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화 (17/21)

괜찮을 거라는 석경의 말뜻을, 즉 임신할 위험 같은 건 없을 거라는 뜻을 알아들은 권윤조가 묘한 얼굴을 했다.

“…….”

“진짜 괜찮으니까 그냥 해.”

권윤조는 석경의 허리 아래에 베개를 대고는 남은 다리도 제 어깨 위에 턱 걸쳤다.

두툼한 귀두가 꽉 다물린 입구의 주름을 문질렀다. 본능적인 두려움에 위로 도망치자 권윤조가 골반을 붙잡아 석경을 원위치로 끌어당겼다. 그 행동은 다소 강압적으로 느껴졌다. 막무가내로 밀고 들어올 것 같았는데 예상외로 권윤조는 몸을 숙이고 긴장을 풀어주듯 석경의 부은 젖꼭지를 부드럽게 머금었다.

굳었던 몸이 어느 정도 풀어지자 그는 다시 몸을 일으키고 석경의 허벅지를 꽉 붙들었다. 그리고, 푸욱 쑤셨다. 귀두를 콱 씹어 문 구멍이 한계까지 벌어졌다.

“아악!”

새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손가락과는 차원이 달랐다. 짤막한 비명 뒤에 숨을 멈춰 버렸다. 소리를 낼 여유도 없이 아팠다.

“석경아, 숨 쉬어.”

권윤조가 달래듯이 엉덩이를 토닥거렸다. 저를 달래고 싶으면 엉덩이를 토닥거릴 것이 아니라 당장 그 팔뚝만 한 성기를 빼는 게 맞았다. 석경은 끄윽끄윽 숨을 들이켰다. 권윤조에게 붙잡힌 허벅지가 달달 떨렸다.

“으아, 아, 아파.”

“많이 아파?”

“……어, 많이, 아…….”

“아직 머리밖에 안 들어갔어.”

뭐? 너무 놀라서 끄윽끄윽 들이켜기만 하던 숨을 맥없이 탁 토해냈다. 도저히 못하겠다고, 빼라고 부탁하려는데 권윤조가 고통 때문에 시들어 버린 석경의 것을 감싸 쥐었다.

“힘 빼, 석경아. 이대로 하다가는 너 다칠 것 같아.”

도리어 권윤조가 석경에게 힘을 빼라고 부탁했다. 성기에 가해지는 부드러운 자극에 그제야 권윤조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터뜨릴 것처럼 귀두를 씹어 물고 있는 석경 때문에 저도 힘든지 잘생긴 눈썹이 미세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권윤조를 사로잡고 있다는 만족감이 울컥 치솟으며 경직된 몸이 약간 풀렸다. 석경은 여전한 고통에 허덕이면서도 두 팔을 뻗었다. 권윤조가 몸을 숙여 석경이 뻗은 두 팔 사이로 들어왔다.

“읏, 흐으…….”

“석경아…….”

“더, 더 들어와도 돼.”

권윤조의 목을 꼭 끌어안으며 말했다. 석경의 몸 위로 권윤조의 체중이 실렸다. 몸을 겹친 채로 거대한 살 기둥이 안으로 파고들었다. 내벽이 찢어질 것 같은 느낌이 들 때마다 석경은 억눌린 신음과 함께 몸을 움찔거렸다.

권윤조는 그럴 때마다 무리해서 들어오기보다는 잠시 멈추고 서로 호흡을 나눴다. 고통으로 헤벌어진 입술을 빨아 감고, 턱, 목, 가슴에 애무를 퍼부으며 아주 천천히 들어왔다. 중간 정도 들어왔을 때 권윤조가 곤란한 얼굴을 했다.

“으읏, 왜에.”

“너무 좋아서.”

“…….”

“쌀 것 같아.”

“싸. 응? 얼른.”

버거운 것을 받아들이느라 낑낑거리던 석경은 내심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나만 좋을 수는 없잖아.”

“하아, 됐어. 나는 괜찮아.”

“조금만 참아, 석경아.”

권윤조의 것이 다시 꾸역꾸역 밀려 들어왔다.

완전히 들어오기까지 정말 오랜 시간이 걸렸다. 석경은 내벽을 채운 엄청난 크기에 적응하기 위해 노력했다. 아팠지만 빠듯한 압박감이 나쁘지 않았다.

석경을 짓누르고 있던 단단한 상체가 떨어졌다. 권윤조가 느릿하게 허리를 세우고 있었다. 자세가 바뀌자 안에 들어찬 거대한 기둥에 각도의 변화가 일어나면서 내벽이 뒤틀렸다.

“흐아앗!”

기겁하며 허리를 떨자 권윤조가 골반께를 슬슬 쓰다듬었다. 석경의 골반을 움켜쥔 권윤조가 기둥을 쑤욱 뺐다. 끝까지 넣기까지 한세월이 걸렸는데 쉽고 빠르게도 뺐다.

내벽을 거칠게 쓸고 나간 기둥이 두툼하게 살이 오른 대가리에서 턱 걸려서 멈췄다. 겨우 다 집어넣은 건데 저걸 또 언제 다 넣지, 염려와 두려움으로 권윤조를 바라보는데 퍼억 뿌리까지 단번에 쳐들어왔다.

석경은 순식간에 기둥에 꿰뚫린 상황이 믿기지 않아 눈을 크게 뜨고 그저 꺽꺽댔다. 한 차례 딸려 나갔던 내벽의 주름이 반대로 눕혀지면서 권윤조의 것에 착 달라붙었다. 마치 다시는 빠져나가지 못하게 하려는 듯이.

“흐, 아아, 아, 아파…….”

권윤조가 또 성기를 거침없이 뽑을까 봐 안달이 난 석경은 꿈틀꿈틀 엉덩이를 아래로 움직여 권윤조와의 결합을 단단히 했다. 순간 권윤조의 눈빛이 형형해졌다. 골반을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가는가 싶더니 기둥이 쑥 빠졌다가 또 대가리에서 턱 걸렸다.

석경은 이번에는 권윤조의 것을 밀어내기 위해 구멍을 빠끔거렸다. 그만 나가라는 뜻이었는데 얼른 들어오라는 부추김으로 해석했는지 푸욱 뿌리까지 밀고 들어왔다.

“으으아, 아으으……!”

석경은 도리질을 치며 벅찬 신음을 터뜨렸다. 겨우 두어 번 넣었다 뺐다 했을 뿐인데 기둥의 부피 탓에 내벽에 홧홧하게 열이 올랐다. 뜨거운 열은 빡빡한 조임을 동반했다.

“하, 석경아, 너 너무 조여…….”

“흐아앗, 흐으으, 빼지 마, 제발.”

들어올 때도 마찬가지지만 성기가 빠져나갈 때의 고통은 상상을 초월했다. 못 빠져나가게 엉덩이를 붙이자 권윤조의 음낭이 엉덩이에 닿았다. 음낭을 뭉개버릴 듯이 엉덩이를 더 붙였다. 권윤조의 깊은 탄식이 들렸다.

“석경아, 너 정말…….”

권윤조는 빠르게 빠져나가더니 곧바로 올려붙였다. 그리고 쉼 없이 몰아붙였다.

“흣! 아! 아! 아! 앗! 그, 그만!”

내장이 짓눌리는 듯한 고통스러운 압박감에 기어이 눈물이 터져 나왔다. 석경은 허리를 비틀며 주먹을 쥐고 매트리스를 팡팡 때렸다. 불이 붙은 것처럼 내벽이 뜨거웠다. 안을 적시던 물기를 바싹 말려버릴 듯한 열기였다.

권윤조가 매트리스를 때리는 석경의 주먹을 감싸 쥐었다. 들락거림이 멎었다. 숨통이 트이자마자 석경은 고개를 옆으로 돌리고 침대 시트에 볼을 비비며 흐느꼈다.

“석경아, 많이 아파?”

“흐으윽, 아파.”

