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만남 (3)
잠에서 깨 눈을 떴을 땐 이미 한낮이었다. 유나는 눈을 뜨자마자 생각했다. 좆 됐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 개운하면 그건 망했다는 신호였다. 출근하기 전에 개운할 리가 없었다. 자고 싶은데 자지 못해서 욕이 나와야 하는데 그렇지 않다? 지각이었다. 유나는 고개를 돌려 시계를 확인하자마자 머리를 쥐어뜯었다. 1시였다. 미쳤다. 이럴 리 없었다.
아니, 이럴 수 있었다. 알람을 듣지 못했을 게 뻔했다. 정지운, 그 사람이 과연 알람이 울리도록 그대로 뒀을까? 아니었다. 절대로.
왜 그 생각을 하지 못했는지 유나는 어제의 저를 호되게 야단쳤다. 아마 보지 않아도 부재중 전화가 여러 개 쌓여 있을 게 뻔했다.
유나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탁자 위에 있는 스마트폰을 가져가 알림을 확인했다.
아무것도 없었다.
부재중 전화도, 메시지도, 아무것도.
“뭐야……?”
잘렸나? 아니, 그럴 린 없었다. 원장님이 말도 없이 자를 린 없었다. 그럴 사람이 아니었다. 병원에 오래 버틸 수 있었던 건 사람 좋은 원장님 탓이 컸으니까. 그러면 뭐지?
유나는 우선 직장 동료에게 전화를 걸었다. 다행히 점심시간이라 가능한 일이었다.
“어머, 유나 씨?”
전화를 받자마자 동료가 이름부터 불렀다. 유나는 우선 가장 궁금한 걸 물었다.
“선생님, 저 오늘 출근 안 했는데 왜 전화 한 통 없으셨어요? 저 이제 일어났어요.”
“아니, 자기 그만뒀다고 그러던데? 원장님이 그러셨어.”
“네……?”
이게 무슨 말이지?
“저 그만둔다고 말한 적 없는데요……?”
“응? 원장님께선 그러시던데? 자기 잘린 거야?”
아니 잘리다니. 원장님이 말없이 해고할 사람은 아닌데……. 이상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정지운이 뭔 짓을 한 게 틀림없었다.
“모르겠어요… 저 그만둔다고 한 적 없어요. 정말로 원장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어요?”
“응, 실장님이 원장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다던데? 실장님도 자세한 이야기는 못 들었나 봐.”
“…일단 알겠어요, 선생님. 나중에 연락할게요.”
“그래, 유나 씨.”
유나는 전화를 끊자마자 으아악, 포효 비슷한 소리를 내지르며 방 밖으로 뛰쳐나갔다.
“야, 정지운!”
그리고 개새끼의 이름을 불렀다. 하나 거실에 없었다. 어디에 있지? 유나는 온 집 안 곳곳을 다 들쑤셨다. 집은 더럽게 크고 넓었다. 혼자 살면서 왜 이렇게 큰 집에 사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리고 짜증 났다.
베란다, 창고, 옷방, 거실, 온갖 곳을 뒤져도 정지운은 없었다. 전화를 걸기 위해 전화번호부를 열어 보았지만, 번호를 저장한 적 없으므로 전화를 걸 수도 없었다.
유나는 우선 지운의 방으로 돌아가 옷을 주섬주섬 껴입었다. 여기서 나간 다음, 일단 집으로 돌아가야지. 유나는 집과 엄마가 그리웠다.
옷을 껴입은 다음 현관으로 향했다. 도어 록 버튼을 눌렀다. 하나 띠링, 소리와 함께 안내음이 들렸다.
―안면 암호가 일치하지 않습니다.
유나의 머릿속에 물음표가 떠올랐다. 안면 암호? 그건 또 뭐야? 유나는 다시 도어 록 버튼을 눌렀다.
―안면 암호가 일치하지 않습니다.
물음표 다음으로는 점이 머릿속에 찍혔다. 유나는 다시 버튼을 눌렀다.
―안면 암호가 일치하지 않습니다.
다시 버튼을 눌렀다.
―안면 암호가 일치하지 않습니다. 5회 이상 불일치할 시, 시스템 경보가 울립니다.
물음표, 점, 그다음은 욕이었다. 미친 새끼. 정지운의 짓이었다. 백 퍼센트였다. 일부러 걸어 놓은 게 틀림없었다. 유나가 도어 록을 세게 주먹으로 때렸다.
“아악!”
하나 흠집은커녕 유나의 손만 아파 왔다. 유나는 비명을 질렀다.
“아아아악! 씨발 놈아!!”
그리고 버튼을 눌렀다.
―안면 암호가 일치하지 않습니다. 5회 이상 불일치하여 시스템 경보가 울립니다.
삐용, 삐용, 삐용, 삐용. 안내음대로 경보음이 집 안 전체에 울렸다. 유나가 귀를 막았다. 미친 새끼, 이거 실화야?
유나는 경보음 가운데 제 벨 소리를 들었다. 귀를 막은 손 한쪽을 떼고 스마트폰 화면을 확인했다. 모르는 번호였다. 하나 유나는 단박에 그게 누군지 알아맞혔다.
“개새끼야!”
다짜고짜 욕을 박았다. 그러자 스마트폰 너머로 웃음소리가 들렸다.
―하하, 유나야. 앙칼진 거 너무 귀엽다. 경보음 안 시끄러워?
“개소리 말고 빨리 이거 풀어. 안 풀어?”
―안 돼. 나 지금 일하는 중이란 말이야. 나 갈 때까지 기다려? 일단 경보음은 안 울리도록 할게.
“기다리긴 뭘! 집에 보내 줘!”
―빨리 끝낼게, 자기야. 거의 끝나가거든? 조금만 기다려 줘.
희미하게 스마트폰 너머로 누군가 정지운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한 명도 아니고 여러 명이 지운의 이름을 불렀다.
