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 자각 (1) (9/13)

4. 자각 (1)

어린 시절 기억은 희미하다. 대부분 센터에 있는 방에 홀로 남겨져 있는 기억이 대부분이었다. 지운은 빈방에 갇힌 채 엄마가 퇴근하기를 기다렸다. 아빠는 없었다. 태어날 때부터 없었다고 했다.

‘지운아, 네 아빠는 저기 먼 나라에 있어.’

어린 시절에는 그 말이 진짜라고 믿었다. 하나 지운은 크고 나서 알았다. S급 에스퍼인 아빠가 뒤늦게 어느 가이드와 사랑에 빠져 임신 중이었던 엄마와 배 속의 저를 버리고 갔다는 걸.

엄마와 결혼까지 했으면서, 그 가이드와 각인까지 하고 엄마에게 강제로 이혼을 통보했다는 걸.

대체로 상성이 맞는 에스퍼와 가이드는 서로에게 필연적으로 끌리기 마련이었다. 많은 사례와 논문이 그걸 증명했다. 가이딩을 받거나 가이딩을 할 때, 가이드와 에스퍼 둘 다 엔도르핀이 다량 분비된다는 건 실험으로 증명된 사실이었다.

엄마는 가이드가 아닌 일반인이었다. 가이딩은 할 수 없어도 똑똑하고 강인한 사람이었다. 아빠의 배신과 부재에도 끄떡없어 보였다. 센터에서 커리어를 쌓아 나가며, 한편으로는 S급 에스퍼 판정을 받아 교육을 시작해야 하는 지운의 걱정도 함께 했다.

‘잘할 수 있지, 아들? 잘할 수 있을 거야.’

지운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에스퍼들이 다니는 학교에 홀로 입학했다. 그곳에서 지운은 충실히 수업을 받았다. 하나 문제는 실습수업이었다. 힘 조절을 못 한 나머지 선생 한 명이 크게 다쳤다.

그 뒤 지운은 주의 요망 학생이 되어 다른 이들의 감시를 받았다. 감시와 시선이 귀찮았다. 지운은 그들이 저를 어떻게 생각하든 말든 제가 하고 싶은 대로 힘을 썼다.

결과는 징계였다. 징계를 받고 풀려나도 똑같은 일이 반복되었다. 모두 지운을 피하기 시작했다. 학생도, 선생도, 모두 마찬가지였다. 얼마 없는 S급 에스퍼조차 그랬다.

‘넌 너무 막무가내야.’

S급 에스퍼 중 한 명인 윤진아가 그렇게 말했다. 다른 에스퍼들도 별반 다를 바 없었다.

학교를 다니는 동안 지운은 늘 혼자였다. 어렸을 때부터 늘 혼자였기 때문에 일반적이지 않다는 것 또한 개의치 않았다. 늘 그랬으니까.

지운은 이른 나이에 에스퍼들이 모인 학교에서 배울 수 있는 모든 걸 끝마치고 열다섯 살에 곧바로 전장으로 투입됐다. 대개 열여덟 살 때 첫 출전하는 것과 달리 극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지운은 열다섯 나이로 S급 몬스터를 전부 다 격파했다. 이것 또한 이례적인 일이었다. 지운은 제 마음대로 힘을 쓸 수 있다는 것이 좋아 전장을 제집처럼 들쑤시고 다녔다.

하나 그것도 오래가지 못했다. 폭주가 왔기 때문이었다.

지운은 폭주했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했다. 단기 기억 상실에 걸린 것처럼 아무 기억도 하지 못했다. 폭주 이후에야 부리나케 그에게 전용 가이드가 붙었다. S급 가이드는 수가 극히 적어 A급 가이드가 한 명 붙었다. 지운보다 나이 다섯 살 많은 여자 가이드였다.

여자는 가이딩을 해 주겠다고 지운의 손을 덥석 잡았다. 지운이 무표정하게 손을 쳐 내자 여자는 상처받았는지 그 이후로 먼저 지운에게 다가가지 못했다. 하나 폭주하지 않기 위해선 가이드가 필요했다. 몇 번 억지로 가이딩을 해도 지운의 기분은 나아지지 않았다.

다른 가이드로 갈아 치워도 마찬가지였다. A급, B급, C급, F급까지 다양한 등급의 가이드를 죄다 붙여 봐도 마찬가지였다. 지운은 늘 폭주 직전의 상태를 유지하고 사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그 상태가 지속되자 머리가 깨질 것 같은 두통이 찾아왔다. 이따금 두통 때문에 움직일 수 없을 때도 있었다. 가이드 존부터 시작해서 강도 높은 가이딩을 받아 보아도 마찬가지였다. 두통은 사라지질 않았다.

전장에서 마음껏 능력을 쓰지 못하고 조절을 해야 한다는 것도 성가신 일이었다.

지운이 전장 곳곳을 들쑤시고 다니자, 소식을 들은 지운의 아버지가 오래간만에 지운의 앞에 나타났다. 연락도 없었다. 지운은 제집 문 앞에서 진을 치고 있는 남자를 내려다보았다.

“지운아.”

지운의 시선을 느낀 남자가 몸을 일으켰다. 남자는 지운과 얼굴을 마주하더니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지운은 저와 닮은 남자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아버지구나. 닮은 얼굴로 알 수 있었다. 하나 지운은 아버지를 보아도 별 감흥이 없었다. 태어날 때부터 없었고, 그리움을 느낀 적도 없었으며, 아버지의 부재에 영향을 받은 적도 없었다. 애초부터 혼자인 적이 많았으니까.

“네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지운아. S급 에스퍼로 아주 훌륭하게 지내고 있다던데.”

“무슨 말을 하려고 온 거야?”

지운이 심드렁한 말투로 물었다. 지운의 아버지는 예상했다는 듯, 그러면서도 당황한 듯 눈을 찌푸리더니 입술을 달싹거렸다.

“이제 와서 늦은 건 안다. 지금이라도 뒤늦게나마… 네게 용서를 구하고 싶어서.”

용서? 지운은 고개를 갸웃했다. 무엇에 대해 용서를 구한단 말인가.

“아버지는 그때 네 어머니와 선으로 결혼했다. 잘 맞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서 결혼까지 했지만… 뒤늦게 아버지에게 진짜 사랑이 찾아왔어.”

무슨 이야기를 하나 싶었더니, 고작 진부한 사랑 이야기였다. 지운은 슬슬 아버지를 독대하고 있기 귀찮아졌다.

“에스퍼와 가이드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야. 아주 절대적인 관계란다. 아버지는 그걸 너무 늦게 알았어. 일반인인 너희 어머니와 결혼하면 안 됐다는 걸, 아버지는 너무 늦게 알았어.”

“그래서?”

“그 사람을 사랑하니까 너희 엄마와 너를 떠날 수밖에 없었어. 같이 있지 않으면 죽을 거 같았어. 너희 엄마와 네겐 큰 죄인 거 안다. 그래서 네게 용서를…….”

지운이 도어 록에 손을 대자 지운의 아버지가 황급히 지운의 앞을 막아섰다.

“지운아. 너도 나와 같은 에스퍼라 곧 알게 될 거다. 아버지를 이해하게 되는 순간이 올 거야. 그러니 부디 용서해 다오.”

갑자기 늙으니까 노망이 왔나. 지운은 어이가 없었다. 지운의 아버지가 불쑥 지운의 팔목을 잡았다.

“비켜요.”

지운이 아버지를 밀치고는 도어 록의 암호를 풀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그것으로 아버지와의 첫 만남은 끝이었다.

나중에야 어머니를 통해 제집 주소를 듣고 찾아왔다는 걸 알게 되었다. 어머니도, 아버지도 지운은 둘 다 이해할 수 없었다. 제게 시급한 건 이 빌어먹을 두통을 없앨 방법뿐이었다.

결국 지운은 S급 가이드에게 가이딩을 받기 위해 S급 에스퍼들이 모여 산다는 숙소로 갔다.

