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박태정! 네이비즘이랑 네이버 시계랑 같은 거야?”
“다를걸?”
“야, 수강신청 사이트 시계가 가장 정확하지 않겠냐?”
“올클리어 하려면 네이비즘 보라던데.”
“이수현 너는?”
“난 타임시커.”
“아이 씨, 그건 또 뭐야. 석경아, 넌?”
기계공학과 동기 5명은 수강신청 당일 아침 일찍부터 피시방에 모였다.
주 4파, 학점 팍팍 잘 퍼주는 교수, 클린하고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어가는 팀플 없는 수업, 꿀 빠는 동영상 강의 등의 조건을 갖춘 완벽한 시간표를 염원하는 5명의 마음가짐은 몹시도 비장했다.
“나? 나는 수강신청 사이트…….”
“하나만 켜 놓으려고?”
“어, 왜?”
“너는 있는 대로 다 켜 놔. 하나로는 안 돼.”
준영의 당부에 석경은 당황해서 옆에 앉은 권윤조의 얼굴을 봤다. 권윤조가 싱긋 웃으며 마우스를 쥔 석경의 손등을 토닥거렸다.
“석경아, 걱정 마. 너 광탈하면 내가 너 대신 열심히 로비하고 돌아다닐게. 네가 서버 시계 백 개를 본다고 해서 크게 달라질 건 없을 거야.”
“뭐?”
달라질 게 없다니. 무슨 뜻이지? 무시당한 느낌에 발끈해서 따지려는데 준영이 외쳤다.
“야! 시간 다 됐다. 얘들아! 주 4파 가자!”
마우스를 쥔 손에서 땀이 났다. 석경은 네이비즘인지 타임시커인지 하는 서버 시계를 지금이라도 몽땅 다 켜 놓을까 하다가 관뒀다.
정각과 동시에 석경은 혼신의 힘을 다해 마우스를 클릭했다. 손가락 새끼, 오늘따라 왜 이럴까. 당황스럽게. 왜 벌써 정원이 다 차고 난리냐. 이거 망한 건가? 승부는 순식간에 판가름 났다.
“석경아, 어떻게 됐어?”
한차례 폭풍이 지나가고 난 후, 권윤조가 웃으며 물었다. 얘가 지금 웃네. 지금 웃음이 나오나 보네.
“4개 정원 초과.”
“그래도 선방했네.”
“어디가 선방이야. 망한 거잖아. 넌?”
“나야 뭐.”
“너는 뭐.”
“다 들어가지던데.”
구겨지는 석경의 표정을 보며 권윤조가 소리 내어 웃었다. 지금 누구 놀리냐고. 석경은 한숨을 내쉬었다. 망한 수강신청을 앞으로 만회할 일이 걱정이었다.
태정과 이수현은 1개, 준영은 2개의 실패를 기록했다. 준영은 짜증을 내려다가 4개나 실패한 석경을 보고 슬그머니 짜증을 억누르는 기색이었다.
“밥 먹으러 갈까?”
아침이라 문을 연 식당이 마땅히 없어서 24시간 영업하는 감자탕 집을 찾았다. 권윤조를 제외한 모두가 수강신청에 장렬히 실패한 석경의 눈치를 살폈다. 석경도 괜히 눈치가 보였다.
“나 괜찮으니까 신경 쓰지 마.”
“그래, 괜찮을 거야. 정정 기간에 잘 하면 돼.”
이수현이 답지 않게 부드러운 목소리로 위로를 건넸다. 준영도 컵에 물을 따르며 말했다.
“권윤조가 도와줄 거야. 석경이랑 같은 수업 안 들으면 권윤조만 손해지.”
“권윤조가 왜 손해야?”
이수현은 준영이 뱉은 묘한 뉘앙스를 놓치지 않고 잡아냈다. 석경은 준영의 허벅지를 꼬집으며 어색하게 웃었다.
“내가 학점이 높으니까?”
이수현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석경을 훑어보다가 고기를 발라 먹었다. 석경은 준영에게 권윤조와 사귀기로 한 사실을 알렸다. 태정도 겉으로 내색은 안 하지만 권윤조에게 들어서 이미 아는 눈치였다.
이수현만 아직 모른다. 이수현에게 알리기에는 아무래도 껄끄러웠다.
권윤조는 절대 아니라고 말했지만 석경은 이수현이 권윤조에게 친구 이상의 감정을 품었을 거라고 믿었다. 그러니까 교제 사실을 알리더라도 자신이 아니라 권윤조가 알려서 감정 정리를 도와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준영이 누구의 의견도 묻지 않고 소주 2병을 주문했다. 아침부터 무슨 술이냐고 절레절레 고개를 젓던 석경도 막상 표면에 시원하게 이슬이 맺힌 초록색 병을 보니 술잔을 내밀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다섯이서 이른 시간부터 소주 7병을 해치웠다. 오랜만에 마시는 술이라 그런지 취기가 제법 돌았다.
“벌써 개강이라니 믿기지가 않는다.”
“뭐야 씨발, 방학 돌려줘. 내가 잘할게.”
방학 중에는 오히려 술 마실 기회가 없었다. 억지로 이름을 붙여가며 만들어진 숱한 술자리가 없으니 술집에 갈 일도 없었다.
석경은 방학 내내 권윤조와 붙어 있었다. 주량은 꽤 되지만 술을 즐기는 편은 아닌 권윤조와 함께 있다 보니 자연히 석경도 술 생각이 안 났다. 물론 그 이유가 다는 아니었다.
둘은 서로의 집을 오가며 두 집에서 동거 비슷한 것을 했다. 석경은 눈만 마주치면 싱싱하고 거침없는 성욕을 드러내며 급하게 제 옷을 벗기는 권윤조 때문에 매일 녹초가 되는 몸을 추슬러야 했다.
밀어내려고 다짐해도 막상 권윤조와 닿으면 몸이 뜨거워지고 이성이 조각났다.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짐승처럼 뒤엉키느라 끼니를 거른 적도 허다했다. 끼니도 제때 못 챙겨 먹은 몸이 술을 떠올릴 리가 없었다.
노팅이라도 하는 날이면 석경의 몸은 완전히 혹사당했다. 아프고 버거우면서도 황홀했다. 그런 밤이면 석경은 권윤조의 얼굴을 보려고도 하지 않았다. 아프고 버거운 느낌 때문이 아니라 온몸이 부르르 떨리는 황홀한 느낌 때문에 권윤조의 얼굴을 똑바로 볼 수가 없었다. 권윤조는 석경의 매정한 뒤통수를 보며 쩔쩔맸다.