―잠시만. 나 부른다. 내가 유나한테 전화 걸려고 잠시 전장을 이탈했거든. 자기야, 집에서 얌전히 기다리고 있어야 해? 알겠지?
지운이 다급하게 말하더니 전화를 뚝, 끊었다. 유나가 끊긴 스마트폰을 보고 소리를 질렀다.
“야! 야! 야! 미친 새끼야!”
하나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유나는 으아악, 소리를 지르며 스마트폰을 벽에 던지는 시늉을 했다. 던지진 않았다. 스마트폰은 비싸니까. 그러고는 심호흡을 하며 정지운의 번호를 저장했다. 혹시 또 전화할 일이 있을지 몰랐다.
유나는 짧은 욕설을 내뱉다가 꼬르륵 소리를 내는 배를 움켜쥐었다. 어제 저녁도 먹지 않고 아침, 점심 다 먹지 않았으니 배가 고플 만했다. 유나는 아침은 먹지 않아도 점심은 꼭 챙겼다. 기분은 안 좋았지만 사람이 밥은 먹고 살아야 할 거 아닌가? 유나는 주방으로 가 냉장고 문을 열었다.
냉장고에는 먹을 게 많았다. 다양한 식재료는 물론이고 밀키트와 인스턴트 음식들이 가득 있었다. 유나는 떡볶이를 좋아했기에 떡볶이 밀키트를 꺼냈다. 냄비에 넣고 다 끓이기만 하면 그만이었다.
주방에서 냄비를 찾아 꺼내고 재료를 몽땅 다 넣었다. 유나는 그 앞에 가만히 서서 천천히 끓어오르는 냄비를 바라보았다. 고추장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지금쯤 일하고 있어야 하는데… 내가 여기서 뭐 하고 있지?
지옥 같은 출근길도 없고, 하루에 한 번 꼭 만나는 진상도 없고, 의자에 계속 앉아 있지도 않고……. 몸은 편한데 무언가 불안하고 초조했다. 넓은 집에 덩그러니 혼자 있으니 더 그랬다. 출근해야 하는데. 출근해야 하는데. 출근. 출근……. 계속 출근이라는 글자가 머릿속을 둥둥 떠다녔다.
진짜 나 잘린 거야?
유나는 입을 벌렸다. 아까 전화했을 때 그걸 물어봤어야 했는데. 도어 록이 잠긴 것에 정신이 팔려서 그 일을 물어보지 못했다. 그걸 물어보려면 또 정지운이 오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미친놈한테 단단히 붙잡혔다. 늘 돌아 있는 정지운의 눈깔과 빙글거리는 미소가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이윽고 한 문장이 머릿속을 가득 메웠다. 내 인생, 앞으로 어쩌지?
유나는 앞으로의 인생이 순탄치 않으리라는 걸 직감하고선 조용히 눈을 내리감았다. 눈앞이 캄캄했다.
떡볶이 냄새가 코를 찔렀다. 유나는 불을 껐다. 숟가락으로 슥 저어 주자 밑이 눌어붙은 게 느껴졌다. 저으면서 해야 하는데 생각에 빠져 젓지 않은 탓이었다. 뭐 어떠랴. 내가 설거지할 것도 아닌데. 유나는 그리 생각하며 냄비째로 떡볶이를 먹었다.
밀키트 떡볶이는 쌀떡이었다. 밀떡이 좋은데. 유나는 멍하니 그런 생각을 하며 입 안에 음식을 넣고 씹었다.
아… 진짜 잘렸나? 나 이제 출근 못 하나? 진짜 그 병원 괜찮았는데. 원장님도, 선생님도, 실장님도 다 괜찮은 곳이었는데. 이런 곳 찾기 쉽지 않은데……. 이렇게 하루아침에 그만두게 되었으니 실장님과 선생님이 날 오해하지 않을까? 안 좋은 소문이 나진 않을까? 병원 업계 좁은데…….
씹는 속도가 현저히 느려졌다. 유나는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았다. 다시 취직하고 말고를 떠나 여기서 나갈 수 있을지,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지, 그게 제일 중요했다. 정지운 그 새끼는 도대체 뭐 하는 새끼지? 왜 말을 알아 처듣지 못하지? 나는 왜 그 새끼랑 대화를 해야 하지?
그러다 문득 유나는 제 스마트폰을 떠올렸다. 정지운이 가져가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보란 듯이 놔두지 않았던가? 유나는 그걸 떠올리고 황급히 스마트폰으로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뚜르르… 뚜르르…….
하나 신호음만 가고 연결은 되지 않았다. 이상했다. 어디 나갔나? 이번에는 아빠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신호음만 가고 연결은 되지 않았다.
전화를 끊고 문자를 했다.
「엄마, 왜 전화가 안 돼?」 오후 1:53
문자는 정상적으로 전송이 됐다. 하나 답장은 없었다. 무슨 일이라도 있나……. 유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인상을 찌푸렸다.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던 유나는 드글드글 끓는 속 때문에 가슴을 퍽퍽 쳤다. 이러다 화병 걸릴 지경이었다. 갑자기 제 일상이 망가진 건 다 그 새끼를 만난 뒤부터였다. 정지운.
유나는 남아 있는 떡볶이를 마저 다 먹고 냄비를 개수대에 던지듯 집어넣었다. 기분이 좋지 않았다. 유나는 욕실로 가 옷을 다 벗고 샤워를 시작했다. 그리고 뜨거운 물 밑에서 생각을 정리했다.
나는 나도 모르게 엄마가 주는 억제제를 먹고 살았고, 그 때문에 가이딩 판정 검사에서 늘 부적격을 받았다. 하지만 억제제를 먹지 않고 검사를 한 순간 그 사실이 드러났다. 엄마가 나 몰래 내게 억제제를 먹이는지 몰랐기 때문에 무척 당황했다.
