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 만남 (1) (2/13)

1. 만남 (1)

유나는 평범한 직장인이었다. 매일 아침마다 정해진 시간에 출근을 하고, 정해진 시간에 퇴근을 했다. 월급은 적었지만 규칙적인 출퇴근 시간이 좋아 유나는 한 직장에 2년째 불만 없이 다니고 있었다.

일반인으로 태어나 뉴스나 매체에서 나오는 에스퍼와 가이드를 남 일 보듯, 아니 싫어하는 평범한 시민이었다. 나라에서 2년에 한 번씩 해 주는 건강 검진을 하면서 이따금 가이드 검사를 하곤 하는, 그런 시민.

검사를 할 때마다 유나는 가이드 부적격으로 검사 결과가 나왔다. 그때마다 유나는 당연하다는 생각과 더불어 안도를 했다.

가이드가 없으면 안 되는 에스퍼. 얼핏 보면 꽤나 로맨틱한 설정으로 보이지만 유나의 생각은 달랐다. 가이드는 에스퍼의 도구였다. 에스퍼가 필요할 때마다 착취당하는 도구.

‘너는 절대로 가이드가 되면 안 된다, 유나야.’

가이드인 유나의 어머니가 늘 하는 말이었다. 에스퍼인 아버지에게 성적 착취와 가이드 착취를 동시에 당하며 끔찍한 삶을 살아가는 엄마가 하는 말.

사랑하던 사람과 강제로 이별당하고, 강제로 에스퍼인 아버지와 결혼해야 했던 어머니의 비참한 삶을 가장 가까이서 봐 온 유나였기에 그녀는 원하지도 않는 가이드란 체질에 얽매이고 싶지 않았다.

엄마의 삶에 비하면 내 삶은 행복한 편이지, 뭐.

유나는 그리 생각하며 쳇바퀴 굴러가듯 돌아가는 일상 루틴에 만족했다. 아침 7시 30분에 일어나 출근 준비를 하고, 9시까지 출근을 한 다음 7시까지 일하고 퇴근하는 삶.

유나는 병원의 코디네이터로 일했다. 데스크에서 일하다 보니 유나는 다양한 유형의 사람과 맞닥뜨렸다. 의사한텐 한마디도 못 하면서 간호사와 코디네이터에게 폭언을 일삼는 사람, 돈을 내지 않고 도망가는 사람, 대뜸 반말부터 하는 사람. 정말 가지각색의 인간 군상을 만났다. 그럴 때마다 유나는 참을 인을 새겨 가며 일했다.

오늘도 어김없이 출근한 유나는 병원 오픈 준비를 먼저 했다. 불을 켜고, 컴퓨터를 켜고, 공기 청정기를 켜고… 그런 자질구레한 일들을.

이 병원은 직원이 세 명이 다였고, 코디네이터는 유나 한 명밖에 없었다. 그 말인즉슨, 데스크엔 유나가 다였다. 병원에 오는 환자 모두 유나가 먼저 맞이했다.

평범하게 오전 진료를 마치고, 점심을 먹고, 오후 진료를 맞이했다. 유나는 오후 진료를 하자마자 들어온 환자를 보았다. 키가 크고 잘생긴 남자였다.

잘생겼네.

유나가 그리 생각하며 남자에게 말을 걸었다.

“처음 오셨나요? 진료 접수증 작성 부탁드립니다.”

“으음…….”

남자가 유나가 건넨 종이를 받아 들더니 잠시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고는 슥슥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유나는 남자가 쓰는 진료 접수증을 흘긋 내려다보고는 조금 놀랐다.

에스퍼였다. 그것도 S급.

S급 에스퍼가 왜 이런 작은 병원에 왔지? 유나는 놀란 마음을 최대한 숨기며 남자가 건넨 종이를 받았다.

정지운, 28세, S급 에스퍼……. 유나는 빠르게 남자의 신상 정보를 습득하고 초진 환자 등록을 했다.

“앉아 계세요.”

지운이 고개를 끄덕이며 소파에 앉았다. 타자를 두들기는데도 여전히 느껴지는 시선에 유나는 컴퓨터에서 시선을 떼고 시선이 느껴지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정지운, 남자가 계속 저를 보고 있었다.

왜 계속 보는 거지? 유나는 의아해하면서 다시 모니터에 시선을 고정했다. 하나 계속해서 느껴지는 시선에 유나는 흘끔 다시 지운을 보았다. 눈이 마주쳤다.

남자가 눈이 마주치자마자 싱긋, 눈을 접어 웃었다. 웃는 얼굴이 해사했다. 잘생긴 남자가 눈을 마주치며 웃으니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유나는 어색하게 따라 웃으며 다시 모니터로 시선을 옮겼다. 기분이 나쁘진 않은데, 좀 이상한 사람인 것 같았다. 왜 계속 쳐다봐……?

“정지운 환자분, 들어오세요.”

진료실에 있던 간호사가 나와 말했다. 지운은 일어나 간호사를 따라가면서도 유나에게 시선을 쭉 건넸다.

이상해, 저 남자. 잘생기긴 했는데 정신이 좀 이상한가 봐. 아니, 그래도 에스퍼인데 정신 이상자일 리 있나?

그 이상 생각은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환자가 갑자기 몰려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정지운은 유나의 기억 속에서 잊혀졌다.

다시 만난 건 그로부터 이틀 뒤였다. 병원 오픈 준비를 하고 있는데, 갑자기 병원 문이 열렸다. 동료 직원이 온 줄 알고 유나가 고개를 돌리지도 않고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좋은 아침이에요~”

“응, 좋은 아침.”

하지만 돌아온 건 남자 목소리였다. 이 병원은 원장님도 여자였다. 남자가 병원 오픈 시간 전에 올 이유는 없었다. 환자가 저렇게 대답할 리는 없었으므로 유나는 곧바로 근처에 있는 대걸레를 들어 올렸다. 하나 잡아서 휘두르기도 전에 유나의 손에서 대걸레가 빠져나갔다.

“위험하게 휘두르면 안 되지.”

고개를 돌리고 나서야 유나는 남자가 이틀 전, 병원에 방문했던 S급 에스퍼라는 걸 깨달았다. 유나가 달달 떨면서 억지로 미소 지었다.

“아, 아직 병원 오픈 시간 전인데요. 10시 이후에 오시면 됩니다, 환자분…….”

“병원에 볼일이 있는 게 아니라, 너한테 볼일이 있어서.”

“네? 저요?”

유나가 지운의 얼굴과 바닥에 떨어진 대걸레를 번갈아 보며 물었다. 왜 나한테 볼일이 있지? 그때 초진 환자 등록을 하면 안 됐나? 뭐 실수를 했나? 유나는 이전에 있었던 일들을 떠올렸다. 딱히 실수한 건 없었다.

“응. 너. 잠시만 거기 있어 볼래?”

유나가 기막혀하면서 지운의 말대로 일단 가만히 있었다. 상대는 S급 에스퍼였다. 무슨 능력이 있는지 알 수는 없지만, 제가 잡은 대걸레를 멀리서 아주 자연스럽게 손에서 빼내지 않았는가. 염동 능력자인지, 시간 능력자인지 알 수는 없지만 유나는 잠자코 지운의 뜻대로 따랐다.