늘 혼자가 편했기에 누군가와 함께 산다는 건 굉장히 성가시고 짜증 나는 일이었지만, 두통을 해결하는 게 급선무였다. S급 가이드는 굉장히 수가 적어서 S급 가이드에게 가이딩을 받으려면 숙소 생활을 해야만 했다.

그러나 그곳에 있는 S급 가이드에게 가이딩을 받아도 결과는 똑같았다.

아무 변화도 없다.

지운은 변화도 없는데 가이딩을 해 주겠다며 들러붙는 가이드가 귀찮게 느껴졌다. 몇 번 폭주를 한 탓인지―기억은 전혀 없지만― S급 에스퍼들도 지운을 슬슬 피하거나 대하기 어려워했다.

그러던 와중에 S급 가이드 중 한 명인 김혜진이 납치당해 죽었다. 혼자 외출을 했다가 벌어진 사달이었다. 혜진이 죽기 직전까지 지운에게 연락했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다른 S급 에스퍼들이 지운을 비난하고 나섰다.

성가시고 짜증 나.

지운은 그대로 숙소를 떠났다. 더 이상 있을 이유가 없었다.

지운은 이제 전국에 있는 병원을 돌기 시작했다. 유명한 신경과는 모조리 다 들렀다. 하나 의사 모두 같은 답변을 했다. 에스퍼에게 불가결한 가이딩은 현대 의학으로는 재현할 수 없다고.

상성이 맞는 가이드도 없다.

가이딩이 아니면 두통을 고칠 수도 없다.

폭주 직전의 아슬아슬한 상태로 살아가는 수밖에 없다.

지운은 처음으로 제 맘대로 되지 않는 것에 분노했고, 한편으로는 난생처음 초조함을 느꼈다.

그런 와중에 찾은 게 한유나였다. 병원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지운은 유나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무언가에 홀리듯 시선이 갔다. 다가가자 희미하게나마 좋은 냄새가 났다.

“처음 오셨나요? 진료 접수증 작성 부탁드립니다.”

어깨까지 오는 머리가 찰랑거렸다. 내리깐 눈이 예뻤다.

“으음…….”

지운은 진료 접수증을 작성하면서도 유나를 계속해서 흘긋거렸다. 유나는 지운이 쓰고 있는 진료 접수증을 보느라 정신이 없어 시선을 눈치채지 못했다.

“앉아 계세요.”

지운은 자리에 앉아서도 유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이상했다. 이런 식으로 눈길이 가는 애는 없었는데. 가이드가 병원에서 일할 리도 없고.

계속해서 쳐다보자 시선을 눈치챈 것인지 컴퓨터에 눈을 고정하고 있던 유나가 고개를 틀어 지운을 바라보았다. 지운이 싱긋, 눈을 접어 웃었다. 유나가 어색하게 웃으며 그 미소에 화답하듯 입꼬리를 올렸다. 하나 그걸로 끝이었다. 유나는 다시 시선을 거뒀다.

지운은 진료실로 가면서도 유나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아니, 뗄 수 없었다.

이상해.

쟤는 뭐지?

진료를 끝내고 집에 돌아가서도 계속 생각이 났다. 한유나. 한유나. 지운이 집에서 홀로 유나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생각만 하던 지운은 이틀 뒤, 다시 병원으로 걸음을 옮겼다. 미리 병원 입구를 실드로 막아 놓고 병원 문을 열고 들어서자 마침 유나가 보였다.

“안녕하세요, 좋은 아침이에요~”

유나가 해맑게 인사했다. 지운은 웃으며 그 인사에 답했다.

“응, 좋은 아침.”

하나 대답하자마자 유나가 몸을 흠칫, 떨더니 대걸레를 들어 올렸다. 휘두르기 전에 지운이 능력을 이용해 대걸레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유나는 제법 당황한 눈치였다.

지운은 저와 달리 유나의 반응이 심상치 않자 아쉬움을 느꼈다.

“위험하게 휘두르면 안 되지.”

지운이 그리 말하자 유나가 억지로 웃으며 대답했다.

“아, 아직 병원 오픈 시간 전인데요. 10시 이후에 오시면 됩니다, 환자분…….”

“병원에 볼일이 있는 게 아니라, 너한테 볼일이 있어서.”

“네? 저요?”

당황한 눈치였다. 예상했던 반응이었다. 지운이 말했다.

“응. 너. 잠시만 거기 있어 볼래?”

그러고는 앞으로 성큼 걸어 유나의 곁으로 다가갔다.

이 예상도 들어맞았다. 가까이 다가가자마자 지끈거리던 두통이 조금 나아졌다. 희미하게나마 나던 좋은 냄새도 더욱 짙어졌다. 지운이 웃었다.

“역시. 맞네.”

내 가이드야.

드디어, 드디어 찾았어.

내 가이드.

지운이 환하게 웃었다. 찾았다. 이제 더 이상 빌어먹을 두통에 시달릴 일도 없고, 힘을 조절해야 할 필요도 없어졌다. 지운은 기뻤다. 태어난 이래로 가장 기뻤다.

“있잖아.”

“네.”

“나 이때까지 가이드가 없어서 불편한 점이 많았거든.”

“네…….”

유나의 표정이 서서히 굳었다. 지운은 웃으며 계속 말을 이었다.

“아무리 찾아도 없는 거야. F급 가이드까지 싹 다 뒤져도.”

“네…….”

“근데 이제 찾았네.”

“…….”

“내 가이드, 너인 것 같아.”

“…….”

“널 보니까 기분이 좋아졌어. 그래, 네가 내 가이드야.”

찾았다. 내 가이드. 지운이 유나의 목덜미에 코를 박으며 숨을 한껏 들이켰다. 좋은 냄새가 콧속으로 스미며 지끈거리던 두통이 한결 나아졌다. 마치 몸을 갑갑하게 두르고 있던 허물을 벗고 새 몸으로 다시 태어난 기분이었다.

“넌 이제 내 거야.”

내 가이드였다.

가이드는 생각보다 고분고분하지 않았다. 울고, 반항하고, 소리 지르고. 지운은 그런 유나가 성가시다고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 까랑까랑 반항하는 게 귀엽게 느껴졌다. 꼭 조그마한 강아지 같았다.

끝까지 가이드가 아니라며 잡아떼면서 달아날 궁리만 하느라 바빴다. 매번 눈동자를 굴리며 벗어날 생각만 하는 게 보였다. 그건 그리 귀엽게 느껴지지 않았다.

싫다고 하는 것도 많았다. 퇴사도 싫어, 각인도 싫어, 같이 있기도 싫어.

내 가이드는 싫은 것도 많네.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내 가이드니까. 지운은 유나의 반항을 감수하기로 했다. 같이 있으면 편안하고, 손을 잡으면 기분이 좋아지고, 보고 있으면 귀여우니까.

가이드가 아니라고 그렇게 잡아떼더니, 다시 검사하니 결국 S급 가이드인 것으로 판정이 났다. 만약 S급 가이드가 아니라고 해도 지운은 유나를 놓아줄 생각 따위 없었다.

하나 S급 가이드로 판정 난 이후에도 유나는 계속해서 반항했다. 그 모습이 귀여우면서도 짜증이 났다. 계속 달아나고, 달아나고, 또 달아나려고 하니까. 게다가 가이드의 부모 두 명 다 짜증 나게 신경을 긁었다. 어떻게 연락처를 알고 계속 메시지와 전화질을 해 댔다.

흠집을 내기 싫은데, 어쩔 수 없이 기절시킬 수밖에 없었다. 겨우 집에 데려가자 이제 욕설을 퍼부었다. 울분에 찬 얼굴로 욕설을 내뱉는 것도 귀여웠다. 그러다가도 성질을 참고 협상을 시도하는 것도 귀여웠다. 그래 봤자 눈에 훤히 다 보였다.

유나는 지운을 속이고 몇 번 도망쳤다. 도어 록을 부수고, 차 문에서 뛰어내렸다. 화가 났지만 귀여운 얼굴로 우니까 마음이 약해졌다. 이상한 일이었다.

