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 탄생(1권) (1/19)

1. 탄생

 거실 벽에는 시계가 붙어 있다. 그 시계는 무소음이지만 매시간 정각이 되면 딱딱한 전자음을 냈다. 열두 살의 서해정은 그 시계를 확인하는 것이 버릇이었다. 4시 반. 시계가 알려 주지 않는 그 시간에 형이 오기 때문이었다. 

 최승우. 형의 이름이었다. 승우의 엄마는 스물한 살에 결혼해서 승우를 낳았다. 이혼은 승우가 태어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그리고 5년 후, 그녀는 유명한 미남 배우와 재혼을 했다. 재혼을 하고 일 년 뒤에 낳은 아이가 해정이었다. 승우는 동생이 생겼다며 기쁜 척을 했지만, 사실 전혀 기쁘지 않았다.

 도리어 승우는 갓난아기인 해정을 보며, 차라리 얼른 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초등학생이 된 동생을 학대하기 시작했다. 보이면 무조건 때리는 폭력적인 방법이었으나 교묘한 면도 있었다. 승우는 부모가 없는 낮과 이른 저녁에만 해정을 때렸다. 부모의 앞에서는 항상 웃었다. 어린 해정이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폭력을 피해 숨는 것뿐이었다.

 해정은 어젯밤 아빠가 사다 놓았던 홀케이크를 조각내어 접시에 담았다. 그리고 접시와 포크를 들고 소파에 앉았다. 야금야금 케이크를 먹던 해정이 시간을 확인했다. 4시 10분. 아직 이십 분이 남아 있었다. 해정은 케이크를 후딱 해치우고 방에 들어가 있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형이 학교에서 돌아와도 자신은 문을 잠그고 쥐 죽은 듯 있으면 맞지 않았다.

 케이크를 다 먹고 접시에 남은 생크림을 포크의 옆면으로 긁어내던 중이었다. 갑자기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해정이 번뜩 고개를 들었다. ‘아직 15분인데.’ 해정은 당황했다.

 삐리릭. 문이 잠기는 소리였다. 해정이 가느다란 다리를 딛고 섰다. 그리고 미끌거리는 대리석 바닥을 휘청대며 걸었다. 던지듯 설거지통에 접시와 포크를 넣은 해정이 뒤돌아 다시 거실로 나왔다. 형이 허리를 숙여 신발을 벗고 있었다. 해정은 황급히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문을 잠갔다.

“…….”

 방 안은 고요했다. 하늘색 벽지에는 낙서 하나 없었고, 아이보리색 장식장에는 남자아이들이 좋아할 법한 장난감들이 군인처럼 줄을 서 있었다. 해정은 그 장난감들을 가지고 논 적이 없었다. 

 해정이 관심을 갖는 것은 오로지 컴퓨터였다. 방에 들어온 그의 이동 루트는 항상 같았다. 해정이 책상 앞 자세 교정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익숙하게 엄지발가락으로 컴퓨터 본체의 전원 버튼을 눌렀다. 제 얼굴만 한 헤드셋을 쓴다. 마우스를 쥔 작은 손이 빠르게 움직였다. 딸깍. 동영상이 켜졌다.

 「안녕하세요, 씨튜브 시청자분들. 게임 방송 킴수입니다.」

 단정하고도 발랄한 목소리가 헤드셋을 통해 들려왔다. 일순 불안정하게 뛰던 심장이 조금씩 규칙을 되찾았다. 

 방 밖에 있는 형에게 목소리가 들릴까 해정의 숨은 죽어 있었다. 그러나 동영상 속 목소리는 총을 쏘는 게임 하나 하면서도 요란하고, 생명력이 넘쳤다.

 처음에는 그거 하나로 신기했고 재밌었다. 방 안에서 공부나 책 읽기 외에는 아무것도 하는 게 없던 해정이 찾은 유일한 즐거움이었다. 다른 방송도 재밌을까 싶어 동영상 사이트를 돌아다녀 보았지만 처음 본 게 이 사람의 영상인 탓인지, 이 사람이 가장 재밌었다. 그래서 몇 개월을 내리 보다 보니 어느새 챙겨 보고 있었다. 나이 때문에 생방송은 못 봤으나 그래도 동영상 사이트를 통해 모든 방송을 챙겨 봤고, 항상 댓글을 남겼다. 얼마 전 처음 답댓글을 받은 후, 설레어 밤잠을 설쳤다.

 해정이 품은 건 동경이었다. 얼마 전 진로 탐구 시간에 선생님이 장래 희망을 적어 내라며 나눠 주었던 갱지에, 해정은 잠깐 고민한 뒤 ‘킴수’라 적어 낼 정도였다. 후폭풍은 없었다. 해정의 담임은 항상 조용히 앉아 공부만 하는 해정에게 그러한 취미라도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한 시간 반짜리 동영상이 끝났다. 해정이 헤드셋을 벗었다. 꾹 짓눌려 있던 귀가 얼얼했다. 해정이 키보드를 밀어내고 책상 위에 철퍼덕 엎드렸다. 요즘에는 방송 중독 증세가 심해진 건지, 방송을 보고 나면 그 사람의 목소리가 아른아른 들려오곤 했다. 해정은 도리어 그게 좋았다. 방 안에 혼자 있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 * *

 해정이 가장 싫어하는 일은 자다가 중간에 깨는 것이었다. 근래 생긴 이상한 현상 때문이었다.

 시작은 늘 같다. 기억도 안 나는 께름칙한 꿈을 꾸다가 일어난다. 주변은 쥐 죽은 듯 조용하고, 잠자기 전까지 켜져 있던 수면등은 어느새 꺼져 있다. 어두컴컴한 시야에 해정은 수면등을 다시 켜기 위해 손을 더듬거린다.

 갑자기 출처를 알 수 없는 두려움이 몰려든다. 팔딱팔딱 심장이 발광하듯 뛰기 시작하고, 이상한 긴장감이 감돈다.

 덜컥.

 굳게 닫혀 있던 문이 열린다. 어둠보다 더 새카만 형체가 문턱에 서 있다. 해정이 그것에 무서움을 가질수록 그 형체는 입을 갖게 되고, 이빨을 갖게 되고, 빨간 눈과 세로로 찢어진 콧구멍을 갖게 된다. 몸집이 커진다. 소리를 낸다. 해정의 공포를 키우는 소리들이 어지러이 섞여 귀를 짓이긴다.

 그중에는 죽으라는, 형의 목소리가 있다. 해정은 숨을 헐떡인다. 곧 호흡이 멎을 사람처럼 필사적으로 수면등을 켠다. 은은한 조명이 침대 윗부분을 비춘다. 그것은 잠시 주춤하더니, 이내 더 성을 낸다. 음량을 키우고, 한 발씩 다가온다.

 해정은 베개 밑에 숨겨 두었던 것을 기억한다. 손을 넣어 꺼낸다. 어느새 이마는 축축이 젖어 있다. 손에 쥐고 있는 건 태블릿 피씨다. 손보다 훨씬 큰 태블릿의 끝을 꾹 쥐고 잠금을 푼다.

 빨리. 빨리. 빨리. 빨리. 빨리.

 버퍼링이 길어질수록 해정은 초조해진다. 곧 둥글게 돌던 점선들이 없어진다. 그것은 이미 침대 가까이에 와 있다.

 「안녕하세요.」

 익숙한 목소리. 순식간에 사라지는 큰 형체. 해정이 숨을 헉헉댄다. 어떤 게임을 하든, 무슨 말을 하든 관심이 없다. 지금 이 순간은 그 목소리만으로 충분하다. 수면 아래 있던 몸이 위로 끌어 올려진 듯한 느낌. 

 해정이 태블릿을 껴안는다. 태블릿이 따끈따끈해질 때까지, 목소리는 멈추지 않고 떠든다.

* * *

 관자놀이가 지끈거렸다. 벼락 치듯 한순간 콱 몰리는 신경에 해정이 눈살을 찌푸렸다. ‘약을 또 먹어야 하는 건가.’ 해정은 생각하며 손을 뻗어 가방을 쥐었다. 작은 주머니 속에 플라스틱 약통이 있었다. 네모난 약통 안에는 진통제가 가득 들어 있다. 해정이 하나를 집어 든 후 다시 약통을 닫아 가방 속에 넣었다. 물을 떠 올까, 잠깐 생각하다 만다. 귀찮았다. 해정은 알약을 입에 넣고 꼴깍 삼켰다. 목에 걸리는 느낌도 잠시였다. 약이 부드럽게 넘어갔다.

 톡톡. 누군가가 등을 두드렸다. 해정이 인상을 굳힌 채로 뒤를 돌아보았다.

 어디 아파?

 강여름. 해정과 같은 반인 여학생이었다. 여름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입을 뻥끗거렸다. ‘얘도 이 독서실에 다녔었나.’ 해정은 생각하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허나 여름은 더 걱정되는 얼굴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해정의 얼굴은 창백했다. 원래 종잇장처럼 하얀 얼굴이긴 했지만, 지금은 파리한 기색까지 감돌고 있었다. 비단 형광등 때문만은 아니었다. 입술도 바싹 말라 색이 없었다. 조금만 더 있다간 쓰러질 것 같았다.

 여름이 다시 한 번 입을 뻥긋거렸다.

 너 쓰러질 것 같아.

 아니라는데 귀찮게 왜 이래. 해정은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확실히 머리가 핑 돌면서 두통도 계속 있긴 했으나 그건 이 여자애와 상관없는 일이었다. 해정은 한숨을 쉬며 한 번 더 고개를 저었다.

 다시 한 번 말을 하려던 여름이 이내 알겠다는 표정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당사자가 괜찮다는데 계속 묻는 건 오지랖이었다.

 해정이 등을 돌렸다. 단정한 뒤통수를 바라보던 여름도 다시 등을 돌렸다.

 “…….”

 여름은 해정을 좋아했다.

 처음에는 아니었다. 1학년 때부터 같은 반에, 같은 독서실의 뒷자리인 자신을 못 알아보는 게 신기한 정도였다. ‘대체 뭐야? 일부러 그러나?’ 하는 의문이 든 적도 있었는데, 그러기엔 해정의 눈은 정말 무감각했다. 애초에 시야가 좁은 것 같았다. 학교가 끝나고 밤 10시까지, 해정은 딱 다섯 시간 공부를 했는데 그동안 거의 움직이질 않았다.

 딴짓을 전혀 안 하는 건 아니었다. 가끔 스마트폰으로 영상을 보는 것 같기도 했다. 고개를 깊게 숙이고 있어 표정을 보지는 못했지만, 공부를 할 때처럼 집중하고 있었다. 게임 좋아하나 보네. 여름은 그렇게 여기고 말았다. 아직 자신이 해정을 관찰하고 있다는 걸 자각하지 못할 때였다.

 해정은 학교 내에서 유명했다. 미스터리 한 인물이기도 했다. 우선은 예쁜 이목구비에 하얀 얼굴이 눈에 띄었고, 거기에 더해 그는 친구 한 명 사귀지 않았다. 항상 앉아서 공부만 했다. 밥도 당연하단 듯 혼자 먹었고, 다시 교실로 돌아와 공부를 했다. 자신에게 다가오는 사람들을 쳐 내는 건 아니었는데, 더 다가오지 못하도록 가로막는 묘한 아우라가 있었다.

 전교 1등이잖아. 공부만 하려고 작정한 거겠지.

 이렇게 말하는 녀석들도 있었으나 몇몇 예리한 아이들은 그게 아닌 걸 어렴풋이 눈치채고 있었다. 그중에는 여름도 있었다. 

 ‘친해지고 싶다.’ 여름은 문제집 구석에 끄적거리며 생각했다. 지금은 자신이 해정을 관찰하고 있다는 것도, 더해서 그에 관한 걸 기억하려고 애쓰고 있다는 것도 충분히 자각하고 있는 상태였다.

 그래도, 말을 건 것으로 오늘은 큰 수확이었다.

* * *

 우욱. 해정이 변기를 붙잡고 입을 크게 벌렸다. 말간 위액에 아까까지 꼴깍꼴깍 삼켰던 알약들이 녹아 쏟아졌다. 하루 종일 먹은 게 없던 탓이었다. 해정이 침을 뱉었다. 큰 눈망울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있었다. “씨발.” 작게 읊조린 욕설이 변기 물이 내려가는 소리에 묻혔다.