지운은 유나의 곁에 오자마자 으음, 목으로 소리를 내면서 빙긋 웃었다.

“역시. 맞네.”

뭐가 맞다는 거지? 유나는 조심스레 지운의 눈치를 보며 바닥에 있는 대걸레를 다시 들어 올렸다. 그러자 지운이 흠, 다시 한숨을 내쉬며 이번엔 직접 유나가 쥔 대걸레를 잡아챘다.

“이건 뭐 하는 데 쓰려고? 나 때리려고?”

“아뇨… 그냥, 저 바닥 청소해야 하거든요.”

유나가 일단 되는대로 변명하자 지운이 웃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는 하지 말고.”

빠각. 대걸레가 순식간에 두 동강이 났다. 유나가 입을 쩍 벌렸다. 저것도 엄연히 병원의 재산이었다. 저놈이 두 동강을 낸 걸 제가 물어 줘야 하는 거 아니야? 순간 든 생각은 그런 것이었다.

“있잖아.”

“네.”

“나 이때까지 가이드가 없어서 불편한 점이 많았거든.”

“네…….”

나한테 왜 궁금하지도 않은 자기 이야기를 하지. 유나는 어이없어하는 표정으로 그가 하는 말을 들었다.

“아무리 찾아도 없는 거야. F급 가이드까지 싹 다 뒤져도.”

“네…….”

“근데 이제 찾았네.”

“…….”

“내 가이드, 너인 것 같아.”

난데없는 말에 유나가 인상을 찌푸렸다. 무슨 소리지?

“널 보니까 기분이 좋아졌어. 그래, 네가 내 가이드야.”

지운이 활짝 웃으며 유나의 어깨를 잡아챘다. 그러더니 유나의 목덜미에 코를 박았다. 유나의 체취를 맡은 그가 하아, 나른한 한숨을 내쉬었다.

“넌 이제 내 거야.”

“……?”

뭐야, 이 미친놈은? 유나가 화들짝 놀라며 몸을 뒤로 물렸다. 하나 그에 맞춰 지운 또한 따라 한 걸음 내디뎌 유나의 목덜미에 다시 코를 박았다.

뭔 이런 미친 또라이가 다 있지? 유나가 기겁하며 제 어깨를 잡아챈 지운의 손을 후려쳤다. 온몸에 소름이 쫙 돋았다.

이제 두 번 만난 여자한테 가이드니, 넌 내 거니……. 진짜 미친놈 아냐, 이거? 그때도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정말로 정신 이상자였던 모양이었다.

“죄송한데, 여긴 정신과가 아니에요. 다른 병원 가 보셔야 할 것 같아요.”

유나가 진지하게 이야기했다. 남자에게 필요한 건 신경과가 아니라 정신과였다.

“신경과와 정신과를 오인하는 경우도 간혹 있긴 해요. 이 근처에 괜찮은 정신과가 있어요. 여기서 나가셔서 왼쪽으로 가시면…….”

“이름이 유나야?”

지운이 유나의 말을 끊고 물었다. 내 이름은 어떻게 알았지? 유나가 인상을 찌푸렸다가 이내 제가 차고 있는 명찰의 존재를 깨달았다. 병원 유니폼에 명찰을 달고 있었다.

“한유나. 이름 예쁘네.”

고맙다고 해야 하나. 유나는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유나야. 너 이제 여기 퇴사해야겠다.”

“아까부터 대체 무슨 소리를 하시는 건지 모르겠어요… 저한테 왜 이러세요…….”

“말했잖아. 널 보면 기분이 좋아진다고.”

“그게 대체 제가 퇴사해야 할 이유랑 뭔 상관인데요……. 그리고 이제 저희 두 번 만났고, 저 가이드 부적격자예요. 착각하신 것 같은데 이 이상 더 그러시면 경찰에 신고할 거예요.”

물론 경찰은 에스퍼에게 한없이 을이었지만, 그래도 신고를 안 하는 것보단 하는 게 나았다. 제가 가이드 부적격자라는 말을 못 믿을까 싶어 유나가 제 신분증을 보여 주었다.

“자, 보이시죠? 일반인 신분증이에요. 저 가이드 아니에요.”

“이상하네. 다시 이리 와 봐.”

지운이 고개를 갸웃하며 유나의 어깨를 다시 잡았다. 잡자마자 다시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지운은 유나의 반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다시 유나의 목덜미에 코를 묻었다.

“봐. 기분 좋아져. 좆같은 두통도 한결 낫고.”

“…….”

“너 내 가이드 맞는데?”

“아니라니까요.”

“아니면 어때. 머리 아픈 게 없어지는데.”

미친놈이었다. 유나는 바들바들 떨면서 다른 선생님이 오기를 바랐다. 하나 이상하게도 곧 병원 오픈 시간이 다 되어 가는데 아무도 오질 않았다. 유나가 병원 입구를 계속해서 흘끔거리자 지운이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아무도 안 와. 여기 문 막아 뒀거든.”

“네……?”

“못 들어오게 투명 벽으로 막아 놨어. 아무도 못 와.”

안 되겠다. 신고해야겠다. 유나는 제 어깨를 잡은 지운의 손 위에 제 손을 조심스레 얹었다. 손을 내리기 위함이었다. 하나 그걸 다르게 받아들였는지 지운이 활짝 웃었다.

“기분 좋아.”

미친놈. 미친놈. 미친놈. 미친놈이다. 유나가 등을 돌려 직원 휴게실로 재빠르게 뛰었다. 아니, 뛰려고 했다.

“어디 가?”

지운이 뛰는 유나의 몸을 멈춰 세웠다. 손이 닿지도 않았는데 앞으로 뛸 수가 없었다. 멀리서 염동력으로 조종하는 듯했다. 유나의 눈에 왈칵 눈물이 고였다.

미친놈이 왜 나한테 이래? 나 뭐 잘못한 거 없이 살았잖아.

억울해서 눈물이 다 났다. 유나가 눈물을 줄줄 흘리자 지운이 고개를 갸웃했다.

“왜 울어?”

“당신 같으면 안 울겠어요? 웬 미친놈이 갑자기 와서 나보고 가이드라고 하질 않나, 퇴사하라고 하질 않나, 병원 문을 막았다고 하질 않나. 또 목덜미에 코를 박는데.”

“울진 않을 것 같은데. 으음……. 일단 여기 말고 센터로 가자.”

“저 일해야 해요……. 오늘 데스크에 저밖에 없어서 저 없으면 안 된단 말이에요.”

저 대신 데스크에서 일할 수 있는 사람은 실장님밖에 없는데, 하필이면 오늘은 실장님이 오프였다. 제가 없으면 안 됐다. 하나 지운은 들은 척도 안 하고 유나의 손을 잡았다.

“가자.”

“안 된다니까요?! 차라리 일 끝나고 저녁에 오시면 안 될까요?”

“음, 꼭 그래야 해?”

“네. 일해야 해요. 저 무단결근하면 잘려요.”

