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오후 수업이 남아 있어서 다시 학교에 들어가야 했다. 공대 앞 주차장에 도착했을 때, 막 차에서 내리는 최승희를 발견했다. 나갈 때는 한세진, 들어올 때는 최승희. 어쩐지 스페셜한 하루라는 생각이 들었다.
최승희를 발견한 준영이 대뜸 권윤조를 노려봤다. 주먹까지 불끈 쥐고서. 말리지 않으면 ‘네가 뭔데 석경이를 힘들게 해’라는 대사와 함께 당장이라도 주먹을 날릴 기세였다.
“준영 씨.”
그때 최승희가 웃으면서 준영의 이름을 불렀다.
“엥? 저요?”
“준영 씨, 오랜만이에요.”
와, 꿀잼각. 예상은 했지만 역시나 최승희는 준영을 보러 온 거였다. 석경은 뒤로 한발 물러난 채로 두 사람의 모습을 지켜봤다.
“아, 네.”
“준영 씨, 이거 받으세요.”
최승희가 제법 큰 종이가방을 건넸고 준영이 엉겁결에 그것을 받아들었다.
“이게 뭔데요?”
“산삼이에요. 집에 남는 거 있길래 몇 뿌리 챙겨 왔어요.”
최승희가 생긋 웃으며 말했다. 준영은 잠시 벙쪄 있다가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물었다.
“이, 이걸 왜 저한테…….”
“삼계탕에 넣어 먹는 것도 괜찮은데, 자연산이니까 생으로 씹어 먹는 게 제일 좋아요.”
“네?”
“그럼 저는 이만 가 볼게요. 수업이 있어서요.”
최승희는 나타날 때와 마찬가지로 홀연히 사라졌다.
준영이 손에 든 산삼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울상을 지은 채 권윤조를 바라봤다.
“야, 권윤조. 이거 어떡하냐.”
“뭐를.”
“나 이거 못 받아. 네가 이거 승희 씨한테 돌려줘.”
“뭐래. 네가 알아서 해. 석경아, 가자.”
“응.”
석경은 권윤조와 함께 공대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준영에게는 곤란한 일이겠지만 석경은 솔직히 재밌었다. 산삼이라니. 인삼도 아니고 홍삼도 아니고 장뇌삼도 아니고 자연산 산삼이라니.
“석경아. 내 인생에서 다행스러운 일이 두 가지가 있는데 뭔지 알아?”
“뭔데?”
“하나는 최승희가 좋아하는 사람이 내가 아니라는 거고.”
“뭐야, 그게. 다른 하나는?”
“다른 하나는, 최승희가 좋아하는 사람이 석경이 네가 아니라는 거야.”
석경은 웃었지만 권윤조는 농담이 아니었던 듯 한없이 진지했다. 정말 그 두 가지 사실을 다행스럽게 여기는 눈치였다.
뒤따라 동방에 들어온 준영은 한차례 더 권윤조에게 산삼을 떠넘기려 했지만 단칼에 거절당했다.
“김준영, 껌 씹을래?”
“…….”
“참, 너는 산삼을 씹으면 되겠구나.”
이수현이 때를 놓치지 않고 준영을 놀렸다. 준영은 대거리할 기운도 없는지 넋이 나간 채로 있다가 수업에 들어갔다.
* * *
“석경아, 깜빡이 켜야지.”
“아, 맞다.”
“좌회전 말고, 우회전.”
“어, 그래. 우회전.”
석경은 허둥지둥 우회전 깜빡이를 넣었다. 차 안에 에어컨이 빵빵하게 돌아가고 있는데도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석경아, 차 잠깐 세울래?”
석경은 브레이크를 밟았다. 굳이 그럴 필요도 없는데 급브레이크였다. 덜컹. 몸이 앞으로 휙 쏠렸다. 예외 없이 앞으로 튕겨 나간 권윤조를 미안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이게 운전이, 생각보다 잘 안 되네.”
“괜찮아. 천천히 하면 돼.”
권윤조가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운전 연습 장소는 골프장의 드넓은 주차장이었다. 권윤조의 누나가 소유한 골프장이라고 했다. 주차되어 있는 차들이 하나같이 억 소리 나는 차들이라 더 긴장되고 몸이 마음을 안 따라 주는 느낌이었다.
장소를 옮기자고 슬쩍 말을 꺼냈지만 어느 정도 긴장감을 갖고 연습하는 게 좋다는 이유로 기각당했다.
“석경아, 너 왼쪽이랑 오른쪽은 구분할 수 있지?”
