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문 앞
집 안이 조용했다. 침대에 누운 해정이 슬쩍 문 쪽을 바라보았다. 오늘은 다른 날보다 더 꼼꼼히 박스 테이프를 붙여 놨으나 어쩐지 심장이 불안정한 리듬으로 쿵쾅거려 잠이 오질 않았다. 해정이 휴대 전화로 시간을 확인했다. 새벽이었다. 지금 전화하면, 형이 싫어하겠지. 해정은 이성을 크게 키워 짐짓 그렇게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게, ‘형이 하라는 대로 할게요.’ 하고 말했던 게 어제 오후의 일이었다.
불현듯 목이 탔다. 밖에 누구 일어나 있지는 않겠지. 생각하던 해정이 곧 집에 아무도 없음을 깨달았다. 아빠의 영화 촬영이 끝난 걸 기념한답시고 부모는 여행을 간 상태였다.
천장을 멍하니 바라보던 해정이 기어이 상체를 일으켰다. 착각이었다는 듯 갈증이 사라졌다. 대신에 현수의 목소리를 듣고 싶은 충동이 인다.
그래도 형은 계속 나 받아 줘야 한다고 말했고, 형은 알겠다고 했잖아.
스스로를 납득시키듯 해정은 그런 생각을 했다. 그리고 침대에서 일어서서 휴대 전화 잠금을 풀었다. 불안정하게 박동했던 심장이 들뜬 것처럼 울렁거렸다. 흰 손가락이 급하게 현수의 연락처를 눌렀다. 그 찰나였다.
귀찮아할걸. 결국은 날 떼어 내려고 했잖아. 그건 사실인데?
소강되지 않은 배신감이 퍼렇게 혀를 내두르며 말했다. 손가락이 멈춘다. “씨발.” 급기야 해정이 휴대 전화를 침대 위로 던졌다. 갑자기 넓은 방 안이 몸 하나 크기의 관 속인 것처럼 답답하게 느껴졌다. 숨을 쉬어야 한다. 해정이 문으로 걸어가 잠금을 풀고 힘껏 문을 밀었다. 덕지덕지 붙어 있던 테이프가 쩌억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거실 밖으로 나와도 다를 건 없었다. 집 안은 새카맸고, 통유리창 밖의 야경만 빛나고 있었다. 아무도 없다. 형이 보고 싶지만, 여기에는 아무도 없다.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귀를 찢을 듯 날카로운 웃음소리가 들렸다.
그래, 그리고 안 찾아갈 거야. 널 귀찮아하고 있어. 너무 귀찮아.
이젠 ‘나’가 아니라 ‘너’였다. 심장 박동이 빨라졌다. 해정이 거실 가운데에 서서 어찌할 줄을 모르고 손바닥만 쥐었다가 폈다. 땀이 배어 나온다. 괴물이 나올 것 같았다. 안 돼. 생각을 멈춰야 한다. 이 생각보다, 자신을 더 괴롭게 만들어 생각 자체를 막아야 한다. 해정이 급히 아빠의 방으로 들어갔다. 쿵쾅거리는 발소리와 세게 여닫는 문소리로 잠시 소란스러웠으나, 다시 집 안은 조용해졌다.
넓은 방 한 면에는 유리로 된 장식장이 놓여 있었다. 여러 종류의 프라모델들이 각을 잡고 서 있었다. 해정은 장식장을 지나쳐 원목 책상 앞에 앉았다. 그리고 서랍장을 열었다. 도구들을 헤집는 손이 거칠었다.
해정은 프라모델을 조립할 때 쓰는 제도 칼을 찾고 있었으나, 맨 위 서랍장에는 없는 모양이었다. 쾅. 서랍장을 닫은 해정이 망설임 없이 두 번째 서랍장을 열었다. 얼른 찾아야 했다. 방치된 불안이 그날처럼 살기로 변모할까 봐 무서웠다. 더 이상 현수로 끔찍한 상상을 하는 건 괴로웠다. 차라리 손목에 빨리 톱날을 박아 버려서 생각을 휘발시키는 게 나았다.
이윽고 살짝 떨리는 손가락이 까만색 플라스틱 통을 지나다가 되돌아왔다. 낚아채듯 플라스틱 통을 집은 해정이 잠금장치를 풀어 덮개를 열었다. 플라스틱 통 안에는 제도 칼 대신, 알알이 모여 밀봉된 약봉지가 길게 붙어 고이 접혀 있었다. 해정이 약봉지를 들여다보았다. 무엇인지 생각하는 얼굴이었다.
신경 안정제다.
금방 유추할 수 있었다. 대중은 모르는 일이지만, 제 아빠가 정신과에 다니는 건 가족들에겐 생활처럼 당연한 일이었다. 놀랄 것도 아니었다. 직업 때문인지는 몰라도 저가 기억할 때부터 정신과에 다녔던 사람이었다.
‘이렇게 약을 꽁꽁 숨겨 놓을 줄은 몰랐지만.’ 해정은 생각하며 약봉지를 뜯어냈다. 설령 감기약이라 하더라도 죽지는 않을 테니 상관없었다.
* * *
널따란 대리석 식탁 위에 손만 한 크기의 박스가 놓여 있었다. 방으로 들어가려던 해정의 걸음이 멈추었다. 남색 포장지에 금색 리본이 둘러진 패키지가 익숙했다. 저가 좋아하는 초콜릿 브랜드의 선물용 포장이었다. 해정이 박스를 들어 올리자 딱딱한 종이가 식탁 위로 툭 떨어졌다.
[우리 해정이 수능 잘 봐. 사랑하는 엄마 아빠가.]
상아색 종이에는 짧은 문장이 검게 인쇄되어 있었다. 해정은 시큰둥한 얼굴로 엽서를 내려놓고 포장지를 찢었다. 박스를 열자 플라스틱 케이스에 작은 초콜릿들이 정갈한 모양으로 놓여 있었다. 해정이 망설임 없는 손길로 몰드 초콜릿 하나를 집어 입 안에 쏙 넣었다. 매끄러운 표면이 금방 입 안에서 녹아내렸다.
초콜릿 박스를 툭, 성의 없는 손길로 내려놓은 해정이 거실의 소파에 풀썩 눕듯이 앉았다. 집 안의 적막이 익숙하지 않았다. 곧바로 집으로 하교한 게 얼마 만이더라. 해정은 세어 보다가 곧 그만두었다. 그대로 교복 주머니를 뒤져 휴대 전화를 꺼낸다.
「응, 해정아.」
통화 연결음이 들릴 새도 없이 전화가 연결되었다. 중음의 나긋한 목소리는 초콜릿보다 더 빠르게 귀를 녹였다. 보고 싶다. 해정은 생각하며 소파 등받이 위에 뒤통수를 기대었다. 오후의 햇빛이 젖힌 얼굴 위로 내려앉았다. 눈이 감긴다.
“내일까지 어떻게 기다려요. 벌써 보고 싶은데.”
느닷없는 투덜거림에 나지막이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해정이 테이블 위에 두 발을 엑스 자로 겹쳐 올렸다.
「내일이 수능인데, 공부해야지.」
“대학 합격했다니까요. 최저만 맞추면 되는 건데.”
해정은 한숨을 쉬며 느릿하게 말했다. 어제도 누누이 말했던 것이지만 현수는 자못 단호했다.
실은, 현수가 그리 단호하다 하여도 해정은 결국 제 맘대로 하기 일쑤였다. 그러나 어제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 몸과 정신이 물먹은 솜처럼 늘어진 탓이었다. 무어라 물고 늘어지려던 해정은 급기야 배터리가 방전된 기계처럼 작게 ‘그래도…….’ 하다가 끝내 엎드려 버렸다.
이 주일 전, 아빠의 서랍장에서 찾은 신경 안정제 때문일 거라고 해정은 짐작했다.
그는 아빠의 약을 발견했던 새벽 이후 하루에 몇 번씩, 그러니까 불안해질 때마다 약을 먹기 시작했다. 많이 먹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하긴 하였지만 적당량을 알 수도 없으니 어찌할 방도가 없었다. 게다가 그저께까지는 두통이 조금 있을 뿐, 별달리 나쁜 반응도 없었다.
반응이 급격히 뒤틀린 건 어제부터였다. 어제부터, 깨어 있을 때도 자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질척한 늪에 잠긴 것처럼 몸과 눈꺼풀이 무거웠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마지막으로 정리하고 그래야 하는 거 아니야? 형은 수능을 안 봐서 잘 모르겠지만.」
“…….”
「……해정아?」
저를 부르는 목소리에 해정이 눈을 번쩍 떴다. 놀란 눈으로 고개를 가로젓더니 “……미안해요. 잠깐 졸았어요.” 한다. 넓적한 등이 빳빳이 섰다.
「피곤해? 끊을까?」
“아니에요. 어차피 할 것도 없어요.”
「그래도 내일 시험 잘 보려면 쉬어야지.」
“만날 쉬는데요, 뭐. 어제도 10시간 잤어요. 12시간인가.”
사실이었다. 요즘에는 신경 안정제를 먹고 자니까 온갖 불길한 기운을 원천에 봉쇄해 버리는 것처럼 까무룩 잠이 들었다. 의식의 필름을 싹둑 잘라 내는 것 같았다. 문제는 잘라 낸 의식들은 버리지 않고 엉킨 상태로 머리에 그대로 방치되었다는 것이다. 뒷머리가 묵직한 느낌에 해정이 결국 소파에 상체를 눕혔다.
눈을 감았다가, 눈을 떴는데 시야가 어두웠다. 해정은 어둠 속에서 눈을 몇 번이나 깜빡였다. 끊긴 의식 전의 상황이 떠오르지가 않았다.
“…….”
현수 형이랑 통화하다가 잠들었구나.
기억을 완전히 더듬은 건 잠시 후였다. 해정은 곧바로 소파를 더듬으며 휴대 전화를 찾았다. 휴대 전화는 바로 옆에 있었다. 7시. 꽤 많이 잤다고 생각했는데, 그건 또 아니었다. 소파에서 일어난 해정이 거실 불을 켰다. 눌린 뒷머리를 툴툴 털고선 휴대 전화를 다시 확인한다. 통화하다가 잠든 이후, 현수는 아무런 문자도 보내지 않았다.
[통화하다가 잠들었나 봐요]
그렇게 문자를 보내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답장이 왔다.
[응 그런것같더라 갑자기 숨소리만들리길래 끊었어]
[많이 피곤한것같은데 씻고 밥먹고 빨리자]
해정이 곧장 통화 버튼을 눌렀다. 아까와 같이 현수는 통화 연결음이 울릴 새도 없이 전화를 받았다.
“밥 같이 먹어요.”
약을 먹으면 기절하는 것처럼 다시 잠들 수 있겠지만, 해일처럼 덮쳐 오는 불안감도 기묘할 정도로 잠잠해지겠지만, 그러기가 싫었다. 본능은 여전히 계속 현수를 보고 싶다고 비명을 질렀다. 그저, 약의 통제에 목젖이 짓눌려 들리지 않는 것뿐이었다.
전화가 연결되자마자 그렇게 말하는 해정이 당황스러운 듯, 현수는 잠시 말이 없었다. 해정이 다시 입을 열었다.
“집에 부모님도 없고, 혼자 먹기도 싫어요. 와서 같이 밥 먹어요. 그리고 금방 가면 되잖아요. 형은.”
조곤조곤 설득하는 목소리였다. 현수가 대답을 고를 동안, 해정이 식탁으로 가 초콜릿을 하나 더 집어 입에 넣었다. 초콜릿이 녹기도 전, 맞물리는 이에 와그작 부서진다.
「알았어.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견과류와 말린 체리 맛이 느껴진다. 해정이 초콜릿을 볼에 머금은 채로 옅게 웃었다.
* * *
오 분 뒤면 도착한다는 현수의 연락에 해정이 거울을 확인했다. 눈 밑이 푸르스름하긴 한데, 이 정도면 괜찮을 것 같았다. 해정은 마무리를 하듯이 제 앞머리를 슥슥 정리하고, 식탁 위 초콜릿 박스를 휴지통에 넣었다. 아직 내용물이 많이 남아 있었으나 혼자 다 못 먹을 것 같았고, 어디에 정리를 해 두는 것도 귀찮았다. 어차피 여행을 떠난 부모가 올 때쯤이면 하우스 키퍼가 쓰레기봉투를 내놓을 테니 상관없었다. 초콜릿은, 현수가 가끔 가다 주는 걸로 충분했다.
잠시 후, 현관 벨소리가 넓은 집 안에 울려 퍼졌다. 식탁 의자에 멍하니 앉아 있던 해정이 벌떡 일어났다.
“형!”
현관문을 열자 볼이 발갛게 상기된 현수가 서 있었다. 회색 머플러는 저번에 저에게 사 주었던 것과 같은 종류였다. 해정이 활짝 웃으며 현수를 한 번에 껴안았다. 볼을 슥슥 비비자 쌓인 눈같이 차갑고도 부드러운 감촉이 느껴졌다.
집 안으로 들어선 건 한참이 지나서였다. “이제 들어가자. 형도 배고프다.” 현수가 저를 부둥켜안은 채 가만히 서 있는 해정의 허리를 토닥토닥 두들기며 말했다. 서서히 몸이 떨어졌다.
식탁 위에 비닐봉지 하나와 크래프트 쇼핑백 하나가 놓였다. 반투명의 비닐봉지 안에는 플라스틱 용기가 들어 있었다.
“이건 뭐예요?”
해정이 손을 뻗은 건 크래프트 쇼핑백이었다. 비닐봉지에는 ‘○○ 무릎도가니탕’이라는 로고가 떡하니 인쇄되어 있어 궁금해할 필요가 없었다. 해정이 쇼핑백을 제게로 끌어오는 동안, 현수는 비닐봉지에서 플라스틱 용기들을 꺼내었다.
“너 수능 잘 보라고.”
쇼핑백 안에는 사각형의 박스가 있었다. 외관만 보아도 그가 무엇을 사 왔는지 짐작이 가능했으나, 해정은 짐짓 눈을 둥그렇게 뜨며 “뭔데요?” 했다. 현수가 답을 하지 않고 플라스틱 용기의 뚜껑을 뜯었다. 뽀얗고 흰 국물 위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너 파 많이 안 넣지?”
“응.”
해정은 이리저리 박스를 돌려 보며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크리스마스 선물을 뜯는 아이처럼 들뜬 모습에 현수는 소리 없이 웃었다. 그리고 비닐봉지를 뜯어 파를 조금 넣은 뒤 해정의 앞으로 밀었다. 이윽고 박스에 붙어 있던 금색 스티커를 떼어 낸 해정이 박스를 열었다.
“저게 수제라 늦게 배송됐어. 오늘 왔더라. 원래 더 일찍 주려고 했는데.”
마지막으로 섞박지까지 꺼내 뚜껑을 뜯은 현수가 지나가듯 말을 붙였다.
내용물은 해정의 예상대로였다. 박스 안에는 한 입 크기의 초콜릿들이 칸칸이 들어 있었고, 드문드문 갈색의 표면 위에 ‘합격 기원’ 등의 글자가 흰색으로 새겨져 있었다. 틀어 놓은 난방 때문인지 따끈따끈한 공기 사이로 초콜릿 향이 퍼졌다. 해정이 입꼬리를 흐물거리며 웃었다. 고개를 들어 현수를 본다. 현수는 일회용 젓가락과 숟가락을 뜯어 주며 “일단 넣어 놔. 밥 먹자.” 했다.
“나 진짜 초콜릿 엄청 먹고 싶었는데.”
“그래?”
“응응. 고마워요. 진짜로.”
해정이 닫은 초콜릿 박스를 꼬옥 제 품에 안으며 말했다. 눈이 마주치자 애교를 부리듯 배시시 웃는다.
최선을 다해 기뻐해야 한다. 그래야만 이 사람의 관심을 더 많이 받을 수 있다.
교태의 목적이었다. 마치 형제가 많은 집의 자녀가 부모의 사랑을 어떻게든 더 받으려고 착한 척하고, 작은 것에 유난을 떨며 기뻐하는 것처럼 해정은 선물을 받을 때마다 행복해했다. 사실은, 선물을 받았다는 기쁨보다는 계속 받아야 한다는 불안이 더 컸으나 그 마음은 철저히 숨겼다.
식사를 마친 후 현수는 뒷정리를 했다. 시간을 확인하는 모습을 곁눈질로 보던 해정이 붙잡듯 황급히 손을 뻗어 현수의 팔목을 쥐었다. 현수의 고개가 돌아갔다.
“초콜릿만 먹고 가요. 형 커피 좋아하잖아요. 커피 타 줄게요.”
커피를 좋아한다는 말은 저번 주에 현수가 방송에서 지나가듯 언급했던 것이었다. 그걸 또 기억해 내고, 벽시계만 힐끔 보았을 뿐인데 이렇게 급하게 붙잡는 해정이 현수는 왜인지 모르게 애처롭게 느껴졌다. 별다른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이 아님에도 그랬다. 현수의 손이 복슬복슬 조금 자란 머리를 헝클었다. “알았어. 거실에 앉아 있을게.”
따뜻한 블랙커피 하나 내리는 것치고 시간이 오래 걸렸다. 부엌에서 몇 번이고 드르륵, 시끄러운 소리가 들렸으나 현수는 모른 척 거실에 앉아 멍하니 꺼진 텔레비전을 보았다. 이윽고 길고 큰 머그잔을 가져온 해정이 현수의 옆에 앉았다. “고마워.” 도자기 머그잔을 받아 든 현수가 생각보다 무거운 무게에 놀라 얼른 잔을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깊은 머그잔에 진한 색의 블랙커피가 가득 들어 있었다.
“이거 다 마시면 나흘은 잠 안 오겠는데.”
현수가 픽 웃으며 말하자 해정이 초콜릿 박스를 열며 “몰라요. 그냥 마셔요. 다 마시고 가요.” 했다. 잔을 드는 대신, 고개를 숙여 커피를 홀짝 마신 현수가 해정을 향해 몸을 돌렸다. 손을 들어 해정의 볼을 감싼다. 그새 초콜릿 하나를 입에 쏙 넣은 해정이 눈을 크게 뜨고 고개를 돌렸다. 볼록 튀어나온 볼을 현수가 문질문질 매만졌다.
“……요즘은, 어때?”
느닷없는 물음에도 해정은 놀라지 않았다. 다만 대답을 고르는 것처럼 눈을 굴릴 뿐이었다.
제게 형이 하라는 대로 하겠노라고 말한 뒤부터 해정은 확실히 눈에 띄게 고분고분해졌다. 나쁜 방향의 변화는 아니라 좋게 받아들여야 하는데도, 영 기분이 찝찝했다. 저가 알기로 해정은 그저 방송 애청자들과 이제야 조금 친목을 다지고 있는 단계일 뿐이고, 그 외에 별다른 걸 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아무런 과도기도 없이, 해정은 금방 안정을 찾았다. 비약적일 정도의 변화가 현수는 이상하다 못해 수상했다.
잠시 눈을 굴리던 해정이 이내 현수의 손목을 잡고, 고개를 돌려 손바닥에 살짝 입을 맞췄다.
“괜찮아요. 보다시피.”
뭔가를 숨기는 것처럼 의미심장한 웃음이 안면에 떠올랐다. 나른하고 평화로운 어조였다. 고요한 분위기는 조금이라도 캐묻다가는 꼭 얇은 설탕 판처럼 와작 깨질 것만 같았다. 그때, 차 안에서도 해정은 갑자기 무서울 정도로 화를 냈다. 결국 현수는 찝찝한 기분을 거두어 냈다. 그리고 잡힌 손의 손가락으로 해정의 볼을 톡톡 두드렸다.
“……애들이 너랑 친해졌다고 신났던데. 게임도 같이 하기로 했다며, 수능 끝나면.”
“어디서 그런 말들을 했어요?”
“어제 방송 끝나고 내가 따로 물어봤어. 게임 메신저로.”
그렇구나. 해정은 눈을 감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손바닥에 입술을 위아래로 비비적거리다가 멈추었다.
하나, 둘, 셋, 넷…….
해정이 머릿속으로 초를 세었다. 배가 부르고, 거실은 뜨끈하고, 입 안은 달콤하고, 옆에는 현수까지 있다. 머릿속이 비가 그친 뒤의 초원처럼 맑았다. 어디선가 자그마한 새가 찌르르 우는 것도 같았다. 환청……, 아니, 상상인가. 몰라. 해정이 사사로운 생각을 치워 내며 손바닥에 입술을 더 깊숙이 묻었다.
잠시 침묵이 내려앉았다. ‘내일 수능인데, 이러고 있어도 되나.’ 잠시 그런 생각이 떠올랐으나 휴식을 취하듯이 편안한 얼굴을 보니 흐름을 깨기도 어려웠다. 끝내 현수는 해정에게 손을 내어 준 채 잠자코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점점 손바닥에 닿은 입술에 무게가 실렸다. 해정의 얼굴이 기우는 탓이었다. 현수가 잡히지 않은 손을 들어 해정의 등을 톡톡 두드리며 “해정아, 졸리면 이 닦고 가서 잘래?” 작게 말했다. 수면 아래로 쉼 없이 내려가던 의식이 잠시 멈추었다. 해정은 눈을 감은 채로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해정아?”
“……으응…….”
아까 낮에도 통화하다 자지 않았나. 왜 이러는 거지.
현수는 생각했다. 원래 해정은 잠이 많은 편도 아니었다. ‘걱정되네.’ 현수가 살짝 인상을 굳힌 채로 해정의 등을 매만졌다. 고개를 끄덕이던 해정은 급기야 다시 잠에 빠져든 모양이었다. 잠시 그런 그의 얼굴을 바라보던 현수가 다시금 등을 크게 쓸어내리며 “해정아. 씻고 침대 가서 자자.” 했다. 아까보다 조금 더 큰 목소리였다. 그제야 해정이 슬쩍 눈을 떴다.
해정이 이를 닦는 동안, 현수는 해정의 방에 들어가 난방 매트를 켰다. 씻고 오면 재우고 가야겠다. 생각하며 슥 방을 둘러보다가 시선을 멈춘다. 닿은 곳은 방문이었다. 문 주변에 자잘하게 테이프 조각이 붙어 있었다. ‘어쩌다 저렇게 된 거지.’ 깔끔한 방과 박스 테이프로 더러워진 문의 간극 탓인지, 별거 아닐지는 몰라도 못내 신경이 쓰였다.
곧이어 문이 열렸다. 침대 옆에 앉아 문을 노려보던 현수가 짐짓 눈에 힘을 풀었다. 터덜터덜 힘없이 다가오는 해정을 보며 툭툭 침대를 친다. “와서 자.”하며 이불을 걷어 두자 해정이 슬렁슬렁 침대 위로 올라왔다. 현수가 해정의 턱 아래까지 이불을 덮었다. 방 불을 끄고, 협탁 위 수면등을 켠다. 은은한 불빛이 침대 주변을 밝혔다. 이윽고 해정이 이불 위로 손을 꺼내어 잡아 달라는 듯 살짝 흔들었다. 다시 침대 옆에 앉은 현수가 해정의 손을 쥐자 눈이 감겼다.
“너 잠들면 형 갈게.”
“응…….”
해정이 잠꼬대를 하는 것처럼 흐리멍덩한 목소리로 답했다. 욕실에서 방으로 오는 동안, 신경 안정제를 또 한 번 먹었더니 하루 종일 아슬아슬 잠겨 있던 정신이 기어코 푹 젖은 탓이었다. 명치 위가 좀 아픈 것도 같았으나 신경 쓸 정도는 아니었다. 무엇보다 졸렸다. 아니, 졸립다기보다는 지쳤다.