‘얼굴 좀 보여 주면 안 돼?’
‘…….’
‘앞으로 조심할게, 응?’
‘…….’
‘근데 석경아, 왜 이렇게 각인이 안 되지?’
‘…….’
‘이제야 얼굴 보여 주네.’
횟수를 세는 게 힘들 만큼 서로 몸을 섞었지만 석경의 각인은 여태 이루어지지 않고 있었다. 아직은 권윤조의 일방 각인 상태인 것이다.
권윤조는 석경이 억제제를 먹는 일에 대해 굉장히 예민했다. 억제제를 먹느니 차라리 외출을 하지 말라고 하는 바람에 본의 아니게 방학 내내 두문불출해야만 했다.
석경은 권윤조가 억제제에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 이유를 짐작하고 그를 타일렀다. 죽으려는 의도가 아니었다고 여러 번 말했다. 그러나 권윤조에게는 이미 트라우마로 박혀 버린 사건이 됐는지 불안을 거두지 않았다.
서로가 편해지려면 석경이 각인을 하루라도 빨리 해야 하는데 그게 잘 안 됐다. 권윤조에게는 그렇게나 쉬웠던 일이 저에게는 왜 이렇게 어려운지 모를 일이었다. 마치 석경에게는 분에 겨운 행운이라고 일깨워 주듯이 각인은 쉽사리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대로 영영 각인이 안 되는 것은 아닐까, 겉으로 티는 안 냈지만 석경의 신경은 날카롭게 곤두서 있었다. 하루하루 어쩔 수 없이 맛보는 실망이 두려웠다.
권윤조는 걱정 말라며 느긋하게 말하다가도 관계 중 노팅으로 애를 먹은 석경이 눈길조차 주지 않고 차갑게 굴면 최후의 한 수처럼 각인 얘기를 꺼내곤 했다. 노팅이 각인 확률을 가장 높인다는 식으로 나오는 것이다. 그러면 석경은 솔직히 할 말이 없었다.
“석경아, 내일 저녁에 세진이랑 술 한잔하기로 했는데 너도 낄래?”
박하사탕을 입에 문 준영이 말했다. 감자탕 집에서 이제 막 나온 참이었다. 2차 없이 이대로 헤어지기로 했는데 누구도 자리를 뜨지 않고 가게 앞에 모여 있었다.
저에게 말을 건 사람은 준영이건만 석경은 권윤조의 얼굴을 보았다. 속을 읽을 수 없는 무표정이었다. 때문에 석경은 한세진의 존재가 권윤조에게 얼마나 비중을 차지하는지, 얼마나 거슬리는 존재인지를 알아채지 못했다.
“어? 나는 됐어. 둘이 만나.”
“그래. 나 먼저 간다.”
준영이 손을 흔들며 먼저 자리를 떴다. 뒤이어 태정도 가고 권윤조와 석경, 이수현 셋이 남았다. 권윤조를 한 번 쳐다본 이수현이 석경의 앞으로 다가왔다.
“잠깐 시간 돼?”
“나?”
“어. 10분이면 돼.”
석경은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 이번에도 권윤조를 보았다. 아까보다 표정이 좀 더 험악해진 느낌이 들었다.
권윤조를 먼저 제 자취방에 보내고 이수현을 따라갔다. 빠른 걸음이 아닌데도 더운 숨이 훅훅 내뱉어지는 날씨였다. 이수현은 가장 가까이에 위치한 편의점 앞에서 발길을 멈추고 말했다.
“잠깐 여기 앉아 있어. 음료수 사 올게.”
“아니야, 내가 사 올게.”
“앉아.”
이수현은 두 말 않겠다는 듯 잘라 말하고 편의점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따라 들어가려던 석경은 계산대 앞에서 괜한 실랑이가 일어날 것 같아서 얌전히 파라솔 의자에 앉았다. 음료수 정도는 크게 빚지는 것도 아니니 부담 없이 얻어먹기로 한 것이다.
잠시 후 이수현이 편의점에서 나와 석경의 맞은편에 앉았다. 단둘이 함께 있는 자리는 오랜만이었다.
“마셔.”
“고마워. 잘 마실게.”
손에 쥔 캔 음료가 시원했다. 뚜껑을 따는데 이수현이 무언가를 또 내밀었다.
“이것도.”
하트 모양의 투명한 케이스 안에 금박 포장된 동그란 초콜릿이 여러 개 들어 있었다. 분명 이전에도 받은 적이 있는 초콜릿이었다. 어리둥절한 얼굴로 바라보자 이수현은 음료수를 한 모금 들이켜고 입을 열었다.
“방금 편의점에서 산 거야. 너 주려고.”
“아, 고마워. 전에 네가 준 거 먹었는데 맛있더라. 너는, 초콜릿 싫어한댔지?”
이수현은 화이트 데이 때 다른 사람에게 받은 초콜릿을 석경에게 주었다. 저는 초콜릿을 싫어한다고 말하면서. 그래서 기억하고 있었다.
“좋아해.”
“응?”
“나 초콜릿 좋아해.”
“…….”
“그리고 나, 이석경 너도 좋아해.”
“…….”
“화이트 데이 때 너한테 준 거, 그거 사실은 다른 사람한테 받은 게 아니라 너 주려고 내가 직접 산 거야. 내가 너 좋아해서.”
석경이 아무 말도 못하고 얼이 빠져 있는 사이 이수현은 방금 고백한 사람이라고는 믿기지 않게 시침을 뚝 뗀 얼굴로 음료수를 비웠다.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하는데 어떤 말도 꺼낼 수 없었다.
“저기, 이수현…….”
“대답은 안 해도 돼. 너랑 권윤조랑 사귀는 거 알고 있으니까.”
“……미안해.”
“미안하긴.”
이수현은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나는 진짜, 전혀 몰랐어. 나는 네가 윤조한테 마음이 있는 줄 알았어.”
“뭔지 알아. 나도 네 주변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다 너를 좋아하는 것만 같았으니까.”
“…….”
“자꾸 속이 좁아지고. 그랬어.”
침묵이 흘렀다. 이수현이 빈 음료수 캔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갈게. 개강하면 보자.”
그렇게 쿨한 인사를 남기고 멀어졌다.
석경은 10분을 더 멍하니 앉아 있었다. 뜨거운 햇볕이 파라솔 그늘 안으로 자꾸만 비집고 들어오려는 것을 보고 그제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알딸딸한 취기와 더위, 이수현의 충격 고백까지 석경을 멍하게 만들기에 충분한 요소들이었다.