“어차피 퇴사할 건데 잘리면 어때?”

말이 안 통했다. 유나가 아악 소리를 지르고 싶은 걸 겨우 참았다.

“일단 저녁에 오세요. 그땐 하란 대로 다 할 테니까, 제발 저녁에 와 주세요.”

“하란 대로 다 한다는 거, 진짜지?”

“…네. 그러니까 저녁에 오세요.”

하란 대로 하진 않을 거지만 일단 그렇게 대답했다. 지운이 어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 그럼 시간 맞춰서 저녁에 올게. 도망가면 안 돼?”

“네…….”

미친놈을 쫓아내는 게 우선이었다. 지운이 상쾌한 걸음으로 병원 밖으로 나갔다. 그가 나가고 얼마 있지 않아 출근한 동료 직원과 원장님이 의아한 표정으로 병원 안으로 들어섰다. 원장님이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유나야, 저 남자분 뭐야? 너랑 할 이야기가 있어서 병원 문 막아 뒀다던데?”

“네, 아 그게요…….”

설명하려니 너무 길었다. 유나가 머리를 쥐어뜯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죄송해요. 일이 좀 있었어요.”

“투명 벽을 쓴 걸 보면 급 높은 에스퍼 같은데. 그러고 보니 저 환자 며칠 전에 오신 분 아냐? 유나 설마 너 가이드니?”

“아니에요! 가이드 아니에요. 아는 사이도 아니고, 아니 이제 두 번 만났는데 갑자기 저 남자가…….”

억울해서 말이 술술 튀어 나가다가 멈췄다. 더 이야기해 봤자 좋을 게 없었다. 유나는 일단 고개를 숙여 사과했다.

“죄송해요. 10시 다 되어 가니까 오픈 준비부터 마저 할게요.”

거의 다 했지만 아직 할 일이 남아 있었다. 유나는 직원 휴게실로 가 머리 망을 한 다음 준비를 마저 끝냈다. 동료 직원이 궁금한 얼굴로 유나에게 물었다.

“잘생겼던데. 전 남친이에요?”

“아니에요. 두 번 만났다고 했잖아요…….”

“진짜 잘생겼던데.”

잘생기긴 했다. 정신병자라서 그렇지. 유나는 맥 빠진 한숨을 내쉬며 영혼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유나는 몰려드는 환자를 받으면서도 머릿속 한편에 자리 잡은 남자 때문에 일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그래서 몇 번 실수까지 했다. 왜지? 왜 내가 미친놈한테 걸린 거지? 내가 뭘 잘못했다고? 그런 생각만 연신 들었다.

진료를 모두 끝마치자 지운이 시간을 딱 맞춰 병원에 도착했다. 동료 직원이 다시 온 지운에게 인사하며 지운과 유나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보는 눈길이 이리 묻고 있었다. 저 남자 너한테 관심 있는 거 아냐?

아니에요. 유나가 동료 직원을 향해 고개를 단호히 저은 다음, 지운을 바라보았다. 지운이 아까 오전에 봤던 것처럼 활짝 웃으며 유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손 줘, 빨리.”

“……?”

“머리 아프거든, 지금.”

유나가 손을 내밀지 않자 지운이 다가와 유나의 손을 잡아끌었다. 유나가 어어, 하면서 지운과 손깍지를 낀 채 앞으로 끌려갔다.

“좋아.”

지운이 그리 이야기하며 웃는 낯으로 유나를 내려다보았다. 그 눈빛이 퍽이나 다정했다. 유나는 우선 다른 사람의 눈도 있고 하니 지운의 손을 톡톡 두드리며 속삭이듯 말했다.

“일단 나가요. 여기 다른 직원분도 계시니까.”

“응.”

지운이 고개를 끄덕였다. 유나와 지운이 손을 잡은 채로 병원 문밖을 나섰다.

“혼자 살아?”

“아뇨. 부모님이랑요…….”

유나는 아직까지 부모님이랑 살고 있었다. 굳이 독립하고 싶지도 않았고, 무엇보다 유나는 엄마를 무척이나 좋아했다. 엄마 또한 그녀를 품속에 끼고 놓지 않으려 했다.

“음.”

지운이 잡지 않은 손으로 턱을 쓸더니 늘 그랬듯 희미한 웃음기를 띠고서 유나에게 말했다.

“이제 거기도 나와야 할 텐데. 부모님한테 말해 둬.”

“네……?”

미치겠다. 유나는 허, 헛웃음을 터트렸다. 이 남자에겐 상식이란 게 없는 모양이었다.

“아니. 왜 저랑 상의도 안 하고 멋대로 결정해요?”

“에스퍼랑 가이드는 웬만하면 같이 사는 게 좋아. 필요할 때마다 옆에 있어야 하고.”

그건 유나도 잘 알았다. 부모님이 에스퍼와 가이드였으니까. 폭주가 일어나기 직전의 에스퍼가 얼마나 두렵고 끔찍한 존재인지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제게 말 한마디 없이 멋대로 결정하는 건 기분이 나빴다. 게다가 아직 제가 가이드인지 아닌지도 확실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저기요. 제가 가이드인지 아닌지도 확실하지 않은 마당에 이러는 거, 경우가 없지 않아요? 제발 일반적인 상식대로 행동해 주세요.”

“일반적인 상식이 뭔데?”

“그건…….”

뭐라고 설명해야 하지? 그러니까 보통 사람, 보통의 기준을 말하고 싶은데 마땅히 생각나는 게 없었다. 유나가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무언가를 결정하기 전에 상대방에게 의사를 묻고, 서로 합의한 다음 결정하는 거요…….”

“일일이 그러기 귀찮아.”

지운이 단칼에 대답하며 눈을 접었다.

“퇴사하고, 집 나오고, 짐 싸서 우리 집으로 와.”

유나는 머리를 쥐어뜯고 싶어졌다. 화가 나고 어이가 없었다. 유나가 날카로운 어조로 대답했다.

“싫어요. 왜 제가 짐을 싸고 그쪽 집으로 가야 하는데요?”

“내가 하란 대로 다 한다며?”

“그 약속 취소할게요. 없던 걸로 할게요.”

지운의 눈이 더욱 휘었다. 그가 손깍지를 낀 손에 힘을 주더니 다른 손으로 가볍게 유나의 머리통을 잡았다.

“조금만 힘을 주면 이 머리통이 바로 터질걸, 유나야.”

“…지금 협박하는 거예요?”

“글쎄. 생각보다 내 가이드가 고분고분하지 않아서 짜증 나네.”

그 말은 유나의 심기를 긁기에 적당했다. 고분고분하지 않아서 짜증이 난다고? 그럼 에스퍼 말에 넙죽 엎드리고 순종해야 한단 말인가? 마치 가이드를 사람이 아닌 도구로 보는 것 같아서 화가 울컥 솟아올랐다.

“저는 가이드도 아니고요, 설령 가이드라 하더라도 당신 같은 에스퍼를 가이딩하고 싶지 않아요.”

“으음. 일단 여기서 괜히 입씨름하지 말고 가자, 유나야.”

