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화 (15/21)

* * *

다음날 석경은 전날과 비슷한 시간에 집을 나섰다. 일방 각인을 일차적으로 수락한 상대와 미팅을 갖기 위해서였다. 석경은 약속 장소인 카페에 들어가 별 어려움 없이 상대를 찾았다.

세미 정장 차림의 남자는 테이블 위에 빨간색 야구 모자를 올려놓고 있었다. 서로 알아보기 위해 사전에 약속한 소품이었다.

“안녕하세요.”

상대는 20대 후반 정도의 멀끔한 인상을 가진 남자였다. 웃는 얼굴이 선해 보였다.

두 사람은 약 10분 정도 가벼운 대화로 서로를 탐색했다.

“그런데, 경험은 있으세요?”

그러다 갑작스럽게 훅 들어온 남자의 질문에 석경은 짐짓 당황했다. 얼이 빠져 선뜻 대답을 못하자 남자가 부연했다.

“섹스 경험요. 아, 물론 남자와의 경험을 묻는 겁니다. 남자를 받은 적이 있는지 말입니다.”

“……아뇨.”

석경의 대답에 남자가 작게 웃었다.

“석경 씨. 각인 방법을 체액으로 하길 원한다고요.”

“네.”

“그건 경험이 없으셔서 그런 건가요. 뭐, 이해합니다.”

뭘 이해한다는 말인지. 석경은 오히려 그렇게 말하는 남자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

석경은 한숨과 함께 앞머리를 쓸어 넘겼다.

“그런데 앞으로 매번 주기가 찾아올 텐데 섹스를 하는 편이 석경 씨한테도 좋지 않을까요. 애초에 각인을 맺는 방식을 성관계로 하는 건 어떠세요.”

“아뇨, 저는…….”

아직 주어밖에 말하지 못했는데 남자는 석경의 말을 툭 자르고 들어왔다.

“저도 주기 때마다 매번 피를 빼는 건 좀 그렇고요. 제 피가 뭐 남아도는 것도 아니고. 또 제가 주삿바늘을 싫어해서 그래요. 저 그런 사람 아닙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그런 사람’을 어떤 사람으로 이해해야 되는 걸까. 석경은 남자의 화법이 꽤나 독특하다고 생각하며 입을 열었다.

“채혈이 부담되신다면 제가 주기 때마다 따로 금전적인 대가를 지불해 드리겠습니다. 각인 비용과는 별도로요.”

시종일관 싱글대던 남자의 얼굴이 일순 굳어지는가 싶더니 이맛살을 접으며 눈을 치켜떴다.

“석경 씨. 고집이 좀 센 편인가 봅니다? 자기주장도 확실하고.”

“네?”

“아니 뭐 그런 것 같다고요. 오늘 처음 만난 제가 석경 씨에 대해 뭐, 잘 알겠어요? 그냥 제 감상이 그렇다는 거지. 근데 칭찬이에요.”

“제가 프로그램에 등록한 각인 방법에 동의하시고 나오신 게 아닌가요. 저는 그렇게 알고 있었습니다.”

“아니 뭐 어쨌든 각인 방법은 나중에 천천히 얘기하기로 하죠. 시간이야 많으니까. 석경 씨 마음이 앞으로 어떻게 바뀔지 모르는 거고.”

석경은 마음이 바뀔 일이 결코 없을 거라고 ‘자기주장’을 펼치려다가 의미 없는 소모 같아서 관뒀다. 피로가 몰려왔다.

이후로 약 한 시간가량 남자와 대화를 나누었다. 아니, 일방적인 남자의 수다였다. 석경은 반쯤 넋을 놓고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만 같은 남자의 수다를 묵묵히 들었다.

남자는 돈이 필요해서 일방 각인을 수락한 게 아니라고 말했다. 알파의 도움이 절실한 오메가를 위해 봉사를 하려는 취지로 어려운 결정을 내린 거라고 여러 번 강조했다. 쌍방 각인도 아니고 저의 일방 각인인데 왜 남자가 어려운 결정을 내려야만 했는지 석경은 이해할 수 없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또한 남자는 석경의 외모를 찬양하고 높이 사면서도 석경이 오메가이고 자신은 알파라는 사실을 끊임없이 환기시켰다.

대화 내내 남자의 시선이 끈끈하게 들러붙었다. 벌레처럼 몸 위를 기어 다니는 시선 탓에 석경은 곱절로 피로를 느꼈다. 남자의 페로몬 때문에 시궁창 속에서 허우적대는 기분이었다.

그런 남자를 견디기가 버거워지면 이따금 권윤조의 얼굴이 아른거렸다. 그러면 숨통이 조금은 트였다.

석경은 더는 선해 보이지 않는 남자의 웃는 얼굴을 무연하게 바라봤다. 생존을 위한 각인이다. 일일이 상대를 골라가며 까탈을 부릴 일이 아니다.

구차하게 삶을 끌어안기 위한 각인. 남자와 자신의 관계에서 그것 이상의 의미는 없다고 석경은 수차례 되뇌었다.

* * *

전공 필수 과목을 마지막으로 1학기 기말고사가 끝났다. 석경은 홀가분한 기분으로 강의실에서 곧장 동방으로 향했다.

동아리에서 주최하는 종강 엠티가 이번 주말로 잡혔다. 동아리 회장은 한 달 전부터 전원 참석을 부르짖으며 불참 시에는 향후에 일절 동방 출입이 금지될 거라고 단호하게 못을 박았다.

공강 시간마다 편안한 아지트가 되어주는 동방을 포기할 수는 없었기에 1학년들은 한마음 한뜻으로 엠티 참석 의사를 밝혔다. 권윤조를 제외하고.

석경은 엠티에 가지 않는 권윤조가 신경 쓰였다. 제가 가니까 안 가는 게 분명해서 더 그랬다. 태정은 그런 게 아니니까 신경 쓰지 말라고 했지만 차라리 자신이 엠티를 안 갔으면 안 갔지 신경을 안 쓰기는 어려웠다.

결국 석경은 고민 끝에 권윤조를 따로 불러냈다. 권윤조는 뜻밖에 말을 걸어오는 석경을 보고 짐짓 놀라는 기색이었으나 잠깐 얘기 좀 하자는 요청에는 순순히 응했다.

“음료수 마실래?”

