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 첫 번째 탈출 (1) (5/13)

2. 첫 번째 탈출 (1)

유나는 가진 건 스마트폰뿐이라는 걸 깨달았다. 문자도, 전화도 되지 않는 스마트폰. 정지운이 무슨 짓을 쓴 게 틀림없으니 유나는 오피스텔 바닥에 스마트폰을 버리고 미친 듯이 내달렸다. 지갑도, 스마트폰도, 가진 것 하나 없는 빈털터리 상태였지만 유나는 괜찮았다.

유나는 무작정 택시를 탔다.

“아저씨, 죄송한데 제가 지갑이랑 스마트폰을 잃어버렸거든요? 집에 도착해서 돈 가져올 테니까 태워 주시면 안 될까요?”

기사는 인상을 팍 찌푸리며 싫은 티를 냈지만, 유나가 몇 번 더 사정하자 아가씨 약속 지키라며 허락의 의사를 표했다.

정지운의 집은 유나의 집과 가까웠다. 유나는 집에 도착하자마자 돈을 찾은 다음 택시 기사에게 건넸다.

이제 어쩌지.

정지운이 찾아올까? 당연했다. 집에는 엄마, 아빠 모두 없었다. 유나는 집에 있는 돈을 모조리 싹싹 다 긁은 다음 경찰서로 향했다. 아무리 나라가 에스퍼를 위한다지만 무고한 시민을 모른 척할까?

유나는 경찰서에 가서 경찰관에게 사실대로 이야기했다.

“제가 에스퍼에게 감금당했다가 방금 겨우 탈출했어요.”

유나가 숨을 고르며 다소 격정적인 어조로 말했다. 하나 경찰은 심드렁하게 그런 유나를 바라보며 다시 모니터로 시선을 옮겼다.

“가이드 등록 번호 말씀 부탁드립니다.”

“아뇨, 전 가이드 등록은 안 되어 있는데요… 가이드…거든요?”

“네?”

경찰관이 지금 유나더러 뭔 소리를 하냐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유나는 당황해서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저도 제가 가이드인 줄 몰랐는데요… 아니 이게 이야기가 긴데… 아, 전화 한 통만 빌려주세요.”

“아, 예…….”

경찰관이 어이없어하면서도 본인 스마트폰을 건넸다. 유나는 감사합니다, 인사를 하고는 엄마에게 바로 전화를 걸었다. 뚜르르, 신호음 뒤에 바로 엄마가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엄마!”

―유나야!

엄마의 놀란 마음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외침이었다. 유나는 가슴이 찡해져 눈가를 찌푸렸다. 목소리를 듣자마자 눈물이 날 뻔했다.

“엄마, 나 탈출했어. 지금 ○○ 경찰서야. 빨리 와 줘.”

―알겠어, 엄마가 금방 갈게.

엄마는 당연하다는 듯 대답하며 전화를 뚝 끊었다.

역시, 정지운이 제 스마트폰에 뭔 짓을 했던 것이다. 아무 연락도 되지 않게끔. 유나는 혹시라도 지운이 경찰서에 쳐들어오지는 않을까 경찰서 입구 문이 열릴 때마다 가슴을 졸였다.

“어머니 문자 오셨네요. 지금 거의 다 와 간다고.”

“네…….”

유나는 후우 한숨을 쉬며 경찰서 입구를 바라보았다. 몇 번 모르는 사람이 들어왔다 나갔다를 반복하다가, 문이 열리고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엄마였다.

“엄마!”

유나가 몸을 일으킨 순간, 엄마의 뒤로 또 낯익은 얼굴이 나타났다.

정지운이었다.

“유나야.”

엄마의 뒤에 딱 붙어서, 바로. 엄마의 표정은 참담했다. 유나는 말을 잃고 멍하니 엄마와 함께 들어오는 지운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지운은 여전히 빙글빙글 웃고 있었다.

“저기, 경찰관 아저씨… 저 남자거든요? 저 납치한 사람이… 저 좀 살려 주세요.”

“아, 여긴 어쩐 일로 오셨습니까.”

경찰관이 유나의 말을 무시하고 들어오는 지운을 향해 깍듯이 고개를 숙여 인사하며 말했다. 유나가 입을 쩍 벌렸다. 뭐야?

“내 가이드가 도망쳐서. 여기 얼마나 있었어?”

“20분쯤 되는 것 같습니다.”

“그럼 데려갈게.”

“넵.”

뭐야, 뭐야? 이 새끼들 뭐야? 유나가 경악하며 눈을 굴렸다. 지운은 당연하다는 듯이 유나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유나의 엄마도 지운의 걸음을 따라 움직였다. 지금 보니 보이지 않는 힘에 의해 강제로 묶인 상태인 듯했다. 유나가 엄마… 작게 중얼거리자 엄마의 눈이 일그러졌다.

유나는 저도 모르게 가까이 오는 엄마의 손을 잡았다. 잡자마자 짜릿한 통증이 느껴졌다.

“앗!”

유나가 놀라 바로 손을 뗐다.

“유나야, 그러다 다쳐. 함부로 손대지 마. 지금 내가 힘을 쓰고 있는 상태라서.”

“아니… 도대체… 우리 엄마한테 뭔 짓 한 거예요?”

“뭔 짓 안 했어. 그냥 오는 길에 마주쳐서, 같이 가려고 연결 좀 한 거지.”

“빨리 풀어요!”

유나의 말이 끝나자마자 연결이 풀린 듯 유나의 엄마가 허헉, 숨을 들이마시며 앞으로 휘청거렸다. 유나가 곧바로 잡아 주지 않았더라면 넘어지고 말았을 것이다. 유나가 이글거리는 눈으로 지운을 노려보았다.

“고작 도망친 곳이 경찰서야, 유나야? 너무 귀엽다.”

유나는 이를 악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경찰관 모두 이 상황을 흥미롭게 관전할 뿐, 그 누구도 도와주는 이 없었다.

그래, 어렴풋이 이럴 걸 알고 있었으면서도 왜 경찰서에 와 버렸을까. 지난 시간을 후회해도 소용없었다.

“유나야, 가자. 어머님은 집까지 데려다 드리고.”

“시, 싫어요…….”

싫다는 말에 지운의 웃음이 싹 가셨다.

“유나야. 나 화나는 거 참고 말하는 거니까, 내 말대로 해. 알겠지?”

웃음기가 싹 가진 무표정한 얼굴은 소름이 돋을 정도로 무서웠다. 유나도 순간 두려움에 온몸의 털이 곤두섰을 정도로. 유나는 비틀거리는 엄마를 껴안으며 주먹을 꽉 쥐었다.

“유나야. 어머니 많이 좋아하지? 그럼 얌전히 따라와.”

협박이었다. 이런 미친 협박을 하는데도 경찰서에 있는 모두 관전할 뿐이다. 여기 내 편은 엄마밖에 없구나. 가슴속에서 무언가 울컥했다.

“유나야. 엄마는 괜…찮아.”

엄마가 입을 열었다. 말을 잘 잇지 못하는 걸 보아 여기까지 올 때 무슨 일이라도 있었던 듯했다. 유나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엄마, 저 사람이 엄마한테 뭔 짓 했어?”

“엄마는 됐으니까… 빨리 도망쳐. 얼른.”

“왜 둘이 계속 속닥거려? 유나야, 빨리 오라니까? 나 힘 쓰게 하지 말구.”

지운이 성큼성큼 다가와 결국 유나의 팔을 쥐고 끌었다. 유나의 품에 안겨 있던 유나의 엄마가 바닥으로 쓰러졌다. 지운이 어이쿠, 하며 바닥에 쓰러진 유나의 엄마를 염동력으로 세워 일으켰다.

그는 아까처럼 다시 유나의 엄마를 저와 연결을 시키고는 앞으로 걸었다. 엄마가 자연스레 그와 연결된 채 타의로 걷게 되자, 유나는 어쩔 수 없이 그의 뒤를 따랐다. 그를 따라 나갈 때까지 경찰 중 아무도 그녀를 돕는 사람이 없었다. 개같은 새끼들.

“유나야, 우선 어머님부터 집에 데려다 드리자.”

“…….”

유나는 입을 다물고 지운을 노려보았다.

“우와, 내 얼굴 뚫리겠다. 무서워.”

지운이 과장되게 몸을 떨었다. 저런 능구렁이 같은 태도도 짜증이 확 올랐다. 유나는 부글부글 끓는 속 때문에 이대로 화병에 걸려 돌연사해도 이상할 것 없다고 생각했다.

“자, 차에 타.”

그때처럼 검은 차였다. 유나는 지운과 연결된 엄마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차에 올랐다. 유나의 엄마가 계속해서 유나에게 입 모양으로 중얼거렸다.

‘도망쳐.’

유나는 지운 몰래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엄마가 그렇게 말하지 않아도 계속 도망칠 거야. 그렇게.

경찰서에서 곧바로 유나의 집으로 출발한 차는 얼마 지나지 않아 유나의 집 앞에 멈췄다. 지운은 차 문을 열자마자 지운의 엄마를 부축해 문 앞에 갖다 세웠다.

“푹 쉬세요, 어머님.”

“…….”

“어머님도 저 싫으시죠? 저도 어머님 싫어요. 유나 계속 데려가려고 하구.”

유나의 엄마 또한 유나처럼 지운을 말없이 노려보았다. 지운이 하하 웃었다.