“어디 가는데요.”

“센터. 가서 각인 맺어야지.”

각인? 그 단어를 듣자마자 유나의 머리가 새하얗게 변했다. 각인을 하게 되면 영영 에스퍼에게 귀속된다. 혼인 관계는 끊을 수라도 있지, 각인은 끊을 수 없었다. 평생, 죽을 때까지 국가 기관에 등록되어 그 흔적이 사라지지 않았다.

죽어도 싫었다.

“싫어요.”

“계속 말 안 들으면 맴매한다.”

“싫어요. 안 갈래요. 집에 갈게요.”

유나가 딱딱 하고 싶은 말을 내뱉고선 잡고 있던 손을 놓았다. 등을 돌린 순간, 날카로운 통증과 함께 유나의 몸이 바르르 떨렸다.

“악!”

유나가 짧은 비명을 질렀다. 고개를 내리자 목덜미에서 붉은 피가 주르륵, 흐르는 게 보였다.

“맴매한다고 했잖아.”

유나의 몸이 붕 뜨더니 저절로 지운의 옆으로 도착했다. 유나가 본능적인 두려움에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목덜미를 가로지른 기다란 상처에서 피가 끊임없이 흘러내려 옷을 적셨다.

“흐음.”

지운이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유나의 피를 닦아 주었다.

“흠집 내긴 싫은데. 자꾸 손이 가게 하네.”

“진짜… 갑자기 나타나선. 대체 왜… 대체 왜 나야.”

왜 또라이 눈에 든 게 나냐고. 억울했다. 깨문 아랫입술에서도 송골송골 피가 솟았다.

“피를 좋아해? 계속 피를 만드네.”

지운이 엄지로 유나의 입술을 스치듯 만졌다. 그러고는 묻은 피를 혀를 내어 핥았다.

“피도 달아. 맛있어.”

미친 새끼. 미친 새끼. 미친 새끼. 유나가 속으로 욕을 내뱉으며 지운을 노려보았다. 몸을 전혀 움직일 수가 없었다. 무슨 수를 쓴 모양이었다.

“귀찮지만 힘 좀 써서 데려갈게. 좀만 참아, 예쁜아?”

“예쁜아는 무슨… 미친 새끼!”

“그게 원래 모습이야? 앙칼지네. 깡깡 짖는 강아지 같아.”

지운이 하하 웃음소리를 흘리며 눈을 초승달처럼 휘었다. 하는 짓과 별개로 웃는 얼굴과 목소리는 평이하고 다정했다. 유나는 그 극명한 대조가 더 끔찍하고 소름이 돋았다.

유나는 그대로 지운의 등에 업혔다. 당연히 손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염동 능력자인가? 무슨 능력자지? 유나는 남자의 뒤통수를 째려보며 머리를 굴렸다. 조금이라도 틈이 생기면 도망칠 수 있게끔.

하지만 검은 차에 태워진 순간, 그 희망이 깨졌음을 깨달았다. 검은 차 안에는 운전석과 조수석에 남자 두 명이 타 있었다. 남자 두 명은 지운과 유나를 번갈아 바라보더니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응, 센터로 가자.”

지운이 그리 이야기하며 유나를 눕히곤 무릎베개를 해 주었다. 유나는 그가 제 머리카락을 소중한 듯 쓰다듬는 걸 느끼며 속으로 치를 떨었다. 미친놈. 미친 새끼. 죽어. 죽어. 속으로 연신 지운을 욕했다.

차는 도로 위를 매끄럽게 달리며 센터로 향했다. 센터에 도착할 때까지 지운이 몸을 숙여 유나의 귓가에 대고 끊임없이 이야기했다.

“유나야. 너 나보다 세 살 어리더라. 그쪽 말고 지운 씨, 지운 오빠. 편한 대로 불러?”

제발 죽어. 움직일 수 있었다면 그대로 머리를 들어 턱주가리를 갈겼을 텐데. 유나는 진심으로 아쉬웠다.

“부모님이 에스퍼랑 가이드던데.”

언제 또 뒷조사까지 끝낸 모양이었다. 유나는 움직일 수 있는 눈동자를 굴려 지운을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지운이 싱글벙글 웃으며 유나의 뺨을 매만졌다.

“보통 에스퍼와 가이드인 부모님을 두면 자식도 유전되는 경우가 많은데. 우리 유나는 왜 부적격자라고 떴을까?”

“내가 알겠니?”

“우리 유나, 생긴 거랑 다르게 입버릇이 왜 그래.”

지운이 여전히 빙글빙글 웃는 채로 이야기했다.

“대화가 되어야 대화를 하지. 벽이랑 대화하면서 안 미칠 사람 있겠니?”

“우리 유나, 일단 가서 검사받고 그때 다시 이야기하자.”

다시 검사해 봤자 뻔했다. 부적격자라고 뜨겠지. 이때까지 한 검사에서 한 번도 가이드라고 뜬 적 없었고, 죄다 부적격자로 떴다. 유나는 제발 이 미친놈이 자신이 부적격자로 떴을 때 풀어 주길 간절히 바랐다.

차가 센터 앞에 멈춰 섰다. 지운이 유나의 몸을 들어 올려 안으며 말했다.

“자, 예쁜아. 내리자.”

“내 발로 내릴 수 있거든? 좀 풀어 줘.”

“안 돼. 센터 들어갈 때까진 못 풀어 줘. 도망칠 거잖아.”

“…….”

아까처럼 유나는 지운의 등에 업혔다. 다 큰 성인이 업히다니. 부끄러워 미칠 것 같았다. 게다가 센터 근처에는 돌아다니는 사람이 많았다. 정지운은 꽤 유명 인사인지 그를 보고 무어라 숙덕이거나 아는 체하는 사람이 많았다. 업힌 유나를 보고 누구냐고 묻기도 했다.

“내 가이드.”

그러면 정지운은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저렇게 이야기했다. 가이드는 무슨, 얼어 죽을.

“저 가이드 아니에요. 일반인인데 이 사람한테 납치당했어요.”

그에 질세라 유나도 바로 그리 반격했다. 그렇게 말해도 다들 의아한 표정을 지을 뿐, 유나를 도와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다 한통속 같으니라고.

센터 안으로 들어가자 지운은 약속했던 대로 유나를 풀어 주었다. 속박에서 풀려난 유나가 바로 등을 돌려 센터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 지운은 예상한 듯 바로 유나의 목에 팔을 걸어 품으로 끌어당겼다.

“어허, 어디 가려고.”

“씹…….”

유나가 욕설을 중얼거리자 지운이 놀란 듯 눈을 토끼처럼 크게 떴다.

“우와, 유나야. 욕 한두 번 해 본 솜씨가 아닌데?”

욕이 안 나오게 생겼냐? 유나가 눈으로 그렇게 말하자 지운이 하하 소리 내어 웃었다. 퍽이나 우스운 모양이었다. 짜증 나는 새끼.

지운은 싱글벙글 웃는 낯으로 유나의 목에 팔을 건 채 앞으로 쭉쭉 걸었다. 유나는 나무늘보처럼 지운의 걸음에 질질 이끌리듯 걸었다. 부적격이 나올 게 뻔했지만 그래도 어쨌든 이 남자랑 같이 있고 싶지 않았다.

