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 걸음 (2/19)

2. 걸음

 어릴 적 현수는 시골에 살았다. 집을 기점으로 차로 몇 분 가다 보면 시내에 시장이 있었는데, 현수의 조부는 거기서 개를 팔았다. 파란 트럭의 짐칸에는 철창이 있었고, 그 철창 안에는 유기되었는지, 길을 잃었는지 모를 큰 개들이 왈왈 짖고 있었다. 어릴 적 현수는 그 개들이 어디로 팔려 가는 것인지 알지 못했다. 누구도 알려 준 적이 없었다. 

 현수가 열세 살일 때, 조부는 시골에 남았고 현수는 부모와 함께 서울로 이사를 했다. 붉은 벽돌의 시골집을 떠나 아파트에 살게 되었다.

 시골 학교에서의 마지막 날이었다. 작은 학교라 6학년 반은 두 반뿐이었다. 6년간 친하게 지냈던 아이들은 현수에게 작별 선물을 준비해 주었다. 초코파이를 쌓아 올려 파티까지 했다. 현수가 받은 선물은 문구 세트와 8절지 크기의 롤링 페이퍼였다. 노란색 종이의 한가운데는 반장의 반듯한 글씨가 큼지막하게 쓰여 있었다. 

 현수야 우리 잊지 마♡우리 우정 영원히 -반장 김지혜-

 사랑받는 기분이었다. 돌돌 말아 고무줄로 고정시킨 롤링 페이퍼와 문구 세트를 품에 안은 현수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집으로 향했다. 집의 대문 앞에 파란 트럭이 서 있었다. 할아버지 일찍 오셨네. 현수는 생각했다. 아무래도 내일이 이사 날인지라 일찍 장사를 마치신 모양이었다.

 현수가 트럭을 지나자 개들이 현수를 향해 사납게 짖었다. 덜 자란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한 번도 개들을 이렇게 가까이서 본 적이 없었다. 할아버지는 늘 늦은 밤에 집에 오곤 했다. 개들이 짖는 소리가 마당에서부터 들려오면 현수는 ‘할아버지 오셨구나.’ 하고 말았다. 

 “안녕.”

 현수가 어색하게 손바닥을 펴 개들을 향해 인사했다. 작은 목소리는 개들의 소리에 묻혔다. 개들은 계속해서 짖었다. 현수는 황급히 대문을 열고 들어갔다. 등에 삐질삐질 땀이 났다.

 집 안에 고소한 냄새가 가득했다. 부엌에는 할아버지와 엄마가 있었다. 현수는 책가방을 소파에 던지고, 부엌으로 달려가 제 할아버지와 엄마에게 친구들과 담임 선생님이 오늘 제게 열어 주었던 파티와 받은 선물들을 자랑했다. 할아버지와 엄마는 그러느냐며 현수를 안아 줬다.

 쫑알쫑알 떠들다 보니 어느새 저녁 시간이었다. 할아버지가 옆집 경주댁이 준 거라며 팩에 담긴 소고기를 냉장고에서 꺼내었다. 식탁 가운데에 휴대용 가스버너와 불판이 있었다. ‘나는 소고기보다 삼겹살이 더 좋은데…….’ 현수는 의자에 앉아 다리를 달랑거리며 생각했다. 아빠가 랩을 뜯어 소고기를 불판 위에 올렸다. 치익. 고기가 타는 소리가 났다. 현수는 두부무침을 젓가락으로 집어 먹으면서 고기가 익기를 기다렸다.

 “이건, 할아버지가 특별히 준비하신 거야.”

 가스레인지 앞에 서서 들통 안을 국자로 휘젓던 엄마가 국그릇에 국을 가득 담아 가져왔다. 아까부터 풍기던 고소한 냄새였다. 빨간 국물이 꼭 육개장 같았다. 평소 엄마가 해 주던 육개장보다 고기가 훨씬 많이 올라가 있었다. 현수는 숟가락을 들어 국물을 떴다. 그리고 맛을 보듯 후루룩 마셨다. “뜨거워, 조심해.” 현수의 엄마가 말했다.

 “음. 맛있다. 육개장이야?”

 “비슷한 거지.”

 할아버지가 제 앞에 놓인 국의 고기를 현수의 국그릇에 옮겨 담아 주며 말했다. 현수가 젓가락을 들어 고기를 집었다. 

 “돼지고기야?”

 “비슷한 거지.”

 똑같은 답이 돌아왔다. 현수가 고기를 입 안에 넣었다. “어때, 맛있어?” 할아버지가 물었다.

 “응.”

 현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엄마가 아빠의 앞에 국그릇을 놓았다. “나는 됐어. 안 먹어.” 아빠가 집게를 든 채 휘휘 손을 내저었다. 현수가 발견하지 못할 만큼, 할아버지가 살짝 인상을 썼다가 폈다. 엄마가 아빠의 국그릇을 제 앞에 놓으며 자리에 앉았다. 

 “친구들이 편지도 써 줬다며. 한번 같이 읽어 보자.”

 식사를 마치고 과일을 먹던 중이었다. 엄마가 현수에게 단감을 건네며 말했다. 현수는 답지 않게 수줍어하며 고개를 저었다. “내일 서울로 올라가면서 혼자 읽을 거야.” 현수의 말에 아빠가 귀엽다는 듯 머리를 쓰다듬었다. 폭식을 한 탓인지 8시도 안 되었는데 잠이 왔다. 과일까지 다 해치웠다. 현수가 소파에 누워 끔벅끔벅 눈을 감았다 떴다. 내일 바쁠 거라며, 아빠는 빨리 자라고 했다. 현수는 소파에서 잠이 들었다. 

 누가 옮겼는지는 모르지만, 일어날 때는 침대 위였다. 아침부터 이삿짐센터 직원들이 집 안으로 들어왔다. 소란스러웠다. 현수가 아빠의 SUV에 올라탔다. 어젯밤에 일찍 잔 탓인지 정신이 말똥말똥했다.

 “할아버지, 갈게요.”

 “응. 연락하구.”

 할아버지 등 뒤에 주차된 트럭이 신경 쓰였지만, 현수는 짐짓 시선을 두지 않았다. 부르릉, 시동이 걸렸다. 할아버지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현수는 손을 흔들었다. 

 “다음 휴게소 한 번 들를게.”

 운전하던 아빠가 말했다. 조수석에 탄 엄마는 곤히 자고 있었다. 현수는 뒷좌석에 앉아 고속도로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심심했다. 아빠가 틀어 놓은 라디오는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들과 알 수 없는 노래들만 틀어 주었다. ‘뭐 할 거 없나.’ 현수가 손을 뻗어 제 책가방을 들었다. 그와 동시에, 어제 받았던 선물들과 롤링 페이퍼가 떠올랐다. 현수의 얼굴에 지루한 빛이 사라졌다. 가방 지퍼를 여니 안에 뜯지 않은 문구 세트와 돌돌 말린 롤링 페이퍼가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현수가 고무줄을 빼 롤링 페이퍼를 펼쳤다.

 사실 울 반에서 니가 젤 잘생겻어 ㅎㅎ -수민♥-

 가장 눈에 들어온 건 현수를 대놓고 좋아했던 한 여자애의 글이었다. 현수가 뿌듯한 얼굴로 웃었다. 그 밖에도 다 비슷비슷한 내용들이었지만 현수는 꼼꼼히 글들을 읽었다.

 개고기집 아들 ㅂㅂ

 왼쪽 상단 모퉁이에 작게 적혀 있는 글이었다. 이름을 적어 놓지 않아 누군지 알 수는 없었지만 글씨체로 짐작할 수 있었다. 반에서 겉돌면서도 꿋꿋이 나쁜 말만 하며 여자애들을 곧잘 울리던 남자애였다.

 개고기?……. 현수는 그 글자를 반복해서 읽었다. 이해가 가지 않았던 탓이었다. 제 집은 개고깃집이 아니었다. 애초에 식당이 아니다. 근데 이 남자애가 왜 이런 말을 하는 건지, 현수는 가늠이 되지 않았다. 

 개와 관련된 것은 단 하나. 할아버지가 몰고 다니는 그 파란 트럭뿐이었다.

 이건, 할아버지가 특별히 준비한 거야.

 별안간 어제저녁, 엄마가 국그릇을 제 앞에 두며 했던 말이 현수의 머리를 스쳤다. 현수는 조금 더 생각했다. 

 육개장이야?

 비슷한 거지.

 돼지고기야?

 비슷한 거지.

 돼지고기랑 비슷한 거. 갑자기 속이 울렁거렸다. 단순한 멀미가 아니었다. 현수가 손을 들어 제 입을 막았다. 우욱. 구역질을 하자 아빠가 급히 뒤를 돌았다.

 “왜 그래, 현수야. 멀미 나?”

 현수는 입을 세게 틀어막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한 번 더 명치에서부터 무엇인가가 세게 올라왔다. 우욱! 현수의 몸이 꿈틀거렸다. 눈에 눈물이 가득 맺혔다. 금방이라도 토할 것 같은 모습에, 아빠가 액셀러레이터를 밟았다. 

 “현수야, 조금만 참아. 조금만. 어? 휴게소 거의 다 왔어.”

 왈왈왈, 왈왈왈. 

 아빠의 목소리 위로 개들의 소리가 겹쳤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현수가 눈을 질끈 감았다. 눈물이 또르륵 흘러 손등을 지났다. 차가 심하게 흔들렸다. 아니다. 착각이다. 왈왈. 살려 줘. 왈왈왈. 왈왈. 으르릉.

 왈왈. 살려 줘. 살려 줘.

 안녕?

 그 앞에서 인사를 하던 자신.

 우웨엑. 별안간 바지 위로 토사물이 잔뜩 쏟아졌다. 휴게소에 도착한 건 그 직후였다. 현수는 그 뒤로 한 번 더 토했다. 

 그리고 또 한 번 더. 또. 또. 또. 또. 몇 번이고 토한 뒤에야 현수는 잠에서 깨어났다.

 “하…….”

 익숙한 천장을 바라보며 현수가 한숨을 쉬었다. 목이 말랐다. 꿈에서 토를 몇 번이고 할 때 현실의 자신은 무엇을 하는지 알 수는 없었으나, 이 꿈을 꾸는 날 아침은 이렇게 가위에 눌린 것처럼 몸이 축 늘어지고 목이 말랐다.

 현수가 눈을 도록 굴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날이 흐렸다. 구름이 잔뜩 끼고, 금방이라도 비가 올 것 같은 날씨였다. 기분이 더러웠다. 꿈속, 과거의 그날과 날씨가 같았다.

 악몽을 꾸게 된 건 정확히 열다섯 살, 사춘기 이후부터였다. 토를 한 것은 맞지만, 그 당시에 실제로 환청을 느낀 건 아니었다. 그 악몽을 꾼 후부터, 꿈속에서 환청을 들은 순간부터 살려 달라는 개들의 목소리는 현실까지 범람했다. 열일곱 살 때, 현수는 그 악몽의 이름이 죄책감이라는 것을 문득 깨달았다.

 현수에게 동정은 습관이자 끔찍한 죄책감을 상쇄하는 수단이었다. 현수는 그렇게 자랐다. 어제 해정을 모질게 쳐 낼 수 없었던 이유이기도 했다. 

 일어나니 현기증이 났다. 급하게 일어난 탓이었다. 현수가 잠깐 눈을 감고 서 있다가 괜찮아질 즈음에 느리게 주방 쪽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작은 냉장고 문을 열었다. 

 “아, 젠장.”

 어제 물을 산다는 걸 깜빡했다. ‘어쩐지 이정호 데려다주고 집 오는 길에 찝찝하더라니.’ 현수가 신경질적으로 제 머리를 박박 긁었다. 목이 타는 것 같았다. 현수는 대충 세수를 하고 트레이닝 바지를 입은 뒤 지갑을 챙겼다.

 편의점은 원룸 빌라 바로 밑에 있었다. 딸랑, 편의점 안으로 들어서자 문에 달린 종이 울렸다. “어서 오세요.” 편의점 직원이 활기차게 인사했다. 현수는 대충 고개로 인사를 했다. ‘일단…… 물.’ 현수가 2L 생수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그 옆 도시락 코너를 서성거렸다. 편의점 온 김에 식사를 하고 갈 셈이었다. 생수를 품에 안은 채 제일 커 보이는 도시락을 집어 든 현수가 계산대로 향했다.

 “5300원입니다.”

 계산 후, 현수는 생수를 편의점 테이블 위에 놓고 전자레인지 앞으로 갔다. 자취생들이 많이 사는 동네라 편의점 안은 앉아서 먹을 수 있는 공간이 넓었다. 현수는 제일 구석 자리에 앉았다. ‘일단 물부터…….’ 현수가 생수를 따서 꼴깍꼴깍 물을 마셨다. 전자레인지에서 도시락을 꺼내 와 다시 자리에 앉은 순간이었다.

 “형?”

 애매한 시간인 탓인지, 편의점에서 밥을 먹고 있는 사람은 현수 혼자뿐이었다. 그 말인즉슨 누군가를 부르는 소리는 자신을 향한 것이라는 거였다. 현수가 고개를 들었다. 앞에 있는 사람은 해정이었다. 

 “…….”

 대답할 타이밍을 놓쳤다. 현수의 머리에 물음표가 가득 찼다. 배경과, 인물이 전혀 매치가 안 됐다. 몸이 그대로 멈췄다. 의문이 가득한 눈에도 해정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해정이 현수 앞에 앉았다. 싱긋 웃는 낯이었다.

 “왜 여기서 혼자 밥 먹어요?”

 차라리 대로변에 자리한 편의점이라면, 덜 놀랐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여기는 원룸촌 골목에 자리한 편의점이다. 서해정이 여기에 있을 이유는 없었다. 그러나 제 앞에 있는 사람의 흰 얼굴, 눈, 코, 입, 조곤조곤한 목소리는 다 서해정의 것이 맞다. 대체, 대체 왜. 어제 신사동에서 본 녀석이 대체 왜 이 동네에. 현수가 멍하니 해정을 바라보았다. 해정은 그의 대답을 기다리는 듯했다.

 “너 왜 여기 있어?”

 현수가 가까스로 물었다. 해정의 태도가 너무 뻔뻔해서, 바보라면 정말 우연히 만난 거라고 믿겠지만 세상에 이런 우연은 없을 것이었다. 

 “그냥 지나가다 있길래, 뭐 좀 먹을까 해서 들렀는데요.”

 어이가 없었다. 눈 가리고 아웅 하는 수준의 거짓말이었다. 말은 그렇게 해도 딱히 숨길 건 아니었는지 해정이 씩 웃었다. 해맑게 웃는 얼굴이 어쩐지 소름이 돋았다. 현수가 슬쩍 상체를 뒤로 물렸다.

 “그나저나 왜 이런 걸 먹어요. 밥 먹으러 갈래요? 나도 밥 안 먹었는데.”

 해정이 손을 뻗어 현수의 앞머리를 매만졌다. 현수가 경악에 물든 눈으로 해정을 보았다. 손을 피하지 않는 게 마음에 들었는지 해정이 다시 싱긋 눈웃음을 쳤다. 애교 살이 도톰하게 올라왔다. 현수의 뒷목이 빳빳이 굳었다. 이윽고 해정의 손이 떨어졌다. “왜 여기 있냐고, 너.” 현수가 다시 한 번 물었다.

 “그냥 지나가다 들렀다니까요.”

 “해정아, 너 이런 식으로 하면 곤란해.”

 현수가 짐짓 얼굴을 딱딱하게 굳히고 말했다. 제 동네를 어떻게 안 것인지 감조차 오지 않았다. 무서웠다. 어제만 해도 처연하게 눈꼬리를 축 떨어뜨리며 제 아픔을 얘기하고, 마음을 접는다던, 통화만 하게 해 달라던 녀석은 없었다. 어쩌면, 그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지어낸 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 스쳤다.

 “……너 약속 지켜야지. 형 부담스럽게 안 하기로 했잖아.”

 현수는 일단 설득을 선택했다. 현수의 말에 해정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약속이요? 그런 거 한 적 없는데…….”

 “뭐?”

 “그리고 저도 몰랐어요. 여기에 형이 있는지 제가 어떻게 알겠어요. 형 부담스럽지 않게 한다고 외출을 안 할 수는 없잖아요.”

 “너는 그럼 너랑 내가 우연히 만났다는 얘기를 하고 싶은 거야?”

 해정이 억울하다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도톰한 입술이 살짝 나와 삐친 얼굴을 지어냈다. 

 “그럼 제가 거짓말하겠어요?”

 말문이 막혔다. 말로는 이길 수 없는 애다. 아니, 말이 통하지 않는 애다. 벽을 보고 얘기하는 것 같았다. 갑자기 피로감이 몰려왔다. 현수가 한숨을 쉬었다. 해정이 흘끗 도시락을 내려다보았다. 

 “그나저나, 진짜 이거 먹을 거예요? 밥 먹으러 가요.”

 현수의 눈이 질끈 감겼다. 오늘 꾸었던 악몽 탓인지 별안간 머리가 아파 왔다. 사실 아까부터 컨디션이 안 좋기는 했다. 윙, 윙. 현기증이 날 때 들리는, 멍멍한 소리가 났다. 그 사이로 다시 개들이 짖기 시작했다. 개들의 목소리 그대로, 억양 그대로, 그들은 말을 했다.

 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그저 살려 달라는 말만 했다.

 “…….”

 “네? 밥 먹으러 가요.”

 오래간 대답이 없는 현수가 불안한 건지, 이번에는 조금 애원조로 해정은 말했다. 천연덕스럽게 굴어도 계속 밀어낸다면 해정 또한 불안했다. 애초에 불안감이 많아 더 뻔뻔하게 구는 것일지도 몰랐다. 

 현수는 여전히 눈을 감고 있었다. 시끄러운 환청이 잦아들지 않은 탓이었다. 

 “…….”

 “……네?”

 해정이 다시 한 번 물었다. 두꺼워 보였던 뻔뻔함의 가면은 현수의 침묵 하나로 빠르게 녹아내려 민낯을 드러냈다. 말의 끝이 살짝 떨렸다. 해정의 목소리는 초조함이 가득 배어 있었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목소리 위로 개들의 아우성이 겹쳤다. 이윽고 현수가 살며시 눈을 떴다. 그리고 해정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굳은 얼굴. 처절했던 그 개들의 표정과 같은 점이라곤 촉촉하게 젖은 눈망울, 그거 하나뿐인데 어째서인지 오버랩이 되었다. 현수는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너, 어제 나한테 했던 말……. 그것도 거짓말이었어?”

 “거짓말? 어떤 거요?”

 “……살려 달라는 말.”

 현수의 말이 짧게 떨어졌다. 순식간에 해정의 눈이 깊게 가라앉았다. 해정이 손을 뻗어 현수의 팔목을 쥐었다. 거세게 쥐는 손에 현수가 인상을 찌푸렸다. 아팠다. 

 “내가 형한테 살려 달라고 하는 거, 그거.”

 “…….”

 “그게 거짓말이 될 날은, 아마 없을 거예요.”

 편의점에서 마주친 이후 계속 거짓을 말하던 해정이 처음으로 진실을 내뱉었다. 아까 급히 축였던 목이 다시 바싹 마르는 기분에, 현수는 마른침을 삼켰다. 순식간에 개들의 소리가 잦아들었다. 잠시 해정과 눈을 마주하던 현수가 해정에게 잡힌 팔을 제 쪽으로 당겼다. “아파.” 작게 말하자 해정이 손을 뗐다.

 현수가 일어섰다. 해정의 시선이 따라붙었다. 쿵. 묵직한 소리가 났다. 쓰레기통에 도시락이 처박히는 소리였다.

* * *

 낮인데도 밤처럼 어두웠다. 이따 되면 비 오겠는데. 현수가 하늘을 올려 보며 생각했다. 구름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았다. 

 도시락을 쓰레기통에 처박은 뒤, 현수는 해정의 손에 잡혀 편의점 밖으로 나왔다. 해정은 곧바로 택시를 잡아탔다. 그리고 이 리터짜리 물을 다시 가지고 올지 말지 고민하며 머뭇거리는 현수의 손을 끌어당겨 택시에 태웠다. “압구정 제일 백화점 쪽으로 가 주세요.” 해정이 말하자 택시가 움직였다. “형은 무슨 음식 좋아해요? 삼계탕 좋아해요? 그거 먹을 건데.” 압구정에 도착할 때까지, 해정은 현수의 손을 붙들며 조잘조잘 떠들었다. 

 “여기요.”

 택시가 멈춰 섰다. 해정이 지갑을 뒤적거리는 사이 미리 카드를 꺼내 놓은 현수가 택시 기사에게 제 카드를 내밀었다. 해정이 의아한 얼굴로 그를 돌아보았다. 현수가 차에서 내리자, 해정이 곧바로 따라 내렸다. “어디로 가?” 현수가 물었다. 

 “이쪽이에요.”

 해정이 현수의 손을 잡았다. 현수가 깜짝 놀라 해정을 바라보았다. 빠지려는 손을 더 꽉 쥐고, 손가락이 사이사이 옭아 들었다. 해정이 웃는 얼굴로 걸음을 옮겼다. 손을 잡는 것도 당황스럽지만, 잡힌 손이 아팠다. “서해정, 손 좀…….” 현수가 곤란하다는 듯 말하자 앞서 걷던 해정이 뒤를 돌았다. 

 “형도 형 마음대로 돈 냈잖아요. 그러니까 나도 내 마음대로 손잡는 거예요.”

 해정의 고개가 다시 앞으로 향했다. 순간 현수의 상체가 앞으로 쏠렸다. 해정이 끌어당긴 것이었다. “옆에서 걸어요.” 나지막한 목소리가 말했다.

 백화점 근처일 줄 알았는데, 해정은 생각보다 오래 걸었다. 10분을 넘게 걸어 도착한 삼계탕집은 허름했다. 서울의 골목길 사이에 자리한, 전형적인 오래된 식당이었다. “이런 곳이 맛있어요.” 해정은 그렇게 말하며 현수가 들어올 때까지 문을 열어 두었다. 현수가 가게 안으로 들어서자 문이 닫혔다. 작은 실내 안은 비가 올 것 같은 꿉꿉한 날씨 탓인지 에어컨을 틀어 두고 있었다. 차갑고 건조한 공기에 현수가 제 팔을 슥슥 비볐다. 해정은 가장 안쪽 자리에 앉았다. 현수가 해정의 건너편에 따라 앉았다.

 까탈스럽게 생겨서는 이런 집엘 오네. 현수가 물컵에 물을 따르며 생각했다. 해정은 팔짱을 낀 채 팔꿈치를 테이블 위에 올려 두고 현수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싱글싱글 웃는 게 자못 기분이 좋은 모양이었다. 물을 따른 후 수저를 꺼내는데, 손이 잡혔다. 현수가 고개를 올렸다. 해정이었다. 손을 제 쪽으로 끌어당긴 해정이 슬금슬금 손을 올려 피하지 못하도록 손을 한 손에 꽉 쥐었다. 그리고 현수의 검지를 깨물었다. 현수가 얼른 잡힌 손을 뺐다. 

 “이런 거…….”

 하지 말라고, 현수는 말을 하려다 관두었다. 처음 만날 때부터 해정은 이런 스킨십들을 서슴지 않았다. 그때마다 현수는 하지 말라는 말들을 모양만 바꾸어 가며 했지만, 결국 입만 아픈 짓이었다. 해정은 결국 말을 듣지 않았다. 그런 해정에게 정색하며 화를 내고 싶지는 않았다. “하아…….” 결국 한숨만 쉬고 만다. 현수가 물컵을 들어 물을 마셨다. 해정은 현수의 목젖 부근을 보고 있었다. 물을 넘길 때마다 위아래로 울렁이는 게 섹시했다. 핥아 내고, 빨고 싶었다. 

 주문한 삼계탕이 나왔다. 큰 돌솥에 흰 백숙 하나가 푸짐하게 들어가 있었다. 송송 썰린 파가 양껏 들어간 맑은 국물 위로 김이 멈추지 않고 올라왔다. 순식간에 얼굴이 더워졌다. 해정은 현수의 앞에 놓인 공깃밥의 뚜껑 먼저 열어 주고, 제 공깃밥의 뚜껑을 열었다. 현수가 떨떠름한 목소리로 고맙다고 중얼거렸다. 

 이런 곳이 맛있다며, 강동에서 굳이 찾아온 것치고 해정은 깨작깨작 먹었다. 도리어 삼계탕에 얼굴을 박고 먹는 건 현수였다. 해정은 먹는 것보다는 그의 얼굴을 감상하는 게 주목적인 듯했다. 현수의 이마에 송골송골 땀이 맺히자, 해정이 냉큼 티슈를 뽑아 이마를 톡톡 닦아 내었다. 현수가 닭다리를 뜯다 놀라 멈추었지만 해정은 아랑곳 않는 듯했다. 더해서 비닐장갑까지 끼고 살을 발라내어 현수의 밑 접시에 넣어 주었다.

 식사 내내 해정은 그런 일들을 멈추지 않고 계속했다. 물이 떨어지면 물을 따라 주고, 소금이 떨어지면 덜어 내 주고, 김치가 떨어주면 시켜 주고, 맛있냐고 물으며 웃기도 했다. 어느 순간 현수는 그런 부분에 대해 포기하기 시작했다. 식사를 마친 현수가 고개를 들어 해정의 자리를 보았다. 해정은 반도 먹지 않은 상태였다. 

 “제 거 더 드릴까요?”

 해정이 물었다. 현수가 손을 내저으며 배부르다고 답했다. 그리고 티슈를 뽑아 제 입을 닦아 내었다. 그사이 해정이 손을 뻗어 현수의 볼을 살짝 꼬집었다. 현수는 흠칫 놀라거나 뒤로 물러서지 않았다. 

 “엄청 귀여워요, 먹는 거.”

 해정이 그렇게 말하며 손가락으로 꼬집은 부분을 슥슥 매만졌다. 현수가 인상을 살짝 찌푸리며 “귀엽기는…….” 했다. 그리고 지갑을 챙겨 일어섰다. 계산을 할 셈이었다.

 “형이 계산할 거예요?”

 해정이 현수를 따라 일어서며 물었다. 당연했다. 현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계산대로 향했다. 계산대 앞에 서서 카드를 내미는 현수의 뒤에 해정이 바짝 붙어 섰다. 그리고 현수의 어깨에 제 코를 묻었다. 계산을 하던 아저씨가 놀라 눈을 크게 뜨며, “허허, 동생이 참 애교가 많네.” 했다. 현수가 어색하게 웃는 사이, 해정은 고개를 돌려 어깨에 볼을 비비며 중얼거렸다. 

 “동생 아닌데.”

 희미한 목소리였다. 아저씨는 듣지 못한 듯 예의 친절한 얼굴로 영수증과 카드를 현수에게 내밀었다. 현수가 고개를 꾸벅 숙이며 “감사합니다.” 했다. 해정이 현수의 허리에 손을 얹었다. 그리고 문 쪽으로 몸을 밀었다. 움찔, 허리를 떤 현수가 걸음을 서둘렀다.

 가게 밖으로 나오자마자 허리를 쥐고 있던 손이 더 과감해졌다. 꽉, 세게 허리를 쥐었다가 이내 허리를 껴안은 해정이 현수의 목에 코를 박고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간지러운 느낌이 목덜미에서 시작되어 발끝까지 울렸다. 으. 현수가 몸을 비틀었다. 해정의 팔은 쉽게 현수를 놓아주었다. 

