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얼굴
승우는 자취하는 집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온 김에 오랜만에 집에 좀 있다가 가라는 수연의 말 때문이었다. 그녀는 바싹 마른 승우의 몸이 퍽 눈에 걸리는 듯했다. 물론 승우는 제 집에 돌아가고 싶었으나, 연말에 가족을 두고 다시 혼자 사는 곳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부득이한 이유를 찾지 못했다. 특히나 취업 준비를 할 필요 없이 졸업식만을 기다리는, 부유한 대학생의 신분으로서는 더욱 그러했다.
아침밥을 먹는 내내 승우는 제 밥그릇에 시선을 처박고 있었다. 밥 먹는 데에 집중한다기보다는 해정과 눈을 마주치지 않기 위함이었다. 늘 그래 왔기도 했고 딱히 관심도 없던 행동이었지만, 해정은 문득 그것이 의문스러웠다. 어제저녁의 일 때문이었다.
승우는 저를 단순히 싫어하고, 질투하고 있는 게 아닌 것 같았다. 어제저녁 화장실 앞. 해정은 그의 눈에서 공포를 발견했다.
‘학대를 당한 건 난데, 왜 나를 무서워하는 거지? 내가 뭘 했다고.’ 생각하다가 결국, ‘혹시 이제 와서 부모님이 그 일들을 알게 될까 봐 저러는 걸까.’라는 짐작까지 해 보았으나 그건 아닐 것이다. 자신이 폭로할 생각이 없다는 건 본인도 잘 알 터였다.
사실 어떻든 상관없기는 했다. 어차피 시냇물을 따라 흐르는 나뭇가지 같은 생각이었다. 거치적거리기만 할 뿐, 제게 영향을 주는 건 없다.
“…….”
“…….”
그것보다는, 지금 제 앞에 앉아서 게임을 하고 있는 현수가 해정에게는 더 중요했다. 요즘 현수는 휴대용 게임기에 푹 빠져 있었다. 듣기로는 새롭게 출시된 게임기라고 했다. 침대에 다리를 쭉 뻗고 벽에 기대앉아서는 게임기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게 꼭 어린아이 같았다.
해정은 침대 앞에 앉아 물끄러미 그런 현수를 구경했다. 잠시 후, 뭔가가 실패했는지 현수가 “아.” 짧은 탄성을 내뱉으며 제 이마를 짚었다.
“…….”
뭔가에 몰두하는 모습이 귀엽긴 한데, 계속 보다 보니 시선을 빼앗고 싶다는 충동이 인다. 충동이 머리채를 잡을 듯 쫓아오고 있었지만, 해정은 아닌 척 차분한 목소리로 “형.” 했다. 해정의 목소리에 재시작 버튼을 누르려던 현수의 손가락이 멈췄다. 게임기에 파묻고 있던 얼굴이 들렸다. 다정한 눈이 자신을 향하자, 그제야 충동이 추격을 멈춘다.
“응?”
“……내가요, 무슨 잘못이 있을까요?”
느닷없는 질문이었다. 꼭 신문 모퉁이에 있는 수수께끼를 같이 풀어 달라는 듯 가볍고 천진하기도 하였다. 현수는 이해를 하지 못한 모양인지 의문스러운 얼굴을 했다. 해정이 눈을 깜빡거리며 말을 이었다.
“그 형한테 말이에요. 내가 뭘 잘못한 게 있을까요?”
거치적거리는 나뭇가지는 이렇게 쓰일 수도 있다.
해정의 덧붙임에, 휴대용 게임기를 옆에 내려놓던 손이 뚝 멈췄다. 놀란 듯 동그랗게 뜨였던 눈이 점점 구겨졌다. 불쾌한 것을 들었다는 듯이 표정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걔가 그래? 네가 잘못한 게 있다고?”
묻는 목소리가 낮았다. 해정은 얼굴을 기울여 볼 한쪽을 매트리스에 푹 기대었다. 시선을 떨어뜨리고, 멀거니 벽을 바라보면 불쌍하게 보일 것 같아 그렇게 하였다.
“그렇게 말한 건 아니지만…….”
말끝이 흐지부지 지워졌다. 현수는 여전히 인상을 그은 채로 해정을 바라보았다. 길고 숱 많은 속눈썹이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고 있다.
기어이 현수가 무릎걸음으로 해정의 앞에 가까이 다가가 앉았다. 그리고 동그란 머리를 슥 손으로 쓰다듬었다. 몇 번 천천히 쓰다듬자 해정이 다시 얼굴을 제대로 두고 그를 올려 보았다. 눈이 마주쳤다. 현수는 머리를 쓰다듬는 손을 멈추지 않았다.
그 사람이 이 어린아이에게 무슨 말을 했는지는 모르지만, 필시 좋은 말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부 형과 만난다는 사실만으로도 이 주 내내 제 품 안에서 떨었던 아이다. 후유증이 없을 것이라 생각한 건 아니었는데, 막상 멀쩡해 보여서 마음을 놓고 있었다. 공연한 죄책감에 현수가 약하게 제 입술을 깨물었다가, 이내 다시 입을 열었다.
“너는 피해자야. 네가 잘못한 게 있을 리가 없잖아.”
“…….”
“……걔가, 너한테 뭐라고 했는데?”
사뭇 단호했던 목소리가 조금의 분노를 담아 물었다. 머리 위에 머물고 있던 손이 흐르듯 내려와 말랑한 볼을 조심스럽게 매만졌다. 해정이 등을 느리고 크게 들썩이며 숨을 내쉬었다. 어젯밤의 대화를 떠올린다. 단순히, 현수의 물음에 대답하기 위해서였다.
걔가 뭐라고 했지. 최승우가 나한테……. 음, 그러니까…… 뭐라고 했더라.
네 바닥난 인간성, 언젠가 다 들킬 거라고.
“…….”
“응? 뭐라고 했는데. 위협이라도 한 거야?”
그 공포심이 가득한 목소리가 떠오르자마자 본능이 입을 틀어막았다. 최승우가 제게 했던 말을 그대로 현수에게 전하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스친 건 자신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동시에, 그저 가볍게 넘겼던 그 말이 종잇장에 베인 것처럼 날카롭게 존재감을 내보였다.
“…….”
이런 뜻으로 한 말인가?
“……해정아?”
현수의 종용에 해정은 딱딱하게 굳은 입가를 풀어 애매하게 웃었다. 그리고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별거 아니에요. 괜찮아요.”
“해정아.”
“……형, 나 안아 줘요.”
해정이 팔을 위로 뻗었다. 현수는 대답을 회피하는 태도를 어떻게 해석한 건지, 더 속상하다는 듯한 얼굴을 했다. 허리를 숙여 조심히 해정의 머리를 껴안는다. 위로하듯 등을 토닥이는 손이 다정했다. 해정이 숨을 느리게 들이마셨다. 현수의 향기가 폐에 가득 찼다.
안 들켜.
들킬 리가 없다. 그가 자신을 의심할 리가 없다. 그렇게 두지도 않을 거다.
별거 아니었던 나뭇가지가 날카로운 껍질로 손가락을 찌른 건 의외의 순간이었다. 망울망울 찔린 살 사이로 새어 나오는, 또 다른 불안감이 기분 나빴다. 해정이 좋은 향기가 나는 그 품에 제 볼을 더욱 깊이 파묻었다.
* * *
현수는 규칙적인 생활을 하는 건 아니었지만, 나름대로 정해진 생활 패턴이 있었다. 방송 전에는 편의점에 꼭 갔고, 방송이 끝나면 꼭 목욕을 했다. 해정을 집에 보내고 돌아와 잠에 드는 시간도 비슷했다.
마찬가지로, 매일 하는 목욕도 정해진 듯 시간이 같았다. 십오 분에서 이십 분 사이. 현수가 목욕을 하는 시간은 그 정도였다.
해정은 그 시간에 제 비밀스러운 행동을 맞췄다. 그가 욕실에 들어가기 전에는 침대에 누워서 휴대 전화를 하는 척하거나, 욕실에 들어가는 모습을 대놓고 바라본다. 잠시 뒤, 욕실 문이 닫히고 물이 쏟아지는 소리가 들리면 그때부터 10초를 센다. 10초 후에도 물소리가 끊이지 않으면 침대에서 일어선다. 휴대 전화는 대부분 책상 키보드 옆에 있다. 침대 옆 멀티탭 주변에 있는 경우는 여태껏 세 번 있었다.
휴대 전화를 쥐어 침대에 앉으면서도 욕실의 물소리를 놓치면 안 된다. 만에 하나 갑자기 나올 수도 있으니까. 현수는 물을 계속 틀어 두고 목욕을 하기 때문에 언제 나올지 추측이 가능했다. 왜인지 중간에 물소리가 끊긴 적이 있었지만 딱 한 번뿐이었다.
여유 시간 일 분을 뺀 십사 분에서 십구 분 사이. 그사이에는 비밀번호를 일곱 번 시도할 수 있다. 처음에는 다섯 번을 시도할 수 있다. 그리고 다섯 번 틀린다면, 일 분 동안 비밀번호를 누르는 걸 시도할 수 없다는 문구와 함께 휴대 전화가 잠긴다. 일 분 후 한 번 더 시도해서 또 틀리면 휴대 전화는 오 분 동안 잠긴다. 오 분 다음은 십오 분이다. 십오 분 동안 휴대 전화가 잠긴다.
일곱 번 시도한 뒤는 이미 칠 분 정도가 지난 상태다. 그때부터 십오 분 뒤면 휴대 전화의 잠금이 풀리기도 전에 목욕을 마친 현수가 나올 것이다. 그러니 해정은 휴대 전화를 있던 자리에다 두고 다시 침대에 누워야 했다. 목욕을 마친 현수는 곧장 해정에게로 다가왔다. 그래서 제 휴대 전화가 비밀번호가 잘못 눌려서 잠겨 있다는 걸 알지 못했다. 현수가 휴대 전화를 확인할 때쯤은 십오 분간의 잠금도 풀린 상태였다.
이 짓을 하기 전, 좀 더 쉽게 알기 위해 머리를 쓴 적이 있었다. 몇 주 전이었다. 해정은 현수가 머그잔을 닦을 때 다가가 형이 하는 유료 게임을 나도 해 보고 싶다며 졸라 댔었다. 현수는 해정의 보챔에 잠금을 풀어 주려고 했지만, 해정의 예상대로 축축한 손가락 때문에 지문 인식이 되지 않았다. 결국 현수는 슬쩍 액정을 가리면서 비밀번호를 눌렀다. 비밀번호 네 자리를 다 볼 수 있다면 좋았겠지만, 해정이 본 건 앞자리 두 글자, 3, 그리고 7이었다.
오늘은 그저께에 이어 3792부터 시작이었다. 해정은 물소리를 들으면서 침대에 걸터앉았다. 이제 남은 번호는 3792, 3793, 3794, 3795, 3796, 3797, 3798, 3799. 딱 여덟 개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오늘 아니면 내일 풀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하필이면 구십 번대 인 게 불운이었지만 어쨌든 곧 비밀번호를 풀 수 있는 게 기뻤다.
볼 건 많았다. 메신저 친구들, 대화, 문자, 전화번호부, 사진첩, 메모장, 인터넷 사용 기록 등등. 어쩌면 비밀 SNS 계정이 있을 수도 있고, 아니면 여기저기 뒤지다가 그의 다른 신상 정보를 알 수 있을지도 몰랐다. 어찌 되었든 큰 수확이다. 일단 먼저 가져야 하는 건 그의 가족, 친구들의 전화번호다.
생각만 해도 기뻐서 숨이 벅찼다. 해정은 액정을 손가락 끝으로 누르기 시작했다. 3, 7, 9. 그리고 2까지 누른 그 순간이었다.
“……아.”
잠금이 풀렸다. 오늘 첫 번째로 시도했던 번호로 풀릴 거라고는 왜인지, 예상하지 못했다. 워낙 몇 주 동안 원하고 있던 것이어서 막상 알아내니 얼떨떨하기도 했다. 해정은 놀란 눈으로 액정을 바라보다가, 확인하듯 고개를 돌려 물소리가 들리는 욕실 쪽을 바라보았다.
“…….”
그리고 다시 액정으로 돌아온 얼굴은 해맑게 웃고 있었다.
당황도 잠시, 길게 뻗은 손가락이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해정이 전화번호부를 샅샅이 훑었다. 그답게 부모님은 ‘엄마’, ‘아빠’라고 등록되어 있었다. 친한 친구는 별명으로 적어 둔 건지 중간중간 세 글자의 이름이 아닌 것들도 있었다. ‘쩡호’와 ‘경태’, ‘우서기’가 그러했다. 해정이 주머니에서 제 휴대 전화를 꺼내 다섯 개의 번호를 옮겨 저장했다. 언젠간 다 저장해 둘 것이지만, 지금 다 할 수는 없으니 우선순위를 두어야 했다.
다음은 메신저였다. 대화 목록 맨 위에는 자신과의 대화가 있었다. 그걸 확인한 해정이 또 한 번 웃었다. 그리고 제 대화 밑은, 단체 대화 방이었다. 구성원은 ‘쩡호’, ‘경태’, ‘우서기’. 특별히 그가 별명으로 저장한 셋이다. 친한 친구들인 것 같았다. ‘저번에 부산 갔을 때 같이 갔던 사람들인가.’ 해정은 짐작했다. 그때도 세 명이었으니까, 제 짐작이 맞을 확률이 높다.
해정이 망설임 없이 단체 대화 방을 눌렀다. 최근 메시지는 어제였다.
[양주 삼^^]
[크 좋군]
[굿]
그리고 마지막은 현수가 보낸 엄지 이모티콘이다. 저 ‘쩡호’라는 사람이 양주를 사서 혼자 마시는 것이라면, 굳이 단체 대화 방에서 사진을 찍어 자랑할 이유도 없고 나머지 셋이 저렇게 좋아할 리가 없다. 해정은 빠르게 판단했다. 다시 대화창이 느린 속도로 밀려 내려갔다.
“…….”
반들거리는 눈 위로 대화창이 비쳤다. 그 눈은 점점 온도를 낮추고 있었다. 기어이 차갑게 얼어붙을 정도였다.
잠시 후, 희게 질린 손가락이 꿈틀거렸다. 홀드 키를 누르자 액정이 새까맣게 꺼졌다. 해정은 그 액정을 뚫을 듯 바라보았다. 머릿속이 어지러웠다. 불난리가 난 것처럼 뜨겁고, 짜증이 났다.
당장 이 쓸모없고 더러운 휴대 전화를 벽에 집어 던지고 싶었다. 그래도 분이 풀리지 않을 것 같다. 욕실 문을 쾅쾅 두드리고 당장 현수를 끌어내 몰아붙이고 싶었다.
별안간 해정이 눈을 꽉 감았다. 휴대 전화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가 부들부들 떨렸다. 해정이 느리게 일어나 책상 앞으로 갔다. 휴대 전화를 있던 곳에 두고, 다시 돌아와 침대에 누웠다. 자신을 진정시키려는 듯 크게 숨을 들이마신다. 코 안에 현수의 향이 가득 들어찼지만, 발길질하는 심장은 여전했다.
하지만 화내면 안 된다. 조금 더 영리하게, 형을 붙들 수 있는 방법으로. 형의 약점을 알잖아. 그러니까, 진정해야 해. 진정……. 씨발, 서해정. 병신같이 굴지 말고 진정하라고.
네 바닥난 인간성, 언젠간 다 들킬 거라니까? 모두 다. 네가 얼마나 안 불쌍한 새끼인지. 너밖에 모르는 새끼인지. 얍삽하고 비인간적인 놈인지. 엄마, 아빠도, 김현수도. 다 알게 될 거야, 언젠가는.
언젠가는.
“그, 개씨발 새끼가…….”
이건 환청이다. 해정이 씹어뱉듯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제 귀를 거칠게 비벼 댔다. 이죽대던 환정은 마찰음에 의해 사라졌다.
안 들킨다. 그 새끼의 바람대로 엄마 아빠한테 들키는 건 상관없다. 자신이 얼마나 진창인 속내를 가지고 있든, 사람의 마음을 이용해 처먹든, 들키면 뭐 어쩔 건지 상상하는 것조차 지루하다.
하지만 김현수에게는 절대 들키지 않을 것이다. 그 증거로, 지금 자신은 잘 참고 있다.
“후우…….”
꽉 문 잇새로 뜨거운 한숨이 새어 나갔다. 해정은 한 번 더 현수의 향기를 탐했다.
* * *
욕실 문이 열렸다. 수건을 목에 걸친 채 나온 현수가 제 뒷머리를 한 번 털었다. 그리고 바구니에 수건을 던져 넣었다. 해정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몸을 잔뜩 만 채로 눈을 감고 있었다. 현수가 습관적으로 웃으며 그에게로 다가갔다. 침대에 걸터앉아 손을 뻗는 것도, 이제는 습관이라고 할 정도로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손가락이 이마에 살짝 닿았을 때 해정의 눈이 뜨였다. 흔들림 없이 곧바로 마주쳐 오는 눈에 현수는 잠깐 멈추었다가 이내 “깜짝이야.” 하며 앞머리를 흐트러뜨렸다. 장난스러운 손짓이었다. 그 모양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던 해정이 어색하지 않을 순간에 살짝 웃었다.
“나 방금은 진짜 잠들었어요.”
말하는 목소리가 잠겨 있었다. 해정이 팔을 아래로 쭉 펴고 기지개를 켜듯이 몸에 힘을 주었다. 현수가 자신이 어질렀던 앞머리를 세심하게 정돈하며 눈을 가늘게 떴다.
“거짓말.”
그 말에 낮게 소리 내어 웃으며 몸에 힘을 푼다. 눈을 슥삭슥삭 아무렇게나 비비면서 “안 속네.” 하는 모습이 못내 장난스러웠다. 현수가 무어라 대답하기도 전, 해정이 손을 뻗어 제 머리를 매만지는 손을 잡았다. 표정과 다르게 단단한 힘이었다.
“형.”
“응?”
부르는 목소리가 사뭇 낮았다. 현수가 눈을 키우며 대답하자, 해정이 느리게 상체를 일으켰다. 머리가 부드럽게 넘어갔다. 손은 여전히 맞잡은 채였다. 손등을 꾹 짓누르고 있던 엄지가 힘을 빼고 슬슬 살을 매만졌다. 잠시 입을 다물고 있던 해정이 손을 바라보고 있던 시선을 들어 현수와 눈을 맞췄다.
“괴물 이야기, 해도 돼요?”
잡힌 손이 올라갔다. 해정이 현수의 손등에 제 볼을 비볐다. 간청하는 듯이 얼굴을 돌려 짧게 입을 맞추고는 그 위로 이마를 묻는다. 갑작스러운 어리광이었지만, 당황스러울 건 없었다. 해정은 늘 이랬으니까. 도리어 이제는 해정이 이러지 않는 게 더 어색할 정도였다.
현수는 새카만 뒤통수를 내려 보며, “응.” 대답했다. 해정이 손을 떼고, 현수의 허리에 팔을 감았다. 허벅지에 볼을 대며 다시 상체를 눕는다. 현수가 부드럽게 웃었다. 결 좋은 머리를 쓰다듬자 느린 숨이 허벅지 위로 퍼졌다. 노곤한 기색이, 정말 잠을 잔 것 같기도 하다.
“괴물이 보이기 시작한 건, 열두 살 때였어요.”
“…….”
“열두 살 때면 그렇게 까먹을 정도는 아닌 것 같은데……, 이상하게 그때 기억이 잘 안 나요. 토막이라도 낸 것같이 짧게, 짧게 몇 개 장면들만 기억나거든요. 그중 하나예요, 괴물에 대한 기억이. 그거 말고도 기억나는 건……. 형 방송 본 거, 학대당한 거, 공황 장애 때문에 갔던 병원 생김새, 괴물. 이거 네 개만 기억나네.”
조곤조곤 이어 나가던 말을 끊은 해정이 고개를 살짝 돌려 허벅지 위에 입을 맞추었다. “그중에서 몰래 형 방송 봤던 기억이 제일 생생해요.” 입을 댄 채로 속삭이는 목소리가 곰살맞았다. 맨살이 아니었는데도, 예민한 부위인 탓인지 움찔 허벅지가 떨렸다. 해정은 느끼지 못한 것처럼 다시 바지 위에 볼을 비빈 뒤, 말을 이었다.
“괴물에 대한 것도 나름대로 생생하게 기억나요. 요즘도 가끔 나타나니까 기억을 지울 수 없기도 하고……. 나타나는 건 똑같아요. 형체는 매번 다른데, 내는 소리가 똑같거든요. 칠판 긁는 소리도 내고, 비명 소리도 내고, 별소리가 다 나는데요, 그중 제일 잘 들리는 소리가 있어요. 죽어. 죽어. 이러거든요, 괴물이. 계속 저보고 죽으라고 해요. 그 형이 저보고 죽으라고 한 적이 딱 한 번 있었는데……. 그때 기억 때문인 것 같아요.”
“너보고, 죽으라고 했던 거?”
볼 위로 살포시 내려앉는 목소리가 한껏 염려를 담고 있었다. 현수가 섬세한 손길로 해정의 머리카락 사이를 비집었다.
“네. 실은 몸 여기저기 맞았던 것 빼고는 학대당했던 상황들이 기억이 잘 안 나거든요. 근데 왜 그렇게 그 목소리는 잘 생각날까요. ……생각해 보니까 그 말을 들은 이후로 공황 장애도 생기고, 괴물을 본 것 같기도 해요. 응. 그게 시발점인 것 같아요. 확실하지는 않은데……. 맞는 것 같아. 그렇지 않고서야 그 목소리만 생각이 날 리가 없잖아요. 괴물이 그 말만 할 리가…….”
“해정아.”
문득 의식을 꿰뚫는 목소리에 현수의 몸을 아무렇게나 만지던 손길과, 목소리가 뚝 멎었다. 해정이 고개를 돌렸다. 수직으로 눈이 마주쳤다. 현수가 해정의 속눈썹을 손가락으로 쓸자, 한쪽 눈이 살포시 감겼다가 뜨였다.
“그만 생각해도 돼.”
경험상 그런 건 다 쓸데없는 생각이었다. 자신이 개에 대한 트라우마를 겪을 때 가장 힘들었던 부분이었다. 왜 나는 그게 생각이 날까, 라고 고민해도 나오는 답이 아니다. 애초에 답이 없다. 그냥 생각나서일 뿐이다. 그냥, 괴로우니까. 그냥, 그게 뇌리에 남았으니까. 답을 찾으려고 하면 상처를 파헤치는 자학적인 행위가 될 뿐이다.
잠시 생각하는 듯 가만히 현수를 보고 있던 해정이 이내 알겠다는 듯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천천히 상체를 일으킨다.
얼굴이 멀어지기 전에 현수가 손을 뻗어 해정의 볼을 붙들었다. 그리고 제게 가까이 끌어왔다. 현수의 손길에 해정이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고운 얼굴이 가까이 자리했다. 체리 립밤이 입가에 살짝 번져 있었다. 아까 제 허벅지에 얼굴을 비비적거릴 때 번진 모양이었다. 현수가 느릿하게 고개를 내밀었다. 번진 입가에 입술을 대자, 체리 향이 훅 끼쳤다. 해정이 제 허벅지에 대고 그랬던 것처럼, 현수는 그대로 속삭였다. 입술 끝으로 끈적한 살결을 맛보는 기분이었다.
“그런 건 생각 안 해도 돼.”
“…….”
“형이 있잖아. 형이 있으면 괴물 같은 거, 없어지잖아. 맞지?”
괴물에 대해 말하는 해정은 차분했다. 불안해하지도 않았고, 안아 달라고 요구하지도 않았으며 손을 떨거나 목소리를 떨지도 않았다. 그렇게 될까 봐 해정의 말을 자른 것이나 결국 그는 멀쩡했다.
그러니까, 이건 서해정이 시켜서 말하는 게 아니다. 자의다. 체리 향에 익숙해진 코가 더 이상 그 향기를 맡지 못한 순간, 현수는 자각했다. 그렇게 살며시 얹힌 자각 위에 못을 박는 것처럼 이내 쿵쿵쿵, 심장이 뛰었다.
“……네.”
해정이 허리에 팔을 감아 현수를 꽉 안았다. 어깨에 턱이 놓인다. 숨을 길게 내리쉬는 소리가 머리 뒤로 들렸다. 현수는 너른 등을 토닥이면서도 맞닿은 심장에 집중했다. 해정과 저는 똑같은 박자로 박동하고 있었다.
* * *
시야가 휙휙 돌았다. 똑바로 걷는데 바닥이 들쑥날쑥하기도 했다. 그게 멀미가 나서, 승우는 걷던 걸 멈추고 보이는 벽에 기대었다. 등을 댄 채로 구역질을 몇 번이나 삼키고 나니 움직이던 바닥이 점점 잠잠해지기 시작했다.
‘너무 많이 마셨나.’ 승우는 의식적으로 숨을 쉬면서 생각했다. 동네에 온 김에 고등학교 친구들을 만났는데, 익숙한 듯 낯설어진 얼굴들을 보니 조금 들떴던 것 같기도 하다. 부잣집 아들이 쏘라며 부추기는 말들에 카드를 긁은 것도 들뜬 마음 때문이었다. ‘언제 또 만나자고 했던 것 같았는데…….’ 승우는 되새기다가 고개를 저었다. 술이 깨면 메신저로 물어보면 될 일이다.
한참 있으니 어지럼증이 가셨다. 승우가 벽에 기대었던 등을 떼고 똑바로 섰다. 아직도 속이 좀 울렁거렸지만 아까보다는 나았다. 잔상을 지워 내듯 눈을 꾹 감았다가 뜨니, 시야 끝에 익숙하면서도 낯선 인형이 있었다. ‘……아까 본 동창들은 아닐 테고.’ 승우는 생각하면서 눈을 가늘게 떴다. 동창 중에는 키가 저렇게 큰 놈이 없었다.
걸어오는 사람은 멈추지 않고 승우 쪽으로 다가왔다. 어둡게만 보였던 실루엣 위에 가로등 불빛이 비추었다.
“…….”
다가오던 인물은 서해정이었다.
오밤중에 새하얀 얼굴과 마주치니 꼭 귀신을 본 양 소름이 끼쳤다. 눈이 마주치자마자 재빨리 시선을 피한 건 승우였다. 여기는, 집으로 가는 길목이다. 내게 오고 있던 게 아니다. 승우는 허공을 바라본 채로 그렇게 생각했다.
걸음 소리는 멈추지 않았다. 해정은 걸음걸이를 늦추지도 않고, 빨리 하지도 않은 채 그대로 승우를 지나쳤다. 승우의 예상대로였다.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치지 않게, 조금 있다가 들어가야겠다.
그렇게 생각할 때였다. 기어이 소멸되었던 걸음 소리가, 점점 크기를 키웠다. 간격도 점점 빨라졌다. 승우가 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창백한 얼굴이, 지나쳤던 쪽에서 다시 돌아오고 있었다. 아까 보았던 얼굴과 다르게 눈빛이 형형하다. 저절로 숨을 삼킨 승우가 뒤로 물러났다. 등 뒤로 벽이 닿았다.
탁.
걸음이 멈추었다. 해정은 간격 없이 말을 꺼내었다.
“넌, 가해자야.”
별안간 툭 튀어나온 목소리는 칼날처럼 날카로웠다. 배를 찌를 것처럼 위태롭게 승우의 명치를 겨누고 있다.
승우는 해정의 저의를 파악하려 했으나, 도무지 파악할 수가 없었다.
서해정은 한 번도 자신이 학대당한 일에 대해서 입에 올린 적이 없었다. 부모님 앞에서는 물론이고, 제 앞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꼭 비밀을 지키려는 사람처럼, 오히려 자신이 꺼림칙할 정도로, 정말 한 번도.
근데 왜 갑자기 지금?
“대답해.”
“…….”
왜, 서해정이, 나한테 이런 말을?
엄마 아빠한테 말하려고?
누구한테 말하려고?
갑자기 왜?
승우가 팔을 뻗어 흩어진 궁금증을 한데 끌어모은 순간이었다.
“큭!”
불현듯 큰 손이 다가와 한 손으로 승우의 목을 틀어쥐었다. 쿵. 곧바로 마른 등이 세게 벽에 부딪쳤다. 갑작스레 조여 오는 힘과 등뼈에서 느껴지는 고통에 놀란 승우가 파르르 어깨를 떨었다. 가느다란 손이 제 목을 쥔 손을 힘껏 쳤다.
“대답해.”
“……미친, 새……! 큭, 이거, 안……, 놔?”
바르작거리는 몸을 느긋하게 바라보던 해정이 고개를 밀어 승우와의 거리를 좁혔다. 상황과 어울리지 않게 스치는 달콤한 체리 향이 괴이했다. 승우는 펄떡거리는 걸 멈추지 않고 몸을 비틀었다. 힘줄이 불거진 손이 더 세게 목을 조인다. 눈알이 터질 것 같은 위협감이 신경을 건드렸다. 유리알처럼 투명한 눈이 그런 제 얼굴을 구경하듯 물끄러미 바라본다.
이 눈.
“대답 못하겠으면 알아 둬.”
“씹, 컥……! 이, 거……!”
“나는 피해자고, 너는 가해자야.”
“크……, 헉……!”
정말 눈알이 터진 것도 아닌데, 어딘가가 터진 것처럼 과거의 기억이 미친 듯이 돌아가는 머리 위로 후두둑 쏟아졌다.
이 눈. 봤다. 그때.
7년 전. 고작 열두 살밖에 안 된, 저보다 훨씬 작은 몸을 가졌었던, 나보다 힘이 약했던, 그 서해정. 그때도 이런 눈을 하고 내게. ‘죽어.’라고 했던 내게. 이 새끼는.
“너는 내게 트라우마를 준 거야. 너는 날 학대한 거야. 네가 잘못한 거야. 난 불쌍한 거야. 난 고통받은 거야. 나는 트라우마가 있어. 불쌍해. 난 자살하고 싶었고, 그건 다 너 때문이었어. 네가 날 때렸으니까. 난 맞았으니까. 못 알아듣겠으면 죽을힘을 다해 새겨 놔. 뇌에 칼집을 내서라도 기억해. 안 그러면 내가 쑤셔 줄 거니까.”
중얼, 중얼, 중얼, 중얼. 지금의 목소리는 쉼 없이 떠들었다. 그 사이로 산산이 쪼개진, 과거의 목소리가 귀에 박힌다.
그래. 이 눈을 하고서.
“알았어?”
—그런 말, 엄마 아빠 앞에서는 하면 안 돼. 들키잖아.
대답을 겁박하듯 시뻘건 눈이 가까이 다가왔다. 승우는 눈을 질끈 감았다. 반사적으로 숨을 멈춘다. 직면한 건 공포였다. 위잉. 실내도 아닌데 환풍기 돌아가는 소리가 멀리서 나는 것 같았다. 기절하고 싶다고 그는 생각했다.
별안간 목을 조이던 힘이 풀렸다. 기침이 터졌는데, 제 목이 아닌 것 같아 승우는 더듬거리며 아릿한 살을 만졌다. 주저앉지도 못하고 벽에 기댄 채 기침을 하는 승우의 모습을 가만히 내려 보던 해정이 한 걸음 물러섰다.
두 손을 들어 제 얼굴을 가리고 느리게 비빈다. 잠시 후, 한숨과 함께 드러난 얼굴은 바닷물처럼 고요했다. 기침 끝에 침을 뱉은 승우가 덜덜 떨리는 손을 들어 제 눈을 닦았다. 비릿한 눈물이 배어 나왔다.
“나도 궁금해졌어. 분명히 형 때문에 괴물을 보게 됐는데……. 왜 형이 안 무섭지?”
해정이 헐떡거리며 상체를 숙이고 있는 승우의 등을 보며 말했다. 말 사이에 자책하는 한숨이 섞여 있었다. “그게 이상하단 말이야. 분명 괴물이 나타나면, 꼭 형 목소리가 들리는데…….” 중얼거리는 목소리는 추리를 하는 것처럼 의구심을 가득 품고 있었다.
“……아무튼, 형.”
“…….”
친절한 어조가 경쾌하게 화제를 바꾼다. 이윽고 뒤통수에 무거운 무게감이 느껴졌다. 승우가 또 한 번 터지려는 기침을 꾹 삼켰다.
“내 바닥난 인간성이 그렇게 무서우면…….”
“…….”
아랫것을 대하듯, 뒤통수에 얹힌 손이 아무렇게나 승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고등학생인 승우가 어린 해정에게 힘으로 제 감정을 배설했을 때부터 자연스레 형성된 건 육체적인 힘에 기반 한 상하 관계,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스미는 굴욕감에 승우가 제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더 굴욕적인 건, 서해정은 애초에 그런 걸 신경 쓰지 않았다는 거다. 이내 더러운 걸 떨쳐 내듯이 무겁게 뒤통수를 짓누르던 손이 거칠게 떨어졌다.
“끝까지 안 들키게, 형이 좀 도와줘.”
