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3. 두 번째 탈출
4. 자각 (1)
4. 자각 (2)
5. 세 번째 탈출 (1)
5. 세 번째 탈출 (2)
에필로그. 안정
3. 두 번째 탈출
가이드 센터로 도착한 유나는 후문 쪽에서 자신을 데리러 올 사람을 기다렸다. 그러는 동안에도 유나는 여전히 두려움에 반쯤 잠식된 채 손톱을 물어뜯었다.
도망치지 않을 거지. 도망치지 않을 거지…….
그만 떠올려야 하는데 계속해서 머리에서 웅웅 울렸다. 개새끼. 개새끼. 개새끼. 유나는 벽에 기댄 채 눈을 감았다. 그때, 수신음과 함께 스마트폰 액정이 켜졌다.
아빠인가? 확인해 보니, 정지운이었다.
「유나야. 잘 놀고 있어?? 뭐 하고 놀고 있어? 유나 보고 싶다 ㅠ」 오후 1:23
답장을 해야 하나. 고민하는 차에 연달아 메시지가 하나 더 왔다.
「밥은 먹었어?」 오후 1:24
어떡하지. 유나가 메시지를 내려다보다가 고민 후에 답장했다.
「밥 안 먹었어요. 밖에서 먹으려고요.」 오후 1:27
「그렇구나. 근데 가이드 센터에는 왜 갔어?」 오후 1:27
“아, 미친 새끼.”
유나가 욕설을 내뱉으며 바로 스마트폰의 전원을 껐다. 위치 추적을 안 할 리가 없었다. 씹. 언제 오지? 유나는 까치발을 들고 저 멀리 내다봤다. 희미하게 사람이 몇 명 보이긴 했다. 두 명, 세 명……?
데리러 오는 사람이 몇 명인지는 아빠가 말하지 않았다. 설마 여러 명이 데리러 오는 건가? 유나가 눈을 깜빡이며 제게 다가오는 인영을 보는 사이, 그들이 한층 가까워졌다. 이제 얼굴을 확인할 수 있을 정도로 가까워졌다.
세 명이었다. 키가 크고 덩치가 큰 남자 세 명. 유나는 위압감까지 느껴지는 남자 세 명을 둘러보다가 그중 한 명과 눈이 마주쳤다. 눈이 마주친 남자가 손을 내밀었다.
“안녕하세요. 최윤성이라고 합니다.”
정상인인가, 이 사람은? 유나는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윤성을 바라보다가 이내 손을 내밀어 악수를 했다. 손이 맞닿는 순간 남자가 눈을 접어 웃었다.
“가이드 맞으시네요.”
“…네?”
“한유나 씨, 맞으시죠?”
“…네.”
설마 가이드가 맞나 확인하려고 악수를 청한 건가? 유나는 바로 잡은 손을 빼려고 했다. 하나 남자의 손이 너무 강했다. 남자가 손을 꽉 붙들어 맨 채 놓아주질 않았다.
“잠시만 가이딩 좀 해 주시겠어요?”
“야, 왜 너만 받냐?”
옆에서 다른 남자가 발끈해서 소리쳤다. 유나는 어이가 없어졌다.
“일단 여기를 좀 벗어나면 안 될까요? 정지운이 쫓아올 거 같아서요.”
“네.”
유나의 말에 윤성이 잡고 있던 손을 놓았다. 그러고는 턱짓으로 방향을 가리켰다.
“일단 차로 가요. 거기서 가이딩 마저 받을게요.”
유나는 그들과 함께 걷다가 주머니 속의 스마트폰을 바닥에 세게 쾅, 던졌다. 파열음과 함께 스마트폰의 액정이 파삭 깨졌다. 남자 세 명이 일제히 동그랗게 뜬 눈으로 유나를 바라보았다.
“위치 추적을 해서요.”
“…아.”
남자들이 일제히 멍한 표정을 지었다가 앞을 향해 걸었다. 유나는 그들의 걸음에 맞춰 목적지를 향해 걸었다.
차에 도착한 유나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혹시라도 정지운이 쫓아오진 않을까 일말의 불안감이 남아 있긴 했다.
“가이딩해 줘.”
윤성이 아닌 다른 남자가 유나에게 불쑥 손을 내밀었다. 유나가 남자를 흘긋 보았다. 올라간 눈매 때문에 고양이처럼 생긴 미형의 남자였다. 유나는 남자의 손을 잡지 않고 제 손으로 다이아몬드 모양을 만들었다.
“가이딩 존.”
이러면 일석이조 아닌가. 동시에 가이딩을 할 수 있으니까. 하나 남자가 바로 유나의 손을 잡아 저지했다.
“뭐 하냐? 전장이 아닌 곳에서 가이딩 존을 만들면 안 되는 거 몰라? 빨리 해제해!”
“…아.”
처음 알았다. 유나는 다시 손으로 다이아몬드 모양을 만들고 중얼거렸다.
“가이딩 존 해제.”
빠르게 펼쳐지던 노란 빛의 가이딩 존이 사그라들었다. 가이딩 존이 해제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고양이를 닮은 남자가 바로 유나의 손을 잡았다. 유나는 가만히 있다가 살며시 제 다른 손을 붙잡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안경을 써서 무뚝뚝해 보이는 남자였다. 유나는 제 손을 붙잡은 남자 두 명을 번갈아 바라보다가 물었다.
“이름이 뭐예요?”
“김승오.”
고양이를 닮은 남자가 말했다. 뒤이어 안경을 쓴 남자가 대답했다.
“강지창.”
유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윤성은 운전 중이라 가이딩이 불가능했다. 그게 본인도 아쉬운지 운전석에서 투덜거렸다.
“운전은 맨날 내 담당이야. 가이딩도 못 받고…….”
유나와 손을 붙잡고 있던 승오가 유나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자연스러워서 유나가 놀랄 틈도 없었다. 어깨에 머리를 기댄 승오가 눈을 감았다. 지창은 유나의 손 한쪽만 잡은 채 앞만 바라보았다.
차가 쭉 달렸다. 생각보다 멀었다. 유나는 차량에 있는 시계를 확인했다. 한 시간은 족히 넘었다.
“…언제 도착해요?”
“아직 많이 남았어.”
“어디로 가요?”
“남쪽. 우리는 남쪽 담당이거든.”
호남이나 영남으로 가고 있다는 소리였다. 유나는 그냥 눈을 감았다. 자고 일어나도 도착하지 않을 게 뻔했다.
그 예상대로 유나가 잠이 들었다 깼을 때도 차는 달리고 있었다. 그래도 아까보다 한 시간 반이 흐른 뒤였다.
“…얼마나 남았어요?”
“20분 정도요. 얼마 안 남았어요.”
운전을 하고 있는 윤성이 대답했다. 다시 자야겠다. 유나는 눈을 감았다. 하지만 방금까지 꽤 오래 잔 탓인지 잠이 오지 않았다. 승오는 여전히 자고 있었다. 유나는 제 어깨에 기댄 머리가 무겁게 느껴져서 승오의 머리를 차창에 갖다 댔다.
차창에 대자마자 승오가 눈을 번뜩 떴다. 유나가 놀라서 어, 소리를 냈다. 눈을 뜬 승오가 유나를 한번 흘긋 보더니 다시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유나는 눈을 한번 지그시 감았다가 떴다. 참아야지, 내가…….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유나는 승오의 머리를 어깨로 감당해야만 했다. 세 시간 가까이 혹사당한 어깨는 승오가 머리를 떼자마자 비명을 질렀다. 유나는 어깨를 손으로 마사지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유나는 남자 세 명이 걷는 쪽으로 같이 걸으며 커다란 주택을 바라보았다. 엄청 커다란 주택이었다. 4층 높이는 족히 됐다. 여기서 세 명이 같이 사는 건가?
“여기서 셋이서 같이 살아요……?”
“아니, 세 명이 아니라 여섯 명.”
“…여섯 명이요?”
“어. 에스퍼 다섯에 가이드 하나. 가이드가 한 명이니까 에스퍼가 모여 살 수밖에 없지.”
승오가 비웃음을 지었다. 유나는 꽤나 비틀린 웃음이라 생각하면서 조금은 얼떨떨한 기분으로 문 안으로 들어섰다. 들어서자마자 유나는 입을 쩍 벌렸다. 나머지 세 명이 기다렸다는 듯 거실에 앉아 들어오는 이들을 하나하나 훑어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유나는 저와 마주치자마자 천천히 소파에서 일어나는 남자 두 명과 여자 한 명을 바라보았다. 그중 한 남자와 오래도록 눈이 마주쳤다. 눈빛이 이상하리만큼 깊었다. 그 눈빛과 마주치자 몸이 우뚝 멈춰 섰다.
“뭐 해, 안 들어오고.”
