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1화 (21/21)

“석경아.”

“응?”

석경은 윤조의 넓은 가슴팍에 얼굴을 묻고 잠을 청하려다가 저를 부르는 목소리에 비몽사몽 대답했다.

“석경이 너 히트사이클이었잖아.”

“우웅.”

“근데 나 아까 노팅 했잖아.”

“……우웅.”

“이거 백 프로 임신 아닐까?”

“…….”

“석경아, 낳을 거지?”

윤조의 목소리는 기대와 흥분으로 살짝 떨려 나왔다. 석경이 뭐라 대꾸를 하려는 찰나에 윤조의 흥분된 목소리가 이어졌다.

“딸이면 좋겠다.”

“……어.”

“석경이 너랑 닮은 딸이면 너무 예쁠 것 같아. 이름은 석희라고 지을까?”

우리 윤조, 작명 센스가 그다지 좋은 편은 아니구나. 석경은 속으로 생각하다가 더 시간 끌면 안 될 것 같아서 입을 열었다.

“윤조야, 저기…….”

“응?”

“즐거운 상상 중에 미안한데, 나 피임약 먹었어.”

“뭐? 언제?”

윤조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되물었다. 조금만 더 늦게 말했으면 실제로 존재하는 딸을 빼앗긴 것처럼 굴었을지도 모른다.

“너 자고 있을 때 히트사이클 온 거 알고 먹었어. 아까 참다가 너한테 간 거였거든.”

“왜 참았어. 바로 깨우지.”

“아니, 너 잘 자고 있는데 그거 하자고 깨우기가 좀 그렇잖아. 그래서 일단 참아 봤지.”

“그게 참아져?”

“못 참아서 피임약 먹고 너한테 간 거잖아.”

윤조가 어깨를 떨며 웃었다. 품에 안겨 있던 석경의 몸도 덩달아 떨렸다.

“석경아, 우리 사귀기 전에…….”

“응.”

“그때 내가 못 참고 너 안았으면 네가 나 미워했겠지?”

그때가 언제를 말하는 건지 석경은 바로 알아들었다. 윤조의 생일날, 주기가 아닌데도 히트사이클이 일찍 찾아왔었다.

“안 미워했을 거야. 그때도 내가 너, 많이 좋아했으니까.”

“그럼 괜히 참았다. 나는 너 다칠까 봐, 몸이든 마음이든 다칠까 봐 이 악물고 참았던 거였는데.”

“근데, 윤조야.”

“응?”

“고마웠어, 그때.”

“뭐가?”

석경은 자기 스스로를 보잘것없는 오메가라고 생각했었다. 그런 오메가를 권윤조는 혹시나 다칠까 봐 전전긍긍하며 지켜 줬었다. 그 마음이 고맙지 않을 리가 없었다.

“안정제 비싼 걸로 놔 줘서.”

“뭐야, 그게.”

윤조가 다시 어깨를 떨며 웃었다. 석경도 윤조의 품에 안겨 같이 웃었다.

* * *

“권윤조 혈색이 오늘따라 왜 좋아 보이지? 아침부터 기분 나쁘게.”

이제 막 강의실에 들어온 윤조를 보며 준영이 아니꼬운 말투로 말했다.

“너는 왜 아침부터 시비야.”

준영이 대뜸 시비를 걸어 와도 윤조의 마음은 너그러웠다. 어제 정말 굉장했으니까. 매일매일이 석경의 히트사이클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윤조는 불가능한 바람을 가져 보았다.

“하아…….”

준영이 땅이 꺼질 듯한 한숨을 내쉬었다. 제 고민을 알아달라는 강력한 어필이었지만 윤조는 못 들은 척했다. 하지만 석경이 이를 모른 척할 리가 없었다.

“준영아, 왜 그래? 무슨 고민 있어?”

“김준영은 뇌가 없는데 무슨 고민이 있겠어.”

이수현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냐는 투로 말했다. 준영이 이수현을 잠시 노려보다가 다시 꺼질 듯한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워낙 냉미남이라 마인드 컨트롤에 능하고 얼핏 감정이 메말라 보일 수는 있겠지만, 이래 봬도 섬세한 편이거든.”

“뭐라는 거냐.”

“몰라.”

애들은 준영의 고민을 무시했지만, 석경은 늘 해맑은 준영이 어두운 얼굴을 하고 있자 염려가 됐다.

“준영아, 왜 그래. 혹시 코인 물렸어?”

“아니, 석경아. 내가 코인 손절 친 지가 언젠데.”

“그럼 어머니가 카드 압수하셨어?”

“석경아, 내가 그런 세속적인 것들로 고민할 사람으로 보여?”

준영이 안타깝다는 어조로 말했다.

“너 지난주에 점심 내기 사다리 걸렸다고 사흘 내내 꽁해 있지 않았냐?”

태정이 말하자 이수현이 받았다.

“아, 그럼 그것 때문에 아직도?”

“아니라고!”

준영이 강하게 부정하자 다들 고개를 끄덕인 뒤 관심을 끊고 각자의 일에 몰두했다. 태정은 잠시 멈췄던 핸드폰 게임을 이어서 했고, 이수현은 가방에서 전공 책을 주섬주섬 꺼냈다. 윤조는 턱을 괴고 오늘도 빛나는 석경의 미모를 감상했다.

“…….”

준영은 자신의 인간관계를 돌아보았다. 얄팍한 것들 같으니라고. 얼마 전, 권윤조가 고민 상담을 해 왔을 때 무시하려고 했던 행동을 이런 식으로 되돌려 받는 건가 싶기도 했다.

준영은 하는 수 없이 제 입으로 직접 고민을 털어놓기로 했다. 관심 좀 넉넉하게 받으려고 뜸을 들였더니 역효과만 일으켰다.

“사실 내 고민은…….”

준영은 어렵게 입을 뗐다.

“교수 왔다.”

그리고 묻혔다.

****

“얘들아, 사실 나 고민 있어.”

준영은 동방에서 다시 한번 판을 깔았다. 아까처럼 묻힐까 봐 노골적으로. 약간 PPT 발표하는 느낌으로. 게다가 무려 손까지 들었다.

“야, 오늘 점심도 사다리 타냐?”

“사다리 타는 거 지겹지 않냐?”

“지겹긴 해. 지겨우니까 오늘은 권윤조가 사라.”

“오케이. 오늘은 내가 산다.”

“윤조야, 나 오늘은 이상하게 국밥이 땡겨.”

“석경아, 국밥이 땡겨? 국밥집 하나 차려 줄까?”

“아니, 그냥 국밥 한 그릇만 먹으면 돼.”

그러나 놀랍게도 아무도 관심을 주지 않았다. 준영은 살심이 끌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동방에는 어째서 총이 없는 거지? 총이 있었다면 저것들을 다 쏴 버렸을 텐데.

“석경아, 나 고민 있다니까.”

준영은 그나마 제일 마음이 약하고 정상적인 사고를 지닌 석경을 공략하기로 했다. 위험에 처했을 때 무작정 도와달라고 소리치지 말고, 한 사람을 지목해서 도와 달라고 해야 효과를 볼 수 있다는 지혜를 이용한 것이다.