그래도 하나 좋은 건, 손에 느껴지는 온기였다. 형. 아직 가면 안 돼요. 나 안 자고 있어요. 입을 열어 당부하고 싶었는데 목소리가 안 나왔다. 그럴 힘이 없었다. 입만 벙긋거리던 해정이 이내 완전히 수면 아래로 잠식했다.
싹둑. 필름이 다시 한 번 잘렸다.
방 안은 쥐 죽은 듯 조용했다. 현수의 손 사이사이 얽혀 있던 손가락이 돌연 실크 리본처럼 스륵 풀렸다. ‘완전히 잠들었나.’ 현수가 무릎을 바닥에 딛고 엉덩이를 일으켰다. 해정의 얼굴 위로 그림자가 드리웠다. 현수가 관찰하듯 그의 얼굴을 살폈다. 감긴 눈에서 입술까지 바라보다가 손을 뻗는다. 손바닥에 깨끗한 뺨의 감촉이 느껴졌다.
“……기절한 것같이 자네.”
뺨 부근을 맴돌던 손가락이 슬슬 올라갔다. 손가락으로 속눈썹을 한 차례 훑는다. 가벼이 다물려 있던 입술이 아슬아슬 흔들리던 꽃잎 위로 빗방울 하나가 떨어지는 것처럼 톡, 벌어졌다. 촉촉한 틈 사이로 색색 자그마한 숨소리가 달싹였다.
예뻐라. 현수의 얼굴에 은은한 미소가 퍼졌다. 웃고 있다는 걸 자각하자마자 ‘참 나. 무슨 부모도 아니고.’ 자조적인 생각이 떠올랐으나 또 요즘 자신이 해정에게 하는 걸 보면 마냥 틀린 말도 아니었다.
누군가를 챙겨 주거나 염려하는 건 제게는 습관이었다. 어느 날 경태에게 지적당했던 것과 같이, 어쩌면 이기심이기도 했다. 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강박. 처음 해정을 받아 준 것도 분명 그런 이유가 맞다.
근데 요즘은, 잘 모르겠다. 한낱 그 강박, 그리고 이기심 때문인지.
해정의 선물을 사는 건 ‘챙겨 줘야겠다.’ 하고 의식적으로 생각하는 게 아니었다. 그보단, 머플러 선물에 행복해했던 얼굴을 보았을 때 느낀 그 감정을 좇는다는 게 맞았다.
수제 초콜릿을 살 때도 그랬다. 그 얼굴을 보고 싶어서 홀린 듯 주문했고, 주문한 뒤에는 왜인지 모르게 스스로가 우스운 기분이 들었다. 변명처럼 다섯 개를 더 주문하고 나니 더 우스웠다. 꼭, 짝사랑하는 상대에게 빼빼로를 주기 위해 반 전체에게 빼빼로를 돌리는 중학생 같다는 생각이 든 탓이었다.
‘그건 비유가 좀 다른가.’ 현수의 손가락이 살짝살짝 해정의 볼을 눌렀다. 심술을 부리는 것 같기도 했다.
“형이 너한테 정이 많이 들었나 봐.”
당장은 그렇게 정의할 수 있었다. ‘뭐, 아빠 마음?…….’ 저가 떠올려 놓고도 웃긴지 현수가 푸스스 웃으며 손을 올려 부드러운 앞머리를 한 번 쓸어 넘겨 주었다. 현수의 손에 의해 뒤로 넘어간 앞머리가 다시 앞으로 쏠렸다.
그리고 그 순간, 현수가 얼굴을 굳혔다. 불현듯 기분 나쁜 위화감이 등을 타고 기어 올라온 까닭이었다. 현수가 입을 꾹 다물었다. 확인을 하듯 고개를 기울여 입술 가까이에 귀를 댄다.
“…….”
아무런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내내 들리던 숨소리조차도.
현수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급기야 현수가 해정의 어깨를 쥐어 한 번 흔들었다. “해정아.” 나지막한 목소리는 조금 떨리고 있었다. 해정은 눈을 뜨지 않았다. 핏기가 빠진 것 같은 혈색이 불안감을 부추겼다. 숨소리도 여전히 들리지 않았다.
“해정아.”
속삭이던 목소리가 기어이 진성으로 커졌다. 어깨를 흔드는 손길도 조금 더 거칠어졌다. 해정의 얼굴이 좌우로 흔들렸다. 그때, 고요했던 얼굴이 왈칵 인상을 찌푸린다. “으응…….” 언제 그랬냐는 듯, 해정이 칭얼거리는 소리를 내었다. 입술이 불만스레 툭 튀어나왔다. 몸을 뒤척이더니 이윽고 옆으로 눕는다. 다시 숨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
현수의 손이 천천히 떨어졌다. 그는 당황한 눈으로 가만히 해정을 내려 보았다. ‘……착각이었나.’ 생각했으나, 그렇다고 여기기에 찰나의 그 얼굴은 질식사하기 직전의 사람 같았다.
기묘한 기분이 뒷목을 에워쌌다. 통화를 하다가 잠들던 것. 밥을 먹는 내내 졸린 듯 끔뻑 거리던 눈. 조금 전의 상황. 아까부터 신경 쓰였던 방문의 테이프들. 다 이상했다.
해정을 바라보던 눈이 감겼다. 현수가 고개를 살래살래 내저었다. 천천히 일어선다. 저가 과민 반응을 하는 걸 수도 있었다. 아니, 과민 반응이다. ‘진짜 부모도 아니고.’ 걱정을 털 듯 현수는 짐짓 장난을 섞어 생각했다. 마지막으로 손을 뻗어 해정의 머리를 손가락 끝으로 슬쩍 매만진 현수가 방을 나섰다.
거실 불 스위치는 부엌을 지나쳐야 있었다. 현수는 놓고 가는 건 없는지 생각하며 걸음을 떼었다. 방에 놓아 둔 쓸데없는 걱정들이 계속해서 저를 부르고 있는 듯한 착각이 일었으나 애써 무시했다. 과한 걱정이다. 해정을 어린애처럼 대하긴 하지만, 그는 정말로 다섯 살배기 어린애가 아니다.
거실 불을 끈 뒤 이어 현관에 다다른 현수가 현관 불에 의지해 신발을 신다가, 별안간 행동을 멈추고 번쩍 고개를 들었다. 목이 허전하다고 느낀 탓이었다. 머플러가 없다. 어디다 뒀더라. 현수가 천장을 바라보며 기억을 더듬었다.
집에 들어서자마자 해정이에게 안겼고, 한참 있다가 부엌으로 바로 갔지. 가서, 식탁 위에 쇼핑백 올려 두고, 또 비닐봉지 올려 두고…….
생각하던 현수가 이내 “아.” 짧게 소리를 내었다. 신발을 벗는다. 걸음이 향한 곳은 부엌이었다.
* * *
약에 의해 사지가 절단된 의식은 더 이상 몸을 깨울 힘이 없다. 육체가 시간의 흐름에 지쳐 스스로 일어날 때까지 방치한다. 그게 언제인지는 알 수 없다. 해정은 수면 아래에서 눈을 감고 있었다. 해정의 주변을 너울거리기만 하던 의식이 갑자기 그물망에 걸려든 것처럼 우악스러운 힘에 끌려갔다.
……기절한 것같이 자네.
익숙한 목소리가 해정의 세상 전체에 울렸다. 새카만 바닷속에 여린 햇빛이 슬쩍 스쳤다가 사라졌다. 해정이 눈을 떴다. 목소리가 멈추자, 끌려가던 의식은 풀려났다. 다시 해정의 곁으로 돌아와 너울거린다.
형이 너한테 정이 많이 들었나 봐.
다시 한 번 강한 힘이 전체를 흔든다. 해정은 반응하고 싶었다. 뻐끔거리자 입 사이로 공기 방울이 꼬록 거리며 생기더니 이윽고 상승하며 소멸했다. 해정은 수면 위로 올라가기 위해 몸부림쳤다. 허나 의식은 그걸 거부했다. 해파리처럼 유연하게 해정의 손을 피한다.
답답했다. 그렇게 느끼는 순간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 내가 어떻게 물에 있지. 공기는 어디 있지. 현실적인 생각이 약 기운과 싸우기 시작했으나, 열세였다.
지진이 인다. 심해어들이 놀라 우왕좌왕하다가 곧 한쪽으로 몰려가기 시작한다.
해정아.
흔들림은 더 강해졌다. 좌우로 몸이 쏠렸다. 의식도 마찬가지였다. 그때, 해정이 갈기갈기 찢긴 의식의 몸뚱어리를 잡아냈다.
입이 움직였다. 무어라고 소리를 낸 것 같았는데 스스로에겐 들리지가 않았다. 허나 말을 하긴 한 것 같았다. 잠깐 손에 잡혔던 의식은 액체가 되어 손아귀를 빠져나가더니 다시 합체했다.
지진이 멈췄다. 다시 고요해졌다. 다만 저는 힘들었다. 몸에 힘이 빠졌다. 더 어두운 곳으로 가라앉는다.
……정아.
기어이 칠흑만치 어두운 곳에 당도했다. 여트막한 목소리가 송사리처럼 휘적대며 다가오더니 해정의 볼을 툭 쳤다. 해정은 미동하지 않았다.
서해정.
이젠 진짜 일어나야…….
이번엔 조금 더 세다. 작은 몸통에 힘을 꽉 주고 볼을 쳐 댄다. 해정의 눈꺼풀이 꿈틀거리자 이때다 싶어 한 번 더 몸을 부딪쳤지만 힘에 부친 모양이었다. 목소리는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해정은 여전히 그대로다.
이러다 진짜 늦겠어.
송사리의 입이 갑자기 메기처럼 가로로 쭈욱 늘어났다. 뒤늦게 입에 맞춰 몸집이 불어난다. 넓적한 몸은 해정을 통째로 삼킬 만큼 컸다. 아귀가 느리게 벌어진다. 생겨난 공기 방울이 해정의 얼굴에 닿았다.
비린내.
해정이 눈을 떴다. 동시에 입이 헙, 다물린다.
“……정아, 서해정!”
물고기의 입 속은 제 방 안이었다.
“…….”
해정은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도록 눈을 굴렸다. 방 안. 푸르스름한 바깥. 축축한 등. 보글보글 끓는 소리. 침대 위의 자신. 그리고 제 옆에는…….
“……형.”
김현수가 있었다.
해정과 눈이 마주치자 살짝 찌푸려져 있던 인상이 순식간에 풀어졌다. 현수가 해정의 등과 매트리스 사이에 손을 넣고 그의 등을 밀었다. 해정의 상체가 일어났다.
“엄청 안 일어나네. 형 없었음 너 큰일 났다.”
“…….”
“빨리 씻고 나와. 아침 먹고 수능장 가려면 빠듯해.”
비린내는 멸치 육수 냄새였다. 해정은 현수의 얼굴을 보며 눈을 깜빡였다. 침대를 짚고 일어선 현수가 기어이 그의 이마를 톡 쳤다. “빨리 안 일어날래?” 타박하는 목소리가 정신을 깨웠다. 해정이 제 다리를 덮고 있는 이불을 걷었다.
* * *
진눈깨비가 내리고 있어서인지 길이 막혔다. 앞 유리에 매달린 와이퍼가 바쁘게 눈을 치우고 있었다. 빠득, 빠득. 젖은 고무가 유리에 밀리는 소리가 반복되었다. 현수가 시간을 확인했다. 여유를 두고 출발한 게 다행이었다. 시간을 보던 눈이 시선을 옮겼다.
조수석에 앉은 해정은 책가방을 품에 안은 채로 현수를 바라보고 있었다. 들뜬 눈이 꼭 수험장이 아닌 유원지라도 가는 듯했다. 눈이 마주치자 싱긋 웃는다.
“긴장 안 돼?”
현수가 곁에 있어 주었다는 걸 좋아라 하며 티 내는 것도 좋지만, 일단은 시험이 코앞이었다. 현수의 물음에 해정은 괘념치 않는다는 듯 어깨를 들먹였다. 대신 방글방글한 얼굴 그대로 현수에게 “어디서 잤어요?” 묻는다.
“안 잤어.”
앞 차가 서서히 전진했다. 현수가 브레이크에서 발을 떼어 내며 말을 이었다.
“자면 너 못 깨울 것 같아서 그냥 일어나 있었어.”
“제가 못 일어날 것 같았어요?”
왜 그런 생각을 했는지 모르겠는지, 해정이 의아한 목소리로 물었다. 대답을 고르는 사람처럼 현수의 입술이 숨었다가 드러났다.
“……응. 그냥.”
‘그냥?’ 해정은 여태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현수는 공연히 정면을 응시했다. 핸들이 옆으로 꺾였다.
“…….”
“근데, 새벽에 아주머니 오시더라?”
부연 설명 대신, 새로운 화제가 현수에 의해 잡혀 올라왔다. 해정이 창틀 위에 팔을 얹어 얼굴을 기대며 고개를 끄덕였다. 현수가 다시 입을 열었다.
“너는 내가 깨우겠다고 도시락이랑 반찬만 부탁드렸어. 그래 놓고 아주머니 가고 나서 갑자기 잠 와서 죽는 줄 알았지만.”
말끝에 고의적인 웃음이 매달렸다. 해정은 제 팔에 기운 볼을 더 파묻으며 “아줌마가 형보고 누구냐고 안 해요?” 물었다.
“응. 하셨지.”
“뭐라고 했어요?”
“사촌 형이라고 했어.”
해정은 가볍게 호응했다.
“아무튼 고마워요. 정말로.”
그 뒤, 이런저런 이야기를 더 나누었으나 점점 말수가 줄어들던 해정은 기어이 조용해졌다. “자?” 현수의 물음이 허공에 흩어졌다. 현수가 눈을 흘겨 해정을 확인했다. 아까 그 자세 그대로 눈만 감고 있다. 현수의 얼굴이 미묘하게 가라앉았다.
차가 교문 앞에 멈추었다. 멀찍이서 사람들의 소리가 들렸다. 교문 앞에 서서 제 선배들을 응원하는 학생들의 목소리였다. 기어를 바꾸고, 시동을 끈 현수가 여전히 자고 있는 해정을 보고서 약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내 손을 뻗어 해정의 몸을 흔든다. “서해정. 일어나. 도착했어.” 현수의 목소리에 곧바로 눈이 뜨였다. 깊이 잠든 건 아닌 모양이었다.
“……다 왔어요?”
“응.”
“고마워요.”
잠에 취한 목소리가 흐지부지 흘러나왔다. 해정이 안전벨트를 풀고, 책가방을 등 뒤로 멨다.
“기다릴까?”
현수가 해정의 뒷모습에 대고 말했다. 해정이 문을 열다 말고 그를 돌아보았다. 놀란 듯 큰 눈을 두어 번 깜빡인다.
“……여기서요?”
“응. 근처에 있다가 끝날 때쯤 올까?”
토끼 눈을 뜨고 있던 얼굴 위로 사르륵 설렘이 떠올랐다.
“형은, 나한테 왜 이렇게 잘해 줘요?”
그 말에 현수가 픽 웃으면서 팔을 뻗었다. 건조한 손가락이 슬쩍 해정의 볼을 스친다. 해정이 놓치지 않고 물러서려는 손을 잡아채어 제 입술로 끌었다. 그리고 촉, 손등에 짧게 입을 맞추었다.
“내가 언제는 못한 적 있어?”
장난기가 섞인 말이었으나, 그건 정말 아니라는 듯 해정은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현수는 항상 다정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챙겨 주고, 생각해 주고, 받아 주었다. 늘 그랬다.
형이 너무 좋아. 해정은 그 말 대신 제 볼을 손등에 비볐다. 그 모양을 빤히 바라보던 현수가 맥을 자르듯 돌연 잡힌 손을 잡아당겼다.
“시험 잘 보고 와. 졸지 말고.”
해정은 쉬이 물러났다. 그도 그럴 게 입실 시간이 머지않은 시간이었다. 교문으로 향할 때까지 계속 뒤를 돌아보고, 손을 흔드는 해정을 현수는 가만히 바라보았다.
잠시 후, 해정의 뒷모습이 사라졌다. 교문이 닫히자 동시에 현수가 핸들 위로 엎어졌다.
“하아…….”
참고 있던 한숨이 찬 공기 중으로 퍼졌다. 손등 위에 이마를 처박은 채로 현수는 눈을 감았다.
지난밤. 집으로 돌아가기 전 의자에 걸어 둔 제 머플러가 기억난 바람에 되돌아갔던 식탁. 그리고 식탁 위에 있던 빈 컵.
뜯어진 약봉지.
별거 아닐 거라고 또 한 번 자신을 다그쳤으나 의구심은 쉽사리 사라지지 못했다. 그러기엔 의식적으로 넘어간 것들이 너무나도 많았다. 약봉지를 주머니에 넣고, 빈 컵을 설거지통에 넣은 현수는 결국 다시 외투를 벗었다.
새벽 내내 잠든 해정을 바라보았다. 얼마 지켜보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정신을 차려 보니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지독할 정도로 일어나지 않던 해정은 밥을 먹을 때까지 멍한 눈이었다. 심지어 저가 식탁 위에 그대로 두고 잔 약봉지와 빈 컵마저도 기억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본인이 눈치채지 못하는데 섣불리 무어라고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도 모르겠지만.’ 현수는 생각하며 핸들에서 얼굴을 떼어 냈다. 그리고 주머니를 뒤적였다. 약봉지는 꿈이 아니었다는 것처럼 곧바로 손에 잡혔다. 구겨진 유산지를 잠시간 내려 보던 현수가 그대로 창문을 내려 그것을 창밖으로 던졌다. 멀리 날아가지 못한 종이는 팔랑이며 차 바로 옆 인도에 내려앉았다. 건조한 손바닥이 현수의 얼굴을 쓸어내렸다.
……내가 정말, 해정이한테 정이 많이 들었나 보다.
어젯밤 잠든 해정에게 했던 말을, 현수는 저에게 다시 한 번 되새겼다. 그렇지 않다면, 막연한 걱정을 넘어 마음을 무겁게 짓누르는 이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가 없었다.
* * *
해가 지고 있었다. 턱을 괸 채 바깥을 바라보고 있던 현수가 휴대 전화를 꺼내어 시간을 확인했다. 지금 출발하면 수능이 끝날 시간에 얼추 맞을 것 같았다. 그는 조금밖에 남지 않은 아메리카노를 한 번에 머금고 일어났다. 차갑고 쓴 물이 꼴깍 목 뒤로 넘어갔다.
카페 뒤에 주차해 놓은 차를 향해 가던 중에 벨소리가 울렸다. ‘벌써 끝났나?’ 현수는 망연히 생각하며 주머니에서 휴대 전화를 꺼내었다. 예상과 달리 발신인은 해정이 아니었다.
“여보세요.”
「연락 한번 먼저 안 하지? 건방진 놈아.」
정호의 목소리가 툭 하니 튀어나왔다. 난데없는 핀잔에 현수는 픽 웃으며 차 문을 열었다.
“네가 쓸데없이 많이 하는 거라고 생각 안 해?”
휴대 전화 너머로 정 없는 놈이라며 무어라 하는 말들이 쏟아졌다. 현수는 대충 귓등으로 흘리면서 시동을 걸고, 운전석과 조수석의 열선을 켰다.
“나 바쁘니까 용건만 말하면 안 되냐?”
이윽고 어느 정도 들어 주었다 싶어 말을 자르니, 용건이 있긴 했는지 「아, 맞다.」 한다. 현수가 또 한 번 웃었다. 내비게이션으로 목적지를 설정하는 동안 정호가 본론을 꺼내었다.
「12월 말일에 뭐 하냐? 안 하지?」
“……왜?”
「왜긴. 한잔하려고 그러지.」
“12월 얘기하기에는 너무 이르지 않냐. 아직 11월도 다 안 갔는데.”
현수는 승낙이나 거절 대신 어중간하게 다른 말을 내놓았다. 차가 움직였다.
「청해 예약하려면 지금 해야 돼.」
청해는 정호가 좋아하는 횟집의 이름이었다. 휴가철에 두어 번 정도 따라간 적이 있었는데, 맛집인 건지 갈 때마다 사람들이 북적였다. 거기까지 떠올리던 현수가 이내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청해? 정동진 가려고?”
「당연하지. 해돋이에는 정동진 아니겠냐?」
“무슨 정동진까지. 나이 먹는 게 신날 때는 지났잖아.”
「내년이 그냥 새해냐? 우리 서른 되는 해인데? 네 말대로 겁나게 슬프니까 기쁨으로 승화시켜 보자고.」
“…….”
「갈 거지?」
자연스레 해정의 얼굴이 눈앞에 떠오른다. 현수는 곤란한 듯이 머리를 긁적였다. 습관적으로 해정의 반응이 걱정된 탓이었다.
「어?」
“…….”
「에이. 마누라라도 있는 사람처럼 왜 이렇게 튕기시나. 가정은커녕 여친도 없으신 분이.」
정호가 꼬여 내는 투로 느물거렸다. 그때, 현수의 머릿속에 어제의 일이 떠올랐다.
비록 결국 저녁에 만나긴 했지만, 하루 떨어질 수는 있었다. 그 말인즉슨 해정은 이제 하루 떨어져 있는 정도로는 심하게 불안감을 느끼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바로 집으로 하교하라는 제 말에 공격적으로 변하지도 않았다. 만약 멀리 여행 가는 것을 싫어하는 것이라면, 그 정도는 속일 수 있었다.
잊고 있던 변화를 인지한 순간, 아주 작은 틈이 생겨났다.
“……알았어. 난 방송하고 가면 좀 늦을 수도 있어.”
틈 사이로 목소리가 떨어졌다. 얼마나 빠르게 떨어지고 있는지 부딪히는 공기가 서늘했다. 정호가 유쾌한 목소리로 인사하곤 바로 전화를 끊었다. 현수는 제 팔을 슥슥 비비며 히터를 틀었다.
* * *
학교에 도착하자마자 문자가 왔다. 해정이었다. 현수는 아까 내려 주었던 데라고 답장한 뒤 조수석 시트에 손등을 댔다. 뜨끈했다.
답장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저 멀리서 익숙한 인형이 보였다. 현수의 눈이 다가오는 해정을 따랐다. 이윽고 조수석 문이 열렸다. 차가운 공기가 한꺼번에 공간 안으로 들어왔다.
“수고했어.”
“형도 수고했어요, 나 기다리느라.”
해정이 가볍게 답하며 웃었다.
현수는 시동을 걸면서 해정을 살폈다. 아무리 이미 대학에 합격했다 하더라도 일단은 큰일을 치른 건 맞을 텐데 해정은 그렇게 보이지 않았다. 짐을 털어 냈다는 듯 개운해 보이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망치지는 않았을까 불안해 보이지도 않았다. 무덤덤한 얼굴이었다.
“시험은, 잘 봤어?”
부담을 줄 수도 있는 말이라는 건 알았지만 현수는 그리 물었다. 기다리는 내내 취한 사람처럼 눈만 붙이면 잠을 잤던 해정의 모습이 자꾸 떠올랐었다. 그게 여간 불안한 게 아니었는데, 돌아온 해정이 특별한 말을 덧붙이지 않으니 참을 수가 없다.
안전벨트를 매고 있던 해정이 고개를 들어 현수를 바라보았다. 학업에 대해 일절 물어본 적이 없던 현수가 그렇게 물은 게 의아한 모양이었다.
“평소보단 못 봤는데, 최저 맞출 만큼은 될걸요.”
의아함은 가볍게 날아갔다. 해정은 탁, 안전벨트를 고정시키고는 답했다. 현수가 “다행이네. 잘했어.” 말하며 해정의 정수리를 슬쩍 쓰다듬었다. 해정이 미미하게 웃었다.
“최저 등급이 어느 정도야?”
궁금해서 물었다기보다는 그저 대화를 이어 가는 꼬리였다. 현수가 손을 떼어 내고 핸들을 돌렸다.