승오가 유나의 팔목을 잡아 안쪽으로 이끌었다. 유나가 신발을 급하게 벗으며 중문을 넘었다. …왠지 호랑이 한 마리를 피하려다가 사자 무리로 들어가는 기분인데. 유나는 주변을 둘러보면서 조심조심 안으로 들어갔다.
거실 소파 앞에 서 있는 남자 세 명이 들어오는 유나를 가만히 살펴보았다. 유나는 이름도 모르는 남자 세 명을 슥 둘러보다가 그나마 저를 챙겨 주는 승오 뒤에 숨었다.
“왜.”
승오가 제 뒤에 숨는 유나를 바라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유나는 입을 다물라는 신호로 승오의 어깨를 툭, 치며 어깨 너머로 보이는 남자 두 명과 여자 한 명을 바라보았다. …누가 가이드지?
“나와서 인사해.”
승오가 유나의 팔목을 잡고 앞으로 툭, 밀었다. 유나가 어어, 하면서 졸지에 무리 중앙에 섰다. 유나는 여섯 명의 무리를 둘러보며 조금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한유나예요… 나이는 스물다섯이고요…….”
“S급 가이드라던데.”
이름을 모르는 남자 중 한 명이 말했다. 유나는 남자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가이딩 능력은 어떻게 됩니까?”
“괜찮던데.”
유나 대신 승오가 대답했다. 유나는 눈을 깜빡이다가 보여 드릴까요? 하고 조심스레 물었다. 그 말에 기다렸다는 듯 윤성이 유나에게 불쑥 다가왔다.
“네. 저부터 해 주세요.”
“아니, 그… 접촉 말고. 가이딩 존으로요.”
이렇게 많은 인원을 가이딩하려면 그게 효과적이지 않은가? 전장이 아니지만, 그래도 구석진 곳에 위치한 집이니까 상관없지 않을까.
유나가 손을 다이아몬드 모양으로 하고 가이딩 존, 하고 외쳤다. 그러자 순식간에 노란 빛의 가이딩 존이 형성되어 여섯 명을 감쌌다. 성인 여섯을 감싸고도 남을 정도로 큰 크기의 가이딩 존이었다.
“맞네요. S급 가이드.”
아까 가이딩 능력을 물었던 남자가 그렇게 말했다. 유나는 문득 느껴지는 시선에 고개를 돌렸다. 눈이 마주친 남자가 눈을 휘며 유나에게 손을 건넸다.
“안녕하세요. 전혜성이라고 해요. 저도 S급 가이드인데, 유나 씨 덕분에 숨 좀 돌릴 거 같아요. 고마워요.”
남자 가이드였다. 전장에서도 남자 가이드를 몇 보았기에 어색함은 없었다. 유나가 손을 맞잡아 흔들었다.
옆에 있던 여자가 다가와 혜성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혜성이 자연스레 유나와 잡고 있던 손을 풀고 여자와 손을 잡았다.
“이쪽은… 윤진아. 제 여자 친구예요.”
“처음 뵙겠습니다.”
진아가 손을 내밀었다. 유나가 그 손을 맞잡고 아까처럼 흔들었다. S급 가이드와 S급 에스퍼끼리 연인이구나…….
유나는 하루 만에 여러 사람의 이름을 들으니 혹시라도 헷갈려서 이름을 달리 부르지 않을까 걱정이 조금 들었다.
다른 이름 모를 남자 또한 다가와 유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임준호라고 합니다.”
“안녕하세요…….”
많다. 사람이 너무 많다. 유나는 기가 빨리는 걸 느꼈다. 제게 집중된 시선에 피곤함을 느꼈고, 이때까지 차를 오래 타고 오느라 느낀 피로함 때문에 좀 쉬고 싶었다. 유나가 눈을 아래로 내리며 물었다.
“저… 좀 쉬어도 될까요? 제 방이 있나요?”
“네. 미리 준비해 놨습니다.”
“아.”
유나가 한숨을 쉬며 가이딩 존을 해제했다. 거실을 꽉 메웠던 존이 사라졌다. 유나 옆에 서 있던 준호가 유나에게 손짓을 했다. 방을 알려 주려는 듯했다. 유나는 준호를 따라 계단을 올랐다. 유나는 계단을 타고 올라가면서 설마 4층은 아니겠지, 했다.
설마가 맞았다. 제일 꼭대기 층이었다. 유나는 인상을 찌푸렸다. 얹혀사는 입장이니 이렇게 가리면 안 되는데, 사람인지라 어쩔 수 없었다.
유나는 준호와 함께 계단을 오르다가 조심스레 그를 향해 물었다.
“저… 그리고… 죄송한데, 혹시 스마트폰 한 대만 개통해 주실 수 있나요? 원래 있던 스마트폰이 고장이 나서… 대신 제 명의 말고요…….”
“네.”
생각보다 준호는 쉽게 부탁을 들어줬다. 어렵사리 꺼낸 부탁이었는데도.
“고맙습니다… 지낼 곳도 내어 주시고…….”
“아닙니다. 저희도 어차피 가이드 한 명만으로는 버거웠으니까요. 게다가, 혜성 씨와 진아 씨가 곧 결혼할 예정이거든요. 그렇게 되면 남은 에스퍼들이 곤란하니까.”
“아…….”
정말 가이드 한 명으로 어찌어찌 굴러가고 있었구나. 유나는 지운에게 들었던 죽었다는 가이드에 대해 묻고 싶었지만 참았다. 나중에 물어도 되겠지…….
방에 도착한 유나는 데려다준 준호에게 고개 숙여 감사 인사를 하고 침대맡에 걸터앉았다. 양말을 벗는 순간 실감이 났다. 정지운의 집이 아닌 낯선 곳에 와 있다는 걸. 늘 보던 풍경이 아니었다. 내 집도, 정지운의 집도 아닌, 처음 보는 낯선 방…….
컴퓨터도 있고, 책상도 있고, 책장에는 책도 꽂혀 있었다. 유나가 침대에서 일어나 옷장 앞에 섰다. 옷장 문을 열자 옷이 여러 벌 보였다. 제가 온다고 미리 준비라도 해 준 걸까… 사이즈는 어떻게 알고. 유나는 방을 쭉 둘러보다가 다시 침대로 갔다.
엄마랑 아빠는 어떻게 됐을까. 유나는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며 그동안 회피하고 있던 생각에 빠져들었다. 내가 없어진 걸 알고 정지운은 어떻게 했을까. 분명히 엄마와 아빠를 먼저 찾아갔겠지? 그때처럼 엄마한테 해를 가했을까? 하지만… 이번엔 엄마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는데.
엄마와 아빠한테 무슨 일이 생겼으면 어쩌지.
방에 홀로 있으니 잡생각이 계속 끊임없이 들었다. 유나가 침대에 벌러덩 누워 몇 번 뒹굴거렸다. 개새끼한테서 벗어났는데 왜 여전히 마음이 불편하지? 이런 건 싫었다.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렸다. 유나가 네, 하고 대답했다. 이윽고 문이 열리고 준호가 얼굴을 내밀었다.
“유나 씨. 배고프지 않아요? 지금 저녁 준비하고 있는데. 같이 하실래요?”
“저 요리할 줄 모르는데요…….”
“그냥 심심하면 내려와서 같이 이야기하잔 소리입니다. 유나 씨는 요리 안 해도 돼요. 요리 담당은 저랑 승오라서.”
“아, 네.”
요리 담당이라고 하면 청소나 다른 담당도 따로 있다는 말인가. 유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차피 혼자 있어 봤자 잡생각만 빠지고 좋지 못한 참이었다.
유나는 준호와 함께 1층으로 내려갔다. 윤성과 혜성, 진아가 거실 소파에 앉아서 함께 TV를 보고 있었다. 생각보다 분위기가 나쁘지 않았다. 승오가 요리를 하고 있었고, 준호가 자연스레 부엌으로 가 합류했다.
유나는 어쩌지, 고민하다가 슬쩍 진아 옆에 앉았다. 진아가 제 옆에 앉은 유나를 흘긋 보았다가 다시 TV로 시선을 돌리며 입을 열었다.
“심심하죠.”
“…네.”
“아무래도 다들 근무지가 떨어져 있는데 가이드는 한 명이다 보니 중간 지점 찾기가 어려웠어요. 겨우 상의 끝에 이런 한적한 주택에 살게 됐는데, 주변에 아무것도 없어요. 놀러 나갈 수가 없죠.”
“아…….”
하긴, 이 에스퍼들이 같은 근무지에서 근무할 리도 없고. 그럼 다들 여기서 출퇴근을 한다는 소리였다.
“그럼… 출근까지 얼마나 걸리세요?”