 “맛있었죠?”

 해정이 천연덕스럽게 웃으며 물었다. “서해정.” 현수가 해정의 이름을 부르자, 해정이 “네?” 하고 곧바로 대답했다. 

 물론 사소한 스킨십은 점점 익숙해지는 중이었으나, 그렇다고 모든 스킨십을 그러려니, 하며 넘어갈 수는 없었다. 게다가 남들 앞에서는 더더욱 아니었다. 현수가 “방금처럼…….” 하며 말머리를 틀었다. 그때였다. 별안간 현수의 정수리에 툭, 물방울이 떨어졌다. 현수가 말을 끊고 턱을 젖혔다. 하늘은 먹구름이 점점 더 모여들기 시작했다. 다시 한 번 툭, 현수의 볼에 물방울이 떨어졌다. 점점 내리는 속도가 빨라졌다. 곧이어 어깨를 금방 적실 것처럼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뛰자.”

 현수가 정수리에 손바닥을 대고 뛰었다. 그 뒤로 해정이 쫓아왔다. 툭, 투두둑, 떨어지던 비는 어느새 시원한 소리를 내며 쏟아지고 있었다. 현수가 걸음을 멈춘 곳은 어느 빌라의 지상 주차장이었다. 머리가 젖었다. 현수가 숨을 몰아쉬며 머리를 툴툴 털었다. ‘많이는 안 맞아서 다행이다. 앞머리는 엉망이겠지만.’ 현수가 생각했다. 잠시 후, 현수를 쫓아 뛰던 해정이 그의 옆에 섰다. 해정은 현수만큼 숨을 몰아쉬지 않았다. ‘하여간 젊네.’ 현수는 그렇게 생각하며 제 옆에 선 해정을 돌아보았다.

 “…….”

 확실히, 해정은 아름다운 얼굴이었다. 비에 젖으니 더 아름다웠다. 눈썹과 눈 중간 길이였던 앞머리는 물에 젖어 더 길게 내려와 있었고, 매끈한 피부는 촉촉이 젖어 더 투명해 보였다. 서 있는 것만으로도 화보에 나올 것 같은 모습이었다. 홀린 듯이 현수가 해정을 보자, 해정도 현수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저를 빤히 보는 현수가 기분 좋은 듯, 해정이 시원하게 입꼬리를 찢으며 웃었다. 오른쪽 눈 아래에 인디언 보조개가 살짝 파였다. 

 “왜요?”

 해정이 나지막이 물었다. 유혹적인 목소리였다. 쏴아아. 비는 더욱 거세게 내리고 있었다. 해정이 손을 들어 현수의 양 볼을 차례로 닦아 주었다. 꼭 아기를 다루는 것 같은, 조심스러운 손길이었다. 

 “너 진짜 예쁘게 생겼다.”

 현수가 감탄하듯이 말했다.

 어릴 때부터 들어온 말이었지만, 현수에게 듣는 건 색달랐다. 기분이 좋았다. 해정이 물기를 닦아 주었던 손을 내리지 않고 그대로 현수의 볼을 감쌌다. 그의 볼도, 제 손도 비에 젖어 서늘했다. 같은 온도였다. 편안했다. 현수는 눈을 깜빡이며 계속해서 저를 바라보고 있었다.

 “정말요?”

 해정이 물었다. 작게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가 시끄러운 빗소리 사이로 오직 현수에게만 다가갔다. 현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 진짜. 가까이서 보니까 더 그래. 너 연예인 해도 되겠다.”

 현수가 말했다. 해정이 엄지를 쓸며 축축한 살결을 매만졌다.

 “연예인, 별로 좋은 직업 아니에요.”

 “해 봤어? 아역 배우?”

 “아뇨. 아빠가 배우라서.”

 “배우? 누구?”

 어쩐지 볼 때부터 누군가를 닮았다고 생각했다. 특히 눈매가 누군가를 연상시켰는데, 그게 언뜻언뜻 보이는 수준이라 쉽게 유추가 되지를 않았다. 그래. 이런 얼굴이 평범한 유전자일리 없지. 현수는 생각했다. 

 현수의 질문에 해정은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저 웃을 뿐이었다.

 “궁금해요?”

 곧이어 그렇게 물어 온다. 눈을 반짝이며 궁금해하는 현수가 귀여워 죽겠다는 표정이었다.

 “어. 누군데?”

 “알려 주면요?”

 “어?”

 “알려 주면 뭐 해 줄 건데요?”

 하. 현수가 어이없다는 듯 짧게 웃었다. 그걸 가만히 내려 보던 해정이 고개를 숙여 현수의 얼굴에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갔다.

 “아니, 그렇잖아요. 나는 형 번호 알아내려고 천만 원이나 썼는데. 형은 공짜로 나에 대해 알려고 그래요?”

 악덕하네, 어른이.

 해정이 소곤소곤 속삭였다. 볼을 매만지던 손이 슬금슬금 자리를 옮겨 뒷목에 닿았다. 

 “환불해 줬잖아.”

 “그건 형 의지잖아요. 난 줬어요. 원하면 다시 주면 돼요?”

 “됐어.”

 안 알려 주려면 말고. 현수가 고개를 빼내려는데, 순간 뒷목에 닿은 손이 그를 붙들었다. 손가락이 유독 긴 손이 거미처럼 뒷목에 달라붙었다. 꼼짝 못하게 붙드는 힘에 현수가 인상을 쓰고 해정을 올려 보았다.

 “이거 안 놔? 어린놈이.”

 “안 궁금해요? 내 아빠가 누군지. 우리 아빠 되게 유명한데.”

 손가락이 톡톡 현수의 뒷목을 두드렸다. 어느새 코가 닿을 듯한 거리였다. 끌려가지 않도록 현수가 발에 힘을 주었다. 

 “안 알려 준다며.”

 “내가 언제 그랬어요? 공짜로 안 알려 준다 했지.”

 “그럼 뭐. 또 뭐 사 주면 돼?”

 현수의 말에 해정이 푸스스 웃었다. 해정의 발이 움직였다. 더 가까이 현수에게 다가간다. 해정이 깊숙이 고개를 숙였다. 기어이 두 이마가 닿았다. 현수가 턱을 끌어당겼다. 입술까지 닿을 것 같아서였다. 이윽고 해정이 낮게 말했다.

 “아니. 키스해 줘.”

 화끈. 빗물에 차갑게 식어 있던 얼굴이 삽시간에 타올랐다. 현수가 불에 덴 양 급하게 해정의 어깨를 밀어냈다. 해정이 물러났다. 지금 장난쳐? 물을 수도 없었다. 그 목소리는 진심이었다. 여유롭게 웃던 얼굴 밑에 숨겨 둔, 뜨겁고 축축한 욕망이었다. 갑자기 해정의 앞에서 홀딱 벗겨진 기분이었다. 현수가 씩씩대며 해정을 올려 보았다. 

 “서해정. 어제 말했지. 네가 이상한 말만 안 하면 상대해 주겠다고.”

 “…….”

 “그건, 선을 넘지 말라는 얘기야.”

 “…….”

 “그리고 넌 지금 선을 넘었고.”

 비는 멈추지 않았다. 하지만 이 주차장에서 계속 이 녀석과 있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현수가 넓은 폭으로 발을 뗐다. 그리고 빗속으로 뛰쳐나갔다. 택시를 타기엔 돈이 아까우니, 가까운 역까지 뛰어갈 셈이었다.

 젠장. 어디로 가야 대로변이지. 비가 공격적으로 쏟아졌다. 빗소리에 차 소리가 들리지 않을 정도였다. 별로 뛰지도 않았는데 숨이 찼다. ‘아, 늙었어…….’ 현수는 한탄했다. 발이 점점 느려진다는 생각을 한 순간, 팔목이 잡혔다. 세게 잡는 손길이 몸을 끌어당겼다. 현수의 몸이 힘없이 휙 돌아갔다.

 “너……!”

 급히 내뱉어진 말이 먹혀들었다. 양 볼이 터질 듯 강하게 붙잡힌다. 현수가 해정의 어깨를 필사적으로 밀어냈으나, 해정은 작정한 사람처럼 놓아주지 않았다. 세게 부딪혔는지 피 맛이 났다. 입술이 터진 모양이었다. 해정은 상관하지 않았다. 그저 굳게 닫힌 현수의 입술 사이로 혀를 밀어 넣고, 간밤 상상 속에서 몇 번이고 휘저었던 입 속을 느끼는 게 중요했다. 계속해서 현수를 느껴야 하는 게 중요했다.

 그래야만 안정감이 들었다. 자꾸 내성이 생겨서 저야말로 미칠 것 같았다. 처음에는 현수를 듣고, 보기만 해도 괜찮았는데 눈앞에 보이면 살을 만져야 불안감이 사라졌고, 만지면 입술의 감촉을 느껴야만 했다. 이렇게, 뜨거운 혀를 몇 번이고 빨아들이고 탐해야 했다. 언젠가는 그래도 불안감이 사라지지 않을까 봐 무서웠다.

 그때는 어떡하지. 형의 모든 걸 다 가지고 싶어서, 지금보다 욕심이 커져서, 안달이 나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으면 어떡하지.

 빗소리에 묻혀 둘 사이에는 어느 소리도 나지 않았다. 계속 비가 들어와서 눈을 뜨는 것도 쉽지 않았다. 현수가 눈을 꽉 감은 채 연신 해정을 밀어내다가 끝내 포기했다. 대신 해정의 팔을 쥐었다.

 곧이어 입술이 떨어졌다. 돌진한 건 해정 쪽이었는데, 해정의 입술이 터져 있었다. 해정은 붉어진 입술을 혀로 훑어 내며 현수를 내려 보았다.

 “왜 안 돼요?”

 그리 물어 온다. 따지는 말투가 아니었다. 해정은 정말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왜 선을 넘으면 안 되는지 묻고 있었다. 현수가 입을 살짝 벌린 채 해정을 올려 보았다. 다시 해정의 얼굴이 다가왔다. 현수가 얼굴을 뒤로 당기자 바싹 끌어당기는 힘이 억셌다.

 해정이 다시 현수의 입술에 한 번 더 입을 맞췄다. 난폭했던 아까와는 달랐다. 금방이라도 울 듯한 얼굴로, 억울해 죽겠다는 얼굴로, 애달픈 표정으로, 해정은 떨리는 입술을 현수의 얼굴 곳곳에 찍어 누르기 시작했다.

 “……안 돼.”

 가만히 해정의 입맞춤을 받아 내던 현수가 말했다. 축축이 젖은 얼굴이 그 말에 움직임을 멈추고 현수를 내려 보았다. 

 “왜 안 되냐구요.”

 “그냥, 안 돼.”

 당연한 것에 이유는 없었다. 당연하니까. 구구절절 설명하는 건 불가능하다. 현수는 단호하게 말을 잘랐다. “살려 준다 했잖아요.” 해정이 따졌다. 현수가 해정의 어깨를 잡아 세게 밀었다. 몸이 밀려났다. 해정은 큰 몸을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비 때문에 추운 모양이었다. 현수가 입고 있던 얇은 후드 집업을 벗어 해정의 어깨에 걸쳐 주었다. 그것 역시 젖어 있었지만, 맨살보단 나을 것 같아서였다. 

 “너 지금 살아 있잖아.”

 현수가 말했다. 냉정한 어투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강하게 말한 것도 아니었는데 해정은 충격을 받은 얼굴을 했다. 어느새 파랗게 질린 입술이 뻐끔거렸다.

 “곧 죽어요.”

 “…….”

 “나는 형 없으면 죽는단 말이야.”

 어린아이처럼 울먹이는 목소리였다. 해정이 손을 뻗어 현수의 팔을 쥐려고 했다. 현수는 그 손을 피했다. 저를 부르는 목소리를 무시하고, 뒤를 돌았다.

 현수의 뒷모습이 멀어졌다.

* * *

 다음 날이었다. 현수는 이른 아침에 일어났다. 비를 많이 맞은 탓인지 조금 미열이 나는 것 같아서였다. 현수는 집 안 곳곳을 뒤져 겨우 감기약을 하나 찾아내었다. 대충 두유를 마셔 배를 채운 뒤 약을 삼키고 다시 잠자리에 들었다.

 그리고 다시 일어나니 낮이었다. 아침보다 몸이 가벼웠다. 예상했던 바였다. 자신은 선천적으로 건강한 체질이었다. 골골거리는 일이 거의 없었다. 마지막으로 감기에 걸린 것이 기억하기로는 4년 전이었다. 서해정은 괜찮으려나. 내가 이 정도인데. 양치를 하다가 문득 생각한 현수가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서해정은 참 묘했다. 어떨 때는 소름 끼치고, 꺼림칙한 스토커 짓을 잘도 하다가 또 어떨 때는 마음 안에 있는 동정심을 모조리 끌어 올리기도 했다. 비단 자신이 동정심을 베푸는 데 아낌이 없는 성격이기 때문은 아니었다. 정말로 그는 처절하고 애처로웠다.

 현수는 해정이 착각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아직 어렸다. 아직 판단 능력이 제대로 서지 않았을 것이다. 공황 장애를 앓고 있는 아이라면, 하루빨리 두려움을 지우고 싶은 아이라면 더 그럴 수도 있었다. 만약 시간이 지나 해정이 다른 누군가를 좋아하게 된다면, 금세 현재 저에게 하고 있는 그대로 똑같이 할 것 같았다. 그저 대상만 바뀐 채로. 불안해하는 아이들은 늘 그런 대상을 갈구하곤 하니까. 어제 그가 제게 키스했을 때, 이상하다고 느끼지 않은 이유이기도 했다. 갈구하는 대상에 성별은 중요한 요소가 아니다.

 그날은 서해정에게 연락이 오지 않았다. 그리고 또 다음 날이었다.

 “안녕하세요, 여러분.”

 어김없이 열 시 반이 찾아왔다. 현수는 마이크에 대고 항상 해 왔던 멘트를 내뱉었다. 오늘은 시청자들과 같이 게임을 하는 날이었다. 참여한 시청자 중에 해정은 없었다. 채팅창에서도 누군가 [오늘 노넴님 왜 없음? 이런 적 첨 아님?] 하다가 친목은 안 된다는 매니저의 제재를 받았다. 그 말 그대로였다. 2년 전, 열일곱의 해정이 시청자 참여 게임을 하기 시작한 후부터 해정은 빠진 적이 없었다. 현수가 방송한 날에 비하면 2년은 비교적 짧았으나, 그래도 해정만큼 꾸준히 참여하는 시청자는 드물었다.

 “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안녕.”

 방송 종료. 현수가 종료 버튼을 누른 후 의자에 등을 기대어 앉았다. 그리고 시간을 확인했다. 새벽 한 시였다. 자정이 지났으니 하루가 지났다. 

 오늘, 아니, 어제도 해정은 연락이 없었다. 이틀째 연락을 안 하고 있는 거다.

 현수는 그 사실을 곱씹다가, 곧 제 뒷머리를 박박 긁었다. ‘뭐, 그럴 수도 있지.’ 현수가 전원 버튼을 눌렀다. 본체 안 쿨러가 회전을 멈췄다. 픽, 전원이 꺼졌다. 원룸 안에 정적이 감돌았다. 현수는 꺼진 모니터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나는 형 없으면 죽는단 말이야.

 별안간 물기를 잔뜩 머금은 목소리가 떠올랐다. 기분이 이상했다. 불안감이 연기처럼 스멀스멀 피어오른다.

 ……진짜로, 왜 연락이 없지? 어제 내가 냉정하게 굴어서? 삐쳐서? 녀석이 언제 그런 거에 굴하기나 했던가. 스킨십이든 뭐든 싫다고 해도 녀석은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았다. 근데 왜 쥐 죽은 것처럼 조용하지. 

 “…….”

 째깍, 째깍. 벽시계의 초침이 움직이는 소리가 크게 느껴졌다. 현수는 턱을 괸 채로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이틀 전 상황을 연신 되짚어 보았다. 

 설마. 에이, 설마. 녀석이 암만 위태로워 보인다고 해도…… 설마.

 “……자야겠다.”

 이내 현수가 벌떡 일어나 화장실로 향했다. 쿵쿵. 발소리가 시끄러웠다. 

* * *

 “헉…… 헉…….”

 등 뒤가 축축했다. 이마도 마찬가지였다. 현수가 입을 벌린 채 숨을 몰아쉬었다. 아직 원룸 안은 깜깜했다. 새벽인 것 같았다.

 현수가 더듬더듬 손을 움직여 휴대 전화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시간을 확인했다. 새벽 3시 43분. 침대에 누운 건 2시였고, 2시 반까지 잠을 설치다 억지로 잠을 청했던 것까지는 기억한다. 고작 한 시간 정도 잠든 것이었는데, 그 마저도 악몽을 꿨다. 최악이었다. 

 아무래도 불안해하다 잔 탓인지, 꿈에서는 해정이 나왔다. 칼을 든 채 위협을 했다. 현수를 향해서가 아니라, 제 몸을 향해 칼날을 겨누고 있었다. 나 죽어요. 형이 죽이는 거예요. 아이는 웃으면서 계속 그런 말을 했다. 아니, 웃는 얼굴이었으나 웃는 건 아니었다. 설마 죽겠어. 현수는 망설이지 않고 뒤를 돌았다. 푹. 살덩이에 칼이 박히는 소리가 났다. 뒷목이 뜨끈했다. 피의 온도였다. 현수의 몸이 돌아갔다. 해정이 배에 칼을 박은 채 눈을 마주쳐 왔다.

 형 때문에 죽은 거야. 그 개들처럼, 나도. 형 때문에. 

 현수는 억울했다. 내가 죽였다고? 난 아무것도 한 게 없어. 내가 칼로 쑤신 것도 아니고, 죽으라고 저주한 적도 없어. 난 아무것도 안 했다고.

 그렇게 말하고 싶었는데, 꽥꽥 입을 벌려 소리를 질러도 목소리가 안 나왔다. 계속 쉰 소리만 나왔다. 진공 상태에서 얘기하는 것 같았다. 해정의 상체가 움찔거렸다. 울컥. 칼이 박힌 배에서 검붉은 피가 흘러나왔다. 그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아니, 말을 할 수 없는 상태였다. 죽었다. 해정의 상체가 바닥 위로 고꾸라졌다. 철퍽, 하는 소리가 공간을 메웠다.

 현수는 공포를 느꼈다. 공간 안을 빠져나가고 싶었다. 후들거리는 다리가 어느 한 방향으로 뛰었다. 출구인지는 알 수 없었다.

 아무것도 안 하는 게 죽이는 거랑 뭐가 다른데.

 알면서 모르는 척해. 비겁한 새끼.

 해정의 목소리였다.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 목소리는 공간 안에 울려 퍼진 게 아니었다. 오직 현수에게만 말했다. 귀에 입을 바싹 대어 속삭이고 있다.

 네가 죽인 거라고.

 현수가 눈을 떴다. 원룸 안이 밝았다. 손을 들어 제 이마를 만졌다. 감촉이 느껴졌다. 꿈이 아니었다. 현수는 새벽에 잠깐 깨었던 것도 꿈이었는지, 아니면 현실인 건지 헷갈렸다. 천장을 보며 고민하던 현수가 문득 가슴팍 위로 무게감을 느꼈다. 휴대 전화가 올라가 있었다. 현실이구나. 진짜 깼었구나. 현수는 생각했다. 시간을 확인하다가 다시 깜빡 잠이 든 모양이었다. 

 그저께도 악몽, 오늘도 악몽. 뭐라도 키우면 나으려나. 현수는 생각하면서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침구를 정리했다. 휴대 전화를 확인하니 오전 10시였다. 잠자리가 뒤숭숭한 탓에 일찍 깨 버렸다. 그렇다고 다시 잠이 오는 건 아니었다.

 샤워 후, 현수는 또 휴대 전화를 확인했다. 시간은 오전 10시 32분. 현수가 소리를 내어 말했다. 그리고 빤히 액정을 바라보았다. 

 삐리릭! 삐리릭!

 갑자기 울리는 벨소리에 현수가 어깨를 움찔 떨었다. 이놈의 벨소리, 바꾸든가 해야지 원. 현수가 벌렁거리는 심장을 진정시켰다. 발신인은 모르는 번호였으나, 며칠 전에도 보았던 번호였다.

 서해정이다.

 “여보세요.”

「혀엉…….」

 잔뜩 쉰 목소리였으나, 분명히 서해정의 목소리였다. 현수는 묘하게 내려앉는 안도감을 무시했다. 콜록, 콜록. 전화기 멀리서 기침하는 소리가 들렸다. 

 “서해정?”

 현수의 물음에 해정이 대답할 새도 없이 한 번 더 기침을 했다. 

 「현수 혀엉…… 나 아파서 죽을 것 같아요. 학교도 못 갔는데…… 집에 아무도 없어요…….」

* * *

 해정이 담요를 둘둘 만 채 콜록, 작게 기침을 했다. 그렇게 냉정하게 굴고 가 버릴 땐 언제고, 아프니까 와 달라고 하는 말에는 금방 넘어가 버리는 게 참, 알고는 있었지만 새삼 사람이 무르다 싶었다. 해정이 꿈틀대며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종종걸음으로 거울 앞에 섰다. 부스스한 머리에 양 볼이 촌놈처럼 벌겋게 떠 있었으나 흉할 정도는 아니었다. 

 어제는 현수에게 전화도 한 통 못 걸 정도로 아팠다. 월요일에는 감기 기운만 있었는데, 그 상태로 차갑게 샤워를 했더니 기어이 감기에 걸리고 말았다. 하여간 너무 아팠다. 오한이 나서 몸이 벌벌 떨릴 정도였다. 해정의 부모는 평일에 집에서 자는 일이 드물었다. 엄마는 늘 야근을 했고, 아빠는 촬영으로 바빴다. 하우스 키퍼는 하필이면 화요일과 수요일이 쉬는 날이었다.

 그러니까, 집에 아무도 없는 건 사실이었다. 그러나 약을 챙겨 먹지 않은 건 고의였다. 차갑게 샤워를 한 것 또한 감기에 걸리기 위해서였다. 적당히 아파야 현수도 부르고, 또 저도 꼬드길 정신이 있을 테니까. 해정은 어제 내내 몸이 아예 멀쩡하게 낫지 않기를 바라며 침대에 누워 있었다.

 이윽고 공동 현관 호출음이 들렸다. 해정이 빠르게 걸어 인터폰 앞에 섰다. 현수의 얼굴이 보였다. 고작 이틀 안 본 건데도 얼마나 보고 싶었는지, 해정이 활짝 웃으며 열림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현관문 쪽으로 달려갔다. 벌컥, 문을 열어 둔 해정이 발로 바닥을 두드리며 엘리베이터가 올라오기를 기다렸다.

 “형!”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한 층에 한 가구만 사는 구조였다. 그러므로 엘리베이터에 타고 있는 건 현수였다. 와락, 덮치듯 해정이 현수를 안았다. 순식간에 뜨거운 기운이 현수의 몸을 감쌌다. 해정이 낑낑거리며 곧은 목에 제 머리를 비볐다. 현수가 달래듯 한 손으로 해정의 등을 토닥였다. 반대편 손은 죽이 든 봉투를 들고 있었다.

 “일단 집 좀 들어가자.”

 그 말에 해정이 아쉽다는 듯 다시 한 번 현수의 목에 이마를 비비다가 떨어졌다.

 사실, 이틀 전의 일로 해정이 조금 어색해하거나 앙금이 남아 있어 삐쭉삐쭉할 거라고 예상했던 현수는 의외의 태도에 당황하고 있었다. 해정은 아무 기억이 안 나는 양 굴었다.

 기억이 안 나는 게 아니었다. 그저께 현수가 자신을 버리고 갔건, 냉정한 말을 내뱉어서 상처를 받았건 그건 지금 상관없는 일일 뿐이었다. 그저 해정은 현수의 존재가 반갑고, 좋았다. 

 해정이 현수의 손을 잡아 집 안으로 들어왔다. 현수는 순순히 해정의 뒤를 쫓았다. 집 안은 생각보다 훨씬 넓었다. 고급스럽고 깔끔한 내부에 ‘유명한 배우 아들은 맞나 보네, 이 녀석.’ 하고 현수는 생각했다. 거실을 지날 때, 현수가 말했다.

 “근데 멀쩡하네? 감기 다 나은 거 아니야?”

 해정이 소파에 털썩 앉았다. 현수는 앉지 않고 엉거주춤하게 서서 그를 내려 보았다. 해정이 현수의 손에 들려 있던 죽 봉투를 받아 들어 탁자 위에 두었다. 그리고 현수를 올려다보며 칭얼댔다. “아니에요. 진짜 아파요.” 그러고선 만져 보라며 현수의 손을 끌어 제 이마 위에 두었다. 현수의 손이 이마를 덮고, 쓰다듬듯 내려와 볼을 매만졌다. 따끈따끈한 게 열이 있기는 있는 것 같았다. ‘홍조도 있고, 또 눈도 살짝 부어 있고…….’ 현수가 빤히 해정을 내려 보자, 해정이 짐짓 기침을 냈다. 

 “열 있네.”

 “그렇다니까요.”

 해정이 말꼬리를 늘이며 현수의 손이 거두어지지 않도록 두 손으로 현수의 손을 잡고 제 볼에 문질렀다. “시원해서 기분 좋아.” 해정이 말했다. 아프니까 어리광을 피우는 게 정말 애 같았다. 현수가 픽 웃으며 다른 한 손으로 해정의 반대편 볼을 감쌌다. 해정이 눈을 감았다.

 “약은 먹었어?”

 해정이 아랫입술을 삐죽 내밀며 고개를 살짝 저었다. 현수가 잡힌 손을 빼내고 탁자 앞에 양반다리를 하고 앉았다. 그리고 종이봉투에서 죽과 동치미를 꺼내며 “그럼 이거 먹어. 참치 좋아해?” 했다.

 “네.”

 “다행이네.”

 플라스틱 뚜껑을 열자 따끈따끈한 김이 피어났다. 해정이 소파에서 내려와 현수의 옆에 앉았다. 현수가 숟가락을 뜯어 해정의 손에 쥐여 주었다. 해정이 숟가락으로 죽을 이리저리 뒤섞었다. 그리고 반 술 떠서 호호, 불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현수가 별안간 벌떡 일어나 거실에 버려진 담요를 주워 왔다. 해정의 등에 담요가 덮였다. 해정은 현수의 동선을 눈으로 좇으며 깨작깨작 죽을 먹었다.

 “맛 괜찮아? 동치미도 마셔.”

 “네.”

 죽을 먹이고, 약까지 먹이고 나면 또 홀랑 가 버릴 것 같아. 해정이 느리게 숟가락을 움직이며 생각했다. 현수는 더 이상 관여하지 않고 가만히 해정의 옆에 앉아 있었다. 해정이 숟가락을 쥐지 않은 손으로 현수의 손을 잡았다. 꾹 쥐는 손의 힘이 이제는 익숙했다. 

 “형이 그렇게 가고 나서요.”

 “……응.”

 “몇 분 동안 거기 서서 비 맞았어요.”

 “그러니까 감기에 걸리지.”

 “응. 감기 걸리려고요.”

 해정이 죽을 뜬 수저를 물었다. 현수는 그러려니 하는 얼굴이었다. 그런 짓도 이제 놀랍지 않았다. 동네까지 찾아오는 녀석이었다. 이 정도는 그에 비하면 약과였다. “다 먹었어요.” 이윽고 해정이 숟가락을 플라스틱 용기 위에 두며 말했다. 

