비용이었는데, 놓인 지폐는 만 원과 오만 원이 여러 장 섞여 있었다. 당황한 기사가 무어라 말할 틈도 없이 뒷문이 열렸다. 급하게 빠져나간 해정이 쾅, 문을 닫고 빌라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하아…… 하…….”
어떻게 계단을 올랐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저 지금 집에 김현수가 있다면 어디도 도망가지 못하게 얼른 발목부터 분질러 버려야 한다는 생각과, 만약 없다면 얼른 쫓아가서 죽여 버리든, 죽은 듯이 살게 해 버려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머리가 벌써부터 피 냄새를 맡은 살인귀처럼 날뛰어서 눈앞을 까맣게 마비시켰다. 해정이 떨리는 손으로 비밀번호를 눌렀다.
현관문이 열렸다. 동시에 현수의 로션 냄새가 잔뜩 퍼졌다. 찾을 필요도 없이, 도망간 것을 확신하고 있었던 김현수가 바로 눈 안에 들어찬다. 마르고 정갈한 등이 보였다.
해정이 침을 삼키며 집 안으로 들어섰다. 현수는 식탁에 엎드려 있었다. 정신없이 자는 건지 다가오는 기척도 느끼지 못한다.
‘자는 척하고 있는 거 아닐까.’, ‘어딜 갔다 온 다음에…….’ 식탁 위에는 식빵 부스러기가 남아 있었는데, 이것조차 의도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괴물의 짓이다. 안다. 알고는 있는데 생각을 멈출 수가 없다.
냄새부터 확인해야 한다. 맡아 보면 안다. 몸에 코를 깊숙이 박고 들이마시면, 약하게 바깥 냄새가 난다. 김현수는 단순해서 그런 것들을 잘 묻혀 오곤 하니까. 거기까지 생각한 해정이 곧바로 현수가 앉아 있는 의자를 쥐어 제 쪽으로 끌었다.
끼익.
의자 다리가 장판을 긁는 소리가 거칠었다. 식탁에 엎드려 있던 현수의 팔이 쓸렸다. 동시에 잠에서 깬 현수가 번쩍 눈을 떴다. 상체가 돌아가는 느낌에 가까스로 몸을 일으킨다. 어느새 옆으로 돌아간 의자 앞에는 서해정이 서 있었다. 현수가 눈을 깜빡이며 제 앞에 서 있는 얼굴을 바라보았다. 방금 깨서 정신이 없지만, 이건 꿈이 아니었다.
“해정아?”
현수의 부름이 들리지 않는 모양인지 돌아오는 대답이 없었다. 억센 팔이 그대로 현수의 허리를 쥐어 올렸다. 갑작스레 몸이 들리자 현수가 놀란 듯 팔을 떨며 해정의 목에 매달렸다.
앉혀진 곳은 바로 옆, 식탁 위였다. 해정이 의자를 차 버리듯 옆으로 밀고 현수의 앞에 섰다. 밀린 의자가 중심을 잃고 옆으로 쓰러졌다. 큰 소리가 났다.
“해정아, 왜 그래?”
이 돌발적인 상황들이 우습게도, 이제는 좀 익숙하다. 여전히 당황스러운 건 사실이었지만 손이 떨리거나 하지는 않았다. 해정이 현수의 티셔츠에 손을 넣고 몸을 여기저기 쓰다듬으면서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었다. 깊이 들이마시는 숨이 세밀했다.
늘 그랬듯 목덜미에 오래 머무를 줄 알았던 얼굴이 멈추지 않고 내려갔다. 티셔츠를 걷고서는 몸 여기저기를 핥아 낸다. 상처를 마구잡이로 눌러 대며 더듬거리는 손 탓에 뒤로 물러서고 싶었으나, 현수는 잠자코 해정의 등을 토닥이기만 했다. 그가 무슨 기분으로 이러는지 아는 까닭이었다.
어디도 가지 않았다.
끝내 해정이 그렇게 확신을 내린 건 한참 뒤였다. 얼굴이 올랐다. 저를 내려 보는 현수와 눈이 마주했다. 동시에, 김현수의 옆에 김현수의 얼굴을 하고 있는 괴물이 나타났다. 괴물은 김현수와 똑같은 자세로 앉아서 해정을 놀리듯이 다리를 달랑거리고 있었다.