나긋한 목소리가 차가운 밤바람과 함께 승우의 귀를 스쳤다. “응?” 해정이 대답을 물었으나, 승우는 아스팔트 바닥만 뚫어져라 바라볼 뿐이었다. 해정은 괘념치 않는 듯 가벼이 등을 돌렸다. 걸음 소리가 다시 멀어졌고, 이내 사라졌지만 승우는 한참을 그렇게 우두커니 서 있었다.
* * *
생각해
빨리
* * *
거실 벽에는 가족사진이 붙어 있다. 그 사진은 불과 4년 전에 찍었던 것이지만 지금의 모습과는 다르다. 같다고 속없이 말하기에는 열아홉 살의 최승우는 눈치가 빨랐고, 겁도 많았다. 그래서 승우는 그 가족사진이 꺼림칙했다. 정확히 말하면 그 사진 속 저보다 일곱 살 어린 동생과 눈을 마주치기가 싫었다.
서해정. 동생의 이름이었다. 저와 아빠가 다른 동생이 엄마의 몸에서 태어났을 때, 승우는 기쁜 척을 했지만 사실 전혀 기쁘지 않았다. 겁이 난 탓이었다. 그는 제 새아빠와 친엄마의 피를 고스란히 받은 이 예쁜 아기가 제 자리를 다 빼앗아 갈 것 같다는 불안에 휩싸였다. 종종 피가 섞인 그 셋이서만 즐거워하는 상상을 했고, 자신이 없어서 후련하다며 엄마가 웃는 악몽을 꾸었다.
공포가 기어이 정신을 좀먹게 되었을 때, 승우는 저가 받는 공포만큼 제 동생도 받기를 원했다. 저가 서해정의 존재만으로 느꼈던 공포만큼, 서해정도 저의 존재만으로 그 끔찍한 감정을 느끼기를 바랐다. 그래야만 억울하지 않을 것 같았다.
선택한 방법은 폭력이었다. 그건 가장 원초적이면서도 손쉬웠다. 학대를 가하자 제 바람대로 동생은 무서워했다. 제가 손을 올릴 적마다 움칠 떨었으며 폭력을 피해 숨기도 하였다. 승우는 만족했다. 제 바람대로 되고 있다고 생각했다.
며칠 전까지는 그랬다.
학교를 끝마치고 귀가했던, 여느 때와 같은 날이었다. 4시 반. 집에 도착했고, 그 조그맣고 저를 무서워하는 서해정은 당연히 방에 숨어 있을 것이라고 승우는 생각했다.
근데 제 예상과 달리, 해정은 거실에 있었다. 마른 등을 내보인 채로 소파에 앉아 있었다. 승우는 짐짓 발소리를 내며 다가갔으나 아이는 미동조차 않았다. 귀에 이어폰이 꽂혀 있었고, 어딘가에 정신이 팔려 있는 것 같았다. 승우는 해정의 바로 뒤에 섰다.
서해정이 상체를 푹 말고서 꼭 쥐고 있는 건, 제 태블릿이었다.
“이, 씨발……!”
필요가 없어서 서랍에 처박아 두었지만 일단은 자신의 태블릿이었다. 제 것인데, 서해정이 어떻게 가지고 있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더 기분이 나빴다. 기분이 나쁜 정도가 아니라, 꼭 제 영역을 침범당한 듯 찝찝했다. 불쾌하다.
이 새끼는 항상 그랬다. 태어날 때부터, 내 자리를, 내 걸 다 빼앗은 새끼. 그래 놓고 태연한 새끼. 재수 없는 새끼, 엿 같은, 새끼.
성난 손이 그대로 해정의 어깨를 쥐어 몸을 돌렸다. 종잇장 같은 몸이 맥없이 휙 돌았다. 귀에 꽂힌 이어폰 한쪽이 곡선을 그리며 빠졌다. 분노에 휩싸인 주먹이 꾹 손가락을 만 채로 명치를 가격했다.
“윽!”
“씨발, 네가 뭔데!”
“으윽, 읏!”
주먹질은 이성을 잃고 날뛰었다. 거세게 말아 쥔 손가락이 얼얼했다. 승우가 경련하는 옆구리를 세게 찼다. 소파에 앉아 있던 해정의 몸이 바닥으로 나뒹굴었다. 맞지 않으려고 몸을 웅크린다. 그게 꼭, 꿈틀거리는 지네 같았다.
죽여도 죽여도 꿈틀거리며 살아나는 지네. 그러고선 내 방이 제 집이라는 듯 뻔뻔하게 바닥을 기어 다니는 지네. 아니. 지네는 몸을 절단 내어서라도 죽일 수 있어. 근데 서해정은 안 되잖아. 죽었으면 좋겠는데. 죽이고 싶은데. 그래. 차라리 죽이고 싶어. 이 새끼가 죽어야만 다 행복해. 이 새끼가 죽어야만 다 사라져.
내 열등감. 피해 의식. 불안감. 소외감. 외로움. 외로움.
“윽, 헉!”
외로움. 외로움. 외로움.
내 자리를 빼앗고, 너는.
“큭……!”
외로움. 외로움. 소외감. 주변인.
외로움.
“우윽, 으!”
다 죽이면 나아질 거야. 다 행복해질 거라고. 다 되찾을 수 있어. 다 다시 내 거야. 따뜻함도. 시선도. 대화도. 엄마. 아빠. 나의 자리. 내 자리. 핏줄. 중심. 나. 내 거야. 내 거였어.
그러니까, 넌 필요 없어. 넌 껍데기야. 다 내 걸 빼앗아 간 새끼일 뿐이야, 너는. 그냥 뒤져. 너만 없으면 난 다시 다 가질 수 있어. 뒤져. 죽어 버리라고. 죽어. 죽어. 죽어. 죽어. 죽어. 죽어. 죽어. 죽어. 죽어. 죽어. 죽어. 죽어. 죽어. 죽어. 죽어. “죽어.” 죽어.
“…….”
“……흐으…….”
“…….”
어?
나 방금……?
* * *
약한 척 불쌍한 척 하는 건 누구나 할 수 있어 형은 누구한테나 이럴 수 있어 누구든 약하게만 굴면 형을 옭아맬 수 있다고 형은 나한테 약한 게 아니니까 형은 그냥 트라우마가 있는 거니까 그러니까 이 정도로는 안 돼 항상 나는 형한테 괴물이 보인다고만 했어 그게 형은 우스웠던 거야 그러니까 어딜 간다는 거지 내 옆에만 있지 않겠지 그럴 필요가 없는 거야 난 죽을 것 같은 기분을 느끼는 것뿐이지 진짜 죽을 위협을 느끼는 건 아니잖아 진짜 죽을 것 같은 위협이 있어야 형도 놀랄 거야 내가 걱정되어서 나만 볼 거야 어디 갈 생각도 못하고 나한테 모든 걸 쏟겠지 그래 지금 형은 그냥 내가 웃긴 거야 어쭙잖게 머릿속에만 있는 괴물이 무섭다고 벌벌 떠니까 얼마나 병신 같았겠어 진짜도 아닌데 맞아 괴물에 대한 건 과거일 뿐이잖아 지금은 학대당하지도 않는데 그냥 기억일 뿐인데 과거인데 현재가 아닌데 과거 회상 환상 발작 그런 거 다 그냥 머릿속에만 있는 거잖아 가짜잖아 그러니까 형이 우습게 보는 거야 우습게 보는 거야 우습게 보는 거야 가짜 괴물. 얼마나 웃겨?
응? 진짜도 아니고.
빨리 당장 날 해칠 만한 거 내가 뒈질 위기에 놓이는 거 형이 놀랄 정도로 충격받을 정도로 그래 이게 우스운 일이 아니라는 걸 깨닫게 될 정도로 자극적인 게 필요해 만들어야 돼
피? 살인? 상처? 내장 파열? 교통사고? 스토킹? 다리 한쪽? 퍽치기? 병원? 뇌진탕? 자살? 정신병? 자해? 우울증? 비명? 혐오? 칼? 실명? 투신? 분열? 귀? 악몽? 협박? 신경 안정제? 폐소 공포증? 목줄? 새끼손가락? 손톱? 칼부림? 학대? 범죄? 멍? 청산가리? 목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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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정아.」
……아니야. 알잖아.
형이 가장 신경 쓰는 거.
「그만 생각해도 돼.」
형의 약점.
맞아.
「형이 있잖아. 형이 있으면 괴물 같은 거, 없어지잖아. 맞지?」
형이 그랬어.
따뜻한 눈빛. 온기가 스민 팔. 자그마하지만 넓은 품 안. 입김. 속눈썹. 속삭임. 김현수.
「네가 괴물을 보면, 형이 지켜 줄게.」
「형이 안아 줄게. 키스도 해 줄게. 옆에 있어 줄게. 해정아, 하고 불러 줄게.」
김현수. 김현수의 살. 하얗고 부드럽고 맛있게 생긴 그 살갗. 뺨. 허벅지. 입술. 점막. 혀. 안쪽. 깊은 곳.
「옷 벗어 줄게. 다리도 벌려 주고, 좆도 빨아 줄게. 원하면 목줄도 매고 있을게. 내가 의심 가면 목을 졸라도 좋아. 내 몸을 핥느라 밤을 새도 아무 말 안 할게. 하루 종일 네 걸 꽂고 있을게. 너만을 위해 존재하는 사람처럼 살게. 그러니까……. 네가」
내가?
「괴물만 보면.」
아.
「다, 해 줄게.」
진짜 괴물.
* * *
이명이 들렸다. 흡. 작게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이명 새로 들리고, 눈이 뜨였다. 승우는 꼭 숨을 참았던 사람처럼 작게 헐떡이며 천장을 응시했다. 마른 가슴팍이 약하게 들썩거렸다.
꿈을 꿨다. 아주 오래전에 있었던 일이 꿈에서 나온 적은 없었다. 처음이었다. ‘이거 때문인가.’ 승우는 생각하며 제 목을 매만졌다. 성대는 괜찮은 것 같은데, 살갗이 아직도 욱신거렸다. 제 목을 졸랐던 서해정의 얼굴이 찰나에 눈앞을 스친다. 승우가 눈을 질끈 감고 침을 삼켰다. 따끔한 감각이 목 뒤로 넘어갔다.
“…….”
주변이 조용했다. 다시 눈을 떴다. 검은자가 시야를 훑었다. 방 안이 캄캄했다.
목을 졸린 후, 한참을 아파트 앞을 서성이다가 집으로 돌아오니 서해정의 방문은 늘 그렇듯 닫혀 있었다. 저는 한 시까지 부모를 기다렸다. 일 때문에 귀가하지 못할 것 같다는 연락은 한 시 오 분에 왔고, 연락을 받은 후 곧바로 잠자리에 들었다. 세 시까지 잠을 못 이루다가 겨우 잠들었었는데, 아직도 방이 어두운 걸 보니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은 듯했다.
거기까지 생각이 닿으니 몸이 피로로 욱신거렸다. 문득 켜 둔 온열 매트가 덥게 느껴졌다. 가슴팍 위에 물에 젖은 두꺼운 수건이 얹혀 있는 것처럼 답답했다. 결국 승우는 이불을 걷어 내며 몸을 일으켰다. 곧 바닥 위에 맨발이 닿았다.
‘물이라도 마셔야겠다.’ 방문 앞까지 다가간 승우가 문고리를 잡았다. 차가운 금속의 감촉이 손안에 번졌다. 별안간 섬뜩한 느낌에 인상이 구겨진다.
문이 열렸다. 달빛 탓에 푸르스름한 거실의 공기가 아귀를 벌리며 시야에 들어찼다. 승우는 짐짓 발걸음 소리를 죽이며 방 밖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부엌은 승우의 방 앞이었다. 기어이 푸르스름한 공간이 끝까지 입을 벌렸다. 승우는 차가운 문고리를 잡은 그대로 문 앞에 섰다. 시야에 사람의 형체가 걸친 탓이었다.
식탁 앞에 누군가가 앉아 있었다. 푸른 공기에 잠식되어 얼어 버린 것 같은 얼굴은 서해정이었다.
왜 여기에 앉아 있는 거지.
승우가 물음을 다 띄우기도 전에 넋이 사라진 눈알이 파충류처럼 소리 없이 스르륵 굴러갔다. 눈이 마주쳤다. 동시에 승우의 손가락이 움칠거렸다. 승우가 반사적으로 눈을 피하며 해정의 앞에 자리한 식탁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의 눈은 안정을 찾지 못하고 해정과 눈을 마주칠 때보다 더 크게 뜨였다.
“…….”
식탁 위에는 식칼이 놓여 있었다. 인지하자 급기야 코와 입이 틀어 막힌 것처럼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날 죽이려고?
승우의 머릿속이 원초적인 공포로 뒤섞였다. 그 위로 빨간색 핏덩이가 투두둑 떨어졌다.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서해정은 정상이 아니다. 알고 있다. 알고는 있었는데…….
승우는 억지로 침을 삼켰다. 잔잔하게 귀를 울렸던 이명이 뚝 멎었다. 꿈 탓에 몽롱했던 정신이 찬물을 끼얹은 듯 번쩍 뜨였다. 몇 시간 전 제 목을 부러뜨릴 것처럼 쥐었던 힘의 잔상이 느껴진다.
어떻게 해야 되지. 어떻게 해야 되지. 어떻게…….
드르륵.
별안간 식탁 의자가 바닥을 긁는 소리가 났다. 승우가 눈에 띄게 어깨를 떨며 눈을 들었다. 해정이 느리게 몸을 일으키며 일어났다. 꼭 다시 정신을 되찾은 사람처럼 금세 눈에 맑은 빛을 띤다.
“아, 그래.”
작게 읊조리는 목소리가 밝았다.
“…….”
“형이 도와주기로 했었지?”
식탁을 더듬거리며 칼을 집는 손이 광기 어렸다. 나지막하게 웃는다. 그 웃는 얼굴에, 차가운 금속의 느낌이 손바닥이 아닌 팔뚝 전체를 지배했다. 승우가 주춤 뒤로 물러섰다.
“……무슨 소리야. 너, 지금, 뭐 하는 거야.”
경계심이 가득한 목소리가 부들부들 떨렸다. 칼을 쥔 해정이 식탁을 돌아 승우에게로 다가갔다. 발걸음은 망설임이 없었다.
“서해정!”
경고하고자 외친 것이었지만, 공포에 질려 비명을 지르는 거나 다름이 없었다. 관절이 딱딱하게 굳은 것처럼 움직여지질 않았다. 승우가 한 번 숨을 크게 들이마시는 사이 해정이 승우 앞에 섰다. 번뜩이는 칼날은 여전히 바닥을 향해 있었다. “후우…….” 승우가 숨을 길게 내리쉬었다. 숨결이 바람에 흔들리듯 파들거렸다.
“내가 스스로 찌르려고 했는데, 한번 쑤시면 제어가 안 될 것 같더라고. 욕심부리다 내장 다 후벼 놓을 것 같아서…….”
“…….”
흐르는 목소리는 날씨를 얘기하는 것같이 가벼웠다. 말끝을 흐린 해정이 마른 웃음을 내뱉었다. 승우는 눈을 깜빡이지 않고 해정을 빤히 바라보았다. 눈을 깜빡이는 사이 해정이 제 배를 찌를 것 같다는 착각과 불안이 저를 겨눈 탓이다. 그렇다고 도망치듯 뒤를 돌면 등을 찔릴 것만 같았다. 그 공포에 휩싸여 승우는 해정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으나, 되물을 필요는 느끼지 못하였다.
승우의 대답을 기다리는 것인지 눈을 깜빡이며 가만히 그를 내려 보던 해정이 이내 불쑥 칼을 내밀었다. 별안간 움직이는 손에 승우가 반사적으로 배에 힘을 주었다. 흡. 작은 소리가 입 안에 울렸다.
“고민하고 있었어. 그래. 마침 잘됐다.”
“…….”
제게로 향한 건 칼날이 아니라, 손잡이였다. 받으라는 듯 날을 집은 창백한 손이 칼을 한 번 흔든다. 승우는 재빨리 칼을 잡았다. 동시에 몸을 꽉 쥐고 있던 불안이 조금 힘을 풀었다.
“빨리 해.”
“……뭘, 하라는 거야?”
“내 배 찔러.”
“뭐?”
나른하게 풀린 얼굴로 종용하던 해정이 승우의 되물음이 짜증 난다는 듯 얼굴을 굳혔다.
“내 배, 찌르라고. 네가.”
가벼운 표정이 순식간에 묵직한 철근을 매달았다. 험악하게 굳은 얼굴이었다. 목소리는 협박하듯 발음을 딱딱 끊어 뱉었다. 승우가 눈을 어설프게 깜빡였다. 내 배가 아니라? 네 배를……?
칼을 쥔 채 당황하며 머뭇거리는 승우가 답답한지 급기야 해정이 승우의 손 위에 제 손을 덮어 제게로 끌어당겼다. 삽시간에 날카로운 칼날이 해정의 배 바로 앞까지 닿았다. 승우가 짧게 소리를 지르며 손에 힘을 주었다. 배를 파고들려던 날이 뚝 전진하던 걸 멈추었다.
제 배 부근을 보고 있던 해정이 고개를 천천히 들었다.
“왜 멈춰?”
“뭐, 뭐 하는……!”
다시 한 번 손이 당겨진다. 승우가 필사적으로 엉덩이를 뒤로 빼고 칼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해정의 손 위로 승우의 반대편 손이 덮였다. 과하게 힘에 받친 칼이 위태로이 떨렸다.
“찌르라고. 귓구멍 처막혔어? 안 들려? 칼로 씨발, 내 배 쑤시라고.”
“너, 무슨 생각, 이야, 이 미친, 새끼, 야……!”
승우는 필사적으로 손에 힘을 주었다. 칼이 배 위를 짓눌렀지만 이 속도로는 어림없었다. 자해와 다를 바가 없다. “씨발!” 해정이 욕설을 내뱉으며 거칠게 칼을 쥔 손을 빼내었다. 크게 떨리던 마른 몸이 불현듯 뒤로 넘어갔다. 승우가 엉덩이를 찧으며 넘어졌다.
챙그랑. 칼이 대리석 바닥 위로 떨어졌다. 해정이 떨어진 칼을 주워 주저앉은 승우의 앞으로 다가갔다. 승우는 팔로 겨우 상체를 지탱한 채 사시나무 떨듯 떨고 있었다. 제 앞의 미친놈도 공포였고, 칼도 공포였으며, 이해할 수 없는 상황 자체까지 공포였다.
달빛은 점점 더 파랗게 질렸다. 흰 얼굴은 그 빛을 고스란히 받고 있었다. 승우의 앞에 선 해정이 허리를 천천히 숙였다. 얼굴을 들여다보는 눈이 번들거렸다.
“내가 아까 말했잖아, 형.”
“미친, 미친 새끼, 이, 미친…….”
“나는 피해자고, 너는 가해자야.”
“너, 씹……. 나를 뭐, 뭐로 만들려고…….”
승우의 물음에 해정이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느긋한 목소리로 “어?” 하다가 이내 웃음을 터뜨렸다. 약하게 쥔 칼이 덜렁덜렁 손 아래에서 흔들렸다.
웃느라 멀어졌던 얼굴이 웃음기를 거두고 다시 다가왔다. 눈의 광기는 여전했다.
“나는 네가 뭐가 되든 좆도 관심 없는데?”
“…….”
가벼운 목소리와 함께 불현듯 칼이 승우의 마른 뺨 옆으로 바싹 다가왔다. 조금 전처럼 뭉툭한 손잡이가 아니었다. 칼끝이었다. 인지한 순간 목 뒤가 빳빳하게 굳었다. 목젖이 요동친다. 승우는 오랜 시간 감지 않아 뻘겋게 물든 눈을 부릅 홉떴다. 슥삭슥삭, 이성의 끈이 톱밥을 떨어뜨리며 빠르게 갈리고 있다.
그런 승우를 구경하듯 칼날이 웃으며 빙글빙글 움직였다. 칼을 쥔 해정 또한 칼날처럼 헤실헤실 웃고 있었다.
“네가 여기서 뺨이 후벼지든, 아니면 몸이 난도질되어 죽든 나는 관심 없다고.”
“…….”
“관심은 없는데……. 네가 내 말을 안 들으면, 그렇게 할 수도 있겠지?”
별안간 칼날이 움직임을 멈추었다. 해정도 마찬가지로 얼굴을 싸늘하게 굳혔다. 승우가 눈을 질끈 감았다. 갉아 먹힌 이성의 끈이 기어이 너덜너덜해졌다. 끊어질 것처럼 대롱거린다.
“승우 형.”
“…….”
숨은 어떻게 쉬는 거였더라. 열 시간을 쉼 없이 뛴 것처럼 숨이 가쁘다. 곧 끊어질 거다.
“형이 대가리 안 굴러가는 것 같으니까, 다시 한 번 말해 줄게.”
“…….”
살을 주시하고 있는 칼날이 느껴진다. 아파. 아플 것 같아. 안 돼. 무서워. 나, 나는.
“마지막이야.”
“흐……! 흐으, 흡…….”
나 울고 있는 건가? 아니면 숨을 쉬고 있는 건가? 내 소리는 맞나? 칼이 쑤셔졌나? 아니, 아직 아니야. ……아직은? 그럼? 그럼, 나중엔?
“울지 말고……. 왜 이렇게 병신 같냐, 너.”
“흐으, 흑……. 읍…….”
칼등이 뺨을 쓸어내린다. 여차하면, 서해정은 방향을 틀어 곧바로 내 광대와 턱 사이를 꿰뚫을 수도 있다.
안 돼.
“형. 뒤지기 싫으면 머리에 새겨 놔.”
“흡, 으…….”
“나는 피해자고, 너는 가해자야. 너는 괴물이고, 난 너 때문에 고통받아. 너는 여전히 날 학대해. 그래서 나는 지금도 자살하고 싶어. 오늘은 네가 나한테 칼까지 쑤셨어. 내 배에, 네가 칼을 쑤셨다고.”
“…….”
“알았지?”
빙긋 웃는 얼굴이 뺨에 닿은 칼날보다 더 날카로이 번뜩인다.
응.
이라고 대답해야만 한다고, 이성이 비명을 질렀다.
* * *
나무 냄새가 작은 부엌 안에 가득 찼다. 마른걸레로 식탁 위를 닦은 현수가 그대로 식탁에 앉아 엎드렸다. 아침부터 무거운 걸 나르고 조립하다 보니 팔다리가 축 처졌다. 다음부턴 조립식 사지 말아야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살 때가 되면 꼭 저렴한 조립식을 골라 버리는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돈의 노예…….
자조적으로 생각하면서도 피식피식 웃음이 나왔다. 사실 혼자 사는 자그마한 빌라에 식탁을 들여놓을 필요는 없었다. 그렇다고 저가 인테리어에 욕심이 있는 편도 아니었다. ‘결혼할 때 제대로 된 집에, 제대로 된 인테리어를 해야지.’ 하고 막연히 떠올렸던 미래의 계획이 있었으나, 요즘 들어 그것이 점점 더욱 희미해지고 멀어져서 이번에 식탁을 구입하는 것에 대해 거리낌이 없었다. 아니, 도리어 필요성을 느껴서 구매한 것이었다. 그것이 현수는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우스웠다. 우스움은, 오래간 생각하고 있던 미래의 계획이 쉽게 틀어졌다는 상황보다, 식탁의 필요성을 느낀 원인에 있었다.
그때였다. 식탁 위에 얹고 있던 볼에서 작게 진동이 느껴졌다. 휴대 전화 진동이었다. 현수가 상체를 일으켜 휴대 전화를 확인했다. 발신자는 정호였다.
“응.”
「아이구, 얼굴 비싼 현수 씨. 뭐 하세요?」
잔뜩 비꼬는 투였다. 몇 주 내내 코빼기도 비추지 않는 현수가 영 마음에 들지 않은 모양이었다. 현수가 머쓱한 얼굴로 제 뒷머리를 긁었다.
“나야 뭐…… 집이지. 너는? 회사 아니야?”
「야, 너 진짜 심하다. 또 집이야? 너 몸에 곰팡이 피는 거 아니냐? 아, 나는 외근 가는 중.」
“이 자식, 심심해서 전화했구만? 다른 데 알아보세요. 라디오를 들으시든가.”
운전하는 걸 따분하게 여기는 정호는 종종 멀리 외근을 나갈 적마다 친구들에게 전화를 걸곤 했다. 그중 가장 많이 전화를 받아 주는 건 시간이 자유롭고 무른 현수였다. 현수가 딱 보아도 알겠다는 듯 코웃음을 치자 정호가 「잠깐만, 잠깐만.」 했다. 휴대 전화가 뺨에서 떨어지다 멈추었다. 현수는 흘긋 벽시계를 확인했다. 얼추 해정이 올 시간이다.
「너 요즘, 무슨 일 있는 건 아니지?」
“응? 무슨 일?”
「너 요즘 진짜 코빼기도 안 보이잖아. 경태마저도 오늘 네 얘기 꺼내면서 이상하다 하더라. 너 혹시 만나는 사람 생겼냐?」
“만나는 사람은 무슨, 갑자기.”
「아니, 그러고 보니 너 그 스토커 새끼는 어떻게 했냐?」
“……왜 갑자기 나한테 이렇게 관심이 많아?”
대수롭지 않은 얘기를 듣는다는 듯 현수가 가벼이 말을 흘렸다. ‘스토커 새끼’라는 다섯 개의 음절이 귀에 박혔지만 내색은 하지 않았다. 정호가 무어라 대답하기 전에, 현수가 다시 말을 꺼냈다.
“관심 좀 꺼 줘. 부담스럽다. 나한테 관심 갖는 걸 보니 외로우신 것 같은데……. 노력해서 여친도 좀 사귀고, 정호야.”
「이 새끼가……. 늘 말하는 거지만 난 안 사귀는 거야. 못 사귀는 게 아니라.」
“아……. 그러세요.”
「됐고! 말 돌리지 말고 말해. 왜 요즘 코빼기도 안 보이냐고, 너.」
“아, 뭐…….”
「뭐.」
“몸이 좀 안 좋아서 그래. 아홉수라 그런가 봐. 여기저기 성치가 않아. 늙었어.”
두 번의 농담에 말 돌리기는 통하지 않는 건지, 정호는 웃지 않았다. 도리어 수상하다는 듯「쓰읍…….」 하며 숨을 얄팍하게 들이켠다. 현수는 멋쩍은 표정을 지으며 제 볼을 긁었다.
「됐어. 더 안 묻는다. 더럽게 신비주의 고수하네. 곰팡이나 잘 닦고 살아라.」
석연찮다는 듯 혀를 쯧, 차던 정호가 그렇게 말을 매듭지었다. 현수가 짐짓 웃는 소리를 내면서 식탁 옆 냉장고 문을 열었다. 그리고 어젯밤에 사 두었던 딸기 팩을 꺼냈다. ‘이거 씻어야 하는데.’ 생각하며 식탁 위에 딸기 팩을 올렸다.
「너 말일에 정동진 가는 건 확실하지? 나흘 뒤다. 예약 다 해 놨어. 그날 잠수 타면 진짜 안 돼.」
“내가 또 언제 잠수를 탔다고…….”
「요즘 너 하는 낌새 보면 그럴 것 같아서 그러지.」
플라스틱 체에 딸기를 담던 손이 뚝 멈췄다. 정호의 말은 가야 한다는 의무감을 제게 내어 주고 있었다. 현수가 눈을 깜빡였다. 가겠다고 결심을 세우긴 했으나, 퍽 애매하게 세운 탓인지 그 결심은 요즘따라 몇 번씩 오락가락하고 있었다. ‘가야만 하나.’라는 편협한 물음을 담은 입장은 오늘 내내 현수의 머리 위에 기름처럼 둥둥 떠 있기까지 하였다. 어제 괴물에 대해 조곤조곤 말을 했던 해정의 눈이 그 까닭이었다.
자신이 있으니 괴물이 없어지지 않느냐고 묻던 제 품에 안기고, ‘네.’ 하고 대답하던 해정이.
예쁜 해정이.
내가 있어야 사는 해정이.
내가 구원해 주는, 해정이.
그런 해정이를 두고 어디를 가야만 할까. 내가. 굳이.
「……현수, 김현수!」
“……아. 아, 응.”
「왜 대답이 없어? 아씨, 너 진짜 잠수 타려고 했냐?」
늘 능글맞던 목소리에 기어이 얕은 섭섭함이 깔렸다. 그걸 걷어 주어야 한다고, 오래된 습관이 현수를 부추겼다. 현수는 떠밀리듯 급히 입을 열었다.
“……아냐. 갈 거야.”
그 뒤로 몇 번의 당부를 듣고서야 통화를 종료할 수 있었다. 쏟아지던 음성이 한순간에 끊기자 귀가 씻어 낸 듯 조용했다.
현수는 휴대 전화를 식탁 위에 올려 두고, 천천히 고개를 들어 다시 벽시계를 확인하였다. 해정이 평소 오던 시간에서 조금 더 지나 있었다. ‘오늘은 좀 늦네.’ 생각하며 싱크대 앞에 섰다.
딸기를 씻은 후, 접시에 담고 그 위에 해정의 취향대로 설탕을 솔솔 뿌릴 때까지도 머리가 복잡했다. 현수가 약하게 한숨을 쉬었다. 섭섭한 정호의 목소리에 당황했지만 간다고 말을 했고, 종래엔 섭섭함을 말끔히 지운 목소리를 들으며 전화를 끊었으면 된 것 같은데, 이상하게도 마음 어딘가가 무겁다. 왜 이리 무거운지 알 것도 같은데 또 확실히 잡히지가 않아 답답했다.
딸기를 담은 접시가 식탁 테이블 중간에 놓였다. 현수가 다시 식탁에 볼을 대고 엎드렸다. 편백 나무 향기와 설탕과 과일의 달콤한 냄새가 같이 풍겼다.
아, 모르겠다.
현수는 결국 눈을 질끈 감으며 제 무거운 마음을 우선순위에서 치워 버렸다. 그리고 당장의 상황에 시선을 돌렸다. 그게 편하고, 또 마주하기도 즐거웠다.
당장의 상황은, 해정이 오는 것이었다. 현수는 새카만 시야 위에 딸기를 먹는 얼굴을 그렸다. 그 가지런하고 반짝이는 얼굴은 딸기를 오물오물 씹으면서도 얌전한 말투로 아무 말이든 할 것이었다. 거기까지 상상하니, 환청처럼 해정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딸기를 먹으며 이야기하던 해정이 별안간 의자를 끌며 다가온다. 얼굴이 가까워지니, 체리 향기가 풍겼다.
그와 동시에 현수가 눈을 떴다. ‘왜 이렇게 늦지.’ 벌떡 상체를 일으키고 벽시계를 본다. 해정이 평소 오던 시간에서 조금 많이 지나 있었다.
“…….”
현수는 다시 엎드렸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 삼십 분 후, 그는 다시 일어나 벽시계를 보았다. 해정이 평소 오던 시간에서 한 시간이 지나 있었다.
다시 엎드렸다가, 일어났다. 눈이 벽시계를 향했다. 그렇게 두 시간이 지났고, 세 시간, 네 시간, 다섯 시간이 지났다.
다섯 시간이 지나고 멍하니 앉아 있던 현수가 느리게 자리에서 일어날 때까지, 해정은 오지 않았다.
* * *
강한 빛이 눈꺼풀을 직선으로 내리찍었던 것 같다. 포악한 세기였으나, 눈이 감겨 있어 시리지는 않았다. 또 어수선한 손길들이 몸을 헤집었던 것 같기도 했다. 그중 가장 섬세한 손은 옆구리 피부를 오랜 시간 갉작거렸는데, 아프지도, 간지럽지도 않았다.
확실하게 느낀 건 하나였다. 몸이 뜨거웠다. 그 탓인지 불더미에 갇히는 꿈이나, 뜨거운 흙구덩이에 몸이 잠기는 꿈을 꾸다가 일어나기를 반복했다. 잠에서 깨면 온몸이 땀에 젖어 있었다. 꿈 탓이 아니라 몸에서 나는 열 탓이었다. 깰 때는 옆에 누군가가 있을 때도 있었고, 없을 때도 있었다. 그 누군가는 간호사일 때도, 부모일 때도 있었고, 어쩔 때는 최승우일 때도 있었다. 누군가가 없을 때는 모두 잠든 아주 조용한 새벽이었다.
괴물은 그때를 노려 나타났다.
안 와. 안 올 거야.
괴물은 발광했다. 해정이 누워 있는 침대 위를 이리저리 뛰어다니면서 안 온다는 말만을 반복했다. 발은 가끔씩 해정의 명치나 심장 쪽을 지르밟기도 했다. 그때마다 숨이 쉬어지지 않아서, 해정은 기침을 했다. 콜록. 기침이 튀어나오면 괴물은 깔깔 웃으면서 납작 엎드려 해정과 얼굴을 가까이 했다. 웃고 있는데, 잔뜩 화가 나 있었다.
김현수는, 안 와.
말소리 틈으로 부득부득 이가 갈리는 소리가 났다. 이 목소리는 누구지. 스치듯 고민하는 사이, 괴물은 다시 소리 내어 웃었다. 그리고 사라졌다.
해정이 휴대 전화를 든 건 괴물이 두 번째로 오고 간 후였다. 타이밍을 기다렸다기보다는, 그제야 몸을 움직일 정신이 났다. 해정은 잔열에 지끈거리는 머리를 작게 흔들며 흐릿한 초점을 맞추었다.