 “약 먹어야지. 물 어디 있어?”

 현수가 종이봉투 안에 용기들을 다 넣으며 물었다. 해정이 자리에서 일어나 부엌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컵에 물을 담아 왔다. 현수가 주머니에서 약을 꺼냈다. 해정이 소파에 앉으며 제 옆자리를 톡톡 쳤다. “여기 앉아요, 형.” 그 말에 현수가 쭈뼛거리다 앉았다. 

 “자.”

 현수가 실을 뜯어내고 약 하나를 해정의 손바닥 위에 올렸다. 해정이 약을 빤히 내려 보았다. “뭐 해? 빨리 먹어.” 현수가 말했다. 해정이 곤란하다는 표정을 했다.

 “저 알약 잘 못 먹어요.”

 “한번 삼켜 봐. 못 먹는 게 어디 있어. 다 큰 놈이.”

 그 말에 해정이 주춤거리더니 물을 한가득 입에 담고 약을 입 안에 쏙 넣었다. 그리고 물만 꼴깍 삼켰다. 해정이 눈썹을 늘어뜨리며 혀를 내밀었다. 혀끝에 살짝 녹은 알약이 있었다.

 “써…….”

 “나 참, 애도 아니고……. 그럼 숟가락으로 빻아서 먹을래?”

 해정이 다시 손바닥 위로 알약을 뱉어 냈다. “그럼 쓰잖아요.” 우물거리는 목소리가 곤란하다는 듯 말했다. 

 “그럼 여태껏 어떻게 먹었는데?”

 “몰라요.”

 “뭐?”

 “형이 먹여 주면 안 돼요?”

 “먹여 달라고?”

 “네.”

 해정이 컵을 들어 현수의 입가에 댔다. “머금어 봐요.” 현수가 입을 꾹 다물고 해정을 보다가 기어이 작게 입을 열었다.

 “뭐 하려고.”

 “약 먹여 달라고요.”

 “너……. 약 못 먹는 거 거짓말이지.”

 “진짠데. 아, 나 약 못 먹어서 감기 기운 더 나는 것 같아요.”

 뻔뻔하게 사기를 치네. 현수가 소파에서 일어났다. 해정이 현수의 손을 쥐어 내렸다. 다시 앉은 현수가 인상을 썼다.

 “키스는 안 된다 했지.”

 “이게 왜 키스예요? 먹여 주는 거예요. 혀 섞는 것도 아닌데.”

 논리에 막혔다기보다는 어이가 없어서 말문이 막혔다. 돌아오는 답이 없자 해정이 다시 한 번 입을 열었다.

 “그냥 머금은 채로 넘겨주기만 하면 되는 건데 왜 그래요.”

 “그러면 알약이 쉽게 넘어가긴 해?”

 “네. 스펀지에 나왔어요.”

 스펀…… 하아……. 현수가 한숨을 쉬었다. 

 “스펀지 종영한 지가 언젠데.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빨리 먹어. 안 그럼 먹든지 말든지 그냥 간다.”

 “너무해.”

 애초에 무리한 부탁을 한 건 자신이면서, 해정은 꼭 현수가 잘못을 저지른 것처럼 삐친 얼굴을 했다. 그리고 손바닥에 올려 두었던 알약을 입에 넣고 물도 없이 꼴깍 삼켰다. 현수가 일어나지 못하게 그의 허벅지를 꾹 쥔 채였다. 해정이 현수의 어깨에 제 머리를 기댔다.

 “약 먹으면 바로 가려고 했죠?”

 “그럼. 더 있을 이유도 없는데.”

 “가지 말아요.”

 해정이 말했다. 그리고 두 손으로 양 허벅지를 내리눌렀다. 해정의 얼굴이 빠르게 다가와 현수의 턱을 깨물고, 핥았다. 언젠가 자신이 상상했던 것처럼 그래 보았다. 상상보다 더 달콤한 맛이 났다.

 아, 진짜 너무 좋다. 친절한 것도 좋고, 귀여운 것도 좋고, 다 좋아.

 해정이 현수의 허리를 양팔로 감아 테디베어를 안듯이 꽉 끌어안았다. 그리고 가까이 닿은 현수의 볼에 제 볼을 비볐다. 

 “해정아.”

 현수가 나지막이 이름을 불렀다. 여기까지 하라는 뜻이었다. 그때 말했던, 선을 지키라는 이야기다. 해정은 현수의 말을 듣지 않았다. 들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해정이 고개를 돌려 현수의 볼을 핥았다. 뜨겁고 축축한 살덩이가 입술로 이동했다. 맛을 보듯 입술을 할짝 핥는다. 저번에, 사진을 핥을 때와는 차원이 다른 맛이었다. 해정이 웃었다. 현수가 몸을 비틀었다. 끌어안은 팔의 힘이 더 거세졌다. “윽.” 내장이 짜그라지는 느낌에 현수가 짧은 신음을 내뱉었다.

 해정은 현수를 안은 그대로 소파에 엎어졌다. 현수의 머리가 잔뜩 흐트러졌다. 해정이 드러난 이마에 쪽, 쪽, 키스했다. 그리고 현수와 눈을 맞췄다. 감기가 걸린 건 맞는지, 뜨거운 숨이 현수의 얼굴을 살살 간지럽혔다.

 “하지 마. 나와.”

 “…….”

 “서해정.”

 경고조의 음성이었다. 현수의 다리 사이로 해정의 무릎이 파고들었다. 현수가 다리를 움찔거렸다. 해정이 한 번 더 촉, 빨아들이듯이 촉촉해진 입술에 키스했다.

 “선 넘지 말라 했어.”

 “형이 말하는 저와 형 사이의 선은 키스예요?”

 “난 너랑 사귀는 사이가 아니야.”

 “저한테는 넘지 말아야 할 선 같은 거, 없는데요.”

 각자 다른 얘기를 하고 있다. 해정이 무릎을 세워 현수의 중심을 살살 짓눌렀다. 현수의 얼굴에 피가 몰렸다. 열 살이나 어린 애에게 이런 일을 당하는 것 자체가 치욕이었다. “서해정.” 현수가 다시 해정을 불렀다. 움직임은 멈추지 않았다.

 “선이라…….”

 해정은 고민하는 얼굴을 했다. 잠시 후, 해정이 현수의 얼굴 옆으로 입술을 댔다. 터질 듯 빨갛게 익은 귓바퀴를 콱 깨물자 현수가 낮게 신음했다. 

 “그런 게 있어 봐야……. 음……. 막 내가 형 다리 자르고 그런 거? 그 정도인 것 같은데. 그 정도는 하지 말자고 생각해요, 저도.”

 확신은 못하겠지만.

 시시콜콜한 말을 하듯 가볍게 흘러나온 목소리였다. 뒷목에 소름이 끼쳤다. 현수가 침을 삼켰다. 해정이 서서히 다시 얼굴을 들었다. 그리고 현수와 눈을 마주했다.

 “선 같은 거 생각하지 말죠. 형.”

 아아, 이런 애다. 이런 애였다. 방심하고 있었다. 왜 자꾸 까먹는 건지, 왜 자꾸 속아 넘어가는 건지. 왜 해정이 비를 맞아 가면서 감기에 걸렸는지, 왜 굳이 자신을 집으로, 해정의 영역으로 끌어들인 건지, 현수는 그제야 알아챘다. 

 “……알았으니까, 나와. 일단.”

 “음, 키스해 주면요.”

 해정이 싱긋 웃었다. 현수는 얼굴을 들어 그의 입에 살짝 제 입을 맞댔다. 해정이 현수의 볼을 쥐었다. 황급히 들어와 입 안을 헤집어 놓는 혀의 감촉이 느껴졌다. 현수가 질끈, 눈을 감았다.

 사실 해정이 그리 협박한다 해도 물러서지 않을 수 있었다. 빈틈은 많았고, 그대로 해정을 밀어내고 거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자신이 왜 그러지 않았는가에 대한 이유는, 솔직히 간단했다.

 “형, 좀만 더…….”

 어깨를 살짝 밀어내자 매달리는 목소리와 함께 물기 어린 눈이 깜빡거렸다. 밀어내는 손에 힘이 빠졌다. 곧바로 입술이 다시 부딪쳤다. 현수는 다시 눈을 감았다.

 “아…… 음…….”

 까만 시야 위로 눈이 아롱거렸다. 눈. 그 눈. 제게 삶을 구걸하는 눈. 그 눈은 왈왈, 철창 너머로 짖었던 그 짐승들과 닮아 있었다. 그게, 저가 지금 해정을 쉽사리 내치지 못하는 이유였다.

* * *

 벨소리가 울렸다. 얼마 전 바꾼 탓에 아직 익숙하지 않은 벨소리였다. 현수가 수건으로 얼굴의 물기를 닦고 화장실에서 나왔다. 그리고 휴대 전화를 집어 들어 이어폰을 꽂았다. 발신인의 이름이 떴다. 서해정. 

 “여보세요.”

 「보고 싶어요.」

 녀석은 항상 전화를 받자마자 이런 식으로 이야기했다. 방송 후, 전화를 하기 시작한 지 일주일 정도가 지나니 이제 당황스럽지도 않았다. 현수는 침대에 누웠다. 그리고 이어폰에 달린 마이크를 입 아래에 올려 두었다. “누웠어요?” 뭘 듣고 알아챈 건지 해정이 물었다. 

 “응.”

 「형.」

 “응?”

 「오늘 뭐 해요?」

 별다른 약속 없으면 만나자는 말을 할 거였다. 현수가 눈을 굴렸다. 

 “글쎄…….”

 납득시킬 만한 핑계가 서지 않았다. 이미 다 써 버린 탓이었다. 심지어 괜찮은 핑계를 대도, 해정은 어떻게 해서든 현수를 만났다. 해정의 집에 간 게 일주일 전이었는데 그사이 네 번을 만났다.

 달리 특별한 걸 하는 건 아니었다. 키스를 하고, 스킨십을 당하고, 형은 너무 잘생겼다, 형과 살고 싶다, 요즘 형이 너무 보고 싶어서 힘들다, 하는 둥의 말들만 주구장창 듣다가 헤어지는 게 다였다. 현수는 점점 그것에 익숙해져 가고 있었다. 이제는 그저 완전히 해정에게 말려들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정도였다.

 「별로 할 일 없으면, 만나 주면 안 돼요?」

 해정은 부탁하는 말투로 말했지만 부탁이 아니라는 걸 현수는 알았다. 결국엔 강요였다. 현수가 들리지 않게 한숨을 내쉬었다. 현수의 무응답이 승낙이라 생각을 한 건지 아니면 아무래도 상관이 없는 건지, 해정이 다시 말을 꺼내었다. 

 「삼계탕 먹으러 갈까요? 정규 수업 끝나면 4시 반이에요. 다섯 시에 봐요. 어때요?」

 해정의 물음과 동시에 문자가 왔다. 액정에 노란 말풍선이 떴다. 현수가 메신저 앱을 켰다. 정호와 저를 포함한, 친한 고등학교 동창 4명이 있는 단체 채팅 방이었다. 

 [이번 주 토욜 우리 집 앞 10시까지다. 늦는 사람 벌금 1분당 만원임]

 이정호의 메시지였다. 오늘은 목요일이었다. 무슨 뚱딴지같은 소릴 하나 싶었다. [무슨 말이야?] 현수가 문자를 보냈다. 물어보았는데도 오래간 대답을 안 하는 현수가 이상했는지 해정이 「형?」 하고 현수를 불렀다.

 “어, 어.”

 현수가 대충 대답했다. 해정은 말이 없었다. 현수의 메시지 옆에 적힌 숫자가 점점 줄어들었다. 현수는 그것을 확인하며 다시 입을 열었다.

 “어, 알았어. 삼계탕 먹자.”

 「……지금 뭐 하고 있어요?」

 해정이 물었다. 낮은 목소리였다. 심기가 불편할 때 나오는 목소리다. 현수가 금방 “아, 어. 잠깐 메시지가 와서.” 했다. 

 [아 김현수 또 저런다..]

 [두달전부터 얘기했잖아!!!!!! 부산 가기로 예약도 같이해놓고서는 씨벌]

 [왠지 결방공지 안 떴다 했다ㅋ]

  녀석들의 원성이 비처럼 쏟아졌다. 마지막은 정호였다. 메시지들을 다 읽고 나서야 기억이 났다. 워낙 오래전에 계획했던 바람에 잊고 있던 여행이었다. [아 맞다맞다 미안 ㅠㅠ] 현수는 이모티콘까지 넣어 문자를 전송했다. 

 「이 시간에 누가 문자를 해요? 나 말고?」

 해정이 추궁하듯 물었다.

 “친구들.”

 현수가 짤막하게 답하자 해정이 아, 하고 작게 수긍했다. 

 그 뒤로 기분이 괜찮아진 건지, 아니면 괜찮아진 척하는 것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해정은 다시 평소처럼 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조잘조잘 쉴 새 없이 떠드는 해정의 말 중간중간에 추임새를 넣으며 현수가 아까 껐던 컴퓨터를 켰다. 결방 공지를 띄워야 할 것 같아서였다. 

 「사실은 수시는 합격했는데요, 할 거 없어서 독서실 다녀요. 그러니까 형 그런 거 신경 쓰지 말라고요…….」

 해정의 말이 점점 느려졌다. 공지를 쓴 현수가 작성 버튼을 눌렀다. 느려지던 말이 서서히 잦아들었다가 이윽고, 수화기 너머가 조용해졌다.

 “해정아.”

 「…….」

 “자?” 

 현수가 물었다. 그리고 시간을 확인했다. 세 시였다. 현수가 작게 웃었다. 늘 해정은 세 시만 되면 목소리가 느려지고, 작아지기 시작한다. 그러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전화를 끊지도 않고 잠에 빠진다. 

 “서해정. 자는 거야?”

 작게 속삭이는 목소리였다. 대답 대신 작은 숨소리만 들려왔다. ‘피곤했나 보네. 오늘은 세 시가 된 지 1분도 안 돼서 자는 걸 보면.’ 혹여나 해정이 깰까 현수는 묻는 것을 그만두었다. 해정의 숨소리는 규칙적이었다. 녀석의 자는 얼굴을 본 적은 없었지만, 자는 숨소리만 들어도 얼마나 곤히 자고 있는지 느껴졌다.

 현수가 컴퓨터 전원을 끈 뒤 다시 침대로 가 누웠다. 누운 채 녀석의 숨소리를 듣고 있자니 함께 잠을 자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잘 자.”

 이 녀석이 그냥 친한 동생이었다면, 참 아껴 줬을 텐데. 염려도 많이 해 주었을 텐데. 요즘 가장 많이 하는 생각이었다. 만약 언젠가 자신을 좋아하고 있는 거라는 해정의 착각이 거두어진다면. 그때는 친한 형, 동생 사이로 지낼 수 있을까. 현수는 자문해 보았다. 동시에 해정의 입술이 느껴지는 환상이 일었다. 키스까지 했는데. 아무렇지도 않게 그럴 수 있을까.

 그럴 수는 없겠지. 현수가 얕게 한숨을 쉬었다. 여러모로 복잡했다.

* * *

 교복을 입고 있는 해정은 언제 보아도 낯설었다. 처음 보았을 때 사복을 입고 있던 게 인상 깊었나. 현수는 감흥 없이 생각하며 멀찍이 서서 보아도 눈에 띄는 해정을 바라보았다. 현수를 발견한 해정이 방방 팔을 흔들며 인사했다. 현수가 해정에게로 걸어갔다. 해정이 망설임 없이 현수를 꽉 껴안았다. 몸 전체를 통째로 압박하는 느낌이었다. 현수가 “숨 막혀. 사람들이 본다.” 하자 그제야 힘이 풀렸다. 대신 손이 잡혔다.

 해정이 골목길을 향해 걸었다. 삼계탕집으로 향하는 길이었다. 현수가 따라 걷자, 해정이  그를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현수는 익숙한 얼굴로 끌려갔다. 그리고 해정의 옆에서 걸었다. 해정이 방긋방긋 웃으며 현수의 옆얼굴을 보다가, 이내 말랑해 보이는 볼을 톡 쳤다. 현수가 고개를 돌려 해정을 바라보았다.

 “하지……. 어?”

 하지 말라고 말을 하던 현수가 뚝 말을 멈추고, 또 걸음도 멈추었다. 눈은 해정의 얼굴을 향한 채였다. “왜 그래요?” 해정이 물었다. 현수는 무언가를 발견한 사람처럼 빤히 해정의 얼굴을 올려 보았다. 약간 놀란 얼굴이었다.

 “뭐 묻었어요?”

 해정이 말하며 제 얼굴을 더듬었다. 현수가 살짝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손을 들어 해정의 눈 아래를 약하게 두드렸다. 해정이 눈을 깜빡였다. 영문을 모르겠단 얼굴이었다.

 “아니, 너 요즘 잠 안 자?”

 여태까지 보아 왔던 해정의 피부는 관리를 받는 연예인처럼 뽀얗고, 항상 윤기가 흘렀다. 매끈거려 만지기조차 조심스러울 정도였다. 다크서클 하나 없었는데, 지금은 눈 밑에 그림자처럼 다크서클이 있었다.

 하루 이틀 못 잔 눈이 아닌데. 현수가 생각하며 손을 거두었다. 아니, 거두려고 했다. 떨어지려는 현수의 손이 잡혔다. 해정이 현수의 손을 쥔 채 제 얼굴을 만지게 했다. 만진 피부의 결이 전보다 많이 까칠했다. 현수가 눈을 크게 키우자 해정이 입꼬리를 늘려 웃었다.

 “원래 다섯 시간 자는데. 3시부터 8시. 자는 시간은 똑같이 지켜서 자고 있어요.”

 수면 시간이 부족한 게 아니라는 뜻이었다. 해정이 제 얼굴을 만지는 손을 더 제 쪽으로 끌었다. 그리고 골목 사이, 후미진 곳으로 현수를 끌어들였다. 앞에 선 현수를 내려 보다가 툭 이마를 어깨에 기댄다. 언제 기대도 좋았다. 편안하다. 현수가 괜찮다면 계속 이대로 있고 싶을 만큼.

 “하아…….”

 해정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잠깐 그 상태로 가만히 있다가, 고개를 들어 현수를 보았다. 그리곤 현수의 볼을 감싸 고개를 숙였다. 키스였다. 

 처음에는 게걸스러울 정도로 급하던 키스였는데, 이제는 제법 여유로웠다. 입 안 점막을 훑는 감촉에 현수가 질끈 눈을 감았다. 현수의 반응은 달라진 게 없었다. 해정의 집에 갔던 날 이후, 어느 정도 포기했던 부분이긴 하였으나 그래도 자연스레 받아들일 만큼 키스는 가벼운 행위가 아니었다.

 반면 해정은 눈을 감지 않았다. 촙, 한 번 입술을 세게 빨아들이자 현수의 짧은 속눈썹이 움찔 떨렸다. 이런 광경을 보기 위해서였다.

 “윽……!”

 별안간 현수가 인상을 찌푸렸다. 그리고 번뜩 눈을 떴다. 입술이 화끈거렸다. 해정이 이를 세워 현수의 입술을 콱 물어 버린 것이었다. 장난의 정도가 아니었다. 현수가 해정의 어깨를 밀었다. 해정의 등이 담벼락에 부딪혔다. 얼얼한 감각에 현수가 손등을 입술에 대어 보았다. 피가 묻어 나왔다.

 “서해정!”

 목소리가 커졌다. 해정은 현수의 말을 듣지 않았다. 들리지 않는 게 아니라, 안 듣겠다는 표정이었다. 해정이 현수의 양팔을 쥐고 저가 기댔던 벽으로 현수를 밀쳤다. 현수의 등이 벽에 부딪혔다. 현수가 한 번 더 이름을 부르려던 순간, 해정이 그의 멱살을 쥐어 제 입술을 박았다. 

 “윽!”

 이건 키스가 아니라 폭력이었다. 자신의 감정에 있던 불순물들을 해소하는, 폭력의 일종이었다. 왜 갑자기 이러는지 모르겠다. 살덩이가 제 입 안을 정신없이 헤집고 있다. 현수는 망설임 없이 그걸 씹었다. 바로 피 맛이 났다. 움찔. 해정이 크게 몸을 떠는 사이 현수가 저를 압박하고 있던 몸을 밀쳐 냈다. 

 짝! 뺨을 후려치는 소리가 좁은 골목 안을 메웠다. 해정의 얼굴이 돌아갔다. 흰 피부에 손자국이 금방 올라왔다. 해정은 돌아간 고개 그대로 있었다. 놀란 듯 멍한 얼굴이었다. 현수는 후회하지 않았다. 제게 갖는 감정이 착각이라는 걸 스스로 깨달을 때까지 어느 정도는 받아 주려고 했지만 이런 식이면 안 된다.

 “너 정신 안 차릴래?”

 “…….”

 “너, 결방 공지 때문에 이래?”

 하나 걸리는 건 이것뿐이었다. 대충 짐작하여 말하자 정곡을 찔린 듯 해정이 서서히 고개를 돌려 현수를 내려 보았다. 어린애는 어린애다. 현수는 생각했다. 필사적으로 여유로운 척을 해도 금방 참지 못하고 달려드는 꼴이 그랬다. 

 왜 때리느냐고 화를 낼 줄 알았는데, 해정은 의외로 잠잠했다. 대신 현수를 안고 계속 제 얼굴을 비비적대었다. 괴로워하는 것 같았다. 

 “알고 있었어요?”

 해정이 물었다.

 알고 있던 건 아니었다. 그저 오늘 공지를 쓰는 도중에, 정확히 말하면 [여행 가요. 친구들이랑. 2박 3일.]이라고 적는 부분에서 잠깐 멈추고 ‘서해정이 화낼 것 같은데.’라고 스치듯 생각하긴 했다. 확신은 아니었다. 조금 전, 해정이 저를 밀치고 입을 세게 부딪칠 때까지도 몰랐다. 

 그러나 현수는 몰랐다고 답하지 않았다. 잠자코 벌겋게 달아오른 뺨을 손가락으로 살짝 만지기만 하자 해정이 옆구리를 꽉 쥐어 왔다.

 “어디 가는데요?”

 “왜? 따라오게?”

 “네.”

 어쩔 땐 여우처럼 영악하다 싶다가도, 또 이럴 때는 너무 솔직했다. 하하. 현수가 어이없다는 듯 웃고 말자 급기야 맑은 눈 위로 눈물이 슬며시 고였다. 우는 정도는 아니었으나 어쨌든 서럽기는 한 것 같았다. 해정이 눈꼬리를 축 늘어뜨렸다.

 “방송은 안 해도, 전화는 할게.”

 “알아요. 결방한다고 이러는 거 아니에요.”

 “그럼.”

 해정이 입을 꾹 다물었다. ‘진짜 뭐 때문에 이러는지 모른다는 거야?’ 해정의 눈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현수가 다시 한 번 “그럼 뭐 때문에 그러는데.” 하고 물었다.

 “어디로 가요.”

 “말 안 해 줘.”

 말하면 학교고 뭐고 다 제치고 쫓아올 얼굴이었다. 생각만으로도 끔찍했다. 해정이 한 걸음 다가왔다. 현수를 바라본 채였다. 얼굴 위로 그림자가 드리웠다. 현수도 고집스러운 얼굴을 했다. 이번엔 안 된다. 만약 쫓아온다면, 제 친구들에게도 무슨 짓을 할지 몰랐다. 

 “…….”

 “…….”

 침묵은 계속되었다. 둘 중 누구도 눈을 피하는 사람이 없었다. 꼭 피하면 양보해야만 한다는 룰이 있는 것처럼 대치했다. 잠시 후, 해정이 “아…… 짜증 나.” 하며 인상을 찌푸렸다. 해정의 얼굴이 현수의 얼굴 앞에 가까이 붙었다. 잔뜩 삐친 얼굴이었다.

 “얄미워.”

 해정의 이가 다시 한 번, 아까 물었던 곳을 그대로 콱 물었다. 현수가 인상을 쓰며 “아!” 소리를 냈다. 그래도 화가 풀리지 않는다. 해정이 현수를 안았다.

 해정과 현수가 골목 사이를 나온 건 들어가고 30분이 훨씬 지난 후였다.

* * *

 목을 조이는 넥타이가 답답했다. 해정은 살짝 넥타이를 끄른 후 깊게 숨을 내쉬었다. 한숨이 아니었다. 숨이 막힐 것 같을 때, 이렇게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가 내쉬면 좀 괜찮아지는 것 같았다. 해정이 창문을 내렸다.

 창밖은 어둡고, 불빛이 많았다. 사람들은 야경을 좋아했지만 해정은 한 번도 야경이 예쁘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그저 이렇게나 많이 불을 밝혀도 해 하나 있는 낮을 따라가지 못하는 게 우습다고 생각했었다. 그게 낭만이라고 누군가는 말했으나 해정은 이해하지 못했다. 

 해를 가지고 싶었다. 실제로 가지고 싶다는 게 아니었다. 아무리 온갖 발광체를 가져다 놔도 결국에는 어두운, 앞을 알 수 없을 정도로 새카만 제 속내에 관한 이야기였다. 

 “학생. 다 왔어.”

 택시 기사가 말했다. 해정이 지갑에서 지폐를 꺼내 내밀었다. “잔돈은 괜찮습니다.” 습관처럼 그렇게 말한 뒤, 택시에서 내렸다. 아파트를 향해 걸으면서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가 내쉬었다. 그래도 답답함이 사라지지가 않았다. 왜 이러지. 다시 병원에 가 봐야 하나. 해정은 생각했다. 

 엘리베이터가 도착했다. 한 걸음 내딛던 해정이,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느닷없이 엘리베이터 안이 무섭게 느껴진 탓이었다. 해정이 발을 물렀다. 문이 닫혔다.

 왜 이래. 무서울 거 없잖아.

 해정이 스스로에게 말했다. 오늘도 현수 형을 만났고, 키스도 세 번이나 했고, 집 가서 현수 형의 방송을 볼 수 있고, 방송이 끝나면 전화도 할 건데 왜. 현수 형이 여행 가서?……. 어딜 가는지 본인 입으로 듣지 못한 게 짜증이 나긴 했으나 진지해질 정도는 아니었다.

 무서울 거 없어. 해정이 다시 한 번 저를 타일렀다. 그리고 버튼을 눌렀다. 엘리베이터가 입을 쩍 벌렸다. 해정은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가 버튼을 눌렀다. 

 “…….”

 엘리베이터 안은 조용했다. 저번처럼 쓰러질 듯 머리가 아프다거나 하지도 않았고, 괴물이 보일 것 같지도 않았다. 평소와 같았다. 

 그런데도 미칠 것 같았다. 화가 나기도 했다.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더 심했다. 알 수가 없어서 답답했다. 현수가 싫은 건 아니었다. 전화 중에 잠에 빠지면, 일어나 현수가 잠든 제게 ‘잘 자.’ 하고 인사를 했다. 아침에 일어나 녹음본을 듣는 게 요즘의 낙이었다. 그렇게나 사랑스러운데 싫을 리가 없었다. 도리어 좋아서. 끝을 알 수 없을 정도로 좋아서 힘들었다. 끝없는 늪에 침잠하는 것 같았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역시 괴물은 나타나지 않았다. 불안해하거나, 외롭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충분했다. 요즘의 저는 충분히 안전하다고, 해정은 되뇌었다.