“확실히는 모르겠는데……. 대부분 2등급만 맞으면 될걸요, 아마.”
“2등급?”
현수의 눈이 크게 뜨였으나 창문을 바라보고 있는 해정은 눈치채지 못하였다. 대수롭지 않다는 목소리로 “네.” 답한다.
“되게 높은 대학인가 봐. 2등급이면.”
“네.”
간결한 답이었다. 사실이었으니 망설일 것도 없었다.
생각하는 듯 눈을 이리저리 굴리던 현수가 곧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어딘데?” 물었다. 되돌아온 답 역시 간결했다.
빨간불로 인해 차가 멈추었다. 이윽고 놀란 얼굴이 그대로 돌아가 해정을 바라보았다.
“……너, 원래 그렇게 공부 잘했어?”
해정의 성적에 대해 구체적으로 예상을 한 적은 없었으나, 놀랄 수밖에 없는 대답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가 간다는 곳은 보통 공부 잘하는 학생들이 가는 대학이 아니었다. 그야말로 수재들만 가는 곳이었다.
해정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것 역시 사실이니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이윽고, 현수가 입을 벌리며 활짝 웃었다.
“와. 너 진짜 짱이다.”
순수한 칭찬이자 기쁨이 담뿍 들어간 목소리였다. 손이 다가와 정수리를 헝클었으나 해정은 아까처럼 웃지 못했다. 예상외의 반응이 얼떨떨한 탓이었다. 잠자코 제 머리를 헝크는 손길을 받고 있자 현수가 다시 한 번 입을 열었다.
“그렇게 공부를 잘하는데, 어떻게 여태껏 한 번도 자랑을 안 했어? 나라면 입이 근질근질할 텐데.”
제 인생에 생존을 위한 행위를 제외하고 하는 일은 현수를 보는 일이었다. 어쩔 수 없이 현수를 볼 수 없는 시간에는 공부를 했다. 제게 공부는 그저 시간을 죽이는 행위일 뿐이었다. 그러니까, 그로 인해 따라오는 좋은 성적은 당연했다. 공부를 많이 하니까 잘하는 것뿐이라고 해정은 여기고 있었다.
무어라 대답을 해야 할지 모르겠는지 뒷목을 긁적인다. 현수가 손을 미끄러트리듯 내려 볼을 매만졌다.
“나 명문대생이랑 아는 사이네?”
이건 과장이 섞인 칭찬이긴 했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의 진심도 들어 있었다. 공부와 담 쌓았던 과거가 있다 보니 더 그러했다. 순전히 자신의 능력이 닿지 않는 영역에 대한 막연한 동경이었다.
게다가, 해정이가.
이상한 포만감이 느껴진다. 기어이 현수의 눈이 휘었다. 현수가 쓰다듬던 살결을 약하게 꼬집었다.
멍하게 현수를 바라보고 있던 눈이 찬찬히 내려갔다. 이윽고 해정이 아래를 바라본 채로 제 아랫입술을 살짝 물었다. 스멀스멀 흰 볼이 발갛게 물든다.
“……이에요.”
“응?”
어쩔 줄 모르던 입술이 용기를 내어 무어라고 웅얼거렸으나 자동차 엔진 소리를 뚫고 나오기엔 너무나도 희미한 목소리였다. 현수가 슬쩍 턱을 돌려 귀를 가까이 했다.
“……나, 전교 일등이에요.”
몰랑몰랑한 목소리가 공기 중으로 둥둥 떴다. 현수가 다시 고개를 돌렸다. 가까운 곳에 해정의 얼굴이 자리했다. 다시금 맞닿은 눈은 꼭 처음 초콜릿을 먹어 본 꼬마 아이처럼 흥분과 설렘, 그리고 수줍은 욕심이 넘쳐흐르고 있었다.
현수의 입술 끝이 매끄럽게 올랐다. 그리고 슬쩍 얼굴을 물렸다. 해정의 눈이 집요하게 현수를 좇았다.
“우와. 전교 일등?”
현수의 과장된 되물음에 해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현수는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꾹 누르고 해정의 이마서부터 서서히 시선을 내렸다. 뜸을 들이니 마음이 급해지는 건지, 해정이 “네.” 보채듯이 소리를 내어 대답했다. 동시에 아래턱까지 내려간 시선이 다시 올라 눈을 맞추었다.
“최고네. 해정이. 진짜 잘했어.”
넘쳐흐르는 감정들을 기꺼이 흡수하고서, 현수는 그렇게 속삭여 주었다.
빠앙. 별안간 뒤에서 클랙슨 소리가 났다. 직진 신호였다. 차가 다시 움직였다. 현수가 핸들을 잡으며 “밥 뭐 먹을래? 배고프지?” 물었다. 해정이 대답하려는 순간이었다. 이번엔 벨소리가 차 안을 메웠다. 자연스레 현수 쪽으로 신경을 세우던 해정이 곧 제 코트 안에서 울리는 소리임을 깨닫고 주머니를 뒤적였다.
“잠시만요.”
“응.”
해정이 액정을 확인했다. 박동우. 저와 동갑인 현수의 방송 애청자였다. 별안간 해정의 머릿속에 수능 끝나는 날 같이 PC방에 가자던 동우의 말이 떠올랐다. 생각 없이 알겠다고 대답해 버린 저까지 기억한 해정이 설핏 인상을 찌푸렸다. 벨소리를 끄고 다시 주머니에 휴대 전화를 넣는다. 흘긋흘긋 그가 하는 것을 훔쳐보던 현수가 입을 열었다.
“안 받아도 돼? 부모님 아니야?”
“부모님 외국 가 있어요. 내일 와요.”
“아…….”
“저 배고파요. 빨리 아무 데나 가서 밥 먹어요.”
해정은 화제를 바꾸려는 듯이 목소리를 키워 말했다.
그러는 동안에도, 조수석 창문에 빛이 비쳤다. 주머니 속에서 반짝거리는 액정이었다. 옆을 보고 있지는 않지만, 그게 시야 끝에 계속 걸렸다. 부모님이 아니면 누구인지 현수는 대충 짐작이 갔다. 고민하는 얼굴로 핸들을 툭툭 검지로 두드리던 현수가 기어이 천천히 입을 떼었다.
“친구들이야?”
친구들. 그래, 부모님이 아니면, ‘친구들’이다. 해정의 세계를 넓혀 줄 타인들. 모른 척하면 안 된다는 의무감이 현수를 부추겼다.
해정이 입을 꾹 다물고 가만히 정면을 응시하다가, 이윽고 “네.” 답했다. 목소리는 별다르지 않았다.
“근데 왜 안 받아. ……아아, 맞다. 오늘 같이 게임 하기로 했지? 그거 때문 아니야?”
현수는 마치 지금 생각난 양 말했다. 연락을 무시하는 해정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한 척 목소리를 높게 띄운다.
“…….”
허나 제 노력이 무색하게, 돌아오는 답이 없었다. 무언가를 기억한 듯이 몸이 반사적으로 굳기 시작한다. 현수가 다시 한 번 해정 쪽으로 시선을 흘렸다. 해정은 어느새 창문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그 바람에 표정을 살필 수가 없었다. 현수가 핸들을 고쳐 쥐며 침을 꼴깍 삼켰다.
돌연 다시 한 번 벨소리가 울렸다. 해정의 손이 느리게 움직였다. 주머니를 뒤적이더니, 곧이어 휴대 전화를 꺼낸다.
“…….”
“여보세요.”
평소처럼 얌전한 어조였다. 현수의 입술 새로, 본인도 모르게 참고 있던 숨이 터졌다.
* * *
“대박, 이걸 이기네. 진짜……. 노넴, 아니, 해정아…….”
게임이 끝나자마자 동우는 제 입을 가리며 옆에 앉은 해정을 바라보았다. 반대편 자리에 앉은 세민도 마찬가지였다.
벌써 3연승이었다. 하는 족족 1등을 했다. 해정의 덕이었다. “진짜 존나 멋있다, 너…….” 급기야 세민은 감격한 얼굴로 해정의 어깨를 톡톡 다독였다. 해정이 물끄러미 손길이 닿고 있는 제 어깨를 바라보았다. 별안간 세민이 감동을 참지 못하겠다는 듯 벌떡 일어섰다.
“뭐 먹을래? 진짜 내가 뭐 사 줘야겠다. 내가 뭐 사 줄게.”
“야 됐어. 너 돈 없잖아. 내가 사 줄게. 해정아, 뭐 먹고 싶어?”
동우가 덩달아 일어났다. 동우와 세민은 원래부터 친한 듯했다. 해정의 시선이 천천히 올라 둘을 바라보았다. 이윽고 딱딱한 얼굴에 표정이 그린 것처럼 번진다. 친절하고도 정갈한 미소였다.
“너네 먹는 거. 아무거나 사 줘.”
동우와 세민이 사 온 것은 컵라면이었다. 의자에 머리를 기대어 눈을 감고 있던 해정이 다가오는 기척에 눈을 떴다. 동우가 해정의 자리에 컵라면을 놓으며 곧바로 “게임 돌린다?” 했다. 반대편에 앉은 세민이 왈칵 인상을 찌푸렸다.
“아, 이거 다 먹고 돌려. 먹으면서 게임 하는 거 싫다고.”
동우가 탐탁지 않은 얼굴로 “그럴래?” 해정에게 물었다. 해정이 싫다 하면 바로 게임을 시작할 작정인 듯했다. 해정은 웃음을 옅게 띠며 “먹고 하자.” 했다. 억지로 웃으면서 게임을 하려니 머리가 아파 올 지경이었다.
후루룩거리는 소리가 양쪽에서 들려왔다. 라면 냄새가 풀풀 났다. 해정은 아무도 볼 수 없을 정도로 약하게 인상을 찌푸리다가, 이내 “미안한데, 난 못 먹겠다. 속이 별로 안 좋네.” 했다. 컵에 얼굴을 박고 있던 세민이 번뜩 고개를 쳐들었다.
“어, 그럼 나 먹을까?”
손은 이미 컵라면을 향해 있었다. 해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국물을 마시던 동우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한심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거지새끼.”
“진짜 거지한테 거지라 하면 상처받는다.”
그리 말하면서도 익숙하다는 듯 세민은 망설임 없이 컵라면의 뚜껑을 열었다. 흰 김이 퍼졌다.
“해정아, 저 거지새끼 가방 봐 봐.”
동우가 장난거리를 발견한 듯이 눈을 반짝였다. 그리고 해정의 의자를 툭툭 쳤다. 세민이 면발을 빨아들이며 보라는 듯 제 등 뒤에 두었던 가방을 들었다. 검은색 백팩의 아래가 다 뜯겨져 실로 꿰매 놓은 상태였다. “완전 거지 같지.” 동우가 킥킥거리며 말했다.
“야, 근데 이건 내가 거지라서 그러는 거 아니거든? 말은 제대로 하자? 지도 알면서.”
라면을 입에 머금은 채로 세민이 말했다. 동우가 웃음을 머금은 채로 “그건 그렇지.” 하다가 설명을 하려는 듯 해정을 바라보았다.
“저게 현수 형이 선물해 준 거거든.”
허공에 뜬 백팩을 감흥 없이 바라보고 있던 눈에 감정이 트였다. 해정이 천천히 뒤를 돌아 동우를 바라보았다.
“현수 형?”
“응. 쟤 고등학교 입학할 때 현수 형이 쟤 집 사정 알고 나서 몰래 선물해 줬대. 저 새끼 감동 먹어서 그때부터 지금까지…….”
“너 현수 형 실제로 본 적 있어?”
해정이 동우의 말을 자르고 세민에게 물었다. 줄곧 사근사근했던 말투에 툭 가시가 불거졌다. 눈빛도 마찬가지였다.
“어? 아니? 그냥 메신저로. 내가 가끔 말 걸었거든. 막 관심 받으려고 집안사 오지게 털어놓으면서 형 덕분에 힘이 났어요. 감사합니다. 이랬는데 형이 어느 날 주소 알려 달라 하더니 보내 줬었어.”
“아…….”
“근데 형 실제로 보면 대박이겠다. 궁금해.”
동우가 웃으며 말했다. 세민이 고개를 끄덕이며 “맞아.” 동조했다. 해정이 등받이에 등을 기대었다. 그리고 세민의 등 뒤에 있는 가방을 빤히 바라보았다. 동우와 현수의 생김새를 추측하며 짧게 담소하던 세민이 그의 시선을 느꼈는지 제 가방과 해정의 눈을 번갈아 보았다.
“너도 메신저로 말 걸어 봐. 그렇게 시청자 참여도 많이 했으면서 한 번도 말 건 적이 없어?”
해정의 시선을 얼렁뚱땅 해석한 모양이었다. 해정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헐. 진짜 없어? 현수 형 완전 아낌없이 주는 나무인데.”
동우가 말했다. 해정이 다시 동우를 바라보았다. 깊이 가라앉은 눈이었으나 동우는 이상을 눈치채지 못하고 “그치?” 하며 세민에게 동의를 구했다. 세민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 그, 용인 사는 애 있잖아. 명훈이. 걔는 형이 교복 해 줬을걸?”
“헉. 진짜?”
“몰랐냐? 걔 그래서 후기 팬 카페에 올렸었는데? 감사하다고.”
“형이 방송에서 말 안 하면 모르지. 와. 가보로 간직해야 된다, 그건.”
동우가 다시 한 번 해정의 의자를 툭툭 쳤다.
“그런 거는 솔직히 특이 케이스니까 우린 바라지 말자. 1등 한 적 없다고 불쌍한 척하면 형이 아이템이라도 선물해 주니까 그래 봐 봐.”
“관종 새끼. 너 그거 관심 받고 싶어서 그러는 거잖아.”
“당연하지.”
돌연 해정이 뒤돌아 제 가방을 꺼내었다. 가방을 헤집는 손이 얕게 떨리고 있었으나 얼굴만은 침착했다. 동우와 세민은 이러니저러니 하며 계속 잡담을 늘어놓고 있었다. 약봉지 하나를 손에 쥔 해정이 소리 없이 일어났다.
“나 잠깐 물 좀.”
“아, 응.”
조금 굳은 얼굴에 세민은 의아한 눈을 했지만 말을 덧붙이지는 않았다. 해정이 카운터 방향으로 사라진 뒤, 동우에게 “해정이, 속 많이 안 좋은가 본데?” 할 뿐이었다.
해정은 세민이 컵라면을 다 먹을 때쯤에야 돌아왔다. 세수를 했는지 앞머리와 얼굴이 젖어 있었다. 세민이 의자에 앉는 해정의 얼굴을 살폈다. 표정은 좀 나아진 것 같았는데, 얼굴빛이 눈에 띄게 창백했다.
“해정아, 혹시 속 많이 안 좋아?”
동우도 세민과 같이 느꼈는지 걱정하는 얼굴을 했다. 책상 가까이 의자를 끌던 해정이 고개를 돌려 동우를 바라보았다. 별나라 이야기를 듣는 것처럼 눈을 깜빡인다. 그러다가 입꼬리를 끌어 살짝 웃는다.
“아니, 괜찮아.”
가시를 빼내지 못해 싹둑 잘라 낸 뒤의 목소리가 맥없이 누그러졌다.
* * *
집 안이 컴컴했다. 현수는 신발을 벗고 익숙한 각도로 손을 뻗어 거실 불을 켰다. 황량한 풍경이 그를 반겼다. 더없이 익숙한 광경임이 분명한데도 이상하게 낯설었다. 눈을 돌려 시계를 본 현수가 곧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흘렸다. 최근 딱 이 시간이면 해정과 함께였다는 사실이 떠오른 탓이었다.
침대에 앉아 긴 시간 배달부를 뒤적였으나 구미가 당기는 게 없었다. 결국 현수는 배달부를 무릎 위에 올려 둔 채로 얼굴을 젖혔다. 이어 상체가 느리게 넘어갔다. 이불 위로 풀썩, 등이 떨어졌다. 형광등 빛이 직선으로 쏟아져 눈꺼풀 위가 뻘겋게 물들었다. 현수는 손등을 들어 제 눈을 가렸다.
“…….”
억지로 귀를 틀어막고 있는 것처럼 이어지는 정적은 해가 뜰 때까지 이어졌다.
* * *
잠에서 깬 이유는 배고픔이었다. 점심을 카페 샌드위치로 때운 것에 더해 저녁까지 거르고 자니 허기가 고통으로 느껴질 정도였다. 샤워를 하고 나온 현수는 곧바로 부엌으로 향했다. 냉장고를 열어 안을 죽 훑는다.
먹을 만한 건 초콜릿과 우유뿐이었다. 게다가 쌓인 초콜릿 박스는 입맛이 당기지도 않을뿐더러, 저가 먹으려고 산 것도 아니었다.
결국 선택권은 하나였다. 한숨을 쉬며 우유를 꺼낸 현수가 그릇에 우유를 부은 뒤 찬장을 열었다.
찬장 안에는 시리얼 박스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들어 올리니 너무 가볍다 생각하긴 하였는데, 남아 있는 양이 예상보다 더 적었다. 온전한 모양의 시리얼이 미끄러져 나오다가, 곧 부스러기와 가루가 탈탈 우유 위로 떨어졌다. 그것을 망연히 바라보던 현수는 그대로 그릇을 들어 주욱 우유를 들이켰다. 우유를 거의 다 비워 내고 나니 잠겨 있던 한 입 거리의 시리얼들이 입 안에 들어왔다. 그는 와그작 시리얼을 씹으며 깨끗이 빈 그릇을 싱크대 안에 넣었다.
되돌아간 곳은 다시 침대였다. 배는 만족스럽게 채워지지 않았다. ‘뭘 시켜 먹어야 하나.’ 천장을 보며 생각하던 참이었다.
초인종 소리가 들렸다. 현수가 아까보다 빠르게 상체를 일으켰다. 벽시계를 확인한다. 10시. 아직 해정이 올 시간은 아니었다.
침대에서 거실로 나가는 사이, 또 한 번 초인종이 울렸다. 찌르르 거리는 소리가 간격 없이 이어지기 시작했다. 현수가 인상을 찌푸리며 “나가요.” 크게 외쳤다. 동시에 해정은 분명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성질이 폭탄 같던 경비 아저씨의 얼굴을 상상하며 문을 열었다.
벌어지고 있는 문 사이로 흰 손이 불쑥 튀어나왔다. 두꺼운 철문을 잡아 벌린다. 빠르게 문이 열렸다.
“어?”
서 있는 건 해정이었다. 현수가 눈을 크게 뜨며 깜빡이자 해정이 슬쩍 웃었다. 시비 거는 것같이 느껴졌던 초인종 소리는 제 짓이 아니라는 듯 맑은 웃음이었다. ‘착각이었구나.’ 현수는 생각했다.
“왜 이리 일찍 끝났어?”
“수능 끝났잖아요. 이제 출석만 하고 가도 돼요.”
“아.”
짧게 수긍하며 살짝 몸을 비키자 해정이 자연스레 현관으로 들어섰다. 현수는 신발을 벗는 해정을 지나 보일러 앞에 섰다. 온도를 올리고, 다시 해정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냉장고에 아무것도 없던 게 기억나 ‘배고파?’ 물으려던 순간이었다. 숙인 허리를 펴던 해정의 몸이 휘청거렸다.
현수가 눈을 키우며 짧게 숨을 들이켰다. 반사적으로 해정을 향해 가려던 몸이 일순 멈췄다. 부축해 줄 겨를도 없이 해정이 스스로 몸을 바로 세웠다. 그리고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행동을 이어 갔다. 이번엔 해정이 현수를 지났다.
“…….”
“왜 거기 서 있어요?”
거실 중간에 서서 돌아보는 얼굴은 평온함을 가장하고 있었지만, 얼굴빛은 그러지 못했다.
이윽고 현수가 해정에게로 걸어갔다. 현관은 응달이어서 몰랐는데, 햇빛 아래 서니 혈색이 좋지 않은 게 여실히 보였다. 확인하듯 그의 앞에 다가가던 걸음이 우뚝 멈췄다. 현수는 해정을 올려 본 채로 살며시 얼굴을 굳혔다.
“……너, 어제 잠 안 잤어?”
혼을 내는 것처럼 딱딱한 목소리가 이에 부딪혔다. 해정의 컨디션이 난조인 것과, 그걸 저가 걱정하는 것은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었으나 걱정이 다른 감정으로 뻗어 나가는 건 새삼스러운 일이었다. 이틀간 현수의 머릿속에 눌어붙어 있던 약봉지의 존재가 짜증스러울 정도로 집요하게 그를 건드린 결과였다.
“잠이요? 잘 잤는데.”
해정이 눈을 크게 뜨며 눈 아래를 더듬거렸다. “왜요? 다크서클 있어요?” 묻는 목소리는 맹물처럼 투명하게 흘렀다.
현수는 설핏 인상을 찌푸리면서도 무어라고 말을 하지 못하고 입만 꾹 다물었다. 약봉지. 그 세 음절의 단어가 성대의 점막에 붙어 떨어질 생각을 않는 탓이었다.
형 때문이잖아요.
만약 약봉지의 정체가 제 불안한 예감대로라면. 그래서 해정이 그렇게 말한다면 어떻게 답해야 할까. 정말 내 탓일까. 자문하는 순간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해정에게 다른 방법을 강구해 보자고 저가 제안할 적부터 그가 변한 건 사실이어서 더 그러했다.
“…….”
“형?”
불편한 표정으로 일관하며 아무 말도 않는 현수가 영 이상한지, 해정이 손을 들어 그의 볼을 톡 건드렸다. 현수가 번뜩 고개를 쳐들었다. 놀란 눈으로 해정을 바라보다가, 기어이 체념하는 것처럼 한숨을 내쉰다.
“다시 신발 신어. 마트 가자.”
현수는 두려움을 윤활제 삼아, 하려던 말을 다시 목 아래로 넣어 버렸다.
* * *
“돼지가 좋아, 소가 좋아?”
정육점 코너 앞이었다. 분홍빛 정육대 앞에서 잘린 고기를 내려 보던 현수가 뒤를 돌았다. 카트 손잡이에 비스듬히 몸을 기대고 있던 해정과 정면으로 눈이 마주했다. 해정은 현수의 뒷모습을 응시하고 있던 표정 그대로 “아무거나 괜찮아요.” 했다.
“너 먹을 거니까 네가 먹고 싶은 걸로 해야지.”
방관적인 태도에 현수가 약한 불만을 품고 말했다. 협조를 바란다기보다는, 입이 짧은 해정이 그나마 먹고 싶어 하는 것을 고르고 싶은데 정작 본인이 자꾸 애매한 답을 내놓으니 답답했다.
해정이 몸을 바로 세우며 어깨를 들먹였다.
“진짜 모르겠는데. 아무거나 사도 돼요.”
난처하다는 목소리였다.
“그럼 소고기. 괜찮지?”
결국 조금 더 영양가가 있음직한 걸 고르자 해정이 고개를 얕게 끄덕였다. 고기 팩을 집어 들어 카트에 넣은 현수가 앞머리를 잡고 방향을 이끌었다. 해정이 천천히 카트를 밀면서 그를 따랐다.
“근데 왜 집에서 먹어요, 새삼? 밖에서 먹지. 귀찮게.”
해정이 허리를 숙여 랩을 꾹꾹 엄지로 누르며 말했다. 물컹한 감각이 손끝에 느껴졌다.
기본적인 조미료들을 카트에 넣던 현수가 해정을 바라보았다. 시선이 진득하게 머물렀다. 조금 고민하는 것처럼 손의 움직임이 느려졌다가, 이내 다시 빨라졌다. 시선도 다시 카트 안으로 돌아갔다.
“너 수능 끝났으니까 그렇지. 형이 맛있는 거 해 주려고.”
“사 주면 되지.”
“집에서 먹는 게 건강해.”
“내가 환자예요?”