“미안해.”

미안하다고 하면서도 권윤조는 허리를 느릿하게 움직였다. 세게 몰아붙여진 적이 있어서인지 느릿한 움직임은 차라리 고마울 지경이었다.

권윤조는 흐느끼는 석경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로 성기를 애무했다. 앞으로 쾌감이 오자 권윤조의 것을 품고 있는 뒤가 녹진하게 풀어지면서 한결 나아졌다. 열기로 말랐던 물기가 다시 차오르며 안이 축축해졌다.

곤두선 그의 것이 깊이 들어오고 빠져나갈 때마다 내벽이 기둥에 척척하게 달라붙었다. 간질간질한 쾌감이 뒤로도 찾아오기 시작했다. 권윤조가 가득 채워지면 쫀득한 점막이 한없이 기뻐하며 요동쳤고 빠져나가면 아쉬워하며 게걸스럽게 기둥을 붙들었다.

“으읏, 으응, 아……응…….”

느슨해진 신음과 쿨척거리며 박히는 소리는 음란하기 그지없었다. 매트리스를 때리던 주먹이 슬그머니 펴지고 손끝이 덜덜 떨렸다. 침대 시트를 꼭 쥐며 애달픈 쾌감을 견뎌내는데 순간 꼬리뼈가 저릿했다. 벼락같은 쾌감이었다.

“흐아앗!”

석경의 변화를 기민하게 알아차린 권윤조가 같은 지점을 꾸욱 눌렀다.

“여기 좋아?”

물음 끝에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푹 찔러왔다. 아으읏! 석경이 허리를 튕기며 자지러지자 권윤조는 만족스럽게 웃으며 허리를 뒤로 뺐다가 정확히 같은 지점을 올려쳤다.

“흐으, 거기, 거기, 아……. 윤조야.”

“좋아?”

“으으응. 조, 좋아. 으응.”

권윤조가 속도를 높여 허리를 앞뒤로 움직였다. 빨라진 속도에도 착실하게 야릇한 포인트를 건드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어서 달라고 흥건하게 젖은 점막이 벌름거렸다. 불덩이처럼 뜨거운 기둥이 철썩철썩 소리를 내며 음란한 내벽을 들쑤셨다.

석경은 권윤조에게 쉼 없이 박히면서 이대로 녹아 버릴 것만 같았다.

“석경아, 하아, 석경아…….”

“으응, 하으, 흐읍……. 어떡해, 하아읏.”

“석경아, 이게…… 뭐야. 어떻게, 이럴 수, 있어.”

“하으앗, 으읏, 아앗! 윤조야… 천천히, 하으으.”

“너는, 어떻게, 하아, 이렇게…….”

권윤조는 석경을 망가뜨릴 것처럼 허리를 빠르고 강하게 쳐올렸다. 이러다 구멍이 찢어질 것만 같은 공포가 덮쳐 왔지만 석경은 번쩍번쩍 튀는 쾌감을 포기할 수 없었다. 고통의 크기만큼 쾌락도 컸다. 아픈 걸 즐기는 이상성욕자가 된 기분이었다.

“아아, 흐으, 윤조야…… 어떡해, 나, 으응…….”

“그래, 석경아…….”

“나, 죽을 것 같, 흐으, 어떡해……, 아아…….”

발가락이 곱아들면서 권윤조의 움직임에 따라 하염없이 흔들리던 성기에서 사정액이 탁 튀었다. 뒤로 절정을 맞은 것이다. 난생처음 겪는 지독한 쾌감이었다. 힘없이 늘어진 석경의 안에 몇 번 더 퍽퍽 쑤셔 박던 권윤조도 끓는 듯한 낮은 신음을 뱉으며 사정했다.

권윤조는 사정 후에 석경을 꼭 끌어안고 입술을 부드럽게 핥았다. 조금 전의 격정이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그러나 화끈거리는 석경의 내벽은 결코 거짓이 아님을 생생하게 증명하고 있었다.

상체를 일으킨 권윤조가 허리를 뒤로 물렸다. 그의 것이 빠져나가는 감각이 선연했다. 한껏 벌어졌던 구멍이 다물리는 느낌이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만큼 이상했다. 채워져 있어야 할 것이 사라진 듯한 공허감과 아직도 제 안에 권윤조가 가득 들어찬 듯한 느낌이 교차했다.

이대로 끝내기 아쉽다는 듯 구멍이 움찔움찔 경련했다. 그러나 구멍의 사정과는 반대로 거의 쉴 틈 없이 4번이나 사정한 석경의 몸은 끓는 물에 데친 채소처럼 흐물흐물 만신창이였다.

생애 처음이었다. 성욕에 눈을 뜬 나이가 되고부터는 짧으면 2주에 한 번, 길면 한 달에 한 번 쌓인 것을 스스로 푸는 게 전부였었다. 오메가로 발현한 후로도 히트사이클을 제외하면 성욕에 있어서는 담백한 편이었다.

그런 자신이 권윤조를 받아내며 어떠했던가. 음탕하게 매달리며 허리를 흔들어댔다.

“……뭐 해……?”

석경은 기운 없이 내리깐 눈으로 권윤조를 보았다.

“왜?”

권윤조는 오히려 되묻고는 흐트러진 베개를 다시 야무지게 석경의 허리 아래에 받쳤다.

“또 하려고?”

“응.”

“나 힘든데.”

석경은 부러 더 기운 없는 얼굴을 하며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권윤조가 석경의 허벅지 안쪽을 손으로 쓰다듬었다. 명백히 성적인 의도를 담은 손길이었다.

“석경아, 많이 힘들어?”

“응.”

석경의 대답에 주위를 둘러보던 권윤조가 협탁 위에 있는 생수병의 뚜껑을 따서 내밀었다. 받지 않고 멀뚱히 바라보자 눈빛으로 재촉하며 더 가까이 내밀었다. 마침 목이 탔던 참이라 받아서 물을 마시자 권윤조가 유쾌하게 웃더니 말했다.

“남자는 자고로 숟가락 들 힘만 있으면 할 수 있대. 근데 우리 석경이는 숟가락보다 훨씬 무거운 생수병을 들었으니까 문제없을 거야.”

“영혼까지 쥐어짜서 더 나올 것도 없어.”

권윤조는 조금도 발기하지 않은 석경의 성기를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한 손으로 엉덩이를 움켜쥐었다. 구멍 안으로 손가락이 불쑥 침범했다. 손마디를 몇 번 구부리자 쿨척쿨척 물소리가 들렸다.

“이렇게 물이 많이 나오는데?”

그거 네가 싼 정액이잖아, 라고 항변할 틈도 없이 손가락을 빼낸 권윤조가 석경의 허벅지를 붙잡고 곧장 성기를 쑤셔 넣었다. 한 번 했는데도 그곳은 여전히 비좁았다. 단숨에 끝까지 밀고 들어온 권윤조를 흠뻑 젖은 내벽이 흡반처럼 빨아들였다.

“흐으…….”

두어 번 허리를 흔들었는데 정확하게 전립선만 찔러댔다. 권윤조에게 붙들린 허벅지가 덜덜 떨렸다.

“흐응, 아, 아아…….”

권윤조는 석경의 허벅지를 가슴까지 밀어붙였다. 엉덩이가 위로 들리면서 천장과 거의 마주 보는 자세가 되었다. 그 상태를 유지한 채로 권윤조가 성기를 퍽퍽 박았다.

훨씬 깊게 들어오는 느낌에 놀라서 고개를 퍼뜩 들자 제 구멍을 들락거리는 두꺼운 기둥의 모습이 적나라하게 보였다. 감각으로만 느꼈던 행위를 직접 눈에 담자 충격으로 온몸이 덜덜 떨렸다. 권윤조도 제 성기가 들어오고 나가는 접합부에 눈을 둔 채로 허리를 움직이고 있었다.

“아흐, 아, 안 돼, 아! 아! 흐윽!”

