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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첫 번째 탈출 (3) (7/13)

2. 첫 번째 탈출 (3)

가끔 나가는 산책을 제외하고는 여전히 쳇바퀴 같은 일상이 반복됐다. 집에 갇혀 있다가 지운이 오면 섹스하고, 씻고, 같이 밥 먹고, 자고, 일어나서 게임을 하고……. 가끔 산책을 나가고. 친구들과 연락을 하고. 엄마와 잠깐 통화를 하고. 그때마다 유나는 괜찮은 척을 했다.

유나는 조금씩 모서리가 닳은 식탁처럼 낡기 시작했다. 지치고 피로해졌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데도 그랬다. 그냥 먹고 숨을 쉴 뿐인 삶. 이게 의미가 있나.

외로움 다음에는 우울이었다. 우울은 조금씩 유나를 잠식했다. 태생적으로 멘털이 튼튼하고 긍정적인 유나조차 허물어질 만큼. 갇힌 지 자그마치 꼬박 두 달이 다 되어 가니 이상할 일도 아니었다.

이제 산책도 전처럼 새롭게 느껴지지 않았다. 옆에는 늘 정지운이 있었으니까.

“심심해.”

유나는 친구 지수에게 전화를 걸었다. 지수는 수업 중인지 전화를 받지 않았다. 전화가 끊긴 다음 메시지가 왔다.

「ㅈㅅㅈㅅ 나수업중」 오후 12:10

지수에게도 본인의 삶이 있었다. 할 일이 있었다. 그걸 알면서도 유나는 시무룩해졌다. 아주 조금, 지수의 일상이 부러워졌다.

유나는 멍하니 거실 소파에 앉아 있다가 리모컨으로 TV를 켰다. 하하 호호 웃는 사람들이 나왔다. 유나는 그걸 가만히 바라보면서 웃긴 장면이 나오면 웃고, 슬픈 장면이 나오면 눈꼬리를 내려트렸다. 그걸 반복하다 보니 점점 또 지루해졌다. 소파에 아예 드러누워 눈을 반쯤 감았다. 또 잠이 왔다.

잠에서 깼을 땐 거실 소파가 아니라 침대 위였다. 눈을 비비면서 몸을 일으켰다. 주변이 캄캄했다. 일어나서 거실로 나가자 요리를 하고 있는 지운의 뒷모습이 보였다.

“일어났어, 유나야?”

유나는 아무 말 없이 주방으로 가서 그가 뭘 하고 있나 구경했다.

“슈림프카나페 하고 있어. 유나 일어났을 때 가볍게 먹기 좋으라구.”

그가 다 만든 카나페를 유나의 입에 넣어 주었다. 유나가 턱을 움직여 음식을 씹었다. 맛있었다. 고소한 새우와 계란, 바삭한 빵, 아삭한 양배추가 동시에 씹혔다. 한입 크기였다.

유나가 다 씹어 삼키자 지운이 또다시 입에 음식을 넣어 주었다. …꼭 간식을 주는 주인 같다. 유나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음식을 삼켰다.

음식을 다 먹고 나선 유나는 지운과 함께 목욕을 했다. 이마저도 지운이 가만히 있는 유나를 씻겨 주어서 꼭 주인이 애완동물을 씻기는 것과 다름없었다. 유나가 물었다.

“언제 나갈 수 있어요?”

“아, 산책하고 싶어? 내일 갈까?”

뻔히 제 질문의 의도를 알면서 뻔뻔하기는……. 유나는 질린다는 듯 지운을 흘긋 보았다가 시선을 내렸다. 굳이 더 대화를 잇고 싶지 않았다. 하나 지운이 계속 말을 이었다.

“내일 갈까? 호출만 없으면.”

“네.”

유나가 건성으로 대답했다. 그저 한 가지 생각만 반복해서 들었다. 빨리 나가고 싶어…….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는 유나의 머릿속으로 주변 사람들이 다 스쳐 지나갔다. 엄마, 아빠, 지수, 연지, 수미……. 하나 제 일에 소중한 누군가를 끌어들이고 싶지 않았다. 괜히 끼어들게 했다가 변을 볼 게 뻔했으니까.

유나는 그들에게 연락해서 자신 좀 도와 달라고 외치고 싶은 맘을 억눌렀다. 지운은 일반인에게 아무렇지 않게 능력을 쓰는 사람이었다. 그러고도 제재가 없는 특혜를 받는 S급 에스퍼였다. 욕이 그득 올라올 정도로 화가 나고 억울하고 어이가 없지만, 상황이 그랬다. 유나는 희망 없는 상황에 눈을 내리깔았다.

죽을까.

순간 그런 야릇한 충동이 샘솟았다. 유나는 멍하니 그런 생각을 하다가 생각을 지웠다. 죽기엔 아직 용기가 없었다. 유나는 제 몸을 잡고 돌리는 지운을 느끼며 이내 내리깔았던 눈을 들어 지운과 마주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친 그가 웃었다. 그리고 키스가 이어졌다.

유나는 뒤섞이는 혀에 눈을 반쯤 감았다. 내일도 또 이런 일상이 반복되겠지……. 생각이 뚝, 끊겼다.

* * *

갇힌 지 세 달째.

유나는 이제 잠도 오지 않았다. 원래 지운보다 먼저 잠드는 게 유나였는데, 이제 지운이 잠이 들고 몇 시간이 지나도 잠이 오질 않았다. 유나는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지운이 잠든 사이에 도망칠까, 고민하기도 여러 번이었다. 도망치고 싶어. 나가고 싶어. 혼자 길거리를 걷고 싶어. 그냥 아무것도 신경 안 쓰고 나만을 위해 그러면 안 되나.

말에 박차를 가하는 것처럼 충동은 계속해서 이어지고, 이어지고, 또 이어졌다. 유나가 잠든 지운을 빤히 내려다보다가 살며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

천천히 어두컴컴한 거실을 걷다가 중문을 열고 현관에 도착했다. 유나는 도어 록을 바라보았다.

저번에 도어 록을 박살 내서 도망친 이후로, 지운은 웬만한 망치질에 부서지지 않는다는 튼튼한 도어 록으로 새로 교체했다. 그 말에 걸맞게 도어 록은 딱 보아도 부수기 어렵게 생겨 먹었다. 어차피 이 밤중에 망치질을 했다가는 바로 지운에게 들킬 게 뻔했다.

도어 록의 버튼을 눌렀다.

―안면 암호가 일치하지 않습니다.

또 그 기계음. 유나는 다시 또 누르길 포기했다. 그러다 현관에 쪼그리고 앉았다. 나가고 싶어 미칠 것 같았다. 그리고 동시에 엄마의 얼굴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또 나가면 엄마가 다시 위험해지겠지. 유나는 얼굴을 와락 일그러트렸다. 숨이 턱턱 막혔다. 답답해서 미칠 것 같았다. 소리라도 지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유나야.”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쪼그리고 앉았던 유나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지운이 뒤에 서 있었다.