“다들 한 시간 이상요. 그중에서 제일 오래 걸리는 게 저죠. 인천이니까. 기본 출근 시간 두 시간 반은 잡아야 해요. 돈을 많이 주니까 참는 거지, 아니었음 때려치웠어요.”
여기서 인천? 엄청 멀었다. 유나는 입을 쩍 벌리며 제가 병원에 다녔을 때 출퇴근 시간이 얼마였는가 생각해 보았다. 유나는 무조건 가까운 게 장땡이라고 생각했기에 집에서 가까운 병원에서 근무했었다. 걸어서 30분 정도. 버스를 타면 10분. 가까웠다. 이들에 비하면 자신의 출근 시간은 선녀였다.
“사람이 많다 보니 호출 없는 애도 주중에 생기거든요. 그때 같이 놀든가 해요. 잘 놀아 줄 거예요.”
“…네.”
유나가 고개를 끄덕이며 TV를 봤다. TV 소리와 저녁 준비하는 소리가 한데 섞여 조화로웠다. 적어도 혼자 있는 적막함보다는 사람들로 가득한 이 북적거림이 훨씬 좋았다. 그때를 생각하니 가슴이 덜컹 흔들렸다. 이상했다.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지금이 왠지 꿈같았다.
유나는 적응이 되질 않아 주변을 조심스레 살폈다. 사람들이 아무렇지 않게 TV를 보고, 손을 잡고, 한 공간에 자연스레 녹아 있었다. 혜성과 진아는 속삭이며 대화를 나눴고, 윤성은 가이딩 때문인지 혜성과 접촉을 한 채 TV를 보는 데 여념이 없었다.
난 어땠더라. 빈집에서 혼자 놀고, 누워서 자고… 정지운이 오면 밥 먹고, 섹스하고……. 유나는 생각하다가 다시 TV에 집중했다. 괜히 안 좋은 감정에 사로잡힐 필요 따위 없었다. 정지운이 뭐라고. 그 새끼가 뭐라고. 왜 계속 생각해. 왜.
“근데 유나 씨는 어쩌다 갑자기 S급 가이드로 발현이 됐어요? 보통 S급 가이드 같은 고능력자는 태어날 때부터 능력이 발현되는데…….”
진아와 얘기하던 혜성이 유나에게 넌지시 말을 붙였다. 유나는 사실대로 이야기할까 고민하다가 괜히 이야기가 길어질 거 같아 애매한 미소로 대답했다.
“그래도 덕분에 다행이에요. 현재 S급 가이드가 저밖에 안 남아서… 손이 좀 필요했거든요. 고마워요, 유나 씨.”
“네.”
유나가 어색하게 웃었다. 정지운이 아닌 다른 낯선 사람과 얘기하는 게 오래간만이라 뭐라 대답해야 할지, 그것조차 어려웠다. 3개월 만이었다. 낯선 사람과 대화하는 것이.
“그, 듣기로는… 지운이랑 같이 살고 있었다던데.”
혜성이 지운의 이름을 친근하게 내뱉었다. 유나는 눈을 깜빡였다. 혜성이 침묵을 달리 해석했는지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아, 자세히 아는 건 아니에요. 그런데 어쩌다 지운이랑 만나게 되셨어요?”
“…이야기가 길어요. 그리고 같이 산 것도 제 의지대로 산 게 아니라, 납치당해서 같이 살고 있던 거고요…….”
“음.”
혜성이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옆에 있던 진아가 허, 헛웃음을 내뱉으며 턱을 들었다.
“걔는 여전하네. 제멋대로인 거.”
이곳에 와서 처음으로 강한 공감과 동질감을 느꼈다. 유나는 벌떡 일어나서 그러니까요! 하고 외치려다가 말았다.
“걔랑 사느라 힘들었겠어요. 걘 다른 에스퍼들도 꺼려 해요. 사고도 여러 번 치고, 폭주도 여러 번 해서.”
“폭주요?”
유나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TV에 집중하고 있던 윤성이 고개를 돌려 유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몰랐구나. 정지운이 말 안 해 줬어요?”
“…네.”
“걘 도저히 감당이 안 됐어요. 문제는 폭주 뒤 기억을 못 해요. 자기가 폭주한 줄도 몰라.”
진아가 어휴, 한숨을 쉬며 어깨를 털었다. …정지운이 한 번도 제게 말해 준 적 없었다.
“혜성이랑도 …혜진이랑도 상성이 안 맞았어요. 그래서 걘 폭주를 스스로 조절하는 수밖에 없었지.”
혜진……. 그게 죽은 가이드의 이름인가. 유나는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았다. 윤성이 크흠, 헛기침을 하더니 화제를 돌렸다.
“승오야, 밥 언제 돼?”
“다 됐어. 앉아서 수저 차려.”
승오가 식탁 위에 찌개를 놓으며 이야기했다. 윤성이 응, 대답하며 자리에서 일어나 식탁에 수저를 차리기 시작했다. 그 행동을 시작으로 진아와 혜성도 일어나 각자 밥을 그릇에 담으며 식사 준비를 했다. 유나도 그 분위기에 맞춰 밥을 담고 도와줄 게 없나 주변을 기웃거렸다.
“유나 씨, 앉아 있어요.”
준호가 말했다. 유나는 뻘쭘하게 자리에 앉아 그들이 반찬을 그릇에 담고 식탁 위에 탁탁 놓는 걸 구경했다. 식사는 말없이 시작됐다. 누가 뭐라고 할 것도 없이 각자 빠르게 수저를 놀렸다.
유나는 된장찌개를 국자로 퍼서 앞접시에 따로 담아 먹었다. 찌개를 한 입 먹자마자 정지운이 한 된장찌개가 바로 생각이 났다. 애호박이랑 양파, 두부만 넣었는데도 달짝지근하고 맛있었는데. 반찬도 내가 좋아하는 걸로 해 주고. 뭣 같았어도 요리는 잘했다. 특히 정지운이 한 갈비찜은 정말 맛있었다.
“아.”
유나가 먹다가 소리를 냈다. 시선이 몰렸다. 유나가 아니에요, 작게 고개를 흔들면서 밥을 씹었다.
미친 게 틀림없다. 그 새끼 생각을 왜 해.
유나는 괜스레 더 밥을 우걱우걱 먹으면서 생각을 지우려 애썼다. 하지만 계속해서 생각이 났다. 정지운이 해 준 음식, 정지운이 해 준 음식의 맛, 정지운이 했던 말, 정지운이…….
유나가 수저를 내려놓았다. 밥맛이 뚝 떨어졌다. 승오가 보더니 물었다.
“왜, 맛없냐?”
“아뇨, 맛있어요. 그냥 피곤해서 밥이 잘 안 넘어가서요.”
유나가 어색하게 웃으며 다시 수저를 들었다.
“괜히 먹었다가 체하지 말고 올라가요. 첫날인데 푹 쉬어요.”
윤성이 수저를 든 유나를 제지하며 말했다. 유나는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네에, 대답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남긴 밥을 음식물 쓰레기통에 버리고 수저와 그릇을 개수대에 놓았다.
개새끼. 여기 와서도 기어코 나를 괴롭히는 새끼. 유나는 속으로 지운을 욕하며 계단을 올랐다. 유나는 의자에 앉았다가 괜스레 데스크톱의 전원을 켰다. 예전에 했던 게임을 한두 판 했다. 그래도 여전히 드문드문 정지운이 떠올랐다. 정말이지 개같은 일이었다.
유나는 결국 게임을 끄고 침대에 벌러덩, 누웠다. 그러다 문득 속옷이 떠올랐다. 속옷도 미리 준비해 놓았나? 옷장 밑의 서랍장을 여니 다행히 속옷과 양말이 준비되어 있었다. 누가 산 걸까. 진아 씨가 준비해 준 걸까. 궁금해졌다.
유나는 침대에 파묻힌 채 으응, 작게 신음했다. 아직도 꿈같았다. 눈을 뜨면 다시 정지운의 집일 것 같았다. 옆에는 정지운이 있고, 자연스레 저를 껴안고 가슴을 주무르고… 그러다…….
유나는 생각을 멈췄다. 그리고 침대를 주먹으로 쾅쾅 내리쳤다. 그러고도 생각이 멈추질 않아서 벽에 머리를 쿵쿵 박았다. 떠올리지 마. 떠올리지 마. 하나 떠오르는 걸 멈출 수 없었다.
유나는 결국 침대에 몸을 완전히 파묻고 눈을 감았다. 지금 이 순간마저도 정지운의 방 침대와 비교하고 있는 자신이 싫었다. 화가 났다. 왜, 왜 잊을 수 없는지. 왜 벗어나서도 그 새끼 생각을 하고 있는지.
