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 자각 (2) (10/13)

4. 자각 (2)

지운은 퇴근하자마자 바로 집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가정부가 숙식하는 별관 앞에 섰다. 벨을 누르자 가정부가 문을 열고 지운을 맞이했다.

“네, 사장님.”

“응. 오늘 별일 없었어?”

지운의 물음에 가정부가 낯빛을 흐리더니 말하기를 머뭇거렸다. 그러고는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사모님께서 우울증을 앓고 계신 것 같아요. 많이 침울해 보이시고… 또 어머니가 많이 보고 싶으신지 눈물을 보이시더라고요.”

“그것 외에는? 도망칠 기회를 엿본다거나. 이것저것 물어본다거나.”

“그런 건 없었어요. 그런데 사장님, 그… 우울증에 좋은 차라든가, 집 안 곳곳에 화초라든지 식물을 좀 놔두는 건 어떨까요? 사모님이 많이 힘들어 보이세요.”

“알아서 해.”

“아, 그리고 그 어머니를 뵙게 해 주는 건…….”

“그건 당신이 신경 쓸 게 아니야.”

지운이 가정부의 말을 자르고 등을 돌렸다. 그러고는 바로 별관을 나가 집 안으로 들어섰다. 어제처럼 얌전히 소파에 앉아 있는 유나가 보였다.

“유나야, 잘 있었어?”

지운이 들어오자 흐리멍덩하던 유나의 눈에 빛이 돌았다. 지운이 다가가서 유나 앞에 무릎을 꿇은 뒤 눈을 맞췄다.

“밥은 먹었어?”

“아뇨… 입맛이 없어서.”

이상했다. 유나는 먹을 걸 참 좋아하는데. 지운이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유나를 바라보다가 이내 주방으로 향했다. 냉장고 안에는 가정부가 이미 만들어 놓은 반찬이 가득했다. 음식을 좋아하는 유나 때문에 솜씨가 좋은 가정부로 뽑은 것인데, 입맛에 맞지 않았던 건가?

“가정부 아주머니가 한 음식 맛이 별로야? 바꿔 줄까?”

“아뇨! 아뇨, 아니에요. 그냥 안 먹은 거예요. 한 입도 안 먹었어요.”

유나가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지운이 그래? 대답하며 냉장고 식재료 칸을 흘긋 보았다. 역시 제가 해 준 음식이 나을까. 지운은 고민하다가 직접 요리를 하기로 마음먹었다.

유나는 음식은 가리는 것 없이 좋아했다. 입맛이 없는 것 같으니 간단하게 샌드위치라도 해 주는 게 좋을 듯했다. 지운은 금방 BLT 샌드위치를 뚝딱 만들었다. 유나가 먹기 쉽도록 샌드위치에 이쑤시개를 몇 개 꽂아 고정한 다음, 그릇 위에 올려 유나에게 건네주었다.

유나는 그릇 위의 샌드위치를 보더니 고개를 가로저었다.

“왜? 샌드위치 별로야?”

“그냥… 먹기 싫어요.”

제가 만든 음식이라면 꼬박꼬박 다 먹었던 예전 유나와는 딴판이었다. 지운은 전보다 마른 유나의 뺨을 바라보았다. 이전에도 느꼈지만, 처음 만났을 때보다 더 말라 있었다. 가느다란 팔과 다리를 보자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유나야. 거기서 더 말라지면 어떡하려고 그래, 응?”

유나는 여전히 심드렁한 눈빛이었다. 지운이 억지로 샌드위치를 들어 유나의 입에 가져다 댔다.

“한 입이라도 먹어.”

유나가 겨우 입을 조금 벌려 샌드위치를 작게 베어 물었다. 몇 번 씹어 먹더니, 그걸로 끝이었다. 하나도 채 먹지 못했다. 맛있는 걸 먹으면 빙긋 웃던 얼굴도 없었다.

지운은 그제야 유나가 이곳에 와서 한 번도 웃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왜 안 웃어?”

지운의 물음에 가만히 허공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던 유나가 고개를 들어 지운을 바라보았다.

“왜 웃어야 하는데요?”

“유나는 맛있는 걸 먹으면 웃었잖아. 맛없어?”

“…입맛이 없다고 했잖아요.”

유나가 다시 눈을 내리깔고 시선을 돌렸다. 왠지 지운은 초조해졌다. 유나의 고개를 잡아 억지로 고개를 들게 했다.

“유나, 요즘 이상해.”

“뭐가요.”

“웃지도 않고… 맨날 멍하니 허공만 바라보고. 멍한 표정으로 울고. 나랑 각인까지 맺었는데, 넌 아무렇지 않아?”

유나가 허, 헛웃음을 내뱉더니 이내 눈을 찌푸렸다. 무어라 말하려는 듯 입을 열었다가 다시 닫았다. 귀찮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유나가 이상해. 원래 안 이랬는데. 까랑까랑, 소리도 높이고 화를 냈는데.

초조함이 사라지지 않았다. 지운은 들고 있던 샌드위치를 아무 곳에나 놔두고 유나를 품에 안았다. 그러면 이 이상한 감정이 사라질까 싶어. 하지만 똑같았다. 꼭, 저와 맞는 가이드를 찾지 못해 헤맬 때 느꼈던 초조함과 비슷했다.

내 가이드는 여기 있는데… 왜 초조하지?

왜 유나는 자꾸 당연한 일을 거부하고, 거절하고, 비틀어 놓는 걸까. 이해가 되지 않았다.

“유나야.”

“…….”

유나가 대답 없이 품에 가만히 몸을 기댔다. 더없이 순종적이었다. 이전처럼 화내지도 않고, 벗어나려고 하지도 않고, 손발을 휘두르지도 않았다. 그러니까 좋아야 하는데… 왜 좋지 않지. 지운은 알 수 없었다.

“오늘은 뭐 했어?”

“그냥… 아무것도 안 했어요.”

“게임기도 오고, 데스크톱도 왔잖아.”

“귀찮아요.”

유나는 유달리 귀찮다는 말을 자주 했다. 예전에는 그러지 않았는데. 이거 해 달라, 저거 해 달라. 많이 졸랐는데. 요즘엔 그런 게 없었다.

“하고 싶은 거 없어?”

“없어요.”

“갖고 싶은 건?”

“없어요.”

이상해. 지운은 속으로 계속 중얼거렸다. 이상해. 이상해. 이상해……. 전부터 느꼈지만 지금은 더욱 그랬다.

내 가이드가 이상했다.

* * *

집에 화초가 들어섰다. 베란다는 물론이고, 거실 곳곳에 화초가 놓였다. 창가에는 꽃이 심긴 화분이 놓였다. 집 안에 향긋한 풀 냄새와 꽃향기가 진동했다.

“사모님, 풀 냄새가 정말 좋네요. 그렇지요?”

부엌에서 요리를 하던 가정부가 싱글벙글 웃으며 말했다. 유나는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사모님이 된장찌개를 좋아한다고 들어서, 된장찌개를 했어요. 두부도 가득 넣고, 버섯도 넣고요.”

가정부가 식탁에 된장찌개를 놓으며 말했다. 유나는 코끝으로 들어오는 음식 냄새를 맡았다. 여전히 식욕이 돌지 않았다.

“사모님, 식사하러 오세요.”

“…별로 안 먹고 싶어요.”

“그래도 식사는 하셔야죠. 오늘 하루 종일 아무것도 안 드셨잖아요.”

유나는 팔뚝에 뺨을 묻고 눈을 감았다. 그냥 자고 싶었다. 아무 생각도 안 하고, 아무 걱정 없이 그렇게.

유나가 그대로 눈을 감아 버리자 가정부가 걱정 어린 눈길로 눈을 감은 유나를 바라보았다. 마른 팔뚝이 보기 안쓰러웠다. 이곳에 와서 한 번도 사모님께서 식사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결국, 가정부는 그대로 차린 밥상을 치워야 했다.

유나가 다시 눈을 떴을 땐, 침대였다. 옆에는 당연하다는 듯 지운이 자리하고 있었다. 유나가 눈을 깜빡거리자 지운이 유나의 뺨을 쓰다듬으며 물었다.

“오늘 하루 종일 잤다며.”

“…네.”

“밥도 안 먹고.”

유나가 등을 움츠렸다. 지운이 홀쭉한 유나의 배를 노려보았다.

“이런 몸으로 어떻게 아이를 가져.”

“…….”

유나가 얕은 한숨을 내쉬며 다시 눈을 감았다. 정신이 멍했다.

“유나야. 엄마 보고 싶다며.”

하나 엄마 이야기에 감겨 있던 유나의 눈이 뜨였다. 유나가 고개를 들어 지운을 바라보았다.

“어머니… 뵙게 해 줄게.”

“정말요?”

유나가 상체를 일으켰다. 늘 멍하던 유나의 눈빛에 총기가 돌자 지운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요? 언제?”