자취방에 도착하니 권윤조가 있었다. 샤워를 했는지 머리카락이 살짝 젖어 있었다. 저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시선을 의식하며 석경은 곧장 욕실로 들어가 찬물로 샤워를 했다. 덕분에 정신이 조금 드는 것 같았다.
“이수현이 고백했어?”
욕실에서 나오자마자 권윤조가 물었다. 어떻게 알았느냐고 물으려다가 관뒀다. 주위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다 석경을 좋아하는 것만 같았다는, 자꾸 속이 좁아지고 그랬다는 이수현의 말이 떠올랐다. 아마 권윤조도 그랬을 것이다. 석경이 그랬던 것처럼.
석경은 권윤조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말없이 두 팔로 목을 끌어안았다. 그에게서 희미하게 담배 냄새가 났다.
“지금 애교 부리는 거야?”
권윤조가 웃음을 터뜨렸다.
“담배 피웠어?”
추궁하듯 묻자 웃음을 지운 권윤조가 낭패한 얼굴을 했다.
“냄새 나? 딱 두 모금밖에 안 피웠는데.”
“끊기로 했잖아.”
“기분이 안 좋아서.”
“화났어? 나 너랑 사귄다고 했어. 이수현도 털어 버리려고 고백한 거고.”
권윤조가 칭찬이라도 하듯이 석경의 뒷머리를 다정하게 쓰다듬었다.
“잘했어. 근데 어쩌지? 나 이수현 때문에 화난 거 아닌데.”
“그럼?”
“한세진.”
석경은 권윤조를 안고 있던 팔을 풀었다. 몸을 약간 떨어뜨려 권윤조의 얼굴을 보았다.
“한세진?”
“아까 준영이가 셋이 같이 술 마시자고 했을 때 너 당황했잖아.”
“아닌데.”
“아니긴. 동공에 지진 나고 난리 났던데 뭐.”
“…….”
“너랑 한세진, 현재 위치가 어디야?”
“무슨 위치.”
“한세진이 너한테 좋아한다고 고백했어?”
“…….”
“석경아, 어딘지 알아야 나도 엉뚱한 데 삽질 안 하지.”
솔직하게 말하는 게 좋을까. 아무것도 없었다고 잡아뗄까. 석경은 잠시 고민하다가 이내 결정을 내렸다.
“아무것도 없었어.”
감쪽같이 시침을 뚝 뗄 재간도 없는 주제에 일단 저질렀다. 빤히 보는 시선 탓에 표정에 균열이 일어났다.
“아무것도 없었다고? 지금 나더러 그 말을 믿으라고?”
“윤조야.”
“나중에 우리 아이한테 다 이를 거야. 아빠가 다른 남자랑 키스했었다고.”
“우리 아이가, 너랑 내 아이야?”
“당연한 걸 묻네.”
그럼 안 되지. 우리 아이가 그런 TMI를 듣게 할 수는 없다고 석경은 생각했다. 권윤조는 한다면 하는 성미니까.
“한세진이 나한테 고백했고, 내가 거절했고…….”
“그리고?”
“한세진이 다시 한번 잘 생각해 보라고 했어.”
“그 뒤는 없고?”
“……그 뒤는 네가 본 거……. 키스.”
“…….”
“그리고 아무것도 없었어.”
권윤조는 입을 꾹 다물었다. 정말 없냐고 재차 캐묻고 싶은 걸 간신히 참는 눈치였다.
“석경아, 아까 이수현이랑 확실히 정리했지? 설마 여지 남긴 건 아니지?”
“야, 나를 뭐로 보는 거야.”
“그럼 오늘 다 해치우자. 한세진한테 연락해. 당장 만나자고.”
* * *
갑작스럽게 카페로 불려 나온 한세진은 조금 당황한 눈치였다. 그도 그럴 게 약간 떨어진 테이블에 앉은 권윤조가 이쪽을 노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권윤조의 눈은 이글이글 타오르는 것 같았다.
“석경아. 쟤 권윤조 맞지?”
“……응.”
“엄청 노려보는데.”
“미안해.”
“나 차이는 거 구경하러 나온 거래? 그럼 나도 얌전히 차이기 싫을 것 같은데.”
카페 안에 에어컨이 빵빵하게 켜져 있는데도 이마에 식은땀이 솟았다. 석경은 자리에서 일어나 권윤조에게 다가갔다.
“가.”
이미 여러 번 한 말을 또 했다. 권윤조는 말없이 한세진을 한 번 노려보고는 석경을 올려다봤다. 고집스러우면서도 한편으로는 불안 가득한 눈빛으로. 화를 내서라도 그를 쫓아내려던 석경은 무르춤해졌다.
“정리했어?”
“차에서 기다려. 금방 갈게.”
달래는 말투로 부드럽게 말했지만 여전히 그는 움직이려고 들지 않았다. 대신 슬며시 비껴놓은 눈빛이 흔들렸다. 감정의 떨림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
“너 보는 앞에서 차이기 싫대.”
하늘이 무너져도 자리를 지킬 것만 같았던 권윤조가 그제야 일어났다. 석경은 권윤조가 카페를 나가는 뒷모습을 지켜보다가 다시 자리로 돌아왔다.
“세진아.”
결의에 찬 석경의 눈동자가 한세진을 향했다.
약 20분 후, 카페를 나온 석경은 짧게 경적을 울린 차에 올라탔다. 아직 한세진이 있을 카페를 슬쩍 돌아본 석경은 들릴 듯 말 듯 한숨을 내쉬고 안전벨트를 맸다. 권윤조가 말없이 가속페달을 밟으며 차를 출발시켰다.
하늘이 붉었다. 한나절 사이에 석경은 많은 일들을 겪었다. 수강신청 실패와 이수현의 고백, 그리고 한세진과의 만남.
“저녁 먹고 들어갈까?”
권윤조가 물었다. 석경은 고개를 저으려다가 끄덕였다.
“맛있는 거 먹자.”
아무리 정리하는 자리라지만 저를 한세진과 단둘이 두고 밖에서 기다렸을 권윤조의 심정을 모를 수가 없었다. 최승희 때문에 속을 많이 끓여봐서 석경도 잘 안다. 참혹한 질투에 휩싸여 형편없는 사람이 되는 기분. 속이 좁아지는 기분. 그 기분들은 석경을 한없이 부끄럽게 만들었었다.