자판기 앞으로 권윤조를 데려온 석경은 조금 어색한 말투로 물었다. 권윤조는 고개를 저었다. 그를 감싸는 분위기가 온통 낯설게 느껴졌다.

“할 말이 뭐야?”

음료수를 거절하고 본론을 재촉하는 권윤조의 무심한 눈빛에 석경은 위축됐다. 그의 목소리는 낮았고 버석거리는 느낌이 들 정도로 건조했다.

오랜만에 그와 단둘이 있게 된 순간부터, 석경은 서로의 공백을 조금은 그리운 마음으로 의식했지만 권윤조는 그런 건 안중에도 없어 보였다. 그저 석경이 꺼내게 될 용건만이 유일한 관심사이고 다른 건 다 무관심해 보였다.

석경은 그가 엠티를 가고 안 가고 하는 문제를 감히 제가 개입해도 되는 것인지 자신이 없어졌다. 마음이 자꾸만 뒷걸음질 쳐졌다.

그렇다고 기껏 불러놓고 싱거운 얘기로 때울 수는 없었다. 딱히 떠오르는 싱거운 얘기도 없었으므로 결국 엠티 얘기를 꺼내지 않을 수 없었다. 음료수 사 주고 싶어서 불렀다고 하면 안 믿겠지. 안 믿기만 하면 다행이게. 눈을 무섭게 뜨고 욕을 할지도 모른다. 욕 잘하던데.

“저기, 엠티 말인데…….”

“…….”

“이번에 안 가는 사람 동방 출입 금지래.”

“알아.”

“아는구나.”

“어, 알아.”

가슴이 답답했다. 권윤조가 모를 리가 없는 얘기를 꺼내면서 시간을 끄는 스스로가 한심했다.

“엠티 네가 가.”

결국 하고 싶은 말을 하긴 했는데 지나치게 간략해서 마치 명령하는 투 같았다. 권윤조의 짙고 단정한 눈썹이 미세하게 찌푸려졌다.

“뭐?”

“혹시 나 때문에 안 가는 거라면 내가 엠티 안 갈게. 그러니까 네가…….”

“누가 그래? 내가 너 때문에 엠티 안 간다고?”

“아니, 누가 그런 건 아니고. 그냥 나 혼자 생각한 거야. 아니라면 미안해.”

“맞아. 너 때문에 안 가는 거.”

뭐지? 갑작스러운 팩트 공격에 석경은 멍한 얼굴을 했다. 반면 권윤조는 무표정했다.

석경은 짧은 시간 동안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자신이 경솔했다는 후회가 가장 먼저 들었다. 기껏 사람 불러 놓고 한다는 말이 나 때문에 엠티 안 간다며? 라니. 이건 뭐 싸우자는 거나 다름없는 말이었다.

너 때문이 아니라고 다른 일 때문에 안 가는 거라고, 권윤조가 제 마음을 편하게 해 주기라도 기대한 건가. 맹세코 그런 대답을 기대한 건 아니었지만 결과를 놓고 돌아보니 자신의 얕은 배려가 몹시 야비해 보였다. 이걸 어떻게 수습하지.

“내가 안 갈게, 엠티.”

솔직하게 말했다. 동방 안 간다고 뭐 죽는 것도 아니고. 게다가 현재 제 처지가 다음 학기 등록을 보장할 수가 없는 상태였다. 억제제 효과가 하루가 다르게 현저하게 줄어들고 있었다. 서둘러서 각인이든 뭐든 하지 않으면 문을 열고 집 밖에 나가는 일 자체가 힘들어질 터였다.

일방 각인을 조율 중인 남자를 떠올리자 석경의 가슴에 무거운 납덩이가 들어앉았다. 각인 방법에 대해 한 치의 양보가 없는 남자는 석경이 아쉬운 입장이며 시간마저 촉박하다는 사실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

“그러니까 네가 가.”

“왜 그렇게까지 하는 건데?”

“……네가 엠티 가면 좋을 것 같아서.”

“내가…… 엠티 가면 좋겠다고?”

“……어.”

“그래?”

석경은 그제야 권윤조의 분위기가 어딘가 비틀려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응.”

“그럼 가야지. 이석경이 그렇게 말하는데…….”

“…….”

“당연히 가야지.”

“…….”

냉랭한 표정의 권윤조가 고저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너도 갈 거지?”

당연히 그래야 한다는 투였다. 석경은 엉겁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권윤조는 멍해진 석경을 남겨 두고 간다는 말도 없이 먼저 자리를 떴다.

* * *

1, 2학년은 예외 없이 종강 엠티에 전원 참석했다. 동방이라는 장소에 대한 집착이 덜한 3, 4학년의 참석률은 저조한 편이었는데 회장은 예상했다는 듯 그러려니 했다.

공학관 주차장에 모인 인원은 총 17명이었고 일반 승용차 다섯 대가 동원됐다. 다섯 대 중에 한 대인 권윤조의 차에는 1학년 다섯 명이 타기로 했다. 태정이 운전을 하겠다고 나섰지만 차주인 권윤조에게 단칼에 거절당했다.

“내가 앞에 탈래.”

이수현이 손까지 번쩍 들며 외쳤다. 선수를 빼앗겼다고 해서 순순히 양보할 리가 없는 태정과 준영도 앞다투어 한마디씩 했다.

“운전 못 하는 것도 서러운데 조수석이 아니면 어디에 앉으라는 말이야?”

“박태정을 트렁크에 태우고 내가 조수석에 앉을게.”

보조석 인기가 많았다. 보조석이 전혀 탐나지 않는 석경은 돌아가는 상황에 공감하지 못하고 뒤로 한 발 물러나 있었다.

태정이 보조석 손잡이에 손을 대자마자 준영이 어깨빵을 날렸다. 저만치 날아간 태정을 보면서 비웃음을 흘린 준영이 보조석 손잡이에 손을 대자 이번에는 이수현이 팔꿈치로 준영의 복부를 가격했다. 순식간에 개싸움이 벌어졌다.

“씨발, 귀 뜯지 마!”

“머리 잡아당긴 새끼 누구야?”

“잠깐만! 나 방금 십자인대 파열됐어! 나 군대 면제되면 한 턱 쏜다!”

아수라장을 가만히 지켜보던 권윤조가 낮게 뇌까렸다.

“지랄들 하네.”