“…오늘 연락해 볼게, 어머님께. 이곳으로 오라고 할게.”

유나가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격한 반응에 지운의 눈이 흔들렸다.

“그러니까… 이제 밥 좀 먹어. 그러다가 쓰러지겠어.”

“…네.”

지운이 유나의 손을 움켜쥐고 몸을 일으켰다. 그의 움직임에 맞춰 일어난 유나가 뒤를 따랐다. 주방으로 간 지운이 유나에게 물었다.

“뭐 먹고 싶어?”

“…아무거나.”

“죽 끓여 줄까?”

“네.”

지운은 금방 냄비에 물을 받고 으깬 감자와 양파를 넣어 섞었다. 다진 고기도 듬뿍 넣었다. 불린 쌀을 넣고 따뜻하게 끓인 다음, 그릇에 담았다. 유나는 가만히 김이 몽글몽글 올라오는 죽을 바라보다가 한 입 떠먹었다.

“맛있어?”

“네.”

유나가 천천히, 느릿하게 죽을 떠먹었다. 비록 느리지만 그릇을 다 비웠다. 지운이 뿌듯하다는 듯 웃었다.

“잘했어, 유나야.”

겨우 죽 한 그릇을 다 비운 것뿐인데 이토록 기쁠 수 없었다. 지운이 유나의 뺨에 쪽, 입을 맞췄다.

* * *

지운은 약속을 지켰다. 다음 날, 지운은 유나의 어머니와 함께 집 안에 들어섰다. 유나의 엄마는 집에 들어서자마자 소파에 몸을 웅크리고 앉아 있는 딸을 보더니 금세 눈물을 머금고 신발도 벗지 않고 유나에게 달려들었다.

“유나야!”

유나는 순간 꿈인가 했다. 하나 맡아지는 엄마의 체향에 꿈이 아님을 깨달았다. 유나가 으으, 신음하더니 그대로 아이처럼 엉엉 오열하기 시작했다.

“어으, 엄마, 엄마…….”

“내 딸, 우리 딸. 유나야, 내 딸.”

모녀가 서로 엉엉 울면서 껴안았다. 지운은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에겐 낯선 광경이었다.

유나와 유나의 어머니는 그렇게 오래도록 울다가, 이내 눈물을 그치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시작했다. 잘 지냈니, 어떻게 지냈니, 안부 인사부터 시작해서 그간 있었던 일들에 대해 미주알고주알 털어놓기 시작했다.

지운은 관람객처럼 그들의 대화를 한 발자국 떨어진 곳에서 들었다. 지운은 끼어들 수 없을 만큼 그들의 관계가 형성한 막이 단단해 보였다. 저와 유나의 사이보다 더.

왜 유나는 항상 내가 아니라 엄마를 계속 부르짖고 그리워하는 걸까. 지운은 이것조차 이해할 수 없었다.

“엄마, 나 엄마가 너무너무 보고 싶었어. 계속 엄마 생각을 했어.”

“유나야, 엄마는 안 그랬을 거 같니. 매일같이 보던 내 새끼, 하루 못 봐도 힘든데 오래도록 못 봤으니 엄마 속이 얼마나 타들어 간 줄 아니.”

유나의 엄마가 유나의 얼굴 이곳저곳을 만졌다. 홀쭉해진 뺨과 깊어진 눈두덩이에 엄마의 눈에 또다시 눈물이 고였다.

“내 딸… 왜 이렇게 말랐어. 얼마나 힘들었으면.”

“아냐, 엄마. 나 괜찮아.”

대답하는 유나의 목소리가 떨렸다. 유나의 엄마가 유나의 손을 꽉 붙잡더니 고개를 돌려 지운을 쏘아보았다. 왜 제 딸을 고생시켰냐는 듯, 쏘아보는 눈빛에 꾸중과 경멸이 그득했다. 지운은 할 말이 없었다.

지운은 혹시나 그들이 손을 잡고 도망갈까 싶어 멀리서나마 그들이 이야기하는 것을 듣고, 그들의 표정과 몸짓 하나하나를 살폈다.

그들은 서로 껴안고, 몸을 쓰다듬으며 만지기 여념 없었다. 손짓마다 그리움과 애달픔이 묻어났다. 지운은 그들의 그토록 깊은 애착을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바라보았다. 어머니가 뭐길래.

늘 멍하게 허공을 바라보던 유나가 오래간만에 표정을 일그러트리며 울고, 소리 내어 웃었다. 엄마의 손을 꼭 붙잡은 채 잠시도 쉬지 않고 입을 움직였다.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과 있을 때 유나는 마치 다른 사람 같았다. 까랑까랑 소리를 지르지도 않고, 부드럽게 웃고, 눈을 예쁘게 접으며 입꼬리를 올렸다.

저 미소를 갖고 싶다.

지운은 딱 달라붙은 두 사람을 바라보다가 이내 고개를 틀었다. 속이 들끓기 시작했다.

유나의 엄마는 늦은 시간이 되어서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유나는 아쉬운 눈으로 현관에 선 제 엄마의 손을 꼭 붙잡고 놓지 않았다.

“엄마, 또 와야 해. 응?”

“응. 엄마 또 올게. 그동안 우리 유나, 밥도 많이 먹고 잘 지내야 한다. 알겠지?”

“엄마, 엄마…….”

유나가 다시 울음을 터트렸다. 딸이 울음을 터트리자 유나의 엄마도 눈물을 그렁그렁 매달고서 딸을 껴안았다.

“엄마, 꼭 올게. 그동안 아프면 안 된다, 우리 딸. 삐쩍 말라 가지곤. 얼굴도 반쪽이 되고.”

“응, 엄마. 엄마 올 때까지 기다릴게.”

한참 껴안고 있던 두 사람이 몸을 떨어트렸다. 지운은 유나의 엄마를 흘긋 보고는 말했다.

“나와요, 이제.”

“…….”

모녀는 문이 닫힐 때까지 서로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문이 완전히 닫히자 유나의 엄마가 눈빛을 바로 바꿨다. 지운을 책망 가득한 눈빛으로 쏘아보았다. 지운은 곧장 차로 향했다. 문은 구태여 열어 주지 않았다.

“내 딸에게 어떻게 했길래 애가 저렇게 마른 거야? 애를 얼마나 괴롭힌 거야?”

“맛있는 거 많이 먹였습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먹였는데 애 얼굴이 저렇게 비쩍 말랐어?”

“그건 저도 안타깝게 생각해요.”

지운이 직접 차를 몰았다. 유나의 부모님이 사는 집은 애초부터 알고 있었다. 내비게이션에 찍을 필요도 없었다.

“유나랑 각인 맺었지? 집으로 증명서가 날아왔어.”

“네.”

“네가 내 딸 인생을 망친 거야. 알아? 집안을 쑥대밭으로 만들고, 애 인생을 망쳐 놨다고.”

유나의 엄마가 지운을 강력하게 비난했다. 지운은 앞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굳이 그 말에 변명하지도 않았다. 망쳤다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유나의 삶을 변화시킨 건 사실이니까. 하나 어쩔 수 없이 해야만 하는 일이었다. 유나는 나의 가이드고, 자신은 유나의 에스퍼니까.

“내 딸 인생을 네가 망쳤어.”

유나의 엄마가 다시 한번 강조하듯 말하며 울컥, 눈물을 터트렸다. 그녀가 내 딸, 하면서 흐느꼈다. 지운이 미간을 좁혔다.

유나의 엄마를 데려다주고, 다시 지운이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도착했을 땐 이미 새벽 3시쯤이었다. 문을 열고 집으로 들어서자마자 지운이 놀라 몸을 굳혔다. 중문 앞에서 유나가 충혈된 눈으로 지운을 바라보고 있었다.

“안 잤어, 유나야?”

“엄마 잘 데려다줬죠? 어디 이상한 곳에 데려다주지 않았죠? 집에 잘 들어가셨죠?”

유나가 기다렸다는 듯 다다다 질문을 했다. 지운이 웃으며 유나의 어깨를 가볍게 껴안았다.

“날 뭘로 보고. 곧 장모님 되실 분인데. 잘 데려다 드렸어.”

“또 엄마를 데리고 올 거죠? 자주 볼 수 있게 해 줄 거죠?”

“…….”

지운이 시선을 피했다. 유나가 지운의 팔을 붙잡고 흔들었다.

“제발, 제발 또 데리고 와 줘요.”

지운이 대답을 피했다. 유나가 몇 번이고 지운의 팔을 붙잡고 흔들다가 지운에게서 반응이 없자 이내 체념한 얼굴로 팔을 놓았다. 그러고는 방으로 조용히 돌아갔다. 방으로 돌아가는 뒷모습이 처연했다.

