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세 번째 탈출 (2)
출근 날, 유나는 아침 일찍 일어나 출근 준비를 시작했다. 아직 자고 있는 세현이와 엄마, 아빠를 하나둘 내려다본 다음, 집 밖으로 나섰다. 익숙한 출근길이었다. 늘 그랬듯 아주 이른 시간이라 지하철에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유나는 늘 내리던 역에서 내려서 쭉 앞으로 걸었다. 그러다 문득 이상한 낌새를 눈치챘다. 누군가 뒤에서 따라오는 것 같은 그런 느낌이었다.
유나가 걷다가 멈춰 뒤돌아 주변을 둘러보았다. 저 멀리, 검은 옷을 입은 남자 한 명이 보였다. 눈이 마주치자 남자가 걸음을 멈췄다. 하나 이내 다시 유나에게 가까이 다가오기 시작했다.
유나는 본능적으로 위험을 깨달았다. 유나가 그대로 등을 돌려 빠른 속도로 출구를 향해 걸었다. 그러자 뒤따라오던 남자도 속도를 높여 유나를 쫓았다.
뭐지, 뭐야? 유나는 당황했다. 순간 혜진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F급 에스퍼한테 납치당해서 죽었다는 이야기. 설마 그게 자신의 이야기가 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지하철로 출퇴근하는 데다, 나름 도심이니까 괜찮으리라고 생각했다.
유나는 서둘러 남자를 피해 뛰었으나 역부족이었다. 결국 남자에게 어깨를 잡혔다.
“놔, 놔!”
유나가 소리를 지르며 남자를 뿌리치려 애썼으나 소용없었다. 남자가 황급히 유나의 목을 팔목으로 감았다.
“흐흐.”
남자가 이상한 목소리로 웃었다. 유나가 흐느끼며 제 목을 휘감은 남자의 팔을 퍽퍽, 세게 때렸다.
“귀한 S급 가이드를 내가 잡다니.”
남자는 유나의 반항에 아랑곳하지 않고 연신 낄낄거리며 웃었다. 남자가 그대로 유나를 붙잡은 채 계단으로 향했다. 유나가 소리를 질렀다.
“아무도 없어요? 아무도 없어요?!”
이른 시간이라 그런지 자신과 남자를 제외하고는 그 어떤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초조함과 불안함에 눈에 그득 눈물이 차올랐다. 반항하던 유나가 남자의 팔을 콱, 세게 깨물었다.
“악!”
남자가 외마디 비명을 지르더니 그대로 몸에 힘을 풀었다. 유나는 서둘러 남자를 떨쳐 내고 다급하게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거기 서!”
남자가 깨물린 팔과 도망가는 유나를 보더니 다시 그녀의 뒤를 쫓았다. 유나는 젖 먹던 힘을 다해 빠르게 발을 움직였다. 숨이 목 끝까지 차올랐다. 그대로 먹었던 것을 죄다 토할 것 같았다.
어느새 남자가 벌써 뒤까지 바짝 쫓아왔다. 그래도 출구 밖으로 나가면 사람이 있을 테니까. 그 생각 하나로 유나는 미친 듯이 위로 올랐다. 하나 다급한 마음 때문일까, 발이 삐끗했다. 순간 유나의 몸이 휘청이며 뒤로 기울었다. 넘어지는 유나에게 남자가 손을 뻗었다.
“아!”
유나는 그대로 눈을 질끈 감았다. 그대로 굴러떨어질 거라 생각했다. 하나 누군가 몸을 받쳐 주는 느낌이 들더니, 몸이 똑바로 섰다. 유나가 눈을 크게 떴다. 바로 손이 떨어지긴 했지만 허리를 감싼 온기는 분명히 거짓이 아니었다.
곧이어 유나의 뒤까지 바짝 쫓아왔던 남자가 갑자기 계단 밑으로 날아갔다. 쿵, 큰 소리와 함께 남자의 머리가 바닥과 부딪혔다. 유나는 계단 밑바닥에 번지는 피를 보고 입을 쩍 벌렸다. 떨어진 남자는 정신을 잃은 듯 보였다.
“정지운?”
당황한 유나가 이름을 불렀다. 그러고는 허공을 마구잡이로 더듬었다. 턱, 누군가 만져졌다. 투명하지만 분명히 여기에 정지운이 있었다. 유나가 마구잡이로 그의 몸을 더듬었다. 어깨, 가슴, 허리, 손. 정지운이 맞았다.
“야, 너 맞잖아!”
유나가 소리치자 결국 지운이 투명화 능력을 해지하고 모습을 드러냈다. 모습이 완전히 드러났으나 그가 유나를 바라보지 못하고 시선을 이곳저곳으로 방황했다.
유나는 전보다 마른 그의 얼굴에 지수가 한 말이 거짓이 아님을 깨달았다. 그나마 봐 줄 만한 게 얼굴이랑 허우대였는데, 얼굴이 완전히 망가졌지 않은가. 유나가 그의 핼쑥한 뺨과 퀭한 눈가를 노려보았다.
“…미안.”
지운이 사과했다. 유나는 우선 계단 바닥에 널브러진 남자를 바라보았다. 피가 난 걸로 보아 적어도 머리통은 깨진 게 확실했다. 유나는 기절한 남자를 가리켰다.
“저 남자부터 어떻게 해요.”
“밑의 애들한테 말해 놓을게.”
지운이 스마트폰을 꺼내어 누군가에게 전화를 했다. 대강 역으로 와 남자 한 명을 알아서 처리하란 말을 하고서 그가 빠르게 전화를 끊었다. 침묵이 이어졌다. 유나가 먼저 입을 열었다.
“호출은요.”
“…….”
대답하지 않는 걸로 보아, 호출이 있는 듯했다.
“전장 안 가요?”
“…요즘 가도 힘을 제대로 못 써.”
“왜요.”
“머리가 아파서… 힘이 제대로 안 나.”
지운이 여전히 시선을 맞추지 못했다. 유나는 그의 시선이 닿은 곳을 바라보았다. 제 손이었다.
그때 법원에서 내민 손을 거절했던 건 지운이었다. 그리고 이제 그를 계속 가이딩할 필요도 없었다. 자신은 이제 그의 전용 가이드가 아니었으며, 제가 있어야 할 전장에 가야 하고, 그도 그래야 하니까.
그걸 알면서도 뻗어지는 손을 멈출 수 없었다. 유나가 손을 들어 지운의 뺨을 그러쥐었다. 손길을 느낀 지운이 시선을 올렸다. 눈이 마주쳤다. 그때처럼 텅 빈 눈이었다.
“가이딩…….”
지운이 중얼거렸다.
“가이딩받고 싶어서 그런 거 아냐. 그냥… 안 보니까 보고 싶어서. 물론 유나 너는 내가 안 보고 싶었겠지만…….”
횡설수설, 그답지 않았다. 유나는 그가 상태가 좋지 않음을 더 확실히 느꼈다. 얼굴도 그렇고, 목소리에도 예전의 유들거림이 없었다. 그가 다시 시선을 깔았다. 이것조차 그답지 않았다. 유나는 망설이다가 손을 뻗어 그를 품에 껴안았다. 지운이 몸을 멈칫, 굳혔다.
“…이건 당신이 좋아서가 아니라 당신 상태가 안 좋아 보여서 하는 거예요.”
“…응.”
지운이 유나의 어깨에 고개를 파묻었다. 유나는 제 목덜미 위로 쏟아지는 그의 머리카락에 눈을 감았다. 돌연, 어깻죽지가 축축해지기 시작했다. 유나가 눈을 깜빡거렸다. 품속의 그가 숨을 몰아쉬었다. 유나가 놀라 그의 등에 손을 올렸다.
“지운 씨?”
“미안.”