유나는 결국 잠들기 전까지 정지운의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잠에서 깬 유나는 낯선 천장을 보자마자 안도하며 몸을 일으켰다. 정지운의 방이 아니었다. 아직 적응하지 못한 낯선 방, 낯선 곳이었다.
유나는 일어나자마자 방에 딸린 욕실로 가서 제 얼굴을 확인했다. 어느새 가슴까지 오는 긴 머리칼에 조금 초췌한 모습의 여자가 우뚝 서 있었다. 유나는 가만히 제 얼굴을 바라보다가 옷을 하나둘 벗고 샤워를 시작했다.
다 씻고 나온 뒤에야 드라이기가 어디 있는지 모른다는 걸 깨달았다. 유나는 한참 욕실을 뒤적거린 후에야 드라이기를 찾았다. 머리를 말리는 동안, 문득 머리를 말려 주던 손길이 떠올라 유나는 잠시 움직임을 멈췄다가 다시 재개했다.
머리를 다 말린 후, 유나가 계단을 타고 1층으로 내려갔다. 어제와 달리 아무도 없었다. 다들 호출을 나갔나? 머리를 긁적이며 주방으로 향했다. 찌개가 끓여져 있었고, 냉장고 안에는 반찬이 남아 있었다.
밥솥에 있는 밥을 그릇에 담고, 반찬도 그릇에 담은 뒤 식사를 시작했다. 이상하게 어제와 같이 밥이 잘 넘어가지 않았다. 유나는 몇 숟가락 먹다가, 잠시 멈췄다가 반복하며 식사를 꾸역꾸역 이어 나갔다.
다 먹은 다음에는 설거지를 했다. 설거지를 하고 그릇을 정리하는데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리자 준호가 보였다. 이제 막 일어났는지 머리가 까치집이었다. 유나가 있는 걸 예상하지 못했는지 잠깐 멈칫하더니 이내 그가 손을 가볍게 흔들며 인사했다.
“좋은 아침이에요, 유나 씨.”
“네, 준호 씨.”
몇 살일까. 유나는 준호의 얼굴을 보며 나이를 가늠했다. 스물여섯? 스물여덟? 그쯤 됐으려나.
“혹시 몇 살인지 물어봐도 돼요?”
“아. 모르시는구나. 저는 서른이에요.”
서른……. 생각보다 많은 나이 차이에 유나는 조금 놀랐다. 준호가 잠시 유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말했다.
“어제 스마트폰 필요하다고 말씀하셨는데, 그거 오늘 같이 사러 갈까요.”
“어…….”
유나가 눈을 깜빡거리다가 이어 고개를 끄덕였다. 갑작스러운 외출이었지만 그래도 괜찮지 않을까…….
“준비하세요. 30분 있다 1층에서 봐요.”
“네.”
유나는 다시 4층으로 올라가 옷을 갈아입고 얼굴에 로션을 발랐다. 간단한 화장품도 있었지만 굳이 화장은 하지 않았다.
30분 뒤 내려가자 외출복을 입고 서 있는 준호가 보였다. 유나가 그 곁으로 다가갔다. 준호는 외출복을 입은 유나를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옷 잘 어울리네요. 사이즈 몰라서 대충 가늠해서 샀는데. 잘 맞아서 다행이네요.”
“어… 준호 씨가 사신 거예요?”
“네.”
“설마 속옷도……?”
“네.”
유나가 속으로 뜨악, 비명을 질렀다. 맙소사. 정작 준호는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원래 무덤덤한 사람인가? 유나는 그런 준호를 흘긋 보고는 그와 함께 문밖으로 나섰다.
준호는 익숙하게 주택 앞에 주차되어 있는 차에 오르더니 시동을 켰다. 유나는 안전벨트를 매면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확실히 풀밖에 없었다.
“주변 마트까지 차 타고 얼마나 걸려요?”
“큰 마트는 10분 정도 걸려요.”
시골이구나. 유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이윽고 차창 밖의 모습을 구경했다. 흔들리며 앞으로 나아가는 풍경이 보였다. 익숙하지는 않지만… 마음 한편이 편안해졌다. 준호가 앞을 바라보며 운전하면서 유나에게 넌지시 말을 걸었다.
“어쩌다 정지운이랑 같이 살게 됐어요?”
“…….”
차창 밖을 가만히 바라보던 유나의 눈빛이 빠르게 식었다. 입술을 달싹이다가 유나가 완전히 입을 다물었다. 이야기하기엔 길었고, 되새김질하기엔 그 추억이 좋지 못했다. 구태여 이야기해 봤자 제 기분만 상할 게 뻔했다.
유나가 대답하지 않자 준호도 입을 다물었다. 어색한 침묵이 감돌았다. 유나가 입을 열었다.
“정지운도 여기서 같이 살았어요?”
“…네. 유나 씨 쓰던 방이 원래 정지운이 쓰던 방이었어요.”
아. 유나가 미간을 찌푸렸다.
“근데 얼마 안 있었어요. 걔 성격 감당하기도 힘들었고, 가이드랑 상성도 맞지 않아서 같이 있을 필요가 없었거든요.”
유나는 다른 에스퍼들이 그를 꺼려 하는 점에 조금 흥미를 느꼈다. 진아 씨도 그렇고 혜성 씨, 준호 씨도 정지운을 좋아하지 않는 것 같았다. 하긴 그 성격을 누가 좋아할까?
“유나 씨도 힘들었겠어요.”
“…그렇죠.”
유나가 한마디로 동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준호는 알 만하다는 듯 얕은 한숨을 쉬었다. 그 뒤로 다시 침묵이 이어졌다. 유나는 눈을 내리깔았다가 다시 또 입을 열었다.
“정지운이… 폭주도 자주 했었어요?”
“…자주 했죠. 여러 번.”
유나는 폭주했던 제 아빠를 떠올렸다. 이성을 잃고 엄마 위에 몸을 드리웠던 아빠. 정지운도 그랬을까.
“어떻게 폭주했는데요?”
“정지운은 오히려 화나면 조용해지는 편이라. 폭주도 똑같았어요. 아무 말도 없이 가만히 서 있어서 다가가면 눈이 이상했죠. 그러다 누가 건드리면 그때부터 시작이었어요. 다 부수고, 까딱하면 다 죽일 것처럼.”
유나는 차에서 도망치고 나서 붙잡혔을 때를 떠올렸다. 그때도 그랬다. 유나는 문득 제가 정지운에 대해서만 연달아 질문하는 것을 깨닫고 인상을 찌푸렸다.
그 새끼에 대해 왜 계속 궁금해해. 왜 계속 알려고 해. 그럴 필요 없어. 스스로에게 윽박지르듯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 뒤로 침묵이 이어졌다. 마트에 도착할 때까지 대화 한마디 없었다. 도착하고 차에서 내린 다음, 유나와 준호는 바로 마트 안으로 들어섰다.
마트 안에 있는 조그마한 대리점에서 준호가 스마트폰을 개통했다. 유나는 자신 때문에 그의 명의로 하나 더 개통하는 준호에게 고마움과 동시에 약간의 의구심을 품었다. 왜 제 부탁을 이렇게도 쉽게 들어주는 거지.
유나는 준호의 얼굴을 알게 모르게 샅샅이 살폈다. 개통 뒤, 준호가 개통한 스마트폰을 유나에게 건네주면서 웃음을 흘렸다.
“왜 그렇게 의심스럽게 쳐다봐요?”
유나가 정곡이 찔려 잠깐 멈칫했다가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너무 잘해 주셔서.”
“부탁한 건 유나 씨잖아요. 그냥 들어준 것뿐인데요.”
유나가 꿀 먹은 벙어리처럼 멀뚱멀뚱 서 있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히 아빠가 다른 S급 에스퍼들도 지운과 똑같은 족속들이라고 일렀는데, 의외로 마주한 그들은 그냥 평범한 사람 같았다. 정지운처럼 무섭지도 않고, 특별하게 느껴지지도 않고, 길 가다가 마주칠 거 같은 그런 평범한 사람.
“…준호 씨는 무슨 능력을 갖고 있어요?”
“궁금해요?”
준호가 주차장을 향해 걷다가 걸음을 멈추고 유나를 바라보았다. 유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불이요.”
준호가 짧게 대답하고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유나가 뒤숭숭한 마음으로 그 뒤를 쫓았다. S급 에스퍼도… 그냥 평범한 사람 같아서. 아무렇지 않게 능력을 쓰던 지운과 비교가 되어서.
유나는 차에 올라타자마자 새로 개통한 스마트폰의 전원을 켜고 이것저것 설정을 시작했다. 그러고는 기억하고 있는 엄마와 아빠, 친구 지수의 번호를 입력했다. 하나 연락하지 않았다. 할 수 없었다.
“저… 언제까지 여기서 지낼 수 있을까요.”