욕실로 가서 씻고 나온 지운이 방으로 들어갔다. 유나는 이미 잠들어 있었다. 지운은 잠든 유나를 내려다보다가 유나의 뺨을 조심스레 쓸어 보았다. 거칠고 메말라 있었다. 이전의 생기 돌던 뺨이 아니었다.

지운은 오래도록 유나를 내려다보다가, 이내 그녀 옆에 누워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내 가이드. 내 것. 나만의 가이드. 지운은 유나의 목덜미에 입술을 묻고서 체취를 들이마셨다. 그제야 울렁이던 마음이 조금 진정됐다.

내 가이드야. 각인도 맺었으니, 이제 유나도 마음이 안정되고 모든 게 바로잡힐 거야. 지운은 다시 한번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 * *

유나는 TV를 틀어 놓고 멍하니 화면을 바라보았다. TV 속 출연진들이 무어라 떠들고 있긴 한데, 귀로 들어오진 않았다.

“사모님, 뭐 드시고 싶으신 거 있으세요?”

“없어요…….”

유나가 중얼거리며 몸을 더욱 웅크렸다. 요즘 이상하게 몸이 으슬으슬 추웠다. 두꺼운 잠옷을 입고 있는데도 그랬다. 유나는 담요를 몸에 둘렀다. 그제야 조금 나아졌다.

유나 스스로도 몸이 점점 안 좋아지는 것을 느꼈다. 음식 냄새만 맡아도 속이 메슥거리고, 식욕은 점점 더 떨어졌다. 정지운이 해 주는 죽 정도만 겨우 입에 들어가고, 나머지 음식은 입에 대고 싶지도 않았다.

“오늘은 낙지랑 김치 넣고 죽 끓여 드릴까요?”

“네.”

유나가 고개를 끄덕이며 TV에 시선을 고정했다. 하하 호호, 웃는 사람들이 부러웠다. 저 사람들은 뭐가 그렇게 신이 날까. 뭐가 그렇게 재미있을까.

나도 웃고 싶다. 저렇게 웃고 싶어. 엄마 보고 싶어. 친구들 보고 싶어.

멍하니 그런 생각을 반복하고 있는데, 누군가 어깨를 두들겼다.

“사모님, 사모님?”

“아… 네?”

“죽 다 됐어요.”

멍하니 눈을 깜빡거리며 뒤돌아보자 걱정 어린 눈길로 저를 바라보고 있는 가정부 아주머니가 보였다. 유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식탁 의자에 앉아 천천히 수저를 들었다.

죽을 한 입 먹자마자 김치의 신맛이 너무 강하게 느껴졌다. 유나가 바로 수저를 내렸다.

“에구머니나, 입맛에 안 맞으세요?”

“김치가… 너무 셔서…….”

“에구, 괜히 묵은지로 했나 봐요. 다시 하겠습니다, 사모님.”

“괜찮아요. 입맛이 없어요.”

“사모님이 끼니를 안 챙기시면 제가 사장님께 혼이 나요.”

그 말에 유나가 입을 다물었다. 결국 유나는 생김치로 한 김치죽을 입맛이 없어도 꾸역꾸역 먹을 수밖에 없었다.

밥을 다 먹은 유나는 또 소파에 앉아 꾸벅꾸벅 졸았다. 하루 종일 잠이 쏟아졌다. 자다가, 깨고, 자다가, 깨고. 그러다 눈을 뜨면 정지운이 와 있었다.

“유나야.”

눈을 뜨자마자 눈앞에 정지운이 있었다. 유나는 자연스럽게 눈앞에 있는 지운의 품에 관성처럼 뺨을 기댔다. 익숙한 행위였다. 지운은 제 품에 뺨을 기대는 유나를 껴안으며 유나의 안색을 살폈다.

“몸이 안 좋아?”

“그냥… 졸려요, 계속.”

지운이 유나의 뒤통수를 쓰다듬으며 미간을 좁혔다. 요즘 따라 유나의 상태가 영 좋지 못했다. 그가 걱정스러운 눈길로 연신 유나의 얼굴과 마른 몸 곳곳을 바라보았다.

“안 되겠다, 유나야. 내일 병원 가서 검사받아 보자.”

“귀찮은데…….”

“건강 검진 받자. 알겠지?”

지운이 유나의 두 뺨을 거머쥐었다. 유나는 그러거나 말거나 눈을 반쯤 감은 채로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또 졸렸다. 완전히 지운의 손에 얼굴을 기댄 채 또 잠에 빠졌다.

지운은 호출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유나를 데리고 병원에 갔다. 유나는 병원으로 향하는 차 안에서도 창밖만 바라봤다. 지운은 유나의 손을 연신 마사지하며 유나의 시선을 끌기 위해 애썼다.

“유나야.”

“…….”

“진짜 먹고 싶은 거 없어? 입맛이 그렇게 없어?”

“없어요.”

“오늘 검진한 다음에 초밥 먹으러 갈까?”

초밥. 예전 같았으면 네! 하고 대답했을 테지만, 입맛이 그리 돌지 않았다. 유나는 고개를 저었다. 지운이 유나의 어깨에 뺨을 묻었다.

“뼈밖에 없어, 유나.”

예전에 통실통실 살이 올랐던 유나가 그리웠다. 입 안 가득 음식을 넣고 오물오물 씹던 유나가 그리웠다. 지운은 그때를 그리워하듯 유나의 뺨을 덧그렸다. 유나는 가만히 그 손길을 느끼며 생각했다. 엄마가 보고 싶다고.

병원에 도착한 유나는 건강 검진 센터로 가서 전체적인 검진을 받았다. 피 검사를 하고, 방사선으로 흉부를 촬영하고, 소변 검사도 마쳤다. 마지막으로 남은 것은 산부인과 검진이었다.

산부인과가 있는 층으로 가자, 대기실에 부부끼리 앉은 사람이 많이 보였다. 지운은 유나의 손을 꽉 잡은 채 차례를 기다렸다. 이러다 진료실 안까지 같이 들어갈 기색이었다.

“…같이 들어갈 거예요?”

“당연하지.”

괜히 물었다. 유나는 휴우, 얕은 한숨을 쉬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유나의 이름이 호명됐다. 유나와 지운이 손을 잡은 채 진료실 안으로 들어갔다.

유나는 의사가 묻는 말에 이것저것 대답하다가 검사를 위해 체어가 있는 방 안으로 들어갔다. 이곳까지는 지운이 들어갈 수 없었다.

유나는 체어에 누운 채 검진을 받았다. 질 안으로 초음파 기기를 넣은 의사가 어, 하더니 유나를 바라보았다.

“환자분, 임신하셨습니다.”

“…네?”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고 있던 유나가 고개를 돌렸다. 의사가 초음파를 바라보며 말했다.

“아기 집이 보이네요. 아기 심장 박동은 측정이 되지 않는 걸 보아 대략 4주 정도 된 것 같습니다.”

유나는 멍하니 초음파 화면을 바라보았다. 유나의 눈에는 까만 화면에 흰 점들밖에 보이지 않았다.

“뭐가… 뭐가 아기 집이에요?”

“여기 보이시나요? 이게 아기 집이에요.”

작았다. 내가 임신을 했다고? 유나는 멍하니 화면을 바라보며 입술을 달싹거렸다. 임신… 임신……. 진짜로 임신했다. 아이를 가지자던 정지운의 목소리가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그 이후 계속 질내 사정을 했으니, 임신 가능성은 충분했다. 하나 유나는 기묘하게도 제가 임신하지 않으리라 믿었다. 그냥 그렇게 믿고 싶었다.

덧없는 믿음은 순식간에 깨졌다. 의사가 초음파 기계를 질 밖으로 뺐다.

“축하드립니다. 밖의 분은 남편이시죠?”

아니었다. 남편도, 연인도, 그 무엇도 아니었다. 그냥 에스퍼. 정지운이었다. 유나는 옷을 입고 나오라는 간호사의 말에도 멍하니 누워 있다가 환자분, 다시 부르는 소리에 정신을 차리고 체어에서 내려와 옷을 입었다.

임신. 임신했어.

유나는 절뚝이듯 방 밖으로 나갔다. 진료실에 앉아서 기다리고 있던 지운이 나오는 유나를 바라보았다. 이미 의사에게 이야기를 들은 듯 지운의 눈이 반짝이고 있었다.

“유나야.”

지운이 유나를 꽉 껴안았다.

“유나야.”

지운이 다시 제 이름을 불렀지만, 유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의사가 유나에게 이것저것 조언했다. 유나는 제게 균형 잡힌 식사를 해라, 비타민을 먹어라, 이건 먹지 마라, 여러 가지 설명하는 의사의 말을 대충 흘려들었다. 옆에 있는 지운이 더 열심히 의사의 말을 경청했다.

병원 밖으로 나와 차에 올라탄 순간까지 유나는 현실감을 느끼지 못했다. 임신. 제게 머나먼 단어였다. 작년의 저만 해도 전혀 생각지도 못한 단어. 아주 멀고, 시간이 많이 흐른 뒤에야 접할 것 같던 그런 단어였다.