왜 계속 사과를 하는 거지. 이 남자답지 않다. 유나는 당황스러웠다. 설마 울고 있는 건가. 얼굴을 확인하려고 해도 지운은 기어코 고개를 들지 않았다. 다만 몰아쉬는 숨과 가파르게 오르내리는 등으로 그가 울고 있구나, 짐작할 수 있었다.
유나는 가만히 그를 껴안고서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았다. 얼마 뒤, 정장을 입은 남자 두 명이 계단 밑에 있던 남자를 수습해 갔다. 능숙했다.
“…에스퍼는 사람을 죽여도 처벌받지 않아요?”
“죽여 본 적 없어서 몰라. 근데 죽진 않았을 거야. 힘 조절 했어.”
유나는 슬슬 품에 있는 지운을 밀어냈다. 지운이 아쉽다는 듯 손끝으로 유나의 옷자락을 매만졌지만 몸이 떨어졌다. 유나가 그의 뺨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울었어요?”
유나가 손을 뻗어 지운의 뺨을 훑었다. 마른 눈물 자국이 느껴졌다.
“한 번도 운 적 없잖아요.”
“응.”
지운이 작게 대답했다.
“나만… 유나가 필요하니까.”
“…….”
“난 유나가 없어서 힘들어 죽을 것 같은데… 유나 너는 그렇지 않아서.”
“…….”
“정말로 넌… 내가 필요 없구나. 그런 생각이 들어서.”
지운이 중얼거리듯 말하다가 고개를 틀었다. 그의 눈에 눈물이 고인 게 보였다. 지운의 눈물을 보자마자 유나의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이때까지 한 번도 눈물을 보인 적 없던 사람이었다. 법원에서조차, 헤어질 때조차. 침울한 얼굴은 할지언정 그 어느 때에도 눈물을 보이지 않을 것 같은 사람이었다.
“너도 언젠가 내가 필요하겠지… 그렇게 생각했어.”
“…….”
“근데 유나는 내가 없어야 잘 지내니까… 결국 나만 널 좋아하는 거잖아. 난 네 에스퍼가 되지 못한 거잖아.”
그렁그렁 고여 있던 눈물이 그의 뺨을 타고 주르륵 흘러내렸다.
“인정하기 싫었어.”
그가 여전히 텅 빈 눈으로 중얼거리듯 말을 이었다.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사랑이, 사실 당연하지 않았다는 걸.”
유나의 입술이 떨렸다. 그 어떤 말도 나오지 않았다. 성대가 굳은 듯 목소리가 얼어붙었다. 지운은 계속해서 소리 없이 울었다. 유나는 멍하니 그의 턱에 맺힌 눈물과 떨어지는 눈물방울을 보았다. 심장이 크게 뛰었다.
“너는 내 가이드가 되기 싫어하고, 이제 유나는 내 가이드도 뭣도 아닌데…….”
지운의 뺨이 눈물로 젖어 들었다.
“왜 난 네가 보고 싶고, 왜 계속 네가 생각나는 거지.”
그가 고개를 돌려 유나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에서 여전히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유나야, 이상해. 계속 네가 생각나.”
“…….”
“난 네 에스퍼가 아니고 이제 너도 내 가이드가 아닌데. 근데… 근데도 계속 네가…….”
지운이 말끝을 흐리더니 손을 들어 제 뺨을 더듬었다. 그의 손가락에 눈물이 흥건하게 묻어났다. 그가 멍하니 손을 적신 눈물을 바라보다가 이어 유나를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쳤다.
유나는 흠뻑 젖은 검은 눈을 보자마자 몸이 떨리는 걸 느꼈다. 그의 눈물이 가시라도 된 것처럼 가슴에 깊게 박혀 들었다.
“…미안. 내가 네 앞에 나타나면 안 되는 건데.”
지운이 등을 돌렸다. 유나는 가만히 돌아선 그의 등을 바라보았다. 차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가 천천히 계단을 내려갔다. 유나는 저도 모르게 멀어지는 그에게 손을 뻗었다가, 다시 내렸다. 그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고 난 뒤에도 유나는 한동안 발을 뗄 수 없었다.
그날 이후, 지운의 우는 얼굴이 유나의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평생 울지 않을 것 같던 남자가 우는 모습은 이상하면서도 충격적이었으니까.
유나는 자고 있는 세현을 내려다보다가 세현의 눈매가 그와 닮았다는 사실을 문득 깨달았다. 눈매뿐만이 아니었다. 코도, 입술도, 느낌도, 모두 그와 닮았다. 그러면서도 자신과 닮았다. 그와 나의 아이구나. 다시 한번 실감했다.
그도 이렇게 어린 시절이 있었겠지. 어떤 어린 시절을 보냈기에 그토록 결여된 사람으로 자란 걸까. 꼭 감정의 어느 부분이 없는 사람처럼…….
내가 세현을 안아 주듯이, 그에게도 안아 줄 사람이 있었다면 무언가 달라졌을까? 하지만 의미 없는 가정이었다. 이미 다 끝났으니까.
유나는 계속해서 지운에 관한 걸 떠올리다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매일매일 그의 생각을 하지 않는 날이 없었다. 무얼 보든 간에 정지운이 떠오르고, 정지운과 연관 짓고, 정지운을 생각했다.
생각의 끝은 똑같았다. 우는 정지운의 얼굴과 쓸쓸한 뒷모습. 처진 어깨. 늘 여유 가득한 표정으로 웃고 있는 정지운과는 다른 모습을 떠올리는 것.
유나는 생각보다 그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2년이라는 시간 동안 함께했는데도…….
“유나야. 무슨 생각해?”
유나의 엄마가 유나의 어깨를 두드리며 물었다. 그제야 유나가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들었다.
“아, 엄마.”
“얘가 요즘 왜 이래? 틈만 나면 멍 때리고.”
“…….”
유나의 아랫입술에서 피가 샜다. 유나는 혀를 내어 그 피를 핥은 다음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엄마. 나… 정지운이 계속 생각나.”
“왜? 아직도 힘들어?”
유나의 엄마가 눈썹을 늘어트리며 유나의 옆에 완전히 자리 잡았다. 유나는 엄마의 질문에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
“아니, 그냥… 계속 생각나.”
유나가 입술을 달싹거리다가 말을 이었다.
“나를 그렇게 힘들게 했는데도… 밉지가 않아서… 이상해.”
유나의 엄마가 탄식했다. 그러더니 유나의 손을 움켜쥐었다.
“유나야. 아기 아빠라서 그래? 괜히 동정심 갖지 마. 네가 이해할 필요 없어.”
“아냐, 그런 게 아냐. 그런 게 아니라…….”
유나가 고개를 빠르게 저었다.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그녀조차 알 수 없었다. 보고 싶은 건가? 잊지 못한 건가? 왜 계속 생각이 나지? 동정심이 아니었다. 결코 그런 감정이 아니었다.
“…보고 싶은 거 같아.”
유나의 엄마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일그러트렸다. 엄마의 표정과 마주하자 유나는 제가 한 말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지 또 깨달았다. 하지만 거짓말은 아니었다.
“진심이야?”
엄마가 찌푸린 눈 그대로 물었다. 유나의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모르겠어. 그런 거 같아. 나도 이상해. 나도 날 모르겠어.”
유나가 횡설수설 말을 잇다가 이내 주먹을 꽉 말아 쥐었다. 또다시 그의 뒷모습이 눈앞에서 아른거렸다. 가이드가 아닌데도 자신이 보고 싶었다던 그가 떠올랐다.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사랑이 사실 당연하지 않았다고 중얼거리듯 말하던 그가 잊히지 않았다.