 긴 몸이 비틀대며 세면대 앞에 섰다. 손바닥에 물을 담아 몇 차례 가글을 한 뒤, 거울을 확인한다. 별안간 교복 바지 주머니에서 전자음이 울렸다. 알람이었다. 해정이 신경질적인 손길로 휴대 전화를 빼내었다.

 오후 10시. 액정에 현재 시간이 크게 떴다. 늘 울리던 알람이었다. 해정은 이 알람이 울리면 독서실에서 나와 집으로 향했다. 독서실과 집은 20분 거리였다. 걸어서 집에 도착한 뒤, 씻으면 10시 반이다. 그때 컴퓨터를 켜면 방송이 시작된다. 고등학교에 올라간 뒤로 해정은 한 번도 이 패턴을 벗어난 적이 없었다. 

 패턴을 어긴 건 도리어 반대쪽이었다. 일주일 전부터, 다른 공지도 없이 갑자기 방송을 하지 않았다. ‘내가 공지를 못 본 건가.’ 해정은 그렇게 생각하며 팬카페부터 방송 사이트, 에스엔에스 계정까지 다 뒤져 보았으나 그런 얘기는 없었다. 그걸 확인한 순간부터 해정은 끝도 없는 불안함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알람을 껐다. 그리고 화장실에서 나와 다시 독서실 제 자리로 돌아갔다.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10시에 독서실을 나서는 건 여전했다. 가방을 챙긴 해정이 힐끗 여름의 뒷모습을 보았다. ‘내 뒷자리였네.’ 생각하며 문을 밀었다.

 집으로 걷는 길 내내 아스팔트 바닥이 울렁거렸다. 해정은 자신이 비틀대며 걷는지도 몰랐다. 어느 순간 까맣게 현기증이 일었다. 해정이 이를 악물고 택시를 세웠다.

 “리버뷰 아파트요.”

 해정의 뒤통수가 푹신한 의자에 닿았다. 차체가 움직였다. 해정은 눈을 꾹 감고 욕을 삼켰다. 멀미가 났다. 몸 상태가 최악이다.

 불안해지기 시작한 순간부터, 해정은 음식을 전혀 받아들이지 못했다. 꾸역꾸역 먹긴 했지만 거식증 환자처럼 다시 게워 내기만 했다. 이틀 전에는 응급실에 실려 갔다. “다이어트 해요? 그건 아닐 테고…….” 의사는 해정을 죽 훑으며 말했다. 해정은 제 엄지와 검지 사이 가죽을 꾹꾹 누를 뿐이었다. 대체 왜 음식이 들어가지 않는지 스스로도 모르는 탓이었다.

 링거를 맞고 괜찮아지나 싶던 것도 잠시, 어제부터는 머리가 아파 오기 시작했다. 중학교 2학년 때부터 이따금씩 두통이 있었던 탓에 해정은 별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약통을 들고 다니며 아플 때마다 꿀꺽 삼켰다. 사실 나아지는 건 없었지만 안 먹는 것보다 낫다고 생각했다.

 그러더니 오늘은 아침부터 머리가 핑핑 돌았다. 가정부는 해정에게 오늘은 학교를 쉬라고 했다. 해정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방 안에 혼자 박혀 있으나, 밖에 있으나 끔찍한 건 똑같았다. 이건 신체의 문제가 아니었다.

 “학생, 다 왔어. 일어나.”

 눈을 감은 채 아무런 미동도 없는 해정이 잠을 자고 있다고 생각했는지, 택시 기사는 뒤돌아 해정을 깨웠다. 핏기가 가신 얼굴이 표정 없이 번뜩 눈을 떴다. “억, 깜짝이야.” 기사가 작게 말하며 움찔거렸다. 해정은 괘념치 않는다는 듯 무감한 얼굴로 지갑을 뒤적였다. 이내 지갑에서 만 원짜리를 한 장 꺼내 기사에게 내밀었다.

 “잔돈은 괜찮습니다. 감사합니다.”

 해정은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덜컥. 차 문이 열렸다. 해정이 느릿느릿 차에서 내려 아파트를 올려 보았다. 고층 아파트는 언제 바라봐도 답답했다. 질질 끄는 발은 꼭 수용소에 들어가는 죄수의 그것 같았다.

 보고 싶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비록 목소리밖에 모르지만, 듣고 싶다는 표현보다는 보고 싶다는 표현이 더 걸맞았다. 해정은 엘리베이터 벽에 퉁, 머리를 박았다.

 보고 싶다. 보고 싶다.

 이런 갈증은 처음이었다. 슬슬 인내심이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조금씩 이마에 열이 올랐다. 해정의 머리에 여러 가지 문장들이 휘갈기듯 스쳤다.

 말이라도 하지. 그럼 기다릴 수 있잖아. 불안하게 하지 말든가. 왜 사람을 힘들게 해. 목소리 듣고 싶다고. 보고 싶다고. 왜 아무 말 없이 없어져. 이런 적 없었잖아. 왜 이렇게 오래…….

 혹시 그만둘 셈이야?

 눈앞이 새하얗게 번졌다. 해정이 벽에서 이마를 떼고 눈을 깜빡였다. 금방 달리기를 한 사람처럼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새하얀 눈앞에 검은 이물질들이 여기저기 흩뿌려진다. 그만둔다는 것은, 영원히 안 온다는 거다. 이 사실이 명백히 떠올랐다.

 그럼 난. 나는 어떻게 형을 찾아. 나는 형 계속 보고 싶은데. 어떡해. 난 어쩌라고.

 “…….”

 “……아.”

 이윽고 해정이 뒷걸음질을 쳤다. 꽉 여문 엘리베이터의 문 틈새로 시뻘건 것들이 스멀스멀 들어왔다. 

 오랜만이야.

 시뻘건 것들은 합쳐져 한 덩어리가 되었다. 그리고 말을 했다. 어릴 적에 가끔 방에 들어왔던 그것과 다른 생김새였지만, 같은 괴물이라는 것을 해정은 직감했다.

 괴물은 잔뜩 약이 오른 채였다. 마치 이 순간만을 기다렸다는 듯 즐겁게 웃었다. 웃는 소리와 함께 빨간 몸체 위로 흰 이빨이 지퍼처럼 열렸다. 해정이 엘리베이터 끝에 섰다. 등 뒤에 벽이 닿았다. 온몸이 굳었다.

 오래 버티긴 했지. 그 사람은 단순히 방송을 할 뿐이야. 너랑 아무런 관계 없어. 알잖아? 응, 관계없어. 그 사람은 너의 존재도 몰라. 넌, 그 사람을 붙잡을 수 없다는 거야. 얼굴도 모르는 주제에.

 외로움. 고립감. 불안감. 정적. 침묵. 무관심.

 잊고 있던 모든 것들이 머리 위로 쏟아졌다. 괴물은 웃었다. 해정의 바로 앞에 시뻘건 것이 다가왔다. 피 냄새가 났다.

 그 순간, 해정은 정신을 잃었다.

* * *

 먹색 천장. 해정이 눈을 뜨자마자 본 것이었다. 방이었다. 해정은 팔을 들어 제 손을 바라보았다. 주먹을 쥐었다가 펴도 감각이 돌아오지 않았다. 잠을 오래 잔 것 같은 기분이다. 계속 주먹을 쥐었다가 펴니 이내 조금씩 감각이 느껴졌다. 해정이 손바닥으로 제 이마를 덮고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 일어났어?”

 아빠의 목소리였다. 해정은 고개를 돌리지 않은 채로 살짝 끄덕였다. 해정의 아빠, 정원이 침대 끝에 걸터앉았다. 정원의 손이 흰 볼을 톡 건드렸다.

 “고등학교 3학년이나 된 녀석이 픽픽 쓰러지고 말이야. 이번 주만 해도 두 번째다, 너.”

 그 말은 계속 쓰러지는 이유에 대한 물음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원래 허약했으면 몰라도, 해정은 튼튼한 아이였다. 비록 초등학교 때까지는 키가 작았지만 중학교에 올라오고 나서부터 키도 쑥쑥 크기 시작했고, 비리비리했던 골격도 꽤 탄탄하다 싶을 만큼 커졌다. 뛰는 건 싫어하는 반면에 수영은 꽤 좋아해서 운동량이 부족한 것도 아니었다. 잔병마저도 없었다. 신경이 좀 예민했지만 정신에 지배당해 건강을 해칠 정도는 아니었다.

 그래서 정원은 더욱 요즘의 해정이 걱정이었다. 며칠 전, 촬영 중에 아들이 쓰러졌다는 말을 전해 들었을 때, 해정보다 승우를 먼저 떠올렸다. 승우는 독립을 한 이후부터 밥을 제대로 챙겨 먹지 않으니 그럴 가능성이 더 많았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쓰러진 건 해정이었다. 몸조심해. 처음에는 그 말만으로 충분했지만 얼마 안 되어 또 쓰러지고 마니 걱정이 안 될 리가 없었다.

 어젯밤 해정은 엘리베이터 안에서 쓰러졌다. 처음 해정을 발견한 사람은 그가 코피를 철철 흘린 채로 쓰러져 있었다고 말했다. 정원은 앰뷸런스를 부르는 대신 해정을 침대에 눕히고 의사를 불렀다. 의사는 스트레스 때문이라며, 병이 아니니 크게 걱정할 필요는 없다고 했다.

 “……나 얼마나 잤어요?”

 “지금 오후 한 시야.”

 “아빠는요.”

 “오늘 촬영 캔슬.”

 해정이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정적이 감돌았다. 정원은 방을 나가지 않고 해정을 빤히 내려 보았다. 의사의 말처럼 크게 걱정할 필요가 없다며 가벼이 넘기기에는, 해정은 아직 그 스트레스에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문득 해정이 피곤하다는 듯 손을 휘휘 내저었다.

 “……잘래요.”

 어떤 식으로 추궁하든지 간에 입을 열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정원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따 점심 먹을 거니까 부르면 자는 척하지 말고 나와.”

 “네.”

 문이 닫혔다. 해정이 “후우…….” 길게 숨을 내쉬며 상체를 일으켰다. 그리고 휴대 전화를 찾았다. 휴대 전화는 침대 옆 협탁 위에 놓여 있었다. 해정이 휴대 전화를 집어 익숙하게 동영상 사이트를 켰다. 역시 아무것도 없었다. 긴 손가락이 톡톡, 액정을 가볍게 눌렀다. 동영상 사이트가 꺼지고 팬카페가 켜졌다.

 일순 해정의 눈이 크게 뜨였다. 새로운 글이었다. 팬들이 자유게시판에 올린 글이 아닌, 공지 글이었다. 형이 올린 거다. 휴대 전화를 붙잡은 손이 잘게 떨렸다. 무언가가 올라왔다는 기쁨보다는 그만둔다는 통보식의 공지일까 싶어 불안했다. 손가락이 느리게 뻗쳤다.

[제목] 공지입니다.

[내용] 하이하이. 갑자기 말도 없이 잠수 타서 미안..

일부러 그런 건 아니고 갑자기 집안에 어르신이 쓰러지셔서 좀 정신이 없었어.

매니저를 통해 전달할 정신도 없었다.. 방송한 지 9년째인데 이런 일 첨이라 다들 당황스러웠지? 정말 미안하게 생각해..

방송은 내일부터 다시 제시간에 할 거야! 걱정하게 해서 진짜 미안. 내일 보자!

[댓글] 형.. 돌아올 줄 알았어... 현수형!!!!!!!!!!

[댓글] 내일봐ㅠㅠㅠ 흑흑.. 일주일이 일년 같았어..

[댓글] 킴하킴하!!ㅠㅠ 킴수형 이제어디가지마...

 해정은 댓글을 달지 않았다. 홀드 버튼을 누른 해정이 휴대 전화를 가슴팍 위에 올려 두었다.