“모녀가 닮았네? 노려보는 게 똑같아.”

“우리 엄마 모욕하지 마세요! 기분 나쁘니까.”

차 안에 있던 유나가 소리쳤다. 지운이 어깨를 으쓱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우, 무서워. 알겠어, 유나야. 미안 미안.”

이런 거엔 사과하고, 정작 사과가 필요한 일엔 사과하지 않고. 뇌 과학원에서 이 사람의 뇌를 연구 좀 해 줬으면 좋겠다. 유나는 지운의 검은 머리통을 뚫을 듯 째려보았다.

이대로 그 오피스텔에 가면 더 경비가 삼엄해지겠지. 도어 록도 교체할 테고. 그럼 어쩌지. 유나는 달리는 차 안에서 손톱을 뜯었다. 지운은 유나의 옆에 앉아 유나에게 머리를 기댄 채 눈을 치떠 유나를 바라보았다.

“유나야, 무슨 생각해? 또 도망칠 생각?”

“…경찰서까지 어떻게 알고 왔어요?”

“유나가 갈 곳이야 뻔하지. 유나 집, 아니면 경찰서. 그때도 신고한다고 화냈었잖아.”

내가 미쳤지. 경찰을 믿다니. 유나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근데 경찰이 어떻게 당신을 알아요? 당신 뭐 하는 사람이에요?”

“나? 그냥……?”

지운이 배시시 웃으며 유나의 어깨에 뺨을 비볐다. 그러고는 손으로 유나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오늘 집에 오자마자 유나 없어서 돌아 버리는 줄 알았어.”

“…….”

“문고리는 작살나 있지, 유나는 없지. 밥은 또 먹고 없지.”

“…….”

“밥은 맛있었어?”

“네.”

사실이었으니까 그리 대답했다.

“다음번엔 더 맛있는 거 해 줄게. 근데 나 오늘 좀 많이 화났었다? 사실은 음… 유나를 어떻게 구워삶을까, 생각했는데. 유나 얼굴 보니까 또 괜찮아지더라.”

개가 짖는다. 유나는 백미러를 바라보며 어디서 문을 벌컥 열고 나갈지 고민했다. 차가 멈춰 섰을 때 뛰쳐나갈까? 아니면 달릴 때 뛰쳐나갈까?

제집에서 정지운의 집까진 그리 멀지 않았다. 그러니까 시간이 얼마 없었다. 유나는 백미러를 주시하다가 제 어깨에 기댄 지운을 흘긋 내려다보았다.

어떻게 시선을 빼앗지.

시선이 마주친 지운이 유나를 보고 생긋 웃었다. 마치 따라 웃어야 할 것 같지만 유나는 무표정을 고수했다. 처음 봤을 땐 참 잘생긴 얼굴이라고 생각했는데……. 여전히 잘생기긴 했지만 짜증 났다.

“왜 그렇게 봐?”

“…아니에요.”

유나는 다시 백미러를 흘긋 보았다가, 지운의 두 뺨을 손으로 그러쥐었다. 지운의 눈이 크게 뜨였다. 유나는 크게 뜨인 그의 눈을 바라보며 천천히 얼굴을 가까이 댔다. 그리고 먼저 입을 맞췄다.

지운이 여전히 눈을 뜬 채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키스를 받았다. 유나는 어설프게나마 지운의 아랫입술을 빨았다. 토끼처럼 뜨인 지운의 눈이 점점 원래의 모양을 되찾더니, 이내 초승달처럼 반으로 접혔다.

유나가 한 손으로 지운의 뒤통수를 잡고 다른 한 손을 아래로 내렸다. 열심히 입술을 빨며 유나는 지운이 방심하기를 속으로 바라고 또 바랐다.

차가 신호에 걸려 멈춘 순간, 유나가 차의 잠금쇠를 풀고 바로 지운을 퍽, 밀치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유나 스스로 생각해도 순식간이었다.

유나는 뛰쳐나가자마자 곧바로 인파들 속에 숨어들었다. 에스퍼는 일반인에게 힘을 쓰는 것이 불법이었다. 설마 정지운이 이렇게 많은 사람들에게 힘을 쓰겠어? 유나는 그리 생각하며 미친 듯이 사람들 속으로 파고들어 뛰고 뛰었다. 이곳이 번화한 곳이라 다행이었다.

“유나야.”

저 뒤에서 지운이 유나의 이름을 불렀다. 천연덕스럽기까지 한 부름에 유나의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잡히면 난 죽는다. 유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허겁지겁 앞을 향해 뛰고 뛰었다.

“으아악!”

뒤에서 사람들의 비명 소리가 들렸다. 설마, 하며 유나가 뒤를 흘긋 돌아보았다.

설마, 하는 예상은 맞았다. 지운이 유나의 뒤에 있는 사람들을 염동력으로 밀쳐 내며 유나를 쫓아오고 있었다.

미친 새끼! 미친 새끼! 유나는 꺄악― 비명을 지르며 서둘러 어떤 빌딩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미친 듯이 계단을 올랐다.

헉, 헉, 헉, 헉. 숨이 벅찼다. 유나는 계단을 오르다가 뒤따라오는 발걸음 소리를 듣고 황급히 몸을 돌려 여자 화장실 안으로 들어갔다.

“유나야~”

지운이 유나의 이름을 불렀다. 유나는 제 벅찬 숨소리가 혹여나 들릴까 싶어 손으로 입을 가리고 벽에 딱 붙었다.

“우리 유나, 어디로 갔을까?”

유나의 몸이 사시나무처럼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목소리가 가까워졌다.

“꼭꼭 숨어라, 머리카락 보일라~”

노랫소리와 발걸음 소리가 번갈아 가며 들렸다. 유나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고였다. 저는 잡힐까 바들바들 떨고 있는데, 저 새끼는 노래를 부르고 있다니. 어이가 없으면서도 서글프고 억울했다.

발걸음 소리가 더 가까워졌다. 유나는 지금이라도 여기서 뛰쳐나갈까, 칸 안으로 들어갈까 고민했다. 주변을 둘러보았다. 화장실엔 창문도 없었다. 유나가 탄식했다.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유나는 최대한 발소리를 죽여 칸 안으로 들어갔다.

“유나야~”

제발 이름 좀 부르지 마. 유나는 제 숨소리가 들리지 않기를, 제발 여기를 지나쳐 가기를 간절히 바라며 두 손으로 입을 꾹 눌렀다.

제발, 제발, 제발.

“유나. 빼꼼 보이는 발 귀엽다.”

아.

들켰다.

유나가 두 손을 아래로 내리자마자 문이 빠각 부서지며 두 동강으로 조각난 문짝이 바닥에 쾅,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발도 작네?”

지운이 말했다. 유나는 멍하니 부서진 문짝을 바라보았다가 고개를 들어 지운을 바라보았다. 지운의 얼굴에 웃음기가 하나도 없었다.

섬뜩한 한기가 목 뒤로 스쳐 지나갔다. 유나가 아랫입술을 깨물며 눈을 굴렸다. 지운이 한 걸음, 유나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유나가 저도 모르게 뒤로 피했다. 그러자 지운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지운이 다시 한 걸음 앞으로 걸었다. 유나 또한 뒤에 바짝 붙었다.

“짜증 나네.”

지운이 그리 말하며 순식간에 유나에게 바짝 다가가 유나의 목덜미를 움켜쥐었다.

“왜 이렇게 신경을 거슬리게 하지?”

“컥…….”

유나가 제 목덜미를 쥔 지운의 손을 떼어 내려 하며 눈을 찌푸린 채 지운을 올려다보았다. 웃음기가 싹 가신 눈동자는 너무 짙어서 그 속의 감정이 무엇인지 도저히 들여다볼 수 없었다.

생각해 보면 정지운은 웃고 있을 때가 대부분이었다. 다른 표정은 잘 떠오르지 않을 정도로, 늘 빙글빙글 웃고 있었다. 저런 무서운 표정은 처음이었다. 유나는 본능적인 두려움에 휩싸였다. 죽을 수도 있겠다. 그런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벗어, 유나야.”

지운이 손을 떼며 유나에게 명령했다. 유나가 딸꾹, 딸꾹질을 하며 지운을 흘끔 보았다. 지운이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

“벗어.”

“…흐으.”

유나는 눈을 굴리며 시간을 벌다 번복되지 않는 명령에 결국 손을 들어 제 옷자락을 움켜쥐었다. 하나 쥐기만 할 뿐, 차마 벗을 수 없었다.

“내가 벗길까, 네가 벗을래.”

“제, 제가 벗을게요.”

여기서 하는 건가. 유나의 눈에 그렁그렁 고인 눈물이 바닥으로 뚝, 뚝 떨어졌다. 유나가 훌쩍거리며 울기 시작하자 지운이 고개를 갸웃했다.

“왜 네가 울지?”

“여, 여기서 할 거예요? 진짜로?”

“응. 싫으면 얌전히 집에서 기다리고 있었어야지.”

“내가… 짐승이에요? 집에서 기다리고 있게? 난 사람이에요.”

“내 가이드지. 너는.”

가이드……. 난 그냥 가이드일 뿐인가?

유나가 고개를 들어 지운을 바라보았다. 고인 눈물이 또르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지운이 유나의 흐른 눈물을 바라보다가 하아, 한숨을 쉬었다.

“왜 계속 울어. 마음 아프게.”

“마음이, 아프면… 그런 말 하지 말지.”