유나의 엄마가 착잡한 표정으로 유나를 바라보았다. 유나는 제 손을 거머쥔 엄마의 손으로 시선을 고정했다. 차마 엄마와 눈을 마주할 수가 없었다. 엄마에게 그토록 무례하게 굴었던 사람인데, 그런 사람이 보고 싶다니.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게 엄마인데 그런 엄마에게 함부로 군 그 사람이 잊히지 않는다니.
감정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기가 어려웠다. 유나는 가슴이 크게 쿵쿵 뛰는 걸 느꼈다. 화가 났다. 이런 감정을 느끼는 자신에게 화가 났다. 그리고 무엇보다 엄마에게 미안했다. 엄마와 눈을 마주치기가 힘들 정도로…….
“엄마, 미안해.”
유나가 말했다.
“나… 그 사람이 좋은 거 같아.”
유나의 손을 거머쥔 엄마의 손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유나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엄마와 눈을 마주했다. 엄마의 눈이 참담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엄마, 미안해.”
유나가 다시 한번 사과했다. 유나의 엄마가 잠시 멈칫하더니 유나의 손등을 찰싹 내리쳤다.
“정신 차려, 이 계집애야. 왜 엄마한테 미안해?”
“그 사람, 엄마한테 그렇게 못되게 굴었는데… 좋다니. 말이 안 되잖아. 나도 내가 이해가 안 돼.”
“걔가 왜 좋은데? 좋은 게 확실해?”
유나가 다시 고개를 숙였다. 왜 좋은지 설명할 수 없었다. 이유가 없었다. 마치 오래전부터 진행돼 온 마음 같았다. 가랑비에 옷 젖듯이, 스스로도 알아차릴 수 없을 만큼 아주 천천히… 그렇게.
“나도 모르겠어.”
“…….”
“그냥… 보고 싶어.”
유나의 엄마가 침묵했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짧은 정적 동안 유나의 마음이 뒤죽박죽 엉켰다. 엄마를 사랑하는 마음과 정지운을 생각하는 마음 그리고 정지운을 생각하는 자신을 꾸짖는 제 이성이 충돌했다. 정적은 유나의 엄마가 한숨을 쉬며 깨졌다.
“다시 합치려고?”
“그런 건 아냐. 아직 숙려 기간도 남았고. 그냥… 보고 싶어. 그것밖에 없어.”
다시 한번 얼굴을 마주하고 싶다는 생각. 그게 먼저였다. 유나의 엄마가 다시 한숨을 쉬더니 말했다.
“엄마는 모르겠다.”
그러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유나를 흘긋 내려다보는 눈길에 걱정이 묻어났다. 유나는 그 시선과 마주했다가 고개를 돌렸다. 이윽고 문이 닫혔다. 방에 유나와 세현만이 남겨졌다.
* * *
또 시작이었다.
지운은 지이잉― 귓바퀴에 맴도는 소음에 눈을 찌푸렸다. 눈앞에는 희끄무레한 지렁이 같은 것이 기어 다녔다.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다. 그가 이마를 짚었다. 뜨거웠다.
“사령관님, 괜찮으십니까?”
옆에서 누군가 물었다. 지운은 숨을 죽이며 손을 올렸다. 아무 말도 하지 말라는 뜻이었다. 주변에 있던 에스퍼들이 뒷걸음질 쳤다. 지운의 근처에서 모래와 돌이 진동하는 것이 보였다. 지뢰, 암암리에 도는 지운의 별칭이었다. 그는 딱 지뢰처럼 보였다.
지운이 벽에 기댄 채 심호흡을 했다. 하나 그래도 두통은 쉬이 가라앉지 않았다. 그때, 누군가 S급 몬스터의 출현 소식을 알렸다. 지운은 머리를 움켜쥐면서도 소리가 들린 쪽으로 비틀비틀 걸었다.
능력을 써서 몬스터를 죽인 그가 몬스터의 죽음을 확인하자마자 곧바로 바닥에 쓰러졌다. 주변에서는 그에게 다가가지도 못하고 그런 그를 바라보기만 했다.
지운이 쓰러진 채 미동도 없자, 그제야 그의 수하들이 그에게 다가가 그를 일으켜 세웠다. 완전히 정신을 잃은 상태였다. 이런 일이 이전에도 몇 번 있었기에 주변에서는 익숙한 듯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전장은 다시 원래의 풍경대로 돌아갔다.
지운은 눈을 뜨자마자 느껴지는 익숙한 풍경에 자신이 또 정신을 잃었다 깨어났음을 깨달았다. 그가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며 눈을 깜빡였다. 그러고는 손을 뻗어 익숙한 옷가지를 그러쥐었다. 유나가 남기고 간 옷이었다.
지운은 그 옷을 들어 코에 갖다 댔다. 이제는 유나의 체취가 느껴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지운은 옷을 꽉 잡은 채 놓지 않았다. 아주 잠시지만, 이 순간만큼은 그래도 빌어먹을 두통이 조금 나아졌으니까.
하나 아주 잠시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또 머리를 울리는 두통이 찾아왔다. 지운은 턱에 힘을 주어 통증을 견뎠다.
“씹…….”
지운이 작게 욕설을 내뱉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누워 있어 봤자 좋을 것 없었다. 그가 비틀비틀 걸어 현관으로 향했다.
지운은 국경 근처의 집이 아니라 서울에 있는 오피스텔에서 지내고 있었다. 유나와 처음 함께 산 곳. 이곳에서 사는 이유는 간단했다. 유나의 모습을 조금이라도 더 볼 수 있으니까.
지운이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 주차장에 있는 제 차 조수석에 올라탔다. 유나가 떠난 뒤, 지운은 두통 때문에 운전조차 할 수 없게 되어 상시 운전기사를 대동해야만 했다. 기사는 익숙한 듯 바로 차를 몰았다.
지운이 시트에 몸을 기댄 채 눈을 감았다. 주변의 모든 소리가 소음으로 느껴졌다. 제 심장 소리마저도 크게 들려 두통에 이바지했다. 두통 때문에 잠을 잘 수도 없었다. 오롯이 견디며 참는 수밖에 없었다.
눈을 감았다가 느리게 뜬 지운은 멈춰 선 차에 창문 밖을 확인해 보았다. 그가 원하는 목적지였다. 지운은 차 문을 열고 나갔다. 유나와 자주 걸었던 거리였다. 지운은 유나 없이 홀로 거리를 걸으면서 허공을 더듬었다. 제 팔에 팔짱을 낀 유나가 아직도 옆에 있을 것 같은데, 없었다. 아무것도 잡히지 않았다.
지운은 그렇게 몇 번이고 유나와 걸었던 거리를 돌고 돌다가 다시 차로 돌아왔다. 차가 다시 이동했다. 이번에는 유나와 함께 갔던 식당이었다. 음식만 시키고 지운은 음식을 한 입도 먹지 않았다. 그저 나온 음식들을 바라보며 그것을 먹으며 웃던 유나의 얼굴만을 떠올렸다.
이번에는 유나와 함께 갔던 영화관에 갔다. 옆에 앉아 영화에 집중하던 유나는 없었다. 지운은 스크린에 뜬 화면을 아무 생각 없이 바라보기만 했다. 그저 떠오르는 것은 유나의 얼굴뿐이었다.
그렇게 유나와 갔던 모든 곳을 돌아다니다 마지막으로 도착하는 곳은 제집, 오피스텔이었다. 유나와 가장 많은 일이 있었던 곳. 전장에서 돌아오자마자 제게 달려오던 유나가 있었던 곳.
이제는 아무도 없었다.
유나와 자신은 이제 아무 관련도 없다. 유나는 자신의 가이드가 아니며, 자신 또한 유나의 에스퍼가 되어 주지 못했다. 알면서도 지운은 유나의 생각을 머릿속에서 몰아낼 수 없었다. 추억을 더듬고, 갔던 장소를 되풀이하는 것 또한 멈출 수 없었다. 불가항력이었다.