들려진 허리를 내리려고 애써 봤지만 저를 짓누른 권윤조의 힘을 감당할 수가 없었다. 멎었던 눈물이 줄줄 흘렀다. 와중에도 쾌락은 착실하게 석경의 아랫배에 꽂혔다.

접합부를 매만지는 손길에 고개를 내젓자 더 집요하게 만져졌다. 눈이 뒤집힌 권윤조에게 저항은 통하지 않았다. 석경은 순응했다. 위에서 아래로 쾅쾅 내리찍을 때마다 쾌락에 흐느끼며 신음을 흘렸다. 소리가 숫제 발정 난 고양이와도 같았다.

두 번째는 첫 번째 교합보다 훨씬 길었다. 구멍이 헐어 버릴 것만 같았다. 쾌감에 못 이겨 발기한 석경의 성기에서 시원찮은 정액이 쪼르륵 흘러나왔다. 5번째 사정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권윤조의 사정도 이어졌다.

“…….”

석경은 권윤조가 또다시 흐트러진 베개를 제 허리 아래에 꼼꼼하게 받치는 모습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그만하자고 해도 하겠지. 생수병을 달라고 말할까. 못 들고 떨어뜨리면 그만하지 않을까. 속일 작정이 아니라 정말 못 들 것 같은데.

어느새 두툼한 귀두가 부어오른 구멍을 비비며 안으로 들어올 준비를 했다. 실랑이할 기운이 없었다. 어차피 같은 결과라면 조금이라도 기운을 덜 빼는 게 나았다.

이번에는 다시 처음과 같은 자세로 박혔다. 엉덩이가 천장으로 치솟은 민망하고 버거운 체위가 아니라 견딜 만했다.

“하으으, 으응, 어떡해, 하아으…….”

퉁퉁 부은 내벽은 권윤조의 것을 기쁘게 받아들였다. 내벽 전체가 쾌락점이 된 느낌이었다. 귀두까지 빠져나간 기둥이 깊이 파고들었다. 부딪힌 점막이 녹아버릴 듯 흐물대다가 좆대가리를 콱 씹어 물었다.

순간 권윤조가 멈칫하며 움직임을 멈췄다. 달라진 공기를 감지한 석경이 쾌락에 절여진 눈동자로 권윤조를 올려다봤다.

“왜……?”

“…….”

권윤조의 얼굴이 점차 당황으로 물들어갔다. 그에 맞춰 석경의 안을 채운 살 기둥에도 섬뜩한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굵직한 기둥이 커지고 있었다. 내벽을 찢어 버릴 것처럼 부풀어 오르는 성기에 석경은 익숙해진 고통을 넘어선 공포를 느꼈다.

“아으윽, 윤조야, 왜, 아아악!”

투두둑. 안이 찢어지는 소리가 환청처럼 들렸다. 환청이 아닐지도 몰랐다. 석경은 고통에 몸부림치며 권윤조의 어깨를 주먹으로 때렸다.

“아! 아파! 빼! 제발! 흐윽! 아아, 아파!”

“……석경아.”

“으윽, 아파, 너 뭐야, 왜! 흐읍, 으윽!”

“미안해. 근데 이거 못 빼. 빼면 너…….”

못 뺀다는 말을 듣자마자 석경은 스스로 빼려고 허리를 움직였다.

“흐아악!”

“이대로 빼면 너 다쳐. 이거 노팅이라…….”

노팅? 석경의 눈앞이 하얘졌다. 권윤조도 이럴 줄 전혀 예상을 못 한 듯 당황을 숨기지 못했다. 끝도 없이 부풀던 성기는 다행히 더는 커지지 않았지만 이미 석경의 비좁은 내벽이 감당할 수 있는 크기가 아니었다.

넣을 수도, 뺄 수도, 그렇다고 움직일 수도 없는 상황에서 석경의 몸이 주체할 수 없이 파르르 떨렸다. 눈물샘이 고장난 것처럼 눈물이 줄줄 흘러내려 시야가 잔뜩 일그러졌다. 눈물을 털어내듯 고개를 저었다. 그마저도 힘없는 고갯짓이었다.

흉흉하게 부푼 성기 모양대로 벌어진 구멍이 평생 다물어지지 않을 것만 같은 두려움이 덮쳐 왔다.

“아파, 흐읍, 무서워, 어떡해…….”

“석경아, 조금만 참아, 응?”

뿌연 시야로 권윤조의 얼굴이 들어왔다. 권윤조의 붉은 눈가가 젖어 있었다.

“하아, 윤조야, 너 울어?”

석경이 두 팔을 뻗었다. 작은 움직임에도 엉덩이가 반으로 쪼개질 것 같았지만 미안함 때문에 눈물을 흘리는 권윤조를 달래 주고 싶었다.

권윤조가 몸을 숙여 석경을 꼭 끌어안았다. 틈 없이 맞닿아 있는데도 서로가 서로에게 간절하게 매달렸다. 연거푸 입을 맞추고 목덜미와 가슴을 끝없이 애무했다.

권윤조는 석경의 것을 부드럽게 움켜쥐었다. 귀두를 뭉근하게 문지르고 기둥을 위아래로 움직였다. 그렇게 한동안 공을 들이자 석경의 몸이 서서히 풀리기 시작했다. 경직된 내벽이 흐물흐물해지면서 기형적으로 부푼 성기를 빨판처럼 감쌌다. 무시무시한 크기에 어느 정도 익숙해진 것이다.

“윤조야, 나 이제 괜찮아.”

“…….”

“움직여도 될 것 같아. 너무 세게는 말고.”

그렇게 말하는 석경의 허벅지가 경련하듯 덜덜 떨렸다. 닥쳐올 고통이 어쩔 수 없이 두려웠다. 떨림을 고스란히 느낀 권윤조의 얼굴에 염려가 가득했다. 그러나 권윤조도 느꼈을 것이다. 물건을 터뜨릴 듯한 조임이 아까보다는 덜해졌음을.

“괜찮아?”

“으응.”

“천천히 할게. 아프면 말해. 주먹을 날려도 되고.”

“뭐야 그게.”

“움직일게.”

“응. 얼른.”

보채자 권윤조의 얼굴에 색욕인지 식욕인지 모를 허기가 한층 짙어졌다. 권윤조는 마지막으로 석경의 입술을 빨고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잔잔한 움직임이었지만 석경은 죽을 것만 같았다. 권윤조가 허리를 잘게 칠 때마다 석경은 강하게 때려 박힌 것처럼 자지러졌다.

석경은 계속해서 울었다. 너무 심하게 울어서 걱정스러운 마음에 권윤조가 허리를 멈추면 더 울었다.

섹스가 오늘 처음이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만큼 석경의 몸은 무척 예민해졌다. 내벽 어디를 건드려도 쾌감에 몸서리쳤다. 숨이 깔딱깔딱 넘어갔다.

“아파?”

“읏, 아, 아니. 계속, 하으, 계속해.”

잠시 멈췄던 허리가 다시 느릿하게 움직였다. 석경은 끙끙 앓는 소리를 내며 몸을 바르작댔다. 한껏 음탕해진 육벽이 게걸스럽게 권윤조의 것에 달라붙는 느낌이 생생했다.

미처 삼키지 못한 침이 줄줄 새어 나왔다. 석경은 부끄러움도 모르고 침을 질질 흘리면서 혼탁하게 풀린 눈으로 주문했다.

“윤조야, 흐읏, 더, 빨리, 으응.”

“하아…….”

잘게 쳐올리는 허리 움직임이 빨라졌다. 기형적인 형태의 벅찬 살 기둥이 내벽을 짓이기면서 찰박거리는 물소리를 냈다. 깊은 곳의 점막이 심장처럼 벌렁거렸다.