“……어. 할 수 있어.”
“근데 왜……. 아니다.”
말을 아끼는 게 어쩐지 이상했다. 왜 말을 하다 말지. 석경은 찝찝한 기분으로 핸들을 꽉 움켜쥐었다.
“……무슨 문제라도 있어?”
“다 좋은데, 석경아. 코너링이랑, 주행이랑, 급발진이랑, 급정거랑, 평행 주차랑, 후진이 문제거든.”
“다 문제라는 얘기야?”
“그건 아니고. 코너링이랑, 주행이랑, 급발진, 급정거, 평행 주차, 후진만 문제야.”
“…….”
“참, 왼쪽이랑 오른쪽도 제대로 구분하면 더 좋고.”
권윤조의 표정과 말투는 시종일관 부드러웠다. 언성 한 번 높이지 않고 벌써 두 시간째 인내심 있게 석경을 살펴 줬다. 그가 무심코 짜증을 흘렸더라면 반발심이나 오기가 생겨 투지가 불타올랐겠지만, 그러지 않아서 더 오싹하고 긴장만 될 뿐이었다.
“나, 그만할래.”
“응?”
“그만하고 싶어. 안 할래.”
“왜? 조금만 더 하면 베스트 드라이버가 될 수 있을 텐데.”
진심으로 하는 말인가. 권윤조의 눈빛은 비꼬는 기색 하나 없었고, 심지어 석경을 더 많이 칭찬하지 못해서 아쉬워하는 느낌이었다.
이렇게 성심성의껏 가르쳐 주는데 하기 싫다고 하면 맥 빠지겠지? 석경은 권윤조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다.
“열심히 할게.”
“그래, 마음 편하게 먹고.”
석경은 차를 출발시켰다. 이번에도 급발진이었다. 당황해서 브레이크를 세게 밟았다.
“아.”
“마음 편하게 먹었으면, 이제 출발할까?”
권윤조는 방금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태연한 목소리로 말했다. 석경은 귀 끝까지 붉어진 채로 브레이크에서 천천히 발을 뗐다. 핸들을 쥔 손이 더없이 비장했다.
그렇게 한 시간을 더 연습했다. 석경은 진이 빠지고 배가 고팠다. 점심도 아니고 저녁도 아닌 어중간한 식사를 골프장 내의 레스토랑에서 해결하기로 했다.
오늘은 이쯤하고 밥을 먹자는 권윤조의 말에 반갑고 기쁜 마음이 드는 걸 석경은 막을 도리가 없었다.
“여기 셰프 실력 있어. 우리 누나 입맛이 보통 까다로운 게 아니거든.”
“누나 분은 연세가 어떻게 되셔?”
“연세?”
권윤조는 크게 웃었다. 석경은 말실수를 한 것 같아서 민망해졌다. 괜히 와인 잔에 담긴 물을 한 모금 들이켰다. 춘추라고 할 수는 없잖아.
“누나 나이가 몇이더라. 이십 대 후반? 서른인가?”
“아, 누나 나이를 잘 모르는구나.”
“응, 내 나이가 아니잖아.”
굳이 알 필요가 없다는 투였다. 열 살 가까이 차이가 나니 그럴 수도 있겠다고 속으로 권윤조의 무심함을 실드 쳤다.
메인 요리가 나왔다. 안심 부위를 살짝 익힌 스테이크와, 관자와 새우 살을 채워 넣은 랍스터 요리였다. 친절한 웨이터가 프랑스어로 요리 이름을 소개했지만 듣자마자 까먹었다. 테르미 어쩌고였는데.
“맛있다.”
한 입 넣자마자 눈이 번쩍 뜨였다.
“많이 먹어, 석경아. 운전 배우느라 고생 많았지?”
“가르치느라 네가 고생했지.”
“고생은 무슨. 나는 좋았어.”
요리를 깨끗이 비우고 디저트까지 배불리 먹었다. 커피를 앞에 놓고 도란도란 대화를 나누는데 입구 쪽에서 대표님 어쩌고 하는 소리가 들렸다.
무심코 시선을 돌리자 이십 대 중반쯤으로 보이는 늘씬한 단발머리 미인이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윤조야.”
단발머리 미인이 권윤조의 이름을 불렀다. 석경은 물론이고 권윤조도 짐짓 놀란 눈치였다.
“누나.”
아, 권윤조 누님이었구나. 석경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꾸벅 허리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반가워요.”