“왜 그러고 있어? 이 새벽에 산책하고 싶어서 그래?”

“…….”

그놈의 산책. 유나가 쪼그리고 앉아 있던 몸을 폈다. 지운이 유나에게 다가가 또 품에 안았다. 유나는 밀착한 사람의 온기에 제 마음이 움직이는 걸 느꼈다.

이건 정지운이라서가 아니라… 사람이라서 그렇다.

유나는 제 등을 감싸는 지운의 손길을 느끼면서도 가만히 있었다. 지운이 유나의 등을 부드럽게 쓸었다.

“잠깐 나갔다 올까?”

“…네.”

그러면 이 답답한 속이 뚫릴까.

유나는 아무렇지 않게 버튼을 눌러 도어 록 암호를 해제하는 지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시선을 눈치챈 지운이 왜? 하며 물었다.

“저는 아무리 풀려고 해도 안 풀리는데, 당신은 손짓 한 번에 쉽게 풀어서요.”

“으응, 나만 풀 수 있게 해 놓았으니까.”

지운이 유나의 손을 잡았다. 유나는 그와 손을 잡은 채 고층 아파트의 복도를 걸었다. 밖이 어두컴컴했다. 지운과 손을 잡은 유나의 손가락이 조금 움츠러들었다.

“춥진 않아?”

“…네.”

집에 있는 시간이 많으니 계절 감각도 잊었다. 벌써 여름이 끝나가나? 유나는 띠링, 소리를 내며 도착한 엘리베이터에 탑승하고는 내려가는 층수를 보았다. 29, 28, 27, 26…….

1층에 도착하고 지운이 먼저 발을 앞으로 내디뎠다. 유나는 그보다 조금 더 뒤에서 그와 손을 잡은 채 같이 걸었다. 가로등이 켜져 있긴 하지만 새벽의 어둠을 완전히 물리칠 순 없었다.

지운이 손을 들어 유나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이 근처만 좀 돌다가 갈까?”

“네…….”

지운과 제 몸 사이에 낀 왼쪽 팔을 들어 자연스럽게 유나도 그의 허리에 팔을 감았다. 이게 감금한 사람과 감금당한 사람의 모습일까. 유나는 저와 지운의 모습이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보일까 생각해 보았다가 말았다. 어차피 주변에 사람도 없었다.

“유나야. 요즘 많이 힘들어?”

“…네.”

이제야 묻네.

“우리 그럼 일어나면 같이 백화점 좀 돌고 맛있는 것도 먹을까?”

“네…….”

유나가 힘없이 대답했다. 지운이 속상한 듯 울상을 지으며 유나를 내려다보았다.

“유나는 책 안 읽는다고 했지? 혹시 뜨개질 같은 거라도 할래?”

“아뇨.”

“게임 질렸어?”

“네.”

그냥 집에 갇혀 있는 게 신물 나는 건데. 유나가 그렇게 말하려다 말았다. 어차피 벽일 테니까. 유나가 입을 다물었다.

대화가 끊겼다. 유나와 지운은 손을 잡은 채 앞을 보며 걸었다. 두 바퀴쯤 돌았을 때, 지운이 물었다.

“기분은 이제 괜찮아졌어? 들어갈까?”

“네…….”

기분은 하나도 좋아지지 않았다. 하나 유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왠지 맥이 빠졌다.

다음 날, 눈을 떴을 때 지운이 없었다. 호출을 받고 나간 모양이었다. 유나는 주방으로 향했다. 예상대로 지운이 차려 놓은 밥상과 메모가 보였다.

「호출 때문에 ㅜㅜ 유나야 이거 먹고 조금만 기다려!」

식탁 위에 있는 천을 들추자 맛있어 보이는 음식들이 보였다. 제 취향에 맞는 반찬들이었다. 인덕션 위에 있는 냄비에는 김치찌개도 있었다. 유나는 인덕션 전원을 켜고 버튼을 눌렀다.

시간이 지나자 김치찌개가 보글보글 끓기 시작했다. 김치 냄새가 코를 찔렀다. 근데 왠지 먹고 싶지 않았다. 유나는 김치찌개가 부글거리며 끓는데도 그 앞에 가만히 서 있기만 했다.

결국 김치찌개가 완전히 졸아 버렸다. 냄비 타는 냄새가 났다. 그제야 유나는 인덕션을 껐다. 까맣게 탄 김치가 보였다.

귀찮아…….

유나는 식탁 위를 천으로 다시 덮지도 않고 침대로 향했다. 누워서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았다. 이젠 만사가 귀찮아졌다. 게임을 하기도 귀찮았다. 밥 먹는 것도 귀찮았다. 세상에서 제일 좋은 게 맛있는 거 먹는 건데…….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식욕이 나지 않아 유나는 벽에 몸을 붙였다.

잠깐 눈을 감았더니 또 잠이 든 모양이었다. 눈을 뜨니 침대맡에 걸터앉아 제 머리를 쓰다듬는 지운이 보였다. 유나가 눈을 깜빡거리다 손등으로 눈을 비볐다.

“…지금 몇 시예요?”

“5시 반?”

“네…….”

“근데 유나야. 오늘 아무것도 안 먹은 거야? 밥이 맛없었어?”

“안 먹어 봐서 몰라요.”

배에서 기다렸다는 듯 꼬르륵, 소리를 냈다. 슬슬 저녁 시간이고 점심도 먹지 않았으니 배가 고플 만했다. 하지만 그와 별개로 식욕은 없었다.

“김치찌개 안 좋아해?”

“아뇨… 좋아하는데… 그냥 먹기 싫었어요.”

“나가서 먹을까? 그래도 밥은 먹어야지, 유나야.”

“…귀찮아요.”

유나가 엎드려 누우며 눈을 감았다. 지운이 엎드린 유나의 등을 쓰다듬으며 걱정스러운 어조로 이어 말했다.

“그러다 몸살 나. 밥은 먹어.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내가 해 주든가, 시켜 줄게.”

“…딸기 라테.”

“알겠어. 시킬게.”

지운이 딸기 라테와 다른 디저트 메뉴를 시켰다. 배달이 올 동안 유나는 침대에 누운 채로 꼼짝하지 않았다.

배달은 한 시간 뒤에 도착했다. 유나는 배달 온 딸기 라테를 반쯤 누운 채로 먹으며 생각했던 맛과 달라 조금 실망했다. 더 달았으면 좋겠는데……. 입 안에 맴도는 딸기를 씹어 먹었다.

다 먹고 나선 지운이 달라붙었다. 유나는 제 등 뒤에서 저를 껴안고 제 가슴을 움켜쥐는 손길을 거부하지 않았다. 익숙했다.