* * *

 개놈 새끼들, 씨발놈들. 중얼중얼 욕을 하는 소리가 들렸다. 옆에 서 있는 경태였다. 둘의 앞으로 초등학생들이 지나가며 흠칫거렸지만 현수는 경태를 제지하지 않았다. 같은 마음이기 때문이었다. 손목을 들어 시계를 확인했다. 현재 시간은 10시 46분. 그리고 약속 시간은 10시. 믿을 수가 없어 몇 번이고 확인했지만 분명, 10시였다. 지각 벌금 1분당 만 원이라는 이야기까지 들었다. ‘분명 와서는 없는 일인 양 굴겠지.’ 현수가 욕을 삼켰다. 대신 경태가 욕을 했다. 저가 온 시간은 23분이었고, 경태는 10시에 왔다고 했다. 저 또한 늦긴 했으나, 다른 놈들에 비해선 양반이었다. 

 “다리 아프기 시작했어. 염병할.”

 “만날 욕하면서도 제시간에 오는 너도 참 대단해.”

 “벌금 낸다 했었잖아!”

 경태가 소리쳤다. 안경이 주륵 흘러내렸다. 현수가 안경을 추켜올려 주며 픽 웃었다. 참 변한 게 없었다. 다른 놈들도 물론 그러긴 했지만 경태가 특히 그랬다.

 경태는 왕따였다. 사람 자체가 나쁜 건 아니었는데, 좀 눈치가 없고 가난한 주제에, 당당하다는 게 이유였다. 그 시절에는 가난이 치욕이었다. 그걸 거스른 게 경태였다. 가난해도, 숨기고 다니거나 힘이 세면 괜찮았지만 경태는 아니었다. 급식 지원을 받는 아이 중 유일하게 고개를 빳빳이 들고 다녔다. 그게 어느 놈들의 심기를 건든 모양이었다. 남고는 양육강식이 가장 잘 먹히는 사회였다. 힘이 센 애들이 경태를 때리기 시작하자, 다른 놈들도 경태를 무시했다. 

 무리 중 먼저 경태에게 손을 내민 건 현수였다. 늘 그렇듯 현수는 그런 사람들을 지나치지 못했다. 정호는 그런 현수를 잘 알았고, 그래서 말리지 않았다. 정호, 현수와 같이 다니던 우석도 상관없다는 눈치였다. 그러나 그런 그를 고깝게 여긴 건 다름 아닌 경태 본인이었다.

 너 지금 나 동정하냐?

 그러면 필요 없어. 씨발.

 독기가 있는 눈이었다. 너의 속내를 안다는 눈빛에 현수는 순간 할 말을 잃었다. 경태가 현수의 어깨를 치고 지나갔다. 

 그 이후 어떻게 친해졌는지는 자세히 기억나지 않았다. 처음 말을 걸었을 때의 일이 너무 강했던 탓이었다. 그 때문에 현수는 아직도 묘하게 경태를 어려워했다. 처음이었다, 자신의 그런 부분을 지적한 사람은.

 나머지 두 명이 온 건 열한 시가 다 되어서였다. 경태는 침을 튀기며 욕을 쏟아 냈고, 두 녀석은 허허 웃기만 할 뿐이었다.

 차를 모는 건 우석의 몫이었다. 경태가 조수석에 앉았다. “고경태 멀미약 붙였네!” 경태의 뒤에 앉은 정호가 경태를 놀렸다. 경태가 또 한 차례 욕을 했다. 발갛게 달아오른 경태의 얼굴이 귀여워 현수가 소리 내어 웃었다. 그때, 문자 알림음이 울렸다. 바지를 뒤져 휴대 전화를 꺼내었다. 해정으로부터 온 메시지였다.

 [잘 갔다 와요. 형]

 그와 동시에 우석이 시동 버튼을 눌렀다. [딱 출발할 때 보내네.] 현수가 메시지를 보냈다. 해정은 답을 보내지 않았다. 현수는 한참 동안 휴대 전화를 만지작대다가 다시 주머니에 넣었다.

* * *

 밤이었다. 여름이 아니니, 물놀이를 하기에는 무리였다. 발만 살짝 담근 게 아쉬워 여기 저기 돌아다닌 끝에 결국 PC방에 가 2시간 동안 온라인 게임을 하다가 또 오락실로 향했다. “우리 부산 온 거 맞냐.” 우석이 물었다. 손에는 뽑은 인형들이 가득이었다. 현수가 웃는 얼굴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서울에서나, 부산에서나 노는 게 똑같았다. 

 “그럼 뭐 어때.”

 정호가 그렇게 말하면서 농구대에 동전을 넣었다. 그사이, 우석이 인형들을 경태에게 떠넘기듯 안겨 주었다. “갖고 있어.” 우석이 제 손을 탁탁 털었다. 또 시작이네. 현수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우석과 정호는 고등학교 때부터 농구에 목숨을 걸었다. 늘 오락실에 가면 내기를 걸어 농구 게임을 했고, 실제로 둘 다 서로의 전적까지 외우고 있었다. 

 “이번에는 뭐 걸래?”

 우석이 물었다.

 “헌팅 해 오기. 성공할 때까지.”

 “콜.”

 현수는 우석이 졌으면 했다. 좀 더 잘생긴 놈이 헌팅을 하는 게 더 나았다. 하지만 키로나, 전적으로나 우석이 이길 가능성이 농후했다. 경태도 현수와 같은 생각인지 인형을 양팔에 안은 채 정호를 응원했다. 

 100초는 금방 지나갔다. 아무런 말도 없이 집중하던 둘은 10초가 남자 괴상한 소리를 내며 하나라도 더 넣으려고 발악을 하기 시작했다. 결과는 우석의 승리였다. 아, 귀찮아지겠다. 현수는 생각했다. 어느 여자들이 정호의 얼굴을 보고 헌팅을 승낙할까 싶었다. 

 정호는 깔끔하게 승복했다. 둘은 어느 농구 만화처럼 하이파이브를 하더니, 곧 어깨동무를 하며 오락실을 나섰다. “하여간 초딩 새끼들.” 경태가 옆에서 중얼거렸다. 현수는 군소리 없이 셋을 따르며 그 말에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현수, 경태, 우석이 쪼르르 계단에 앉았다. 그리고 먼발치에서 삐끼마냥 지나가는 여자들에게 말을 거는 정호를 바라보았다. 30분째였다. 해가 서서히 지고 있었다. 얼마 안 있으면 금방 어두워질 것이었다. 여자들은 정호를 도를 아십니까, 내지는 다단계라고 생각하는 것인지 이야기도 들어 보지 않고 피해 갔다. 경태가 무릎을 세워 턱을 괴었다. 여전히 인형들을 안은 채였다.

 “밤새 해도 안 될 것 같은데.”

 경태가 중얼거렸다. 우석이 동의하는 건지 고개를 끄덕거렸다. 현수는 저 상황에 대해 아무런 생각이 없었다. 빨리 회 먹고 싶다. 그 생각만 반복적으로 하고 있었다. 끝내 정호가 이쪽으로 걸어왔다. 아무래도 안 되겠다 싶은 모양이었다. 

 “나는 쓰레기야.”

 정호의 어깨가 축 늘어졌다. 우석이 낄낄 웃었다. 정호가 울상 진 얼굴로 현수를 바라보았다. “현수야.” 하고 이름을 부르는 게 영 불안했다. 현수가 바로 귀를 막았다. 어떤 부탁이든 들어주지 않겠다는 의사 표현이었다.

 “같이 가 주라!”

 소리가 손바닥을 뚫고 들어올 정도로, 정호가 크게 외쳤다. 하여간 제일 만만한 게 나지. 현수가 인상을 찌푸리며 정호를 올려 보았다. 이윽고 정호가 현수의 두 손목을 잡고 그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현수야아, 같이 가 주라. 어?”

 “……그만하고 회나 먹으러 가자.”

 “왜. 한번 같이 가 봐. 여자들이랑 회 먹으면 되지. 캬.”

 저 새끼는 여친도 있으면서……. 현수가 고갤 돌려 우석을 노려보았다. 우석이 딴청 피우듯 휘파람을 불었다. 현수가 다시 정호를 보았다.

 “얘 데려가.”

 현수의 턱이 우석을 가리켰다. “에이. 나는 아니지. 나는 내기에서 이겼는데.” 우석이 느물대며 말했다.

 “니들, 왜 나는 제외하고 말하냐?”

 잠자코 있던 경태가 조용히 물었다. “그야…….” 정호가 입을 뗐다. 아, 안 돼. 현수가 정호의 입을 막기 위해 손을 뻗었으나, 정호의 입이 더 빨랐다.

 “경태 넌 168이잖아.”

 “갔다 올게. 가자.”

 현수가 벌떡 일어나 정호의 팔을 잡아끌었다. 뒷일은 최우석이 알아서 하겠지. 등 뒤로 들려오는 경태의 욕을 애써 모른 척하며 모래사장을 걸었다. 

 “진짜 눈치 지지리도 없는 놈아.”

 “왜? 맞는 말이잖아.”

 더 이상 말하기도 귀찮았다. 현수가 팔을 쥐고 있던 손을 떼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저 멀리서 여자들이 오고 있었다. 후우. 숨소리가 경직된 채로 흘렀다.

* * *

 “너 여자 생겼냐?”

 소주를 한 잔 들이켠 우석이 말했다. ‘누구 얘기지.’ 현수가 고개를 들어 주변을 살폈다. 우석이 저를 보고 있었다. 경태도, 정호도. 셋 다 자신을 보고 있었다. 현수가 검지를 펴 저를 가리켰다. “나?” 묻자 우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여자는 무슨 여자. 나 만날 이정호랑 노는데.”

 “그래?”

 되물음이 의뭉스러웠다. 믿지 않는 눈치였다. 

 “여자 있었음 내가 그렇게 필사적으로 헌팅을 했겠냐?”

 물론 고경태 화내는 게 무서워 그런 거지만. 현수가 뒷말을 삼켰다. “흐음.” 우석이 눈을 가늘게 뜨고 현수를 보았다. 취기가 오른 얼굴이었다.

 “휴대 전화도 필사적으로 보시길래요. 아님 말고.”

 그렇다고 취기로 헛소리를 하는 건 아닌 듯, 옆에서 쉴 새 없이 회를 집어 먹던 경태가 고개를 격하게 끄덕거렸다. 정호도 마찬가지였다.

 현수가 뒷머리를 긁었다. 그때, 문자 알림음이 울렸다. 민망한 타이밍이었다. 여기서 문자를 확인한다면 누군가가 휴대 전화를 빼앗아 갈 것 같았다. 그는 공연히 “방송 안 하니까 괜히 불안해서.” 하며 맥주를 조금 마셨다. 아무도 믿지 않는 눈치였지만 화제는 곧 우석의 여자 친구로 옮겨 갔다.

 경태와 우석은 둘 다 술이 약한 편이었다. 정호는 금주를 하다가 오랜만에 술을 마셔서인지 금방 취해 버렸다. 정신을 차려 보니 멀쩡한 사람은 자신뿐이었다. 우선 비교적 통장에 돈이 많은 우석의 지갑을 꺼내 계산을 한 현수가 숙소까지 어떻게 갈지 고민했다. 차는 숙소 근처에 세워 두고 왔다.

 택시가 나으려나.

 여차저차 녀석들을 끌고 나와 거리에 섰다. 성수기가 지나서인지 한창때인 시간인데도 거리에는 아무도 없었다. 녀석들은 오징어마냥 길바닥에 붙어 흐물거리고 있었다. ‘저 진상들.’ 현수가 욕을 삼키고 좀 더 걸어 대로변 쪽으로 나갔다.

 몇 분을 기다려도 지나가는 택시가 없었다. 한 번 지나갔지만 다른 손님을 태운 채였다. ‘콜택시 불러야 하나.’ 현수가 주머니에서 휴대 전화를 꺼내었다. 노란색 앱 옆에 숫자 1이 붙어 있었다. 아까 미처 확인하지 못한 메시지였다. 메시지를 보낸 건 역시 해정이었다. 오전에 출발할 때 이후, 두 번째 메시지였다.

 하루 종일 전화나 문자를 할 줄 알았는데 의외로 해정은 조용했다. 그게 알게 모르게 신경 쓰였던 모양이었다. 현수가 여자 생겼느냐는 우석의 물음을 떠올리다가 고개를 살짝 내저었다. 그리고 해정의 메시지를 확인했다.

 [저녁 먹고 있어요?]

 오후 10시 12분에 온 메시지였다. 얘는 밥을 10시에 먹나. 어떻게 알고 이때 물어보냐. 현수는 생각하며 액정을 두드렸다.

 [응 방금다먹었고 이제숙소가려고]

 현수가 메시지를 전송했다. 그리고 인터넷을 켜 부산 콜택시를 찾았다. 그때, 누군가가 뒤에서 살갑게 어깨를 안는 것이 느껴졌다. ‘뭐지?’ 현수가 고개를 돌렸다. 일순 심장 박동이 빨라졌다.

 “야아. 크을럽. 클럽 가자아.”

 술 냄새가 확 끼쳤다. ‘오징어 중 한 명이구나.’ 현수가 한숨을 쉬었다. 목소리를 들으니 이정호였던 오징어다. 현수의 등 뒤로 무게를 잔뜩 실은 정호가 얼굴을 비비적댔다. 

 “안 꺼져? 버리고 간다, 새끼야.”

 현수가 몸을 비틀며 정호의 품에서 벗어나기 위해 애를 썼다. 술에 취하면 힘이 얼마나 세지는 건지, 스스로 고주망태가 되어 보지 않아서 잘은 모르지만 다년간 이정호를 통해 느껴 본 바로는 아주, 빌어먹도록 세지는 것 같았다. 현수가 이를 악물고 계속해서 들러붙는 정호를 떼어 냈다.

 “혀언수야아. 클럽. 크을럽 데리고 가 주라. 어? 크을럽.”

 “클럽 가면 여자들이 너보고 뺨 때려 미친놈아. 아 씨, 꺼지라고!”

 “크을럽. 어? 아아니……. 아까 우서기랑, 가기로 했는데…….”

 “여자들 대신 내가 때려 줄까? 안 나와?”

 현수가 정색을 하고 손을 들었다. 때릴 듯이 굴자 정호가 배시시 웃었다. ‘이 새끼 진짜 단단히 취했네. 아까 봉인 해제돼서 쏘맥 미친 듯이 말아 먹을 때부터 알아봤다, 내가.’ 생각하는 사이, 저를 안고 있던 팔에 힘이 풀렸다. 현수가 정호를 밀어냈다. 정호는 쉽게 떨어졌다. 여전히 배시시 웃는 얼굴이다.

 “크을럽…….”

 “닥쳐.”

 현수가 휴대 전화로 다시 콜택시를 찾으며 말했다. “크을럽. 크을러업.” 연이어 중얼거리던 정호가 별안간 현수의 볼 한쪽을 제 쪽으로 밀었다. 현수의 몸이 오뚝이처럼 기우뚱, 기울었다. 쪽. 정호가 현수의 볼에 뽀뽀했다.

 “이 미친!”

 정호가 밀려났다. 현수가 민 것이었다. 정호는 또 히히 웃었다. 보나마나 그다음은 “사랑하는 내 친구우.” 하며 부둥켜안을 게 뻔했다. 현수는 뭐라 한 소리 하기 위해 완전히 몸을 돌렸다. 입을 연 순간이었다.

 퍽, 소리가 났다. 이건 저가 한 게 아니었다. 눈을 감았다가 뜨니 정호가 아스팔트 위에 엎어져 뒹굴고 있었다. 그리고 정호와 자신 사이에, 누군가가 서 있었다. 어디서 튀어나온 건지, 언제 튀어나온 건지 모를 정도로 순식간이었다. 현수가 눈을 깜빡이며 정호를 바라보았다. 너무 순식간에 일어난 상황이라 파악이 힘들었다. 

 “씨발……, 어디서…….”

 낮은 목소리 사이사이 숨소리가 가득했다. 화를 참는 목소리인데도, 분함이 그대로 드러났다. 살기가 가득 배어 있었다. 

 서해정의 목소리다.

 “너…… 무슨…….”

 천만 원을 받았을 때보다, 환불하면 계속 돈을 보낼 거라며 협박을 받았을 때보다, 동네 편의점에서 서해정을 보았을 때보다, 그러니까 그 어느 때보다 당황스러웠다.

 뒤를 돌아본다. 얼굴 또한, 역시 서해정이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가늠이 안 갔다. 언제부터? 어떻게? 왜? 어쩌려고? 현수의 머릿속에 물음표가 가득 들어찼다.

 해정이 다가왔다. 손목이 잡혔다. 강하게 붙드는 힘에 현수의 몸이 휘청거렸다. 정호가 끄응, 신음을 내뱉는 소리가 났다. 현수가 정호를 향해 걸음을 떼는 순간 해정이 현수를 끌어당겼다. 

 “서해정!”

 해정은 멈추지 않았다. 현수를 안은 해정이 끌어당긴 몸 곳곳을 주물럭거렸다. 아프도록 센 힘이었다. 당황하여 두리번거리는 목에 코를 박고 연신 킁킁거리다가, 쇄골을 핥고 깨물기를 반복한다. 미친 사람 같았다. 현수가 해정의 어깨를 세게 밀었다. 

 “그만해, 길거리야!”

 “부족해요.”

 대체 뭐가 부족하다는 건지, 현수는 이해하지 못했다. 해정이 손을 뻗었다. 언뜻 괴로워하는 얼굴이 스쳤다. 현수가 걸음을 뒤로 뺐다. 무엇도 잡아내지 못한 손이 허공에 멈췄다.

 “이리 와요.”

 “서해정, 진정 좀 해.”

 해정이 성큼 다가가 현수의 뒷목을 잡아채었다. 그대로 제 입술을 박는다. 턱을 세게 쥐어 억지로 입을 벌리게 했다. 혀를 빨고, 아프지만 피는 나지 않을 정도로 깨물었다. 몰아치는 키스였다. 현수는 얼마 전처럼 녀석의 혀를 씹으려고 시도했으나 쉽지 않았다. 해정의 혀가 물뱀처럼 현수의 입에서 빠져나와 아랫입술을 핥은 후 떨어졌다. 질척거리는 소리가 났다. 

 “뭐가 그렇게 즐거워요?”

 해정이 물었다. 현수가 정신 차리라는 듯 해정의 뺨을 치기 위해 손을 들었다. 손목이 잡혔다. 해정은 현수의 손을 끌어 손가락 사이사이를 핥았다. 그리고 중지를 세게 깨물었다. 현수가 신음하자, 그건 맘에 든다는 듯 웃는다. 소중한 인형을 안는 것처럼 안아 온다.

 “나는 오늘 죽을 것 같았는데.”

 금세 또 위태로운 목소리였다.

 미친놈처럼 맘껏 날뛰어 놓고, 이제 와 또 살살 엄살을 피운다. 여기까지 따라와서. 여기까지. 대체 무슨 생각이야. 질렸다. 이번엔 정말이었다. 얘는 정상이 아니라고 늘 생각해 왔지만, 이번만큼은 정말 확실했다. 

 현수는 생각하기 시작했다. 일단은, 침착해야 한다. 우석과 경태, 그리고 정호는 자신이 처리를 해야 했다. 정호는 정신을 잃었는지 지금은 아무런 움직임이 없었다. 현수가 저도 모르게 벌벌 떨리는 손에 힘을 주었다. 그나마 떨림이 잦아들었다. 현수가 빳빳하게 손을 들었다. 그리고 해정의 정수리를 쓰다듬었다. 해정이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떼어 내고 그를 바라보았다.

 “……내가 미안해.”

 그렇게 말하자 해정의 눈이 놀란 듯 커졌다. ‘침착해. 침착하자.’ 현수가 해정의 앞머리를 쓸어 넘겼다. 결 좋은 머리칼이 뒤로 넘어갔다가 다시 흐트러지며 앞으로 돌아왔다.

 현수가 해정의 눈과 마주했다. 그리고 최대한 다정하게 속삭였다.

 “해정아, 일단 숙소로 가서 얘기하자.”

 “…….”

 “응?”

 탁탁 소리를 내며 타올랐던 눈이, 조금씩 진화됐다. 현수가 한 번 더 해정의 머리를 매만졌다.

 이제 서해정이라면, 좀 알 것도 같다는 생각이 든다.

 “…….”

 “…….”

 침묵은 잠시였다. 현수를 빤히 내려 보던 해정이 작게 입을 열었다.

 “……갔다 와요. 나 여기 있을게요.”

 그러고선 벤치에 털썩 앉는다. 현수는 살짝 떨리는 손으로 다시 휴대 전화를 쥐었다.

 콜택시는 빠르게 도착했다. 해정은 벤치에 앉아 현수가 친구들을 끌어 택시에 집어넣는 것을 가만히 보고 있었다. 눈에 띄게 누그러진 기색이었다. 어떻게 보면, 힘이 없는 것 같기도 했다. 현수가 경태까지 밀어 넣은 후 뒷좌석 문을 닫았다. 그리고 조수석 문을 열 때였다.

 “형.”

 뒤에서 해정의 목소리가 들렸다. 현수가 뒤를 돌았다. 가로등 불빛을 받는 얼굴은 하얗다 못해 창백했다.

 “……빨리 와요.”

 사그라지는 목소리가 현수의 발목에 거머리처럼 붙었다. 현수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이고 조수석 문을 닫았다. 해정은 계속 저를 바라보고 있었다. 접착제를 떼어 내는 것처럼 힘겹게 정면으로 고개를 돌린 현수가 “JJ리조트로 가 주세요.” 하고 말했다. 택시가 출발했다. 해정의 시선이 아직도 느껴졌다.

 숙소에 가는 도중, 뒷자리에서 끄응 거리는 소리가 났다. 현수가 고개를 돌려 뒷좌석을 확인했다. 의식을 되찾은 건 정호였다. 그는 인상을 잔뜩 찌푸린 채로 맞은 쪽 볼을 살살 어루만지고 있었다. 술이 어느 정도 깬 것인지 눈빛이 선명했다.

 “깼어? 괜찮아?”

 “야……. 저 새끼 뭐야……. 아 존나 아파…….”

 대답하기가 곤란했다. 현수는 짐짓 “……입 벌리지 마. 너 입술 터졌어.” 한 뒤, 다시 정면을 바라보았다. 정호는 재차 물어보지 않고 제 입술 부근을 찍어 핏자국이 묻어 나오는지 확인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리조트 앞에 택시가 멈추었다. 정호는 가운데에 앉아 있던 우석을 부축했고, 현수는 문을 열어 경태를 둘러멨다.

 방이 복도 초입에 있어 다행이었다. 방문을 연 현수가 경태를 그대로 거실 소파에 내려놓았다. 뒤따라온 정호는 거실 바닥에 우석을 패대기치듯 내려놓았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현수를 바라보았다. 아까 택시에서 듣지 못했던 대답을 종용하는 눈이었다.

 잠깐 이상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침묵을 깬 건 현수였다.

 “너 약 발라야겠다.”

 “……혹시, 걔냐?”

 현수가 입을 꾹 다물고 머리를 긁적였다. 긍정이었다. 정호의 눈이 삽시간에 커졌다. 혹시나 하고 물었는데 정말일 줄은 몰랐던 모양이었다.

 “진짜 걔야?”

 “……응.”

 “미친 거 아니야? 너 걔한테 부산 온다고 말했어?”

 득달같이 물어 오는 정호가 유난스럽다고 느껴지지 않았다. 아까, 해정이 나타났을 때 저도 정호만큼 놀랐으면 놀랐지, 덜하지는 않았던 탓이다. ‘말을 했다면 이렇게는 안 놀랐겠지.’ 현수는 속으로 답했다. 그러나 사실대로 말한다면 정호가 더 걱정할 게 뻔했다. 더군다나 지금은 다시 밖에 나가야 했다. 아까 그곳에서 해정이 기다리고 있었다.

 잠시 생각한 현수가 정호의 눈을 피하며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응. 말했어.”

 “미친. 말했다고 따라온 거야? 근데 나는 왜 때려, 씨발. 아, 아파. 갑자기 열 받네. 그 새끼 어디 있어, 지금.”

 “……정호야. 약 바르고 자라.”

 쏟아지는 질문에 답할 여유가 없었다. 현수가 대충 대화를 갈무리하고 현관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정호가 현수를 쫓았다.

 “넌 지금 어디 가는데?”

 거짓말을 하고 싶었는데 달리 댈 핑곗거리가 없었다. 현수는 짐짓 아무렇지 않은 척 신발을 신으며 “걔 만나러.” 했다. 정호가 성큼 현관문 쪽으로 가까이 다가섰다.

 “뭐? 미쳤어? 왜?”

 “……뭔가 마무리는 지어야 할 거 아니야.”

 “그럼 나도 같이 가.”

 정호가 신발에 발을 넣었다. 현수가 손사래를 치며 허리를 폈다. 

 “아니야. 나 혼자 갈게.”

 “야. 그 새끼 진짜 이상하다고.”

 “괜찮아. 나 혼자 가는 게 나아.”

 대충 신발을 꿰어 신은 정호가 현수의 팔을 잡았다.

 “그러면 차라리 경찰서에 신고하자. 나 맞았잖아.”

 “……우리는 성인 네 명이고 걔는 청소년 하나다.”

 “그게 뭐. 그래서 우리가 때렸어? 아, 됐고. 혼자 갈 거면 그냥 가지 마. 그 새끼 진짜 좀 위험해. 나이가 문제가 아니라 그냥 정신이 미친놈이라니까. 칼이라도 들고 설치면 어쩌려고 그러냐?”

 해정이 정상적인 놈이 아닌 건 동의했지만, 그렇다고 칼을 들고 설칠 것 같지는 않았다. 도리어 자신이 정호와 함께 간다면 그럴 수도 있었다. 현수가 제 팔을 쥔 손을 떼어 냈다. 그리고 문을 열었다. 정호가 한 번 더 현수의 이름을 불렀다. 

 “야, 내가 애냐? 괜찮다니까. 너나 약이나 좀 바르고 있어. 얻어터져 가지고는……. 금방 올게.”

 현수가 인상을 찌푸리고 괜스레 크게 목소리를 냈다. 정호가 제 뒷머리를 털어 내며 “에휴, 병신.” 했다. 평소 고집이 그렇게 센 편이 아니었던 현수가 이리 강경하게 나오니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결국 정호는 한 걸음 물러났다. 현수가 바깥으로 발을 뗐다.

 “……어린애라고 봐주지 말고 아차 싶으면 후려갈겨. 합의금은 걱정 말고.”

 아닌 척하면서도 해정에게 한 대 맞은 게 꽤나 겸연쩍었던 모양이었다. 현수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문이 닫히자 현수가 곧바로 시간을 확인했다. 20분이 넘게 지나 있었다. 빨리 오라는 해정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복도를 빠져나가는 걸음이 조금 빨라졌다.

 도로는 한산했다. 택시 아저씨는 여기는 뭐가 맛있고, 뭐가 맛없다며 신나게 떠들었다. 현수는 대충 대답하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빠르게 지나치는 자동차 불빛이 위태롭게 느껴졌다.

 끼익. 높고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차가 멈췄다. 현수가 “감사합니다.” 하며 문을 닫았다. 택시는 곧바로 떠났다. 뒤를 돌자 아까 해정이 앉아 있던 벤치가 보였다.

 현수를 발견하지 못한 건지, 해정은 벤치에 등을 기댄 채로 가만히 앉아 있었다. 현수가 조심스레 그 앞에 섰다.

 “…….”