“그래? 고민이 뭔데?”

결과는 성공이었다. 석경과 동기화라도 된 것처럼 행동하는 권윤조의 주의를 끈 것은 물론이고, 태정과 이수현도 이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모르겠는데…….”

“준영아, 무슨 고민이길래 그래.”

“저기, 승희 씨가…….”

“응? 승희 씨가 왜?”

“아무래도 승희 씨가 나를 좋아하는 것 같아.”

“…….”

일순 동방이 쥐 죽은 듯이 조용해졌다. 충격적이겠지. 저도 설마설마하고 의심을 시작했을 때 충격을 받았으니까.

“준영아.”

한참 후에 석경이 침묵을 깼다.

“응?”

“그게 고민이야?”

“어.”

“난 또 뭐라고. 나는 무슨 엄청난 고민이라도 있는 줄 알고 걱정했잖아.”

석경의 반응은 싱거웠다. 정말 별거 아니라는 듯한 반응. 이건 준영이 예상했던 반응이 아니었다. 설마 석경은 제 말을 믿지 않는 것일까. 최승희가 저를 좋아할 리가 없을 거라고 생각하는 걸까.

“진짜야. 승희 씨가 진짜로 나 좋아하다는 것 같다니까? 시간마다 톡 보내고, 신상 털듯이 자꾸 이것저것 캐묻고.”

“…….”

“아니, 좋아하는 것까지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관심 정도는 있다니까?”

“준영아.”

“응?”

“알고 있었어.”

“뭐?”

“우리 모두 알고 있었어.”

석경은 옅은 미소와 함께 고개까지 살짝 끄덕였다. 준영은 제 입이 벌어진 줄도 모를 만큼 충격을 받았다. 다들 알고 있었다고? 어떻게? 무슨 수로? 준영은 혼란스러웠다.

아니나 다를까, 석경의 말이 사실인 듯 하나같이 쉬어 터진 떡밥을 앞에 둔 것처럼 시큰둥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렇구나. 다들 알고 있었구나. 그럼 나만 몰랐던 거네?

“왜, 나한테 말 안 했어?”

“너도 아는 줄 알았지.”

“몰랐어. 전혀 몰랐어.”

듣고 있던 태정이 짜증 난다는 투로 말했다.

“저 새끼는 왜 이제 와서 시조새를 파킹한다고 난리냐.”

“그러게. 뒷북 오진다.”

석경은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준영의 어깨를 부드럽게 토닥거렸다.

“이제라도 알았으니 됐어, 준영아.”

되긴 뭐가 돼? 된 게 뭐가 하나도 없는데? 그러나 준영이 혼란스러워하거나 말거나 이후로 아무도 준영을 신경 쓰지 않았다. 그렇게 준영은 쓸쓸하게 방치되었다.

“권윤조, 집들이해라.”

태정이 건수를 잡는 하이에나의 눈빛을 하고 말했다.

“뭔 집들이야. 내가 이사 들어온 지가 언젠데.”

윤조는 불쾌함을 만면에 드러냈다. 악귀들이 어디 신성한 곳에 발을 들이려고.

“아니, 너 석경이랑 같이 살기로 했잖아. 신혼 집들이하라고.”

“언제 할까? 이번 주 토요일에 할까?”

신혼 집들이라는 말에 윤조는 순식간에 태도를 바꿨다. 태정은 역시 쉬운 새끼라며 속으로 비웃었다.

“이번 주 토요일 좋다. 이수현 너도 올 거지?”

“나는 금요일부터 가 있으려고 했는데?”

“야, 금요일은 좀 그렇고. 토요일에 가서 하룻밤 자면 되겠다.”

윤조는 신혼 집들이를 하기로 결정한 지 1분도 안 되어 후회했다.

“뭘 자고 가. 오지 마.”

“자고 갈 건데?”

이수현이 절대 이 기회를 놓칠 수 없다는 듯 눈을 빛냈다. 마치 소풍 전날의 초등학생 같았다.

“이수현 너는 외박하고 막 그래도 되냐? 부모님이 걱정 안 하셔?”

윤조는 태정에 비해 상대적으로 떨구기 쉬운 이수현을 공략했다. 신혼 집들이를 동아리 엠티 분위기로 흘러가게 놔둘 수는 없었다.

“부모님이 왜 걱정하는데. 아, 내가 가냘픈 여자라서?”

“뭐래, 딸이 유치장 신세 지고 있을까 봐 걱정하실 것 같다는 거지.”

“미친 새끼가?”

이수현이 주먹을 들어 올렸지만 윤조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어차피 이수현이랑은 언젠가 한 번쯤 결판을 지으려고 벼르고 있었다. 감히 우리 석경이를 좋아해?

“그럼 우리 파자마 파티하는 거야?”

일촉즉발의 팽팽한 긴장감을 깨고 석경이 해맑은 목소리로 말했다.

“석경아, 아니야. 무슨 파자마 파티야.”

윤조가 황급히 고개를 저었지만 소용없었다.

“나는 파자마 없는데 생활한복 입어도 되냐? 모양은 파자마랑 얼추 비슷한데.”

이수현이 어울리지도 않게 양해를 구하는 말투로 말했다.

“당연히 되지.”

“아, 다행이다.”

분위기는 이미 윤조가 걷잡을 수 없을 만큼 화기애애하게 흘러갔다. 그래 뭐, 석경이가 행복하면 된 거지.

석경에게 귀여운 파자마를 사 입힐 생각을 하며 윤조는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 * *

“윤조야, 오늘 뭐 준비할까?”

‘신혼 집들이’는 토요일 오후 5시부터였다. 5시에 시작해서 6시에 내보내려던 윤조의 계획은 펼쳐 보지도 못한 채 1박 2일 파자마 파티로 결정이 났다.

“준비하긴 뭘 준비해. 그냥 술이나 마시다 가라고 해.”

윤조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말했다. 김준영 자식이 최승희한테 멍청하게 정보를 흘리는 바람에 어제 한바탕 난리가 났던 걸 떠올리면 아직도 이가 갈렸다.

집들이 정보를 알게 된 최승희가 저도 집들이에 참석하게 해달라고 졸라댔고, 윤조는 거머리를 떼어내듯 최승희를 떼어냈다. 그러자 최승희는 윤조의 어머니까지 동원하는 비겁한 술수를 부렸다.

‘윤조야, 집들이에 승희도 초대하지 그러니?’

‘아, 집들이 취소됐어요.’

‘어머, 그래? 엄마도 잠깐 얼굴 비치려고 했는데 아쉽구나. 그럼 집들이 계획은 앞으로도 없는 거니?’

‘네, 없어요. 학생이니까 공부해야죠. 집들이하면서 놀 시간이 어딨어요.’

윤조는 거짓말로 겨우 수습을 했다. 어머니도 집들이에 올 생각이었다니. 상상만으로도 간담이 서늘해졌다.

“아니 그래도 뭐라도 먹여야지.”

“배달 음식 몇 개 시키지 뭐.”