누님이 웃으며 석경에게 손을 내밀었다. 석경은 얼떨결에 누님과 악수를 나눴다. 권윤조의 옆자리에 앉은 누님은 웨이터를 불러 커피를 주문했다.
“누나가 여기 웬일이야?”
권윤조가 떨떠름한 얼굴로 물었다.
“나 여기 대표야.”
“무늬만 대표잖아.”
“너 왔다는 연락 받고 와 봤지.”
“무슨 속셈이야.”
“누나한테 속셈이라니? 공손하게 말해야지.”
“무슨 개수작입니까.”
“권윤조, 선 넘네.”
권윤조를 흘겨본 누님이 석경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바라보는 눈빛이 호기심 반, 감탄 반 같았다.
“와.”
그녀의 눈빛에서 감탄을 읽은 것은 착각이 아니었다. 누님은 작게 탄성을 내뱉었다.
“……?”
“진짜 잘생겼네요.”
“아, 감사합니다. 누님도 무척 아름다우세요.”
“고마워요. 석경 씨 맞죠?”
“네, 이석경이라고 합니다. 윤조랑 같은 과예요.”
누님이 저에 대해 어디까지 알고 있을까. 석경은 권윤조를 향해 도움을 요청하는 눈길을 보냈다. 권윤조가 보일 듯 말 듯한 미소를 머금었다.
“보고 싶었어요.”
권윤조를 향해 재차 도와달라는 신호를 보내던 석경은 순간 귀를 의심했다.
“저를요?”
“네, 나뿐만 아니라 우리 가족 다.”
“아…….”
알고 계시는구나. 자신이 권윤조 각인 상대라는 것을. 누님의 반응은 다행히 호의적이었지만, 남은 가족들의 마음도 같을 수는 없기에 석경은 불안하고 주눅이 들었다. 귀한 아들, 혹은 귀한 동생의 신세를 망가뜨릴 화근으로 생각하는 것은 아닐까.
“진즉부터 집에 초대하고 싶었는데, 윤조가 호적 파고 나갈 거라고 협박하더라구요.”
“얼굴 봤으면 이제 가. 석경이가 불편해 하잖아.”
석경은 경악 어린 눈빛으로 권윤조를 봤다. 그렇게 노골적으로 말하면 내 입장이 뭐가 돼.
“너는 나한테 고마워해야 돼. 엄마도 석경 씨 보러 오겠다고 헤어숍까지 예약하는 거, 내가 겨우 말렸거든. 석경 씨, 내가 불편하게 한 건 아니죠?”
“아, 아닙니다.”
“우리 윤조 잘 부탁해요. 내가 관상은 볼 줄 몰라도 사람 보는 눈이 아주 없는 편은 아니거든요. 내가 보기엔 석경 씨 정말 좋은 사람 같아요.”
좋은 사람이라는 말에 코끝이 찡해졌다. 눈물샘이 발작할 것 같아서 급하게 시선을 떨구었다.
“고맙습니다.”
“다음에 만날 때는 편하게 말 놓을게요.”
석경은 놀라서 시선을 들었다. 제 쪽에서 먼저 말 놓으라는 말을 했어야 하는데 워낙 경황이 없다 보니까 여태 뻔뻔하게 존대를 듣고 있었다. 얼굴에 확 열이 올랐다.
“지금 놓으셔도 돼요.”
“그럴까?”
권윤조와 묘하게 닮은 시원스러운 눈매가 예쁘게 접혔다. 눈웃음은 유전인가 보네. 와중에 엉뚱한 감상이 끼어들었다. 권윤조의 부모님과 형들도 권윤조와 닮았겠지? 그런 생각을 하자 마음이 편안해지면서 용기가 생겼다.
“저, 괜찮으시다면 댁에 한번 초대해 주세요.”
“정말?”
“네.”
“부모님이 너무 좋아하시겠다. 부담 갖지 말고 편하게 와.”
“네.”
누님은 다음에 보자는 인사를 하고 먼저 자리를 떴다. 석경은 참았던 숨을 몰아쉬기라도 하듯 길게 숨을 뱉었다.
“미안해. 놀랐지?”
“아냐, 괜찮아.”
“근데 석경아, 우리 가족들 보는 거 괜찮겠어?”
“응, 정말 괜찮아. 애지중지 키운 막내아들 각인 상대가 누군지 많이 궁금하시겠지.”
“애지중지는 아니야.”
“누님만 봐도 알겠던데 뭐. 누님이랑 많이 친하지?”
“아니, 전혀.”