셀 수도 없는 침입이 한없이 이어졌지만 석경의 내벽은 단 한 번도 게을리하지 않고 권윤조의 것을 기쁘게 씹어 물었다. 오그라든 발끝이 허공에서 흔들렸다. 축 늘어진 몸도 하염없이 흔들렸다. 길고 긴 정사였다.

마침내 권윤조가 사정했다. 끝도 없이 쏟아져 나오는 사정액이 석경의 배를 잔뜩 불려 놨다.

결착이 서서히 풀리고 한계까지 벌어진 내벽도 오므라들었다. 석경은 권윤조가 빠져나가는 것을 기다리지 못하고 깜박깜박 점멸하던 의식을 놓았다.

* * *

잠에서 깼을 때 권윤조가 바로 옆에 누워 있다는 건 벅차도록 설레는 일이었다. 석경의 육신은 너덜너덜하다는 표현이 넘치지 않을 만큼 넝마가 되었지만 정신은 놀랍도록 또렷했다.

늦은 새벽에 시작해서 해가 뜰 때까지 이어졌던 섹스의 기억이 하나의 덩어리가 되어 부표처럼 수면 위로 떠올랐다. 정신을 반쯤 놓았다고 생각했는데 기억 하나하나가 생생해서 온몸이 달아올랐다. 이 순간 혼자 깨어 있는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몰랐다.

권윤조의 체향을 가만히 들이마시던 석경은 무심코 몸을 뒤척였다가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다. 하루 온종일 두들겨 맞은 느낌이었다. 안에 아직도 권윤조가 들어차 있는 착각이 들었다.

가만히 권윤조의 자는 얼굴을 구경하는데 불현듯 최승희가 떠올랐다. 정확히는 최승희와 권윤조의 관계로 인해 마음을 다쳤던 지난날이 떠올랐다. 최승희와 함께 권윤조의 집에 찾아갔던 그날이. 지질하게도 묻고 싶었다. 너 그때 최승희랑 잤어?

석경은 햇살이 내려앉은 권윤조의 얼굴을 바라봤다. 이제 앞으로 최승희는 어떻게 되는 걸까. 예전의 나처럼 이번에는 그녀가 상처를 받게 되지 않을까. 권윤조는 최승희와 사귀는 사이가 아니라고 말했지만 집안끼리 약혼 이야기가 오가는 상대다. 생각이 멋대로 달려 나갔다. 둘이 결국 약혼하면 나는 어떻게 되는 걸까. 어쩌면 최승희가 아니라 스스로를 걱정해야 하는 상황일지도 모른다.

서로 통했다고 느꼈던 마음이 콱 막힌 것처럼 답답해졌다.

석경은 조심스럽게 상체를 일으켜 앉았다.

“……석경아.”

“흐억! 깜짝이야!”

권윤조가 잠이 덜 깬 목소리로 낮게 웃었다. 몸을 일으킨 권윤조가 석경의 얼굴을 살폈다.

“추워?”

바닥에 널브러진 옷을 주섬주섬 주워 입는 석경에게 권윤조가 불쑥 물었다.

“……아니.”

“근데 왜 옷을 입어?”

옷이라는 게 추울 때만 입는 거였던가.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말없이 바라보자 권윤조가 장난스러운 얼굴로 웃음을 터뜨렸다.

“석경아, 나는 네 그 표정 너무 귀엽더라.”

“무슨 표정?”

“내가 정상인지 아닌지 헷갈려 하는 표정.”

“별게 다 귀엽다.”

석경은 주섬주섬 마저 옷을 입고 침대를 내려왔다. 등 뒤로 꽂히는 권윤조의 시선을 느끼며 삐걱대는 걸음을 옮겼다.

석경은 욕실에 들어간 김에 샤워까지 하고 나왔다. 자꾸만 떠오르는 생생한 기억들이 민망해서 권윤조를 마주하는 시간을 조금이라도 늦추고 싶었다.

문을 열고 나오자 주방 쪽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창밖에 새하얀 빛이 있었다. 한낮쯤 되었을까.

“뭐 찾아?”

휴대폰이든 손목시계든 시간을 알 수 있는 것을 찾기 위해 두리번거리자 주방 쪽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아, 몇 시야?”

“세 시 반. 샤워했어?”

생각보다 더 오래 잤다는 생각을 하며 석경은 주방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풍겨오는 라면 냄새에 잠잠했던 위장이 요동쳤다.

“응. 라면 끓여?”

“거의 다 됐으니까 앉아. 배고프지? 당장 배 채울 만한 게 라면밖에 없네.”

집주인처럼 말하는 권윤조를 보며 석경은 손님처럼 어색하게 식탁에 앉았다. 전자레인지에서 소리가 났다. 인덕션 앞에 있던 권윤조가 몸을 돌려 전자레인지 안에서 즉석밥을 꺼냈다.

수저라도 놓으려고 도로 일어난 석경을 앉힌 권윤조가 라면과 즉석밥을 식탁 위에 세팅했다. 거기서 끝나지 않고 그릇에 라면을 덜어주기까지 했다. 권윤조는 먹여 주고 싶은데 그러지 못해 아쉽다는 눈빛을 뿜어내며 친절을 베풀었다.

석경은 그릇에 거의 고개를 박을 기세로 묵묵히 라면을 먹었다. 무심코 고개를 들었을 때 권윤조의 뜨거운 시선이 기다리고 있어서 얼른 고개를 숙인 이후로 한 번도 들지 않았다.

“석경아.”

고개를 들자 권윤조가 턱을 괸 채로 저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석경은 눈을 내리뜨고 작게 대답했다.

“왜.”

“그냥 불러 봤어.”

꿀 떨어지는 눈빛에 어색하게 웃은 석경은 권윤조의 손등을 한번 그러잡았다가 놓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싱크대 개수대에 빈 그릇을 옮기자 권윤조도 가만히 앉아 있지를 못하고 끝내 설거지까지 자기가 했다.

설거지를 끝내고 간단히 씻고 나온 권윤조가 침대에 멍하니 앉아 있는 석경에게 다가왔다.

“슬슬 갈까?”

펜션을 나선 두 사람은 차에 올라탔다. 권윤조는 석경의 안전벨트까지 꼼꼼하게 매준 뒤 어디 불편한 곳은 없냐고 다정하게 물었다. 아니 정말 이렇게까지 할 일인가 싶어 내심 당황스러웠다. 고개를 젓자 안심한 듯 씨익 웃고는 천천히 차를 출발시켰다.

“피곤하면 자도 돼.”

“괜찮아.”

운전하는 권윤조를 생각해서 깨어 있으려고 했는데 고단한 몸에 수마가 빠르게 몰려왔다. 두어 차례 손바닥으로 볼을 두드리며 졸음을 쫓으려는 노력을 하던 석경은 자도 된다는 권윤조의 말에 괜찮다고 대답한 지 3초 만에 잠들어 버렸다

어깨를 두드리는 손길에 다시 눈을 떴을 때는 해 질 녘의 하늘에 붉은 노을이 깔려 있었다. 차창 밖으로 보이는 익숙한 아파트 단지 내의 모습에 석경은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여기…….”

“…….”

“어떻게 알고 왔어?”

도착한 곳은 대학교 앞 빌라가 아니었다. 석경의 본가인 아파트 단지 안이었다.

“왜? 자취방으로 가고 싶었어?”

“…….”

“방학도 했으니까 본가에서 지내는 줄 알고.”

“우리 집은 어떻게 알았어?”

“……그냥 다 아는 수가 있어.”

여기까지 왔는데 그냥 본가로 들어가야 하나 고민하던 석경은 이내 마음을 고쳐먹었다. 아버지의 얼굴을 마주치기가 싫었다. 아버지가 있는 집에 있으면 편히 숨을 쉴 때보다 숨 막히는 기분이 들 때가 더 많았다. 하지만 그런 불편함은 둘째 문제였다.

