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첫 번째 탈출 (2)
지운이 잠들고 나서 유나는 지운에게 등을 돌린 채 스마트폰으로 가이딩 방법에 대해 검색했다. 특히 가이딩 존에 대해서 자세히 알아보았다. 가이딩 존은 어떻게 펼칠 수 있는지, 어떻게 에스퍼들이 가이딩을 받는지.
유나는 가이드 판정만 받았지, 스킨십을 제외하곤 가이딩을 어떻게 하는지에 대해서 완전히 무지했다. 설명조차 듣지 못하고 지운에 의해 다시 집으로 돌아갔으니까.
「가이딩 존을 펼치는 방법은 간단합니다. 두 손을 모아 다이아몬드 모양을 만들고, ‘가이딩 존’이라고 외치면 존이 만들어집니다. 등급이 높을수록 가이딩 존의 크기가 큽니다. 해제하기 위해서는 무조건 가이딩 존 안에서 다시 손을 다이아몬드 모양으로 모은 다음 ‘가이딩 존 해제’라고 말씀하시면 됩니다.」
유나는 다른 사람이 써 놓은 설명 글을 보고는 눈을 토끼처럼 동그랗게 떴다. 뭐야, 이렇게 간단하다고?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유나는 지운 몰래 살금살금 거실로 향했다. 유나는 반신반의하면서 거실로 나가 검색해서 나온 결과대로 두 손을 다이아몬드 모양으로 모았다.
“가이딩 존.”
그렇게 말하자마자 몸에서 무언가 빠져나가는 기분이 들더니 이윽고 노란 빛이 몸에서 반짝거리기 시작했다. 유나가 경악하며 제 몸에서 반짝이는 빛을 바라보았다. 새삼 제가 가이드라는 사실이 피부로 실감 났다.
나, 가이드 맞구나. 유나는 멍하니 그 빛이 모여 커다란 가이딩 존을 형성하는 걸 바라보았다. 넓은 거실을 뒤덮을 만큼 커다란 존이 형성되었다.
유나가 멍하니 커다란 가이딩 존을 둘러보는데, 불현듯 시선을 느꼈다. 설마, 하고 돌아보자 문에 기댄 채 저를 바라보고 있는 지운과 눈이 마주쳤다.
“유나야, 뭐 해?”
“어…….”
유나가 눈을 깜빡거리다가 더듬거리며 대답했다.
“가이딩 존… 만들어 봤어요.”
“이런 걸 왜? 그냥 내 옆에 꼭 붙어 있으면 되는데?”
“그냥…….”
만들어 보고 싶었다. 내 능력을 눈으로 보고 싶었다. 그것조차 내 맘대로 안 되는 건가? 유나는 오히려 저를 책망하듯 묻는 지운에게 반항심이 들었다. 유나는 다시 두 손을 다이아몬드 모양으로 모은 다음 중얼거렸다.
“가이딩 존 해제.”
반짝거리던 노란 빛이 조금씩 수그러들더니 이내 완전히 사라졌다. 지운이 차가운 눈으로 유나와 가이딩 존이 있었던 자리를 바라보다가 성큼성큼 유나에게 다가왔다.
“이런 거 함부로 만들지 마.”
명령이었다. 유나가 지운을 째릿 노려보며 다소 반항적인 어조로 대답했다.
“왜요? 제 능력이잖아요.”
“네가 다른 애들 가이딩해 주는 거 싫어.”
“왜요?”
“넌 내 가이드니까.”
유나의 속이 다시 뒤틀렸다. ‘내 가이드’. 심사가 뒤틀리는 말이었다. 종속되는 관계는 끔찍하고 싫었다. 집착과 종속, 구속이 한 사람을 어떻게 망가뜨리는지 보았으니까.
유나는 말없이 지운을 노려보았다가 지운을 지나쳐 방으로 돌아갔다. 지운은 저를 지나쳐 가는 유나를 잡지 않았다.
유나는 제 어깨를 흔드는 손길에 부스스 눈을 떴다. 인상을 찌푸리며 눈을 게슴츠레 뜨자 희미하게 저를 깨우는 지운이 보였다.
“유나야, 같이 전장 가자.”
“네……?”
“어제 이야기했잖아. 같이 가자고.”
“아으… 귀찮아요…….”
“안 갈 거야?”
“하아…….”
유나가 상체를 일으켰다. 손등으로 눈을 비볐다. 아직 잠이 완전히 깨지 않았다. 눈을 질끈 감았다가 뜨자 모든 준비를 끝낸 지운이 어렴풋이 보였다.
“씻고 옷 갈아입자, 유나야.”
지운이 유나의 손을 잡고 일으켰다. 유나는 으응, 괜히 앙탈을 부렸다가 이내 포기하고 지운과 함께 욕실로 갔다. 지운이 물을 틀어 온도를 맞추며 유나의 손에 물을 끼얹었다.
“물 온도는 맞아?”
“네에…….”
“아직 졸리구나. 세수하면 괜찮아질 거야.”
지운이 조심스레 유나의 얼굴에 물을 끼얹었다. 졸음기가 가득한 유나의 눈이 약간 찌푸려졌다. 지운이 다시 한번 유나의 얼굴에 물을 끼얹고는 클렌징 폼을 손에 발라 비벼 거품을 낸 다음, 유나의 얼굴에 꼼꼼히 거품을 발랐다.
이젠 얼굴도 씻겨 주네. 유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지운이 따뜻한 물로 씻겨 주는 걸 얌전히 받았다. 세수가 끝난 다음에는 지운이 양치도 시켜 줬다.
“이.”
“이.”
헹구는 건 물론 유나가 했다. 그것마저 지운이 해 줄 필요는 없다며.
다 씻고 옷을 갈아입은 유나는 지운과 함께 집 밖으로 나섰다. 유나는 익숙하게 지운과 손을 잡은 채 걷고 검은 차에 올라탔다.
운전하는 사람은 어제와 똑같았다. 따로 고용한 운전기사인가? 저 사람은 일반인일까, 에스퍼일까. 궁금증이 샘솟았지만 유나는 구태여 지운에게 묻지 않았다.
차는 국경으로 향해 갔다. 제법 거리가 됐다. 유나는 톨게이트로 진입한 후 고속도로를 빠르게 내달리는 차의 속도를 느끼며 창문을 살짝 열었다. 바람은 시원했으나 소리가 시끄러웠다. 다시 창문을 닫았다.
“유나야, 혹시나 해서 말하지만. 다른 애들 가이딩해 주면 혼난다.”
유나는 지운의 말을 무시하고 차창에 시선을 고정했다. 가이드하는 건 제 맘이었다.
“유나야, 혼난다?”
대답하나 봐라. 유나가 대답하지 않자 지운의 웃음에 파삭 금이 갔다. 지운이 희미한 미소만 짓고서 다시 이야기했다.
“말했어. 하지 말라고.”
“…….”
유나가 끝까지 대답하지 않자 지운이 유나의 뺨을 잡아 강하게 자신 쪽으로 돌렸다. 강제로 지운과 눈이 마주친 유나가 멈칫 몸을 굳혔다. 꼭, 그때 도망쳤다가 잡혔을 때 눈 같았다. 짙고 어두운 검은 눈. 본능적으로 두려움이 들고 마는…….
유나가 저도 모르게 네, 하고 조그맣게 대답했다. 사실상 협박과 다름없었다. 유나가 제 말에 긍정의 대답을 하고 나서야 지운의 표정이 사르르 풀렸다. 평소와 같은 미소 지은 얼굴로 돌아간 지운이 유나의 뺨을 부드럽게 톡톡 쳤다.
“말만 잘 들으면 얼마나 좋아.”
강아지가 된 기분……. 유나는 고개를 살짝 숙였다.
차가 드디어 국경에 도착했다. 이미 벽 근처 전장에는 많은 가이드와 에스퍼가 모여 있었다. 지운이 유나와 함께 차 밖으로 발을 내딛자마자 시선이 둘에게 쏠렸다.
지운과 눈이 마주친 에스퍼들이 지운에게 인사했다. 지운이 대충 손을 휘적거리며 그 인사를 받았다. 유나는 낯설기 그지없는 곳을 둘러보며 지운의 옆에 꼭 붙었다. 아는 사람이 지운밖에 없었으니까. 지운은 그게 좋은지 웃으며 유나의 어깨를 껴안았다.
“내 옆에만 있으면 돼.”