힘들어하는 게 안쓰러워 전화도 하게 해 주고, 스마트폰을 사용할 수 있게 해 주고, 심심하지 않도록 이것저것 많이도 사 줬다. 전장에도 데려갔다. 물론 다른 에스퍼들에게 가이딩을 해 며칠 만에 그만두었지만.

같이 밖에 나가서 데이트도 하고, 힘들어하면 산책을 함께 하자고 권유하기도 했으며, 그 딴에는 유나를 위한 노력을 많이 했다. 언젠가 유나도 자신을 받아들이리라 생각했다. 그가 유나를 생각하듯, 유나도 그를 그렇게 생각하리라 믿었다.

종내에는 저 없이 나갈 수 있도록 허락했다.

그게 실수였다.

또 도망쳤다. 혼자서 나갈 수 있게 해 준 지 하루도 안 돼서였다. 지운은 유나가 연락을 받지 않자 곧바로 GPS에 마지막으로 찍힌 가이드 센터로 갔다. 하나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그다음으로는 유나의 어머니를 찾아가 물었다. 그녀조차 제 딸의 행방을 하나도 알지 못했다.

이번에는 유나의 아버지를 찾아갔다. 입에 아교라도 붙인 양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지운은 이제 S급 에스퍼들이 모여 사는 숙소로 향했다. 예상대로 유나가 있었다. 옆에는 임준호도 있었다. 둘이서 차를 타고 어디론가 향했다.

다른 남자 옆에 있는 유나를 보니 기분이 이상했다. 한 번도 상상하지 못했던 모습이었다. 유나가 다른 사람에게 가이딩을 하는 건 더러 상상해 보았으나, 가이딩이 아닌 다른 목적으로 함께 있는 건 생각해 보지 못했다.

지금이라도 당장 쳐들어가서 유나를 데려올까, 하다가 지운은 참았다. 제가 없는 한유나는 어떨까. 순전히 그런 호기심에서였다.

첫날을 제외하곤 유나는 방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았다. 그러다 어느 날, 산책을 한번 나왔다. 발에 맞지도 않은 커다란 슬리퍼를 신고서. 1층에 있는 임준호와 이야기를 좀 나누더니 혼자서 걷기 시작했다. 지운이 그 뒤를 따랐다.

걸을 때마다 흔들리는 머리카락을 쥐고 싶었다. 당장이라도 달려가 껴안고 싶었다. 유나가 없는 지금, 지운은 예전처럼 번거롭게도 힘 조절을 하고, 폭주를 하지 않기 위해 잔뜩 날이 선 채로 생활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왜인지 당장 달려가 유나를 잡아 오고 싶지 않았다.

제가 없을 때의 한유나는 어떨지 궁금해서. 단 하나의 이유 때문이었다. 그러다 충동적으로 입을 열었다.

“유나야.”

이름을 부르자마자 유나의 몸이 굳었다. 그대로 유나가 나무 뒤에 숨더니 나무 위와 주변을 샅샅이 살피기 시작했다. 겁먹은 다람쥐 같았다. 아무리 둘러봐도 찾을 수 없을 텐데.

지운은 염력과 투명화 능력을 두 개 다 가지고 있었다.

계속해서 주변을 둘러보던 유나가 숙소가 있는 쪽으로 빠르게 달리기 시작했다. 지운을 달려가는 유나를 바라보며 손을 흔들었다. 보지 못할 걸 뻔히 알면서도.

한유나는 행복해 보였다. 다른 사람과 웃으면서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이 눈에 박혔다. 다른 사람에게 스스럼없이 가이딩을 하는 모습에 속이 들끓었다. 지운은 호출이 있는 날이든, 없는 날이든 유나가 있는 곳으로 가 유나를 보고 왔다.

유나를 보고만 있는 것이 두 달쯤 이르렀을 때, 슬슬 정신에 한계가 왔다. 눈앞에 아지랑이가 기어 다니고 지끈거리는 두통은 더욱 심해졌다.

유나는 이제 아무렇지 않게 사람들과 함께 나와 산책하기도 했고, 혼자서 근방을 돌아다니기도 했다.

하나 거슬리는 점이 있었다.

임준호. 그 새끼였다. 유나와 자주 마주치고, 자주 이야기했다. 꼭 김혜진에게 살랑거리던 그때와 똑같았다. 보는 눈빛이 딱 보아도 사심이 있는 게 분명했다.

거슬려.

가뜩이나 임준호는 몬스터들이 자주 등장하지 않는 지역을 맡고 있어 호출도 적었다.

두 달이었다. 이쯤이면 충분했다. 저 없이 충분히 많은 시간을 보냈다. 더 있다가는 숙소로 찾아가 임준호 그 새끼부터 패 죽여 버릴지도 몰랐다. 유나도 이 정도 떨어져 있었으니, 제가 없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겠지.

마침 유나 혼자 산책은 물론이고 시내까지 나갔다. 꼭 자신을 잡아가라는 것처럼. 지운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 * *

결국 다시 잡혔어.

하도 울었더니 머리가 웅웅 울리고 시야가 흐릿했다. 겨우 눈물을 그친 유나는 멍하니 저를 바라보고 있는 지운과 눈을 마주했다. 정지운은 연신 싱글벙글 웃는 낯이었다. 저는 울고, 정지운은 웃고. 우스운 일이었다.

“유나야. 피곤하면 눈 붙여도 돼.”

“이 상황에 잠이 오겠니, 너 같으면?”

유나의 대답에 지운이 하하, 소리 내어 웃었다. 퍽이나 즐거워 보였다.

“이제 진짜 유나답네. 까랑까랑 화내고.”

지운이 유나를 꽉 껴안으며 유나의 목덜미에 입술을 비볐다. 목덜미에 얼굴을 박은 채로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 내뱉기를 반복했다. 유나는 가까이 느껴지는 지운의 체취에 아랫입술을 안으로 말았다. 빌어먹게도 익숙했다.

유나는 호시탐탐 지운에게서 벗어날 기회만을 찾았다. 한 번이 어렵지 두 번이 어려울 건 없었다. 언제든 차 문을 열고 뛰쳐나갈 기회만 찾았다. 지금은 고속도로라 어렵지만, 서울에 진입하고 나서는 차가 막혀 충분히 빠져나갈 기회가 생길 게 분명했다.

유나가 창밖을 흘끔거리자 유나를 꽉 안고 있던 지운이 유나의 귓가에 속삭였다.

“유나야, 안 돼.”

유나가 품속에서 몸을 바르작거리며 고개를 들어 지운을 바라보았다. 표정이 없었다.

“두 번은 없지.”

꽉 안고도 모자라 지운이 유나의 다리에 제 다리를 단단히 끼워 놓았다. 유나가 버둥거려도 손깍지라도 낀 듯 옭아매진 몸은 조금의 틈도 내어 주지 않았다.

결국, 집에 도착할 때까지 유나는 지운의 품속에 갇혀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유나는 지운을 밀치고 다시 달아나려고 했지만, 그것도 무용했다. 지운이 예상했다는 듯 유나를 낚아채 바로 유나를 방으로 데려갔다.

“놔, 놔!”

유나가 길길이 날뛰며 반항했다. 하나 지운은 그대로 유나를 침대에 내던지듯 눕혔다. 유나가 스프링처럼 다시 일어나기도 전에 그가 유나의 몸을 꽉 누른 채 미리 침대 옆에 준비해 놓았던 수갑을 유나의 손목과 발목에 채웠다.

“뭐야, 이거 뭐야, 미친 새끼가!”

유나가 수갑이 채워진 제 팔목을 내려다보며 미친 듯이 흔들었으나 쇠가 찰랑거리는 소리만 날 뿐, 풀리지 않았다. 발목에도 걸린 수갑 때문에 발버둥도 칠 수 없었다.

“자기야. 왜 도망을 쳐? 다시 이렇게 잡힐 거면서.”