“그럼 배달 음식 몇 개 시키고 내가 요리 한두 개 정도 하면 되겠다.”

윤조는 세차게 뛰는 심장 박동을 느꼈다. 석경이가 요리를? 안 돼.

“……석경아, 요리, 하려고?”

“응, 전에 만들어 봤으니까 일단 해물파전은 할 거고, 나머지 하나는 닭볶음탕 어때? 레시피 찾아봤더니 쉽더라. 고추장하고 생닭만 있으면 돼.”

고추장하고 생닭만 있다고 닭볶음탕이 절대 될 리가 없었다. 윤조 역시도 요리에 대해 아는 바가 없지만 그 정도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뭐 하러 그런 고생을 해. 닭볶음탕이랑 해물파전이 먹고 싶으면 그것도 배달시키자.”

“아냐, 그래도 우리가 초대하는 손님인데 그 정도 정성은 보여야지.”

윤조는 더 이상 석경을 말릴 수가 없었다. 저렇게 행복해 하는데 어떻게 말려. 석경이 하고 싶은 거 다 하게 내버려 둘 수밖에는 도리가 없었다.

둘이 함께 마트에 가서 장을 봐 오고, 석경은 4시부터 요리를 시작했다. 윤조는 이전처럼 요리하는 모습을 구경하게 해 달라고 조르지 않았다. 그저 석경이 요리하다가 다치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

철퍽! 뭔가를 바닥에 패대기치는 소리와 석경의 안타까운 탄식이 연이어 들렸다. 무슨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지는 보지 않아도 뻔했다. 해물파전을 뒤집는답시고 공중으로 휙 던졌다가 프라이팬이 아니라 바닥에 떨군 모양이었다. 이미 지난번에 몇 차례 두 눈으로 직접 목격했던 장면이었다. 그 많은 재료를 사고도 해물파전이 겨우 한 장밖에 나오지 않은 까닭이기도 했다. 차라리 다행이었다. 뒤집기에 성공했더라면 그걸 다 먹어야 했을 테니까.

철퍽, 하는 소리를 네 번쯤 더 들었을 무렵 초인종 소리가 울렸다. 시계를 보니 다섯 시 십 분 전이었다. 집에 없는 척하고 열어 주지 말까.

“윤조야! 애들 왔나 봐! 문 좀 열어 줄래?”

다섯 시까지 버티려던 윤조는 주방에서 들리는 석경의 목소리에 느릿느릿 몸을 일으켰다.

살벌한 표정으로 문을 열어 주자 반갑지 않은 얼굴 셋이 우르르 집안으로 쳐들어왔다.

“뭐 하느라 문을 늦게 열어? 나무늘보냐?”

김준영이 밉살스럽게 눈을 흘겼다. 윤조가 김준영의 인중에 주먹을 한 치의 오차 없이 정확하게 꽂을 각을 재고 있는데 석경이 앞치마를 두른 채로 나와 녀석들을 맞이했다.

“어서 와.”

“석경아, 웬 앞치마야?”

“요리 좀 하느라. 얼른 앉아. 배고프지? 빈손으로 와도 되는데 뭘 사 왔어.”

태정은 케이크를, 이수현은 갑 티슈를, 준영은 콘돔을 사 왔다. 석경은 준영이 사 온 수십 개의 콘돔 박스를 본 순간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석경아, 노콘노섹인 거 알지? 자나 깨나 명심해야 돼.”

준영이 석경의 손을 꼭 붙잡고 말했다.

“이거 변태 또라이 새끼 아냐.”

윤조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이제 막 집안에 발을 들였을 뿐인데 벌써부터 제 혈압을 오르게 하는 것도 재주구나 싶었다. 역시 악귀들의 클래스는 남달랐다.

배달 음식이 하나둘씩 도착했다. 석경은 주방에 들어가서 요리를 마무리했다. 이제 곧 있으면 석경의 요리가 등장할 터였다. 물론 윤조의 마음은 편치 않았다. 1초밖에 남지 않은 시한폭탄을 눈앞에 둔 심정이랄까.

“석경아, 빨리 와라!”

와중에 눈치 없는 김준영이 석경을 재촉했다.

“어! 다 됐어. 갈게!”

석경이 해물파전을 들고 나타났다. 테이블 위에 해물파전을 짜잔 내려놓은 석경은 곧바로 몸을 돌려 총총 주방으로 사라지더니 이번에는 닭볶음탕을 들고 나타났다.

해물파전의 처참한 생김새를 보고 일동은 아연해졌다.

“이게 뭐야?”

이수현이 다소 도발로 느껴질 수 있는 질문을 날렸다.

“해물파전이야.”

그러나 석경은 도발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친절하게 대답했다. 자부심이 깃든 초롱초롱한 눈빛이 퍽 해맑아 보였다.

“이건 해물파전이 아닌데?”

“야, 이수현 닥치고 먹어.”

윤조는 어금니를 악물고 조용히 경고했다.

“아니, 이건 해물파전이 아니잖아. 내 눈이 이상한 거야? 이거 까만 건 뭐야? 숯이야?”

계속되는 이수현의 도발에 그제야 석경의 표정도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윤조는 초조해져서 재빨리 입을 열었다.

“맞아, 이수현. 이건 해물파전이 아니야.”

“그치? 그럴 줄 알았어.”

“이건 해물파전이 아니라 예술이야. 요리가 아니라 하나의 예술 작품이라고 할 수 있지.”

윤조가 수습을 위해 아무렇게나 입을 털자 준영이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래서 이렇게 난해하구나. 난 예술 작품 이런 거 잘 모르겠더라. 하나같이 어렵더라고 나한테는.”

“예술 작품이면 눈으로만 보면 되는 거지?”

약삭빠른 태정이 황급히 선을 그었다. 먹지 않겠다는 선언이었다.

“모양은 좀 이상해도 먹어 보면 맛있어.”

석경이 소심하게 말했다. 윤조는 속으로 탄식했다. 석경아, 그거 아니야. 모양은 좀 이상하지만, 먹어 보면 존나 더 이상해. 게다가 오늘도 역시나 오징어와 새우, 그리고 반죽까지 덜 익었다. 석경이가 사실은 날로 먹는 걸 좋아했던 걸까?

“알았어. 일단 먹어 볼게.”

고맙게도 이수현이 먼저 젓가락을 들었다. 그러자 준영도 따라서 젓가락을 들었다. 윤조의 매서운 눈빛을 견디지 못하고 태정도 뒤늦게 해물파전을 시식했다.

표정이 하나 둘 썩어 들어가기 시작했다. 윤조는 누구 하나라도 음식을 뱉으면 가만두지 않으리라 벼르던 참이었다. 다행히 뱉는 사람은 없었다.

“…….”

이수현이 먼저 조용히 젓가락을 내려놨다. 그러자 준영도 따라서 젓가락을 내려놨다. 조용히 일어나 화장실에 가려던 태정은 윤조의 살기 어린 눈빛에 까딱 잘못하다가는 좆 될 수도 있다는 위기감을 느끼고 도로 앉았다.

“맛…… 없어?”