“네…….”
지운이 앞으로 성큼성큼 걸었다. 유나는 에스퍼들이 지운에게 인사하는 것을 들으며 순간 ‘사령관님’이라는 단어를 스치듯 들었다. 유나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당신 직책이 사령관이에요?”
“으음, 응. 근데 별거 아냐. 애들이 다 알아서 해서 내가 할 일은 별로 없어.”
유나는 허, 입을 쩍 벌렸다. 이 많은 에스퍼들을 총괄 감독할 정도면 엄청 높은 직급이란 말이었다. 이때껏 센터에서 봤던 에스퍼와 가이드가 왜 그를 계속 쳐다봤는지 이제야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당연했다. 에스퍼들을 감독하는 제일 웃대가리니까.
지운은 가만히 저를 바라보고 있는 유나를 흘긋 보더니 이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별거 아니야, 정말로. 그보다 일단 빨리 가자. 오늘 유나 깨우느라 나 좀 늦게 왔거든.”
“네.”
유나는 지운과 손을 잡은 채 지운의 걸음걸이에 맞춰 걸었다. 지운은 익숙한 듯 벽 근처까지 갔다. 그곳에 모여 있던 에스퍼들이 지운을 기다리고 있었던 듯 지운을 보자마자 인사했다. 그리고 짜 맞춘 듯 지운과 손을 잡고 있는 유나를 바라보았다. 지운이 웃으며 말했다.
“내 가이드.”
그러고는 잡은 손을 흔들어 보였다. 유나는 놀란 듯 저를 바라보는 눈길을 피해 뻘쭘하게 바닥을 바라보았다. 아, 진짜 쪽팔려…….
시선은 잠시, 유나를 바라보던 에스퍼들 중 한 명이 손을 들며 지운에게 말을 걸었다.
“사령관님, S급 듀링어 무리가 벽을 넘으려 하고 있습니다. 넘어오는 하급 몬스터들은 즉시 처리하고 있습니다만, 듀링어는 어떻게 할까요?”
“내가 벽 위로 올라가서 죽이지 뭐. 근데 떨거지들이 새끼를 많이 쳤나 보네? 계속 넘어오는 거 보니까.”
“넵.”
지운이 벽 너머를 흘긋 보더니 이내 유나의 몸을 꽉 잡았다. 이윽고 그의 몸이 공중으로 두둥실 뜨기 시작했다. 지운과 손을 잡고 있던 유나 또한 공중에 떠올랐다. 유나가 놀라서 비명을 질렀다.
“꺄악, 뭐야, 뭐야!”
“유나야. 얌전히 있어. 벽 위로 올라갈 거야.”
“미쳤어요? 내려 줘요!”
“공중에서 나는 거 안 재밌어?”
“재미없어요! 빨리 내려 주세요!”
“이미 올라왔어. 조금만 참아?”
으악, 유나가 비명을 지르며 지운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제게 달라붙는 유나가 기분 좋은지 지운이 소리 내서 웃었다. 공중이 아니라 땅이었으면 바로 명치를 때리는 건데. 유나는 차마 밑을 바라보지 못하고 눈을 질끈 감았다. 벽 위에 올라갈 때까지 유나는 지운의 품에 얼굴을 묻은 채 고개를 들지 못했다.
벽에 도착하고 나서야 유나는 고개를 들 수 있었다. 벽 위는 상상을 초월할 만큼 높았다. 벽이 두껍고 견고했으나 그렇다고 해도 무서운 건 무서운 거였다. 유나가 바들바들 떨었다. 없던 고소 공포증이 생길 판이었다.
“제발 저 좀 내려 주면 안 돼요……?”
“그렇게 무서워?”
“네, 제발요.”
“알겠어. 빨리 죽이고 내려 줄게. 미안해, 유나야.”
유나가 몸을 달달 떨면서 무서워하자 지운이 유나에게 사과하며 안심하라는 듯 유나의 등을 쓰다듬었다. 유나는 팔뚝에 얼굴을 묻으며 떨지 않기 위해 애썼다. 나는 지금 땅이다, 나는 지금 땅이다. 바닥이다. 바닥이다. 자기 세뇌를 했다.
“빨리할게.”
그 말과 동시에 몬스터들이 끼에엑, 비명을 지르는 소리가 들렸다. 팔뚝에 눈을 파묻고 있던 유나가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고개를 들었다. 저 멀리 벽 아래 몬스터들이 피를 토하며 죽고 있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몬스터를 본 유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생각보다 크고 징그러웠다.
“뭐예요……?”
“S급 몬스터 중 하나인 듀링어. 다 죽였어.”
순식간이었다. 1초도 아니었다. 빨리할게, 그 말과 동시에 몬스터들이 비명을 터트렸으니까.
“어떻게 한 거예요?”
“그냥 죽였는데?”
천연덕스러운 대답이었다. 그 천연덕스러움에 유나가 오히려 말을 잃었다. 지운이 입을 벌리고 서 있는 유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자, 이제 내려가자. 아니면 업힐래?”
“네…….”
그냥 내려가는 것보다는 업히는 게 덜 무서울 것 같긴 했다. 유나는 지운의 등에 올라타고는 그의 목에 팔을 휘감았다. 지운이 끙차, 하더니 그대로 벽 아래로 발을 디뎠다. 추락하는 일 없이 천천히 아래로 내려갔다.
염동력으로 몬스터도 죽이고, 하늘도 날고, 아래로 내려가고… 화장실 문짝도 부수고… 온갖 걸 다 하는구나. 유나는 그의 목덜미에 뺨을 묻은 채 허허, 실없는 웃음소리를 흘렸다.
지운이 땅에 발을 딛자마자 유나가 바로 그의 등 위에서 내려왔다.
“이게 끝이에요?”
“응. 사체는 애들이 처리할 거고, 또 쟤네 말고 하급 떨거지들은 또 다른 애들이 알아서 할 거야.”
“네…….”
그럼 전장에서의 일은 이게 끝인가? 싶었는데 누군가 또 지운에게 다가와 S급 몬스터의 침입 소식을 알렸다. 지운이 고개를 끄덕이며 몬스터가 나타난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지운의 손을 잡고 있는 유나도 덩달아 지운과 함께 걸었다.
이번에도 지운은 아무렇지 않게 몬스터를 격퇴했다. 너무 쉬워서 김이 빠질 정도였다. 커다란 몬스터가 지운의 공격에 바로 피를 토하며 죽기 일쑤였다. 유나는 이제 궁금해졌다.
“다른 에스퍼들은 뭐 해요?”
“하급 몬스터 처리. 계속 들어오거든. 쟤네도 나름 바빠.”
“…맨날 이렇게 몬스터가 침입해요? 국경의 벽 너머로만 침입하는 거예요?”
“바다에서도 나와. 다른 데서도 나오고.”
그렇구나. 유나가 중얼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지운의 말대로 약해 보이는 몬스터들은 다른 에스퍼들이 해치우고 있었다. 쉴 새 없이 넘어오는 게 지치지도 않나 싶을 정도였다.
TV에서나 몬스터를 봤지, 실제로 몬스터를 본 게 처음인데도 하도 몬스터들이 바로바로 죽어서 유나는 이제 몬스터가 하나도 두렵지 않았다. 게다가 하급 몬스터는 덩치가 조그마하거나 생긴 게 그리 징그럽지 않았다. 오히려 귀엽게 생긴 몬스터들도 있었다.
“쟤들은 왜 계속 죽는데도 넘어오는 거예요?”
“자기들이 사는 땅이 좁으니까. 인간들이 다 땅을 먹어 버렸잖아. 새끼들도 많이 싸지르니 발 디딜 곳이 필요한 거겠지.”
“아…….”
유나는 끊임없이 넘어오는 몬스터와 그에 맞춰 끊임없이 몬스터를 죽이는 에스퍼를 바라보았다. 그런 에스퍼 옆에는 가이드가 있었다. 가이드는 몬스터를 처리하는 에스퍼의 몸을 잡고 있거나, 혹은 가이딩 존을 형성해서 각자의 방법대로 가이딩을 하고 있었다.
유나는 지운과 맞잡은 손을 바라보며 지운에게 물었다.
“저도… 가이딩 존으로 가이딩하는 건 어떨까요?”
“굳이? 나는 유나랑 손잡고 뽀뽀하고 섹스하는 게 더 좋은데.”
“제발 그런 말은 작게 좀 말해요.”