그래야 지운은 살 것 같았다. 그러지 않고서는 이 미칠 것 같은 두통과 생각의 편린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것이라도 해야 숨통이 트였다. 하나 그것조차 순간적이었다.
지운은 아무도 없는 빈집 소파에 앉아 고개를 위로 든 채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았다. …머리가 아팠다. 유나가 보고 싶었다.
* * *
유나는 이제 전장 일에 완전히 익숙해졌다. 가이딩을 하는 것도, 가이딩 존을 만드는 것도 눈을 감고 뚝딱 해냈다. 진아가 웃으며 유나에게 말을 건넸다.
“이제 몬스터를 봐도 안 놀라네요?”
“네. 이제 익숙해요.”
처음 보는 몬스터가 수면 위로 펄떡 뛰어오르면 깜짝 놀라곤 했는데, 이제는 워낙 많이 보는 터라 아무렇지 않아졌다. 생김새가 자유분방하고 징그럽게 생기긴 했지만, 이제 그러려니 익숙하게 받아들였다.
“맞다, 내일 혜성이가 오는 날이니까 안 와도 돼요.”
“네.”
유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S급 몬스터를 전부 다 소탕했기 때문에 이제 전장은 소강상태였다. 시간도 4시를 넘어 슬슬 퇴근 시간에 가까워져 있었다. 진아가 스마트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하는 유나를 흘긋 보더니 입을 열었다.
“유나 씨. 정지운 소식 알고 있어요?”
스마트폰을 주머니에 넣던 유나가 몸을 멈칫하더니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아는 바가 없었다.
“결국 폭주했대요.”
“…….”
유나가 입술을 안으로 말았다. 예상했던 일이었다. 하지만 예상했다고 해서 충격이 없는 건 아니었다. 폭주. 어렸을 적 보았던 아빠의 폭주 모습이 떠올랐다. 이성을 잃고 날뛰는 아빠의 모습……. 정지운도 그렇게 됐을까?
“그래서 걔 대신 다른 애들이 국경 가서 돌려 막기 하고 있어요.”
“…괜찮대요?”
“모르겠어요. 전부터 몇 번 폭주 직전 상태로 기절했다는 얘기는 들었는데, 폭주한 건 이번이 처음이라.”
심장이 두근두근 뛰었다. 유나는 손끝이 떨리는 걸 느꼈다. 감추기 위해 주먹을 말아 쥐었지만, 떨리는 숨까지는 어찌할 수 없었다. 유나는 평정을 가장하기 위해 진아에게서 고개를 돌리고 무표정하기 위해 애썼다.
왜 동요하는 거야, 한유나.
바보 같다고 생각하면서도 떠오르는 걸 막을 순 없었다. 폭주 직전까지 가서 기절했다는 말도 계속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평정심은 전혀 유지할 수 없었다. 가이딩을 하는 내내 어지러운 머릿속 때문에 존이 불안정하게 흔들리기까지 했다. 결국 진아가 한마디 했다.
“유나 씨, 정지운 때문에 그래요?”
“…….”
그 말에 차마 아니라고 대답할 수 없었다. 유나가 입을 다물고 대답하지 않자 진아가 하아, 한숨을 쉬었다.
“유나 씨. 아직 정지운 못 잊었죠?”
“…….”
“표정 보면 다 티 나요.”
그렇겠지. 유나는 어색하게 미소를 지었다가 이내 그 미소도 지웠다. 느린 한숨이 잇새로 흘러나왔다. 진아가 굳은 유나의 얼굴을 보더니 시계를 흘긋 보며 말했다.
“이제 퇴근해요, 유나 씨.”
이제 퇴근할 시간이긴 했다. 유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가이딩 존을 해제했다. 전장을 가로질러 걷는데 걸음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지하철역까지 제법 거리가 됐으므로 유나는 걷는 내내 생각에 빠졌다.
…어떻게 폭주했을까. 저번에 진아 씨가 말하길, 조용했다가 누군가 건드리면 다 죽일 듯이 물건들을 부쉈다고 했는데. 이번에도 그랬을까? 지금은 어떨까.
걸음이 느려졌다. 유나는 습관처럼 입술을 깨물었다. 생각하지 않으려고 해도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지하철에 타고, 집에 가면서도 유나의 머릿속엔 온통 폭주했다는 정지운밖에 없었다.
유나는 홀린 듯 이전에 살았던 정지운의 집이 있는 동네로 향했다. 지하철에서 내리고, 익숙한 거리를 걸었다. 눈에 들어오는 풍경이 지독히도 익숙했다. 정지운의 허락하에 그와 함께 걸었던 거리였다.
제 옆에 찰싹 달라붙어 있던 온기는 이제 없다. 조잘거리던 정지운의 목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유나야.’
늘 부드러운 어조로 날 그렇게 불렀는데.
나쁜 새끼.
차라리 끝까지 제게 못되게 굴었으면 이러지도 않았을 텐데. 왜 그렇게 내 이름을 부르고, 매번 안아 주고, 사람을 흔들었을까. 그런 눈으로 보지 말지. 이때까지 했던 행동들 모두 다 네가 가이드라서 그런 거라고 하지 왜…….
‘너는 내 가이드가 되기 싫어하고, 이제 유나는 내 가이드도 뭣도 아닌데……. 왜 난 네가 보고 싶고, 왜 계속 네가 생각나는 거지.’
울면서 그런 말을 해.
유나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차올랐다. 형용할 수 없는 감정들이 심장을 찌르고 지나갔다. 엄마를 향한 미안함, 스스로를 향한 원망, 이해할 수 없는 미련, 그럼에도 느끼는 그리움. 차오른 눈물이 기어코 뺨을 타고 줄줄 흘러내렸다.
“흐으…….”
유나가 거리를 걸으며 울었다. 길거리에서 울면서 걷는 건 난생처음이었다. 소리도 참지 않았다. 주변에서 쳐다보는 게 느껴졌으나 유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나오는 눈물을 모조리 내보냈다.
“개새끼…….”
차오른 눈물 때문에 시야가 흐릿해졌다. 유나는 눈물을 닦지도 않고 걸었다. 흐릿한 시야라도 앞의 풍경은 기억 때문에 선연하게 느껴졌다.
유나가 느릿하게 걷다가 이내 보이는 익숙한 인영에 걸음을 멈칫했다. 저 멀리, 벤치에 앉아 있는 남자의 모습이 무척이나 낯익었다. 유나가 손등으로 눈물을 훔쳤다. …멀리서도 알 수 있었다. 남자 또한 유나를 알아본 것인지 고개를 돌린 자세 그대로 굳어 있었다.
발에 추라도 달린 것처럼 움직일 수 없었다. 하나 눈물은 여전히 흘러내렸다. 두근두근, 심장이 크게 뛰기 시작했다. 유나가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천천히 앞으로 발을 내디뎠다.
벤치 앞까지 도착한 유나는 저와 눈을 마주한 지운을 바라보며 물었다.
“왜 여기 앉아 있어요.”
지운이 멍하니 유나와 눈을 맞췄다. 그의 눈이 흐리멍덩했다. 새하얗게 질린 낯빛에 뺨은 전보다 더 말랐다. 유나가 그의 눈 밑에 자리 잡은 거뭇한 다크서클을 노려보며 소리를 높였다. 눈물이 울컥 차올랐다.
“집에서 쉬어야 할 사람이 왜 이러고 앉아 있냐고요!”
“…진짜 유나야?”
그가 중얼거리더니 고개를 푹 숙였다가 다시 들었다. 아직도 멍한 표정이었다. 그가 눈을 깜빡거렸다.
“유나가 여기 올 리 없는데.”