 존재. 하나의 존재가 돌아온 것뿐인데 살 것 같았다. 묘하게 울렁거리던 것도, 지끈거리기 시작했던 머리도 잠잠해졌다. 별거 아니었어. 다시 돌아올 거였어. 해정은 스스로를 안심시키듯 그렇게 되뇌었다. 사실이다. 사실인데, 이상하게도 완전히 해결된 것 같지가 않았다. 뭔가 찜찜했다.

 오래 버티긴 했지. 그 사람은 단순히 방송을 할 뿐이야. 너랑 아무런 관계 없어. 알잖아? 응, 관계없어. 그 사람은 너의 존재도 몰라. 넌 그 사람을 붙잡을 수 없다는 거야. 얼굴도 모르는 주제에.

 어제의 괴물은 제게 미래를 가르쳤다. 그것에 대한 해결책은, 아무것도 없었다. 해정은 그것을 자각하고 있었다. 알 수 없었다. 관계의 끝은 예측할 수 없다. 아는 사람이라면 덜할 것이었다.

 차라리, 이 사람에 대해 무엇이라도 안다면. 모든 이가 다 아는 본명 같은 거 말고, 이 사람이 없어졌을 때에 찾을 수 있을 만한 어떤 정보. 이 사람에 대한 것. 꼬리를 잡을 수 있을 만큼이라도 안다면. 얼굴이라도 안다면, 전국을 이 잡듯 뒤져서라도 찾아낼 텐데.

 그러나 자신은 아는 게 아무것도 없다. 생각하자 별안간 머리에 번개가 내리쳤다.

 “……씨발……. 머리 아파.”

 해정은 자신이 더 이상 동경만을 품고 있지 않음을 깨달았다.  

* * *

 10월인데 벌써부터 쌀쌀했다. 으으. 추워. 현수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원룸 안은 금방 추워지고, 또 금방 더워졌다. 통풍 안 되는 데 말고, 좀 쾌적한 곳으로 이사 갈까. 현수는 이따금씩 그런 생각을 했지만 정작 실행에 옮기지는 않았다. 돈이 부족해서는 아니었다. 좀 귀찮을 뿐이었다. 남자 혼자 사는데 넓은 곳으로 가는 것도 쓸데없었다. 

 배가 고팠다. ‘치킨이나 시켜 먹을까.’ 현수는 생각하면서 벽시계를 바라보았다. 9시 반. 생방송 시작은 10시 반. 충분했다. 현수가 휴대 전화를 들었다. 

 “허니콤보 하나 갖다주세요. 카드로요.”

 「대광빌라 맞으시죠?」

 “네.”

 주문은 10초도 걸리지 않았다. 현수가 담요를 몸에 돌돌 두르고 의자에 앉았다. 오늘은 시청자들이 참여하는 방송이라, 일찍 들어가 미리 준비를 해 두어야 했다.

 ‘치킨 기다리는 동안 좀 할까.’ 현수가 컴퓨터를 켰다. 메신저에 들어가니 한 명이 미리 들어와 있었다. 노네임이라는 닉네임의 시청자였다. 알기로는 초등학교 때부터 봐서 지금 고등학교 3학년이라고 했던 것 같았다.

 현수가 노네임에게 대화를 걸었다.

[노넴아 하이]

[안녕하세요.]

[방송 기다리고 있는 거야?]

[네]

[오키오키 한 10시쯤에 다시 부를게 일단 겜 켜놔]

[네]

 꽤나 열혈 시청자임에도 불구하고, 노네임이라는 녀석은 항상 제게 담담하게 대했다. 그래서 현수는 며칠 전, 유행에 편승해 시청자 참여 게임이라는 콘텐츠를 시작할 무렵 노네임을 보았을 때 정말 자신의 팬이 맞나 싶었다. 제 팬들은 일반적으로 우악스러운 이미지였다. 다 그랬다. 시끄럽고, 무례했다. 그 가운데 별종처럼 유난히 침착하고 조용한 녀석이 노네임이었다. 노네임은 정말 조용히 게임만 했다. 게임 레벨이 낮은 걸로 보아 콘텐츠에 참여하고 싶어 계정을 만든 것 같았는데, 그런 것치고 설레는 기색조차 없었다. 특이한 녀석이었다.

 치킨은 생각보다 더 빨리 도착했다. 치킨을 먹고 나니 10시였다. 현수는 양치를 하고 컴퓨터 앞에 앉았다. 미리 고지했던 것과 같이 참여할 시청자들은 메신저와 게임에 들어와 있었다. 노네임도 마찬가지였다.

 노네임은 낮은 레벨인 것치고 꽤 잘했다. 총싸움을 할 때 흔히 말하는 ‘샷발’이 좋았다. 잘 쏘긴 했으나 문제는 현수와 대치를 하게 되면 현수를 쏘지 않고, 대신 자신이 죽었다. 방송 채팅창에는 [노네임 킴수 진짜 봐주네ㅋㅋㅋ], [팬심가득이네... 역시.. 킴덕..] 등의 말들이 빠르게 올라갔다.

 현수는 그게 곤란했다. 게임의 승패 유무보다 중요한 건 방송이었다. 팽팽하게 싸워야 재미있는 그림인데, 노네임은 자신과 싸울 마음이 없다는 듯이 굴었다. 

 방송은 새벽 2시에 끝이 났다. 현수는 방송이 끝난 후에도 여전히 온라인 상태인 노네임의 아이디를 빤히 바라보았다. ‘뭐라고 할까, 말까.’ 고민하던 게 무색하게 노네임에게서 대화가 걸려 왔다.

 [안 주무세요?]

 이것도 특이했다. 노네임은 고등학생 주제에 다른 성인 시청자들보다 더 어른스럽게 굴었다. 유행어를 쓰지도 않았고, 맞춤법도 잘 지켰다.

 현수가 잠시 고민하다가 타자를 두드렸다.

 [엉ㅋㅋ 난 원래 더 늦게 자 너 자야지 학교가야되잖아]

 적당히 대화를 하다가 스치듯이 말을 꺼낼 셈이었다. 현수의 말에 노네임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메신저에서 나갔나?’ 현수가 친구 목록을 확인했다. 아직 온라인 상태였다.

 [괜찮습니다.]

 진짜 딱딱하네. 현수가 픽 헛바람을 내며 웃었다. 뭐라고 해야 할지 고민하는 사이 노네임에게서 한 번 더 메시지가 왔다.

 [형]

 노네임의 목소리를 안다. 아주 조곤조곤하고 나긋한 목소리였다. 게임 중에도 줄곧 음성 채팅으로 ‘형, 형’ 하며 자신을 부르곤 했다. 활자만 보는데도 그 목소리가 떠올랐다. [응?] 현수가 짧게 타자를 쳤다.

 현수의 답이 돌아오자마자 노네임의 메시지가 떴다.

 [형이랑 가까워지려면 어떻게 해야 돼요?]

 “…….”

 아무리 TV에 나오지 않는 인터넷 방송을 한다 하여도 방송인과 팬의 암묵적인 거리 유지는 필요했다. 그리고 우악스러운 애정 표현을 하는 다른 시청자들도 그걸 알고 있었다. 기본적인 선이었다. 그걸 지금, 가장 잘 지키고 있었던 녀석이 넘어오려 하고 있었다. 

 현수는 당황했다. 두 번째로 든 생각은, ‘아, 얘 이러면 안 되는데.’였다. 사적으로 접근하는 것은 부담스러웠다. 그리고 안 될 일이기도 했다. 현수가 톡톡, 검지로 책상을 두드리다 이내 키보드에 손을 올렸다.

 [내 방송을 매일 보면 돼ㅋㅋ]

 [그런 거 말고요.]

 [후원을 맨날 만원씩 쏴ㅋㅋㅋ]

 장난식으로 무마하려는 셈이었다. 사적으로 접근은 삼가 줘, 라고 말하기는 힘들었다. 옛날부터 봐 왔던 시청자이기도 했고, 또 어린애에게 그렇게 차갑게 말하기도 꺼려졌다. 현수의 메시지에 노네임은 잠시 말이 없었다.

 2분 후, 메시지가 대화창에 떴다.

 [후원 많이 하면 전화번호라도 주나요?]

 그 말에 현수는 얘가 지금 장난치는 건가, 싶었다. 키읔이나 웃는 이모티콘이나 그런 것 하나 들어 있지 않았지만 그럴 가능성도 있었다.

 “으음…….”

 급기야 헷갈리기 시작한다. 인터넷상의 말투가 워낙에 딱딱한 녀석이다. 그러니까, 농담도 이렇게 한 것뿐인데 자신이 진담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걸지도 몰랐다.

 ……그래. 장난이겠지. 암만 어리다고 해도.

 더욱이 생각해 보니 고등학생이 많이 한다 해도 만 원 이상 후원하는 것은 무리일 것 같았다. 현수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음. 그러네. 장난이네, 장난이야.

 [그래 ㅋㅋ]

 결국 현수는 그렇게 메시지를 보냈다. 10초도 안 되어 노네임이 [알겠습니다. 오늘 밤에 봬요.] 했다. 그리곤 바로 메신저를 나갔다. 꼭 이것만이 목적이었던 듯한 태도다.

 현수가 오프라인으로 표시된 노네임의 아이디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잠시 후, 고개를 느리게 내저었다.

 장난이야, 장난.

* * *

 현수가 일어난 건 휴대 전화 벨소리 때문이었다. 더듬더듬 베개 위를 짚던 손이 이내 휴대 전화를 쥐었다. 실눈으로 휴대 전화 액정을 바라본 현수가 이름을 확인했다. 이정호. 익숙한 이름이었다. 곧게 뻗은 손가락이 통화 버튼을 눌렀다.

 “아침부터 무슨 일이야…….”

 「아침 아니야. 산 탈래? 오늘 날 좋다.」

 “죽어, 진짜. 이상한 말 할 거면 끊는다.”

 「오키 오키. 장난이고, 나 지금 너네 집 다 와 가거든?」

 현수가 인상을 찌푸렸다. 

 “아, 왜…… 다시 돌아가, 쫌.”

 정호는 답이 없었다. 현수가 다시 실눈을 뜨고 휴대 전화를 확인했다. 전화가 끊겨 있는 건 아니었다. 별안간 원룸 안에 초인종 소리가 울렸다. 현수가 고통스러운 신음을 내며 베개에 얼굴을 비볐다. 귀찮아, 귀찮아.

 쾅쾅쾅. 철문을 대차게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야아. 김현수. 열어 줘어.” 문 너머와 휴대 전화로 동시에 정호의 목소리가 들렸다. 현수가 베개에 턱을 괴고 “하아…….” 체념한 듯 한숨을 내쉬었다. 

 “기다려.”

 연신 쾅쾅 두드리는 소리가 짜증 나 소리를 지르자 주먹질이 멈추었다. 현수가 까치집이 된 머리를 박박 긁으며 문을 열었다. 정호는 실실 웃는 얼굴로 치킨을 들고 있었다.

 “어제도 먹었어. 안 사요.”

 현수의 목소리가 냉정하게 떨어졌다. 다시 문을 닫으려 하자 사이로 정호의 손이 불쑥 들어왔다. “아, 진짜 까칠하시네, 이분.” 정호가 툴툴대며 문 틈새를 벌렸다.

 현수가 뒤돌아 다시 침대 쪽으로 걸어갔다. 등 뒤로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신발을 벗은 정호가 치킨을 부엌 조리대에 두고 현수를 졸졸 쫓아갔다. 현수가 다시 자려는 듯 이불을 들추며 침대에 오르자 홀랑 정호가 몸을 비비며 저도 같이 이불 안에 들어왔다.

 “야, 불편해. 이거 싱글이야. 꺼져.”

 “킴수 님. 벌써 주무시게요? 놀자.”

 정호가 현수의 팔을 살짝씩 꼬집으며 살갑게 굴었다. “아, 아파. 아프다고.” 짜증을 내며 몸을 비틀던 현수가 상체를 일으켜 정호를 세게 밀어냈다. 

 “가!”

 “어? 벌써 잠 깬 것 같은데.”

 사실이었다. 현수가 씩씩대며 정호를 보았다. “잠 깬 거 맞지?” 정호가 실실거리며 말했다. 현수는 대꾸하지 않고 침대를 벗어났다.