“이제 좀 괜찮아졌어?”
현수가 해정의 뺨을 감싸며 물어 왔다. 동시에 괴물이 이죽거렸다.
이제 도망갈 거야.
기어이 내려앉는 듯했던 불꽃이 다시 위로 솟으며 폭발했다. 번쩍. 찰나에 눈앞이 점멸했다. 해정이 현수의 허리를 세게 쥐었다. “그렇게 쥐면 형 아파.” 현수는 달래듯 말하며 해정의 팔을 쓰다듬었다.
“……그냥 못 두겠어요.”
파랗게 질린 입술 사이로 바람처럼 떨리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괴물이 해정의 말에 정말 재밌다는 듯 낄낄거리며 웃었다. 다시 심장이 달싹인다.
못 참겠다. 참을 수가 없다. 애초에 오면서부터 다짐했던 거다. 지금 안 하면 후회할 거야. 그런 생각들이 해정을 부추겼다. 허리를 쥐었던 손이 더듬거리며 식탁에 매달려 있던 다리 한쪽까지 내려갔다. 무릎을 한 손으로 쥔 해정이 현수의 얼굴에 제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었다. 검은 눈동자가 한꺼번에 시야에 들어찬다.
“지금, 지금 형 다리 부러뜨려야 돼요.”
“……해정아.”
“미안한데, 안 된다고 해도 어쩔 수가 없어요. 말끔하게 나으면 안 되니까 하루만 아픈 거 참아요. 그러면 내가 다음 날 병원에 데려다줄게요.”
“그게, 그게 무슨 말이야. ……왜 그래, 응? 형 봐 봐.”
주절주절 말하는 게 이미 결정을 내린 것처럼 막힘이 없었다. 무릎을 쥐고 있는 손에 점점 힘이 들어갔다. 무릎 위 손등이 입술처럼 파랗게 질려 부들부들 떨었다.
현수가 티 나지 않을 정도로 작게 침을 삼켰다. 정말 금방이라도 다리를 어떻게 해 버릴 것 같은 힘에 두려움이 턱밑까지 엄습했다.
몸이 점점 떨어졌다. 힘이 풀어진다 싶더니 손이 스멀스멀 발목까지 내려가기 시작했다. 두려움을 숨기지 못한 발목이 결국 움찔 떨자 별안간 콱, 벼락같은 힘이 발목을 쥐었다. 뼈에 찌릿한 감각이 내리친다.
“아!”
“놔요. 팔도 부러뜨리기 전에.”
현수가 놀라 파득대며 팔을 쥐자 해정이 낮게 경고했다. ‘이대로는 안 된다. 진심이다.’ 그 생각만이 현수의 뒷목을 연신 내리찍었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해정을 받아들였던 게 겨우 어제의 일이다. 그리고 오늘, 자신은 하루 종일 집에 있었고 해정도 그걸 아는 것 같았다. 떨어진 건 고작 몇 시간 정도였다. 그런데도 해정은 이렇게 불안해했다. 기어이 또 이렇게 미쳐서 날뛰고 만다.
현수가 두 손으로 해정의 팔을 쥔 채 부드럽게 당겼다. 몸이 살짝 가까워진 틈을 타 빠르게 손을 옮겨 해정의 목을 껴안는다. 발목이 잡힌 탓에 완전히 가까워지지는 않았으나 이 정도면 충분했다.
“해정아. 일단 진정하고……. 진정하고 결정하자.”
하지만 해정의 비정상적인 행동을 비난할 수가 없었다. 모든 원인은 자신이다. 그가 이렇게 고통스러워할 정도로 불안해하는 건, 자신이 옆에 있기 때문이다.
현수가 최대한 허리를 숙여 해정과 얼굴을 가까이 했다. 서늘한 뺨에 촉촉촉촉, 연신 키스를 하면서 필사적으로 달래는 목소리를 내었다. 함께 지내다 보니 깨달은 건데, 해정이 이렇게 어딘가 엇나간 눈을 했을 때는 무조건 안 된다고 말하면 안 됐다.
