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세 번째 탈출 (1)
유나는 조수석에 앉은 채 여전히 달달 떨었다. 운전을 하는 지수가 핀잔을 주었다.
“그만 좀 떨어.”
“너 같으면 안 떨리겠어? 애를 두고 도망치는데.”
“운전하는 데 방해된단 말이야.”
참나. 유나는 혀를 차고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늘 타던 정지운의 차가 아니었다. 비좁은 경차였다. 그것조차 유나는 새롭고 마음이 들뜨는 걸 느꼈다.
막아 놨던 둑이 터진 양, 다양한 감정의 스펙트럼이 심장을 스쳐 지나갔다. 유나가 창밖을 바라보고 웃자 운전하고 있던 지수가 슬쩍 보고선 하, 웃음을 터트렸다.
“이제 너 같다.”
“나 같은 게 뭔데.”
“지랄 맞고, 잘 웃고, 잘 우는 한유나.”
유나가 하하, 소리 내어 웃었다. 소리 내어 웃은 것도 오래간만이었다. 뭔가 후련했다. 아이를 놓고 왔는데도.
나 나쁜 엄마구나. 유나는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다시 그곳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세현이를 사랑했다. 몇 달 동안 배 아파 낳은 아이였고, 아이를 볼 때면 사랑스러운 감정이 솟구쳤다. 하지만…….
죄책감이 들끓었다. 유나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야, 깊게 생각하지 마.”
지수가 말했다. 유나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아이가 계속 생각이 났다. 잘 울고, 잘 칭얼거리는 아이인데… 엄마인 저를 찾을 게 분명했다.
“아주머니께서 걱정 말라고 하셨잖아.”
“…응.”
“잘 보살펴 주실 거야.”
“응.”
정적이 흘렀다. 먼저 입을 열어 분위기를 환기한 것은 지수였다.
“야. 너 내가 방 뺀 것도 모르지?”
“어, 방 뺐어?”
지수는 본가가 서울인데도 학교 위치 때문에 자취를 하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이제 4학년 2학기를 마쳤을 테니 더 이상 자취할 필요성이 없긴 했다.
“졸업도 했겠네?”
“졸업한 지 한참 됐지. 나 백수야, 백수.”
“그럼 부모님 집에서 지내고 있어?”
“응. 지석이도 제대해서 같이 지내.”
유나는 지수의 부모님과 남동생과도 친한 사이였다. 고등학생 때부터 지수의 집을 들락날락했으니 이미 안면을 튼 건 물론이고 친밀감도 충분했다.
“그럼 지금 부모님 댁으로 가는 거야?”
“아무래도 그래야 하지 않겠냐.”
“…정지운이 찾아올 거 같은데.”
충분히 그럴 수 있었다. 지수의 연락처까지 아는데 집 주소라고 모를 리 없었다. 지수의 부모님에게까지 해를 끼칠 순 없었다.
“지수야… 미안한데, 나 돈 좀 빌려줘. 아무래도 여관에서 지내야 할 거 같아.”
제겐 스마트폰도, 지갑도, 아무것도 없었다. 말 그대로 빈털터리였다. 지수가 허, 웃었다.
“그러고 보니 너 빈손으로 나왔네. 가방은 챙겼어야 했는데.”
“나 원래 폰도 없고 지갑도 없어.”
“네 남편 짓이야?”
“응.”
“완전 미친놈이네?”
“응.”
맞아, 미친놈. 유나가 덧붙였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 막막했다. 지수의 부모님 집으로 갈 수도 없고, 수중에 돈도 없었다. 지수가 빌려준다고 해도 한계가 있을 것이다. 이제 막 학교를 졸업하고, 백수라고 했으니까…….
“나한테 빌려준 돈은… 우리 엄마한테 연락해서 받아줘, 지수야.”
“응. 내 전 재산 너한테 다 줄게. 백만 원이 다지만.”
유나가 푸하, 웃음을 터트렸다. 그냥 웃겼다. 유나가 웃음을 터트리자 지수도 같이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다 다시 정적이 흘렀다.
가이드는 에스퍼 없이 다른 지역으로 이동이 불가했다. 자차가 아닌 이상 그랬다. 비행기 표든 시외버스 표든 에스퍼와 동행하지 않으면 끊을 수 없었다. 지수의 차를 타고 이동하는 게 아닌 이상, 어쩔 수 없이 서울에 머물러야 했다.
어느새 차는 고속도로를 벗어나 국도에 진입했다. 높이 세워진 빌딩이 눈에 보이자 유나는 다시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혹시라도 지수에게 해코지라도 하면 어쩌지. 불안해서 다시 몸이 떨렸다.
“지수야, 미안해.”
“뭐가.”
“괜히 휘말리게 해서……. 그 사람이 너한테 해코지할 수도 있어. 정말로.”
“죽는 거만 아니면 됐어.”
지수가 심드렁하게 이야기했다. 유나는 인상을 와락 찌푸렸다가 이내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깊게 생각하지 말자.
차가 완전히 서울로 진입했다. 유나는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지수야. 돈은 현금으로 뽑아서 줄 수 있어?”
“응.”
여관비를 아끼기 위해선 최대한 서울 외곽 쪽으로 이동해야 했다. 유나는 지수에게 부탁해 최대한 여관비가 저렴한 곳으로 이동했다. 시계를 보자 3시 반이었다. 슬슬 정지운이 집에 도착할 시간이 다가왔다.
또 알게 되면… 이번엔 어떻게 할까. 그때처럼 두 달 동안 지켜볼까? 아니면 바로 잡으러 올까. 어떤 방법이든 간에 다시 강제로 붙잡아 가는 건 똑같겠지. 유나는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지수는 유나가 말했던 대로 돈을 인출해 현금으로 유나에게 건넸다.
“야, 잃어버리지 마?”
“응. 우리 엄마한테 연락해서 꼭 돈 받아, 알겠지?”
“응. 그건 걱정 말고. 근데 폰이 없어서 연락을 못 하겠네. 너 어느 여관에 묵는지만 알고 가자.”
“응.”
유나와 지수는 모텔과 여관이 모여 있는 모텔촌을 전전하며 싼값에 장기 숙박을 할 수 있는 여관을 찾아다녔다. 그나마 저렴한 곳을 골랐다. 지수는 유나가 머무는 호실까지 확인하고선 신신당부했다.
“밥 잘 먹고, 잘 지내라. 내가 몇 번 들를 테니까.”
“응.”
유나가 고개를 끄덕이며 지수에게 손을 흔들었다. 지수의 얼굴에 걱정이 역력했다. 도망치라고 한 건 자기면서. 유나가 피식 웃음을 흘리자 지수 또한 웃음을 흘렸다.
지수가 여러 차례 신신당부를 한 끝에, 여관방을 떠났다. 유나는 문을 닫고 허름한 여관방 안에 앉아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았다. 또 도망쳤다. 또…….
이번에는 얼마나 갈까? 그런 자조적인 생각이 들었다. 아이를 두고 도망쳤다는 것에 대한 죄책감도 들끓었다. 세현이는 죄가 없었으니까. 하지만… 다시 그곳에 돌아가고 싶진 않았다. 그곳에 가면 내가 이상해지니까.
유나는 퀴퀴한 냄새가 나는 침대에 누웠다. 비록 정지운의 집에 있는 침대보다 못했지만, 마음은 이곳이 더 편안했다. 이상한 일이었다. 유나는 하하, 실없는 웃음을 흘렸다가 이내 계속 소리 내어 웃었다. 미친 사람처럼.
* * *
지운은 CCTV로 유나와 지수가 함께 나가는 걸 고스란히 지켜보았다. 가정부는 죄수처럼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고개를 푹 숙였다.