유나가 끅끅거리며 말을 이었다. 한번 눈물이 터지자 봇물처럼 확, 터졌다. 유나가 이내 아이처럼 엉엉 소리 내어 울기 시작했다. 지운이 당황한 듯 어어, 하며 유나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내가 왜… 왜, 어엉, 엉… 엄마랑, 같이 있지도 못하고… 집에 갇혀서… 연락도 못 하고… 지, 직장도, 흑, 잘리, 고, 흐윽.”

“울지 마, 유나야.”

당황한 지운이 유나의 얼굴을 이 방향 저 방향 바꿔 가며 보다가 결국 엉엉 우는 유나를 품에 껴안았다. 유나는 지운의 셔츠에 뺨을 묻은 채 그대로 펑펑 눈물을 내보냈다. 눈물은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냥 억울하고 다 싫었다. 말도 안 통하는 이 미친 새끼도, 졸지에 가이드가 되어 버린 자신도, 갇혀 있다가 탈출하니 미친 새끼가 잡으러 온 이 상황도. 전부 다.

“제 스마트폰은 언제 손댄 거예요? 전화도, 문자도, 흐으… 다 안 되고.”

“첫날이랑 둘째 날에. 유나가 혹시 도망칠까 봐 유나 가족이랑 친구한텐 연락 못 하게 막아 놨다가, 나중엔 그냥 다 막았어.”

“왜요?”

“지금처럼 이렇게 도망칠까 봐.”

“저 좀 그냥 놔주면 안 돼요?”

“미안. 안 돼.”

벽도 이런 벽이 없었다. 고장 난 벽시계처럼 정지운은 늘 똑같은 대답을 하고, 자신도 똑같은 말만 한다. 싫어요, 놔줘요, 그만해요. 물론 그가 제 말을 들어준 적은 거의 없었다. 유나는 긴 숨을 내쉬며 고개를 숙였다. 가슴이 술렁거렸다.

어차피 말해 봤자 소용없다면…….

“다 울었어? 이제 갈까?”

지운이 고개를 숙인 유나의 정수리를 쓰다듬으며 물었다. 유나는 제 머리를 쓰다듬는 지운의 옷자락을 꽉 쥐며 입을 열었다.

“…이제 도망, 안 칠게요… 그러니까 약속 하나만 해 줘요.”

그러고는 고개를 들면서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지운이 유나의 뺨을 손등으로 문지르며 심드렁한 말투로 뭔데? 하고 물었다.

“엄마랑 친구랑… 연락만 되게 해 줘요. 당신 집에서… 살 테니까.”

지운이 잠시 말없이 유나를 바라보았다. 유나는 끅, 숨을 크게 들이켜며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남아 있던 눈물이 다시 뺨을 타고 흘렀다. 지운은 또르르 흘러내리며 턱에 고인 유나의 눈물을 흘긋 보았다가 다시 유나의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유나는 이때까지 거짓말만 했잖아.”

“이제 거짓말 아니에요… 안 도망칠 테니까, 연락만 되게 해 줘요. 숨통만 좀 트이게…….”

지운이 손가락으로 유나의 턱에 고인 눈물을 툭, 건드렸다. 눈물이 지운의 손가락 끝에 닿았다가 흡수되었다. 유나는 지운의 행동을 예의 주시 하며 눈동자를 굴렸다.

“정말로 도망 안 칠 거야?”

“…네.”

“저번처럼 약속했다가 배신할 일 없는 거지?”

“…네.”

유나가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지운이 일렁거리는 유나의 눈동자를 바라보더니 눈을 내리깔았다. 그가 손을 들어 유나의 젖은 뺨을 그러쥐었다.

“유나야. 나도 병신인가 보다. 네가 울면서 그러니까, 믿고 싶어졌어.”

“…….”

“아까처럼 먼저 입 맞춰 봐.”

지운이 새끼손가락을 내밀며 말했다. 유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이내 까치발을 들고 지운의 입술에 쪽, 입을 맞춘 후 지운의 새끼손가락에 제 새끼손가락을 얽었다.

“짧아, 다시.”

지운이 말했다. 유나는 입술을 다물었다가 다시 까치발을 들고 지운의 입술에 제 입술을 오래도록 문질렀다. 지운이 잇새로 후후 웃음소리를 흘렸다. 지운이 유나의 몸을 꽉 껴안아 들었다. 그러고는 한 손으로 유나의 뒤통수를 받치고 유나의 입 속으로 혀를 넣었다.

“흐으.”

지운이 유나의 혀에 제 혀를 비볐다. 유나가 흐느끼며 혀를 뒤로 빼자 곧바로 그 뒤를 쫓아가 다시 뱀처럼 얽었다. 지운은 집요하게 유나의 혀를 얽으며 타액을 섞었다. 눈을 반쯤 뜨고 있던 유나가 결국 눈을 감았다.

“우으응…….”

유나가 신음하며 지운의 어깨를 붙잡았다. 유나의 몸이 완전히 벽에 달라붙었다. 지운이 혀로 입천장을 긁었다가 이내 유나의 혀 뒤쪽을 쑥 눌렀다. 유나가 몸을 움찔 떨었다.

“…유나야, 그냥 여기서 하면 안 돼?”

지운이 아랫도리를 비비며 물었다. 유나는 천 너머로 여실히 느껴지는 곧추선 것에 감았던 눈을 떴다. 지운이 유나의 입술에 가볍게 쪽, 입을 맞추며 다시 물었다.

“응? 하자.”

“진짜… 변태.”

지운이 고개를 빠르게 두세 번 끄덕였다.

“응, 나 변태 맞으니까. 넣게 해 줘, 응?”

유나는 입술을 안으로 말았다. 아무리 그가 달아올랐다 해도 여기는 밖이었다. 허름한 빌딩이라고는 하나 언제 사람이 올지 몰랐다. 지운이 유나의 생각을 알아차린 듯 고개를 돌려 염동력으로 부서진 문짝을 화장실 입구에 세웠다.

“내가 입구 막아 놓을게.”

그렇게 하고 싶나. 유나가 얼빠진 표정을 지었다. 지운이 하아, 한숨을 쉬며 아랫도리를 다시 한번 유나에게 비볐다. 그러고는 애교를 부리듯 유나의 목덜미에 뺨을 비비며 턱에 뽀뽀를 했다.

“하자아아.”

쪽, 쪽, 쪽, 쪽, 쪽.

뽀뽀가 멈추질 않았다. 유나는 결국 지운의 조름에 못 이겨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지운이 싱긋 웃으며 유나의 옷 안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브래지어를 위로 올린 지운이 유나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고 유두를 입에 물었다.

“응…….”

유나가 신음을 참기 위해 손등에 입술을 묻었다. 지운이 유나의 유두를 소리 내어 빨면서 다른 손을 아래로 내려 유나의 바지 지퍼를 내렸다. 그러고는 속옷과 함께 바지를 끌어 내렸다.

바깥 공기와 맨살이 닿자 유나의 솜털이 곤두섰다. 지운이 귀여워, 속삭였다. 아래에 손을 대려던 지운이 잠시 멈칫하더니 가슴에서 얼굴을 들었다.

“아. 손 안 씻었다.”

그러고는 곧장 화장실 세면대로 가 비누로 손을 씻기 시작했다. 유나는 아까처럼 얼빠진 얼굴로 손을 씻는 지운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허… 헛웃음을 내뱉었다.

이상한 부분에서 깔끔하고, 이상한 부분에서 다정한 사람. 정말 종잡을 수 없는 남자였다.

손을 씻고 온 지운이 손을 비비며 제 손에 호오, 입김을 불었다.

“막 씻어서 차가워.”

손을 데우는 것이었다. 유나는 그런 지운을 바라보다가 이내 손을 내밀어 지운의 머리통을 껴안았다. 그냥, 그러고 싶었다. 아까처럼 가슴에 파묻힌 지운이 음, 소리를 내었다가 이어 웃었다.

“유나 가슴에서 좋은 냄새나.”

“…당신 집에서 씻었으니까요.”

“당신 말고 지운 오빠.”

“…….”

유나는 입을 다물었다. 지운은 손에서 한기가 사라지자마자 엄지와 검지로 유나의 아래 살을 벌렸다.

“벌써 젖었네?”

유나가 시선을 피했다. 키스를 하고 가슴을 빠는데 자연스럽게 나올 수밖에 없지 않은가. 유나는 젖은 살을 손가락으로 꾹 누르고 위아래로 만지는 손길을 느끼며 안쪽 깊숙한 곳에 열기가 뭉치는 걸 느꼈다. 침대가 아닌 바깥인데도 몸은 당연하다는 듯 쾌락을 좇았다. 아니 오히려 상황의 특수성 때문인지 더 달아올랐다.

유나는 지운의 머리를 껴안은 채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냥, 빨리……. 저도 모르게 머릿속으로 그런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유나는 아랫입술을 꽉 깨물며 제 아래를 희롱하는 지운의 손길에 몸을 떨었다. …기분 좋았다.

“흐으… 하.”

참으려고 해도 잇새로 계속해서 소리가 새어 나갔다. 유나가 고개를 젖히며 몸에 힘을 주었다. 그냥, 그냥…….

“빨리 넣어요…….”

유나가 제 클리토리스를 꾹 누르는 지운을 향해 재촉했다. 아래로 몰린 열기 때문에 머리가 홧홧했다. 참을 수 없었다. 그냥 빨리 박아서 흔들어 주었으면. 유나는 이런 생각을 하는 자신에게 스스로 놀랐으나, 우선 급한 건 지금 쾌락이었다. 지운이 눈을 휘며 웃었다.