그건 차치하고, 일 잘하던 직장에서 잘렸고 이 집에 갇혔다. 그 원흉은 정지운이었다. 애초에 정지운만 아니었으면 센터에 가서 가이딩 판정 검사를 할 일도 없었을 거다.
다 정지운 그 새끼가 원흉이잖아. 원인이 너무 극명했다.
일단 그 새끼가 오면 차분히 대화를 시도하자. 그리고 안 되면… 안 되면 어쩌지? 그래, 문제는 이거였다. 정지운은 말이 안 통했다. 정말 하나도. 일반적인 기준이란 걸 모르는 사람이었다. 이때까지 경험을 비추어 보아 말해 봤자 제 입만 아플 게 뻔했다.
그러니 대화가 통하지 않을 때 제가 어떤 방법을 쓸지, 그게 제일 핵심이었다.
가이딩을 해 주지 않겠다고 협박할까? 아니, 그 사람한테 협박이 들어 먹힐까? 탈락. 각인도 해 줄 테니까, 제발 내 말 좀 들어 달라고 부탁할까? 이건 싫었다. 각인은 죽어도 안 되니까. 탈락. 그럼 남은 건 도망뿐이었다.
어떤 방법을 쓰든 간에 도망치는 것.
도망칠 궁리만 하면 되는 거였다. 유나는 말끔히 결론을 내리고는 세수와 양치까지 마치고 수건으로 몸을 닦고 밖으로 나갔다. 나가자마자 유나가 꺄악, 비명을 질렀다.
“유나야, 얌전히 잘 기다리고 있었네?”
욕실 문을 열자마자 지운이 있었다. 뒤로 나동그라지지 않게 지운이 염동력을 이용해서 받쳐 주지 않았더라면 그대로 엉덩방아를 찧었을 게 분명했다.
“아 진짜! 사람 왜 놀라게 만들어요!”
“유나 막 씻고 나온 뽀송뽀송한 얼굴 보고 싶어서 그랬지.”
아, 진짜 미친 새끼. 유나는 수건으로 머리를 탈탈 털며 그를 지나쳤다.
“드라이기 어딨어요?”
“잠시만.”
지운이 드라이기를 찾아 건네주었다. 유나는 콘센트에 꽂고는 차가운 바람으로 머리를 말렸다. 허공을 노려보며 머리를 탈탈 말리고 있는데 뒤에서 지운이 드라이기를 빼앗아 갔다.
“내가 말려 줄게, 자기야.”
“…네.”
미친 새끼야. 그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으나 겨우 삼켰다. 머리 말리기 귀찮은데, 그걸 도와준다니 뭐 나쁠 게 있나? 맘대로 하라 그러지.
유나는 제 머리를 말려 주면서 은근히 목을 만지는 손길만 아니었어도 얌전히 있을 작정이었다. 지운이 계속해서 손끝으로 목덜미와 어깨를 만졌다. 그냥 모른 척 넘어가지 못할 정도로.
“…뭐 해요?”
“나 오늘 힘 좀 많이 썼거든. 그래서.”
허. 유나는 헛웃음을 내뱉었다. 그가 덜 마른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나른한 한숨을 쉬었다.
“더 만지고 싶은데. 참는 거야. 유나 오늘 화난 것 같아서.”
화가 난 건 안 모양이었다. 자기 행동이 상대방에게 화를 불러일으킬 거라는 걸 아는 게 신기했다.
“정지운 씨. 당신이 저 직장 잘리게 만들었어요?”
“으음… 그냥 이야기만 했지. 너 이제 안 나온다고.”
“이야기만 해서 하루 만에 그만두게 만든다고요? 뭔 짓 했어요?”
“이야기만 했어. 걱정 마, 유나야. 어차피 이제 나가지도 않을 직장 왜 걱정해.”
유나는 심호흡을 했다. 그대로 지운의 머리통을 후려갈길 뻔했기 때문이었다. 심호흡을 한 다음 다시 물었다.
“도어 록 안면 암호는 왜 설정했어요?”
“왜긴. 유나가 몰래 나갈까 봐 그랬지.”
“제가 왜 나가면 안 되는데요?”
“그대로 도망칠 거잖아.”
그건 맞았다. 하지만 그렇다 해서 그게 감금할 이유는 되지 못했다. 유나는 화를 억누르고 말했다.
“제가 말했잖아요. 가이딩해 줄 거라고. 대신 일은 나가게 해 주고, 집으로 돌아가게 해 달라고 했는데. 그게 그렇게 어려운 요구예요?”
“굳이 안 그러고 싶어.”
이번에는 참지 못했다. 유나는 그대로 등을 돌려 지운을 퍽, 쳤다.
“아야.”
지운이 과장되게 소리를 내며 맞은 어깨를 문질렀다. 맞을 짓 한 건 아는지 놀란 기색은 없었다.
“그냥 나 따라다니면서 계속 같이 있으면 안 돼? 왜 굳이 힘든 길을 걸어, 유나야.”
어떡하지. 유나는 이제 말할 힘도 잃었다. 유나는 팔을 휘적거리며 지운을 쳤다. 얘기하기도 싫었다.
“근데 오늘 하루 종일 떡볶이 하나 먹은 거야? 배고프지 않아? 맛있는 거 해 줄까?”
지운이 유나의 팔을 잡으며 싱긋 웃었다. 어쩐지, 냉장고 안에 식재료가 많더니. 요리를 할 줄 아는 모양이었다. 하나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음식이야 밖에서 사 먹으면 그만 아닌가.
“됐고… 좀…….”
보내 줘요. 그렇게 말하려다 말았다. 어차피 안 들어줄 테니까. 유나는 입을 다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우울하고 짜증 났다. 2년 동안 잘 다니던 직장을 하루아침에 그만두게 되고, 여기서 나가지도 못하게 됐다.