지랄……? 방금 권윤조가 지랄이라고 말한 건가? 입에 착 달라붙는 욕설에 석경이 흠칫 놀라는 사이 권윤조가 보조석 문을 열고 석경에게 눈짓을 했다.

“이석경. 네가 앞에 타.”

“어?”

“쟤들 셋이 사이좋게 뒷좌석에 앉아서 가라고 하고 네가 앞에 타.”

석경은 고개를 저으려다가 어쩐지 권윤조의 기에 눌리는 바람에 얌전히 차에 올라탔다.

결국 뒷좌석에 앉은 세 사람은 가운데 자리에 서로 앉지 않겠다고 투닥거리다가 차가 그냥 출발해버리자 허겁지겁 달려와서 차 안에 몸을 구겨 넣었다. 엉겁결에 가운데에 앉게 된 준영은 극도로 예민해져서 한동안 태정과 이수현에게 시비를 걸어 댔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면서 욕을 9할 정도는 끊은 준영이 한창때 실력을 발휘하는 모습을 보며 석경은 제가 정말 여기 편하게 앉아서 가도 되나 몸 둘 바를 모르게 됐다.

게다가 권윤조가 바로 옆에 있어서 어색하고 불편하기까지 했다. 좌석에 여유가 있는 선배들 차에 끼어 탈 걸 그랬다는 생각이 뒤늦게 들었다.

“김준영, 무릎 괜찮냐?”

한차례 소란이 지나가고 카 오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잔잔한 음악이 침묵을 메우고 있을 때 이수현이 많이 차분해진 어조로 말을 꺼냈다.

“아, 내 무릎 발로 깐 게 너였냐?”

“그렇게 됐다. 암튼 괜찮냐고. 진짜 십자인대 파열됐어? 김준영 군대 면제되면 안 되는데. 군대 가서 빡세게 굴러야 하는데.”

“괜찮아. 아슬아슬하게 십자인대 파열 진단 나올 것 같아. 그나저나 너 머리 뜯긴 건 좀 어떠, 악!”

이수현이 느닷없이 준영의 머리카락을 잡아 뜯었다.

“역시 너였어! 내가 그럴 줄 알고 함정을 팠지.”

“씨발, 놔! 안 놔?”

또다시 벌어진 난투극에 석경은 운전하는 권윤조를 힐끔 바라봤다. 운전에 방해되는 건 아니겠지? 석경은 괜히 안전벨트를 확인하고 다시 권윤조를 힐끔 보았다. 순간 권윤조와 눈이 마주쳤다. 당황해서 눈이 커진 석경을 잠시 무표정으로 응시하던 권윤조가 정면으로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왜 자꾸 쳐다봐?”

“본 게 아니라…….”

“본 게 아니면?”

“걱정돼서.”

“뭐가?”

“애들 때문에 신경 쓰여서 너 운전 못 할까 봐.”

룸미러를 확인하는 권윤조의 입꼬리가 비스듬히 올라갔다.

“신경 안 쓰여.”

“그럼 다행이고.”

“네가 나 쳐다보는 게 더 신경 쓰여.”

장난기 하나 없는 무뚝뚝한 말투는 얼핏 제 행동을 탓하는 것처럼 들렸다. 석경은 무릎 위에 올려놓은 손을 가만히 그러쥐었다. 에어컨이 켜져 있는데도 얼굴에 열이 올랐다.

“미안해. 안 쳐다볼게.”

작게 말하고 차창 쪽으로 아예 고개를 돌렸을 때 휴대폰 진동이 울렸다. 액정에 ‘매칭상대’라는 저장명이 떠 있었다. 석경은 수신 거부를 눌렀다.

남자가 이번 주말에 만나길 원했지만 석경은 엠티에 가야 한다며 거절했다.

곧바로 메시지가 왔다.

[매칭상대 : 전화 안 받네요. 엠티 가서 잘 놀다 와요]

[매칭상대 : 기계과라고 했던가? 남자들 많겠네요]

[매칭상대 : 뭐 석경 씨가 알아서 처신 잘하겠죠]

메시지는 거기서 끝이었다. 석경은 답장하지 않았다. 처신을…… 잘해야 하는 건가. 왜, 내가 그래야 하는 건데.

남자의 독특한 화법에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았다. 깊이 생각할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며 석경은 눈을 감았다. 남자가 틈틈이 보내는 메시지의 가치와, 앞으로 자신이 억지로라도 붙들어야 할 어두침침한 삶의 가치가 엇비슷해져 가는 듯한 요즘이었다.

* * *

다섯 대의 차가 예약한 펜션에 차례대로 도착했다. 푸른 잔디가 깔린 펜션 앞마당에 엠티에 참여한 동아리 인원이 하나도 빠짐없이 모였다. 앞에 선 회장이 손뼉을 두어 번 짝짝 치며 주목을 끌었다.

“방은 4인 1실이니까 열쇠 받아 가서 각자 짐 풀고 30분 후에 다시 여기로 집합합시다.”

“4인 1실이면 한 명이 남는데요?”

“나는 이따가 정우 형이랑 같이 쓸 거야. 2인 1실로.”

“정우 선배 오기로 했어요?”

“응, 저녁에 오신대.”

석경은 팔꿈치로 이수현의 팔을 살짝 건드리며 물었다.

“정우 선배가 누구야?”

그러자 이수현이 인상을 확 찌푸렸다.

“전에 너 술 먹이던 꼰대 새끼 이름이 김정우야. 오늘은 이름 잘 외워 둬라. 그때처럼 당하기 싫으면.”

어렴풋이 기억이 떠올랐다. 자기 이름을 아느냐고 회식 자리에서 유난히 석경을 물고 늘어지던 졸업생. 생김새는 기억에 없지만 그가 알파였다는 사실은 기억에 남아 있었다.

이수현은 여자 선배들과 한방을 쓰고, 나머지 1학년들은 넷이서 같은 방을 쓰게 됐다.

“등산 싫다. 여기는 케이블카 없나?”

태정이 등산용 배낭을 챙기며 투덜거렸다. 방에 들어와 짐을 풀고 다시 산행을 위한 짐을 꾸리다 보니 30분이 훌쩍 지났다. 석경이 문단속을 하고 마지막으로 방을 나왔다.

앞마당에 모인 동아리 멤버들의 표정은 하나같이 우중충했다. 누구도 반기지 않는 등산을 강행해야 하는 이유를 아무도 몰랐고 심지어 회장조차도 얼버무렸다. 그저 대대로 내려오는 동아리의 오랜 전통이니 계승해야 한다고 했다.