석경이 굳이 감상을 물었다. 윤조는 초조해졌다. 아니, 왜? 저것들한테 무슨 난도질을 당하려고.

“나는 말을 아낄게.”

약삭빠르고 사리에 밝은 태정이 말했다.

“내가 먹은 게 해물파전인지, 해물파전이 나인지 모르겠어.”

또라이 이수현이 말했다.

“그게 무슨 말이야?”

“존나 혼란스럽다는 말이야. 이게 막, 인생에 대해 돌이켜 보는 시간을 갖게 되네.”

“…….”

석경의 눈길이 마지막으로 준영에게 향했다. 준영이 어렵사리 입을 뗐다.

“석경아.”

“응?”

“너는 참 잘생겼어.”

“어? 고마워.”

“그리고 공부도 잘해.”

“…….”

“근데 요리까지 잘할 필요가 있을까?”

“…….”

보다 못한 윤조가 해물파전을 먹어치우기 시작했다. 다시 먹어도 끊었던 담배가 간절해지는 맛이었다.

다들 입을 다물고 윤조가 먹는 모습을 아련하게 지켜봤다. 팔불출 새끼.

“석경아, 맛있어. 저것들이 너 놀리려고 괜히 그러는 거야.”

윤조는 맥주로 입가심을 하고 말했다.

“권윤조, 그러지 마. 석경이도 현실을 직시해야지.”

웬만해선 덮어놓고 석경의 편을 드는 준영이 안타까운 목소리로 말했다.

“윤조야, 솔직히 말해 줘.”

“…….”

석경은 윤조의 눈을 똑바로 바라봤지만 윤조는 석경의 눈을 제대로 볼 수 없었다.

“나한테 거짓말한 거야?”

“석경아, 그게 아니라…….”

약간 발그족족해진 석경의 눈가를 본 윤조가 모든 걸 포기하고 사실을 털어놓으려는 순간 기적적으로 구원자가 나타났다.

“난 맛있던데?”

말을 아낀다던 태정의 한마디로 상황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됐다.

* * *

“자, 익명이니까 한 치의 거짓도 없이 솔직하게 써.”

이수현이 에이포 용지를 한 장씩 나눠 주며 당부했다.

2 대 2의 결과에 도대체 맛이 있다는 건지 없다는 건지 석경이 헷갈려 하자 또라이 이수현이 쓸데없이 아이디어를 냈다. 익명으로 감상문을 적자는 거였다.

윤조는 극구 반대했지만 태정이 재밌겠다는 이유로 저쪽 편에 붙어 버리는 바람에 대세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근데 이수현, 이거 익명 확실한 거지?”

“익명 맞아. 내가 보장할게.”

태정이 고개를 갸웃했다.

“볼펜 색깔이 전부 다 다른데 이게 어떻게 익명이야?”

“아찻차! 실수!”

저거 분명 일부러 그랬다. 윤조는 발연기를 펼치는 이수현을 지그시 노려봤다. 이수현은 다시 검은색 볼펜으로 통일해서 모두에게 나눠줬다.

윤조는 착잡한 심정으로 새하얀 종이를 보다가 글자를 적기 시작했다.

“다 썼지?”

이수현이 감상문을 접으며 물었다.

“난 아까 다 썼어.”

태정이 말했다.

“난 두 줄만 더 쓰고.”

준영이 말했다.

“집에들 가라.”

윤조가 말했다.

“딱 3분만 더 줄게.”

이수현이 윤조의 목소리를 못 들은 척 말했다. 3분이 지나고 감상문이 이수현의 손에 모였다. 이수현은 네 번씩 접은 똑같은 크기의 감상문들을 섞었다. 그리고 그중에 하나를 무작위로 뽑았다.

“내가 읽을게.”

이수현의 말에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이수현은 기대 반 두려움 반으로 뒤섞인 석경의 얼굴을 흘깃 보더니 입을 열었다.

“‘오버 쿡과 언더 쿡으로 명징하게 직조해 낸 괴랄하면서 처참한 해물 파동.’” (각주: 영화평론가 이동진의 영화 기생충 한 줄 평 '상승과 하강으로 명징하게 직조해낸 신랄하면서 처연한 계급 우화')

“……씨발, 뭔 말이야?”

준영이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이수현이 고개를 저었다.

“나도 모르겠어. 명징? 직조? 근데 이거 표절 아냐?”

“표절이네.”

“그래서 맛있다는 말이야, 맛없다는 말이야.”

“있어 보이는 문장이니까 맛있다는 말 아닐까?”

가만히 있던 윤조가 애써 의견을 냈다. 그러자 이수현이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이건 아무래도 리뷰어가 직접 등판해야 할 것 같아.”

“뭐야, 익명이라며.”

“박태정 너구나?”

익명을 주장한 태정이 딱 걸려 버렸다. 태정에게 곧바로 격렬한 야유가 쏟아졌다.

“다른 사람 평론을 함부로 갖다 써도 돼?”

이수현이 말했다.

“그래서 별이 몇 개야?”

준영이 말했다.

“집에들 가라.”

윤조가 말했다.

“이건 해석하기 나름이야.”

석경의 고등학생 때 별명이 ‘불주먹’이었음을 떠올린 태정이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갔다.

“맛있다는 뜻 같아.”

해석하기 나름이라는 말에 석경이 정신승리를 했다.

판단을 보류한 채로 이수현이 두 번째 감상문을 펼쳤다.

“‘해물파전이 있는데 왜 먹지를 못하니, 왜 먹지를 못하니. 괴상하게도 오늘은 운수가 좋더니만.’” (각주: 현진건 단편소설 ‘운수 좋은 날’ 중에서.)

“이것도 표절인데?”

준영이 예리하게 눈을 반짝였다. 순간 이수현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누가 봐도 이수현이 쓴 감상문이었다. 다른 사람 평론을 함부로 갖다 써도 되냐며 태정을 질책하던 바로 그 이수현 말이다.

벌써 둘이나 신상이 털려 버린 마당에 익명으로서의 취지가 옅어지고 있었다.

“흠, 다음!”

이수현이 재빨리 다음 감상문을 펼쳤다.

“’해물파전은 쪽파와 해산물을 밀가루 반죽과 함께 부쳐낸 전으로 초간장에 찍어 먹는 요리이다. 해물의 쫄깃한 식감과 파의 아삭함이 어우러져 씹을수록 고소한 맛이 난다. 쪽파에는 비타민 C가 풍부하여 피부미용, 면역력 강화, 피로 해소에 효과적이며, 식이섬유가 함유되어 있어 변비 예방에도 좋다. 또한, 해물에는 단백질이 풍부하면서도 지방 함량이 낮아 체중조절 시 도움이 되며, 비타민과 무기질, DHA가 풍부하여 고혈압과 같은 성인병 예방은 물론 노인 건강에도 이롭지만, 해물파전을 먹느니 나는 차라리 건강에 해로운 컵라면을 먹겠다.’”

“…….”

늘 제일 먼저 딴지를 걸던 준영이 웬일로 아무 말이 없었다. 입만 다물고 있는 게 아니라 기척까지 죽이고 있었다. 이수현의 눈길이 준영에게 향했다.