유나는 우울에 빠졌다. 꼭 출근길 지하철 안에서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채 고개밖에 돌리지 못할 때 느끼는, 그런 우울감이었다. 목적지 역에 도착할 때까지 그대로 옴짝달싹하지 못하는, 그런 막막하고 짜증 나는 상황에서 느끼는 우울감.
출퇴근길 같은 새끼. 유나는 속으로 지운을 욕했다.
“언제 보내 줄 거예요?”
“글쎄. 유나가 나랑 각인 맺고, 나랑 평생 같이 다닌다고 약속해 주면?”
그냥 노예가 되면 풀어 주겠다, 이 소리였다. 각인을 하게 되면 서로가 서로에게 이끌려 벗어날 수 없는 관계에 얽매이게 된다. 법적으로도, 그것 외에도. 평생 각인을 한 가이드라는 꼬리표가 붙어 다니며 행동에 제약이 생긴다.
에스퍼와 동반하지 않는 거주지 지역 외 이동은 불가했으며, 해외여행도 당연히 금지였다. 어딜 가든 에스퍼와 동반해야 했다.
이유는 하나였다. 에스퍼가 폭주하지 않도록 가이드는 늘 언제 어디서나 에스퍼 근처에 상주해야 하니까.
치가 떨렸다. 엄마가 아빠를 사랑하지 않는데 결코 이혼할 수도, 별거할 수도 없는 이유였다. 에스퍼는 국가의 중요한 자산이었고, 가이드는 그 에스퍼의 도구일 뿐이었다.
유나는 그 당연한 흐름이 너무 싫었다. 지운에게 순종하는 건 그 흐름에 저도 따르는 것이었다. 강제로 얽매인 엄마와 아빠의 삶을 보며 치를 떨었던 자신을 배신하는 행동이기도 했다.
그럴 수 없었다.
“싫어요.”
그렇기에 유나가 할 수 있는 말은 하나였다.
“죽어도 그럴 일 없어요.”
지운의 웃음에 금이 갔다. 그가 금이 간 웃음을 매달고 물었다.
“왜?”
“그때 말했잖아요. 난 죽어도 누군가의 가이드가 되기 싫어요. 얽매이는 관계는 제가 죽어서 가능할 거예요.”
정 하려면 죽이라는 소리와 다를 바 없었다. 하나 시체는 아무 효력이 없었다. 유나의 결연한 표정에 지운의 눈썹이 까딱였다.
“유나는 고집쟁이.”
“…….”
“그럼 나도 어쩔 수 없네.”
지운이 유나에게 성큼 다가와 팔목을 붙잡았다. 유나는 본능적으로 위험을 느끼고 그 손을 떨쳐 내려 했으나 붙잡은 힘이 단단하여 떨쳐 내지 못했다.
“난 충분히 내 가이드를 배려해 줬다고 생각하는데. 내 가이드는 너무 손이 많이 가.”
‘내 가이드’. 유나가 인상을 찌푸렸다. 그 말에 담긴 함축적인 의미를 알 것 같았다. 유나의 주먹이 부르르 떨렸다.
“고분고분하게 굴면 좋았을 텐데. 아쉬워.”
지운이 유나의 팔목을 잡은 채 침대로 이끌었다. 유나가 지운에게 발을 휘두르며 말했다.
“싫어! 이거 놔!”
“유나야. 입 다물어.”
지운이 발버둥 치는 유나를 손쉽게 제압했다. 그러고는 유나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으읍, 읍!”
“못된 말 하는 입 봉인.”
그 뒤 지운이 유나의 몸을 돌렸다. 시트에 고개가 바짝 붙었다. 유나가 제 몸 위로 드리운 지운에게서 피하려고 했으나, 이윽고 들어오는 혀 때문에 정신이 새하얘졌다. 혀가 입천장을 긁자마자 짜릿한 섬광이 머릿속을 내달렸다.
“미친… 흡, 새끼!”
유나는 숨이 막히는 와중에도 입을 열어 욕설을 내뱉었다. 지운이 등 뒤에서 웃는 소리가 들렸다. 퍽이나 즐거운 웃음소리였다. 유나의 속이 뒤틀렸다.
“우리 유나, 뒤에서 박힐 때 엉덩이는 어떨까?”
“닥, 쳐!”
“탱글탱글 토마토처럼 귀엽네. 박힐 때도 귀여울 것 같아.”
하필이면 유나는 나체였다. 지운이 은근한 손길로 엉덩이를 꽉 쥐었다. 아까 샤워할 때 옷을 안에 들고 갈걸. 유나가 뒤늦게 후회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뒤에서 바지 버클을 내리는 소리가 들렸다. 설마, 하는 예감은 적중했다. 지운이 유나의 엉덩이를 벌렸다. 유나가 싫다고 말하려는 순간, 눈이 번뜩이는 통증이 아래에서 올라왔다.
“으흣!”
성기가 순식간에 안으로 푹, 파고들었다. 이런 식으로 급하게 삽입한 건 처음이었다. 아래가 꽉 메워졌다.
“후… 좁아.”
지운이 한마디를 내뱉고는 아래에 침을 퉤, 뱉었다. 유나는 모멸감과 수치심을 동시에 느꼈다.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지운은 아파하는 유나를 아랑곳하지 않고 허리를 움직였다. 유나가 몸을 뒤틀었다.
“너무 커……!”
“아파? 유나, 말 안 들어서 벌주는 거야.”
“흐으, 흐…….”
압박감이 상당했다. 너무 컸다. 유나는 압박감을 참고 겨우 말을 이었다.
“빨리, 이거… 놔…….”
“다 안 들어간다. 젤을 써야겠는데.”