그러더니 눈을 느릿하게 감았다가 떴다. 이내 그의 흐릿한 눈에 이채가 돌더니 그가 눈을 크게 떴다. 유나의 눈에서 눈물이 코피처럼 쏟아졌다. 그녀는 속절없이 흐르는 눈물을 닦지도 않고서 여전히 그를 노려보았다.
“이번에는 안 찾아갔는데… 왜 울어?”
가슴이 울렁거렸다. 왜 안 찾아왔냐고, 그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왜 안 찾아왔냐니. 그만하자고 한 건 나인데. 제가 생각해도 모순 그 자체였다.
지운이 가만히 유나를 올려다보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유나가 일어선 지운의 팔목을 붙잡았다. 뼈가 잡혔다.
“왜 전보다 더 말랐어?”
“…….”
지운이 입을 다물었다. 유나가 고개를 들어 지운의 뺨을 바라보았다. 푸석푸석하고 홀쭉했다. 잠을 자지 못한 게 여실히 보이는 거뭇한 눈가에 가슴이 찌르듯이 아파 왔다. 유나의 눈에 고인 눈물이 후드득 떨어졌다.
눈앞의 이 남자가 차라리 자신을 꽉 안아 주었으면 했다. 하나 지운은 요지부동이었다. 유나가 그런 지운을 노려보았다.
“왜 안아 주지 않아?”
지운이 당황한 듯 눈을 깜빡거렸다. 유나의 손에 잡힌 그의 팔이 움찔, 움직였다.
“왜 아무것도 안 하냐고.”
전처럼 막 휘두르고, 아무렇지 않게 껴안고, 입맞춤을 흩뿌리던 그가 아니었다. 이게 다 ‘가이드’가 아니어서라니. 가이드, 그게 뭐라고. 가이드가 아닌데도 보고 싶고 생각난다고 했으면서. 왜.
“유나는… 내가 필요 없잖아.”
지운이 중얼거렸다. 유나가 아랫입술을 꽉 깨물며 팔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아니라고, 그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요동치는 감정을 믿을 수 없었다.
필요 없지 않았다.
“…안아 줘.”
지운의 동공이 흔들렸다.
“그런 소리 하지 말고 그냥 안아 달라고!”
유나가 크게 소리쳤다. 지운이 여전히 떨리는 눈동자로 유나를 바라보다가 더듬더듬 손을 들어 유나를 안았다. 유나의 뺨이 지운의 가슴에 닿았다. 익숙한 품이었다. 팔목을 잡았던 손을 놓고 유나가 그의 등을 꽉 껴안았다. 또다시 눈물이 차올랐다. 품에 안기고 나자 유나는 한 번 더 확신할 수 있었다.
나는 정지운이 보고 싶었다고. 이 품이 그리웠다고.
“흐으…….”
유나가 아이처럼 흐느끼며 울었다. 어정쩡하게 허공을 맴돌던 지운의 손이 유나의 등에 닿았다. 그의 등이 가파르게 오르내렸다. 그가 후욱,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유나의 어깨 위로 물기가 떨어졌다. 그도 울고 있었다.
“나쁜 새끼…….”
정지운이 에스퍼라서 좋아하게 된 걸까? 그런 거라면 싫었다. 좋아하는 이유를 그런 곳에서 찾고 싶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정지운이 자신을 가이드라고 생각해서 좋아하는 게 싫었다. 가이드니까 좋아하는 거라고, 그렇게 느끼게 하는 게 죽도록 싫었다.
왜 그게 사랑의 이유가 되어야 해.
“내가 가이드라서 좋다며.”
“그런 줄 알았어. 에스퍼와 가이드니까… 좋아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어.”
“…….”
“당연히 유나도 날 사랑하게 될 줄 알았어.”
지운의 뺨이 눈물로 흠뻑 젖어 들었다. 유나가 고개를 들어 지운을 마주 바라보았다. 유나가 한 손으로 그의 뺨을 움켜쥐었다. 뜨거웠다.
“난… 그런 거 싫어. 에스퍼라서, 가이드라서, 그래서 좋아하는 거 싫어.”
그런 게 사랑의 이유가 되는 건 싫었다.
“그냥… 그냥 좋아한다고 하면 안 돼?”
유나가 눈을 와락 일그러트렸다. 오래도록 가슴 속에 묻어 놓았던 말이었다. 내뱉고 나자 가슴이 가벼워진 한편, 또다시 울음이 차올랐다. 그럴듯하게 세워 두었던 자존심이 모두 무너져 내렸다. 이제 알맹이만 남았다.
지운이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유나가 눈을 부릅뜨고 지운을 바라보았다. 그가 아, 탄식하더니 숨을 갈급하게 몰아쉬었다. 유나가 손을 뻗어 지운의 목을 껴안았다. 지운이 유나의 목덜미에 입술을 묻었다.
“좋아해.”
“…….”
“사랑해, 유나야.”
유나가 끕, 숨을 삼켰다. 알맹이만 남은 심장이 강렬하게 요동쳤다.
“네가 가이드라서가 아니라, 그냥 네가 좋아.”
“…….”
“그냥… 유나 네가 좋아.”
듣고 싶었던 말이었다. 어쩌면 예전부터 쭉… 기다려 왔던 말이었다. 유나가 흐느끼며 물었다.
“얼마큼?”
“매일 네 생각을 할 만큼.”
“또?”
“꿈에서도 네가 나올 만큼.”
“또.”
“처음으로 울 만큼.”
“또…….”
“처음으로… 내가 잘못했다는 걸 깨달을 만큼.”
유나가 껴안은 팔을 풀고 그의 눈을 다시 바라보았다. 눈에 고인 눈물이 바닥에 점점이 떨어졌다. 지운이 손을 뻗어 유나의 두 뺨을 움켜쥐었다.
“미안해…….”
“나쁜 놈.”
“…잘못했어.”
지운이 유나의 눈가에 입을 맞췄다. 유나의 눈물이 그의 입술에 스며들었다. 유나가 그의 손등 위로 제 손을 겹쳤다. 뜨거웠다. 정지운이었다. 죽도록 미워하고, 죽도록 싫다고 소리쳤지만, 그만큼 죽도록 생각했던 사람이었다.
유나는 이제 자신의 마음을 완전히 받아들이기로 했다. 더 이상 자신을 자책하거나 탓하지 않기로 했다. 지운이 ‘가이드’가 아닌데도 내가 보고 싶다고 했으니까.
“유나도 내가 보고 싶었어?”
지운이 여전히 믿기지 않는다는 듯 의문스러운 눈으로 물었다. 유나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응, 나쁜 새끼야.”
“정말? 내가 싫지 않아?”
“안 싫어… 나쁜 놈아.”
유나가 이번에는 고개를 저으며 먼저 지운에게 입을 맞췄다. 지운은 기꺼이 입술을 열었다.
지운의 집은 엉망이었다. 자신의 옷가지가 여기저기 널려 있고, 집 안 곳곳에 먼지가 쌓여 있었다. 이전의 깔끔했던 집과는 딴판이었다. 유나는 침대 위에 널린 제 옷가지를 흘긋 보았다가 소파에 앉아 그에게 손짓했다.
“이리 와요.”
우선 가이딩이 필요해 보였다. 지운은 유나의 손짓대로 그녀에게 다가와 그녀 옆에 자리 잡았다. 유나가 팔을 벌렸다.
“자요.”
그가 눈을 깜빡이며 유나의 품을 빤히 바라보더니 이내 그녀의 품 안으로 몸을 구겨 넣었다. 유나가 그의 어깨와 등을 쓰다듬었다.
“…유나야. 이상해.”
그가 품 안에서 중얼거렸다.
“나 싫지 않아?”
“네, 왜요?”
“원래 나 싫어했잖아…….”