유나는 새벽 4시가 되어 가도 잠을 자지 못했다. 이러고 또 낮에 까무룩 잠이 들 게 뻔했다. 생활 패턴이 뒤바뀐 걸 스스로 알고 있으면서도 고칠 생각도, 고쳐야 할 의욕도 나지 않았다.

이제 눈물도 메말랐다. 유나는 멍하니 눈을 깜빡거리며 생각의 바다에 몸을 던졌다. 엄마, 아빠, 지수… 정지운. 유나는 제 옆에서 새근새근 자고 있는 지운의 목을 조르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죽을까? 안 죽겠지. 유나는 바로 포기했다. 대신 천장을 바라보고 입을 살짝 벌렸다.

나가고 싶어.

뛰쳐나가고 싶어.

지금 당장이라도 이 빌어먹을 집에서 탈출해서 내달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유나는 갑갑함과 동시에 상상으로 해방감을 맛보았다. 어리석지만 상상으로는 실현할 수 있었다.

어떻게든 적응하며 살아야겠다는 생각도, 엄마에 대한 죄책감도 어느덧 서서히 사그라들고 있었다. 스스로를 좀먹는 상황이 계속되니 누가 어떻게 되든 상관없으니 어떻게든 나가고 싶은 욕구가 차올랐다. 하나 생각뿐, 실현하지 못할 건 스스로 잘 알았다. 엄마를 사랑하니까.

그럼 엄마와 아빠, 친구에게 해가 없이 어떻게 탈출할 수 있지? 유나는 머릿속을 헤집었다. 자신이 가진 건 S급 가이딩 능력, 그거 하나뿐이었다. 아니, 그것 하나뿐이지만 이 능력은 누구나 쉽게 가지지 못하는 것이었다. 특별하다고도 할 수 있는 능력을 자신은 갖고 있었다.

비록 가이딩 능력을 제외하면 일반인과 다를 바 없다 해도, 유나는 이 능력이 제게 도움이 되리란 걸 알았다. 어떻게든 이용해야만 했다. 자신을 위해서.

그게 누구든 간에.

다음 날, 유나는 지운이 없는 집을 쭉 한 바퀴 돌았다가 몇 번의 심호흡 후 스마트폰으로 아빠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빠는 다행히 금방 받았다.

―여보세요.

“아빠, 나야. 유나.”

―그래, 유나야. 오늘은 뭘 먹었어?

아빠가 자연스럽게 안부를 물었다. 유나는 다른 이야기를 하다가 서서히 본론을 꺼내려고 했지만, 울컥 목구멍까지 차오른 말에 곧장 본론을 꺼냈다.

“응, 아빠. 아직 아무것도 안 먹었어. 근데 있잖아, 아빠. 나 괜찮은 줄 알았는데… 근데…….”

유나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힘이 빠진 유나를 느낀 유나의 아빠가 다소 다급한 어조로 물었다.

―유나야. 그래, 괜찮은 게 아니지? 아빠한테 솔직하게 말해 봐.

“나… 너무 힘들어.”

유나의 목소리가 타 버린 재처럼 희미해지더니 이내 울컥 눈물을 터트렸다. 눈물이 봇물 터지듯 터졌다. 유나가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유나는 이때까지 지운 외의 사람에겐 말한 적 없는 말을 이제야 내뱉었다.

“나, 나 나가고 싶어, 엉어, 아빠. 엄마랑 아빠 보고 싶어, 흐으으…….”

“유나야.”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유나의 아빠가 침착한 목소리로 유나를 불렀다. 유나가 엉엉 울며 이어 말했다.

“으으… 흐. 나 혼자 참으려고 했는데, 못, 참겠어… 너무… 힘들어.”

―유나야. 아빠가 도와줄게. 거기 어디니? 아빠가 갈게.

“아냐, 괜찮아, 아빠는 오지 마…….”

유나가 코를 킁, 먹으면서 눈물을 닦았다. 고개를 휘휘 내저으며 눈물이 멈추길 기다렸다. 이성적으로 생각해야 했다. 아빠는 신중한 성격이었다. 한번 말로 내뱉었으니 어떻게든 성사시키려고 할 것이었다. 아빠의 그런 성격을 알기에 유나는 그의 아빠가 일에 직접적으로 개입하는 건 원치 않았다.

“흐읍… 괜히 아빠가 직접 끼어들었다가는 아빠가 위험해져. 엄마한테도 해코지한 사람이야. 그러니까… 방법이 있어.”

―뭔데?

“…나 S급 가이드야.”

―뭐?

아빠가 헛숨을 들이켜며 되물었다. 유나는 코를 훌쩍였다.

“…나도 이 사실을 안 지 몇 달 안 됐어. 그러니까 다른 S급 에스퍼들이 날 도와주지 않을까? S급 가이드는 귀하잖아, 그러니까…….”

―가이드 검사에서 그렇게 나왔어?

“응… 정지운 때문에… 하게 됐는데, 이때까지 내가 억제제를 먹고 있었나 봐. 나도 몰랐어.”

잠시 아빠에게서 말이 없었다. 유나가 설마, 하며 물었다.

“아빠도 알고 있었어?”

―…유나야, S급 에스퍼들은 다 비슷한 족속들이야. 다 그놈처럼 널 맘대로 휘어잡으려 들 거야.

아빠가 대답하지 않고 화제를 돌렸다. 엄마와 아빠, 둘 다 알고 있었구나. 유나는 잠시 바닥을 바라보다가 눈을 내리감았다. 배신감이 잠시 가슴에서 들끓었다가 이내 사라졌다. 이미 전에 한번 겪은 감정이었다. 다시 되새김질하기 싫어 치워 버렸다.

―차라리 아빠가 도와줄게.

“…안 돼, 아빠가 끼어들면 안 돼.”

―유나야.

“그래도 다른 S급 에스퍼가 정지운보다는 낫지 않겠어?”

잠시나마 스마트폰 너머로 대답이 없었다. 유나가 아빠를 재촉했다.

“부탁해, 아빠. 아빠가 직접 일에 개입하진 마. 혹시 아빠한테 피해 갈 수 있으니까, 그냥… 그 사람들에게 부탁만 해 줘.”

―…알겠어. 아빠가 다른 S급 에스퍼와 접촉해 보고 연락할게.

“응. 연락해 줘. 기다릴게.”

툭, 전화가 끊겼다. 유나는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스마트폰을 바라보다가 거실 소파에 앉았다.

끌어들이고 싶지 않았지만 그래도 아빠는 A급 에스퍼였다. 엄마와 친구들과는 달랐다. 가이딩 능력을 제외하고는 일반인과 다를 바 없는 엄마나 일반인인 친구들을 끼게 하고 싶진 않았다.

유나는 손톱 끝을 물어뜯다가 머리카락을 한 움큼 쥐었다. 스트레스 때문에 머리가 웅웅 울렸다.