하나 지운은 유나의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지운이 유나의 안에 귀두만 넣은 채로 염동력을 이용해 서랍 안에 있는 젤을 꺼내 침대로 가져왔다. 유나는 젤이 염동력에 의해 두둥실 떠서 이동하는 걸 보고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그래, 정지운은 에스퍼였다. 실생활에서 초능력을 이용하기도 하고, 또 초능력으로 몬스터를 죽이기도 하는 에스퍼. 힘으로 이길 리 없었다.
유나는 처음으로 강한 무력감을 느꼈다. 그래도 이전까진 어떻게든 벗어나려 애썼다. 하나 지금은 막막한 미로 속에 갇힌 기분이었다.
직장도 잘렸고, 이곳에서 나갈 수도 없다. 저를 지켜 줄 엄마도, 아빠도 연락이 되지 않았다. 아마 그것조차 지운의 짓이겠지. 그리 생각하니 헛웃음이 나왔다.
“좀 낫네.”
젤을 기둥과 질 입구에 바른 지운이 그리 말하며 웃었다. 쑥, 성기가 안으로 한 번에 들어갔다. 유나가 비명을 지르지 않기 위해 턱에 힘을 주어 참았다. 한 번에 들어갔을지라도 메마른 내벽이 쓸려 무척이나 따가웠다.
아프고 답답했다. 유나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출퇴근길 같은 새끼. 고작 움직임 하나하나에 온 신경이 쏠렸다. 유나는 아픔에 무력한 자신에게 환멸을 느꼈다. 고통은 무감각해지려고 해도 무감각해지지 않았다.
지운은 뒤에서 허리를 천천히 움직였다. 쯔릅, 스윽, 슥. 꿀렁꿀렁한 소리 때문에 접합부에서 이상한 소리가 났다. 유나는 다시 한번 수치심을 느꼈다.
“뒤에서 박히는 유나도 섹시하네.”
지운이 유나의 엉덩이를 짝, 내리치며 말했다. 깜짝 놀란 유나의 몸이 바짝 긴장을 해 빳빳하게 굳었다. 지운은 굳은 유나의 등을 쓸어내리며 눈을 휘었다.
“유나 귀여워. 젤 발랐는데도 그렇게 아파?”
“그럼, 안 아프…겠냐, 개새끼야? 헉, 흐으!”
말하는 도중에 지운이 퍽, 세게 박는 바람에 유나가 숨을 크게 들이켰다. 따가움과 저릿한 아픔이 동시에 느껴졌다. 거친 허리 짓으로 유나는 지운이 화가 났음을 알 수 있었다.
“유나는 입이 너무 거칠어. 예쁜 말만 하면 얼마나 좋아?”
“너나 잘, 해, 씹, 흑, 아, 읏!”
거친 움직임 때문에 말을 똑바로 이을 수가 없었다. 유나가 시트를 그러쥐며 헐떡였다. 내벽을 보호하기 위해 나오는 애액과 젤이 섞여 접합부 사이로 거품이 인 애액이 흘러내렸다. 유나는 허벅지를 적시는 애액을 느끼며 인상을 찌푸렸다. 어느 순간부터 따가움은 점차 사라지고 있었다.
“앞으로 젤 자주 써야겠다. 우리 유나 보지가 좁아서.”
“흐읏, 읏, 흑…….”
지운이 몸을 일으키며 엎드린 유나의 엉덩이를 위로 높이 들었다. 고양이 자세처럼 위로 엉덩이만 훅 들린 유나가 엉거주춤 두 팔로 자세를 고정했다. 시트에 한쪽 뺨을 처박은 유나의 몸이 지운의 움직임에 따라 처박혔다가 아래로 내려갔다가를 반복했다. 움직임이 너무 가파르고 빨랐다.
유나가 흐느끼며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이제는 완전히 아픔이 사라졌다. 빌어먹게도 느껴지는 쾌감에 유나의 눈에 고여 있던 눈물이 흘러내렸다.
지운이 몸을 앞으로 숙이며 유나의 가슴을 움켜쥐었다. 그러고는 유나의 눈물을 발견한 듯 유나의 뺨을 조심스레 쓸었다. 거친 아래의 허리 짓과는 사뭇 다른 다정한 손길이었다.
“유나야, 왜 울어.”
울려 놓고 하는 소리가 왜 우냐니. 유나는 눈물을 흘리는 와중에도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나왔다. 유나는 흐느끼면서 웃고, 웃으면서 울었다.
지운은 유나의 눈물을 쓸어내리며 인상을 찌푸렸다.
“유나가 울어서 마음이 안 좋네.”
미친 새끼. 이상하게 돌아 버린 새끼. 유나가 입 속으로 중얼거렸다. 말은 저렇게 하면서 여전히 움직이고 있었다. 울고 있는 유나와 달리 지운은 만족스러운 쾌락과 이곳에 올 때까지 저를 괴롭히던 두통이 사라져 기분이 좋았다. 검은 눈에 만족이 그득했다.
“하아… 좋아.”
지운이 식사를 마친 포식자처럼 나른한 미소를 지었다. 유나의 동그란 엉덩이를 두 손으로 꽉 쥐고는 제 성기가 유나의 안에 들어갔다 나갔다 반복하는 걸 바라보았다.
“유나 보지 귀여워.”
미친 새끼. 미친 새끼. 미친 새끼. 유나가 속으로 미친 듯이 중얼거렸다. 하나 생각은 아까보다 더 깊이 처박히는 성기 때문에 하얗게 사라졌다.
“하으읏…….”
“유나야, 신음 참지 마.”
지운이 몸을 숙여 유나의 귓가에 속삭였다. 혀가 뱀처럼 귓바퀴를 핥았다. 유나의 온몸에 소름이 쫙 돋았다. 소름 끼치면서도, 온몸의 감각이 살아나는 기분이었다. 아까와는 다른 의미로 눈에 눈물이 고였다.
싫어, 싫어, 싫어…….