지운이 싱긋 웃었다. 유나는 흐느끼며 그에게서 벗어나려 애썼다. 아무리 몸부림을 쳐도 손목과 발목을 옥죈 수갑은 풀릴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가능성 없는 몸부림조차 못마땅했는지 지운이 인상을 찌푸렸다.

“말만 잘 들으면 편할 텐데. 왜 이렇게 말을 안 듣지?”

지운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고는 손을 들어 유나의 머리통을 콕콕 찔렀다.

“이해가 안 돼, 유나야.”

“개, 새끼…야. 너 같으면, 네 말을 곧이곧대로 들을 것 같아?”

유나의 입에서 신랄한 욕설이 튀어나왔다. 지운이 씨익 웃었다가 이내 표정을 싸악 바꾸더니 유나의 목덜미를 그러쥐었다.

“또. 말 안 듣는다.”

“차라리 죽여, 씹새끼야!”

유나가 온몸을 써 가며 발악했다. 발버둥을 치고 손을 미친 듯이 움직였다. 수갑이 철그렁철그렁 시끄러운 소리를 냈다.

“유나야. 시끄러워.”

지운이 발버둥 치는 유나를 잡아 눌렀다. 지운은 지운 나름대로 힘 조절을 해 유나를 제압하고 있는 것이지만 유나에게 그런 것 따위 중요하지 않았다. 제 자유 의지를 강제하고, 제 행동을 강제로 막는다는 것에 분노했다.

저딴 새끼가 내 에스퍼라니.

에스퍼와 가이드 따위, 그런 종속적인 관계 따위 싫었다. 유나는 아악 소리를 지르다가 이내 흐느끼며 울기 시작했다. 이 상황이 너무 싫었다. 왜, 왜, 왜……. 유나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평안했던 제 일상을 떠올렸다.

이 새끼랑 만나지만 않았어도…….

그냥 평온하게, 엄마와 아빠랑 같이 살고 있었을 텐데. 물 흐르듯 그렇게 살고 있었을 텐데. 정지운과 만난 이후부터 제 삶이 송두리째 바뀌어 버렸다.

유나가 다시 아이처럼 엉엉 울기 시작했다.

“이제 울어도 소용없어. 이건 벌이야. 내 말 안 듣고, 계속 나 거부한 벌.”

지운이 그렇게 말하면서 우는 유나 옆에 앉아 유나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유나가 몸을 거칠게 흔들며 그 손길을 거부했다. 지운은 정말로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유나야. 왜 그렇게 싫은 거야? 갖고 싶은 것도 다 가지게 해 주고, 맛있는 것도 해 주고, 같이 나가서 놀고, 그리고 이번엔 두 달 동안 나 없이 지내봤잖아. 그걸로도 부족해?”

“왜 싫냐니? 진짜 또라이 새끼 아냐?”

유나가 숨을 헐떡이며 묶인 팔로 지운의 어깨를 퍽, 쳤다.

“너 같으면 안 싫겠냐?”

“난 진짜로 모르겠어, 유나야. 왜 싫어? 우린 에스퍼랑 가이드인데.”

수없이 말했는데 못 알아 처먹는 건 본인이면서, 상대방에게 계속 답을 구하다니. 유나는 지운을 힘껏 노려보며 다시 한번 팔을 흔들었다. 쇠가 찰그랑거렸다.

“유나야.”

지운이 유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유나는 그가 손을 내밀자마자 바로 고개를 돌려 그를 외면했다. 지운이 손을 멈칫했다.

허공에 있던 손이 천천히 아래로 내려갔다. 유나는 아예 시트에 얼굴을 처박고 뺨을 적신 눈물을 닦았다. 이제 눈물도 아까웠다. 저 새끼 때문에 울고, 힘들어하고, 괴로워하고, 이제 전부 지쳤다.

진정된 유나가 숨을 고르게 쉬기 시작하자 지운이 그녀 옆에 와서 앉았다. 유나가 그제야 고개를 돌려 지운을 바라보았다.

“유나야. 넌 나 하나도 안 보고 싶었어?”

“네.”

그러고 유나가 시선을 피했다. 지운이 유나의 뺨을 붙잡아 제게 시선을 고정하게 만들었다.

“정말? 내 생각 한 번도 한 적 없어?”

“…네.”

대답하는 유나의 목소리가 떨렸다. 지운은 여전히 이해할 수 없는 얼굴로 한숨을 쉬더니 이내 유나의 옆에 와 누웠다.

“난 매일매일 생각했는데. 매일매일 보러 가고.”

“…보러 왔어요?”

“응. 맨날 맨날. 너 임준호랑 붙어 있는 것도 보고.”

그래, 역시 환청이 아니었던 거다. 내가 미친 게 아니었어. 유나는 멍하니 그리 생각하다가 제 등을 쓸어내리는 손길을 느꼈다. 이제 놀랍지도 않았다. 익숙했다.

“그래도 많이 참았어, 나. 두 달 동안이나 참았으니까.”

“네, 참 많이도 참으셨네요.”

유나가 비꼬듯 대답했지만 지운은 방긋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많이 참았어. 근데 임준호가 너한테 수작질이라도 했어?”

“아뇨. 그 사람은 당신이랑 다르게 상식적이거든요.”

“그래? 걘 여자라면 다 좋다는 애인데.”

유나는 허, 헛웃음 한번 날리고는 이내 시선을 완전히 거뒀다. 지운이 슬금슬금 유나를 등 뒤에서 껴안으며 유나의 가슴을 움켜쥐었다.

유나가 성가시다는 듯 가슴을 움켜쥔 손등 위에 제 손바닥을 겹치고서 옆으로 밀어내려고 했으나, 이내 그것도 잠시였다. 포기한 유나가 한숨과 함께 손을 완전히 아래로 늘어트렸다.

지운이 유나의 목덜미에 입술을 비비며 가슴을 부드럽게 주물렀다. 유나는 지운의 다른 손이 제 옷을 위로 끌어 올리는 것을 내려다보며 눈을 감았다. 어차피… 이것 또한 예상했던 것이었다.

가슴과 배를 어루만지는 손이 따듯했다. 맨살을 몇 번 어루만지던 지운이 유나의 몸을 돌려 눕혔다. 지운은 수갑 때문에 다리를 오므리고 있는 유나를 바라보더니 혀를 쯧, 차면서 발목에 묶인 수갑을 풀어 주었다.

다리에 자유가 생긴 것도 잠시, 지운이 벌어진 다리 사이로 파고들었다. 유나가 눈을 떠 제 몸 위로 완전히 드리운 지운을 바라보았다. 지운은 옷을 반쯤 걸친 유나를 웃는 낯으로 바라보다가 천천히 유나의 다리 사이를 손으로 쓰다듬었다.

“벌써 젖었네.”

“…….”

지운이 유나가 입고 있는 바지와 속옷을 한 번에 끌어 내렸다.

“이 속옷은 누가 사 준 거야?”

“…….”

“임준호, 그 새끼?”

지운이 순식간에 능력으로 속옷과 바지를 찢어발겼다. 유나가 눈을 찌푸렸다. 지운은 천 쪼가리가 된 옷을 만족스럽게 바라본 후 다시 유나의 몸에 시선을 고정했다.

“보고 싶었어. 이 몸도.”

지운이 유나의 가슴에 입술을 맞췄다. 입술이 부드럽게 정점을 빨자 유나가 흐으, 신음을 흘리며 시트를 거머쥐었다. 익숙하지만, 오래간만에 느끼는 감각이었다.

지운이 유나의 가슴을 빨면서 한 손으로 허리와 배를 쓰다듬었다. 유나는 저도 모르게 다리를 더 벌리며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아랫배로 열기가 슬슬 모였다. 이미 젖었다는 건… 정지운이 말하기 전부터 스스로 알고 있었다.

몇 번이고 몸을 섞었으니까 당연한 몸의 반응이라고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런 제 몸이 싫었다. 언제든 정지운이 들어올 준비를 끝낸 제 몸이…….

지운은 오래간만의 정사에 흥분을 참을 수 없었는지, 평소보다는 조급하게 삽입을 서둘렀다. 유나는 빠듯하게 안을 밀고 들어오는 것에 숨을 헐떡였다. 오래간만에 겪는 삽입 때문인지 압박감이 컸다.