 ‘하여간 능구렁이 같은 놈.’ 고등학교 때부터 늘 이런 패턴이었다. 현수가 이를 갈며 냉장고를 열어 생수를 들이켰다. 어느새 침구 정리까지 한 정호가 현수 쪽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아까 두었던 치킨 봉지를 들어 올렸다.

 “먹을 거지?”

 현수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좌식 상을 폈다. 정호가 낄낄 웃었다.

 정호에 의해 강제로 기상한 현수는 정호가 가져온 DVD를 보고, 또 플레이스테이션을 하다가 해가 질 때쯤에는 족발을 시켜 먹었다. 정호는 오늘 하루 현수의 집에 눌러앉을 셈이었다. “그러고 보니, 오늘 일 쉬어?” 현수의 물음에 정호는 시선을 TV에 둔 채 고개를 끄덕였다.

 “월차 냈어.”

 “왜?”

 “너무 피곤해서.”

 현수는 군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회사원의 고충은 잘 모르는 영역이었다. 현수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대학에 가지 않고 그대로 인터넷 방송을 시작했다. 현수에게는 인터넷 방송이 곧 생계 수단이었다. 그 불안전한 길을 유일하게 응원해 준 주변인이 정호였다. 

 현수가 시간을 확인했다. 오후 10시였다. ‘슬슬 방송 준비해야겠다.’ 현수는 생각하며 하루 종일 눌어붙어 있던 소파에서 일어났다. 비척비척 컴퓨터 앞에 앉으니 현수를 따라온 정호가 다른 의자를 끌어 현수의 옆에 앉았다.

 “왜.”

 “너 방송하는 거 오랜만에 구경 좀 하게.”

 “그러든지.”

 방송 세팅을 마친 현수가 방송을 켰다. 이제는 아는 사람 앞에서 방송하는 게 부끄럽지도 않았다. 정호가 싱글벙글 웃으며 채팅창을 구경했다. 빠르게 올라가는 채팅창도 재밌는지 모니터에서 눈을 떼지 않는다. 

 “안녕하세요, 여러분.”

 현수가 첫 멘트를 말한 것은 방송이 켜지고 1분 후였다. 그리고 현수의 멘트 직후, 후원이 들어왔다는 알림이 떴다. 현수가 마우스를 딸깍이며 후원을 확인했다. 

 “…….”

 “……뭐야?”

 옆에서 같이 보고 있던 정호가 내뱉은 말이었다. 현수는 놀라 아예 말을 잇지 못했다.

 후원금의 금액은 천만 원이었다. 다시 세어 보아도 숫자 1에, 0이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일곱 개. 천만 원이 맞았다. 채팅창은 날아갈 것처럼 빠르게 올라갔다. 역대 최고로 빠른 채팅이었다. 현수가 침을 꼴깍 삼키며 후원 메시지를 확인했다. 

 [이 정도면 돼요?]

 후원자의 이름은 노네임이었다.

 “…….”

 등 뒤로 땀이 삐질 흘렀다. 현수가 잠시간 말이 없자, 채팅창에서는 우는 것이냐며 현수를 놀렸다. [근데 노넴님 학생아님..?ㄷㄷ] 하는 채팅들이 간간이 올라왔으나 금방 묻혔다. 모두가 후원자보다는 후원 금액에 신경 쓰고 있었다.

 잠시 후 툭, 정호가 현수의 팔꿈치를 쳤다. 현수가 고개를 돌려 정호를 보았다. 말해. 정호가 입을 벙긋거렸다. 무엇이든 말하라는 의미였다. 현수가 아차, 하며 마이크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 아……. 노네임님 정말 감사드립니다. 이런 큰 후원 진짜 9년 동안 방송하면서 처음인데……. 이거 제가 받아도 될는지……. 감사드립니다. 와, 원래는 되게 유쾌한 리액션 해 드리는데 너무 액수가 커서요, 당황해서……. 감사합니다.”

 몇 분간 현수는 감사하다는 말만 멍청하게 되뇌었다. 채팅창에는 [ㅋㅋㅋㅋㅋ킴수 진지해졌네] 하는 둥의 말들이 올라왔다. 노네임은 아무 말이 없었다. 상황이 정리된 건 10분이 지나서였다.

 방송이 끝난 후, 현수는 의자에 늘어지듯 등을 기댔다. 열두 시 반. 오늘은 방송을 일찍 껐다. 온몸에 힘이 쭉 빠지는 느낌이었다. 정호는 “대박, 대박.”을 외치며 술 마시러 가자고 현수를 꼬드겼다. 현수가 눈만 도록 굴려 그를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그거, 돌려줘야 할 것 같아.”

 “뭐?”

 현수의 말에 정호가 이해가 안 된다는 듯 얼굴을 와락 구겼다. 정호를 지친 눈으로 바라보던 이내 현수가 허리를 세워 의자에 바로 앉았다. 그리고 메신저를 켰다.

 “걔 학생이야.”

 “어?”

 “천만 원 후원한 애. 고등학생이라고.”

 설명을 덧붙이자 정호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눈이 깜빡거렸다. “진짜로? 사기 친 거 아니야?” 정호의 말에 현수가 ‘차라리 그런 거면 좋겠다.’ 생각하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씨튜브 댓글에서나, 방송 채팅에서나 7년 전부터 자주 보이던 녀석이었다. 7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제 나이를 속일 리가 없었다. 더욱이 속일 이유도 없었다.

 “그럼 돈은? 부모님 걸로 긁은 거 아니야? 천만 원이 긁히긴 하나?”

 “……그러니까, 환불해 줘야 된다고.”

 현수도 정호와 같은 생각이었다. 친구 목록을 확인했다. 노네임이 들어와 있었다. 현수가 망설임 없이 대화창을 켰다.

 [야]

 [네]

 노네임은 기다렸다는 듯이 즉시 답을 했다. 정호가 의자를 끌어 모니터 쪽으로 몸을 가까이 했다. “얘야?” 정호의 물음에 현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뭐라고 하게?”

 정호가 또 물었다. 현수는 대답 대신 키보드를 두들겼다.

 [너 대체 뭐야 천만ㄴ원 그거 부모님돈 아니야/? 너고등학생이잖아]

 노네임은 잠시 말이 없었다. 현수는 대답을 재촉하지 않았다. 만약 노네임이 맞다고 인정한다면, 다음부터 그러지 말라고 조금 훈계를 한 후 환불을 해 줄 예정이었다. 아깝긴 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철없는 아들을 둔 부모님의 돈을 자신이 아무렇지 않게 주워 먹을 정도로 염치없지는 않았다. 게다가, 천만 원이다.

 [제가 오늘 형에게 후원한 돈이 제 부모님 돈이라는 거예요?]

 노네임의 메시지였다. 기다, 아니다, 라는 답 대신에 노네임은 다시 현수에게 물었다. 현수의 메시지와 달리 노네임의 메시지는 흐트러짐이 없었다. 그래서 글만 보면 녀석이 무슨 감정을 가지고 있는지 가늠하기가 힘들었다.

 메시지를 보내기도 전, 노네임에게서 한 번 더 메시지가 왔다.

 [맞아요. 아빠 카드로 긁었어요.]

 “하.” 현수가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옆에 있던 정호는 재미있다는 듯 낄낄 웃었다. “야, 얘 골 때린다. 존나 당당하네.” 그 말에 현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동의했다. 진짜 골 때리는 놈이다.

 [환불해줄게.]

 더 이상 고민할 것도 없었다. 일이 더 꼬인다면 이걸 알게 된 녀석의 아빠가 자신에게 연락을 해 올지도 몰랐다. 아니, 이 정도의 거액이면 분명 연락을 해 올 것이었다. 현수가 인터넷을 켰다. 그리고 후원 목록을 눌렀다. 이내 반짝반짝, 작업 표시줄의 메신저 아이콘이 노랗게 빛났다. 알림이었다. 현수가 메신저를 띄웠다. 

 [그럼 다시 보낼 거예요.]

 [계속]

 [100만 원씩 연달아]

 이상하게 기분이 나빴다. 왜 이렇게 집착하는 거지. 꼭 어린아이가 바득바득 우기는 것 같았다. 여태까지 봐 왔던 녀석과는 조금 달랐다.

 “…….”

 “야, 얘 좀 이상한 듯. 관종 아니야?”

 정호가 약간 질린다는 목소리로 말했다. 현수도 마찬가지였다. 조금 이상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왜 이렇게 후원을 받으라고 하는 건데? 고딩이면 사리 분별은 할 나이인데…….” 정호가 이어서 말했다.

 현수가 뒷머리를 긁으며 마우스 휠을 위로 올렸다. 새벽의 메시지가 화면 위로 떠올랐다. 정호가 중얼중얼, 현수와 노네임의 대화를 따라 읽더니 이윽고 경악에 찬 얼굴로 현수를 바라보았다.

 “얘 그럼, 지금 네 번호 받으려고 이러는 거?”

 “그런가 봐.”

 “넌 장난인 줄 알았어?”

 “당연하지.”

 현수와 정호가 이야기하는 사이, 노네임에게서 한 번 더 메시지가 왔다.

 [차단하면]

 [아이디 또 만들면 되고.]

 그 메시지를 읽은 현수는 아닌 척 입을 꾹 다물고 있었으나 사실은 등과 뒷목까지 소름이 끼쳤다. 정호도 마찬가지인 모양인지 “히익.” 숨을 삼키는 소리를 내었다. 

 “야, 저거 완전 미친놈이네. 그냥 차단해.”

 정호가 말했다. 더 이상 볼 것도 없다는 말투였다. 현수도 마음 같아서는 당장에 그러고 싶었으나, 논란이 될 게 걱정되었다. 아니, 논란이 될 게 분명했다. 거액을 후원한 시청자를 블랙리스트에 추가한 스트리머. 악플이 달리고, 안 좋은 소문이 퍼질 수도 있었다. 좋아하고 믿어 주는 사람들은 계속 남아 있겠지만 전반적인 이미지는 긍정적이지 않을 것이었다. 더욱이 왜 그랬느냐고 사람들이 달려들어 묻는 상상을 하니 벌써부터 머리가 아파 왔다. 

 [일단 환불해 줄게]

 [그리고 번호 줄게 됐지?]

 ‘차라리 그깟 번호 하나 주는 게 나아.’ 현수는 생각했다. 큰일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 “야!” 정호가 뭐 하냐는 듯 소리를 쳤다. 현수가 이마를 짚으며 손을 휘휘 저었다. 

 “이게 나아. 이게 최선책이야.”

 “아, 저 새끼 좀 이상한데.”

 정호가 찝찝하다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래 봤자 고삐리야. 여친이라도 생기면 금방 흥미 가시겠지.”

 그렇게 말은 했지만, 사실 현수 또한 불안했다. 현수는 다시 인터넷 창을 띄우고 환불을 진행했다. 정호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예감이 안 좋다고 재차 중얼거린다.

 잠시 후, 환불을 완료한 현수가 한숨을 폭 내쉬며 인터넷 창을 닫았다. 그리고 메신저를 켜 노네임에게 제 번호를 전송했다. 정호가 더 크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안 좋아. 무척 안 좋아.”

 “도사냐?”

 “저 새끼가 이상한 거 보내면 그냥 번호 바꿔 버려.”

 정호의 말에 현수가 고개를 끄덕이며 컴퓨터를 껐다. 피곤했다. 

* * *

 결국 알 수 없는 녀석에게 전화번호를 주고 말았던 새벽에 현수는 어렴풋이 더 피곤한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느꼈다. 하지만 그 불안감이 기우이기를 바랐다.

 사실 연락을 해도, 대충 안부를 묻는 식의 문자만 보내는 것이라면 그럭저럭 받아 줄 수는 있었다. 고등학생과 문자 친구가 되는 취미는 없으나 그렇다고 못 견딜 정도는 아닐 것이다. 현수는 그렇게 짐작했다.

 [형 이렇게 생겼구나.]

 녀석의 첫 번째 메시지였다. 녀석은 문자가 아닌, 스마트폰용 메신저 앱으로 연락을 했다. ‘서해정’이라는 이름으로 온 메시지였다. 프로필 사진은 없었고, 이름도 낯설었지만 현수는 서해정이 노네임의 본명이라는 것을 직감했다. 현수는 친구 추가 버튼을 누른 뒤, 곧장 제 프로필 사진을 삭제했다.