 해정은 현수를 올려 보지도, 그렇다고 말을 걸지도 않았다.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발견하지 못한 게 아니라, 꼭 졸고 있는 모양새였다. 의아함을 느낀 현수가 손을 들어 해정의 어깨를 톡 쳤다. 

 “……서해정?”

 해정은 답하지 않았다. 잠이 든 건가. 현수는 그리 생각하며 어깨를 감싸 쥐었다. 그 순간이었다.

 “해정……. 야!”

 한적한 길가에 현수의 목소리가 크게 울렸다. 핏기 없는 손이 현수의 팔을 구기듯이 쥠과 동시에 해정의 상체가 바닥에 넘어질 것처럼 앞으로 기울었다. 쓰러지려는 몸을 잡은 건 현수였다. 이건 조는 것도, 자는 것도 아니었다. 현수가 급히 몸을 굽혀 해정의 상체를 받아 들었다. 그리고 고개를 숙여 얼굴을 살폈다. 식은땀이 이마 위에 송골송골 맺혀 있고, 마른 입술은 버거운 듯이 거친 숨만 내쉬고 있었다. 

 “해정아. 정신 차려 봐. 너 왜 그래? 어? 괜찮아?”

 해정이 고개를 느리고 얕게 끄덕였다. 현수가 해정의 상체를 받친 채로 떠듬떠듬 벤치에 앉았다. 쇄골 부근에 해정의 얼굴이 기울었다. 맞닿은 몸이 싸하고 차가웠다. 그게 꼭 시체 같다고 무의식중으로 생각이 든 순간, 몸이 부들 떨렸다. 심장이 기분 나쁠 정도로 쿵쿵 날뛰기 시작했다. 

 현수가 주머니를 뒤져 휴대 전화를 꺼내었다. 아까, 해정이 갑자기 나타나 정호를 때렸을 때보다 손이 더 크게 떨리고 있었다. 해정은 곧 죽을 사람같이 싸늘하고, 힘이 없었다. 그게 현수를 과거의 공포로 몰았다. 손이 축축해 지문 인식이 자꾸 실패했다. 젠장. 현수가 떨리는 손을 바로잡고 가까스로 잠금을 풀었다. 

 “해정아, 정신 있지? 어? 대답해 봐.”

 일단 의식을 놓게 하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스쳤다. 119. 숫자 세 개를 누르는 게 어려울 정도로 눈앞이 새카맸다. 심장이 너무 뛰어서인지, 구역질이 튀어나올 것 같았다. 명치에서 울컥울컥 뭔가가 계속 치솟았다. 언젠가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었다. 토가 나올 것 같았던, 그때. 그러니까. 자신이 개고기를 먹었다는 것을 깨달았던 그때.

 왈왈. 왈왈. 왈왈.

 악몽이 아닌데도 환청이 들린다. 짖는 소리가 귓구멍을 찢을 기세로 파고들기 시작했다. 공격적이었다. 현수의 눈이 길을 잃고 헤맸다. 시끄러웠다. 정신이 뒤흔들렸다. 흔드는 손은 죄책감이었다. 일, 일, 팔이 아니라. 구. 구가 어디 있지. 아, 잘못 눌렀어. 잘못 눌렀는데……. 처음부터, 지우기 버튼이…….

 급기야 현수가 숨을 고르며 침을 삼켰다. 직후, 핏기 없는 새하얀 손이 불쑥 시야 안으로 튀어나왔다. 패닉 상태에 시달렸던 현수가 정신을 되찾은 것처럼 몸을 움찔 떨었다. 튀어나온 건 해정의 손이었다. 해정이 휴대 전화를 밑으로 내리눌렀다.

 “괜, 찮으니까…….”

 숨이 많이 섞인 목소리가 간신히 새어 나왔다. 해정이 고개를 들어 현수와 눈을 마주했다. 조금 전보다는 어느 정도 정신이 돌아온 것 같았다. 눈에 초점이 생겼다. 해정이 침을 삼키며 눈을 끔뻑였다. 

 “……부르지 마요.”

 “아니. 그래도…….”

 해정의 손은 단호했다. 끝내 휴대 전화는 다시 잠금 상태가 된 채 벤치 위에 놓였다. 해정이 현수의 목을 잡아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허리를 꼭 쥐어 상체를 밀착한다. 현수의 목덜미에 해정의 불규칙한 숨이 닿았다. 

 “그냥, 형이 안아, 주면…….”

 “…….”

 “괜찮아, 지니까……. 잠시만…….”

 희미한 목소리는 이런 상황이 익숙한 양 침착했다. ‘내가 안아 주면?…….’ 현수가 눈을 크게 떴다. 해정의 말을 되새기자마자 곧바로 개들이 입을 다물었다. 자그마한 이명만이 귀 주변을 맴돌았다.

 매달리듯 현수를 안은 해정이 미간을 찌푸린 채로 눈을 감았다. 앉아 있는데도 바닥이 들쑥날쑥하는 착각이 일 정도로 멀미가 났다. 현수를 기다렸던 그사이에 저에게 다가오려 했었던 괴물이 다시 나타나기 전에 필사적으로 자신을 안심시킨다.

 지금 닿고 있는 건 현수 형의 살이다. 내가 안고 있어. 지금은 못 가. 안 사라져. 지금 내가 안고 있잖아. 이거 현수 형이야. 현수 형. 김현수. ……김현수. 

 “…….”

 “…….”

 시간이 느리게 흘렀다. 현수가 슬쩍 뒤로 물러서려 할 때마다, 해정은 더 세게 그를 붙잡아 안았다. 현수는 등을 안아 줄까 고민하다가 거두었다. 맞닿은 몸에 점점 온기가 느껴졌다. 제 체온이 옮겨 가는 걸 수도 있었다.

 한참 뒤, 해정의 손이 현수를 놓았다. 현수가 천천히 몸을 떼어 냈다. 고운 얼굴은 아직까지도 창백한 색을 띠고 있었다.

 “……어지러워요.”

 “……어디 아픈 거야? 이러고 있지 말고 병원 가자.”

 해정이 눈을 감고 설레설레 고개를 내저었다. “그냥 좀만 누워 있을래요. 형 있으면 괜찮아요.” 말하는 목소리에는 쇳소리가 섞여 있었다. 해정이 상체를 눕히자 현수가 벤치 끝으로 이동했다. 곧이어 현수의 허벅지 위에 머리가 내려앉았다. 해정이 무릎을 세워 누운 채로 손을 뻗었다. 그리고 현수의 한쪽 손을 붙잡았다. 눈이 감긴다.

 “…….”

 “…….”

 소나기가 내린 후 갠 하늘처럼 조용했다. 가을의 바람이 둘 사이를 스쳤다. 해정은 눈을 감고 있었으나, 아까처럼 죽은 사람 같지는 않았다. 현수는 해정의 얼굴을 가만히 내려 보았다.

 하려던 말은 많았다. 어떻게 찾아왔는지. 정말로 자신을 미행한 건지. 하루 종일 저를 보고 있었던 건지. 무슨 생각으로 정호를 때린 건지. 지적하고, 추궁하고, 또 결과적으로 그에 대한 책임으로 이 관계를 정리하려고 했다. 이렇게 덮어 두고 받아 주다 보면 언젠가 큰일이 벌어질 것 같다는 위기의식이 든 탓이었다.

 근데 그러지를 못했다.

 현수가 잡힌 손을 슬쩍 빼내려 하자, 더 억센 힘이 들러붙었다. 자고 있는 건 아니었던 듯했다. 결국 현수는 잡히지 않은 손으로 그의 앞머리를 쓸어 올려 주었다. 드러난 이마에 아직도 식은땀이 맺혀 있었다.

 내가 형한테 살려 달라고 하는 거, 그거.

 그게 거짓말이 될 날은, 아마 없을 거예요.

 불현듯 해정이 제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게 거짓말이라고 의심한 적은 없었으나, 가슴을 짓누를 정도로 무거운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현수는 그 말에 서서히 물이 차는 것처럼 점점 무게가 실리고 있음을 느끼고 있었다. 말로 듣기만 하는 것과, 직접 경험한 건 확실히 달랐다. 조금 전, 이 아이는 내가 옆에 있어 줬기 때문에 괜찮아진 것이다. 꼭 죽을 것처럼 굴다가, 이렇게 내가 있어 주니까. 내가…….

 “해정아.”

 현수가 이마를 간질이는 바람처럼 속삭였다. 해정은 대답 대신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나한테 원하는 게 뭐야?”

 “…….”

 감겨 있던 눈이 긴 속눈썹을 너풀거리며 뜨였다. 시선이 수직으로 맞닿았다. 현수가 다시 한 번 해정의 머리를 매만졌다. 겁을 먹은 것처럼 질려 있던 입술은 어느새 혈색이 돌고 있었다. 해정이 눈을 깜빡였다. 철창 속 개들처럼 축축이 젖은, 그 눈. 

 “내가 어떻게 하면 네가 좀 나아질까.”

 “…….”

 구할 수 있다면 구해 줘야 한다.

 계속 만져 달라는 듯, 해정이 현수의 손목을 가볍게 잡아 제 이마에 대며 “……모르겠어요.” 했다. 현수의 손은 멈추지 않고 해정의 앞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해정의 대답은 예상했던 것이었다. 

 “그럼 반대로 물어볼게.”

 “…….”

 “뭐가 불안한 거야?”

 해정은 생각하는 것처럼 눈을 여러 번 깜빡였다. 다시 입을 연 건 조금 뒤였다.

 “형이, 사라질 것 같아서요.”

 “…….”

 “형이 옆에 없으면, 불안해져요. 이대로 사라질까 봐. 그냥 나를 계속 혼자 둘까 봐. 처음엔 형에 대한 것만 좀 알면 괜찮아질 줄 알았는데 안 그래요. 더 심해지는 것 같아요. 형이 사라질 것 같다, 그런 생각 하다 보면 괴물이 찾아와요. 방금, 형 기다릴 때도 그랬고……. 나는 그게 무서워서…….”

 별안간 뼈를 부술 것같이 억세게 잡아 오는 힘에 손에 찌릿한 고통이 느껴졌다. 현수가 비명을 삼켰다. 해정은 저가 그리 잡고 있는지도 자각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다시 눈을 감고 살짝 한숨을 내쉰다. 지친 기색이었다. 하얗게 번진 손가락 끝이 힘을 주체하지 못하고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현수는 그 손 위에 제 손을 겹쳐 올렸다. 

 “해정아.”

 “네.”

 “……도와줄게.”

 해정이 눈을 떴다. 현수가 해정의 볼을 살며시 감쌌다. 살려 주세요. 저를 처음 만났을 때, 그렇게 말했던 해정을 기억했다.

 “…….”

 “네가 불안해하지 않도록 도와줄게.”

 그 말에 해정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현수가 손바닥으로 볼의 온기를 느낀 순간, 고막을 살살 긁고 있던 자그마한 이명조차 멎었다. 

* * *

 풍경들이 직선을 그리며 지나쳤다. 현수는 창문 너머를 바라보다가, 해정을 흘긋 보았다. 그 역시 창문을 보고 있었다. 안색이 어젯밤보다는 훨씬 나았다. 불현듯 벨소리가 울렸다. 해정의 고개가 돌아갔다. 현수는 짐짓 태연한 얼굴로 수신 버튼을 눌렀다.

 「야, 너 어디야? 왜 아직도 안 와?」

 정호였다. 지금 일어난 모양이었다. 현수가 복도 쪽으로 살짝 몸을 비틀며 “나 기차 안이야.” 작게 말했다.

 「뭐?」

 “지금 걔랑…… 서울 올라가고 있어. 저기, 정호야. 미안한데 내 짐 좀 챙겨 주라.”

 「뭐어?」

 음량이 커졌다. 현수가 살짝 귀를 떼어 냈다. 「걔? 어제 그 새끼? 걔랑 왜 먼저 올라가는데? 야, 대체 뭐야?」 당황한 목소리가 휴대 전화 스피커를 통해 울렸다. 현수는 눈치를 보듯 옆을 바라보았다. 해정이 빤히 저를 바라보고 있었다.

 현수도 물론 다시 리조트로 돌아갈 셈이었다. 가까운 곳에 있는 호텔에 돈을 털어 방을 잡아 주기만 하려고 했는데, 해정은 가지 말라며 돌아서는 현수를 붙잡았다. 현수가 멈춰 해정을 돌아보았다. 애달픈 눈이 제게 매달렸다. 그걸 내치기가 힘들었다.

 그래서 차선책을 선택했다. 현수는 해정을 재운 뒤, 몰래 빠져나가려고 했다. 그러나 해정은 몹시 예민했다. 침대에 누워 잠을 자다가도, 조그만 기척이 느껴지면 번쩍 눈을 떴다. 결국 현수는 돌아가는 걸 포기했다. 옆에 눕지도 못하고 꾸벅 졸다가, 제 볼을 감싸는 감각에 잠에서 깼다. 푸르스름한 새벽이었다. 옆에서 자요. 해정이 속삭였으나 현수는 졸린 눈을 비비며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침대 옆 소파에 몸을 구기고 누웠다.

 일어난 뒤라고 다를 건 없었다. 해정은 씻는 와중에도 욕실 앞에 서서 현수를 기다렸다. 저가 씻을 때도 현수를 욕실 안에 세웠다. 거침없이 옷을 훌렁 벗어 버리는 행동에 당황한 건 현수였다. 그는 결국 문 쪽으로 얼굴을 대고 몇십 분을 서 있었다.

 리조트에 간다면 쫓아올 게 자명했다. 결국 현수는 호텔에서 나와 리조트에 들르지 않고 기차역으로 향했다. 해정은 군말 없이 현수를 따랐다. 어제도 얕게 잠을 잤는지, 묘하게 힘이 없었다.

 “정호야. 내가 나중에 전화할게. 미안해.”

 급기야 현수는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어 버렸다. 해정의 시선이 의식된 탓이었다. 현수가 다시 몸을 정면으로 틀었다. 부드러운 머리칼이 어깨에 닿았다. 자연스러운 움직임이었다. 

 “형 친구가 저 알아요?”

 나긋한 말투였다. 아무래도 정호의 목소리를 들은 듯했다. “응.” 현수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답하며 팔을 뻗었다. 좌석 앞에 넣어 둔 탄산수를 꺼낼 셈이었다.

 “뭐라고?”

 “어?”

 “뭐라고 아느냐고요.”

 “뭐…….”

 “스토커?”

 움직임이 멈췄다. 동요를 놓치지 않고 목격한 해정이 어깨에 볼을 비비며 소리 없이 웃었다.

 “맞나 보네. 스토커. 스토커라…….”

 불쾌한 기색이 아니었다. 되풀이하는 목소리는 도리어 재밌다는 듯 들떠 있었다. 현수는 할 만한 대답을 찾지 못하고 탄산수를 집어 뚜껑을 열었다. 탄산이 튀는 소리가 났다. 불현듯 해정이 팔을 뻗어 현수의 상체를 꽉 안았다. 한 모금 머금고 뚜껑을 닫던 현수가 슬쩍 고개를 돌리자, 어깨에 닿은 얼굴이 더 깊숙이 파고든다.

 “형도 내가 스토커 같아요?”

 “…….”

 아니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상체가 갑갑했다. 현수가 살짝 몸을 비틀었다. 더 강한 힘이 몸을 붙든다.

 “아니. 스토커라 하기엔 좀 부족한 것 같아.”

 해정이 제 질문에 스스로 답했다. 중얼거리는 목소리는 고민하는 기색을 품고 있었다.

 “나는 형 따라다닌다는 행위 자체로 만족이 안 되거든요. 형의 집 문 열쇠를 복사하고, 형을 미행하고, 통제하고……. 하다못해 형의 모든 걸 안다고 해도 만족이 될 것 같지가 않아. 되게 이상하죠.”

 해정이 느리게 제 머리를 현수의 어깨에 비볐다. 검은 머리가 부슬부슬 흔들릴 때마다 호텔 샴푸 향이 풍겼다. 이윽고 얼굴이 들렸다. 팔이 거두어지고, 손이 잡힌다. 현수의 손을 두 손으로 쥔 해정이 손바닥에 입술을 댔다.

 “나도 모르겠어. 처음에 형을 볼 때는 형의 존재 자체가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좋았는데……. 지금은 잘 모르겠어요. 그걸로는 안 돼. 욕심이 나는데, 어느 정도인지, 어떤 게 그리 욕심이 나는지 모르겠어. 가늠이 안 가.”

 조곤조곤 말을 하며 두 눈을 감는다. 숱 많은 속눈썹이 눈 밑에 내려앉았다. 말랑한 입술의 감촉이 손바닥에 느껴졌다. 현수는 가만히 해정을 바라보았다. 잠시 후, 눈이 서서히 뜨였다. 시선이 얽혔다. 

 “나도 잘 모르겠어서, 진짜 무섭다고요.”

 “…….”

 “너무 무서워.”

 큰 눈은 바다의 수면 아래처럼 잠잠했다. 그 위에 커다란 파도가 일렁이고 있다는 걸, 본인은 알지 못하는 듯했다. 목격자만이 조용히 침을 삼킬 뿐이었다.

* * *

 과자는 빼는 게 낫나.

 삑, 삑. 바코드가 찍힌 식료품들이 차례로 옮겨졌다. 이윽고 점원이 초코 과자를 집었다. 그것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물건을 봉지에 담고 있던 현수가 “아, 저기.” 했다. 점원이 바코드를 찍다 말고 그를 바라보았다. 권태로운 눈이 성가시다는 빛을 내비쳤다. ‘뺄 거면 빨리 말하시든가.’ 하는 듯했다.

 “그거 빼 주……. 아, 아니. 아니에요.”

 현수가 작게 손사래를 치자 점원의 시선이 떨어졌다. 삑. 계산대 위로 초코 과자가 미끄러졌다.

 장을 보는 건 생필품이 떨어졌을 때 겸하는 정도였으나, 그렇다고 해서 한 번에 많이 사는 것도 아니었다. 식료품을 사 봤자 과일이나 라면 정도였다. 현수는 물건으로 가득 찬 비닐 봉투 두 개를 한 손으로 들고 무빙워크에 올랐다. 그리고 허리를 살짝 숙여 비닐 봉투를 신발 위에 얹었다. 쏟아지지 않게 손잡이는 쥔 채였다. 발등 위로 묵직한 무게감이 느껴졌다.

 ‘뭘 이렇게 많이 샀지.’ 현수는 마지막에 담긴 초코 과자 박스를 내려 보며 생각했다. 문득 바지 주머니에서 진동이 느껴졌다. 현수가 휴대 전화를 꺼내어 발신자를 확인했다. 제 예상과는 다르게, 경태였다.

 “응.”

 「카톡 엄청 안 보네, 진짜.」

 전화를 받자마자, 특유의 퉁명스러운 말투가 들렸다. 동시에 무빙워크에서 내린 현수가 주차장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봉투 두 개의 무게를 감당하고 있는 오른쪽 어깨가 조금씩 저리기 시작했다.

 “미안. 장 보고 있었어. 왜?”

 「나 내일 이사하는 거 알지?」

 아, 그랬나. 그렇게 말했던 것 같기도 하고. 그런 생각이 스쳤으나 현수는 짐짓 자연스러운 말투로 “어, 알지.” 했다.

「그게 끝이야? 도와준다고 했었잖아.」 

 “내가?”

 의아한 목소리가 튀어나온 건 반사적이었다. 「……뭐야. 까먹었어? 나서서 말해 놓고는.」 실망감이 그득한 말투였다. 현수가 곧바로 입을 열어 “아, 까먹기는. 기억나.” 했다. 어느새 차 앞이었다. 차 키를 꺼내기 위해 봉투를 내려놓으려고 할 때였다. 뒤에서 팔이 뻗어 와 현수의 손에서 봉투 손잡이를 가져갔다. 현수가 뒤를 돌았다.

 「바쁘면 됐고.」

 “…….”

 그의 뒤에 서 있는 건 해정이었다. 학교 끝나고 바로 온 건지 교복 차림이었다. 문 열어 줘요. 해정이 차를 가리키며 입 모양으로 말했다.

「여보세요?」

 “어, 어. 아니야. 바쁘기는. 안 바빠. 갈게.”

 놀란 눈으로 해정을 바라보던 현수가 그렇게 말하며 주머니를 뒤졌다. 차 키를 꺼내 버튼을 눌렀다. 해정이 뒷문을 열어 봉투를 넣었다. 

 「알았어. 10시 정도에 와.」

 “응. 내일 봐.”

 전화를 끊음과 동시에 뒷문이 닫혔다. 해정이 뒤돌아 현수를 바라보았다. 자연스레 손이 잡혔다. 살짝 끌어당기는 힘에 현수의 발걸음이 떨어졌다. 

 “누구예요?”

 “친구. 타.”

 여기는 어떻게 왔느냐고 물어봤자 돌아오는 건 눈 가리고 아웅 하는 식의 대답일 게 뻔했다. 현수가 잠자코 대답한 뒤, 보닛을 돌았다. 해정은 금세 조수석에 앉아 있었다. “친구 누구?” 운전석 문이 열리자마자 급히 물어 온다.

 “너 내 친구 한 명밖에 모르잖아. 네가 부산에서 때렸던.”

 “그 친구예요?”

 현수는 장난조로 책망하듯 말했으나 해정은 그것을 잘못으로 인식하지 않는 것인지 천연하게 눈을 깜빡이며 물었다.

 “아니. 다른 친구.”

 “어디 가기로 했는데요.”

 뾰루퉁한 목소리였다. 흘긋 바라보니 창문을 손가락으로 툭툭 치고 있다.

 불과 일주일 전이라면 집요히 물어 오는 것에 불편함을 느낄 만도 했겠지만 이제는 그러려니 했다. 익숙해졌다기보다는, 의식적인 수용이었다. 시동을 걸자 차체가 진동했다. 현수는 기어를 바꾸며 “이사하는 거 도와주기로 했어.” 했다. 

 부산에서 해정에게 그렇게 말한 뒤로 해정은 매일같이 현수를 찾아왔고, 현수는 해정을 피하지 않았다. 도와주기로 했으니 옆에 있어 주었다. 그렇다고 그 전과 별달리 달라진 것은 없었다. 구속당하는 것처럼 스케줄을 꼬박꼬박 읊기는 했으나 해정이 제 스케줄을 따라오는 건 아니었다. 

 빌라에 도착할 때까지 차 안은 조용했다. 날 선 분위기는 아니었다. 주차 선에 맞춰 주차한 현수가 기어를 바꾸며 해정을 보았다. 해정 역시 그냥 심술이었다는 것처럼 일상적인 얼굴이었다.

 현수는 차에서 내리고, 곧바로 뒷문을 열었다. 봉투를 두 손에 들고 몸을 돌리자 해정이 서 있었다. “하나 줘요.” 하며 손을 내민다. 현수가 비교적 가벼운 봉투를 내밀고 문을 닫았다. 

 해정은 조용히 현수를 따랐다. 현수가 계단을 오르고, 현관문을 열 때까지는 그랬다. 쾅. 현관문이 닫히자마자 와락 안기는 큰 몸에 현수가 손을 부들 떨며 봉투를 놓쳤다. 얼마나 세게 안겼는지 몸이 휘청거릴 정도였다. 해정이 갑자기 이상 반응을 보이면, 불쾌감보다는 걱정 먼저 드는 건 불가항력적이었다. 본래 현수의 성정이기도 했고, 일전의 경험이 영향을 미친 탓이기도 했다.

 현수는 몸을 바로 세우며 더듬더듬 해정을 안아 주었다. 해정의 손가락 끝이 마른 등을 파고들 듯이 꾹 쥔다.

 “왜 그래. 어디 힘들어?”

 이렇게 묻는 것도 익숙해질 참이었다. 부산에서 온 뒤 일주일밖에 지나지 않았으나 해정은 하루에 한 번씩은 꼭 무서운 것을 피해 숨는 아이처럼 이렇게 몸을 떨곤 했다. 불안하다는 눈으로 현수를 붙들어 안고 숨을 거칠게 내쉰다. 지금도 그랬다. 그에 현수가 하는 일은 늘 같았다. 해정의 등을 안아 주며 끈질기게 달래는 것이었다.

 “마트 간 거 말 안 했어.”

 해정이 작게 말했다. 호흡이 불안정하기도 했고, 품에 파묻혀서 잘 들리지가 않았다. 현수가 “어?” 되물었다. 해정이 고개를 들어 올렸다. 가까운 곳에 얼굴이 자리하자 현수가 흠칫 고개를 뒤로 뺐다. 

 “내가 안 찾았으면 마트에 간 거 말 안 했을 거 아니에요. 어디에 가든지 다 말해 준다고 그랬잖아요.”

 분명 그렇게 말하기는 했다. 부산에서 서울로 올라오는 기차 안에서 해정은 현수의 손을 붙들고 여러 가지를 요구했다. 그중 하나였다. 어디를 가든지 꼭 말하기.

 허나 일부러 말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사사롭기도 했고, 해정의 학교가 끝나기 전에 집에만 오면 된다고 현수는 생각했다. 실제로 평소보다 일찍 끝난 건 해정이었다. 이참에 어떻게 내가 있는 곳을 아는 거냐고 물어볼까. 잠시 생각했으나 금방 거두었다. 그것을 말한다면 지금 상태로는 불난 집에 부채질을 하는 꼴이었다. 생각을 정리한 현수가 이내 손을 들어 등을 살짝 쓰다듬었다.

 “미안해. 다음부터는 꼭 말할게.”

 “친구 만난다는 것도 내가 통화 안 들었으면 말 안 하려고 했죠.”

 쏘아보는 눈은 억울함을 가득 내포하고 있었다. 날을 세워 위협하듯 번뜩이고 있었으나 공격적이지는 않았다. 도리어 자학적이었다. 보는 이로 하여금 곧 있으면 무너지지 않을까, 불안하게 만든다. 

 “아니야. 말하려고 했어.”

 사실 그 약속을 기억도 하지 못했으나 구구절절 말하기도 모호했다. 현수의 말에도 해정의 눈은 위태로이 들썩이는 걸 멈추지 못했다. 

 “거짓말이잖아. 나 몰래 친구 만나려고 한 거지.”

 “아니…….”

 “친구인 것도 거짓말이야? 그래요?”

 폭주 기관차처럼 돌진하는 망상은 해정의 의도가 아니었다. 머리의 어느 한편에서는 정신병자처럼 굴지 말라고 스스로에게 아우성을 치고 있었으나 금방 물 아래로 잠겨 버렸다. 불안감이 제 살갗을 꿰어 이은 실로 꼭두각시처럼 저를 조종하고 있는 것 같았다. 해정이 부들거리며 입술을 깨물었다.

 “거짓말이라니. 아니야. 도와주기로 했는데, 내가 왜 거짓말을 해.”

 현수는 달래는 목소리를 냈다. 순간 확 조여 오는 팔에 숨을 삼킨다. 코가 맞닿을 정도로 얼굴이 가까워졌다. 해정이 작게 입을 열었다. 도톰하고 붉은 입술이 잘게 떨리고 있었다.

 “……안 믿겨.” 

 “…….”

 “형 말을 믿고 싶은데, 믿으려고 노력하고 있는데, 지금 진짜 안 믿겨요. 어떡하지.”

 낮고 공포감이 서린 목소리. 쿵쿵쿵쿵. 빠르고 크게 밟아 대는 박동은 제 것이 아니었다. 밀착한 해정의 가슴팍에서 느껴지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해정의 말은 진짜였다. 현수가 달래듯 해정의 볼을 매만지자, 금방 입술이 닿았다. 몸이 굳는 건 잠시였다. 현수가 입을 벌려 해정을 허락했다. 신발장 벽에 뒤통수가 닿았다. 해정의 다리 한쪽이 현수의 가랑이 사이를 비집었다. 