“그냥 내보내 줬어?”
“…네, 사장님. 그냥 친구분이랑 어디 놀러 가는 줄 알았어요.”
“내가 분명히 외부인의 출입은 받지 말라고 했는데.”
가정부가 입을 다물었다. 지운이 하, 헛웃음을 터트렸다.
어느 정도 직감하고 있었기에 큰 충격은 없었다. 다만 지운은 솟구치는 감정을 제어하느라 턱에 힘을 주어야 했다. 유나는 매번 도망치고, 도망치고, 또 도망쳤다. 도망칠 수 없게 결혼을 하고, 아이를 임신하게 하고, 각인까지 했는데도 기어코 벗어났다. 그 어떤 방법을 써도 유나는 벗어났다.
지운은 바로 오늘까지 보았던 바짝 마른 유나를 떠올렸다. 웃지 않는 유나. 맛있는 걸 먹어도 무표정한 유나. 전처럼 화내지도 않고, 울지도 않는 유나. 늘 멍하니 허공만 바라보는 유나…….
지운은 결국 완전히 인정해야만 했다.
유나는 저를 사랑하지 않는다. 좋아하지 않는다. 유나는 저만의 가이드에 불과하다. 자신은 유나의 에스퍼가 되지 못했다. 혼자만 붙잡고 있는 관계였다.
시간이 지나면 유나도 자신을 좋아하게 되리라는 믿음도 덧없이 깨졌다. 가면 갈수록 유나는 겨울나무의 가지처럼 말라 갔다. 자신을 사랑하지도 않았다.
왜 날 사랑하지 않을까.
왜 내가 필요하지 않지?
지운은 가만히 유나를 위해 놔둔 화분을 바라보다가 이내 그것을 발로 밀어 부쉈다. 와장창, 소리를 내며 유리가 깨졌다. 가정부가 숨을 집어삼켰다.
그걸로도 감정의 파도가 멎지 않아 또 다른 화분을 부쉈다. 하나, 둘, 그렇게 계속……. 유리가 깨지는 파열음에 맞춰 정신도 산산조각 나는 기분이 들었다.
화분을 모조리 부순 다음에야 지운은 숨을 몰아쉬며 엉망진창이 된 바닥을 바라보았다. 어찌 됐든 다시 유나를 찾아야 했다. 지운은 우선 김지수의 집부터 찾아가기로 했다.
김지수는 예상했다는 듯 제집에 찾아온 지운을 맞았다.
“숨도 안 쉬고 달려왔나 보네요.”
지수가 지운의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보며 비웃듯 말했다. 지운은 인상을 찌푸리며 본론부터 꺼냈다.
“유나 어딨어?”
“내가 그걸 말해 줄 거 같아요? 댁이 유나 망친 장본인인데.”
“힘 쓰기 싫은데.”
“죽일 거예요? 나 죽이면 유나가 댁 평생 원망할걸? 안 그래도 당신 싫어하는데, 더 싫어하게 될걸요.”
그 말에 맥이 탁, 풀렸다. 지운이 말없이 지수를 노려보았다. 조금이라도 힘을 쓰면 저 여자는 바로 죽을 것이다. 알면서도 힘을 쓸 수 없었다. 뒤따라올 성가실 일들 때문이 아니었다. 유나 때문에. 저 여자를 죽이면 다시는 유나를 마주 볼 수 없으리란 확신이 들어서.
“유나 더 망치기 싫으면 유나 좀 놔줘요.”
“…….”
“그렇게 살다간 당신은 평생 유나 사랑 못 받아.”
그 말이 지운의 가슴에 박혀 들었다. 유나의 사랑. 유나가 자신을 사랑한다면 그건 어떤 기분일까. 느껴 보지 못했기에 상상은 무궁무진했다.
지운은 저를 비웃는 지수를 앞에 두고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스스로가 병신 같았다. 고작 유나의 친구란 이유만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다니.
지운은 다시 차로 돌아와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았다. 좆같았다. 모든 게. 전부 다.
* * *
유나는 여관방 안에서 거의 모든 걸 해결했다. 식사도 배달을 시켜 해결했다. 매시간 여관방 안에 처박혀 있다고 해도 과장이 아니었다. 여관방 안에는 시계도 없어서 시간을 알려면 TV를 틀어 시간을 알려 주는 채널을 틀어야만 했다.
여관방에서 지낸 지 일주일째. 지수는 아직 오지 않았다. 아직 오십만 원 넘게 돈이 남아 있어 다행이지, 이렇게 계속 생활하다간 돈이 떨어질 게 분명했다.
방 안에 틀어박혀 지내던 유나는 슬슬 창밖을 내다보면서 바깥의 동향을 살피기 시작했다. 모텔촌이라 그런지 모텔을 들르는 사람을 제외하고는 그렇게 사람이 많이 다니는 골목이 아니었다. 근처에 식당이 몇 개 있긴 하지만 식당 또한 손님이 그렇게 많지 않았다.
세현이는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유나는 이제 막 돌을 넘긴 제 아이를 떠올렸다. 많이 울고 잘 칭얼거리고 부드럽고 작은 제 아이. 아무 죄 없는 아이. 아이를 떠올릴 때면 또 마음이 착잡해졌다.
하지만… 다시 그곳에 내 발로 돌아가진 않을 거야. 유나는 마음속으로 중얼거리며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낯익은 인영을 보고 창문에 가까이 붙었다. 지수의 남동생, 지석이었다.
지석이 주변을 살피더니 제가 머무는 여관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초인종이 울렸다. 유나는 바로 문을 열었다.
“지석아?”
제대한 지 얼마 안 됐다더니, 아직 머리가 짧은 지석이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유나 누나. 누나 대신 제가 왔어요.”
지석의 얼굴에 난감함이 가득했다. 그가 머뭇거리더니 말을 이었다.
“그… 누나 남편분이 우리 누나한테 찾아왔다고 하더라고요. 혹시 모르니 누난 안 가겠다고…….”
한편으로 예상했던 일이었다. 정지운이 가만히 있을 인사가 아니었다.
“지수는. 괜찮대?”
“네. 별일 없었대요. 그래도 누나 대신 제가 오기로 했어요.”
“그래, 고마워.”
“그, 누나. 늦었지만… 결혼 축하드려요.”
지석이 여전히 어색한 미소를 지은 채 고개를 꾸벅 숙였다가 등을 돌렸다. 어렸을 때부터 지수한테 호되게 교육을 받아 지수에게도 그렇고 누나 친구들에게도 잘하는 남자애였다. 유나는 괜히 지석까지 끌어들인 것 같아 더욱 마음이 착잡해졌다.
아직까진 괜찮다고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어떻게 될지 모를 일이었다.
유나는 초조하게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세현이는 어떻게 지내고 있지. 유나는 마음의 안정을 조금씩 되찾아 갈수록 다른 한편으로 계속 끊임없는 잡생각과 걱정에 시달렸다. 내가 이렇게 편해도 되는 걸까. 괜찮아도 되는 걸까. 그런 생각이 연달아 이어졌다.
부정적인 생각은 하지 말자. 고개를 내젓고 생각을 전환하려고 해도 다시 도돌이표였다.
유나는 기분이 가라앉을 때마다 기분을 환기시키기 위해 샤워를 했다. 마음 같아서는 나가서 산책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아니면 여관방에 있는 전화로 엄마나 지수에게 전화를 걸고 싶었다. 하지만 감시를 당하는 것 같다고 말했으니 함부로 그들에게 전화를 걸 수도 없었다.