“근데 우리 동아리가 뭐 하는 동아리였지?”

“미친놈아, 영어 동아리잖아.”

준영과 태정이 작게 속삭였다. 옆에서 듣고 있던 석경은 잊고 있던 동아리의 정체성을 덕분에 알게 됐다.

회장이 다시 손뼉을 쳤다. 한 번에 주목이 되지 않아 여러 번 쳐야 했다.

“입산하기에 앞서 엠티에 임하는 각오 한 말씀씩을 듣겠습니다.”

“뭐? 뭘 듣겠다고?”

“각오라는데?”

“엠티에서 각오가 왜 필요해? 술만 잘 마시면 되지.”

웅성거림이 높아졌다. 회장이 소란을 잠재울 요량으로 손뼉을 더 세게 쳤다.

“거기 1학년 이수현부터 각오 한 말씀.”

“아, 저요? 저는 다음 학기에는 반드시 장학금을 타겠습니다.”

“그건 엠티에 임하는 각오가 아닌데.”

“그럼 회장님이 생각하시는 엠티에 임하는 각오는 뭔가요?”

“뭐, 됐어. 이수현은 장학금 꼭 타고. 다음 사람은…….”

“뭔가요!”

끈질기게 묻는 이수현을 무시한 회장은 서둘러 준영에게 차례를 넘겼다. 준영은 부모님께 효도하겠다고 수줍은 목소리로 각오를 밝혔다.

그 뒤로는 금연 성공, 다이어트 성공, 로또 1등 당첨, 모쏠 탈출 등등 새해 소망이나 다름없는 말들이 줄을 이었다. 말하기 귀찮아서 옆 사람의 각오를 표절하는 경우도 많았다. 석경은 술을 줄이겠다고 말했다가 대놓고 비웃음을 당했다.

4학년을 선두로 역순으로 입산이 시작됐다.

10분 만에 이수현이 고통을 호소했다.

“씨이, 도저히 못 해 먹겠어. 나 내려갈래.”

“여태까지 쭉 평지였어. 어딜 내려가겠다는 거야.”

준영이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을 했다.

“닥쳐, 김준영. 너 같은 게 이 섬세한 경사를 알아?”

“경사? 섬세하게 내리막길인 건 알겠다.”

“돌아 버렸냐? 대체 어디가 내리막길?”

석경은 씩씩거리는 이수현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이수현, 힘들면 가방 이리 줘. 내가 들어 줄게.”

“됐어.”

“달라니까.”

석경은 이수현의 가방끈 쪽으로 손을 뻗었다. 그러자 손 하나가 불쑥 튀어나와 이수현의 가방을 먼저 낚아채 갔다. 권윤조였다.

“뭐야, 이거. 별로 무겁지도 않네.”

권윤조는 심드렁한 말투로 말하고는 이수현의 가방을 한쪽 어깨에 걸친 채 빠른 걸음으로 앞장섰다. 순간 멍해졌던 석경은 급히 표정을 추슬렀다.

슬쩍 보니 이수현은 아예 신경도 안 쓰는 눈치였다. 문제는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그의 무심한 친절에 또 사정없이 두근대는 제 심장이었다. 석경은 길게 한숨을 내쉬며 걸음을 옮겼다.

산을 오르고 또 오르다 보니 드디어 정상이었다. 다행히 회장의 별다른 푸닥거리 없이 얼마간의 휴식 후에 하산이 바로 시작됐다.

“다들 조심해. 내리막길이 더 위험한 법이야.”

회장이 음산한 목소리로 경고인지 저주인지 모를 말을 내뱉었다. 올라가는 것보다 그래도 한결 나은지 이수현의 죽는소리가 절반 이상 줄었다.

이수현의 뒤통수를 보며 적당히 가파른 산길을 내려가는데 바지 주머니 안에서 진동이 울렸다.

[매칭상대 : 오늘 담당자한테 다른 오메가는 없냐고 물어봤습니다]

[매칭상대 : 각인을 원하는 오메가가 많더군요. 석경씨보다 더 높은 금액을 제시하는 오메가도 있었고요]

[매칭상대 : 그래도 석경씨만큼 예쁜 오메가는 없겠죠]

[매칭상대 : 걱정 마세요. 제가 석경씨 배신하는 일은 없을 겁니다. 대신 석경씨도 빨리 결정을 해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석경은 표정 없이 휴대폰을 주머니 속에 쑤셔 넣었다.

회장의 경고인지 저주인지가 먹혀든 것은 하산을 시작한 지 30분쯤 지났을 무렵이었다. 튀어나온 돌부리를 보지 못한 석경은 요란하게 넘어지고 말았다. 누가 볼세라 황급히 몸을 일으켰지만 이미 다수의 목격자들이 놀란 눈으로 석경을 보고 있었다. 하필이면 목격자 가운데 권윤조도 섞여 있었다.

석경은 괜찮다는 의미를 담아 방긋 웃었다. 그러자 목격자들이 일제히 흠칫했다.

“쟤 왜 쪼개는 거야?”

“몰라, 자빠지면서 머리 다친 거 아냐?”

석경은 흙 묻은 바지를 툭툭 털고 전혀 대수롭지 않다는 듯 태연한 얼굴로 걸음을 옮겼다. 넘어지면서 발목을 접질렸는지 욱신욱신 쑤셨다. 고통으로 인해 얼굴이 저절로 일그러지려는 것을 어금니를 악물며 참았다. 권윤조의 시선이 따가울 만큼 느껴졌다.

“괜찮냐?”

준영의 물음에 석경은 입꼬리를 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발목이 아파서 속도가 자꾸만 뒤처졌다. 괜찮은 척했던 연기가 완벽했는지 아무도 석경의 몸 상태에 관심이 없었다. 그건 참 다행이었다.

어쨌든 석경은 서서히 낙오되어 갔다. 앞서가던 이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고 대화 소리마저 들리지 않게 됐을 때 석경은 마침내 바위에 걸터앉았다.

바지를 조금 걷어 올리자 퉁퉁 부어오른 발목이 보였다. 부상 정도를 눈으로 직접 확인하자 어째 더 아픈 느낌이었다. 차라리 보지 말걸. 이 다리로 산을 내려갈 자신이 없어졌다.