그랬던 것 같기도 하다. 어느 순간 미움은 희석되고 자신도 알지 못하게 가랑비에 옷 젖듯이 스며든 애정이 생겨 버렸지만. 유나는 대답하지 않고 화제를 돌렸다.
“이제 저랑 약속해요.”
“어떤 거?”
지운이 부모의 말을 경청하는 아이처럼 귀를 쫑긋했다.
“다른 생명체나 사물을 소중히 다뤄 봐요. 그때 그 집에 있었던 화분… 그거 당신이 깨트린 거죠? 다시 가니 없던데.”
지운이 입을 꾹 다물었다. 침묵은 곧 긍정이었다. 유나가 한숨을 쉬었다.
“…알겠어.”
그가 천천히 대답했다. 유나가 눈을 치켜뜨며 또 일렀다.
“다른 사람 입장에서 한 번 더 먼저 생각해 보고요.”
“응.”
“당신 마음대로 굴기 전에, 나한테 의사 먼저 묻고요.”
“응.”
지운이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너무 순순히 대답해서 유나는 오히려 맥이 빠졌다. 이때까지 그럼 모르겠다고, 이해가 안 간다고 했던 게 진짜로 몰라서 그랬단 말이야? 어이가 없었다. 주변에서 오냐오냐 떠받들어 줬다더니, 그래서 이렇게 자란 건가?
“전부 다 소중히 다뤄야 해? 난 뭔가를 죽이는 게 일상인데.”
“…….”
이 남자는 애초부터 문제구나. 유나는 속으로 고개를 저으며 입을 열었다.
“사람에게 위해를 가하는 몬스터는 제외하고요.”
“으음…….”
그가 한숨을 쉬며 유나의 가슴팍에 뺨을 묻었다.
“유나 말고 다른 게 소중한 건 싫어.”
“…그럼 조심히 다뤄 봐요.”
“알겠어.”
“그리고… 나는 몰라도 우리 부모님에게까지 함부로 구는 건 용서할 수 없어요. 그러니까 다음번에 엄마랑 아빠 만나면 정식으로 사과해요.”
“응… 미안해.”
지운이 유나의 품에 완전히 몸을 묻었다. 마치 한 쌍의 뱀처럼 몸이 얽혔다. 유나는 여실히 느껴지는 아래의 느낌에 멈칫했지만, 이내 모른 척했다.
“그럼 유나도 내가 좋은 거야?”
“…왜 계속 물어요.”
“안 믿겨서. 내가 왜 좋아? 에스퍼라서 좋아하는 게 아니라면…….”
유나는 그렇게 말하는 지운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그의 정수리와 내리깐 기다란 속눈썹이 보였다. 시선을 느꼈는지 그가 눈을 위로 치뜨며 유나를 바라보았다. 그 검은 눈동자를 보면서 평이한 어조로 대답했다.
“잘생겨서요.”
“…….”
“또라이에다 정상은 아니지만, 당신 잘생겼잖아요.”
“…내가 잘생겨서 좋아?”
그가 손을 들어 제 뺨을 만졌다. 마른 뺨이 손바닥에 여실히 느껴졌다. 그가 인상을 찌푸렸다. 지금은 못생긴 거 같은데…….
“지금은 말라서 전보다 별로긴 해요.”
그 말에 지운의 표정이 쩍 굳었다.
“…별로야?”
“조금? 그러니까 밥 잘 챙겨 먹고, 이제부터 푹 자요.”
“나도 밥 먹고 싶고, 자고 싶었는데… 유나가 없으니까… 안 됐는걸.”
그가 억울하다는 듯 항변했다. 유나는 그의 뺨을 장난스레 툭 쳤다. 폭주까지 했다는 걸 알기에 그의 말이 거짓말이 아니라는 건 알았다. 지운은 별로라는 말이 제법 충격이었는지 계속 제 뺨과 얼굴을 더듬었다.
“…빨리 전처럼 돌아갈게.”
“네.”
유나가 슬슬 몸을 일으켰다. 이제 집으로 돌아가야 했다. 안 그래도 주머니 속 스마트폰이 계속 울리고 있었다. 보지 않아도 엄마의 전화일 게 뻔했다.
“이제 갈게요.”
“…벌써?”
지운이 주인 잃은 강아지 같은 얼굴로 물었다. 멀어지는 유나의 몸에 손을 뻗었다가 그가 천천히 손을 내렸다.
“네. 세현이 보러 가야죠.”
“또 볼 수 있어?”
“네.”
“유나 전장으로 내가 데리러 가도 돼?”
“마음대로 해요.”
그 말에 지운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그가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유나가 현관으로 향했다. 신발을 신고 나가는데 지운이 당연하다는 듯 뒤를 따랐다. 지운이 조심스레 유나의 손을 거머쥐었다. 유나는 그 손을 뿌리치지 않고 맞잡았다.
예전에 자주 봤던 기사가 이미 차 운전석에 앉아 있었다. 유나는 지운과 함께 조수석에 올라탔다.
“세현이 보고 싶어.”
지운이 말했다. 유나는 문득 아빠라고 중얼거리던 세현을 떠올렸다. 세현이는 그를 기억할까? 그리고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
아직 남은 게 많았다. 숙려 기간이 아직 끝나지 않았지만 그와 이혼 신청을 했고, 세현이가 있었으며, 부모님이 있었다. 그와의 관계에서 아직 청산하지 못한 앙금이 남아 있었다.
“보러 와요.”
“…응.”
“하지만 지금 말고 나중에. 시간이 흐르고 나서.”
“응.”
그가 수긍했다. 유나는 제 어깨에 얼굴을 기대는 지운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 * *
유나의 일상은 여전히 똑같았다. 아침이 되면 출근하고, 퇴근하면 집으로 돌아가 세현을 돌봤다. 다만 달라진 것은 퇴근길마다 그가 함께한다는 것이었다.
진아는 그가 데리러 온 첫날, 저 멀리 유나를 기다리고 있는 지운을 보고서 입을 쩍 벌렸다.
“유나 씨. 정지운이랑 다시 만나요?”
“…그렇게 됐어요.”
진아는 할 말은 많지만 하지 않는다는 얼굴로 유나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 눈빛에 유나가 머쓱하게 시선을 피했다. 친구보고 그 남자 친구와 헤어지라고 닦달했던 예전의 자신이 설핏 떠올랐다. 진아 씨 마음도 그때 자신과 똑같으리라…….
“구역 변경 할 거예요?”
“그건 아직 안 정했어요.”
진아의 표정이 복잡하게 변했다. 그녀가 계속 빤히 유나를 바라보다가 이내 어깨를 으쓱였다.
“뭐, 유나 씨 일이니까. 유나 씨가 알아서 하겠지. 내일 봐요.”
“네…….”
그러고 진아는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이후 그럴 줄 알았다는 말을 의미심장하게 남겼을 뿐이었다.
유나는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다가 제 목덜미에 뺨을 비비는 지운을 느끼며 고개를 돌렸다.
지운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스킨십이 많았지만, 다시 만난 이후로 부쩍 어리광이 많아졌다. 자기 좀 봐 달라고 애쓰는 어린아이처럼.
“무슨 생각해?”
“아무 생각도 안 했어요.”
지운이 물끄러미 유나를 바라보았다. 유나는 혈색이 좋아진 그의 얼굴을 마주 내려다보았다. 전보다 뺨에 살이 붙었고, 다크서클로 거뭇했던 눈가도 이제 다시 되돌아왔다.
“이제 두통은 없어요?”
“응. 완전히 없어진 건 아닌데, 그래도 괜찮아.”
지운이 그리 대답하며 유나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은 채 체취를 흠뻑 들이마셨다. 유나는 그런 지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지운이 눈을 휘며 웃었다. 그 웃음을 마주하자 유나의 마음이 몽글몽글 부풀어 올랐다. 지운만 변한 것은 아니었다. 유나 또한 지운과 다시 만나며 전보다 안정되고, 잔잔한 행복을 느끼고 있었다.