언제까지 여기 처박혀 있어야 하지? 차라리 택시를 타고 다른 지방으로 넘어가는 건 어떨까. 그런 생각도 머릿속을 스쳤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지수와의 연결이 끊긴다. 머릿속이 복잡하게 엉켰다.
지석이는 언제 다시 오지. …그곳이나 이곳이나 초조하긴 매한가지구나. 유나는 미간을 좁힌 채 손톱을 물어뜯었다. 그때, 초인종이 울렸다.
딩동―
지석인가? 유나가 한달음에 문 앞까지 갔다가 움직임을 멈췄다. 왠지 목뒤가 서늘했다. 유나는 고민하다가 조심스레 문에 있는 조그마한 구멍에 눈을 댔다. 그리고 그대로 저와 같이 동그란 구멍에 눈을 대고 있는 검은색 동공과 마주쳤다.
“꺄아아악!”
유나가 비명을 지르며 뒤로 넘어졌다. 그러면서 동시에 문고리가 부서지며 문이 열렸다.
“유나, 여기 있었네. 찾느라 애먹었어.”
유나는 뒤로 넘어진 채 그대로 고개를 들어 방 안으로 들어오는 지운과 눈이 마주쳤다. 지운이 넘어진 유나를 내려다보더니 일어나라는 듯 손을 내밀었다. 유나는 저도 모르게 뒤로 몸을 뺐다.
지운은 유나가 뒤로 물러난 만큼 몇 걸음 더 나아간 뒤, 그녀 앞에 쪼그려 앉았다. 그러고는 유나와 눈높이를 맞췄다.
유나는 입술을 안으로 말며 지운과 눈을 정면으로 마주했다. 유나를 빤히 바라보던 지운이 고개를 갸웃했다.
“뭐가 문제지?”
유나에게 묻는 게 아니었다. 지운은 이해가 안 간다는 듯 또 한 번 고개를 갸웃했다.
“뭐가 그렇게 싫어? 뭐가 그렇게 힘든데?”
정말로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지운이 유나의 눈을 빤히 바라보았다.
“왜 또 도망쳤어?”
정말로 모르겠다는 듯. 유나는 순진무구하게까지 느껴지는 눈동자에 혼란스러움을 느꼈다. 정말… 정말 모른다고? 정말? 유나가 인상을 와락 찌푸렸다.
“몇 번을 말했잖아요. 각인은 싫다고! 직장을 그만두는 것도 싫다고!”
“그것 때문이야?”
그것 때문이냐고? 아니었다. 훨씬 많았다. 셀 수 없을 만큼. 유나가 핏대를 세우며 소리쳤다.
“고작 그것뿐이겠어요? 당신 때문에 내 인생 자체가 송두리째 바뀌었는데. 고작 당신 하나 때문에!”
유나의 화난 얼굴을 마주한 지운의 표정이 흐려졌다. 지운이 침묵하다 입을 열었다.
“그래서… 계속 이렇게 도망칠 거야?”
유나가 멈칫했다.
“나랑 세현이를 버리고?”
세현이. 유나가 눈을 빠르게 깜빡였다. 정지운은 몰라도 세현은 죄가 없었다. 아이를 볼모를 잡고 협박하는 그의 말에 화를 내야 하는데, 성대가 굳은 듯 말이 나오지 않았다. 유나가 입술을 달싹였다.
“난 유나가 없으면 안 되는데. 유나가 없으면 또 그 지옥 같은 두통에 시달리고, 매번 초조함에 시달릴 텐데.”
“…….”
“유나는 내가 없는 게 나아?”
“…네.”
입술을 달싹이던 유나가 겨우 대답했다. 흐린 표정을 한 지운이 힘없이 고개를 떨궜다.
“그렇구나. 유나는 내가 필요 없구나.”
“…….”
“왜지.”
지운이 중얼거렸다. 그러고는 고개를 들었다. 여전히 무표정했다. 늘 짓고 있는 미소가 없었다. 하나 화난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왜 내가 필요 없지?”
“…….”
“내가 어떻게 해야 해, 유나야?”
지운이 여전히 무표정한 표정으로 물었다. 아까와 똑같은 어투였다. 정말로 모르겠다는 듯, 순진무구한 아이처럼.
“알려 줘, 유나야. 네가 내 옆에 있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방법은 없었다. 이미 그가 모든 걸 망쳐 놓은 뒤였으니까. 잘 다니던 직장도 그가 강제로 그만두게 했고, 이미 각인도 맺었다. 결혼도 했고, 아이도 낳았다. 인생이 이미 송두리째 바뀌어 돌이킬 수 없었다.
모든 걸 망가트리고 어떻게 해야 하냐니. 유나는 그것조차 기만으로 느껴졌다. 하나 무표정하게 중얼거리는 그의 얼굴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그간 그에게서 느꼈던 깃털 같은 가벼움도, 장난스러운 미소도, 그 무엇도 볼 수 없었으니까.
“각인도 했고, 결혼도 했고, 아이도 낳았어. 그런데도 나를 받아들일 수 없어?”
지운이 물었다. 유나는 망설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지운의 동공이 크게 떨렸다.
“왜? 우리는… 잘 맞는 에스퍼와 가이드잖아.”
지운이 순진한 아이처럼 물었다. 유나가 허, 헛웃음을 터트렸다.
“에스퍼와 가이드? 그게 이유예요?”
고작 그게 이때까지 했던 모든 것들의 이유라고? 유나는 더욱 허탈하고 어이가 없었다. 유나가 지운을 노려보았다. 분노와 원망이 섞인 눈빛과 마주친 지운이 눈도 감지 못하고 그 눈을 그대로 마주했다. 한참이나 말을 잇지 못하던 지운이 더듬거리며 입을 열었다.
“내가 어떻게 하면 돼?”
“…….”
“다시 직장에 다니게 하면 돼?”
“…….”
“너를 어머님께 돌려보내야 해?”
“…….”
“알려 줘, 유나야.”
“…….”
“왜 날 좋아하지 않아?”
“그걸 왜 이제 와서 물어요.”
유나가 눈을 와락 찌푸리며 말했다.
“아주 예전에… 우리가 만난 지 얼마 안 됐을 때, 그때 묻지. 왜 이제 와서 묻냐고요.”
이미 돌이킬 수 없을 만큼 늦어 버렸는데. 이제 와서 말해 봤자 소용없는데.
지운이 유나 앞에 무릎을 꿇고 무릎걸음으로 그녀에게 완전히 가까이 다가왔다. 그가 손을 뻗었다. 유나는 다가오는 손을 피해 고개를 틀었다. 지운이 손을 멈칫했다.
“닿는 것도 싫어?”
“…싫어요.”
“그렇게 내가 싫어?”
“…싫어요.”
유나가 주먹을 꽉 쥐고서 말했다. 주먹 쥔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허공에서 맴돌던 지운의 손이 잠시 망설이는 듯하더니 유나의 뺨을 거머쥐었다.
“정말로 내가 싫어?”
“…네. 싫어요.”
유나가 제 뺨을 거머쥔 지운의 손을 강제로 떼어 놓았다. 예상외로 지운의 손은 순순히 떨어져 나갔다. 제가 떼어 놓고선 순순히 떨어진 손에 놀라 유나가 지운을 바라보았다. 지운의 눈이 텅, 비어 있었다.
유나는 조심스레 지운을 뒤로 밀었다. 지운이 저항 없이 뒤로 밀렸다. 그의 무릎이 바닥과 닿았다. 유나는 머뭇거리다가 지운의 이름을 불렀다.
“지운 씨.”
정지운에게서 대답이 없었다. 빈 눈동자와 표정 없는 얼굴은 똑같았다. 유나는 그의 품에서 빠져나왔다. 유나의 온기가 멀어지자 그제야 지운의 눈에 초점이 돌아왔다. 지운이 고개를 들어 일어선 유나를 바라보았다. 그는 무릎 꿇은 자세 그대로였다.