엄지로 휴대 전화의 홈 버튼을 꾹 눌렀다. 액정이 밝게 빛났다. 날짜가 꽤 지났을 것이라고 예상했는데, 아니었다. 29일. 아직 31일이 아니라는 게 다행이었다. 안도감에 작게 웃는데 옆구리 쪽에서 싸하게 통증이 느껴졌다. 굳이 손을 더듬어 수술 자국을 확인하지는 않았다. 확인할 정도의 관심은 없었다.
김현수에게 여러 개의 문자와 두 개의 부재중 전화가 와 있었다. 남겨진 문자들은 얼마나 다정하고 따뜻한지, 활자만으로도 머리를 쓰다듬는 그 손길이 느껴지는 듯했다. 문자를 읽던 해정이 참지 못하고 조금 전보다 더 크게 웃었다. 문자를 입력하는 손가락의 움직임이 퍽 경쾌했다.
툭.
잠시 후, 휴대 전화가 이불 위로 떨어졌다. 아직 완전히 내려가지 않은 열이 몸을 노곤하게 만들었다. 해정이 베개 위로 볼을 폭 묻었다. 기대감에 젖은 얼굴이 가벼이 눈을 감았다. 수마가 의식을 훔쳐 가는 건 순간이었다.
* * *
[seo] 재밌어요.
└[kimsoo] 매일 좋은 댓글 남겨줘서 고마워요! :D
참 별난 감정이었다.
열두 살의 서해정은 그 감정의 이름을 알지 못했다. 그래서 킴수의 답글이 제게 남긴 감정을 스스로 ‘별난 것’이라고 칭했다.
처음 느껴 보는 것이었다. 그건 감정이라기보다는, 마치 신체 반응 같기도 했다. 타는 것같이 목이 말랐고, 무언가를 쥐고 싶어서 손이 간지러웠다.
어떻게 하고 싶어서 견딜 수가 없는 것. 욕구. 그래, 그것은 무언가에 대한 욕구였다.
제 짧은 인생에서 겪었던 욕구는 오로지 생존을 위한 것뿐이었다. 물을 마시거나, 배를 채우거나, 잠을 자거나 하는 등의 아주 원초적인 욕구들. 근데 이건 아니었다. 그래서 더 신경을 건드리는 것 같기도 했다.
대체, 내가 뭘 원하는 거지. 해정은 쿵쿵 뛰는 가슴을 쥐면서 며칠 밤을 고민했다.
더 가까이, 더 많이, 내게 말을 해 줬으면 좋겠다.
다행히도 고민은 성과가 있었다. 그건 욕구가 아닌 욕심이라는 것을 그때의 해정은 알지 못했으나, 원하는 것만은 정확히 알아챌 수 있었다.
14세 미만은 그의 생방송에 들어갈 수가 없었다. 시청자들이 채팅을 통해 거친 언어를 쓰는 경우가 많아서, 그가 임의로 그리 정한 것이었다.
그러니까, 오로지 그것 때문이었다. 최승우의 서랍을 뒤진 건.
「아고. 또 죽었네……. 은근히 어렵네요, 이거.」
태블릿을 훔쳐 방송 어플에 들어간 뒤, 킴수의 채널을 찾아 방송에 들어가는 것까지는 순탄했다. 방송을 켜자마자 킴수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도 좋았다. 해정은 이어폰을 귀 안으로 깊이 쑤셔 넣으면서 묘한 안정감을 느꼈다. 실시간의 그다. 그런 생각을 하니 돌연 기대감으로 머리가 부풀기 시작하였다. 동영상 사이트에서 그의 답글을 봤을 때처럼 심장이 뛴다.
그가 내게 말을 했으면 좋겠다. 내 말에 답을 해 주었으면 좋겠다. ……관심을.
관심을.
침이 꼴깍 넘어갔다. 해정은 흥분으로 파르르 떨리는 손가락을 부여잡고 토독토독 액정을 두드렸다.
[tmddn123] 안녕하세요
입력 버튼을 누르자 채팅창에 제가 쓴 글자가 박혀 올라갔다. 해정은 눈을 깜빡이며 숨을 죽였다.
「다시 시도할게요. 네? 음……. 공략법은 아직 안 돼요. 제 힘으로 한 번 더 해 보고…….」
그리고 그는 말을 했다. 허나 그건 제 말에 하는 대답이 아니었다.
깊게 넣은 이어폰 덕에 방송 속 목소리가 짱짱하게 귀를 채우고 있는데, 그 사이로 구멍이 하나 뚫린 것 같았다. 해정이 쓴 글은 덧없는 움직임으로 다른 시청자들에 의해 쓸려 올라갔다.
“…….”
이윽고 빵빵했던 풍선에 조금씩 공기가 푸스스 빠지기 시작한다. 잠시 멍하니 액정을 바라보고 있던 해정이 손가락 관절에 힘을 주고, 한 번 더 액정을 두드렸다. 전보다는 조금 느린 동작이었다.
[tmddn123] 안ㄴ녕하세요
해정의 글이 채팅창 위로 올라온 뒤 곧바로 게임이 시작되었다.
화면 속 캐릭터가 우스꽝스러운 모양으로 도랑에 빠졌고, 나뒹굴며 죽었다. 게임 오버. 크고 빨간 글자가 화면을 가득 채웠다. 채팅창이 아까보다 빠르게 올랐다.
「잠깐만. 아니, 이게 뭐야.」
목소리도 상황이 어이없는지 말을 더듬다가 결국 청량한 음색으로 웃어 버렸다. 해정은 웃지 않았다. 다만 빤히 액정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가 내게 답하지 않는다.
“…….”
상상과의 괴리.
이상한 기분이었다. 녹화된 동영상을 보는 것, 생방송을 보는 것. 시점의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더 가깝게 느껴지지 않았다. 도리어 더 멀어진 기분이었다. 차라리 지금 채팅창에 미친 듯이 ‘ㅋㅋㅋㅋ’를 써 붙이는 시청자가 그에게 가까이 있는 것 같았다.
“…….”
나보다? 나보다 더 가까이?
「여러분. 잘할 수 있어요. 저 이제 진짜 감 찾았어요. 정말로. 믿어 주세요.」
당황한 목소리가 말했다. 더듬거리며 실패 요인을 추리하기 시작한다. 말의 화살표는 여전히 자신을 향하지 않았다.
게임 소리. 키보드 소리. 배경음. 모든 것이 빼곡하게 귀를 메우고 있었다. 그런데도, 해정은 적막에 갇힌 것 같았다.
어째서?
「해정아.」
별안간, 눈앞이 까맣게 물들었다. 목소리는 해정의 코앞으로 다가왔다. 해정이 반사적으로 숨을 멈췄다. 목소리는 이어 말했다.
「해정아. 형 여기 있어.」
눈을 감았다 떠도 어둠은 마찬가지였다. 해정이 허공을 향해 손을 뻗었다. 돌연 손가락 끝에서부터 열이 느껴졌다. 불이다. 불빛은 없었지만, 그럴 것이라고 해정은 확신했다. 그 정도로 뜨거웠다.
불은 손가락 끝을 태웠다. 그리고 빠르게 손목, 팔, 어깨를 타고 옮겨 갔다. 뜨거워. 해정이 약하게 신음했다. 몸이 타는 듯한 고통에 기어이 눈살을 찌푸렸다. 눈을 꾹 감았다. 그리고 다시 눈꺼풀을 들어 올렸을 때였다.
“……하.”
어둠 대신 병실이 보였다. 그리고 제 옆에는 누군가가 앉아 있었다. 해정이 눈을 돌려 사람의 얼굴을 확인했다. 병실은 열을 잠재울 것처럼 차가운 빛을 머금고 있었고, 사람의 얼굴은 그 빛에 그대로 젖어 있었다. 사람의 얼굴은 현수였다.
해정이 뒷머리를 들썩이자 현수가 행동을 저지하듯 어깨에 손을 짚었다.
“일어나지 마. 힘들어.”
나지막한 목소리는 생생했다. 멍한 눈이 현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세 번째로 맞이한 새벽에 찾아온 건 괴물이 아닌 진짜 김현수였다. 몽롱한 의식 사이에서도 그 사실만은 선명하다. 해정이 눈을 가늘게 뜨고 소리 없이 웃었다.
“……꿈을 꿨어요.”
잠에 잠긴 목소리가 새벽 공기 위에 번졌다. 말끝에 사소한 기침이 터졌다. 기침 소리 탓인지, 현수의 눈이 조금 더 심각하게 굳었다. 가지런한 손이 다가와 해정의 가슴팍 위에 얹혔다. 토닥이는 손길이 간지러울 정도로 섬세했다.
“무슨 꿈?”
“옛날 꿈.”
잠을 재우는 것처럼 토닥이던 손이 올라 앞머리를 넘겨 정돈했다. 흰 이마 위에 땀이 맺혀 있었다. 티슈를 뽑아 이마를 닦아 주는 손길이 조심스러웠다. 그동안, 현수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고 있던 해정이 이내 다시 입을 열었다.
“형 방송을 보고 있는데도, 외로웠던 날이 있었거든요.”
“…….”
“어릴 때.”
이마에 향해 있던 시선이 천천히 내려갔다. 곧이어 눈이 마주하자 해정이 입꼬리를 끌어 웃었다. 입술이 건조한 건지, 따가운 감각이 느껴졌다.
손이 거두어졌다. 휴지를 휴지통에 버린 손이 다시 다가와 해정의 눈 위에 덮였다.
“좀 더 자. 깨워서 미안. 악몽 꾸는 것 같아서 그랬어.”
“형이 저 계속 불렀어요?”
손목에 손가락이 감겼다. 제 눈을 덮던 손을 살짝 떼어 낸 해정이 눈을 마주치며 현수에게 물었다. 자그마하고 다정한 목소리가 “응.” 했다. 평소와 같으면서도 다른 목소리다. 조금 더 가라앉아 있었고, 약했다. 선명했는데, 끝은 무언가를 참는 듯 파르르 떨리는 것도 같았다.
현수가 제 손을 거두었다. 손목에 감겨 있던 손가락도 자연스레 떨어졌다. 해정은 제 손을 다시 이불 속으로 넣으며 관찰하듯 현수를 바라보았다.
눈도 마찬가지다. 다정한 눈에, 평소에는 보지 못한 감정이 담겨 있었다. 날 걱정해 주는 걸까. 속상해하는 걸까. 슬픈 걸까. 많이 슬퍼하고 있을까. 내가 이런 꼴을 당해서 많이 슬플까. 머릿속엔 내 생각밖에 없는 걸까. 해정은 바삐 추측했다. 그것만으로도 심장이 쿵쿵 뛰어서 견디기 힘들 정도였다.
그사이, 이불이 턱 밑까지 끌려 올라갔다. 톡톡, 마무리하듯 이불을 두드린 손이 다시 해정의 볼을 쓰다듬었다.
“자, 해정아. 너 아직 열 있어.”
“형.”
“응.”
“어디 가지 말아요. 나 다시 일어날 때까지.”
묘하게 굳은 입가가 그 말에 부드럽게 풀렸다. 부드러운 눈빛. 부드러운 웃음. 손길. 향기. 심하게 어리광을 부리고 싶어져 해정은 짐짓 “어디 가면 나 힘들 것 같아.” 하고 덧붙였다. 현수는 조금 더 선명하게 웃었다.
“옆에 있을게.”
“계속?”
“응. 얼른 자.”
“입 맞춰 줘요.”
다가오는 움직임은 기다렸다는 듯 자연스러웠다. 현수가 허리를 숙여 해정의 입술에 소리 내어 입을 맞췄다. 곧이어 살짝 떨어진 얼굴은 가까운 거리에서 멈췄다. 눈이 마주했다. 일 초. 이 초. 삼 초. 사 초. 오 초. 공기가 새벽의 정적 사이에서 잠시 걸음을 멈췄다.
“…….”
“조금 더 해도 돼요.”
해정은 그렇게 미끼를 던져 보았다. 현수는 망설임 없이 미끼를 물었다.
마른 목이 더 깊이 아래로 내려갔다. 입술이 부딪혔다. 전보다는 조금 더 진하고 긴 입맞춤이었다.
“……잘 자, 해정아.”
입맞춤의 여운처럼 달콤하게 속삭이는 목소리. 다시 수면 아래로 잠긴 건, 그다음이었다.
* * *
눈 아래 누워 있던 속눈썹이 천천히 일어났다. 깜빡이는 눈이 천장을 가리켰다가, 이내 이동했다.
“일어났어?”
간밤에 보았던 건 꿈이 아니었다는 듯 고개를 숙여 오며 제게 말을 거는 사람은 현수였다. 해정이 입꼬리를 끌어 웃었다. 살짝 고개를 끄덕이니 정갈한 손이 머리를 한 번 쓰다듬었다. 익숙한 손길이었다. 잠에 빠졌던 내내 이 촉감을 느꼈던 것도 같았다. 해정이 떨어지려는 손을 한 손으로 잡아 내 제 볼에 댔다.
“피곤해 보여요.”
“그래? 괜찮은데.”
“……나 자는 동안 여기 앉아 있었어요?”
현수는 대답 대신 엄지로 매끄러운 볼을 매만졌다. 긍정의 뜻이었다. 해정이 손을 더 끌어 미지근한 손바닥에 작게 입을 맞추었다. “피곤했겠다.” 속삭이는 목소리가 사분했다.
“진짜 괜찮아. 그나저나 열 많이 내린 것 같네. 왔는데 너 열에 펄펄 끓고 있어서 깜짝 놀랐어.”
“몇 시에 왔는데요?”
손이 빠져나가 앞머리를 푸스스 약하게 털어 낸 뒤 떨어졌다. 떨어져 나가는 손길이 아쉬워서, 해정은 이불 위로 팔을 뻗어 손을 작게 흔들었다. 현수가 픽 웃으며 손을 마주 잡아 주었다. 맞잡은 손이 흰 이불 위로 떨어졌다.
“네 문자 오자마자.”
“새벽에 보냈는데……. 안 자고 있었어요?”
“응.”
“왜요?”
왜 안 자고 있었냐고 묻는 건가. 현수는 해정을 내려 보며 질문을 되새겼다. 해정은 흔들림 없이 현수를 올려 보고 있었다. 유리알 같은 눈이 저를 뚫을 듯 보고 있는 순간에는 거짓말을 하는 게 못내 어려웠다.
“…….”
그렇다고 진실을 꺼내는 것도 참 어려운 일이었다. 아직 저도 받아들이지 못한 것이었다.
기어이 현수가 눈을 피했다. 동시에 잡힌 손을 자연스레 빼내려고 했다. 절반 정도 빠져나가던 손이 다시 붙잡혔다. 마른 손 위에 힘줄이 불거졌다. 현수가 자못 놀란 눈으로 해정을 바라보았다. 해정의 표정은 손아귀의 힘과 달리 평온했다.
“보통 새벽에 병문안 못하잖아요. 지정 시간이 있으니까.”
해정이 작게 입을 열어 말했다. 현수가 의아한 얼굴을 했다. 그렇게 짚어 주니까 이제야 그렇구나, 싶기는 한데…….
“간호사분이…… 계셨는데. 네 이름 말하니까 안내해 주셨어.”
“제가 부탁드렸어요. 여기 나름 특별실인데……. 아무나 들여보내 줄 리가 없잖아요.”
“…….”
“형이 정말로 새벽에 올 거라 생각은 못했지만……. 그래도 뭐, 혹시나 하고.”
나긋한 목소리는 가느다란 거미줄을 긋고 있었다. 내가 안일했던 건가. 현수는 생각했다.
아니. 단순히 안일했던 게 아니었다. 다른 현실적인 문제들을 생각할 정신이 없었다. 해정의 문자를 읽자마자 얼른 그를 보러 가야겠다는 생각에 머리가 어지러웠다. 새벽에 미친 사람처럼 집에서 튀어나와 택시를 탔다. 해정이 어느 정도로 다쳤는지 가늠하느라 다른 생각은 할 수가 없었다. 수술을 한 건가. 흉터가 남았을까. 얼마나 아팠을까. 형은. 해정의 부모는. 여러 가지를 생각하다 보니 엄지손톱이 엉망으로 우그러져 있을 정도였다. 병문안 지정 시간이 언젠지, 어떻게 간호사가 자신을 아무런 의심 없이 병실까지 안내해 주었는지 같은 것들은 떠올릴 틈이 없었다.
해정이 다쳤다는, 그 사실만이 사이렌처럼 윙윙 울려 머릿속을 꽉 메운 탓이다.
“궁금해서요.”
해정은 정말로 궁금해서라기보다는, 제가 아는 답을 현수가 스스로 내뱉기를 바라는 얼굴이었다. 잠잠한 눈에 작은 기대감이 울렁였다. 현수는 발을 움찔 떨었다. 보이지 않았던 거미줄은 마치 흰 밧줄처럼 굵어져 발목을 옭매고 있었다.
“형이 새벽까지 잠을 못 이룬 이유.”
“…….”
흰 손이 스멀스멀 올라 손목을 잡았다. 그대로 끌어당긴다. 끼익. 상체가 기우는 바람에 의자에서 소리가 났다. 촉. 작은 마찰음이 손바닥 가운데 위로 울렸다. 잠시 현수의 손바닥부근을 보고 있던 눈이 올라 다시 시선을 맞추었다.
유리알. 매끄럽게 번들거리는 바람에 유리알인 줄 알았던 그 눈은, 실은 거울이었다.
덫이었을까.
“내가 다쳤다는 문자 하나에, 무작정 병원까지 달려온 이유.”
“…….”
그 눈은 투명하지 않았다. 도리어 제 속내는 감추고, 상대방을 적나라하게 비추고 있었다.
“그 이유들. 나는 너무 궁금한데…….”
“…….”
“알려 줄 수 있어요?”
덫이 맞다. 현수는 그제야 알아챘다. 새벽의 문자는, 아주 작고 또 치밀한 덫이었다.
짧지 않은 시간 동안 침묵이 감돌았다. 해정은 그 기다림도 지루하지 않다는 듯 현수의 손바닥을 뺨에 댄 채로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았다. 그 눈을 가만히 마주하고 있던 현수가 이윽고 입꼬리를 당겨 웃었다. 잡힌 손이 해정의 볼을 살짝 꼬집는다.
“……이 쪼끄만 게.”
침묵을 깨뜨린 건 그 짧은 한마디였다. 살을 꼬집었던 손가락이 풀어지고 손등이 슥, 흰 뺨을 쓸어내렸다. 현수가 짧게 한숨을 쉬었다. 직후 이어지는 말의 소리는 작았으나, 발음은 흐트러짐 없이 또렷했다.
“내가 너 걱정하느라 잠 못 잤으면, 어쩔 건데?”
“…….”
“너 다쳤다는 문자 보자마자 네 걱정 외에는 아무 생각도 안 나서 새벽에 병원 문이 열리든, 닫혔든, 그런 생각도 못하고 정신없이 달려왔다고 하면, 어쩔 거야.”
“…….”
“……넌 나를 어쩌고 싶어서, 나한테 그런 걸 묻는 건데?”
해정이 대답 없이 눈을 깜빡였다. 역으로 질문할 줄은 예상하지 못했던 모양이었다. 잠시 후, 열 때문인지, 현수의 말 때문인지, 불그스름하게 물든 얼굴이 천천히 입을 연 순간이었다.
문 쪽에서 소리가 들렸다. 노크 소리였다.
“……네.”
해정이 짧게 말했다. 곧바로 문이 열렸다. 들어온 건 간호사였다.
* * *
12월 31일. 휴대 전화는 정확히 오늘의 날짜를 알리고 있었다. 지금 시간은 오전 10시였다. 방송을 당분간 쉰다는 공지를 올린 건 10분 전이니, 아직 정호에게 연락이 올 때는 아니었다. 어쩌면 오늘 하루 종일 공지를 안 볼 수도 있었다. 녀석이 딱히 제 팬 카페를 드나드는 것은 아니니까.
쪼로록. 바닥까지 줄어든 아메리카노가 힘겹게 빨대 위로 올랐다. 더 이상 빨아들일 것도 없었으나 현수의 입은 떨어지지 않았다. 이가 잘근, 빨대를 씹었다. 현수가 일인용 소파에 등을 눕듯이 기대며 다리를 꼬았다. 시선은 허공을 향한 채였다.
부모가 병실에 잠깐 들를 거라는 해정의 말에 망설임 없이 자리를 피했다. 해정에게는 어색할까 봐 피하는 거라고 둘러대었지만 사실은 아니었다. 시야에 해정이 없는 곳에서 고민을 해야 더 이성적인 선택을 할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
“하아…….”
그렇다고 결정이 순탄한 건 아니었다. 카페에 혼자 앉아 있기를 20분째였다. 답이 나오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어느 쪽이든 상처를 주는 일이었다. 정호의 실망감이든, 해정의 외로움이든, 결국 하나는 제가 감내해야 할 것이었다. 그게 염려스럽다기보다는 무서웠다. 남에게 좋지 않은 감정을 주는 일은 현수에게 익숙지 않았다.
습관적으로 빨대를 빨아들였지만 들어오는 건 없었다. 현수가 입을 떼고 플라스틱 컵을 바라보았다. 채 녹지 않은 얼음들이 그득그득 들어차 있었다. 현수가 입을 다시며 쭈욱, 허리를 곧추세웠다. 아직까지 목이 말랐다.
정면에 오더 존이 있었다. 현수의 시선이 그쪽으로 멀어졌다. 정확히는 주문을 받고 있는 직원의 머리 위, 메뉴판이었다.
‘아메리카노는 또 마시기 좀 그렇고……. 차 마실까.’ 현수가 그렇게 생각하던 찰나였다. 오더 존 앞에 서서 주문을 하던 남자가 뒤돌았다. 메뉴들을 훑던 현수의 시선이 힐긋 남자를 보았다. 의식적인 행동이 아니었다. 다시 원위치로 돌아갈 의미 없는 가벼운 시선이었는데, 현수의 눈은 떨어지지 못했다.
남자는 시선에 예민한 모양이었다. 곧바로 시선을 느꼈는지 고개를 돌려 현수를 바라보았다. 그 퀭한 눈과 시선을 마주하자 어쩐지 심장이 굴러떨어지는 것만 같았다. 도둑질을 하다 들킨 사람처럼, 현수가 깜짝 놀란 얼굴을 숨기지 못하고 재빨리 시선을 피했다. 현수를 잠시 바라보던 남자도 시선을 옮겼다.
남자를 바라보는 건 비단 현수만이 아니었다. 옆 테이블에 앉아 있던 중년 부부도 남자를 힐긋힐긋 훔쳐보고 있었다. 그 정도로 남자는 바싹 말라 있었고, 피폐해 보였다. 얼굴, 둘러싼 분위기, 표정, 눈. 남자의 몸 전체에 깊은 불행이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 병원 안에 자리한 카페가 아닌 다른 곳에서 보았다면 대체 저 남자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 저도 모르게 머릿속으로 추리했을 것이었다.
‘아니, 그만하자.’ 현수는 스스로를 꾸짖듯 고개를 저었다. 어떤 일이든 남의 불행에 대해 깊이 파고드는 건 무례한 관심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털어 내듯 자리에서 일어난 현수가 오더 존 쪽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그때였다. 휴대 전화가 진동했다. 전화였다.
“여보세요?”
「엄마 아빠 갔어요.」
“아, 벌써?”
양손에 테이크 아웃 잔을 두 개 든 남자가 현수의 옆에 서며 “잠시만요.” 했다. 그 남자였다. 목소리는 표정만큼 매가리가 없었다. 텅 빈 눈이 현수를 바라보았다. 시선을 마주치는 것만으로 시린 바람이 부는 것 같았다. 현수가 카운터 쪽으로 몸을 비켜 주며 고개를 가볍게 숙였다 들어 올렸다. 남자가 현수의 뒤를 지났다.
「제가 빨리 가라 했어요. 어딘데요?」
휴대 전화 너머 보채는 목소리가 귀여웠다. 현수가 소리 없이 웃었다. 주문을 포기하고 걸음을 틀어 출구를 향해 갔다. 카페 안을 빠져나간 남자는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 병원 입구에서 서성이고 있었다. 남자의 마른 뒷모습을 바라보던 현수가 시선을 떼고 해정이 준 출입 카드를 꺼내었다. 그리고 전용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었다.
“알았어. 지금 올라갈게.”
카드를 인식시키고, 버튼을 누를 새도 없이 1층을 향해 내려오던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다. 엘리베이터 안에 정면으로 서 있던 남자와 현수의 눈이 마주했다. 익숙한 얼굴이었다.
“…….”
「빨리 와요. 엘리베이터 탔어요?」
해정의 아빠, 서정원이었다.
연예인이다. 한순간 그런 단순한 생각이 들었다. 연예인을 실제로 본 적이 처음인 탓에 현수는 당황한 얼굴로 눈만 깜빡였다. 어쩐지 몸이 유연하게 움직여지질 않았다. 텔레비전을 보듯 엘리베이터 앞에 우두커니 서 있으니, 그런 상황이 익숙한지 정원이 친절하게 웃었다. “나가겠습니다.” 말하는 목소리가 온화했다. 정원의 옆에는 여자가 있었다. 측면의 거울을 바라보고 있던 여자가 고개를 돌렸다. 얼굴을 보자마자, 현수는 확신했다. 서해정의 엄마다. “죄송합니다.” 현수가 부산스러운 움직임으로 비켜섰다. 두 사람이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엘리베이터 안을 빠져나갔다.
「여보세요?」
“아, 응. 이제 타.”
아빠도 닮긴 닮았는데, 엄마를 더 닮았네.
난생처음 연예인을 본 뒤 남은 감상은 그것뿐이었다.
* * *
밖이 어두웠다. 벌써 열한 시였다. 정호에게 아직 연락이 없는 걸 보니, 저가 팬 카페에 올려놓은 공지를 보지 못한 듯했다. 휴대 전화를 바라보고 있던 현수가 얕게 한숨을 쉬었다. 보통 방송을 종료하는 시간은 열두 시이고, 정호도 그를 안다. 이제 한 시간 내에 결정을 내려야 한다.
결정. 조금 더 나은 결정. ……대체 뭐가 더 나은 건지 도무지 모르겠다.
현수가 휴대 전화를 주머니 안에 쑤셔 넣었다. 입술 사이로 깊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아까, 아침밥 먹기 전에요.”
멈춘 공기를 가르고 불쑥 튀어나온 목소리는 답지 않게 조금 전부터 휴대 전화에 몰두해 있던 해정이었다. 현수가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어 해정을 바라보았다. 언제부터였는지, 해정은 현수를 보고 있었다. 휴대 전화는 허벅지 위에 올려 둔 채였다. 침대 헤드에 등을 기댄 몸은 평소보다 조금 말라 있었다. 그렇다고 얼굴이 많이 상한 건 아니라 다행이었다. 순간, 오전에 보았던 그 해골 같은 남자의 얼굴이 현수의 무의식을 스쳤다.
해정이 꼭 쥐고 있는 휴대 전화의 액정을 슬슬 엄지로 매만지며 말을 이었다.
“형이 물었잖아요. 나를 어쩌고 싶어서 그런 걸 묻냐, 하고.”
“……응.”
그 대화를 아직까지 생각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현수는 멋쩍은 듯 뒷머리를 긁적이며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형을 어쩌고 싶은지는…… 솔직히 말하면 많아요.”
“…….”
“근데 그것과는 별개로, 뭘 바라고 그렇게 물은 건 아니에요.”
“그럼?”
예상외의 말에 현수의 눈이 의아함을 비쳤다. 해정이라면 분명, 바라는 바를 이것저것 늘어놓을 거라고 예상한 탓이었다.
해정이 말을 고르듯 눈을 굴리면서, 제 옆구리 부근을 매만졌다. 묻지는 않았지만 저쪽이 칼에 찔린 부위일 것이라고 현수는 예상했다. 오늘 해정은 하루 종일 저 부분을 매만지곤 했다.
정말 말의 모양을 고르는 것뿐이었는지, 질문에 대한 대답은 쉬이 떨어졌다.
“정말로 궁금해서 그랬어요. 그냥, 이대로 가면 멋대로 기대할 것 같아서요.”
무슨 기대를 말하는 거지. 현수의 생각이 제대로 물꼬를 트기도 전, 해정이 푸스스 웃으며 “나 형 좋아하잖아요.” 했다. 대수롭지 않은 말투였는데, 자명한 사실을 읊는 듯이 말하는 그 태도가 어쩐지 현수의 심장을 들먹였다. 현수는 짐짓 의연한 얼굴을 하고 계속 말해 보라는 듯 고개를 짧게 끄덕였다.
“형이 그렇게 막, 친절하게 굴면 나도 어쩔 수 없이 기대를 한다고요.”
“…….”
“……그래서 물어봤어요. 혹시나 해서.”
해정은 쉽게 말하고 있었으나, 현수에게는 못내 어렵게 들렸다. ‘대체 뭐가 궁금하다는 거지.’ 현수는 의문을 담아 해정을 바라보았다. 옆구리 부근을 만지던 손이 올라 현수를 향했다. 톡. 손가락 끝이 현수의 가슴팍을 가벼이 건드렸다.
“형 마음이요.”
“…….”
“형 마음이 궁금해서요.”
아주 간단한 말 하나가 이리저리 불어오던 잔바람들을 뚝 멎게 만들었다. 현수가 느리게 눈을 감았다가 떴다. 내 마음. 해정의 말을 되새겨 본다.
우습게도,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던 것이었다.
정호. 경태. 우석. 친구들. 의리. 즐거울 것. 실망시키고 싶지 않은 마음. 해정이. 해정이가 슬퍼할 것. 해정이의 외로움. 자신의 죄책감. 현실적인 문제들.
다 생각했다. 다 파고들어 보았다. 친구들. 그리고 서해정. 그 사이에 대해 고민했을 때, 줄곧 고려했던 것들이었다. 그런데도 그것만은, 그러니까 제 마음만은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정호의 섭섭함. 해정의 슬픔. 그리고 아픔. 가장 큰 것들이 선택의 화살표를 흔들었으나 제 마음이라는 것은 그에 비해 콧잔등을 여리게 스치는 아주 약한 바람이었다. 제게만큼은 그랬다.
“그게 중요한 거잖아요.”
“…….”
어쩌면 아주 간단한 문제였다.
“형이 날 좋아하면, 그건 아주 엄청난 거니까.”
가슴을 건드렸던 손가락이 올라 살짝 벌어진 아랫입술을 스쳤다. 제가 한 번도 중요시하지 않았던 그것을, 해정은 아주 중요하고 엄청난 것이라 말한다. 그것 또한 어쩌면 아주 간단한 사실이었다.
해정의 입술이 매끄럽게 올랐다. 아랫입술을 스치던 손가락은 신기루처럼 멀어져 갔다. 현수는 또 한 번 눈을 깜빡였다.
어쩌면 아주 간단한 문제.
어쩌면 아주 간단한 사실.
새벽에, 열에 시달리면서도 제 이름을 애타게 부르던 해정을 보면서 저는 무슨 생각을 했던가. 문득 현수는 회상했다. 해정이 며칠째 연락이 없을 때는 초조했고, 문자 알림이 떴을 땐 울컥, 의미 없는 화가 났으며, 형에게 찔려 다쳤다는 문자를 보았을 때는 세상이 날뛰었다.
그리고 달뜬 얼굴로, 무의식에 허우적거리면서도 저를 찾았던 해정을 바라보았을 때, 그 입술과 그 뺨. 그 찌푸린 눈을 보았을 때 어땠던가, 내 마음은.
내 마음은, 어땠지?
이미 쓰레기통에 버린 지 오래인 모양이었다. 떠올려 봐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해정아.”
“네.”
“오늘 같이 있어 달라고, 해 볼래.”
현수의 느닷없는 부탁이 퍽 기묘하게 느껴질 수 있었는데도, 해정은 괘념치 않은 듯했다. 도톰한 입술이 톡 열렸다.
“같이 있어 주세요.”
“…….”
지금 내 마음은 어떻지.
현수가 가장 기본적이고 직관적인 곳으로 시선을 돌린 순간, 흰 손이 불쑥 다가왔다. 팔을 붙드는 힘이 강했다. 해정은 다를 것 없는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나는요, 형이 없으면 죽을 것 같아요. 그러니까.”
“…….”
“내 옆에 있어 주세요. ……제발요.”
구걸. 제 손길을 필요로 하는 그 절박함. 이것들을 해정에게서 받았을 때, 저는 어떻던가.
돌연 바람이 불었다. 이것 또한, 어쩌면 아주 간단한 마음이다.
기뻤다. 새벽에 저만을 찾던 아픈 해정과 지금 저를 필요로 하는 해정을 보며, 자신은 기뻐하고 있었고, 기뻐하고 있다. 행복하다. 계속 옆에 있고 싶다. 친구들은 자신을 이렇게 필요로 하지 않는다. 아니, 그 어느 누구도. 해정이 아닌 어느 누구도 저에게 이렇게 삶을 구걸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런 네가, 이렇게 불쌍한 네가, 삶의 벼랑 끝에서 나에게만 손을 뻗는 네가, 나는 너무 사랑스러워.