“유나야. 의사 말 잘 들었지? 너무 말랐어, 유나. 앞으로 이제 아기를 위해서라도 많이 먹어야 해.”

내가 왜. 순간 그런 생각이 솟구쳤다. 유나는 그런 제 생각에 스스로 놀랐다.

아이는 죄가 없었다. 저 새끼가 문제였다. 근데 왜… 왜……. 유나는 제 배를 그러쥐었다. 여기에 정지운과 자신의 아이가 있다. 믿기지 않았다. 믿고 싶지 않았다.

“유나야. 갖고 싶은 거, 먹고 싶은 거, 해 달라는 거, 다 해 줄게.”

지운이 유나의 무릎에 머리를 베며 배에 입을 맞췄다.

“일단 결혼식부터 먼저 빨리 올리자.”

“…….”

“그래서 요즘 몸이 안 좋았구나, 유나야. 더 일찍 병원에 데려올걸.”

이런 다정한 말을 쏟아 내는 남자가 제 인생을 어그러트리고, 제 자유를 억압하고, 부모님과 강제로 떼어 놓은 남자였다. 그 간극이 한편으로는 우습고, 한편으로는 슬펐다. 유나가 눈물을 뚝뚝 흘리자 지운이 바로 몸을 일으켰다.

“유나야.”

“왜, 왜… 당신은 에스퍼고, 나는 가이드예요?”

지운이 유나의 질문에 고개를 갸웃했다가 이내 유나의 뒤통수를 그러쥐며 대답했다.

“하늘이 그렇게 만든 거지. 이렇게 만나라고.”

턱에 맺힌 눈물이 유나의 허벅지로 후드득 떨어졌다. 지운이 유나의 턱에 맺힌 눈물을 입술로 빨았다.

“너랑 나랑 결혼하라고.”

무슨 말인지 당최 이해할 수 없었다. 유나가 울면서 인상을 찌푸렸다.

“왜 에스퍼랑 가이드인 게 서로 결혼하는 이유가 돼요?”

“에스퍼랑 가이드는 운명의 짝이니까.”

유나가 가만히 눈을 깜빡였다. 이 남자가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머릿속이 잠깐 새하얗게 물들었다. 유나가 입술을 달싹이다 더듬거리며 물었다.

“당신… 나 좋아해요?”

“응.”

이전에도 들었던 대답이었다. 유나는 이번에는 질문을 달리했다.

“날 사랑해요?”

“응.”

당연하다는 듯, 지운이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유나가 고개를 내저었다.

“가볍게 묻는 거 아니에요. 장난으로 묻는 거 아니에요.”

“나도 가볍게 대답하는 거 아니야.”

유나가 소리를 질렀다.

“어떻게, 어떻게 날 사랑한다는 사람이 그래요!”

“사랑하니까 갖고 싶고, 사랑하니까 같이 있고 싶고, 떨어지기 싫은 거잖아.”

“…….”

“사랑은 그런 거 아냐?”

유나는 천진해 보이기까지 하는 지운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남자의 표정 속에는 한 치의 거짓도 없어 보였다. 그 어떤 악의도 없어 보였다.

“유나는 날 사랑하지 않아?”

“당연하죠!”

“왜?”

“왜냐니… 당신을 어떻게 사랑해요?”

“그렇지만 우리는… 에스퍼와 가이드인걸.”

에스퍼와 가이드라는 이유만으로 사랑에 이유가 생긴다고? 유나는 납득할 수 없었다. 그게 어떻게 사랑이야. 그건 제가 아니라 다른 가이드여도 마찬가지일 것 아닌가.

“다른 상성 맞는 가이드가 나타나면 그땐 그 가이드도 사랑할 거예요, 그럼?”

“아니, 유나밖에 없어. 유나만 사랑할 거야.”

“그걸 어떻게 확신해요. 그냥 가이드라는 이유로 사랑하는 건데!”

유나가 빽 소리를 질렀다. 충혈된 눈이 눈물로 번들거렸다. 지운의 사랑을 믿을 수 없었다. 아니, 지운의 사랑의 뿌리 자체를 이해할 수 없었다.

“내가 사랑하는 가이드는 너밖에 없는데.”

지운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고는 우는 유나의 뺨을 그러쥐었다.

“왜 이러는지 모르겠어.”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고? 내가 왜 이러겠어? 왜 이러는 거 같아?”

“모르겠어. 유나는 계속 도망치려고 하고, 날 피하고… 날 사랑하지 않아.”

“…….”

“난 유나를 좋아하고, 사랑하고, 아끼는데… 내 곁을 떠나는 게 아니라면 뭐든 다 해 주고 싶은데. 네가 너무 좋은데. 보고만 있어도 안고 싶고, 닿고 싶고, 유나 네가 없을 땐 네 생각밖에 안 하는데.”

“…….”

“왜 유나는 날 받아들이지 않아? 나는 네 에스퍼고 넌 나의 가이드인데.”

유나의 눈에 다시 눈물이 고였다. 고인 눈물이 또르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눈물이 입술에 맺혀 짠맛이 났다.

“유나는… 내가 싫어?”

유나가 눈을 와락 일그러트렸다. 그러고는 지운의 가슴팍을 퍽퍽, 때리기 시작했다.

“개새끼, 개새끼, 개새끼.”

눈물이 하염없이 쏟아졌다. 그치질 않았다. 이번에는 지운도 유나를 말리지 않았다. 유나가 마구잡이로 그를 쳐도 가만히 있었다. 힘이 빠질 때까지 그의 가슴팍을 때리던 유나가 지쳐 그의 가슴팍에 쓰러지듯 얼굴을 묻을 때도, 그는 가만히 있었다.

유나가 흐느끼며 지운의 가슴팍에 뺨을 비볐다. 싫냐는 물음에 그렇다고 대답할 수 없는 자신이 미웠다. 싫지 않다니. 제 인생을 망친 훼방꾼이 싫지 않다니.

저 자신이 끔찍했다. 유나는 집에 도착할 때까지 흐느끼며 울었다.

* * *

아이는 유나의 배 속에서 무럭무럭 잘 자랐다. 유나는 점점 불러 오는 배를 내려다보았다. 눈으로 보이는 변화에도 유나는 아직 실감이 잘 나지 않았다.

“유나야. 예식 일정 잡고, 장소도 정했어. 더 배가 부르기 전에 하는 게 좋을 것 같아.”

“…네.”

유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운이 유나의 옆에 완전히 자리 잡고 조잘조잘 떠들기 시작했다.

“플래너도 내가 찾을게. 유나는 신경 쓰지 말고, 잘 먹고 잘 자는 거에 집중해. 알겠지?”

지운이 유나의 뺨에 가벼운 입맞춤을 하며 말했다. 유나는 이번에도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결혼식 준비는 척척 진행됐다. 유나는 정말로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아도 됐다. 유나가 한 건 드레스를 고른 것밖에 없었다.

웨딩 촬영도 이뤄졌다. 유나는 사진사가 하라는 대로 억지로 웃고, 지운의 허리를 껴안았다. 지운은 그 누구보다 행복한 사람처럼 웃었다. 사진사가 보여 준 화면 속 지운은 정말로 행복해 보였다. 유나의 표정은 조금 어색했다.

“유나, 너무 예뻐.”

지운이 사진사가 보든 말든 거리낌 없이 유나의 볼에 제 뺨을 비비고 껴안았다. 유나가 고개를 틀며 그런 지운을 밀었다. 사진사가 웃으며 말했다.

“예비 신랑분이 예비 신부님을 무척 사랑하시는 것 같아요.”

“응.”

지운이 유나 대신 대답하며 제 신부가 될 유나를 바라보았다. 유나는 제게 향한 반짝거리는 눈빛을 잠시 마주했다가 이내 다시 시선을 피했다.

웨딩 사진은 액자로 만들어져 집 안 곳곳에 걸렸다. 그걸 본 가정부가 박수를 치며 좋아했다.

“정말 잘 어울리세요, 사장님, 사모님!”

“그렇지?”

지운이 뿌듯해하며 웃었다. 유나는 사진 속의 자신과 정지운을 빤히 바라보았다. 마주 본 자세로 찍은 사진이었다. 저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은 정말로 사랑에 빠진 남자의 눈빛 그 자체였다.

유나는 그걸 가만히 바라보다가 제 허리를 껴안는 손길에 고개를 돌렸다.

“유나야, 먹고 싶은 거 없어?”

틈날 때마다 지운이 묻는 것이었다. 임신 초기를 벗어나 중기에 들어섰는데도, 아직 입덧이 완전히 낫지 않아 먹는 양이 적었다.

“별로…….”

그렇게 대답한 유나가 잠깐 눈을 굴리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딸기?”

“딸기? 알겠어.”