유나가 흐느끼며 시트에 얼굴을 완전히 파묻었다. 신음 소리 따위 내고 싶지 않았다. 어떻게든 참고 싶었다. 견고하리라 믿었던 자존심에 서서히 스크래치가 갔다.
“왜 계속 소리 참고 그래.”
지운이 시트에 처박은 유나의 머리를 잡아 강제로 위로 올렸다. 지탱하고 있던 한 팔이 비틀리며 유나의 몸이 아래로 쓰러졌다. 지운은 곧바로 성기가 빠져나가기라도 할까 유나의 움직임에 맞춰 몸을 아래로 내렸다. 유나는 제 등을 완전히 뒤덮은 체온을 느끼며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싫어, 싫어, 싫어.
“유나야. 혼난다.”
지운이 앙다문 유나의 입술을 손가락으로 억지로 벌리며 그 안으로 손가락을 집어넣었다. 흰 손가락이 유나의 붉은 혀를 헤집었다.
“흐으, 흐!”
“뒤로 박히는 것도 좋아, 유나야?”
“하앙, 아, 후읍, 흐!”
“아니면 얼굴 보고 박히는 게 더 꼴려?”
지운이 성기를 깊숙이 넣고 귀두로 내벽을 뭉근하게 문질렀다. 유나가 하으으, 신음하며 지운의 손가락을 깨물었다.
분명히 저 새끼가 싫은데 더 해 달라고, 계속 움직여 달라고 말하고 싶었다. 내가 그런 생각을 하다니. 자기혐오에 빠졌다. 너무, 너무 싫었다… 정지운도, 나도.
“유나야. 나랑 섹스하면서 딴생각하는 거 아냐.”
지운이 유나의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혀를 헤집던 손가락이 거칠게 유나의 입천장을 긁었다. 유나가 작게 비명을 지르며 눈가를 찌푸렸다.
“아읏…….”
“자기야. 다른 남자 생각해?”
“무슨 미, 친 소리를… 흑!”
“유나 지금 사귀는 남자 친구 없잖아, 그렇지? 혹시 전 남친 생각한 거야?”
“좀……!”
말도 안 되는 개소리였다. 유나가 눈가를 완전히 찌푸렸다. 지운이 눈을 휘었다.
“이제야 날 좀 바라보네? 계속 피하더니.”
“…읏.”
일부러 말도 안 되는 소리로 시선을 끌다니. 유나는 저런 헛소리에 시선이 팔린 자신에게 부끄러움과 약간의 짜증을 느끼며 바로 눈을 피했다. 그리고 까득, 지운의 손가락을 세게 물었다. 지운은 별다른 반응 없이 유나의 뺨을 톡톡 두들겼다.
“눈 피하지 말고. 고개 돌리지 말고. 나 좀 봐 줘, 응?”
유나는 오히려 오기가 생겨 일부러 시선을 다른 곳에 두고 지운에게 시선 한 톨 주지 않았다. 지운이 혀를 쯧, 찼다.
“정말 말 안 듣네.”
어린아이 대하듯 하는 저 어투. 저것부터 마음에 안 들었다. 금이 간 자존심에 더 금이 갈 순 없었다. 지운이 귀두로 유나가 잘 느끼는 곳을 뭉근하게 문질렀다.
“이래도 안 볼 거야?”
유나가 새어 나오는 신음을 애써 참으며 눈과 입을 질끈 다물었다. 강제로 돌리는 게 아닌 이상 제가 먼저 보긴 싫었다. 절대로.
“유나는 고집쟁이.”
지운이 유나의 허리를 들어 뒤에서 등을 완전히 껴안고는 몸을 옆으로 눕게 했다. 그가 유나의 아래를 벌려 속살에 숨어 있는 클리토리스를 손가락으로 살살 문질렀다.
“하으으…….”
소름 돋는 감각에 신음을 참지 못했다. 흐느끼는 신음을 내뱉자 클리토리스와 그 주위를 손가락으로 문지르던 지운이 조그맣게 솟아오른 동그란 살을 꾹 눌렀다. 유나가 비명을 질렀다.
“아읏!”
“이렇게 잘 느끼면서. 고집만 세고. 응?”
지운이 다른 한 손으로 유나의 가슴을 꽉 움켜쥐었다. 손가락 사이로 미처 다 쥐지 못한 살이 튀어 올랐다. 지운이 웃으며 딱딱하게 솟아오른 젖꼭지를 건드렸다.
“몸은 입과 달리 거짓말을 안 하네, 유나야.”
다시 한번 자존심에 스크래치가 갔다. 유나가 시트를 손가락으로 쥐며 말했다.
“닥…쳐, 미친, 흑, 새끼야.”
욕설을 내뱉자마자 내벽을 뭉근하게 문지르던 성기가 돌연 거세게 안을 치받았다.
“흐윽! 욕먹, 을 미친 짓을 하는 건, 흐으… 자기면서, 욕을 듣는 건, 아, 아흑… 싫은, 모양이, 지?”
유나가 제 가슴을 움켜쥔 지운의 손등에 손톱자국을 내며 비꽜다. 신랄하게 비꼬고, 손톱으로 손등을 할퀴고 자국을 내도 지운은 가슴을 주무르는 손길을 멈추지 않았다.
“유나야. 따가워. 하아… 움직이는 데, 방해, 되잖아.”
지운이 가슴을 주무르다가 유나의 손을 꽉 움켜쥐며 말했다. 유나는 제 손등을 덮은 커다란 손을 노려보았다. 콱 깨물어 버릴까. 그런 야릇한 충동이 들었다.
“음…….”
지운이 목으로 소리를 내며 유나의 목덜미에 입술을 비볐다.
“역시 유나 보지 안에 파묻혀야 제일 살 것 같아.”