혐오와 경멸을 엄격함으로 가장한 채 저를 바라보는 아버지의 눈빛을 보면 권윤조와 몸을 섞은 게 잘못이 아닌데도 마치 제가 큰 잘못이라도 저지른 것처럼 움츠러들 것 같았다. 석경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권윤조와 나눈 행위가 ‘잘못’이 되는 것이 싫었다.

“윤조야, 미안한데.”

“응?”

“나 자취방으로 가고 싶어.”

무엇보다 그와 꼭 나눠야 할 중요한 이야기가 있었다.

“그래, 그럼.”

권윤조는 별일도 아니라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 후, 원룸촌의 빌라 앞에 차가 멈췄다. 안전벨트를 푼 석경은 권윤조를 돌아보며 말했다.

“저기…….”

“응?”

“내 방에, 들렀다 갈래?”

전혀 예상치도 못한 말을 들은 듯 권윤조의 눈이 커졌다.

* * *

권윤조는 신발을 벗지도 않고 현관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뭐해, 안 들어오고.”

“……어, 네 체향 많이 난다.”

“아, 미안. 환기시킬게.”

석경은 허둥지둥 창가로 향했다. 권윤조는 그제야 신발을 벗고 안으로 들어왔다.

“창문 열지 마. 좋다는 말이었어.”

석경은 창문을 열려던 손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다가 열지 마, 한 번 더 날아온 말에 손을 거두었다.

권윤조는 평범하고 소박한 석경의 자취방을 여상치 않은 광경을 보듯 군데군데 눈여겨봤다.

좁은 원룸이라 소파 따위는 없었으므로 침대와 바닥 말고는 앉을 곳이 마땅치가 않았다. 석경은 침대를 가리켰다.

“앉아. 마실 것 좀 가져올게.”

냉장고 안에 마실 거라곤 캔맥주와 생수뿐이었다. 석경은 생수병을 꺼내서 컵에 따라 권윤조에게 내밀었다.

“마실 게 물밖에 없네.”

캔맥주가 있다는 사실은 쏙 숨기고 변명처럼 중얼거리자 다정한 미소와 함께 컵을 받아들었다. 권윤조는 물 한 컵을 단숨에 비웠다. ‘한 잔 더 갖다 줄까?’ 물어보자 됐다며 고개를 저었다.

석경은 약간 떨어진 곳에 엉덩이를 걸쳤다. 권윤조가 짐짓 어색한 표정으로 그런 석경을 지켜봤다. 좁은 방안에 단둘뿐임을 의식하자 어젯밤 기억이 되살아났다.

“되게 긴장된다.”

“…….”

권윤조가 말했다. 같은 마음이라 석경은 별다른 대꾸 없이 어색하게 웃기만 했다.

“나 화장실 좀 가도 돼?”

“어, 저쪽이야.”

손으로 가리키자 권윤조는 뒷머리를 매만지며 욕실로 걸어갔다. 잠시 후 욕실에서 나온 그는 볼 것도 없는 방을 또 괜히 둘러보는 것이었다.

석경은 그 모습이 귀여워서 속으로 웃다가 침대 옆자리를 손바닥으로 두드렸다.

“윤조야, 할 말 있으니까 옆에 앉아 봐.”

저도 모르게 진지하게 흘러나온 목소리에 권윤조의 표정이 약간 굳어졌다. 그러면서도 얌전히 옆에 와서 앉았다.

“무슨 할 말?”

“윤조야, 너 어제, 아니 오늘…… 노팅 했잖아.”

“미안해. 많이 아팠지?”

권윤조가 금세 의기소침한 얼굴을 했다. 석경은 급히 고개를 저었다. 아프지 않았다는 게 아니라 새삼스럽게 사과를 듣자고 꺼낸 이야기가 아니라는 의미였다.

“그게 아니라, 너 병원 가서 검사받자고.”

“응?”

“너 각인했을 수도 있으니까.”

걱정과 미안함이 뒤섞인 석경의 얼굴을 보며 권윤조가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알파가 오메가와 관계 중에 노팅을 하면 상대 오메가에게 각인할 확률이 90% 이상이다. 쌍방 각인의 확률도 그 정도 된다.

석경은 권윤조가 저에게 각인이라도 했을까 봐 오늘 잠에서 깬 순간부터 내내 노심초사했다.

권윤조는 속을 알기 어려운 표정으로 석경을 말없이 바라보기만 했다. 따라서 다시 입을 여는 건 이번에도 석경이 되었다.

“만에 하나라도 각인했으면 빠른 시일 내에 치료받아야 하니까.”

“치료…….”

“응.”

물론 저 역시 검사를 받을 생각이었다. 검사를 받아 보고 각인이 됐으면 염치없지만 권윤조의 허락을 구해 일방 각인을 유지할 생각이었다.

최승희가 마음에 걸렸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권윤조와 몸을 섞기로 마음먹은 것부터가 이기적인 선택이었으니까.

“석경아.”

“응?”

“각인이 병이야?”

“아니 그게, 병은 아닌데…… 어쨌든 각인을 끊어야 하니까.”

석경은 말꼬리를 잡는 권윤조를 어떻게 상대해야 좋을지 난감했다. 어쨌든 각인 끊는 절차를 밟아야 하니까 별생각 없이 치료라고 표현한 건데 뭐가 심기를 건드린 건지 권윤조의 표정이 영 좋지 않았다.

대화가 이런 식으로 흐를 줄은 몰랐다. 권윤조가 노팅과 각인의 연관성에 대해 모르는 것도 아니고 어련히 알아서 검사를 받을 텐데 괜한 오지랖을 부린 것은 아닌지, 각인을 끊고 말고의 결정권이 마치 저에게 있는 것처럼 주제넘게 굴었나 싶어 머리가 복잡했다.

“근데 석경아, 내가 왜 각인을 끊어야 해?”

석경은 잠시 말문이 막혀서 눈썹께를 긁적였다. 몰라서 묻는 건 아닐 테고.

“왜냐니.”

“각인을 끊어야 한다고 생각한 이유가 있을 거 아니야. 그러니까 나한테 말을 꺼냈겠지.”

“내 생각이라기보다 일반적인 이유야. 네가 혹시라도 나한테 각인을 했으면…….”

석경은 말을 끊고 둘 사이의 공기를 살폈다. 여전히 썩 좋은 분위기는 아니었다. 권윤조가 무언가 크게 언짢아하고 있었다. 다 그를 걱정해서 꺼낸 말인데 사약이라도 권한 듯한 험악한 분위기가 됐다.

“했으면?”

뒷얘기가 궁금해서라기보다 무슨 말을 하나 두고 보자는 투였다. 같은 의미 같지만 확실히 달랐다. 주눅이 들었다.

“내가 혹시라도 잘못되면 어쩌려고. 그리고 또…….”

“또?”

“나 말고 다른 사람이랑…….”

“…….”

“섹스도 못하게 되고…….”

권윤조의 목울대가 출렁거리는 동시에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올라간 입꼬리와 어울리지 않는 사나워진 눈빛이 석경의 입을 틀어막았다. 까드득 어금니를 세게 악문 권윤조의 턱 근육이 팽팽해졌다. 이런 얼굴을 전에도 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언제였지. 결말이 좋지 않았었던 기억이 석경을 불안하게 했다.

“석경아.”

“으응.”

“돌았어?”

“……뭐?”

“어디 아파?”

“…….”

“너 지금 네가 무슨 말을 한 건지 알고 있어?”

“윤조야.”

“왜 그런 말을 해.”

“윤조야, 내가…….”

“석경아, 너는 내가 다른 사람이랑 섹스를 못 하게 되는 게, 걱정돼?”

묻고는 오히려 제가 더 상처받은 얼굴을 하는 권윤조의 모습에 석경은 황급히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야, 윤조야.”

“아니면 왜 그렇게 말해? 너 나 진짜로 좋아하는 거 맞아?”

뭐부터 대답해야 할까. 왜 그렇게 말을 했는지, 진짜 좋아하는 게 맞는지, 입력된 질문의 우선순위를 고르려는데 저도 모르게 말부터 튀어나갔다.