“재촉하는 유나 귀여워.”

지운이 바지를 허벅지까지 내렸다. 유나는 드러난 흉흉한 것에 두려움보다 기대를 느꼈다. 유나가 먼저 다리를 넓게 벌렸다. 지운은 기둥에 콘돔을 씌운 다음, 유나의 다리 사이로 파고들며 기다렸다는 듯 한 번에 성기를 푹, 깊게 삽입했다.

“하으으으!”

유나가 한 번에 파고든 것에 바르르 떨며 지운의 어깨에 손톱을 세웠다. 지운이 나른한 한숨을 쉬었다. 한참을 유나의 안에 파묻고 있던 지운이 천천히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으응…….”

고개를 젖힌 유나가 손가락을 구부렸다 펴며 눈을 감았다. 안을 뭉근하게 눌렀다가 빠져나가는 게 기분이 좋았다. 더, 더, 더……. 저도 모르게 유나가 그렇게 말했다.

지운이 유나의 요청에 따라 움직임에 속도를 높였다. 퍽, 퍽, 퍽. 움직임이 빨라지자 벽에 달라붙은 유나의 몸이 위태롭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지운이 유나의 몸을 밀어붙이며 단단하게 고정했다. 지운이 유나의 뺨에 제 뺨을 밀착했다.

“기분 좋아, 유나야.”

지운이 상체를 밀착한 채 허리를 계속해서 움직였다. 유나는 미친 듯이 제 안을 빠져나갔다 다시 들어오는 성기에 숨을 허덕거리며 지운의 상체를 끌어안았다.

“흑, 하앙, 아.”

좋아.

유나는 지운을 꽉 끌어안은 채 잠시 모든 일을 잊고 아래의 감각에 집중했다. 굵은 기둥이 내벽을 짓쳐들어왔다가 안을 긁으며 빠져나가는 감각을. 빠져나갈 때마다 저릿하게까지 느껴지는 쾌감이 척수를 내달려 뇌까지 잠식했다. 유나의 몸이 바들바들 떨렸다.

“그만, 그만… 히익, 흐! 앙!”

“아, 씹. 너무, 조여 유나야.”

“아, 하앙, 안 돼, 흑! 아! 그만, 그만……!”

유나가 지운의 목덜미에 입술을 묻은 채 비명을 질렀다. 아래에서 뭔가 나올 것 같았다. 유나가 아래에 힘을 주고 참자, 지운이 욕설을 내뱉으며 유나의 목덜미에 이를 세웠다.

“유나야, 힘 빼.”

지운이 안으로 치받은 채 가만히 숨을 골랐다. 조이는 힘이 너무 강했다.

“씨팔, 조루도 아닌데…….”

쌀 것 같네. 지운이 중얼거리며 긴 한숨을 쉬었다. 품에 안긴 유나가 아직도 몸을 바르르 떨며 거친 숨을 내뱉고 있었다. 지운이 제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은 유나의 머리를 조심스럽게 툭, 툭 건드렸다.

“유나야.”

“움직이지, 마세요… 뭐 나올, 것 같아서… 당신 옷, 젖어요…….”

유나가 지운의 품에 더 파고들며 고개를 흔들었다. 지운이 귀엽다는 듯 피식 웃음을 흘리며 유나의 뒤통수를 쓰다듬었다.

“으음, 응. 알겠어.”

지운이 여전히 유나의 아래에 제 것을 파묻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사정 직전에 멈춘 것이지만 지운은 별 내색 하지 않고 유나의 머리를 계속해서 쓰다듬었다.

“이제 괜찮아?”

“…네, 조금…….”

유나가 고개를 들었다. 유나의 이마와 지운의 코가 가볍게 부딪혔다. 지운이 배시시 웃으며 유나의 이마에 제 코를 비볐다.

“나머지는 집 가서 할까?”

“…네.”

지운이 마지막으로 유나의 이마에 쪽, 입을 맞추고는 허리를 뗐다. 자연스레 안을 메우고 있던 것 또한 빠져나갔다. 지운이 콘돔을 벗기고는 휴지통에 버렸다. 유나는 아직도 흉흉한 지운의 아래를 보고는 흘긋 지운의 눈치를 봤다.

“…괜찮아요?”

“뭐가?”

“아직, 안 괜찮은 것 같은데…….”

“응. 나머지는 집 가서 하자.”

지운이 바지를 올렸다. 유나는 민망한 미소를 지으며 눈을 찌푸렸다.

“그, 저기… 너무 티 나는데.”

“그럼? 유나가 나 쌀 때까지 빨아 줄래?”

“…아뇨.”

“나중에 알아서 풀려.”

지운이 유나의 옷을 추슬러 주며 말했다. 유나는 옷매무새를 마지막으로 단장하고는 제게 내밀어진 손을 흘긋 보았다. 지운의 손이었다. …잡아야 하나. 유나는 망설이다가 손을 잡았다. 지운이 유나의 손에 깍지를 꽉 끼었다.

지운이 부서진 문짝을 발로 툭, 치고는 화장실 입구 밖으로 나갔다. 유나가 입구 바닥에 덩그러니 부서져 있는 문짝과 지운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괜찮아요? 저렇게 둬도.”

“응. 알아서 애들이 다 커버 쳐 주더라~ 괜찮아~”

해맑다 못해 발랄하기까지 한 목소리였다. 유나는 인상을 찌푸렸다. 에스퍼란 참 좋네. 남의 빌딩 화장실 문짝을 부숴도 아무 문제 없으니…….

가이드가 아니라 에스퍼로 태어났으면 참 좋았을 텐데. 아니, 그냥저냥인 급 낮은 에스퍼 말고 S급으로. 유나는 가이드로 태어난 제 운명을 원망했다.

빌딩 계단을 손을 잡은 채 쭉 내려갔다. 유나는 연인도 아닌데 왜 그와 손을 잡고 걷고 있는지, 조금 궁금해졌다. 이것도 가이딩의 일종인 걸까…….

가이딩은 그냥 스킨십만 하면 끝인 건가? 유나는 가이딩에 대해 무지했다. 유나가 고민하다가 지운에게 물었다.

“가이딩은 그냥 스킨십만 하면 되는 건가요?”

“아니? 스킨십이 제일 효과가 좋긴 하지만, 급 높은 가이드는 가이딩 존을 만들어서 그 안에서 여러 명의 에스퍼를 가이딩하기도 해. A급 이상은 되어야 가능하지만.”

그럼… 나도 그런 방법이 가능한 걸까? 호기심이 샘솟았다. 그때 에스퍼 센터에서 검사한 가이드 검사는 정식 검사가 아니었다. 지금은 억제제도 먹고 있지 않으니까 정식 검사를 받아도 되지 않을까. 제 급을 알고 싶었고, 의사에게 자세한 설명도 듣고 싶었다.

“그… 저 가이드 정식 검사를 받고 싶어요. 그때 센터에서 한 건 억제제 효과가 좀 남아 있었을 테니까… 이번에 제대로요.”

“음.”

지운이 고개를 갸웃하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참에 가이드 정식 등록도 하고. 그게 좋겠네.”

“정식 등록은… 안 하고 싶어요.”

뭐든 기록에 남는 건 싫었다. 등록도, 각인도, 무엇도. 유나는 지나치게 가이드로 등록되는 것에 두려움과 불쾌함을 느꼈다. 엄마와 똑같은 삶을 살게 될까, 그런 막연한 불안감이 들었다.

지운은 불안한 듯 입술을 안으로 마는 유나를 흘긋 내려다보았다가 대답 없이 앞을 향해 걸었다. 유나는 아직도 깍지를 끼고 있는 두 손을 내려다보며 대답을 기다리는 걸 포기했다. 지운은 여전했다.

집에 도착한 지운은 도착하자마자 유나에게 달려들었다. 현관에서 시작된 정사는 주방에서 절정을 맞이했다. 식탁 위에는 유나가 꾸깃하게 구겨 버리고 간 메모지가 펼쳐진 채 다시 올려져 있었다.

유나는 나체로 식탁에 엎드린 채 숨을 할딱였다. 지운은 정사의 여운을 즐기기라도 하듯 유나의 등에 입맞춤을 흩뿌리며 손바닥으로 유나의 허리와 배를 쓰다듬었다.

“유나야. 먹고 싶은 거 있으면 말해. 해 줄 테니까.”

“…갈비찜.”

“알겠어.”

지운이 엎드린 유나의 몸을 돌려 다시 유나의 다리를 벌렸다. 또? 묻기도 전에 그가 다시 삽입했다. 유나는 흐느끼며 식탁을 움켜쥐었다. 다시 또 몸이 흔들렸다.

정사는 늦은 오후가 되어서야 끝났다. 연달아 세 차례나 한 덕분에 유나의 온몸에 진이 빠졌다. 유나가 식탁에 축 늘어진 채 숨을 고르자 지운이 그런 유나를 공주님 안기로 껴안아 욕실로 데려갔다.

“피곤해?”

“…당신은 안 피곤해요?”

“나? 괜찮아. 근데 당신 말고 지운 씨, 지운 오빠.”

“그 말도 이제 안 지겨워요?”

“별로?”