유나가 황급히 한 손으로 지운의 입을 틀어막으며 주변을 살폈다. 다행히 들은 사람은 없었다. 심장이 쿵, 내려앉는 줄 알았다.
유나는 가이딩 존을 형성한 가이드들을 다 훑어보았다. 가이드마다 가이딩 존 크기가 제각각이었다. 에스퍼 한 명을 겨우 씌운 가이딩 존도 있었고, 세 명은 넉넉히 씌운 가이딩 존도 있었다.
유나는 어제 제가 만든 가이딩 존을 떠올렸다. 제가 만든 가이딩 존에는 몇 명쯤 들어갈까. 적어도 열 명은 들어갈 것 같았다.
“S급 가이드들은… 주로 뭘 해요?”
“S급 에스퍼들이랑 같이 다니지. S급 에스퍼들은 S급이 아닌 A급 이하 가이드들에게 가이딩을 받으면 별 효과가 없거든.”
결국 저와 지운처럼 함께 다닌다는 소리였다. 계속해서 하나둘 궁금한 게 생기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지운이 아닌 다른 S급 에스퍼와 가이드들은 어디 있는 걸까? 각자 정해진 구역이 있는 걸까?
“다른 S급 에스퍼들은 어디 있어요?”
“몬스터들이 대거 나오는 곳에 각각 한 명씩 배치되어 있어. 나는 국경을 맡았고, 다른 S급들은 다른 곳에 있어.”
“S급 에스퍼 수가 많아요?”
“아니? 나 포함 여섯 명.”
“그러면… 가이드 수도 그만큼 적어요?”
“…….”
지운이 입을 다물었다. 묘한 표정으로 유나를 내려다보던 지운이 이내 싱긋 미소 짓더니 유나의 입술에 뽀뽀를 쪽, 했다.
“이제 그만 갈까? 대강 처리했으니. 나머지는 애들이 알아서 할 거야. 급한 거면 연락 오겠지.”
“네…….”
왜 가이드에 관한 건 대답을 안 해 주지. 유나는 제 손을 잡고 빙빙 흔드는 지운을 바라보며 주머니 속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렸다. 지운이 알려 주지 않으면, 제가 검색하면 그만이었다.
달리는 차 안에서 유나가 스마트폰을 꺼냈다. 유나의 어깨에 머리를 기댄 지운이 유나가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는 걸 바라보았다. 시선이 꽤나 집요했다. 눈치가 보여 검색하기를 꺼리다가, 이내 유나는 보란 듯이 검색창에 ‘S급 가이드 숫자’를 검색했다. 지운이 눈을 치떠 유나를 바라보았다.
검색 결과가 뜨지 않았다. 소수라고만 나와 있지, 정확한 명수가 적혀 있지 않았다. 시원찮은 결과에 유나의 고개가 기울어졌다. 지운이 웃었다.
“S급에 관한 건 국가 기밀이라 웬만해선 정보 노출이 잘 안 돼. 검색해도 안 뜰걸.”
“…S급 가이드는 몇 명이에요?”
“글쎄.”
지운이 또 대답을 얼버무렸다.
유나는 지운이 보든 말든 검색을 열심히 하기 시작했다. S급 가이드, 가이드 숫자, S급 가이드가 가이딩하는 법, 온갖 단어들로 검색해 보았지만 아무것도 뜨지 않았다. 죄다 하급 가이드를 위한 정보가 대부분이었다.
인원이 많은 쪽의 정보가 많이 나오는 게 당연한 건데도 유나는 짜증이 샘솟았다. 이러면 어떻게 정보를 습득한단 말인가?
“포기해, 유나야.”
지운이 웃으며 말했다. 유나는 그런 지운을 째릿 째려보며 이번에는 에스퍼에 대해서 검색했다. 에스퍼도 마찬가지로 S급에 관한 건 제대로 뜨지 않았다. 아예 뜨지 않도록 막아 둔 건가? 이번에는 해외 사이트를 통해 검색했다. 몇 개 검색 결과가 뜨긴 했지만 국내 이야기가 아니라 그다지 소용없는 정보들뿐이었다. 유나는 한숨을 쉬었다.
“그보다… 뭐 먹고 싶은 거 없어, 유나야? 밖에서 먹을래, 아니면 내가 해 줄까?”
“…뭐 할 수 있는데요?”
“유나가 해 달라는 거 전부 다?”
“…삼겹살.”
삼겹살이라는 말에 지운이 푸하, 웃었다.
“그건 밖에서 사 먹는 게 낫겠다. 집에서 먹으면 연기 나니까.”
네. 유나가 대답했다. 그러고 보니 삼겹살을 먹지 않은 지 오래됐구나, 싶었다. 어느새 유나의 머릿속엔 쌈무와 마늘을 함께 싸서 먹는 삼겹살이 가득 찼다. 점심을 먹지 않았기 때문에 배가 고팠다. 시간을 확인하자 2시였다.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흘러 있었다.
“조금만 참아?”
“네.”
둘은 이른 오전부터 여는 고급 고깃집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유나는 한바탕 식사를 했다. 지운은 유나가 먹는 걸 구경하기만 했다. 유나는 지운이 그러거나 말거나 맛있게 식사를 했다.
집에 돌아갔을 땐 배가 불러서 속이 더부룩할 정도였다. 유나는 집으로 오자마자 욕실로 들어갔다. 지운도 마찬가지로 따라왔다. 지운이 밥을 많이 먹어 살짝 솟아오른 유나의 배를 콕콕 찔렀다.
“어떡해. 너무 귀엽네.”
“뱃살이 뭐가 귀여워요…….”
유나가 중얼거리듯 말하며 오늘은 제발 그가 건드리지 않기를 바랐다. 다행히 그는 목욕 중에 건드리지 않았다. 유나는 씻고 몸을 닦은 다음 슬금슬금 눈치를 보며 그에게 말했다.
“오늘은… 안 하면 안 돼요?”
“왜?”
“우리 매일매일 했잖아요. 하루 정도는 안 해도 되지 않을까 싶어서.”
“그럼 유나가 나한테 뽀뽀를 많이 해 줘. 그러면 힘이 좀 날 것 같아.”
“…가이딩 존, 만들어 드리면 어떨까요.”
유나가 지운의 눈치를 보며 가이딩 존에 대한 화제를 꺼냈다. 그녀는 제 가이딩 존에 대해 실험해 보고 싶었다. 효과가 있는지, 있다면 그 효과는 좋은지 알고 싶었다. 하나 지운이 고개를 저으며 거절했다.
“굳이? 난 유나 뽀뽀가 더 좋아. 뽀뽀해 줘.”
“…….”
유나가 망설이다가 까치발을 들어 지운에게 뽀뽀를 쪽, 했다. 지운이 다시 한번 더, 라고 하며 고개를 내밀었다. 유나가 다시 한번 뽀뽀를 했다.
“더.”
쪽, 쪽, 쪽, 쪽. 유나와 지운이 연달아 뽀뽀를 했다. 지운이 멀어지는 유나의 뒤통수를 그러쥐고 유나의 입 안으로 혀를 넣었다. 유나가 지운의 가슴을 밀어내려고 했으나 소용없었다. 또 시작이었다.
또 두 차례나 몸을 섞고 난 다음에야 유나는 지운에게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었다. 잘 때도 지운은 딱 달라붙어서 유나에게서 떨어질 줄 몰랐다.
잠들고 일어나서도 유나는 제 옆에 딱 달라붙은 지운을 흘긋 내려다보며 작게 한숨을 쉬었다.
“왜 한숨 쉬어, 자기야.”
“…왜 이렇게 딱 달라붙어 있어요. 잘 때 불편하게.”
“불편해?”
“그럼, 불편하죠.”
“알겠어. 그럼 잘 때 손만 잡고 잘게.”
그래도 꼴에 양보해 줬네. 하도 부탁을 안 들어주는 게 많으니 이 정도도 고마워해야 할 지경에 이르렀다. 정말 우스운 일이었다.
“오늘도 같이 나가요?”
“아니? 오늘은 호출이 없어서 안 나가도 될 것 같아. 나중에 호출이 올 수도 있지만.”
유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스마트폰으로 시간을 확인했다. 10시였다. S급 에스퍼는 S급 몬스터를 상대할 때만 호출당하는 건가? 그렇다면 참 편리한 지위구나, 싶었다. 유나는 침대에 누운 채 턱을 괴었다.