유나는 두통에 끙끙 앓다가 이내 침대로 가 몸을 완전히 뉘었다. 분명히 일은 하지 않는데, 일을 할 때보다 더 몸이 안 좋은 기분이었다. 유나는 침대에 누워 멍하니 생각에 빠졌다.

왜 하필 정지운은 내가 일하는 병원에 왔을까. 왜 하필 내가 정지운이랑 마주쳤을까. 왜, 왜, 왜.

생각은 생각을 낳고, 꼬리는 꼬리를 또 물며 계속해서 생각의 늪에 빠졌다. 유나는 스스로를 자책하기도 했고, 괜찮다고 위안하기도 했으며, 현 상황을 긍정적으로 보려 애쓰기도 하고, 또 낙담하기도 했다.

수많은 감정을 겪으며 유나는 울었다. 유나는 처음과 달리 점점 변해 가는 자신이 싫었다. 외로움에 허덕이는 자신이 싫었다.

이렇게 울고 있는 건 다 정지운, 그 사람 한 명 때문이었다. 그 사람만 아니었어도… 이러지 않았을 텐데. 유나는 모든 일의 근원인 정지운을 머릿속에서 때리고 또 때렸다.

상상 속의 유나는 지운보다 강력했다. 그를 마음껏 때리기도 했고, 뺨을 치기도 했으며, 발로 뻥 멀리 까 버리기도 했다. 하나 그것은 상상에 지나지 않았다. 현실에선 터무니없었다.

그렇게 멍하니 상상을 반복하고 있으니, 도어 록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유나는 거실로 나가지도 않았다.

“유나야. 집에 잘 있었어?”

내가 강아지냐고. 유나가 속으로 중얼거렸다.

“유나, 오늘 아버지랑 통화했던데. 무슨 이야기 했어?”

유나가 숨을 잠시 멈추고 몸을 홱 일으켰다. 지운이 웃는 얼굴로 유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통화 내역을 알고 있었다. 설마 하는 생각 뒤, 그럼 그렇지… 하는 체념이 뒤따랐다. 새로운 스마트폰을 줄 때 일찌감치 손을 쓴 듯했다. 정지운답다고 생각하면서도 깊은 탄식과 잔잔한 분노가 치솟았다. 그럼 그동안 친구들과 연락한 것도 엄마, 아빠와 연락한 것도 다 알고 있단 말이었다.

설마 통화 내용까지 알고 있는 건가? 유나는 지운의 표정 하나하나를 뜯어보며 안에 숨겨 놓은 속내가 뭔지 살폈다. 속을 영 알 수 없었다.

“왜 물어봐요?”

“오늘은 아빠랑만 연락했길래 물어본 거야.”

“…그냥, 오늘은 어쩌다 보니 아빠랑만 통화하게 된 거예요.”

“정말?”

“…네.”

유나는 그리 대답하며 지운을 흘긋 보았다가 다시 침대에 누웠다. …메시지 내용이나 통화 내용까지 아는 거 아닐까? 불안이 서서히 차올랐다.

“…통화 내역까지 감시해야겠어요?”

“으음. 왜냐면 유나는 전적이 있으니까.”

“그렇게 숨 막히게 해야겠어?”

유나가 반말을 쓰자 지운이 어깨를 으쓱했다. 유나는 화가 많이 났을 때만 반말을 쓰곤 했다. 지운이 눈을 휘며 말했다.

“미안. 유나를 믿게 될 때까지만 조금만 참아 줘.”

“언제까지?”

유나가 뒤틀린 어조로 물었다. 언제까지 참아야 한단 말인가. 벌써 갇힌 지 세 달째였다. 그동안 유나는 조금씩 변화했다. 처음과 달라졌다. 변화는 아주 천천히 일어났고, 눈치챘을 땐 이미 많은 게 변한 후였다. 외로움에 못 이긴 유나가 격양된 어조로 외쳤다.

“세 달이면 충분한 거 아니야? 언제까지 집에 가둬 둘 건데?”

“유나야. 많이 힘들었어? 기분 안 좋으면 나가서 산책하고 맛있는 것도 먹자.”

유나는 소리를 지르고 싶다고 생각했다. 아악, 소리를 지르고 미친 듯이 뛰고 싶었다. 망설임은 잠시였다. 유나가 폭발했다. 그간 잠잠하게 억눌러 왔다고 생각한 분노가 한순간에 터졌다.

“아악!”

유나가 소리를 지르며 침대를 퍽퍽 내리쳤다. 분노로 머리가 징 울렸다.

“나 좀 내보내 달라고! 좀! 숨 좀 쉬게 해 달라고!”

“유나야.”

지운이 난처한 표정으로 침대를 마구잡이로 때리는 유나를 바라보았다. 유나는 남 일 보듯 하는 저 시선에 더 화가 나서 때릴 수 없는 지운 대신 때릴 수 있는 침대 시트를 마구 내리쳤다.

이러다 화병에 걸려 죽는다고 해도 이상할 것 없었다. 콱 혀를 깨물고 죽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나 내가 왜 죽어야 해? 저 새끼가 잘못했는데. 내가 죽는 건 너무 억울했다.

“유나야, 알겠어. 나가자, 같이 나가자.”

유나가 베개를 들어 지운을 마구잡이로 내려치기 시작했다.

“죽어, 죽어, 죽어!”

막 소리치면서 유나가 지운을 때렸다. 지운은 아야, 아야, 과장된 신음을 내면서 팔로 얼굴을 막았다.

“아프지도 않으면서 왜 아픈 척이야?”

“아냐, 진짜 아파.”

“왜, 왜, 왜… 왜 하필 나야! 나 좀 보내 달라고!”

“…….”

“죽어, 죽어, 죽어, 미친 새끼야!”

유나는 더 화가 나 분이 풀릴 때까지 계속, 계속, 계속 지운을 베개로 때렸다. 힘이 빠진 유나가 헉헉대면서 베개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머리를 가리고 있던 지운이 팔을 내리며 유나에게 다가왔다.

“화 좀 풀렸어?”

“흐으… 흐.”

지운이 다정한 어조로 물었다. 그 목소리를 듣자마자 무언가 울컥, 올라왔다. 유나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고였다.

“유나야.”

유나의 눈물을 본 지운이 당황했다. 그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왜 울어? 내가 뭐 또 잘못한 거 있어?”

자기가 잘못한 건 알아? 유나는 자기가 잘못한 게 있냐고 묻는 지운이 어이가 없어서 손을 들어 그의 어깨를 툭, 쳤다. 지운이 밀려나면서 눈물이 그렁그렁 고인 유나를 마주 바라보았다.

“왜 그래, 유나야?”

“왜 그러긴. 너 때문이잖아, 개새끼야.”

유나가 울음을 터트렸다. 아까 아빠와 통화할 때처럼, 아니 그것보다 더. 눈물이 소나기처럼 후드득 떨어졌다. 화가 끝까지 차올라 나는 눈물이었다.