유나는 입을 다물고 욕조에 뜨거운 물을 받는 지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시선을 느낀 지운이 고개를 돌려 유나를 바라보며 싱긋 웃었다.

“왜?”

“…그냥요.”

유나가 물이 반쯤 차오른 욕조에 발을 담갔다. 조금 뜨거웠다. 하나 유나는 욕조 안으로 완전히 들어가 앉았다. 피곤하고 씻고 싶었다.

목욕은 느긋하게 이어졌다. 목욕을 하다 중간에 지운이 다시 발정이 나 유나의 몸을 건드리는 탓에 시간이 더 길어졌지만.

머리를 말리고, 지운과 함께 침대에 누운 유나는 눈을 감을 때까지 온갖 잡생각에 시달렸다. 이렇게 살아도 되는 건지. 이래도 되는 건지.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지운이 고른 숨을 내쉬며 잠이 든 순간까지 유나는 생각에 빠져 있다가, 잠이 들기 직전 눈물을 한 방울 흘렸다. 슬펐다.

* * *

오늘도 지운은 옆에 없었다. 유나는 또 텅 빈 집에서 눈을 떴다. 새로운 스마트폰이 보란 듯이 방 안 탁자 위에 있었다. 그래도 부탁을 들어준 모양이었다.

유나는 새로운 스마트폰을 집어 들었다. 전자기기에 관심이 없는 유나조차 알 만큼 비싸고 좋은 신형 스마트폰이었다.

새 스마트폰이지만 연락처와 사진 모두 옮겨져 있었다. 고마워해야 하나. 유나는 멍하니 연락처를 훑다가 엄마와 친구 지수에게 연락을 했다. 나는 잘 있다고.

엄마는 연락을 보내자마자 전화가 왔다.

―유나야, 어떻게 된 거야?

“엄마.”

엄마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유나의 가슴이 미친 듯이 술렁였다. 지금 당장이라도 집으로 다시 돌아가고 싶었다. 유나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고였다.

―유나야, 엄마한테 다 말해 봐. 엄마가 알아서 할게. 엄마가 유나 거기서 나오게 할게.

“아냐, 나 괜찮아. 괜히 그러다 엄마까지 위험해져.”

―그런 거 신경 쓰지 말고 빨리 엄마한테 말해. 엄마가 다 알아서 할게.

엄마가 알아서 한다는 말에 신뢰가 가야 하는데 지운이 어떤 짓을 벌이면서까지 쫓아왔는지 알고 있기 때문일까, 그다지 신뢰가 가지 않았다. 내 생애 절반 그 이상을 함께해 온 엄마인데도……. 아니, 오히려 그렇기에 엄마가 힘들어할 게 싫었다. 무엇 때문이든 간에.

“엄마, 나 잘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 이제 나 괜찮아.”

―한유나. 너 거기 어디야. 엄마가 갈게.

“나도 몰라. 정확한 주소는……. 그냥 밥 잘 먹고, 잘 자고 있어. 연락하는 건 이제 허락받았으니까… 계속 연락할게.”

―한유나!

유나는 제 이름을 부르는 엄마의 외침에도 전화를 뚝 끊었다. 전화를 끊자마자 다시 전화가 왔으나 유나는 받지 않았다. 대신 지수에게 온 연락에 답장을 했다.

「야 너 뭐냐? 왜 이제 연락해? 내 연락 다 씹더니」 오전 10:40

연락이 왔었구나. 유나는 몰랐다.

「미안 미안. 사정이 있어서. 별일 없어?? ㅋㅋ」 오전 10:45

「ㅇㅇ 별일 없지. 넌 별일 없는 거 맞냐??」 오전 10:46

「엉 괜찮아 나중에 또 연락할게」 오전 10:47

스마트폰의 화면을 껐다. 유나는 멍하니 침대에 앉아 있다가 데스크톱 앞에 앉았다. 게임을 해 보라던 지운의 말이 떠올라서였다.

유나는 컴퓨터를 켜서 하지도 않던 게임을 찾아보았다. 게임의 종류는 많았다. 유나는 그중 레이싱 게임을 골랐다. 이유는 없었다. 그냥 그게 제일 쉬울 것 같아서였다.

유나는 게임을 잘하지 못했고, 그 덕분에 게임에서 계속 꼴찌를 했다. 유나는 애초에 승부욕이 별로 없었다. 꼴찌를 하든 말든, 1등을 못 하든 말든 상관없었다. 그렇게 몇 판 하다가 유나는 지루해졌다.

이번엔 RPG 게임을 시작했다. 이유가 있었다. 아기자기한 캐릭터가 귀여워서였다. 유나는 캐릭터를 생성하고 튜토리얼이 알려 주는 대로 게임을 했다. 레벨을 올리고, 캐릭터가 그에 맞게 성장하는 재미가 있었다. 유나는 게임에 빠져들었다.

눈을 깜빡하고 뜨니 세 시간이 지나 있었다. 유나는 배가 고파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제처럼 상에 음식이 차려져 있었다. 이번에도 메모가 있었다.

「유나가 갈비찜 먹고 싶다고 해서 갈비 사서 했엉. 아침에 연 마트 찾아다니느라 힘들었당ㅠㅠ 오늘은 일찍 올게. ^0^」

커다란 뚝배기에 갈비찜이 있었다. 뼈에 붙어 있는 커다란 소고기와 당근과 양파, 큼지막하게 썰어 놓은 파가 눈에 들어왔다. 유나는 뚝배기를 인덕션 위에 올려서 데웠다.

갈비찜 국물이 보글보글 끓기 시작할 때 즈음 유나는 인덕션을 껐다. 왠지 뜨거워진 뚝배기를 다시 들고 식탁 위에 올려놓기 귀찮아졌다. 유나는 뜨거워진 뚝배기를 바라보다가 가만히 서서 식기를 기다렸다.

시간이 지난 후에 유나가 뚝배기를 맨손으로 잡고 식탁 위에 올려놓았다. 이럴 거면 데운 의미가 없는데. 멍하니 그렇게 생각하다가 숟가락을 들었다.

갈비찜은 맛있었다. 다른 반찬도 맛있었다. 하지만 왠지 평소보다 식욕이 떨어졌다. 유나는 기계적으로 숟가락과 젓가락을 움직이며 먹다가 밥 한 공기를 다 비운 다음에 수저를 내려놓았다. 입맛이 없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잘 들어가던 음식이 들어가지 않았다. 이렇게 맛있는 반찬이면 평소 같았음 밥 두 그릇을 먹었을 텐데.

유나는 다시 데스크톱 앞에 앉아 게임을 시작했다. 마우스와 키보드를 계속해서 움직이면 캐릭터가 사냥을 하며 레벨 업을 했고, 성장을 했으며, 스킬 레벨이 올랐다. 유나는 아무 생각 없이 키보드와 마우스를 딸깍거렸다.

게임에 빠진 와중에 도어 록 소리와 함께 중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유나는 소리가 들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유나, 게임하고 있었네?”

“네.”

유나가 하던 걸 멈추고 다가오는 지운을 보았다. 지운이 몸을 숙여 유나의 입술에 짧게 뽀뽀를 했다.

“얌전히 잘 있었네. 잘했어. 이제 검사하러 갈까?”

“네…….”

유나가 얌전히 대답했다.

“준비하자, 유나야. 바로 나가게.”

유나는 지운의 말대로 준비를 시작했다. 세수와 양치를 하고 옷을 갈아입었다. 준비를 끝낸 유나에게 지운이 손을 내밀었다.

“가자.”

“네.”

유나는 얌전히 그 손을 잡았다. 검사를 하고 싶긴 했지만, 막상 나가려고 하니 귀찮았다. 어차피 나가 봤자 이 사람이 가는 대로 따라가고, 인형처럼 끌려다닐 텐데 뭐. 유나는 잠깐 인상을 찌푸렸다가 풀었다. 괜히 부정적인 생각으로 기분을 망칠 필요는 없었다. 지금도 충분히 우울했다.

처음에는 짜증, 그다음에는 분노, 이제는 우울이었다. 유나는 속수무책으로 변해 버리는 제 감정과 이제는 점점 무감각해지는 감정에 고마워해야 할지, 아니면 경계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가이드 센터로 가자. 거기가 제일 정확해. 유나는 이때까지 일반 의원에서 검사받았지?”

“네.”

“그럴수록 억제제를 먹는다는 사실을 배제하고 검사했을지도 모르겠네. 지금은 억제제 안 먹은 지 좀 됐어도, 그래도 꾸준히 억제제를 먹었다고 연구원에게 얘기는 해 놨어.”

“네.”

지운이 얘기하고, 유나가 대답하는 식으로 대화는 이어졌다. 지운은 대답만 하는 유나가 이상했는지 차에 오르자마자 유나의 어깨에 기대며 물었다.

“유나야, 할 이야기 없어?”

“…네.”

뭔 일이 있어야 이야기를 하지. 유나는 이제까지 지운과 만나면서 한 거라고는 직장이 잘리고, 지운의 집에 갇히고, 갇혀서 밥 먹고 뒹굴거린 것밖에 없었다.

“게임한 거라도 이야기해 봐. 무슨 게임 했어?”

“그냥… 레이싱 게임 하고, RPG 게임 하고… 그게 다예요.”

“재밌어?”

“그럭저럭요.”

시간은 잘 갔다. 어차피 할 것도 없는데 게임이라도 하라던 지운의 말이 맞았다. 시간 죽이기에 딱이었다. 하나 그걸로 끝이었다. 가슴이 짜릿할 만큼 재미있다거나 그 시간이 의미 있게 느껴지진 않았다.