 입술이 떨어진 건 한참 후였다. 해정은 현수의 이마에 제 이마를 댔다. 내려 보는 눈이 아슬아슬하게 일렁였다.

 “형 여기 있잖아, 해정아.”

 “…….”

 두려움은 쉬이 가시지 않는다. 해정은 여전히 새벽에 악몽에서 깨어나 부모님을 찾아가는 아이처럼 절박한 눈을 했다. 현수가 턱을 밀어 그의 입술에 가벼이 키스했다. 따끔한 것으로 보아 기어이 입술이 터지고 만 모양이었다.

 “마트 간 거 말 안 해서 미안해. 네가 초콜릿 좋아한다는 거 갑자기 생각이 났어. 그래서 사러 가는 김에 이것저것 많이 사려고 마트 간 건데, 네가 학교가 일찍 끝날 줄은 몰랐어. 다음부터는 어딜 가도 꼭 말할게.”

 싸늘한 겨울에 마시는 핫초코같이 달콤하고 녹녹했다. 말을 할 때마다 살짝씩 닿는 입술이 간지러웠다. 현수가 해정의 팔을 쥐고 엄지로 문질렀다.

 거의 다 거짓말이었다. 살까 말까 고민했던 초코 과자를 산 게 다행이라고 현수는 생각했다.

 그 거짓말들을 들은 해정의 눈은 아까보다 훨씬 잠잠해졌다. 그러나 부족해 보였다. 그는 현수에게 결정적인 것을 원하고 있었다. ‘아, 결국.’ 현수가 씁쓸하게 웃었다. 

 “내일은 집에 있을게.”

 기어이 해정이 쓰러지는 모양으로 현수의 어깨에 제 이마를 묻었다. 길게 내쉬는 한숨은 겁먹은 포식자처럼 역설적이었다. 당장은 괜찮다, 하며 안심하는 한숨이기도 했고 더 심해질 제 불안을 걱정하는 한숨이기도 했다. 어떻게 해야 하지. 해정은 자문했으나 답은 까만 밤처럼 아득한 곳에 있는 것 같았다. 그는 현수를 안은 채로 한참을 서 있었다.

* * *

 날씨가 추워지면서 교실의 공기도 같이 얼어붙었다. 달이 바뀌니 수험의 압박이 더 심해진 것이었다. 서걱거리는 샤프 소리와 책장을 넘기는 소리만 간간이 들렸다.

 쉬는 시간을 알리는 종이 울렸다. 여름이 빳빳해진 뒷목을 주무르며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리고 의자 등받이를 잡고 기지개를 켜듯 허리를 비틀었다. 맨 뒷자리에는 해정이 있었다.

 해정의 책상 위에는 책이 놓여 있지 않았다. 대신 휴대 전화가 자리했다. 이미 대학에 합격했으니 남이 보기에 영 이상한 건 아니었다. 그러나 해정은 일찍이 대학에 합격한 뒤에도 정시를 준비하는 학생들과 다를 게 없었다. 자습 시간에는 공부를 했고, 독서실도 다녔다. 몇 주 전까지는 그랬다. 갑자기 다른 것에 취미가 붙어서 그런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었으나, 비단 그런 이유 탓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자꾸 여름을 들쑤셨다.

 여름은 휴대 전화를 만지는 손을 바라보다가 시선을 올렸다. 별안간 해정이 탁, 소리를 내며 책상 위에 휴대 전화를 내려놓았다. 신경질적인 손길이었다. 그리곤 턱을 괴어 창밖을 바라본다. 햇빛을 받으면 생기 있게 반짝거렸던 흰 피부가 푸르게 질려 있었다. 바싹 메마른 입술이 이에 짓눌려 희게 번졌다. 턱을 받치고 있는 손까지도 불안한 움직임으로 떨리고 있었다.

 행여나 눈이 마주칠까 재빨리 몸을 제자리로 돌린 여름이 조금 전 해정처럼 턱을 괴었다.

 “…….”

 해정은 분명 변화하고 있었다. 급격한 속도였으나 조용해서 눈에 띄지 않을 뿐이다. 매일같이 해정의 얼굴을 훔쳐보던 저가 그걸 모를 리 없었다. ‘어디, 무슨 나쁜 일에 휘말리고 있는 건가.’ 여름은 생각했다. 그때였다. 누군가가 여름의 어깨를 툭 쳤다.

 “강여름, 매점 갈래?”

 모의고사 채점을 막 마친 짝꿍이었다. 여름은 “아……. 어. 가자.” 대답하곤 다시 뒤를 돌아 의자에 걸어 둔 가방을 뒤적였다. 해정의 얼굴을 힐끔 스치듯 쳐다본다. 어느새 해정은 휴대 전화를 귀에 대고 있었다. 드르륵. 의자가 밀리는 소리가 났다. 벌떡 일어난 그가 뒷문을 향해 걸었다. 가방을 멘 채였다.

 “야, 뭐 해.”

 짝꿍이 다시 한 번 여름의 어깨를 쳤다. 해정의 뒷모습을 놀란 듯 바라보던 눈이 이동했다. “아, 아. 미안.” 여름이 고개를 숙여 다시 제 가방을 뒤적였다.

* * *

 “이야아. 이게 누구야.”

 정장 차림의 정호가 팔을 벌리며 너스레를 떨었다. 옆에는 경태도 있었다. 경태 또한 정장 차림이었다. 현수는 멋쩍게 웃으며 둘에게로 다가갔다. 정호가 들고 있던 쇼핑백을 내밀었다. 부산에서 챙긴 현수의 짐이었다. “아, 고마워.” 현수는 그것을 받아 든 뒤, 조심스러운 손길로 경태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이사는 잘했어?”

 “빨리도 물어본다. 잘했지. 너 못 온다 해서 최우석 불러서 했어. 야, 부대찌개 말고 순댓국.”

 뒷말은 정호를 향한 것이었다. 경태가 팔을 툭 치며 말하자 정호가 앞서 걷던 걸음을 서두르며 “오케이. 그럼 빨리 가자. 사람 금방 차.” 했다.

 현수는 고개를 숙여 경태의 얼굴을 살폈다. 건조하긴 했으나 평상시의 말투였고, 경태가 그런 일에 오래 꽁하고 있는 성격이 아닌 걸 잘 알았으나 괜스레 눈치가 보였다. 앞을 보고 걷던 경태가 흘긋 현수를 봤다.

 “왜 그래?”

 “아니, 그냥.”

 “그냥 뭐?”

 “……네가 마음 상했나 해서.”

 소심하게 중얼거리는 목소리에 일상 조였던 얼굴이 일순 일그러졌다. 현수가 당황할 새도 없이, 경태가 제 어깨 위로 붙은 팔을 쥐어 떼어 냈다.

 “야, 김현수. 너는…….”

 “야, 빨리 와! 대기 없어.”

 경태의 말을 자른 건 어느새 저 멀리에 서 있는 정호였다. 정호는 제 직후에 들어온 무리의 눈치를 보며 경태와 현수를 향해 손짓했다. 하나 남은 테이블을 뺏길까 봐 조급해하는 얼굴이었다. 경태가 입을 다물었다.

 자리에 앉고 얼마 지나지 않아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뚝배기 세 개가 테이블 위에 놓였다. 현수는 정호와 경태가 새우젓과 소금, 파, 들깨, 다지기를 기호대로 넣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뒤늦게 새우젓과 들깨를 넣었다. 조용히 숟가락으로 휘휘 국물을 젓다가 흘끔 제 건너편에 앉은 경태의 눈치를 살핀다.

 경태는 기분이 좋아 보이지 않았다. ‘뭐 때문에 기분이 나빠진 거지. 내가 뭘 실수한 거지.’ 현수는 되짚어 보았으나 도무지 이유를 종잡을 수가 없었다.

 “김현수, 그래서 그 새끼는 어떻게 됐냐? 요즘 네가 코빼기도 안 보이는 거랑 관련 있냐?”

 정호가 공깃밥을 퍼다 뚝배기 안에 넣으며 물었다. 순대 먼저 건져 올리던 현수가 “아, 뭐…….” 말을 흐렸다. 경태가 현수와 정호를 번갈아 보았다.

 “뭔데?”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냐고 묻는 것이었다. 현수는 잠자코 순대를 입에 넣었다. 정호는 현수의 반응을 본 뒤, “그게 말이야.” 하며 말꼬를 텄다.

 “김현수한테 스토커가 붙었거든. 남자.”

 “스토커?”

 “어. 김현수 방송 시청자였는데, 그 새끼가 부산까지 쫓아왔었어.”

 “……부산까지?”

 경태가 살며시 인상을 찌푸렸다. 정호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너랑 최우석은 꽐라 돼서 기억 못 해. 나 다음 날 입 터졌었잖아. 그거 걔 때문이야. 그 새끼가 횟집 앞에서 내 얼굴 쳤다니까.”

 “……너 원래 취하면 여기저기 부딪히고 다니잖아. 김현수, 얘 말 진짜야?”

 말로만 들어도 충격적인 상황이 믿기지 않는지, 경태가 옆으로 턱짓을 하며 현수에게 물었다. 현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입이 가벼운 정호가 아는 일이었다. 다른 친구들에게 숨길 생각은 진즉에 포기하고 있었다.

 정호가 제게 집중하라는 듯 경태의 팔을 툭툭 쳤다.

 “근데, 다음 날 김현수가 그 새끼랑 같이 서울 올라갔다는 게 더 충격.”

 “일 있어서 먼저 간 거 아니고?”

 그 당시에 그렇게 둘러대었던 듯했다. “당사자 없는 데서 함부로 뭐라 하면 안 될 것 같아서 그렇게 말했지.” 그때에 입을 닫고 있었던 게 뿌듯한 건지 정호는 어깨를 들먹이며 밥을 한 술 떠먹었다. 경태가 눈을 들어 현수를 보았다.

 “경찰에 신고는 했어?”

 “어?”

 “신고해야지. 스토커라며.”

 “아…….” 

 현수가 제 뒷머리를 긁으며 곤란한 웃음을 지었다.

 “……안 했어.”

 “안 했다고?”

 경태가 인상을 찌푸리며 안경을 추켜올렸다.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이었다. 현수가 급히 살을 붙였다.

 “아, 얘가 미성년자고……. 증거도, 뭐 따지고 보면 없고……. 무엇보다 좀 불쌍해. 어릴 때 힘들었는데, 내 방송이 힘이 됐나 봐. 나한테 의지를 많이 해. 그게 눈에 밟혀서 내치지를 못하겠더라.”

 자신의 성격을 알면 납득할 만하다고 현수는 생각했다. 허나 그의 예상과는 달리, 경태는 더욱 의문스러운 빛을 비치며 고개를 기울였다.

 “부산까지 따라오고 사람까지 칠 정도인 애를? 되게 위험해 보이는데. 그 정도면 부모님한테 알려야지. 그럼 부모가 알아서 하겠지. 애를 정신병원에 집어넣든, 집에서 훈육을 하든.”

 “에이, 그랬겠지.”

 정호가 별걸 다 걱정한다는 듯 픽 웃었다. 정호도 경태의 말처럼 그가 마땅히 그리했을 거라 짐작하고 있던 모양이었다. 현수가 입을 일그러뜨리며 어색하게 웃었다.

 “아……. 그렇지.”

 불현듯 벨소리가 울렸다. 정호가 주머니에서 휴대 전화를 꺼냈다. 주의가 분산되었다. 액정을 확인한 정호가 “이 씨발, 주 과장 새끼……. 야, 잠깐만.” 하며 일어섰다. 뒤를 돌아 문으로 걸어간다. 입을 가리며 “예. 주 과장님.” 하는 뒷모습을 보던 현수가 이내 저를 빤히 보는 시선에 고개를 돌렸다. 경태였다. 

 “너……. 걔 부모님한테 말 안 했어?”

 현수가 왜 그러느냐고 물을 새도 없이 경태가 물었다. 원래 눈치가 빠르고, 날카로울 정도로 예리한 경태였다. 눈치를 못 챘을 거라 생각하지 않았다. 현수는 대답하지 않고 순댓국을 한 술 떠먹었다.

 “말 안 하고 뭐 해. 네가 걔 데리고 뭐 하는데? 들어 보면 완전 정신병자라 네가 뭘 어떡할 수준이 아닌데.” 

 입 안에서 부서지는 밥알이 딱딱하게 느껴졌다. 현수가 국물을 한 번 떠먹으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 애매하게 웃는 표정을 한 채였다. 답이 없는 현수가 답답한지, 기어이 경태가 미간을 구겼다. 

 “야. 김현…….”

 “그게, 좀 그래.”

 상냥한 얼굴은 그대로였으나 가로채는 말은 날카로웠다. 경태가 입을 다물고 잠자코 현수를 바라보았다.

 모두가 아는 그답지 않게, 서늘하게 굳은 눈이었다. 당장이라도 뭔가를 뺏길 것처럼 고집스러움을 한껏 드러내고 있었다. 그 눈을 직면하면서도, 경태는 놀라지 않는 눈치였다.

 그 표정도 잠시였다. 현수가 제 입가를 가리고 슥, 한 차례 매만졌다. 표정이 숨어든다. 손이 떨어졌을 때는 아까처럼 어색하게 웃고 있는 입이 있었다.

 “……미안. 화내려고 한 건 아닌데.”

 “…….”

 사실 화낸 거라 하기에도 민망할 정도였으나 현수는 머뭇거리며 사과했다. 경태는 대수롭지 않다는 얼굴로 물을 한 모금 마셨다.

 “……그게, 부모님에게 알린다고 해서 뭐가 달라질 것 같지도 않고……. 그냥. 그냥……. 내 선에서 감당할 수 있다면, 그렇게 하고 싶어.”

 현수의 변명에도 냉기는 가시지 않았다. 도리어 더 차갑게 얼었다. 이내 컵을 내려놓은 경태가 서서히 눈을 들어 현수를 보았다. 어쭙잖다는 표정이었다.

 “너는 진짜 이기적인 새끼야.”

 “…….”

 늘 그렇게 생각해 왔다는 듯, 감정 하나 깃들지 않은 목소리였다. 현수가 손가락을 움찔 떨었다.

 “이사하던 날에 짜장면 먹는데 갑자기 최우석이 그러더라? 고등학교 때 내가 너 공개적으로 쪽 줘서 네가 나 지금까지 어려워하는 거라고. 너 유난히 멘탈 약한 놈인 거 알면 친절하게 좀 대해 주라고.”

 “…….”

 고등학교 시절, 급식실에서의 일이 현수의 머리를 스쳤다.

 경태가 누구와도 친하지 않고, 왕따를 당했을 때였다. 경태를 유독 괴롭히던 놈이 경태의 머리 위로 식판을 뒤집었고, 경태의 머리에 미지근한 수프와 반찬들이 쏟아졌다. 주변이 웅성거렸으나 누구 하나 경태에게 다가가지 않았다. 경태는 독기가 서린 눈으로 낄낄거리며 급식실을 빠져나가는 놈을 쳐다볼 뿐, 달려들지는 않았다. 그때 경태에게 다가간 건 현수였다. 경태를 둘러싸고 있던 시선들이 이동했다. 현수가 주저앉은 경태를 향해 손을 뻗었다. 

 「……너 나 지금 동정하냐?」

 경태가 한 말이었다. 급기야 피식피식 작은 웃음소리가 곳곳에서 터졌다. 하지만 괘념치 않는다는 듯 안경 너머의 눈은 차갑고 날카롭게 현수의 속내를 꿰뚫고 있었다.

 경태는 손으로 바닥을 짚으며 일어섰다. 

 「그러면 필요 없어. 씨발.」

 기어이 터진 웃음소리들이 급식실을 어지러이 돌았다. ‘존나 쟤네 드라마 찍냐?’ 누군가가 키득거렸다. 경태가 현수를 지나쳤다. 어깨가 부딪쳤다. 경태가 급식실을 빠져나가자 비웃음은 대놓고 왕따에게 무시를 당한 현수로 향했다.

 그 비웃음들은, 현수에게 별로 상처가 되지 않았다.

 “네가 멘탈이 약하다고? 진짜 웃기는 소리 아니냐.”

 회상에 잠겼던 현수를 끌어온 건 그 비웃음들과는 전혀 다른 형태의 비웃음이었다. 경태는 고개를 절레절레 내젓다가 얼굴을 굳혔다. 이윽고 경태의 눈이 현수에게 직설적으로 와 닿았다.

 “왜 그런 강박이 있는지는 모르겠는데, 남 나쁜 놈 만들면서까지 착한 척하지 마. 새끼야. 애초에 내 일인데, 그깟 이사 안 도와줬다고 내가 마음 상했겠냐? 내가 여태껏 그런 걸로 뭐라 한 적 있어? 왜 지레 그런 말을 하는 건데, 기분 더럽게. 그게 진짜 날 위해서냐? 아니면 그냥 네가 편해지기 위해서냐? 너는 네 스스로가 착한 놈이 아니면 불편해 죽으려고 하잖아. 아니야?”

 경태의 말들은 알 수 없는 문자가 되어 현수의 귀에 마구잡이로 꽂혔다. 현수는 눈을 깜빡였다. 어떻게 반응을 해야 할지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 탁. 경태가 순댓국을 이리저리 휘젓던 수저를 내려놓았다. 

 “또 하나 묻자.”

 “…….”

 “네가 부모님한테도 알리지 않고 혼자 감당하겠다는 그 미성년자에 스토커라는 놈. 네가 받아 주니까 잠잠해지든? 좀, 나아지는 것 같아?”

 “…….”

 “그냥 네가 그러고 싶어서 그러는 건 아니고?”

 고드름이 박히는 것처럼 가슴이 따끔거린다. 급식실에서처럼 차갑고 날카로운 눈. 답을 안다는 듯한 어조. 불 보듯 뻔하다는 목소리. 기어이 경태의 냉기가 옮았다. 손가락 끝부터 얼어붙는 감각에 꾹, 현수가 주먹을 쥐었다.

* * *

 차를 가지고 나올걸. 현수는 집에 가는 내내 후회했다. 속이 메스꺼웠다. 명치 위가 딱딱한 무엇인가에 막힌 느낌이었다. 힘을 주어 명치를 꾹꾹 누르던 현수가 살짝 창문을 열었다. 시원한 바람이 좁은 틈 사이로 들어왔다. 후욱, 후욱. 의식적으로 숨을 들이쉬었다가 내쉬어도 도무지 나아지지가 않았다. 현수는 창문틀에 머리를 기대고 눈을 감았다.

 다시 눈을 뜬 건 내려야 할 정류장에 사람들이 내리고 있을 때였다. 상황을 파악한 즉시 일어나니 머리가 핑 돌았다. 현수는 눈을 부릅뜨고 휴대 전화를 단말기에 댔다. 도망 나오듯 버스 밖으로 빠져나온 현수가 핑 도는 시야에 더듬거리며 이마를 짚었다. 머리까지 어지러운 걸 보면 단단히 체한 것 같았다. 

 돌연 팔이 잡혔다. 현수의 몸이 힘없이 돌아갔다. 잡아 돌린 건 해정이었다. 어디서 뛰어온 건지 숨이 거칠었고, 앞머리는 엉망이었다. 곧바로 현수의 코트 주머니 안을 쑤시는 손은 거침이 없었다. 

 “전화를 씨발, 어디다가 두고 다니길래.”

 해정은 바득바득 이를 갈며 말했다. 눈에 핏발이 서 있었다. 그리고, 주머니 안을 휘젓던 해정의 손에 휴대 전화가 닿는 순간이었다. 현수가 해정의 팔을 붙잡듯 꾹 쥐었다. 상체가 훅 무너진다. 별안간 해정의 얼굴에 혈기가 가시고 당황이 서렸다.

 해정이 현수의 어깨를 잡고 고개를 깊이 숙여 그의 얼굴을 살폈다. 피가 통하지 않는 것처럼 창백하다.

 “왜 이래. 형, 어디 아파?”

 “잠깐, 미안, 해정아, 나, 토할 것 같…….”

 우욱. 현수가 떠듬떠듬 말을 하다 말고 제 입을 틀어막았다. 고기 비린내가 역할 정도로 코를 들쑤신다. 마른 몸이 한 번 들썩였다. 구역질을 참아 내는 것이었다. 해정의 시선이 급하게 현수를 이리저리 살폈다.

 “토? 토할 것 같아? 토할래요?”

 금방 토할 것 같았는지, 해정이 반사적으로 제 손을 들어 현수의 턱 아래를 받쳤다. 현수가 고개를 살짝 내저었다. 그 순간 땅이 푹 꺼지는 환상이 일었다. 현기증이었다. 토역을 참느라 숨을 참으니 답답했다. 현수가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다시 한 번 휘청거리는 몸을 잡은 해정이 이내 현수 앞에 무릎을 접어 앉았다. 그리고 팔을 뒤로 뻗어 다리를 잡아 끌어당기며 “업혀요.” 했다. 현수가 힘을 놓은 사람처럼 해정의 손길대로 등 위에 쓰러졌다. 망설일 정신이 없었다.

 “빨리 갈게요. 많이 힘들어요?”

 다리를 감싼 손이 더듬더듬 달래듯 허벅지를 매만졌다. 보폭을 넓게 하고 걷는 탓에 현수의 몸이 들썩들썩 흔들렸다. 현수가 해정의 어깨에 제 입을 꾹 짓누르고 눈을 감았다.

* * *

 덜커덩. 쇠가 부딪히는 소리가 들린다. 현수가 본능적으로 몸을 물린 순간, 어두웠던 주변에 빛이 들어섰다. 자신이 서 있는 곳은 시골집 마당이었다. 철창이 바로 앞에 있었고, 그 안에는 개들이 빼곡할 정도로 많이 모여 있었다. 눈높이가 낯설 만치 낮다.

 아, 그 꿈이다. 현수의 머리에 그런 생각이 스침과 동시에 개들의 고개가 돌아갔다. 일제히 현수를 향한 눈들은 짐승의 것이 아니었다. 기시감이 느껴졌다. 허나 그 기시감보다 더 이상한 게 있었다. 

 왜 짖지 않는 거지.

 현수는 의문을 품는다. 별안간 철창이 고로 안에 들어간 것처럼 녹아내렸다. 이상하게도 고소한 냄새가 났다. 현수와 개들 사이를 가로막던 쇠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도망쳐야 한다고 머리는 생각하고 있었는데, 다리가 움직이질 않았다. 가장 가까이 있던 누렁이가 현수에게로 다가왔다. 이상할 정도로 잠잠한 태도다. 개들은 계속 현수를 주시하고 있다.

 할짝. 개의 혀가 건조한 손을 핥았다. 손바닥이 뜨끈한 물에 담긴 것처럼 지르르 간지러웠다.

 형, 일어나 봐요.

 개가 말을 한다. 익숙한 목소리다. 눈을 뜨고 있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던지 갑자기 눈이 무겁게 느껴졌다. 현수가 눈꺼풀에 힘을 주어 시야를 밝혔다. 형광등 빛이 망막을 문질렀다.

 제 옆에 앉아 있는 건 해정이었고, 손을 잡고 있는 건 개의 혀가 아닌 해정의 손이었다. 고소한 냄새는 여전히 느껴졌다. 죽 냄샌가. 가벼이 짐작한 현수가 흘긋 천장을 보았다. 제 자취방이었다.

 현수가 눈을 깜빡이며 상황 파악을 한 뒤, 눈을 돌려 해정을 보았다. 눈이 마주치자마자 긴장한 듯 얼어 있던 얼굴이 사르르 녹아 기어이 물기를 머금었다. 상체를 숙여 배에 얼굴을 파묻는다. 

 “좀 괜찮아요?”

 “…….”

 어찌나 깊게 잤던지, 또 조금 시간을 보내고 나서야 의식 아래 파묻혀 있던 상황들이 떠올랐다.

 해정의 등에 업혀 자취방에 들어오고, 해정이 꺼내 준 소화제를 마시고, 머리는 아픈데 속은 메스꺼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침대에 앉고, 결국 피로감이 몰려와 벽에 등을 기댄 채 눈을 감았던 것까지. 꼭 먼 과거 같지만 저가 잠들기 전의 상황들이었다. 

 이윽고 현수가 해정의 머리 위에 제 손을 얹었다. 그리고 슥슥, 매만졌다. 해정이 어리광을 부리는 것처럼 배에 얼굴을 비비적댔다. “나 너무 놀랐어요…….” 웅얼대는 목소리로 어리광을 부린다.

 “나 얼마나 잤어?”

 “두 시간 정도요. 왜 그랬어요. 먹은 거 체한 거예요? 지금은 어때요.”

 “응. 먹은 게 체했나 봐. 미안해. 지금은 괜찮아.”

 그 말에 해정이 느리게 상체를 일으켜 현수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미안하기는…….” 그렇게 말하면 섭섭하다는 얼굴을 한 채 뺨을 매만진다. 애달플 정도로 집요한 시선이 샅샅이 현수를 훑었다. 현수는 붙잡힌 것처럼 해정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똑, 딱, 똑, 딱, 시계 침 소리가 방 안에 흘렀다.

 “연락이 안 돼서……. 너무 불안하고, 화나서 찾아온 건데. 내가 화낼 새도 없이 아파 버리면 어떡해요.”

 “…….”

 손이 슬금슬금 내려오더니 이내 목줄기를 슥 훑어 내렸다. 현수가 침을 삼켰다. 해정의 시선이 잠깐 울대뼈에 머물다 떨어졌다. 다시 눈이 마주했다.

 “……놀랐잖아요.”

 “…….”

 해정의 눈은 진창이었다. ‘언제부터 이런 눈을 했지.’ 가벼운 의문이 몇 시간 전 경태의 물음을 상기시켰다.

 네가 부모님한테도 알리지 않고 혼자 감당하겠다는 그 미성년자에 스토커라는 놈. 네가 받아 주니까 잠잠해지든? 좀, 나아지는 것 같아?

 그 물음과 지금 저가 마주한 해정은 서늘할 정도의 괴리가 있었다. 전혀.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나아지기는커녕, 오히려…….

 기어이 현수가 도망치듯 해정의 시선을 피했다. 갈수록 위태로워지는 그 눈을 보기가 무서운 탓이었다. 그러나 그 회피를 어떻게 받아들인 것인지, 협박하는 것처럼 목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꾹, 목덜미를 압박하는 힘이 위험하다고 느껴질 찰나에 해정이 손을 떼었다. 그리고 다시 안기듯 현수의 품에 제 얼굴을 파묻었다. 팔을 들어 상체를 껴안는다.

 “난 이제 형이 누구를 만나는 것조차 못 참겠어.” 

 “…….”

 “……그래도 참았잖아. 나 참았어. 참았다고. 근데 연락을 안 받으면 어떡해. 연락마저 안 받으면 어떡해. 너무 무서운데, 괴물이. 불안한 게…….”

 해정은 제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는 것 같았다. 끊임없이 중얼거리는 목소리는 정처 없이 둘 사이를 맴돌았다.

 “나 진짜 죽어……. 나 너무 힘들어요.”