“휴일은 따로 없어요?”
“응. 주말이라고 몬스터가 안 나오는 게 아니잖아? 그냥 호출이 안 오는 날이 휴일이야. 일주일에 한두 번 있어.”
휴일이 정해져 있지 않다니. 이건 전 직장인으로서 조금 안타까운 일이었다. 하지만 정지운이라서 불쌍하진 않았다.
“그럼 밤에는 어떻게 해요? 밤에도 호출이 올 수도 있잖아요.”
“몬스터들도 밤에는 자. 물론 침입하는 경우가 있긴 하지만, 매우 드물어.”
“그렇구나.”
몬스터들도 자는구나. 뭔가 웃겼다. 만약에 내가 몬스터라면 사람들이 자는 밤에 침입할 텐데. 지능이 달리나? 하긴, 지능이 달린다고 들었다. 유나는 손에 턱을 괸 채 고개를 움직이다가 그냥 모로 누웠다. 잠이 오는 건 아니었지만 역시 쉴 땐 눕는 게 최고였다.
“나랑 데이트할래, 유나야?”
“…네?”
“같이 영화나 연극 보고, 밥도 먹고.”
“…….”
유나가 지운을 빤히 바라보았다. 지운이 싱긋 웃으며 왜? 하고 고개를 갸웃했다.
“그냥… 모르겠어요.”
“뭐가?”
“그냥 가이드라면서요. 데이트를 하고 싶은 이유가 뭐예요?”
“그야, 유나가 맛있는 밥 먹으면서 웃는 게 좋고 유나가 같이 있으면 재밌는걸.”
“…저 좋아해요?”
“좋아하지, 그럼.”
도대체 뭘까, 이 남자는. 너무 가볍다. 그래서 더 진심을 모르겠어.
유나는 완전히 도망가려는 의지를 꺾은 게 아니었다. 단지 상황이 여의치 않으니 잠시 접어 두고 다른 방법을 모색하려는 것이었다. 엄마를 괜히 상황에 끌어들이고 싶지 않았으니까.
하나 지운이 이런 식으로 나올 때마다 조금 곤란해졌다. 사람의 마음을 허물어트리는 노력인 건지, 아니면 저것조차 가식인 건지. 분간하기 어려웠다. 남자의 진심을 파악하기가 너무 어려웠다.
유나는 지운의 말이 진심인지 아닌지 판단하다가 이내 포기했다. 지운이 하는 말은 깃털처럼 가볍게 느껴졌다. 설령 그의 말이 진짜라고 해도 완전히 믿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그는 제게 온전히 신뢰를 주지 못했으니까.
“그래요, 가요.”
그래서 저 또한 가벼워지는 걸까. 유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욕실로 향했다. 나갈 준비를 해야 했다.
모든 채비를 끝낸 두 사람은 문밖을 나서기 전, 무엇을 먹을지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일식 먹을까?”
“네. 오마카세, 비싼 걸로요.”
“음, 당일 예약 받아 주는 데가 있으려나. 기다려 봐.”
“안 되면 다른 비싼 곳으로요. 한우 꽃등심, 토시살, 이런 거.”
“그래그래.”
지운이 스마트폰으로 어딘가에 연락을 하기 시작했다. 식당 예약이라도 하려는 모양이었다. 한데 대화 내용이 가관이었다. 원래 값의 세 배를 얹어 줄 테니 룸으로 예약을 해 달라는 것이었다. 세 배? 유나가 입을 쩍 벌렸다.
“그렇게까지 안 해도 돼요.”
유나가 조용히 입 모양으로 속삭였다. 하나 지운이 고개를 젓더니 이내 통화를 마쳤다.
“이야기가 잘됐으니 괜찮아. 가자, 밥 먹으러.”
“아니…….”
이래도 되는 거 맞나? 유나는 찝찝한 마음을 떨쳐 내지 못하고 그와 함께 문밖으로 나섰다. 익숙하게 차에 오른 다음, 차가 매끄럽게 도로 위를 달리는 것을 느꼈다. 차는 곧바로 식당으로 향했다.
가는 동안에도 유나는 이게 맞나, 생각을 했다. 식당 안으로 들어설 때도 그랬다. 깔끔한 인테리어에 자그마한 인공 호수도 있는 곳이었다. 한 마디로 그냥 비싸 보였다.
지운이 이름을 말하자 점원이 룸으로 지운과 유나를 안내했다. 유나는 룸에 들어서자마자 좀 놀랐다. 인테리어가 아름다웠다. 일본풍으로 잘 꾸민 방을 둘러보며 유나는 말없이 감탄했다. 가격이 궁금해졌지만 괜히 듣게 되면 찝찝해질 것 같아 유나는 말았다. 이미 예약이 된 방이었을 거 같은데… 아닌가?
“이미 예약된 방 아니에요, 여기?”
“취소한 사람이 있어서 괜찮대. 다행이지.”
진짠가? 유나는 긴가민가하면서 자리에 앉았다. 곧 푸딩 같은 계란찜이 나왔다. 한 입 떠먹은 순간 잡생각은 다 날아갔다. 부드럽고 포슬포슬한 계란찜이 입 안에서 녹아내렸다. 유나는 두 입 만에 계란찜을 순식간에 없애 버렸다.
그 뒤로 나오는 음식도 마찬가지였다. 유나는 한 입 만에, 아니면 두 입 만에 모든 음식을 다 먹었다. 입 안에서 녹아내리는 맛이 일품이었다.
식사는 만족스러웠다. 한정식도, 이번에 먹은 일식 오마카세도 전부 다 맛있어서 행복할 정도였다.
“맛있어?”
“네. 진짜 맛있어요.”
후식으로 나온 파르페를 먹으며 유나가 기분 좋게 웃었다.
“영화 볼래, 연극 볼래?”
“영화가 낫지 않아요?”
“그래, 그럼 영화 보자. 뭐 좋아해?”
“저는 액션 영화요.”
유나는 피 튀기고 싸움이 난무하는 액션 영화를 좋아했다. 지운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러면 제일 상영 순위가 높은 액션 영화로 예약할게. 근데 유나는 맛있는 걸 먹으면 기분이 확 좋아지는구나. 웬일로 좋게 대답해 주고.”
아, 생각해 보니 정말 아무렇지 않게 지운의 영화 제안에 그러자고 대답하고 고분고분 다 대답하긴 했다. 깨닫고 나니 조금 짜증이 나서 유나가 인상을 팍 찌푸리며 남은 파르페를 입에 넣었다. 단 게 들어가니 또 짜증이 조금 완화되었다.
식당 밖을 나선 둘은 곧바로 근처에 있는 영화관으로 향했다. 길거리로 나오자마자 지운은 당연하다는 듯 유나의 손을 잡았고 유나는 에라 모르겠다, 하며 손의 힘을 풀었다.
영화 예매도 지운이 했다. 만약에 평범하게 만난 사이였다면 돈 많은 남자 친구 만났다고 행복해했을 텐데. 아니면 남자 친구가 너무 부담하는 것 같아 걱정했거나.
그런데 지운은 연애하기 직전의 남자도 아니고, 남자 친구도 아니고, 그냥 그 무엇도 아닌 저를 감금하고 있는 에스퍼였다.
영화 도중에 화장실을 간다고 하고 도망칠까. 유나는 잠시 고민했다가 말았다. 푸쉬시, 의욕이 재처럼 사라졌다.
영화가 시작하기 전까지 둘은 영화관 내 카페에 잠시 앉아서 커피를 마셨다. 지운은 굳이 유나의 옆자리에 앉아 유나의 몸에 딱 달라붙어 그녀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유나랑 노니까 좋다.”
“네.”
“다음에는 놀이공원이라도 가자. 수족관도 좋고, 전시회도 좋아.”
“…친구 없어요?”
지운이 소리 내어 웃었다. 진짜 없어서 나랑 하려는 건가? 하긴 친구가 없을 것 같긴 했다. 친구가 없다고 생각하니 조금 불쌍했다. 유나도 친구가 많은 편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아예 없진 않았다.
“굳이 남자랑 저런 데 갈 이유는 없잖아.”
“…진짜 친구 없어요?”
“있으면 어떻고, 없으면 또 어때? 유나, 날 너무 이상하게 보는 거 아냐?”
이상하게 볼 수밖에 없지 않나. 자기가 한 행동을 생각해 보라지. 아무리 생각해도 정지운은 자기객관화가 덜 된 사람이었다.