“……기대.”
“…….”
“기대 안 해도 돼.”
더 자세히 말해 보라는 듯, 해정이 현수의 팔을 더 세게 쥐었다.
“기대가 아니라, 정말이야.”
숨소리가 약하게 들려오기 시작했다. 점점 가빠진다. 그에 동화되듯, 현수는 제 빨라지는 심장 박동을 느끼며 침을 꼴깍 삼켰다. 그리고 다시 입을 열었다.
“나, 너 좋아하고 있나 봐. 해정아.”
간단한 문제이고, 간단한 사실이었고, 간단한 마음이었다. 다만, 제가 느끼지 못했을 뿐이었다. 자신의 마음을 이렇게 적나라하게 들여다본 적이 있었던가. 현수는 자문하다가 웃고 말았다. 곧 서른 살이 되는 나이임에도, 이런 적은 한 번도 없었다. 30년 인생 동안 자신의 마음은 아주 가벼운 바람과도 같았으니까.
별안간 잡힌 팔이 당겨졌다. 상체가 기울었고, 곧바로 입술이 맞닿았다. 헤집듯 입 안을 들쑤시는 혀를 피하지 않았다. 현수가 해정의 팔을 쥐며 의자에서 일어나 침대 모서리에 앉았다.
입술이 떨어졌다. 거친 숨결이 느껴졌다. 키스를 오래 하지는 않았으니 숨이 모자란 건 아니었다. 평온했던 눈동자에 어느새 불이 붙어 있었다. 아직 입술을 움직이면 살 끝이 닿을 가까운 거리였다. 현수가 슬쩍 고개를 돌리자, 해정이 턱을 쥐어 저를 보게 했다. 다시 시선이 닿았다.
“…….”
“……계속, 내, 옆에,”
기어이 가슴팍이 들썩거렸다. 흥분한 눈이 번들거렸다. 낮게 들끓는 목소리가 부득부득 말을 이었다.
“있을 거라는, 거지?”
숨을 어찌나 몰아쉬는지 당장에라도 넘어갈 것만 같았다. 현수는 평소 그랬던 것처럼 ‘응.’이라고 예의 다정하게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에, 먼저 키스했다.
“하아……. 으읍…….”
가볍게 입을 맞추는 것으로 시작했던 키스는 가볍게 끝나지 못했다.
해정이 떨어지려는 얼굴을 두 손으로 붙들고 입술을 깊이 맞대어 왔다. 벌건 혀가 약하게 벌어진 틈 사이를 밀고 들어갔다. 상체를 당기는 힘에 현수의 손이 다급히 해정의 양어깨를 쥐고 밀었다.
“여기선……!”
찰나에 떨어졌던 입술이 다시 강하게 부딪쳤다. 급하게 새어 나온 목소리가 금세 먹혀들었다.
‘이러면 안 되는데.’ 이성은 계속 그렇게 말했으나, 현수는 해정을 밀어내던 걸 멈추었다. 해정은 이성이 통하지 않는 사람이었다는 사실이 문득 떠오른 탓이었다. 그걸 아는데 계속 해정을 밀어내는 건 그를 자극하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차라리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게 더 나은 방법일 수도 있었다.
축축한 혀가 짓눌리고, 섞이는 소리가 점점 느려졌다. 현수는 손바닥에 감기는 머리카락을 더 섬세한 손길로 쓰다듬었다. “으음…….” 해정이 음미하듯 약한 소리를 내며 입술을 떼어 냈다. 현수가 꾹 감고 있던 눈에 힘을 풀었다. 가느다랗게 뜬 눈 사이로 해정의 얼굴이 보였다. 살며시 인상을 찌푸린 해정이 뒤늦게 눈을 떴다. 느리게 물러서던 살이 완전히 떨어졌다. 해정의 숨은 여전히 불안정했다.
입술이 다가왔다. 이번엔 현수의 옆 턱이었다. 턱뼈를 꽉 깨문 입술이 멈추지 않고 아래로 내려갔다.
현수의 예상과 달리, 해정은 멈출 생각이 없어 보였다. 받아 주고 머리를 쓰다듬어 주니 무식하게 밀어붙이던 힘이 조금 약해졌으나 그뿐이었다. 살결 위로 뜨겁고 거친 숨이 연신 닿아 왔다.
“해정아. 잠깐만, 여기서는…….”
당황한 목소리가 떠듬떠듬 떨어졌다. 머리를 쓰다듬던 손이 다시금 어깨를 쥐어 왔다. “해정아…….” 한 번 더 부르는 음성에 목을 따라 입술을 옮기며 살을 물고 빨던 해정이 고개를 들어 올렸다.
“아무도 벌컥벌컥 안 들어와요.”
무덤덤한 어조였으나, 자꾸 저지하는 게 못내 짜증이 나는 것인지 말 사이사이 불만이 묻어났다. 현수에게는 그 불만이 들렸다.
“그래도, 여기선 좀 그래. 병원이잖아. 너도 환자고.”
“…….”
“……해정아, 응?”
어깨를 쥐던 손이 부드럽게 내려와 팔을 움켜쥐었다, 풀기를 반복하였다. 현수가 해정에게로 고개를 숙여 오며 얼굴을 옆으로 살짝 기울였다.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해정이 별안간 턱을 밀어 쪽, 짧게 키스했다. 키스 끝에 자그마한 한숨이 묻어났다.
“나 지금 꼴려서 미치겠는데, 여기가 병원인지 어딘지 따질 겨를이 있겠어요?”
불만을 토로하듯 따지고 있었는데 목소리는 조곤조곤했다. 그렇게 말하면서도 끝끝내 입술을 떼어 내는 것이 마냥 기특했다. 현수가 약하게 웃으면서 불퉁하게 솟은 볼을 만져 주었다. 해정이 현수의 목덜미를 쥐더니 손가락으로 슬슬 매만졌다. 목 부근을 뚫을 듯 바라보는 시선이 끈질겼다. 미련이 남는 모양이었다.
현수가 볼에서 손을 떼어 냈다. ‘뭐라고 칭찬을 해 줘야 해정이가 불만을 조금이라도 덜어 낼 것 같은데.’ 잠시간 생각한 뒤 입을 연다.
“우리 안 친했을 때는 엄청 막무가내였는데……. 그래도 이제 하지 말라면 안 하네.”
착해. 간질거리도록 자그마한 칭찬이 따라붙었다. 해정이 제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충동을 참는 것은 익숙해서 그다지 괴롭지는 않았다. 다만 현수에 관한 건 참기가 싫을 뿐이었다. 마음 한편에서는 이상한 반발심이 생기기도 하였다. 그런 뜻이 아닌 줄 알면서도, 저를 거부하는 김현수의 입과 손이 무작정 밉고 얄미웠다. 빈정이 상해서 도리어 보란 듯이 확 저질러 버리고 싶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수가 하지 말라면 하지 말아야 했다. 비틀린 감정이 야생 동물처럼 불쑥불쑥 튀어나와도 참아야 했다. 예전 같으면 몰라도, 이제는 그래야 한다.
이윽고 꾹 닫힌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
“형이 나 좋아한다고 했잖아요.”
목덜미 위로 살살 원을 그리던 손가락에 문득 힘이 들어갔다. 꾹꾹. 규칙적인 간격으로 살을 내리누른다. 해정이 말을 이었다.
“어렵게 얻은 걸, 내 손으로 버려 버리고 싶지는 않아요.”
“…….”
양손이 미끄러지듯 내려가 허리를 안았다. 부드럽게 끌어당기는 힘에 현수가 순순히 제 몸을 맡겼다. 이내 마른 몸을 한 품에 안은 해정이 현수의 어깨 위에 제 코를 묻었다. 천천히 들이마시는 숨이 섬세했다.
“최선을 다해 아양을 떨어도 모자란데.”
“……그런 말 하지 마. 형도 노력하는 거지. 나이로 치면 형이 도둑놈인데 왜 그런 말을 해. 네가 뭐가 모자라다고.”
침대 위에 덩그러니 놓여 있던 손이 올라 해정의 등을 마주 안았다. 퍽 단호한 현수의 말에 해정이 낮게 웃었다. 가쁜 울림이 몸에 느껴졌다.
“그러게요. 나한테 잘해요, 형.”
“응. 잘할게.”
그 짧은 대화가 뭐가 그렇게 웃긴 것인지, 해정은 또 한 번 웃었다. 이번에는 조금 더 크고 청량했다. 어깨에 코를 슬쩍 비비더니 고개를 살짝 들어 입술을 댄다.
“나 진짜 못 참겠는데……. 어깨만 깨물게 해 주면 안 돼요?”
현수가 작게 고개를 끄덕임과 동시에 해정이 입을 벌렸다. 콱. 망설임 없이 박아 넣는 이에 목덜미가 움찔 떨렸다. 피가 나겠다고 현수는 생각했지만, 해정을 말리지는 않았다. 살 위를 지그시 누르던 이가 점점 깊이 살을 파고들었다. 놀란 현수가 반사적으로 등을 안고 있던 손을 들어 해정의 팔을 쥐었다.
“읏……!”
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했는데, 꼭 그런 현수를 알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세워진 이는 더 날카롭게 약한 살을 비집었다. 언젠가 피가 철철 날 정도로 손가락을 깨물렸던 순간이 경고 조로 현수의 머리를 스쳤다. 팔을 쥔 손이 부들 떨며 손가락을 모았다. 손끝이 하얗게 물들었다.
“후으…….”
입 안에 비릿한 맛이 가득 찼다. 그제야 무례하게 날뛰던 불만이 잠잠해지기 시작했다. 이윽고 목덜미에서 떨어진 입이 비죽비죽 웃었다. 미끄럽게 늘어난 입술 사이로 뾰족한 혀가 삐져나와 그새 피가 망울진 피부 위를 훑었다. 몸이 또 한 번 떨렸다. 그러면서도, 현수는 참았다. 아픔을 감내하고 있었다.
사랑스러워.
목덜미를 할짝거리며 해정은 생각했다. 이 마르고 건조한 몸에 더 상처를 내고 싶다는 충동이 일었지만 참아야 했다.
맞붙은 두 상체가 떨어졌다. 해정의 손이 현수의 턱을 쥐고 가볍게 키스했다. 촉. 작은 마찰음은 조금 전의 행위와 다르게 애교스러웠다.
“사랑해요.”
자그마한 목소리에 응하는 단정한 웃음소리 또한 작았다. 돌아오는 말이 없어서 속상하다. 해정은 웃기만 하는 야속한 입술에 한 번 더 키스했다. “형은요. 형은 어때요.” 가까운 곳에서 멈춘 얼굴이 조바심을 냈다.
“나도, 그래.”
“그게 뭐야. 제대로 말해 봐요.”
“……부끄러운데…….”
살짝 붉어진 얼굴이 예뻤지만 거기에 만족하여 물러설 수는 없었다. 해정이 고개를 숙여 현수의 귀에 입술을 대었다. “사랑해요.” 정확한 발음으로 속삭인다.
“사랑해요. 사랑해요. 사랑해요. ……현수 형. 사랑해. 사랑해요.”
쉼 없이 이어지는 낮은 울림이 몸을 데웠다. 현수의 얼굴이 조금 더 발갛게 익었다. “그만. 알았어. 그만, ……그만.” 흐물거리는 입술이 급박하게 중얼거렸다. 못 참겠다는 듯 반대쪽으로 얼굴을 기울여 입술을 피한다. 해정이 가까이 하고 있던 얼굴을 물리고 현수를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종용하는 눈에, 현수가 이리저리 방황하던 시선을 가까스로 고정시켰다. 눈이 마주했다.
“사랑해.”
“누구를?”
현수가 눈썹을 늘어뜨렸으나 해정은 물러설 생각 따위 없다는 듯 직선으로 마주치는 눈을 깜빡거리기만 했다.
머뭇거리던 현수의 팔이 별안간 해정의 목을 감아 안았다. 안겨 오는 몸이 뜨끈했다. ‘진짜 부끄러워하고 있구나.’ 해정은 생각했다. 상상하지 못한 모습이어서 못 견디게 귀여웠다. 열이 오른 볼이 차갑게 식은 볼에 빈틈없이 붙었다. 해정의 귀에 현수의 우물거리는 윗입술이 닿았다.
“해정아, 사랑해.”
공기 중에 흐리게 번지는 목소리와는 반대로, 쿵쿵거리는 심장의 울림은 선명했다.
* * *
잠이 오지 않았다. 어쩌면 당연했다. 넓다곤 하여도 해정이 줄곧 혼자 누워 있던 침대에 그와 나란히 누워 있는 꼴이 스스로도 우스웠고, 어색했다.
병실 안은 주황빛이 은은하게 내려앉은 채였다. 천장을 멍하니 올려 보던 현수가 슬쩍 고개를 틀어 제 품에 파고든 채 자고 있는 해정을 내려 보았다. 온몸을 구긴 채로 안겨 있기 위해 노력하는 자세가 자못 불편해 보였는데, 그에 비해 얼굴은 꽤 편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가지런히 내려앉은 속눈썹이 꼭 인형 같았다. 만져 보고 싶었지만 조금만 움직여도 번쩍 눈이 뜨일 것 같았다. 잠시 허공에서 주춤거리던 손이 이내 다시 물러났다. 해정의 잠을 방해하고 싶지는 않았다.
대신 고운 얼굴을 구경하듯 꼼꼼히 훑어보다가, 다시 천장으로 고개를 돌렸다. 베개와 머리카락이 작은 마찰음을 냈다.
결국 못 갔네.
다시 천장을 바라보니 현실적인 생각이 스멀스멀 돌아오기 시작했다. 무음으로 해 둔 탓에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아마 정호에게 전화가 몇 통은 와 있을 것이다. 화 많이 났겠지. 얼마큼 화가 났는지 짐작하다가, 가슴이 돌연 서늘해졌다. “후…….” 현수의 입술 사이로 옅고 긴 한숨이 끌려 나왔다.
“왜요?”
별안간 불쑥 튀어나온 목소리에 현수가 눈을 크게 떴다. 해정을 안아 주던 손이 작게 움찔거렸다.
해정의 목소리였다.
“안 자고 있었어?”
튀어나온 목소리는 깨어 있던 사람처럼 또렷했다. 현수가 해정에게로 고개를 돌리고 물었다. 해정이 입꼬리를 끌어 웃으며 “잤어요. 방금 깬 거예요.” 했다.
“아…….”
“이렇게 깊게 잔 것도 오랜만인 것 같아요.”
“너 별로 안 잤어. 한 한 시간 잤나…….”
“그래도. 형 오기 전에도 계속 자다 깨다 했는데, 그건 자는 것 같지가 않았거든요.”
해정이 현수의 품에 얼굴을 파고들면서 말했다. 그 말이 못내 걱정되어, 현수가 몸을 해정 쪽으로 돌렸다. 턱 아래에 해정의 얼굴이 파묻혀 있었다. 목 부근에 느껴지는 따끈한 숨결이 묘한 안정감을 느끼게 했다. 현수의 손이 해정의 뒷머리를 가볍게 쓸어내렸다.
“왜 자다 깼어. 많이 아팠어?”
“아픈 것보다는……. 괴물 때문에.”
뒷머리를 연신 쓰다듬던 손이 우뚝 멎었다. 정호의 생각 탓에 서늘했던 가슴의 온도가 더 차갑게 떨어졌다. 퍼렇게 얼어붙을 정도였다.
현수가 턱을 깊게 당겨 해정의 정수리를 바라보았다. 살짝 고개를 올려 그와 눈을 마주한 해정이, 건조하게 웃으며 다시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자다가 깨면 괴물이 계속 왔어요.”
“……형한테 얼른 연락하지.”
해정은 대답 대신 작게 웃고 말았다.
그의 말대로 마음 같아선 그러고 싶었다. 실제로 수술 직후가 제일 아팠고, 열도 많이 났으니까. 이 꼴을 김현수에게 보이면 좋겠다는 생각을 안 한 건 아니었다. 애초에 이런 짓을 벌인 자체가 그 때문이었다. 허나 수술 직후 제 옆에는 최승우, 혹은 부모가 붙어 있었다. 부모라면 몰라도 최승우는 마주치게 하면 안 되었다. 김현수에게, 자신은 피해자여야만 했다.
“많이 힘들었겠다.”
해정의 웃음을 어떻게 해석한 것인지, 현수가 그리 말했다. 염려하는 목소리가 귓바퀴를 따라 사르르 녹아드는 것 같았다. 해정은 새어 나오는 웃음을 들키지 않기 위해 더 깊이 현수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괴물이 내 침대 위에 있었어요. 겁주는 것처럼 계속 그랬어요. 형이 안 온다고요.”
“걔가 틀렸네. 그치. 형은 바로 달려왔는데.”
나지막한 물음에 해정이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바싹 엎드려서 얼굴을 가까이 대고, 마지막으로 또 그랬어요. 형은 안 온다고. 거기다 대고 아니라고 하고 싶었는데 목소리가 안 나왔어요.”
“얼굴을 가까이 댔다고?”
그 말인즉슨, 해정의 환상이 구체적인 형상을 만들어 냈다는 뜻이기도 했다. 현수의 되물음에 해정이 “네.” 했다.
“얼굴 봤어?”
“네.”
끔찍한 얼굴이었을까. 귀신과 닮은 형상일 수도 있었다. ‘목소리가 안 나왔다고 하기도 했고…… 가위에 눌리는 것과 비슷한가.’ 현수는 짐작하며 해정의 머리를 다시 쓰다듬기 시작했다.
“많이 무서웠지.”
“괜찮아요. 오늘은 형이 있어 줬잖아요.”
“형이 있으면 괜찮아?”
가슴팍에 묻혀 있던 얼굴이 슬금 올라 쇄골에 짧게 입 맞췄다.
“네.”
간결하고도, 명확한 답이었다. 해정은 말을 이었다.
“형이 내일도, 내일모레도, 계속 내 옆에만 있어 주면 다 괜찮아요. 괴물도 안 와요. 불안하지도 않고요. 내가 처음 만났을 때부터 말했잖아요.”
말, 혹은, 주문이었다.
차갑게 얼어붙었던 가슴이 금세 따뜻해지는 것을 느끼며, 현수는 “응.” 하고 대답하였다.
* * *
[오늘 오지 마]
식탁 아래로 휴대 전화를 확인한 승우의 표정은 변화가 없었다. 바싹 얼어서 동태처럼 초점이 사라진 눈동자가 다시 식탁 위로 올랐다. 휴대 전화가 소리 없이 옆 의자에 놓였다. 마른 손가락이 젓가락을 들었다. 젓가락 끝이 반찬들 사이에서 방황했다. 먹고 싶은 게 있기는커녕 먹어서 괜찮을 반찬도 없었다. 집어넣으면 다시 게워 낼 것만 같은 냄새와 형상들이었다.
“오늘은 몇 시에 갈 거야? 바로 갈 거지? 아침 먹고.”
착 가라앉은 목소리가 대뜸 식탁 위에 놓였다. 승우가 고개를 들어 맞은편에 앉아 있는 제 엄마를 바라보았다.
며칠 만에 수연은 바싹 말라 있었다. 병원에 갈 때는 그렇게 보이지 않으려 최대한 노력하는 편이었지만 수연도, 정원도 큰 충격을 받은 듯했다.
푹 파인 눈가를 바라보던 승우가 시선을 옮기지 않은 채로 “오늘은 안 와도 된대, 해정이가.” 했다. 가지 무침을 들어 승우의 밑 접시에 올려 두던 수연의 눈이 빠르게 올랐다.
“왜?”
불안함이 스민 목소리였다. 왜 오지 말라는지 물어볼 생각이 없기도 했고 물어봤자 해정이 친절하게 답해 줄 리가 없었다. 승우는 무의식중으로 추측했던 이유를 말했다.
“……친구가 온대.”
더 캐물을까 봐, 승우는 서둘러 고개를 숙이고 밑 접시에 놓인 가지를 입 안에 넣었다. 이가 물컹한 살을 갈랐다. 동시에, 옆구리를 가르던 그 뻑뻑한 칼의 감각이 느껴졌다. 돌연 구역질이 척추를 타고 목젖 위로 튀었다. 승우의 손이 황급히 컵을 쥐어 들었다. 물을 한 번에 머금고 기분 나쁜 것들을 삼킨다.
그사이, 생각하는 듯 입을 다물고 있던 수연이 고개를 들어 승우를 바라보았다.
“그래도 잠깐 들러. 얼굴만이라도 확인하고 와. 대화도 좀 해 주고. ……엄마가 일을 줄이고 싶은데, 그럴 수가 없어. 승우 너도 잘 알잖아. 정원 씨도 힘든데, 계속 영화 촬영 때문에 바빠서…….”
“…….”
“……해정이 혼자 두면 걱정돼서 그래. 승우야. 형이잖아. 응?”
이런 그녀의 반응이 과보호는 아니었다. 객관적으로 생각하면 그랬다. 그런데 사람의 심리는 객관적으로 흘러가지를 못했다.
질투가 났다. 억울했다. 잘린 가지가 식도에 꽉 끼어 있는 느낌이었다. 승우는 힘겹게 침을 삼키며 감정을 동시에 억눌렀다. 금방이라도 서해정의 광기에 대해 다 말해 버리고 싶었다.
걔 자해한 거 아니야, 엄마. 그 미친 새끼가 날 협박했어. 왜 그런지는 몰라. 모르겠는데…… 날 위협했어. 엄마. 엄마 아들을 위협했다니까. 자기 배를 안 찌르면 네가 찔린다고 그러면서 내 손으로 제 배를 찌르게 만들었어. 나 무서워. 나 좀 알아줘. 나 요즘 잠도 못자. 먹으면 다 토해. 악몽도 꿔. 칼만 보면 죽을 것 같아. 힘들어. 진짜 힘들어. 엄마. 나 엄마 아들이잖아. 내가 그 새끼보다 엄마랑 더 오래 살았던, 엄마 진짜 아들이잖아.
—넌 가해자고, 나는 피해자야.
스치듯 들린 목소리에, 파들파들 떨면서 젓가락을 꽉 쥐고 있던 손에 힘이 풀렸다. 하얗게 질린 피부가 제 색을 되찾았다.
이 모든 걸 말할 수 없는 이유는, 과거의 그 실수들 때문이었다. 기어이 젓가락을 던지듯 내려놓은 승우가 깊이 한숨을 내쉬었다.
“……알았어. 잠깐 들를게.”
힘없는 목소리가 한숨 사이로 흘렀다. 역겨운 느낌은 쉽사리 잦아들지 못하였다.
* * *
기분 탓인지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컸다. 박스를 여는 단순한 행위를 하고 있음에도 손가락 관절이 빳빳이 굳는 것 같았다. 가나슈 타르트의 하판을 꺼내던 현수가 결국 시선을 옮겨 해정을 바라보았다. 제 손가락을 샅샅이 핥는 시선은 식탐까지 담겨 있는 듯했다.
그 시선이 싫은 건 아니었으나, 도무지 의식을 안 하려야 안 할 수가 없었다. 타르트를 꺼내는 그 사소한 행위마저도 힘들었다.
“……아침 먹은 거, 맞지?”
침을 삼키느라 울렁이는 목울대를 바라보며 현수가 물었다. 곧이어 타르트 박스 위에 하판이 놓였다.
현수의 손가락을 바라보고 있던 해정의 시선이 이동했다. 느닷없이 그렇게 묻는 현수가 의아한 모양이었다.
“네. 왜요?”
“근데 왜 그렇게 형 손가락을 먹을 것같이 쳐다봐.”
민망함을 장난으로 돌리기 위한 농담이었다. 눈을 깜빡이던 해정이 이내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빨고 싶어서요.”
거침없는 언행에 할 말을 잃는 건 언제나 자신이다. 현수의 눈에 여과 없이 당황이 드러나자 해정이 쥐고 있던 포크로 새끼손가락을 약하게 찔렀다. “여기랑.” 작은 목소리와 함께 포크가 이동했다. 포크가 약지, 검지를 차례로 건드렸다.
“여기랑, 여기는 빨고 싶고, 나머지 두 개는 세게 물고 싶어요.”
천연하게 말을 잇는 목소리는 의도 없이 감상적이었다. 그래서 더 당황스러웠다. 끝내 목과 어깨를 내어 주었던 지난 새벽이 현수의 머리에 떠올랐다. 이갈이를 하는 새끼 짐승처럼 끈질기게 살을 무는 이에서 해소되지 못한 갈증이 느껴졌었다. 그리고 그 갈증의 본질을 알 것만 같아서 자꾸만 얼굴이 붉어졌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해정이 표현하는 모든 것에 풋내기처럼 반응할 수는 없었다. 어쩐지, 지난밤부터 계속 해정에게 말려들고 있는 것 같았다. 현수가 짐짓 동작을 크게 하곤 가나슈 타르트를 떴다. 그리고 해정의 입 앞에 대었다.
“먹어. 병원 근처에 있는 초콜릿 카페 건데, 맛있대. 유명하던데.”
해정이 군말 없이 타르트를 물었다. 우물우물 씹으면서도 “나 아침 먹는 동안 거기까지 갔다 왔어요?” 하고 묻는다. 현수가 포크의 옆면으로 타르트를 자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응. 맛있어?”
“응.”
“다행이다. 수제 초콜릿도 많이 팔더라. 인기 많다는 것들 사 왔어. 냉장고에 넣어 놨으니까 입 심심하면 먹어. 다 먹으면 또 사 올게.”
본인이 엄살을 부리기도 했지만, 실제로 많이 아팠던 게 얼굴에서부터 티가 나서 내심 속상했다. 그래서 해정이 좋아하는 것이면 뭐든 먹이고 싶었다.
“…….”
“꼭 먹어. 알았지?”
현수가 당부하듯 말하자 해정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해정이 끄덕이는 걸 보고 난 뒤에야 현수의 시선이 떨어졌다. 타르트를 자르던 손이 다시 움직인다. 그런 현수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해정이 이내 입을 열었다.
“거기 갔다가 또 어디 갔어요?”
자른 타르트로 조각을 뜨던 현수가 눈을 둥그렇게 뜨고 고개를 들었다.
“내가 또 어디 간 거 어떻게 알았어?”
“거기만 바로 갔다 왔으면 이렇게 늦게 올 리가 없으니까.”
대수롭지 않은 목소리였다. ‘내가 그렇게 늦었었나.’ 잠시 생각하던 현수가 타르트를 해정의 입 앞에 대며 “편의점 가서 양치 세트 샀어.” 했다. 해정은 그것을 받아먹으면서도 현수를 바라보는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또?”
“빵 사 먹고, 이도 닦고…….”
“또?”
시간이 지체될 만한 건 그것 외에는 없는데, 당연하다는 듯 똑같은 높이로 물어 오는 음성은 꼭 대답을 해야 할 것만 같은 압박감을 주었다. 현수가 포크를 내려놓으며 제 목덜미를 긁적였다. 잠시 침묵이 감돌았다.
“정호한테…… 전화했다가.”
“또.”
말꼬리를 콱 물어 오는 말의 끝이 좀 전처럼 올라가지 않았다. 낮은 어조에 문득 의아함을 느낀 현수가 확인하는 것처럼 고개를 들었다. 해정은 제 포크로 가나슈의 표면을 낙서하듯 살살 긁어내고 있었다. 표정은 평이했다.
“전화 안 받아서, 문자 넣어 뒀지.”
“…….”
줄줄이 했던 일을 읊으면서도, 왜 자신이 이걸 말하고 있는 것인지 의문스러웠다. ‘안 될 건 없지만…….’ 현수는 생각하면서 해정을 보았다. 가만히 포크질을 하던 해정이 급기야 알았다는 듯 얼굴을 느리게 끄덕였다. 고개는 여전히 숙인 채였다.
“오늘도 여기서 잘 거죠.”
“오늘은 집에 갔다가 아침에 올게. 형도 씻어야 하고, 여기 계속 있으려면 짐도…….”
“병원 주변에서 대충 사 오면 되잖아.”
매끄러웠던 말투에 삐죽 가시가 튀어나왔다. 불현듯 표면을 긁던 포크가 가나슈 크림 속을 푹 파고들었다.
집과 병원이 몇 시간 걸리는 먼 거리도 아닌데 굳이 주변에서 갈아입을 옷과 속옷을 새로 살 필요는 없었다. 그러니까 지금 해정은 억지를 부리고 있는 것이다. 그 증거로, 평화로이 흘러가고 있었던 공기가 삽시간에 날카롭게 현수를 응시하고 있었다. 항상 그랬다. 해정은 사소한 표정과 말투의 변화만으로 주변의 공기를 휙휙 제 맘대로 바꿔 버리곤 했다.
“……그럼, 지금 얼른 집 갔다 올까?”
현수가 포크를 쥔 손 위에 제 손을 겹쳤다. 포크질을 저지하듯 부드럽게 손을 위로 끌어당기며 묻자 기어이 해정이 눈을 들어 눈을 맞췄다. “그럴까?” 현수가 또 한 번 물었다. 이게 최선의 선택이었다. 어차피 해정을 두고 집에서 발 뻗고 자기는 힘들 것 같다고 생각한 참이기는 했다. 해정은 저가 없으면 또 괴물을 볼 것이었다.
“얼마나 걸리는데요.”
“버스로 40분 정도 걸리니까…… 한 시간 반?”
그것도 급하게 다녀와야 가능할 최소한의 시간이었는데 해정은 꼭 못 들을 것을 들었다는 듯 고개를 푹 숙였다. 곧바로 “싫어.” 한다. 입가가 고집스레 굳었다.
“해정…….”
돌연 현수의 목소리가 가로채였다. 목소리를 덮은 건 현수의 외투 주머니에 들어 있는 휴대 전화였다. 얼른 받으라는 듯 크게 울리는 소리가 자못 어색했다. 거의 이틀 내내 무음으로 하고 있던 탓이었다. 무음 모드를 해제한 이유는 분명 언젠가 걸려 올 정호의 전화를 놓치지 않기 위함이었지만, 이런 식을 기대한 건 아니었다. 타이밍이 좋지 않았다.
“잠시만.”
현수가 흘리듯이 말하며 머뭇머뭇 자리에서 일어났다. 해정의 손등을 살포시 잡고 있던 손이 멀어졌다.
그때였다. 타르트를 빤히 바라보고 있던 눈이 올라 현수를 보았다. 눈이 마주친 순간 팔이 잡혔고, 그대로 잡아당겨졌다. 억센 힘에 현수의 몸이 맥없이 쓰러졌다. 그대로 고꾸라지려는 현수의 몸을 붙잡은 건 해정이었다. 짧은 소리를 낼 틈도 없이 입술이 먹혔다. 엉거주춤 침대에 무릎을 댄 현수가 그대로 침대 위에 엉덩이를 내려 앉았다.
거칠었던 키스가 점점 부드러워졌다. 츕. 타액에 젖은 입술이 잠깐 떨어지면서 질척한 마찰음을 내었다. 그사이 현수의 약한 한숨이 섞였다. 해정은 못 들은 척 키스를 이어 갔다.
전화를 받게 하고 싶지 않았다. 늘 저 새끼가 문제였다. 새해에 어딜 간다는 것도 저 새끼였다. 아니. 다 싫었다. 저 새끼뿐만이 아닌, 김현수를 둘러싼 건 다 싫었다. 모두 제게서 김현수를 뺏어 가려는 개새끼들뿐이다. 김현수의 친구도. 김현수의 집도.
이윽고 벨소리가 끊겼다. 그 뒤에 입술이 떨어졌다. 그사이 살짝 부은 입술에 해정이 쪽, 짧게 키스하고선 얼굴을 물렸다.
“……좀 봐줘요. 형 없으면 나, 불안하고 힘든데…….”
“…….”
그렇게 거칠게 심술을 부려 댔으면서도 눈꼬리를 축 늘어뜨리며 이렇게 말하면 마음이 동하고 만다. 도리어 정말 자신이 잘못을 저지른 것만 같은 이상한 착각이 들 정도였다.
부은 것이 퍽 따끔한지, 제 아랫입술을 계속 매만지던 현수가 이윽고 손을 뻗었다. 늘어진 눈꼬리를 손끝으로 살살 펴내는 것처럼 만진다.
“그러면…….”
“…….”
“건너편 큰 마트, 금방 갔다 올게. ……괜찮아?”
체념한 듯한 목소리가 살금살금 현수의 입술 새로 흘러나왔다. 피부를 간지럽게 매만지는 것 같은 음성이었다. 그제야 딱딱하게 얼어 있던 얼굴이 사르르 녹았다. 그리고 꽃을 피웠다. 눈에 띄게 예쁜 척하는 미소였는데, 정말로 예뻐서 보는 사람의 기분을 좋아지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네.”
꼭 원하던 장난감을 쟁취한 아이처럼 그제야 말 잘 듣는 척, 목소리가 사근사근해졌다. 그게 어이없기도 하고, 뻔뻔해 보이기도 해서 현수는 작게 웃고 말았다. 그사이, 해정이 다시 한 번 그의 양 뺨을 붙들었다. 이번엔 부드러운 힘으로 얼굴을 끌어당긴다. 서로의 숨결이 느껴질 만큼의 거리에서 얼굴이 멈췄다.
“빨리 갔다 와야 해요. 최대한 빨리.”