“조여.”

지운이 말하며 유나의 다리를 더 넓게 벌렸다. 유나는 신음을 참기 위해 한 손으로 제 입을 틀어막았다. 그러지 않으면 금방이라도 허덕이는 제 소리가 적나라하게 나올 것 같았다.

“하아…….”

지운이 만족스러운 한숨을 내쉬며 완전히 삽입했다. 유나가 흐느끼며 제 손가락을 깨물었다.

“왜 소리 참아, 유나야.”

지운이 유나의 손을 아래로 끌어 내리며 여유롭게 허리 짓을 했다. 느릿한 움직임이라 더욱 성기가 안을 긁었다가 스르륵 빠져나가는 감각이 선연했다. 유나는 어떻게든 소리를 참기 위해 입술을 안으로 말았다. 하나 잇새로 소리가 새어 나가는 건 어쩔 도리가 없었다.

“아, 흐으… 읏, 아…….”

“기분 좋아.”

지운이 눈을 휘며 허리를 쳐올렸다. 그러고는 유나의 가느다란 허리를 꽉 잡았다.

“왜 살이 더 빠졌어, 유나야.”

“으응…….”

“밥이 맛없었어?”

지운의 물음에 유나는 스스럼없이 네, 라고 대답하려다가 바로 고개를 저었다. 지운은 알 만하다는 표정으로 유나의 홀쭉한 배에 쪽, 입을 맞췄다가 뗐다. 그러고는 서서히 움직임에 박차를 가했다.

유나는 리드미컬하게 흔들리는 몸에 시트를 그러쥐었다가, 그러다가도 신음을 참기 위해 한 손으로 입을 막았다. 벌어진 다리가 후들거리고 손조차 조금의 틈 없이 계속해서 움직였다.

유나는 손을 쥐었다 펴며 어떻게든 파도치는 감각에서 헤어나려고 애썼으나 쾌락은 손쓸 새도 없이 밀려왔다. 퍽, 퍽, 퍽. 안으로 치받는 성기와 단단한 몸, 내려다보는 눈빛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하으으, 아, 아읏…….”

움직임이 빨라졌다. 유나는 이제 신음을 참는 것도 잊은 채 고개를 뒤로 젖히며 흐느꼈다.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저 안을 꿰뚫는 감각과 굽이치는 쾌락에 머리가 새하얗게 물들었다.

“아앙, 아!”

시트를 거머쥐고 있던 유나가 손을 들어 지운의 목을 휘감았다. 지운은 기꺼이 고개를 내려 유나가 저를 껴안을 수 있도록 했다.

“흣, 아, 아흑!”

절정이 코앞이었다. 유나가 비명을 지르며 지운의 목을 꽉 껴안았다. 절정의 순간, 눈앞에 폭죽이 튀는 환상이 보이며 유나는 그대로 눈을 질끈 감았다.

“흐, 흐으응…….”

채 삼키지 못한 타액이 입술 끝을 타고 흘러내렸다. 지운 또한 절정에 달했다. 그가 빠르게 성기를 안에서 빼내더니 유나의 배에 사정했다.

배에 흩뿌려지는 정액에 반쯤 풀려 있던 유나의 눈이 번뜩 뜨였다.

“콘돔… 콘돔 안 했어요?”

“응.”

“미쳤어요?”

유나가 황급히 휴지로 아래와 배에 묻은 정액을 닦아 냈다. 지운이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아이를 가지면 유나가 마음의 안정을 찾지 않겠어? 그래도 안에 안 쌌잖아.”

“…진짜 미쳤어요?”

유나가 입을 쩍 벌렸다. 그러고는 쥐고 있던 휴지를 땅바닥에 던지듯 버렸다. 말하는 눈빛을 보아하니 장난이 아니라 진심이었다.

“임신이 장난이에요? 생명을 가지는 게 장난이에요?”

저번에 반려동물에 대해 이야기했을 때도 이랬다. 생명을 마치 장난감처럼, 물건처럼 사고팔 수 있는 것처럼 말하는 어투. 소름이 돋았다.

“유나는 내 아이를 가지기 싫어?”

“말이 되는 소리를 해요. 무슨 아이를 가지고 싶다고 해서 덜컥 가져요?”

그와 저는 연인도 뭣도 아니었으며, 결혼도 하지 않았을뿐더러 아직 어렸다. 부모가 되기 위한 준비도 되지 않았다. 유나는 가벼운 그의 언행에 환멸을 느꼈다.

각인을 하자는 말도, 좋아한다는 말도, 아이를 가지자는 말도. 그에겐 너무 쉬웠다. 어려운 게 없었다. 그래서 더 믿기 힘들었다.

그의 모든 말, 모든 행동, 모든 것… 전부 깃털처럼 느껴졌다. 김혜진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나니 더 그랬다. 그는 제가 필요하기 때문에 집착하는 것뿐이지, 필요가 없어지면 김혜진처럼 저를 사람 취급도 하지 않고 버릴 게 뻔했다.

내가 그와 잘 맞는 S급 가이드라서… 그 이유가 전부니까.

“유나는 뭐든 싫다고 하네.”

“당신이 내가 싫어하는 것만 요구하니까요.”

“왜 싫어?”

또 도돌이표였다. 유나는 이제 말없이 한숨만 쉬고 말았다. 지운이 돌아눕는 유나를 껴안으며 물었다.

“내가 왜 싫어?”

“그러는 당신은… 내가 왜 좋은데요.”

“내 가이드니까.”

가이드. 그 이유 하나 때문에. 유나는 제 허리를 휘감은 지운의 손등 위에 괜스레 손톱자국을 냈다. 결국 원점이었다.

다시 돌아왔다. 유나는 익숙한 풍경을 둘러보며 어쩌면 지난 두 달 동안 숙소에서 지낸 게 꿈은 아니었나, 하는 생각을 했다. 미쳐서 환상을 봤다든가.

하나 발에 묶인 기다란 사슬 덕분에 꿈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화장실과 거실만 갈 수 있고, 나머지는 사슬의 길이가 짧아 갈 수 없었다. 계획된 길이라는 게 뻔히 보였다.

준호의 명의로 개통한 스마트폰도, 원래 제 것인 스마트폰도 없다. 가방 자체가 통째로 사라진 걸 보아하니 정지운이 가방째로 버린 듯했다.

게임기도 이제 사라졌다. 이전에 주어졌던 아주 약간의 자유조차 사라졌다. 유나는 이제 거실과 방만 맴돌며 지운이 오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개새끼. 유나는 욕설을 짓씹었다.

일을 끝내고 돌아온 지운이 유나부터 찾았다.

“유나야. 잘 있었어?”

유나는 거실 소파에 옹송그리고 앉아 제게 다가오는 지운을 노려보았다. 항의하듯이 발에 걸린 사슬을 흔들어 댔다. 지운이 웃었다.

“많이 불편해?”

“말이라고 해요, 그걸?”

“응. 심심하지? 일부러 게임기 치워 놨어. 너 그 숙소에 있을 땐 혼자서 얌전히 잘 지내길래.”

유나가 입술을 짓씹었다. 그곳에 있을 때와 여기 있을 때가 같나? 적어도 그곳엔 사람이 있었다. 여긴 저밖에 없는 황무지고.

지운은 거실 소파에 앉아 있는 유나를 흘긋 본 다음 바로 욕실로 향했다. 이윽고 물줄기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동안 유나는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무릎을 껴안고 앉아 허공만 노려보았다. 할 게 없었으니까.

샤워를 마치고 나온 지운이 수건으로 머리를 털면서 유나에게 다가왔다.

“유나야. 우리 이사 갈 거야. 집 미리 구해 놨어.”

“…네?”

“넓은 정원이 있는 곳이야. 우리 아이들이 잘 뛰어놀 수 있게.”

아이들? 유나가 고개를 갸웃했다가 이내 입을 벌렸다.

“진짜… 진심이에요?”