유나는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세현이 보러 올래요?”
그 말에 유나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있던 지운이 고개를 들었다.
“그래도 돼?”
“엄마랑 아빠한테 말해 볼게요.”
유나가 가장 걱정하는 것은 엄마와 아빠의 반대였다. 지운이 그간 했던 행위는 저뿐만 아니라 제 부모님에게도 영향을 끼쳤기에 부모님의 생각 또한 중요했다. 제 감정을 차치하고, 엄마에게 했던 행위는 그가 따로 엄마에게 용서를 구해야 할 일이었다.
“응…….”
지운의 표정이 흐려졌다.
집으로 돌아간 유나는 어김없이 저를 반기는 엄마와 아빠에게 인사를 하고 바로 세현부터 찾았다. 세현이 유나를 보자마자 엄마, 하고 그녀를 불렀다. 세현이 뒤뚱뒤뚱 걸어 유나에게 왔다.
“세현이 잘 있었어?”
“우웅.”
유나가 자연스럽게 세현을 안아 들었다. 유나의 엄마가 부엌에서 말했다.
“유나, 밥은?”
“먹을게.”
이미 코끝으로 음식 냄새가 스며들어 왔다.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세현을 내려놓고, 유나와 유나의 아빠가 식사 준비를 시작했다. 가족 모두 식탁 앞에 앉아 수저를 들었다. 유나가 음식을 입에 넣으면서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엄마, 아빠. 있잖아 나…….”
입을 열고 나서도 차마 말이 곧바로 나오지 않았다. 유나는 심호흡을 한번 한 다음 말을 내뱉었다.
“정지운이랑 다시 만나.”
그 말에 식탁의 분위기가 쩡― 얼어붙었다. 이미 이전에 유나에게 한번 언질을 들었던 엄마조차 표정이 차갑게 굳었다. 유나의 아빠가 수저를 내려놓았다.
“왜?”
가장 쉽지만, 가장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이기도 했다. 유나는 망설이다가 대답했다.
“좋아서…….”
그게 가장 큰 이유였다. 보고 싶었고, 좋았고, 다시 만나고 싶었으니까. 유나의 아빠가 미간을 찌푸렸다.
“좋아? 뭐가 좋아. 유나야. 너 그렇게 힘들어했으면서 또 만난다고?”
“…엄마랑 아빠가 이해 못 할 거 알아. 아는데, 근데… 그렇게 됐어.”
유나의 엄마가 소리 나게 수저를 내려놓고 유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엄마의 시선을 느낀 유나가 몸을 굳혔다. 아빠보다는 엄마의 의견이 유나에게 더 큰 위압감을 줬다. 지운이 이전에 엄마에게 직접적으로 위해를 가하기도 했고, 엄마와 심적으로 무척 가깝기 때문도 있었다.
“그래서, 다시 합칠 거야?”
“아니. 그런 건 아니야. 아직 숙려 기간도 남았고. 얼마 남지 않았지만…….”
“숙려 기간 안에 이혼 신청 안 하면 다 말짱 도루묵 되잖아. 다시 결혼 생활 이어 나가겠다는 거지?”
엄마의 허를 찌르는 질문에 유나가 턱에 힘을 주었다. 그랬다. 어쨌든 나중에 합칠 거였다. 시간문제일 뿐.
“정지운이 찾아와서 널 슬슬 꼬시던?”
“그런 거 아냐. 내가… 내가 먼저 찾아갔어.”
먼저 찾아간 게 아니라 우연히 만난 거지만, 유나는 그렇게 말하며 그녀 또한 수저를 내려놓았다. 엄마의 표정은 여전히 얼음장 같았다. 아빠 또한 마찬가지였다.
이런 반응을 일찌감치 예상했기에 큰 충격은 없었지만 그래도 마음이 무거웠다. 유나는 눈을 이리저리 굴리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세현이랑도 만나게 할까 해.”
유나의 엄마가 허, 헛웃음을 내뱉었다.
“이 집에 데려오겠다고? 아님 네가 그 집에 다시 돌아갈 거야?”
속사포처럼 쏟아지는 질문에 유나가 고개를 들어 엄마를 바라보았다. 엄마의 눈에 원망이 섞여 있었다. 유나의 심장이 아래로 쿵, 내려앉았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결국 저녁 식사는 살얼음판처럼 차갑게 얼어붙은 채 끝이 났다. 유나는 눈칫밥에 못 이겨 자리에서 일어나 방으로 돌아갔다.
세현과 함께 시간을 보내면서도 유나는 계속 떠오르는 엄마의 원망 섞인 눈동자가 잊히지 않았다. 엄마의 마음을 모르는 건 아니었다. 그렇게 강제하고, 저를 힘들게 하고, 엄마와 아빠를 무시한 남자와 다시 만난다니. 엄마가 원망할 이유는 충분했다.
하지만… 정지운에게는 자신이 필요하지 않은가. 자신 또한 그가 필요했다.
생각에 빠져 있는 와중에 문이 열렸다. 고개를 돌리자 엄마가 보였다. 여전히 엄마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유나가 시선을 아래로 떨궜다.
“한유나.”
“…응.”
엄마가 유나의 옆에 앉았다. 유나는 입술을 안으로 말았다.
“엄마 마음 이해하지.”
“…응.”
이해하고 또 이해했다. 하지만 그와 다시 헤어지고 싶진 않았다.
“하루아침에 네가 사라지고, S급 가이드가 되고, 결혼하고, 아이까지 낳고. 엄마 품에서 오래도록 떠나간 그동안 엄마가 얼마나 마음고생을 한 줄 아니?”
알고 있었다. 저뿐만 아니라 엄마도 자신만큼 괴로워하고 힘들어했음을 충분히 알았다. 유나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근데도 다시 만나고 싶어?”
“…응.”
그래도 유나는 대답했다. 유나의 엄마가 눈가를 일그러트렸다.
“유나야. 엄마는 네가 이 집을 떠나가는 게 서운해.”
“…….”
“언제까지고 유나 네가 엄마랑 같이 살 줄 알았는데, 아니라는 게 엄마 마음을 아프게 해.”
유나가 고개를 들었다. 어릴 때부터 엄마와 자신은 늘 붙어 있었다. 너희 모녀 심하다, 그런 소리를 들어도 유나는 개의치 않았다. 엄마를 사랑했으니까. 엄마 또한 자신을 사랑했으니까.
“엄마는 이때까지 너 때문에 살아왔는데. 네가 없어지면 엄마는 너무 외로울 거야.”
그 말에 유나의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 이때까지 엄마가 저 때문에 살아왔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았다. 그런 엄마를 떠나가는 게 엄마에게 큰 충격이라는 것도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엄마랑 영영 헤어지는 게 아닌 거 알잖아.”
“또 그놈이 너를 못 만나게 하면?”
“이제 그럴 일 없어.”
엄마의 눈가가 여전히 일그러진 채 표정 변화가 없었다. 엄마가 믿지 못할 것도 알았다. 엄마의 눈에 원망과 약간의 배신감이 아직도 엿보여서 유나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미안해, 엄마.”
할 말은 이것밖에 없었다. 미안하다는 말. 유나는 언제나 엄마에게 미안했다. 어릴 적부터 그랬다. 아빠의 폭주를 본 그 순간부터 어린 시절부터 늘 엄마를 향한 부채감이 마음속에 자리 잡아 있었다.
엄마가 나 때문에 산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았다. 하지만 이제 그런 엄마에게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 또한… 한편으로 느꼈다.
“나 잘 살게, 엄마.”
“…….”
“내 의지대로 결정한 거야. 나 고집 센 거 알지?”