지운이 곧바로 냉장고로 향했다. 유나가 혹시 먹고 싶어 하는 게 있을까, 냉장고에는 온갖 식재료로 가득했다. 딸기를 찾아낸 그가 딸기를 정성스레 씻고, 그릇에 담은 뒤 설탕과 함께 가져왔다.

“딸기 말고 다른 건?”

“없어요.”

지운이 딸기를 설탕에 찍어 유나의 입술에 들이밀었다. 유나가 입을 벌려 딸기를 받아먹었다. 달았다.

“맛있어?”

“네.”

지운은 모이를 주는 어미 새처럼 유나에게 계속해서 딸기를 먹였다. 유나도 거절하지 않고 하나하나 다 받아먹었다.

그릇에 있는 딸기가 동이 나자, 그가 또 물었다.

“다른 건 정말로 안 먹고 싶어?”

“네.”

지운이 유나의 입술을 손가락으로 훔치며 그릇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나 개수대로 향했다. 그러고는 설거지를 시작했다.

유나는 설거지를 하는 지운의 등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정지운은… 자신을 공주 취급 했다. 과할 정도로. 이곳에서 자신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해 주는 것만 받는 공주와 다를 바 없었다.

설거지를 마친 지운이 다시 유나의 옆에 와서는 유나를 품에 껴안았다. 유나는 자연스럽게 지운의 품에 몸을 기댔다.

“곧 우리 결혼식이야, 유나야.”

“…….”

“정식으로 부부가 돼.”

유나는 말없이 지운의 품속에 얼굴을 파묻었다. 저와 같은 보디 워시 향이 코끝을 찔렀다.

“사랑해, 유나야.”

유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 * *

본식 이전에 신부와 지인이 함께 사진 찍는 과정은 생략되었다. 자잘한 모든 과정은 생략되고, 오로지 본식만 진행되었다.

결혼식은 성대하고 화려하게 치러졌다. 비록 신부와 신부 부모님의 얼굴은 흙빛이어도 신랑만큼은 무척 행복해 보였다. 유나의 친구들은 돌연 닥친 유나의 결혼에 아직도 어안이 벙벙한 듯 의아한 기색이 역력했다.

예식이 진행되는 내내 유나는 무표정했다. 키스 타임에서조차 그랬다. 결혼식을 보던 유나의 엄마는 결국 눈물을 보였다. 유나의 아빠는 화가 난 얼굴로 지운을 그저 매섭게 노려볼 뿐이었다. 지운의 엄마는 모든 상황을 알면서도 방관하듯 제 아들과 유나를 바라보았다. 말리지 않았다.

예식이 파하고 환복을 했다. 유나는 제 옆에 당연하다는 듯 딱 달라붙은 지운과 함께 예식장 밖으로 나갔다. 정산실로 이동해야 했다. 하나 예식장 밖에 있던 지수가 한달음에 유나에게 다가왔다.

지수의 눈이 유나와 지운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지운을 바라보는 눈길에 당신은 빠져 달란 신호가 역력했지만, 지운은 알면서도 빠져 주지 않았다. 결국 지수는 지운이 있는 자리에서 유나에게 질문을 쏘아붙였다.

“뭐야, 너 왜 갑자기 결혼이야? 원래 남자 친구 있었어?”

지수의 눈이 유나의 배로 향했다. 아무리 드레스로 가려도 부른 배가 티가 났다. 이미 하객들 사이에서 신부가 혼전 임신을 해서 결혼하는 것 같다는 말이 한차례 오간 후였다.

“그냥… 어쩌다 보니.”

유나가 흐지부지하게 대답했다. 지수가 이해가 안 간다는 듯 외쳤다.

“왜 말 안 했어? 연락도 그동안 없었고! 내 연락 다 씹고! 그러다가 갑자기 네 남편분한테서 결혼한다고 연락이 오더라. 네가 내 연락처 알려 줬어?”

가르쳐 준 적 없었지만 유나는 입을 다물었다. 지수가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그리고 너 왜 이렇게 말랐어? 얼굴이 왜 이래?”

지수의 눈이 다시 지운에게로 향했다. 제 친구를 못살게 군 게 당신이냐는 책망의 눈빛이었다. 지운은 고개를 저었다.

“맛있는 거 많이 먹이고, 잘해 줬는데.”

“진짜야, 유나야?”

유나는 숨을 잠깐 멈췄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지수는 여전히 의심 가득한 눈초리로 유나와 지운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신혼여행은 어디로 가기로 했는데?”

“안 가기로 했어.”

“저기요. 저희 초면 아니에요? 왜 말 짧게 해요? 그리고 저 유나한테 물었어요.”

지수가 지운을 노려보았다가 유나의 손을 꼭 잡았다. 말을 못 하겠으면 눈빛으로라도 전하라는 듯, 지수가 손가락으로 손등을 툭툭 두들기며 신호를 줬다. 유나는 잠시 지수를 바라보다가 그녀 또한 지수의 손등을 두들겼다. 지수의 눈이 커졌다.

“유나야, 이제 가자.”

지운이 유나의 손을 잡아챘다. 유나는 그대로 걷는 지운의 뒤를 따랐다. 지수가 끝까지 저를 바라보는 게 느껴졌다. 유나는 그 시선을 알면서도 지운을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그럴 수밖에 없으니까…….

신혼여행은 생략됐다. 임신한 상태로 비행기를 타는 건 위험하다고 그가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대신 국내에 있는 곳이라도 가자는 지운의 말에 유나는 고개를 저었다. 배 속의 아이에게 부담된다는 말로 둘러서 거절했지만, 실은 가기 귀찮아서였다.

유나는 멍하니 소파에 앉아 출산과 육아에 관한 책자를 읽었다. 지운이 사 들고 온 것들이었다.

“사모님, 이것 좀 드세요. 아주 달고 맛있어요.”

가정부가 유나에게 껍질을 깐 귤을 건넸다. 유나는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집어 들어 하나씩 떼어서 먹었다. 달고 맛있었다. 유나가 귤 하나를 다 먹자 가정부가 반색하며 몇 개 더 들고 왔다.

“많이 드세요, 사모님.”

유나가 귤을 하나, 둘, 셋, 넷, 다 먹어 치웠다. 이상하게도 계속 들어갔다. 입덧 때문에 죽만 먹던 전과는 달랐다.

배 속의 아이가 영양분이라도 필요한 걸까…….

유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다시 책에 시선을 집중했다. 글자가 눈에 들어오지만 머릿속으로는 들어오지 못했다. 눈을 내리자 동그랗게 솟아오른 배가 보였다.

이제 부정할 수 없었다. 이 안에 아이가 있었다.

지운이 박스 큰 것 하나를 들고 집에 들어왔다. 툭, 박스를 놓는 소리에 유나가 고개를 돌렸다.

“유나야, 귤 많이 먹었다며. 과일 이것저것 잔뜩 사 들고 왔어.”

유나가 일어나 박스를 향해 다가갔다. 박스 안에는 딸기부터 시작해서 바나나, 배, 체리, 파인애플, 포도 등의 과일이 가득했다.

“홍시도 사 왔어. 근데 홍시는 너무 많이 먹으면 안 좋대.”

홍시……. 유나가 박스 안에 담긴 홍시를 꺼냈다. 아직 차가웠다. 포장지를 뜯고, 플라스틱 뚜껑을 열어 안에 담긴 홍시 하나를 베어 물었다. 맛있었다.

유나가 오물오물 씹어 먹자 지운이 활짝 웃었다.

“잠깐만, 기다려 봐. 과일 씻어 줄게.”

지운이 박스 안에 담긴 과일을 식탁 위로 옮기고는 하나씩 씻기 시작했다. 유나가 식탁 의자에 앉아 지운이 가져다줄 과일을 기다렸다.

“딸기랑 포도 주세요.”

“응.”

지운이 딸기와 포도부터 그릇에 담아 유나에게 건네주었다.

“설탕도 주세요.”

“응.”

그가 종지 그릇에 설탕을 부어 건넸다. 유나는 손으로 딸기 꼭지를 쥐고는 끝에 설탕을 묻혀 하나씩 먹었다. 하나둘, 먹기 시작하자 금세 그릇이 동이 났다.

“이번에는?”

“파인애플.”

“응.”

지운이 파인애플을 가르고 껍질을 까기 시작했다. 기다리는 동안 유나는 지운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검은 머리카락… 넓은 등, 근육이 잡힌 팔. 겉보기엔 화려하고 멋있는 남자였다.

만약 그와 에스퍼와 가이드가 아닌 사이로 만났으면 어땠을까. 조금쯤… 괜찮았을까. 나도 그를 완전히 받아들일 수 있었을까.

하나 이것 또한 가정이었다. 잠깐 현실에서 도피할 수 있는 짧은 생각에 지나지 않았다.

“자.”

그가 파인애플과 포크를 건넸다. 포크에 찍어 파인애플을 먹었다. 시원하고 달았다.