 [이미 캡처 했는데.]

 그 메시지에 현수가 인상을 찌푸렸다. 묘하게 스토커 기질이 있는 놈이었다.

 [유포하지마]

 [설마요. 나만 볼 건데]

 그 뒤로 며칠간 현수는 해정과 계속 메시지를 주고받았다.

 기본적으로 서해정은 늘 저런 식이었다. 조금 부담스럽고, 조금 많이 질척거리는 메시지들은 끝도 없이 이어졌다. 해소되지 못한 불쾌감은 현수도 모르는 사이에 마음 한구석에 계속 쌓였다. 조신하게 굴다가 갑자기 가면을 벗은 것처럼 성격이 바뀐 녀석에게 약간의 배신감마저 느끼던 중이었다.

 [오늘 날 좋은데 어디 놀러 가요?]

 그리고, 해정에게 번호를 준 지 일주일이 되던 날이기도 했다. 오후 한 시. 어김없이 해정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현수는 그 메시지를 빤히 내려 보다가 홀드 버튼을 눌렀다. 답을 하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한 게 아니었다. 잠시 후에 답을 하려고 했을 뿐이었다. 손가락을 꿈쩍도 하기 싫기도 했고, 파도처럼 끝없이 몰아닥치는 메시지가 조금 질렸던 까닭도 있다. 현수는 여태껏 누군가와 이렇게 하루 종일 메시지를 이어 간 적이 없었다. 여자와도 없었다.

 현수는 대충 시켜 먹은 배달 도시락을 현관 앞에 내려 두고, 이를 닦은 후 침대에 누웠다. 휴대 전화는 책상 위에 올려 둔 상태였다. ‘답장해야지. 그 미저리 녀석에게 답장해 줘야지.’ 머릿속으로 그런 생각은 계속 하고 있었는데, 오후의 햇볕이 내리쬐고 배까지 부르니 야금야금 오던 졸음이 갑자기 덮치듯 몰려왔다. 다시 일어나서 책상까지 가기가 귀찮았다. 침대 옆 창문을 통해 바람이 불어왔다. 앞머리가 사락 넘어가는 게 기분 좋았다. 현수가 눈을 감으며 이불을 코 밑까지 끌어 올렸다. 

 답장해야지.

 일어나야지, 짧게 답장만 하고…….

 답장을…… 아, 귀찮아…….

 “…….”

 삐리릭! 삐리릭!

 “헉!”

 감겨 있던 눈이 번뜩 뜨였다. 언제 잤었는지 기억을 하지 못할 정도로, 여기가 어디고 오늘이 며칠인지 잠시 가늠하지 못할 정도로 깊게 잠이 들었던 모양이다. 멍청하게 천장을 바라보며 눈을 깜빡이던 현수가 이내 고개를 살짝 가로저었다.

 삐리릭! 삐리릭! 현수의 잠을 깨운 벨소리는 여전히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소리는 책상 쪽이었다. ‘아, 핸드폰이구나.’ 현수는 그제야 시끄러운 기계음이 전화 벨소리인 것을 깨달았다. 

 황급히 일어난 현수가 책상을 향해 걸어갔다. 전화 벨소리는 한 번 끊기더니, 다시 무서운 기세로 울리기 시작했다. 바깥은 아직도 환했다. 현수가 휴대 전화를 집어 들었다. 모르는 번호였으나, 070으로 시작되는 번호는 아니었다. 휴대 전화 번호였다. ‘스팸은 아닌가.’ 현수는 생각하며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목소리가 갈라졌다. 현수가 곧바로 큼큼, 목을 가다듬었다. 상대방은 답이 없었다. 계속 기다려도 답이 없었다. 현수가 눈을 깜빡이며 액정을 바라보았다. 통화 중이었다. 휴대 전화의 액정이 다시 현수의 귀에 붙었다.

 “여보세요?”

 「왜 답장 안 해요?」

 싸늘하고 낮은 목소리였다. 혼내듯이 튀어나온 말에 현수는 저도 모르게 어깨를 움칠 떨었다. 어디선가 들어 본 목소리인 것 같기도 했다.

 「왜 답장을 안 하냐고요.」

 노네임. 서해정이다. 현수는 깨달음과 동시에 아까 잠들기 전, 녀석의 메시지에 답장을 하려고 했던 것을 기억했다. 

 “잠깐 잤어.”

 현수는 잘못 없다는 듯 당당한 말투로 답했다. 그래도 찝찝했다. 자신이 변명을 하는 상황이었다. 애초에 무슨 사이도 아닌데 답장이 없다고 전화하고 화내는 녀석이 이상한 거다. ‘남이야 답장을 하든 말든 시시콜콜한 말들에 대답해야 할 의무가 내게 있냐고.’ 현수는 쏟아지는 불만들을 삼켰다. 열 살 어린 녀석에게 화를 내는 것도 썩 좋은 방향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 탓이었다.

 해정은 현수의 말이 끝나자마자 전화를 끊었다. 무례하고 신경질적이었다. 웅성거리던 주변 소음이 불현듯 뚝 멎는다. 현수가 액정을 확인했다. 끊어진 게 맞았다. 그리고 지금 시간은 3시 14분이다. 깊게 자서 오랜 시간 잔 것같이 느껴졌지만, 고작 두 시간이었다. 현수가 메신저 앱을 켰다. 해정에게 온 메시지는 200통이 넘었다. 

 [놀러 가요 형?]

 [놀러 가냐고요.]

 [1이 없어졌는데 왜 대답이 없지.]

 [이제 안 없어지네.]

 [일부러 안 봐요?]

 처음에는 이런 식이었다. 해정의 메시지는 점점 시간의 간격을 좁혔다. 현수가 스크롤을 크게 내렸다. 하나하나 보기도 싫었다. 채무자를 쫓는 사채업자가 따로 없었다. 빠르게 내리니 어느새 마지막 메시지가 보였다. 5분 전, 전화하기 직전의 메시지였다.

 [현수 형]

 뭐라고 메시지를 보내야 하지. 현수는 잠시 고민했다. 그렇게 고민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메시지를 보내기 싫다는 마음이 들었다.

 점점 놈에게 말려드는 기분이었다. 두 시간의 공백 동안 200통이 넘는 메시지를 보낸 것도, 다짜고짜 전화해서는 왜 답장을 안 하느냐고 화를 내는 것도, 분명 놈은 도가 넘는 짓을 하고 있었다. 도를 넘는데도 뻔뻔했다.

 왜? 대체 왜. 현수는 스스로에게 원론적인 생각을 요구했다. 더 이상 수동적인 태도로 될 대로 되라, 하다가는 끝이 없을 것 같았다. 번호를 준 것뿐, 자신에게는 해정의 메시지에 계속 답장을 해야 할 의무가 없었다.

 차라리 대놓고 사이코 짓을 했으면 괜찮았을지도 몰랐다. 아예 미친놈 취급을 하고 무시하면 되는 거였는데, 또 그건 아니었다. 놈은 서서히, 그렇지만 느리지는 않게 점점 제 영역을 침범하고 있었다. 

 현수가 빤히 휴대 전화를 노려보았다. 별안간 해정의 메시지가 화면에 떴다. 앱을 켜고 있던 탓에 곧바로 1이 없어졌다.

 [답장 좀 재깍재깍 해 줘요.]

 [불안하잖아요.]

 [형]

 [네?]

 10초도 안 되어 연달아 온 메시지들이었다. 뻔뻔히 애인 행세를 하는 게, 정말 스토커 같았다.

 스토커.

 현수는 다시 한 번 그 단어를 떠올렸다. 문득 손과 발끝이 얼어붙는 것처럼 싸늘해졌다. 내가 잘못 생각했어. 잘못 생각하고 있었을지도 몰라. 현수는 생각했다.

 처음부터 이렇게 하도록 두면 안 되었다. 같은 남자여서 너무 위기감이 없었다. 자신도 강경하게 대해야 했다. 큰일을 막으려다, 더 큰 일이 날 수도 있다. 

 “……스토커…….”

 스토커 같은 게 아니라, 스토커 같은 면모 따위가 있는 게 아니라, 정말 녀석은 스토커가 될 수도 있다.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해정아]

 현수의 메시지에 해정은 1분간 답이 없었다. 느닷없이 제 본명을 부르는 현수가 당황스러운 모양이었다.

 [네]

 해정의 대답을 확인한 현수가 손가락으로 액정을 꾹꾹 눌렀다. 문장을 쓰는 와중에도, 과연 제 대처가 잘한 일인지 현수는 계속 고민했다. 그렇지만 다른 방안은 생각나지 않았다. 녀석의 말은 활자로만 보면 대체 어떤 기분으로 쓰는 건지, 농담인지, 진담인지, 화난 건지, 아니면 좋은 건지 가늠할 수가 없었다. 그러니까

 [만나자. 만나서얘기좀하자.] 

 이 방법밖에 없었다. 

 엄지손가락이 전송 버튼을 눌렀다. 메시지가 위로 떴다. 바로 1이 사라졌다. 

 [네.] 

* * *

 새하얀 피부는 광택까지 나서 멀리서 보아도 튀었다. 길고 풍성한 속눈썹은 꼭 뷰러로 올린 것처럼 둥근 곡선을 그리며 올라가 있었다. 아래 속눈썹도 길고 풍성하긴 마찬가지였다. 눈 위에 그어진 쌍꺼풀은 두껍지 않고 적당히 얇게 그어져 있었고, 눈매는 강아지보단 고양이에 가까웠는데, 앙칼지다는 느낌보다는 온순하고 청순했다. 무표정일 때는 새초롬했다. 눈동자는 평범한 다갈색이었으나 미용 렌즈를 낀 것같이 테두리가 선명하고 컸다. 그 위에 물기까지 그렁그렁해서 꼭 인형 같았다. 높고 날렵하게 선 콧대 아래로 특히 위가 도톰한 입술은 항상 꾹 다물려 있었다.

 그렇게 예쁜 얼굴이 웃었다. 멍하니 해정을 바라보던 여름이 깜짝 놀라 볼을 붉혔다. 웃으니까 더 예뻤다. 입만 웃는 게 아니라, 정말 눈까지 휘어 웃는 웃음이었다. 저절로 탄성이 나와 손으로 입을 막았다.

 휴대 전화를 보던 해정이 고개를 들었다. 거리가 있지만, 정면에는 여름이 있었다. 여름이 입을 막고 있던 손을 들어 어색하게 인사했다. 해정이 고개를 끄덕이며 저도 손을 들었다. 그것으로도 여름은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만나자. 만나서얘기좀하자.]

 조금 전 해정이 보고 웃었던 메시지였다.

 해정은 바로 네. 하고 답장을 보내었다. 그는 영리하고, 눈치도 빨랐다. 어려서부터 이부 형의 눈치를 살피곤 했던 해정이 지금 현수의 속내를 눈치 못 챌 리가 없었다.

 질린다.

 분명 현수는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었다. 당연한 감정의 인과였다. 해정은 다 알면서도 멈출 수 없을 뿐이었다. 이렇게 하면 현수 형이 싫어하겠지. 얼굴도 모르는데 이런 말 하면 꺼림칙해하겠지. 다 염려하고 있었지만, 그와 상관없다는 듯 손가락이 제멋대로 움직였다. 형의 방송을 기다리지 않고도 형을 느낄 수 있는데 메시지를 보내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해정은 현수가 저를 이상하게 여기는 것조차 좋았다. 자신을 생각하는 형을 생각하면, 저절로 사랑스럽다는 감정이 느껴졌다. 신기한 경험이었다.

 두 시간 동안 연락을 하지 않았던 현수 탓에 바닥을 쳤던 기분은 다시 상승 곡선을 탔다. 만난다. 현수의 얼굴을 본다. 그 사실만으로도 붕붕 하늘 위를 떠다니는 기분이었다. 번호를 저장한 후, 메신저 앱으로 현수의 계정을 찾았을 때, 현수의 프로필 사진을 보았을 때의 희열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학교 종이 울렸다. 해정의 대답에 현수는 잠시 말이 없었다. 해정은 휴대 전화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사물함을 닫았다. 그리고 교과서를 품에 안고 자리로 걸어갔다.