“뭐 먹을까?”
“먹고 싶은 거 있어?”
“너 먹고 싶은 거.”
메뉴 정하는 일이 얼마나 힘든 일인데. 권윤조를 향해 슬쩍 눈을 흘긴 석경은 뭘 먹어야 할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저녁 메뉴를 열심히 떠올리고 있는데 권윤조의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석경아.”
“응?”
“아까 카페에 도로 들어가고 싶은 거 겨우 참았어.”
“잘 참았어.”
저 혼자 끝을 맺게 해줘서 권윤조에게 고마웠다.
“잘 참았으니까 숨기지 말고 말해줘. 한세진이 순순히 물러났어?”
“응.”
“설마.”
“진짜야.”
“…….”
“내가 너한테 각인했다고 말했거든.”
권윤조의 놀란 두 눈이 석경을 향했다. 운전 중이라는 사실도 잊고 석경의 얼굴을 보느라 여념이 없었다.
“뭐?”
“윤조야, 앞에, 운전해야지.”
권윤조는 겨우 정신을 차리고 갓길에 서둘러 차를 세웠다. 석경은 주정차 금지 구역은 아닌지 도로 주변을 자세히 살피느라 정신이 없었다.
“다시 말해 봐.”
“윤조야, 여기 아무래도 주정차 안 되는 것 같은데.”
“지금 그게 문제야? 나한테 뭘 했다고?”
“각인.”
“진짜야? 진짜 했어? 한세진 떼어내려고 거짓말한 거 아니고?”
“진짜야. 아마 거의 확실한 것 같아. 요 며칠 심한 건 아니고 열이 좀 났거든. 처음엔 감기 기운인가 했는데 아무래도 각인한 것 같아. 내일 병원 가서 검사해 보려고.”
권윤조는 각인할 때 심하게 앓았다던데, 자신은 그다지 심각한 수준이 아니라 긴가민가할 수밖에 없었다.
“왜 나한테 말 안 했어?”
“확실해지면 말하려고 했어. 근데 윤조야, 여기 계속 있으면 카메라 찍힐 것 같아.”
“석경아. 억제제 갖고 있지? 이리 줘 봐.”
석경은 얼떨떨한 얼굴로 하얀 약통을 꺼내 내밀었다. 약통을 빼앗듯이 가져간 권윤조가 차 문을 열고 내렸다. 그는 무언가를 찾는 듯 두리번거리다가 쓰레기통을 발견하고는 석경을 보며 환하게 웃었다. 그리고 잘 지켜보라는 듯 과장된 동작으로 약통을 쓰레기통 안에 던져 넣었다.
권윤조는 이보다 더 후련할 수 없다는 얼굴로 차에 올라탔다. 앓던 이를 뺀 것처럼, 악성 종양을 깨끗하게 도려낸 듯 기뻐했다.
“통쾌하다.”
각인했다는 사실을 듣고 권윤조가 가장 처음 보인 반응에 석경은 웃음이 비어져 나왔다. 석경의 고통을 자신의 일처럼 여기지 않았다면 결코 나올 수 없는 행동이었다. 그 와중에 준법정신도 투철하게 쓰레기통에 버리고. 웃음이 나오는데 이상하게도 눈앞이 흐려졌다.
“응. 통쾌하다.”
“집에 있는 것도 다 버리자. 한 알도 남기지 말고.”
“응, 그래.”
“왜 울어.”
“좋아서.”
“키스해도 돼?”
“안돼. 카메라 있잖아.”
석경은 장난스럽게 말했다.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차가 급하게 출발했다. 밖에서 저녁을 먹기로 한 계획은 쏙 들어가고 행선지가 권윤조의 집이 되었다.
기가 막힌 주차 솜씨를 보인 권윤조가 차에서 내려 무서운 기세로 조수석 문을 열어젖혔다. 석경의 손목을 붙잡고 그렇게 말 한마디 없이 엘리베이터를 타고, 현관문을 열고, 집안에 들어와 마침내 석경에게 입을 맞췄다. 석경의 턱을 붙잡고 몸을 벽에 밀어붙이고 입술을 겹쳤다.
벽에 부딪힌 충격으로 앓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끙끙 앓으면서도 습관처럼 목에 매달리자 권윤조가 웃었다. 석경의 입술에 막혀 버린 웃음이 그르릉 떨리면서 낮게 목을 긁는 소리가 났다.
“하, 으읏!”
벽에 가로막혀 물러날 곳도 없는데도 권윤조는 계속해서 석경을 밀어붙였다. 벽과 맞닿은 등이 아팠다. 권윤조에게 먹힌 입술도 아팠다. 온전히 전해져 오는 권윤조의 흥분에 석경은 휘청거렸다.
과연 자신이 감당할 수 있을까. 이렇게나 많이 흥분한 권윤조를. 다급하게 바지를 벗겨 내는 손의 힘을 감당할 수가 없었다. 몸이 휙 돌려지면서 이번에는 등이 아닌 가슴과 벽이 맞닿았다.
“흐윽!”
크고 단단한 것이 뒤를 가르고 들어왔다. 다리가 덜덜 떨렸다. 권윤조는 주저앉으려는 석경의 허리를 강하게 끌어안고 빠르게 박아 넣었다. 전립선을 때려 박는 자극을 도무지 감당할 수 없었다. 정신이 뭉텅뭉텅 빠져나갔다. 눈물이 줄줄 흘렀다. 쾌감인지 고통인지 알 수 없는 감각에 절여져 흐느꼈다.
행위는 깊은 밤까지 이어졌다. 마지막 관계에서 노팅을 하지 않았더라면 아마 권윤조는 날이 새도록 석경을 놓아주지 않았을 것이다.
석경은 모든 기운을 소진하고 침대에 축 늘어졌다. 나른하고 몽롱했다. 기절이라도 했으면 차라리 편했을 텐데 오늘따라 몸뚱어리가 눈치도 없이 잘도 버텼다. 유독 길게 느껴지는 하루였다.
“윤조야.”
“알았어. 물 가져올게.”
이름만 불렀을 뿐인데 권윤조는 알아서 시원한 물을 대령했다. 둘은 물을 나눠 마시고 나란히 누웠다.
저녁도 거르고 에너지를 쓴 탓에 뱃가죽에 등에 딱 달라붙은 느낌이었다.
“배고프다.”
석경이 혼잣말인 듯 아닌 듯 작게 중얼거리자 권윤조가 아차 싶은 얼굴을 했다.