 마지막 말은 한숨이 그득 섞여 있었다. 여간 불안한 게 아니었는지, 등을 매만지는 손은 마구잡이로 현수의 온기를 찾았다. 현수가 조심스레 팔을 들어 해정의 머리를 안았다. 불안정한 호흡이 옷 위로 느껴졌다. “알았어. 연락 받을게. 미안해.” 그렇게 말하자, 벌처럼 명치가 다시 콱 틀어 막히는 듯한 갑갑함이 느껴졌다. 현수는 눈을 감았다. 모든 것을 간과하고 싶었다.

* * *

 열두 시가 넘어가는 시간이었다. 마무리 멘트를 마친 현수가 방송을 껐다. 뒤에서 기척이 느껴진다. 곧바로 의자가 돌아갔다. 뒤에 있던 건 해정이었다. 씻고 나온 건지 머리가 젖어 있었다. 길게 축 처진 앞머리 끝에 물방울이 방울방울 맺혀 있다. 감기 걸리겠네. 현수는 생각하며 입을 열었다.

 “씻어도 안 재워 줘.”

 해정은 대답 없이 허리를 숙였다. 습관적으로 목덜미에 파고들려는 얼굴을 잡아 낸 건 현수였다. 현수는 두 손으로 볼을 쥐어 얼굴을 떼어 냈다. 욕실의 습기를 담뿍 머금은 살이 촉촉했다. 해정이 의문을 담은 눈으로 현수를 보았다.

 “왜요?”

 “로션 발라야지.”

 “안 발라도 돼요.”

 해정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하며 다시 얼굴을 숙였다. 하지만 현수의 손은 단호했다. 해정의 얼굴을 쥐어 밀어낸 현수가 빠져나가듯 의자에서 일어나 바로 앞 침대에 걸터앉았다. 그를 시선으로 좇던 해정이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현수의 앞, 바닥에 앉았다.

 현수는 슥슥, 젖은 앞머리를 옆으로 쓸어 넘겼다. 그리고 침대 옆 협탁에 놓인 실핀을 집어 머리에 꽂았다. 다시 협탁으로 손을 뻗는다. 쥔 건 스킨이었다. 이윽고 울컥, 투명한 액체가 그의 손바닥 위로 흘러나왔다. 현수는 손바닥을 맞대 비빈 뒤 해정의 양 뺨을 두드렸다. 찹찹, 젖은 마찰음이 났다. 이내 마무리를 하듯 턱과 이마를 매만져 바르자 해정이 살짝 눈을 감았다가 떴다. 기어이 현수가 픽 웃었다. 깻잎 머리를 한 채로 순순히 제 다리 사이에 앉아 저를 올려 보기만 하는 해정이 귀엽게 느껴진 탓이었다.

 현수의 손바닥이 떨어지자, 다 끝난 줄 알았는지 해정이 손을 들어 앞머리에 꽂힌 핀을 빼내려 했다. 현수가 해정의 손을 잡아 떨어뜨리며 “아직 안 끝났어. 로션 발라야지.” 했다. 해정이 살짝 한숨을 쉬었다. 귀찮음이 그득했다.

 “방금 발랐잖아요.”

 “그건 스킨.”

 “또 안 발라도 되는데…….”

 현수는 해정의 중얼거림을 가볍게 넘기며 로션을 손바닥에 툭툭 덜었다. “그런 거 찝찝한데…….” 해정이 또 한 번 중얼거렸다. 스킨은 그나마 물 같아 견딜 수 있었는데, 끈적끈적한 점액질은 싫은 모양이다. 해정의 양 뺨, 코끝, 이마, 아래턱에 로션을 나누어 올리던 현수가 결국 소리 내어 웃었다.

 ‘나한테는 애 같은데.’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해정을 처음 실물로 봤을 때부터 지금까지 해정은 자신에게 이랬다. 불안정하고, 감정이 날뛰었고, 참을성이 없었으며, 솔직했다.

 현수는 오늘 방송을 하던 중에, ‘노네임님 요즘 왜 이렇게 안 보이지.’ 하고 지나가듯 말하던 녀석을 떠올렸다. 알기로는 해정과 나이가 같았다. 그 녀석은 시청자 게임을 하는 내내 저와 동갑이면서도 실력이 월등한 해정과 친해지고 싶어 했다. 애초에 충성심이 높은 소수의 애청자들이 모인 현수의 방송 특성상, 알게 모르게 애청자들끼리 친목을 다지는 분위기이기는 했다. 현수는 모르는 척하고 있지만, 사실 해정과 동갑인 녀석들끼리는 다 친하게 지내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 무리 중 제외된 건 해정뿐이다. 

 뺨부터 살살 로션을 펴 바르기 시작하자 느낌이 어색한지 해정이 슬쩍 턱을 내렸다. 현수의 손가락이 가벼운 힘으로 다시 턱을 올렸다. 눈이 마주했다.

 “오늘 퓨마가 너 찾던데. 너 요즘 안 보인다고.”

 “퓨마가 뭔데요?”

 꽤 많은 게임을 같이 했음에도 불구하고 해정은 정말 모르는 듯 눈을 깜빡였다. 현수가 톡톡 로션을 흡수시키며 “왜, 너랑 동갑인 애 있잖아. 닉네임인데……. 내 방송 애청자. 시청자 참여 게임에서 너랑 팀도 자주 했는데.” 하고 덧붙였으나, 해정은 여전한 표정이었다. 

 이랬다. 현수는 실핀을 빼고 앞머리를 정돈시켜 주며 또 한 번 실감했다. 제 나이 같고, 솔직한, 꼭 살아 있는 것 같은 해정의 모습은 오직 제게만 한정되어 있다. 그에 비해 다른 사람을 대하는 그는 꼭 영혼이 빠져나간 것처럼 보였다. 무심하다는 표현이 모자랄 정도다.

 “몰라요, 관심 없어요.”

 “…….”

 “형도 관심 꺼요.”

 그렇게 말하는 목소리는 사막처럼 건조했다. 현수가 다른 사람을 화제로 꺼낸 것이 영 싫은 것인지 천연했던 눈빛도 금세 가라앉았다.

 로션을 바른 얼굴에서 광채가 돌았다. “예쁘네.” 현수가 분위기를 환기하듯 그리 말하며 볼을 톡톡 건드렸다. 손목이 잡힌다. 해정이 일어나면서 현수의 어깨를 밀어 눕혔다. 촉촉, 얼굴 곳곳에 키스가 쏟아졌다. 그제야 해정의 눈빛이 생명력으로 들뜨기 시작했다. 눈가에 닿는 입술을 받아내는 현수는 무언가 고민에 빠진 얼굴을 하고 있었다. 

 “……왜요.”

 이상을 빠르게 눈치챈 해정이 얼굴을 가까이 둔 채로 물었다. 그늘진 얼굴은 필사적이고, 또 맹목적이었다.

 이 모습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자신은 해정에게 불안해하지 않도록 도와주겠다 했지만, 결론적으로는 그리되지 않았다. 해정은 나날이 불안증이 심해지고 있고, 저는 그런 해정을 받아 주기만 하고 있다. 

 “…….”

 이기적인 일이다. 끝내 현수는 인정했다. 경태의 지적이 맞다. 그저 자신은 개에 대한 죄책감을 지우기 위해 해정을 이용하고 있는 거였다.

 저밖에 없는 해정의 세상에 스스로 들어가 해정을 감싸고돌지 말아야 했다. 그의 세상을 넓혀 주어야 했다. 그게 그를 도와주는 일이다.

 “무슨 생각 해.”

 그 순간, 급속도로 낮아진 목소리가 현수에게 모서리를 겨누었다. 상념의 공간에서 허덕이던 현수의 눈이 깨어났다. 금방 답하지 않으면 어떻게 할 것처럼 위협하면서도, 축축한 눈은 여린 불안감이 일렁이기 시작한다.

 이윽고 현수가 손을 들어 젖은 머리를 살금살금 매만졌다.

 “……너 집에 언제 가나. 하는 생각.”

 대수롭지 않다는 듯한 장난조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이제야 해정을 위한 일이 무엇인지 깨달았지만, 현수는 섣불리 누설하면 안 된다는 걸 알았다. 자신에게 해정을 대하는 건 얇고 긴 유리 위를 깨지지 않게 자근자근 걸어 나가는 것처럼 위태로운 일이었다. 이 아이는, 세심하고 조심히 다루어야 한다.

 해정의 눈이 또 한 번 제 속내를 파고들려는 찰나, 현수가 그의 어깨를 밀면서 몸을 일으켰다. 

 “너 이제 집 가야지.”

 “자고 갈래요.”

 “머리 말리고 갈래? 감기 걸릴 수도 있겠다.”

 현수는 돌려 말하며 침대에서 일어섰다.

 ‘미성년자와 키스하는 주제에.’라는 생각이 자조적으로 들곤 했으나, 어쨌든 이건 제가 정한 마지노선이었다. 그리고 해정은 그게 퍽 마음에 들지 않는지 이따금씩 들쑤시듯 현수에게 자고 가겠다고 요구했다. 하지만 현수는 단호했고, 해정은 불만스러운 빛을 내비치면서도 결국 물러섰다. 점점 그 불만스러운 빛이 신경질적으로 커져 가고 있었으나 아직까지는 그랬다.

 해정이 물끄러미 현수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곧 저도 침대에서 일어났다. 현수는 의자에 걸쳐져 있던 외투를 입으며 차 키를 챙겼다. 그리고 어떻게 할 거냐는 듯 해정을 올려 본다. 금세 앞으로 다가온 해정이 현수의 손에서 차 키를 빼 다시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됐어요. 택시 타고 갈래요.”

 “그럼 앞까지 데려다줄게.”

 해정이 저 보라는 듯 딱딱하게 굴고 있었으나, 현수는 짐짓 모르는 척하며 빠르게 현관을 향해 걸었다.

* * *

 지익. 지익. 박스 테이프가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이어 가윗날이 길게 늘어진 테이프의 끝자락을 잘라 냈다. 테이프를 붙인 곳에 동그랗고 자그마한 기포가 몇 개 생겨났다. 해정은 다시 한 번 그 위에 테이프를 길게 늘여 덧붙였다. 꾹꾹, 붙인 곳을 손바닥으로 누른 해정이 뒤로 물러나 제 방문을 바라보았다. 직사각형의 문틈을 따라 황갈색 테이프가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요즘 자기 전에 하는 일이었다. 옛날에, 괴물을 보기 시작했던 그날부터 문을 잠그고 자는 건 일상이 되었으나 이제는 그 정도로 불안증이 쉬이 사라지지 않았다. 

 꼼꼼히 붙였나 확인을 다 한 뒤에야 침대에 누울 수 있다. 해정이 느린 몸짓으로 침대에 누운 뒤, 이어폰을 귀에 꽂았다. 음악 앱을 켠다. 음악 앱에는 파일이 하나뿐이었다. 해정이 삼각형 모양의 재생 버튼을 눌렀다.

 현수의 목소리가 이어폰을 통해 흘러나오기 시작하자, 해정이 길게 숨을 내쉬었다.

 재생되는 건 해정이 직접 동영상에서 추출해 편집한 음성 파일이었다. 미숙한 실력으로 공백 없이 음성만 나오도록 숭덩숭덩 자르고 붙인 터라 부자연스러운 부분이 대부분이다. 파일은 말이 뚝뚝 끊겼다가, 갑자기 다른 톤의 목소리가 툭 튀어나왔다가, 또 숨소리만 들렸다가를 들쑥날쑥한 볼륨으로 반복했다. 남들이 듣는다면 괴이쩍다고 느낄 수도 있었으나, 해정에게는 신도가 듣는 찬송가처럼 편안했다.

 잠시간 현수의 목소리를 감상하던 해정이 이내 휴대 전화를 위로 들어 잠금을 풀었다. 그리고 시간을 보았다. 아까 저를 택시에 태워 보낼 때, 현수는 제게 한 시에 전화를 하겠다고 말했다. 아직 오 분 정도의 여유가 있음을 확인한 해정이 인터넷을 켰다.

 현수가 제게 스킨과 로션을 발라 주었을 때, 티 내지는 않았지만 해정은 흥분했다. 인형 놀이를 하는 것처럼 곱게 머리를 빗어 핀을 꽂아 줄 때까지는 별생각이 없었다. 그저 나긋한 손길이 기분 좋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러나 현수가 제게 스킨과 로션을 토닥거리며 살에 발라 주었을 때, 불현듯 현수의 냄새를 맡았다. 자각한 적 없던, 그러나 너무나도 익숙한 향이었다. 묵직하면서도 깨끗한 향. 그 향이 제 살에 치덕치덕 발렸고 스며들었다. 그게 해정은 묘했다. 급기야 손목을 쥐어 그 향이 가득 묻은 손바닥을 핥아 내고 싶은 충동이 날뛰었으나, 기어이 참아 냈다. 현수의 손길을 더 느끼고 싶었던 탓이다.

 곧이어 기억해 둔 화장품 브랜드의 홈페이지가 휴대 전화 액정 위로 떴다. 해정은 망설임 없이 똑같은 제품을 다섯 세트로 주문한 뒤, 제 볼을 살살 매만졌다. 축축하기도 하고, 귀찮기도 해서 산다고 해도 꼬박꼬박 바를 것 같지는 않지만 방 곳곳에 어디든 향수처럼 뿌려 두면 좋을 것 같았다. 아니면, 가지고 다니면서 향을 맡는 것도 좋을 것 같고. 해정이 흩날리는 꽃잎처럼 미미하게 웃었다.

 그때, 현수의 목소리가 끊겼다. 뒤이어 벨소리가 울렸다. 해정이 수신 버튼을 눌렀다. 

 “네.”

 「응. 집 도착했지?」

 “네. 형은요?”

 저를 보내는 얼굴이 퍽 피곤해 보였다. 게다가 열두 시가 넘은 시각에 느닷없이 어딜 나갈 리가 없다는 걸 상식적으로 알았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이 더 컸다. 해정의 물음에 현수 또한 어이없다는 듯 푸스스 웃는 소리를 내며 「집이지, 당연히.」 했다. 웃을 때 길게 늘어지는 입꼬리가 눈앞에 어른거린다. ‘보고 싶어.’ 숨 쉬듯 당연한 충동에 해정이 손등으로 제 눈 위를 덮었다.

 “형.”

 「응.」

 “아까 나 보면서 무슨 생각 했어요?”

 계속 생각하고 있던 것이었다. 작게 읊조리는 목소리는 집요했다. 현수가 장난식으로 넘어가려 하기에 당장은 넘어가자 한 것뿐이지, 속지는 않았다. 해정에게는 얕디얕은 속임이다.

 현수가 잠시 침묵했다. 대체 무슨 생각을 했기에 망설이는데. 해정은 울컥울컥 치솟는 조급을 참았다. 현수가 다시 입을 연 건 잠시 뒤였다.

 「해정아.」

 “네.”

 「내일 주말이잖아.」

 주말이라서, 뭐? 나 안 만나겠다고?……. 이걸 말하느라 그렇게 생각에 잠겼었나 싶어, 마음이 눈을 치켜뜨고 날을 세웠다. 오늘 몸이 안 좋지 않았느냐고, 걱정된다고, 그러니까 집에서 쉬라고 말할까. 제 욕심에 조금이라도 설득력을 심기 위해 해정이 말을 고르고 있던 순간이었다.

 「어디 놀러 갈까? 가고 싶은 데 있어?」

 보드라운 목소리가 미지근한 물을 끼얹었다. 잠시 후, 눈 위를 덮은 손이 치워졌다. 드러난 건 놀란 듯 커진 눈이었다. 

 둘의 만남은, 늘 일방적이었다. 부산에서 올라온 뒤 만나는 건 일상이 되었으나 늘 찾아오는 건 해정이었고 현수가 하는 일은 그를 받아 주는 것뿐이었다. 그러니까, 현수가 먼저 이런 식으로 말을 꺼낸 건 처음이다.

 해정의 사고가 정지했다. 세웠던 날도 몽글한 모양으로 녹아 흐르기 시작했다. 해정이 답을 하지 않자, 현수가 한 번 더 말했다.

 「우리 데이트하자고.」

 다정하고도 뜨끈한 목소리는 해정의 예민한 시야를 어둑하게 가리기에 충분했다.

 해정이 침을 삼켰다. 풍선처럼 부풀지만, 보슬보슬한 털을 가진 알 수 없는 형체가 가슴에 몽글몽글 피기 시작했다.

* * *

 현수가 초조한 얼굴로 제 앞머리를 쓸어 올렸다. 앞차와의 간격이 넓어졌다. 조금 나아갔다가, 얼마 가지도 못하고 다시 브레이크를 밟는다. 이 상태로 20분이 넘어가고 있었다. 주말의 백화점은 처음이어서 이럴 줄 예상하지 못했던 게 실수였다. ‘차를 끌고 나오지 말걸.’ 현수는 핸들을 손가락으로 두드리다가 휴대 전화를 확인했다. 아직 약속 시간이 된 건 아니었지만, 벌써부터 해정이 저를 기다리고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조급해졌다.

 겨우 주차를 했을 때는 그로부터 조금 뒤였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현수가 대로변과 가까운 출입구를 향해 걸었다. 휴대 전화를 꺼내 시간을 확인하니 정각이었다. ‘전화해 봐야겠다.’ 그리 생각할 때였다. 이중문 사이 공간에 누군가가 우두커니 서 있는 게 눈에 띄었다. 현수는 휴대 전화를 주머니에 넣으며 문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누군가는 해정이 맞았다. 해정은 제 옆으로 사람들이 정신없이 지나가고 있는데도 어디에 시선 하나 주지 않고 살짝 벽에 기댄 채로 휴대 전화만 들여다보고 있었다. ‘휴대 전화로 뭘 그리 열심히 하고 있지.’ 현수가 의문을 품음과 동시에, 금방 주머니에 넣었던 휴대 전화가 울렸다. 현수가 울려오는 벨소리를 무시하고 문을 열었다. 살짝 다가가자 해정의 얼굴이 들렸다. 벨소리가 뚝 끊겼다. 마주 본 눈에 생기가 살아난다.

 “추운데 왜 여기서 기다려. 안에서 기다리지.”

 문 사이라고는 해도, 바깥의 공기가 쉴 새 없이 들어와 추웠다. 현수는 걱정을 섞어 나무라는 목소리를 냈다. 해정이 미미하게 웃으며 현수의 손을 잡았다. 소스라치게 찬 감각에 현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제 보니 귀 끝과 양 볼도 벌겋게 얼어 있었다.

 “너 여기서 얼마나 기다렸어?”

 “그냥……. 일어나서 씻고 옷 입고 바로 나왔어요.”

 현수의 손을 잡은 해정이 어깨로 문을 밀면서 백화점 안으로 들어섰다. 힐끔힐끔 이쪽을 보는 시선들이 노골적일 정도였으나, 해정은 상관하지 않는다는 얼굴이었다. 현수도 부득부득 손을 빼서 굳이 해정의 기분을 상하게 하고 싶지는 않아 살짝 고개를 숙이기만 했다.

 “언제 일어났는데?”

 “여섯 시인가…….”

 “뭐?”

 약속 시간은 1시였다. 놀란 현수가 목소리를 키우며 다시 고개를 치켜들었다. 앞서 걷던 해정이 흘긋 뒤를 돌아 현수를 보았다. 그리곤 다시 앞을 보며 “요즘 잠이 줄었어요.” 한다. 무덤덤한 목소리였다.

 해정이 에스컬레이터에 올랐다. 따라 뒤에 오른 현수가 몸을 돌려 저를 내려 보는 해정의 두 손을 붙잡았다. 겉옷이라곤 따뜻할 것 같지도 않은 면 재질의 싱글 코트 하나에, 아이보리색 맨투맨 위로는 머플러 하나 두르지 않아 길고 곧은 목이 훤히 드러나 있다. 현수가 엄지로 해정의 손을 슬슬 매만지며 살짝 눈썹을 찌푸렸다.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그럼 몇 시간이나 기다린 거야. 대체.”

 궁금해서 묻는 게 아니다. 여섯 시에 일어나 씻고, 바로 왔으면 늦어도 일곱 시부터는 여기서 기다렸다는 뜻이다. 심지어 백화점이 오픈 되기도 전에. 이렇게 춥게 입고 가만히 백화점 앞에 서서 기다렸을 해정의 모습을 떠올리니, 저가 잘못한 것도 아닌데 괜스레 죄책감이 들었다. 현수의 한숨 섞인 목소리에 해정이 옅게 웃었다.

 “아침부터 보고 싶다고 형 집 찾아가면 반가워하지도 않을 거잖아요. 재워 주지도 않으면서.”

 뒷말은 불만스러운 양 삐쭉거리는 목소리였다. 해정은 뒤를 돌아 에스컬레이터에서 내렸다. 따라 내린 현수가 무어라 말을 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내가 널 재우지 않는 건 귀찮아서가 아니야.’ 하며 구구절절 해정이 오해하고 있는 걸 짚어 주면 또 해정은 꼬리를 물고 그럼 이유가 뭐냐고 할 게 자명했다. 형이 내세운 이유가 어떻든 납득하지 않겠다는 태도로. 해정은 한번 그런 태도를 취하면 제가 원하는 대로 될 때까지 풀리지 않았으나, 다른 건 몰라도 그에 관해서는 저도 물러설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오늘은 그럴 날이 아니다. 현수는 오늘, 해정과 최대한 좋은 분위기로 있었으면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상충된 화제를 집어 들면 안 된다.

 “밥 먹기 전에 저기 잠깐 들르자.” 

 현수는 어색하지 않을 간격으로 말을 돌렸다. 크게 입점되어 있는 스파 브랜드를 가리키니 해정이 손가락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스파 브랜드 내부는 조금 전, 백화점 출입구보다 사람이 많았다. 여기저기 빨간 바탕에 흰 글씨로 ‘SALE’이라 쓰여 있는 걸 보니 그 탓인 듯했다. 해정이 슬며시 얼굴을 굳히며 현수의 어깨에 제 몸을 밀착했다. 지나가는 사람과 옷자락이라도 부딪히는 게 영 싫은 눈치였다.

 다른 사람이라면 유난스럽다고 할 법도 하지만, 해정이라면 도리어 이런 반응이 더 자연스러웠다. 현수는 익숙한 얼굴로 해정의 팔을 쥐고 제게로 끌어당겼다. 그리고 이리저리 매장을 둘러보다가 어느 순간 걸음을 멈추었다. 캐시미어 머플러가 옷걸이에 걸려 진열되어 있는 코너 앞이었다. 해정이 멀뚱히 서서 그의 옷깃만 만지작댔다. 여러모로 흥미가 없는 얼굴이었다.

 주욱 머플러를 가로로 그으며 지나치던 손가락이 흰 기가 많이 섞인 분홍색 머플러 앞에 멈췄다. 대뜸 해정의 얼굴 밑에 분홍색 머플러가 닿았다. 해정이 눈을 깜빡이며 현수를 내려 보았다. 얼굴이 워낙 희어 아무 색이나 어울릴 거라 예상하긴 했으나, 막상 대 보니 이게 가장 잘 어울리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잘 어울렸다. 잠시 해정과 머플러를 번갈아 보던 현수가 다시 행거에 머플러를 걸었다. 

 “잘 어울리긴 하는데……. 분홍색은 그래도 좀 그렇지? 어디에 맞춰 입기도 힘들고.”

 “……저 사 주려고요?”

 현수는 캐멀색 머플러를 꺼내며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해정의 얼굴 밑에 머플러를 댄다. “이게 좋겠다. 귀엽네.” 잠시 보며 중얼거린 현수가 머플러를 거두지 않은 채로 눈만 올렸다. “이거 괜찮아?” 조곤조곤한 물음에 해정이 대답 대신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묘한 눈이었다. 왜 저런 눈을 하는 건지 알 것도 같아, 현수는 장난치듯 그대로 머플러를 올려 해정의 얼굴을 가렸다.

 “세일이라 사 주는 거다. 세일 아니었음 얄짤없었어.”

 대답 대신 머플러가 찬찬히 내려갔다. 잡아 내린 건 해정의 손이었다. 곧이어 얼굴이 드러났다. 웃음을 잔잔하게 머금었지만, 조금 있으면 흘러넘칠 것만 같은 벅찬 얼굴이었다. 

 “…….”

 근 한 달간 가장 자주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지금 제 앞에 선 해정은 처음 보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게 사고를 잠시 멈추게 한다. 달뜬 기쁨을 띤 눈은 요란스레 반짝거리지 않았다. 은은한 열기가, 투명한 감동이 올곧이 현수를 향했다. 사로잡히는 기분에 현수가 짐짓 머플러를 꾹 쥐었다. 잠시 둘 사이에 침묵이 감돌았다. 

 “…….”

 “고마워요.”

 침묵 끝에, 해정이 나지막이 말했다.

* * *

 계산을 마치자마자 태그를 뜯지 않은 상태로 머플러를 매 달라기에 매무새를 확인하려나 보다, 여겼던 게 실수였다. 머플러를 매 주자 해정은 거울을 보지도 않고 바로 매장의 출구 쪽으로 향했다. 백화점은 덥다고, 벗으라고 현수가 연신 말했으나 해정은 듣지 않았다. 밥을 먹는 와중에도, 심지어 영화를 보는 와중에도 머플러를 맨 채였다. 중간중간 흐트러지면 얼굴을 내밀곤 “제대로 해 줘요.” 하는데 그에 한숨을 쉬면서도 결국 고쳐 준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오늘만큼은 해정이 좋을 대로 해 주는 게 낫다고 현수는 생각했다.

 평소 주말, 해정이 제 집에 왔을 때는 하루 종일 뭘 하고 지냈나, 의문스러울 정도로 할 일이 생각나지 않았다. 영화를 보고 나오니 5시가 다 되어 가는 시간이었다. 현수는 머플러에 붙은 팝콘 부스러기들을 툴툴 털어 주며 “이제 뭐 하지?” 해정에게 물었다. 해정도 별다른 생각이 없는 건지, 아니면 아무래도 좋은 건지 건성 조로 “모르겠어요.” 한다. 현수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얕게 한숨을 내쉬며 웃었다.

 “그럼 그냥 집 갈까?”

 해정이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주차장에 내려가기 전, 푸드코트에 들러 먹거리를 사자고 제안한 건 현수였다. 느닷없는 제안이었으나, 해정은 현수를 한 번 흘긋 보기만 할 뿐이었다. “네.” 대답하는 목소리는 무심했다.

 “벌써 어둡네.”

 주차장을 나서며 현수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언제 밝았냐는 듯 짙게 깔린 어둠에 차 불빛과 가로등, 건물의 전깃불만이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해정은 대답 대신 창문에 제 뒤통수를 기대고 현수를 바라보았다. 현수가 핸들을 돌려 도로에 진입한 뒤, 흘깃 해정을 보았다.

 “……왜 그렇게 봐?”

 “뭐가요?”

 현수의 물음과 동시에 해정이 눈을 둥그렇게 뜨고 깜빡였다. 오히려 제 물음이 의아하다는 반응에, 현수는 찰나에 느낀 위화감을 날려 보냈다. 곧이어 진득하게 붙어 있던 시선이 떨어졌다. 해정이 상체를 정면으로 돌리고, 의자에 제 뒷머리를 파묻었다. 

 “막상 밖에 나오니까 할 거 없다. 그치.”

 일상적인 정적을 비집고, 대뜸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현수의 목소리였다. 정면을 보고 있던 해정이 눈만 도로록 굴려 현수를 보다가, 다시 정면으로 시선을 되돌리며 “그러게요.” 했다. 톡톡톡톡. 길게 뻗은 검지가 가죽 핸들을 간헐적으로 두드렸다. 

 잠시 후, 현수가 한 번 더 입을 열었다.