끝없는 욕심. 싫지가 않은 게 문제라면 문제였다. 현수가 욕심 많고, 고집 세고, 또 예쁜 입술에 촉, 제 입을 맞췄다.
짧은 입맞춤은 다시 자연스레 키스가 되었다. 현수의 혀가 제 입 속을 파고드는 살덩이를 반기듯 꾹 짓눌렀을 때였다.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다. 똑똑. 짧은 노크 후에 망설임 없이 철컥, 문고리가 돌아가는 소리가 문 너머에서 났다. 그 소리에 현수가 급히 해정의 어깨를 쥐었다. 밀어내려 했으나, 허리에 감긴 손이 현수를 끌어당겼다.
철컥. 철컥. 문고리는 확인하는 것처럼 두 번 돌아갔다. 문이 잠긴 모양이었다. 그 사실을 알고 있던 건지 아랑곳하지 않고 키스를 이어 하려는 입술 위에 현수의 손이 비집고 섰다. 꾹. 손바닥이 지그시 얼굴을 밀었다.
“안 돼. 밖에 사람 기다리잖아.”
해정이 고집을 부리는 눈으로 현수를 바라보았다. 현수는 못 본 척 손바닥에 더 힘을 주었다.
급기야 허리를 감은 팔에 힘이 풀렸다. 냉큼 침대에서 벗어난 현수가 “잠시만요.” 하며 문을 향해 걸어갔다. 문을 열기 전 얼굴을 벅벅 매만진다. 해정이 립스틱을 바른 것도 아닌데, 어딘가 키스를 한 흔적으로 얼굴이 흐트러져 있을 것 같았다.
문이 열렸다. 이윽고 벌어지는 문틈 사이로 저와 비슷한 높이의 얼굴이 보였다. 의사나 간호사일 것이라고 예상했으나, 밖에 서 있는 사람은 의사도, 간호사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초면도 아니었다. 딱 한 번, 이 얼굴을 본 적이 있었다.
“…….”
“…….”
짧게 인식했던 얼굴이었지만, 선명하게 기억이 났다. 바로 어제의 일이기도 했고 또 꽤나 인상 깊기도 한 탓이었다. 현수가 눈을 깜빡이며 남자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남자도 그 퀭한 눈으로 현수를 멀거니 바라보기만 했다. 잠시 후, 먼저 시선을 옮긴 건 남자였다. 검은 눈알이 도르륵 굴러 현수의 어깨 너머를 바라보았다.
‘해정이랑, 아는 사이인가?’ 불현듯 그런 생각이 들었다. 현수가 급히 몸을 비켜서며 해정을 바라보았다.
“…….”
“…….”
“누구세요?”
해정은 침대 위에 앉은 자세 그대로 남자에게 말했다. 완전히 시선이 옮겨지기 직전, 싸늘했던 얼굴이었던 것도 같았으나 찰나여서 확신할 수는 없었다.
미묘한 침묵이 해정과 남자 사이를 오갔다. 그것도 잠시였다.
“병실 잘못 찾으신 것 같은데. 여기 이천삼 호예요.”
의아한 듯 눈을 동그랗게 뜨던 해정의 얼굴이 선하게 피었다. 해정은 친절한 웃음을 머금고서 조곤조곤 말했다.
그럼에도 남자는 답이 없었다. 현수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 남자를 보았다. 문고리를 쥔 손이 움찔 떨렸다. 아주 자그마한 움직임이었는데, 현수에게는 보였다.
“……여기, 이천삼 호라고요.”
느릿하게 말을 되풀이하는 해정의 목소리가 들렸다. 현수는 계속 남자를 보고 있었다. 눈에 걸리는 탓이었다. 불과 어제 본 사람인데도, 분위기가 어제보다 더 좋지 않았다. 벼랑 끝에 선 사람처럼 위태로워 보였다.
남자가 바싹 마른 입술을 떼어 낸 건 그다음 순간이었다.
“……아, 네.”
“…….”
“…….”
“죄송…….”
합니다. 뒷말은 다시금 닫힌 문소리에 파묻혔다. 귀를 기울여야만 들을 수 있을 정도로 미약한 목소리였다. 현수는 해정의 목소리가 들릴 때까지, 남자가 닫은 문을 이상한 기분으로 바라보았다.
“이리 와요. 뭘 보고 섰어요.”
“아……. 응.”
목소리가 차가워진 것 같았으나, 이것 역시 찰나였기 때문에 확신할 수 없었다. “다시 키스해 줘요.” 다가온 현수의 팔을 끌어당기며 조르는 목소리는 아까, 그가 품고 있던 온도 그대로였다.
* * *
승우는 병원 입구가 보이는 유리창을 향해 앉았다. 아까 그 사람이 병원을 나가는 걸 확인하고 올라오라는 해정의 문자 때문이었다.
병원 안에 있는 카페일지라도, 카페 안은 병원과 달리 소곤거리는 목소리들로 비교적 따뜻한 분위기를 풍겼다. 그게 섬뜩할 만치 이질적이라고 어제 문득 그런 생각을 했었다. 부모의 커피를 주문했을 때, 웃고 있는 직원의 얼굴을 마주하면서는 팔뚝에 오소소 소름이 돋아날 정도였다.
그 말을 하니 약한 피해망상 증상이 있는 것 같다고 어제저녁, 정신과 담당의는 말했다. 허나 자신은 동의할 수 없었다. 도리어 그 이질적인 것들을 어떻게 그렇게 가볍게 받아들일 수 있는지 의문이었다.
나한테 칼을 들이밀었던 그 미친 살인귀가, 어떻게 엄마 아빠 앞에서는 그렇게 잠잠할 수가 있냐고. 귀신이 사람이 됐어. 그날 밤엔 분명 귀신이었는데, 사람이 됐다니까. 그게 안 무서워? 진짜 미친 것 같지 않아? 당신이 그 미친놈이 벌려 놓은 간극을 직접 한 번 봐. 보고 말해. 정말 그런 말이 나올 것 같아?
어제는 그 정도였다. 끝내는 흥분해 버려서 공격적으로 그렇게 말해 버렸으나 금방 진정할 수 있었다. 참을 수 있는 공포였다.
그런데, 조금 전 그것은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그 미친놈의 문자가 아니었다면 한시라도 빨리 이 병원을 벗어났을 것이었다. 안정제라도 먹고 싶었는데 챙겨 온 게 없었다. 결국 잘게 떨리는 손이 뜨끈한 허브티가 담긴 종이컵을 쥐었다. 투명한 액체의 표면이 요동쳤다.
불현듯 조금 전, 저를 향해 웃어 보이던 미친놈의 얼굴이 눈을 스친다. 엄마 아빠 앞에서도 그렇게 웃은 적이 없던 놈이었다. 간극이 더 벌어져 있었다. 그 차이가 너무 무서워서 진정이 안 됐다. 허브티를 작게 삼킨 승우가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그때, 병원 문으로 다가가는 사람이 시야에 걸렸다. 병실 안에서 보았던 그 사람, 해정이 문자로 말했던 ‘그 사람’이었다.
“…….”
승우가 손가락으로 따뜻한 종이컵을 매만지면서, 병원을 나서는 단정한 뒷모습을 끈질기게 좇았다.
아무래도 저 사람은 제 부모님보다 더 큰 영향력으로, 그 미친놈이 가진 간극을 움직이는 것 같았다.
* * *
벌컥, 문이 열렸다가 닫혔다. 습관적으로 바닥을 바라보고 있던 승우가 고개를 들어 올렸다. 동시에 침대에 걸터앉아 있던 해정이 일어섰다. 성큼성큼 걸음을 옮겨 승우에게로 걸어간다.
빠르게 거리를 가까이 하는 흰 얼굴에 기시감이 들었다. 승우는 반사적으로 숨을 삼켰다. 그 밤을 기억하는 심장이 발광했다.
유령 같은 얼굴이 뚝 멈춘, 그 순간이었다. 날카롭고 큰 마찰음이 병실 안을 긁었다. 승우가 돌아간 얼굴 그대로 눈을 깜빡였다. 후려 맞은 뺨이 불에 타는 것처럼 홧홧했다.
“씨발, 여기가, 네 안방이야?”
흉포하게 뺨을 갈겼던 손이 바로 이어서 툭, 반대편으로 얼굴을 밀었다. 승우의 얼굴이 다시 정면으로 돌아갔다. 돌연 목을 움켜쥐는 손에 승우의 어깨가 퍼드득 움직였다. 퍽. 등이 문에 세게 부딪힌다.
“내가 오지 말라 했지. 뒤지고 싶어? 아니면 내 말이 개좆같이 들렸어?”
아니다. 그 밤보다, 그 새벽보다 온도가 더 높았다. 서해정은 지금 진심으로 화를 내고 있었다. 핏줄이 빳빳하게 선 눈이 그 증거였다.
“이거, 놔!”
승우의 눈이 파리하게 질렸다. 그 밤의 기억 탓인지 금방이라도 숨이 막힐 것 같은 기분에 어깨가 절로 벌벌 떨렸다. 뺨을 맞았다는 충격과 굴욕감조차 아직까지 느끼지 못할 정도였다.
해정이 목을 조이던 손을 풀었다. 승우가 숨을 정돈하기도 전, 우악스러운 손이 멱살을 쥐었다. 다른 손이 한 번 더 뺨을 후려쳤다. 일전보다 더 둔탁한 소리가 났다. 입이 터진 것인지 삽시간에 입 안에 피가 고였다. 승우는 가까스로 침을 삼켰다. 반항하고, 저도 똑같이 때려 주고 싶었지만 힘이 없었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다. 시야가 흐릿하게 일렁였다.
“개새, 끼…….”
울음을 가득 담은 목소리가 풀렸다. 해정은 그 목소리마저 분노에 가려 들리지 않는 모양인지 다시 한 번 쾅, 승우의 등을 문에 쳐 올렸다.
하마터면 들킬 뻔했다. 이 새끼 때문에. 이 멍청한 씨발 새끼 때문에. 이제야 좀 뭐가 되어 가는데. 이제야.
“내가 하나 말해 줄까? 네가 진짜 내 생각 이상으로 멍청한 새끼인 걸 이제야 알아 버려서, 어, 그래. 그러니까 들어, 그냥. 좀 이해해. 알았지?”
“흑, 으…….”
“내가 너는 가해자고, 난 피해자라고 했지? 그게 너한테 안 좋은 일 같아? 잘 생각해 봐, 최승우. 내가 너한테 역할을 부여한 거야.”
역할?
“이 역할이 없어지잖아? 그러니까, 씨발, 뭐라고 해야 되냐. 어. 네 역할이 박탈되잖아? 그러면 넌 더 이상 이용 가치가 없어. 이용 가치가 없어지면, 어쩔까. 내가 너를 그냥 둘까? 응?”
“큭……!”
다시금 콱 조여 오는 힘에 숨을 쉴 수가 없다. 서해정의 목소리가 윙윙 이명처럼 메아리친다.
“묻잖아. 내가, 너를, 그냥, 둘 것 같아?”
“이거, 놔, 이 개새, 끼, 야……! 크윽……!”
“아니. 역할이 없어지면 너는 내 손에 뒤지는 거야. 그러니까, 잘해.”
역할.
“너 오늘 뒤질 뻔했어.”
난 지금, 연극을 하고 있는 건가?
흔들리던 뇌에 그런 생각이 칼처럼 박혀들었다. 진동이 멈춘다. 돌연 내팽개치듯 멱살을 쥐고 있던 손아귀가 떨어져 나갔다.
압정처럼 벽에 꽂혀 있던 마른 몸이 바닥에 쓰러졌다. “허억. 허억.” 숨을 쉬는 것 자체가 버거운지 등이 위아래로 들썩였다. 어느새 평온을 덮은 눈을 한 해정이 그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참 나약한 새끼다. 조금 전은, 며칠 전의 밤과 달리 단순히 목을 조른 시늉만 했을 뿐이었다. 그런데도 겁을 먹어서는 혼자서 저렇게 난리를 쳐 대고 있었다. 끝내 트라우마가 생겨 버린 모양이었다.
“빨리 나가.”
어떻든 흥미 없는 생각이다. 해정은 그렇게 생각을 갈무리하며 작게 말했다. 차갑게 식은 목소리가 승우의 뒷목 위로 쏟아졌다. 잠시 후, 승우가 비틀거리며 엎드려 있던 몸을 일으켰다. 놀란 가슴이 여전히 날뛰고 있었지만 튀어나와 아플 정도는 아니었다.
그사이, 해정은 창가로 가 바깥을 내려 보고 있었다.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 같은 뒷모습을 바라보던 승우의 머리 위로 문득 그 낯선 남자의 얼굴이 스쳤다. 승우는 지끈거리는 목을 매만지면서 병실을 나섰다. 그리고 생각했다.
단순히 간극을 조종하는 사람이 아닐지도 모른다.
아마도 그 사람은, 관객이다.
* * *
「여보세요.」
“…….”
전화기 너머로 들리는 목소리가 냉랭했다. 예상은 했지만 직접 피부에 닿는 감각에 심장이 움칠거렸다. 현수가 플라스틱 바구니를 들면서 어색하게 웃었다. 정말 웃겨서가 아니었다. 못 견디는 상황에서 저도 모르게 나오는 회피성의 버릇이었다.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모르겠어서 이로 입술 껍질을 뜯고 있자니, 냉랭한 목소리가 한 번 더 들려왔다.
「할 말 없으면 끊어도 되냐?」
“……아, 아니, 잠깐만.”
마트 안이 히터로 따뜻하다고 하여도 땀이 날 정도는 아니었는데, 어쩐지 이마에서 식은땀이 나는 것 같았다. 현수에게는 반사적인 반응에 가까웠다.
현수가 급히 말을 꺼내자, 정호는 할 말 있으면 해 보라는 듯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
“……미안해.”
사과하는 목소리가 여리게 떨렸다. 전화기 너머의 정호는 듣지 못할 정도였으나, 친한 친구로서 지금 현수가 이 상황 자체에 심하게 스트레스를 받고 있을 거라는 것을 그가 모르지는 않을 것이었다.
현수는 사과를 하는 상황에 익숙하지 않았다. 미안, 미안, 하고 입버릇처럼 튀어나오는 사과가 아닌, 진지한 사과를 받는 상황까지 온 건 그의 오래된 친구인 정호도 처음이었다. 그만큼 현수는 철저했다. 누군가가 제게 앙심을 쌓기 전에 필사적으로 타인을 살폈고, 미안하다고 자주 사과했으며, 도저히 모르겠으면 조심스레 기분을 물었다. 그의 친구들이라면 다 아는 현수의 천성이었다.
「…….」
“진짜…… 미안.”
그런 현수를 보고 경태는 ‘답답한 놈’이라고도 했고, 진지하게는 ‘강박증 환자’라고 했다. 그게 아니라 단순히 착한 놈일 뿐이라고 정호는 줄곧 생각해 왔었지만, 지금 제게 사과를 해 오는 목소리를 듣고 있자니 경태의 말이 맞는 것 같기도 하다. 현수는 지금 사과를 받는 사람이 도리어 죄책감을 가질 정도로 심하게 긴장하고 있었다. 친구에게 사과를 하는 그 일상적인 상황에 심각하게 긴장하는 성인 남자는 드물다.
정호가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넌 진짜 알다가도 모르겠다. 이 새끼야. ……아오, 진짜! 이 우라질 놈아!」
“미안해.”
「경태는 당연히 화났고, 그 최우석도 화났어. 어쩔래? 걔네들한테도 다 이렇게 찌질찌질 사과할래? 없어 보이게? 그러게 안 그러던 놈이 왜 갑자기 사과할 짓을 만드냐?」
“…….”
「아니, 그래. 안 가면 안 가는 거지. 사정이 생기면 안 갈 수도 있어. 근데 대체 당일 잠수는 뭐냐고. 내가 그것만큼은 좀 하지 말라고 전화로도 그랬었잖아. ……아팠냐? 아니면 뭐, 가족 모임이라도 갔냐? 뭐든 변명이라도 하고 좀 빠지든가. 전화도 안 받고, 확인해 보니까 방송도 안 했다 그러고. 그래, 방송을 했으면 몰라. 우리가 너 갑자기 연락 안 되면 그냥 연락 안 되네! 하고 넘기겠냐? 그냥 싹 잊고 놀겠냐고, 새끼야.」
현수는 티셔츠가 쌓여 있는 철 매대 앞에 선 채 애꿎은 손만 쥐락펴락하였다. 따발총처럼 쏟아지는 말이 옷을 고를 정신마저도 빼앗아 가고 있었다. “미안.” 질질 끄는 것처럼 축 처진 목소리가 다시 한 번 흐릿하게 울렸다. 정호의 한숨이 한 번 더 깊이 퍼졌다.
「걱정하잖아. 그건 생각 안 하냐?」
“…….”
정호의 말마따나, 그건 생각해 보지 못했다. 다만 친구들이 화가 났을 것이라고만 예상했다. 제 사고 회로는 항상 그게 중심이었으니까.
현수가 대답을 하지 못하자, 길게 화를 낸 게 퍽 지치는 모양인지 정호가 수그러든 목소리로 「그래서, 뭐 했는데. 뭔 일 있는 건 아니지?」 했다.
“그건 아니고…….”
「아니고?」
이윽고 현수의 손이 매대 위로 올랐다. 애꿎은 티셔츠의 자락만 매만지면서 생각을 고른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말해야 할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오늘 막 스무 살이 된 애와 사귀게 된 걸 말해야 하나. 남자인 거? 그리고 너도 아는 그, 스토커라는 거?
“…….”
「김현수?」
“……나중에 다 말해 줄게. 만나서.”
남자와 사귄다는 걸 정호에게 숨길 생각은 없었다. 놀랄지언정 혐오할 녀석은 아니라는 건 자신이 제일 잘 알았다. 허나 무턱대고 모든 일들을 말할 수는 없었다. 전화로 가볍게 꺼낼 이야기도 아니었다. 해정이 정호에게 저지른 짓들도 있었고, 정호 또한 해정을 껄끄럽게 여기고 있었다. 여러 가지로 복잡한 상황이었다.
「뭐냐? 너 지금 엄청 수상한데.」
“숨기는 거 아니야. 전화로 말하기 좀 그래서 그래. 만나서 다 얘기할게.”
「야, 너, 뭐, 다단계 같은 거 들어간 거 아니지? 길거리에서 누가 자기 좀 도와 달라든? 대학생이래? 설문 조사 해 달래?」
정호의 목소리가 찬찬히 녹더니, 기어이 평소의 분위기로 돌아왔다. 현수는 내심 안도하면서도 어이없다는 듯 “내가 바보냐.” 하고 대꾸했다. 매대 위에 놓여 있던 현수의 손이 검정색 티셔츠를 쥐었다. 긴장이 풀려 매끄러운 움직임이었다.
「아님 말고. 그거 아니면 됐어.」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미미하게 낮아진 것으로 보아 제 경험을 회상하고 있는 듯했다.
사실, 그런 면에서 순진한 건 저가 아닌 정호였다. 대학교 때 중고 사기를 여러 번 당했었던 걸로 모자라, 무료로 기타를 배울 수 있다는 말에 현혹되어 일주일간 다녔던 곳이 알고 보니 사이비 종교의 소굴이었던 적도 있었다. 참다못한 경태가 멍청한 놈이라며 정호의 등짝을 때리기도 했었다.
그때를 회상하던 현수가 슬쩍 웃었다. 그사이, 정호가 다시 말을 꺼내었다.
「그래서, 언제 만날 건데.」
“음…….”
날짜를 정하기 위해 생각을 굴렸으나, 굴리는 곳마다 해정이 걸렸다. 잠시 목소리를 끌던 현수가 끝내 “……내가 나중에 연락할게.” 하였다. 자신이 정해서 해정에게 통보하듯 말하는 건 저도 싫었다. 지금은 자신보다, 무엇보다 해정이 먼저였다.
「뭐, 그래, 그럼. 연락해라.」
“응.”
맞다. 해정이가 빨리 오라고 했는데.
해정을 떠올리니 불현듯 그런 생각이 꼬리처럼 따라붙었다. 곧이어 전화가 끊겼다. 현수가 휴대 전화를 주머니에 넣으며 걸음을 빨리했다.
마트에 간 김에 해정이 좋아할 만한 과일까지 이것저것 사다 보니 비닐 봉투가 제법 무거워졌다. 현수가 손잡이를 고쳐 잡으며 횡단보도 건너편의 빨간색 불빛을 멀거니 쳐다보았다. 고개를 숙여 휴대 전화를 확인한다. 막 20분이 지났다. 걸음을 빨리하면 병실에 5분 뒤에는 도착할 수 있었다. 빨리 가야겠다. 그런 생각을 하니 못내 마음이 조급해졌다.
보행 신호였다. 약간 들려 있던 턱이 제자리로 내려갔다. 신호등에 향해 있던 눈이 정면으로 이동했다.
현수가 횡단보도의 절반 정도를 건넜을 때였다. 주변 소음에 뒤섞여 제대로 인지하지 못한 발걸음 소리가 문득 귀를 잘근 밟았다. 누군가가 뒤늦게 횡단보도를 건너는 걸 수도 있었으나, 그 소리는 위협적일 정도로 현수의 등 바로 뒤까지 다가왔다.
거리가 지나치게 가깝다고 생각한, 그 찰나였다.
“그대로 건너요. 그냥 따라가는 거니까.”
목을 긁는 목소리가 낮게 말했다. 협박조도 아니었는데, 반사적으로 등을 돌려 확인하려던 현수의 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조금 더 빨라진 걸음이 쫓기듯 횡단보도를 건넜다.
이윽고 도보 위에 선 현수가 천천히 몸을 돌렸다. 제 뒤를 쫓던 인물의 얼굴을 확인하자 심장이 쿵, 떨어지는 듯했다. 당황스러웠다. 제 뒤를 쫓은 사람은 불과 30분 전, 해정의 병실 문 앞에 서 있었던 그 남자였다.
그사이 어디서 다친 것인지, 얼굴이 좀 울긋불긋하였다. 입 끝에 시뻘건 피딱지가 붙어 있었다. 남자의 눈도 어느새 그만큼 채도 높은 광기를 머금고 있었다. 자연스레 돋아나는 소름에 현수가 주춤 뒤로 물러났다.
“나랑 말 섞었다고 서해정한테 말하면 가만 안 둬요.”
대뜸 남자의 입에서 자연스러운 발음으로 서해정의 이름이 씹혔다. 순간 흘러내리려는 비닐 손잡이를 더 꽉 그러쥐며, 현수가 미간을 찌푸렸다.
서해정이랑, 아는 사이?
“알았어요? 가만 안 둔다고요. 저 진지하게 말하는 거예요.”
말의 형태는 협박이었지만 위협적이지는 못했다. 남자는 꼭 저가 협박당하는 사람인 것처럼 밑 턱을 볼품없이 떨고 있었다.
저보다 어려 보이는 남자가 제게 무례하게 굴고 있는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걸리는 것은 그뿐이었다. 해정에 관한 의문. 분명 해정은 이 남자를 모른 척했다. 근데 이 남자는 지금 서해정의 이름을 말했다. 서해정의 이름을 안다.
그 말은, 해정이 나한테 거짓말을 했다는 건데…….
“……해정이랑, 아는 사이세요?”
현수가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생각을 비집고 물었다. 차분한 물음에 남자가 눈을 부릅떴다.
“당신은 뭔데.”
“네?”
“서해정이랑 무슨 사이냐고. 당신부터 말해.”
말이 짧아진 것을 보니, 퍽 나긋한 태도의 현수를 우습게 보기 시작한 모양이었다. 그러면서도 본능적인 경계는 여전히 가시처럼 돋아나 있었다.
“…….”
혹시, 정신병자는 아닐까.
현수의 머리에 문득 그런 생각이 스쳤다. 지금 이 느닷없는 행동들을 보아 그럴 가능성이 다분했다. 휙휙 변하는 태도도 그러했고, 처음 이 남자를 보았을 때도 범상치 않은 분위기가 인상 깊었다. 무엇보다 지금 이 남자는 필요 이상으로 불안에 떨고 있었다. 어떻게 봐도 정상인은 아닌 것 같았다.
“……대답 안 해?”
차근차근 남자의 정체에 대해 추리하며 쌓아 올리던 생각들이 별안간 와르르 무너졌다. 갑작스레 멱살을 잡힌 현수가 눈을 크게 떴다. 퍽. 비닐 봉투가 묵직한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놀란 손이 남자의 어깨를 붙잡듯 쥐었다.
“저기, 진정하시고…….”
“얼른 대답해.”
마음이 조급해지니 행동도 점점 과격해졌다. 이성이 따라잡기에는, 조급함이 너무 빠르게 달려가고 있었다. 택시를 타려다가 이 남자의 뒷모습을 발견했을 때부터 쿵쿵 뛰기 시작한 심장은 도무지 잠잠해지지를 않았다. 무슨 정신으로 따라왔는지도 모르겠다. 그럴 리가 없는데도 서해정이 어디선가 튀어나올 것만 같은 불안이 제 뇌를 쪼아 먹고 있었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현수와 승우를 힐긋힐긋 쳐다보았다. 그 시선들까지 서해정의 것 같아서 승우의 심장을 옥죄었다. 멱살을 쥔 마른 손가락이 푸르게 질렸다. 점점 더 조급해졌다. 어서 알아야 했다. 그 미친놈이 왜 자신을 연극판에 끌어들였는지. 칼을 겨누면서까지 제게 역할을 강요하는 건지. 그 짓거리를 한 건지. 나는 피해자고, 너는 가해자라는 그 말이 단순한 복수가 아니었다면, 대체 왜.
이 남자의 정체가 그 실마리임이 분명했다. 제 정체를 이 남자에게 드러낸 것만으로도 서해정은 길길이 날뛰었다. 이런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윽!”
별안간 어깨를 쥔 손 위로 힘줄이 돋았다. 현수가 강하게 힘을 주어 승우의 몸을 밀어냈다. 겨우겨우 밀어냈다기보다는, 놓아주질 않으니 어쩔 수 없이 거칠게 대한 것이었다. 애초에 제 멱살을 쥔 손아귀의 힘이 약했다.
해골처럼 바싹 마른 몸이 파득 거리며 밀려났다. 승우를 밀어낸 현수가 기어이 인상을 쓴 채로 입을 열었을 때였다. 현수의 외투 주머니 안에 놓여 있던 휴대 전화가 비명을 질렀다. 놀란 듯 몸을 떤 건 승우였다.
“…….”
현수가 칼칼해진 목을 가다듬으며 고민했다.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분명한 발신자의 존재에 돌연 마음이 급해진다. 얼른 해정에게 가야 했다. 하지만 이 남자를 무시하고 갈 수가 없었다. 이 남자의 입에서 나온 이름이, 자신을 그냥 지나갈 수가 없게 만들었다.
“……그쪽 핸드폰 주세요.”
결국 현수가 손을 내밀었다. 승우가 가지런한 손바닥을 멀거니 바라보았다. 해정의 전화로 마음은 급해질 대로 급해졌는데, 상대방은 상황을 파악하지 못했는지 산 시체처럼 눈만 굴리니 답답했다. 현수가 종용하듯 손을 흔들었다.
“지금 해정이한테 전화 오거든요. 그쪽 말대로 다 불어 버리기 전에 얼른 핸드폰 주세요. 제 번호 드릴게요.”
불신의 눈을 하면서도 머뭇머뭇 휴대 전화를 내미는 게, 아무래도 상황에 즉각적으로 잘 휩쓸리는 타입인 듯했다. 곧이어 휴대 전화를 받아 든 현수가 빠른 속도로 제 번호를 눌렀다. 그리고 문자를 보냈다. 불안하게 흔들리는 눈이 현수가 하는 모양을 더듬거리며 관찰한다.
“말 안 할 거니까 그렇게 바라보지 마시고요.”
“…….”
진심이었다. 이 남자의 정체를 알기 전에는 해정에게 말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이건 남자의 부탁을 들어준다기보다는 해정을 보호하기 위함이었다.
승우가 제 휴대 전화를 다시 받아 들었다. 현수는 공연히 침착한 표정을 지으며 바닥에 떨어진 비닐 봉투를 주워 들었으나, 손잡이를 쥔 손은 벌렁거리는 심장을 대변하는 것처럼 잘게 떨리고 있었다.
“대뜸, 사람 멱살 잡고 그러지 마세요.”
이대로 돌아서면 억울할 것 같아서, 현수는 뒤돌기 전 짐짓 경고하듯 말했다. 허나 그 말을 들은 남자가 어떻게 반응하는지까지는 보지 못했다. 느긋하게 살펴볼 겨를이 없었다.
해정이 기다리고 있었다.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하고 있다. 곧바로 등을 돌린 현수가 떨리는 손을 진정시키면서 빠른 속도로 걸었다.
병실로 올라가는 내내 현수는 나무 조각을 세공하는 것처럼 생각을 깎고, 다듬는 데에 집중했다. 검은 눈동자가 닫힌 엘리베이터 문을 빤히 바라보았다.
남자가 던져 놓은 상황에서 자신이 취급해야 할 건 딱 두 가지뿐이었다. 그 남자는 누구인지, 왜 서해정의 주변을 돈 것인지. 그것들만 알게 된다면 해정이 거짓말을 한 이유도 저절로 알게 될 것이었다. ……아니면 해정이 정말 그 남자를 모를 수도 있는 거고. 하여튼, 그 남자와 이야기하면 그 두 가지 의문도 풀 수 있다.
잠시 후, 엘리베이터가 멈추었다. 현수가 대충 생각을 갈무리하면서도 채 다 열리지 않은 문틈 사이로 발을 디밀었다. 한 번 온 해정의 전화는 받기 전에 끊겼고, 자리를 비운 지는 거의 40분이 다 되어 가고 있었다. 마음이 더 급해진다. 현수가 봉지 손잡이를 고쳐 쥐며 병원 복도를 가로지르는 걸음을 서둘렀다.
병실의 문이 열렸다. 현수가 그새 흐트러진 숨을 진정시키며 병실 안에 들어섰다.
부스럭거리는 비닐 봉투의 소리가 크게 느껴질 정도로 병실 안은 조용했다. 침대 위에 웅크려 누워 문 쪽을 바라보고 있는 해정과 현수의 눈이 곧바로 마주쳤다. “해정아.” 현수가 그를 불렀으나, 해정은 소리 내어 답하는 대신 눈을 한 번 깜빡이기만 하였다.
현수가 성큼성큼 걸어 침대에 가까이 다가섰다. 바닥에 비닐 봉투를 내려놓고 그대로 허리를 숙였다. 해정이 현수를 따라 시선을 옮기다가, 이내 등을 침대에 붙여 정면으로 누웠다.
바깥의 서늘함이 배어 있는 손이 따뜻한 볼을 감쌌다. 현수가 그대로 고개를 더 깊이 숙였다. 붉은 입술에 천천히 제 입술을 맞춘 뒤 떨어진다. 입을 맞추느라 잠시 감겨 있던 눈이 다시 뜨였다. 지레 죄책감이 일렁이는 눈동자가 꼼꼼히 해정의 표정을 살폈다.
“미안해. 많이 기다렸어?”
“…….”
해정은 대답 대신 몸을 움직였다. 이불 속에 있던 팔이 드러났다. 손이 위로 올라 현수의 뒷목을 살짝 끌어당겼다.
그 순간, 낯선 냄새가 현수의 코를 스쳤다. ‘이게 무슨 냄새지.’ 현수가 짧게 추측하고 있는 사이 입술이 닿았다. 그리고 떨어졌을 때, 현수의 눈이 번뜩, 크게 뜨였다.
이건 피 냄새다.
“……잠깐만, 너!”
얼굴이 멀어졌다. 현수가 다소 거친 손길로 해정의 손목을 잡아 냈다. 해정이 느릿하게 상체를 일으키며 제 팔목을 바라보고 있는 현수를 응시했다.
시허연 팔목에 아직 아물지 않은 상처가 하나, 그리고 방금 생긴 듯한 상처들이 있었다. 팔목이 흔들리자 죽 길게 그어진 상처 사이로 피가 흘렀다. 이건 저번처럼 물어뜯어 생긴 상처가 아니었다. 짧고 긴 빨간색 줄들이 여러 개 그려져 있었다. 그중에는 깊은 상처도 있었고, 내일이면 옅어질 만큼 얕은 상처도 있었다. 서해정이 자신의 팔을 발작적으로 그어 댔다는 소리다.
병실 안은, 태풍이 휘몰아치고 난 뒤의 고요함만이 자리하고 있던 것이다. 그런 생각까지 치닫자, 울컥, 무엇인가가 가슴에서 치솟았다. 현수가 감정을 꾹 삼키면서 말을 꺼내었다.
“……대체 이게 뭐야. 뭐로 이랬어. 어? 안 아파? 의사 선생님 부를까?”
이번에도 해정은 대답 대신 반대편 손을 들어 보였다.
검지, 중지의 길게 자란 손톱에 피가 묻어 있었다. 손톱으로 팔을 해한 모양이었다. 살짝 뒤집힌 이불에는 핏자국이 나 있었다. 현수가 이불을 아예 걷어치워 버리고 침대 위에 앉았다.
“안 불러도 돼요. 엄마랑 아빠가 알면 더 걱정할 테니까 그냥 형이 약 발라 줘요.”