무서워서 절로 거칠어지는 숨을 가까스로 진정시키며 현수가 말을 이었다. 앗, 하는 사이에 정말 잡힌 발목이 꺾일까 봐 심장이 쉴 새 없이 덜컹거렸다.
“부러, 부러뜨려도 돼. 내 몸 네 거잖아. 네 거니까, 그러니까 그래도 돼. 근데, 근데…… 좀, 좀만……. 좀만 진정하고……. 응? 이렇게 하면 형 놀라잖아.”
“…….”
최대한 침착하게 말하려고 했는데, 그게 생각처럼 잘되지 않았다. 말을 끝낸 현수가 다시 열심히 뺨에 쪽쪽 키스하며 천천히 입술을 옮겼다. 곧이어 입술이 맞닿았다. 그대로 꾸욱, 입술을 누르자 해정이 불안한 눈 그대로 현수를 내려 본다. 혼란스러워하는 표정이 꼭 길을 잃은 아이 같았다.
“……나 하루 종일 집에 있었어. 침대에 계속 누워 있다가 씻고, 빵 먹다 좀 잤어. 도망가겠다는 생각도 안 했고 나가고 싶다는 생각도 안 했어.”
“…….”
“앞으로도 안 도망가. 그럴 생각 없어. ……너한테 말 안 하고 어디 나가지도 않을 거고. 형이 어딜 가, 널 두고.”
현수가 입술을 살짝 떼고 말했다. 이건 진심이었으니 조금 전보다 더욱 확실한 말투였다.
“…….”
“…….”
정적. 얇은 줄이 투둑 소리를 내며 끊어질 것 같은 긴장이 이어졌다. 아직도 어디로 튈지 모르는 손은 제 발목을 쥐고 있다. 그게 무서워서 금방이라도 식탁에서 내려오고 싶었으나, 현수는 잠자코 앉아 있었다. 충동을 억눌렀다. 그리고 관찰하듯 저를 지그시 내려 보는 눈을 피하지 않고 마주 보았다. 발목을 쥔 손목의 힘이 약해진 것은 한참 뒤였다. 이때다 싶어 빼 버리면 안 된다. 현수는 제게 되뇌며 슬며시 턱을 밀었다.
가벼이 닿은 입술이 숨을 삼켰다. 닿은 힘이 강해졌다. 몰아붙이듯 입술을 쪽, 빨고선 혀를 들이미는 감각에 현수가 뒷목을 엄지로 슬슬 매만졌다.
혀가 엉키면서 질척이는 소리를 냈다. 혀를 세게 빨아들이는 감각에 아찔해져 뒷목을 매만지던 엄지에 돌연 힘이 꾹 들어갔다.
발목 부근에 머물던 손이 떨어졌다. 해방감마저 느껴져서 현수가 “흐…….” 작게 소리를 끌었다. 다리 사이에 해정의 몸이 파고들듯 가까이 섰다. 바깥의 온도 탓인지 아직도 차가운 팔이 허리를 단단히 감싸 맨다.
입술이 떨어졌다. 현수가 눈을 뜨며 해정의 얼굴을 확인했다. 다행히도 조금 진정이 된 것 같았다. 덩달아 불안정하게 뛰던 박동이 차츰 나아졌다. 현수의 손이 검은 머리를 위에서 아래로 쓸어내렸다.
“……진짜 어디 안 갈 거야?”
해정이 얼굴을 숙이고 현수의 어깨에 코를 파묻었다. 차분하고 조용한 목소리가 응석을 부리듯 웅얼거린다. 현수는 머리를 쓸어내리는 걸 멈추지 않았다. “응. 안 가.” 간단히 떨어지는 대답에 기어이 참았던 걸 터뜨리는 것처럼 껴안긴 몸이 흔들렸다.
“안 갈 거야? 안 도망갈 거야?”
“응. 안 가. 정말로.”
“……못 믿겠어.”
예전부터 해정은 자주 이런 말을 했다. 제 말을 안 믿는 게 아니라 못 믿겠다고. 예전에는 두 말의 차이를 몰랐는데, 이제는 알았다.
아마 지금도 내 옆에 있는 괴물이 보이겠지. 나와 똑같이 생긴 그 괴물이.