계속되는 장난질을 저지하고 만지지 못하게 고기를 앞쪽으로 옮기니 해정이 숙이고 있던 허리를 세우면서 픽 웃었다. 현수는 대답 대신 카트를 끌었다. 카트 바퀴가 바닥 위를 덜덜거리며 굴렀다.
“내가 환자 같냐고요.”
돌연 농담처럼 흐른 말의 껍질이 삭, 조용한 소리를 내며 벗겨졌다. 추궁하듯 낮은 목소리가 바닥을 긁었다.
채소 옆에 달려 있는 속비닐을 향해 뻗던 손이 허공에서 멈추었다가, 곧 다시 전진했다.
“누가 그렇대?”
상한 목소리가 툭 튀어나왔다. 의중은 알 수 없었으나, 그의 기분을 맞춰 주기에는 저도 그다지 기분이 좋지 못했다. 도리어 ‘환자 같은 걸 알면, 몸 관리 좀 해.’ 하며 답답함을 화로 풀어내고 싶은 충동이 일 정도였다. 툭. 팽팽하게 당겨 있던 속비닐이 점선을 따라 뜯겼다.
그 순간 비닐이 거칠게 빠져나갔다. 저절로 인상을 찌푸린 현수가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미묘하게 굳은 옆얼굴이 버리는 것처럼 카트에 비닐을 내던졌다. 아까의 초인종 소리처럼 신경질적인 빛이었다.
“……뭐 하는 짓이야?”
잔잔하나 분노를 고스란히 품은 목소리로 현수가 물었다. 해정은 태연하게 카트 손잡이를 쥐었다. 가지런한 얼굴은 현수와 달리 분노 한 조각도 남아 있지 않았다.
“야채는 안 먹을 거라서요.”
“…….”
상황을 갈무리시켜 버리려는 듯이 말끔한 어조였다. 계산대로 향하는 뒷모습을 바라보던 현수의 입술 새로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짐을 뒷좌석에 내려놓는 건 해정의 몫이었다. 탁, 뒷문을 닫은 해정이 공연히 손을 털어 냈다. 평소 같았으면 고맙다는 둥의 말을 했을 현수는 해정이 무사히 짐을 넣는 것까지만 본 뒤 운전석에 올랐다. 매정한 소리로 문이 닫혔다. 해정이 물끄러미 닫힌 문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걸어 조수석에 앉았다. 이미 현수는 안전벨트를 맨 채로 정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혹시 화났어요?”
삐삐삐삐삑. 후방 경고음 사이에 나지막한 목소리가 흘렀다. 후진하던 차가 멈추었다. 현수가 슬쩍 고개를 돌려 해정을 보았다. 시선이 머무르는 건 순간이었다.
“화난 건 너겠지.”
평소의 온도보다 두드러지게 낮은 목소리였다. 차가 주차 선을 빠져나갔다.
현수가 정산소에 앉아 있는 직원에게 영수증을 건네고 “감사합니다.” 하며 고개를 까딱할 때까지, 해정은 입을 다물고 있었다. 창문과 함께 기다란 차단기가 올랐다.
“나 화 안 났어요.”
단정 짓듯 깔끔하게 베어 내는 목소리였다. 고집을 피우는 것처럼 들리지도 않았다. 해정은 정말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듯했다. 현수가 눈을 굴려 조수석 쪽을 바라보았다. 해정은 큰 손으로 제 볼을 위아래로 밀어 올렸다가 내리고 있었다. 의미 없이 느긋한 속도였다.
“그냥 짜증 낸 거예요.”
고저 없는 어투가 그리 말을 덧붙였다.
현수는 입을 꾹 다물고 정면을 바라보았다. 해정이 어느 포인트에서 배알이 꼴렸는지 가늠조차 가지 않았으나 더 이상 파고들지 않았다. 피곤해서 더 이상 대거리를 하고 싶지 않았다.
“알았어.”
간결한 대답을 끝으로 침묵이 내려앉았다. 공기가 당겨진 속비닐처럼 팽팽해졌다. 그 넓고 질긴 면에 얼굴 전체를 박고 있는 것처럼, 별안간 호흡이 곤란한 느낌이 들이쳤다. 위잉. 운전석 창문이 짧게 내려갔다.
볼을 비비던 손이 내려가 이번엔 턱을 매만진다. 해정은 눈을 한 번 깜빡이곤 제 얼굴을 만지던 손을 거두었다. 천천히 고개를 돌려 창문을 바라본다. 잔잔한 호수처럼 평온한 눈이 바깥 풍경을 담았다.
* * *
현수가 뒷좌석에서 짐을 꺼내자 그 뒤에 서 있던 해정이 손을 내밀었다. 달라는 듯이 손가락이 까딱였다.
“됐어.”
그 말에 손이 거두어졌다. 대신 빈손이 잡혔다. 아무런 트러블도 없었다는 듯 자연스럽게 감겨드는 손에 당황한 건 도리어 현수였다. 손가락이 슬쩍 굳었으나 얽히는 손가락을 거부하지는 않았다.
계단을 오를 동안 입을 여는 사람은 없었다. 간간이 해정이 긴 손가락으로 톡톡 현수의 손등을 두드렸다. 톡, 칠 때도 있었고 톡톡, 연달아 두드릴 때도 있었다. 그게 신경 쓰여 손을 조금씩 움찔거리던 현수는 현관문 앞에서 기묘한 해방감을 느꼈다.
“나 손 좀.”
마침내 손이 떨어졌다. 현수는 작게 한숨을 내쉬면서 도어록을 풀었다. 그사이 땀이 배어 나왔는지 인식이 되지 않는 바람에 몇 번 손바닥을 슥슥 바지에 닦았다. 마침내 기계음과 함께 현관문이 열렸다.
신발장 옆에 비닐 봉투를 두고 집 안으로 들어섰다. 현수를 뒤따라온 해정이 신발을 벗고선 비닐 봉투를 들었다. 해정보다 뒤늦게 신발을 벗은 현수가 그를 따랐다. 해정이 냉장고 옆에 비닐 봉투를 두고, 냉장고를 열었다. 동시에 현수가 해정의 옆에 앉았다.
“내가 할게.”
주스를 꺼내 들며 말해도, 냉장고 앞에 자리한 몸은 움직일 생각을 않았다. 현수가 흘긋 옆을 바라보았다. 해정은 냉장고 안의 무엇인가를 유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시선을 따라가자 닿은 곳은 겹겹이 쌓인 다섯 개의 초콜릿 박스였다. 그를 확인하고서 현수는 주스를 틀 안에 넣었다.
“네 거 사면서 애들 것도 샀어.”
“애들?”
“시청자들. 그냥 수능 보느라 수고했다고.”
지나치게 사사로운 얘기라 입을 움직이기가 귀찮을 정도였다. 최대한 짧게 대답한 현수가 다시금 비닐 봉투를 뒤졌다. 곧이어 고기 팩을 꺼내 들고 냉장고를 향해 몸을 돌렸다. 그때, 해정의 손이 쌓인 초콜릿 박스의 맨 아래를 향했다. 그대로 박스 다섯 개를 꺼낸다. 다섯 개의 박스가 아슬아슬하게 흔들렸다.
현수는 고기 팩을 냉장고에 넣으면서 “먹을 거면 하나만 먹어.” 했다. 아직 이벤트 공지를 올리지 않았으니, 해정이 다 먹어도 상관은 없었지만 일단은 식사를 해야 했다.
비닐 봉투를 살폈다. 냉장고에 넣을 건 이게 끝인 듯했다. 현수는 그대로 일어섰다. 냉장고 문을 닫으려고 했으나, 바로 앞에 해정이 버티고 앉아 있었다. 해정은 처음 보는 생물을 보는 것처럼 여전히 박스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너 줬던 거랑 맛은 다 똑같아. 아무거나 먹어도 돼.”
현수가 해정을 내려 보며 말했다. 해정의 시선은 떨어질 줄을 몰랐다. 샅샅이 초콜릿 박스를 훑어보는 눈에 의아함을 느끼다가, 곧 거두었다. 일단은 점심을 준비하는 게 급했다. 현수는 해정의 등을 지나치며 “냉장고 문 닫아.” 했다.
허나 조리대 위에 봉투를 올려놓고, 찬장을 열고, 조미료의 입구에 붙어 있는 비닐을 뜯어내기 시작할 때까지 냉장고 문이 닫히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대신 경고음이 날카롭게 울렸다. 현수가 조미료를 조리대 위에 내려놓은 후 뒤를 돌았다.
“문 닫게 일어나 봐.”
그사이, 해정은 박스를 하나 까서 초콜릿 하나를 우물거리고 있었다. 현수가 냉장고 문을 쥔 채로 그리 말하는데도, 해정은 요지부동이었다. 평온한 얼굴로 고개를 들어 현수를 바라볼 뿐이었다.
삐, 삐, 삐, 삐. 간헐적인 기계음이 현수를 독촉했다. “나오라니까.” 현수가 말하는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꼴깍. 내용물을 삼킨다. 그리고 초콜릿 하나를 집더니, 입에 넣는다. 볼 한쪽이 볼록 솟았다. 망설임 없이 또 한 개가 입 안에 처박혔다.
“왜 그래. 천천히 먹어.”
삐, 삐, 삐. 냉장고는 여전히 문을 닫아 달라 아우성이었고, 해정은 하나도 들리지 않는다는 듯 대충 초콜릿을 씹고 또 꼴깍 목 뒤로 조각을 넘겼다. 기이할 정도로 기계적이었다.
현수가 인상을 찌푸렸다. 이상한 분위기를 눈치챈 순간 갑작스레 머리가 어지럽게 흐트러지기 시작했다. 그동안 해정은 또 두 개를 한꺼번에 입 안에 쑤셔 넣었다.
“그만하라니까?”
현수가 해정의 팔을 잡아챘다. 해정은 여전한 표정으로 잡힌 팔을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별반 힘을 주지 않은 것 같은데도, 현수는 휘청거리며 해정의 팔에서 떨어졌다.
해정의 손은 멈추지 않았다. 열다섯 개가 든 초콜릿 박스에, 초콜릿이 네 개가 남았다. 파랗게 언 손가락은 멈추지 않고 초콜릿을 집었다. 얼굴도 마찬가지였다. 이미 체한 것처럼 파리한 기색이 감돌고 있었다.
그가 기괴한 행동을 하는 것보다, 속에 받지 않는지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안색이 현수를 벼랑으로 몰았다.
대체 왜 그러는데.
급기야 분노가 화르륵 일었다. 핑, 뜨거운 열기가 눈 아래에 피었다. 목젖이 울렁인다. 다시금 그를 향해 손을 뻗자 금방 잡혔다. 손가락 사이 어딘가가 꾹 짓눌렸다. 소스라치는 고통이 퍼졌다.
“아!”
현수가 몸을 비틀자 손이 떨어졌다. 그사이, 해정은 남은 두 개의 초콜릿을 입에 넣었다. 똑똑히 보라는 듯 주시해 오는 눈이 무서웠다. 눈앞이 핑핑 돌기 시작한다. 눈가가 뜨거워서 델 것 같았다. 이마도 마찬가지였다.
“서해정, 너 진짜 미쳤어?”
현수가 날카롭게 소리쳤다. 다시 해정의 팔을 붙잡는다. 부들부들 떨리는 손등 위에 푸른 핏줄이 불거졌다. 불현듯 두 번째 박스를 뜯던 손이 멈추었다. 동시에 냉장고의 경고음이 뚝 멎었다.
퍽. 둔탁한 소리와 함께 크림색 벽에 초콜릿 박스가 처박힌 건, 찰나의 일이었다. 반사적으로 눈을 꾹 감던 현수가 서서히 눈을 떴다. 끼긱. 돌아가지 않는 목을 돌려 벽을 바라보았다. 일그러진 모양의 종이 박스가 바닥에 나뒹굴고 있었다. 심장이 튀어 오를 듯 뛰기 시작했다.
“그럼, 그냥 버릴까?”
정적 사이로 해정이 말했다. 형형하게 타오르는 목소리가 갈고리처럼 뒷목을 잡아끄는 듯했다.
“나 혼자 다 처먹기 힘드니까 그게 낫긴 하겠다.”
이어지는 목소리는 마트에서, 그리고 차 안에서와 다를 것이 없었다. 평이했고, 시냇물처럼 잔잔했다.
망연히 벽을 바라보던 얼굴이 돌아갔다.
“……대체, 문제가 뭐야.”
현수는 꾸역꾸역 말을 뱉어 냈다. 그 물음이 우스운 건지 해정은 비릿하게 웃었다. 그리고 눈을 내려 제 앞에 놓여 있는 초콜릿 박스를 툭툭 손톱으로 쳤다. 쓰읍, 바람을 삼키는 소리를 내면서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기울인다.
“글쎄요.”
간결한 대답 끝에 간질이는 웃음이 매달렸다. “문제가 뭘까.” 기꺼이 생각해 보겠다는 듯 구는 목소리가 빙글빙글 돌며 현수의 귓가를 휘저었다.
“형.”
곧이어 말을 거는 것처럼 새삼스러운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깨끗한 손톱을 향해 있던 눈이 올랐다. 다시 눈이 마주한다.
“사람이 진짜 지랄 같은 게요.”
“…….”
“욕심이 점점 커진다?”
우드득, 구겨지는 소리가 났다. 현수의 눈이 소음을 좇았다. 초콜릿 박스 하나가 흰 손 안에서 우그러지고 있었다. 사이로 튀어나와 질척하게 손에 묻어나는 것도 상관없다는 듯, 손은 점점 더 강하게 초콜릿 박스를 압박했다.
“…….”
“형 착한 거, 되게 좋았는데……. 이제 좀 싫어졌거든요.”
눈빛은 협박하는 것처럼 점점 가라앉았다. 계속 바라보고 있으면 심해 아래로 잠겨 아무것도 듣지 못하고, 보지 못할 것 같은 불안감이 들 정도로 새카맸다.
현수는 고여 있던 눈물을 손등으로 슥슥 닦아 내는 척하면서 그 눈을 피했다. 손등이 다시 떨어진 건 스스로의 의지가 아니었다. 어느새 손목에 붙은 손가락 때문이었다. 손목이 아릴 것같이 아팠다. 현수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다시금 눈물이 고인다.
“있잖아, 나보다 아프고, 불쌍하고, 형 없으면 뒤지겠다고 그러면서 빌빌대는 애 나타나면,”
구구단을 설명하는 선생님처럼 조곤조곤하게 나열되던 말이 뚝 멎었다. 해정이 눈을 내리깔며 살짝 한숨을 내쉬었다. 다시 번쩍 눈이 들린다.
“형은 걔한테도 이럴래?”
아니.
머리는 손쉽게 답을 내렸는데, 입이 움직이지 않았다. 조여 오는 것처럼 끈끈한 눈에 긴장되어 해정의 말이 마치 어려운 난센스 퀴즈처럼 들린 탓이었다. 부정이 확실한 답이었지만, 그렇다고 간단히 아니라고 답하면 가볍게 대답하는 거 아니냐며 또 의심할 것 같았다.
불현듯 그게 화가 났다. 저가 잘못한 건 하나도 없는 것 같은데, 그저 해정의 건강이 걱정될 뿐이었는데, 전전긍긍한 것밖에 한 게 없는데, 결국 돌아오는 건 이런 상황이라는 게 억울했다. 아무리 달려도 제자리인 쳇바퀴 위에 놓여 있는 기분이었다.
“……네가.”
이가 바득 갈렸다. 현수는 다시 홧홧해지는 눈가를 애써 식히며 목소리를 끌어 올렸다. 눈을 한 번 깜빡였다. 노력이 무색하게도, 눈물이 한 방울 뚝 뺨을 갈랐다. 짐짓 눈에 힘을 준다.
“네가 이런 식이면, 취급 안 해 준다고 난, 분명히 말했어.”
아득한 과거 같은, 한 달 전 즈음에 이런 말을 했었다. 그때와 형태는 같았으나 무게는 달랐다. 너무 무거워서, 무게를 견디지 못한 심장이 첨벙이며 물가로 떨어질 정도였다.
그리고 그 찰나에 휴대 전화 진동이 삼킬 것처럼 크게 천장을 흔들었다. 출처는 해정의 외투 주머니였다.
“전화 받아.”
“뭐?”
그 말에 반사적으로 흘긋 제 주머니께를 바라보던 눈이 날을 세운 채로 현수를 올려 보았다. 현수는 거침없이 손을 뻗어 해정의 주머니 외투를 헤집었다. 바르르 떨리고 있는 휴대 전화의 액정을 확인하지도 않고, 해정의 가슴팍에 퍽 박는다.
“받아. 어차피 이 상태로 계속 있어 봤자…….”
진동은 끊기지 않고 이어지고 있었다. 이상할 정도로 제 턱도 휴대 전화처럼 바르르 떨리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다음에 할 말은 결코 쉽게 나올 말이 아니었다. 현수는 아플 정도로 턱에 힘을 주고, 뚝뚝 끊기는 생각을 필사적으로 붙들었다.
똑, 엿을 떼어 내듯 입이 떨어졌다.
“……네가, 날, 죽이는 상상밖에 더 하겠어?”
상황을 종결하기 위해서는 이렇게 밀어내는 수밖에 없었다. 아니면 저번처럼 뺨을 때려 버리거나. 곧 쓰러질 것처럼 창백한 얼굴에 손을 대는 게 힘들 것 같아서 선택했는데, 차라리 뺨을 때리는 게 나았을 거라는 짧은 후회가 들었다.
해정이 서서히 고개를 숙였다. 제 휴대 전화를 쥔다. 살짝 닿은 살은 싸늘했다. 일견 침착해 보이는 얼굴과는 다르게 손이 벌벌 떨리고 있었다.
“……어.”
전화기 너머로 남성의 목소리가 아름아름 들려왔다. 낮은 목소리를 들으며 현수는 도피하듯이 눈을 감았다.
그리고 감았던 눈이 다시 뜨인 건 같은 리듬으로 툭툭 튀어나오던 대답이 갑자기 멈추었을 때였다.
“…….”
해정은 여전히 휴대 전화를 귀에 대고 있었다. 이내 성가시게 되었다는 듯 숨을 길게 내리쉬며 고개를 치켜 천장을 바라보았다.
조금 뒤, 천장을 향해 있던 눈이 도로록 굴러 현수에게로 향했다. 눈이 마주쳤다.
“…….”
“……나중에 얘기해요. 지금 갈게요.”
시선을 떨어뜨리지 않고 입만 작게 열어 말한다. 조금 전과는 다르게 물을 끼얹은 듯 차분한 목소리였다. 전화가 끊김과 동시에 응시하던 눈이 떨어졌다. 해정이 휴대 전화를 외투 주머니 안에 넣고 일어섰다. 그 자리에 서서 눈을 감고 제 미간을 연신 톡톡 두드린다. 생각을 하는 것 같았다.
“……무슨 일 있어?”
현수가 물었다. 정말 궁금해서라기보다는, 머릿속에 무언가가 스친 탓이었다.
미간을 건드리던 큰 손이 얼굴을 스윽 훑어 내리면서 떨어졌다. 가려진 얼굴이 드러났다. 해정이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눈을 깜빡이는 찰나 통화가 이어지는 동안 송골 맺혀 있던 감정이 순식간에 숨어들었다.
“아니요, 그냥.”
“…….”
“아빠가 오래요. 급한 일 있나 봐요.”
아무것도 아닌 양 말하는 목소리였으나 그답지 않은 두루뭉술한 말투였다. ‘피하는 거다.’ 그런 생각이 들자 인상이 저절로 구겨졌다.
해정이 현수를 지나쳤다. 현관 가운데에 서서 신발을 신는 모습을 바라보던 현수가 돌연 벌떡 일어났다.
“데려다줄게.”
“됐어요. 지금 형 기분 좆같잖아.”
해정은 슬쩍 인상을 쓴 채 눈을 감았다.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으며 담담한 목소리로 “아니, 그, 별로잖아.” 한다. 이윽고 턱을 살짝 당겨 제 신발 부근을 바라보는 얼굴은 두통을 느끼는 사람처럼 여전히 눈썹이 구겨져 있었다.
현수는 망설임 없이 신발장 위에 놓여 있는 차 키를 집었다. 두 번 말릴 생각은 없는 모양인지, 해정은 잠자코 허리를 숙여 현수의 신발을 가지런히 모아 앞으로 밀었다.
주차장까지 내려가고, 차가 빌라촌을 벗어나는 동안 시선은 계속해서 엇갈렸다. 무언의 규칙을 지키는 것처럼 현수가 허공을 바라보고 있을 때는 해정이 그를 흘긋, 바라보았고 그 반대의 경우에도 그러했다.
서로 다른 생각을 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허나 현수의 기분이 최하로 곤두박질치고 있는 이유는 비단 그것 때문이 아니었다.
해정은 자신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으레 알 것이었고, 저는 모른다. 해정이 무슨 전화를 받았는지, 왜 곧바로 집으로 가는 건지, 그래서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자신은 모른다. 무슨 일이냐고 묻기까지 했지만, 서해정은 피했다.
“수능 전날.”
잔잔한 공기 사이에 돌연 말이 퐁당 튀어 올랐다.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던 손이 멈추었다. 정면을 향해 있던 해정의 고개가 현수에게로 돌아갔다. 현수가 말을 이었다.
“너 잠든 뒤에, 나가다가 봤어.”
“……뭘?”
해정이 등을 시트에 비벼 고쳐 앉으며 물었다. 무엇을 보았을지 전혀 모르겠어서 저렇게 묻는 건지, 아니면 알 것 같아서 재촉하듯 묻는 건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현수가 제 아랫입술을 꼭 깨물어 잠시 말을 미루다가, 이내 입을 열었다.
“약봉지.”
제 옆모습을 바라보는 얼굴은 다시 정면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시야로 그게 보였는데, 운전을 해야 하는 탓에 표정을 확인할 수가 없었다. 허나 조금씩 길어지는 침묵으로 어느 정도 답을 유추할 수가 있었다.
잠시 후, 차가 정차했다. 기어를 바꾸고 잠시간 멍하니 빨간불을 바라보던 현수가 조용히 고개를 돌렸다.
이틀 내내 저를 괴롭게 했던 것을 토해 낼 차례였다.
“그거, 뭐야?”
해정은 동요하지 않았다. 물끄러미 현수를 바라보다가, 곧이어 작게 입을 뗀다.
“약봉지요?”
되묻는 목소리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가벼이 흘렀다. 해정이 볼을 슬쩍 긁으며 시선을 물렸다.
“……기억이 안 나는데.”
이틀 전 일이?
“뭐, 감기약이나 먹었겠죠.”
거짓말.
“…….”
거짓말이잖아.
“……파란불이에요.”
현수의 눈이 붙어 있던 접착제처럼 느리게 떨어졌다. 고개가 돌아갔고, 잠시 정지해 있던 차의 바퀴와 공기는 다시 회전했다. 속도를 가하는 엔진 소리가 시끄럽게 차 안을 울렸다.
대화는 그게 끝이었다. 아니, 끝내기 위해 현수는 짐짓 운전에 신경을 집중했다. 해정이 아무것도 아니라고 했으니 믿어야 했다. 이대로 해정을 집 앞에 내려 주고, 자신은 집에 되돌아가면 된다.
이성은 그렇게 저를 설득하고 있는데, 자꾸만 신경이 흐트러졌다.
거짓말.
거짓말을 했어.
나한테.
서해정이.
서해정이. 서해정이! 되새김과 동시에 가죽이 꽉 조여들었다. 핸들을 쥔 손 위로 힘줄이 불거졌다.
돌연 차가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갓길에 멈춰 섰다. 해정의 고개가 돌아갔다. 그사이, 쾅, 주먹을 받은 핸들이 흔들렸다. 현수가 손등 위에 이마를 박았다. 순식간에 새빨갛게 열이 달아오른다. 그걸 식히듯이 숨을 빠르게 내쉬었다. 마른 등이 급하게 들썩였다.