“미안해, 석경아. 배 많이 고프지? 내가 너무 급해서 저녁 먹기로 한 거 깜빡했어.”
“뭐가 그렇게 급했는데.”
어이가 없다는 듯 웃으며 묻자 권윤조가 석경의 앞머리를 부드럽게 매만졌다.
“당연히 네가 급했지.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우리 석경이.”
권윤조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고는 뜨거운 입술로 길게 키스했다.
“근데 윤조야, 너 그거, 노팅 조절 아직 안 돼?”
“……미안해. 많이 아팠어?”
“아니, 아픈 건 많이 익숙해져서 괜찮은데, 앞으로도 계속 조절 안 되는 건가 해서.”
“노력할게.”
“…….”
“근데 석경아, 네가 그냥 포기해. 나 아무래도 계속 조절 안 될 것 같아. 너만 보면 그래. 아무래도 너 나한테 좀 많이 해로운 것 같아. 내 혼을 쏙 빼놓잖아. 무섭게.”
“아, 내 잘못이야?”
“응. 그러니까 석경아.”
“…….”
“네가 나 좀 봐주면 안 될까?”
“…….”
비단 노팅 얘기만이 아니라는 걸 석경이 모를 리가 없었다. 깜빡이도 없이 가끔 뭐가 하나 끊어진 것처럼 행동하는 권윤조를, 그의 느닷없는 격렬함을 몇 차례 겪었으니까.
“근데 석경아. 네가 감당하기 힘들다면 안 그럴게. 네가 원하는 게 어른스럽고 절제도 잘 하고 그런 모습이라면 내가 노력할게. 잘 될지는 모르겠지만 네가 원하는 모습으로 다 맞춰 줄게. 네 옷 벗길 때도 두 번은 생각하고 벗길게. 그 이상 생각하는 건 힘들고.”
본인이 노력한다는데 노력하게 놔둘까. 손을 들어 올려 그의 얼굴을 부드럽게 매만졌다.
석경은 자신이 원하는 그의 모습이 뭔지 생각해 봤다. 생각할 필요도 없이 사실 어떤 모습이든 다 좋았다. 좋은 것이 너무 많아서 그 반대의 것들은 떠오르지도 않았다.
석경은 말도 안 되게 잘생긴 권윤조의 얼굴을 보며,
“그냥 하던 대로 해. 내가 다 감당해야지 뭐.”
그렇게 감당 못할 말을 저지르고 말았다.
“또 야하게 말한다.”
“내가 뭘.”
“나 섰어. 네가 또 야하게 말해서.”
권윤조의 눈빛이 형형해졌다.
석경은 저를 볼 때 한없이 유순한 권윤조의 눈빛이 문득 거칠게 돌변하는 순간에 자신이 느끼는 짜릿하고 은밀한 쾌감 같은 것을 그에게 평생 들키고 싶지 않았다.
어느 정도 고통을 안겨주는 아픈 섹스가, 섹스로 얻는 쾌락의 죄책감을 덜어 주어 좋았었다는 사실 또한 평생 들키고 싶지 않았다.
발각당하는 순간 꼼짝없이 변태로 낙인찍히겠지.
그러나 언젠가 들키더라도 권윤조를 향한 자신의 욕망을 더는 부끄러워하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그게 ‘오메가’의 음탕한 욕망이든 ‘이석경’의 비밀스러운 욕망이든 상관없었다. 어차피 권윤조는 이석경의 것이니까. 이석경의 알파니까.
품으로 파고들자 조금 빠른 듯한 권윤조의 심장 소리가 기분 좋게 울렸다. 석경은 작게 웃으며 그의 단단한 가슴팍에 마음껏 이마를 비볐다.
외전 1
“나 진짜 가?”
벌써 몇 번째 물음인지 모르겠다. 석경은 눈앞에 버티고 서 있는 남자를 곤혹스럽게 바라봤다. 큰 키에 넓은 어깨, 길쭉한 다리, 지나가는 사람이 열 명이라면 열세 명이 입을 벌리고 돌아볼 만한 빼어난 외모의 남자, 바로 권윤조였다. 말도 안 되게 잘생긴 얼굴을 무기로 자꾸만 심장을 어택해 오는 권윤조 때문에 석경은 미칠 것 같았다. 아, 진짜 안 되는데. 단단하게 먹은 마음이 흐물흐물 녹으려고 했다.
“응, 얼른 가.”
“석경아.”
“응.”
권윤조는 불러 놓고 잠시 뜸을 들였다.
“혹시 내가, 뭐 잘못했어?”
혼자 전전긍긍 속을 앓다가 도저히 못 참고 나온 질문 같았다. 사람을 그냥 빤히 바라보기만 하는 건데도 사연이 한가득인 것처럼 보이는 특유의 멜로 눈깔 때문에 그렇게 느껴지는 건지도 몰랐다. 더욱이 감미롭게 고막을 녹이는 저음의 목소리까지. 어쨌든 석경은 오해가 생기지 않게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아니야.”
“근데 왜 자꾸 가라고 해? 나 너희 집에서 자고 가고 싶은데. 너랑 같이 있고 싶은데.”
“말했잖아, 윤조야. 학기 중에는 공부해야 된다고.”
“하면 되잖아.”
“너랑 같이 있는데 공부가 되겠어? 그리고…….”
또 새벽까지 안 놔줄 거잖아, 라는 말은 차마 입 밖에 내지 못했다. 약간 김칫국 마시는 것 같아서. 김칫국이 아니더라도 석경을 놀리기 좋아하는 권윤조라면 또 능청을 떨어 댈 게 분명했다. ‘석경아, 나랑 새벽까지 하고 싶어?’라는 말을 벌써 들은 것 같은 건 기분 탓이겠지.
“그리고, 뭐?”
밤새 혹사당한 몸으로 수업에 들어가 강의실에서 꾸벅꾸벅 조는 생활도 하루 이틀이었다. 이대로 계속 방탕한 생활을 이어 가다가는 학점 관리에 소홀해질 게 분명했다. 안 돼, 장학금 타야 해.
“내일 일찍 일어나야 돼.”
새벽까지, 섹스, 이런 말들은 빼고 최대한 에둘러서 표현했다. 시무룩한 얼굴로 석경을 바라보던 권윤조가 초조한 듯 앞머리를 쓸어 넘겼다.
“내가 깨워 줄게.”
“모닝콜 해 줘.”
“모닝 키스로 깨워 주면 안 돼?”
“윤조야.”