현수가 저절로 솟는 죄책감을 삼켰다. 머리를 쓸던 손이 흐르듯 내려가 안쓰럽도록 떠는 등을 토닥였다.
“믿어도 돼. 거짓말 아니야. 나 진짜 어디 안 가.”
“형이 거짓말하고 있대.”
“아니야. 진짜야. 진짜 안 갈 거야.”
“……시끄러워, 씨발, 시끄럽다고…….”
이 말은 저를 향한 게 아니었다. 아무래도 괴물이 악을 지르고 있는 모양이었다. 현수가 토닥이던 손에 힘을 주어 더 세게 해정을 끌어당겼다. 해정이 도피하듯 얼굴을 비비적거리며 기어이 현수의 품 안으로 더 깊이 숨었다. 거친 숨결이 목을 타고 품 안에 고스란히 스며든다.
누가 내 머리에 총을 겨누고 있는 건 똑같은데, 거기에 안정제만 먹는다고 이게 나아질 리가 없잖아요.
문득 어제 남자가 하던 말이 스쳤다. 지금 해정이 그런 것 같다고, 현수는 생각했다. 아침에 해정을 배웅하면서 그에게 그래도 방법을 다 써 봤으면 좋겠다고 말했으나, 사실 그게 바보 같은 짓이라는 걸 스스로도 알고 있었다.
병원에 간다고 나아질 리가 없다. 자신이 영영 사라지지 않는 이상 해정은 끝없는 불안에 휘말리고 말 것이었다. 그 불안은 이렇게 체감할 정도로 더 깊이 가라앉고 있었다. 그걸 알면서도, 자신은 지푸라기라도 잡아야 했다. 설령 그게 효과가 없는 바보 같은 짓이라 할지라도.
괴물의 목소리가 계속 들리는 것인지, 끝내 해정이 약하게 신음했다. 현수가 양손을 들어 해정의 두 귀를 감싸듯 막았다. 그리고 천천히 얼굴을 들어 올렸다. 해정의 얼굴이 현수의 손길대로 올랐다. 눈이 마주했다. 쪽, 쪽. 해정의 입술에 다정하게 입을 맞춘 현수가 그대로 얼굴을 옆으로 옮겼다. 귀를 감싼 오른손을 살짝 떼어 내고 그 작은 틈 사이로 목소리를 흘려보낸다.
“해정아.”
부드러운 목소리. 제게는 유일한 그 목소리만이 손 틈 사이로 흘러와 귀 안에 녹았다. 해정은 대답 대신 발발 떨리는 입술을 사리물며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잠시 해정의 얼굴을 확인한 현수가 다시 얼굴을 옮겼다.
“우리 같이 살자.”
그 말을 끝으로, 괴물의 목소리가 또 들어가지는 않을까 가지런한 손이 빠르게 귀를 막았다.
거짓말이야. 거짓말이야. 거짓말이야. 거짓말이야.
어찌나 빨리 말하는지 여러 사람이 말하는 것처럼 말의 시작과 끝이 겹치기도 했다. 귀를 막는다 하여도, 괴물의 목소리는 선명했다. 허나 기이할 정도로 반복되는 이 목소리를 견딜 수 있는 건 귀를 감싸는 손의 온기 때문임이 맞았다. 해정은 그걸 알았다.
이번에도 해정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현수가 웃었다. 이번에는 무슨 말을 해 주어야 할까. 잠시 고민한다.
“사랑해.”
눈을 마주하며 현수가 작게 말했다. 입 모양으로 알아들었는지 해정이 현수의 양 무릎에 손을 짚고 꾹, 무게를 실으며 다가왔다. 귀를 막던 손이 그대로 목을 안았다.
지푸라기라도 잡아야 한다. 자신은 영영 사라지는 것 대신 옆에 있는 걸 택했기 때문이다. 이기적이라고 누군가가 비난하여도, 설령 서해정이 비난한다 하더라도 어쩔 수 없었다.
원래 사람은 다 그런 거잖아요. 다 자기밖에 모른다고요.
모두 다, 자기밖에 모르는 괴물들이야.
그리 말했던 건 서해정이었다. 그러니까 자신은 초대에 응한 것뿐이라고 현수는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