유나가 장난스럽게 웃어 보였다. 엄마의 표정에 이제 서글픔이 섞였다. 유나는 가슴속에 차오르는 슬픔을 억누르고 웃음을 유지했다. 결국 엄마가 먼저 유나의 손을 잡았다. 유나 또한 엄마의 손을 맞잡았다.
“힘들게 하면 다시 갈라서. 엄마랑 평생 살아도 되니까.”
“응.”
유나가 그제야 진심으로 활짝 웃었다. 엄마 또한 슬픈 표정을 애써 지우고 입꼬리를 올려 보였다.
* * *
유나는 결국 구역을 변경하고 지운과 함께 서울의 오피스텔에서 함께 출근하는 것으로 결정 내렸다. 진아는 예상했다는 듯 받아들였다.
“그래도 가끔 연락해요, 유나 씨.”
“네. 그동안 고마웠어요.”
“뭘요. 가뜩이나 S급 가이드가 귀한데, 덕분에 제가 편했죠 뭐.”
유나가 아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나 이별은 아쉬운 법이었다. 짧게나마 정을 나눴던 진아와의 이별조차 그랬다.
이제는 부모님 품에서 벗어날 차례였다. 유나는 지운과 함께 집 안으로 들어갔다. 지운 또한 긴장했는지 평소와 달리 능글거리는 미소를 싹 지우고 거실에 있는 유나의 부모님과 마주했다.
“…오래간만입니다.”
지운이 그답지 않게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유나의 부모님은 그런 지운을 보는 둥 마는 둥 했다. 인사가 씹혔지만, 지운은 아무렇지 않게 방 안으로 들어가는 유나의 뒤를 따랐다. 방 안에는 세현이 있었다. 세현과 오래간만에 마주한 지운이 가만히 제게 뒤뚱뒤뚱 걸어오는 세현을 바라보았다.
“아, 빠.”
그 부름에 놀란 건 지운뿐만이 아니었다. 유나 또한 눈을 동그랗게 뜨고 세현을 보았다.
“기억나, 세현아?”
“우으응, 엄마… 아빠.”
떨어진 지 제법 되었는데도 기억하다니. 유나는 벌어진 입을 한 손으로 틀어막았다. 뭐든 배우는 게 빠르고 습득력이 좋은데 기억력까지 좋다니. 무릇 부모가 갖는 팔불출이 마음속에서 미친 듯이 샘솟았다.
지운은 제게 다가온 세현을 품에 안아 들었다. 세현이 얌전히 품에 안겼다.
유나는 지운의 품에 얌전히 안긴 세현을 바라보다가 이어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챙길 게 많았다. 유나는 캐리어에 짐을 차곡차곡 쌓으면서 20년 넘게 산 이 집에서 떠난다는 걸 실감했다. 이 집에서 떠난다는 건 엄마와 아빠에게서 떠나는 것과 같았다.
이제야 자신이 결혼을 했고, 아이를 낳았으며, 가정을 꾸렸다는 게 비로소 느껴졌다. 그동안 감정이 무뎌져서 느끼지 못했던 흐름이 빠르게 머릿속을 휩쓸고 지나갔다.
이제… 자신에게는 정지운과 세현이 있었다.
짐을 다 챙긴 유나가 캐리어를 끌고 거실로 나갔다. 지운도 그 뒤를 따랐다. 소파에 앉아 있던 엄마와 아빠가 떠나는 유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지운이 입을 열었다.
“그동안 죄송했습니다.”
“…….”
유나의 엄마가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지운을 바라보았다. 유나의 아빠도 표정이 비슷했다. 사람 성정이 얼마나 변한다고, 그렇게 말하는 눈이었다.
“이젠… 그러지 않겠습니다.”
그 말에 정적이 흘렀다. 오랜 정적을 깬 건 유나 엄마의 한숨이었다.
“가 봐.”
짧지만 확실한 대답이었다. 수긍. 유나의 표정이 확 밝아졌다. 그제야 유나의 아빠도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유나야. 뭔 일 있으면 연락해라.”
“응.”
유나가 현관문을 열었다. 문을 닫을 때까지 유나는 엄마의 조금 슬퍼 보이는 표정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익숙한 차에 올라타고 나서도 유나는 마음 한편이 조금 찝찝한 걸 느꼈다. 지운 또한 그것을 알아차리고 유나의 표정을 살폈다.
“…유나야, 왜 그래?”
“그냥 엄마한테 미안해서요.”
“…미안.”
유나가 눈썹을 아래로 늘어트렸다.
“이건 나와 엄마의 문제기도 해요. 물론 당신이 잘못한 게 많긴 하지만. 언젠가 한 번쯤 겪었어야 할 문제예요.”
엄마의 품에서 벗어나는 것. 유나는 이때까지 엄마와 제가 서로에게 집착하는 게 싫지 않았다. 소중하고 사랑하니까. 정지운을 만나기 전이었다면 그 생각은 변함없었겠지.
유나는 지운의 품에 안긴 세현을 흘긋 보며 머릿속에서 엄마의 생각을 조금씩 지워 냈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엄마를 소중하게 생각하고 사랑하는 마음은 같으니까.
지운의 오피스텔에 도착한 유나는 우선 지운에게 캐리어를 가리키며 말했다.
“짐 좀 풀어 줘요.”
“응.”
지운이 곧바로 대답하며 캐리어에서 짐을 꺼내 정리하기 시작했다. 유나는 문득 이전 국경 근처의 집에서 살 때, 매번 얼굴을 마주했던 가정부 아주머니를 떠올렸다. 잘 지내실까?
“가정부 아주머니는 어떻게 됐어요?”
“아직 그 집에서 살아.”
“…네?”
“관리해야 할 사람은 필요하니까. 그 사람한테 맡겼어.”
정지운이 천연덕스러운 얼굴로 답했다. 유나는 허, 헛웃음을 터트렸다가 이내 정지운답다고 생각했다. 단순하고 과격함 그 자체였다.
“이제 아이를 돌볼 사람이 필요하잖아요. 그 아주머니… 다시 불러 주세요.”
“응.”
세현이를 맡긴다면 그 아주머니께 맡기고 싶었다.
유나는 지운의 방에 아기 침대를 놓고, 그 위 천장에 모빌을 달았다. 그리고 거실에 유아용 매트를 깔고 장난감 바구니를 놓았다.
어느새 넓은 집이 가득 찼다. 짐 정리를 마친 지운이 유나에게 쪼르르 다가와 유나를 뒤에서 껴안았다.
“유나야.”
그의 입술이 유나의 귓가에 닿았다. 뜨거운 숨결이 귓가로 전해졌다.
“고마워. 그리고… 많이 사랑해.”
이전에는 한없이 가볍다고 넘겼던 말이 이제는 그렇게 다가오지 않았다. 그의 진심을 이제 아니까. 하지만 유나는 조금 심술을 부리기로 했다.
“유나는?”
“몰라요.”
유나를 등 뒤에서 껴안고 있던 지운이 뭐? 하며 유나의 앞을 막아섰다.
“유나는 나 안 사랑해?”
“…몰라요.”
“진짜 그러기야?”
“조금 좋아하는 것 같긴 해요.”
그러고는 유나가 지운을 지나쳐 세현에게로 다가갔다. 지운이 뒤에서 무어라 구시렁거렸으나 유나는 가볍게 그 말을 무시했다. 아주 나중에, 시간이 많이 흐른 뒤에… 그때 말해 줄 생각이었다.
그를 사랑하긴 하지만 아직까지 그를 완전히 용서한 건 아니니까.
유나는 다시 제게 다가와 껴안는 지운의 목을 두 손으로 휘감았다. 당연하다는 듯 그의 입술이 쏟아졌다. 유나는 눈을 감고 그 입맞춤을 받았다. 따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