저 개새끼가 너무 싫어서 미치고 팔짝 뛰겠는데, 세 달 내내 보는 얼굴이 저 얼굴이었다.

유나가 가장 싫은 건, 지운이 다정하다고 느낄 때였다. 어느새 그가 주는 음식과 편안함에 길들여지는 자신도 싫었다. 그냥, 그냥 전부 다 싫었다.

“어허으, 흐…….”

유나가 펑펑 울어 대자 지운이 난감한 듯 미간을 좁히며 우는 유나의 어깨를 붙잡고 유나의 얼굴 곳곳을 살폈다.

“울지 마, 유나야. 울어도 예쁘긴 한데, 그래도 웃을 때가 제일 예뻐.”

미친 새끼. 개새끼. 처죽일 놈. 유나가 제 어깨를 잡은 지운을 쳐 내며 히끅거렸다. 지운이 유나를 품에 안았다.

“미안해. 자주 나가자, 이제. 난 유나가 나가기 싫어하는 줄 알았어. 매번 누워 있길래, 피곤한 줄 알고.”

너랑 가기 싫은 거라고. 유나는 그렇게 말하면서 또 엉엉 울었다.

“그냥 나 좀 내보내 줘…….”

“그건 안 돼.”

또 도돌이표였다. 보내 달라고 말하고, 안 된다고 대답하고. 그 과정의 반복. 유나는 나오는 코를 지운의 옷에 다 묻히며 고개를 저었다. 지운이 유나의 뒤통수를 껴안고 쓰다듬었다.

“집이 답답하면 우리 나가서 잘까? 호텔 같은 데라도.”

“흐윽…….”

“지금 당장 가자.”

지운이 유나를 품에 꽉 껴안았다가 힘을 풀며 유나의 두 뺨을 그러쥐었다. 그러고는 손가락으로 유나의 눈물과 콧물을 다 닦아 주었다.

“더럽게, 뭐 하는 거야…….”

“안 더러워.”

지운이 눈물로 얼룩진 유나의 뺨에 쪽, 뽀뽀를 하며 다시 유나를 껴안았다. 유나는 너른 품에 안기며 눈을 감았다. 나를 괴롭히는 것도, 나를 이런 식으로 위로하는 것도 다 정지운이구나. 나는 왜 이 품에서 안정감을 느끼지. 이중적이고 역겹기 짝이 없었다.

유나는 지운이 예약한 호텔 객실의 욕조에서 꼬박 한 시간 동안 혼자만의 시간을 가졌다. 뜨거운 물이 식을 때마다 뜨거운 물을 다시 틀어 덥히길 반복했다.

이번에는 지운이 간섭하지 않았다. 호텔이 고층이라서 그런 건지, 호텔 욕실에서 나갈 방법이 없다는 걸 알고 있는 건지 이유는 모르겠지만.

유나는 전보다 많이 길어 가슴을 넘긴 머리를 내려다보았다. 여기 오기 전까지만 해도 쇄골을 넘겼던 거 같은데, 어느새 벌써 가슴을 넘겼다. …그동안 미용실도 가지 못했다.

유나는 들고 온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며 아빠에게 연락이 오길 기다렸다. 접촉했다고 했으니, 연락이 와야 하는데……. 혹시나 제가 자고 있을 때 지운이 스마트폰을 보기라도 할까 싶어 비밀번호를 바꿨다. 혹시 모르니까.

유나가 욕조에 몸을 완전히 파묻었다가 다시 고개를 내밀었다가를 반복했다. 의미 없는 행동을 반복해도 정신은 여전히 멍멍했다. 정지운의 집에 갇힌 뒤로 자신이 이상해진 기분이었다. 그런 기분을 떨쳐 내기 위해 엄마, 아빠, 친구와 연락을 해도 여전히 자신이 이상해진 것 같았다.

집에 혼자서 시간을 죽일 때, 정지운이 해 준 밥을 먹을 때, 정지운이 사 온 디저트를 먹을 때, 정지운과 섹스를 다 한 후에… 점점 자신은 이상해졌다. 유나는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다가 다시 욕조 속 물에 몸을 파묻었다.

“유나야, 언제 나올 거야?”

욕실 밖에서 지운이 물었다. 유나는 눈을 감은 채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가 욕실 문이 열리는 소리에 물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유나야, 그러다 감기 걸려.”

“…신경 꺼요.”

“네 일인데 어떻게 신경을 꺼.”

지운이 수건을 들고서 유나에게 다가왔다. 그러고는 유나의 팔목을 잡아 일으켰다.

“자, 닦아 줄게. 이제 그만 나오자.”

괜히 오기가 발동했다. 유나가 욕조에 있는 물을 지운에게 흩뿌렸다. 얼굴에 물을 맞은 지운이 푸훕, 웃음을 터트렸다.

“심술부리지 말고 얼른 나오자.”

유나가 발로 지운의 다리에 물을 흩뿌렸다. 지운이 웃으면서 유나를 껴안아 욕조 밖으로 나오게 했다. 물을 맞든 말든 신경도 쓰지 않는 것 같아 유나는 더 오기가 솟았다. 바동거리며 지운을 쳤다.

“아야, 아야, 아야. 그만하고.”

지운이 젖은 유나의 몸을 꽉 껴안았다. 유나는 지운의 옷이 물 범벅이 된 것을 바라보았다. 딱 달라붙은 쪽도 물에 젖어 가는 것이 보였다. 유나가 품속에서 심호흡을 하며 가만히 있자 지운이 유나의 등을 쓸었다.

“안 추워?”

“…네.”

지운이 품에 안긴 유나를 내려다보다가 유나의 이마에 쪽, 입맞춤했다. 그러고는 눈 위에도 입맞춤을 흩뿌렸다. 눈 다음에는 코, 뺨, 귀, 턱, 목덜미… 입술이었다.

유나는 제 잇새로 파고들어 오는 혀를 느끼며 자연스럽게 입술을 벌렸다. 매일매일 하는 섹스라 이제 몸이 먼저 반응했다. 입을 맞추자마자 자연스럽게 아래가 젖어 들었으니까.

유나는 제 가슴을 움켜쥐는 손길에 아, 작게 신음했다. 지운이 혀로 입천장을 긁고 혀 밑의 살을 쓸었다. 몸이 바르르 떨렸다. 그는 키스를 하면서 천천히 유나의 몸을 욕실 바깥으로 이끌었다. 그가 이끄는 대로 유나의 몸이 점점 욕실 바깥으로, 침대로 향했다.

침대 위에 완전히 등을 누인 유나가 키스에 헐떡이며 지운의 어깨를 잡았다. 지운이 입술을 떼고 유나의 목덜미에 이를 박았다.

“흐으…….”

지운이 목덜미에 이를 박은 채 한 손으로 가슴을 움켜쥐고는 부드럽게 주물렀다. 손가락 사이로 흰 가슴이 삐져나왔다.