슬슬 상영 시간이 다가왔다. 유나와 지운은 상영관으로 가 미리 자리에 앉았다. 광고가 우르르 나왔다. 유나는 광고를 멍하니 감상했다. 광고도 나름 재밌는 게 많았다. 멍하니 시간 때우기에 좋았다.
영화가 시작되고 유나는 영화에 완전히 몰입했다. 지운은 유나의 어깨에 머리를 기댄 채 영화를 봤다. 지운은 영화에 몰입한 유나의 손가락을 만지작거렸다가,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가 하며 유나의 정신을 흩트렸다. 결국 참다못한 유나가 산만한 지운의 손을 찰싹 때렸다.
“그만 좀 해요.”
작게 속삭이자 지운이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응…….”
그러자 지운이 바로 얌전해졌다. 손만 얌전히 잡은 채 그도 영화에 몰입했다. 유나는 이제 정신이 흐트러지는 일 없이 영화에 완전히 집중했다.
영화는 재미있었다. 박진감 넘치고, 액션 신도 훌륭했다. 그리고 서사도 재미있었다. 가족적인 메시지가 영화 내에 고루고루 분포해 있었다. 유나는 영화 속 아버지 캐릭터에 큰 감명을 받았다. 딸과 아내를 위해 본인을 희생하는 캐릭터였다.
영화가 끝나고, 상영관 밖으로 나오면서 지운이 물었다.
“어땠어, 영화?”
“재밌었어요. 저는 특히 아빠 캐릭터가 인상 깊었어요. 가족을 위해 본인을 희생하잖아요. 솔직히 아빠가 희생해서 죽는 신에선 눈물이 찔끔 나올 뻔했는데 겨우 참았어요.”
“그래?”
유나와 달리 지운은 별 감흥이 없었는지 심드렁하게 대답하고 말았다. 유나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별로 재미없었어요?”
“아니. 재밌었어. 근데 나는 아빠가 없으니까.”
“어…….”
유나가 말을 잃고 지운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지운의 어머니 이름이 정윤미였다. 지운과 같은 성씨였다. 그땐 그러려니 넘겼는데 지금 생각하니 퍼즐처럼 맞아떨어졌다.
“…원래 없었어요?”
“응. 처음부터 없었어.”
“…….”
“그런 눈으로 안 봐도 돼. 원래 없었으니까 별로 아무 생각 없어.”
그래서 부모님과의 관계를 들먹이고, 가족 이야기를 하면서 호소했을 때 들어 먹지 않았던 건가? 유나가 침묵을 지키다가 입을 열었다.
“어머니랑은 사이좋아요?”
“그냥? 그렇게 친하지도 않고, 나쁘지도 않고. 내가 어렸을 때부터 바빠서.”
그렇게 좋지 않다는 소리네. 되레 당사자인 지운은 아무렇지 않아 보였지만 유나는 찬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찝찝해졌다. 묻지 말걸. 후회하면서도 유나가 입을 열었다.
“외롭진 않았어요?”
“어렸을 땐 그랬던 거 같은데… 지금은 잘 모르겠어. 외롭다는 게 뭔지도 모르겠고.”
지운이 태연한 어조로 대답했다. 유나는 물끄러미 지운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기분이 이상해졌다. 괜히 물었어…….
“유나는 엄마가 그렇게 좋아?”
“…네. 엄마 없는 삶은 상상이 잘 안 돼요.”
“왜? 언젠가는 죽을 텐데.”
“하아, 정지운 씨…….”
단어 선택이 왜 저 모양이지? 유나는 화를 내려다 말았다. 한두 번이 아니었으니까.
“그럼 저나 정지운 씨도 언젠가 죽는데 왜 살아요? 사는 동안이라도 원하는 거 하면서 사는 거지. 전 죽을 때까지 엄마 곁에 있을 거예요.”
“그래? 대단하네.”
지운이 순수하게 감탄하며 박수를 쳤다. 비꼬는 게 아니라서 유나는 그게 더 아니꼬웠다. 유나가 손톱으로 지운의 손등을 꼬집었다. 지운이 아야, 과장스럽게 아픈 체했다. 유나는 그런 지운을 흘긋 보며 화제를 돌렸다.
“이제 어디 가요?”
“미술관이라도 갈까? 아니면 어디 가고 싶은 곳 있어? 드라이브해도 되고.”
“운전할 줄 알아요?”
“응. 당연하지. 기사 보내고 우리 둘끼리 드라이브할까?”
“…네.”
지운과 유나는 차가 주차되어 있는 곳으로 향했다. 차에 기대 서 있던 기사가 지운을 보더니 인사했다. 지운이 지갑에서 돈을 꺼내더니 기사에게 건넸다.
“오늘은 쉬어.”
기사가 놀란 얼굴로 돈을 받았다. 지운이 운전석으로 들어가며 유나에게 말했다.
“뭐 해? 얼른 타.”
“네…….”
유나는 얌전히 차에 올랐다. 지운은 능숙하게 차를 몰았다. 유나는 창밖 풍경을 바라보며 생각에 빠졌다. 이렇게 쭉 살게 되면 어떻게 될까. 이렇게 살아도 괜찮지 않을까. 좋은 음식, 좋은 집, 말만 잘 들으면 주어지는 좋은 것들……. 하나 밖으로 혼자서 나갈 수 없고, 애완동물 같은 삶. 제가 그걸로 만족할 수 있을까?
머리가 지끈거렸다. 유나는 눈을 감았다.
눈을 뜨니 집이었다. 어느새? 눈을 깜빡거리자 눈앞으로 지운이 불쑥 나왔다.
“으악.”
유나가 비명을 지르며 몸을 뒤로 물렸다. 지운이 하하 웃었다.
“일어났어? 도중에 유나가 잠들어서. 그냥 집으로 왔어.”
“네…….”
유나가 끔뻑거리며 다시 침대 안으로 파고들었다. 안이 따뜻해서 기분 좋았다. 유나가 계속 누워 있자 지운이 유나 옆에 따라 누웠다.
“또 자는 거야?”
“…….”
집에 있으면 할 게 잠 말고 더 있나. 깨어 있으면 또 지운이 몸을 섞기 위해 달라붙을 게 뻔했다. 피곤하기도 하니 그냥 자는 수밖에. 유나가 눈을 감자 지운이 유나를 품에 껴안고 유나의 등을 토닥거렸다.
“잘 자, 유나야.”
엄마 보고 싶다. 유나는 다시 눈을 감았다.
유나는 저를 흔들어 깨우는 지운의 손길에 눈을 떴다.
“유나야. 나 호출.”
“…몇 시예요?”
“낮 10시.”
나 왜 이렇게 잠이 많아졌지. 유나는 손등으로 눈을 비비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어나서 씻고 준비를 한 다음 지운과 함께 차를 탔다. 차를 타고 가는 동안에도 유나는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다가 스마트폰을 확인했다.
엄마에게서 연락이 수십 통 넘게 와 있었다. 잘 지내냐, 뭐 하고 있느냐, 그런 안부 연락이었다. 유나는 연락을 다 확인하고 짧게 답장했다. 잘 있다고. 답장을 보내고 나니 유나는 더 우울해졌다. 엄마를 직접 보고 싶었다.
“…언제쯤 엄마를 볼 수 있어요?”
“음. 시간 좀 지나면?”
“얼마나요?”
“글쎄. 그건 나도 잘 모르겠네.”
묘한 감정이 심장에서 부글부글 끓었다. 유나는 심호흡을 하며 감정을 진정시킨 후 눈을 감았다. 국경에 도착하려면 아직 한참 남았다.
국경에 도착한 유나는 그때처럼 지운의 옆에 붙어 그를 가이딩했다. 가이딩이라고 해 봤자 손을 잡는 게 전부였지만 지운은 그걸로도 충분하다고 말했다.
가이딩 존을 만들고 싶은데……. 유나는 지운의 눈치를 보며 가이딩 존을 만들 기회를 찾았다. 하나 웬만해선 기회가 생기질 않았다. 지운이 S급 몬스터들을 한 방에 해치우는 데다, 계속해서 손을 잡고 있어서 가이딩 존을 만들 수가 없었다.
“유나야. 무슨 생각해?”
지운이 유나의 어깨를 툭툭 건들며 물었다. 유나가 아차, 하며 고개를 내저었다.
“아무것도요. 그냥…….”