목소리를 낮게 깔고 이름을 부르자 권윤조의 얼굴에 체념하는 빛이 희미하게 떠올랐다.
“그럼 네가 우리 집에 가서 같이 자는 건…….”
오늘 아침까지 줄곧 권윤조의 집에서 시달리다가 나락으로 떨어지는 체력을 보충할 필요성을 느끼고 제 자취방으로 피신을 온 건데 다시 도돌이표를 만들 수는 없었다.
“안돼.”
석경은 약해지려는 마음을 다잡고 단호하게 말했다. 반동거 생활을 접기로 굳게 결심한 만큼 반드시 실행에 옮겨야 했다.
연애한답시고 1학기에 비해서 성적이 떨어지기라도 한다면, 그런 스스로를 용납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만에 하나 떨어진 성적에 대한 원망의 불꽃이 권윤조에게 튀는 것도 미연에 방지하고 싶었다.
“알았어. 갈게.”
석경의 눈동자에서 돌이킬 수 없는 굳은 의지를 엿봤는지 권윤조가 드디어 항복을 선언했다.
“잘 가.”
“잘 자, 석경아. 무슨 일 있으면 전화하고. 당장 달려올게.”
“응.”
밤사이 무슨 일이 있을까 싶었지만 석경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집 앞에서 실랑이만 30분째, 드디어 권윤조가 잘 떨어지지 않는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멀어지는 권윤조의 등을 미안한 얼굴로 바라보던 석경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윤조야, 미안해. 사실 나 오늘 아침에 샤워하다가 코피 쏟았거든.
* * *
강의실 안으로 들어가자 익숙한 얼굴 셋이 석경을 반겼다. 준영과 태정, 그리고 이수현. 석경은 무의식중에 자리에 없는 권윤조를 찾았다. 아침에 통화했으니 늦잠 자는 건 아닐 터였다. 아직 강의 시간도 남았으니 속으로 곧 오겠지, 하고 말았다.
“이석경, 안녕.”
석경은 무뚝뚝하게 인사를 건네는 이수현을 보며 미소 지었다. 언제 고백 따위를 했냐는 듯, 자신을 대하는 태도에 일말의 변화도 없는 이수현이 석경은 고맙고 편했다.
“안녕.”
“권윤조는?”
태정이 석경을 향해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개강하고 2주일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세트처럼 다니던 두 사람 중 하나가 보이지 않으니 궁금할 법도 했다.
“아마 오고 있을걸?”
“오오, 싸웠어?”
준영이 기쁨을 감추지 못하는 들뜬 목소리로 물었다.
“아니, 안 싸웠는데.”
“안 싸웠다고? 왜 안 싸워?”
“싸워야 돼?”
“당연하지, 석경아. 내가 싸움 구경하는 낙이라도 있어야 하지 않겠냐?”
석경은 대꾸 없이 픽 웃고 말았다. 준영의 말이 별로 농담 같지가 않아 보여서 더 웃겼다. 근데 싸울 일이 없는데, 어쩌지. 하나부터 열까지 온통 저에게 맞춰 주는 권윤조가 아니던가. 아무래도 당분간은 준영의 소망을 이루어 주기가 힘들 것 같았다.
“왔어?”
권윤조가 강의실로 들어왔다. 오늘도 여전히 잘생긴, 아니 어제보다 더 잘생긴 얼굴이었다. 석경은 잠시 넋을 놓으려 하다가 황급히 정신을 붙잡았다.
권윤조는 자연스럽게 석경의 옆자리에 앉았다.
“석경아, 잘 잤어?”
“응, 너도?”
푹 잤을 뿐만 아니라, 다행히 오늘 아침은 샤워하다가 코피를 흘리지도 않았다.
“난 잘 못 잤어.”
권윤조가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했다. 아, 저 말을 하려고 잘 잤냐는 질문을 한 거구나. 진짜 잘 못 잤나. 다른 날보다 더 날카로워 보이는 권윤조의 턱선이 새삼 눈에 들어왔다.
“권윤조, 너 석경이랑 언제쯤 싸울 거냐?”
준영이 묻자 권윤조가 아침부터 무슨 헛소리를 하냐는 듯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안 싸울 건데.”
“그래?”
“어.”
“음, 이거 좀 심각한데?”
“뭐가.”
“원래 싸울수록 서로 애틋해지고 사이도 돈독해지는 법이잖아. 니들이 안 싸운다는 건 권태기일 가능성이 크다는 거야. 설마 권태기야?”
석경은 권태기라는 말에 어안이 벙벙했다. 싸울 일이 없어서 안 싸우는 것뿐인데 왜 권태기라는 결론이 나오지?
“김준영. 너는 도대체 어떤 인생을 살고 있는 거냐.”
권윤조가 준영을 한심한 눈길로 보다가 말했다.
“내 말이 틀려? 머리가 있으면 다 아는 사실이잖아.”
“야, 내가 충고 하나 해도 될까?”
“하지 마.”
“머리가 있으면 입 열기 전에 너 자신이 솔로라는 사실을 1초만 생각하고 말하는 게 어떨까.”
“뭐야, 권윤조. 너 지금 솔로들을 멸시하고 혐오하는 거야? 너는 솔로 안 될 것 같냐? 석경이랑 안 헤어질 것 같아?”
“응.”
권윤조는 동요 한 점 없이 확신에 가득 찬 얼굴로 대답했다. 그 모습에 동요하는 쪽은 오히려 준영이었다.
“이수현, 너 왜 가만히 있어. 권윤조가 지금 솔로를 박해하는 발언을 했는데. 너도 솔로잖아. 한마디 해야지.”
“야, 창피하니까 작게 말해.”
이수현이 진저리를 치며 준영을 흘겨봤다.
“실망이다, 이수현. 내 편에 서서 권윤조를 단죄해도 모자랄 판에. 너는 그럼 권윤조가 한 말에 동의하는 거야?”
“둘 다 등신 같으니까 그만하라고.”
“이거 그거네, 양비론. 양비론이 제일 나쁜 거 모르냐.”
“야, 박태정. 교수 불러와. 김준영 입 좀 다물게.”
때마침 교수가 들어왔고 소란스러웠던 강의실이 조용해졌다.
30분쯤 지났을까. 집중해서 강의를 듣고 있는데 석경의 앞으로 태블릿 하나가 쓰윽 내밀어졌다.
석경아 너 설마 권태기는 아니지?