권윤조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어쩐지 친하다는 말에 기분 나빠하는 느낌도 들었다. 우쭈쭈해주는 누님과 틱틱대는 권윤조의 관계가 눈앞에 그려져서 웃음이 나왔다.
“왜 웃어?”
“기분 좋아서.”
“뭐가?”
“아까 누님이 나한테 잘생겼다고 했잖아.”
“당연한 소린데 그게 기분이 좋아?”
“좋지. 다른 사람도 아니고 너희 누나잖아.”
“귀여워.”
붉은 노을이 유리창을 넘어왔다. 눈앞에 있는 잘생긴 권윤조 때문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저를 향해 웃는 눈에 사랑이 가득해서 마치 처음으로 고백을 받은 것처럼 설렜다.
“윤조야.”
“응.”
“우리 어머니도 너 보면, 분명 잘생겼다고 하실 거야.”
“……?”
“우리 아버지는, 만나기 힘들겠지만……. 괜찮으면 나중에 우리 어머니랑 재경이랑 같이 볼래?”
“응.”
돌아오는 대답에 기쁨이 뚝뚝 묻어 있었다.
“근데 가족들한테 내 얘기는 언제 한 거야?”
“석경이 네가 나한테 각인했을 때.”
“……아.”
“다들 많이 기뻐하셨어. 많이 보고 싶어 하셨고.”
다른 사람도 아닌 권윤조의 가족에게 환영받는 존재라는 사실이 석경의 가슴을 뭉클하게 했다. 그의 가족들을 얼른 만나 보고 싶다는 기대감이 드는 한편, 혹시나 실망을 안겨 주지는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공존하면서 뭉클했던 가슴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 * *
[재경 : 나 윤조형한테 용돈 받는다]
[재경 : 혹시 모를까 봐 알고 있으라고]
[뭐? 언제부터?]
[재경 : 그건 비밀]
[비밀? 뭐야! 똑바로 말 안 해?]
[재경 : 나 공부하는 중. 방해X]
불리할 때마다 나오는 재경의 치트키에 석경은 기가 막혔다. 석경은 심각한 얼굴로 미간을 찌푸리고 있다가 운전 중인 권윤조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윤조야. 너 재경이한테 용돈 줘?”
“어?”
권윤조가 당황했다. 당황한다는 건 자신이 그 사실을 모르길 바랐다는 거다.
“재경이한테 들었으니까 사실대로 말해도 돼.”
“석경아, 다른 뜻은 아니고 내가 그래도 재경이 매형이잖아. 그래서…….”
“매형? 내가 재경이 누나야? 매형은 무슨 매형이야”
“어? 아니. 매형이 아니라. 그럼 뭐지? 내가 재경이 형수인가?”
화나서 추궁하는 게 아닌데도 당황해서 횡설수설하는 권윤조가 웃겼다. 석경은 그만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얼마나 줬는데.”
“얼마 안 줬어. 그냥 담뱃값 정도?”
“뭐? 재경이 담배 피워?”
“아니, 아니. 말이 그렇다는 거지. 그만큼 얼마 안 되는 액수라는 뜻이야.”
“이재경 이 자식을 내가 가만두나 봐.”
“아니야, 석경아. 오해야. 진짜 오해야. 재경이 담배 안 피워.”
일단 권윤조가 운전 중이기도 해서 석경은 머리꼭지까지 차오른 흥분을 가라앉혔다.
[지금 당장 형 자취방으로 와]
석경은 재경에게 분노의 메시지를 보냈다.
[재경 : ?? 공부하는 중임. 방해X]
[너 담배 피우는 거 엄마한테 말한다]
[재경 : 20분 후 도착]
집 앞에 도착하자 마침 택시에서 내리는 재경의 모습이 보였다. 고등학생 주제에 택시를 타고 다녀? 권윤조한테 받은 담뱃값이 아주 넉넉한가 보지? 오늘따라 재경이 더 껄렁껄렁해 보이고 마음에 안 들었다.
“형.”
재경이 굳은 얼굴로 석경을 불렀다.
“윤조야, 너는 가.”
“가지 마. 윤조 형.”
재경이 권윤조의 팔을 붙잡았다. 절박하게 붙잡는 꼴이 방패막이가 되어 주길 바라는 모양이었다.
“가, 윤조야.”
“가지 마. 윤조 형.”
권윤조는 형제들 사이에 껴서 중간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곤란한 얼굴을 했다.
“엉? 다들 밖에 나와서 뭐 하냐? 나 마중 나온 거야?”
그때 갑자기 준영이 나타났다. 준영의 등장은 너무나도 뜻밖이라 석경은 황당했다.