“좋아해. 진짜 좋아해, 윤조야.”

열렬한 고백에 권윤조의 표정이 약간 풀렸다. 권윤조는 정말 아무것도 모른다. 진짜 좋아하는 게 맞느냐고? 스스로에게 이미 수없이 던졌던 질문이다. 그 대답을 자신이 아닌 권윤조에게 해주고 싶어서 참을 수 없었던 날들이, 그를 조금이라도 덜 좋아하고 싶었던 날들이 떠올랐다. 그러자 또다시 입술이 열렸다.

“윤조야, 좋아해.”

권윤조의 눈매가 미세하게 일그러졌다. 한없이 풀어지려는 표정을 다잡는 기색이었다. 마음을 풀기에는 아직 해결해야 할 문제가 남은 것이다.

격양되었던 공기가 누그러진 틈을 타서 석경은 수습에 나섰다.

“태정이한테 들었어. 너랑 승희 씨, 집안끼리 맺어진 사이라고. 나 잘은 모르지만 정략결혼이면, 아니 그러니까 부모님이 그렇게 결정하신 거면 너 해야 하잖아, 약혼.”

“……그래서?”

“그럼 나한테 각인하면 안 되잖아. 너 최승희랑 결혼하면……, 아이도 낳아야 하고.”

수습하려고 꺼낸 말들이 어째 하나같이 다 이 모양일까. 괜한 망상을 풀어내는 것도 아니고 사실만을 말했는데도 못된 말로 권윤조를 상처 입히는 기분이었다.

공격하려고 한 말이 아닌데 권윤조는 치명상을 입은 것처럼 아파했다. 절망으로 물들어 가는 권윤조의 얼굴이 석경을 궁지로 몰아넣었다.

서운해 하고 절망해야 할 사람은 정작 자신인데, 억울한 마음도 들기 시작했다.

그런데 권윤조를 공격하려는 마음이 전혀 없었을까? 석경은 스스로에게 물었다. 아직도 그저 신기루처럼 여겨지는, 온전히 제 것이 아닌 것만 같은 권윤조에게 투정을 부리고 싶었던 것은 아닌지 자신의 좁고 어두운 속을 들여다봐야 했다.

“석경아, 그러니까 네 말은.”

“……응.”

“최승희랑 결혼해서 아이를 낳으려면 섹스를 해야 하는데, 너한테 각인하면 내가 최승희랑 섹스를 못하게 되니까 각인을 끊어라 이 말이지?”

“…….”

“배우자로서 중대한 결격 사유가 생길까 봐?”

결격 사유. 일방 각인으로 권윤조가 겪게 될 여러 피해와 불편함이 한 단어로 정리됐다.

하지만 석경의 염려는 그게 다가 아니었다. 석경의 페로몬이 없으면 권윤조가 지독한 금단 증세를 겪을 테고, 또 제가 죽으면 권윤조도 서서히 죽어갈 것이다. 그러니까 권윤조가 그런 성가신 불안감을 느끼지 않게 각인을 끊는 것이 마땅하다는 생각이었다.

“석경아, 너 나랑 대체 뭐 하자는 거야?”

“…….”

날선 질문에 석경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아슬아슬한 기분으로 그의 눈치만 살폈다.

“너는 꼭 나랑 정리하려고 고백한 애 같아. 고백도 하고 섹스도 하고 할 거 다 했으니까 미련도 후회도 없이 그렇게 나를 정리하려는 사람 같아.”

“……그런 거 아니야.”

“내가 무슨 끔찍한 생각까지 드는지 알아? 석경이 너 일방 각인 상대 찾았었지?”

“그게 왜…….”

“나한테 각인하려고 사실은 나 좋아하지도 않는데 좋아한다고 고백한 건 아닐까, 그런 좆같은 생각이 든다고. 나란 사람이 이렇게까지 한심해질 수가 있을까 싶었는데, 그게 되네.”

“야 너, 진짜 그거 아니야.”

마음을 부정당하자 화가 났다. 꽃뱀 취급이라도 당한 것 같았다. 엉망진창이었다. 왜 이렇게까지 엉망진창이 됐을까.

꽃뱀 짓을 하려고 작정했다면 저를 좋아하는 한세진을 이용하는 게 차라리 편했을 것이다. 한세진 이름이라도 들먹여서 결백을 증명하려던 석경은 그만뒀다. 그 말을 꺼내면 돌이킬 수 없는 지경까지 갈 것 같아서. 권윤조가 저와 각인할 뻔한 남자에게 느끼는 분노가 어느 정도인지 석경은 모르지 않았다. 남자의 인생을 송두리째 박살내고도 풀리지 않을 분노일 것이다.

“근데 왜 나를 최승희한테 보내려고 해? 나 좋아한다며. 내가 다른 사람이랑 결혼하고 아이를 낳아도 네 마음은 아무렇지 않아?”

“그건 내 마음이니까 내가 알아서 할게.”

“……뭐?”

순간 선을 긋는 못된 말을 내뱉고는 석경은 입술을 감쳐물었다. 제 마음을 조금도 알아주지 않는 권윤조 때문에 눈가가 뜨거워졌다. 그런데 석경 자신도 제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무엇을 원하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억울하고 답답했다.

나오려는 눈물을 무턱대고 참는 건 어린 시절부터 길들여온 오랜 습관이었다.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고 애써도 자꾸만 젖어드는 눈동자가 야속했다. 젖은 눈동자를 빤히 바라보는 권윤조는 더 야속했다.

느릿하게 머리를 쓸어 넘긴 권윤조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석경아. 내가 전에 최승희랑 아무 사이 아니라고 말했잖아.”

“…….”

“너 그때 나한테 뭐라 그랬어? 내가 걔랑 약혼을 하든 결혼을 하든 아무것도 설명할 필요 없다고 했었지? 너 그런 말 한 이유가 내 말은 안 듣고 네 마음대로 믿고 해석하려고 그랬던 거야? 혹시 지금도 그래? 내가 말하는 진실은 안 믿고 너 마음대로 해석할 거야? 그럴 거면 미리 말해.”

“미리 말하면?”

“지금 당장 네 옷부터 벗길 거야. 알맹이 없는 대화로 기운 빼느니 침대에서 너랑 실컷 뒹굴 거야.”

“…….”

“최승희 불러서 삼자대면하는 방법도 있지만 웬만하면 걔는 안 부르고 싶어. 네가 제3자가 아닌 나를 믿어줬으면 좋겠어.”

권윤조의 눈빛은 진심이었다. 당장이라도 침대에서 뒹굴 준비가 된 그의 표정을 보고 석경은 고개를 가로로 젓다가 세차게 끄덕였다.

“믿을게.”

차분해진 권윤조가 석경의 손을 잡아 왔다.

“석경아, 네가 원하는 게 정확히 뭐야.”

“…….”

“나는 네가 원하는 걸 말했으면 좋겠어. 원하는 게 있으면 내놓으라고 보채고 성깔도 부렸으면 좋겠어.”

“…….”

“나한테 그만하자고 냉정하게 말했을 때처럼 최승희랑 아무것도 하지 말라고 말했으면 좋겠어.”

눈물이 없는 편인데 요즘 들어 권윤조 앞에서 툭하면 눈물을 보이는 것만 같았다. 사실 석경은 눈물이 없는 사람이 아니라 울고 싶을 때 마음껏 울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성깔 부리라고 부추기는 말에 야속한 감정이 누그러지긴 했는데 서러움은 어디 안 가고 그대로였다. 내가 각인 때문에 좋아하지도 않는데 저한테 고백했다고? 고백하면 그래도 조금은 쉬워질 줄 알았는데 더 어려워졌다. 석경은 두 뺨을 적신 눈물을 손등으로 쓱쓱 닦아냈다.

“말하면 뭐…….”

“…….”

“들어줄 수는 있고?”