지운은 어느 방 앞에 멈춰 서더니 두어 번 노크 뒤, 방문을 열었다. 열자마자 안경을 쓴 여자가 놀란 눈으로 지운과 지운의 팔에 매달린 유나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데려왔어. 내 가이드.”

“어떻게 찾았어?”

“병원에서.”

여자는 조금 당황한 얼굴로 지운에게 매달린 유나를 바라보았다. 딱 보아도 걱정 어린 눈길이었다. 유나는 미끼를 문 물고기처럼 이거다, 하며 여자를 향해 속사포처럼 말을 내뱉었다.

“선생님, 제발 도와주세요. 저는 일반인인데 이 사람이 절 멋대로 납치했어요. 전 가이드도 아니고요, 가이드 검사 할 때마다 부적격 떴거든요? 선량하고도 평범한 시민이에요.”

“으음.”

유나를 붙잡고 있던 지운이 목으로 소리를 내며 유나를 흘긋 내려다보았다. 다분히 흥미 어린 눈길이었지만 유나는 신경 쓰지 않고 계속 말을 이었다.

“가이드 검사 해 보시면 알 거예요. 저 정말로 일반인이고요, 이 사람이 뭔가 착각하는 거예요. 검사 좀 시켜주세요, 네?”

“…정말이야, 정지운?”

“으음. 응. 일반인이라고 주장하는데, 난 얘만 보면 기분이 좋아지는걸. 두통도 괜찮아지고.”

지운이 유나의 머리카락을 쓰다듬다가 이내 머리칼에 얼굴을 묻었다. 흡―하. 숨을 몰아쉰 지운이 웃었다. 유나는 소름이 돋는 나머지 곧 토할 사람처럼 인상을 와락 찌푸렸다.

“일단 일반인이라고 주장하시니까… 검사는 하고 각인을 맺든가 해야지.”

여자가 그리 말하며 일어섰다. 여자는 가지런한 걸음으로 유나에게 다가와 악수를 청했다.

“정윤미 교수입니다. 지운이의 엄마예요.”

미친, 어머니였어? 유나는 얼이 빠져서 입을 쩍 벌렸다가 일단 손을 내밀어 악수했다. 그래도 아들과 달리 어머니는 정상으로 보여 다행이었다.

“이때까지 가이드 검사는 몇 번 해 보셨죠?”

“세 번이요. 전부 부적격이 떴어요.”

“그럼 다시 한번 해 보도록 해요. 절 따라오세요.”

정 교수가 문밖으로 나섰다. 지운이 유나에게 팔짱을 끼고서 함께 걸었다.

“댁은 왜 따라와요?”

“너 꼼수 부릴까 봐.”

“…….”

“그리고 유나야. 그쪽, 댁, 아니라 오빠, 지운 씨.”

“제발 닥쳐 주세요.”

오빠라고 부르느니 혀를 깨물고 말지. 유나는 그 뒤로 지운이 어떤 소리를 하든 저 사람이 하는 말은 다 개소리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무시하면서 앞을 향해 걸었다.

어머니 쪽은 상식적인 인간으로 보이니 저쪽에 모든 걸 거는 수밖에 없었다. 일반인으로 나오면 풀어 주시겠지……. 저 인간도 자기 엄마 말을 거역하겠어? 효자는 아닌 것 같지만, 그래도 어머니께서 어떻게든 해 주시겠지…….

검사실에 들어선 유나는 자연스럽게 속옷까지 모두 벗고 검사복으로 갈아입었다. 검사는 간단했다. 방사선 기기로 진단을 하고, 피 검사만 하면 끝이었다.

유나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초조하게 검사실 내부를 둘러보았다. 이때까지 부적격이 뜨긴 했지만… 전부 피 검사 덕분이었다. 방사선 기기로 진단했을 땐 가이딩이 가능하다는 진단이 나왔지만, 피 검사를 했을 땐 가이딩 능력은 발현될 수 없을 정도로 현저하게 부족하다는 진단이 내려져 가이드 부적격 판정을 받았다. 저 같은 타입의 일반인들도 꽤 많았다.

이번에도 그렇겠지.

유나는 방사선 기기 앞에 선 채 검사를 받고, 이어 바로 피를 채취했다. 정 교수는 검사실에서 곧바로 피 검사 결과까지 판독했다.

“응?”

정 교수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녀는 검사 결과가 의아한 듯 결과지와 유나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유나 씨, 약 먹는 거 있어요?”

“…네?”

“유나 씨, 가이드 억제제 먹고 있냐고요.”

“……?”

영문 모를 소리였다. 억제제라니.

“아뇨, 억제제는 안 먹고 엄마가 주는 영양제만…….”

엄마가 주는 영양제.

문득 유나의 목 뒤로 섬뜩한 한기가 스쳐 지나갔다. 엄마가 어렸을 때부터 아침, 저녁으로 챙겨 주는 영양제가 있었다. 건강 검진을 할 때도, 가이드 검사를 할 때도 하루도 빠짐없이 챙겨 줬다. 여행을 갈 때조차 엄마가 신신당부를 해서 늘 먹었다.

노란색 알약 두 알을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쭉 하루에 두 번. 아침, 저녁으로 매일매일 먹었다. 오늘도 출근하기 전에 먹었다.

“가이드 맞는데요, 유나 씨?”

“…….”

“그동안 억제제 먹고 잘 숨겨 왔네요?”

무슨 소리지? 유나의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했다. 말이 안 됐다. 억제제라니. 그동안 엄마가 내게 먹인 게 영양제가 아니라 억제제였단 말인가? 그렇다면 태어나자마자 바로 하는 검사에선 왜 가이드라고 뜨지 않았고?

이상했다. 그리고 엄마가 내게 말도 없이 억제제를 먹일 리 없었다. 설마, 엄마가 그럴 리가…….

‘너만은 절대, 내 딸만큼은 절대 나처럼 살게 하지 않을 거야.’

유달리 엄마가 늘 자주 하던 말이었다.

‘너는 절대로 가이드가 되면 안 된다, 유나야.’

엄마가 그럴 리가.

유나가 당황해서 어, 어, 어, 하며 눈을 깜빡거렸다.

“그럴 리가요. 억제제를 먹은 기억은 없는걸요……. 그리고 억제제를 먹었다고 어떻게 확신하세요?”

“억제제의 효과는 하루 내내 이어지지 않아요. 약을 먹고 최대 열두 시간까지 유효하죠.”

“아…….”

“생각해 봐요. 약을 언제 먹었는지.”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먹었다. 7시 30분 즈음에. 최대 열두 시간까지 유효하다면… 저녁 시간을 훌쩍 넘긴 지금쯤, 약효가 떨어지고도 남을 시간이었다.

저녁 약을 먹지 않았다.

“아…….”

유나가 저도 모르게 탄식을 내뱉었다. 온몸이 사시나무 떨리듯 떨리기 시작했다. 설마, 그럴 리가. 내가 가이드일 리 없잖아.