“뭐야, 너 왜 왔어?”
“나? 재경이가 불러서 왔는데. 네가 부르라고 했다며.”
석경은 휙 고개를 돌려 재경을 노려봤다. 재경이 슬그머니 눈을 피했다. 준영까지 방패막이로 부른 재경의 치밀함이 실로 놀라웠다.
“이재경, 잘하는 짓이다.”
결국 좁은 자취방 안에 장정 넷이 작은 좌탁을 가운데에 두고 앉았다. 심각한 얼굴로 턱을 매만지던 준영이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재경이가 담배를 피운단 말이지?”
“…….”
“권윤조가 스폰해 준 자금으로?”
“김준영, 말 똑바로 해라.”
권윤조가 낮게 경고했다. 준영은 작게 콧방귀를 뀌고는 말을 이었다.
“이거 보통 심각한 일이 아닌 듯하다. 편의점에서 미성년자한테 담배만 팔아도 영업 정지를 먹는데, 권윤조는 음, 하여튼 심각하다, 심각해.”
“담배 사라고 준 용돈 아니야.”
권윤조가 석경의 눈치를 살피며 억울하다는 듯 말했지만 준영은 바로 말꼬리를 잡았다.
“담뱃값이라고 했다며.”
“말이 그렇다는 거지.”
“말을 왜 그렇게 하냐. 말 똑바로 해야 하는 사람은 내가 아니라 너인 듯.”
“…….”
권윤조가 입을 다물자 준영의 어깨가 한껏 올라갔다. 석경이 보기에 아무래도 준영은 이 상황을 무척 즐기는 것 같았다. 쩔쩔매는 권윤조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기회는 흔치 않으니까. 아니나 다를까 준영은 이 기회를 십분 활용했다.
“편의점은 영업 정지를 때려야 하고! 권윤조한테는 영업 정지를 때릴 수는 없으니까, 석경이랑 헤어져라.”
“김준영, 뒈지고 싶냐?”
권윤조가 눈을 부라렸지만 준영은 조금도 타격을 입지 않고 실실 웃었다.
“네가 먼저 석경이한테 뒈질 것 같은데.”
권윤조는 간절한 눈빛으로 석경을 바라봤다.
“석경아, 믿어 줘. 나는 정말 재경이한테 그런 뜻으로 용돈을 준 게 아니야. 내가 재경이 매형으로서, 아니 재경이 형수로서 뭔가를 해 주고 싶었을 뿐이야. 또 내가 동생이 없다 보니까 형 노릇도 해 보고 싶었고. 재경이가 가끔 네 어릴 때 사진도 보내 주니까 그게 참 고맙더라고. 얼마를 줘도 아깝지 않은 마음이더라. 아, 그렇다고 네 어릴 때 사진 받겠다고 재경이랑 거래한 건 아니야.”
“이재경, 너 내 사진 돈 받고 팔았어?”
석경의 날카로운 질문에 재경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아니야, 형. 절대 아니야.”
“이재경. 너 그런 못된 버르장머리 어디서 배웠어.”
“나 아니라니까. 윤조 형이 먼저, 형 사진 보내 주면 용돈 준다 그랬어.”
“와, 엄청난 반전에 화들짝.”
준영이 눈을 빛내며 감탄했다. 권윤조와 재경이 동시에 준영을 노려봤다. 재경 입장에서는 준영이 특히 더 어이없을 것이다. 방패막이가 되어 달라고 불렀더니 장작을 넣고 앉아 있으니.
“권윤조, 네가 말해 봐.”
석경은 권윤조에게 발언권을 줬다. 권윤조의 긴 속눈썹이 잘게 떨렸다.
“석경아. 나는 억울해.”
“뭐가 억울한데.”
“사진을 세 장밖에 못 받았어.”
“뭐?”
“재경이가 네 사진을 세 장밖에 안 줬어. 부족하다고 더 달라고 하는데도 맨날 바쁘다는 핑계나 대고. 방해 금지, 이러고 있고. 쟤 아무래도 양아치 같아. 석경아, 혼내 줘.”
“와, 권윤조 노선 트는 솜씨에 또 한 번 화들짝.”
준영이 감탄한 표정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석경은 이마를 짚었다. 재경이 양아치인 것도 맞고, 권윤조의 노선 트는 솜씨가 예술이라는 것도 알겠다. 알아선 안 되는 것들을 잔뜩 알아 버린 기분이었다.
“진짜 공부하느라 바빴어.”
재경도 억울하다는 듯이 말했다.