불과 1분 전에 믿는다고 해놓고 여전히 불신을 담은 말을 툭 던지자 권윤조는 졌다는 얼굴로 씁쓸하게 웃었다. 그 표정이 마치 저한테 크게 질린 것만 같아서 석경은 가슴이 얼어붙는 것만 같았다.

“석경아, 내가 너랑 오늘 얘기하면서 뼈저리게 느낀 점이 하나 있거든.”

“……뭔데.”

“너한테 나 진짜 어마어마한 쌍놈이구나.”

“뭐? 아니야. 갑자기 왜…….”

“갑자기가 아니라……. 근데 나 쌍놈 맞아.”

“…….”

“나 사실 너한테 첫눈에 반했어. 근데 계속 내 감정에 솔직하지 못했어. 그래서 자꾸 떠보기만 하고 너 헷갈리게 하고. 네가 나 피할까 봐 무서워서 그랬던 거긴 한데 그것도 어차피 다 변명일 뿐이잖아. 어마어마한 쌍놈 맞지.”

“아냐.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방금도 네 진심 알고 싶어서 떠본 거야. 확실히 못 박아 두지 않으면 너 도망갈 것 같아서, 끝내 네 입으로 최승희랑 약혼하지 말라는 말 들으려고. 평생 나 책임져 달라고 당당하게 요구할 수 있는 구실 만들고 싶어서. 근데 잘 안 넘어오네.”

눈은 크게 뜰 수 있는데 귀는 왜 그러지 못하는 걸까. 그의 입에서 쏟아져 나오는 말들이 아까웠다. 하나도 놓치기 싫었고 실제로 놓친 말은 없었지만 제 고막이 일을 제대로 하고 있는지 못 미더웠다. 평생 책임져 달라고? 그거 내가 제일 하고 싶었던 거잖아.

석경은 권윤조에게 잡힌 손을 빼냈다. 그리고 제 쪽에서 그의 손을 다시 힘주어 잡았다.

“윤조야.”

“…….”

“하지 마, 약혼.”

석경은 박력을 담아 명령조로 말했다. 권윤조는 그걸로는 아직 부족하다는 듯 석경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권윤조, 너 나 좋아하잖아. 나한테 각인, 했을 수도 있잖아.”

“…….”

“그럼 섹스도 나랑만 할 수 있는 거잖아.”

“……각인 안 됐으면?”

“그래도 앞으로는 평생 나랑만 섹스해.”

권윤조가 그제야 환하게 웃었다. 뭐가 그리 웃긴지 어깨까지 떨며 웃다가 몸을 일으켜 티슈를 뽑아와 석경에게 건넸다.

“석경아, 콧물 닦아.”

“내 콧물이 웃겨?”

“아니. 콧물 흘리면서 명령하니까 감히 거역하기가 힘드네.”

“그래? 얼마든지 더 흘릴 수 있는데.”

“키스하자.”

“콧물 나와서 지금은 안 돼.”

일부러 더 심하게 훌쩍거리며 다가오는 어깨를 밀어내자 권윤조가 이마를 찌푸렸다. 막무가내로 입술을 붙여 올 줄 알았는데 권윤조는 의외로 순순히 떨어져 나갔다. 세수라도 하고 오려고 엉덩이를 떼자 권윤조가 손목을 붙잡았다.

“어디 가려고?”

“세수하려고.”

“내 대답도 안 듣고?”

“한 거 아니야? 거역하기 힘들다며. 키스하자며.”

“아직 남았어. 앉아.”

석경은 침대에 다시 엉덩이를 붙였다. 권윤조의 단단한 눈빛은 단단한 대답의 예고편처럼 느껴졌다.

“나 최승희랑 약혼 안 해. 내 말 믿어?”

“응, 믿어.”

“좋아. 또 궁금한 거 있어?”

“승희 씨는? 승희 씨도 너한테 감정 없어?”

약혼 이야기를 최승희와도 확실히 마무리 지은 걸까. 석경이 보기에 최승희는 권윤조를 많이 좋아하는 듯했고 쉽게 포기할 것 같지 않았다.

“왜? 질투 나?”

“어. 질투 나서 자다가도 벌떡벌떡 일어날 것 같아. 솔직히 말해. 너는 승희 씨 좋아한 적 없어?”

권윤조와 최승희가 더는 엮일 일이 없다는 확신이 필요했다. 이후에 우연히라도 불쑥 튀어나오는 ‘최승희’라는 이름 석 자에 대책 없이 흔들려서는 안 되니까.

“없어. 그리고 네가 오해할까 봐 확실히 말해두는 건데 나 최승희랑 진짜 사귄 적 없어. 그때 한동안 같이 붙어 다녔던 건 그럴 만한 사정이 있어서 그랬어.”

“무슨 사정?”

“미안해. 그건 말 못 해.”

“알았어.”

물고 늘어지지 않자 권윤조가 오히려 당황했다. 석경 딴에는 여태 구질구질한 질투를 해 댔으니 뒤늦게라도 쿨한 척을 하려는 거였다.

“안 궁금해?”

“말 못 한다며.”

“우리 석경이 포기가 빠르구나. 한 번만 더 물어봐 주면 안 돼?”

석경 입장에서는 기회를 놓칠 이유가 없었다.

“무슨 사정인데?”

“최승희가 너랑 나 이어 준다고 그런 거였어. 어설프게 질투 작전 같은 거. 유치하지? 너무 유치해서 죽을 때까지 숨기고 싶은데 내 입으로 실토하는 이유는, 내가 말 안 해도 언젠가 최승희가 말할 것 같아서.”

“질투 작전?”

“응.”

석경은 이마를 짚었다. 아니 대체 뭐 하는 애들이지? 그게 통할 거라고 생각한 건가? 둘 다? 적어도 둘 중 하나는 제정신이었어야 하는 거 아닌가?

“야, 그거 완전 역효과였어. 내가 얼마나 힘들었는데.”

“미안해. 다시는 힘들게 안 할게. 참, 그리고 최승희가 김준영 좋아해.”

“헐.”

“그래서 도중에는 작전 타깃이 네가 아니라 김준영이 됐어. 김준영은 전혀 모르는 눈치지만.”

“어. 나도 몰랐어.”

“너야, 뭐. 원래 눈치 없으니까.”

“내가 눈치가 왜 없어?”

권윤조는 석경의 손을 잡아 두툼해진 바지 앞섶 위에 올려놨다.

“아까부터 이 상태였는데, 눈치 못 챘지?”

석경은 붙잡힌 손을 슬그머니 빼냈다.

“갑자기 왜 그래.”

“뭐가.”

“분위기 이상해지잖아.”

“이상해지고 싶은데.”

석경은 시선을 피했다. 티는 안 냈지만 허리고 엉덩이고 성한 데가 없었다.

“윤조야.”

“응?”

“너 정말 나한테 첫눈에 반했어?”

겨우 화제를 돌렸다.

“아, 귀여워. 그게 계속 궁금했어? 계속 궁금했는데도 참고 참다가 지금 물어보는 거야?”

정곡을 찌르는 말을 석경은 못 들은 척했다.

“그럼 새터에서 반한 거야?”

새터에서 저에게만 유독 무뚝뚝하게 굴었던 권윤조의 모습이 떠올랐다. 이후의 다정함을 생각하면 같은 인물이 맞나 의심스러울 정도다. 소위 말하는 입덕부정기 뭐 그런 거였나. 당시에는 죽었다 깨어나도 절대 얘랑은 친해질 일이 없겠다고 생각했는데 어느새 몸을 섞은 사이가 됐다.

“석경아.”

“…….”

낮지만 다정하게 흘러나온 차분한 목소리에 고막이 아닌 심장이 먼저 반응했다. 말없이 바라보자 목울대가 다시 크게 움직였다.