“부드러워.”

지운이 속삭이듯 말하며 다른 한 손으로는 유나의 허리와 옆구리를 쓰다듬었다. 간질거리는 느낌에 유나가 흐느끼며 지운의 목을 껴안았다. 몇 번이고 하는데도 도저히 이 감각이 익숙해지지 않았다. 간질거리고, 이상하고, 아래가 뜨거워지고…….

유나는 제 아래가 젖어 드는 것을 고스란히 느끼며 저도 모르게 다리를 더 넓게 벌렸다. 지운이 완전히 유나의 다리 사이에 자리 잡고는 젖은 아래를 매만졌다.

“젖었네.”

지운이 그렇게 말하며 입구를 쓰다듬었다. 유나가 아랫입술을 깨물며 한쪽 뺨을 시트에 묻었다. 그가 손가락으로 입구를 벌리며 젖은 살을 문질렀다.

“으응…….”

위아래로 쓰다듬던 그가 손가락을 조금 더 위로 올려 동그랗게 솟아오른 클리토리스를 꾹, 눌렀다. 유나가 감았던 눈을 번뜩 뜨며 시트에 뺨을 비볐다.

“유나, 갈수록 더 느끼는 거 같아.”

지운이 그렇게 말하며 클리토리스를 집중적으로 만지기 시작했다. 뺨을 비비던 유나가 참지 못하겠다는 듯 손톱으로 시트를 긁어 댔다. 허리가 절로 휘고 발가락이 곱아 들었다. 찌릿하고 이상한 느낌이 계속해서 이어졌다.

“그만, 그만, 아으읏…….”

유나가 다리를 오므리며 지운의 어깨를 꽉 쥐었다. 지운은 유나의 다리가 제 몸을 죄고 어깨에 손톱자국이 남는데도 계속해서 유나의 아래를 자극했다.

“하으응, 아, 아, 아!”

지운이 클리토리스 자극을 멈추지 않은 채, 검지와 중지를 동시에 내벽 안으로 넣었다. 유나의 오므라든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다. 그가 손가락을 위로 짓쳐 올리며 피스톤질을 시작했다.

“응, 아, 아!”

손가락이 빠져나갈 때마다 젖은 소리가 났다. 유나가 고개를 내저으며 허리를 뒤틀었다.

“그만, 그만, 그만……!”

허리를 뒤로 빼려고 하자 지운이 유나의 몸을 단단히 잡아 고정했다. 유나가 숨을 헐떡이며 시트를 잡아 뜯었다.

“싫어, 싫, 어, 으응, 아!”

어떻게든 절정에 이르게 하려는 게 보였다. 아무리 고개를 휘저어도 손짓은 그대로였다. 유나는 결국 고개를 완전히 젖히고 쾌락에 몸을 맡겼다. 온몸의 털이 쭈뼛 서는 쾌락이 몸을 뒤흔들었다. 유나가 밭은 숨을 내쉬며 비명 같은 신음을 질렀다.

“흐읏, 아, 아, 아흑!”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투명한 물이 분수처럼 쏘아 올려졌다. 절정에 달한 유나가 흐느끼며 시트를 꽉 그러쥐었다. 시트를 그러쥔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흐으…….”

유나가 한숨 같은 숨을 내쉬며 시트에 몸을 묻었다. 한 번의 절정만으로 온몸의 힘이 빠졌다. 지운이 늘어진 유나의 몸을 잡더니 다리를 넓게 벌렸다. 그가 벌어진 공간에 자리 잡고선 성기에 콘돔을 씌웠다. 유나가 멍하니 그런 그를 바라보다가 아래에 느껴지는 묵직한 이물감에 반쯤 감았던 눈을 번뜩 떴다.

“아…….”

아프진 않았다. 하나 묵직하고 두꺼웠다.

“안이 뜨거워, 유나야.”

지운이 그리 말하며 제 것을 한 번에 쑥, 삽입했다. 유나가 숨을 크게 들이마시며 미간을 좁혔다. 안이 완전히 메워지자 자연스레 아래로 열기가 몰렸다. 딱딱한 무언가가 안에 자리 잡은 게 느껴졌다. 그가 잠시 움직임을 멈추고 몸을 내려 유나의 이마에 입술을 댔다.

“아파?”

“아뇨…….”

“움직여도 돼?”

“…네.”

지운이 유나의 이마와 눈꺼풀 위에 쪽, 입을 맞춘 후에 천천히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유나는 안이 자연스럽게 움직이는 성기를 죄는 걸 느끼며 눈을 반쯤 감았다. 벌써부터 간질거리는 감각이 아래에서부터 피어올랐다. …익숙했다, 이 모든 게.

“흐으, 앙…….”

더 세게 해 줬으면. 유나는 저도 모르게 든 생각에 아예 눈을 질끈 감았다. 내벽을 긁고 지나가는 귀두의 느낌에 벌어진 다리가 절로 후들후들 떨렸다. 세게, 세게 해 줬으면…….

유나가 두 손을 뻗어 지운의 목을 휘감았다. 그러고는 그의 움직임에 맞춰 허리를 흔들었다. 채근하듯 그녀가 움직이자 지운이 짧은 웃음소리를 흘렸다.

“유나, 귀여워.”

“흐응, 빨리… 세게…….”

“응.”

지운이 퍽, 세게 처박은 뒤 이후 빠르게 허리를 쳐올리기 시작했다. 퍽, 퍽, 퍽, 퍽. 살과 살이 부딪히는 소리와 아래에서 철퍽이는 소리가 호텔 객실을 메웠다. 유나는 휘몰아치는 정사에 이제야 맘 놓고 쾌락에 정신을 놓았다. 좋았다.

“앙, 아아, 흣, 아, 아!”

안이 깊숙한 곳을 찌르고 빠져나갈 때마다 눈앞에서 폭죽이 튀는 환상이 보였다. 그가 유나의 가슴을 제 몸으로 누르며 거친 숨을 내뱉었다.

“아, 씹…….”

“응, 아, 아앙…….”

“힘 좀, 풀어 봐, 유나야. 너무, 조여. 후우…….”

지운이 미간을 좁히며 더운 숨을 내쉬었다. 유나는 제 위로 쏟아지는 숨과 땀방울에 감았던 눈을 떴다. 눈을 좁힌 채 헐떡이는 얼굴이 보였다.

눈이 마주치자 지운이 표정을 풀고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그 순간이 슬로 모션처럼 천천히 보였다. 유나는 잠깐 눈을 깜빡이다가 다시 눈을 감았다. 떠오르는 순간을 지우기 위해 아래의 쾌락에 집중했다.

“아흣, 으, 흐으, 응!”

유나가 허리를 휘며 다리를 더 넓게 벌렸다. 아까 느꼈던 절정이 또 한 번 오려고 했다. 싫어, 안 돼, 몇 번 내뱉던 유나가 비명 같은 신음과 함께 또 절정에 다다랐다. 그리고 동시에 지운도 꽉 죄이는 내벽에 거친 신음과 함께 사정했다.