유나의 표정이 심드렁하자 지운이 흐음, 한숨을 쉬었다.

“책이라도 사 줄까?”

“아뇨.”

유나는 책은 딱 질색이었다. 공부도 싫었고.

“으음… 보드게임은?”

“혼자서 하면 재미없어요.”

“퍼즐이나 큐브는?”

“안 해 봐서 몰라요.”

“화구 사 줄까?”

“…그냥 내보내 주는 게 낫겠어요.”

“그건 안 되고.”

그럴 줄 알았다. 어떻게든 집 안에 가둬 놓으려고 애를 쓰는구나. 유나는 약간의 짜증과 체념을 동시에 느꼈다. 어차피 예상한 결과였다.

유나는 집에 있는 걸 좋아했지만, 그렇다고 집에 하루 종일 박혀 있는 걸 좋아하는 건 아니었다. 바깥에 나가서 산책도 하고, 햇빛도 받는 걸 좋아했다.

“산책도 안 돼요?”

“음. 그건 생각해 볼게. 아니면 나랑 있을 때 나가든가.”

“…날 진짜 강아지로 생각하는 거예요?”

“유나가 강아지 같긴 하지.”

“말장난하자는 건 아니었는데요.”

유나가 한숨을 쉬었다. 이건 대화가 아니었다. 벽에 대고 혼자 말하는 거였다. 유나는 대화하길 포기했다. 입을 다무는 게 더 속이 편했다.

지운이 유나의 손을 가지고 손장난을 쳤다. 손가락을 쓰다듬었다가 손등을 툭툭 건드렸다가 손바닥에 글씨를 쓰며 놀았다. 유나는 신경 쓰지 않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거리의 풍경이 왜인지 조금 낯설게 느껴졌다.

가이드 센터는 제법 먼 곳에 있는지 가는 데 시간이 오래 걸렸다. 가는 동안 유나는 내내 입을 다물고 있다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이때까지 가이딩은 어떻게 했어요?”

“그냥 적당한 가이드한테 받았는데. 물론 효과는 별로 없었어.”

“적당한 가이드라면… 몇 급이요?”

“S급.”

S급이 적당한 가이드예요? 유나는 그렇게 쏘아붙이려다가 말았다. 뭐가 됐든, 정지운이 S급 중에서도 상위권 S급이라는 건 알 것 같았다.

차가 막혔다. 유나는 짜증스레 꽉 막힌 도로를 노려보았다. 지운이 유나의 어깨에 머리를 기댄 채 유나의 손을 꽉 그러쥐었다.

“…나한테도 물어봐 줘. 오늘 무슨 일 있었는지, 뭘 했는지, 그런 거.”

“안 궁금해요.”

유나가 딱 잘라 말했다가 아차, 했다. 지운의 심기를 거슬러 봤자 좋을 것 없었다. 유나는 잠깐 숨을 내쉰 후 다시 입을 열었다.

“오늘 뭐 했는데요?”

지운도 한 템포 뒤 대답했다.

“오늘 벽을 타고 몬스터 열 마리가 침입했어. 숲에 사는 녀석들인데, 그새 번식을 해서. 덩치가 꽤 커서 많은 에스퍼들이 투입됐지. 20명 정도.”

“…그래요?”

“많아서 정신없었어. 마릿수만 많지 지능은 떨어지는 녀석들이라 힘만 있으면 그만이거든. 바로 제압했고…….”

말을 잇던 지운이 유나의 어깨에 기댄 채로 유나를 올려다보았다.

“다른 녀석들은 가이드를 데리고 있는데, 나만 없더라고. 네 생각 나더라, 유나야.”

“…….”

지금 돌려 말하는 건가? 너도 옆에 있어 주면 좋겠다, 그런 말인가. 창밖을 보던 유나가 시선을 내려 지운을 바라보았다. 까만 눈과 마주쳤다.

“집에만 있는 거 지루하지? 나랑 같이 다니자, 유나야.”

“…저 정식 등록 안 할 거예요.”

“왜? 하면 나라에서 돈도 주고, 혜택도 많은데.”

“혜택이 많은 만큼, 제약도 생기니까요.”

“내가 최대한 막아 줄게. 넌 내 전용 가이드니까.”

전용 가이드. 그 말이 유나의 심기를 거슬렀다. 유나가 인상을 찌푸리자 지운이 흐음, 한숨을 쉬었다.

“검사를 해서 네 결과가 상위 가이드로 나오면 어차피 센터에서 등록을 시킬 거야. F급같이 하등한 거 아닌 이상, 웬만하면 다 알아서 등록시키니까.”

“…….”

정식 등록이 아무리 싫다 해도, 결국 시간 문제란 말인가. 유나의 눈에서 힘이 풀렸다. 평생 억제제를 먹고 살 게 아니라면 어차피 가이드인 게 들통나기 마련이었다. 한 번이라도 사실이 다른 이에게 알려진 이상, 정식 등록은 해야만 했다. 하나 하고 싶지 않아 최대한 미뤄 두고 싶은 것뿐……. 유나는 차창에 고개를 기댔다.

차가 가이드 센터 앞에 도착했다. 유나가 먼저 내린 다음, 지운이 문을 닫고 나왔다. 지운이 앞서 걷는 유나의 손을 당연하다는 듯 잡았다.

유나는 그가 제 손을 잡자마자 쏠린 시선을 느꼈다. 주변을 둘러보자 센터 근처에 있는 사람들이 저와 지운을 번갈아 바라보고 있었다.

‘네 에스퍼가 정지운이니?’

불현듯 엄마의 물음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엄마가 정지운을 알고 있었다. 그때 경찰도 마찬가지였다. 경찰이 지운을 알아보고 깍듯하게 인사했었다. 도대체 정지운은 뭐 하는 사람이지? 그냥 단순한 에스퍼가 아니란 말인가? 유나가 지운에게 속삭이듯 물었다.

“당신 뭐 하는 사람이에요? 왜 계속 우리를 쳐다봐요?”

“그러게. 계속 쳐다보네?”

원래 S급 에스퍼가 이렇게 다들 알 만큼 유명한가? S급 에스퍼가 흔하지 않다는 건 알지만, 그렇다고 이 정도로 쳐다볼 일인가. 유나는 시선이 껄끄러워 센터 안으로 급히 발걸음을 옮겼다.

데스크에 도착하자마자 지운이 바로 데스크 직원에게 말을 걸었다.

“오늘 가이드 정식 검사 예약했어. 이름은 한유나. 내가 대리인.”

이 사람은 모두에게 반말을 하는구나. 어떻게 보면 공평하긴 한데, 참……. 유나는 질린다는 듯 지운을 바라보았다.

“네, 한유나 씨 이름으로 3시 반 예약하셨네요. 검사실 앞에서 대기하시면 됩니다.”

“응. 유나야, 가자.”

지운은 가이드 센터가 익숙한 듯 건물 내부를 잠깐의 멈춤도 없이 성큼성큼 걸었다. 유나는 그가 걷는 대로 따라 걸었다.

검사실은 3층에 있었다. 유나는 지운과 함께 검사실 앞 의자에 앉아 이름이 불리길 기다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유나의 이름이 불렸다.

“한유나 씨. 안으로 들어오세요.”

유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운이 눈으로 잘 갔다 오라고 인사했다. 유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검사실 안으로 들어갔다. 검사실 직원의 안내에 따라 유나는 속옷을 벗고 가운으로 갈아입은 다음, 검사 기기를 이용해 검사를 받았다. 익숙하게 피 검사도 받았다.

“검사 결과는 세 시간 후 나옵니다.”

직원이 그렇게 이야기했고, 유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원래 옷으로 갈아입었다. 검사는 의원에서 받았던 거랑 비슷하되 기계만 조금 달랐다. 큰 차이를 느끼지 못한 유나는 심드렁하게 검사실 밖으로 나갔다.

“세 시간 뒤 결과 나온대요.”

저번에 에스퍼 센터에서 했던 검사는 지운의 어머니가 바로 해 줬기 때문일까, 결과가 바로 나왔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지운이 고개를 끄덕이며 유나의 손을 잡았다.

“세 시간 동안 좀 놀다 오자.”

“네.”

어디 가서 논다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유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운이 유나의 손을 잡고 센터 밖으로 나갔다. 여전히 유나는 사람들의 시선이 신경 쓰여 괜스레 허공에서 눈을 굴렸다. 꼭 동물원 속 원숭이가 된 기분이었다.

“우리 어디 가요?”

“근처에서 백화점 좀 구경하다가 저녁이나 먹자. 유나 배고파?”

“조금요.”

아까 밥을 먹다 말았기 때문에 배는 고팠다. 지운이 잘됐다, 하며 백화점으로 걸음을 옮겼다. 지운이 유나의 걸음에 맞춰 걸으며 잡았던 손을 풀고 유나의 허리에 팔을 감았다. 딱 달라붙은 체온은 따뜻했다.

유나는 그의 허리와 제 허리 사이에 낀 왼쪽 팔을 빼냈다. 손을 어디에 두지, 방황하다가 결국 그의 허리에 감았다. 지운이 웃었다.

“유나야, 꽉 잡아도 돼.”

“네에…….”

지운이 유나의 머리에 제 머리를 기댔다. 누가 보면 영락없이 연인이라고 생각하겠지. 하지만 저와 지운은 연인이 아니었다. 그냥 에스퍼와 가이드일 뿐.