 [너 어디살아]

 그 순간, 현수의 메시지가 왔다. 해정이 다시 웃었다.

* * *

 해정은 현수에게 [제가 형 동네로 갈게요.]라고 했으나 현수는 끝까지 거절했다. 거절의 이유는 말하지 않았지만 대강 양쪽 다 인지하고 있는 부분이었다. 해정의 동네는 현수의 집과 멀지 않았다. 같은 서울권이었다. 슬쩍 떠보듯 해정은 현수에게 [형 집이랑 가깝죠?] 하고 물었으나, 그는 말을 돌려 날짜를 통보했다.

 약속 장소는 제 집과 멀지 않은 곳이었다. 신사동의 유명한 카페였다. 해정은 약속 시간 한 시간 전부터 나와 파인애플 주스를 마시고 있었다. 두 잔째였다. 해정은 테라스에 앉아 다리를 꼰 채로 밖을 내다보았다. 칠부 소매의 흰 티셔츠와 청바지, 또 학생들이 많이 신는 스니커즈를 신었을 뿐인데 얼굴이 워낙 튀는 바람에 사람들은 그의 얼굴을 힐끗힐끗 바라보며 지나갔다.

 해정이 테라스에 앉은 이유는 제 외모를 자랑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현수를 알아보기 위함이었다. 혹시라도 현수가 카페 근처까지 오다가, ‘이건 좀 아니야.’ 하는 생각이 들어 뒤를 돌아 가 버리면 붙잡아야 했다.

 이내 해정이 휴대 전화를 들어 시간을 확인했다. 약속 시간은 2시였고, 지금은 1시 43분이다. 해정이 의자에 파묻힌 허리를 바로 세워 테이블 위에 팔꿈치를 얹고 턱을 괴었다. 그리고 손가락으로 제 볼을 톡톡 두드리며 밖을 바라보았다.

 “어…….”

 그리고 그 순간, 빠른 걸음으로 누군가가 테라스를 지나쳤다. 그리고 테라스 옆의 카페 문을 열었다. 해정이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보았다. 일순간에 꼬고 있던 다리가 풀린다. 권태로웠던 해정의 눈이 반짝거렸다.

 딸랑. 종소리를 내며 카페 문이 열렸다. 들어온 것은 현수였다. 조금 헐렁한 남색 스트라이프 남방과 그 아래에 입은 흰색 반팔 티, 청바지. 컨버스 소재의 스니커즈. 역시 평범한 차림이었으나 해정은 눈을 뗄 수가 없었다.

 “…….”

 실물. 김현수의 실물.

 그 사실만으로도 온몸의 피가 더 빠르게 도는 것 같았다. 해정의 양 볼 위로 붉게 홍조가 번졌다. 현수는 들어오자마자 커피를 주문했다. 그리고 직원이 커피를 만드는 동안 뒤를 돌아 휘휘 대충 카페 내부를 돌아보았다. 누군가를 찾는 눈이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해정과 현수의 눈이 찰나에 마주쳤다. 현수의 눈은 금방 다른 쪽으로 돌아갔다.

 “…….”

 당연한 일이다.

 형은 내 얼굴을 모르니까, 당연한 일이야.

 그걸 안다. 아는데도 울컥, 작게 신경질이 났다. 해정이 손톱을 물어뜯으며 벌떡 일어섰다. 처음 현수를 발견했을 때의 얼굴이 삽시간에 변해 있었다. 해정은 차갑게 식은 얼굴을 한 채 걸음을 뗐다. 그사이, 현수가 시킨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픽업대에 놓였다.

 “연하게 한 아이스 아메리카노 나왔습니다.”

 직원이 현수를 향해 말했다. 현수가 뒤를 돌아 픽업대 앞에 섰다. 내부를 둘러보니, 카페 안에 서해정으로 추정되는 사람은 없었다. ‘내가 20분 정도 빨리 왔으니 아직 안 오긴 했겠다.’ 현수는 그렇게 생각하며 테이크 아웃 잔에 담긴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쥐었다. 직원이 컵 뚜껑의 구멍에 빨대를 꽂아 주었다.

 “감사합니다.”

 현수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했다. 그리고 등을 돌렸다.

 “…….”

 “…….”

 눈앞에 누군가가 서 있었다. 지나치게 가까운 거리에 현수가 반사적으로 뒤로 물러섰다. 고개를 들어 얼굴을 확인한다. 아까 잠깐 눈이 마주쳤던 남자였다.

 카페 안에서 유일하게 혼자 앉아 있긴 하였으나 현수는 이 남자가 절대 서해정일 리 없다고 생각했다. 이목구비 자체는 고등학생이라 하기에 무리가 없었지만, 학생 특유의 투박한 느낌이 없었다. 전체적으로 풍기는 분위기가 20대 초반의 대학생 같았다. 만약 미성년자라 한다면 모델이나 연예인일 것이다. 그만큼 남자는 도회적인 느낌이었다. ‘모르긴 몰라도 연예인일 것 같아.’ 조금 전, 그런 생각이 스치기는 했었다.

 그런 남자가 저를 빤히 내려 보고 있었다. 얼어붙은 표정 탓인지, 혹은 남자의 분위기 탓인지 저를 내려 보는 게 꼭 깔보는 것같이 느껴졌다. 현수가 남자의 시선을 피하며 옆으로 비켜섰다.

 “지나가세요.”

 퉁명스러운 말투였다.

 그 말이 들렸음에도 해정은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는 것에 더 가까웠다. 가까이서 본 현수의 얼굴은 정말 황홀하다는 표현이 걸맞았다. 객관적으로 보면 특별히 잘난 데도, 모난 데도 없는 얼굴이었지만 단정한 눈매와 긴 입술이 눈을 끌었다. 비단 그것뿐만이 아니더라도 그랬다. 7년 동안 상상해 보곤 했던 얼굴. 그리고 일주일간 화면으로만 수도 없이 보았던 얼굴.

 “현수 형.”

 해정이 현수의 이름을 불렀다. 현수의 눈이 놀란 듯 커졌다. “현수 형.” 해정이 다시 한 번 불렀다. 불러도, 불러도 지겹지가 않았다. 계속 부르고 싶었다. 어떨 때는 ‘왜 이름도 김현수지.’ 하는 멍청한 생각을 하며 끙끙 앓은 적도 있었다.

 “아……. 어…….”

 현수는 당황했다. ‘진짜, 이 남자가 노네임…… 아니, 서해정이라고?’ 현수가 눈을 빠르게 깜빡이며 해정을 올려 보다가, 이내 주변을 둘러보았다. 사람들과 직원들의 시선이 이쪽을 향해 있었다.

 “……일단 앉아서 얘기하자.”

 계속 현수를 향해 시선을 고정한 채로, 해정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차가웠던 표정은 온데간데없이 톡 건들면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현수가 해정이 앉아 있었던 테라스 쪽 자리로 걸음을 옮겼다. 해정이 현수를 따라 걸었다. 현수를 따라 원래 앉던 자리에 앉는 그 순간에도, 그의 시선은 접착제라도 붙여 놓은 양 떨어질 줄을 몰랐다. 괜스레 머쓱한 기분에 현수가 뒷목을 긁적였다.

 “내 얼굴에 뭐 묻은 건 아니지?”

 “성형했어요?”

 해정이 느닷없이 물었다. ‘뭔 소리야.’ 현수가 고개를 저었다.

 “이게 한 얼굴로 보여?”

 현수는 그러는 해정이야말로 성형을 하지 않았을까 싶었다. 부자연스러운 구석이 있는 건 아니었는데, 평범한, 제 방송을 보는 보통의 고등학생치고는 너무 잘난 얼굴이었다. 솔직히 좀, 아까울 정도로.

 “근데 어떻게 그렇게 잘생겼어요?”

 “뭐?”

 “진짜 잘생겼어. 그러면서 귀엽기도 하고…….”

 해정이 감탄하는 말투로 중얼중얼 말을 이었다. 진심인 듯한 목소리였으나, 저런 얼굴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자신에게 그런 소리를 하니 신빙성이 없었다. ‘놀리는 건가.’ 그런 생각마저 들었다.

 너 나 놀리는 거지, 라고 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잠자코 빨대를 집은 현수가 쪼록,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셨다. 홀린 듯 저를 바라보는 눈이 부담스러워 해정의 눈을 바라보지 못하고 시선을 내렸다.

 “……뭐야.”

 갑자기 볼에 차가운 감촉이 닿았다. 해정의 손가락이었다. 현수가 미간을 찌푸리며 슬쩍 얼굴을 피했다. 예고도 없이 불쑥 다가온 건 자신이면서, 해정은 섭섭하다는 얼굴을 했다.

 “만져 보면 안 돼요?”

 “너…….”

 일주일간 메신저로 대화했던 그 녀석이 맞구나. 기어이 현수는 납득했다. 해정은 포기하지 않고 다시 손을 움직여 현수의 볼을 살짝 쥐었다가 떼어 냈다. 곧 얼굴에 만족감이 잔뜩 피어올랐다. 금세 상기된 얼굴이었다.

 현수와 관련된 것이라면 꼭 누군가에게 조종당하는 꼭두각시가 된 것처럼 자제력을 잃었다. 현수의 볼을 만지는 것도, 현수와 살을 맞닿고 싶다는 생각을 하는 것도, 계속 바라보게 되는 것도, 목소리를 더 듣고 싶은 것도, 형체를 알 수 없는 욕심들이 꾹 닫힌 마음 틈 사이로 퐁퐁 새어 나와 비눗방울처럼 크기를 키우는 것도. 모두 다 자신의 의지가 아니었다. 저절로 그렇게 되는 거였다. 해정은 갈증을 느꼈다. 파인애플 주스 따위를 더 마시고 싶은 게 아니었다.

 좀 더 예민한 곳을 만지고, 누구도 보지 못했던 부분을 보고, 깨물고, 핥고, 내 눈을 바라보게 하고, 끝이 붉은 귓바퀴에 입술을 대어 자극이 될 만한 말들을 끝도 없이 속삭이는…….

 “노네임이 아니라 서해정이라고 부를게.”

 줄줄이 쏟아지는 망상을 잘라 낸 것은 현수였다. 가라앉은 음성이 차가운 물처럼 해정의 머리 위로 쏟아졌다. 해정이 번뜩 정신을 차리고 초점을 현수의 눈에 맞췄다. “네.” 작게 대답한다.

 “어……. 그러니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네.”

 “해정아.”

 무언가를 설득하려는 듯 제 이름을 나지막이 부르는 목소리가 달콤했다. 해정이 음악을 감상하는 것처럼 눈을 살며시 감았다.

 아. 너무 좋아. 응, 형. 더 불러 줘. 더. 더…… 내 이름.

 “이제……. 음, 이제 그만하자.”

 돌연 눈이 뜨였다. 슬쩍 올라가 있던 입꼬리가 단숨에 굳는다. 해정의 표정 변화는 소름 끼칠 정도로 극단적이었다. 그게 어딘가 영화 속에 나오는 사이코 같아서, 현수는 드문드문 기분이 이상했다. 잠시 정적이 감돌았다.

 “뭘 그만하자는 거예요?”

 “…….”

 정적을 깬 것은 해정이었다. 입 안이 바싹 마르는 것 같아 현수는 다시 한 번 아메리카노를 쪽 빨아 마셨다.

 “우리 뭐, 시작이라도 했나요?”

 “아니, 그러니까……. 어……. 메신저로 대화하는 거 말이야.”

 “그게 왜요?”

 “나는 그게 좀 부담스러워.”

 확실히 말을 해야겠다 싶었다. 현수의 말투는 단호했으나 눈은 다시 테이블로 향해 있었다. 해정은 깜빡깜빡, 눈을 감았다 뜨다가 손을 뻗어 현수의 아메리카노를 쥐었다. 현수가 고개를 들어 해정이 쥔 제 음료를 바라보았다.

 해정은 현수를 응시한 채로, 빨대를 앙, 삼키듯 물었다. 현수의 시선이 슬슬 올라갔다. 곧 해정의 얼굴을 바라본다. 한 번 아메리카노를 빨아 마신 해정이 느리게 빨대를 놓았다. 꼴깍. 커피를 넘기는 소리가 컸다. 