석경은 웃음이 팍 터져 나오려는 걸 가까스로 참았다. 준영이 한 말을 마음에 담아 두고 있었던 모양이다. 사귄 지 이제 겨우 2,3달째인데, 벌써 권태기일 리가 없었다. 3달이 아니라 3년이라고 해도 자신이 권윤조에게 권태기 같은 걸 느낄 리 만무했다.
절대 아님❤
석경은 꽉 채운 하트까지 그려서 권윤조에게 태블릿을 넘겼다. 곧바로 관자놀이에 짙은 시선이 느껴졌다. 슬쩍 돌아보자 더없이 부드럽고 다정한 미소가 석경을 향해 있었다. 계속 마주 보고 있기가 쑥스러워서 얼마 못 버티고 먼저 시선을 피해 버렸다.
손잡으면 안 되겠지?❤❤
강의 중에는 손잡지 말라고 주의를 준 게 바로 어제 일이었다. 그러고 보니 어제는 특히나 이건 안 되고, 저것도 안 되는 게 많았던 날이라 권윤조에게 미안해졌다.
지금 손잡는 대신에 이따가 뽀뽀할까?❤❤❤
기분 좋은 듯한 낮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석경도 소리 없이 입꼬리를 올렸다.
뽀뽀 말고 키스❤❤❤❤
좋아❤❤❤❤❤
❤❤❤❤❤❤❤❤❤❤
웃느라 광대가 자꾸만 솟았다. 마음을 가라앉히고 다시 강의에 집중했다. 권윤조도 더는 석경을 방해하지 않았다.
강의가 끝나자마자 권윤조는 석경의 손목을 붙잡고 말 한마디 없이 화장실로 끌고 갔다. 입술을 잡아먹을 듯 격렬한 입맞춤이 5분을 넘겼을 때, 핸드폰 진동이 울리기 시작했다. 텀을 두고 짧게 끊기던 진동이 길게 울리자, 석경은 권윤조를 밀어낼 수밖에 없었다.
“준영이한테 전화 왔어.”
“받지 마.”
권윤조가 불만스럽게 미간을 찌푸리며 다시 입술을 붙여 왔다. 석경은 조금 반항하다가 집요하게 파고드는 권윤조를 뿌리치지 못하고 순응했다.
뜨거운 혀가 치열을 훑고 입천장을 간지럽히자 석경은 참지 못하고 신음을 흘렸다. 다리에 힘이 풀려 버린 석경을 눈치챘는지 허리를 감아오는 손길이 단단해졌다.
석경은 고개를 뒤로 젖히려 했으나, 뒤통수가 벽에 닿아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와중에 허리를 지분대는 권윤조의 손길이 전희라도 하듯 농밀해져서 온몸이 달아오르고 허리가 움찔움찔 떨렸다.
당장이라도 일을 치를 것처럼 하반신을 비벼 오는 권윤조 때문에 석경의 욕망에 불이 붙었다.
“하아, 안 돼.”
“석경아.”
“여기 학교야.”
석경은 안간힘을 다해 권윤조를 밀어냈다. 여기서 끝내지 않고 더 했다가는 제 쪽에서 권윤조한테 매달릴 것 같았다. 권윤조는 마지막으로 석경의 입술에 쪽쪽 입을 맞추더니 아쉬운 듯 떨어졌다.
바깥의 인기척을 살피고 화장실 칸에서 나오자마자 핸드폰을 보니 메시지가 쌓여 있었다. 어디냐, 왜 전화 안 받아, 빨리 동방으로 오라는 내용이었다.
“나 입술 부었어?”
이런 쪽으로 눈치가 귀신같이 빠른 준영이 알아차릴까 봐 세면대 거울로 확인하고 권윤조에게도 물어봤다. 권윤조가 웃으며 석경의 입술을 빤히 바라봤다.
“응, 딱 먹기 좋게 부었어.”
“아니, 그러지 말고. 많이 부었어? 준영이가 알아볼까?”
“김준영이 알아보든 말든 무슨 상관이야.”
상관이 있지, 왜 없어. 며칠 전에도 입술이 퉁퉁 부어서 나타난 석경을 보고 준영이 얼마나 거품을 물었던가. 나는 너를 이렇게 키운 적이 없다며 난리를 치다가 기어이 이수현한테 한 대 얻어맞고 조용해진 준영이었다.
동방 문을 열고 들어가자 먼저 와 있던 세 사람의 시선이 일제히 쏠렸다.
“뭐 하느라 전화도 안 받고 이제 와?”
준영이 하얗게 눈을 까뒤집고 득달같이 물었다. 시어머니가 따로 없었다. 권윤조와 사귀기로 했다는 말에 축하 반, 씁쓸함 반의 반응을 보이긴 했어도 나름대로 기뻐했던 준영이 날이 갈수록 빡세지고 있었다.
“어, 아니…….”
“석경아, 너 정말 왜 이래. 나 흑화하는 꼴 보고 싶어서 이래?”
아니, 내가 뭘 어쨌다고. 석경이 뭐라 대꾸하기도 전에 ‘밥값 내기’ 사다리를 그리던 이수현이 풉 비웃음을 터뜨렸다.
“흑화는 아무나 하는 줄 아냐? 너 같은 꽃밭은 흑화 안 하니까 걱정 말렴.”
“내가 왜 꽃밭이야. 나 같은 카리스마 냉미남한테 꽃밭이라는 말이 가당키나 해?”
“김준영 얘는 진짜, 아직도 냉미남 이 지랄.”
석경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이수현과 그런 이수현을 노려보는 준영을 번갈아 봤다.
준영을 열렬하게 짝사랑 중인 최승희에게는 미안한 얘기지만 암만 봐도 두 사람, 제법 잘 어울리는 한 쌍 같았다.
“윤조야, 오늘 점심은 네가 사라.”
석경의 부은 입술을 힐끔 쳐다본 태정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언제는 내가 안 산 것처럼 말한다.”
“그래, 오늘도 네가 사라.”
“아, 모처럼 사다리 그렸는데 아쉽네. 심혈을 기울였는데.”
이수현이 사다리를 그려 놓은 종이를 흔들며 아쉬움을 토했다.
“그렇게 아쉬우면 그냥 사다리 타든지.”
권윤조의 말에 이수현이 종이를 박박 찢었다.
“어이쿠, 찢어져 버렸네?”
다섯은 우르르 동방을 나왔다. 어차피 학교 앞에서 먹을 셈이라서 날씨도 좋으니 차를 타는 대신에 걷기로 했다.
이수현을 가운데에 두고 준영과 태정 세 사람이 앞에서 걸었고, 권윤조와 석경이 몇 걸음 떨어져서 뒤를 따랐다.