“김준영.”

“응?”

“너냐?”

“……어.”

범인이라는 단서를 하나하나 풀어놓기도 전에 준영이 순순히 자백했다.

“어디서 베꼈어?”

“지식백과.”

“과제할 때 인터넷 긁던 버릇을 이런 데서도 써먹는다고?”

“뒷부분은 안 베꼈어.”

작게 한숨을 내쉰 이수현이 마지막 감상문을, 누구의 감상문인지 모두가 알고 있는 감상문을 읽었다.

“‘집에들 가라’”

* * *

다들 파자마로 갈아입으면서 본격적으로 파자마 파티의 막이 올랐다.

석경은 무난하고 평범한, 하지만 가격은 전혀 무난하고 평범하지 않은 연푸른색 파자마를 입었다. 사실 윤조에게 두 벌의 잠옷을 선물받았는데 다른 하나는 남들 앞에서 절대로 입을 수 없는 디자인이었다. 고양이 귀와 꼬리가 달려 있는 잠옷이었으니까.

한편, 이수현은 정말로 생활한복을 가져왔다. 그것도 등짝에 신토불이(身土不二)라고 한자로 적힌 황토색 생활한복을.

“이야, 무슨 도 닦으러 오셨어요?”

준영이 빈정거렸다.

“그러는 너는 반쪽짜리 하트 뭐냐? 커플 파자마냐?”

이수현이 지지 않고 받아쳤다.

“이거? 당근 마트에서 누가 싸게 팔길래 샀거든. 1주년을 사흘인가 앞두고 헤어졌대.”

“재수 없게 뭐 그런 걸 사고 난리야.”

“싸니까 샀지.”

“직거래 했냐?”

“어, 왜?”

“남자 거 파자마 팔았으면 판매자가 여자였을 거 아냐. 이것도 인연인데 그 여자랑 사귀지 그랬냐.”

“중학생이던데?”

“뭐야, 그럼 그 파자마도 설마 중학생 거야?”

“나야, 모르지. 근데 요새 애들이 발육이 워낙 좋잖아.”

아무리 봐도 둘이 어울리는데. 석경은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황토색 생활한복 차림의 이수현과 반쪽짜리 하트 파자마 차림의 준영을 번갈아 봤다.

“야, 우리 이거 까자.”

태정이 무척 비싸 보이는 양주를 손에 들고 왔다. 아버지 진열장에서 슬쩍 가져온 거라는데 가격이 못해도 족히 일이백은 한다고 했다. 평소에 윤조에게 툭하면 밥을 사라고 하면서 겉으로는 빈대처럼 굴지만 사실 태정은 윤조 못지않게 돈 씀씀이가 컸다. 오늘 사 온 케이크도 5성급 호텔에서 사 온 거였다.

“태정아, 너는 진짜 괜찮은 놈이다.”

준영이 몸을 반쯤 일으키며 양주를 반겼다. 술이라면 뭐든 환장하는 석경도 신나서 손뼉을 쳤다.

“석경아, 아까 품평회 때는 미안했다.”

태정이 석경의 잔에 양주를 따라 주며 사과했다. 상처뿐인 품평회였지만, 윤조가 요리 학원을 끊어 준다고 했기 때문에 석경은 상처를 털어 버릴 수 있었다.

“괜찮아. 니들 요리도 마찬가지일 거야.”

“그래서 시도조차 안 하잖아. 재료들한테 미안해서.”

“미안해. 재료들한테 미안한 짓 해서.”

“아니, 난 그런 뜻이 아니라.”

태정이 쩔쩔매며 석경의 빈 잔에 양주를 다시 채웠다. 석경은 곧바로 잔을 비웠다. 아니! 이렇게 맛있다니! 역시 비싼 건 뭐가 달라도 달랐다.

“석경아, 천천히 마셔.”

윤조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석경의 손목을 붙잡았다.

“걱정 마, 윤조야.”

그러게 말하면서도 석경은 양주 병을 보며 눈을 번뜩였다.

“사실 나는 요리를 꽤 하는 편이야.”

이수현이 특유의 무심한 투로 툭 던졌다. 그러나 놀랍게도 그 누구도 반응하지 않았다.

“양주가 맛이 고급지네. 비싼 거라고 했던가?”

준영이 엄지를 치켜세운 채로 말했다.

“응, 아버지한테 걸리면 나 뒈짐.”

“저런, 내일 당장 걸렸으면 좋겠다.”

“괜찮아. 아버지 기억력 짱나쁨.”

“저런, 아버지 핸드폰 번호가 어떻게 되시냐?”

“꺼져, 김준영.”

준영과 태정이 비싼 양주를 주거니 받거니 하며 낄낄대고 있는데 이수현이 발끝으로 준영을 툭툭 건드리며 다시 입을 열었다.

“김준영, 나 요리 잘한다고.”

“아, 어쩌라고!”

석경은 둘의 모습을 보며 눈을 빛냈다. 혹시 저건? 이수현이 준영이한테 매력을 어필하는 건가? 주말 드라마를 보는 심정으로 둘을 지켜보는데 윤조가 팔을 톡톡 건드렸다. 돌아보자 윤조가 미소를 머금은 채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석경아, 그거 아니야.”

“응? 뭐가?”

“네가 생각하는 그거 아니라고.”

“내, 내가 뭘 생각했는데?”

“이수현이 김준영, 그거 아니라고.”

“그거야 모르는 거지. 그걸 네가 어떻게 장담해.”

“하여간 아니야.”

김샜네. 석경은 속으로 투덜거리며 양주를 들이켰다. 그나저나 윤조는 내 생각을 어떻게 알았을까? 가끔씩 독심술이라도 하는 것처럼 행동하는 윤조가 석경은 마냥 신기했다.

“석경아, 너 방금 내가 어떻게 알았을까 궁금해하고 있었지?”

“어? 응.”

윤조가 웃으며 검지로 석경의 코끝을 톡 건드렸다.

“이렇게 표정에 다 드러나는데, 어떻게 몇 달 동안이나 네 마음을 모르고 있었을까. 그때는 내 눈에 뭐가 씌었었나 봐.”

“나 표정에 다 드러나?”

“응.”

“근데 윤조야.”

“응?”

“그거 아마 내 마음이 편해져서 그래 보일 거야. 네가 내 옆에 있으니까. 내가 전에도 그러지는 않았을 거야.”

윤조의 얼굴이 감동으로 물들어가는 찰나, 술잔을 신경질적으로 탁 내려놓는 소리가 들렸다. 돌아보자 준영을 비롯해 태정과 이수현의 눈길이 이쪽을 향해 있었다.

“야, 다 들리거든? 이것들이 어디서 꽁냥대고 지랄?”

준영이 얼굴까지 붉히며 노발대발하자 윤조가 짧고 굵게 한 마디 했다.

“여기 우리 집인데.”

“계속해. 재밌게 듣고 있었어.”

집에 가라는 말을 제일 무서워하는 준영이 바로 꼬리를 내렸다. 윤조는 이번 한 번만 봐준다는 얼굴을 했다.