 “……너는, 친구들이랑 평소에 뭐 하고 놀아? 학교 아닌 데에서.”

 조금 전과 같이 눈이 돌아간다. 다른 리듬이었다. 향하는 속도가 조금 더 느렸다. 이윽고 대답하는 간격이 평상시의 범주를 넘어섰을 때, 현수가 확인하듯 고개를 돌렸다. 동시에 해정의 눈이 깜빡였다. 현수의 옆모습을 보던 검은자가 눈꺼풀을 들어 올렸을 때는 정면을 향해 있었다.

 “친구 없어요. 그래서 놀아 본 적도 없고.”

 평범한 목소리였다. 현수가 다시 정면으로 고개를 돌렸다. 빨간불로 인해 잠시 정차해 있던 차가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현수의 목울대가 울렁였다. 혀가 살짝 삐져나와 아랫입술을 훑는다. 

 “……아……. 그래?”

 “네. 난 친구 안 사귀어요.”

 핸들을 쥔 손에 꾹, 힘이 들어갔다가 빠졌다. 현수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도, 친구를 사귀어야 재밌지 않아?”

 “네?”

 해정이 창문 유리를 죽죽 엄지로 문지르며 되물었다. 되묻는 속도가 빨랐으나, 그래도 가벼운 목소리였다. 지나가는 차들의 바퀴 소리가 시끄러워서 안 들렸을 수도 있다. 현수는 그렇게 여겼다.

 최대한 일상 조로 말해야만 한다고 그는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되새겼다. 어젯밤부터 쌓아 올린 걱정과 계획 탓에 한없이 무거워진 말이었으나, 무게를 들키면 안 된다. 애초에 별것 아닌 제안이다.

 이윽고 현수가 다시 한 번 입을 열었다. 

 “……친구, 사귀면 재밌잖아.”

 “네?”

 똑같은 어조였다. 여전히 가볍다. 다시 한 번 차가 빨간불 앞에 멈춰 섰다. 차 안이 진공인 것처럼 조용했다.

 핸들을 쥔 손바닥에서 땀이 배어 나왔다. ‘왜 이렇게 긴장하지, 내가. 그럴 필요 없는데.’ 현수가 핸들에서 손을 떼고, 대충 허벅지에 문질러 닦으며 다시 고개를 돌렸을 때였다. 

 “네?”

 그 세 번째 물음을 끝으로, 갑자기 해정이 소리 내어 웃기 시작했다.

 제 얼굴을 가리고 어깨를 들썩이며 웃는 모습이, 썩 유쾌한 분위기는 아니었다. 돌연 뒤에서 경적 소리가 날카로이 울렸다. 당황한 눈으로 해정을 보던 현수가 황급히 핸들을 쥐었다. 갑자기 울린 경적 소리 때문인지, 아니면 해정 때문인지, 뒷목이 땀이 식는 것처럼 싸늘했다.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기괴한 광경이었다. 조수석에 앉은 해정은 미친 듯이 웃고 있었고, 자신은 왜인지 경직되어 운전을 하고 있다. 해정이 무슨 생각으로 저리 웃고 있는 건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나름대로 착착 정리해 두었던 머릿속 생각들이 어지러이 흩어지기 시작한다.

 “형, 형. 잠깐 세워 봐요.”

 목소리에 웃음이 가득 녹아 있다. 툭툭, 어깨를 치는 손이 신경을 건드는 것처럼 시비조였다. “어? 빨리 세워 봐요.” 해정이 실실대며 또 한 번 채근했을 때, 현수는 기어이 갓길에 차를 세울 수 있었다. 해정이 또 한 번 키득 웃다가, “아아.” 길고 단조로운 목소리로 탄성을 내뱉으며 제 앞머리를 쓸어 올렸다.

 “아, 진짜 웃기네…….”

 “…….”

 웃음기가 밴 얼굴이 돌아갔다. 언제나 물기를 머금고 있던 눈은 어둠을 흡수하고 있었다. 저건 진짜 즐거운 게 아니다. 현수가 확실하게 결론을 내린 찰나, 해정이 다시 입을 열었다.

 “이거 꼭 그런 것 같지 않아요? 나 이런 거, 막, 존나 촌스러운 드라마……. 일일 드라마, 이런 데서 본 건데?”

 “…….”

 신나게 수다를 떠는 모습이 낯선 것을 넘어 섬뜩할 정도였다. 낮게 욕을 뇌까리는 건 몇 번 본 적이 있지만, 이렇게 방방 떠서 천박하게 욕을 하는 해정은 처음이었다. 흩어진 생각들이 갈가리 분쇄되기 시작했다. 뭔가 잘못됐다. 현수는 직감했다. “그으, 막.” 해정이 뭔가를 떠올리려는 사람처럼 눈을 한 바퀴 돌리다가 이내 손가락을 맞부딪쳐 딱 소리를 냈다.

 “그런 거 있잖아요. 애새끼 떼고 싶어서, 어? 놀이동산 데려가서는 자위하듯이, 그러면서 애새끼 위하는 척 아련하게 놀아 준 다음에 쓰레기처럼 버려 버리는 부모.”

 심장이 쿵, 쿵, 제가 내뱉었던 말의 진짜 무게보다 더 무겁게 내려앉았다. 뭐라고 대답을 해야 할지, 어떻게 반응을 해야 할지 흐릿했다. 화를 내야 하는지. 아니라고 타일러야 하는지. 그것도 아니면, 미안하다고 해야 하는지. 판단은커녕 현수는 지금 자신이 무슨 감정을 느끼고 있는지조차 모르고 있었다.

 해정이 손을 들어 올려 제 눈을 가리고 슥슥 비볐다. 나른한 몸짓이었다. 손이 치워지고, 눈이 드러났다. 시선이 얽힌다.

 “…….”

 “내 부모는 나를 지금 잘 키우고 있는데, 그 애새끼가 된 감정을 느끼게 하네, 형이.”

 웃음기는 원래부터 없었다는 듯 흔적도 없이 사라진 채였다. 

 차 안의 공기도 마찬가지였다. 현수는 지금 자신이 숨을 쉬고 있지 않는 것 같은 착각을 느꼈다. 실제로 호흡이 곤란한 건 아니었다. 그저, 차 안은 시커먼 우주처럼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다는 듯 조용했고, 차분했다. 

 별안간 불쑥 흰 손이 튀어나왔다. 현수가 움찔 뒤로 물러섰다. 손목에 긴 손가락이 철썩 들러붙었다. 보듬어 달라는 듯, 해정이 잡은 손을 제 볼께로 당겼다. 느슨하게 풀린 얼굴과는 달리 우악스러운 힘이었다.

 “왜 아무 말도 안 해요. 민망하게.”

 “…….”

 “화난 거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요. 그냥 웃겨서 그랬어요. 진짜 웃겨서.”

 미약하게 웃는 얼굴이 인위적이었다. 현수의 손가락이 꿈쩍도 하지 않자, 해정이 애가 닳은 아이처럼 손바닥에 촉촉 입술을 댔다. 

 “……해정아.”

 “네.”

 입술 사이로 혀가 빠져나온다. 질척한 감각이 손바닥과 손가락 사이에 느껴졌다. 현수가 슬쩍 손을 빼내려 하자, 강한 힘이 손목을 붙들었다. 현수는 얕게 한숨을 쉰 뒤, 작게 입을 열었다.

 “형은, 너 떼어 내려고 그런 거 아니야. 버리려고 그런 거 아니라고.”

 “그래요?”

 해정은 어느새 손바닥을 핥는 행위에 열중하고 있었다. 한쪽 눈썹이 휙 올라가며 심드렁한 목소리가 흘렀다. 현수가 해명을 덧붙이기도 전, 해정이 말을 이었다.

 “근데 형은 나 성가시게 생각하잖아요.”

 “아냐. 그런 거 아니야.”

 새끼손가락을 약하게 깨무는 이가 위협적이었다. 움칠, 손가락이 떨렸으나 해정은 괘념치 않는다는 듯 이어 약지를 깨물었다.

 “성가시게 생각하잖아. 나 존나 귀찮지.”

 “아니…… 아!”

 이번엔 손바닥이 반사적으로 뒤로 물러섰다. 손목이 더 세게 붙들린다. 세게 깨물린 중지가 아파서, 눈에 눈물이 고일 정도였다. 해정이 눈을 들어 현수를 보았다. 심연처럼 짙은 눈이다. 

 “성가셔서 집에서 재워 주지도 않는 주제에.”

 “그게 왜 여기서 튀어나오는…….”

 “나 잘 때 제일 힘들어하는 거 형도 잘 알잖아. 근데 왜? 그냥, 성가셔서 그런 거 맞잖아. 아니야?”

 현수의 말을 가로채고 해정이 물었다. 아니, 묻는 게 아니었다. 불만으로 포장했던, 무엇으로 채워도 충족되지 않는 그 스산한 욕구가 터진 것이다. 급기야 붙들린 손목도 아려 오기 시작했다. 현수가 세게 손목을 당겼다. 몸이 들썩일 정도였으나, 손목은 여전히 붙들려 있었다.

 “그런 거 아니라…… 윽!”

 세게 깨물린 중지가 또 한 번 물렸다. 짐승에게 먹히는 것처럼 강한 힘이었다. 살점이 떨어지진 않았을까 싶을 정도였다. 급박하게 심장이 날뛰기 시작했다. 공포에 의한 박동이었다. 아파. 아파. 새빨간 본능이 머릿속에서 비명을 질렀다.

 “재워 줘, 그럼.”

 “서해정!”

 현수가 울부짖는 것처럼 해정에게 소리쳤다. 해정은 듣지 않고 다시 한 번 손가락을 물었다. 현수는 비명을 참기 위해 이를 악물었다. 손 전체가 벌벌 떨렸다.

 “재워 줘.”

 해정이 고장 난 인형처럼 다시 한 번 중얼거렸다. 현수는 눈을 부릅뜨고 해정을 보았다. 그리고 곧바로 답했다.

 “너, 계속 이런 식이면 꿈도 꾸지 마.”

 이를 바득바득 갈고 있었으나 목소리 자체는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차 안은 쉬익, 쉬익, 현수가 숨을 몰아쉬는 소리만 들렸다.

 돌연 손목이 팽팽하게 당겨졌다. 현수가 다시 한 번 손목을 제게로 당긴 것이었다. 반사적으로 손목을 꽉 쥐어 잡아 낸 해정은 눈싸움을 하듯이 현수를 바라보았다. 현수도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왜 나를 싫어하는 듯이, 그렇게 봐. 왜. 대체 왜.

 해정이 그런 생각을 떠올렸을 때였다. 본인도 예상 못할 정도로 강한 살기가 머리를 내려쳤다. 뒤통수가 띵, 둔탁한 무엇인가에 맞은 것처럼 울린다. 

 그대로 현수의 멱살을 잡는다. 얼굴을 가까이 해서 저를 벌레 보듯이 보는 눈에 침을 뱉어 버린다. 칼을 꺼낸다. 배 부근에 갖다 댄다. 저를 떼어 낼 생각을 한 것에 대해 반성하라고 협박을 한다.

 형은 반성해야 해. 나를 떼어 내려고 했잖아. 아주 잘못한 짓이니까, 이렇게 되는 게 당연해. 그러니까, 반성하지 않으면 안 되는 거야. 알았지? 만약에 형이 반성하지 않으면……. 나는 형을, 있잖아, 형을 어떻게 할 거냐면, 어, 그러니까, 그러니까…….

 안 돼.

 불현듯 냉정한 두 음절의 말이 상상을 잘라 냈다. 해정이 움찔 온몸을 떨었다. 그 말을 한 건 해정 스스로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결국엔 환청이었지만, 어찌 되었든 현수의 목소리였다.

 해정의 힘이 약해진 틈을 타 현수가 제 손목을 빼냈다. 해정이 귀신을 본 것처럼 눈을 크게 뜨고 현수를 바라보았다.

 내가 방금 무슨 생각을 한 거지. 해정이 자문한 순간, 끈적하고 깊은 어딘가에 사는 누군가가 보글거리며 대답했다.

 “……서해정, 너 왜 그래?”

 형을 죽이는 상상.

 그렇게 화를 내다가, 갑자기 멍하니 저를 보다가, 급기야는 지독한 감기에 걸려 한기를 느끼는 사람처럼 벌벌 떠는 해정이 이상해서 현수는 손가락을 떨면서도 그에게 손을 뻗었다.

 쾅. 조수석 문이 요란스러운 소리를 내며 열렸다. 해정 스스로 문을 연 것이었다. 겁에 질린 것처럼 차 안을 빠져나간 해정이, 온 힘을 다해 거리를 내달렸다.

 하지만 아무리 달리고 도망쳐도, 누군가가 대답한 그 목소리는 사라지지 않고 해정의 귀를 연이어 찔러 대었다.

* * *

 눈을 떴다. 창 너머에 뜬 해가 중천을 넘어가고 있었다. 몸을 쭉 뻗어 억지로 기지개를 켠 현수가 옆에 둔 휴대 전화를 끌어 시간을 확인했다. 오후 네 시. ‘미쳤네.’ 현수는 자조적으로 생각하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왼손만 이용해 샤워를 하니 시간이 평소보다 배로 걸렸다. 스킨은 건너뛰고 대충 로션만 치덕치덕 볼에 펴 바른 현수가 이내 옆에 놓인 드라이어를 쥐었다. 피어 있던 인상이 순식간에 구겨진다. 드라이어와 맞닿은 환부가 지끈지끈했다. 현수는 슬쩍 한숨을 쉬며 왼손으로 드라이어를 바꿔 쥐었다. 그리고 오른손의 중지 가운데에 자리한 잇자국을 빤히 내려 보았다. 위이잉. 드라이어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뜨거운 바람을 뿜어낸다.

 “…….”

 대충 지혈만 하고 방치해 둔 손가락을 보고 있자니, 의식적으로 처박아 두었던 어젯밤의 기억이 새록새록 피어나기 시작했다. 정확히는 해정의 얼굴이었다.

 화를 낼 것은 어느 정도 예상했다. 그러지 않도록 조심히 말을 꺼내었지만 어쨌든 실패한 것이었다. 그래서 그가 그리 미친 것처럼 화를 냈던 게, 놀라기는 했지만 충격적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찰나의 순간, 저는 분명히 목격했다. 겁을 먹은 해정의 얼굴을.

 대체 왜? 왜 나를 그렇게 본 거지. 아무리 추측해도 현수는 그것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제 손을 잡지 않고, 그대로 도망간 것까지 그랬다. 불안해도 저와 있으면 안정을 되찾았던 눈이, 반대로 흘러가고 있었다. 그건 꼭, 물이 거꾸로 솟고 있는 거다. 이상했다.

 왜 날 보면서 그렇게 겁을 먹었지. 왜. 왜 도망갔지, 그럴 이유가 없는데. 나는 너한테 그런 존재가 아닌데. 너에게 해를 가하는 존재가 아니잖아. 나는, 너를 구해 주는…….

 “아.”

 돌연 드라이어가 둔탁한 소리를 내며 바닥과 충돌했다. 바들 떨며 드라이어를 놓친 손이 그대로 홧홧하게 덴 두피를 덮었다. 현수는 머리를 감싼 채 고개를 푹 숙였다. 눈을 질끈 감는다. ‘아니야. 이건 아니야. 이런 생각 하면 안 돼.’ 가만히 앉아 제 어지럽게 꼬인 강박, 혹은 이기심을 멀리 치워 낸다.

 집을 나선 건 그로부터 한참 뒤였다. 현수는 의자에 걸린 외투를 집어 들고 도망치듯 신발장으로 향했다. 신발을 구겨 신은 채로 현관문을 열었다. 바깥의 찬 공기가 훅 정수리에 끼쳤다. 문득 이 년 전에 끊은 담배 냄새가 코를 스치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담배 하나 살까. 현수는 생각하며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어 올렸다.

 현관문 앞 계단에 누군가가 앉아 있었다. 열리는 문소리에, 멍하니 정면을 바라보던 얼굴이 올랐다. 눈이 마주친다. 

 “…….”

 해정이었다.

 현수가 문손잡이를 놓지 않은 채 가만히 해정을 내려 보았다. 큰 눈은 축 늘어져서는 초조한 빛을 가득 머금고 있었다. 뭐라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는 건지, 마른 입술이 여러 번 달싹였다.

 해정은 어제와 같이 겁을 먹고 있었으나, 좀 달랐다. 이건 이유가 명백하게 드러나 있다. 현수가 자신을 밀어낼까 무서워하는 눈이었다. 아까, 멀리 치워 둔 음침한 것들이 다시 게걸음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묘한 안정감이 싸늘했던 마음에 온기처럼 내려앉는다. 

 “여기서 뭐 해?”

 침묵을 깬 건 현수였다. 현수가 짐짓 딱딱하게 말을 꺼내자, 해정은 그러쥔 손에 힘을 주었다.

 “형 손, 걱정돼서…….”

 말을 흐리면서 흘끗, 현수의 손을 확인한다. 지금 보니 해정의 옆에 큼지막한 비닐 봉투가 놓여 있었다. 갈지자를 그리며 방황하던 눈이 이내 추락하듯 떨어진다.

 “죄지었어? 여태껏 못된 짓은 뻔뻔하게 다 해 놓고, 새삼.”

 “…….”

 장난조로 타박하는 목소리에 해정이 머뭇머뭇 다시 고개를 들어 올렸다. 현수가 마르게 웃으며 슬쩍 해정의 정수리를 매만졌다. 해정이 더듬더듬 손을 올려 제 머리를 만지는 손을 끌어 상처를 다시 확인했다. 고운 선으로 뻗은 손가락 중간에 흠집처럼 잇자국이 나 있다. 눈썹이 축 내려간다.

 “……미안해요.”

 “괜찮아. 별로 안 다쳤어.”

 해정이 거두어지는 손목을 붙들듯 꽉 잡았다. 그리곤 제 볼에 손등을 대고 비비적대기 시작했다.

 “나는 형 다치게 안 할 거예요. 어제는, 내가 미쳤던 거야. 잠시 미쳤었어. 형이 없어지면 안 되는 건데. 그러니까, 아무리 화나는 일이 있어도, 나는. 절대……. 그런 생각은…….”

 대화를 하는 것 같았던 어조는 어느새 혼잣말이 되고, 이리저리 눈치를 보던 눈은 또 어느새 자신의 세계 안에 풍덩 빠져 있었다. 손가락 하나 다치게 한 것치고는 과한 반성이었다. 심지어 이전의 해정은 저가 한 일에 대해 합리화하면 했지, 이리 반성하는 편도 아니었다. ‘왜 저러지.’ 잠시 고민하던 현수가 점점 조여 오는 힘에 생각을 거두었다. 그리고 정신 차리라는 듯 해정의 이마를 손가락으로 약하게 튕겼다.

 “……추워. 쫑알쫑알하지 말고 들어와.”

* * *

 해정의 몸은 얼음장이었다. 얼마나 오래 앉아 있었던 건지 묻기도 겁날 정도였다. 현수는 소파에 앉은 해정의 어깨 위로 담요를 덮어 주고, 부엌으로 향했다. 뒤로 해정이 일어서는 소리가 들려 “앉아 있어.” 하자 다시 앉는 소리가 났다. 현수가 핫초코 분말을 탈탈 털어 넣은 컵에 끓인 물을 붓고, 젓가락으로 휘휘 돌리며 뒤를 돌아보았다. 해정은 눈을 깜빡이며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윽고 현수가 젓가락을 싱크대에 던져 놓고 해정에게로 다가갔다. 따끈해진 머그잔을 건네자 해정이 느리게 받아 들었다. 현수가 소파 앞, 바닥에 앉아 약국 봉투를 뒤적였다. 평생 써도 모자라지 않을 양의 대일 밴드와 연고, 소독약이 있었다.

 “이거 언제 다 쓰라고 이렇게 많이 샀어.”

 현수가 고개를 들어 웃으면서 말했다. 해정은 꼭 쥐고 있는 머그잔 표면을 엄지로 슬슬 문지르며 “그냥…….” 하고 말을 얼버무렸다. 아직도 어색해하는 기색이었다. ‘내 손을 다치게 한 게 그렇게 죄책감이 드나.’ 현수의 머리에 아까 거두었던 생각이 다시 떠올랐다. 손가락이야 그 순간에는 저도 발끈한 건 맞지만, 지금까지 질질 끌 정도로 화날 일도 아니었다. 애초에 해정의 온전치 않은 성격을 알아서 조심했던 것도 자신이었다.

 “설마, 이만큼 사 줘 놓고 이제 시도 때도 없이 물고 그러려고?”

 그래서 현수는 짐짓 짓궂게 말했다. 그렇게 어색해할 정도로 죄책감을 갖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었다.

 “…….”

 예상으로는, ‘그런 거 아니에요.’ 하며 칭얼대는 목소리를 내는 것이었는데 해정은 제 예상과 달리 조용했다. 기어이 고개까지 푹 숙인다. 해정의 대답을 기다리던 현수가 이내 민망한 듯 “아니면 말고.” 덧붙이며 대일 밴드 박스를 뜯었다.

 “……형을 죽이는 상상을 했어요.”

 박스를 뜯던 손이 멈췄다. 현수의 고개가 천천히 들렸다. 해정의 눈도, 어느새 현수를 향해 있었다. 붉은 입술이 어젯밤처럼 약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막상 토로하고 나니 현수가 물러날까 싶은지, 해정이 자기 보호를 하는 것처럼 급하게 말을 덧붙였다.

 “나도 모르게, 나도 모르게 그랬어요……. 진짜, 나도 모르게…….”

 “…….”

 의식적인 것보다 더 무서운 건 무의식이라는 걸 해정은 아직 모르는 듯했다. 하지만 현수는 굳이 지적하지 않았다. 

 “나도 모르게 그러니까, 그게 무서워서……. 근데 정말 안 그럴 거예요. 제가 어떻게 그러겠어요.”

 “…….”

 “……어떻게, 그러겠어요.”

 ‘어제 그렇게 나를 보았던 게 그러면, 그 때문이었던 건가.’ 현수는 생각했다. 말끝을 되풀이하며, 해정은 현수가 제 말에 긍정하길 원하는 것처럼 간절하게 현수를 바라보았다. 평소와 다름없는 눈. 구원해 주기를 바라는 눈. 나를, 필요로 하는 눈.

 “…….”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른다.

 현수가 대답을 하지 않자, 머그잔을 쥐고 있던 손에 힘이 점점 풀리기 시작했다. 이내 현수가 손을 뻗어 해정의 손에서 머그잔을 가져갔다. 테이블 위에 머그잔을 내려놓는 손을 시선으로 따라가던 해정이, 다시 현수가 저를 돌아보자 숨듯이 고개를 숙였다. 현수가 소파 앞에 가까이 앉았다.

 “해정아.”

 “…….”

 “형 봐 봐.”

 달래듯 무릎에 손을 얹고 문질문질 매만지자, 해정이 서서히 시선을 올려 눈을 맞췄다. 현수가 그대로 오른손을 올려 해정의 눈앞에 두었다. 해정의 시선이 손가락으로 향했다.

 “형 다친 거 봐 봐.”

 “…….”

 망설임 없이 손이 감긴다. 속상하다는 듯, 해정의 손가락이 붉은 자국 위를 슥슥 매만졌다. 맞닿기만 해도 아픈 상처였으나 현수는 짐짓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일관했다. 현수가 왼손을 올려 해정의 볼을 감쌌다. 시선이 마주쳤다.

 “형 다친 건 어떻게 해야 나아. 네가 이렇게 무작정 만져 준다고 나을까?”

 꼭 유치원생에게 차근차근 장난감 조립의 순서를 일러 주는 것처럼 현수가 조곤조곤 물었다. 상처를 매만지던 움직임이 머뭇거리며 멈췄다. 해정이 입을 꾹 다문 채로 고개를 가로로 내저었다.

 “약 바르고, 대일 밴드 붙여야 낫겠지. 그걸 아니까 너도 이만큼 사 온 거잖아.”

 “…….”

 “응?”

 “……네.”

 “형 보기에는, 해정이 너도 그래.”

 그 말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해정이 눈을 내리깔았다. 현수가 해정의 손에 잡힌 제 손을 비틀어 빼내었다. 그리고 살짝 일어나 해정의 목을 안았다. 부드러운 손길이 토닥토닥 등을 두드리자, 해정이 현수의 어깨에 제 얼굴을 묻었다.

 “형이 무작정 옆에 있어 준다고 나아지는 게 아니었어. 형이 잘못 생각한 거야.”

 그 말은 부정하고 싶었는지, 해정이 얼굴을 묻은 채로 가로저으며 현수의 허리를 끌어당겨 감쌌다. 그리고 현수의 몸을 그대로 들어 소파에 눕혔다. 허리를 껴안은 팔에 더 힘을 준 해정이 “아니에요. 그런 거 아니야.” 억지를 피우듯 웅얼거렸다. 죄책감은 죄책감이고, 싫은 건 여전히 싫은 모양이었다. 현수가 한쪽 손을 올려 해정의 뒤통수를 매만졌다.

 “형은 네 옆에 있을 거야.”

 “…….”

 나지막한 목소리는 최대한 이타적이고, 해정을 위하는 사람을 연기하고 있었다. 허나 말 자체는 진심이었다. 해정이 나아질 때까지는 옆에 있을 것이었다.

 하지만 해정이 더 이상 저에게 구원을 원하지 않는다면, 그때는 다시 되돌아가겠지. 해정을 놓아줘야겠지. 아니면 스스로 떠날지도. 그렇게 되면, 나는……. 나는 다시 습관이 되어 버린 그 죄의식에 갇히겠지.

 해정의 머리 안을 헤집고 있던 손가락이 조금 더 섬세하고 집요해졌다. 현수는 잠시 닫고 있던 입을 천천히 떼었다.

 “……그러니까, 해정아. 우리, 약도 한번 발라 보자.”

 사실, 이건 진심이 아닐지도 모른다.

 잠시 후, 해정이 파묻고 있던 얼굴을 들어 올려 현수를 내려 보았다. 코가 닿을 거리였다. 그렁그렁한 눈이 파고들듯 현수의 눈을 응시했다. 본심을 들킬까 무서워 현수는 살짝 고개를 틀었다. 곧 무서운 기세로 턱이 잡힌다. 다시 눈이 마주쳤다.

 “……떠나지 않을 거라 약속해요.”

 낮은 목소리가 위협하듯 말했다. 현수는 해정의 머리칼을 손가락으로 한 바퀴 감았다가, 풀기를 반복했다. “응.” 상냥한 목소리가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내가 그만두자고 할 때까지, 형은 계속 나 받아 줘야 하는 거예요.”

 “응.”

 “형이 하라는 대로 할게요.”

 “…….”

 “그 대신, 나아지지 않는다 해도 도망가지 말아요.”

 “응.”

 얼굴이 더 가까워진다. 곧 이마가 맞닿았다. 블랙홀같이 빨려들 것 같은 눈이었다. 현수는 피하지 않았다. 

 “도망가면 쫓아가.”

 엄포를 놓는 것처럼 공격적으로 변한 목소리가 단단히 못을 박았다. “응.” 현수의 대답이 입술 사이로 새어 나옴과 동시에 입술이 부딪혔다. 해정이 느슨해진 손을 끌어 와 깍지를 끼어 소파 위로 내리눌렀다. 거친 힘에 다친 손가락이 아팠으나 현수는 그만두라는 말 대신에 입을 벌렸다. 성난 혀가 마구잡이로 입 안을 헤집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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