 다시 현수의 앞에 아메리카노 잔이 놓였다. 해정이 의자에 등을 기대고 천천히 다리를 꼬았다.

 “계속하면 익숙해지지 않을까요.”

 “……아니. 나는 싫어.”

 “나는 형이 좋아요.”

 “아니, 그런 말이 아니라. 네가 내 방송을 봐 주는 건 고마운데…….”

 “형이 좋아요.”

 현수의 말을 가로채고, 해정은 강요하는 것처럼 그렇게 말했다.

 “…….”

 좋아한다. 팬으로서 방송인에게 할 수 있는 말이었지만, 해정의 뉘앙스는 명백히 연애 감정을 말하고 있었다. 그게 적나라하게 느껴져서, 현수는 당황했다. 저절로 상체가 뒤로 빠졌다. 그걸 알아챈 해정이 매달리듯 그의 손을 잡아 끌어당겼다. 그리고 손에 제 볼을 비빈다. 언제 그랬냐는 듯 눈꼬리가 축 처져 있는 채였다.

 “형…….”

 “저기, 해정아.”

 현수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놀라지는 않았다. 대충 예상하고 있던 바였다. 막상 들으니 생각보다 더 당황스럽긴 했지만 감출 수 있는 정도였다. ‘살다 살다, 인터넷 방송 9년 만에 이런 일도 다 겪네……. 남자애한테…….’ 현수는 생각했다. 그새 그렁그렁 눈물이 맺힌 채로 해정이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저는…… 어렸을 때부터 이부 형한테 학대 받았어요.”

 해정이 말했다. 거짓말을 하는 눈은 아니었다. 현수가 놀란 얼굴을 하자, 해정이 볼을 비비며 더욱더 가지런한 손 사이를 파고들었다.

 “그래서인지는 모르겠는데…… 공황 장애를 앓기 시작했어요. 초등학생 때.”

 “…….”

 “금방이라도 내 목숨을 빼앗아 갈 것 같은 이상한 괴물들이 내 방에 들어올 것만 같은 착각이 드는 거였어요.”

 말이 잠깐 멈추었다. 해정이 침을 꼴깍 삼켰다.

 “무섭고, 두려웠어요. 처음에는 그냥 그럴 것 같다, 하는 불안감만 들었는데, 점점 현실처럼 환각이 일어났어요. 병원에 가도 소용이 없었어요. 약을 먹어도 소용없었고……. 근데, 형 방송 보기 시작한 후부터 낫기 시작했어요. 진짜요. 괴물들이 안 보이기 시작했어요, 정말로…….”

 할 말이 없었다. 꼭 고해 성사를 하듯 간절한 목소리로 말하는 어린아이를 더 이상 모질게 밀어내기가 힘들었다. 이내 현수의 손을 꽉 붙들던 손아귀에 힘이 빠졌다. 해정이 제 두 손을 허벅지 위에 올려 두고, 잔뜩 벌을 받는 것 마냥 어깨를 움츠러트렸다. 툭, 해정이 고개를 떨구었다.

 “이렇게 컸는데도, 지금도 그래요. 저는 형 없으면 힘들어요.”

 “…….”

 “……그러니까, 형. 제가 하고 싶은 말은…….”

 해정이 망설이는 듯 말끝을 끌었다.

 만나 달라고? 아니면, 사귀어 달라고?……. 현수의 머릿속이 추측으로 가득 찼다. 해정의 사연은 퍽 측은지심이 들기에 충분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귄다거나 만나는 것은 솔직히 말이 안 됐다. 자신은 동성애자가 아니었다. 스물아홉이 되도록 여자 친구 한 번 사귀어 본 적이 없는, 소위 말하는 ‘모태솔로’였으나 그게 여자가 싫어서는 아니었다.

 곧이어 해정이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우물쭈물하던 해정이 기어 들어갈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루 종일 메신저 하는 게 부담스러우시면…… 밤마다 형이랑 통화라도 하면 안 돼요? 제가 아직 너무 힘들어서 그래요. 형이 싫으시면 마음도 서서히 접을게요. 노력할게요. 형한테 강요하지도 않아요. 그냥, 그냥 그 정도만…….”

 네? 살려 주세요…….

 해정이 구명줄을 내려 달라고 부탁하는 사람처럼 비굴한 목소리를 내었다. 현수는 대답하지 않았지만, 확실히 고민하고 있었다. 표정에 다 드러났다. 현수의 얼굴을 확인한 해정이 틈을 파고들듯 다시 한 번 “네?” 하고 대답을 종용했다.

 ‘통화 정도라면…….’ 현수가 제 턱을 문질렀다. 어쨌든 지금 이렇게 헤어지는 것도 찝찝할 것 같기는 했다. 이렇게 제 이야기를 다 털어놓은 애를 다시 한 번 내치는 건 힘들었다.

 길게 고민하던 현수가 기어이 결정을 한 듯 얼굴을 들어 올렸다.

 “……네가 이상한 말만 안 하면.”

 승낙의 말이었다. 이윽고 해정이 활짝 웃었다.

 사실은, ‘저는 어렸을 때부터…….’ 하며 말을 꺼내기 시작할 때부터 예상했던 승낙이었다.  해정은 영리했다. 사람을 꼬드기는 건 쉬웠다. 또, 김현수가 심하게 무른 사람이라는 것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네.”

 그러니 정말로 어려운 건 하나밖에 없었다. 금방이라도 현수를 붙잡아 온몸으로 껴안고 싶은 충동을 참는 거였다.

* * *

 현수는 주차 구역으로 걸음을 옮겼다. 해정은 카페에서 나와 반대편으로 걸어갔다. 버스 정류장 쪽이었다. 현수가 조금 전 헤어졌던 해정의 얼굴을 떠올리며 손가락으로 키를 돌렸다. 

 결과적으로, 수확은 없었다. 이제 그만해 달라고 제대로 이야기한 것 같지도 않고, 그렇다고 연락을 끊게 된 것도 아니었다. 메신저를 하지 않기로 했지만 그 대신 밤마다 통화를 해야 했다. 어쩌면 그게 더 피곤할 수도 있었다. 심하게 물기 어린 눈 때문인지, 아니면 털어놓은 사연 때문인지, 자신의 문제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완벽하게 넘어가 버렸다.

 내가 그렇지 뭐. 현수가 자조적으로 웃으며 차에 올라탔다. 시동을 걸고 사이드 브레이크를 풀었다. 주차 구역을 나서며 라디오를 튼 현수가 흘러나온 최신 가요를 따라 흥얼거렸다. 주말의 신사동은 차가 많았다. 현수가 쯧, 혀를 차고서 휴대 전화를 들어 정호에게 전화를 걸었다. 노래가 멈추고, 대신 통화 연결음이 들렸다. 잠시 후 정호가 전화를 받았다.

 「어.」

 “응. 어디야?”

 「왜?」

 “그냥. 오랜만에 밖에 나왔는데 그냥 들어가기 심심해서.”

 「올. 누구 만났어?」

 “아…….”

 현수가 대답을 망설였다. 해정에게 번호를 주던 날, 예감이 좋지 않다며 중얼거렸던 정호가 떠오른 탓이었다.

 “만나서 얘기해 줄게. 할 거 없음 나와. 너네 집 쪽으로 갈게. 나 차 가지고 나왔어.”

 「뭐야. 뭔 일 있어?」

 “별거 아니야. 만나서 얘기해 준다고.”

 「알았어. 얼마 뒤에 도착하는데?」

 현수가 손을 뻗어 내비게이션에 목적지를 지정했다. 

 “20분 뒤. 막히면 좀 더 걸려.”

 「오케이.」

 전화가 끊겼다. 바로 앞의 신호등이 빨간불로 바뀌었다. 현수가 브레이크를 밟았다. 차간 거리를 좁게 하고 뒤를 쫓던 택시가 금방이라도 차체가 닿을 듯 급히 정지했다. 룸미러로 택시를 보던 현수가 인상을 그었다. 하여간 택시 운전 진짜 난폭해.

 정호가 살고 있는 아파트 근처에서 현수는 다시 한 번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정호는 금방 전화를 받았다. 정호는 금주를 하고 있고, 현수도 그렇게 술을 좋아하는 편은 아닌 탓에 둘은 아파트 상가에서 간단하게 밥을 먹었다. 그리고 동네 카페로 자리를 옮겼다. 

 “그래서, 오늘 누구 만났는데?”

 정호가 소파에 상체를 깊게 묻으며 물었다. 현수는 짐짓 대수롭지 않은 표정으로 “너 저번 주에 우리 집 왔을 때, 내가 번호 줬던 시청자 기억나지?” 했다. 그 말에 정호가 설마, 하며 눈을 크게 키웠다.

 “걔랑 만났어? 왜? 어쩌다?”

 “그냥 연락하다가…….”

 “하다가?”

 “뭐, 이제 연락하지 말자. 이런 식으로 설득 좀 하려고 만났어. 걔는 학생이기도 하고, 또 내가 귀찮기도 하고.”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걸 말할 필요는 없다 싶었다. 현수의 말에 정호가 고개를 끄덕이며 빨대로 아이스 초코를 휘휘 저었다. 그리고 한 모금 마신 뒤, “그래서 어쩌기로 했는데?” 하고 물었다. 현수가 뒷목을 긁적였다. 

 “결과적으로는…… 연락을 계속할 것 같은데. 나도 한 모금만 줘.”

 현수가 손을 뻗었다. 정호가 쥐고 있던 아이스 초코를 내밀었다. 현수가 아이스 초코를 마시는 동안, 정호가 눈썹을 찌푸리며 “왜?” 하고 물었다. 현수가 아이스 초코를 테이블 위에 놓았다.

 “그게 좀, 복잡해. 막상 실제로 보니 나쁜 애 같지는 않아.”

 해정이 털어놓은 이야기까지는 함부로 말할 수 없었다. 현수가 말꼬리를 흐렸다.

 “이상한 짓은 안 하지?”

 “했으면 내가 가만히 있겠냐.”

 “네가 하도 븅신 같으니까 왠지 당해 줄 것 같단 말이야.”

 “뭘 당해 줘, 당해 주긴. 아니야.”

 현수가 푸스스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물론 제 볼을 쥐거나, 손을 잡아 볼을 비비긴 했지만 그다지 신경 쓸 것까지는 아니었다. 정호는 웃지 않았다. 도리어 더 진지한 얼굴을 했다.

 “현수야. 조심해.”

 “뭐야, 갑자기 진지해져서는.”

 “우리 누나 고등학교 다닐 때, 스토커 한 번 붙은 적 있거든?”

 그래서 더 난리였구나. 현수가 고개를 끄덕이자 정호가 말을 이었다.

 “그 스토커가 진짜 집 앞까지 쫓아오고, 하여간 미친놈이었어. 나 그때 중학생이었는데 나한테도 접근하고 그랬다니까. 진짜 그 새끼 때문에 한동안 경찰서 들락거리고 아무튼 난리였는데.”

 “근데.”

 “그냥 느낌일 뿐이긴 한데. 뻔뻔하게 구는 거나, 막무가내로 우기는 거나, 뭐든 협박하려고 드는 거나…….”

 “…….”

 “느낌이 너무 비슷해, 걔. 그놈이랑. 만나 본 적은 없지만 대충 봐도 그래.”

 정호는 의심이 많은 성격이라 평소에도 이것저것 걱정을 하곤 했었다. 그렇지만 평소처럼 ‘또 오바 한다.’ 하며 웃어넘길 수가 없었다. 현수는 입을 다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제 앞에 놓인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셨다. 어쩐지 목이 탔다. 커피를 많이 마신 탓인지, 아니면 정말 불안감 때문인지,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몇 차례나 무슨 일 있으면 연락하라고 말하는 정호를 아파트 단지 앞까지 데려다준 후, 현수는 집으로 향했다. 어느새 해가 져 있었다. 2시간 뒤면 방송이었다. 교차로에서 우회전을 하려는데 횡단보도가 파란불이었다. 사람들이 횡단보도를 건넜다. 현수는 브레이크를 밟고 사람들이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직진 차선으로 달리던 택시가 차선을 바꾸어 현수의 뒤에 섰다. 다시 횡단보도의 신호가 바뀌었다. 잠시 룸미러에 향해 있던 현수의 시선이 정면으로 이동했다. 차가 움직였다.