“내가… 싫구나.”
지운이 중얼거렸다.
“나만… 네가 좋은 거였어. 결국.”
그 말에 유나가 주먹을 꽉 쥐었다.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었다.
“각인을 해지하면 돼?”
“…….”
“이혼하면 되는 거야?”
그의 물음에 유나는 물끄러미 그를 내려다보았다. 그의 안색이 창백했다. 유나는 시선을 한번 피했다가 다시 지운에게로 고정하고서 입을 열었다.
“그렇게 해 줄 수 있어요?”
“…….”
“대신 세현이는 내가 데려갈 거예요. 그래도 날 놔줄 수 있어요?”
지운이 입술을 달싹거렸다. 그가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 그럼 그렇지, 유나가 눈을 가늘게 떴다. 하나 그 뒤에 나온 대답은 예상외의 것이었다.
“응. 놔줄게.”
유나가 눈을 크게 떴다. 지운에게서 처음으로 듣는 대답이었다. 놔주겠다는 말. 빈말로라도 그가 하지 않던 말이었다.
“…정말요?”
“응.”
믿을 수 없었다. 유나가 눈을 찌푸리며 물었다.
“왜 갑자기 마음이 바뀌었어요? 그렇게 얽매지 못해 안달이었던 사람이, 갑자기 왜?”
“유나는… 내가 뭘 어떻게 해도 날 싫어하니까.”
지운이 중얼거리듯 대답했다.
“나는 당연히 유나도 날 좋아하게 될 줄 알았어. 에스퍼와 가이드는 서로 끌리기 마련이니까. 근데… 아니었네.”
“…….”
“내가 뭘 어떻게 하든 유나는 날 필요로 하지 않아.”
지운이 평이하기까지 한 어조로 이야기했다. 그러더니 그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다시 눈높이가 올라갔다. 유나가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그가 무표정하게 말을 이었다.
“각인 해지하러 가자. 이혼도… 하고. 아이는 네가 데려가.”
지운이 손을 내밀었다. 유나가 그 손을 물끄러미 보기만 하고 잡지 않자 그가 손을 물렸다.
“가자, 유나야.”
그가 등을 돌렸다. 유나는 조금 멍한 기분으로 그 뒤를 따랐다. 이상했다. 정지운이 이럴 리 없는데. 이럴 사람이 아닌데.
하나 정지운은 약속했던 대로 센터에 가서 각인을 해지했다. 각인을 맺는 것만큼 해지하는 것도 간단했다. 물론 에스퍼의 동의하에 이뤄졌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각인이란 게 끔찍이도 서로를 족쇄하는 관계임에도, 맺고 끊는 게 이렇게 간단하다니. 허무하기 짝이 없었다.
손목에 새겨진 각인 고유 번호가 사라졌다. 각인을 해지하고, 센터에서 나오는 동안 지운과 유나는 단 한마디도 나누지 않았다.
먼저 입을 연 것은 조수석에 올라탄 유나였다.
“이혼은… 협의 이혼으로 할 거죠?”
“응.”
“이혼 서류는 저랑 부모님이랑 같이 사는 집으로 보내요.”
“응.”
차는 지운과 함께 살던 집으로 향했다. 세현을 데려와야 하기 때문이었다. 차에서 내리고 집으로 들어간 순간, 유나는 익숙한 아기 냄새에 홀린 듯 세현의 이름을 불렀다.
“세현아.”
“사모님.”
아이를 안고 있던 가정부가 그녀를 불렀다. 유나는 곧바로 가정부에게서 아이를 건네받았다. 새근새근, 잘 자고 있었다.
“그동안 별일 없었죠?”
“네, 아무렴요.”
가정부가 웃었다. 하나 집 안에 있던 화분이 전부 사라져 있었다. 유나가 화분이 있었던 자리를 바라보다가 이어 자고 있는 세현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고작 일주일 넘게 떨어져 있는 것뿐이었는데도 생각보다 죄책감이 심했는지 아이를 보자마자 눈물이 울컥 차올랐다.
“미안해.”
유나는 아이에게 사과했다. 잠깐이나마 너를 두고 떠난 것에 대해서 정말로 미안하다고…….
유나가 아이를 품에 껴안고서 가정부 아주머니를 향해 고개를 꾸벅 숙였다.
“그동안 감사했어요, 아주머니.”
“뭘요. 사모님께서 그동안 고생 많으셨죠.”
“다음에… 또 기회가 된다면 뵐 수 있으면 좋겠어요.”
유나가 짧은 미소를 지으며 문고리를 돌렸다. 아직 차 운전석에 정지운이 그대로 앉아 있었다. 유나는 차 뒷좌석에 있는 유아용 시트에 세현을 앉히고, 그 옆에 올라탔다. 조수석에 올라타지 않았다.
지운이 룸 미러로 뒷좌석에 앉은 세현과 유나를 흘긋 보았다가 차를 앞으로 몰았다. 유나는 숨 막히는 정적에 가만히 창밖만 바라보았다.
평소 같았으면 이것저것 정지운이 떠들었을 텐데, 지운에게서 그 어떤 말도 없었다. 그러다 유나는 흔들리는 차에 앗, 하며 시트를 짚었다. 차가 위태롭게 흔들리고 있었다.
“지운 씨?”
유나가 지운을 불렀다. 지운은 여전히 앞을 본 채로 운전을 했다. 하나 흔들리는 건 여전했다.
“정지운!”
크게 불러도 미동이 없었다. 이러다 다른 차와 박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유나가 지운의 어깨를 흔들었다.
“야, 정지운! 정신 차려!”
유나의 손길이 닿자 그제야 지운이 아, 나지막한 한숨을 내쉬더니 갓길에 차를 세웠다. 다행히 시간대도 시간대이거니와 차가 잘 다니지 않는 텅텅 빈 고속도로라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큰일이 날 뻔했다.
“미쳤어요? 왜 정신을 빼고 운전해요? 졸리면 잠깐 눈 붙이고 가든가요!”
“…머리 아파.”
지운이 중얼거렸다.
“미안. 잠시만.”
지운이 시트에 몸을 완전히 기댔다. 그러고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았다. 그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유나는 두통을 앓는 그를 바라보다가, 오늘 그와 한 접촉이 그리 많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그러면 그는 일주일 넘게 가이딩을 받지 않은 것이다.
유나는 망설이다가 차 뒷좌석에서 내려 조수석으로 옮겨 탔다. 그러고는 느릿하게 눈을 깜빡이는 그에게 제 손을 내밀었다.
“…잡아요.”
지운이 유나의 손을 바라보다가 내민 손을 맞잡았다. 뜨거웠다. 지운이 유나의 손을 꽉 잡았다가 눈치를 보며 물었다.
“안아도 돼……?”
유나가 작게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지운이 천천히 손을 뻗어 유나를 품에 안았다. 그러고는 고른 숨을 내쉬었다. 유나 또한 이 품이 싫지 않았다. 따듯하고 익숙했으니까. 하지만… 이제 끝났다.
오래도록 유나를 껴안고 있던 지운이 중얼거렸다.
“너 없이 어떻게 살지.”
“…잘 살 거예요.”
지운이 쓴웃음을 지었다. 유나가 그를 밀어냈다. 그가 아쉬운 듯 눈길을 한번 주었으나, 그걸로 끝이었다. 유나가 조수석에서 내리고 뒷좌석에 앉았다. 차가 다시 출발했다. 이번에는 흔들리지 않았다.