“응. 언젠가는 우리 아이를 가져야지. 각인도 맺고, 결혼도 하고.”

“시, 싫어요.”

“이제 유나가 싫다고 하든 말든 신경 안 쓰기로 했어. 내일은 센터에 가서 각인을 맺을 거야. 알겠지? 그럼 이제 유나도 괜한 반항도 멈추고, 날 좀 받아들일 수 있을 거야.”

통보였다. 유나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지운에게 달려들었다.

“왜 다 네 맘대로야, 개새끼야!”

“그건 유나도 마찬가지잖아. 도망치지 않겠다고 약속했는데 도망치고. 매번 싫다고 하고.”

지운이 유나의 두 팔목을 휘어잡고는 품에 안았다. 유나가 품속에서 버둥거리다가 다리를 들어 지운의 정강이를 후려쳤다. 지운이 아야, 과장된 신음을 내뱉으면서도 손을 놓아주지 않았다.

“이제 미룰 필요가 없어. 내일 센터 가서 각인 맺을 거야.”

유나의 눈에 울컥 눈물이 차올랐다. 각인을 맺으면, 그 후부터는 완전히 법적으로 얽매여 벗어날 수 없을뿐더러 심적으로도 거대한 족쇄를 만드는 것이었다. 어딜 가든 에스퍼와 동행해야 했으며 여행도, 해외 출국도 에스퍼 없이는 할 수 없었다.

엄마, 아빠처럼 사는 것이다. 원망하면서도 서로를 놓지 못하고, 결국 평생을 함께해야 하는 삶. 죽어도 너만은 가이드가 되지 말라던 엄마의 말을 거역하는 삶.

결국 이렇게 될 거였나.

유나가 울면서 흐느끼자 지운이 유나의 뒤통수를 쓰다듬었다.

“이제 울어도 소용없어.”

울면 왜 우냐며, 다정하게 뺨을 쓰다듬던 행위가 사라졌다. 대신 지운은 우는 유나의 표정을 보지 않기 위해 그녀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차가 센터 앞에 도착했다. 유나는 지운의 팔에 단단히 붙들린 채 그와 함께 센터 안으로 들어갔다. 지운은 능숙하게 데스크에 본인의 인적 사항과 유나의 인적 사항을 읊었다. 그러고는 예정된 방으로 향했다.

방에 도착하자 연구원 한 명이 유나와 지운에게 인사했다.

“어서 오세요.”

그러고는 지운의 팔에 붙들린 유나를 흘긋 보고선 물었다.

“각인은 두 사람 모두 동의해야 이뤄지는 것을 알고 있지요?”

“응.”

유나가 아랫입술을 꾹 깨물고 연구원을 바라보았다. 연구원은 그 눈빛을 알아차렸지만 이내 고개를 돌려 서류 두 장을 내밀었다.

“우선 서류 작성부터 하셔야 합니다.”

지운이 서류와 펜 두 개를 들고서 저 혼자 슥슥 작성하기 시작했다. 유나에게 쓰라는 말도 없었다. 유나는 이제 화도 나지 않았다. 깊은 체념이 가슴 속에 그득 차올랐다.

서류 작성이 끝난 후, 파장이 흐르는 방에 들어가 광 조사를 받았다. 얼마간 받고 방에서 나오니 손목에 희미하게나마 글자가 새겨진 것이 보였다. 연구원에게 뭐냐고 물으니 각인 번호라고 했다.

각인은 그렇게 허무하게 끝이 났다. 정말 별것 없었다. 앞으로의 일상에 커다란 파장을 미치는 각인이 이런 식으로 허무하게 끝나다니.

유나는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을 내뱉었고, 지운은 기뻐서 활짝 웃었다.

“유나가 이제 진짜 내 가이드가 됐어.”

“…….”

“이제 모든 게 다 괜찮아질 거야.”

유나는 말없이 표정을 구겼다. 죽어도 각인은 싫다고 했는데 기어코 이렇게 되니 해탈의 지경에 이르렀다.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고, 이제 화도 나지 않았다. 어쩌면… 이렇게 될 걸 알고 미리 마음의 준비를 해서 괜찮은 건지도 몰랐다.

유나와 지운은 손을 맞잡은 채 센터 밖으로 나왔다. 올라탄 차는 지운의 오피스텔이 아닌 다른 곳으로 향했다. 유나가 달라진 창밖의 풍경을 바라보며 물었다.

“어디 가요?”

“우리의 새로운 보금자리.”

“…이사 준비가 그새 다 됐어요?”

“응.”

몰라, 될 대로 되라지. 유나는 그냥 한숨만 쉬고 말았다. 이제 포기했다.

차는 제법 오래 달렸다. 톨게이트까지 진입한 데다 고속도로를 한 시간 이상 쭉 달렸다. 아마도 그의 전장에서 멀리 벗어나지 않은 곳에 자리를 잡은 듯했다.

이제 시내를 벗어나니 더 할 게 없어지겠네. 유나는 창밖 풍경을 보며 멍하니 생각했다. 고인 줄도 몰랐던 눈물이 주르륵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유나야.”

지운이 창밖을 바라보고 있던 유나의 고개를 잡아 돌렸다. 그러고는 유나의 뺨을 적신 눈물을 손가락으로 훔쳤다.

“이제 괜한 생각 하지 마.”

괜한 생각이라는 말에 유나가 허, 헛웃음을 터트리며 눈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지운이 내리깐 눈가 위로 입술을 댔다.

새로 도착한 집은 에스퍼 숙소만큼은 아니지만 컸다. 유나가 집을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

“…관리하는 사람이 따로 있어요?”

“응. 숙식하는 가정부 아주머니 한 분 계실 거야.”

그러고 보니 주택 옆에 따로 별관 같은 게 하나 있었는데, 그곳에서 아주머니 한 분이 생활하시는 모양이었다. 유나는 지운과 손을 잡은 채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이미 사람이 사는 집 같았다. 가구도 물론이고, 사람의 온기가 집 안에 가득했다. 누군가 이미 한번 거치고 간 집처럼.

유나는 집을 둘러보다가 이내 거실 소파에 털썩 주저앉아 머리를 뒤로 기댔다. 지운이 약속한 것처럼 그 옆에 자리 잡았다.

“유나야. 혼인 신고부터 하고, 그다음에 결혼식 치르자.”

“…….”

유나가 고개를 돌려 지운을 바라보았다. 이제 화낼 기운조차 없었다. 이미 각인까지 한 마당에 결혼을 거부해 봤자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결혼보다 더한 족쇄가 바로 각인이었다.

“각인이랑 혼인 신고까지 끝마치면, 더 이상 네 부모님도 뭐라 못 하시겠지. 유나 너도 날 받아들이게 될 거야.”

“…엄마랑 아빠, 만날 수 있게 해 줄 거예요?”

“응.”

결혼해야 주어지는 자유라니.

어차피 저 미친 새끼한테서 벗어날 방법이 없었다. 도망쳐 봤자 다시 잡혀 오고, 희망도 뿌리째로 뽑혔으니 더 이상 도망갈 의욕도 생기지 않았다.

“갖고 싶은 건 다 가지게 해 줄게, 유나야. 내 곁에서 벗어나지 않는 거라면 원하는 것도 전부 다 들어줄게.”

“…….”

“원하면 이 근방을 산책해도 좋아. 정원도 넓고, 길이 험하긴 하지만 위험한 야생 동물 같은 건 없으니까.”

유나가 눈을 감자 지운이 유나의 얼굴을 틀어쥐고선 그녀에게 입을 맞췄다. 키스도, 접촉도, 모든 게 익숙했다. 지운이 유나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유나는 얌전히 그 품에 안겨 쏟아지는 입맞춤을 받았다. 두 사람의 옷자락이 모두 아래로 떨어졌다.

장소가 침실로 옮겨졌다. 유나는 지운에게 공주님 안기 자세로 안긴 채 그대로 침대에 눕혀졌다.