“일단 알았어.”
석경이 말했다. 뒤숭숭한 속내와는 달리 목소리는 차분하게 흘러나왔다.
“형.”
“석경아.”
재경과 권윤조가 마치 제 편을 들어 달라는 듯이 석경을 간절하게 바라봤다.
“재경이 너는 담배 끊어.”
“알았어. 끊을게. 이미 끊었어. 끊은 지 두 시간 됐어.”
“까불지 말고.”
“넵.”
석경은 권윤조에게 눈을 돌린 후 느리게 입을 열었다.
“권윤조 너는…….”
“…….”
“내 사진 갖고 싶으면 나한테 말하지 그랬어.”
“석경아…….”
“내가 줄게.”
“석경아…….”
권윤조가 특유의 멜로 눈깔로 석경을 바라봤다.
“뭐야, 결말 맘에 안 드는데. 환불해 줘요.”
준영이 투덜거렸다.
“준영이 너는…….”
“뭐야, 나한테도 할 말 있어?”
“게임 좀 적당히 해. 어제 또 밤새웠지? 다크서클 뭐냐.”
“석경아, 나 걱정해 주는 거야? 나는 네가 권윤조랑 사귄 후로 나는 안중에도 없는 것 같아서 얼마나 서운했는데. 역시 네 마음속에는 내가 항상 자리하고 있구나. 그것도 제일 윗자리에. 가장 크게. 석경아, 기억 나? 그때가 아마 중학생 때였지. 내가 깜박하고 숙제를 안 해 왔을 때 석경이 네가, 네 숙제를 나한테 줬었잖아. 너는 숙제를 안 해 와도 별로 안 혼나겠지만 나는 상습범이라 맞아 죽을 수도 있다면서. 그때 나 정말 많이 감동했었어. 이런 게 바로 진정한 우정이구나 싶었어. 덕분에 나는 그때 죽지 않고 아직까지 살아 있단다. 권윤조 알겠냐? 이런 게 바로 참사랑이다.”
“너무 지루해서 안 들었어. 근데 안 들어도 헛소리인 건 알겠다.”
“흐흐, 다 들었으면서.”
재경이 배가 고프다고 해서 피자와 치킨을 시켰다. 재경은 권윤조가 계산을 하는 모습을 보고 꽁했던 마음을 풀고 역시 윤조 형이 최고라며 권윤조를 추켜세웠다.
피자와 치킨을 다 먹고, 권윤조는 재경을 데려다주겠다며 일어났다. 재경은 지하철을 타고 가도 된다며 한사코 사양했지만, 권윤조가 말없이 차 키를 챙겨들고 먼저 나가 버리자 하는 수 없이 신세를 져야 했다.
두 사람이 가고 석경과 준영 둘만 남게 됐다.
“준영아, 늦었으니까 너도 가.”
“나 자고 갈까, 오랜만에.”
자고 가면 권윤조가 가만히 안 있을 텐데. 석경은 제일 먼저 권윤조를 떠올렸다. 어떻게 외간 남자랑 같이 밤을 보낼 수가 있냐고 노발대발하는 권윤조가 눈에 선했다.
석경이 바로 대답을 하지 않자 준영이 입술을 삐죽였다.
“이석경, 변했어.”
“아니야, 준영아.”
“뭐가 아니야.”
“자고 가, 준영아.”
“됐어. 이미 마음 상했어.”
준영의 입술이 점점 튀어나와서 석경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
“준영아.”
“내가 좋아, 권윤조가 좋아?”
“……네가 좋아.”
“방금 뜸 들였지.”
“아니야.”
“못 믿겠어. 상처받았어.”
“상처받지 마.”
석경은 토라진 준영을 계속 달랬다. 준영의 튀어나온 입술이 겨우 원래 위치로 돌아간 것을 보고 석경은 안심했다.
둘은 캔 맥주를 하나씩 손에 들고 나란히 앉아서 TV를 봤다. 연애 상담 프로그램을 아무 생각 없이 보고 있는데 준영이 물었다.
“석경아, 너 그거 알아?”
“뭐?”
“요새 SNS에서 유행하는 게 있는데. ‘남친 갔어 와도 돼’ 그거 몰라? 들어본 적 없어?”
“응, 모르는데.”
“너 그거 권윤조한테 해 봐라.”
“어? 뭘 해?”
“권윤조한테 ‘남친 갔어 와도 돼’라고 메시지 보내면 돼. 간단하지?”
남친 갔어. 와도 돼? 한 2초 정도 곱씹어 보자 의미가 파악됐다.