석경은 10분을 더 쉬고 일어났다. 고작 10분을 앉아 있었는데 10년쯤 도를 닦고 하산하는 기분이었다.

“어, 깜짝이야!”

지켜보는 눈도 없으니 마음 놓고 다리를 절뚝거리며 내려갈 생각으로 멀쩡한 발을 내딛던 석경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언제 나타났는지 권윤조가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산짐승처럼 이쪽을 노려보고 있었다. 어찌나 땀을 많이 흘렸는지 앞머리가 살짝 젖어 있었다. 울창한 나뭇잎 사이를 뚫고, 한 줌 빛이 그의 젖은 앞머리에 내려앉았다.

“하아, 이석경, 너…….”

권윤조의 눈길이 정확히 아픈 발목에 꽂혔다. 석경은 권윤조가 제 코앞으로 다가올 때까지 미동조차 할 수 없었다. 한쪽 무릎을 꿇고 자세를 낮춘 그가 돌연 석경의 바지를 걷어 올렸다.

“야! 뭐 하는 거야!”

퉁퉁 부은 발목을 흡사 부러뜨릴 기세로 노려보던 권윤조는 깊게 한숨을 내쉬고 걷어 올린 바지를 내렸다.

석경을 올려다보는 눈빛이 매섭기 짝이 없었다. 단단히 화가 난 얼굴이었다. 왜 화가 났는데? 뭐 땜에 화를 내는데? 걱정이 빚어낸 분노임을 알면서도 사나운 눈빛에 묘한 반발심이 일어났다. 다친 걸 들키지 않으려고 얼마나 노력했는데, 내가 도와 달라고 한 것도 아닌데 왜 굳이 내려간 길을 되짚어 올라와서 사람을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는가.

“일단 업혀.”

권윤조는 당연한 일인 듯 자세를 틀어 등을 내보였다. 일단 업히라고? 일단 업히고 나면 다음에 뭐가 또 있는 건가?

석경은 엉뚱한 생각을 하며 넓은 등짝을 보고만 있었다. 저 등에 업힐 생각으로 보는 게 아니라 그냥 봤다. 아무 생각 없이. 사실 수만 가지 생각이 속을 어지럽혔지만 무엇 하나 뚜렷하지 않고 흐지부지해서 그저 멍을 때리는 느낌이었다.

“걸을 수 있어.”

권윤조가 일단 업히라고 했으니 석경도 일단 거절을 해야 했다. 업혀라, 싫다, 아득한 실랑이가 이어질 줄 알았는데 권윤조는 기다렸다는 듯이 몸을 일으켰다.

“그렇게 말할 줄 알았어.”

순식간에 몸이 공중에 떠올랐다. 석경은 저를 훌쩍 안아 든 권윤조를 미친놈 보듯 바라봤다. 그가 두 팔로 단단히 받치고 있는 등과 오금이 저릿했다.

‘일단’ 업히라고 말한 뜻을 그제야 알 것 같았다. 일단 업히고 나면 다음에 뭐가 있는 게 아니라, 일단 업히지 않으면 뭐가 있었던 것이다. 신장 180센티미터의 성인 남자를 아무렇지 않게 안아 든 권윤조의 괴력에 석경은 약간 기가 질렸다.

“내려 줘. 나 죽기 싫어.”

“누가 너 죽인대?”

“너 발이라도 헛디뎌 봐. 내가 죽나 안 죽나 보자.”

“안 죽어.”

“내려 줘.”

권윤조는 석경을 안아 든 채로 묵묵히 산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석경은 권윤조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간담이 서늘해지고 머리가 쭈뼛 섰다. ‘내려 줘. 응? 제발.’ 낮게 가라앉았던 목소리가 애원으로 변해갔다. 권윤조는 대꾸하지 않았다. 그의 무반응이 길어질수록 이상하게도 권윤조의 목을 끌어안은 손에 점점 힘이 들어갔다.

착각이 아니라 권윤조의 체향이 짙어지고 있었다. 온몸 구석구석에 스며드는 체향에 정신이 아찔해졌다. 석경은 제 몸이 급하게 달구어지고 있음을 느끼고 열기로 축축해진 이마를 찌푸렸다.

“…….”

거침없이 산을 내려가던 권윤조가 예고도 없이 우뚝 멈춰 섰다.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색색 달뜬 석경의 호흡도 순간 멈췄다.

무의식중에 권윤조의 가슴팍에, 마치 아이가 어리광이라도 부리듯 이마를 비벼대던 석경은 제 행동을 뒤늦게 깨닫고 기겁했다.

저를 내려다보는 권윤조와 눈이 마주쳤다. 탐색하는 시선에 서둘러 벽을 세웠지만 벽을 뚫어버릴 듯 한층 깊어진 지긋한 시선에 귓불이 뜨거워졌다. 아랫배가 간질거리고 호흡도 흐트러졌다.

그는 1분쯤, 아니 어쩌면 더 오래 석경을 말없이 바라보다가 약간 잠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방금 뭐 한 거야?”

“……뭐가?”

시치미를 떼자 권윤조가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석경에게 제대로 된 대답을 듣고야 말겠다는 듯 진득했던 그의 눈빛은 침묵과 함께 시간이 흐를수록 점차 건조하게 변해갔다.

“이석경.”

“…….”

“숙소 도착하면…….”

“…….”

“억제제부터 먹어.”

권윤조의 말이 뇌로 전달되기가 무섭게 온몸이 떨렸다. 저를 안고 있는 권윤조가 눈치채지 못할 리가 없는 떨림이었다.

석경의 뒤는 아까부터 흠뻑 젖어 있었다. 그것도 눈치챘을까. 알파의 품에 안겨 성기를 세우고 축축하게 뒤를 적신 발정 난 오메가는 억제제를 먹으라는 말을 달리 해석할 여유가 없었다.

“내려 줘.”

석경은 위태롭게 버둥거렸고 권윤조는 결국 석경을 땅에 내려놓았다. 땅에 발을 내딛기가 무섭게 석경은 절뚝거리며 산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얼마 가지도 못하고 손목을 붙잡혔다.

“이석경.”

“…….”

“왜 그러는데.”

“…….”

권윤조가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또 선 넘었어?”

“…….”

“너 발목이 그 지경인데 어떻게 혼자 걷게 해.”