“글쎄요.”
준호가 애매한 대답을 하며 핸들을 돌렸다. 유나는 멍하니 스마트폰의 액정에 비친 제 얼굴을 바라보다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도망치면 모든 게 괜찮아질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불안감에서 헤어 나올 수 없었다. 이곳에 머무는 것조차 영원하지 않을 걸 아니까 더욱 그랬다.
다시 돌아가면? 그땐 어떻게 되는 거지?
엄마와 아빠에게 연락을 하면?
여기서도 내가 뭘 할 수 있지?
부정적인 생각이 연달아 들었다. 유나가 아랫입술을 더욱 세게 깨물며 눈을 질끈 감았다. 생각하지 마. 생각하지 마…….
“유나 씨.”
운전을 하던 준호가 손톱을 물어뜯는 유나를 흘긋 보며 말했다.
“마음 놓으세요.”
“…….”
“괜찮을 거예요.”
그 말 한마디에 술렁이던 마음이 조금 진정되었다. 유나가 손을 허벅지 위에 올리며 고개를 돌려 준호를 바라보았다. 그가 시선을 느꼈는지 입꼬리를 올렸다.
다정한 사람이구나. 유나는 그리 생각하며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정지운은 지금쯤 뭘 하고 있을까.
유나는 한동안 방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았다. 밥을 먹을 때를 제외하고는 1층에 가지도 않았다. 이따금 혜성이나 진아, 준호, 승오가 문을 두들겼으나 유나는 괜찮다는 말과 함께 침대에 누워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가이딩해 줘야 하는데. 나는 그러려고 왔는데.
그런 생각이 들면서도 누워서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분명히 정지운의 집에 갇혀 있을 때만 해도 나가고 싶어서 미칠 지경이었는데도.
불안했다. 그리고 묘한 죄책감에 시달렸다. 정말이지 제가 생각해도 끔찍한 감정임에도 그 늪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계속해서 정지운이 생각났다. 도망치지 않을 거지, 그리 묻던 정지운. 제게 요리해 주며 방긋 웃던 정지운. 유나야, 제 이름을 부르던 정지운. 저를 꽉 품에 안고 쓰다듬어 주던 정지운, 정지운, 정지운…….
늪에 빠진 유나를 억지로 끌어낸 건 승오였다.
“야, 나와.”
승오가 노크도 없이 문을 열고 유나의 방에 들이닥쳤다. 벽을 보고 누워 있던 유나가 놀라 상체를 일으켰다.
“언제까지 누워 있을래? 빨리 나와.”
승오가 유나에게 성큼 다가와 유나의 팔목을 잡아 일으켰다. 유나가 어어, 당황하면서도 침대 밖으로 발을 디뎠다.
“계속 그렇게 죽상으로 있으면 될 것도 안 돼. 나가서 산책이나 하고 와.”
분명히 강압적인 태도인데도 별다른 반항심 없이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승오가 현관문을 벌컥 열고는 유나를 밖으로 떠밀었다. 마침 밖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던 준호가 헛기침을 하더니 담배를 휴대용 재떨이에 비벼 껐다.
“유나 씨, 산책하시게요?”
“네? 네…….”
그러려고 그런 건 아닌데, 승오 때문에 얼떨결에 그렇게 됐다. 준호는 허공을 흘긋 보더니 웃으며 말했다.
“산책하다 보면 간혹 너구리 같은 야생 동물이 나타날 때가 많거든요? 놀라지 말고요.”
“네.”
유나가 고개를 끄덕이며 걸음을 옮겼다. 발에 맞지 않은 커다란 슬리퍼가 질질 끌렸다. 불편한데도 다시 집 안으로 들어가 갈아 신고 싶지 않았다. 유나는 멍하니 앞만 보고 걸었다.
걷고 또 걷다 보니 어느새 주택과는 많이 멀어졌다. 유나는 뒤를 돌아 주택을 확인한 다음, 너무 멀리 벗어나지 않고 주변을 빙빙 돌았다.
오래간만의 산책이었다. 맑은 공기를 들이마시자 그제야 정신이 드는 듯했다. 내가 왜 그동안 끙끙 앓고 있었지. 침대에 누워 있는 자신의 모습이 오버랩됐다.
바닥을 기어 다니는 벌레와 울창한 나무를 바라보며 유나가 어색하게 웃었다. 그러다 소리 내어 웃었다.
“하하, 하하…….”
그래, 내가 정지운의 집에서 지내면서 원했던 건 이런 거였다. 아무런 속박 없이, 아무런 목적 없이 걷는 것.
자유.
자유였다. 유나는 생생하게 느껴지는 자유에 소리 내어 크게 웃다가 두 손에 얼굴을 파묻었다. 너무나도 당연한 건데, 이때까지 누리지 못했다는 사실이 뼈아프게 스몄다. 정지운, 그 새끼 때문에.
“유나야.”
문득 들린 목소리에 두 손에 얼굴을 파묻고 있던 유나가 고개를 퍼뜩 들었다. 뒤를 돌아 주변을 확인했다.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아까 분명… 제 이름을 부른 목소리를 들었다. 틀림없이 정지운이었다.
유나가 황급히 근처 나무 뒤에 몸을 숨겼다. 내가 밖으로 나오자마자 쫓아온 거야. 벌써 잡으러 온 거야. 나무를 꼭 붙잡은 채 유나가 몸을 덜덜 떨었다. 하나 주변을 아무리 둘러봐도 정지운은 보이지 않았다.
정지운은 높은 곳도 올라갈 수 있으니까 나무 위에서 저를 내려다보고 있지 않을까? 유나가 고개를 들어 이번엔 나무 위쪽을 바라보았다. 그럼에도 정지운은 보이지 않았다.
잘못 들었나…….
유나가 슬그머니 나무 뒤에서 빠져나왔다. 그리고 주변을 살피며 살금살금 걷다가 이내 주택을 향해 빠르게 뛰어갔다. 유나야. 제 이름을 부른 목소리가 아직도 고막에서 맴맴 맴돌았다.
유나가 집으로 도착하자 거실 소파에 앉아 있던 준호가 유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유나 씨, 왜 이렇게 빨리 돌아왔어요?”
유나는 차오른 숨을 헉헉 내뱉으며 입술을 달싹였다. 제가 들은 게 진짜인지 환청인지 자신도 알 수 없었다. 내가 미친 건가? 병원에 가야 하나? 유나는 혼란스러웠다. 준호가 소파에서 일어나 현관에 우뚝 서 있는 유나에게 다가왔다.
“유나 씨. 괜찮아요?”
유나가 가만히 선 채로 허공을 바라보다 대답했다.
“아뇨… 안 괜찮아요.”
“…정지운 때문에 그래요?”
정지운. 다른 사람의 입으로 들으니 더 가슴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유나가 빠르게 중얼거리듯 말했다.
“제가… 미쳐 가나 봐요. 그 새끼한테서 벗어났다고 생각했는데… 아닌가 봐요. 계속, 계속 생각나서 미칠 것 같아요.”
아니 이미 미친 걸지도. 유나는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다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준호는 진지한 표정으로 유나를 내려다보았다가 미간을 좁혔다.
“정지운이 유나 씨한테 도대체 어떻게 한 거예요?”
어떻게 했더라.
유나의 머릿속에 온갖 정지운이 스쳐 지나갔다. 처음 병원에서 마주쳤을 때 정지운, 다음 날 병원에 찾아온 정지운, 나에게 각인을 맺자고 말하던 정지운, 나를 강제로 끌고 간 정지운, 나를 가둬 둔 정지운, 나에게 입 맞추던 정지운, 나를 안아 주던 정지운…….
온갖 정지운이 머릿속에서 믹서기처럼 섞였다. 유나가 느린 한숨을 쉬며 두 손에 얼굴을 파묻었다. 준호는 난감한 표정으로 유나의 어깨를 토닥거렸다.
“으음…….”
준호의 손이 허공을 더듬다가 아래로 내려갔다. 그 대신 준호가 느린 어조로 조심스레 말했다.
“혹시라도… 제 도움이 필요하면 말씀하세요.”
“…저한테 왜 이렇게 잘해 주는 거예요?”
준호가 잠시 말문이 막힌 듯 대답하기를 망설였다가 입을 열었다.
“그냥 유나 씨를 보면… 죽은 혜진이 생각이 나서요.”
혜진……. 죽은 S급 가이드를 말하는 걸까. 유나가 두 손에 파묻었던 얼굴을 들며 눈을 위로 떠 준호를 바라보았다.
“혜진 씨는 왜 죽은 거예요?”
준호가 음, 하고 낮은 신음을 냈다. 대답하기 곤란한 듯 그가 눈을 몇 번 굴리다가 결심한 듯 말했다.