뭐라도 하고 싶다는 생각. 내가 내 힘으로, 내 의지대로 뭔가를 하고 싶다는 생각……. 유나는 멍하니 생각하며 고개를 돌려 주변을 바라보았다. 스킨십으로 가이딩을 하는 가이드도 물론 있었지만, 그보다 가이딩 존으로 가이딩을 하는 가이드가 더 많았다. 그게 더 효율적이기 때문이겠지.
“사령관님!”
그때, 멀리서 누군가 지운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지운이 응? 하며 목소리가 들린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뛰어온 남자가 급한 어조로 말했다.
“스노어 무리가 벽을 타고 침입했습니다!”
“왜 그걸 이제야 말하는 거야?”
“빠른 속도로 침입한 탓에 말씀드릴 새가 없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일단 됐고, 갈게.”
지운이 유나와 잡은 손을 흘긋 내려다보더니 잠시 손을 놓았다.
“잠시만 유나야. 나 빨리 가야 해서. 뛰어갈게? 나 따라와?”
그러더니 그가 뛰어가기 시작했다. 유나는 뭐야? 어리둥절하면서도 어서 빨리 그의 뒤를 쫓았다. 저 멀리 사람처럼 보이지만 사람이 아닌 기괴한 생명체가 보였다. 그리고 그들을 둘러싼 에스퍼들이 그들의 공격에 나가떨어지는 것도 보였다.
사람보다 덩치가 세 배는 더 컸다. 유나는 순간 느껴지는 공포에 온몸의 털이 곤두섰다. 은색 피부를 한 기괴한 생명체, 스노어라고 불리는 몬스터는 눈알이 빨간색에 그 안의 동공이 노란색이었다. 벌어진 잇새로 상어처럼 날카로운 치아가 보였다. 한마디로 끔찍하게 생겼다.
피를 흘리며 나동그라진 에스퍼들이 보였다. 유나는 스노어를 공격하기 시작한 지운과 나동그라진 에스퍼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고민은 짧았다. 유나가 서둘러 에스퍼에게 다가가 외쳤다.
“가이딩 존!”
손을 다이아몬드 모양으로 만들자마자 순식간에 노란 빛의 가이딩 존이 형성되었다. 커다란 가이딩 존이 순식간에 만들어지자 주변에 있던 에스퍼들이 놀라 유나를 바라보았다.
유나는 제가 만들어 놓고서도 당황하며 커다란 가이딩 존을 바라보았다. 커다랗고 반짝거리며 빛나는 가이딩 존이 에스퍼들을 둘러쌌다. 전투 중인 에스퍼들도, 그렇지 않은 에스퍼들도 모두 다.
가이딩 존 안에 둘러싸인 부상을 입은 에스퍼가 피를 토하는 것을 멈추고 점차 몸을 움직였다. 치유가 되고 있었다. 유나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제 가이딩 존 안에서 치유가 되는 에스퍼들을 바라보았다. 치유가 되는 가이딩 존이라니. 유나조차 그 사실을 몰랐다.
그 광경을 멍하니 바라보던 누군가 말했다.
“S급 가이드…….”
스노어 무리를 하나둘 쓰러트리고 있던 지운이 고개를 돌려 유나가 만든 가이딩 존을 바라보았다. 다른 에스퍼들을 감싼 가이딩 존을 본 그의 눈에 서서히 노기가 깃들었다. 그가 스노어를 쓰러트리는 것을 멈추고 유나에게 다가가 그녀의 팔목을 움켜쥐었다.
“유나야. 당장 해제해.”
“왜, 왜요……? 다친 사람들이 낫고 있는데…….”
“당장 해제해.”
지운이 드물게 인상을 쓰고 말했다. 인상 쓴 얼굴을 보고 덜컥 겁에 질렸으나 유나가 고개를 강하게 내저었다.
“시, 싫어요.”
이때까지 네, 네. 그렇게만 대답했다. 최대한 반항하지 않으려 애썼다. 하나 지금은 아니었다. 주변에 사람들도 많았고, 게다가 굳이 이 가이딩 존을 해제하고 싶지 않았다. 유나가 고개를 내젓자 지운의 표정이 좀 더 험악해졌다.
“말 들어.”
“시, 싫어요.”
유나가 다시 한번 더 저항하자 지운의 표정이 싹 사라졌다. 완전한 무표정이 됐다. 무채색 같은 표정에 유나가 몸을 움찔 떨었다.
“네 아버지가 폭주해도 좋아?”
“…….”
협박이었다. 엄마와 아빠를 강제로 떼어 놓아 아빠를 폭주 상태로 만들겠다는. 유나가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또 협박하는 거예요?”
“유나가 말을 안 들으면 어쩔 수 없지.”
턱이 달달 떨렸다. 유나는 고개를 숙여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몸도 분노로 덜덜 떨리고 있었다. 개새끼, 개새끼. 유나가 속으로 중얼거리며 가이딩 존 안으로 들어갔다.
“가이딩 존 해제.”
손을 다이아몬드 모양으로 만들고 해제를 말하자마자 가이딩 존이 서서히 사라지기 시작했다.
가이딩 존이 사라지자마자 지운이 성큼성큼 몬스터가 있는 쪽으로 향했다. 그러고는 스노어 무리를 다시 쓰러트렸다. 커다란 스노어는 괴성을 지르면서 땅으로 쓰러졌다. 덩치가 큰 탓에 스노어에 깔린 에스퍼와 가이드도 있었다. 그들이 비명을 질렀다.
유나는 스노어 주변으로 흩뿌려진 피와 깔린 사람들, 고통에 비명을 지르는 사람들을 보며 입술을 안으로 말았다. 이게 전장이구나. 피부로 실감이 확 들었다. 유나는 다시 한번 가이딩 존을 만들고 싶다는 야릇한 충동을 느꼈다. 하나 그러자마자 지운의 목소리도 떠올랐다.
‘네 아버지가 폭주해도 좋아?’
순간 가슴속에서 무언가 울컥했다. 저 멀리 보이는 뒤통수를 달려가서 후려치고 싶었다. 개새끼, 개새끼, 개새끼. 제가 바보였다. 이렇게 살아도 괜찮지 않을까 생각했던 자신이 바보였다. 내 맘대로 할 수 있는 게 없는 삶이 어떻게 괜찮을 수가 있어.
유나는 턱을 덜덜 떨면서 분노와 설움을 참아야 했다. 지운이 스노어를 모두 물리치고 왔을 때조차 넘쳐흐른 분노는 채 숨길 수 없을 정도였다. 지운이 유나의 뺨을 툭툭 건드렸다.
“유나, 화난 얼굴.”
“…….”
“근데 나도 화나는데.”
유나가 입술을 안으로 말았다. 남의 감정보다 자신의 감정이 중요한 남자……. 소시오패스가 분명했다.
“돌아가자, 유나야.”
유나는 지운이 제 팔목을 붙잡고 이끄는 대로 걸음을 옮겼다. 하나 화난 얼굴은 감추지 않았다.
차에 올라타서도 유나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지운이 유나의 옆에 앉으며 말했다.
“우리 둘 다 화났으니까 쌤쌤이네, 유나야. 근데… 내가 다른 에스퍼는 가이딩하지 말라고 했잖아. 먼저 내 말을 어긴 건 유나야. 근데 유나가 왜 화가 나?”
“제가 왜 당신 말을 다 들어야 해요? 왜 내 맘대로 할 수 있는 게 없어요? 가이딩은 내 능력이잖아요. 왜 내 능력도 내 맘대로 못 쓴다는 거예요?”
“유나는 내 전용 가이드니까.”
“그러니까 왜 내가 당신 전용 가이드냐고요.”
“S급 가이드는 S급 에스퍼에게만 가이딩하는 게 좋아. 괜한 떨거지들한테 해코지당하고 싶은 게 아니라면.”
지운이 말을 하며 유나의 뺨을 부드럽게 쓸었다. 유나가 여전히 지운을 노려보자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S급 가이드가 몇 명 있는지 말해 줄까, 유나야?”
뺨을 쓸어내리는 손길이 부드러우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소름이 돋았다. 유나가 눈을 위로 치떠 지운을 바라보았다.
“유나를 제외하고 두 명이 있었어. 그중 한 명은 죽었어. 왜일 것 같아?”
“…….”
“떨거지 에스퍼한테 납치당했다가 살해당했거든.”