지운은 깨지기 쉬운 도자기를 다루듯 유나의 몸을 조심스레 애무했다. 가슴을 빠는 입술도, 배와 옆구리를 쓰다듬는 손길도 무척 섬세했다.

“으응…….”

유나가 아랫입술을 깨물며 팔뚝으로 눈을 가렸다. 제 위에서 움직이는 지운과 정면으로 눈을 마주치는 것보다 이게 나았다. 하나 지운이 유나의 팔뚝을 아래로 내리며 한 손으로 유나의 아래를 쓸었다.

“봐, 유나야. 젖은 거.”

지운이 은실처럼 늘어나는 애액을 보여 주며 보란 듯이 그것을 입에 넣었다. 유나는 이제 놀라지도 않았다. 다만 미간을 좁혔다.

“바로 넣고 싶은데, 그러면 아프겠지.”

“…언제 그런 거, 후으… 신경… 썼다구요. 그냥, 넣어요…….”

“난 유나가 빨개져선 앙앙 우는 게 좋아.”

지운이 유나의 아래에 손가락을 두 개 넣었다. 빠끔거리던 아래가 손가락을 꽉 조이며 침입자를 받아들였다. 유나는 안을 꾹꾹 누르며 길을 넓히는 손가락에 좁힌 미간을 풀지 않고서 끄응, 신음했다.

이미 흠뻑 젖은 아래는 질구는 물론이고 회음부까지 젖어 있었다. 지운이 유나의 아래를 쓸다가 고개를 내려 그녀의 아래에 입술을 파묻었다.

“하으응!”

유나가 지운의 머리카락을 쥐었다. 지운이 혀로 갈라진 살을 쓸다가 동그랗게 솟아오른 클리토리스를 혀로 꾹, 눌렀다. 유나의 허리가 튀었다.

“흑…….”

아래가 찌르르했다. 유나는 견디기 힘든 쾌감에 고개를 내저으며 시트를 꽉 그러쥐었다. 벌어진 다리가 덜덜 떨렸다. 유나가 몸을 뒤로 물리며 벗어나려 애썼다.

“그만, 그만…….”

하나 지운이 유나의 허벅지를 꽉 잡아 고정한 뒤, 입술로 클리토리스를 약하게 빨았다. 그것만으로도 강한 자극에 유나가 비명 같은 신음을 내지르며 엉덩이를 들썩였다.

“읏, 아, 아!”

뜨거웠다. 뜨겁고 정신이 혼미했다. 유나가 강한 자극에서 벗어나기 위해 또 한 번 허리를 뒤로 빼려고 했으나 이번에도 소용없었다. 벌어진 입에서 타액이 주르륵 흘렀다. 차마 삼킬 새도 없었다.

“하윽, 으, 응, 아, 갈 것, 같……!”

무언가 안에서 폭발할 것 같았다. 절정에 도달한 유나가 숨을 크게 들이마시며 눈을 번뜩 떴다. 머리가 새하얗게 변함과 동시에 아래에서 물줄기가 터졌다.

“아아!”

절정에 달한 유나가 허리를 바들바들 떨며 경련했다. 지운은 흠뻑 젖은 시트와 얼굴과 몸을 빨갛게 물들인 채 떠는 유나를 바라보며 눈을 휘었다.

“예뻐.”

그러고는 곧추선 제 성기를 슥, 훑었다. 그러고는 귀두를 질구에 문질렀다. 금방이라도 넣을 것처럼 입구에 비볐다가, 이내 클리토리스를 꾹 누르며 느릿하게 유나의 반응을 살폈다.

방금 막 절정에 달했는데도 유나는 또다시 가해지는 자극에 달아오르는 자신을 느꼈다. 지운이 입구에 귀두만 넣었다 빼며 간을 봤다. 유나가 인상을 찌푸리며 허리를 아래로 내렸다.

“빨리…….”

“빨리 뭐?”

“…….”

지운이 웃으며 다시 귀두만 넣었다 뺐다 반복하며 얕은 삽입을 했다. 유나는 저도 모르게 허리를 움직이며 재촉했다.

“넣어… 빨리…….”

“넣어 주세요, 지운 씨, 해 봐.”

“…….”

유나가 인상을 와락 찌푸리며 지운을 노려보았다. 귀두만 넣은 채 가만히 있다가 조금씩 안으로 삽입했다. 감질나는 느낌에 유나가 숨을 내뱉으며 입술을 안으로 말았다. 목까지 말이 차올랐으나 자존심 때문에 내뱉을 수 없었다.

유나가 말하지 않자 지운이 다시 성기를 밖으로 조금 뺐다. 유나의 입구가 아쉽다는 듯 빠끔거렸다.

“얼른.”

지운이 다시 귀두를 들이밀며 말했다. 유나가 인상을 찌푸렸다가 감질나는 감각에 웅얼거리듯 대답했다.

“넣어… 주세요… 지운… 씨.”

유나의 얼굴이 홍당무처럼 붉어졌다. 모기처럼 작은 소리였지만 용케 알아들은 지운이 싱긋 웃었다. 그가 응, 대답하며 순식간에 안으로 깊숙이 처넣었다. 깊숙한 삽입에 유나가 숨을 멈추고서 고개를 옆으로 돌려 시트에 처박았다. 너무 깊었다.

성기가 내벽을 긁으며 천천히 빠져나갔다. 그러다 다시 숙, 들어왔다. 느릿한 움직임인데도 쾌감은 속절없이 찾아왔다. 귀두로 안을 뭉근하게 문질렀다가, 이어서 빠져나가고 다시 빠르게 쳐올리는 감각이 아찔했다.

“으응, 아, 아…….”

유나가 할딱이며 신음했다. 기분이 좋았다. 지운은 발그레하게 물든 유나의 뺨을 허리 짓 하며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그의 눈빛이 진득하게 유나의 얼굴과 몸 곳곳에 닿았다. 접힌 눈꼬리, 발간 뺨, 올라간 입꼬리, 부드러운 뺨… 시트를 그러쥔 손, 벌어진 다리. 그가 충동을 이기지 못하고 유나의 뺨을 그러쥐고 입맞춤했다.

“후으응…….”

유나가 키스를 하는 와중에도 허리를 움직이며 쾌락을 좇았다. 지운은 혀를 섞으면서 그 움직임에 화답하듯 그 또한 허리를 움직였다. 지운의 혀가 유나의 입천장을 긁자 유나가 막힌 입술로도 길게 신음하며 지운의 목을 껴안았다. 지운의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뭐지.

순간 지운은 멈칫했다. 그 잠깐의 멈춤에도 유나가 재촉하며 허리를 흔들었다. 곧바로 지운이 다시 허리 짓을 재개했다. 퍽, 퍽, 퍽. 연달아 처박자 유나가 할딱이며 목을 휘감은 팔에 힘을 주었다.

사정에 임박했다. 지운이 움직임에 박차를 가했다. 유나는 휘몰아치는 움직임에 넋을 놓고 연이어 신음했다.

“크윽.”

지운이 유나의 목덜미에 입술을 꾹, 박은 채 그대로 유나의 안에 사정했다. 유나는 안에 미지근하게 퍼지는 액체에 멍하니 눈을 깜빡이다 이내 눈을 크게 떴다.

“안에… 안에 쌌어요?”

지운이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응. 임신해야지, 유나.”

“진짜… 진심이에요?”

유나가 서둘러 허리를 뒤로 물리려 했다. 안에 남아 있는 것을 빼내기 위함이었다. 하나 그 속셈을 알아차린 듯 지운이 바로 유나의 허리를 낚아채 아래에서 흐르는 정액을 다시 모아 안에 집어넣었다.

“응.”

지운이 그리 대답하며 유나를 안았다.

“유나랑 결혼하고, 아이를 가지고 싶어.”

꼭 청혼을 하는 남자처럼, 설렘에 반짝거리는 눈동자였다. 유나는 순간 착각할 뻔했다. 그가 에스퍼가 아닌 일반인이고, 그저 연인을 사랑하는 남자 같다고. 하나 그래 봤자 착각이었다. 유나는 잠깐이나마 머릿속을 스쳐 간 생각을 억지로 지웠다.