“말하기 썩 좋은 주제는 아닙니다. 하지만… 유나 씨가 알 필요는 있을 것 같네요. 혜진이는 F급 에스퍼에게 납치당해 죽었어요.”
정지운이 떨거지 에스퍼라고 말하긴 했지만, 그 정도로 하급 에스퍼에게 납치당해 죽은 줄은 몰랐다. 유나가 인상을 찌푸리며 눈을 내리깔았다.
“혜진이가 죽기 전까지 연락했던 게 정지운이었어요.”
유나가 내리깔았던 눈을 위로 퍼뜩 들며 인상을 찌푸렸다.
“네?”
“혜진이는… 지운이를 좋아했으니까. 하지만 정지운은 끝까지 연락을 안 받았어요.”
“…….”
“혜진이를 귀찮아했거든요.”
유나의 동공이 잘게 떨렸다. 유나가 아… 나직한 탄식을 내뱉었다.
“저를 보면… 혜진 씨가 생각난다고요.”
“아.”
준호가 말실수라는 걸 깨달았는지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전혀 닮지 않았어요. 성격도, 외모도요. 그냥 같은 S급 가이드라서 그래서……. 미안합니다. 실수했어요.”
준호가 당황한 티가 역력한 얼굴로 연신 고개와 손을 저었다. 유나는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지만 현관에서 우뚝 선 채 한 걸음도 움직이지 않았다. 못 박힌 듯 움직일 수 없었다. 준호가 이마를 긁적이다가 아아, 난감한 신음을 냈다.
“미안합니다, 유나 씨. 가뜩이나 마음 뒤숭숭할 텐데. 괜히 혼란 주려고 한 말은 아니었어요. 잊어요.”
“…네.”
유나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슬리퍼를 벗었다. 발에 맞지도 않는 슬리퍼는 몇 번 발꿈치에서 까딱거리다가 스르르 발에서 떨어져 나갔다. 유나는 맨발로 거실 바닥을 걷다가 계단을 타고 올랐다. 준호가 바라보는 게 느껴졌지만 유나는 그쪽으로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내가 불쌍한가?
유나는 준호가 저를 바라보던 눈빛이 어땠는지를 떠올렸다. 무언가 애틋한 눈빛. 제 상황이 보통과 다르다는 걸 스스로 알고 있긴 하지만, 다른 사람의 눈으로 자신이 판단된다고 생각하니 비참하고 분노가 차올랐다. 다른 사람도 나를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까?
내가 언제부터 불쌍한 사람이 되었지. 유나는 씩씩거리며 계단을 오르다가 문고리를 잡아 돌린 순간 아, 탄식을 내뱉었다.
자신은 분노할 처지도 아니었다. 이곳에서 얹혀사는 신세였다. 그저 고마워만 해야 할 판에 저를 불쌍히 여겼다고 분노하는 것도 우스운 일이었다. 오히려 불쌍히 여겨 줘서 고맙다고 하는 게 맞을지도 몰랐다.
분수를 알아야지. 나는 여기서 얹혀사는 존재야. 유나는 자조적으로 웃었다. 자신은 이곳 사람들과 잘 지내는 데 노력해야 했다. 그게 이곳에서 오래 지낼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었다.
아, 엄마.
유나는 하하 힘없이 웃었다. 엄마가 너무, 너무너무 보고 싶었다.
정지운과 죽은 혜진이라는 S급 가이드에 대한 생각은 오래도록 이어졌다. 둘이 뭔가 있었나? 정지운 같은 사람을 왜 좋아하지? 정지운이 혜진이란 사람에게 잘해 줬을까?
잤을까?
유나는 스스로 생각해 놓고도 그런 생각을 한 제가 끔찍해서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하나 상상은 상상이었다. 아무 결론도 없었다. 준호에게 물어볼까, 고민도 했으나 말았다. 입 밖으로 내어 물어보기엔 자존심이 상했다.
유나는 그 생각을 잊으려고 사람들과 더 가까이하고, 더 많이 이야기하려고 애썼다. 병원에 막 입사했을 때, 병원 사람들과 잘 지내기 위해 곰살맞게 굴었던 것처럼 밝게 웃고 대화에 자주 참여했다.
전처럼 방에 처박혀 있지 않고 나와서 사람들에게 가이딩을 해 줬다. 손을 잡아 주거나 가이딩 존을 만들었다.
다행히 그들은 유나가 다가오는 걸 꺼려 하지 않았다. 무척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그리고 또 하나 다행스러운 일은 사람이 많아 잡생각이 점차 사라지고 다른 생각이 머릿속에 비집고 들어온다는 점이었다.
같이 밥을 먹고, 이야기하고, 그러면서 새로 알게 되는 사실들을 습득하고. 유나는 그러면서 제게서 정지운의 흔적이 점점 옅어지는 것 같아 그것만으로 기뻤다.
에스퍼들이 모인 주택에서의 하루는 정지운네 집에서 살 때만큼이나 느리게 흘렀다. 오히려 정지운네 집에 있을 때보다 할 게 더 없었다. 큐브도, 퍼즐도, 게임기도, 십자수도, 캘리그라피도, 그림 그리는 용품도, 그 무엇도 없었다. 대신 사람이 있었다. 유나는 그것만으로도 만족하기로 했다.
가이드인 혜성은 주로 낮에 자리를 비우고 없었지만, 호출이 없는 에스퍼는 곧잘 집에 있었다. 유나는 그들과 같이 TV도 보고, 같이 이야기하고, 함께 산책을 하거나 장을 보면서 더욱더 친해졌다.
저녁 시간이 되면 일을 끝내고 온 에스퍼들을 위해 가이딩 존을 만들고, 그다음 식사 준비를 도우면 끝이었다.
유나는 저 말고 유일한 가이드인 혜성과도 잘 지내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혜성은 유들유들한 성격이어서 대화할 때도 무척 편안했다. 그리고 혜성의 연인인 진아 또한 툭툭대는 면은 있지만 나쁜 사람은 아니었다.
자유롭고 단조로운 일상이 반복되었다. 유나는 편안한 일상에 서서히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벌써 이곳에 머문 지 한 달이 다 되어 가고 있었다.
유나는 활동 반경을 완전히 넓혔다. 이제 모든 층을 자유롭게 돌아다니고, 청소 역할도 배정받아 제 몫을 다했다. 4층 방 청소였다. 4층이라고 해 봤자 진아와 유나, 둘만 쓰므로 실질적으로 제 방과 진아의 방만 치우면 그만이었다. 쉬운 일이었다.
유나는 청소를 끝내고 방으로 돌아와 침대에 기대앉았다. 동영상 플랫폼을 켜려고 막 하는 순간, 목소리가 들렸다.
“유나야.”
정지운의 목소리였다. 유나가 화들짝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주변을 살폈다. 아무도 없었다. 창문을 벌컥 열고 밖까지 휘휘 둘러보았다. 그 어디에도 정지운은 없었다. 밖에서 담배를 피고 있는 준호만 보였다.
준호가 창밖으로 머리를 내밀고 있는 유나를 발견하고서는 손을 흔들었다. 유나는 멍하니 눈을 깜빡이다 뒤늦게 손을 흔들어 인사에 화답했다.
잘못 들었나?
유나는 창문을 닫고서 벽에 기대섰다. 저번에도 이랬는데……. 지금도 그때도 환청을 듣고 있는 건가? 유나는 정신을 차리라는 신호로 제 뺨을 툭툭 쳤다.
나는 괜찮아. 유나는 아랫입술을 사리물고선 허공을 노려보았다.
나는 괜찮아…….
도망치지 않을 거지?
“헉!”
유나가 숨을 크게 들이마시며 벌떡 일어났다. 깨자마자 시트를 거머쥔 채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 어디에도 정지운은 없었다.
정지운의 꿈을 꿨다. 유나가 시선을 시트에 고정하고선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지금 느끼는 감정이 불안감인지, 두려움인지, 아니면 말도 안 되는 죄책감인지 스스로 분간할 수가 없었다.
유나는 끄응, 소리를 내서 앓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1층으로 내려가자 아무도 없는 적막한 거실이 보였다. 오늘은 전부 다 호출이 있어서 나간 모양이었다.
유나는 비어 있는 거실을 둘러보다가 대충 냉장고에 있는 반찬을 꺼내서 식사를 했다. 배가 부르니 심심해졌다. 유나는 다시 4층으로 올라가 겉옷을 입고 내려와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마당에 있는 화분에 물을 주고 있는 준호가 보였다.
“어… 준호 씨 있었네요?”
“아, 유나 씨.”
준호가 분무기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제가 담당인 곳이 몬스터 출현이 제일 적은 지역이라 호출이 없는 편이거든요. 자주 봐서 지겹죠?”