살해. 그 말에 지운이 힘을 줬다. 유나가 몸을 움찔 떨었다.
“유나가 S급 가이드인 걸 알게 된 다른 에스퍼들이 어떻게 반응할 것 같아? 널 고귀하게 대접해 줄 것 같아?”
“…….”
“아니. 오히려 널 이용하려고 하겠지. S급 가이드가 한 명 죽고 나서야 S급 에스퍼들이 S급 가이드를 보호하기 시작했지만, 고작 한 명 남았는걸. 유나 널 제외하곤.”
나 말고 한 명밖에 없다고……. 유나는 멍하니 지운을 올려다보았다. 지운은 그 시선을 어떻게 의식한 것인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괜히 위험에 처할 필요는 없어.”
“…….”
나 말고 한 명밖에 없다.
달리 생각하면 다른 S급 에스퍼들에게 제가 필요하다는 말이기도 했다. S급 에스퍼는 그때 분명 지운을 포함해서 여섯 명이라고 했으니까, 지운 말고 다른 에스퍼들이 꽤 있는 것이다.
유나가 눈을 내리깔았다. 만약에 그들이 저를 원한다면, 그렇게 된다면 정지운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 아닌가?
“이제 유나는 전장 오는 거 금지야.”
유나가 내리깔았던 눈을 들었다. 지운이 빙긋 웃었다.
“유나가 다른 애들 가이딩했으니까. 그 벌. 그리고 유나가 S급 가이드인 걸 다른 애들이 안 마당에 굳이 나갈 필요 없어.”
개새끼. 유나는 속으로 욕설을 짓씹었다.
다음 날, 일어나니 정말로 정지운 없이 집이 텅 비어 있었다. 유나가 눈을 깜빡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지운 씨.”
불러도 대답이 없었다. 거실과 주방을 확인해도 아무도 없었다. …저 없이 호출을 받고 전장에 나간 것이다. 어제 말했던 대로.
“개새끼, 진짜.”
유나가 욕설을 내뱉으며 식탁 위를 확인했다. 그래도 식사는 만들어 놓고 나갔다. 유나는 반찬과 인덕션 위에 있는 냄비를 확인한 후 다시 방으로 돌아왔다.
스마트폰으로 시간을 확인했다. 12시였다.
「유나, 집에 얌전히 잘 있어야 해? ^ㅇ^」 오전 9:45
정지운의 메시지도 하나 와 있었다. 유나는 미간을 찌푸리며 액정을 껐다.
할 게 없었다. 유나는 침대맡에 앉아 있다가 다시 벌떡 일어나 거실로 갔다. 그래도 할 게 없었다. 유나는 다시 방으로 돌아와 데스크톱 앞에 앉아 전원을 켰다.
게임을 하니 시간이 잘 흘렀다. 정신을 차리고 나니 2시였다. 그쯤 되니 슬슬 질려서 끄고 게임기로 다른 게임을 했다. 그것도 한 시간 좀 넘게 하니 질렸다.
유나는 게임기를 방구석에 내팽개치고 거실로 나가 소파에 앉았다. 그러고는 스마트폰으로 이것저것 동영상을 보며 시간을 보냈다. 동영상을 볼 때면 재미있었지만 중간에 광고가 나오면 머리가 띵해졌다.
내가 지금 뭐 하고 있지? 싶어서. 이런 식으로 아무 목적 없이 시간을 소비해도 되는 건가?
동영상 어플을 끄고 이제는 친구들에게 연락을 했다. 다들 뭐 하냐고 물으면 일한다, 수업 듣는다, 하고 대답했다. 그냥 쉰다고 하는 친구는 없었다.
띠링.
도어 록 잠금이 해제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유나는 저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 현관으로 쪼르르 달려 나갔다.
“유나야, 잘 있었어?”
지운이 자연스럽게 제게 다가오는 유나를 껴안으며 유나의 볼에 쪽, 뽀뽀를 했다. 유나는 그 자연스러운 움직임에 저도 모르게 감겨들었다가 이내 지운을 떼어 내며 그를 노려보았다.
“혼자 집에 있으면 할 게 없는데 이렇게 가둬 두고 가면 어떡하란 말이에요?”
“음, 게임기랑 PC랑 스마트폰이랑. 그거로 충분하지 않아? 다른 거 또 뭐 사 줄까?”
“그 얘기가 아니잖아요. 혼자 있기 싫단 말이에요.”
“미안해, 유나야. 최대한 일찍 끝내고 빨리 돌아오도록 노력할게.”
지운이 다시 유나를 품에 안으며 유나의 뒤통수를 쓰다듬었다.
“왜 이래요, 진짜? 놔요.”
“조금만 더, 응? 가이딩 좀 해 줘.”
하아. 유나가 한숨을 쉬며 몸의 힘을 풀었다. 지운이 기다렸다는 듯이 바로 유나를 꽉 껴안으며 유나의 몸 곳곳에 입맞춤을 흩뿌렸다.
“유나야. 지루하겠지만 나 올 때까지 조금만 참아 줘.”
“…….”
유나가 입을 다물었다. 그저 제 등을 둘러 안고 입맞춤하는 그를 가만히 받아들였다.
* * *
시간이 점점 느리게 흘렀다. 유나는 지루함을 없애기 위해 거실을 빙빙 걷기도 했고, 서재에 있는 책을 읽기도 했다.
“재미없어.”
하지만 뭘 해도 재미없었다. 유나는 애초에 책에 관심이 없었으므로 문자의 나열에 흥미를 느낄 리 없었다. 심심해서 미칠 거 같았다. 하루 종일 동영상 어플을 들락거리거나 게임을 하거나 반복하다가 지운이 오면 달려 나가고, 그런 일상의 반복이었다.
지운이 오자마자 유나는 저를 껴안고 다녀왔어, 말하는 지운에게 곧바로 칭얼거렸다.
“너무, 너무너무 심심해요…….”
“심심했어?”
“네…….”
지운이 유나의 등을 부드럽게 토닥거렸다. 유나는 저를 껴안은 품속으로 파고들며 중얼거렸다.
“산책이라도 좀… 하면 안 돼요?”
“으음… 퍼즐이나 큐브 같은 거라도 사 줄까?”
하나 지운은 못 들은 척 화제를 돌리며 유나의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 주고는 유나의 뺨을 손바닥으로 쓰다듬었다. 손이 조금 차가웠다. 유나가 한쪽 눈썹을 찡그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흥미는 없었지만, 그래도 그거라도 하면 시간은 잘 가지 않을까?
“그래. 그럼 나 씻을 동안 좀 골라 놓을래?”
“네.”
지운이 욕실로 곧장 향했다. 유나는 침대로 쏙 들어가 스마트폰으로 퍼즐과 큐브를 검색했다. 생각보다 종류가 무척 다양하고 재미있어 보이는 것도 많았다. 유나는 몇 개를 장바구니에 넣었다.
다 씻고 나온 지운이 머리를 털면서 물었다.
“골랐어?”
“네.”
“보자.”
지운이 유나의 옆에 파고들며 유나가 고른 퍼즐과 큐브를 쭉 보았다. 그러고는 곧장 결제를 완료했다. 결제까지 이어진 시간은 얼마 되지 않았다. 지운이 유나의 볼을 툭, 건드리며 물었다.
“이제 됐지?”
“…네.”
된 건가? 유나는 멍하니 눈을 깜빡거리며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지운이 유나의 얼굴을 붙잡아 제 쪽으로 돌렸다. 그러고는 자연스레 입을 맞췄다. 유나는 익숙한 입맞춤에 입술을 열고서 눈을 감았다. …어제랑 비슷한 일상이었다.
며칠 후, 퍼즐과 큐브가 도착했다. 유나는 지운이 없는 시간 동안 큐브와 퍼즐을 조립하며 놀았다. 재미있었다. 하지만 퍼즐을 완성하고, 큐브도 모두 조립하고 나자 순식간에 흥미도가 떨어졌다.
유나는 집에 온 지운에게 또 심심하다고 졸랐고, 지운은 그럼 이건 어때? 하며 십자수를 권했다. 유나는 또 알겠다고 했다.
십자수도 퍼즐과 큐브처럼 하루 만에 질렸다. 십자수 다음에는 캘리그라피가 뒤를 이었다. 그다음에는 그림 그리기, 그다음에는 색칠 놀이였다. 전부 다 처음에는 재밌었다. 하지만 재미와 흥미는 오래가지 못했다.