* * *

 “여기에 내려 주세요. 감사합니다.”

 해정이 조수석에 앉아 창밖을 빤히 쳐다보며 말했다. 그리고 지갑을 꺼내 택시 기사에게 카드를 건네었다. “영수증은 괜찮습니다.” 해정은 그렇게 말하고 문을 열어 내렸다. 

 낯선 동네였다. 서울 토박이기는 했지만, 강남 한정인 탓에 강동 쪽은 잘 몰랐다. ‘여기 사는 건가?’ 해정은 상가 건물에 몸을 숨기며 현수의 차 뒤꽁무니를 바라보았다. 현수의 차가 아파트 상가 앞에 멈췄다. 현수가 차에서 내렸다. 그리고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처럼 길을 서성이며 걸었다. 

 누구를?

 잠시 후, 현수가 어딘가를 향해 손을 흔들며 인사했다. 해정이 현수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현수와 비슷한 나이대로 보이는 남자였다. 별안간 그 남자가 고개를 홱 해정 쪽으로 돌렸다. 해정이 급히 몸을 숨겼다. 그리고 잠시 후, 다시 그쪽을 향해 목을 뻗었다. 남자와 현수는 아파트 상가에 있는 덮밥집으로 들어갔다. 해정은 현수가 먹는 모습을 놓치지 않고 관찰했다. 

 식사 후 남자와 현수는 카페에 갔다. 현수가 남자의 음료 잔을 들어 남자가 입을 대었던 빨대를 아무런 망설임 없이 무는 것을 보았을 때, 해정은 짜증이 났다. 남자는 심각하게 현수에게 무어라 말하고 있었다.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지.’ 멀리서 지켜보고 있는 탓에 입 모양이 잘 보이지가 않았다.

 “아.”

 별안간 손톱 부분이 아팠다. 해정이 눈을 내려 제 손을 바라보았다. 무의식중에 손톱을 심하게 괴롭힌 것인지, 손톱 옆 부분에서 피가 났다. ‘귀찮게.’ 해정이 인상을 쓰며 손가락을 빨았다.

 남자와 현수는 30분 후 일어났다. 또 어디 가려나. 해정은 생각했다. 그 전에는 어떻게 참은 건지, 막상 현수를 실제로 보고 나니 알 수 없는 독점욕이 솟구쳤다. 짜증이 났다. 나랑은 30분도 안 있었으면서. 저 남자랑은 밥도 먹고, 카페도 가고. 당장이라도 달려가 짜증을 부리고 싶었다. 해정이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쓸어 넘겼다.

 다행히도 남자와 현수는 카페를 나선 후 헤어졌다. 남자가 현수의 차 조수석에 탈 때, 해정은 남자를 끌어 내리고 싶었다. 현수는 남자를 아파트 단지에 내려 줬다. 그 모습을 확인하며 해정이 택시를 세웠다.

 “저 차 따라가 주세요.”

 해정이 손가락을 뻗어 현수의 차를 가리켰다.

 이제 집에 가겠지. 해정은 생각하며 안전벨트를 맸다. 이게 오늘 만남의 가장 큰 목적이었다. 현수의 집을 알아내는 것. 현수의 차가 움직였다. 택시가 현수의 차 뒤를 바싹 따라붙었다. 

 현수의 집도 강동 쪽이었다. 원룸 빌라 주차장으로 차가 들어가는 것을 확인한 해정이 휴대 전화를 꺼내 현수의 집 주소를 메모했다.

 “청담 리버뷰 아파트로 가 주세요.” 

 이제야 마음이 편했다. 해정이 폭 의자 시트에 몸을 기대며 말했다. 드디어 알아냈다, 형이 어디 사는지. 어딘가에 서식하고 있던 괴물들의 존재감이 차츰 흐려졌다. 해정의 얼굴에 만족감이 번졌다.

 현수와 해정의 집은 택시로 30분도 안 걸리는 거리였다. 이렇게 가깝게 살았는데. 그렇게 멀지도 않았어. 진작 이럴걸. 해정이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문 앞 지문 인식기에 손가락을 갖다 대자 짧은 전자음이 났다.

 해정의 부모가 거실 소파에 앉아 있었다. 해정은 고개를 숙여 꾸벅, 인사하며 방으로 향했다. 

 “왔어?”

 “네.”

 뒤돌아보지 않고 대답한 해정은 곧장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하아…….”

 문에 기댄 채로 눈을 감는다. 흥분한 손이 더듬거리며 문을 잠갔다.

 김현수.

 그 이름 세 글자를 떠올리는 것만으로 미칠 것 같았다. 해정은 오늘 만났던 현수를 다시 한 번 떠올렸다.

 시선을 맞추던 다정한 눈. 살짝 끝이 올라간 귀여운 모양의 입꼬리. 사랑스럽기 그지없는 얼굴이었다. 목소리는 말도 못했다. 해정에게는 가장 익숙한 현수의 요소였다. 늘 헤드셋을 통해서 듣던 목소리가 육성으로 들리고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좋았다. 일상 속의 말투는 방송을 할 때의 말투보다 조금 더 차분했다. 그게 묘하게 섹시하게 느껴져서, 자꾸 말을 걸고 싶었다. 특히 한숨을 쉬면서 ‘해정아…….’ 하고 부를 때는 정말, 정말로.

 “미치겠어, 진짜…….”

 끄으응, 해정이 앓았다. 목소리가 들떴다. 그저 생각만 한 것뿐인데 숨이 가빠지고 몸이 달아올랐다. 해정의 볼이 발갛게 상기되었다. 몸이 부글부글 끓었다. 몸살감기를 앓을 때와 비슷한 느낌이었다. 눈을 감아도 현수의 잔상이 계속 아른아른했다. 해정이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카페에서 손을 쥐어 볼에 비볐을 때, 희미한 핸드크림 향이 났던 것까지 생생하게 살아나 감각을 두드렸다. 

 아, 진짜 좋아 죽겠어.

 가까이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점점 마음이 커졌다. 애초에 갖고 있는 환상 같은 건 없었다. 해정은 그저 현수, 그 자체가 좋았다. 생각보다 어떻다, 어떻다, 왈가왈부하는 단계가 아니었다. 존재감 하나만으로 벅찼고, 제 눈앞에 살아 있는 현수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놀라운 경험이었다.

 첫 만남은 폭발적인 후유증을 남겼다. 해정이 눈을 돌려 벽시계를 확인했다. 9시. 아직 방송 시간까지 여유가 있었다. 주르륵, 등이 미끄러지듯 내려앉았다. 

 여러 가지로 많이 참았다. 신사동 카페에서나, 낯선 동네의 카페 앞에서나.

 급기야 해정이 몸을 일으켜 섰다. 그리고 비틀비틀 걸어 책상 앞 의자에 털썩 앉았다. 등을 기대니 끼익- 소리가 났다. 등이 완전히 등받이에 밀착했다. 

 “씹…….”

 낮은 욕설이 방 안에 내려앉았다. 해정의 손이 급하게 움직였다. 청바지 지퍼가 내려갔다. 해정이 브리프를 내렸다. 흰 손이 잔뜩 발기한 성기를 쥐었다. 부푼 기둥을 타고 쿠퍼액이 진득하니 흘러내렸다. 조금 전, 현수를 생각한 것만으로 이렇게 된 것이었다. 해정이 다시 눈을 감았다. 살결 위로 촘촘한 속눈썹들이 곱게 내려앉았다.

 의도한 게 아니었다. 저절로, 검은 시야 위로 현수의 얼굴이 떠올랐다. 아직 보지 못한 그곳까지 훤히 드러나도록 다리를 벌리고 해정의 허벅지 위에 앉아 있었다. 아무도 길들인 적 없던 그 음란한 곳에 해정의 성기가 들어가 있었다. 여기는 원래부터 내 거야. 내 거였어. 해정이 주장했다. 현수가 맞아, 하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적당한 밝기의 피부는 보통의 남성과 다를 바가 없었는데, 해정에게는 유난스럽도록 먹음직스러웠다. 해정이 턱 밑을 핥았다. 달콤한 맛이 났다. 그 상상을 할 때의 해정은 제 아랫입술을 핥고 있었다. 

 “아, 하……. 하아…….”

 기둥을 위아래로 흔드는 손길이 빨라졌다. 탁, 탁, 탁. 마찰음이 음량을 키웠다. 속눈썹이 파들파들 떨렸다. —꾹. 해정이 손바닥으로 기둥 전체를 세게 감쌌다. 형, 형 너무 조여. 해정이 현수의 귀에 속삭였다. 현수가 얼굴을 붉혔다. 그러면서 동시에 항문을 더 조였다. 유혹하는 거야? 그래? 귀여워. 야해.

 진짜로, 먹고 싶다. 형 몸.

 “흐…….”

 정액이 쏟아졌다. 해정이 왼손을 뻗어 휴지를 뽑았다. 부드러운 면이 성기를 감쌌다. 방 안에 퀴퀴한 냄새가 퍼졌다. 해정이 휴지를 더 뽑아 요도 밑에 댔다. 사정을 마친 뒤에도 여전히 성기는 발기된 상태였다. 해정이 바지 주머니에서 휴대 전화를 꺼냈다. 그리고 갤러리 앱을 켜 현수의 사진을 눌렀다. 액정에 현수의 얼굴이 가득 찼다. 

 카메라를 응시하고 있는 새까만 눈동자. 어색하게 웃고 있는 긴 입. 정갈하게 깎은 머리. 해정은 천천히 그 얼굴을 감상했다. 실물보다는 못했지만, 그래도 흥분하기에는 충분했다. 아니, 충분한 정도가 아니다. 차고 넘쳤다. 해정은 사진을 보며 현수의 목소리를 떠올렸다.

 해정아.

 해정아.

 해정아, 서해정.

 괜찮아. 다 먹어도 돼.

 현수의 목소리는 해정의 머릿속에서 그가 듣고 싶은 대로 말했다. 손이 움직였다. 요도를 살살 엄지손가락으로 문지르며 해정은 그게 현수의 혀끝이라고 상상했다. 허벅지에서 내려온 현수가 이번엔 다리 사이에 얼굴을 묻고 맛있다는 듯 성기를 한 번에 삼켰다. 볼록 튀어나온 볼이 귀엽고, 야했다. 좋으냐고 해정이 물었다. 현수는 끄덕였다. 

 “아……! 후으…….”

 해정의 사타구니를 손으로 쥐어 벌리며 현수는 열심히 고개를 뒤로 뺐다가, 다시 성기를 삼켰다를 반복했다. 중간중간 해정의 표정을 살피는 게 사랑스러웠다. 현수가 펠라를 해 준다는 상상 그 자체로 해정은 금방 사정감을 느꼈다. 쌀래. 형. 얼굴에 싸도 돼? 해정은 그렇게 물으며 현수의 볼을 핥았다.

 해정의 혀에 차가운 액정이 느껴졌다. 액정 표면에 물기가 묻었다. 해정이 한 번 더 현수의 사진을 핥았다. 현수 형의 볼. 현수 형의 살. 그렇게 생각하니 더럽지도 않았다. 현수 형. 현수 형. 현수가 거부하지만 않는다면, 밤이 새도록 현수의 몸 구석구석을 핥고 싶었다. 아니, 언젠가는 꼭 그럴 거야.

 “하…….”

 해정이 한 번 더 사정했다. 정액은 끝을 모르고 줄줄 쏟아졌다. 형 얼굴에 싸고 싶다. 아니면 배 속이나. 해정은 그렇게 생각하며 휴지를 더 뽑았다. 이렇게 만족스러운 자위는 처음이었다. 제 앞섶을 정리한 해정이 휴대 전화 액정도 휴지로 닦아 내었다. 여전히 액정에 현수의 얼굴이 떠 있었다. 해정의 입술이 액정에 닿았다. 쪽. 소리를 내어 뽀뽀한 해정이 귀여운 얼굴로 웃으며 사진 속 현수와 눈을 마주했다.

 “나는 형 아니면 안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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