“괜찮아. 걸을 수 있어.”

석경은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어수선한 속내와 세포 구석구석까지 번진 예민한 긴장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권윤조가 그때 멈춰 서지 않았다면 제가 어떤 추태를 부렸을지 상상만으로도 오싹했다. 가슴팍에 이마를 비비는 것으로도 모자라 권윤조의 목줄기를 핥았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석경은 잡힌 손목을 가볍게 뿌리치고 한쪽 다리를 절며 내려갔다. 제 몸에서 청포도 향이 진동했다. 억제제를 먹으라고 말한 이유를 뒤늦게 깨달았지만 여전히 진정이 안 됐다. 저의 성욕을 그가 어디까지 알아차렸을지 두려웠다.

* * *

석경은 샤워를 마치고 제 몸에서 나는 냄새를 확인했다. 산에서 내려오자마자 억제제를 챙겨 먹은 덕분에 냄새가 사라져 있었다.

산을 내려오는 내내 권윤조와는 말을 한마디도 섞지 않았다. 석경은 다리를 심하게 절면서도 끝내 도움을 요청하지 않았고, 권윤조는 그런 석경에게 질려 버린 듯 냉랭한 표정으로 일관했다. 그래도 안겨서 가는 것보다는 훨씬 나았으므로 석경은 권윤조의 노여움을 모른 척했다.

욕실에서 나오자 방은 텅 비어 있었다. 다른 방으로 샤워를 하러 갔던 권윤조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창문 밖이 소란스러웠다. 목을 쭉 빼고 내다보자 펜션 앞마당에 익숙한 얼굴들이 보였다. 저를 제외한 동아리 인원이 벌써 다 모여 떠들썩하게 술판을 벌이는 중이었다.

준영이 구해온 압박붕대가 침대 위에 놓여 있었다. 석경은 발목에 붕대를 단단히 감고 일어나서 다친 발에 체중을 실어 보았다. 이만하면 한결 나았다.

마당으로 내려가기 위해 방을 나왔다. 복도를 지나 계단을 내려가는데 권윤조가 마침 계단을 올라오고 있었다. 석경을 보자마자 사납게 미간부터 찌푸리는 얼굴에 괜히 주눅이 들었다. 온기 없는 눈빛은 산에서의 일을 떠올리게 했다. 샤워를 하고 축축하게 젖은 팬티를 갈아입었는데도 석경은 어쩐지 떳떳할 수가 없었다.

새삼스럽게 나눌 말도 없었으므로 무시하고 계단을 내려가는데 차갑고 무뚝뚝한 목소리가 날아왔다.

“머리 젖은 채로 돌아다니지 마.”

저절로 권윤조를 향해 고개가 돌아갔다. 붕대를 감고 서둘러 내려오다 보니 덜 마른 머리카락에 소홀했다. 그래도. 마음속에서 무언가가 훅 치밀어 올랐다. 그렇게 무섭게 명령하듯이 말할 일인가? 내가 너한테 피해를 준 것도 아닌데.

“신경 쓰지 마. 알아서 할게.”

“머리 말리고 내려가.”

그러니까 내가 왜 네 말을 들어야 하냐고. 목구멍까지 나온 반항을 겨우 삼켰다. 석경은 그를 무시하고 다시 계단을 내려갔다. 권윤조는 붙잡지 않았다.

건물을 나오자 숯불 향과 고기 냄새가 식욕을 자극했다. 준영이 석경을 발견하자마자 쌈을 싸서 입에 한가득 넣어 주었다.

“맛있지? 끝내주지?”

눈을 빛내며 물어오는 준영에게 꽉 찬 입으로 웅웅 대답하며 고개를 열심히 끄덕여 주었다.

“석경아, 권윤조 안 만났어?”

“왜?”

“너 발목에 붕대 감아 준다고 방에 올라갔는데.”

준영이 말하지 않았다면 모르고 지나쳤을 사실이었다. 권윤조는 친절을 베풀러 올라온 사람치고는 꽤 날카롭고 공격적이었으니까. 엇갈린 진심을 알게 됐지만 마음은 그냥 덤덤했다.

석경은 솔직하지 않은 권윤조가 낯설었다. 정작 그에게 한 번도 솔직하지 않았던 건 저였던 주제에.

“붕대 내가 감았어.”

어릴 때부터 합기도를 오래 해서 스스로 붕대를 감는 일은 익숙했다. 그 사실을 아는 준영은 어련히 잘했겠지 하며 더는 말을 보태지 않았다.

석경은 가벼운 대화와 함께 술잔을 기울이면서도 권윤조가 언제 나오는지 신경을 기울였다. 저 때문에 올라갔다는 말을 들어서인지 더욱 그랬다.

잠시 후 건물에서 나오는 권윤조의 손에는 수건이 들려 있었다. 아, 설마. 못 본 척 고개를 돌렸지만 느릿느릿 다가오는 기척에 한껏 예민해질 수밖에 없었다.

“물기 좀 닦아.”

권윤조가 수건을 내밀며 말했다.

“됐어.”

“직접 닦아 줘?”

“……내가 할게.”

석경은 들고 있던 술잔을 내려놓고 조금 한적한 곳으로 몇 걸음 이동해서 수건으로 머리를 탈탈 털었다. 권윤조가 감시하듯 이쪽을 보고 있었다.

우리 지금 뭐 하는 거냐? 석경은 속으로 의문을 뱉으면서도 착실하게 권윤조가 하라는 대로 정성껏 머리를 말렸다.

회장이 손뼉을 짝짝 쳤다. 다들 귀찮아하면서도 회장 쪽을 주목했다.

“술자리에서 술 게임이 빠질 수 없지 않겠습니까. 지금 이 시간부터 영어 단어를 쓰는 사람은 벌주를 마시기로 합니다.”

“회장님, 저희 영어 동아린데요.”

누군가 께름칙한 표정으로 발언했다.

“알아. 그러니까 영어랑 연관된 게임을 하자는 거 아니야.”

“영어랑 아예 연관을 끊자는 것 같아서요. 그리고 회장님 방금 영어 단어 말씀하셨어요. 벌주 드세요.”

“내가 언제?”

“‘놀이’라는 단어를 영어로 말했어요.”

회장은 자존심에 크게 상처를 입은 얼굴로 벌주를 들이켰다.