준호가 장난 섞인 목소리로 물었고 유나가 바로 아니라며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침묵이 이어졌다. 준호가 다시 분무기를 들고 화분에 물을 주기 시작했다. 유나는 물끄러미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정지운이랑… 혜진이란 그 사람이랑… 둘이 뭔가 있었어요?”
괜히 물었나, 싶었다. 하지만 며칠 내내 궁금했기 때문에 질문을 다시 무르고 싶진 않았다. 준호는 뒤돌아 유나를 흘긋 보았다가 다시 화분에 시선을 고정했다.
“그냥… 혜진이 혼자 좋아했죠. 상성은 안 맞아도 지운이한테 계속 가이딩해 주려고 하고… 정지운은 귀찮아하고……. 그냥 그랬어요.”
왜 마음이 아직도 찝찝할까. 유나는 입술을 안으로 말며 눈을 이리저리 굴렸다. 이상했다. 계속 신경이 쓰이고 생각이 났다. 어떻게 보면 정지운이 연락만 받았어도 혜진이라는 사람이 죽지 않았을 수도 있는데……. 그때 정지운이 했었던 말을 떠올려 보면 그다지 죄책감 같은 건 보이지 않았었다.
사이코패스인가, 진지하게 고민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정지운은 감정이 결여된 사람인 건 분명했다.
“유나 씨, 혼자 집에서 지내니까 심심하죠?”
“아무래도 그렇죠.”
“같이 나가서 놀까요?”
준호가 분무기를 완전히 내려놓으며 물었다. 유나는 예상치 못한 제안에 눈을 깜빡거렸다. 그동안 다른 사람과 나간 적은 몇 번 있었으나, 둘이서 나간 것은 이전에 준호와 함께 스마트폰 개통을 하러 나간 적을 제외하면 없었기 때문이었다.
“어… 어디로 가는데요?”
“식사는 하셨어요?”
“네.”
“그럼 가볍게 영화 보고, 산책도 하고, 그렇게 해요. 드라이브해도 좋고요.”
유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같이 이 근방 산책해요.”
“그래요, 좋아요.”
준호와 유나가 나란히 집 안으로 들어갔다. 준비를 다 한 다음에 거실에서 만나기로 했다. 유나는 4층으로 올라가 머리를 빗고 옷을 갈아입었다. 그러고 보니 이번이 두 번째였다. 준호 씨와 단둘이 나가서 돌아다니는 것.
설마 준호 씨가 나한테 관심이 있나. 그런 생각이 문득 스쳐 지나갔지만 이내 사라졌다. 지나친 생각이었다.
준비를 다 마친 다음 거실로 내려가자 준호가 소파에 앉아 기다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갈까요?”
준호가 물었고 유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차 없이 쭉 걷고 또 걸었다. 산책을 하는 내내 유나는 주변을 흘긋거렸다. 혹시라도 정지운이 있지 않을까, 어디선가 보지 않을까 심장이 두근거렸다.
하나 한 시간 가까이 걸어도 정지운의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제야 유나는 긴장이 풀려 준호와 웃으며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산책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오고 나서 유나는 어쩌면 저 혼자 전전긍긍하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자신 따윈 잊고 다른 상성 맞는 가이드를 찾아다니고 있을지도 몰랐다. 찾았을 수도 있고…….
그렇게 생각하자 잠깐 가슴이 따끔거렸다. 그렇게 제가 없으면 안 될 것처럼 굴더니, 홀라당 다른 가이드를 찾았다고?
아니, 차라리 좋은 일이었다. 끈질기게 달라붙는 정지운 하나 사라진다고 제가 뭐 아쉬울 줄 아나. 오히려 속 편하고 좋은 일이었다. 유나는 후우, 한숨을 쉬며 시트에 얼굴을 파묻었다. 그래, 안도할 일이었다.
유나는 점점 물 흐르듯 편안하게 흘러가는 일상에 완전히 녹아들었다. 에스퍼들과 함께 산 지 두 달쯤 되자 이제 말도 안 되는 죄책감과 초조와 불안도 서서히 없어지기 시작했다. 불안이 없어지자 서서히 가슴속에 평화가 찾아왔다.
정말 날 잊었나 봐. 두 달 동안이나 안 찾아왔어.
약간은 찝찝했지만 어쨌든 후련했다. 유나는 이제 새로운 삶의 시작을 맞이하는 의미로 우렁차게 방 안에서 만세를 외쳤다.
“개새끼야, 해방이다!”
맘 같아서는 미친 듯이 집 안을 활보하고 싶었지만 여기는 제집이 아니었으므로 참았다.
그동안 엄마, 아빠, 친구와도 연락을 두 달간 하지 않았으니 이제 슬슬 그들과 연락을 하고 싶었다. 하지만… 혹시 몰랐다. 그리고 괜히 안 좋은 소식을 들었다간 제 마음이 뒤숭숭해질 게 뻔했으므로 회피하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했다.
그래도 엄마 보고 싶다. 아빠도.
유나는 몇 달 전에 마지막으로 본 엄마와 아빠의 모습을 떠올리며 침울해지는 것을 느꼈다. 엄마 보고 싶다.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너무나도 궁금했다. 혹시라도 정지운이 해코지는 하지 않았는지, 밥은 잘 먹고 있는지…….
괜히 생각하지 말자.
유나는 고개를 도리도리 내저으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뭐든 집에만 있으면 처지기 마련이었다. 욕실로 가서 샤워를 하고 머리를 말렸다. 그것만으로도 기분이 전환되었다.
옷을 갈아입고, 화장대에 앉아 처음으로 화장품을 개봉했다. 준호 씨가 여기에 있는 물건들을 전부 다 사 놓았다고 했지……. 유나는 그러고 보니 그에게 정식으로 감사 인사를 하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다정한 사람이지.
지운과는 달랐다. 제 표정을 하나하나 살피며 감정을 읽으려 애쓰고, 같이 있으면 불편하지 않고 편안한 사람이었다. 매번 빙긋빙긋 웃으며 제 마음을 들쑤시는 정지운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같은 S급 에스퍼인데 이렇게 다를 수가 있나. 유나는 거울을 바라보며 화장을 시작했다. 화장을 마치고 제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립스틱을 바른 덕분인지 전보다 생기가 돌아 보였다. 유나의 시선이 이어 머리카락으로 향했다. 어느새 머리가 가슴을 넘어 허리에 다다른 것이 보였다.
많이 길렀네. 잘라야지……. 이왕 이렇게 된 거 나가서 미용실에 오래간만에 들러도 좋을 듯했다. 유나는 은행 앱을 켜서 잔액을 확인했다. 버는 것도 없고 딱히 쓰지도 않았으니 전과 다를 게 없었다.
유나는 이제 쌀쌀해진 날씨 때문에 두꺼운 외투를 껴입고 주머니에 지갑과 스마트폰을 챙겼다. 거실로 나가자 웬일로 아무도 없는 것이 보였다. 원래 한 명쯤은 있는 편인데, 오늘은 전부 다 호출이 있는 모양이었다.
유나가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찬 바람이 뺨을 스쳤다. 어느새 한겨울이었다. 분명히… 정지운과 처음 만난 게 초여름 즈음이었는데. 거의 반년 가까이 지난 셈이었다.
그동안 허비한 시간이 아까웠다. 아니었으면 돈을 차곡차곡 모으고 있었을 텐데. 괜찮은 직장도 그만두게 되고…….
유나가 고개를 휘휘 내저으며 부정적인 생각을 날리려 애썼다. 이젠 좋은 생각만 하기로 마음먹었다. 안 좋은 생각에 빠져 봤자 좋을 거 없으니까.
유나는 기분 전환을 위해 작게 콧노래를 부르며 앞으로 걸었다. 차를 타고 15분은 가야 시내가 나왔지만, 오늘은 차도 없고 제 명의도 아니니 시내까지 걸을 생각이었다. 차로 많이 오갔기 때문에 위치는 알고 있었다.
추운 날씨가 흠이긴 하지만 뭐 어떠랴.
유나는 인적 드문 길을 걸으면서 계속 콧노래를 불렀다. 주머니 안에 손을 넣고 고개를 목에 바짝 붙인 다음 주변에 있는 논밭을 둘러보고 이따금 지나가는 경운기와 그곳에 타고 있는 할머니, 할아버지에게 시선을 건넸다. 그들은 젊은 여자인 유나가 퍽이나 신기한지 눈을 떼지 않았다.
그냥 여행 왔다고 생각하자. 좀 쉬는 거지, 뭐.
유나가 외투의 지퍼를 올려 잠갔다. 그리고 스마트폰으로 시간을 확인했다. 오전 10시였다. 아직 이른 시간이었다. 충분히 시내에 도착해서 밥을 먹고 미용실에 갈 만했다.