“왜 그…….”
“내려.”
놀란 해정의 말을 거칠게 낚아채는 목소리에는 숨이 잔뜩 섞여 있었다.
이건, 비이성적이다. 스스로도 알고 있다. 이렇게 자신이 화낼 일도 아니다. 늘 그랬던 것처럼 걱정만 해 주면, ‘거짓말했지?’ 하고서는 하지 말라고 타이르기만 하면 될 일인데, 감정이 이성을 추월해 버렸다.
대체 뭐 때문에. 왜.
“……내가 아까 화낸 것 때문에 그래요?”
한참 후, 차분한 목소리가 당사자 대신 이유를 물었다. 그건 아니었지만 또 구구절절 말하기도 지쳤을 뿐더러, 자신이 왜 이렇게 화가 나는 건지 스스로도 알 수가 없는데 타인에게 설명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현수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은 채 침만 꿀꺽 삼켰다. 자꾸 울컥울컥 치솟는 것들을 추스르는 것이었다.
현수의 뒷목을 가만히 내려 보던 해정이 곧이어 작게 입을 열었다.
“이제, 슬슬 짜증 나?”
나지막하게 묻는다. 그 물음이, 여린 속을 마구잡이로 긁었다. 속도 모르고 지껄인다고 현수는 폭주하듯 생각했다.
해정이 막 나가는 건 오늘로 네 번째였다. 그에 뺨을 때렸고, 달랬고, 막말도 했지만 그의 화를 진화시키기 위함이었지 덩달아 치솟는 화를 풀어 버리기 위함은 아니었다. 서해정의 미친 짓. 그게 문제였으면 이미 연을 끊고도 남았다.
현수가 핸들에 박고 있던 얼굴을 들었다. 그대로 두 손으로 제 얼굴을 가리고 몸을 폭 시트에 기댄다. 돌아오지 않는 답에 살벌해진 눈이 그의 동태를 집요하게 좇았다.
잠시 후, 손가락 사이로 한숨이 길게 새어 나왔다.
“제발, 좀, 내려 줘.”
흥분을 가득 머금은 목소리는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왜 그러는데요, 갑자기. 그럼 씨발, 말을 하면…….”
“네 말대로, 나 지금 기분 좆같아.”
손이 툭, 기력을 다한 사람처럼 떨어져 내렸다. 잔뜩 벌게진 얼굴이 서서히 턱을 옮겨 해정을 바라보았다.
“……근데, 왜 이렇게 좆같은지 나도 모르겠어.”
진심을 호소하는 목소리였다. “진짜, 모르겠다고.” 끝자락에 중얼거리는 목소리는 조금 울먹거렸다. 해정의 눈이 터질 것처럼 빨갛게 달아올랐다. 현수가 손을 들어 제 이마를 짚었다. 뜨끈뜨끈했다.
“그러니까 해정아, 오늘은 좀 그만하자.”
“…….”
“나 생각할 시간 좀 줘.”
벼랑 끝에 다다른 부탁이 위태롭게 흔들렸다.
“…….”
“…….”
날 선 정적이 길게 이어졌다. 현수의 가슴팍이 연신 오르락내리락했다. 정적을 깬 건, 현수를 뚫을 것같이 바라보던 해정이었다.
“내일 전화할 거니까, 받아요.”
협박조의 낮은 목소리가 질근질근 들끓었다. “안 받으면,”까지 말하던 해정이 제 입을 틀어막는 것처럼 거세게 입을 다물었다. 말을 고르는 듯 눈동자가 방황했다.
“……받아요.”
결국 내뱉어진 건 되풀이였다. 곧이어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났다.
* * *
집으로 가는 내내, 해정은 일부러 다른 생각을 하려고 했다. 이 이상 현수에 대해 생각하면 자신이 붙들고 있는 어떤 것이 너덜너덜해져 기어이 끊어져 버릴 것만 같은 위기감이 든 탓이었다.
해정은 조금 전 받았던 아빠의 전화로 뻑뻑한 눈알을 굴렸다. 여행에서 돌아오자마자 서랍을 확인할 줄은 몰랐다. 제 불찰이 크기도 했다. 애초에 숨겨야 한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그렇다고 알아주길 바랐던 것도 아니었다. 굳이 말하자면, 안중에도 없었다.
맞다. 부모도 안중에 없다. 그저 저는 현수에게 들키지 않았으면 했다. 처음에 약을 먹기 시작했을 때는 그에게도 마찬가지로 들켜도 상관없었다. 도리어 들키면 그가 걱정해 줄 것 같아서, 그것도 꽤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다.
들키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한 건, 그가 제게 칭찬을 해 주었을 때였다.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다. 약에 의존하는 건 한심한 거니까. 그가 자신을 한심하게, 혹은 실망했다는 눈으로 쳐다보면 기쁜 만큼 아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상상만 해도 헛통증을 느끼는 사람처럼 가슴이 저밀 정도였다.
“…….”
그래서 숨기고 싶었던 것뿐인데.
나는 형한테, 잘 보이고 싶을 뿐인데.
해정은 울음을 참는 아이처럼 쿵, 창문에 얼굴을 박으며 입을 꾹 깨물었다. 낯선 감각이 목젖 위로 솟구쳤다. 울렁이며 파도치는 것은, 서러움이었다.
“일주일 동안, 그걸 다 먹었어?”
집에 돌아오자마자 아빠의 서재로 불려 갔다. 엄마는 해외에서 오자마자 어딜 갔는지 집에 없었다. 아빠의 책상 앞 일인용 소파에 눕듯이 앉아 있던 해정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프라모델 진열장 앞을 서성이던 걸음이 우뚝 멈추었다. 정원이 제 이마를 짚으며 길게 한숨을 내뱉었다. 지끈거리는 감각이 관자놀이를 괴롭힌다. 눈을 감고 있던 그가 인상을 찌푸린 채로 눈을 떴다.
“……병원은 안 가 봐도 돼?”
“속은 괜찮아요. 토한 적도 없고.”
정원이 설레설레 고개를 저으며 “아니, 정신과. 검진은 다 할 거야.” 했다. 해정은 답하지 않았다. 이미 정해진 거면 답할 가치가 없었다.
침묵이 긴 시간 흐른 뒤, 이윽고 또 한 번의 한숨이 방 안에 퍼졌다.
* * *
달콤하고 짠 냄새가 났다. 먹고 싶다기보다는 거슬렸다. 해정은 반듯하게 잘린 돼지고기를 젓가락으로 쿡쿡 찌르다가 마음에 안 든다는 듯 이리저리 흩뜨렸다. 건너편에 그의 부모가 앉아 있었지만 누구 하나 지적하는 사람은 없었다. 미지근한 메밀차를 마시던 해정의 엄마, 수연이 그 모습을 보다가 입을 떼고선 “돼지 싫어? 다른 거 달라고 할까?” 할 뿐이었다.
불현듯 정육대 앞에 서서 제게 돼지고기가 좋은지 소고기가 좋은지 묻던 어느 모습이 떠오른다. 마치 엄청 과거의 일같이 아득했는데, 생각해 보니 어제의 일이었다.
해정이 작게 한숨을 쉬며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그냥 입맛이 없어서 그래요.”
“그래도 먹어야지.”
이번엔 정원이 말했다. 해정이 고개를 느리게 가로젓자, 정원이 들깨죽을 밀었다.
“그럼 이거라도 먹어.”
“…….”
“응?”
기어이 가늘고 기다란 손이 숟가락을 가볍게 쥐었다. 금속이 그릇에 부딪치는 소리가 간간이 들렸다.
작게 죽을 떠먹던 해정이 숟가락을 쥔 채로 물 잔을 들어 올릴 때였다.
“상담은, 괜찮았어?”
혀 아래에 오래 머무르던 말이 마침내 튀어나왔다. 해정은 물 잔에 입을 대고선 정면을 바라보았다. 제 엄마와 눈을 맞추며 입을 뗀다. 꼴깍. 고소한 맛의 물이 목 뒤로 넘어갔다.
“네.”
“불편한 건 없었고?”
“불편한 거라기보다는…….”
눈이 한 바퀴 굴렀다. 물 잔이 테이블 위로 놓였다.
“자꾸 원인을 찾아보자고 그러는데.”
사근사근한 목소리가 떠올랐다. 해결법이 명확히 존재한다면 분명 불안하게 된 원인 또한 명확하게 있을 거라고, 의사는 말했다. 제 부모님에게 한 것처럼 애꿎은 것을 끌어 오며 거짓말을 할 필요가 없어서, 해정은 곧바로 대답했다.
형이 절 때렸었는데……. 저 어렸을 때요.
지금은요?
의사의 물음까지 떠올렸을 때였다.
“그러는데? 원인을 찾으려고 하면 막, 숨 막히고 힘들어?”
정원의 걱정 어린 목소리가 회상을 비집고 들어왔다. 잠시 허공을 바라보던 해정의 눈이 내려갔다. 고개를 느긋하게 내젓는다.
“아니, 그건 아닌데요. 원인으로 추측되는 걸 말했는데도. ……그냥 계속, 다른 원인이 있을 거라 그러네.”
대답 그대로였다. 지금은 때리지 않는다는 제 말에, 의사도 제 아빠처럼 그렇게 물었다. 그럼 형을 떠올리면 엄청난 불안감이 느껴지느냐고. 당장에 떠올려 보았지만, 그저 뾰족한 인상의 얼굴만 둥둥 뜰 뿐 별다른 반응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대로 답하니 의사는 말했다.
그러면 다른 원인이 있을 거예요.
다른 원인이요?
해정의 미심쩍은 목소리에도 의사는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펜을 한 바퀴 돌리며 말했다.
육체처럼 정신도 진화합니다. 항상성을 유지할 줄도 알아요. 그러니까, 아주 고장 나지 않는 이상은 제정신을 해치는 것에 자주 노출되면 면역도 생깁니다. 근데 마약 하는 사람들 있죠? 마약에 중독된 사람들. 그런 사람들은 면역이 생길 틈도 없이 상처 위에 스테로이드를 덕지덕지 발라 버린 사람들이라고 생각하시면 돼요. 상처 위에 스테로이드 막 바르면 당장에 낫기야 낫죠. 만병통치약이라고도 불리잖아요. 근데 얼마 안 되어서 리바운드 현상이 찾아오죠. 염증이 더 심해져요. 마약도 똑같아. 그때는 황홀하고 행복해요. 근데, 부작용이 엄청 심한 거예요. 우울함, 무력감, 패배감……, 그런 것들이요.
왜 이런 말을 나한테 하지. 해정은 그렇게 생각하며 망연히 시간을 헤아렸다. 오늘만 버티고, 다 나아졌다고 해야지. 다짐을 시작으로 다른 생각이 확장했다.
급기야 현수 형에게 얼른 전화하고 싶다는 충동까지 다다랐을 때, 중얼중얼 말하던 의사는 “그러니까.” 하며 말을 정리했다.
다른 원인을 찾기 힘들다면요. 한번 해정 씨가 생각하는 원인, 그것을 타개하기 위해 해정 씨가 무엇을 했는지 생각해 보세요. 당장에 행복한 것들이 어쩌면 관련이 있을 수도 있으니까요.
“뭘 원인을 찾으래? 네가 아니라는데.”
수연이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해정이 마르게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그러니까요. 무슨 지뢰 찾기도 아니고…….”
진담이었는데, 농담이라고 생각했는지 수연은 금세 인상을 풀고 해정의 비유가 귀엽다는 듯이 웃었다. 해정은 굳이 정정하지 않고 옆에 놓인 휴대 전화를 살짝 들었다. 그리고 시간을 확인했다.
두 시간. 김현수가 전화를 받지 않은 지 두 시간이 지나가고 있다.
그를 인지하자마자 손이 불가항력적으로 벌벌 떨리기 시작했다. 해정은 마른침을 삼키며 손을 식탁 아래에 숨겼다.
* * *
해를 가리던 빌딩이 지나쳤다. 새하얀 빛이 순식간에 차 안을 비추었다. 고개를 숙이며 창문에 이마를 톡, 맞댄 해정이 눈을 내리깔았다. 눈 아래로 속눈썹 모양의 그림자가 드리웠다.
오십육. 오십칠. 오십팔. 오십구.
곧바로 이마를 떼어 내고 휴대 전화를 확인한다. 일 분이 더해졌다. 두 시간 이십칠 분이 지나가고 있었다.
“나 여기서 내려 주세요.”
교차로에서 차가 정차하고 있을 때, 해정이 초를 세던 것을 그만두고 말했다. 운전석에 앉은 수연이 백미러로 흘긋 눈을 올렸다.
“집 바로 안 가고? 오늘 추운데.”
“약속 있어요.”
해정은 옆에 아무렇게나 벗어 두었던 캐시미어 머플러를 목에 두르며 말했다. “이거 하고 가.” 정원이 제 코트 안에 넣어 두었던 장갑을 꺼내어 팔을 뒤로 뻗었다. 차가 인도 옆으로 붙었다.
“괜찮아요.”
“오늘 한파래. 추워.”
정원이 장갑을 흔들며 다시 한 번 권유했으나, 해정은 고개를 내저었다. 차 문을 열자 차가운 빌딩 숲의 공기가 한껏 휘몰아쳤다. 차분했던 앞머리가 바람에 나부꼈다. 해정은 머플러에 턱을 파묻으며 문을 닫았다.
“명일동 대광 빌라요.”
해정이 택시의 뒷문을 열면서 말했다. 조급한 태도가 추워서 그렇다고 생각한 모양인지 기사는 허허 웃었다. “밖이 좀 춥죠?” 묻는 말에 해정은 빨갛게 물든 손을 슥슥 비비며 그렇다고 대답했다. 시선은 다른 곳을 향한 채였다. 주머니를 뒤져 휴대 전화를 꺼내는 손이 잘게 떨렸다. ‘엄청 춥나 보네.’ 기사는 기어를 바꾸면서 생각했다.
해정은 머플러를 벗고, 코트를 벗어 옆 좌석에 아무렇게나 구겨 놓았다. 어쩐지 택시 안 히터가 답답하게 느껴진 탓이었다. 손목에 찬 시계를 슬쩍 제 쪽으로 돌려 본다.
두 시간 삼십 분.
시간을 확인하자마자, 총구가 이마 정중앙에 조준된 양 눈이 질끈 감겼다. 뭐 하느라 못 받았다는 둥의 문자도, 전화도 없다. 해정의 눈앞에 어제의 상황이 스쳤다.
내려.
말의 형태보다 더 무서웠던 건, 그것이 품은 감정이었다.
괴로워하고 있었다. 정확한 원인은 알 수 없지만 어쨌든 그가 내린 타개법은 자신이 차에서 내리는 것이었다. 김현수의 곁에서, 시야에서 자신이 사라지는 것. 무엇인가가 사라졌으면 하는 건 저도 잘 아는 기분이었다. 오래간 제 방에 찾아왔던 그 괴물이 제게는 그러했으니까. 문에 덕지덕지 박스 테이프를 붙이고, 문을 걸어 잠그고, 책상이나 의자를 끌어 두고 잘 정도로, 그 괴물이 제 곁으로 다가오지 않기를 원했으니까.
형도 그런 마음이었을까. 그런 생각을 하니 손목 근처에 살던 생명이 소스라치며 벌떡벌떡 뛰기 시작했다. 온몸의 세포도 덩달아 난리를 쳤다.
아니야, 아니야. 낙서로 점철된 연습장을 죽 찢어 버리는 것처럼 해정은 생각의 줄기를 찢었다. 깨어나려는 고통을 다시 잠재우기 위해 필사적으로 시선을 돌린다.
그런 거 생각할 필요 없어. 잡아 둘 거야. 그럼 된 거지. 일단은, 일단은 현수 형은 옆에 있고. 아니, 지금은 옆에 없지만, 난 지금 현수 형에게 가고 있고. 집에 가면 있을 거고. 왜 전화를 안 받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현수 형은 지금 내가 아는 곳에 있잖아. 가면 있을 거야.
만약에, 형이 집에 없으면? 그래서 전화를 안 받는 거면?
쫓아가면 돼. 쫓아간다고 했잖아.
어떻게 쫓아갈 건데. 더 현실적으로 생각해 봐.
집 앞에서 기다리지 뭐. 안 오면, 형 친구 집도 알잖아. 형 친구한테 칼 들고 협박이라도…….
아니, 아니. 그게 아니지 이 병신아. 바로 찾을 수 있어? 형이 작정하고 도망간 거라면, 지금의 나는 찾아낸다 하더라도 오래 걸릴 거야. 지금 난 아무것도 아니잖아.
어쨌든 찾는 게 중요한 거잖아.
그럼 형이 없는 공백 동안, 나는, 버틸 수 있어?
힘없는 지금의 내가 형을 찾으려고 좆 빠지게 애쓰는 동안, 그동안 형이 누군가를 받아 준다면?
형은 나 아닌 누군가를 칭찬해 줄 수도 있고, 만져 줄 수도 있고, 쓰다듬어 줄 수도 있어.
나에게 했던 것처럼, 어쩌면 나에게 했던 것보다 더 다정하게 말이야.
형이?
응.
형이, 눈을 마주치고, 눈빛에서부터 느껴지는 사랑스러운 온기를 나누고, 서로를 원하고, 목에 그 예쁘고 단정한 손을 감고, 얼굴을 가까이 하고, 아직은 다른 향기에 설레어하고, 한참 동안 살가죽에 코를 박고, 작게 웃고, 콧등부터 부딪히고, 입술을 맞대고, 윗입술, 그리고 아랫입술, 말랑한 감촉, 질척한 감촉, 혀가 들어오고,
혀를 섞고,
옷을 벗고,
맨몸,
검은 머리카락,
음란한 단어들,
입꼬리,
은밀한 곳의 향기,
나지막한 목소리.
“…….”
더 보여 줄까, 해정아?
하하, 나 좀 봐. 아니지. 서해정 그 새끼 말고.
버려진 나에 대한 비웃음. 그리고
다리를 활짝
벌려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별안간 물고문을 당한 사람처럼 해정이 펄떡 뛰어올랐다. 확 지르는 소리에 차가 급하게 정지했다. “학생, 왜 그래?” 기사가 눈을 크게 뜨고 뒤를 돌았다. 아까까지는 괜찮았던 얼굴이 순식간에 유령처럼 새파래져 있었고, 입술이 빨갛게 번져 있었다. 입술에 묻은 건 피였다.
“학생, 얼굴에 피가……!”
“저, 저 좀, 내려 주세요, 잠깐, 아니, 저기요, 저, 좀 내려 주, 내려 주세요.”
안절부절못하며 떠는 모습에 기사는 당황한 얼굴을 했다. 액셀러레이터가 꾹 밟혔다. “어어, 거의 다 왔어. 어디 아파? 괜찮아? 조금만 참아 봐.” 서툴게 뒤로 손을 뻗으며 달래 보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쾅쾅쾅쾅. 기어이 해정이 납치당한 사람처럼 창문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유리를 깨뜨릴 것처럼 연신 박아 대는 주먹 밑에는 팔꿈치까지 니트 소매가 걷혀 있고, 드러난 팔뚝에 후벼진 상처가 있었다. 팔이 흔들리자 상처에서 피가 새어 나와 흘렀다.
차가 휘청거리며 멈췄다. 지갑을 던지듯이 건넨 해정이 그대로 문을 열고 뛰기 시작했다. 귀 옆으로 지나가는 바람 소리가 몰아쳤다. 꼭 저를 비웃는 것 같았다.
멍청했다. 그렇게 했으면 안 되는 건데. 아직은, 아직은 그러면 안 됐는데. 형한테 잘 보여야 했는데. 아무리 화나는 일이 있더라도, 아직은 그러면 안 됐어.
아직, 자신의 그물망은 너무 작았다.
그걸 깨닫자 처참했다. 쫓아갈 수 있다 해도, 나중에야 붙잡을 수 있다 해도, 그 공백을 견딜 자신이 없다. 그 공백을 줄일 능력도 지금은 없다. 그게 생길 때까지는 닥치고 있어야만 했던 거다.
해정은 숨을 쉬는 것도 잊고 다리를 뻗었다. 저 멀리 현수가 사는 빌라가 보이자 불안이 더 날뛰기 시작했다. 형이 있어야만 했다. 주제도 모르고 저지른 자신의 죄악에 대한 용서를 구해야 한다.
순백색의 깔끔한 스니커즈가 더러운 계단을 디디며 두 칸씩 뛰어올랐다. 어느새 그의 집 앞이었다. 해정이 제멋대로 휘청거리는 몸을 바로잡기 위해 난간을 잡았다. 알루미늄 난간 위로 핏자국이 손바닥 주름 모양대로 찍혔다. 팔에서부터 흘러내린 피였다.
견고히 닫힌 문이 꼭 철옹성처럼 보였다. 해정은 그 위로 주먹을 내리쳤다. 뼈마디로 아픔이 느껴졌지만 아프다는 사실이 사고까지는 닿지 못했다.
“형, 형, 형, 형. ……형!”
문고리를 잡아 돌렸지만 채 다 돌아가지 않았다. 그리고 해정이 다시금 한 번 더 쾅, 문을 내리쳤을 때였다.
문이 열렸다. 허탈할 정도로 쉬이 드러난 건, 젖은 머리의 현수였다. 현수 형이 있다. 인지하자마자 해정의 몸이 쓰러지듯 현수에게 다가갔다. 강한 힘이 현수의 어깨를 쥐어 밀었다. 등 뒤로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났다.
확 다가오는 몸에 먼저 반응한 건 후각이었다. 피 냄새가 났다.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은 현수가 당황한 눈으로 냄새의 출처를 찾으며 고개를 돌렸다.
“야, 너 팔!”
흰 팔뚝에 이질적일 정도로 시뻘건 상처가 있었다. 현수는 잡아 살피려는 심산으로 손을 뻗었으나, 팔 대신 거미줄 같은 손이 얽혀들었다. 해정은 제 몸에 있는 상처임에도 불구하고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현수의 다리 사이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리고 그의 어깨에 제 이마를 비비적거렸다.
“잘못했어요. 형, 잘못했어요. 잘못했어요. 잘못했어요.”
“해정아, 너 또 왜 그래. 응? 형 봐 봐. 아니, 너 팔 좀 보자.”
달래는 목소리에는 조급함과 당황이 섞여 있었다. 해정은 계속 잘못했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어제 그렇게 살벌하게 굴 때는 언제고, 갑자기 이렇게 돌변하니까 어리둥절한 건 둘째 치고 안쓰러울 지경이었다.
현수가 살짝 몸을 밀어내는 만큼 해정은 계속 어딘가에 숨는 아이처럼 얼굴을 작은 품에 파고들었다. 결국 현수는 밀어내는 걸 포기하고, 팔을 들어 그의 등을 토닥이기 시작했다. 고개를 비틀어 귀에 달래듯 속삭인다.
“……네 잘못도 있어. 있는데, 나도 잘못했어. 형도 미안해.”
그 말에 들썩이던 숨이 일순 멈추었다.
잠시 후, 해정이 어깨에 묻고 있던 얼굴을 느리게 들어 올렸다. 힘이 약해진 틈을 타 현수가 살짝 몸을 떼어 내고 고개를 숙여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입술에 묻은 피가 옆으로 번져 있었다. 현수가 인상을 찌푸리며 해정의 턱을 가볍게 잡았다.
“너 입은 또 왜 이래?”
아랫입술을 습관적으로 깨물던 게 생각나 살펴봤지만 피가 묻었을 뿐 터진 곳은 없었다. 현수는 그대로 엄지로 아랫입술을 꾹 눌렀다. 입술 안쪽의 살이 드러났다. 안쪽 살도 괜찮았다. 다만 생고기를 먹은 것처럼 이 전체가 빨갰다.