사실 윤조는 석경을 당장 침실로 데려가지 못해 울분이 쌓이고 있던 참이었다. 정말 하등 필요도 없는 인간관계. 하루빨리 정리해야겠다는 다짐을 한 번 더 되새기는 윤조였다.

“미안하다. 작게 말해서 안 들릴 줄 알았어.”

뻔뻔한 윤조와는 달리 석경은 민망하고 쑥스러운 얼굴을 했다. 술기운 때문인지 용기가 생겨서 낯간지러운 말도 한 것 같은데.

“석경아, 네가 뭐가 미안해. 지금 저것들이 주거침입 중인데, 네가 아니라 저것들이 미안해해야지.”

“야, 권윤조. 우리 정당하게 초대받고 왔거든?”

이수현이 항변했지만 윤조는 코웃음을 칠 뿐이었다.

이수현은 허우대만 멀쩡하고 인성은 개차반인 권윤조를 보며 속으로 이를 갈았다. 내가 저딴 거한테 밀리다니. 아직도 권윤조 얼굴만 보면 심화가 들끓었다.

‘고백 안 하면 안 되냐.’

‘안 하면? 네가 하게?’

‘시간을 줘.’

‘이번 학기까지만 기다릴 거야. 2학기 개강하자마자 고백할 거니까 그렇게 알아. 개강 총회 때 술 먹고 이석경 덮칠 수도 있어. 나 술 마시면 개 되는 거 알지?’

이전에 권윤조와 나눴던 대화가 주마등처럼 이수현의 뇌리를 스쳤다. 그때 최승희가 권윤조 약혼자라고 나댈 때, 사정 봐주지 말고 이석경한테 바로 고백했어야 했어. 삽질하는 꼴이 짠해서 양보했더니 은혜도 모르고 방해꾼 취급을 해? 지금이라도 술 마시고 개 되는 거 보여 줘?

아무리 마음을 정리 중이라지만 이석경만 보면 아깝고 아쉬운 마음이 드는 건 사람인지라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이석경한테 연애 감정 같은 거 일절 없는 김준영조차도 저렇게 아까워하는데 좋아하는 감정까지 품었던 자신은 오죽할까.

그런데…….

권윤조의 옆에서 이전보다 많이 편안해 보이는 이석경의 얼굴을 보며 이수현은 아쉬움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권윤조가 아니면 어느 누구도 저토록 이석경을 편안하게 해 주지 못했을 것이다.

권윤조와 사귀기 전, 이석경에게는 알게 모르게 그늘이 져 있었다. 우울하고 처연한 분위기가 또 덕심을 자극하긴 했지만, 햇살같은 지금의 이석경이 훨씬 좋아 보였다.

그래 뭐. 잘된 거야. 이석경 본인이 행복한 게 제일이니까.

아니, 근데 권윤조 저 새끼가.

아냐, 그래도 권윤조가 이석경한테는 잘하잖아.

아니, 근데 권윤조 저 쌍놈 새끼가.

“이수현 그 눈깔 뭐냐.”

이수현이 끝없이 자아분열을 하고 있는데 권윤조의 언짢아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뭐가 또.”

“우리 석경이를 그런 눈으로 보는 저의가 뭔지 알아야겠는데.”

이수현이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시종일관 무심한 표정을 하고 있는 이수현이 저런 표정을 한다는 건 진심으로 황당해하고 있다는 거다.

“그냥 봤는데? 그냥 본 거라서 뭐라 딱히 할 말이 없네.”

“보지 마.”

“권윤조 인성 무엇?”

“내 인성은 네가 알 바 아니고.”

“존나 싸우자는 거지, 이거 지금?”

주먹을 치켜드는 이수현을 준영이 말렸다.

“야, 참아. 권윤조 인성 하루 이틀 겪은 것도 아니고.”

“아니! 내 눈으로 내가 본다는데 왜 난리냐고!”

준영은 비싼 양주를 따라 주며 이수현을 진정시켰다. 이수현이 양주를 벌컥 들이켜고는 화를 삭였다.

석경은 속으로 윤조가 차라리 이수현한테 주먹으로 한 대 맞고 끝나는 게 깔끔하겠다는 계산을 하고 있었다. 방금 건 확실히 윤조가 선을 세게 넘긴 했으니까.

“다들 집중해. 할 얘기가 있으니까.”

준영이 턱을 문지르며 자못 심각한 어조로 말했다.

“최승희 얘기면 넣어 둬.”

태정의 말에 준영이 화들짝 놀랐다.

“승희 씨 얘기가 여기서 왜 나와.”

“아님 말고. 뭔데 그래.”

준영이 다시 심각한 얼굴로 돌아와 턱을 문질렀다.

“권윤조 말인데.”

“내가 뭐.”

“다들 느끼고 있을 거야. 권윤조 인성에 문제가 많다는 걸. 이대로 놔두다간 우리 파자마 동호회에 심각한 위기가 닥칠 거야.”

“파자마 동호회는 뭐냐? 나 그딴 동호회 가입한 적 없는데.”

윤조가 말했지만 준영은 듣는 시늉조차 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다들 내 말에 동의하지?”

“파자마 동호회 회장으로서 동의를 표한다.”

이수현이 말했다.

“윤조 인성이 어때서. 밥도 잘 사잖아. 아, 밥은 나도 잘 사는구나. 재밌을 것 같으니까 일단 나도 동의.”

태정이 말했다.

“그래도 애는 착해.”

석경이 말했다.

“이석경은 미안한데 잠시 조용히 하고 있자. 김준영, 그래서 뭘 어쩔 건데?”

이수현이 준영에게 물었다.

“이수현. 아까 에이포 용지 남았지? 근데 너 에이포 용지는 뭐 땜에 갖고 다니냐?”

“마피아 게임하려고.”

“다섯이서 무슨 마피아 게임을, 아 됐고. 일단 줘 봐. 볼펜도.”

이수현이 에이포 용지와 볼펜을 가져왔다. 준영이 비장한 표정으로 그것을 받아 들더니 윤조를 제외한 모두에게 하나씩 나눠 줬다.

“다들 믿기 어렵겠지만 어릴 때 나는 사고뭉치 말썽꾸러기였어.”

준영은 말문을 열고 좌중의 반응을 살폈다. 다들 의외라는 얼굴을 하고 있을 줄 알았는데 표정에 미동 하나 없었다. 준영은 겸연쩍게 헛기침을 하고 말을 이었다.

“어머니는 어느 날 참다못해 나에게 편지 한 장을 쓰셨지. 편지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어. ‘내가 너를 반품하고 싶지만, 친아들이라 차마 그렇게는 못하겠고 어디 반품할 데도 없으니 어쩔 수 없이 너를 고쳐서 써야겠다’라고. 그리고 1번부터 100번까지 내가 고쳐야 할 점들을 나열해 놓으셨지.”

“편지가 아니라 민원인데?”

“어쨌든 나는 그 편지를 읽고 충격을 많이 받았어.”

“아, 그때 충격으로 뇌가 없어진 거야?”