“유나, 품에 쏙 들어와서 좋아.”

“네. 당신도 커서 좋아요.”

“응? 혹시 비꼬는 거야?”

지운이 웃으며 물었다. 유나는 마음대로 생각하라는 식으로 한번 입꼬리를 올렸다가 내렸다. 가뜩이나 키 작은 것 가지고 이러쿵저러쿵해서 짜증 나는데 또.

“차 안 타고 굳이 걸어가는 이유가 뭐예요?”

“유나 네가 산책하고 싶다며.”

“…그건 나 혼자서 하고 싶다는 말이었는데.”

“혼자서는 안 돼. 믿는 도끼에 또 발등 찍혀.”

언제 제대로 믿어 본 적은 있나. 유나는 허, 입을 벌렸다. 애당초 신뢰를 받고 싶으면 본인이 신뢰를 받을 수 있게끔 행동하든가. 난봉꾼처럼 제멋대로 구니까 나도 그렇게 나가는 거지. 유나는 입 밖으로 우다다다 쏘아붙이려다가 말았다. 입만 아프지, 또.

“얼마나 걸어야 해요?”

“15분 정도? 왜? 다리 아파?”

“아뇨…….”

오히려 걸어서 좋았다. 유나는 바깥 풍경에 집중했다. 높게 솟아오른 은행나무와 바닥에 떨어진 냄새 나는 은행들이 이토록 그리울 줄 몰랐다. 주변을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도…….

“유나는 앞에서 볼 때도 예쁜데, 옆에서 볼 때가 더 예쁜 것 같아. 속눈썹도 길고, 코도 앙증맞고… 옆에서 볼 때 입술이 너무 귀여워.”

유나는 혹여나 길에 있는 은행을 밟을까 조심조심 밑을 보며 걸었다. 괜히 은행을 밟았다가 코를 찌르는 냄새가 신발에 밸 수도 있었다.

“내 말은 듣지도 않네.”

지운이 뾰로통한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유나는 앞을 보며 걷는 것에 집중했다. 저 사람이 하는 말에 대답해 주는 것까지 약속해 주진 않았다.

“새 옷이랑 속옷 사 줄게. 또 갖고 싶은 거 있어? 이왕 간 김에 태블릿 PC도 하나 사고. 게임기도 사 줄게. 그리고 TV는 틀어 봤어? OTT 플랫폼도 다 뚫어 놨는데.”

“아뇨, 안 틀어 봤는데… 내일 확인할게요.”

이것저것 사 준다는데 받아야지 뭐. 할 것도 없는데. 유나는 굳이 거절하지 않았다. 유나의 반응이 심드렁하자 지운이 입술을 삐죽 내밀며 흐응, 소리를 냈다. 지운이 입을 다물자 침묵이 이어졌다.

백화점에 도착할 때까지 지운 또한 입을 열지 않았다. 백화점 1층 매장에 도착했을 때, 지운이 유나를 흘긋 내려다보며 물었다.

“갖고 싶은 거 또 없어?”

“네.”

“알겠어. 그럼 전자기기 매장으로 바로 가자.”

유나와 지운은 곧바로 전자기기가 있는 층으로 올라갔다. 그곳에서 유나는 지운이 사 주는 대로 넙죽넙죽 다 받았다. 태블릿 PC와 게임기를 공짜로 얻었다. 게임기는 매장에서 집까지 배송해 준다고 했다. 유나는 지운에게 알아서 편한 대로 하라고 했다.

전자기기를 산 다음에는 옷 가게에 갔다. 그곳에서 지운은 유나에게 어울리는 옷을 한꺼번에 골라 계산했다. 유나는 옷을 갈아입을 필요도 없이 지운이 고르는 대로 옷을 받았다.

“속옷 사이즈 몇이야?”

“위에는 75D, 아래는 95요.”

“응.”

속옷도 마찬가지였다. 지운이 골랐다. 다양한 디자인으로, 여러 벌. 어느새 지운의 손에 짐이 한가득 들렸다. 보다 못한 유나가 지운에게 손을 내밀었다.

“제가 하나 들게요.”

“괜찮아. 아, 근데 유나랑 손을 못 잡는 건 아쉽네. 애 한 명 불러야겠다.”

지운이 그리 말하더니 잠시만, 하고는 유나에게 짐을 하나 건넸다. 그러고는 스마트폰을 꺼내 누군가와 통화를 했다. 옆에 있으니 통화 내용이 다 들렸다. 대충 백화점에 와 짐을 픽업하라는 이야기였다. 짐 들어 주는 사람도 막 부르는구나. 유나는 지운이 어떤 사람인지 더욱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집도 크고 넓고 좋았고… 에스퍼 센터와 가이드 센터에 있는 이들 모두 정지운을 아는 눈치였다. 어떤 사람일까. 본인에게 직접 물어도 제대로 대답하지 않으니 알 턱이 없었다. 연락이 되는 엄마에게 직접 묻는 수밖에 없겠구나, 싶었다.

전화를 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지운과 유나가 있는 곳으로 어떤 남자가 한 명 왔다. 남자는 지운에게 인사를 깍듯이 하더니 유나를 흘긋 보았다. 그 시선을 알아챈 지운이 웃으며 말했다.

“내 가이드.”

“네.”

남자가 유나에게도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유나는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를 받았다. 인사를 마친 남자가 짐을 들고 사라졌다. 유나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저 사람은 누구예요?”

“내 밑에 있는 애들 중 한 명.”

“에스퍼예요, 일반인이에요……?”

“에스퍼.”

도대체 뭐 하는 인간이지. 유나가 미간을 완전히 찌푸리며 물었다.

“당신 진짜 뭐 하는 사람이에요? 왜 안 알려 줘요? 무슨 직책인지라도 알려 줘요.”

“나? 그냥… 애들한테 뭐 하라고 시키고, 감독하고……? 그냥 그런 일?”

또 대답이 모호했다. 유나가 짜증스럽게 지운의 어깨를 툭, 치며 앞으로 성큼 걸었다.

“에이씨. 됐어요, 진짜.”

“유나야, 왜 화내. 근데 진짜 별거 아냐. 혹시 배고파서 그래? 밥 먹으러 갈까?”

지운이 유나 옆에 서며 유나의 손에 깍지를 꼈다. 지운이 빙글빙글 웃으며 말을 이었다.

“여기 근처에 코스 요리 잘하는 집 있는데. 거기 갈까? 한식이 좋아, 일식이 좋아?”

“아무거나요.”

유나는 가리는 것 없이 잘 먹었다. 비린 것도 잘 먹었다. 못 먹는 걸 꼽는 게 더 빠를 정도로 가리는 게 없었다.

“그럼 한정식집 가자. 깔끔하고 괜찮아.”

“네.”

예약 안 하고 가도 되나? 그런 의문이 들었지만, 유나는 이내 생각을 지웠다. 정지운이 알아서 하겠지, 뭐. 저는 그냥 쟤가 하란 대로 하면 됐다.

지운이 차를 백화점 앞으로 불렀다. 검은 차는 얼마 지나지 않아 백화점 앞으로 왔다. 지운이 가게 이름을 이야기했고, 차는 곧바로 출발지를 향해 도로 위를 달렸다.

한정식집에 도착한 지운은 익숙하게 가게 안으로 들어섰다. 가게 점원이 지운을 보자마자 알아보고서는 룸으로 안내했다. 단골인 듯했다. 유나는 지운과 함께 따로 마련된 룸으로 향했다. 점원이 나가기 전, 지운이 주문을 했다. 유나는 가만히 있었다.

얼마 지나고, 음식이 차례대로 나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큼지막한 전복이 들어간 전복죽이 소량 나왔다. 그다음엔 샐러드, 그다음에는 칠절판, 그다음에는…….

음식이 끊임없이 나왔다. 유나는 말을 잃고 맛있는 음식에 빠졌다. 일식 코스 요리는 먹어 봤지만, 한식 코스 요리는 처음인 탓이었다. 모든 메뉴가 새로웠고 맛있었다. 유나가 먹는 데 빠져 있자 지운이 씩 웃었다.

“유나, 잘 먹네. 자주 데리고 와야겠다.”

유나는 대답하지 않고 바삭한 버섯 탕수육을 씹어 먹었다. 잘게 다진 돼지고기 안에 섞인 버섯 향이 고소했다.

코스 요리의 메인은 신선로였다. 숯불 향과 고기 냄새가 방 안을 가득 메웠다. 유나는 가지런히 놓인 고기와 야채, 완자를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여기에 조금씩 육수를 넣으면서 먹으면 돼. 이거 맛있어.”

“우와…….”

왜 이때까지 한정식 코스 요리를 안 먹어 봤을까? 유나가 조심스레 육수가 담긴 주전자를 들고 육수를 조금씩 부었다. 뜨거운 김이 풀풀 올라왔다. 주전자를 놓고 제일 위에 있는 완자를 집어 먹었다. 고기의 고소한 향과 육즙이 입 안 가득 퍼졌다. 맛있었다. 유나의 입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유나, 먹는 거 진짜 좋아하는구나.”

유나가 미소 지은 채로 우물우물 음식을 씹어 먹었다. 다 삼킨 다음 바로 가지런히 썰어진 소고기와 야채를 함께 집어 먹었다. 맛있었다. 오늘 점심에 우울해서 식욕이 떨어진 게 언제였냐는 듯 음식이 계속해서 입 안으로 들어갔다.