제 입 속을 관찰하는 현수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해정이, 곧이어 현수가 고개를 들어 올리자 눈꼬리를 늘어뜨렸다. 맑은 눈동자 위에 처연함이 물들었다.
“팔 내놔 봐.”
해정이 손을 내밀 새도 없이 현수가 그의 손목을 쥐어 제게로 끌어당겼다. 살이 송곳으로 후빈 것처럼 파헤쳐져 있다.
상처를 확인한 얼굴이 서서히 굳었다. 해정이 현수의 눈치를 살폈다. 팔을 뚫어져라 바라보던 현수가 이내 깊고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팔을 왜 이렇게 물어뜯었어.”
“……기억이 안 나요.”
사실이었다. 택시 안에서, 생각을 하던 도중 팔에 따끔한 감각이 느껴졌던 것 같기도 했지만 썩어 문드러지는 것 같은 심장의 고통보다는 덜했다. 스스로 팔을 물어뜯은 것이라면, 아마 그 고통을 잊기 위함이었을 터였다.
현수가 손목을 쥐던 손을 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팔을 제 쪽으로 숨기던 해정이 고개를 번뜩 들어 현수를 바라보았다. 그를 따라 몸을 일으키려는 순간이었다.
“앉아 있어. 약 가지고 올게.”
눈에 보이지 않아도 뻔하다는 듯, 현수가 방 안으로 들어가며 말했다.
* * *
제 팔에 착 달라붙은 밴드를 내려 보던 해정의 어깨 위에 체크무늬 담요가 덮였다. 해정이 고개를 들었다가, 제 앞에 앉는 현수를 따라 다시 내렸다. 뜨끈한 머그잔에 입을 가까이 하고 후후, 불던 현수가 별안간 픽 웃었다.
“이 추운 날씨에, 외투도 안 입고 팔에 피 흘리면서 뛰는 놈 보면서 사람들이 무슨 생각을 했을까.”
웃으라고 한 말이건만, 해정은 웃기지 않다는 듯 손을 꼼질거렸다. “형이 전화를 안 받아서…….” 하며 입술을 오물거린다. 현수의 시선이 자연스레 움직이는 입술로 내려갔다. 팔의 상처에만 신경을 쓰다 보니 깜빡했는데, 이제 보니 입술 옆까지 번진 핏자국도 어떻게 해야 할 것 같았다. 현수가 머그잔을 내려놓고, 테이블 위에 놓여 있는 물티슈를 뜯어 뽑았다.
“미안해. 잠이 안 와서 멀뚱히 있다가 해 뜨는 거 보고 잤더니, 늦게 일어났어.”
“……아니에요.”
평소 얌전한 말투이긴 했어도, 이건 정도가 과했다. 얌전한 게 아니라 복종하는 말투였다.
이윽고 턱을 쥐는 감촉에 놀란 해정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현수를 바라보았다. 현수는 입가에 눈을 둔 채로 슬슬 물티슈로 핏자국 위를 문질렀다.
“형 눈치 보지 마. 형도 잘못했다니까.”
덤덤하게 말하는 목소리가 문드러진 심장을 감쌌다. 괜스레 복받치는 감각에 해정이 조용히 손을 뻗어 현수의 허벅지를 꾹 눌렀다. 입 옆을 닦아 낸 물티슈가 자리를 옮겨 아랫입술을 톡톡 가볍게 두드렸다. 도톰한 살이 눌렸다가, 젤리처럼 탄력 있게 튀어 오르기를 반복했다.
“아무리 화가 났어도, 그렇게 거칠게 말하면 안 됐는데.”
“…….”
“어제 너 보내고, 생각 많이 했어. ……그래서 잠 못 잔 것도 맞고.”
현수가 말을 흐리며 조금 웃었다. 손이 떨어져 나갔다. 입술에 향해 있던 시선이 올라 눈을 마주했다.
“해정이 너는, 형을 좋아한다고 했지.”
“……네.”
“형은 아니야.”
그렇게 말하면서, 손을 뻗어 해정의 아랫입술을 톡 건드린다. 무의식중에 아랫입술을 꽉 깨물고 있던 치아가 마법에서 풀리는 것처럼 힘을 풀었다. “깨물지 마. 피 나.” 작게 주의를 준 현수가 말을 이었다.
“근데, 내가 해정이 너를 받아 주는 이유가 뭐라고 생각해? 내가 착해서?”
해정은 답하지 않았다. 현수의 질문에 답을 생각하고 있다기보다는, 그저 그가 지금 이 이야기를 하고 있는 저의를 찾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그래서 이제 받아 줄 이유가 없다고?……. 그러면 안 되는데. 아직은, 안 되는데.
“아니야. 나는 안 착해. 엄청 이기적이야.”
그 순간, 해정의 생각을 잘라 내는 것처럼 조곤조곤하면서도 단호한 목소리가 흘렀다. 가느다란 손가락이 연신 허벅지 위를 쓸었다.
“형이 어렸을 때, 모르고 개고기를 먹은 적이 있어. 그리고 다음 날에, 그걸 알자마자 그 자리에서 다 토해 냈어. 단순히 개고기를 먹어서가 아니야. 형네 할아버지가 개장수를 하셨거든. 개들이 가득 있는 트럭을 끌고 다니셨는데……. 그게 사실은 개고기가 될 개들이었던 거지. 근데 형은 몰랐어, 어렸으니까. 모르고 그 개들한테 인사를 건네기도 했었는데……. 그게 너무 잔인한 짓이었다는 걸 깨달은 거야.”
“…….”
“죄책감이겠지. 자주 보지도 않았는데, 그 개들의 모습이 머릿속에 오래 남더라. 아직도 가끔 악몽을 꿀 정도야. 형만 보면 엄청나게 짖어 댔었어. 근데 그게 어쩌면 지 운명을 알고 살려 달라 짖어 댄 걸 수도 있었는데, 나만 모르고, 인사하고, 게다가…… 먹기까지 했다고 생각하니까.”
현수가 말을 끊고 공기를 들이켰다. 서서히 눈을 내리면서, 후으, 턱 밑까지 차오른 숨을 내쉰다. 허벅지를 바쁘게 배회하던 손가락은 속도를 늦춰 느리게 원을 그리고 있었다.
“……끔찍하더라. 정말, 엄청.”
현수가 손을 제 허벅지 위에 놓았다. 온도가 다른 손가락들이 질서 없이 엉켰다. 해정이 아무렇게나 잡히는 손가락 하나를 잡고 끌어당겼다. 현수의 상체가 조금 기울었다. 얼굴이 가까워졌다.
“…….”
“…….”
큰 눈이 면밀한 움직임으로 현수의 얼굴을 훑었다. 침묵이 깨진 건 조금 뒤였다.
“그러니까, 제가, 살려 달라고 짖는 것 같았다는 거죠?”
“…….”
“형은 죄책감을 아직도 못 덜었고.”
이해가 빠르다. 현수는 대답하지 않고 해정의 얼굴을 살폈다. 가지런한 얼굴에는 궁금함이 가득할 뿐, 다른 감정은 없었다. 하지만 모르는 일이었다. 해정의 감정은 늘 무덤에서 벌떡 일어나는 귀신처럼 별안간 튀어나오곤 하니까. ‘그럼, 혹시 기분이 나쁜가.’ 그런 생각이 스쳤으나, 이제야 아니라고 잡아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눈꺼풀이 두어 번 눈을 감췄다가 드러냈다. 머지않은 간격으로 해정의 얼굴 근육이 느리게 움직였다.
“그러면…….”
“…….”
“아직은, 아니라는 거네?”
알 수 없는 질문을 한다. 완성된 표정은 한껏 웃는 얼굴이었다.
대답을 바란 건 아니었는지, 곧바로 해정이 현수의 허리를 당겨 제 품에 껴안았다. 아직까지도 차가운 몸이 맞닿자 현수가 살짝 등을 떨었다. 그러면서도, 손을 들어 해정의 등을 매만진다.
“네가, 꼭 죽을 것같이 약해지면 형은 너무 속상해. 해정아.”
“네.”
“근데 네가 그걸 숨기면, 더 속상해. ……화가 나.”
“네. 미안해요.”
“…….”
“형이 본 약봉지. 그거, 감기약, 아니었어요.”
해정은 금방 적응했고, 또 금방 미끼를 던졌다. 등 뒤로 현수의 습관적인 한숨이 들렸다. 그 숨이 등 위를 흐르자 스미는 것처럼 온기가 옮겨 갔다. 그보다 먼저, 맞닿은 명치서부터 서서히 온도가 오르는 게 느껴졌다. 해정은 달콤한 것을 음미하듯 눈을 감았다.
신경 안정제예요. 너무 힘들어서 그랬어요. 죽겠어서, 죽겠어서…….
깨우친 것을 바른대로 읊으며, 그는 안심했다.
* * *
12월이 되니 늘 그랬던 것처럼 세상이 요란스러워졌다. 지난 11개월을 실제로 어떻게 살았던지 상관없이 길거리의 연말은 항상 행복하고 따뜻하게 연출되곤 했다. 그 다소 억지스러운 분위기를 감지하면, 현수는 그제야 ‘연말이구나.’ 하고 실감했다.
지금이 그런 순간이었다. 상가 밖에 붙어 있는 스피커에서 황홀하고 벅찬 멜로디의 노래가 나오는 것을 들으며 그는 가로수를 바라보고 있었다.
가로수는 꼬마전구가 달린 전선을 몸에 둘둘 두르고 있었다. 연말이구나, 하고 생각하다가 언젠가 정호가 ‘늘 느낀 건데, 이런 거 보면 나무가 포박당한 채로 전기 고문 당하는 것 같지 않냐.’ 했던 것이 떠올라 웃음이 터졌다. ‘터졌다’고는 해도 소리가 난 건 아니었다. 하다못해 공기가 새는 소리도 내지 않고 입꼬리를 길게 늘이기만 했을 뿐이었다. 그런데도 어떻게 안 건지 귀신같이 해정의 고개가 돌아갔다.
“…….”
“나무가 포박당한 채로 전기 고문 당하는 것 같아서.”
현수가 설명을 붙이며 동의를 구하듯 또 웃었다. 친구의 말을 떠올렸다는 걸 숨긴 이유는 혹시 모를 불상사를 방지하기 위함이었다. 도무지 해정이 불안해하거나 힘들어하는 부분들을 파악할 수가 없어서 세운 그 나름대로의 대책이었다. 꼭 화재를 방지하기 위해 가스 불도 켜지 않는다는 것과 같았으나, 해정이 푸르게 질려 곧 죽을 사람처럼 몸을 벌벌 떠는 걸 보는 것보다는 나았다.
해정이 현수를 따라 가로수를 보곤 건성으로 웃더니 “형답지 않은 생각이네요.” 했다.
“근데 어디 가는 거야, 지금?”
현수가 공연히 주변을 돌아보며 물었다. 화제를 바꾸기 위함도 있었지만 물어볼 만한 것이기도 했다. 갑자기 생각났는지 잠깐 나가자며 보채는 해정의 손에 이끌려 나온 게 10분 전의 일이었다.
해정은 대답 대신 손을 뻗어 한 블록 앞의 건물을 가리켰다. 손가락 끝에는 스파 브랜드 건물이 있었다.
“머플러를 잃어버려서요.”
“머플러?”
“형이 선물해 준 거요. 택시에 두고 내렸어요.”
그러고 보니, 저가 사 준 뒤로 해정이 줄기차게 두르고 다녀 매일 보았던 것이 거의 일주일째 보이지 않았다. 현수는 텅 빈 목 부근을 바라보며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또 선물해 주세요.”
당당함을 넘어 뻔뻔한 목소리가 말을 이었다. 모양만 부탁이지, 명령에 가까웠다. 현수가 고개를 들어 올려 해정을 바라보았다. 표정도 목소리만큼 뻔뻔했다. 큰 눈이 천연하게 깜빡거렸다.
‘……심지어 가게까지 데려와서는 다시 선물해 달라는 정성이라니.’ 어이없는 것은 둘째 치고, 귀여웠다. 현수가 짧게 웃음을 내뱉으며 “그래.” 했다. 손을 들어 뒷머리를 쓸어 주자 해정이 슬쩍 고개를 숙였다.
건물 앞이었다. 해정이 현수의 팔과 몸 사이에 제 손을 끼우며 문을 밀었다. 뜨끈한 실내의 공기가 차가운 얼굴을 데웠다.
머플러 코너로 향하고 있었을 때, 현수는 문득 제 주머니가 가볍다는 걸 느꼈다. 그는 곧바로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좁은 공간을 이리저리 헤집었으나, 제 불안한 예상대로 잡히는 게 없었다. ‘정말 안 가지고 나왔나?’ 현수는 주머니를 더듬던 걸 멈추고 조금 전의 상황을 되짚어 보았다. 정확히 떠오르진 않았으나, 집에 있다가 갑자기 끌려 나온 것이니 지갑을 챙길 틈이 없기도 했다.
“……해정아, 나 지갑 두고 온 것 같아.”
말하는 목소리는 당황으로 조금 굳어 있었다. 이윽고 머플러가 진열된 구석 자리 앞에 선 해정이 머플러를 훑어보며 가볍게 입을 열었다.
“돈 줄게요.”
“어?”
“제가 돈 주면, 그 돈으로 형이 사 주면 되는 거잖아요.”
대수롭지 않다는 듯한 얼굴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리 큰 값은 아니었다. 아는데, 그래도 대뜸 받아들이기에 영 애매한 상황이었다. 현수가 대답 없이 고민하는 얼굴을 하자, 해정은 캐멀색의 캐시미어 머플러를 슥 손가락으로 훑으며 “이걸로 사 줄 거예요? 빨리 색 골라 줘요.” 하며 그를 채근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선물해 주는 게 아닌데. 찝찝한 생각을 흘리면서도 그는 머플러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먼저 눈에 들어오는 건 연분홍색의 머플러였다. 효용성이 낮아 보여서 그때는 결국 다른 색을 사긴 했는데, 다시 보니 또 마음이 끌렸다. 사실 그뿐만이 아니라 해정이 머플러를 두르고 올 적마다 ‘그것도 사 줄 걸 그랬나.’ 하고 짧게 생각하곤 했다. 제 옷을 살 때는 한 번도 고려해 보지 않은 색이었으나 해정에게는 그만큼 잘 어울렸다.
‘입술이 붉어서 그런가.’ 결국 또 한 번 해정의 얼굴 아래에 연분홍색 머플러를 가져다 대며, 현수는 연구하듯 생각했다. 붉은 입술과 흰 살결의 턱. 그리고 그 아래 바로 분홍색의 머플러.
진짜 예쁜데…….
“저번에도 이 색 먼저 고르지 않았어요?”
물 흐르듯 흐르던 감상이 자그마한 물음에 의해 끊겼다. 현수가 번뜩 턱을 들어 올려 해정을 바라보았다. 해정은 저를 계속 바라보고 있었던 듯했다. 현수는 서둘러 머플러를 거두었다. 그리고 작게 웃으며 “응.” 했다. 괜히 사소한 데에 집착을 하는 것 같아 못내 민망하다.
“그, 너 입술 색이 되게 붉잖아. 그래서 잘 어울려.”
“…….”
이유랍시고 내뱉긴 하였는데, 말없이 저를 응시하는 시선을 고스란히 받고 있자니 밝히기에 썩 좋은 이유는 아니었다는 생각이 서서히 들기 시작했다. 현수가 제 뒷목을 슥슥 손바닥으로 문지르며 시선을 비꼈다.
“아니, 내가 네 입술을 보고 만날 그런 생각을 한 건 아닌데……. 그러니까, 꼭 이걸 사고 싶거나 그런 건 아니고, 그냥 그렇다는 거야.”
“…….”
급하게 이리저리 덧붙이니 침착한 말투가 점점 흐트러졌다. 해정은 여전히 반응 없이 현수를 내려 보고 있었다. 문질렀던 뒷목부터 열이 올랐다. “……그냥, 그렇다고.” 중얼거린 현수가 급기야는 급한 손길로 머플러를 행거에 걸고, 바로 옆 캐멀색 머플러를 꺼내었다.
“이, 이걸로 하자.”
하지만 행거에 걸린 머플러는 다음 순간 다시 해정의 손에 의해 꺼내어졌다. 해정이 연분홍색 머플러를 품 안에 넣고서는 고개를 돌렸다. 현수가 들고 있는 캐멀색 머플러를 가져가며 “그래요. 그것도 해요.” 한다.
“……그것도 사게?”
“응.”
해정은 짧게 답하며 현수의 손을 잡았다. 평온한 얼굴과는 달리 맞닿은 손바닥은 델 듯 뜨거웠다. 이어 손가락이 얽혀들었다. 꼭 쥐어짜는 것처럼 압박하는 힘에 현수는 움찔, 손을 떨었다.
왜인지 모르게, 출처를 알 수 없는 누군가의 감정이 제 피부까지 적시며 밀려들어 오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 * *
방송 후 씻는 건 현수에게 습관과도 같았다. 가만히 앉아서 게임을 하는 게 전부인데도, 정신을 쏟고 있어서인지 방송이 끝나면 지쳤다. 더운 날에는 가끔 땀이 삐질 나오기도 했다. 땀이 많이 나는 체질이 아니기도 한 데다, 요즘은 겨울이라 땀이 나는 건 아니었지만 어찌 되었건 그의 걸음은 욕실로 향했다.
습기가 가득한 욕실에서 티셔츠와 바지를 입는 건 퍽 고역이었다. 이것은 해정이 제 집에 늦게까지 있다가 가기 시작한 뒤부터 생긴 또 다른 습관이었다. 현수가 티셔츠 자락을 내리고, 목에 건 수건으로 뒷머리를 툴툴 털며 욕실 문을 열었다. 건조한 공기가 얼굴을 식혔다.
현수는 바구니에 수건을 던져 넣고 방문을 열었다. 해정은 매트리스 위에 누워 있었다. 옆으로 누워 잔뜩 웅크린 자세에, 두 손을 덮은 베개 위에는 얼굴이 묻혀 있었다. 살짝 눌린 볼에, 눈은 감긴 채였다.
현수가 낮게 웃으며 매트리스 앞으로 다가가 앉았다. 자는 척이라고 생각했다. 해정은 가끔 이랬다. 자고 가는 것만큼은 허락하지 않는 저에게 살살 애교를 부리며 넘어가 주세요, 하는 것처럼 요망스레 자는 척을 했다. 그리고 저가 다가가 ‘안 자는 거 다 알아.’ 하면 감은 눈을 살짝 휘고, 배시시 웃었다. 물론 해정의 기분이 좋을 때의 일이기는 했다.
그러니까 이렇게 자는 척하는 건 오랜만이었다. ‘언제까지 자는 척하나 보자.’ 괜한 반가움에 들뜬 탓인지, 장난기 어린 생각이 불쑥 튀어나왔다. 현수는 안 자는 거 다 안다는 말 대신 매트리스 위에 손을 짚고 천천히 상체의 중심을 옮겼다. 상체가 침대로 기울었다.
해정의 얼굴 위로 그림자가 드리웠다. 눈을 감았다고는 해도, 눈꺼풀 위가 어두워졌다는 것은 느꼈을 터인데 감은 눈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퍽 오래간 바라보고 있어도 마찬가지였다.
“…….”
진짜 자나?
기어이, 현수의 생각이 옆으로 옮겨 갔을 때였다.
“내 입술.”
돌연 또렷한 목소리가 둘 사이에 울렸다. 아래에 자리한 눈은 여전히 감겨 있었다.
“붉어요?”
“…….”
목소리의 정체는 당연하게도 해정이었다. 짧게 물음을 마친 입술이 작은 틈을 남긴 채 가볍게 다물렸다. 현수가 고개를 뒤로 물렸다. 매트리스의 스프링이 무게에 눌리는 소리가 났다. 그림자의 색이 옅어지자 반응처럼 눈꺼풀이 올랐다. 눈이 드러난다.
“얼마나 붉은데요.”
“…….”
더 물러서면 안 된다는 것처럼 별안간 팔이 붙잡혔다. 맞닿은 검은 눈은 숨 막힐 정도로 밀도가 높았다.
“더 말해 줘요.”
뭐를. 묻기도 전, 해정이 덧붙였다. 팔을 끌어당긴다. 얼굴이 아까처럼 가까워졌다.
“내 입술에 대해서요.”
팔을 쥔 손에 힘이 실리기 시작했다. 눈동자를 얽맨 촘촘한 그것은, 질척하고, 검고, 뜨겁고, 끓었다.
“…….”
“…….”
그 눈에 홀린 듯했다. 현수가 눈을 내려 입술을 바라보았다. 적당히 도톰하고, 색이 다양한 입술. 평소에는 붉지만, 가끔은 하얗게 질리기도 했고, 어느 날에는 파랗게 얼기도 했다. 그 이유는 필시 저 때문일 것이었다. 생각이 거기까지 닿으니 저절로 입술이 열렸다.
“……예뻐.”
사실 입술의 형상보다는, 그 이유에 치우친 감상일지도 몰랐다. 입술에 머물던 시선이 머뭇거리며 올랐다. 다시 시선이 얽혔다. 기어이 해정의 눈에 가득 담겨 있던 것이 울컥 소리를 내며 끓어 넘칠 때, 현수는 직감했다.
키스할 것이다.
피하지 않았다. 뒤로 물러서지도 않았다. 받아 줘야 한다는 얄팍한 강박 탓이 아니었다. 단순히, 그러고 싶지 않았다.
해정의 얼굴이 다가오기 시작했다. 침을 삼키고 싶었는데 소리가 들릴 것 같았다. 공기조차 숨을 멈춘 듯했다. 대신에, 현수는 바싹 마른 입술을 달싹였다. 그마저도 버석거리는 소리가 났다. 그리고 그 찰나였다.
일순 끓어 넘치던 것이 눈꺼풀에 의해 틀어 막혔다. 질끈 눈을 감은 해정이 움직임을 뚝 멈췄다. 더 이상 입술이 다가오지 않았다. 현수는 눈을 깜빡였다. 그리고, 의아해했다.
……키스.
안 하나?
되감기라도 하는 것처럼 얼굴이 떨어진다. 그에 재잘대던 심장 또한 평소대로 돌아갔다. 잔뜩 힘 준 어깨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해정이 상체를 일으켰다. 그 뒷모습을 돌아보며, 현수는 두어 번 눈을 깜빡였다. 이상하고 미묘한 침묵은 잠시였다. 이윽고 해정이 고개를 돌렸다.
“저, 갈게요.”
“…….”
“……늦었으니까.”
기류가 바뀌었다. 질척한 것들은 원래 존재하지 않았다는 듯 흔적도 없이 증발했다. 가지런한 얼굴이 해맑게 웃음 지었다.
* * *
「아니에요. 괜찮아요. 여러분, 아이고……. 흥분하지 마세요. 다시 시작하면 돼요.」
귀에 꽂은 이어폰에서 다정하고도 조곤조곤한 목소리가 흘렀다. 작게 탄식을 내뱉는 중에는 한숨 소리가 섞여 있었다.
그 모든 소리가 귓속으로 침투하여 몸 곳곳을 순환했다. 도무지 화면에 집중이 되지 않는다. 결국 해정이 집중하는 걸 포기하고 질끈 눈을 감았다. 입술 사이로 현수의 한숨보다는 조금 깊고 긴 한숨이 새어 나왔다.
너 입술 색이 되게 붉잖아. 그래서 잘 어울려.
……예뻐.
내내 머리 주변을 떠돌던 그 말들을 선명하게 떠올렸다. 반사적으로 심장이 둥, 둥, 징처럼 울리기 시작했다.