지운이 쪽쪽, 유나의 목덜미에 입맞춤을 흩뿌렸다. 연인에게 하듯 행위는 다정하나 저와 지운은 연인이 아니었다. 아이러니했다. 유나는 제 다리 한쪽을 들고 아래에서 위로 처박는 감각을 고스란히 느끼며 눈을 감았다. 반항해 봤자 지운이 싸기 전까진 끝이 나지 않을 걸 알았으니까.
유나는 지운의 아래에서 연거푸 흔들리고, 또 흔들렸다. 처음에는 반항하던 유나도 행위가 이어질수록 점차 그 반항은 옅어지고 눈을 감고 신음을 내지르며 허리를 움직였다. 자책은 짧았다. 하나 쾌락은 짜릿하고 길었다.
섹스는 지운이 두 번 사정하고 나서야 끝이 났다. 할 때마다 콘돔은 쓰는 걸 다행으로 여겨야 할까? 유나는 절정 후 힘이 빠져 침대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았다. 씻기도 귀찮았다. 아까 씻자마자 정지운이 달려든 덕분에 두 번 씻게 생겼다. 여러모로 짜증 났다.
지운은 섹스 후에도 유나의 옆에 달라붙어 계속 뽀뽀를 쪽쪽 해 댔다. 어깨와 목덜미, 등, 팔, 가리지 않고 했다. 유나가 달라붙은 지운에게 팔을 휘적거렸다.
“좀, 저리 가요.”
“싫어. 붙어 있어야 기분 좋단 말이야.”
유나는 그냥 눈을 감았다. 찝찝하든 뭐 어쨌든 피곤했다. 눈을 감으니 잠이 솔솔 몰려왔다.
“유나야. 자려고?”
유나는 대답하지 않고 몰려오는 잠에 집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유나는 완전히 잠이 들었다.
눈을 떴을 땐 어둑한 밤이었다. 유나는 눈을 뜨자마자 느껴지는 체온에 고개를 돌렸다. 지운이 유나의 온몸을 뱀처럼 칭칭 휘감고 자고 있었다.
눈을 감고 새근새근 잠들어 있는 지운은 무해하고 얌전해 보였다. 유나는 그 얼굴을 빤히 바라보다가 허리를 휘감고 있는 지운의 팔을 조심스레 치웠다. 얽고 있는 다리를 빼기 위해 움직이자, 지운이 으음 소리를 내며 눈을 떴다.
“어디 가……?”
“…화장실요.”
“으응.”
지운이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흔들었다. 고작 화장실을 갔다 오는 건데 웬 인사. 유나는 이상하다는 듯 바라보며 화장실로 향했다.
화장실을 쓰고, 손까지 씻고 문을 열었다.
“아아악!”
유나는 문을 열자마자 바로 앞에 있는 얼굴에 비명을 지르며 그대로 뒤로 넘어졌다.
“아, 미안. 졸려서 힘을 바로 못 썼다.”
지운이 사과하며 뒤로 넘어진 유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유나는 손을 잡지 않고 소리를 질렀다.
“아, 진짜! 어제도 그렇고 왜 계속 이래요? 미쳤어요, 진짜?”
“그냥. 유나랑 같이 손잡고 다시 들어가서 자고 싶어서.”
욕이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유나는 겨우 욕을 참고는 손을 내민 지운을 무시하고 혼자서 몸을 일으켰다. 지나치자 지운이 유나야, 하며 유나의 손목을 잡았다.
“나중에 집에 혼자 있을 때 심심하면 TV라도 봐. 데스크톱도 있으니까 게임해도 되고.”
“저 게임 안 해요.”
“이참에 해 보는 것도 좋지. 노트북이나 태블릿 PC가 필요하면 말해. 사 줄 테니까.”
유나는 주절거리는 지운의 말을 귓등으로 듣고 침대 위에 올라가 몸을 뉘었다. 지운도 따라 눕고는 돌아누운 유나의 몸을 껴안았다. 유나는 한숨을 쉬며 그냥 내버려 뒀다. 일찍 잠이 들어서인지, 중간에 잠을 깨서인지 눈을 감아도 다시 잠이 오지 않았다.
“유나야, 안 졸려?”
잠을 설치는 걸 눈치챘는지 지운이 유나의 귓가에 속삭이듯 물었다. 유나는 제 허리를 휘감은 지운의 두 팔을 살짝 밀어내며 대답했다.
“거슬리니까 좀 떼요.”
“안고 있어야 좋단 말이야.”
“내가 거슬린다니까요?”
“조금만 참아 줘.”
정신병 걸릴 것 같다는 말은 이럴 때 쓰는 거구나. 유나는 제 머리카락을 쥐어뜯으려다가 참았다. 참을 인, 참을 인, 참을 인. 참자.
지운은 곧 잠이 들었으나 유나는 여전히 잠을 설쳤다. 잠이 오지 않았다. 결국 뜬눈으로 몇 시간 밤을 지내고 나서야 또다시 잠이 들 수 있었다.
눈을 떴을 땐 아침이었다. 곁에 지운은 없었다.
나갔구나. 유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몸을 일으켰다. 집 안에 아무도 없었다. 유나는 텅 빈 집 안에 덩그러니 혼자 남겨진 채 멀뚱멀뚱 서서 넓은 거실을 바라보았다.
할 게 없었다. 유나는 다시 침대로 돌아가 누운 채 스마트폰을 보았다. 여전히 엄마와 아빠에게선 연락이 없었다. 유나는 제일 친한 친구 지수에게 전화를 걸었다. 휴학을 하고 해외여행을 여러 번 다녀온 덕분에 지수는 아직 대학교 3학년이었다.
뚜르르, 뚜르르……. 신호음이 갔다. 전화를 받지 않았다. 수업 중인가? 유나는 지수에게 문자 한 통을 남겨 놓았다.
「야 나 감금당함」 오전 9:30
송신이 됐다. 지수는 웬만하면 답장이 빨랐으므로 유나는 가만히 지수에게 답장이 오길 기다렸다. 답장이 없었다.