상경대 앞을 지날 때 생각지도 못한 인물과 딱 마주쳤다.
“어! 세진아!”
준영이 커다란 목청을 자랑하며 세진을 불렀다. 한세진이 같이 있던 친구들에게 뭐라 말을 하더니 이쪽으로 다가왔다.
“어디 가?”
“밥 먹으러.”
한세진과는 전에 카페에서 확실하게 거절을 한 이후로 한 번도 만나지 않았었다. 석경은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몰라서 고장 난 것처럼 어색하게 있다가 고개를 숙였다.
“석경아.”
준영과 짧게 인사를 주고받은 한세진이 석경 앞으로 걸어왔다.
“어, 세진아. 안녕.”
“잘 지냈어?”
“응.”
“나중에 술 한잔하자.”
“어, 그래.”
“갈게.”
한세진은 권윤조를 흘깃 보더니 친구들이 있는 쪽으로 갔다.
갑작스러운 만남의 여파로 석경은 반쯤 혼이 나간 채 걸음을 옮겼다. 옆에서 나란히 걷는 권윤조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저라도 자연스럽게 말을 걸고 싶은데 싸늘한 냉기가 느껴져서 섣불리 입을 뗄 수가 없었다. 안 봐도 권윤조의 이마에 핏줄 하나가 서 있으리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숨 막히는 정적과 함께 걸음을 내딛고 있는데 핸드폰이 울렸다.
[한세진 : 권윤조 장난 아니다. 부모 죽인 원수도 그런 눈으로는 안 볼 것 같은데]
석경은 속으로 쓰게 웃으며 답장을 쳤다.
[그래도 애는 착해ㅎㅎ]
[한세진 : 너한테나 착하겠지]
별로 틀린 말은 아니라 답장할 말을 찾지 못하고 괜히 ‘ㅎㅎㅎ’나 보냈다.
“누구야?”
권윤조가 핸드폰을 눈짓으로 가리키며 물었다.
“아, 한세진.”
숨기는 게 오히려 수상하게 느껴져서 솔직히 말하자 권윤조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무슨 얘기 했어?”
“별 얘기 안 했어.”
“별 얘기도 아닌데 연락을 하는구나. 그 자식은 왜 별 얘기도 아닌데 연락을 하고 난리지?”
조곤조곤한 말투가 어째 살벌하게 들렸다. 석경은 난색을 표하다가 들고 있던 핸드폰을 권윤조 쪽으로 내밀었다.
“그게 아니라, 직접 볼래?”
“아니, 됐어.”
“…….”
“근데 석경아.”
“응?”
“핸드폰에 차단 기능 있는 거 알지?”
“어?”
“모르면 알아 두라고.”
질투를 이런 식으로도 하는구나. 하아, 너무 귀엽잖아. 혹시 나중에 거슬리는 사람이 권윤조한테 연락하면 저도 그대로 써먹어야겠다고 석경은 다짐했다.
* * *
“내가 생각을 해 봤는데.”
점심을 먹고 나서 다 같이 카페로 이동해 왔다. 딸기 스무디를 빨대로 휘휘 젓던 준영이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꺼냈다.
“뭐.”
“석경이가 아직 장롱 면허잖아. 권윤조 네가 석경이한테 운전 가르쳐 주는 거 어때?”
듣고 있던 이수현이 피식 웃었다.
“생각해 봤다는 게 고작 권윤조랑 이석경 싸우게 하는 방법이었냐?”
“아, 들킴?”
“꽃밭치고는 나름 괜찮은 아이디어였어. 깜박 속을 뻔.”
“아깝다.”
“뭘 그렇게까지 집착하는데. 쟤네 싸운다고 너한테 이득 되는 거라도 있어?”
“이득까지는 아니고. 한 번쯤 꼭 해 보고 싶은 게 있거든”
준영이 수줍은 듯 볼을 붉혔다. 이수현은 못 볼 거라도 본 듯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뭔데.”
“둘이 싸우면, 내가 권윤조 찾아가서 ‘네가 뭔데 석경이를 힘들게 해’하고 주먹을 딱 날리는 거야. 존나 카리스마 있지?”
“그냥 더는 상종 안 할게.”
“아, 왜!”
이수현과 준영이 또다시 투닥거리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흐뭇한 눈길로 지켜보는데 권윤조가 석경의 손등을 가볍게 톡톡 건드렸다.
“석경아, 내가 운전 가르쳐 줄게. 주말에 틈틈이 연습하자.”
권윤조가 직접 운전을 가르쳐 준다니. 상상만으로도 좋았지만 석경은 걱정부터 앞섰다.
“근데 사고라도 나면 어떡해? 네 차 무지 비싼 거잖아. 살짝 긁히기만 해도 수리비 많이 나올 텐데.”
“이석경, 너 지금 권윤조 돈 걱정하는 거야?”
태정이 웃겨 죽겠다는 투로 말했다. 그러네. 내가 재벌 돈 걱정을 했네. 석경은 머쓱하게 이마를 긁었다.
“그래, 석경아. 범퍼 좀 나가더라도 권윤조 통장 끄떡없으니까 걱정 말고 편하게 박아.”
준영이 자기 차라도 되는 듯 너그럽게 말했다. 이수현도 눈을 빛내며 보탰다.
“권윤조 차 곧 있으면 폐차되는 거야? 재밌네. 얼른 진행시켜.”
석경은 살짝 자존심이 상했다. 왜들 하나같이…….
“왜 내가 운전을 못할 거라고 생각해? 나 그래도 기계공학과야.”
“뭔 상관? 우리 석경이 권윤조랑 놀더니 이상해졌어. 아무 말이나 막 하고.”
“그건 김준영 너랑 놀아서 그런 게 아닐까?”
이수현의 일침에 둘은 또 투닥거리기 시작했다.
불과 몇 개월 전까지만 해도, 석경은 자신이 이런 여유를 즐길 수 있을 거라고는 기대조차 하지 않았었다. 평화로운 일상을 빼앗긴 암담한 미래밖에 볼 수 없었다.
억제제를 꼬박꼬박 챙겨 먹기 위해 신경을 곤두세우지 않아도 되고, 히트사이클의 고통을 앞두고 불안에 떨지 않아도 되는 삶이 편안하고 행복했다.
이 모든 걸 선물해 준 권윤조가, 늘 제 옆을 지켜주는 든든한 아카시아 향기가 정말이지 고맙고 소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