“방사선 검사와 피 검사 결과가 조금 달라서 의아했는데, 역시. 그랬군요. 억제제를 먹었는데도 이 정도면 억제제를 먹지 않았을 때 유나 씨 가이딩 능력은 적어도 A급 이상이에요.”

정 교수가 무어라 이야기했지만 유나의 귀엔 제대로 들어오지 않았다. 유나는 패닉에 빠져 할 말을 잊은 채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았다. 왜 엄마는 이 사실을 숨겼지? 왜?

“엄마… 엄마에게 물어봐야 해요.”

엄마의 입으로 듣기 전까지는 믿을 수 없었다. 유나가 스마트폰을 쓰기 위해 주머니를 뒤졌다. 스마트폰이 없었다.

“이거 찾아?”

뒤에 있는 벽에 기대서서 잠자코 기다리고 있던 지운이 싱긋 웃으며 유나의 가방을 흔들었다. 유나가 가방을 낚아채기 위해 손을 뻗자 지운이 어이쿠, 하며 가방을 뒤로 물렸다.

“억제제 먹었어, 유나야?”

“빨리, 빨리 가방 줘. 엄마한테 전화해야 해.”

“그래 놓고 나한테 시치미 떼고, 검사하자고 조른 거야?”

“달라고!”

“여태까지 내 가이드는 어디 갔나 했는데, 억제제를 먹고 꽁꽁 숨어 있었으니… 못 찾을 만했네.”

“줘!”

“난 꽁꽁 숨은 내 가이드 덕에 전국에 있는 신경과는 다 돈 것 같은데.”

지운이 가방을 빙글빙글 흔들다가 유나에게 가방을 내밀었다. 유나가 황급히 가방을 낚아채고는 그곳에서 스마트폰을 찾아 꺼냈다. 잠금 화면을 풀자마자 부재중 전화 다섯 통 알림이 보였다. 전부 엄마였다.

전화를 걸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엄마가 전화를 받았다.

―한유나, 어디야? 퇴근 시간을 훌쩍 넘겼는데 집에 안 오고.

“엄마…….”

유나가 넋 잃은 목소리로 엄마를 부르자 스마트폰 너머로 걱정 어린 엄마의 목소리가 들렸다.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엄마, 엄마가 나한테 억제제 먹였어?”

―…그게 무슨 소리야?

“엄마가 나 몰래 나한테 억제제 먹였냐구!”

스마트폰 너머로 말소리가 없었다. 숨소리만 들릴 뿐. 설마. 유나는 머리가 빙빙 도는 걸 느꼈다. 아무리 그래도… 내게 말 한마디 하지 않았을 리가.

―엄마는 다 널 위해서 그런 거야.

엄마는 날 못 믿었던 걸까? 아니면 어떻게든 내가 가이드인 걸 깨닫지 못하게 하려고 그랬던 걸까? 유나의 머릿속에 오만 가지 추측과 의심이 스쳐 지나갔다. 엄마가 이때까지 나한테 먹인 게 정말로 가이드 억제제였다고?

―너만큼은, 너만큼은 엄마처럼 살게 하고 싶지 않아서.

“뭐가 됐든! 왜 나한테 숨겼냔 말이야!”

―유나야, 너 지금 어디니. 검사한 거야? 검사 결과 어떻게 나왔어, 응?

“여기, 센터야…….”

―센터? 에스퍼들 모여 있는 크리드 센터?

유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것을 긍정으로 알아들은 유나의 엄마가 스마트폰 너머로 미쳐 날뛰기 시작했다.

―너 왜 거기 있어! 왜 거기 간 거야! 미쳤다고 거길 가!

“나도 오고 싶어서 온 거 아니야. 어떤 미친놈이 나보고 내가 자기 가이드라면서 날 납치했단 말이야.”

―유나야. 엄마가 갈게, 엄마가 지금 당장 갈게. 기다려. 엄마가 갈게.

뚝, 전화가 끊겼다. 유나는 전화가 끊겼음에도 스마트폰을 귀에 대고 있다가 수 초가 흘러서야 스마트폰을 귀에서 뗐다.

“유나야. 전화 소리 다 들리더라. 어머님 지금 여기 오신다구?”

멍하니 서 있는 유나의 귓가에 지운이 속삭였다. 왈칵 화가 뻗쳐 유나는 손을 들어 지운의 뺨을 내리쳤다.

짝―

그대로 지운의 고개가 돌아갔다. 뺨을 맞은 지운이 맞은 자세 그대로 멀뚱멀뚱 눈을 깜빡이다가 손을 들어 맞은 왼쪽 뺨을 손끝으로 매만졌다.

“와. 나 뺨 맞은 거야?”

지운이 중얼거리며 맞은 뺨을 계속해서 만지다가 고개를 돌려 유나를 바라보았다. 뺨 맞은 게 그렇게나 신기한지 연신 만지는 걸 멈추지 않았다. 내가 왜 저런 또라이랑.

“왜, 왜, 왜 갑자기 나타나서… 왜…….”

유나가 웅얼거리며 입술을 앙다물었다. 눈물이 그렁그렁 고였다. 제 삶이라고는 없이 아빠의 스케줄에 맞춰 사는 엄마의 삶이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엄마는 후천적으로 능력이 발현된 가이드였다. 종종 있는 유형이었다. 후천적으로 발현된 가이딩 능력 때문에 엄마는 그 당시 결혼을 약속한 남자와 헤어지고 강제로 사랑하지도 않는 아빠와 각인을 하고 결혼을 했다.

A급 에스퍼인 아빠는 전투로 늘 바쁜 와중에도 제겐 잘해 주었다. 무뚝뚝한 아빠는 엄마와는 다른 사랑을 주었다.

하나 엄마는 강제로 발현된 가이딩 능력과 각인 그리고 결혼, 가이딩을 가장한 성 착취 때문에 아빠를 아직까지도 사랑하지 않았다.

제겐 좋은 아빠였다. 하나 좋은 남편은 아니었다.

사랑과 미움은 종이 한 장 차이라고, 유나는 아빠를 미워하는 엄마를 보며 아빠를 함께 미워하기도 했고 어느 순간은 아빠를 사랑하기도 했다.

엄마의 갈 곳 잃은 사랑은 모두 제게 쏠렸다. 유나는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엄마의 과하다 싶은 사랑과 과잉보호 속에서 자라났다. 그랬기에 엄마의 행동이 믿기지 않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엄마니까 그랬으리란 어렴풋한 믿음이 들었다. 엄마라면 제게 말하지 않고, 저 몰래 억제제를 먹일 수 있었다.

“그쪽만 안 나타났어도… 그냥 평범하게, 평온하게 살았을 텐데.”

저 몰래 먹인 것에 대해서는 화가 났지만, 저를 생각해 준 엄마의 행동이 밉진 않았다. 유나 또한 가이드가 되기 싫었으니까. 평범하게, 높낮이 없이 단조로운 일반인의 삶을 살고 싶었으니까.

유나는 엄마를 이해했다. 그래서 미웠다. 저를 믿지 않고 이야기해 주지 않은 엄마가 원망스러웠다. 혼자 안고 가려는 엄마에게 화가 났다.