“하지만 나는 충격을 딛고 일어나 어머니의 말들을 하나하나 새기기 시작했어. 그 결과 이렇게 훌륭한 청년으로 성장할 수 있었단다.”

“…….”

중간중간 추임새를 넣던 이수현마저도 마지막 말에는 할 말을 잃어버렸다.

“우리 모두 그 방법을 권윤조한테 써 보자. 백 개는 너무 많으니까 시간 관계상 한 개씩만 적어. 익명은 보장할게.”

“근데 효과 있는 거 맞아? 훌륭한 청년이 없는데요. 안 보여요.”

이수현이 말했다.

“재밌을 것 같으니까 난 할래.”

태정이 말했다.

“긁어 부스럼 될 것 같으니까 하지 말자.”

석경이 말했다.

“……!”

하는 짓들이 하도 가관이라 어디까지 막 나가는지 말없이 지켜보고 있던 윤조는 석경의 말에 타격을 입었다.

“석경아, 그 말은……. 무슨 뜻이야?”

“아니, 역효과 날 수도 있으니까. 금쪽이들한테도 뭐라고 하는 것보다 칭찬이 약이잖아.”

“석경아, 내가 금쪽이야?”

“윤조야, 너는 당연히 금쪽이가 아니지. 너는 다 컸잖아.”

다 컸지만 인성에는 문제가 있다는 뜻으로 들리는 것은 저만의 착각일까. 윤조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제 인성에 대해서 돌아보는 시간을 갖게 됐다. 그러는 사이 어느새 모두가 에이포 용지에 뭔가를 열심히 적고 있었다. 심지어 석경마저도.

윤조는 이번에야말로 저것들을 내쫓고 싶었지만 미간까지 웅크린 채 진지하게 뭘 적을지 고민하는 석경을 보고 있자니 마음이 한없이 관대해졌다. 석경이가 즐거우면 됐어.

그때 핸드폰 벨 소리가 울렸다.

“누구 전화냐.”

“내 전화.”

윤조는 제 핸드폰을 집어 들고 액정을 봤다. 재경의 이름이 떠 있었다.

“어, 재경아.”

고개를 숙이고 있던 석경이 재경이라는 이름에 번쩍 고개를 들고 윤조를 쳐다봤다.

- 윤조 형. 나 지금 형네 집에 가도 돼?”

“왜?”

- 이유는 가서 말해 줄게.

“어, 와.”

- 넵.

“재경이가 왜?”

윤조가 전화를 끊자 석경이 곧바로 물었다.

“우리 집에 온대.”

“지금?”

“응.”

“그래서 뭐라고 했어?”

“오라고 했지.”

석경은 황당했다. 하지만 윤조는 뭐가 문제인지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애들한테 물어보지도 않고 재경이를 부르면 어떡해.”

“우리 집인데 왜 그걸 저것들한테 물어봐.”

윤조의 말에 준영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석경아, 됐어. 권윤조가 그런 거 우리한테 일일이 물어보는 놈이었으면, 우리가 지금 이런 거 쓰고 있지도 않았겠지.”

김준영이 오랜만에 참으로 맞는 말을 한다고 이수현은 생각했다. 그나저나 재경이라고? 이석경 동생이라고 전에 얼핏 들었던 것 같은데.

전화를 끊은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초인종 소리가 들렸다. 윤조가 문을 열어 주자 재경이 안으로 들어왔다.

“뭐야, 왜 이렇게 빨리 왔어.”

“집 앞이었어.”

“무슨 일인데 그래.”

“윤조 형, 나 오늘 여기서 자고 가도 돼?”

“왜?”

“아 쫌 말하기 그런데.”

“말해.”

친형인 석경이 보기에도 권윤조와 재경의 분위기는 친형제처럼 자연스러웠다. 언제 저렇게 친해졌을까. 용돈의 힘일까.

이쪽으로 걸어온 재경이 낯선 얼굴들을 보고 흠칫 놀라더니 꾸벅 허리를 굽혀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저는 이재경이라고 합니다. 석경이 형 동생입니다.”

“귀엽네. 서 있지 말고 앉아, 학생.”

이수현이 말했다.

“잘생겼네. 술 한잔할래?”

태정도 재경을 반겼다.

“안돼. 쟤 미성년자야. 이재경 너 무슨 일이야. 왜 집에 안 들어가려고 하는데.”

어느새 엄격한 형 모드로 전환된 석경이 바른대로 말하라는 눈빛을 했다. 잠시 머뭇거리던 재경이 대답했다.

“그게, 실은 형. 내가 집 앞에서 여친이랑 키스하다가 엄마랑 눈 마주쳤거든.”

“뭐?”

“근데 당황해서 나도 모르게 도망쳤어.”

“너 여자 친구도 있었어?”

“엉. 이 나이에 여친도 없으면 찐따지.”

재경보다 두 살 많은 나이에 여친이 없는 태정과 준영, 그리고 남친이 없는 이수현은 졸지에 찐따가 되고 말았다.

“학생, 말이 너무 심한데?”

재경은 이상한 황토색 생활한복 차림의 이수현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얼굴은 걸그룹 센터 급으로 생겼는데 말투도 이상하고 옷차림은 더 이상했다.

“네? 제 말이 왜요?”

“찐따라는 말은 쓰면 안 되는 거야.”

“왜요?”

“학생이 따박따박 말대꾸를 하네.”

“네?”

“앞으로 입 조심해.”

얼떨결에 혼이 난 재경은 자세를 바르게 하고 이수현의 눈치를 살폈다. 그러자 옆에서 석경의 공격이 들어왔다.

“너 맨날 공부한다면서 여자 친구 사귈 시간은 있냐? 담배 피울 시간도 있고?”

“아, 담배는 끊었다니까. 그리고 숨 쉴 시간도 있는데 여자 친구 사귈 시간이 왜 없어.”

“이 자식이 입만 살아서는. 네가 지금 여자 친구랑 키스할 때야?”

“아, 키스가 왜! 형은 맨날 맨날 윤조 형이랑 섹스하잖아!”

재경의 말에 석경은 쩌억 굳어버렸다. 저, 저 새끼가 못하는 말이 없네. 그나저나 내가 윤조랑 섹스하는 건 어떻게 알았지?

“너! 너! 야, 우리 아직 섹스 안 했거든?”

재경이 누굴 등신으로 아냐는 듯 피식 비웃음을 흘렸다.

“그럼 둘이 손만 잡고 각인했어?”

“손만 잡고도 각인되거든?”

“아, 그렇다고 해.”

재경은 여전히 비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알 거 다 아는 처지에 왜 이러냐는 식이었다. 석경은 당황스럽고 민망해서 더는 이 화제를 이어 나갈 자신이 없었다. 때문에 황급히 말을 돌렸다.

“근데 너 혼자 도망쳤어? 네 여자 친구는?”

“놓고 왔지. 챙길 정신이 아니었어.”

“그 여자애는 대체 뭘 보고 너 같은 놈이랑 사귀는 거래?”

“그렇지 않아도 아까 헤어지자는 문자 받았어.”