지운의 차가 유나의 집 앞에 도착했다. 유나는 세현을 안고 차에서 내렸다. 지운 또한 내렸다. 유나는 오히려 망설이면 더 발걸음을 떼기 어려울 것 같아 바로 등을 돌렸다. 지운이 뒤에서 유나를 불렀다.
“유나야.”
“…….”
“잘 지내.”
유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대로 세현을 안고 도망치듯 집 안으로 들어갔다. 등 뒤로 시선이 따라붙었지만 애써 무시하고서.
* * *
유나는 한동안 지운에게서 벗어났다는 사실을 실감하지 못했다. 아직도 그가 자신을 놔주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이마저도 그의 시험이 아닌가, 그런 의심을 했을 정도였다. 하나 집으로 도착한 합의 이혼 서류에 의심이 완전히 깨졌다.
유나의 주변 인물도 정지운이 그렇게 쉽게 놔주었다는 사실을 믿지 못했다. 유나의 엄마는 아직도 그가 잡으러 올지도 모른다며 매번 불안에 떨었다. 지수 또한 믿지 않았다. 혹시 모르니 조심하란 연락을 수차례 했다.
하나 유나는 이혼 서류를 받은 순간부터 불안에 떨지 않았다. 기묘한 확신이 생겼다. 정지운이 다시는 저를 강제하지 않을 거라는 기묘한 확신이…….
지운과 떨어져 부모님과 함께 살면서 유나는 차츰차츰 회복했다. 멍해진 정신도 서서히 돌아오고, 예전처럼 울고 웃고 감정 표현이 다양해졌다. 상담을 받아 보라는 지수의 권유가 있었지만, 유나는 고개를 저었다. 굳이 지운과의 일을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다.
아이 또한 쑥쑥 컸다. 돌을 훌쩍 넘기고, 이제 15개월에 들어서고 있었다. 유나는 엄마, 하면서 저를 부르는 세현의 옆에 누워 세현의 손가락을 톡, 건드렸다.
세현이는 뭐든 빨랐다. 옹알이도, 뒤집기도, 엄마라고 부르는 것도 이미 돌이 되기 전에 다 했다. 돌이 지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우뚝 서기까지 했다. 뭐든 빠른 아이였다.
이미 젖도 떼서 이유식을 먹이고 있었다. 아이는 뭐든 잘 먹었다. 유나가 주로 아이를 돌보긴 하지만, 유나의 부모님도 육아를 도왔다.
이제 유나에겐 스마트폰이 있었고, 새로 발급받은 카드와 가이드 신분증이 있었다. 어딜 가든 자유였고, 뭘 하든 또 자유였다. 이제는 가족과도 친구와도 아무렇지 않게 연락해서 볼 수 있었고, 더 이상 불안에 떠는 일도 없었다. 매일매일 엄마와 얼굴을 마주했다. 하나 유나는 공허함을 느꼈다.
일을 안 해서 그런가……. 유나는 슬슬 다시 직장을 알아봐야 하나 고민했다. 하지만 S급 가이드인 이상, 일반 직장에 다니긴 까다로웠다.
각인을 해제했기 때문일까, 나라에서 벌써 여러 차례 안내문이 내려왔다. 전장에 투입되거나, 혹은 S급 에스퍼들이 지내는 숙소에 들어가라는 안내문이. 두 가지 방법밖에 없었다. 가이드인 이상, 에스퍼를 위해 일해야 했다.
이래서 가이드가 되기 싫었는데.
하나 어쩔 수 없었다. 유나는 선택해야만 했다. 아이가 있기 때문에 에스퍼들이 지내는 숙소에서 지내는 건 무리였고, 남은 방법은 전자뿐이었다. 전장 투입.
그러나 이것도 문제가 있었다. 쉬쉬하고 있는 사실이긴 하지만 S급 가이드는 저와 혜성, 둘뿐이었다. 숙소 생활 없이 전장에 투입되었다는 S급 가이드에 대해선 들어본 적 없었다. 위험 부담이 컸다. 납치되어서 죽었다는 혜진의 이야기를 알기에 더욱 꺼림칙했다.
숙소 생활을 하며 S급 에스퍼와 쭉 붙어 다니는 게 가장 안전했다. 하지만 아이와 떨어지고 싶진 않았다.
“유나야. 그냥 세현이는 엄마랑 아빠한테 맡기고, 너는 숙소 생활 해.”
유나의 엄마가 말했다. 아빠의 의견도 마찬가지였다.
“그래. 전장에 투입되는 건 너무 위험해. 가뜩이나 S급 가이드 수가 적은데……. 널 노릴 에스퍼가 많을 거다.”
엄마와 아빠의 말은 충분히 일리가 있었다. 그리고 전장은 멀었다. 국경과 맞닿는 지점이나 국토의 가장자리 혹은 바다가 있는 곳에 주로 몬스터가 출몰했는데, 서울과는 대부분 거리가 있었다.
하지만 유나는 세현을 포기하면서까지 숙소 생활을 하고 싶진 않았다.
“나, 그냥… 전장에 투입될래.”
“유나야! 위험하다니까!”
“알아, 아는데. 그래도 세현이가 있는데 애를 놔두고 숙소 생활을 어떻게 해.”
유나의 의지가 결연했다. 유나는 고집이 센 편이라 웬만해선 의지가 꺾이질 않았다. 유나의 아빠가 한숨을 쉬며 이마를 짚었다. 유나의 엄마는 끝까지 반대했다.
“너 또 위험해지는 꼴 엄마 못 봐. 엄마 피 말려 죽이려고 환장했니, 이 개딸아!”
“엄마, 나 믿어. 이제 위험할 일 없을 거야. 최대한 가까운 전장에 다닐 거고…….”
서울에서 가장 가까운 전장은 인천이었다. 진아가 맡은 곳. 그래서 더욱 전장으로 가는 결심이 굳어졌다. 그녀라면 저를 케어해 줄 것 같았다.
결국 유나의 부모님은 유나의 의지를 꺾지 못했다. 유나는 가이드 센터에 가서 전장 투입 신청 서류를 냈다. 지역은 인천으로 신청했다. 다행히 서류는 별 탈 없이 통과됐다. 남은 건 심사뿐이었다. 그리고… 법원 출석. 정지운과 다시 한번 얼굴을 마주해야 했다.
* * *
법원 출석 날, 유나가 먼저 지운에게 연락했다.
「법원 앞에서 4시에 봐요.」
그에게 호출이 있는 걸 감안해서 시간을 늦게 잡은 것이었다. 지운에게서 답장이 왔다.
「응.」
매번 이모티콘을 같이 보내던 전과 달리 간결하기 짝이 없었다. 그 간극에 또 한 번 그와 끝났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유나는 약속 시간보다 조금 일찍 법원 앞에서 그를 기다렸다. 지운은 딱 4시에 맞춰 법원 앞에 도착했다. 멀리서 걸어오는 그의 모습이 보였다. 유나는 멀리서도 보이는 지운의 초췌한 몰골에 가슴이 쿵, 내려앉는 걸 느꼈다.
가까이서 보니 더욱 그랬다. 마른 뺨, 거멓게 죽은 안색. 늘 여유만만하게 미소 짓고 있던 정지운의 모습이 아니었다. 유나가 그를 보자마자 인상을 찌푸렸다.
“왜. 얼굴 마주하기도 싫어졌어, 이제?”
지운이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유나는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가이딩, 받고 있어요?”
“말했잖아. 유나 아닌 다른 가이드한테 가이딩받아도 소용없다고.”
유나의 가슴이 따끔거렸다. 가이딩을 받지 못해서 이렇게 힘들어하는 걸까. 아니면…….
“서류는 챙겨 왔지?”
“…네.”
“가자.”