“그쪽이 아니라 지운 씨, 지운 오빠.”

“아 좀…….”

“그보다 유나야. 손 맵다. 아파.”

지운이 애교를 부리듯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가 배시시 웃었다. 미친 새끼 아냐, 진짜……. 유나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수그렸다가 다시 들었다. 엄마가 센터로 온다고 했다. 어쨌든 엄마를 만나야 했다.

“일단… 엄마 좀 만나게 해 줘요. 얘기는 해야 할 거 아니에요.”

“무슨 얘기?”

“가이드… 판정받았다고. 당신이 나 납치했다고.”

“납치라니. 유나가 말을 안 들으니까 내가 여기로 데려다준 거지.”

“그게 그거죠. 괜히 부모님 걱정시키고 싶지 않으니까 만나게 해 줘요.”

“응. 대신 도망 못 가게 내 근처에서. 알겠지?”

“…네, 알겠으니까 좀…….”

나 좀 혼자 내버려 둬. 그렇게 말하려다가 유나는 벽에 머리를 콩, 박았다. 오늘 폭풍처럼 휘몰아친 일 때문에 머릿속이 어지러워서 정신이 없었다. 정지운도, 가이드 판정도, 엄마가 내게 몰래 억제제를 먹인 것도 전부 다 꿈같고, 어지럽고, 화나고, 어이없고…….

유나는 실없는 웃음을 흘렸다.

“유나 씨, 억제제를 오랜 기간 복용했으면 분명 끊고 나서 부작용이 있을 거예요. 가이딩 능력을 조절하지 못한다든가…….”

“네…….”

그러든가 말든가. 유나의 귀에 의미 있게 박히진 않았다. 부작용이고 뭐고 집에 가고 싶었다.

“일단 여기서 나가요. 안 도망갈 테니까, 바람 좀 쐬게 해 줘요.”

“유나 너 거짓말 너무 잘해서 안 믿겨.”

“진짜예요. 엄마도 온다고 했잖아요. 엄마가 여기로 온댔는데 설마 도망을 치겠어요?”

“그래도, 나랑 손잡고 있어.”

지운이 유나의 손가락 사이로 제 손가락을 얽으며 빙긋 웃었다. 유나는 하아, 한숨을 쉬었다. 이 남자는 답이 없었다.

유나와 지운은 손을 잡은 채 센터 밖으로 나가 근처에 있는 벤치에 앉았다. 유나는 별이 없는 까만 밤하늘을 바라보았다가, 개미가 기어 다니는 바닥을 바라보았다가, 이어 저를 바라보고 있는 지운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그냥 손만 잡고 있어도 가이딩이 돼요?”

“몰라. 그냥, 너랑 있으면 기분이 좋아져. 완전히 없어지진 않지만 머리 아픈 것도 한결 낫고.”

“그냥 난… 당신 두통 치료제예요?”

“왜 그렇게 자신을 표현해, 유나야. 입 꿰매 버린다?”

미치겠다. 유나는 그냥 화제를 돌렸다.

“…당신은 폭주한 적 없어요?”

“…왜?”

“난 폭주 직전까지 간 우리 아빠 본 적 있거든요.”

유나가 중얼거리듯 이야기했다. 지운이 가만히 유나를 바라보았다.

“우리 엄마랑 아빠, 가이드랑 에스퍼잖아요. 우리 엄마는 좋아서 아빠랑 결혼한 거 아니에요. 강제로 결혼하고 각인했어요. 우리 아빠가 하필 A급 에스퍼에, 엄마랑 상성이 좋았거든요. 우리 엄마는 후천적으로 발현한 고작 C급 가이든데.”

지운이 얘기를 듣고 있다는 듯 응, 대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엄마는 우리 아빠 안 좋아해요. 그래서 언제 한번 크게 싸우고… 엄마가 아빠한테 가이딩하는 걸 거부한 적이 있어요.”

“…저런.”

지운이 한 손으로 턱을 괴며 왼쪽 입꼬리를 올렸다.

“아빠는 엄마 외의 다른 사람에게 가이딩받고 싶지 않아 했어요. 그래서 참고, 참고, 또 참다가…….”

기억을 떠올린 유나가 잠시 말을 멈췄다. 어린 시절 또렷하게 남은 기억. 공포스러웠던 기억. 차마 입 밖으로 낸 적 없는 기억이었다. 그 누구에게도.

다섯 살 때였다. 방에서 놀고 있던 유나는 거실에서 들리는 커다란 소리에 방문을 절대 열지 말라는 엄마의 외침을 무시하고서 조그마한 발을 위로 들어 문고리를 잡아 돌렸다. 그리고 맞닥뜨린 건, 엄마의 옷을 마구잡이로 뜯고 있는 아빠와 그 밑에 깔려 울부짖는 엄마였다.

유나는 아빠가 엄마를 괴롭힌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아빠한테 다가가 안 된다고, 엄마 괴롭히지 말라고 말하며 울었다.

“아빠, 싫어, 엄마 괴롭히지 마!”

아빠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엄마는 신음하면서 어떻게든 유나의 눈과 귀를 막기 위해 애를 썼다. 어린 유나는 아빠의 종아리를 잡고 흔들었다.

“아빠, 아빠!”

하나 폭주 직전의 아빠는 유나의 목소리를 듣지 못했다. 아니, 오히려 딸을 방해물로 여기고선 종아리에 매달린 유나를 걷어차기까지 했다. 그대로 유나는 나동그라졌다. 엉엉 울어도 아무도 그녀를 달래 주지 않았다. 엄마의 비명, 이성을 잃은 아빠의 모습…….

어린 유나는 모든 걸 잊은 척 엄마에게 내색 하나 하지 않았다. 아무것도 기억 안 나, 엄마! 그렇게 말하며 웃었다. 하나 그렇지 않다는 걸 유나도, 엄마도 모두 알았다.

고작 다섯 살 때 기억인데. 스물다섯이 된 지금까지 뇌리에 박혀 사라지지 않았다. 유나는 그때 기억을 떠올리며 씁쓸하게 웃었다. 에스퍼와 가이드……. 제겐 낭만과는 오백 보는 더 멀리 떨어진 존재들이었다. 한데 내가 가이드라니.

“유나야, 슬퍼?”

“…왜요?”

“슬픈 얼굴을 하고 있어서.”

지운이 유나의 뺨을 잡고 제게 돌렸다. 유나는 지운과 눈이 정면으로 마주쳤다. 그제야 유나는 지운의 눈이 유달리 새까맣다는 것을 깨달았다. 밤하늘보다 더.

“나… 가이드 되기 싫어요.”

유나가 진심을 다해 이야기했다. 정말로, 죽어도 가이드는 되기 싫었다.

“으음.”

“에스퍼랑 가이드인 우리 엄마, 아빠를 보고 자랐어요. 나한텐 끔찍해.”

까만 눈이 반으로 접혔다. 지운이 유나의 입술에 쪽, 뽀뽀했다.

“싫어. 안 돼.”