“나 고2 때까지 내 성적으로 인서울 중위권 정도나 갈 수 있었어. 기부금 내면 인서울 상위권 정도는 들어갔겠지만 우리 학교는 못 왔겠지. 여기는 기부금 같은 거 안 받잖아.”

태정에게 얼핏 들었던 기억이 났다. 권윤조가 어느 날 갑자기 미친 듯이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고. 그런데 이 타이밍에 왜 그 얘기를 꺼내는지 알 수 없었다.

“나 석경이 너랑 같은 학교 다니려고 죽기 살기로 공부한 거야.”

“뭐야 그게. 나 듣기 좋으라고 너무 아무렇게나 말하는 거 아니야? 이왕이면 나 때문에 기계과 썼다고 말하지그래?”

“맞아. 네가 기계과 지원한다고 해서 나도 따라온 거야. 재경이가 알려줬거든.”

“뭐? 너 지금 무슨, 잠깐…….”

“…….”

“재경이? 내 동생? 네가 재경이를 어떻게 알아?”

“물론 새터에서도 너한테 반하긴 했지만 제일 처음 반했던 건 고2 때야.”

재경에게 자신의 지망학과를 미리 들었다는 권윤조, 고등학교 2학년 때 저에게 처음 반했다는 권윤조, 거짓말 같은 이야기를 하는 권윤조의 표정에 장난기가 전혀 없었다.

고2는 석경의 인생에 있어서 암흑기나 다름없었다. 오메가로의 발현. 그 시절의 저를 알고 있는 것도 놀라운데 어둡기 짝이 없었던 자신에게 반했다니 믿기지 않았다.

“고2 때 나를 처음 봤다고?”

“응.”

“나는, 네가 기억이 안 나는데……. 너를 봤으면 기억을 못 할 리가 없을 텐데.”

권윤조는 혼란스러워하는 석경을 끌어안았다. 그의 단단한 가슴팍과 석경의 이마가 맞닿았다.

“……네가 그때 제정신이 아니었거든.”

두고두고 인생에서 지워 버리고 싶은 날이 불현듯 떠올랐다. 어둑한 공원에서 몸을 가누지 못하고 고열에 헐떡거리던 석경을 겁탈하려던 알파. 누군가 도와줘서 아무 일 없었다고 재경은 말했었다. 석경은 ‘누군가’의 존재를 일부러 묻지 않고 살아왔다. 굳이 알 필요가 없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

“…….”

아니, 사실은 어렴풋하게 기억에 남아 있었다. 혼몽한 의식 틈으로 비집고 들어왔던 아카시아 향기. 고통에 신음하던 저를 감싸 주던 따뜻했던 체온. 꿈결 같았던 뜨거운 입술. 상처를 핥아 주던 부드럽고 축축한 감촉. 그런 것들이.

“혹시 공원…….”

“기억하는 거야?”

“잘은 안 나.”

오래 석경을 바라보던 권윤조가 돌연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석경아.”

“너 왜, 얼른 일어나. 뭐 하는…….”

“나 실은 너한테 각인한지 좀 됐어. 네가 각인 상대 찾는 거 알고 어제 말하려고 했는데 타이밍을 놓쳤어. 네가 고백하는 바람에.”

“뭐? 언제?”

“그날 공원에서 너한테 키스했거든.”

“…….”

“미안해. 허락도 없이 키스해서.”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빠르게 생각을 정리했다. 아니, 그 전에 무릎을 꿇고 있는 권윤조부터 일으켜 세웠다.

다시 생각을 이어 나가기 시작했다. 근데 키스로 각인을 했다고? 처음에는 의아스러웠으나 석경은 곧 이해할 수 있었다. 체액으로 인한 각인. 그 무렵, 한동안 틈만 나면 버릇처럼 혀끝으로 볼 안쪽 살과 입술을 쓸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혀끝에 닿았던 갈라진 상처의 감각과 비릿한 피 맛도. 그리 많은 양의 피가 아니었을 텐데 희박한 확률을 안고 권윤조는 각인을 한 것이다.

신기하면서도 안쓰러웠다. 각인 이후에 별 도리 없이 불지옥에 고스란히 몸을 맡겨야 했을 그의 시간들이 가슴 아팠다.

“왜 여태 말 안 했어?”

“말하면 너 도망갈까 봐.”

“지금은? 내가 안 도망갈 것 같아?”

권윤조는 불안한 표정으로 말했다.

“안 도망갔으면 좋겠는데. 도망 안 가면 안 돼? 가지 마.”

석경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지워 버리고 싶은 그날에 권윤조가 있었다니, 그날을 지우면 권윤조도 지워진다니. 그렇다면 지우려 애쓰지 말고 그대로 둬야 하는 거겠지. 역겨워서 견딜 수 없었던 청포도 향이 처음으로 달게 느껴졌다.

“윤조야, 더 자세히 얘기해 줘.”

권윤조는 석경이 기억하지 못하는 그날의 이야기를 들려줬다. 각인 이후에 재경을 만났던 이야기도.

권윤조의 긴 이야기를 들으면서 석경은 그가 자신을 오래도록 사랑해왔다는 사실을 매 순간 깨달았다.

“윤조야.”

“응?”

“입으로 해 줄까?”

“……어?”

부풀어 오른 권윤조의 아랫도리를 눈짓으로 가리켰다. 당황하는 모습이 귀여워서 웃음이 나왔다.

“나 엉덩이 아프니까 입으로 빨아줄게.”

“아 쫌, 야하게 말하지 말라니까.”

지퍼를 내리고 속옷까지 끌어내리자 석경의 시선에서 봤을 때 왼쪽으로 수납되어 있던 물건이 툭 튀어나왔다. 몇 시간 동안 뒤로 품고 있었음에도 도저히 익숙해지지 않는 크기였다.

괜히 입으로 빨아준다고 말했나, 후회가 됐다. 넘칠 듯 출렁이는 기분을 안고 반쯤은 충동적으로 뱉은 말이었다. 아직은 서툰 제 감정을 권윤조에게 어떻게든 표현하고 싶어서.

미간을 구기고 권윤조의 것을 빤히 응시했다. 아무래도 입 찢어질 것 같은데. 그냥 이대로 입에 물면 되는 건가.

“석경아, 하지 마.”

“왜. 할 거야. 할 수 있어.”

“나 아직 노팅 조절 안 된단 말이야.”

아, 그럼 문제가 크지. 석경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턱뼈는 한계가 있어서 저만 다치는 게 아니라 권윤조도 다칠 터였다.

“그럼 없던 일로 하자.”

“와. 사람을 들었다 놨…….”

입술이 간지럽게 맞닿았다. 권윤조는 입술을 살짝 벌리고 석경의 혀가 들어오기를 기다렸다. 머뭇거리며 혀를 밀어 넣자 기다렸다는 듯이 빨아 당겼다. 오래도록 서로의 입술을, 혀를 탐했다. 석경은 자연스럽게 제 옷 속을 파고드는 권윤조의 손을 몇 번이나 쳐내야 했다.

권윤조는 늦은 시간까지 집에 가지 않았다. 석경도 집에 언제 갈 거냐고 묻지 않았다. 그렇다고 자고 가라는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함께 있는 게 당연하다는 듯 시간을 보냈다.

두 사람은 침대에 누워 밤늦게까지 못다 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몇 번을 들어도 질리지 않는 이야기는 매번 처음인 것처럼 몇 번이나 묻기도 했다. 이를테면…….

“윤조야, 너 정말 나한테 첫눈에 반했어?”

“어, 응, 당연하지.”

권윤조가 웃음을 꾹 참고 있는 게 훤했지만 석경은 개의치 않고 뻔뻔하게 말했다.

“자세히 말해줘.”

“그러니까 그때가 무지 더운 여름이었거든. 학교 끝나고 태정이랑 카페에 갔었는데…….”

권윤조 역시 질리지도 않은지 매번 처음 얘기를 꺼내는 것처럼 설레는 얼굴로 긴 이야기의 말문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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