“유나, 요즘 단 게 끌려? 과일 말고 또 먹고 싶은 거 있어? 과자 같은 거 사다 놓을까?”

“과자…….”

생각하니 먹고 싶었다. 유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지운이 눈을 접었다.

“알겠어. 사 올게.”

외투도 벗지 않고 과일을 씻고 손질한 그는 왔던 상태 그대로 다시 밖으로 나갔다. 차가 마당에서 빠져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바로 사러 간 것이었다.

그러고 30분 뒤, 그가 바리바리 짐을 가득 들고서 도착했다. 전부 다 과자들이었다.

“뭘 좋아하는지 잘 모르니까, 그냥 보이는 것들 다 사 왔어.”

“이렇게 많이 사 오면 어떡해요. 언제 다 먹으라고…….”

“언젠가 다 먹겠지.”

지운이 식탁 의자를 뒤로 빼 유나 옆자리에 앉았다. 그러고는 입을 맞췄다.

“유나한테서 파인애플 맛이 나.”

“파인애플을 먹었으니까요.”

“응.”

지운이 자연스럽게 유나를 또 껴안았다. 유나는 그가 그랬듯, 그녀 또한 자연스럽게 그 품으로 파고들었다. 익숙했다.

* * *

지운은 점점 배가 부르는 유나를 보며 만족감과 동시에 묘한 불안을 느꼈다.

유나에게서 점점 표정이 사라졌다.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거나, 초점 없는 눈으로 육아 관련 서적을 읽거나 둘 중 하나였다. 밥도 잘 먹지 않았다.

지운은 불안감에 유나의 배에 귀를 대고 태동을 들었다. 배를 치는 아이의 움직임으로 아이도, 산모도 모두 무사하다는 걸 알았지만 그래도 불안감은 쉬이 사라지지 않았다.

“유나야.”

이름을 불러도 눈길 한번 주지 않는다. 여러 차례 불러야 그제야 시선만 흘긋 주었다.

앙상한 나뭇가지 같아.

지운은 유나의 팔과 다리를 연신 마사지하고, 배에 튼살 크림을 발라 주며 유나에게 말을 붙였다.

“오늘은 별일 없었어?”

“네.”

“점심은?”

“…죽 한 숟갈 먹었어요.”

“그것밖에 안 먹었어?”

“배 안 고파요.”

맛있는 걸 먹고 웃던 유나가 생생한데. 지금의 유나는 그 어떤 욕구도 없어 보였다. 마치 실이 끊긴 인형 같았다. 지운은 초조함을 이기지 못하고 유나를 품에 꽉 껴안았다. 그러면 유나가 제 곁에 머물고 있다는 사실을 느낄 수 있었으니까.

품 안에서 유나는 얌전했다. 제 가슴에 기대는 뺨을 느낄 때마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하나 그뿐이었다. 유나는 더 이상 그에게 무언가를 주지 않았다. 줄 것조차 없어 보였다.

지운은 유나와 함께 있으면서도 매 순간 갈증을 느꼈다. 가이드가 날 원하지 않는다. 필연처럼 서로 끌리는 게 에스퍼와 가이드인데… 유나는 그렇지 않아.

왜?

의문은 계속 이어졌다. 왜 나만 유나를 원하지. 왜 유나는 나를 원하지 않지.

자존심이 상하고 굴욕적인 일이었다. 지운은 누군가를 이토록 원해 본 적이 없었다. 가지고 싶었던 것도 없었다. 가지고 싶다는 마음이 들기 전에도 이미 제 손아귀에 있었으니까.

분명히 옆에 있는데 옆에 있는 것 같지 않아.

지운은 허상 같은 유나를 끌어안고서 그 목덜미에 입술을 묻었다. 희미한 체향과 온기에 일말의 불안을 잠재우는 것만이 그가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유나야.”

“…….”

이번에도 대답은 없었다.

* * *

임신은 점점 예정일을 향해 갔다. 그러면서 유나는 조금씩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제가 아이를 낳는다는 사실이 아직도 놀라웠고, 무엇보다 몸의 변화에 마음이 초조해졌다. 태동을 느낄 때도… 가끔 이슬이 비칠 때도 감정이 이리저리 날뛰었다.

매번 마음을 졸일 바에야 차라리 빨리 낳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런 마음을 알아주기라도 한 것인지, 진통은 예정일보다 조금 일찍 찾아왔다. 새벽녘이었다. 유나는 느껴지는 통증에 잠에서 번쩍 깨자마자 배를 움켜쥐었다.

“하으…….”

이전에도 가진통을 몇 번 느꼈던 유나는 이번에도 지나가는 진통이리라 생각하며 참았다. 하지만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아팠다. 무언가 달랐다.

다른 걸 인식하자마자 유나가 손을 뻗어 지운을 흔들었다.

“지운 씨, 지운 씨. 나, 배, 배 아파요…….”

자고 있던 지운이 그 소리에 바로 눈을 뜨고서 몸을 일으켰다.

“아파? 많이? 빨리 병원 가자.”

지운이 서둘러 끙끙거리는 유나를 들었다. 유나는 밭은 숨을 내쉬며 눈을 질끈 감았다. 아팠다.

차에 타자마자 뒷좌석에 거의 눕다시피 한 유나가 차 시트를 움켜쥐고 끙끙 앓았다.

“하으, 으, 으…….”

“유나야. 조금만 참아, 조금만.”

양수가 터졌다. 유나가 앓는 신음을 흘렸다. 바지가 흠뻑 젖었다.

“양수, 양수 터졌어요…….”

“다 왔어.”

지운은 병원 앞에 차를 대자마자 그대로 유나를 들어서 빠르게 병원 안으로 들어섰다. 출산에 임박한 산모가 들어서자 새벽녘, 야간 근무를 하고 있던 간호사가 빠르게 바로 접수를 받았다.

“유나야, 괜찮을 거야, 괜찮을 거야.”

“으읏, 아아악!”

참을 수 없었다. 분만실로 가는 내내 유나는 비명을 질렀다. 너무 아팠다. 간호사와 의사가 안으로 들이닥치고 곧 분만실 문이 닫혔다. 그대로 지운의 얼굴도 사라졌다.

* * *

지운은 분만실 밖에서 하염없이 유나를 기다렸다. 호출이 와도 무시했다. 비명 소리가 들릴 때마다 지운의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임신 말기가 되면서 이것저것 많이 먹긴 했어도 그래 봤자 과일 정도였고 예전만큼 토실토실하지 못했다. 비쩍 마른 몸을 볼 때마다 지운은 불안했다. 혹시라도 이대로 유나가 쓰러지진 않을까. 아프진 않을까. 사라지지 않을까. 저를 두고 가진 않을까. 불안했다.

문 앞을 뱅글뱅글 돌고 있는데 으아앙, 아이 울음소리가 들렸다. 바닥을 바라보고 있던 지운이 고개를 퍼뜩 들었다. 분만실 문이 열렸다.

“아들입니다.”

지운이 바로 분만실 안으로 들어섰다. 아직 탯줄이 연결된 아이와 새하얗게 질린 유나가 보였다. 간호사가 지운에게 가위를 건넸다.

“탯줄 자르시면 되세요.”

지운이 덜덜 떨리는 손으로 탯줄을 잘랐다. 지운의 눈에는 하얗게 질린 채 눈을 반쯤 뜨고 있는 유나의 얼굴밖에 보이지 않았다.

간호사가 아이의 상태에 대해 브리핑을 했다. 다 정상적이라는 말이었다. 유나가 고개를 끄덕이며 품 안의 아이를 안았다. 지운이 고개를 내려 아이를 바라보았다. 눈도 뜨지 못하고 울고 있는 붉은 아이가 보였다. 그리고 뒤이어 하얗게 질린 유나가 보였다. 곧 죽을 것처럼 새하얀 유나가.

지운의 심장이 미친 듯이 쿵쿵 뛰기 시작했다. 누군가 가슴을 송곳으로 콕콕 찌르는 것 같았다. 꼭 유나가 제게서 도망쳤을 때 느꼈던 감정과 비슷했다.

왜 이런 감정을 느끼는 거지.

지운은 당황했다. 제 눈앞에 있는데, 어느새 신기루처럼 사라져 버릴 것만 같았다. 유나를 붙잡기 위해 각인도 하고, 결혼도 하고, 아이까지 가졌다. 그런데도 유나는 어디론가 또 떠나 버릴 것 같았다. 제 손에 잡히지 않은 채 영영, 그렇게…….

지운은 결국 유나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차마 유나를 계속 바라볼 수 없었다. 하나 시선을 돌렸는데도 심장의 두근거림은 잦아들지 못했다.

* * *

아이는 신생아실로 보내지고, 유나와 지운은 병실로 향했다. 지운이 기진맥진한 유나의 옆에 달라붙었다.

“유나야, 괜찮아?”