그사이 해정이 말했다. 덤덤한 말투였다. 현수가 해정의 손목을 고쳐 쥐고 고개를 더 깊이 숙여 상처를 살폈다. 미간이 절로 찌푸려졌다. 아예 날이 예리한 도구로 그었다면 차라리 덜 충격적이었을지도 모른다. 손톱이 길게 자랐다 한들, 어떻게 하면 손톱으로 이런 상처를 낼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팔에 그어진 상처가 무자비했다.
“왜 그랬어. 아프잖아.”
“형이 안 와서요.”
축축한 물음에 간단히 나온 대답은 무미건조했다. ‘……내가 늦게 온 것 때문에 이랬다고?’ 놀란 현수가 작게 숨을 삼키다가 이내 의식적으로 숨을 내쉬었다. 해정의 눈동자가 피 묻은 제 손톱으로 이동했다. 물끄러미 손톱을 바라보는 시선은 티끌의 감정 하나 없었다. 이윽고 다시 현수를 본다. 입이 작게 열렸다.
“형이 너무 안 오니까, 이대로 어디로 가 버린 건 아닐까 싶었어요. 나 두고 어딜 간 걸까. 다시 안 오면 어떡하지. 생각하니까 심장이 빠르게 뛰었어요. 형이 떠나 버린 그 상황이 너무 무서워서 아닐 거라고 부정했어요. 아니야. 형 올 거야. 온다고 했어. 계속 소리 내서 말했어요. 형이 다시 오겠다고 했으니까. 안 잊으려고.”
“…….”
40분.
거의 이틀을 내리 붙어 있었고, 그동안 마음을 인정했고, 끝없이 사랑을 속삭였으며, 숨 쉬듯이 입을 맞추고 안아 주었다. 그리고 떨어져 있던 시간은 기껏해야 40분이었다.
“조금 안정됐다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누가 문을 열었어요. 괴물이요. 괴물이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는데, 제 목을 엄청 세게 졸랐어요. 진짜 죽이려는 것 같았어요. 숨이 막혀서 아무 생각이 안 났어요. 다시 오겠다고 했던 말들도 갑자기 생각이 안 났어요. 그러니까 괴물이 막 웃었어요. 그리고 계속 그랬어요, 나한테.”
그런데도 해정은 고통스러워했다. 저와 떨어진 고작 그 40분 동안 괴로워하다가 환상을 보고, 공포를 느끼고, 숨까지 쉬지 못했다.
“…….”
그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대체 왜. 뭐가 그렇게 그를 고통스럽게 만드는 걸까. 왜 괴물을 보는 걸까.
현수의 아랫입술이 이에 꽉 짓눌렸다. 손목을 연신 쓰다듬는 손가락이 못내 조급한 움직임으로 흔들렸다. 해정이 느리게 상체를 숙여 현수의 어깨에 제 이마를 기댔다. 그리고 목소리를 낮췄다.
“김현수는 안 와. 널 떠날 거야. 도망칠 거야. 널 싫어해. 사라질 거야. 사라질 거야. 라고, 계속 그랬어요.”
얼굴이 돌아갔다. 건조한 입술이 목줄기에 닿았다. 그대로 말을 잇는다.
“그 말들이 너무 고통스러워서, 다른 생각을 하고 싶었어요. 근데 다른 생각이 잘 안 났어요. 그럴 겨를도 안 줄 것처럼 괴물이 계속 말했거든요. 형이 나를 떠나는 상상을 계속하게 만들었거든.”
“…….”
“그래서, 그랬어요. 몸이 고통스러워야 다른 생각이 안 나니까.”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도무지 모르겠다. 해정에게 어떻게 해 줘야 할지 모르겠다. 아니, 그 괴물을 어떻게 막아야 할지 모르겠다.
본인은 모르는 것 같았지만, 해정은 잘 때도 가끔 신음을 흘리면서 괴로워했었다. 문득 그것이 생각나, 현수가 해정의 머리를 감싸고 저를 바라보게 했다. 가까이에 눈이 자리했다. 짙은 밤처럼 탁하게 가라앉은 눈 한가운데에는 저만 비춰져 있었다.
“꿈에서도 괴물이 나타나?”
“……요즘 가끔요.”
정말 몰랐던 모양이었다. 해정이 놀란 듯 눈을 살짝 키우다가, 이내 눈을 아래로 내리깔며 대답했다. 숨기고 싶었던 건지 대답하는 목소리가 영 흐릿했다. 현수가 괜찮다는 의사로 보드라운 뺨을 둥글게 매만졌다. 그리고 한 번 더 물었다.
“언제부터 그랬는데?”
“얼마 전에, 괴물의 얼굴을 봤던 날부터요.”
맞다. 그랬었다. 해정은 괴물의 얼굴을 봤다고 했다.
“…….”
괜스레 마음이 복잡해져 조용히 뺨만 매만지고 있자, 해정이 눈을 들어 그런 현수를 살폈다. 답지 않게 기운이 한껏 수그러져 있었다.
“나 너무 겁쟁이 같죠.”
“어?”
느닷없는 말에 현수가 뺨을 만지던 걸 멈추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해정이 눈을 두어 번 깜빡이면서 고개를 살짝 숙였다.
“이제 스무 살인데…… 그렇잖아요. 환청에, 환각에, 그걸 못 이겨서 자해까지 하고. 혼자서 서 있지도 못하는 것 같아요. 애처럼 악몽까지 꾸잖아요. 잘 때마저도 공포에 떨고 있는 거나 다름없는 거고. 형이 더 봐 주니까, 더 신경 써 주니까 좋기는 한데…….”
“…….”
“내가 너무 겁쟁이 같아서, 형이 싫어할까 봐 걱정돼요.”
이제야 좋아한다고 해 줬는데…….
말끝이 웅얼웅얼 입 안으로 먹혀 들어갔다. 깜빡거리는 속눈썹이 나비처럼 펄럭이다가, 이내 바르르 떨었다.
뺨 부근에 올라 있던 손이 천천히 내려갔다. 그리고 단단한 허리를 붙들었다. 살포시 쥐어 잡는 감각에 해정이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어 올렸다. 얼굴이 마주했다. 단정한 얼굴에 미미한 웃음이 걸쳐 있었다. 현수가 작게 입을 열었다.
“좋아하는 사람한테까지 씩씩한 척하는 사람이 바보인 거야.”
비밀을 말하는 것처럼 속삭인다. 해정이 눈을 한 번 감았다 뜨는 사이, 현수가 짧게 키스했다. 체온이 닿았다 떨어지는 그 찰나의 감각에 일렁이던 감정들이 잠잠해졌다. 신기하고도 파괴적인 힘이었다.
* * *
“나 토요일에 퇴원해요.”
똑깍. 소리가 났다. 현수가 고개를 들어 올렸다. 두 눈이 마주했다. “다 나았대?” 의아하다는 듯 묻는 목소리에 해정이 약하게 웃었다.
“사실 나은 지는 꽤 됐어요. 형이 올 때쯤은 열도 내려갔고, 괜찮았는데 제가 버티고 있던 거였거든요.”
그렇게 말하면서 계속하라는 듯 현수의 손 위에 놓여 있는 제 손을 힐긋 본다. 현수가 다시 고개를 숙였다. 손톱깎이가 약지 손톱에 자리 잡았다. 똑깍. 다시 작은 소리가 났다.
“퇴원 안 했다고? 왜?”
“형이랑 여기 계속 있는 게 좋아서요.”
‘농담인가. 진담인가.’ 헷갈려서 현수는 작게 웃고 말았다. 이윽고 소지의 손톱까지 다 깎아 낸 현수가 “반대쪽.” 하며 손을 내밀었다. 해정이 바싹 손톱이 짧아진 손을 거두고 반대편 손을 내밀었다. 곧바로 손을 아래로 감싸 오는 손바닥의 감촉이 좋아서 스멀스멀 웃음이 나왔다.
“아, 진짜 좋은데 어떡하지. 손톱 다시 자랄 때까지라도 더 있고 싶다.”
진심이었다. 저를 위해 현수가 이것저것 챙겨 주는 것도 좋았고, 짐짓 입맛이 없다고 하면 숟가락으로 직접 밥을 떠서 입에 넣어 주는 것도 좋았다. 안아 주는 것은 물론이고 키스도 자주했다. 잘 때도 현수의 품에 안겨서 잤다. 너무 행복해서 공기가 꿀에 절여져 있는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숨 쉬는 것조차 달콤했다.
그래서 퇴원을 미루고, 또 미룬 건데 아마도 이번 토요일까지가 한계인 듯했다. 아무도 오지 말라고 하면서도 계속 병원에 눌러앉아 있는 자신이 부모는 못내 걱정인 모양이었다. 종종 전화로 병원에서 뭐 하는 것인지 꼬치꼬치 캐묻는 것이 영 불안했다. 시간만 된다면 불시에 방문할 기세였다. 사실 부모만 오는 거면 상관없었지만, 최승우까지 함께라면 문제였다.
“어차피 병원 아니라도 매일 만나는데 뭐 어때.”
해정의 말에 현수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 그렇게 말했다. 손톱을 깎는 데 집중하느라 말똥거리는 눈이 귀여워서 해정이 슬쩍 강아지를 만지는 것처럼 그의 머리칼을 매만졌다. 현수는 의식하지 못한 듯했다. “매일 같이 자지는 않잖아요.” 들으라는 듯 짐짓 퉁명스럽게 말했지만 그 또한 의식하지 못한 건지 달라질 것 없는 표정으로 작게 고개를 끄덕인다.
“그건 그러네.”
“…….”
퇴원해도 같이 자자는 뜻이었는데, 그걸 알아주지 않으니 또 그새 심통이 났다. 저도 모르게 손가락을 움칠거린 것인지 현수가 “손 움직이지 마.” 했다. 해정이 손가락에 빳빳이 힘을 주면서 무어라 말을 했다. 손톱을 깎는 것에 집중한 탓에 해정의 말을 제대로 듣지 못한 현수가 잠시 하던 것을 멈추고 고개를 들어 올렸다.
“응? 뭐라고 했어?”
“계단에서 구르면 전치 얼마나 나올까요?”
해정이 녹음된 음성을 재생하는 것처럼 똑같은 어조로 말을 했다. 그에 별안간 현수의 미간이 구겨졌다. 기다렸다는 듯 간격 없이 툭 튀어나온 말 때문이 아니었다. 그 말의 의도를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어서였다. 급기야 이상한 추측까지 삽시간에 머리를 뒤덮는다.
“……갑자기 그런 건 왜?”
허투루 물어본 건 아니었는지, 해정이 대답하려는 듯 입을 열다가 곧바로 입을 닫았다. 되물어 오는 현수의 얼굴이 차갑게 굳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말은 안 하는 게 나으려나.’ 해정이 생각했다.
요즘 해정은 조금, 현수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그의 고백을 들은 이후, 해정으로서는 낯선 욕심이 생긴 탓이었다.
그가 불쾌해하거나 당혹스러워하는 말이나 행동은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 쪽으로는 이상하게 머리가 잘 안 굴러가는 까닭에 보통의 기준을 잘 파악할 수가 없어 조금 골치 아프긴 했으나, 괜찮았다. 즉각적으로 그의 얼굴을 봐 가면서 판단하면 되는 일이었다.
‘계단에서 굴러서라도 더 입원하고 싶어서요.’라는 말은, 안 하는 게 옳을 것 같다. 그리 판단한 해정이 어색하지 않을 타이밍에 다시금 입을 열었다.
“그냥요. 뭐, 궁금해서.”
“……그런 말 하지 마. 형 놀라게.”
“알았어요.”
약하게 손을 누르던 힘이 떨어졌다. 손톱이 짧게 깎인 손이 소리 없이 주먹을 쥐었다가, 폈다. 손톱깎이를 협탁 서랍에 넣어 두는 현수를 바라보는 시선이 끈질겼다.
조금 뒤 눈이 마주쳤다. 해정이 기다렸다는 양 의식적으로 눈을 휘고 웃었다. 팔을 벌린다. 자석처럼 자연스레 붙어 오는 몸을 그대로 팔 안에 가두었다.
“…….”
“…….”
아무리 그래도, 속절없이 지나가는 시간이 못 견디게 싫었다. 아무런 수확 없이 퇴원하는 건 아까웠다. 현수의 몸을 안고, 가만히 그 시원한 체향을 맡고 있자니 그런 생각이 물방울처럼 뚝뚝 떨어졌다.
등을 안고 있던 손이 유려한 움직임으로 내려갔다. 허리를 슬쩍 매만지자 근육이 긴장한 게 느껴졌다. 한 번 숨을 크게 들이마신 해정이 엄지를 세워 허리를 위에서 아래로 죽 훑었다.
그리고 입을 열어서 무어라고 작게, 아주 작게 속삭였다.
“형. 나 퇴원하면요…….”
숨으로 눅눅하게 젖어 있는 목소리. 그마저도 뒷말은 현수의 귀에만 들어올 정도의 크기였다. 현수가 대답을 하지 못한 이유는 외설적으로 들리기까지 하는 그 목소리 때문만이 아니었다. 말의 내용이 더욱 낯부끄러웠다.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그는 그저 혀를 내밀어 제 입술을 축였다.
“…….”
“……응?”
대답 없는 현수가 답답한지 기어이 해정이 대답을 졸랐다. 허리 부근에 놓여 있는 손이 슬쩍 마른 살가죽을 아프지 않게 꼬집었다.
“…….”
고개를 살짝 끄덕이는 움직임은 보이지 않을 정도로 찰나였고, 약했다. 하지만 그 정도로 충분했다.
해정이 웃었다. 아까와 다르게, 정말 기분에서 우러나오는 웃음이었다. 그새 붉어진 뒷목을 더듬어 오는 손이 섬세했다.
* * *
방 안을 둘러싼 적막이 낯설었다. 해정과 함께 있을 때도 그렇게 시끄러운 건 아니었지만, 그의 존재가 있다는 의식만으로 머릿속이 시끄러울 때가 많았다. 특히 그 웃는 얼굴을 볼 때 그러했다.
밀린 집안일을 끝냈는데도 겨우 정오를 넘긴 시간이었다. ‘해정이는 이제 밥 먹고 있으려나.’ 현수는 생각하며 무감한 표정으로 냉장고 문을 열었다. 여러 가지 먹을 건 많았는데, 먹고 싶은 건 없었다.
퇴원을 하는 날에는 부모가 데리러 온다고 했다. 마주치고 싶은 마음이 있는 건 아니라서 자리를 피할 생각이기는 했지만 해정이 먼저 말을 꺼낼 줄은 몰랐다.
집에 가 있을래요? 점심만 엄마 아빠랑 먹고 집으로 갈게요.
아직 해가 다 뜨지 않은 새벽이었다. 현수를 약하게 흔들어 깨운 해정은 그의 얼굴 곳곳에 키스하면서도 그리 말했다. 부드러운 어조였으나 행동은 어딘가 조급했다. 꼭 독촉하는 것 같은 느낌에 현수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부모님에게 설명하기 어려운 관계다. 그러니까, 유치하게 섭섭해하거나 속상해할 필요 따위는 없다. 현수는 스스로에게 그렇게 말하면서 탁, 냉장고 문을 닫았다.
점심은 정호와 먹어야겠다.
* * *
“일주일 내내 구역질 나도록 먹었던 부대찌개를 내가 쉬는 날까지도 먹어야겠냐?”
정호는 투덜투덜 불평을 하면서도 습관처럼 집게를 들더니 라면 사리를 살살 건드려 풀었다. 현수가 물컵에 입술을 갖다 댄 채 작게 웃다가, 물을 삼켰다. 물컵을 내려놓았을 때 정호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서, 빨리 말해.”
집게가 냄비에 걸쳐졌다. 냄비를 바라보고 있던 눈이 이동해 현수를 바라보았다.
올 것이 왔다. 현수는 꼭 벌을 받을 차례가 된 아이처럼 조금 긴장한 얼굴을 했다. 손가락 끝이 의미 없이 테이블 위를 미끄러지며 원을 그렸다.
“나, 만나는 사람 생겼어.”
작은 목소리가 손가락 끝처럼 테이블 위를 미끄러져 흘렀다. 전달할 의사가 없는 것처럼 또렷하지 못했는데도 용케 들었는지, 정호가 쩌억 턱을 벌렸다. 동그랗게 뜨인 눈이 놀람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다. 현수가 자조적으로 웃으며 “그게 그렇게 놀랄 일이냐.” 하자 고개를 크게 끄덕인다.
“만난다는 게, 그러니까…… 미트가 아니라, 어, 그러니까…… 러브. 러브 말하는 거지?”
“……러브…….”
현수가 망연히 단어를 되새기자 정호가 “어? 맞지?” 믿기지 않는다는 듯 재차 물어 왔다. 현수가 제 뒷머리를 긁으면서 애매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별안간 정호가 불쑥 상체를 내밀고 현수의 손을 붙잡았다.
“축하한다. 친구야. 너도 드디어 모태솔로 딱지 뗐구나.”
“…….”
“서른 살이나 먹고 이제야 뗀 거지만 그래도 난 네가 정말 자랑스럽다. 다 컸네, 다 컸어.”
“…….”
“이제 경태만 남은 거네. 경태만 여자 친구 생기면…….”
“그, 정호야.”
현수가 붙잡힌 제 손을 슬그머니 물리며 신난 듯 주절주절 떠드는 정호의 목소리를 잡아챘다. 아까보다 조금 더 낮고, 긴장으로 딱딱하게 굳은 목소리였다. 정호가 두 눈썹을 위로 치켜세우며 “어?” 물었다. 조금 전과 다름없는 높이었다.
“그…….”
“어, 왜?”
천연하게 눈을 깜빡이는 얼굴에 폭탄을 던질 생각을 하니, 눈앞이 컴컴해지는 기분이었다. 어느새 손바닥에 땀이 배어 나왔다. 현수가 공연히 손을 쥐었다가 폈다. 입을 떼는 그 작은 몸짓이 이다지도 무거울 줄은 생각도 하지 못했다.
“……나 사귀는 사람 있잖아.”
“응.”
이쯤이면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읽을 만도 한데, 정호는 현수가 누군가와 교제를 하고 있다는 사실에 이미 도취되어 있는 듯했다.
현수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그대로 목소리를 흘렸다.
“남자야.”
눈을 빼곡하게 채우던 도취가 깨지고, 그 위에 커다란 물음표가 떠오른다. 정호가 눈을 느리게 한 번 감았다가, 떴다. 살짝 웃고 있던 입 모양 그대로 “어?” 하고 묻는 게 저가 잘못 들었을 가능성을 고려해 보는 모양이었다. 현수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리고 조금 더 정확한 발음으로 말했다.
“남자야.”
“…….”
“……이번에 스무 살 됐어.”
“…….”
“그리고 너도 아는…….”
“…….”
“그, 스토커,”
짧고 작게 터지는 정보들, 그리고 침묵. 그것을 가르고 현수가 또 한 번 말했다.
“…….”
“……걔야.”
드르륵. 돌연 의자가 바닥에 끌리는 소리가 났다. 벌떡 자리에서 일어난 정호의 얼굴이 푸르게 질려 있었다. 눈을 마주할 자신이 없어 현수는 약간 고개를 낮췄다.
잠시 후, 가만히 선 채로 현수의 정수리를 바라보고 있던 정호가 이내 힘이 풀린 것처럼 털썩, 제 자리에 앉았다.
“…….”
“…….”
이 침묵이 무거운 건 사실이었으나 털어놓으니 마음은 또 가벼웠다.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정호에게만은 언젠가 얘기해야 할 사실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해정을 만나기 전에는 자신의 생활에 가장 밀접해 있던 사람이다. 숨긴다 해도 언젠가는 들킬 것이었고 완벽히 숨기려면 사이가 멀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정호와 멀어지는 건 싫었다. 무엇보다 그는 이해해 줄 것이라는 믿음이 현수에게는 있었다.
살짝 벌어진 입술이 떨어졌다. 두둑했던 발성이 바람이 빠진 것처럼 침묵 사이를 힘없이 흘렀다.
“……농담이길, 바라는데…….”
“…….”
“농담은…… 아닌 것 같네.”
물음에 가까운 혼잣말이었다. 현수는 대답 대신 입을 꾹 다문 채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그 작은 고갯짓을 확인한 정호가 기어이 가슴팍이 들썩일 정도로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리고 제 얼굴을 감싸더니 “하아…….” 한숨을 내쉬었다. 얼굴은 드러나지 않았다.
현수는 생각을 정리하는 것처럼 손에 얼굴을 묻은 채로 굳은 정호를 바라보다가, 공연히 집게를 들어 정호의 밑 접시에 라면 사리를 옮겨 담았다.
식기가 부딪히는 소리에 눈을 가린 손가락이 슬쩍 틈을 만든다. 정호가 현수가 하는 양을 가늘게 뜬 눈으로 보며 “지금 내가…… 라면이 들어가겠냐?” 했다.
“너 설익은 거 좋아하잖아. 일단 먹어. ……먹고, 자세히 말해 줄게.”
“이미 너무 자세해. 너무너무. 돌아 버릴 정도로.”
“……그래 그럼. 말하지 말고 그냥 먹자.”
“이 미친놈이. 장난해? 죽여 버리기 전에 빨리 자세히 말해.”
힘없는 목소리가 돌연 발끈 튀어 오른다. 오락가락하는 게, 자못 충격을 받은 모양이었다. 부대찌개 냄새가 그래도 구미가 당기기는 하는 것인지 끝내 젓가락을 든 정호가 후루룩, 라면을 빨아들였다. 그게 조금은 안심이 되어 현수는 소리 없이 웃었다. 정호의 눈썹이 휙 올라갔다.
“웃어?”
현수가 얼른 웃음을 거두고 “미안.” 했다. 정호가 젓가락으로 냄비 안에 남아 있는 라면 사리를 깡그리 모으더니 제 밑 접시에 담았다. “말해. 자세히.” 짧은 말이 떨어졌다. 현수가 테이블 아래에 제 손을 모으고 손톱 거스러미를 갉작였다.
“정신적으로 좀 아픈 애야. 나한테 의지를 많이 해서…….”
“그 말 했었어. 그래서 그거랑 너랑 사귀는 거랑 무슨 상관인데.”
“……자주 우리 집에 와 있었어. 내가 없으면 자꾸 괴물 같은 걸 보나 봐.”
“괴물?”
“환각을 보는 것 같아. 그게 무섭다고 자해도 해, 가끔은.”
후루룩, 라면을 한껏 빨아들여 먹던 정호가 눈썹을 일그러뜨렸다.
“정신과 가야 되는 거 아니야?”
“그래도 잘 치료가 안 돼서…….”
“그래서?”
“내가 옆에 있어 주면 괜찮대. 그래서 옆에 있어 주다 보니까 정들고…… 뭐, 그러다 보니 나도 좋아하게 됐어.”
“……너 원래 여자 좋아했던 건, 맞지?”
진지하게 사귀고 싶다거나 접근할 생각까지 한 적은 없었지만, 예쁜 여자를 보면 가슴이 설레긴 했다. 잘생긴 남자에게 눈을 떼지 못한 적은 또 없었다. 현수가 고개를 짧게 끄덕였다. 탁. 정호가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와.” 짧게 탄성을 내면서 의자에 등을 붙인다.
“그럼 그 자식이 너 꼬드긴 거네.”
“아니야. 내가 고백했어.”
‘해정이가 유도한 건 맞지만.’ 뒷말은 속으로 삼킨 현수가 입에 물을 머금고 바싹 마른 입 속을 축였다. 뻐근할 만큼 긴장했던 뒷목이 이제야 조금씩 풀리는 것 같았다.
현수의 말에 정호는 그것도 공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국자를 들었다.
“하긴. 나이 차로 보면 네가 양심 없는 거다. 야, 혹시 몰라서 하는 말인데 아무한테도 말 하지 마라. ……경태랑 우석이한테도 나중에 말해. 걔네들을 못 믿는 건 아니고,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냄비 안을 휘젓던 국자가 갑자기 현수를 겨누었다. 현수가 고개를 끄덕이며 “응.” 했다. 대답을 듣고 나서야 정호가 국자를 내렸다. 부대찌개를 한가득 퍼 담는다.
“그래서, 요즘은 괜찮대?”
“어?”
“걔 말이야. 네가 있어 주면 좀 낫다며.”
건성으로 묻는 목소리였다. 정호는 어떤 의도를 품고 묻는 게 아니었다. 그저 누군가가 아프다고 하니 안위를 묻는 도의적인 차원에서의 물음이었다.
그런데도, 그 물음을 듣는 순간 현수의 머리에 언젠가 경태가 날카롭게 박아 두었던 그 물음이 떠올랐다.
「그 미성년자에 스토커라는 놈. 네가 받아 주니까 잠잠해지든? 좀, 나아지는 것 같아?」
냉기가 퍼지는 건 찰나였다. 얼어붙은 뇌가 생각의 흐름을 막았다.
정호가 숟가락질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멀거니 멈춰 있는 현수를 잠시 바라보다가 “뭐 해?” 묻는다. 현수의 몸이 눈에 띄게 움칠 떨렸다.
“아, 아니, 아, 응.”
“뭐야, 아니라는 거, 맞다는 거.”
핀잔을 주는 목소리였지만 현수가 어떻게 대답하든 상관없다는 듯 발음은 뭉툭했다. 허를 찌를 정도의 예리한 질문도 아니었다. 단순하면서도 당연한 이야기였다. 불안증을 앓는 아이가 자신을 옆에 두면 좀 나아진다고 했고, 그래서 옆에 있어 주었다. 그럼 나아지는 게 당연한 수순인 거다.
나아졌나.
자신이 40분 자리를 비웠다고 자해했던 그 아이를 두고, 과연 나아졌다고 말할 수 있을까.
“…….”
잠시 생각하던 현수가 눈을 서서히 들어 다시 그릇에 얼굴을 박고 있는 정호의 정수리를 바라보았다.
“……응. 나아졌어.”
말이 천천히 흘러나왔다. 정호가 “그래?” 흥미 없다는 듯 되물으며 고개를 들어 물을 마셨다. 현수의 목울대가 작게 울렁였다.
* * *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는 신호등이 바뀌는 줄 몰라 뒤에서 두 번이나 경적을 울렸고, 바보처럼 길을 잘못 들어 10분을 빙빙 돌았다.
젠장.
겨우겨우 빌라 주차장에 차를 세운 현수가 핸들 위에 이마를 박으면서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해정과 시간을 보내는 것에 눈이 멀어 보지 못했던 객관적인 사실들이 주룩주룩 비처럼 머리 위로 쏟아지는 것 같았다. ‘정말 내가 도움이 되는 걸까.’ 해정에게 그렇게 물어보면, 해정은 분명 한 치의 망설임 없이, 혹은 도리어 그런 질문을 받은 게 기분 나쁘다는 듯이 당연하다고 대답할 것이다.
근데 상황은 전혀 아닌 것 같았다. 예전에 경태에게 그 질문을 받았을 때는 겨우겨우 외면할 수 있었지만 이제는 외면하면 안 되었다. 되지도 않았다. 해정은 이제 타인이 아니다.
뭐가 문제일까.
저가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도움이 되고 싶었다. 어쭙잖게 걱정해서 저밖에 모르는 그 아이가 섣불리 신경 안정제를 먹는 상황을 만드는 게 아닌, 정말 실질적인 도움이.
집에 올라가 씻고, 옷을 갈아입는 동안에도 그런 생각들은 현수의 머리를 빼곡하게 채우고 톱니바퀴가 굴러가듯 쉴 새 없이 맞물려 움직이고 있었다.
“후우…….”
그리고 현관문에서 소리가 들린 것은, 끝내 현수의 입에서 한숨이 새어 나왔을 때였다. 침대 위에 붙었던 엉덩이가 곧바로 떨어졌다. 해정이다. 작동하며 뱅뱅 돌고 있던 생각이 돌연 정지했다.
현수가 방에서 나와 신발장 앞에 섰다. 띠리릭. 잠금장치가 돌아가며 풀리는 동안 어떤 자세로 해정을 반겨야 하는지 잠시 고민했다. 그사이 문이 열렸다. 팔짱을 꼈다가 ‘이건 아닌가.’ 생각하며 급히 팔을 푼 현수가 본능적으로 현관에 발을 디뎠다. 맨발이 현관 바닥에 아무렇게나 놓여 있던 스니커즈 위를 짓눌렀다.
“해정…… 윽.”
문이 열리자마자 익숙한 품이 한꺼번에 현수의 몸을 껴안았다. 그리고 여전히 적응하지 못한 팔의 힘이 허리를 꽉 둘러멨다. 스니커즈 위에 놓여 있던 맨발이 쏟아지는 힘에 의해 다시 집 안으로 한 걸음 물러섰다.
차가운 몸과 달리 델 듯 뜨거운 입술이 현수의 목덜미와 턱에 연신 도장을 찍었다. 쪽. 쪽. 쪽. 살짝살짝 빨아들이는 소리가 귀엽게 느껴져서, 현수는 작게 웃었다. 단단한 목을 껴안자 해정의 얼굴이 목과 쇄골 사이에 더 깊숙이 파고들었다.
해정은 현수의 살갗이 꼭 사탕인 것처럼 여러 번 쪽쪽 빠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발로 제 신발을 대충 벗어 뒤로 내던졌다. 현관문에 신발이 부딪히는 소리가 나자 현수가 확인하려는 듯 얼굴을 비틀었으나 곧바로 해정의 손에 가로막혔다.
“잠깐, 천천히…….”
두 뺨이 붙잡히자 놀라 무어라고 할 새도 없이 해정이 키스해 왔다. 다시 현수의 발이 뒤로 물러섰다. 현수가 물러서는 것만큼 앞으로 나아가던 해정이 이내 뺨을 붙들던 손을 내렸다. 다시 허리를 꽉 붙들어 당긴다. 두 상체가 바짝 밀착했다.
“으음…….”
천천히, 라는 말은 하지만 하지 말라고는 안 하는 현수가 좋았다. 밀려드는 혀를 감당하지 못하고 이따금씩 흘리는 소리도 예뻤다. 소리까지 먹을 수만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해정이 계속 뒤로 밀리는 몸을 제 쪽으로 당기면서도, 더 다가가고 싶어서 한 걸음씩 옮겼다. 집 안에는 혀가 섞이는 소리와 현수의 신음이 느린 템포로 뒤섞였다.
“해정아, 나, 하아……, 숨, 막혀.”
입술이 떨어졌다. 밑도 끝도 없이 몰아붙이는 힘을 감당하지 못하고 밀리기만 하니 어느새 침대 아래에 눕듯이 앉아 있었다. 숨을 몰아쉬면서도 다시 다가오려는 해정의 어깨를 붙잡으며 현수가 말했다.
잠시 멈칫하던 해정이 입술로 다가가던 얼굴을 내려 마른 어깨에 이마를 기댔다. 느리고 뜨거운 숨이 살 위로 느껴졌다.
“우리 빨리 해요, 형. 약속했잖아요.”
잔뜩 안달이 난 목소리가 낮게 울렸다. 그 순간 며칠 전, 해정이 했던 말이 현수의 머리에 떠올랐다.
형. 나 퇴원하면요…….
‘아. 그래서…….’ 해정이 유독 불도저처럼 밀어붙이고 있는 이유를 현수가 그제야 수긍했다. 그사이, 해정이 파고들고 있던 어깨에 살을 비비면서 또 한 번 보채는 소리를 내었다.
“빨리. 응?”
손이 미끄러지듯 티셔츠를 걷어 내고 허리를 매만지기 시작했다. 어찌나 조급한지 늘 버석할 정도로 건조하던 손이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
어떡하지. 현수는 잠시 고민했다. 마음의 준비 정도는 어렵지 않았다. 해정이 어떤 방식으로 저를 만지든지 상관없었다. 어차피, 그를 좋아한다고 인정했을 때부터 염두에 두고 있었다.
다만…….
“……아!”
기어이 인내심이 바닥이 난 모양인지 불현듯 해정이 이를 세워 귓불을 콱 물어 왔다. 생각에 잠겨 있던 현수가 어깨를 파르르 떨었다. 해정의 어깨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현수가 고개를 숙여 얼굴을 마주했다. 해정은 조금 화가 난 듯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눈에서 불꽃이 툭툭 소리를 내며 튀고 있다. 조금 더 망설이면 화르륵 타오를 것이었다.
“약속했잖아요.”
“아, 아니, 그러니까, 해도 되는데…….”
“되는데.”
“근데…….”
허리를 쥔 손이 더 세게 살을 짓뭉갰다. “아, 아파, 해정아…….” 현수가 작게 얼렀으나 해정은 듣지 못한 척 말이나 하라는 얼굴로 일관했다.
현수가 해정의 목을 끌어당겨 제 표정을 보지 못하게 꽉 안았다. 벌써부터 얼굴에 열이 몰렸다. 그도 그럴 게, 당장 해야 할 말이 스스로도 수치스러웠다.
“내가 잘 못해서, 네가 실망할까 봐…….”
허나 수치스러운 만큼, 가장 노골적인 진심이었다.
화난 듯 살짝 거칠었던 숨이 별안간 뚝 멎었다. 덩달아 긴장이 되었다. 현수가 입을 꾹 다물었다.