지운이 먼저 발걸음을 옮겼다. 유나는 여전히 아랫입술을 깨문 채로 그의 뒤를 따랐다.
법원에 가서 안내를 받고, 필요한 서류를 제출했다. 친권 협의도 원만하게 끝났다. 양육권을 오롯이 유나에게 맡기고, 지운이 매달 양육비를 지급하는 것으로. 미성년 자녀가 있기 때문에 숙려 기간은 3개월이었다.
서류를 작성하고, 안내를 받는 내내 지운의 안색은 여전히 흐리고 어두웠다. 법원에 나올 때까지 표정도 마찬가지였다. 참다못한 유나가 지운에게 손을 내밀었다.
“가이딩해 줄게요. 손잡아요.”
“…….”
하나 지운은 내밀어진 손을 보고도 가만히 그 손을 내려다볼 뿐, 반응이 없었다.
“왜 안 잡아요?”
“매번 네가 내게 가이딩을 해 줄 수 없잖아. 그러니까… 네가 없는 상황에 익숙해져야 해.”
지운이 결국 손을 잡지 않았다. 유나는 당황했다. 먼저 달려든 건 언제나 정지운 쪽이었는데. 유나는 멍하니 눈을 깜빡이며 지운을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지운이 눈을 휘었다.
“유나, 살쪘다. 보기 좋아.”
“…그러는 당신은 살이 빠졌어요.”
“응. 미안, 보기 싫지.”
“그게 아니라…….”
유나가 말끝을 흐리며 시선을 피했다. 왜지, 왜 그가 마치 피해자고 자신이 가해자 같단 말인가. 유나는 울컥 감정이 솟아 괜히 그에게 툭툭거렸다.
“전 당신이 없으니까 이제 사는 게 사는 것 같아요.”
“그래? …잘됐네.”
지운이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정적이 흘렀다. 얼마 뒤, 그가 먼저 유나에게 손을 흔들었다.
“잘 가, 유나야. 조심해서 가.”
그래, 이제 용건도 끝났고 더 이상 볼일 없었다. 유나는 답인사 없이 뒤돌아서 먼저 걸음을 옮겼다. 하나 걷는 내내 뒤를 돌아보고 싶어 미칠 것 같았다.
자신이 오르페우스도 아닌데, 뒤돌아보지 못할 게 뭐 있단 말인가. 충동을 참지 못하고 유나가 휙 뒤돌아보았다. 지운이 아까 그 자리 그대로 못 박힌 듯 서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눈이 마주쳤다. 유나 또한 그 자리에서 굳었다. 정지운이 웃었다. 하나 평소 짓던 그 웃음이 아니었다. 희미해서 금방 재처럼 사그라들 것 같은 그런 웃음이었다.
“잘 가.”
지운이 다시 한번 말했다. 유나는 심장이 조여드는 기분을 느꼈다. 도망치고 싶었다. 유나는 그대로 뛰듯이 자리를 피했다. 심장이 기분 나쁜 맥동으로 쿵쿵 계속해서 울렸다.
* * *
유나는 인천의 전장에 정식 투입됐다. 유나는 인천까지 지하철로 출퇴근을 시작했다. 출근 시간이 워낙 길어 아침 일찍 타는 덕분인지 다행히도 지옥철을 경험하진 않아도 됐다.
유나는 사람이 뜨문뜨문 앉아 있는 지하철을 둘러보았다. 정지운이 곁에 있었다면 이렇게 지하철을 타고 출퇴근하는 일도 없었겠지. 만약 전장에 투입됐다 하더라도 정지운이 있는 전장에 투입됐을 게 뻔했다.
이렇게 앉아서 인천까지 가는 것도 모두 정지운이 곁에 없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정지운의 의사 없이 제 의사대로 결정한 일이었고. 그리 생각하니 그동안 정지운 때문에 수없이 가로막혔던 제 의사와 결정이 떠올랐다.
어찌 됐든 그와 멀어지는 건 맞는 선택이었다. 순순히 놓아준 것과 텅 빈 얼굴이 아직도 가슴을 따끔거리게 했지만… 이게 맞았다.
인천에 있는 전장에 도착한 유나는 뻘쭘하게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미 포진해 있는 가이드와 에스퍼가 많았다. 유나가 우물쭈물하고 서 있자 멀리서 누군가 그녀의 이름을 부르며 그녀에게 달려왔다.
“유나 씨!”
진아였다. 반가운 얼굴에 유나 또한 진아에게로 뛰어갔다.
“진아 씨!!”
오래간만에 보는 얼굴에 유나가 활짝 웃었다. 가까이 다가온 진아가 유나의 손을 덥석 잡았다.
“그때 연락도 없이 가 버려서 놀랐잖아요. 정지운한테 다시 잡힌 거였죠? 결혼했다는 이야기도 들었는데.”
“네. 그랬는데… 지금은 각인도 해지하고, 이혼 신청도 했어요.”
“역시. 소문이 맞았구나.”
진아가 그럴 만하다는 듯 고개를 끄떡였다. 소문? 유나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놈, 전으로 돌아갔다고 하더라고요. 걔 별명이 뭔 줄 알아요? 지뢰예요, 지뢰. 건드리면 폭발한다고. 매번 폭주 직전의 상태로 전장에 있으니까.”
유나가 숨을 멈췄다. 그래… 자신이 없으니 정지운은 제가 없는 예전의 상태로 돌아가는 게 당연했다. 당연한 일이니 놀랄 것도 없었다.
“어쩔 수 없지. 자기 업보죠, 뭐. 쌤통이라고 생각해요.”
“네…….”
정지운은 어떤 인생을 살아왔길래 주변 사람들에게 이렇게 평판이 안 좋을까. 짐작은 된다만 유나는 지운에게 편이 없음을 절실히 느꼈다.
“유나 씨가 할 일은 간단해요. 혜성이가 없는 날엔 제 옆에 붙어서 저를 계속 가이딩해 주면 돼요. 혜성이가 있는 날엔 제가 유나 씨한테 오지 말라고 연락할게요.”
“그래도 돼요?”
“뭐, 재량껏 하는 거죠. 혜성이는 돌아가면서 애들 가이딩해 주니까, 혜성이 있는 날엔 유나 씬 안 와도 괜찮아요.”
“네…….”
“유나 씨, 번호 바뀌었죠? 그동안 연락이 안 되던데.”
“네. 정확히는 그동안 폰이 없었던 거지만… 바뀐 번호 알려 드릴게요.”
유나가 진아에게 바뀐 번호를 알려 주었다. 진아가 흐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안 그래도 준호가 유나 씨한테 몇 번 연락을 했는데, 받지 않는다고 하더라고요. 준호가 유나 씨 걱정 많이 했어요.”
“…준호 씨가요?”
“네.”
에스퍼 숙소에서 지낼 때 가장 잘해 주었던 사람이었다. 그에게는 도움도 많이 받았다. 생각해 보니 그에게 감사 인사도 제대로 전하지 못했다는 걸 깨달았다.
“그… 다른 분들 번호도 알려 주세요.”
“네.”
진아가 준호를 포함해서 다른 에스퍼들의 번호와 혜성의 번호까지 알려 주었다. 그래도 없어진 동안 나를 잊은 건 아니었구나. 왠지 조금 감동이었다.
누군가 S급 몬스터의 침입 소식을 알렸다. 진아는 그 소리를 듣자마자 달렸고, 유나 또한 그 뒤를 바짝 쫓았다.
진아의 능력은 얼음이었다. 손에 서리를 맺히게 한 다음, 날카로운 고드름을 수십 개 만들어 바다에서 튀어 올라 땅으로 달려오는 몬스터를 공격했다. 온몸에 얼음송곳이 박힌 몬스터들이 비명을 질렀다. 유나는 서둘러 가이딩 존을 만들었다.