이걸 과연 좋은 결말로 봐야 하는 건지 석경은 헷갈렸다. 이제 막 여자 친구한테 차인 사람치고는 재경의 얼굴이 덤덤해 보여서 ‘요즘 애들이란’말이 절로 나왔다.

“그럼 학생은 이제 여친이 없는 거야?”

이수현이 물었다. 재경은 걸그룹 센터 급 미모의 여성이 저에게 관심을 보이자 쑥스러워져서 예, 하고 들릴 듯 말 듯 작게 대답했다.

“그럼 학생도 이제 찐따가 된 거야?”

“……?”

“거봐. 입조심 안 하면 다 본인이 돌려받게 되는 거라고.”

세상에! 말하는 스타일이 완전 꼰대다! 황토색 생활한복을 입은 꼰대야! 재경은 속으로 경악했지만 명심하겠다며 고분고분 고개를 끄덕였다.

“저기, 누나.”

“왜, 학생.”

“혹시 누룽지 맛 사탕 좋아하세요?”

“그건 왜 물어?”

“아뇨, 왠지 좋아하실 것 같아서요.”

“……?”

“근데 다들 뭐 하고 있었어요? 종이는 뭐예요?”

재경의 물음에 준영이 어떤 상황인지 친절하게 설명해 줬다. 그러자 재경이 짙은 흥미를 보였다.

“저도 할래요.”

준영은 남은 에이포 용지를 재경에게 줬다. 그렇게 민원인이 네 명에서 다섯 명으로 늘어났다.

“다 썼지?”

준영은 한데 모은 종이를 이수현에게 건넸다.

“내가 읽어?”

“응.”

이수현은 무작위로 종이 하나를 펼쳤다. 석경은 무슨 말이 나올지 내심 긴장했지만, 정작 당사자인 윤조는 해탈한 듯 보였다. 표정이 어디 한 번 잘들 놀아 보라는 느낌이었다.

“‘형. 용돈 주는 건 고마운데, 입금자명에 ‘사랑해 처남’이라는 말은 좀 안 쓰면 안 돼? 약간 소름 돋거든?’”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준영이 침묵을 깼다.

“재경아, 이거 익명이라고 했는데.”

“응, 그래서 이름 안 적었잖아.”

“어, 그래. 잘했네. 근데 재경아, 너 반에서 몇 등이나……. 아니다. 착하고 건강하면 됐지.”

“……?”

“이수현, 다음 거 읽어.”

이수현이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 다른 종이를 펼쳤다.

“‘이석경 귀엽다는 톡 지겨우니까 그만 보내라. 특히 자다 일어난 모습 귀엽다는 얘기, 진심 안물안궁이다.’”

내내 무표정하게 있던 윤조의 눈썹이 꿈틀했다.

“박태정 너지, 씨발 새끼야?”

“뭐, 씨발. 덤벼.”

“야, 익명인데 왜들 그래.”

준영이 입으로만 말리는 시늉을 했다. 사태가 잠잠해지자 이수현이 손에 들고 있던 종이를 뒤로 휙 던져 버리고 새로운 종이를 펼쳤다.

“‘승희 씨한테 산삼 돌려주기로 한 약속 왜 안 지키냐? 양아치냐?’”

석경이 보기에 다들 하나같이 익명으로 할 마음이 전혀 없어 보였다. 이럴 바에는 종이에 적을 게 아니라 말로 직접 하는 게 낫지 않았을까. 준영은 게다가 재경에게 반에서 몇 등 어쩌고 하며 재경의 지능까지 의심하지 않았는가. 저도 다 티 나게 쓴 주제에.

“나 양아치 맞아. 네 일이니까 네가 알아서 해. 어린애도 아니고 그 정도는 할 수 있잖아.”

윤조가 비웃는 듯한 말투로 말하자 준영이 화를 삭이는 것처럼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너는 어린애라서 나한테 고민 상담했냐?”

“다 큰 어른이라도 친구한테 고민 상담쯤이야 할 수 있지.”

“내가 왜 네 친구야.”

“친구가 아니면. 그럼 뭔데.”

권윤조 입으로 직접 친구라는 말을 들으니 준영은 어쩐지 기분이 묘했다. 생각해 보니 저한테 고민 상담을 해 온 것도 권윤조가 자신을 어느 정도 친구로서 의지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세상에서 오로지 본인밖에, 아니 석경이랑 본인 둘밖에 모르는 것 같았던 권윤조가 그래도 친구라는 개념은 갖고 있는 모양이었다.

“……친구 맞네. 아, 나 쫌 감동.”

“뭐래, 등신이.”

“권윤조, 우리 앞으로도 친하게 지내자. 건배.”

준영은 헤헤 웃으며 윤조와 건배를 했다.

이수현은 둘의 모습을 보며 콧방귀를 뀌더니 더는 못 봐주겠다는 듯 얼른 종이를 펼쳐서 읽었다.

“‘한 번만 더 문 잠가 놓고 동방에서 키스하면 죽는다. 동방이 너네 집 침실이냐?’”

이수현은 다른 때와 달리 감정을 실어서 읽었다. 당연했다. 이수현 본인이 쓴 거니까. 아무튼 이건 저에게도 해당되는 말이라 석경은 뜨끔해서 황급히 사과했다.

“미안해. 다신 안 그럴게.”

“이석경 너한테 하는 말 아니야. 너는 안 된다고 했는데 권윤조가 막무가내였겠지.”

마치 지켜본 것처럼 상황을 정확히 꿰뚫어 보는 말이었다. 하지만 결국 허락한 것은 자신이니까 석경도 똑같이 잘못한 일이었다.

“그래도 미안해.”

“이석경 너는 사과할 필요 없다니까. 권윤조 저게…….”

그때 잠자코 있던 권윤조가 이수현의 말허리를 잘랐다.

“동방에 안마 의자 최신형으로 하나 사다 놓을게.”

“권윤조, 나는 이렇게 생각해. 하루에 10분 정도는 동방이 너네 집 침실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하지만 10분 이상은 곤란해.”

“알았어. 10분.”

“권윤조가 보기보다 참 융통성이 있어.”

이수현이 입꼬리를 올린 채 흡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뭔가 어둠의 로비가 오고 간 것 같은데. 석경은 콧노래까지 작게 흥얼거리며 마지막 종이를 펼치는 이수현을 보며 혼란을 느꼈다.

“자, 마지막이야.”

“이미 망한 것 같은데, 굳이 읽을 필요 있을까?”

준영이 회의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그래도 읽어야지.”

펼친 종이를 눈으로 훑은 이수현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아이씨, 못 해 먹겠네.”

“뭔데 뭔데.”

이수현이 종이를 구겨 휙 던져 버렸다. 윤조가 저만치 날아간 종이를 주워 와서 펼쳤다.

<사랑하는 윤조야, 넌 지금도 너무너무너무 완벽하니까 네가 하고 싶은 거 다 해!>

종이를 바라보는 윤조의 얼굴에 그 어느 때보다도 눈부신 미소가 피어올랐다.

깜빡이 좀 켜줄래 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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