제 서투른 모습 따위에 해정이 실망하지 않는다는 것 정도는 안다. 그렇지만 이건 스스로의 문제였다. 열 살이나 많은 연상인데도, 해정과 다를 바가 하나도 없었다. 둘 중 어느 누구도 능숙하지 못했다. 해정은 나이로 변명할 수 있겠지만 저는 아니었다. 그 사실들이 저를 바보로 만드는 것 같았다. 정호의 말대로 자신은 이제야 자라고 있는지도 몰랐다.
여러 가지 자책이 섞인 생각들이 현수의 머리를 휘젓는 중이었다. 별안간 해정이 작은 소리로 웃기 시작했다. ‘비웃는 건가.’ 현수가 생각하며 몸을 떼어 내려는 찰나였다. 해정이 팔에 힘을 주어 현수를 안아 일으켰다. 몸이 가볍게 들렸다. 이윽고, 현수의 등이 침대 위에 닿았다.
“……그러게요. 내가 실망하면 어쩌죠?”
몸이 현수의 다리 사이에 자리 잡았다. 해정은 방글방글 웃는 얼굴로 그렇게 말하면서도 거침없이 제 코트와 감색 터틀넥을 벗어 던졌다. 갑작스레 드러난 상체는 탄탄하면서도 얼굴처럼 예뻤다. 균형이 잘 잡힌 몸이었다. 이 몸에 가장 어울리지 않는 건, 옆구리에 생생하게 자리한 긴 흉터였다. 그에 시선을 빼앗길 새도 없이 고운 얼굴이 다가와 또 한 차례 키스했다.
현수의 뒷머리가 매트리스에 깊이 파묻혔다가, 올랐다. 이윽고 얼굴이 천천히 떨어졌다.
“난 진짜 평생 좆 세워 본 건 형밖에 없는데.”
“아…… 읏…….”
타액으로 번들거리는 입술이 턱을 한 번 가볍게 핥고는 물 흐르듯 내려가 쇄골을 세게 깨물었다. 현수가 등을 비틀면서도 해정의 목에 손을 감았다. 큰 손이 너풀거리는 티셔츠 자락을 위로 걷어 냈다. 별안간 느껴지는 한기에 살 위로 소름이 돋아났다.
“따먹고 싶다고 생각한 건 형밖에 없는데.”
“아……!”
느긋하게 말을 잇던 입술 사이로 입김이 퍼졌다. 그 덕에 가슴께에 얼굴이 있는 건 알았는데, 유두가 깨물릴 거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현수의 허리가 놀란 듯 들썩였다. 혀가 딱딱하게 굳은 돌기를 달래듯 핥아 올렸다.
“나 미치게 하는 건 김현수 몸밖에 없는데……, 응?”
“아, 아파……!”
왜 그런 생각을 하고 앉았어요. 뒷말은 삼킨 해정이 손톱을 세워 반대편 유두를 세게 비틀어 꼬집었다. 이번엔 많이 아팠는지 현수가 참다못해 비명을 터뜨렸다.
바싹 대고 제게 낮게 말하는 얼굴은 무언가로 일렁거리고 있었다. 화난 건 아닌데, 화난 감정과 닮아 있다. 성대가 벌벌 떨리는 느낌에 현수가 짐짓 침을 꼴깍 삼켰다. 곧이어 다정하게 볼에 키스하는 입술의 감각이 느껴졌다.
“그럼, 형이 좀 노력해 줄래요?”
빙글빙글 묻는 목소리는 놀리는 것처럼 들떠 있었다. 다시 얼굴이 마주했다. 코끝이 닿을 듯한 거리였다. 현수는 대답 대신 숨을 삼켰다. 유두에 느껴지는 알싸한 통증 탓에 머리가 어지러웠다.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그렇지만 꼭 대답을 바라고 물은 건 아니었는지, 해정은 짧은 간격으로 다시 말했다. 슬쩍 웃는 얼굴이 그답지 않게 음습하게 느껴졌다.
“내가 실망하지 않게요. 노력해 줄래요?”
“노력이야 하겠지만…….”
“네. 그러면 됐어요.”
말끝을 잡아채는 목소리는 평소와 같았으나 눈은 그렇지 못했다. 눈동자만은 감정이 숨겨지지 않는 듯했다. 번개처럼 번쩍, 무언가가 다갈색 눈 위로 스친 순간이었다.
“아, 잠깐……!”
별안간 바지와 브리프가 끌려가듯 쑥 내려갔다. 갑작스러운 속도감이 적응되지 않아 입버릇처럼 한 말이었는데, 해정은 벗긴 옷을 등 뒤로 아무렇게나 던져 버리면서 “실망 안 시킨다고 했잖아요.” 했다. 딱딱한 말투였다.
건수 잡혔다. 현수는 생각했다. 해정의 속셈이 짐작되었으나, 그것을 지적할 생각은 없었다. 넘어뜨린다면 넘어질 것이다.
곧이어 해정이 상체를 일으키고 제 바지 벨트를 풀기 시작했다. 그러면서도 맨몸의 현수를 훑어보는 눈이 면밀했다. 몸을 보는 것에 집중을 뺏기는 것인지 두어 번 헛손질을 하기도 했다. 시선이 여기저기를 파고들수록 눈의 온도가 높아졌다.
누군가의 피사체가 된 건 처음이었다. 낯설기는 했지만, 생각보다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도리어 저도 덩달아 체온이 올라가는 것 같았다.
“……형 섰어요.”
브리프를 내리던 해정이 문득 그렇게 말했다. 비웃는 목소리는 아니었지만 공연히 부끄러워져 현수가 다리를 모으며 몸을 옆으로 비틀었다.
잠시 후, 해정의 것이 열린 바지 사이로 튀어나왔다. 터질 듯 발기해 있는 성기는 보는 것만으로도 부담스러웠다. 상태에서부터 크기까지 그랬다. 기어이 현수가 얼굴까지 옆으로 돌려 버렸다.
턱이 잡힌 건 바로 다음 순간이었다. 다시 얼굴이 정면으로 돌아갔다. 금세 가까이 자리한 해정의 얼굴이 붉었다. 눈은 길길이 흥분하고 있었는데, 또 아닌 척 제 아랫입술을 훑는다.
“…….”
“내 마음대로 해도, 나 안 싫어하겠다고 약속해 줄 수 있어요?”
나지막이 묻는 목소리는 흥분한 와중에도 치밀하게 그물을 치고 있었다. 약속. 비록 구두뿐인 약속이지만 합리성을 얻기에는 충분했다. 더군다나 연인 사이에서는 더 그렇다.
허나 치밀한 머리와 달리, 몸은 주체하지 못하는 듯 해정은 그렇게 묻는 와중에도 제 딱딱한 성기를 현수의 맨 허벅지에 세게 문질렀다. 어쩌면 스스로도 자각하고 있지 못하는 무의식중의 행동일 수도 있었다.
잠깐의 침묵 후, 다소 서늘한 손이 해정의 얼굴을 부드럽게 감쌌다. 검지가 뺨을 슬슬 간질인다. 현수가 해정과 눈을 똑바로 맞추며 물었다.
“네 마음대로 하고 싶어?”
“오늘은.”
“그래, 그럼.”
늘 이랬던 삶이었다. 남이 편한 게 제게 편한 거였다. 더하여 그 상대방이 해정이라면 더 그랬다.
쉽게 떨어지는 대답에 해정이 못을 박듯 얼굴을 조금 더 가까이 했다. 입술이 살짝 닿았다.
“약속하는 거죠?”
언제 한 번 그랬던 것처럼 현수는 가장 확실하게 의사를 표현했다. 대답 대신 목을 끌어 키스하자 해정이 자연스레 턱을 비틀었다. 살덩이를 휘감는 혀의 감촉에 녹아내릴 것 같았다.
달아오른 숨이 연이어 터지는 사이, 매트리스와 오른쪽 허벅지 아래 사이를 손바닥이 비집었다. 곧 손이 허벅지를 위로 밀었다. 허벅지가 느리게 벌어졌다.
그리고, 츕, 혀를 빨던 입술이 붉은빛을 내비치며 살짝 떨어졌을 때. 현수의 숨이 코와 입으로 퍼져 나가기 시작했을 때.
“……으, 윽!”
그때였다.
“잠깐! 아……, 아윽! 흑……!”
퍽. 하는 소리가 난 것 같기도 하다. 불이 붙은 꼬챙이가 애널을 뚫고 내장을 파고든다. 눈앞이 하얘지는 고통에 현수가 발버둥을 쳤다. 본능에 밀접한 몸짓이었다. 해정이 허벅지를 누르는 손에 힘을 주고, 반대편 골반을 단단히 붙들었다.
애무 없이 파고든 애널은 찢어져서 상처 사이로 피가 새어 나왔다. 해정이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한 번에 집어넣은 성기를 약간 물린 뒤, 다시 한 번 깊게 처박았다.
“아, 아흑……! 아, 아파, 으……!”
혀를 깨문 것인지 입에서 피 맛이 났다. 그럴 리가 없는데, 목 끝까지 무엇인가가 치닫는 것처럼 숨이 쉬어지지가 않았다. 현수가 턱을 잔뜩 민 채로 숨을 쉬기 위해 물고기처럼 헐떡였다.
“아……. 좋아…….”
“해정, 으, 아파, 악, 윽……!”
고통으로 일그러진 얼굴 위로 나긋한 입맞춤이 떨어졌다. 해정은 헤벌쭉 웃으면서 느리게 숨을 내쉬었다. 성기가 잘릴 것같이 조이는 게 아프기도 한데, 그만큼 김현수의 안에 들어가 있다는 사실이 생생하게 다가와 기분이 좋았다.
돌이 내려앉은 것처럼 해정의 몸은 단단하게 박혀서 떨어지지 않았다. 발버둥을 치던 현수가 결국 생명줄을 붙잡듯 해정의 뒷목을 쥐었다. 열 손가락의 끝이 하얗게 질려 부들부들 떨렸다.
“아파, 해정아, 아, 아래, 찢어진 것…….”
“응. 찢어졌어요.”
당연한 거 아니냐는 목소리였다. 피가 너무 많이 나는 바람에 이제는 아래가 물컹하게 들어갈 지경이었다. 현수가 말을 끝까지 잇지 못하고 침을 꼴깍 삼키자, 그마저도 사랑스럽다는 듯 해정이 목울대를 짧게 쪽, 빨았다.
그게 기점이었다. 처음의 움직임보다 더 빠른 속도로 성기가 빠져나가더니, 숨을 쉴 틈도 없이 허벅지가 세게 부딪혔다. 현수의 몸이 위로 쑥 밀렸다가 아래로 내려갔다.
“아, 아! 아흑, 으, 나, 아읏! 잠, 깐……!”
“왜? 내, 마음대로, 하겠, 다고, 했잖아.”
뭘 잠깐이야.
풀렸던 미간이 살짝 일그러졌다. 곧바로 짓씹듯 말하는 목소리는 협박조였다.
마른 몸이 쉼 없이 흔들렸다. 깊게 파고드는 성기는 내벽 어딘가를 아무렇게나 쑤시고 나가기를 반복했다. 애널과 깊은 쪽에서 시작된 고통은 전신을 마비시키는 것 같았다. 사고는 계속 이 고통을 멈추기를 강요했다. 아팠다. 아파서, 죽을 것 같았다.
“아, 흐으, 아, 아윽!”
해정은 현수가 바르작거리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상체를 숙여 이제는 희미해진 잇자국 위에 이를 박았다. 허리는 움직임을 멈추지 않고 퍽, 퍽, 성기 끝으로 현수의 안을 연이어 갈랐다.
“아, 해정, 읏, 아……! 아!”
마음대로 하겠다는 말에 응한 건 사실이었지만, 이렇게 거칠 줄은 몰랐다. 목덜미를 씹던 얼굴이 떨어지자 피 냄새가 더 진하게 풍겼다. 순식간에 온몸을 찌르는 고통들이 살갗을 찢는 것 같았다.
너무 아프다고 말해도, 지금 해정은 들어주지 않을 거다. 현수는 직감했다. 왜냐하면 지금 그는 고통을 고스란히 참는 자신을 보면서 좋아하고 있었다. 얼굴을 관찰하는 눈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동그란 눈동자 위에 차오를 듯 찰랑이며 담겨 있는 건 희열이었다.
“아, 윽, 해정아, 아……!”
“아파요? 응?”
“응……, 아, 아파, 으, 흣……!”
상체를 다시 일으킨 해정이 두 손으로 현수의 허벅지를 쥐어 더 넓게 벌렸다. 치대는 소리는 물에 젖은 것처럼 질퍽거렸다. 접합부를 잔뜩 적신 건 피였다.
잠시 후, 움직임이 멎었다. 헐떡이던 현수가 눈을 깜빡이자 눈물이 뚝 피부 위를 갈랐다. 눈물이 지나간 자리를 혀끝으로 쓱 훑은 해정이 속삭였다.
“흐우……, 흐으…….”
“형, 나 좋아해?”
속삭임이 끝남과 동시에 끝까지 빠져나간 성기가 빠른 속도로 들어왔다. “아윽!” 현수가 목을 쥔 손에 힘을 주며 소리를 내질렀다. 눈이 꽉 감겼다가, 속눈썹을 파들거리며 뜨였다. 시야를 꽉 채운 건 관찰하는 것같이 번들거리는 눈이었다.
“빨리 말해 봐. 나 좋아해?”
단순한 섹스가 아니다.
이건, 폭력적인 시험이었다.
그 눈을 마주하자마자 현수는 깨달았다. 덜덜 떨리는 턱을 가까스로 벌려서 앞에 자리한 입술을 작게 핥아 내자, 해정은 그게 아니라는 듯 허벅지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빨리 말해.
변덕스럽게 굳은 얼굴이 그렇게 보채고 있었다.
“……사랑, 해. 해정아.”
아까 혀를 깨문 탓에 발음을 하기도 힘들었지만 현수는 안간힘을 다해 해정이 그토록 원하는 답을 내어 주었다.
어리고 지독하도록 이기적인 그 예쁜 얼굴에, 만족감이 꽃처럼 피었다. 퍽퍽 치대던 허리가 섬세하게 움직임을 바꾼 것은 그다음부터였다.
“응. 나도. 너무 사랑해, 형.”
“하아, 응…….”
“난 형밖에 없어.”
“…….”
형도 나밖에 없게 될 거야.
귀를 파고드는 속삭임은 그 무엇보다 자극적이었지만, 까무룩 수면 아래로 잠기는 정신을 막을 수는 없었다.
* * *
고통이 쾌감이 되어 버린 순간이 언제였더라. 가늠해 보려고 했지만 대충이라도 가늠이 되지 않았다. 그럴 만도 했다. 정신을 몇 번 잃었는지도 기억이 나지 않았고,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도, 해정이 몇 번 사정했고 제 것이 해정의 손에 흔들려 몇 번을 사정했는지도 몰랐다.
“흐으, 응……. 읏…….”
“아, 진짜 너무 예뻐.”
내가 언제부터 허리를 흔들고 있었더라. 이건 가늠이 가능했다. 아까, 한 번 키스를 하며 사정한 뒤에 해정이 제 몸을 안은 채 헤드에 기댔었다. 몸의 무게에 의해 더 깊이 파고드는 성기에 작게 비명을 내질렀고, 해정이 시키지도 않았는데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 아흣…….”
성기가 어딘가를 찌를 때마다 아래에 찌릿찌릿 전류가 흐르는 것 같은 감각이 멀어졌다가 가까워졌다가 했다. 그게 감질 맛이 나서 어떻게든 확 터뜨리고 싶었다.
몇 번 허리를 느리게 돌리던 현수가 땀에 젖은 손으로 해정의 목을 또 한 번 끌어당겼다. 입술이 따가워질 정도로 쪽쪽 빨아 대고, 키스했지만 멈출 수가 없었다.
“으음……. 응…….”
혀를 섞다가 이내 쪽쪽 혀를 잡아 빨아 당기는 힘에 찢어진 구멍이 움찔거렸다. 기어이 혀를 빨던 입술이 떨어졌다. 황홀하단 눈으로 현수를 바라보던 해정이 작게 말했다.
“내가 찔러 줄까요? 형 아쉬운 것 같은데.”
현수는 말없이 목을 꼭 붙들어 안았다. 볼과 볼이 맞붙었다. 고개를 끄덕이자 볼이 비비적거렸다.
골반이 두 손에 붙잡혔다. 동시에 해정이 허리를 위로 세게 쳐 올렸다.
“아, 아! 으, 으읏……, 응!”
“아, 하아, 윽, 읏…….”
거친 움직임을 시작으로 뭉툭한 끝이 내벽을 쉴 새 없이 찧어 댔다. 현수가 제 안을 찔러 대는 성기의 움직임을 따라 허리를 흔들었다. 허벅지 위에 얹혀 있는 엉덩이가 들썩거렸다. 꽂혀 있는 성기를 머금었다, 뱉기를 반복한다. 골반을 쥐던 손이 내려 엉덩이를 세게 움켜쥐었다가, 둥글게 매만졌다.
“아, 해정, 아, 나 어떡, 아, 아흣!”
“……아, 씨발…….”
목 아래로 긁는 소리가 났다. 또 완전히 흥분한 것인지 해정이 현수의 등을 안은 채 그대로 몸을 눕혔다. 그리고 허공에 애매하게 뜬 두 발목을 잡았다. 두 다리가 브이 자로 벌어졌다. 발목에서 미끄러지듯 손이 내려와 무릎 아래를 받쳤다. 다리를 벌리는 손등 위로 힘줄이 돋아났다.
“아, 아아, 아……!”
곧이어 묵직한 마찰음이 터졌다. 퍽, 세게 제 것을 박아 넣은 해정이 그대로 숨을 길게 내리쉬었다. 기어이 벌겋게 부은 접합부에서 정액이 쉴 새 없이 줄줄 새어 나왔다.
끄응, 현수가 작게 앓는 소리를 냈다. 아직 사정하지 못한 제 것이 고통스러운 모양이었다. 해정이 작게 웃었다. 잔뜩 일그러진 얼굴 위로 만족감이 서린 입술이 내려앉았다. 쪽. 자그마한 소리가 났다.
“나 한 번만 더 싸고 앞에 만져 줄게요.”
그 말에 현수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아래가 터질 것 같았지만, 아니, 터지는 한이 있더라도 그래야만 했다.
「그 미성년자에 스토커라는 놈. 네가 받아 주니까 잠잠해지든? 좀, 나아지는 것 같아?」
「걔 말이야. 네가 있어 주면 좀 낫다며.」
그게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응, 나아졌어.」
뭐든지.
* * *
상체와 하체가 분리된 것 같았다. 골반 아래로 감각이 없었다. 아니, 도리어 감각이 너무 넘쳐서 이게 무슨 종류의 것인지 가늠이 되지 않는 걸 수도 있었다.
엎드린 자세가 자못 힘든 모양이었다. 현수의 마른 몸이 안쓰럽도록 위태로이 떨렸다. 그 위에 올라붙은 해정은 연이어 하체를 치대고 있었다. 반쯤 선 현수의 성기에서 투둑, 투둑, 정액인지 뭔지 모를 액체가 떨어져 침대를 적셨다. 눈꼬리와 살짝 벌어진 입 사이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흐으……. 으, 으응…….”
울음도, 비명도 아닌 흐리멍덩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해정이 현수의 볼을 밀어 뒤를 보게 만들었다. 얼굴이 힘없이 돌아갔다. 동시에 팔이 고꾸라졌으나, 몸은 쓰러지지 않았다.
허리를 한 팔로 둘러 감싸 안은 해정이 침이 질질 흐르고 있는 턱을 핥아 올렸다. 부은 눈만 겨우 깜빡거리던 현수가 흐트러진 숨을 가다듬었다.
“나, 배가, 흐으……, 배, 배 안이…….”
“배 아파요?”
곧바로 고개를 끄덕인다. 울먹이는 것을 참느라 입 끝이 파들파들 떨렸다.
그럴 만도 하지. 해정은 태연히 수긍했다. 안에 몇 번이나 쌌는지 자신도 세다가 포기했는데, 하여간 많이 싸기는 했다.
더 이상 서지 않을 것 같아도 그냥 끼우고 있다가 기절한 듯한 현수의 몸을 여기저기 깨물고 만지다 보면 또 발기했다. 그래서 또 미친 듯이 추삽질을 하면, 언젠가부터 의식이 깬 현수가 우는 소리를 냈다. 그 패턴이 몇 번째인지도 세다가 포기했다.
“그럴 것 같아요.”
느긋하게 대답하는 해정이 야속한지 현수가 고개를 가로로 설레설레 저었다.
“진짜, 안에, ……이, 이상해…….”
“그래서요. 더 이상하게 해 줄까요?”
“흑……, 해정아……. 흐, 으…….”
한계가 온 듯했다. 한 번도 그런 적이 없는데, 그 말이 퍽 무서웠는지 현수가 눈에 띄게 몸을 떨더니 어리광을 부렸다. 좀 봐 달라는 듯 눈을 일그러뜨리면서 뒤로 손을 뻗어 아무렇게나 더듬거린다. 젖은 눈이 죽음을 직감한 산토끼처럼 공포에 질려 있었다.
예뻐라. 해정이 작게 웃으면서 우물거리는 입술에 제 입술을 가볍게 댔다.
“장난이에요.”
“제발…… 나, 나 진짜…….”
정신을 몇 번이나 잃었다가 깨는 경험은 원초적인 공포를 고스란히 남겼다. 깜빡, 깜빡, 수명이 다된 형광등이 점멸하는 것처럼 시야가 어두워졌다가 밝아졌다. 목이 바싹 말라서 까끌까끌했다. 바로 옆에서 속삭이는 해정의 목소리가 저 멀리서 말하는 것같이 아스라이 들려왔다.
또 정신을 잃기는 싫었다. 현수는 눈을 강제로 빠르게 깜빡이며 숨을 규칙적으로 쉬려고 노력했다.
그 순간이었다. 삽입된 채로 몸이 돌았다. 해정의 힘이었다. 순식간에 시야에 가득 찬 얼굴에 현수가 겨우 참았던 울음을 다시금 쏟아 냈다. 눈물이 후두둑 붉은 뺨 위로 흘러내렸다. 등 뒤로 침대가 닿자 바짝 긴장하고 있던 몸에 힘이 풀렸다.
현수를 그대로 눕힌 해정이 천천히 제 성기를 빼내려다가, 이내 다시 쑥 안에 집어넣었다. “흐읏…….” 현수가 눈을 감은 채로 약하게 신음을 흘렸다.
“음……. 빼기는 싫다. 어떡하지.”
“하아……. 하…….”
현수의 위에 엎드려 그대로 우는 얼굴을 감상하던 해정이 고민하는 것처럼 입을 살짝 내밀었다. 땀에 젖은 앞머리를 뒤로 넘겨 주는 손이 다정했다.
“좀만 이러고 있어도 돼요?”
답은 정해져 있었다. 온몸을 들썩거릴 정도로 울면서도 현수는 약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쪽. 짧게 볼에 키스한 해정이 현수의 몸을 껴안은 채로 옆에 누웠다.
틱.
불안하게 깜빡거리던 형광등이 기어이 수명을 다했다. 현수의 의식이 다시금 어둠 속으로 처박혔다.
* * *
꿈을 많이 꾼 것 같은데, 하나도 기억나는 게 없었다. 다만 일어날 때 고여 있던 꿈들이 머리 위로 쏟아지며 지진을 일으켰다. 골이 울렸다. 눈을 제대로 뜰 수가 없을 정도로 머리가 아팠다. 현수가 눈을 가늘게 뜨며 주변을 살폈다. 기절하기 전과 다를 바가 없는 풍경이었다. 다른 게 있다면, 옆에 해정이 없었다.
해정아. 부르고 싶었는데 입이 움직이기만 하고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약한 쇳소리만 입 사이로 새어 나왔다. 그 소리가 너무 기괴해서 제 목소리임을 깨닫게 된 건 조금 지나서였다.
이윽고 닫혀 있던 방문이 열렸다. 상체를 들어 누가 들어왔는지 확인하고 싶었는데, 온몸이 밧줄로 꽁꽁 매여 있는 것처럼 움직여지지 않았다. 눈만 굴리고 있는 현수의 얼굴 위로 방금 씻은 듯 말간 얼굴이 다가왔다.
“어? 깼어요?”
“해, 정…….”
목소리를 내었는데 성대가 찢긴 듯이 아팠다. 현수가 말을 하다 말고 인상을 일그러뜨렸다. 콜록. 뭔가 걸린 느낌에 기침을 했지만 나오는 건 없었다.
“말하지 말아요. 아래는 괜찮아요? 형 쓰러져서 내가 씻기고 약도 발라 주긴 했는데……. 상처가 좀, 생각보다 심해서.”
침대 아래 바닥에 앉은 해정이 그렇게 말하며 현수의 눈가를 엄지로 매만졌다. 다가온 손에서 바디워시의 시원한 향기가 났다.
굳이 그렇게 말해 주지 않아도 상처가 심각할 것이라는 건 현수도 짐작하고 있었다. 몸으로 느껴졌다. 차라리 아래를 도려내고 싶다고 생각할 정도로 아팠다. 찢어진 애널뿐만 아니라, 배도 누군가가 내장을 한 움큼씩 파먹고 있는 것 같았고 온몸의 관절도 다 삔 것처럼 쑤셨다. 솔직히, 안 아픈 곳을 찾기가 힘들었다.
현수가 대답 없이 침만 꼴깍 삼키자 해정이 애매하게 웃었다. 큰 눈에 난처함이 떠오른다.
“진짜 그렇게까지 상처 날 줄은 몰랐어요. 나도 씻기다 깜짝 놀랐어요. 내가 잘 몰라서……. 진짜 미안해요.”
용서를 구하는 아이처럼 이불에 들어가 있는 손을 꺼내어 들어 제 볼을 비비적거린다. 그 모습을 가만히 보고 있던 현수가 작게 입을 열었다. 말을 하면 또 목이 아플 것이지만, 정정할 것은 해야 했다.
“……거짓말.”
그 말에, 한껏 갸륵한 표정으로 볼을 비비적거리던 얼굴에서 서서히 웃음이 퍼졌다. 끝내 큭큭 웃기 시작한다. 얼굴이 떨어졌다. 사랑스럽다는 듯 현수의 입술에 쪽, 짧게 키스한 해정이 가까운 곳에 얼굴을 멈추었다.
“티 났어요?”
현수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곧이어 해정이 웃는 낯 그대로 이불을 걷고 침대 안으로 기어들어 왔다. 살짝 젖은 머리가 팔에 닿자 현수의 몸이 저절로 움츠러들었다.
“일부러 그렇게 한 거 알면서, 왜 나 안 싫어해요?”
작게 말해요. 목 아프니까.
현수를 인형처럼 껴안고 몸에 파고든 해정이 당부하듯 속삭였다. 시원한 향이 멀미가 날 정도로 강하게 퍼졌다. 현수가 아프지 않을 정도로 작게 말했다.
“그런 걸로, 너 안 싫어해.”
“……참는 거에 쾌감 느껴요? 그렇게 보이지는 않았는데.”
잠시 가슴에 얼굴을 대고 비비적거리던 해정이 상체를 살짝 들어서 현수의 볼에 쪽쪽 뽀뽀하기 시작했다. 가까이 자리한 얼굴에 현수가 눈을 마주했다. 질문이 어이가 없어서 입을 비틀어 웃고 말자 당겨진 입술 끝에 해정이 꾹, 도장을 찍었다.
“응? 왜 나 안 싫어해요?”
“꼭 싫어하라는 것처럼 들리네.”
“그런 거 아니에요.”
“근데 왜 자꾸 물어봐.”
콜록. 갈라진 기침이 작은 목소리 끝에 터졌다. 밑 턱을 아프지 않게 두 번 깨문 해정이 할짝할짝 살을 핥다가 폭 한숨을 내쉬었다.
“형이 자꾸 받아 주니까 불안해서요.”
“……그럼 튕길까? 싫어, 저리 가, 이러면 돼?”
현수가 약하게 어깨를 쥐고 밀어내는 시늉을 하자 해정의 눈썹이 와그작 어그러졌다. 장난인 걸 알면서도 밀어내는 건 싫은지, 금방 화를 내는 것처럼 얼굴이 돌변했다.
“장난으로라도 그런 말 하지 말아요. 나 방금 짜증 났어.”
그럼 어쩌라는 건지. 현수가 웃음을 멈추지 않고 밀어내던 손을 뒤로 옮겼다. 물기가 남아 있는 머리칼을 매만져 주자 숨을 깊게 내리쉬며 목에 얼굴을 파묻는다. 또 피가 날 정도로 깨물까 봐 머리보다 몸이 먼저 반응했다. 움찔거리는 몸이 느껴진다. 해정이 현수의 체향을 맡으면서도 소리 없이 웃었다.
“……아, 어떡하지. 나 점점 불안해져.”
“…….”
“형. 나 어떡해?”
웃음이 점점 가시더니, 곧 다시 또 심각한 얼굴이 된다. 그 변화가 무서울 정도로 빨랐으나, 현수는 놀라는 대신 더 섬세한 손길로 머리를 쓰다듬었다.
“형 어디 안 가.”
찰나에 해정의 눈이 바싹 얼었다.
“……그래 놓고 어디 갔으니까 내가 이러잖아요.”
얼음이 뚝뚝 떨어질 것 같은 표정. 별안간 섬뜩할 정도로 차가워진 목소리가 송곳처럼 튀어나왔다. 서늘한 날에 머리를 쓰다듬던 손이 움찔 떨렸다. 심장 위로 무거운 돌이 쿵, 떨어졌다.
“오늘 어디 갔다 왔어?”
계속 염두에 두고 있었던 듯 이어 물어 오는 게 거침이 없었다.
잠깐 숨을 삼킨 현수가 잠시 후 느리게 숨을 뱉었다. “나 어디 갔는지, 어떻게 알았어?” 하고 묻는 목소리는 당황을 잔뜩 머금고 있었다.
냉기를 머금었던 눈 위로 돌연 검은 흙이 덮였다. 곧이어 해정이 괴로운 것처럼 현수의 몸에 숨듯이 파고들었다. 얼굴이 가려진다. 머뭇거리는 목소리가 약하게 새어 나온 건 잠시 뒤였다.
“설거지통에 물기도 없었고……. 배달 음식 시켜 먹었어도 형 그릇 씻어서 두잖아요. 분리수거도 아무것도 없고……. 현관에는 형 자주 신는 신발 있어서요. 병원에서는 그거 안 신었는데, 나와 있길래…….”
눈치를 보는 것처럼 잔뜩 누그러진 어조였다. 말소리의 진동이 살결 위로 느껴졌다.
“……”
관찰력도 좋다. 짐짓 가벼이 생각하려 했지만 팔 위로 돋아나는 소름은 불가항력이었다. 현수가 굳은 손을 펴 다시 의식적으로 머리를 위에서 아래로 쓰다듬었다. 그리고 얼떨떨한 마음을 급히 추스르며 입을 열었다.
“그, 정호, 친구랑 점심 먹었어.”
“밥만?”
“그럼 내가 뭘 하겠어, 걔랑.”
해정은 현수의 되물음에 답하지 않았다. 대신 품에 조금 더 파고들며 작게 말했다.
“……형을 점점 못 믿겠어요.”
“…….”
“내가 못 믿는 게 아니라, 안 믿겨.”
왜?
물어봤자 알 리가 없다. 그래서 현수는 묻지 않았다. 이윽고 몸을 꽉 조여 오는 힘이 느껴졌다. 현수는 뒷머리를 만지던 걸 거두고 양손으로 해정의 옆머리를 붙잡았다. “해정아. 형 봐 봐.” 속삭이는 목소리에 해정이 얼굴을 들어 올렸다. 눈이 마주했다.
“형이, 하나 궁금한 게 있어.”
묻는 목소리는 쉬어 있었으나 눈빛만큼은 단단했다.
‘왜.’ 해정에게 묻는 것 대신 현수는 저가 직접 알아내기로 했다. 해정의 불안. 해정의 고통. 밤마다 찾아오는 그 괴물을 알아내고, 없애 줄 것이었다. 그래야만 해정이 편해질 수가 있었다.
내가 낫게 해 줄 거니까.
“궁금한 거?”
“응.”
“뭔데요?”
해정의 눈이 현수의 얼굴 곳곳을 섬세하게 훑었다.
“괴물 얼굴을 봤다고 했잖아. 너 수술하고 난 다음에.”
“……아. 네.”
해정이 언젠가 했던 말을 기억하고 꺼낸 말이었다. 현수가 손가락으로 뺨을 부드럽게 문질렀다.
“그게 어떻게 생겼어?”
“……어떻게요?”
“응. 만약 사람이면, 누군지 알아? 사람 아니어도 괜찮으니까 어떻게 생겼는지 말해 볼래?”
“아…….”
작게 입이 벌어졌다. 해정이 탄성처럼 뱉어 낸 말을 조금 길게 끌었다. 생각을 하는 것처럼 눈동자가 빙, 한 바퀴 돌았다가 이내 현수에게로 돌아왔다.
“……형이에요.”
“어?”
“그, 이부 형이요.”
아.