“아니, 그걸 왜 하는데.”
“권윤조가 어떻게 나올지 궁금하지 않아?”
“안 궁금해.”
“잘하면 싸울 수도 있어. 너네 싸우면 재밌겠다. 폰 줘 봐.”
“야, 싫어.”
준영이 다시 시무룩한 얼굴을 했다.
“석경아, 나는 그럼 무슨 낙으로 살아? 권윤조한테 너도 뺏기고 나는 요즘 사는 게 재미가 없어.”
“미치겠네.”
“권윤조보다 내가 더 좋다며. 그거 거짓말이야?”
“아니야. 거짓말 아니야.”
“…….”
석경은 하는 수 없이 핸드폰을 건넸다. 준영이 밝아진 얼굴로 손가락을 빠르게 놀렸다.
“보냈어.”
“진짜? 뭐라고 보냈는데?”
“직접 봐.”
[권윤조 갔어]
[와도 돼]
어느새 읽었는지 숫자도 사라진 메시지 창을 보며 석경이 넋을 놓고 있는데 전화가 걸려 왔다. 권윤조에게 걸려 온 전화였다.
“어떡하냐. 전화 왔다.”
석경은 당황한 나머지 다른 사람도 아니고 준영에게 해결책을 물었다.
“받지 마.”
“받지 말라고?”
“어, 받지 마.”
“안 받으면 싸우는 게 아니라 헤어질 것 같은데.”
준영은 씩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권윤조 올 것 같으니까 나는 갈게.”
“야, 김준영!”
현관문이 닫히고 석경은 방에 혼자 남겨졌다. 부재중 전화 1통과 함께.
권윤조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번에는 권윤조가 받지 않았다. 세 번이나 더 걸었지만 계속 받지 않았다. 화난 건가?
[준영이가 장난친 거야]
일단 해명 메시지를 보내놓고 이 사태를 어떻게 수습할까 머리를 싸매고 있는데 현관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튕기듯이 달려 나가 문을 열자 뛰어온 건지 권윤조가 숨을 거칠게 내쉬고 있었다.
“윤조야.”
“문자 뭐야?”
석경은 권윤조의 팔을 잡아끌어 집안으로 들어오게 했다.
“준영이가 장난친 거야.”
“…….”
권윤조는 말없이 석경을 바라봤다. 의심 가득한 눈으로.
“진짜야.”
“누구한테 와도 된다고 한 거야? 누구한테 보내려던 문자였어?”
“내 말 안 믿는 거야?”
“설마 한세진이야? 집에 불러서 뭐 하려고 했어?”
권윤조는 화났다기보다 크게 상처받은 모습이었다. 그의 입에서 한세진의 이름이 나온 순간 석경은 이 일이 간단하게 수습되기는 틀렸음을 직감했다.
“윤조야, 일단 진정하고 내 말 들어. 너도 알잖아. 준영이가 어떤 앤지.”
“모르는데.”
“그게 있지, 뭐 요새 SNS에서 유행하는 거래.”
“석경아, 내가 너를 믿고 싶은데.”
“응, 믿으면 돼.”
“불안해.”
“…….”
“그러니까 우리 같이 살자.”
“뭐?”
아까 낮에 운전 연습할 때 자신이 급발진 할 때마다 권윤조가 이런 기분이었을까. ‘불안해’에서 ‘우리 같이 살자’로 이어지는 흐름이 몹시 갑작스럽고 뜬금없었다.
“혼전 동거가 좀 그러면 결혼부터 해도 되고.”
“갑자기? 결혼을?”
“결혼이 갑작스러우면 동거부터 해도 되고.”
“동거를?”
“난 다 괜찮아. 석경이 네가 편한 대로 따를게. 동거랑 결혼 둘 중에 하나 골라.”
“꼭 둘 중에 하나로 골라야 돼?”
“응. 같이 안 살면 내가 도저히 불안해서 안 되겠어.”
“알았어. 생각해 볼게.”
천천히 생각을 해 보려고 했는데 느닷없이 입술을 덮쳐 왔다. 생각할 틈을 주지 않겠다는 듯 몰아붙이는 입술에 머리가 아찔해졌다. 벌어진 입술 사이로 축축한 혀가 밀려 들어왔다. 질척하게 젖은 소리가 방안을 울렸다.
권윤조는 능숙한 손길로 석경의 셔츠를 벗겼다. 쇄골에 닿는 뜨거운 숨에 잔소름이 돋았다. 몸이 번쩍 들어올려졌다.