쭉 걷고 걷다 보니 점점 상가가 보이기 시작했다. 초등학교도 하나 보였다. 점점 시내에 다 와 가고 있었다.
유나는 우선 눈에 띄는 식당에 들어가 밥을 시켰다. 식당에는 중년이 많았다. 보장된 맛집인가? 유나는 식사에 기대했다.
맛은 그럭저럭 괜찮았다. 하지만 역시 어딘가 부족했다. 정지운이 해 준 밥이라든가, 그가 사 준 밥 때문에 입맛의 기준이 높아진 탓이었다. 도움이 되는 게 없어, 그 새낀. 유나는 인상을 팍 찌푸리며 남은 밥을 입에 구겨 넣었다. 오기가 생겨서 다 먹고 싶어졌다.
밥과 반찬을 다 비운 유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카운터에서 계산을 했다. 카드를 내미는데 그것만으로도 약간의 쾌감이 들었다. 오래간만이었다. 내 돈으로 무언가 계산하고 먹는 건. 그것만으로도 행복했다.
유나는 이제 미용실에 갔다. 예약을 하고 오지 않아서 그런지 대기 시간이 제법 길었지만 괜찮았다. 아무랑도 연락할 수 없는 스마트폰이지만 그래도 폰을 하면서 놀았다.
원래는 너무 길어진 머리를 커트만 할 생각이었지만 미용사분이 극구 말렸다.
“이때까지 기른 게 너무 아깝지 않으세요? 차라리 펌을 하면 좋을 거 같아요.”
그런가? 귀가 솔깃했다. 결국 미용사분의 권유대로 펌을 하게 됐다. 펌을 하는 데는 시간이 제법 오래 걸렸다. 머리에 약을 바르고, 머리를 감고, 둘둘 말고……. 그래도 유나는 오래간만에 맡는 미용실의 약 냄새와 두런두런 사람들의 대화 소리가 좋아 만족스러웠다.
펌은 두 시간 반 정도 걸렸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정말 잘 어울리시네요, 손님!”
미용사가 환하게 웃으며 칭찬했다. 유나도 따라 웃었다. 뻣뻣하게 길었던 생머리보다 굽이치는 머리가 더 예쁘긴 했다.
미용실 계단을 내려가며 유나는 머리에서 나는 좋은 냄새를 맡았다. 마지막에 에센스를 발라 줘서 머리에서 꽃향기가 솔솔 났다. 기분이 좋았다.
유나가 방긋 웃은 채로 완전히 계단을 내려갔다.
“유나야.”
아, 또 환청이네. 유나는 오래간만에 듣는 환청이라고 생각하면서 앞으로 걸었다.
“유나야.”
이상하네. 환청이 두 번이나 들렸다. 유나는 그제야 무언가 이상하다는 걸 깨달았다. 걸음이 우뚝, 멈춰 섰다.
“파마했어? 잘 어울리네.”
목소리가 가까이에서 들렸다. 틀림없는 정지운의 목소리였다. 유나가 눈을 느리게 깜빡거리다가 고개를 돌리지 않고 빠르게 앞으로 내달렸다. 거의 본능적인 움직임이었다.
하나 얼마 가지 못하고 팔목이 잡혀 몸이 뒤로 돌려졌다. 유나는 마주하게 된 지운의 얼굴을 보자마자 그대로 몸을 굳혔다. 정지운이 웃고 있었다.
“잘 지냈어?”
정지운은 달라진 게 없었다. 웃는 얼굴도 똑같았다. 유나는 잡힌 손을 떨쳐 내지도 못하고 웃고 있는 지운을 굳은 채 바라보았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길 한복판에 선 두 명을 흘긋 보면서 지나쳤다.
“유나 머리한 거 잘 어울린다. 더 귀여워졌어.”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머릿속이 새하얘져서 그 어떤 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그동안 잘 지냈지?”
“…….”
“혹시 괴롭히는 사람은 없었어? 다 잘해 줬어?”
“…….”
“빨리 데려가고 싶었는데 참았어. 유나가 잘 지내는 거 같아서.”
“…….”
“근데 임준호랑 너무 붙어 다녀서 짜증 나더라고.”
뭐지……. 저 새끼가 그런 걸 어떻게 알고 있지. 유나는 순간 소름이 돋아 저를 잡고 있는 팔을 떨쳐 내기 위해 팔을 세게 흔들었다. 하나 잡은 손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 정도면 됐지? 이제 돌아가자, 유나야.”
“놔… 놔!”
지운이 유나를 잡고 앞으로 끌기 시작했다. 유나는 바로 놓으라며 발버둥을 쳤지만 소용없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무어라 숙덕거리기 시작했다. 유나가 소리를 질렀다.
“살려 주세요, 살려 주세요!”
유나가 소리를 지르자 지운과 유나를 지켜보던 무리 중 어떤 아주머니 한 명이 달려와 소리쳤다.
“총각, 왜 아가씨를 힘으로 끌고 가!”
유나는 제 어머니와 비슷한 또래의 아주머니가 다가와 소리치는 것에 가슴이 찡해졌다. 하나 지운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앞으로 갔다. 말로 해서 되지 않자 아주머니가 다가와 억지로 유나와 지운을 떼어 놓으려고 했다. 가는 데 방해가 되자 그제야 지운의 눈길이 아주머니에게 닿았다.
“방해돼.”
지운이 한마디 하더니 아주머니의 어깨를 가볍게 툭, 쳤다. 뒤로 밀려난 아주머니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말려서 되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는지 아주머니가 스마트폰을 꺼내 들어 경찰에 신고했다.
지운은 그러는 와중에도 아무렇지 않게 유나를 질질 끌고 갔다. 유나는 익숙한 검은 차가 보이자 순식간에 공포심과 다시 붙잡혀 가리라는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싫어, 싫어, 싫어!”
유나가 발로 지운의 정강이를 후려쳤다. 지운은 윽, 소리를 내면서도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유나가 다른 팔로 지운의 온몸을 때리기 시작했다.
“놔, 놔, 놔! 놓으라고!”
반항해도 소용없자 유나의 눈에 울컥 눈물이 차올랐다. 또 잡혀가는 거야? 또?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그때로 돌아간다고? 싫어. 싫어. 죽기보다 싫었다.
유나가 엉엉 울었다.
“제발, 나 데려가지 마……. 나 좀 놔줘.”
검은 차 앞에 도착했다. 지운은 문을 열고 유나를 뒷좌석에 밀어 넣었다. 유나가 바로 기어서 다른 쪽 차 문을 열려고 했으나 잠겨 있었다. 잠금 해제를 하고 문고리를 돌리기도 전에 지운이 안에 타 유나를 단단히 붙잡았다.
“출발해.”
그 말과 동시에 차가 앞으로 출발했다. 유나가 저를 꽉 껴안은 지운의 품속에서 힘껏 반항했다. 발로 지운을 치고, 손으로 지운을 미친 듯이 때리려고 애썼다. 하나 크게 대미지를 주지 못했다. 지운이 성가신지 작은 한숨과 함께 유나의 두 손을 한 손으로 꽉 잡았다.
유나의 눈에서 눈물이 질질 흘렀다. 막힌 코 때문에 숨도 제대로 쉬어지지 않았다. 유나가 히끅거리며 흐린 눈을 감았다 떴다.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싫어어어…….”
경찰에 신고해도 날 도와주러 오는 사람은 없겠지. 유나는 그러리라는 걸 잘 알았다. 저를 도와주던 아주머니 생각이 나 더 슬펐다. 주변에서 말려도 정지운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으니까.
유나가 반항을 멈추고 아이처럼 엉엉 울기 시작하자 지운이 유나의 등을 꽉 껴안아 뒤통수를 쓰다듬었다.
“두 달 동안 잘 쉬었잖아. 나도 많이 참았어, 유나야.”
“시…발, 놈아. 흐윽, 뭘, 참아.”
“그동안 힘들었어. 힘도 맘대로 못 쓰고, 폭주 직전까지 가고…….”
지운이 제가 불쌍하지 않냐는 듯 눈꼬리를 내리고 침울한 강아지 같은 표정을 지었다. 유나는 울면서도 더 울고 싶어졌다. 이 새끼는 여전했다.
“너무, 너무너무 보고 싶었어. 유나야.”
지운이 유나를 꽉 껴안고 유나의 뺨에 얼굴을 비볐다. 꼭 오래간만에 만난 연인을 마주하듯 애틋한 스킨십이었다. 지운이 유나의 머리카락에 입을 맞췄다.
“너무… 너무 보고 싶었어.”
그가 했던 말을 반복해서 했다. 유나는 그의 품속에서 히끅거리며 눈물을 줄줄 흘렸다. 다시 원상 복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