그가 후우, 한숨을 내쉬며 한 손으로 이마에 맺힌 땀을 훔쳤다. 그러고는 천천히 몸을 뒤로 물려 성기를 뺐다. 콘돔 끄트머리에 정액이 가득 고여 있었다. 그는 콘돔을 묶어 쓰레기통에 버렸다.

유나는 절정 후 힘이 빠져 눈을 반쯤 감은 채 색색거리는 숨만 내쉬었다. 지운이 그런 유나의 몸을 반쯤 일으키며 말했다.

“씻어야지, 유나야.”

“…귀찮아요.”

씻자마자 몸을 섞고, 또 씻는다니. 귀찮았다. 지운이 늘어진 유나를 공주님 안기로 안은 다음 욕실로 데려갔다. 유나는 으으, 신음하며 지운을 째릿 노려보았다.

“내가 씻겨 줄게. 눈 감고 쉬고 있어.”

누가 씻겨 주는데 쉬는 게 어떻게 가능하단 말인가…….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생각하면서 유나는 눈을 감았다. 곧이어 샤워기 소리가 들리더니 적당히 따뜻한 물이 등에 닿았다.

뜨거운 물이 몸을 적시니 꾸벅꾸벅 졸음이 몰려왔다. 지운이 보디 워시 거품을 몸에 묻히고 씻겨 주는데도 잠이 깨지 않았다. 유나는 지운의 가슴에 완전히 몸을 기댄 채 졸았다.

샤워기 물이 꺼지고, 지운이 유나를 붙잡은 채 몸을 조심스레 닦아 주었다. 유나는 눈을 뜨지 않았다.

“유나야, 많이 졸려?”

“…응.”

“유나, 요즘 왜 이렇게 잠이 늘었지? 임신했나?”

임신? 졸고 있던 유나가 눈을 번뜩 떴다.

“뭔 소리예요, 갑자기?”

“농담이야. 계속 콘돔 끼고 했으니까 그럴 일 없어.”

“왜 그런 말을 장난으로 해요? 깜짝 놀랐잖아요.”

“미안, 미안. 유나가 유독 잠이 늘어서 한 소리지.”

지운의 장난 때문에 잠이 다 깼다. 유나는 지운을 노려보다가 이내 한숨과 함께 다시 침대에 누웠다.

임신. 그럴 리 없었다. 정지운은 할 때마다 콘돔을 꼈으니까. 요즘 잠이 는 것도 그냥… 집에서 할 일이 없어서 그런 거고. 생리도 얼마 전에 했다. 알면서도 괜스레 불안해졌다.

만약 그가 갑자기 콘돔을 끼지 않겠다고 하면? 피임하지 않으면? 콘돔을 끼는 것도 지운이 원해서 끼는 것이지, 만약 그가 원하지 않는다면 끼지 않을 것이다. 유나는 저도 모르게 손톱을 물어뜯으며 눈을 빠르게 깜빡였다.

왜 갑자기 신경 쓰이게 저런 말을 하지.

“아.”

손톱은 물론이고 손톱 옆의 살을 물어뜯다 피가 비쳤다. 유나는 그제야 엉망이 된 검지를 내려다보고는 움직임을 멈췄다.

유나는 지운의 말 한마디에 일희일비하는 저 자신에게 환멸을 느꼈다. …더 이상해지기 전에 하루라도 빨리 정지운 곁에서 벗어나야만 했다.

하필이면 다음 날, 지운에게서 호출이 오지 않았다. 덕분에 유나는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호텔에서 또 오래 뒹굴거려야 했다. 그동안 아빠에게서 연락이 오지 않을까 노심초사했다. 다행히 전화는 오지 않았다.

정지운이 있을 때 전화가 오지 않는 것에 대한 안도감과 동시에 일이 잘 풀리지 않는가, 하는 걱정이 들었다. 유나는 지운의 눈치를 흘긋 보며 입을 열었다.

“…계속 여기 있어요?”

“왜? 나가서 놀까?”

나가서……. 유나는 고민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무기력해진 탓인지 뛰쳐나가고 싶은 욕망은 물론 있으면서도 지운과 함께 돌아다니며 놀고 싶진 않았다.

“유나야, 맨날 누워 있으면 안 심심해?”

“…심심해요.”

“뭐라도 할래?”

“다 해 봤잖아요. 큐브도 해 보고, 퍼즐도 맞춰 보고, 그림도 그려 보고, 캘리그라피도 해 보고, 게임도 해 보고… 다 해 봤는데… 이제 질려요. 재미없어요.”

“수족관이라도 집에 둘까? 물고기 구경이라도 해. 아니면 햄스터나 도마뱀, 토끼, 이런 동물을 키워도 괜찮아.”

“…그런 가벼운 마음가짐으로 다른 생명을 들이면 안 돼요.”

유나가 더 말할 것도 없다는 듯이 등을 돌렸다. 한숨이 나왔다.

“유나야. 더 누워 있지 말고 밥이라도 먹으러 나갔다 오자. 응?”

“…….”

누구 때문에 계속 누워 있는 건데. 반발심이 울컥 차올랐다. 정지운만 아니었어도 지금쯤……. 유나는 다시 꼬리를 무는 생각에 아예 고개를 내저어 생각을 지우고 베개에 얼굴을 파묻었다.

믿을 건 아빠에게 한 부탁밖에 없었다. 이 지긋지긋한 곳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탈출뿐이니까.

지운이 누워만 있는 유나의 몸을 뒤에서 끌어안으며 속삭이듯 말했다.

“유나야. 진짜로 도망 안 칠 거야?”

“…….”

유나가 잠시 입을 다물었다. 내리깔았던 눈을 위로 뜨며 유나가 망설임 뒤에 대답했다.

“네. 안 칠게요.”

“그럼… 나 없을 때 나가는 거, 허락할게.”

등을 보이고 있던 유나가 눈을 크게 뜨며 지운을 향해 돌아누웠다. 지운이 시무룩한 표정으로 유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진짜로요?”

“응. 유나가 힘들어하니까…….”

“정말로? 당신 없을 때 돌아다녀도 돼요?”

“응. 친구도 만나고… 어머님도… 만나. 대신, 다시 돌아와야 해. 그것만 약속해 줘.”

지운이 저와 마주한 유나를 꽉 껴안으며 그녀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었다. 그러고는 눈을 치떠 유나를 바라보았다. 그 눈길이 퍽이나 간절해서, 유나는 순간 그와 제 위치가 바뀐 건가 착각할 뻔했다. 그래 봤자 가둬 두는 건 그인데, 왜 저런 얼굴로 나를 바라보는 걸까.