“아, 잠깐만…….”
침대에 눕혀졌다. 그다지 비싼 침대가 아니라서 관계를 할 때마다 삐걱삐걱 스프링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리는 터라 석경은 벌써부터 신경이 쓰였다. 더욱이 낡고 오래된 빌라라 방음도 잘 안 됐다. 삐걱대는 침대 소리 때문에 석경이 제대로 집중을 못하는 것을 아는 권윤조도 웬만하면 자기 집에서 관계를 가지려고 했었다.
그런데 이렇게 갑작스럽게……. 그거 조금 버둥거렸다고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 침대가 벌써부터 요란스럽게 소리를 냈다. 삐걱삐걱 소리를 들으면서 박히면 이상하게 민망하고 부끄러운 기분이 배가 되는 느낌이었다.
어느새 알몸이 되었다. 앞을 세운 것보다 뒤가 젖어 있다는 사실이 더 수치스러웠다. 엉덩이 사이로 들어온 손가락은 단숨에 야릇한 포인트를 건드렸다.
“흐읏!”
손가락 개수가 늘어날수록 안쪽의 여린 점막이 더욱 예민해지면서 입술 사이로 신음이 저절로 흘러나왔다.
“석경아, 골랐어?”
“하, 으읏……! 아직…….”
손가락이 빠져나가고 두꺼운 기둥이 안을 파고들었다. 깊숙이 박아 넣으며 권윤조가 물었다.
“나랑 결혼할래?”
“아, 아니…….”
퍽, 다소 거칠게 밀고 들어왔다. 내벽이 빠른 속도로 짓뭉개지며 머릿속에서 새하얀 전기가 튀었다.
“그럼 동거할래?”
쾌감으로 인해 하반신은 물론이고 뇌까지 녹아서 제대로 판단할 수가 없었다.
“으……응.”
“그래, 석경아. 일단 동거부터 하자.”
입술이 포개졌다. 앓는 소리가 권윤조의 입안으로 먹혀들었다. 몸이 위아래로 흔들리면서 삐걱삐걱 침대 스프링이 아우성치는 소리가 거세졌다. 아, 소리, 어떡해. 석경은 손을 뻗어 권윤조의 목에 매달렸다. 그렇게 하면 제 몸이 덜 흔들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석경아, 소리 들려줘.”
스프링 소리는 어쩔 수 없는 노릇이라 석경은 신음이라도 참아 보려 노력했다. 그러자 권윤조가 소리를 들려달라며 더 세게 허리를 쳐올렸다.
“……흐읏, 아, 안 돼.”
“왜.”
안 된다는 말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권윤조가 저 안쪽 깊숙한 곳까지 빠르게 꿰뚫고 들어왔다. 아찔한 고통에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이었다.
“하으……앗! 여기 방음…….”
쿵! 쿵! 쿵! 정신없이 몰아쳤다.
“석경아, 내가 너를, 너무 살살 다뤘나 봐.”
“하읏! 앗! 유, 윤조야!”
“그런 거 신경 쓸 여유도 있고.”
흥건하게 젖은 구멍에 크고 흉포한 기둥이 빠르게 들락거렸다. 교성에 가까운 신음 소리에, 삐걱대는 스프링 소리에, 침대 헤드에 머리를 쿵쿵 박아 대는 소리, 그리고 찰박거리는 질펀한 물소리까지 더해졌다.
“하앗! 제, 제발! 으읏! 그만!”
“석경아, 내가 지금, 너 억지로 범하는 거야?”
“아, 아니! 흐읏!”
석경은 정신없이 박히는 와중에도 세차게 고개를 내저었다.
“근데 왜, 그만하래.”
권윤조가 혼을 내듯 여린 내벽을 쾅 강하게 짓뭉갰다. 발가락이 곱아들고 허벅지가 덜덜 떨렸다. 머릿속이 하얘지면서 석경의 성기 끝에서 물줄기가 툭툭 터져 나왔다. 탈력감이 전신을 휘감았다. 축 늘어지고만 싶었으나 석경의 안에 있는 권윤조의 것은 아직 건재했다.
권윤조가 ‘그만하자’는 말에 유독 예민하다는 사실을 깜박했다. 어쩌지. 권윤조의 뇌관을 건드려 버렸으니 오늘 밤도 일찍 잠들긴 글렀다.
온몸을 녹여 버릴 듯한 지나친 자극에 귀까지 먹먹했다. 끼이익, 끼이익, 스프링 소리가 아득하게 멀어지더니 더는 들리지 않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