순식간에 입술을 겹쳤다가 떨어져 나가서 유나가 거부할 새도 없었다. 유나는 돌처럼 굳은 채 눈을 깜빡거렸다. 저 새끼가 지금 뭘 한 거지?

“와. 손잡는 거보다 뽀뽀가 더 좋아.”

“허…….”

화도 안 났다, 이젠. 그냥 어이가 없었다.

“내 얘기 들은 거 맞아요?”

“응. 들었는데? 근데 유나야. 안타깝지만 부모님 일은 부모님 일이고, 우리 일은 우리 일이지 않을까? 분리해서 바라볼 줄 알아야 해.”

이 남자가 누군가를 향해 훈계하다니. 진짜 믿기지 않는다. 유나는 너무나도 어이가 없어 이젠 헛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당신이 조언하니까 너무 웃겨.”

“당신이 아니라 지운 씨, 지운 오빠.”

“그 소리도 이제 지겨우니까 그만해요.”

“그러면 유나가 나한테 오빠라고 불러 주면 되잖아.”

“…….”

유나는 입을 다물었다. 더 말해 봤자 저만 손해였다. 벌써부터 속이 들들 끓으니까. 유나는 가만히 먼 곳을 바라보며 엄마가 오길 바랐다. 엄마가 보고 싶었다.

그냥, 집에 가서 엄마가 해 준 밥을 먹고… 엄마랑 같이 평생 사는 게 꿈이었는데…….

‘야, 너희 모녀 좀 심한 거 아니야?’

친구 중 누군가는 그렇게 말하기도 했다. 하나 유나는 상관없었다. 엄마가 없는 삶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으니까. 엄마랑 평생 살 거였으니까. 유나는 엄마 때문에 결혼도 포기했다. 엄마에게 저밖에 없는 것처럼, 저도 엄마에게 유일한 존재이고 싶었다.

“유나야!”

저 멀리서 제 이름을 부르는 엄마의 목소리가 들렸다. 유나가 벌떡 일어났다. 지운도 따라 일어나 유나의 손을 잡았다.

“뛰지 마, 유나야.”

지운이 그리 말하며 유나의 걸음 속도를 조절했다. 유나는 멀리서 보아도 알 수 있는 엄마의 모습에 턱에 힘을 주고 울지 않기 위해 애썼다. 제가 가이드 판정을 받고 나서 제일 힘들 사람은 자신이 아니라 엄마였으니까.

유나가 있는 곳에 한걸음에 다가온 엄마는 유나와 손을 잡고 있는 지운을 빤히 바라보더니 이윽고 한숨을 내쉬었다. 긴 한숨에는 많은 의미가 담겨 있었다. 한숨을 내쉰 엄마는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유나야.”

목소리에 참담함이 가득했다. 손에 얼굴을 묻은 채 숨을 고르던 엄마가 고개를 들고 물었다.

“네 에스퍼가 정지운이니?”

엄마가 정지운을 알고 있었다. 유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떻게…….”

유나의 엄마는 이런 일을 예상했다는 듯, 그러면서도 믿기지 않는다는 듯 복잡한 얼굴로 유나를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그녀는 제 딸의 손을 잡고 있는 지운을 잠시간 노려보더니 잡고 있는 손을 강제로 떼 냈다.

“집에 가자.”

하나 떼어지자마자 곧바로 지운이 다시 유나의 손을 잡았다.

“어머님, 유나랑 저 같이 살기로 했어요.”

“아니야, 엄마!”

유나가 바로 부정했다. 정지운은 제가 바라는 바를 꼭 유나도 원했던 것처럼 말하곤 했다. 유나 입장에선 어이가 없었다.

“그래, 그러니까 일단 집에 가자. 정지운 씨, 나중에 연락을 주든가 해요. 이렇게 바로 데려가는 건 무슨 경우예요? 우선 제가 딸아이하고 이야기를 한 다음…….”

“도망친다는 말 되게 길게 한다.”

지운이 싱긋 웃으며 말을 잘랐다. 지운은 유나의 잡은 손을 들어 올린 다음 그 손을 휘휘 흔들었다.

“어머님, 얘 데려갈 테니 그리 아세요.”

“안 돼!”

데려간다는 말에 엄마의 눈이 빙글 돌았다. 그녀가 버럭 소리를 지르며 지운에게 달려들었다. 어떻게든 유나와 떨어트리기 위함이었지만 지운이 어이쿠, 하며 그새 저와 유나 근처로 투명 장벽을 만들었다. 장벽에 부딪힌 유나의 엄마가 뒤로 나동그라졌다.

“야!”

엄마가 넘어지자마자 유나가 펄쩍 뛰어오르며 엄마에게 달려가려고 했다. 하나 잡힌 손과 장벽 때문에 그럴 수 없었다. 유나조차도 장벽 밖으로 나갈 수 없도록 만든 듯했다.

“미친 새끼야, 지금 우리 엄마한테 뭐 하는 짓이야?!”

어떻게든 깍지 낀 손을 떼어 내려고 손을 마구잡이로 흔들어 댔지만 지운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자자. 괜히 힘 빼지 말고 가자, 유나야. 어머님한테는 나중에 연락하게 해 줄게.”

“미친……. 엄마! 엄마!”

유나가 미친 듯이 엄마를 외쳤다. 유나의 엄마 또한 어떻게든 제 딸을 구해 내기 위해 장벽 안으로 들어오려 아등바등했지만 그래 봤자 C급 가이드였다. 가이딩 능력을 제외하면 일반인과 다를 바 없었다.

유나가 발을 구르고 몸부림을 치며 강렬하게 저항했다. 그러자 지운은 귀찮아졌는지 혀를 쯧, 차며 유나의 머리통을 툭툭 손끝으로 건드렸다.

“유나야. 흠집 내기 싫다고 했잖아. 셋 셀 테니까 그 안에 얌전해지자?”

“미친놈아, 이거 풀어!”

“하나.”

“엄마! 엄마!”

“두울.”

“놔, 놓으라구, 엄마!”

“세엣.”

지운이 진심으로 안타까운 한숨을 내쉬더니 유나의 목덜미 뒤를 잡아 올렸다. 어미의 이에 물려 대롱대롱 매달린 고양이처럼 유나가 공중에서 흔들렸다.

“뭐 하는 거야, 미친 새끼야. 풀어 달라고!”

“조용.”

지운이 그대로 주먹을 들어 유나의 명치를 가볍게 가격했다. 지운의 기준에선 아주 가볍게 친 것이었으나 유나에겐 그렇지 않았다. 그대로 명치를 얻어맞은 유나가 소리도 내지 못하고 그대로 기절했다. 그 광경을 본 유나의 엄마가 더 미친 듯이 발악하기 시작했다.

“어머님, 나중에 또 뵈어요. 그땐 얌전하셨으면 좋겠어요.”

제 딸이 에스퍼에게 납치되는데도 그저 이렇게 무력했다. 유나의 엄마가 소리 내어 울기 시작했다. 주변에 에스퍼 몇몇이 지나갔지만 흔한 광경이라 그들은 못 본 척 저들 갈 길을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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