지운의 능력이 아닌, 다른 S급 에스퍼의 능력은 처음 보는 것이었다. 유나는 진아의 손에서 만들어지는 얼음과 그 얼음을 맞고 비명을 지르는 몬스터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가이딩 존이 해제가 되지 않나, 기민하게 존을 살폈다.
염동력으로 한순간에 목숨을 빼앗았던 정지운과 달리, 진아는 서서히 몬스터의 목숨을 빼앗았다. 그로 인해 뒤따라오던 몬스터들이 전의를 잃고 주춤거리는 것이 보였다.
진아는 뒤에 있는 몬스터들에게도 얼음송곳을 날렸다. 정확한 명중률이었다.
“와… 대단해요.”
유나가 순수하게 감탄했다. 진아가 머쓱한지 피식 웃음을 흘렸다.
“뭘요. 학교 다닐 때부터 쭉 연습했으니까 잘하는 거죠. 이거 못하면 학교 졸업 못 해요.”
“학교는 얼마나 다녀요?”
“에스퍼마다 달라요. 저는 열여덟 살 때 졸업했고, 정지운은… 최연소로 졸업했죠. 열다섯에.”
열다섯이면 이제 막 중학교 2학년 아닌가. 그때 졸업했다고?
“그러고 바로 전장에 투입됐어요. 이례적인 일이긴 한데, 학교에서 그 녀석을 감당 못 해서 전장에 바로 보낸 것도 있어요.”
유나가 가만히 진아가 하는 이야기를 들었다. 진아는 얘기하면서도 끝없이 몬스터들을 공격했다.
“인성이 그 모양이라 인정하기 싫지만, 능력은 엄청났으니까요. 걔는 염동력도 염동력이고, 투명화 능력도 가지고 있어요. 두 가지 능력을 타고난 에스퍼는 한국에서 걔밖에 없었죠.”
진아가 이야기하면서 인상을 찌푸렸다.
“주변에서 오냐오냐, 아주 떠받들어 줬죠. 나라에서도 특별 대우를 해 주고.”
유나가 눈을 내리깔았다. 두 가지 능력……. 그래서 그때, 숙소에 침입해서 제게 말을 걸었는데도 발견할 수 없었구나. 그제야 깨달았다.
“그런 정지운 눈에 들었으니, 유나 씬 오죽 힘들었겠어요.”
유나가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지운과 있는 시간 동안 그로 인해 인생이 많이 뒤바뀌긴 했다.
S급 가이드라는 사실을 알게 되고, 그에게 강제로 납치를 당하고, 도망쳐도 다시 잡혀 오고, 에스퍼 숙소에서도 짧게나마 시간을 보냈다. 각인도 하고, 결혼도 하고, 아이까지 낳고서 이혼했다. 2년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많은 일이 있었다.
“그 새끼 재수 없죠?”
“…네.”
유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재수 없는 자식이긴 했다. 뭐든 제멋대로에, 안하무인, 자기 마음대로 될 거라고 당연하다는 듯 생각하고. 그래도…….
유나가 생각을 멈췄다. 정신이 흔들리자 가이딩 존 또한 함께 흔들렸다. 유나는 바로 생각을 갈무리하고 다시 집중했다.
진아는 그때나 지금이나 조잘조잘 말이 많았다. 덕분에 전장에 있는 동안 유나는 지루한 시간 없이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그러면서 유나는 전장에 대한 다양한 사실을 알게 됐다.
각 구역마다 나오는 몬스터가 다르고, 정지운이 맡은 국경 쪽이 가장 강력한 S급 몬스터가 많이 나온다는 것. 비교적 남쪽으로 갈수록 몬스터들의 힘이 약하다는 것. 그래서 구역마다 호출 횟수가 다르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몬스터마다 습성이 달라서, 저녁에 주로 출몰하는 몬스터도 있다고 했다. 그 때문에 A급 에스퍼들이 교대로 근무한다고 했다.
유나는 불과 1년 전까지만 해도 먼 세상 이야기 같았던 전장과 몬스터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흥미가 솟구치는 걸 느꼈다. 생각보다 재미있었다.
출근 시간이 이른 만큼, 퇴근 시간이 빠른 게 장점이라면 장점이었다. 유나는 4시쯤에 지하철을 타고 퇴근할 수 있었다. 집으로 돌아가자 아이를 보고 있던 엄마가 유나를 반갑게 맞이했다.
“유나야, 괜찮았어? 별일 없었지?”
“응. 엄마가 너무 과하게 걱정하는 거라니까. 별일 없었어.”
오히려 재미있었다. 유나는 엄마에게 전장에서 있었던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웃었다. 엄마 또한 가이드이기에 유나가 하는 이야기 대부분을 다 알아듣고 맞장구를 쳤다.
유나는 점점 자신이 생기를 되찾아 가는 것을 느꼈다. 정지운의 빈자리를 아주 가끔… 아주 가끔 느끼긴 하지만. 그래도.
* * *
출근 시간이 이르고 퇴근 시간이 빠른 한편, 이 일은 정해진 휴일이 따로 없는 게 최대 단점이었다. 유나는 주말에도 일했다. 다만 일주일에 두세 번 정도 쉴 수 있었다. 휴일이 언제인지 알 수 없다는 것도 이 일의 단점 중 하나였다.
병원 일보다는 못하지만, 그래도 유나는 일에 만족했다. 무엇보다 재미있었다. 자신의 가이딩이 누군가에게 직접적으로 힘이 된다는 걸 느끼니 더욱 그랬다.
유나는 점점 이 일에 진심으로 흥미를 느끼고 만족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물론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준비하는 과정은 매우 짜증 나지만 말이다.
유나는 진아 외의 다른 S급 에스퍼들에게도 고맙다는 연락을 했다. 다행히 모두에게 답장이 왔다. 특히 준호에게서 길게 답장이 왔다. 조만간 보고 싶다고 준호가 뜻을 비쳤으나, 유나는 확답을 하지 않았다.
진아와는 더 친해져서 이제 농담 따먹기까지 아무렇지 않게 하는 사이가 됐다. 점점 일에 진심이 되어 가고 있었다.
오늘도 늘 그랬듯이 유나는 출근 준비를 했다. 유나가 출근하기 때문에 이제 대부분 육아는 엄마와 아빠가 주로 담당하게 됐다. 아빠도 나이가 나이인지라, 전장에 참여하는 횟수를 줄여도 나라에서 뭐라고 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유나는 자고 있는 세현의 볼에 쪽, 입을 맞춘 다음 집 밖으로 나갔다. 이제 바람이 뜨뜻미지근했다. 벌써 여름이 오고 있었다.
정지운과 만난 게 이맘때 재작년이었나. 유나는 그와의 첫 만남을 회상했다. 처음 봤을 땐 웬 잘생긴 미친놈이라고 생각했는데. 그 예상이 맞았다.
유나는 저도 모르게 그를 계속 생각하다가 아차, 했다. 왜 계속 틈만 나면 정지운을 생각하는 거지. 유나는 씁쓸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러나저러나, 제게 큰 영향을 미친 건 틀림없으니까…….
이제 자신은 어느새 스물일곱이었다. 정지운은 이제 서른이 됐겠네. 유나가 쓴웃음을 지었다.
오늘따라 지하철에 사람이 별로 없었다. 주말이라 그런 듯했다. 유나는 지하철 의자에 푹 기댄 채 눈을 감았다. 가는 데 시간이 오래 걸려서 잠깐 눈을 붙여도 괜찮았다.