건조한 손바닥이 얼굴 위를 덮었다. 해정은 제 얼굴을 감싼 채 엄지로 제 턱뼈를 꾹꾹 짓눌렀다. 귀에서는 녹음 파일을 틀어 놓은 것처럼, 그 목소리가 연이어 반복되었다.
너 입술 색이 되게 붉잖아. 너 입술 색이 되게 붉잖아. 너 입술 색이 되게 붉잖아. 너 입술 색이 되게 붉잖아. 붉잖아. 입술 색. 붉잖아. 붉잖아. 예뻐. 예뻐…….
끼이익. 의자 등받이가 느리고 묵직하게 밀렸다. 해정의 얼굴이 넘어갔다. 얼굴 위는 여전히 손으로 덮인 채였다. 검은 머리카락이 이마 뒤로 떨어진다.
씨발 대체…….
대체, 어떻게 그런 말을 해.
현수의 사소한 행동 하나하나에 과하게 의미 부여를 하는 자신을 스스로도 알고 있기는 했다. 그런데 이건 좀처럼 다스릴 수가 없었다. 반복되던 말은 기어이 혈관처럼 영역을 넓혔다. 제 입술을 보는 시선을 상상하게 되었고, ‘붉다’고 생각하는 머리를 상상하게 되었다. 시선. 그 사랑스러운 시선. 형의 시선. 붉다는 감상. 내 입술이, 붉었다. 그의 눈에는. 아까, 제 입술을 봤다. 그러고선 예쁘다고 했지. 예쁘다고…….
말은 되새길수록 더 선연한 색이 되었다. 어느새 몸이 빨갛게 익었다. 손이 더듬거리며 내려갔다. 가느다란 손가락이 조급하게 바지 지퍼를 내렸다. 드러난 브리프 위가 뜨끈하고, 축축했다. 해정이 브리프를 벌려 안을 확인했다. 흘러나온 흥분이 길게 늘어났다.
제 브리프 안을 내려 보던 눈이 다시 느리게 올랐다. 천장을 바라보며, 해정은 브리프에서 손을 떼어 냈다. 아까의 상황을 돌이켜 본다.
물론, 사랑스러운 입술에 제 입술을 문지를 수도 있었다. 혀를 넣고 휘저을 수도 있었다. 타액을 맛볼 수도 있었고, 마구잡이로 빨 수도 있었다. 정신을 쏙 빼놓은 뒤에 슬쩍 맨살을 만질 수도 있었다. 딸깍, 스위치가 눌린 듯 이성이 까무룩 죽어 버린 육체가 그대로 욕구를 좇아 버리면, 형은 그런 저를 받아 주곤 했으니까.
하지만 그러면 안 된다. 그걸 깨닫게 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다. 그 사실은 여전히 유효하다. 아직 제 그물망은 작다. 그걸 염두에 둬야 한다. 그러니까, 형에게 욕심을 부리면 안 된다. 마음대로 굴면 안 된다. 아직은 안 된다.
그래도, 하고 싶었는데.
이건 머리보다는 몸이 떠올린 충동이었다. 입술의 감촉과 저가 정신없이 빨아 대던 혀의 맛이 환상처럼 세포를 자극했다.
침샘이 고장 난 것처럼 침이 잔뜩 새어 나와 입 안에 고였다. 해정이 손을 올려 제 입술을 가볍게 매만졌다. 여전히 이어폰에서는 현수의 목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와. 드디어 성공했어요.」
몇 번째 실패하던 판을 기어이 성공했는지 약간은 들뜬 목소리였다. 그에 자극당한 육체가 잔뜩 단 기세로 머리에게 매달려 아우성치기 시작했다. 만지고 싶다. 빨고 싶다. 병신 새끼. 아까 키스할걸. 형 안 피했는데. 아니야. 그래도 피하고 싶었는데, 안 피한 거면. 그게 계속 쌓여서, 날 지겨워하게 된다면. 도망간다면.
아직은 그러면 안 되잖아.
별안간 길들여지지 않은 인내가 울컥 신경질을 부렸다. 안 되긴 왜 안 돼, 씨발. 내가 하고 싶다는데. 하기 싫으면 붙잡고 하면 되지. 내가 하고 싶었는데. 입술도, 몸도 전부 다, 다 만지고 싶었는데. 다 맛보고, 다. 다 원래 내 거잖아. 근데 왜 안 돼. 왜 안 되냐고.
검은 태블릿이 일직선으로 날아간 건 순식간의 일이었다. 쑥, 귀에 꽂혀 있던 이어폰이 빠졌다. 곧바로 액정이 벽에 처박혔다. 깨지는 소리가 날카롭게 울렸다. 그의 목소리는 이제 들리지 않을 것이 분명한데도 계속해서 귀에 맴돌았다.
“하아…….”
젖은 숨이 공기 중으로 퍼졌다. 해정의 미간이 마구잡이로 구겨졌다. 억울하다는 듯 입술을 꾹 깨문다. 젖은 브리프 안에, 뜨거운 손이 미끄러지듯 들어갔다.
버거웠다. 이런 버거운 감정은, 처음이었다.
* * *
해정의 부모는 천주교 신자다. 일이 바쁜 터라 매주 일요일마다 갈 수는 없었으나 시간이 허락하는 일요일이면 성당에 갔고, 부활절이나 성모승천대축일, 성탄절 등의 중요 행사 때는 일을 미뤄서라도 갔다.
부모의 신앙은 자식인 해정에게도 영향을 끼쳤다. 해정은 부모의 손에 이끌려 초등학교 5학년 전까지 성당을 다녔고, 세례도 받았다. 허나 그랬던 해정이 성당을 다니지 않게 된 건 으레 그렇듯 성장처럼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어느 일요일 아침, 해정은 성당에 가기 싫다고 했고 부모는 아쉬운 얼굴을 하면서도 알겠다고 하였다.
해정의 이부 형, 승우는 제 부모를 따라 착실히 성당에 다녔다. 부모가 일 때문에 못 가는 날에도 갔다. 여름 성경 학교에도 갔고 판공성사도 한 번도 빼먹은 적이 없었다. 신앙이 있는 건 아니었다. 식사 전 기도를 할 때, 승우는 손톱 거스러미를 떼다가 기도가 마무리될 때쯤에야 손을 모으고 눈을 감았다. 해정은 그런 승우를 알고 있었다. 해정 또한 눈을 뜨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이 어떻든 겉으로는 모범적인 신자인 승우의 영향인지 부모는 해정의 의사를 존중하는 듯하면서도 그에 대해 쉬이 포기하지 못했다. 해정이 안 간다 하여도 주말마다 성당에 같이 가지 않겠느냐고 권유했고, 성탄절과 부활절에는 외식을 겸해서 가족끼리 같이 시간을 보내러 나가자며 그를 꾀었다. 해정은 성당에 가지 않겠느냐는 권유는 쉽게 거절했지만, 후자는 거절하지 않았다. 괜한 반항을 부리고 싶지 않아서였다.
그건 요즘도 마찬가지였다. 독립한 승우가 집에 오는 날이라는 수식까지 붙어 부활절과 성탄절은 어느새 가족의 큰 행사로 자리매김했다. 그날만 되면 해정의 가족은 오전에 성당에 갔고, 오후에는 고급 음식점에 가서 점심을 먹었다. 해정은 군말 없이 제 부모를 따랐다. 무리가 될 만한 일이 아닌 까닭이었다.
“크리스마스에 뭐 먹고 싶어, 해정아?”
그래서 성탄절이 보름이나 남은 시점에 이런 물음을 받는 것이 해정으로서는 당연했다. 아침에 방에서 나오다가 널찍한 거실 모퉁이에 큼지막한 트리가 서 있는 걸 보고 예상했었다.
정원이 해정에게 묻자 수연의 시선까지 해정에게로 닿았다. 그녀는 잘 바른 코다리 살을 해정의 밥그릇 위에 올려놓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래. 수능도 끝났는데 해정이 먹고 싶은 데로 가야지.”
꼭 이번만 선택권을 주는 것처럼 말하고 있었지만, 그들은 항상 해정에게 선택권을 주었다. 해정이 아주 어렸을 때부터 그러했다.
“아무 생각 없어요.”
해정의 답 또한 항상 같았다. 선택권을 쉽게 버리는 것이었다. 제가 선택권을 받게 되는 건 그에게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어서 버리는 것 또한 쉬웠다. 물론 누군가에게는 당연한 일이 아니라는 걸 알았다.
정확히 말하면 알게 된 것이었다. 승우가 독립하기 전, 부활절 전날의 저녁이었다. 늘 그렇듯 해정은 부모에게 지금과 비슷한 질문을 받았고, 그는 무심한 표정으로 선택권을 버렸다.
무언가 억눌린 목소리가 불쑥 튀어나온 건 그 직후였다.
……나는, 스테이크 먹고 싶어.
승우였다. 식사를 마친 손은 식탁 아래에 둔 채로 그는 그리 말했다. 그러면 스테이크를 먹으러 가자고 부모는 말했지만, 승우의 얼굴은 자신의 제안이 반려라도 된 것처럼 비참함이 스쳤다. 그 감정을 목격한 건 관찰력이 유독 뛰어난 해정 하나였을 정도로 찰나였다.
“……승우 형도 와요?”
식사를 마친 해정이 물을 마시며 물었다. 해정의 물음이 못내 놀라운지 부모는 동시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해정이 승우에 대한 것을 묻는 건 처음이기 때문이었다.
이내 정원이 “응, 오지.” 했다. 해정은 약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잔을 내려놓았다.
* * *
해정이 현수의 집에 도착했을 때 현수는 통화를 하고 있었다. 그는 휴대 전화를 귀에 댄 채로 문을 열었다. 그 모습을 보자 반사적으로 울컥 짜증과 화가 치솟았지만 해정은 주먹을 조금 세게 그러쥘 뿐이었다. 현수는 통화를 이어 가며 멀뚱히 서 있는 해정의 손목을 잡았다. 그리고 부드럽게 끌어당기며 문을 닫았다. 그사이에 “응. 알았어.” 하고 말했다.
그 작은 단서로는 그가 누구와, 무슨 내용의 통화를 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다. 그렇다고 전화를 끊자마자 물으면 부담스러워할 것 같았다. 해정은 찰나 동안 폭주하듯 고민했다.
그도 그럴 게, 정도를 지키는 건 해정에게 어려웠다. 그 정도란 이름의 선은 애매하고도 흐릿했다. 언젠가 현수에게 말했던 것처럼 현수와 저 사이에 지켜야 할 선 같은 건, 적어도 제게는 없었다. 그래서 더 어려웠다.
“그래. 내일 일찍 갈게. 응.”
해정이 신발을 다 벗었을 때 통화가 종료되었다. 현수는 액정을 톡 가볍게 두드리고서는 해정을 보았다. 여전히 해정의 머리는 여러 가지 경우의 수와 대책들로 어지럽게 흐트러진 채였다.
어딜 가. 누구한테 가는데. 어딜 일찍. 왜. 꼭 가야 되는 건 아닐 거 아니야. 어떻게 물어봐야 하지. 어떻게 알아야 하지. 알아야 하는데. 알아야 하는데……. 조바심이 나는 마음이 시끄럽게 재잘거렸다. 다 껍데기일 뿐 명확한 정답은 없었다. 해정은 일단 제 머릿속을 들키지 않기 위해 무슨 말이라도 꺼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때였다.
“친구가 어딜 좀 다쳤나 봐. 병문안 오라고 하네.”
통화를 마치자마자 허리를 숙인 현수가 해정의 신발을 가지런히 정리하며 말했다. 아무 말이라도 토해 내려고 했던 입술이 살짝 벌어진 채로 멈췄다.
말했어.
“…….”
“별거 아니고, 운동하다 좀 다친 거라니까 어떤지 보고만 올게. 괜찮아?”
정리를 마치고, 상체가 올랐다. 현수가 ‘괜찮아?’ 하고 물었을 때는 다정한 눈이 올라 해정을 보았다. 손가락이 물결처럼 다가와 해정의 앞머리를 정돈했다. 섬세하고 따뜻한 움직임이었다.
나한테 괜찮으냐고 물었어.
별안간 심장이 출렁거렸다. 투명한 것이 물처럼 심장 안을 꽉 채웠다. 표면이 흐를 듯이 찰랑인다. 이런 감각은 익숙하지 않았는데, 그렇다고 아예 낯선 건 아니었다. ‘언제였더라.’ 해정은 잠깐 되짚어 보았다.
그래, 그때다. 현수 형이 제게 머플러를 선물해 주었을 때. 그때도 이랬다.
“…….”
“해정아?”
현수가 또 한 번 물었으나 해정의 대답은 돌아오지 못했다. 별안간 해정의 팔이 현수의 허리를 끌어당겼다. 품 안에 현수를 삼키고, 소화를 시키는 것처럼 씩씩 등이 들썩였다. 현수가 당황하며 눈을 빠르게 깜빡였다. 허나 그도 잠시였다. 이윽고 익숙해진 섬유 유연제 향이 코를 맴돌자, 이제는 습관처럼 그러려니 하게 된다. 가까이에 자리한 타인의 심장이 뛰고 있었는데, 그게 꼭 제 것의 박동처럼 선명하게 느껴졌다.
포옹의 시간은 길었다.
* * *
샴푸가 다 떨어진 걸 안 것은 몸을 다 적시고 난 뒤였다. 물줄기는 계속 쏟아지고 있었고, 현수는 그걸 맞으며 지나치게 가벼운 샴푸 통을 망연히 바라보았다. 어쩔까. 현수는 잠깐 고민했다. 주어진 선택지는 간단했다. 샴푸를 쓰거나, 안 쓰거나.
만약 사 둔 여분의 샴푸가 없었다면 빨리 체념하고 비누나 바디 워시로 머리를 감았겠지만 그럴 정도로 나쁜 상황이 아니었다. 새 샴푸는 세탁기 옆에 있었고, 바깥에 있는 타인이 이성인 것도 아니었다. 해정을 의식하여 지레 샴푸를 쓰는 걸 포기하고 비누를 쓰는 게 이상하게 느껴졌다.
그러니까, 잠깐 나가서 가져와 쓰면 된다.
이래야만 이상한 게 아니다. 해정이 자신을 좋아하고 있지만 일단은 동성이니까. 그러니까 몸을 드러내는 게 이상한 건……. 그건 아닌가. 이상한 건가. 왜냐면 키스를 하니까?…….
근데 요즘엔 안 하잖아.
별안간 그런 생각이 들자 결정의 방향이 꺾였다. 사실이다. 해정은 요즘 제게 담백했다. 포옹을 하거나, 손을 잡기는 했지만 꼭 부모나 친구에게 하는 것처럼 따스할 뿐이었다. 성적인 의미는 없었다.
내가 맨몸으로 나가 샴푸를 가지고 다시 들어오는, 그 단순한 행위를 포기하는 게 이상한 거야.
아무리 생각해도 결론은 그것이었다. 이윽고 물줄기가 멎었다. 현수는 물이 떨어지지 않을 만큼만 물기를 닦아 내고, 욕실 문고리를 잡았다.
“…….”
철컥. 문고리가 돌아갔다. 이제 힘을 주어 밀면 되었는데, 손이 움직이질 않았다. 꼴깍 침이 목 뒤로 넘어갔다. 뿌연 수증기가 눈앞에 어른거렸다. 저혈압도 아닌데 이상하게 현기증이 나는 것도 같았다.
흐릿한 시야 위로 욕실 밖에 있을 해정의 모습이 떠오른다. 여느 때와 같이 침대에 누워 자는 척하고 있을 수도 있었고, 아니면 눈을 뜬 채로 그냥 누워 있을 수도 있었다. 어쨌든 자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제가 잠깐 나갔다 들어가는 걸 신경 쓸 수도 있었고, 아닐 수도 있다. 이건, 신경 쓸 확률이 높다. 제 몸을 안 볼 수도 있었고, 볼 수도 있었다. 그러나 볼 확률이 높다.
제 침대 위에 누워 있는 서해정. 인기척이 느껴지면 상체를 살짝 들겠지. 문이 열려 있으면 바로 욕실이 보인다. 서해정이 욕실에서 나오는 저를 본다면. 정확히는, 제 맨몸을 본다면.
검은자 위에 맺힌 자신의 맨몸.
상상하자 불에 덴 듯 문고리를 잡은 손이 떨어졌다. 화끈거리는 느낌에 현수가 손등으로 제 볼을 매만졌다. 손도 꽤나 열기가 있었는데, 그것보다 더 뜨거웠다. 욕실의 온도 때문이라고 제게 주입하면서도 현수는 다시 샤워기 앞으로 걸어갔다. 쏴아. 다시 물줄기 소리가 욕실 안을 메웠다. 바디 워시를 집어 드는 손이 조금 성급했다.
욕실 문이 열렸다. 옷을 입은 채로 젖은 수건을 바구니에 넣은 현수가 방으로 걸어갔다. 해정은 역시나 침대에 누워 있었다. 눈을 감은 채였다.
현수는 침대 옆에 앉으면서도 눈을 감고 있는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무언가 위화감이 느껴진 탓이었다. 사실은 아까부터 조금 그랬다. 언뜻언뜻 느껴지기만 할 뿐 정확하게는 알 수가 없었다. 나쁜 쪽은 아니었다. 평소보다 조금 더 화사하고, 예뻤다.
“……얼굴에 뭐 발랐어?”
해정이 자는 척을 하고 있다는 건 현수도 알고, 그가 알고 있다는 것 또한 본인도 알고 있으니 말을 거는 게 느닷없지는 않았다. 도리어 요즘은 계속 이랬다. 해정이 눈을 감고 있으면 현수가 자연스레 말을 걸고, 해정이 눈을 뜨며 답하는 패턴이 계속되었다.
그런데 오늘은 답이 없었다. 눈은 계속 감겨 있었다. ‘안 자는 거 다 알고 있는데. 또 새삼.’ 현수는 생각하면서 조금 더 고개를 숙였다. 두 뼘의 간격이었다. 젖은 머리가 다소 무게감 있게 툭, 얼굴 아래로 내려갔다.
“으음……. 뭐 바른 거지.”
현수는 흥얼거리는 것처럼 혼잣말을 하면서, 흐트러진 앞머리 사이로 드러난 이마부터 찬찬히 훑기 시작했다.
살결은 똑같이 맑고, 희었다. 눈썹도 마찬가지로 가지런하고 정갈하게 자라 있었다. 속눈썹이 길고 풍성한 건 여전했고, 깔끔하고 높은 콧대도, 코끝도, 살짝 붉은 볼도 같다. 그리고 마지막, 입술.
……아, 입술이.
“체리 립밤.”
생각을 이어 가는 목소리는 제 것이 아니었다. 입술이 조금 더 붉고, 반질거린다고 현수가 깨달았을 찰나에 해정의 눈이 뜨였다. 그 눈과 마주했을 때, 현수는 저와 그의 거리가 한 뼘으로 줄어들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얼굴을 들여다보느라 저도 모르게 조금씩 다가선 모양이었다.
물이 차오른 것처럼 촉촉한 입술이 멈추지 않고 움직였다.
“체리 립밤 사서 발랐어요.”
그 자그마한 움직임 때문인지, 아니면 그 말의 뜻 때문인지 달콤한 냄새가 코를 스쳤다. 너무 가깝다고, 물러서야 한다고 머릿속 누군가가 말했는데 왜 그래야 하는지 현수는 이유를 찾지 못했다. 정확히 말하면 그러고 싶지 않았다. 언젠가부터 그랬다. 자신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피하고 싶지 않았고, 물러서고 싶지 않았다.
“왜?”
현수는 며칠 전의 이 시간을 떠올렸다. 비슷한 자세였고, 비슷한 분위기였다. 키스. 키스. 키스. 글리터가 박혀 있는 립글로스처럼 끈적하고 반짝거리는 액체가 그 두 음절의 글자를 되새기는 것까지도 비슷했는데, 다른 점이라면 향기가 났다. 인공적이지만 매혹적인 체리 향기.
해정의 손이 현수의 볼을 가볍게 스쳐 지났다. 볼에 감각의 잔상이 남았다. 해정이 눈을 감았다가 뜨자, 현수도 갑자기 눈이 빡빡하게 느껴져서 똑같이 눈을 감았다가 떴다.
“형한테 예쁘게 보이고 싶어서지.”
“…….”
“내 입술 예쁘다고 했잖아.”
다갈색의 눈이 현수의 시선을 붙들었다. 체리 향기는 계속 났다. 홀리는 듯한 목소리가 투둑투둑 액체를 흘렸다. 끈적하고 반짝거리는 액체는 질척거리며 움직였다. 기어이 닿아 흡수하는 곳은 현수의 입 속, 혀였다. 달콤한 맛이 혀끝을 건드리자, 현수는 깨닫고 말았다.
충동. 이건 충동이다.
그 찰나를 어떻게 알았는지, 해정의 얼굴이 코가 닿을 정도로 가까이 다가왔다. 귀 밑에서 쿵쿵거리는 소리가 시끄럽게 났다. 현수는 침을 삼키면서, 제 침이 넘어가는 소리도, 귀 밑에서 나는 소리도 해정에게 들리지 않길 바랐다. 이윽고 윗입술이 닿을 듯 말 듯 한 거리에서 얼굴이 멈췄다. 대신 달뜬 숨이 입술을 데웠다.
“혹시,”
“…….”
“키스하고 싶어요?”
간질거리며 애태우는 목소리는 노골적으로 자신을 구슬리고 있었다. 안다. 알고는 있는데 반감이 들지 않았다. 해정이 ‘하’라고 발음했을 때 드러났던 혀. 그 혀가 자신을 끌어당기고 있었다.
감정보다는 욕구인 것 같았다. 식욕과 가까울 정도로 원초적인 충동. 현수는 그대로 그 입술에 제 입술을 맞대었다. 턱을 비틀고, 입 안을 파고들었다. 끈적한 감촉이 느껴졌다. 체리 맛이 조금 났다.
“아…….”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신음이 끓었다. 부끄럽다고 느낄 새도 없이 혀가 밀려들었다. 우악스러운 힘이 현수의 어깨를 잡았다. 몸이 뒤집히고, 뒤통수가 베개에 푹 파묻혔다. 입 안을 휘젓는 감각이 미칠 것같이 감질났다. 닿고 있었는데 더 닿고 싶었다.
현수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해정은 그걸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손을 더 내려 현수의 두 손을 얽어 침대 위로 짓눌렀다. 아래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뻐근해졌을 때, 해정은 눈을 꾹 감고 입술을 떨어뜨렸다. 현수의 숨소리가 귀를 맴도는 것을 느끼면서 그의 귀에도 제 입술을 대고 숨소리를 퍼뜨렸다.
“형이 하고 싶어서 한 거야.”
그리고, 주문처럼 속삭였다.
* * *
새벽 내내 잠과 의식의 경계를 오고 갔다. 정말 육체가 어딜 걸으면서 오고 가는 건 아닐 터인데도 몸이 축 늘어졌다. 현수는 결국 푸르스름한 시간에 침대에서 일어나 물을 마셨다. 시계를 보니 여섯 시 반이었다. ‘그렇게 이른 시간은 아니네.’ 그는 생각하면서, 차라리 지금부터 씻고 정호의 병문안을 갈까 고민했다.
친구가 걱정되어서라기보다 다른 생각으로 머리를 메워야 한다는 강박 때문이었다. 정호는 고등학교 때부터 다치는 일이 부지기수라 영 심각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입원하는 건 흔치않은 일이긴 했지만, 통화했던 목소리는 말짱했다. 가면 태평하게 누워서 빵이라도 먹고 있을 게 분명했으나 어찌 되었건 빈집에서 서해정의 생각, 정확히 말하면 서해정에게 느꼈던 자신의 충동을 곱씹으며 혼란스러워하는 것보다는, 정호를 찾아가 실없는 농담이라도 주고받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씻는 내내 또 어젯밤 제가 충동적으로 저질렀던 그 키스가 풍선처럼 떠올랐지만 현수는 ‘병원 가는 길에 뭐 살까.’ 하는 둥의 생각들을 의식적으로 꺼냈다. 뭐 살까. 뭐 살까. 그런 물음 사이에 ‘내가 왜 그랬지.’ 하는 생각이 끼어들었다. 체리 향도 함께였다. 현수는 그것들을 무시했다.