“네. 물 좀 주세요…….”

“응.”

지운이 컵에 물을 따라 바로 유나에게 대령했다. 유나는 물을 벌컥벌컥 마셨다. 피곤했다. 침대에 완전히 등을 파묻었다. 장장 열두 시간 동안 식사도 하지 않고 분만했는데, 힘들어서 그런지 배가 고프지도 않았다. 그가 침대에 딸린 식탁에다 병원 밥을 놓으며 말했다.

“미역국 한 숟갈이라도 먹자.”

“배 안 고파요.”

“그래도, 유나야. 너 열두 시간 동안 아무것도 안 먹었어. 뭐라도 먹어야 해.”

말하는 어투에 걱정이 가득했다. 유나는 하아 한숨을 쉬며 눈을 떴다. 그가 유나의 뒤통수를 받치며 입술에 숟가락을 댔다.

“자, 먹자.”

유나가 입을 벌리자 그대로 미역국과 밥알이 입 안으로 들어왔다. 맛은 밍밍했다. 삼키는 족족 다시 숟가락을 그가 입에 댔다. 어쩔 수 없이 계속 받아먹었다.

밥을 다 먹자, 이제 슬슬 졸음이 몰려왔다. 유나가 가물거리는 눈을 끔뻑이며 입을 열었다.

“…엄마 보고 싶어요.”

분만하는 내내 떠올렸던 우리 엄마. 아이의 울음소리를 들으면서도 떠올렸던 우리 엄마.

“엄마 좀 불러 주세요.”

지금 이 순간, 가장 보고 싶은 사람이었다. 지운은 잠시 대답이 없었다. 그러다 눈이 마주치자 결국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 어머님한테 연락할게.”

“네…….”

유나가 눈을 감았다. 눈을 감자, 제게 가까이 다가오는 인기척이 느껴졌다. 그가 제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쓰다듬는 손길에 다시 눈을 떴다.

“푹 자.”

지운이 눈을 휘어 웃었다. 뭔가 다른 웃음에 유나가 잠깐 멈칫했다. 평소처럼 천진하게만 느껴지던 웃음이 아니었다. 뭔가… 다른…….

지운이 등을 돌려 밖으로 나갔다. 그러고 병실 밖에서 희미하게 전화 통화 하는 소리가 들렸다. 병원의 위치와 병원 이름, 병실 호수까지 그가 읊기 시작했다.

엄마한테 연락한 거구나. 유나는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래도 그가 엄마를 보게 해 주어서. 유나는 완전히 눈을 감았다.

“내 딸, 내 새끼.”

깜빡 잠이 든 모양이었다. 유나는 저를 부르는 엄마의 목소리에 눈을 부스스 떴다. 눈앞에 바로 엄마가 보였다.

“엄마.”

엄마가 울고 있었다. 유나가 눈을 찌푸렸다.

“왜 울어.”

“내 딸, 아직 아기 같은데… 네가 애를 낳다니.”

유나가 손을 뻗어 엄마의 눈물을 닦아 주었다.

“나도 안 믿겨, 엄마.”

유나는 아직도 자신의 고등학생 시절이 작년같이 느껴지기도 했다. 아직 자신은 어른이 되지 못한 거 같은데… 부모가 될 자격이 있을까? 그런 생각이 들기도 했다.

“몸은 괜찮니?”

“응. 아이도 건강해.”

대답하는데, 엄마의 등 너머로 지운이 우뚝 서 있는 게 보였다. 정지운답지 않게 조용했다. 그게 뭔가 이상하게 느껴졌다. 저번에도 느꼈던 기시감이었다. 저와 엄마가 이러고 있으면 당연하다는 듯 강제로 떼어 놓을 것만 같은데… 그러질 않아서.

“밥은 먹었어?”

“응. 미역국 먹었어.”

“얼굴이 반쪽이 됐네, 반쪽이 됐어.”

엄마가 연신 뺨을 쓰다듬었다. 그 손길만으로 애틋했다.

“네 친구에게서 연락 왔더라.”

“아…….”

“너 괜찮은 거 맞냐고.”

지수 이야기인가. 유나가 지운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지운이 저를 바라보고 있었다. 유나는 그의 눈치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괜찮아.”

하나 엄마도 여전히 믿지 못하는 눈치였다. 유나는 제게 꽂힌 시선 때문에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저 말없이 엄마를 바라보기만 했다. 엄마 또한 말을 잃었다.

엄마는 늦은 밤이 돼서야 병실을 떠났다. 지운은 여전히 유나의 옆에 있었다.

“…오늘 호출은요.”

“씹었어.”

“그래도 괜찮아요?”

“알아서 하겠지. 네가 더 중요하니까.”

지운이 간이침대를 꺼냈다. 유나가 눈을 찌푸리며 물었다.

“여기서 자고 가려고요?”

“응.”

당연하다는 어투였다. 유나는 잠시 그런 지운을 내려다보다가 입을 다물었다. 그다운 행동이었으니까.

병실에 입원해 있는 동안, 아이는 여러 가지 검사를 받았다. 난청 검사부터 시작해서 에스퍼와 가이드 검사까지. S급 에스퍼와 S급 가이드의 아이답게 아이는 S급 에스퍼 진단 결과를 받았다.

에스퍼는 등급과 상관없이 나라의 인재에 속하므로, 무조건 일반 학교가 아닌 에스퍼들만이 다니는 에스퍼 학교에 따로 다녀야 했다. 일반인들의 삶과는 다른 길을 걷는 것이다. 유나는 품 안에 안긴 아이를 내려다보며 아이의 앞날이 어떻게 될지 예상해 보았다.

저와 정지운 밑에서 올곧게 잘 자랄 수 있을까? 무언가 결여된 게 분명한 정지운이 아이를 잘 케어할 수 있을까? 나도… 좋은 엄마가 될 수 있을까. 아직도 미지수였다.

병실에서 퇴원할 때까지 지운은 쭉 유나 옆에 있었다. 호출이 와도 무시하면서까지. 퇴원 수속을 모두 밟은 후, 유나와 지운 그리고 아이까지 셋이서 함께 차를 타고 이동했다. 차에는 그새 유아용 시트가 마련되어 있었다. 아마 밑의 수하를 썼겠지. 예상이 됐다.

유나는 품 안의 아이를 내려다보았다. 작고 빨갰다. …예뻤다. 아이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제 배에서 나온 아이였다. 내 아이.

“아이 이름은… 같이 정해 보자, 유나야.”

아직 아이에겐 이름이 없었다. 세상에 나온 지 며칠 되었는데도. 유나는 아이를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입을 열었다.

“정세현.”

“세현?”

“네.”

“무슨 뜻이야?”

“그냥… 세현이가 떠올랐어요.”

아무 뜻 없이 그냥 떠오른 이름을 내뱉은 것이었다. 세현. 이 아이를 그렇게 부르고 싶었다.

“알겠어, 유나야. 세현이로 하자.”

아이가 자면서 작게 칭얼거렸다. 유나가 아이를 달랬다. 세현아 괜찮아, 하고. 세현아. 아이의 이름을 부르는 제 목소리가 떨렸다.

아직 엄마가 될 준비가 되지 않았는데 엄마가 됐다.

* * *

지운이 없는 시간대에는 가정부 아주머니와 함께 세현을 돌봤다. 지운이 오면 그때부터 지운과 함께 세현을 돌봤다.

세현은 많이 울고, 많이 칭얼거리는 아이였다. 새벽에도 계속 울어서 잠에서 깨기 일쑤였다. 그럴 때마다 지운이 세현을 안고 얼렀다.

유나는 어느새 제가 지운과 함께 사는 일상에 완전히 녹아든 것을 느꼈다. 예전 같았으면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렇게 살아도 되는 걸까.

정말로, 이렇게…….

“세현아.”

유나의 눈에 아이를 안은 채 웃고 있는 지운의 얼굴이 들어왔다. 제 이름을 부르는 것처럼 아이에게도 다정한 목소리였다. 시선을 느낀 것인지 지운이 고개를 돌려 유나를 바라보았다.

“왜, 유나야? 피곤해?”

“그냥…….”

“좀 쉬어, 세현이는 내가 보고 있을 테니까.”

정말 이렇게 살아도 괜찮을까.

* * *

지운이 없는 시간, 갑자기 초인종 소리가 들렸다. 이 집에서 초인종이 울린 건 처음이었다. 유나가 현관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사모님, 제가 보고 올게요.”

왠지 유나는 저도 인터폰에 비친 사람이 누구인지 보고 싶었다. 유나는 세현이를 아기 침대에 놓은 후, 그녀 또한 가정부를 뒤따라 인터폰을 확인하러 갔다.

지수였다.

띵동, 다시 초인종이 울렸다.

“사장님께서 외부인은 받지 말라고 하셨는데…….”

“제 친구예요.”