아주 잠깐 눈을 붙인 줄 알았는데, 누군가 툭툭 건드리는 느낌에 유나의 눈이 뜨였다. 주변을 둘러보아도 저와 가까이 앉은 사람은 없었다.
뭐지. 방금 누가 나 건드렸는데. 유나는 눈을 비비다가 이내 정차할 역을 확인하고는 눈을 크게 뜨고 부리나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릴 역이었다.
유나는 스마트폰으로 시간을 확인했다. 늦지 않았다. 유나는 출구에서 내린 다음 바로 전장으로 달렸다.
* * *
“엄마.”
세현이 뒤뚱뒤뚱 걸어와 퇴근한 제 엄마를 맞이했다. 유나가 웃으며 세현을 안아 들었다.
“우리 세현이, 잘 있었어?”
“우으응.”
세현이 어리광을 부리듯이 유나의 품에 폭 안겨 앓는 소리를 냈다. 유나가 세현의 등을 토닥거렸다. 제가 없는 동안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돌봐 준다지만, 그래도 엄마인 자신이 보고 싶었겠지 싶어 아이에 대한 미안함과 애착이 더욱 커졌다.
에스퍼는 어린이집이나 유치원에 갈 수 없었다. 갔다가 다른 아이에게 피해를 끼칠 수 있다는 점 때문이었다. 그 때문에 에스퍼 학교에 입학하는 여덟 살이 되기 전까지는 가족이 돌봐 주어야 했다. 그래서 유나는 저녁마다 아이를 붙잡고 직접 감각 교육과 탐색을 시켰다.
“세현아, 이건 두부야.”
유나가 먼저 두부를 만지며 이어 말했다.
“말캉말캉해. 대신 세게 쥐면 이렇게 망가질 수 있어. 그러니까 조심스럽게 만져야 해.”
세게 쥐자 두부가 손안에서 허물어졌다. 유나가 새 두부를 꺼내며 세현에게 건넸다.
“세현이도 한번 만져 볼래?”
S급 에스퍼라는 판정만 받았을 뿐, 유나 또한 세현이 어떤 능력을 가지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아이가 혹시나 다른 생명체나 사물에 위해를 끼칠까 싶어 유나는 아이에게 어떤 것에 대한 소중함을 가르치는 데 주력했다.
동물 영상을 보여 주는 것부터 시작해서, 어떤 걸 함부로 다뤘다간 부서지거나 망가질 수 있다는 점을 끊임없이 교육했다.
그 덕분인지 세현이 두부를 아주 미약하게 툭, 건드리며 엄마를 빤히 바라보았다. 칭찬해 달라는 듯 반짝거리는 눈이었다. 유나가 웃으며 세현을 쓰다듬었다.
“아이, 잘했어. 우리 세현이.”
뭐든 함부로 다루고, 망가뜨리는 데 탁월했던 정지운과는 다르게 키우고 싶었다. 교육에 잘 따라와 주는 세현이 그저 기특하기만 했다.
정지운이 있었다면 어땠을까. 어떤 교육을 시키고 있었을까. 제게 이렇게 교육시킬 만한 의욕이 있었을까?
저도 모르게 그에 관해 떠올린 유나는 고개를 빠르게 휘휘 저어 그의 생각을 떨쳐 내려 애썼다. 생각해 봤자 소용없어. 이미 끝났어. 끝난 사이야. 계속해서 되새김질했다.
* * *
며칠 만의 휴일이었다. 유나는 오래간만에 푹 늦잠을 잤다. 그러다 잠에서 깨서 칭얼거리는 세현이 때문에 부스스 눈을 떴다.
“응, 왜, 세현아?”
“아, 빠, 아…빠.”
“…응?”
엄마, 할머니, 할아버지. 그 말만 했지 아빠라는 말을 한 건 처음이었다. 정신에 불이 켜진 듯 바로 잠에서 깬 유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틀어 준 동영상이나 교육 프로그램에서 아빠라는 단어가 나왔나? 왜 갑자기 아빠라는 말을 하지?
유나는 탄식했다. 언젠가는 세현이도 제게 아빠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텐데……. 아이가 충격받진 않을까 걱정이 됐다. 평생 아빠를 보지 않고 살 수도 없고, 몇 번 만날 일도 생길 텐데 그땐 어쩌지. 유나가 한숨을 쉬며 아빠를 부르는 아이를 껴안고 쓰다듬었다.
“세현아, 엄마는 세현이 곁에 계속 있을게.”
“우응, 엄마…….”
마음 한편이 쓸쓸해졌다. 눈을 내리깔았다. 정지운… 나쁜 자식. 유나가 속으로 중얼거렸다.
휴일 동안 유나는 세현과 오붓하게 시간을 보냈다. 신생아 땐 그렇게 울고 칭얼거리더니 이젠 제법 의젓했다. 그리고 오래간만에 지수가 유나의 집에 놀러 왔다. 손에는 쇼핑백이 가득했다. 아이에게 줄 옷들이었다.
“야, 왜 이렇게 많이 사 왔어?”
“아기들은 쑥쑥 크니까 사이즈 다 다르게 사 와야 할 것 아냐. 이것저것 사느라 이렇게 됐어.”
지수가 세현에게 손을 내밀었다.
“자, 이리 와 봐. 세현아. 내가 네 대모야.”
자칭 대모를 칭한 지수가 제게 다가온 세현을 끌어안았다. 세현이 으우우, 품 안에서 신음했다.
“야. 그렇게 세게 껴안으면 어떡해. 아기들은 약하단 말이야.”
“아, 그래? 세현아. 미안.”
지수가 사과하자 세현이 멀뚱멀뚱 지수를 바라보다 고개를 끄떡거렸다. 지수가 웃었다.
“내 말 다 알아듣는 거야? 똑똑하네.”
“아기들도 분위기 읽고 말도 얼추 알아듣더라. 우리 세현이가 다른 애들보다 좀 빠른 거 같긴 하지만.”
“그래?”
지수가 이제 장난감을 갖고 혼자서 놀기 시작하는 세현을 보더니 입을 열었다.
“나 얼마 전에 네 전남편 봤어.”
“…어?”
전남편. 그 말에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유나가 눈을 깜빡이며 지수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예전에 내가 너한테 시체 같다고 그랬잖아. 지금은 네 전남편이 시체 됐더라.”
“…어디서 봤는데?”
“차 타고 드라이브하다가. 신호 때문에 멈춰 있는데 네 전남편이 보이더라고. 벤치에 가만히 앉아 있더라.”
“…….”
왜 혼자 벤치에 앉아 있었을까. 유나가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네 전남편이 그래도 생긴 건 꽤 잘났었잖아? 근데 지금은… 영 아니더라. 얼굴 많이 망가졌던데.”
유나가 입술을 안으로 말았다. 유나의 표정이 어두워지자 지수가 유나의 등을 가볍게 찰싹 때렸다.
“야, 고소해해야지. 너 없이 잘 사는 것보다 훨씬 낫잖아. 쌤통이라고 생각해.”
그래. 그래야 했다. 하지만 마음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제가 아니면 다른 가이드한테 가이딩받아 봤자 소용없다고 했던 정지운의 목소리가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동시에 진아의 목소리도 떠올랐다. 늘 폭주 직전의 상태를 유지했었다던 정지운……. 전으로 돌아갔다던 정지운.
가슴 한편이 콕콕 아파 왔다. 유나는 괜스레 웃으며 마음에도 없는 말을 했다.
“맞아. 잘됐네. 쌤통이다.”
“그래, 아주 쌤통이다. 그렇지?”
지수가 으스대듯 웃으며 거들었다. 유나 또한 억지로 비웃음 비슷한 걸 지었으나 입꼬리가 경련하듯 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