본보기가 나타나자 희미한 긴장감이 맴돌기 시작했다. 활발했던 대화도 뚝 끊겼다. 술 게임이 되레 들뜬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은 느낌이었다. 그러나 머지않아 긴장이 풀어지고 대화가 재개됐다.

여기저기서 탄식이 들렸다.

“헐. 비닐이 영어였어?”

“비닐이 영어지 그럼 뭐야.”

“한국어로는 뭔데?”

“몰라. 비닐이 비닐이지.”

회장은 자신이 제안한 게임이 분위기를 달구는 것을 흡족한 얼굴로 지켜봤다.

석경도 어쨌든 게임에 동참했다. 아, 나 폰 배터리 없어, 라고 말한 태정에게 벌주 두 잔을 먹인 석경은 한동안 몸을 사리느라 말을 아꼈다. 술은 얼마든지 마실 수 있지만 벌주는 사양이었다. 입을 꾹 다물고 있는 석경을 노리던 태정이 불쑥 질문했다.

“이석경, 가장 마지막으로 한 키스가 언제야?”

“태정아, 너 영어 썼으니까 벌주부터 마셔라.”

준영이 안타까운 얼굴로 지적했다. 태정은 제 입을 몇 번 때리는 시늉을 하더니 벌주를 들이켰다.

“이석경, 대답해. 내가 벌주까지 마시면서 한 질문인데.”

석경은 권윤조의 노골적인 시선을 느꼈다.

“몰라, 기억 안 나.”

“기억을 해.”

“싫어. 내가 마지막으로 한 키스가 왜 궁금한데?”

태정이 환하게 웃었다.

“방금 영어 썼네? 마셔.”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알면서도 키스라는 단어를 말한 석경은 벌주를 마셨다. 태정도 더는 캐묻지 않았다.

길어진 해가 붉게 타오르다가 끝내 넘어갔다. 석경은 2학년 선배들이 나누는 대화를 들으며 불판 위의 고기를 가끔 집어 먹었다.

“방학 때 뭐 할 거냐?”

“계절 들어야지. 영어도 하고. 넌?”

“기사 준비할까 생각 중.”

“기사, 뭐, 어떤 거?”

“쌍기사 따야지.”

“근데 기사 자격증 많으면 대기업에서 별로 안 좋아한다던데. 공기업 준비하다가 물먹고 차선으로 대기업 지원한 거라고.”

“그게 무슨 도시 전설 같은 소리야. 스펙이야 많으면 무조건 좋지.”

“그래, 알아서 해라. 방금 영어 썼으니까 벌주도 마시고.”

다음 학기를 과연 다닐 수 있을지 불투명한 석경으로서는 선배들이 나누는 장래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들이 그저 부럽기만 했다.

숯불이 꺼져갈 무렵, 차 한 대가 펜션 쪽으로 들어왔다. 낯이 익은 남자가 차에서 내렸다. 김정우인가 뭔가 하는 OB 선배였다.

“형 오셨어요?”

회장이 제일 먼저 달려 나갔다. OB가 문이 열린 트렁크를 턱짓으로 가리켰다.

“술 사 왔으니까 애들 시켜서 꺼내.”

‘애들’에 해당하는 1학년 4명이 알아서 몸을 일으켜 트렁크로 향했다. 석경은 OB를 향해 꾸벅 인사부터 하고 술을 날랐다.

마당을 밝히는 조명 주위로 날파리들이 모여들었다. 더는 고기 굽는 냄새가 나지 않았다. 대신 과자와 포를 안주 삼아 술자리가 계속됐다.

석경은 이수현이 전기 모기채를 휘두르고 다니는 모습을 가만히 구경했다. 타닥타닥 전기가 튈 때마다 이수현의 얼굴에 보일 듯 말 듯 희열이 나타났다 사라졌다.

“뭘 그렇게 봐?”

나한테 하는 말인가? 석경은 일단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언제 왔는지 OB가 제 맞은편에 앉아 있었다. 호기심 짙은 눈빛이 석경을 향한 것인지 석경이 보고 있는 것을 향한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뭐가 됐든 달갑지 않았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뭐가 아무것도 아니야?”

“……아무것도 안 봤다는 말입니다.”

“재밌는 친구네.”

“…….”

“이제 내 이름은 알아?”

“네. 김정우 선배님.”

김정우는 과장되게 놀란 표정을 지었다.

“영광이네.”

웃으며 권하는 술잔을 세 잔 연거푸 받았다. 쉽게 자리를 옮길 분위기가 아닌 것 같아서 석경은 빠져나갈 궁리를 했다. 괜히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엉덩이를 들자 곧장 물음이 날아왔다.

“어디 가?”

“저, 화장실 좀.”

“저번에도 그러더니, 너는 나만 보면 화장실에 가고 싶어?”

“아뇨, 그게…….”

“피하는 거야?”

“아이, 정우 선배 그만하세요. 왜 애를 잡고 그래요?”

옆에 있던 선배가 끼어들었다. 김정우의 표정이 일순 험악해지는 것을 석경은 보았다. 그러나 그는 언제 그랬냐는 듯 여유를 가장한 미소를 입가에 걸었다.

“갔다 와. 너 올 때까지 그 자리 아무도 못 앉게 할게.”

“……네.”

석경은 펜션 구석에 있는 화장실 쪽으로 걸어갔다. 그러나 화장실에 들어가는 대신 펜션 뒤편으로 빠졌다.

건물 뒤쪽은 산이 닿을 듯이 붙어 있었다. 산과 건물 사이의 길고 좁은 공간은 건물에서 새어 나오는 희미한 빛 덕분에 마냥 캄캄하지는 않았다. 석경은 사람이 오지도 않고 눈이 닿지도 않는 이곳에서 잠시 신세를 지기로 했다.

바지 주머니 안에서 휴대폰 진동이 울렸다. 또 그 남자인가. 불쾌한 느낌으로 심장이 뛰었다. 액정에 뜬 ‘한세진’이라는 이름에 안도한 석경은 잠시 망설이다가 전화를 받았다.

“응, 세진아.”

- 발목 다쳤다며. 괜찮아?

“준영이한테 들었어? 별거 아닌데.”

- 너 설마 술 마시는 건 아니지? 염증에 술 안 좋아.

“야, 엠티 왔는데 어떻게 술을 안 마셔.”

- 내일 서울 오면 병원 꼭 가.