집을 나선 시간은 일곱 시 반이었다. 현수는 외투 안에 지갑이 있는지 확인하며 문을 열었다. 계단을 내려가는 발이 도망가는 것처럼 빨랐다. 그때까지도 어젯밤의 충동은 계속 불청객처럼, 혹은 여우비처럼 갑작스레 현수의 머릿속을 찾아오고 적셨다가, 이내 내쫓기길 반복했다.
“형.”
그래서 빌라 앞에 선 해정의 모습을 보며, 현수는 그게 환각이라고 잠시 실없이 생각했다. 아니라고 생각을 번복하게 된 건 직후였다. 해정이 제게 다가와 저를 안아 버린 까닭이었다. 저를 안은 몸이 차갑게 식은 채로 벌벌 떨리고 있었다. 이내 상황이 파악되자 현수의 눈이 번쩍 뜨였다.
“너, 너 왜 여기에 있어? 언제부터…….”
“형.”
어젯밤 실험을 하나 끝냈고, 이제 다른 실험을 할 차례다.
해정은 그리 생각하면서도 성실하게 제 눈꼬리를 늘어뜨렸다. 눈을 마주친 뒤, 현수의 어깨에 제 이마를 묻었다. 물론 제 눈이 지금 어떤 기색을 띠고 있을지 몰라서였다. 혹시나 현수 형의 생각만큼 불쌍하지 않으면 안 되니까.
“나, 그……, 형, 있잖아요…….”
“…….”
말을 꺼내는 목소리의 끝이 살짝 떨렸다. 마주 댄 몸이 조금 굳은 걸 느끼며, 해정은 말을 이었다.
“크리스마스 때, 집에 온대요.”
현수는 아직 아무 말도 하고 있지 않았으나 해정은 그의 표정을 가늠할 수 있었다. 하나, 둘. 숫자를 센 해정이 다시 입을 열었다.
“…….”
“……너무, 너무, 무서워요.”
이건 거짓말이 아니니까 죄책감을 가질 필요까지는 없었다. 등을 더 절박하게 끌어안는 손이 떨리는 것도 연기가 아니었다. 지금, 현수가 누굴 만나기 위해 나왔다는 생각만 하면 온갖 불행한 감정이 몰려오는 것도 사실이었고 실제로 손과 목소리가 떨리는 것 또한 마찬가지다. 다만 실제 원인을 숨기고, 조금 다르게 말한 것뿐이다. 그러니까, 해정은 저가 지금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게 아니라고 여겼다.
“오늘은, 옆에 있어 주면 안 돼요?”
아무 데도 가지 말고.
이 말을 하기 위해 새벽 다섯 시부터 빌라 앞에 서 있었다고 하면 싫어하겠지. 내 공포를 의심할 수도 있어. 해정은 계산적으로 생각하면서도 어젯밤처럼 현수가 제게 키스해 주기를 바랐다. 설령 그것이 쾌감을 좇는 행위일 뿐이라 하여도, 현수의 키스를 받는 경험은 짜릿했다.
어깨에 파묻고 있던 눈이 천천히 떨어졌다. 해정이 현수를 보았다. 칼에 찔릴 사람처럼 약한 눈이었다. 그 눈이, 저에게 매달리고 있었다. 현수가 참은 숨을 내뱉듯이 “해정아.” 했다.
“오늘은, 오늘은 옆에 있어 주세요. 나 진짜 무섭단 말이에요…….”
거절의 말은 듣기 싫다는 것처럼 해정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리고 현수의 품에 다시 제 눈을 비비적거렸다. 줄줄이 말을 잇기 시작한다.
“나, 괴물을 봤어요. 또 찾아왔어요. 무서워요, 무섭다니까요…….”
“…….”
“형이, 형이 살려 준다고 그랬잖아요…….”
다 사실이다. 거짓말이 아니다. 어젯밤 또 괴물이 방에 찾아온 것도 사실이었고, 도와주겠다고 현수가 제게 말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니까 이건 기만이 아니고, 정말로 현수가 원하는, ‘삶에 대한 구걸’이다.
그렇게 저에게 말하면서도 비실비실 웃음이 나와서 해정은 숨을 한껏 삼켰다. 웃음이 나오는 이유는 어쩐지 현수의 대답을 예상할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
“…….”
“…….”
잠깐 침묵이 흘렀고, 그간 해정은 현수의 몸에 숨듯이 제 얼굴을 파묻고 있었다.
이윽고 어중간하게 떠 있던 손이 해정의 뒷머리를 매만졌다. 해정이 한 번 더 숨을 삼켰다. 너무 크게 삼키느라 윽, 하는 소리가 났다. 고통스럽게 들려 다행이었다.
“……들어가자.”
실험은 성공이다.
해정은 살짝 어깨에서 얼굴을 떼고, 두 손으로 제 얼굴을 가렸다. 떨리던 손이 멈추었으나 현수는 눈치채지 못했다.
* * *
해정의 볼이 볼록했다. 음식물을 오물오물 씹고 있으면서도 포크로 고기를 집더니, 이내 옆에 놓인 탄산수를 들어 마셨다. 곧이어 잘 익은 고기가 입 안으로 들어갔다. 와인 잔을 둥글게 기울어 흔들며 그를 바라보던 수연이 이내 참을 수 없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맛있어?”
해정이 고기를 씹으면서 끄덕였다. 정원이 해정의 스테이크 접시 위에 아스파라거스를 올려 주며 “이것도 먹어. 소화되게.” 했다.
“난 더 먹기 싫은데……. 형 줘요. 형 아스파라거스 다 먹었네.”
무덤덤한 목소리에 고기를 썰고 있던 승우가 고개를 들어 올렸다. 정원의 얼굴이 돌아가자 승우가 부드럽게 웃으며 “전 괜찮아요.” 했다.
승우의 접시 위에 아스파라거스가 올라간 것은 애매한 침묵 후였다.
“먹어. 너는 아스파라거스든 고기든 많이 먹어야 돼. 너무 말랐잖아.”
“안 말랐어요. 몸은 많이 쪘어요.”
“어이구, 퍽이나. 상체만 봐도 비실비실한데. 최승우, 혼자서 밥 안 챙겨 먹어? 어째 볼 때마다 말라 가.”
“……챙겨 먹어. 영양제도 매일 먹고. 나 원래 마른 체형이잖아.”
말랐다는 말이 본인에게는 퍽 스트레스인 듯, 제 엄마의 잔소리에는 결국 인상을 슬쩍 찌푸리고 만 승우가 포크로 조금 전 놓인 아스파라거스를 쿡쿡 찔렀다. 입맛이 떨어진 모양이었다.
“밥을 안 먹잖아. 너 아직도 군것질하지? 군것질 말고 밥을 먹으라고, 밥을. 응?”
“알겠어. 많이 먹고 있잖아, 지금도.”
본인의 말대로 승우의 접시도 해정의 것만큼 꽤 많이 비워진 상태였다. 그럼에도 수연은 영 탐탁지 않은지 걱정 어린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테이블 위 시선들이 승우에게로 옮겨 간 동안, 해정은 탁자 밑으로 휴대 전화를 확인했다. 현수에게 메시지가 하나 와 있었다. 고기 꼭꼭 씹어 먹으라는 문자 하나에도 웃음이 새어 나왔다. [응 엄청 꼭꼭 씹어 먹고 있어요] 문자를 보낸 뒤, 해정은 다시 고기를 입에 집어넣었다. 바싹 익힌 것이 살짝 식기까지 해 퍽퍽한데도 먹을 만했다. 고깃살을 이로 부서뜨리는데, 이상하게도 말랑한 그 입술이 떠오른다.
키스해 주세요.
그렇게 말하면, 다정한 입술은 주저하면서도 다가왔다. 그리고 저를 달래 주려 노력했다. 많은 나이 차, 동성 간의 키스, 또 상대가 미성년자라는 것. 여러 가지로 만들어진 족쇄에 묶여 있으면서도 그는 끝내 다가와서 키스해 준다.
그 말인즉슨, 현수는 힘들어하며 매달려 오는 자신을 쉽사리 거부하지 못한다는 뜻이었다. 오로지 어렸을 때에 있던 그 사건 하나 때문에. 재수 없었다고 여기고 지나갈 수도 있는 별거 아닌 사건 하나에. 시간이 지나 풍화될 수 있는 죄책감은 도리어 더 견고해져서 단단한 의무감이 되어 버렸다.
‘어떻게 그렇게 착하지, 사람이.’ 해정은 생각하면서 티슈로 제 입가를 닦았다. 그는 자신이 이기적이라고 말했지만 전혀 아니었다. 끔찍할 정도로 남을 생각한다. 심지어 인간이 아닌 짐승에게까지도.
또 자신에게도. 그게 사랑스러웠다. 고운 심성을 가진 현수가 너무 사랑스러워서, 저만 보고 싶은 건 어쩌면 당연했다. 요즘은 통 보이지 않는 괴물을 들먹거리면서 아무도 만나지 못하게 만든 지가 근 이 주째였다. 그렇다고는 해도 집에 가두는 것도 아니고 저와는 여기저기 다니기도 하니 답답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해정은 생각했다. 감금을 한 것도 아니고, 그저 네 번의 약속을 무산시킨 것뿐이다.
다시금 폐가 근질근질해졌다. 해정은 참지 못하고 소리 없이 웃었다. 물을 마셨다. 입 안에 담긴 것이 톡톡 튀며 점막을 자극했다. 별안간 휴대 전화를 쥔 채 일어서니 승우에게 향했던 시선들이 다시 해정에게로 돌아갔다.
“화장실.”
짧게 말한 해정이 망설임 없이 뒤를 돌아 걸었다.
화장실은 자리와 멀었다. 해정은 화장실 근처 벽에 기대서서 현수에게 전화를 걸었다. 두 어 번의 연결음이 울릴 동안 제 손톱을 망연히 바라보다가, 연결음이 끊기자 곧바로 고개를 든다. 눈에 광채가 돌았다.
“형.”
「응, 해정아.」
제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 하나에도 뇌가 녹아 버릴 것만 같다. 매일매일 보다가 오늘은 얼굴을 보지 못해서인지, 목소리를 들으니 부드러운 인상의 얼굴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문득 전화기 너머로 부스럭거리는 소리와 고무바퀴가 아스팔트 바닥에 짓눌리며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헤실헤실 풀어진 입가가 삽시간에 굳었다.
“……어디예요?”
「응? 아, 잠깐 편의점. 에너지 드링크 사러 나왔어. 오늘 방송 오래 해야 돼서.」
그러고 보니 오늘 크리스마스 특집으로 일찍부터 방송을 한다고 했다. ‘작년에도 그랬었지.’ 해정은 생각하면서 혼자서 고개를 끄덕였다.
새삼 작년 크리스마스가 떠오른다. 작년 크리스마스에도 가족끼리 저녁을 먹었고, 집에 돌아가 현수의 방송을 봤다. 그때는 그의 얼굴도 몰랐고, 성격도 자세히 알지 못했고, 입술의 감촉도 몰랐고, 약점도 몰랐으며, 다루는 법도 몰랐다. 근데 올해는, 이렇게 전화까지 하고 있다. 얼굴을 떠올리려면 떠올릴 수도 있다. 아니까. 얼굴도, 어떤 표정을 자주 짓는지도, 평소 말투도…….
그런 생각이 들자 성대 안쪽이 찌르르 울렸다. 해정이 “나도 형 방송 보고 싶다.” 하며 약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현수가 작게 웃었다.
「집 가서 보면 되지.」
“형 보고 싶다.”
당황한 듯 잠깐 말이 없더니 이내 방금 전보다 조금 더 크게 웃는다. 해정은 그 웃음소리를 귀에 다 담아 두려는 것처럼 휴대 전화에 귀를 바싹 댔다.
「……기분은, 괜찮아?」
웃음의 끝이 어색하게 흐려지다가, 꼭 속으로 몇 번이나 시뮬레이션 해 본 사람처럼 조금 긴장한 목소리가 물었다. 오늘 이부 형과 만나는 걸 알고 하는 말일 것이었다. 해정이 어느 정도로 약하게 굴면 되는지, 짧게 고민하면서 눈을 한 바퀴 돌렸다. 이윽고 짐짓 목소리를 낮추고, 말 사이에 아까보다 더욱 처진 한숨을 섞는다.
“좀…… 안 좋은 것 같기도 하고.”
「그래? 힘들어?」
“아니에요. 버틸 수 있을 거예요.”
그 뒤로 몇 마디를 주고받은 뒤에야 통화가 끝났다. 「많이 힘들면 형한테 전화해.」 현수는 그렇게 당부했다. 그 말이 너무 귀여워서, 해정은 엷게 웃었다. 현수의 볼을 매만지는 상상을 하면서 까만 휴대 전화 액정을 엄지로 쓸었다.
휴대 전화를 주머니에 넣고 다시 자리에 돌아가려는데 멀리서 승우가 다가오고 있었다. 잠시 뒤, 그도 해정을 발견했는지 눈이 조금 커지더니 홱 시선을 피했다. 해정은 승우가 다가오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곧 시선을 거두고 걸음을 옮겼다. 꼭 타인을 보는 것 같은 눈이었다.
시간이 지나며 자연스레 혈기가 사라져 버린 승우는, 과거의 실수를 약점처럼 여겼다. 그래서 그 약점을 유일하게 목격한 해정을 껄끄러워했다. 말을 섞는 것도, 눈을 마주치는 것도 잘하지 못했다. 그 말인즉슨 제 혐오를 앞뒤 없이 표출했던 게 실수일 뿐, 해정을 향한 혐오는 아직까지도 여전하다는 뜻이었다.
‘……아니면 그냥 지금은 표출할 수가 없어서 저러는 걸 수도.’ 해정은 승우를 지나치며 그런 생각을 했다. 아예 가망 없는 추측은 아니다. 승우는 이제 해정을 학대하지 못한다. 물리적으로 그랬다. 해정이 승우보다 더 키가 컸고, 힘도 강해진 건 꽤 오래전부터였다.
“……내가, 너한테 미안하다고 했으면 좋겠냐?”
해정이 승우를 지나치고 두어 걸음 내디뎠을 때였다. 불현듯 뒤에서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조금 긴장한 목소리였다. 나한테 하는 소린가. 해정은 눈을 깜빡이며 생각했다. 불안정한 숨소리는 돌아서지 않고 계속 들렸다. 맞나 보네. 간단하게 판단한 해정이 느릿하게 몸을 돌렸다. 얼굴을 딱딱하게 굳힌 승우가 해정을 노려보고 있었다.
왜 저렇게 화를 내는 거지?
해정은 순수하게 궁금했다. 그도 그럴 게, 식사 자리에서 두 사람 사이에 오고 가는 말은 없었다. 해정은 승우에게 말을 걸지 않았고, 그도 마찬가지였다. 식사 내내 자신은 그저 현수의 생각 때문에 기분이 좋아서 폭식을 했고, 가끔 혼자서 웃었다. 부모님이 말을 걸면 간단하게 답했다.
“갑자기 무슨 소리야?”
해정이 제 뒷목을 긁으며 궁금하다는 듯 고개를 기울였다. 태평한 반응이 어딘가를 자극한 건지, 승우의 볼이 살짝 떨렸다.
“내가 너 어릴 때 그랬던 거 후회했으면 좋겠지? 그래서, 너한테 빌빌 기었으면 좋겠지?”
“하든 말든 관심 없는데.”
느긋한 어조는 재미없는 사실을 말하는 것 같았다. 해정이 뒷목을 매만지던 손을 내려 바지 주머니에 찔러 넣었다.
기어이 승우는 치를 떠는 얼굴을 했다. 이게 싫었다. 서해정은 기분이 나빴다. 비단 자신이 처음 그가 태어났을 때부터 가졌던 질투와 견제 때문이 아니었다. 서해정은 정말 기분을 나쁘게 하는 사람이었다.
사람에게 아무런 감정도 가지지 않는 점이 그랬다. 자신이 때리면 벌벌 떨긴 했지만, 그건 자신을 무서워하는 게 아니었다. 폭력 자체를 무서워하는 것뿐이었다. 그것이 어느 순간 이상하다고 느끼기 시작했다. 맞는 와중에도 멀뚱히 자신을 쳐다보는 어린아이의 눈은 어딘가 핀트가 엇나가 있었다. 서해정은 맞을 때만 눈을 꾹 감고 힘겨워했다. 오로지, 폭력에만. 고통에만. 자신이 뿜는 증오 같은 건, 아예 없는 것처럼. 그저 고통에만.
‘죽어.’
사춘기의 비틀린 감정이 폭발했던 어느 날이었다. 승우는 마른 등을 주먹으로 흠씬 두들겨 패다가, 격앙된 목소리로 그 말을 내뱉고 말았다. 행동으로 겨우겨우 풀 수 있었던 끔찍한 진심이었다. 저가 뱉어 놓고도 놀라 승우는 마구잡이로 때리던 주먹을 멈출 정도였다. 자신이 정말 나쁜 사람이 된 것 같아서, 꼭 TV에서 본, 살의에 가득 찬 살인자가 되어 버린 것 같아서 순간적으로 심장이 덜컹거렸다.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아니, 이 정도까지 미워할 건 아니었는데. 이 정도까지, 내가 이상해질 건 아니었는데. 나는 그냥, 얘가 질투 나서. 그냥 싫어서. 우리 엄마, 그리고 겨우 갖게 된, 아빠라는 존재. 그 둘의 관심을 가지는 게, 그 둘의 핏줄을 가진 게, 그게 너무 싫어서…….
달싹거리는 머리가 어지럽게 자신에 대한 공포에 쫓기고 있을 때였다. 정신없이 자기 보호를 하며 공포에게서 달아나고 있을 때, 그때 두들겨 맞던 어린 해정이 제 몸을 겨우 일으켰다. 그리고 말했다.
‘그런 말…….’
“가도 되지?”
별안간 어린 해정의 목소리 위로 현재의 것이 덮였다. 승우가 퍼뜩 눈을 뜨고 해정을 바라보았다.
똑같았다. 그때의 눈과 지금의 눈. 그 눈 안에는 아무것도 없다. 어렸을 때 그렇게 저에게 폭력을 가하고 반성의 기미조차 없는 자신을 보는데도, 꼭 허공을 보는 것처럼 텅 비어 있다. 남의 감정에는 아무런 관심도 보이지 않는, 그 시체 같은 싸늘함이 기분 나쁘다.
서해정은 비단 자신만 그렇게 보는 게 아니었다. 심지어는 부모님에게도 그렇다. 타인에게 예민한 승우는 그것을 알아차렸을 때 그가 징그럽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어떻게, 부모님한테…….
“사람은 물건이 아니야.”
서해정을 징그럽게 여기고 싶지 않았다. 공포심을 느끼는 건, 지는 거와 다를 바가 없으니까.
그래서 승우는 꼭 설득하는 것처럼 그렇게 말했다. 해정은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사람이 왜 물건이야. 숨이 붙어 있는데.”
“너, 왜 엄마, 아빠랑 살아?”
해정은 더더욱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도톰한 입술이 쉽게 열렸다.
“사니까 사는 거지.”
깔끔하고 간결한 대답이었다. 승우가 “하.” 짧게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누구도, 사람을 그렇게…… 아무 생각 없이 대하지는 않거든. 도구적으로.”
“…….”
“근데 넌, 그래. 옛날부터 그랬어.”
“하고 싶은 말이 뭐야?”
도구적이니 뭐니, 빙빙 돌려 말하는 꼴이 답답했다. 해정이 참지 못하겠다는 듯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재빨리 물었다.
“네 바닥난 인간성, 언젠간 다 들킬 거라고.”
그렇게나 당신들이 예뻐하는 아들이 사실은 사람들을 모두 숨이 붙어 있는 빗자루처럼 본다는 걸, 부디 부모님이 알았으면 좋겠다는 염원을 담아 승우는 말했다. 그리고 서해정에게서 도망쳤다. 징그럽다고 생각하지 않으려 해도 자꾸만 팔에 소름이 돋았다. 온도가 낮고 텅 빈 눈동자는 정말로, 시체 같았다.
* * *
[양주 삼^^]
메시지와 함께 올라온 사진은 꽤 비싼 가격의 양주였다. 에너지 드링크와 김밥이 담긴 봉지를 책상 위에 올려놓던 현수가 픽 웃었다. 그사이, 우석과 경태의 메시지가 나란히 올라왔다.
[크 좋군]
[굿]
현수는 엄지를 치켜든 이모티콘 하나를 보내다가, 흠칫 손을 멈췄다. ‘그러고 보니, 해정이한테 아직 말 안 했는데.’ 문득 그런 생각이 벌떡 일어난 탓이었다.
요즘 해정의 상태는 그야말로 최악이었다. 본인의 말대로 오늘 있을 이부 형과의 대면 때문이었다. 폭력적인 면은 조금 누그러들었지만, 대신 모래성처럼 연약했다. 파도가 휩쓸려 오면 그대로 형체도 없이 사라질 것만 같았다. 아슬아슬해 보여서 해정이 제 품에 안겨 웃고 있을 때도 그의 걱정을 할 정도였다.
끼익, 현수가 의자에 앉아 등으로 등받이를 눌렀다. 뒷머리를 기대고, 형광등을 바라보다가 눈을 감았다. 검은 시야 위로 빛의 잔상이 남았다.
어떻게 해야 하지.
뭐가 좋은 방향인지 알 수가 없었다. 생각이 이리저리 흔들렸다. 강풍이 여기에서 불었고, 저기에서도 불어서 중심을 잡기가 힘들었다.
일단 사실만을 생각해 보자. 약속했으니까, 친구들과 정동진에 가야 하는 게 맞다. 요즘 만나는 것도 다 빠졌으니 슬슬 눈치가 보이기도 했다. 친구들과 연을 끊고 싶은 것도 아니고, 가기 싫은 것도 아니다. 섭섭하게 만들고 싶지도 않았다. 게다가 정동진에 가면 맛있는 것도 먹고, 신년을 같이 맞는 것이니 의미가 있기도 하고, 양주도 정호가 샀고……. 많이 즐거울 거다. 그러니까 안 갈 이유는 없다.
“…….”
무서워요.
문득 파리한 목소리가 제 몸을 ‘사실’로 밀어 버리던 강풍 사이로 다가와 귀를 스친다. 현수가 손바닥으로 제 눈가를 폭 덮었다. 느리게 비비니 건조한 살이 마찰하는 소리가 났다.
키스해 주세요.
목적이 확실한 목소리. 부탁, 혹은 강요. 아니면, 제가 죽을 수도 있다는 자기 파괴적인 협박.
이윽고 슥슥, 살을 비비던 소리가 멎었다. 슬금슬금 손이 올라 이마를 짚는다. 현수가 살며시 눈을 떴다. 시릴 정도로 밝은 빛이 눈꺼풀 사이로 비집고 들어와 각막을 두드렸다.
……안 갈 만한 이유가,
“진짜, 없나.”
흐릿한 목소리가 공기 중에 흘렀다가, 본인도 듣지 못할 정도로 찰나에 증발되었다.
서해정. 친구들. 사실.
바람은 다시 여기저기서 불어와 득달같이 현수를 흔들었다. 현수는 그 센 바람 사이에 섞인 미묘한 미풍을 느끼지 못했다. 그건 늘 그렇듯 그의 세계에서 가장 약하고 미미한 존재였다. 입김처럼 너무도 약해서 시선도 가지 않는 그것. 그것은, 제 마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