지운은 다시 유나를 공주님 안기 자세로 안아 욕실로 옮긴 뒤, 욕조에 물을 받아 유나를 씻겼다. 이것도 익숙했다. 다 씻은 다음에는 그가 머리도 말려 주었다.

유나는 화장대에 비치는 제 모습과 지운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는 시종일관 웃고 있었다. 자신은 꼭 사형 선고를 받은 사람처럼 침울해 보였다.

임신…….

그 단어가 머릿속을 기어 다녔다. 한 번이지만, 계속 이어지는 정사에서 또 질내 사정을 하면 언젠가는 임신을 하고 말 것이었다.

아이라니.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이제 스물다섯을 넘어 스물여섯이었다. 결혼도, 아이도 너무 일렀다. 게다가 지운은 저를 그저 전용 가이드로만 여겼다. 유나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고였다.

“유나야.”

지운이 드라이기를 끄고는 의자를 뒤로 밀었다. 그러고는 유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그러게 왜 매를 벌어.”

그가 유나의 볼을 툭툭 쳤다. 하는 행동이나 손길은 더없이 제멋대로인데, 목소리는 저를 향한 애정이 가득한 것처럼 느껴졌다. 유나는 착각하게 되는 자신이 싫었다. 그와 마주할 때마다 흔들리는 자신의 등불 같은 마음이 싫었다.

그를 마주하지 않을 땐 그나마 이 마음이 사그라들었는데. 다시 보니 횃불처럼 마음이 타올라 그녀를 끊임없이 뒤흔들고, 어지럽혔다.

“나는 그냥… 당신 소유물이에요?”

유나가 눈물을 그렁그렁 단 채로 물었다. 지운이 유나의 눈가 아래를 쓰다듬으며 고개를 저었다.

“왜 그렇게 생각해. 넌 나만의 가이드인데.”

그게 결국 소유물이라는 말 아닌가. 유나는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결국은 그저 ‘가이드’이기 때문이라니.

가이드, 가이드, 가이드. 이제 신물이 났다. 그런 거. 유나의 눈에서 눈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지운이 유나의 뺨을 적시는 눈물을 손등으로 닦았다.

“왜 또 울어, 유나야. 응? 이제 각인까지 했는데.”

“그냥… 당신이 너무 미워요.”

유나가 지운의 손을 움켜쥐었다.

“너무… 너무 미워요.”

제 삶에 갑자기 나타나선 송두리째 흔들고 인생을 완전히 뒤바꾸고. 지운은 눈을 좁히며 이내 무릎 꿇고 있던 몸을 일으켜 유나를 껴안았다.

“너도 결국 날 받아들이게 될 거야.”

“왜, 왜… 왜 내가 가이드인 거야.”

에스퍼와 가이드, 그런 종속적인 관계에 얽매이는 것 따위, 정말 싫었는데. 어느새 완전히 매여 버리고 말았다. 서글픈 마음에 눈물이 쏟아졌다. 유나가 엉엉 소리 내어 울자 지운이 유나를 꽉 껴안고서 말을 쏟아 냈다.

“이제 그만 포기해.”

유나가 계속해서 엉엉 울며 지운의 품에 완전히 파묻힌 채 몸의 힘을 뺐다. 유나를 단단히 고정한 지운이 그녀의 몸을 들어 침대로 옮겼다.

침대는 두 사람이 눕고도 자리가 많이 남았다. 유나가 흐느끼며 빈자리를 더듬었다.

“…왜 이렇게 큰 거 샀어요.”

“우리 아이도 여기서 잘 수 있잖아.”

“…….”

유나는 입을 다물었다. 대신 저를 껴안는 지운의 품에 얼굴을 파묻었다. 미친 또라이 새끼지만… 품은 따듯했으니까.

체념하고 나니 오히려 마음은 숙소에 있을 때보다 더 편해졌다. 각인을 해서 그런 건지, 아니면 받아들여서 그런 건진 알 수 없었다.

이곳에서 지낸 지도 벌써 한 달이 다 되어 갔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데도 시간은 흐르다니. 유나는 이제 모든 걸 놓았다. 직장을 다시 다닐 생각도, 밖으로 탈출할 의지도.

이제 지운이 집으로 돌아오는 시간이 더 빨라졌다. 해야 할 업무만 끝내고 곧장 집으로 돌아오는 데다 전장과 집의 위치가 전보다 가까우니 당연한 일이었다.

지운은 늘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유나부터 찾았다.

“유나야!”

유나는 제 이름을 부른 지운을 흘긋 보았다가 다시 무릎에 얼굴을 파묻었다.

“소파에 앉아서 뭐 해?”

“…할 게 없잖아요.”

이 집엔 TV도, 게임기도, 스마트폰도, 데스크톱도, 그 무엇도 없었다. 유나는 하릴없이 집으로 돌아올 지운을 기다리는 거밖에 답이 없었다.

“그 집에 게임기랑 데스크톱 남아 있는데. 가져올까? 네가 원하면 그렇게 할게.”

있어도 그 집에서 지낼 때와 똑같겠지. 아마 하다가 금방 흥미를 잃을 게 뻔했다. 그래도 있는 게 나으려나……. 유나는 고민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 날, 지운이 없는 집으로 택배가 도착했다. 그러면서 유나는 가정부 아주머니와 정식으로 마주했다.

“어… 안녕하세요.”

“네, 사모님.”

이 집에 온 지 이틀 만에 처음으로 마주치는 것이었다. 가정부는 능숙하게 택배 기사에게서 택배를 받아 집 안으로 옮겼다. 유나가 그 모습을 멀뚱멀뚱 보다가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그녀 또한 택배를 받아 집 안으로 옮겼다.

“아이고, 사모님. 안 하셔도 돼요. 제가 할게요.”

가정부가 극구 말렸으나 유나는 듣지 않고 옮겼다. 제법 짐이 많았다. 상자를 열자 게임기부터 시작해서 그 집에 두고 온 자잘한 생필품 같은 것들이 보였다.

유나와 가정부 둘이서 짐을 방에 옮기고 위치를 정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유나는 가정부와 이야기를 나눴다. 가정부 아주머니에겐 저만 한 딸이 있다고 했다.

“따님만 두 명이에요?”

“네. 딸 둘 다 결혼해서 집을 나갔어요. 아저씨랑 둘이 살다가, 나도 좀 혼자만의 시간을 갖고 싶어서 여기 지원했지요.”

“따님이 보고 싶으시겠어요.”

“에이, 뭘요. 알아서 잘 살겠지.”

유나는 가정부 아주머니를 바라보다가 문득 엄마의 얼굴을 떠올렸다. 엄마를 보지 못한 지 벌써 반년이 다 되어 가고 있었다. 아주머니를 보자 엄마에 대한 그리움과 미련이 솟구쳤다.

“저는… 엄마가 너무 보고 싶어요.”

“에구머니나.”

아주머니가 유나의 눈에 고인 눈물을 보더니 깜짝 놀라며 유나에게 다가왔다.

“사모님.”

“못 본 지 오래됐거든요. 너무너무 보고 싶어요…….”

유나의 시야가 흐릿해졌다. 유나의 눈에 고인 눈물이 또르르, 흘러내렸다. 아주머니는 어찌할 바를 찾지 못하고 발을 동동 구르다가 유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유나는 이끌리듯 아주머니의 품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어머니가 많이 보고 싶으시구나, 사모님.”

유나가 훌쩍거렸다. 엄마랑 아빠가 너무 보고 싶었다. 엄마와 비슷한 또래의 아주머니를 보니까 그 그리움은 더 샘솟았다. 그때 자신을 잠깐이나마 도와줬던 아주머니를 보고 느꼈던 감정이랑 비슷했다. 엄마와 비슷한 나이대의 중년 여성을 보면 저도 모르게 감정이 격해졌다.

“괜찮아지실 거예요, 사모님.”

“…네.”

유나가 아주머니의 품속에서 고개를 끄덕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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