돌연 뺨을 만지던 손가락에 살짝 힘이 들어갔다. 현수가 제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그럴 수도 있겠다고 은연중에 예상은 했지만, 확실하게 들으니 갑자기 물이 끓어 넘치는 것처럼 분노가 일었다.
“…….”
현수의 표정을 살피던 해정이 별안간 몸을 말아 얼굴을 숨겼다. 명치께에 숨이 느껴졌다.
“그 형이야.”
“…….”
“……그 형이 아니면 누구겠어요.”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다시금 귀에 박혔다. 깨물린 자국이 뚜렷한 손등이 올라 해정의 까만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괴물을 없애야 한다.
그 생각이 현수의 머리를 강박적으로 내리눌렀다.
* * *
폭력적인 섹스의 후유증은 예상외로 길고 컸다. 몸을 움직일 수 있게 된 것은 그로부터 이틀 뒤였으나, 그조차도 자연스러운 움직임은 아니었다.
해정은 졸업식까지 다시 학교를 다녀야 했다. 안 가도 된다는 해정의 등을 떠민 건 현수였다. ‘마무리는 잘해야지.’ 그렇게 타이르자 해정은 못마땅한 얼굴을 하면서도 다시 학교에 다니기 시작했다. 어차피 곧 있으면 졸업이어서 딱히 학교에서 뭘 하는 건 아니겠지만 그래도 해야 할 건 하게 해야 양심의 가책이 덜했다.
해정이 학교에 가 있는 동안 저가 하는 건 없었다. 방송도 슬슬 다시 시작해야 했는데, 앉아 있기가 힘들어서 휴식 시간을 더 늘릴 수밖에 없었다. 병원에 갈 수도 없어서 꼬박꼬박 스스로 약을 바르고는 있는데, 도무지 적응이 되지 않아 매번 수치심에 시달리곤 했다.
“하아…….”
그리고 지금도 그 수치심에 시달린 뒤였다. 탁, 화장실 불을 끈 현수가 미간을 구긴 채로 한숨을 내쉬었다. 손에 들린 연고를 대충 화장실 옆 서랍장 위에 올려 두었다. 절룩거리는 걸음으로 침대 앞으로 가 엉금엉금 엎드려 누웠다. 불현듯 해정의 향기가 잔뜩 콧속으로 들어왔다.
“아이고, 삭신이야…….”
다음에 할 때도 또 이런 식이면 어쩌지. 상상하다 아찔해져 눈을 질끈 감았다. 할 때마다 수명이 오 년씩은 줄어 끝내는 단명할 것만 같았다. 베개에 얼굴을 묻고 가만히 한숨을 쉬던 현수가 이내 고개를 들어 벽시계를 확인했다. 오전 10시.
“……으윽…….”
그저 일어나는 것뿐인데도 온몸의 관절이 두들겨 맞은 것처럼 아려 왔다. 삐거덕거리며 가까스로 침대에서 벗어난 현수가 거실로 나섰다.
움직이던 몸이 뚝 멈춰 섰다. 현수가 관찰하는 눈으로 거실을 둘러보았다.
“…….”
잠시 후, 몸이 다시 움직였다. 느린 걸음이 향한 곳은 싱크대였다. 현수가 마른 접시와 그릇, 그리고 수저 한 벌을 하나씩 꺼내어 보란 듯 싱크대 옆 건조대에 올려 두었다.
손이 떨어지다가 머뭇거리며 다시 수저부터 쥐어 들었다. 그리고 물을 틀어 식기들을 물에 하나씩 적시기 시작했다. 젖은 식기는 싱크대 옆 건조대에 다시 올라갔다. 식기에서 물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젖은 손을 대충 옷으로 닦아 낸 현수가 다시 걸음을 옮겼다. 현관 앞에서 또 우뚝, 멈춰 선다.
“…….”
물끄러미 현관을 바라본다. 아까처럼 관찰하는 눈이었다. 이윽고 현수가 천천히 허리를 숙였다. 그리고 평소 신던 운동화를 신발장 안에 넣고, 대신 허름한 슬리퍼를 신었다.
상체가 삐걱거리며 일어섰다. 뒤돌아 다시 한 번 확인하듯 거실을 훑어보는 눈이 못내 초조해 보였다.
잠시 후, 현관문이 열렸다. 현수가 주머니를 뒤져 휴대 전화를 꺼냈다. 시간을 확인한다. 지금 시간은 10시 7분. 해정이 오는 시간은 11시. 그 남자와의 약속 시간은 10시 20분.
그 정도면 충분했다.
* * *
오전의 카페는 한산했다.
택시를 타고 왔는데 꼭 전력 질주를 한 것처럼 심장이 세고 빠르게 뛰었다. 어딘가 불편한 듯 엉덩이를 들어 이리저리 수선스럽게 뒤척거리며 의자에 앉은 현수가 아메리카노를 들었다가, 다시 내려놓았다.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휴대 전화의 홈 버튼을 눌러 시간을 확인한다. 10시 16분. 해정이 집까지 오려면 40분 정도가 더 남아 있었는데 자꾸 머릿속에서는 ‘만약의 상황’이 그려졌다.
만약에 학교가 일찍 끝난다면? 만약에, 오늘 갑자기 변덕이 끓어서 빨리 하교했다면?
“…….”
그냥 정호를 만나러 간다고 할 걸 그랬나. 하지만 그렇게 말한다면, 분명 만나서 뭘 했느냐고 해정은 꼬치꼬치 캐물을 것이다. 쏟아지는 질문들에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말을 지어낼 자신이 없었다.
내가 해정이에게 유독 무른 걸까. 아니면 해정이가 너무 예민한 건가. 결국 현수의 생각이 거기까지 닿았을 때였다. 정면에서 보이는 자동문 너머로 새까맣게 옷을 입은 누군가가 섰다. 그 남자였다.
자동문이 열렸다. 남자도 입구의 정면에 앉아 있는 현수를 바로 발견한 듯 카운터를 지났다. 뼈밖에 남지 않은 듯한 남자의 몸은 걷는 것조차 힘들어 보였다. 무감한 눈을 한 채로 제게 다가오는 남자를 바라보다가, 현수는 다시 한 번 시간을 확인했다. 10시 18분. 여전히 시간은 충분하다. 대화는 곧 끝날 것이다. 이 남자는 누구인지. 왜 서해정의 주변을 돈 것인지. 이것만 알면 된다.
현수가 그 두 가지를 되뇌는 사이 남자는 앞까지 다가와 건너편 의자에 앉았다. 으레 하는 인사는 둘 중 누구도 하지 않았다.
“…….”
“…….”
남자는 현수가 시켜 놓은 제 커피를 흘끗 내려 보았다. 그리고 다시 고갤 들어 현수를 보다가, 기어이 바로 옆 통유리 너머의 거리를 바라보았다. 고민하는 눈이었다.
잠시 후, 얇은 입술이 어색한 모양으로 열렸다.
“……저번에, 멱살 잡은 건.”
“…….”
“죄송합니다. 제가 흥분해서 그랬어요. ……제정신이 좀, 아니라서, 요즘.”
지나가는 자동차들을 바라보던 눈이 잠시 방황하더니, 기어이 정면을 향했다. 눈이 마주친 것도 잠시, 시선을 피하듯 남자가 고개를 떨어뜨렸다. “죄송합니다.” 다시 흘러나온 목소리는 희미했으나 내용은 정확했다. 사과였다.
“…….”
“…….”
당황한 눈으로 남자의 이마를 보던 현수가 의식적으로 몸에 힘을 풀었다. 그리고 멋쩍은 양 손을 들어 제 뒷목을 긁었다.
“아…….”
“…….”
“괜찮……, 괜찮습니다. 놀라긴 했는데……. 네. 괜찮아요.”
그때 유독 불안한 상태처럼 보이기는 했는데, 원래 이렇게 차분한 사람일 거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괴리감까지 느껴지는 상황에 적응하기 위해 현수는 짐짓 “괜찮아요.” 하고 한 번 더 말했다.
남자가 살짝 숙였던 고개를 들어 올렸다. 여전히 기가 죽은 눈이긴 했는데, 그때처럼 미친 듯이 떨리고 있지는 않았다.
다시 어색한 정적이 내려앉았다. 현수는 뒷목을 긁던 손을 내려 휴대 전화의 홈 버튼을 눌렀다. 10시 21분.
“……제가, 좀 급해요.”
대뜸 정적 위로 튀어나온 목소리는 현수의 것이 아니었다. 액정 위의 숫자를 바라보던 눈이 올랐다. 남자는 테이블 아래로 모은 제 손을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손가락 끝이 살짝 떨렸다. 떨림을 멈추려는 듯, 남자가 손가락을 손바닥 안으로 숨겼다.
“이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거든요.”
“…….”
“그래서 당신이 궁금했던 거예요. 당신이 서해정이랑 무슨 사이인 건지가요. 서해정이 당신 앞에서는 좀, 다른 것 같아서…… 그렇게 불안해한 적도 없었고, 그래서…….”
“……저기, 죄송한데.”
현수가 남자의 말 사이를 비집자 아래를 바라보고 있던 눈이 도르륵 올랐다. 눈이 마주했다. 현수가 말을 이었다.
“지금 무슨 말씀을 하고 계시는 건지, 제가 하나도 이해가 안 되어서요.”
남자가 처한 상황이 뭔지, 그게 서해정과 무슨 관계인지, 그래서 왜 자신이 궁금한지. 모두 다 연결되지 않는 말들이었다.
돌연 남자의 눈에 슬며시 경계가 섰다. 현수의 표정을 샅샅이 관찰하는 시선이 이어졌지만 현수는 눈을 피하지 않았다. 거짓말도 아니었고, 남자를 해할 생각도 없었으니 저는 떳떳했다.
“…….”
경계가 숨듯이 사라진 건 현수의 생각보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곧이어 관찰하던 눈을 거둔 남자가 무언가를 확신했는지 느리게 상체를 앞으로 기울였다. 팔꿈치가 지그시 테이블 위로 내려앉았다.
“……정신병에 걸렸어요. 제가요.”
“…….”
그 정도는 한눈에 보인다고 말하려던 입을 다물었다. 현수는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의 아랫입술이 억울한 듯 부들 떨렸다.
“전 원래 멀쩡한 사람이었어요. ……알아요. 지금 상태로는 상상도 안 되는 거. 근데 정말로요. 처음부터 정신병자인 사람은 없잖아요. 저도 멀쩡했어요. ……의사 말로는 불안증이래요. 충격적인 일을 겪고 난 뒤의 후유증이라고 했어요.”
“…….”
“약을 먹은 다음에는 괜찮거든요. 지금도 약 먹어서 괜찮아 보이는 거예요. 근데 때를 놓치면 저번의 그때처럼, 좀 이상해지기도 해요. 정말 불안해서 미칠 것 같고, 사람들이 다 피할 정도로 지랄을 해요. ……진짜 정신병자 같죠?”
남자는 비교적 객관적으로 자신의 상태를 파악하고 있는 것 같았다. 스스로 말했던 대로 약을 먹고 난 뒤라서 이성적인 생각을 할 수 있는 모양이었다.
위로를 해 줘야 하나. 현수는 습관적으로 그렇게 생각해 버린 자신을 비웃으며 얼른 생각을 거두었다. 그럴 상황은 전혀 아니다.
남자가 기울였던 상체를 다시 밀어 의자 등받이에 기대었다. 가슴팍이 찬찬히 들썩였다. 남자가 버석 마른 손으로 제 입과 턱을 느리게 쓸더니 말을 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어요. 주변 사람들은 그렇다 치고 내가 힘들어서요. 밥도 못 먹겠고, 잠도 못 자겠고, 사는 것 같지가 않으니까. 병든 채로 있고 싶어 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아무것도 모르는 의사는 약 계속 먹고, 상담하고, 운동 열심히 하고, 밥 잘 먹으면 나아진다는데 아니거든요.”
……진짜 모르니까 그렇게 말하지, 시발.
남자가 짜증이 가득 밴 목소리로 작게 중얼거렸다. 침을 약하게 삼킨다. 두 손이 툭, 허벅지 위로 떨어졌다. 현수를 보는 시선이 찰나에 흔들렸다.
“누가 내 머리에 총을 겨누고 있는 건 똑같은데, 거기에 안정제만 먹는다고 이게 나아질 리가 없잖아요.”
그 목소리는 자못 지쳐 보였다. 말하면서도 약으로 억눌렀던 불안이 점점 엄습해 오는 모양이었다. 남자는 제 손을 도무지 가만두지를 못했다. 손등을 어루만지거나, 손 거죽을 잡아당기거나, 손톱으로 손바닥을 긁거나, 뼈마디를 딱딱 끊는 소리를 내기도 했다.
남자의 손을 가만히 내려 보던 현수가 입을 열었다.
“……그 말은 꼭, 내가 해정이와 무슨 관곈지를 알면 그쪽의 병이 나아질 거라는 걸로 들리네요.”
“정확하지는 않지만 대충은요.”
혼란스러운 말에 떨어진 대답은 깔끔했다. 현수의 눈이 서서히 올랐다.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남자를 바라본다. 눈썹이 작게 일그러졌다.
“왜 그렇게, 생각하시는데요?”
“……그야. 내 머리에 총을 겨누고 있는 게,”
잠시 말을 멈춘 남자가 작게 숨을 들이마셨다. 짧지 않은 간격으로 말이 이어진다. 제 손등을 매만지던 손이 겁을 먹은 것처럼 부르르 떨렸다.
“…….”
“서해정이니까요.”
그 남자가 그 이름을 부르는 순간에, 현수마저도 손을 작게 떨었다.
* * *
내가 너무 둔했을지도 모른다. 사실은 모든 상황들이 다 가리키고 있었는데.
「이부 형이요.」
서해정은 거짓말을 했다.
* * *
현관문이 열렸다. 느긋한 발걸음으로 집 안으로 들어선 해정이 훑듯이 실내를 둘러보았다. 발걸음과 같이 느긋한 시선이었다. 현관, 그리고 부엌 부근까지 바라보던 해정이 이내 작게 웃음을 흘렸다. 유쾌한 건지, 아니면 비웃음인지 모를 모호한 웃음이었다.
“형. 나 왔어요.”
신발을 훌훌 벗어 던지고 느리게 거실을 가로지른다. 현관에 스니커즈가 수직으로 떨어졌다. 질질 끄는 발소리가 뱀이 지나가는 소리와 비슷했다.
방에 들어선 해정이 벽시계를 바라보았다. 11시 10분. 자연스레 벽시계에서 떨어진 눈이 침대로 이동했다. 침대 위에는 현수가 엎드려 누워 있었다.
“…….”
“자?”
끼익. 낡은 매트리스의 스프링이 눌리는 소리가 났다. 현수의 몸 위로 해정이 올라탔다. 달콤한 목소리가 현수의 귓바퀴에서 녹아 흘렀다. 교복 재킷의 감촉이 맨팔에 닿았다.
해정이 정갈한 뒷목에 그대로 코를 박고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차가운 손이 현수의 겨드랑이 사이를 거침없이 비집었다. 팔이 마른 몸통을 끌어안았다. 현수는 아무런 미동이 없었다. “하아…….” 느리게 새어 나온 숨소리가 흩어지자, 공기가 다시금 조용해졌다.
“…….”
해정은 현수를 끌어안은 채로 가만히 숨을 죽였다. 자는 것처럼 고르게 퍼지는 숨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
“……안 자네?”
별안간 살에 닿은 입술이 오물오물 움직였다. 자그마한 목소리에 죽은 듯 가만히 누워 있던 현수의 몸이 움찔 떨렸다. 몸을 안고 있던 팔에 힘이 들어갔다. 해정이 낮게 웃었다. 현수가 몸을 뒤집으려는 듯 힘을 주었으나 해정은 비키지 않았다. 도리어 꼼짝 못하게 몸을 더 내리눌렀다.
“놔줘, 해정아. 나 숨 막혀.”
“왜 자는 척했는지 말해 주면요. 내가 귀찮아서 그랬나 싶으니까 좀 기분 나쁜데.”
느물거리는 목소리였다. 뜨거운 혀가 뒷목을 핥아 올렸다. 바디로션. 머리는 다 말라 있는데. 일부러 말린 건가. 해정이 짧게 생각하는 사이, 현수가 영 힘없는 목소리로 “……자는 척한 거 아니야. 진짜 자고 있었어.” 했다.
괘념치 않는다는 듯 해정은 현수를 안은 채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벽에 기대어 앉았다.
허리를 단단히 매고 있는 팔에 현수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기어이 해정의 몸에 제 등을 기대자 뒤에서 또 한 번 웃는 소리가 들렸다.
“좀 새침하네. 무슨 일 있어요?”
“아니. ……무슨 일은.”
“오늘은 뭐 했어요?”
다정하게 묻는 목소리였다. 정신없이 뒷목에 코를 박고 체향을 맡던 해정이 이내 못 참겠다는 듯이 살갗을 약하게 깨물었다. 현수는 손을 모아 짐짓 제 손가락을 쥐었다 펴면서 작게 대답했다.
“그냥 아침 먹고, 자고…….”
“아침 뭐 먹었는데요?”
곧바로 물어 오는 게 이상할 정도로 빨랐으나, 목소리는 여전히 다정했다. 목에 연달아 키스하는 입술도 부드러웠다. ‘뭔가 눈치챘나.’ 현수는 스치는 생각을 가까스로 무시했다. 아니다. 그럴 꼬리가 없다. 괜한 걱정이었다. 내가 지레 걱정하는 거다.
“집 밥 먹었지 뭐.”
“반찬은?”
“계란이랑, 김, 볶은 김치…….”
다 예상하고 있어서 준비해 두었던 질문들이었다. 현수가 기다렸다는 듯 대답하자 해정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렇구나.” 했다.
제 손가락을 이리저리 얽어 두고 공연히 장난질을 하고 있던 현수의 손 위로 해정의 손이 덮였다. 손을 통째로 감싼다 싶더니, 별안간 콱 구기듯 손에 힘을 준다. 손가락 관절을 뭉개는 듯한 힘에 전기처럼 찌릿 고통이 스쳤다.
“아!”
“밥 먹고는 바로 설거지했어요?”
“아파, 해정아! 손, 손 좀……!”
“대답하면 빼 줄게.”
어찌나 강하게 손을 짓누르는지 손등 위에 힘줄이 불거질 정도였다. 이대로라면 얽어 둔 그대로 손가락이 꺾일 것만 같았다. 뼈가 부러질 것 같은 공포를 참지 못한 현수가 팔을 비틀었으나, 저를 단단히 안은 품은 꼭 맞춘 것처럼 빠져나올 틈이 없었다.
눈치챈 거 맞나?
또 한 번 그런 생각이 경고처럼 스쳤다. 하지만 확답할 수가 없었다. 손은 그렇게 성이 나 있으면서도 목소리는 그대로라 아직까지도 해정이 뭘 알고 이러는 건지, 모르고 이러는 건지 헷갈렸다. 해정은 화가 나지 않아도 가끔씩 세게 살을 물고는 했으니까, 그냥 일상적인 장난일 수도 있었다. 아직까지는 모른다. 지레 이실직고하는 꼴은 면해야 한다.
“했어. 응. 설거지했어. 해정아, 손, 손……!”
거기까지 판단한 현수가 재빨리 대답했다. 약지 손톱이 위협적으로 손바닥의 어딘가를 강하게 짓누른다. 대답을 했으니 힘이 빠져나가야 했는데, 조여드는 힘은 더 강해졌다. 뿌득. 기어이 손가락 관절에서 섬뜩한 소리가 났다.
별안간 시야가 휙 돌아갔다. 눈을 깜빡하는 사이 손을 압박하던 힘이 사라졌다. 대신 두 손목을 침대에 꽉 짓누르는 힘에 현수가 숨을 삼켰다.
바로 제 위에 엎드려 있는 해정의 얼굴은 누가 봐도 화가 나 있었다.
“혹시 거짓말할까 봐 말해 놓은 거긴 한데.”
말해 놓은 거?
현수가 해정의 말을 곱씹었다. 깊이 생각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일전에 해정이 했던 말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쉬이 떠오른 이유는, 자신이 오늘 아침에 계속 되새긴 말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해정은 그렇게 말했었다.
「설거지통에 물기도 없었고……. 현관에는 형 자주 신는 신발 있어서요.」
「그거 안 신었는데, 나와 있길래…….」
“진짜 너무 곧이곧대로 해서 웃길 정도네. 진짜 형 머리는 잘 못 굴리나 봐요.”
맞다. 자신은 해정이 지적한 그 말을 염두에 두고 행동했다. 그대로. 해정의 말을 빌려서 말하자면, 해정이 깔아 준 그 덫대로.
“…….”
그 사실을 깨닫자마자 불이 붙은 듯 얼굴이 뜨거워졌다. 현수를 바라보고 있던 해정이 아까 집에 들어왔을 때처럼 모호하게 웃었다. 얼굴을 숙여 현수의 입술에 짧게 키스한다. 가까운 곳에서 눈이 멈추었다. 냉기와 열기가 뒤섞여 난장인 눈이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봐, 형. 아침에 밥 처먹었다는데 왜 지금까지 젖어 있어. 그릇들이.”
“…….”
“형 원래 밥 먹을 때 반찬도 다 기억 못하던데.”
“…….”
“이렇게 말하면, 이제 또 다음에 내가 말한 그대로 할 거야?”
“……너도.”
점점 미쳐 가는 눈. 파먹듯이 점차 이성을 잃는 정신을 잠자코 보고 있기가 힘들었다. 광기가 섞인 목소리 사이를 가로지르고 현수가 크게 소리를 내었다. 억눌렸던 것을 터뜨리는 목소리는 파들파들 떨리고 있었다.
“너도, 그랬잖아.”
목소리가 떨리는 이유는 겁에 질렸기 때문이 아니었다. 화를 참느라 그러했다. 그리고 침착하게 화를 드러내는 목소리는 정확히 해정을 겨누고 있었다. “……뭐?” 갑작스러운 현수의 행동에 해정의 눈이 찌푸려졌다.
힘이 풀린 건 다음 순간이었다. 그 찰나를 놓치지 않고 현수가 잡힌 손목을 온 힘을 다해 비틀어 빼내었다. 그대로 몸을 일으켜 침대 끝으로 빠르게 물러선다.
해정의 손이 닿지 않을 곳까지 물러선 현수의 얼굴은, 꼭 저가 더 억울하다는 듯 분노로 일그러져 있었다.
“……뭐 해, 지금?”
“너도 거짓말했잖아. 서해정, 너야말로 나한테 거짓말했잖아.”
아까부터 제 머리를 흔들어 기어이 두통에 시달리게 하던 사실이었다. 해정의 눈을 똑바로 보지 못했던 이유였다. 감정이 주체가 안 됐다. 해정의 얼굴을 정면에서 바라보니 기름에 얼음을 떨어뜨린 것처럼 예상하지 못한 곳으로 펑펑 터지고 있었다.
해정이 인상을 쓴 얼굴로 현수에게로 다가가자 기어이 현수가 침대에서 벗어나 일어섰다. 피하는 것처럼 뒤로 물러서는 행동에 뒤집혔던 해정의 속이 더 강하게 뒤틀렸다. 무어라 욕이라도 하려던 해정이 꾹, 제 감정을 억지로 내리눌렀다. 일렁이던 눈이 현수의 얼굴을 가만히 살폈다. 이내 가면을 바꿔 끼우는 것처럼 금세 잠잠한 빛을 비친다.
“……무슨 말이에요? 자세히 말해 봐요. 그렇게 말하면 내가 무슨 말인지 모르잖아요.”
현수의 목울대가 움직였다. 기어이 매끄러웠던 눈의 표면이 투명하게 울렁인다. 눈물이었다. 해정이 놀란 듯 눈을 살짝 키웠다.
김현수가 운다. 뭔가 심상치 않다. 아무래도 오늘 나간 것과 연관이 있는 것 같았다. 대체 뭘 한 거지, 오늘. 어제 휴대 전화를 확인했어야 했다. 김현수의 몸을 물고 빠느라 해이해져서는 멍청하게 실수를 했다. 해정은 자책하며 제 입술을 잘게 씹었다.
잠깐의 정적. 그 뒤로 현수가 입을 열었다. 안쓰럽도록 떠는 몸에는 힘이 잔뜩 들어가 있었다.
“네가 보는 괴물, 그, 얼굴.”
해정의 눈이 작게 일그러졌다. ‘무슨 말을 하려고.’ 생각하지 못한 화제였다.
딱딱하게 굳은 턱이 다시금 벌어졌다. 눈물이 또 한 번 뚝 떨어진다. 기어이 갸름한 턱 끝에 물방울이 고였다. 슥. 그것을 손등으로 훔친 현수가 부릅뜬 눈 그대로 말을 이었다.
“…….”
“그거, 나잖아.”
* * *
「서해정이 그랬어요. 자기는 피해자고, 나는 가해자라고요. ……물론 내가 걔를 어릴 때 때렸던 건 맞아요. 근데 그 새끼는 정말 하나도, 날 무서워하지 않았어요. 트라우마가 남을 애가 아니었다고요. ……아, 아니, 사실 모르겠어요. 어쩌면 어릴 땐 날 무서워했을 수도 있겠죠. 난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아무튼, 지금은 아니에요. 지금은 날 안 무서워한다고. 근데 서해정은 그런 말을 하면서, 그걸 머릿속에 새기지 않으면 죽일 거라고 협박하면서, 칼을 내 손에 쥐게 하고 자기 배를 찌르게 만들었어요. 그, 미친 새끼가.」
서해정은 거짓말을 했다.
「왜 나한테 그런 복수를 했는지 이해가 안 됐어요. 왜 그런 짓을 한 거지? 왜? 내가 잘못한 건 맞아. ……근데 서해정은 나한테 복수할 생각이 없었어요. 그 새끼는 감정이 없거든요. 하물며 나를 증오하지도 않았어. 날 없는 사람 취급했다고요. ……근데 왜 갑자기?」
어쩌면 지극히 당연했던 사실이었는데.
「당신 앞에서, 그 새끼가 날 모르는 척했잖아. 그리고 뭘 했는지 알아요? 그러고 당신 어디 나갔죠? 그다음에 내가 다시 병실에 갔어요. 서해정이 불러서요. ……그리고 그 새끼가 내 목을 졸랐어요. 서해정은 여태껏 날 죽일 거라 협박만 했는데, 그땐, 정말 죽이려고 했어. 진심으로. 화가 나서요.」
모든 상황이 다 가리키고 있었는데.
「나한테 그랬어요. 네 역할을 잘하라고. ……그때야 난 알았다고요. 그 새끼는 복수를 하는 게 아니었어.」
서해정이 하는 사사로운 거짓말들은 상관없었다. 서해정이 누구를 해치든, 하물며 누구를 죽이든 상관없다. 서해정은 원래 그런 존재다. 도리어 지독하게 이기적인 아이라서, 제멋대로 하는 아이라서, 그걸 내가 다 받아 줄 수 있어서, 그래서 더 사랑스러운 거다.
다만
「이건 연극이었던 거예요. 당신 보라고 하는, 연극이었다고.」
그런 서해정을 해치는 괴물이, 나였다는 건.
그것만큼은.
* * *
공기가 멈췄다. 날카롭게 베인 말을 끝으로 현수는 연신 차오르는 숨을 고르기 바빴다. 가슴팍이 들썩였다. 자괴감으로 뼈마디가 욱신거렸다.
해정은 침대에 앉은 채 그런 현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커진 눈은 현수의 말에 못내 놀란 듯했다. 곧이어 큰 눈이 한 번 감겼다가 뜨였다. 그리고 또 두 번 빠르게 깜빡인다. 고운 얼굴이 오른쪽으로 천천히 기울었다.
“……그게 무슨 소리예요?”
“…….”
현수의 태도는 누그러지지 않았다. 현수가 입을 다문 채 대답을 하지 않자, 끝내 해정의 몸이 움직였다. 사냥을 하는 것처럼 몸이 빠르게 다가온다. 현수가 뒤로 물러서자 해정이 손을 뻗어 바로 뒤 방문을 닫았다. 잠시 뒤에 머물러 있던 시선이 다시 현수에게로 이동했다.
“응? 무슨 소리냐고.”
“…….”
“그럴 리가 없는데 왜 자꾸 개소리를 해요, 형.”
목소리 위에 인위적인 웃음이 번졌다. 현수가 발발 떨리는 손을 들어 해정의 어깨를 잡아 쥐었다. 손가락 끝이 하얗게 질렸다.
“서해정. 거짓말하지 마.”
“…….”
“……나도 안 할 테니까, 너도 하지 마. 그냥 넘어갈 생각 없으니까. 아니, 그냥 못 넘기니까.”
간과하고 지나쳤던 기억들이 많았다. 해정의 이부 형에게서 그 얘기를 듣고 나서야 현수는 묻어 두었던 그 기억들을 다시 파헤쳤다.
병실에서 괴물을 보는 악몽을 꾸었다는 해정은 끙끙, 괴롭다는 듯 신음을 내뱉으면서도 제 이름을 불렀었다. 악몽에서 깨어난 의식 사이로 저를 찾는 줄 알고 더 강하게 안아 주었는데, 후에 그 이야기를 꺼내자 서해정은…….
「꿈에서도 괴물이 나타나?」
「……요즘 가끔요.」
되레 숨기고 싶었던 기색으로 대답했었다. 이상한 일이었는데, 곰곰이 생각하지 않았다.
비단 그것뿐만이 아니다. 사실은 그거 말고도 가리키는 것들은 많았다. 저가 있어 주어도 낫기는커녕 더 심해졌던 해정의 상태도 그랬고, 해정이 자해를 시작한 것도 자신과 함께 지낸 뒤부터였다.
그럼 나는, 외면하고 싶었던 건가?
“…….”
“…….”
경고 조의 음성에 해정이 입을 꾹 닫은 채 현수를 내려 보았다. 잠시 후, 천천히 손을 들어 제 앞머리 밑에 넣었다. 이마를 짚고 고개를 숙인다. 돌연 몸이 살짝 떨리기 시작했다. 작은 웃음소리가 흐리게 퍼져 나갔다.
“하하, ……진짜, 우와.”
웃음소리가 별안간 확 크기를 키웠다. 해정의 어깨를 잡고 있던 손이 머뭇거리며 물러났다. 동시에 푹 숙이고 있던 턱이 들렸다. 해정이 앞머리를 쓸어 넘겼다. 훤히 보이는 얼굴은 정말로 웃긴 것을 보는 사람처럼 웃고 있었다.
뒤로 넘어간 손이 다시 흐르듯이 다가와 축축한 볼을 쓸었다. 현수의 몸이 일순 딱딱하게 굳었다. “아아…….” 웃음 끝에 감탄하는 목소리가 질질 끌렸다. 유쾌한 듯 벌어진 입이 시원한 모양을 그렸다.
그 모양 그대로, 해정이 말했다.
“어떻게 알았지?”
시인한다.
“잘 숨겼다고 생각했는데.”
수수께끼를 냈던 사람처럼 가벼운 목소리였다.
현수가 뒤로 주춤 물러났다. 발꿈치에 문이 닿았다. 물러설 곳은 없었다. 그렇다면 이제 사실을 직면할 때다.
서해정의 불안, 고통, 두려움이, 다 나라는 사실을.
남자의 말마따나 처음부터 멀쩡하지 않은 사람은 없다. 그리고 멀쩡했던 서해정을 망친 건, 나다.
아주 약간의 틈만이 벌어져 있던 추측이 그 짧은 한마디로 인해 견고하게 맞물렸다. 이제 틈은 없었다. 추측이 아닌 사실이 되었다.
현수가 눈을 감았다가 떴다. 젖은 속눈썹이 눈 아래에 눌렸다가 떨어진다. 눈물이 또 한 번 흘렀다. 자괴감. 자괴감. 자괴감. 그 견딜 수 없는 감정, 가장 피하고 싶었던 그 감정이 와르르 마음 깊숙이 쏟아졌다.
왈왈왈.
왈왈.
넌 결국, 아무도 못 살리네. 아무도 구원하지 못해. 쓸모없어. 아니, 악이지. 아무리 착한 척해 봤자야.
죽이고, 먹고, 해하고, 또 몰아붙이는 존재. 지옥. 불안. 악마. 저주. 벼랑 끝. 악몽. 악. 악. 악.
서해정의 정신을 갉아먹는 괴물
그게 너야.
사라진 줄 알고 있었던 개들의 짖는 소리가 귀에 내리박힌 건, 그다음 순간이었다. 그것을 다시 없애고 싶었다. 괴로워서 머리가 빙빙 돌 지경이었다. 아니야. 아니라고 부정하고 싶었다.
“……난.”
짖는 소리 사이로 현수가 말했다. 작게 말했는지, 아니면 크게 외쳤는지는 모르겠다. 소리의 크기는 중요하지 않았다. 해정은 금세 가라앉은 눈으로 현수를 보았다. 밤같이 탁한 눈. 그 눈에 비친 건 자신뿐.
“난 그럼, 네 옆에 못 있어.”
부정하고 싶었다. 짖는 소리를 죽이고 싶었다. 그래서 현수는 그렇게 말했다.
해정이 보는 괴물을 없애겠다고 다짐했던 건, 다름 아닌 자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