뭐지? 이상했다. 유나는 연달아 지수에게 연락을 했다.
「야 왜 답장 없음? 네가 대신 경찰에 신고 좀 해 줘. 나 감금당했다고」 오전 9:42
「뭐 해?」 오전 10:20
자나? 유나는 손톱을 뜯으며 답장을 기다리다가 이내 동영상 플랫폼에 들어가서 동영상을 봤다. 처음에는 웃기고 재밌었다. 하나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그것조차 무료해졌다.
「야 김지수 뭔 일 있어?」 오후 12:35
설마 정지운이 전화나 메시지를 못하게 막은 건가? 지수에게 뭔 일이 생길 가능성보다 이게 더 가능성 높았다.
“개같은 새끼.”
유나가 욕을 내뱉으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언제까지고 지수의 연락을 기다려 봤자 소용없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차라리 그 시간에 밥을 먹고 말지.
주방으로 가자 지운이 차리고 나간 듯 식탁 위에 밥상이 차려져 있었다. 메모까지 있었다.
「국 데워 먹어 예쁜아 ><」
정지운다운 이모티콘이었다. 유나는 메모지를 구겨서 바닥에 아무렇게나 버렸다. 그리고 국을 전자레인지에 데우고, 자리에 앉아 젓가락을 들었다. 그리고 반찬을 한 입 먹은 순간, 유나의 입에서 감탄사가 나왔다. 빌어먹게도 정말 맛있었다. 유나는 놀란 얼굴로 다른 반찬도 하나하나 다 맛보았다.
새콤한 오징어무침도, 갓 담근 듯 아삭한 김치 겉절이도, 양념이 잘 배어 있는 고소한 고등어 무조림도, 깊은 맛이 나는 차돌박이 된장찌개도… 전부 다 맛있었다. 유나는 게 눈 감추듯이 순식간에 반찬을 다 먹고 된장찌개의 건더기까지 다 건져 먹었다. 웬만한 식당보다 더 맛있었다.
유나는 어느새 다 해치워 버린 빈 그릇을 보고는 허, 헛웃음을 내뱉었다. 그 정지운이 한 걸 먹었다니. 아니, 하지만 음식은 죄가 없지 않은가? 그래, 음식은 죄가 없었다. 유나는 합리화하며 먹은 그릇을 개수대에 넣었다.
밥을 다 먹고 나니 잠이 왔다. 유나는 침대에 기대앉아 꾸벅꾸벅 졸았다. 그렇게 졸고 눈을 뜨니 3시 반이었다.
먹고 자고. 안 자는 시간에는 스마트폰으로 동영상을 보고. 돼지가 따로 없었다. 유나는 휴지로 입술을 닦다가 제가 침을 흘리며 잤다는 걸 깨달았다. 하아. 한숨이 절로 나왔다. 고작 백수가 된 지 하루 만에 안락한 삶에 적응해 버리고 말다니. 유나는 고개를 휘휘 저으며 정신을 차렸다.
여기서 어떻게 도망치지. 유나는 우선 침대에서 벗어나 방 밖으로 나갔다. 거실에 있는 커튼을 걷고 밖을 바라보았다. 펼쳐진 광경에 유나의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창이 전부 다 통유리 창이었다. 그리고 눈대중으로 보아도 층수가 높았다. 적어도 20층은 될 것 같았다.
이래선 창문을 깨고 도망칠 수도 없었다. 유나는 씹, 욕설을 짓씹고는 베란다로 향했다. 베란다도 마찬가지였다. 어디 발 디딜 곳 하나 보이지 않았다. 층수가 낮았으면 몸을 날려서라도 도망쳤을 테지만, 고층은 자칫 잘못하다가는 바로 저승행이었다.
어떻게 도망치지? 유나는 도어 록으로 향했다. 버튼을 눌렀다.
―안면 암호가 일치하지 않습니다.
여전히 짜증 나는 안내음이 나왔다. 유나는 방법을 달리했다. 나갈 수 없다면 부수면 된다. 유나는 집 안을 뒤져 공구함을 찾았다. 창고 구석에 있는 공구함을 겨우 찾아 드라이브로 나사를 돌리고 온갖 짓을 벌였다. 하나 유나는 기계치였다. 아무리 해도 암호는 풀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에이씨.”
결국 유나는 공구함에 있는 작은 망치로 도어 록을 쾅, 내리찍었다.
도어 록엔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유나는 다시 한번 망치로 쾅, 찍었다. 이번에는 도어 록에서 이잉, 하는 기계음이 들렸다. 유나는 그 소리에 힘을 받아 대장장이처럼 망치로 미친 듯이 도어 록을 두들겨 댔다.
“좀, 고장 나라, 고장 나, 고장 나!”
망치질이 빗나갈 때마다 문에 스크래치가 났다. 유나는 신경 쓰지 않고 계속 망치를 휘둘렀다. 어차피 우리 집도 아닌데 뭔 상관이야.
계속 휘두른 게 효과가 있는지 도어 록이 금이 가며 안의 내부가 드러났다. 유나는 그 드러난 내부가 더 드러날 수 있도록 그 근처 부수기에 집중했다.
쾅, 쾅, 쾅, 쾅.
조그맣게 보이던 내부가 점점 크기를 키웠다. 유나는 내부가 반 이상 드러날 때까지 계속해서 망치질을 했다.
“후아.”
그리고 드디어 안의 내부가 드러났다. 유나는 드러난 핀을 손으로 잡아당겼다. 나오지 않았다. 이번에는 핀을 집중적으로 망치질했다. 쾅, 쾅, 쾅, 쾅. 그런 다음 핀을 쑥 뽑아 보았다. 뽑혔다!
유나는 쾌재를 내지르며 문고리를 돌렸다.
문이 열렸다! 드디어, 드디어 탈출이다.
유나가 광인처럼 웃으며 복도를 내달렸다. 탈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