유나가 먹는 걸 바라보는 지운의 미소가 한층 깊어졌다. 지운은 음식을 먹기보다 먹으면서 웃는 유나를 바라보는 것에 더 시간을 썼다. 유나는 지운이 저를 쳐다보든 말든 먹는 것에 집중했다.

신선로 다음에는 회무침과 해물 튀김이 나왔다. 유나는 통통한 전복 살을 튀긴 것을 먹고는 맛있어서 감탄했다. 전복 튀김이라니. 이런 걸 어떻게 생각하신 걸까? 유나는 요리한 셰프에게 진심으로 감탄했다.

그다음으로 나온 음식은 구운 자연 송이버섯이었다. 유나는 자연 송이를 먹으며 이 코스 요리가 얼마인지 궁금해졌다. 자연 송이가 비싸다는 건 익히 아는 사실이니까. 유나는 자연 송이를 하나 더 먹으며 지운에게 물었다.

“이 코스 요리 얼마예요?”

“음, 1인당 오십?”

자연 송이를 씹어 먹던 유나의 턱이 잠깐 멈칫했다. 하나 다시 움직였다. 내가 돈 낼 것도 아닌데……. 어쨌든 음식은 맛있고, 식당 분위기도 좋고 아늑했다. 방 안에 은은하게 감도는 조금은 독특한 향냄새도 좋았다.

후식으로는 따듯한 영귤차가 나왔다. 마무리하기에 딱 좋았다. 유나는 후후, 불어 가며 영귤차를 마셨다. 배가 든든했다.

“유나, 먹으면서 내내 웃고 있어.”

“…….”

유나는 먹는 걸 좋아했다. 같이 먹는 상대가 지운이란 점이 아쉽고 싫긴 하나, 음식은 맛있고 저는 먹는 걸 좋아하니 뭐 어떠랴. 유나는 오래간만에 맛있는 코스 요리를 먹어 기분이 좋아졌다. 정지운이 아니었으면 못 먹어 봤을 비싼 코스 요리였다.

“다음에는 더 맛있는 곳으로 데려갈게.”

그 말에 유나의 귀가 솔깃했다. 하나 유나는 티 내지 않고 작게 고개만 끄덕였다. 지운이 하하 소리 내어 웃었다.

“소화 좀 시키고 일어날까?”

“네.”

“뭐가 제일 맛있었어?”

“전부 다요.”

“하나만 꼽자면?”

“음… 진짜 다 맛있었는데…….”

정말 어려운 질문이었다. 유나는 고민하다가 대답했다.

“신선로요. 제가 따뜻한 국물 요리 진짜 좋아하거든요. 처음 먹어 보는 건데 맛있었어요.”

“그래? 알겠어. 다음번에는 샤부샤부 먹으러 가자.”

“네.”

유나가 즉시 대답했다. 지운이 또 한 번 소리 내어 웃었다.

몇십 분 앉아 있다가 지운과 유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좌식이라 그런지 일어날 때 다리가 좀 걸렸다. 유나가 다리를 휘청거리자 지운이 곧바로 유나를 잡아 주며 자연스레 유나를 품에 안았다.

“유나야, 고마워.”

“…뭐가요?”

“맛있게 먹어 줘서. 웃는 거 보니까 기분 좋더라.”

유나가 가만히 눈을 깜빡거렸다. 지운이 유나를 품에 안은 채 유나의 뒤통수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그러고는 유나의 이마에 가벼운 입맞춤을 했다.

“유나가 좋아하는 게 뭔지 더 많이 알고 싶어.”

“…….”

유나는 가만히 제 눈앞의 가슴팍을 바라보았다. 머릿속으로 온갖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마음이 기이하게 술렁였다. 뭐지, 이 감정은. 유나는 살짝 눈을 찌푸리며 가슴팍에 그냥 얼굴을 묻었다. 술렁이는 감정이 왠지 불쾌했다.

유나가 가만히 있자 지운이 유나의 뒤통수를 잡아 올리며 키스했다. 유나는 아까 마신 차 맛이 나는 키스라고 생각하며 눈을 감았다. 혀가 뜨거웠다.

지운은 부드럽게 키스를 이어 나갔다. 유나는 곧 그 키스에 녹아들었다. 방 안의 온도는 기분 좋게 따듯했고, 키스는 섬세했다. 조심스레 혀를 얽는 것도, 이따금 입천장을 긁는 혀끝도, 단맛이 나는 혀도, 뒤통수를 그러쥔 커다란 손도, 단단한 가슴팍도 이 순간에 조화롭게 어우러져 금이 간 가슴을 조금이나마 메워 주었다. 이상한 기분이었다.

입술이 떼어졌을 때, 지운이 유나를 보며 환하게 웃었다.

“멍한 표정. 귀여워.”

유나의 양 뺨을 두 손으로 쥐고 그가 가볍게 흔들었다. 유나의 볼살이 흔들렸다. 유나가 작게 푸스스 웃었다. 유나의 웃음을 본 지운의 눈이 반짝거렸다. 유나는 지운의 눈 속에서 반짝이는 저 감정이 무엇일까 생각해 보았다가 말았다. 더 생각을 잇고 싶지 않았다.

유나와 지운이 손을 잡고 나란히 식당 밖으로 나왔다. 검은 차에 올라탄 둘은 차가 다시 가이드 센터로 돌아갈 때까지 손을 잡고 서로의 어깨에 기댄 채 눈을 감았다. 유나는 이제 깍지 낀 지운의 손이 완전히 익숙해졌다.

센터로 다시 돌아간 둘은 함께 검사실 앞으로 갔다. 자리를 지키고 있던 연구원이 유나를 보자마자 ‘한유나 씨.’ 하며 유나의 이름을 불렀다.

“이때까지 왜 가이드 등록을 하지 않으셨죠? S급 가이드 판정이 나오시는데.”

유나가 말을 잃었다. S급. 가이드 중에서도 가장 급이 높은 가이드였다. S급 가이드는 웬만한 에스퍼들도 함부로 건드리지 못하는 걸로 알고 있었다. 내가 S급 가이드라고? 믿기지 않았다.

“추가적으로 검사를 더 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가이딩 존 능력치 검사와 다른 가이드 방법을…….”

“아니, 됐어. 유나는 내 가이드니까. 그냥 가이드 등록만 해 줘. 등급은 C급으로 입력하고.”

지운이 연구원의 말을 자르며 유나를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유나가 어어, 하며 끌려갔다. 유나의 등과 지운의 가슴이 맞닿았다.

연구원이 할 말이 있는 듯 입술을 달싹거렸으나 지운의 웃는 얼굴을 보고는 완전히 입을 다물었다.

검사실 밖으로 나오면서 유나가 당황한 목소리로 지운에게 물었다.

“절 왜 C급으로 등록해요? 그리고 뭔가 더 검사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 저 설명도 듣고 싶어요. 스킨십이 아닌 다른 가이딩 방법도 알고 싶고…….”

“됐어. 유나는 내 가이드니까.”

지운이 웃으며 말을 잘랐다. 아까와 똑같았다. 유나는 미간을 좁혔다. 뭔가 석연치 않은 게 있는 모양이었다.

유나는 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그가 저를 왜 C급으로 등록하라고 한 건지, 혹시 다른 가이딩 방법이라도 있는지 고민했다. 지운이 알려 주지 않는다면 제가 검색해서 찾으면 그만이었다. 정부가 알아서 가이드 방법에 대해 잘 알려 주었으니까.

지운이 복잡한 얼굴로 유나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유나와 눈이 마주친 지운이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S급 가이드로 등록되면 골치 아파.”

아까 유나가 물었지만 대답해 주지 않았던 말이었다. 유나의 귀가 쫑긋 세워졌다. 바로 물었다.

“왜요?”

“다른 녀석들이 탐낸단 말이야. 유나는 내 건데.”

그래서 표정이 안 좋았구나. 유나는 눈을 깜빡였다. 그래, 지운이 아닌 다른 사람을 가이딩할 수도 있었다. 지운만 가이딩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왜 그 생각을 못 했지. 머릿속에 전구가 밝혀진 듯했다.

“유나는 내 거야.”

지운이 유나의 허리를 껴안으며 유나의 볼에 쪽, 뽀뽀를 했다. 유나가 가만히 있자 유나의 고개를 돌리게끔 만들어 입술에도 쪽쪽 뽀뽀를 했다.

“신경 사나워요.”

“흐응.”

지운이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선 유나를 바라보다가 유나의 말을 무시하고 다시 또 뽀뽀를 했다. 유나는 더 말하길 포기했다.

집으로 돌아오고 나서 유나와 지운은 같이 목욕을 했다. 그러고는 당연한 수순처럼 몸을 섞었다. 유나는 이 집에 있는 내내 하루도 그와 섹스를 하지 않은 날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정사가 끝나고 나서 유나는 화장대 앞에 앉아서 몸에 남은 붉은 자국을 바라보았다. 목덜미, 쇄골, 어깨, 가슴, 허리, 허벅지… 자국이 없는 곳이 없었다. 유나가 가만히 그 열꽃을 바라보고 있자 지운이 유나를 뒤에서 껴안으며 말했다.

“유나는 내 거니까. 영역 표시.”

“…….”

만약, 다른 사람을 가이드하게 되면 지운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유나는 조금 궁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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