유나는 입술을 달싹이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돌연 가슴이 이상하게 술렁였다. 유나는 저를 올려다보는 눈과 마주하고 싶지 않아 시선을 피했다. 지운이 품으로 더 파고들었다.

“이번에는 정말로 도망치면 안 돼, 유나야.”

“네…….”

“약속.”

지운이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유나가 잠시 그 새끼손가락을 바라보다가 제 손가락을 내밀었다. 지운이 손가락을 얽고 엄지까지 내밀었다. 유나가 엄지를 맞댔다.

“도망치지 않을 거지?”

“…네.”

가슴이 조여들었다. 유나는 아예 지운의 머리카락에 얼굴을 파묻고 눈을 감았다.

지운은 집에 돌아오자마자 도어 록이 유나의 안면을 인식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눌러 봐.”

누르자 이전처럼 ‘안면 암호가 일치하지 않습니다.’ 하는 안내음 없이 띠링, 소리와 함께 도어 록 암호가 풀렸다. 너무나도 쉽게. 망치질을 하던 그때와 달리, 너무나도 쉽게…….

“대신 유나야. 되도록 나보다는 집에 일찍 오고, 불가피하게 늦어지면 연락을 꼭 해 줬으면 좋겠어. 내가 데리러 갈 수 있도록.”

“네…….”

“응.”

지운이 다시 유나를 품에 껴안았다. 그러고는 유나의 얼굴 이곳저곳에 입맞춤을 했다. 쏟아지는 애정 표현에 유나가 잠시 멈칫했다가 이내 그의 품에 파고들어 등에 손을 둘렀다. 가슴이 여전히 울렁거렸다.

도망치지 않을 거지?

그 말이 계속해서 머리에 맴돌았다.

다음 날, 유나는 지운이 나가고 난 뒤 멍하니 집을 둘러보다가 욕실로 가서 샤워를 했다. 그리고 옷장을 열었다. 지운이 없을 때 외출복으로 갈아입는 건 처음이었다.

옷을 갈아입은 다음, 거울 앞에 섰다. 옆에 정지운이 없다. …왠지 이상했다. 유나는 괜스레 옷을 만지작거리다가 가방을 챙겼다. 하나 챙길 게 얼마 없었다. 화장품, 지갑, 스마트폰. 그게 끝이었다.

그러고 보니 지갑을 열지 않은 지도 오래되었다는 생각이 스쳤다. 매번 지운이 샀기 때문에 유나가 돈을 쓸 일은 거의 없었다. 잔액이 얼마 남았더라. 기억도 나지 않았다.

옷을 다 입고, 가방을 멘 유나는 현관 앞에 서서 도어 록 버튼을 눌렀다. 띠링 소리와 함께 잠금이 해제됐다. 그 짜증 나는 알림음이 없었다. 유나는 문고리를 돌리면서 또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문고리를 열자 복도가 보였다. 유나는 천천히 문을 닫고 복도를 걸었다. 이상해, 이상해, 이상해……. 유나가 속으로 중얼거리며 엘리베이터를 향해 걸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면서도 기분이 묘했다.

유나는 내려가면서 그제야 아무 약속도 없이 밖으로 나간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친구 지수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지수가 금방 전화를 받았다.

“응, 지수야. 난데. 오늘 볼래?”

―응? 오늘? 얘는 내가 만나자고 할 때는 안 된다고 하더니. 나 오늘은 안 돼. 곧 시험이야.

벌써 대학생들 시험 기간인가……? 유나가 아, 하고는 고개를 떨궜다. 마침 엘리베이터가 1층에 도착했다.

“어쩔 수 없지. 그럼 다음에 보자.”

―응응. 시험 끝나고 연락할게.

전화가 끊겼다. 유나는 이번에는 다른 친구들한테 전화를 걸려다 멈췄다. 다른 친구들 모두 대학생이거나, 혹은 직장인이었기 때문이었다. 지금 시간에 만날 수 있는 친구는 없었다.

유나는 결국 정처 없이 앞으로 걷고, 걷고, 또 걸었다. 목적지는 없었다. 그렇게 뛰쳐나가고 싶고, 그렇게 혼자 걷고 싶더니, 막상 혼자 걸으니 기분이 묘하고 착잡했다.

유나는 이윽고 걸음을 멈추고 근처 벤치에 앉았다. 가만히 앉아 있자 여러 감정이 부글부글 끓기 시작했다.

왜 내가 이런 감정을 느껴야 한단 말인가. 나를 멋대로 가두고 납치한 건 정지운인데, 왜 내가 감정의 가책을 느끼고 죄책감을 느끼고 이런 이상한 감정을 느껴야 해. 왜. 왜. 왜.

개새끼, 개새끼. 유나는 인상을 찌푸리며 애꿎은 가방을 벤치에 패대기치다가 문득 울리는 벨 소리에 패대기치는 것을 멈췄다. 아빠였다.

“여보세요?”

―유나야. 도와주기로 했다.

전화를 받자마자 아빠가 본론부터 꺼냈다. 유나가 어, 하며 눈을 깜빡였다. 기뻐야 하는데… 정지운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도망치지 않을 거지?

도망치지 않을 거지?

도망치지 않을 거지?

도망치지 않을 거지?

도망치지 않을 거지?

―유나야?

아빠의 목소리에 그제야 정신이 차려졌다. 유나가 응, 하고 대답했다.

―그쪽에서도 S급 가이드가 많이 부족한지 협조해 주기로 했다. 그리고 이미 네 존재를 알긴 알더라.

“…응?”

―일전에 정지운을 따라 전장에 간 적 있었니?

“아.”

―그때 소문이 좀 퍼진 모양이야. 너만 괜찮다면 그들은 너를 데리고 오고 싶다고 했어. 유나야. 집 위치만 알려 주겠니.

유나가 잠시 입을 다물었다. 정확한 집 위치는 몰랐다. 하지만 이제 아빠에게 집 위치를 알려 줄 필요가 없었다. 이제 정지운 없이도 밖에 나올 수 있고, 어디든 갈 수 있었다.

“나… 밖이야. 내가… 갈게.”

말이 곧바로 나오지 않았다. 더듬더듬 말하고 난 뒤, 가슴이 미친 듯이 쿵쾅거렸다. 유나는 두근거림을 멈추기 위해 벤치에서 벌떡 일어났다.

―밖이라고? 아빠가 갈게, 거기로.

“아냐. 괜히 아빠가 위험해져. 내가 그 사람들 있는 곳으로 갈게. 어디로 가면 돼?”

―가이드 센터로 갈 수 있겠니.

“…응. 갈게.”

지운과 함께 한번 갔던 곳이었다. 그 점이 걸렸지만 유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로 유나가 가방을 멘 채 걸었다. 이번에는 발걸음의 목적지가 있었다.

(그 가이드가 미친 에스퍼에게서 도망치는 방법 2권에서 계속)

그 가이드가 미친 에스퍼에게서 도망치는 방법 1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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