“심심해.”
다 맞춰진 큐브를 괜스레 돌리던 유나가 방구석에 던지며 빈집에서 홀로 중얼거렸다. 당연히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아아아, 심심하다고.”
다시 한번 크게 외쳤다. 이번에도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유나는 순간 자신이 미쳤나 생각했다. 아무도 없으니 당연히 대답이 돌아올 리 없는데 대답을 바라는 게 미친 게 아니면 뭐란 말인가.
유나는 에이씨, 발을 굴리며 방구석에 던져 놓은 큐브를 발로 뻥, 찼다. 큐브가 벽에 부딪혀 튀어 올랐다가 다시 바닥으로 떨어졌다.
유나가 거실로 나가 TV를 켰다. 하하 호호, 웃는 사람들이 나왔다. 유나가 화면에 집중했다. 유나가 혼자서 감상평을 주절거렸다.
“재미없어.”
하필이면 유나는 혼자 하는 것에 흥미가 없었다. 그나마 취미라고 할 만한 것이 산책이었다. 그도 아니면 혼자서 백화점 돌아다니기. 맛있는 거 먹기. 친구들이랑 놀기. 전부 이 집에서 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유나는 스마트폰을 켜서 엄마에게 전화도 하고, 친구에게 연락도 했다. 엄마는 매번 전화를 받았지만 늘 하는 말이 같았다. 엄마가 도와줄 테니 어서 나오라는 이야기였다. 유나는 이내 엄마에게 다시 전화하기가 꺼려졌다.
친구들은 처음에는 연락이 빨랐지만 학교에 다니거나 일을 다니기 때문에 답장이 늦어졌다. 그 공백을 체감할 때마다 집에 있는 자신이 무력하게 느껴져서 심심할 때마다 연락하는 것도 횟수를 줄였다.
유나는 스마트폰을 바닥에 내려다 놓고 맥없이 소파에 몸을 기댔다.
“심심해.”
어느 순간부터 모든 것에 시들해졌다. 혼자 놀고 있으면, 자신이 혼자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되어 뼈아프게 사무쳤다.
“…외로워.”
유나가 혼자 중얼거리고 나서 놀란 듯 손등으로 제 입을 막았다.
외로움이라니. 유나는 제가 느끼는 감정을 부정해 보았다. 외로움이란 건 유나에게 익숙하지 않은 감정이었다. 외로움을 느낄 새가 없었다. 엄마가 있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엄마도 없고, 아빠도 없고, 친구도 없고, 아무도 없다…….
정지운밖에 없다.
유나가 소파에 앉은 채 손톱을 물어뜯었다. …유일한 타인이 정지운밖에 없다.
“유나야, 잘 있었어?”
유나는 어느새 지운이 집에 들어올 때마다 반가움을 느끼는 자신을 발견했다. 그건 참 굴욕적인 일이었다. 하나 감정을 막을 순 없었다.
“유나야.”
지운은 혼자 소파에 덩그러니 앉아 있는 유나에게 다가와 그녀를 부드럽게 껴안았다. 유나는 저를 품에 안고 토닥이는 손길에 따스함을 느꼈다.
따스함이라니. 정지운은 따스함과 정반대의 사람인데. 유나는 스스로에게 소름이 돋았다.
하나 혼자 있는 시간이 되면 어김없이 사람의 온기가 그리워졌다. 제가 아닌 유일한 다른 사람인 정지운에게 자신이 점차 점차 기대고 있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
그럴수록 유나는 지운을 애써 무시하고, 밀어내려고도 해 보았지만, 항상 귀결은 같았다. 외로움에 진 유나가 몇 번 날뛰다가 저를 안는 지운의 품 안에서 눈을 감는 것.
지운이 없을 땐 혼자서 놀거나 엄마와 아빠, 친구들과 연락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 언제 보냐는 엄마와 아빠, 친구들의 연락에도 유나는 두루뭉술한 대답을 하며 말하기를 회피했다. 나갈 수 없었으니까.
“유나야, 오늘은 밖에 놀러 나갈까?”
갇힌 지 꼬박 한 달이 되었을 때였다. 밖에 나가자는 소리에 유나는 저도 모르게 간식을 준다는 주인에게 반응하는 강아지처럼 펄쩍 뛰어올랐다. 흥분을 감출 수 없었다.
“네!”
유나가 크게 대답하자 지운이 씩 웃으며 유나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그때처럼 맛있는 거 먹고, 영화도 보고 그러자.”
“네.”
꼬박 한 달 만에 나가는 거였다. 유나는 기뻐하며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으며 나갈 준비를 했다. 나갈 준비를 마치고, 지운과 함께 밖을 나섰다.
유나는 오래간만에 맡아 보는 바깥 공기에 금방 기분이 좋아졌다. 배시시 웃자 지운이 따라 웃으며 유나의 손에 제 손가락을 얽었다.
“어디 가고 싶은 곳 있어?”
“그냥 밖을 많이 돌아다니고 싶어요.”
“먹고 싶은 건?”
먹고 싶은 건 웬만하면 지운이 집에서 다 요리해 주었기 때문에 딱히 먹고 싶은 건 없었다. 유나가 고개를 저었다.
“알겠어. 그러면 오늘은 차 없이 많이 걷자.”
“네.”
유나와 지운은 차 없이, 그저 손만 잡은 채로 앞을 보며 걷고 또 걸었다. 유나는 주변에 있는 건물들을 훑어보면서 오래간만의 바깥세상에 눈을 반짝였다. 한 달 만에 나온 것이라 그런지 바깥 냄새를 맡는 것도, 시원한 공기를 들이마시는 것도, 지나다니는 사람을 보는 것도, 그저 앞으로 걷는 것도, 전부 다 좋았다.
생각해 보면 이 모든 게 예전에는 당연한 것들이었는데.
“유나야. 산책로 따라 걸을까?”
“네.”
지운이 유나와 잡았던 손을 풀고 유나의 허리에 손을 감았다. 그러고는 유나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며 배시시 웃었다.
“오늘 날씨도 별로 안 춥고. 좋다.”
“…네.”
그러고 보니 오늘 날짜가 어떻게 되더라. 집에 오래도록 있으니 날짜 감각을 잊었다. 유나가 스마트폰으로 날짜를 확인했다. 10월 21일. 가을이었다. 벌써… 가을이었다. 분명히 정지운을 만난 게 여름이었던 거 같은데.
갑자기 눈물이 핑, 돌았다.
“유나야.”
유나를 보고 걷던 지운이 걸음을 멈춰 섰다. 그러고는 유나의 두 뺨을 잡아 저를 마주 보게 했다.
“왜 그래?”
“그냥… 그냥요.”
눈물엔 이유가 없었다. 아무런 일렁임 없이 눈물이 솟아올라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유나는 뺨에서 느껴지는 뜨거움에 그제야 제가 눈물을 비처럼 쏟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유나야.”
지운이 당황한 듯 눈썹을 찌푸리더니 유나의 뺨에 흥건한 눈물을 닦아 주었다.
“갑자기 왜 그래?”
이렇게 나온 것만으로 아이처럼 기뻐하는 내가 싫어서요. 유나가 그렇게 대답하려다가 차오른 말을 삼키고 애써 눈을 휘었다. 울고 싶지 않았다. 주변에서 사람들이 저와 지운을 바라보며 숙덕거리는 게 고스란히 들렸다.
다들 치정 싸움인 줄 아네. 유나가 웃으며 제 두 뺨을 그러쥔 지운의 손등 위에 손바닥을 겹쳤다. 그러고는 킁, 코를 먹고 웃었다.
“유나야.”
지운이 아직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표정으로 다시 유나를 불렀다. 유나는 그런 지운을 올려다보며 또 웃었다. 울었다, 웃었다, 이상하겠지. 근데 어쩔 수 없었다. 이렇게 된 건 정지운 때문인걸.
“이제 됐어요. 이제 그만 가요.”
유나가 지운의 손을 내리며 그녀가 먼저 지운과 손을 맞잡았다. 지운은 그게 좋은지 맞잡은 손을 내려다보면서도 어쩔 줄 몰라 하는 얼굴을 했다. 유나는 당황한 정지운이 우습다고 생각했다.
그날 산책은 지운이 내내 유나의 얼굴을 살피고, 유나는 그런 지운을 우스워하면서 이어졌다. 유나는 지운이 제 눈치를 보는 게 그리 나쁜 기분은 아니라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