유나는 홀린 듯 중문을 열고 현관문을 열었다. 지수가 눈앞에 있었다. 이 집에서 마주하는 것은 처음이라 왠지 낯설었다. 지수는 중문 너머의 집 안을 살펴보더니 신발을 벗고 집 안으로 들어왔다.

“지수야.”

“어머님께 물어서 찾아왔어.”

그러고는 아기 침대로 가 누워 있는 아이를 바라보았다.

“너 언제 애까지 낳았냐?”

“어쩌다 보니…….”

“아니, 결혼도 어쩌다 보니 하고, 출산도 어쩌다 보니야? 내가 널 아는데 네가 어쩌다 보니 결혼하고, 어쩌다 보니 애까지 낳을 애로 알 것 같아?”

지수가 목소리를 높이자 자고 있던 아이가 깨서 으아앙, 울음을 터트리기 시작했다. 유나는 서둘러 아이를 품에 안고 달래기 시작했다.

“세현아, 괜찮아. 착하지. 푹 자자.”

지수는 그런 유나를 경악한 듯 눈을 일그러트리고 바라보았다. 그러곤 유나 옆에서 어색하게 서 있는 가정부 아주머니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저기, 죄송한데. 친구끼리 오래간만에 할 이야기가 있어서요. 죄송하지만 자리 좀 피해 주시겠어요?”

“네, 알겠어요.”

가정부는 유나와 지수를 번갈아 바라보더니 이내 눈치껏 밖으로 자리를 피해 주었다.

으아앙, 울던 세현은 몇 번 달래니 곧 다시 잠에 빠졌다. 유나가 후우, 한숨을 쉬며 세현을 아기 침대에 놓았다.

“너 어떻게 된 거야.”

지수가 유나의 팔을 잡아 돌렸다.

“왜 말 안 했어?”

“어떻게 말해. 내가 알고 보니 S급 가이드였고, 웬 미친 S급 에스퍼한테 납치당하고 감금당했다고.”

“뭐?”

“…세현이 깨니까 방으로 들어가자.”

둘은 침실로 자리를 옮겼다. 지수는 벽에 걸린 웨딩 사진을 보고서도 놀란 듯 헛웃음을 터트렸다.

“이 새끼가 널 납치, 감금했다고? 결혼도 강제야?”

“…….”

“지금이 조선 시대도 아니고, 미친 거 아냐? 경찰에 신고해 봤어?”

“응. 다 했어. 도망도 많이 쳤어, 지수야. 근데 안 되더라. 나 포기했어.”

유나가 초연하게 이야기했다. 지수는 멍하니 그런 유나를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네 얼굴이 어떤 줄 알아? 시체 같아. 죽은 사람 같아. 알아?”

알고 있었다. 매번 거울로 볼 때마다 전보다 마른 얼굴과 하얗게 질린 얼굴을 보니까.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전으로 돌아가는 방법 같은 건 없으니까. 이미 모든 게 다 엎질러져 돌이킬 수 없었다.

제가 한 그 어떤 행동도 통하지 않았다. 유나는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끔찍하게 여겼던 엄마와 아빠의 삶, 그러니까 에스퍼와 가이드의 삶을.

“유나야. 너 병원 가 봤어?”

“무슨 병원?”

“정신과. 너 상담받아야 할 거 같아.”

유나가 헛웃음을 지었다. 누군가 그랬다. 정신 병원에 가야 할 사람이 안 가고, 그런 사람한테 당한 사람들이 정신 병원에 온다고. 병원에 가야 할 사람은 정지운인데.

“너 쉬어야 할 거 같아.”

“어떻게?”

“그냥 어디로든 가서 좀 쉬어야 할 것 같아. 너 결혼식 때 애들이 뭐라고 한 줄 알아? 아니, 아냐.”

얼추 예상은 됐다. 유나는 억지로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네 남편, 나한테 연락했을 때부터 이상하더니. 아니, 네 결혼 소식을 네가 아니라 그 사람한테 받았어. 그거부터 말이 안 되잖아.”

“…….”

“유나야. 너 안 괜찮아. 나랑 가자. 어?”

“그럼 세현이는.”

“일단 너부터 살아야 할 거 아냐.”

나……? 뭘 어떻게 살아야 한단 거지. 괜찮은 것은 뭐고. 유나는 잘 이해할 수 없었다. 괜찮아진다는 것도 잘 모르겠고, 어떻게 해야 괜찮아지는지도 스스로 알 수 없었다.

도망쳤을 땐 다시 잡힐까 봐 두려웠고, 매번 정지운을 떠올리는 자신에게 환멸이 났고, 지금 여기서 살 땐 이렇게 살아도 되나 늘 머릿속이 어지러웠다. 어떻게 살든 똑같았다.

이젠 아이까지 있었다. 도망갈 의지는 완전히 꺾였다.

“아니면 아이 데리고 같이 가자.”

아이를 데리고? 유나가 눈을 깜빡였다. 지수가 아직도 멍해 보이는 유나의 손을 움켜쥐고 흔들었다.

“너 여기서 더 살면 안 돼. 너 진짜 다른 사람 된 거 같아. 어?”

“가도… 다시 잡힐 텐데 뭘…….”

“야, 한유나. 정신 차려.”

지수가 유나의 어깨를 잡고 흔들었다. 유나는 지수가 흔드는 대로 인형처럼 흔들렸다.

“야 진짜… 나 무서워, 유나야.”

“뭐가?”

“너 사람 안 같아. 귀신 같아.”

사람한테 귀신이라니. 유나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지수는 활발하고 말이 거침없는 솔직한 친구였다. 유나도 비슷했기에 서로 죽이 잘 맞고 제일 친했다. 고등학생 시절 내내 붙어 다녔다. 그때가 그리웠다.

“유나야.”

지수가 갑자기 울기 시작했다. 꼭 아이를 낳은 저를 보며 울던 엄마처럼. 왜 울지. 난 정말 괜찮은데…….

아니, 괜찮은 게 맞나.

펑펑 우는 지수를 보니 유나의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나도 예전엔 저렇게 울었는데. 유나는 제가 마지막으로 운 게 언제였나 떠올려 보았다. 잘 생각이 나지 않았다.

나… 진짜 괜찮은 게 맞나.

“가자, 나랑 같이 가자.”

내가 원하는 게 뭐지. 그것도 생각해 본 지 오래였다. 유나는 이전에 에스퍼들의 숙소에서 지냈을 때를 떠올렸다.

숙소 근처를 걸었을 때 느꼈던… 그 해방감, 자유, 어디에도 속해 있지 않다는 느낌.

그런 걸 원했다.

마음속 깊이 묻어 놨던 감정이 수면 위로 드러났다. 유나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나도… 나도 같이 가고 싶어.”

“그러니까 가자고, 여기 있지 말고!”

지수가 소리쳤다. 그 소리가 시발점이라도 된 듯, 유나가 엉엉 울기 시작했다. 소리 내어 울었다. 아이처럼, 이때까지 참아 왔던 걸 터트리듯이 그렇게.

“나도, 흐으… 나도 이렇게, 살기… 싫어. 으흐윽…….”

“그러니까 가자고!”

지수가 다시 한번 크게 외쳤다.

아이가 깼는지 방문 밖으로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몸이 자연스럽게 문밖으로 향했다. 아이를 달래야 했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자, 다시 돌아온 가정부 아주머니가 보였다. 그녀의 품에 이미 아이가 안겨 있었다.

“아이 울음소리가 들려서 들어왔어요…….”

“아주머니, 아이 좀 대신 달래 주시겠어요?”

지수가 말했다. 가정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눈이 눈물에 젖은 유나의 얼굴에 오래도록 머물렀다.

“사모님, 괜찮으세요?”

괜찮은 게 뭐지. 유나는 아직도 머릿속이 어지러웠다. 하나 유나는 이번에는 다르게 대답했다.

“안 괜찮은 것… 같아요.”

그래. 자신은 괜찮지 않았다. 오래전부터 괜찮지 않았다. 괜찮다고 스스로를 속였다. 유나가 울면서 지수의 손을 맞잡았다.

“저… 갈게요. 그동안 세현이 잘 부탁드려요.”

가정부 아주머니가 눈을 크게 떴다. 그러더니 무어라 말하려는 듯 입술을 달싹이다가 이내 놀란 표정을 지우고 웃었다.

“네. 다녀오세요, 사모님. 아이는 걱정 마시고요.”

“…감사합니다.”

문을 열었다. 유나가 자의로 밖으로 발을 디뎠다. 지수가 타고 온 차까지 걷는데 몸이 벌벌 떨렸다.

“얼른 타.”

“응…….”

조수석에 올랐다. …또 도망치고 있었다. 이번에는 내가 낳은 아이를 두고.

도망치지 않을 거지.

또다시 정지운의 목소리가 환청처럼 귓가에 맴돌았다. 이번에는 아이의 울음소리도 함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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