병원 갈 정도는 아닌데 안 간다고 하면 말이 길어질 것 같아서 알았다고 대답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날 밤 키스를 한 이후로 한세진과 직접 만난 적은 없지만 가끔 전화나 메시지로 안부를 주고받았다. 저를 많이 생각해 달라며 키스를 한 한세진. 그러나 석경은 한세진보다는 키스를 목격하고 뭐가 하나 끊어진 것처럼 거칠게 행동하던 권윤조만 떠올랐다.

“…….”

작은 인기척과 함께 목젖을 간질이는 매캐한 담배 냄새가 났다. 고개를 돌리자 익숙한 인영이 건물 벽에 비스듬히 기대선 채로 담배를 빨아들이고 있었다. 깊게 빠느라 푹 꺼졌던 볼이 연기를 내뿜으며 부풀었다. 이질적인 광경에 넋을 반쯤 놓은 채로 한참을 지켜봤다.

희뿌연 연기 너머로 무심한 눈빛이 천천히 석경을 향했다. 담배와 권윤조,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었다.

“여기 좋네.”

권윤조는 담배를 손가락 사이에 끼운 채로 혼잣말인 듯 중얼거렸다.

“…….”

“피곤한 새끼가 들러붙지도 않고.”

피곤한 새끼란 누구를 말하는 걸까. 저처럼 누구한테 시달리다 오기라도 한 걸까.

“권윤조 너, 원래…….”

“…….”

“담배 피웠어?”

“어.”

“언제? 난 한 번도 못 봤는데.”

“고등학교 졸업하면서 끊었었어.”

최근에 다시 피우기 시작한 건가. 언제부터? 고작 담배 따위로 달의 뒷면이라도 본 듯한 낯선 기분에 사로잡혔다.

벽에 불씨를 비벼 끈 권윤조가 몇 걸음 다가왔다. 침착하려 했지만 심장이 날뛰었다. 무언가 성질이 잔뜩 돋은 사나운 눈빛이 어둠 속에서 빛났다. 무심하게 담배를 빨아들이던 얼굴은 온데간데없었다.

석경이 눈썹을 찌푸리자 권윤조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한 대 더 피울 것처럼 새 담배를 꺼냈다가 라이터 불씨만 두세 번 피우고는 도로 담배를 넣었다. 담배 냄새를 싫어하는 저를 배려하는 건가 싶었지만 꼭 그런 것도 아닌 듯했다. 어려웠다. 상황이. 권윤조가.

“한세진이 술 마시지 말래?”

질문이 뜬금없었다. 눈만 끔뻑거리고 대답을 않자 한 걸음 더 다가와 거리를 좁혔다. 갑자기 턱을 쥐는 손길에 흠칫 놀라 탁 쳐냈다.

“…….”

“한세진이 키스할 때는 가만히 있던데.”

“야.”

“걔는 뭐가 좀 달라?”

권윤조의 눈빛이 나른해 보였던 이유를 가까이서 보니 알 것 같았다. 혼몽한 취기가 느껴졌다.

“그만해.”

차갑게 내뱉자 그의 눈가에 떠돌던 취기가 걷히면서 눈빛이 선명해졌다.

“……내가 굳이 그만해야 하는 이유가 있나?”

‘너랑 그만하고 싶어.’

‘뭘?’

‘너하고 나. 전부 다. 뭐가 됐든.’

지난밤 석경의 일방적인 통보까지 아우르는 시위 같았다.

“…….”

“이석경.”

“…….”

“가장 마지막으로 한 키스, 언제야?”

“…….”

다시 턱을 쥐어오는 손길이 처음보다 강했다.

“기억이 안 나?”

죄어오는 힘을 이기지 못하고 입술이 벌어졌다. 입안의 혀를 들여다보는 깊숙한 눈빛은 분명 이전에도 한 번 겪었었다.

“놔.”

벌어진 입술 탓에 발음이 불분명한 소리가 새어 나왔다. 두 볼을 감싼 손을 의식할 겨를도 없이 입술을 먹혔다. 이미 벌려진 입술 사이로 뜨겁고 축축한 혀가 쉽게도 밀려 들어왔다. 쳐들어온 혀가 거칠게 입안을 헤집으며 석경의 혀를 찾았다. 씹어 먹을 기세로 놀라서 굳은 석경의 혀를 능숙하게 농락했다. 미처 삼키지 못한 타액은 권윤조에게 모조리 빼앗겼다.

늘 권윤조와의 키스를 설레는 기분으로 상상했었다. 이루어질 수 없는 상상이라 더욱 애틋하고 소중했던 상상이었다. 그러나 현실은 첫 번째도, 그리고 두 번째도 흡사 사나운 짐승에게 잡아먹히는 것처럼 석경을 한계까지 몰아붙였다.

차오른 숨을 헐떡거리며 고개를 뒤로 빼려 하자 턱을 쥔 손이 이번에는 목뒤를 거머쥐었다. 물러날 수 없었다. 석경은 입술이 먹힌 채로 가늘게 헐떡거렸다. 권윤조는 아랑곳 않고 오래도록 입안을 휘저었다. 입천장을 섬세하게 훑으면서도 혀의 돌기는 세게 비벼왔다.

“……기억이 안 나?”

윗입술과 아랫입술을 차례대로 머금고 겨우 입술을 떨어뜨린 권윤조가 낮게 잠긴 목소리로 물었다.

“…….”

“태정이가 또 물어보면 오늘이라고 말해.”

석경은 누구의 것인지 모를 타액으로 범벅이 된 입술을 손등으로 세게 닦아냈다.

“……까불지 마, 권윤조.”

목소리가 형편없이 떨려 나왔다.

“너는 이게 까부는 걸로 보여?”

“나는, 나는 너랑 다시 잘 지내고 싶었어.”

“다시 잘 지내는 게 어떤 건데?”

“……친구로.”

빈약하기 짝이 없는 대답에 권윤조가 한쪽 입꼬리만 올려 웃었다.

“이석경.”

“…….”

“내가 뭐 하나 알려 줄까.”

“…….”

“나 사실은 치약 밑에서부터 안 짜거든.”

“뭐?”

“애초부터 너랑은 친구 할 이유가 없었다는 뜻이야.”

권윤조는 석경을 말없이 바라보다가 등을 돌렸다. 멀어지는 등을 바라보며 석경은 천천히 허물어졌다.

1